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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허억!”

털썩!

임청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아래의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임청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파르고 험한 절벽이라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어느덧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게 해가 진 때문인지 바위산 아래 계곡이 너무 깊어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절벽은 높고도 높아서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북두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려올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잘도 살아서 저길 내려왔구나.)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임청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등쪽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임청우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반쯤 크기의 반점(斑點)이 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반점은 얼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우(靑牛)라는 이름은 그 반점에서 딴 것이다.

 

임단심은 아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 대신 온갖 욕설과 악의가 섞인 말로 아들을 불렀었다.

어쩔 수 없이 임청우는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성을 모르니 어머니의 성인 임()씨를 썼고 가슴에 있는 푸른 소 형상의 반점에 착안하여 청우를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임청우였다.

 

한숨 돌린 임청우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끌렀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은 임청우와 함께 바닥에 패대기쳐졌었지만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다. 한쪽이 조금 이지러졌을 뿐이다.

!

호리병의 주둥이에 박혀있던 나무 마개를 뽑자 그윽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호리병에 든 것은 임청우가 여러 가지 약초와 과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다. 백초주(百草酒)로 이름붙인 그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꿀꺽! 꿀꺽!

목도 마르고 해서 독한 백초주를 거푸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 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영차!”

다시 마개를 막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찬 임청우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북두홀을 찾아야한다.

 

***

 

다행히 북두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뜨인 것이다.

북두홀을 찾았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헌데 북두홀을 허리띠에 끼우던 임청우의 코가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가 타는 듯한 그 냄새를 따라갔다.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삼, 사십 장쯤 갔을 때 임청우는 연기에 휩싸인 독수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푸스스스!

날개를 활짝 펼친 길이가 일장이 넘는 독수리들의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살은 이미 다 타서 굵은 뼈와 깃털들만이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는 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무서운 독이 살을 녹였구나.)

임청우는 놀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푸스스! 퍼석!

임청우가 보고 있는 사이에 굵은 뼈들도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에서 남아있는 것은 크고 작은 깃털들과 강철같이 번들거리는 발톱뿐이었다.

(이놈에게 잡혀가던 뿔 달린 작은 뱀의 짓일까?)

임청우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저절로 녹아내렸을 리는 없다.

그놈은 죽기 전에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던 게 분명하다.

바로 그때였다.

툭툭!

무언가가 임청우의 오른쪽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

무심코 내려다보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쉭쉭!

머리에 황금색 뿔이 돋아나있는 작은 뱀이 고개를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통이 피 칠을 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등줄기를 따라 갈기까지 나있다.

영락없는 용의 모습인 작은 뱀은 독수리들의 왕에게 잡혀가던 바로 그놈이었다.

(... 이놈이 독수리들의 왕을 물어죽였구나!)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서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를 녹여버릴 정도의 독을 지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다.

!

헌데 뒤로 물러서던 임청우의 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렸다.

!”

임청우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쪘다.

쉭쉭!

뿔 달린 작은 뱀이 그런 임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다가왔다.

(... 죽었다!)

임청우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저앉은 상태라서 그놈이 달려들어 물려고 하면 피할 수가 없다.

임청우의 몸이 공포로 굳어질 때였다.

임청우를 잠시 살펴보던 뿔 달린 작은 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냐

임청우는 어리둥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뱀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잖아!)

임청우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뿔까지 달려있고... 외양만 특이한 게 아니라 진짜 영물이란 건가?)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생긴 임청우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이 금관혈린사(金冠血鱗蛇)인 뿔 달린 작은 뱀은 세상 모든 뱀들의 왕이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안되지만 금관혈린사는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복사(蝮蛇)의 일종인 이놈은 한 때 몸길이가 삼장(三丈;9미터)이 넘는 대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연을 만나 무한한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오히려 작아졌다.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 정기(精氣)가 농축되자 몸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몸은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기뿐 아니라 독기도 농축이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관혈린사의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금관혈린사는 표적을 직접 물지 않고 독기(毒氣)를 뿜어서 죽일 수도 있다.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들의 왕의 입장에서는 모든 뱀들의 제왕인 금관혈린사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늘 금관혈린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었다.

금관혈린사가 비록 모든 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힘으로는 독수리들의 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려고 시도해봤지만 독수리들의 왕의 발목은 강철같은 비늘로 덮여있어서 상처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독기를 뿜어도 봤지만 허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독기가 바람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금관혈린사는 꼼짝없이 독수리들의 왕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임청우가 충동적으로 활을 쏴서 독수리들의 왕을 떨어트렸었다.

다만 임청우가 쏜 강철 촉의 화살도 독수리들의 왕의 숨통을 즉시 끊어놓지는 못했었다. 그놈의 깃털과 가죽이 단단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도 독수리들의 왕은 충격을 받아서 허우적대며 떨어졌었다.

그 바람에 금관혈린사는 강철같은 발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수리들의 왕의 몸통을 물어서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던 것이다.

 

(작고 다리가 없을 뿐 용을 빼닮은 놈이다.)

임청우가 금관혈린사를 보며 전설 속의 용을 떠올릴 때였다.

! !

금관혈린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동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인사치례도 했으니 그만 제 갈길 가나보다 생각했다.

헌데 금관혈린사는 조금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기어가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따라오라는 거냐?”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 !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임청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영물인 게 분명한 놈이 따라오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금관혈린사를 따라 오십여 장쯤 갔을까?

임청우 앞쪽에 안개의 벽이 나타났다.

계곡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마치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금관혈린사는 망설이지 않고 안개의 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째 좀 으스스한데...!”

임청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금관혈린사를 따라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섰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이토록 짙은 안개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짙은지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봐도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금관혈린사 덕분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금관혈린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반딧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나는 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독을 흘린 것인지 다른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점(光點)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앞서 가며 남긴 기이한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안개다. 마치 수초가 몸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 !)

헌데 광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시커먼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작은 것은 개만하고 큰 것은 사람 키의 몇 길이나 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짐승같고 어떤 것은 사람 같으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형상도 있다.

처음에는 한 두 개가 보이던 그것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진다.

괴상한 형상들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그것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눈인 모양인데 머리 뿐 아니라 몸통에도 달려있으며 하나를 단 놈이 있는가 하면 두 개, 세 개, 심지어 십여 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다.

(... 뭐지?)

소름이 오싹 끼친 임청우는 허리춤에 끼운 북두홀을 움켜잡았다.

(안개 속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있다!)

겁에 질린 임청우가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할 때였다.

쉭 쉭!

앞쪽에서 금관혈린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임청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서 금관혈린사의 뿔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뿔 아래에서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이 임청우를 보고 있다.

(... 길을 아니까 따라오라는 거겠지? 일단 저놈만 믿고 가보자!)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개 속을 배회하는 기괴한 형상들도 임청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아서 임청우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금관혈린사가 지나가며 남긴 광점들과 안개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그놈의 뿔이 아니었으면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을 것이다.

화악!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의 벽이 사라지며 임청우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마침내 안개의 벽을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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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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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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