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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들보 위의 비급(秘笈)

 

 

고불선사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한쪽으로 밀어두었고 책과 종이들은 반대쪽에 쌓아서 탁자의 가운데를 비게 만들었다.

덜컹!

문득 고불암의 문이 열리면서 귀면지존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하지만 고불선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탁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귀면지존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노납이 교주라 해도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고불선사는 정리한 물건들 중 몇 장의 종이를 탁자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하물며 이토록 중요한 탁본(拓本)이 유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고불선사가 귀면지존 쪽으로 미는 종이들 위에는 무언가에 먹물을 묻혔다가 찍은 탁본이 새겨져 있다.

주먹을 쥔 사람 팔뚝에 종이를 대어 탁본을 뜬 형태인데 생생한 핏줄과 함께 수많은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범어, 즉 고대 천축의 문자였다.

본좌가 선사에게 맡겼던 그 탁본의 정체를 알아낸 거요?”

귀면지존은 탁자 앞에 멈춰서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비록 파계(破戒)하긴 했지만 노납도 소림사의 제자요. 아무렴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남기신 유물의 탁본을 못 알아보겠소?”

고불선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맞소! 역시 선사는 학식과 혜안으로는 소림제일이시오.”

귀면지존은 탁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스슥!

그러자 탁본을 뜬 종이들이 귀면지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귀면지존은 그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며 확인했다.

유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 모습을 보며 고불선사가 말했다.

무궁무진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달마묵장의 탁본을 세상에 내보내서 풍파를 일으킬만한 배짱이 노납에게는 없으니 말이오.”

선사께서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 말씀은 믿어드리겠소. 하지만...”

화르르!

귀면지존 손이 달아오르면서 탁본을 뜬 종이들이 단번에 불타올랐다.

만에 하나 달마묵장에서 비롯된 무공을 쓰는 자가 발견된다면... 선사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여자로서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귀면지존은 삼매진화로 탁본을 재로 만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불선사는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교주의 암계(暗計)에 빠져 파계를 한 그날 이후로 노납에게 사바세계는 온전히 고해(苦海)일 뿐이었소. 어서 노납을 이 끔찍한 업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구려.”

눈을 감은 고불선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좌를 위해 큰 공을 세워주신 선사의 부탁이니 들어드리리다.”

귀면지존은 탁본을 태운 재를 털어낸 오른손으로 고불선사를 겨누었다.

지징!

그자의 오른손이 진동을 일으키며 달아올랐다.

(시주...)

귀면지존의 손바닥이 진동함에 따라 몸을 떨며 고불선사는 강유를 떠올렸다.

(부디 세존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겠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불선사의 의식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태실봉 일대도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유는 고불암이 자리한 태실봉 동쪽의 절벽 위에 서있었다.

태실봉을 내려갔던 강유는 숲이 울창하여 남의 눈에 띠지 않을만한 곳에서 방향을 돌려 고불암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이각(二刻;30)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강유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각이면 내 걸음으로 오십 리는 충분히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니 고불암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지.)

휘익!

생각을 마친 강유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은 거의 수직인 데다가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하고 높은 절벽이다.

하지만 경신술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요신군의 아들 강유에게 이 정도 절벽을 내려가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 타탁!

강유는 마치 산양처럼 절벽을 이리저리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백여 장쯤 내려가자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세워진 고불암 지붕이 보였다.

휘릭!

강유는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불암 앞의 마당으로 내려섰다.

강유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살펴보니 고불암의 문은 닫혀있다.

스님! 소생 돌아왔습니다.”

강유는 작게 말하며 고불암의 닫혀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강유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얼굴이 굳어졌다.

(피비린내!)

그렇다.

흐릿하지만 고불암의 문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

덜컹!

급히 문을 열고 고불암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불암 내부는 강유가 떠날 때와 딱히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암자 중앙에 놓인 탁자 건너편에 고불선사가 누워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있는 고불선사의 입과 코, 양쪽 귀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주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스님!”

강유는 급히 고불선사 옆으로 다가가가 목 주변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진맥하는 강유의 손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적(入寂)하셨다.)

고불선사를 진맥해본 강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사인(死因)은 심장과 혈맥의 급작스런 파열... 내공을 잘못 운용하여 혈기(血氣)가 폭주한 듯한 모습이다.)

소요신군은 다 방면에 박식하여 강유에게 의술도 상당히 깊이 가르쳤다.

덕분에 강유는 어지간한 의원 못지않은 의술 지식을 갖고 있다.

(사인만 보면 전형적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인데...)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아는 범주 안에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불선사는 자연사 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유는 고불선사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불선사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강유는 고불선사가 탁자에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틀림없다. 스님은 어떤 자에게 살해당하셨다.)

강유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한 마공에 당해 심장과 혈맥이 터져버린 것이다. 내게 오십 리 쯤 갔다가 돌아오라 하신 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흉수가 나도 해코지 할까 우려하신 때문이었고...)

분노하던 강유는 고불선사가 말없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휘익!

급히 일어난 강유는 대들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대들보 근처까지 뛰어오른 강유의 눈에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 않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책이다.

(!)

!

강유는 놀라면서도 재빨리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 후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다.

강유가 대들보에서 발견한 그 책에는 <古佛懺悔記>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불참회기(古佛懺悔記)... 고불선사께서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를 적어놓은 수기(手記)겠구나.)

강유는 책의 내용이 궁금하여 펼쳐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

강유의 귀에 바람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파공성(破空聲)이다!)

강유는 급히 문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고불암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강유는 책을 품속에 넣으면서 암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강유의 눈에 암자 입구 맞은편인 뒤쪽 벽에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게 보였다.

(자칫 고불선사님을 시해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서둘러 쪽문으로 가려고 고불선사의 시신 옆을 지나던 강유는 발길을 멈추었다.

고불선사의 허리 아래에 깔려 있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스님의 원수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 챙겨가자.)

강유가 몸을 숙여 노리개를 집어들 때였다.

휘익! !

옷자락 날리는 소리들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강유는 급히 입구 반대쪽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유가 빠져나온 쪽문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휘익

하지만 강유는 바람처럼 절벽의 측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비스듬히 달린 강유의 앞쪽에 앞쪽으로 조금 돌출 된 모서리가 나타났다.

강유는 그 모서리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며 고불암을 내려다보았다.

휘익! !

그 직후 고불암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서 네 명의 인물이 날 듯이 달려 올라왔다.

네 명 모두 중인데 나이 든 초로의 승려 한 명과 젊은 승려 세 명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왔다.)

강유는 승려들의 복장으로 그들이 고불선사와 동문임을 알아보았다.

!”

... 이런...!”

고불암 앞의 마당에 올라서던 승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불암의 문이 열려있어서 고불선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님!”

급히 고불암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불선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아미타불!”

사숙조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곧 고불암 안에서 승려들의 불호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스님.)

승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는 노리개를 손에 든 채 합장했다.

(스님을 시해한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죄값을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휘익!

강유는 맹세를 하며 절벽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은 이내 고불암에서 사라졌다.

 

* * *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께서는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히셨다.>

<삼 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조사를 만났다.>

<헌데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계셨던 달마조사께서는 낡은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승려들의 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조사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불선사께서는 어찌 하여 당신의 삶을 참회하기 위해 적은 수기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하신 것일까?)

태실봉을 내려온 강유는 숭산 아래 등봉현(登封縣)에 자리한 객잔에 투숙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객실로 돌아온 강유는 서둘러 고불참회기를 꺼내 읽었다.

헌데 강유의 예상과 달리 고불참회기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고 어떻게 살다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고불선사가 남긴 고불참회기의 앞부분에는 바로 그 달마대사의 고사가 적혀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강유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고불참회기에는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비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가죽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팔 한쪽도 가죽신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형태의 그 팔뚝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지만 무엇으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용광로의 쇳물에 넣었다 꺼내도 멀쩡했다.

황제는 달마가 남긴 그 단단한 검은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숨기고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때문에 세상에는 달마의 관에 오직 가죽신 한 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의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세상에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絶代無敵)이 된다는 소문도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묵장... 달마묵장...)

강유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강유는 달마묵장이라는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묵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강유는 자신과 달마묵장이 운명적으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강유가 느꼈던 기이한 감상은 이어진 고불참회기의 내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납 고불은 불제자로서 결코 지으면 안되는 죄를 범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녀자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까지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달마묵장의 고사에 이어 그같은 고백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고불선사께서 금색계(禁色戒)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두었다니...)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와 함께 강유는 고불암에서 자신이 노리개를 건네주었을 때 보였던 고불선사의 심상치 않았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 노리개...)

강유는 고불암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건 고불선사가 범했던 여인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노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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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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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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