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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한 예언

 

 

"삼낭이는... 우리 도룡곡 등씨일족의 유일한 후손이니... 잘 돌봐주기 바란다."

천면음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이동생께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巨人)으로부터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을 보살펴주겠다 약속을 들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구나."

(내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이 될 것이다?)

천면음마의 뜬금없는 칭찬에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예지력(叡智力)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 괜한 소리라 여기지 말거라.”

고검추의 속내를 알아차린 천면음마가 고검추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아마도...”

말을 잇던 천면음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앞날이 보인 것일까?)

고검추는 천면음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내 죄다.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대신 치르겠구나.”

주르르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이 관련된 앞날을 본 모양인데... 대체 세 모녀가 무슨 일을 겪기에 저토록 비탄에 빠진 것일까?)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면음마가 앞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하물며 자신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중 등삼낭과 관련된 일이니...

맹세... 맹세를 해다오.”

천면음마는 눈물로 물든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맹세를 해주길 원하십니까?”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진 천면음마의 말이 고검추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해다오.”

천면음마는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만일 손이 몸에 붙어있었다면 고검추의 옷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고검추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양모 당혜선이 투신해버린 지금 등삼낭과 그녀의 딸들은 자신에게는 거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검추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찬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낭 아주머니는 제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또 옥경이와 옥령이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 피붙이인 듯 지켜주겠습니다.”

고검추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천면음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천면음마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지신명을 걸고... 삼낭이 모녀를 네가 거둬서 보살펴주겠다고 맹세해다오.”

필사적인 표정이 된 천면음마는 고검추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드리겠습니다. 삼낭 아주머니와 옥경이, 옥령이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보살펴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세 모녀를 거둬주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면음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내 정체는 숨겨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천면음마의 당부에 고검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공노할 색마인 천면음마가 자신들의 오라버니이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등삼낭 모녀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져보아라. 네게 줄 물건이 있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돌려 토지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겉옷을 돌아보았다.

그자는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기 전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겉옷을 벗어놨었다.

고검추는 천면음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겉옷을 끌어당겨 살펴보았다.

겉옷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탐화비록(貪花秘錄)

-도룡무보(屠龍武譜)

 

두 권의 비급 중 도룡무보는 도룡곡의 비전 비급이다.

도룡무보 안에는 하마터면 고검추를 죽일 뻔한 도룡삼첩장 등 도룡곡 등씨일족의 패도적인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구식으로 이루어진 도룡도법(屠龍刀法)이었다.

도룡구식(屠龍九式)이라고도 불리는 그 도법은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신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에 도룡구식을 완전히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룡구식을 완벽히 시전할 수 있다면 그는 도제(刀帝)라 불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탐화비록은 천면음마 등천하가 십여 년 전에 얻은 비급이다.

탐화비록을 남긴 인물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마인들로 인정받는 구마(九魔) 중 한 명이었다.

 

-화마(花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숱한 여자들을 농락한 전설적인 색마다.

그 때문에 화마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탐화색마(貪花色魔)라는 혐오스러운 별호로 더 자주 불린다.

화마는 평생 삼만 명 이상의 여자를 농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탁월한 재주덕분이었다.

먼저 화마는 절묘한 역용술을 지녔다.

그자의 역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한 걸음 옮길 때 세 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화마를 무슨 재주로 잡아서 죄를 묻는단 말인가?

변화막측한 역용술 외에도 화마는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경신술로만 따진다면 화마는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정도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을 주축으로 한 중원 무림에 공격당해 멸망했다.

다만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는 그 혈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등천하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했으며 다행히 도룡곡 비전의 도룡무보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등천하의 자질이 평범했다는 점이었다.

도룡무보에 수록된 절기들을 절정까지 연마하면 능히 독보천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뛰어나지 못한 등천하는 이십여 년을 고련했음에도 도룡무보 상의 절기를 채 삼할도 연성하지 못했다.

그 정도 성취로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등천하는 무공 수련을 포기한 채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그는 운중산(雲中山)의 어느 계곡에서 화마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마의 시신에서 탐화비록을 얻은 등천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비로소 무공이 약하더라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수단이란 것이 원수들의 아내와 딸, 여제자들을 겁탈하는 것이었다.

몇 년을 고련한 등천하는 마침내 화마의 수법을 대충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등천하는 자신도 모르게 화마의 음탕한 성격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자를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등천하는 강호의 아녀자들을 짓밟는 제이의 화마, 천면음마가 된 것이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탐화비록에 수록되어... 있다."

말을 잇는 천면음마 등천하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견디기... 힘들구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고검추는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 병아리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비록 상대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때문이지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을 보니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일각이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이 분을 위하는 길이다.)

고검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면음마의 심장 부위에 자신을 손바닥을 붙였다.

"... 고맙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지잉!

고검추는 얼굴을 돌리며 태을강기의 경기를 천면음마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퍼득!

사지가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둥이가 한 차례 세차게 경련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을강기의 강력한 잠경이 천면음마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이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고검추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면음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오공으로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는 천면음마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천면음마라는 이름으로 전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가엾은 인물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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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원의 손길

 

 

-흑혈맹호단(黑血猛虎團)!

 

나유라가 오이라트부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길러낸 달단부의 정예들이다.

달단부 최고의 용사들인 그들은 나유라의 총애 속에 영약과 무공비급을 마음껏 취해 수련해왔으며 그 결과 하나같이 일당백의 고수가 되었다.

나유라의 친위대격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은 그녀의 명령일하에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이었다.

나유라는 오이라트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을 수시로 오이라트부에 잠입시켜왔었다.

그 임무는 실로 위험한 것이라 열 명을 보내면 겨우 다섯 명이 살아 돌아올까 말까할 정도였다.

알몸으로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오이라트부 땅에 잠입했다가 실종된 흑혈맹호단 용사들 중 일부였다.

옳구나! 이런 때 쓸려고 저놈들을 살려두었었구나!”

철목풍이 하후진진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알몸으로 끌려온 것을 보는 순간 하후진진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진진아! ......!”

나유라도 바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녀 역시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크으! 용서하십시오 여왕님!”

... 속하들이 무능하여 이런 수모를 당하시게 했습니다.”

나유라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끌려온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분루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늘같은 자신들의 여왕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죄스러워 필사적으로 남성의 상징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들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지만 지금은 내공이 전폐되어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흐흐흐! 정말 기막힌 계획이다!”

철목풍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흑혈맹호단의 청년들과 나유라를 번갈아보았다.

호호호! 아버님은 제게 감사해야만 하실 거예요. 저 때문에 머잖아 달단부가 저절로 아버님의 손아귀에 굴러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하후진진도 청년들과 나유라를 보며 교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이 암캐의 부하들이 이 근처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때 그 자들은 보게 되겠죠. 평소 그렇게 도도하고 잘난 척했던 자신들의 여왕마마께서 스스로 기른 흑혈맹호단의 젊은 것들과 재미를 보며 교성을 질러대는 꼴을...!”

...그런!”

... 이 간악한...!”

듣고 있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진저리를 쳤다. 그들도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으하하! 절묘하구나 절묘해! 결국 여왕마마께서는 달단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흑혈맹호단을 만든 셈이 될 테니...!”

철목풍은 득의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 자는 분노와 충격으로 치를 떨고 있는 나유라를 쓸어 보며 느물거렸다.

여왕의 그 기막힌 치태를 보면 당신 부하들은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놈에게까지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소?”

철목풍의 그 말을 들은 나유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달단부는 사분오열 될 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달단부는 내 것이 되겠지.”

... 이 악독한 인간들...!”

나유라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철목풍의 말대로였다.

현재의 달단부는 나유라의 권위에 의지하여 결속이 유지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젊은 용사들과 야합을 하는 현장이 보여지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끝장일 것이다.

나유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테고 달단부의 위태롭던 결속은 일거에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분열된 달단부를 오이라트부가 집어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나유라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절박해진 나유라는 급기야 하후진진에게 애원까지 했다.

제발! 진진아! 이러지 말거라. 그래도 너 역시 달단부의 사람이 아니냐?”

물론 소용은 없었다.

내가 달단부의 사람이라고? 웃기지 마라! 내 아버지가 오이라트부의 용사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하후진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년의 남편은 가증스럽게도 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겁탈했다! 호호호! 이제 남편이 지은 죄의 대가까지도 나유라, 네년이 대신 치루어야만 한다!”

하후진진의 악에 바친 교갈에 나유라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나유라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날 깨끗하게 죽여 다오! 그래도 한 때 달단부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녀는 이미 대식국의 공주로서, 또 달단일족의 여왕으로서의 긍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아들이 이어받을 달단부가 사분오열되어 결국 오이라트부에 병탄당하는 일을 방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유라의 필사적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하후진진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작해라!!”

하후진진은 냉혹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을 끌고 온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각기 하나씩의 유리병을 꺼내들고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 죽어버리자 형제들!”

만수무강하십시오 여왕님!”

사태를 깨달은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비통하게 외치며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죽어버려야만 여신같은 존재인 나유라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한걸음 늦고 말았다.

어림없는 짓이지!”

파파팟!

청년들의 그같은 반응을 예견하고 있던 철목풍이 벼락같이 지풍(指風)을 날려 그들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린 것이다.

!”

크흑!”

청년들은 아혈이 짚혀 입을 딱 벌렸다.

어리석은 놈들이로군! 재미를 보게 해주겠다는데도 뒈지겠다고 날뛰다니...!”

클클! 그러게 말일세!”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음험하게 웃으며 다섯 청년의 벌어진 입에 유리병에 든 액체를 쏟아 부었다.

꺼억!” “끄윽!”

강제로 유리병의 액체를 들이킨 청년들의 몸에서는 즉시 반응이 나타났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온몸의 혈맥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애쓰던 그들의 남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용틀임을 해대었다.

으으으!” “크흐흐!”

어느덧 그들의 비통함으로 젖어있던 눈동자도 발정 난 짐승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번들거린다.

(흐윽!)

청년들의 야수같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나유라는 절망감으로 전율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청년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나유라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만이 자신들의 몸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식혀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호! 풀어줘라!”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하후진진이 다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커렁! 철컹!

그러자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막혔던 혈도와 팔 다리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크헝!” “크으으으!”

쇠사슬에서 풀려난 청년들은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일제히 나유라를 덮쳐갔다.

... 안돼! 정신차려라! 아악!”

나유라가 다급히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 찌직!

나유라를 덮친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옷을 찢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안돼! 안된다!”

나유라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인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옷이 야수로 변한 청년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가면서 나유라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허어... 기막히군!”

발가벗겨진 나유라의 모습을 본 철목풍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드러난 나유라의 나신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유라를 발가벗긴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라! 제발... 제발 정신 차려라!”

청년들에게 깔린 나유라는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울부짖음조차도 이내 청년들의 거친 숨소리에 묻혀버렸다.

달단부의 수백만 신민들이 여신처럼 떠받들던 나유라의 육체가 욕정에 눈이 뒤집힌 젊은 숫컷들의 손과 입에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악!”

그리하여 어느 순간 나유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축 늘어졌다.

마침내 그녀의 육체는 젊은 숫컷들 중 한명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호호! 아쉽구나. 네년의 이런 모습을 달단부의 모든 사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하후진진은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청년들에게 유린당하는 무참한 모습을 장면을 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은 그런 하후진진 옆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일 이검한에게 다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 자신이 먼저 나유라를 능욕했을 것이다.

헌데 그 직후였다.

!”

나유라의 육체를 가장 먼저 정복한 채 몸부림치던 청년이 돌연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푸학!

이어 청년의 목이 삐끗하더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으며 잘려진 목에서 피의 분수가 치솟아 나유라의 뽀얀 알몸 위로 흩뿌려진다.

터어엉!

직후 새파랗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나유라가 누워있는 바닥 옆의 바위에 반 넘게 박혔다.

칼날이 너무 새파래 거의 반투명하게까지 보이는 그 보도(寶刀)가 어디선가 날아와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한 청년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흐윽!”

돌연한 사태에 하후진진은 진저리를 치며 주춤 물러섯다.

... 네놈은!”

헌데 하후진진이 어찌된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쪽에서 철목풍의 경악에 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후진진의 시야로 현장에 있던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한쪽 모래 언덕 너머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의 손에 들린 칼날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 번쩍 광채를 일으킨다.

콰콰쾅! 퍼펑!

케엑!” “크억!”

직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여러 번의 단말마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죽일 놈들!”

쐐애애액!

아연실색하는 하후진진의 눈으로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한 명의 소년이 모래 언덕 너머에서 질풍같이 치솟아 올라 좌측으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타는 듯 붉은 피풍의를 몸에 두른 건장한 체격의 소년인데 그 소년이 덮쳐가는 쪽에는 새파랗게 질린 철목풍이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물론 이검한이었다.

그가 마침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 막아랏!”

철목풍은 좌측의 모래 언덕 쪽으로 달아나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미 한차례 충돌에서 이검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맛본 그자는 이검한이 나타나는 즉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웃!”

이놈! 죽어랏!”

화라락! 쏴아아아!

그 직후 철목풍이 달아나는 쪽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라 이검한을 짓쳐갔다.

오이라트부 최강의 정예들인 그들은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몽고의 대초원을 주유하면서 단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다.

바득! 주인을 잘못 만난 죄다!”

이검한은 살기 어린 일갈을 내지르며 벼락같이 양손을 동시에 흔들어냈다.

쩌어어엉! 꽈르르릉!

그러자 그의 왼손에는 톱날같은 날이 선 낭아신검이 들려 허공을 그었고, 오른손 장심으로부터는 시뻘건 섬광이 일어났다.

크아악!”

케에에엑!”

다음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수십 명이 일거에 몰살당하며 선혈이 난비했고 잘려진 육신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살이 타들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한다.

 

-낭아살륙검법(狼牙殺戮劒法)!

-화염마강(火焰魔罡)!

 

천붕랑왕과 마화존자의 무공이 천여 년 만에 시전된 것이다.

서역 무림사상 최강자들이라는 서역사천왕의 절기를 오이라트부의 졸개들 따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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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저녁 무렵. 금릉 교외의 강가. 청풍이 일하던 도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경치가 아주 좋은 강가에 정자가 한 채 서있다. 정자 근처에는 백마가 풀을 뜯고 있고. 정자에는 벽소소가 걸터앉아 멀리를 보고 있다.

정자 크로즈 업. 정자에 앉아있는 게 벽소소임을 보여주고

정자 근처의 관목 더미와 바위 뒤에 숨어있는 네 명의 죽립인들.

죽립인1; <벌써 반 시진 가까이 저러고 계시는군.> 벽소소를 보며 동료들에게 전음으로 말하고

죽립인2; <누굴 만나러 온 것같진 않네.>

죽립인3; <혼사와 관련하여 장주님께 대들다가 꾸중을 들었잖은가?> <아마 화를 풀려고 여기까지 말을 달려온 모양일세.>

죽립인4; <결국 이번에도 허탕을 친 셈인가?> 혀를 차고. 헌데

정자 난간에 걸터앉은 벽소소.

끼릭! ! 다른 곳을 보면서 손톱으로는 정자 난간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다. 쐐기문자 같은 기호들이다. 이윽고

벽소소; [됐어!] 발딱 일어나고

벽소소; [화도 대충 풀렸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 짝짝! 박수치고

풀을 뜯던 말이 고개 들며 돌아보고

정자에서 나오는 벽소소

두두두 달려오는 말

벽소소; [집으로 돌아가자.] ! 말에 뛰어오르고

두두두두! 말을 몰아 달려가는 벽소소. 그러자

! 스윽! 네 명의 죽립인들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몸을 날리고

벽소소; (바보들...) 말 달려가며 곁눈질로 뒤를 보고. 멀리서 날아오는 죽립인들

벽소소; (백날 날 쫓아다녀봐. 내가 꼬리를 잡히나.) 냉소하고

벽소소; (그나저나 사()공자님을 만나면 무어라 말해야할지 막막하다.) 한숨 쉬고

벽소소; (사공자와 백년가약을 약속했는데 무림맹의 청혼을 받았으니...)

벽소소; (사공자가 허락만 한다면 야반도주라도 하고 말거야!) 결심하고

두두두! 곧 멀어지는 벽소소를 태운 말. 죽립인들도 멀어지고. 헌데

 

스스스! 벽소소가 앉아있던 정자 안에 안개같은 사람 형상이 서리더니

!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아주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교활한 인상에 허여멀끔한 인상의 청년이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기생오라비 같은 인상. 이자의 이름은 사우. 별호는 분면랑군. 마교의 사대마가중 암흑마가 출신이다.

사우; [...] 부채를 부치며 정자에 서서 멀리 멀어지는 벽소소를 보고. 이어

벽소소가 걸터앉아있었던 정자 난간으로 가는 사우

난간에 새겨진 기호를 보는 사우

사우; [내일 새벽, 이곳에서라...] 기호를 해독하며 음산하게 웃고

사우; [흐흐흐! 벽가년이 내 섭심술(攝心術)에 제대로 빠졌군. 무림맹 소맹주의 청혼을 받고도 여전히 이렇게 매달리는 걸 보면...] 산하게 웃고.

<벽소소가 위진천에게 시집을 가든 말든 최후의 승자는 본공자가 될 것이다. 계집이란 동물은 첫 사내를 결코 잊지 못하는 법이니...> 흐흐흐! 웃는 사람 사우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24>

<-황금전장> 다시 황금전장. 이제 저녁 무렵이 되었다. 해가 지려 하고

길고 큰 주방 건물. 하녀들이 건물 쪽을 힐끔거리고.

주방 건물 내부. 요리사들이 모두 모여 주대육의 말을 듣고 있다. 주대육 뒤에는 청풍이 서있고

주대육; [내일부터 이청풍이 정육(精肉)을 담당할 것이다.]

주대육; [다만 고기 다루는 솜씨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도 요리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주대육; [고기 요리를 맡은 놈들은 용도에 맞게 구체적으로 고기의 정형을 이청풍에게 요구하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총주방장님!] 고개 숙이며 대답하는 요리사들

주대육; [이청풍에게 질문 있으면 지금해라.] 말하자

요리사1이 손을 든다.

주대육; [철두(鐵頭)! 말해라.] 끄덕

요리사1; [총주방장님의 안목을 믿지만...] [저희들이 보기에 너무 어린 친구입니다.] 조심스럽게

주대육; [솜씨를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냐?]

요리사1; [그렇습니다.] 눈치 보며

주대육;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육회용 고기를 두 덩이 가져와라.] 창고 건물과 가까운 맨 끝의 요리사에게 말하고.

[!] 대답하고 창고로 달려가는 그놈

주대육; [철두! 너는 평소 고기 다루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었다.] 요리사1에게

요리사1; [그렇습니다.]

주대육; [그럼 이청풍과 솜씨를 겨뤄봐라.] 창고쪽을 돌아보고

창고로 달려갔던 요리사가 길죽한 고기 두 덩이를 두 개의 접시에 각기 담아 들고 온다. 뛰듯이

[가져왔습니다.] 접시를 탁자에 놓는 요리사. 탁자에는 도마와 칼도 준비되어 있다.

주대육; [이청풍! 철두!] [저 고기들로 각자 육회를 떠라.]

[!] [맡겨주십시오.] 대답하며 탁자로 가는 청풍과 요리사1 두 사람. 다른 요리사들은 탁자를 에워싸고

길쭉한 고기를 접시에서 도마로 옮기는 두 사람.

청풍을 힐끔 보며 사시미용 칼을 하나 집어드는 요리사1. 하지만

청풍은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단도를 꺼내고

칼집에서 뽑은 청풍의 단도. 짧고 무디어 보인다.

<저렇게 짧고 무딘 칼로 육회를 뜨겠다고?> <육회의 맛은 얼마나 육질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뜨는가에 달렸는데...> 요리사들 어이없는 표정.

주대육은 웃으며 보고 있고

요리사1; (내가 이겼다.) 히죽 웃으며 고기를 얇게 썰기 시작하고

요리사1; (저렇게 조잡한 칼로 뜬 육회에 내 육회가 질 리 없다.) 슥슥! 고기를 얇게 자르고. 헌데

! ! 청풍은 무심하지만 아주 빠르게 칼을 움직인다.

[허어!] [저럴 수가!] [칼이 안보일 정도로 빠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요리사들 경악하고.

요리사1; [!] 돌아보다가 경악하고

사사삭! 종이같이 얇게 고기를 써는 청풍. 이미 거의 다 썰었다.

미소 지으며 끄덕이는 주대육

요리사1; (말도 안되는...) 슥슥! 식은땀 흘리면서도 칼질을 하고

청풍; [끝났습니다.] 먼저 칼을 멈추며 물러서고

요리사1; [... 저도 끝났습니다.] 비지땀 흘리며 마지막 칼질을 하고

도마 위에 얹혀진 두 개의 육회.

주대육; [모두 한 점씩 맛을 봐라.]

[!] 대답하며 다가오는 요리사들. 모두 젓가락을 하나씩 들었다.

먼저 요리사1의 것을 먹고 청풍의 것을 뒤에 먹는 모습들

요리사2; [얇으면서도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았구만.] 일행중 가장 나이가 많은 요리사가 젓가락으로 요리사1의 고기 조각을 집어 들어 살피고

요리사2; [맛은 어떨까?] 입에 넣고.

긴장하며 보는 요리사1

요리사2; [! 역시 훌륭해. 육즙이 농후하게 느껴지는구만.] 끄덕

안도하는 요리사1

요리사2; [그럼 이 친구 것도 먹어볼까?] 청풍 앞의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요리사2; [얇기와 형태는 철두와 막상막하로구만.] 집어든 고기 살피고

요리사2; [결국 맛에서 승부가 나겠지.] 고기를 입에 넣고. 직후

[!] 눈 부릅뜨는 요리사2

주대육; [어떠냐?] 웃고.

요리사2; [이건... 이건...] 우물대며 흥분하고

요리사2; [마치 눈인 것처럼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집니다.] [지금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지미(至味;맛있는 음식)입니다.] 흥분하고

[어디!] [나도 좀 먹어보세.] 우르르 몰려들어 청풍의 육회를 먹는 요리사들. 요리사1은 당황하는데

[... 과장이 아니었구만.] [날고기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기가 막히구만.] 요리사들 감탄하고

요리사1; (저놈의 육회가 그렇게 맛있는 건가?) 불신. 노려보고

주대육; [철두 너도 맛을 봐라. 다른 놈들이 다 먹어치우기 전에...] 웃으며

요리사1; [...] 요리사들 사이로 끼어들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요리사1

요리사1; [!] 눈 부릅

주대육; [소감을 말해봐라.]

요리사1; [이건... 이건...] 우물우물

요리사1; [저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른 요리사들도 끄덕이고

주대육; [이청풍의 칼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해서 고기의 육질에 전혀 손상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육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요리사2; [역시 총주방장님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포권하며 아부하고

요리사2; [이청풍같은 인재를 용케 찾아내셨습니다.] 청풍의 팔을 툭 치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종종 육회 맛도 보주게나.] [정말 대단한 솜씨야.] 몰려들어 청풍과 인사 나누는 요리사들

청풍;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요리사들과 인사 나누며 웃고

주대육; (청풍이 놈 덕분에 황금전장 주방의 명성이 또 올라갈 것이다.) 청풍이 요리사들과 통성명하는 걸 흐뭇하게 보고

<당장 무림맹의 총관 접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게 되었다.> 웃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주대육의 생각 나레이션

 

#25>

여전히 황금전장. 하지만 이제 해가 졌다. 여기저기 등이 내걸리기 시작하고

주방 근처 조용한 곳에서 주대육으로부터 세 명의 인물을 소개 받는 청풍. 주대육 뒤에는 하녀 한명이 쟁반을 들고 있는데 그 위에 두 개의 주머니가 얹혀져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들이다.

주대육; [이분은 우리 황금전장 호원무사들 중 최정예인 황금수라들의 부단장(副團長) 귀견수(鬼見手).] 청풍에게 앞쪽에 서있는 세 명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세명의 인물들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죽립은 쓰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얼굴에 황금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드러나 보인다. <신마유희>에 나온 황금수라들과 같은 모습. 세명의 인물중 중앙에 선 인물의 가면 이마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이자가 황금수라들의 서열이위인 귀견수다.

청풍; [처음 뵙겠습니다.] 포권

세 인물 고개를 조금 까닥.

주대육; [부단장 일행이 함께 가면 단지회의 잡것들이 감히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청풍;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주대육; [감사는 무슨...] 쟁반 들고 있는 하녀쪽으로 돌아서고

주대육; [자네같은 인재를 영입하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 쟁반에서 두 개의 주머니를 집어들고

주대육; [은자를 오백냥 씩 나눠담았다.] 청풍에게 내밀고

주대육; [하나는 아버지의 도박 빚을 감고 다른 하나는 자당에게 드려라.]

청풍; [...] 받고

주대육; [내일 아침에는 도축장에 들렸다가 오도록 하게. 추노대가 말한 좋은 소가 제대로 입하되었는지 확인하고...]

청풍; [내일 뵙겠습니다.] 주머니들을 품속에 넣으며 고개 숙이고

곧 귀견수 일행과 함께 걸어가는 청풍의 뒷모습. 청풍과 귀견수가 나란히 걷고 그 뒤를 두 명의 황금수라들이 따라가는 모습

주대육; (청풍이 저 놈...)

주대육; (아무리 봐도 백정이나 요리사로 인생이 끝날 놈이 아니다.)

주대육; (과연 나중에 어떤 거물이 되어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웃고. 헌데

 

근처 건물 뒤에서 고개 빼꼼 내미는 벽옥령. 여전히 털이 긴 흰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고

황금수라들과 함께 멀어지는 청풍의 모습이 보이고

청풍의 옆모습.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벽옥령

고양이를 안고 몰래 청풍의 뒤를 따라가는 벽옥령. 오가던 하인들과 하녀들은 보고도 못 본 척

 

#26>

여기저기 등이 내 걸리는 황금전장 내부. 하인과 하녀들이 건물 모서리나 담장등에 등을 걸고 있고. 도처에 무사들이 대열을 지어 걸어간다. 송아지만한 개들을 끌고 가는 무사들도 있다. 핏불이나 로트와일러처럼 털이 짧고 근육질의 사납게 생긴 개들이다. 목에는 쇠사슬이 묶여있다. 화면에 나온 건 모두 네 마리다.

개를 끌고 오가던 무사들이 급히 누군가에게 인사하고

청풍이 귀견수 일행과 함께 오고 있다.

청풍; [야간에는 경비가 더 삼엄해지는 모양입니다.] 오가는 무사들과 개들을 보고

귀견수; [본장은 평범한 인간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막대한 재물을 보유하고 있네.] [아마 황실이라 해도 본장의 재력을 능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걸세.]

청풍;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귀견수; [당연히 본장의 재물을 노리는 놈들이 끊이질 않지.] [물론 뜻을 이룬 놈은 단 한명도 없고!] 눈 번득이고

귀견수; [장담하건데 본장의 경비는 천하에서 가장 완벽할 걸세.] [호원무사의 숫자가 천명이 넘을 뿐 아니라 온갖 함정과 기관장치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지.]

귀견수; [멋모르고 본장의 금지구역에 들어간 인간은 시체도 보전하기 어렵다네.]

청풍; [그야말로 금성철벽(金城鐵壁)이로군요.]

귀견수; [당금의 무림을 통틀어도 들키지 않고 본장의 심장부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되지.] 끄덕

청풍; (무서운 분위기와 달리 말이 많은 분이로군.) + [저 개들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사들이 끌고 가는 개들을 보고. 현장에 있는 개들은 모두 네 마리

귀견수; [본장에서 특별히 번식시킨 번견(番犬)들일세.] 함께 개들을 보며

<늑대나 표범과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사나울 뿐 아니라 충성심도 강한 놈들이야.> 침을 질질 흘리며 무사들을 끌고 가는 개들을 배경으로

귀견수; [총주방장님으로부터 향낭(香囊)을 하나 받았겠지?]

청풍; [! 받았습니다.] 작은 향주머니를 들어 보이고

귀견수; [그걸 늘 몸에 지니고 다니게.] [저놈들은 향주머니를 지니지 않은 인간은 무조건 공격하도록 훈련받았으니...] 개들을 보며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귀견수; [일단 개들은 해가 진 후에야 풀어놓지만...] + [!] 말하다가 눈 번뜩이고

크르! ! 개들이 갑자기 청풍과 귀견수 일행이 온 쪽을 돌아본다.

[워워!] [이놈들이 왜 이러지?] [진정해!] 개들을 끌고 가다가 기겁하는 무사들

크릉! 크르르! 날뛰며 청풍과 귀견수가 온 쪽으로 달려가려는 개들

청풍; (개들이 뭔가에 흥분했다.) 역시 돌아보고. 그러다가

[!] 눈 번득

청풍과 귀견수가 지나온 쪽의 건물 뒤에 숨어 있다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는 벽옥령. 품에는 털이 긴 흰 고양이를 안고 있고. 거리는 30미터쯤

청풍; (저 계집아이가 원인이다.) 깨닫고

벽옥령이 안고 있는 고양이 크로즈 업

청풍; (정확히는 계집아이가 안고 있는 고양이가 개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는 원래 앙숙이니...) 생각할 때

크왕! 크릉! ! ! 개들의 목줄이 끊어지거나 목줄을 놓치는 무사들. [!] [안돼!] 비명 지르는 무사들

크왕! 크릉! 벽옥령을 향해 돌진하는 개들. [!] [!] [꺄악!] [엄마야!] 오가던 무사들과 하인, 하녀들 기겁하며 피하고

개들이 달려가는 앞쪽, 숨어있던 건물 뒤에서 나와 뒷걸음질 치는 겁에 질린 벽옥령. 여전히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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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무림칠절(武林七絶) (1)

 

 

우워어어어어!”

길고 웅혼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다. 그가 이리로 오고 있다.”

임청우는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빠르게 달리는 황의소녀의 향긋한 체향에 젖어 있다가 기겁하며 외쳤다.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멀리서 시작되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났다.

장차 금포염왕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되는 기린아 검주 유소기!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검법은, 검법은 배웠어?”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를 밟으며 달리던 황의소녀가 임청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대답이 없었다.

속은 것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든 황의소녀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그럼 뭘 배웠어?”

아직 아무 것도...”

하아...”

임청우의 대답이 황의소녀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

그 사이에 오십여 장 밖에 이른 유소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휘익!

황의소녀는 땅으로 뛰어내려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비정 냉혹한 성격의 유소기는 아마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드드드드!

한데 갑자기 숲이 흔들렸다.

콰콰콰쾅!

앞쪽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두 사람을 향해 쓰러졌다. 누군가 숲 속의 거목들을 일도양단하여 두 사람의 행로를 저지한 것이다.

!”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황의소녀는 몸을 굴려 근처의 바위 뒤로 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지만 피할 곳이라고는 그 바위뿐이었다.

쿠르르릉! 콰드드드!

거대한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지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엎드려!”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한다고 피한 바위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허리를 힘껏 채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직후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황의소녀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임청우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임청우는 키가 반자 정도 작아졌다.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임청우 자신도 몰랐다.

도망가!”

나무를 떠받친 채 임청우가 소리쳤다.

! !

임청우가 떠받치고 있는 나무 위로 또 다른 나무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임청우의 허리가 휘청이고 키는 점점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드러난 팔목과 얼굴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황의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청우는 사방에서 넘어온 나무들을 하나의 나무 위에 받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들보나 다름이 없었다.

임청우가 쓰러진다면 황의소녀는 물론이고 임청우 자신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바위 옆이기는 하지만 크지 않은 그 바위도 아마 박살나버릴 것이다.

황의소녀도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임청우의 곁에 서서 나무를 떠받쳤다.

어서 빠져나가!”

임청우는 비지땀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황의소녀는 힘겨운 얼굴로 살풋 웃어보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받쳤다.

임청우의 부담이 약간 줄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대책도 될 수 없었다.

황의소녀 역시 자신들이 결국에는 깔려 죽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군(刀君),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을 놓칠 뻔했네.”

나무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동산 밖에서 검주 유소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낭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실린 목소리다.

 

휘익!

유소기는 사방에서 가운데를 향해 촘촘히 쓰러져 거대한 노적(露積)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거목들 위에 내려섰다.

파라라랏!

그의 몸에 걸쳐진 청삼이 펄럭이며 바람소리를 냈다.

유소기의 십여 장 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거목 위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폭이 넓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코, 입과 귀, 모두가 큼직큼직한 사람이다. 완강한 턱은 그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 백의의 도객이 칠절 중 검주 유소기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가공할 고수 도군 지청천(池靑天), 바로 그였다.

도군은 유소기의 인사말에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달아나는 앞쪽의 나무들을 베어 가로막은 것은 바로 도군이었다.

그놈이 어수룩한 겉보기완 달리 아주 교활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굴리려 해도 굴릴 수가 없겠군.”

유소기는 쓰러진 나무들이 층층이 겹쳐 이룬 노적 형상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웃었다.

추릿!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소기는 검을 뽑았다.

백금검이 무지개같은 흰빛을 뿜었고,

쿠르르르! 콰콰쾅!

아름드리나무들이 토막토막 베어지며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쪽으로 굴러갔다.

촤아아아!

작은 나뭇가지들과 잎들은 유소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

도망쳤구나!”

갑자기 유소기의 표정이 변했다.

“...!”

좀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군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거목에 부딪혀 박살나버린 바위 곁에는 두 쌍의 발이 깊이 박혔던 흔적만 있을 뿐,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시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휘익!

유소기는 이를 부득 갈며 몸을 날렸다.

거목들이 토막 나서 굴러가는 쪽이었다.

도군도 말없이 몸을 날렸다.

 

퉁퉁퉁퉁!

수레바퀴 같이 굴러가는 거목의 잘린 토막들은 다른 나무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바위 위로 튀기도 하면서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황의소녀와 임청우는 그 나무토막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로 굵은 나무속을 파내고 그 안쪽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라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만한 구멍을 파내기엔 충분했다.

임청우가 두 손으로 나무를 바치고 있는 사이에 황의소녀는 혈도를 써서 재빨리 속을 파냈었다.

거대한 청동향로도 간단히 베었던 혈도다.

청동에 비하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나무를 파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압사(壓死)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헌데 유소기는 나무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잘라서 굴려버렸었다.

그 바람에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숨은 나무토막도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소기의 검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베었다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두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황의소녀가 나무 구멍 안쪽에 숨고 임청우는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입구를 등지고 서서 버티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 상태로 나무토막은 연신 회전하며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

아차하면 임청우의 몸이 통나무 밖으로 튕겨나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임청우는 팔과 다리에 힘을 한껏 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팍팍팍!

백광이 번득이며 통나무 토막들이 둘로 갈라졌다. 유소기가 비탈을 따라 날아 내려가면서 한꺼번에 십여 개씩의 통나무 토막들을 베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잎이나 가는 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다가 돌풍을 타고 올라갔을 리는 없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이 통나무 속에 숨었으리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백 여 개의 통나무가 다시 둘로 나눠지며 빠르게 비탈을 굴렀다.

통통통!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옆으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가 짧아진 통나무들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숨어있는 통나무가 베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은 머리위로 비스듬히 받치고 혈도는 몸 옆의 나무 벽에 밀어붙였다.

혹시 유소기의 검이 그들이 숨어있는 통나무를 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청강사자검과 혈도에 저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임청우는 자신의 옷자락이 통나무 밖으로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유소기는 백금검으로 굴러가는 통나무들을 자르다가 냉소를 머금었다. 굴러가는 통나무들 중 하나의 중간쯤에서 펄럭이는 임청우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휘익!

즉시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은 유소기는 허공에서 요자번신(鷂子翻身)의 수법으로 몸을 굴린 후 그 통나무 앞을 가로막았다.

!

마주 보고 있던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통나무가 갑자기 멈추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

황의소녀가 눈물을 찔끔 쏟으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통나무가 수직으로 홱 쳐들려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두 사람을 밖으로 쏟아냈다.

!”

엄마야!”

임청우는 바닥에 나뒹굴고 황의소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휘익! 터텅!

통나무를 한손으로 간단히 잡고 흔들어서 두 사람을 쏟아낸 유소기는 빈 통나무를 뒤로 던져버렸다.

(검주 유소기!)

(... 틀렸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눈앞에 서있는 임풍옥수같은 용모의 중년인 유소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텅 터터터텅!

그 사이에도 유소기 뒤쪽에서 나머지 통나무들이 요란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손을 젓자 수십 개의 통나무들은 간단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수만으로도 유소기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통나무들은 조금 더 굴러간 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임청우의 얼굴을 본 유소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옥같이 맑던 임청우의 얼굴이 불과 반나절 만에 검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황의소녀는 유소기의 추적을 따돌릴 목적으로 임청우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유소기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몽선도!”

하지만 유소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청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에게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대안탑에서 인()이 포함된 재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유소기는 검집으로 황의소녀를 가리켰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 예쁜 소녀가 화를 당하게 된다.”

황의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지도 않았음에도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뼛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임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큰 백의의 중년인이 그의 뒤에 칼을 뽑아든 채 서있었다. 도군이었다.

순간 임청우는 칠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굳이 뺏으려 하니 나는 죽어도 뺏기지 않겠다.)

임청우는 오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유소기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져가시오.”

임청우는 소리치며 두 개의 물건을 각기 동북쪽과 동남쪽을 향해서 던졌다.

임청우는 무공은 모르지만 공력만은 아주 높다.

! 피핑!

임청우가 힘을 다해 던진 두 개의 물건은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 파팟!

유소기와 도군의 몸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라 각기 하나의 물건을 쫓아갔다. 그들의 신속함은 먹이를 덮치는 표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임청우는 유소기와 도군이 몸을 날리자마자 황의소녀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얼굴 앞에서 찬바람이 이는 순간 임청우는 황의소녀를 힘껏 껴안으며 땅을 박차고 껑충 뛰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까마득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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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색마의 신세한탄

 

 

"크크크... ... 동정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고검추의 어두운 표정을 본 천면음마는 체념한 듯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철봉황... 그 계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피에 섞어서 뿜어낸 탕음마고(蕩淫魔蠱)에 중독되었으니..."

이어 천면음마는 악에 바쳐 내뱉었다.

사실 그자가 준비한 진정한 암수는 철봉황에게 접근하여 탕음마고라는 지독한 최음제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천면음마는 이빨을 하나 빼서 생긴 빈틈에 최음제가 들어있는 은제 구슬을 끼워두고 있었다.

상대 못할 강적을 맞닥트릴 경우 최음제가 들어있는 그 은제 구슬을 깨트린 후 침에 섞어 분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철봉황의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맞는 순간 입속에 숨기고 있던 최음제 탕음마고를 피에 섞어 뿜어내게 되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베기 위해 쇄도하다가 탕음마고가 섞인 천면음마의 피를 일부 흡입한 것이다.

"... 철봉황! 그 여인이 철봉황이었습니까?"

천면음마의 말을 들은 고검추의 안색이 일변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고검추는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구해 토지묘를 떠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크크크... 그렇다. 그 계집이 호천무맹 최강의 무력집단인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의 총사(總士) 철봉황 고현경이다."

"!"

고검추는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머나먼 기련산으로부터 찾아온 여인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천면음마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그 계집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계집은 곧 탕음마고의 발작으로 희대의 탕녀가 될 테니..."

"... 무어라고요?"

고검추는 눈을 부릅떴다.

"클클클... 정파백도의 태두인 호천무맹의 신임 총사가 천하에 다시없을 음탕한 계집으로 변할 테니 볼만하지 않겠느냐?"

천면음마는 악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탕음마고!

 

남만 특산의 고독으로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여 생명의 근원인 원영지기(元嬰之氣)를 먹고 산다.

원영지기를 갈취당한 숙주는 격렬한 욕정을 일으켜 이성(異性)을 찾게 된다.

이성과 관계하여 상대의 정기를 흡수해야만 빼앗긴 원영지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분노의 표정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 악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는 철봉황 고현경이 아버지의 동문 사매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양모 당혜선이 그녀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한데 그런 철봉황 고현경이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에 중독 당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천면음마에게 살의가 일어나는 고검추였다.

"흐흐흐... 그 계집을 탕음마고에서 구하고 싶으냐?"

천면음마는 그런 고검추의 표정을 살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검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기도 쉽군."

고검추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들은 천면음마는 히죽 웃었다.

"본좌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다오. 그러면... 철봉황을 구할 방도를 가르쳐주마."

"말해 보시오."

고검추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면음마는 고검추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꾸했다.

"첫번째 조건은... 본좌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말에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봉황 고현경은 천면음마의 전신 경맥을 난자해 놓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피하고 난자하여 쉽사리 죽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천면음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것이다.

천면음마는 그 끔찍한 고통을 끝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나의 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천면음마는 고통으로 이지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피붙이가 있었습니까?"

고검추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기도 하고... 나같은 말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착한 누이동생이지.”

천면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숱한 여자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제에 제 누이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문 사매인 철봉황을 구하려면 천면음마와 거래를 해야만 한다.

영누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말씀해보시오.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고검추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천면음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자는 내심 고검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진 그자의 말이 고검추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내 누이의 이름은 등삼낭(鄧三娘)이고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 등삼낭!”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이 외쳤다.

“...!”

말을 이어가려던 천면음마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그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같다! 그렇다면...)

고검추는 팽가촌 촌장의 며느리인 등삼낭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네놈... 내 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냐?”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누이동생 분의 왼쪽 입 꼬리 쪽에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고검추는 등삼낭의 얼굴에 나있는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틀림없구나. 네놈은 내 누이와 아는 사이였어.”

천면음마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등삼낭 아주머니가 이 악명 높은 색마의 누이동생이었다니...)

고검추는 당혹과 함께 자신이 운명의 사슬같은 것에 엮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 지인의 오빠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고검추는 팽가촌의 촌장 팽유가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명문가가 청해의 도룡곡이었음을 깨달았다.

팽유가 등삼낭의 친가가 도룡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도룡곡이 전 무림에 공적으로 찍혔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가촌... 너는 기련산 팽가촌에서 산 적이 있겠구나.”

천면음마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검추라 하며 얼마 전까지 팽가촌에서 살았습니다.”

고검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전에 널 본 적이 있었겠지만... 마지막으로 팽가촌에 들른 게 삼 년 전이었으니 설령 널 보았다 해도 지금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말 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을 때...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종을 만나서 막내 누이가 살아있으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기련산 팽가촌의 촌장이 구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면음마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토지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듯이 말했다.

고검추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천면음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연을 만나 복수할 능력을 갖춘 나는... 우리 도룡곡의 멸망에 관여한 문파나 가문을 찾아다니며 계집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 생각해서 한 짓이었는데...”

천면음마의 눈 꼬리로 물기가 어렸다.

뒤늦게 삼낭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팽가촌을 찾아갔지만... 차마 부끄러워 삼낭이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주르르!

마침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가 누이동생인 걸 알고도 나서지 못한 건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고검추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천면음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강간해왔다.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았으며 비구니와 여자 도사들까지도 거리낌없이 강간했었다.

그런 처지에 차마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의 딸들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천면음마는 먼발치에서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이 낳은 딸들을 몇 번 훔쳐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누이동생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켰었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에게도 혈육을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구나.)

고검추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혈육은 끔찍하게 여기면서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거리낌없이 강간해온 천면음마의 행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해해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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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악독한 소녀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어머니의 원수!”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독기서린 교소를 터뜨렸다.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나유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혈이 찍히는 바람에 지금의 나유라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유라를 암습하여 쓰러트린 소녀는 원한과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크윽... 너는 누구냐?”

딸 뻘인 어린 소녀에게 젖가슴이 짓밟힌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에 찬 신음을 토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찌직!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저고리를 거칠게 좌우로 벌렸다. 고름이 뜯기며 벌어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금방 내린 눈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흐윽!”

헌데 나유라는 저고리가 벌어지는 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봉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자로 길게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진(眞眞)... 진진이로구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나있는 열십자의 흉터를 본 나유라는 전율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소녀는 그런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오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 년 전, 나유라의 남편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당한 것은 하후란이라는 여인이었다.

하후란은 대단한 미인으로 철고륜이 나유라와 결혼하기 전부터 총애하던 후궁이었다.

철고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온 하후란이지만 달단부의 안주인이 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달단부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뱃속에는 전 남편의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철고륜은 천산(天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하후란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미태에 반해 강제로 납치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본래 색탐이 심했던 철고륜은 하후란이 남의 아내이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 따위는 아랑곳 않고 욕심을 채웠다.

하후란이 워낙 빼어난 미녀였기에 철고륜은 얼마 후 대식국의 공주 나유라와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하후란을 총애했다.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된 후 반 년 만에 여자 아이를 낳았었다. 당연히 그 여아는 하후란 전남편의 딸이었다.

하지만 하후란의 미태에 푹 빠진 철고륜은 그 여자아이를 자신의 딸로 삼고 자신의 성씨인 철()씨까지 물려주었다.

 

-철진진(鐵眞眞)!

 

이것이 그 여아의 이름이었다.

비록 하후란의 전 남편 딸이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영특했던 철진진은 철고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철고륜은 도도한 본처 나유라의 몸에서 난 친 딸 철산산보다 오히려 양녀인 철진진을 더 귀여워할 정도였다.

헌데 오 년 전, 하후란과 철진진 모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철고륜이 하후란과 방사를 하던 도중 복상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하후란을 질시하던 다른 후궁들은 하후란이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녀가 철고륜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유라는 하후란을 형리(刑吏)들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하후란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저 단순히 고문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형리들은 그래도 한때 자신들의 왕의 후궁이었던 하후란을 돌아가며 능욕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녀가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하후란은 남편의 부하들에게 몸을 더럽힌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유라는 하후란을 욕보인 형리들을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하후란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버렸다.

하지만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하후란의 딸인 철진진이 오 년 만에 나유라 앞에 나타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나유라는 철진진이 형리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극이 일어날 당시 철진진의 나이는 불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형리들은 하후란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린 철진진을 발가벗겨 놓고 그녀의 여린 가슴을 비수로 갈랐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후란이 보는 앞에서 철진진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도 하후란은 끝내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자백을 해봐야 자신들 모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하후란은 형리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었다.

하후란이 자살한 후 형리들이 철진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후란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져 처형당하면서도 철진진의 처리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유라는 어린 철진진 역시 형리들에게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흐흐흐! 오 년 만에 모녀가 상봉한 소감이 어떻소? 비록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철목풍은 마혈이 찍힌 채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그녀가 던져준 장보도가 들려 있었다.

나유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신음을 토했다.

... 오 년 전 그때 진진이를 구해간 게 철목풍 네놈이었느냐?”

그녀의 물음에 철목풍 대신 철진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오년 간 양부(養父)의 슬하에 숨어서 네년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려왔다!”

철진진, 아니 하후진진은 철목풍의 양녀가 된 상태였다.

 

오 년 전, 철목풍은 철고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단부의 내정을 염탐하기 위해 은밀히 달단부에 잠입했었다.

그러다가 하후진진 모녀가 갇힌 뇌옥을 발견했으며 그 뇌옥의 어느 빈 감옥에서 죽어가던 하후진진을 구출한 것이다.

나유라가 예상했던 대로 형리들은 하후란을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하후진진까지 짓밟는 만행을 자행했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어린 몸으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하후진진은 기식이 엄엄했었다.

사실 하후란이 혀를 물고 자살한 것도 딸이 형리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육중한 몸 아래 깔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바둥거리는 어린 딸의 무참한 모습에 하후란은 하늘을 저주하며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하후란이 자살해버리자 형리들은 당황하여 하후진진을 뇌옥의 후미진 감옥에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후진진은 사경을 헤매던 중 철목풍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호호호! 구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우하사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후진진은 광기에 찬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나유라는 그런 하후진진을 처연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진아!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달단과 오이라트 양 부족의 갈등이 그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나유라의 말 대로였다.

달단부의 형리들이 자신들의 왕의 여자였던 하후란과 그녀의 딸 하후진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녀들이 오이라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달단부와 오이라트부 사이에 벌어졌던 수다한 격전은 두 부족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오이라트부와의 싸움에서 피붙이를 잃지 않은 달단부의 가정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형리들은 하후란과 하후진진 모녀를 욕보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너와 네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전부 내손으로 처단했단다. 아무쪼록 그때 벌어진 일이 내 본의가 아님을 알아다오!”

나유라는 애절한 음성으로 하후진진에게 애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런다고 네년을 동정해줄 줄 아느냐?”

하후진진은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나유라의 말을 막았다.

!”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모인 나유라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양녀인 하후진진의 침이 얼굴에 튀기자 나유라의 옥용은 굴욕과 회한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하후진진은 그런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바득! 네년 때문에 우리 모녀가 당했던 일을 네년도 경험하게 해주마!”

... 너 설마!”

순간 나유라는 아연실색하며 하후진진을 바라보았다.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목풍이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흐! 너희 모녀가 당한 일을 여왕도 경험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이 애비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철목풍은 나유라의 육감적인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쓸어보았다.

나유라는 철목풍이 하후진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을 깨닫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하후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사악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단순히 겁탈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계집을 너무 봐주는 것이지요!”

하후진진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만행을 당한 하후진진의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청을 들게 하면 이 암캐가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내와의 그 짓을 굶주려왔으니까요!”

하후진진은 작은 발로 나유라의 몸을 툭툭 걷어차며 사악하게 웃었다.

철목풍은 하후진진의 말에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노리개로 주지 않겠다면 여왕마마를 어찌 대접하려는 것이냐? 설마 여왕이 네 의모라고 봐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후진진은 광기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소녀가 쓰려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대원제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거예요!”

허어! 그러냐?”

아쉬워하던 철목풍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번득였다.

그놈들을 데려와라!”

하후진진은 뒤쪽의 사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예 공주님!”

사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이어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오이라트부 무사들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왕님!”

알몸으로 끌려오던 청년들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발견하고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청년들을 본 나유라의 안색도 하얗게 변했다.

청년들은 나유라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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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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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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