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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지(絶地)의 수인(囚人)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허튼 수작이시오 교주.”

잠시 동요하는 것같던 제갈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영(娥英)이를 내세워 협박 해봤자 통하지 않소. 혈왕아(血王牙)를 내놓는다 해도 아내와 아영이가 무사할 리 없는데 미쳤다고 교주에게 굴복하겠소?”

귀면지존이 오랜 세월 제갈륜을 이곳에 가둬두고 고문을 해온 목적은 혈왕아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역시 만만치 않군.)

제갈륜의 냉소를 들은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라. 본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네 딸의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뿐이다.”

그러시다니 눈물 나게 고맙구려. 물론 눈알이 뽑힌 이런 몰골이라 눈물을 흘릴 수도 없지만...”

귀면지존의 회유를 제갈륜은 냉소로 받아넘겼다.

네 딸 아영이도 어느덧 열일곱 살이 되어간다. 막 피어나려는 꽃 봉우리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나이지.”

귀면지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딸이 다시 거론되자 제갈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한때 천하오대미인(天下五大美人)중 한명으로 불렸던 어미의 미모를 물려받아 아영이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녀로 자랐다.”

어디 밭만 좋다 뿐이오? 그 밭에 뿌려진 씨도 절세미남의 것이니 예쁠 수밖에...”

귀면지존의 수작에 제갈륜은 냉소로 응대했다.

네가 별호에 옥룡(玉龍)이 들어갈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던 것도 사실이지.”

귀면지존은 느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두 달 후면 아영이도 열일곱 살이 된다. 여자로서 절정의 시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요?”

제갈륜은 눈알이 뽑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귀면지존을 노려보았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귀면지존은 음험하게 웃었다.

부르르! 끼이!

제갈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어 쇠사슬로 하여금 쇳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아영이는 너무 어리고 애처로워서 두고 보기만 했으나... 열일곱 살을 넘기면 어엿한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귀면지존은 귀신 가면 속에서 야비하게 웃었다.

제갈륜은 그자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암시하는지 모를 리 없다.

헌데 제갈륜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흐흐흐! 제발 그러시구려.”

뭐라?”

제갈륜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귀면지존의 눈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복수할 능력이 없고, 또 당금의 하늘아래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죗값을 치르게 해줄 수 있는 인간도 거의 없을 것이오.”

제갈륜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늘이 인간들을 대신해 당신에게 벌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중인데... 당신이 아영이까지 욕보이면 그 죄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질 터! 당연히 하늘이 벌을 내리는 때도 가까워지지 않겠소?”

제갈륜의 어조가 점점 더 열기를 띠며 고조되어갔다.

반면 귀면지존의 눈빛은 차갑게 갈아 앉았다.

아영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소. 난 그저 내가 살아있을 때 당신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오. 크크크!”

끼이! 끼이!

제갈륜은 자신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흔들며 웃었다.

닥쳐라!”

!

그 직후 귀면지존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제갈륜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치치치!

제갈륜의 복부에서 살이 타는 역한 냄새와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제갈륜의 뱃속으로 깊이 파고 든 귀면지존의 손가락들이 화로에서 꺼낸 부젓가락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모든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제갈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떠냐? 창자가 익어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치치치!

귀면지존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제갈륜의 뱃속에 찔러 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잔인하게 웃었다.

... 고맙소 교주. 무료해서 지옥같던 참에 이런 여흥을 마련해주어서...”

제갈륜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여흥?”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교주도 한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혼자 갇혀있어 보시오. 그럼... 무료함이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제갈륜의 그 말에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교주가 자극을 해주니 내 몸뚱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구려.” “고맙고 고맙소이다.”

제갈륜은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껄껄 웃었다.

개소리는 적당히 해라.”

!

귀면지존은 제갈륜의 복부에서 거칠게 손가락을 뽑아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만... 다음번에는 좀 더 흥미진진한 여흥을 준비해서 찾아오겠다.”

배에 난 구멍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제갈륜을 노려보며 귀면지존은 이를 갈았다.

사랑하는 딸년이 눈앞에서 유린당하고 찢겨죽는 데도 지금처럼 태연한 척, 대범한 척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귀면지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자의 모습은 곧 먹물을 뿌려놓은 듯한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허억! 또 한 번... 또 한 번 고비를 넘겼구나.”

귀면지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갈륜은 참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날 찾아와다오 아이야.”

내장이 익어버린 듯한 고통에 떨면서 제갈륜은 이각(二刻; 30) 전쯤에 보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제갈륜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념(思念)을 수용해줄 대상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깊은 산중이라 인적이 드문데다가 간혹 그의 사념을 감지했던 인간들은 놀라 까무라치는 바람에 생각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마침내 제갈륜은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가 있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한()을 남기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

끼이! 끼이!

원한에 사무친 제갈륜이 몸을 떠는 대로 쇠사슬들이 부딪히며 대신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 * *

 

강유의 아버지 강조의 별호는 소요신군(逍遙神君)이다.

보법과 검법으로 명성을 날린 그는 무림칠절의 일인으로 꼽힌다.

 

당금의 무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신주이십팔숙(神州二十八宿)이란 인물들이다.

신주이십팔숙은 다시 일제(一帝), 이비(二秘), 삼기(三奇), 사신(四神),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로 구분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중 칠절에 속한다.

가전의 절기인 소요보법(逍遙步法)과 삼십육식 붕정검법(鵬程劍法)을 구사하는 강조는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덕분에 그는 젊은 나이에 소요신군이라는 비범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강조는 삼십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해버렸다.

사랑하는 아내 냉상영이 은원이 끊이지 않는 강호에서의 삶을 혐오한 탓도 있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제왕성(帝王城)!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을 지배해온 최대 최강의 세력이다.

강조는 바로 그 제왕성과 갈등을 빚었었다.

갈등의 원인은 무림인들을 대하는 제왕성의 폭압적인 처사였다.

제왕성은 자신들에게 맞서거나 반대하는 세력, 인간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제왕성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멸문을 당한 문파나 가문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강조는 몇 번인가 제왕성과 충돌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강조 혼자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세력 제왕성과 맞서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결국 강조는 아내의 애원도 있고 해서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무림을 떠난 강조는 절강성(浙江省)의 명산인 안탕산(雁蕩山)의 깊은 곳에 소요유거(逍遙幽居)라는 띠집을 짓고 유유자적해왔다.

 

* * *

 

해가 제법 높이 솟았다.

소요유거의 마당에서는 강유와 타복이 대련을 하고 있다.

목검(木劒)과 목도(木刀)를 써서 대련하는 두 사람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소요유거를 이루고 있는 세 채의 건물 중 가장 큰 모옥 앞에는 일남일녀가 의자에 앉아서 강유와 타복의 대련을 보고 있다.

강조와 냉상영 부부다.

냉상영에게서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는 타복의 딸 분이가 서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작은 주인의 대련을 보고 있는 분이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하나 들고 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타복이 일방적으로 강유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빗발치듯 날아드는 타복의 목도를 강유는 보법을 펼쳐 피하고 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한가로워 보이는 그 보법이 강씨 집안의 비전절기인 소요보법이다.

스악! !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타복의 목도가 움직일 때마다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일어난다.

타복은 곱사등이임에도 키가 육척에 이른다.

만일 등이 곧게 펴져있다면 칠척을 훌쩍 넘는 장신일 것이다.

타복의 몸은 불구답지 않게 건장하며 특히 양팔은 굵고 길다.

그 강인하고 긴 팔을 써서 휘둘러지는 타복의 목도는 진짜 칼에 못지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 조심하세요 도련님!)

물통에 달린 굵은 끈을 움켜쥔 분이의 양 손 손등에 핏줄이 생긴다.

종횡으로 긋고 찌르고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급소를 노리며 들이닥치는 타복의 목도는 무공을 모르는 분이가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요보법으로 피하고 있지만 강유의 얼굴도 어느덧 땀으로 흠씬 젖어들고 있다.

몇 번인가는 타복의 목도가 강유의 몸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뻔했다.

(아버지도 좀 적당히 하시지...)

그걸 보며 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전인 듯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강유를 공격하는 타복이 못내 미운 분이였다.

부인이 보기에 유의 보법이 어떤 것같소?”

강조는 타복과 대련하는 강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일초무학(一招無學)인 제게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냉상영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냉상영은 정이 그리 많은 성격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 강유에게조차 엄한 것을 넘어 매몰차게 대할 때가 많은 냉상영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냉상영은 종의 딸인 분이는 살갑게 대해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강유가 아니라 분이를 냉상영의 자식으로 여길 정도다.

그래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워 보이는군요. 억지로 꾸며서 보법을 펼치는 것같지는 않고...”

남편의 질문에 너무 성의 없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냉상영이 마지못해 평을 추가했다.

잘 보셨소. 우리 강씨가문의 절기인 소요보법은 소요(逍遙;여유롭게 거님)라는 이름 그대로 자연스러움이 생명이오.”

강조는 타복의 격렬한 공격을 여유있게 피하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무림의 오대보법(五大步法)중 하나이기도 한 소요보법을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가 있소. , 소요보법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유를 무림에 내보내도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오.”

“...”

남편의 말에도 냉상영은 미간을 조금 모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 스슥!

그 즉시 강유와 타복은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소요보법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붕정검법으로 타복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상대해봐라.”

!”

아버지의 말에 강유는 목검을 든 채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먹물을 준비해라.”

강조가 아내 옆쪽에 서있는 분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주인님.”

분이는 즉시 대답하며 강유와 타복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만든 물통을 두 손으로 든 채...

여기 있어요.”

분이가 강유와 타복에게 내미는 물통에는 먹물이 절반 정도 들어있다.

수고한다.”

첨벙!

강유는 목검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며 분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별 말씀을요.”

강유의 미소를 접한 분이의 얼굴이 와락 달아올랐다.

그걸 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강조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지만 냉상영의 미간은 찡그려졌다.

타복도 미간을 조금 모으며 목도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었다.

다시 꺼낸 타복의 목도는 끝 쪽이 한 뼘 정도로 검게 물들었다.

강유도 분이가 들고 있는 물통에서 목검을 뽑았는데 역시 앞쪽의 한 뼘 정도가 검게 변해있었다.

분이 넌 방해되지 않게 멀리 물러나 있어라.”

후두둑!

타복은 목도를 털어서 너무 많이 묻은 먹물을 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

분이가 대답하며 물러서는 사이에 강유도 목검을 흔들어 먹물을 털어내었다.

준비를 마친 강유와 타복은 일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대치했다.

강유는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양팔을 거의 수평으로 벌려 새가 날개를 편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타복은 목도를 상단으로 겨누며 강유와 마주 섰다.

그럼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복.”

양팔을 펼친 강유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몸짓으로 타복에게 다가섰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노복(奴僕)도 전력을 기울일 테니...”

타복도 상단으로 겨눈 목도를 강유에게 겨눈 채 흔들며 마주 다가섰다.

쩍적! !

다음 순간 타복은 호랑이가 앞발로 사냥감을 내려치듯 격렬하게 목도를 내리그었다.

방향과 각도를 각기 달리하며 순간적으로 십여 차례 그어지는 타복의 칼질은 상대가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타복의 독문절기인 오호단문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섯 호랑이가 모든 문을 막아선다는 이름에 어울리는 맹렬한 도법이다.

하지만 강유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스악!

오히려 그는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검을 찌르고 걷어 올렸다.

경쾌한 보법과 함께 펼쳐지는 강유의 검법은 마치 독수리가 날고뛰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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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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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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