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2)

 

 

임청우는 윗부분이 반쯤 날아가 버린 불심연화로 속에 고동의 알맹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수평혈도참에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갈 뻔 했다.

생각하면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척포도 크게 놀랐는지 다시 호리병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는다.

(칼이 수천 근도 넘을 구리 향로를 소리 없이 베어버리다니... 척포 이놈은 저 무시무시한 칼날아래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혈도의 가공할 위력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둘러 붉은 빛줄기를 철선동시에게 퍼붓는 것이 보였다.

우우웅!

마치 붉은 피의 파도가 몰려가는 듯하다.

마면혈도의 끔찍스런 용모와 함께 어우러진 그 광경은 마치 무서운 그림책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정말 사부님이 이기지 못한다고 할 만하구나. 세상에 저보다 더 무서운 무공이 있을 수 있을까?)

마면혈도의 도법을 본 임청우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견문이 짧은 임청우로써는 처음 보는 가공한 장면이었다.

카카캉!

하지만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괴이한 강기의 막을 형성하여 혈도의 도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화악! 파지직!

두 가지 힘이 부딪히며 예리한 경풍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삭!

마면혈도의 발에 밟힌 아미타여래의 머리가 과자부스러기처럼 가루가 되어버렸다.

“끼요오오!”

마면혈도는 괴성을 지르며 더욱 세차게 혈도를 휘둘렀다.

“몽선도를 내놔라!”

철선동시 역시 혈도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며 갈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카카캉!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마면혈도의 혈도를 튕겨내었다.

촤라락!

뒤이어 그자의 빙혼철선이 접혔다가 확 펴지면서 마치 칼처럼 마면혈도의 목을 베어갔다.

마면혈도는 혈도의 끝부분으로는 용조수의 강기를 막고, 손잡이 부분으로는 빙혼철선을 가로막았다.

치이익! 빠카카캉!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 불똥이 튀었다.

휘익!

철선동시는 껑충껑충 뛰면서 바람처럼 재빠르게 물러섰다. 그의 모습은 이야기로나 듣던 강시와 다름이 없다.

두 괴물의 움직임은 귀신이 놀랄 정도로 빨랐다.

마면혈도의 혈도에서 뿌려지는 붉은 빛과 함께 용조수를 펼치는 철선동시의 손톱에서도 푸른빛이 귀화처럼 튀어나와 사방으로 치달린다.

철선동시의 그 기다란 손톱에는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강시가 말대가리에게 이기겠구나.)

임청우는 코 윗부분만 빼꼼히 불심연화로 밖으로 내민 채 구경하며 생각했다.

(발목이 잘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빼앗으려는 걸 보면 몽선도라는 게 정말 중요한 물건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 철선동시는 농산에서도 몽선도를 탐내는 듯한 말을 했었다.

그 사이에도 참혹한 싸움은 이어졌다.

철선동시의 발목은 지혈을 하지 않아서 피가 줄줄 흘러 대안탑 칠층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깨의 살이 움푹 뜯겨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난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용조수와 빙혼철선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의 생각처럼 두 괴물 간의 우열은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가 내뿜는 혈광은 점점 위축되는 반면 철선동시의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은 접혔다 펼쳐졌다를 마음대로 하면서 마면혈도의 요혈을 노리고, 용조수는 가공할 기세로 상대를 핍박한다.

카카캉!

마면혈도는 철선동시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진짜 강시인 듯 껑충껑충 뛰는 철선동시의 경신술은 기이하면서도 빠르다.

마면혈도는 지금까지는 거의 위치를 옮기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철선동시의 공격을 감당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둑! 콰직!

마면혈도가 한걸음씩 물러날 때마다 그자의 발이 대리석 바닥으로 푹푹 파고들었다.

(얼어 죽은 놈이 무공을 속이고 있었구나. 대체 어디서 소림사의 용조수를 배운 것일까?)

마면혈도의 흉측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쫘악!

마면혈도가 생각하면서 생긴 실날같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철선동시의 용조수가 그자의 왼쪽 소매 자락을 뜯어놓았다.

손톱에 직접 닿지도 않은 팔목이 화끈거린다. 용조수의 경풍에 스친 것이다.

팔을 뒤로 물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마면혈도의 팔은 팔꿈치에서부터 뜯겨 나갔을 것이다.

(위험했다.)

마면혈도의 등골로 식은땀이 쫙 흘렀다.

반면 얼어 죽은 시체처럼 창백한 철선동시의 얼굴에는 득의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촤라라랑!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머리를 노렸다가 빙글 돌며 아랫배를 찌르고 들어갔다.

촤악!

동시에 용조수는 마면혈도의 혈도 중간쯤을 비스듬히 가격하고 있었다.

(승부가 났다!)

임청우는 내심 소리쳤다.

마면혈도에게는 뒤로 물러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거나 피할 방법 역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면혈도는 과연 삼괴 중의 일인다웠다.

스악!

마면혈도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빙혼철선을 스쳐 보내며 혈도의 손잡이로 철선동시의 팔꿈치를 가격했다.

철선동시는 팔이 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손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면혈도는 아슬아슬하게 철선동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크카카캇!”

화악!

회심의 일격에 실패한 철선동시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팟! 쏴아!

마면혈도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뒤로 날아갔던 철선동시는 벽을 차고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다.

철선동시는 날아들면서 손을 어지럽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샤샤샥!

순간 철선동시의 손에서 수십 수백의 손 그림자가 생겨났다.

새로 생긴 그림자가 먼저 생긴 그림자를 밀면서 노도같이 마면혈도를 향해 밀려갔다.

드드드!

그 가공할 위세에 반만 남은 불심연화로마저 진동했다.

무릇, 강호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진실한 절기 하나 둘쯤은 결코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기 마련이다.

마면혈도도 이같은 생사의 존망에 처하자 숨기고 있던 비전의 수법을 펼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휘익!

갑자기 마면혈도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꺾이며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무슨 짓을...)

철선동시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번쩍!

직후 그자의 발 앞에서 붉은 빛이 벼락같이 솟구쳤다.

“헉!”

철선동시는 기겁을 하면서 빙혼철선을 아래로 휘둘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크악!”

쩍!

철선동시의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이 동시에 베어져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후두두둑!

피 보라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마면혈도는 자벌레처럼 몸을 뒤로 꺾어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며 혈도를 베어 올렸던 것이다.

바로 혈왕도법 중의 최후 절초인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휘익!

반격에 성공한 마면혈도는 한 바퀴 굴러 자세를 바로 했다.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린 철선동시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것이 그자의 눈에 들어왔다.

화악!

마면혈도는 내친김에 철선동시의 목을 벨 심산으로 철선동시를 덮쳐갔다.

퍽!

하지만 그 직후 접혀진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철선동시는 쓰러지면서 빙혼철선을 던졌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에 흥분한 마면혈도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철선동시에게 덮쳐갔었다.

날아드는 빙혼철선에 자진해서 몸을 들이민 격이 된 것이다.

퍼억!

가슴에 빙혼철선이 박힌 마면혈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엎어졌다.

쿠당탕!

균형을 잃은 철선동시의 몸이 불심연화로에 부딪혔다가 아무렇게나 처박힌 것과 거의 동시였다.

 

후두둑!

임청우는 흠뻑 피를 뒤집어썼다. 철선동시의 팔 다리가 잘려지며 뿜어진 피가 가까이에 있던 불신연화로에 흩뿌려진 것이다.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엉뚱하게도 대안탑 안에서 피비를 맞았다.

드드드!

끈적거리는 불쾌감에 이어 불심연화로가 넘어갈 듯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철선동시의 몸뚱이가 부딪힌 때문이다.

(어이쿠! 이러다간 들키고 말겠다.)

임청우는 요동치는 불심연화로를 바로 하려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퍼억!

그 직후 등덜미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그 바람에 철선동시의 몸이 부딪혀 흔들리던 불심연화로가 기우뚱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콰당탕!

임청우는 밖으로 굴러 나와 약사여래불 앞에 모질게 엎어졌다.

휘익!

엎어지는 임청우의 손에서 벗어난 호리병이 천장의 틈을 통해 대안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으으으...”

등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손발이 떨려온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왼팔이 높이 날아올랐다가 임청우의 등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시퍼런 손톱은 떨어지는 기세로 임청우의 등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임청우는 전신의 맥이 빠지며 학질에 걸린 듯이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온몸으로 확 퍼져가는 끔찍한 냉기에 비하면 등줄기의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으으으...”

임청우는 이빨을 달달 마주치며 무작정 앞으로 기어갔다.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몸속에 깃들어있는 북두칠성의 힘을 깨우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두 마두에게서 멀어져야만 한다.

그때 마면혈도가 엎어졌던 몸을 겨우 뒤집으며 거친 음성을 천천히 내뱉었다.

“크크큭! 숨어있던 쥐새끼가 벼락을 맞았군. 저 강시 놈의 빙골산(氷骨散)은 해약이 없는 극독인데...”

마면혈도는 임청우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불심연화로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다만 호흡이 정제되지 못하고 거친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철선동시도 마찬가지였다.

“끼끼끼... 말대가리, 네놈도 혈도에 색혈사(索血蛇)의 독혈(毒血)을 발라놨었군. 덕분에 셋 다 살아나기는 틀렸어.”

철선동시가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진 채 키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자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에 묻어있던 색혈사의 독혈이 그의 피를 응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 독기는 심장을 향해 가면서 모든 피를 굳혀버린다.

싸우는 동안에는 몸의 움직임이 급격하여 피가 솟구쳐 나왔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은 피가 상처에서부터 심장 쪽으로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철선동시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기 위해 혼신의 공력으로 색혈사의 독혈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팟!

“썩을 놈!”

한숨 돌린 마면혈도가 가슴에 박힌 빙혼철선을 뽑아 던지며 악다구니를 썼다.

푸악!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빙혼철선에도 철선동시가 사용하는 빙골산이 묻어있었다.

빙골산은 극심한 냉기를 품고 있는 특이한 독약이다. 이에 중독된 자는 얼어 죽게 되는데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썩지 않는다.

빙골산의 독기에 의해 마면혈도의 가슴 상처에 서리가 앉으며 허옇게 변하고 있었다.

용조수에 살이 뜯겼던 그자의 어깨는 공력의 운행이 중단된 탓에 벌써 서리가 두텁게 앉아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8장

 

              영물을 잡는 법

 

 

“제가 상처를 잘못 건드렸는가요?”

강유의 등에 약을 발라주던 진상파가 놀라서 물었다.

“아닙니다.”

강유는 고개를 조금 저으며 앞쪽을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왜 이러지?)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들어서 강유와 함께 모닥불 너머의 어둠 속을 보았다.

반짝!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을 띤 한 쌍의 빛이 반짝이는 게 진상파의 눈에도 들어왔다.

“흑...”

진상파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슥!

그 한 쌍의 붉은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쪽 어둠 속에... 뭔가 있군요.”

진상파는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 사람보다는 짐승이 더 무섭다.

“귀찮은 놈이 따라붙었습니다.”

강유는 한숨을 쉬며 누더기가 된 웃옷을 입기 시작했다.

“섬전초라는 그 담비인가요?”

진상파도 비로소 사라진 불빛이 유별나게 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 겁을 주었던 게 별로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옷을 조심스럽게 걸쳤다.

“그런 것같군요.”

진상파는 강유가 옷을 입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앉았다.

“저놈을 방치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제왕성 측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상의를 걸친 강유는 허리띠를 매면서 일어났다.

“그럼...”

“잡아서 혼을 좀 내줘야겠지요. 더 이상 따라다니지 못하도록...”

강유는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모닥불 옆에는 밤새 불을 지피기 위해 강유가 주변에서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강유는 그것들 중에서 가는 것만 한 아름을 추려내었다.

쿡! 쿡!

그리고는 그 나뭇가지들을 모닥불 앞쪽의 공터에 박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진상파는 모닥불 뒤에 무릎 꿇고 앉아서 강유가 나뭇가지들을 바닥에 줄 지어 꽂는 것을 지켜보았다.

(번개같이 빨라서 섬전초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영물을 나뭇가지 몇 개 꽂은 것으로 잡을 수 있다는 걸까?)

진상파가 의아해할 때였다.

“대충 완성되었습니다.”

이윽고 강유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웃었다.

어느덧 바닥에는 나뭇가지들이 깔때기 형태로 박혀있었다.

바깥쪽은 넓고 모닥불과 동굴 쪽은 좁아서 마치 물고기 잡는 통발 같이 보이는 울짱(담장)이다.

나뭇가지를 꽂아 설치한 그 울짱의 넓은 쪽의 폭은 이장 정도고 모닥불 앞의 좁은 쪽은 불과 한자 남짓이다.

또 울짱을 형성하는 나뭇가지들은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섬전초가 위로 튀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특이한 형태의 함정이로군요.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하는 어살(魚箭)같기도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기다리던 진상파가 울짱을 살피면서 말했다.

“어릴 적에 저는 안탕산의 험한 산속을 누비며 산토끼들을 잡으러 다녔었습니다.”

모닥불 앞으로 돌아온 강유는 자신의 물건들 중 명주실을 꼬아 만든 가느다란 밧줄을 집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산토끼란 놈은 워낙 빠르고 기민한 탓에 무작정 쫓아다녀서는 잡을 수가 없었지요.”

강유는 그 가느다란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이런 올가미였습니다.”

강유는 만든 올가미를 들고 통발 형태로 꽂아놓은 나뭇가지 울짱의 가장 좁은 곳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섬전초를 함정 안쪽으로 몰아와서 그 올가미로 잡으실 계획이시군요.”

진상파의 눈이 반짝 빛났다.

“토끼나 사슴처럼 빠르게 달리는 게 장기인 짐승들은 부상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합니다. 그래서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장애물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습성이 있지요.”

강유는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 끝을 바닥에 깊이 꽂아놓은 굵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어떤 짐승보다 빨리 달리는 섬전초 역시 비슷한 습성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유는 올가미를 원형으로 펴서 좌우의 나뭇가지에 살짝 걸쳐놓았다.

“섬전초도 일단 함정 안으로 들어오면 울짱을 뛰어넘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겠군요.”

“비록 급조한 함정이긴 해도 효과는 있을 겁니다.”

웃으며 일어나는 강유의 손에는 방책을 만들고 남은 두 개의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이제 그놈을 이 울짱 안쪽으로 몰아넣기만 하면 됩니다.”

강유는 나뭇가지를 양손에 나눠들고 어둠 속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숨바꼭질을 시작해볼까?”

딱! 딱!

이어 강유는 나뭇가지들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미있어하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늠름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아직 순진한 소년의 면모도 지니고 있는 사내야.)

강유에게 한층 더 호감이 생기는 진상파였다.

 

계곡 입구 쪽의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섬전초는 움찔했다

딱! 딱!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느낀 섬전초는 숨어있던 바위 위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떠나지 않고 근처에 머물러 있었구나.”

딱! 딱!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두개를 부딪혀 소리를 내며 강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유는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섬전초의 붉은 눈을 단번에 찾아낸 것이다.

카아!

휘릭!

섬전초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숨어있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내가 내는 소리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숨어있던 곳에서 머리를 내밀어 들키기도 하고... 짐승은 어쩔 수 없는 짐승이로구나.”

강유는 웃으며 섬전초쪽으로 다가왔다.

끼이! 팟!

섬전초는 재빨리 튀어 올라서 계곡 입구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어림없다.”

동시에 강유가 나뭇가지 하나를 강하게 던졌다.

패앵!

나뭇가지는 풍차처럼 돌면서 섬전초를 노리고 날아갔다.

스팟!

앞으로 달려가던 섬전초는 몸을 옆으로 홱 틀어서 그 나뭇가지를 피했다.

빠각!

섬전초를 스쳐 지나간 나뭇가지는 앞쪽의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휘익!

나뭇가지를 피한 섬전초는 방향을 틀어 바람같이 달려갔다.

그 때문에 이제 놈이 달려가는 쪽은 계곡 입구가 아니라 계곡 안쪽이었다.

“서라 이놈아!”

강유는 짐짓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려 섬전초를 따라갔다.

휘익!

섬전초는 절벽 아래쪽을 따라 한줄기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놈의 앞쪽 이십여 장 쯤에 모닥불이 타고 있고 강유가 급조해놓은 울짱도 보인다.

진상파는 모닥불 뒤쪽에 앉아있어서 그 모습이 섬전초에게는 안보였다.

하지만 섬전초가 달리는 방향은 절벽 바로 아래쪽이라 울짱 안으로는 들어갈 것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맞아랏!”

그때 섬전초를 쫓아오던 강유가 두 번째 나뭇가지를 던졌다.

파캉!

이번에도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며 날아간 나뭇가지는 섬전초가 달려가는 앞쪽 절벽에 부딪혀서 박살난다.

팟!

그러자 섬전초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서 부러진 나뭇가지 파편을 피했다.

휘릭!

그리고 그놈이 다시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어느덧 강유가 설치한 울짱의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대단하네.)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본 진상파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나뭇가지 두 개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짐승이라는 섬전초를 함정으로 몰아넣었어.)

감탄하는 진상파의 눈에 건너편 어둠 속에서 섬전초가 나타나 울짱 안으로 뛰어드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놈 뒤에서 따라오는 강유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였다.

쐐애액!

울짱 안쪽으로 들어선 섬전초는 좌우는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날 듯이 달려왔다.

울짱의 좁은 끝 부분이 섬전초 앞으로 확 다가왔다.

그곳에 올가미가 설치되어 있지만 물론 섬전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촤악!

그리하여 나뭇가지로 만든 울짱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섬전초의 목에 올가미가 확 걸렸다

“캥!”

팽!

올가미가 목에 걸린 섬전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홱 뒤집어졌다.

(걸렸네.)

진상파가 눈을 치뜰 때였다.

퍼억!

허공으로 튕겨졌던 섬전초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패대기쳐졌다.

달려온 속도가 빨라서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것도 아주 세찼다

“맛이 어떠냐 이놈아?”

휙!

강유가 껄껄 웃으며 섬전초 옆으로 내려섰다.

팟!

동시에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섬전초의 몸이 용수철 튀듯이 일어났다.

까득!

이어 그놈은 자기 목을 묶은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을 입으로 물어뜯고 앞발로 눌렀다.

“그렇게는 안되지.”

콱!

강유는 재빨리 섬전초의 목을 뒤에서 움켜쥐었다.

“카악!”

목이 강유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조여지자 섬전초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자연스럽게 그놈은 물고 있던 밧줄도 토해내게 되었다.

“못된 말썽장이 같으니... 다시는 허튼 짓을 못하게 만들어주마.”

휘릭! 휙!

강유는 오른손으로 섬전초의 목을 움켜쥔 채 왼손으로는 밧줄을 재빨리 움직여서 그놈의 네 발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섬전초는 칵칵 거리며 몸부림쳤지만 꼼짝 못하고 네 개의 발목이 하나로 묶여버렸다.

그 때문에 그놈의 긴 허리가 활처럼 아래로 휘어졌다.

“분명 경고를 했는데 따라와서 알짱거린 대가를...”

말하던 강유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콱!

섬전초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뒤로 돌려서 자기 목을 쥐고 있는 강유의 팔뚝을 물어버린 것이다.

다만 목을 억지로 돌려서 문 탓에 그리 깊이 물지는 못했으며 입의 한쪽으로만 문 상태였다.

그래도 섬전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강유의 팔뚝에 상처를 내서 피가 배어나온다.

“흑!”

그걸 본 진상파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르르!

섬전초는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물지 않은 쪽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하지만 그 직후 섬전초의 눈이 위로 흡 떠졌다.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강유의 표정이 아주 살벌했기 때문이다

끼이...

주눅이 든 섬전초는 곁눈질로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입으로는 여전히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날 물었다 이거지? 대충 혼내주고 풀어줄 생각이었다만 마음이 바뀌었다.”

강유는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섬전초를 들고 모닥불로 다가갔다.

카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가까워지자 섬전초는 깜짝 놀라 강유의 팔뚝을 물고 있던 이빨을 뽑았다.

“강소협! 설마...”

진상파도 깜짝 놀랄 때였다.

“살려두면 사람을 해칠 놈입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니 이놈을 구워서 야식으로 먹어야겠습니다”

강유는 냉혹하게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 위쪽에 드리웠다.

까아! 까아!

섬전초는 등쪽이 모닥불 위로 드리워지며 겁에 질려 몸부림쳤다.

치치치!

끼잉! 낑!

등쪽 털이 모닥불의 열기에 그슬려지기 시작하자 섬전초는 강유를 돌아보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애원해봤자 늦었다 이놈아. 마침 배도 고프던 참이니 맛있게 먹어주마.”

강유는 섬전초의 애원을 무시하며 입맛까지 쩝쩝 다셨다.

끼이이!

강유의 그 표정을 본 섬전초는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구워볼까?”

강유는 히죽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에 더 가까이 내려 보냈다.

치치치!

그러자 섬전초의 털이 더 많이 그슬려졌고..

카아! 카!

섬전초는 겁에 질려 몸부림치며 울어대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강유가 그런 섬전초를 보며 또 입맛을 다실 때였다.

“그만 하세요!”

팟!

보고 있던 진상파가 급히 일어나 강유의 손에서 섬전초를 낚아챘다.

“조금 귀찮게 굴었다고 태워죽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상파는 털이 제법 많이 그슬린 섬전초를 품에 안고 다시 바닥에 앉으며 눈을 흘겼다.

끼이!

구사일생(?)한 섬전초는 애처롭게 울면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저, 조심하시오. 언제 표변해서 물지 모르는 사나운 놈이오.”

“걱정해주실 거 없어요.”

강유의 경고에 진상파는 섬전초를 보듬어 안은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법이 어디 있...”

강유에게 화를 내던 진상파는 흠칫했다. 그제서야 강유가 실실 웃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진상파는 비로소 강유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요 녀석을 순치(馴致;짐승을 길들임)시키려고 구워 먹을 것처럼 겁을 줬던 거야.)

진상파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안고 있는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것! 많이 놀랐지?”

이어 그녀는 섬전초의 네 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서 목에 걸린 올가미는 풀어주지 않았다.

끼잉! 끼잉!

함께 묶여있던 네 개의 발이 풀리자 섬전초는 겁에 질려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자길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나뿐이라는 걸 알고 안겨드네.)

진상파는 미소를 지으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이거 참 아쉽구만.”

강유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진상파 건너편에 책상 다리를 하며 주저앉았다.

“그놈을 노릇노릇 구워서 뜯어먹으면 아주 맛났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셔서 불길이 확 일어나게 만들었다.

불길이 세차게 치솟자 섬전초는 기함을 했다.

낑! 낑!

그놈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적당히 하세요.”

진상파는 모닥불을 위협적으로 들쑤시는 강유에게 눈을 흘기면서 웃었다.

“이 애도 이제 소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깨달았을 거예요.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끼잉!

섬전초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기도 하지. 언니 말만 잘 들으면 별일 없을 테니 안심하렴.”

어느덧 섬전초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7장

 

           소년이여.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우리 이쪽 문도 열어 봐요"

강미루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가운데 석문으로 갔다.

그긍!

백남빈이 손으로 밀자 가운데 석문도 그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열렸다.

석문 안쪽의 석실에는 석탁이 하나, 돌로 만든 침대가 하나가 놓여있다.

침실인 게 분명한 데 특이하게도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맨 우측의 석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데 그곳은 앞쪽의 두 곳과 달리 그냥 석실이 아니었다.

“어머!”

“억!”

석문을 열고 들어서던 강미루와 백남빈의 입에서 놀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것은 석문을 열자마자 한기(寒氣)가 확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성을 토한 석문 안쪽에 상상도 못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어서였다.

 

***

 

마지막 석문의 내부는 앞선 두 곳과 전혀 달랐다.

먼저 넓이가 달랐다.

석문 안쪽에는 석실 밖의 뜰 보다가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넓을 뿐 아니라 그 형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 석문 내부는 천장이 아주 높은 천연의 지하광장이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타원형이다.

입구에서 열 걸음 쯤 가면 갑자기 길이 뚝 끊기면서 수직의 절벽이 나타난다.

높이가 오장 쯤 되는 그 절벽 아래쪽은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이다.

백남빈과 강미루를 오싹하게 만든 한기는 그 차가운 연못물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직경이 삼십 장 쯤 되는 타원형의 연못 한 가운데에는 바위섬이 하나 솟아있다.

헌데 이 바위섬의 형태가 기묘했다.

위는 좁고 밑은 넓으면서 전체 형태는 둥근 원추(圓錐)형인 것이다.

마치 깔때기를 엎어 놓은 듯한 바위섬의 평평한 정상은 폭이 일장쯤이며 맨 아랫부분은 직경이 십여 장 쯤 되어 보인다.

원추형의 바위섬에는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의 길이 나있다.

그 나선형 길 중간 중간에는 석감(石龕;불상등을 안치하기 위해 바위에 판 공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석감마다 좌화(座化)한 시신들이 한 구씩 앉아있는데 그 숫자가 모두 열셋이었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기묘한 바위섬에 창평곡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석문의 입구와 높이가 같은 바위섬의 정상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녹이 슬지 않는 쇠로 만들어진 다리는 폭이 좁아서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어떤 분들인지 건너가서 살펴봅시다.”

백남빈은 바위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좁은 철제 다리 옆에 사람 키만한 비석이 하나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자검처럼 짙은 녹색인 그 비석에는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네 자의 글이 적혀있었다.

 

<獅子劒傳>

 

“사자검전(獅子劒傳)!”

녹색의 비석에 적힌 글을 확인한 강미루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오 미루?”

강미루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백남빈이 놀라며 돌아보았다.

“이런... 이런 바보같은... 아아! 난 정말 멍청한 계집이에요! 사자검을 보고도 사자검전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강미루는 흥분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자기 이마를 치며 자책했다.

백남빈은 영문을 몰랐지만 말없이 기다렸다. 강미루의 흥분이 갈아 앉아야만 자책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비문(四大秘門)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요?”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백남빈에게 물었다.

“네 개의 비밀스러운 문파라... 무림에 그런 문파들이 있었소?”

백남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양부 이탁의 영향으로 독서량이 남다른 백남빈이지만 사대비문이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불교로 비교하자면 구대문파처럼 세상에 잘 알려진 문파들은 현교(顯敎;교리가 드러난 종파)이고 사대비문은 밀교(密敎;교리가 감춰진 종파)라 할 수 있는데...”

구구절절 설명하려던 강미루는 방법을 바꿨다. 백남빈이 뜬 구름 잡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마교(魔敎)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알고 있소. 명교(明敎)라고도 불리었으며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한 때 몸을 담았다고 알려진 비밀결사 아니오?”

강미루의 물음에 대답을 하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혹시 마교도...”

“사대비문중 하나예요.”

강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외에 삼성동(三聖洞), 북두무맥(北斗武脈), 그리고 사자검전이 사대비문이랍니다.”

쉽사리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한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교-!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누구는 동진(東晋) 시대에 존재했던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가 마교의 뿌리라고 한다.

또 누구는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와 마니교(摩尼敎)가 중원에 전래되었다가 사교(邪敎)로 낙인찍혀 지하로 숨어들면서 마교가 되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난세가 되면 마교가 백련교, 명교, 미륵교등의 이름으로 민초들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뻗힌다는 사실이다.

마교의 기본 교리가 명왕(明王)이 현세하여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 신앙과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는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되는 마교를 탄압하기에 혈안이 되어 왔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홍무제 주원장의 권력 기반이 되어주었던 마교, 즉 명교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마교는 깊이 잠적하여 지금은 종적이 묘연해진 상태다.

 

삼성동-!

북송(北宋) 시절에 살았던 무공과 의술과 공장(工匠) 방면에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세 명의 기인이 세운 문파다.

십절무성(十絶武聖), 대라의성(大羅醫聖), 성수신장(聖手神匠)이 삼성(三聖)이다.

삼성은 각 방면에서 절세적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향이 같다는 인연으로 해서 의기투합하여 만든 문파가 삼성동이다.

 

북두무맥-!

천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여전히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추앙받고 있는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의 후예들이다.

북두무제 섭장홍은 스승도 없이 무공을 깨우쳤으며 이십오 세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수들을 꺾은 것으로 신화가 된 인물이다.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만큼 북두무제의 무공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한 사람이 다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북두무제는 일곱 명의 기재를 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심득을 나누어 가르쳤다.

북두무제의 일곱 제자들은 북두칠성을 관장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으로 불렸다.

 

“사자검전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마교, 삼성동, 북두무맥보다도 없어요.”

강미루는 어느 정도 흥분이 갈아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무림 어딘가에 검을 쓰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가 있으며 사자검전이라 불리는 그들의 검술이 절세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랍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허리에 차고 있는 기괴한 검, 사자검을 곁눈질로 보았다.

“사자검(獅子劒)을 전(傳)한다라... 문파 이름도 특이하군.”

백남빈도 새삼 자신의 사자검을 만져 보았다.

사자검을 휘두르면 검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고 몸속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 용솟음 쳤던 것이 모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헌데 미루는 세상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사대비문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요?”

백남빈은 두 살이나 어린 강미루의 견문이 자신과 비교도 안되게 넓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 물었다.

“어렸을 때 형부가 옛날이야기 대신 해줘서 알고 있었어요.”

강미루의 대답을 들은 백남빈은 그녀의 형부인 광평객 신가람이란 인물에 대해 새삼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마흔 살도 안되었다는 광평객 신가람은 어떻게 독안룡 이탁도 모르고 있는 것같은 강호의 깊은 비밀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축하드려요. 사자검을 얻으셨으니 공자님은 이제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전인(傳人)이세요.”

강미루가 두 손을 모은 채 진심어린 표정으로 축하했다.

“사자검은 우리 둘의 공동 소유요. 따라서 미루 역시 사자검전의 전인이니 축하드리겠소.”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포권을 하며 웃었다.

(나... 나도 사자검전의 제자라니...)

백남빈의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이 앞장서고 강미루가 뒤 따르며 좁은 다리를 건넜다.

원추형의 바위섬 정상은 평평한 데 폭이 일장 남짓으로 제법 널찍하다.

경건한 자세로 그곳에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신선같은 풍모(風貌)를 지닌 노인이었다.

바위섬 정상의 평지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이 노인은 오래 전에 좌화한 시신이건만 얼굴이 불그스레하여 금방이라도 눈을 부릅뜰 것만 같다.

바위섬을 에워싼 차가운 연못물의 냉기가 시신의 원형을 보전해주기도 했지만 생시에 내공이 신화경에 이르렀었다는 반증이다.

풍채도 좋아서 보는 이를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노인의 시신 주변 바닥에는 글이 가득 새겨져 있다. 어떤 명가(名家)의 글씨보다 수려한 필체의 글이었다.

 

<나 이백(李白)이 마침내 술을 깨고 보니 더 이상 세상에 아름다운 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인(佳人;양귀비)의 마음은 추악하고 제왕(帝王;당 현종)은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탐욕스러웠다.

인세의 드문 수재(秀才)인 친구(親舊;杜甫.)는 날마다 굶어서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었다.

도적이 곳곳에 일어나도 혼미한 대부(大夫;벼슬아치)들은 자신의 곳간만 지킬 뿐이었다.

벗의 말마따나 대부들의 집에선 고기가 썩어 나가고 백성들의 집에서는 날마다 아사(餓死)한 시체가 썩어 나갔다.

나는 술 취한 사람이라 그렇다지만 나라는 어찌 하여 비틀거리며 기강을 잃었단 말인가?

황제도 의지할 바 못되고 지사(志士)도 믿을 바가 못 되도다.

평생의 뜻을 얻고자 천하를 주유했으나 성인(聖人:德이 많은 사람, 또는 孔子)은 보이지 않고 문왕(文王: 周의 문왕)도 만나지 못했도다.

세상의 친구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처량하게 되었으니 취한 유객(遊客)이 마침내 잔(盞)을 버리고 달 속에 들었도다.>

 

붓으로 직접 바위에 쓴 듯한 수려한 필체의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백남빈은 읽기를 중단하고 노인의 시신에 대고 큰절을 했다.

"시선(詩仙)의 유해(遺骸)가 이곳에 계셨습니다. 후진이 일찍이 시선의 유협(遊俠)을 부러워하고 분방함을 존경하여 마지않았는데 유해나마 직접 뵙게 되었으니 어찌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은 바로 시선으로 불리던 이백, 이태백이었다.

놀랍게도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시조는 다름 아닌 이백이었던 것이다.

이백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대시인일 뿐 아니라 협객으로도 이름을 청사(靑史)에 남겼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백이 사대비문 중 사자검전의 시조였을 줄을 백남빈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강미루도 덩달아 이백의 시신에 절을 올리고 이백의 유지(遺旨)를 함께 읽어 내려갔다.

 

<짧은 깨달음에 의지하여 잔을 들듯 검을 들기를 육십여 년, 잔은 전하여지지 않아도 나의 기호(嗜好)이니 무방하나 검은 옛사람으로부터 전해진 것이기에 묻을 수가 없다.

마침내 동정호에서 어부 소년을 만나 그에게 전하기로 하였다.

유객이 말하기를

"그대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하였더니

소년 어부가 답하여 가로되

"검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선기(禪氣)를 지녔으니 가히 옛사람의 법을 전할 만하지 않겠는가?

세세히 그림을 그려 이곳을 일러주고 찾아오기를 거듭 당부하였다.

백(;李白)은 여기서 죽는다마는 검은 마침내 전해지리라.

소년, 그대 지금 나를 보거든 구배(九拜)하기를 주저치 말라.

오늘 여기에 옛사람의 검을 전하리라.>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1)

 

 

(사부...)

척포에게 당하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있던 임청우는 우협 장백승이란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임청우는 이미 장백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스럽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철선동시의 입에서 우협 장백승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온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우협... 그가 왜 나를...”

마면혈도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중얼거렸다.

철선동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냉소를 했다.

“자네는 물론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

마면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가 또 말했다.

“하지만 우협이 검주 유소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겠지?”

마면혈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철선동시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한 발을 턱 걸치며 말했다.

“자네는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만, 우협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 더우기 우협은 지금 자네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는 중이지.”

“우... 우협이 날 죽이려 뒤쫓고 있었다니...”

극도의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린 마면혈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했고 마면혈도도 자신이 사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마면혈도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검주 유소기라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인데... 사부는 그 유소기라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라고도 하고...)

임청우가 의혹에 휩싸여있을 때 마면혈도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철선동시, 자넨 어떻게 우협이 나를 뒤쫓는 것을 알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우협을 만났었네.”

철선동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세 번이나?”

마면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래 세 번! 마지막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네.”

철선동시는 발을 올려놓았던 아미타여래의 머리를 의자삼아 앉으면서 말했다.

“언제... 우협이 언제부터 날 쫓고 있었는가?”

마면혈도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식은땀이 난 모양이었다.

“그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우협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수(漢水)에서였네. 그는 어부에게 자네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고,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굽신거리며 모른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우협은 곧 가버렸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몰래 다가가 그 어부를 죽여 버렸네.”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마면혈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그 어부의 계집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지.”

철선동시의 말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면혈도는 말같이 생긴 추악한 용모 때문에 여자의 환심을 사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만 보면 여염집 규수와 과부, 여승과 처녀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겁탈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면혈도에게 겁탈당하고 죽거나 미쳐버린 여자는 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우협을 만난 건 우리가 함양(咸陽)의 기루에 숨었을 때일세.”

진시황의 궁전이 있었던 함양은 서안의 북서쪽 육십여리 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도 자네는 계집을 끌어안고 뒤엉켜있었는데, 기루 안으로 들어서는 우협을 창가에 앉아있었던 내가 운 좋게 먼저 보았지. 기세로 보아 우협은 우리가 그 기루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네.”

“그날 기루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자네였군.”

마면혈도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두 마두는 검주 유소기를 피하기 위해 농산에서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민산산맥(岷山山脈)을 넘어 한수까지 갔었다.

헌데 한수에 이르렀을 때 철선동시는 유소기뿐 아니라 우협 장백승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급히 방향을 바꾸어 민산산맥을 다시 넘어서 함양으로 갔었으며 그후에 황하 줄기를 따라 내려와 서안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로 우협을 본 건 어디서였는가?”

마면혈도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로 이곳 자은사!”

철선동시의 짧은 대답에 마면혈도는 침묵했다.

 

서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은사를 찾아왔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소기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헌데 철선동시가 또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은사를 도로 나와 근처 객점에서 한잠 늘어지게 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자은사를 찾아온 것인데 철선동시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자은사에 들렀을 때 우협 장백승도 자은사에 있었던 것이다.

철선동시는 장백승이 한번 돌아보고 간 곳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은사의 대안탑을 은신처로 선택했었다.

철선동시의 그같은 생각도 몰랐다니...

마면혈도는 내심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사부가 자은사에 왔었구나!)

임청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협 장백승이야말로 임청우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황을 건드렸었는데...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우협까지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모양이다. 아마 계집들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고 다닌 게 우협을 화나게 했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마면혈도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힐끔 철선동시를 쳐다보았다.

철선동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속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얼어 죽은 놈은 근 한 달 째 내게 선심을 쓰고 있다. 물론 선심을 쓰는 목적은 내 손에 있는 몽선도의 반쪽을 넘겨받는 것이겠지.)

마면혈도는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되지 안돼. 죽었다 깨어나도 몽선도는 넘겨줄 수 없다.)

마면혈도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지만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과, 진 빚은 꼭 갚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다.

헌데 벌써 수차에 걸쳐 철선동시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면혈도를 괴롭혔다.

철선동시는 아닌 척하면서 마면혈도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이내 실망했다.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마는 성격의 마면혈도이건만 자신에게 몽선도를 바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선도는 쉽게 내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철선동시는 흉악한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협만 아니라면 검주 유소기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마면혈도가 우협을 자극했기 때문에 쫓겨 다닌다는 듯한 말투다.

마면혈도는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냈다.

“내가 적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선동시! 설마 너 혼자서 검주 유소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철선동시가 백납처럼 하얀 얼굴에 강시처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유소기는 우리 삼괴 다음 서열인 칠절에 속한다. 비록 그놈이 칠절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하하핫!”

순간 마면혈도가 큰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입과 턱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얼어 죽은 놈! 유소기가 근처에 없다고 그런 허풍을 치다니...”

마면혈도는 웃음을 뚝 그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왜 도망만 쳤느냐? 나 마면혈도도 유소기의 삼검(三劒)을 당하지 못하고 겨우 도망쳤는데... 설마하니 네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단 말이냐?”

“키키키... 자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빙혼철선(氷魂鐵扇)은 유소기의 검보단 반 푼 정도 무섭고 자네의 혈도보단 두 배 정도 강하지.”

철선동시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웃는 그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팟!

“이제 보니 네놈은...”

마면혈도는 무엇을 느꼈는지 바람처럼 신속하게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카캇! 말대가리가 제법이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카카캇! 네놈이 직접 바치지 않으니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화악!

철선동시가 그림자처럼 마면혈도를 쫓아가며 손톱으로 할퀴는데 그 수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스악! 서걱!

철선동시는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풍만으로도 마면혈도의 가슴부위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그럴진대 손톱에 직접 할퀴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헛! 용조수(龍爪手)!”

마면혈도가 놀라 소리치며 피했다.

용조수는 응조수(鷹爪手)와 함께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중 하나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무공은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사에서도 절전되어 익힌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뜻밖에도 얼어 죽은 귀신같은 몰골인 철선동시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마면혈도조차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쩍!

마면혈도는 혈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붉은 고리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도의 혈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용조수의 위력은 과연 놀랄 만했다.

파카캉!

혈도의 측면을 후려친 철선동시의 손톱은 다음 순간 마면혈도의 얼굴을 할퀴려 들고 있었다.

“크카카캇! 용조수를 알아보았으면 순순히 반부의 몽선도를 내놓으시지.”

철선동시의 살벌한 공격을 그러나 마면혈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수평혈도참(水平血刀斬)!”

번-쩍!

아침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듯,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노도같이 철선동시에게 밀려갔다.

쩌어억!

칠층 중앙에 서있던 불심연화로의 상반부가 혈도의 도기에 베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퍼억!

석가여래의 허리도 무참히 베어져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팟!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왼쪽 발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혈도참은 마면혈도의 삼십이초(三十二招) 혈왕도법(血王刀法) 중 최후의 이(二) 초식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다.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만났을 때도 마면혈도는 수평혈도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철선동시는 수평혈도참의 존재를 몰랐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말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할 철선동시가 아니었다.

화악!

잘려진 발목 때문에 허공에서 불안한 몸짓을 보이면서도 철선동시는 용조수 중의 절초를 펼쳐냈다.

쫘악!

마면혈도의 어깨에서 옷과 함께 피 묻은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왔다.

휙! 휘릭!

피차 피를 본 두 사람은 훌쩍 물러나 이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도 무시못할 중상을 입었지만 작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할 뿐이었다.

촤라락!

철선동시가 접은 채 들고 있던 빙혼철선을 펼쳤다.

스윽!

마면혈도는 혈도를 비스듬히 내려서 철선동시의 하체를 겨누었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순간적인 방심이 만들어낸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7장

 

               마검칠식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깊은 밤중이지만 강변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원 안팍에는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 장원은 제왕성의 분타중 한 곳이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장원 중에서도 대청 일대가 가장 환하다.

여러 개의 등이 밝혀진 대청 안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속에는 수의를 걸친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누워있다.

사우의 시체가 걸치고 있는 수의의 가슴 부분은 피로 물들어 있다.

관의 뒤쪽에는 사우가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위사들은 고개를 떨 군 채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주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청 안으로 들이쳤다.

철위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틈엔지 대청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은 제왕성의 외(外)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그가 급보를 받고 수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려온 것이다.

궁무독과 동행한 인물들은 대조적인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깡마르고 훤칠한 체격의 백발노인인데 옷자락에는 <銀>자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줄이 은실(銀絲)로 새겨져 있다.

이 백발노인이 제왕성 사대무력집단 중 은위사대(銀衛士隊)의 대주인 백월사신(白月死神)이다.

다른 노인은 백월사신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의 소유자다.

체격이 장대하고 대머리인데 옷자락에는 <銅>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푸른 줄이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빚어진 듯한 인상의 이 대머리 노인이 동위사대(銅衛士隊) 대주인 독두태보(禿頭太保)다.

“총... 총관님!”

“분합니다 총관님!”

궁무독 일행을 본 십여 명의 철위사들은 분루를 흘리며 엎드렸다.

“속하들도 대주님을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보고하기 위해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속하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

철위사들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오열했다.

그들의 이마가 삽시에 피로 물들었다.

“닥쳐라!”

쾅!

하지만 궁무독은 발을 구르며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드드드!

궁무독의 내공이 실린 진각(振脚)과 고함으로 인해 대청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내공의 심후함만으로도 궁무독이 사우를 간단히 능가하는 고수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밖에서 경비를 서던 철위사들이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청 안의 철위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계집처럼 질질 짜지 마라. 너희들의 대주를 위한다면 복수를 위해 가슴 속에 칼을 갈아야하지 않느냐?”

궁무독은 살기 어린 눈으로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철위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 떨군 채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못난 인간 같으니... 이름도 없는 놈에게 죽임을 당해서 제왕성의 이름에 먹칠을 해?”

궁무독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사우가 남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제왕성의 위명이 실추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노부가 사(査)대주의 사인을 살펴보겠소이다.”

그때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이 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해주시오 백(白)대주.”

궁무독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른 외상은 없고...”

백월사신은 관 속에 누워있는 사우의 시체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들어왔다

“가슴에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군.”

슥!

백월사신은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을 젖혀 보았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우의 가슴에는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등까지 뚫려있었다.

“이건!”

“헉!”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구멍을 보는 순간 백월사신뿐 아니라 독두태보와 궁무동의 입에서도 비명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 사대주의 등까지 뚫려있는 상처의 측면이 나선형으로 파여 있군. 그렇다는 건...”

백월사신은 덜덜 떨며 손으로 상처의 측면을 만져보았다.

특이하게도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의 측면은 나선형의 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검칠식! 천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천마구절기(天魔九絶技)중 마검칠식이오.”

궁무독이 전율하며 말했다.

“마... 마검칠식이라면 십팔 년 전에...”

독두태보는 너무 놀라 헉헉 대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무후님... 영창공주님을 시해한 흉수가 쓴 무공도 마검칠식이었지.”

백월사신이 이를 부득 갈며 내뱉었다.

(맙소사! 역시 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법은 마검칠식이었구나.)

(십팔 년 전 주모님이 시해 당하신 것과 같은...)

무릎을 꿇고 있던 철위사들도 전율했다.

 

십팔 년 전, 마교 교주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치기 위해 제왕성에 잠입했었다.

그리고 달마묵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지키던 흑백신귀에게 종적이 발견되어 쫓기게 되었다.

무사히 제왕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자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안주인인 무후 주영창, 즉 영창공주의 거처로 들이닥쳤었다.

그곳에서 귀면지존은 갓 돌을 맞은 제왕성의 소성주 섭무궁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영창공주를 살해했었다.

영창공주는 귀면지존의 검에 찔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절명했었다.

그리고 십팔 년 만에 영창공주를 죽게 만든 마공, 마검칠식의 흔적이 냉혈철심 사우의 시신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 마검칠식은 마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악랄하고 치명적인 검법인데...”

“총관! 드디어 십팔 년 전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 같소.”

독두태보와 백월사신이 극도의 흥분으로 떨며 궁무독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의 대주를 살해한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궁무독은 두 노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있는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약관도 안된 애송이었는데...”

강유와 대결했다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철위사 장흔이 일행을 대표하여 보고했다.

“살아계실 때 대주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놈이 사용한 다른 무공은 칠절 중 소요신군 강조의 것이었습니다.”

“소요신군 강조!”

궁무독과 백월사신, 독두태보는 전율하며 눈을 부릅떴다.

 

* * *

 

산중의 밤은 더욱 어둡다.

휘익!

섬전초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속도를 줄이는 그놈 앞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섬전초는 절벽 끝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절벽 끝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섬전초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아래쪽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는 계곡인데 그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끼이...

섬전초의 등이 긴장으로 활처럼 굽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면서도 섬전초는 소리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곡 막다른 곳의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동굴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피운 모닥불이 타고 있다.

모닥불에는 물기가 있는 쑥대가 얹혀져 있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극성스러운 모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운 모깃불인 것이다.

강유는 동굴을 등지고 모닥불을 앞에 둔 위치에 앉아있다.

상의를 벗은 상태인 강유는 사우와 싸우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납작한 도자기 용기에 들어 있는 고약을 손가락으로 떠낸 강유는 상당히 깊게 갈라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 고약은 어머니 냉상영이 비상약으로 챙겨준 금창약(金瘡藥)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유 옆에는 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단도 한 자루와 몇 개의 약병, 갈아입을 속옷과 먹다 남은 건량,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한 다발의 가느다란 밧줄등이 그것이다.

모두 강유가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에 들어있던 물건들이다.

정작 봇짐을 싼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 물건들 외에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봉투도 함께 놓여있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개봉(開封)의 동북방 삼백여리 쯤에 자리한 양산(梁山)이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황금성이 있는 금릉과는 오히려 백여 리쯤 멀어진 상태다.

제왕성의 인간들은 당연히 진상파가 금릉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추격대의 주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예상한 진상파는 목적지를 금릉과 반대쪽인 개봉으로 바꿨다.

천년고도인 개봉에도 황금성의 분점(分店)이 있다.

그것도 보통 분점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거대한 분점이다.

금릉의 황금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개봉의 분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성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진상파는 금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개봉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다만 강유의 상처가 가볍지 않고 진상파 자신도 밤눈이 어두운 것을 감안하여 오늘 밤은 양산의 깊은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강유가 등지고 앉아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입구에서 오장쯤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온다.

동굴 끝의 바닥에는 마른 풀잎과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에 진상파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동굴 입구를 볼 수 있도록 가로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는 강유의 봇짐을 쌌던 천이 덮여 있다.

밤이 깊었지만 진상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는 있으나 두 사내의 모습이 번갈아 뇌리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사내는 물론 강유와 모용준이다.

(같은 인간이고 사내인데 어찌 그렇게 다를까?)

진상파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데 반면 또 다른 사내는 생면부지인 나를 구해주려고 목숨을 도외시했었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유모인 구숙정과 짐승처럼 뒤엉키던 장면을 떠올리고 새삼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것에 담긴 영혼에는 천양지차가 날 수 있구나.)

감았던 눈을 뜬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돌려 동굴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강유가 진상파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앉아서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다.

강유의 몸에 가려서 모닥불의 불빛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 강유...)

상의를 벗고 있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처녀인 나를 배려해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을 대비하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상파는 시선이 자꾸만 강유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협객이며 대장부... 어쩌면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살을 드러낸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살인을 했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강유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필살일초에 당해 죽어가며 눈을 부릅뜨던 냉혈철심 사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었지만 한 인간의 목숨을 내손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과 비탄에 잠길 가족이 있을 텐데...)

상처에 고약을 바르는 강유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몸에 묻었던 그자의 피는 씻어버렸으나 내 영혼에는 살인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게 될 테지.)

깊은 한숨이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림인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경험하자 후회와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란 놈은 너무 심약해서 무림인으로서의 거친 삶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구나.)

강유가 우울하게 한숨을 쉴 때였다.

사박!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진상파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저... 밤이 이미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강유는 멋쩍어져서 벗어놓았던 상의를 집어 앞을 가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탓인지 쉽게 잠 들 수가 없군요.”

진상파가 강유 뒤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주무셔야...”

말하던 강유는 움찔했다. 진상파의 손이 강유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고약 통을 잡았기 때문이다.

“등 쪽 상처에는 손이 닿지 않으실 테니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강유의 뒤쪽에 무릎을 꿇은 진상파가 고약 통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강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등을 진상파에게 맡겼다.

진상파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떠낸 금창약을 강유의 등 쪽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녀가 아버지 이외의 사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진상파의 손가락이 살에 닿자 강유의 몸에 움찔 경련이 치달렸다.

(이런 느낌이로구나.)

강유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진상파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몸을 만지는 느낌은 이토록 흥분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었어.)

진상파는 가빠지는 숨결을 강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유 역시 심장이 거칠게 뛰노는 것을 행여나 진상파가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분이 외의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경험이로구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강유였다.

(만일 분이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난리가 나겠지?)

그 와중에도 분이의 화난 표정이 떠올라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그 직후의 일이었다.

반짝!

모닥불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강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 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0장

 

                두 가지 선물

 

 

"담세황이란 놈이 내게서 노리고 있는 두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옥여상은 꼭 끌어안고 있던 고검추의 머리를 조금 풀어주며 물었다.

"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고개를 조금 든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변화를 옥여상에게 들켰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장보도(藏寶圖)란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고검추의 모습을 본 옥여상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보도라면 어떤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린 지도겠군요."

고검추는 흠칫 놀라며 옥여상을 내려다 보았다.

"십칠 년 전, 그다지 친분도 없던 어떤 인물이 인편으로 손수건 한 장을 보내왔었다. 그 손수건 위에는 복잡한 암호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한 자루의 신검을 감춘 장보도인 줄 알게 되었단다."

(신검을 감춘 장보도!)

고검추는 어떤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마신검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사신각주가 자신의 양모 당혜선을 다그치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주머니께서 장보도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고검추는 떨리는 음성으로 옥여상에게 물었다.

옥여상은 야릇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내는 내가 장보도를 받은 직후 불미스러운 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파백도의 차기 맹주로 손꼽히던 철사자 고창룡이 그 장본인이다."

"...!"

고검추의 몸이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옥여상이 고검추에게 주겠다고 한 장보도는 사신검 중 복마신검을 감춘 장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보도를 옥여상에게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부친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십칠 년 전, 고창룡은 친분도 별로 없는 옥여상에게 복마신검의 장보도를 보냈었다.

고창룡과 옥여상은 한두 번 얼굴 마주친 정도의 교분밖엔 없었다. 각자 걷는 길이 다른지라 흑백양도를 대표하는 기재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헌데 고창룡이 늙은 하인을 시켜 암호가 적힌 손수건을 옥여상에게 보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나 옥여상이라면 믿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옥여상이 손수건을 전해 받은 얼마 후 고창룡이 패륜아로 몰려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창룡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여상의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창룡이 죽음을 예견하고 암호가 적혀잇는 손수건을 보낸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옥여상은 고창룡이 자신에게 손수건을 보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손수건에 적혀있는 암호는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려웠으며 마천루의 제이대 루주가 된 직후라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옥여상은 마천루를 훌륭히 영도하여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호천무맹이 봉문한 무림에서 마천루에 맞설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옥여상도 마도제일인을 넘어 중원제일인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룰 만큼 이루었고 큰 우환도 없어서 여유가 생긴 옥여상은 고창룡이 보낸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암호가 적혀있는 손수건이 사신검 중 하나를 감춘 장보도임을 알아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장보도를 전혀 남인 이 분께 보내셨을까? 어머니나 양모님은 물론이고 호천무맹의 원로들 중에서도 믿을만한 분이 계셨을 텐데...)

고검추는 옥여상의 풍만한 몸 위에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로구나. 철사자 고창룡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옥여상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검추의 경악하는 모습에서 그와 고창룡의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치 않고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담세황이 노리던 두 가지 보물을 네게 모두 줄 작정이다. 거절하지 않겠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고모님!"

"고모..."

고모라는 고검추의 호칭에 옥여상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천애고아인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옥여상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옥여상이 아버지의 지인인 것을 알고 별 생각없이 고모라 부른 것이다.

“무례는 무슨... 너같이 귀여운 조카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감... 감사합니다.”

고검추는 꽃잎같이 부드러운 옥여상의 입술을 이마에 느끼며 안도했다.

"헌데 너는 사신검의 장보도 말고 다른 한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나 알고 감사하는 것이냐?"

옥여상은 야릇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자신이 옥여상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검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옥여상이 옥용을 발그레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고모의... 처녀(處女)다."

"예엣?"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아연실색했다.

옥여상이 고검추 자신에게 주겠다는 두 번째 보물이라는 게 처녀라니... 고검추로서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모님과..."

고검추는 너무 놀라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옥여상의 시선을 피했다.

비록 젊어 보이지만 옥여상은 고검추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어떻게 교접을 한단 말인가?

"네가 왜 나의 두 번째 선물을 못받겠다고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받아 주어야만 한다. 그게 고모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옥여상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처... 처녀를 제게 주시는 것이 고모님을 구하는 방법이라니... 무슨 뜻이신지요?"

고검추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휴우... 이 모두가 담세황이라는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옥여상의 옥용이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은발마희 옥여상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옥면마성 담세황-!

바로 그 자였다.

동문의 사형제이지만 옥여상과 담세황은 모자지간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 옥여상은 마흔 세 살이고 담세황은 스물일곱 살인 것이다.

옥여상이 일찍 시집을 갔으면 담세황 또래의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사형제면서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담세황은 마천루를 세운 구천마야(九天魔爺) 담백양(潭白楊)의 다소 먼 친척이다.

비록 친척이라 해도 구천마야는 담세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인 마천루를 이끌어가려면 탁월한 무공과 영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담세황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천마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담세황의 일가의 식솔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구천마야가 유일하게 구해낸 것이 담세황이었으며 당시 여덟 살이었다.

원래 구천마야는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옥여상 외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애고아가 된 담세황이 가엾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대신 구천마야는 마천루의 차기 루주는 대제자인 옥여상이라는 것을 수시로 천명했다. 옥여상의 위상과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그같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옥여상은 담세황을 친동생인 듯 성심껏 돌보아 주었다.

다만 담세황이 지나치게 영악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언행이 계산 끝에 나온 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안이 멸족당한 후유증이거니 생각하며 담세황의 행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옥여상은 담세황을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 스승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담세황을 제자로 맞아들일 당시 구천마야는 이미 팔순을 넘겨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옥여상이 늙은 사부를 대신하여 담세황을 가르쳐야만 했다.

옥여상과 담세황은 사형제가 아니라 사실상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옥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삼 년 전 어느 날 사단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담세황이 한 권의 오래 된 책을 옥여상에게 주었다. 그 고서는 상고시대의 절기가 실려있는 비급이었다.

 

-헌원태을경(軒轅太乙經)!

 

담세황은 그같은 이름의 비급을 천산(天山)의 어느 빙동(氷洞)에서 얻었다고 했다.

옥여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헌원태을경이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남겼다고 알려진 비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원태을경은 황제 헌원씨가 총애하던 소녀(素女)를 위해 지은 비급이다.

황제는 소녀가 헌원태을경을 익혀서 몸을 지키길 원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헌원태을경의 무공들은 수비와 보신에 특화되어 있다.

헌원태을경에 수록된 무공들의 정수는 태을강기(太乙罡氣)다.

태을(太乙)은 북극성(北極星)을 의미하며 북극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

그 태을이 이름에 들어간 태을강기를 완전히 수련하면 생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온몸의 모공에서 늘 강기가 흘러나와 외부의 충격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태을강기를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다만 태을강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약점이 있다.

먼저 수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온몸의 모공으로 강기를 뿜어내려면 온몸의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안될 것이다.

즉, 태을강기의 수련 비결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태을강기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약점은 더욱 치명적이다.

태을강기는 팔만사천 개로 알려진 전신의 모공으로 발산과 수렴을 하는 까닭에 통제하기가 메우 어렵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속을 제 멋대로 떠도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막을 수 없다.

태을강기를 수련중인 인물을 제압하여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의 사술을 쓰면 그때까지 축적해놓은 태을강기를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담세황, 그 배은망덕한 놈은 내가 사신검의 장보도를 지니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놈은 내게서 장보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원태을경을 얻게 되었으며...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리고 그걸 내게 준 것이다."

듣고 있던 고검추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스스로 태을강기를 익힐 자신이 없었던 그 자는 고모님으로 하여금 태을강기를 수련하게 한 후 갈취할 생각이었겠군요."

옥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가량 수련한 결과 나의 태을강기는 구성(九成)을 넘겼다. 그걸 확인한 담세황은 방심하고 있던 나를 쇄심마장으로 암습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하루 전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 못할 말종이로군요."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여상은 그런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처녀가 왜 보물인지 알겠지?"

“예...”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옥여상이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처녀라는 사실과 태을강기를 이전받으려면 그녀와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구성 수준의 태을강기를 얻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무공에도 다치지 않는 사실상의 불사지체가 된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고모님."

잠시 고민하던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옥여상의 호의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고모가 쉰 살을 바라보는 늙은 계집이라 싫은 것이냐?"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난처한 듯 더듬거리던 고검추는 이윽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꾸만 고모님이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 같아서 도저히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 가득 뽀얗게 물기가 차올랐다.

"내게도 너같이 착한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옥여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라 불리는 나같은 계집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니 고맙구나."

"고모님..."

옥여상의 품에 안긴 고검추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고모의 처녀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고모와 천하무림을 위하는 길이란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년화리를 구하러 북해로 갈 작정이다. 하지만 만년화리를 잡아서 쇄심마장의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보다 담세황의 추적을 벗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옥여상은 그늘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나의 내공은 절반 이상이 쇄심마장의 마기를 억누르는데 소모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담세황과 백초도 겨루지 못한다."

본래 옥여상은 담세황 정도는 삼십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 담세황이 사실상의 사부인 자신을 기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방심하다 암습당해서 담세황과 백초도 겨룰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된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어? 당신 손에 있던 단검은 어쨌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에 단검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녹지에 던져 버렸어요."

강미루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대답했다.

"아니 왜?"

"당신을 찔렀던 물건을 계속 갖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혹시 당신을 찌르는 경우가 또 생기면 어떡하라구요?"

말하는 강미루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린다.

백남빈은 그런 강미루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녀가 자신을 깊이 생각해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애정이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강미루의 깊은 애정에 다 보답하지 못하는 듯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몰랐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틀림없는 구혼(求婚)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미루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백남빈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던 여걸의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백남빈도 강미루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녹지의 푸른 물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녹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평곡의 야경(夜景)이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평곡은 사방이 수백 길 절벽으로 에워싸인 항아리같은 구조다. 그 때문에 햇빛에 의하든 달빛에 의하든 한쪽에는 늘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해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잠깐 동안이지만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중천에 이르자 창평곡 어느 곳에도 절벽의 그늘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노란 보름달은 새파란 녹지 중앙에도 떠올랐다.

녹지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콕 찍어 누르는 송곳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는 보름달이 녹지 중앙에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치떴다.

녹지의 수면이 천천히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줄어들고 있다!>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백남빈과 강미루는 서로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마치 보름달의 달빛에 실린 무게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녹지의 수면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백남빈과 강미루가 알아차렸을 때 녹지의 수면은 이미 한길 이상이나 갈아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럭! 크르럭!

어디선가 쇠사슬 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았다.

크럭! 크드드!

연달아 쇳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맞은편, 즉 서쪽 절벽인데 그 절벽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蒼平谷>이라 적혀있는 부분이 절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폭과 두께는 각 일장쯤이고 길이는 오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석괴가 위쪽부터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다.

크릭! 끼끼익!

석괴의 안쪽 윗부분에는 두 가닥의 굵은 쇠사슬이 달려있어 석괴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마치 해자(垓字) 위에 놓여지는 다리처럼 내려오는 석괴 뒤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글... 글씨가 적혀 있던 부분이 감춰진 문이었어요!"

“가봅시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잡고 함께 신법(身法)을 펼쳐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크럭 크럭 끼릭 끼릭!

거대한 석괴를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가 타는 냄새를 공기 중에 뿌린다.

크드드!

이윽고 석괴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석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 안쪽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眼力)이 생긴 터였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밀장치를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의 내부는 천연의 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통로였다.

천장에는 종유석(鐘乳石)들을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의 종유석들은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열주랑(列柱廊)처럼 안쪽까지 도열해 있다.

종유석들의 열주랑을 지나 왼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일반적인 암동(巖洞)으로 종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암동 끝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지 달빛이 흘러들어와 밝았다.

 

십여 장 길이의 암동을 지나자 백 평 정도의 제법 넓직한 뜰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사방의 석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조그맣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 개의 절벽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천연의 동부(洞府)였다.

달빛이 흘러드는 위쪽 입구는 까마득하게 높은데, 그 입구마저 바깥쪽 절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동부의 존재를 결코 눈치 챌 수 없다.

뜰에는 키가 작으면서도 옆으로 떡 벌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고 그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납작한 돌판으로 덮인 오솔길을 따라가자 세 개의 석문(石門)이 나란히 붙어있는 벽이 나왔고 벽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바가지가 놓여있는 작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깥도 아름다운데 여기는 오밀조밀해서 더 아름답군요. 정말 신선이 살았던 곳이 아닐까요?"

신비한 정경에 도취되어 묻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의 말에 강미루가"칫!"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길 보세요. 이 바가지는 사람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반치는 쌓였는데 누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당신이 그토록 총명하니 장차 남편을 마음대로 흔들겠군."

백남빈이 웃으면서 농(弄)을 했다.

"어쩜, 지금 같은 때에도 장난이 나와요? 저를 놀려서 당신은 무엇이 좋은가요? 아까 밖에서 저한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강미루가 눈을 흘기며 힐난하자 뜨끔해진 백남빈은 얼른 굽신거리며 둘러대었다.

"천만에, 천만에! 내말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진정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강미루는 보면 볼수록 교묘한 동부인지라 백남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엉뚱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우리 이 문들이나 열어 봐요."

백남빈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에 걸린 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검을 돌려 달라고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로군."

"차라리 검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잖아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이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세 개의 문 중 좌측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긍!

백남빈이 슬쩍 밀자 석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눈에 가장 먼저 뛴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몇 권의 책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든지 보다가 던져져서 엎어진 책장(冊張)들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백남빈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먼지를 툭툭 털고 제목을 읽었다.

 

<이백시선(李白詩選)>

 

바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를 모은 시집이었다.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시를 좋아한 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매우 아취(雅趣)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요"

함께 보고 있던 강미루가 말하자 백남빈이 대뜸 받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책도 어질러 놓으려고?"

"남의 거처에 와서까지 주인을 욕하는 거예요?"

백남빈은 강미루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심이 센 그녀를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백남빈이었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손에서 책을 받아 옆에 있는 서가의 빈곳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정에 박힌 야광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은은히 비치는 이 석실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서가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책 뿐 아니라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도 석실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가요. 밀폐되어 있어서인지 공기가 탁해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석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백남빈이"어__?" 하며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강미루는 재빨리 안에서 석문을 닫아버렸다.

"미루, 미루, 왜 그러는 거요?"

강미루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백남빈은 겁이 털컥 나서 석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석문 안쪽에서 강미루의 대답이 들린다.

 

사실 강미루는 창평곡에 들어온 이후로 옷 같은 옷을 입어 보지 못했다.

비록 기후가 따뜻해서 지내는데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상체는 백남빈이 벗어 준 남색 상의를 입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풀로 엮어 만든 치마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버석거리고 까칠한 감촉은 둘째 치고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속살이 드러나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모퉁이에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한 강미루는 대단히 기뻤었다. 어떤 종류의 옷이든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전부 남자들의 옷뿐이네."

그래도 옷가지들을 들쳐본 강미루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석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옷은 모두 남자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 옷이라도 풀치마보다는 났다.

강미루는 헐렁한 남색 상의를 벗어버리고 옷가지들 중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옷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턴 후 입어 보니 옷 전체가 몸에 착 붙고 가느다란 소매는 팔목을 살짝 조였다. 상당히 작은 체형의 사내가 입었던 옷 같았다.

한 벌인 듯한 꼭 끼는 바지를 마저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하지만 속옷도 없이 맨살에 겉옷만 두른 상태라 뭔가 허전하다.

"뭘 하는 거요?"

밖에서 초조해진 백남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어요."

강미루는 마주 소리치며 재빨리 헐렁한 장삼을 하나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장삼의 허리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서 대충 크기를 맞추었다.

몸을 슬쩍 돌려 살펴보니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강미루는 몇 벌의 옷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

확 달라진 강미루의 모습에 백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아이같이 변한 강미루의 모습은 어여쁠 뿐 아니라 깜찍하기까지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안고 나온 옷가지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혀 주었다.

품이 넉넉한 장삼을 걸치고 사자검을 허리에 찬 백남빈의 모습이 옛날이야기 속의 검선(劍仙)을 떠올리게 해서 강미루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은 엿새만에 사람의 형용(形容)을 되찾게 되었다.

석실 안팍에 벗어놓은 남색상의와 풀잎 옷 한 벌은 장차 높이 날아오를 그들의 껍질인 듯 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0.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