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무협소설'에 해당되는 글 187건

  1. 2020.05.02 [환골탈태] 제 25장 애절한 이별
  2. 2020.05.01 [환골탈태] 제 24장 미궁에 빠진 신세내력
  3. 2020.04.30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3
  4. 2020.04.29 [환골탈태] 제 23장 느닷없는 봉변
  5. 2020.04.29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2
  6. 2020.04.28 [환골탈태] 제 22장 다시 만난 마두들
  7. 2020.04.28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1
  8. 2020.04.27 [환골탈태] 제 21장 의성의 딸
  9. 2020.04.27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3
  10. 2020.04.26 [환골탈태] 제 20장 구원의 손길 1
  11. 2020.04.26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2
  12. 2020.04.25 [환골탈태] 제 19장 함정에 빠지다
  13. 2020.04.25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14. 2020.04.24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1
  15. 2020.04.24 [환골탈태] 제 18장 살성의 귀향 1
  16. 2020.04.23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17. 2020.04.23 [환골탈태] 제 17장 아아 ! 청구단서!
  18. 2020.04.22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1
  19. 2020.04.22 [환골탈태] 제 16장 의부의 죽음
  20. 2020.04.21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느나 먼 곳에서 왔느니 1
  21. 2020.04.21 [환골탈태] 제 15장 인간쟁탈전
  22. 2020.04.20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4
  23. 2020.04.20 [환골탈태] 제 14장 어머니를 닮은 여인
  24. 2020.04.19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3
  25. 2020.04.19 [환골탈태] 제 13장 구원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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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애절한 이별

 

 

막비강은 두 소녀가 필시 뒤쫓아오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북산검호각을 나서기 무섭게 팔보간섬의 경공술을 극한까지 전개하여 유성처럼 날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질주했을까?

붉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에서 족히 오백여 리는 남쪽으로 내쳐 달린 상태였다.

돌연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산봉이 막비강으로 하여금 급히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막비강이 멈춰 선 곳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 이어진 수직의 절벽 위쪽인데 수백장은 됨직한 그 절벽 아래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막비강은 비록 깜짝 놀랐지만 적시에 걸음을 멈춘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에 제때 멈추지 못해 강변에 노출된 기암괴석 위에 떨어졌다면 분신쇄골은 말할 것도 없고 뼈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내 침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 텐데... 나같이 불효불인(不孝不仁)하고 죽어서 묻힐 땅도 없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강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하다.]

비통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 저었다.

[... 아니지. 난 마땅히 집에 돌아가 아버님 앞에서 죽어 그분에게 최후의 위안이나마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된다. 만일 아버님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면 앞으로 사람 노릇도 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아버님 앞에서 자결한다면 부모의 마음만 상하게 하는 셈이니... ... 죽기는 어차피 죽어야 할 텐데 어떤 방법으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몇 번이나 투신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생사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인지라 산봉 위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헌데 그때였다.

[히히히! 누나! 보아하니 저 사람은 이곳에 연자비운(燕子飛雲)의 경공신법을 연마하러 온 모양이야.]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치기어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막비강이 흠칫 놀랄 때 또 다른 음성이 이어졌다.

[아니다. 그는 우리처럼 죽을 장소를 찾고 있다.]

두 번째 들린 음성은 제법 나이가 든 소녀의 것이었다.

[그럼 뛰어내리기만 하면 될 텐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그렇지도 않다. 죽지도 못하고 팔다리만 부러지면 평생을 두고 고생하게 된다.]

막비강은 처음 목소리가 어린 소년의 음성인지라 의아심을 금치 못하고 귀담아들었다.

헌데 이어진 나이가 더 든 소녀의 음성이 자기들도 죽을 장소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엾은 생각이 들어 탄식을 했다.

(어린 나이에 죽으려고 하다니 애석한 일이구나!)

그는 자기의 소행은 죽는다고 해서 마음속의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그것도 나이도 어린 소년 소녀들이 죽는다는 말을 하자 무엇 때문에 꼭 죽으려 하는지의 이유를 물을 심산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의 대화를 계속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상대방이 자기를 비웃고 있음을 깨닫고 화가 치밀어 버럭 노성을 질렀다.

[내가 죽으려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자 나무 뒤에서 소녀의 놀리는 소리가 전해 왔다.

[호호호! 우리는 여기서 당신이 죽는 것을 구경할 테니 빨리 뛰어내리세요.]

이때 아래쪽 강상(江上)에서 돌연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여아(麗兒), 너는 또 천아(川兒)와 말다툼을 했구나. 천아야! 뛰어내리면 안 된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중년여인의 음성이었다.

막비강은 어둠 속에서 최대한 시력을 돋우어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까마득한 아래쪽의 강 물위로 작은 조각배 한 척이 떠가고 그 위에서 날렵한 인영이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머니! 이곳에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어요.]

중년여인의 말에 소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중년여인의 음성은 싸늘하고 무정하게 일변했다.

[자살하려는 작자가 있다면 뛰어내리게 버려 두어라!]

막비강은 멀리 떨어진 강 위에 있음에도 음성이 맑고 똑똑히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 여인의 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뛰어내렸다가 저 여인에게 구조된다면 죽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속의 일을 말해 주어야 하니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막비강은 아무 대꾸도 않고 발을 굴러 절벽을 따라 상류 쪽으로 질주해 갔다.

[호호호, 겁쟁이!]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좋다. 너희들이 내가 죽지 못한다고 비웃지만 나는 꼭 강물에 뛰어내려 죽을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보여 주겠다.)

막비강은 미친 사람처럼 질주하며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였다.

 

***

 

절벽 위의 길을 따라 다시 얼마를 달려갔을까?

그는 어느덧 또 다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천인단애 위에 도착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센 파도가 춤을 추고 괴석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이번에는 뜻대로 죽을 수 있겠구나. 여기서 뛰어내리면 분신쇄골이 되어 강물에 떠내려갈 테니 나의 이 죄 많은 몸은 세상에 뼈도 남지 않겠지.)

헌데 그가 막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길 봐요. 저 사람 혹시 둘째 오라버니가 아녜요?]

[정말 그렇구나!]

갑자기 절벽 중간쯤에서 귀에 익은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막비강은 그 목소리들을 듣는 순간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알고 깜짝 놀랐다.

바로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과 그녀의 딸 막영란이었다.

혈검산장에서 막고천과 함께 사라졌던 두 모녀가 어떻게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막비강은 당혹해하면서도 생각을 굴렸다.

(염라철장 곡 백부님의 일을 그들 모녀에게 알려 주어 그들 모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나의 부친 막고천도 이 근처에 있다면 죄를 받고 죽을 수 있으니 더욱 잘된 일이다.)

이런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강아! 절대 아래로 뛰어내려선 안 된다!]

냉상영의 애절한 음성이 전해 왔다.

화라라락!

고함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쪽으로 이어진 좁은 협도(狹道)로 한 명의 중년여인이 다급히 달려 올라왔다.

바로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이었다.

온순하고 자애로운 냉상영의 얼굴은 이 순간 당혹과 초조로 물들어 있었다.

냉상영은 혹시나 막비강이 투신할까 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냉상영의 뒤쪽으로는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체구의 소녀가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냉상영의 딸인 막영란이었다.

[이러지 말아라, 강아야!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돼!]

단숨에 절벽 위로 달려 올라온 냉상영이 와락 막비강을 끌어안았다.

막비강의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자그마한 키의 여체가 부들부들 떨며 막비강의 건장한 몸을 휘어감는다.

너무도 풍만하고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서는 막비강의 코에 매우 익숙한 내음이 났다.

은은히 백합 형기가 감도는 살내음이다.

하지만 이 순간 막비강은 그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마치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냉상영을 내려다보았다.

가녀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육중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냉상영의 젖가슴이 자신의 가슴과 그녀의 교구 사이에 끼어 납작하게 눌려져 있다.

[두 분은 어찌하여 이런 곳에 계십니까? 나의 부친은 어딜 가셨습니까?]

막비강이 망연자실하여 묻자 냉상영이 곤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누가 네 부친이란 말이냐?]

[혈검산장의 막고천 장주님 말입니다.]

[그 막가 악적 말이냐?]

순간 온순하던 냉상영의 눈에서 표독한 한기가 내뻗쳤다.

[그는 네 부친이 아니다.]

냉상영은 만면에 분노의 빛을 머금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 소리하지 마시오! 그분 어른은 나를 낳아 주신 부친이 틀림없소.]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외쳤다.

[당초 염라철장 곡 선배님이 나를 잘못 유괴하는 바람에 난 그분이 나의 부친이라 오해했던 거요. 그러나 이제 나는 염라철장 곡선배가 아주머니의 원래 남편이고 나는 막 장주의 친자식임을 알아냈소.]

막비강의 말에 냉상영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나는 염라철장 곡 선배님이 내게 금강옥액을 먹여 대공을 성취시켜 주신 은덕을 생각하여 두 분을 탓하지 않겠소. 곡 선배님의 유품을 돌려줄 테니 안전한 곳에 숨어 편히 사십시오.]

막비강은 품속에서 염라철장의 상징인 강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냉상영이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말했다.

[강아, 기구한 우리 모녀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막고천은 절대 너의 부친이 아니다. 그것은 그 악적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 사실이니 틀림없다.]

[... 그게 정말입니까?]

냉상영의 말에 막비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냉상영이 애절한 표정으로 막비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나의 진짜 부친은 누굽니까?]

막비강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급히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네 모친이 상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혹시 나를 속이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냉상영의 대답에 막비강은 검미를 찌푸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냉상영은 애잔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삼년 만에 혈검산장으로 돌아와 소란을 피웠을 때 나는 네 수중의 강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원래 남편이신 염라철장께서 너를 자기 유복자로 알고 데려갔음을 알았다. 하지만 막가 악적의 장원에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냉상영은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였다.

[네가 보인 놀라운 신위에 놀라 달아난 막가 악적은 혈검산장에서 멀지 않은 곳의 은신처에 피신했다. 그곳에서 막고천은 경파 언니에게 악독한 자식을 낳아 다리가 잘리고 수모를 당하게 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네 어머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너를 끝까지 막가 악적의 자식이라 고집했다. 그러자 막가 악적은 그제서야 네 모친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막비강은 참지 못하고 말을 받아 물었다.

[그 사실이 무엇입니까?]

[원래 그 노적은 한 가지 악독한 무공을 연성한 후 일신의 정혈(精血)이 고갈되어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노적이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이십 년도 전의 일이다.]

막비강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작자는 이미 아이를 가진 임산부만 골라 탈취했군요. 남의 자식을 훔쳐 가문을 이으려고!]

[단순히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냉상영은 한 서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막고천은 고갈된 정혈을 보충하고 또 내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수태한 여인들을 골라 욕보인 것이다!]

그녀는 지난날의 치욕이 떠오른 듯 치를 떨었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몸으로 막고천에게 처음 능욕 당하던 그날의 악몽이 지금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그녀다.

막비강도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외간 사내에게 겁탈 당했을 냉상영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는 조금쯤 상상이 간 때문이다.

[, 그렇다면 큰형 막불계도 막고천의 친자식이 아니겠군요.]

막비강은 어색함을 감추려 화제를 돌렸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냉상영은 소매 자락으로 눈가의 물기를 찍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 모친이 막가 악적의 집에 끌려온 것은 나보다 삼 년 가량 빨랐다. 그리고 경파 언니가 혈검산장에 들어왔을 때 불계는 이미 세 살이었으므로 그 애가 막가 악적의 친자식인지의 여부는 그 애의 생모만 아는 일이다.]

막비강은 냉상영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막고천에게 피를 뽑아 혈연관계를 증명하자고 말했을 때 그의 안색이 대변한 것은 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구나. 자살하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혈검산장에 돌아가 그 악적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으면 난 사람도 아니다.]

냉상영이 탄식을 하며 말을 받았다.

[지금 산장에 가 보았자 그 악적을 만나지 못한다.]

막비강은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중이 도망쳐도 절까지 짊어지고 도망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검산장이 존재하는 한 언제고...!]

[강아,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네가 산장을 떠난 후 막가 악적은 대부분의 수하들을 해산시키고 여자들과 몇 명의 심복만 데리고 떠났다. 우리 모녀는 그자의 심정이 극도로 복잡해져 있는 틈을 이용하여 간신히 도망쳐 나온 것이다.]

[그럼 제 생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비강은 급히 물었다.

[당시 제각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다른 사람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네 모친은 막가 악적의 심복들로부터 삼엄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는지라 아마 우리처럼 도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막비강은 곤경에 처해 있을 생모를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냉상영이 그런 그를 품에 안아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강아, 울음을 거두어라! 네 모친이 고생은 하겠지만 결코 죽임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적은 다시 네게 따라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그녀를 살려 둘 것이기 때문이다.]

막비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막고천! 나는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놈을 찾아내고 말겠다.]

냉상영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강아, 너는 어디서 란아의 부친을 만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 아주머니!]

이어 막비강은 염라철장에 대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냉상영은 막비강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비 오듯 흘리더니 갑자기 막비강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막비강은 그녀와 함께 무릎을 꿇으며 손을 저었다.

[아주머니, 이러시지 마십시오.]

[아니다. 네가 친히 내 남편을 안장해 주었으니 마땅히 나의 절을 받아야 한다. 란아, 너도 빨리 오라버니에게 큰절을 올려 고맙다는 인사를 해라!]

막영란은 모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꿇었다.

막비강은 안절부절못하며 급히 만류했다.

[아주머니, 이러시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냉상영은 만면에 처량한 빛을 가득 머금었다.

[강아, 네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느냐?]

막비강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염라철장 곡 선배님께 대은(大恩)을 입은 그때부터 그분을 부친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주머니는 저의 친어머니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분부만 내리십시오. 저는 어떠한 일이라도 기꺼이 복종하겠습니다.]

냉상영의 처량한 얼굴에 한 가닥 희열의 빛이 스쳐 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란아 부친의 얼굴을 봐서라도 란아에게 몇 가지 무예를 가르쳐....]

막비강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지금 저는 그날 복용했던 금강옥액을 모두 란 매에게 돌려주고 제가 연성한 절예까지 모두 전수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의 마음이 그렇게 기특하니 하늘도 너희 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

냉상영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막비강을 끌어안더니 막영란을 돌아보았다.

[란아, 똑똑히 들어라! 어미가 막고천 그 악적에게 정조를 잃고도 지난 십 팔 년간 모욕을 참으며 살아온 것은 네가 커서 부친의 원수를 갚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오라버니를 사부로 모시고 열심히 무예를 연마해라. 그래야만 이 어미를 슬프지 않게 할 수 있다.]

막영란은 눈물을 흘리며 냉상영에게 큰절을 했다.

[어머니,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아무렴 그래야지. 그럼 어미는 이만 가 보아야겠다.]

화라락!

냉상영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막비강을 힘껏 밀치더니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막비강은 그녀가 자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지라 냉상영이 미는 기세에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안 됩니다!]

막비강이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땐 냉상영은 이미 절벽 아래로 투신한 후였다.

[어머니!]

그때 막영란도 모친을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란 매, 안 돼!]

막비강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막영란이 놀랍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절벽 아래에서 바람을 타고 냉상영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란아, 굳세게 살아 남아서 부친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어미는 이제야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구나.]

절벽은 너무 높아 냉상영은 이 몇 마디 말을 하고 한참 후에야 비로소 수면에 떨어졌다.

첨벙!

물에 빠진 냉상영은 순식간에 파도에 삼켜져 버렸다.

그리고 절벽 위에서 두 남녀만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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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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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미궁에 빠진 신세내력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정신이 돌아온 막비강은 망연자실하여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혼미한 중에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꿈이었을까?)

막비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제발 악몽이기를 바랐다.

[흑흑! 혜아야!]

[흐윽! ... 이제 어쩌면 좋아, 언니?]

하지만 한옆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두 소녀의 울음소리가 그의 희망을 산산이 바스러뜨려 버렸다.

어둑한 동굴 속, 두 소녀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전씨 자매였다.

[죽여 주시오!]

막비강은 두 소녀 앞에 팍 머리를 박았다.

그저 그녀들의 처분에 맡길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그저 두 분이 죽으라면...!]

[닥쳐요!]

막비강이 다시 죄를 빌려 하자 언니 쪽인 홍의소녀가 발칵 화를 내었다.

[당신을 죽이면 우리 자매의 앞날은 어찌되죠? 다시 한 번 죽겠다는 소릴 하면 그땐 정말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어요!]

(자신들의 앞날이라고...? 완전히 옴치고 뛸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막비강은 홍의소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간파하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홍의소녀는 과연 언니답게 그 와중에서도 재빨리 막비강에게 올가미를 씌워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들 자매를 막비강이 함께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암시를 한 것이다.

[알겠소! 두 분에게 지은 죄가 태산보다도 무거우니 책임을...!]

[꺄악!]

막비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 순간 녹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녹의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인이 될 이 사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훔쳐보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로 막비강의 알몸이 들어온 것이다.

(망신살하고는...!)

막비강은 급히 옷을 끌어들여 가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에그머니나...)

막비강의 알몸을 본 녹의소녀는 새삼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본의 아니게 추태를 부린 셈이 된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서둘러 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는 역시 몸을 가린 두 자매와 마주앉았다.

녹의소녀는 원래의 녹의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언니 쪽인 홍의소녀는 헐렁한 막비강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막비강이 그녀의 적삼을 너무 거칠게 벗겨 버리는 바람에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 낭자께서 이렇게 도와 주셨으니 소생은 평생 두 분께 봉사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막비강의 말에 이제는 제법 대담해진 녹의소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봉사를 받으려는 거겠죠? 하여간 좋겠네요! 당신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양손에 꽃을 꺾어 든 셈이니...!]

[혜아야!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홍의소녀가 질겁하며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막비강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야 유구무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두 분 낭자의 방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홍의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싸움을 할 때는 매섭고 인정사정도 없더니 말하는 태도는 마치 여자 같군요. 제 이름은 전란(田蘭)이고 이 아이는 동생인 전혜(田蕙)예요. 사실 저희 자매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랍니다!]

그녀의 말에 막비강은 흠칫 놀랐다.

두 소녀가 자매인 줄은 알았지만 쌍둥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두 자매는 모든 게 대조적이었다.

언니 쪽인 전란은 몸매도 풍만할 뿐 아니라 성격도 넉넉하고 활달했다.

반면 동생인 전혜는 선병질적인 가녀린 체구에 성격도 쌀쌀맞고 매몰찬 것이다.

도저히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자매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두 소녀는 방년 십구 세로 막비강보다 두 살 아래였다.

또한 그녀들은 사패천 중 하나인 북산검호각의 직계 후손이었다.

막비강은 두 소녀와 몇 마디 형식적인 말을 나눈 후 다시 전포에 관해 물었다.

 

노호검(老虎劍) 전포(田袍)!

 

그는 전대 북산검호각의 각주로서 두 자매에게는 백조부(伯祖父), 즉 큰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막비강의 물음에 녹의소녀 전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은 왜 그분 어른에 관해서만 계속 질문을 하시죠?]

[그분 어른을 만나 뵙고 내 부친이 누군지 여쭈어 보려고 합니다.]

막비강은 지난일들을 대충 설명하고 눈동자에서 기대의 광망을 발산하며 두 자매를 주시했다.

언니 쪽인 전란이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실망하시겠지만 사실 우리 자매도 지금 그분 어른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이 이 말을 듣고 실망의 빛을 띠자 전란이 얼른 말을 이었다.

[백조부께서는 십오 년 전에 집을 떠나신 후 돌아오시지 않아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저희 집안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발생하여 전가족이 출동하여 그분 어른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은 곤혹의 빛을 띠며 전란을 응시했다.

[어떤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까?]

전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혜가 옆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어쩌면 당신과 관련이 있을지 몰라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요? 나와 관련이 있다구요?]

전혜는 전란이 눈짓으로 제지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은방울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에요. 사실 지난달 우리 집 중당(中堂)에서 한 장의 산수화가 발견되었어요.]

[그림?]

[그 그림 속에는 많은 인물이 있으나 대부분이 죽었으며 만면에 놀람과 당황하는 빛을 가득 머금은 한 명의 임산부와 또 두 명의 사내가 시체 더미 속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 그림은 방금 당신이 말한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잖아요?]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매우 흡사하군요. 임신한 그 부인은 아마 나의 모친일 것이며 혈전을 벌이는 두 사람 중 한 분은 나의 부친이 틀림없습니다. 헌데 당신의 백조부는 왜 찾으려고 합니까?]

이번에는 전란이 말을 받았다.

[그 그림 뒷면에는 백조부님의 수결(手決)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걸로 미루어 보건대 그 그림은 백조부님께서 친히 집안에 간직해 두셨든지 아니면 그분 어른과 관계있는 사람이 가져왔을 거예요. 어쩌면 백조부님의 원수 소행일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조사해야만 해요.]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전씨 자매를 바라보았다.

[전 낭자, 외람된 말 같지만 나를 귀각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리하여 막비강은 두 소녀를 따라 길을 떠났다.

 

***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에 도착하여 그림 속의 인물을 보면 자기의 신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만 알아내면 막고천이 부친을 괴롭히고 모친을 탈취한 증거까지 생기게 된다.

그럼 다시 혈검산장에 찾아가 떳떳하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보름 후, 그는 기대와 흥분이 뒤엉킨 심정을 안고 드디어 북악(北岳) 항산(恒山)에 자리한 북산검호각에 도착했다.

북산검호각은 사패천 중 북패천이라 불리는 것과 달리 매우 적막했다.

깎아지른 항산의 봉우리들 사이에 지어진 드넓은 성보에는 다만 삼백여 명의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북산검호각은 제자를 받아들이는 절차가 까다롭고 또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하산을 허락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 때문에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그토록 적은 인원으로도 무림의 사패천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을 보면 북산검호각의 검호들 개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검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가솔들이 적은 북산검호각인데다 근래에는 노호검 전포의 종적을 찾기 위해 대다수의 검호들이 강호로 나간 상태라 한층 더 적막했다.

두 자매의 웃어른들은 하나도 없고 그저 몇몇 문인들과 시비들만이 북산검호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시바삐 그림을 보고 싶은 일념에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의 적막한 모습 같은 것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 이분은!]

헌데 예의 그림을 보는 순간 막비강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림 속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내는 젊은 시절의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과 염라철장(閻羅鐵掌) 곡강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놀람과 당황의 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임산부는 막비강 자신의 생모 한경파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 중 다섯 번째인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염라철장이 막고천에게 빼앗긴 부인이란 다름아닌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염라철장 곡강의 자식은 막비강 자신이 아니라 그의 손아래 누이동생인 막영란이었고...!

이 발견은 막비강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더니 갑자기 외마디 함성을 질렀다.

[불효자식은 죽어 마땅하다!]

전란은 그의 얼굴빛이 갑자기 크게 변하자 급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 순간 막비강의 가슴속에선 후회와 미움, 그리고 비통이 동시에 치솟았다.

(막고천과 염라철장이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던 사람이 다섯 번째 어머니 냉상영이라면 나는 막고천의 친자식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막비강은 자신이 염라철장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막고천의 사람됨이 어떻든 간에 난 그의 친자식임에 분명하다! 헌데 나는 생부를 원수로 생각하고 다리까지 부러뜨렸다.)

극도의 비통함으로 막비강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뿐 아니라 그날 큰어머니를 학대했으며 큰형님에게까지 덤볐으니 이것은 실로 극악무도한 불효 행위다! 이제 내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던 중 전란이 이런 질문을 하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미안하오! 나중에 저승에서나 다시 만납시다.]

쐐액!

막비강은 비통하게 외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생인 전혜가 어리둥절하며 막비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니, 저승에서 만나자니 그럼 저 사람 죽으려고...!]

[빨리 뒤쫓아가자!]

두 소녀가 지붕 위로 뛰어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십여 리 밖에서 하나의 흑점이 번뜩하더니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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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3)

 

 

바로 그 순간 청년은 무슨 영문인지 눈살을 찌푸렸고,

현천록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고무공처럼 날려가 담장에 부딪혔다.

!

휘익!

현천록의 머리 위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현천록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렸다.

[네가 이긴 것으로 해주마. 노도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다. 다음에 반드시 약속대로 해주마.]

진양진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신궁 오무한으로 변신한 상태로 물 속에서 숨을 쉬기 어려워지자 그대로 귀식대법을 펼쳤다.

그후 현천록이 이끄는대로 우물까지 와서 다시 귀식대법을 풀었지만 현천록에게 들키지 않았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서 소천성수로 현천록을 공격하고 도주해버린 것이었다.

현천록의 손에는 진무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이 현천록에게 다가왔다.

현천록은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흠뻑 젖은 옷에 흙까지 묻어버려 도포가 아주 뻑뻑하다. 조금 있으면 얼어서 완전히 뻐득뻐득해져 버릴 것 같다.

청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장력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도장은 금강불괴에 달했군.]

현천록은 쓴 입맛을 다셨다.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느새 다섯 명의 소녀들이 비수를 들고 그를 애워싸고 있었다.

청년이 말했다.

[신법도 바람을 탄 것처럼 자연스러우니 도장은 정말 듣던 것보다 훨씬 고명한 인물인 것 같소.]

현천록은 나몰라라는 듯이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교활한 진양진인에게 또 당하고 보니 어지간히 속이 상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는 이번엔 무슨 수로 진양진인을 붙잡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바보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청년이 손가락을 뻗었다.

번쩍!

소리없이 빛줄기가 현천록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현천록에게는 약간 따끔거리는 정도의 느낌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청년이 소녀들에게 말했다.

[이 도사는 이상하오. 무공도 그렇게 마음도 보통과 다른 듯하니 그냥 둘 수는 없겠소.]

소녀들 중 하나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 오늘따라 간섭이 심하군요. 그걸로 당신 잘못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아가씬 안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다 들었으니까요.]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녀와 나의 문제니 당신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오. 일단은 저 도사를 뇌옥에 가두는게 나을거요.]

돌아서서 걷는 청년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한 소녀가 현천록의 혈도를 몇 군데 거듭 찌르더니 오라로 온몸을 꽁꽁 묶었다.

두 손과 두 발도 하나로 묶였지만 현천록은 내버려두자는 심정으로 몸을 맡겨버렸다.

다른 소녀가 장대를 가져와 두팔사이로 끼워들었다.

현천록은 원시인들한테 잡혀가는 돼지새끼마냥 들리웠다.

앞에서 장대를 든 소녀의 엉덩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눈을 어지럽게 한다.

세상이 거꾸로 보이고 피가 머리에 모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상쾌한 새벽 공기, 그리고 그의 몸에 묻었던 물기가 증발되면서 모락모락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같은 안개...

현천록은 세상을 거꾸로 보면서 알듯 말듯한 펼쳐지는 요지경을 보았다.

소녀들은 몇 개의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 갔다.

건물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건물들 너머로 우뚝한 탑이 하나 보였다.

이리저리 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 이따금씩은 나이든 중년 여인들이 뭔가를 들고 가는 모습,

그곳은 조용한 가운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현천록은 탑 아래에 있는 뇌옥에 그냥 던져졌다.

소녀들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품을 뒤져보지도 않았다.

뒤쪽은 석벽이고 앞쪽은 듬성듬성한 쇠창살로 된 뇌옥이다.

현천록이 던져진 칸 외에도 한 사람씩 들어있는 칸이 세 개, 아무도 없는 빈 곳이 두 개가 더 있었다.

현천록의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이 나가는 소녀들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신경쓰지 않아서 무슨 욕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소녀들이 재빨리 나가고 문을 쾅 닫는 소리만 들렸다.

욕을 하던 사람은 사십 쯤 되어보이는 서생인데 얼굴이 아주 훤한 미남이었다.

뇌옥에 갖힌지 꽤 된 듯 차림새는 꾀죄죄하지만 이상하게 얼굴만은 반들거렸다.

그리고 보니 그 양 옆에 있는 칸의 사람들도 얼굴만은 반들반들했다.

현천록의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건네왔다.

[도장! 도장도 재수없는 년들한테 걸렸구려.]

현천록은 빙긋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전까진 진양진인 만이 그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침울한 얼굴의 청년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도장도 재주가 아주 용한 사람이오. 하하하하! 우리야 세치혓바닥과 반지르르한 얼굴을 앞세워 계집을 호리지만 도장은 무슨 수법을 쓰는거요?]

현천록이 고개를 들고 빤히 보았다.

앞에 있는 중년인이 말했다.

[거 사람 싱겁게 말게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여기 잡혀오는 사람은 다 똑같은 죄를 짓고오는데 부끄러워 할 게 뭐있소?]

중년인인 자기의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저 친구는 화양일음도(華陽一淫盜) 모청(毛鯖)이오. 하하하! 수고스럽게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소. 전문적으로 처녀만 골라가며 길을 내줬으니 뒷사람이 얼마나 고마워했겠소.]

현천록이 멀뚱하게 중년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중년인이 또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잡식성이오. 치마두른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데... 쩝 문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종종... ... 아무튼 나도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오. 음약에 관한한 저 친구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거요.]

잡식성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죽겠네. 방금 전의 고 감질나는 것들이 들어왔다 가는 통에 몸이 달아서 미칠지경이네.]

중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소린 집어치우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기회가 있을 테니까. 아참 이제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난 채음신(採陰神) 목요봉(穆耀峯)이네. 주로 채음보양을 하지.]

현천록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좋지 않은 사람들이군.]

세 사람이 껄껄 웃었다.

[도사도 여기까지 잡혀온 걸보면 만만치 않을 텐데 뭘 그러시오? 도사는 무슨 수법을 쓰는지나 말해보시오.]

[혹시 참배하러 온 여인들 방을 몰래 덮치는 치졸한 수법을 쓰는 건 아니오?]

[여기 여주인은 천하절색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혹시 도사한테는 몸을 허락할 지도 모르겠소.]

음탕한 소리를 주고 받으며 세 음적은 여자의 어디가 어떻게 어떤 여자는 거기가 어떻는데 어떻게 절묘하고, 자기가 뭘 어떻게 했는데 여자가 아주 음탕하여 무슨 수법을 요구했느니 하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반쯤은 현천록을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반쯤은 현천록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적으로는 음담패설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현천록은 화를 내며 백금퉁소를 꺼내들었다.

음담패설이 뚝 그쳤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의 공력을 실어서 백금퉁소를 검처럼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철창살이 한꺼번에 네 대가 소리없이 베어졌다.

세 음적이 겁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현천록은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중년인을 가두고 있는 창살을 베어버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당신같은 사람은 내가 죽이나 죽이지 않으나 마찬가지지만 그냥가지는 못하겠소.]

중년인이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 도사님! 소인들은 그저 심심하다보니...]

현천록은 퉁소를 뻗어서 중년인의 가슴을 겨냥했다.

투툭! !

뼈가 부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서 뒤로 넘어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폐인이 되어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현천록은 다른 두 사람도 똑같은 꼴로 만들어 놓고나자 속이 후련했다.

아주 즐거운 일을 한 것처럼 통쾌했다.

[하하하하!]

한바탕 실컷 웃고 나서 철문을 밀어보니 철문 만은 열 도리가 없었다.

공력을 모두 실어서 퉁소로 내리쳐도 철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손이 울려서 퉁소를 망칠 뻔했다.

현천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났다. 동굴에 갇혔다가 나온지 금방인데 이번엔 뇌옥에 갇혔구나. 내가 무슨 마음으로 순순히 여기까지 잡혀왔지?)

스스로 자기 머리를 꽉 쥐어 박았다.

그리고 보니 번쩍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 침울한 얼굴의 청년 때문이었다.

진양진인은 놓쳐버렸고 청년이 묘한 힘으로 그를 묶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현천록은 자기가 어떤 것에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고 사는 것도, 갇히거나 풀려나는 것도, 죽이는 것이나 살리는 것도, 현천록에게는 조금도 심각하거나 큰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오른쪽길로 갈까 왼쪽 길로 갈까 선택하는 단순한 선택문제 같이 느껴졌다.

오로지 호기심만이 그에게 점점 더 큰 비중으로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고 있었다.

현천록이 생사탄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생긴 변화였다.

잠시 후, 현천록은 철문 아래 계단에 앉아서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에게 배운 광릉산이었다.

칙칙한 뇌옥안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퉁소소리로 가득찼다.

세 사람의 음적도 그 혼이 반쯤은 빠져서 음률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 빠져들어 버렸다.

광릉산은 대륙을 가로지는 장강과도 같아서 어떤 곳에서는 급하고 어떤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며 어떤 곳은 한없이 높아지고 어떤 곳은 몸을 허물어뜨릴 만큼 낮아졌다.

광릉산의 열두 소절 중에서 일곱 소절이 끝나고 여덟 소절이 막 시작될 때였다.

갑자기 둔중한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우아한 자태로 들어왔다.

허리가 아주 가늘고 목도 가늘어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진 듯하다.

그윽한 향기가 일순간에 뇌옥을 감돌고 소녀의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현천록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소녀의 전신에 어려있는 이상한 기운이, 이상한 아름다움이 그를 질식하게 했다.

갑자기 온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퉁소소리가 뚝 끊어졌다.

소녀가 현천록 앞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인이 왕림하신 줄 모르고 누추한 곳에 모셨습니다.]

사람의 입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이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천록은 퉁소를 내리며 속으로 말했다.

(내가 미색에 빠지고 말았구나!)

소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두 말않고 바칠 것만 같았다.

현천록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떨려왔다.

강렬한 두근거림. 소녀의 체향, 귓속을 맴도는 목소리, 사그락거리는 옷자락소리. 가늘게 들리는 숨소리. 잘게 흔들리는 소녀의 속눈썹...

그 모든 것이 현천록을 포위하고 사로잡아버렸다.

얼굴은 보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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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느닷없는 봉변

 

 

 

광풍진천장 역시 청구상인의 절기 중 하나로써 만일 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작은 동산 하나는 뿌리 채 날려보낼 수가 있다.

다만 광풍진천장은 내공 소모가 극심한 단점이 있어 연달아 펼쳐내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끝장을 내자!]

꽈르릉!

광풍진천장으로 기선을 잡은 막비강은 질풍노도같이 낙성신마를 공격해 갔다.

막비강은 비록 금강옥액을 마시고 청구단서를 익혔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어 전적으로 혼자 무공을 배워야만 했다.

그런 탓에 그의 청구절학은 아직 채 오성(五成)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 바람에 청구절학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우내사마 정도의 인물도 압도할 수 없었다.

! 퍼펑!

막비강은 자신의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지라 일단 선기를 잡자 놓치지 않고 격렬한 공격을 가해 갔다.

홍의소녀는 만면에 경악의 빛을 머금은 채 막비강이 낙성신마를 몰아붙이는 것을 구경하였다.

설마 약관의 청년이 백여년 년 전부터 악명을 떨쳐 온 거마를 이토록 쉽게 궁지로 몰아넣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홍의소녀는 다시 녹의소녀와 분면색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헌데 이때 녹의소녀와 분면색마도 싸움을 중지하고 넋 잃은 사람처럼 막비강과 낙성신마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막비강의 신위에 경악과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홍의소녀가 녹의소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녹의소녀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니!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

[혼비백산하는 꼴이 우습구나. 저 음적이 기습을 하면 어쩌려고 넋을 잃은 채 구경하고 있는 거냐?]

분면색마는 불과 일 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 서 있는지라 홍의소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음험하게 웃었다.

[소생은 저들이 승부를 가리는 것을 본 다음에 당신들 자매를 즐겁게 해줄 테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홍의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음적! 쓸데없는 주둥아리는 그만 놀리고 죽음이나 받아라!]

추학!

그녀는 장검을 휘둘러 분면색마를 공격해 갔다.

분면색마는 갑자기 홍의소녀에게 기습을 받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연달아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바로 그때였다.

퍼펑!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일어나고 모래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개의 인영이 각기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홍의소녀와 분면색마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깜짝 놀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저런...!]

여기저기서 경악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섯 개의 인영이 각기 낙성신마와 막비강에게로 달려갔다.

막비강은 비록 일장으로 낙성신마를 격퇴시켰지만 자신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욱이 피어오른 먼지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화락! 스슷!

홍색과 녹색 두 개의 날렵한 인영이 동시에 막비강 앞에 도착하여 관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다치지 않았어요?]

막비강은 간신히 몸을 가누었지만 얼른 숨을 고를 수가 없어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녹의소녀가 홍의소녀를 돌아보며 급히 말했다.

[언니, 그에게 소환단(小還丹)을 한 알 줘!]

홍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하나 꺼냈다.

옥병 속에는 붉은 기름종이에 싸인 대추알만한 환약 두 알이 들어 있었다.

이 환약이 소림사(少林寺)에 전해지는 절세의 영약인 소환단이다.

아무리 심한 내상이라도 한 알의 소환단이면 금방 완쾌될 수가 있다.

어린 소녀들이 어떻게 소림사의 요상영단을 갖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 이걸 먹어요!]

언니에게서 소환단을 받은 녹의소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막비강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막비강은 진기를 돋우어 한바퀴 순환시켜 본 결과 기혈만 약간 뒤틀렸을 뿐 별 지장이 없는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귀한 단약(丹藥)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홍의소녀가 눈을 치켜 뜨며 약간 성이 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꺼냈는데 다시 집어넣으란 말인가요? 빨리 받으세요!]

막비강은 그녀의 화내는 모습이 귀여워 녹의소녀에게서 소환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녹의소녀가 그걸 보고 물었다.

[왜 먹지 않으세요?]

[아껴 두었다가 정말 부상을 당했을 때 먹으려고 합니다.]

모래먼지가 흩어지자 장풍이 마주쳤던 지면에 길이가 오 장 가량 길게 갈라지고 깊이는 석 자 정도로 파여 있는 것이 드러났다.

낙성신마는 움푹 파인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으며 그의 좌우에는 천수인마와 화색쌍요가 서서 그를 보호하며 막비강 일행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그자들에게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두 자매에게 물었다.

[낭자의 성이 전씨라면 혹시 전포라는 분을 아십니까?]

녹의소녀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분은 우리 백조부(伯祖父)님이세요.]

[그만둬!]

홍의소녀는 동생의 입빠른 것을 꾸짖는 듯이 눈을 흘겼다.

막비강은 홍의소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낭자께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긴한 일로 그분 어른을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리 큰할아버지를 뵈려는 거죠?]

홍의소녀가 경계를 풀지 않으며 물었다.

[제 이름은 곡능천이라 합니다.]

[! 천면신룡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녹의소녀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어느덧 막비강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약관밖에 안 된 젊은 나이에 우내사마를 물리치는 신위를 본 순간 소녀의 방심은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이야앗!]

쐐액!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세 줄기 인영이 동시에 막비강 일행에게 날아들었다.

기회를 엿보던 천수인마와 쌍요가 동시에 공격을 발동한 것이다.

퍼펑!

특히 쌍요는 악독하게도 먼저 한 무더기 분홍색 독분(毒粉)을 퍼뜨려 시야를 가린 뒤 장력을 날려 왔다.

[두 분! 빨리 후퇴하시오!]

꽈르릉!

막비강은 다급히 전씨 자매에게 외치며 쌍장을 휘둘러 청구상인의 최강절기인 치우강기를 천수인마와 쌍요를 향해 펼쳐냈다.

퍼펑!

[!]

[크흑!]

다음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천수인마와 쌍요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또한 막 물러서려던 홍의와 녹의 두 자매까지도 날려 나가 땅바닥에 곤두박질했다.

그뿐 아니었다.

[!]

십여 장 밖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던 낙성신마조차도 치우강기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치 호박처럼 오 장 밖으로 굴러 나갔다.

[!]

그러나 막비강도 선혈을 한 모금 토해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래 치우강기는 위력이 강한 대신 심대한 내공의 소모를 동반한다.

헌데 막비강은 방금 전 낙성신마와의 격돌로 기혈이 흔들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치우강기를 펼쳐내게 되었다.

그 바람에 체내의 기혈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다.

막비강이 발휘한 치우강기는 비록 대부분이 앞으로 발출되었지만 옆에 서 있던 두 자매도 상당한 타격을 받고 나뒹굴었다.

[... 무서운 무공이야!]

[청구상인의 치우강기가 천하제일의 신공이라는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그녀들은 바닥에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일어났다.

[크으...!]

그런 그녀들의 시야로 돌풍에 휘말려 뒹굴었던 낙성신마가 악을 쓰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이런 때 저 노마가 덤벼들면 큰일이다!)

두 자매는 내심 가슴이 덜컥해졌다.

[빨리 여길 떠나자!]

파앗!

홍의소녀는 급히 인사불성이 된 막비강을 등에 들쳐업고 몸을 날렸다.

녹의소녀도 막비강을 들쳐업은 언니를 호위하며 전력을 다해 질주해 갔다.

[... 거기 서라!]

뒤쪽에서 낙성신마의 악에 받친 폭갈이 들려 두 자매는 한층 힘을 내서 몸을 날렸다.

 

***

 

반 시진 가량 질주하였을까?

두 자매는 추격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두 자매가 멈춘 곳은 은밀한 계곡 안쪽이었다. 계곡 위로는 숲이 우거져 아주 은밀했다.

[언니, 잠시 쉬었다 가!]

녹의소녀가 할딱이며 말하자 홍의소녀는 한옆에 뚫린 동굴을 가리켰다.

[그자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니 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 쉬자.]

두 자매는 곧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막비강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세를 살폈다.

막비강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듯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홍의소녀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을 했다.

[이 사람은 살아나기 어렵겠는데 어쩌면 좋지?]

[소환단을 그에게 먹여.]

[상세가 몹시 엄중하니 너의 대환단(大還丹)도 한 알 먹여라!]

홍의소녀의 말에 녹의소녀도 품속에서 호두알만한 환약을 하나 꺼냈다.

밀납으로 포장된 그 환약 역시 소림사의 영약인 대환단이다.

대환단은 그 약효가 소환단보다 더 신효하여 숨이 끊어지지만 않았으면 어떤 중상이라도 고쳐 준다.

뿐만 아니라 한 알을 먹으면 이십 년 참선 수련한 것에 필적하는 내공을 증진시켜 주기도 한다.

두 자매는 대환단과 소환단을 한 알씩 꺼내어 망설이지 않고 막비강에게 먹였다.

사실 두 자매는 막비강이 낙성신마를 몰아붙이는 광경을 본 순간부터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었다.

당금 강호에서 약관밖에 안 된 나이에 우내사마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내가 막비강말고 또 있겠는가?

다른 혼인 적령기의 소녀들처럼 두 자매도 능력 있는 배우자를 원하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막비강은 최고의 배필감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인지라 두 자매는 자신들이 지닌 영약을 아낌없이 막비강에게 먹였다.

뿐만 아니라 약효가 빨리 돌도록 정성을 다해 그의 전신 혈도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양옆에 앉아 막비강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두 자매는 은근히 서로를 곁눈질로 살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들은 둘인데 배필감은 하나다.

은근히 경쟁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중원의 법도상 같은 핏줄을 타고난 자매가 한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명문가일수록 여러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은연중에 권장되기도 한다.

그것이 가문의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또 처첩들끼리 분란을 일으켜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 남자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여자의 본성이다.

두 자매는 경쟁적으로 막비강의 몸을 문지르고 주무르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자매는 막비강의 은밀한 부위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다.

탄탄한 허벅지를 주무를 때 스쳐 가는 손길에 막비강의 순양지물이 느껴지곤 한다.

두 자매는 당연히 아직 처녀의 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건장한 청년의 단단한 몸을 주무르게 되어다.

하지만 남성의 상징이 손끝에 느껴지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곧 약효가 도는지 막비강의 숨결은 급격히 정상을 회복해 갔다.

두 자매는 비로소 안도하며 추궁과혈하던 손을 멈추었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막비강은 숨결은 본래대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 헉헉!]

오히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리지 않는가?

[... 어찌된 걸까?]

[혹시 주화입마에라도 빠진 것이 아닐까?]

두 자매는 당황하여 막비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순간 막비강의 얼굴은 마치 숯불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한 전신에서 비지 같은 땀을 흘려내며 연신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막비강은 지금 치솟는 욕화로 전신의 혈맥이 터질 지경이었다.

방심하던 차에 분면색마가 날린 최음독분을 다량 들이킨 때문이다.

두 자매가 먹인 영약은 내상은 치유해 주었지만 최음독분의 독기는 해독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두 자매가 약효를 돋우어 준다고 야들야들한 손으로 추궁과혈을 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소녀의 순음지기가 오히려 막비강의 몸 속의 양정을 격발시켜 최음독분의 독기를 가일층 빠르게 확산시킨 것이다.

[몸이 불덩이 같애! 주화입마에 빠진 게 틀림없어!]

하지만 순진한 홍의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섬섬옥수로 막비강의 이마를 짚었다.

번쩍!

바로 그 순간 굳게 감겼던 막비강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시뻘건 안광을 흘려내었다.

[어멋!]

막비강의 눈빛은 흡사 굶주린 야수의 그것과 같아 순진한 전씨 자매도 무언가 깨닫고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다.

[크아!]

그러나 다음 순간 막비강은 야수같이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나 두 자매를 덮쳐 갔다.

녹의소녀는 급히 막비강의 손길을 피했으나 좀 더 가까이 있던 홍의소녀는 미처 빠져 나가지 못했다.

[아악! 왜 이래요?]

막비강의 우악스런 손길에 잡힌 홍의소녀가 놀라 비명을 질러대었다.

하지만 연약한 그녀의 힘으로 불 맞은 황소 같은 막비강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홍의소녀의 나이답지 않게 풍만한 교구를 감싸고 있던 적삼이 찢겨지며 벗겨져 내렸다.

[...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동굴 입구로 달아났던 녹의소녀가 언니의 비명을 듣고 다시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막비강의 몸 아래 깔려 바둥대는 것을 보고는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을 토했다.

[바득! 이 짐승 같은 놈! 기껏 살려 줬더니...!]

!

그녀는 검을 뽑으며 달려들어 막비강을 내리치려 했다.

[흐윽!]

하지만 다음 순간 녹의소녀는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막비강의 비밀을 본 것이다.

그것은 숫처녀인 녹의소녀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따당!

녹의소녀는 너무 놀라 빼 들었던 검을 떨구어 버렸다.

[()... 혜아야! 도와 줘!]

막비강에게 깔린 채 홍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충격에 숨마저 멈춘 녹의소녀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하여 막비강의 만행을 지켜보기만 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모두 꿈속의 일인 양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욕심을 채운 막비강은 굶주린 야수같이 시뻘건 눈을 녹의소녀에게로 돌렸다.

망연자실해져 있던 녹의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막비강이 그런 그녀를 덮쳐왔다.

(안 돼! 안 돼요, 제발!)

막비강의 무자비한 유린이 시작되었지만 녹의소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 저항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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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2)

 

 

현천록이 오무한에게 물었다.

[두분은 우리 외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아무도 못봤습니다.]

현천록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현천록은 일곱사람과 함께 진양진인에게서 태극혜검을 배웠던 곳으로 돌아왔다.

지하에 흐르는 강은 신비로움을 주고,

흘러오는 곳과 가는 곳은 모두 또 다른 동굴이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에게 여기서도 방위를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신궁 오무한이 지남철(指南鐵)을 꺼내 놓았다.

오무한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항상 지남철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물이 들어오는 쪽은 북쪽이고 나가는 쪽은 남쪽이었다.

자금산은 장강의 남쪽에 있으니까 물은 장강으로 들어가는 물이 아니라 장강에서 지하동굴로 흘러오는 물일 가능성이 많았다.

어느 쪽을 통하는 것이 나가기 더 수월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속으로 가야하는 만큼 밖이 나올 때까지 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천산삼로 중의 노대가 노삼을 물에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귀찮게 생각할 것 없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라. 한 달이고 두달이고 간에 언젠가는 밖에 이르겠지.]

노이는 노대를 피해서 머뭇거렸다.

노대가 가까이 가자 노이가 급하게 말했다.

[노대! 내 검은 독검이오. 물에 들어가면 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고 말거요.]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마라. 주머니가 이렇게 많은 데 무슨 걱정이냐?]

노대가 노이의 독검을 뺏었다.

그리고 벼락같이 오무한의 등줄기에 칼집채로 내리박았다.

[으악!]

오무한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현천록도 장군묵도 막지 못했다.

옆에 있던 포두화상이 오무한을 옆으로 당겼다.

노대가 내려친 검은 오무한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쳤다.

오무한이 쓰러져버렸다.

[이 흉악한 마두!]

마춘보가 철연화를 유성추처럼 날리며 고함쳤다.

노대는 손에 들었던 검으로 철연화를 튕겨버리고 두 걸음 물러섰다.

노대는 오무한의 몸을 노이의 독검을 감싸는 도구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오무한이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아주 놀라운 속도였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 시주 공력이 놀랍군. 뽑히진 않았지만 노대의 칼에 맞고도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순간 장군묵이 고함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멈춰라!]

추앙!

용이 뛰어든 듯 물이 높이 치솟았다.

현천록도 속으로 욕을 하며 물에 뛰어들었다.

(교활한 도사! 어쨌든 내가 빠져나가게 해주지. 하지만 당신은 나한테 졌다구.)

멀리 사라졌는가 했던 진양진인이 신궁 오무한으로 변장해서 가까이 숨어있었다.

어쩌면 나가려다가 동굴이 막혀버려서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노대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마각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현천록은 장군묵보다 늦게 물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주 깊이 몸을 가라앉혔다.

자기가 진양진인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현천록은 물 속에서 미미하게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꾸륵! 꾸륵하는 소리도 들렸다.

초상감각에 눈을 뜬 현천록은 그 소리들이 무엇인지 즉시 알았다.

쿵쿵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꾸륵꾸륵하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왔다.

심장소리, 그리고 내장이 움직이는 소리다.

현천록이 다가옴을 알고 심장은 느리게 뛰게 하거나 박동을 멈춘 모양이지만 내장이 내는 소리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은 살그머니 손을 뻗었다.

쇠갈쿠리같은 억센 뼈마디가 현천록의 손을 휘감았다.

현천록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버렸다.

서로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위에서 첨벙이는 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한 덩어리가 되어 물밑 바닥에 가라앉은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현천록의 허파에 물이 가득찼다.

하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않고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자니 발버둥치던 진양진인이 축늘어졌다.

현천록은 그제서야 진양진인을 겨드랑이에 끼고 물을 거슬러 헤엄치기 시작했다.

 

x x x

 

현천록은 한참 후에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되고 말았다.

무작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그만 샛길로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또다른 동굴로 들어와버렸는지 사방은 꽉 막혀있고 위는 칠흑처럼 깜깜하다.

매끈한 사방은 어디 발이라도 올려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다시 물 속의 미로를 헤엄쳐야 한다는 사실에 맥이 쭉 빠졌다.

그러나 일단 폐속의 물을 겨워내고 공기로 채우고 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허파 속이 얼어붙는 것같은 묘한 느낌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진양진인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찢어진 가죽부대에 담긴 술처럼 물이 저항없이 흘러나왔다.

현천록은 일단 그곳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진무검을 들어서 석벽에 깊숙히 박고 자루에 진양진인을 걸어놓았다.

바로 그때 콧소리가 섞인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여기서 얼쩡대다가 우리 아가씨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리고 죽을걸요?]

[다른 뜻은 없소. 난 다만 먼발치에서라도 소저를 한 번 뵙고 싶은 마음뿐이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현천록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하늘인가 저승인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당신한테 얼굴을 보이겠어요?]

[나는... 나는... 나는 다만...]

남자가 말을 더듬는 모양이다.

여자가 차갑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가씨의 면사를 벗기려다가 실패해서 죽은 사람만도 서른이 넘어요. 한데 당신은 공짜로 몰래 숨어서 보려하다니 아주 뻔뻔스럽군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나는 싸우고 싶지 않소. 하지만 소저는 꼭 보고 싶소.]

[웃기는 소리 말고 빨리 꺼져요. 삼년 동안 본 안면이 있으니 그냥 보내주겠어요. 자꾸 딴소리하면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여자의 말소리가 얼음장보다 더 차갑다.

부드럽고 달콤하던 처음의 그 여자 음성이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현천록은 여자는 정말 열두번도 더 둔갑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한테 모욕을 당하고 참는 건지 분노하지 못하는 건지 몰라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휘이익!

허공에서 무언가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현천록은 급히 진양진인을 붙잡고 검을 거둔 후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철퍼덕!

물위에 뭔가 떨어졌다.

현천록은 그 순간에 확연히 깨달았다. 자기는 네모난 우물 속에 들어있고 방금 떨어진 것은 커다란 두레박이라는 것을.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구나!)

현천록은 두레박을 기울여 물을 쏟아버리고 진양진인을 넣었다. 보나마나 도르레로 움직이는 아주 큰 두레박이다.

드륵드륵!

두레박이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

현천록은 두레박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따라올라갔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렸다.

[좋게 말할 때 빨리 꺼져요. 난 아가씨한테 꾸중듣고 싶은 생각없으니까.]

목소리의 주인이 말하면서 보이는 호흡과 두레박이 올라가면서 보이는 박자가 동일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난 소저를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다만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을 뿐이오.]

여자가 소리친다.

[! 직접 나설 용기도 없는 작자가.]

드륵!

두레박이 끝까지 다 올라왔다.

열 여덟 쯤 된 소녀가 두레박을 끌어서 옮겨부으려고 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고 위로 솟구쳤다.

휘익!

[!]

소녀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리고 현천록은 깜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돌려 다시 우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

우물을 덮고 있던 지붕과 도르레를 받치듯 받침대가 박살나버렸다.

[웬놈이냐?]

소녀가 앙칼진 소리를 외치며 현천록을 향해서 공격해왔다. 손에는 다섯치 길이의 비수가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은 검의 자루로 소녀의 손목을 치고 물러났다.

시비를 붙을 이유도 없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미안하오.]

현천록은 정중하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날렸다.

하지만 현천록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희뿌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며 멈춰섰다.

스물살 쯤 된 청년이 마치 허깨비처럼 공중에 서있었다.

현천록은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설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의 어깨에는 수실이 삭아버리고 가죽이 바랜 고검(古劍)이 걸려있고 청년의 얼굴은 희뿌연데 암울한 눈빛을 하고 있다.

청년은 어느 새 다시 현천록의 앞에 내려서 있었다.

현천록은 말 그대로 등골이 서늘했다.

청년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다만 그의 앞을 가로막기만 했지만 현천록에게 아주 기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뒤에서 소녀가 현천록의 등을 공격해왔다.

현천록은 보지도 않고 칼집 채 휘둘러 소녀의 공격을 받았다.

소녀가 길길이 날뛰며 비수를 휘둘렀지만 현천록에게 다가설 수 조차 없었다.

현천록은 암울한 눈빛의 청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중얼거렸다.

[무당파의 진양도장이었군. 가보시오.]

청년은 어느 새 삼보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말 그대로 부동이면서 동()인 미묘한 신법이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지나가지 못했다.

청년이 말했다.

[소저에게 불측한 마음을 품은 자인줄 알았소. 가도 좋소.]

[!]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바보 도터지는 소리를 냈다.

우물에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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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시 만난 마두들

 

 

 

동녘에선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는 밤을 새워 막비강을 추격했다.

남악 형산은 이미 쫓고 쫓기는 세 사람 뒤로 아득히 멀어진 후였다.

낙성신마와 천수인마가 속한 우내사마의 서열은 천하오기보다 앞에 있다.

하지만 밤새 추격했음에도 그자들은 막비강과의 거리를 조금도 단축시키지 못했다.

물론 막비강도 두 마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강호일절이라는 우주도철의 경신술로도 우내사마에 드는 두 마두를 떨쳐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물론 막비강은 청구절학을 한 몸에 지닌지라 우내사마라 해도 그리 두렵진 않았다.

다만 그자들이 방향을 바꿔 악소궁을 추격할까 저어하여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문득 희미하게 밝아오는 아침 안개 속을 헤치고 전면에서 두 개의 인영이 달려오는 것이 막비강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려오는 두 사람은 일신에서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인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법의 쾌첩함은 전광석화 같아서 눈 깜빡할 사이에 막비강의 십 장 전면에 도착했다.

(저자들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인물의 모습을 알아본 막비강은 가슴이 덜컹했다.

그자들은 막비강이 일전 곤욕을 치른 바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화색쌍요(花色雙妖)!

 

그렇다! 그자들은 육요 중 둘인 분면색마(粉面色魔)와 도화요희(桃花妖姬)였던 것이다.

삼년 전 막비강은 그자들이 뿌린 최음제 때문에 헌원여호에게 동정을 빼앗겼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막비강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생각 같아서는 두 탕부탕녀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적에게 쫓기는 입장인지라 그자들과 시비를 걸 여유가 없었다.

(오냐! 다음에 보자!)

막비강은 내심 이를 갈며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그들을 비켜가려 했다.

그러나 막비강을 발견한 쌍요 중 분면색마가 질풍같이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했다.

[크크! 애송아! 너는 왜 도망치느냐?]

그자는 당연히 막비강을 알아보지 못했다.

분면색마가 청련사에서 막비강과 만났을 때 막비강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분면색마가 막비강을 제지하는 사이 이마가 가까이 이르렀다.

[흐흐흐! 애송아! 네놈이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테냐?]

화라락!

낙성신마는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가로막으며 징그럽게 웃었다.

막비강을 제지하던 분면색마는 비로소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보니 사마 중의 두 분 선배 아니시오?]

[! 당신들은 화색쌍요...!]

천수인마와 낙성신마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첩첩산중이로군!)

막비강은 쌍방이 서로 아는 사이임을 알고 내심 다급해졌다.

[비켜라!]

그는 화색쌍요 중 앞을 막고 있는 분면색마를 향해 맹렬히 일장을 격출했다.

[! 어린놈이...!]

분면색마는 강맹한 장풍이 엄습해 오자 코웃음을 날리며 맞받아쳤다.

퍼펑!

[어억!]

분면색마는 막비강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전신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아 비틀거리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화색쌍요 중 다른 한 사람인 도화요희가 안색이 일변하여 고함을 질렀다.

[거기에 털도 안 난 놈이 기습을 하다니!]

파팟!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오른손을 뻗어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요망한...! !]

막비강은 코웃음을 치며 반격하려다가 질겁했다.

도화요희는 여전히 속이 훤히 비치는 나삼을 걸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나삼 속에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나마 나삼은 앞과 옆이 다 터져 있어 움직일 때마다 속살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가슴에 매달린 한 쌍의 젖가슴은 움직일 때마다 세차게 상하좌우로 출렁거린다.

그리고 몸을 날림에 따라 갈라진 치마 사이로 미끈한 다리와 허연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농염하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여자의 몸에다가 무자비하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독한 심보를 지닌 사내는 드물다.

하물며 도화요희는 고의적으로 비스듬히 몸을 날리며 다리를 활짝 벌리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막비강은 본의 아니게 그녀의 치부를 그대로 보고 말았다.

(!)

막비강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사이에 도화요희의 날카로운 손톱이 어깨의 혈도를 움켜쥐려 했다.

막비강은 다급히 몸을 틀어 겨우 그녀의 공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어깨의 옷이 도화요희의 손톱에 걸려 길게 짖어진다.

화락!

(, 위험했다!)

위기를 넘긴 막비강은 찬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멀찍이 내려섰다.

[! 여기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뒤쪽을 막고 서있던 천수인마가 괴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오냐! 내 탕마일초(蕩魔一招)를 받아 봐라, 노마!]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막비강은 벼락같이 쌍장을 뻗어내며 외쳤다.

초식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치우강기가 실린 탓에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이 뻗어나갔다.

[! 이놈 봐라!]

청구절예는 과연 비범하였다.

퍼펑!

천수인마같은 전대의 거마도 막비강의 일장에 정면으로 마주치자 전신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며 비틀 물러섰다.

천수인마를 물러서게 한 막비강이 주위를 돌아보니 전후 좌우가 강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막비강은 오늘의 상황이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하하! 비겁한 요마들! 오늘 내가 천벌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줄 테니 전부 덤벼라!]

천수인마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이것은 네놈이 청구상인의 제자 된 벌이다. 사부 대신 네놈이 당년의 빚을 갚아야 한다.]

천수인마는 나이가 이 갑자가 넘는다.

그래서 젊은 시절 청구상인과 만났던 적이 있었고 또 못된 짓을 하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다.

옛날의 원한을 떠올린 천수인마는 두 눈에서 살기를 발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네놈에게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일단 말을 한 이상 약속을 지킬 테니 어서 출수해 봐라!]

막비강도 검미를 치켜 올리며 차갑게 코웃음을 날렸다.

[! 나야말로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네게 삼 초를 양보해야 마땅하다.]

[건방진 애송이놈!]

천수인마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막비강 역시 위압당하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크왓! 천수벽력장(千手霹靂掌)을 받아 봐랏!]

꽈르르릉!

천수인마가 사나운 고함을 지르며 쌍장을 내쳤다.

순간 사방이 수많은 손그림자에 뒤덮였다.

과연 천수인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장공이었다.

[잘 왔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손그림자 속에서 막비강도 고함을 치며 마주 양손을 찔러 냈다.

쩌러렁!

순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막비강의 양손에서 금색(金色)과 벽색(碧色)의 광망이 터져 나가 천수인마의 공격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이 수법은 세 권의 청구단서 중 연형편에 수록된 수공(手功)으로 전문적으로 호신강기를 파해하는 위력을 지녔다.

[허억! 청구상인의 벽금산수(碧金散手)!]

퍼펑! 꽈다당!

요란한 폭음과 짙은 모래먼지가 확 일어나는 중에서 천수인마의 신음 소리가 터졌다.

이어 천수인마가 방금의 일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듯 쓰러질 듯 휘청이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벽금산수에 의해 호신강기가 무너지며 기혈이 뒤집힌 것이다.

[이것도 받아랏, 노마!]

쐐액!

승기를 잡은 막비강은 사나운 외침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솟구쳤다.

[붕천멸압장(崩天滅壓掌)!]

꽈르르릉!

이어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그는 쌍장을 아래로 내리쳐 천수인마의 머리 위로 극히 막중한 압력을 가해 갔다.

[!]

스팟!

천수인마는 깜짝 놀라며 발끝을 힘껏 굴러 뒤로 육칠 장 가량 날아 나갔다.

하지만 정작 막비강의 장력은 천수인마가 섰던 곳에 이르자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변해 버렸다.

막비강의 이 일초는 진력이 들어가지 않은 허초였던 것이다.

막비강은 바닥에 사뿐히 내려선 후 얼굴에 경멸의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난 분명 삼 초를 양보한다고 했는데 노마는 어찌하여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후퇴하느냐?]

비로소 자신이 놀림을 당한 것을 알아차린 천수인마의 안색이 썩은 돼지 간처럼 변했다.

낙성신마는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청구상인이 남긴 금강옥액이 아무리 신묘하기로서니 이갑자 이상의 공력이 실린 천수인마의 일장을 받아내지 못해야 정상인데...! 그렇다면 저 어린 놈이 벌써 치우강기를 대성했단 말인가?)

생각을 굴린 낙성신마는 직접 확인해 볼 요량으로 막비강 앞으로 나섰다.

[애송이놈! 노부는 네게 먼저 손을 쓸 기회를 주겠다.]

바로 그때였다.

[!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구나! 비겁한 늙은이들 같으니...!]

화라라락! 스슷!

코웃음 소리와 함께 돌연 두 개의 가냘픈 인영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둘은 각기 푸르고 붉은 옷을 걸친 십팔구 세쯤 된 소녀들이었다.

두 소녀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자매인 듯 전체적인 모습이 비슷했는데 한눈에 보아도 눈앞이 훤해지는 절색의 소유자들이었다.

두 자매 중 녹의소녀(綠衣少女)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몸매에 쌀쌀맞은 인상이었다.

반면 홍의소녀(紅衣少女)는 나이답지 않게 몸매가 풍만한데다가 얼굴도 도화빛으로 화사했다.

[늙은 것들이 떼를 지어 젊은 사람을 괴롭히다니, 보아하니 너희들은 명성을 떨친 인물 같은데 어찌 이렇게 수치심도 없느냐?]

두 자매 중 녹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천수인마는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발설할 길 없던 중 이런 말을 듣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사타구니에 날 것도 안 난 어린년들이 감히!]

막비강도 두 소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녹색 경장과 홍색 의삼을 입고 등에 장검을 멘 두 자매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막비강 정도의 고수가 보기에 그녀들의 신법은 별로 고명한 편이 못되었다.

이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두 소녀의 신법을 보아하니 자기들의 안위도 보호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구나. 그녀들의 출현으로 나는 도주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침중하게 말했다.

[두 분 낭자는 어서 물러가시오! 이 마두들은 매우 무서운 자들이오.]

그러자 홍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코웃음을 날렸다.

[! 당신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런 말을 하세요? 얌전히 우리 자매의 솜씨나 구경하세요.]

파팟!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쌍장을 휘둘러 마치 눈꽃이 날리는 듯한 장풍으로 천수인마를 공격했다.

천수인마는 홍의소녀의 장법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급히 옆으로 피했다.

[지마(地魔) 사도봉(司徒鳳)의 지라신장(地羅神掌)이로구나! 아이야! 우린 한 식구나 마찬가지니 어서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천수인마가 외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소녀도 우내사마의 후손인 모양이군! 한 통속인 늑대와 여우가 어울려 싸우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는걸!)

그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노마와 어린 마녀의 혈전을 관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막비강이 뭘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천마(天魔) 황보룡(皇甫龍)!

지마(地魔) 사도봉(司徒鳳)!

 

그들이 우내사마의 나머지 둘이다. 그리고 이들 두 남녀는 부부 사이다.

비록 같은 사마의 서열에 들긴 했으나 천지이마(天地二魔)는 천수인마나 낙성신마와는 천양지차로 격이 다른 인물들이었다.

왜냐하면 천지이마는 마도무림인들에게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는 마교(魔敎) 출신이기 때문이다.

천지이마는 단지 마도에 속한 인물이라 낙성신마, 천수인마 등과 함께 우내사마로 불릴 뿐이다.

게다가 그들 부부는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보다 나이가 한 참 어려 처음 강호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여년 전이다.

비록 나이는 오십 살 이상 어리지만 천지이마의 무공 실력은 낙성신마나 천수인마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자들 뿐만 아니라 일선(一仙) 이불(二佛), 삼도(三道)까지도 천지이마에게는 한 수 양보할 정도였다.

홍의소녀가 방금 펼친 장법은 바로 그 천지이마 중 지마 사도봉의 절기였다.

지마 사도봉은 마교의 마공 중에서도 아녀자들에게 적합한 마공만을 전수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가 지마 사도봉의 무공을 사용하자 천수인마는 절로 꺼려지는 바가 있어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본래 지마 사도봉은 무공이 빼어날 뿐 아니라 성격이 아주 표독하여 자신에게 터럭만한 죄라도 지은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삼십 몇 년 전, 백도 무림의 대명사인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오인하여 지마 사도봉의 친인(親姻)을 해친 적이 있었다.

이에 지마 사도봉이 무자비한 살수를 펼쳐 무려 열 배나 많은 구파일방의 제자들을 살해한 사건은 아직도 무림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아무리 천수인마가 일세를 풍미한 거마이긴 하지만 감히 지마 사도봉에게 죄를 지을 용기는 없다.

그래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으며 물러서려 했다.

[! 늙어빠진 영감아! 똑똑히 보고 주둥아리를 놀려라! 지마 사도봉만 마교의 무공을 사용하는 줄 아느냐?]

헌데 의외로 홍의소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홍의소녀가 지마 사도봉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히 천마 황보룡과도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천수인마는 홍의소녀가 지마 사도봉과의 관계를 부인하자 어리둥절해했다.

방금 전 홍의소녀가 사용한 장법은 분명 지마 사도봉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참 잘되었군!]

그러자 쌍요 중의 분면색마가 앞으로 나서며 음탕하게 웃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채화음적은 두 자매가 나타나자마자 회가 동해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계집이 스스로 천지이마와 관계도 없다니 소생이 요리하겠소.]

듣고 있던 녹의소녀가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 하는 작자냐?]

[소생의 성은 관()가고 이름은 지()라고 하오.]

막비강은 나이 오십이 넘은 작자가 자칭 소생이라 칭하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녹의소녀는 상대방의 이름을 듣고 처음에는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곧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비로소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네놈이 죽일 놈의 채화음적 분면색마였구나!]

!

그녀는 이를 갈며 벼락같이 검을 뽑아 휘두르며 분면색마를 덮쳐 갔다.

하지만 관지는 허리를 비틀며 녹의소녀의 검망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보기 좋게 펑퍼짐한 엉덩이를 살짝 만지며 음탕한 웃음을 머금었다.

[흐흐흐! 탄력이 매우 좋구나! 재미볼 때 요분질을 잘하겠어!]

[... 이 악적!]

녹의소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쩌저정!

다음 순간 갑자기 그녀의 검끝에서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서릿발 같은 광채가 뻗어 나왔다.

바로 전설 속의 검강(劍罡)이었다.

그것을 본 관지는 안색이 일변하며 경악의 함성을 질렀다.

[그건 북산검호각의 추상검강(秋霜劍罡)!]

(북산검호각! 저 소녀들이 사패천 중 북패천으로 불리는 북산검호각의 제자란 말인가!)

막비강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악소궁에게서 북패천 북산검호각의 일족이 전()씨라는 말을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북패천 북산검호각의 위명은 실로 대단하여 그 음탕하던 분면색마도 이 순간만큼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츠츠츠!

그자의 손바닥은 어느덧 백옥(白玉)처럼 희게 변했다.

아마도 북산검호각의 검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생의 절기를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녹의소녀의 검법도 신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쩌러렁!

서릿발 같은 기운이 그녀의 검에서 번져 나와 분면색마를 무찔러 갔다.

! 퍼펑!

분면색마는 연달아 몇 장을 발출하여 녹의소녀의 검기를 흩뜨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녹의소녀의 검기는 더욱더 날카롭게 변해 분면색마를 공격했다.

막비강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옆에서 관전하고 있는 홍의소녀에게 물었다.

[낭자, 당신들의 성은 전()씨요?]

홍의소녀가 흘겨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전씨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뭘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오. 낭자의 성이 전씨라면 내가 당신들을 도와 주겠소.]

막비강은 두 자매의 성이 전가라고 말하자 혹시 염라철장의 유서에 적힌 전포(田袍)란 인물과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두 자매를 도와 싸운 후 그녀들에게 전포의 행방을 묻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돕고 있는 거예요.]

막비강은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아 빙긋 웃었다.

[누가 누굴 돕든 지금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입니다.]

그러자 홍의소녀가 눈을 흘기며 차갑게 외쳤다.

[누가 당신과 같은 배를 탄 운명이란 말이에요?]

낙성신마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애송이놈아! 아부를 하려면 똑똑히 해라!]

낙성신마는 히죽거리며 홍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 계집애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으니 우리도 한바탕 놀아 보자! 노부는 너를 인질로 삼아 악불령을 유인해야 하므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마라!]

홍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외쳤다.

[늙은 작자야! 우선 나와 먼저 고하를 가늠하자!]

!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일장을 격출했다.

낙성신마는 홍의소녀의 성격이 불같은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어깨를 살짝 비틀어 공격을 피해 버렸다.

물론 홍의소녀는 낙성신마의 적수가 못 된다.

그래도 낙성신마는 그녀가 혹시 지마 사도봉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손을 쓰는 것이 꺼려졌다.

대신 그는 벼락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그렇지 않아도 홍의소녀가 낙성신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내 일장부터 받아랏!]

꽈르르릉!

그는 상대방이 초식을 발출하기도 전에 먼저 오른손을 뒤집어 일장을 뻗어냈다.

청구절학은 펼쳐내기만 하면 광풍이 휘몰아치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위력이 있었다.

즉시 짙은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펼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허엇! 광풍진천장(狂風振天掌)까지...!]

낙성신마는 깜짝 놀라 연달아 여덟 걸음이나 후퇴하였다.

그런 후에야 가까스로 막비강의 흉맹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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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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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현천록과 장군묵이 달려갔을 때 그곳에는 노삼과 뚱뚱한 중이 싸우고 있었다.

노삼은 천산육유장(天山六喩掌)을 펼쳐서 뚱뚱한 중을 몰아부치고 있었고 뚱뚱한 중은 합장을 한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겨우 피하는 중이었다.

뚱뚱한 중은 현천록을 보자 반색을 하며 말했다.

[도장! 여기 있었구려. 어디 말좀 해주시오. 내가 그런게 아니라고.]

현천록은 그가 계명사에서 만났던 포두화상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포두화상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노삼의 천산육유장을 상대했다.

노삼이 소리쳤다.

[이 중놈아! 네가 그러지 않았어면 도깨비라도 그랬단 말이냐?]

장군묵이 버럭 고함쳤다.

[입닥쳐라!]

[...]

노삼은 귀속이 윙하고 울려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굴 속도 노삼의 귀속처럼 한참동안 웅웅거렸다.

현천록은 장군묵의 소리에 기침을 크게 했을 때처럼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장군묵의 공력은 정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공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강했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젊은 시주의 공력이 아주 놀랍네 그려. 사자후(獅子吼) 못지 않았네.]

장군묵은 포두화상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천록이 노삼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소?]

노삼은 장군묵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제각기 흩어져서 출구를 찾는 중이오.]

현천록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쓰면 금방 뚫을 수 있는 곳이 있소.]

노삼은 그의 말은 듣지 않고 어떻게 장군묵의 손에서 아직도 현천록이 무사한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도장! 늙은 중이 약속에 좀 늦었소.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그만 용서하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대사와 싸우지 않겠소. 여기서 나가는데 힘을 모읍시다.]

포두화상이 껄껄웃었다.

[진작부터 그랬어야 옳은 일이오. 도장이 이제야 깨달았구려. 노납은 중이라 부처님이 계신 서방극락은 가보고 싶어도 옥황신전인가 하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오.]

말을 끝맺기도 전에 포두화상은 머쓱해졌다.

현천록은 노삼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검을 돌려 주시오.]

노삼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닌지라 현천록에게 순순히 진무검을 돌려주었다.

현천록은 검을 받아 칼집에 넣으며 물었다.

[아까 있던 그 네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

노삼이 말했다.

[노대가 시키는 대로 동굴을 조사하는 중이오.]

장군묵이 말했다.

[아니. 그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다.]

과연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노대와 노이가 연이어 도착하고 금전표 곽기와 수리전 형가운이 그 뒤에 도착했다.

노이가 말했다.

[틀렸다 틀렸어. 노삼! 우린 아주 지독한 놈한테 걸렸다. 꼼짝없이 여기서 죽을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노삼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요. 길이 없으면 뚫으면 돼고 무너진 건 치우면 언젠가는 나가게 될 텐데 재수없는 소릴하는거요?]

노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에는 노이의 말이 옳다. 우린 기주인지 뭔지 하는 독한 놈한테 당해버렸다. 재수가 없어 남의 무덤에 들어와 죽는거지.]

현천록이 노대를 채근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노대가 섭선을 확 펼치며 말했다.

[늙은 도사야! 네놈을 쫓아왔다가 이지경이 됐으니 일단 네놈부터 죽여야 좀 들 억울하겠다.]

학이 날개짓을 하듯 섭선이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하지만 마치 예리한 도끼날 같은 기운이 팔방에서 현천록을 애워싼 채 몰려왔다.

현천록은 검이 없었다. 창졸간에 백금퉁소를 휘둘러 연달아 이검을 펼쳐 노대의 공격을 막았다.

추잇!

노대의 섭선이 더욱 변화를 부렸다.

하지만 갑자기 섭선은 걷히고 노대가 풀죽은 얼굴로 물러섰다.

현천록이 돌아보니 장군묵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쏘아보고 있었다.

포두화상이 노대를 알아보고 말했다.

[천산육유장에 천산백학선법! 시주들은 고명한 천산삼로들이셨군. 무슨 영문으로 우리가 나갈 수 없는지나 알아봅시다.]

그때 금전표 곽기가 말했다.

[이 종이가 바로 해답입니다.]

스윽!

포두화상은 소매를 흔들었다.

곽기의 손에 있던 종이가 포두화상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포두화상이 큰소리로 읽었다.

[무너진 흙과 바위 더미 속에는 벽력탄이 들어있다. 함부로 치우려하다가는 폭사하고 말 것이다? 시주! 이건 누가 쓴 거요?]

뒤에 말은 종이에 없는 말이었다.

곽기가 의기소침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님! 기주가 쓴 것입니다. 왼쪽 아래쪽에 보면 작은 깃발이 하나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포두화상이 곽기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

[왕년에 삼상에서 이름을 날렸던 금전표 곽시주로군. 이 몇 해동안 금전표에 죽은 시체들이 한해에 여섯 구식 꼭꼭 발견되더니 곽시주가 범인이오?]

곽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해마다 곽기는 기주의 명령에 따라 여섯 명씩을 죽여왔다.

하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시체는 태우고 어떤 시체는 바다에 가라앉혔으며 어떤 시체는 산짐승에게 던져주기도 했는데 포두화상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곡을 찔려버리자 부인조차 할 수 없었다.

[... 소인이 범인입니다.]

포두화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곽시주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는데... 쯧쯔... 안타깝군.]

수리전 형가운은 포두화상의 눈이 자기를 훑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시주는 수리전 형시주구먼. 형시주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한해에 여섯 식 죽였소? 수리전이 심장에 박히긴 했지만 등을 뚫고 나오지도 않고 가슴에 뒤가 남아있지도 않았으니 그런 수법은 오직 형시주만이...]

수리전 형가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죄과를 어찌 다 거두려고 그런 짓을 다 하셨소? 나무아미타불...]

금전표 곽기가 말했다.

[저희는 기주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 그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포두화상이 또 말했다.

[석년에 구화산 명경곡(明鏡谷)에서 장씨 모자(母子)를 죽인 것도 명령 때문이었소?]

금전표 곽기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변해버렸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조차 쉬지 못했다.

수리전 형가운도 포두화상이 저승의 사자처럼 두려워졌다.

곽기와 형가운이 포두화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두화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수로 그대들은 그대들의 죄과를 씻으려는고?]

곽기가 오른손으로 자기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

수박이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곽기의 머리가 깨어져 골수가 피와함께 흩어졌다.

형가운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심장에는 수리전이 박혀 있었다.

노대가 냉소하며 말했다.

[신통력이 대단한 중이군. 몇 마디 말로 두 사람을 자결케 했어.]

노이가 말했다.

[그 신통력으로 막힌 동굴도 뚫어보시오.]

포두화상이 나지막하게 경을 외우고 나서 말했다.

[세상이 원래 헛된 것이니 선과 악도 다 헛된 것이오. 자기의 진면목을 보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니 이들은 자기를 대할 수가 없었던 거요.]

노삼이 불쑥 말했다.

[나도 적지 않게 죽였소. 기분이 나빠 죽인 놈도 있고 힘도 없이 도전하길래 죽여버린 것도 있소. 어디 나도 한 번 죽게 해보시오.]

포두화상이 껄껄 웃었다.

[시주는 노납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오. 노납도 사람인지라 불쑥 객기가 치밀었던 거요. ! 어서 동굴을 빠져나갈 궁리나 합시다.]

신궁 오무한과 철연화 마춘보가 횃불을 들고 왔다.

오무한의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무슨 내용이 적혀잇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노대가 포두화상에게 말했다.

[화상! 저 두사람도 죽여야 하지 않소?]

오무한과 마춘보는 그제서야 포두화상의 앞에 있는 두구의 시체가 곽기와 형가운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노납은 살생을 즐기지 않소. 내말이 틀렸소 진인?]

[! 옳고말구요.]

현천록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다가 건성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진양진인의 목소리지만 말하는 투는 영락없이 어린아이의 말투였다.

노대가 말했다.

[당신이 기주라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그 두사람도 빨리 죽여야지.]

오무한과 마춘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시주는 노납이 그들의 죄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의심하는 모양이구려. 그건 사실 그들이 말해준 것이오.]

노삼이 말했다.

[죽은 놈들은 계집처럼 입이 하나씩 더 달려있었소? 아니면 화상이 귓구멍이 하나 더 달려있어서 하지도 않은 말을 들었소?]

포두화상이 말했다.

[후자가 옳소. 노납은 종종 마음 속의 귀로 남의 마음을 옅듣곤 한다오.]

노대가 차갑게 말했다.

[소림사의 포두화상이 혜광심어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남의 마음 속에 말을 하는데 그 마음 속에 있는 걸 듣기도 당연히 들을 수 있겠지.]

포두화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나무관세음.]

[하지만 그걸로 화상 당신이 기주가 아니라는걸 증명할 수 있을까?]

노대가 은근히 비위를 건드리는 투로 말했다.

장군묵이 말했다.

[천산삼로의 첫째는 머리가 아주 총명하다고 들었는데 그럴 듯한 말을 하는군.]

포두화상은 자기의 등에 박히듯 하는 힘을 느꼈다.

[진양진인! 노납을 위해서 한 마디 변명도 해주지 않을 테요?]

현천록이 말했다.

[대사는 철인연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 분이시니 기주일리는 없겠지요. 더구나 이곳을 봉쇄하면서 남아있을 바보는 더더욱 아닐테고.]

포두화상이 호탕하게 웃었다.

[도우는 역시 노납을 잘 알고 있네 그려. 도우가 노납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면서도 이따금씩 만나는 것처럼 노납 또한 도우를 통해 옥황신전을 조금이라도 알까 싶어서 멀리가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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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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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의성의 딸

 

 

 

두 사람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하여 사흘째 저녁 무렵에는 멀리 남악(南岳) 형산(衡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헌데 형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거인같이 우뚝 솟아있는 어느 산봉우리 밑에서는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남산의성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본 악소궁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여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 이미 늦어 버렸구나!]

막비강은 그런 그녀를 급히 부축했다.

[누님! 진정하십시오. 집에 불이 나긴 했지만 영존까지 해를 입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제가 먼저 달려가 볼 테니 누님은 천천히 오십시오!]

악소궁을 위로한 막비강은 곧 팔보간섬을 극한까지 전개하여 불길이 치솟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어둠의 장막이 남악 형산 위로 드리워지고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쐐액!

문득 한 줄기 포물선이 밤하늘을 가르더니 한 명의 청년이 지면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물론 그 청년은 막비강이었다.

막비강이 내려선 앞쪽에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초가집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남산의성 악불령의 거처는 몇 채의 모옥(茅屋;초가집)으로 이루어진지라 불이 붙자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해 버린 것이다.

불타 버린 초가집의 잔해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돼지, 닭 등 가축이 불에 타 죽으며 내는 고약한 악취만 풍길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흉사(凶邪)들은 일을 끝내고 이미 현장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과 그의 식솔들이 변을 당한 것같아 자신도 모르게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오른 손을 저어 한 줄기 광풍을 뿜어냈다.

화르르!

그러자 그때까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던 잔불과 연기가 모두 꺼져 버렸다.

막비강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잿더미 속으로 들어가 타다 남은 잔해들을 뒤척여 보았다. 남산의성 악불령 일가의 유골이나마 찾을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타 죽은 돼지와 닭 몇 마리만 나올 뿐 사람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악 선배님 일가가 도피하면서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지른 게 아닐까? 아니면 흉도들이 사람들을 생포해 간 다음 화풀이로 잿더미를 만들어 버린 것일까?)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잿더미가 된 집 근처에서 악소궁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악소궁은 나타나지 않았다.

헌데 막비강이 불안해 하고 있을 때였다.

[크하하하하!]

돌연 멀리서 심맥을 진탕시키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 왔다.

막비강은 이 웃음소리의 주인이 남산의성의 원수들 중 한 명일 것이라 단정하였다. 그리고 흉수가 이제야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남산의성이 화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적이 안심이 되었다.

이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가 여길 떠나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면 뒤따라올 악소궁이 적의 손에 잡힐 것은 뻔한 일이다.

[카카카!]

막비강이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음산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첫 번째 웃음소리는 십여 리 밖에서 들렸는데 두 번째 웃음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린다. 그만큼 웃음소리의 주인의 경신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쐐액!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막비강은 한 줄기 흑선(黑線)이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르며 날아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거 참 시끄럽구만!]

그의 이 음성은 맑고 우렁차 음산한 웃음소리를 완전히 제압했다.

[크크크! 어린놈이 제법이로구나!]

화라락!

직후 음산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장내에 내려섰다.

그자는 다른 곳도 아니고 잿더미 위에 내려서면서도 먼지 한 점 일으키지 않았다. 이같은 경공신법은 등봉조극(登峯造極)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오기를 능가하는 고수다!)

막비강은 긴장하며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차림은 시골 문사 차림인데 긴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었다. 머리는 백발이 희끗희끗한 반면 안색은 불그레한 것이 한창 나이의 젊은이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녹광(綠光)이 번져 나와 사이하고 괴괴한 인상을 풍겼다.

녹안(綠眼)의 괴인은 바닥에 내려서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웃음소리를 압도한 음성의 주인이 뜻밖에도 약관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누구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갔느냐?]

녹안괴인은 막비강의 아래 위를 살펴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막비강은 나타난 사람이 소리장도 강용이 아니면 백독서생 이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생소한 얼굴인지라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녹안괴인은 막비강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악불령 집안사람이냐?]

[집안사람일 수도 있고 집안사람이 아닐 수도 있소.]

녹안괴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악불령은 어딜 갔느냐?]

막비강은 시종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오.]

막비강의 무례한 대답에 녹안괴인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놈! 보아하니 빨리 죽는 게 소원인 모양이로구나.]

막비강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누군지부터 말하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나와 싸울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소.]

그러자 녹안괴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낄낄낄! 네가 감히 노부 낙성신마(落星神魔)에게 싸움을 청할 생각이냐?]

[인마(人魔)가 아니라 신마(神魔)란 말이지?]

막비강은 상대가 천수인마가 아닐까 생각했다가 예상이 빗나가자 검미를 모았다.

[헌데 자칭 신마 양반! 당신은 여기 무엇 하러 왔소?]

[요놈이 영특하게 생겨서 봐주려고 했더니...!]

낙성신마라는 자는 대답하려다 말고 갑자기 옆의 울창한 고목 쪽을 홱 돌아보며 외쳤다.

[거기 어떤 쥐새끼냐?]

그자는 나뭇가지 위에서 경미한 음향이 이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막비강도 악소궁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외쳤다.

[누님이십니까?]

그러자 나뭇가지 위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 누가 네놈의 누님이란 말이냐?]

화락!

이어 하나의 인영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번에 나타난 자는 바로 소리장도 강용이었는데 그자의 옆구리에는 혈도가 짚인 악소궁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누님이 어떻게 그에게 생포되었지?)

악소궁이 강용에게 잡힌 것을 본 막비강은 내심 놀라면서도 버럭 노성을 질렀다.

[악적! 빨리 그분을 내려놓아라!]

강용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네놈은 누구냐?]

이년의 세월이 지난 탓에 강용은 막비강을 금방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넌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다. 빨리 사람이나 내려놓아라!]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네놈도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이겠지만....]

[잔말이 많다!]

!

막비강은 강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번개같이 덮쳐가며 그자의 안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

강용은 안면을 향해 뻗어 오는 막비강의 벼락같은 일장에 기겁하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사실 그자의 안면으로 날린 막비강의 이 일장은 허초였다.

!

막비강은 강용이 깜짝 놀라 허둥대는 틈을 타 그자의 겨드랑에서 악소궁을 낚아채 재빨리 후퇴했다. 그의 이 같은 동작은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내놔라!]

꽈릉!

얼떨결에 악소궁을 빼앗긴 강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막비강에게 일장을 격출했다.

그때였다.

[잠깐!]

낙성신마라고 자칭한 녹안괴인이 가볍게 손을 들어 강용의 일장을 봉쇄했다.

!

강용의 공력도 매우 심후한데 의외로 녹안괴인이 아무렇게나 휘저은 일장에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그는 놀란 음성으로 녹안괴인에게 물었다.

[귀하는 누군데 노부의 일을 간섭하는 거요?]

순간 녹안괴인은 두 눈에서 섬뜩한 녹망을 발산했다.

[낄낄낄! 감히 내 앞에서 노부라 자칭하다니...! 네놈은 도대체 몇 살이나 처먹었느냐?]

녹안괴인의 말에 강용은 당황했다. 그는 비로소 상대가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인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기회다!)

막비강은 녹안괴인이 강용에게 눈을 부라리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날렸다.

헌데 막비강이 막 몸을 날린 그 순간이었다.

[흐흐! 어림없다!]

꽈릉!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막비강의 면전을 향해 엄습해 왔다.

막비강은 흠칫 놀라며 일장을 마주쳐 냈다.

!

다음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며 한 줄기 선풍이 지면으로부터 모래먼지를 대동한 채 허공으로 뻗어 올랐다.

막비강은 기습해 온 상대의 공격에 제지당해서 다시 원래 위치에 내려섰다.

화라락!

직후 또 다른 인영이 그의 앞으로 날아 내리며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애송아! 네놈이 노부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번에 나타난 인물은 얼굴이 유달리 하얘 음침한 인상을 주는 중년문사였는데 다름아닌 육요(六妖) 중 백독서생 이량이었다.

상대가 백독서생 이량인 것을 알아본 막비강은 화가 치밀어 악소궁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노독물! 너도 내 일장을 받아 보아라!]

꽈르릉!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막비강의 손바닥에서 강맹무비한 장풍이 노도같이 뻗어 나갔다.

백독서생 이량은 막비강의 막강한 장풍에 안색이 대변하며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소리쳐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자 역시 막비강을 오랜 만에 만난지라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바로 천면신룡이시다!]

막비강은 사납게 외치며 재차 장력을 날렸다.

[이제 보니 네놈이...! 커억!]

! 후두둑!

백독서생 이량은 경악성을 토해내다가 막비강이 다시 격출한 일장에 강타당해 나뒹굴었다. 육요 중 한 명인 백독서생조차 지금의 막비강에게는 적수가 못되는 것이다.

막비강은 바닥에 나뒹굴어 피를 토하고 있는 백독서생 이량을 노려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 노독물!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이 정말 광오하군!]

또 다른 사람이 허공에서 음험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화라락!

그 사람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장내에 내려섰다.

이번에 나타난 자는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덮여 나이를 알 수가 없는 노인인데 양팔이 유난히 길고 검었다.

(이자가 우내사마 중의 천수인마겠구나!)

막비강은 새로 나타난 노인의 정체를 간파하고 내심 긴장했다.

그때 장내에 내려선 노인, 천수인마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후학 중에 너같은 고수가 있다니 대견하도다! 해서 특별히 삼 초를 양보해 줄 테니 실력을 발휘해보거라.]

막비강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늙은이가 바로 악명높은 천수인마겠구나. 헌데 노마는 정말 나의 삼 장을 반격하지 않고도 받아낼 자신이 있느냐?]

천수인마는 막비강이 단번에 자신의 신분을 간파하자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노부가 누군지 알아보다니 기특한 놈이로다!]

바로 그때였다.

[! 당신은 천수인마 사마(司馬) 형 아니오?]

자칭 낙성신마라 하던 녹안괴인이 천수인마라는 말을 듣고는 다가왔다.

[으핫하하! 낙성신마 사공(司空) 형도 왔구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이십 년도 더 되었군 그래.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천수인마도 비로소 낙성신마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눈에도 그자가 낙성신마를 꺼려함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막비강은 웃으며 말했다.

[하나는 신마(神魔)고 하나는 인마(人魔)이니 당신들 이마(二魔)가 먼저 고하를 겨루어 보시오. 이긴 사람을 내가 상대해 주겠소!]

막비강은 그렇게 말하며 악소궁에게 다가가 재빨리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정신을 차린 악소궁은 장내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었다. 소리장도 강용과 백독서생 이량, 거기에다가 우내사마 중 두 사람이나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절망의 표정이 되어 막비강에게 말했다.

[아우! 아우는 어서 여길 빠져나가게. 누이는 선친을 따라 지하로 가겠네.]

막비강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누님은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영존께서는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분의 뒤를 따라 지하에 가겠다는 겁니까?]

[집이 모두 타 버린 것으로 보아 가친도...!]

[뿐만 아니라 돼지도 몇 마리 타 죽었더군요.]

막비강의 말에 악소궁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네 말은 가친께서 살아 계신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빨리 도주해야 하네.]

[조금 기다려 보십시다. 영존께서 왜 이런 계략을 세워야 했는지 저자들의 대화에서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막비강은 악소궁이 무사히 도주할 수 있도록 이마가 서로 싸우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마는 서로 상대방을 꺼려하는지라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고받을 뿐 싸울 의사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마! 설마 저 어린 놈과 일행은 아니겠지요?]

천수인마의 말에 낙성신마는 막비강과 악소궁을 힐끗 돌아보고 대답했다.

[노부는 악불령을 만나러 왔을 뿐 저 녀석과는 아무 관계도 없소.]

천수인마는 안도하며 다시 물었다.

[신마는 무슨 일로 악불령을 만나려 하시오?]

[늦게 얻은 딸내미의 괴질(怪疾)을 치료하기 위해서요. 보아하니 인마도 악불령을 만나러 온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오?]

낙성신마가 되묻자 천수인마는 소리장도 강용을 가리켰다.

[노부의 제자가 당년에 악불령에게 굴욕을 당했기에 빚을 갚아주기 위해 찾아왔소.]

낙성신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열흘 전 노부는 아랫사람을 통해 예물을 주며 악불령을 초빙했었소. 이런 사정으로 악불령은 현재 노부의 빈객이 된 상태니 인마는 그를 너무 난처하게 만들지 마시오.]

막비강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말을 받았다.

[옳소. 사람[]은 마땅히 신()에게 양보해야 하오.]

천수인마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애송이놈! 잠자코 있지 못할까?]

이어 그자는 다시 낙성신마를 돌아보았다.

[악불령이 집에 불을 지르고 줄행랑을 친 것은 신마가 그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었군. 하지만 그의 무남독녀가 여기 있으니 이 계집만 잡아 두면 그가 아무리 멀리 도주해도 걱정할 게 없소.]

[누가 악불령의 무남독녀요?]

낙성신마가 눈을 번뜩이며 돌아보았다.

[애송이 뒤에 있는 계집이 바로 악불령의 외동딸 악소궁이란 계집이오.]

천수신마의 말에 낙성신마는 준엄한 표정으로 악소궁에게 말했다.

[악소궁!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자 악소궁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막비강은 얼른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가면 안 됩니다, 누님.]

[잠깐!]

천수인마도 급히 낙성신마에게 말했다.

[노부는 악가 계집을 잠시 신마에게 양보하여 악불령이 영애의 병을 치료하게 하겠소. 그러니 영애의 병이 완쾌되면 그 계집을 석방하지 말고 노부에게 넘겨주시오.]

낙성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하리다!]

악소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비강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당신네들끼리 함부로 결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겠소.]

[낄낄낄....]

낙성신마가 괴소를 터뜨리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어린 녀석이 패기가 대단하구나! 하지만 너는 너무 늦게 세상에 태어난 탓에 일선(一仙), 이불(二佛), 삼도(三道), 사마(四魔), 오기(五奇), 육요(六妖), 칠절(七絶)의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오기, 육요, 칠절은 들어 봤지만 일선, 이불, 삼도, 사마는 또 어떤 자들인가?)

막비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낙성신마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일선(一仙) 음양선옹(陰陽仙翁)은 은거해 버렸고 이불(二佛)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삼도(三道) 역시 오래전 부터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당연히 당금 무림에서 우리 사마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 사마 중 이마(二魔)가 이곳에 있는데도 네놈은 큰소릴 치느냐?]

막비강은 상대방이 천하오기를 다섯 번째 서열에 두자 내심 놀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오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한 사람을 빠뜨렸소. 마땅히 나 일룡(一龍) 천면신룡도 서열에 끼워야 했소.]

낙성신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부는 천면신룡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다.]

백독서생은 막비강의 일장에 격중되어 쓰러졌다가 지금까지 운기조식을 하여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운기조식하면서도 세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라 몸을 일으키며 참견을 했다.

[저 어린 놈은 악불령의 기명제자이며 또한 우주도철의 양자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막비강이고 별명은 천면신룡입니다.]

그 말에 낙성신마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껄껄껄, 악불령의 기명제자라면 더욱 놓아줄 수 없지.]

막비강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여길 떠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악 누님을 여기 두면 너희들이 행패를 부릴 것이 뻔하므로 먼저 누님부터 보낸 다음 다시 얘기를 하겠다.]

낙성신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노부는 너희 둘을 모두 잡아 두겠다.]

막비강은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날 잡아 두고 싶으면 어디 잡아봐라. 그러나 악 누님은 연약한 아녀자니 손대지 마라!]

낙성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마라. 누구든지 그녀에게 손을 대면 노부가 가만두지 않겠다.]

[남아 일언 중천금이다.]

막비강은 이렇게 말한 후 악소궁에게 전음으로 속삭였다.

[누님을 숲 속으로 던져 넣을 테니 제 걱정은 말고 전력을 다해 도주하십시오.]

악소궁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평범한 자신은 이곳에 남아봤자 막비강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흉사들은 막비강이 악소궁과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지만 몇 마디 당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버려두었다.

[가십시오.]

그런데 막비강은 갑자기 악소궁의 몸을 번쩍 들더니 옆의 숲 속으로 힘껏 던졌다.

쐐액!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던진지라 악소궁의 풍만한 교구는 마치 유성처럼 숲 안쪽으로 날아들어갔다.

그것을 본 낙성신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 감히 노부 앞에서 속임수를 써?]

그자는 분노하여 외치며 숲으로 날아드는 악소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핫하하! 노마의 상대는 나란 걸 잊었나?]

막비강은 대소를 터뜨리며 날아올라 쌍장을 밀어냈다.

[애송이놈! 죽고 싶으냐?]

대노한 낙성신마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주 일장을 후려쳤다.

퍼펑!

다음 순간 막비강의 장력과 낙성신마가 쳐낸 장력이 충돌하며 요란한 폭음을 일으켰다.

쐐액!

헌데 서로의 장력이 부딪히는 순간 막비강의 몸은 쏘아진 화살처럼 뒤로 날아갔다. 막비강은 낙성신마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자의 장력을 빌어 현장에서 이탈한 것이다.

[!]

낙성신마는 자신이 상대방을 전송해준 꼴이 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놈은 청구상인의 문인이다. 저놈에게 감쪽같이 속았구나!]

천수인마가 급히 외쳤다. 그자는 언 듯 막비강의 장심에서 허연 강기가 번뜩이는 것을 본 것이다. 장력에 자유자재로 강기를 실을 수 있는 신공은 청구상인의 치우강기 외에는 없다.

[빨리 추격합시다!]

쐐액!

천수인마는 즉시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막비강의 뒤를 쫓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낙성신마도 이를 부득 갈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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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3)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장군묵은 출구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마다 가봤지만 무너져 내린 바위더미 위에는 볼 수 없었다.

그것들을 다 뚫고 나간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기주인가 뭔가 하는 자에 의해 모두 막혀버린 것 같소.]

장군묵은 현천록을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린 다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장이 들어온 곳은 어딘가?]

현천록이 말했다.

[제일 먼저 무너졌소.]

장군묵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만약 허튼짓을 하려한다면 두 손부터 날려버리겠소.]

현천록은 입을 삐쭉했다.

[내겐 그런 능력도 없소. 당신이 믿을 지는 몰라도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나도 꼭 알고 싶은 것들이오.]

장군묵이 묵묵히 현천록을 보다가 말했다.

[도장이 지난 세월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옥황빙서가 말해주는거요?]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양진인은 팔십년 전부터인가 옥황신전에 들어가 옥황사자가 되었소. 삼년 마다 한 장식의 옥황빙서를 적임자에게 전해주는 역할이었소.]

현천록이 순순히 대답해버리자 장군묵이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하지만 옥황신전이 어디있는지 또 뭐하는 곳인지 물으면 할 말이 없소. 나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이오.]

장군묵이 물었다.

[옥황빙서는?]

[그놈의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당신네 아홉째에게 줬소. 목숨을 요구하는 대가로.]

현천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가 진양진인인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말이니까 언 듯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홉째? 아홉째를 만났단 말이오?]

현천록이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지 않으면 결코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거요.]

장군묵은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함부로 하면 현천록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잠시 보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오. 조금 긴 이야기도 될 수 있소. 교활한 늙은 도사와 호기심 많고 해보고 싶은 것 많은 철부지 소년의 이야기요.]

장군묵은 호기심이란 말에 깊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기심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삼년을 기다리는가 하면 또 한 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흉흉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훔치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오.]

장군묵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않은가? 결과가 나온다면 백년도 기다리고 목적을 위해서면 만번이라도 싸울 수 있지. 하물며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죽을 인간을 죽이는 것 따위가 뭐 어떴단 말인가?]

현천록이 칭찬하며 말했다.

[정말 호탕하오. 대장부는 마땅히 그래야 할 거요.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오. 나를 죽이려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장군묵이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 귀찮을 뿐이지. 사실 죽이는 것도 귀찮지. 하지만 그냥 두는 것이 더 귀찮을 때는 약간 덜 귀찮은 쪽을 택하오. 그쪽이 바로 죽이는 쪽이지.]

현천록이 안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겠소.]

장군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중원 어딘가에 칼이나 검, 방패, 창 따위를 잘 파는 꼬마가 있었소. 상당히 수완이 좋아서 단골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소. 그런데 어느 겨울날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소.]

현천록이 힐끗보니 장군묵은 이야기에 끌리는지 몸을 현천록 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꿈은 참 빨리도 이루는구나. 되고 싶은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했더니, 시체도 되어보고 순찰사자노릇도 해보고, 사기꾼 노릇에 퉁소쟁이까지 되었다가 도사가 되는가 했더니 이제 이야기꾼이 되는구나. 그래 멋대로 되라. 언젠가는 다 정리가 되겠지.)

재미가 없지는 않다.

자기 속에 얼마나 많은 모습이 있는지, 아니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하나인데 아직 굳어지지 않아서 어떤 형태로든 상황에 맞춰서 변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현천록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자기의 이야기였다.

[지독한 노인이 하나 찾아왔는데 자기가 가진 검을 팔려고 했소. 검은 무당파의 진무검보다 못하지 않은 보검이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쓰기는 어렵고 그 노인의 몸은 딱 그검을 쓰기에 알맞았소. 몸과 검이 서로 닮아있었던 거요. 나는 아주 싸게 사려고 했소. 노인은 그걸 되사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느냐고 물었소. 나는 그검을 다시 사려면 판 가격의 칠백배를 내야 된다고 말했소.]

장군묵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 비싸군.]

현천록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비싸지 않았소. 오히려 내가 단단히 당했으니까?]

[도장이?]

장군묵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현천록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장군묵은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빨려들고 있는 중인데 흐름을 끊으면 산통도 깨어진다.

[그 꼬마가 당했단 말이오. 노인은 한푼도 받지 않고 검을 팔았소. 황당한 노릇이었지. 한푼도 받지 않았으니 칠백배 아니라 만배라도 똑같지 않소? 그냥 그 노인이 와서 다시 달라고 하면 나도 그냥 줄 수 밖에 없으니까. 꼬마는 그때서야 후회했소. 그럴 줄 알았다면 보관료를 아주 비싸게 책정하는 게 백번 낫지 않겠소.]

장군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단서까지 달아놓았소. 검을 잃어버리거나 하여 자기에게 되팔지 못할 때에는 꼬마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소. 꼬마는 검을 들고 주인에게 가서 소상히 다 고했소. 주인은 그 검을 곰곰히 보고는 고독마검이라고 했소.]

장군묵이 코웃음을 쳤다.

[고독마검 불이태가 아직 살아있었군.]

현천록이 물었다.

[고독마검은 어떤 고수요?]

장군묵이 말했다.

[칠검동(七劒洞)의 제사검(第四劒)이지. 그 사이에 순위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만.]

현천록이 말했다.

[칠검동이라는 데도 있었군. 하여간 일은 그날 터졌소. 꼬마가 주인에게 고하고 자기 방으로 가는데 갑자기 눈 앞에 하얀 손바닥 하나가 보이지 않겠소? 그리고 꼬마는 정신을 잃어버렸소.]

장군묵이 말했다.

[그건 풍허객의 소월심인장(素月心印掌)이겠군. 상처도 없이 그냥 정신을 잃게 만들지.]

현천록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마 그럴거요. 꼬마는 맞은 것 같지도 않고 다친데도 없었으니까. 하여간 풍허객이란 사람이 나타났소. 그 꼬마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꼬마가 갑자기 죽고 말았소.]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풍허객이 죽였소?]

현천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소. 저절로 고개를 뒤로 휙 젓히며 머리를 땅에 부딪히고 죽어버렸소.]

장군묵의 얼굴이 굳어지고 그의 눈이 현천록을 빤히 현천록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이 그런 눈빛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구장심조의 첫 번째 껍질이 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데 죽었으되 죽은 건 아니었소. 꿈인지 생신지 산건지 죽은건지 꼬마는 다시 정신을 차렸소. 삼년이 지났다고 하고, 온몸이 새까만, 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꼬마를 반겼소. 그 여인 이름이 아마 보초였을 것이오.]

순간 현천록은 목이 꽉 막혔다.

장군묵이 한손으로 현천록의 목을 쥐고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생사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무당파 제자는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이제 그 맹세를 깨뜨릴 수도 있다.]

장군묵의 음성은 아주 무거웠고 숨이막힐 듯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의 장군묵의 두 팔을 잡고 매달리며 겨우 말했다.

[이야기는 아직 남았소. 가만히 기다리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듣게 될거요.]

장군묵은 다시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조금전처럼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검의 자루를 은근히 만지면서 허튼짓을 하지말라는 위협적인 행동도 포함되어있었다.

현천록은 한숨을 쉬었다.

장군묵은 필요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 꼬마는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소. 구장심조라는 무공이면서도 아니고 아니면서도 무공인 이상한 힘 때문이었소.]

장군묵의 입이 실룩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보초라는 분에게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사탄의 비밀과 구장심조의 진정한 뜻을 찾기 위해서 세상을 나다닌다고 들었소. 그말을 듣자마자 꼬마는 자기도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소.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먼저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소. 자기 앞에 펼쳐질 운명을 믿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는 일단 좀더 많이 알기로 작정했소.]

장군묵은 현천록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기네 아홉째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다면 생사탄의 사람을 어떤 수단으로도 말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호기심이 걷잡을 수없이 피어올랐지만 현천록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세상에 다시 나왔다가 일곱째를 만났소. 그리고 그날 밤에 현무호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퉁소소리에 이끌려 계명사 활몽루로 갔소. 활몽루에는 어떤 도사가 퉁소를 불고 있었는데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었소. 그 때문인지 꼬마보다 먼저 일곱째가 그 도사를 혼내주려 했소. 한데, 도사가 요상한 수법을 부려서 활몽루를 사라지게 했소.]

장군묵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은 그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말했다.

[꼬마는 활몽루와 함께 그들이 사라져버리자 재빨리 성안으로 달려가 퉁소를 하나 구했소. 그리고 현무호 가운데 섬에서 퉁소를 불었소. 그 도사와 똑같은 곡이었소. 이윽고 허공에서 갑자기 도사만 나타났소. 호수에 떨어졌는데 퉁소소리에 이끌려 꼬마가 있는 쪽으로 나왔소. 꼬마는 도사를 포로로 잡았소. 그도 도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있었기 때문이오.]

꿀꺽!

장군묵이 침을 삼켰다.

현천록은 계속 말했다.

꼬마가 도사를 데리고 자금산의 동굴 속에 숨은 일과 그 도사와 내기를 한 일, 그리고 어떻게 태극혜검을 배우게 되었고 어떻게 암습을 당했으며 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그래서 그 꼬마는 졸지에 빨간 머리띠를 맨 도사가 되어버렸던 것이오.]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목을 덮썩 잡았다.

현천록은 가만히 있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왼손을 보며 소리쳤다.

[미장! 정말 아홉째 너구나!]

현천록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묵심환이 나타나고 있었다.

현천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장군묵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발로 땅을 굴렸다.

쿠웅!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동굴 전체가 울렸다.

[그 교활한 도사놈이 이런 짓을 꾸미다니! 아직 멀리 가진 못했겠지.]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을 봐요. 남의 몸도 이렇게 바꿔버리는데 자기가 변신하는 건 더 쉽겠지요. 어떻게 알아보고 찾는단 말입니까?]

장군묵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네 몸에 펼쳐진 수법은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현천록이 놀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어야 된단 말예요?]

장군묵이 힐끗보며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허허허!]

현천록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변신을 하자고 했는데 너무 기가막힌 변신을 해버렸다.

빨간 머리띠를 맨 늙은 도사가 되어버렸다.

그때 펑펑! 하는 장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강맹한 장력인지 현천록과 장군묵이 있는 곳까지 바람이 확 밀려왔다.

[이 미친 중놈아! 죽으려면 곱게 죽지 왜 동굴은 무너뜨리려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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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구원의 손길

 

 

 

[크흑!]

막비강은 들끓는 욕화를 참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여 필사적으로 치솟는 욕화를 억눌러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번 불붙은 욕화는 요원의 불길처럼 그의 전신으로 번져 갔다.

막비강은 너무도 강력한 욕화에 급격히 이성을 잃어 갔다

그의 순양지물은 극한대로 팽창하여 끊어질 듯이 아팠다.

지금 이 순간 막비강의 뇌리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아랫배에 그득한 채 들끓고 있는 용암을 어디론가 토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방이 밀폐된 이 철실에서 그의 욕화를 풀어 줄 대상이 있을 리 없었다.

[으아아아!]

그는 치미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걸치고 있던 의복을 모두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끊어질 듯이 아픈 일부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긍!

문득 밀실의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어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밖을 살피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철문을 다시 닫았다

그 인물은 한 명의 중년미부였는데 무엇이 꺼려지는지 얼굴은 수건으로 가려 알아볼 수 없었다.

[...!]

실내에 들어선 여인은 상황을 살펴보다가 바르르르 몸을 떨었다

한구석에 전라의 몸으로 벌렁 누운 채 정신을 잃은 막비강을 발견한 때문이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막비강의 건장한 알몸은 중년여인을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순간 막비강의 몸은 전신의 혈관이 툭툭 불거진 채 끊임없이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은 이미 까뒤집어져 허연 흰자위가 드러나 있고 입과 코에서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욕화가 기혈을 뒤집어 놓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엾은 아이...!)

면사 속에서 여인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막비강을 구하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춤주춤 막비강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막비강 옆으로 가까이 다가선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의 하체 중심부에 불끈 치솟아 있는 일부를 발견한 때문이다.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으로 양정(陽精)이 범인의 수십 배에 이른다

그 탓에 그의 실체도 평균의 배에 가까운 크기였다.

여섯 치가 넘는 막비강의 일부는 마치 무쇠로 만든 조형물처럼 강인해 보였다

여인은 살아오면서 두 명의 사내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막비강의 그것에는 비견될 수 없었다

특히 그 압도적인 굵기와 중량감은 상상도 못해 본 것이었다.

여인의 봉목은 갈등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네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서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치마를 허리 위로 걷어 올렸다.

만지면 묻어날 듯이 새하얀 허벅지가 어둠 속에서 눈이 부셨다.

헌데 기이하게도 여인의 가랑이 사이의 계곡에는 성숙한 여자라면 당연히 깔려 있어야 할 음영(陰影)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백옥(白玉) 덩이같이 뽀얀 두덩과 그 아래로 탐스럽게 벌어진 균열이 보일 뿐이었다.

인은 흥분과 수치심으로 바들 바들 떨며 막비강의 몸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와 함께 떨리는 섬섬옥수가 용틀임을 보듬어 쥐었다

여인의 손안에 쥐어진 그것은 마치 뱀처럼 꿈틀대며 맥동했다.

(뜨거워!)

손안에서 요동치는 용틀임을 느끼며 여인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치마를 복부와 다리 사이에 낀 여인은 그 용틀임을 자신의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 정말 내가 강아와 이런 짓을 해도 좋을까?)

마지막 순간 여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막비강과 이런 짓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사이였다.

인륜을 지켜야 한다는 망설임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머뭇거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인의 입술이 깨물리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어 그녀는 육중한 하체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 아파! 그이하고의 첫날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찔한 통증을 느낀 여인은 입술을 악물었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막비강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흐윽!]

여인은 막비강을 완전히 수용한 뒤 무너지듯 그의 넓은 가슴에 넘어졌다.

아랫배에 가득 들어찬 채 연신 꿈틀대는 막비강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 내가 결국 강이와 ...!)

그 와중에도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인해 흘러 넘친 여인의 뜨거운 눈물이 막비강의 가슴 위로 굴렀다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자신의 몸으로 순결한 막비강을 받아들인 것이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자신과 막비강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버렸다

남자와 여자로서 최후의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죄책감에 떠는 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되었으니 네 마음껏...!)

여인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본능에 몸을 맡겼다.

일단 분 뜨거운 열풍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 * *

 

(누구였을까?)

막비강은 망연자실하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는 온몸이 개운한 상태였다

아랫배를 그득 채우며 들끓던 용암은 이미 한 방울도 남김없이 외부로 방출된 후였다

치미는 열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벗어 젖혔던 의복도 누군가에 의해 원래대로 입혀져 있었다.

(젊은 여자는 아니었어!)

막비강의 숨결이 절로 거칠어졌다.

그는 어렴풋이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욕화로 반쯤 혼절해 있었을 때 누군가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자신의 몸 위에 걸터앉았었다는 사실을...!

그 여인의 몸에서는 참으로 좋은 냄새가 났었다

과일 냄새 같기도 하고 백합 향기 같기도 한 그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고 있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막비강은 능동적으로 욕구를 채웠었다

막비강이 짐승처럼 덤벼들자 여인은 슬픈 눈빛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막비강이 욕구를 채우던 중 여인이 얼굴에 쓰고 있는 면사를 벗겨버리려 하자 그녀는 돌변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끝내 면사를 벗기지 못한 탓에 막비강은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구한 여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몸매로 보아 제법 나이가 든 여인이었으니 혈검산장의 비녀나 하녀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막고천의 처첩(妻妾)들 중 한 명이란 얘긴데...!)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여러 여인들을 떠올려 봤다

그러나 정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해 줄 동기를 지닌 여인은 그녀들 중에는 없었다.

언뜻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의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역시 막비강 자신을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고 알게 되겠지!)

막비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정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열쇠로 연 것이 틀림없었다.

헌데 함정을 나서려던 막비강은 문간에 떨어져 있는 한 짝의 귀고리를 발견했다.

(그 여인이 흘린 것이겠구나!)

막비강은 그 귀고리를 집어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혈검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모두 떠난 드넓은 장원에는 괴괴한 적막만이 흘렀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한철로 만들어진 철문을 부수려 하자 질겁하여 달아났고, 다른 식솔들도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서패천(西覇天)이라 불리며 서북삼성(西北三省)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던 혈검산장은 삽시에 폐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네가 어디로 숨든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 막고천!)

막비강은 막고천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혈검산장을 떠났다.

 

 

***

 

쐐액!

막고천의 암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가 정체불명의 여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한 막비강은 마음속의 울분을 발설하기라도 하듯이 우주도철의 경신술 팔보간섬(八步間閃)을 극한까지 펼쳐 질주하였다.

반 자절 이상을 내쳐 달리자 수백 리를 주파하여 종남산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윽고 종남산의 험준한 산 그림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막비강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길가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제법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비강이 멈춘 곳은 야트막한 고갯마루였다.

[이제 어딜 가서 무얼 해야 하나?]

고개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막비강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그는 혈검산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진상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막고천을 생포하여 통쾌하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그렇지는 못해도 최소한 생모 한경파를 구출하여 자기의 신세내력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막고천은 놓쳤고 생모조차 어디론지 잡혀가 버린 것이다.

(막고천! 네놈이 만일 나한테 당한 화풀이로 어머니를 괴롭힌다면 기필코 사로잡아 천참만륙해 버리겠다!)

막비강은 마음이 초조해져 이를 부득 갈았다. 생모 한경파의 안위가 못내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고천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헌데 막비강이 길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두서 없는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화라라락!

고개 아래에서 하나의 작달막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오는 것이 막비강의 눈에 들어왔다

그 인영은 한 명의 여인이었는데 단번에 고개 위로 날아올라오더니 막비강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황망히 달려가는 걸까?)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본래 남의 일에 간섭하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인이 펼쳐내는 경공술이 어쩐지 눈에 익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부인! 잠깐만 걸음을 멈춰 주십시오.]

막비강이 급히 부르자 여인은 고개는 돌리지 않았으나 예의 있게 대답했다.

[용서하세요! 가친(家親)께 위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야한답니다.]

여인은 그렇게 외치며 전력을 다해 질주해 갔다

발끝이 가볍게 땅을 찍을 때마다 사, 오 장씩을 날아가는데 그 자태가 아주 가볍고 우아하다.

!

막비강은 여인의 이 같은 경신술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서 즉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뒤쫓아가기 시작했다.

날 듯이 달려가는 여인의 경신술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껏 막비강이 본 어떤 무림 고수보다도 빠르고 경쾌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경신술로 유명한 우주도철의 팔보간섬을 연마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일년 동안 수시로 공청석유를 마시고 하수오를 상식(常食)했었다. 

덕분에 공력이 전보다 배 가까이 심후해진 상태다

막비강은 오래지 않아 여인의 바로 뒤로 따라붙을 수 있었다.

여인도 막비강이 삽시에 자신을 따라붙자 놀란 듯 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질풍같이 달리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막비강이 가까이 따라붙어 살펴보니 상대는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순후한 인상의 중년여인이었다

그다지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박속같이 하얀 피부와 온유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절로 호감을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나이 탓에 비만해 보일 정도로 살이 올라 풍만한 몸에는 질박하나 깨끗한 베옷을 걸치고 있어 초탈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남산의성(南山醫聖) 악 선배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막비강은 여인과 보조를 맞추어 달리면서 물었다

그는 이 풍만한 중년여인의 경신법이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능운신보(凌雲神步)임을 알아본 것이다.

[소협의 존함을 말해 줄 수 있겠어요?]

화락!

막비강의 물음에 중년여인은 급히 걸음을 멈추며 반문했다.

[소제는 막비강이라 합니다.]

막비강도 따라 멈춰 서며 중년여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이제 보니 막 소협이었군요. 제 이름은 악소궁(岳少宮)이라고 하며 남산의성께서는 저의 가친 되세요.]

중년여인이 반색을 하며 막비강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악 누님이셨군요.]

막비강도 반색을 했다.

그는 이 년 전 악불령에게서 의술을 배울 때 그의 가족 사항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 푸근한 인상의 중년여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외동딸인 악소궁이었던 것이다.

악소궁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세 살이다

그녀는 스무 살이 채 안되어 출가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었다

즉 지금의 그녀는 과부인 것이다.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된 악소궁은 별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채약(採藥)과 연단(煉丹)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의성 어르신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누님?]

막비강은 악소궁의 안색이 매우 초조한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악불령에게 사사(私師)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 악소궁이 비록 어머니 나이뻘이었으나 스스럼없이 누님이라 불렀다.

악소궁도 막비강에 대해 부친에게서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그가 대뜸 자신을 누님이라 불렀으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삼년 전 뇌강서(雷鋼鋤)를 도난당한 일이었네.]

악소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도 상대가 자신의 사제뻘인 막비강임을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강용은 자기의 무공으로는 가친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이리저리 피해 다녔지.]

막비강 역시 그 일은 알고 있다.

소리장도 강용은 위왕, 즉 조조의 무덤을 도굴할 목적으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뇌강서를 훔쳤었다

그 과정에서 막비강은 소리장도로부터 도가의 상승 운기토납술인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을 배우는 기연을 만났었다.

[도망다니던 강용은 가친이 경지하 강변에서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과 싸워 적대관계가 된 것을 알고는 많은 재물을 마련하여 그자를 찾아가 사부로 삼았다네.]

막비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을 받았다.

[백독서생 이량은 영존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 강용이 그런 자를 사부로 삼은 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건 자네가 모르고 하는 말이야. 강용이 백독서생 이량을 사부로 삼은 건 무공이 아니라 아버님을 상대하기 위한 용독절학(用毒絶學)을 배우기 위해서였거든.]

[그렇군요!]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 무림에서 남산의성의 의술에 상대될만한 것은 백독서생의 용독절학 밖에 없다.

말을 잇는 악소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강용은 전설적인 거마 천수인마(千手人魔)까지 사부로 모셔 절기를 배웠다고 하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그자는 복수를 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데 천수인마도 강용과 동행한다더군.]

막비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천수인마의 무공은 천하오기(天下五奇)에 비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네.]

악소궁은 아미를 모으며 대답했다.

[천수인마는 백여 년 전부터 무림에 명성을 떨쳐 온 천(), (), (), ()의 우내사마(宇內四魔) 중 한 명이네. 강호의 일반적인 평판으로는 우내사마가 천하오기보다 좀더 강하다고 봐야겠지!]

막비강은 우내사마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

하지만 우내사마가 무려 백여 년 전부터 악명을 떨쳐왔다는 설명을 듣고 그자들이 천하오기보다도 더 무서운 인물들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비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잘되었습니다. 소제도 영존을 만나 뵙고 어떤 사람의 행방을 물을 생각이었으니 함께 가시지요.]

[자네가 함께 가 준다면 천수인마도 감히 행패를 부리지 못할 게야.]

악소궁은 막비강이 함께 가자고 말하자 기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당금 무림에서 천하오기 외에는 나를 추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 그런데도 단숨에 내 뒤를 쫓아온 걸 보면 자네의 무공이 천하오기를 능가한다는 걸 알 수 있겠네!]

말하는 악소궁의 표정이 밝아졌다.

실제로 악소궁은 다른 무공은 평범하지만 경신공부만은 아주 빼어났다

막비강은 그녀의 젊은 시절 별호가 남산비연(南山飛燕)이었음을 떠올렸다.

막비강도 악소궁이 자신을 높게 평가해 주자 내심 기뻤다.

[헌데 소협은 가친에게 누구의 행방을 물으려는 겐가?]

악소궁이 묻자 막비강은 침중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소제가 찾으려는 사람의 이름은 전포(田袍)라고 합니다. 혹시 악 누님은 이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 금시초문이구먼. 하지만 가친께선 알고 계실 것 같네. 워낙 발이 넓으신 분이니까.]

악소궁의 대답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포가 무림의 고인이 아니라면 염라철장이 내게 전포를 만나 사정을 물어 보라고 당부할 리 만무하지.)

생각을 굴리던 막비강은 다시 악소궁에게 물었다.

[혹시 무림도상에 전()씨 성이면서 위명을 떨친 인물이 없습니까?]

[전씨라....]

악소궁은 이마를 모으며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고 보니 전씨 중에서도 무림에 명망을 떨치는 가문이 하나 있기는 하구먼!]

[그렇습니까? 그게 어느 가문입니까?]

악소궁의 말에 막비강은 급히 물었다.

[사패천 중 북패천(北覇天) 북산검호각(北山劍豪閣)이 대대로 전씨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네! 하지만 그들 일족은 중원의 북쪽 변방에 웅거한 채 외부인들과 교류가 적어 당금 북산검호각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

막비강은 악소궁에게서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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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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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2)

 

 

새로 온 사람이 버럭 소리쳤다.

[개똥같은 도사놈아! 모가지를 비틀어야 옥황빙서를 내놓겠느냐?]

현천록이 말했다.

[난 진양진인이 아니오. 난 현천록이오. 진양진인이 나를 이렇게 해놓았소.]

장군묵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튼 수작으로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해.]

장군묵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순간 현천록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부드러운 기운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든 검이 휘둘러졌다.

번쩍!

그의 검은 장군묵의 부드러운 장력을 베어버리고 그의 왼쪽 눈을 찌르고 있었다.

태극혜검 중의 소경심매란 초식이다.

장군묵의 붉으스레한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현천록은 앗차 했을 때 벌써 자기도 모르게 장군묵의 눈을 찌르고 있는 중이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반격에 다시 반격을 가했다.

검이 부딪혀도 챙강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불똥이 튀고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날뿐이었다.

현천록도 울며겨자먹기로 반격에 반격을, 그 반격에 다시 반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태극혜검은 원래부터 공수를 겸한 것이기에 반격을 반격으로 맞는다.

눈부시게 검광이 흐르고 불꽃이 뛰는 가운데 순식간에 사십여 초가 지나갔다.

현천록은 장군묵과의 싸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태극혜검 중의 수법들을 쥐어짜내며 겨우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군묵이 사용하는 검법도 역시 태극혜검이지만 현천록이 미처 모르던 수법들도 섞여 있었다.

장군묵도 현천록이 자기의 검술에 검술로 당당히 맞서고 있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자기한테 입은 중상 때문에 공력도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태극혜검을 펼치는 진양진인의 공력이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잡다한 것 보다는 공력이 순수하면 순수한 만큼 강해진다.

공력에도 양이 아니라 질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태극혜검의 수법이 지난 밤에 싸웠을 때보다 오히려 더 정치(精緻)하게 느껴진다.

장군묵은 버럭 소리쳤다.

[재주를 숨기고 있었군. 하지만 그정도의 태극혜검으로 나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

장군묵의 검에서 뿜어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아주 강해졌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에게 초상감각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단 일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운들은 느끼는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겉으로 볼 때 현천록과 장군묵의 싸움은 눈부신 검광으로 인해 사람을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 였다.

[노대! 진양진인의 검술이 아주 대단하군요.]

나중에 온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조금 늘었군. 하지만 저 청년이 더 대단해. 나이도 젊어보이는데 완전히 압도하고 있어. 진양은 보검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야. 저 보검만 아니라면 벌써 끝장났을 걸?]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노대! 조금 이상합니다. 진양진인의 검술이 싸우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군요. 저 정도라면 저도 백초를 넘기기 힘들 것 같은데요.]

세 사람은 절벽 중간의 입구로 들어왔던 천산삼로였다.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은 여우굴처럼 여러 개의 굴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노대가 이를 부드득 갈며 욕을 했다.

[빌어먹을 도사놈! 검술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노이!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나도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구만.]

노삼이 물었다.

[노대! 검술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뭐요?]

노대가 말했다.

[썩어빠질 놈아! 너는 사부한테 들은 말은 전부 똥통에 쳐박아버렸냐? 말 그대로 검술이 몸속에 스며들어 사람이 검이 되고 그 사람의 움직임이 바로 검술이 되는 그런 걸 말하잖나. 어떤 검술이 위력이 아니고 수법으로서는 최고에 달한 거야. 소위 검신(劍神)이 된 거지.]

현천록은 꼼짝없이 진양진인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습과 목소리가 똑같을 뿐 아니라 태극혜검까지 썼으니 아무리 자기가 아니라고 해도 알아줄 리가 없을 것 같다.

함께 싸우고 있는 장군묵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현천록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장군묵은 진양진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살수를 써야할 때도 상처만 입히는 가벼운 수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현천록의 짐작은 틀림없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똑같은 검술로 상대하는 현천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 수 없다.

잠시는 재롱삼아 봐줄지 모르지만 마침내는 장군묵이 손을 크게 쓰고 말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장군묵에게 잡힌다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고 자기도 알고 싶어하지만 모르는 사실을 말하라고 강박당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현천록은 진짜 진양진인이 되어 도망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진양진인이 되어 도망치려면, 현천록은 진양진인이 자기를 속였듯이 장군묵을 속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더 이상 저항은 하지 말아야 한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장군묵의 검을 억지로 막고는 검을 떨어뜨려 버렸다.

피웃!

장군묵의 검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목에 쌍검을 가위처럼 교차시켜 걸쳤다.

조금만 힘을 주면 현천록의 늙은(?) 목은 순식간에 잘려질 판이다.

현천록이 저절로 나오는 진양진인의 음성으로 말했다.

[일곱째! 내가 졌소. 하지만 당신도 졌소.]

투투투툭!

장군묵이 장검으로 현천록의 몸에 여섯 군데 혈도를 찍었다. 그는 이번에야 말로 단단히 작정한 한 것 같았다.

[보검인데.]

천산삼로 중의 노삼이 현천록이 떨어뜨린 진양진인의 보검을 줏어들며 말했다.

노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금석을 두부자르듯 하는 신검이야. 어지간한 보검은 무베듯이 베어버릴거야.]

노대는 장군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당파의 진산지보인 진무검(眞武劍)이다. 그나저나 자네는 태극혜검을 정말 잘 쓰는군. 젊은 나이에 아주 대단하네.]

장군묵은 피식 웃었다.

노대가 말했다.

[사실 난 진양진인을 혼자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무림엔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아주 뜻밖이야. 자넨 누군가?]

장군묵이 차갑게 말했다.

[꺼져라! 네 사부 천산일괴(天山一怪)와 안면만 없었다면 그냥 죽였을 거다.]

노삼이 나서며 말했다.

[그건 우리 보고 한 소리겠지?]

노이가 물었다.

[우리 사부를 알고 있나? 죽은지 백년도 더 됐는데.]

노삼이 말했다.

[미친 소리요. 젊은 놈이 어떻게 사부를 알아.]

장군묵이 현천록을 한손으로 들어올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나는 젊었지. 늙지는 않았어. 세상에 있을 땐 진양의 사부의 사부의 사부가 나한테 사형이라고 불렀지.]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노삼과 노이가 미친 것처럼 웃으며 미친놈을 보듯이 장군묵을 본다.

하지만 노대는 장군묵에게 보통 사람과 다른 뭔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진양! 그 사람 말이 정말인가?]

현천록은 동동 매달린 채 말했다.

[정말이오.]

!

노삼과 노이가 웃음을 멈췄다.

장군묵이 현천록에게 말했다.

[도장! 이제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잠깐!]

노대가 돌아서는 장군묵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자네가 진양의 태사숙조가 된다면 왜 진양에게 호칭을 그렇게 하는가?]

장군묵이 언찮은 표정을 지었다.

현천록이 재빨리 말했다.

[이분께선 이미 본파를 떠나셨소. 그래서 나를 대할 때도 본파의 어른으로서 나를 대하는 게 아니라 남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대하는 것이오.]

장군묵이 뜻밖인 듯 현천록을 힐끗 본다.

현천록은 빙그레 웃었다.

웃어야할 상황인지는 판단이 쓰지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 웃음은 꼭 자기가 잘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노삼이 나서며 말했다.

[그대가 옛날 도사였는지 지금도 도사였는지는 알바 없소. 우린 진양에게 물건을 얻으려고 왔는데 당신이 진양을 그냥 데려간다면 곤란하지 않겠소.]

현천록이 또 말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요?]

노삼이 말했다.

[우린 천산에서 몇 달이나 걸려서 왔는데 헛걸음질치고 돌아가면 최소한 일년은 허송세월하는 셈이오. 우리 나이는 적지 않아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일년은 적은 시간이 아니지.]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을 보상받고 싶으면 그 검을 가지시오.]

노삼이 말했다.

[아니! 아니! 진양! 나는 검을 쓰지 않으니 필요가 없소. 또 가진다 해도 노이에게 주는게 최선이오. 우리 중에서 오직 노이만이 검을 쓰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검을 돌려줄테니 당신이 갖고 있는 옥황빙서를 우리한테 주시오.]

하하하하!

현천록은 그렇게 웃었지만 허허거리는 소리가 되어 나왔다.

노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웃는가?]

장군묵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천산삼로도 입을 다물었고 현천록도 입을 다물었다.

장군묵이 손을 이상하게 한 번 썼다.

[어어!]

그의 앞을 막았던 노삼이 둥실 떠올라 동굴 벽에 부딪혔다.

장군묵이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도 보지 못했다.

[멈추시오!]

노대가 소리쳤다.

하지만 장군묵은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불가사의에 가까운 신법이었다.

노삼이 욕을 했다.

[빌어먹을 작자! 감히 나를 집어던지다니. 똥통에나 빠져버려라.]

노이도 사라지고 없었다.

노대가 큰소리로 불렀다.

[노이! 돌아와라! 그를 따라갈 순 없다.]

휘이이익!

노이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노대 앞으로 날아왔다. 그는 장군묵이 신법을 펼칠 때 함께 신법을 펼쳐 뒤쫓았던 것이다.

노대는 어둠 속에 대고 물었다.

[여기에 들어온 놈은 모두 몇이냐?]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우리 일행은 칠십 명이 들어왔소. 하지만 다 죽고 지금은 여기있는 네 명만 남은 것 같소.]

노대가 말했다.

[네 놈들도 옥황빙서를 노리고 왔느냐?]

신궁 오무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명령을 받고 왔을 뿐이오. 진양진인을 찾으라는.]

노삼이 코웃음을 쳤다.

[노대, 저놈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오. 진양진인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찾는데 칠십 명씩이나 동굴에 집어넣을 바보 멍청이가 있겠소?]

노대가 말했다.

[네놈들의 이름은 뭐냐?]

네 사람이 각기 대답했다.

[활을 좀 쏜다고 해서 신궁이라 불러주는 오무한이오.]

[금전표(金錢鏢) 곽기(郭基).]

[수리전(袖裏箭) 형가운(衡駕雲)이오.]

[철연화(鐵蓮花) 마춘보(馬春寶).]

노이가 말했다.

[노대! 모두 질 좋는 놈들이 아니오. 암기나부랑이나 쓰는 녀석들이오. 모두 죽여버립시다.]

금전표 곽기와 수리전 형가운, 그리고 철연화 마춘보가 찬바람을 들이켰다.

자기들이 무슨 수를 써도 괴상한 세 노인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을 때 신궁 오무한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리가 죽기를 원한다면 세 분이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소. 우린 그냥 둬도 여기서 죽게 될거요.]

노삼이 말했다.

[무슨 소리냐? 우리가 죽이지 않아도 죽는단 말이냐?]

오무한이 말했다.

[이미 동굴 입구는 다 무너졌소. 여기서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노삼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그 때문에 네놈들이 죽는다면 우리도 그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냐?]

오무한이 말했다.

[기주는 이미 동굴을 무너뜨렸소. 혹시 뚫고 나간다고 해도 기주 손에 죽고 말것이오. 당신들은 우리 때문에 죽게 된 피해자요.]

노대가 물었다.

[기주란 놈은 또 뭐냐?]

오무한이 말했다.

철연화 마춘보가 말했다.

[기주는... 기주요.]

노삼이 고함쳤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금전표 곽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걸 어떡하겠소?]

노대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나머지는 여기를 나간 후에 알아보도록 하지.]

노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노대! 무슨 냄새를 맡았소?]

노대가 손을 저어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따라와. 이 동굴은 간단치 않아.]

노이와 노삼은 물론이고 신궁 오무한과 금전표 일행도 노대의 뒤에 따라붙었다.

노삼은 자꾸만 오무한과 금전표 등을 죽여버리고 싶은지 힐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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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함정에 빠지다!

 

 

 

부악!

막고천은 이번 기회에 후환을 없앨 작정을 하고 전력을 기울여 장력을 날렸다. 그 기세는 처음의 일장 보다 배는 더 강력하고 악독했다.

[!]

그러나 막고천의 이번 공격은 막비강이 팔보간섬의 경신술로 슬쩍 피하는 바람에 헛것이 되고 말았다.

[불효막심한 놈! 빨리 꿇어앉아 죽음을 받아라!]

화가 치민 막고천은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막비강을 덮쳐왔다.

화락!

하지만 막비강은 그 순간 몸을 날려 명륜당 밖으로 내려섰다.

[막 노적! 자신 있으면 밖으로 나와라. 오늘 내 손으로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뜰에 내려선 막비강이 막고천에게 삿대질을 할 때였다.

[! 날뛰지 마라!]

[호로자식이 어디서 감히...!]

휘휙! 화락!

막고천 대신 두 개의 인영이 동시에 날아 나왔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막고천 옆에 앉아 있던 고희의 노인들이었다.

두 노인 중 동홍선생(冬烘先生;서당 훈장)처럼 생긴 자가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너 같은 불효막심한 자식은 노부가 대신 벌을 주어야겠다.]

막비강은 이 노인이 막고천을 능가하는 고수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거만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요?]

동홍선생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피를 섞어 시험했으니 친혈육임이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계속 난동을 부리는 네놈은 금수나 다름없다. 예로부터 금수같은 인간은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법! 노부가 오늘 장주를 대신하여 네놈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

막비강은 냉소하며 말했다.

[! 당신은 나잇살이나 쳐먹어 놓고도 방금 전의 그 혼혈친인에 거짓 수작이 숨겨져 있음도 못 알아보시오?]

그때 중인들을 이끌고 명륜당에서 달려나오던 막고천이 그 말을 듣고 고함을 질렀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다 똑똑히 보았는데 무슨 거짓 수작이 숨겨져 있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뜨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았으니 나와 피가 혼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는 절대 너 같은 악적의 자식이 아니다. 자신이 있으면 나와 단독으로 혼혈친인을 해보자.]

막고천은 막비강이 단독으로 시험해 보자는 제의를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당황했다. 대답이 궁색해진 그는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질렀다.

[아비를 악적이라 욕하는 죄만으로 죽어 마땅한데 또 무엇을 시험하잔 말이냐?]

막고천은 분노하며 또 다시 막비강에게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비강은 미리 방비하고 있었던 터라 가볍게 피해냈다.

[어머니!]

막비강은 막고천을 상대하지 않고 다른 여인들과 명륜당 입구까지 나와있는 어머니 한경파 곁으로 날아갔다.

[이제 저 악적에게 시달리실 필요 없습니다! 소자와 함께 여길 떠납시다.]

막비강은 팔을 뻗혀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한경파는 슬픈 표정으로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 너나 빨리 여길 떠나거라 강아!]

[죽일 놈!]

! 퍼엉!

그 사이에 막고천이 다시 쫓아와 연달아 장력을 쳐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이 팔보간섬을 전개하자 막고천은 이번에도 그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공격을 피하며 냉랭히 웃었다.

[나는 네놈을 일장에 격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상을 먼저 알고 싶어 손을 쓰지 않을 뿐이니 분수를 알고 멈춰라!]

막비강의 조롱에 막고천은 대로하여 고함을 질렀다.

[짐승보다 못한 놈! 나를 아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 부친이 누구란 말이냐?]

[그건 내가 네게 묻고 싶은 말이다.]

이때 막고천의 장남인 막불계가 덮쳐 오며 외쳤다.

[둘째! 너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독할 테냐?]

막비강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막불계에게 수없이 괄시를 받고 매도 맞았다. 자연히 그는 지난날의 울분이 일시에 치밀어 냉랭히 대꾸했다.

[막불계! 네 모친도 이 악적이 남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겁탈했을 텐데 뭐가 고맙다고 두둔하느냐?]

막불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무엄한 놈 같으니...! 뭐가 어쩌고 어째?]

!

막불계는 악에 바쳐 일장을 후려쳤다.

[! 그런 실력으로 내게 덤비다니!]

하지만 막비강은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그의 손목을 움켜잡아 던져 버렸다.

[어헉!]

막불계의 몸은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막불계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혈검산장의 가전비학을 모두 연마했고 또 흑도의 거물들인 십악구흉, 칠열팔준들로부터 사사받아 젊은 층에선 제일인자라 불렸다.

그런 그가 미처 일초도 버티지 못하고 내 팽개쳐지자 중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막고천의 아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십대 후반의 중년부인이 눈에서 살기를 발산하며 한경파에게 노성을 질렀다.

[셋째 동서! 자네가 이 불효막심한 자식 놈을 따끔하게 벌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치도곤을 내리겠다.]

이 여인이 바로 막고천의 정실(正室)인 당숙경(唐淑瓊)이다.

막불계와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보통 여인들보다 체격이 큰 데다 상당히 살이 쪄서 몸매가 아주 당당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피부도 깨끗하고 이목구비도 뚜렷하여 여전히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기승스러워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혈검산장에서 막비강을 가장 못 살게 괴롭힌 사람이 다름 아닌 당숙경이다. 막비강이 자신의 다섯 시앗들이 낳은 아이들 중 유일한 아들인 탓인지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를 못 살게 굴었었다.

막비강은 그런 당숙경이 자신의 어머니 한경파를 윽박지르자 분노하여 이를 부득 갈았다.

[네가 날 어쩌겠다는 거냐 이 살찐 돼지야?]

[, 뭐야? 돼지?]

당숙경은 평소에도 자신이 다른 시앗들보다 살이 많이 찐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오고 있었다. 당연히 살찐 돼지라는 막비강의 욕은 그녀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그 주둥이! 찢어버리겠다!]

당숙경이 악을 쓰며 막비강을 덮쳐왔다. 서패천 혈검산장의 안주인답게 그녀의 무공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래봤자 막고천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막비강의 상대가 될 까닭이 없다.

[꺼져!]

막비강은 당숙경이 덮쳐들자마자 그녀의 하얀 손목을 잡아채 마당에 던져 버렸다.

[아이쿠!]

당숙경의 피둥피둥 살이 찐 몸뚱이가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마당에 널부러졌다.

당숙경은 여러 바퀴 뒹구는 바람에 치마가 허리 위로 걷혀 올라가버렸다. 그 바람에 투실투실 살이 오른 중년여인의 허연 아랫도리가 그대로 드러나버렸다.

유달리 육덕이 좋은 그녀인지라 허벅지 하나가 한 아름이 넘어보인다. 그러면서도 그 우람한 허벅지들은 처녀같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숙경은 발라당 나자빠지는 바람에 가랑이를 벌린 자세로 넘어졌는데 흐드러진 허벅지 사이에는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살이 두둑히 오른 둔덕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살진 두덩이를 가린 작은 고의는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본의 아니게 당숙경의 사타구니를 본 막비강은 민망하여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부친을 모독하고 형을 때렸으며 부친의 정실을 욕보였으니 막비강은 이제 패륜무도라는 오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저 놈을 잡아라!]

[이놈! 어디서 패악질이냐?]

막비강이 형인 막불계에 이어 큰 어머니인 당숙경마저 능멸하는 것을 본 혈검산장의 무리들이 분노하며 일제히 막비강을 덮쳐왔다.

[강아!]

십악구흉, 칠열팔준등이 분노하여 사방에서 아들을 덮쳐가는 것을 본 한경파가 비명을 질렀다. 육요 칠절에 버금가는 고수 삼십여명으로부터 합공을 받는 아들이 당장이라도 피곤죽이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한경파가 우려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리 삼십 명이 넘는 고수가 공격한다 해도 일시에 막비강에게 들이닥칠 수 있는 인원은 너댓명 밖에 안된다.

그리고 막비강은 이미 육요 칠절정도의 고수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절정고수가 되어있었다. 육요 칠절이 아니라 천하오기라도 지금의 막비강에게는 몇 초 견디지 못할 정도다.

[꺼져라!]

막비강은 사납게 외치며 쌍장을 후려쳤다. 그의 이 일장은 염라철장 곡강의 염라장법이다. 당연히 혈검산장의 악도들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무공이다.

하지만 막비강이 펼친 지금의 염라장법에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치우강기가 실려 있었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치우강기가 가미된 염라장법의 위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퍼펑! 꽈르릉!

[케엑!]

[크악!]

무쇠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처참한 비명이 일시에 터졌다.

치우강기에 정면으로 가격당한 혈검산장의 고수 다섯 명이 가슴과 머리통이 으깨져 즉사했다. 요행히 정면으로 얻어맞지 않은 자들도 치우강기가 실린 염라장법의 장풍이 스치는 순간 내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허억!]

[, 저럴 수가!]

십악구흉, 칠열팔준중 단 번에 다섯 명이 즉사하고 일곱명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자 장내는 공포와 전율이 휩쓸었다. 이같은 결과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막비강도 일시 넋이 나갔다. 그는 막불계나 당숙경 모자를 상대할 때는 그래도 차마 살수를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막고천의 수하들이 떼로 덮쳐오자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치밀어 치우강기를 발휘하였다.

헌데 불과 삼성의 치우강기를 염라장법에 가미했을 뿐인데도 단번에 다섯 명의 절정고수를 죽이고 일곱명을 부상 입혔다. 이것은 막비강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막비강으로서도 최초의 살인이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인 것이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보다는 치우강기의 가공할 파괴력이 그를 더욱 전율하게 만들었다. 청구단서가 왜 천하제일의 비급이고 청구상인이 어째서 무성(武聖)이라 불리는지 이 일장으로 증명된 것이다.

헌데 막비강이 스스로 벌인 살육에 넋이 나가 있을 때였다.

[이 짐승같은 놈!]

[죽어라!]

동홍선생과 또 다른 한 노인이 살기 어린 고함을 지르며 동시에 막비강을 공격해왔다. 과연 그자들은 육요 칠절을 능가하는 고수라 장풍이 닿기도 전에 숨 막히는 압력이 밀려온다.

넋을 놓고 있던 막비강은 움찔하면서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퍼펑! 콰쾅!

그 바람에 빗나간 두 노인의 장력이 지면을 강타하여 깊은 구덩이 두 개를 만들었다. 일장을 날려 깊이 석자에 폭이 일장 가까운 구덩이를 만든 두 노인의 공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자들이다!)

막비강은 두 노인이 오봉도인이나 우주도철에 그리 뒤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들임을 알고 내심 긴장했다.

[흐흐흐! 그동안 막장주로부터 후대를 받은 값을 해야겠군!]

[낄낄! 청구단서의 무공이 결코 절대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마!]

두 노인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좌우에서 막비강에게 다가왔다.

막비강도 이번에는 방심하지 못하고 양 손에 치우강기를 운집시켰다. 그때였다.

[, 그만 두세요!]

문득 겁에 질려 물러선 사람들을 헤치고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달려나왔다.

[() 노선배님! () 노선배님! 천첩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 아이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달려 나온 날렵한 인영이 두 노인을 가로 막으며 애원했다. 뜻 밖에도 그 여인은 막고천의 다섯 번째 부인인 냉상영이었다.

냉상영이 가로 막자 두 노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들을 식객으로 맞아준 막고천의 첩인 것이다.

헌데 그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천한 계집!]

지켜보던 막고천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냉상영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

막고천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허리를 걷어채인 냉상영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머니!]

보고 있던 냉상영의 딸 막영란이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넘어진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허리가 걷어채여 스러진 냉상영은 충격이 컸는지 운신을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린다.

[이 간악한 악적!]

이 광경을 본 막비강은 대로하였다.

꽈릉!

그는 분노한 나머지 일장에 치우강기를 실어 막고천을 후려쳤다.

[으악!]

다음 순간 막고천은 외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런 그자의 왼쪽 다리가 치우강기에 맞아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

[장주님!]

십악구흉등 살아남은 자들은 경악성을 지르며 막고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막고천의 혈도를 찍어 지혈해 준 다음 들쳐업고 후원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홍선생과 또 한 노인은 막고천 옆에 서 있었지만 막비강의 출수가 너무도 쾌첩한 탓에 미처 막아볼 엄두도 못냈다.

[이 개잡종!]

[죽어라!]

다음 순간 두 노인은 분노의 폭갈을 터트리며 막비강을 덮쳐왔다. 과연 이 노인들의 공력은 심후하기 이를 데 없어 그들이 일단 공세를 발동하자 막비강은 숨이 콱 막히는 압력을 느꼈다.

막비강은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두 절세고수의 합공을 받자 경시할 수 없어 치우강기를 최대한 끌어내 마주 장력을 후려쳤다.

! 꽈다다당!

쌍방의 장력이 맞닥뜨리는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난무하고 바닥에 깊이가 다섯 자가 넘는 구덩이가 움푹 파였다.

[!]

[크억!]

흩날리는 폭음 속에서 세 마디의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막비강은 기혈이 요동쳐서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반면 두 노인은 피분수를 뿌리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두 노인은 치우강기에 진탕되어 내장이 위치를 바꾸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 가세!]

[, 괴물같은 놈!]

겨우 바닥에 내려선 두 노인은 사색이 되어 몸을 날렸다. 단 일합의 격돌이었지만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자신들조차도 막비강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이다.

막비강이 들끓는 기혈을 갈아앉혔을 때 명륜당 앞 마당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에 맞아 죽은 다섯 구의 시신만이 널려있을 뿐이었다.

혈검산장의 무리들은 막비강이 십악구흉등을 일장에 다섯 명이나 격살하고 막고천이 삼고초려하여 초빙한 두 명의 전대 기인조차도 간단히 패퇴시키자 공포에 질려 뿔불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그제서야 막고천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어머니 한경파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혈검산장의 무리들은 달아나면서 한경파와 냉상영등 여자들도 함게 끌고 사라진 것이다.

[막가야! 숨어도 소용없다!]

막비강은 사나운 고함과 함께 몸을 뽑아 올려 막고천 일행이 사라진 후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단 생모 한경파를 막고천의 마수에서 구해내 혈검산장을 떠날 작정을 했다. 생모에게 상세한 내막을 물은 다음 부친 염라철장의 피맺힌 원한을 갚을 심산이었다.

 

* * *

 

(모두 어디로 사라졌지?)

헌데 후원에 들어선 막비강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짧은 사이에 막고천뿐만 아니라 생모를 비롯한 막고천의 처첩들도 모두 사라져 버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주위에 내가 모르는 은밀한 밀실이 있구나!)

막비강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기다!)

이내 막비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한쪽 옆의 담벼락 밑에 몇 방울의 핏자국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콰쾅!

막비강은 즉시 그 담장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담장이 왈칵 무너지며 과연 그 뒤쪽에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 이젠 독 안에 든 쥐다! 막가 노적아!]

막비강은 온몸으로 살기를 토해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곧 끝나고 한 칸의 밀실이 나타났다.

하지만 다른 출구가 없는 그 밀실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밀로가 있는 것일까?)

막비강은 갸웃하며 사방의 벽을 두드려 보았다.

텅텅!

헌데 벽을 두드리자 둔중한 금속성이 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방이로군! 사방 벽이 철벽(鐵壁)이라니...! 만일 누가 이 안에 들어왔을 때 문을 봉쇄해 버린다면 꼼짝없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막비강은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함정(陷穽)?)

막비강은 질겁하며 다급히 밀실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한걸음 늦고 말았다.

쿠쿠쿵!

돌연 육중한 굉음과 함께 입구가 다섯 치 두께의 철문으로 막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야앗!]

막비강은 사색이 되어 맹렬히 장풍을 날렸다.

꽈릉!

하지만 굉음과 함께 먼지가 우수수 떨어질 뿐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런!]

막비강은 비로소 자신이 막고천이 판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고 신음했다. 그때였다.

[크크크! 꼴좋구나, 망나니 녀석!]

어디선가 악에 받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막고천이었다.

막비강은 분노하여 외쳤다.

[이 악적!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당당히 나서라!]

[흐흐! 네놈은 죽어 마땅한 패륜아다! 그 안에서 아사 직전이 되면 꺼내 주마!]

[닥쳐라!]

콰르르릉!

막비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맹렬히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철실 전체가 무너질 듯이 진동하며 요동을 쳤지만 벽은 깨어지지 않았다.

[크크크! 발악해 봐야 소용없다! 그 방은 사면이 한철(寒鐵)로 주조되어 만 근의 화약으로도 깨뜨릴 수가...!]

꽈르르릉!

막고천의 득의에 찬 음성은 다음 순간 요란한 폭음에 묻혀 버렸다. 막비강이 이번에는 치우강기를 최대한 일으켜 철문을 후려친 것이다.

우두둑!

그러자 굉음과 함께 철문의 중앙이 움푹 우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십여 번만 더 치면 무너뜨릴 수 있다!)

막비강은 새삼 치우강기의 위력에 놀라며 재차 장력을 날렸다.

콰드득!

이번에는 좀더 큰 폭음이 터지며 문의 형상이 이지러졌다.

[... 괴물 같은 놈!]

어디선가 지켜보던 막고천의 음성이 공포로 물들었다.

[독무! 독무(毒霧)를 안쪽으로 내뿜어라!]

푸스스스! 쉬익!

막고천의 두려움에 질린 일갈에 이어 철실의 사방 모서리에서 자욱한 운무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천오주를 지닌 탓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헛수고라는 걸 알려 주마! 곧 나가서 죽여 주마!]

꽈르릉!

막비강은 독무는 무시하고 다시 철문을 부수는 데 전념했다.

[으으으! 만독불침이란 말이냐? ... 가자!]

겁에 질린 막고천의 음성이 급히 멀어졌다. 독도 무서워하지 않는 막비강의 모습에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으하하하! 지옥 밑구멍이라도 널 숨겨 두지 못한다!]

! 콰쾅!

막비강은 살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연신 장력을 후려쳤다.

헌데 그때였다.

(허억!)

막비강은 돌연 부르르르 몸을 떨었다. 갑자기 아랫배 깊은 곳에서 무서운 열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 아차! 이놈이 다급한 김에 최음제(催淫劑)도 독무에 섞어 흘려보냈구나!)

막비강이 대경실색하여 호흡을 멈추었으나 이미 늦었다. 방심하는 사이 다량의 최음제를 들이마신 그의 전신은 삽시에 불덩이처럼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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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동쪽 절벽은 아주 높고 컸다.

이매봉은 한시간이나 벽호공(壁虎功)을 펼쳐 절벽을 탄 후에야 천산삼로의 노이가 말한 그 동굴로 짐작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매향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괜한 짓을 했군. 녀석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한가하게 그녀석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는데...]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매봉은 동굴 입구의 바위턱에 걸터앉았다.

파란 하늘 아래 먹이를 찾아 날고 있는 매 한 쌍이 보인다.

눈에 덮힌 산등성이 주름진 여름 이불자락같고,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눈으로 치장하고도 푸른 가시창날같다.

바람은 절벽을 만나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한 참 올라와버린 해는 겨울날의 미미한 자기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말해준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텅빈 속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밤에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천산삼로 중 둘째의 말 한마디에 이곳까지 와본 자기가 한심하기도 했다.

어쩌면 벌써 현천록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괘심한 마음이 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욱 같이 있게 될 것같은 기분이었는데, 단지 몇 시간 만이 주욱이란 기분인가 싶다.

이매봉은 품에서 물소뿔 모양의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

 

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매봉이 다시 한 번 나팔을 불었을 때 절벽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까마귀처럼 깃털은 새까맣고 매처럼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으며 머리는 닭과 비슷했다.

괴조(怪鳥)는 이매봉을 발견하고 동굴 앞으로 천천히 미끌어지듯이 내려왔다.

이매봉은 훌쩍 날아 괴조의 등에 올라 목 뒤의 깃털 속에 몸을 묻었다.

깃털 하나가 파초잎 만하다.

괴조의 체온이 이매봉의 몸을 훈훈하게 한다.

이매봉은 괴조의 등을 두드려주듯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서안(西安)으로 가자.]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금산 정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는 괴조를 힐끗 본 후에 절벽으로 뛰어내려왔다.

수 십장의 절벽을 떨어져 내리던 그 사람의 몸은 마치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둥실 멈추더니 동굴에 내려섰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포두화상이었다.

나한상처럼 둥글고 납작한 얼굴에는 해픈 웃음이 걸려있지만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포두화상은 동굴 입구를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의 새 환우마조(寰宇魔鳥)가 나타났다는 건 환우회의 회주가 왔었다는 이야기인데... 환우회마저 옥황빙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포두화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환우회의 회주가 여기에 왔었다면 이 화상도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지.]

포두화상의 몸이 구름을 밟는 듯 기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후,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치달려 올라와 동굴로 들어갔다.

비슷하게 생긴 천산삼로였다.

 

***

 

현천록은 생각했다.

(동굴을 되돌아 간다면 입구가 막혔으니 뚫고 나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우같은 진양진인이 여기서 사라졌으니 그곳 말고도 출구는 있다. 물이 흐르고 있으니 물을 거슬러간다면 장강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이 동굴은 지하세계처럼 넓고 거대하니까 또 다른 출구도 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막힌 곳을 뚫고 나가고 그 전에는 다른데를 찾아보자.)

암흑 속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현천록은 들어온 곳과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체중이 없는 그의 몸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흘렀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굴 속 바람을 따라 얼마동안 갔을 때, 앞이 점점 밝아졌다.

그가 가는 앞쪽 어딘가에 불이 있었다.

일렁이는 것으로 봐서 횃불인 것 같았다.

현천록은 그와 진양진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출구가 또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현천록은 불을 향해서 다가갔다.

한데, 불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백개도 넘을 것같은 횃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두런 거리며 주고 받는 말소리도 들린다.

[난 이번일만 끝내고 나면 정말 무림을 떠날 생각이네.]

[뭘 할 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살겠어.]

[! 신궁(神弓) 오무한(吳武漢)이 사냥도 아니고 농사를 짓겠다고?]

나직한 탄식이 섞인 소리로 먼저 말한 자가 말했다.

[더 이상 죽이기가 지겨워졌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냥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기르고 보살피는...]

[한심한 소릴 하는군. 이십년 동안 자네 활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와서 그런 소린가? 우리한테 다른 길은 없네. 그냥 살아왔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옳은 이야기야. 지금 다르게 살아봤자 아무도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아.]

신궁 오무한이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심한 소리라는 건 아네. 하지만 이제 죽이고 빼앗는 건 너무 질렸어. 누구의 용서를 바라거나 동정을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라네.]

끼어든 목소리가 코웃음을 쳤다.

[답답한 소리군. 자네 활이 정말 신궁인지 의심이 다가는군. 자네는 가만히 숨어살고 싶겠지만 자네 원수들도 그냥있을까? 아마 끝까지 찾아가서 죽이려 들걸세.]

[난 이번 일로 패혼기(覇魂旗)에 진 빛을 다 갚게 되네. 살아난다면 말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고 싶네.]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기주(旗主)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비록 여기엔 패혼기에 얽매인 사람들만 들어왔다 하지만 조심하는게 좋을걸세.]

[이렇게 큰 동굴에 그자가 숨었다면 스스로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거네. 어쩌면 기주에겐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로 그때였다.

쿠쿵!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동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굉음이 동굴 속의 두런거리던 소리들을 모두 삼켜버린 듯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구 쪽이다!]

누군가가 소리치며 횃불을 팽개치고 달려갔다.

가지런히 움직이던 횃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어떤 것은 몰려들고 어떤 것들은 멀어져갔다.

하지만 대체로 횃불들은 현천록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엔 다른 쪽이었다.

현천록은 근처에 떨어진 횃불을 하나 집어들었다.

입구 쪽으로 달려가지 않고 머뭇거리던 불빛은 겨우 두세개 밖에 없었다.

현천록도 횃불을 들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동굴속이라 불이 있어도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치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가... 기주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하고 있어. 동굴 속에 생매장하려고... 나쁜 노옴!]

다른 사람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틀렸어. 기주는 우리가 다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자야. 우릴 죽이려 마음 먹은 이상 다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우린 모두 칠십명이다. 각기 지닌 재주가 다르니까 어쩌면 다른 출구를 찾아 나갈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네. 다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

신궁 오무한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기주가 온 산을 다뒤져 진양진인을 찾으라고 한 것도 결국 우릴 여기에 들여보내 죽이려고 꾸민 일이란 말인가?]

[현무호에서 죽은 사람만해도 삼백 명이 넘네.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우리처럼 패혼기에 복종하고 왔을 걸세.]

오무한의 목소리는 아주 침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을 뚫고 나갈 수는 없을까?]

바로 그때 아주 길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그곳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그처럼 처절한 비명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시작이었다.

연이어 지옥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비명들이 공포가 되어 동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휘익! 픽픽!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자기들의 횃불을 꺼버리는 것을 보면서 현천록도 양의신공을 입으로 불어내 꺼버렸다.

[저렇게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기주뿐이다.]

다른 사람도 말했다.

하지만 모두 혼란에 빠져버렸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있다면 대체 누가 입구를 파괴했단 말인가?

모두 호흡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비명에 이어서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까지는 정말 찰라지간이었다.

꺼지지 않은 횃불들 중 어떤 것은 시체위에 떨어져 살을 태우는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그 불빛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양 손에 각기 하나씩의 검을 들었으며 검날을 타고 피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현천록은 입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장군묵이었다.

두 손에 낭아봉 대신 검을 들었지만 틀림없는 장군묵이었다.

장군묵의 눈은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군묵은 검으로 현천록을 가리켰다.

밝은 곳에서도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신궁 오무한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기주가 아니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들을 살해했는가?]

장군묵이 씨익 웃었다.

젊은이란 말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전음으로 오무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기주는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고술세. 움직일 때는 함께 하세.]

전음은 현천록의 귀에도 들렸다.

장군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 세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물러섰다. 장군묵이 그들 앞 세자 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때문이다.

쉬이이이익!

검광이 어둠을 양단했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들은 폭포수같은 검광 앞에서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바로 앞에 있을 때는 압도당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치지지직! !

 

찬물에 달군 쇠를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가 오무한과 동료들을 깨웠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혔다가 미끌어지며 파란 불꽃을 튕겼다.

[후후후... 이번에도 태극혜검인가? 내가 낭아봉대신 검을 들었을 때는 당신한테 검술을 한 수 가르치려는 뜻이 있다는 걸 알았을텐데...]

장군묵이 쌍검 중 하나는 등 뒤로 돌리고 하나는 앞에 세우며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가 진양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혈을 제압해놓은 것은 금방 풀렸었지만 모습을 바꾼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군묵이 믿고 안 믿고는 차후에 생각해볼 일이고 일단 말부터 꺼냈다.

[일곱째! 진양진인은 벌써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장군묵이 어리둥절했고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장군묵은 자기가 일곱째라는 걸 진양진인이 어떻게 아는가 싶어서 였고, 현천록은 아혈이 풀렸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늙수구레한 진양진인의 목소리가 나와서였다.

붉으스름한 장군묵의 눈이 현천록을 노려보았다. 안개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의 뒤에 섰던 네 사람은 본능적인 공포에 비칠비칠 물러섰다.

장군묵이 말했다.

[역시 당신은 뭔가 있어. 후후후... 그 이상한 행동에 이어... 내가 일곱째라는 것을 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인가?]

현천록은 당황했다. 이러다간 정말 진양진인의 의도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났구나! 이사람은 나를 정말 진양진인으로 단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않겠구나.)

항상 여유를 갖고 즐겁게 지내려는 그의 정신상태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마음 속을 기쁨이 아닌 다른 침울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뒤에서 신궁 오무한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진양진인이오?]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거냐? 개똥같은 도사놈아!]

먼저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네놈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는다.]

현천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 설상가상이구나! 한 사람도 모자라서 두 명 세명이 이 가짜 진양진인한테 볼일을 보려하다니.)

그의 머리가 아주 오랜만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여차했다간 정말 재수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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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진양진인이 말했다.

[가장 뛰어난 검법인 태극혜검이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입문할 엄두도 못내는 절학이지. 할 수 있겠느냐?]

현천록이 말했다.

[동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구결을 외우게. 구결에 따라 내력을 운용하며 펼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내가검법(內家劍法)이 있을 수 없네.]

무당파 최고의 절학이라는 태극혜검의 구결은 두 가지로 천결과 지결로 나뉘어 있었다.

천결(天訣)은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 각 초식마다 양의신공을 따로 운용하는 특이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지결(地訣)은 각 초식이 어떤 상황에서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것이며 그 효능을 분명히 해주는 비결이다.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마음을 두가지로 나누어 사용하지 못하면 천결과 지결 역시 동시에 운용할 수 없고 위력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양의신공에 포함되어 있는 양심공으로 공력을 안팎으로 함께 운용해야 되는 것이니 만큼 태극혜검은 아주 특이하고도 그 위력을 직접 보기 전에는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지도에 따라 태극혜검을 모두 익혔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아주 고팠다.

현천록이 건져올린 물고기를 진양진인이 삼매진화로 구웠다.

현천록은 시쳇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두 가지의 절기를 지닌 고수가 되었고 그를 고수로 변모시킨 진양진인은 오히려 자기가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현천록은 백금퉁소로 검을 대신해서 태극혜검을 연습했고, 그를 보며 진양진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자세에 너무 치중하고 있군. 자세를 잃지는 않아야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어야 하네.]

진양진인은 보검으로 현천록을 가볍게 내질렀다.

태극혜검의 첫 번째 수법인 지일고승(指日高升)이었다.

현천록은 여섯 번째 수법인 고월침강(孤月沈江)을 펼쳐 보검을 걷어냈다.

진양진인은 즉시 수법을 바꾸어 우밀휘진(羽密揮塵)의 맹렬한 수법을 사용했다.

현천록은 비홍횡강(飛鴻橫江)을 써서 진양진인의 머리를 노렸다.

진양진인은 벽죽소영(碧竹掃影)을 사용했다.

지일고승이나 고월침강, 우밀휘진, 비홍횡강, 그리고 벽죽소영에서 볼 수 있듯이 태극혜검의 열 두 초식은 모두 수비와 공격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처음에 열두초식을 펼쳐 초식만으로 일곱 번 현천록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세 번만이 현천록의 초식을 뚫을 수 있었고,

세 번째에는 두 번의 기회를 가졌으며, 세 번째에는 아예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네 번째에 이르자 현천록의 태극혜검은 완벽에 가까워지면 마치 다른 검법처럼 보였다.

전체가 하나의 초식처럼도 사용되고 두 초식이 하나가 되기도 하며 한 초식이 나누어져 세 초식이 되기도 했다.

진양진인은 이런 변화에 깜짝 놀랐다.

현천록을 연습을 통해 단련시킨다는 목적이었을 뿐이었는데 태극혜검을 자기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번쩍 하는 순간에 진양진인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찬바람이 이마에 몰려왔다.

그보다 먼저 현천록의 퉁소가 한치 앞에 멈춰있다.

지일고승! 진양진인이 제일 먼저 펼쳤던 수법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서로가 대결했으나 이미 초상감각을 터득한 두 사람은 보지 않아도 거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심장이 터질 듯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보검을 휘둘러 용도천문(龍到天門)과 한망충소(寒茫沖宵)를 잇달아 펼쳤다.

그러나 현천록의 소경심매(掃徑尋梅)는 말 그대로 길을 헤치고 매화를 찾듯이 용도천문과 한망충소를 뚫고 진양진인의 목젖에 다다랐다.

진양진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왈칵 두려움이 일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족족 자기를 능가해버리는 현천록에게 경이를 넘어 공포까지 느껴 지는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음성을 떨면서 물었다.

[자넨... 자넨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넨 정말 사람이 아닐세.]

현천록이 말했다.

[제게 남이 갖지 못한 재주가 한가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재주인가? 자넨...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진 않았지만 내게 태극혜검을 배웠으니 그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진양진인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말했다.

[사람과 물건을 볼 줄 아는 재주입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적합한지가 즉시 떠오르고 물건을 보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금방 아는 재주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럼 검을 보면 검법이 떠오르고 퉁소를 보면 부는 법이 저절로 떠오른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비슷합니다.]

진양진인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자넨... 생지지자(生知之者)로군! 전생에 아마 절세고수였던 모양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는 없습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현천록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귓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현천록은 서있던 곳에서 두 번이나 굴러서 눅눅한 바위에 떨어졌다.

[생지지자도 강호의 험난함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양의신공을 익혔다 해도 아직 부족한 화후로는 소천성(小天星)의 중수법을 견뎌낼 수가 없네. 무림에선 항상 가까이 있는 자를 경계해야하거늘 다음에 태어나거든 그때는 좀더 현명해지도록 하게.]

현천록은 잠시 충격을 받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구장심조를 익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데 다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진양진인의 말은 그가 신화병기점에 있을 때 여러 무림인들로에게 듣곤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소천성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현천록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진양진인이 그토록 공을 들여 자기를 가르치고 이제와서는 또 왜 해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백 수십 살이나 먹은 신선같은 노인이 하는 짓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안아서 자기가 누웠었던 편평한 장소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자네한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아네. 하지만 노도는 아직 죽을 수 없고 자네는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사람이네. 오히려 자네같은 사람이 마음을 한 번 잘못 먹고 나면 세상을 크게 해치지. 어느 누구도 자네를 막을 수 없을 테니 그 위험이야 오히려 더 크지 않겠나?]

현천록은 겨우 그런 이유로 자기를 해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기를 해치고 나서 진양진인은 일곱째인 장군묵의 손아귀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도 궁금했다.

진양진인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뭘 궁금하게 여겼는지 대충은 짐작하네. 자네를 죽게 만드는 마당에 노도가 뭘 숨기겠는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주겠네. 듣고 말고는 자네 문제일세.]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노도는... 먼곳에서 왔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가고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네. 바로 옥황신전(玉皇神殿)일세.]

현천록은 자기의 얼굴이 진흙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진양진인은 말을 하면서도 특이한 수법으로 현천록의 얼굴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노도가 옥황빙서(玉皇聘書)를 전달하는 옥황사자(玉皇使者)가 된 건 칠십 년 전이네. 그 이후 삼년 마다 한 장씩의 옥황빙서를 각각 주인을 찾아서 전달했네.]

진양진인은 자기의 수염을 떼서 현천록의 얼굴에 심었다.

말 그대로 진흙처럼 물러진 그의 얼굴에 수염을 하나하나 심은 것이다.

[옥황사자가 되어 옥황신전의 무공을 익히고 노도는 새로 눈을 떴었지. 하늘 밖에 존재하는 진정한 하늘에 대해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머리카락마저 하얗게 만들었다.

[노도를 노리는 자들은 생각밖에 많다네. 특히 철인련맹은 유일하게 옥황신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곳이지. 그들은 옥황신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며 항상 노도를 죽이려고 했네. 포두화상 그 도우가 철인련맹에 속해있네. 아마도 내가 옥황빙서를 가졌다는 소문을 낸 것도 철인련맹일 것일세.]

그가 중얼거리며 현천록을 주물럭거리는 동안에 현천록의 모습은 완전히 진양진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피부는 계수나무 껍질처럼 검버섯이 피었고 골격마저 노인의 골격으로 바뀌어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하지만 여러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첫째는 왜 창허진인이 나를 쫓는가 하는 문제고, 둘째는 자네같은 기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나는가 하는 거네. 세상에는 조금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지 귀재(鬼才)는 오히려 해롭다네. 수십년 동안 고수들을 만나고 옥황신전으로 초빙하는 사자의 역할을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모두가 이해될 만한 사람들이었지. 하여간 자네는 죽게 되겠지만 내가 만난 최고의 인재라는 의미에서 옥황빙서를 주겠네. 이걸로 삼년 안에는 어느 누구도 옥황빙서를 얻지 못하게 됐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여벌의 옷을 현천록에게 입혔다.

품에는 옥황빙서와 현천록의 소지품을 넣어주고 옷은 흐르는 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후에 몇 개의 혈도를 찍었다.

현천록은 그 혈도들이 아혈(啞穴)과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누르기만 하면 아무 소리도 입밖에 내지 못하는 혈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퍼퍼퍽!

가슴과 배에 세 번의 장력이 떨어졌다.

기혈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소천성의 장력이었지만 그다지 강하게 친 것 같지는 않았다.

 

현천록은 비로소 진양진인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확연하게 깨달았다.

진짜 진양진인은 가버렸지만 가짜 진양진인은 남아있다.

양의신공과 태극혜검까지 익히고 있는 가짜 진양진인이.

진양진인은 아마도 이런 상태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천록이 어설픈 흉내라도 내다가 일곱째 장군묵에게 죽으면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가르친 건 자기의 내공을 촉발시킬 수 있는 조력자로 만들기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태극혜검을 가르치게 된 것은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익히는데 놀라운 소질을 보였기에 내친 김에 더 완벽하게 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의신공을 그처럼 빠르게 터득하는데 태극혜검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현천록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방법을 썼더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런 할말이 없다.

내기는 이겨야 주장할 수 있으니까.

현천록은 몸을 일으켰다.

늙은이로 변해있었지만 속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마를 만져보니 천잠사로 만든 머리띠가 그대로 있다.

용의주도한 진양진인도 긴장했던지 머리띠를 벗기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초상감각을 발휘해 현천록은 물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있는 자기의 옷을 다시 찾았다.

진양진인은 벌써 멀리 갔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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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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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살성의 귀향

 

 

그날부터 막비강은 칠흑같이 어두운 우혈의 밀실 안에서 청구단서에 수록된 절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치우강기(蚩尤罡氣)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상고시대에 치우(蚩尤)는 황제(黃帝) 헌원씨와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전설 속의 초인이다.

중원에서도 전신(戰神)으로 추앙받는 치우는 동방 청구에서는 상고시대 그들 종족이 모셨던 제왕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강기신공(罡氣神功)에 치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치우강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무적의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무공과 초식에도 쉽게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평범한 무공이라도 이 치우강기가 실리면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한다.

청구절학의 고하(高下)는 바로 치우강기의 화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막비강은 식음도 잊고 신공수련에 몰입했다.

그와 함께 매일 한 뿌리씩의 하수오와 단호 한 병 분량의 영천석유가 사라져 갔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어느 날 문득 공력을 돋우어 보니 전신이 후끈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기를 운용하는 대로 석벽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가 일어났고, 호흡을 할 때마다 몸이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치우강기가 구체적으로 발현(發現)되는 수준인 오성(五成)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막비강은 자기의 공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천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꽈르릉!

그러자 굵은 물기둥이 공중으로 수십 장이나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가 광세절학(曠世絶學)을 연성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이 치우강기를 십 성(十成) 수준까지 올리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성의 치우강기로도 천하무적(天下無敵)은 장담할 수 없어도 충분히 강호를 호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막비강은 청구절학의 수련을 중단하고 출도할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하수오가 사라져 석벽이 드러난 상태였다.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청구단서를 얻은 후 불과 일 년 여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러나 막비강에게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생겼다.

치기가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어느덧 건장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변했으며 무공도 일류 중의 일류고수가 되어 천하오기도 능가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뿌리의 하수오와 마지막 한 모금의 영천석유를 마신 그는 선사(先師) 청구상인의 유명(遺命)에 따라 비급을 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진기를 한 모금 끌어올려 단숨에 우혈 위의 동굴에 올라섰다.

 

* * *

 

막비강은 우혈에서 나온 즉시 경신술을 전개하여 영롱탑이 있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때는 새벽무렵이다. 당연히 영롱탑 근처에도 인적이 없다.

막비강은 조씨부인 일가의 집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지난 일 년 사이 집터에 잡초만 무성해져서 한 층 더 을씨년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조씨부인의 집터에서 서성이며 막비강은 여러 가지 생각을 굴렸다.

(복수를 먼저 할까, 아니면 신세를 먼저 조사할까? 참! 염라철장께서 말씀하신 전포(田袍)라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그러다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나의 무예로 막고천을 격살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직접 혈검산장으로 찾아가자! 막가 악적을 생포하여 심문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전포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지.)

그는 직접 막고천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스악!

결심을 한 막비강은 즉시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유령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었을 무렵, 종남산 자락에 자리한 혈검산장 정문 앞에 한 명의 영준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의 나는 듯한 걸음걸이는 곧장 문을 박차고 뛰어들 것만 같았다.

[멈춰라!]

정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장한이 급히 청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네 명의 장한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청년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본장을 찾아왔느냐?]

청년이 검미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서평(徐平), 너는 어찌 나를 몰라보느냐?]

서평이라 불린 건장한 장한은 어리둥절하여 청년을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보니 둘째 도련님이시군요. 삼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이렇게 건장한 청년이 되셨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서평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곧 정문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그의 고함 소리를 들은 정문 안쪽의 사람들이 황급히 후당(後堂)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다.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통보할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을 만나겠다.]

그러자 서평이 난색을 지었다.

[둘째 도련님, 지금의 본장은 지난날과 크게 달라 어느 누구도 무단히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막비강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럼 장주님이라도 산장을 들고 날 때는 누군가에게 통보를 해야 한단 말이냐?]

막비강의 말에 서평은 말문이 막혀 대꾸를 못했다.

그때 문 안쪽에서 여러 사람이 이리 저리 부산히 움직이더니 몇 사람이 나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자들 중 우두머리는 살이 없는 강팍한 얼굴에 눈빛이 얼음같이 차가운 초로의 장한이었다.

그가 바로 혈검산장의 총관인 혈적수(血滴手) 원인초(元人初)란 인물이다.

원인초는 그 지닌 바 실력이 육요, 칠절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흑도의 거효(巨梟)인데 막고천의 초청을 받아 혈검산장의 총관일을 맡고 있었다.

[이(二)소장주께서 드디어 돌아오셨구려. 신태비범해지신 것을 보니 이미 청구단서상의 절학을 연성하신 모양이외다. 경하드리오!]

혈적수 원인초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공손하게 말하는 원인초를 보는 순간 막비강은 절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삼 년 전 혈검산장을 떠나기 전까지 혈검산장의 수하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막비강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자가 바로 총관인 원인초였기 때문이다.

원인초로부터 받은 온갖 수모와 능멸이 떠오르자 막비강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하지만 막비강은 웃음을 머금으며 마주 포권을 했다.

아직 막고천의 상판도 못 봤는데 그의 졸개인 원인초와 시비를 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총관! 내게 너무 공손하실 필요 없소. 그보다 장주께선 지금 안에 계시오?]

원인초는 얄팍한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이미 통보했으니 장주께선 곧 영접하러 나오실 것이외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만나면 안 되오?]

[소장주는 외인이라 자처하고 부친을 장주라 불렀으니 부자의 정이 끊어졌음이 분명하오. 그러므로 장주의 분부 없이는 장원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소.]

막비강은 원인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장원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비록 큰 소리는 나지 않지만 급히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와 나직 나직한 호령소리들이 들린다.

갑작스런 막비강의 귀향에 혈검산장의 인물들이 놀라 대응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혈검산장 안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고수들을 총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때 대문 안에서 이십 삼, 사세쯤 된 건장한 청년이 달려나오며 외쳤다.

[둘째! 아버지께선 너를 명륜당(明倫堂)에서 만나시겠다고 하셨다.]

그 청년이 바로 막고천의 장남인 막불계(莫不戒)로 막비강보다는 네 살이 위였다.

[알겠소!]

막비강은 응답을 한 후 막불계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명륜당은 혈검산장에서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는 일종의 형당(形堂)이다.

이 무렵 명륜당 주위에는 백여명의 무사들이 병기를 든 채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막비강이 막불계를 따라 명륜당 안으로 들어가니 낯 익은 얼굴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은 상좌에 놓인 호피를 깐 태사의에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삼년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막고천의 모습을 본 순간 막비강은 가슴 속에서 살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구박한 것을 그렇다 쳐도 가엾은 어머니를 창녀처럼 다루던 그자의 만행이 떠오른 때문이다.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살기를 억누르며 명륜당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선은 어머니 한경파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리고 한 차례 명륜당 안을 둘러본 그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만하게 앉아있는 막고천 뒤에는 하나같이 천하절색인 중년미부 여섯 명이 시립하고 있다.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까지의 나이인 이 미녀들이 바로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이다.

막고천의 여섯 아내 뒤쪽에는 다시 여섯 명의 젊은 여자들이 서있다.

막고천의 아내들이 낳은 딸들이다.

그들 중 둘은 본처 소생이고 넷은 첩들의 자식이다.

헌데 막고천의 여섯 아내 중 한 명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다.

연약한 몸매에 파리한 안색을 한 그 중년미부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였다.

(어머니!)

한경파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해 혈검산장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고천과 그의 부인들 앞쪽에는 수십명의 인물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기세가 사나워 한 지역의 패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자들!

그들이 바로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혈검산장의 십악구흉(十惡九兇)과 칠열팔준(七烈八駿)이다.

이 서른 네 명의 고수들이야말로 혈검산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막고천 외에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은 단 둘이다.

막고천 좌측에는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고희를 넘긴 노인 두 명이 앉아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노인들은 장내에 있는 누구보다고 강한 실력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막비강은 두 노인은 처음 본다.

아마도 그가 혈검산장을 떠난 후 막고천이 초청한 강호의 기인들인 모양이다.

[흥!]

명륜당을 한 바퀴 돌아본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안하무인격으로 굴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불효자식 같으니! 빨리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막고천! 너는 그래도 내 아버지 행세를 할 생각이냐? 오늘 나는 네놈의 목숨을 뺏으러 왔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던 한경파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너 미쳤느냐?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빨리 무릎을 꿇어라!]

낳아준 어머니가 호통을 치자 막비강은 하는 수 없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아직도 이 어미를 기억하고 있다니, 너는 역시 착한 아이구나.]

한경파는 막비강이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자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 두시오 삼(三)부인!]

그 순간 막고천이 한경파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저런 불효막심한 자식에게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베풀 생각이오?]

어머니의 가냘픈 몸이 막고천의 손에 잡혀 비틀거리는 것을 본 막비강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라렸다.

[노적! 너는 왜 나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제로 빼앗았느냐?]

이 말이 떨어지자 막고천 뿐 아니라 한경파도 온몸을 세차게 떨었다.

그리고 막고천의 다섯 부인들도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하지만 한경파는 곧 격동을 가라앉히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이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네 부친께서 네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나를 빼앗았다니! 누가 네게 그런 헛소리를 하더냐?]

막비강은 굳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어머니는 자진해서 저자에게 시집을 왔단 말입니까?]

막비강이 막고천을 가리키며 말하자 한경파의 가녀린 교구에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이 스쳤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파리해졌다. 지극히 심한 충격을 받았고 심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이같은 반응을 본 막비강은 자신의 의심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해서 이를 악물며 생모를 몰아붙였다.

[말씀해보십시오! 어머니는 저자와 자의로 결합했습니까?]

그러자 잠시 파르르 떨던 한경파는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그녀는 두려움이 실린 표정으로 연신 막고천의 눈치를 살핀다.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심을 숨기고 막고천을 지아비라고 인정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얼굴을 분노의 빛으로 물들이며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럼 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저... 저런 패륜무도한...!]

막비강의 이 무엄한 말에 장내의 인물들은 분노의 노성을 질렀다.

한경파도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가냘픈 교구는 애처롭게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처연하게 말했다.

[하나의 안장은 수만 마리의 말 등에 올릴 수 있지만 한 마리 말은 동시에 두 개의 안장을 올릴 수 없다. 이 어미의 남편은 네 아버지 한 분뿐인데 어찌 다른 남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막비강은 눈에서 차가운 안광을 토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진짜 나의 부친은 누굽니까?]

그러자 한경파는 서럽게 흐느끼며 대답했다.

[강아! 지난 몇 년 동안 너는 도대체 무얼 잘못 배웠기에 어미에게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 너의 진짜 부친은 네 면전에 계시는 장주님이시다.]

하지만 막비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염라철장이란 분은 누굽니까?]

한경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염라철장이라니? 어미는 그런 사람 모른다.]

다른 처첩들도 웅성대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때 막고천이 격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불효막심한 놈! 빨리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네놈이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염라철장에게 속았음이 분명하구나.]

막비강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나는 신분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너의 자식이라는 것을 네가 증명한다면 나는 즉시 자진을 해서 무례한 행위에 대한 사죄를 하겠다.]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더니 치를 바르르 떨었다.

[불효막심한 놈이 말 하는 꼴이 갈수록 가관이구나. 네 어미가 나와 결혼하여 너를 낳았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나의 모친이 너와 결혼한 것은 사실이고 네가 나를 양육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네 자식이 아니다.]

[당치 않은 소릴 계속 지껄일 테냐?]

[내 말은 절대 당치 않은 소리가 아니다.]

막고천의 노갈에 막비강도지지 않고 마주 외쳤다.

[나는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유달리 냉대를 받았다. 너는 내게 무예도 가르치지 않았고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귀여워해 주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나의 부친이 틀림없다면 중인들 앞에서 피를 섞어 시험해볼 용기가 있느냐?]

막고천은 피를 뽑아 시험하자는 말을 듣더니 안색이 일변했다.

본래 피를 나눈 부모 자식간의 피는 무리없이 섞이지만 서로 다른 피는 완전히 혼합되지 않는 법이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으로부터 이같은 이치를 배워 알고 있었다.

[이 패륜무도한 놈이 이젠 반란을 일으키려는구나!]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비강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혼혈(混血)하여 혈친 관계를 시험하자니! 삼부인! 이놈은 당신이 낳았으니 당신이 직접 사로잡으시오!]

막고천의 그 말에 한경파는 안색이 일변하여 막비강에게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강아! 너는 스스로 포박을 받지 않고 어미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들려느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막고천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좋다! 혼혈친인(混血親認)의 시험을 하고 싶다면 해주겠다. 그 시험으로 사실이 밝혀지면 네놈이 또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녀들에게 명령했다.

[물을 한 그릇 떠와라!]

명륜당에 운집한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 부자가 피를 섞어 친자 여부를 증명하는 시험을 지켜보았다.

비녀가 물을 대야에 떠오자 막고천은 한경파에게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먼저 피를 떨구시오!]

한경파는 전전긍긍하며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왼손 약지 끝을 찔러 선혈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붉은 피는 대야의 물 속에 떨어지자 붉은 구름처럼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막고천도 한경파에게서 비수를 받아 중지 끝을 찔러 핏방울을 물그릇에 떨구었다.

물 속에서 만난 부부의 피는 완만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불효막심한 놈아! 너도 와서 핏방울을 떨구어라!]

[흥!]

막비강은 코웃음을 날리더니 허리춤에서 강장을 꺼내 들며 빠르게 어머니와 막고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서 약간의 실마리나마 찾아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한경파는 시종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혼합이 진행되는 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고천이 또 흉흉하게 외쳤다.

[이놈! 빨리 피를 떨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막비강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흥! 정말 가증스런 한 쌍의 간부음부(奸夫淫婦)군.)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들고 있는 강장을 보지 않는 것과 막고천이 빨리 손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을 본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래의 남편을 배반하고 막고천과 재혼했다고 단정했다.

자연히 어머니 한경파에 대해 심한 반감이 일어났다.

그는 분노에 떨면서 강장의 날카로운 손톱 부분으로 왼손 약지를 살짝 찔렀다.

일순, 한 줄기 선혈이 흘러 그릇 속에 떨어지더니 막고천 부부의 피와 혼합되어 신속하게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피가 잘 혼합되는 것은 막고천과 막비강이 친혈육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막비강은 이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막고천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불효막심한 놈!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

막고천은 고함을 치며 막비강에게 강력한 일장을 후려쳤다.

펑!

두 사람의 거리는 석 자도 되지 않았고 막비강은 또 조금도 방비하지 않고 있던 터라 막고천의 일장에 그대로 가슴을 얻어맞았다.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은 육요 칠절을 능가하는 고수다.

그런 그자의 일장을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쿵! 쿵!

막비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으며 입가로는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만일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몸이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막고천의 이 독랄한 일장에 즉사했거나 죽지 않았다고 해도 회복 불능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내 자식을 때리지 마세요!]

막고천의 일장에 가슴을 얻어맞은 막비강이 피를 흘리며 물러서는 것을 본 한경파가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막비강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막고천은 다시 막비강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고 얼어붙어 있었다.

(저놈이 죽지 않다니...!)

전력을 기울인 자신의 일장을 정통으로 얻어맏고도 그저 몇 걸음 물러섰을 뿐인 막비강의 모습이 막고천에게는 괴물처럼 보인다.

막비강은 비록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심한 타격은 입지 않았다.

그저 일시에 기혈이 흔들여 역류했을 뿐이다.

헌데 우연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막비강은 막고천의 첩 중 한 명이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막고천의 다섯째 부인 냉상영(冷祥英)이었다.

냉상영은 웬일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소생인 딸 막영란(莫英蘭)에게 부축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막영란은 막비강보다 두 살 어린 열 일곱 살이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비강이 막고천에게 맞았는데 왜 다섯째 부인인 냉상영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일까?

막비강은 비록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비키시오!]

펑!

정신을 수습한 막고천이 한경파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또 다시 일장을 날려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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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이매봉은 일백수십 살씩이나 먹은 노인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징그럽게 느껴졌다.

꼭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본 것같은 기분이다.

정나미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왜 왔는지를 물었다.

노삼이 말했다.

[옥황빙서를 얻을 목적으로 왔다. 설마 너도 옥황빙서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매봉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세상은 옥황빙서로 완전히 뒤집어졌군요. 은거했던 사람들도 다시 뛰쳐나와서 죽기나 하고...]

노이가 말했다.

[우리는 다르다. 다른 놈들은 진양진인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그에게서 옥황빙서를 빼앗을 것이다.]

이매봉은 말을 돌렸다.

[한데 당신들은 형제예요? 어쩜 그렇게 닮았죠?]

노대는 코웃음을 쳤고 노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는 사람보는 눈이 있구나. 우리는 형제는 아니지만 꼭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땐 정말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었다. 우리 사부도 우리와 꼭 닮았었지.]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핏줄도 섞이지 않았는데 사부나 제자들이 모두 닮다니... 믿을 수 없군요.]

노이가 말했다.

[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는 자기와 닮은 우리를 찾기 위해 꽤 고생을 했으니까.]

이매봉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신들 사부는 왜 그렇게 했죠?]

노삼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 버릇없는 것아! 지금까지 잘 대답했더니 별 시시콜콜한 걸 다 묻는구나!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우리가 언제 너를 죽이겠느냐?]

이매봉은 슬그머니 웃었다.

바보는 바보라도 뭔가 규칙이 있는 바보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이매봉이 간절하게 말하자 노삼이 뿌르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키우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자기와 얼굴이라도 닮아야 정도 빨리 들고 사랑스러운 게 당연하지. 제자들도 사부와 얼굴이 닮았으니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쉬운 노릇이고.]

[호호호호!]

이매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너무 단순한 이유다.

벼란간 노삼이 이매봉에게 덥쳐들면서 소리쳤다.

[! 그럼 이만 죽어라!]

노삼의 손가락이 갈구리처럼 변해서 이매봉의 목을 죄여왔다.

이매봉은 바람처럼 물러서면서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한가지만 더! 한가지만 더 물을께요.]

[에잇!]

노삼이 손을 중간에서 거둬들이고 화난다는 듯이 발로 눈을 걷어찼다.

노대가 얼굴을 굳히고 부채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매봉은 재빨리 말했다.

[이 근처에 동굴이 있다고 하셨죠? 그 동굴은 어디에 있죠?]

노이가 말했다.

[동쪽에 있는 절벽 중간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진양진인의 냄새가 동쪽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노이와 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눈을 번쩍 치켜뜨고 물었다.

[너는 진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이냐?]

이매봉이 말했다.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향기 같기도 한 냄새가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걸요.]

이매봉은 소매 속에서 일매향이 들어있는 작은 병의 마개를 살짝 열어서 동쪽으로 은밀히 쏘았다.

이매봉이 동쪽을 등지고 섰기 때문에 일매향 병이 날아가는 모습은 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노대!]

노삼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노대는 벌써 동쪽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이매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애와 스무고개 놀이를 지겹게 하고난 것같네.]

한데, 이매봉의 앞으로 새까만 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노이가 검으로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이매봉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두 자루의 장검이 쥐어지며 노이의 검을 튕겨냈다.

타탕!

치이익!

노이의 검에 닿은 장검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매봉의 왼쪽 소매자락이 조금 베어지며 색이 바랬다.

역한 냄새가 풍긴다.

노이의 검은 독검(毒劒)이다.

노이는 이미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아무소리없이 검으로 순식간에 서른 여섯 번을 베어왔다.

눈앞이 온통 노이의 독검으로 시꺼멓게 되는 것 같았다.

이매봉은 서른 다섯 번을 막아내고 서른 여섯 번째는 검의 힘이 말린 듯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아앗!]

노이가 독검을 거두고 동쪽 절벽가에 우뚝 섰다.

이매봉이 푸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이는 노대를 부르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매봉은 벼랑 위로 뛰어올라왔다.

돌아보니 그녀의 겉옷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있다.

이매봉이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엉망이야! 젠장! 앞으론 금선탈각(金蟬脫殼)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도무지 숙녀가 쓸 수법이 아니야.]

경장 차림이 된 이매봉은 동쪽 절벽을 천천히 내려가며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코가 개보다 더 예민한 노대는 이매봉이 던진 일매향 병을 찾아갔을 것이다.

먼저 동굴을 찾아야 한다.

현천록을 진양진인인줄 알고 뒤쫓는 귀찮은 늙은이들과 또 마주친다는 건 일단은 짜증나는 일이다.

만나고 나면 조금 그 상황을 즐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x x x

 

[내가 얼마나 잤는가?]

진양진인은 가만히 눈을 뜨고 물었다.

현천록은 지하를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를 두 마리 건져올려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시간 정도 됐을겁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자네의 양의신공으로 내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네.]

현천록은 누워있는 진양진인의 단중에 오른손 장심을 붙였다.

그리고 진양진인이 말하는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현천록의 오른손을 통해서 순수한 선천지기가 진양진인의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양진인은 배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그 기운을 끌어들여 기해혈을 바로잡았다.

이각 정도 걸려서 기해혈을 바로 잡고 났을 때 현천록이 맥이 팍 풀려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직은 공력이 부족해서 그렇네. 하지만 아주 큰 일을 했네. 허허허! 기해혈을 바로 잡자면 스무날을 걸릴 것이라 생각했건만... 양의신공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게.]

현천록이 물었다.

[도장이나 내가 똑같은 양의신공을 익혔는데도 왜 내 공력이 바위를 뚫고 가는 것 처럼 힘들게 도장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길이 뒤집어졌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 근본이 바로 잡혔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자네가 도와주면 금방 바로 잡을 수도 있네.]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사이에 진양진인도 구슬 땀을 흘리며 자기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현천록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아예 진기요상(眞氣療傷)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해혈이 회복된 이상 더디긴 해도 조금씩 노력하면 공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더구나 현천록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선천지기를 일부 받아들였으니 내력이 더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진양진인은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자기가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천록은 힘을 보충하고나서 다시 진양진인을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그 힘이 배는 강했다.

진양진인은 자기의 회복된 힘과 현천록의 힘을 합하여 단숨에 열 일곱 개의 대혈을 회복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써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는 삼백육십여 혈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현천록도 진양진인도 완전히 땀으로 흠벅 젖어버렸다.

진양진인은 온 몸이 솜뭉치처럼 축 쳐져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현천록은 완전히 탈진했지만 오히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몸 안은 텅비어버린 것 같은 데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기운들은 모공으로 들어와 길을 찾고 모여드는 것처럼 현천록의 기해혈로 응집되었다.

현천록은 기해혈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전신이 힘으로 가득찬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가득 든 것 같기도 하며 불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도 맑아지고 피로는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천록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무엇이든지 간에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리 춤에 찌르고 있던 백금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도 백금퉁소에 새겨진 용이 희미하게 빛난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퉁소를 불었다.

맑고 그윽한 음율이 암흑의 동굴 속으로 퍼져나갔다.

구슬픈 가락의 애상곡이었지만 슬픈 느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만 가득했다.

애상곡은 세 번을 연거푸 연주되었지만 그때마다 그 느낌이 달랐다.

처음에는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이었고 두 번째는 웅장하고 엄숙했으며 세 번째는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세 번의 연주 모두 원래의 애상곡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마치 아기를 달려는 듯하군.]

세 번째 애상곡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을 차린 진양진인이 말했다.

[애상곡은 언제 배웠는가?]

[도장이 부는 걸 보고 흉내를 내봤을 뿐입니다.]

현천록은 퉁소에서 입을 떼면서 말했다.

진양진인이 실소했다.

[음율을 단번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당년의 왕산악이라 해도 마찬가질 걸세.]

진양진인의 음성은 이제 기운이 있었다.

현천록은 그 음성 만으로 이제 그가 몸을 다 치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현천록이 말했다.

[애상곡 외에 다른 곡은 없습니까?]

진양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배울 수 있다면 한 번 배워보게. 아예 이소곡(離騷曲)이나 광릉산(廣陵散)을 가르쳐줌세.]

진양진인은 말을 마치자 마자 자기의 퉁소를 꺼내서 불었다.

이소곡이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진양진인의 곡이 끝나자마자 퉁소에 입을 대었다.

진양진인이 부른 곡과 똑같은 곡이 흘러나왔다.

완급과 호흡마저 완전히 동일했다.

진양진인은 한방 맞은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진양진인은 이소곡을 부르며 음이 아주 높은 세 소절은 빼고 부르지 않았다.

현천록이 그전부터 이소곡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천록은 완전히 자기와 똑같이 연주하고 있었다.

아니, 음이 오히려 더 고아한 것 같다.

현천록의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다시 퉁소를 입에 대고 광릉산을 불었다.

광릉산은 위진(魏晋)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분인 완적(阮籍)이 만든 것으로 그 이후에 곡이 끊어 졌다고 알려져 있다.

진양진인은 젊었을 때 남쪽에 갔다가 어느 낡은 도관의 천장에 광릉산의 악보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배웠다.

광릉산이야말로 당금의 세상에서는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진양진인이었다.

광릉산의 곡은 길기도 길거니와 온갖 현란한 기교와 은밀한 수법이 들어있어 십년을 배운다 해도 이루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그가 지금의 중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광릉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자기가 연주하지 않은 광릉산을 듣는 홍복을 누리게 되었다.

현천록은 너무 자연스럽게 누에가 실을 뽑는 것처럼 퉁소로 광릉산을 뽑아내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자기의 퉁소를 꺾어버렸다.

파각!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 못됐지만 퉁소로는 천하제일을 자부했더니... 허허... 말짱 헛된 오만이었구나.]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곡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광릉산은 아주 좋은 곡이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마 다시는 듣지 못할 걸세. 자네같은 사람이 또 있기도 어렵고 노도는 결코 연주하지 않을 테니까. 광릉산을 알아주는 사람은 또 한 분이 있네만 이제 그분도 더 듣지는 못하게 돼군.]

진양진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자넨 귀재(鬼才)네 귀재. 내가 평생 처음 만나는 기재일세.]

번쩍!

진양진인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현천록의 목에 닿아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든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금석을 무베듯 하던 시퍼런 장검이 목을 시리게 한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같은 기재가 무공을 익힌다면 십 년 래에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자네 발밑에 무릎을 꿇어야 할 걸세. 아마 다른 고수들이 자넬 발견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걸세. 죽여서 싹을 제거하든가 제자로 키워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하겠지.]

현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장께선 어느 쪽입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느 쪽은 어느 쪽이겠나? 그냥 자네와 난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일세. ! 이 검은 줄 수 없으니 그 퉁소로 따라하게.]

진양진인은 훌쩍 물러나며 검을 춤을 추듯이 휘둘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현천록의 눈에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 질 뿐이었다.

착각!

삽시간에 검광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 되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다 보았으면 어디 한 번 해보게.]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두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직 제 느낌으로는 확연하게 다 잡지 못했으니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싸늘하게 웃고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검광이 순식간에 눈을 부시게 한다.

현천록은 눈을 감고 진양진인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다.

처음보다 훨씬 확연하게 진양진인이 느껴졌다.

베고 찌르고, 걷는가 하면 치고 찍는 모두 동작이 하나의 선을 이룬 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 두가지의 수법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한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알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이제 하나 하나 따로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현천록의 말대로 열 두가지 동작을 따로 따로 펼쳐보였다.

현천록은 느낀 대로 머리 속에서 열 두 개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머리와 꼬리가 없었다.

어떤 것이든 머리가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꼬리가 될 수 있었다.

현천록은 머리 속으로 곰곰히 더듬어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대단한 검법이군요. 이런 검법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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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아! 청구단서!

 

 

 

석 달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드디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이 되긴 했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고 한 달 새 눈도 내리지 않았다.

막비강은 삼경이 조금 안된 시간에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지하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막비강은 마음을 놓았다.

헌데 영롱탑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은 지난번에 들렀었던 조씨부인의 농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농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짧은 석 달간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무공은 석 달 전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농가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에 탄 집의 잔해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집의 일가족이 흉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것일까?)

불탄 폐허를 돌아보는 막비강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졌다. 조씨부인의 집이 타버린 것이 아무래도 자신 때문일 것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던 막비강은 유해(遺骸)나마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잔해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깨진 항아리와 불탄 가재도구들만 발견될 뿐 사람의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그가 신녀비로 잔해의 여기 저기를 찔러 보고 있을 때였다.

반짝!

갑자기 한 줄기 금광이 번뜩했다.

막비강이 얼른 흙을 파보니 자신이 이 집을 떠날 때 장연아에게 맡겼던 호로와 강장이 나왔다. 이 물건들의 발견만으로 막비강은 큰 위안을 얻었다.

(유해가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모두 무사히 피한 모양이다. 여길 떠나면서 호로와 강장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므로 여기 묻어 두고 갔을 것이다.)

 

막비강은 곧 강변으로 달려가 강장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이어 호로에 묻은 흙도 닦으려는데 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밝은 달빛이 호로에 비치었다. 그러자 돌연 호로 표면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한 폭의 산경(山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막비강은 호로의 그 문양이 청구단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이 일대의 경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았다. 다만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탑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막비강은 다시 주위의 경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영롱탑이 아리나 영롱탑의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호로를 다시 찾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일년이 걸려도 헛수고를 할 뻔했구나.]

그는 기뻐하며 호로 안에 든 찌꺼기를 모두 쏟았다. 그러자 호로 속에서 찌꺼기들과 함께 종이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쪽지를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임은 갔구나! 임 가신 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베갯머리에 엎드려 무사함을 믿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만나길 기도했지만 천첩의 뜻이 아직도 통하지 않았구나.>

 

파리 머리보다 작게 쓴 글씨는 여자의 필적임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굴까? 장연아라면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숙하게 임이니 천첩이니 하는 글을 쓸 까닭이 없는데....)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 조씨부인이 썼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이 호로 속에 이런 걸 넣어 두었을까?)

막비강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 글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로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찬 뒤 영롱탑 아래쪽의 경지하로 달려갔다.

 

***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정월 대보름날 밤 삼경이다. 한 겨울이라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막비강은 물 가 높은 바위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영롱탑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곧 영롱탑의 그림자 끝 부분이 가르키는 곳이 물 속 깊은 곳에 놓인 하나의 거석(巨石)임을 발견했다. 집채만한 크기인 그 바위는 물 속 아주 깊은 곳에 놓여있었지만 경지하의 물이 워낙 맑아 물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호로에서 떠오른 산수화에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비급은 영롱탑 꼭대기가 아니라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친 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청구상인이 후세 사람들을 농락할 의도가 없다면 청구단서는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자리한 물 속 거석 밑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풍덩!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한 막비강은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거석이 있는 곳으로 잠수했다.

거석이 놓인 곳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 거의 십여 장을 잠수하여 귀가 멍멍해지고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무렵 막비강은 가까스로 거석에 도착했다. 만일 막비강이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남달리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면 거석이 놓인 곳까지 잠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석은 마치 강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단단히 박혀있었다.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흔들어 보았지만 거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거석을 흔들어 보던 막비강은 숨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허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다 있군!]

막비강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물가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나처럼 비밀을 알아내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력이 충만함을 느낀 막비강은 움찔 놀라며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막비강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오봉도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막비강이 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고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상대방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천하오기 중 오봉도인이었다.

이에 막비강은 다시 급히 물 속으로 잠수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거석을 흔들어 보았다.

우두둑!

그러자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거석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시 숨이 목 아래까지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비강은 별 수 없이 또 수면으로 부상했다.

오봉도인은 재차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막비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너는 과연 거기서 비급을 찾고 있었구나. 빈도는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청구단서를 찾으면 즉시 갖고 나오너라. 함께 연구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자는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비급을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해 좋은 말로 막비강에게 제안했다.

오봉도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막비강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요사한 도사야! 내가 그런 수작에 걸려들 것 같으냐? 청구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찾아낸다면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멀리 헤엄쳐 가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무공 실력을 잘 아는지라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청구단서는 도가(道家)의 비급이라 배움이 얕은 후배로서는 얻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도장께서 지도해 주신다니 저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봉도인은 막비강이 순진하여 자신이 말에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총명하고 영리하여 천면신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네가 비급만 찾아 나오면 빈도는 최선을 다해 널 지도해 주겠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비강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거석을 밀어보았다.

쏴아!

다음 순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거석이 벌렁 뒤집혀졌다. 헌데 거석이 넘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수직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물이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을 막고 있던 거석은 물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다.

콰아아아!

거석이 뒤집히자 텅 비어있던 동굴 속으로 물이 와락 밀려들어간다. 삽시에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막비강의 몸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혼비백산한 막비강은 비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다급히 호흡을 멈추어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 했다.

그 상태로 막비강은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린 채 아래로 떨어졌다.

 

***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처음에는 그를 아래로 하락시키더니 다시 옆으로 백 장 가량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막비강은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낀 거석(巨石) 아래쪽에 도착하게 했다. 그는 얼른 거석을 붙잡고 일 장 가량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막비강이 나온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요행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 어떻게 밖으로 다시 나가지?)

그는 깜깜한 주위를 둘러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막비강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동굴 바닥은 고른 편이었다. 조그만 돌 조각을 사람 손으로 이어 붙여 마치 비늘같이 만들어졌는데 끝없이 길게 뻗어있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돌연 앞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지만 막비강은 기쁘기보단 긴장이 앞섰다.

(저것은 밖에서 흘러드는 빛일까? 아니면 어떤 짐승의 눈빛일까?)

그는 긴장하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한동안 그 빛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은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막비강은 용기를 내어 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석벽(石壁)에 하나의 옥합(玉盒)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막비강이 어둠 속에서 본 빛은 그 미끄러운 옥합의 표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츠으으!

막비강이 석벽에 박힌 옥합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갑자기 빛이 증가되어 주위를 백주(白晝)처럼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이 옥합은 야광옥(夜光玉)이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옥을 깍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합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야광옥합(夜光玉盒) 속에 동이족의 무학비전인 청구단서가 들어 있으니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리라.>

 

[! 이것이 바로 청구단서구나!]

막비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옥합을 바닥 위에 내려놓고 큰절을 올렸다.

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과연 한 통의 편지와 붉은 표지를 지닌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세 권의 책자 겉면에는 각각 신공결(神功訣), 연형결(鍊形訣), 초혼결(招魂訣)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막비강은 비급들 보다 먼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도는 본시 동방(東方) 청구(靑丘) 출신이다. 우리 동이족이 잃어버린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으려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명을 마치게 되었도다. 하지만 창세삼보를 찾는 일은 동방국인(東方國人)이 할 일이므로 중원인인 그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이에 그 내막을 여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우혈한천(牛穴寒泉) 위로 올라가 최소 일 년 이상 일체의 중단없이 청구절학을 연마하라. 일단 연공을 시작하면 기초가 잡힐 때까지 쉬지 말아야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혈 근처에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 형성된 영천석유(靈泉石乳)와 일 년 동안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다. 또 야광주는 비급을 읽을 수 있게 빛을 발산해줄 것이니 무공을 연마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으면 비급을 다시 야광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후세의 인연을 기다려라.>

 

막비강은 야광옥합에 적힌 글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그냥 거짓말로 추명염왕 등을 속인 것이었는데 우혈이 정말 청구단서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막비강은 비록 우혈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동굴이 우혈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상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급을 품속에 넣은 후 옥합을 들고 야광주의 광망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

 

얼마 가량 걸었을까? 전면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천면신룡!]

막비강은 이런 지하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차가운 한기가 솟구치는 연못가에 서있던 그 사람은 야광옥합을 손에 든 막비강을 발견하고는 다가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괴상한 야광옥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청구단서를 취득한 모양이구나. 당장 그걸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추명염왕! 저자가 죽지를 않았구나!)

야광옥합의 빛을 빌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상대방은 추명염왕이었다.

헌데 석달 사이 그자의 얼굴은 아주 추악하고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누런 털이 길게 자란데다 눈에서는 연신 녹광(綠光)이 번뜩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한다.

그러나 막비강은 지난 석달 간 자신의 무공도 장족의 발전을 보였음을 떠올리고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이건 빈 옥합일 뿐인데 무엇이 볼 게 있다고 그러느냐?]

[빈 옥합이라고? 네놈이 감히 노부를 속이려 드느냐?]

[이런 마당에서 당신을 속일 필요가 뭐 있느냐?]

추명염왕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청구단서는 어디 있느냐?]

막비강은 술술 말을 이었다.

[소면호가 탈취해 갔다. 그자는 청구단서 세 권을 모두 자기가 갖고 내게는 이 빈 옥합만 주더니 발길질로 나를 물 속에 처넣었다. 당신은 내 몸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막비강의 말을 곧이 들은 추명염왕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소면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노부가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가 만약 청구단서의 절학을 연성한다면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 노부는 그놈을 때려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막비강은 뻔히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여길 들어왔느냐?]

추명염왕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막비강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추명염왕은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그 어린 녀석이 알고 있지.]

[어린 녀석이라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지금은 도대체 몇 일이냐?]

[정월 보름날 아니면 정월 열엿새 아침일 것이다.]

추명염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그럼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다면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먹었느냐?]

막비강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히죽 웃었다.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추명염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들 못 먹겠느냐? 얼마 후 노부는 너도 잡아먹을 것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라고?]

추명염왕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웃었다.

[석 달 전 나이가 너와 비슷한 녀석이 소면호와 삼촌정, 그리고 노부를 데리고 네놈을 찾는다면서 이곳 우혈에 왔었다. 그런데 소면호가 방심한 노부와 삼촌정을 갑자기 공격하여 이 수직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물 속에 떨어져 죽음은 면했다.]

막비강은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 선배님도 이곳에 계시겠군요.]

그러자 추명염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이간질하려고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다고 그가 너를 구해 줄 것 같으냐? 사실대로 말해 주겠는데 그는 이미 내게 잡아먹혔다.]

막비강은 흠칫 놀랐으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노부가 너를 잡아먹을 때가 되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추명염왕은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세상이치다. 그러니 내가 몇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자는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한천이 있는데 시체를 그 한천에 담가 두면 상하지 않는다. 원래 한천에는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시체가 여러 구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걸 사이좋게 나누어 먹다가 나중엔 그 마저도 떨어지자 서로 다투게 되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삼촌정이 버릇없이 굴기에 노부는 그놈을 죽여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놈이 나타났구나.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 살려 두겠지만....]

막비강은 추명염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어라!]

추명염왕의 말을 듣던 막비강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일장을 격출했다. 그는 끔찍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이 일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 네놈이!]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감히 먼저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또한 그의 공력이 이렇게 심후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한 가운데 일장을 맞받아 냈다.

!

[커헉!]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명염왕은 우반신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받아랏!]

막비강은 일초가 성공하자 자신이 생겨 옥합을 바닥에 던져놓고 쌍장을 교차하여 쉴새없이 연달아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퍼펑!

추명염왕은 몇 장을 맞받아 낸 후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훨씬 심후함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호기가 격발하여 장력을 발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잠깐은 무슨 잠깐이냐? 나는 오늘 금릉 개방의 네 분 노개와 삼촌정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겠다.]

퍼펑!

막비강은 고함과 함께 쌍장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냈다.

[아이쿠!]

첨벙!

추명염왕은 연달아 몇 바퀴 곤두박질하더니 그대로 차가운 한천(寒泉)에 빠져 버렸다.

막비강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염왕이니 황천에 가야 마땅하다. 그래도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는 추명염왕이 밖으로 나올 것이 염려되어 한천 끝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의 추악한 시체는 수면에서 몇 바퀴 맴돌더니 천천히 물 속으로 잠겼다.

막비강은 자기가 십 성의 공력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추명염왕이 당해내지 못하고 한천에 빠져 죽자 의외였다. 추명염왕이 일장에 네 명의 노개를 격살했던 일로 미루어 자기의 무예는 이미 일류고수에 못지 않음을 알았다.

[잘 하면 지금 실력으로 막고천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자를 일장에 죽이는 것은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막비강은 비록 자신이 추명염왕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지만 천하오기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기 중의 누구라도 원수 막고천을 도우면 원수를 갚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는 청구절학을 연마한 후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옥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청구상인이 말한 양식이 있다는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한 쪽 벽에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석혈(石穴)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았다.

구멍 안쪽은 넓이가 여덟 자 가량 되는 자그마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이 석실에는 식량은커녕 돌 조각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밀실 한 곁에 우윳빛의 액체가 조금 고인 샘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청구상인이 말한 영천석유였다.

그러나 그것뿐, 석실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본래 여러 가지 약재를 알고 있는지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그 식량이란 것이....)

그는 즉시 한천의 맞은편 벽쪽으로 가서 야명주로 비춰 보았다. 과연 흙이 엉겨붙은 그곳에는 희세의 영약인 하수오(河首烏)가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 이런 희세의 영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니...!)

그는 청구상인이 말한 식량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곳에 나 있는 하수오들은 모두 수백 년 묵은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희세의 영약들인 것이다. 대충 양을 따져보니 일 년 동안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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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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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휘익!

노대가 바위를 날아 넘어 이매봉 앞에 내려섰다.

[! 숨을 죽인다고 냄새까지 없앨 수 있을 줄 알았나?]

[노대! 진양이오?]

노이와 노삼이 뒤이어 날아왔다.

이매봉은 그들이 하는 짓이 총명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찾던 사람이나 잘 찾아봐요. 난 웬 놈도 아니고 도사도 아니니 나를 찾진 않았을 거잖아요.]

노삼이 말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넌 우리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니 죽어야겠다.]

이매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죽어야 하는가요? 난 몰랐어요. 미리 알았으면 귀를 막고 듣지 않는건데...]

노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우릴 놀릴 셈이냐? 어린 계집애가 앙큼하구나.]

이매봉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가요?]

노대가 말했다.

[이른 아침에 산정에 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흥! 이 근처의 눈 위에 네 발자국이 없다는 건 뭘 말하느냐? 적어도 설상비(雪上飛)보다 뛰어난 경신술을 쓸 줄 안다는 얘긴데 순진한 척 시치미를 떼려하다니.]

이매봉이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거참! 하는 수 없군요. 적당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들이겠죠?]

노삼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요즘 나 다니는 강호의 시러배 잡놈들과는 다르다.]

[호호호호!]

이매봉이 깔깔 웃고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확실히 좀 달라 보여요.]

노삼이 칭찬을 듣고 우쭐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여기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노대가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주마. 시체도 손상시키지 않겠다.]

노삼이 말했다.

[만약 말하지 않으면 먼저 두 눈을 파내고 배에다 구멍을 낸 후에 사지를 자르고 송곳을 귀속에 넣어 두개골을 휘저어 죽이겠다.]

노이가 말했다.

[거짓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휴~ 무서워라.]

이매봉은 정말 겁내는 것처럼 몸을 움추렸다.

노대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이매봉이 울먹울먹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왕!]

노삼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노대! 울어버리는군요. 우는 아이는 어떻게 달래야하죠? 당장 죽여버릴까요? ]

노이가 말했다.

[우는 아이는 엉덩이를 까서 볼기짝을 두들겨 주는 법이야. 나도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그렇게 맞았네.]

이매봉이 울면서 말했다.

[난 이제 죽게 되는군요. 흑흑! 너무 슬퍼요. 얼마 살지도 못했는데 죽게 되다니...흑흑! 이건 너무 억울해요.]

노삼이 말했다.

[노대, 이 아이가 억울하다는 군요.]

노대가 말했다.

[죽을 땐 누구나 다 억울한 법이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죽인 놈들 중에선 억울하다고 한 놈이 하나도 없었는데...]

노삼은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마라! 그렇게 슬퍼할 것 없다. 노부가 직접 죽이면 너도 다른 놈들처럼 억울하지 않고 잘 죽을거다.]

이매봉이 말했다.

[왜 억울하지 않겠어요? 엉엉! 난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당신들 말 다 들었으면 죽어야 된다고 해놓고 다 듣지도 못한 나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요. 엉엉, 다 들었으면 죽어도 억울하지 않는건데... 엉엉.]

노삼이 아주 당황했다.

[그건... ... 노부가 그렇게 말했었군. 으음... 노부 일백사십 평생에 처음하는 실수다.]

노대가 소리쳤다.

[노삼! 입 다물어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이 문제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

노삼은 노대의 살벌한 눈초리를 대하고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노대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이매봉은 눈물을 닦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 아비나 사부의 이름은 뭐냐?]

이매봉이 말했다.

[그 또한 아랫사람이 허락없이 함부로 들먹일 수 있는 함자가 못되는군요.]

[방자한 것!]

노대는 섭선을 모아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순간 섭선의 끝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바람소리가 났다.

쉬익!

이매봉은 깜짝 놀랐다.

(무형강기(無形罡氣)!)

몸속의 내공을 뭉쳐서 밖으로 발출하되 그것이 형체는 없으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하고 단단하다면 무형강기라고 부른다.

무형강기를 발할 수 있는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몇 명이 나올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드물다.

피하지 않으면 금강불괴라 해도 온전하기가 힘들다.

이매봉은 즉시 옆으로 두걸음 비켜섰다.

한데,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서 번득하더니 어느새엔가 노삼이 그의 앞을 막아서 있었다.

!

무형강기는 노삼의 가슴에 격중했다.

[!]

노삼이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어?]

노삼이 말했다.

[노대! 생각해보니 이 아이가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소. 게다가 이 아이가 억울하면 우리가 우리 얼굴에 똥칠한 꼴이 되지 않겠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듣고 싶은 말은 다 듣게해줍시다.]

노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삼 말이 옳은 것 같소. 노대 그렇게 합시다. 그래야 죽는 저 아이는 편안하게 죽을 거고 우리도 신용을 지키지 않겠소?]

노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희 둘은 완전한 바보 멍청이들이야. 그런다고 죽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나?]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럴 것 같아요.]

노이와 노삼이 그것보라는 듯이 노대를 본다.

노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우린 여기에 있지만 먼곳에서 왔다. 이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하러 온게 아니란 걸 명심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데요?]

노대가 말했다.

[바보짓을 하려면 천산(天山)도 족하지. 그 먼곳에서 여기까지 와서 바보짓을 할 건 뭐란 말이냐?]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정말 바보짓을 한 거요? 억울함을 풀어주고 신용을 지켜 명예를 보전하려 했을 뿐인데...]

이매봉이 맞장구를 쳤다.

[옳아요!]

노대가 이매봉을 흘겨보았다.

이매봉은 슬그머니 노삼의 등뒤에 숨었다.

그녀는 노삼의 몸이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무형강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금강불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대가 말했다.

[강호가 험난 한 건 이래서 험난하다. 노인을 조심해야 하고, 어린아이를 조심해야 하고, 특히 이런 젊은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얼굴이 예쁘면 더욱 조심해야되지.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강호로 잘 나오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당신은 예쁜 여자한테 속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예쁜 여자를 나쁘게 말하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데.]

노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대는 절대로 남에게 속지 않는다. 노대도 우리같은 바본 줄 알면 안돼.]

노삼이 말했다.

[맞다. 노대는 바보가 아니지. 우리와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정말 똑똑해. 물론 우리한테 화를 잘 내고 짜증부리지만.]

이매봉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세 사람이 작당해서 나 하나를 괴롭히려 하는군요. 남자가 치사하지도 않아요? 비겁하게 여자 하나를 괴롭히려 하다니. !]

노삼이 머리를 긁으면 어쩔 줄 몰라했다.

[정말 야단났군. 이건 어른이 아이를 괴롭한다는 말에도 해당되고 남자가 여자를 괴롭힌다는 말에도 해당되는군. 역시 노대말씀이 옳아. 여자를 상대하는 건 머리가 아파.]

이매봉이 다그쳐 물었다.

[말해봐요. 당신들은 누구죠? 난 당신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소릴 못들었어요.]

노이가 이매봉을 상대하기로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린 천산삼로(天山三老). 좋은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쁜 사람이랄 수도 없다.]

이매봉은 생각했다.

(천산삼로라? 덜 떨어진 것 같은 이들이 천산삼로라구? 세상에나... 멀쩡한 사람들은 다 뭘하고 이 사람들이 천산삼로야? 어쩐지 무형강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고 했더니...)

천산삼로는 오래 전부터 천산에 출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이름이 알려져 왔다.

천산일대의 녹림을 장악하고 있을 뿐아니라 개개인의 무공이 아주 특이하고 고강하여 천산에 갈 때는 항상 그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해진다.

중원의 유명한 고수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낭패를 보거나 살해당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구십년 전쯤에 무당의 탁월한 고수인 진양진인이 그들의 우두머리와 싸워 이겼다는 말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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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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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의부의 죽음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물러서는 것을 보며 우주도철은 광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부는 백년을 넘게 살았으나 자식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아이는 정사 양파의 무학을 지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노부와 뜻이 같으니 노부에게 양보해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우주도철도 사람 쟁탈전에 가담하려 하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는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후 우주도철을 향해 포권의 예를 올렸다.

[() 선배님께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면 이 아이의 홍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군요.]

남산의성의 그 마지막 말은 막비강에게 승낙하지 말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막비강은 악불령이 우주도철을 선배님이라 칭하자 얼른 다른 생각이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

[이 선배님과 호 선배님 모두 나를 양자로 삼으시려 하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선 먼저 실력을 겨루어 보십시오.]

백독서생 이량이 대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감히 이간책을 쓰려 하다니...!]

하지만 우주도철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으핫하하! 이것은 가장 현명한 방법인데 어찌 이간책이라 하느냐?]

백독서생 이량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푸르락붉으락하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너 따위 미친 진사(進士)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이어 왼손을 확 휘둘렀다.

쏴아아!

그러자 마치 연기 같은 독장(毒瘴)이 그의 소매 속에서 쏟아져 나와 우주도철을 덮어씌워 갔다.

중인들은 이량이 독을 쓰자 분분히 장내에서 멀어졌다. 그 독연기는 피부에 슬쩍 닿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드는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크! 이런 잔재주는 애들에게나 써먹어라!]

하지만 우주도철은 만면에 경멸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입김을 확 불었다.

콰아아아!

그러자 갑자기 한차례 광풍이 일어나 백독서생 이량의 독장을 모두 되날려 버렸다.

[대단하다!]

막비강이 우주도철의 신공에 경탄할 때, 백독서생 이량도 흠칫 놀라더니 곧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연달아 장력을 발출했다.

퍼퍼펑! 치치칙!

장풍이 난무하는 가운데 연무독장(煙霧毒瘴)도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아무렇게나 양팔을 휘젓자 백독서생 이량이 발출한 연무독장은 마치 무형의 담벼락에 부딪힌 것처럼 공중으로 상승했다. 그러다가 이내 모두 백독서생 이량의 머리 뒤로 떨어졌다.

백독서생은 흠칫 놀라다가 재차 독분을 날려 우주도철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두 절정고수의 대결을 보며 내심 곤혹을 금치 못했다.

(우주도철의 공은 백독서생보다 훨씬 고강한 것 같은데 왜 공세를 취하지 않을까?)

그는 우주도철이 여유 만만하게 상대방의 흉맹한 공세를 파해하는 것으로 보아 백독서생 이량을 죽이려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수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무림에서 보기 드문 격전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스팟!

[!]

막비강은 갑자기 뒤통수로 한 줄기 강맹무비한 경풍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동시에 우주도철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전광석화같이 일지를 퉁겼다.

[크아악!]

다음 순간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외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졌다. 막비강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소면호가 양다리를 허벅지에서 잘린 채 선혈을 샘물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우주도철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너 같은 피라미가 감히 노부 앞에서 기습을 가하다니. 만약 노부의 지난날 성격 같았으면 네놈은 뼈도 찾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소면호도 절정고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무공을 채 일초도 받아내지 못하자 구경하던 군호들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죽어 마땅한 영감 같으니...!)

막비강은 소면호가 자신을 암산하려 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소면호가 참변을 당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비록 그것이 음모가 숨겨진 가르침이었지만 어쨌든 소면호는 지난 이십여 일간 자신에게 무예를 전수해 준 정이 있지를 않은가?

해서 막비강은 급히 우주도철 앞으로 달려가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님에게 상세를 치료하는 약이 있습니까?]

우주도철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너는 저자를 살릴 생각이냐?]

[다리가 잘린 징벌만으로도 충분하니 목숨만은 살려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좋다. 너의 체면을 봐서 그에게 만령단(萬靈丹)을 한 알 주겠다.]

우주도철은 말을 끝낸 후 주머니 속에서 단약을 한 알 꺼내어 막비강에게 건네주며 사용 방법도 말해 주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의 착한 마음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군호들이 막비강이 소면호의 상세를 치료하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문득 한 명의 흑의노도(黑衣老道)가 영롱탑의 상층부에서 사뿐히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군호들의 후면에 도착했다. 그자는 바로 천하오대기인 중의 또 다른 한 명인 오봉도인이었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소면호의 치료를 끝냈다.

헌데 치료가 끝나는 순간 소면호는 갑자기 쌍장으로 땅바닥을 짚어 몸을 굴려 사도 인물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저 어린 녀석을 놓치지 마라! 저놈이 천면신룡이다!]

[뭐라고?]

[천면신룡이 저 애송이라고?]

장내는 삽시에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 되었다.

막비강은 신분을 간파당하는 순간 안색이 일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파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파 인물들도 자기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면호가 배은망덕하게 고함을 지르자 급히 몸을 솟구쳐 장권 밖으로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섰거라!]

갑자기 인영이 번쩍하더니 한 명의 흑의노도가 그의 면전을 막아섰다. 그와 함께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가슴을 향해 뻗어 왔다.

막비강은 본능적으로 일장을 격출하여 반탄력을 이용하여 옆으로 피하려 했다.

퍼펑!

[!]

하지만 상대방의 장력이 너무 강맹하여 막비강은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간신히 몸을 가눈 막비강은 상대방이 바로 천하오기 중 한 명인 오봉도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어 그는 급히 방향을 바꿔 사력을 다해 도주하려 했다.

[아이야, 겁먹을 것 없다!]

화라라락!

그때 말소리와 함께 우주도철이 날아와 막비강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어 그는 오봉도인을 바라보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 잡()도사야! 감히 노부의 양자를 괴롭히려 하다니....]

오봉도인도 음산한 눈을 빛내며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다른 사람은 너 늙은 도철을 무서워하겠지만 빈도는 안목에도 두지 않는다.]

[잡도사! 감히 노부에게 덤빌 생각이냐?]

[네가 무엇이 두려워 덤비지 못한단 말이냐?]

막비강은 강적에게 포위당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주도철에게 의지해야 무사히 빠져 나갈 희망이 있음을 알았다. 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불렀다.

[의부(義父)! 우리는 빨리 여길 떠납시다.]

그의 의부라는 말에 우주도철은 크게 기뻐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가 가지 않아도 이제는 아무도 감히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오봉도인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으핫하하! 늙은 도철아! 너무 큰소리치지 마라! 그 어린 녀석을 데려가려면 우선 빈도의 승낙부터 받아야 한다.]

우주도철은 백미를 치켜 올리며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지옥에 가고 싶다면 그건 매우 쉬운 일이다.]

오봉도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주위의 군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수고스럽지만 여러분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이때 우주도철도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내가 이 잡도사를 황천으로 보내 버릴 테니 뒤로 물러서거라.]

군호들은 천하오대기인에 속하는 두 인물이 싸움을 시작하면 치열하기 짝이 없을 것임을 알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비록 강적이 면전에 버티고 있지만 우주도철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오봉도인을 보며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잡도사! 노부는 네게 삼 초를 먼저 양보하겠다.]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눈에서 분노의 화염을 발산했다.

[늙은 도철아, 양보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는 노갈을 터뜨리며 일장을 격출했다.

콰르르르!

그의 이 일장은 보기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장경이 다가들자 광풍이 노도같이 휘몰아치고 주위 십 장 이내는 온통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찼다.

우주도철은 몸을 뽑아 올려 상대방의 머리 위를 뛰어넘더니 오 장 뒤에 내려선 후 웃으며 말했다.

[잡도사야, 너는 삼십 년간 열심히 공력을 연마했는데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구나.]

오봉도인은 우주도철이 머리 위로 뛰어넘는 것을 보고 재차 장력을 발출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신법이 너무 쾌속하여 격중되지 않았다. 그는 우주도철의 이런 행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팔을 휘둘렀다.

!

한 줄기 광염이 모래먼지를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게 하여 십여 장 밖에 서 있던 군호들의 의삼까지도 날려온 모래먼지에 맞아 무수한 구멍이 뚫렸다.

우주도철은 막 바닥에 내려섰을 때 오봉도인의 장경이 노도같이 휘말려 오자 할 수 없이 재차 몸을 뽑아 올려 강맹한 장풍을 발 밑으로 스쳐 가게 했다.

오봉도인은 교묘한 초식으로 상대방의 신법을 둔화시킨 후 즉시 절예를 전개하여 쌍장으로 쉴새없이 맹공을 가했다.

우주도철도 더 이상 상대방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공중으로 오르내리며 장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각도에서 발출했는데 이상한 것은 그가 발출하는 장력은 바람도 일지 않고 경력도 없어 오봉도인의 강맹한 강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고수는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누가 누군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막비강은 전신의 공력을 눈에 모아서야 간신히 두 사람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한편 기뻐하며 또 한편 내심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때 소면호가 갑자기 또 고함을 질렀다.

[누구든지 청구단서를 취득하려면 먼저 저 어린 녀석부터 생포하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독서생 이량 등 사파의 인물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막비강에게로 덮쳐 왔다.

[멈추시오!]

남산의성 악불령이 급히 고함을 지르며 분분히 장력을 발출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시키려 했다.

[낄낄낄....]

헌데 갑자기 음산한 괴소 소리와 함께 흑영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콰쾅!

[으악!]

[크아악!]

이어 몇 차례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군호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막비강을 포위 공격하던 사람 중 네 명이 상체가 박살이 나 죽어 있었다.

[으하하하! 내 아들은 노부가 데려간다!]

쏴아아!

막비강은 이미 우주도철에게 구출되어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서랏, 미친 늙은이야!]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한 채 우주도철을 추격했다.

오대기인 중의 두 고인은 삽시에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그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우주도철은 오봉도인이 틀림없이 추격해올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는 주로 울창한 수림과 계곡 등 적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장소만 골라 질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오봉도인을 떨쳐 버렸다.

어느덧 달이 서산으로 기울고 동녘에는 일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우주도철은 밤을 새워 질주했는지라 비록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이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만 쉬었다 가자!]

이윽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곧 자신이 어느덧 천대산(天臺山)에 도착했음을 알고 비로소 막비강을 내려놓고는 땀을 씻었다.

[노부는 가까스로 너를 구출했구나. 그러나 정사 양파의 인물들은 청구단서를 취득하기 위해 불원천리 여기까지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

우주도철의 안색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숙해졌다.

[노부는 천하를 수십 년간 종횡하여 이제 죽을 날도 머지 않았으니 청구단서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러니 너는 행여 내가 나쁜 마음을...!]

헌데 우주도철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낄낄낄...!]

갑자기 수림 속에서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하는 괴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그 웃음소리를 들은 우주도철은 안색이 일변했다.

[어서 받아라! 강적이 가까이 왔다!]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어 급히 막비강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가 저자와 싸움을 시작하면 너는 숲 속으로 숨어야 한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막비강도 사태의 엄중함을 깨달았다. 그는 보따리를 받아 품속에 넣으며 급히 물었다.

[의부께선 함께 가시면 안 됩니까?]

[저자는 나와 함께 천하오기 중에 드는 절정고수다. 평시였다면 두렵지 않지만...!]

우주도철은 말을 하다 말고 청색 인영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머금었다.

[귀화상(鬼和尙)!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막비강도 고개를 들어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대머리가 마치 거울처럼 번뜩이는 화상이었다. 몸은 마른 대나무같이 야위었으며 청색 승포를 입었는데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서 형형한 녹광(綠光)이 발산했다.

스스스!

[킬킬킬!]

그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면전에 도착했다. 그는 우주도철의 일 장 전면에서 걸음을 멈추고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은 현명한 사람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사실 빈승도 이 어린아이 때문에 찾아왔소.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직 상의할 여지가 있소.]

우주도철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귀화상! 당신은 무엇을 상의하려는지 말해 보시오.]

[빈승은 당신이 이 아이를 양자로 맞이했음을 알고 있으니 뺏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그러나 잠시 빌려주시오. 비급만 취득하면 곧 당신에게 돌려주겠소.]

[만약 노부가 빌려주지 않겠다면?]

[빈승의 말은 절대 신용이 있으니 빌려주지 않을 리 없지요.]

[미안하지만 노부는 빌려주지 못하겠소.]

[당신은 이 아이를 업고 밤새도록 달렸는데 빈승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소?]

그 사람의 이 말은 우주도철의 약점을 바로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도철은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인지라 쉽게 굴복할 리 만무했다.

[! 기껏해야 두 사람 모두 패하고 부상을 입을 것이오.]

[좋소. 정 그렇다면 빈승은 당신을 저승으로 먼저 보내 주겠소.]

[받아라!]

우주도철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함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꽈르르릉!

그는 비록 밤이 새도록 달렸지만 역시 오기 중의 인물은 비범하여 이 일장에 돌 조각이 날고 세찬 강풍이 일어났다.

귀화상은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삼 장 가량 미끄러져 우주도철의 강맹한 일장을 피한 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 노형의 일신의 음유(陰柔)한 무학이 강맹한 장세로 바꼈군. 이것은 여력이 다했다는 증거이니 빈승도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소.]

파앗!

그자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날려 막비강의 손목을 향해 잡아갔다.

막비강은 귀화상의 신법이 이렇게 쾌첩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서 인영이 번뜩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상대방에게 왼쪽 완맥을 붙잡혔음을 깨달았다.

퍼펑!

그러나 막비강은 진기를 한 모금 들이켜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다.

[놓아라!]

동시에 우주도철도 고함을 지르며 덮쳐 와 귀화상의 배심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

귀화상은 막비강의 의지가 이렇게 강한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앞가슴에 일장을 맞고 말았다. 또 우주도철의 일장이 배심을 향해 엄습해 오자 할 수 없이 몸을 솟구쳐 옆으로 피했다.

[! 함부로 날뛴 벌이다!]

우둑!

하지만 그자는 몸을 솟구치면서 막비강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고 그 바람에 막비강의 손목뼈가 그대로 빠졌다.

[아얏!]

콰당!

막비강은 격렬한 통증을 참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이 악랄한 땡추!]

우주도철은 대로하여 필생의 공력을 다해 공격을 가했다.

귀화상은 막비강을 끌며 싸우려니 행동하기가 불편했던지 막비강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살고 싶지 않다면 빈승은 살수를 펼쳐내는 도리밖에 없다.]

콰콰쾅!

우주도철은 상대방을 쫓아 버리고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맹공을 계속 가했다. 그리하여 오대기인 중의 두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생사존망의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에서 둥근 해가 떠오르고 아침 안개를 깨끗이 쓸어 갔다.

[! !]

[으음!]

천하오기의 두 고인은 기진맥진하여 강호의 일반 무사들보다 더욱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손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초식을 주고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비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왼쪽 손목에서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얏!]

그의 비명 소리에 혈전을 벌이던 두 고수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받아랏!]

[죽어랏!]

퍼펑!

두 사람 중 한 명은 막비강을 탈취하기 위하여, 다른 한 명은 막비강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서로 상반된 심리 상태에서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각각 여력을 다한 일장을 발출했다.

퍼펑!

[으아아악!]

[!]

우렁찬 폭음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개의 인영이 각자 뒤로 굴러 나갔다. 그중 하나는 그대로 뒤쪽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렸고 다른 하나는 막비강의 곁으로 굴러와 그의 몸에 부딪혀 비로소 멈추었다.

[와악!]

굴러온 인물은 검은 피를 한 모금 토하더니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의부!]

막비강은 통증을 참고 고개를 돌려보다가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으로 굴러온 사람은 바로 우주도철이었다.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진 자는 귀화상이었다.

막비강은 주위에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우주도철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맥박은 완전히 멎었으며 가슴을 만져보니 심맥(心脈)도 이미 끊어져 있었다.

[크흐흑! 의부! 저 때문에 돌아가시다니...!]

막비강은 우주도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비록 만난 지 반나절밖에 안 되었으나 우주도철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주었고, 결국 그를 지키기 위해 강적과 동귀어진한 것이다.

한동안 서럽게 울던 막비강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부상을 입고 도주한 것이 아닐까? 만약 상대방이 상세를 치료하고 되돌아온다면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눈물을 거두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손목뼈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빠진 것임을 알았다. 이에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골절을 원상대로 끼워 맞췄다.

그리고 땅을 파서 일대기인 우주도철의 시체를 매장한 후 공손히 절을 한 다음 수림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우주도철의 조그만 보따리 속에는 한 권의 연무비록(練武秘綠)과 몇 알의 만령환이 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백약에 정통한지라 만령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곧 독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성약(聖藥)임을 알고 한 알을 복용했다. 그러자 잠시 후 손목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상처가 치료되자 막비강은 연무비록을 펼쳐보았다.

우주도철의 연무비록에는 기공(氣功), 경공(勁功), 장공(掌功) 등 각가지 정묘한 절예가 기재되어 있었다. 도철식혼장(饕餮食魂掌), 우주일기공(宇宙一氣功), 일지참교룡(一指斬蛟龍)등의 절기는 하나 하나가 그 방면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든 빼어난 것들이다.

막비강이 이제껏 익힌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 남산의성등의 무공도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뛰어난 절기들이다. 하지만 우주도철의 무공을 접한 막비강은 염라철장 등의 무공이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과연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로구나!)

지금까지 익힌 무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기들은 막비강을 흠뻑 매료시켰다.

우주도철의 여러 무공들 중에서 막비강의 시선을 가장 잡아끈 것은 경신공부인 팔보간섬(八步間閃)이었다. 벼락 한 번 번쩍일 동안(間閃) 여덟 걸음(八步)을 간다는 이 경신술은 빠르고도 신묘했다. 막비강은 우주도철이 이 경신술로 같이 천하오기에 드는 오봉도인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던 일을 떠올렸다.

막비강은 비록을 한 차례 훑어보고 덮은 뒤 생각에 잠겼다.

(우주도철은 고귀한 생명을 희생해 가며 나를 구해 주었고 또 이런 절기들까지 남겼으니 그가 정파이든 사파이든 내게 베푼 은혜는 하해와 같다. 나는 기필코 그분의 피맺힌 원수를 갚고 말겠다.)

그는 귀화상이 이미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막비강은 다시 청구단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같이 고수가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경지하 강변에서 청구단서를 취득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비급이 숨겨진 곳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정월 대 보름날 밤이냐, 아니면 팔월 중추절 밤 삼경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중추절 삼경이라면 어젯밤에 많은 고수들이 경지하 물 속을 샅샅이 뒤졌을 테니 청구단서는 이미 어떤 고수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정월 대보름이라면 아직도 석 달이 남았으니 그동안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굴린 끝에 지금 경지하에 가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그는 근처 산 속에 한 채의 모옥(茅屋)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며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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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초상감각에 아주 빨리 눈 뜨는 것을 보고 충분히 가르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천록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버렸다.

양의신공의 구결을 진양진인이 풀어주기 시작하자마자 즉시 그 의미를 해득해버린 것이다.

양의신공같은 상승무공은 연공도 연공이지만 깨달음이 주가 된다.

특히 양의신공은 그 속에 여러 가지 무공의 비결을 담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양의신공에는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사용하는 양심공이 포함되어 있다.

무당에서 원로들 중에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양의신공 속에 있는 양심공의 구결이나 그 밖의 묘용들을 깨달아 익히는 자 또한 극히 드물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완벽하게 암송해낼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이끌어내 양의신공의 바탕으로 만드는데는 진양진인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자넨... 정말 신비하군. 마치 물을 담는 그릇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넨 양의신공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네.]

현천록은 내공을 쌓기 위해서 흔히 하는 토납(吐納)과 축기(蓄氣)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보통 내공을 닦을 때는 천지의 기운을 몸속에 받아들여 쌓고 키워 나가며 더욱 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처음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지기를 이끌어내게 되면 그 순수함을 바탕으로 크지는 않아도 아주 뛰어난 내공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진양진인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해득하면서 선천지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보는 그의 감회는 아주 특별했다.

양의신공은 도가의 무공이니 선천지기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진양진인은 어쩌면 양의신공을 다른 무공을 배운 후에 익혔기 때문에 선천지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천록이야 말로 진짜 양의신공을 익히게 되는 것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진양진인은 양의신공의 구결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양의신공은 이미 현천록의 무공이 되어 있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내력을 손으로 모아서 바위를 쳐보게.]

현천록의 손이 바위에 닿자 밀가루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

가볍게 돌가루가 날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정도면 얼마나 배운거죠?]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주 잘했네. 아마도 전설 속의 그 창허진인도 자네보다는 못했을걸세. 세상에 기재는 따로 있었네 그려. 그 정도면 다른 사람의 삼십년 공력에 못지않네.]

현천록은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이 무슨 생각에서 무당파의 최고 신공인 양의신공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기를 몸 속에 지니게 됐다는 사실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이제 자네가 내 몸에 양의신공을 조금 주입해서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현기와 명문, 좌협, 천중, 선기, 협곡이네. 아니아니! 자네는 혈도를 아직 모르겠군. 총명하니 금방 배우게 될걸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우리가 내기했다는 걸 잊기라도 한 것 같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잊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자네가 지게 될걸세. 일단 내말에 따르기로 했으니 내가 시키는대로 따르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이 자기의 몸을 일일이 짚어가며 혈도의 정확한 위치와 묘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들었다.

[이제 자네 손으로 직접 자네 혈도들을 확인해보게.]

진양진인이 아주 지친 듯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이 마치 거미줄에 휘감긴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손으로 혈도를 확인해나가는 곳마다 온 몸을 거미줄같은 것이 휘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삼백육십개의 혈도를 다 확인하고 났을 때는 마치 몸밖에서 몸을 보는 것처럼 자기의 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미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끊어지기도 하고 신음도 섞여있다.

장군묵의 손에 중상을 입고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전수하느라 지칠때로 지쳐버린 진양진인의 숨소리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을 다시 연습하면서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무공을 배우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X X X

 

하얀 눈으로 뒤덮힌 자금산에 태양이 떠올랐다.

눈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겠군. 겨울에도 나다니려면 몽면을 하든지 해야지 원.]

이매봉은 투덜거리면서 황금빛 일출을 맞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코를 끙끙거리면서 눈밭을 헤맸지만 결국 희미해져버린 현천록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매봉은 손수건을 깔고 앉았지만 엉덩이가 몹시 시려왔다.

어지간히 지치기도 지쳤다.

[어휴~ 그녀석!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정도로 생각했더니 나한테서 도망을 쳐? 어디 찾기만 해봐라 그냥...]

이매봉은 눈앞에 현천록이 있으면 치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햇살이 이렇게 찬란한데 주먹질을 해대는 건 어울리지 않을 성 싶어서다.

엉덩이는 찬바위를 닮아가며 싸늘하지만 얼굴은 햇빛을 받아 따스하다.

반이나마 온화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세상사는 낙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이매봉의 드문 감상은 세 사람이 산정으로 다가오면서 끝나고 말았다.

세사람은 흑의(黑衣)를 입었는데 눈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말 그대로 검은 점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이매봉은 마주쳐봤자 귀찮은 일만 있을 것 같아 적당한 바위를 찾아 몸을 숨겼다.

세 사람 모두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상이나 눈빛이 모두 바르게 살아온 사람같지는 않다.

친형제지간인지 모두 비슷한 얼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검을 들었고, 또 한사람은 한겨울인데도 합죽선(合竹扇)을 들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손안에서 호두 두 알을 굴리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호두를 굴리는 사람이 말했다.

[노대(老大)! 진양진인 그 늙은이가 머리를 좀 쓴 것 같소. 헤헤... 물론 노대에겐 못미치겠지만 말이오.]

합죽선을 든 사람이 어깨를 한 번 우쭐하며 웃는다.

검을 든 사람이 말했다.

[노대! 노삼(老三) 말이 맞소. 그 늙은이가 함정을 파놨을 거라는 짐작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졌소. 겁없이 날뛰던 놈들은 현무호에서 모조리 죽었소.]

촤락!

합죽선을 든 사람이 한 번 펼쳐서 얼굴을 부치며 말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노이(老二)! 너도 한번 생각해봐라. 진양진인과 포두화상은 절친하다고는 못해도 옛날부터 친구지간이었지. 한데 뜬금없이 현무호에서 만나 싸운다는 게 말이나 되나?]

호두알을 굴리는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진양진인이 옥황빙서를 가졌다면 포두화상이 싸움을 걸 수도 있지 않겠소?]

노대가 말했다.

[옥황빙서? ! 다들 미쳐서 날뛰는 옥황빙서 말이지? 진양진인이 가졌다고 들었는데 글쎄... 현무호에서는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괴물같은 놈이 나왔지. 모두 그 괴물같은 놈에게 옥황빙서를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는데 어떻게 됐나? 모두 죽었어. 그 괴물같은 작자는 옥황빙서에 대해서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노이가 말했다.

[그럼 노대는...]

노대가 말했다.

[잘 생각해야돼. 괴물같은 놈과 진양진인을 혼동하면 절대로 안되지. 진양진인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무공도 뛰어나지만 항상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이용하곤하지. 철저하게 계산적인 머리를 지닌 사람이지. 괴물같은 놈도 진양진인에게 이용당했을 거야.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가지고 있을거야. 우린 무조건 진양진인만 찾아서 죽이면 돼.]

노삼이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노대는 진양진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그려.]

노대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진양진인에게 패했던 걸 비웃는거냐?]

노삼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난 노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오. 석년에 노대가 그와 싸워 이기지 못한 것도 실상 노대의 삼음장(三陰掌)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소? 지금 노대는 삼음장을 대성했으니 진양진인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확실하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 알랑방귀 따윈 집어치워라. 진양진인이 왜 진양진인이겠나? 소양지(小陽指)의 공력을 지니고 있는데 내 삼음장인들 무슨 위세를 부릴까? 하지만 흥! 내겐 비장의 수법이 있지.]

그때 노이가 불쑥 물었다.

[노대, 진양진인은 누구한테서 옥황빙서를 얻었소? 그리고 대체 옥황빙서가 뭐요?]

노대는 한심하다는 듯이 노이를 보고 나서 말했다.

[옥황빙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옥황빙서에는 어떤 곳을 가리키는 지도가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천상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옥황빙서를 얻는다면 첫째는 무공을 익히고 둘째는 지도에 적힌 곳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다.]

노이가 물었다.

[옥황빙서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 사부님께 얼핏 들은 적이 있소. 대체 옥황빙서는 얼마나 오래된 것이오?]

노대가 말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없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이 됐는지도 모르지.]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만약 옥황빙서를 얻게 된다면... 무공은 함께 익힐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곳을 찾아가는 것도 함께 할 수 있소? 혹시 한 사람만 갈 수 있다면...]

노대가 차갑게 쏘아부쳤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 쓸데없는 걱정말고 진양진인이나 찾아봐! 틀림없이 자금산 중에 있을 테니까.]

노삼이 입이 쑥 들어갔다.

노대가 말했다.

[현무호에서 자금산 쪽으로 묘한 냄새가 이어졌단 말이야.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냄새같기도 한 냄새지.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잘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묘한 냄새야. 어쩌면 옥황빙서에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고 진양진인이 가진 다른 물건 냄샐 수도 있지. 어쨌든 이 근처가 틀림없어.]

이매봉은 노대라는 자가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늙은 생강이네. 우리가 쓰는 일매향(逸梅香)은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릴 수도 없는데... 완전 개코다! 한데 일매향은 현천록한테서 나는 냄새잖아. 진양진인이라니 당신들은 짚어도 한 참 잘못짚었어.)

이매봉은 바위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나도 못찾은 녀석 당신들이 찾아주면 고맙지.]

그때 노이가 말했다.

[노대! 산 동쪽으로 가면 동굴이 하나 있소. 절벽 중간에 있는데 혹시 그곳에 숨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갑자기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웬놈이냐!]

이매봉은 그 소리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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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간쟁탈전

 

 

 

[이놈아! 너는 누구냐?]

삼촌정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막비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추명염왕이 뒤따라 도착하며 고함을 질렀다.

[애송아! 너는 감히 막비강, 곡능천, 능곡천이 아니라고 말할 테냐?]

막비강은 그자가 단숨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자 내심 뜨끔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노인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못 알아듣겠소.]

뒤어어 도착한 소면호도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 수작 부리지 마라! 노부가 네놈의 몸을 수색해 보겠다!]

막비강은 한 걸음 물러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 몸에서 무엇을 수색하겠다는 거요?]

!

하지만 소면호는 대꾸하지 않고 지풍을 날려 막비강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수색하여 무협제원의 유물인 신녀비를 찾아냈다.

[교활한 놈! 이래도 시치미를 뗄 테냐! 이건 무협제원의 신녀비가 아니냐?]

소면호는 비수를 막비강의 목에 들이대었다. 그는 이미 막비강이 무협제원의 무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

소면호는 금방이라도 신녀비로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며 말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라니요?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소. 생사람 잡지말고 빨리 혈도나 풀어주시오! 그 단검은 허리춤에 붉은 빛이 도는 호로를 찬 내 또래의 소년이 준 것이오.]

막비강의 말에 마두들은 흠칫했다.

하지만 소면호는 끝내 의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 놈이 무엇 때문에 이런 절세보검을 네게 주었느냐?]

막비강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둘러댔다.

[그는 내게 우혈(牛穴)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소. 그래서 알려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그 단검을 내게 주었소.]

빈틈없는 막비강의 대답에 세 마두는 반신반의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의 말을 잠시 믿어주겠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놈이 보이지 않으면 네놈을 대신 우혈 속에 던져 버리겠다.]

삼촌정은 즉시 막비강을 옆구리에 끼고는 경신술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곧 경지하 변에 높이 솟아있는 절벽 앞에 이르렀다. 그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때때로 안쪽에서 소가 우는 듯한 괴성이 들려 우혈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막비강은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경지하 변에 우혈이란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다가 세 마두에게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과 세 마두가 우혈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만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어른을 속여? 네놈부터 먼저 죽이겠다.]

소면호는 우혈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살기 어린 노성을 질렀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다급히 말했다.

[당신들은 비급을 취득하러 왔다고 말했지 않소? 그럼 그 소년이 먼저 우혈 안으로 비급을 찾으러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추명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안을 살펴보자.]

삼촌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비강을 옆구리에 낀 채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그때 소면호가 삼촌정에게서 막비강을 낚아채며 말했다.

[난쟁아! 너는 몸집이 작아서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보기에 적합하다. 이놈은 내가 업고 뒤따라 들어가고 염왕을 내 뒤에서 보호하게 하자.]

삼촌정과 추명염왕은 소면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막비강도 속으로 탈출할 계획을 생각하며 소면호의 등에 업힌 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량 들어가자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 그와 함께 발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의 바닥을 이루는 바위의 아래쪽에는 지하수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의 수위가 변하며 간간이 소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는 것이다.

[... 큰일날 뻔했구나!]

문득 앞장서서 들어가던 삼촌정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동굴 바닥이 끝나며 수직 동굴이 나타난 때문이다. 자칫 했으면 삼촌정은 그대로 수직동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이 수직 동굴은 얼마나 깊은 지 알 수가 없다. 삼촌정이 품 속에서 천리화(千里火)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아래쪽을 비추어 보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직 동굴 아래쪽에서는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운 냉기(冷氣)가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든다.

길이 끊긴 것을 확인한 삼촌정은 고개를 홱 돌려 막비강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 여기 어디에 사람이 있느냐? 이 수직갱 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너무 깊어 일단 뛰어내려가면 올라올 수도 없다. 설마 막비강이란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단 말이냐?]

하지만 막비강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나라도 절세비급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을 거요.]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 !

[으악!]

[고금! 네놈이... 으아아아!]

갑자기 두 차례 둔탁한 폭음이 일어나고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풍덩! 풍덩!

그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대로 수직갱 아래의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어둠 속에서 소면호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희 두 노적은 비급 때문에 지금까지 나와 다투었지만 이제는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과 다투어라!]

수직갱 속으로 추락한 것은 바로 추명염왕과 삼촌정이었다. 소면호가 방심하고 있는 그들을 장력으로 급습하여 수직갱에 밀어버린 것이다.

막비강은 짐짓 겁에 질린 척하며 벌벌 떨었다.

[... 살려 주세요!]

[흐흐흐! 어린 녀석아, 무서워할 것 없다.]

소면호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노적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넌 죽이지 않을 테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바른 대로 말해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막비강이 시치미를 떼었으나 소면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앞에선 어리석은 수작 부리지 마라. 끝까지 곡능천이 아니라고 고집부린다면 네놈도 저 속에 던져 버리겠다.]

[난 오진강(吳振綱)이라는 소흥부 사람입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데려가 물어 보면 알게 될 텐데 왜 나를 곡능천이라 하는 거요?]

[주둥아리 닥쳐라!]

소면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외쳤다.

[아무리 교활해도 사람에겐 실수가 있는 법이다. 그저 길을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절세보검을 기증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리고 노부는 네놈의 허리띠가 원래의 그 허리띠임을 알아보았다. 설마 곡능천이 허리띠까지 네게 주진 않았겠지?]

막비강은 더 이상 시치미를 떼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자신이 천면신룡 곡능천임을 인정했다.

[확실히 당신은 죽은 두 인간보다 세심하군. 이렇게 잡혔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경지하로 돌아가자.]

소면호는 막비강을 달래기 위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만약 청구단서를 얻게 되면 노부는 청구상인의 무공과 노부의 일신 절예를 모두 네게 전수하여 제자로 삼아주겠다.]

그자의 말에 막비강은 속으로 냉소했다.

(! 만약 네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나는 그 무공으로 네놈부터 없애버리겠다.)

막비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면호가 또 웃으며 물었다.

[! 그러니 어서 말해봐라. 네가 파손한 석벽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었느냐?]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한 수의 시구가 새겨져 있었소.]

막비강은 이어 시구를 읽어 주었다. 하지만 다른 구절은 석벽에 새겨진 대로 말해 주었으나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라는 구절은 가득 찬 달밤 삼경에 북두(北斗)의 손잡이가 이동하여로 고쳐 말했다.

소면호는 막비강이 말한 시구를 한 동안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구는 과연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리는 관건이구나.]

[그렇소. 이 시구의 뜻으로 보아 달 밝은 밤에 경지하 강변에 가면 틀림없이 청구단서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오.]

소면호는 막비강이 시원하게 비급의 행방을 말하자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보니 너는 정말 총명하고 시세를 아는 아이구나. 노부는 설사 그 비급을 찾지 못한다 해도 노부의 절기를 모두 네게 전수해 주겠다.]

[아직 비급도 찾지 못했고 또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절기를 전수받은 후 노부를 기억해주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럼 우리 그만 영롱탑 근처로 가서 삼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막비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군요. 그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보름 달밤이라야 하며 그것도 팔월 중추절 밤의 삼경을 가리키는 것일 거요. 오늘은 스무날이니 앞으로 스무닷새가 더 지나야만 보름달이 옵니다.]

소면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막비강의 총명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소년의 계략에 걸려들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께닫지 못했다.

 

* * *

 

이십오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어느덧 둥글게 찬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대지는 은가루를 뿌려 대낮같이 밝았다.

막비강은 지난 이십오 일간 소면호를 따라다니며 많은 무학비결을 배웠다.

그리고 이날 소면호와 함께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강변에 이르렀다.

[와아!]

[크아아악!]

챙채앵! 퍼퍼펑!

하지만 이 무렵 경지하 강변에는 무수한 인영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죽고 죽이며 토해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내심 조소를 머금는 동시애 우려를 금치 못했다.

(저들도 청구단서 때문에 여기에 온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 시간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면호도 내심 의혹을 금치 못하고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그들도 대석비곡에 가서 그 석벽의 글자를 본 것이 아니냐?]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석벽의 글들을 긁어내긴 했지만 글이 적혀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만일 공력이 심후한 자라면 원래의 글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면호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지워진 시구를 다시 판독했다 해도 저자들 역시 나처럼 그 안의 뜻을 절반밖에는 풀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반만 풀이했다면 이렇게 공교롭게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막비강은 이렇게 대꾸한 후 영롱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영롱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귀화가 나타난다는 장몽아의 말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무림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남산의성 악불령 등 막비강도 눈에 익은 무림 고수들이 끼여 있었다.

하지만 오봉도인과 조씨부인 일가, 그리고 날수선랑 조손(祖孫)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수선랑과 조씨부인 일가는 집안에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다 하더라도 오봉도인은 대석비곡까지 왔었는데 비급 탈취 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악() 노인과 먼저 고하를 가늠하고 싶소.]

그때 많은 인파 중에서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 외치며 걸어나왔다. 그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반면 두 눈에서는 새파란 남광이 번뜩여 사이하고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저자가 육요(六妖)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李良)이다!]

소면호가 설명해 주었다.

(백독서생 이량!)

막비강도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유심히 그자를 지켜보았다.

별호 그대로 백가지 극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백독서생 이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용독(用毒)의 천하제일인이다. 그 때문에 어떤 고수라도 백독서생 이량을 상대하길 꺼려한다.

[하하하! 그동안 이 서생의 용독술이 제법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니...!]

군중들 속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약초 캐는 호미를 든 노인이 중인들을 헤치고 나갔다. 이 노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이었다. 백독서생 이량이 용독으로 천하제일이라면 남산의성 악불령을 용약(用藥)으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단났구나! 천오주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저분은 무엇으로 백독서생을 대항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대신 나가 백독서생을 상대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막비강이 숨어 있던 수풀에서 나가려 하자 소면호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끌어안았다.

[너는 왜 이렇게 마음이 착하냐? 우린 그들이 서로 싸워 죽을 때를 기다렸다 나가서 뒷수습만 하면 된다.]

[안 됩니다. 악 노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꼭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너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소면호와 함께 이십여 일을 같이 생활하며 상대방의 절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비열한 행위와 독랄한 마음을 보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반감이 더했다.

[가지 말라면 가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면호로 하여금 팔을 놓게 했다.

[이얏!]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풀 숲에서 날아 나갔다.

[이놈이...! 거기 서지 못해?]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뒤따라 몸을 솟구쳐 추격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어 근 일 갑자의 공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먼저 몸을 날렸다. 그 때문에 소면호의 경공신법이 아무리 쾌첩하다 해도 단번에 그를 추격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남산의성 악불령과 백독서생 이량은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 막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들리는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의 인영이 비조(飛鳥)처럼 날아오고 그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남산의성 악불령은 전면의 인영이 전개하는 신법에서 반년 전에 만났던 소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걱정 마라, 아이야!]

그는 급히 달려가 막비강을 맞이한 다음 소면호에게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왜 어린 후배를 괴롭히는 거요?]

[비켜라!]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상대방의 장풍이 강맹함을 느끼고 황급히 일장을 맞받아 냈다.

!

그러나 이 무렵 소면호는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는지라 남산의성 악불령은 팔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누군가 했더니 고명이 쟁쟁하신 소면호 고 노인이셨군!]

악불령은 몸을 가눈 다음에야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즉시 오른손의 뇌강서로 둥근 흑광을 형성하여 질풍처럼 덮쳐 갔다.

소면호는 자기의 무예가 상대방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음을 알고 처음부터 전신의 공력을 발출했었다. 헌데 상대방이 병기를 휘두르며 덮쳐 오자 더욱 두려움을 금치 못하고 급히 쌍구검(雙鉤劍)을 뽑아 평생의 절학을 다해 악불령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백독서생 이량 앞에 도착하여 포권의 예를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 선배님의 독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후배 오진강이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장내의 군중은 그의 그 같은 행위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대개가 강호에서 위명을 떨친 고수들이지만 백독서생 이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헌데 갑자기 약관도 안된 어린 소년이 백독서생 이량에게 도전한 것이다.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막비강의 안위를 걱정했다.

백독서생 이량은 자기 소개를 하고 나온 자가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소년임을 보고 실소했다.

[애송아! 너의 담량은 대단하구나. 너는 누구의 자제이며 사부는 누구냐?]

[후배에겐 사부도 없고 부친도 없습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이냐? 사부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부친이 없다면 너는 어디서 났단 말이냐?]

[물론 부친이야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자신도 내 부친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친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전할 필요 없이 노부를 사부로 모셔라. 그럼 네게 독문(毒門)의 용독학(用毒學)을 전수해 주겠다.]

[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잔재주 따위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독공이 잔재주라는 막비강의 말에 백독서생 이량의 눈에서 한 줄기 살기가 발산되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글쎄, 그게 쉽게 될지 의심스럽군요.]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량에게 도전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뇌강서로 강맹한 일초를 공격한 다음 소면호를 버려 둔 채 질풍처럼 날아왔다.

[얘야,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는 이어 백독서생 이량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기명제자(記名弟子).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니 실례가 있었더라도 이해하시오!]

백독서생 이량은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은 사부도 부친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당신의 기명제자라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그는 노부의 기명제자이기도 하오.]

소면호가 뒤따라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저 아이가 남산의성의 제자이며 또 소면호의 제자라고?]

장내의 군웅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정사(正邪) 양파의 무학을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너무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뿐 아니라 백독서생 이량 등도 어리둥절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자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등 세 사람의 무공을 배웠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다시 소면호의 무공을 배운 것에 대해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고 노인,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추켜세우지 마라. 설령 당신이 저 아이에게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해도 기명제자라곤 말할 수 없다.]

소면호가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를 너의 기명제자라 말하느냐?]

[그가 나의 독문의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독문무학을 배웠다.]

백독서생 이량이 옆에서 웃으며 참견을 했다.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투지 마시오. 이 아이가 내게 도전해 왔으니 나는 그를 양자로 삼아야겠소.]

[핫하하하!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비급 쟁탈전이 이제 사람의 쟁탈전으로 변하다니...!]

문득 허공에서 누군가의 가가대소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화라라라!

처음 웃음소리는 분명 수마장 밖에서 들려 왔는데 다음 순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실로 대단한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쿠쿵쿵!

지축을 흔들며 날아 내린 인물은 한 명 산발한 노인이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산발을 했고, 얼굴의 절반은 지전분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다 낡아 해진 관복이었는데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아 때로 찌든 커다란 발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미친 사람 형상의 노인이 나타나자 중인들은 안색이 변해서 급히 사방으로 물러섰다.

[우주도철(宇宙饕餮)! 우주도철이다!]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우주도철!

 

그렇다. 그 광인이야말로 전대의 최절정고수들인 천하오대기인 중의 우주도철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벼슬을 했던 적도 있어 늘 낡은 관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도철(饕餮)이란 본래 탐욕스럽고 광폭하여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의 괴물이다.

별호에 그 도철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 인물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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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4)

 

 

 

현무호에 왔던 이매봉은 혀를 찼다.

[! 한 발 늦었어.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겠는걸.]

근처 바위 위에 서있던 상관숭이 시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자는 이십년 전에 좌검우도(左劒右刀)로 이름을 날렸던 관부의 고수 황보전호(皇甫戰虎)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은거했다질 않았나?]

상관숭이 말했다.

[속하가 살펴본 스물일곱은 모두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뭣 때문에 다시 강호에 나와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옥황빙서 때문이야. 죽은 놈들이 외치는 소리도 못 들었어? 멀리까지 들리던데.]

상관숭이 이매봉 앞에 날아내리며 말했다.

[옥황빙서는 전설입니다. 아직 누구도 그걸 가졌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곱째라는 자가 옥황빙서라는 걸 가졌겠군. 그러니까 그처럼 대단한 척하겠지.]

이매봉이 말했다.

[그 괴물을 잡아놓고 한 번 확인해보자구. 어때 너하고 한 번 붙어볼 만 하겠어?]

상관숭이 머리를 저었다.

[이백 초를 넘기지 못하고 찢어질 것입니다. 그자는 무공에 있어서 이미 일대종사(一代宗師)입니다. 어느 누구도 무공으로는 그의 앞에서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살며시 접근해서 실험만 해보면 되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고 말 걸?]

상관숭이 말했다.

[금은동철석의 오보(五寶)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매봉이 말했다.

[한 녀석이 사기치길래 그냥 줘버렸어. 한 삼년 있으면 다시 구하게 되겠지.]

상관숭이 아주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매봉이 활달하게 말했다.

[이봐! 너희들 오신검(五神劍)은 지금도 충분히 강해. 그리고 삼년 뒤에 다시 오보가 준비될 테니 서두르지마!]

[알겠습니다.]

상관숭이 머리를 숙였다.

금은동철석, 이 다섯 가지의 정화는 상관숭이 속해있는 오신검(五神劍)의 검을 다시 녹여 보강할 중요한 재료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할 검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검이 된다.

상관숭은 머리를 숙였지만 지난 삼년을 기다렸는데 다시 삼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이매봉이 말했다.

[오보는 그 녀석을 찾는 중요한 단서다. 우리 물건들에는 특이한 향이 들어있다는 걸 녀석은 모르고 있어.]

상관숭이 불쑥 말했다.

[그를 좋아하는군요.]

순간 이매봉의 손이 춤을 추었다.

짜짜짜자작!

상관숭의 양쪽 뺨에 불이 튀었다.

그리고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턱을 걷어찼다.

상관숭은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 까뒤집어진 후에 눈 위에 떨어졌다.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머리를 밟았다.

상관숭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매봉이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숭! 본회주를 청루의 기녀쯤으로 아느냐?]

상관숭은 머리를 들래야 들 수도 없었다.

[속하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이매봉이 소리쳤다.

[죽여 달라는 소리 대신 용서하라고?]

[죽여...주십시오.]

상관숭이 힘없이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이매봉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살아나긴 틀렸다 싶었다.

이매봉은, 상관숭이 아는 이매봉은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망설이거나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이매봉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들이 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거칠 것 없이 행동하고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매봉이었다.

상관숭도 그녀의 입에서 무시무시하고도 중대한 결정들이 장난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숱하게 봤었다.

이매봉이 말했다.

[본 회주를 빈정거리거나 억누르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 상관숭! 여기서 머리를 박살내고 싶지만 바꿔 신을 신이 없어 그냥 둔다. 하지만 즉시 돌아가라. 돌아가서 형극(荊棘)의 방에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

형극의 방...

상관숭은 앞이 캄캄해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간다면 죽어나오거나 미쳐 나오는 두가지 경우 밖에 없다.

약한 자는 모두 죽었고 강한 자는 미쳤다.

하지만 명이 떨어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 회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상관숭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매봉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관숭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늦는다면 그 뒤에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모른다.

회주 이매봉은 여자인 것이다.

여자의 앙심은 처음에 풀어놓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보복을 당한다.

남자 보기를 소 닭 보듯 하는 이매봉에게 실언을 했으니 처음부터 그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면,

상관숭은 오보가 새로 완성되기 전에 자기는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매봉은 다정다감한 듯 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여자다.

다정다감함에 잠시 경계를 늦추었던 것이 실수다.

더구나, 제멋대로 인듯하면서도 거대한 조직을 조금의 실수도 없이 이끌고 있다.

이매봉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상관숭이 달려가는 방향은 서쪽이다.

같은 시간 이매봉은 냄새를 쫓아서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매봉은 자금산을 향해서 달려갔다.

(현천록 그 녀석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현무호에 일어났던 혈풍도 녀석 때문인지도 몰라. 재미난 일이야. 녀석을 만나고부터 계속 이상한 일들이 생기니... 게다가 옥황빙서라니 후훗!)

머릿속에 현천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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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머니를 닮은 여인

 

 

 

오봉도인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켰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이 어린 녀석에게 물어 보시오.]

오봉도인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빈도더러 어린아이에게 물어 보라는 거요?]

삼촌정이 옆에서 급히 말을 받았다.

[곽 형의 말이 옳소. 도장은 저 어린 녀석에게 물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오.]

[좋소. 그럼 빈도는 오늘 파격적인 일을 한 가지 하겠소.]

오봉도인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막비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빈도와 인연이 많을 것 같구나. 도대체 무슨 일로 그들과 이런 싸움을 하느냐?]

막비강은 겉으로는 청수하게 보이는 이 노도사의 무서운 내력을 모르는지라 솔직히 대답했다.

[이 노적들이 제게 청구단서의 행방을 알려 달라기에 이곳의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는데도 믿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저 분 할머니와 개방 사람들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오봉도인은 무엇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년 남짓 사이에 각처의 큰 비석이 모두 파헤쳐져 있기에 빈도는 여기의 큰 비석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내 추측이 맞았구나. 그래, 청구단서는 찾아냈느냐?]

추명염왕이 냉랭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비급이 비석 밑에 있었다면 우리가 벌써 꺼냈지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 같소?]

[그럼 비급은 지금 어디 있소?]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에게 있소.]

막비강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노마는 무슨 근거로 비급이 내 몸에 있다고 하는 거냐?]

추명염왕은 징그럽게 웃었다.

[노부는 네 놈이 석벽의 조각을 파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만약 그 가운데 비밀이 없었다면 넌 왜 그 조각을 파손시켰느냐?]

오봉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렇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툴 필요 없소. 비급이 이 비석 밑에 없으면 개방과는 무관하니 이 아이를 빈도가....]

추명염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받았다.

[당신은 이 어린 녀석을 데려갈 생각이오?]

[? 염왕은 내 행동을 제지할 작정이오?]

추명염왕은 소면호와 삼촌정에게 눈짓을 하더니 오봉도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셋이 한꺼번에 오봉도인을 상대할 속셈인 것이다.

오봉도인은 빙긋이 웃으며 막비강에게 말했다.

[너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거라. 빈도는 그들을 수습한 다음 너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겠다.]

이때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 고금의 일장부터 먼저 받아랏!]

!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격출되었다.

오봉도인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막비강을 붙잡고 옆으로 슬쩍 피했다.

하지만 삼촌정이 구르듯이 추격하며 일장을 뻗어냈고 추명염왕과 소면호도 옆에서 각각 협공을 가했다.

오봉도인은 얼굴을 굳히더니 소매 속에서 우선(羽扇)을 꺼내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스스스!

그러자 세 명의 절정고수가 격출한 장풍은 거짓말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침착한 태도와 오묘한 초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오 장 뒤로 물러선 후 내심 몹시 흠모했다.

(만약 이분 노도를 사부로 모신다면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탈한 막가 악적을 충분히 죽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날수선랑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어 막비강의 귓전으로 모깃소리 같은 작은 음성이 전해졌다.

[아이야, 빨리 여길 떠나라! 저 도인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막비강은 내심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이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오봉도인의 청수한 겉모습에 그대로 속아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비강은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오봉도인을 응원했다.

[하하하! 정말 오묘한 초식이십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봉도인을 치켜 올렸다.

파앗!

그러다가 쌍방의 격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벼락같이 몸을 솟구쳤다.

[어엇! 저 애송이가!]

[거기 서랏!]

네 명의 마두가 실색했을 때 이미 막비강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기지를 발휘하여 마두들의 추격을 따돌린 막비강은 곧 역용환으로 용모와 옷차림을 바꾼 후 소흥부(紹興府)로 향했다.

금릉에서 소흥부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무림인이라면 경신술을 펼쳐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막비강은 무려 닷새나 걸려 겨우 소흥부에 도착했다. 혹시나 마두들에게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봐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 때문이다.

덕분에 막비강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소흥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흥부에 도착한 막비강은 길을 물어 약야계(約野溪) 부근의 경지하를 찾아갔다.

경지하를 찾아간 막비강은 높직한 강변 언덕 위에 한 채의 칠층보탑(七層寶塔)이 보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칠층보탑이 있는 강변의 풍경이 대석비곡의 석실에서 본 산수화 조각과 완전히 일치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탑이 바로 영롱탑이겠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드디어 난 청구단서가 있는 곳을 찾아냈구나!)

헌데 그가 흥분하여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보탑에서 밤이면 빛을 흘리는 게 요정(妖精)일까요 요귀(妖鬼)일까요?]

돌연 어디선가 은방울 소리 같은 소녀의 음성이 전해 왔다.

[세상에 요귀가 어디 있느냐? 그건 다 무림인들이 양민들로 하여금 겁을 먹고 접급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두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닐까?)

막비강은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강변에 자리한 초가집의 대나무 울타리 뒤에 두 개의 크고 작은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녀(母女)로 보이는 두 여인은 영롱탑을 응시하느라 막비강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두 여자가 다 눈에 익잖은가?)

막비강은 두 모녀의 옆얼굴을 보며 갸웃했다.

모녀 중 딸 쪽은 열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이는데 바로 대석비곡에서 자신을 도와 준 연아란 소녀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다만 다른 점은 연아가 활달한 편에 비해 이 소녀는 새침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어머니를 닮았다!)

그리고 모녀 중 어머니 쪽을 본 막비강은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여인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와 판에 박은 듯 흡사했던 것이다.

다만 이 여인은 농사일을 하는 탓인지 피부가 좀 검다. 그리고 날씬한 한경파와 달리 상당히 살이 쪄서 풍만해 보이는 점이 차이일 뿐이었다.

또 하나 다른 점이라면 막비강의 생모 한경파가 늘 어둡고 쌀쌀맞은 표정인데 반해 이 여인은 아주 푸근하고 자애스러운 표정을 지니고 있다.

여인은 막비강이 진정으로 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여인이 어머니라면 자신의 어리광이나 투정도 다 받아줄 것만 같다.

막비강은 한동안 망연자실해서 생모를 닮은 그 촌부(村婦)를 바라보다가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넓은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인가?)

막비강은 고소를 지으며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가 막 대나무 울타리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사람이 영롱탑 쪽으로 가고 있어요. 혹시 저 사람도 요귀들의 일당이 아닐까요?]

소녀가 막비강을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다. 남의 집 귀한 도련님을 요귀의 일당이라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는 소녀를 꾸짖더니 곧 막비강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너는 이 일대에 밤만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못 들었느냐?]

막비강은 웃으며 포권을 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소흥부에 처음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한 줄 몰랐습니다.]

[!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어린 네가 혼자 나돌아다니면 집안어른들께서 걱정하지 않느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막비강은 본명이나 곡능천이라는 새 이름을 말하기 뭣해 대충 둘러대었다.

[저의 성은 능()가고 이름은 곡천(曲天)이라 합니다.]

그러자 소녀가 코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 당신은 왜 곡능천이라고 하지 않죠?]

막비강은 잠시 당황하다가 말을 이었다.

[부모가 주신 성을 어떻게 마음대로 고칠 수 있소?]

소녀가 또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성은 고칠 수 없다고요? 그럼 왜 고쳤다가 또 고치곤 하세요?]

[내 이름은 진짜 능곡천이오. 낭자에게 이름을 속일 필요가 뭐 있소?]

자애로운 인상의 촌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얘야, 우릴 속일 필요 없다. 너의 본명은 막비강이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곡능천이라고 개명했다가 금릉에서 다시 능곡천로 고치고....]

소녀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다음에 만나면 천능곡(天凌曲)이라고 바꿀 거예요.]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면전의 이 촌부의 얼굴이 생모를 빼닮은 탓에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촌부는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너의 정체는 이미 천면신룡(千面神龍)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이름만 바꿔서는 남의 눈을 속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천면신룡이란 별호가 붙었구나!)

막비강은 비로소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음을 알았다.

천면신룡이라는 별호는 제법 마음에 든 막비강은 웃으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누구신데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십니까?]

[내 성은 조()가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로 장몽아(張夢兒)라 한단다. 이 아이에게 장연아(張燕兒)라는 말괄량이 동생이 있는데 너는 이미 만나 보았을 것이다.]

막비강은 그제서야 내막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날수선랑 송 할머니께서 아주머니께 말씀해 주셨군요. 어쩐지 금릉에서 고친 이름까지 아주머니께서 알고 계시더라니....]

[네가 여기 온 건 비급을 찾는 일과 관련이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많은 무림인들이 이 근처에 출몰하고 저 낡아빠진 탑에서는 밤마다 불빛이 흘러나오더구나.]

막비강은 무림인들이 출몰한다는 조씨부인의 말을 듣고 안색이 일변했다.

[아주머니, 어떤 인물들이 이곳에 찾아왔습니까?]

조씨부인은 칠층보탑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얘기를 나누자.]

조씨부인은 사립문을 열고 막비강을 맞아들였다.

 

조씨부인의 집은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여덟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비록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가지만 뒤로는 악야계의 그림같은 봉우리들을 등지고 있고 앞쪽에는 천하절경인 경지하가 흐르고 있어 빼어난 운치를 풍겼다.

막비강이 조씨부인의 안내를 받아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집 뒤에서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말한 그 바보가 왔으니 어서들 나가 봐라!]

이어 세 명의 소동들이 왁자하니 뛰어나왔다.

일곱 살에서 열 두어살까지인 이 개구쟁이들은 장연아와 장몽아를 닮아서 그녀들의 친 동생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막비강은 아이들에 둘러 쌓인 채 집 뒤쪽을 보며 웃었다.

[내가 바보라고 해둡시다. 헌데 낭자는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소?]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거라구요!]

집 뒤에서 장연아가 웃으며 나왔다. 새침 떠는 언니 장몽아와 달리 이 말괄량이의 얼굴에서는 생글생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지자 마두들은 싸움을 멈추고 당신을 추격해 갔어요. 우리도 즉시 따라가려고 했는데 범개선이 할머니에게 당신이 경지하로 갈 거라 말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이리로 달려왔지요. 우연인지 당신이 찾아온 곳이 우리 집 근처였지 뭐예요.]

장연아가 말하는데 조씨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거라.]

막비강이 세 모녀를 따라 대청에 들어가니 십여 명의 남녀노소가 앉아 있었다.

날수선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칠순 가량의 노부인이 일가친척으로 보이는 어른들에 둘러 쌓여 앉아있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에게 그들을 차례로 소개시켜 주었다.

막비강의 어머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 조씨부인은 막비강이 생각했던 대로 날수선랑의 딸이었다.

, 장씨 집안과 날수선랑은 사돈간인 것이다.

장씨 집안은 지금은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한 때 표국을 운영했던 무가(武家).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張大日)이 표행을 나갔다가 흑도의 흉사들과 시비가 붙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사고로 장씨 일족은 표국을 그만 두었고 장대일은 얼마 안 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즉 조씨부인은 현재 과부(寡婦)인 것이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보다 한 살이 아래인 마흔 두살이다.

하지만 결혼은 한경파보다도 먼저 했다.

조씨부인은 불과 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 장대일과 금슬이 아주 좋아서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다.

장연아 장몽아 자매 위로도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은 장성대(張成大)라고 하며 벌써 스물 여섯 살이나 되었다. 조씨부인은 첫 아들을 겨우 열일곱살에 낳은 것이다.

둘째 아들 장성일(張成日)도 막비강보다 세살이 많은 스물 두 살이다.

두 아들은 이미 장성하여 집안일을 이끌어 가고 있다.

듬직한 두 아들을 낳은 후에도 조씨부인은 꾸준히 아이들을 가져서 이남삼녀를 더 낳았다.

장몽아, 장연아를 연년생으로 낳고 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것이다.

막내딸인 장상아(張翔娥)는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이 변을 당했을 무렵 아직 그녀의 뱃속에 있었다.

[엄마! 젖줘!]

올해 네 살인 이 귀여운 소녀는 사람들이 보는 중에도 자꾸만 엄마의 품에 파고 들어 젖을 찾는다. 전형적인 막내딸인 장상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

조씨부인은 손님인 막비강이 있는 자리건만 별 거리낌 없이 저고리 고름을 풀어 가슴을 들어내고는 막내딸에게 젖을 물려주었다.

물론 젖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도 장상아는 맛있다는 듯 엄마 젖을 빨며 한 손으로는 엄마의 다른 젖을 쥐고 조물락거린다. 아마도 아버지가 없이 자란 응석을 이런 식으로 부리는 모양이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얼굴과 달리 조씨부인의 젖가슴은 너무도 희고 곱다. 갓 쪄낸 백설기같이 하얀 그녀의 젖가슴은 또 아주 풍만하고 탐스럽다.

큼직한 수박만한 살덩이 두 개가 거친 삼베 저고리 사이에서 털렁 드러나 출렁거린다.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또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젖을 먹여 키운 탓인지 조씨부인의 유방은 좀 늘어진 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탄력과 묵직한 중량감을 지녀 보기에 좋다.

막비강은 막내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 한경파가 너무 쌀쌀맞은 탓에 막비강은 일찍 젖을 떼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모성, 특히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자애스러운 표정으로 막내 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은 막비강이 늘 꿈꿔오던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딸에게 젖을 물리던 조씨부인은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이 딸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넋을 놓고 보는 막비강과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굳이 자기 젖가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막비강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을 전부 소개받았다.

장신을 차린 막비강도 자신이 혈검산장을 뛰쳐나온 사정을 실토했다. 어머니를 닮은 조씨부인때문인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이 남같게 느껴지지 않은 때문이다.

[가엾기도 하지! 이젠 그만 고생하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구나.]

조씨부인에게 시어머니 되는 노파가 막비강의 손을 꼭 쥐며 인자하게 말했다.

막비강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푸근한 가족의 정을 느낀 때문이다.

[할머니! 말씀은 고맙지만...!]

헌데 막비강이 막 대답하려 할 때였다.

[우우우!]

돌연 멀리서 날카로운 여자의 장소성이 전해 왔다.

그 장소성을 들은 장씨 일족 어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돈어른이 또 그 마두들을 만난 모양이구나.]

조씨부인의 시어머니가 급히 지팡이를 들고 일어서려 했다. 비록 칠순은 넘었지만 젊은 사람처럼 정정한 것으로 보아 이 노파 역시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로 보인다.

하지만 막비강이 얼른 노파를 막았다.

[할머니께선 여기 계십시오. 마두들은 제가 다른 곳으로 유인하겠습니다.]

장연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막비강은 얼굴을 굳히며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나와 함께 나가면 이 집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오.]

막비강의 말에 장연아는 입술만 삐쭉일 뿐 더 이상 우기지는 않았다.

[대신 이걸 좀 맡아주시오!]

막비강은 호로와 강장을 장연아에게 맡겨 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장씨 일족의 집을 나선 막비강은 외침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 그의 눈에 추명염왕, 삼촌정, 그리고 소면호 등이 날수선랑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핫하하하!]

막비강은 마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소리로 광소를 터뜨리며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 저놈이 그놈이다!]

삼촌정은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날수선랑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는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거기 서랏!]

추명염왕과 소면호는 삼촌정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먼저 알 것이 염려되어 다투어 삼촌정의 뒤를 쫓았다.

날수선랑도 마두들을 유인해간 소년이 누군지 궁금하여 황급히 마두들을 추격했다.

 

막비강은 비록 일 갑자 가까운 내공을 심후한 지녔지만 이제까지 전심전력으로 무예를 연마할 시간이 없었다. 자연히 추명염왕같은 절정고수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십여리를 달렸을 때 마두들은 막비강의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따라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지만 막비강은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어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들은 왜 나를 쫓아오는 거요?]

막비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추명염왕등을 돌아보며 물었다.

삼촌정이 맨 먼저 도착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서있는 소년의 얼굴은 처음 보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막비강이 역용환을 이용하여 얼굴을 바꾼 것을 알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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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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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3)

 

 

상청관(上靑館) 연무장은 일백년 래 가장 많은 제자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그 흔한 잔기침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당한 창허진인이 이대제자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상투는 풀어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취조하겠다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물었다.

[창허야!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함은 너를 해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장차 네가 이 무당의 천년 위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너는 오직 진실로 이 사부의 물음에 답해주기 바란다.]

광화도장의 말은 누가 들어도 가슴 속에 뭔가 꽉 힌 것이 있는 사람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창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체념하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부! 말씀하십시오. 사부께서 물으시는 것이라면 제자 창허는 어떤 것이든 다 대답하겠습니다.]

광화도장은 격동하는 듯했고 운집한 제자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가 본파의 제자가 된 지 이제 칠년이다. 그 동안 나와 네 사숙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무당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할 것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 부족합니다.]

광화도장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 자질도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열성으로 배워 나와 네 사숙들을 일찍이 능가했으니 아마도 무공으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너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미 본파의 시조이신 삼봉진인에 못지않으니...]

원로들의 머리가 애석한 듯 숙여진다.

무당 최고의 인재가 애꿎은 구설수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소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게 대한 두 가지의 소문 중 어느 것도 이 사부는 믿기 어렵다. 너는 말해주겠느냐?]

창허가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어떤 소문입니까?]

광화도장이 말했다.

[첫째는 네가 신선이라는 소문이다.]

모여든 제자들이 모두 놀란다.

사문에 반도가 생겨 처단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왔는데 아주 엉뚱한 소리였던 것이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칠년 전에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월이 너를 잊어버린 것처럼 너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구나. 혹시 예전에 주안과(朱顔果) 같은 과일을 먹은 적이라도 있느냐?]

창허가 말했다.

[주안과를 먹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 사부께서 지난 칠년동안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허가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촤르르릉! 소리가 나면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졌다.

옆에 있던 이대제자들이 놀라며 다시 결박하려 했지만 광화도장이 저지시켰다.

창허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에게 검을 빌려주시게 하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다시 술렁거렸다.

그의 손에 검이 들어간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광화도장이 자기의 검을 뽑아서 창허에게 건네주었다.

옆에서 원로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만류했지만 광화도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들 하라! 창허가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다.]

창허는 두손으로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제자 오직 무당산에는 사부님만이 참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광화도장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

창허가 받았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버린 것이다.

광화도장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창허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피해버렸다.

광화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자결하려느냐? 이 이만한 시련도 못참고...]

광화도장의 보검은 창허의 심장을 꿰뚫고 등뒤로 가시처럼 솟아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심장이 식는 것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창허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놀랍게도 창허의 음성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죽음의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광화도장은 말문이 막히고 맥이 탁 풀려서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서 천하의 기문(奇聞)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신선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선이 죽지 않는, 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제자가 바로 신선입니다.]

쿠웅!

그 순간 상청관 안에는 바늘만 떨어져도 굉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자가 죽지 않는 존재라니...

창허는 자기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심장에 꽂았던 검을 옆으로 밀었다.

검날이 갈비뼈를 자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창허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을 뿐 피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광화도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신선이었구나. 그럼 이 질문에도 대답해다오. 장경각의 마공을 익혔는지.]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상황이 어떻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큼은 해야한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이미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자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허가 말했다.

[익혔습니다.]

[? 무엇 때문에 익혔느냐?]

창허가 대답했다.

[본파의 무공은 탈속(脫俗)합니다. 그 뜻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탈속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자가 생각할 때 다른 도가의 문파들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본파는 그런 점을 중시한다. 공동파나 아미파도 마찬가지니라.]

창허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속된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오욕과 칠정을 가지고 나는데 어찌 그것을 모두 버리고 속되지 않은 것만 취할 수 있습니까? 이는 뿌리를 버리고 꽃이나 열매만을 좋아함과 마찬가지입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다. 도를 닦음은 먼저 몸을 청정케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마침내 우화등선하는 것은 나중의 결과일 뿐이니라. 우리 도가의 청정케 할 몸은 진신(眞身)이니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지.]

창허가 물었다.

[진신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듯이, 지금의 이 몸도 정신과 함께 있는 것인데 굳이 진신을 구해서 무엇합니까?]

광화도장이 말문이 막혔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가 마공을 익힌 이유는 바로 이같은 데 있습니다. 마공이란 원래 인간의 속성을 추종하여 창안된 것들이니 인간을 더욱 잘 알게 해줍니다. 제자도 인간인 이상 인간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참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솔잎을 씹고 이슬을 받아 마신다고 해도 인간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광화도장이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본파의 대기(大忌)를 범하는구나. 너를 파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창허가 광화도장에게 검들 돌려주며 말했다.

[사부! 제자 창허는 오늘로 사라집니다. 무공을 쓰더라도 사부께 배운 검은 쓰지 않을 것이고,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광화도장은 앞이 막막했다.

파문을 하려면 먼저 무공을 폐하는 게 순서지만 죽지도 않는 자에게 무공을 폐하려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도 하나의 전례로 남을 것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제자들에게 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창허의 기해혈을 파괴하고 주근(主筋)을 자르게 했다.

그러나 창허에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도 나지 않고 다만 칼이 지나갔다는 정도였다.

창허는 그제서야 무당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서 진짜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무당의 아랫 제자들은 신선의 우화등선을 구경하고 절을 하고 야단법썩을 떨었다.

그 사이에 자기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처리했던 광화도장은 앉은 채로 영혼만 우화등선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소란을 피울 때 그의 영혼도 창허와 함께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X X X

 

[자네는 노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진양진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이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지. 남들이 노도를 삼백년 래 무당 최고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 노도가 창허진인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했기 때문일 걸세. 한데... 허허... 노도는 그 전설 속의 창허진인을 만났네. 낭아봉을 쓴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무공들을 쓴다는 것 외에는 들었던 것과 똑같았네. 싸우고... 도망쳤지.]

진양진인이 자기가 전설속의 주인공인 창허진인과 싸웠다는 사실에 아주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자른 돌들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방안과 밖에 따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믿기 어려울 걸세.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니... 더구나 우리를 찾는 자라는 사실이...]

현천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원래 나와 만나기로 한 포두화상이 왔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네. 애상곡은 포두화상을 부르는 소리였는데 창허진인이 왔지.]

현천록이 말했다.

[포두화상은 도장보다 무공이 높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비슷하네. 하지만 그와 내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패하지는 않을 걸세.]

[대단하군요.]

[포두화상은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는 중이지. 칠십이종 절기 중 서른 여덟 가지를 익혔으니 달마(達磨)와 육조(六祖) 이후로 최고수인 셈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무슨 수로 포두화상을 여기까지 불러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말게. 나는 양의신공을 익혔으니 그 속에 포함된 양심공(兩心功)도 당연히 알고 있네.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괜찮네만, 자네는 심력을 아끼게. 당장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니까.]

현천록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진양진인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현천록은 자기가 바로 일곱째 진양진인과 똑같은 불사신이라고 말한다면 진양진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마음먹고 진양진인이 하는 대로 따라갔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구를 신통하게도 잘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가 두 번째로 읊을 때 이미 구결은 완벽하게 암기해버렸다.

하지만 진양진인은 일곱 번이나 거듭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양의신공의 내용을 해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첫째는 구결의 운율을 잘 들어놓아야 하네. 노랫가락처럼 운율부터 이해해야 외울 수가 있네. 외고 난 다음에는 앞에서부터 구결을 한구절씩 풀어서 실제로 연공을 해야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무당에서도 양의신공을 끝까지 익힌 사람은 불과 다섯을 넘지 않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무당의 최고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익힐 수도 없지.]

현천록이 물었다.

[태극혜검은 실전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쳤다.

[무림에서는 노도가 태극혜검을 다시 복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태극혜검이야말로 검술의 정화지. 창허진인도 태극혜검만큼은 나보다 못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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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원의 손길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적수공권으로 다섯 명의 노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을 보고 무공이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강장을 손에 끼고 발출하는 공세에 거의 일 갑자의 공력이 함유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흠칫 놀라며 급히 마주 일장을 뻗어냈다.

!

한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고 추명염왕은 몸을 약간 휘청했지만 막비강은 연달아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또 한 번 받아 봐라!]

그러나 막비강은 재차 여력을 돋우어 재차 일장을 발출했다.

추명염왕은 먼지가 자욱하여 상대방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갑자기 또 한 줄기 강맹한 경기가 엄습해 오자 내심 깜짝 놀라며 급히 쌍장을 휘두르고 비석 뒤로 피했다.

헌데 그가 막 두 개의 크지 않은 비석으로 형성된 협도(夾道)까지 물러나갔을 때였다.

[차앗! 받아랏!]

돌연 머리 위에서 차가운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예리한 강풍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예의 소녀가 발사한 단전이었다.

[요 망할 계집년이...!]

추명염왕은 대로하여 어깨를 비틀어 단전을 피한 후 쏜살같이 몸을 솟구쳐 큰 비석 위에 내려섰다.

이때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작은 비석 뒤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콰르릉!

추명염왕은 부리나케 추격하여 노성과 함께 장력을 격출했다.

그러나 그 조그만 인영은 몹시 영활하여 경기가 엄습해 오자 허리를 비틀어 비석에 몸을 바짝 붙이며 손목을 뒤집어 한 줄기 경풍을 뻗어냈다.

추명염왕은 이 일장이 반드시 격중되리라 믿었었다. 헌데 의외로 소녀가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몸을 석벽에 붙이며 반격을 가하자 오히려 추명염왕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어쩔 수 없이 한바퀴 곤두박질을 하여 오 장 밖으로 날아 나갔다.

추명염왕은 본래 성격이 흉악한데다 연달아 기습까지 받자 더욱 화가 치밀어 만면에 짙은 살기를 가득 머금었다.

하지만 그가 바닥에 내려선 후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어린 계집년이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비석 모퉁이에 조그만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덮쳐 갔다.

꽈르릉!

그러나 그자가 미처 비석 모퉁이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엄습해 왔다. 추명염왕은 깜짝 놀라 허리를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그는 비석 모퉁이에서 기습을 가한 사람이 막비강임을 보고 괴소를 터뜨리며 재빨리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너는 그래도 비급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말하지 않겠느냐?]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추명염왕은 그를 일장에 격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아내야 하는지라 눈에서 흉망을 발산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이놈아! 솔직히 내가 일장을 때리면 네놈은 뼈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한다면 나는 너를 제자로 맞이하여...!]

헌데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킬킬, 헛소리 마라! 곽가야!]

돌연 한소리 음침한 일갈과 함께 막비강의 몸이 선 자세에서 갑자기 뒤로 확 끌려갔다. 어느 틈엔지 난쟁이 삼촌정이 나타나 막비강을 낚아챈 것이다.

[이 난쟁이놈이...!]

추명염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급히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달아나는 난쟁이를 추격했다.

 

삼촌정은 비록 무예가 고절하지만 옆구리에 사람을 끼고 있는지라 곡구까지 나와선 곧 추명염왕에게 추격 당했다.

삼촌정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가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나는 이 어린 녀석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추명염왕은 어리둥절하더니 곧 뒤따라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면 누구도 비급을 얻지 못하게 되겠지.]

바로 그때였다.

[으핫하하! 이 교활한 늙은이들 같으니! 너희들은 나를 그 할망구와 싸우게 하고는 여기 와서 어린 녀석을 붙잡아 보물의 행방을 추궁하고 있구나!]

거석 위에서 우렁찬 광소 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비급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 소문에 의하면 청구단서는 상, , 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니 우리 세 사람이 각각 한 권씩 나누어 가지자.]

추명염왕은 혼자 삼킬 수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이다. 난쟁아, 너는 우선 그 어린 녀석의 혈도를 풀어 주어라! 그래야만 비급의 행방을 물을 수 있을 게 아니냐.]

[알았다.]

삼촌정이 막비강의 허리 부위를 살짝 꼬집었다.

[죽엇!]

헌데 막비강은 혈도가 풀리기 무섭게 오른손에 낀 강장으로 삼촌정의 가슴을 공격했다. 동시에 왼손의 신녀비로는 추명염왕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삼촌정은 연마혈(軟痲穴)이 찍힌 상태에서 막비강이 반항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억!]

퍼펑!

쌍방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또 갑작스럽게 발생한 변고인지라 삼촌정은 막비강의 일장에 왼쪽 옆구리를 격중당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추명염왕도 막비강이 일초이식(一招二式)으로 자기를 공격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한광이 번뜩하는 것을 보고서야 급히 뒤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미 신녀비 끝이 스쳐 장포 자락이 찢어졌을 뿐 아니라 허리띠까지 끊어져 급히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한 후 흘러내린 바지춤을 끌어올렸다.

화라라락!

막비강은 일초를 성공하자 수중의 신녀비로 검화를 형성한 채 급히 도주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핫하하하. 어린 녀석아, 도망칠 필요 없다.]

회색 인영이 번뜩하더니 한 노인이 막비강의 면전에 도착하여 일장을 격출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막비강은 부득불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너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하면 노부는 책임지고 널 보호해 주겠다.]

소면호의 말에 막비강은 화가 치밀어 노성을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어 신녀비를 휘두르며 앞으로 덮쳐 나갔다.

[낄낄낄!]

소면호는 괴소를 터뜨리더니 눈에서 짙은 살염을 발산하며 번개같이 일장을 반격했다.

막비강은 상대방의 징그러운 표정에서 살수를 펼쳐내려는 것을 알고 급히 강장을 마주 뻗어냈다. 그러나 그가 강장으로 내친 기운을 뚫고 여전히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엄습해 왔다.

(이제 끝장이구나.)

막비강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소면호의 일장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의 표정이 되었다. 바로 그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꽈르릉!

돌연 옆에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나와 막비강을 일 장 밖으로 날려보냈다.

[고 영감, 너는 우리 일을 방해할 생각이냐?]

막비강이 막 몸을 가누었을 때 뒤에서 우렁찬 음향과 삼촌정의 음성이 전해 왔다. 난쟁이 삼촌정이 소면호를 급습한 것이었다.

난쟁이의 외침을 들으며 막비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놈도 사람 같은 놈이 없구나! 이 틈에 달아나자!)

생각을 굴린 막비강은 즉시 몸을 솟구쳐 날아 나갔다.

[핫하하하! 또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지만 추명염왕이 한차례 광소를 터뜨리더니 몸을 솟구쳐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이어 그는 양팔을 휘둘러 열 줄기 경풍으로 막비강의 전신요혈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일년 넘게 네 명 무림 고수의 무학을 연마했는지라 이미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즉시 구로략파(鷗鷺掠派) 초식을 펼쳐 옆으로 비스듬히 삼 장 가량 날아 나가 추명염왕의 십지구혼(十指句魂) 일초를 간신히 피해냈다.

바로 그때였다.

[늙은 것들이 정말 염치가 없구나!]

화라락!

한소리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유성처럼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막비강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인영은 한 명의 백발노부인이었다.

 

나타난 백발의 노부인은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이고 머리카락은 눈이 내린 듯 하얗다. 하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으며 또 이목구비는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젊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었던 듯 여전히 미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할머니를 전에 어디서 봤을까?)

막비강은 이 아름다운 백발의 노부인 얼굴이 왠지 눈에 익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막비강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흡사했으나 일시적으로 그게 누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야! 노신 날수선랑(辣手仙娘)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노부인은 한 손에 괴장(拐杖;지팡이)을 들고 막비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수선랑! 이분이 바로 칠절 중의 한 분인...!)

막비강은 노부인의 이름을 듣고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

 

성이 송()씨라고만 알려진 그녀는 바로 백도의 고인들인 강호칠절 중 한 명이다. 성격이 불같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아 흑도와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그녀를 야차나 나찰보다도 더 무서워했다.

막비강이 놀랄 때였다.

[너희들 세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이백 살도 넘거늘 아직 약관도 안된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

백발노파는 괴장으로 추명염왕을 가리키며 차갑게 외쳤다.

추명염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노파! 노부가 노파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아까는 우리 세 사람이 오랫동안 싸움을 하여 허점을 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니 내가 독수를 펼쳐내도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삼촌정이 옆에서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흐흐흐, 당신들은 한 명은 선랑(仙娘)이고 한 명은 염왕(閻王)이니 고하를 가름해야 옳지. 고 노인과 노부가 증인이 되어 주겠다.]

날수선랑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난쟁아, 노신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때 막비강이 얼른 말했다.

[노선배님! 그들의 간계에 걸려들지 마십시오. 염왕은 후배가 상대하겠습니다.]

[너는 그의 독장이 두렵지 않느냐?]

[후배는 백독이 불침하니 그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헌데 그때였다.

[! 허풍떨지 마! 나는 아까 네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녀가 범개선과 함께 장내에 도착하여 냉소를 날렸다.

방금 전 막비강은 추명염왕이 독장으로 개방 제자들을 살해할 것이 염려되어 비석 아래의 구멍에서 뛰어나갔었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막비강이 도주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그녀의 이 말에 검미를 치켜 올렸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두고 보아라!]

이어 한 걸음 나서며 강장을 낀 손으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이미 막비강과 싸운 적이 있는지라 막비강의 공력이 자기보다 별로 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자기의 진력을 보존해 두기 위해 얼른 옆으로 피했다.

[송 노파! 너는 후배를 대신 죽게 만들 생각이냐?]

날수선랑은 냉랭히 쏘아붙였다.

[노마는 이 아이가 무서우면 빨리 꼬리를 감추고 도주해라!]

이어 그녀는 막비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야, 내가 여기 있는 이상 그는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 마음놓고 싸워라!]

막비강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검장(劍掌)을 동시에 발출했다. 그는 소녀 앞에서 실력을 과시하기로 결심했는지라 처음부터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절학을 펼쳐냈다. 순간 검풍이 세찬 파공성을 일으키고 장풍이 곧장 추명염왕에게로 쏘아져갔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추명염왕은 비록 이렇게 고함을 질렀지만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쌍장을 비벼 손바닥을 암흑색으로 변하게 한 다음 장풍검영의 빈틈으로 초식을 뻗어냈다.

곧 두 노소는 치열하게 얽혀 돌아갔다.

소녀는 막비강이 추명염왕과 대등하게 싸우는 광경을 보고 만면에 부러운 빛을 띠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삼촌정과 소면호가 몇 마디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솟구쳤다.

[송 노파! 한가하게 구경만 하지 말고 같이 놀아보자!]

날수선랑은 얼굴을 굳히며 괴장을 휘둘렀다.

[연아(燕兒)! 빨리 후퇴해라!]

소면호와 삼촌정은 날수선랑의 실력을 잘 아는지라 뒤로 각각 한 걸음씩 후퇴하며 동시에 병기를 뽑아 들었다. 흑도팔흉의 실력은 아무래도 강호칠절보다 손색이 있는 것이다.

날수선랑은 상대방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면 손녀 연아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즉시 괴장을 휘두르며 상대방 두 사람에게 맹공을 가했다.

일순 편영(鞭影)이 난무하고 장풍(杖風)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세 사람은 한데 어울려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연아라 불린 소녀는 손에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소궁(小弓)을 들고 짧은 화살을 활줄에 걸어 소면호와 삼촌정을 겨냥했다. 하지만 세 고수가 워낙 빠르게 돌아가며 싸우는 바람에 발사하지는, 못했다.

!

그러자 연아는 갑자기 목표를 바꾸어 추명염왕에게로 화살을 발사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생포하기 위해 허초만 발출한 탓에 별로 우세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를 놓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자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짧은 화살이 세찬 바람을 대동한 채 간발의 차이로 그의 뱃가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강장으로 추명염왕의 왼쪽 어깨를 격중시켰다.

!

[크흑!]

순간 추명염왕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요 쥐방울만한 놈이!]

일격을 당한 추명염왕은 독이 올라 한 자루 금륜(金輪)을 뽑아 들고 막비강을 향해 덮쳐 왔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금륜을 휘두르자 번뜩이는 금광과 함께 사면팔방에서 강맹한 장영이 눌러 옴을 느끼고 내심 깜짝 놀랐다.

(야단났구나!)

추명염왕은 맹공을 가하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놈아! 빨리 병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전륜차(轉輪車)로 네놈의 몸뚱이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노마!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놈이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주마!]

헌데 추명염왕이 말을 막 끝냈을 때였다.

! !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단전(短箭)이 연달아 날아오더니 이어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번개같이 덮쳐 왔다.

원래 연아는 자기가 단전을 발사한 때문에 오히려 막비강이 궁지에 몰리자 다급해진 나머지 연달아 단전을 발산한 것이다.

[어린 계집년! 너부터 수습해야겠구나!]

추명염왕은 눈에서 무서운 살염을 발산하며 연아를 향해 흉험한 일장을 격출했다.

[!]

날수선랑은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의 함성을 질렀다. 그녀는 급히 수중의 괴장으로 상대방을 후퇴시킨 후 연아 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때 그녀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었다.

[받아랏!]

위기일발의 순간 막비강이 함성을 지르며 전신의 진력을 뽑아 올려 추명염왕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던 것이다.

퍼펑!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막비강은 추명염왕과 일장을 주고받아 몸이 허공으로 날려 나갔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전륜차를 돌파하고 나와 연아를 구출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여 뒤로 세 걸음 가량 밀려났다. 다행히 연아는 부상을 입지 않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연아! 너는 먼저 가거라!]

날수선랑은 공중에서 한바퀴 맴돌아 튕겨져 나온 막비강의 몸을 받은 후 급히 고함을 질렀다.

[크크! 가긴 어딜 가느냐?]

하지만 세 마두가 막비강 등 세 사람을 포위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개방 제자들은 모두 공격 준비를 갖추어라!]

범개선이 고함을 질러 상세가 완쾌된 십여 명의 개방 제자가 세 마두를 첩첩이 포위했다.

[!]

추명염왕은 경멸의 코웃음을 날리더니 날수선랑에게 냉랭히 말했다.

[송 노파! 몇 년 더 살고 싶거든 어린 녀석은 남겨놓고 손녀만 데리고 꺼져라!]

쌍방이 잠시 입씨름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틈을 이용하여 막비강은 날수선랑의 품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추명염왕을 향해 사정없이 살초를 발출했다.

날수선랑은 괴장을 휘두르며 삼촌정과 소면호를 공격했다.

연아 역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범개선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들은 나의 할머니를 도우세요. 나는 저 어린 녀석을 도우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검끝으로 추명염왕의 등뒤 명문사혈(命門死穴)을 향해 찔러 갔다.

이리하여 싸움의 국면은 두 조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 조는 막비강과 연아가 합세하여 추명염왕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고, 또 한 조는 날수선랑과 개방 제자들이 삼촌정과 소면호를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추명염왕은 비록 위력이 강맹무비한 전륜차를 지니고 있지만 소년 소녀가 절묘하게 배합을 이루어 공격하자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삼촌정과 소면호는 날수선랑 한 사람을 상대할 땐 약간 우세했었다. 하지만 범개선이 이끄는 개방 제자들이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을 가하자 판도가 뒤바뀌어 간신히 자기들의 몸만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쌍방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화라라락!

문득 장내에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팔괘도포(八卦道袍)를 입은 노도사(老道師)가 나타났다. 이 노도사의 신법은 실로 유령 같아 장중의 고수들 누구도 그가 나타난 줄 모르고 있었다.

[...!]

그 노도인은 눈에서 형형한 광망을 발산하며 쌍방의 격전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 여기서 여러 고인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이렇게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소?]

(저자는...!)

날수선랑은 나타난 사람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오봉도인(五峯道人) 왕존일(王尊一)!)

(저 노마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추명염왕 등 세 마두 역시 그 노도를 알아보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봉도인 왕존일!

 

그자는 오십 년 전부터 귀신이 보아도 두려워했다는 일대의 마두로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에 드는 전설적인 고수였다.

오기(五奇)는 육요(六妖), 칠절(七絶), 팔흉(八凶)보다 한 배분 위의 고인들이었다. 비록 추명염왕 등이 알아주는 거마들이긴 하지만 오기 중의 한 명인 오봉도인의 잔인함에는 많이 부족함이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느 한쪽을 도우면 다른 한쪽이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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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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