'2020/03'에 해당되는 글 152건

  1. 2020.03.16 [고독천년] 제 2장 몰려든 군웅들
  2. 2020.03.16 [무림군웅보] 제 7장 모여드는 군웅들
  3. 2020.03.16 [북두무맥] 제 8장 신비한 계곡
  4. 2020.03.16 [고독천년] 제 1장 빗속의 인연
  5. 2020.03.16 [고독천년] 서장 신마풍운록의 음모
  6. 2020.03.16 [전설신검] 제 6장 사로잡힌 여인 1
  7. 2020.03.15 [달마묵장] 제 9장 이상한 반지
  8. 2020.03.15 [무림군웅보] 제 6장 풍운의 빙죽도
  9. 2020.03.15 [달마묵장] 제 8장 달마와 천마의 비사
  10. 2020.03.15 [금포염왕] 제 7장 이름이 새겨지다 1
  11. 2020.03.15 [북두무맥] 제 7장 진법에 빠진 남녀
  12. 2020.03.15 [무림군웅보] 제 5장 사해선문
  13. 2020.03.14 [금포염왕] 제 6장 뱀을 먹는 뱀 1
  14. 2020.03.14 [달마묵장] 제 7장 대들보 위의 비급
  15. 2020.03.14 [북두무맥] 제 6장 같은 말을 탄 원수
  16. 2020.03.14 [무림군웅보] 제 4장 무인도의 기연
  17. 2020.03.13 [금포염왕] 제 5장 북두무랑, 천하제일인을 만드는 복도 1
  18. 2020.03.13 [달마묵장] 제 6장 오십리를 간 후 돌아오라
  19. 2020.03.13 [북두무맥] 제 5장 말괄량이의 가출
  20. 2020.03.13 [무림군웅보] 제 3장 만년 묵은 흰 고래
  21. 2020.03.13 [전설신검] 제 5장 불길한 화살 1
  22. 2020.03.13 [금포염왕] 제 4장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2
  23. 2020.03.13 [달마묵장] 제 5장 기인들의 제안
  24. 2020.03.13 [전설신검] 제 4장 뻔뻔한 노인 1
  25. 2020.03.13 [북두무맥] 제 4장 떠버리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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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몰려든 군웅들

 

 

아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약빙이 자책하며 급히 미소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힘없이 쓰러지는 미소부의 가슴에는 비수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혀있었다.

(제발...)

우르르!

냉약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미소부의 단전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을 주입했다.

으음!”

심후한 내공이 주입되자 숨이 끊어지려던 미소부는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냉약빙이 주입해준 내공이 죽어가는 그녀를 잠시 되살린 것이다.

... 정말 전모 냉여협이신가요?”

미소부는 죽어가는 눈으로 냉약빙을 올려다보며 미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냉약빙이에요!”

냉약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죽기 전에 냉여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저희 이씨(李氏)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군요!”

미소부는 냉약빙의 대답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이씨!)

냉약빙은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로 이씨 성을 지닌 젊은 기협(奇俠)이 떠오른 때문이다.

, 부탁이 있어요 냉여협!”

미소부는 꺼져드는 미약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냉약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부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 아이를 부탁드려요. 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이청천(李靑天)...!”

이청천!”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냉약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청천이란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청천이란 인물은 냉약빙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태양신협(太陽神俠) 이청천!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六位)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비록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여섯 번째지만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사실상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협 이청천이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 내에 드는 기인들 중 가장 젊기 때문이다.

태양신협 이청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신마풍운록에 서열 육위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은 비단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격이 인후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기인이사들이 따르고 추종했다.

만일 그가 천하제패의 야심만 있었다면 단시일 내에 거대한 조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태양신협 이청천은 애초에 천하의 패권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의 교외에 자리한 태양곡(太陽谷)에 장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서북제일미인(西北第一美人)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옥수상아(玉手霜娥) 우담혜(憂曇慧)!

 

태양신협 이청천이 혼탁한 강호를 떠나 태양곡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절세미인인 이 여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바로 이대협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

태양신협 이청천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냉약빙인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미소부는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이며 서북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옥수상아 우담혜였다.

(대체 태양곡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옥수상아가 이런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냉약빙은 의아함과 함께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협 이청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냉약빙은 태양신협 이청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기력이 쇠잔한 옥수상아 우담혜가 그녀의 품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절벽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물론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이었다.

(가엾은 여인이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인물의 아내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다니...!)

냉약빙은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 앞에 서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 안겨있었다. 귀엽고 총기 있는 용모를 지닌 이 아이는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다.

(훌륭한 근골(筋骨)이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기뻐하시겠구나!)

냉약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오라버니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냉약빙은 다시금 자신이 처한 급박한 사정을 깨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편히 잠드세요 우부인! 아드님은 나 냉약빙이 친아들처럼 보살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팟!

옥수상아의 무덤에 대고 맹세를 한 직후 냉약빙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거구를 날려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무참한 만행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

 

곤륜산은 천산(天山)과 함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를 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대륙의 지붕이다.

본래 곤륜(崑崙)은 신들의 거처를 뜻한다.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뭇 신들이 곤륜산에 금전옥루(金殿玉樓)의 궁궐을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다던가?

그 장대한 곤륜산의 동쪽 끝에는 남쪽의 청해성(靑海省)을 굽어보고 있는 천길 단애가 자리하고 있다.

 

-고독애(孤獨崖)!

 

지면에서 수직으로 수백 장이나 치솟아 올라 있어 마치 거꾸로 꽂힌 칼의 허리 부분을 뚝 분질러 세워놓은 듯 웅장한 단애의 이름이다.

너무 높아 허리 부분이 늘 운무로 휘감겨 있는 고독애의 형상은 이름 그대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 고독애의 정상부분은 의외로 넓어서 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이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차있는 넓직한 평지 끝에는 돌로 지은 석옥(石屋)이 한 채 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석옥은 마치 세외도원의 일부인 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별세계의 선경과도 같은 고독애 일대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독애 정상의 넓은 평지에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독애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석옥 주변에는 머리가 으깨졌거나 몸뚱이가 짓뭉개진 수백 구의 시신들이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들이 질펀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전율하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처참한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가 된 자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지역의 패자들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자들은 하나같이 신마풍운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명숙들이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같이 막중한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중원으로부터 머나먼 이곳 곤륜산의 고독애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

“...!”

장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비록 운집한 군웅들 중 절반 정도가 죽음을 당했으나 여전히 고독애에는 오륙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웅들은 그 납덩이같은 침묵 속에 반월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고독애 끝에 자리한 석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석옥을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면면을 보면 실로 대단했다. 당금 무림의 명숙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군웅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석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나타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이 공포의 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석옥 안에는 과연 누가 있기에 뭇 군웅들을 떨게 만든단 말인가?

 

군웅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었다.

석옥 뒤쪽의 천길 단애를 제외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기도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만 했다.

반월형 포위망의 정면 맨 앞쪽에 서있는 인물은 일신에 푸른색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노검수(老劒手)였다.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 노검수의 허리춤에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깍은 목검(木劒)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 목검은 유서 깊은 검술명가(劒術名家)의 상징이다.

 

<혁련검호각(赫蓮劒豪閣)>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술명가다.

현련검호각은 연원을 따져보면 무려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호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력검호각의 일족은 오랜 세월 오직 검술 한 가지에만 매진해 왔으며 그 결과 무적의 검법을 이룩해냈다.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혁련검호각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의를 걸친 노검수는 바로 그 혁련검호각의 당대 가주다.

 

-유성신검황(流星神劒皇) 혁련휘(赫蓮輝)!

 

신마풍운록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비록 당금 무림의 세 번째 고수로 꼽히지만 단순히 검법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대검호가 유성신검황 혁련휘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왼쪽에는 오척(五尺) 단구(短軀)의 꼽추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키만한 길이의 긴 곰방대를 빨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 꼽추노인의 피부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비단 피부색만이 녹색이 아니었다. 이 인물은 눈동자마저도 섬뜩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마치 뱀이나 악어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듯한 그자의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 괴상망측한 행색의 꼽추노인 주변 십여 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꼽추노인을 극히 두려워하는 듯 연신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신마풍운록의 서열 사위(四位)의 인물로서 일반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독천존 서래음이 독공(毒功)으로는 천하제일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 전체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배어 있어 단지 숨결만으로도 십 리 밖의 적을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림인들이 역신(疫神)처럼 두려워하는 독천존 서래음은 대리(大里)에 자리한 독성부(毒聖府)의 부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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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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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모여드는 群雄

 

 

 

순간,

[적염혈마(赤髥血魔)!]

태산일수는 안색이 변해 외쳤다.

적포괴인___.

그는 얼굴이 온통 적염(赤髥)으로 뒤덮여 흉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흐흐흐... 누군가 했더니 태산의 늙은 너구리였군.]

적포괴인, 즉 적염혈마 역시 태산일수를 발견하고 음침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허나 곧 적염혈마는 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천해비동의 입구로 다가갔다.

순간, 기검룡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라!]

[어림없는 소리!]

적염혈마는 두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놈!]

그는 벼락같이 적색장력을 내뻗었다.

꽈르릉!

허나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풍천벽력장을 후려쳤다.

[물러가시오!]

콰쾅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고막을 파열시키는 폭음이 터졌다.

[___ !]

적염혈마는 다급성을 발하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일 장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천해비동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곧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적염혈마의 수염과 모발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그의 전신이 완전히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어린 놈! 제법이다. 이번에는 적살마강(赤煞魔罡)을 받아봐라!]

그말에 태산일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놈이 최후의 비기(秘技)까지 펼치다니...!)

이때, 적염혈마의 전신에 퍼진 핏빛 강기가 급격히 서로 뭉쳐졌다.

[흐흐흐... 뒈져랏!]

적염혈마는 음침하게 소리치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기검룡도 황급히 그에 대항하여 쌍장을 후려쳤다.

[벽력패왕수!]

츠츠츠... ... 콰쾅!

천번지복(天翻地復)을 방불케하는 가공할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잠시 후, 폭음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 장 정도의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패여져 있었다.

그 구덩이 양쪽에 선 두 사람___

기검룡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두눈을 감고 있었다.

허나 적염혈마의 신색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입가에 선혈을 주르르 흘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에 중인들은 일제히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저 어린 소년이 적염혈마를 이기다니...)

그들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문득 능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칠십이도객! 용아를 호위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칠십이도객들은 일제히 기검룡을 둘러쌌다.

그때였다.

! ___!

장내에 다시 네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순간, 그들을 본 능소취가 두눈을 반짝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기 앞장선 자가 바로 지난밤 용오빠와 싸웠던 그 노인이예요.]

그말에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백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당주, 저들은 누구죠?]

백객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그는 곧 표저응가다듬으며 말했다.

[저 앞에선 회의인은 독수인마라고 하는 자입니다. 뒤의 삼인(三人)은 북망삼괴(北亡三怪)로서 북망사신(北亡邪神)의 제자들입니다.]

능부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북망사신이라면 백팔무인 중 일인(一人)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북망삼괴의 무공은 적염혈마에 못지 않습니다. 또 저들은 최초로 상강일괴(湘江逸怪)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하니 주위에 방조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말에 능부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럼 상강일괴 그자가 직접 이곳에 와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백객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독수마인이 휙 신형을 날려 기검룡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탁몽과 백객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허나,

[흐흐흐... 비켜라!]

북망삼괴가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들을 막아섰다.

이것을 틈타 독수인마는 다시 눈을 감고 운공중인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칠십이도객들이 이를 좌시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완벽한 방어의 자세로 기검룡을 호위했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비켯!]

그는 벼락같이 양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소매 속에서 무수한 암기가 발출되어 칠십이도객들을 덮어씌웠다.

허자 도 객중 십여 명이 일제히 도()를 휘둘렀다.

! !

독수인마의 암기는 맹렬한 도기에 그대로 튕겨나고 말았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흉광을 내뻗으며 번쩍 쌍장을 치켜들었다.

순간,

[___ !]

[크윽___!]

순식간에 사오 명의 도객들이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독수인마는 그들 사이를 뚫고 다시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그 순간, 기검룡이 두눈을 번쩍 뜨며 벼락같이 양수(兩手)를 내뻗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독수인마는 미처 방어할 틈도없이 앞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허망하게 날아갔다.

___천강신공, 그것을 펼친 것이었다.

기검룡은 일순 싸늘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고는 휙! 몸을 돌려 북망삼괴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당신들은 아직도 물러갈 생각이 없소?]

그의 싸늘한 물음에 북망삼괴 중 대괴(大怪)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렇다. 꼬마.]

[그럼 죽어야지!]

기검룡은 싸늘히 일갈하며 다짜고짜 쌍장을 쫙 벌렸다.

뻗어냈다.

도객들의 죽음에 살기가 치뻗힌 것이었다.

순간, 꽈르릉___!

___!

[___ !]

대괴는 다급히 장력을 마주쳤으나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사오 보나 후퇴했다.

[놓치지 않는다!]

기검룡은 차갑게 외치며 재차 장을 뻗어냈다.

___!

[___ !]

폭음과 함께 대괴는 피보라를 뿌리며 날아갔다.

이때,

[! 아버님!]

능소취가 갑자기 천해비동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해신룡, 그가 전신에 서리가 가득히 앉은 채로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탐욕으로 빛났다.

그의 수중에 하나의 백옥함과 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 부인, 운공을 해야겠으니 호법을 부탁하오.]

이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능부인을 비롯한 네 명의 비녀가 빠르게 그를 에워쌌다.

어느새 그녀들의 수중에는 두 자 길이의 짧은 보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타핫!]

돌연 적염혈마가 대갈일성과 함께 사해신룡에게 덮쳐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북망이괴와 사공망, 심지어는 태산일수조차도 일제히 몸을 날려 사해신룡에게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멈추시오!]

기검룡은 황급히 소리치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허나 적영혈마가 음산하게 그를 노려보며 적살마강을 후려쳤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랏!]

기검룡 또한 물러서지 않고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로 그의 공격을 맞받았다.

파파___ !

[___ !]

적염혈마는 앞가슴을 거세게 얻어맞고 다급히 물러섰다.

이때,

[! ... 빙백신공(氷魄神功)! 당신은 빙궁(氷宮)...]

돌연 북망이괴의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말에 중인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능부인, 그녀의 온화한 얼굴에 싸늘한 서리가 덮이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녀는 얼음으로 깎아만든 듯 투명한 옥수(玉手)를 휘둘렀다.

순간,

[___ !]

[___ !]

북망이괴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전신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들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즉사했다.

! 실로 끔찍하고도 가공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경악할 사태에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빙궁(氷宮).

 

이 얼마나 두려운 이름인가!

이백 년 전___

희세의 대도(大盜) 천수야제(千手夜帝)가 빙궁의 지보(至寶) 빙백신검(氷白神劍)을 훔친 일이 있었다.

빙궁에서는 천수야제를 잡기위해 사자를 파견했다.

빙궁설녀(氷宮雪女)___

그녀는 천하를 다 뒤졌으나 결국 천수야제를 찾지 못하고 중원무림에 대혈겁을 일으켰다.

그녀의 무공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중원인 중 그녀의 일초 반식을 받아낸 인물이 없었다.

그녀가 중원을 종횡무진 휩쓸며 살겁을 일으킨지 일 년(一年).

돌연 빙궁설녀가 사라졌다.

그 이후, 빙궁은 중원무림인들에 있어 일대 공포의 존재로 알려져 왔다.

헌데, 놀랍게도 능부인의 손에서 빙궁의 절기가 펼쳐진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크흐흐... 정말 뜻밖이군. 이런 곳에서 빙궁의 절학을 보게 되다니...]

돌연 듣기 거북한 탁음이 조용한 장내를 울렸다.

이어, ! !

계곡후면의 석벽을 날아 두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각각 백의(白衣)와 금의(金衣)를 걸친 노인이었다.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은 마치 해골에 가죽을 씌워놓은 듯 비쩍마른 체구였다.

반대로, 금의노인은 통통한 체구를 지닌 자였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 사이에서 경악의 부르짖음이 터졌다.

[북망사신(北亡邪神)!]

[... 상강일괴(湘江逸怪)까지...]

백의노인___ 그가 바로 백팔무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십여 명의 일인(一人)인 북망사신이었다.

금의노인___ 그는 상강일대의 패주로 군림하는 상강일괴였다.

북망사신은 능부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본 사신의 제자들을 해쳤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어, 그는 우장(右掌)을 치켜들었다.

순간 지독한 악취가 장내를 뒤덮었다.

능부인도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백옥같은 옥수를 들어올렸다.

츠츠츳... 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시커먼 독무(毒霧)와 새하얀 빙기(氷氣)가 서로 뒤엉켰다.

[...]

[... ...]

그들은 동시에 상체를 휘청했다.

허나 곧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능부인과 북망사신이 어지럽게 혼전을 치루고 있는 것을 틈타 상강일괴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운공하고 있는 사해신룡에게 다가갔다.

[서랏!]

기검룡이 이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치며 표표히 상강일괴 앞에 내려섰다.

[흐흐... 꼬마야 비켜랏!]

상강일괴는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___!

강맹한 장력이 쏟아지며 폭음이 일었다.

[이놈!]

상강일괴는 한 걸음 밀려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재차 장을 후려쳤다.

___ ___ !

서너 차례의 폭음이 잇따라 터졌다.

[!]

기검룡은 일순 신형을 비틀했다.

허나 그는 급히 몸을 바로잡으며 좌장을 내질렀다.

[벽력패왕(霹靂覇王)!]

상강일괴 역시 성명절학을 쏟아냈다.

[옥청강수(玉靑罡手)!]

___ 꽈르릉___!

엄청난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기검룡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반면 상강일괴는 무릎까지 푹 박혀 들어갔다.

이때, 적염혈마가 교활한 눈빛으로 번개같이 사해신룡을 호위하는 네 소녀에게 덮쳐들었다.

[!]

[어딜!]

네 소녀는 교갈을 터뜨리며 네 개의 단검을 교차시켜 찬란한 광망을 일으켰다.

차차차창___!

[으헉!]

적염혈마는 허리를 난도질 당해 선혈을 쏟으며 튕겨났다.

이때 기회만 노리던 사공망의 보검이 번득 네 소녀사이를 파고들었다.

[!]

한 명의 시녀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보던 기검룡은 두눈에 불빛을 뿜었다.

이때,

[크흐흐...]

허리에 일검을 맞은 적염혈마가 다시 괴소를 흘리며 진()이 무너진 소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기검룡은 불끈 입술을 물며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을 발출했다.

[___ ___ !]

적염혈마는 심장을 관통당한 채 피보라를 뿌리며 즉사했다.

허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사공망과 상강일괴, 태산일수가 번갈아가며 세 소녀를 공격했다.

기검룡은 휙! 신형을 날려 사해신룡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때,

[호호호홋...!]

갑자기 간들어지도록 뇌살적인 여인의 교소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중인들은 흠칫하여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계곡 뒤쪽의 석벽 위___.

한 명의 타는 듯 붉은 나삼을 걸친 여인이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략 이십여 세 정도 되었을까?

붉은 나삼은 몸에 꼭 끼어 선정적인 육체의 선이 그대로 나타났다.

용모또한 천하에서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___ !

그녀는 교구를 날려 사뿐히 중인들 앞에 내려섰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그녀의 미모는 더욱더 선정적이고 뇌살적이었다.

추수같은 맑은 눈에는 은은한 색기(色氣)가 어려 단번에 사내의 마음을 끄는 마력(魔力)이 풍겼다.

오똑 솟은 콧날 아래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고 도톰한 입술.

그것은 너무도 육감적이었다.

상강일괴와 태산일수, 사공망들은 일순 넋나간 표정으로 나타난 여인을 응시했다. 허나 기검룡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쑥 물었다.

[이것보시오! 당신은 또 무엇이오?]

그 말에 고개를 돌린 홍의여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머! 귀여운 공자님!]

그녀는 탄성을 발하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허나 기검룡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시오! 당신도 보물을 노리고 왔소?]

홍의여인은 선정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 그래요.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는 공자님을 돕고 싶어요.]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때,

[...! 이제보니 소저는...!]

태산일수가 그제서야 홍삼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허나 홍삼여인은 얼른 그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그래요. 본 낭자가 바로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홍라선희(紅羅仙姬)예요.]

그말에 보고있던 능소취가 문득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천하제일미로 자화자찬하는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던 것이다.

허나 홍삼여인, 즉 홍라선희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님, 만일 제가 공자님을 도와드리면 그 대가는 어떻게 치루겠어요?]

그녀의 말에 상강일괴 등의 안색이 홱 변했다.

상강일괴는 홍라선희를 바라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낭자께서는 저 꼬마를 도와주려고 하시오?]

[못할 것도 없죠.]

홍라선희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___홍라선희.

그녀는 이년(二年) 전부터 강호에 나타나 자칭 천하제일미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허나 여인의 일신무공은 실로 추측할 길없이 고강하여 수많은 수많은 절정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기검룡을 도우려 하니 상강일괴 등은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홍라선희는 문득 기검룡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보였다.

[공자님, 싸움이 끝나고나면 공자님은 재뺨에 입맞춤을 해주시겠어요.]

[...]

그말에 기검룡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홍라선희는 다짜고짜 기검룡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흔들며 만족한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약속... 약속 하셨어요. 공자님.]

헌데 이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능소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나 홍라선희는 몹시 기분좋은 듯 중인들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분이 가르침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태산일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보검을 뽑아들었다.

[노부가 낭자의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 추상신검(秋霜神劍)이군요. 당신의 자운십이식(紫雲十二式)이 무적(無敵)이라는 소문은 들었어요. 소녀에게 견식좀 시켜주세요.]

[조심하시오!]

태산일수는 한 마디 크게 외치며 추상신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뭉클! 십여 송이의 검화가 치솟아 올랐다.

[호호... 좋아요!]

홍라선희는 교수를 앞가슴에 교차시키며 쾌첩하게 일장을 내뻗었다.

헌데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옥청강수!]

상강일괴와 사공망이 동시에 기검룡을 덮쳤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의 당황함 없이 전력으로 쌍장을 후려쳤다.

츠츠츠... ___!

[으흑!]

기검룡은 옥청강수를 받은 손이 부서져 나갈 듯이 아프아고 느낀 순간 사공망의 보검에 허리를 스쳤다.

허나,

[흐흐... 다시 받아 보아라!]

상강일괴가 음침하게 웃으며 재차 옥청강수를 쏟아냈다.

동시에 사공망의 보검이 기쾌하게 사해신룡을 베어갔다.

[!]

기검룡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정면에서는 옥청강수가 날아들고 사공망의 검세는 세 시녀를 뚫고 곧바로 사해신룡을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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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계곡

 

 

무공과 달리 기문둔갑(奇門遁甲), 즉 진법은 짧은 시간의 공부나 타고난 재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걸쳐야만 진법을 설치하고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물론 백남빈은 보통 사람보다는 기문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양부 이탁이 기문진법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현장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지금 자신들이 빠진 진법과 유사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순하고 평범한 검법이지만 그 안에 무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

 

난감해하던 백남빈은 양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독안룡 이탁은 백남빈에게 기초적인 무공 두 가지만 가르쳤었다.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삼재검법과 육합심법(六合心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천년 이상 무림인들 사이에서 수련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이 이루어져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무공이 되었다.

물론 무공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것과 위력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은 워낙 단순하고 변칙이 없는 무공이라 그 위력이 위협적이거나 빼어나지는 않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을 진지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탁은 다른 무공들은 다 제쳐두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백남빈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독문절기인 칠로절천검(七路絶天劍)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백남빈이 백무염을 만나 가문의 절기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탁의 말을 통해 백남빈은 자신의 아버지 백무염도 무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닌...

하지만 이탁은 구체적으로 백무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남빈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백무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백남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가전절기를 익혀야하므로 함부로 다른 무공은 익히면 안된다는 양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무공을 폭 넓고 다양하게 익히는 대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극한까지 수련해온 것이다.

만일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으로 겨룬다면 백남빈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백남빈이 오 년 전 등천제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공도 삼재검법이었다.

위력이 평범한 삼재검법만을 구사하다 보니 매번 어려움에 처했었다.

그러나 결국 근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백남빈은 상대 무공의 결점을 파악해서 승리하길 반복했었다.

 

(하늘의 뜻, 땅의 이치, 인간의 도리...)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검결을 되새겼다.

(), (), ()을 삼재(三才)라 부르며 도가에서는 우주가 오직 삼재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진법이라는 것도 결국 우주의 원리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복잡한 진법이라도 삼재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삼재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칙, 즉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에 구름이 다소 흩어져 반쯤 찬 달과 함께 여러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저쪽에 있으니 북쪽은 이 방향이고...)

백남빈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찾았다.

그리고는 북두칠성이 떠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앞쪽 하늘에 있던 북두칠성이 갑자기 좌측으로 성큼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다시 몇 걸음 내딛자 하늘이 또 빙글 돌면서 북두칠성의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북두칠성이 바뀌는 방향과 걸음을 옮긴 거리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하자 주위의 경물이 확 바뀌었다.

 

***

 

!”

흑왕의 등에 앉아 있던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백남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왕을 황급히 돌려서 백남빈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마치 안개가 흩어진 것처럼...

주위는 어둡고 함께 있던 사람마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너무도 고요한 공간에 강미루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방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생겨난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든다.

공포에 휩싸이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고 이빨은 저절로 닥닥 부딪친다.

"...!"

극심한 공포에 질린 강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흑왕의 등에 와락 엎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친 듯이 흑왕의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잉! 두두두!

갑자기 박차가 가해지자 흑왕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발굽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음을 느낀 강미루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경사가 심한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주르르르! 티틱!

흑왕은 뒷발을 웅크리고 앞발은 버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콰드드드!

그러나 비탈의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라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강미루는 십여 장쯤 앞쪽에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왕이 미끄러져 가는 속도는 이미 쏘아진 화살 같다.

이대로 미끄러진다면 말과 사람은 그 바위에 부딪혀서 서로를 구분 못할 정도의 피떡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히히힝!

흑왕도 위기를 느끼고 웅크렸던 뒷발을 벌떡 세웠다.

파앗!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리던 속력보다 더 빨리 달려서 눈앞의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바위 너머는 허공이었다.

바위는 가파른 비탈의 끝 부분이었으며 그 너머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절벽이었던 것이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강미루의 귓가에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흑왕도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강미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악!”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강미루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 직후 강미루는 후끈한 열기가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기기를 십여 차례 했을 때 백남빈은 마침내 원형의 미로를 벗어나 진법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주위의 경물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강미루와 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차!)

깜짝 놀란 백남빈이 강미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협곡으로 들어 온 방법으로는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아악!>

멀리서 강미루가 내지른 게 분명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서 백남빈의 속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소저!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비명이 들린 방향을 어림하여 외쳐보았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바위들 틈에 나있는 사람이 다닌 듯한 길을 따라갔다.

 

***

 

길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끊겼는가 싶으면 바위 뒤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고 수시로 꼬불꼬불해져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백남빈은 단검에 찔려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려가는 길이 사라졌을 때 백남빈은 자신이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의 바닥에 이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가 지면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바닥이라 분지의 형태와 넓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말괄량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백남빈은 강미루가 아직도 원형의 미로를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빠져 나갔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좀 쉬어야한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지친 데다가 강미루의 단검에 찔린 허벅지의 상처에서 출혈이 가볍지 않아서 어지럽다.

털썩!

백남빈은 풀이 무성하게 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하늘을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면서 상큼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고르며 소지품을 점검해봤다.

악전고투를 치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무황성에 제출해야하는 밀서를 만지던 백남빈의 손길에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가 만져졌다.

정교하게 만든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가 들어있다.

옥패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단단하다.

그 옥패가 막아준 덕분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날린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디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하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날 지켜주신 셈이다.)

백남빈은 냉옥패를 어루만지면서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푸르르! 꿀럭! 꿀럭!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괴상한 소리가 상념에 잠긴 백남빈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 뭔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소리에 백남빈은 모골이 송연해 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남빈은 토곤이 강진남에게 예물로 보내려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꾸르륵! 푸르르!

그 사이에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한 괴성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청랑검이라 이름 붙인 단검의 날을 번득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싼 백남빈은 살금살금 기어서 괴성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반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나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제법 환해 주변을 분간할 수 있다.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로 다가가니 바닥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펴본 백남빈은 이내 그것이 실제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이가 족히 삼십 장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연못에 달빛과 별빛이 비친 것이다.

꾸르르! 푸륵!

괴성(怪聲)은 바로 그 연못 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흙은 따뜻하고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못은 온천(溫泉)인 게 분명하다.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 주변에는 여러 가지 풀이 자라고 있으며 꽃이 핀 것과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 연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백남빈의 콧속으로 풀냄새와 함께 각가지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다.

푸륵! 푸르르!

연못 가운데에서 다시 괴성이 들렸는데 말이 내는 투레질 소리 같다.

백남빈은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살펴봤지만 딱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르! 푸릉!

붉은 색의 무언가가 물위에 떠 있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발버둥을 치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내었다 잠겼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 시커멓고 거대한 머리로 보아하니 강미루의 천리마 흑왕인 게 분명하다.

(붉은 물체는 대려장의 그 말괄량이겠구나.)

백남빈은 비로소 흑왕과 강미루가 자기보다 먼저 이 신비한 절곡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구하고 볼 일이다.

연못에 발을 담가 보니 너무 뜨거워서 살갗을 바늘로 치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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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속의 인연

 

 

-기련산(祈蓮山)!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자리한 험산으로 서북쪽에는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중원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남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기련산의 서쪽 끝은 곤륜산의 장대한 산맥과 이어져 있다.

쏴아아아!

늦여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기련산 전역을 맹렬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쐐애애액!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질풍같이 질주하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이 인물의 경신술은 너무도 빨라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설령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지닌 무림고수라 해도 그저 흐릿한 사람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이나 쭉쭉 나아가는 경이적인 경신술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테니...”

질풍같이 달리는 인영으로부터 문득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 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처럼 걸걸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섬전처럼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 인물이 여자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경신술을 연마했기에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여인의 몸 주위로는 진공(眞空)의 막()이 생겨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들! 이 모두가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간악한 음모이거늘... 그 까짓 비급에 눈이 멀어 고독애로 몰려들다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연신 이를 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주 특이하여 한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구(巨軀)!

여인은 무려 칠척(七尺; 2m 10cm)에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린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이 여인은 다리 하나의 굵기도 어지간한 사내들의 몸통만하다.

투학!

그 강인한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여인의 늘씬한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일까?

비록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 구릿빛 피부에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는 경국지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만이 아니다.

칠척 가까운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팔 다리가 늘씬할 뿐 아니라 들어갈 곳은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나올 곳은 당당하게 나와 있다.

무지막지한 거구의 소유자라는 것만 빼면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께서 이미 변을 당했다면... 전 무림이 나 냉약빙(冷若氷)의 손에 피로 씻기리라!)

거구의 여인은 질풍같이 날아가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큼직한 손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게 오라버니는 생명과 다름없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굉천벽력탄(轟天霹靂彈)보다 더한 것이라도 쓸 수 있다!)

냉약빙이란 이름의 여인은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에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 십여 개가 들어있다. 굉천벽력탄이라는 그 화탄은 한 알로 십장 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여간 서둘러야 한다! 곤륜산의 고독애까지는 아직도 천여 리나 남았으니...!)

쐐애애액!

냉약빙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천여리라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먹히는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이 여인에게는 천리 길도 그저 하루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헌데 냉약빙이 막 하나의 산봉을 새처럼 날아 넘을 때였다.

아악!”

퍼붓는 빗속에서 한소리 애처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산 속에서 웬 여자가...!)

콰우우우!

빛살처럼 질주하던 냉약빙의 몸이 송곳을 꽂듯이 딱 멈춰졌다. 그녀는 달리는 것도 빨랐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빨랐다.

쏴아아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우뚝 멈춰선 냉약빙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그녀의 거구가 삽시에 빗물에 젖어들면서 얇은 여름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흠씬 젖은 옷자락을 통해 그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냉약빙의 젖가슴은 하나하나가 가장 큰 수박만하다. 그 육중한 한 쌍의 살덩이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가빠진 탓에 연신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멈춰선 냉약빙은 먹물을 칠한 듯 짙은 눈썹을 모으며 비명이 들려온 우측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가볼까?)

냉약빙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평상시였다면 당연히 달려가 보았을 것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녀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촌각을 다투어 곤륜산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냉약빙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악! 안돼! 안된다 이놈들아! 아악!”

또 다시 여인의 절박하고도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어떤 여인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냉약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은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같이 초조했지만 같은 여인의 입장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스파앗!

다음 순간 냉약빙의 모습은 흐릿하게 변해서 어떤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온 계곡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는 계곡에도 장대발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그 계곡의 끝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수십 길 높이인 그 절벽 앞쪽으로는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옷을 걸친 사내 십여 명이 어떤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흘흘! 고것 육덕 한번 기막히군!”

빨리 끝내라 장가야! 너 혼자 즐길 계집이 아니지 않느냐?”

빙 둘러선 혈포인들이 저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보는 가운데 한 명의 여인이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내들에게 깔려 능욕당하고 있는 그 여인은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부(美少婦)였다.

여인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우아한 기품까지 지녀 한눈에 보기에도 명문가의 안주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으며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채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미소부의 팔 다리는 흉칙한 인상의 사내 넷이 활짝 벌려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 미소부의 몸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자가 하체를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깔린 여체는 마치 작살을 맞은 듯 물고기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한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인데 그곳에는 사내아이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귀엽고 잘 생긴 그 아이는 바로 유린당하고 있는 미소부의 아들이었다.

사내아이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은 미소부의 아들을 해치고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는 중이었다.

... 정말 기가 막히구만! 이런 계집을 마누라로 두었었느니 태양신협(太陽神俠)이란 놈도 여한은 없었겠다.”

미소부의 몸 위에서 날뛰는 사내가 헐떡이며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였다.

크악!”

커억!”

돌연 단말마의 비명 십여 마디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산통깨지게!”

미소부를 유린하던 사내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직후 그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퍼퍼퍽! 콰당탕!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육시를 할 놈들!”

화악!

뒤 이어 사나운 일갈과 함께 장내로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바로 냉약빙이라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 당신은!”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냉약빙을 본 순간 미소부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자의 뇌리로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여살성(女煞星)의 존재가 떠오른 때문이다.

... 전모(電母) 냉약빙!”

파앗!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여체에서 떨어진 사내는 다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자는 벌거벗은 하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존재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모 냉약빙!

 

여자의 몸으로 신마풍운록에 서열 십위(十位)로 기록되어 있는 절세고수다.

별호가 암시하듯 냉약빙의 경신술은 단연 우내최강이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하다.

냉약빙이 구사하는 전궁만리비(電弓萬里飛)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로 알려져 있다.

전궁(電弓)은 번개를 뜻한다.

전모라는 별호는 냉약빙의 경신술이 번개가 치는 것만큼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냉약빙의 표적이 된 자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전모 냉약빙이 나타났으니 일개 음적에 불과한 사내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으헉!”

나타난 여인이 전모 냉약빙임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뿌옇다 싶은 순간 냉약빙의 모습이 유령같이 앞쪽에 나타난 것이다.

쩌어엉!

이어 그녀의 큼직한 손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고...

안돼, 케엑!”

퍼억!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연 뇌수가 빗속으로 확 뿌려졌다. 냉약빙의 손가락에서 일어난 강력한 파괴력이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머리통이 으깨져 나뒹구는 음적의 시체를 노려보며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았다.

헌데 그 직후였다.

흐윽!”

그녀의 뒤에서 짤막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반사적으로 돌아본 냉약빙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내들에게 유린을 당하던 미소부가 한 자루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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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강 무협소설

 

             고독천년 -孤獨千年

 

 

서장

 

            신마풍운록의 음모

 

 

 

-신마풍운록(神魔風雲錄)!

 

이것은 무림인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人名簿)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인명부로 인해 무림역사상 최악의 살겁이 벌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수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진 대참사가 어이없게도 그저 이름을 나열해놓았을 뿐인 한 권의 책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신마풍운록!

 

제목 그대로 당금의 무림에서 천신(天神)과 마귀(鬼魔)처럼 풍운(風雲)을 일으키고 있는 고수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다.

물론 무림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지방의 패주(覇主)이거나 어떤 방면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들만이 신마풍운록을 장식할 수 있다.

즉,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림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력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마풍운록이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한 권의 인명부는 어느 날 문득 천하 각지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누군가에 의해 작성되어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에 거의 동시에 배포된 신마풍운록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은 득의해 마지 않았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당금 무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임이 증명된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득의는 오래지 않아 공포와 의혹으로 돌변하였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린 명숙들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명숙들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내 밝혀졌다.

 

신마풍운록-!

 

도처에서 일어난 참사의 원흉은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물론 신마풍운록이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다. 신마풍운록은 그저 살인의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신마풍운록에 올려진 이름들에 서열(序列)이 매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작성자는 대단한 통찰과 분석력으로 무림인들의 능력을 분석하여 서열을 매겨 놓았는바, 그것이 재앙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제삼자가 보기에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수긍이 갈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열이 매겨진 당사자들의 생각까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혈겁의 단초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왜 그 작자보다 서열이 낮은가?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같은 불만을 품었으며 급기야 자기보다 상위 서열로 기록된 인물들에게 격렬한 질시와 살의를 느끼게 되었다.

 

-만일 그자가 사라진다면 내가 그자의 서열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같은 악마의 속삭임이 불만을 느낀 무림인들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대참극의 시발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자기보다 윗 서열의 인물을 암살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는 신마풍운록에 서열 칠십이위(七十二位)로 기록 된 상강조수(湘江釣搜)란 인물이었다.

한 자루 낚싯대만 있으면 고래라도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상강조수는 세상의 욕심과 명예 따위는 하찮게 여겨왔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하위 서열로 기록 된 몇 명의 인간들에게 합공을 당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피 빛 회오리의 시작이었다.

상강조수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기보다 윗 서열의 고수들을 암살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질투가 원인인 이같은 추악한 암살극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으며 일단 일어난 피바람은 일거에 전 중원을 휩쓸었다.

피는 피를 부르고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낳았다.

신마풍운록의 고수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상대를 죽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이제 평화란 말은 사라지고 살육과 피비린내만이 강호를 휩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림에 퍼진 한 가지 소문에 의해 신마풍운록이 일으킨 혈풍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고독마야(孤獨魔爺)가 혈마대장경(血魔大藏經)을 얻었다!>

 

이같은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경악으로 전율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에 언급된 한 인물의 이름과 비급의 제목이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 연남천(燕南天)!

 

그가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닌가?

신마풍운록의 첫 장을 차지하고 있는 서열 일위(一位)의 절대고수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인 것이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육십여 년의 세월을 실로 고독하게 살아 왔다.

그에게는 친구는 물론이고 적수도 없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누구도 고독마야의 삼초지적(三招之敵)이 되지 못했다.

적수조차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행한 일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강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절대자!

그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혈마대장경!

 

그 이름은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혈마대장경은 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중 한 명이 남긴 비급이었다.

 

-흡혈마조(吸血魔祖)!

 

사파(邪派) 무림에서 종가로 숭배받는 혈교(血敎)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인육(人肉)을 즐겨먹고 인혈(人血)을 술 대신 마셨다는 전설 속의 마인이었다.

흡혈마조는 천인공노할 악행을 숱하게 자행하였으나 일백 수십 살의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너무도 강한 그자를 세상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염라대왕마저도 두려워서 끝까지 살려두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흡혈마조는 막강했으며 공포 그 자체였다.

흡혈마조가 창안한 저주받을 마공들이 수록되어 있는 비급이 혈마대장경이다.

바로 그 혈마대장경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무적으로 여겨져 온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까지 연마한다면 그 결과는 삼척동자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마야에게 혈마대장경을 연마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가 혈마대장경마저 익힌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영원히 고독마야를 능가하지 못한다!

-혈마대장경의 마공 중 한 가지만 얻어도 독패군림(獨覇君臨)할 수 있다!

 

두려움과 함께 추악한 탐욕이 전 무림을 열병처럼 휩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수많은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 고독애(孤獨崖)로 몰려갔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 거의 전원이 곤륜산으로 운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천하를 집어 삼키려는 음모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치밀하고도 잔혹한 음모의 그물이 전 무림을 옥죄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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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사로잡힌 여인

 

 

휘익!

질풍같이 내달리던 당혜선이 돌연 급정거했다.

"...!"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고검추는 흠칫했다.

당혜선이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단애 위였다도끼로 쪼개놓은 듯 쩍 갈라진 절벽 아래로는 거친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청룡탄(靑龍灘)!

 

기련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가는 험한 물줄기다산속을 수백 리 치달린 거친 계류는 황하와 이어진다.

당혜선이 멈춰선 단애는 그 청룡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콰르르!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다.

팽가촌에서 청룡탄까지의 거리는 오십 리가 넘는다당혜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으음... 틀렸단 말인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던 당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검추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당혜선은 선녀곡을 벗어난 직후부터 추격이 따라붙은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련산에서도 험한 곳을 골라 치달렸건만 끝내 추격을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추격에 가세한 자의 속도는 놀라웠다처음에는 이십여 리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십리 안쪽으로 따라붙었다.

혼자라면 어찌 어찌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고검추를 안고 그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자는 사신각주 본인일 텐데... 추아만이라도 그 살인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비장한 표정이 된 당혜선은 고검추를 안고 우측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바위들 사이를 지나자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입구에 바위들이 겹쳐 있어서 밖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다.

당혜선은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는 맹수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었다.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표범이 석벽 근처에서 돌연 사라졌었는데 피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굴 안에서 죽어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숨기면 누구도 추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파팟!

동굴로 들어간 당혜선은 고검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후 바닥에 눕혔다.

동굴 입구는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멀지 않은 곳으로는 청룡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내공이 제 아무리 심후한 자라도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고검추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고검추는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당혜선을 바라보았다.

대략 반 시진(1시간)쯤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혜선은 혈도가 짚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고검추를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혈도가 풀리더라도 팽가촌으로는 돌아가지 마라사신각의 악귀들이 팽가촌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대신 복우산(伏牛山)에 자리한 호천무맹으로 가서 철봉황(鐵鳳凰고현경(高玄鏡)이란 아이를 만나라내 이름을 대면 그 아이가 널 돌봐 줄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검추를 내려다보던 당혜선은 동굴을 나갔다.

휘익!

당혜선은 동굴 안에 누워있는 고검추를 한 번 더 돌아본 후 새처럼 날아올라 사라졌다.

(어머니...!)

고검추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사신각의 무리들을 유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속내와 달리 고검추는 말을 할 수도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무사하기를막혀있는 혈도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헌데 당혜선이 사라지고 일다경쯤 지났을 때였다.

스악!

한 줄기 검붉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동굴 앞을 스쳐지나갔다.

(... 사신각의 살인귀들 중 한명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검추는 곁눈질로 동굴 밖을 살펴보았다.

엇갈리게 서있는 바위들 틈새로 동굴 밖이 보인다.

하지만 나타났던 자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몸놀림이 어머니에 못지않은 걸 보면 사신각이란 조직의 두목일지도 모른다.)

고검추는 속이 타들어갔다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곳이 당혜선이 사라진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셔야할 텐데...)

고검추는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의 심정이라는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어머니가 과연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고검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반시진은 지나야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의 고검추에게 반시진은 말 그대로 여삼추(如三秋)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라락!

당혜선과 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쪽에서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사신각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오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굴 밖을 주시했다.

휘익!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동굴 앞으로 날아 내렸다.

(!)

그 직후 고검추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타난 자는 검붉은 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얼굴은 같은 색의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부분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신각주였다.

헌데 사신각주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머니!)

고검추는 기겁했다사신각주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여인은 바로 당혜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결국 달아나지 못하고 사신각주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 불리던 흑모철웅조차 쓰러트린 당혜선이다.

그런 그녀가 별 저항도 못하고 사로잡힌 것만으로도 사신각주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가년이 이 근처에서 잠깐 지체했었는데...)

사신각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심후한 공력으로 당혜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이 이쯤에서 잠시 멈췄던 것을 알아차렸었다.

사신각주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서 딱히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천시지청술을 펼쳐서 탐색하려고 해도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탄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흐르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당혜선이 의도한 대로 사신각주는 지척에 숨어있는 고검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털썩!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신각주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당혜선을 바닥에 던졌다.

"...!"

모질게 바닥에 던져졌지만 당혜선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움직이려는 시도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짚인 듯 했다.

"당혜선더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복마신검을 내놔라."

사신각주는 힘없이 누워있는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복마신검을 내놓으라니...?"

당혜선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흐흐흐알만한 인간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인데 발뺌할 작정이냐?“

사신각주는 칙칙한 살기가 서린 눈으로 당혜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혜선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복마신검을 어떻게 내놓는단 말이냐?"

"그럼 네년은 왜 십칠 년 전 호천무맹을 도망치듯 떠났느냐?"

"...!"

사신각주의 이어진 추궁에 당혜선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정관음 능벽운을 제외하면 고창룡과 가장 가까웠던 건 바로 사매인 네년이었다당연히 고창룡은 죽기 전에 네년에게 복마신검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신각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헌데 복마신검이라니... 십칠 년 전 철사자 고창룡이 사모를 겁탈하고 죽은 참사가 사신검중 복마와 관련 있단 말인가?

고창룡이 죽은 이상 오직 네년만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그러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발뺌을 해볼 생각은 마라

사신각주가 쓰고 있는 복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테면 죽여라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내 입에서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혜선은 단호하게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네년이...!"

사신각주의 두 눈이 살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자는 당혜선의 태도에 격노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수단이 없었다.

사실 사신각주는 당혜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의 성격이 얼마나 당찬지 잘 알고 있었다당혜선은 일단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고문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섭혼술을 쓰면 입을 열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된다.

문제는 사신각주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가공할 고수가 기련산에 들어와 있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고수에게 포착되기 전에 어떻게든 당혜선의 입을 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신각주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좋다네년의 입에서 복마신검의 행방을 듣는 것은 포기하겠다그 대신 다른 것을 갖도록 하지."

사신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당혜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당혜선은 불길한 예감에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복마신검은 포기하고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중 한 명이었던 네년의 속살 맛이나 봐야겠다."

사신각주는 음험한 눈으로 당혜선의 풍만한 몸매를 쓸어보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

당혜선의 분노에 찬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상의를 찢어버리듯 단번에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흐윽!”

사신각주는 분노와 수치로 떠는 당혜선의 치마마저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제 당혜선은 작은 속곳으로 은밀한 곳만 가린 민망한 자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럼 네 년의 꿀단지도 구경해볼까?"

사신각주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속곳에도 손을 댔다.

"... 안된다제발 이러지 마라!"

사신각주의 손이 속곳에 닿자 당혜선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지척에 고검추가 숨어있다.

아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했다.

당혜선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혈도가 찍힌 상태라 혀를 깨물 수도 없다.

본좌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면 복마신검의 소재를 대라.”

사신각주는 당혜선의 속곳으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당혜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신각주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모른다난 복마신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그렇게 결심했다니 어쩔 수 없군.”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살기를 뿜어냈다겁탈하겠다는 협박도 당혜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의 그같은 반응도 사신각주가 예상한 것이다.

흐흐흐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마지막 남아있던 보루인 작은 속곳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흐윽!"

하체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 당혜선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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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상한 반지

 

 

 

제왕성에 경사가 생긴 것은 십팔 년 만이다.

소성주 모용준(慕容俊)이 배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왕성 섭씨일족은 자손이 귀하다.

삼대(三代)가 거푸 외아들로 이어져 올 정도였다.

당대 성주인 철면제왕 섭장천도 자식 복이 없었다. 본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첩을 뒀지만 후손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본처가 병으로 죽자 섭장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었다.

섭장천의 두 번째 아내 주영청(朱永淸)은 황제의 누이였다.

주영청은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가 다음해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었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쓸쓸히 지내는 누이를 보다 못해 재가를 권유했다.

이에 주영청은 다른 좋은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할아버지뻘인 섭장천에게 시집을 왔었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 온 다음 해에 늙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 섭무궁(葉無窮)의 돌 잔칫날에 비극이 벌어졌다.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 달마묵장을 노리고 제왕성에 잠입했다가 주영청을 살해하고 섭무궁을 납치해간 것이다.

그날 이후 제왕성에서는 웃음이 끊겼다.

섭장천은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성격도 모질고 괴팍해져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관대하고 정의롭던 제왕성이 포악한 패도(覇道)의 집단이 된 것도 십팔 년 전의 그 비극이 벌어진 이후부터였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무림을 지배해온 제왕성은 어느덧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두려움과 증오의 악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십여 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면지존에게 납치당한 섭무궁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섭장천의 나이는 칠순을 넘어버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양자를 들여 제왕성의 대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섭장천의 결단으로 덕을 본 행운아가 바로 모용준이다.

모용준은 하남성에 근거를 둔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였다.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는 제법 기침 꽤나 하지만 무림 전체로 놓고 보면 딱히 특출 날 것도 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모용세가가 내세울만 자랑거리가 한 가지는 있었다.

전전대의 안주인이 철면제왕 섭장천의 먼 친척 누이였다는 게 그것이다.

섭장천은 생판 남보다는 그래도 약간의 피가 섞인 모용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용준은 핏줄 덕분에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서 일약 무림의 패자인 제왕성의 소성주가 된 것이다.

바로 그가 내일 혼례를 올릴 예정이다.

 

* * *

 

(이런 허접 쓰레기를 예물이라고 내놓다니...)

진상파(陳祥芭)는 치밀어 오르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제왕성의 내()총관 구숙정(具淑貞)이 가져온 패물함의 내용물이 그녀를 기막히게 만든 것이다.

 

내일 모용준과 혼례를 올릴 예정인 진상파는 황금성(黃金城)의 성주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제왕성이라면 대륙의 상계(商界)는 황금성이 장악하고 있다.

황금성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실조차도 황금성의 눈치를 본다고 할 정도다.

올해 나이 스무 살인 진상파는 바로 그 황금성의 성주다.

전대 성주였던 새석숭(賽石崇) 진보륜(陳寶輪)이 돌연사하면서 외동딸인 진상파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전대 성주의 유일한 핏줄이라 황금성을 물려받긴 했으나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상파를 몰아내고 황금성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인척들이 호시탐탐 진상파의 자리를 노려왔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제왕성의 무력이라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진상파는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이 패물들이 황금성의 주인이신 소저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왕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 구숙정은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패물함의 패물들은 질과 양에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영청공주(永淸公主)님께서 제왕성으로 시집오실 때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구숙정은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나이지만 구숙정은 여전히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구숙정에게는 구미호리(九尾狐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별호가 붙어있다.

성주님께서 다음 대 제왕성의 안주인이 되실 소저에게 친히 내리신 것이니 소중하게 다뤄주시길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패물함을 진상파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주님께는 총관이 나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진상파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제왕성에 왔지만 진상파는 아직 성주인 섭장천을 접견하진 못했다.

소저의 말씀은 그대로 성주님께 전해드리지요. 내일 있을 혼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열려있는 문 밖에는 여자답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여자 무사들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거구의 여자들은 진상파의 전속 호위들인 백팔금차(百八金叉)들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약물로 단련된 그녀들의 몸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백팔금차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단 한시도 신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백팔금차들 덕분에 진상파는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팔금자들은 구숙정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년...)

백팔금차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영빈관(迎賓館)을 나서는 구숙정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진상파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가 구숙정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그 상판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제왕성의 진짜 안주인이 누군지 알게 될 테고...)

독기를 품고 영빈관을 떠나는 구숙정의 뒤에서 백팔금차들이 방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방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 패물들이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주제라도 아니 다행이네.”

진상파는 코웃음 치며 패물함의 내용물들을 흘겨보았다.

세공(細工)은 고리타분하고 보석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관리 상태까지 엉망이고...”

진상파는 패물들을 건성으로 뒤적였다.

물론 패물함의 패물들이 값어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들은 아니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제법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품질을 지닌 보물들만 보며 자라온 진상파의 눈에는 한 없이 허접하게만 보였다.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면 뭐해? 이 패물들을 다 팔아봐야 내가 끼고 있는 반지 하나 값도 안 나올 텐데...”

패물들을 뒤적이는 진상파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두 씨만한 금강석이 박힌 그 반지를 팔면 수만 평의 옥토(沃土)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왕성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니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만...”

냉소하던 진상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패물을 뒤적이던 진상파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쑥 끼워졌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저절로 끼워진 그 반지를 살펴보았다.

용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반지인데 재질은 은이며 용의 눈 부위에는 콩알보다도 작은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다.

하다하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진상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쌍룡패미(雙龍敗尾)!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삼키는 세공이라니... 황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면서 어쩜 이토록 조잡할 수가 있지?”

진상파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재질은 은(), 용의 눈이라고 박아 넣은 건 질 낮은 홍옥(紅玉), 잘 춰줘야 은자 백냥 정도 나갈 이따위 싸구려 반지까지 패물이라고 내놓아? 황금성의 성주인 날 엿 먹여도 유분수지.”

진상파는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뽑아내려했다.

헌데 반지는 의외로 꽉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끼워질 때는 어째서 그리 쉽게 끼워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개 다 속을 썩이네.”

오만상을 쓰며 반지를 뽑으려던 진상파의 손이 멈칫, 멈춰졌다.

말해!”

진상파는 왼손으로 반지를 만지면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모용준은 저녁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진상파의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들이라는데 그다지 질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뭉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였다.

여자는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는데 엄청난 거구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 몸매를 지니고 있다.

얼굴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이 거녀(巨女)의 이름은 철관음(鐵觀音)이다.

진상파의 수신 호위들인 백팔금차의 수령이 바로 그녀다.

백팔금차의 수령답게 철관음의 무공은 심후하여 신주이십팔숙중 오왕, 육패, 칠절에 필적할 정도다.

내일 혼례를 앞둔 인간이 악우(惡友)들과 어울리고 있다?”

철관음의 보고를 받은 진상파는 이를 바득 갈았다.

철관음은 진상파의 지시로 제왕성의 소성주 모용준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계집들도 있겠지?”

진상파는 철관음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철관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언니 잘못은 아니니까.”

!

진상파는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 타당!

패물이 들어있던 패물함이 탁자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상파는 황금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에 매진해온 탓에 무공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진상파의 무공 수준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정색하고 화를 내면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타고난 기질과 위엄이 남다른 탓이다.

... 환락가로 유명한 양주(揚州)에서 창기(娼妓)들을 여럿 불러와 놀고 있습니다.”

철관음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요충지 양주는 환락가로 유명하다.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북경과 금릉을 제외하면 창기로 이름난 네 고장이 있고 그중 한 곳이 양주다.

양주의 창기들은 양주수마(揚州瘦馬)라 불린다.

양주수마에 비견되는 유명한 창기들로는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仙娘), 태산고자(泰山姑子)가 있다.

양주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모용준은 그래서 양주로부터 창기들을 조달해왔을 것이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도 태산고자라는 이름의 특별한 창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산고자는 매춘을 하는 도고(道姑)들이다.

아무리 대담한 모용준이라 해도 음란한 도고들을 제왕성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다니들까지 끼고 농탕(弄蕩)을 치고 있다 이거지?”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에 이를 바득 갈았다.

진상파는 당연히 남편이 될 모용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모용준은 섭씨일족의 피가 조금 흐른다는 이유로 운 좋게 제왕성의 후계자가 된 행운아일 뿐이다.

성격은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밝혔다.

그저 출신 배경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내가 모용준인 것이다.

모용준이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진상파는 자세히 알고 있다.

모용준의 악행과 엽색에 관한 보고서의 지면이 백장을 넘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은 황금성 성주로서의 지위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도덕군자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앞둔 작자가 창기들까지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제왕성 내의 계집들을 끼고 놀면 뒷말이 생길 것같으니까 밖에서 창기들을 조달한 듯합니다.”

찰관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앞장서!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진상파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상파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철관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행실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와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창녀들을 집에 끌어들여?”

!

진상파는 거칠게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놔야만 해!)

진상파는 이를 부득 갈며 영빈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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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風雲氷竹島

 

 

빙죽도(氷竹島)!

사해선문의 총단이 있는 절유도(絶有島)와 마주보고 있는 고도(孤島).

희구한 빙죽(氷竹)으로 빽빽이 둘러싸여 있는 신비의 섬이었다.

진시초(辰時初), 수십 척의 거선이 빙죽도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선두(先頭)의 거선___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있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선수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

맨 중앙에 선 인물은 바로 사해신룡 이었다.

청색무복을 가뿐하게 걸친 그의 전신에는 기개가 넘쳐흘렀다.

그 옆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능부인이 서 있었고 기검룡과 능소취도 그녀의 옆에 서서 다가오는 빙죽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뒤로는 육 명의 장한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사해선문의 내삼당(內三堂), 외삼당(外三堂)의 당주(堂主)들이 그들이었다.

 

외삼당주(外三堂主),

___흑수창객(黑水創客),

___동해쌍교(東海雙蛟),

내삼당주(內三堂主),

___백객(白客) 조인창(曺仁滄),

___신력대도(神力大刀) 탁몽(卓蒙),

___철배수(鐵徘手) 독고인(獨孤仁),

 

이때, 빙죽도로부터 한 척의 소주(小舟)가 쾌속하게 거선을 향해 다가왔다.

소주에는 비천해응 하후염이 피풍을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___ !

하후염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단번에 날아 범섬 위로 올라섰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는 사해신룡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해신룡 역시 진중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수고하셨소. 본 문주(門主)는 내삼당의 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들과 섬으로 오를테니 당주께서 거선들을 지휘하여 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후염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

곧 그들을 태운 거선은 빙죽도에 닿았다.

철썩... ___ !

파도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하해신룡을 필두로 기검룡과 능소취, 능부인은 배에서 내려섰다.

뒤이어, 능부인의 시중을 드는 네 시녀가 내렸고 두 척의 거선에서 칠십 이 명의 체격이 우람하고 건장한 괴한들이 따라 내렸다.

칠 십 이명의 거한들은 모두 등에 커다란 감산도(坎山刀)를 메고 있었다.

___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 이들이 바로 사해선문 최정예들이었다.

사해신룡 일행은 빙죽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하나의 구릉을 넘어 그다지 넓지않은 계곡에 이르렀다.

계곡의 긑은 칠팔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있었고 그 주위네는 빙죽도 특유의 빙죽(氷竹)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계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사해신룡은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파랑대도진(波浪大刀陣)을 펼쳐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칠십이도객들은 신속히 몸을 움직여 하나의 진식(陣式)을 형성했다.

사해신룡은 이번에는 내삼당의 세 당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문의 전력(全力)은 전격적으로 빙죽도에 총집결되어 있소. 이백여 척의 전선(戰船)이 빙죽도 주변의 해상을 봉쇄하고 있고 이 섬에도 오백여 명의 본문 수하들이 진을 치고있소.]

[...!]

[허나 이번 거사(巨事)가 극비에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밀이 밖으로 새어나가 오늘이 빙죽도에 적들이 내침할 것으로 추축되오.]

그말에 일순 백객 조인창의 시선이 가늘게 떨림을 아무도 발견치 못했다.

허나, 한쪽 옆에서 한쌍의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뚫어져라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조인창 또한 알지 못했다.

능부인 바로 그녀였다.

사해신룡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본문은 능히 사해구주를 위무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오늘의 일이 실패한다면 본분은 멸문의 화를 면치못할 면치못할 것이오.]

사해선문 수하들의 안색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비록 강대문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두려워 해본 적이 없는 사해선문이었다.

허나 이번 일만은 실로 막중한 것인지라 그들은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해신룡은 나머지 고수들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여러 형제들은 삼당주의 지휘를 받고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여 주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용아는 이곳에서 취아와 숙모를 지켜다오.]

기검룡은 염려말라는 듯 주먹을 쥐어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취아와 숙모님은 용아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어요.]

[하하... 그래 용아만 믿겠다.]

사해신룡은 껄걸 웃으며 기검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 그는 계곡 밑의 석벽으로 다가가 족히 천 근(千斤)은 됨직한 거석(巨石)을 두 팔로 껴안았다.

[으협___!]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는 거석을 번적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하나의 석동이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 저런 곳에 동굴이 있었다니...!]

중인들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석동 안으로부터 극심한 한기가 뻗어나와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나 사해신룡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능부인을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들어갔다 오리다.]

[...]

능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염려의 기색이 가득했다.

사해신룡은 등을 돌려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그가 동굴 안으로 사라지자 사위는 갑자기 깊은 적막에 빠졌다.

근 육백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의 전신을 압박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___ !

일진 표향이 일었다.

중인들은 흠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섬의 서쪽에서 급격히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순간 기검룡은 벌떡 일어섰다.

[여기들 계십시오!]

그는 중인들에게 외친 후 가볍게 몸을 날렸다.

___!

그는 약 십여 장 높이의 빙죽긑에 올라섰다.

그러자 섬 주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해선문의 크고 작은 이백여 척의 전선들이 빙죽도를 몰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급격히 서쪽방향에서 백여 척의 대선단이 나타나 빙죽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소리쳤다.

[서쪽에 대서단이 나타났어요! 아마 해룡방(海龍幫)에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말에 중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주역전선들이 점차 서쪽 해상으로 집결하는 것이 보였다.

기검룡은 빙죽 위에 선채 다시 상황을 알렸다.

[동북쪽에서도 몇 척의 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역시 두 척의 선박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어요.]

그말에 삼당주 중 한 명인 탁몽이 나직 이침음했다.

[, 본문의 수하들에게도 극비로 붙여졌던 일인데 강호로 유출되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순간, 백객 조인창의 두눈에 당황함이 스쳤다.

허나 곧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때, 해룡방의 전선들이 무서운 속도로 진젹하여 사해선문의 전선들과 충돌했다.

___ 우지끈___

[___!]

[죽여라___!]

폭음과 굉음, 바다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올랐다.

이어, 무수한 화전(火箭)이 날았다.

삽시에 몇 척의 전선이 불길에 휩싸였다.

기검룡은 숨을 조이고 사태를 관망했다.

허나, 사해선문의 선진(船陣)이 서서히 무너지고 해룡방의 전선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진(船陣)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군.]

기검룡은 검미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두눈을 크게 떴다.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던 사해선문의 전선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환()을 만들어 해룡방의 전선들을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 정말 멋진 유인술이다!]

기검룡은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때, 사해선문의 전선사이로 몇십 척의 작은 갑선(甲船)들이 나타났다.

갑선들은 쏜살같이 해룡방의 전선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순간, ___ 콰르릉___

엄청난 폭음과 함께 해룡방의 전선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파산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선단의 삼층 누각이 세워진 한 척의 거선은 십여 채 거선의 호위를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왔다.

그러자, 사해선문의 선진에 선 수십 척의 전선이 이를 추격했다.

___ ! ___

또다시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삼층누각의 거선을 호위하던 십여 척의 전선들이 갑선에 의해 파산한 것이다.

허나 삼층누각의 거선은 또 다른 전선들의 추격을 저지하는 사이에 빙죽도를 향해 바짝 접근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저선 중 한 척의 전선이 굉장한 속도로 거선을 육박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바로 비천해응 하후염이 타고 있었다.

___ !

그는 순식간에 선수를 박차고 거선의 뱃전으로 날아 올랐다.

[해룡왕(海龍王)! 나서라!]

하후염이 맹렬한 기세로 소리치자 십여 명의 인물들이 그를 막아섰다.

허나,

[___ ___ !]

[___ !]

그들은 한꺼번에 피보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이때,

[비천해응! 멈춰라!]

삼층 누각으로부터 두 명의 적포노인들이 날아와 비천해응의 공격을 막아갔다.

___ ___!

장력이 무섭게 격동하는 순간, 비천해응 하후염은 비천응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쌍장을 후려쳤다.

[___ ___ !]

[___ !]

두 명의 적포노인은 처절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허나, 바로 그때, 다시 한 명의 금포중년인이 하후영의 말을 가로 막았다.

금포인의 공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장()은 마치 천근 바위가 짓눌려 오는 듯 무서운 맙력을 내포했다.

___

정면으로 금포인의 장력을 받아친 하후염은 일순 신형을 휘청하여 해면으로 떨어졌다.

[!]

하후염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이때,

[조심하십시오!]

한소리 외침과 함께 전선에서 달려온 흑수창객이 떨어지는 하후염의 발밑으로 판자를 날려 보냈다.

[타앗!]

하후염은 판자를 딛고 흑수창객의 전신으로 신속히 날아 올랐다.

허나 그 사이 행룡방의 거선은 이미 빙죽도에 닿았다.

[상륙하라___]

금포인의 우렁찬 외침에 이어 백여 명의 해룡방 수하들이 속속 빙죽도로 뛰어 내렸다.

이때, 문득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기검룡은 흠칫 했다.

예의 두 채의 거선이 사해선문 전선들의 제지를 뚫고 거의 빙죽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빙죽에서 가볍게 아래로 뛰어 내리며 중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 하십시오. 선진(船陣)이 뚫려 적도들이 빙죽도에 상륙했어요.]

중인들은 바짝 긴장하여 병기를 움켜 쥐었다.

그 순간,

[__ __ !]

[__ __ !]

___! ___ !

남쪽과 서쪽, 그리고 동북쪽에 상륙한 적들이 사해선문과 무섭게 충돌했다.

비명! 비명! 비명!

온통 어지러운 폭음과 비명이 바다를 집어삼킬 듯 뒤 흔들었다.

급기야 남쪽의 거선은 사해선문의 포위망을 뚫고 순식간에 계곡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 식경이 채 미치지 못해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내로 날아내렸다.

___ ___ !

선두에 선 인물은 삼십(三十)전후의 냉오한 인상의 중년검수였다.

그의 뒤로 안광이 형형한 흑의검수 이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백객 조인창이 안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귀하는 어느 방문의 고수들이오?]

중년검수는 냉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본인은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 휘하의 흑석도주(黑石島主) 사공망이오. 빙죽도를 접수하러 왔소!]

그의 안하무인격인 말에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남해문(南海門)___

이는 남해(南海)의 십팔 개 섬이 연합한 문파였다.

그들은 중원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막강하여 중원을 제패하고도 남을 정도라 했다.

남해문의 문주(門主)는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라 불리는 잠룡도(潛龍島)였다.

중원인은 이들의 동태를 모르고 있었으나 사해선문이나 해룡방 등에서는 항상 이들을 경원해 왔다.

헌데, 지금 남해십팔도 중 제 십칠도인 흑석도(黑石島)의 고수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탁몽이 중년검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빙죽도는 본문이 오랫동안 소유해온 영지요. 허튼소리 집어 치우시오.]

허나, 중년문사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그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곱게 말할 때 물러가라!]

탁몽은 분노한 두눈을 부릅떴다.

[무엇이라고? 이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받아랏!]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벼락 같이 감산대도를 휘둘렀다.

___ ___ !

산악같은 도기가 무섭게 허공을 덮었다.

[!]

사공망은 허나 코웃음치며 장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어림없다!]

탁몽은 자신있다는 듯 장검을 마주쳐 갔다.

허나,

[흐흡!]

그는 다급한 신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사공망은 쾌속한 일검을 그어냈다.

___ !

[___ !]

탁몽은 황급히 물러섰으나 어느새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말았다.

이때 보고있던 백객 조인창과 철배수가 동시에 사공망을 향해 출수했다.

허나 사공망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리며 기이한 검식을 펼쳤다.

[___ !]

미처 생각지못한 각도에서 밀려오는 검기에 백객과 철배수는 가볍지 않은 검상을 입었다.

헌데 이때,

[__ __ __ ___!]

동북쪽에서 돌연 웅후한 장소성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공망은 다급히 검세를 증폭시키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요지(要地)를 점령하랏!]

순간 흑의검수들은 일제히 칠십이도객을 덮쳤다.

허나 그와 동시에 탁몽이 감산도를 높이 치켜들며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발진(發陣)!]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칠십이도객은 일제히 신형을 움직여 덮쳐드는 흑의검수들에 맞섰다.

___ ___ !

___ 차차창___!

그들이 펼쳐낸 도막(刀幕)에 발진되어 흑의검수들은 속속 퉁겨나갔다.

___파랑대도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흑의검수들은 신랄한 검식으로 어지러이 움직였다.

허나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관전하던 사고망은 두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소리쳤다.

[바보같은 놈들! 그까짓 도진(刀陣) 하나 파해하지 못하다니!]

이어 그는 시녕을 번뜩 하는 순간 칠십이도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백객과 철배수가 급히 그의 공세를 차단했다.

허나,

[크윽!]

[으음...]

그들은 가슴에 치명적인 일검을 맞고 쓰러졌다.

사공망은 휙!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그의 신형은 칠십이도객의 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것이 아닌가?

[___ !]

[__ ___ !]

여덟 명의 도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것은 그야말로 섬전일순 이었다.

그들로 인해 도진이 멈칫 하자 흑의검수들이 급격히 도진에 충돌했다.

___ 차창___!

허나 칠십이도객들은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그들을 밀어냈다.

이때 사공망이 지면으로 날아내리며 외쳤다.

[흑살합벽검(黑煞合碧劍)을 펼쳐라!]

순간 흑석도의 검수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그 기세는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콰르릉___!

검세가 파랑대도진과 맞닥뜨리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___ !]

[__ __ __ !]

[___ !]

십여 명의 도객들이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이 광경에 탁몽은 핏발 선 눈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뚫리면 안된다. 막아랏!]

그는 외팔로 도()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도진을 이끌었다.

허나, ___! ___ !

[___ ___ !]

[___ !]

도객들은 잇달아 흑살합벽검에 부딪쳐 죽어갔다.

이때였다.

[도진(刀陣)을 푸시오! 희생만 늘 뿐이오!]

부다못한 기검룡이 소리쳤다.

순간 탁몽은 멈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남은 도객들을 지휘하여 천해비동의 입구를 막아섰다.

기검룡은 어느새 여섯 자 길이의 빙죽을 깨어들고 번득 신형을 날려 사공망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오면 용서치 않겠소!]

[흐흐... 애송아 비켜랏!]

사공망은 기검룡을 얕잡아보고 육성의 공력으로 가볍게 장력을 밀어냈다.

허나 기검룡은 슬쩍 신형을 피하며 위품있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경고했소!]

이어 그는 들고있는 빙죽을 급속히 휘둘렀다.

___ ___!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빙죽은 무서운 기세로 사공망을 짓쳐들었다.

사공망은 흠칫 하며 몸을 피했다.

허나, 파파팍___!

[으윽!]

빙죽의 기세가 너무도 급격해 그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서 선명한 핏줄기가 푹 솟구쳐 올랐다.

[... 이놈의 꼬마가...!]

그는 급히 지혈을 하고 다시 전력을 다해 일장을 후려쳤다.

허나 기검룡의 공격은 그보다 한수 빨랐다.

[벽력진천___!]

___!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닥뜨리자 가공할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 이럴 수가...!]

사공망은 크게 한 걸음을 밀려나 창백한 안색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기검룡 그는 상체를 약간 휘청했을 뿐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랍다. 애송이 놈이 백년공력을 지닌 나를 능가하다니...!]

사공망의 안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허나 곧 그는 입술을 불끈 깨물며 양손으로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보검에서 마치 흑무(黑霧)를 연상케하는 시커먼 검기(劍氣)가 쏟아져 나와 사위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이 돌연한 광경에 바짝 긴장했다.

그는 빙죽을 버리고 양손에 천강신공을 끌어모았다.

헌데 이때, 휘익! ___!

장내에 한 명의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버렸다.

순간 백객 조인창의 안색이 홱 변했다.

[... 태산일수(太山一叟)!]

그는 경악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___태산일수, 그는 십년 전 낙혼애의 일전에서 천강마존에게 죽은 백팔무인의 일인(一人) 태산일괴(太山一怪)의 제자였다.

그의 사부는 죽었으나 그는 오히려 태산일괴보다 자질이 뛰어난 절정고수였다.

태산일수는 장내에 대치한 기검룡과 중년검수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 저런 기재가 있었다니... 어린나이에도 저 흑의검수의 기세를 오히려 능가하는구나.)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사공망은 대갈을 터뜨리며 치켜들었던 검을 휘둘렀다.

___ !

그의 전신을 짙게 감쌌던 흑빛검기가 해일처럼 기검룡에게 밀어닥쳤다.

허나 기검룡 또한 지지않고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참마절(斬魔絶)!]

순간, 츠츠츠츠츳___! ___!

검은빛의 검기가 새파란 광채를 띄운 천강신공에 의해 물결갈라지듯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흑!]

[...!]

동시에 답답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 헌데 보라!

사공망은 칠팔 보나 뒤로 물러서 울컥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은 서너 군데 검상을 입었지만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관전하던 중인들은 모두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털썩___!

사공망은 마침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위로 재빨리 흑의검수들이 검진을 펼쳐 호법을 섰다.

그때였다.

[용오빠___!]

능소취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기검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검룡은 선혈이 배인 상처에 지혈을 시키며 그녀를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에 약간 베었을 뿐이니까.]

보고있던 능부인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득 기검룡의 곁으로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상처를 좀 보자꾸나.]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강적들이 주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___ !

한 명의 적포괴인이 번득 장내로 날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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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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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달마와 천마의 비사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의 제자임에도 무공수련보다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더 많았던 고불선사는 천하를 떠돌며 전대의 고승들이 남긴 유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날도 고불선사는 천태산(天台山)에 남아있는 육조(六祖;선종의 육대 종사 혜능)의 유적을 연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쏟아지는 굳은 날씨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육조의 귀한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고불선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아악!”

헌데 빗속을 뚫고 발길을 재촉하던 고불선사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제자로서 위급한 처지의 중생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달려가 보니 산적들이 산속의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을 겁탈하려는 중이었다.

고불선사는 산적들을 혼내 쫓아 보내고 여인을 구했다.

전삼낭(全三娘)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사냥꾼의 아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었던 남편은 사냥 도중에 변을 당해 죽었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를 근처 산채의 산적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겁탈당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가을비를 맞은 탓인지 전삼낭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불제자로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불선사는 전삼낭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전삼낭을 보살피던 중 고불선사는 그만 파계를 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전삼낭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고불선사쯤 되는 고승이 그저 여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그 여자가 함정을 파서 고불선사를 유혹한 것이 아닐까?)

강유는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꿈같은 하루 밤낮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고불선사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금색계를 지켜야하는 불제자로서, 그것도 손녀뻘인 젊은 여인을 간음하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고불선사는 회한과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삼낭의 필사적인 애원에 고불선사는 자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삼낭은 부처님이 정말 계신다면 고불선사가 자신을 범한 것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삼낭으로부터는 용서받았지만 고불선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노리개를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고 떠나며 언제든 소림사로 찾아와 죄의 대가를 받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강유가 고불암에서 가져온 노리개는 예상과 달리 원래부터 고불선사의 것이었다.

 

전삼낭과 헤어져 소림사로 돌아온 고불선사는 토굴(土窟)에 스스로를 가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헌데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밀봉된 편지가 고불선사가 참회하고 있던 토굴에 은밀히 전해졌다.

봉투 안에는 고불선사가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었던 노리개와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기를 보러 와달라는 전삼낭의 편지였다.

고불선사는 토굴을 나와 한달음에 전삼낭을 인연을 맺은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전삼낭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전삼낭은 고불선사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불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삼낭과 아기뿐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자가 아기의 목에 칼을 댄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선사는 비로소 일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불선사가 전삼낭을 만난 것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귀면지존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마교의 당대 교주 귀면지존!)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 무림의 종가다.

동진(東晋) 시대에 결성 된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는 서역의 배화교(拜火敎)와 천축의 미륵(彌勒)사상을 받아들여 마침내 마교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교는 오십 여 년 전 제왕성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제왕성에 의해 뿌리가 뽑혔다고 알려진 마교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암약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마교의 교주 귀면지존은 무슨 목적으로 고불선사님을 파계시키는 함정을 판 것일까?)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불참회기를 읽었다.

 

전삼낭 모녀를 인질로 잡은 귀면지존은 몇 장의 종이를 고불선사에게 건네주며 해독(解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종이들은 원통형의 물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탁본(拓本)이었다.

노납은 탁본의 문양들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귀면지존은 그 고대 범어를 해독하기 위해 옛날 문자에 박학(博學)한 고불선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비록 음모에 빠져서 관계를 맺은 결과이긴 하지만 고불선사는 전삼낭이 낳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면지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탁본에 새겨진 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것인 탓에 고불선사로서도 해독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귀면지존은 고불선사는 증표로 노리개를 요구했고 그것을 가져오는 자에게 탁본의 해독본(解讀本)을 건네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노리개가 고불선사께서 귀면지존에게 건네준 증표라는 건데...)

강유는 탁자에 내려놓은 노리개를 만져보며 검미를 모았다.

(이게 어떻게 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또 아버지는 어떤 경로로 고불선사께서 탁본을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풀릴 길 없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설마!)

어느 순간 강유의 눈이 부릅뗘졌다.

(아버지도 귀면지존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대신 보내 탁본의 해독본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강유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귀면지존의 마수에 빠져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는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귀면지존이 고불선사님을 함정에 빠트려가면서까지 해독하라고 강요한 탁본의 내용은 무엇일까?)

강유는 타들어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고불참회기를 집어들었다.

(전삼낭으로 하여금 고불선사님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걸 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강유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 맙소사!)

강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불참회기를 넘겼다.

 

<노납은 십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탁본의 내용을 해독할 수가 있었는 바, 그 내용과 실체는 실로 놀라웠다. 귀면지존이 노납에게 맡긴 탁본은 바로 달마묵장에서 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불참회기의 내용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달마대사의 고사를 굳이 수기에 적어놓으신 이유가 있었구나.”

강유는 고불참회기가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견문이 일천한 강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달마묵장은 무림에 전해지는 가장 귀한 보물들인 무림칠보(武林七寶)의 으뜸이다.

달마대사가 달마묵장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힘을 얻으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고불선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음모는 바로 그 달마묵장으로 인해 벌어졌던 것이다.

(달마묵장이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무림은 다시 한 번 마교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기는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고불선사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 끝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탁본에는 두 가지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비결은 삼백육십오 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墨掌眞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글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에는 그러나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문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정수 중의 정수가 묵장진언인 것이다.

묵장진언을 이루고 있는 삼백육십오 개의 문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무공과 술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묵장진언에서 어떤 힘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소질과 기연에 달린 것이다.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긴 두 번째 비결은 아주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두 자로 이루어진 그 비결에는 묵장진언에 못지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쌍혜합벽(雙鞋合壁), 묵장전지(墨掌展指), 천마심현(天魔心現)>

 

이것이 달마묵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결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한 쌍의 신발이 합쳐지면(雙鞋合壁)

검은 손바닥이 손가락을 펼 것이며(墨掌展指)

천마의 심장이 나타날 것이다(天魔心現)

 

한 쌍의 신발이라면 달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가죽신, 달마혜(達磨鞋)일 것이다.

달마는 가죽신 중 한 짝은 자신의 관 속에 남겼고 다른 한 짝은 지팡이에 매단 채 서쪽으로 가져갔었다.

달마가 한 쌍의 신발을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비결에 포함되어 있는 천마의 심장, 천마심(天魔心)이란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무림칠보의 서열이위(序列二位)이기도 한 천마심은 마교의 중흥조(中興祖)인 천마조종(天魔祖宗)의 심장, 정확히는 그의 내단(內丹)이다.

 

보통 천마(天魔)라 불리는 천마조종은 고금제일인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마교의 제칠대 교주였던 천마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마교는 오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패권을 다퉜던 막강한 세력이다.

하지만 마교에 전해지는 것은 천마의 진정한 능력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천마에게 불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달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의 나이가 달마보다 일갑자(一甲子;60)쯤 많기는 했지만 두 절대고수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쳐져 있었다.

마도와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 간의 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천마의 패배였다.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마는 달마와의 결투에서 지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천마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렸으며 그의 모든 힘과 저주가 천마심으로 남았다고 한다.

무림에는 천마심을 얻는다면 제이(第二)의 천마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달마묵장은 달마의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는 보물일 뿐 아니라 천마의 저주, 천마심을 봉인하고 있는 법기(法器)인 것이다.

달마묵장은 무엇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하다.

그 달마묵장이 손가락을 펴서 천마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달마의 가죽신, 달마혜가 다시 합쳐지는 게 그것이다.

 

고불선사는 십여 년 만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후 오 년 동안 삼백육십오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을 연구했다.

물론 귀면지존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에서 어떤 무공비결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자질과 지식이 무공과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을 오 년 간 연구한 결과 무공 대신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만들어냈다.

 

-달마독명안(達磨讀命眼)

 

바로 이것이다.

달마독명안은 일종의 관법(灌法;진리를 살피는 법)이다.

이것을 온전히 수련해 내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흘러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달마독명안에 대한 설명을 읽은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달마독명안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무서운 신통력일 것이다. 불문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과 흡사한...)

육신통은 인간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여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것을 궤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달마독명안은 바로 이 육신통과 여러모로 통하는 능력이다.

(묵장진언을 불과 오 년 간 연구하여 육신통에 버금가는 달마독명안을 만들어내신 걸 보면 고불선사님도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강유는 새삼 고불선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적어놓은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즉 두 가지 비결을 외워 기억한 후 반드시 고불참회기를 태워 없애야할 것이다.>

 

고불참회기는 고불선사가 남긴 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염치없지만 시주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전삼낭과 그녀의 딸을 귀면지존의 마수에서 구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면 그 은혜를 삼생(三生)에 걸쳐서라도 갚을 것이다.>

 

(스님의 근심하신 바를 기억해두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강유는 고불참회기와 노리개를 향해 합장을 했다.

그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삼낭 모녀를 찾아내어 보살펴주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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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이 새겨지다.

 

 

안개의 벽속에는 여전히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형상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법에 의해 만들어진 환각일 거라고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임청우였다.

기괴한 형상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임청우는 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에 찍혀있는 광점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안개의 벽을 절반 쯤 지났을 때였다.

“...!”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기괴한 형상들의 모호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같이 강렬한 시선이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뭐지?)

임청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수많은 기괴한 형상들 속에 어떤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서 임청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모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옷!

건장한 몸에 걸쳐진 화려한 비단옷은 무채색인 기괴한 형상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부각된다.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진법 속에 있다.)

임청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인물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부르르!

바로 그때 허리춤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호리병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뱀 중의 왕인 이놈이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임청우는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물이라 보지 않고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건데...)

호리병에 잠깐 시선을 돌렸던 임청우는 다시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속으로 반문해보았다.

(나 혼자 잘못 본 것이라면 영통한 이놈까지 두려움에 떨 리가 없다.)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아직도 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임청우는 자신이 결코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임청우는 겁에 질려 안개의 벽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훼손된 북두무랑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임청우가 안개의 벽 속에서 보았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

북두무랑으로 들어선 인물은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참하게 훼손된 북두무랑의 참상이 그 인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임청우조차 분노했던 만행을 보면서도 그 인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서있던 그 인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사사!

그 인물이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훼손되었던 북두무랑의 양쪽 벽이 매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매끈해진 벽면에는 수많은 글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던 무학비결들이었다.

북두무랑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진 흑옥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벽 속에서 북두칠성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고 북극성 자리에는 북두홀이 끼워져 있다.

달칵!

그 인물이 손을 대자 북두홀은 간단하게 흑옥의 벽에서 분리되었다.

“...”

벽에서 떼어낸 북두홀을 어루만지는 그 인물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한숨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인물은 오른쪽의 월동문으로 나왔다.

북두무랑을 나온 그 인물은 월동문 옆에 새겨져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인물은 벽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파팟!

그러자 불꽃과 돌가루가 튀며 새로운 이름이 서명에 추가되었다.

서명의 맨 아랫줄에 새겨진 이름은 <林靑牛>였다.

 

***

 

농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류폭포(天流瀑布)는 높이가 오십 장이 넘는다.

높을 뿐 아니라 수량도 엄청난 폭포다. 혹시 세상이 너무 좁아서 천류폭포가 쏟아내는 물로 인해 잠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다.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수는 호수처럼 넓게 퍼졌다가 다시 급해지고 가늘어지면서 황하(黃河)로 흘러간다.

물이 퍼지면서 만들어진 호수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을 서서 왼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그 왼쪽 봉우리 아래쪽에는 진짜 말의 귀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말의 귓구멍 같은 부분은 아래위로 좁게 갈라진 틈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그 틈새 안쪽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계곡이 숨겨져 있다.

 

별들 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밀고 물위에는 별들이 아가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빛을 발한다.

어둠이 농산에 무게를 주어 만물을 침묵하게 했다.

오직 특권을 허락받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밤의 적막을 깰 뿐이다.

첨벙! 첨벙!

문득 물소리가 들리며 키가 껑충하게 큰 괴물이 폭포 아래쪽의 호수에 나타났다.

반달을 등지고 나타난 괴물의 다리는 두 개뿐인데 아주 가늘면서 길이는 무려 이장(二丈;6미터)이 넘는다.

괴물의 몸뚱이는 그 긴 다리의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몸뚱이의 허리 어림에는 대가리인 듯한 것이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첨벙! 첨벙!

괴물은 기다란 다리로 한 번에 일장 넘게 움직여 호수를 가로질렀다.

징검다리처럼 깔려있는 바위섬들을 지난 괴물은 왼쪽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다가갔다.

말의 귓구멍인 듯 움푹 들어간 계곡 입구는 수면에서 일장 남짓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이른 괴물의 몸뚱이가 마치 줄을 타는 거미처럼 다리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윽고 계곡 입구에 내려선 그것은 괴물도 뭐도 아닌, 망태를 짊어진 소년이었다.

바로 해질 무렵 표운봉 아래의 계곡을 떠난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길이가 이장이 넘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竹馬)를 사용하여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두개의 대나무 죽마를 암벽에 기대어 놓은 임청우는 계곡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휘이잉!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찬바람이 불어나온다.

이곳은 농산의 다른 곳과 달리 한여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다.

 

바위 사이의 좁고 긴 틈새가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서있다.

모옥 앞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가 있고, 모옥 옆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다.

모옥은 절벽 위의 암반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모옥 바로 앞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를 지나며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 꺼진 모옥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이 깊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머니!”

덜컹!

임청우는 급히 모옥의 문을 열었다.

쉬잇!

헌데 문이 왈칵 열린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모옥 안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임청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짜악!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임청우의 오른쪽 뺨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

콰당탕!

임청우는 시리도록 새하얀 손에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무고하셨군요.”

하지만 임청우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 볼을 문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응당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임청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별일 없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시냐?”

모옥 안쪽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경(三更;11~새벽 1)에 막 접어든 것 같습니다.”

임청우는 밤하늘의 별 자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북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국자가 왼쪽으로 많이 일어서 있다.

갑자기 피핏!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임청우의 어머니 임단심이다.

반 시진(한 시간)만 지나면 오늘도 끝이다.”

기름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인 임단심이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경고한 대로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라. 일각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내손으로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임청우를 돌아보는 임단심의 눈이 새파란 빛을 흘린다.

어머니는 온통 저를 죽일 생각뿐이시군요.”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상 당해온 냉대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자정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네 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임단심은 표정을 굳히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그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는 않겠군요.”

화악!

임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으려던 임단심이 유령처럼 임청우를 덮쳐왔다.

!

약초가 담긴 망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임단심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지만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임청우는 망태를 들어 뺨을 가렸던 것이다.

임단심이 임청우가 서있던 곳에 내려섰을 때 임청우는 서쪽으로 다람쥐처럼 달려가 절벽 끝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모습도 아니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늘상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듯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어머닌 저를 죽일 수 없어요. 벌써 천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실패만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은 놈!”

임단심이 살기어린 눈으로 임청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은 그 귀신같은 눈치도 눈치지만 내게 네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각기 반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

임청우의 말을 들은 임단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그러나 임청우는 절벽가로 한걸음 더 물러섰을 뿐,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병이 깊어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께서 저를 괴롭히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인들 더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저를 죽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왜 절벽가로 도망치느냐? 죽지 않을 자신 있다면서...”

무엇이든 참는 것이 수양(修養)에는 더할 바 없이 좋은 것이라지만...”

임청우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통을 당한다는 건 왠지 사람답지 않은 것같아서입니다.”

임단심은 무서운 눈초리로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닫혀진 방문 안쪽에서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사람이 아니다. 네놈의 아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임청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살수(殺手)에 수시로 노출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태연히 웃으며 응대하던 임청우였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 한마디에 고소를 지으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작은 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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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법에 빠진 두 남녀

 

 

두두두!

마상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 끝에 두 남녀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찰떡처럼 붙어있는데 흑왕은 정신없이 당산산맥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방금 전까지 자신의 꼬리에 달라붙어있던 귀신같은 놈이 따라붙을까봐 전력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요동평야를 활개치고 다녔던 흑왕은 강미루의 형부인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加籃)이란 인물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졌었다.

당시의 흑왕은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에게 한눈을 팔다가 기습을 당해서 올가미가 목에 걸렸었다.

만일 경계하고 있었던 상태라면 절세고수인 신가람이라 해도 흑왕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신가람이 사흘 내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고도 흑왕을 따라잡지 못한 게 그 증거다.

당연히 흑왕은 달리는 자기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백남빈에게 꼬리를 잡혔었기에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신같은 존재가 지금은 자기의 등위에 앉아있음은 꿈에도 모르고 있고...

 

***

 

대려장의 기마대는 백남빈과 흑왕이 일으킨 대량의 흙먼지로 인해서 앞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먼지가 갈아 앉았을 때는 강미루와 흑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쫓던 철령보 전령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해가 지면서 급격히 짙어지는 당산산맥의 산그늘이 두 남녀와 흑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단지 백남빈이 타고 있던 말이 흑왕의 뒤로 쳐져서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대려장 무사들 중 몇은 보고를 하기 위해 그 말을 끌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당산산맥 안쪽으로 들어가 강미루와 흑왕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같이 사라진 흑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수색은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

 

***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넓은 등은 아기 혼자 태워놓아도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다.

백남빈은 흑왕의 엉덩이를 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다.

그 때문에 주변의 풍경이 뒤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당산산맥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구나.)

백남빈은 조금 여유를 되찾아서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졌던 격전은 그야말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차 실수라도 했었다면 중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부상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턱을 물리긴 또 처음이군.)

백남빈은 자신의 턱을 물고 있는 붉은 옷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턱을 물고 물린 자세다 보니 서로의 코가 아주 가깝다.

소녀는 입으로 백남빈의 턱을 가득 베어 물고 있는 탓에 숨은 전적으로 버선코같이 오똑하고 어여쁜 코로만 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연신 새근대며 코로 뿜어내는 소녀의 숨결이 바로 위쪽에 자리한 백남빈의 코로 흘러들어온다.

내뿜는 숨결이니 당연히 탁하고 역겨워야하는데 난초나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하게 느껴져서 백남빈을 혼란에 빠트렸다.

백남빈은 약관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껏 여자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백남빈이 알고 있는 여자라고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뵌 이모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론 하녀들이야 적지 않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성격인 백남빈을 어려워해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사내들하고만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당연히 시큼하고 쿰쿰하다는 편견이 백남빈에게 있었다.

헌데 자신의 품에 답삭 안겨있는 이 붉은 옷의 소녀는 다른 세상의 존재같다.

몸은 뼈가 하나도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용수철 같고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 같은 탄력을 지녔다.

살결은 극상품의 백옥같이 희고 깨끗해서 설부(雪膚)라는 표현이 어째서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특히 냄새!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땀조차 향기롭다.

(양귀비의 몸에서 난 땀이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는 고사가 그냥 지어낸 게 아니겠구나.)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온몸으로 흘려내는 그윽한 내음에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강미루는 커다란 두 눈을 흡뜬 채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봉긋한 강미루의 젖가슴의 감촉과 그 안쪽의 심장이 쿵닥거리는 것도 백남빈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반대로 백남빈의 몸에서 일어나는 망측한 변화 역시 강미루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백남빈은 두 다리로 강미루의 허리를 휘감은 자세로 마주 앉아있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아랫도리는 강미루의 하복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죽일...)

강미루는 서로의 몸이 강하게 짓눌려 있는 부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백남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강미루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금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가?)

분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와서 울컥해지는 강미루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다 보니 힘까지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뽀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백남빈은 잠시 고통도 잊고 중얼거렸다.

"찔리고 물린 내가 울지 않는데 찌르고 문 여나찰(女羅刹)이 우는군."

물론 그 중얼거림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말같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철부지같은 성미의 이 말괄량이가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강미루는 턱에 힘을 가하여 더 세게 백남빈을 턱을 깨물었다.

"!"

강미루가 온힘을 다해 물은지라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턱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이 독종(毒種)이 마음이 바뀌어서 놓아주었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백남빈은 강미루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크게 웃어버렸다.

강미루는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표정이 야릇했다. 백남빈을 깨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턱이 빠져 버린 것이다.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두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미루를 보면서 백남빈은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백남빈은 눈앞의 이 말괄량이 소녀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소녀에게 악감정도 살기도 생기지 않았다.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풀어 한 손으로는 강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걸치며 턱을 받쳐 올려서 교정시켜 주었다.

강미루로서는 백남빈의 이같은 행동이 너무도 의외였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한 적의 턱을 교정해주는 것이건만 백남빈의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하다.

(이 작자 뭐야?)

강미루는 잘 끼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턱을 만지는 백남빈을 바라보며 얼굴이 발개졌다.

어느덧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 솟아서 두 팔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백남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살기는 봄눈 녹 듯 걷혀졌다.

마주 보며 말 등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자세는 묘하다.

이제는 껴안고 있지 않았지만 백남빈의 다리는 여전히 강미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이다.

"!"

이 야릇한 상황에서 강미루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져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남자, 참 잘생겼구나.)

어리둥절해하는 백남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미루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상대가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걸 알 리 없는 흑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계곡으로 접어들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그믐은 아니지만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어있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푸악!

백남빈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백남빈은 아픔을 참으며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단검을 강미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끌러 허벅지의 상처를 싸맸다.

강미루는 단검을 받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침과 피로 얼룩진 백남빈의 얼굴 하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백남빈은 묵묵히 강미루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남빈은 이미 이 대려장의 말괄량이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백남빈의 얼굴을 닦아준 강미루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백남빈의 다리로 슬쩍 향한다.

... 미안하오.”

백남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미루의 허리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천리마 흑왕이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그놈 위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몸과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거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내공이 정심한 두 사람인지라 주위를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똑같은 길을 계속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의 풍경은 한동안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같은 처지라는 은연중의 생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앞쪽으로 이동하여 말고삐를 바르게 잡았다.

백남빈도 돌아앉아 강미루의 바로 뒤에 걸터앉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긴장과 불안한 감정이 원래 적이었던 두 사람을 한마음이 되게 만들었다.

"끼럇!"

두두두! 히히힝!

강미루가 박차를 가하자 흑왕은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자 그들의 앞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분명 말이 달린 흔적이었다.

백남빈이 두 손으로 강미루의 허리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팟! 휘릭!

강미루가 말고삐를 잡아채자 흑왕은 언제 달렸는가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백남빈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흑왕 앞쪽으로 간 백남빈은 바닥에 생생하게 남은 말발자국을 뼘으로 재어보았다.

그리고 흑왕의 뒤로 돌아가 그놈이 방금 전에 딛은 발굽 자국과 비교해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백남빈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왕을 타고 같은 장소를 뺑뺑이 돈 것이다!

"기문진(奇門陣)이오. 느끼지도 못하는 새 어떤 진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소."

기문진에 빠졌다는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강진남의 딸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여 진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백남빈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한 데 진법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강미루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그저 백남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의 대가인 독안룡 이탁을 양부로 둔 백남빈 역시 파진법(破陣法)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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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四海船門

 

 

일출(日出).

끝없이 펼쳐진 대해(大海)를 가르며 불끈 태양이 치솟아 올랐다.

만경창파(萬頃蒼波), 보검(寶劍)의 칼날처럼 출렁이는 물결 위에 시뻘건 불덩이가 퍼져오른다.

! 그것은 실로 형용할길 없는 벅찬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소주(小舟)___

기검룡 일행을 태운 작은배는 천천히 일출의 바다 속을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기검룡은 눈부시도록 찬란한 일출의 장관에 넋을 잃고 있었다.

[...!]

신비한 태양의 광휘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러자 문득 그는 가슴 속에 위대한 포부가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 뜨거운 피가 불끈 치솟아 웅심(雄心)을 흔들었다.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멍한 표정으로 일출을 감상하고 있었다.

헌데 이때, 문득 기검룡이 무엇을 발견한 듯 소리쳤다.

[! 큰 배가 온다!]

그말에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대번에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안력을 돋구어 머리 앞을 바라보았다.

[...?]

허나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엄청난 태양의 광막이 안력을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검룡은 똑똑히 보였다.

그는 능소취를 바라보았다.

[저기 태양의 왼쪽에 큰 배가 오는 것이 보이지 않아?]

허나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철담흑객도 의아하다는 듯 기검룡을 응시했다.

기검룡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 그렇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에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는 의혹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상, 그것은 바로 무인도의 기이한 복숭아를 먿은 덕분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로인해 내공과 시력이 급증했다는 사실도.

이때, 철담흑객이 탄성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 맞습니다. 그제서야 과연 공자님의 말씀대로 배입니다.]

능소취도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하고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나 문득 철담흑객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 해역에는 해룡방(海龍幇)의 배가 자주 출몰(出沒) 하는데, 혹시...?]

기검룡은 멀리 보이는 큰 배를 자세히 살폈다.

[선두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깃발이 달려있는 배다!]

기검룡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철담흑객은 안색을 활짝 펐다.

[그럼 본문(本文)의 순시선이 분명합니다. 해룡방의 표식은 흑룡(黑龍) 입니다.]

그말에 능소취도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잠시 후, 거선은 점점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하후할아버지!]

능소취는 거선에 오르자마자 반가운 환성을 지르며 한 명의 백삼노인에게 안겼다.

백삼노인___ 약 칠순(七旬) 정도의 청수한 인상이었다.

허나 그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백삼노인은 달려오는 능소취를 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취아! 얼굴이 새카맣게 탓구나.]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된 일인가? 호의무사들과 오향주(五香主)는 어찌되고 자네만 남았는가?]

철담흑객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화후당주님. 오향주는 모두 전사하고 소인과 아가씨만 간신히...]

이어 그는 기검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 공자님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은 허연 눈썹을 꿈틀했다.

[, 해룡왕(海龍王)! 그 작자가 점점 담이 커지는군, 빨리 제거해야겠군.]

이어 그는 기검룡을 응시하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 소공자께서 우리 취아를 구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소.]

허나 기검룡은 그저 싱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능소취는 백삼노인을 올려다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할아버지. 용오빠는 굉장해요. 그 단홍검(丹紅劍)이란 자를 일장(一掌)에 죽였고요. 바다위를 마음대로 걸어요.]

어느새 능소취는 기검룡을 오빠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기검룡의 나이가 그녀보다 한 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백삼노인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굉장하구나.]

허나 그는 단순히 그녀의 말을 일축해 버리고 실제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자 능소취는 정색을 하며 재차 말했다.

[어머! 정말이예요. 용오빠. 어디 한 번 보여줘요.]

그녀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기검룡도 흥미가 있었다.

순간, 그는 바다 위로 휙! 몸을 날렸다.

이어, 파도를 밟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신법으로 거선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 저럴 수가...!]

[___ ___!]

백삼노인과 사해선문의 제자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윽고 거검룡은 유유한 신법으로 다시 배위로 올라왔다.

백삼노인은 두눈을 크게 뜬채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랍구려. 혹시 그 경공은 해연약파(海燕躍破)가 아니요?]

[맞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필시 이 소년의 신분은 범상치가 않다...!)

그는 예리한 직감을 놓치지 않고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들 일행은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삼노인___.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수석당주인 비천해응(飛天海鷹) 하후염(夏候炎)이었다.

그는 비천응신술(飛天鷹身術).

이 경공은 과거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에 올랐던 백팔무인(百八武人) 중 일인(一人)인 혈응신(血鷹神)의 경공에 맞먹는 절기로 알려졌다.

 

선실(船室)___.

기검룡과 능소취, 비천해응 하후염과 철담흑객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검룡은 물론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몹시 시장해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쯤 비전해응 하후염이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 사부는 누구시오?]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모릅니다. 단지 저는 그분들을 작은 할아버지, 큰할아버지라고 불러왔어요.]

하후염은 더욱 관심이 깃든 어조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생김새는 어떠하오?]

기검룡은 천강마존과 낙천문사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낙척문사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허나 천강마존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했다.

단지 매우 엄격하고 과묵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을 뿐.

그의 설명을 듣고난 하후염은 안색이 대변했다.

(... 그렇다면 틀림없이 한 분은 낙천문사(落拓文士)...! 그러면 나머지 한 분은 쌍기(雙奇)의 한 명이신 고죽취옹(枯竹醉翁)이 아니겠는가?)

내심 그렇게 추측한 그는 가슴이 크게 격당함을 느꼈다.

쌍기(雙奇)___ 이들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군웅보의 당당한 서열 제 이위(二位)에 오른 전대고인이 아닌가?

허나 하후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설마 낙척문사 외의 기검룡의 또 다른 사부가 바로 천강마존일 줄은.

 

사해선문(四海船門).

동해를 주름잡는 사해선문의 총단은 동해의 절유도(絶有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___사해신룡(四海神龍) 능천위(凌天威).

그가 사해선문의 문주(門主)였다.

사해선문은 중원과의 왕래가 거의 없으니 쟁쟁한 위력을 지닌 문파였다.

 

기검룡 일행이 탄 거선은 이윽고 절유도에 도착했다.

거대한 수채(水寨)로 형성된 사해선문의 총단.

그들은 마침내 거선에서 내렸다.

수십 척의 선박이 질서있게 정박해 있는 도선장(渡船場)에는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늘어 서 있었다.

앞 장 선 사람은 한 쌍의 부부(夫婦)였다.

남자는 남포장삼을 걸친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엄이 넘쳐 흘렀다.

그는 사십 후반의 중년인으로 두눈은 정광으로 충만해 있었다.

여자는 백의궁장(白衣宮裝)을 한 삼십 전후(前後)의 미부인(美婦人)이었다. 이때,

[어머니...!]

능소취가 반가운 음성으로 소리치며 미부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녀는 기품있는 자태에 온화하고 포근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품에 안긴 능소취의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한없이 부드러웠다.

[취아,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녀는 기쁨과 함께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포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위엄서린 표정으로 하후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후당주. 어떻게 당주께서 취아를 데리고 왔소이까?]

하후염은 공손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 그것은 모두 이분 공자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한옆에 우뚝 서 있는 기검룡을 가리켰다.

문주(門主)라면...?

! 그렇다면 남포장삼인 그가 바로 사해신룡 능천위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문주 사해신룡 능천위였다.

하후염의 말에 사해신룡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후염이 모든 사정을 얘기할 때 기검룡을 쌍기(雙奇)의 제자라고 밝힌 점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기검룡을 주시했다.

기검룡은 선뜻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소생 기검룡 두분 숙부님과 숙모님을 뵙습니다.]

그의 깍듯한 태도에 사해신룡 부부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사해신룡이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쌍기 두분 노선배님의 제자라면 강호에서 높은 배분이지만 그냥 네게 용아(龍兒)라고 부르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숙보님. 용아는 오히려 그러기를 더욱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외로운 몸이었다.

절해고도에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 두 사람밖에 모르던 그러서는 오랜만에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이 무척 기뻐던 것이다.

이때, 능소취가 문득 기검룡의 손을 잡아끌었다.

[용오빠, 날따라 와봐. 이곳엔 구경할게 많으니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그들이 수채 안으로 사라지자 사해신룡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해룡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

하후염 역시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비록 천해비동(天海秘洞)의 위치를 모르나 대강 추측은 한 듯 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아가씨를 노린 것이 분명합니다. 아가씨를 인적으로 삼아 천해비동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해신룡은 하후염을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일이 천해비동으로 입동(立洞)할 수 있는 자오절(子午節)이오. 아무쪼록 기밀이 유지되도록 당주께서 힘써주시오.]

하후염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X X X

 

어둠. 깊은 어둠이 흐르고 있었다.

기검룡은 사해선문 안의 깊은 대전에 속한 한 칸의 방에 들어 있었다.

침상___ 그는 지금 편안히 침상에 누워있었다.

허나 잠은 오지 않았다.

웬지 머리 속에 자꾸만 무인도에서 발견한 비급의 구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허나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일어나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름모를 불완전한 장공(掌功)이었다.

기검룡은 머리 속의 기억을 따라 천천히 운공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가 익힌 천강신공(天罡神功)의 진기를 운용하여 장공의 구결을 따라 기류를 운행하는 순간,

[!]

그는 잠시에 전신을 부르르 떨며 고통의 비명을 발했다.

전신의 진기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며 마구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아악...! ___ 으윽...!]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연신 비명을 터뜨렸다.

마침내, ___!

그는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허나 그 순간, 노도같은 경기가 갑자기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기검룡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기검룡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순간, 그는 만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헌데 나는 죽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상, 기검룡은 하마터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할 뻔했다.

각기 성질이 틀린 두 가지 무공을 잘못 융합한 탓이었다.

허나 무인도에서 먹은 금빛복숭아로 인해 오히려 극적으로 진기를 융합, 그것이 사지(四脂)로 퍼지면서 내공마저 배이상 급증한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기검룡은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이 장공(掌功)의 연마에 성공했단 말인가?]

그는 앉은 채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탁 쳤다.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부웅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 연대좌불(蓮台坐佛)의 경공이 펼쳐지다니...!]

기검룡은 희열의 탄성을 발하며 빙글 몸을 회전하여 그대로 창밖으로 날아갔다.

___연대좌불(蓮台坐佛).

그는 낙척문사가 그에게 전수한 개세의 경공이었다.

허나 기검룡은 여태까지 내공이 약해 그것을 떨치지 못햇던 것이다.

기검룡의 기쁨은 실로 컸다.

그는 한 인공야산의 바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

그는 육성(六成)의 공력을 사용하여 장력을 내뻗었다. 허나,

[...!]

기검룡은 놀람을 금치못했다.

장력은 소리는 물론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바위에는 장력이 부딪친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어째서 아무런 위력도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무심코 바위를 발로 툭 찼다.

순간, 우수수...!

놀랍게도 바위는 완전히 부서져 가루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껍질부분만 남고 바위의 속부분이 다 부서졌다는 점이었다.

[...!]

기검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환성을 발했다.

이어 문득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이 장법은 악독하기 그지없구나. 검은 멀쩡하나 속은 완전히 부서졌으니... 더구나 무형중에 날아가니 피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겠군. 헌데 이 장법의 이름을 모르니...

허나 그 순간 그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이것을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이라 부르자!]

그는 스스로 장법에 이름을 붙인 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금(少琴),

기검룡은 방으로 돌아와 무인도에서 가져온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을 만지고 있었다.

그는 소금의 외줄을 장난삼아 당겨보았다.

허나,

[?]

소금의 외줄은 조금도 당겨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공력을 끌어올려 다시 줄을 당겼다.

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솟았다.

[어디... 얼마나 단단한가 보자!]

그는 전 공력을 끌어모아 손가락으로 힘껏 소금의 줄을 당겼다.

그 순간, !

한 줄기 청아한 금음이 울려퍼졌다.

이어, 콰르릉...!

가공할 천둥소리와 함께 무형의 강기(罡氣)가 사방으로 폭사하는 것이 아닌가?

와르르... 우릉...!

그와 동시에 방의 사방벽이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 ...!]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용아! 무슨 일이냐? 이 소리는?]

사해신룡과 그의 부인 능부인, 또한 능소취 마저 놀란 표정으로 기검룡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보자 기검룡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 심심풀이 무공을 연마하다가...]

그이 멋적어하는 태도에 사해신룡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방이 이 모양으로 변했단 말이냐?]

허나 기검룡은 무인도 얘기를 꺼내기가 웬지 망설여졌다.

문득 그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 그것은과거 벽력문(霹靂門)의 절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사해신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벽력문이라고?]

그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___벽력문(霹靂門).

이는 삼백 년(三百年) 전 대막혈궁(大漠血宮)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멸문(滅門)한 막강한 문파였다.

그들의 무학 중 벽력진해(霹靂眞解)는 그야말로 무림일절이었다.

 

사해신룡은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 ... 벽력문의 절기를 네가 익혔다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곧 그는 돌아섰다.

[이제 그만 자거라.]

사해신룡은 방을 나갔다. 이때, 능소취가 얼른 그의 등뒤에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취아는 용오빠하고 자겠어요!]

그말에 사해신룡은 흠치했다.

허나 문득 그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그가 방을 나가자 능부인이 황급히 그를 뒤따르며 말했다.

[아니 여보! 어쩌자고 한방에... 저들이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녀는 자못 염려스러운 듯 사해신룡을 바라보았다.

허나 사해신룡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쁠 것 뭐가 있소? 당신은 저 두 아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소?]

[... 그건 그렇사오나...]

[하하... 내게 다 생각이 있소]

그제서야 능부인은 문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오빠. 그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취아에게 보여줄 수 있어?]

능소취는 기검룡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청했다.

기검룡은 향긋한 소녀의 체취에 문득 당황한 마음이 되었다.

[... 여기선 안돼. 잘못하면 옮긴 이 방도 무너진다.]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방의 벽이 다 무너져버린 탓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의 말에 능소취는 안색을 활짝 퍼며 말했다.

[! 혹아저씨, 나 용오빠하고 바닷가에 잠깐 다녀올께요.]

그녀의 말에 철담흑객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두 분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가시려면 소인과 같이 가셔야 합니다.]

능소취는 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바닷가.

밤의 바닷가는 깊고 짙은 어둠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암석으로 가로막힌 곳에 삼인(三人)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물론 기검룡과 능소취, 그리고 철담흑객이었다.

능소취는 두눈을 기대의 빛으로 반짝이며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마음을 놓아도 돼, 어서 한 번 해봐 용오빠.]

그녀의 재촉에 기검룡은 문득 눈썹을 꿈틀했다.

이어 그는 약 십 장(十丈) 거리에 있는 오 장(五丈) 높이의 한 암석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가슴에는 불끈 투지가 끓어올랐다.

그는 내심 풍천벽력장의 구결을 외웠다. 이어,

[벽력진천(霹靂振天!]

우렁차고 낭랑한 일성과 함께 우수를 쭉 내뻗었다.

꽈르릉...!

그의 힘찬 우장(右掌)이 펼쳐지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벽력음이 터져올랐다.

[___ !]

능소취는 이 경악한 사태에 소리 높여 탄성을 발했다.

오 장 높이의 암석 중 한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허나, 쿠르릉___ 콰릉___!

기검룡은 연달아 장력을 내뻗었다.

 

풍천벽력장.

이는 모두 팔식(八式)으로 되어 있었다.

매초식마다 그 위력이 배로 증가하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꽈르릉___ ___ !

기검룡의 우장이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잠시 숨을 돌렸다.

이윽고, 풍천벽력장의 팔식(八式)을 완전히 펼쳐낸 기검룡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헌데, 아 보라!

십 장 앞의 암석은 절반정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 아닌가?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허나, 기검룡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엔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마.]

이어 그는 입속으로 무엇인가를 중얼중얼 외웠다.

다음 순간,

[벽력패왕수(霹靂覇王手)!]

그는 섬전같이 손바닥을 쭉 뻗었다.

순간, 주황빛 경기가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 꽈르르릉___! ___!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가공할 굉음과 함께 전면의 암석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

능소취는 찬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다시 탄성을 질렀다.

허나 철담흑객은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기검룡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게 변했다.

벽력패왕수.

이는 벽력진해 중에서도 최강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따라서 진기소모가 극심했던 것이다.

능소취는 그 모습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용오빠.]

기검룡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잠깐 운공을 하면 되니까.]

이어 그는 곧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앉아 운공했다.

그는 빠르게 공력을 회복했다. 문득, 그는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이 벽력패왕수는 실상 벽력천강(霹靂天罡)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작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말에 그만 아연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허나 곧 철담흑객이 그제서야 생각난 듯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두 분도 이제 그만 돌아가 주무셔야지요.]

기검룡과 능소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돌아섰다.

헌데, 섬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기검룡은 문득 흠칫 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누군가 있어요.]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허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았다.

해변(海邊), 어둠 속의 한 그루 커다란 송목(松木) 아래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허나 그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명은 회의(灰衣)를 입은 깡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백의인(白衣人)과 마주보고 서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턱밑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로 쭉 찢어진 뱁새눈에 음험한 인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선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의인이 문득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주와 수석당주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에 천해비동(天海秘洞)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의 깡마른 노인은 낮고 음침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흐흐.. 상관없다. 천해비동의 빙죽도(氷竹島)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천해비보(天海秘寶)는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헌데 이때,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기위해 앞으로 고개를 내밀던 기검룡은 잘못하여 그만 발밑의 조약독을 건드리고 말았다.

...!

조용한 가운데 그 소리가 울리자 회의인(灰衣人)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누구냣!]

동시에 그의 소매가 번득 휘둘어지며 무수한 한망이 세 사람을 덮어씌웠다.

[... 들켰어.]

능소취는 겁먹은 음성으로 울상을 지었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도 당황함 없이 벌떡 일어서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을 후려쳤다.

우르릉...!

고막을 진동시키는 우뢰성이 이는 순간, 회의인이 발출한 암기는 일제히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회의인은 음험한 광망을 번득이며 휙 선형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기검룡의 머리 위에 이르러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벽락같이 장()을 후려쳤다. 허나,

[타앗!]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천왕탁탑(天王托塔)의 일식에 그의 장경이 맞섰다.

___! 하는 폭음과 함께,

[...!]

회의노인은 기혈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서 기검룡을 노려보았다.

이때,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백의인이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회의노인에게 말했다.

[그 꼬마가 쌍기(雙奇)의 손자라는 아이입니다. 어리지만 무서운 공력을 지녔으니 조심하십시오.]

회의노인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알았다. 그대는 빨리 돌아가라.]

순간, 백의인은 전면의 송림사이로 휙 신형을 날렸다.

[서랏!]

기검룡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으려했다.

허나, 회의노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가로막았다.

[흐흐... 꼬마야, 네 강대는 여기있다.]

동시에 그는 숨쉴틈 조차 주지않고 막강한 장력을 쏟아냈다.

기검령은 반사적으로 마주 일장을 쳐냈다.

콰르릉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자 요란한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회의노인은 신형을 휘청하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기검룡 역시 일순 몸이 흔들렸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회의노인은 내심 경악의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 역시... 어린 놈의 공력이 노부보다 뛰어나구나, 허나 어린 놈은 역시 어린 놈... 흐흐...)

그는 암중에 독계(毒計)를 품고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어린 놈! 죽어랏!]

그는 재차 일갈하며 장을 후려쳤다.

기검룡 역시 물러서지 않고 기쾌하게 일장을 내뱉았다.

허나,

[...!]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친 순간, 그는 자신이 허공을 후려쳤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회의노인이 펼친 허초(虛招)에 속은 것이었다.

이때,

[흐흐... 죽어랏!]

회의노인이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번득 우수(右手)를 휘둘렀다.

헌데 그의 손에서 발출된 것은 한 무더기의 독침이 아닌가?

[!]

기검룡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몇 개의 독침들이 그의 다리에 적중되고 말았다.

[아주 가거랏!]

회의노인은 앞으로 쓰러지는 기검룡을 단번에 박살낼 듯 다시 장을 후려쳤다. 순간,

[... 용오빠___]

보고있던 능소취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이때, 바닥에 나뒹굴던 기검룡의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어느새 그의 우수가 번득 청색고아망을 일으켰다. 찰나!

[___ !]

회의노인은 기혈을 토해내며 나뒹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그는 기검룡이 저지할 틈도없이 풍덩 바닷 속으로 뛰어들며 사라졌다.

[...]

기검룡은 일순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용오빠, 괜찮아요?]

능소취가 잔뜩 염려가 어린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디봅시다. 공자님. 방금 그자는 독수인마(毒手人魔)라는 자로 그자의 암기에 발린 독()은 극히 악랄하여 위험합니다.]

철담흑객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기검룡은 독침이 박힌 다리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의 하얀 다리에는 서너군데 미세한 검은 점이 푸른빛을 띈 채 박혀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푸른 반점은 점차 조금씩 축소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전에 무슨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으십니까? 독이 절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허나 기검룡 역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별로 그런 기억은 없는데...]

이어 그는 장()을 독침이 박힌 부위에 대고 공력으로 독침을 빼내었다.

이윽고, 다리에 박힌 독침을 모두 빼낸 기검룡은 문득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외인(外人)과 내통한 그 백의인을 잡았어야 하는건데...]

능소취 역시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옇든 돌아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렇게하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사해선문의 총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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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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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뱀을 먹는 뱀

 

 

퍼억!

임청우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억겁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임청우는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근육이 열기에 녹은 엿가락처럼 풀어지고 관절 마디가 전부 벌어져버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에 젖은 솜처럼 퍼져 누운 채 임청우는 멍하니 흑옥의 벽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깊고도 검은 흑옥의 벽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이 내 몸 속으로 빨려 들어왔던 것같은데...)

투명하게 변해가던 자신의 몸으로 북두칠성이 하나씩 흡수되었었다.

환각인가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인간의 생사와 운명,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차례차례 임청우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었었다.

덕분에 광활한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가던 임청우는 다시 형상을 갖추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임청우였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모른다.

이윽고 풀어졌던 근육에 탄성이 돌아오고 벌어졌던 관절도 맞물려졌다.

임청우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옥의 벽에 박혀있는 북두홀을 만져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임청우는 아쉬움을 남기고 흑옥의 벽 앞을 떠났다.

 

***

 

임청우는 북두무랑을 나왔다.

두 개의 월동문 중 <>자가 새겨진 오른쪽 월동문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북두무랑 안에서 보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단 한 구절의 무공비결도 얻을 수 없었다.)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북두무랑을 나섰다.

(하긴 기연이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림고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밖으로 나온 임청우는 아쉬운 마음에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왼쪽 월동문처럼 오른쪽 월동문 옆의 벽에도 상당히 많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게 들어왔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글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서명은 수십 줄인데 한 줄에 하나의 이름만 새겨진 경우도 있고 십여 개가 나란히 적혀있기도 했다.

(살아서 북두무랑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한 줄이 한 세대를 의미할 테고...)

임청우는 서명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았다.

윗부분의 십여 줄은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어서 판독이 불가능했다.

중간쯤부터는 읽을 수가 있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이름의 주인이 직접 새겨 넣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름들 가운데 임청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을 살펴보자. 어쩌면 북두무랑을 훼손한 범인도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몸을 숙여서 맨 아랫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천영(趙天永), 번리충(樊利忠), 풍건군(馮建軍), 왕천달(王千達), 당소광(唐小光), 양시우(梁翅祐)...

여섯 개의 서명 중 앞쪽의 다섯 개는 파인 부분의 색이 절벽과 비슷하다. 이름을 새긴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양시우(梁翅祐)라는 이름에는 바위 안쪽의 밝은 색이 남아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그 이름이 새겨진 후 이십 년 이상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찾았다! 바로 이자다!”

임청우는 마지막에 새겨진 서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풍화된 정도로 봐서 양시우란 이 이름은 북두무랑의 무학비결들이 훼손되었을 무렵에 새겨졌다. 거의 틀림없이 이자가 범인이다!”

임청우는 양시우라는 자가 북두무랑을 통과한 후 다른 사람이 북두무제의 무학비결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해버렸음을 확신했다.

하긴 범인을 알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북두무제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북두무랑의 상태나 알려주도록 하자.”

임청우는 월동문을 등지고 돌아서 안개의 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헌데 임청우는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기겁하며 멈춰 섰다.

월동문 앞쪽의 땅 바닥에 수많은 뱀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한 뼘 쯤 되는 작은 새끼 뱀이 있는가 하면 대들보만한 크기의 구렁이도 보인다.

그 많은 뱀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미동도 않고 누워있다.

... 이 뱀들, 왜 갑자기 몰려든 건가?”

소스라치듯 놀란 임청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산을 타다보면 뱀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저 놈 뭐하는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임청우는 금관혈린사를 발견했다.

금관혈린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뱀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인데 하는 짓거리가 기이했다.

그 놈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거만하게 고개를 세운 채 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뱀 옆에 이르면 쭉 몸을 펴서 길이를 잰다.

금린혈관사가 자기 옆에 몸을 누이면 비교당하는 뱀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에 길이를 잰 뱀은 금관혈린사보다 한 뼘쯤 더 크다

툭툭!

금관혈린사는 불만스럽게 그 뱀을 꼬리로 건드렸다.

금관혈린사의 꼬리에 닿은 뱀은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안도하며 긴장을 푼다.

다른 뱀들의 길이를 재고 있는 건가?”

임청우가 어리둥절할 때 금관혈린사는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떠는 그 뱀 옆에 몸을 쭉 펴며 누웠다.

이번에는 길이가 딱 맞다.

쉿쉿!

그걸 확인한 금관혈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쳐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스스스! 사사삭!

그러자 다른 뱀들은 안도하며 일제히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있고 조각상처럼 보이는 시체들 사이로 숨는 놈도 있다.

이제 동굴 앞쪽의 바닥에는 금관혈린사와 그놈이 길이를 잰 놈만이 남았다.

(죽은 듯 누워있던 뱀들이 마치 황제의 칙명을 받은 신하들처럼 흩어진다.)

임청우가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감탄할 때 금관혈린사는 홀로 남은 뱀의 머리를 붉은 혀로 핥았다.

금관혈린사의 혀가 머리에 닿은 뱀은 보기에도 딱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

(뭘 하려고 몸길이를 비교했을까? 설마 짝짓기 상대를 찾은 것일까?)

임청우가 의아해할 때였다.

금관혈린사가 남아있는 뱀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뱀을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뭐야? 잡아먹기에 적당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길이를 재본 건가?”

후루룩!

임청우가 놀라는 사이에 금관혈린사는 순식간에 뱀을 다 삼켜버려서 꼬리만 입 밖으로 나와 흔들리고 있다

참 빨리도 먹는다!”

그 꼬리마저 이내 삼키는 금관혈린사를 보며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끄억!

자기 몸 길이만한 뱀을 삼킨 금관혈린사는 사람처럼 트림까지 하는데 어느덧 그놈의 몸은 전보다 배로 통통해져 있었다.

트림까지하고... 참 골고루 한다.”

꼬르륵!

쓴웃음을 짓는 임청우의 배에서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저놈이 배 채우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출출해지는구나. 먹을 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면서 백초주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간다.

그러자 배를 채우고 누워있던 금관혈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꼴꼴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임청우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금관혈린사가 그의 발치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왜 또?”

임청우는 경계하며 호리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거냐?”

임청우가 혹시나 해서 묻자 금관혈린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참... 뱀이 술을 달래기도 하고...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임청우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리병을 금관혈린사의 머리 위로 가져가 기울였다.

조금 맛만 봐라. 넌 덩치가 작아서 술에는 약할 거다!”

쪼르르!

임청우가 아래로 기울이는 호리병에서 술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금관혈린사는 그 즉시 입을 쩍 벌려서 술을 받아마셨다.

술맛 좋지? 백가지 약초를 삭혀서 만든 백초주라는 거다. 내가 이래 뵈도 사냥과 채약뿐 아니라 술도 잘 담근다는 거 아니냐?”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에게 술을 먹이며 자랑할 때였다.

!

갑자기 금관혈린사가 호리병 입구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임청우는 기겁하며 호리병을 쳐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금관혈린사는 단번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관혈린사는 머리에 뿔도 달려있고 식사를 한 직후라 몸통도 호리병 입구보다 더 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혈린사는 마치 연기나 물처럼 변해 호리병에 들어가 버렸다.

놈은 임청우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빨리 나와! 잘못 하면 너 뱀술 된다!”

당황한 임청우는 호리병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금관혈린사가 다시 불쑥 머리를 호리병 밖으로 내밀었다.

끄억!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트림을 한다.

호리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 그 새 남아있던 술을 다 마신 거냐?”

스르르!

임청우가 놀라는데 금관혈린사는 뿔을 몸통에 찰싹 붙이더니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롱! 고로롱!

이어 호리병 속에서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술 병 속에서 잠들고... 뭐 이런 벽창호가 다 있는 건가?”

임청우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금관혈린사는 호리병 속이 아늑해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을 꺼내려면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을 찢어야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호리병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

어쩔 수 없이 금관혈린사를 넣은 채 호리병을 가져가야한다.

하긴 너같은 친구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잘 자라! 술 깨면 풀어주마!”

임청우는 호리병을 허리띠에 묶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길 빠져 나가자!”

호리병을 허리에 찬 임청우는 서둘러 안개의 벽으로 다가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흐려졌지만 점점이 광점이 남아있다. 금관혈린사가 임청우를 안내하며 남겼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청우는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는 광점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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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들보 위의 비급(秘笈)

 

 

고불선사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한쪽으로 밀어두었고 책과 종이들은 반대쪽에 쌓아서 탁자의 가운데를 비게 만들었다.

덜컹!

문득 고불암의 문이 열리면서 귀면지존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하지만 고불선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탁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귀면지존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노납이 교주라 해도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고불선사는 정리한 물건들 중 몇 장의 종이를 탁자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하물며 이토록 중요한 탁본(拓本)이 유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고불선사가 귀면지존 쪽으로 미는 종이들 위에는 무언가에 먹물을 묻혔다가 찍은 탁본이 새겨져 있다.

주먹을 쥔 사람 팔뚝에 종이를 대어 탁본을 뜬 형태인데 생생한 핏줄과 함께 수많은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범어, 즉 고대 천축의 문자였다.

본좌가 선사에게 맡겼던 그 탁본의 정체를 알아낸 거요?”

귀면지존은 탁자 앞에 멈춰서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비록 파계(破戒)하긴 했지만 노납도 소림사의 제자요. 아무렴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남기신 유물의 탁본을 못 알아보겠소?”

고불선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맞소! 역시 선사는 학식과 혜안으로는 소림제일이시오.”

귀면지존은 탁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스슥!

그러자 탁본을 뜬 종이들이 귀면지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귀면지존은 그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며 확인했다.

유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 모습을 보며 고불선사가 말했다.

무궁무진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달마묵장의 탁본을 세상에 내보내서 풍파를 일으킬만한 배짱이 노납에게는 없으니 말이오.”

선사께서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 말씀은 믿어드리겠소. 하지만...”

화르르!

귀면지존 손이 달아오르면서 탁본을 뜬 종이들이 단번에 불타올랐다.

만에 하나 달마묵장에서 비롯된 무공을 쓰는 자가 발견된다면... 선사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여자로서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귀면지존은 삼매진화로 탁본을 재로 만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불선사는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교주의 암계(暗計)에 빠져 파계를 한 그날 이후로 노납에게 사바세계는 온전히 고해(苦海)일 뿐이었소. 어서 노납을 이 끔찍한 업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구려.”

눈을 감은 고불선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좌를 위해 큰 공을 세워주신 선사의 부탁이니 들어드리리다.”

귀면지존은 탁본을 태운 재를 털어낸 오른손으로 고불선사를 겨누었다.

지징!

그자의 오른손이 진동을 일으키며 달아올랐다.

(시주...)

귀면지존의 손바닥이 진동함에 따라 몸을 떨며 고불선사는 강유를 떠올렸다.

(부디 세존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겠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불선사의 의식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태실봉 일대도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유는 고불암이 자리한 태실봉 동쪽의 절벽 위에 서있었다.

태실봉을 내려갔던 강유는 숲이 울창하여 남의 눈에 띠지 않을만한 곳에서 방향을 돌려 고불암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이각(二刻;30)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강유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각이면 내 걸음으로 오십 리는 충분히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니 고불암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지.)

휘익!

생각을 마친 강유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은 거의 수직인 데다가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하고 높은 절벽이다.

하지만 경신술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요신군의 아들 강유에게 이 정도 절벽을 내려가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 타탁!

강유는 마치 산양처럼 절벽을 이리저리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백여 장쯤 내려가자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세워진 고불암 지붕이 보였다.

휘릭!

강유는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불암 앞의 마당으로 내려섰다.

강유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살펴보니 고불암의 문은 닫혀있다.

스님! 소생 돌아왔습니다.”

강유는 작게 말하며 고불암의 닫혀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강유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얼굴이 굳어졌다.

(피비린내!)

그렇다.

흐릿하지만 고불암의 문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

덜컹!

급히 문을 열고 고불암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불암 내부는 강유가 떠날 때와 딱히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암자 중앙에 놓인 탁자 건너편에 고불선사가 누워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있는 고불선사의 입과 코, 양쪽 귀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주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스님!”

강유는 급히 고불선사 옆으로 다가가가 목 주변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진맥하는 강유의 손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적(入寂)하셨다.)

고불선사를 진맥해본 강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사인(死因)은 심장과 혈맥의 급작스런 파열... 내공을 잘못 운용하여 혈기(血氣)가 폭주한 듯한 모습이다.)

소요신군은 다 방면에 박식하여 강유에게 의술도 상당히 깊이 가르쳤다.

덕분에 강유는 어지간한 의원 못지않은 의술 지식을 갖고 있다.

(사인만 보면 전형적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인데...)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아는 범주 안에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불선사는 자연사 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유는 고불선사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불선사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강유는 고불선사가 탁자에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틀림없다. 스님은 어떤 자에게 살해당하셨다.)

강유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한 마공에 당해 심장과 혈맥이 터져버린 것이다. 내게 오십 리 쯤 갔다가 돌아오라 하신 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흉수가 나도 해코지 할까 우려하신 때문이었고...)

분노하던 강유는 고불선사가 말없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휘익!

급히 일어난 강유는 대들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대들보 근처까지 뛰어오른 강유의 눈에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 않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책이다.

(!)

!

강유는 놀라면서도 재빨리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 후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다.

강유가 대들보에서 발견한 그 책에는 <古佛懺悔記>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불참회기(古佛懺悔記)... 고불선사께서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를 적어놓은 수기(手記)겠구나.)

강유는 책의 내용이 궁금하여 펼쳐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

강유의 귀에 바람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파공성(破空聲)이다!)

강유는 급히 문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고불암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강유는 책을 품속에 넣으면서 암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강유의 눈에 암자 입구 맞은편인 뒤쪽 벽에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게 보였다.

(자칫 고불선사님을 시해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서둘러 쪽문으로 가려고 고불선사의 시신 옆을 지나던 강유는 발길을 멈추었다.

고불선사의 허리 아래에 깔려 있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스님의 원수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 챙겨가자.)

강유가 몸을 숙여 노리개를 집어들 때였다.

휘익! !

옷자락 날리는 소리들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강유는 급히 입구 반대쪽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유가 빠져나온 쪽문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휘익

하지만 강유는 바람처럼 절벽의 측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비스듬히 달린 강유의 앞쪽에 앞쪽으로 조금 돌출 된 모서리가 나타났다.

강유는 그 모서리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며 고불암을 내려다보았다.

휘익! !

그 직후 고불암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서 네 명의 인물이 날 듯이 달려 올라왔다.

네 명 모두 중인데 나이 든 초로의 승려 한 명과 젊은 승려 세 명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왔다.)

강유는 승려들의 복장으로 그들이 고불선사와 동문임을 알아보았다.

!”

... 이런...!”

고불암 앞의 마당에 올라서던 승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불암의 문이 열려있어서 고불선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님!”

급히 고불암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불선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아미타불!”

사숙조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곧 고불암 안에서 승려들의 불호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스님.)

승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는 노리개를 손에 든 채 합장했다.

(스님을 시해한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죄값을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휘익!

강유는 맹세를 하며 절벽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은 이내 고불암에서 사라졌다.

 

* * *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께서는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히셨다.>

<삼 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조사를 만났다.>

<헌데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계셨던 달마조사께서는 낡은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승려들의 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조사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불선사께서는 어찌 하여 당신의 삶을 참회하기 위해 적은 수기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하신 것일까?)

태실봉을 내려온 강유는 숭산 아래 등봉현(登封縣)에 자리한 객잔에 투숙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객실로 돌아온 강유는 서둘러 고불참회기를 꺼내 읽었다.

헌데 강유의 예상과 달리 고불참회기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고 어떻게 살다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고불선사가 남긴 고불참회기의 앞부분에는 바로 그 달마대사의 고사가 적혀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강유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고불참회기에는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비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가죽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팔 한쪽도 가죽신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형태의 그 팔뚝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지만 무엇으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용광로의 쇳물에 넣었다 꺼내도 멀쩡했다.

황제는 달마가 남긴 그 단단한 검은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숨기고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때문에 세상에는 달마의 관에 오직 가죽신 한 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의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세상에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絶代無敵)이 된다는 소문도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묵장... 달마묵장...)

강유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강유는 달마묵장이라는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묵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강유는 자신과 달마묵장이 운명적으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강유가 느꼈던 기이한 감상은 이어진 고불참회기의 내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납 고불은 불제자로서 결코 지으면 안되는 죄를 범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녀자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까지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달마묵장의 고사에 이어 그같은 고백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고불선사께서 금색계(禁色戒)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두었다니...)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와 함께 강유는 고불암에서 자신이 노리개를 건네주었을 때 보였던 고불선사의 심상치 않았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 노리개...)

강유는 고불암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건 고불선사가 범했던 여인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노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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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같은 말()을 탄 원수

 

 

(누가 활을 쏜 건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란 백남빈은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얼마 전 대려장 기마대와의 거리가 십리 이상인 것을 확인 했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팔 힘이 좋은 궁수라도 화살을 십리 넘게 날려 보내지는 못한다.

하물며 말의 목에 상처를 낸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든 게 아니라 수평으로 들이닥쳤었다.

“!”

몸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던 백남빈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과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쇄도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백남빈으로서는 십여 리나 되는 거리를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좁힐 수 있는 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화악!

낙타보다도 큰 흑마는 말 그대로 나는 듯이 들이닥치고 있다.

콰드드!

얼마나 빠른지 그 흑마의 네 개의 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올 정도다.

거센 바람을 탄 먹장구름처럼 다가오는 흑마에는 날씬한 몸에 붉은 옷을 걸친 소녀가 타고 있는데 상체를 고추 세운 채 철궁의 시위를 놓고 있었다.

(아차!)

붉은 옷의 소녀가 시위를 놓은 자세인 것을 본 백남빈의 눈이 다시 치떠졌다.

!

두 번째 화살이 이미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까지 이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

두 번째 화살이 말 위에서 돌아보는 자세인 백남빈의 가슴에 여지없이 꽂히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티잉!

하지만 화살은 백남빈의 가슴을 궤뚫지 못하고 궤적을 바꾸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화살에 실린 강력한 힘에 백남빈의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어떤 갑옷이라도 뚫을 수 있는 강철촉의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저자의 옷 속에 든 더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때문이다.)

츄학!

강미루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면서도 물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다시 두 자루의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았다.

"! !"

"미루! 미루!"

십여 리 뒤에서 따라오는 대려장 기마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의 눈에는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허억!)

왼쪽 늑골에 가해진 충격에 백남빈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강미루가 쏜 화살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백남빈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며 말 등에 엎어졌다.

(아버지가 날 지켜주셨다.)

백남빈은 말의 갈기를 움켜쥐어 옆으로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면서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두 번째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 든 옥패 덕분이었다.

실종 된 아버지가 남겼다는 그 옥패가 화살을 막아준 것이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백남빈이 지닌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옥패는 정확히 화살이 닿는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강철로 만든 화살촉도 그 옥패를 깨트리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 !

말 등에 엎드린 백남빈의 귀에 연달아 시위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강미루를 태운 거대한 흑마 흑왕은 불과 십여 장 뒤에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흑왕도 진저리치게 빨랐고 강미루 속사(速射)도 무섭게 빨랐다.

!

백남빈은 말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려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 피잉!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날아든 두 자루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백남빈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콰드드!

백남빈의 몸은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으나 두발은 땅에 끌리면서 먼지를 확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대량의 먼지에 의해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던 강미루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가려졌다.

강미루는 다시 활에 화살을 재운 상태였지만 백남빈의 모습을 놓쳐 쏠 수가 없었다.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남빈은 땅에 끌리던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가 다시 말 등을 구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달리는 속도가 번개같은 흑왕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반격할 수밖에 없다.

!

백남빈은 허공에 뜬 채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두두두!

그 사이에 흑왕은 백남빈의 발 아래로 달려왔다.

!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등 위로 떨어져 내리며 검으로 강미루를 찔러갔다.

하지만 강미루는 이미 왼손에 흑왕의 안장에 달아놓았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백남빈이 두 발로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자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서 방패를 집어든 것인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림없다!“

!

강미루는 앙칼지게 외치며 백남빈의 검을 방패로 막았을 뿐 아니라 강하게 옆으로 밀쳐 버렸다.

아직 어린 여자답지 않은 기민한 반응이다.

몸은 허공에 떠있는데 전력을 기울여 찔렀던 검은 강하게 옆으로 밀쳐졌다.

휘익!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백남빈의 몸은 강미루의 머리를 넘어 흑왕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패대기쳐지려는 순간 백남빈은 왼손으로 흑왕의 길고 풍성한 꼬리를 잡아챘다.

히이잉!

느닷없이 꼬리가 잡힌 흑왕은 깜짝 놀라 껑충 껑충 뛰며 앞으로 달려갔다.

낙타보다 큰 체격의 흑왕은 겅중겅중 뛰면서도 질풍같이 달려갔고 그 바람에 그놈의 꼬리를 잡은 백남빈의 몸은 마치 깃발처럼 허공에 휘날려졌다.

!

그런 백남빈의 머리를 향해 방패가 맹렬히 돌면서 날아든다. 강미루가 몸을 돌린 자세로 왼손의 방패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놀란 흑왕이 겅중겅중 뛰면서 달리고 있는 탓에 조준을 정확히 할 수가 없었다.

! 따다당!

백남빈의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 방패는 뒤쪽의 땅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방패로 백남빈을 때리는 게 실패하자 강미루는 활을 던져버리고 안장에 걸려 있는 창을 뽑아들었다.

떨어져랏!”

그리고는 몸을 뒤쪽으로 돌린 자세로 창을 휘둘러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부악!

던져진 방패와 달리 수직으로 내리쳐지는 창은 정확히 백남빈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흑왕의 꼬리를 잡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백남빈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다.

별 수 없이 내공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그대로 얻어맞았다.

!

굵은 창대가 백남빈의 정수리를 강타하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창대에 맞아 치명상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서 백남빈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놓쳐버렸다.

만일 강미루가 당황하지 않아서 창대에 내공을 주입해서 휘둘렀더라면 백남빈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깨어졌을 것이다.

따다당!

백남빈이 놓친 검도 흑왕의 뒤로 아스라이 멀어진다.

"차앗!"

그 사이에 창을 짧게 고쳐 잡은 강미루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백남빈을 찔러왔다.

검을 놓쳐버렸으니 찔러오는 창날을 막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흑왕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창날을 피했다.

가뜩이나 휘날리던 몸인데 이제 백남빈의 몸은 바람 속에서 세차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변했다.

미꾸라지 같은...”

강미루에게는 황당한 일이었으나 백남빈에게는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말에서는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흑왕의 꼬리를 놓치면 뒤 따라오는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사람의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네 발로 달리는 말의 추격을 떨쳐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놀라긴 흑왕도 마찬가지였다.

히히힝! 두두두!

백남빈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자 놀란 흑왕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죽엇! 죽어라!”

슈슉! 피핑!

강미루는 뒤를 돌아보는 자세인 채 기를 쓰고 백남빈을 찌르려 했고 백남빈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창끝을 피해냈다.

백남빈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상태를 타개하지 못하면 결국 창에 찔리고 말 것이다.

반격을 해야만 한다.

"크왓!"

화악!

다시 한 번 강미루의 세찬 창질을 피한 백남빈은 온 힘을 모아 말꼬리를 축으로 몸을 옆으로 휘돌렸다.

그리고는 몸이 돌아가는 기세를 빌어 양발로 강미루의 허리를 찍어갔다.

!”

강미루는 기겁하며 몸을 흑왕의 엉덩이 쪽으로 홱 젖혀서 백남빈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다.

발길질이 빗나가려 하자 백남빈은 붙이고 있던 두 다리를 확 벌렸다.

콰득!

그리고는 뒤로 몸을 젖히던 강미루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아버렸다. 몸은 거의 수평으로 누인 채로...

네놈이...”

허리가 휘감긴 강미루는 깜짝 놀라 창대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

백남빈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흑왕의 꼬리를 놓고는 자신을 내리쳐오는 창대의 중간을 잡았다.

백남빈의 이같은 수법은 대담하고 재빨랐지만 강미루 또한 임기응변이 아주 빨랐다.

!

창대가 상대에게 잡히자마자 강미루는 즉시 창을 놓아버리며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

그리고는 그 단검을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에 힘껏 꽂았다.

(!)

백남빈은 까무라칠 듯한 통증에 눈을 흡떴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도 백남빈에게는 없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강미루가 다시 단검을 쓰게 하면 위험하다.

우둑!

잡고 있던 창을 던져버린 백남빈은 강미루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초식이고 뭐고 나올 게재가 아니었다.

아흑!”

강미루의 눈이 치떠졌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꽂은 단검을 뽑을 새도 없이 두 팔이 백남빈의 강철 족쇄같은 팔에 묶여 버린 것이다.

!

놀라고 분노한 강미루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을 벌려 백남빈의 턱을 덥썩 물었다.

(!)

턱이 물린 백남빈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심보가 악독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다.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몸도 사리지 않고 덤빈단 말인가?)

난생 처음 겪는 고통에 백남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밀착한 채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수준의 내공을 지녔으며 그 내공을 상대방이 혈도를 찍지 못하도록 중요한 혈도를 방어하는데 동원하고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내공을 흐트렸다가는 상대방에게 혈도를 제압당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완력으로만 대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남빈은 허벅지를 찔린 고통으로 인해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지만 강미루 역시 죽을 맛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철령보의 종자들은 하나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헌데 자신의 몸을 팔과 다리로 제압하고 있는 이 사내가 보여준 임기응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만나서 육탄전(肉彈戰)을 벌이는 곤욕을 치룬담!)

강미루는 부끄럽고도 화가 치밀어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철이 든 이래 사내의 손가락 끝조차 몸에 닿아본 적이 없는 강미루다.

헌데 지금 사내의 품에 으스러지도록 안겨 있으며 사내는 또 그녀의 하체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다.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강미루의 입이 물고 있는 부위가 문제였다.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자니 오히려 그녀의 턱이 얼얼해 왔다.

사람의 턱은 정말 물어뜯을 곳이 못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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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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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無人島奇綠

 

 

잠시 숨을 돌린 기검룡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두눈은 경이로 크게 떠졌다.

[...!]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섬은 파석도(波石島)와는 전혀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수목들이 마치 그림같이 신선한 경이감을 느끼게 했다.

헌데 이때, 정신없이 섬의 풍경에 취해있던 기검룡은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하루종일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보지도 못한 탓이었다.

[먹을만한 것이 없을까?]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문득 걸음을 옮겨 섬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정도 들어갔을까?

울창하던 수림이 끝나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다투어 피어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헌데, 그 초원의 끝에 허술한 한 채의 석옥(石屋)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인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초원을 가로질러 뛰듯이 석옥을 향해 다가갔다.

석옥 앞에 이른 기검룡은 한쪽 옆을 바라보며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석옥 옆에는 장정 두 사람이 팔을 둘러도 다 안을 수 없는 큰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대략 이 장 정도.

또한 그것은 도저히 몇 년이나 묵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고목(古木)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 어린아이 머리만큼 커다란 하나의 금빛 복숭아가 살짝 감추어진 채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그 금과(金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굉장히 큰 봉숭아구나...)

단번에 시장기를 자극하는 금빛 복숭아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긋한 향기가 풍겼다.

기검룡은 즉시 복숭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순간 그는 멈칫 했다.

(석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있는 물건인지 모른다. 더우가 저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몰래 먹어버린다면 주인이 화를 낼 것이다.)

기검룡은 평소 낙척문사에게 엄한 예의범절을 배운 탓으로 비록 허기가 밀려왔으나 선뜻 복숭아를 따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석옥 앞에 우뚝 섰다.

지은지 매우 오래인 듯 벽이며 문() 등이 온통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의아함을 느끼며 석문을 밀었다.

___ ___ !

어렵지 않게 석문은 열렸다.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허나 그 순간,

[... ... 시체...!]

기검룡은 경악성을 발하며 그 자리에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석옥의 한 곳에 놓여있는 돌침상에 한 구의 백골(白骨)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석옥 안을 살펴보았다.

백골이 누워있는 돌침상 앞에는 높이 두 자 정도의 석탁(石卓)이 놓여있었다.

또한 석문의 맞은편 벽에는 기이하게도 한 폭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기검룡은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키고 석옥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조심스럽게 석탁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석탁 위에는 수북이 먼지가 쌓인 가운데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

기검룡은 두눈에 이채를 발하며 그 물건을 살폈다.

그중 하나는 극히 낡은 한 권의 책자였다.

책의 겉장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한 자의 글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

 

기검룡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서슴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허나 그 순간,

[... 이런...!]

그는 당황성을 발했다.

책자의 앞부분이 그의 손에 닿자 한 줌의 가루로 화해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못내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그는 부서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내용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읽은 것은 한 가지 장공(掌功)의 진결(眞訣)이었다.

앞부분이 삭아 없어져 어떤 종류의 장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머지 진결의 내용으로 미루어 끔찍한 음한장력(陰寒掌力)의 위력이 내포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검룡은 다음장을 넘겼다.

허나 장력의 진결부분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부서져 나갔다.

두 번째의 내용은 고어로 씌어진 한 가지 지공(指功)이었다.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

 

기검룡은 지공의 구결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지공은 익힌바 없는 그로서는 생소하고 난해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내용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 지나쳤다.

허나 그순간 구결은 이미 그의 뇌리에 암기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무공은 한 가지의 음공(音功)이었다.

 

<척천마음(擲天魔音).>

 

이것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악기로도 탄주가 가능하다.

이 마음(魔音)이 한 번 펼쳐지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를면 치못한다.

[...!]

기검룡은 척천마음의 위력 앞에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가공할 음공이 하늘아래 존재하다니...]

그는 경악의 심정을 억제치 못했으나 곧 그 낡은 비급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비급의 옆에 놓여있는 것은 하나의 소금(小琴)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니 반질반질 윤이나는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이 드러났다.

허나 그것은 마땅이 일곱 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정말 기이한 소금이구나.]

기검룡은 고개를 갸우뚱 했으나 경이함으로 두눈을 빛내며 그것을 갈무리했다.

이어 문득 그는 정면에 걸린 화폭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폭의 상단에는 용비봉무(龍飛鳳舞)의 웅휘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태극조원(太極造元).>

 

또한 글자 아래에는 한 가지 기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짙은 채색의 힘있는 화법으로 그려진 훌륭한 그림이었다.

헌데 그것은 기이하게도 작아지는 듯한 절벽이 갈라져 무너지는 형상을 마치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

기검룡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 깊은 현기(玄氣)가 깃든 그림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화폭에 담긴 속에는 어떤 은밀한 안배가 가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림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재삼 감탄하고 말았다.

짙은 채색 밑으로 극히 세밀하게 절벽의 결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몇번 그 그림을 훑어보는 동안 그림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외우고야 말았다.

허나 끝내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그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할아버지들께서 보시면 알아내실지도 모른다.]

기검룡은 화폭을 거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나, 우수수...!

비급과 마찬가지로 그 화폭역시 순식간에 부서져 한줌 먼지로 화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순 가볍게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온전한 것이라고는 소금(小琴)밖에 없군.]

그는 호기심이 사라지자 낮게 투덜거렸다.

이때 문득 그는 다시 극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금빛 복숭아를 생각하고 석옥 밖으로 나갔다.

[주인이 없는 것이니...]

그는 금빛 천도(天桃)를 따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순간 입안 가득 더할 수 없이 향기롭고 달콤한 맛이 느껴지며 복숭아는 그대로 사르르 녹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가 있었다니...]

기검룡은 순식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복숭아를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허기가 거짓말처럼 싹 가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배고픔이 가시자 기검룡은 문득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파석도로 돌아가야할 것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문득 그는 섬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산봉(山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산봉에 올라가면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을지가 모른다.]

그는 한 가닥 기대를 갖고 획! 몸을 솟구쳤다.

헌데, 산봉을 향해 달리던 기검룡은 문득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아무리 빨리 달렸으나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달리면 달릴수록 전신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막강한 진력이 용솟음치며 단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순식간에 공력이 배로 늘어난 것 같으니...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산봉의 정상에 이르러 우뚝 몸을 멈추었다.

기검룡은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곧 그는 실망의 표정을 짓고 말았다.

주위는 끝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___.

어디를 둘러봐도 푸르게 출렁이는 물(), 물뿐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점차 서쪽 수평선이 진홍의 불덩이에 잠겨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석양(夕陽). 해가 지고 있는 것이다.

기검룡은 막연한 심정이 되어 한동안 산봉에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아무리 뛰어난 절기를 지녔다 하나 그는 이제 십오 세밖에 안된 소년이 아닌가!

허나 기검룡은 결코 나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슬을 피할 장소를 찾았다.

[어두워지기 이전에 잠잘 곳은 찾아봐야겠다.]

석옥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웬지, 그곳은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백골과 함께 밤을 새우기에는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다시 산봉을 내려갔다.

산봉중턱___.

그곳에 다행히 하나의 작은 암혈(暗穴)이 있었다.

기검룡은 그곳에 잠자리를 만들어 드러누웠다.

[... 할아버지들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실텐데...]

그는 문득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허나 몇 번을 뒤척이던 기검룡은 깜박 잠이 들었다.

 

[___ ___ ___!]

돌연 멀리서 허공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기검룡은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벌떡 일어났다.

섬칫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나 그는 혹시하는 기대감으로 조심스럽게 암혈을 나섰다.

밖은 칠흑의 밤이었다.

암혈을 빠져나온 기검룡은 순간 두눈을 크게 떴다.

[... 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소리쳤다.

섬의 동쪽 바다 위___.

두 척의 거선(巨船)이 거의 맞붙다시피 떠올랐다.

헌데, 그 중 한 척은 온통 시뻘건 화염으로 휩싸인 채 파선직전에 놓여있었다.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었다.

그의 눈에 불붙은 거선에서 한척의 소주가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이 소주(小舟)는 빠르게 무인도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두 배에 탄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血戰)을 벌이고 있는 듯 했다.

허나 기검룡은 그들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급히 산봉을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해안에 닿았을 때 예의 소주는 해안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허나, 북붙지 않은 거선에서 내려진 또다른 한 척의 소주가 앞의 그것을 바싹 뒤쫓고 있었다.

기검룡은 앞의 소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이때, 뒤따르던 소주가 무서운 속도로 앞의 소주를 향해 쇄도하여 들어왔다.

동시에, 한 명의 흑의인이 뱃전을 박차고 앞의 소주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앞의 소주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이때, 흑의인이 덮쳐들자 한 중년인이 벌떡 일어서며 무섭게 장()을 후려쳤다.

허나, 그순간 중년인은 한 줄기 싸늘한 검망이 자신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___ !]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물속으로 급속히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냈다.

[굉장한 쾌검(快劍)!]

이때 나머지 한 명의 중년인이 노를 젓다가 벌떡 일어서며 쇠로 만들어진 노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중년인, 그는 마치 철탑을 연상케하는 거구(巨軀)였다.

또한 얼굴 전체가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뒤덮여 있어 몹시 위맹해 보였다.

___ ___ ___!

긴 노는 풍차처럼 돌며 흑의인을 단번에 박살낼 듯 몰아쳐갔다.

소주로 내려서려던 흑의인은 그 공세를 피하기 위해 일순 흠칫 하는 순간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그때,

[당주님! 갑시다.]

뒤따르던 소주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치며 넓적한 판자를 흑의인의 발밑으로 던졌다.

[타핫___!]

흑의인은 재빨리 그 판자를 찍으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중년의 대한은 버럭 노갈을 터뜨리며 재차 노를 휘둘렀다.

[내려가랏!]

허나 한 번 겪어본 흑의인은 날렵하개 그의 공세를 피해내며 기쾌한 일검을 내뻗었다.

츠츠츠츳...!

[!]

섬전같은 검기의 공세를 피하지 못하고 대한은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보라가 솟구쳤다.

흑의인은 일검이 성공하자 점차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랏!]

그의 장검이 막 대한의 심장을 향해 짓쳐오는 순간,

[멈추시오!]

낭랑하고 위엄있는 소년의 음성이 흑의인의 손속을 제지시켰다.

___!

흑의인은 새파란 강기(罡氣)가 무섭게 자신의 장검을 타격해 들어오자 자칫 쥐고 있던 검()을 놓칠뻔 하였다.

그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일갈이 떨어지는 순간 기검룡이 가볍게 흑의인과 대한 사이로 날아내렸다.

[이보시오! 왜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거요?]

기검룡은 흑의인을 바라보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그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마야 비켜라!]

그는 기검룡의 존재를 싹 무시하고 이번에는 무겁게 장()을 휘둘렀다.

___ ___ !

웅후한 음향과 함께 막강한 장력이 노도처럼 기검룡을 짓쳐들었다.

기검룡은 냉혹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내려보았다.

[당신은 나쁜사람이군!]

이어, 그는 번쩍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___ ___ !

그의 장심(掌心)에서 일순 새파란 강기가 폭사되었다.

순간,

[___ ___ ___!]

흑의인은 자신의 장력이 가볍게 무산됨을 느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바닷 속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대한과 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허나 정작 더욱 놀란 사람은 기검룡 자신이었다.

그는 흑의인이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 버리자 도리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___천강신공(天罡神功),

그가 펼친 이 무공에 대적할 무공이 천하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리 없는 그였다.

이때, 뒤따르던 소주에서 또 다른 흑의인이 벼락같이 기검룡을 덮쳤다.

[... 꼬마 놈이... 죽어랏!]

그들은 흉폭한 기세로 맹렬하게 검을 쪼개갔다.

허나 기검룡은 빙글 몸을 돌리며 우수를 휘둘렀다.

[! 돌아가랏!]

그의 우수가 섬전처럼 허공을 가른 순간, ___! ___!

[으헉!]

[!]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다급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이어, ___ ___! 첨벙___!

두 명의 흑의인은 거의 동시에 바닷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기검룡은 단번에 세 명의 흑의인을 격퇴하고 나자 일순 멍한 표정으로 지었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저지른 살생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공손하고도 미세한 대한의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들렸다.

[소공자님! 위험한 지경에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말에 기검룡은 퍼뜩 정신이 들어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 우직하고 순박해 보이는 대한과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한 소녀가 놀란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소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십 사오 세 가량의 취의소녀, 그녀의 용모는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막 여인(女人)으로 발돋움하는 풋풋하고 청초한 아름다움, 그녀의 전신은 샘물처럼 맑은 싱그러움으로 뭉쳐져 있는 듯 했다.

기검룡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러자 취의소녀 역시 배시시 따라 웃는 것이 아닌가?

눈부시도록 맑고 고운 웃음이었다.

기검룡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기검룡(奇劍龍)이다. 파석도(波石島)에서 왔지.]

그 말에 취의소녀는 반짝 두눈을 빛내며 생긋 웃었다.

[파석도라는 이름은 처음듣는 것 같아요. 흑아저씨는 혹시 알고 있나요?]

그녀의 의아하다는 듯 옆의 거한을 바라보았다.

허나 거한은 우직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누벼 동해(東海)라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지만 파석도는 처음듣는 섬이름입니다.]

파석도, 남해에서도 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절해고도를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문득 취의소녀가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머! 배가 가라앉으려고 해요!]

기검룡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취의소녀 등이 처음에 타고 있던 기선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호승심이 치솟았다.

그의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대신 저기 큰 배를 가라앉혀 버릴까?]

허나 그말에 취의소녀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모습은 보기 싫어 아저씨 빨리 이곳을 떠나요!]

그녀의 재촉에 거한은 상처를 싸매고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삐걱... 삐걱...!

그들 삼인(三人)을 태운 작은 배는 물살을 가르며 쉼없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근 한 시진이 지나자 그들은 완전히 치열한 해전(海戰)이 벌어졌든 수역(水域)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동녘이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문득 기검룡이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취의소녀는 크고 해맑은 눈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능소취(陵素翠)라고 해. 그냥 취아(翠兒)라고 불러줘.]

이어 그는 거한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철담흑객(鐵擔黑客)이라고 불러. 취아는 그냥 흑아저씨하고 부르지만 말이야.]

취의소녀, 즉 능소취의 말에 거한은 노를 젓으며 기검룡을 기검룡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기검룡은 사람좋아 보이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는 굉장히 힘이 세어보이는데 아까는 왜 그 사람의 검을 그냥 맞았지요?]

철담흑객은 머쓱하게 웃었다.

[소인은 아가씨의 부친이신 사해신룡(四海神龍)을 모시는 일개 종복인지라 정식으로 내공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저 외공(外功)을 약간 익혔기 때문에 내가고수(內家高手)들을 당하기는 힘들지요.]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환한 표정으로 탄성을 발했다.

[... 그렇군.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능소취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기검룡은 철담흑객과 그녀를 동시에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혹시 철벽신공(鐵壁神功)을 알고 있나요?]

허나 철담흑객과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기검룡은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설명했다.

[철벽신공(鐵壁神功)은 외가(外家) 최고의 기공이예요. 철파상이나 금종조 같은 외공(外功)보다도 뛰어난 외공으로 만일 이것을 완전히 연성하면 내공으로 이룰 수 있는 금강기체(金剛之體)와 똑같이 될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난 능소취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넌 참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런 것은 다 어디서 배웠어?]

기검룡은 가볍게 씨익 웃었다.

[난 그동안 두분 할아버지와 살았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별별신기한 냉용의 책을 다 갖고 계시지. 철벽신공도 할아버지의 책을 보고 외운거다.]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의 어떠십니까? 어렵신 하지만 철벽신공을 익혀보지 않겠습니까?]

철담흑객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배울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보겠습니다.]

기검룡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시간이 나는대로 철벽신공을 연마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겠어요.]

그들 사이의 대화가 끝나자 능소취는 두눈을 반짝이며 기검룡을 응시했다.

[그런데 넌 왜 그 무인도에 혼자 있었지?]

[백경(白鯨)과 싸우다가 그놈이 나를 꿀꺽 삼키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기검룡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삼키는 시늉을 하자 능소취는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고래에게 잡혀먹혔는데 어떻게 살아나올 수가 있어?]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기검룡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자신이 겪는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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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두무랑(北斗武廊), 천하제일인을 만드는 복도

 

 

표운봉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안개의 벽을 빠져나온 임청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청우가 들어선 곳은 계곡의 막다른 곳인데 아주 높은 안개의 벽이 반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다.

(내가 통과한 안개의 벽은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의해 형성된 게 틀림없다. 안개 속에서 배회하던 기괴한 존재들도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 테고... 만일 뿔 달린 작은 뱀이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절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안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을 살펴보았다.

삼십여 장쯤 앞쪽에는 얼마나 높은지 정상 부분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서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그 절벽은 마침 서쪽 멀리에서 비치는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는 <北斗武廊>이라는 사람크기 만한 글씨들이 옛날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북두무랑(北斗武廊)...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무예의 복도라는 뜻인데...“

임청우는 절벽에 세로로 새겨진 큰 글씨들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북두홀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북두무랑이라는 글과 북두홀이 관련이 있는 기분이 든다.

쉬쉭!

그 사이에도 임청우를 인도한 금관혈린사는 절벽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금관혈린사를 따라가던 임청우는 절벽 아래쪽에 두 개의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륙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뚫려있는 그것들은 멀리서 봐도 천연동굴은 아니다. 동굴 입구가 원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월동문을 방불케 한다.

그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앞쪽 바닥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널려있었다. 앉거나 누운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은 얼추 보기에도 백여 개나 된다.

(시체!)

헌데 절벽으로 다가가던 임청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각상들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시체였기 때문이다.

앉고 누운 시체들은 모습이 다양할 뿐 아니라 죽은 시기도 제각각으로 보였다.

이끼로 뒤덮여 진짜 조각상처럼 보이는 해골이 있는가 하면 아직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도 있다.

육탈(肉脫)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아서 살이 붙어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나 몸이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빠져 죽은 사람들일까?)

임청우는 곁눈질로 시체들을 훔쳐보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산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시체나 해골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거의 백여 구의 시체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임청우는 각가지 형상을 한 시체들 사이를 지나 두 개의 동굴이 뚫려있는 절벽 아래쪽에 이르렀다.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중 왼쪽 것의 위쪽에는 <>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동굴 위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과 출()... 왼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오라는 뜻인데... 주화입마에 걸려 죽은듯한 시체들도 그렇고... 여긴 어떤 무림 문파의 성지인 모양이다!)

두 개의 월동문을 살펴보며 임청우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이런 걸 기연(奇緣)이라고 하나? 잘하면 절세의 무공비결을 얻어 무림인이 될 수도 있겠다!)

임청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입()자가 새겨진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갔다.

금관혈린사는 왼쪽 월동문 입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놈은 임청우를 여기까지 안내한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 여기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는 금관혈린사를 지나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가니 문 옆의 매끈한 벽에 글이 여러 자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북두무랑이란 곳을 통과하기 전에 읽어야하는 안내문인가?”

임청우는 가까이 다가가 글들을 읽어 보았다

 

<고금 이래 존재한 거의 모든 무공을 연구한 후 최악의 난제(難題)들만을 모아 북두무랑에 남긴다. 북두무랑을 통과하며 노부가 남긴 난제들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능히 세상을 굽어볼 수 있으리라.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

 

그리 길지 않은 글의 내용이다.

풍화된 상태로 보아 글이 새겨진 후 수백 년의 세월은 족히 흐른 것같다.

북두무제 섭장홍... 북두무랑을 조영한 분인 것같은데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임청우는 북두무제 섭정홍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다.

철이 든 이래 어머니와 단 둘이 외진 산중에서 살아온 탓에 무림에 대한 임청우의 견문은 일천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북두무제 섭장홍은 성당(盛唐) 시절의 인물이다.

아득한 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견문도 일천한 임청우가 알 리 없다.

무공과 관련된 최악의 난제들만을 모아놨다면 나같은 일초무학(一招無學)은 기웃거릴 곳이 못된다.”

내심 기연을 기대했던 임청우는 실망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다.

그런 그에게 무림 역사상 최고 난이도의 문제들이라면 전혀 쓸모가 없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시체들은 북두무제께서 남긴 무학의 난제들을 풀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희생자들이겠구나.)

임청우는 절벽 아래 널려있는 시체들의 사인이 무언지 짐작이 갔다.

북두무랑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임청우는 용기를 냈다.

(나같은 일초무학이 난해한 무학비결을 접한다고 주화입마에 빠질 리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

임청우는 긴장하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수가...!”

헌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선 직후 임청우의 눈이 충격과 분노로 부릅떠졌다.

 

북두무랑은 말굽자석이나 말의 편자 형태로 절벽을 파서 만든 복도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천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빛이 나는 구슬들이 박혀있어 그리 어둡지 않다.

전체 길이가 오십여 장인 말굽 형태의 복도 벽에는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었다.

헌데 그 글들을 누군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서 훼손시켜버렸다.

... 어떤 자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북두무제라는 분께서 남긴 무학비결들을 전부 훼손해버렸잖아!”

임청우는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가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복도에 새겨져 있던 글들은 철저하게 훼손되어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북두무제가 남긴 무학비결을 보길 원치 않은 누군가의 짓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북두무랑은 죽었다. 북두무랑이 죽어버렸으니 북두무랑을 바탕으로 세워졌을 문파도 절맥(切脈)되었다고 봐야한다.”

임청우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며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 판독이 가능한 글이 남아있을까 했던 임청우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두무랑의 무학비결을 훼손한 자의 만행은 실로 철저해서 단 한자의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임청우는 글자 대신 그림을 한 폭 발견할 수 있었다.

북두무랑의 가장 안쪽, 입구 쪽의 복도가 일단 끝나는 곳에 그 그림이 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부분의 벽은 전체가 칠흑같이 검은 옥(黑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색은 검지만 유리처럼 투명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흑옥이다.

높이 일장 남짓에 길이는 삼장이 넘는 흑옥의 벽에는 밝은 점들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 점들은 표면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흑옥 안쪽에서 반짝이는 이물질들이었다.

새카만 흑옥 안쪽에 박힌 채 반짝이는 그 이물질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 같다.

박혀있는 깊이와 밝기도 제각각이라 실제 밤하늘처럼 입체감이 느껴진다.

흑옥의 벽은 높고도 길어서 그 앞에 서면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 때문에 흑옥의 벽을 마주 보고 있자니 임청우는 마치 자신이 새카만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이건 천상열차분야도(天上列次分野圖).)

흑옥의 벽을 살펴보던 임청우는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다.

무질서하게 찍혀있는 점들 중에서 비교적 밝게 빛나는 점들이 눈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점들은 천문도경(天文圖經)이란 책에서 본 별자리의 그림이다.

천상열차분야도는 하늘의 형상을 분야별로 그린 천문도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옥석에 저절로 천상열차분야도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걸까?)

임청우는 놀라움에 휩싸인 채 흑옥에 박혀있는 별자리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흑옥의 벽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임청우는 다시 한 번 전율했다.

흑옥의 벽 정중앙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천상열차분야도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유달리 밝아서 놓칠 수가 없다.

헌데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회전할 때 중심축이 되는 북극성(北極星) 자리에 별 대신 길쭉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그 홈의 아래쪽은 평평하고 위쪽은 마름모꼴이다.

(북두홀과 형태가 같다!)

그 홈을 본 임청우는 어떤 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것을 느끼며 허리춤에서 급히 북두홀을 뽑아냈다.

북극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파여 있는 홈은 영락없이 북두홀의 형상이었다.

임청우는 떨리는 손으로 북두홀을 그 홈에 맞춰보려고 했다.

!

순간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을 떠나 그 홈에 그대로 딸려 들어가 끼워졌다.

!”

당황한 임청우는 홈에서 북두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홈과 북두홀은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같아서 틈새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흑옥의 벽 안쪽에서 어떤 강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 때문에 북두홀은 흑옥의 벽과 완전히 합쳐진 모습이 되었다.

안돼! 북두홀은 나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란 말이야.”

임청우는 울상이 되어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임청우의 능력으로는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북두홀과 흑옥의 벽에 나있는 홈은 면도날조차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딱 맞는데다가 흑옥의 벽 안쪽에서 강력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되는데...”

임청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북두홀 주변의 흑옥을 손톱으로 긁어댈 때였다.

갑자기 흑옥의 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

북두홀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어...”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움직임에 따라 임청우의 몸도 돌기 시작했다.

 

어느덧 임청우의 몸은 어둡고 광활한 밤하늘에 떠있었다.

북두칠성이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별과 별 자리와 성운이 함께 회전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별의 바다에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조차 의미가 없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끝이 없도록 넓은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하면 임청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하다.

그것을 절감하자 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감각도 급속히 사라져간다.

임청우는 자신이 물에 풀어진 종이처럼 시시각각 소멸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직전에 임청우는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응답이 있었다.

슈우!

임청우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북두칠성이 하나 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임청우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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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십 리를 간 후 돌아오라.

 

 

숭산(崇山)이 유명한 것은 소림사(少林寺)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少室峰) 역시 그 중턱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명승이 되었다.

하지만 숭산에 소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봉(太室峰)과 준극봉(峻極峰)등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숭산을 중악(中岳)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장강 변의 위가진을 떠난 강유는 닷새 만에 숭산에 도착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결과다.

해가 한 뼘쯤 남은 오후에 강유는 태실봉을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태실봉을 올라가던 강유는 중턱쯤에서 숨을 돌렸다.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돌아보는 강유의 오른쪽에 태실봉보다 좀 낮지만 자락이 아주 넓은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턱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수많은 건물과 탑들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봉우리가 소실봉이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사찰이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대로 무림에 퍼져 있는 무공들 중 대부분은 소림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강유는 멀리 보이는 소림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오랫동안 인재가 끊긴 탓에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초라해졌지만 소림사가 천하무림의 종가(宗家)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유는 다시 걸음 옮겼다.

(그 소림사를 지척에 두고도 들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집중할 때다.)

강유는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암벽의 중간에 나있는 산길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암자 한 채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세워진 암자는 거리가 제법 멀고 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암자로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저 암자가 고불암이다.)

강유는 수많은 계단 위쪽으로 작게 보이는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는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불암에 기거하는 분은 고불선사(古佛禪師)라는 고승이다.)

족히 천여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강유는 고불암에 대해 수소문 한 것을 되새겨보았다.

숭산에 자리한 암자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불선사는 소림사 출신이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출신이므로 고불선사는 당연히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불선사는 무공보다는 학식(學識)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천축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불선사가 고불암에 홀로 기거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범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 범어의 권위자인 고불선사와 교류를 나누게 된 것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같은 계단을 올라가며 강유는 새삼 의문을 느꼈다.

 

* * *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가 자리한 그 돌출부의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래도 고불암 앞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강유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암자 앞의 마당으로 올라섰다.

(비록 외지고 험해도 절경이긴 하다.)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며 암자로 다가갔다.

저 멀리로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 보인다.

(세상 풍파와 온전히 단절된 곳이니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이겠구나.)

강유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암자 문 앞에 이르렀다.

(암자 안에 인기척이 있다.)

암자의 닫혀진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잔기침 섞인 숨소리가 들려서 강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청수(淸修)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님.”

강유는 의관을 정제한 후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스님께 맡겨둔 물건을 받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다시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반응이 있었다.

아미타불! 들어오게나.”

암자 안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강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암자 내부는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들이 쌓여있거나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 때문에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암자 중앙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너머에는 한 명의 노승이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상당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노승이었다.

노승이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 뿐 아니라 주전자, 찻잔, 여러 권의 책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저분이 고불선사...)

강유는 문을 닫으며 노승, 고불선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자 안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지만 고불선사의 모습은 강유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소하고 꼬장꼬장한 늙은 선비같은 인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풍채가 좋고 인상이 호방해서 도저히 학승(學僧)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유는 글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고불선사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학후진 강유가 선사께 인사 올립니다.”

강유는 탁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했다.

강유라...”

고불선사는 중얼거리면서도 강유는 보지 않고 종이에 글만 쓰고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가려면 증표를 보여라.”

고불선사는 여전히 강유를 보지 않고 글을 쓰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딸칵!

강유는 품속에서 꺼낸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 글을 쓰고 있던 고불선사의 손길이 멈춰졌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조금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강유는 붓을 들고 있는 고불선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해온 노승이 격동하고 있다. 대체 저 볼품없는 노리개가 무엇이기에 불문 고승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인가?)

강유의 의아함을 느낄 때 붓을 내려놓은 고불선사가 노리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집어든 고불선사의 입에서 회한이 서린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비구(比丘)가 쌓은 업보가 구천(九天)에 이를 정도로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는 고불선사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린다.

강유는 궁금증이 구름같이 일었지만 말없이 그런 고불선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건은 확실히 받았네.”

고불선사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강유를 보았다.

헌데 시주는 이 물건을 맡긴 인물과 어떤 사이인가?”

고불선사는 강유를 살펴보면서 노리개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게 중임을 맡기신 분은 가부입니다.”

가부라...”

강유의 대답을 들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불가해(不可解)... 불가해로다. 그에게 시주같은 보배가 열매로 맺힐 복연(福緣)은 없어 보였거늘...”

(무슨 뜻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분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유가 의아해할 때였다.

사연과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불선사는 혼잣말을 하며 탁자 위에 쌓여있는 종이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

이윽고 고불선사는 책 사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패옥을 전해주라고 한 중생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걸세.”

고불선사는 봉투를 강유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무릎 꿇고 있었던 강유는 상체를 세우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스님의 청수를 어지럽힌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후학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한 강유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고불선사가 다시 탁자 위의 책들을 뒤지면서 말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이 늙은 중의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게나.”

곧 고불선사는 쌓여있던 책들 사이에서 얇은 책을 한권 꺼내 강유에게 내밀었다

헌데 그 책을 받으려던 강유는 깜짝 놀랐다.

책의 표지에는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스님! 혹시 그 책은 혹시...”

강유는 내밀었던 손을 급히 거두며 굳어진 표정으로 고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소림칠십이절기 중 탄지신통을 수련할 수 있는 비결일세. 진본은 아니고 노납이 심심할 때 적어놓은 필사본이지.”

고불선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하지만 강유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이라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강호를 독보할 수 있는 게 소림칠십이절기다.

고불선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기에 속하는 탄지신통의 비급을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탄지신통을 익히면 십장 밖에 있는 한 치 두께의 철판도 궤뚫을 수 있다네.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스님의 성의는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강유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부의 명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지 말게나. 노납의 성의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불선사가 다시 권했지만 강유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기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유출할 생각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로구나.)

강유는 쓴웃음 지으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좋네 좋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네.”

강유가 탄지신통의 비급을 사양하자 고불선사는 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 오른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대신 노납의 인사는 받고 가시게나.”

결례를 했다면 용서를...”

문간에서 돌아서던 강유의 눈이 치떠졌다.

용서는 노납이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고불선사가 찻잔에 담갔다가 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물로 탁자에 글을 쓴다.)

강유는 고불선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탁자 앞으로 갔다.

다가가서 보니 탁자 위에는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십리거후(五十里去後) 회귀(回歸)... 오십 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

강유가 탁자에 찻물로 적힌 글을 읽고 놀랄 때였다.

산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

강유가 글을 읽은 것을 확인한 고불선사는 찻물로 쓴 글을 소매로 쓸어 지워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분은 설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어서 감시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찻물로 뜻을 전한 것인가?)

강유가 놀라고 당황할 때였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들어서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대들보를 왜...)

강유는 반사적으로 고불선사와 함께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걸세.”

고불선사가 합장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 역시 스님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강유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불선사와 인사를 나눈 강유는 암자를 나갔다.

!

문이 닫히고 고불암에는 다시 고불선사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재(善哉)로다! 세존의 가호로다.”

고불선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합장을 했다.

크나큰 죄를 안고 소리없이 지옥으로 들어가려 했거늘... 세존께서는 못난 제자가 세상에 뿌려놓을 업보를 거둘 인연을 마련해두셨구나.”

주르르!

합장한 고불선사의 주름 진 손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뭔가 있다.)

강유는 마당 끝의 계단 입구로 가며 곁눈질로 고불암을 보았다.

(탄지신통의 비급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나에 대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고불선사가 왜 뜬금없이 소림칠십이절기 중 한 가지를 선물이라며 내놨는지 짐작이 가는 강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테지만... 그걸 거절한 덕분에 나는 고불선사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겠지.)

강유는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일단 고불선사님의 지시대로 오십 리쯤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자.)

강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이 고불암 앞의 마당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마당 가운데에 안개 같은 것이 서리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공포스러운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바로 안탕산 깊은 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는 제갈륜을 협박했던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그자가 안탕산에서 이천여 리나 떨어진 숭산에 나타난 것이다.

“...”

마당 끝으로 간 귀면지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유가 날렵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 귀면지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귀면지존은 고불암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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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괄량이의 가출

 

 

단숨에 주워 삼키는 에센의 분석은 정확했다.

(확실히 평범한 인재는 아니다. 말만 좀 가려서 할 줄 알고 겸손하기만 하다면 미루와 짝을 지어주어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강진남이 에센을 아쉬운 표정으로 볼 때였다.

... 장주님! 큰일...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문루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그 중년여인은 강미루의 유모 최씨였다.

미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둥대며 문루로 올라오는 유모 최씨를 본 강진남은 미간을 찡그렸다.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는 조신한 성품인 첫째 딸 강미조(姜美藻)와 딴판으로 지나치게 활달하여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 작은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요.”

헐떡이며 문루로 올라선 유모가 울상을 짓는다.

미루가 사라지다니? 어디로?”

강진남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뿔난 망아지같은 둘째 딸이 말썽을 부리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꽤 오래 안 보이시기 계실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출진한 애들 속에 묻어서 본장을 빠져나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 녀석 참...”

울먹이는 유모와 달리 강진남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 당장 파발을 보내 돌아오라고 분부하셔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니옵니까?”

그럴 거 없네. 제 녀석도 오죽 답답했으면 가출을 했겠는가?”

유모의 애원에도 강진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혼자도 아니고 대려장의 정예들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니 딱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물론 강미루가 핏덩이일 때부터 키워온 유모의 심정은 달랐다.

... 장주님! 작은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매정한 말씀을...”

서운해 하는 유모의 말에 강진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지. 정 걱정되면 그 녀석 형부에게 가서 부탁해보게나.”

... 그리 합지요.”

강진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유모는 서둘러 문루를 달려 내려갔다. 강미루의 형부, 즉 강진남의 사위를 찾아가 부탁하는 쪽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루사매도 이제 제법 여자 태가 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에센이 히죽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성주는 내 딸을 전에 본 적이 있겠군.”

강진남은 자신의 둘째 딸과 이 오이라트의 떠버리 후계자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었지요. 사모님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데리고 왔었으니까요.”

안하무인이던 방금 전과 달리 에센은 강진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에센의 사부와 강미루가 사부로 모신 여기인은 부부지간이다.

그 때문에 에센은 강미루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에센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강미루는 아직 철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제가 이번에 밀사를 자처한 이유 중 하나도 미루사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에센이 다시 강진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강진남의 둘째 딸이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린지는 이미 오래다.

대려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고 해서 무림의 수많은 청년들이 강미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혈기방장한 에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강미루가 사모의 제자이기도 해서 무례하게 수작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 못해왔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는 에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모다.

그러던 중 아버지 토곤이 대려장으로 밀사를 보낸다고 하자 냉큼 자원을 했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지만 에센의 기대는 강진남의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소성주의 사부... 검왕(劍王)과 관련된 염문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내 귀에 들리더군.”

바람둥이를 사부로 둔 너도 똑같은 인간 아니냐는 뜻이다.

 

***

 

강진남과 에센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탁은 백남빈에게 무황성을 향해 직진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요서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인 진황도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라고 지시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배 이상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높은 행로다.

다만 같은 생각을 강진남도 했다는 게 문제다.

대려장주가 동북의 제갈량이라는 평판이 과장된 건 아니로군.”

백남빈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리쯤 뒤쪽에서 흙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일백이 넘는 숫자의 기마대가 백남빈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다.

대려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대는 수백기였지만 도중에 철령보의 기마대와 격돌하는 바람에 대 부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래도 특히 발이 빠른 일단의 기마대는 철령보의 저지를 뚫고 남진하여 백남빈을 추격하는 중이다.

물론 백남빈이 대려장의 기마대에 따라잡힐 위험은 거의 없다. 사해검객이 준비해준 말이 철령보에서 으뜸가는 준마이기 때문이다.

십여 리나 간격이 있으니 진황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꼬리를 달고 진황도에 도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천진으로 가는 배를 수배하는 동안 대려장의 고수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다.

(진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대려장의 인간들을 따돌려야한다.)

백남빈은 진행방향의 우측, 즉 서쪽을 돌아보았다.

철령평야에서 발해만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험준한 산맥이 오른쪽에 보인다.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불리는 장대한 협곡의 서쪽 면을 이루는 당산산맥(唐山山脈)이다.

일망무제한 평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른 탓에 당산산맥의 봉우리들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고 험준하게 보인다.

(길은 좀 험하겠지만 요서주랑을 타는 대신 당산산맥을 횡단해서 진황도로 가자. 그 과정에서 귀찮은 파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

두두두!

결심 한 즉시 백남빈은 말머리를 서쪽, 당산산맥을 향해 돌렸다.

대략 삼십여 리쯤을 달리면 당산산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저 놈이 진로를 바꿨다.”

당산산맥으로 들어가서 우릴 따돌릴 생각이다.”

백남빈을 추격하던 대려장의 기마대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남빈이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본 때문이다.

백남빈이 달려가는 서쪽에는 지는 해를 머리에 인 당산산맥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것이다.

만일 백남빈이 이대로 당산산맥으로 들어가 버리면 따라잡을 희망이 거의 없다.

박차를 가해라!”

저놈이 당산산맥의 산그늘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한다!”

두두두! 히히힝!

대려장의 무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말을 몰아붙여도 십여 리쯤 되는 백남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백남빈이 타고 있는 말의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 이러다가 놓치고 말겠다!”

젠장! 저놈이 타고 가는 말이 우리들의 말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백남빈이 당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에잇! 답답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려장 기마대의 후미에서 갑자기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해되니까 비켜!”

어이쿠!” “!”

히히힝! 두두두!

앙칼진 외침에 이어 무사들의 비명과 당황한 말들의 울부짖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겁하며 돌아보는 선두의 무사들 눈에 칠흑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와락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흑마(黑馬)였다.

단순히 털만 검은 게 아니다.

흑마는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배는 됨직하다.

낙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그 거대한 흑마의 등에는 날씬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옷을 걸치고 죽립을 깊이 눌러쓴 기사(騎士)가 타고 있다.

흑마의 엄청난 체구에 비해 타고 있는 기사는 대려장의 다른 무사들보다 몸이 작고 가냘프다.

그 때문에 마치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보이는 그 기사의 등에는 수십 자루의 화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서 꽂은 화살통이 짊어져 있다.

또 기사는 허리에 단검에 가까운 짧은 검을 차고 있으며 말 안장 좌우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과 긴 창이 한 자루씩 걸려 있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

작고 날씬한 체구의 기사는 그때까지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것은 두 뺨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다.

... 작은 아가씨!”

... 이제 보니 저놈은 작은 아가씨의 애마 흑왕(黑王)이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놀라면서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마 위의 소녀는 바로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였다.

유모 최씨의 추측대로 강미루는 새벽에 대려장을 빠져나온 기마대에 섞여 가출을 한 것이다.

강미루의 별호는 홍의창(紅衣槍)이다.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창술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타오르는 불같이 활달해서 붙여진 별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강미루는 제법 오래 외출을 못해 답답하던 차에 원수같은 철령보에 대한 공격이 시도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도 철령보의 공격에 참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봤자 들어주실 리 없다.

그래서 강미루는 죽립을 눌러쓴 채 몰래 기마대에 끼어든 것이다.

 

저 새끼는 내가 잡아버리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전부 비켜!”

정체를 드러낸 강미루는 흑마에게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히히힝! 화악!

거대한 흑마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질풍같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대려장의 기마대는 물살처럼 갈라져 흑마에게 길을 내주었다.

낙타보다도 큰 이 거대한 흑마의 이름은 흑왕(黑王)이다.

흑왕은 요동평야의 모든 야생마들을 지배하던 말들의 왕이었는데 강진남의 사위가 사흘 밤낮을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길을 들였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천리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흑왕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살처럼 갈라지는 대려장의 다른 말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흑왕은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당산산맥의 산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당산산맥 너머로 지고 있다.

그와 함께 백남빈도 산그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달리면 당산산맥의 험준한 산중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대려장의 추격은 떨쳐버릴 수 있겠구나.)

백남빈은 가까워지는 당산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보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숨을 곳이 없는 평야와 달리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당산산맥에서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오싹!

백남빈은 냉수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위험...)

!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히힝!

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몸을 앞으로 확 숙인 백남빈의 머리 위로 지나간 화살이 말의 목 옆을 스치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냈다.

만일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남빈은 그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백남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안이라는 남다른 능력이 미리 살기를 감지해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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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萬年白鯨

 

 

철썩... 철썩...!

쿠르릉___ ___!

천지개벽을 일으키듯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천지를 삼킬 듯한 기세로 밀고 밀린다.

 

파석도(波石島)___.

오직 돌()과 파도만이 있는 섬, 아무도 찾지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돌연,

[하하하...!]

호탕하고도 낭랑한 웃음이 파석도의 적막을 깨뜨렸다.

파석도의 정상!

짧은 초지가 깔려있는 분지가 있었다.

그곳에 하나의 남삼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십 사오 세 정도 되었을까?

헌데, !

천상(天上)의 선동(仙童)이랄까?

혜지가 가득 담긴 두눈은 한 번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력(魔力)을 발산했다.

피부는 거의 투명할 정도로 희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산()같은 기개를 풍겼고 입술은 붉으면서 굳센 의지가 서린 듯 붉었다.

전신에 짙은 남색의 무복(武腹)을 가뿐하게 걸친 그 모습은 실로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헌데, 그는 나이에 비해서 월등이 큰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 육 척(六尺)이 넘는 거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언뜻보면 장성한 청년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영준한 얼굴에는 아직 장난스런 치기가 어려있었다.

이때, 소년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리며 소리쳤다.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오늘도 저놈이 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그의 눈은 바다 한복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곳에는 마치 하나의 작은 섬과 같은 거대한 백경(白鯨)이 유유자적 물기둥을 뿜어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길이만 해도 무려 오십 장(五十丈).

실로 엄청난 크기의 고래였다.

이 백경은 근 일만 년(一萬年) 이상을 산 영물이었다.

이때, 풀밭사이로 난 계단으로 두 명의 인영이 올라왔다.

천강마존과 낙척문사___

바로 그들이었다.

문득, 낙척문사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하... 백경이 또 나타난 모양이구나?]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백경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쥐어보였다.

[두고봐요! 오늘은 꼭 저놈의 등에 타고 말거예요!]

낙척문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하하... ()아야, 어제도 그러더니 도리어 백경에게 혼나지 않았느냐!]

[! 어제는 방심을 했기 때문이예요. 오늘은 저놈의 등에 타보고 말거예요.]

용아라 불리운 소년은 고집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혜지 가득한 두눈은 계속 백경을 쫓고 있었다.

백경은 유유히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순간,

[기다려라! 용아가 간다!]

소년은 휙! 지면을 박차고 바다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석도 정상에서 바다까지는 수백 장의 거리에 달했다.

헌데 소년은 일직선으로 신형을 쏘아가며 단번에 삼십 장을 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가볍게 신형을 멈추며 다시 이십 장을 날고 또 바위를 찍으며 다시 떠올랐다.

실로 찬탄할 절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낙척문사는 그러한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조심하거라! 용아!]

[하하... 걱정없어요. 용아의 해연약파(海燕掌波)는 완벽하다고요!]

소년은 바다 위를 스치듯이 날았다.

천강마존은 문득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묵묵히 파석도의 정상에 선채 소년을 지켜볼 뿐이었다.

소년은 가볍게 파도를 밟고 백겨에게 접근했다.

[!]

그는 거대한 파도의 파봉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우르르... 철썩... !

미친 듯 광난하는 파도를 교묘히 타고 소년은 점점 앞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마침내 백경의 등으로 접근했다.

이때, 지켜보던 낙척문사가 문득 감탄의 표정을 입을 열었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저 아이의 자질은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저 해연약파의 경공은 꼬박 십 년(十年)이 넘어도 익히기 힘드는데 검룡(劍龍) 저 아이는 불과 일년 사이에 터득하고 말았으니...]

검룡(劍龍)___.

이것이 소년의 이름인가?

천강마존은 말없이 눈빛을 번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우형이 천강신공(天罡神功)을 육성(六成) 이루는데 꼬박 팔년(八年)이 걸렸네. 헌데 용아는 천강심결(天罡心訣)을 전수받은지 오년만에 육성의 조예를 이루었지 않은가! 정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녀석이야.]

소년 검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문득 자애롭게 변했다.

검룡.

그는 바로 낙척문사가 데려온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적자 즉, 기검룡이었다.

이때, 소년 기검룡은 마치 거대한 빙산(氷山)을 연상케하는 만년백경(萬年白鯨)에게 달려들어가고 있었다.

만년백경은 기검룡이 가가오는 것을 커다란 두눈을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이 수면을 박차고 자신의 등위로 올라타려고 하자 거대한 동굴같은 입을 쩍 벌리며 세찬 물기둥을 쏘아올렸다.

쏴아___!

기검룡은 전에도 한 번 그 물기둥에 맞아 곤욕을 치룬적이 있었으므로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하하... 어림없다!]

그와 동시에 그는 힘껏 장()을 내밀어 물기둥의 힘을 받으며 그대로 삼사 장을 더 치솟아 올랐다.

___!

[어엇!]

기검룡은 허공에서 쏜살처럼 만녀백경의 등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에잇!]

그가 막 백경의 등을 밟으려는 순간 만년백경의 동체가 갑자기 물속으로 숙 잠겨지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시지간 발디딜 곳을 잃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한 모금의 진원진기를 모아 발끝으로 수면을 찍으며 그는 다시 허공으로 이 장 정도 떠올랐다.

그 순간, 백경의 거대한 꼬리가 사방을 휘저으며 산더미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

기검룡은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곧 그는 입술을 물며 전력을 다해 장()을 뻗어 파도와 맞닥드렸다.

콰르르릉___!

[...!]

기검룡은 천강기공이 파도의 전면을 후려쳤다고 느낀 순간 뒤이어 쏟아지는 파도에 거세게 전신을 얻어맞았다.

이때,

[용아! 위험하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낙척문사가 대경하여 소리쳤다.

낙척문사의 외침을 들은 기검룡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진기를 모아 허공에 떠올라 몸을 고정시키려 했다.

허나 그보다 빨리 만년백경의 꼬리가 재차 산악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그의 몸을 쳤다.

[아앗!]

기검룡은 재차 파도에 가격당하며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용아!]

낙척문사와 천강마존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허나 그 순간, 만년백경의 거구가 기검룡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심해(深海)로 가라앉았다.

 

X X X

 

기검룡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순간, 그는 온몸이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암흑(暗黑)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문득 몸을 일으켰다.

순간, 미끈하는 감촉과 함께 그는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악___!]

그 바람에 전신관절이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낀 기검룡은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헌데 그는 실로 기이함을 느꼈다.

누워있는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미끈미끈한 액체의 감촉마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뜨겁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기검룡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허나 다시 주르르 발이 미끄러지며 그는 그만 풍덩 웅덩이게 빠지고 말았다.

웅덩이 속에는 끈끈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헌데 이때, 웅덩이의 맞은편에서 문득 한 줄기의 빛이 비쳐드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어 눈을 감았다 크게 떴다.

그것은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하얀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구슬은 맞은편의 벽에 매달려 있었고 그 주위로 그물과도 같은 이상한 줄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신비한 흰색기류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며 기검룡은 당장 호기심을 느꼈다.

[! 신기하게 생긴 구슬이구나!]

본래, 이 백색구슬은 백경이 만년(萬年) 동안 정기(精氣)를 모아 형성한 내단(內丹)이었다.

! 그렇다면 기검룡 그는 지금 만년백경의 몸속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기검룡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따보자!)

결심한 순간 그는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그는 손목이 찌르르함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백경의 내단은 백경의 진원(眞元)이나 다름없이 스스로 보호하는 진기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 시도에 실패하자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어 그는 천강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양팔이 청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그는 벼락같이 쌍수를 떨쳐냈다.

파파팟___ 꽈릉___!

파열음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허나 천하에서 가장 강맹한 천강신공이건만 백색구슬 주위의 하얀기류를 흩어버릴 수는 없었다.

[!]

기검룡은 재차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기듯이 물러났다.

일순 전신의 기혈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에 그는 눈앞이 아찔했다.

허나 잠시 후 기혈이 가라앉자 기검룡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천강신공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强)한 신공이라 하셨다. 헌데 저 흰색기류를 제거치 못하다니...?]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는 문득 낙척문사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___무릇 장수하며 오래사는 영물들은 자연으로부터 정기(精氣)를 얻어 단기(丹氣)를 이룬다. 그 단기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서로 뭉쳐 고형화(固形化)되어 구슬과 같은 모양을 하게 되는데 이를 단주(丹珠) 또는 내단(內丹)이라 한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여기며 무인(武人)이 이것을 용해하여 단기(丹氣)를 흡수하면 공력을 연마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___

 

이러한 낙척문사의 말을 기억해낸 기검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것은 내단(內丹)임에 틀림없다. 그럼 여기가 짐승의 뱃속...!]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만년백경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괘씸한 마음이 들어 소리쳤다.

[백경! 나를 삼키다니 도저히 용서치 못하겠다!]

이어, 꽈릉___! 꽈르릉___!

기검룡은 백경의 내단을 향해 마구 천강신공을 쳐냈다.

허나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기검룡은 그만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하면 백경을 시원하게 골탕먹일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문득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단의 주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선을 향해 천강신공을 벼락같이 쳐냈다.

파팍___!

허나 의외로 신경선은 매우 질겨 간신히 한 가닥만이 끊어졌을 뿐이었다.

(굉장히 질긴걸?)

기검룡은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천강신공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았다.

파파팍___ !

그의 손이 힘차게 내려쳐지자 단번에 십여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졌다.

허나 그것은 수천 줄기의 신경선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검룡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신공(神功)만 쓰면 이렇게 질긴 것을 자르는데 별효과가 없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수법이 있다면 좋을텐데...)

다음 순간 그는 문득 손뼉을 탁 쳤다.

(그렇다!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가 있다!)

 

___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

 

본래 도가(道家)의 중수법(重手法)이었던 참마인(斬魔刃)이라는 수법을 사백 년 전 점창의 절정고수였던 제룡신협(制龍神俠)이 개조한 무공이었다.

강기(罡氣)를 파해하는 전문수법으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신랄한 무공이다.

검창에서는 오래 전에 실전하였으나 낙척문사가 이를 얻었던 것이다.

기검룡은 참마제룡수의 구결을 마음 속으로 외우고 난 다음 신경선이 뻗친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순간 그는 우수(右手)를 번쩍 치켜들어 사정없이 신경선을 내려쳤다.

파파파팍___!

그러자 놀랍게도 단번에 수십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다!]

기검룡은 환성을 지르며 쉬지않고 수도(手刀)를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 새파란 광망이 번뜩일 때마다 수많은 신경선들이 속속 끊어져 나갔다.

파파___ ! ! !

그렇게 거듭할수록 청망은 더욱 짙어지고 한 번에 끊어지는 신경선의 숫자도 많아졌다.

[다 됐다!]

기검룡은 탄성을 발하며 기뻐했다.

어느새 내단의 뒤에 달린 굵직한 주신경선(主身俓線)만 남곤 미세한 신경선은 모두 끊어져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주신경선을 후려쳤다.

순간,

[크아악___!]

만년백경은 극심한 내부의 충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그로인해 기검룡이 서 있는 부분의 사방벽이 짓눌리며 그를 압박했다.

[!]

기검룡은 재빨리 만녀백경의 내단을 집어들고 입구로 날아올랐다.

쏴아아___!

그가 처음에 누워있던 장소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전면에서 밝은 햇살이 비쳐들었다.

또한 만년백경이 물을 들이키는 듯 해일같은 기세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회는 지금이다!)

내심 생각한 그는 빛을 향해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이얍!]

힘찬 일갈과 함께 천강신공을 펼치자 바닷물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___ !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전속력으로 뛰쳐나갔다.

콰르릉___!

그가 마침내 만년백경의 입에서 뛰쳐나오자 대노한 만년백경은 미친 듯이 불기둥을 쏘아올렸다.

허나,

[하하... 고맙다!]

기검룡은 오히려 그 물기둥을 타고 삼십여 장 상공으로 까마득히 치솟았다.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우측 수평 위에 아스라이 섬그림자가 보였다.

기검룡은 지체없이 방향을 틀어 섬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내단을 빼앗긴 만년백경은 대노하여 기검룡의 뒤를 쫓았다.

(이크...! 저놈이 정말 화가 난 모양이구나...!)

쏜살같이 해연약파(海燕掌波)의 경공을 펼쳐 섬으로 달아나던 기검룡은 등뒤에서 세찬 물살을 가르며 쫓아오는 만년백경 보고 기겁했다.

그는 더욱 속력을 가했다.

허나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만년백경과 기검룡의 거리는 좁혀들었다.

이윽고 전면에 뚜렷이 하나의 섬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사이는 불과 이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쏴아아___!

재차 산악같은 물기둥이 쏘아졌다.

[어엇...!]

기검룡은 십여 장 넓이의 물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바닷 속으로 잠겨들었다.

(으흡...!)

기검룡은 바닷 속에 잠겨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뻔 했다.

만년백경은 일시에 기검룡의 행적을 놓치자 잠시 멈칫 했다.

허나 곧 만년백경은 섬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쏘아가기 시작했다.

기검룡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만년백경의 배밑에 숨죽여 숨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거의 섬의 전역에 들어온 듯 바닷속이 얕아져 백경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빠르게 앞으로 나가다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만년백경은 막 방향을 틀다가 기검룡이 떠오른 것을 보고 쏜살같이 물살을 가르며 덮쳐들었다.

___ ___!

허나 섬이 이미 코앞에 있었다.

소년은 번개같이 몸을 띄워 섬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다가 문득 힐끗 뒤를 돌아보니 만년백경은 섬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을 못하고 그 부근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하하...! 요놈아 꼴좋구나...!]

기검룡은 돌아서서 크게 외치며 섬주변의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___ ___ 처얼썩...!

[... 힘들다...]

기검룡은 백사장에 닿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까지도 만년백경은 미련이 남았는지 섬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기검룡의 천진한 얼굴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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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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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길한 화살

 

 

작은 분지 형태인 선녀곡에는 주황색 노을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녀곡 끝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모옥이 한 채 서있다. 지난 십칠 년 간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살아온 집이다.

모옥은 잘 가꿔진 채마밭과 화단이 감싸고 있다.

“...!”

선녀곡으로 들어서던 고검추의 눈이 치떠졌다. 모옥의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보인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타탁!

고검추는 반가운 마음에 모옥을 향해 달려갔다.

고검추는 경신술을 쓸 줄 몰라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고검추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몸속의 기운이 잘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만 수련하게 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진기토납술을 수련해온 덕분에 고검추는 무공을 쓸 줄 몰라도 온몸의 경맥은 막힘없이 뚫려있다.

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고검추의 질문에 당혜선은 즉답은 피했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당혜선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가르치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고검추는 그날 이후로 무공을 가르쳐달라 조르지 않았다.

비록 무공은 쓸 줄 몰라도 고검추의 뜀박질은 아주 빠르다.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 몸을 무리하게 써도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

삼십여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여 모옥 근처에 이른 고검추의 몸이 갑자기 멈춰졌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난장판이 된 모옥 내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방안의 집기들은 다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다. 어떤 자가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은 듯한 정황이다.

(그자 짓이었을까?)

고검추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다가 화들 짝 놀라 달아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대체 무얼 노리고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인가?)

고검추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고검추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화살!

마치 피를 칠한 듯 검붉은 화살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어지?)

핏빛 화살을 본 고검추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세히 보니 화살의 깃에는 검은색으로 글이 한자씩 적혀 있었다.

<()>자와 <()>자였다.

"초혼(招魂)? 혼백을 부른다?"

화살 깃에 적힌 글을 확인한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고검추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익!

놀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 내렸다. 촌부(村婦)처럼 피부는 가무잡잡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각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다.

비록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겼지만 이 여인을 본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가고 말 것이다. 여인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풍만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여인의 몸에는 검소한 마의가 걸쳐져 있다.

물론 수수한 그 차림새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진 못한다.

 

-당혜선

 

여인은 바로 고검추의 어머니인 당혜선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등에 짊어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호의 여걸이다.

돌아오셨군요 어머니!”

고검추는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색했다. 흑모철웅을 추살하러 떠났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검추와 달리 당혜선은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문에 박혀있는 핏빛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핏빛 화살을 살펴본 당혜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의에 감싸인 탄력 넘치는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화살이 무엇인데 어머니가 저토록 놀라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화살은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있었느냐?"

당혜선이 굳어진 표정으로 고검추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

고검추는 당혜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악랄한 무리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당혜선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무리들이라니... 누구 말씀인지요?"

의아해진 고검추가 물었다.

"이 화살의 이름은 초혼전(招魂箭)으로 사신각이라는 청부살수조직의 표기다."

당혜선은 화살을 노려보며 설명했다.

사신각...”

고검추는 사신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섬뜩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혼전에는 백일취(白日臭)라는 것이 묻어있다. 이름 그대로 냄새가 백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약물이다. 일단 백일취가 몸에 묻으면 최소 백일간은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당혜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후 서둘러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나무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왔다. 가로 세로 일곱 치 정도에 두께는 한 치가 채 안되는 납작한 상자다.

고검추는 그 나무상자를 오늘 처음 본다. 나무상자는 벽 틈에 설치 된 교묘한 공간에 숨겨져 있어서 침입자가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당혜선은 들고 나온 나무상자를 고검추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본 고검추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신각의 초혼전이 발동된 이상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혜선은 말하면서 고검추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고검추의 키는 어느덧 당혜선보다 커졌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검추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들었다.

".. 어머니...!"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안긴 고검추가 당황할 때였다.

휘익!

다 큰 아들을 두 팔로 안아든 당혜선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무공은 역시 대단하구나.)

당혜선의 품에 안겨 날아가며 고검추는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던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검에 간단히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당혜선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각이 그만큼 무서운 조직이라는 것을 고검추는 깨닫고 있었다.

 

***

 

틀림없느냐?”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부릅떠졌다.

... 분명 그 늙은이였습니다.”

사신각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는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나타났던 바로 그자다.

산적이 아닐까 했던 고검추의 추측과 달리 그자는 사신각 소속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 팔이 하나 없어졌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있긴 했지만... 본각의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는 대()늙은이의 용모파기와 일치했습니다.”

사내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살수 주제에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늙은이가 십구 년 전에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혼잣말을 하는 사신각주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역력히 묻어있다. 그만큼 그자가 떠올린 인물은 공포스러운 존재다.

기련산에 들어온 후 열 명 가까운 형제들이 점호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신각주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사신각의 자객들은 지령이 떨어지면 그 복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늙은이를 만나서 불귀의 객이 되었겠군.”

사신각주는 복면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대늙은이는 본각이 십칠 년 전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우릴 따라서 기련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대늙은이의 느닷없는 출현을 설명할 수 없겠지.”

복면인의 말에 사신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대늙은이는 정확한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형제들은 대늙은이에게 사로잡히는 즉시 입 속에 숨겨놓은 독을 깨물어서 비밀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사신각의 살수들은 입속에 독을 숨기고 있다가 임무에 실패하면 터트려서 자결을 한다. 살인청부를 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팔(鄭八) 저놈을 잡지도 않고 살려 보낸 건 잡아봤자 자결할 걸 알아서였겠군.”

사신각주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힐끔 보았다.

대늙은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당가년에 대한 추격은 중지하는 게 어떨지...”

복면인이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혜선의 거처에 초혼전을 남겨뒀다고 했지?”

사신각주는 복면인에게 대꾸하는 대신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각주님.”

긴장한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신각주의 눈치를 살폈다.

본각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가년은 즉시 기련산을 벗어나 종적을 감춰버릴 게 분명하다.”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희번덕였다.

이번에도 당가년을 놓치면 지난 몇 년간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기필코 잡아야만 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각주가 결정을 내리면 따라야만 한다.

기련산에 들어온 본각의 전력 절반을 대늙은이의 행방을 찾는데 투입하라. 그 늙은이를 발견하는 즉시 십리적(十里笛)을 써서 보고하고!”

사신각주가 지시를 내렸다.

존명!”

휘휙! !

일제히 대답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호사다마라더니...”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마천루의 떨거지들이 기련산 일대에 출몰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늘... 저 세상에 가있을 줄 알았던 무서운 노괴까지 우리 사신각의 뒤를 캐고 있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신각주의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늙은이의 눈에 띠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지만... 이제 와서 당가년의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년을 잡아야만 복마신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사신각주는 길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최대한 빨리 당가년을 찾아내 사로잡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휘익!

결의를 굳힌 사신각주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쐐액!

고검추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검추를 두 팔로 안은 당혜선은 기련산의 험한 산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당혜선이 달리는 속도는 어떤 산짐승보다도 빠르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고검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고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던 고검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홱홱 변하는 주변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십자단맥검을 쓴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고검추를 안고 달리며 당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 전, 당혜선은 납치당한 등삼낭을 구하기 위해 철웅채로 쳐들어갔었다.

철웅채의 채주이며 기련산 일대에서 최강자로 꼽히던 흑모철웅은 당혜선에게 패해 달아났었다.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다준 후 당혜선은 흑모철웅을 추격했다. 살려둘 경우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 전, 당혜선은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흑모철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흑모철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철피공을 익힌 그자의 몸뚱이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은 비장의 절기를 써야만 했다.

그 절기가 바로 십자단맥검이었다.

십자단맥검은 금강불괴라도 베어버리는 위력을 지녔다. 흑모철웅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해도 십자단맥검을 견디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단맥검에 치명상을 입은 흑모철웅은 높은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에 빠져 실종되었다.

당혜선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흑모철웅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는 워낙 거칠어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오일 동안 격류를 따라 내려가며 샅샅이 뒤졌지면 흑모철웅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팽가촌으로 돌아와 보니 사신각의 초혼전이 집의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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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허억!”

털썩!

임청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아래의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임청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파르고 험한 절벽이라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어느덧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게 해가 진 때문인지 바위산 아래 계곡이 너무 깊어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절벽은 높고도 높아서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북두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려올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잘도 살아서 저길 내려왔구나.)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임청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등쪽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임청우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반쯤 크기의 반점(斑點)이 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반점은 얼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우(靑牛)라는 이름은 그 반점에서 딴 것이다.

 

임단심은 아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 대신 온갖 욕설과 악의가 섞인 말로 아들을 불렀었다.

어쩔 수 없이 임청우는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성을 모르니 어머니의 성인 임()씨를 썼고 가슴에 있는 푸른 소 형상의 반점에 착안하여 청우를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임청우였다.

 

한숨 돌린 임청우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끌렀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은 임청우와 함께 바닥에 패대기쳐졌었지만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다. 한쪽이 조금 이지러졌을 뿐이다.

!

호리병의 주둥이에 박혀있던 나무 마개를 뽑자 그윽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호리병에 든 것은 임청우가 여러 가지 약초와 과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다. 백초주(百草酒)로 이름붙인 그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꿀꺽! 꿀꺽!

목도 마르고 해서 독한 백초주를 거푸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 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영차!”

다시 마개를 막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찬 임청우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북두홀을 찾아야한다.

 

***

 

다행히 북두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뜨인 것이다.

북두홀을 찾았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헌데 북두홀을 허리띠에 끼우던 임청우의 코가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가 타는 듯한 그 냄새를 따라갔다.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삼, 사십 장쯤 갔을 때 임청우는 연기에 휩싸인 독수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푸스스스!

날개를 활짝 펼친 길이가 일장이 넘는 독수리들의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살은 이미 다 타서 굵은 뼈와 깃털들만이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는 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무서운 독이 살을 녹였구나.)

임청우는 놀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푸스스! 퍼석!

임청우가 보고 있는 사이에 굵은 뼈들도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에서 남아있는 것은 크고 작은 깃털들과 강철같이 번들거리는 발톱뿐이었다.

(이놈에게 잡혀가던 뿔 달린 작은 뱀의 짓일까?)

임청우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저절로 녹아내렸을 리는 없다.

그놈은 죽기 전에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던 게 분명하다.

바로 그때였다.

툭툭!

무언가가 임청우의 오른쪽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

무심코 내려다보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쉭쉭!

머리에 황금색 뿔이 돋아나있는 작은 뱀이 고개를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통이 피 칠을 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등줄기를 따라 갈기까지 나있다.

영락없는 용의 모습인 작은 뱀은 독수리들의 왕에게 잡혀가던 바로 그놈이었다.

(... 이놈이 독수리들의 왕을 물어죽였구나!)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서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를 녹여버릴 정도의 독을 지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다.

!

헌데 뒤로 물러서던 임청우의 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렸다.

!”

임청우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쪘다.

쉭쉭!

뿔 달린 작은 뱀이 그런 임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다가왔다.

(... 죽었다!)

임청우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저앉은 상태라서 그놈이 달려들어 물려고 하면 피할 수가 없다.

임청우의 몸이 공포로 굳어질 때였다.

임청우를 잠시 살펴보던 뿔 달린 작은 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냐

임청우는 어리둥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뱀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잖아!)

임청우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뿔까지 달려있고... 외양만 특이한 게 아니라 진짜 영물이란 건가?)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생긴 임청우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이 금관혈린사(金冠血鱗蛇)인 뿔 달린 작은 뱀은 세상 모든 뱀들의 왕이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안되지만 금관혈린사는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복사(蝮蛇)의 일종인 이놈은 한 때 몸길이가 삼장(三丈;9미터)이 넘는 대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연을 만나 무한한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오히려 작아졌다.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 정기(精氣)가 농축되자 몸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몸은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기뿐 아니라 독기도 농축이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관혈린사의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금관혈린사는 표적을 직접 물지 않고 독기(毒氣)를 뿜어서 죽일 수도 있다.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들의 왕의 입장에서는 모든 뱀들의 제왕인 금관혈린사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늘 금관혈린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었다.

금관혈린사가 비록 모든 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힘으로는 독수리들의 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려고 시도해봤지만 독수리들의 왕의 발목은 강철같은 비늘로 덮여있어서 상처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독기를 뿜어도 봤지만 허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독기가 바람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금관혈린사는 꼼짝없이 독수리들의 왕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임청우가 충동적으로 활을 쏴서 독수리들의 왕을 떨어트렸었다.

다만 임청우가 쏜 강철 촉의 화살도 독수리들의 왕의 숨통을 즉시 끊어놓지는 못했었다. 그놈의 깃털과 가죽이 단단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도 독수리들의 왕은 충격을 받아서 허우적대며 떨어졌었다.

그 바람에 금관혈린사는 강철같은 발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수리들의 왕의 몸통을 물어서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던 것이다.

 

(작고 다리가 없을 뿐 용을 빼닮은 놈이다.)

임청우가 금관혈린사를 보며 전설 속의 용을 떠올릴 때였다.

! !

금관혈린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동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인사치례도 했으니 그만 제 갈길 가나보다 생각했다.

헌데 금관혈린사는 조금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기어가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따라오라는 거냐?”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 !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임청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영물인 게 분명한 놈이 따라오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금관혈린사를 따라 오십여 장쯤 갔을까?

임청우 앞쪽에 안개의 벽이 나타났다.

계곡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마치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금관혈린사는 망설이지 않고 안개의 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째 좀 으스스한데...!”

임청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금관혈린사를 따라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섰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이토록 짙은 안개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짙은지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봐도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금관혈린사 덕분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금관혈린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반딧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나는 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독을 흘린 것인지 다른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점(光點)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앞서 가며 남긴 기이한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안개다. 마치 수초가 몸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 !)

헌데 광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시커먼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작은 것은 개만하고 큰 것은 사람 키의 몇 길이나 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짐승같고 어떤 것은 사람 같으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형상도 있다.

처음에는 한 두 개가 보이던 그것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진다.

괴상한 형상들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그것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눈인 모양인데 머리 뿐 아니라 몸통에도 달려있으며 하나를 단 놈이 있는가 하면 두 개, 세 개, 심지어 십여 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다.

(... 뭐지?)

소름이 오싹 끼친 임청우는 허리춤에 끼운 북두홀을 움켜잡았다.

(안개 속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있다!)

겁에 질린 임청우가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할 때였다.

쉭 쉭!

앞쪽에서 금관혈린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임청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서 금관혈린사의 뿔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뿔 아래에서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이 임청우를 보고 있다.

(... 길을 아니까 따라오라는 거겠지? 일단 저놈만 믿고 가보자!)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개 속을 배회하는 기괴한 형상들도 임청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아서 임청우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금관혈린사가 지나가며 남긴 광점들과 안개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그놈의 뿔이 아니었으면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을 것이다.

화악!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의 벽이 사라지며 임청우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마침내 안개의 벽을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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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인들의 제안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가장 빨리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주시오. 건량(乾糧;마른 음식)도 사흘치 정도 포장해주고...”

강유는 점소이에게 동전을 넉넉히 건네주며 말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손으로 동전을 받으며 굽신거렸다.

재빠른 셈으로 최소한 한 두 냥은 남는다는 걸 확인한 점소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점소이는 동전을 세면서 희희낙락 하며 주방쪽으로 갔다.

(장강을 건넜으니 여정의 절반쯤은 지난 셈이다.)

강유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안탕산을 떠난 게 사흘 전이다.

전에도 아버지를 따라 안탕산을 내려온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강유 혼자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앞으로 사나흘만 부지런히 가면 숭산(崇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품속에 오른손을 넣으며 생각했다.

 

<숭산 태실봉(太室峰) 뒤쪽에 고불암(古佛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아버지 강조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품속에서 꺼낸 강유의 손에는 여자들이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가 하나 들려있었다.

네모 난 녹옥(綠玉)에 호박(琥珀)으로 만든 구슬이 몇 개 달려있는 노리개다.

 

<고불암에 기거하는 노승에게 이 노리개를 건네주면 대신 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오는 게 아비의 심부름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면서 강유는 강조의 말을 떠올렸다.

강유가 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하는 곳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패옥(佩玉)이다.)

강유는 노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리개의 재료인 녹옥과 호박은 그리 질이 높은 게 아니었다.

녹옥의 색은 탁하고 호박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있다.

그렇다고 세공 솜씨가 정교한 것도 아니다.

네모 난 녹옥에는 봉황이 투각(透刻)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솜씨가 어설프고 조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시장통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장신구일 뿐이다.

(단지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한 걸 보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인 것같긴 하다.)

강유는 반질반질한 녹옥의 모서리를 만져 보았다.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는 것 외에는 값어치가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이 패옥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노리개에 얽힌 사연이 궁금한 강유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그저 아버지의 분부만 이행하면 되니까.)

강유는 생각을 그치며 노리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나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고 혼자 강호에 보내신 것일지도...)

노리개를 챙기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의자에 피부가 검고 흰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물론 두 노인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였다.

(이 노인들...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앞자리에 와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유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마만 조금 찡긋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다.)

강유는 한 눈에 흑백신귀가 자신은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지라 묵묵히 흑백신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흑백신귀도 그런 강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

국수 한 그릇을 얹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와 흑백신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언제 이 자리로 옮겨왔지?)

점소이는 당황하여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 어떻게 할까요 손님?”

놓고 가시오.”

강유는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두 노인을 향한 채...

점소이는 흑백신귀의 눈치를 보면서 강유 앞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두 분 노야, 식사는 하셨는지요?”

강유는 젓가락을 집어들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던 점소이는 혹시나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가 묻자 백귀는 끄덕이고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두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강유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후배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히...”

강유의 권유에 흑신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백괴가 점소이에게 가라고 손짓을 해서 막았다.

... 건량은 포장해놓았으니 나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강유에게 굽신거렸다.

(이상한 늙은이들이잖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자리에 합석이나 하고 말이야.)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이자니 좀 부담스럽군.)

강유는 쓴웃음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세외기인들이고 내게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겠지.)

후룩! 후루룩!

가능한 빨리 식사를 마칠 생각에 강유는 쉬지 않고 국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용골호체(龍骨虎體)!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의 골격이고 체질이야>

 

부지런히 국수를 먹는 강유를 보면서 흑백신귀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주님 못지않은 자질을 지녔어.>

<어떤 면에서는 성주님보다도 빼어날 정도야>

<이놈을 후계자로 삼으면 우리 신귀각(神鬼閣)이 제이(第二)의 제왕성이 될 수도 있겠어.>

<성주님께는 불충한 생각이지만 자네 생각에 동의함세.>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우리 신귀각의 후계자로 삼아야지.>

 

흑백신귀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이에 이윽고 강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국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것이다.

후배는 가부(家父)의 명을 서둘러 수행해야만 하는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흑백신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강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강유, 한 달 후면 열아홉 살이 됩니다.”

일어나려던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강씨였군.”

기초가 튼튼한 걸 보니 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가르쳤어.”

흑백신귀는 또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시차 없이 말을 해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강유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당금 무림에 강씨 성을 지녔으면서 아들을 너 정도로 기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구파일방과 삼문육가(三門六家)에도 강씨성을 쓰는 인간들이 제법 있지만 후손을 잘 둔 놈은 없고...”

흑백신귀는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무명지배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

결국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볼수록 놀라운 인물들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까지 단번에 추론 해내다니...)

흑백신귀의 분석을 들은 강유가 놀랄 때였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이신 일제(一帝) 철면제왕님은 당연히 강씨가 아니고...”

또 쌍비(雙秘)는 여자인 데다가 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

삼기(三奇)와 사신(四神) 중에도 강씨가 둘 있지만 너무 늙었으니 제외...”

결국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중 한명이겠군.”

흑백신귀의 분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흑백신귀는 동시에 강유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주시했다.

오왕, 육패, 칠절에 속하면서도 성이 강씨고 검법이 특기인 놈이라면...”

이제야 알겠도다!”

! !

흑백신귀는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네 아비는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겠구나.”

그렇지? 맞지?”

흑백신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두 분 노야의 해박한 견문에는 후배,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강유는 다시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소요신군이라 불리는 분이 후배의 가부입니다.”

역시 그랬어!”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 백미(白眉)라 불리던 소요신군의 자식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흑백신귀는 동시에 무릎을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를 높이 쳐주시니 자식 된 입장으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두 분 노야께서는 후배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십년 안에 널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마.”

흑백신귀는 다시 동시에 말하면서 몸을 강유 쪽으로 숙였다.

후배를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반면 강유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두 늙은이는 신주이십팔숙중 일제 철면제왕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상좌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창 때는 마교와 혈교의 교주들도 우리를 두려워했을 정도야.”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당금 무림에 철면제왕을 제외한 신주이십팔숙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강유가 당혹스러워할 때였다.

노부들의 별호는 흑백신귀이며 노부가 그중 흑신이다.”

노부가 백귀다.”

우린 마교와 혈교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신귀각의 공동 문주들이다.”

사연이 있어서 남의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분은 아니다.”

흑백신귀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흑백신귀는 물론이고 신귀각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는 아버지 강조로부터도 흑백신귀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신주이십팔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쌍비, 삼기에 필적하는 고수가 존재하고... 역시 세상은 넓구나.)

강유는 강호에 기인과 고수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며 흑백신귀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모자란 후배를 어여삐 보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승을 모시는 일은 실로 엄중한 대사인지라 후배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리가 있군.”

만일 네 아비 소요신군이 허락하면 노부들의 제자가 되겠느냐?”

가부가 허락하면 두 분 노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

네 아비의 허락이 떨어지면 넌 우리 신귀각의 차기문주다.”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강조가 당연히 아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노친네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고...)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가부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 치고 우리 두 늙은이의 이목이 뻗어있지 않은 곳은 없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고개 저어 강유의 말을 막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강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다니 후배는 안심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냐! 일 봐라.”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게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답례했다.

강유는 벗어놓았던 봇짐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객잔 입구로 간 강유는 점소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았다. 며칠간 먹을 건량이다.

건량 꾸러미를 건네받은 강유는 서둘러 객잔을 나갔다.

흑백신귀의 시선은 그런 강유에게서 촌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볼수록 기막힌 자질이야.”

흑신은 강유가 주점에서 나가는 걸 보며 새삼 감탄했다.

반면 백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본문의 오랜 숙원인 신귀합벽(神鬼合壁)을 저놈이라면 완성해낼 지도 모르겠어.”

흑신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백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자네, 강유 저놈에게서 뭐 느낀 거 없는가?”

흑신의 물음에 백귀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몸을 망칠 수도 있는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의 교정이야 우리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무공 얘기가 아닐세. 저 놈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떠올려 보게.”

흑신의 대답에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연상시킨다? 뜬금없이 저놈이 누구를 닮았다고...”

백귀의 말에 대꾸하던 흑신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 맙소사!”

얼마나 놀랐는지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네.”

백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놈이 성주와 흡사한 분위기를 지녀서 마음이 불편했던 걸세.”

그럼... 그럼 저놈이 혹시 십팔 년 전에 귀면지존이 납치해간...”

흑신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아닐 걸세.”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정인군자로 소문났으며 출신도 확실한 소요신군이 저놈 아비일세. 소요신군의 아들이 생사가 불명한 소성주일 리는 없어.”

그렇긴 하네만... 핏줄로 이어지지 않고는 저렇게 분위기가 흡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절대자(絶代者)의 운명을 타고 나서 성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네.”

그럴 가능성도 있군.”

백귀의 말에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소요신군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세.”

그놈을 만나보면 강유에게서 성주가 연상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우리 두 늙은이의 죄책감이 강유 저 아이를 소성주와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고기재를 후계자로 삼게 될 기대로 들떴던 두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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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뻔한 노인

 

 

오빠! 검추오빠!”

자매중 동생인 팽옥령이 달음박질한 탓에 발개진 얼굴로 와락 고검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나 죽네!”

고검추는 팽옥령을 품에 안은 채 뒷걸음질 치며 엄살을 부렸다.

하루 종일 심심했지? 이제부터 옥령이가 오빠하고 놀아줄게.”

고검추의 허리를 가는 두 팔로 끌어안고 올려다보는 팽옥령의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다.

하하하 놀아준다니 영광이옵니다 옥령아가씨!”

고검추는 명치쯤에 닿은 팽옥령의 가슴에 약간 붕긋한 융기가 돋아나 있는 걸 느끼며 웃었다.

검추오빠 피곤할 텐데 귀찮게 하면 안된다.”

뒤이어 도착한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쌀쌀 맞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팽옥경의 두 볼에도 살짝 홍조가 어려 있는 것을 고검추는 놓치지 않았다.

오빠는 옥령이 안 귀찮아해. 그렇지 오빠?”

팽옥령은 가는 두 팔로 고검추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언니에게 눈을 흘겼다.

(저 년이...)

그 꼴을 본 팽옥경의 눈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피를 나눈 동생인 데도 고검추에게 아양을 떠는 팽옥령이 눈에 거슬리는 그녀다.

팽옥경은 고검추와 동갑이다.

당혜선이 어린 고검추를 안고 팽가촌에 나타난 며칠 후 팽옥경이 태어났었다.

당시 당혜선은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어서 고검추에게 수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당혜선을 대신해서 마침 출산한 등삼낭이 고검추에게 젖을 먹이며 키워주었다.

고검추에게 등삼낭은 사실상의 유모인 것이다.

고검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검추는 팽옥경과 함께 등삼낭의 젖을 한쪽씩 나눠 물고 빨며 자랐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고검추는 팽옥경과 친 남매처럼 지내왔다.

물론 팽옥경이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가 토실토실해지면서 서먹해지긴 했지만...

가져왔어요 엄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생에게 한 번 더 눈을 흘긴 팽옥령이 보자기로 싼 찬합을 등삼낭에게 내밀었다.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구나. 옥경이가 몇 가지 음식을 마련했으니 집에 가져가서 먹도록 해라.”

등삼낭은 큰 딸이 내민 찬합을 받지 않고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 좋은데...”

여전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팽옥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떼 쓰지마. 검추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할 거야. 이모가 오늘이라도 돌아올지 모르니...”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찬합을 내밀었다.

누가 그걸 모른데?”

팽옥령은 언니에게 마주 눈을 흘기면서 고검추에게서 떨어졌다. 고검추의 허리를 풀어주는 팽옥령의 손에서 아쉬움이 가득 느껴진다.

잘 먹을게.”

팽옥령에게서 벗어난 고검추는 어색하게 웃으며 팽옥경이 내민 찬합을 받아들었다.

그럼 내일 해뜨기 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손에 찬합을 든 고검추는 세 모녀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가라.”

잘 자 오빠!”

“...”

세 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검추를 배웅했다.

고검추는 곧 마을을 벗어나 자기 집이 자리한 동쪽으로 멀어졌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옥경이를 검추와 짝지어줄 생각이었는데... 당언니에게 너무도 참담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여서 차마 사돈 맺자는 말을 할 수가 없겠구나.)

멀어지는 고검추의 뒷모습을 보며 등삼낭은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무사했던 게 아니었다.

당혜선이 철웅채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비극은 벌어졌었다.

등삼낭은 흑모철웅의 무지막지한 몸 아래 깔려 강간을 당하다가 기절한 후였던 것이다.

당혜선은 분노하기도 했지만 등삼낭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었다.

당혜선이 기필코 흑모철웅을 죽여 버리려는 이유도 등삼낭을 위해서였다.

“...”

소리 죽여 한숨을 쉬는 엄마를 훔쳐보는 팽옥경의 표정도 복잡했다.

등삼낭을 구해 돌아온 당혜선은 마을 사람들을 일체 배제하고 팽옥경에게 엄마를 돌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혼절한 엄마의 몸을 닦아주면서 팽옥경은 엄마가 철웅채로 끌려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버렸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너무도 가엾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자신이 고검추와 맺어지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서는 팽옥경이었다.

 

***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사는 골짜기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붙을 만큼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며 아주 깊거나 험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가촌 주민들은 두 모자가 사는 계곡을 선녀곡(仙女谷)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 당혜선은 영락없는 선녀였기 때문이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한다.

 

(심마니인가?)

팽옥경으로부터 받은 찬합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올라오던 고검추는 미간을 조금 모았다.

고갯마루 못미처에 서있는 단풍나무 아래 노인 한명이 앉아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젊었을 때는 체격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서 볼품없어 보인다.

볼품없는 것은 체형만이 아니다.

백발인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역시 허연 수염은 가꾸지 않아 제멋대로 자랐다.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여있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왼쪽 뺨에는 길게 갈라졌다가 아문 상처가 나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뺨이 갈라질 때 눈도 상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팔 하나가 없다. 오른쪽 소매는 팔이 들어있지 않아서 힘없이 늘어져 있다.

독비(獨臂) 독안(獨眼)의 노인은 망태기를 하나 짊어지고 있는데 약초 캐는 괭이의 손잡이가 망태기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불구의 몸이긴 해도 전형적인 심마니의 행색인 노인이다.

노인이 걸터앉은 바위에는 옹이 진 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으로 용케 기련산을 올라왔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성치 않은 모습을 살펴보며 단풍나무로 다가갔다.

“...”

노인도 고개를 올라오는 고검추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노인인데도 눈이 참 맑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수정처럼 맑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다가 고검추는 무엇 때문인지 노인의 미간이 움찔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게서 뭘 보았기에 잠깐이지만 놀라신 걸까?)

고검추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 했다.

꼬르륵!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고검추의 귀에 들렸다.

돌아보니 노인이 하나뿐인 눈으로 고검추가 들고 있는 찬합을 유심히 보고 있다.

꼬르륵!

그와 함께 다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노인의 배에서 나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다.)

고검추는 잠깐 갈등하다가 막 지나친 노인쪽으로 돌아섰다.

노야! 출출하시면 이걸 드십시오.”

고검추는 노인에게 찬합을 내밀었다.

찬합에 팽옥경이 정성과 공을 들여 만든 음식이 들어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배를 곯고 있는 게 분명한, 그것도 불구의 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허허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노인은 사양하지 않고 헤벌쭉 웃었다.

그저 웃은 정도가 아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보다시피 이 늙은이는 손이 하나 없어서 보자기를 풀 수가 없구먼.”

노인은 흐느적거리는 오른쪽 소매를 고검추에게 보이며 말했다.

(찬합을 직접 열어달라는...)

노인의 뻔뻔한 요구에 고검추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두말 않고 보자기를 풀었다.

드시지요.”

고검추는 찬합의 뚜껑까지 열어서 노인에게 내밀었다. 찬합에는 닭과 소, 양의 고기를 써서 만든 요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젓가락도 쥐어다오.”

노인은 이제 당연한 권리라는 듯 고검추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내민 왼손에는 소지(小指)와 무명지(無名指), 즉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이 없다. 오른팔이 없을 뿐 아니라 왼손도 손가락이 세 개뿐인 것이다.

(어쩌다 이토록 심한 불구가 되신 것일까?)

고검추는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 팽옥경이 찬합과 함께 싸준 젓가락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맛나구먼. 어떤 계집인지 모르지만 자넬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요리야.”

고검추에게서 젓가락을 건네받은 노인은 게걸스럽게 찬합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세 개 뿐이지만 사용하는 데 익숙한 듯 젓가락질이 자연스럽다.

노인은 연신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걸터앉은 바위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노인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찬합을 두 손으로 들고 서있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종과 하인이거나 할아버지와 손자로 볼만한 장면이다.

꺼억! 잘 먹었다. 뱃가죽이 등가죽과 입을 맞춰서 일어날 힘도 없었던 참이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찬합의 음식을 입에 쓸어 넣은 노인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엉겁결에 일면식도 없는 노인에게 공양을 한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노인의 행동거지에서 딱히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검추의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불구의 노인을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고검추는 웃으며 찬합을 다시 보자기로 싸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

그런 고검추에게 노인이 불쑥 물었다.

고검추라고 합니다.”

고검추... 고씨란 말이지?”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가늘어졌다.

(이분도 내 이름을 듣자 옥여상이란 아주머니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구나.)

고검추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푸 두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비는 누구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민망합니다. 어머니가 가친(家親)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고검추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체 거론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남에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노인은 노을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인지 고검추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노인은 다시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성은 대()씨다.”

대노야셨군요. 헌데 기련산에는 어인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고검추의 물음에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기련산에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묘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영생불사의 묘약... 기련산 토박이인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생불사의 묘약이 기련산에 있다는 노인의 말은 얼토당토않게 느껴진다.

너는 아직 살날이 구만리 같아서 뜬 구름같은 희망에라도 매달려야만 하는 늙은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던 노인의 시선이 고갯마루쪽으로 이동했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눈에 한 사내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것이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그자는 기련산의 주민이 아니다.

몸에는 날렵한 경장을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다.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서 그자가 무공을 익혔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 산채의 산적인가?)

고검추가 긴장하며 볼 때였다.

“...!”

고개를 넘어오려던 사내의 몸이 와락 경직되는 게 고검추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뜬 그자는 뒷걸음질을 하다가 홱 돌아섰다.

!

그리고는 놀란 노루처럼 튀어 올라 좌측의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무공을 익힌 자인데 뭘 보았기에 저리 놀라 황급히 달아난 것일까?)

고검추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접 잘 받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꾸나.”

노인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를 끌며 고갯마루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다리까지도 불편한 듯 했다.

살펴가십시오.”

고검추는 팽가촌 쪽으로 멀어지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지팡이를 조금 들어보이고는 팽가촌 쪽으로 불편해 보이는 걸음을 옮겼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이다.)

고검추는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리를 끌며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신경이 쓰인다.

(저분 말씀대로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고검추는 돌아서서 고갯마루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언제쯤 돌아오실지 모르겠다.)

고검추의 생각은 다시 흑모철웅을 추격해간 어머니 당혜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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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버리 기재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은 동북(東北)의 제갈량이라 불린다.

병법과 진법으로 강진남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 이탁뿐이다.

강진남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요동의 군소문파중 하나였던 대려장을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로 키워냈다.

당금의 무림에서 강진남의 이름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당대에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과 달리 강진남은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다. 본처와 여러 첩들에게서 겨우 두 명의 딸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독안룡 이탁이란 벽에 막혀 요서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강진남을 번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큰 근심이다.

 

***

 

아이 참,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강미루(姜美樓)는 잠옷 차림인 채로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히히힝! 푸르르!

몇 개의 담장 너머에 있는 마당에서 수많은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가씨도 깨셨군요.”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유모 최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가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마당 쪽이 대낮같이 환한 게 보인다.

한밤중에 마구간에서 끌려나온 말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그 말들에게 마구(馬具)를 채우는 마부들의 호통소리가 요란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잖아. 한밤중에 왜 저 난리래?”

무군자 강진남의 둘째딸인 강미루는 유모와 함께 창가에 서서 마당 쪽으로 목을 빼들었다.

쇤네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철령보쪽으로 급히 출동할 일이 생겼다네요.”

유모는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철령보의 잡것들이 또 시비를 걸어온 거야?”

강미루는 도끼눈으로 마당 쪽을 흘겨보았다.

강미루는 대려장의 그 누구보다도 철령보를 미워한다. 아버지 강진남이 철령보에 막혀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직 서는 아이들 말로는 이각(二刻;30) 전쯤에 본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해요. 그 손님이 가져온 급보를 접한 장주님이 철령보쪽으로 출동을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유모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려장의 둘째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철령보 쪽으로 출동한단 말이지?”

유모의 설명을 들은 강미루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지며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

 

백남빈은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을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며 대청을 나섰다. 반지는 워낙 커서 가운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감싼다.

완안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오채금환은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무황성에 가져가는 도중 분실할 수도 있어서 손가락에 낀 것이다.

오채금환 외에도 백남빈은 기름종이로 만든 두툼한 봉투를 상의 속에 품고 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신랑성주 토곤이 대려장주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이탁의 보고서가 들어있다.

또 백남빈의 허리춤에는 길이가 한자 반쯤 되는 단검이 끼워져 있다. 손잡이에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그 단검 역시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같다.

청랑검(靑狼劍)으로 이름 붙인 그 단검은 강철도 어렵지 않게 자를 정도로 날카롭다.

대청을 나서니 총관인 사해검객 종리완이 행장이 준비 된 말의 고삐를 잡고 서있다.

이틀 전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괜잖겠는가?”

다가오는 백남빈을 보며 사해검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더 밤을 새도 끄덕없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남빈은 사해검객 앞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 종리완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주님을 보필할 테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게.”

사해검객도 마주 포권을 하며 웃었다.

헌데 그런 사해검객의 모습이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져 백남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백남빈은 사해검객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속내를 들킬지도 몰라서...

사해검객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 둘러보니 주변에 서있는 철령보의 무사들, 심지어 철령보의 건물들까지도 꿈속인 듯 흐릿하게 느껴진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령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불안한 감정이 백남빈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철령보에 남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신랑성과 대려장이 손을 잡은 사실은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소자가 무황성에 다녀올 때까지 존체보중하십시오.)

백남빈은 양부 이탁이 있는 대청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힘차게 말에 올라탔다.

두두두!

곧 백남빈은 사해검객과 철령보 무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철령보를 달려 나갔다.

 

홀로 대청 안에 앉아있는 이탁의 귀에도 백남빈을 태운 말의 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린다.

백남빈과 달리 이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리 근심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남빈이가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이탁은 근심 대신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치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형님의 핏줄이니 결국 극복해낼 테지.)

이탁은 백남빈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는 손위 동서가 되는 백무염을 떠올렸다. 백무염은 이탁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또 두려워하는 존재다.

백남빈은 여러모로 생부인 백무염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백무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백남빈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볼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탁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백남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남빈에게 백무염처럼 근본(根本)을 알아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안(神明眼)이라 불리는 그 힘을 지닌 덕분에 어떤 위장이나 눈속임도 백남빈을 미혹시키지 못한다.

백남빈이 불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등천제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의 실체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탁은 가끔 양아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눈 속에 감춰진 깊은 어둠을 이미 다 들여다 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빈이가 무황성까지 가는 길에 치명적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한다.)

이탁은 백무염과 백남빈 부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끊고 사해검객을 불렀다.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대려장과의 접경으로 이동시켜라. 요하를 건너는 대려장의 인마는 무조건 주살한다."

이탁의 명령을 받은 사해검객은 곧 수하들을 이끌고 철령보를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철령보와 대려장 사이에 전에 없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

 

요하 건너 대려장에도 어느덧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철령보에서 나가는 것은 새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신랑성의 밀사가 본장에 도착한 것을 무황성이 알게 해선 안된다!”

두두두! 히히힝!

흥분에 찬 호통과 긴장어린 고함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우레처럼 터져 나온다.

활짝 열린 대려장의 정문을 통해 수백기의 기마대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간이지만 대려장의 기마대는 거침없이 요하쪽으로 몰려갔다. 요하에는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가설되어 있었다.

 

대려장의 정문에 설치 된 높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검은 물결인 듯 서쪽으로 몰려가는 기마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초로의 인물이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하며 차림새가 격식을 갖추지 않아 분방하게 보이는 청년이다.

소성주(少城主)가 직접 밀사로 올 줄은 몰랐네.”

초로의 인물은 대려장을 빠져나가는 기마대를 내려다보며 청년에게 말했다. 그가 바로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이다.

구처기(丘處機), 즉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징기스칸께 진언하기를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소이다.”

강진남의 말에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훤칠한 체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은 청년이다.

하지만 나 에센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했으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처지! 가야만 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직접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청년은 제 흥에 겨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청년이 바로 신랑성의 소성주 에센이다.

오이라트의 족장이기도 한 신랑성주 토곤의 장남인 그가 직접 아비의 밀서를 들고 대려장을 찾아온 것이다.

에센은 토곤이 보낸 밀사인 동시에 볼모인 셈이다.

(영걸 소리를 듣는 제 아비보다도 몇 배 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놈이다.)

강진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센이 대려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시진 남짓 전이었지만 강진남이 지난 한 달 동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많은 것은 에센의 성격이 수다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몽고초원을 지배하는 오이라트의 후계자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에센의 혀를 자제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를 숨기고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은 높이 사줄만 하다.)

강진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센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얀을 대동한 부성주는 어제 오후에 귀장에 도착해야만 했소. 부성주 정도 되는 인물이 연락조차 보내오지 못한다는 것은 철령보에 의해 죽거나 잡혔다는 뜻이오. 사실 부성주는 여진족 출신이라 본성 내에 적이 많소. 그 중 어떤 버러지가 부성주의 종적을 극품당과 철령보에 누설했을 것이오.”

다 알고 있고 짐작하는 내용이지만 강진남은 끈기를 갖고 에센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강진남의 인내심이 남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에센이 쏟아내는 말 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다수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성주에게는 완안준(完顔俊), 완안극(完顔極)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소. 본성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을 맡고 있는 그 둘과 부성주를 합쳐서 완안삼절(完顔三絶)이라 부르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철풍사(鐵風社)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소. 철풍사는 극품당에 패해 망명한 여진족 무사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에센이 몸을 조금 문루 밖으로 내밀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 대려장을 빠져나간 기마의 선발대는 이미 십여 리 밖에 있는 요하를 건너고 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기마대는 마치 개미떼처럼 작고 까맣게 보인다.

헌데 배다리를 건넌 개미떼같은 기마대는 철령보가 자리한 서쪽으로 가지 않고 요하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주의 수하들이 남쪽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기마대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일 것 같은가?”

강진남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 에센을 시험하시는구려.”

에센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강진남에게 다시 말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서남진(西南進)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 신랑성에서도 만일 대비하여 그쪽으로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소. 이를 모를 리 없는 독안룡 이탁은 전령(傳令)을 남쪽으로 보내 진황도(秦皇島)에서 배편으로 천진(天津)까지 가게 했을 것이오. 천진에서 북경 근처 무황성까지는 지척지간이니... 이에 장주께서도 철령보쪽이 아니라 진황도 방면으로 추격하라 명령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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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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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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