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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뤄진 혈겁

 

 

(나 연남천은 팔십 평생 단 한 번도 도전을 회피해 본 적이 없다. 비록 저 어리석은 자들이 남의 꾐에 빠져 도전해 오기는 했으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서늘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밖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는 나 연남천과 함께 이곳 고독애에 뼈를 묻게 되리라! 비록 무형지독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갈 힘은 남아 있으니...!)

고독마야는 서탁 위로 손을 뻗어 혈마대장경을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저주받은 마물들부터 없애야 하리라. 못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크나 큰 화근이 될 테니...!)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혈마대장경에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천마공(逆天魔功)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비록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흡혈마조가 남긴 혈마대장경상의 무공도 고독마야의 일신 절기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혈마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마공들의 잔혹하고 신랄한 면은 고독마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해서 고독마야는 죽기 전에 아예 이 화근덩어리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흡혈마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비록 저주받을 마공이긴 해도 필생의 성취라고 남겼는데 없애 버려야 하니...”

고독마야는 고소를 흘리며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마대장경을 태워버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우우!”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고독애 아래에서 들려왔다. 걸걸하기는 하지만 그 장소성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막 혈마대장경을 재로 만들어 버리려던 고독마야는 흠칫하며 삼매진화의 운용을 멈추었다.

쐐애애액!

그 직후 고독애 측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한줄기 흐릿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하나같이 천하를 위진 시키고 있는 고수들인 군웅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전모 냉약빙이다!”

막아랏!”

고독헌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빠른 경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명뿐임을 안 때문이다.

멈춰라 전모!”

못 들어간다!”

파팟! 쐐애액!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급급히 날아올라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쏴아아아!

고독애 측면의 절벽을 날아오른 인영은 자신을 막아서려는 군웅들의 머리 위를 한 걸음에 뛰어넘어 고독헌 쪽으로 날아갔다.

훤칠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을 지닌 그 인영의 이같은 가공할 경신술은 이곳에 운집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닭 쫓던 개처럼 만들어버렸다.

잡아랏! 혈마대장경이 전모의 손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 서랏!”

쐐애액! 휘익!

일차 저지에 실패한 군웅들은 저마다 고함을 터트리며 고독헌 쪽으로 날아가는 인영의 뒤를 쫓아갔다.

절벽을 날아오른 후 일거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날아 넘은 여인은 다름 아닌 전모 냉약빙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같은 경이적인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다.

죽고 싶은 작자들은 와라!”

단번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독헌 앞에 내려선 냉약빙은 빙글 돌아서며 군웅들을 향해 사나운 일갈을 터뜨렸다.

피핑!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검붉은 구슬 하나가 추적해오는 군웅들을 향해 던져졌다.

(저것은...!)

원래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성신검황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냉약빙이 던져낸 검붉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피해라! 굉천벽력탄이다!”

유성신검황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한걸음 늦고 말았다.

콰르릉! 콰콰쾅!

수십 개의 천둥이 일제히 작렬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콰아아아!

그와 함께 고독애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면서 시뻘건 화염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수십 장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일거에 수십 명의 군웅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굉천벽력탄이 터진 자리에는 깊이 삼장, 너비 십여 장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주위로 터지고 그슬린 인간의 육신들이 널려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벽력당(霹靂堂)의 화기를 지니고 있다니...!”

히익!”

몸을 날린 게 늦은 덕분에 살아난 군웅들은 사색이 되어 고독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놀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냉약빙의 두 눈은 싸늘한 한광을 토해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경거망동해도 좋다!”

칠척 가까운 거구로 고독헌 입구를 완전히 가린 채 우뚝 선 냉약빙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몇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굉천벽력탄이었다.

냉약빙의 수중에 들린 굉천벽력탄을 본 독천존과 유령마제의 안색이 낭패로 물들었다.

으득! 저 계집이 산통을 다 깨는군!”

독천존과 유령마제도 일세를 풍미하는 고수들이긴 하지만 굉천벽력탄의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냉약빙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내최강의 경공술을 지니고 있다. 만일 냉약빙이 자신들을 폭사(爆死)시킬 작정을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냉약빙이 번개가 치는 듯한 빠르기로 달려들어 던지는 굉천벽력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천존과 유령마제가 낭패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명심해라! 고독헌에 접근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굉천벽력탄을 안겨줄 것이다!”

냉약빙은 군웅들에게 경고를 남기고는 거구를 홱 돌려 고독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두가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내의 그 누구도 냉약빙의 가슴 섶이 유난히 불록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한 걸음 늦었다 약빙아!”

고독마야는 고독헌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약빙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 지금 이 순간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냉약빙이야말로 고독마야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음을 주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親姻)이기 때문이다.

먼 친척 사이인 두 사람은 비록 조손(祖孫) 사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이좋은 오빠고 누이동생이었다.

게다가 고독마야가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 유일한 존재가 냉약빙이다. , 고독마야에게 냉약빙은 누이동생일 뿐 아니라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라버니...!”

칠척 거구의 냉약빙이 들어서자 그리 넓지 않은 고독헌 안이 꽉 차 보인다.

냉약빙도 본래는 평범한 계집아이였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같은 어마어마한 거구가 된 데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냉약빙은 어린 시절 우연히 거령삼왕(巨靈蔘王)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거령삼왕은 산삼의 일종으로 기사회생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약효가 지나쳐서 복용한 사람의 체격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거령(巨靈)이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거령삼왕을 복용한 덕분에 냉약빙은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이르는 막강한 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여자임에도 칠척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독마야는 냉약빙의 막강한 내공과 엄청난 체격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경신술을 가르쳤고 그 결과 냉약빙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인물이 되었다.

 

, 중독당하셨군요 오라버니...!”

고독헌 안으로 들어선 직후 냉약빙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마야가 지독한 극독에 중독된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득,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래음에게서 해약을 빼앗아오겠어요!”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며 고독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오라비를...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냐 약빙아?”

하지만 고독마야의 나직한 한 마디 말에 냉약빙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고독마야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크흐윽, 오라버니...!”

냉약빙은 분노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돌림병으로 일가 피붙이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 고독마야만이 유일한 친인이다.

헌데 그 고독마야마저 지금 중독당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울지 마라 약빙아! 인간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고독마야는 오열하는 냉약빙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냉약빙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한 정감이 담겨져 있었다.

하여간 잘 왔다. 저 어리석은 작자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이제 네게 그것을 맡기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쓰레기들과 동귀어진하실 작정인가요 오라버니?”

하지만 냉약빙은 깜짝 놀라며 고개들 들어 고독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들이라니...! 그래도 저자들은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들인 대단한 고수들 아니냐?”

고독마야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된 자들을 모조리 동반하여 저 세상에 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냉약빙은 고독마야의 그 말에 질겁했다.

, 그래서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나 고독마야의 뜻은 이미 확고해진 상태였다.

비록 너라고 해도 나를 막지는 못 한다 약빙아!”

부드러운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말하는 고독마야를 올려다보며 냉약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소매에게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만한 수단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차서 장담했지만 고독마야는 믿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고독마야는 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내포한 미소였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소매의 무기예요!”

냉약빙이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가슴 섶을 좌우로 벌려보였다.

“...!”

순간 고독마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몸으로 한 차례 세찬 경련이 스쳐가기까지 했다.

냉약빙의 헐렁한 겉옷 안쪽에는 머리를 흰 천 조각으로 동여맨 사내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고독마야는 숨을 죽였다.

(천골(天骨)이다!)

한눈에 사내아이가 세상에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사내아이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팔십 평생 이룩한 성취가 절전(絶傳)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고독마야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을 때 냉약빙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사내아이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교활한 아이구나 약빙아!”

고독마야의 창백한 안색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깡마른 두 손이 어느새 냉약빙이 내미는 사내아이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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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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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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