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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1)

 

 

황의소녀 심주은도 임청우가 정신을 잃는 순간에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전적으로 임청우가 몸으로 받았기에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은 차렸으나 몸이 차가우면서도 끈적거리는 것에 잠겨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당연히 숨도 쉴 수가 없다.

(우리가 추락한 절벽 아래에 늪이 있었구나.)

심주은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달았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쪽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난 것도 아니다.

늪 속으로 얼마나 깊이 잠겨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우린 늪의 뻘 속에 깊이 잠겼을 것이다.)

심주은은 정신을 잃은 임청우를 한 팔로 껴안고 남은 팔과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빨리 늪의 표면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고 만다.)

죽음이란 말이 눈앞에 떠오르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임청우의 늘어진 몸 이외에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심주은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두려움과 공포로 심주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특하고 당돌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일 뿐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있어서 남과 다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의 공포 속에서 심주은은 오직 팔다리만을 허둥거렸다.

한데 어느 순간 임청우를 잡고 있는 팔 위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심주은의 팔을 타고 올라온 가늘고 긴 그 물체는 목을 지나 머리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심주은의 긴 머리카락을 가는 몸으로 휘감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은 그 물체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심주은과 임청우의 몸을 끌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놀라던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엇엔가 단단히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힘껏 당겼다.

슈우우욱!

심주은은 자신의 몸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추악!

어느 순간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

하아! 하아!”

마침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심주은은 시원한 공기와 함께 진흙마저도 들이마셨다.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든 가릴 게제가 아니었다.

막혔던 숨통을 틔운 심주은은 서둘러 임청우를 늪 밖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임청우의 얼굴에서 진흙을 벗겨 주었다.

얼굴에서 진흙이 제거되었음에도 임청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임청우는 왼손에 든 청강사자검은 죽어라 움켜쥐어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 걸고 있던 혈도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겨우 한숨 돌린 심주은은 자기의 머리카락이 늪지에 자라있는 키 작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알았다. 키는 작지만 둥치는 상당히 굵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어서 우산이나 버섯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대체 무엇이 내 머리카락을 끌고 올라와 나뭇가지에 걸었을까?)

심주은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이 걸려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헌데 그녀가 임청우를 끌어안고 나뭇가지에 올라갔을 때였다.

쉬쉭!

그 나뭇가지 위에 붉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녀를 향해 새빨간 혀를 내밀었다.

!”

!

심주은은 기겁하며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강력한 장력이 정통으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뱀은 끄떡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두개의 황금빛 뿔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 붉은 뱀의 정체를 알아본 심주은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질식사를 면했다 했더니 독물들의 제왕이라는 금관혈린사를 만나고... 난 참 운이 지독하게도 없구나.)

심주은은 소매 속에 있는 천잠사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며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천잠사는 어떤 보검에도 잘리지 않는 보물이다.

하지만 천잠사가 금관혈린사의 독에도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심주은 앞쪽에서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짐승은 바로 임청우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척포였다.

원래 척포는 겹쳐 말린 두 장의 몽선도를 집으로 삼아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 생긴 집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임청우가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져 늪 속에 처박혔으니 척포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화가 났지만 몽선도에서 빠져나온 후 심주은의 머리카락을 꼬리로 말아서 늪 밖으로 끌고 나왔던 것이다.

한 때 몸길이가 삼장에 이르렀던 영물인 척포인지라 심주은과 임청우를 끌고 올라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늪에 빠진 후 심주은이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 올라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늪의 표면에 작용하는 장력(張力)은 묽디묽은 아래쪽과 비할 바가 아닌 때문이다.

만일 척포가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심주은은 척포를 노려보았고 느닷없이 얻어맞아서 화가 난 척포도 심주은을 마주 노려보는 묘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주은도 여자인지라 뱀이란 생물은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고 싫었다.

하지만 물러서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에 심주은은 조금도 눈빛을 양보하지 않고 척포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늪에서 멀지 않은 절벽 근처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가 칠절에게 각기 흩어져서 임청우를 찾으라 명령하는 소리였다.

(위험해!)

풀쩍!

심주은은 임청우를 껴안은 채 다시 늪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주은의 몸은 이내 늪으로 잠겨 안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심주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금붙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쉬쉬!

척포는 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 저었다.

쏴아!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흰 안개를 내뿜었다.

츠츠츠!

척포가 뿜어낸 하얀 안개에 닿자 심주은의 머리카락에 달려있던 금붙이 장식은 얼음처럼 녹아서 늪에 잠겨들었다.

심주은은 척포가 자신을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알 리가 없다. 그저 늪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모든 신경을 돋우어 주변의 동정을 살치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녀는 곧 다급하게 들려오는 퉁소소리를 들었고 자신들 위쪽으로 유소기가 천리전음으로 말하며 날아가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턱까지 찬 심주은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숨 돌리려는데 유소기가 다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유소기는 지존수 사마명을 베려다가 도군의 중재로 검을 거두고 몽선도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뽀록!

심주은이 황급히 머리를 늪 속에 밀어 넣은 자리에 거품이 일어났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심주은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한갓 바램으로 끝나고 말았다.

요망한 것!”

유소기의 대노한 음성이 늪 속에까지 들려왔다.

심주은은 낙담했다.

(틀렸다. 이미 저자는 내가 숨는 것을 본 모양이다.)

늪 속에서 검을 맞고 죽기는 싫었다.

맑은 공기라도 한 번 더 숨 쉬고 죽고 싶었다.

촤아!

자포자기한 심주은은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번쩍!

순간 한줄기 백광이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래야 결코 피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죽었구나!)

심주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직후였다.

끼익!”

괴상한 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울렸다.

심주은은 자신이 베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다가 앗차! 싶었다.

유소기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닌 나무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금관혈린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황급히 늪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만 앞에서 날아오던 유소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화악!

유소기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벼락같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었다.

심주은은 임청우를 잡지 않은 왼손을 얼굴 앞에 세우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스스슷!

순간 그녀의 모습이 작은 바위처럼 변해버렸다.

환술(幻術)을 쓰다니... 신녀문의 제자인가?”

!

유소기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면서 발길질로 척포를 멀리 차날려 버림과 동시에 심주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올리며 말했다.

심주은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얼굴에 묻은 진흙 때문에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럼 구태여 나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겠다.)

그녀는 즉시 임청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며 두 발로 임청우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했다.

그래요. 나는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예요. 즉시 내 머리를 놓도록 하세요.”

유소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이대 제자... 그럼 정정(貞貞)보다 한 배분 아래인가? 한데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

유소기의 독백같은 말을 들은 심주은은 약간 당황했다. 정정은 그녀가 사부로 모신 여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소기가 사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심주은은 즉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초면인 분이 사문의 일을 물으면 내가 대답할 것 같아요?”

심주은은 당돌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유소기가 화를 내고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입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소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성미까지 정정을 빼닮았구나. 그래, 혹시 이 근처로 떨어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하나를 보지 못했느냐?”

내심 안도한 심주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아무도 살지 못해요. 이곳이 비록 늪이기는 하지만 저 절벽은 워낙 높아서 돌바닥에 떨어진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에요. 시체가 요행히 나무위에 걸쳐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늪은 바닥이 없어서 뭐든지 삼켜버리니까요.”

한데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유소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심주은을 약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주은은 잘못 대답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난 아직도 사흘 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해요.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요.”

유소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잠시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라.”

유소기가 잡아 올렸던 머리채를 내려놓자 심주은은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늪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늪 속에 잠겨있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댄 게 정말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유소기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몽선도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물건인가? 그토록 얻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깊은 늪 속에 잠기고 말다니... 금포염왕을 대적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잠시 후 유소기의 천리전음에 따라 모여든 칠절은 계곡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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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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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견수; [작은 아가씨!] ! 놀라며 날아오르고. 두 명의 황금수라들도 날아오르고

청풍; (저 계집아이가 장주의 둘째 딸이로구나.) 생각하며 역시 달려가고. 하지만

화악! 크왕! 크르르! 개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귀견수 일행이 따라잡지 못한다.

벽옥령; [엄마야!] 겁에 질려 뒷걸음질. 이제 개들은 벽옥령의 10여 미터 앞까지 쇄도하고 있고

귀견수; (둘째 아가씨가 위험하다!) ! 날아가며 검을 뽑아 던지려 하고. 그때

청풍; [고양이를 던져!] 귀견수를 따라 달려가며 외치고

벽옥령; [!] 깨닫는 벽옥령.

[!] [!] 귀견수와 황금수라들도 깨닫고. 검을 던지려던 귀견수의 손도 멈칫. 이어

벽옥령; [도망가 설아!] ! 고양이를 뒤로 홱 집어 던지고. ! 비명 지르며 뒤로 날아가는 고양이

휘릭! 회전하며 바닥에 내려서는 고양이. 직후

크왕! 크릉! 휘익! 파팟! 벽옥령을 지나치며 고양이를 덮쳐가는 개들. + 벽옥령; [꺄악!] 비명 지르며 웅크리는 벽옥령

하악!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등을 굽히며 맞서고

고양이를 덮치는 개들

뚱뚱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게 피하는 고양이

이하 네 마리 개와 한 마리 고양이의 치열하게 싸움. 개들은 고양이를 포위하며 물려고 하지만 이리저리 잘 피하는 고양이

귀견수; [아가씨!] 휘릭! 겁에 질린 벽옥령의 옆으로 날아 내리는 귀견수와 두 명의 황금수라들

귀견수; [안심하십시오. 속하들이 지켜드리겠습니다.] 벽옥령의 앞을 가로 막으며 외치고

크왕! 크르르! 하악! 그 사이에도 개들과 고양이는 치열하게 싸운다. 고양이를 에워싸고 연신 물려고 하며 돌아가는 개들. 필사적으로 피하는 고양이.

벽옥령; [설아!] 비명 지르며 그걸 보고. 그 사이에 청풍도 달려왔고. 그때

! 한 마리 개의 앞발질에 맞아 나뒹구는 고양이

벽옥령; [!] 그걸 보고 비명

! 나뒹군 고양이를 물려는 개의 입. 간발의 차이로 굴러서 피하는 고양이

벽옥령; [설아! 설아를 구해줘! 저러다 죽겠어!] 발 동동 비명

<고양이를 구하려면 미처 날뛰는 개들을 죽여야 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여 훈련시킨 놈들이지만 어쩔 수 없다.> <작은 아가씨가 죽고 못 사는 고양이를 죽게 둘 수는 없지!> 검을 뽑으며 개들에게 다가서는 귀견수와 황금수라들, 그 사이에도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개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고

청풍; (개들을 죽일 생각이로군.) + [기다려주십시오.] 귀견수에게 다가가고. 돌아보는 귀견수와 황금수라들

청풍;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개와 고양이 모두 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말하며 귀견수에게 손을 내밀고. 검을 달라고

[!] 눈 반짝이는 벽옥령.

귀견수; (자신이 있으니 나섰겠지.) + [그럼세.] 검을 넘겨주고

검을 들고 사납게 날뛰는 개들에게 다가가는 청풍.

[어쩌려고 저러지?] [번견들은 한번 흥분하면 통제가 안되는데...] 주변 사람들 웅성. 귀견수와 벽옥령도 긴장하며 보고.

! 청풍의 눈이 빛나고.

날뛰는 개들의 몸에 혈관과 뼈가 보이고. 그러자

청풍; (여기로군.) ! 다가가며 가까이 있는 개의 등쪽을 찌르고

! 찔린 개가 펄쩍 뛰며 비명 지르고. 다른 개들 놀라 돌아보고

털썩! 몸이 마비되어 쓰러지는 개

크르르! 크릉! 이빨 드러내며 경계하는 다른 개들. 하지만

! ! 다가가며 개들의 몸을 한 번씩 찌르는 청풍의 검. 그러자

! ! 그 개들도 퍼덕이다가

털썩! ! 몸이 마비되어 쓰러지는 개들. 고양이가 그 사이에서 놀라고

[... 저게 어떻게 된 건가?] [살짝 찔렀는데 개들이 쓰러졌어.] [요술같구만!] 사람들 놀라고. 환호하며 박수치는 사람들도 있고

벽옥령; [설아!] 울면서 달려오고. 청풍은 검을 내리고 있고

야옹! 고양이도 안심하며 마주 달려오고

벽옥령; [!] 야옹! 안고 안기며 우는 벽옥령과 고양이.

청풍; (고양이도 주인도 둘 다 귀엽군.) 그걸 보며 흐뭇

귀견수; [수고했네.] 다가오고. 다른 황금수라들은 개들의 상태를 살피러 가고

청풍; [잘 썼습니다.] 검을 손잡이가 귀견수에게 향하게 내밀고

귀견수; [어떠냐?] 검을 받으며 개들을 살피는 황금수라들에게 말하고

[몸이 마비되긴 했지만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네 놈 모두 무사합니다.] 개들 살피며 대답하는 황금수라들

귀견수; [신기하구만. 통제불능으로 날뛰는 개들을 죽이지 않고 쓰러트리다니...] 검을 칼집에 꽂으며

청풍; [짐승들도 사람처럼 혈도가 있습니다.] [그 혈도를 제대로 찌르면 마비시킬 수도 있지요.]

귀견수;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놀랍군.] [사람과는 몸 구조가 전혀 다른 개들의 혈도를 제압하다니...]

청풍; [, 돼지뿐 아니라 개들도 도축해본 적이 많아서 혈도를 알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귀견수; [하여간 총관께서는 투자금의 몇 배를 단번에 뽑으셨어.] [저 개 한 마리 기르는데 들어가는 돈들이 최하 오백냥 이상이었느니...]

청풍;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웃고. 그때

벽옥령; [...] 다가오고. 고양이를 안은 채. 돌아보는 귀견수와 청풍

벽옥령; [설아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오빠.] 얼굴 발개져서 청풍을 올려다보고

벽옥령; [설아가 잘못 되었으면 옥령이는 정말 슬펐을 거예요.]

귀견수; [소개하겠네. 이분이 본장의 둘째 아가씨야.] 청풍에게 벽옥령을 소개하고

청풍; [이청풍입니다.] [내일부터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포권하고

벽옥령; [... 벽옥령이에요.] 수줍어 어쩔 줄 몰라하고

청풍; (착하고 귀여운 계집아이로군.) 웃고

귀견수; (별일도 다 있구먼.) 청풍과 벽옥령을 보며 눈 번뜩

<황금전장의 딸인데다가 귀염둥이 막내로 자라서 누구도 어려워하지 않는 둘째 아가씨가 저렇게 수줍어하다니...> 청풍을 훔쳐보며 얼굴 발개져서 좋아 죽으려는 벽옥령을 배경으로 귀견수의 생각. 그때

벽옥령; [이거...] ! 머리에 꽂고 있던 머리 핀 하나를 뽑고. 꽃 모양인데 가운데에 상당히 큰 보석이 박혀있다.

벽옥령; [받아주세요. 설아를 구해준 감사예요.] 머리핀을 내밀고

청풍;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당황

귀견수; [받아둬. 둘째 아가씨의 성의표시이니...] 옆에서 끄덕

청풍; [알겠습니다.] 두 손으로 머리핀을 받고.

청풍;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머리핀을 들고 웃고

귀견수; (소중하게 간직해야겠지. 그 머리 장식에 박힌 보석의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 웃고. 그때

벽옥령; [... 내일 봐요.] 다다다! 부끄러워서 고양이를 안고 달려가는 벽옥령

청풍;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멀어지는 벽옥령을 보며 생각. 오가던 사람들 급히 벽옥령에게 인사하고

청풍; (돈에 관한한 피도 눈물도 없어서 냉혈전호라 불리는 장주에게 어떻게 저토록 귀엽고 순수한 딸이 생긴 걸까?) 흐뭇하게 보고. 헌데

 

[!] 눈 부릅뜨며 노려보는 벽소소. 건물들 사이에 서있고. 그 뒤에 무사 한명이 말 고삐를 잡은 채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다.

벽소소의 시점. 귀견수와 뭐라 대화하고 있는 청풍의 모습

청풍의 모습 크로즈 업

벽소소; (그 죽일 놈이다! 낮에 거리에서 날 개망신시킨...) 이를 바득. 거리에서 말을 타고 가다가 청풍에게 창피 당한 장면 떠올리고

벽소소; (잘 걸렸다. 네놈이 어떻게 본장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만...)

벽소소; (지옥을 경험하게 해주겠다!) 마녀같이 웃고

 

#27>

. 불이 켜지기 시작한 환락가. 야한 여자들이 호객을 하고. 한량들이 기루와 술집을 드나들고

환락가의 뒷골목. 도박장이 즐비한 곳. #4>에 나온 뒷골목. 그때와 다른 점은 연신 도박장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고. 도박장을 지키는 건달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새벽녘과 다르다.

그 중 <大慶賭場>이라는 간판이 걸린 도박장. 이산하가 돈을 잃은 그곳. 입구에 건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고

도박장 내부. 벌써 손님들이 바글바글

도박장 내부의 끝. 건달들이 지키는 문이 하나 있다. 닫혀있는데 지키는 건달들이 왠지 긴장한 표정

 

[오백 냥이오!] ! 탁자에 내려놓는 묵직한 돈 주머니.

청풍; [액수 확인하고 차용증 내놓으시오.] 밀실에 서있는 청풍. 청풍의 뒤에는 귀견수와 두 명의 황금수라가 서있다. 탁자 건너편에는 도박장 책임자인 정필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밀실 안에는 험상궂게 생긴 건달 십여명이 서있다.

건달1; [이 새끼가 철근을 삼켰나? 왜 이렇게 뻣뻣해?] 정필 뒤에서 눈 부라리는 건달1. 빈민가에도 왔던 두 명의 건달 중 한명

건달2; [누구 보고 이래라 마라야? 창자 흘러나오는 거 네놈 눈으로 봐야 정신 차리겠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대고. 하지만

정필; [조용히 못해?] !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건달1, 2를 윽박지르고. 깜짝 놀라는 건달1, 2

건달1; [... 형님!] + 건달1; [우린 그냥 저 새끼가 건방져서 훈계를 한 것뿐인데...] 눈치 보는데

더 노려보는 정필

[... 죄송합니다.] 삭 죽어서 고개 떨구는 건달1, 2

정필; [돈은 세어볼 필요 없네.] 일어나고. 종이를 한 장 들면서

정필; [대부금은 확실히 변제 받았네. 차용증을 받게나.] 종이를 청풍에게 내밀며 억지로 웃고

! 종이를 낚아채서

내용을 읽어보는 청풍

청풍; [경고하는데...] ! ! 차용증을 접어서 찢기 시작하며

청풍; [내 아버지가 혹시라도 다시 찾아오면 당신네 가게에 들이지 마시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책임지지 못하니...] 찍찌! 종이를 잘게 찢으며 정필을 노려보고

정필; [알겠네. 자네 아비는 얼씬도 못하게 함세.] 비굴하게 웃고

청풍; [우리 다시 보는 일 없도록 합시다.] ! 잘게 찢은 종이를 방안에 뿌리며 돌아서고

<저 새끼가...> 분노하는 건달들. 하지만

돌아서며 손가락을 입에 대는 귀견수. 그 앞에서 다른 황금수라가 문을 열고 있고 그 문으로 청풍이 나간다.

정필; [살펴가게나.] 억지로 웃으며 포권하고.

귀견수가 청풍을 따라 나가고 문을 연 황금수라도 나가면서 문을 닫으려 한다

! 닫히는 문. 이제 밀실에는 정필과 건달들만 있고

건달1; [뭡니까 형님?] 불만을 토하고. 다른 자들도 불만스런 표정으로 정필을 보고

건달1; [저 백정 새끼가 기고만장하게 구는 걸 어째서 보고만 계신 것입니까?] 의자에 다시 앉는 정필에게 항의

정필; [앞으로 두 번 다시 이가놈 부자 주변에는 얼씬거리지도 마라.] 의자에 앉으며 침통하게 말하고

건달1;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려달라는 거 아닙니까?]

정필; [이 새끼가...] 홱 돌아보고. 찔끔하는 건달1

건달1; [... 죄송합니다 형님!]

건달1을 노려보는 정필

<이거 잘못하면 피 보겠는데...> <장웅이 놈이 이성을 잃고 정필 형님 신경을 건드렸어.> 다른 건달들 긴장할 때

정필; [그만 두자!] 고개 설레 젓고. 이어

정필; [이가놈이 데려온 자들이 누군지 아는 놈 손들어!] 건달들 둘러보며 말하지만

건달들 멀뚱하게 서로를 보고

정필; [그래, 아는 놈 없겠지.] [황금수라들을 만나고 목숨 부지한 인간은 거의 없으니...] 한숨. 그러자

[... 황금수라!] 기겁하는 건달들

건달1; [... 이가놈의 동행이 황금전장의 비밀고수들이라는 황금수라들이었습니까?] 덜덜 떨고

건달2; [황금수라들은 몸뚱이가 금강불괴라 도검과 독약이 불침하고 사용하는 병기는 신병이기라 죽이지 못하는 대상이 없다던데...] 비로소 깨닫고 덜덜 떨고

정필; [하물며 이가놈을 경호한 건 황금수라의 부단장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자의 가면에는 부()자가 새겨져 있었지.] 덜덜 떠는 건달들

정필; [어떻게 줄이 닿았는지 모르지만 이가놈은 황금전장의 비호를 받고 있다.]

정필; [그리고 황금전장의 능력이면 우리 단지회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정필; [이가놈 부자는 액신(厄神)같은 것들이니 주변에 얼씬도 마라.] 겁에 질린 얼굴 크로즈 업

 

#28>

역시 밤. 금릉 성내의 높은 탑.

휘익! 그 탑 꼭대기에 바람처럼 나타나는 풍신장

주변을 둘러보는 풍신장. 굳은 표정. 직후

[늦었어요.] 휘익! 탑의 처마쪽에 구름 덩어리 같은 것이 서리며 말소리가 들리더니

화악! 구름이 흩어지며 드러나는 운신장.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다

풍신장; [어서 와라 운매.] ! 운신장 근처의 처마 위로 이동하고

풍신장; [보아하니 성과가 없었던 것같구나.]

운신장; [뒤질 수 있는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종이를 들어 보이고

운신장; [풍오라버니가 그려주신 이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자는 발견할 수 없었어요.] 운신장이 쳐든 종이에는 청풍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풍신장; [그놈은 분명 금릉 성내에 있다.] [먼길 떠나는 차림이 아니었으니 여행객이나 뜨내기는 결코 아니었다.]

운신장; [십팔 년 전, 아연아가씨의 몸종이었던 진삼낭이 금릉 근처에서 종적이 사라졌다는 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군요.]

풍신장; [진삼낭, 그년이 금릉에 숨어 용무린의 아들을 길러온 게 분명하다.] 이를 부득 갈고. 이어

풍신장; [천마의 적통이기도 한 그놈의 존재가 알려지면 무림은 다시 한번 격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마교의 잔당들이 그놈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우리 무림맹의 천하를 뒤엎으려 들 테니...]

운신장; [게다가 진삼낭에게는 천마묵장(天魔墨掌)을 얻을 수 있는 두 개의 열쇠중 하나가 있기도 하지요.]

풍신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삼낭과 그놈을 찾아내야한다.] [소맹주의 혼사 따위는 이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휘익! 날아오르고

풍신장; [성 밖을 살펴봐라.] [난 금릉의 뒷골목을 훑어볼 테니...] 날아가고

운신장; (풍신장 오라버니의 우려도 기우가 아니다.) 걱정

운신장; (맹주님은 어느덧 팔순을 넘겨 나날이 쇠약해지고 계신다.) (이럴 때 천마의 적통이기도 한 아연아가씨의 핏줄이 나타나면 마교의 잔당들이 미쳐 날뛸 테고...)

운신장; (그럼 우리 무림맹이 지난 삼십여년 간 구축해놓은 무림의 판도가 단번에 뒤집어질 수 있다.) 휘이이! 운신장의 몸 주위로 안개와 구름이 생기고

운신장; (풍오라버니 말대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아연아가씨의 아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화악! 구름에 휘감겨 사라지는 운신장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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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칠절(武林七絶) (2)

 

 

!”

휘릭!

유소기는 다급성을 지르며 뒤로 몸을 뒤집으며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으로 돌아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밑이 절벽이라는 것은 임청우가 던진 물건을 잡는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군 지청천도 폭넓은 칼에 무언가를 받아들고 벼랑 끝에 내려서고 있었다. 도군은 무공이 유소기보다는 조금 쳐져서 손이 아닌 칼로 물건을 받아낸 것이었다.

유소기는 손에 넣은 얇은 책을 펼쳐보았다. <일옹청풍일지>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찌직!

혹시나 싶어서 몇 장 넘기던 유소기는 책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영악한 놈!”

유소기는 이를 갈며 절벽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길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도군도 손에 든 장자(壯子)를 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삘릴리...

그때 그들의 뒤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퉁소소리가 들려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입에 퉁소를 물었으며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있는 중년인, 바로 칠절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소(神簫)였다.

놓쳤다.”

유소기가 돌아서면서 동료들에게 내뱉았다.

그가 서있는 곳으로 나머지 칠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진 벼랑 가에 둘러서서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비객 소도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어떻게 할 텐가?”

유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벽을 내려간다. 시체라도 뒤져서 찾아내도록 하자.”

유소기가 앞장서자 모두 그 뒤를 따라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내려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몽선도를 찾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

 

절벽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임청우는 죽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강적을 피하기 위해 절벽을 택했을 뿐 죽으려면 그 자리에서 죽었지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죽는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는 절벽에서 살아날 방법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황의소녀의 몸에서 나는 은근한 체향과 체온이 몸으로 전해온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내심 체념하며 소리쳐 물었다.

이름이 뭐야?”

황의소녀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반짝 뜨며 대답하고 물었다.

심주은(沈珠隱)! 네 이름은?”

슈앙!

임청우는 아래가 더욱 검어지는 것을 보면서 소리쳤다.

제기랄... 다 내려온 것 같다. 저승에서 가르쳐주마.”

그는 심주은이라는 이름의 황의소녀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였다.

!

끈적끈적한 풀 속으로 몸이 묻히는 것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임청우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약한 냄새...)

정신의 자락을 놓치면서도 임청우는 자신이 무언가 지독한 악취의 구덩이로 잠기는 것을 깨달았다.

 

***

 

계곡은 온통 검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땅에 기듯이 깔려있어 어깨높이에 달하는 것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이곳에서 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계곡이고 크지도 않은 숲이다.

바위들에는 이끼와 버섯, 이름 모를 기이한 풀들이 자라있어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주(劒主) 유소기를 비롯하여 도군(刀君), 신소(神簫), 뇌문신권(雷紊神拳), 지존수(至尊手), 비객(飛客), 묵궁(墨弓) 등의 칠절은 반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내려온 절벽 아래의 기이한 풍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융단처럼 땅을 덮고 있는 이런 곳에서 천길 절벽위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 계곡에서는 절벽 위에서는 보이던 반달마저도 보이지 않아 칠흑같이 어둡다.

칠절은 유소기의 신호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서 계곡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휘이익!

유소기는 바람을 몰고 나지막한 나무들을 밟고 달리면서 떨어진 흔적을 찾느라고 눈을 빛냈다.

그러나 위에서 떨어진 방향으로 봐서 그 근처가 분명할 것 같은 데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추락하는 도중 바람에 휘말려서 다른 쪽으로 떨어졌는가 보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기 위해 몸을 날릴 때였다.

부웅! 부웅!

갑자기 퉁소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렸다. 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신소, 찾았는가?”

유소기는 몸을 날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퉁소소리 보다 더 넓고 잔잔하게 계곡을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삭이는 듯이 낮은 음성이다.

바로 천리전음(千里傳音)이란 수법을 펼친 것이다.

부우우웅!

퉁소소리는 계곡의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소를 제외한 칠절들은 긴 그림자를 끌면서 일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신소 강상곡(姜想曲)은 굳은 얼굴로 퉁소를 입에서 뗐다.

무슨 일인가?”

가장 먼저 달려온 비객 소도성이 물었다.

신소 강상곡이 퉁소로 자신의 뒤쪽 암벽을 가리켰다.

어둠 속의 암벽은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높이 솟아 그들을 덮칠 듯이 보였다.

환상신녀(幻想神女)...!”

뒤이어 도착한 유소기가 암벽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자르듯이 내뱉었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며 어깨를 드러낸 절세미녀의 모습이 음각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버드나무가지를 들었으며 다른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있다.

지존수 사마명(司馬明)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신녀문(神女門)이 근처에 있단 말인가? 이 계곡에는 건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환상신녀의 모습이 이곳에 있는 한 신녀문은 이곳에 있다. 모두 의견을 말해보게. 신녀문과 충돌을 불사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날 것인지.”

유소기가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은... 신녀문과 부딪혀서는 안돼. 신녀문을 없애는 건 별 것 아니겠지만, 그 계집들 중 단 한명이라도 살아나간다면 무산(巫山)의 할망구를 무림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뇌문신권 방일휘(方一揮)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산의 할망구를 제거한 후라면 모를까 그전에는 신녀문을 건드려서는 골치만 아플 뿐이야.”

묵궁 진패선(陳覇善)이 뇌문신권 방일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때 지존수 사마명이 불쑥 말했다.

혹시 무산의 할망구가 늙어 죽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소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육지신녀(六指神女)는 신녀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다. 신녀문의 이술(異術)을 십중팔구는 익힌 그녀를 범상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

유소기의 말에도 지존수 사마명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근년에 신녀문의 제자가 무림에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신녀문은 제자를 택 해지 못해서 문을 닫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소 강상곡이 그런 지존수 사마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녀문을 없애버릴 심산이로군.”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다. 난 성결한 척하면서 온갖 잡술을 부리는 계집들을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우리 모두를 끌어들일 셈인가? 큰일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나?”

유소기가 지존수 사마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핫! 유소기, 너야말로 이곳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닌가?”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말했다.

모두들 생각 해보라구. 여기 어딘가에는 몽선도가 떨어져 있어. 몽선도라면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신녀문인가 하는 계집들이 겁이 나서 물러난다는 게 어디 말이라도 되는가?”

신소 강상곡과 비객 소도성, 뇌문신권 방일휘등이 일제히 불안한 시선을 유소기에게 보냈다.

유소기의 관옥같은 얼굴에 싸늘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살기(殺氣)였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하지만 유소기,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죽게 되면 네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는 힘들어질 걸?”

유소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이 어깨의 백금검을 잡아갔다.

화악!

유소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존수 사마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언제라도 발출할 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백금검의 검병(劒柄;검의 손잡이)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객 소도성도 신소 강상곡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었구나!)

지존수 사마명은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유소기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서면 그들도 동조하여 유소기의 독주를 견제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유소기는 자신들과 같은 칠절이기는 하지만 그 무공에 있어서는 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합공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유소기가 동료가 없음으로 인해 겪는 불편은 견딜 수 있지만 수모를 받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르르릉!

백금검이 차디찬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유소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존수 사마명의 이마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장내에 팽배했다.

신소 강상곡등은 손에 땀을 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졌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도군 지청천이 두 사람 사이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

이어 폭넓은 칼이 지존수 사마명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지존수 사마명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도군 지청천의 칼이 마치 만근의 무게로 그를 내리 눌렀다.

(으으으음...)

지존수 사마명은 내심 신음을 삼켰지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군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살려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과해라!”

문득 도군이 입을 열었다.

지존수 사마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마명 뿐 아니라 도군을 제외한 칠절 전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 그들은 머리가 약간 어찔 하는 것을 느꼈다.

도군이 입을 여는 것은 적과 상대할 때뿐이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한 것이었다.

도군의 목소리는 특이한 음공(音功)이 실려 있어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지존수 사마명은 지체없이 손을 쫙 펼쳤다.

열 개의 손가락이 오리발처럼 쫑긋해졌다.

파팟!

지존수 사마명이 이를 악무는 순간 그의 양쪽 손 무명지(無名指)가 각기 폭발하면서 떨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터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다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유소기가 검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몽선도를 찾는다. 만일 신녀문의 제자들과 부딪힌다면 가차없이 죽여라. 몽선도를 찾아내든 못 찾든 여기서 나가는 대로 무산의 육지신녀를 제거한다.”

유소기가 뒤돌아 걸어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지존수 사마명의 사과를 받은 대가로 그의 제안도 받아들인 것이다.

칠절의 우두머리로서 손가락 두 개를 날려버린 지존수 사마명의 무거운 사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도 가슴이 아프겠군. 처가(妻家)나 다름없는 신녀문을 제거하라고 했으니...)

앞서가는 유소기의 완강한 등을 보며 신소 강상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마명은 유소기의 살수를 피할 순 없겠어. 어리석은 친구같으니...)

고개를 떨군 채 지혈을 하는 지존수 사마명의 옆을 지나며 신소 강상곡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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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한 예언

 

 

"삼낭이는... 우리 도룡곡 등씨일족의 유일한 후손이니... 잘 돌봐주기 바란다."

천면음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이동생께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巨人)으로부터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을 보살펴주겠다 약속을 들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구나."

(내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이 될 것이다?)

천면음마의 뜬금없는 칭찬에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예지력(叡智力)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 괜한 소리라 여기지 말거라.”

고검추의 속내를 알아차린 천면음마가 고검추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아마도...”

말을 잇던 천면음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앞날이 보인 것일까?)

고검추는 천면음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내 죄다.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대신 치르겠구나.”

주르르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이 관련된 앞날을 본 모양인데... 대체 세 모녀가 무슨 일을 겪기에 저토록 비탄에 빠진 것일까?)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면음마가 앞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하물며 자신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중 등삼낭과 관련된 일이니...

맹세... 맹세를 해다오.”

천면음마는 눈물로 물든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맹세를 해주길 원하십니까?”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진 천면음마의 말이 고검추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해다오.”

천면음마는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만일 손이 몸에 붙어있었다면 고검추의 옷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고검추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양모 당혜선이 투신해버린 지금 등삼낭과 그녀의 딸들은 자신에게는 거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검추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찬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낭 아주머니는 제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또 옥경이와 옥령이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 피붙이인 듯 지켜주겠습니다.”

고검추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천면음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천면음마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지신명을 걸고... 삼낭이 모녀를 네가 거둬서 보살펴주겠다고 맹세해다오.”

필사적인 표정이 된 천면음마는 고검추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드리겠습니다. 삼낭 아주머니와 옥경이, 옥령이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보살펴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세 모녀를 거둬주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면음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내 정체는 숨겨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천면음마의 당부에 고검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공노할 색마인 천면음마가 자신들의 오라버니이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등삼낭 모녀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져보아라. 네게 줄 물건이 있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돌려 토지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겉옷을 돌아보았다.

그자는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기 전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겉옷을 벗어놨었다.

고검추는 천면음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겉옷을 끌어당겨 살펴보았다.

겉옷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탐화비록(貪花秘錄)

-도룡무보(屠龍武譜)

 

두 권의 비급 중 도룡무보는 도룡곡의 비전 비급이다.

도룡무보 안에는 하마터면 고검추를 죽일 뻔한 도룡삼첩장 등 도룡곡 등씨일족의 패도적인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구식으로 이루어진 도룡도법(屠龍刀法)이었다.

도룡구식(屠龍九式)이라고도 불리는 그 도법은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신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에 도룡구식을 완전히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룡구식을 완벽히 시전할 수 있다면 그는 도제(刀帝)라 불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탐화비록은 천면음마 등천하가 십여 년 전에 얻은 비급이다.

탐화비록을 남긴 인물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마인들로 인정받는 구마(九魔) 중 한 명이었다.

 

-화마(花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숱한 여자들을 농락한 전설적인 색마다.

그 때문에 화마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탐화색마(貪花色魔)라는 혐오스러운 별호로 더 자주 불린다.

화마는 평생 삼만 명 이상의 여자를 농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탁월한 재주덕분이었다.

먼저 화마는 절묘한 역용술을 지녔다.

그자의 역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한 걸음 옮길 때 세 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화마를 무슨 재주로 잡아서 죄를 묻는단 말인가?

변화막측한 역용술 외에도 화마는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경신술로만 따진다면 화마는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정도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을 주축으로 한 중원 무림에 공격당해 멸망했다.

다만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는 그 혈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등천하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했으며 다행히 도룡곡 비전의 도룡무보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등천하의 자질이 평범했다는 점이었다.

도룡무보에 수록된 절기들을 절정까지 연마하면 능히 독보천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뛰어나지 못한 등천하는 이십여 년을 고련했음에도 도룡무보 상의 절기를 채 삼할도 연성하지 못했다.

그 정도 성취로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등천하는 무공 수련을 포기한 채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그는 운중산(雲中山)의 어느 계곡에서 화마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마의 시신에서 탐화비록을 얻은 등천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비로소 무공이 약하더라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수단이란 것이 원수들의 아내와 딸, 여제자들을 겁탈하는 것이었다.

몇 년을 고련한 등천하는 마침내 화마의 수법을 대충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등천하는 자신도 모르게 화마의 음탕한 성격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자를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등천하는 강호의 아녀자들을 짓밟는 제이의 화마, 천면음마가 된 것이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탐화비록에 수록되어... 있다."

말을 잇는 천면음마 등천하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견디기... 힘들구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고검추는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 병아리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비록 상대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때문이지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을 보니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일각이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이 분을 위하는 길이다.)

고검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면음마의 심장 부위에 자신을 손바닥을 붙였다.

"... 고맙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지잉!

고검추는 얼굴을 돌리며 태을강기의 경기를 천면음마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퍼득!

사지가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둥이가 한 차례 세차게 경련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을강기의 강력한 잠경이 천면음마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이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고검추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면음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오공으로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는 천면음마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천면음마라는 이름으로 전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가엾은 인물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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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원의 손길

 

 

-흑혈맹호단(黑血猛虎團)!

 

나유라가 오이라트부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길러낸 달단부의 정예들이다.

달단부 최고의 용사들인 그들은 나유라의 총애 속에 영약과 무공비급을 마음껏 취해 수련해왔으며 그 결과 하나같이 일당백의 고수가 되었다.

나유라의 친위대격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은 그녀의 명령일하에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이었다.

나유라는 오이라트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을 수시로 오이라트부에 잠입시켜왔었다.

그 임무는 실로 위험한 것이라 열 명을 보내면 겨우 다섯 명이 살아 돌아올까 말까할 정도였다.

알몸으로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오이라트부 땅에 잠입했다가 실종된 흑혈맹호단 용사들 중 일부였다.

옳구나! 이런 때 쓸려고 저놈들을 살려두었었구나!”

철목풍이 하후진진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알몸으로 끌려온 것을 보는 순간 하후진진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진진아! ......!”

나유라도 바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녀 역시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크으! 용서하십시오 여왕님!”

... 속하들이 무능하여 이런 수모를 당하시게 했습니다.”

나유라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끌려온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분루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늘같은 자신들의 여왕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죄스러워 필사적으로 남성의 상징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들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지만 지금은 내공이 전폐되어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흐흐흐! 정말 기막힌 계획이다!”

철목풍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흑혈맹호단의 청년들과 나유라를 번갈아보았다.

호호호! 아버님은 제게 감사해야만 하실 거예요. 저 때문에 머잖아 달단부가 저절로 아버님의 손아귀에 굴러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하후진진도 청년들과 나유라를 보며 교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이 암캐의 부하들이 이 근처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때 그 자들은 보게 되겠죠. 평소 그렇게 도도하고 잘난 척했던 자신들의 여왕마마께서 스스로 기른 흑혈맹호단의 젊은 것들과 재미를 보며 교성을 질러대는 꼴을...!”

...그런!”

... 이 간악한...!”

듣고 있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진저리를 쳤다. 그들도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으하하! 절묘하구나 절묘해! 결국 여왕마마께서는 달단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흑혈맹호단을 만든 셈이 될 테니...!”

철목풍은 득의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 자는 분노와 충격으로 치를 떨고 있는 나유라를 쓸어 보며 느물거렸다.

여왕의 그 기막힌 치태를 보면 당신 부하들은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놈에게까지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소?”

철목풍의 그 말을 들은 나유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달단부는 사분오열 될 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달단부는 내 것이 되겠지.”

... 이 악독한 인간들...!”

나유라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철목풍의 말대로였다.

현재의 달단부는 나유라의 권위에 의지하여 결속이 유지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젊은 용사들과 야합을 하는 현장이 보여지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끝장일 것이다.

나유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테고 달단부의 위태롭던 결속은 일거에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분열된 달단부를 오이라트부가 집어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나유라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절박해진 나유라는 급기야 하후진진에게 애원까지 했다.

제발! 진진아! 이러지 말거라. 그래도 너 역시 달단부의 사람이 아니냐?”

물론 소용은 없었다.

내가 달단부의 사람이라고? 웃기지 마라! 내 아버지가 오이라트부의 용사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하후진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년의 남편은 가증스럽게도 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겁탈했다! 호호호! 이제 남편이 지은 죄의 대가까지도 나유라, 네년이 대신 치루어야만 한다!”

하후진진의 악에 바친 교갈에 나유라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나유라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날 깨끗하게 죽여 다오! 그래도 한 때 달단부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녀는 이미 대식국의 공주로서, 또 달단일족의 여왕으로서의 긍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아들이 이어받을 달단부가 사분오열되어 결국 오이라트부에 병탄당하는 일을 방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유라의 필사적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하후진진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작해라!!”

하후진진은 냉혹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을 끌고 온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각기 하나씩의 유리병을 꺼내들고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 죽어버리자 형제들!”

만수무강하십시오 여왕님!”

사태를 깨달은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비통하게 외치며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죽어버려야만 여신같은 존재인 나유라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한걸음 늦고 말았다.

어림없는 짓이지!”

파파팟!

청년들의 그같은 반응을 예견하고 있던 철목풍이 벼락같이 지풍(指風)을 날려 그들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린 것이다.

!”

크흑!”

청년들은 아혈이 짚혀 입을 딱 벌렸다.

어리석은 놈들이로군! 재미를 보게 해주겠다는데도 뒈지겠다고 날뛰다니...!”

클클! 그러게 말일세!”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음험하게 웃으며 다섯 청년의 벌어진 입에 유리병에 든 액체를 쏟아 부었다.

꺼억!” “끄윽!”

강제로 유리병의 액체를 들이킨 청년들의 몸에서는 즉시 반응이 나타났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온몸의 혈맥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애쓰던 그들의 남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용틀임을 해대었다.

으으으!” “크흐흐!”

어느덧 그들의 비통함으로 젖어있던 눈동자도 발정 난 짐승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번들거린다.

(흐윽!)

청년들의 야수같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나유라는 절망감으로 전율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청년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나유라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만이 자신들의 몸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식혀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호! 풀어줘라!”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하후진진이 다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커렁! 철컹!

그러자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막혔던 혈도와 팔 다리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크헝!” “크으으으!”

쇠사슬에서 풀려난 청년들은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일제히 나유라를 덮쳐갔다.

... 안돼! 정신차려라! 아악!”

나유라가 다급히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 찌직!

나유라를 덮친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옷을 찢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안돼! 안된다!”

나유라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인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옷이 야수로 변한 청년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가면서 나유라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허어... 기막히군!”

발가벗겨진 나유라의 모습을 본 철목풍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드러난 나유라의 나신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유라를 발가벗긴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라! 제발... 제발 정신 차려라!”

청년들에게 깔린 나유라는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울부짖음조차도 이내 청년들의 거친 숨소리에 묻혀버렸다.

달단부의 수백만 신민들이 여신처럼 떠받들던 나유라의 육체가 욕정에 눈이 뒤집힌 젊은 숫컷들의 손과 입에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악!”

그리하여 어느 순간 나유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축 늘어졌다.

마침내 그녀의 육체는 젊은 숫컷들 중 한명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호호! 아쉽구나. 네년의 이런 모습을 달단부의 모든 사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하후진진은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청년들에게 유린당하는 무참한 모습을 장면을 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은 그런 하후진진 옆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일 이검한에게 다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 자신이 먼저 나유라를 능욕했을 것이다.

헌데 그 직후였다.

!”

나유라의 육체를 가장 먼저 정복한 채 몸부림치던 청년이 돌연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푸학!

이어 청년의 목이 삐끗하더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으며 잘려진 목에서 피의 분수가 치솟아 나유라의 뽀얀 알몸 위로 흩뿌려진다.

터어엉!

직후 새파랗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나유라가 누워있는 바닥 옆의 바위에 반 넘게 박혔다.

칼날이 너무 새파래 거의 반투명하게까지 보이는 그 보도(寶刀)가 어디선가 날아와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한 청년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흐윽!”

돌연한 사태에 하후진진은 진저리를 치며 주춤 물러섯다.

... 네놈은!”

헌데 하후진진이 어찌된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쪽에서 철목풍의 경악에 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후진진의 시야로 현장에 있던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한쪽 모래 언덕 너머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의 손에 들린 칼날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 번쩍 광채를 일으킨다.

콰콰쾅! 퍼펑!

케엑!” “크억!”

직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여러 번의 단말마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죽일 놈들!”

쐐애애액!

아연실색하는 하후진진의 눈으로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한 명의 소년이 모래 언덕 너머에서 질풍같이 치솟아 올라 좌측으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타는 듯 붉은 피풍의를 몸에 두른 건장한 체격의 소년인데 그 소년이 덮쳐가는 쪽에는 새파랗게 질린 철목풍이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물론 이검한이었다.

그가 마침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 막아랏!”

철목풍은 좌측의 모래 언덕 쪽으로 달아나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미 한차례 충돌에서 이검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맛본 그자는 이검한이 나타나는 즉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웃!”

이놈! 죽어랏!”

화라락! 쏴아아아!

그 직후 철목풍이 달아나는 쪽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라 이검한을 짓쳐갔다.

오이라트부 최강의 정예들인 그들은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몽고의 대초원을 주유하면서 단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다.

바득! 주인을 잘못 만난 죄다!”

이검한은 살기 어린 일갈을 내지르며 벼락같이 양손을 동시에 흔들어냈다.

쩌어어엉! 꽈르르릉!

그러자 그의 왼손에는 톱날같은 날이 선 낭아신검이 들려 허공을 그었고, 오른손 장심으로부터는 시뻘건 섬광이 일어났다.

크아악!”

케에에엑!”

다음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수십 명이 일거에 몰살당하며 선혈이 난비했고 잘려진 육신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살이 타들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한다.

 

-낭아살륙검법(狼牙殺戮劒法)!

-화염마강(火焰魔罡)!

 

천붕랑왕과 마화존자의 무공이 천여 년 만에 시전된 것이다.

서역 무림사상 최강자들이라는 서역사천왕의 절기를 오이라트부의 졸개들 따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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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저녁 무렵. 금릉 교외의 강가. 청풍이 일하던 도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경치가 아주 좋은 강가에 정자가 한 채 서있다. 정자 근처에는 백마가 풀을 뜯고 있고. 정자에는 벽소소가 걸터앉아 멀리를 보고 있다.

정자 크로즈 업. 정자에 앉아있는 게 벽소소임을 보여주고

정자 근처의 관목 더미와 바위 뒤에 숨어있는 네 명의 죽립인들.

죽립인1; <벌써 반 시진 가까이 저러고 계시는군.> 벽소소를 보며 동료들에게 전음으로 말하고

죽립인2; <누굴 만나러 온 것같진 않네.>

죽립인3; <혼사와 관련하여 장주님께 대들다가 꾸중을 들었잖은가?> <아마 화를 풀려고 여기까지 말을 달려온 모양일세.>

죽립인4; <결국 이번에도 허탕을 친 셈인가?> 혀를 차고. 헌데

정자 난간에 걸터앉은 벽소소.

끼릭! ! 다른 곳을 보면서 손톱으로는 정자 난간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다. 쐐기문자 같은 기호들이다. 이윽고

벽소소; [됐어!] 발딱 일어나고

벽소소; [화도 대충 풀렸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 짝짝! 박수치고

풀을 뜯던 말이 고개 들며 돌아보고

정자에서 나오는 벽소소

두두두 달려오는 말

벽소소; [집으로 돌아가자.] ! 말에 뛰어오르고

두두두두! 말을 몰아 달려가는 벽소소. 그러자

! 스윽! 네 명의 죽립인들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몸을 날리고

벽소소; (바보들...) 말 달려가며 곁눈질로 뒤를 보고. 멀리서 날아오는 죽립인들

벽소소; (백날 날 쫓아다녀봐. 내가 꼬리를 잡히나.) 냉소하고

벽소소; (그나저나 사()공자님을 만나면 무어라 말해야할지 막막하다.) 한숨 쉬고

벽소소; (사공자와 백년가약을 약속했는데 무림맹의 청혼을 받았으니...)

벽소소; (사공자가 허락만 한다면 야반도주라도 하고 말거야!) 결심하고

두두두! 곧 멀어지는 벽소소를 태운 말. 죽립인들도 멀어지고. 헌데

 

스스스! 벽소소가 앉아있던 정자 안에 안개같은 사람 형상이 서리더니

!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아주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교활한 인상에 허여멀끔한 인상의 청년이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기생오라비 같은 인상. 이자의 이름은 사우. 별호는 분면랑군. 마교의 사대마가중 암흑마가 출신이다.

사우; [...] 부채를 부치며 정자에 서서 멀리 멀어지는 벽소소를 보고. 이어

벽소소가 걸터앉아있었던 정자 난간으로 가는 사우

난간에 새겨진 기호를 보는 사우

사우; [내일 새벽, 이곳에서라...] 기호를 해독하며 음산하게 웃고

사우; [흐흐흐! 벽가년이 내 섭심술(攝心術)에 제대로 빠졌군. 무림맹 소맹주의 청혼을 받고도 여전히 이렇게 매달리는 걸 보면...] 산하게 웃고.

<벽소소가 위진천에게 시집을 가든 말든 최후의 승자는 본공자가 될 것이다. 계집이란 동물은 첫 사내를 결코 잊지 못하는 법이니...> 흐흐흐! 웃는 사람 사우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24>

<-황금전장> 다시 황금전장. 이제 저녁 무렵이 되었다. 해가 지려 하고

길고 큰 주방 건물. 하녀들이 건물 쪽을 힐끔거리고.

주방 건물 내부. 요리사들이 모두 모여 주대육의 말을 듣고 있다. 주대육 뒤에는 청풍이 서있고

주대육; [내일부터 이청풍이 정육(精肉)을 담당할 것이다.]

주대육; [다만 고기 다루는 솜씨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도 요리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주대육; [고기 요리를 맡은 놈들은 용도에 맞게 구체적으로 고기의 정형을 이청풍에게 요구하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총주방장님!] 고개 숙이며 대답하는 요리사들

주대육; [이청풍에게 질문 있으면 지금해라.] 말하자

요리사1이 손을 든다.

주대육; [철두(鐵頭)! 말해라.] 끄덕

요리사1; [총주방장님의 안목을 믿지만...] [저희들이 보기에 너무 어린 친구입니다.] 조심스럽게

주대육; [솜씨를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냐?]

요리사1; [그렇습니다.] 눈치 보며

주대육;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육회용 고기를 두 덩이 가져와라.] 창고 건물과 가까운 맨 끝의 요리사에게 말하고.

[!] 대답하고 창고로 달려가는 그놈

주대육; [철두! 너는 평소 고기 다루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었다.] 요리사1에게

요리사1; [그렇습니다.]

주대육; [그럼 이청풍과 솜씨를 겨뤄봐라.] 창고쪽을 돌아보고

창고로 달려갔던 요리사가 길죽한 고기 두 덩이를 두 개의 접시에 각기 담아 들고 온다. 뛰듯이

[가져왔습니다.] 접시를 탁자에 놓는 요리사. 탁자에는 도마와 칼도 준비되어 있다.

주대육; [이청풍! 철두!] [저 고기들로 각자 육회를 떠라.]

[!] [맡겨주십시오.] 대답하며 탁자로 가는 청풍과 요리사1 두 사람. 다른 요리사들은 탁자를 에워싸고

길쭉한 고기를 접시에서 도마로 옮기는 두 사람.

청풍을 힐끔 보며 사시미용 칼을 하나 집어드는 요리사1. 하지만

청풍은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단도를 꺼내고

칼집에서 뽑은 청풍의 단도. 짧고 무디어 보인다.

<저렇게 짧고 무딘 칼로 육회를 뜨겠다고?> <육회의 맛은 얼마나 육질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뜨는가에 달렸는데...> 요리사들 어이없는 표정.

주대육은 웃으며 보고 있고

요리사1; (내가 이겼다.) 히죽 웃으며 고기를 얇게 썰기 시작하고

요리사1; (저렇게 조잡한 칼로 뜬 육회에 내 육회가 질 리 없다.) 슥슥! 고기를 얇게 자르고. 헌데

! ! 청풍은 무심하지만 아주 빠르게 칼을 움직인다.

[허어!] [저럴 수가!] [칼이 안보일 정도로 빠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요리사들 경악하고.

요리사1; [!] 돌아보다가 경악하고

사사삭! 종이같이 얇게 고기를 써는 청풍. 이미 거의 다 썰었다.

미소 지으며 끄덕이는 주대육

요리사1; (말도 안되는...) 슥슥! 식은땀 흘리면서도 칼질을 하고

청풍; [끝났습니다.] 먼저 칼을 멈추며 물러서고

요리사1; [... 저도 끝났습니다.] 비지땀 흘리며 마지막 칼질을 하고

도마 위에 얹혀진 두 개의 육회.

주대육; [모두 한 점씩 맛을 봐라.]

[!] 대답하며 다가오는 요리사들. 모두 젓가락을 하나씩 들었다.

먼저 요리사1의 것을 먹고 청풍의 것을 뒤에 먹는 모습들

요리사2; [얇으면서도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았구만.] 일행중 가장 나이가 많은 요리사가 젓가락으로 요리사1의 고기 조각을 집어 들어 살피고

요리사2; [맛은 어떨까?] 입에 넣고.

긴장하며 보는 요리사1

요리사2; [! 역시 훌륭해. 육즙이 농후하게 느껴지는구만.] 끄덕

안도하는 요리사1

요리사2; [그럼 이 친구 것도 먹어볼까?] 청풍 앞의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요리사2; [얇기와 형태는 철두와 막상막하로구만.] 집어든 고기 살피고

요리사2; [결국 맛에서 승부가 나겠지.] 고기를 입에 넣고. 직후

[!] 눈 부릅뜨는 요리사2

주대육; [어떠냐?] 웃고.

요리사2; [이건... 이건...] 우물대며 흥분하고

요리사2; [마치 눈인 것처럼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집니다.] [지금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지미(至味;맛있는 음식)입니다.] 흥분하고

[어디!] [나도 좀 먹어보세.] 우르르 몰려들어 청풍의 육회를 먹는 요리사들. 요리사1은 당황하는데

[... 과장이 아니었구만.] [날고기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기가 막히구만.] 요리사들 감탄하고

요리사1; (저놈의 육회가 그렇게 맛있는 건가?) 불신. 노려보고

주대육; [철두 너도 맛을 봐라. 다른 놈들이 다 먹어치우기 전에...] 웃으며

요리사1; [...] 요리사들 사이로 끼어들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요리사1

요리사1; [!] 눈 부릅

주대육; [소감을 말해봐라.]

요리사1; [이건... 이건...] 우물우물

요리사1; [저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른 요리사들도 끄덕이고

주대육; [이청풍의 칼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해서 고기의 육질에 전혀 손상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육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요리사2; [역시 총주방장님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포권하며 아부하고

요리사2; [이청풍같은 인재를 용케 찾아내셨습니다.] 청풍의 팔을 툭 치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종종 육회 맛도 보주게나.] [정말 대단한 솜씨야.] 몰려들어 청풍과 인사 나누는 요리사들

청풍;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요리사들과 인사 나누며 웃고

주대육; (청풍이 놈 덕분에 황금전장 주방의 명성이 또 올라갈 것이다.) 청풍이 요리사들과 통성명하는 걸 흐뭇하게 보고

<당장 무림맹의 총관 접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게 되었다.> 웃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주대육의 생각 나레이션

 

#25>

여전히 황금전장. 하지만 이제 해가 졌다. 여기저기 등이 내걸리기 시작하고

주방 근처 조용한 곳에서 주대육으로부터 세 명의 인물을 소개 받는 청풍. 주대육 뒤에는 하녀 한명이 쟁반을 들고 있는데 그 위에 두 개의 주머니가 얹혀져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들이다.

주대육; [이분은 우리 황금전장 호원무사들 중 최정예인 황금수라들의 부단장(副團長) 귀견수(鬼見手).] 청풍에게 앞쪽에 서있는 세 명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세명의 인물들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죽립은 쓰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얼굴에 황금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드러나 보인다. <신마유희>에 나온 황금수라들과 같은 모습. 세명의 인물중 중앙에 선 인물의 가면 이마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이자가 황금수라들의 서열이위인 귀견수다.

청풍; [처음 뵙겠습니다.] 포권

세 인물 고개를 조금 까닥.

주대육; [부단장 일행이 함께 가면 단지회의 잡것들이 감히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청풍;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주대육; [감사는 무슨...] 쟁반 들고 있는 하녀쪽으로 돌아서고

주대육; [자네같은 인재를 영입하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 쟁반에서 두 개의 주머니를 집어들고

주대육; [은자를 오백냥 씩 나눠담았다.] 청풍에게 내밀고

주대육; [하나는 아버지의 도박 빚을 감고 다른 하나는 자당에게 드려라.]

청풍; [...] 받고

주대육; [내일 아침에는 도축장에 들렸다가 오도록 하게. 추노대가 말한 좋은 소가 제대로 입하되었는지 확인하고...]

청풍; [내일 뵙겠습니다.] 주머니들을 품속에 넣으며 고개 숙이고

곧 귀견수 일행과 함께 걸어가는 청풍의 뒷모습. 청풍과 귀견수가 나란히 걷고 그 뒤를 두 명의 황금수라들이 따라가는 모습

주대육; (청풍이 저 놈...)

주대육; (아무리 봐도 백정이나 요리사로 인생이 끝날 놈이 아니다.)

주대육; (과연 나중에 어떤 거물이 되어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웃고. 헌데

 

근처 건물 뒤에서 고개 빼꼼 내미는 벽옥령. 여전히 털이 긴 흰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고

황금수라들과 함께 멀어지는 청풍의 모습이 보이고

청풍의 옆모습.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벽옥령

고양이를 안고 몰래 청풍의 뒤를 따라가는 벽옥령. 오가던 하인들과 하녀들은 보고도 못 본 척

 

#26>

여기저기 등이 내 걸리는 황금전장 내부. 하인과 하녀들이 건물 모서리나 담장등에 등을 걸고 있고. 도처에 무사들이 대열을 지어 걸어간다. 송아지만한 개들을 끌고 가는 무사들도 있다. 핏불이나 로트와일러처럼 털이 짧고 근육질의 사납게 생긴 개들이다. 목에는 쇠사슬이 묶여있다. 화면에 나온 건 모두 네 마리다.

개를 끌고 오가던 무사들이 급히 누군가에게 인사하고

청풍이 귀견수 일행과 함께 오고 있다.

청풍; [야간에는 경비가 더 삼엄해지는 모양입니다.] 오가는 무사들과 개들을 보고

귀견수; [본장은 평범한 인간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막대한 재물을 보유하고 있네.] [아마 황실이라 해도 본장의 재력을 능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걸세.]

청풍;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귀견수; [당연히 본장의 재물을 노리는 놈들이 끊이질 않지.] [물론 뜻을 이룬 놈은 단 한명도 없고!] 눈 번득이고

귀견수; [장담하건데 본장의 경비는 천하에서 가장 완벽할 걸세.] [호원무사의 숫자가 천명이 넘을 뿐 아니라 온갖 함정과 기관장치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지.]

귀견수; [멋모르고 본장의 금지구역에 들어간 인간은 시체도 보전하기 어렵다네.]

청풍; [그야말로 금성철벽(金城鐵壁)이로군요.]

귀견수; [당금의 무림을 통틀어도 들키지 않고 본장의 심장부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되지.] 끄덕

청풍; (무서운 분위기와 달리 말이 많은 분이로군.) + [저 개들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사들이 끌고 가는 개들을 보고. 현장에 있는 개들은 모두 네 마리

귀견수; [본장에서 특별히 번식시킨 번견(番犬)들일세.] 함께 개들을 보며

<늑대나 표범과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사나울 뿐 아니라 충성심도 강한 놈들이야.> 침을 질질 흘리며 무사들을 끌고 가는 개들을 배경으로

귀견수; [총주방장님으로부터 향낭(香囊)을 하나 받았겠지?]

청풍; [! 받았습니다.] 작은 향주머니를 들어 보이고

귀견수; [그걸 늘 몸에 지니고 다니게.] [저놈들은 향주머니를 지니지 않은 인간은 무조건 공격하도록 훈련받았으니...] 개들을 보며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귀견수; [일단 개들은 해가 진 후에야 풀어놓지만...] + [!] 말하다가 눈 번뜩이고

크르! ! 개들이 갑자기 청풍과 귀견수 일행이 온 쪽을 돌아본다.

[워워!] [이놈들이 왜 이러지?] [진정해!] 개들을 끌고 가다가 기겁하는 무사들

크릉! 크르르! 날뛰며 청풍과 귀견수가 온 쪽으로 달려가려는 개들

청풍; (개들이 뭔가에 흥분했다.) 역시 돌아보고. 그러다가

[!] 눈 번득

청풍과 귀견수가 지나온 쪽의 건물 뒤에 숨어 있다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는 벽옥령. 품에는 털이 긴 흰 고양이를 안고 있고. 거리는 30미터쯤

청풍; (저 계집아이가 원인이다.) 깨닫고

벽옥령이 안고 있는 고양이 크로즈 업

청풍; (정확히는 계집아이가 안고 있는 고양이가 개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는 원래 앙숙이니...) 생각할 때

크왕! 크릉! ! ! 개들의 목줄이 끊어지거나 목줄을 놓치는 무사들. [!] [안돼!] 비명 지르는 무사들

크왕! 크릉! 벽옥령을 향해 돌진하는 개들. [!] [!] [꺄악!] [엄마야!] 오가던 무사들과 하인, 하녀들 기겁하며 피하고

개들이 달려가는 앞쪽, 숨어있던 건물 뒤에서 나와 뒷걸음질 치는 겁에 질린 벽옥령. 여전히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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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무림칠절(武林七絶) (1)

 

 

우워어어어어!”

길고 웅혼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다. 그가 이리로 오고 있다.”

임청우는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빠르게 달리는 황의소녀의 향긋한 체향에 젖어 있다가 기겁하며 외쳤다.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멀리서 시작되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났다.

장차 금포염왕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되는 기린아 검주 유소기!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검법은, 검법은 배웠어?”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를 밟으며 달리던 황의소녀가 임청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대답이 없었다.

속은 것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든 황의소녀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그럼 뭘 배웠어?”

아직 아무 것도...”

하아...”

임청우의 대답이 황의소녀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

그 사이에 오십여 장 밖에 이른 유소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휘익!

황의소녀는 땅으로 뛰어내려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비정 냉혹한 성격의 유소기는 아마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드드드드!

한데 갑자기 숲이 흔들렸다.

콰콰콰쾅!

앞쪽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두 사람을 향해 쓰러졌다. 누군가 숲 속의 거목들을 일도양단하여 두 사람의 행로를 저지한 것이다.

!”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황의소녀는 몸을 굴려 근처의 바위 뒤로 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지만 피할 곳이라고는 그 바위뿐이었다.

쿠르르릉! 콰드드드!

거대한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지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엎드려!”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한다고 피한 바위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허리를 힘껏 채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직후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황의소녀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임청우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임청우는 키가 반자 정도 작아졌다.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임청우 자신도 몰랐다.

도망가!”

나무를 떠받친 채 임청우가 소리쳤다.

! !

임청우가 떠받치고 있는 나무 위로 또 다른 나무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임청우의 허리가 휘청이고 키는 점점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드러난 팔목과 얼굴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황의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청우는 사방에서 넘어온 나무들을 하나의 나무 위에 받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들보나 다름이 없었다.

임청우가 쓰러진다면 황의소녀는 물론이고 임청우 자신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바위 옆이기는 하지만 크지 않은 그 바위도 아마 박살나버릴 것이다.

황의소녀도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임청우의 곁에 서서 나무를 떠받쳤다.

어서 빠져나가!”

임청우는 비지땀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황의소녀는 힘겨운 얼굴로 살풋 웃어보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받쳤다.

임청우의 부담이 약간 줄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대책도 될 수 없었다.

황의소녀 역시 자신들이 결국에는 깔려 죽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군(刀君),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을 놓칠 뻔했네.”

나무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동산 밖에서 검주 유소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낭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실린 목소리다.

 

휘익!

유소기는 사방에서 가운데를 향해 촘촘히 쓰러져 거대한 노적(露積)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거목들 위에 내려섰다.

파라라랏!

그의 몸에 걸쳐진 청삼이 펄럭이며 바람소리를 냈다.

유소기의 십여 장 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거목 위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폭이 넓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코, 입과 귀, 모두가 큼직큼직한 사람이다. 완강한 턱은 그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 백의의 도객이 칠절 중 검주 유소기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가공할 고수 도군 지청천(池靑天), 바로 그였다.

도군은 유소기의 인사말에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달아나는 앞쪽의 나무들을 베어 가로막은 것은 바로 도군이었다.

그놈이 어수룩한 겉보기완 달리 아주 교활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굴리려 해도 굴릴 수가 없겠군.”

유소기는 쓰러진 나무들이 층층이 겹쳐 이룬 노적 형상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웃었다.

추릿!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소기는 검을 뽑았다.

백금검이 무지개같은 흰빛을 뿜었고,

쿠르르르! 콰콰쾅!

아름드리나무들이 토막토막 베어지며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쪽으로 굴러갔다.

촤아아아!

작은 나뭇가지들과 잎들은 유소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

도망쳤구나!”

갑자기 유소기의 표정이 변했다.

“...!”

좀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군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거목에 부딪혀 박살나버린 바위 곁에는 두 쌍의 발이 깊이 박혔던 흔적만 있을 뿐,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시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휘익!

유소기는 이를 부득 갈며 몸을 날렸다.

거목들이 토막 나서 굴러가는 쪽이었다.

도군도 말없이 몸을 날렸다.

 

퉁퉁퉁퉁!

수레바퀴 같이 굴러가는 거목의 잘린 토막들은 다른 나무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바위 위로 튀기도 하면서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황의소녀와 임청우는 그 나무토막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로 굵은 나무속을 파내고 그 안쪽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라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만한 구멍을 파내기엔 충분했다.

임청우가 두 손으로 나무를 바치고 있는 사이에 황의소녀는 혈도를 써서 재빨리 속을 파냈었다.

거대한 청동향로도 간단히 베었던 혈도다.

청동에 비하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나무를 파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압사(壓死)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헌데 유소기는 나무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잘라서 굴려버렸었다.

그 바람에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숨은 나무토막도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소기의 검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베었다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두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황의소녀가 나무 구멍 안쪽에 숨고 임청우는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입구를 등지고 서서 버티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 상태로 나무토막은 연신 회전하며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

아차하면 임청우의 몸이 통나무 밖으로 튕겨나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임청우는 팔과 다리에 힘을 한껏 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팍팍팍!

백광이 번득이며 통나무 토막들이 둘로 갈라졌다. 유소기가 비탈을 따라 날아 내려가면서 한꺼번에 십여 개씩의 통나무 토막들을 베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잎이나 가는 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다가 돌풍을 타고 올라갔을 리는 없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이 통나무 속에 숨었으리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백 여 개의 통나무가 다시 둘로 나눠지며 빠르게 비탈을 굴렀다.

통통통!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옆으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가 짧아진 통나무들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숨어있는 통나무가 베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은 머리위로 비스듬히 받치고 혈도는 몸 옆의 나무 벽에 밀어붙였다.

혹시 유소기의 검이 그들이 숨어있는 통나무를 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청강사자검과 혈도에 저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임청우는 자신의 옷자락이 통나무 밖으로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유소기는 백금검으로 굴러가는 통나무들을 자르다가 냉소를 머금었다. 굴러가는 통나무들 중 하나의 중간쯤에서 펄럭이는 임청우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휘익!

즉시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은 유소기는 허공에서 요자번신(鷂子翻身)의 수법으로 몸을 굴린 후 그 통나무 앞을 가로막았다.

!

마주 보고 있던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통나무가 갑자기 멈추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

황의소녀가 눈물을 찔끔 쏟으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통나무가 수직으로 홱 쳐들려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두 사람을 밖으로 쏟아냈다.

!”

엄마야!”

임청우는 바닥에 나뒹굴고 황의소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휘익! 터텅!

통나무를 한손으로 간단히 잡고 흔들어서 두 사람을 쏟아낸 유소기는 빈 통나무를 뒤로 던져버렸다.

(검주 유소기!)

(... 틀렸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눈앞에 서있는 임풍옥수같은 용모의 중년인 유소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텅 터터터텅!

그 사이에도 유소기 뒤쪽에서 나머지 통나무들이 요란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손을 젓자 수십 개의 통나무들은 간단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수만으로도 유소기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통나무들은 조금 더 굴러간 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임청우의 얼굴을 본 유소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옥같이 맑던 임청우의 얼굴이 불과 반나절 만에 검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황의소녀는 유소기의 추적을 따돌릴 목적으로 임청우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유소기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몽선도!”

하지만 유소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청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에게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대안탑에서 인()이 포함된 재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유소기는 검집으로 황의소녀를 가리켰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 예쁜 소녀가 화를 당하게 된다.”

황의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지도 않았음에도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뼛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임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큰 백의의 중년인이 그의 뒤에 칼을 뽑아든 채 서있었다. 도군이었다.

순간 임청우는 칠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굳이 뺏으려 하니 나는 죽어도 뺏기지 않겠다.)

임청우는 오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유소기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져가시오.”

임청우는 소리치며 두 개의 물건을 각기 동북쪽과 동남쪽을 향해서 던졌다.

임청우는 무공은 모르지만 공력만은 아주 높다.

! 피핑!

임청우가 힘을 다해 던진 두 개의 물건은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 파팟!

유소기와 도군의 몸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라 각기 하나의 물건을 쫓아갔다. 그들의 신속함은 먹이를 덮치는 표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임청우는 유소기와 도군이 몸을 날리자마자 황의소녀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얼굴 앞에서 찬바람이 이는 순간 임청우는 황의소녀를 힘껏 껴안으며 땅을 박차고 껑충 뛰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까마득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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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색마의 신세한탄

 

 

"크크크... ... 동정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고검추의 어두운 표정을 본 천면음마는 체념한 듯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철봉황... 그 계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피에 섞어서 뿜어낸 탕음마고(蕩淫魔蠱)에 중독되었으니..."

이어 천면음마는 악에 바쳐 내뱉었다.

사실 그자가 준비한 진정한 암수는 철봉황에게 접근하여 탕음마고라는 지독한 최음제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천면음마는 이빨을 하나 빼서 생긴 빈틈에 최음제가 들어있는 은제 구슬을 끼워두고 있었다.

상대 못할 강적을 맞닥트릴 경우 최음제가 들어있는 그 은제 구슬을 깨트린 후 침에 섞어 분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철봉황의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맞는 순간 입속에 숨기고 있던 최음제 탕음마고를 피에 섞어 뿜어내게 되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베기 위해 쇄도하다가 탕음마고가 섞인 천면음마의 피를 일부 흡입한 것이다.

"... 철봉황! 그 여인이 철봉황이었습니까?"

천면음마의 말을 들은 고검추의 안색이 일변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고검추는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구해 토지묘를 떠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크크크... 그렇다. 그 계집이 호천무맹 최강의 무력집단인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의 총사(總士) 철봉황 고현경이다."

"!"

고검추는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머나먼 기련산으로부터 찾아온 여인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천면음마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그 계집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계집은 곧 탕음마고의 발작으로 희대의 탕녀가 될 테니..."

"... 무어라고요?"

고검추는 눈을 부릅떴다.

"클클클... 정파백도의 태두인 호천무맹의 신임 총사가 천하에 다시없을 음탕한 계집으로 변할 테니 볼만하지 않겠느냐?"

천면음마는 악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탕음마고!

 

남만 특산의 고독으로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여 생명의 근원인 원영지기(元嬰之氣)를 먹고 산다.

원영지기를 갈취당한 숙주는 격렬한 욕정을 일으켜 이성(異性)을 찾게 된다.

이성과 관계하여 상대의 정기를 흡수해야만 빼앗긴 원영지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분노의 표정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 악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는 철봉황 고현경이 아버지의 동문 사매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양모 당혜선이 그녀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한데 그런 철봉황 고현경이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에 중독 당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천면음마에게 살의가 일어나는 고검추였다.

"흐흐흐... 그 계집을 탕음마고에서 구하고 싶으냐?"

천면음마는 그런 고검추의 표정을 살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검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기도 쉽군."

고검추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들은 천면음마는 히죽 웃었다.

"본좌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다오. 그러면... 철봉황을 구할 방도를 가르쳐주마."

"말해 보시오."

고검추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면음마는 고검추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꾸했다.

"첫번째 조건은... 본좌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말에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봉황 고현경은 천면음마의 전신 경맥을 난자해 놓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피하고 난자하여 쉽사리 죽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천면음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것이다.

천면음마는 그 끔찍한 고통을 끝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나의 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천면음마는 고통으로 이지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피붙이가 있었습니까?"

고검추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기도 하고... 나같은 말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착한 누이동생이지.”

천면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숱한 여자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제에 제 누이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문 사매인 철봉황을 구하려면 천면음마와 거래를 해야만 한다.

영누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말씀해보시오.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고검추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천면음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자는 내심 고검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진 그자의 말이 고검추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내 누이의 이름은 등삼낭(鄧三娘)이고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 등삼낭!”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이 외쳤다.

“...!”

말을 이어가려던 천면음마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그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같다! 그렇다면...)

고검추는 팽가촌 촌장의 며느리인 등삼낭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네놈... 내 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냐?”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누이동생 분의 왼쪽 입 꼬리 쪽에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고검추는 등삼낭의 얼굴에 나있는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틀림없구나. 네놈은 내 누이와 아는 사이였어.”

천면음마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등삼낭 아주머니가 이 악명 높은 색마의 누이동생이었다니...)

고검추는 당혹과 함께 자신이 운명의 사슬같은 것에 엮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 지인의 오빠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고검추는 팽가촌의 촌장 팽유가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명문가가 청해의 도룡곡이었음을 깨달았다.

팽유가 등삼낭의 친가가 도룡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도룡곡이 전 무림에 공적으로 찍혔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가촌... 너는 기련산 팽가촌에서 산 적이 있겠구나.”

천면음마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검추라 하며 얼마 전까지 팽가촌에서 살았습니다.”

고검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전에 널 본 적이 있었겠지만... 마지막으로 팽가촌에 들른 게 삼 년 전이었으니 설령 널 보았다 해도 지금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말 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을 때...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종을 만나서 막내 누이가 살아있으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기련산 팽가촌의 촌장이 구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면음마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토지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듯이 말했다.

고검추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천면음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연을 만나 복수할 능력을 갖춘 나는... 우리 도룡곡의 멸망에 관여한 문파나 가문을 찾아다니며 계집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 생각해서 한 짓이었는데...”

천면음마의 눈 꼬리로 물기가 어렸다.

뒤늦게 삼낭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팽가촌을 찾아갔지만... 차마 부끄러워 삼낭이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주르르!

마침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가 누이동생인 걸 알고도 나서지 못한 건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고검추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천면음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강간해왔다.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았으며 비구니와 여자 도사들까지도 거리낌없이 강간했었다.

그런 처지에 차마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의 딸들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천면음마는 먼발치에서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이 낳은 딸들을 몇 번 훔쳐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누이동생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켰었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에게도 혈육을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구나.)

고검추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혈육은 끔찍하게 여기면서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거리낌없이 강간해온 천면음마의 행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해해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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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악독한 소녀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어머니의 원수!”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독기서린 교소를 터뜨렸다.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나유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혈이 찍히는 바람에 지금의 나유라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유라를 암습하여 쓰러트린 소녀는 원한과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크윽... 너는 누구냐?”

딸 뻘인 어린 소녀에게 젖가슴이 짓밟힌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에 찬 신음을 토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찌직!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저고리를 거칠게 좌우로 벌렸다. 고름이 뜯기며 벌어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금방 내린 눈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흐윽!”

헌데 나유라는 저고리가 벌어지는 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봉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자로 길게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진(眞眞)... 진진이로구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나있는 열십자의 흉터를 본 나유라는 전율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소녀는 그런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오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 년 전, 나유라의 남편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당한 것은 하후란이라는 여인이었다.

하후란은 대단한 미인으로 철고륜이 나유라와 결혼하기 전부터 총애하던 후궁이었다.

철고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온 하후란이지만 달단부의 안주인이 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달단부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뱃속에는 전 남편의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철고륜은 천산(天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하후란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미태에 반해 강제로 납치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본래 색탐이 심했던 철고륜은 하후란이 남의 아내이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 따위는 아랑곳 않고 욕심을 채웠다.

하후란이 워낙 빼어난 미녀였기에 철고륜은 얼마 후 대식국의 공주 나유라와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하후란을 총애했다.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된 후 반 년 만에 여자 아이를 낳았었다. 당연히 그 여아는 하후란 전남편의 딸이었다.

하지만 하후란의 미태에 푹 빠진 철고륜은 그 여자아이를 자신의 딸로 삼고 자신의 성씨인 철()씨까지 물려주었다.

 

-철진진(鐵眞眞)!

 

이것이 그 여아의 이름이었다.

비록 하후란의 전 남편 딸이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영특했던 철진진은 철고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철고륜은 도도한 본처 나유라의 몸에서 난 친 딸 철산산보다 오히려 양녀인 철진진을 더 귀여워할 정도였다.

헌데 오 년 전, 하후란과 철진진 모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철고륜이 하후란과 방사를 하던 도중 복상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하후란을 질시하던 다른 후궁들은 하후란이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녀가 철고륜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유라는 하후란을 형리(刑吏)들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하후란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저 단순히 고문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형리들은 그래도 한때 자신들의 왕의 후궁이었던 하후란을 돌아가며 능욕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녀가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하후란은 남편의 부하들에게 몸을 더럽힌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유라는 하후란을 욕보인 형리들을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하후란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버렸다.

하지만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하후란의 딸인 철진진이 오 년 만에 나유라 앞에 나타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나유라는 철진진이 형리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극이 일어날 당시 철진진의 나이는 불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형리들은 하후란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린 철진진을 발가벗겨 놓고 그녀의 여린 가슴을 비수로 갈랐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후란이 보는 앞에서 철진진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도 하후란은 끝내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자백을 해봐야 자신들 모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하후란은 형리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었다.

하후란이 자살한 후 형리들이 철진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후란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져 처형당하면서도 철진진의 처리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유라는 어린 철진진 역시 형리들에게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흐흐흐! 오 년 만에 모녀가 상봉한 소감이 어떻소? 비록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철목풍은 마혈이 찍힌 채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그녀가 던져준 장보도가 들려 있었다.

나유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신음을 토했다.

... 오 년 전 그때 진진이를 구해간 게 철목풍 네놈이었느냐?”

그녀의 물음에 철목풍 대신 철진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오년 간 양부(養父)의 슬하에 숨어서 네년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려왔다!”

철진진, 아니 하후진진은 철목풍의 양녀가 된 상태였다.

 

오 년 전, 철목풍은 철고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단부의 내정을 염탐하기 위해 은밀히 달단부에 잠입했었다.

그러다가 하후진진 모녀가 갇힌 뇌옥을 발견했으며 그 뇌옥의 어느 빈 감옥에서 죽어가던 하후진진을 구출한 것이다.

나유라가 예상했던 대로 형리들은 하후란을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하후진진까지 짓밟는 만행을 자행했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어린 몸으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하후진진은 기식이 엄엄했었다.

사실 하후란이 혀를 물고 자살한 것도 딸이 형리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육중한 몸 아래 깔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바둥거리는 어린 딸의 무참한 모습에 하후란은 하늘을 저주하며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하후란이 자살해버리자 형리들은 당황하여 하후진진을 뇌옥의 후미진 감옥에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후진진은 사경을 헤매던 중 철목풍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호호호! 구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우하사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후진진은 광기에 찬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나유라는 그런 하후진진을 처연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진아!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달단과 오이라트 양 부족의 갈등이 그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나유라의 말 대로였다.

달단부의 형리들이 자신들의 왕의 여자였던 하후란과 그녀의 딸 하후진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녀들이 오이라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달단부와 오이라트부 사이에 벌어졌던 수다한 격전은 두 부족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오이라트부와의 싸움에서 피붙이를 잃지 않은 달단부의 가정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형리들은 하후란과 하후진진 모녀를 욕보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너와 네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전부 내손으로 처단했단다. 아무쪼록 그때 벌어진 일이 내 본의가 아님을 알아다오!”

나유라는 애절한 음성으로 하후진진에게 애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런다고 네년을 동정해줄 줄 아느냐?”

하후진진은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나유라의 말을 막았다.

!”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모인 나유라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양녀인 하후진진의 침이 얼굴에 튀기자 나유라의 옥용은 굴욕과 회한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하후진진은 그런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바득! 네년 때문에 우리 모녀가 당했던 일을 네년도 경험하게 해주마!”

... 너 설마!”

순간 나유라는 아연실색하며 하후진진을 바라보았다.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목풍이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흐! 너희 모녀가 당한 일을 여왕도 경험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이 애비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철목풍은 나유라의 육감적인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쓸어보았다.

나유라는 철목풍이 하후진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을 깨닫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하후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사악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단순히 겁탈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계집을 너무 봐주는 것이지요!”

하후진진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만행을 당한 하후진진의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청을 들게 하면 이 암캐가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내와의 그 짓을 굶주려왔으니까요!”

하후진진은 작은 발로 나유라의 몸을 툭툭 걷어차며 사악하게 웃었다.

철목풍은 하후진진의 말에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노리개로 주지 않겠다면 여왕마마를 어찌 대접하려는 것이냐? 설마 여왕이 네 의모라고 봐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후진진은 광기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소녀가 쓰려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대원제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거예요!”

허어! 그러냐?”

아쉬워하던 철목풍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번득였다.

그놈들을 데려와라!”

하후진진은 뒤쪽의 사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예 공주님!”

사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이어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오이라트부 무사들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왕님!”

알몸으로 끌려오던 청년들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발견하고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청년들을 본 나유라의 안색도 하얗게 변했다.

청년들은 나유라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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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2)

 

 

신랑이 기가 막혀하는 가운데 혼례가 거행되었다.

비록 맑은 물 한잔과 수탉 한 마리만 탁자위에 올려놓고 맞절을 하는 간단한 혼례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혼례였다.

신랑측의 혼주(婚主)도 있었고 신부측의 혼주도 있었다.

자기의 몸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부려지고 일으켜지는 데야 임청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개방의 전대고수 부부가 주관한 거지같은 혼인이 끝났다.

첫날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식을 마친 후 할머니가 황의소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남자는 원래 밥통 같아서 뭣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단다. 네가 잘 가르쳐야 할 거야. 우린 근처 숲에서 자고 아침에 올 테니 그렇게 알아라.”

...”

할머니의 말에 황의소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범하고 뻔뻔스러운 데가 있는 소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노부부는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혈도가 찍힌 임청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장승처럼 서있을 뿐 옴쭉달쭉할 수도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렇게 벼락 치듯이 혼례를 올리게 될 줄은 꿈엔들 생각지 못했다.

아니 혼례라는 것 자체도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임청우인 것이다.

두 부부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장승처럼 서있는 그를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나를 때리면 아내를 때리는 천한 남자란 소리를 들을 것이고 도망친다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겠지? 우협의 제자도 우협같은 성인군자일 테니 결코 그런 말을 듣지 않겠지? 그랬다간 우협이란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임청우는 화가 나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사부님의 명성을 내가 해칠 수는 없다. 네 말대로 이미 억지로라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부부가 되었으니 너를 때리지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짓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게 나와 부부가 된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 주겠다.)

한데 황의소녀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져갔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내가 좀 엉뚱한 짓을 한 것은 인정해. 난 가끔 이러니까. 하지만, 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었어. 아버지의 부하들은 나를 잡아가려고 하고, 내가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한데... ”

소녀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걸승(妓乞僧)... 아버지의 충실한 개인 그들이 네가 우협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두 도망 가버리지 않았어? ... 이미 그때 결심했어. 너와 혼인하겠다고...”

임청우는 비로소 황의소녀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신과 혼례식을 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수하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과 부부가 된 것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긴 싫었어.”

당돌하면서도 거침없어 보였던 황의소녀였다.

한데 그녀가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임청우는 가슴이 찡해왔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동시에 단전에서 한줄기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막혀있던 혈도들이 순식간에 타통되어 버렸다.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소녀의 어깨에 얹었다.

“...!”

황의소녀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미안...”

임청우도 놀라 그녀의 어깨에서 급히 손을 뗐다.

... 어떻게 혈도를 풀었지?”

황의소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순간이 계속됐다.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이 소저, 아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 데, 그래도 성미는 여간 사나운 것 같지가 않다. 어머니처럼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만... 미리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어머니의 성격은 무시무시하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혼인을 올리게 된 황의소녀도 자기의 뺨을 때리는 둥, 그 성미에 있어서 결코 녹녹한 것 같지가 않다.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다시 농산에서의 괴로운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다.

임청우는 어느 책에선가 본 구절을 떠올리며 혼잣말 처럼 천천히 말했다.

똑똑한 남자는 나라를 세우고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망친다고 하던데...”

! 나라를 세우기나 하라구. 망치는 건 그 이후의 문제니까.”

황의소녀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이런 산속에서 꼬마들이 반역을 획책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침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깜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임청우가 막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슈우!

침실 안쪽에서 뭔가가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오척 단구에 뚱뚱한 몸을 한 중년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침실에는 거실과 연결된 방문 말고는 작은 창문 밖에 없었다.

임청우는 어떻게 뚱뚱한 중년인이 침실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데 뚱보 중년인은 당황하는 임청우를 보며 오히려 놀란 듯했다.

? 들은 것과는 다른데.”

사삭!

임청우는 번개처럼 자기의 얼굴을 더듬고 물러서는 손을 느꼈다.

임청우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뚱보 중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뭘 칠한 것도 아닌데...”

그때 임청우 뒤에서 황의소녀가 나서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혹시 칠절 중 비객(飛客)이라 불리는 소대협(蘇大俠)이 아니신가요?”

맞아, 내가 바로 비객 소도성(蘇道盛)이다. 넌 누구길래 어린 아이 주제에 날 알고 있는 것이냐?”

중년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키가 작고 뚱뚱해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인,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라는 칠절 중의 비객 소도성이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그 뚱뚱한 몸이 어떻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리가 길기가 하나 몸이 날렵해 보이기를 하나...

굴러다닌다면 믿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황의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천하제이(天下第二)의 경공술을 가지신 비객 소도성을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겠어요?”

하하핫! 내가, 이 비객 소도성이 천하에서 두번째라고? 그것 참 웃기는군. 그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있으니 한번 놀아보자구나. 그래 그럼 제일은 누구냐?”

소도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청우는 소도성이 말한 <>라는 소리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 너를 찾고 있는 검주 유소기지 누구겠나?”

그가 왜 나를 찾습니까?”

하하핫! 너는 그에게 볼일이 없겠지만 그는 아마도 단단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소도성이 임청우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검주 유소기의 임청우에 대한 볼일, 두 말할 것도 없이 몽선도를 뺏으려는 일이었다.

황의소녀가 다시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무림칠절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을 걸요?”

마면혈도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무비옹을 믿고 있는 모양이군.”

소도성이 가소롭다는 말했다.

황의소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보다 빠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 그는 바로 일왕(一王), 금포염왕이라구요.”

일왕... 그라면 나보다 빠를 수도 있겠지. 설마 일왕이 저 놈의 배후에 있단 말인가?”

소도성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빠르기로 유명한 비객이지만 감히 금포염왕보다 빠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마하니 일왕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죠?”

황의소녀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임청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다시는 우협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부라면 자기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임청우는 소도성에게 말했다.

칠절은 모두 강도를 일삼는 무리입니까?”

소도성의 눈이 번쩍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칠절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은가?”

만만치 않다는 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같이 들리는군요.”

소도성은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그만두자. 나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인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굳이 살인을 하고 싶진 않다.”

황의소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임청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칠절이 다 오는 모양이야. 어서 도망쳐야해. 만약에 검주 유소기와 도군(刀君), 신소(神簫) 등이 도착하면 도망칠 래야 칠 수도 없어.”

임청우의 몸이 움찔했다.

소도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도망치려고? 이 소도성 앞에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정확하게 맞췄어요.”

“...?”

그녀의 서슴없이 하는 말에 소도성이 긴가민가하는 순간이었다.

스스슷!

갑자기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몸이 안개에 휩싸인 듯이 흐릿해졌다.

내 앞에서 달아나겠다? 어림 반문어치도 없은 생각이지.”

소도성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유있게 웃었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번개처럼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날아나갔다.

으헉!”

스팟!

그러나 초가집을 뛰쳐나온 소도성은 채 삼장도 가지 못해 다급한 비명과 함께 더 빠르게 물러났다.

두 개의 나무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있는 눈에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실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황의소녀의 천잠사다.

으으...”

소도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빠른 속도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허리가 잘릴 뻔 했다.

공력이 높아 허리를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천잠사에 닿은 옷은 예리한 검에 베인 듯이 잘라져 버렸고 허리에도 붉게 금이 그어졌다.

놀람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여우같은 년!”

!

소도성이 발을 한번 구르는 순간 그의 뚱뚱한 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헌데 소도성이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슷!

천잠사가 감겨있는 나무 뒤에서 황의소녀와 임청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 도망가야 해! 비객 소도성을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일 순 없어. 금방 속은 줄 알고 돌아올 거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들 사이로 달렸다.

황의소녀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따라가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의 얼굴을 힐끗 보아도 그 검은 얼굴이 진지하게 보인다.

결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마... 경신술도 모른단 말인가? 우협의 제자가...)

어쩌면 우협의 제자이기에 경신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협이라면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일협으로서의 그 가공할 무공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 만전만패의 기인이 아니던가?

!

마음이 급해진 황의소녀는 자기보다 키가 큰 임청우의 허리를 끼고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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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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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황의 살기 어린 교갈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네년도 저 암중처럼 만들어주마!"

파앗!

뜻밖에도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가 달아나기는커녕 철봉황을 덮쳐오는 게 아닌가?

그자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면음마는 절묘한 역용술과 함께 빼어난 경신술을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어떤 강적에게도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천면음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철봉황이 노렸는지는 몰라도 천면음마는 한쪽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런 몸 상태라면 달아난다고 해도 멀리가지 못하고 철봉황에게 따라잡힐 가능성이 높다.

달아나지 못한다면 먼저 철봉황을 공격하여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자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

대담하게 쇄도하는 천면음마를 향해 철봉황의 검이 벼락같이 그어졌다.

그녀의 이 일검은 빠르면서도 변화가 막측하여 천면음마가 막을 수도 피하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스슥!

헌데 쇄도하는 천면음마의 모습이 갑자기 네 개로 불어났다. 경신술과 보법을 이용한 속임수다.

스악!

철봉황은 흠칫 놀라면서도 그어냈던 검을 놀라운 속도로 회수한 후 비스듬히 내리쳤다.

그녀의 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반응에 네 명으로 불어났던 천면음마의 모습 중 세 개가 갈라졌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가 철봉황의 검을 피하며 쇄도해 들어왔다.

그것이 천면음마의 실체였다.

부악!

단번에 철봉황에게 접근한 천면음마는 오른손을 비스듬이 그었다.

강철 갈고리같이 변한 그자의 손가락에 스치면 금강불괴라 해도 상처가 날 것이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 철봉황은 도저히 천면음마의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순간 철봉황의 입에서 사나운 고함이 터졌다.

!

그러자 막 철봉황의 목을 손가락으로 그으려던 천면음마는 가슴을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휘청했다.

위기의 순간 철봉황은 소림사의 칠십이절기중 하나인 복마사자후(伏魔獅子吼)를 토해낸 것이다.

복마사자후는 일반적인 사자후와 달리 소리를 한 곳에 집중시켜 타격을 가하는 위력을 지녔다.

!”

!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강타당한 천면음마는 허공에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그자가 뿜어낸 패가 안개처럼 확 퍼진다.

!

철봉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쇄도하며 철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어냈다.

"케엑!"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번졌다.

퍼억! 털썩!

세 조각의 육괴가 바닥에 흩어졌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허벅지에서 잘린 채 나뒹군 것이다.

"...!"

헌데 철봉황의 안색도 일변하며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천면음마를 벤 직후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기증은 이내 사라져서 철봉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크크크! 네년은 이제 영원히 본좌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잘렸음에도 악에 바쳐 웃었다.

"헛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해라."

철봉황은 차갑게 일갈하며 검을 흔들었다.

퍼억!

케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두 팔도 성둥 잘려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 자는 두 팔과 두 다리는 모두 잘려나간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이다.

"간단히 죽이지는 않겠다. 지옥에 이르기 전까지 네놈이 그동안 저지른 죄과를 두고두고 참회해라."

스윽! !

철봉황은 얼음같은 표정으로 철검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퍼퍼퍽!

"케에엑!"

끔찍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전신 혈도에서 분수처럼 선혈이 치솟았다.

철봉황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로 그 자의 전신을 난자해 버린 것이다.

끄윽...”

결국 천면음마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혼절해버렸다.

철봉황은 그제야 분이 풀린 듯 검을 거두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휴우! 한 발 늦었구나."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훑어본 철봉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남녀 관계에는 문외한인 그녀였지만 자운 비구니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당혹한 심정이 되었다.

(자운사매의 몸에 파과의 흔적이 없는 게 의외로구나.)

자운 비구니의 몸위에서 출혈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유린당한 건 확실한데 피가 나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조신한 척 해왔지만 사실은 남 몰래 어떤 사내와 통정을 한 것일까? 아니다. 무공 수련 과정에서 처녀의 상징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으니 예단하지 말자.)

철봉황은 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찢어진 승복으로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대충 감쌌다.

"어쨌거나 오늘 일로 자운사매가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할 텐데..."

자운 비구니를 안아든 철봉황은 한숨을 쉬며 토지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쏴아아!

이내 그녀의 모습은 장대 같은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으으..."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토지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들어선 그 인물은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도룡삼첩장을 등에 맞고 순간적으로 혼절했었다.

사실 도룡곡의 비전 절기인 도룡삼첩장은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표적에 닿는 순간 세 번 연속 진동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방비하는 게 극히 어렵다.

막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연이어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고검추는 그 도룡삼첩장에 무방비 상태로 가격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잠시 격심한 고통을 느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고검추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을강기가 몸을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도룡삼첩장의 역도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태을강기가 즉각 반응하며 그 역도를 밀어내었다.

고검추의 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멀리 튕겨져 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룡삼첩장의 역도는 순간적으로 고검추의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고검추는 그 충격에 머리가 흔들려 잠시 혼절했던 것이다.

까무라쳤던 고검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알고 토지묘 밖으로 날아나가고 있었다.

고검추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자운 비구니를 구해간 여인이 바로 자신이 복우산으로 찾아가던 그 철봉황임을...

고검추는 그저 그녀가 대단한 기세를 지닌 여인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비록 정신을 차렸으나 고검추는 즉각 운신은 할 수 없었다.

도룡삼첩장에 당한 충격으로 인해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한 동안 쏟아지는 빗속에 누워 팔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려야만 했었다.

 

"...!"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참혹했다!

낭자한 선혈 속에 사지가 모두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뚱이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누워 있었다.

(... 끔찍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솜씨인 모양이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무참한 모습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헌데 그가 역겨운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할 때였다.

"으으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천면음마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천면음마가 살아있는 것을 알아차린 고검추는 갈등에 휩싸였다.

천면음마는 비구니조차 서슴없이 겁탈한 용서받지 못할 색마다.

그런 인간 말종에게 동정을 보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고검추는 이내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에게로 다가갔다.

상대가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라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으으으... ... 내가 죽어 저승에 온 것이냐?"

고검추가 다가가자 천면음마는 피에 젖은 눈을 치뜬 채 올려다보며 헐떡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자신의 도룡삼첩장에 격살되었다고 믿었던 고검추가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유령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고검추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면음마 옆에 앉았다.

(틀렸다. 이런 몸으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다.)

그는 천면음마의 난도질당한 몸을 내려다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팔 다리가 모두 잘린 것은 치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출혈이 심할 뿐 당장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기 때문이다.

치명상은 철봉황의 검기에 온몸의 경맥이 토막 쳐진 것이었다.

철봉황은 일격에 천면음마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혀서 천면음마가 고통 속에 죽어가게 만든 것이다.

천면음마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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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황금전장> 황금전장의 정문 모습

황금전장의 깊은 곳. 여러 개의 굴뚝이 있는 아주 긴 건물. 주방 건물인데 규모가 크고. 창고도 근처에 있고. 여러 굴뚝에서는 연기가 치솟고

건물 앞 마당의 지붕이 달린 커다란 우물에서는 여자들이 물을 길어서 큰 그릇의 식재료를 씻고 있다. 마당은 납작 돌로 덮여있다

 

길고 넓은 주방 내에서는 요리사들이 한창 요리를 만들고 있다. 불길이 치솟는 화구에 웍을 얹어놓고 돌리는 자, 기름에 튀기는 자, 썰거나 무치는 자. 요리에 장식하는 자. 주방에 있는 요리사만 수십 명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즐비한 탁자들도 있고

그 주방에 딸린 접견실. 벽이 없어서 주방에서도 보이는 그곳에서 청풍이 주대육과 만나고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모자를 쓴 요리하던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주대육과 그 앞에 공손히 서있는 청풍

주방의 요리사들 힐끔거리며 곁눈질로 보고

요리사1; [저 놈 뭐야?] 덩치가 아주 크고 심술궂게 생긴 젊은 요리사가 웍을 돌리며 곁눈질로 청풍을 보면서 동료에게 묻고. 이놈은 몇 번 나올 캐릭터

요리사2; [몰라. 호원무사가 데려오자 총주방장님이 직접 만나고 있어.] 역시 웍을 돌리면서 대꾸

요리사3; [별일이로군. 총주방장님은 여간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데...] 탕탕! 위의 두놈 뒤에서 칼질하며

요래사4; [뭔가 기막힌 재주가 있는 놈인 모양이지.] 통통! 역시 칼질하며

 

주대육; [그런 사정이 있었군.] 끄덕

청풍;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청풍; [편의를 봐주시면 보은하겠습니다.]

주대육; (간곡하지만 비굴하지는 않다.) 웃고

주대육;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로군.) + [오백냥이라...]

청풍; [적지 않은 금액인 건 알고 있습니다.]

주대육; [아니, 금액이 문제가 아닐세.] 고개 젓고

주대육; [오백냥이 아니라 천냥이나 이천냥이라도 융통해줄 수 있어.]

주대육; [다만 그냥 채용하는 게 아니고 적지 않은 선금(先金)을 주고 채용하려면 총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해.]

청풍; [이해합니다.] 끄덕

주대육;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일어나며 앞치마를 풀면서 말하고.

주대육; [함께 가세. 총관에게 인사도 해야 하니...] 이어

앞치마와 모자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고

청풍과 함께 주방을 나가는 주대육

 

요리사1; [저 놈, 총주방장님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특별대우를 받는구만.] 질투의 표정으로 청풍을 노려보고

요리사2; [총주방장님이 저렇게 곰살궂게 대한 놈은 본적이 없어.] 역시 궁시렁 대는데

! 만들어놓은 음식들이 놓인 탁자 아래에서 예쁜 계집아이 손이 올라온다.

접시에 수북이 쌓아놓은 경단들 중 하나를 집으며 탁자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소녀. 나이는 15살 정도. 이진진보다 어린데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고 순진하게 보인다. <신마유희> <마왕강림>등에 나온 옥령 캐릭터. 이 작품에서의 이름은 벽옥령. 냉혈전호 벽초천의 둘째딸, 즉 벽소소의 동생이다. 당연히 화려한 옷을 입었다. 공주같은 소녀 취향의 옷을 입었는데 한 팔로는 살이 쪄서 뚱뚱한 흰색의 털이 긴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벽옥령은 머리에도 몇 개의 머리핀을 꽂고 있다. 대부분 꽃모양인데 가운데에는 상당히 큰 보석이 박혀있어서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머리핀들이다. 이 머리핀들은 나중에 쓰일 소품이다.

경단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주방 밖을 보는 벽옥령.

주대육과 뭐라 대화 나누며 걸어가는 청풍의 뒷모습이 보이고

청풍의 얼굴 크로즈 업

두근! 얼굴이 발개지고 가슴이 뛰는 벽옥령. 그때

야옹! 고양이가 칭얼대고. 그러자

벽옥령; [미안해 설()! 나만 먹어서...] 고양이에게 사과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냉혈전호 벽초천의 차녀 벽옥령(碧玉鈴)>

벽옥령; [보자. 설아가 좋아하는 고기가 어디 있더라?] 고개를 내밀고 탁자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음식 접시들중 산적같은 고기가 쌓인 접시가 있다.

벽옥령; [좋아! 오늘은 소고기다.] 웃으며 고기에 손을 내밀고. 그러다가

멈칫! 하며 주변 둘러보는 벽옥령과 고양이.

! 주변에 요리사들이 둘러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다

벽옥령; [헤헤헤! 들켰네.] 귀엽게 웃으며 일어나고

<심쿵!> <아흑!> <귀여워!> 요리사들 벽옥령의 귀여운 모습에 뿅 가지만

요리사1; (그렇다고 저 귀여움에 마음 약해지면 안되지.) + [작은 아가씨! 안돼요 안돼!] 손가락을 세워 흔들고

요리사1; [주방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것저것 훔쳐 먹는 바람에 아가씨는 물론이고 그 고양이새끼까지 돼지가 되어가고 있잖습니다.]

벽옥령; [돼지라니 말이 너무 심해.] 입술 삐죽이고

요리사1; [제발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작은 아가씨! 요즘 몸이 많이 부셨지 않습니까?] 벽옥령의 아래위를 보고

벽옥령; [유모는 통통해서 귀엽다던데...] 샐쭉

요리사1; [틀린 말은 아니지만...] 헤벌레. + 요리사2; [저희 사정 좀 봐주십쇼 작은 아가씨!] 팔꿈치로 요리사1의 옆구리를 치며

요리사2; [자꾸 이렇게 훔쳐 드시면 저희가 총관님께 혼이 납니다요.] 애원하는데

벽옥령; [튀자 설아!] ! 외치며 한 손으로 경단을 낚아채고. 고양이는 벽옥령의 품에서 뛰어내려 쇠고기 요리를 덮치고

[작은 아가씨!] [이놈의 고양이가!] [막아!] 요리사들이 기겁하며 벽옥령과 고양이를 잡으려 하지만

다다다! 입에 경단을 물고 양손에 경단을 든 벽옥령과 입에 고기를 문 고양이가 미꾸라지처럼 요리사들 사이를 빠져 도망친다.

[이런 미꾸라지같은...] [저 고양이새끼 잡아!] 요리사들 허둥대지만. 그 사이로 쪼르르 달려가는 벽옥령과 고양이.

[다시는 주방에 얼씬거리지 마십쇼!] [먹고 싶으면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잡히면 나비탕 만들어버린다 고양이새끼야!] 요리사들이 주먹질하고 건물 밖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로 달아나는 벽옥령과 고양이

벽옥령; (그 오빠 누굴까?) 달려가며 청풍을 떠올리고

벽옥령; (이유를 모르겠어. 그 오빠를 보자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이유를...) 얼굴 발개지고.

벽옥령; (설마 옥령이, 병에 걸린 거 아닐까?) 울상 지으며 달려가고

 

#20>

벽소소가 난리 쳤던 그 건물. 두 명의 무사가 입구를 지키고 있고. 문은 닫혀있다.

건물 내부에 벽초천은 없고 벽세황과 이세창이 앉아서 대화중이다. 벽세황이 아버지가 앉았던 상좌에 앉아있다. 부서진 탁자는 치워졌고 새 탁자가 놓여있다.

벽세황; [상대가 어떤 놈인지 아직도 모른다?] 거만한 자세로 앉아서 오만상

이세창; [큰 아가씨는 주로 한밤중에 본장을 빠져나가 그자를 만나왔습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 보며

이세창; [그때마다 미행을 붙였지만...] [큰 아가씨의 종적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번번이 놓치곤 했습니다.] 눈치 보며

벽세황;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이 누군지 알아내야만 하오.] [곧 무림맹에서 혼서가 도착하겠지만 추문이라도 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요.] 이를 부득 갈면서 쾅! 주먹으로 의자 손잡이를 치고

이세창; [알고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이세창; [지금도 우리 황금전장의 최정예인 황금수라(黃金修羅)들이 큰 아가씨의 뒤를 밟고 있는 중입니다.]

이세창; [조만간 아가씨와 밀회를 하는 자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벽세황; [죽일 놈의 정체가 밝혀지면 황금수라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세상에서 지워버리시오.] 이를 부득 갈고

이세창; [!] 대답하며 건물 입구를 보고. 건물 입구는 닫혀있는데. 이어

이세창; [말해라.] 입구를 향해 말하고. 그러자

<총주방장님께서 총관님께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음성

이세창; (총주방장이 무슨 일로...) + [안으로 모셔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벽세황은 일어나지 않고

<!> 덜컹!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열린 문 밖에 서있는 주대육과 청풍. 무사 한명이 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세창; [안으로 드시지요 총주방장!] 안으로 들어오라 권하고

주대육; [고맙소.] [들어가세.] 앞장서서 들어가며 청풍에게 말하고.

두 사람이 들어가자 밖에서 문을 닫아주는 무사1. 무사2는 옆에서 보고 있고

주대육; [소장주!] [무림맹에서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일이 바빠서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며 벽세황에게 포권하고. 청풍은 문간에 멈춰 서있고. 문은 뒤에서 닫혔다.

벽세황; [오랜만이오 주숙수!] 앉아서 대충 포권하는 시늉을 하며 거만하게 말하고

벽세황; [주숙수가 애써준 덕분에 집안 식구 모두 건강하게 지낸다고 들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말하며 전에 자신이 앉았던 우측의 자리를 손으로 권하고

주대육; [별 말씀을...] 자리에 앉고

이세창; [제게 용무가 있으시다구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주대육에게 말하며 청풍을 보고. 청풍은 문간에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손한 자세로 서있다.

주대육; [저 아이는 이청풍이라고 하는데 내일부터 주방에서 일을 시켰으면 하외다.] 청풍을 가리키며

이세창; [아직 어린놈이오만...] 청풍을 마뜩찮은 표정으로 훑어보고

이세창; [총주방장께서 직접 인사 시키러 데려온 걸 보면 재주가 비상하겠습니다.]

주대육; [고기 다루는 재주가 포정의 재림이라 할만한 아이지요.]

이세창; [허어... 전설 속의 백정인 포정의 재림이라...] 감탄하며 새삼 청풍을 보고

벽세황; [주숙수의 눈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겠소.] 비웃고

주대육; [저 아이 솜씨는 믿으셔도 될 것입니다.] 웃고

이세창; [요리사를 채용하는 건 총주방장의 재량인데...] [그럼에도 굳이 인사를 시키러 오신 데는 이유가 있겠습니다.]

주대육; [사실 저 아이에게 천냥 정도 선금을 주었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세창; [선금으로 천냥이나?] 놀라고

청풍; (내가 원한 액수의 두 배를...) 긴장

벽세황; [천냥이면 몇 년 동안 일 하지 않고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액수인데...] [젊은 놈이 어디에 쓰려고 그런 거금을 달라는 거요?] 청풍을 흘겨보고

주대육; [그게...] 좀 난감한 표정으로 청풍을 보고

청풍; [저는 괜잖습니다.] 고개 숙이고

주대육; [알겠네.] 끄덕

주대육; [사실 돈은 저 아이가 필요한 게 아니고...] 벽세황과 이세창에게 설명하고

 

#21>

건물 밖의 모습. 무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그러다가 흠칫! 하며 한쪽을 보는 무사들.

정원의 관목 뒤에 숨어있는 벽옥령과 고양이. 털이 긴 흰 고양이는 그루밍을 하고 있고 벽옥령은 잎이 많이 달린 나뭇가지 두 개를 들어서 머리를 가린 채 쪼그려 앉아 있다. 그 자세로 건물 쪽을 보고 있다.

무사1; (작은 아가씨가 왜 저기에...) 벽옥령이 숨은 곳으로 가려 하지만

무사2가 무사1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젓고

무사2; <혼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계시는 것같으니까 모른 척 하게.> 전음을 보내며 웃고

무사1; <하긴 놀아줄 또래 친구가 없으니 오죽 심심하실까?> 혀를 차며 곁눈질로 벽옥령을 보고

숨어서 건물을 보는 백옥령

벽옥령의 시점. 닫혀있는 문

벽옥령;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얼굴 발개진 채

두근! 청풍의 얼굴 떠올리자 가슴이 뛰는 벽옥령

벽옥령;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그 오빠에게 저절로 끌리고 있어.)

벽옥령; (차림새도 볼품없고 그렇게 미남도 아닌데 자꾸만 얼굴이 떠올라.)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벽옥령; (지금까지 본 다른 집의 귀한 도련님들과 분위기가 다른 때문일까?) (아니면 운명적인 상대인 때문일까?) 이마를 귀엽게 찡그리고

벽옥령; (아무래도 내가 중증의 상사병에 걸린 모양이야.) 한숨 쉬고

 

#22>

다시 건물 내부. 주대육의 설명이 끝났다.

이세창; [네놈도 참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한다.] 혀를 차며 청풍을 보고

청풍; [그러게 말입니다.] 쓴웃음

이세창; (간이 비정상적으로 큰 놈이로군. 보통 인간들이라면 오줌을 질질 싸도 시원잖을 상황에서 장단을 맞추다니...) 청풍을 흘겨보고

벽세황; [단지회란 놈들, 어떻게 평가하시오?] 이세창에게

이세창; [흑사회 인간들이 대개 그렇듯 무공은 별 볼일 없는 무리들입니다.]

이세창; [하지만 갈 데까지 간 밑바닥 인생들이라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점이 제법 귀찮은 것들이지요.]

벽세황; [그렇다고 들었소.] 끄덕

이세창; [물론 그래봐야 우리 황금전장이 나서면 열명쯤의 황금수라로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

벽세황; [온갖 영약으로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졌을 뿐 아니라 신병이기로 무장하고 있는 황금수라!]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천하를 통틀어도 몇 없을 거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덕

이세창; [사실 단지회를 없애려면 황금수라들을 동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조직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산하게 웃으며 말하고

벽세황; [들었지?] 웃으며 청풍을 보고

벽세황; [혹시라도 단지회 놈들이 귀찮게 굴면 말만해.] [황금전장의 식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세상 흑사회 놈들 모두가 알게 해줄 테니까.] 음산하게 웃고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조금 숙이고

주대육; [이 아이의 채용을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세창과 벽세황에게 포권

벽세황; [고맙긴 뭘...] 거만하게. 이어

벽세황; [그보다 무림맹 총관이 이틀 후면 소소에게 건넬 혼서를 갖고 도착할 예정이오.] 주대육을 보며

벽세황; [그 양반은 무림맹 내에서도 유명한 미식가이니 총주방장이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셔야할 것이오.]

주대육;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벽세황; [나는 그저 총주방장만 믿을 뿐이오.] 호탕하게 웃고

청풍; (교만하고 자신감이 지나친 성격이다.) 주대육과 뭐라 대화하는 벽세황을 보며 생각하고

<하지만 자기 식구는 확실하게 챙긴다는 사실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벽세황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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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달단족의 여왕

 

 

여명 무렵이다.

길고 길었던 사막의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뿌려대는 눈부신 햇빛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사막을 가로질러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바득! 산산이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라트(衛拉), 네놈들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 찬 표정인 채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화사한 비단옷 위에 두터운 피풍을 두른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金髮)이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로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인데 한 가지 흠이라면 인상이 지나치게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라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다보니 여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 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젊은 여인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완숙한 관능이 숨 쉬고 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을 막히게 만든다.

금발미부는 한 자루 활을 들고 있으며 등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다.

허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도 한 자루 차고 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섬전 같았다.

그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의 일신 무공은 결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은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였다.

산산!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

 

몽고의 양대 부족 중 하나인 달단(韃靼)부의 젊은 여왕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공주였다.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부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주들 중 한 명을 달단왕과 정략결혼 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나유라였다.

당시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질 수는 없었다.

비록 두 명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스무 살도 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질 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유라는 아들과 딸을 정성들여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헌데 오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이십대 후반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를 두고 한때 독살이라는 소문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라트부 출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라트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 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부를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부를 지배해왔으며 급기야 달단여왕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혈(鐵血)의 간담(肝膽)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딸인 철산산이 피납 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해 온 것이었다.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한 자루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누구냐?”

나유라는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랐다가 나유라 앞에 내려섰다. 음침하고 교활한 이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그렇다. 청포장한은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서 쫓겨 갔던 철목풍이었다.

철목풍은 장포 속의 가슴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 아닌 오이라트부의 신왕(新王)이다. 그자는 숙부인 전대 오이라트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이다.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도 했었다. 철목풍이 달단부와 오이라트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나유라는 그런 철목풍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스악!

그러면서 한 자루 철시(鐵矢)를 빠르게 활시위에 걸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유라는 신궁(神弓)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활 솜씨를 지녔다.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 것이니...!”

짝짝!

철목풍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뻑을 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쪽 사구(砂丘) 너머에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산산아!”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산이를 내놓아랏!”

쐐애애액!

활과 화살을 팽개친 나유라는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어딜!”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쳤다. 그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네놈이...”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으음!”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철목풍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여왕께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최근에 얻으신 장보도(藏寶圖) 말이오!”

철목풍의 말에 나유라는 움찔했다.

그자의 말대로 나유라는 얼마 전 한 장의 장보도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철목풍이 어떻게 알아낸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장보도라니?”

나유라는 내심의 동요를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철목풍은 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소!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쿠빌라이)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비로소 자신의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된다.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그러니 먼저 산산이를 이리 던져라!”

나유라는 차갑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지!”

나유라가 꺼낸 양피지를 본 철목풍은 두 눈을 탐욕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는 철목풍도 동의했다.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이어 철목풍은 뒤에 서있는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 보냈다.

산산아!”

!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산산아! 이제 안심... !”

헌데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금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것은 철산산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산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그 소녀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답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철산산과 달리 소녀는 아주 표독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소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

경악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이어 나유라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가짜 철산산이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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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1)

 

 

일각 정도 걸었을 때 임청우는 멀리 보이던 불빛을 십장 밖에 두고 있었다.

불빛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따라 숲을 헤맬 때 이 집을 보았었다.

초가집으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청우는 초가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소리는 여전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음성인지 여자의 음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소리는 임청우가 가까이 가는 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당연히 황의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미 나쁜 계집애가 삐쳐서 어디론가 샜나 보다 생각하면서 임청우는 뒷걸음질로 초가집에서 물러섰다.

그에 따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장 정도 물러나도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다만 웅웅 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가까이 가면 작아지고 물러서면 커지는 말소리라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

하지만 용기를 낸 임청우는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다시 초가집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던 사람입니다.”

초가집 문 앞에 이른 임청우는 무게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

갑자기 문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임청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초가집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긴장한 임청우는 쓸 줄도 모르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이 순간에는 그쳐버렸다.

어둠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임청우는 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끌듯이 미끄러뜨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발에 느껴지는 거친 바닥이 자기가 살았던 농산의 모옥과 비슷했다.

임청우는 발끝으로 앞을 더듬으며 살쾡이처럼 소리없이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긴장은 실이 당겨지듯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몸은 자신의 무게를 잊어버렸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

임청우의 발이 각목을 더듬어 냈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의 다리라 생각하며 옆으로 돌았다.

그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임청우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그 푸른 그림자들은 흐느적거리며 날아올라 임청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덮쳐들었다.

카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유부의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임청우는 검을 뽑아 앞에 있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파앗!

청광이 일면서 푸른 그림자가 두 조각이 되었다.

위위위윙!

동시에 그것들은 임청우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

악귀의 울부짖음은 같은 괴성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푸른 그림자들은 다시 배로 늘어났다.

눈앞이 팽팽 돌며 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푸른 그림자들에 갑자기 눈과 입이 생겼다.

크아아!”

임청우가 놀라는 순간에 그것들은 임청우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으합!”

임청우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양손으로 푸른 그림자들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푸른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냄새가 났다.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는 검소한 거실인데 임청우는 그 가운데에 조각조각 찢어진 푸른 천 조각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나오시오.”

임청우는 내동댕이쳤던 검을 주워 칼집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 사람도 아니군.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임청우가 들어온 문의 반대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황의소녀가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임청우는 그녀를 응시하고 물었다.

갑자기 황의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투 제발 좀 쓰지 않을 수 없어? 속이 니글거리지도 않아?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그만 서로 편한 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내게 감히 존대말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 대신...”

“...”

억울하면 너도 나처럼 편하게 말해.”

황의소녀는 빠르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해도 크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까칠한 계집애가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했다.

황의소녀가 자신과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그녀가 싫지는 않다.

임청우도 딱딱한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고 싶다.

미인에게는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임청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황의소녀가 열어놓은 방문에서 농사꾼 차림의 늙은 부부가 나왔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고 온화해보였으며 할머니는 작은 키에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훗날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아이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임청우는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의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있었다.

과묵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천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고 탁자로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저건 우리 부부의 이불이지. 마련한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바꿀 때도 되었어. 그러니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단다.”

임청우는 문득 그 할머니가 자기가 만난 적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저 아이에게 다 들었단다. 네 얼굴이 검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올바르고 기상이 훌륭하니 용모에 그렇게 구애될 것은 없단다. 대장부는 그 행동으로 말하지 얼굴을 파는 것은 기생오라비나 하는 짓이란다.”

임청우는 어리둥절했다.

자기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다고는 할 수 없다. 씻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이 이미 우협 장백승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 황의소녀가 검게 변하는 약을 다시 발랐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며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다독거리며 또 말했다.

효자는 부모의 그릇된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다. 비록 한때는 불효소리를 듣더라도 훗날 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효란다.”

임청우는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

할머니, 대체 무슨...”

흠흠...”

임청우가 말을 하려는 순간 황의소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막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단다 얘야. 우리도 너와 같은 나이에 혼인을 했단다. 아무 말 말고 오늘 밤 여기서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혼례를 올려?)

임청우는 어리벙벙한 심정이 되어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할아버지가 주워 모은 푸른 천들을 받아서 한쪽에 있는 아궁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영감! 오늘이 길일이 맞죠?”

그렇소.”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임청우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혼례준비를 할 테니 너희들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황의소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그녀에게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의 침실은 자그만 했다. 하나의 침상과 밖의 것보다 약간 작은 탁자가 하나 있으며, 벽쪽으로는 낡은 옷장이 붙어있다.

황의소녀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임청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왜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지.”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지.”

“...”

지금 하도록 하겠어.”

황의소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임청우는 다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롱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의소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큰일!

임청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빛나자 황의소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협의 제자, 그리고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며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네가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우협의 제자가 아니라면 넌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은 목숨일 거야.”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더구나 소녀가 큰일을 해보자는 대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가 결심한 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지 않은가?

황의소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쫓기고 있어. 그들은 아버지의 부하들인데 나를 잡아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말거야. 한데, 난 무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임청우가 물었다.

황의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한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거야. 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네가 말하는 큰일인가?”

임청우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그 여자만 죽일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몇 달 동안 무림을 돌아본 바로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첫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너야.”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고 있다.

무림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청우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가...

황의소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아?”

임청우는 야심으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만 같은 눈이다.

한데 그 일과 혼례가 무슨 상관이 있나? 왜 그런 일로 사람을 우롱하려는 거야?”

임청우가 말머리를 돌렸다.

황의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건 거짓말은 약간 했지만 장난은 아니야. 어차피 여자는 시집을 가야해. 그렇다면 적당한 상대를 발견했을 때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나?”

임청우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황의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에게.”

임청우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다니. 난 너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맘대로 해라.”

황의소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벌써 부부싸움을 하느냐? 하지만 그건 침실에서 소리를 낮추고 해야지 방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되는 것이란다.”

임청우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소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말다툼 한번 했다고 여자를 버리고 떠날 셈이냐? 이 할머니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할머니는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리고 임청우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콰득!

너무도 신속하고 재빠른 솜씨에 임청우는 꼼짝 못하고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벌써 할머니가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임청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오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풀고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란다. 다시는 여자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녀는 임청우의 혈도를 다시 풀어줄 기세였다.

그때 황의소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풀어주지 말아요. 도망가고 말거예요.”

걱정 말거라. 우리 부부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우협의 제자란 말예요.”

!”

황의소녀의 외침에 할머니는 놀란 듯이 임청우를 다시 보았다.

임청우의 왼손에 들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 얼핏 보기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그 검을 보는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우협의 제자였구나. 우협께선 안녕하시냐? 만나거든 개방의 종가(宗家)부부가 안부하더라고 전해라.”

혈도를 풀어주면 절 버리고 도망 가버릴 거예요.”

황의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애야, 네 사부께선 우리 개방의 은인이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선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일단 혼례를 치르고 나면 풀어주고 사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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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룻강아지의 용기

 

 

"흐흐흐 그렇다! 내가 바로 천면음마다.."

등천하는 두 눈을 광기로 번들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악명 높은 색마 천면음마임을 자인한 것이다.

... 그런...”

짐작은 했지만 자신을 납치해온 자가 천면음마라는 사실에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었다.

호천무맹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천면음마에게 사로잡혔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짐작이 간 것이다.

본좌는 호천무맹에 속한 문파의 계집들이라면 노소를 불문하고 해치워온 건 네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천하, 즉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희롱하며 음험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네년에게도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가슴을 터트릴 듯 움켜쥐며 낄낄거렸다.

"... 아미타불! 시주는 정녕 신불(神佛)의 심판이 두렵지 않나요?"

자운 비구니는 고통과 분노에 치를 떨며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흐흐흐... 본좌가 아니라 네년 자신의 처지나 걱정해라."

천면음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의 저고리를 움켜쥐었다.

"... 안돼요 악!"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천면음마가 그녀의 승복 저고리를 거침없이 찢어냈기 때문이다.

"흐흐흐... 기막힌 젖가슴이로군!"

저고리가 찢어지며 드러난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본 천면음마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아랫도리도 구경해볼까?”

이어 그자는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 치마로 손을 옮겼다.

"... 아미타불! 시주...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는 부처님을 모시는 비구니랍니다."

천면음마의 두 손이 자신의 치마 고름을 푸는 것을 느낀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어리석구나! 네년이 비구니라 날 더 미치게 한다는 걸 모르느냐?”

천면음마는 그녀의 애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치마를 벗겨 내렸다.

!”

자운 비구니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죽일 놈!)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는 것을 본 고검추는 치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여자를 강제로 농락하는 자들에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

헌데 바로 지척에서 보통 여자도 아니고 비구니가 유린당하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 천면음마를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검추는 잘 알고 있었다.

고검추 자신은 겨우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룻강아지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천면음마는 숱한 문파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여자들을 겁탈해온 희대의 색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검추 자신은 천면음마의 상대가 못 된다.

무작정 뛰쳐나가 공격해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겁탈하는 데 온 신경을 쏟을 때를...

 

"흐흐흐 비구니는 제법 오랜만이군."

천면음마는 두 눈이 벌개진 채 자운 비구니의 몸에 올라갔다.

한데 그자가 막 자운 비구니를 욕보이려는 순간이었다.

"죽일 놈!"

돌연 천면음마의 귓전으로 사나운 폭갈이 들려왔다.

콰창! 파앗!

동시에 토지묘의 신상이 부서지며 그 뒤에서 한 줄기 인영이 득달같이 뛰쳐나와 천면음마를 덮쳤다.

그 인영은 물론 고검추였다.

기회를 엿보던 그가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천면음마를 덮친 것이다.

고검추는 은발마희 옥여상에게서 구성의 태을강기를 전수받았으나 아직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연마한 혈전삼식의 제일식 분뢰개벽으로 천면음마를 공격했다.

꽈르르릉!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은은한 우뢰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줄기 역도가 일어나 천면음마를 후려쳐갔다.

"!"

!

막 자운 비구니를 유린하려던 천면음마는 기겁하면서도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고검추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신속한 반응이었다.

사실 단순히 경신술만이라면 천면음마는 사신각주나 옥면마성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직!

그 때문에 고검추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재빨리 옆으로 구른 천면음마의 몸 위를 지나쳐 토지며 입구쪽의 바닥을 박살냈다.

웬놈이냐?”

스팟!

고검추의 기습을 흘려보낸 천면음마는 바닥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내려섰다.

"!"

헌데 토지묘 입구쪽에 내려서던 천면음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기습한 자가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크크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군."

고검추를 일별한 천면음마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공격을 늦추면 안된다!)

!

일격이 실패했지만 고검추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천면음마에게 돌진해갔다.

반격의 기회를 주면 자신이 패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꽈르릉!

쇄도하며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다시 우레성이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분뢰개벽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천면음마에게 같은 수법이 두 번 씩이나 통할 리 없었다.

"크크크 귀여운 놈이로군!"

천면음마는 고검추가 덮쳐오는 것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순간 그 자의 모습이 꺼지듯이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공격 대상을 놓친 고검추는 기겁했다.

!

직후 고검추의 등판으로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미 뒤로 돌아간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등에 강력한 일장을 가한 것이다.

! 콰쾅!

헌데 맞은 것은 한번인데 충격이 연달아 두 번 더 고검추의 몸을 흔들었다.

"!"

고검추는 척주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퍼엉!

그와 함께 고검추의 몸은 토지묘 밖으로 튕겨나갔다.

철퍽!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간 고검추의 몸은 빗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팽개쳐갔다.

부르르!

세차게 나뒹군 고검추는 한 차례 몸을 떨고는 축 늘어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 시주!"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혼절했다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천면음마의 반격을 받고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을 보았던 것이다.

"흐흐흐! 도룡삼첩장(屠龍三捷掌)에 맞았으니 척추가 박살나 뒈졌겠지."

천면음마는 빗속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고검추를 내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자가 고검추를 친 장법은 일격으로 세 번의 충격을 반복해서 가하는 도룡곡 비전의 절기다.

내공을 순차적으로 토해내서 표적을 때리고 돌아오는 힘을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는 장법인 것이다.

그 때문에 가격당한 상대는 연이어 삼장을 얻어맞는 셈이 된다.

능력도 안되면서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낸 대가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천면음마는 방금 전의 일격으로 고검추를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시 자운 비구니를 향해 돌아섰다.

... 죽여라!”

자운 비구니는 자신의 알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악을 섰다.

이년아. 죽여줄 테니 너무 재촉하지는 마라.”

천면음마는 음험하게 웃으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왔다.

곧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렸다.

정말... 정말 아깝구나.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한 번 즐기고 버려야 하다니...”

천면음마는 혼절한 자운 비구니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바로 그때였다.

"... ... !”

천면음마의 등 뒤에서 천동치는 듯한 여인의 노갈이 들려왔다.

쩌억!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천면음마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

!

자운 비구니의 몸 위에 엎드려있던 천면음마는 대경실색하면서도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자의 이같은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쩌억!

바닥을 구르는 천면음마의 몸 위로 새파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피한 천면음마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토지묘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

헌데 놀랍게도 스치고 지나갔던 검기가 낫같이 홱 휘어지며 천면음마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 참마회선검강(斬魔廻旋劒罡)!"

천면음마의 입에서 경악에 찬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퍼억! 후두둑!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솟구쳤다.

천면음마는 궤적을 바꾼 검기를 피하지 못해서 왼쪽 허벅지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은 것이다.

콰당탕!

하마터면 허벅지의 뼈까지 베일 뻔한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화라락!

동시에 토지묘 안으로 날렵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인데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 흑의여인의 미모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대단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명공이 빚은 듯 단아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를 지녔지만 흑의여인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는 도도하고 오연하기 이를 데 없다.

조각같은 여인의 얼굴에는 서릿발같은 위엄이 깔려있어서 간담이 작은 사내라면 감히 마주 바라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헌데 아름다운 외모와 고고한 분위기에 비해 여인의 차림새는 질박할 정도로 평범하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질끈 묵었으며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상당히 오래 입었는지 빛이 바래있다.

여인은 어떤 치장도 하지 않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오른손에 비껴들고 있는 석 자 네 치의 투박해 보이는 장검뿐이다.

마치 전쟁의 여신이 인간 세상에 하강한 듯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다.

헌데 세차게 퍼붓는 폭우 속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은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의 몸에서 무형의 강기가 흘러나와 빗물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인의 내공은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 흑의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토지묘가 갑자기 비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 철봉황(鐵鳳凰)!"

흑의여인을 본 천면음마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헌데 철봉황이라면 고검추가 호천무맹을 찾아가서 만나려던 여인이 아닌가?

흑의여인, 즉 철봉황은 자운 비구니를 구하기 위해 천면음마를 추적해 왔을 것이다.

빠직!

토지묘 안에 내려서던 철봉황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폭사되었다.

자운 비구니가 발가벗은 채 혼절해 있는 발견한 때문이다.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천면음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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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초의 살인

 

 

(허억!)

막 철산산의 애처로운 육체를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일어났다.

... 네놈은...?”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 끝을 밟고 표연히 서있었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특이하게도 이 소년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타는 듯 붉은 색의 바람막이, 즉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피풍의가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그러자 드러나는 소년의 양쪽 허리춤에는 각기 칼과 검 한 자루씩이 꽂혀있다. 폭이 얇은 칼과 반대로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이다.

칼의 이름은 파천마도(破天魔刀)고 검의 이름은 낭아신검(狼牙神劍)이다.

이검한-!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대과벽 중간쯤에 숨겨져 있는 현음동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준 철익신응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과벽에서 곤륜산 남쪽에 자리한 장춘곡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된다.

가려면 못갈 것도 없지만 열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현음동천에 머물면서 서역사천왕의 무공을 연마하며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늘 밤 현음동천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라와 본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철목풍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철목풍은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모습에 방심하게 되었다.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보면 안되는 장면을 보다니...!”

철목풍은 이검한에게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죽어랏!”

그리고는 일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카카캉!

철목풍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잔양강살(殘陽罡煞)!”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인데 스치기만 해도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철목풍이 날린 잔양강살이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 저럴 수가...!”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의 몸이 그저 움찔했을 뿐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의 하나인 적룡풍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에 지금 이검한의 내공은 철목풍보다 두 배 이상 심후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철목풍이 구사한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는 이검한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다.

... 죽여랏!”

철목풍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이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자는 부하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자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 해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 판단되면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와아!”

죽여라!”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케에엑!” “크에엑!”

그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퉁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뒹군 장한들의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깨져있었다.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철목풍과 포대붕도 이검한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달아나야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에에엑!”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고 보자!”

피이이잉!

이어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께 철목풍의 몸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철목풍은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검한은 난생 처음 살인을 한 탓에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들자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헌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렸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이검한이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을 상대해본 후였다.

철목풍조차 이검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간단히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목풍에게 겁탈 당할 뻔한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알몸을 본 때문이다.

(누란왕후나 현음마모님과는 또 다르구나!)

중심부에 소담스러운 황금색 춘초(春草)가 덮여있는 철산산의 아랫도리를 훔쳐보며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인들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여 똑같을 수 없다.

하물며 이검한이 본 누란왕후 흑요설이나 현음마모의 알몸은 난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반면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 소녀다.

황금색 솜털로 덮여있는 철산산의 중심부를 본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검한이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비밀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현음마모의 몸을 오랫동안 품어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든다.

(다행히 수혈이 짚혀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검한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 보낸 이검한이건만 가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포대붕은 이검한이 철산산의 알몸에 손을 대자 아연긴장했었다.

하지만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포대붕이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포대붕의 아내인 교숙하의 무덤이었다. 철목풍에게 납치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인...

포대붕은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아내의 시신을 안장한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혈이 풀려 정신을 차린 철산산은 벽안을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철산산은 아버지뻘인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늠름해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뺨을 살짝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감사는 무슨...!”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자님!”

고개를 숙인 포대붕은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韃靼王府)의 큰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 분골쇄신으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그의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대붕의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포역사?”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호위도 대동하지 못하신 채 속하를 추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포대붕의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이 포대붕에게 물었다.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저쪽입니다!”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대붕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이검한의 그 신쾌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벌렸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보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천산산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어 미소를 지었다.

(산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소녀의 은밀한 설레임 속에 서역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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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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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릉 성내.

웅장한 장원. 화려한 대문으로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드나들고. 있다.

<-황금전장(黃金錢莊)> 웅장한 정문에 <黃金錢莊>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걸 배경으로 나레이션

어느 화려한 건물. 월동문이 있는 높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건물 입구는 잘 차려입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그러다가

깜짝 놀라는 무사들

화가 나서 큰 걸음으로 뛰듯이 월동문으로 들어오는 절세미녀. 늘씬한 체격에 도도한 인상을 지녔다.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 벽초천의 큰딸인 벽소소. 이때 나이는 청풍과 동갑인 18세다.

[아가씨!] [큰 아가씨를 뵙습니다.] 급히 인사하는 무사들

벽소소;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눈 치뜨며 다가오고. 급히 물러서는 무사들.

벽소소; [아버지!] !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벽소소.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장주의 큰 딸 벽소소(碧素素)>

벽소소; [날 무림맹 소맹주에게 시집보내시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에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습으로 들어서고

건물 안에서 대화하다가 돌아보는 세 사람. 상좌의 화려한 의자에 앉은 인물은 냉혈전호 벽초천이다. 나이는 50세 정도. 다른 작품의 냉혈전호 벽초천 캐릭터.

벽초천 앞쪽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인물이 마주 앉아 있다가 돌아본다. 좌측 인물은 교활하고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황금전장 총관인 이세창. <신마유희>등 다른 작품에 나온 이세창 캐릭터. 맞은편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20살 가량의 청년. 벽초천의 아들인 벽세황. 별호는 황금공자

벽세황; [어서 와라 소소야. 오랜만이다.] 어색하게 웃고. 이세창은 일어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소장주 황금공자(黃金公子) 벽세황(碧世皇)>

벽소소; [오빠한테는 볼일 없어!] 탁자 앞쪽에 버티고 서며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

벽소소; [말씀해보세요. 정말 절 무림맹의 소맹주에게 시집보내실 건가요?]

벽초천; [좋은 일인데 왜 화를 내는 것이냐?] 찡그리며 노려보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冷血錢虎) 벽초천(碧超天)>

벽소소; [좋은 일이라구요?] 이를 바득 갈고

벽소소; [제 일생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제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시집을 보내시려는 건가요?] [제게 이러시면 안되죠!]

벽초천; [!] 불쾌한 듯 찡그리고. 그러자

이세창; [... 진정하십시오 큰 아가씨!] 벽초천의 눈치를 보며 억지 웃음. 벽세황 앞쪽에서 일어선 채.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총관 이세창(李世昌)>

벽세소소; [진정?] 이세창을 노려보고

이세창; [알고 계시겠지만 무림맹은 황실조차 눈치를 보는 당금 무림의 지배자입니다.] 억지웃음 지으며 굽신

이세창; [그리고 무림맹의 소맹주인 위진천(威振天) 공자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미남으로 소문난 분이지요.]

이세창; [무림의 모든 여협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위진천 공자께서 직접 큰 아가씨께 청혼을 한 것입니다.]

벽소소; [그래서 영광으로 알라는 거야 뭐야?] ! 발로 바닥을 구르고

이세창; [... 그게 아니라...] 당황

벽초천은 불쾌한 듯 찡그리고

벽소소; [내가 모를 줄 알아?] [무림맹이 청혼을 한 건 우리 황금전장의 재력이 탐나서라는 걸?] 이세창을 노려보고

벽소소; [그리고 아버지는 무림맹의 세력을 등에 없고 사업을 번성케 할 목적으로 날 무림맹에 시집보내시려는 걸 테구요!] 벽초천을 노려보고

찡그리며 대답하지 않는 벽초천

벽세황; (소소 저것이 아버지의 역린을 건드리기 전에 제어를 해야겠군.) + [그만해라 소소야!]

벽소소; [그마하라니? 뭘 그만해?]

벽소소; [내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내가 왜 입 다물고 있어야하는데?]

벽세황; [이게 다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감수해야한다.]

벽소소; [그렇게는 못해!] 바락

벽세황; [소소야!] 굳은 표정

벽소소; [더 이상 날 회유하려 하지마.] [오빠가 이번 혼사를 주도했다는 걸 내가 모를 것같아?]

찡그리며 입 다무는 벽세황

벽소소; [날 위진천인가 뭔가 하는 인간에게 시집보내면 오빠는 좋겠지.] [무림맹주의 제자인 오빠의 무림맹 내에서의 지위가 단번에 부동의 것이 될 테니까!] 냉소하고

벽세황; [내 이익을 위해 누이인 널 팔아넘겼다는 거냐?] 얼굴 굳어지고

벽소소;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지!] 비웃고

벽세황;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눈 부릅뜰 때

벽초천; [그만!] ! 손바닥으로 탁자를 친다. 그러자

! 탁자가 그대로 박살이 난다. 움찔하며 몸을 뒤로 젖히는 벽세황과 물러서는 이세창

벽소소; [... 아버지!] 겁에 질려 주춤하고

벽초천; [소소 네 녀석은 삼종지도(三從之道)가 뭔지도 모르느냐?] 노려보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지고

벽소소; [... 그게...] 달달 떨고

벽세황; (역시 아버지다. 화를 내시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진다.) 침 꼴깍

벽초천; [출가 전에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남편에 순종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 부도(婦道)!]

벽초천; [그리고 미혼인 네 혼처를 정한 것은 아비이니 거역은 용납지 않겠다!] 쿠오오! 온몸에서 뿜어지는 기운. 그러자

벽소소; [!!] 홱 돌아서고

벽소소; [좋아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타탁! 밖으로 뛰쳐나가며 악을 쓰고

벽소소; [내가 불행해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마시라구요!] 악을 쓰며 건물 밖으로 달려나간다.

벽초천; [저 년이...] 분노하며 노려보고.

벽세황;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벽세황;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소소는 자기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혼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삐진 것뿐입니다.]

벽세황; [혼사가 착착 진행되고 또 위사제(威師弟)를 직접 만나 보면 마음이 바뀔 것입니다.]

벽세황; [위사제... 소맹주는 사내인 제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기남자(奇男子)입니다. 소소도 마음을 빼앗길 게 분명합니다.]

벽초천; [그랬으면 좋겠지만...] 난감

벽세황; [제가 모르는 문제가 있습니까?] 흠칫! 하고

벽초천; [총관! 자네가 말해주게. 내 입에 올리기는 민망하니...] 이세창에게 말하고

이세창; [예 장주님!] 고개 숙이고

이세창; <얼마 전 큰 아가씨가 갑자기 열병을 알아서 본장 전속의 의원이 진맥을 했었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전음으로 말하고. 건물 밖의 무사들을 곁눈질로 보며

벽세황; (갑자기 전음으로 바꾸다니... 남이 들으면 안되는 내용이란 건가?) 흠칫! 할 때

이세창; <큰 아가씨 몸에서 수궁사(守宮沙)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고개를 벽세황 쪽으로 내밀며 전음으로 속삭이고. 순간

벽세황; <... 수궁사가 사라져?>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찍어두는 수궁사는 오직 처녀를 잃었을 때만 사라지는데...> 경악

벽세황; [아버지! 설마!] 벽초천을 돌아보고

벽초천;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침통하게 끄덕이고

벽초천; <소소 년이 어떤 놈과 통정을 해온 것 같다. 열병을 앓은 것도 그놈에게서 얻은 화류병(花柳病;성병) 때문이었고...> 전음으로 말하며 침통한 표정

벽세황; (맙소사!) 경악

 

#15>

역시 금릉. 번화한 거리.

사람들 사이를 걸어오는 청풍. 침통한 표정

<자네 혹시 요리를 배워볼 생각은 없는가?> 주대육이 하던 말을 떠올리는 청풍

 

주대육; [칼을 쓴다는 점에서 도축과 요리는 일맥상통하는 분야야.] [자네 정도의 감각이라면 어렵지 않게 요리를 배울 수 있을 걸세.]

주육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황금전장으로 날 찾아오게나.] 돌아서며 말하고

회상 끝

 

청풍; (지금으로서는 황금전장의 총주방장 주선생이 유일한 희망이다.)

청풍; (황금전장의 종이 되어서라도 돈을 융통해야한다. 진진이를 지키려면...) 비장하고. 그때

[꺄악!] [!] 두두두! 사람들 비명과 말 달리는 소리가 앞쪽에서 요란하게 들리고

흠칫! 하며 고개 드는 청풍. 길 저편에서 말 한필이 맹렬히 달려온다. 체구가 거대한 백마인데 등에는 늘씬한 여자가 타고 있다. 여자는 물론 벽소소다.

벽소소; [비켜! 말굽에 치어 죽고 싶지 않으면...] 착착! 악을 쓰며 채찍으로 연신 말의 엉덩이를 친다. 그 때문에 말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고.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며 길가로 피하는 중이다.

 

#16>

길가 주점. 이층 창가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흠칫! 하며 밖을 돌아보는 사내. 무림맹 사신장중 풍신장이다. 탁자에는 간단한 안주 외에도 만두가 한 그릇 놓여있다.

번화가를 맹렬히 달려오는 벽소소의 말.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있고. 그러자

풍신장; [역시 세상을 넓고 또라이들도 많아. 사람 붐비는 백주대로에 말을 몰고 달리는 년도 있고...] 웃고

 

#17>

두두두!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맹렬히 달려오는 벽소소의 백마

[... 저 미친 년...] [백주대로에서 말을 달리다니...] [채찍질까지 하고 있어!] [꺄악!] [히익!] 사람들 비명 지르며 좌우로 달아나고.

청풍; (저 여자,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찡그리며 길가로 피하고. 그 사이에 말이 거의 청풍의 근처로 다가왔다. 헌데

5-6세쯤 된 어린 딸과 함께 다급히 길가로 피하려는 20대 중반쯤의 여자. 청풍에게서 멀지 않은 곳이다.

! 그 계집아이의 꽃신 신은 발이 돌부리에 걸리고

[엄마!] 철퍼덕! 앞으로 넘어지며 비명 지르는 계집아이. 그 바람에 엄마의 손을 놓치고. + 여자; [!] 돌아보며 비명. 여자는 이미 길가로 피한 상태지만 아이는 길 중간에 넘어졌고. 말은 아이에게 들이닥치고 있다.

[안돼!] [저런...] [아이가 밟히겠어!] 사람들 비명 지르지만 누구 하나 아이를 구하러 나서지 못하고

벽소소; [!] 말을 달리던 벽소소도 눈 부릅뜨지만 방법이 없다. 말 바로 앞에 아이가 쓰러져 있어서.

 

풍신장; [!] 혀를 차며 일어나고. 헌데 그 직후

 

! 허리춤에 끼운 단도를 칼집 채 뽑으며 몸을 날리는 청풍.

[! 저런...!] [저 청년, 죽으려고 작정했나?] [함께 밟히겠다.] 사람들 그걸 보며 비명

 

[!] 주점 이층 창가에서 일어나던 풍신장의 눈도 번뜩

 

휘익! 다이빙으로 아이를 덮쳐가며 눈을 말에게로 향하는 청풍

! 빛나는 청풍의 눈

스륵! ! 말의 발굽이 움직이는 게 슬로모션으로 보인다. 어디를 밟을지 청풍이 예측하는 모습이고.

청풍; (여기다!) ! 칼을 던진다. ! 회전하며 날아가는 칼

! 칼이 말의 발굽 위 관절에 맞고 튕겨지고

[!] 고통을 느끼고 눈 치뜨는 말

히히힝!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려는 말. 비수는 바닥에 튕겨 떨어지고. + 벽소소; [!] 기겁하며 말에서 뛰어오르려 하고

[!] [!] 길가로 비켜선 사람들 뒤로 죽립을 쓰고 망토를 두른 차림의 사내들 네 명이 움직이다가 흠칫! 하며 멈춰서고. 눌러쓴 죽립 아래 황금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보인다. 황금 가면에는 눈 부분에만 구멍이 나있고 그곳으로 드러나 보이는 눈빛이 날카로운 자들. 그자들은 벽소소가 말 타고 달려온 방향에서 함께 달려왔다. 황금전장의 비밀고수들인 황금수라들이다. <신마유희>에 나왔던 황금전장의 경호무사 황금수라들과 동일 캐릭터에 죽립만 씌운 모습이다. 원래는 죽립을 쓰지 않지만 지금은 벽소소를 비밀경호하기 위해 죽립을 쓰고 있다. 망토 속에 검을 차고 있다. 죽립을 쓰고 있을 때는 죽립인으로 표기

! 아이를 끌어안고 옆으로 뒹구는 청풍.

 

풍신장; [허어!] 밖으로 날아가려다가 감탄하며 멈춰서고

 

콰당탕! 히히힝! 말도 비명을 지르며 청풍의 반대편으로 나뒹굴고. 그 주변의 사람들 비명 지르며 도망치고. 벽소소는 말 등에서 튀어 오르고. 대단하진 않지만 벽소소도 무공을 익히고 있다.

[!] [!] 안도하며 멈춰서는 네명의 죽립인들.

청풍; (성공했다.) 휘릭! 아이를 안은 채 한쪽 무릎 꿇는 자세로 일어나고.

벽소소; [지랄...] 휘릭! 놀라고 화난 표정으로 내려서는 벽소소

청풍;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도 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동물들의 몸의 구조를 즉시 알아볼 수 있다.) 우는 아이를 다독여 달래고

청풍; (더 나아가 그런 몸 구조를 지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도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울면서 달려오는 아이 엄마를 보며 일어나려 하고

청풍; (덕분에 말의 발굽 위쪽 관절을 건드려 말의 균형을 잃게 만들 수 있었다.) 일어나는데. 직후

벽소소; [개 잡종아!] 짜악! 청풍의 등쪽에서 내리쳐지는 말 채찍. 물론 말 채찍을 내리친 것은 벽소소다. 하지만

! 몸을 조금 돌리면서 벽소소의 채찍을 피하는 청풍. 앞쪽에서는 아이 엄마가 달려오다가 깜짝 놀라 물러선다

 

풍신장; (말 채찍이 내리쳐지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번득이며 내려다보고

풍신장; (설마 저놈 상대의 움직임이 미리 보인다는 건가?) 자리에 앉고

 

벽소소; [냄새나는 천한 버러지 주제에...!] 다시 말 채찍을 쳐들고

벽소소; [감히 내 애마를 다치게 해? 죽여 버리겠다!] 채찍을 휘두르려 하고. 그 뒤에서 말이 버둥대며 일어나고 있고

청풍; [당신은 사람보다 말의 안위가 더 중요한 거요?] 아이를 아이 엄마에게 건네주며 벽소소를 노려보고

벽소소; [당연한 걸 묻는 거냐?] 어이없다는 표정

벽소소; [내 애마는 유서 깊은 혈통의 말이다.] [몸값이 최소한 만 냥은 넘는데 그깟 가난뱅이네 딸년하고 비교가 되겠어?] 일어나 쩔뚝거리는 말을 돌아보며

청풍; [뭐요?] 어이없고

[허어 저런...] [사람 목숨 값이 말 새끼보다 못하다고?] [너무 뻔뻔해서 욕도 안나오는군.] 사람들 놀라고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의 죽립인들

 

풍신장;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저 년, 진짜 미친년이었구만.] 웃으며 접시에 놓인 만두들 중 하나를 집어들고

 

벽소소; [하여간 너 오늘 잘못 걸렸다.] [마침 내 기분이 개 같던 참이니 네놈을 피곤죽으로 만들어야겠다.] 말 채찍으로 청풍을 겨누며 다가오는데

! 위쪽에서 날아온 만두가 벽소소의 머리를 때린다.

벽소소; [!] 만두에 머리를 맞고 비명 지르며 비틀하고.

[!] [!] 죽립인들 가면 속에서 눈 부릅뜨고.

 

주점 이층에서 숨듯이 서서 만두를 던진 자세로 웃는 풍신장

 

벽소소; [어떤 개잡종이야?] 머리에 묻은 만두 흔적을 터는 자세로 악을 쓰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 ! 사방에서 만두와 빵, 야채등이 날아온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던지고 있다.

벽소소; [이것들이...] ! 휘익! 급히 피하고 말 채찍으로 쳐내며 이를 갈고

[사람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는 분께 드리는 선물이오.] [어이쿠! 말에게 던진다는 게 손이 미끄러졌네.] [많이 드시오 아가씨!] [말 새끼야 너도 많이 먹어라!] 사람들이 신나서 만두와 빵과 야채를 던진다

벽소소; [!] 피하고 막다가 다 피하지 못해서 만두나 야채에 맞고 비명 지르는 벽소소.

죽립인1; (죽일 놈들!) ! 죽립인 중 한명이 망토 속에 차고 있던 칼을 뽑으려 하고. 이를 갈며. 하지만

다른 죽립인이 그자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도리질하고.

죽립인1; <막지 말게! 아가씨가 다칠 수도 있어!> 칼을 뽑으려는 첫 번째 죽립인. 전음으로 말하지만

죽립인2;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네. 그리고 우리 목적이 뭔지 잊으면 안되네.> 두 번째 죽립인이 역시 전음으로 말하며 고개를 젓고.

죽립인3; <아가씨를 미행해서 누굴 만나는지 확인하는 게 최우선 임무지!> + 죽립인4; <좀 지켜보자고.> 다른 두 명의 죽립인도 첫 번째 죽립인을 말리고. 그때

벽소소; [이 버러지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 이를 갈며 날아올라서

휘릭! 말의 안장에 앉고. 이어

벽소소; [두고 보자!]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치며 악을 쓰고

히히힝! 두두두! 달려가는 말

[잘 가쇼!] [꼴좋구나!] [말하고 재미 많이 봐라 이년아!] 사람들 멀어지는 벽소소에게 외치며 비웃고.

죽립인들은 환호하는 사람들 뒤에서 움직이며 다시 벽소소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쪽으로 달려가고

청풍; (세상인심이 아주 각박하진 않군.)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기 칼로 다가가며 웃고

청풍; (분노해야할 상황에서 함께 분노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바닥에서 자기 칼을 집어들고.

[고맙습니다 공자님! 고맙습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은 채로 연신 꾸벅거리고

청풍; [애가 놀랐을 테니 잘 다독이십쇼.] 칼을 허리춤에 끼우며 웃고

청풍; [잘 가라 아가야!] 엄마 품에 안긴 계집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아이도 손을 흔들고

멀어지는 청풍.

 

#18>

풍신장; [총관을 경호하러 왔다가 좋은 구경을 했군.]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밖을 보며 웃고

풍신장; [그놈,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움직임이 기막혔었다.] [임무 수행중만 아니었으면 낚아채서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청풍이 아이를 구하던 장면 떠올리고

풍신장; [저런 수준의 재능은 혈통이 뒷받침 되어야 발현되는 것일 텐데...] + [!] 술 마시다가 눈 부릅

청풍의 얼굴 크로즈 업 되어 뇌리에 떠오르고

풍신장; [맙소사!] 벌떡! 일어나고

풍신장; [그놈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용무린과 아연아가씨의 얼굴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스팟! 밖으로 날아가고

휘익! 청풍이 날아간 쪽으로 바람처럼 날아가는 풍신장. 너무 빨리 날아가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날아가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보는 풍신장

하지만 어디에도 청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풍신장;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풍신장; (나이도 그렇고... 그놈이 용무린의 아들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날아가며 굳어지는 얼굴

풍신장; (운신장을 만나 도움을 청해야겠다. 정말 금릉에 용무린의 아들이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날아간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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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2)

 

 

아람드리 나무가 즐비한 숲속을 황의소녀는 순식간에 십여 리나 달렸다.

숲속으로도 오솔길은 나있고, 두 갈래의 오솔길에 마주치게 되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황의소녀는 혈도를 짚은 채 겨드랑이에 끼고 왔던 임청우를 오른쪽 길 옆 숲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임청우는 장작처럼 뻣뻣하게 던져져 수풀 속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지만 이내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곁에 내려앉기도 했다.

잠시 후, 길게 바람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기걸승 세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 역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거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벌써 며칠 째 종남산에서 술래잡이라니...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데 막상 잡을 순 없고...”

노파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거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냐?”

그쪽으로 가기는 아마 갔을 거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린 역시 소저를 잡지 못할 거요. 아마도 소저에겐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어려서부터 장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 깊고 깊은 심처에서 그녀가 어떤 재주를 배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 재주도 없고 단지 우리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아직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소?”

거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파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그건 이상해. 더구나 소저의 몸에선 끊임없이 만리향 냄새가 풍기는데 말이야.”

문득 중이 입을 열었다.

소저는 주인을 닮았소. 도무지 그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질 않소.”

거지와 노파가 흠칫했다.

중이 계속 말했다.

우린 주인을 대하듯이 소저를 대해야 할 것 같소. 주인의 생각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명령만 충실히 수행하듯 소저의 생각을 예측할 필요 없이 무작정 쫓기만 하면 언젠가는 소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자기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쫓는다. 우린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주인이나 소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노파와 중은 만리향의 냄새가 흐르고 있는 왼쪽길로 주저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지는 오른쪽 길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그들을 뒤쫓아 갔다.

임청우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을 죽이려 하는 건가? 내가 책에서 보고 배운 건 모두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었단 말인가?)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듣기로는 노파 등의 주인이란 사람은 황의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락!

갑자기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임청우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임청우는 자신의 눈까풀이 무거워져 내려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혈도가 찍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청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숲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리고, 그 땅을 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눈앞에는 영롱한 두 개의 별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멍청이! 이제야 깨어났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임청우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영롱한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임청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푹 자고 난 덕분인지 몸이 아주 홀가분했다.

비록 미음 한 그릇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허기도 사라졌다.

몸이 편해진 탓인지 황의소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불쾌한 감정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확인하며 임청우는 물었다.

? 나를 이리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남을 잘 속이기 때문이야.”

황의소녀가 해실해실 웃으며 대답했다.

임청우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는 속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쓰륵쓰륵!

아래쪽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지가 기우뚱거린다.

그들이 있는 곳은 키가 이십 여장에 달하는 거목의 가지 위였다.

임청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속이 좁은 사람이나 여자와는 다툴 바가 못 된다 했다. 바람소리거니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공간에 가득한 바람만 느껴질 뿐 땅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려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우며 황의소녀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말을 던졌다.

임청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층층으로 얹혀진 가지들 중 하나를 내려왔을 때 위쪽에 있는 소녀가 또 던지듯이 말했다.

검주 유소기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내가 보기에 넌 유소기를 영원히 속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해. 또 유소기의 손아귀를 벗어날 만한 능력도 없고.”

휘익!

임청우가 손과 발을 멈추고 있는 앞으로 황의소녀가 나비가 날 듯 부드럽게 날아내려 왔다. 그녀가 내려선 가지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황의소녀는 임청우에게서 망설임을 읽고 말했다.

나도 쫓기고 있지만 사실 기걸승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들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들은 나도 어떻게 하지 못했어.”

임청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의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뱉었다.

나도 너 정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뭔가가 임청우의 양쪽 귀에 걸려있었다. 그의 발을 묶은 적이 있던 천잠사였다.

임청우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황의소녀가 돌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는 우악스럽게 황의소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난 죽을 고비라면 수백 번도 더 넘겼다. 우리 어머니조차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셨다. 그런 나를 죽고 사는 것으로 협박하려하다니...”

임청우의 손힘은 황의소녀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할 만큼이나 엄청났다.

그의 몸속에 있는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밖으로는 뿜어낼 수 없다하지만 고강한 공력임에는 분명한 때문이다.

우협의 제자가 여자나 괴롭히는 사람이야?”

황의소녀가 작지만 뾰족하게 소리쳤다.

순간 임청우는 뱀에 물리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청우에게 있어 마음속의 사부인 우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백번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황의소녀의 손목을 풀어준 임청우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지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임청우는 늘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발아래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임청우는 황의소녀가 기걸승 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리향의 향기를 높은 나무 위에서 바람에 실어 날려버리는 것이다.

기걸승이 어느 정도 높이 까지 솟아오르지 않고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되질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왜 이 근처에서만 맴도는 거지?”

임청우가 물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황의소녀는 화난 듯이 쏘아붙이며 나비처럼 날아서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협의 제자인 것 같은 이 녀석은 어떤 면에선 전혀 우협을 닮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이나 상하게 하는 짓 따윈 진짜 우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임청우도 묵묵히 황의소녀를 따라 나무를 내려갔다.

잘 들어! 너나 나나 여기 계속 있다간 다 죽어.”

이윽고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잠자코 내 뒤만 따라와.”

임청우는 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의소녀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쁘게 눈망울을 굴리며 숲속으로 유연한 물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만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

 

숲속을 헤맨 것도 두 시간 정도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그녀는 여전히 그 숲 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중요한 그 무엇을 찾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마침내 임청우가 물었다.

대체 찾고 있는 게 뭐야?”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황의소녀가 빠르게 말했다.

어두워서 쉽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찾아야 돼. 그곳만 찾을 수 있다면 넌 유소기에게서, 난 기걸승으로부터 쫓기지 않아도 될 거야.”

임청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이루려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전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이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포함된다면 우린 전혀 찾을 필요가 없지.”

임청우의 말에 황의소녀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임청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우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남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나도 좋아하진 않아.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해. 설혹 여기에 그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대현(大賢)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인다고 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은 또한 아주 현명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이나 아주 현명한 것이나 모두 일반에서 유리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없어 생기는 혼돈일 것이다.

이 순간에 황의소녀의 심정이 그랬다.

임청우가 어리석은 것인지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면, 남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고금에 걸친 불변의 진리 중 하나일 것이다.

 

쓰륵! 쓰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임청우가 앞장을 서고 황의소녀가 뒤따른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갔다. 그는 황의소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임청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경신술을 배우지 못했었다. 물론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바보같이... 경신법을 펼치면 금방 갈 텐데...)

황의소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면 되지 꼭 하늘 가린 곳이라야 돼? 허세는 혼자 다 부리면서...)

임청우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는 이미 알았다.

그녀는 임청우가 잘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임청우를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삿!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따라오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불빛을 향해 갔다.

비록 경신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몸속에는 용조층층공이란 공력이 숨 쉬고 있기에 그 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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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닭 쫓는 노인

 

 

백남빈은 배가 고플 때 외에는 조사동을 나가지 않았다.

나가 보았자 강미루도 없고 흑왕도 없는데 새소리만 듣기는 싫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백 조사의 사자검결과 진룡 사부의 검결만을 외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어 나머지 십일 인의 사조들의 검결도 모두 외우기로 하였다.

 

한번 몰두하여 깊이 빠지자 세상의 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사조들의 검결을 외우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혹시 틀린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자검결은 본래 그 뜻이 애매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읽어도 읽어도 쉽게 외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이것저것 뒤죽박죽되어 버리곤 했다.

다른 사조들의 검결 역시 이백조사의 사자검결에서 파생한 탓에 비슷한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이백과 진룡의 검결만을 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백남빈은 먼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검결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암송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거듭거듭 확인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찾아먹고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다시 새로운 검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암기가 확실히 되어갈 수록 각각의 검결들 사이에 무언가 서로를 구분 짓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열세 개의 검결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독립성이 뚜렷하여 전혀 섞일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백남빈이 조사동에서 검결을 외느라고 쳐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큰비가 몇 번이나 왔다.

겨울이지만 창평곡은 눈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큰비가 여러 번 왔다는 것은 큰 눈이 자주 왔다는 말이 된다.

며칠 전 그는 열세 개의 검결을 전혀 헷갈리지 않고 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의 점검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

 

이날도 백남빈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요기를 하기 위해 조사동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평곡에 들어 온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미루가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미루가 떠나고도 수십일은 족히 흘렀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녹지를 지나치는데 그날따라 겨울 장마에 무너진 오두막이 그의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한데 풀색과는 전혀 다른 남색 천이 사각으로 접혀져 빗물을 튕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전에 입었다가 미루에게 준 남색상의였다.

백남빈은 그것을 힐끗 보았다.

전에도 몇 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색상의 속에 어떤 각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른 날에는 옷자락이 부풀어서 알 수 없었던 것이 옷감이 비에 젖어 달라붙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루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했었는데... . 남색상의... 뭐였더라?)

백남빈은 그 사이 강미루의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가가서 접혀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속에 다른 것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확 펼쳤다.

펄럭!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갑자기 기름종이에 싸여진 한권의 책이 옷자락 속에서 빠져나와 앞쪽으로 날아갔다.

백남빈의 몸이 일렁이는 순간 땅으로 떨어지던 책은 그의 손에 빨리듯이 들어갔다. 녹지의 물이 그 정도로 깊은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다.

 

<八陣圖解>

 

표지에 적힌 그같은 제목이 백남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미루가 한 말은 이 책을 찾으라는 거였구나. 그녀는 창평곡을 들고 날 수 있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나 몰래 감추고 있었고...)

백남빈은 비로소 강미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자신들의 집안은 원수나 다름없다.

그 때문의 두 사람의 사랑은 오직 이곳 창평곡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강미루는 창평곡을 나가기 싫었고 팔진도해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강미루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백남빈은 팔진도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강미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바닷가의 정월 바람은 차갑기도 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이 푸른 바다색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도처에서는 패권다툼이 일어나고 무황성과 신랑성의 격돌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산산맥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바닷가는 세상의 혼란과 상관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사별의 슬픔은 목이 메고

생이별은 항상 가슴 쓰리네.

강남은 풍토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조차 없구나.

친구(;이백)가 내 꿈에 찾아오니

나를 오래도록 생각함일세.

평소의 혼이 아닌 듯하여 두려우나

길이 멀어 알 수가 없네.

그대의 혼이 올 때 풍림(楓林) 푸르더니

돌아갈 때 관문(關門) 요새(要塞) 어둡구려.

그대는 지금 유배되었건만

어찌 날개 얻어 여기 왔는고.

지는 달이 내 집 들보 비추는데

그대 얼굴 아닌가 의심하였노라.

물은 깊고 파도 거치니

부디 교룡(鮫龍)에게 잡히지 말게.

 

바닷가를 따라 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낭송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녹색의 장검을 어깨에 둘러맨 청년이 산길에 쌓인 눈을 밟고 걸어오면서 책을 펴든 채 읽고 있었다.

청년은 창평곡을 나선 백남빈이었다.

무황성으로 가는 일은 급했었지만 자신이 알려야 할 소식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야심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증빙물(證憑物)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양부의 명령이므로 무황성으로 가서 군명(軍命)을 완수해야겠지만 거들떠보기나 할지 몰랐다.

자연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밤 꿈에 강미루가 보여 울적했었다.

그래서 창평곡을 나설 때 갖고 나온 여러 권의 시집 중 하나를 뒤적이자 두보가 이백을 꿈에 보고 지은 시가 있었다.

그 정이 흡사 자신이 강미루를 그리워하는 심정 같은지라 길을 걸으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의 심금(心琴)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길 옆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상투를 튼 노인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 떨어지는 소리에 백남빈이 고개를 돌릴 때 노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는데 노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이어 노인은 다시 고개를 낮추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동에 백남빈은 어리둥절했다.

백남빈이 갸웃하며 다시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고수였구나!)

백남빈은 노인의 유령같은 신법에 놀라고도 감탄했다.

노인은 백남빈이 무슨 소리라도 낼까 싶어 주의를 주면서 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백남빈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끄는데로 따라갔다.

길 옆 숲속의 커다란 나무들을 몇 개 지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백남빈의 귀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지키고 서있다가 저 나무사이에서 작은 짐승이 뛰쳐나올 때 크게 소리 한번만 질러주게. 그러면 내 평생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백남빈의 소매를 잡고 있는 노인의 입술이 옴찔거리며 전음술(傳音術)을 펼친 것이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지라 백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까닥였다가 드니 상투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 외에 다른 무공은 평범한 백남빈에게는 부럽게만 느껴지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부러움이 일어 노인이 서있었던 곳을 한 번 더 쳐다볼 때였다.

!

갑자기 앞쪽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노란 그림자가 휙 뛰쳐나왔다.

백남빈은 소리를 질려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사사삭!

노란 그림자는 쏜살처럼 백남빈의 옆을 스쳐 다른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앞이 어른거리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바보같으니... !"

욕을 하면서 땅에 침을 탁 뱉은 노인은 백남빈을 한번 노려본 후 노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노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백남빈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품속에 집어넣고 노인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은 따로 신법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창평곡에서 내공과 외공을 깊이 쌓게 된 후로 몸이 강해지고 가벼워져서 바람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를 오리쯤 달려가니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말라버린 가시덤불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백남빈이 자기를 쫓아 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도 고수였을 줄은 몰랐구만."

"아닙니다. 저는 무황성의 일개 무사에 불과 합니다."

백남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빈정거렸다.

". 언제부터 무황성에서 그대같은 절세고수를 일개 무사로 두기 시작했을꼬?"

백남빈은 오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결이 전혀 흩트려 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걸 보고 백남빈이 실력을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육정풍(陸靖風)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아무튼 그딴 것은 조금 있다가 따지자. 지금은 바쁘니까."

노인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다시 가시덤불 쪽을 돌아보았다.

백남빈은 육정풍이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는 않아서 육정풍이란 노인과 함께 가시덤불 쪽을 살펴보았다.

무성한 가시덤불 맞은편에는 노란색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닭인 듯 한데 노란 깃털이 선명하며 부리가 강철같이 야무지고 새빨간 벼슬이 멋있어 보였다.

그 노란 산닭의 뒤는 절벽이었다.

(왜 이 노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지 알겠다. 만약 덤불을 건드리기만 하면 닭은 절벽으로 뛰어 내리고 말겠지.)

백남빈은 노란 산닭이 맘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닭도 백남빈과 육정풍을 쳐다보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척 오만해 보이는 자태였다.

"! 네놈도 저 황계(黃鷄)를 탐내고 있구나.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육정풍이 백남빈에게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저놈은 내가 장백산(長白山)에서 발견하여 여기까지 몰아온 거야. 비록 아직 내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내 것이나 다름 없다구."

"어째서 별 것 아닌 산닭 한 마리를 이천 리 넘게 쫓으면서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백남빈의 물음에 육정풍이 눈을 부라리며 얼굴표정을 무섭게 했다.

"별것 아니라고? 저 황계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놈!"

백남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열네 살에 무황성 등천제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양부의 영향으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를 무식한 놈으로 취급하자 백남빈은 영 기분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황계라는 이름의 산닭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저놈의 황계를 내가 잡아버려야지. 이 영감이 얼마나 애걸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계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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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처절한 일막

 

 

청포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반월도(半月刀)가 꽂혀 있다.

또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난 오른쪽 손목에 특이한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무쇠로 만든 팔찌인데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는 징기스칸의 상징이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교숙하를 납치한 장본인인 철목풍이었다.

그 계집이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겠군!”

철목풍은 포대붕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음침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라!”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에 찬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는 장차 대원제국의 가한(可汗;황제)이 될 존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

철목풍은 음산하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두두두!

그러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대과벽쪽으로 달려왔다.

그 말들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명씩 타고 있는데 맨 앞쪽에서 달려오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양쪽 손목이 함께 묶인 채 질질 끌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의복이 갈가리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분노와 안도감을 함께 느끼며 포대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래선 안돼지!”

꽈르릉!

하지만 철목풍이 음험하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철목풍! 네놈이...!”

포대붕은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휘릭!

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로 지면으로 내려서야했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은 장내에 이르러 멈춰 섰다.

그 즉시 선두의 장한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으으으!”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그 여인은 바로 포대붕 자신의 아내인 교숙하였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아도 교숙하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같았다.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데려온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웃었다.

죽일 놈!”

포대붕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라!”

휘익!

포대붕은 안고 있던 금발소녀 철산산을 철목풍에게 던졌다.

으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철목풍은 날아든 철산산을 두 팔로 받아 안으며 득의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자신의 두 팔에 안긴 철산산을 내려다보는 철목풍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찢어 죽일...!”

헌데 아내 곁으로 내려선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교숙하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교숙하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쳐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교숙하의 아랫도리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오는 도중에 알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하의가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숙하는 이미 수많은 사내들에게 짓밟힌 상태였다.

으으으...”

아내의 상태를 살펴보며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징기스칸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속을 지킬 줄 알았다!”

포대붕은 아내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급히 풀며 철목풍을 향해 이를 갈았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철목풍은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뭐라고?”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철목풍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철산산의 얼굴을 살펴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교숙하의 허옇게 들어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교숙하를 유린하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하여간 불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이 짐승만도 못한...!”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 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포대붕에게 있어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 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으으음!”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해주자 교숙하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안심하시오 부인. 내가 왔소!”

아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부르르!

정신을 차린 교숙하는 눈을 부릅뜨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 당하던 와중에서도 잊지 않았던 남편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교숙하의 가슴을 메운 것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숱한 사내들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떠오른 때문이다.

!”

직후 교숙하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혓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교숙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문 것이었다.

... 부인!”

포대붕은 기겁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교숙하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런!”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푸들푸들 떨었다.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보고 있던 철목풍이 혀를 찼다.

... 뭐라고?”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같지 않게 보이는 그였다.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네 마누라의 꿀단지를 가장 먼저 맛본 건 바로 나였다. 내게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의 몸 아래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죽인다!”

쐐애애액!

철부를 뽑아든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가 대지를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커억!”

콰당탕!

하지만 다음 순간 피를 뿌리며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 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로 덤빈 결과 철목풍의 단 일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교숙하가 당한 무참한 일들을 떠벌린 것이다.

크으... ... 짐승만도 못한 놈!”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포대붕은 가슴의 혈도 몇 곳이 파괴되는 바람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다. 포대붕!”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집이 딸을 납치한 네놈을 어떻게 처단할지 궁금하구나!”

철목풍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

철목풍은 두 눈을 야릇하게 번득이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네놈 설마!”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마라!”

포대붕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혈도가 짚인 상태인 그가 철산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포대붕은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미 한 마리 짐승으로 변한 철목풍의 귀에 포대붕의 애원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철목풍은 철산산의 속옷도 거침없이 벗겨버렸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소녀의 교구는 말 그대로 황홀한 것이었다.

철목풍 주변에서 철산산의 알몸을 들여다보는 장한들의 눈이 짐승의 그것같이 번들거린다.

흐흐흐 기가 막히군.”

철산산을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놓은 철목풍의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우리 공주님의 꿀단지를 구경해볼까?”

철목풍은 극한의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산산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죽일 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악을 쓰던 포대붕은 선혈을 울컥 토해내고는 축 늘어졌다. 눈앞에서 어린 주인이 철목풍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기혈이 뒤집혀 기절한 것이다.

흐흐... 곧 달단여왕이란 오만한 네 어미도 본좌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목풍은 황금색의 춘초로 덮인 철산산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며 도착척인 흥분에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만 하지! 보기에 흉하니...!”

돌연 철목풍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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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청풍의 집이 있는 성 밖의 빈민가.

그곳으로 달려오는 청풍. 청풍이 앞장서서 달려오고 그 뒤를 이진진이 숨이 턱에 차서 헐떡이며 따라온다. 거리가 제법 떨어졌다.

[!] 눈 부릅뜨며 앞을 보는 청풍.

청풍의 집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며 안쪽을 보고 있다. 그러다가

청풍과 이진진을 발견하고 돌아보는 사람들

[청풍이다!] [청풍이가 왔어!] [빨리 와봐라 청풍아! 네 엄마 큰일 났어!] 사람들 손 흔들며 외치고

와장창! [진진아버지! 제발...] [어디 있어? 빨리 안 내놔?] 물건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악쓰는 소리가 청풍의 귀에 들리고

청풍; (젠장!) 더 빨리 달려가고. 그러다가

곁눈질로 옆을 보는 청풍

골목에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건달 두 놈. #4>에 나온 도박장 지키던 건달들

청풍; (이 마을에서 못 보던 놈들...)

청풍; (행색을 보면 흑사회의 버러지들인데...) 생각하는 사이에 집 앞에 이르는 청풍. 사람들이 급히 물러서고

와장창!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서 눈 치뜨며 멈춰서는 청풍

 

#11>

와장창! 콰창! 문이 활짝 열려 들여다보이는 집 안 내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집 안의 모습. 원룸처럼 방 한 칸에 부엌이 있는 구조인데. 집안에서 절름발이 이산하가 집안의 집기들을 쓰러트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 진삼낭이 매달리며 애원하고 있고

이산하; [그거 어디 있어? 어디에다 숨겼냐고?] 와장창! 장롱을 잡아 당겨 쓰러트리고.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해서 질질 끄는 모습이다. + 진삼낭; [제발 그만 하세요 진진아버지!] 이산하의 팔에 매달리며 울부짖고

진삼낭; [말했잖아요. 그 팔찌는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구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애원하지만

이산하; [거짓부렁 하덜 말어!] [임자가 그 팔찌를 얼마나 애지중지해왔는지 아는데 잃어버렸다고?] 충혈 된 눈을 번들거리며 이를 갈고

이산하; [빨리 이실직고해! 살림 다 부수기 전에!] ! 발로 장을 걷어차고

진삼낭;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신?] [얼마나 빚을 졌기에 없는 팔찌까지 내놓으라는 건가요?] 매달리며 애원하고

이산하; [임자가 알 거 없어! 그 팔찌를 꼭 팔아야할 일이 생긴 것뿐이야!] 와장창! 다른 가구도 쓰러트리고

진삼낭; [없는 걸 어떻게 내놔요? 있다고 해도 못 내줘요.] 악에 바쳐 외치고

진삼낭; [노름으로 날려먹을 게 뻔한 데 어떻게 당신에게 내놓겠어요?] 역시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이산하; [말 다 했어 이 여편네야?] ! 자기 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진삼낭; [!] 철퍼덕! 바닥에 나뒹굴고

이산하; [내가 다리병신 된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 삿대질하고

이산하; [네년과 청풍이 놈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이 이런 꼬라지가 되진 않았다구!]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진삼낭을 때리려 하고

! 이산하의 손목을 잡는 큰 손

이산하; [!]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눈 치뜨고

! 어느 틈에 방에 들어온 청풍이 이산하의 손목을 잡고 있다. 굳은 표정. 키가 청풍이 이산하보다 한 뼘 쯤 크다. 몸도 더 건장하고

진삼낭; [... 청풍아!] 안도하며 올려다보고

이산하; [너 이 새끼...] 손목을 청풍의 손에서 빼내려 애쓰지만

꿈쩍도 않는 청풍의 손

이산하; [이거 안놔? 네놈 눈에는 아비도 안보여?] 퍽퍽! 다른 손으로 청풍을 때리며 악을 쓰지만 청풍은 꿈쩍도 않고. 그때

이진진; [엄마!] 울면서 뛰어 들어온다. 숨이 턱에 찬 표정이고

진삼낭; [진진아!] 울며 돌아보고. 밖에서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청풍; [뭔 구경났소?] 밖을 노려보며 말하고.

찔끔! 하는 사람들

[... 가세!] [청풍이가 왔으니 별일 없겠지.] [이게 대체 뭔 난리래?] [그렇게 금슬 좋던 부부가 대낮에 싸움이라니...] 혀를 차며 흩어지는 사람들. 그러자

청풍; [문 닫아라 진진아.] 여전히 이산하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문간에 서서 숨을 고르는 이진진에게

이진진; [... 알았어 오빠!] 급히 문을 닫고

! 문이 닫히며 집안이 어둑해진다. 이제 밖과는 시선이 차단되었고, 그러자

청풍; [말해보시오.] ! 거칠게 이산하의 손목을 뿌리치듯 놔주며 말하고

비틀하다가

털썩! 주저앉는 이산하

청풍; [이 난리를 친 이유가 대체 뭐요?]

이산하; [너 이놈 아비에게 무슨 행패를...] 일어나며 눈 부라리다가

내려다보는 청풍. 어둑한 방안을 배경으로 청풍의 눈이 화등잔처럼 번들거린다

이산하; (무슨 놈의 눈빛이...) 오싹! 소름이 돋아 시선 피하고

진삼낭; [청풍이 말 대로 털어놔요 여보!] 무릎 꿇으며 이산하에게 애원하고. 이진진은 방 밖의 부엌에 서서 듣고 있고

진삼낭; [당신은 온순한 분이었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릇 밤 새 사람이 변한 것처럼 군 건가요?] 애원하고

이산하; [... 그게...] 시선 피하며 말을 못하고

청풍; [얼마나 잃었소?]

움찔! 하는 이산하

청풍; [집안의 돈을 몽땅 털어서 바친 것도 모자라 도박장에 빚까지 진 거요?]

이산하; [... 그러니까 그게...]

진삼낭; [말해 봐요 여보.] [나도 일해서 벌고 청풍이도 수입이 적지 않잖아요.] [얼만지 말씀만 하시면 어떻게든 갚아드릴게요.] 이산하를 달리는데

이산하; [... ...] 더듬

진삼낭; [오십 냥을 빚졌어요?] 놀라고

이진진; (오십 냥이면 오빠가 몇 달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질린 표정이 되고

청풍도 찡그릴 때

이산하; [오십 냥이 아니오.] 삭 죽어서 눈치 보며

이진진; (맙소사!) 경악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진삼낭; [... 당신!] 털썩! 기가 막혀 주저앉는 진삼낭

찡그리는 청풍

진삼낭; [오십 냥이 아니면... 오백... 오백냥을 빚졌단 말인가요?] 숨이 막혀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산하; [사기도박에 당한 거요.] 고개 들고 항변

이산하; [절대 질 수 없는 패가 떴는데 그놈들이 짜고 말도 안되는 패를 만들어서 날 물 먹인 거요.] 흥분해서 외치고

진삼낭;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악을 쓰고. 움찔! 입을 다무는 이산하

진삼낭; [아무리 도박에 미쳤어도 어떻게 오백냥이나 빚을 질 수가 있어요?] [오백냥은 청풍이와 내가 몇 년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거액인데...] 울며 이를 갈고

이산하; [... 면목이 없소.] 삭 죽는데

청풍; [뭘 담보로 걸었소?] 이산하를 노려보며

움찔! 하는 이산하

진삼낭; [... 담보라니...?] ! 하는 표정

청풍; [도박장을 운영하는 흑사회의 악귀들이 담보도 없이 오백 냥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진삼낭에게

진삼낭; [하지만 우리 집에 걸만한 담보 따위는 없는데...] + [!] 말하다가 깨닫고

반사적으로 이진진을 돌아보는 청풍과 진삼낭

[!]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전율하는 이진진

진삼낭; [정말이에요?] 와락! 두 손으로 이산하의 멱살을 부여잡고

진삼낭; [진진이를... 우리 딸 진진이를 담보로 돈을 빌린 거예요?] 이를 갈며 울고

이산하; [... 그래서 내가 당신 보고 팔찌를 내놓으라고 한 거요.] 뻔뻔하게 눈을 가재미 눈으로 만들며

이산하; [사흘... 사흘 안에 오백 냥을 갚아야 진진이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소.] [그리고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팔찌라면 오백 냥 이상 받고 팔 수 있을 거요.]

이산하; [그러니... 우리 딸을 위해서라도 팔찌를 주시오.]

진삼낭; [닥쳐요!] 이산하를 확 뿌리치고. 그러자

! 이산하의 몸이 몇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집 전체가 흔들리고

청풍; (연약하게만 보이던 어머니에게 저런 힘이...) 움찔 놀랄 때

털석! 바닥에 나뒹구는 이산하

진삼낭; [당신이란 인간... 어떻게... 어떻게 딸을 담보로 걸고 노름을 할 수 있어요?] 벌떡 일어나 삿대질하며 이를 갈고

진삼낭;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독 오른 고양이처럼 악을 쓰고

이산하; [미안하오. 면목이 없소.] 일어나려 애쓰며 비참하게

진삼낭;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요.] [진진이는 절대 못 내줘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돼요.] 악을 쓰며 울고

이진진도 문간에 주저앉아 울고. 그러다가

움찔! 하는 이진진. 청풍이 방을 나와 이진진의 옆을 지나간다

이진진; [... 오빠!] 겁에 질려 부르지만

청풍은 들은 척도 않고 문을 열고 나간다.

 

#12>

집 밖으로 나오는 청풍. 근처에서 엿듣던 마을 사람들 움찔하며 시선 피하고

굳은 표정으로 그 사람들을 무시하고 한쪽으로 가는 청풍. 건달들이 숨듯이 서있는 골목이다

[!] [!] 골목에 서 있던 건달들도 움찔! 하고. 청풍이 다가온다

딴청 부리는 건달들.

청풍; [어느 조직 식구들이오?] 멈춰서며 말하고

[이 새끼가...] [네까짓 게 우리가 어느 조직 소속인지 알아서 뭐하게?] 눈 희번득이며 청풍을 노려보지만

말없이 노려보는 청풍.

[우리 소속은 알 거 없고...] [우린 네놈 아비한테 볼일 있으니 넌 깝치지 마라.] + [!] 청풍을 협박하다가 움찔하는 두 놈

청풍의 주변이 어둑해지고 눈이 강렬해진다.

(!) (이게 무슨...) 겁에 질려 비틀 물러서는데

<백정 노릇을 해 와서 눈빛이 저런 건가?> <오금이 저려 마주 볼 수가 없다.> 시선 피하는 두 놈

청풍; [어느 조직인지 물었소.] 살벌

건달1; [... 우린 단지회다!] 한 놈이 겁에 질리면서도 용기를 내며 말하고. 손을 들어 보이면서

그자의 새끼손가락이 없는 손 크로즈 업

청풍; (단지회...) 그걸 보며 찡그리고

청풍; (금릉 흑사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이라던가? 조직에 들어가려면 손가락을 하나 잘라야한다는...) 찡그릴 때

건달1; [우리가 어디 소속인지 알았으면 잔머리 굴려도 소용없다는 거 알 거다.] 히죽

건달2; [금릉, 아니 강남(江南) 일대에 우리 단지회의 손이 뻗히지 않은 곳은 없다.] [그러니 행여 야반도주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야비하게 웃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청풍; [당신네 사두(蛇頭;두목)에게 가서 전하시오.] [반드시 오백 냥을 구해서 찾아갈 테니 차용증 준비해두라고...] 홱 돌아서고

이어서 빈민가 입구쪽으로 걸어가는 청풍.

건달1;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멀어지는 청풍을 보며 눈 부라리고. 안도하면서

건달1; [나도 성질 많이 죽었어.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에게 교훈을 내리지도 못하고...] 궁시렁. 이마의 식은땀 닦으며

건달2; [저년을 보면서 화 죽여.] 청풍의 집 쪽을 보며 히죽 웃고. 돌아보는 건달1

청풍의 집.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던 이진진이 건달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

! 급히 문을 닫는 이진진

건달2; [이진진이란 저 년, 행색이 초라해서 그렇지 지금까지 본적이 절세미녀야.] 히죽 거리며

건달2; [저 년만 잘 팔아넘기면 오백냥이 아니라 오천냥도 넘게 벌 수 있을 거야.]

건달1; [물론 그러려면 절름발이의 아들놈이 돈을 구해오지 못해야 하잖은가?]

건달2;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뱅이들이 오백 냥을 어디 가서 구해? 그것도 사흘 안에...?] 눈 흘기고

건달1; [그렇긴 한데...]

건달2; [두고 봐! 이진진이란 년은 결국 우리 단도회 차지가 될 테니...] 음험하게 웃고

 

#13>

도축장.

어느 건물. 백정들이 지나가면서 힐끔 거리고

[백냥 조금 안된다.] ! 돈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는 손을 배경으로

추노대; [우리도 매일 지출해야하는 돈이 있어서 이것 밖에는 여유가 안되는구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청풍과 마주 서서 말하고

추노대; [일단 이걸로 급한 불을 끄고 말미를 얻거라.] [며칠 내로 더 마련해보도록 할 테니...] 청풍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데

청풍; [괜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노대.] ! 돈주머니를 다시 추노대 앞으로 밀어주고

추노대; [청풍아!] 난색

청풍; [제가 어떻게 해결해보겠습니다. 그동안 온정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포권하며 고개 숙이고

추노대; (황금전장을 찾아갈 생각이로구나.) + [온정은 무슨... 다 나 좋다고 널 쓴 것뿐인데...] 체념하고

청풍; [자주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입구로 가며 말하고

추노대; [오냐!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구나.] 억지로 웃고

! 나가서 문을 닫는 청풍.

추노대; (불쌍한 놈...) 털석! 의자에 앉고

추노대; (아직 어린 나이인데 제 앞가림 뿐 아니라 노름쟁이 아비의 뒷치닥까지 해야 하다니...)

추노대; (아무쪼록 별일 없어야할 텐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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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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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1)

 

 

산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보이는 곳에 주점(酒店)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점 앞에 내 놓은 의자와 식탁에는 다섯 명의 손님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임청우는 길가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주인을 찾았다.

음식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건네 준 후에 다가왔다. 육십이 넘은 노인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이다.

임청우는 삶은 돼지고기와 만두, 그리고 술을 주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없이 눈이 옆 자리로 계속 돌아가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행과 함께 앉아있던 옆 자리 사람이 그런 임청우가 못마땅한지 음식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놓고 먹기 시작했다.

!

다행히 주인이 음식을 빨리 가져왔다.

?”

헌데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보았다. 식탁에 놓인 것은 그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한 그릇의 미음이었던 것이다.

급체에 걸려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네. 먼저 그것을 먹고 나면 주문한 것을 가져다주겠네.”

늙은 주인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을 굶은 후이니 기름진 음식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미음부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임청우는 주인의 성심에 감동하며 미음 그릇을 들고 한입에 마셔버렸다. 미음은 이미 식어있어서 먹기도 쉬었다.

한데 미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임청우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있던 다섯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차! 했다.

에워싼 사람들은 검을 멘 세 명의 중년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임청우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청우는 혈도가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이란 참으로 경우가 없구나. 낯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보기만 하면 뺏으려 드니...)

임청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연이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을 멘 중년인들 중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본인는 화산파(華山派)의 상승칠검(常勝七劒)중 오검(五劒) 척광태(擲光太)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내 사제로 육검(六劒) 마진산(馬晉山)과 칠검(七劒) 동호복(董毫福)이다.”

임청우는 농산을 내려와 소림사니 무당파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미음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상승삼검의 맞은편에 서있던 두 청년 중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만상보(萬商堡)의 진가형제(眞價兄弟). 소형제는 그 칼을 우리에게 팔 생각이 없는가?”

만상보는 무림인들 중에서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와, 상인들 중에서 야심이 큰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은 중원 천하에 발을 뻗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고팔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생명을 팔고 사는가 하면 무림의 온갖 기보(奇寶)와 신병이기(神兵異器), 무공비급(武功秘級)을 거래하기도 했다.

진가형제는 만상보의 수천 명 상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들로 실제에 있어서는 무림인들이 그들을 진가형제(眞假兄弟)라고 불렀다.

그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

상승오검 척광태가 검을 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진가형제!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이자는 마면혈도의 칼을 지니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형제가 가고 나면 혈도를 혼자서 차지하겠다는 것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소리친 자는 음식을 임청우가 보지 못하도록 돌려놓고 먹던 청년이었다.

진가형제중 형쪽인 그자는 임청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그 칼을 우리에게 팔기만 하면 자네의 목숨은 우리가 지켜주겠네.”

한데 그자는 손바닥이 뜨끔함을 느끼며 황급히 임청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던 무쌍층층공과 용조수가 합쳐진 공력, 즉 용조층층공이 은연중에 발동하여 그자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그 공력의 대단함은 감히 자기들 진가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자는 즉시 아우의 소매를 끌면서 은밀히 말했다.

가자, 이번 장사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하는 것 같다.”

“...?”

진가형제의 아우쪽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두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주점의 뒤로 돌아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척광태 등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가형제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눈앞의 소년에게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척광태는 아무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쩌면 혈도의 주인인 마면혈도가 주위에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척광태의 시력과 청력으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청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음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이 어떻게 마면혈도의 성명병기인 혈도를 가지고 있을까?)

척광태가 은근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임청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슷!

마치 안개가 이는 듯 하더니 임청우 곁에 서있는 동호복의 뒤에 황색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척광태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며 소리쳤다.

사제! 피해라!”

 

한 인간의 생명은 전우주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어느 누군가가 판결의 취지문에 써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우주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생명은 전혀 고귀할 것도 없는 다른 어떤 사실들 앞에 맥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 말은 너무 고매해서 사람에게서조차 멀리 떠올라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승칠검의 다섯 째 척광태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동호복은 외침을 듣는 순간에 움찔했지만 죽음의 손길로부터 피하지는 못했다.

미친 마귀의 눈빛을 한 그 황색 가사의 중()은 합장하듯이 손바닥을 모았고, 두 개의 동발(銅鉢)이 합쳐지듯 그 손바닥이 합쳐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던 동호복의 머리는 압착기에 눌린 계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척광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엔 불신과 공포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직후 척광태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

묘한 콧소리와 함께 척광태의 시체 뒤에 한 명의 노파(老婆)가 나타났다.

손에는 금방 사용되었을 법한 가는 천잠사를 감고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것 같은 노파다.

그렇지만 결코 곱게 늙지는 못했다.

세파가 스쳐가며 만든 주름살일랑은 차치하고라도 얼굴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근육들이 남아있는 것은 노파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긴장이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임청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상승칠검중 육검 마진산이 죽는 모습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엔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차르르륵!

문득 임청우의 눈앞에 한 폭의 족자(簇子)가 펼쳐졌다.

비단폭이 스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족자 뒤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거지가 서있다.

거지가 임청우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거지의 눈빛은 종이를 태울 만큼 강렬하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임청우는 단지 보았다고 했을 뿐인데...

으하하하!”

그 즉시 거지의 살벌한 눈빛이 가시면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킬킬킬!”

거의 동시라 할만큼 노파와 중도 덩달아서 웃었다.

삼인의 웃는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임청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공력이 뛰어난 고수들의 웃음소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뒤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 신체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노파가 웃음을 뚝 그치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있느냐?”

임청우도 즉시 되물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거지가 큰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늙은이가 이걸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분명히 여기서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분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임청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체에 걸릴까봐 미음부터 내주었던 주점 주인을 생각하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끈 치솟는 무엇이 있었다.

네놈이 감히 흥정하려는 건가?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

날카롭고도 높은 소리의 음성으로 노파가 말했다.

임청우는 이 순간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는 그가 숲속에서 불과 얼마 전에 본 황의소녀였다.

그리고, 높고 낮은 휘파람 소리의 주인들이 바로 이들 세 명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한데 이들이 왜 엉뚱하게 자기를 닦달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끊어놓기까지 하는가?

황의소녀를 쫓기만 한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닦달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그러해야할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아왔기에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선 미워하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청우의 속에서는 빙산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던 자들이 이젠 한갓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 중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소저를 이놈은 봤다고 하니 어쩌면 이놈과 소저는 아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면서 중을 쳐다보았다.

중이 근처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이 근처에 계신 줄 알고 있소이다.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소.”

중이 임청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반반하군.”

하지만 그 반반한 임청우의 목에는 어느 새 노파의 천잠사가 감겨져 있다. 살짝 힘주어 당기기만 하면 무처럼 성둥 베어지고 말 터이다.

임청우의 입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이 있으면...”

나지막하고 탁한 음성이지만 폭발할 듯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은 세 사람의 이목을 그에게 끌었다.

임청우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노파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슴이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는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릇됨을 용납하지 않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천지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것은 우협 장백승을 은연중에 닮아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걸승(妓乞僧), 즉 기녀 차림의 노파와 거지 중은 그제서야 임청우의 면목을 바로 대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몰골이지만 한 자루의 보검과 보도를 가지고 있다.

청강사자검(靑鋼獅子劒)!”

거지가 먼저 임청우의 검을 알아보고 경악하며 주춤 물러섰다.

! 휘익!

노파와 중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장 밖으로 피했다.

... 넌 우협 장백승과 어떤 관계냐?”

임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무엇이건 벨 것 같은 검기가 청강사자검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만 가자! 만리향(萬里香)으로 봐서 소저는 아직 종남산(終南山)을 벗어나진 않았다.”

노파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지며 거지와 중에게 말했다. 그 음성에서만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거지와 중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임청우는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책속에 매장 당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덜컹!

길가 주점의 좌측 숲에 있던 굵은 나무 한 그루의 껍질이 열리더니 황의소녀가 튀어나왔다.

슈우우웅!

소녀는 임청우의 곁을 스치면서 그를 나꿔채 숲으로 달려갔다.

임청우는 순간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꼼짝없이 소녀에게 끌려 허공을 날아갔다.

황의소녀가 날아가는 곳은 노파 일행이 간곳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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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색마와 비구니

 

 

() 늙은이는 물론이고 고검추의 행방도 묘연해졌습니다.”

삼십살객(三十殺客) 정팔(鄭八)은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녀곡에 초혼전을 남겼었던 그자는 사신각의 삼십살객중 한명이다.

사신각에서의 직급은 청부살인을 성공한 회수로 정해진다.

열 번 성공한 자는 십살객(十殺客), 백 번 성공한 자는 백살객(百殺客)으로 불리는 식이다.

백살객은 사신각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된다.

정팔이란 자가 삼십살객으로 불리는 것은 삼십 번 이상의 청부 살인을 완수했다는 의미다.

서른 살 남짓인 정팔은 근래 들어 사신각 내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객 중 한명이다.

대 늙은이는 몰라도 고가놈은 이미 기련산을 빠져나갔다고 봐야겠군.”

사신각주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신각주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기련산 동쪽 산록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다.

그자는 기련산에 나타난 대씨 성의 무시무시한 고수를 피해 기련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신각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팔을 비롯하여 몇몇 자객들로 하여금 팽가촌 일대를 감시하게 했었다.

하지만 고검추의 행방은 묘연해져 기련산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정팔 너는 기련산에 남아서 팽가촌을 감시해라. 고가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본각이 철수했다 여기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존명!”

사신각주의 지시에 정팔은 고개를 조아린 후에 자리를 떴다.

고검추! 네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는 네놈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신분이 있으니...”

사신각주는 잘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쏴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서 있었다.

토지묘는 농사를 관장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휴우... 지독하게 퍼붓는구나."

문득 토지묘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토지묘 내부는 오랫동안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으며 칠이 벗겨진 토지신의 신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그 토지묘 문간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영준한 용모에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소년이다.

고검추... 바로 그였다.

이곳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이다.

기련산을 떠난 고검추는 한 달여 만에 이곳 신개령에 이르렀다.

이제 열흘 정도만 더 가면 호천무맹이 자리한 복우산(伏牛山)에 이를 수 있다.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의 유언대로 호천무맹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늦여름의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토지묘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개령까지 오는 동안 고검추는 태을강기를 꾸준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 십성에는 이르지 못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고검추는 태을강기와 함께 은발마희 옥여상이 남긴 혈전삼식도 틈틈이 연마했다.

덕분에 제일식 분뢰개벽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철봉황은 어떤 여인일까? 어머니는 왜 그녀를 찾아가라 하셨을까?)

토지묘 문간에 기대앉은 고검추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고검추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휘익!

멀리에서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토지묘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굴까? 이런 산중에...)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벌떡 일어섰다.

양모 당혜선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사신각의 자객들이 초혼전에 묻어있던 백일취를 맡고 추격해온 게 아닐까?)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고검추는 토지묘로 접근하고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기련산을 내려온 후 고검추는 초혼전을 불에 태워 백일취를 제거했었다.

하지만 백일취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백일취가 실수로 몸에 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 사이에 나타난 자는 토지묘에서 십여 장 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고검추가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 서글프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쓴 웃음을 지으며 문가에서 물러난 고검추는 낡은 신단 뒤쪽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었다.

쐐액! 후두둑!

그 직후 선풍과 빗물을 흩뿌리며 한 명의 인물이 토지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단 뒤쪽의 빈 공간에 몸을 숨긴 고검추는 신단에 나있는 틈으로 그 인물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헌데 사내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비구니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구니는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명공이 빚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는데 파르라니 깎은 머리 때문에 애잔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회색 승복은 빗물에 흠씬 젖어있다.

그 때문에 비구니답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흐흐흐... 이쯤이면 그 드센 계집도 못 쫓아오겠지?"

사내는 토지묘 밖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자는 어떤 여자에게 쫓기는 중인 듯 했다.

털썩!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구니를 토지묘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젖은 승복에 감싸인 비구니의 탄력 넘치는 육체가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흐흐흐... 암중이라니... 오늘은 즐거움이 배가 되겠군."

!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구니의 몸매를 훑어보던 사내는 굽혔던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사내가 날린 지력이 가슴에 파고들자 비구니는 한 차례 몸을 퍼덕인 후 눈을 떴다.

"흐윽!"

눈을 뜬 직후 비구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의 징그러운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표정을 본 비구니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깨달고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渾穴)만 풀렸을 뿐 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시주는 감히 호천무맹에 죄를 지을 작정인가요?"

비구니는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사내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호천무맹! 저 스님이 호천무맹의 문하란 말인가?)

신단 뒤에 숨어 있던 고검추는 크게 놀랐다.

호천무맹은 자신의 생부인 철사자 고창룡의 사문 아닌가?

헌데 그 호천무맹 소속의 여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검추가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호천무맹의 이름 따위로 본좌를 겁주려 해도 소용없다 자운(紫雲)!"

사내는 비구니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호천무맹이 심혈을 기울여 기르고 있는 호천십영(護天十英)의 일인이니 도룡곡(屠龍谷)이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도룡곡!"

자운이라 불린 비구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비구니는 호천무맹이 장래를 위해 육성중인 열명의 신진고수들중 한명이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역사에 해박하여 도룡곡이란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도룡곡은 청해(靑海)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던 문파였다.

도룡곡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실전적이고 악랄하여 정파보다도 사파 취급을 받았다.

비록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에 자리한 문파였으나 도룡곡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이 주축을 이룬 중원 무림인들에게 공격당해 멸망했다.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는 변황 무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때문이었다.

당시의 중원 무림은 서역 무림을 일통한 강대한 세력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호천무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중원 무림은 천신만고 끝에 서역 무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직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고 멸문한 것이다.

도룡곡은 청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 무림의 세력에 가장 먼저 제압당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해왔었다.

그것이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였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도룡곡 식솔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룡곡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완전히 제명당했다.

그 후 도룡곡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헌데 도룡곡이란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 설마 시주는..."

비구니 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그렇다. 본좌가 바로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鄧天河)."

사내는 비구니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윽!”

자신을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라 소개한 그자의 손이 뺨에 닿자 비구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나는 마루 밑에 숨어서 부모형제들이 너희들 호천무맹의 인간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등천하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인 채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혈채를 반드시 천배 만배로 갚고 말겠다고...!"

"... 아미타불!"

안색이 밀납처럼 변한 자운 비구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크크크... 이제 본좌가 왜 너를 납치해 왔는지 짐작이 가겠지?"

등천하는 음소를 흘리며 젖은 승복에 감싸인 자운 비구니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선 네년에게 극락구경을 시켜준 후 발가벗겨서 낙양 성문에 매달아 두겠다. 호천무맹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인 네년의 알몸을 가능한 많은 인간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 그러고 보니 근래 일어났던 본맹 산하 문파들의 겁탈 사건이 모두 시주의 짓이었군요."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몇 년 전부터 호천무맹 소속 문파의 아녀자들이 겁탈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문파 장문인들의 처첩이나 여자 제자, 딸들이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만 해도 서른 개가 넘는 문파와 가문의 여자들이 몸을 더럽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용모파기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인의 소행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범인이 여자들을 유린한 수법이 대동소이한 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정체불명인 범인에게는 천면음마(千面淫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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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등장

 

 

안탕산 일대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무렵처럼 어둑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겁게 깔린 먹장구름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

문득 한 줄기 기화(旗火), 즉 불꽃 신호가 안탕산의 깊은 산중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기화가 쏘아진 곳은 물이 마른 계곡이다.

그곳에 제왕성의 철위사 다섯 명이 모여 있다.

철위사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인데 두 명은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살피고 있으며 두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철위사는 빈 금속통을 든 채 허공을 보고 있다.

방금 전에 기화를 쏘아올린 것은 바로 그자였다.

허공에서는 어느덧 불꽃이 흩어지고 있다.

기화를 쏘아 올린 게 너희들이냐?”

휘익!

외침과 함께 누군가 계곡으로 날아 내려 철위사들은 급히 돌아보았다.

여기서도 일이 벌어진 것이냐?”

계곡에 내려서는 인물은 바로 제왕성의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휘익! !

궁무독과 함께 두 명의 동위사들도 현장에 내려섰다.

총관님!”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궁무독을 본 철위사들은 비로소 안도한 표정이 되며 급히 포권을 했다.

형제들이 또 흉수에게 변을 당했습니다.”

철위사들이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며 철위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철위사가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데 사인은 가슴에 난 사발만한 구멍이 었다.

마검칠식!”

이번에도 마검칠식에 당했습니다.”

궁무독을 따라온 두 명의 동위사가 급히 시체로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동위사들이 시체의 사인을 살피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틀림없습니다 총관님! 이 형제들을 죽인 무공은 천마의 구대절기중 마검칠식입니다.”

안탕산에 접어든 이래 벌써 스물세 명이나 당했습니다. 마검칠식을 쓰는 놈들이 우리 제왕성의 안탕산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위사들의 사인을 확인한 동위사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이제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 참사의 원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요신군이나 그자의 수하들이 본성에 적대하는 건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정하지 마라. 진짜 범인이 소요신군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이는 짓일 수도 있으니...”

궁무독은 냉정한 어조로 철위사와 동위사들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소요신군의 아들놈도 마검칠식을 구사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동위사 중 한명이 오만상을 쓰며 이의를 제기했다.

누명을 썼든 어쨌든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의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건 분명...”

불만을 토로하던 그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궁무독이 한손을 들어 자신의 말을 막으며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무독이 보고 있는 쪽에는 철쭉이나 찔레같은 키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데 거리는 십장 남짓이었다.

(총관님이 왜 저러시지?)

(저곳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철위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목 숲을 보았다.

찌릿! 찌릿!

하지만 동위사들은 몸을 마비시키는 것같은 살기를 느끼고 숨을 멈췄다.

! 스릉!

동위사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

그때 궁무독은 오른발을 관목 숲 쪽으로 내딛으며 오른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 스릉!

궁무독은 내민 오른발로 세차게 발을 구르며 발검을 했다.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흔한 검기조차 궁무독의 검에서는 내뻗치지 않았다.

스악!

궁무독은 발검한 검으로 앞쪽을 수평으로 그어내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검기도 내뻗치지 않는 궁무독의 이 일초는 무공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허세를 부리는 칼부림처럼 느껴졌다.

(뭘 하신 거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철위사들은 발검 했던 검을 거둬들인 궁무독이 다시 두 발을 모으며 서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서걱!

관목 숲이 일제히 같은 높이에서 잘려 나갔다.

좌우로 이장(二丈;6미터), 앞뒤로 일장(一丈)쯤인 반달형으로 관목 숲이 매끈하게 잘린 것이다.

!”

!”

동위사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철위사들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철위사들은 자신들의 외총관인 궁무독이 무공을 쓰는 것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퍼억! 푸스스!

그때 똑같은 높이로 갈라진 관목들의 잘려진 부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 가공!)

(족히 십장은 되는 거리를 두고 관목 숲을 무형의 검기로 베어버렸다.)

(과연 우리 제왕성의 총관다운 솜씨다.)

철위사들은 감탄과 흠모의 표정으로 궁무독을 보았다.

독검마유 궁무독은 몇 대째 제왕성을 섬겨온 충신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무독이 가문과 출신을 배경으로 제왕성의 총관이 되었다 여겨왔다.

하지만 사실 궁무독은 은위사나 금위사들에 못지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방금 전 소리없이 관목 숲을 베어버린 일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러나 검을 거둔 궁무독의 이마는 심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동위사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들 저러시지?)

(총관님 뿐 아니라 동위사들도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잖은가?)

철위사들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놀랍군. 마교의 몰영만안대법(沒影瞞眼大法)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가 당대에 존재할 줄이야.”

궁무독이 앞쪽을 노려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몰영만안대법!)

(그건 빛을 반사하거나 흘려보내서 상대방의 눈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교의 은신술 아닌가?)

(저곳에 누가 있단 말인가?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철위사들은 관목 숲이 반달형으로 갈라진 곳을 보며 놀라워했다.

 

<흐흐흐! 역시 만만치 않아!>

 

그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내의 음성인데 어디서 들리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독검마유 궁무독! 당신이 제왕성에서 총관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단지 운이 좋았거나 출신 배경 덕분이 아니라는 걸 방금 전의 일격으로 알게 되었다.>

 

츠으! 지이!

말소리와 함께 반달형으로 잘려나간 관목 숲 뒤쪽의 허공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같은 그 현상은 곧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 저기에 사람이 있다.”

무언가 움직인다.”

! 차창!

철위사들도 비로소 알아차리고 다급히 무기를 뽑아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다!>

 

!

음산한 외침과 함께 섬뜩한 섬광이 철위사 한명에게 날아들었다

!”

표적이 된 철위사는 다급히 칼을 들어 그 섬광을 막으려 했다.

콰창!

하지만 날아든 섬광에 닿는 순간 철위사의 칼은 유리처럼 깨졌다.

그 섬광은 마검칠식으로 발휘된 검기였던 것이다.

가강!

일거에 검을 깨트린 섬광은 철위사의 가슴으로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죽었다!)

철위사는 자기 가슴으로 파고 드는 차가운 섬광을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불쑥 내밀어진 누군가의 검이 철위사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섬광을 쳐냈다.

그 검의 주인은 물론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 감사합니다 총관님!”

스팟!

구사일생한 철위사는 뒤로 휙 날아 피하며 외쳤다.

스악!

철위사를 구한 궁무독은 몸을 홱 돌리며 허공에 대고 다시 검을 그었다.

이번에도 검에서 검기가 내뻗치는 흔적은 없었다.

 

<멸적살검(滅跡殺劍)!>

 

!

하지만 누군가의 긴장한 외침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두둑!

뒤이어 허공에서 피가 한줄기 확 뿌려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떤 자가 궁무독이 발휘한 기척 없는 검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베었다!”

그렇지!”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안도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휘청!

허공에서 사람의 흐릿한 형상이 휘청하고 있는데 그 형상의 어깨 쪽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다.

스악! !

철위사들이 환호할 때 동위사들은 이미 소리없이 쇄도하여 그 사람 형상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빠르고 격렬한 공격이다.

카캉! !

그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과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을 일으켰다.

파캉! !

하지만 그 직후 동위사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혀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역시 마검칠식에 당한 것이다.

“...!”

“...!”

스팟! 휘익!

무기가 부러진 동위사들은 벼락같이 뒤로 물러섰다.

스악!

물러서는 동위사들 뒤에서 궁무독이 다시 소리없이 검을 그어냈다.

다만 이번에는 수평으로 긋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그었는데 역시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크!>

 

!

아지랑이 같은 사람의 형상이 피를 허공에 뿌리면서 차가운 섬광을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그어 올렸다.

빠캉! 카앙!

궁무독이 발휘한 보이지 않는 검기가 그 섬광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검을 거둬들였다.

그만 합시다 궁총관! 오늘은 내가 진 것으로 할 테니...”

츠츠츠!

그 직후 젊은 사내의 음성과 함께 궁무독의 오장쯤 앞쪽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일신에 은박처럼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도 은박 재질에 눈 부위에만 구멍이 나있는 자루 모양의 복면을 쓰고 있다.

양손에는 같은 재질의 장갑을 끼었으며 발에 신은 신발도 같은 은박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자의 일신을 뒤덮고 있는 그 은박 재질의 천이 사람 눈에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 듯 했다.

무림에 나온 이래 본좌의 몸에 상처를 낸 건 궁총관이 처음이었소.”

말하는 복면인의 오른쪽 어깨에는 제법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궁무독이 두 번째로 그어낸 무형의 검기에 베어진 것이다.

마교의 인간이냐?”

철컥!

궁무독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렇소이다. 본좌는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막내인 검마(劍魔) 비무강(非无姜)이라고 하외다.”

복면인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마교!)

(구대마왕은 대대로 마교가 세상에 내보내는 최강의 고수들 호칭 아닌가?)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저자가 구대마왕의 일인이었구나.)

철위사들과 동위사들은 아연긴장하며 복면인, 검마를 노려보았다.

마교가 소요신군 강조를 비호하는 이유를 들어볼까?”

검마 비무강에게 걸어서 다가가는 궁무독의 두 눈이 차갑게 갈아 앉았다.

유감이지만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이다. 궁총관과 더 교분을 나누고 싶어도 혹시 정들까봐 겁이 나니...”

스스스!

검마 비무강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마음대로 오고가지는 못한다.”

! !

거의 동시에 궁무독은 칼집에 꽂았던 검을 다시 발검하여 허공을 종횡으로 긋고 갈랐다.

콰쾅! 투쾅!

그러자 검마가 서있던 곳 뒤쪽에서 두 번의 폭발이 일어난다. 궁무독이 발휘한 무형의 검기가 그 부분의 바닥을 박살낸 것이다.

 

<첫인사 치고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소이다. 기억해두리다. 흐흐흐!>

 

하지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마 비무강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놓쳤구나.)

동위사와 철위사들은 상황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말없이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 진 피 빚은 가급적 빨리 갚아드릴 테니 기대하시구려. 흐흐흐!>

 

검마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죽일 놈!”

서라!”

! 휘익!

분노한 동위사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쫓지 마라.”

궁무독이 그런 그들을 저지했다.

총관님!”

하지만 저놈 손에 스무명이 넘는 형제들이 당했는데...”

! 휘익!

동위사들은 분개하면서도 궁무독의 명령에 따라 도로 날아내렸다.

저자가 정말 구대마왕중 한명이라면 섣불리 상대해선 안된다.”

궁무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연락해서 반드시 네 명 이상이 조를 짜서 움직이라고 전하라. 일단 놈과 조우하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찾아내도록 시도하라 전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 !

동위사들은 복창한 후 왔던 길로 도로 날아갔다.

(마교의 최고 고수들인 구대마왕중 한 놈이 안탕산에 진을 치고 있다 이거지?)

날아가는 동위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두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요신군 강조! 점점 더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궁무독의 얼굴에는 어느덧 서릿발같은 살의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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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단지맹정(斷指盟情),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강미루는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녹지 옆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을 헤치고 흙을 조금 파내자 접혀진 남색 옷자락이 보였다.

강미루는 잘 접은 남색 옷을 두 손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백남빈의 머리 옆에 놓았다.

세상 모든 일이 바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남빈의 가슴과 코에 손을 대보니 형부의 말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가람이 보고 있음에 불구하고 백남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가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광평검법은 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형의 기운인 광평기(廣平氣)를 뿜어내어 상대방을 팔방(八方)에서 압박한다.

그런 후에야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상대방을 검으로 쓸어 베는 것이다.

일검을 교환할 때 신가람의 광평기는 팔방에서 백남빈을 압박하여 들어갔었다.

그러나 백남빈이 펼쳐낸 미녀각기검에는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자검결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가람의 광평기는 사자검으로 펼친 백남빈의 미녀각기검법에 휘말려 방향을 바뀌었고 검의 진로도 틀어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백남빈의 검에서 예리한 검기가 긴 나선형을 이루며 폭출되어 나왔다.

미녀각기검의 나선형 검기는 날아드는 동안 수없이 궤적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디로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같아서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백전노장답게 신가람은 순간적으로 둔형보(遁形步)를 펼쳐 땅에 스치듯이 하여 백남빈의 뒤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매자락은 백남빈의 나선형 검기에 베어져 허공으로 날렸다.

동시에 신가람이 둔형보를 펼치며 다시 내뿜은 광평기에 백남빈은 심맥을 다쳤던 것이다.

신가람이 수 십 종의 검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백남빈의 미녀각기검을 깨뜨릴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백남빈에게 패할 리야 없겠지만 일초에 그를 제압한 것은 다분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젊은 무사의 검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말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신가람의 눈에 강미루가 백남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들어왔다.

마음에서 살기가 꿈틀거렸으나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인물!"

강미루는 형부가 안타까워하며 백남빈을 높이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백남빈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서며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 형부는 영웅이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가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하여 강미루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부탁만은 꼭 들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는 강미루의 고집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치 강하다.

죽겠다고 결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신가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들어는 보자구나."

"이곳에는 설청묘라는 야생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늘 갖고 싶었지만 우리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답니다. 형부가 그 고양이를 잡아 주기만 하면 두말 않고 따라 가겠어요."

신가람은 창평곡을 쭉 훑어보았다.

잘해야 만평 남짓인 곳에 숨어 있을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이 귀여운 말괄량이 처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우리가 전에 있었다는 보금자리를 찾아가 보았으나 옮겨 버렸는지 눈에 뛰지 않았어요. 형부는 능력이 신선과 같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새인가 강미루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설청묘는 찾기가 어렵다. 잡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형부가 잡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올 리 없다. 그러면 저 사람은 그 사이에 정신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든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야 저 사람의 모습이 영영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눈물이 어리는 강미루였다.

신가람이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전에 있었다던 야생 고양이의 보금자리는 어디냐?"

미루는 북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 뒤에 있는 절벽 틈이었어요."

신가람은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숲으로 날아들어 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시위(示威)인 듯 했다.

 

신가람이 숲으로 떠나자 강미루는 즉시 백남빈을 품에 안았다.

사랑하는 임은 심하게 다쳐서 기절해 있는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스스로의 무능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녹지의 물을 생각해 냈다.

녹지로 달려가서 신발로 가득 물을 떠왔다.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자 물은 금방 우유빛으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물을 백남빈의 입을 벌리고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팔다리를 주물러 주자 백남빈이 마침내 눈을 떴다.

"당신, 아직 가지 않았군!"

강미루를 본 백남빈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열흘 전 백남빈이 한 청혼에 대한 답이 이제야 나왔다.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듯 했다.

"그 사람은?"

백남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강미루는 힘없이 북쪽 숲을 가리켰다.

"설청묘를 잡아달라고 했어요. 아마도 금방 잡아 오겠죠."

"미루, 우리 영원토록 잊지 맙시다."

백남빈은 격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제 가슴에 당신이 준 흔적이 남았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강미루는 가슴을 누르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백남빈은 그녀의 그 말에 죽음보다도 더 깊은 맹세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대의 형부를 따라 가시오. 언제고 반드시 대려장으로 찾아가서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하늘과 땅을 두고 피로서 맹세하오."

백남빈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사자검을 들어 강미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 첫마디를 잘라버렸다.

!”

순간 피가 튀고 강미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손을 마주 쥔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진심과 맹세가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신가람이었다.

그는 벌써 양손에 한 마리씩의 눈같이 흰 설청묘를 잡아 쥐고 기척도 없이 돌아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피로 물든 손을 놓고 일어섰다.

"소녀 강미루는 영원토록 당신만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신가람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보름 남짓 함께 지내면서 처제와 저 철령보의 청년무사 사이에서는 깊은 정이 생기고 말았다.

처제의 신세가 벌써부터 평탄하지는 않아보였다.

저 청년무사를 잊게 하는 방도는 가능한 빨리 멋진 사내를 찾아서 처제와 맺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진 밖에는 본장의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너를 찾아서 보름이 넘도록 돌아다니는 바람에 차질이 적지 않았다."

돌아서는 강미루의 손을 잡으며 백남빈이 품에서 하얀 옥패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강미루의 손에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표(情表)였다.

하지만 강미루는 살래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옥돌보다는 당신의 잘려진 손가락을 갖고 싶답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남빈의 피 묻은 손가락 한마디를 손수건에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남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우리가 떠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도록 해라."

신가람이 백남빈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백남빈은 그에게 악의를 품을 수 없었다. 신가람은 적인 자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법도를 갖고 대한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신가람은 그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많이 닮았어."

백남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알 수 없어 설핏 미소만 지었다.

강미루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골짜기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털어 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헤아리고 있던 백남빈이었다.

"삐이익!"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히히힝! 두두두!

흑왕이 옛 주인의 부름을 받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은 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서 흑왕의 등에 앉았다.

신가람 앞쪽에 앉혀진 강미루가 비명처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색상의(藍色上衣)! 남색상의를 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강미루의 말이 끝날 쯤 흑왕은 이미 동쪽 절벽까지 달려가있었다.

몇 번 흑왕의 모습이 바위들 틈에서 보였는데 다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미루는 신가람에게 이끌려 창평곡을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강미루가 떠나버린 창평곡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백남빈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가 떠나며 부르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꿈결인양 아스라히 맴돌고 있었다.

백남빈은 일어서서 동부를 향해 비칠비칠 걸어갔다.

잘려진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검의 전인이 된 후로 난 벌써 사랑하는 여인을 멀리 보내고 말았구나. 이것이 정말 사자검을 익힌 때문일까?)

정사초 사조의 한탄어린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자검의 전인의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도 나와 같이 사자검결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도 같은 신세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말 것이다!

 

백남빈은 조사동에 들어가서 여러 사조 앞에서 한바탕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 졌다.

감정이 풀어져 버린 듯, 어느새 낙천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가 되자면 마음을 다스리는데 백남빈해져야 한다.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툴툴 털어버리고 오직 호쾌한 마음으로 사자검을 휘둘렀다.

신가람과 대적하면서 백남빈의 검술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외고 있는 사자검결이야말로 절학 중의 절학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힘껏 뻗어도 그의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검기만이 폭출되어 미녀각기검의 방향을 따라 그물처럼 뻗어나갈 뿐이었다.

신가람과 대적할 때 미녀각기검이 광평기를 되돌려 놓지 못했더라면 백남빈 자신은 신가람의 검이 이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미녀각기검법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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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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