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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은 강시(畺屍) ! 이제야 따라왔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둥그레졌던 마면혈도는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휘익!

껄껄 웃는 마면혈도 앞으로 사각 모자를 쓴 초로의 인물이 임청우의 멱살을 오른손으로 틀어쥔 채 훌쩍 내려섰다.

결코 가볍지 않을 임청우의 몸을 헝겊 쪼가리인 듯 흔들면서 내려선 인물은 왼손에 쥔 쇠로 만든 접는 부채, 철선(鐵扇)을 성마르게 부치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의 몰골도 마면혈도 못지않게 기괴하다.

안색은 시체처럼 하얗고 창백한 반면 입술은 피를 마신 듯 새빨갛다.

또 열흘은 굶은 듯 퀭한 두 눈은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낄낄낄... 얼어 죽은 송장 놈아! 이 형님보다 한발 늦었구나.”

마면혈도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어 죽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괴인의 별호는 철선동시(鐵扇凍屍).

철선동시는 성격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자였다.

우리를 본 놈을 살려서 보내려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마면혈도!”

!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한쪽에 던져버리며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자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바닥에 던져진 임청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낄낄낄... 그놈은 무림인이 아니야.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내버려뒀으면 살아남지 못했어.”

마면혈도가 다친 말이 우는 것같은 걸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악명 높은 마면혈도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군.”

철선동시는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엎어져 있는 임청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

마면혈도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맹세를 어겼단 말이냐? 나 마면혈도가 살인, 방화, 강간을 가리지 않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그래 그래,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는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빴을 뿐이로군.”

철선동시는 냉랭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 얼어 죽은 송장 놈이...”

!

대노한 마면혈도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손잡이만 핏빛이 아니라 칼날도 피를 칠한 듯이 붉었다.

토막 쳐 버리고 말겠다아아아!”

마면혈도는 날이 넓은 핏빛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철선동시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그자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하늘로 뻗어 올랐다.

! 서걱!

핏빛의 칼이 내뻗는 그 혈광에 스친 바위들이 마치 두부처럼 소리없이 베어졌다.

스슥!

그러나 철선동시는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면혈도의 사나운 칼질을 피해버렸다.

날 죽이려 드는 것만 봐도 자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머리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농산 표운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만도 다행이지.”

빗발치듯 날아드는 핏빛 칼을 흘려보내면서 철선동시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면혈도는 흠칫하며 칼질을 멈추었다.

네놈을 죽이려는 게 뭐 어떻단 말이냐? 나는 네놈만 죽어 없어지면 속이 후련하겠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유()가 놈을 완전히 따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철선동시의 그 한마디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마면혈도의 핏빛 칼, 즉 혈도(血刀)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보도(寶刀).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그 혈도를 아무 생각없이 마구 휘둘렀으니, 강적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혀서 붉으락푸르락 하는 마면혈도의 얼굴을 보면서 철선동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전한 곳에 숨을 때까지는 만나는 모든 놈을 죽여 버리자고 자네가 먼저 말했었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여서 화골산(化骨酸)으로 녹여 없앤 놈들만 하더라도 무려 이백 칠십 아홉일세. 한데 자네는 저 이백 팔십 번째 놈을 죽이지 않았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거지.”

철선동시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임청우를 가리켰다.

그만해! 지금이라도 저놈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마면혈도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야지.”

철선동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저놈을 구한 것도 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자네 손으로 저놈을 죽여야만 자네가 이부지자(二父之子) 개새끼가 아니게 될 테니...”

마면혈도는 성미가 급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철선동시의 말을 듣자 자기 손으로 임청우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개새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마면혈도는 혈도를 어깨위로 반쯤 비스듬히 돌려서 임청우를 향해 휘두르려 했다.

번쩍!

핏빛 칼에서 혈광이 다시 한 번 길게 일어났다.

기절한 임청우는 영문도 모르고 몸뚱이가 무 토막처럼 잘라질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

하늘을 뒤흔드는 용의 울음소리인 듯, 초목산천을 떨게 만드는 대호(大虎)의 포효인 듯한 웅혼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그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합창하듯 외쳤다.

그런 그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

다음순간 철선동시가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마면혈도도 혈도를 회수하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대가리를 깨서 골수를 파먹어도 시원찮을 유가놈 같으니...”

마면혈도는 표운봉 아래로 달려가는 철선동시의 뒤를 따라가며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표운봉에서 사라졌다.

우워어어어어!”

그와 함께 두 마두를 쫓아버린 고함소리는 바위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방향을 바꿔 멀어져갔다.

고함소리의 주인은 두 마두의 종적을 발견하고 추격해갔을 것이다.

이제 표운봉 정상에는 죽은 듯 미동도 않는 임청우만이 뜨거운 태양아래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 산봉우리 위로 기울어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그 노을 속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표운봉 정상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의 왕에는 못 미치지만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사람 키 정도는 되는 커다란 독수리들이다.

오래전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던 그놈들은 주린 배를 채워줄 희생물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퍼덕거리는 날개 짓이 돌먼지를 날리고, 날카로운 부리들은 임청우의 등을 쪼았다.

! 퍼퍽!

세차게 찍어대는 독수리들의 부리에 임청우의 등에서 살이 뜯기며 피가 번져 나왔다.

짊어지고 있던 망태와 입고 있던 삼베옷도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누더기가 되어갔다.

!

또 한 번 등을 깊이 쪼이는 순간 임청우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

뒤이어 다른 독수리의 부리가 임청우의 어깨 부위도 찍었다.

!”

순간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끼약! 카아악!

만찬을 즐기려던 독수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높이 날아올라갔다.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공으로 혈도를 막아버렸었다.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임청우의 혈도가 독수리들의 부리에 쪼이면서 풀어진 것이다.

망할 놈의 날짐승들 같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리는 임청우의 등과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털썩!

임청우는 누더기가 된 망태를 벗어 던졌다.

쫘악!

이어 피로 물든 웃옷도 찢듯이 벗었다.

등에 생긴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지나 뒤쪽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임청우는 벗은 옷을 수건처럼 둘둘 말아서 때를 벗기듯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거친 삼베 옷감이 상처를 쓸고 지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다.

빌어먹을!”

등에서 대충 피를 닦아낸 임청우는 피에 젖은 옷을 확 집어던졌다. 옷은 피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서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옷을 집어던진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절을 두 번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임청우는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대가리야! 얼어 죽은 송장같은 놈아! 네놈들이 살아있어도 내게는 죽은 놈들로 보인다. 이제 내가 두 번을 절했으니 네놈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오. 네놈들이 죽었다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독수리들의 먹이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임청우는 땅바닥에 패대기친 망태에서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약초들을 입안에 쑤셔 넣은 임청우는 우걱우걱 씹어 다진 후 근처 바위에 턱 붙였다.

그리고는 등의 상처를 바위에 붙인 약초에 대고 비벼대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신통하게 멎었다.

어머니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산을 타며 채약을 해온 임청우인지라 어떤 약초가 어떤 증상에 잘 듣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대낮에 귀신같은 것들을 만나서 십년감수하질 않나... 농산을 떠나긴 떠나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라면 진작 떠났을 농산이지만...”

상처에서 피가 멎으며 임청우의 화도 조금은 풀렸다.

옷은 포기해야겠구나.‘

집어던졌던 웃옷을 살펴본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웃옷은 원래 낡았었는데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헤집어져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피에 절고 살점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웃옷을 다시 던져버린 임청우는 망태를 챙겼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망태에 활과 화살을 우겨넣은 임청우는 절벽 끝으로 갔다.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절벽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북두홀을 찾는 건 포기해야하나?)

임청우는 갈등했다.

그는 멱살을 틀어쥔 마면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북두홀로 그자의 팔을 찍었었다.

하지만 북두홀은 강철같은 마면혈도의 팔뚝에 전혀 상처를 못 내고 임청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표운봉의 남쪽 절벽은 가파를 뿐 아니라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가 없다.

산을 타는데 능숙한 임청우라도 쉽사리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북두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북두칠성이 새겨진 북두홀은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북두홀은 임청우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보아온 물건이다.

임단심은 가끔씩 북두홀을 꺼내보며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북두홀이 아버지 것이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단심이 임청우를 데리고 농산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 전이다.

그 얼마 후 임단심은 북두홀을 깊은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임단심에게 북두홀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북두홀은 너무도 단단하여 훼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깊은 계곡에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임청우는 북두홀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청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으로 내려가 북두홀을 회수했었다.

임단심은 임청우가 북두홀을 찾아온 걸 알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후로 임청우는 북두홀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열두 살 때도 천길 벼랑을 타고 내려가 북두홀을 찾아왔었다.)

임청우는 망태를 등에 짊어지며 심호흡을 했다.

망태의 거친 표면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쓸어 오만상을 쓰게 만든다.

(어렸을 때 했던 일을 지금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절벽의 틈새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대가리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되었구나.)

깎아지른 절벽을 신중하게 타고 내려가며 새삼 마면혈도가 미워지는 임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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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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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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