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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괴수대전

 

 

한 차례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멎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호!”

쐐애액!

비가 온 후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천야만야한 절벽을 평지처럼 차고 올라온 그 인영은 곤륜의 험봉들 위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과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소년!

물론 그는 이검한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그의 잘 생기고 호쾌한 인상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검한은 장춘곡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높고 험한 곤륜산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이 가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이검한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사저인 냉약빙과 사부인 고독마야가 극진히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이검한의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달했으나 정작 이검한의 마음은 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독마야를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인 이검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는 것이었다. 곤륜산의 장대한 산줄기를 따라 질풍처럼 달리다보면 어느덧 가슴 저미던 외로움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검한은 스쳐지나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산과 함께 세상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곤륜산의 곳곳을 달려본 이검한이지만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검한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고 다시 고독애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어억!

어디선가 한소리 괴성이 들려왔다.

(새의 울음소리인데...!)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방금 들린 날카로운 괴성은 어떤 거조(巨鳥)가 지른 것임이 분명했다.

(가 보자!)

스파앗!

다음 순간 이검한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

 

크아아! 키아아악!

나무 한 그루 나있지 않은 황량한 계곡 끝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무대로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거대한 독수리와 기괴한 모습의 구렁이였다.

두 괴물 중 독수리는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육장(五丈;18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철익신응(鐵翼神鷹)!

 

곤륜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제왕이다.

철익신응은 천 년 이전부터 곤륜산 일대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왔다.

즉,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이 하늘의 제왕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딱히 없다.

강철같은 발톱은 바위를 두부처럼 으깰 수 있으며 강력한 날개의 힘은 코끼리를 낚아 채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곤륜산맥의 제왕으로 인정받아온 철익신응이건만 오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적과 조우한 상태였다.

철익신응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무기나 용이라고 해야 어울릴 거대한 구렁이였다.

몸통의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대망(大蟒;큰 구렁이. 이무기)인데 배 부분에는 체구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여섯 개의 발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수련만 더 쌓으면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는 이 괴물의 몸뚱이는 강철인 듯 번들거리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적린화룡(赤鱗火龍)!

 

용이 아님에도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적린화룡은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화맥(火脈)의 열기를 흡수하며 승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화맥의 화기를 흡수해온 덕분에 적린화룡의 몸 속에는 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엄청난 열이 고여 있다.

그 때문에 적린화룡이 내뿜는 숨결에 섞여있는 열독(熱毒)은 무쇠를 얼음처럼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무시무시한 열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적린화룡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해서 도검이 불침한다. 화맥을 찾아 땅 속을 누비고 다니기 위해 무엇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강인한 비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적린화룡은 불사화망(不死火蟒)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아앙!

적린화룡은 섬뜩한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에 떠있는 철익신응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쩌어엉! 촤아아아!

그놈이 커다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수십 장까지 확 내뻗쳤다. 적린화룡이 몸속에 품고 있는 열독이 숨결을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무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그 열독에 정통으로 휩쓸린다면 제 아무리 곤륜산맥의 제왕이라는 철익신응이라 해도 숯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카아악! 화악!

도리 없이 철익신응은 다급히 날개 짓을 해서 적린화룡이 뿜어내는 열독을 피해냈다.

하지만 철익신응의 깃털은 이미 상당 분량이 열독에 스쳐 시커멓게 그슬려져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곤륜산의 하늘을 지배해온 제왕답지 않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철익신응은 호시탐탐 적린화룡을 노리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괴물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계곡 한쪽의 절벽 위에 멈춰 선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검한은 냉약빙이 구해다 준 고서들을 통해 적린화룡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곤륜산맥의 뭇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익신응이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영물이 이검한 자신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를 일별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이 불리한 싸움을 하면서도 이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검한이 서있는 곳과 맞은 편인 절벽 가운데에는 거대한 새둥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초가집만한 그 둥지 안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송아지만한 그 새끼 독수리는 바로 철익신응의 새끼였다.

철익신응이 수백 년 만에 겨우 얻은 그 새끼를 적린화룡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 화맥의 화기를 흡수하며 살아온 적린화룡이지만 가끔은 배를 채운 먹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린화룡은 철익신응의 새끼를 노리고 둥지로 접근해 온 것이고 철익신응은 필사적으로 그놈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적린화룡 쪽이 유리했다.

카아아! 화아악!

적린화룡은 연신 지독한 열독을 방사하여 철익신응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적린화룡은 둥지에 이르러 철익신응의 새끼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나쁜 놈이로군!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남의 귀한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다니...!)

상황을 파악한 이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약육강식이 자연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새끼를 노리는 적린화룡의 만행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철익신응을 도와주자!)

이검한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검불침의 괴물인 적린화룡이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적린화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검한은 장내를 돌아보며 염두를 굴렸다.

(일단 적린화룡의 주의를 분산시켜보자. 그럼 철익신응이 그 틈에 공격을 해서 적린화룡은 물리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검한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쐐액!

직후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장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검한은 질풍같이 적린화룡의 옆을 스치며 그놈의 머리통을 노리고 돌을 던졌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이검한이 던진 돌이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비록 그 일격이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적린화룡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카아아아! 화악!

돌 조각에 머리를 맞자 분노한 적린화룡은 자신의 옆을 질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검한을 향해 열독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에 휩쓸릴 이검한이 아니었다.

“하하! 여기다 이 바보야!”

쐐액! 텅!

이검한은 유령같이 휘돌며 재차 돌을 던져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크아아앙!

두 번이나 연달아 이검한에게 우롱당한 적린화룡은 사나운 괴성을 토하며 발광했다.

마침내 그놈은 공격 대상을 철익신응에서 이검한으로 바꾸었다.

촤촤촤! 쏴아아아!

적린화룡은 거구를 끌고 이검한을 뒤쫓으며 시뻘건 열독을 연신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철익신응은 이내 이검한이 자신을 도와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철익신응은 이검한을 쫓아가느라 주의가 분산된 적린화룡은 향해 벼락같이 내리 꽃혔다.

적린화룡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콰드드득!

철익신응의 강철같은 발톱이 그대로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카오오오!

바위도 간단히 으깨버리는 철익신응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찍혀 두 눈이 으깨져버린 적린화룡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저항해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키아아악! 쏴아아아!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쥔 철익신응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머리통을 잡힌 이상 적린화룡의 열독도 더 이상 철익신응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거대한 몸뚱이를 움켜쥐고 수백 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발톱을 풀어 버렸다.

쾅!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린화룡의 거구는 계곡의 바닥에 팽개쳐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적린화룡의 몸뚱이가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우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고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수백 장 높이에서 떨어진 적린화룡은 벌린 입으로 내장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제 아무리 그놈의 몸뚱이가 도검불침이라 해도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진 충격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껍질이 질기고 단단하여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적린화룡의 내장과 척추는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휴우, 정말 끔찍한 놈이로군!”

스스스!

이검한은 숨이 끊어진 적린화룡의 시체 옆으로 내려서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 널부러진 적린화룡의 몸뚱이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했다. 그 때문에 계곡 바닥에 작은 둔덕이 하나 새로 생겨난 듯이 보였다.

(저것은...!)

헌데 적린화룡의 시체를 살피던 이검한은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츠츠츠!

내장과 피를 토하고 죽은 적린화룡의 아가리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불그스름한 화광(火光)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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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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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1)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우는 검댕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비련곡을 빠져나왔다.

검댕을 묻혀 시꺼멓게 변한 임청우의 얼굴에서는 볼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만 눈에 띨 뿐이었다.

사실 얼굴에 검댕을 바르는 건 임청우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임청우의 얼굴만 보면 화를 내고 죽이려 들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이래 임청우는 수시로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잘 씻지 않았다. 검댕을 묻히면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목욕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정성껏 씻은 기억은 거의 없는 임청우였다.

물론 얼굴에 검댕을 바른다고 해서 어머니의 학대가 줄어들지는 않았었다.

 

농산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임청우인지라 가장 은밀한 길만 골라서 빠져 나왔다.

그 덕분인지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만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산을 벗어난 임청우는 서안(西安)을 목적지로 삼았다.

농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가 서안이다.

그 서안에 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농산 밖의 세상은 벌써 몇 달 째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청우는 관도(官途)로 서안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져 음식은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기갈이 심할 때에는 황하의 탁한 물을 들이키고 배가 고플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서 생긴 웅덩이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었다.

무작정 황하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서 보름이 지났을 때 중원 제일의 고도(古都)인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서안은 한(漢)대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렸고 당(唐)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전설이 살아 숨 쉬었던 곳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중국을 일통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향한 집념이 피어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뭄의 고통은 서안 곳곳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버텨온 고도 서안은 그 역사의 힘으로 자연의 시련마저 견디는 듯했다.

여전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

임청우는 옛 건물들로 가득 찬 서안의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적 드문 산속 깊은 곳에 살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처에 나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한 구경거리들이다.

물론 서안은 임청우에 대해서 결코 감탄하지 않았다. 그의 몰골은 거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골뿐 아니라 형편도 거지보다 못했다.

거지는 구걸이라도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임청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구걸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거지 역시 직업인만큼 강한 직업의식이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나 바가지 들고 나서서 될 수 있는 게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다.

민심이 흉흉한 때인 만큼 도둑질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임청우는 그같은 경우를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이처럼 임청우의 배는 하루에 한번 채워지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척포는 언제나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게다가 놈의 식성은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놈은 어디서든지 아침이 되면 호리병 속에서 기어 나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면 불과 일각도 되기 전에 임청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몰려와 구더기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척포란 놈은 오만하게 황금빛 뿔이 달린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뱀들 사이로 들어간다.

몰려온 뱀들은 가지각색의 기기묘묘한 모양과 색깔을 갖춘 독사들이었지만 척포가 가까이 가면 모두 <날 잡아 잡슈!> 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꼼짝도 않는다.

척포는 그 뱀들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길이가 같은 놈을 물색한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수백 마리의 뱀을 걸러 보낸 후 자기와 길이가 꼭 같고 굵기도 꼭 같은 독사를 발견하면 한 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린 후에 아가리를 쫙 벌려 독사의 머리부터 삼켜버린다.

임청우는 몰려왔던 뱀들이 모두 음식으로 보였지만 그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한두 마리라면 잡아서 배를 채우련만, 수백 수천 마리가 되고 보니 한 마리 먹겠다고 덤비다간 되려 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물과 물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에서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농산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엔 눈을 빨갛게 하고 있지도 않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속에 몰입하여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

 

일옹청풍일지를 펼쳐들고 중얼중얼 읽으면서 임청우는 역사의 현장인 자은사(慈恩寺)로 갔다.

그저께 저녁부터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한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어서 꼬르륵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도 서안에 왔으니 자은사와 대안탑(大雁塔)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우협 장백승으로부터 받은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청강검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자은사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씩씩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玄獎)은 직접 천축으로 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범어로 씌여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있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이대(二大) 역성(譯聖)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구마라습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백마사(白馬寺)인 반면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바로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이었다.

높이가 무려 이십일장(二十一丈;63미터)에 달하는 대안탑은 밑변이 정방형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각뿔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분주했을 대안탑이지만 이제는 폐쇄되고 인적이 끊어졌다.

오직 대안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자은사 승려들만이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대안탑이 멀리 보이는 자은사 정문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글쎄, 너 같은 거지는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까.”

지객승(知客僧)으로 보이는 젊은 중이 소년을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왼손에 고색창연한 보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서 눈만 반들거리고 있으며 입은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검은 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훤칠한 키와 손에 든 보검 외에는 거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은 물론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밀어내려는 지객승의 손을 뿌리치며 무게 있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단지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오.”

“하하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럼 형편이 좋은 거지도 있던가?”

지객승이 큰소리로 비웃으며 다시 임청우를 밀어내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지객승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끔과 동시에 옆으로 슬쩍 비키며 발을 걸었다.

“어이쿠!”

지객승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스님께 구걸하지 않았소. 그런 나를 거지라고 할 수 있소? 나를 모욕한 댓가라 생각하시오.”

임청우는 빠르게 말하고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객승이 씩씩거리며 일어섰을 때 임청우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거지새끼야!”

지객승은 발바닥에 부리나케 뒤쫓아 들어갔다.

 

일단 절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아무도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객승도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포기해 버렸는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임청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년 고찰 자은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설전(無說殿)과 비로전(毘盧殿)을 돌아본 후에 대안탑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십장이 넘는 웅장한 대안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대안탑의 형상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산을 연상케 했다.

올려다보면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는 대안탑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임청우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집을 짓는다면 저같이 천년을 갈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사람으로 났으면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하리라!”

지는 석양을 보면서 야망을 일깨운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임청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에 몸을 떨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사로잡혔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대안탑에서 불경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

삼론종(三論宗), 성실종(誠實宗), 열반종(涅槃宗), 찰론종(擦論宗), 지론종(持論宗)은 물론이고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마저도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청우의 독백처럼 현장이 세웠던 대안탑은 천년을 가는 집이었고, 현장이 행한 바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큰일을 하리라.)

임청우는 마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苛)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숙! 혹시 어린 거지새끼 한 놈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가 대안탑 근처에 있는 극락전(極樂殿) 쪽에서 들려왔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미 고약한 지객승이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임청우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대안탑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나무나 건물이 없었다.

타타탁!

지객승이 다른 중으로부터 임청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임청우는 이내 지객승을 발견했지만 지객승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만든 대안탑의 그림자가 임청우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임청우는 출입을 금하는 붉은 줄이 쳐져있는 대안탑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대안탑으로 들어온 즉시 문 옆의 벽에 바싹 등을 붙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꺼져버린 거야!”

대안탑 주변에서도 임청우를 찾지 못한 지객승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임청우는 지객승을 속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밖은 아직 훤한데도 대안탑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대안탑에는 사방에 하나씩 창문이 나있지만 벽돌을 쌓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려던 임청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잘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대안탑에서 자고 가면 어떨까? 여기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자고 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임청우는 밖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대안탑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그 옛날 언젠가는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졌으며 수많은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으리라.

과거로 흘러가버린 밝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임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더듬어 가노라니 난간이 만져졌다.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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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앙큼한 추격자

 

 

 

(심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여자임에 분명하다. 어쩐지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고...)

멀어지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점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확실히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다.)

안내받은 창가의 자리로 가서 앉은 강유는 진상파가 주고 간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반지의 재질은 은이고 두 마리 용의 눈 부위에 박혀있는 보석들은 질 낮은 홍옥이다.

시장에 내다팔면 아마 은자 몇 냥 받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는 반지다. 마치 언젠가 전에 이 반지를 보거나 만진 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유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홀린 듯이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이런 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것일 텐데... 비록 싸구려로 보이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반지임에 틀림없다.)

강유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꺄악!”

“엄마야!”

“으헉!”

갑자기 주점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강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을 가던 사람들과 말들이 화들짝 놀라 피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과 말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사이로 한 마리의 짐승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길이가 세 자쯤인 담비인데 온몸이 황금색 털로 덮여있고 한 쌍의 눈은 타는 듯이 붉다.

그놈은 바로 구미호리 구숙정이 진상파를 추적하라고 풀어놓은 영물 담비 섬전초였다.

(별일이 다 있구나. 어떤 짐승보다 조심성이 많고 사람을 싫어하는 담비가 백주 대낮에 관도를 활보하다니...)

강유가 놀라며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는 주점 입구에 이르러 급정거했다.

킁킁!

그리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저 짐승 새끼가...”

“들어오지 마!”

“엄마야!”

주인과 점원들은 기겁하여 외치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동행한 사내들에게 달라붙었다.

담비는 비록 체구는 작아도 아주 날래고 사나워서 늑대에 못지않은 맹수로 통한다.

대부분의 경우 담비가 알아서 사람을 피한다.

하지만 담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수무책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너무 날래서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담비를 두려워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끼이...

그러거나 말거나 섬전초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저리가 이놈아! 나가!”

“꺼져라 이 못된 짐승!”

휙휙!

주인과 점원들은 빗자루를 휘둘러 섬전초를 주점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휘익!

하지만 섬전초는 바람처럼 움직여 빗자루질을 피하며 주점 안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꺄악! 엄마야!”

“오... 오지마라!”

주점 안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안기며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 중에서도 겁이 많은 자는 의자나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피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강유를 비롯한 몇 몇 무림인들뿐이었다.

(볼수록 맹랑한 놈이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다니...)

강유는 자신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담비가 날래고 사납다는 건 산속에서 살아온 강유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금모적안의 희귀한 담비인 섬전초의 모습에는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면이 있었다.

강유가 신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의 새빨간 눈이 무언가 발견한 듯 번뜩였다.

카아!

이어 그놈은 강유의 탁자 옆에 이르러 강유를 올려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야 임마! 언제 봤다고 나한테 시비냐?”

강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카아!

하지만 등을 활처럼 굽힌 섬전초는 한층 더 흉포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조... 조심하시오 젊은이. 담비는 작다고 깔보면 안되는 위험한 짐승이오.”

“옛말에도 범 잡는 담비라는 말이 있지 않소? 몇 마리만 모이면 호랑이도 사냥한다는 무서운 놈이오.”

주변 사람들이 강유를 향해 외치며 걱정을 해주었다.

“이거 참...”

강유는 한숨을 쉬었다.

“초면인데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 아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빨 감춰라.”

강유가 섬전초에게 눈을 부라릴 때였다.

“이쪽이다.”

“섬전초가 주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 강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익! 휙!

섬전초가 온 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바람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옷자락에 <鐵>자가 새겨진 무림인들이었다.

“저... 저자들은...!”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중 철위사대의 철위사들이다.”

“저 흉악한 것들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

달려오는 무사들을 본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겁에 질리고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들에게 제왕성의 위사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시비가 붙을 경우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칫 객기를 부리거나 분을 참지 못해서 제왕성 위사들과 싸우게 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제왕성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들이 제왕성의 철위사...)

강유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적잖게 놀랐다.

소요신군 강조는 안탕산을 떠나는 강유에게 제왕성의 위사들과는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었다.

섬전초를 따라온 자들은 물론 철위사대 대주 냉혈철심 사우와 철위사들이었다.

강유가 보고 있을 때 사우 일행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주점으로 들어온 그자들은 곧 섬전초를 발견하고 강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섬전초는 그때까지 강유 옆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다가온 사우가 음산한 눈초리로 강유의 아래위를 살피며 물었다.

강유는 한눈에 사우가 일행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진상파? 금시초문인 이름이오만...”

강유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저 새끼가 건방지게 대주님 말씀에 대꾸를...”

사우 뒤에 서있던 철위사 한 놈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으려 하였다.

“진상파를 모른단 말이냐?”

사우는 손을 들어 그자를 자제시키며 다시 강유에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진상파라는 이름을 귀하를 통해 오늘 처음 들었소.”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직후였다.

쩍!

강유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의 날이 닿아있었다.

사우가 발검하여 검을 강유의 목에 댄 것이다.

“헉!”

“저... 저런...”

주변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은 기겁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우의 발검이 너무나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주르르!

사우의 검이 강유의 목으로 조금 파고들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대단한 쾌검! 검을 뽑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강유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사우는 강유가 강호에 나와 처음 상대해보는 일류고수였다.

실제로 철위사대의 대주인 사우의 실력은 강유의 아버지이며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와 비교해도 그리 아래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검을 강유의 목에 댄 채 사우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물읍시다.”

강유는 목에 검이 닿아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우를 올려다보았다.

“뭐라?”

“저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는 무뚝뚝한 어조로 사우에게 말했다.

“귀하는 내가 왜 진상파라는 여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영물중의 영물인 섬전초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진상파의 냄새만 맡고도 삼백여리를 달려왔으니...”

사우는 스산한 냉기가 느껴지는 눈초리로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였군.)

강유는 비로소 자신에게 쌍룡환을 주고 간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의 성주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내게서 진상파란 여자의 냄새가 난다는 거요?”

강유는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 네놈은 어떤 식으로든 진상파와 관련이 있...”

거기까지 말하던 사우는 멈칫 하며 강유의 뒤를 보았다.

끼기! 끼!

섬전초가 다른 좌석으로 가서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그 좌석에서 국수를 먹었었다.

“히익!”

“저... 저리 가!”

섬전초가 살피고 있는 자리 근처의 사람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다.

“저놈이 왜 저러지?”

“저 자리에서도 진소저의 냄새가 나는 건가?”

다른 좌석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는 섬전초를 보며 사우와 철위사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소... 소인은 이 가게의 주인 장씨입니다요.”

그때 주인이 용기를 내서 나섰다.

“어떤 소저가 얼마 전 저희 가게에 들렸다 갔는데 저 담비 놈이 그 냄새를 맡고 들어온 듯합니다요.”

주인은 비지땀을 흘리며 섬전초를 가리켰다.

“그럼 섬전초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가?”

“주점 안에 남아있는 진소저의 냄새를 오인해서 들어왔구나.”

상황을 파악한 사우와 철위사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끼이!

진상파가 앉아있던 자리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던 섬전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휘익!

코를 허공에 대고 벌름거리던 그놈은 바람같이 주점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피해주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젠장! 헛걸음 했다.”

“저놈이 엉뚱한 짓을 했군.”

“가자!”

철위사들은 섬전초를 따라 급히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우도 강유의 목에서 검을 떼었다.

“바짝 따라붙어라. 또 놓치면 안된다.”

철컹!

사우는 검을 칼집에 꽂으며 먼저 주점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귀하의 이름이나 압시다.”

강유는 목의 상처에서 나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수하들을 따라 주점에서 나가려던 사우는 멈칫 하며 돌아보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강유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좌에게 앙심이라도 품었다는 거냐?”

사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유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자를 바라보았다.

(안... 안돼!)

(상대는 제왕성의 철위사야!)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사우와 강유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제왕성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수 없는 게 당금 무림의 현실이다.

(저 벽창호가... 가게 안에서 칼부림이 나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봐 힘들게 무마시켰건만...)

주점의 주인 역시 원망스런 표정으로 강유를 흘겨볼 때였다.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해서 본좌가 누군지 알려주마. 본좌는 제왕성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다!”

사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 냉혈철심 사우!)

(맙소사! 평범한 철위사가 아니라 철위사대의 수령이었구나.)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저자와 싸우면 이긴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는데...)

사우의 정체를 안 무림인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답게 사우는 적을 대함에 있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기어코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 때문에 설령 사우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라도 사우와 싸우는 것은 꺼려한다.

“피를 본 게 억울하면 언제든지 본좌를 찾아와라. 상대해 줄 테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주점에서 나갔다.

휘익!

그리고는 앞서 주점을 나간 수하들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에휴! 십년 감수했구만.”

“하여간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하여간 요즘 제왕성의 인간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와 이유를 불문하고 도륙한다잖아.”

“마교와 혈교를 절멸시켜 세상을 구한 제왕성이 저렇게 패도적인 세력으로 변질될 줄 누가 알았겠나?”

“십팔 년 전부터는 제왕성에 밉보이고 무사한 인간이나 문파가 없잖아.”

“진짜 문제는 제왕성의 폭압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야.”

“하긴 황실도 제왕성의 눈치를 본다더만...”

제왕성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쏟아내던 사람들은 흠칫했다.

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보게 젊은이, 화가 나더라도 참게나.”

“냉혈철심 사우를 만나고도 그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사우가 인간백정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손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무림인들이 입구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강유에게 충고를 했다.

(진상파라고 했지?)

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서둘러 주점을 나섰다.

(그 여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왕성의 표적이 되었다.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었던 여자인데 위험에 빠진 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휘익!

주점을 나온 강유는 사우 일행이 간 쪽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저 어린 친구가 혈기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구만.”

“안됐어. 제왕성에 죄를 짓고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삽시에 멀어지는 강유를 보며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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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강미루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 백남빈은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강미루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강미루는 다시 입을 맞추려고 내미는 백남빈의 입에 불쑥 과일을 갖다 대었다.

백남빈이 말없이 웃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즙과 함께 과육이 녹듯이 넘어가 버렸다.

(잘 익은 감과 비슷한 맛이로구나.)

백남빈은 과일을 하나 더 집어 입에 가져갔다. 왕성한 식욕이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던 백남빈은 과일 하나를 집어 그때까지 미소를 띤 채 보고만 있는 강미루에게 건네주었다.

강미루도 그제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두 사람의 상처는 놀라울 만치 회복이 빨랐다.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는 온천에서 나왔을 무렵에 벌써 아물고 있었고, 강미루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창평곡에서 청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신랑성의 도발은 시작되고 있었다.

토곤이 신랑성으로 하여금 오이라트 기마군단의 남침을 위한 통로의 개척을 명령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마군단이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장애물의 제거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신랑성의 고수들은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몇 군데 요충지를 목표로 쇄도해왔다.

만리장성 일대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저지에 나섰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인 신랑성의 정예들을 막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부는 무황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황성이 북경 북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였으며 지금까지는 매번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황성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황성의 당대 성주 주진충은 오래전부터 무황성 깊은 곳에 은거한 채 무림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 왕소군이 무황성을 관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왕소군은 무황성 상하(上下)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인지라 대국적인 안목이 없는데다가 측근들만 중용하고 방탕하여 무황성의 화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실정으로 인해 무황성의 강대한 힘은 결집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신랑성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다.

토곤이 전면적인 중원 침공을 시도하게 된 데에는 무황성의 쇠락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무황성으로서는 명나라 군부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왕소군은 신랑성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며 각처의 분타에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북과 산서성의 각지에서 신랑성과 무황성의 고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왕소군은 은거 중인 남편 주진충을 찾아가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한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

 

-유우겸(劉盂兼)!

 

육순에 접어든 그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국조미랑 왕소군의 지도력 부재와 방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무황성을 애써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의열전(義烈殿)의 전주인 유우겸이었다.

의열전은 중원 밖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무황성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철령보도 공식적으로는 의열전에 속해 있을 정도다.

왕소군은 그 철령보로부터 날아든 전서구의 내용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의열전을 맡고 있는 유우겸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독안룡 이탁의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하북과 산서 일대의 분타에 경계령을 발동했다.

그 덕분에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온 신랑성의 세력을 하북과 산서의 분타들이 제 때 요격할 수 있었다.

비록 의열전주 유우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무황성의 대세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중원 내부를 관장하는 조직인 군림전(君臨殿)의 전주 예운림(睿雲林)이란 자가 야욕을 품고 왕소군을 방조하고 있는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유우겸은 의열전의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몸이 묻힌 만큼이나 그의 고심의 깊이도 깊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랑성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 무황성은 기필코 패배하고 만다."

유우겸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

그의 뒤로 백의의 문사 차림인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전주, 꼭 그렇지 만도 않소이다."

갑작스런 백의문사의 등장이지만 유우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사의에 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남궁대협(南宮大俠)! 군림전주 예운림의 숨겨진 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유우겸의 말에 남궁대협이라 불린 백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무황성의 쟁쟁한 인물들치고 자기 세력을 암암리에 키워 오지 않은 자가 없지 않소이까?"

백의문사의 말을 들은 유우겸은 탄식했다.

"세상에 알려진 무황성의 힘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외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 누가 앞장서서 자신의 힘을 소비하려 들겠소?"

"사실이 그렇긴 하오. 그래도 무황이 검을 높이 들기만 하면 무황성의 모든 힘이 다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역시 무황과 그의 후처인 국조미랑 왕소군이오."

백의문사의 말을 받아 유우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궁대협. 노부의 집안은 대대로 무황성에 충성을 바쳐왔소. 노부는 감히 성주와 주모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소이다."

"무황성의 충신인 유전주의 입장은 이해하오."

백의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는 없소. 남궁대협께서 노부를 도와주기만 하신다면 토곤의 야심을 꺾을 가능성은 충분하오."

 

무황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유우겸과 백의문사의 밀담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헌데 남궁대협이라고 불린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이기에 무황성의 기둥인 의열전 전주가 이토록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창평곡의 아침은 푸른색 온천수로 채워져 있는 연못 녹지(綠池)에 반사된 햇살에 서쪽 절벽이 아롱지며 시작된다.

흑왕은 언제 일어났는지 남쪽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백남빈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구석에는 강미루가 고개를 백남빈쪽으로 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추한 차림도 선녀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하지는 못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백남빈이 상아같은 뺨에 살짝 입술을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면서도 피곤했는지 쉽사리 깨어나지는 못하는 강미루다.

 

"정말 세상 밖에 서야만 세상을 잊게 되는구나."

혼자 오두막 밖으로 나선 백남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평곡의 아침은 세외선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계곡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게 한다.

“아아아!”

기분이 고조된 백남빈은 크게 한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북쪽 숲에서는 새들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고성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

 

백남빈의 고함을 들은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바탕이 반석(盤石)같은 자다.)

신가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거리가 먼 때문인지, 아니면 진법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장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공이 심후한 신가람을 제외하면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려장 무사들 중 누구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록 소리는 작게 들렸지만 지축이 순간적으로 흔들 하는 것을 신가람은 감지했다.

마치 항아리같은 지형인 창평곡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함 소리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사형(大師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신가람은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그 인물이라면 방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놈의 장소성이었으니 대사형은 아니다.)

신가람은 고함이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미간을 모았다.

철부지 처제가 실종된 근처에 젊은 사내놈이 함께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점이 신가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가람이 파진을 시도한 후로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신가람은 미혼진을 칠할 넘게 파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법에 빠져 실종되었던 네 명의 대려장 무사들을 발견했다.

네 명중 둘은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공포에 질려 들고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의 고함 덕분에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미혼진의 파진이 좀 더 쉽게 되었다.)

닷새 넘게 깎지 않은 수염으로 덥수룩해진 턱을 만지며 신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백남빈이 지른 고함이 신가람에게는 지남철(指南鐵)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신가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지난 닷새 동안 자신을 곤혹하게 만들었던 미혼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진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진법이 또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매망량(魑鬽魍魎)들이 사방에서 신가람을 위협하며 덮쳐들었다.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散魄陣)이 신가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삐익!"

한 차례 고함을 지른 후 백남빈은 휘파람을 불어 흑왕을 불렀다.

그리고는 껑충거리며 다가온 흑왕을 타고 그리 넓지 않은 분지를 신바람 나게 몇 바퀴 돌았다.

흑왕과의 아침 산책은 상처가 완쾌된 이후로 매일같이 행하는 일과였다.

 

곤히 잠들었던 강미루도 백남빈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다.

서둘러 녹지로 가서 세수를 한 그녀는 가지가지의 과일을 꺼내어 돌탁자 위에 놓았다.

때맞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두막으로 들어온 백남빈이 탁자 앞에 앉았다.

이곳 창평곡은 아무래도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이 나곤했다.

"잘 잤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백남빈이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창평곡에 들어오기 전의 백남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글맞은 수작이다.

"네! 공자님!"

하지만 강미루는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엿새간 두 사람은 부부처럼 지내왔다.

서로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서로가 없으면 단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선만은 지켰다.

비록 한 지붕 아래 몸을 눕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벼운 애정표현 이상은 하지 않아온 것이다.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사람은 동쪽절벽으로 갔다.

동쪽절벽은 백남빈이 내려왔던 곳이다.

당연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끝내 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곳에 출로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백남빈이었다.

한참 동안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두드려 보고 하다가 지친 두 사람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묶은 강미루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때마다 일렁거려서 그림자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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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내 아들이 아니다!

 

 

"으음!"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당혜선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머니...!"

고검추는 안도하며 당혜선의 무참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죽지 않았다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품에 안긴 채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주르르!

당혜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배어 눈 꼬리를 타고 좌우로 흘러내렸다.

"흐윽... 추아야."

당혜선은 오열하며 고검추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고검추도 분노와 회한에 오열을 느끼며 당혜선을 끌어안았다.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무참한 만행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고검추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두 모자의 뜨거운 오열은 어두워지는 청룡탄 위를 서럽게 물들였다.

 

***

 

“역시 생각한 대로다!”

사신각주의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그자는 만행이 벌어졌던 단애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었다. 거리는 대략 삼리 정도다.

“아랫놈들이 수집해온 첩보에 의하면 당가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놈의 성이 고씨인 걸 보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 당가년이 사람들 눈을 피해 고창룡과 붙어먹었다가 생긴 놈일 테고...”

사신각주는 삼리 쯤 떨어진 단애 위를 노려보며 흥분에 휩싸였다.

밤이고 제법 거리가 멀지만 사신각주의 눈에는 고검추와 당혜선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창룡의 아들까지 낳았다면 당가년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흐흐흐!”

사신각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가년이 아무리 독해도 복마신검을 아들의 목숨과 바꾸진 못할 것이다!”

사신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자는 당혜선이 아들을 데리고 선녀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당혜선의 아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혜선을 고문한 후 초혼전으로 죽인 척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당혜선이 죽어가는 걸 보면 숨어있던 당혜선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각주의 예상대로 마침내 고검추가 숨어있던 은밀한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검추를 잡아서 협박하면 독하기 이를 데 없던 당혜선도 어쩔 수 없이 복마신검의 행방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사신검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사신각주는 득의하며 단애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 사신각주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삐익! 삑!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새 울음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신각주의 귀에는 새가 우는 것같은 그 소리들에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다.

“대늙은이가 서남쪽에서 급속 접근중... 일백을 셀 정도의 시간 안에 내가 있는 이곳까지 도착할 예정...”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들을 해석하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때문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가공할 인물이 급속 접근중이다.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인물의 눈에 포착되어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당연히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를 생포할 시간 따위는 없다.

“똥물에 빠져 죽을 늙은이...”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서남쪽을 돌아보았다.

삐익! 삑!

새 우는 것같은 피리소리들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멀리고 허떤 인물이 한 가닥 유성처럼 날아오는 게 보인다.

“대늙은이!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팟!

사신각주는 저주를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사신검 중 하나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포기해야만 한다.

속이 너무도 쓰리고 쓰린 사신각주였다.

곧 사신각주의 모습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단애 위에서는 한 차례 격정의 물결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알몸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당혜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고검추는 무릎을 꿇고 당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는 사실...”

당혜선은 내적인 갈등이 심한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당혜선은 본론을 꺼냈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고검추는 하마터면 기함(氣陷)할 뻔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은 생모(生母)가 아니다."

당혜선의 말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고검추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귀가 멍멍해지고 주변 사물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듯했다.

이제껏 유일한 피붙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혜선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당혜선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검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내게는 인중지룡인 사형이 한 분 계셨다. 너는 바로 그 분의 아들이다."

"어... 어머니의 사형 되시는 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고검추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헉헉 대며 물었다.

당혜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의 성함은 고창룡... 무림인들은 그 분에게 철사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다. 그만큼 의지견정하고 용맹한 분이셨지."

"고... 고창룡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검추는 온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혜선은 흠칫했다.

"어... 어디서 그 분의 성함을 들은 적이 있느냐?"

"저녁 무렵에 옥여상이란 분을 만났었습니다."

고검추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옥여상!"

당혜선의 안색이 일변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만큼 옥여상이란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분을 아십니까?"

당혜선이 놀라는 모습을 본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무림인 된 자 치고 희세의 마녀 은발마희(銀髮魔姬) 옥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혜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부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놀라는 고검추에게 당혜선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설명해주었다.

"옥여상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들인 우내팔강(宇內八强)의 일인이며 마도 무림의 맹주격인 마천루(魔天樓)라는 문파의 지존이기도 하다."

"아!"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옥여상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사람에 들며 또 거칠고 사나운 마도 무림을 다스리는 마천루라는 문파의 주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은발마희 옥여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림인들은 사색이 된다.

그녀는 냉혹 비정한 성정을 지녀서 눈에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나이는 비록 삼십대이지만 그녀와 겨룰 수 있는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채 안된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하신 분인데... 사실은 마녀같은 존재였구나.)

고검추는 인간 세상의 존재같지 않았던 옥여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옥여상에게 은발의 마희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혜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옥여상이 왜 고검추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게 대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검추였다.

"그 마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더냐?"

당혜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검추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자에게 고창룡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으음..."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당혜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마음 속에서 격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당혜선은 결심한 듯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어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낙망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검추는 고개를 숙였다.

생모로 믿어온 당혜선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매, 즉 사고(師姑)로 변한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아버지시고 어미에게는 사형되시는 그 분은 아주 악독한 음모에 희생당해 돌아가셨다."

당혜선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철사자 고창룡에 연루된 그 치욕스런 비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인 다정관음 능벽운을 능욕한 일, 그 직후에 죄책감을 느껴 자결한 일등을...

 

-날수비연(辣手霜娥)

 

이것이 당혜선의 별호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인 그녀도 호천무맹의 맹주 십자검존의 제자였다.

호천무맹에서 사천당문이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독과 암기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사천당문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검존은 사천당문이 호천무맹에 헌신한 보답으로 당씨일족의 여식인 당혜선을 제자로 삼아준 것이다.

당혜선과 고창룡 외에도 십자검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당혜선이 고검추로 하여금 찾아가라고 했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이다.

당혜선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대사형인 고창룡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당혜선은 고창룡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었다.

잘 생겼고 다정다감하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고창룡이었다.

그런 그를 지척에서 보고 자랐으면서 반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혜선에게는 불운하게도 고창룡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누이동생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당혜선은 혼자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대사형 고창룡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려군(代麗君)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여인은 신분과 출신내력 모두가 비밀에 싸여 있었다.

분명한 것은 대려군이 대단한 미모와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고창룡과 대려군은 우연히 마주쳤으며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당혜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속내를 감추고 사형 부부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고창룡과 대려군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긴 해도 대려군의 고고한 기품과 다정한 마음씨에 반한 당혜선은 그녀를 친언니같이 여겼다.

호천무맹의 사람들 몰래 고창룡과 대려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당혜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혜선 자신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기거했다. 언젠가는 사형이 자신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벋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세 남녀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윽고 대려군은 고창룡과의 사랑의 결실을 잉태하였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대려군이 임신한 지 팔 개월 째 되던 때였다.

고창룡이 갑자기 미쳐서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한 후 자결한 것이다.

그 일은 당혜선에게는 물론 대려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난륜을 전해들은 대려군은 극도의 상심에 빠졌으며 그 충격으로 두 달 빨리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그 사내아이는 물론 고검추였다.

 

<세상 모든 사내를 저주하겠다!>

 

대려군은 출산한 직후 그같은 저주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핏덩이인 아들까지 내팽개친 채...

당혜선은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고검추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검추가 대사형 고창룡의 아들임이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호천무맹을 떠나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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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장춘곡의 남녀

 

 

초가집 내부는 단촐하고 검박(儉朴)했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가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방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큼직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앞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다.

먼저 여인의 체격이 확 눈에 뛴다.

그녀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를 지녀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 만하다.

팔 하나가 어지간한 장정의 허벅지같이 우람하고 청동으로 빚은 듯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전쟁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추하지가 않다. 비록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긴 하지만 단정한 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 얼굴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 역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넉넉한 저고리에 감싸인 젖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크지만 허리는 확실히 들어갔고 비록 엄청나게 굵기는 해도 두 다리 역시 늘씬하여 절로 시선을 잡아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은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전모 냉약빙!

 

바로 그녀였다.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 연남천을 오라비로 두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인인...

십사 년의 세월이 흘러 냉약빙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십사 년 전 그대로였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도 거의 변화가 없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또 내공이 정심한 덕분에 그녀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처자로 보인다.

잔혹한 세월의 흐름도 전쟁의 여신같은 그녀의 모습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어. 석련(石蓮)의 잎사귀!”

질풍같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 단삼의 소년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채 연꽃 잎사귀 하나를 냉약빙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미는 것은 석련이라는 바위에 피는 희귀한 연꽃의 잎사귀였다.

석련은 곤륜산의 특산으로 이곳 장춘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석룡벽(石龍壁)이라는 곳에서만 자생한다.

헌데 단삼소년은 일다경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왕복 육십여 리나 되는 그 석룡벽까지 달려가서 연꽃잎을 따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의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겨우 육십 리를 왕복한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지다니... 제대로 전궁만리비의 경공을 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냉약빙은 단삼소년을 바라보며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좀 봐줘 누나. 다음에는 잘 할게!”

단삼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소년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것은 소년에게 냉약빙은 이 세상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봐라! 빗물이 묻었는지 보자.”

냉약빙은 소년을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렀다.

“만일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앞으로 삼 일 간 면벽폐관 해야만 한다.”

냉약빙의 엄한 음성에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돼?”

소년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왔는데 빗방울이 몸에 묻었는지를 조사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사실 경신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몸 주위에 진공의 막이 생겨 빗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같은 경지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냉약빙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냉약빙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신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꾀를 부려도 소용없다.”

스윽!

냉약빙은 준엄하게 말하며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비록 단삼 소년이 육척에 가까운 키를 지녔지만 냉약빙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아이쿠!”

피잉!

단삼소년은 냉약빙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자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초가집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딜!”

콱!

하지만 냉약빙의 차가운 교갈이 일며 소년의 오른쪽 손목이 마치 솥뚜껑같이 큼직한 손에 움켜쥐어졌다. 비록 소년의 몸놀림이 경이적으로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냉약빙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에이! 잡히고 말았네!”

소년은 냉약빙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입을 삐죽거렸다.

“네 녀석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스슥!

눈을 흘기는 냉약빙의 큼직한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소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행여 소년의 몸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었을까 조사하는 것이었다.

헌데 냉약빙의 손이 막 소년의 사타구니 부분을 쓰다듬고 지나갈 때였다.

(아이쿠!)

소년은 얼굴이 화끈 붉어지며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내아이가 십대 후반의 나이라면 한창 양기가 충천할 때다. 솥뚜껑같이 큼직하지만 어쨌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불끈 곤두선 것이었다.

“...!”

한 겹의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불기둥의 느낌에 냉약빙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움찔했다.

“헤헷! 기회당!”

스팟!

소년은 장난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제압당한 손목을 미꾸라지처럼 냉약빙의 손에서 빼내며 문밖으로 날아갔다.

“검한(劒恨)아!”

냉약빙은 급히 달아나는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헤! 할아버지에게 다녀올 게!”

멀리서 소년의 장난기 서린 음성만이 여운을 끌며 들려올 뿐이었다.

“휴!”

냉약빙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검한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냉약빙은 소년의 늠름한 실체를 만졌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튼튼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바닥에 생생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삼 년 전부터는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었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냉약빙은 직접 소년을 목욕시켜주곤 했었다.

소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냉약빙이 몸을 닦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아직 붙지 않은 소년의 여린 몸을 닦아주는 게 냉약빙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소년을 통해서 육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삼 년 전부터 소년은 냉약빙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귀엽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 변화가 생겼었다. 목소리도 좀 굵어지고 맨숭맨숭하던 불두덩에 가뭇가뭇 어른의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의 키가 어느덧 오척을 넘겼고 뼈대도 제법 굵어졌지만 냉약빙은 별 생각없이 씻겨주었었다.

그전까지는 냉약빙이 고추를 만지고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닦아줘도 신경 쓰지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냉약빙의 손길이 아랫도리 쪽으로 접근하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몸을 배배 꼬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삼 년 전부터 소년은 혼자 목욕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약빙으로서도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직접 목욕시켜주는 걸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난 지금 소년의 몸에서는 성인의 모습이 문득 문득 느껴졌다.

방금 전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만져본 소년의 몸 가락은 이미 더 이상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추가 아니었다. 얼추 느끼기에도 한 뼘은 충분히 됨직한 튼실한 양물이었다.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기련산에서 어린 검한이를 거둔 것이 벌써 십사 년 전의 일이라니...!)

소년의 양물의 감촉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냉약빙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초가집 밖으로 달아난 소년은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고독마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소년에게 검한(劒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검(刀劍)에 운명을 건 자신의 지난 생애를 한스럽게 생각해온 고독마야로서는 소년이 무림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사방무신 중 한명이었던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무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고독마야는 소년에게 검(劒)을 한(恨)스러워한다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소년 이검한은 자신의 출신내력을 모른다. 기련산에서 변을 당할 때 나이가 서너 살에 불과했기도 했지만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이검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은 이검한은 굳이 고독마야와 냉약빙에게 부모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검한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냉약빙과 고독마야가 피붙이에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양육을 해준 덕분이다.

이검한은 철이 들자마자 냉약빙과 고독마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냉약빙과 고독마야! 그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고독마야!

경신술로 천하무적인 냉약빙!

그들의 지도하에 이검한은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도 이검한은 능히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검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남과 싸워보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검한은 고독마야의 제자다.

하지만 이검한이 알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은 사저(師姐)뻘인 냉약빙이 전수해준 것이었다.

고독마야는 이검한에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만을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내공 외에 경신술 등 잡다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모두 냉약빙의 몫이었다.

냉약빙은 이검한을 친 아들처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검한을 보살펴온지라 냉약빙은 종종 자신이 이검한을 낳은 생모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한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냉약빙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가득했다.

(검한이도 머지않아 자기를 낳아준 생모와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저 아이가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냉약빙의 새하얀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음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는 냉약빙이었다.

그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냉약빙이 이검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부디 언제까지나 지금의 그 밝은 성품을 잃지 말거라. 검한아!)

냉약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검한이 사라진 초가집 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장대같이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덧 가늘어져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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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겁난(劫難) 중의 인연 (2)

 

 

한동안 미친 듯이 사방을 뒤지던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다시 모옥 앞으로 왔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철선동시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면혈도가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고 모옥에 불을 질렀다.

곧 불꽃이 일렁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투타탁! 투탁!

불속에서 뭔가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뒤통수에 대고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한 곳이 못되는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마면혈도는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계곡의 입구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마면혈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철선동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말대가리... 아직 멀었다. 네놈의 심력(心力)은 좀 더 소모되어야 한다. 흐흐흐... 몽선도(夢仙圖)의 주인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황이 뭐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몽선도...!

몽선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얻기만 하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황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지금 철선동시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과 음모의 근원은 몽선도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불측한 의도를 품고 있는 철선동시도 걸음을 옮겨 비련곡을 빠져 나갔다.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자가 혹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휴의다.

철선동시는 불타는 모옥이 만든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밟고 곡구에 다다랐다.

화를 내며 먼저 갔던 마면혈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는 바위섬들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구나.”

임청우는 불꽃을 보면서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악귀에게 유린당한 어머니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집은 불타고 있으며, 이제 자신은 농산을 떠나야한다.

임청우 모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은 모옥 앞 초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과 약초들뿐이다.

애잔한 아쉬움이 임청우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이미 그녀와의 정이 오래전에 끊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세속에서 말하는 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임청우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청우는 고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은 네가 질렀느냐?”

임청우는 이같은 음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그러나 위엄으로 가득 차있으며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한 번 듣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있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불은 네가 놓았느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임청우는 엇!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있었다. 머리는 반백이고 네모 난 얼굴에는 짧게 깎은 수염이 은빛을 발한다.

으악!”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임청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말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은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 족했다. 노인의 어깨에 걸려있는 장검조차도 주인의 위풍에 의해 있는 둥 마는 둥하다.

노인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비틀거리는 임청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노인의 커다란 손에서 흘러나와 임청우의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임청우는 떨리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나 감히 노인의 눈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데 임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놈...!)

노인은 마음속의 커다란 놀라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히 다른 손으로 임청우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천골(天骨)이로다!)

임청우의 골격을 만져보는 노인의 눈에 놀라움과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임청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노인조차 임청우만한 골격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게다가 임청우의 몸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말 그대로 갈지 않은 원석인 셈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구나.)

임청우의 골격을 어루만지고 몸을 살펴보면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생각지도 않게 기막힌 보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임청우가 용기를 내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야(老爺)께서는 낮에 길게 소리쳤던 그분이십니까?”

길게 소리를 쳐? !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말이로군.”

검주 유소기요?”

허허허.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인물이지!”

노인은 진심으로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고 노부는 노부다. 노부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진 않아. 실상 지르지도 못하지만...!”

노인은 웃으면서 임청우의 손을 놓고 절벽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임청우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네 집이냐?”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인의 음성은 마치 사방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아니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임청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산봉과 그 위의 하늘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이곳에 이름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비련곡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비련곡?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야. 자당(慈堂)은 아마도 한이 많으셨던 분인 모양이군.”

“...”

자당은 어디 계시는가?”

노인이 임청우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임청우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흠칫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청우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있기만 했다.

노인 옆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임청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기묘한 기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폭염 중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청량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이 지나갔다.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훨씬 넘어 인시(寅時)가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연히 고개를 들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노부는 우협(愚俠) 장백승(莊百勝)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별호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협객이라니...

우협 장백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인지라 이 노인이 저 일왕(一王) 금포염왕과 비견되는 일세고수 일협(一俠)임을 알 리 없었다.

무림의 은원 때문에 환난을 겪은 것 같거늘 무림을 모른다?”

장백승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함께 살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청우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노부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저는 노야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람의 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럼 노부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게 되자 임청우는 느긋한 마음을 회복하고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선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검술(劒術)이다.”

장백승이 짊어지고 있던 검을 풀어서 내리며 말했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런 검술입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보겠느냐?”

노야께 제가 검술을 배운다면 말대가리같이 생긴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임청우는 혈도를 휘두르던 마면혈도의 공포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

장백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면혈도를 만났구나!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노야께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장백승은 곡구를 힐끗 보다가 탄식하고 말했다.

마면혈도... 그놈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이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건만...”

그는 임청우가 여전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말을 이었다.

당금의 무림에는 최절정으로 꼽히는 열 두 명의 고수가 있지. 그들을 사람들은 일왕(一王) 일협(一俠) 삼괴(三怪) 칠절(七絶)이라 부른다.”

임청우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장백승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만난 마면혈도는 삼괴의 둘째로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열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노부의 검술을 배워서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노부라 하더라도 그놈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장백승을 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장백승의 기도는 마면혈도 따위가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장백승이 태양이라면 마면혈도는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장백승이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니...

장백승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노부는 마면혈도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노야께선 함자를 <백승(百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이런 경우를 들어서 허명(虛名)이라고 하는 것이지. 백승은 이름뿐이야. 젊었을 때 노부를 가르치신 은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임청우가 다시 물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것은 무()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까?”

장백승이 그렇다고 끄덕이자 임청우는 또 물었다.

노야께서는 그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장백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명은 여기에도 있지. 일왕 일협 중의 일협이 바로 우협, 이 바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청우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일왕 다음에 일컬어지는 일협이라면 당연히 그 무공의 강함도 측량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헌데 아무도 이긴 적이 없고 이길 수도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로 보아 마면혈도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만약에 노부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이걸 증표로 종적을 물으면 노부에게 안내해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백승은 풀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임청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 장식이 없는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인데 단지 손잡이 부분에 한 마리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투박하게 음각되어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임청우가 장백승의 따스한 말에 감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협 장백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신선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장백승은 임청우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 중에 홀홀히 밤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마치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남겨져 있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장백승의 마치 천신(天神)같던 기도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 가서 노야를 찾는단 말입니까.”

임청우는 장백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장백승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더욱 초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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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만나다!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날 따라오고 있는 것같다.)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강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숭산에서 안탕산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강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끈적한 시선이 등봉현의 객잔을 떠난 직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은 후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강유는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가고 있는 관도에는 제법 행인이 많다. 강유처럼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마차나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으로 돌리기에는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도 집요하고 확실하다.)

이마를 찡그리는 강유의 백보 쯤 앞쪽에 주점이 하나 보였다.

경치 좋은 강가에 위치해서인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주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자가 있다. 다만 내 능력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강유는 생각에 잠겨 주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달마독명안을 외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저 시선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암기한 후 태워버리라고 고불참회기에 적어놓았었다.

고불선사의 당부에 따르기 위해 강유는 밤새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을 외웠었다.

그 과정에서 강유는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일부 깨닫게 되었다.

달마독명안은 육신통에 필적하는 경이적인 능력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강유의 감각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눈과 귀가 몇 배나 밝아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유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맛보기도 이 정도인데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하게 되면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는 셈이 되겠구나.)

강유가 달마독명안의 힘에 새삼 감탄하며 주점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냐?”

갑자기 주점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치려던 강유도 걸음을 멈추며 문이 열려 있는 주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거냐? 이 따위 유리조각으로 사기를 치려하고?”

주점 입구의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누군가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자의 왼손에는 자두 씨만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주점 주인과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인물은 늘씬한 체형의 여자였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그 여자는 바로 황금성의 성주인 진상파였다.

 

지난 밤 진상파는 들키지 않고 황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래 돈을 주고 뭔가를 사본 적이 없는 진상파다.

당연히 돈을 갖고 다닐 이유와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고 허기가 지면서 진상파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서 황금성이 있는 금릉까지 가려면 열흘 가까이 걸린다.

그동안 먹고 자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가까운 황금성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왕성의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황금성 지점에 들렸다가는 간단히 사로잡혀 제왕성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진상파는 황금성 지점을 찾아가는 건 포기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다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 주점에 들어와 국수를 한 그릇 사먹게 되었다.

지닌 돈은 없지만 끼고 있는 반지로 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도저히 진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게 금강석(金剛石)이라고? 개 풀 뜯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은 왼손으로 쥔 반지를 진상파 얼굴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진상파는 그자의 무례함에 극도로 불쾌해졌지만 즉각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점원들 뿐 아니라 주점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 탓이다.

이런 수모와 난감한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진상파였다.

이만한 크기의 금강석이면 비옥한 땅 수만 평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길바닥 장사치인 나도 안다. 헌데 겨우 국수 한 그릇 먹은 값을 이걸로 치르겠다고?”

탕탕!

주인은 식칼로 계산대를 연신 내리쳐서 흠집을 내며 진상파를 윽박질렀다.

(귀티 나 보이는 여자인데 돈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흥미가 생긴 강유는 걸음을 멈춘 채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성격상 타인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강유는 그 여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 주점 주인의 패악질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으면 그깟 국수 한 그릇 그냥 말아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뻔뻔하게 사기를 치려고 해서 날 열 받게 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진상파의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 저런...”

주인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군.”

저러다 사고치지.”

보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눈치 빠른 손님들은 주인이 진상파를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찼다.

진상파를 협박하면서도 주인의 툭 튀어나온 눈알이 수시로 진상파의 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난생 처음 보는 절세미녀인 진상파에게 엉큼한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게 금강석이 아니라고 쳐요.”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지의 고리를 이루는 금의 무게만도 두 돈이 넘으니 국수 한 그릇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칠 거예요.”

진상파는 주인이 쳐든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장사치인지라 반지의 고리가 금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파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있는 터라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구리를 금이라고 속이려 들어?”

그자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식칼을 쳐들어 진상파를 내려칠 듯이 위협했다.

진상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게 할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자의 의도와 달리 진상파는 미간은 찡그리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대신 보고 있던 주점 안의 손님들 일부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냐! 네년이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주인이 독이 올라 식칼을 진상파의 목에 대려고 할 때였다.

!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움켜잡는 강철 족쇄같은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뭐야?”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진상파도 흠칫 하며 주인의 손목을 틀어쥔 인물을 돌아보았다.

그만하시오 주인장. 분풀이치고는 도가 지나치지 않소?”

칼 든 주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강유였다.

그가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당신 누군데... 어흑!”

강유에게 눈을 부라리며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던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둑!

강유가 주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한 것이다.

(... 무림인!)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와락 겁에 질렸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그자는 강유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분 소저께서 드신 음식 값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러니 그냥 보내드리시오.”

강유는 주인의 손을 놔주며 말했다.

이봐요! 귀하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보고 있던 진상파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신세를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진상파인지라 강유의 개입이 고맙기보다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이걸로 이분 소저의 식대를 함께 계산하시오.”

찰랑!

강유는 진상파의 말은 무시하고 몇 개의 동전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합죠. 식사는 뭘로 준비해드릴깝쇼?”

촤락!

주인은 급히 동전 쓸어서 챙기며 강유의 눈치를 보았다.

길을 서둘러야하니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준비해주시오.”

강유는 고개를 돌려 주점 안의 빈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일이 원만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마음 졸이고 있던 손님들은 다시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요.”

찰랑!

주인은 강유가 준 동전을 불룩한 아랫배에 찬 전대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

그런 주인의 어깨를 강유의 손이 움켜잡았다.

...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주인은 겁에 질려 강유의 눈치를 보며 돌아보았다.

이분 소저에게 돌려드릴 게 있지 않소?”

강유는 웃으면서 주인이 그때까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아이쿠 이런!”

주인은 짐짓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마빡을 쳤다.

국수 값은 받았으니 이 반지는 돌려드리겠소.”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반지를 진상파에게 내밀었다.

강유 옆에 서있던 진상파는 불쾌한 표정으로 반지를 낚아챘다.

(아깝구만. 유리조각인지는 몰라도 예쁘장해서 마누라에게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받아요.”

진상파는 점원의 안내를 따라 빈자리로 가려는 강유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어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소저! 나는...”

인정이니 선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기필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대접한 대가로 수만 냥짜리 반지를 받을 수는 없군요.”

강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지를 보았다.

귀하는 이 반지의 보석이...”

진상파는 눈썹 끝을 조금 올리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진품의 금강석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들어볼까요?”

강유에게 흥미가 생긴 진상파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상파는 지금껏 숱한 미남자와 귀공자들을 보아왔다.

그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청년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사내답게 느껴진다는 정도였었다.

그랬는데 강유의 말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소저 자체가 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강유의 그 말이 진상파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내...)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움찔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옥(寶玉)같은 귀인께서 한갓 유리조각 따위로 자신의 존엄을 흠집 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강유는 진상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물이다. 탁월한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강유의 말을 들으며 진상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영친께서 엄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지만 소생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반지를 받게 되면 자칫 협기(俠氣)를 부리는 척 해서 이익을 챙겼다는 오해를 사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뜻은 알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던 진상파의 눈에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반지인 쌍룡환(雙龍環)이다.

그 쌍룡환은 황실에서 나온 것이라며 구숙정이 가져다주었던 패물함을 뒤적이던 중 저절로 진상파의 손가락에 끼워졌었다.

(이거라면...)

진상파는 별 생각없이 오른손 중지에서 쌍룡환을 뽑았다.

원래 그녀는 쌍룡환으로 국수 값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제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룡환은 좀처럼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었다.

어쩔 수없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금강석 반지를 뽑아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려다가 봉변을 당했었다.

!

헌데 이번에는 혹시 하며 뽑자 쌍룡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조화람!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빠지더니만...)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 쌍룡환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어요.”

소저!”

우연히 갖고 있게 된 반지인데 보다시피 조악하여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에요. 이것마저 거절하면 화내겠어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의 손에 쌍룡환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 반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쌍룡환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명(高名)...?”

쌍룡환을 건네 준 진상파는 강유의 얼굴을 기억해두려는 듯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강유라고 합니다. 안탕산에 살고 있지요.”

진상파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강유는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강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냉상영이나 분이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들이지만 눈앞의 이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 비하면 처지는 면이 있다.

안탕산의 강유소협... 언제고 한번 안탕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강유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상파는 주점을 나갔다.

살펴가십시오.”

강유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진상파는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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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극한 정성

 

 

비록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함께 잠자리를 만들자고 말하기 쑥스럽다.

그래서 백남빈은 혼자서라도 이슬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마련해볼 생각으로 숲으로 갔다.

강미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백남빈을 부축하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녀도 드디어 백남빈의 뜻을 알아차렸다.

몸도 편치 않으니 제게 맡기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을 바위에 앉아있게 한 후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렀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들은 자르고 큰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줄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들을 뗏목을 엮듯이 엮어 세우자 한쪽 벽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미루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게 척척 잘해냈다.

"소저는 최고의 목수요."

구경하던 백남빈이 미안해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백남빈이 칭찬하는 말을 들은 강미루는 쌩긋 웃으며 나무줄기를 훑어 잎들을 백남빈을 향해 뿌렸다.

백남빈도 역시 나뭇잎들을 훑어 뿌렸다.

 

몇 차례의 장난질이 오가고 강미루는 다시 나무를 자르고 묶었다.

머잖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백남빈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도왔다.

이날 그들은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 짓는데도 그렇게 많은 나무가 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남빈은 따뜻한 온천 연못가에서 흑왕이 날라온 나무들로 집을 짜 맞추었다.

지붕에는 나뭇가지들을 얹고 진흙을 개어 발랐다.

따뜻한 창평곡의 기온 덕분에 지붕은 잘 말랐고 해가 질 무렵 오두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리하게 몸을 쓴 탓에 아물어가던 강미루의 가슴과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은 상체가 벌겋게 물들었고, 한 사람은 하체가 벌겋게 물들어 서로가 보기에 몹시도 처참하고 가련했다.

몇 개의 열매를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지혈하는 것도 잊고 곯아 떨어졌다.

 

***

 

백남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이 그로 하여금 눈뜨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품에는 강미루가 피곤에 지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백남빈은 참기 힘든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여 강미루를 깨울까봐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왼쪽 다리는 그의 것이 아닌 양 고통 외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었다.

비록 급한 대로 상처를 싸매긴 했지만 그전에 말을 달리면서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자꾸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다시 치료해야겠구나)

백남빈은 청랑검을 꺼내 허벅지의 퉁퉁 부은 상처에 대고 그었다.

싸악! !

쇠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청랑검의 날이 스치자 고름이 와락 쏟아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누렇고 뻘건 고름은 보기에도 끔찍할 뿐 아니라 지독한 냄새까지 풍긴다.

계곡 밖이었다면 이토록 상처가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평곡의 따뜻한 기온이 그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자니 식은땀이 팍팍 솟았다.

고름이 남지 않도록 빨아냈으면 좋겠는데 입이 상처에까지 닿지 않았다.

고름을 짜내면서 강미루의 가슴에 난 상처도 곪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약도 없는데 이러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죽는 건 아닐까?)

백남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숱한 사경을 경험한 내가 이런 정도의 상처에 죽기야 할려고...)

애써 위안해보았지만 크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여 죽는 일도 허다하므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미루가 깨어났다.

왜 그래요? !”

눈을 부비며 일어나던 강미루는 쩍 벌어진 백남빈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는 퉁퉁 부어있는데다가 고름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강미루는 자기가 낸 상처로 인해서 백남빈이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고 있던 백남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시오 미루. 당신이 내 다리를 찌른 것은 그때 상황으론 잘한 일인데 왜 운단 말이오? 나도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내지 않았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머리칼을 가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플 뿐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강미루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제가 나빴어요.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백남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미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설령 이 상처로 인해 죽는다 해도 당신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상처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공자!”

다정한 말을 들은 강미루는 백남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강미루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백남빈이 다시 말했다.

"진심이오 미루,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가니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소."

백남빈은 강미루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열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를 방불케 할만큼 뜨거웠다.

 

백남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미루는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고름을 다 빨아낸 후였다.

또 체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기 위해 백남빈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커다란 나뭇잎을 모아 부채마냥 부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강미루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청초한 백합같아서 백남빈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백남빈의 다리는 다시 부어오르고 있었다.

열도 금방 올라가서 목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백남빈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고 애쓰며 강미루의 손바닥에 몇 마디를 적었다.

 

<온천물 속에 나를 넣어 주시오. 중독은 반지로 치료할 수 있으니 입에다 반지를 물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남빈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쉽지 않구나! 쉽지 않아.)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곡 일대에 구축되어 있는 진법은 만만하지가 않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켜서 그때까지 구사한 파진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간단하지만 원론적인 이치에 의지하여 진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반면 신가람은 진법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오히려 파진(破陣)이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진법이 일으키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일이 대조하다 보니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뚫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처제의 안위가 걱정이다.)

신가람은 조금씩 가슴이 타들어갔다.

정황상 말썽쟁이 처제가 이 진법에 빠진 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다.

말괄량이라 소문났지만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많은 강미루다.

어린 처제가 위험에 처해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자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신가람이었다.

(진법의 중심부가 어딘지만 알아도 파진이 좀 더 수월할 텐데...)

신가람은 한숨도 자지 못해 시린 눈을 문지르며 다시 진법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강미루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덧 대려장의 강인한 홍의창 강미루가 아닌 연약한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타액이 닿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독으로 변하는 온천 속에 백남빈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지금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을 것 같았다.

하물며 백남빈이 정신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따라주어야 한다.

간병하느라 기진맥진한 강미루는 백남빈의 몸을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연못으로 갔다.

연못가에 이르자 백남빈의 왼손에서 오채금환을 빼어 입에 물렸다.

하얀 이빨 사이에 물려진 오채금환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입에 문 채 백남빈이 죽어가는 중임을 떠올리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끝없이 일었다.

오채금환을 물고 있는 백남빈의 벌거벗은 몸은 연못 속에 천천히 잠겨들어 머리만이 물위에 떠 있었다.

무릎까지 온천수에 다리를 담근 강미루는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백남빈의 머리가 물속으로 갈아 앉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펄펄 끓는 온천수에 잠기자 백남빈의 머리는 뜨거운 찜통처럼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강미루도 연못의 열기와 백남빈의 열기로 인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온천 속에 한 사람은 몸을 담그고 한 사람은 다리를 담근 채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까무라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백남빈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강미루의 몸도 몇 번을 땀으로 뒤집어썼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해는 다시 뉘엿뉘엿 서쪽에 걸쳐져 있고, 천리마 흑왕만이 두 사람이 염려스러운지 다가와서 힐끔힐끔 보다가 가곤 했다.

 

***

 

지면 아래 깊은 분지인 창평곡에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창평곡 밖에서 밀려든 그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강미루가 먼저 정신이 들었다.

몸이 가뿐해져 있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도 백남빈의 머리만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백남빈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의 열이 많이 내린 것이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고 나서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입에 물고 있는 반지는 이빨에 걸려 있었지만 긍방이라도 떨어질듯 말듯 위태로웠다.

강미루는 재빨리 손을 뻗쳐 반지를 잡은 후 백남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평온해진 백남빈의 숨결은 폭풍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했다.

비로소 강미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나도 따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죽었다면 따라 죽을까?)

강미루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 가슴의 상처는 작은 흉터만 남고 다 아물어 버렸구나. 이 연못의 물이 정말 신통한데... 이 사람의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겠지?)

백남빈을 연못에서 좀 더 끌어내 허리 아래만 온천수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난 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릴 동안 과일이나 몇 개 따올 생각으로 근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왕을 불렀다.

몸이 나른하여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흑왕의 등에 오를 수는 있었다.

흑왕이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되자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강미루가 숲으로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열매들을 따서 돌아 왔을 때 백남빈도 정신을 차리고 나른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땀을 푹 뺀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알몸의 백남빈을 연못에서 끌어내어 풀잎 웃도리를 감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쁨에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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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뜻밖의 제안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냉약빙은 고독헌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의 말에 유령마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오 냉여협?”

하지만 그자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냉약빙이 지니고 있는 굉천벽력탄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며 냉약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비겁한 자들, 너희들은 평생 가도 오라버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차갑고 오연한 음성으로 알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들 마음에 달렸어요!”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한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세 권의 낡은 비급이 들려 있었다.

“오오! 저...저것은 혈마대장경이다!”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환호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렇다. 냉약빙이 쳐든 것은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혈마대장경을 본 군웅들의 눈이 탐욕과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유령마제 등 삼인은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계집, 무슨 꿍꿍이지?)

그자들은 갑자기 냉약빙이 혈마대장경을 쳐들자 환호하는 대신 이마를 찌푸렸다.

냉약빙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고독애로 몰려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한 이유는 이 혈마대장경 때문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말에 독천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는 말이오. 냉여협!”

그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냉약빙의 손에 들린 혈마대장경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라버니께서는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으세요.”

냉약빙은 차가운 표정으로 군웅들을 대표하는 삼인의 고수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 세 권의 비급의 처분을 당신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셨어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끝내 오라버니께 대항하다가 몰살당할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자유예요!”

“그, 그럴 수가...!”

“혈, 혈마대장경을 내놓다니...!”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냉약빙의 제안은 실로 천만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선뜻 포기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소란이 일어났다.

유성신검황 등의 안색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고독마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비록 무형지독에 중독되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과 동귀어진 할 수도 있었다.

유성신검황이 군웅들의 소란을 저지하며 냉약빙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냉여협!

이어 그는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며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자리에 모인 세 거두는 머리를 맞대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즉 내공으로 뜻을 전하는 수법을 써서 숙의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일각(一刻;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세 거두는 숙의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성신검황이 삼인을 대표하여 냉약빙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삼인이 연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빌어먹을, 혈마대장경을 자기들끼리 나눠먹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헛물만 들이킨 꼴이 아닌가?)

군웅들은 저마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이지러트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독천존과 유령마제 등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거니와 현재 고독애 일대에는 세 거두의 수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잘 생각했어요!”

유성신검황의 말에 냉약빙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마대장경을 양손으로 나눠들었다.

“받아요.”

피핑!

냉약빙은 세 권의 혈마대장경을 각기 한 권씩 삼인에게 날려 보냈다.

파팟! 팟!

유성심검황등은 행여 남에게 빼앗길 새라 급히 몸을 날려 자신들에게로 날아드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진품이다!)

혈마대장경을 받아든 즉시 뒤적여본 삼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들이 받아든 비급은 틀림없이 혈마대장경임을 확인한 것이다.

“경고해 두겠어요! 이 시간 이후 고독애 주위를 얼쩡거리는 자는 나 냉약빙과 오라버니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참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냉약빙은 장내를 둘러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독천존이 혈마대장경을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냉약빙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흘흘, 알겠소이다. 냉여협! 노부는 그럼 이만 실례하오!”

쐐애액!

독천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고독애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군웅들 중에 섞여있던 독천존의 수하들도 그자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뒤이어 유령마제도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마지막으로 유성신검황은 회의와 갈등의 눈빛으로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유성신검황마저 떠나자 나머지 군웅들도 앞을 다투어 고독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삽시에 장내는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뿐...

“어리석은 인간들...!”

냉약빙은 군웅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넉넉잡아 십오 년, 십오 년만 기다려라! 네놈들에게 오늘의 빛을 받으러 갈 아이가 있을 테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고독헌으로 들어갔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감회에 찬 눈길로 자신의 무릎에 누인 사내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라면 고금제일인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경지를 초월해 보려던 나 연남천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실로 오랜 만에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장차 무림이 운명을 바꾸어놓을 천고기재와 천하제일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고독애!

운명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 * *

 

세월여류(歲月如流)라 했던가?

곤륜산 고독애에서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이 절반 가까이 몰살당한 혈겁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 십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은 공포와 근심으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십사 년 전에 벌어진 두 가지 참사로 인해 무림에 머지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대혈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두 가지 겁난(劫亂) 중 첫째는 물론 고독애의 혈겁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지방을 제패하고 있던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결국 혈마대장경이 사방무신 중 세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으로 고독애의 겁난은 해소되었다.

그 후 고독애 사방 백 리는 금역(禁域)으로 화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겁난은 신주사패천에 들던 태양곡이 의문의 궤멸을 당한 사건이었다.

태양곡이라면 불과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에 올랐던 일대기협 태양신협 이청천의 거처가 아닌가?

바로 그 태양곡이 고독애의 겁난이 있기 며칠 전에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이 경악하며 달려갔지만 태양곡은 이미 온전한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된 후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흉수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개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혈겁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이었건만 흉수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태양곡의 멸망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태양곡의 참사를 장차 무림을 피로 씻을 대겁풍의 전조로 여기고 전전긍긍했다.

혹자는 미리 겁난을 피하기 위해 세외로 은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중원무림에는 유래 없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같은 평화가 십사 년 간 이어지자 무림인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았다.

현자(賢者)나 노강호(老江湖)들은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했다.

작금의 평화가 정말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진정한 평화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독한 천하제일인의 거처가 있는 곤륜산 고독애에서 바야흐로 향후 무림 천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음을...!

 

***

 

우르르릉!

구름 속에서 뇌성이 운다.

마치 굶주린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공복으로 울어대는 듯한 뇌성이다.

곤륜산 고독애 일대는 짙은 먹장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아!

어느 순간 시커먼 먹장구름은 장대같은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의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듯 요란하다.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고독애의 북쪽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지하에 대량의 열천(熱川)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봄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장춘곡(長春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장춘곡 끝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서있다.

십사 년 전부터 금지가 된 고독애 근처에 누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일까?

“차핫!”

문득 초가집 안으로부터 낭랑한 소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펑! 쐐애액!

이어 초가집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초가집 밖으로 질풍같이 뛰쳐나왔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단삼(單衫)을 걸친 소년인데 육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녔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달리 소년의 나이는 잘해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한 듯 단아하다.

단순히 잘 생긴 것이 아니라 숯같이 짙은 눈썹에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쐐애액!

초가집을 박차고 뛰쳐나온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계곡 밖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이 내달리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줄기 검은 선이 장춘곡 밖으로 쭈욱 뻗쳐나간 듯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삽시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채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

장춘곡 밖에서 다시 낭랑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예의 그 단삼 소년의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장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년의 건장한 모습이 계곡의 어귀에 다시 나타났다.

스파앗!

장춘곡 입구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소년은 이미 한 걸음에 계곡을 날아 건너 초가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누나! 다녀왔어!”

초가집 안으로 뛰어든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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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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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章

 

               天罡摩罅維深經

 

 

천강마존은 담담한 눈길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펼쳐보아라.]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순간, 그의 두눈은 갑자기 크게 떠졌다.

 

<무적팔해(無敵八解).>

 

두루마리에는 실로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___제 일해(一解) 개천뢰명(開天雷鳴),

___제 이해(二解) 폭화소천(瀑火燒天),

___제 삼해(三解) 붕천압지(崩天壓地),

___제 사해(四解) 벽뢰파산(霹雷破山),

___제 오해(五解) 노룡자천(怒龍刺天),

___제 육해(六解) 단천복지(斷天覆地),

___제 칠해(七解) 유성파천(流星破天),

___제 팔해(八解) 멸혼극참(滅魂極斬),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백 년(四百年) 전의 기인 무적도군(無敵刀君)이 남긴 무공이다. 도법(刀法)이나 검법(劍法) 어느쪽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극강함과 패도적인 위력은 천하에서 또한 으뜸이다. 내일부터 무적팔해의 수련에 들어갈테니 미리 기억해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기검룡의 얼굴에는 힘찬 투지가 불끈 치솟았다.

 

X X X

 

철썩___ 쿠르릉...!

쏴___ 아___!

교교한 월광(月光)이 파도를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파석도(波石島).

그 바위의 정상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칠 척(七尺)에 달하는 거구에 위풍당당한 풍모.

기검룡! 바로 그였다.

그는 바위 위에 우뚝 선채 두 손에 한 자루의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닌 기형(奇形)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문득, 우우우... 웅...!

갑자기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울부짖음을 발하며 한 차례 떨렸다.

푹은 한 치에 미치지 못했지만 검신의 길이만 근 네 자.

전체모양은 검(劍)의 형태였지만 날이 한쪽으로 서 있는 끝이 위로 약간 구부러져 검(劍)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병기.

헌데 지금 그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음향을 발하며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 우... 웅!

차츰 병기의 울림이 높아졌다.

순간, 기검룡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병기를 중심으로 점차 원반형의 거대한 백색환(白色環)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급격히 백색환은 확산되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간, 파파팍...!

주위의 암석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멸혼극참(滅魂極斬)!]

파석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검룡의 대갈일성이 터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파팟...! 콰르릉___ 쾅!

아! 천지개벽이 일어나려는가?

거대한 백색환이 전광처럼 폭사된 곳은 바닷 속.

헌데 보라! 거대한 포말과 함께 미친 듯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바다의 용트림을.

그 순간 월광마저 포말 위에 부서져 찬란히 흩어졌다.

아아! 실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성공이다! 멸혼극참을 연성하고야 말았다. 하하하하...]

기검룡은 찌렁찌렁한 대소를 터뜨리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때,

[허허... 용아! 드디어 성공했구나. 아주 훌륭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낙척문사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기검룡의 등뒤에 우뚝 서 있었다.

[할아버지!]

기검룡은 그를 바라보며 희열의 음성으로 소리쳤다.

낙척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 할아버지께 어서 무적팔해를 연성했다고 말씀드려야지.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네, 어서가요.]

그들은 곧 몸을 날렸다.

 

석실___.

[할아버지, 용아가 드디어 무적팔해를 모두 연성했어요.]

기검룡은 석실끝의 석상에 앉아있는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일순 천강마존의 안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그것은 떠올랐던 것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그는 곧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수고했다. 허나 무적팔해를 익히는데 무려 일년(一年)이라는 기간을 소요했다. 앞으로 더욱 증진해야만 천강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

그말에 기검룡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자, 내일부터는 이것을 연마하도록 해라.]

천강마존은 그런 기검룡에게 하나의 낡은 비급을 건네주었다.

 

<절존검보(絶尊劍譜).>

 

비급의 겉장에는 위와같은 네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조로 기검룡에게 설명했다.

[절존검보는 절존검후(絶尊劍后)라는 여걸께서 남긴 비급이다. 무적팔해가 천하에서 가장 극강하고 패도적인 무공인데 반해 절존검보 내의 만절극변검식(萬絶極變劍式)은 가장 현묘하고 유(柔)하면서도 난해한 검법이라 모두 삼백육십식(三百六十式)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식마다 스물 네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두 팔천 육백 사십(八千六百四十) 가지의 변화를 일으킨다.]

기검룡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 무학.

범인이라면 평생을 걸려서도 기억조차 못할 엄청난 불량이 아닌가?

허나 천강마존은 준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강무공을 익히려면 이 정도의 난해한 무공을 일년(一年)안에 모두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검룡은 마음이 무거웠다.

허나 그는 곧 의지가 서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밤부터 당장 연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기형병기를 들고 다시 석실을 빠져나갔다.

___무적패도(無敵覇刀).

과거 무적도군(無敵刀君)이 사용하던 천하의 도다.

그것을 불끈 움켜쥔 그의 두눈은 불타는 투지와 원대한 포부로 빛나고 있었다.

기검룡이 석실을 나가고 나자 문득 천강마존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형도 무적팔해를 연성하는데는 꼬박 이 년(二年)이 걸렸었지. 과연 저 아니는 모든 면에서 노부를 능가하는 기재로군.]

그는 기검룡이 무척 대견스러운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서운해 할지 모르나 어쩔 수 없네. 천강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강(强)한 자질이 필요하니...]

낙척문사는 충분히 그의 뜻을 알고 있었다.

[용아는 영리합니다. 형님께서 겉으로는 엄하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의 말에 천강마존은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뼈를 깎는 고련(苦鍊)의 세월.

기검룡은 숱한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몰두했다.

천강마존은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일언반구의 조언조차 해주지 않았다.

기검룡 스스로 검도를 깨우치게 하려함이었다.

이윽고 반년(半年)___

기검룡은 마침내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만절극변검식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년이 흐르자 그는 드디어 만절극변검식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

아! 이는 실로 놀라운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절존검법을 모두 연성한 후 기검룡은 다시 천강마존과 마주앉았다.

천강마존은 또 다른 한 권의 비급을 건네주며 여전히 준엄한 어투로 말했다.

[이것은 칠백 년(七百年) 전의 절정 마두였던 혈음마황(血陰魔況)의 혈황경(血荒經)이다. 다른 부분은 지극히 잔악한 마공들이라 모두 없애버렸다.

다만 혈음패황도(血陰覇皇刀)를 펼칠 수 있는 혈황도식(血荒刀式)과 천천마음의 연마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만을 남겨 놓았다. 이것을 반년(半年) 안에 연성해야 한다.]

기검룡은 묵묵히 그러나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비급을 들고 석실을 나왔다.

그날부터 또 다른 수련은 시작되었다.

 

<혈황오식(血皇五式).>

 

___제 일식(一式) 소혼혈(素魂血).

___제 이식(二式) 척혈살(剔血殺).

___제 삼식(三式) 비혈참(飛血斬).

___제 사식(四式) 환혈류(幻血流).

___제 오식(五式) 혈황극(血荒極).

 

이는 혈음패왕도를 위해 만들어진 도법(刀法)이었다.

그 도세가 독랄, 쾌속하기 이를데 없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잔혹한 필살(必殺)의 도법이었다.

기검룡의 이 도식을 모두 연마하는데에는 삼개월을 소요했다.

이 또한 눈부신 성취라 나이할 수 없었다.

___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 이는 웃음소리로 사람을 살상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사이한 섭혼술(攝魂術)과도 같은 마력(魔力)을 발한다.

기검룡은 이 무공의 수련에는 불과 한달을 소요했을 뿐이었다.

이미 척천마음을 통해 음률에 대한 조예를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남자 기검룡은 천해비보(天海秘譜) 중에서 본 천뢰삼도(天雷三刀)의 수련에 들어갔다.

 

<천뢰삼도(天雷三刀).>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광뢰극! 빛줄기가 번뜩 스치는 순간 이미 적의 몸은 동체에서 날아가 버린다.

심극뢰! 광극뢰보다 두배 빠른 도식(刀式), 살의(殺義)가 이는 순간 도(刀)는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고 돌아와 도집에 들어가 있다.

천극뢰! 이것의 위력은 실로 통천가공할 정도, 상상을 불허하는 쾌도(快刀)의 최고 경지다.

비단 빠르기가 심극뢰의 배가 될뿐 아니라 일시에 방원 십 장을 질타하는 위력 앞에서는 그 어떤 공격도 풍지박살을 면치못한다.

기검룡은 천뢰삼도의 도식을 익히며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꼬박 두달이 걸려서야 그는 광극뢰와 신극뢰를 익힐 수가 있었다.

허나 마지막 도식인 천극뢰만은 그의 천고적인 자질이라해도 터득이 불가능한 것이라 다음으로 미루었다.

 

기검룡! 그는 이제 당당한 십팔 세의 청년으로 변모했다.

그가 다시 반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천강마존을 찾아갔을 때 천강마존은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간은 작은 할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아라.]

그리하여 기검룡은 그날부터 무적패도를 내려놓고 낙척문사와 생활하게 되었다.

낙척문사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대부분 학문(學文)이었다.

허나 강호출도(江湖出道)를 대비한 다방면의 잡학들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독술(毒術), 의술(醫術), 암기수법, 기관지학, 성복지술(星卜之術), 대화술 등은 물론 심지어는 도박수법까지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낙척문사는 두 가지의 절세무공을 전수했다.

___의형수강(意形手罡).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강기(罡氣)로 최고 백여 장까지 떨쳐 낼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___허기머리보(虛氣迷鯉步).

고금(古今)이래 최고의 신법(身法).

낙척문사가 수많은 경공들을 종합 연구하여 창안한 그의 독문경공술이다.

하루에 능히 삼천 리(三千里)를 달릴 수 있다.

이것의 특징은 경공을 펼칠시에 전혀 지면을 밟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면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발바닥에서 유출시키는 공력의 힘으로 펼치는 경공술이었다.

 

다시 일년(一年)의 세월이 흘렀다.

기검룡에게 있어서는 어느 한순간도 휴식이 없었던 고련의 나날이었다.

천강마존은 다시 기검룡을 불러 앉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부터 천강무공의 수련에 들어간다.]

천강마존의 그 한마디에 기검룡의 가슴은 벅찬 격동으로 끓어올랐다.

천강무학(天罡武學)!

이 얼마나 익히기를 원하던 무공인가?

천강마존은 겸양하여 택그성황의 배끝에도 못미치는 보잘 것 없는 무공이라 하지만 기검룡은 잘알고 있었다.

천강무공, 그것이야말로 택그성황의 성취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광세절학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격동과 희열에 벅차게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이 할아버지와 네 신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순간 기검룡의 안면이 굳어졌다.

자신의 신세내력, 그동안 그는 많은 고통과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내력을 알고자 했다.

허나 그것을 물을 때마다 천강마존은 굳게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다만 시기가 임박하면 알려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할뿐,

이때, 천강마존은 기검룡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한 가지 할아버지 앞에서 약속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 할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악인(惡人)보다도 나약한 인간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약속합니다. 할아버지, 여하한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는 못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소자야말로 진정한 천강마존의 손자가 아닙니까?]

기검룡은 내심의 긴장과 불안을 숨기며 자신있게 다짐했다.

(불쌍한 녀석...)

문득 천강마존의 노안(老眼)에는 측은해 하는 비치 떠올랐다.

허나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백 오십여 년 전, 북건성 일대에 검궁(劍宮)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___팔황신검(八荒神劍) 구양신운(九陽神雲).

그가 바로 검궁의 궁주(宮主)였다.

그는 당시 무림의 최절정고수였던 무림팔걸(武林八傑)의 일인이기도 했다.

검궁은 당시의 어느 방파보다 방대한 세력을 갖춘 명실공히 맹주(盟主)역을 맡고 있었다.

헌데, 어느 해였던가?

서역으로 볼일이 있어 서역에 간 구양신운(九陽神雲)은 이름모를 폐사(廢寺)에서 하룻밤을 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 폐사의 허물어진 장경각에서 한 권의 고서를 얻게 되었다.

고서는 서역에서도 오래 전에 사용하지 않게 된 고어(苦語)로 기술되어 있어서 구양신운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그때 비로소 자신이 광세기연을 만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 구양신운(九陽神雲)에게는 열살 정도된 어린아들이 하나 있었다.

구양천(九陽天),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날 정도로 총명이 과인한 아이였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구양천을 반년 이상 가르치지 못했다.

반년만 지나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널리 학식있는 스승을 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명의 박고통금한 지식을 지닌 노문사 한 분이 구양천을 가르치기를 자원하여 구양천의 스승이 되었다.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즉시 그 뜻모를 고서를 노문사에게 보였다.

헌데 고서를 받아든 노문사의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노문사는 그 고서의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천강마하유심경(天罡摩罅維深經).>

 

노문사가 읽어낸 고서의 제목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미 천여 년 전 천축에서 실전한 초고의 내공심경(內功心經)이 아닌가?

구양신운은 기연을 얻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노문사에게 그 내용을 자기 아들 구양천(九陽天)에게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일순.

구양신운이 광세절기가 담긴 비급을 얻어 암중에 연마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졌다.

그러자 이제까지만해도 다정한 친우들이던 팔걸(八傑)이 주측이 되어 전체 강호인들이 호시탐탐 검궁(劍宮)을 노리게 되었다.

결국, 어느 비오는 날 밤___.

수천의 무림고수들이 검궁으로 난입, 강호제일의 대파를 군림하던 검궁은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 구양신운을 비롯하여 천여 명 검궁의 신하들은 완저히 몰살당했다.

허나 천운이었던가?

구양신운의 아들 구양천은 노문사가 피신시켜 다행히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노문사는 사실 전대의 기인으로서 신분을 감춘 채로 검궁에서 살고 있다가 구양처능ㄹ 구해낸 것이다.

 

<죽이리라! 무림을 피로 씻으리라!>

 

노문사에 의해 설산(雪山)으로 피신한 구양천은 절규했다.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도륙당하는 것을 본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다시피 무공을 익혔다.

노기인은 암연히 탄식을 하면서도 구양천에게 천강마하유심경을 가르쳐 주고 또한 전대 기인의 무적도군(無敵刀君)의 진전을 물려주었다.

그 뒤 십년 후, 중원무림에는 한 명의 대살성이 출현했다.

미친 듯이 쏟아내는 도세 속에 천하를 울리던 팔걸(八傑)들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근 이천의 고수가 화를 당했다.

전체 무림은 구양천 한 명에게 피로 씻기게 된 것이었다.

전 강호인들이 전전긍긍 공포에 쌓여 있을 무렵 구양천을 찾은 한 명의 노진인이 있었다.

 

<만검진인(萬劍眞人).>

 

이십여 년 전에 은퇴했던 무당파 최고의 고수.

잠상봉 조사 이후에 처음으로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를 완전히 연성하고 무당최고의 비기 무상혜검(無常慧劍)을 연마해낸 절대고수였다.

만검진인은 좋은 말로 구양천에게 혈겁을 멈추라고 타일렀다.

허나 구양천은 만검진인의 충고를 일소에 붙이고 오히려 그에게 도전했다.

마침내 두 절정고수는 서로 충돌했다. 그러나 구양천은 참담하게 폐했다.

불완전한 천강신공(天罡神功)은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의 강맹한 쇄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무상혜검의 현기 앞에 무적팔해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결국, 만검진인의 백여초를 견디지 못한 구양천은 분루를 흘리며 그 앞에 무릎꿇었다.

 

<빈도를 제압할 자신이 섰을 때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시오.>

 

만검진인은 그렇게 구양천을 중원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구양천 즉 천강마존에 있어서의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였다.

천외유천(天外有天)!

하늘밖에 하늘이 있음을 안 구양천은 낙심하여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십년(十年)의 세월___

고심참담의 뼈를 깎는 듯한 수련 속에서 구양천은 점차 최초의 분노가 가라앉고 만 것

인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의 머리 속에는 삼식(三式)의 검법이 구상되고 있었다.

허나 늘 무엇인가 부족한 듯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아 그는 고심했다.

헌데 어느날이었다.

당시 설산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설산인마(雪山人魔)가 그에게 도전을 청했다.

많은 수련 끝에 마음의 수양을 쌓은 구양천이었지만 도전을 피하지는 않았다.

곧 치열한 혈전은 벌어졌다.

그 결과 설산인마는 구양천의 무적패도를 감당치 못하고 참담하게 죽고 말았다.

허나 구양천 또한 혈전 끝에 천인단애로 떨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는 단애 아래에서 천고의 영약 만년설매실(萬年雪梅實)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빙벽 속에서 무림사상 최고의 여마 절존검후(絶尊劍后)의 진전을 이어받게 된 것이었다.

절존검후의 먼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 변화를 대하는 순간 천강마존은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구상하던 검법에 있어 부족한 점이 바로 변화(變化)와 부드러움(柔)이라는 것을.

다시 십년(十年)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구양천은 그동안 오직 삼식(三式)의 검법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어린 수련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상유래 없었던 엄청난 검식을 창안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천강삼식(天罡三式)이 아닌가?

패도적인 극강함은 무적팔해를 능가하며 종잡을 수 없는 변화는 만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에 필적했다.

그후, 무림에는 신비한 한 명의 검수(劍手)가 나타났다.

늘 청삼을 걸치고 한 자루 반투명한 보검을 지니고 다니는 중년인(中年人), 그가 가는 길에는 적수를 찾을길 없었다.

아니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을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강(强)했다.

헌데 그는 항상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남이 자신을 건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그의 철칙, 허나 막상 그의 눈을 벗어나는 자는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었다.

개세무적의 고수 더 나아가 대방파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암중에 무림제패를 꿈꾸던 무위대제(武威大帝)와 무위궁(武威宮)의 제물이었다.

단 일검에 무위대제의 몸이 양단되었고 무위궁의 최정예 무위삼십육천(武威三十六天)의 태반이 몰살당한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天罡魔尊).>

 

이것이 무림인들이 그글 경원하여 붙인 별호였다.

천강마존은 그후 사제와의 대회전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이야기를 하고 말을 멈추었다.

[...]

[...]

두 노소는 말없이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의 눈에는 앞에 앉아있는 병색완연한 천강마존이 태산과 같이 느껴졌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미동도 않을 것만 같은 거산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할아버니는 지나간 할아버니의 생애를 결코 후회의 눈으로 되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천강마존은 문득 말을 멈추고 앞에 앉아 있는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도 노부와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자칫하면 제 이의 천강마존이 될 수도 있다.)

천강마존은 착잡한 눈빛으로 기검룡을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부는 네가 노무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기검룡이 힘있게 대답하자 천강마존의 눈속에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부 평생에 후회가 되는 일은 가문을 이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이다. 너는 노부의 전철으 밟지 않도록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기검룡은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바짝 긴장하였다.

[이제는 네 신상에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천강마존이 입을 떼자 기검룡은 모든 신경을 천강마존의 말에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언급한 바가 있었지. 노부이후에 중원패주(中原覇主)가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 있었다고 말이다.]

[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이라는 분이 그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하는 순간 기검룡은 이상하게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본시는 서역 황교(黃敎) 출신이었으나 태양성자(太陽聖子)의 진전까지 얻은 듯 했다.]

천강마존의 말을 들으며 기검룡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황룡옥패를 만졌다.

문득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그분이 소손과 무슨 관계라도...?]

천강마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다. 너는 황룡대제 기용천과 청해설랑(靑海雪랑) 모연옥과의 사이에서 난 그의 일점혈육이다.]

순간,

[아아...!]

기검룡은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겠느냐?]

어느새 다가온 낙척문사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전신을 경련하며 두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허나 차츰 그는 안정을 되찾았다.

[괜... 괜찮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찢어질 듯 흡떠진 그의 두눈은 무섭게 충혈되었고 악다문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강마존은 가슴이 쓰라렸다. 허나 그는 지금이 기검룡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잘 알고 있엇다.

자칫 기검룡이 감정을 억제치 못한다면 강호에는 또다시 제 이의 천강마존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강마존은 침착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다. 이후의 판단은 네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 할아버지가 간섭할 일이 못된다. 다만 할아버지는 네가 강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검룡은 멍한 눈빛으로 허고을 쏘아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두 손은 너무도 힘주어 움켜쥐어 붉은 선혈이 터져 흘렀다.

허나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천강마존은 그의 모습을 대하기가 고통스러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으아아... 아아___!]

파석도 정상에서는 바다를 뒤엎을 듯한 처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쿠르르... 콰___ 릉___!

미친 듯한 파도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섬의 전부를 함락시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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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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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겁난(劫難) 중의 인연 (1)

 

 

“쯧쯧! 하여간 계집만 보면 물건을 세운단 말이야!”

비틀거리며 초지에 내려선 철선동시는 혀를 찼다.

모옥 앞 꽃밭에서는 마면혈도가 임단심을 찍어 누른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저년이 대체 무슨 암기를 날렸기에 피할 수가 없었지?”

철선동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벅지에 박힌 철정(鐵釘)을 뽑아들었다. 새파란 빛을 발하는 길쭉한 쇠못 형태의 암기였다.

“사망정(死亡釘)!”

그 쇠못을 본 순간 철선동시는 독사라도 만진 듯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음성으로 외쳤다.

사망정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신물(信物)이다.

비록 그 인물이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공포스러운 무공과 잔혹한 술수를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철선동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허벅지의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멍석을 말아간 듯이 화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흔적은 서쪽의 절벽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마면혈도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의혹을 가슴에 품고 두려움을 손끝에 간직한 채 철선동시는 모옥 앞으로 갔다.

임단심을 화초 위에 던져놓고 겁탈하는 마면혈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둔부를 들썩이고 있고 혈도가 제압당한 임단심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그 짓이나 할 때냐 말대가리야?”

팟!

철선동시는 버럭 외치며 마면혈도의 등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면혈도는 갑자기 임단심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우라질 미친놈아! 마음이 있으면 이 형님이 먼저 즐긴 후에 즐길 것이지 도중에 방해를 해?”

마면혈도의 말의 그것처럼 거대한 남성에는 임단심을 유린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는 대신 왼손을 불쑥 그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철선동시의 손에는 사망정이라고 부르는 쇠못이 들려있었다.

“사... 사망정!”

순간 마면혈도의 성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변해버렸다.

그자는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설마 저 계집이 마황(魔皇)과 관계가 있다는 말...!”

마면혈도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강간하던 임단심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탕한 눈빛이 아니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철선동시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형이 말한 삼보면천을 저 계집이 펼쳤다. 어쩌면 대형이 찾고 있는 자는 마황, 바로 그자인지도 모른다.”

마면혈도가 거듭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그건 안돼! 안돼! 대형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마황은 결코 당할 수 없다.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철선동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대가리, 그럼 마황과 관계가 있는 계집을 강간한 자넨 무슨 짓을 한 건가?”

“으으으..."

마면혈도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마면혈도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에 속한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이같은 공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마황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마면혈도가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던 마면혈도가 갑자기 흉포한 눈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이 계집을 죽여서 수십, 아니 수백 수천 토막을 내고 기름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마면혈도의 음성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자는 혈도를 뽑아들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마황에게 불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철선동시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황이 이번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쓴 것은 말대가리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가 모르면 더욱 좋고...)

철선동시는 마면혈도가 내릴 결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기 위해 말로써 그자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교활한 심보가 깔려 있는 행동이었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쓰러져 있는 임단심 앞으로 다가간 마면혈도는 눈을 질끈 감고 혈도를 내리쳤다.

번쩍!

혈도가 붉은 빛과 함께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쉿!

한 가닥의 붉은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마면혈도의 혈도를 가로막고 튕겨나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칼도 붉은 빛이고 날아온 물건도 붉은 빛이었다.

“억!”

마면혈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자의 혈도는 금옥(金玉)을 무우 베듯 할 수 있는 보도(寶刀)다.

그런데도 옆에서 날아온 붉은 빛은 튕겨져 나갔을 뿐 베어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단심을 없애려던 순간이었다.

그때에 맞춰서 자신의 행위를 방해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마면혈도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쉬쉭!

그 사이에 튕겨져 나갔던 붉은 빛이 방향을 바꿔 다시 마면혈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번쩍! 번쩍!

마면혈도도 이번에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터텅! 쉬익!

붉은 빛은 혈도에 맞아 튕겨나갔다가 다시 빛살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마면혈도는 손아귀에서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 마면혈도를 위해 손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삼괴의 일원으로서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앙숙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상대방을 도울 관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붉은 물체가 언제 철선동시 자신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다.

철선동시는 붉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면혈도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서던 마면혈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금관혈린사! 금관혈린사다!”

그자를 공격했던 붉은 물체는 바로 척포였다.

임청우도 모르게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척포가 임단심을 죽이려는 마면혈도를 막아선 것이다. 천고의 영물답게 척포는 임단심과 임청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

마면혈도의 외침에 철선동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독사만 먹고 산다는 금관혈린사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연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마면혈도를 공격하는 붉은 물체는 머리에 황금빛 뿔이 달려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타는 듯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뱀이었다.

뱀들의 제왕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독물(毒物)들의 제왕이기도 한 금관혈린사의 모습이 틀림없다.

금관혈린사는 품고 있는 독이 지독할 뿐 아니라 도검이 불침하여 쉽사리 죽일 수도 없다.

번쩍! 텅! 텅!

그 사이에도 마면혈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금관혈린사, 즉 척포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만약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상승의 무공을 익혀 무림의 최절정 고수의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금관혈린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금관혈린사의 독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가 독기를 내뿜으면 이장 밖에 있는 황소도 쓰러뜨린다.

한데 금관혈린사는 집요하게 마면혈도를 물려고 덤빌 뿐, 독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저 놈이 왜 독기를 뿌리지 않는 건가?)

마면혈도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척포가 임단심에게 해가 갈까봐 독기는 뿜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철선동시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계집이 없어졌다!”

“뭐?”

마면혈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척포에게 물릴 뻔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다시 절벽위로 올라오려던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철선으로 내뿜은 냉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가 떠올랐다.

상하 좌우로 경계가 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광막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그 별의 바다에 비하면 자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는 실바람만도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이 깃들어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자신을 움켜쥐려던 철선동시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감각은 돌아왔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는 몸으로 절벽을 향해 굴러갔다.

철선동시의 시선을 피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임청우는 동굴 입구의 돌출부에 떨어졌다.

그곳에 누워 몇 번인가 긴 호흡을 들이고 내쉬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벌벌 기어 동굴로 기어들어간 임청우는 떠나면서 남겨두었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마귀같은 두 괴물에게 화살이 통할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헌데 화살 통을 등에 짊어지고 활은 목에 건 채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려는데 철선동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니...

어머니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벽의 삐져나온 부분을 잡고 기어 올라간 임청우는 머리만 내밀고 모옥 쪽을 살펴보았다.

“말 대가리! 넌 계곡 입구 쪽을 살펴봐라!”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에게 고함을 치며 모옥 앞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면혈도는 여전히 척포에게 밀리며 계곡 입구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 임단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작은 천 조각 하나를 임청우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본 순간 임청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앞을 스치고 절벽 밑으로 사라지는 천조각에는 어머니의 체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임단심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임청우는 그녀의 옷이 마면혈도에 의해 갈가리 베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어떤 이해하지 못할 느낌에 머리끝이 쭈뼜해졌을 뿐이다.

 

펑펑!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내어 척포를 날려버린 마면혈도는 모옥 앞에 망연하게 서있는 철선동시 곁으로 달려갔다.

임단심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척포는 더 이상 마면혈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옥 앞에 심어져 있었던 화초들은 짓이겨져 있고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임단심이 당한 무참한 유린의 흔적이다.

철선동시는 냄새로 임단심의 종적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네 곳의 마혈(痲穴)을 짚어놓았는데...”

다가온 마면혈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라진 여자가 보통 여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황과 관련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겁에 질려 모옥을 뒤지고 비련곡의 풀뿌리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허둥대는 두 괴물을 숨어서 지켜보던 임청우는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음이 틀림없다.

“저 말대가리가 어머니를...!”

임청우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저 멀리서 마면혈도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허둥대며 돌아다니고 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 말대가리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감히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죽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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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아난 신부

 

 

 

(천한 계집?)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철이 든 이래 남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때문이다.

모두 물러가라. 소성주는 내가 달래서 화를 풀게 할 테니...”

진상파가 분노에 치를 떨 때 일신재 입구에 이른 구숙정은 사우 일행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존명!”

사우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철수한다!”

이어 그자는 앞장서서 일신재 앞을 떠났다.

사우의 뒤를 따라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자리를 비워도 되나 몰라?”

그러게 말일세.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인데...”

관목 앞을 지나가는 철위사들의 우려 섞인 속삭임이 진상파의 귀에 들렸다.

이 친구들 참, 눈치 없긴... 내총관께서 우리 보고 물러가라고 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철위사중 한명이 수군대는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혹시...”

설마 소성주님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받지 않으려고...”

우려를 표하던 자들도 비로소 깨달았는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때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피해주는 게 아랫것들의 도리야.”

흐흐흐...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철위사들은 모두 일신재 앞을 떠났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니...)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불길하고도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 돌려 일신재 쪽 보니 구숙정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을 닫기 직전 구숙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야릇한 미소가 진상파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천한 년이 이 밤중에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이유가...)

생각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상상으로 진상파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만일...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진상파는 치를 떨며 관목 뒤에서 나와 일신재 쪽으로 다가갔다.

(제왕성이고 뭐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상파는 제멋대로 떨리고 후들 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일신재의 창문으로 접근했다.

그런 그녀가 확인한 것은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늠름해지셨을까? 그 귀엽던 아기가...”

... 숙정 당신이 잘 먹이고 잘 키워준 덕분이지 뭐.”

창문을 통해 들리는 난잡한 대화가 진상파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모용준과 구숙정의 대화를 통해 진상파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숙정은 원래부터 제왕성 소속은 아니었다.

모용세가 출신인 그녀는 모용준의 유모였으며 둘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은밀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모용준은 섭장천의 양자가 되어 제왕성으로 들어올 때 내연관계인 구숙정을 데리고 와서 내총관으로 앉혔던 것이다.

어떻게... 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련님?”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 내일부터 진가년이 도련님의 공식적인 마누라잖아요. 그럼... 나이 들고 볼품없어진 저같은 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겠지요?”

... 그럴 일 없어. 명목상으로는 진상파 그년이 내 본처라 해도... 제왕성의 실질적인 안주인은 숙정 당신이야. 난 절대 당신을 홀대하거나 버리지 않아.”

... 고마워요 도련님! 고마워요!”

... 진가년이 필요한 건 내 자식을 낳을 때까지야. ... 자식이 생겨서 황금성을 공식적으로 집어삼킬 수 있게 되면 그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 아비 곁으로 보내버릴 계획이야.”

... 도련님 말씀을 들으니 진가년이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네요.”

... 진가년 생각은 그만하고 가능한 빨리 내 아이를... 내 자식을 낳아줘. ... 그럼 그 아이로 제왕성의 후계자를 삼을 테니까.”

... 노력해볼게요 도련님.”

 

너무나도 엄청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현실감이 없어졌다.

진상파는 지금 자신이 듣고 경험하는 게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짐승들!)

진상파는 이를 갈며 뒷걸음질로 일신재의 창문에서 떨어졌다.

(날 이용만 하고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이거지? 하지만 너희 년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황금성의 동전 한 푼도 제왕성의 것이 되지 않을 테고...)

진상파는 꿈속을 걷는 듯 허우적거리는 걸음으로 일신재에서 멀어졌다.

모용준과 구숙정은 자신들이 방금 전 치명적인 재앙을 야기했음을 알 리 없었다.

 

* * *

 

밤이 아주 깊어 제왕성에 불이 켜진 건물이 드물다.

하지만 제왕성의 정문 일대는 여전히 대낮같이 환했다. 손님들을 태우고 왔던 마차들이 줄줄이 정문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있을 혼례식을 위해 무려 만 명이 넘는 하객이 제왕성을 찾아왔다.

제왕성이 아무리 규모가 커도 그 많은 하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하객들은 돌아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도록 권유받았다.

진상파는 제왕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들 중 하나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차의 주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부유한 상인이어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혈도가 짚여 기절한 마차 주인 옆에 쪼그려 앉은 채 진상파는 가슴 속의 칼날을 벼리고 또 벼렸다.

얼마 전 일신재에서 엿들어 알게 된 추악한 비밀은 설령 죽어 재가 된다 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용준이 황금성의 재물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을 하려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나마 제왕성의 폭압으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집뿐이니...)

금릉(金陵)에 자리한 황금성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모용준! 구숙정! 나 진상파를 적으로 돌린 게 얼마나 끔찍한 실수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진상파는 초조한 마음을 살의와 분노로 다스리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천천히 제왕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제왕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대무력집단을 포함한 제왕성의 모든 무사들이 나서서 제왕성의 내외를 수색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찍 깨어난 하객들에게는 거처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가 떨어졌다.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는 것이냐?”

혈가람의 화등잔만한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오늘 혼례를 올리기로 되어있는 신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유와 사정을 아는 놈이 한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혈가람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진상파가 사라진 사실을 보고 받은 때문이다.

대청 안에는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나이 든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모용준은 오만상을 쓰며 상좌에 앉아있고 그의 뒤에는 구숙정이 병아리를 지키는 암탉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고정하십시오 부성주님. 살천인조께서 본성의 사대무력집단 전부를 동원하여 수색에 나서셨으니 곧 상황 파악이 될 것입니다.”

궁무독이 혈가람의 격노를 갈아 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듣기 싫다.”

혈가람은 솥뚜껑만한 손을 거칠게 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자존심이 상한 궁무독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일이 터진 후에 수습하면 뭘 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지! 궁무독 너는 외총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누가 제왕성을 들고 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부성주님.”

궁무독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개망신이냐 말이다. 제왕성이 소성주의 신부될 계집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냐?”

혈가람의 질타에 할 말이 없는 궁무독과 무사들은 고개 떨군 채 듣고만 있었다.

당장 진상파, 그 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그년을 찾지 못하면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말고!”

혈가람은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손을 저었다.

존명!”

진소저를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궁무독과 무사들은 일제히 포권을 한 후 대청을 빠져나갔다.

이제 대청에는 혈가람과 모용준, 구숙등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밥 버러지같은 놈들! 제왕성의 이름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대청 밖으로 멀어지는 궁무독 일행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혈가람은 성난 황소처럼 씨근거렸다.

상심이 되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가년을 붙잡아 와서 소성주의 품에 안겨줄 테니...”

그러다가 모용준을 돌아보는 혈가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모용준은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야 대사님만 믿을 따름입니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머저리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가. 노납이 직접 성을 나가서 진가년을 찾아보도록 하겠네.”

혈가람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셨다.

살천인조께서 나서셨는데 대사까지 수고하실 것까지야...”

곧 좋은 소식 갖고 돌아오도록 하겠네.”

휘익!

모용준의 만류에도 혈가람은 바람같이 대청 밖으로 날아나갔다.

저 땡중이 도련님께 잘 보이려고 갖은 재롱을 다 부리는군요.”

그 모습을 본 구숙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준걸(俊傑)인 게야.”

모용준도 비웃음을 흘렸다.

준걸이라뇨? 중놈 주제에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술과 계집에 환장하는 저 땡중이?”

옛말에 시세(時勢)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잖아. 저 땡중은 다음 대 천하의 주인이 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야.”

옳거니! 준걸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황금성의 인간들은 뭐하고 있어?”

진가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우리보다 더 자지러지게 놀라더군요.”

그렇다는 건 진상파를 황금성의 인간들이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건데...”

모용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고독모모를 비롯해서 진가년의 호위들인 백팔금차 전원은 이미 본성을 빠져나가 수색을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지금은 황금성의 몇몇 늙은이들과 아랫것들만 성중에 남아있는 상태구요.”

혹시 고독모모나 백팔금차가 진가년을 먼저 찾아내는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모용준의 우려 섞인 말에 대답하면서 구숙정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반짝!

그러자 천장 구석에서 짐승의 눈 한 쌍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휘익!

이어 천장에서 아래로 날듯이 뛰어내린 것은 한 마리의 담비였다.

특이하게도 온몸이 황금빛 털로 덮인 그 담비는 한 쌍의 눈은 붉은 핏빛이다.

그놈은...!”

담비를 본 모용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본교(本敎)의 영물인 섬전초(閃電貂)예요.”

구숙정은 금모적안(金毛赤眼)의 담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끼이! !

그러자 섬전초라 불린 담비는 가볍게 튀어올라 구숙정의 품에 안겼다.

원래 담비는 체격은 작아도 날래고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다.

호랑이 잡는 담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담비들 중에서 우연히 천고영약을 먹어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 섬전초다.

그놈은 호랑이도 어렵지 않게 잡아 죽이는 흉포함과 함께 빠르기가 번개같아서 섬전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시 몰라서 이놈을 데리고 왔는데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군요.”

구숙정은 자신의 품에 안긴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유모의 준비성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이 아이는 빠르기가 번갯불 같을 뿐 아니라 후각이 사냥개들보다 몇 배 더 민감해요. 진가년의 냄새가 밴 물건만 있으면 그년이 어디에 있든 안내해줄 거예요.”

구속정은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모용준이 따라서 돌아보니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가 대청 옆에 달린 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외총관님.”

다가와서 모용준에게 인사하는 사우의 두 손에는 몇 벌의 여자 옷이 들려있다.

그 옷가지들은?”

진가년이 입던 옷들이에요. ()대주가 손을 써서 구해왔군요.”

구숙정은 섬전초의 얼굴을 사우가 내미는 옷가지에 대어주었다.

휘익!

코를 벌름거리며 옷가지에 배린 냄새를 맡던 섬전초는 이내 눈을 빛내며 구숙정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섬전초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휘익! 끼이!

그러다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대청에서 달려나갔다.

발이 특히 빠른 자들을 데리고 섬전초를 따라가라. 진가년에게 안내해줄 것이다.”

구숙정이 재빨리 사우에게 지시했다.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으니 다른 인간들 보다 먼저 진가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소성주님께 드리기 전에 내 손으로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하니까.”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냉혈철심 사우는 대답과 함께 대청에서 날아갔다.

대청 밖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철위사들인데 경신술이 특기인 자들이다.

따라와라!”

사우는 이미 상당히 멀리 간 섬전초를 따라서 날아가며 외쳤다.

예 대주님.”

가자!”

철위사들도 바람같이 몸을 날려 사우를 따라갔다.

곧 섬전초와 사우 일행은 제왕성을 빠져나갔다.

혼례를 앞두고 달아난 신부를 찾아내기 위한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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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싹 트는 연정(戀情)

 

 

푸른 색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지난 밤 흑왕이 떨어진 절벽인데 윗부분이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나와 있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절벽 아래쪽과 연못 사이의 넓지 않은 바닥에는 동물들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강미루와 흑왕처럼 길을 잘못 들어 절벽에서 떨어진 놈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절벽의 수십 장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하늘을 향해 돌출해있다.

어젯밤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져 내리던 흑왕이 뛰어넘었던 그 바위다.

만일 흑왕이 그 바위를 뛰어넘기 위해 도약하여 멀리 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바위에 부딪혀서 즉사했거나 절벽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서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강미루는 아찔해졌다.

흑왕의 도약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연못에 빠지지 못하고 절벽 아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강미루 자신과 흑왕도 저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처럼 되어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앞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의 중간 부분에 낀 이끼가 마치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창평곡(蒼平谷)>이라고 읽혔다.

(이 분지의 이름이 창평곡이었군.)

(전에 누군가 여기에서 살았었네.)

백남빈과 강미루는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더 큰 창평곡이라는 글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절벽에 깊이 글을 새겨놓았었는데 그늘이 져서 서늘한 그곳에만 이끼가 잘 자라 글씨를 푸르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창평곡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은 없었다. 창평곡 전체가 수백 길의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는 항아리 같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면 절벽을 올라가지 못할 갈 것도 아니지만 그럴 경우 목숨을 걸어야한다.

하물며 왼쪽 다리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백남빈으로서는 수백 길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창평곡 내에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창평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남빈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중원 침공이 임박했다는 증거들을 무황성에 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띠고 있다.

헌데 이 괴상한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서구라도 무황성에 잘 도착했을까?)

답답한 생각에 앞쪽에 앉아있는 강미루에게 집적거렸다.

"소저! 혹시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날린 전서구들도 모두 붙잡은 거요?"

그러나 강미루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백남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백남빈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강미루의 손목을 잡아 주의를 환기시켰다.

... 왜 이래요?”

손목이 잡힌 강미루는 백남빈이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아랫도리를 사실상 발가벗은 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백남빈이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에게 물어볼 게 좀 있소.”

... 물어보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안심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우리가 무황성으로 날려 보낸 전서구들을 전부 잡았소?"

백남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려장은 해동청(海東靑)을 비롯한 많은 매를 길들여 부리고 있다. 그 매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철령보의 전서구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강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전서구를 모두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철령보에서 나오는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서구들이 전멸하지만 않았다면 무황성과 명나라 황실에서도 신랑성의 동향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증거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다.

 

"허벅지의 상처는 어때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썩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열이 나오."

"당신의 그 신기한 반지로도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강미루가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백남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험해 봤지만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만 있는 것 같소"

강미루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리고 이야기하기가 거북하고 힘이 들었다.

!

그래서 별 생각없이 백남빈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풀로 만든 치마가 흔들리며 상아같이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여 백남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체에 걸친 헐렁한 남색상의 사이로도 탐스러운 젖가슴이 다 가려지지 못하고 살짝살짝 엿보였다.

백남빈은 눈앞이 아롱거려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가을인데도 여기는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흑왕의 등에 마주 보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들어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말등인지 소등이지도 잊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인 상대라는 사실 때문인지 강미루는 백남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게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과 원수지간인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남빈 역시 여자와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무작정 좋기만 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대려장 장주의 둘째 딸과 깊이 마음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무황성에 대한 근심이 감해지기까지 해서 백남빈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이 순간만이 시간의 전부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남빈은 무심코 말했다. 깊은 정이 깊이 배인 말이다.

그러나 강미루는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그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단지 백남빈의 중얼거림에 스며있는 애틋한 정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여장부인 내가 그토록 경멸스러워하던 다른 여자들처럼 사내 앞에서 교태나 부리고 있다니...)

강미루는 차츰 혼란한 감정에서 벗어나며 한탄했다.

(미루야! 미루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형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넌 원수인 철령보의 소보주에게 푹 빠져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도 않는구나.)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강미루는 이미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정(戀情)이라는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덫에...

 

***

 

이 앞쪽에서 실종된 동료들이 있단 말이지?”

신가람은 앞쪽에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 점호에 일곱 명의 형제가 빠져서 확인을 해봤더니... 흑왕의 것으로 보이는 발굽자국을 발견하고 이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려장의 기마대를 이끌고 당산산맥까지 온 구철륵(具鐵勒)이란 중년의 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곱 명중 세 명은 기진한 모습으로 계곡 안쪽에서 발견되었지만...”

구철륵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가람과 구철륵에게서 멀지 않은 뒤쪽에 세 명의 사내가 동료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자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 탈진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머지 네 명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구철륵은 다시 계곡 쪽을 보며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미혼진(迷魂陣)이 설치되어 있군.”

신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곡 쪽을 보았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계곡이다.

하지만 그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네 명은 실종되고 세 명은 반송장이 된 채 발견 되었다.

계곡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탈진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고 깊이 진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철륵이 신가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했다. 다시 돌아 나온 셋은 그나마 침착해서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빠져나왔지만 나머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치달리다가 탈진해버렸을 것이다.”

신가람은 계곡 안쪽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이 강진남을 한참 능가할 뿐 아니라 기문진법의 재주도 장인에 못지 않다.

덕분에 계곡 안쪽에 흉험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진법을 연구하고 공부해온 신가람으로서도 처음 접해보는 미지의 진법이다.

그 어떤 강적보다도 위험한 곳이다.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누구도 이 계곡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신가람은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구철륵에게 말했다.

...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구철륵과 대려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등지고 천천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며 신가람은 오랜만에 잠잠하던 몸 속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진법이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계곡 일대에 설치 된 진법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승부욕이 신가람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정말 못 말리는 것이 젊은이들의 벼락같은 사랑이다.

백남빈과 강미루의 감정적 연대는 짧은 시간이건만 더할 수 없이 깊어 갔다.

서로에 대한 연모의 감정에 취해 두 사람은 흑왕이 창평곡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백남빈과 강미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강미루의 얼굴은 발그레하여 햇살 아래 더욱 붉었고 백남빈의 얼굴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상기되어 있었다.

흑왕이 연못가에 와서 발을 멈추었을 때야 강미루가 활짝 웃으며 백남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헌데 뛰어내리는 순간 백남빈하지 않은 풀잎 치마가 위로 훌렁 올라가는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였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엉덩이가 펄럭이는 풀잎 치마 밖으로 언듯 들어났다가 숨어버린다.

강미루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백남빈은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강미루가 말에서 내리려는 백남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백남빈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강미루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비록 소녀에 불과하지만 무공을 익힌 강미루의 완력은 대단하여 백남빈의 몸을 가볍게 받아 땅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이다.

하지만 항아리 형태인 깊은 골짜기에서 낮은 짧을 것이 불문가지다.

백남빈은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말을 꺼내기가 멋쩍었다.

<잠자리>라는 말이 잠은 자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하늘을 보았다가 숲을 보았다가 했다.

(저 사람이 어젯밤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남빈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하자 강미루는 덜컥 겁이 났다. 낮선 곳에서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몸서리 처지도록 경험했었다.

또 혼자 남겨질 수는 없다.

강미루는 백남빈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어젯밤에도 나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백남빈은 강미루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난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언젠가 알 때가 있겠지.)

그것이 백남빈의 생각이었고 원래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은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지만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양부 독안룡 이탁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니 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생부 백무염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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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뤄진 혈겁

 

 

(나 연남천은 팔십 평생 단 한 번도 도전을 회피해 본 적이 없다. 비록 저 어리석은 자들이 남의 꾐에 빠져 도전해 오기는 했으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서늘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밖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는 나 연남천과 함께 이곳 고독애에 뼈를 묻게 되리라! 비록 무형지독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갈 힘은 남아 있으니...!)

고독마야는 서탁 위로 손을 뻗어 혈마대장경을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저주받은 마물들부터 없애야 하리라. 못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크나 큰 화근이 될 테니...!)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혈마대장경에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천마공(逆天魔功)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비록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흡혈마조가 남긴 혈마대장경상의 무공도 고독마야의 일신 절기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혈마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마공들의 잔혹하고 신랄한 면은 고독마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해서 고독마야는 죽기 전에 아예 이 화근덩어리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흡혈마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비록 저주받을 마공이긴 해도 필생의 성취라고 남겼는데 없애 버려야 하니...”

고독마야는 고소를 흘리며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마대장경을 태워버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우우!”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고독애 아래에서 들려왔다. 걸걸하기는 하지만 그 장소성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막 혈마대장경을 재로 만들어 버리려던 고독마야는 흠칫하며 삼매진화의 운용을 멈추었다.

쐐애애액!

그 직후 고독애 측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한줄기 흐릿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하나같이 천하를 위진 시키고 있는 고수들인 군웅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전모 냉약빙이다!”

막아랏!”

고독헌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빠른 경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명뿐임을 안 때문이다.

멈춰라 전모!”

못 들어간다!”

파팟! 쐐애액!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급급히 날아올라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쏴아아아!

고독애 측면의 절벽을 날아오른 인영은 자신을 막아서려는 군웅들의 머리 위를 한 걸음에 뛰어넘어 고독헌 쪽으로 날아갔다.

훤칠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을 지닌 그 인영의 이같은 가공할 경신술은 이곳에 운집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닭 쫓던 개처럼 만들어버렸다.

잡아랏! 혈마대장경이 전모의 손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 서랏!”

쐐애액! 휘익!

일차 저지에 실패한 군웅들은 저마다 고함을 터트리며 고독헌 쪽으로 날아가는 인영의 뒤를 쫓아갔다.

절벽을 날아오른 후 일거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날아 넘은 여인은 다름 아닌 전모 냉약빙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같은 경이적인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다.

죽고 싶은 작자들은 와라!”

단번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독헌 앞에 내려선 냉약빙은 빙글 돌아서며 군웅들을 향해 사나운 일갈을 터뜨렸다.

피핑!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검붉은 구슬 하나가 추적해오는 군웅들을 향해 던져졌다.

(저것은...!)

원래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성신검황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냉약빙이 던져낸 검붉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피해라! 굉천벽력탄이다!”

유성신검황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한걸음 늦고 말았다.

콰르릉! 콰콰쾅!

수십 개의 천둥이 일제히 작렬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콰아아아!

그와 함께 고독애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면서 시뻘건 화염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수십 장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일거에 수십 명의 군웅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굉천벽력탄이 터진 자리에는 깊이 삼장, 너비 십여 장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주위로 터지고 그슬린 인간의 육신들이 널려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벽력당(霹靂堂)의 화기를 지니고 있다니...!”

히익!”

몸을 날린 게 늦은 덕분에 살아난 군웅들은 사색이 되어 고독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놀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냉약빙의 두 눈은 싸늘한 한광을 토해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경거망동해도 좋다!”

칠척 가까운 거구로 고독헌 입구를 완전히 가린 채 우뚝 선 냉약빙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몇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굉천벽력탄이었다.

냉약빙의 수중에 들린 굉천벽력탄을 본 독천존과 유령마제의 안색이 낭패로 물들었다.

으득! 저 계집이 산통을 다 깨는군!”

독천존과 유령마제도 일세를 풍미하는 고수들이긴 하지만 굉천벽력탄의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냉약빙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내최강의 경공술을 지니고 있다. 만일 냉약빙이 자신들을 폭사(爆死)시킬 작정을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냉약빙이 번개가 치는 듯한 빠르기로 달려들어 던지는 굉천벽력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천존과 유령마제가 낭패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명심해라! 고독헌에 접근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굉천벽력탄을 안겨줄 것이다!”

냉약빙은 군웅들에게 경고를 남기고는 거구를 홱 돌려 고독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두가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내의 그 누구도 냉약빙의 가슴 섶이 유난히 불록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한 걸음 늦었다 약빙아!”

고독마야는 고독헌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약빙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 지금 이 순간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냉약빙이야말로 고독마야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음을 주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親姻)이기 때문이다.

먼 친척 사이인 두 사람은 비록 조손(祖孫) 사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이좋은 오빠고 누이동생이었다.

게다가 고독마야가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 유일한 존재가 냉약빙이다. , 고독마야에게 냉약빙은 누이동생일 뿐 아니라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라버니...!”

칠척 거구의 냉약빙이 들어서자 그리 넓지 않은 고독헌 안이 꽉 차 보인다.

냉약빙도 본래는 평범한 계집아이였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같은 어마어마한 거구가 된 데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냉약빙은 어린 시절 우연히 거령삼왕(巨靈蔘王)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거령삼왕은 산삼의 일종으로 기사회생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약효가 지나쳐서 복용한 사람의 체격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거령(巨靈)이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거령삼왕을 복용한 덕분에 냉약빙은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이르는 막강한 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여자임에도 칠척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독마야는 냉약빙의 막강한 내공과 엄청난 체격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경신술을 가르쳤고 그 결과 냉약빙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인물이 되었다.

 

, 중독당하셨군요 오라버니...!”

고독헌 안으로 들어선 직후 냉약빙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마야가 지독한 극독에 중독된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득,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래음에게서 해약을 빼앗아오겠어요!”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며 고독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오라비를...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냐 약빙아?”

하지만 고독마야의 나직한 한 마디 말에 냉약빙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고독마야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크흐윽, 오라버니...!”

냉약빙은 분노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돌림병으로 일가 피붙이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 고독마야만이 유일한 친인이다.

헌데 그 고독마야마저 지금 중독당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울지 마라 약빙아! 인간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고독마야는 오열하는 냉약빙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냉약빙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한 정감이 담겨져 있었다.

하여간 잘 왔다. 저 어리석은 작자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이제 네게 그것을 맡기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쓰레기들과 동귀어진하실 작정인가요 오라버니?”

하지만 냉약빙은 깜짝 놀라며 고개들 들어 고독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들이라니...! 그래도 저자들은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들인 대단한 고수들 아니냐?”

고독마야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된 자들을 모조리 동반하여 저 세상에 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냉약빙은 고독마야의 그 말에 질겁했다.

, 그래서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나 고독마야의 뜻은 이미 확고해진 상태였다.

비록 너라고 해도 나를 막지는 못 한다 약빙아!”

부드러운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말하는 고독마야를 올려다보며 냉약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소매에게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만한 수단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차서 장담했지만 고독마야는 믿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고독마야는 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내포한 미소였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소매의 무기예요!”

냉약빙이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가슴 섶을 좌우로 벌려보였다.

“...!”

순간 고독마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몸으로 한 차례 세찬 경련이 스쳐가기까지 했다.

냉약빙의 헐렁한 겉옷 안쪽에는 머리를 흰 천 조각으로 동여맨 사내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고독마야는 숨을 죽였다.

(천골(天骨)이다!)

한눈에 사내아이가 세상에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사내아이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팔십 평생 이룩한 성취가 절전(絶傳)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고독마야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을 때 냉약빙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사내아이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교활한 아이구나 약빙아!”

고독마야의 창백한 안색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깡마른 두 손이 어느새 냉약빙이 내미는 사내아이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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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古今第一人

 

 

[! 저놈은 만년백경(萬年白鯨)!]

그렇다. 바로 위에는 마치 거대한 섬을 방불케 하는 하얀 고래가 막 사해선문의 선단을 향해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딪쳐 오고 있었다.

기검룡의 외침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했다.

만년백경은 바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전설과 같은 영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기검룡은 달려오는 백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내가 자기의 내단(內丹)을 갖고있는 것을 알고 쫒아오는 것 같구나.]

그 말에 사해신룡은 안색이 변했다.

[용아, 네가 내단을 갖고있단 말이냐?]

이때,

[! 피해라! 부딪치면 안된다!]

경악성이 울렸다.

허나 이미 늦었다.

___! 우지끈___!

삽시간에 십여 척의 선박이 풍지박살났다.

도저히 만년백경의 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기검룡은 입술을 물며 결심했다.

[숙부님, 용아는 저놈을 유인해 갈테니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능소취였다.

[안돼! 오빠! 가지마, 가면 안돼...!]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매달렸다.

기검룡은 그녀를 번쩍 안아 뺨을 비비며 말했다.

[염려마, 다시 만나게 될거야, 이 용아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으니까.]

다음 순간 기검룡은 그녀를 내려놓고 몸을 휘익 날렸다.

[조심하거라, 용아!]

사해신룡의 외침이 들렸다.

[___ ! 이놈아! 난 여기 있다!]

기검룡은 외치며 파도를 밟고 백경을 향해 날아갔다.

콰르릉___ ___ !

백경은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방향을 돌렸다.

[하하하... 날 쫓아와라! 내단은 아직도 네 품속에 있다.]

기검룡은 방향을 사해선문과 정반대로 돌려 파도를 박차고 날아갔다.

___ ___!

백경은 빛살같이 그의 뒤를 쫓았다.

[용오빠...!]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능소취는 울먹였다.

 

파석도(破石島).

기검룡은 전신이 물에 흠뻑 젖은 채 파석도에 돌아왔다.

콰르릉___ ___ ___!

만년백경은 섬 주위에서 마구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경은 내단을 잃어 점점 기력이 쇄잔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악착같이 기검룡을 쫓아왔으나 그를 자비 못했던 것이었다.

[하하하... 백경아! 내단은 미안하지만 돌려 줄 수가 없구나!]

기검룡은 품속에서 유백색의 내단을 꺼내며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내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내가 먹노라... 으윽!]

문득 내단을 삼킨 순간 기검룡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신이 엄청난 열기에 휩싸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 으으... ...!]

기검룡은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구 모래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때였다.

___ !

한 인영이 그의 옆에 떨어졌다.

그는 바로 낙척문사(落拓文士)였다.

[용아! 아니... 이게 어찌된 일...]

그는 기검룡을 번쩍 안아들었다.

검룡은 얼핏 그를 알아보았다.

[... ... 작은 할아버지... ... 용아는 만년백경의 내단을 삼... 켰어......]

[뭣이!]

낙척문사는 크게 놀랐다.

[너를 차자 수일을 헤맸건만 내단을 삼켰다고? ... 이런...]

낙척문사는 다음 순간 신형을 휘익 날렸다.

그는 매우 다급한 듯 했다.

실상 만년백경의 내단은 지극한 효험이 있는 것이었지만 필히 안정할 곳을 찾아 내공이 높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내단을 녹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검룡이 그것도 모르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단을 삼켰으니...

낙척문사는 급히 천강마존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이었다.

 

[...!]

기검룡은 오랜 혼미 속에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큰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기검룡은 너무도 기뻐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름을 느끼며 당황성을 발했다.

겨우 몸을 멈춘 그는 두눈을 크게 뜨며 의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용아의 공력이 이렇게 높아져 있다니 말입니다.]

낙척문사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이한 일이구나, 만년백경의 내단을 복용했다면 이갑자(二甲子) 정도의 내공을 얻는 것이 분명한데, 네 공력은 이미 삼갑자(三甲子) 이상에 이르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기검룡은 기억을 더듬어 그동안의 일을 차근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만년백경에게 먹혔던 일에서부터 무인도에서 만난 일, 사해선문을 도와 천해비보를 찾은 일까지.

허나, 자신도 모르게 무인도에서 본 일중에서 벽에 걸려 있던 기이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만약 그 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는 일찍 더할 수 없는 광세기연(曠世奇緣)을 만날 수 있었겠건만...

기검룡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는 안면 가득 놀라움의 빛을 띄었다.

낙척문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네 공력이 그토록 급증한 이유를 알겠구나.]

기검룡은 문득 짐작이 가는 듯 물었다.

[흑시... 그 이상한 복숭아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 그 복숭아는 금령천도(金靈天挑)라는 영과로서 도가에서 최고의 지보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일곱 번으로 나누어 복용하고 칠일간 운공하면 금강지체(金剛之體)를 이룰 수 있다.]

이어 문득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허나 너는 그것을 모르고 한꺼번에 다 먹어버려 그 효능이 반감된 것이다.]

기검룡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엇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낙척문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마라. 이제 너는 전신에 만독(萬毒)이 불침하며 노력하면 일갑자의 내공을 더 얻을 수 있다. 앞으로 무공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어요. 헌데 그 무인도의 백골은 어느 고인의 것인가요?]

그의 물음에 이번에는 천강마존이 입을 열었다.

[무림사(武林史)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명멸해 왔으나 단연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꼽으라면 꼭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누군가요?]

기검룡은 호기심으로 두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은 바로 천 이백 년(千二百年) 전의 기인(奇人) 절대무성(絶代武聖) 태극성황(太極聖皇)이시다.]

천강마존의 어조는 지극히 공경스러웠으며 엄숙하기까지 했다.

[태극성황(太極聖皇)!]

기검룡은 나직이 입안으로 뇌까렸다.

천강마존은 다시 조용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 이백 년 전 당시의 무림은 무림삼일(武林三日)이라는 세 명의 개세고수들에게지배당하고 있었다.]

 

<무림삼일(武林三日).>

 

___옥황대천(玉皇大天),

___천독마선(天毒魔仙),

___잠형유신(潛形幽神),

 

옥황대천, 그는 화타나 편작을 능가하는 의술의 명인이었다.

천독마선, 그는 만독(萬毒)의 조종(祖宗), 마공(魔功)의 집대성자였다.

잠형유신, 그는 실재(實在)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역용(易容)과 잠형술(潛形術)의 대가였다.

이들 삼인은 당시 무림의 최강(最强)을 지칭한 절대적 존재였다.

헌데, 그런 그들이 하루 아침에 실로 어이없는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날 홀연히 그들을 찾아온 한 젊은서생에게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성명절학을 전력(全力)으로 펼쳤으나 젊은서생의 십초(十招)를 당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그들 삼인(三人)이 합공(合攻)하여 대항했으나 그 또한 그들의 상상을 벗어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완패, 실로 완전한 패배였던 것이다.

무림삼일을 패퇴시킨 후 신비의 서생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

 

___무림에 군림하려하지 말라. 본인이 그대들에게 됴구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___

 

무림삼일은 통탄을 금치못할 지경이었으나 곧 무림에 세웠던 모든 세력을 해체하고 은거하여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무림삼일을 은퇴시킨 신비의 서생은 백년(百年) 동안 무림에서 행도(行道)하여 크게 그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성황(聖皇)이라는 영광스런 청호까지 받게된 것이었다.

헌데, 노년(老年)에 이른 그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근심거리가 생겼다.

백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진전을 이어받을 인재를 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결국, 그는 후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두 명의 기재를 기명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록 태극성황의 전 무학을 이어받을 만한 인재는 되지 못했지만 몇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절세기재들이었다.

태극성황은 자신의 무공을 두 기재에게 적합하도록 음()과 양()으로 나누어 전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림에 두 명의 절세고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___태양성자(太陽聖子) 황보영(皇補英).

___현음마군(玄陰魔君).

허나 이들은 정사종주(正邪宗主)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그들은 사부인 태극성황의 부름을 받았다.

태극성황은 그를 찾아온 두 제자에게 두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이것은 나의 진본무공(眞本武功)이 실린 태극유진(太極貴珍)이다. 이것을 갖게되면 태극일문(太極一門)의 장문인(掌門人)이된다. 또한 이것은 나의 최초의 신공(神功)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을 적어놓은 책자다. 태극호연천신강의 위력은 능히 택그유진의 십배에 달한다. 너희들은 하나씩 선택하도록 해라.>

 

태극성황은 두 가지 물건을 놓고 그렇게 분부했다.

태양성자와 현음마군은 고심했다.

명예(名禮)와 실리(實利)___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허나 결국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태양선자, 그는 태극유진을 택해 명예를 취했다.

반면, 현음마군은 실리를 택해 택극호연천신강을 얻었다.

그는 평소 자신보다 강한 태양성자를 꺾어보는 유일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미처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니...

태영성자와 현음마군은 천하의 기재였다. 그러나 태극성황은 그들에게 진본비기(眞本秘技)를 전수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진전을 전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자질이 부족해서였다.

헌데 택그유진보다 위력이 십 배나 강한 태극호연천신강의 난해함은 더 이상 말하여 무엇하랴!

결국, 현음마군은 현음교(玄陰敎)를 해산하고 잠적했다.

태극호연천신강을 연마하기 위해.

허나 끝내 그는 무림에 다시 나타나지 못했다.

일평생 태극호연천신강과 씨름하다 죽음을 당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태양성자 역시 은거하여 택그일문은 완전히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은 애초에 태극성황이 바라던 결과였는지 몰랐다.

 

천강마존은 긴 이야기를 끝내고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용아도 알 것 같군요. 무인도의 석옥에 있던 백골은 바로 현음마군이로군요.]

그는 낡은 비급에서 본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라는 지공의 이름에서 그것을 추측한 것이었다.

천강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이것들을 보고 그 유골이 현음마군의 것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그는 앞부분이 삭아 없어진 낡은 비급과 외줄의 소금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음마군이 태극성황에게 전수받은 것은 한 가지 신공(神功)과 장공(掌功), 그리고 일초(一招)의 지법(指法)과 음공(音功)이었다. 특히 음공 척천마음(擲天魔 고금제일이라 현음마군 조차도 완전히 연성하지 못했다.]

천강마존은 다시 소금(少琴)을 집어들며 말했다.

[용아도 이 소금의 위력을 체험해봤으니 잘 알 것이다. 이것은 현천마금(玄天魔琴)이라하며 태양성자가 받은 태극신검(太極神劍)과 함께 태극일문의 양대지보였다.]

이번에는 낙척문사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석옥의 어딘가에 분명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의 비급이 있었을텐데 용아가 그것까지 얻지 못한 것이다.]

그 말에 천강마존이 담담히 웃었다.

[인연이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네. 용아가 그 태극호연천신강과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지.]

낙척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그 대신 용아는 그에 못지않은 기연을 얻은 수 있게 되었으니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다.]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낙척문사를 응시했다.

낙척문사는 문득 하나의 붉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바로 기검룡이 사해신룡에게 받은 그 구슬이었다.

[사해신룡은 최대의 기연을 네 개 양보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큰할버지께 옥황대천(玉皇大天)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느냐?]

그 말에 비로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의술이 당대 최고였다던...]

낙척문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태극성황에게 패한 옥황대천은 무공초식으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방도를 구했다.]

[...]

[그는 신선경지에 이를 수 있는 내공을 얻기위해 한 가지 절대신단(絶代神丹)을 만들었다.]

낙척문사는 수중의 붉은구슬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절대신단이 바로 이것이다. 옥황패천은 이 신단을 극허천룡단(極虛天龍丹)이라 이름했다.]

기검룡은 놀라움과 경이가 뒤엉킨 시선으로 붉은구슬, 즉 극허천룡단을 응시했다.

이때, 천강마존이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아의 공력이 급상승했으니 이제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됐다. 내일부터 당장 무공수련에 들어간다. 허나 그 전에 우선 볼것이 있다.]

그는 문득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낙척문사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는 서재 한모퉁이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가지고와 두 사람 앞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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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혈루(血淚)의 일막

 

 

"...!"

고검추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가 너무도 무참한 만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검추가 느낀 충격과 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흐흐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보자!”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당혜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 죽여라!"

사신각주의 마수에 고문당하며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고검추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흐흐흐! 걱정마라.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

사신각주는 히죽거리며 당혜선을 농락했다.

...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

당혜선은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다. 살고 싶으면 복마신검이 어디 있는지 실토해라!”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눈을 희번덕였다.

파르르!

복마신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애원하던 당혜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사신각주가 자신을 고문하고 협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은 때문이다.

무슨 짓을 당한다 해도 사신각주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

당혜선은 대답 대신 사신각주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물론 사신각주는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에 직접 당혜선의 침이 닿지는 못했다.

흐흐흐 이게 네년의 대답이라 이거지?”

당혜선의 침 세례를 받은 사신각주의 눈빛이 흉포해졌다.

그럼 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잔인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아악!"

다음 순간 당혜선의 입에서 단말마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마치 독침을 맞은 나비처럼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르르!

고검추의 몸에도 세찬 경련이 치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 도무지 현실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고검추는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이상하군!"

당혜선을 본격적으로 고문하며 사신각주는 의혹을 느꼈다.

그자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당혜선에게는 아들이 있다.

헌데 당혜선의 몸은 어떻게 봐도 처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신각주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흐흐흐... 네년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자는 광기에 사로잡혀 당혜선을 고문하는데 빠져 들어갔다.

"... 네놈을...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저주하겠다."

그자는 당혜선의 악에 바친 저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같던 끔찍한 고문도 결국 끝이 났다.

"흐흐흐!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본 각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마."

!

그 자는 쓰고 있는 복면 아랫부분을 들어서 얼굴을 당혜선에게 보여주었다.

사신각주는 고검추에게는 등을 돌린 자세인지라 고검추는 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흐윽!"

하지만 고문당한 자세로 누워있던 당혜선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 되어 복면 아래에서 드러난 사신각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당신이... 사신각주라니...!"

당혜선은 온몸을 벌벌 떨며 비명같은 신음을 토했다.

사신각주는 그녀가 익히 아는 자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고사형의... 참사도 바로 당신의 수작..."

당혜선은 분노와 절망에 찬 표정이 되어 사신각주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그렇다. 고가놈은 배은망덕하게도 복마신검을 얻고도 본좌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치룬 것이지."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복면을 다시 내렸다.

"... 이 짐승만도... 못한..."

당혜선이 분노와 경악으로 치를 떨 때였다.

사신각주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초혼전을 꺼내들었다.

"본좌의 비밀을 알았으니 안됐지만 죽어 주어야겠다."

그 자는 냉혹하게 말하며 초혼전을 쳐들었다.

(... 안돼!)

고검추는 전율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지척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려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자신은 짚인 혈도가 아직 풀리지 않은지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고검추는 활활 타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어머니를 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아악!"

단말마같은 짤막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사신각주가 내리꽂은 초혼전이 당혜선의 하복부로 깊이 박힌 것이다.

부르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리던 당혜선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흐흐흐... 감히 본좌의 뜻을 거스른 대가다."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화락!

이어 그 자는 검붉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으하하하! 나 사신각주이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는다."

한 줄기 광소와 함께 사신각주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적막...

다시 사위는 죽음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진 장내에는 하복부에 초혼전이 박힌 당혜선만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초혼전이 박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당혜선이 누워있는 바닥을 흥건히 물들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저녁노을도 스러지고 어둠이 스물 스물 번지고 있었다.

"크흑... 어머니...!"

문득 비통한 울부짖음과 함께 석벽 아래 동굴에서 고검추가 달려나왔다.

마침내 막혔던 혈도가 풀린 것이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어머니... 제발."

달려온 고검추는 당혜선을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아무것도 못한 자신의 무능이 저주스럽다.

사신각주! 하늘에 맹세코 네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다!”

고검추는 어머니의 알몸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헌데 그때였다.

두근 두근

고검추의 귓전으로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소리가 들렸다.

(... 설마!)

오열하던 고검추는 눈을 부릅뜨며 급히 귀를 당혜선의 왼쪽 젖가슴에 대었었다.

두근 두근

그런 고검추의 귀에 확실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 아직 살아계시다.)

당혜선의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고검추의 뇌리로 신비한 은발의 여인 옥여상의 음성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설삼신단!)

내심 부르짖은 고검추는 안고 있던 당혜선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옥여상이 준 그 옥병에는 만년설삼으로 만든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들어 있었다.

설삼신단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백년 수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효능을 지녔다.

(그 분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고 설삼신단을 내게 주었구나.)

고검추는 옥병에 들어있는 설삼신단을 보며 경이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새삼 옥여상이란 여인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설삼신단을 꺼낸 고검추는 당혜선의 하복부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초혼전을 제거해 드리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내려놓고 당혜선의 아랫배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고검추의 손은 멈칫 멈춰졌다.

(초혼전에는 백일취가 묻어있을 테니 직접 만지면 안된다.)

초혼전에 백일취라는 약물이 묻어있다는 당혜선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찢어진 옷으로 추혼전을 감싸쥐었다.

스윽!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초혼전을 뽑았다.

후두둑!

선혈이 분수같이 뿜어지며 초혼전이 당혜선의 아랫배에서 뽑혀졌다.

초혼전을 집어던진 고검추는 급히 두 손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런 후 어느 정도 피가 멎자 손을 떼고 옥병에서 설삼신단을 두 알 모두 꺼냈다.

고검추는 설삼신단 두 알을 모두 당혜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설삼신단은 당혜선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제 운명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설삼신단을 먹여준 고검추는 초조와 긴장으로 물든 시선으로 당혜선의 상태를 주시했다.

잠시 후 당혜선의 밀랍같이 창백하던 옥용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초혼전이 박혔던 하복부의 상처도 급속히 아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혜선은 세상에 보기 드문 영약인 설삼신단을 한 알도 아닌 두 알씩이나 한꺼번에 복용했다.

설령 더 심각한 상태였어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당혜선은 상처가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삼갑자 이상의 내공까지 얻었다. 게다가 강력한 극음기공까지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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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온 마두들 (2)

 

 

정말 묘한 곳이야. 여기라면 유가 놈도 우릴 쉽게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마면혈도가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의 눈에 절벽 가에 서있는 두 개의 대나무가 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나무의 위쪽, 달이 만든 절벽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임청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마면혈도의 얼굴은 더욱 말같이 보여 공포스럽다.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갔으니, 발각되기만 하면 자신은 두 토막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선동시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풍(寒風)이 불어나온다는 건 안쪽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뒤쪽마저 막혀 있다면 금상첨화고...”

캇캇캇!”

마면혈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래도 히히힝! 하고 웃지는 않는군.)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웃음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말울음 소리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신기해했다.

그 마면혈도가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봐! 얼어 죽은 놈! 도망쳐 다니는 것도 질렸으니 그만 이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자.”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바람 속에 사람냄새가 묻어있어. 골짜기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철선동시가 철선을 흔들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면혈도에게 보냈다.

그자의 말에 임청우는 자신이 발각된 줄 알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죽마에서 떨어질 뻔 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죽여야지.”

휘익!

마면혈도가 등에서 혈도를 꺼내들고 앞장서서 비련곡 안으로 사라졌다.

철선동시는 느긋한 웃음을 흘리면서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마면혈도를 따라갔다.

임청우는 두 괴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죽마에서 내려왔다.

죽마를 절벽 그늘진 곳에 숨겨놓은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좁고 긴 계곡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모옥 쪽에서 앙칼지게 외치는 어머니 임단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싱싱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하하핫! 늙은 암고양이가 살고있을 줄은 몰랐는걸.”

즐거운 듯 웃는 마면혈도의 웃음소리가 임단심의 음성에 이어 들려온다.

바닥에 엎드린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등이 보이는 곳까지 기어갔다.

!

그 직후 모옥의 문을 부수고 어머니 임단심이 날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빼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임청우도 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날아 나와 선녀처럼 옷깃을 나부끼며 내려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놀라 눈이 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다.

철선동시는 한쪽으로 슬쩍 비키면서 웃고 말했다.

이같은 경계에 이인(異人)이 살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지. 한데 신법을 보아하니 우리와 동류(同類)인 듯하군.”

... 당신은!”

임단심은 시뻘건 칼을 들고 서있는 괴물같은 마면혈도의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마면혈도...!”

그녀는 주춤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았다.

크캇캇캇! 본좌를 알고 있다니... 그럼 저 친구도 알아보겠는가?”

마면혈도가 광소를 터뜨리고 철선동시를 가리켰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임단심은 철선동시 역시 알아보고 파리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흉포하기로 유명한 삼괴(三怪) 중 두 놈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삼괴...!

일왕(一王) 일협(一俠)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자들은 사파(邪派)를 대표하는 고수들로서 독선적이고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이었다.

삼괴의 첫째는 무비옹(無比翁)이라 불리는 늙은이인데 외호를 스스로 지은 자다.

무비(無比)라는 말은 견줄 곳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오만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비옹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삼괴의 둘째인 마면혈도와 세째인 철선동시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비옹의 무공이 두 사람에 비해 월등할 뿐만 아니라 흉폭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비옹을 본 사람도 거의 없고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더더욱 없다.

대신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지가 찢어지고 몸통은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가 발견되면 그것이 무비옹의 짓이라고 사람들은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그 흉악 잔인함은 이름 그대로 무비, 견줄 곳이 없는 인물이 무비옹이다.

삼괴의 둘째 마면혈도는 살인과 방화, 강간을 밥 먹듯이 하는 자다.

삼괴의 셋째이며 강시(疆屍)같은 몰골을 한 철선동시는 교활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이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나 형제마저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자가 철선동시인 것이다.

 

(오늘밤 어쩌면 나 혈관음(血觀音) 임단심의 모진 목숨이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임청우의 어머니, 혈관음 임단심은 푸른빛이 감도는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삼괴의 우두머리인 무비옹이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삼괴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비록 첫째인 무비옹이 함께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임단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면혈도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흐! 약간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팽팽할 것 같군. 이 나으리를 즐겁게 해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어.”

그자의 주먹덩이 같은 눈동자가 음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임단심은 흠칫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면혈도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인과 강간을 저지른다는 말은 익히 들었었다.

그러나 임단심은 이내 차가운 눈빛을 내쏘며 분노에 저민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 네놈 따위가 감히...”

번쩍!

순간 한줄기 혈광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위험하다!)

임단심은 날카로운 도기를 느끼며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흔들리며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스악!

그러나 혈광은 허공에서 빙글 방향을 돌리더니 임단심의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싸늘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얽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흐흐흐...”

혈도 끝을 임단심의 가슴에 댄 마면혈도가 음탕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삼보면천(三步免天)! 세 걸음이면 하늘의 그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보법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사성(四成) 수준의 삼보면천으로는 이 나으리의 혈도를 피할 수 없지. 자 순순히 옷을 벗어라.”

사삭!

마면혈도가 칼끝을 약간 아래로 내리자 임단심의 앞가슴 옷이 예리하게 베어지며 흰 속살이 드러났다.

임단심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와 수치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녀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삼보면천이라고?”

그때 한쪽에 서있던 철선동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임단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해라! 삼보면천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 그렇지. 대형께서 삼보면천을 사용하는 자를 보면 즉시 잡아두라고 하셨지!”

마면혈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설마 내 신분을 알아차린 것일까?)

임단심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 괴물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기화요초가 무성한 초지에 엎드려서 보고 있던 임청우는 다급해졌다.

그 바람에 척포라고 이름 지어준 금관혈린사가 호리병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마면혈도가 혈도로 어머니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그는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주먹만한 돌을 주워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마면혈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

바람소리를 들은 마면혈도는 뜻밖이라는 듯 몸을 빙글 돌리며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돌을 낚아챘다.

누구냐?”

철선동시도 벼락같이 소리치며 임청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화악!

날아오며 휘두르는 그자의 철선에서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같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들켰다!)

휘리릭!

임청우는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의 몸에 깔린 화초와 약초들이 땅에 납작하게 눌려졌다.

쩌저적!

임청우가 누워있던 곳의 기화요초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철선동시가 휘두른 철선에서 뿜어진 지독한 냉기 때문이다.

재빨리 몸을 굴렸지만 임청우도 그 냉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털썩!

머릿속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기화요초 사이에 널부러졌다.

암고양이뿐 아니라 쥐새끼도 숨어있었구나!”

철선동시가 까마귀같은 음성으로 웃으며 임청우를 덮쳐왔다. 그자는 아직 임청우가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임은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헌데 철선동시가 막 임청우를 낚아채려 할 때였다.

쉬쉬쉭!

돌연 미미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크윽!”

그와 함께 마면혈도의 쥐어짜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마면혈도의 비명소리에 임청우를 낚아채려던 철선동시는 급히 허공에서 빙글 돌아 솟구쳐 올랐다.

우욱!”

직후 철선동시 역시 허벅지에 예리한 흉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몸이 기우뚱했다.

철선이 뿜어낸 냉기에 피가 얼어붙어서 널부러졌던 임청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휘리릭!

정신이 돌아오자 임청우는 다시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구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벽 쪽으로 굴러가는 임청우의 눈에 얼핏 어머니가 무언가를 던진 자세로 훌쩍 물러서는 것이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임청우의 몸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몇 번 구른 사이에 절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크윽!”

마면혈도는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자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길이 한 뼘쯤 되는 쇠못이 목에 박힌 것이다.

하지만 그 쇠못은 피부를 뚫고 들어왔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피가 심하게 뿜어지는 것은 목을 지나는 혈관중 하나가 찢어진 때문이다.

쿨럭! 쿨럭!”

임단심도 연신 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

마면혈도는 목에 박힌 쇠못을 확 잡아 뽑아 멀리 집어던지면서 짐승같이 고함쳤다.

쉬쉭!

흐윽!”

직후 혈도가 빛을 발하고 혈광이 어지럽게 번득이는가 싶더니 임단심이 걸친 옷이 조각조각 나서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이이... 천한 것이 감히...”

삽시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이 되어버린 임단심은 급히 치부를 가리면서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입가에 가득한 선혈과 살기어린 그녀의 눈빛에 마면혈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면혈도는 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을 적시자 다시금 강한 분노와 함께 음욕이 들끓어 올랐다.

임단심은 마면혈도가 날아온 돌을 잡느라 뒤를 돌아보고, 철선동시가 임청우를 향해 몸을 날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세 대의 쇠못을 발출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상이 발작하여 기혈이 막혀버렸다.

그 때문에 공력의 상당부분이 흩어지면서 쇠못의 겨냥도 약간 비틀어져 버렸다.

바로 코앞에 있던 마면혈도의 목을 겨냥했던 쇠못은 요혈을 조금 비켜서 박혀버렸다.

철선동시의 등을 노렸던 나머지 두 대의 쇠못 중 하나는 그자가 피해버리고 겨우 한 대 만이 허벅지에 격중 되었을 뿐이었다.

(... 틀렸나?)

아득한 절망감이 임단심을 휩쓸었다.

흐흐흐... 두 번 다시 뻗대지 못하게 해주마.”

마면혈도가 음욕을 참지 못하는 웃음을 흘리며 칼을 흔들었다.

흐윽!”

붉은 빛이 눈앞에서 다시 한 번 번득이는 순간 임단심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스름 달빛 아래 혈도가 봉쇄되어 쓰러진 그녀의 나신이 파랗게 빛났다.

흐흐흐...”

마면혈도는 칼을 집어넣고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임단심의 얼굴은 서른을 넘긴 나이와 오랜 투병생활에 초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내를 뇌쇄시킬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우악스런 손길로 임단심의 알몸을 화초들 위로 집어던지고, 그 위로 숨을 씩씩거리며 덮쳐갔다.

내상이 도져 정신이 혼미해진 임단심은 배추 속같이 새하얀 두 팔을 양쪽으로 힘없이 떨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헌데 그런 그녀의 왼쪽 팔뚝에는 작고 붉은 점 하나가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수궁사(守宮沙)!

그것은 바로 처녀(處女)의 상징이라는 수궁사였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처녀의 상징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토록 고이 지켜온 처녀성이 지금 색마의 손길아래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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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식 전야

 

 

 

하늘같은 남편이 될 소성주를 중인환시리에 개망신 시키다니... 아무리 속 좁은 계집의 소행이라 해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소.”

혈가람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며 말했다.

소성주님을 위해 격분하시는 부성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혼례를 목전에 둔 지금 진소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자제해야하지 않을런지요?”

신중하게 입을 연 중년인은 제왕성의 외()총관 독검마유(毒劍魔儒) 궁무독(宮無獨)이다.

제왕성의 외총관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를 전담한다.

궁무독은 심기가 깊고 꾀가 많아 외총관의 역할을 능란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외총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일단 내일의 혼례를 원만히 치르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자인 내총관 구숙정이다.

황금성의 진소저가 제 아무리 당찬 성격이라도 일단 소성주의 여자가 되고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요?”

구숙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어쨌든 진소저도 여자는 여자이니...”

무엇보다 혼례를 무사히 치르는 게 중요하긴 해.”

구숙정의 말에 살천인조는 물론이고 혈가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쯧쯧! 그나저나 보지 않아도 뻔하구먼. 소성주는 분을 참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을 게야.”

살천인조가 혀를 끌끌 찼다. 전설적인 자객답게 살천인조는 모용준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성주는 제가 가서 달래볼 테니 부성주님들께서는 귀빈들의 접대에 전념해주세요.”

구숙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 *

 

네가 모용준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독모모(孤獨母母)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하얀 백발에 곱게 늙은 노파인 고독모모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이다.

출신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독모모가 절세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금성의 제일고수이기도 한 고독모모는 어린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제왕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 모용준을 직접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

고독모모는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다.”

진상파의 새침한 말에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보고받은 대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더군요.”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고독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내들 중에서도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어요.”

모용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상파의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노신을 비롯하여 황금성의 모든 식솔들은 상파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모용준이 정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가자.”

고독모모가 연민의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진상파를 사실상 길러온 것이 고독모모다.

고독모모에게는 진상파가 주인이라기보다는 딸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뇨! 내일 있을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파야!”

여자로서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황금성 성주로서의 책임이 더 무거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독모모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모용준은 모든 면에서 제 배필이 되기에 모자란 사내예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제왕성의 강력한 힘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군요.”

진상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성의 안위를 위해 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저는 여자로서도 행복해질 거예요. 모용준을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사내로 변모시키면 되니까요.”

진상파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고독모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독모모인지라 성인이 된 인간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미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구나.”

고독모모는 강철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고독모모는 배웅하려고 일어나는 진상파를 만류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파는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이 얼마나 각박하고 인간은 또 어디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진상파의 방을 나서며 고독모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파가 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모용준의 천박한 성품은 변함이 없을 테고... 결국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고독모모는 문 밖을 지키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의 인사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그저 모용준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괜찮은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한숨을 쉬는 고독모모의 미간에 전에 없던 주름이 깊이 파였다.

 

* * *

 

밤이 깊었다.

(다 큰 사내의 성품을 고치려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진상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악전고투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상파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모용준의 경박하고도 비열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있는 기분이 되는 진상파였다.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라도 모용준을 번듯한 사내로 변모시켜야만 한다.)

진상파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결의를 다졌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고독모모가 방을 나가면서 남긴 말이 쟁쟁하다.

그와 함께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며 집기들을 때려 부수던 모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것이다. 내일 대사를 치러야하니 이 밤이 가기 전에 찾아가서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덜컹!

진상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오셨는지요?”

철관음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진상파는 철관음을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진상파는 철관음을 뿌리치고 영빈관을 떠났다.

괜찮을런지요 단장님?”

백팔금차 중 한명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내원(內院)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 별일 없을 것이다.”

철관음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진상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몰래 경호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치안상태를 믿고 기다려보자.”

...”

철관음의 말에 백팔금차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심란하시겠지. 평생 같이 살아야할 사내의 천박한 실체를 알아버렸으니...)

철관음은 진상파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새석숭님만 급사하지 않으셨어도 인중(人中)의 봉황(鳳凰)인 아가씨가 모용준같이 비루한 인간을 배필로 맞은 일은 없었을 텐데...)

새삼 자신의 전 주인이 비명에 간 것이 아쉬운 철관음이었다.

 

* * *

 

제왕성에는 고수들이 구름같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왕성의 녹을 먹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두 명의 부성주와 오래전에 제왕성을 나간 태상호법 흑백신귀가 신주이십팔숙중 섭장천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명의 부성주와 두 명의 태상호법 외에도 제왕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강호에 알려진 제왕성의 대표적인 전력은 사대무력집단(四大武力集團)이다.

금위사대(金衛士隊), 은위사대(銀衛士隊), 동위사대(銅衛士隊), 철위사대(鐵衛士隊)가 바로 그들이다.

제왕성은 소속 무사들에게 황실을 본 따 위사(衛士)라는 직함을 부여해온 것이다.

 

사대무력집단중 가장 낮은 등급은 철위사대다.

하지만 철위사대 소속 철위사(鐵衛士)들은 강호에 나가면 일류고수 소리를 듣고도 남는 실력자들이다.

그 철위사들의 숫자가 무려 천 명이다.

제왕성에는 위사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이 수만 명 존재한다.

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선발되는 것이 철위사다.

 

동위사(銅衛士)의 숫자는 오백 명으로 각대문파 장로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다.

 

은위사(銀衛士)의 숫자는 삼백 명이며 각대문파 장문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금위사(金衛士)의 숫자는 불과 백 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주이십팔숙에 이름을 올려도 무리가 없는 절세고수들이다.

, 제왕성에는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신주이십팔숙이 무려 백 명이나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에 금위사들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고수들의 집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원로원(元老院)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한 전대고수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로원이다.

숫자 미상인 원로원의 원로들은 제왕성의 대소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성에 심각한 도전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발 벗고 나선다.

원로원의 전력만으로도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나 사파 무림의 주인이었던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평판이다.

 

이처럼 백여 년 간 축적되어온 제왕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전설 속의 천마가 부활한다 해도 제왕성에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 * *

 

일신재는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제왕성 성주가 될 후계자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일신재의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

낮에는 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 무등위(無等位) 위사들이 경비를 선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일신재를 물 샐틈 없이 에워싼 채 지킨다.

 

진상파는 일신재가 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는 울창한 관목들 사이에 숨듯이 서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옷자락에 <>자가 수놓아진 무사들이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철위사대 소속의 철위사들이다.

(제왕성 후계자의 거처답게 경비가 삼엄하구나.)

진상파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녀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다.

철위사 한명도 상대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자존심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모용준을 다독여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래서는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엄한 일신재의 경비를 확인한 진상파는 난감해졌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면 무리없에 일신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 깊은 시간에 자신이 모용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마치 진상파 자신이 먼저 모용준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관목 사이에 숨은 진상파가 철위사들을 훔쳐보며 갈등 할 때였다.

“...!”

“...!”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연 철위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진상파의 눈에 들어왔다.

(들킨 것일까?)

철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진상파는 몸을 좀 더 숙였다.

!

그 직후 누군가 관목 옆을 지나 일신재로 다가갔다.

(저 계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신재로 다가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눈이 치떠졌다.

여자인 진상파가 보기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 여자는 바로 제왕성의 내총관인 구미호리 구숙정이었다.

철위사들은 구숙정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긴장했던 것이다.

(이 야심한 중에 저 천박한 계집이 무슨 일로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것일까?)

진상파가 일신재로 다가가는 구숙정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였다.

휘익!

건물 뒤편에서 날듯이 달려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철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인데 다른 철위사들과 다른 점은 소매에 세 가닥의 검은 색 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 가닥의 줄은 중년인이 철위사대의 수령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자가 철위사대의 대주(隊主)인 냉혈철심(冷血鐵心) 사우(査愚).

내총관님!”

서둘러 달려온 냉혈철심 사우가 포권을 하며 구숙정을 맞이했다.

소성주님은?”

구숙정은 사우에게 물으면서도 일신재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지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우는 구숙정의 눈치를 보며 따라갔다.

사우가 비록 철위사대의 대주이긴 해도 총관인 구숙정보다는 한참 직급이 낮다.

게다가 구숙정에게는 부성주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배경이 있는데...

그럴만도 하지. 평생 부모님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소성주가 천한 계집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구숙정은 코웃음을 치며 일신재의 입구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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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둘만의 절지(絶地), 낙원(樂園)

 

 

... 죄송합니다 신()공자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작은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백남빈의 말을 끌고 돌아간 몇 명을 제외하고 백여 명의 대려장 무사들 모두는 밤새 당산산맥을 달리며 강미루의 종적을 찾았다.

어두운 산속을 말로 달리다보니 몇 명인가는 낙마하여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강미루와 흑왕이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백여 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대들이 죄를 청할 일은 아니니 자책할 것도 없다.”

대려장 무사들 앞쪽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인물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인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시원시원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 좋은 몸에는 도포(道袍)라는 이국적인 형태의 흰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당건(唐巾)을 썼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만 아니라면 무사가 아니라 유생(儒生)으로 보였을 이 인물이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다.

강진남의 큰 딸 강미조의 남편인 그의 이름은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伽藍)이다.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으로 이름이 바뀐 압록강 너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가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강호의 물 좀 먹은 요동 일대의 늙은 무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가람을 대려장의 으뜸 가는 고수로 꼽고 있다.

강진남이라 해도 이 잘 생긴 사위보다 무공으로는 아래라는 것이 늙은 생강들의 일치 된 의견이다.

유모 최씨의 눈물 어린 애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신가람은 강미루를 대려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한 발 늦어서 강미루는 철령보를 빠져나온 전령과 싸우다가 당산산맥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수색 범위를 백리 밖으로 넓히되 말이 달릴 만한 지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신가람의 지시에 대려장의 무사들은 봉명(奉命)을 외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썽쟁이를 찾아내면 볼기짝부터 쳐야겠구나.”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려장 무사들을 보며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

 

강미루는 자신의 애마가 목을 핥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강미루는 기가 막혔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이 조각조각 잘려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선머슴같은 말괄량이라지만 어제 처음 만난 사내에게 알몸을 홀딱 보이고 말았으니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다.

대려장의 둘째 공주로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강미루다.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남빈을 죽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백남빈을 죽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백남빈을 보면 풀이 죽어서 땅만 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마음이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백남빈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강미루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의 붉은 옷을 갈기갈기 잘라버렸었다.

원래 옷이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된 터라 강미루는 백남빈의 남색상의(藍色上衣)로 알몸을 가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알몸이 된 백남빈의 상체가 당당하게 보여 강미루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날은 이미 밝았으나 강미루는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체는 백남빈의 헐렁한 웃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라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쳐 앉을 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너무도 부끄러운 곳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뱃속에서는 드디어 꾸룩 꾸룩 비둘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두 사람이 있는 분지의 형상이 전모를 드러냈다.

분지는 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치 거대한 항아리같은 형태의 분지라 바닥에서는 하늘이 타원형으로 보인다.

분지의 바닥에는 직경이 수십 장인 타원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는 그 연못을 에워싸고 절벽과 원시림과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바깥세상은 이미 깊은 가을이지만 분지 내부는 한 여름처럼 덥다.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연못물은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띄고 있다.

녹색의 온천수가 고여 있는 연못은 주변의 풀, 나무, 바위들과 어울려 낙원을 연상하게 한다.

늘 한 여름인 이 분지는 진정 세상 밖의 세상이요 평화와 안락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호가 홍의창(紅衣槍)이었던 강미루는 하룻밤 사이에 나신창(裸身槍)이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려장의 원수인 철령보 소속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뜻으로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것도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찌 하나?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와 형부가 알면 저 사람을 살려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강미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녀로서 알몸을 보였으면 상대에게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신의 집안과 오랜 원수지간인 철령보 출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부가 허락을 하실지 미지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번민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옆에서", !" 하는 기척이 나서 강미루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백남빈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상당한 양의 풀 뭉치를 내밀고 있다.

그런 백남빈은 상체를 풀로 얼기설기 엮은 것을 도롱이처럼 걸치고 있다.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언제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풀로 몸을 가릴 것을 만든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내미는 것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받아 들었다.

다리를 한껏 오무려 매무새를 바로하고 팔만 돌려서 받노라니 백남빈의 어깨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무의 속껍질과 긴 풀로 만들어진 풀옷은 백남빈을 무슨 요정전사(妖精戰士)처럼 보이게 했다.

준수한 백남빈의 옆모습이 햇살에 밝게 빛나 더 없이 보기 좋았다.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로 된 옷을 가슴에 안았다.

(나도 이 옷을 입으면 저 사람과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야릇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풀 뭉치를 받자 백남빈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강미루에게는 그런 백남빈의 행동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어쩐지 볼일 다 본 후 버림받은 여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강미루가 상의(上衣)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풀 옷은 예상과는 달리 치마였다.

부드럽고 긴 풀들을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엮어서 마치 초가집의 이엉처럼 만들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꽤 정성을 들여 만든 풀 옷이었다. 남자의 거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풀이 흩어지지 않도록 나무의 속껍질로 여러 번 엮어 놓은 것이다.

풀 옷을 허리에 감고 일어서서 온천물에 모습을 비춰보니 우스운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는 헐렁한 남자의 상의를 걸쳤고 아래에는 풀로 된 치마를 입었으니 그보다 더 우스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도 녹색이고 그것에 비친 사람도 녹색이다.

문득 강미루와 정반대의 차림을 한 사내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 곁에 나타났다.

물론 백남빈이다.

그의 품에는 여러 개의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안겨져 있었다.

강미루는 조금 심술이 났다. 물에 비친 백남빈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인 때문이다.

백남빈의 풀 옷 상의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기의 풀로 짠 치마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코웃음을 치며 돌아선 강미루는 백남빈의 품에 있는 열매를 몽땅 집어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토라진 계집아이같은 강미루의 짓거리에도 백남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연못을 향해 앉은 강미루는 백남빈이 따온 이름 모를 과일을 하나 먹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백남빈에게 향해있어 무슨 맛인지 음미할 수도 없다.

백남빈이 그런 강미루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놓여진 과일을 하나 슬며시 집어든다.

강미루는 새침한 표정인 채 관심 없는 척 했다.

백남빈은 강미루의 눈치를 보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벗긴 것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녀의 나신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본성의 발현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몸을 보고 만졌던 어쨌든 자신은 강미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소녀한테 꿀려서 기를 못 편단 말인가)

백남빈은 내심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이성(異性)의 경험이 없는 백남빈으로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감정(人間感情)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인 것을...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백남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빨리 이 분지를 빠져 나가야하는데... 타고 갈 말도 없고 다리마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속은 타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만 한다.”

깊이 몰두하다 보니 백남빈의 생각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강미루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한마디 했다.

"이 분지를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걸요?"

그러나 백남빈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묵묵히 속으로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강미루는 왠지 이 아름다운 분지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곳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일로 허기를 면한 백남빈은 아픈 다리를 끌면서 분지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미루는 휘파람으로 흑왕을 불렀다. 흑왕도 온천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생생하게 기력을 회복한 후였다.

강미루는 다가온 흑왕의 등에 훌쩍 몸을 날려 올라탔다.

그러나 몸을 날릴 때의 시원한 아랫도리의 감촉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치마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이 쓰여 눈이 아래를 보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백남빈을 보다가 하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백남빈 옆에 다다른 강미루가 손을 뻗자 백남빈은 사양할 수 없어 그녀의 뒤로 올라가 앉았다.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말에 타고 있자 어제 저녁의 그 치열했던 쟁투가 생각난다.

백남빈은 겸연쩍어 웃었고 강미루는 설레어 두 뺨이 발개졌다.

 

자세히 둘러보니 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기껏해야 만 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지는 그야말로 세외선경 같다.

북쪽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서쪽에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푸른 연못과 거의 맞닿아있으며, 남쪽 절벽 밑에는 풀밭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름 모를 새들을 제외하고는 토끼 한 마리도 눈에 뛰지 않았다.

동쪽의 절벽은 어제 밤에 백남빈이 내려온 곳인 듯한 데 한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데다가 수백길이나 되는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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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독한 천하제일인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오른쪽에는 음산한 인상을 지닌 중년 장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이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그 검은색 장포 위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본뜬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자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그러나 안색이 지나치게 희고 창백하여 차갑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너무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기까지 보이는 얼굴 탓에 마치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유령마제(幽靈魔帝) 구양수(九陽秀)!

 

신마풍운록 서열 오위(五位)인 그는 얼마 전 북망산(北邙山) 유령궁(幽靈宮)의 새로운 궁주가 된 인물이다.

음유하고 악독한 마공을 연마하여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암수(暗手)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유령마제 구양수가 무림패권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

독천존 서래음-!

유령마제 구양수-!

 

신마풍운록의 서열 삼, ,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고독애에 운집한 군웅들의 사실상 통솔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인 태양신협 이청천을 합쳐 무림인들은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혁련검호각, 독성부, 유령궁, 태양곡 등의 네 문파는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현재 고독애에는 그 사방무신과 신주사패천 중 태양신협 이청천과 태양곡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전 무림의 정영들이 이 비좁은 고독애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서(西)부주?”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마제 구양수였다. 그자는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독천존 서래음을 돌아보았다.

()노괴는 이미 서부주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한 데다가 오백여 명의 고수들을 해치운 대가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요. 그렇거늘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유령마제가 음침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물론 노부의 무형지독은 제법 쓸만 하지!”

독천존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연남천이라 해도 무형지독을 이겨내지는 못할걸?”

그 말을 들은 유령마제가 다시 재촉했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망설이는 것이오? 당장 쳐들어갑시다!”

그러자 독천존의 가늘게 뜬 두 눈에 언 듯 비웃음이 어렸다.

끌끌, 구양궁주는 혈마대장경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는 듯하구만!”

독천존의 그 말에 유령마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독천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천하의 고독마야 연남천이야.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고...”

“...!”

독천존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듯 유령마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어쨌든 독천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자그마한 석옥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은 유령마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인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고독마야와 맞대결해서 십초(十招)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아무도 없다.

클클,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야. 연노괴가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독천존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휴우...!)

독천존의 말에 유성신검황 혁련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마제나 독천존과 달리 광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그는 비록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독되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앞장서서 석옥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그 자신이 평생 동안 극복해보려고 절치부심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괜한 객기를 부려 단기돌입(單騎突入)했다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손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유성신검황은 내심 탄식하며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필부지용으로 고독마야와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한다면 독천존과 유령마제만 이롭게 만들 뿐이다.

독천존의 독성부와 유령마제의 유령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력이 바로 유성신검황 자신의 혁련검호각이 아닌가?

(치욕스러운 일이나... 이 방문좌도(榜門左道)의 무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유성신검황은 소리없이 탄식하며 석옥쪽을 주시했다.

 

석옥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는 마의(麻衣)노인 한 명이 무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술도... 이것이 마지막이로군!”

!

마의노인은 빈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허하게 웃었다.

육척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머리... 얼굴은 비록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형형한 한망(寒茫)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마의노인의 분위기는 아주 독특했다.

온통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잘 벼린 칼로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마야 연남천!

 

마의노인이 바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며 신마풍운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지난 육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고독한 절대자인...!

고독마야가 한 자루 철검(鐵劍)을 짊어지고 무림에 나선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는 적수를 찾기 위해 중원뿐 아니라 새외(塞外)와 변황(邊荒)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어낸 인물조차 없었다.

비록 세상이 한없이 넓고 그 안의 인간이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진정한 인걸(人傑)은 드문 법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세대에 걸쳐도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부의 자질의 소유자인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그런 그를 감복시킬만한 인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적수를 찾아 구주팔황을 헤맨 고독마야의 오십여 년에 걸친 여정은 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긴긴 여정에서 고독마야가 확인한 것은 세상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막강한 그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에 실망하고 인간들의 천박함에 좌절한 고독마야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곤륜산의 깊은 곳에 들어와 석옥 한 채를 짓고 은거해버렸다.

고독마야는 곤륜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해 인적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을 고독애라 이름 짓고 거처로 마련한 석옥에 고독헌(孤獨軒)이라는 현판을 새겼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이 모두가 강호 무림의 파멸을 노린 음모인 줄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나방처럼 몰려든 꼬락서니들이라니...!”

! 퍼석!

고독마야 연남천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빈 술병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안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그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였다.

무형지독-!

색도 냄새도 없는 무색투명한 극독으로써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기에 누구라도 이 무형지독의 암산을 피해내지 못한다.

일단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반각 이내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고독마야가 그 무서운 무형지독을 다량 흡입한 상태에서도 반나절 넘게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의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내공으로도 무형지독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극독은 내공의 힘으로 태워버릴 수도 없다.

고독마야는 그저 무형지독이 발작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독마야는 독천존 서래음의 장담대로 결국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이곳 고독애가 나 연남천의 무덤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이 혼탁하고 추악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의 주름진 눈꼬리로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마풍운록이라는 못된 물건을 만들어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든 놈의 상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고독마야는 눈길을 한쪽 옆 서탁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보는 서탁 위에는 표지가 새것인 책자 한 권과 아주 낡아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세 권의 비단 책자가 놓여있었다.

 

-신마풍운록!

 

최근에 지어진 새 책자는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 고독마야의 수중에 들어왔다.

 

-혈마대장경!

 

세 권의 낡은 비단 책자는 다름 아닌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고독마야를 합공하게 만든 원인인 혈마대장경이었다.

두 달 전, 고독마야는 약초를 구하러 천산(天山)에 갔다가 어느 빙곡(氷谷)의 빙동(氷洞)에서 우연히 혈마대장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마야가 전대기인의 은거지였던 그 빙동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

새북인마(塞北人魔)라는 그자는 신마풍운록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북인마란 작자는 그저 하루살이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먼저 전대기인의 유물을 발견한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새북인마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자는 상대가 고독마야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초나 캐러 다니는 평범한 심마니로 오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비급을 발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하고는 살인멸구 한답시고 고독마야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한 팔이 으깨진 채 거꾸러졌다.

새북인마는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는 사색이 되어 고독마야 앞에 오체복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굳이 새북인마의 목숨까지 뺏을 이유가 없었던 고독마야는 그자가 발견한 비급만 뺏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고독마야가 새북인마에게서 빼앗은 비급이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허둥지둥 달아난 후에야 자신이 흡혈마조가 남긴 비급을 얻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혈마대장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 자신의 무공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이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다른 무공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북인마를 그냥 살려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에게 복수한답시고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지닌 사실을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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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天海秘譜

 

 

다급한 순간, 기검룡은 좌수로는 극영쇄심인을, 우수로는 참마제룡수를 펼쳐 상강일괴와 사공망을 동시에 방어했다.

꽈릉___ !

차차창___

폭음과 금속음이 어지럽게 짓터지는 순간,

[___ ___ !]

[___ !]

두마디의 서로 다른 비명이 잇따라 터졌다.

뒤이어,

[하하하... 용아 숙부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사해신룡이 호탕한 웃음을 트뜨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며 휘두른 일장에 상강일괴는 그대로 즉사했고 기검룡의 참세룡수에 의해 기식이 엄엄했다.

사해신룡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태산일수가 홍라선희에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능부인이 북망사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사해신룡은 능소취를 기검룡에게 맡기고 번쩍 북망사신에로 몸을 날렸다.

능소취는 기검룡과 함께 있게 되자 문득 뾰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오빠, 저 여자한데 입맞춤할거야?]

그녀는 홍라선희를 가리켰다.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여 안색이 붉어졌다.

[... 그럼 어떻게 해. 일방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약속을 해버렸으니...]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말에 능소취는 홱 토라졌다.

이때, 꽈르릉___!

장내에 다시 폭음이 터져올랐다.

사해신룡과 격돌한 북망사신이 순간 비틀 하며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칠 능부인이 아니었다.

[빙음백주강(氷陰白柱罡)!]

그녀의 우장에서 얼음기둥같은 하얀기류가 쭉 뻗어나갔다.

파파팍___ ___!

엄청난 파열음에 이어,

[___ !]

북망사신은 왼팔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두고보자.]

북망사신은 이를 갈며 황급히 몸을 날려 장내를 빠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홍라선희를 상대했던 태산일수가 물러가고 그것을 시작으로 군웅들은 삽시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해신룡은 침중한 신색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칠십이도객의 절반이 죽음을 당했고 내삼당의 당주 역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때,

[호호호...]

홍라선희가 풍만한 둔부를 살래살래 흔들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 귀여운 공자님, 어서 이 누나의 뺨에 입을 맞춰주세요.]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상아빛 뺨을 내밀었다.

능소취는 이 광경에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기검룡이 주저하자 홍라선희는 달콤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공자님, 장부라면 약속을 지키셔야죠.]

기검룡은 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짧은 순간, 홍라선희의 상아빛 뺨은 도화빛으로 물들었고 그에반해 기검룡의 표정은 못할 짓을 한것처럼 떫뜨름하게 변했다.

이 모습에 능소취는 그만 얼굴을 가리고 능부인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윽고 홍라선희는 교태로운 웃음이 어린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호... 공자님, 다시 만나기를 바래요.]

이어 그녀는 기검룡의 손에 무엇인가 살짝 쥐어주고 휙! 몸을 날려 계곡을 떠났다.

이때, 능소취는 눈물젖은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용오빠는 거짓말장이! 취아가 제일 좋다더니 그 여자가 더 좋은거지? 흑흑...]

기검룡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취아... 울지마라. 나는 취아가 누구보다 더 좋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능수취는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문득 의미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용아는 여복이 터졌구나. 벌써부터 저렇게 여자들 사이에서 고민하니 훗날에는 큰일나겠구나.]

기검룡은 머쓱하게 웃으며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참 숙부님! 하후할버지와 해룡방 식구들은 어찌되었을까요?]

그말에 사해신룡도 정색을 했다.

[부인! 이 옥함을 갖고 배로 돌아가 있으시오. 나는 용아와 함께 섬 뒤쪽으로 갔다가 가리다.]

능부인은 사해신룡으로부터 옥함을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 용아 가자.]

, 기검룡과 사해신룡은 절벽을 날아올랐다.

그곳에 올라서니 해룡방과 사해선문이 치열한 호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룡방의 전선은 태반이 침몰되었고 해변가에서는 수백 명 사해선문의 수하들과 해룡방수하들이 뒤엉켜 어지러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멈춰랏___!]

사해신룡은 그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대갈을 터뜨렸다.

순간,

[___!]

사해선문의 진영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사해신룡은 가볍게 그들에게 응수한 뒤 다시 소리쳤다.

[해룡왕(海龍王)! 수십 년간 걸친 양파의 분규는 그대와 본 문주와의 결투로 결말짓는 것이 어떤가?]

[좋다! 패하는 쪽이 영원히 동해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는 것이다.]

비천해응 하후염과 대치하고 있던 금포중년인이 문득 사해신룡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손에 분수자(分水子)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해신룡과 해룡왕___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한 그들은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사해신룡은 손에 든 깃발을 힘껏 펄럭이며 쓸어갔다.

___ ___ !

해룡왕도 혼신의 힘으로 분수자를 휘둘렀다.

허나, 파파파팍___!

[으윽!]

분수자는 기폭에 부딪치는 순간 대여섯 조각으로 부서지고 해룡왕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 졌다!]

그는 고통스럽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돌아가자.]

이어, ! ___!

그들 일행은 모두 몸을 날려 거선으로 돌아갔다.

사해신룡은 장내에 우뚝 선채 위엄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형제들이 힘써준 덕분으로 일이 무사히 끝났소. 앞으로 십년(十年), 십년만 지나면 본 사해선문은 천하게 웅비할 수 있을 것이오. 모두 수고를 하셨소. 총단으로 돌아갑시다.]

[___!]

[문주님 만세___!]

사해선문의 수하들은 바다가 떠나갈 듯 힘찬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기검룡은 사해신룡과 함께 몸을 날리며 홍라선희가 주고간 물건을 꺼내보았다.

그것은 티하나 없는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둥근 옥패였다.

 

<봉황지존(鳳凰之尊).>

 

전면에는 고어로 위와 같은 네 자의 글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뒷면에는 몸이 자색이며 부리는 황금빛으로 된 한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기검룡은 홍라선희가 무슨 까닭으로 영패를 자신에게 주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곧 처음 타고온 거선에 이르렀다.

헌데 문득, 갑판의 한구석을 바라보던 사해신룡은 아미를 찌푸렸다.

백객 조인창___.

그가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사해신룡은 선실을 들어서자마자 능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객은 어찌된 일이오?]

능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첩이 배에 오르기 직전 갑자기 암습을 가하는 바람에...]

그말에 사해신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독수인마와 내통했던 자는 백객이었군.)

이어, 그는 한쪽 탁자 위에 놓여있는 백옥함을 집어들었다.

문득, 기검룡이 궁금한 눈빛으로 백옥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천해비동에 비장되어 있던 보물들인가요?]

사해신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손에 들고있던 기()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그렇다. 이 기()는 천해보기(天海寶旗)라는 상고시대의 기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공력을 주입하면 그것의 몇 배나 되는 경기를 발출하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검룡은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빙죽도는 대대로 사해선문의 영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이제서야 천해비동에 입동하셨습니까?]

[천해비종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다. 허나 동굴 안은 너무도 한랭하여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허나 최근에야 자오절이 되면 다소 한기가 사라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지.]

사해신룡은 이어 백옥함을 열었다.

그 속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작은 옥갑과 하나의 가죽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옥갑 밑으로는 여러 권의 책자들이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칠백 년 전의 기인이신 천해상인(天海上人)께서 남기신 것이다. 그분은 비단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평생 많은 기물과 무공비급들을 모으셨다. 이것이 모두 그분의 유물들이다.]

사해신룡은 먼저 가죽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하나의 붉은 구슬이 들어있었다.

이어 그는 이번에는 두 개의 옥갑 중 작은 쪽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폐부까지 시원하게 하는 향기를 풍기며 세 알의 작은 환약이 밀랍에 쌓인 채 드러났다.

그 속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 환약들은 천원신단(天元神丹)이라 한다. 이것을 복용하면 영지를 맑게하고 내공이 증강한다. 허나 그 효력은 극히 지속적이나 완전히 약효가 나타나려면 십년(十年) 이상을 지나야 한다. 그 연단법은...>

 

밑으로 깨알같은 연단법이 적혀있었으나 그것은 감히 구할 수 없는 영초들 인지라 사해신룡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절세의 기약이다. 취아와 용아가 하나씩 복용해라. 너희같은 아이들이 복용하면 효과가 큰 것이다.]

능소취는 천원신단을 받았으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영약이 필요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임독양맥이 타통되어 있었던 것이 지금도 열려있으므로 내공도 보통사람보다 열 배는 빨리 연성할 수 있습니다.]

그말에 사해신룡과 능부인은 몹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곧 사해신룡은 관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네 무공은 할아버지들의 도움을 받지않고 혼자 연성한 것이냐!]

[, 저는 세 살 때부터 내공입문에 들었어요.]

사해신룡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후일 필요할지 모르니 지니고 있거라.]

그는 천원신단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허나 기검룡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천원신단을 거두고 용안(龍眼)만한 홍주(紅珠)를 피낭에 넣어 건네 주었다.

[그럼 이것이라도 갖도록해라. 이 홍주도 필시 내력이 있는 것일테니.]

기검룡은 그것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 예를 표하며 받아넣었다.

이때 사해신룡은 두 번째의 옥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인이 쓰던 것인 듯 화사한 무늬가 수놓여진 채대가 들어있었다.

채대 밑의 작은 양피지를 꺼내읽은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천해상인과 동시대의 여걸이었던 칠채무후(七彩武后)께서 사용하실 칠채금대(七彩金帶)로군요.]

[어머! 정말 예쁜 것이군요.]

능소취는 채대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했다.

사해신룡은 두 개의 옥갑을 들어낸 다음 수십 권의 얇은 비급들에 눈길을 돌렸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비봉무한 웅휘한 필체로 제목이 씌어진 약간 두툼한 책자였다.

 

<천해무량심경(天海無量心經).>

 

겉장을 넘기자 간단한 서언(序言)이 적혀있었다.

 

<빈도는 무공익히기를 세끼 밥먹기 보다 좋아하여평생 수없이 많은 무공을 섭렵했다. 이제 말년에 이르러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적는다. 빈도가 익히고창안한 신공절기들 중 후세에 남기고 싶은 것을 간추려 모두 서른 여섯 권의 비급을 만들었다. 이글을 읽는 후인은 부디 이 절기를 사용하여 천하를 평정하도록 노력하라.>

 

[, 보고싶은 것이 있으면 골라보도록 해라.]

그 말에 기검룡은 수권의 비급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한 권의 얇은 비급을 꺼내들었다.

 

<천뢰도보(天雷刀譜).>

 

기검룡은 위와 같이 씌어진 책자에 기이하게 마음이 끌림을 느끼며 책장을 열었다.

 

<천지간에 가장 빠른 것은 낙뢰(落雷). 낙뢰의 속도를 따르려고 고심한지 백년(百年) 마침내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세 초식의 도법(刀法)을 창안했다.

___천뢰도광(天雷刀狂).>

 

기검룡은 서문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도법...!)

그는 즉시 그것의 구결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식(刀式)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 가지의 내공심법이었다.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구결을 모두 읽고난 기검룡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가공할 위력과 속도를 지닌 쾌도(快刀)의 극치였다.

그는 두세 번 읽어 구결을 암기한 다음 천뢰도보를 내려놓았다.

이때, 능소취는 문득 한 권의 책자를 집어들며 능부인을 바라보았다.

 

<무후진선경(武后振仙經).>

 

책의 끝장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능부인은 능소취를 바라보며 나직이 웃었다.

[우리 취아가 무척이나 칠채금대가 탐이나는 모양이지?]

능소취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무후진선경을 읽기 시작했다.

헌데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기검룡과 능소취는 호기심을 느끼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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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찾아온 마두들

 

 

밤공기가 서늘하다.

독수리들의 부리에 찢기고 피에 절은 옷을 벗어버린 탓에 벌거숭이가 된 상체에 소름이 돋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웃은 임청우는 모옥 앞으로 가서 바닥에 흩어진 약초들을 주워 모았다.

뿌리 채 뽑아온 약초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에 심고 물을 주었다.

나머지는 그늘에 말려놓은 다른 약초들과 함께 부엌으로 가져가서 다렸다.

침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약사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아려 보니 오늘은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만에 만난다는 날이지만, 임청우는 어머니를 떠나가야만 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

 

***

 

모옥을 나온 임청우는 서쪽의 절벽으로 갔다.

천길 벼랑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길 정도 아래쪽에는 임청우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인 작은 동굴이 있다.

임청우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동굴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에 내려섰다.

절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는 임청우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다.

입구 맞은편에는 임청우가 직접 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든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위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도 임청우가 힘들게 모은 책 수십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임청우는 돌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름등에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후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끼이!

호리병을 돌침대 위에 내려놓자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삐죽 내밀며 두리번거린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라.”

임청우는 이불과 함께 개어놓은 여벌의 옷을 집어들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영물답게 금관혈린사는 머리를 다시 호리병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치는 자식이라니...!)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자신의 팔자가 너무도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안의 물건들 중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수십 권에 이르는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렵게 채집한 약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한 산짐승들을 팔아서 산 책들이다.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그 책들은 임청우가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견뎌온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옛 성현들의 지혜가 깃든 책을 읽을 때만큼은 비참하고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귀하지 않은 건 단 한권도 없다.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니 다 가져갈 수는 없다.

다른 책들은 굳이 가져갈 필요 없고... 장자(莊子)와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일옹청풍일지(一翁淸風日誌)만 가져가자.”

임청우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단 두 권만 챙겼다.

장자는 도교(道敎)의 비조(鼻祖)인 노자(老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일컬어지는 장주(莊周)의 존칭이면서 그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옹청풍일지를 쓴 육일거사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당나라의 한유(韓愈)의 뒤를 이어 고문(古文)을 일으켰던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스스로 정한 호().

말하기를, 집고록(集古錄) 일천 권과 장서(臧書) 일만 권, 거문고 한 채, 바둑판 한 개가 있고 항상 술 한 단지를 두고 구양수 자신이 늙어가니 이를 육일(六一)이라 한다고 했다.

임청우는 또 다른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던 구양수를 좋아했다. 그의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칠 것이 없는 장자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임청우는 장자와 일옹청풍일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저 책 두 권을 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든든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임청우는 동굴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늘 어머니의 학대와 독설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이 동굴로 숨어들면 안전하고 편안했었다.

정이 들었던 피신처를 떠나려니 복잡한 감회가 치밀어 오른다.

동굴을 둘러보던 임청우의 눈에 금관혈린사가 들어있는 호리병이 들어왔다.

금관혈린사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 영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뱀은 뱀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꺼림칙한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청우는 호리병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끼이!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리병이 약간 흔들리더니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한다. 나를 따라 갈 테냐 여기에 남을 테냐?”

임청우는 붉은 보석같은 금관혈린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스르르르!

임청우의 말을 들은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리병의 잘룩한 부분을 꼬리로 감아 끌면서 임청우에게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

임청우가 확인하듯 묻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너라도 길동무가 되어주면 덜 쓸쓸하겠지!”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자 금관혈린사도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들을 긴 혀로 핥았다.

대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너 먹기 없기, 너는 나 먹기 없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해결하기다.”

임청우의 말에 금관혈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 뭐가 좋을까?”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관혈린사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임청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먹이의 길이를 먼저 잰 후에 먹는 게 네 식성이니까 척포(尺飽)라고 하자!”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북두무랑 앞에서 몸길이를 재어 똑같은 길이의 뱀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척포, 어때? ?”

임청우가 묻자 금관혈린사는 고개를 주억 거려 좋다는 표시를 했다.

좋다고? 그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척포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르르!

척포라는 이름을 얻은 금관혈린사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호리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되자 친구를 대신 얻게 되었구나.”

임청우는 척포가 들어간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몸, 세상에 나서는데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겠는가? 어차피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는데...”

척포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차며 임청우의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비록 미물이긴 해도 동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늘 하던 대로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는 돌출부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국자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이다.

모옥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임청우가 다가가자 모옥 안쪽에서 임단심의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납니다 어머니!”

임청우는 모옥을 향해 절을 했다.

, 마음에도 없는 헛치레는 집어 치워라.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넌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겠느냐?”

저는 그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임청우는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한다고 비꼬는 것이냐?”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모옥의 문이 덜컹 열렸다.

죽일 놈!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놔?”

이를 바득 갈며 집 밖으로 나서는 임단심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여서 귀기스럽다.

평소였다면 임청우는 어머니가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아비가 누구냐고?”

임청우를 노려보는 임단심에게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임청우는 말없이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단심의 표정과 눈빛이 짧은 사이에 여러 번 변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목숨이 몇 번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눈 몇 번 깜박이는 정도로 짧았지만 임청우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났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이윽고 임단심이 침묵을 끝냈다.

금포염왕을 찾아가서 물어봐라. 그럼 네 아비가 누군지 가르쳐줄 것이다.”

임단심은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임청우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으며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인적 드물고 궁벽한 농산에서 살아온 탓에 금포염왕이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의 뇌리에는 어떤 인물의 형상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북두무랑을 빠져나올 때 진법 속에서 보았던 인물!

태산처럼 웅장하게 느껴지는 몸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이 안개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관혈린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안개 속에 누군가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포염왕... 금포염왕이란 인물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인지요?”

임청우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네놈을 위해서 더 말해줄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임단심의 매정한 말이 임청우에게서 모든 기대를 앗아갔다.

그러시다니 소자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필요한 약초는 대부분 옮겨 심어놓았으니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임단심에게 절을 하고 일어난 임청우는 계곡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금포염왕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살기와 연민이 망설임으로 반죽이 되어 그녀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은밀하게 쥐어져 있던 머리가 뭉툭한 한 대의 철정(鐵釘)이 쩡! 소리가 나면서 떨어졌다.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단심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결국 내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구나.”

헌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임단심은 마침내 왁! 하고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임청우의 모습은 이내 좁고 어두운 계곡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청우! 네 놈을 세상으로 내쫓는 진짜 이유는 고질이 되어 버린 내 내상(內傷) 때문이다. 바로 네 아비에게 당한...”

잇달아 두 번 더 피를 토한 임단심은 가슴을 부여잡고 뇌까렸다.

더 이상 네 놈을 괴롭힐 수도 없기에...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무림에 내보내 고생하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원한 맺힌 눈으로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임단심은 비틀거리며 모옥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옥 앞 초지에 가득 심겨져 있는 화초와 진기한 약초들만이 바람결에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

 

임청우는 세상을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어머니란 존재마저도 잊어버리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비련곡(悲戀谷) 입구에 다다랐다.

곡구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늘 내뱉는 말처럼 자기가 인간같지 않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걸려있는 호리병을 툭 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척포란 놈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 화난 듯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쏙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비련곡 밖에 있는 천류폭포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다.

임청우는 한쪽 절벽에 세워둔 대나무 죽마를 집어 들었다.

곡 밖에 있는 호수 같이 넓게 퍼진 물이 비록 깊지는 않지만 그냥 건너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배를 이용할 만한 곳도 아니다.

대나무 죽마는 임청우가 비련곡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다.

한데 그가 막 대나무 죽마에 올라타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익!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새처럼 날아 들어와 비련곡 입구에 내려섰다.

임청우가 서있는 곳은 절벽 아래쪽의 달빛 그림자에 가리워진 부분이라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청우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인물이 그에게서 불과 일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저 괴물들이 어떻게 여길...)

임청우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난 자들은 그가 낮에 표운봉에서 만났던 마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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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국(破局)의 전조(前兆)

 

 

 

일신재(日新齋)는 제왕성 소성주 모용준의 거처다.

섭장천은 양자로 삼은 종매의 손자 모용준이 제왕성 성주에 걸맞는 인재가 되길 원하는 마음에 일신재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주었다.

섭장천도 경박하고 호색한 모용준의 인성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에서만 후계자를 고르다보니 모용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신재라는 당호에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을 양자로 삼아야만 했던 섭장천의 고뇌와 기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호호호 아이 공자님도...!”

어머나 엉큼하셔라.”

띠리리링! 띠링!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당호가 무색하게 일신재에서는 풍악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질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농탕질은 밤이 되면서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무얼 보았는지 일신재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혐오로 물들어있었다.

소성주님 거처에서 나오는 년들마다 가자미눈이 되는군.”

일신재 주변을 지키던 제왕성 무사들 중 한명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지. 내일 장가 갈 새신랑이 갈보들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걸 봤을 테니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후환이 없을지 모르겠구만. 황금성의 진소저도 한 성깔 한다는 소문이던데...”

처음 말을 꺼낸 무사가 혀를 찼다.

계집 성깔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단 한 남자의 마누라가 되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는 건데...”

입조심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잖아.”

듣고 있던 동료무사가 급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쪽에서 크고 작은 두 명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여자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지만 뒤따르는 여자는 칠척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다.

진상파와 철관음이다.

황금성의 암호랑이께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군.”

이거 뭔 일 나도 나겠는걸.”

내가 안에 들어가 기별함세.”

무사들 중 한 명이 급히 일신재 안쪽에 통보하려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자의 발걸음은 진상파가 내뱉은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무사들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색이지만 진상파의 말에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삼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띠딩!

호호호! 하하하!

일신재로 다가온 진상파의 귀에 풍악소리와 함께 남녀가 수작을 벌이는 낮 뜨거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짐승같은 것들...)

진상파는 치를 떨었다.

철관음의 보고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주겠다.)

진상파는 이를 갈며 일신재 입구로 다가갔다.

(일 났구만!)

(저 암호랑이가 들이닥친 걸 알리지 못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어.)

곁눈질로 진상파를 훔쳐보는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일신재 안에서는 진상파가 생각하는 대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정난 짐승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사내는 다섯 명이고 여자는 그 배가 넘는 열 명 이상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끼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자! 오늘은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방문 정면의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은 모용준은 흥에 겨워 웃었다.

상의를 풀어헤쳐 맨살을 드러낸 모용준 좌우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녀 두 명이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 밤만 지나면 슬프게도 난 더 이상 총각이 아닌 거다. 불쌍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이 더 화끈하게 놀아야한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나 말하는 본새는 영락없는 시정의 파락호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되는 건데...”

주안상 사이에 기녀를 눕히고 희롱하고 있던 자가 모용준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장가를 가야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모용준도 마주 눈을 흘기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먼저 장가 간 형님의 말씀이니 잘 새겨들어 임마. 마누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오입질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내가 다시 하던 짓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소리의 근거를 말해보라니까.”

!

모용준은 짐짓 거칠게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준이 넌 풍류한량을 자처하는 놈이 일도(一盜), 이비(二卑), 삼기(三妓), 사첩(四妾), 오처(五妻)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옳거니!”

모용준은 그제야 악우(惡友)의 말뜻을 깨닫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자고로 계집은 훔쳐 먹는 게 가장 맛나고 하녀와 창녀, 첩이 그 다음 순서인 거다.”

물론 가장 재미없는 건 마누라야. 마누라와 동침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니까.”

맞아. 맞아. 대를 이을 새끼를 만들어야하는 게 아니라면 마누라하고는 살도 맞대기 싫지.”

다른 놈들도 낄낄 대며 친구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마누라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이거야. 눈 부라리며 감시하는 마누라가 있어야 몰래 훔쳐 먹거나 사먹는 게 맛나거든...”

여자를 눕히고 희롱하는 놈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냐? 제대로 된 오입질은 마누라 눈을 속이면서 하는 것이다?”

모용준은 피식 웃었다.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흥미진하고 살 떨리는 경험인지 준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모용준 옆에서 두 명의 기녀를 함께 희롱하고 있던 다른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 말을 들으니 낙담 대신 기대가 되는구나. 나도 내일 부터는 제대로 된 바람을 피워볼 수가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진정한 오입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모용준!”

장래의 제왕성 성주가 오입장이라니 볼만하겠구먼.”

못된 친구놈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였다.

!

일신재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

뭐냐?”

꺄악!”

엄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놈들과 기녀들은 기겁하며 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짝 열린 문 밖에 진상파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진상파의 표정은 차분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이크!”

... 진소저!”

엉겨 붙어 있던 사내놈들과 기녀들이 불 맞은 짐승들처럼 펄쩍 뛰며 떨어졌다.

... 진소저! 여긴 어쩐 일로...”

어서 오시오 진소저.”

사내놈들은 억지로 웃으며 급히 옷을 추스렸다.

기녀들도 겁에 질려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사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가요.”

진상파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

가라니... 어디를...”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들은 당황하여 진상파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준도 술잔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제왕성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만일 다시 내 눈에 띠는 인간이 있다면...”

진상파의 들끓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집안을 완전한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요.”

진상파는 고저(高低)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진상파의 서늘한 눈가로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진소저.”

당장 사라지겠소이다.”

두 번 다시 제왕성에 얼씬 거리지 않겠소.”

사내들은 겁에 질려 좌우의 쪽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진상파가 서있는 정문으로는 나갈 엄두를 못낸 것이다.

겁에 질린 기녀들도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끌어안고 사내들 뒤를 따랐다.

모용준의 친구들은 제법 사는 집안 출신들인지라 황금성에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어 마침내 돈을 쌓아놓고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황금성에 밉보이면서까지 거래를 하려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일신재 안에는 모용준만이 남게 되었다.

진상파는 문 밖에 서서 모용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젠장...)

진상파의 시선을 피하면서 모용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친구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양부 섭장천이 추진한 이 혼사가 깨질 경우 자신이 제왕성의 주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소저. 소꿉친구들과 기분을 내는 게 좀 지나쳤던 것같소. 내 사과하리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포권을 했다.

진짜 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자기 소행을 변명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의 후계자께서 남에게 머리를 숙일 일을 해서야 되겠어요?”

진상파가 여전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멸감으로 얼굴이 이지러지긴 했지만 모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는...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길 바라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진상파는 일신재를 떠났다.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거야.)

철관음을 거느리고 일신재에서 멀어지며 진상파는 생각했다.

(몸에 밴 못된 버릇이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더 나빠지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살아야한다면 겉모습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밖에...)

진상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뒤이어 분을 못 참고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졸장부가...)

진상파는 미간을 모으며 일신재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의 무사와 하녀들도 겁에 질려 일신재를 보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그 사이에도 일신재 안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용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가씨...”

걱정마. 나도 간단한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감해하는 철관음에게 말하며 진상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속 좁고 천박한 인간!)

진상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모용준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진상파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저런 졸장부와 부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진상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진상파가 바로 응한 것은 아니다. 뒷조사를 통해서 모용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망설이는 진상파에게 적극적으로 혼사를 권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정확하게는 의모(義母)였다.

이름이 조예(趙芮)인 진상파의 의모는 새석숭 진보륜이 늦으막이 거둔 후처였다.

비록 새석숭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예는 황금성의 가장 큰 어른이다.

의모의 강력한 권유도 있고 해서 진상파는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키워온 황금성을 탐욕스러운 떨거지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혼인을 물릴 수도 없다.)

진상파의 손이 핏줄이 드러나도록 강하게 쥐어졌다.

(결국 저 못난 인간을 길들이는 것 외에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진상파는 거푸 심호흡을 하여 참담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렸다.

 

* * *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제왕성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소성주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휘해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때문이다.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이 십팔 년 만에 맞이한 경사다.

무림의 거의 모든 방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축하하기 위해 제왕성을 찾았다.

제왕성의 식솔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하객들을 대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모여 있는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진소저가 기선을 제압했군!”

제왕성의 부()성주 중 한명인 살천인조(殺天忍祖)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제왕성에 부성주라는 직책은 없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처음으로 부성주 두 명이 세워졌다.

납치당한 아들을 찾는 데 전념하던 섭장천은 자신을 대신하여 제왕성의 대소사를 꾸려갈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성주라는 직책은 그렇게 생겼으며 그중 한명이 살천인조다.

인조(忍祖)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천인조는 왜국(倭國) 출신의 전설적인 자객이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지만 현역일 때의 살천인조가 노린 표적은 결코 죽음을 면치 못했었다.

비록 섭장천 때문에 신주이십팔숙에는 끼지 못하지만 살천인조는 섭장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세고수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인조! 소성주가 느꼈을 수모와 모멸감을 생각해보시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붉은 빛 털로 뒤덮인 거구의 중이 화등잔같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불곰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격을 자랑하는 노승의 별호는 혈가람(血伽藍)이다.

혈가람은 소림사 출신으로 소림사 당대 방장에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혈가람은 성격이 급하고 살기가 넘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일단 때려죽이고 보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천명이 넘는 목숨이 혈가람의 손에 희생되자 결국 소림사는 혈가람을 파문시켜버렸었다.

비록 소림사에서 쫓겨난 몸이지만 혈가람의 무공은 막강했다.

섭장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인물이 혈가람이다.

혈가람도 제왕성의 부성주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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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슴 떨리는 치료법

 

 

연못가 풀밭에 눕혀진 강미루의 피부는 먹물을 담은 통에 빠졌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몸이 돌처럼 단단해져 있다. 뜨거운 연못물에서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미루의 모습은 마치 흑옥(黑玉)으로 빚어놓은 옥상(玉像)인 듯 보였다.

(뭔가에 중독되었다.)

백남빈은 검게 변한 강미루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던 연약하고 오똑하던 콧날도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쉽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백남빈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강미루를 보며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이 든 이래 처음 살을 맞대본 여자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 어여쁜 소녀의 죽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다.

흑마의 등에서 자신의 턱을 물었던 악착스러움까지도 죽은 지금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복받친 백남빈은 자신도 모르게 강미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싸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 전해진다.

하지만 백남빈 몸속의 피는 꽃같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은 자신의 왼손이 닿은 강미루의 오른쪽 귀가 언뜻 흰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손을 떼자 강미루의 오른쪽 귀는 다시 검어 졌다.

왼손을 또 갖다 대자 강미루의 피부는 흰빛을 되찾았다.

왼손을 대었다 떼었다 몇 번 해본 백남빈은 그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의 조화임을 알았다.

오채금환은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것으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오채금환을 얼굴에 갖다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서 검은 색이 잠시 없어졌다.

그걸 보며 백남빈은 생각했다.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인데...)

혹시 마땅한 실험대상이 없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백남빈의 눈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는 흑왕이 보였다.

백남빈은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에서 강미루를 꺼내면서 흑왕도 함께 끌고 나왔었다.

흑왕은 오랫동안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녹초가 된 외에는 딱히 독에 중독되거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디에 독상을 입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저 말은 멀쩡한데 사람만 중독되는 독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백남빈은 강미루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몇 겹의 옷이 걸쳐져 있어서 상처가 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사아악!

잠시 망설인 후에 백남빈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강미루가 걸치고 있는 붉은 옷을 청랑검으로 잘라서 벗기기 시작했다.

몸이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옷을 훼손하지 않고는 벗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옷과 속옷이 모두 청랑검에 잘려나간 후 강미루의 알몸이 흑옥같은 빛을 띤 채 드러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소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고 있었다.

백남빈은 자신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체같이 굳어진 모습이지만 굴곡이 뚜렷한 여체를 난생 처음 보는 때문이다.

독에 중독된 후 모든 근육이 긴장을 일으킨 탓에 가슴은 일부러 세운 듯 봉긋했고 다리며 팔은 마치 깎아놓은 조각품 같이 쭉 뻗어있다.

팽팽한 아랫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두둑한 둔덕에는 피부색같이 검은 풀같은 것들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다.

미끈하기만 한 피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숲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백남빈은 마치 독사를 보기라도 한 듯이 질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언 듯 시야로 스쳐지나간 수림 아래의 깊이 갈라진 형적이 백남빈의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트려버릴 듯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언제까지 눈을 감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남빈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강미루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하지만 굳은 다짐과 달리 소녀의 알몸을 본 백남빈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황하여 지리멸렬한 신음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약관이 목전인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더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본 적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화끈 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것같은 여인을 보면서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비록 큰 맘 먹고 옷을 벗기기는 하였으나 막상 벗기고 나자 독상(毒傷)을 입은 곳을 찾기는커녕 왜 발가벗겼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여자를 모르는 숫총각에게 벌거벗은 여체는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눈을 감아도 선하고 눈을 뜨면 정신이 몽롱해 지는것 같았다.

"대장부가... 대장부가... 겨우 여자의 알몸 때문에 평정심을 잃다니..."

백남빈은 용기를 갖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떨려왔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젊음의 끓는 피라는 게 이성(理性)에 의하여 진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검은 조각상같은 강미루의 모습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록 백남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백남빈은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강미루의 몸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훑어보았지만 작은 상처 하나 눈에 뛰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독을 먹었던 것이로구나. 그걸 몰랐어. 그런데 어디서 독을 먹었을까?왜 먹었을까?"

백남빈은 마침내 강미루가 독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음독(飮毒)한 것을 알았다.

백남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강미루의 뻣뻣해진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시시!

그러자 오채금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독을 빨아들인 후 연기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입 속이 독으로 가득 차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백남빈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연못의 물이 독인 것은 아닐까? 뜨겁기도 했지만 뭔가가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었다."

백남빈은 그 즉시 연못물에 젖어 있는 자신의 옷에 반지를 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내심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백남빈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독을 마신 게 분명한데...”

백남빈은 자신이 조금 벌려놓은 강미루의 입술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혹시...)

강미루의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백남빈은 생각 난 것이 있어 연못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에 침을 뱉어 보았다.

츠츠츠!

순간 침이 닿은 옷자락은 먹물에라도 닿은 듯이 검은 색으로 확 변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다."

백남빈은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본래 연못물은 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액(唾液)과 섞이면 독특한 극독(劇毒)이 되어 생명체를 석상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약하게 중독된 사람은 생각도 그대로 할 수 있고 보고 들을 수도 있으나 몸은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의식마저도 잃어버리고 숨도 멈춰서 완전히 검은 조각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미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못물을 들이켰었다.

그래도 흑왕이 헤엄치면서 떠받쳐준 덕분에 연못물을 아주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마셨더라면 강미루는 온몸이 진짜 돌같이 굳어져서 백남빈이 입을 열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남빈의 영감(靈感)이 독을 찾아내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다.

백남빈은 절뚝거리며 일어나 흑왕에게 다가갔다.

파김치가 되어 주저앉아있는 흑왕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허벅지의 상처를 묶었던 머리띠를 끌러서 침을 뱉었다.

연못물에 젖어 있던 머리띠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변했다.

푸르르!

그것을 본 흑왕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지금 네 주인은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잠시 동안만 참아보렴. 네 주인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

백남빈의 부드러운 말에 흑왕이 가만히 있을 때 백남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머리띠를 푸릉거리는 흑왕의 입속에 확 넣어버렸다.

흑왕이 깜짝 놀라"푸럭" 하며 머리띠를 뱉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입속으로 독이 들어가자마자 흑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탑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보통 말의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천리마 흑왕마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본래 검은 색이던 흑왕의 몸은 쇳덩어리처럼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목에 손을 대 보니 벌써 뻣뻣해져있다.

말이 사람보다도 더 독에 민감한 것 같았다.

스윽!

백남빈은 쓰러진 흑왕의 가슴을 청랑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벌써 진하게 굳어진 검은 피가 상처에서 배어나왔다.

백남빈은 그 상처에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스스스!

그러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백남빈은 코를 막으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바닥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푸시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돌처럼 굳어졌던 흑왕의 몸이 가슴의 상처부위부터 시작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백남빈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생각한 오채금환의 사용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말()만큼이나 드센 대려장의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을 죽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남빈이다.

헌데 대려장의 소녀를, 그것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를 구하는데 왜 이처럼 정성을 쏟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럴까?"

백남빈은 반문해 봤으나 뚜렷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채금환은 크기는 작아도 독을 제거하는 효능은 아주 강력해서 벌써 흑왕의 중독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가 점차로 줄어들다가 종래에는 나지 않았다.

몸에서 독이 빠지자마자 흑왕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푸르르!

고개를 든 그놈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백남빈을 보고 있었다.

백남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먹은 그놈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강미루에게 돌아갔다.

푸른 풀밭 위에 누워있는 소녀의 검은 나체가 희미한 새벽에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백남빈의 가슴은 다시금 세차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진정하자!)

벌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강미루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말에게 했듯이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가볍게 칼로 그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중독 상태는 흑왕보다 심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당황하여 조금 더 깊이 베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백남빈은 강미루의 가슴에서 동전만한 크기로 살점을 도려내었다.

도려진 살점은 돌조각 같이 딱딱했다.

불룩한 젖가슴 위에 파여진 오목한 부위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그 상처 부분에 집어넣었다.

치이이!

그러자 달군 쇠를 물속에 집어넣은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연기가 뭉클 일어났다.

강미루의 왼쪽 젖가슴 위에 뚫린 구멍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인양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강미루의 검은색 나신은 점차 흰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백남빈은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해가며 강미루의 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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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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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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