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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혈황(血皇) 등장!

 

 

(... 무슨 망상이냐? 아들 뻘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에게...!)

이검한을 대상으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던 나유라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책했다.

(너무 오래 굶었구나! 나무 오래 굶었어!)

나유라는 부끄러운 망상을 억지로 떨쳐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의를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저 아이가 한 말을 믿어야만 하나? 내 몸이 흑혈맹호단의 아이들에게 더렵혀지기 전에 구했다는 말을...?)

얼마 전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는 나유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이지러졌다.

자신이 수족처럼 여기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유린당한 부분으로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전율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나유라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기절한 탓에 그 후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남편 아닌 외간 사내들의 손길이 몸에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나유라였다.

나유라는 아무래도 마음 속의 미심쩍은 부분을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자신의 몸은 더럽혀지기 전에 구원받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입술을 깨문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나신을 가리며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검한이라고 했느냐?”

이검한은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움찔했다.

비록 눈은 앞쪽을 보고 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을 등 뒤로 쏠려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나유라가 목욕을 마치고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유라의 음성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교가 계십니까 마마?”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린 이검한은 공손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네게 한 가지 확인해볼 일이 있다!”

나유라는 오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몸 위에 이검한의 적룡풍을 걸치고 있었다. 적룡풍 하나로 풍만한 나신을 감싼 그녀의 자태는 더할 수 없이 뇌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신에는 범접키 어려운 기품과 수백만 명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으로서의 위엄이 배어 있었다.

정말 내게 아무 일도 없었느냐?”

나유라는 형형한 눈으로 이검한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검한은 그녀의 그 싸늘하고도 찌르는 듯 강렬한 눈길에 움찔했다. 그렇기는 해도 나유라의 그같은 질문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 소생이 왜 거짓으로 아뢰겠습니까?”

이검한은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검한의 그같은 반응에 나유라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이검한을 추궁했다.

너를 낳아준 어머니의 정조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

그녀의 말에 이검한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머니...!

이검한은 지금껏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도 모르는 처지긴 해도 생모의 정조에 걸고 거짓 맹세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난감한데...)

이검한은 당황하는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즉답을 못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설마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게냐?”

이검한의 그같은 미심쩍은 태도에 나유라는 두 눈을 의혹으로 물들인 채 재차 추궁했다.

... 그게...”

이검한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을 꾸며내려고 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살았다!)

이검한의 두 눈이 갑자기 번뜩 빛났다.

스스스!

돌연 모래가 흐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 때문이다.

나유라도 움찔했다. 그녀 역시 누군가 녹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단 숨자!”

스윽!

누군가 녹원으로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린 나유라는 이검한에게 전음을 보내며 급히 한쪽에 서있는 고목 위로 날아올랐다. 그 고목은 키가 크고 가지와 잎사귀가 울창하여 아래쪽에서는 나무 위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휘릭!

이검한도 즉시 나유라의 뒤를 따라 그 고목 위로 날아올라갔다.

먼저 고목 위로 올라간 나유라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서 녹원 밖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 나유라 옆으로 내려서던 이검한은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순간적으로 훅 느껴지는 그윽한 살 냄새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때문이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검한은 이미 여체의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여자의 살내음을 맡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의 일부가 뜨거워진다.

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고목의 굵은 가지 위에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는 바람에 나유라의 오른쪽 다리는 거의 대부분 적룡풍 밖으로 드러나 있다.

종아리는 탄력이 넘치면서도 미끈하고 뽀얀 허벅지는 한 아름은 됨직하게 풍만하다.

두근!

나유라 옆쪽의 가지 위에 쪼그려 앉으며 곁눈질을 하던 이검한의 가슴이 세차게 뛴다.

적룡풍이 갈라진 사이로 오른쪽 다리가 거의 다 드러난 탓에 나유라의 사타구니 깊은 곳도 일부 엿보였기 때문이다.

흐드러진 한 쌍의 허벅지가 아래위로 엇갈리는 중심부의 둔덕은 황금빛 방초로 덮여있다.

하지만 나유라의 신경은 온통 녹원 밖을 향해 있는 상태인지라 자신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검한아! 이 가엾은 여자에게 딴 마음을 품기나 하고...!)

나유라의 도발적인 자태에 자기도 모르게 매혹되었던 이검한은 이내 자책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시야로 기이한 광경이 들어온 때문이다.

쿠쿠쿠쿠!

녹원 밖의 사막에 갑자기 불룩한 두둑이 생기더니 일직선으로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두더지가 땅속으로 길을 내며 다가오는 것처럼....

이검한보다 먼저 그 현상을 발견한 나유라가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써서 설명해주었다.

저것은 유사마부(流砂魔府)라는 신비문파의 독문무공인 토룡사행둔(土龍砂行遁)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사마부!)

나유라의 설명을 들은 이검한은 해연히 놀랐다. 그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품 속에 있는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을 어루만졌다.

(혹시 유사마부는 유사신령의 후손들이 세운 문파가 아닐까?)

이검한은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긴 두둑을 보며 염두를 굴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천 년도 전에 죽은 서역사천왕의 명맥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검한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쿠오오오!

돌연 모래가 허공으로 확 번지며 인간의 상반신이 모래 밖으로 불쑥 드러났다.

상반신을 모래 밖으로 드러낸 인물은 노인이었다. 음침하고 괴팍한 인상의 노인인데 늘 땅 속에서만 살아서인지 피부가 아주 창백했다.

노인은 양 손에 두더지 발 모양의 기형도구를 차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으로 모래를 파고 전진하는 듯했다.

오기는 제대로 찾아왔군!”

상반신을 밖으로 드러낸 노인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시력이 약한 듯 눈을 찡그리며 햇빛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부가 그 빌어먹을 놈보다 먼저 온 것일까?”

노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촤아!

이어 그는 하반신마저 완전히 모래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그렇지 않다. 본좌는 늙은이 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갑자기 호수 쪽에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 “...!”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이검한과 나유라는 동시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호수가에 한 명의 괴인이 굵은 고목을 등진 채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온통 시뻘건 피빛 천으로 휘감은...!

비단 옷의 색깔만 붉은 게 아니었다.

츠츠츠!

괴인의 몸 주위로는 핏빛의 안개같은 것이 칙칙하게 휘돌고 있었다.

나유라는 물론 이검한도 절정의 내가고수다. 그들보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은 서역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혈포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서운 고수다!)

이검한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괴인을 주시했다.

츠츠츠...

혈포인의 몸에서는 핏빛의 안개 뿐 아니라 섬뜩한 마기(魔氣)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 마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워지는 이검한과 나유라였다.

아연긴장한 두 사람은 숨을 멈추고 심장 박동도 극한까지 느리게 만들었다. 자칫 혈포인의 이목에 감지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때문이다.

혈포인보다 먼저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도 보기 드문 고수다. 단순히 내공만 따져도 노인은 이검한이나 나유라를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역시 혈포인이 흘려내는 음산한 기세에 주눅이 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자칭 혈황(血皇)이란 말종이냐?”

노인은 위축된 내심을 감추려는 듯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혈황!)

순간 이검한과 나유라는 경악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만큼 혈황이라는 이름은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신마풍운록 서열 이위(二位)!

 

혈황은 바로 저 신마풍운록에 고독마야 연남천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독천존, 유령마제, 태양신협등 사방무제(四方武帝)들보다도 앞 선 서열로 기록된 혈황은. 그러나 그의 신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

이름과 출신내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비밀에 쌓여있다.

누구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혈황이 신마풍운록의 서열이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했다.

혹자는 혈황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 했고 또 혹자는 그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 세력의 주인일 것으로 추측했다.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상 최강의 세력 마교(魔敎)의 당대 교주가 혈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혈황이 신마풍운록을 작성한 장본인일 거라는 말도 떠돌았다.

별 볼일 없는 어떤 인물이 자기만족을 위해 신마풍운록을 만들면서 자신에게 혈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서열이위로 올려놓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혈황은 신마풍운록에 이인자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혈황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혈황의 이름이 의외의 장소에서 거론된 것이다

 

(저자가 정말 고독할아버지에 이어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는 혈황일까?)

이검한은 필사적으로 흥분을 억누르며 혈포인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대단한 고수이긴 하다. 이모보다도 강해보이는 걸 보면...)

온몸이 칙칙한 피빛 노을에 뒤덮여 있는 혈포인을 살펴보며 이검한은 새삼 긴장했다.

고독마야와 누란왕후 흑요설, 현음마모를 제외한다면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을 능가하는 고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흐흐흐! 허세를 부릴 거 없다 지둔노조(地遁老祖)! 기왕 일찍 도착했으니 서로의 용무나 빨리 해결하면 되지 않겠느냐?”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이 음산한 음성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역시 저 노인의 지둔노조 유마조율(維魔朝律)이었구나!”

고목 위에 숨어서 보고 있던 나유라가 다시 전음입밀로 이검한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마마께서 아시는 사람입니까?”

이검한도 전음입밀을 써서 되물었다.

그렇다. 저 노괴는 당금의 서역무림에서 최강자들로 꼽히는 하토삼기(蝦土三奇)중 지둔노조다!”

나유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둔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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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살려 보낸 여살성

 

 

한 바탕의 혈우성풍(血雨腥風)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이라트부의 무사들 중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다만 철목풍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자는 수하들이 이검한의 손에 몰살당하는 틈을 타 사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자가 이검한의 추격을 뿌리칠 가능성은 없다.

(이런...)

하지만 철목풍을 추격하려던 이검한은 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했던 첫 번째 청년의 시체를 밀어내고 또 다른 청년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 때문이다.

이검한으로서는 그 청년들이 나유라가 기른 심복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단지 달단여왕으로 보이는 여인을 능욕하는 색마들로 보일 뿐이다.

감히....”

쩌어어엉!

분노한 이검한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낭아검에서 시퍼런 검강이 쭉 내뻗어 네 청년의 몸뚱이를 휩쓸어버렸다.

퍼퍼퍽! 후두둑!

검강이 스치는 순간 네 명의 청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이 동강나 사방으로 쓰러져 버렸다.

흑혈맹호단의 청년들로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그 죽음이 차라리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제 정신이 돌아왔다면 자신들의 여왕을 능욕했다는 죄책감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 “....!”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이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이검한과 하후진진, 그리고 다섯 청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목욕을 한 달단여왕 나유라 뿐이었다.

이검한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의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하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저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이검한으로서는 이것이 두번째 살인이다.

첫 번째 살인에서 십여 명을 죽였는데 두 번째 살인에서는 무려 오십여 명이나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를 견디지 못해 최근에 연마해낸 낭아검법과 화염마강을 전력을 다해 시전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철목풍의 수하들이 몰살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태연하게 살인을 하다니... 이러다가 나란 놈은 전대미문의 살인귀가 되는 게 아닐까?))

이검한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죽어랏!”

!

독살스러운 외침과 함께 한 자루 비수가 벼락같이 이검한의 등을 찔렀다.

독수를 쓴 것은 물론 하후진진이었다.

하후진진은 처음에는 이검한의 무서운 신위에 압도당해 온몸이 얼어붙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하후진진의 가슴 속에서 독랄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극독이 발려진 비수로 이검한의 등을 찌른 것이다.

(죽였다!)

하후진진은 비수 끝에 닿는 묵직한 느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독비(毒匕)는 이검한의 등에 위치한 사혈(死穴)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하지만 하후진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회심의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자신의 독비가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조차 뚫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하후진진으로서는 이검한이 걸친 적룡풍이 도검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희세지보라는 것을 알 리 없다.

이검한은 적룡풍 덕분에 독비에 찔리고도 그저 움찔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 이럴 수가!”

하후진진은 얼굴을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이며 비칠 물러섰다.

이검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부르르!

돌아서는 이검한의 시선과 마주친 하후진진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쩌엉!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검한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불에 달궈진 시뻘건 부젓가락으로 머리 속이 휘저어지는 것같은 전율을 느낀 것이다.

사갈(蛇蝎)같은 심보를 지녔구나! 나이도 어린 계집이...!”

이검한은 무서운 눈으로 하후진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흐윽...!”

이검한의 일갈에 하후진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 낯선 소년이 내뱉은 한마디가 잘 벼려진 비수처럼 방심을 파고든 것이다.

인생이 가엾어서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혼은 좀 나야한다!”

이검한은 준엄하게 일갈하며 유령같이 하후진진 앞으로 다가왔다.

!

다음 순간 하후진진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호되게 뺨을 얻어맞았다.

!”

퍼억!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군 하후진진의 왼쪽 뺨이 삽시에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꺼져라!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네년의 그 악독한 심장을 뽑아내 으스러트려버릴 것이다!”

이검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후진진을 내려다보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하후진진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이 똑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치심과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다!”

하후진진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독기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러운 사내놈아! 오늘 나 하후진진에게 모욕을 준 대가는 언제고 갚고 말테니까!”

하후진진은 한 서린 저주가 실린 독설을 이검한에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검한은 하후진진이 퍼붓는 저주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에 이검한에게 저주를 퍼부은 하후진진의 모습은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장차 세상을 피로 씻을 여살성(女殺星)을 살려준 느낌이 든다!)

이검한은 사라지는 하후진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하후진진을 쫓아가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 악독한 계집이 오늘 내 손에 죽지 않은 것도 정해진 운명이겠지.)

쓴웃음을 지은 이검한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에게 다가갔다.

헌데 나유라에게 다가가던 이검한은 움찔하며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유라의 지금 모습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몸이 된 채 혼절해 있는 나유라의 풍만한 육체는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시신에서 뿜어진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한 걸음 늦었구나!)

가까이 다가가 나유라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던 이검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몸에 유린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유라의 무참한 자태를 본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한걸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일국의 여왕인 나유라의 고귀한 육체가 유린당한 것이다.

(이 비밀은 영원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검한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달단부의 결속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유라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혼절하여 그 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

(가엾은 여자다.)

이검한은 한숨을 쉬며 찢긴 옷가지를 주어모아 나유라의 몸에 칠갑이 되어 있는 피를 대충 닦아주었다.

피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에 나유라의 풍만한 알몸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하지만 이검한은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피에 젖은 그녀의 무참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크!)

그러다가 이검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움찔했다. 멀리 남동쪽 지평선으로 작은 점이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 점은 아마도 철산산과 포대붕일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자. 생모의 이런 무참한 모습을 보면 산산공주가 큰 충격을 받을 테니...!)

파천마도를 회수한 이검한은 적룡풍을 벗어 나유라의 나신을 감쌌다.

스읏!

그리고는 적룡풍에 싸인 나유라의 알몸을 두 팔로 안아들고 서쪽으로 질풍같이 몸을 날렸다.

삽시에 이검한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졌다.

지옥같은 참극이 벌어진 장내에도 어느덧 눈부신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녹원(綠園;오아시스)-!

망망한 사막 가운데 아담한 녹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도는 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을 작은 녹원이다.

녹원 가운데에는 맑은 물이 고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이라는 말이 어울릴 작은 크기의 호수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에서 피어오르는 실같은 아침 안개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찰박! 찰박!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물소리와 함께 능어같은 여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풍만한 여체다.

조심조심 호숫물로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덕분에 여인은 한층 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달단여왕 나유라!

호수에 가슴까지 몸을 담근 채 몸을 씻고 있는 금발의 여인은 물론 나유라였다.

(철목풍!)

찰박! 찰박!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풍만한 몸을 씻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순진하던 진진이를 저토록 악독하게 만들다니... 네놈의 죄는 열 번 죽어도 부족하다!)

나유라는 하후진진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딱히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핏덩이일 때부터 보아온 탓인지 하후진진이 그녀 자신의 친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철목풍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철목풍은 끔찍한 일을 겪은 하후진진을 위로하고 달래주기는커녕 복수심을 부추켜 사갈독심을 지닌 독한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말 신비한 아이다!)

철목풍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던 나유라는 흘깃 한쪽을 돌아보았다.

한쪽 호숫가에는 이검한이 나유라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녹원으로 나유라를 데려와 그녀로 하여금 목욕을 하게 해준 것이다.

(나이가 많아봐야 산산이 보다 두 세살 위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철목풍 조차 능가하는 내공을 지녔다니...!)

나유라는 이검한의 늠름한 뒷모습을 주시하며 숨결이 약간 더워졌다.

자신은 이검한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까지 적나라하게 보였었다. 아들뻘인 어린 소년에게 속살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릇한 설레임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나유라는 십 년 넘게 사내와 관계해 본적이 없었다.

철산산을 낳은 후 그녀는 산후조리를 잘못 해서 상당히 살이 쪘었다. 거의 백오십 근이나 나가 어지간한 사내들보다도 무거운 체중을 지녔었다.

원래 살집이 있고 키가 큰 데다가 살까지 디룩디룩 쪄버리자 남편인 철고륜은 질색하며 그녀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젊고 날씬한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돼지처럼 살이 찐 그녀를 본처라는 이유만으로 상대해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철고륜이 여전히 매력적이고 날씬한 하후란에게 빠져 버린 데에는 나유라가 한 때 비만한 뚱보였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그후 나유라는 무공 연마에 정진하여 다시 원래의 체형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한번 떠난 남편의 애정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드세고 도도한 나유라의 성격상 남편의 애정을 되찾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아양을 떠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여자로서의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절부터 독수공방을 해야만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육체적인 본능을 억눌러 오긴 했으나 물론 그녀가 완전히 석녀(石女)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부에는 쌓이고 쌓인 욕정이 폭발 직전의 수위로 쌓여 있었다.

가끔 뜨거워진 몸을 스스로 달래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손이나 이런 저런 민망한 도구를 이용한 부끄러운 시도는 오히려 갈증만 더 심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얄궂은 운명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이검한에게 모두 보이고 말았다.

그 때문일까?

왜곡된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나유라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귀엽고도 늠름한 저 소년이라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몸을 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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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원의 손길

 

 

-흑혈맹호단(黑血猛虎團)!

 

나유라가 오이라트부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길러낸 달단부의 정예들이다.

달단부 최고의 용사들인 그들은 나유라의 총애 속에 영약과 무공비급을 마음껏 취해 수련해왔으며 그 결과 하나같이 일당백의 고수가 되었다.

나유라의 친위대격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은 그녀의 명령일하에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그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이었다.

나유라는 오이라트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일부 흑혈맹호단의 용사들을 수시로 오이라트부에 잠입시켜왔었다.

그 임무는 실로 위험한 것이라 열 명을 보내면 겨우 다섯 명이 살아 돌아올까 말까할 정도였다.

알몸으로 끌려온 청년들은 바로 오이라트부 땅에 잠입했다가 실종된 흑혈맹호단 용사들 중 일부였다.

옳구나! 이런 때 쓸려고 저놈들을 살려두었었구나!”

철목풍이 하후진진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알몸으로 끌려온 것을 보는 순간 하후진진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진진아! ......!”

나유라도 바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녀 역시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크으! 용서하십시오 여왕님!”

... 속하들이 무능하여 이런 수모를 당하시게 했습니다.”

나유라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끌려온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분루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늘같은 자신들의 여왕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죄스러워 필사적으로 남성의 상징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들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지만 지금은 내공이 전폐되어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흐흐흐! 정말 기막힌 계획이다!”

철목풍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흑혈맹호단의 청년들과 나유라를 번갈아보았다.

호호호! 아버님은 제게 감사해야만 하실 거예요. 저 때문에 머잖아 달단부가 저절로 아버님의 손아귀에 굴러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하후진진도 청년들과 나유라를 보며 교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이 암캐의 부하들이 이 근처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때 그 자들은 보게 되겠죠. 평소 그렇게 도도하고 잘난 척했던 자신들의 여왕마마께서 스스로 기른 흑혈맹호단의 젊은 것들과 재미를 보며 교성을 질러대는 꼴을...!”

...그런!”

... 이 간악한...!”

듣고 있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이 진저리를 쳤다. 그들도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으하하! 절묘하구나 절묘해! 결국 여왕마마께서는 달단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흑혈맹호단을 만든 셈이 될 테니...!”

철목풍은 득의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 자는 분노와 충격으로 치를 떨고 있는 나유라를 쓸어 보며 느물거렸다.

여왕의 그 기막힌 치태를 보면 당신 부하들은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놈에게까지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소?”

철목풍의 그 말을 들은 나유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달단부는 사분오열 될 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달단부는 내 것이 되겠지.”

... 이 악독한 인간들...!”

나유라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철목풍의 말대로였다.

현재의 달단부는 나유라의 권위에 의지하여 결속이 유지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젊은 용사들과 야합을 하는 현장이 보여지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끝장일 것이다.

나유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테고 달단부의 위태롭던 결속은 일거에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분열된 달단부를 오이라트부가 집어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나유라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절박해진 나유라는 급기야 하후진진에게 애원까지 했다.

제발! 진진아! 이러지 말거라. 그래도 너 역시 달단부의 사람이 아니냐?”

물론 소용은 없었다.

내가 달단부의 사람이라고? 웃기지 마라! 내 아버지가 오이라트부의 용사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하후진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년의 남편은 가증스럽게도 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겁탈했다! 호호호! 이제 남편이 지은 죄의 대가까지도 나유라, 네년이 대신 치루어야만 한다!”

하후진진의 악에 바친 교갈에 나유라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나유라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날 깨끗하게 죽여 다오! 그래도 한 때 달단부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유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녀는 이미 대식국의 공주로서, 또 달단일족의 여왕으로서의 긍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아들이 이어받을 달단부가 사분오열되어 결국 오이라트부에 병탄당하는 일을 방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유라의 필사적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하후진진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작해라!!”

하후진진은 냉혹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을 끌고 온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각기 하나씩의 유리병을 꺼내들고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 죽어버리자 형제들!”

만수무강하십시오 여왕님!”

사태를 깨달은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은 비통하게 외치며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죽어버려야만 여신같은 존재인 나유라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한걸음 늦고 말았다.

어림없는 짓이지!”

파파팟!

청년들의 그같은 반응을 예견하고 있던 철목풍이 벼락같이 지풍(指風)을 날려 그들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린 것이다.

!”

크흑!”

청년들은 아혈이 짚혀 입을 딱 벌렸다.

어리석은 놈들이로군! 재미를 보게 해주겠다는데도 뒈지겠다고 날뛰다니...!”

클클! 그러게 말일세!”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음험하게 웃으며 다섯 청년의 벌어진 입에 유리병에 든 액체를 쏟아 부었다.

꺼억!” “끄윽!”

강제로 유리병의 액체를 들이킨 청년들의 몸에서는 즉시 반응이 나타났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온몸의 혈맥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애쓰던 그들의 남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용틀임을 해대었다.

으으으!” “크흐흐!”

어느덧 그들의 비통함으로 젖어있던 눈동자도 발정 난 짐승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번들거린다.

(흐윽!)

청년들의 야수같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나유라는 절망감으로 전율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청년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나유라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만이 자신들의 몸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식혀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호! 풀어줘라!”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하후진진이 다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커렁! 철컹!

그러자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은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막혔던 혈도와 팔 다리를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크헝!” “크으으으!”

쇠사슬에서 풀려난 청년들은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일제히 나유라를 덮쳐갔다.

... 안돼! 정신차려라! 아악!”

나유라가 다급히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 찌직!

나유라를 덮친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옷을 찢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안돼! 안된다!”

나유라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인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옷이 야수로 변한 청년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가면서 나유라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허어... 기막히군!”

발가벗겨진 나유라의 모습을 본 철목풍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드러난 나유라의 나신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유라를 발가벗긴 청년들은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라! 제발... 제발 정신 차려라!”

청년들에게 깔린 나유라는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울부짖음조차도 이내 청년들의 거친 숨소리에 묻혀버렸다.

달단부의 수백만 신민들이 여신처럼 떠받들던 나유라의 육체가 욕정에 눈이 뒤집힌 젊은 숫컷들의 손과 입에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악!”

그리하여 어느 순간 나유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축 늘어졌다.

마침내 그녀의 육체는 젊은 숫컷들 중 한명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호호! 아쉽구나. 네년의 이런 모습을 달단부의 모든 사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하후진진은 나유라가 자신이 기른 청년들에게 유린당하는 무참한 모습을 장면을 보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은 그런 하후진진 옆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일 이검한에게 다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 자신이 먼저 나유라를 능욕했을 것이다.

헌데 그 직후였다.

!”

나유라의 육체를 가장 먼저 정복한 채 몸부림치던 청년이 돌연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푸학!

이어 청년의 목이 삐끗하더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으며 잘려진 목에서 피의 분수가 치솟아 나유라의 뽀얀 알몸 위로 흩뿌려진다.

터어엉!

직후 새파랗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나유라가 누워있는 바닥 옆의 바위에 반 넘게 박혔다.

칼날이 너무 새파래 거의 반투명하게까지 보이는 그 보도(寶刀)가 어디선가 날아와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한 청년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흐윽!”

돌연한 사태에 하후진진은 진저리를 치며 주춤 물러섯다.

... 네놈은!”

헌데 하후진진이 어찌된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쪽에서 철목풍의 경악에 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후진진의 시야로 현장에 있던 오이라트부의 무사들이 한쪽 모래 언덕 너머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의 손에 들린 칼날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 번쩍 광채를 일으킨다.

콰콰쾅! 퍼펑!

케엑!” “크억!”

직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여러 번의 단말마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죽일 놈들!”

쐐애애액!

아연실색하는 하후진진의 눈으로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한 명의 소년이 모래 언덕 너머에서 질풍같이 치솟아 올라 좌측으로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타는 듯 붉은 피풍의를 몸에 두른 건장한 체격의 소년인데 그 소년이 덮쳐가는 쪽에는 새파랗게 질린 철목풍이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물론 이검한이었다.

그가 마침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 막아랏!”

철목풍은 좌측의 모래 언덕 쪽으로 달아나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미 한차례 충돌에서 이검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맛본 그자는 이검한이 나타나는 즉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웃!”

이놈! 죽어랏!”

화라락! 쏴아아아!

그 직후 철목풍이 달아나는 쪽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라 이검한을 짓쳐갔다.

오이라트부 최강의 정예들인 그들은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몽고의 대초원을 주유하면서 단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다.

바득! 주인을 잘못 만난 죄다!”

이검한은 살기 어린 일갈을 내지르며 벼락같이 양손을 동시에 흔들어냈다.

쩌어어엉! 꽈르르릉!

그러자 그의 왼손에는 톱날같은 날이 선 낭아신검이 들려 허공을 그었고, 오른손 장심으로부터는 시뻘건 섬광이 일어났다.

크아악!”

케에에엑!”

다음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수십 명이 일거에 몰살당하며 선혈이 난비했고 잘려진 육신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살이 타들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한다.

 

-낭아살륙검법(狼牙殺戮劒法)!

-화염마강(火焰魔罡)!

 

천붕랑왕과 마화존자의 무공이 천여 년 만에 시전된 것이다.

서역 무림사상 최강자들이라는 서역사천왕의 절기를 오이라트부의 졸개들 따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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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악독한 소녀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어머니의 원수!”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독기서린 교소를 터뜨렸다.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나유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혈이 찍히는 바람에 지금의 나유라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유라를 암습하여 쓰러트린 소녀는 원한과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크윽... 너는 누구냐?”

딸 뻘인 어린 소녀에게 젖가슴이 짓밟힌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에 찬 신음을 토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찌직!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저고리를 거칠게 좌우로 벌렸다. 고름이 뜯기며 벌어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금방 내린 눈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흐윽!”

헌데 나유라는 저고리가 벌어지는 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봉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자로 길게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진(眞眞)... 진진이로구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나있는 열십자의 흉터를 본 나유라는 전율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소녀는 그런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오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 년 전, 나유라의 남편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당한 것은 하후란이라는 여인이었다.

하후란은 대단한 미인으로 철고륜이 나유라와 결혼하기 전부터 총애하던 후궁이었다.

철고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온 하후란이지만 달단부의 안주인이 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달단부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뱃속에는 전 남편의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철고륜은 천산(天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하후란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미태에 반해 강제로 납치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본래 색탐이 심했던 철고륜은 하후란이 남의 아내이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 따위는 아랑곳 않고 욕심을 채웠다.

하후란이 워낙 빼어난 미녀였기에 철고륜은 얼마 후 대식국의 공주 나유라와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하후란을 총애했다.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된 후 반 년 만에 여자 아이를 낳았었다. 당연히 그 여아는 하후란 전남편의 딸이었다.

하지만 하후란의 미태에 푹 빠진 철고륜은 그 여자아이를 자신의 딸로 삼고 자신의 성씨인 철()씨까지 물려주었다.

 

-철진진(鐵眞眞)!

 

이것이 그 여아의 이름이었다.

비록 하후란의 전 남편 딸이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영특했던 철진진은 철고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철고륜은 도도한 본처 나유라의 몸에서 난 친 딸 철산산보다 오히려 양녀인 철진진을 더 귀여워할 정도였다.

헌데 오 년 전, 하후란과 철진진 모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철고륜이 하후란과 방사를 하던 도중 복상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하후란을 질시하던 다른 후궁들은 하후란이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녀가 철고륜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유라는 하후란을 형리(刑吏)들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하후란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저 단순히 고문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형리들은 그래도 한때 자신들의 왕의 후궁이었던 하후란을 돌아가며 능욕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녀가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하후란은 남편의 부하들에게 몸을 더럽힌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유라는 하후란을 욕보인 형리들을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하후란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버렸다.

하지만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하후란의 딸인 철진진이 오 년 만에 나유라 앞에 나타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나유라는 철진진이 형리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극이 일어날 당시 철진진의 나이는 불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형리들은 하후란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린 철진진을 발가벗겨 놓고 그녀의 여린 가슴을 비수로 갈랐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후란이 보는 앞에서 철진진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도 하후란은 끝내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자백을 해봐야 자신들 모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하후란은 형리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었다.

하후란이 자살한 후 형리들이 철진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후란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져 처형당하면서도 철진진의 처리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유라는 어린 철진진 역시 형리들에게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흐흐흐! 오 년 만에 모녀가 상봉한 소감이 어떻소? 비록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철목풍은 마혈이 찍힌 채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그녀가 던져준 장보도가 들려 있었다.

나유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신음을 토했다.

... 오 년 전 그때 진진이를 구해간 게 철목풍 네놈이었느냐?”

그녀의 물음에 철목풍 대신 철진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오년 간 양부(養父)의 슬하에 숨어서 네년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려왔다!”

철진진, 아니 하후진진은 철목풍의 양녀가 된 상태였다.

 

오 년 전, 철목풍은 철고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단부의 내정을 염탐하기 위해 은밀히 달단부에 잠입했었다.

그러다가 하후진진 모녀가 갇힌 뇌옥을 발견했으며 그 뇌옥의 어느 빈 감옥에서 죽어가던 하후진진을 구출한 것이다.

나유라가 예상했던 대로 형리들은 하후란을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하후진진까지 짓밟는 만행을 자행했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어린 몸으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하후진진은 기식이 엄엄했었다.

사실 하후란이 혀를 물고 자살한 것도 딸이 형리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육중한 몸 아래 깔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바둥거리는 어린 딸의 무참한 모습에 하후란은 하늘을 저주하며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하후란이 자살해버리자 형리들은 당황하여 하후진진을 뇌옥의 후미진 감옥에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후진진은 사경을 헤매던 중 철목풍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호호호! 구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우하사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후진진은 광기에 찬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나유라는 그런 하후진진을 처연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진아!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달단과 오이라트 양 부족의 갈등이 그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나유라의 말 대로였다.

달단부의 형리들이 자신들의 왕의 여자였던 하후란과 그녀의 딸 하후진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녀들이 오이라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달단부와 오이라트부 사이에 벌어졌던 수다한 격전은 두 부족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오이라트부와의 싸움에서 피붙이를 잃지 않은 달단부의 가정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형리들은 하후란과 하후진진 모녀를 욕보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너와 네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전부 내손으로 처단했단다. 아무쪼록 그때 벌어진 일이 내 본의가 아님을 알아다오!”

나유라는 애절한 음성으로 하후진진에게 애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런다고 네년을 동정해줄 줄 아느냐?”

하후진진은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나유라의 말을 막았다.

!”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모인 나유라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양녀인 하후진진의 침이 얼굴에 튀기자 나유라의 옥용은 굴욕과 회한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하후진진은 그런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바득! 네년 때문에 우리 모녀가 당했던 일을 네년도 경험하게 해주마!”

... 너 설마!”

순간 나유라는 아연실색하며 하후진진을 바라보았다.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목풍이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흐! 너희 모녀가 당한 일을 여왕도 경험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이 애비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철목풍은 나유라의 육감적인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쓸어보았다.

나유라는 철목풍이 하후진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을 깨닫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하후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사악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단순히 겁탈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계집을 너무 봐주는 것이지요!”

하후진진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만행을 당한 하후진진의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청을 들게 하면 이 암캐가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내와의 그 짓을 굶주려왔으니까요!”

하후진진은 작은 발로 나유라의 몸을 툭툭 걷어차며 사악하게 웃었다.

철목풍은 하후진진의 말에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노리개로 주지 않겠다면 여왕마마를 어찌 대접하려는 것이냐? 설마 여왕이 네 의모라고 봐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후진진은 광기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소녀가 쓰려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대원제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거예요!”

허어! 그러냐?”

아쉬워하던 철목풍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번득였다.

그놈들을 데려와라!”

하후진진은 뒤쪽의 사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예 공주님!”

사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이어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오이라트부 무사들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왕님!”

알몸으로 끌려오던 청년들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발견하고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청년들을 본 나유라의 안색도 하얗게 변했다.

청년들은 나유라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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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달단족의 여왕

 

 

여명 무렵이다.

길고 길었던 사막의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뿌려대는 눈부신 햇빛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사막을 가로질러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바득! 산산이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라트(衛拉), 네놈들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 찬 표정인 채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화사한 비단옷 위에 두터운 피풍을 두른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金髮)이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로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인데 한 가지 흠이라면 인상이 지나치게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라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다보니 여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 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젊은 여인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완숙한 관능이 숨 쉬고 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을 막히게 만든다.

금발미부는 한 자루 활을 들고 있으며 등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다.

허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도 한 자루 차고 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섬전 같았다.

그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의 일신 무공은 결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은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였다.

산산!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

 

몽고의 양대 부족 중 하나인 달단(韃靼)부의 젊은 여왕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공주였다.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부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주들 중 한 명을 달단왕과 정략결혼 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나유라였다.

당시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질 수는 없었다.

비록 두 명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스무 살도 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질 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유라는 아들과 딸을 정성들여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헌데 오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이십대 후반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를 두고 한때 독살이라는 소문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라트부 출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라트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 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부를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부를 지배해왔으며 급기야 달단여왕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혈(鐵血)의 간담(肝膽)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딸인 철산산이 피납 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해 온 것이었다.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한 자루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누구냐?”

나유라는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랐다가 나유라 앞에 내려섰다. 음침하고 교활한 이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그렇다. 청포장한은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서 쫓겨 갔던 철목풍이었다.

철목풍은 장포 속의 가슴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 아닌 오이라트부의 신왕(新王)이다. 그자는 숙부인 전대 오이라트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이다.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도 했었다. 철목풍이 달단부와 오이라트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나유라는 그런 철목풍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스악!

그러면서 한 자루 철시(鐵矢)를 빠르게 활시위에 걸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유라는 신궁(神弓)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활 솜씨를 지녔다.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 것이니...!”

짝짝!

철목풍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뻑을 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쪽 사구(砂丘) 너머에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산산아!”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산이를 내놓아랏!”

쐐애애액!

활과 화살을 팽개친 나유라는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어딜!”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쳤다. 그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네놈이...”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으음!”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철목풍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여왕께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최근에 얻으신 장보도(藏寶圖) 말이오!”

철목풍의 말에 나유라는 움찔했다.

그자의 말대로 나유라는 얼마 전 한 장의 장보도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철목풍이 어떻게 알아낸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장보도라니?”

나유라는 내심의 동요를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철목풍은 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소!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쿠빌라이)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비로소 자신의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된다.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그러니 먼저 산산이를 이리 던져라!”

나유라는 차갑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지!”

나유라가 꺼낸 양피지를 본 철목풍은 두 눈을 탐욕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는 철목풍도 동의했다.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이어 철목풍은 뒤에 서있는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 보냈다.

산산아!”

!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산산아! 이제 안심... !”

헌데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금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것은 철산산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산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그 소녀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답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철산산과 달리 소녀는 아주 표독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소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

경악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이어 나유라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가짜 철산산이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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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초의 살인

 

 

(허억!)

막 철산산의 애처로운 육체를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일어났다.

... 네놈은...?”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 끝을 밟고 표연히 서있었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특이하게도 이 소년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타는 듯 붉은 색의 바람막이, 즉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피풍의가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그러자 드러나는 소년의 양쪽 허리춤에는 각기 칼과 검 한 자루씩이 꽂혀있다. 폭이 얇은 칼과 반대로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이다.

칼의 이름은 파천마도(破天魔刀)고 검의 이름은 낭아신검(狼牙神劍)이다.

이검한-!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대과벽 중간쯤에 숨겨져 있는 현음동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준 철익신응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과벽에서 곤륜산 남쪽에 자리한 장춘곡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된다.

가려면 못갈 것도 없지만 열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현음동천에 머물면서 서역사천왕의 무공을 연마하며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늘 밤 현음동천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라와 본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철목풍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철목풍은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모습에 방심하게 되었다.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보면 안되는 장면을 보다니...!”

철목풍은 이검한에게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죽어랏!”

그리고는 일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카카캉!

철목풍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잔양강살(殘陽罡煞)!”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인데 스치기만 해도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철목풍이 날린 잔양강살이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 저럴 수가...!”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의 몸이 그저 움찔했을 뿐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의 하나인 적룡풍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에 지금 이검한의 내공은 철목풍보다 두 배 이상 심후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철목풍이 구사한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는 이검한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다.

... 죽여랏!”

철목풍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이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자는 부하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자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 해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 판단되면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와아!”

죽여라!”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케에엑!” “크에엑!”

그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퉁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뒹군 장한들의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깨져있었다.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철목풍과 포대붕도 이검한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달아나야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에에엑!”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고 보자!”

피이이잉!

이어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께 철목풍의 몸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철목풍은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검한은 난생 처음 살인을 한 탓에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들자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헌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렸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이검한이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을 상대해본 후였다.

철목풍조차 이검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간단히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목풍에게 겁탈 당할 뻔한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알몸을 본 때문이다.

(누란왕후나 현음마모님과는 또 다르구나!)

중심부에 소담스러운 황금색 춘초(春草)가 덮여있는 철산산의 아랫도리를 훔쳐보며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인들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여 똑같을 수 없다.

하물며 이검한이 본 누란왕후 흑요설이나 현음마모의 알몸은 난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반면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 소녀다.

황금색 솜털로 덮여있는 철산산의 중심부를 본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검한이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비밀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현음마모의 몸을 오랫동안 품어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든다.

(다행히 수혈이 짚혀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검한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 보낸 이검한이건만 가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포대붕은 이검한이 철산산의 알몸에 손을 대자 아연긴장했었다.

하지만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포대붕이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포대붕의 아내인 교숙하의 무덤이었다. 철목풍에게 납치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인...

포대붕은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아내의 시신을 안장한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혈이 풀려 정신을 차린 철산산은 벽안을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철산산은 아버지뻘인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늠름해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뺨을 살짝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감사는 무슨...!”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자님!”

고개를 숙인 포대붕은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韃靼王府)의 큰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 분골쇄신으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그의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대붕의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포역사?”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호위도 대동하지 못하신 채 속하를 추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포대붕의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이 포대붕에게 물었다.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저쪽입니다!”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대붕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이검한의 그 신쾌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벌렸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보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천산산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어 미소를 지었다.

(산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소녀의 은밀한 설레임 속에 서역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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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처절한 일막

 

 

청포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반월도(半月刀)가 꽂혀 있다.

또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난 오른쪽 손목에 특이한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무쇠로 만든 팔찌인데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는 징기스칸의 상징이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교숙하를 납치한 장본인인 철목풍이었다.

그 계집이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겠군!”

철목풍은 포대붕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음침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라!”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에 찬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는 장차 대원제국의 가한(可汗;황제)이 될 존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

철목풍은 음산하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두두두!

그러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대과벽쪽으로 달려왔다.

그 말들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명씩 타고 있는데 맨 앞쪽에서 달려오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양쪽 손목이 함께 묶인 채 질질 끌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의복이 갈가리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분노와 안도감을 함께 느끼며 포대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래선 안돼지!”

꽈르릉!

하지만 철목풍이 음험하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철목풍! 네놈이...!”

포대붕은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휘릭!

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로 지면으로 내려서야했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은 장내에 이르러 멈춰 섰다.

그 즉시 선두의 장한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으으으!”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그 여인은 바로 포대붕 자신의 아내인 교숙하였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아도 교숙하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같았다.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데려온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웃었다.

죽일 놈!”

포대붕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라!”

휘익!

포대붕은 안고 있던 금발소녀 철산산을 철목풍에게 던졌다.

으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철목풍은 날아든 철산산을 두 팔로 받아 안으며 득의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자신의 두 팔에 안긴 철산산을 내려다보는 철목풍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찢어 죽일...!”

헌데 아내 곁으로 내려선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교숙하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교숙하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쳐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교숙하의 아랫도리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오는 도중에 알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하의가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숙하는 이미 수많은 사내들에게 짓밟힌 상태였다.

으으으...”

아내의 상태를 살펴보며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징기스칸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속을 지킬 줄 알았다!”

포대붕은 아내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급히 풀며 철목풍을 향해 이를 갈았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철목풍은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뭐라고?”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철목풍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철산산의 얼굴을 살펴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교숙하의 허옇게 들어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교숙하를 유린하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하여간 불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이 짐승만도 못한...!”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 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포대붕에게 있어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 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으으음!”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해주자 교숙하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안심하시오 부인. 내가 왔소!”

아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부르르!

정신을 차린 교숙하는 눈을 부릅뜨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 당하던 와중에서도 잊지 않았던 남편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교숙하의 가슴을 메운 것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숱한 사내들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떠오른 때문이다.

!”

직후 교숙하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혓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교숙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문 것이었다.

... 부인!”

포대붕은 기겁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교숙하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런!”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푸들푸들 떨었다.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보고 있던 철목풍이 혀를 찼다.

... 뭐라고?”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같지 않게 보이는 그였다.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네 마누라의 꿀단지를 가장 먼저 맛본 건 바로 나였다. 내게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의 몸 아래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죽인다!”

쐐애애액!

철부를 뽑아든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가 대지를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커억!”

콰당탕!

하지만 다음 순간 피를 뿌리며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 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로 덤빈 결과 철목풍의 단 일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교숙하가 당한 무참한 일들을 떠벌린 것이다.

크으... ... 짐승만도 못한 놈!”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포대붕은 가슴의 혈도 몇 곳이 파괴되는 바람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다. 포대붕!”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집이 딸을 납치한 네놈을 어떻게 처단할지 궁금하구나!”

철목풍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

철목풍은 두 눈을 야릇하게 번득이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네놈 설마!”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마라!”

포대붕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혈도가 짚인 상태인 그가 철산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포대붕은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미 한 마리 짐승으로 변한 철목풍의 귀에 포대붕의 애원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철목풍은 철산산의 속옷도 거침없이 벗겨버렸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소녀의 교구는 말 그대로 황홀한 것이었다.

철목풍 주변에서 철산산의 알몸을 들여다보는 장한들의 눈이 짐승의 그것같이 번들거린다.

흐흐흐 기가 막히군.”

철산산을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놓은 철목풍의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우리 공주님의 꿀단지를 구경해볼까?”

철목풍은 극한의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산산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죽일 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악을 쓰던 포대붕은 선혈을 울컥 토해내고는 축 늘어졌다. 눈앞에서 어린 주인이 철목풍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기혈이 뒤집혀 기절한 것이다.

흐흐... 곧 달단여왕이란 오만한 네 어미도 본좌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목풍은 황금색의 춘초로 덮인 철산산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며 도착척인 흥분에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만 하지! 보기에 흉하니...!”

돌연 철목풍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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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과벽의 밤

 

 

내가 하루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이 원시천존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현음마모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이검한은 믿기지 않는 심정이 되었다.

자신이 철익신응을 만나 곤륜산에서 대과벽까지 날아온 것도,

누란왕후 흑요설에 의해 화룡단정은 먹은 것도,

화룡단정의 열기 덕분에 흑요설과 서역사천왕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현음마모의 거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 의도한 대로라는 것이다.

원시천존은 정말로 현음마모를 통해서 초연심결이 이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검한 자신에게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원시천존은 물론이고 현음마모 역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던 분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검한은 원시천존과 현음마모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현음마모가 초연심결을 깨우치기 위해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이 엿본 하늘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

현음마모는 그 초연심결을 이십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이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원시천존이 남긴 고금최강의 무공 대신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십여 년 동안 쓰지 않고 축적만 한 덕분에 그녀의 내공은 정심해질 대로 정심해졌다.

초절의 경지에 이른 그 내공 덕분에 현음마모의 수명은 보통 사람의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현음마모는 오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초연심결의 이치는 깨우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읽은 천기를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에 현음마모는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장생불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원시천존에게서 전수받은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응용하여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이라는 술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빙백불훼대법은 이름 그대로 강력한 냉기를 이용하여 혼백과 육신이 훼손되지 않게 보전해주는 술법이다.

현음마모는 빙백불훼대법은 써서 길고 긴 잠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현음진기를 수련할 때 사용했던 만년한옥도 그녀가 육신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장구한 세월을 거스른 현음마모가 다시 깨어나려면 태양같은 열기를 품고 있는 사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음마모가 원한 대로,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검한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본녀를 통해 네게 초연심결을 전하려 하신 이유를 알려주겠다.

너의 시대에는 악마의 화신이 등장할 것이며 그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을 반드시 깨우쳐야만 한다.

이것이 스승님이 네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내가 당신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고?”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이검한은 아연실색했다.

설마... 설마 내가 태양천자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이검한의 머리 속은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현음마모가 남긴 이글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비록 스스로를 어리석다 자조(自嘲)했지만 현음마모는 여자들 중에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여인이다.

심지어 천기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가 허튼 내용을 남겼을 리 없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을 것까지 알고 계셨던 분이니 내가 태양천자의 먼 후손이라는 암시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천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철이 든 이래로 처음 자신의 출생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검한이었다.

(장춘곡으로 돌아가는 대로 누나에게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이검한은 생각에 잠기며 현음마모가 남긴 비급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월동문 밖에서 한 쌍의 눈이 벽을 투과하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물론 그 눈의 주인은 현음마모였다.

 

현음마모는 이검한의 몸속에서 들끓는 화룡단정의 힘을 빌어 부활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현음마모는 화룡단정의 기운을 갈무리 하여 이검한의 단전에 넣어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음마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이검한에게 허락해야만 했다.

비록 빙백불훼대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지만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물며 그 소년은 자신이 사랑했던 정인의 먼 후손인 것이 분명한데...

정신을 차린 이검한과 얼굴을 맞댈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음마모는 이검한이 깨어나기 전에 종유동굴을 빠져나왔었다.

(볼수록 사형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다.)

두자가 넘은 두꺼운 석벽을 간단히 투과하여 이검한의 얼굴을 살펴보며 현음마모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저 아이의 앞날에 숱한 파란과 우여곡절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와줘서도 안되고 간섭해서도 안된다.)

현음마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축복은 종종 고난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정인의 후손인 소년이 걱정되어 자신의 손으로 고난을 해소시켜주다가는 소년에게 주어질 더 큰 축복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현음마모가 읽은 천기는 이검한을 지켜보기만 할 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복이 많은 아이이니 역경을 잘 헤쳐 나가며 성장할 것이다.)

현음마모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돌아섰다.

(빙백불훼대법으로 잠들어 있었던 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보자.)

걸음을 옮기는 그녀 앞에는 문이 아닌 석벽이 가로 막고 있다.

스윽!

하지만 현음마모의 몸은 그림자가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듯 석벽을 통과하여 난장판이 된 지하광장에 나타났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내가 맺고 있었던 인연은 모두 끊어졌을 것이다.)

유사신령의 시신이 잠겨있었던 공청석유의 연못을 지나며 현음마모는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천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장생불로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사연과 인간들은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음마모 자신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혼자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무섭고도 슬픈 일인가?

(세상을 둘러보다 지치면 저 아이를 찾아와 의지하면 되겠지. 비록 수십 세대가 지났겠지만 저 아이가 사형의 후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스윽!

벽으로 스며들어가며 이검한을 떠올리는 현음마모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 * *

 

밤이다.

서역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

동서로 삼천여리나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가 적막 속에 마치 한 마리 용처럼 누워 있다.

서쪽 지평선으로 갈아 앉고 있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뿌리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액!

문득 서북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인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모직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금발뿐만 아니라 마치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윤곽으로도 소녀가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금발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

장한은 먼 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여기로군!”

대과벽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흑의장한은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포대붕!

 

신력(神力)을 타고 난 그는 서역 일대에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진 역사(力士).

서역의 여러 부족들이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르며 경원하는 포대붕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교숙하(喬淑賀)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철목풍이라는 자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교숙하를 납치한 그자는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납치의 대상이 된 소녀는 다름 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포대붕은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 대한 애정과 근심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철목풍이란 자의 협박을 모른 척 한다면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숱한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결국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다.

 

-철산산(鐵珊珊)!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비록 원()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로부터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같은 인간이라 해도 징기스칸님의 핏줄인 산산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포대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아내만 구해내면 소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철목풍을 쳐죽일 것입니다!)

포대붕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할 때였다.

흐흐!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선택을 했구나 포대붕!”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 대 중반쯤의 장한인데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청포장한의 눈동자는 쉴 새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얄팍한 입술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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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고금제일인의 제자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장의 두루마리와 비단으로 엮은 책 한 권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사라진 흑의여인이 남긴 물건이겠구나!)

이검한은 두 가지 물건 중 두루마리부터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두루마리는 천잠사같은 것으로 짜여 진 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촤락!

두루마리를 펼치자 한 장의 그림이 나타났다.

이게 뭐지? 폭포를 그린건가?”

이검한은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은 아주 기괴했다. 그저 시커먼 먹물 자욱이 아래위로 죽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폭포를 그린 그림 같기도 하지만 그냥 성의 없이 아래위로 여러 번 먹칠을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기(玄氣)가 숨겨져 있다!)

이검한은 그 기괴한 그림을 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폭포를 그린 듯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

이검한이 다시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폭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다면 이 그림이 한 번의 칠로 그려진 게 아니라 수많은 선이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점이었다.

수백 수천 번의 붓 칠 끝에 완성되었을 이 그림에는 오묘한 현기와 신묘함이 내포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잠시 끙끙거리며 그림을 살펴보던 이검한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리고는 흑의여인이 남긴 두 번째 물건인 비단으로 엮은 책을 집어 들었다.

... 이런...!”

하지만 책자를 집어 들려던 이검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푸스스스!

이검한의 손길이 닿자 그 책이 위쪽부터 재로 변해 부서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책은 거의 이천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비록 좋은 재질의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이긴 하지만 이천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견디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이검한이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법 두툼하던 책이 마지막 서너 장만 남은 상태였다.

 

<현음마경(玄陰魔經)>

 

비급의 표지가 부서지기 직전 그 같은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 있었던 것이 이검한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음마경! 그렇다면 설마 그 흑의여인이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자였던 상고시대의 여기인 현음마모(玄陰魔母)란 말인가?)

이검한은 경악하며 흑의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음마모!

 

그렇다. 이검한이 폭주하는 화룡단정의 열기를 식히는데 도움을 받은 흑의여인은 바로 현음마모였다.

이검한은 그 사실을 몇 장 남지 않은 비급의 잔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몇장 남지 않은 비급에는 한 가지 씩의 장법(掌法)과 심법(心法), 그리고 현음마모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현음마모라 불리던 불운한 계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는 아마도 입에 올리기에 민망한 죄를 내게 지었을 것이다.>

 

전자체로 적힌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현음마모는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육체가 이검한에게 희롱당할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는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던 듯했다.

 

<모두가 운명의 장난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이루지 못한 심원을 이루어 준다면 내게 진 빚을 갚는 것이 되리라. 그것은 이 글과 함께 있는 그림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 그림 속에는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한 절기 한 가지가 감추어져 있다. 나는 그 그림을 스승으로부터 하사 받은 후 오랜 세월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의 강호에는 마치 용 같고 신선같은 절세기인이 한 명 있었다.

그 기인은 난세로 인해 사라질 뻔한 상고시대의 무공들을 수습하고 정리하여 무림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종사였다.

 

-원시천존(元始天尊)!

 

고금오대고수의 첫째이며 사실상 고금제일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안배와 노력 덕분에 중원무림의 역사는 아득한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원시천존은 너무나도 오래 전의 인물이다.

무려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당금의 무림인들 대부분은 원시천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혹시 별호는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어떤 무공과 제자들을 남겼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검한은 원시천존을 존경하고 그의 경지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의 후계자다.

덕분에 일반 무림인들과 달리 이검한은 원시천존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다.

고독마야의 말에 의하면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말 그대로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역시 고금오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고독마야조차 감히 헤아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심오해도 윈시천존 역시 유한한 수명을 타고 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백 살도 오래 전에 넘겨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만한 인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원시천존 자신에 필적하는 기재가 아니면 온전히 깨우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원시천존 정도의 재능이 같은 시대에 또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원시천존은 차선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만은 못해도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 불리기에는 충분한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한 것이다.

, 남자 제자에게는 양강(陽强)한 절기를, 여자 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전수한 것이다.

 

-태양천자(太陽天子)!

-현음마모(玄陰魔母)!

 

그들이 바로 원시천존이 거둔 남녀 제자였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삼초지적(三招之敵)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스승의 슬하를 떠나 무림으로 나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씩 문파를 세웠다. 태양천자는 숭양무벌(崇陽武閥),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창건했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흑백(黑白)으로 나뉘는 무림판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동문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 성격 탓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의 관계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게 되었다.

호승심의 대상은 연인이라 해도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연인관계가 깨진 정도가 아니었다.

연마한 무공과 성격이 상극이었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천수를 다하고 우화등선하게 된 원시천존이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원시천존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게 두 가지의 물건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이것들이었다.

태극보정은 원시천존에 의해 세워진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를 상징하는 보물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시대의 성군 순()이 구주(九州)를 순행한 뒤 만들었다는 구정(九鼎) 중 하나였다.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구정은 그러나 주()왕조가 유목민족인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그 구정중 하나를 우연히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에 태극보정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징표로 삼았었다.

, 원시천존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태극보정을 물려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원시무맥의 종사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용도 없었다.

그에 반해 초연심결은 엄청난 유혹을 품고 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마지막 절기가 숨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마해내는 자는 제이(第二)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천존은 제자들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중 한 가지씩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보물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초연심결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실로 난제였기 때문이다.

오랜 고심 끝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태양천자는 태극보정을,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한 것이다.

태양천자는 고금최강의 무공을 얻는 것 보다는 존경하는 스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승의 상징인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모는 태양천자를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경지를 넘보다니...>

 

이어지는 현음마모의 글에서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을 놓고 벌인 암투에서 패배한 것은 본명이 종선인 현음마모였던 것이다.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으로 은거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원시천존이 창안한 최후의 절기 초연심결을 익히는 것 이상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연심결의 이치가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현음마모는 여자중에서는 고금최강으로 불렸던 천고기재다.

그런 현음마모건만 이십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연심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이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의 절기인 초연심결의 도해(圖解)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해야만 했던 시절에 무려 이십여 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은 어리석은 제자를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먼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스승님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과 종국에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초연심결을 보전하는 역할이나 감당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님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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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회생

 

 

종유동굴의 다른 곳과 달리 우윳빛 반석과 그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에는 얼음이 덮여 있지 않다.

극한의 냉기는 얼음조차 증발시켜버린다.

반석도 그렇지만 흑의여인의 몸은 너무 차가워 얼음이 쌓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이검한은 헐떡이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흑의여인이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한기의 근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흑의여인이 누워있는 우윳빛 반석에서도 살을 에는 냉기가 느껴지긴 한다. 아마도 한옥(寒玉)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우윳빛 반석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냉기도 흑의여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한기에 비하면 봄바람 정도로 느껴진다.

! !

이검한이 반석으로 다가감에 따라 공기 중에서 쇠가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난다. 극한의 냉기가 흑의여인의 몸 주변에 첩첩이 쌓여 있다가 요동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꺼운 얼음으로 덮어버린 막대한 양의 냉기는 바로 이 흑의여인의 그리 크지 않은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허억!”

마침내 반석 옆에 이른 이검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반석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끄으윽!”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 이검한은 마치 얼음물에 뛰어든 듯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흑의여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극음한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연마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흑의여인의 몸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몸 근처 일 장 안으로 접근만 해도 지독한 냉기에 침습당해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버린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한 이검한만은 예외였다. 그의 몸속에는 활화산의 용암같은 열기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치치!

이검한이 흑의여인을 끌어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확 일어난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처럼 변한 이검한의 몸과 얼음보다 몇 배 더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이 닿으면서 주변의 공기가 응결하는 것이다.

쿠오오오!

이검한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열기는 반석 주변의 얼음들도 녹였고 그에 따라 수증기는 폭발적으로 짙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 아래 깔린 흑의여인의 몸도 수증기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검은색의 옷이 흠씬 젖어 피부에 달라붙자 흑의여인의 뇌쇄적인 육체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다.

크으... ...!”

흑의여인을 끌어안은 이검한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여체를 끌어안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검한의 몸 속은 여전히 펄펄 끓는 기름을 마신 듯한 초고열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화룡단정의 가공할 열독은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을 잠깐 끌어안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열독을 어떻게든 밖으로 배출해내야만 한다.

이검한은 살기 위해, 내장이 익어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 쳤다.

푸시시시!

두 사람의 맨살이 부벼지면서 달군 쇳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은 것같은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일어난다.

츠츠츠!

그와 함께 일어난 수증기는 급격히 짙어져 이제는 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오랜 세월 차가운 냉기만 흐르던 종유동굴은 삽시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검한의 몸에 고여 있던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고열은 맞닿고 문질러지는 살갗을 통해 흑의여인의 몸속으로 노도같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증기는 점점 더 짙어져서 마침내 드넓은 종유동굴을 가득 메우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체같이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이검한의 몸이 요동칠 때마다 축 늘어져 있던 흑의여인의 몸도 움찔 움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심지어 흑의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미약하지만 숨결이 토해지기까지 했다.

부활(復活)!

그렇다! 흑의여인은 오랜 가사상태(假死狀態)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흑의여인은 한 가지 술법(術法)을 스스로에게 걸어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다. 엄청난 냉기를 일으켜서 육신 뿐 아니라 혼백까지 얼려 시간의 해()를 극복해온 것이다.

다만 이 술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흑의여인 스스로는 술법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것이다.

누군가 용암처럼 뜨거운 양기를 그녀의 몸에 주입해주어야만 술법이 소멸된다.

그리고 흑의여인이 필요로 하는 막강한 양기는 이검한의 몸에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이검한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문질러대는 살갗을 통해 주입되고 있는 그 순양지기가 흑의여인의 얼어붙어 있던 피를 덥히고 순환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두근 두근

마침내 오랫동안 활동을 멈췄던 흑의여인의 심장이 다시 깨어나 온몸으로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윽! !”

그걸 알 리 없는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얼음보다 차가운 몸뚱이를 끌어안고 펄펄 끓는 피를 식히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휴우!”

어느 순간 흑의여인은 긴 숨을 토하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직후 흑의여인의 아미가 약간 모아졌다.

허억! ! 끄윽!”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형...?)

소년의 얼굴이 자신의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어떤 사내를 닮아서 흑의여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흑의여인은 상대가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가 스스로 가사상태에 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사형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없다. 살아있다 해도 어린 소년의 모습일 리도 없고...)

흑의여인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천기(天機)를 믿고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을 펼친 보람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건너 뛴 후 다시 한 번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을 감은 흑의여인의 얼굴로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그녀의 무공은 천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천기를 읽고 미래를 내다본 결과 자신이 술법을 펼쳐 스스로를 재우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무사히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있었지만 흑의여인은 자신이 읽은 천기를 믿고 가사상태에 들어갔었다. 회한과 부끄러움만 남은 당시의 삶을 단 하루도 이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엮인 모든 인연이 소멸된 후에 다시 삶을 이어갈 생각으로 긴긴 잠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에 성공한 것인데...

깨어나 보니 아직 어린 소년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형을 닮은 이 아이에 의해 부활한 것도 운명이겠지. 하지만 차마 부끄러워 다시 깨어난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구나.)

흑의여인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 이검한에게 몸을 맡겼다.

끄윽! 누나... ... 미안해!”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육체에 열독을 토해내며 죄책감에 헐떡였다.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몸뚱이의 주인이 전모 냉약빙인 것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에게 가장 가까운 여인은 냉약빙이다.

화룡단정의 열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상대가 냉약빙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자신을 키워온 냉약빙에게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이검한은 화룡단정의 열독을 해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의여인의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냉약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녀석이 날 누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흑의여인은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몸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정작 이 어린 놈은 자신을 다른 여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게 그 여자가 누군지 물어보기는커녕 차마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 전 시대의 인간인 자신이 어린 소년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도 부끄러운 때문이다. 과연 이검한에 의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이 흑의여인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

 

(꿈이었을까?)

이검한은 우윳빛 반석 위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깜빡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껍게 뒤덮고 있던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얼음뿐만이 아니었다.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 위에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검한 자신의 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내장을 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가 완전히 갈아 앉아있다.

그렇다고 화룡단정의 약효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전을 살펴보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잠력이 도사리고 있다. 양강의 성질을 지닌 그 잠력은 물론 화룡단정을 몸이 흡수하며 생긴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룡단정의 기운은 몸 밖으로 발산되는 열기와 함께 소멸되었어야 했다. 이검한이 도중에 정신을 잃어 화룡단정의 약효를 흡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화룡단정의 기운은 거의 손실됨이 없이 단전 속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다. 마치 누군가 화룡단정의 효능을 모아서 단전에 넣어준 것 같은 상황이다.

(만년한옥(萬年寒玉)인 것같은 이 반석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누워있었는데...)

이검한은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어 자신이 누워있는 반석을 돌아보았다.

물론 반석 위에는 이검한 혼자 누워있다.

맨살에 닿는 반석은 매끈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갑다.

이검한이 짐작하는 대로 이 반석은 만년한옥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 냉기가 모여 이루어진 게 한옥이다.

그 한옥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아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는 만년한옥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만년한옥에는 동정호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냉기가 농축되어 있다.

당연히 만년한옥은 옥중의 옥으로 불리며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이검한이 누워있는 크기 정도의 만년한옥이라면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수 있다.

이검한은 하마터면 자신을 태워죽일 뻔한 화룡단정의 열기를 다스려준 게 만년한옥의 묘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 이 종유동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낼 단서가...

 

있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반듯하게 누워있던 몸을 조금 움직이자 등쪽에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급히 일어나 보니 그리 두껍지 않은 상자 하나가 반석 중앙에 놓여있다.

두께는 한 치, 폭은 한 자, 길이는 한자 반 쯤 되는 납작한 상자인데 재질은 순수한 황금이다.

그 황금상자는 그리 두껍지 않아서 등에 깔고 누워있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이 반석 위에 누워있었던 여인이 남긴 것이다.)

딸칵!

무릎을 꿇은 이검한은 흥분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검한 자신이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흑의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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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연 아닌 기연

 

 

네 말대로 은원의 분간은 확실히 해야겠지?”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난 널 죽이는 대신 몸에 좋은 이걸 먹여줄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손에 든 화룡단정을 이검한의 얼굴 위에 대고 흔들었다.

(... 안돼!)

흑요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검한은 기겁했다.

의술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는 이검한인지라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먹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말아요! 난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

다급히 외치던 이검한의 눈이 치떠졌다. 흑요설이 말을 하느라 벌린 그의 입에 화룡단정을 밀어 넣은 때문이다.

주르르

화룡단정은 이검한의 타액과 닿는 즉시 녹아서 액체가 되었다.

그리고는 코가 막힌 탓에 입으로 밖에 숨을 쉴 수 없게 된 이검한의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크헉!”

다음 순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온 몸을 퍼덕거렸다. 액체가 된 화룡단정을 삼키자마자 뱃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마치 펄펄 끓는 쇳물을 삼킨 기분이다.

끄윽!”

이검한은 내장이 단번에 숯이 되어버리는 것같은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화악!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난 네놈에게 살수를 쓴 게 아니다. 그러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화룡단정의 열독이 이검한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에서 손을 떼었다.

파팟!

그리고는 그때까지 막혀있던 이검한의 마혈(痲穴)을 풀어주었다.

끄윽! !”

마혈이 풀린 이검한은 달궈진 가마 솥 안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몸부림쳤다. 내장이 익어 버리는 듯한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 제발... 살려줘요 왕후님!”

이검한은 엉금엉금 기어가 흑요설의 다리에 매달렸다. 오직 그녀만이 초열지옥에 빠진 것같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더러운 손을 어디에 대느냐?”

!

흑요설은 매몰차게 발길질을 해서 이검한을 떨쳐버렸다.

끄윽!”

콰당탕!

흑요설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이검한의 몸은 바닥에서 몇 바퀴 굴렀다.

제발... 제발 왕후님...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요!”

모질게 나뒹굴었던 이검한은 다시 흑요설을 향해 기어왔다.

정 참기 힘들면 바닥에 머리를 찧어라. 지금 네놈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

흑요설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이검한을 더 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몰라 서둘러 떠나려는 것이다.

호호호! 이제 시작이다. 세상에서 사내라는 족속은 나 흑요설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흑요설은 독기서린 웃음을 터트리며 밀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가지 말아요 왕후님! 살려 주세요 제발...!”

이검한은 멀어지는 흑요설에게 손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밀실을 나가려던 흑요설이 멈칫 멈춰 섰다.

(... 혹시...)

이검한은 엄청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이 헛된 것임은 이내 밝혀졌다.

흑요설이 밀실 입구에 멈춰선 것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물, 마화삼보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이 따위 구리조각에는 볼일이 없다!”

흑요설은 마화삼보중 마화경은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빠캉!

흑요설의 발에 차여서 삼장 쯤 날아간 마화경은 석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마화경에는 마화사원의 경천동지할 무공비결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마화사원의 무공들은 모두 양강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흑요설은 마화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놈은 제법 쓸모가 있겠구나!”

반면 마화신척을 본 흑요설은 눈을 반짝 빛냈다.

장차 사내놈들을 멸종시킬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마화신척을 집어 드는 흑요설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른다. 마화신척에 서려있는 강력한 화기로 사내들을 태워죽일 생각에 미리 흥분되는 흑요설이었다.

호호호! 그래도 네놈은 행복한줄 알아라. 사내놈들이 세상에서 멸절당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을 테니까!”

흑요설은 창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이검한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스슥!

직후 그녀의 모습은 꺼지듯이 밀실에서 사라졌다.

... 안돼요! 그냥 가면 안돼요 왕후님!”

이검한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호호호 나 흑요설이 간다! 기다리고 있거라 더러운 세상아!”

흑요설의 광기서린 웃음소리도 삽시에 까마득히 멀어졌다.

끄윽! ... 너무 해요! ... 날 죽게 만들고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용광로에 빠진 듯 지독한 열기에 휩싸인 채 이검한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은 화로에서 오랫동안 달궈진 쇳조각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푸스스! 화르르!

그와 함께 이검한이 입고 있는 옷가지에 불이 붙어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검한의 전신 모공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 결과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것은 옷가지뿐만이 아니었다.

이검한의 머리카락과 온몸의 털들도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오래지 않아서 이검한의 머리는 몽땅 타고 재가 되어 버렸다. 마치 중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콰득! 까드드득!

터럭과 옷가지를 태우는 연기에 덮인 채 이검한은 석실의 돌바닥을 양손으로 벅벅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삽시에 돌바닥을 긁어대는 손가락 끝이 터져 피로 범벅되고 있었다.

(... 이대로 죽고 마는 건가?)

이검한은 몸속에서 들끓는 엄청난 열기에 아득히 정신을 잃어가며 절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기가 강력한 영약인 화룡단정을 준비없이 복용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흑요설이라면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는 끔찍한 열기도 제어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요설은 이미 밀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흑요설이 가버린 이상 이검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헌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으으!

어디선가 한 가닥 서늘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이 한기는 아주 미미하여 설령 흑요설이라 해도 쉽사리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검한의 몸은 불덩이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극히 미세한 그 한기도 느낄 수가 있었다.

으으으!”

이검한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쇳물을 들이킨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중이다.

그래서 비록 미약한 한기지만 마치 가뭄 끝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 !”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열사의 사막을 헤매던 나그네가 물 냄새를 맡고 샘물을 찾아가듯이...

 

***

 

이검한이 감지한 미세한 한기는 밀실 후면의 석벽에 세로로 길게 나있는 틈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가는 균열은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의해 방금 전 생긴 것이었다.

(... 저 벽 안쪽에 내 몸의 열독(熱毒)을 치료해줄 무언가가 있다!)

이검한은 끔찍한 고열 때문에 시뻘개진 눈으로 석벽에 나있는 틈새를 노려보았다. 비몽사몽간에도 그 석벽 뒤쪽에 자신을 구해줄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 부서져라!”

이검한은 그 석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검한은 몸 속에서 들끓는 지독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석벽은 내공이 실리지 않은 이검한의 주먹질 정도에 부서질 리가 없다.

퍼석!

하지만 단단해 보이던 석벽은 이검한의 주먹이 후려치는 대로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석벽처럼 보였던 벽은 돌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흙벽 위에 회를 두텁게 발라서 석벽처럼 보였을 뿐이다.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그 벽이 갈라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회가 칠해진 흙벽은 두께가 두자가 넘었다.

그 정도 두께의 흙벽을 한 주먹에 무너트릴 힘이 지금의 이검한에게는 없다.

푸시시싯!

헌데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와 함께 흙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검한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후려친 주먹에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력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내공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 그 극양잠경(極陽潛勁)이 흙벽을 일거에 무너트린 것이다.

물론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이검한의 주먹질에서 강력한 극양잠경이 뿜어진 것은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이었다.

퍼석! 푸스스!

한 번 더 후려친 이검한의 주먹질에 흙벽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월동문 형태의 통로였다.

흑요설이 천여 년 동안 갇혀있던 밀실 후면에는 또 다른 밀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밀실을 연결하는 월동문은 회를 바른 두꺼운 흙벽으로 밀봉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

부서져 내리는 흙벽 안쪽으로부터 강력한 냉기(冷氣)가 쏟아져 나왔다.

쩌저정! 쩌적!

월동문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냉기는 얼마나 강력한지 흑요설이 갇혀있던 밀실 전체를 일거에 허연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냉기에 쏘이는 순간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얼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속에서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열기가 들끓고 있는 이검한에게는 그토록 강력한 냉기조차 그저 한 여름의 소나기같이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으으으...”

끓는 물이라도 단번에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뒤집어쓰자 혼미하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다.

이검한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무너진 흙벽 안쪽을 살펴보았다.

 

흙벽이 무너지며 드러난 월동문 안쪽도 한 칸의 밀실이다.

다만 그 밀실은 흑요설이 갇혀있던 앞쪽과 달리 천연의 종유동굴(鐘乳洞窟)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상당히 넓은 종유동굴인데 높은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서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순(石筍)들이 자라고 있다.

한데 이 종유동굴의 벽과 천장은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무언가 강력한 냉기를 품은 물체가 종유동굴 전체를 얼려버린 것이다.

크으! ... 저 여자로구나! 냉기의 근원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월동문 안쪽으로 들어선 이검한은 헐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종유동굴 중앙에는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盤石)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석자 쯤 되는 그 반석 위에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이 누워 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칠흑같이 검은 옷은 춘추전국시대에나 유행했음직한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나이가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그 여인은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서역에서 고금제일미인으로 불려온 누란왕후 흑요설이라 해도 이 흑의여인보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의여인에게는 그 빼어난 미모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일견하기에도 흑의여인이 세상 사내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여걸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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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와의 실랑이

 

 

으으으!”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눈 위에서 성숙한 여체의 비밀이 만개한 꽃처럼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란왕후 흑요설의 은밀한 부위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한 번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처럼...

(여자... 여자의 그 부분이 저렇게 생겼었구나.)

이검한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아직 여자를 모르는 이검한에게 흑요설이 자진해서 개방해 보인 사타구니 속의 관능적인 구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호호호! 순진한 척 해 봐야 소용없다!”

그런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은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네놈도 더러운 수컷임이 확인 되었으니 오늘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드드드!

흑요설이 오른손을 쳐들자 밀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린다. 무려 천년 수위인 막강한 공력이 운용되자 주변의 공기가 저절로 요동을 친 때문이다.

쩌저적! 푸스스!

밀실의 천장과 벽이 문풍지처럼 떨리고 먼지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천년 수위의 막강한 내공이 실려 있는 흑요설의 오른손이 내리쳐지면 이검한의 몸뚱이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으스러져 버릴 것이다.

잠깐... 잠깐만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낀 이검한은 다급히 외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다행히 흑요설은 벌렸던 다리를 다시 모은 자세였다.

... 왕후님이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잘 알아요. 남자들을 증오하시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구요.”

이검한은 흑요설을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왕후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죽이시면 안돼요.”

내가 널 죽이면 안된다고?”

이검한의 말에 흑요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냐! 내가 어째서 너만은 죽이면 안되는 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살았다!)

흑요설의 반응에 이검한은 일단 안도했다.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왕후님도 일국의 안주인이셨으니 은원(恩怨)의 분간은 확실하시겠지요?”

이검한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교활한 놈이...”

흑요설의 아름다운 두 눈이 치떠졌다. 이검한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때문이다.

내가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네놈이 일조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이검한을 노려보았다.

...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가 천붕랑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왕후님은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어야 했을 테고... 그때까지 살아계실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는 없었잖아요.”

이검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하아!”

흑요설은 기가 막혔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이 부활하는 데 이검한이 일조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얄밉지만 귀여운 구석도 있는 놈이다!)

겁에 질려 자신을 곁눈질로 살피는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잘 생기고 귀여운 사내아이다.

키가 흑요설 자신보다 커서 다 자란 성인인줄 알았는데 하는 행동과 말투에서 비로소 아직 어린 소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게다가 아직 철부지 애송이이기도 하고...)

흑요설은 갈등에 휩싸였다.

이검한의 말 대로 어쨌든 자신은 이검한에게 신세를 진 셈이 되었다. 이검한이 이 밀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끝내 한을 품고 마화적말강막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일국의 왕후였던 몸이다.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은 그녀의 자부심과 긍지가 용납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상대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다.

신세를 진 이 순진한 소년을 꼭 죽여야만 할까?

(...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냉혹하기만 했던 흑요설의 심사에 균열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이검한은 숨을 죽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만일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내게도 요 녀석같이 영특하고 늠름한 아들이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

흑요설의 마음속 균열은 점점 커져 어느덧 이검한에게 호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모든 여자는 늠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원한다.

그것은 흑요설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증오하여 말살하기로 맹세한 그녀였지만 본성은 보통의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평범한 여자로 살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을 낳고 정성을 다해 길렀을 것이다.

남에게 망설임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잘난 아들을 길러내는 것보다 더 뿌듯하고 행복한 일은 여자에게 없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 누워있는 이 소년이라면 모든 여자, 어머니들이 꿈꾸는 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에 비해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잘 생긴 얼굴은 한 눈에 봐도 영특하다.

이검한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만한 아들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튼실한 살덩이는 흑요설이 경험해본 어떤 사내의 것보다 우람할 것처럼 보이고...

(죽일...)

시선이 이검한의 아랫도리에 이르는 순간 흑요설의 눈 꼬리가 확 치켜 올라간다.

이검한의 아랫도리의 살덩이는 여전히 성이 나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금제일미인으로까지 여겨지는 절세미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이검한을 내려다보고 있다.

온몸의 체모가 사라진 탓에 사타구니 속까지 매끈하여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미녀중의 미녀인 흑요설의 알몸은 한창 양기가 뻗히는 나이인 이검한에게는 너무나 강한 자극이다.

그녀의 도자기처럼 희고 매끄러운 속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데워진다.

하물며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솟아난 한 쌍의 살덩이와 사타구니 사이의 목탁처럼 매끈하게 나있는 균열의 형상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애써 자제하려고 해도 이검한의 양물은 분기탱천하여 시들 줄을 모른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놈도 결국은 여자만 보면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의 알몸을 보고 극한까지 흥분해있는 이검한의 일부를 확인한 순간 갈등을 일으키던 그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 어째 느낌이 안 좋은데...)

부드러워지던 흑요설의 눈빛이 다시 서릿발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발견한 이검한은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이검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흑요설아! 흑요설아! 설마 짐승같은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어 짓밟혔던 치욕을 잊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약해지려던 마음을 추스렸다.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벗어나는 데 네놈의 신세를 진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사내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몸이다.”

애써 차갑게 말하며 흑요설은 다시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 놈이 사내로 태어난 것이나 원망해라! 명복은 빌어줄 테니...”

드드드!

흑요설의 오른손에서 일어나는 역도에 의해 밀실이 다시 지진이라도 만난 듯이 뒤흔들렸다.

이제 그녀의 손이 내려쳐지며 이검한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 살려주세요 왕후님!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했다.

(요놈이...)

이검한이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자 차갑게 식어가던 흑요설의 가슴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겁에 질려 눈물을 질질 짜는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은 흑요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되살렸다.

십삼 연합국의 공격을 받고 누란왕국이 멸망할 때의 기억이 그것이었다.

누란왕국을 침공한 십삼 연합국의 군사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었다.

특히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들에게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를 썼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도살당하며 비명을 지르던 누란왕국 소년들의 모습이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떠오르는 흑요설이었다.

(죽여야 한다! 이놈도 여자만 보면 짐승이 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모질게 마음을 먹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치켜든 오른손을 바르르 떨기만 할 뿐 이검한을 내려치지 못했다. 겁에 질려 우는 덩치만 큰 소년의 모습은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이래서는 안된다!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세상에서 사내들을 없이 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래도 흑요설은 선뜻 이검한에게 살수를 쓸 수가 없었다.

(뭐지?)

그렇게 갈등하던 중 흑요설은 이검한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를 감지하고 흠칫했다.

천여 년의 세월동안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던 터라 열기를 감지해낼 수 있는 흑요설의 감각은 세상 누구보다 예민하다.

품속에 무얼 숨기고 있는지 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리며 이검한에게 몸을 숙였다.

흑요설이 몸을 숙이자 아름다우면서 탄력이 넘치는 한 쌍의 살덩이가 이검한의 얼굴 위에 매달려 출렁거린다.

하지만 이검한에게는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신세였으므로...

흑요설의 섬섬옥수가 이검한의 옷 속으로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꺼낸 그녀의 손에는 오리알만한 구슬이 하나 들려있었다.

츠으! 츠으!

구슬에서는 노을같이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물론 그 구슬은 적린화룡이 죽으며 남긴 내단 화룡단정이었다.

화룡단정은 세상에 존재하는 영약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火氣)를 지니고 있다. 만일 남자가 화룡단정을 복용하면 절륜한 정력은 물론 무쇠라도 녹여버릴 수 있는 양강지기(陽强之氣)를 얻게 된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하려면 음기(陰氣)를 지닌 영약을 함께 복용해야만 한다. 화룡단정의 열독이 워낙 강한 때문이다.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복용하는 것은 펄펄 끓는 용암을 그냥 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걸 쓰면 되겠구나!)

한눈에 화룡단정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본 흑요설의 얼굴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검한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 드릴 게요. 마음에 드시면 그거 가지세요.”

화룡단정을 찾아낸 흑요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본 이검한은 급히 말했다.

화룡단정은 아깝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그걸 포기하고 살 수만 있다면 손해도 아니다.

물론 이검한은 흑요설의 생각을 잘못 짚었다.

귀한 물건이건 같지만 사양하마.”

흑요설은 배시시 웃으며 왼손으로 이검한의 코를 잡았다.

(설마...!)

코가 흑요설의 매끈한 손가락에 강하게 잡혀 숨을 입으로만 쉴 수밖에 없게 된 이검한은 불길한 예감에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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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천년만의 부활

 

 

흑요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미미하게나마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다.

츠으! 츠으!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을 감싼 마화적멸강막이 급격히 엷어져갔다.

(... 내가 천붕랑왕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다.)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한 이검한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이 밀실은 천여 년 동안 밀폐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철문을 여는 바람에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밖으로 급격히 유출되면서 약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마화적멸강막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두근! 두근!

경악하는 이검한의 귓전으로 미미하나마 누란왕후 흑요설의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저 마녀가 소생하려고 한다!)

이검한은 너무 놀라 심장이 멎을 지경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천년 이전에 살았던 누란의 왕후 흑요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약해지자 부활하려는 것이다.

사실 흑요설의 성취는 서역사천왕이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그녀는 당시에 이미 완벽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루어 도검에 해를 입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더 긴 수명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흑요설을 금제하기 위해 마화존자가 펼친 마화적멸강막조차도 그녀가 천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마화적멸강막은 외부의 영향을 완벽하게 차단해놓았으며 덕분에 흑요설은 세월의 잔인한 손톱에 할큄을 당하지 않고 육체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에 타격을 입고 정신을 잃었던 흑요설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마화적멸강막에 갇힌 후였다.

흑요설도 처음에는 마화적멸강막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내 마화사원 최강의 금제인 마화적멸강막이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이에 흑요설은 장기전을 택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마화적멸강막의 기운을 조금씩 자신의 몸에 흡수하여 중화시킬 작정을 한 것이다.

그녀의 특기는 바로 사내의 순양지기를 갈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채양보음이 아닌가?

흑요설은 동면에 들어간 개구리나 뱀처럼 신진대사를 극도로 저하시킨 상태에서 마화적멸강막의 힘을 조금씩 흡수해왔다.

몸 안으로 받아들인 마화적멸강막의 그 강렬한 화기 때문에 그녀의 온몸에서 털이란 털은 남김없이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흑요설이 마화적멸강막을 완전히 중화시키려면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지나야만 한다.

아무리 신진대사를 극한까지 저하시켰다고 해도 과연 그때까지 그녀의 육체가 견디어줄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헌데 흑요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검한이 호기심에 철문을 열면서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밖으로 유출되며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마화적멸강막을 흐트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같은 내막을 알아차린 이검한은 다급해졌다.

(죽여야만 한다! 더 늦기 전에...!)

마화신척을 집어든 이검한은 긴장과 흥분으로 떨며 서둘러 흑요설에게 다가갔다.

흑요설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자 마화적멸강막의 잔재가 이검한을 막아선다.

치치치!

마화강막의 힘이 살갗을 태우며 연기를 일으켰으나 이검한은 개의치 않았다. 모든 관심이 흑요설을 죽이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화적멸강막을 뚫고 들어간 이검한은 백옥침상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거꾸로 잡은 마화신척을 쳐들어 흑요설의 가슴을 겨누었다.

용서하세요 왕후마마!”

이검한은 흑요설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비록 흑요설이 세상의 모든 사내를 절멸시키겠다고 맹세한 마녀라고는 해도 여자를 해치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헌데 이검한이 떨리는 손으로 마화신척을 흑요설의 가슴에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번쩍!

굳게 감겨있던 흑요설의 두 눈이 갑자기 부릅 치떠졌다.

쩌어엉!

눈썹 한 올 없는 눈꺼풀이 떨어지며 그 안에서 추수(秋水)같이 새파란 한 쌍의 신비로운 벽안(碧眼)이 드러났다.

(!)

이검한은 숨이 턱 막혔다. 흑요설의 그 푸른 벽안을 접하는 순간 마치 심혼이 몽땅 빨려 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제발... 제발 살려다오!>

 

애절한 사념(思念)이 이검한의 뇌리를 직격했다.

(가엾다!)

머릿속을 울리는 간절한 애원에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흑요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 때문에 이검한은 마화신척을 흑요설의 가슴에 찔러 넣지 못했다.

사실 흑요설은 천여 년의 세월동안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또 마화적멸강막을 중화시키느라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만일 이검한이 마화신척으로 찌르기만 했으면 흑요설의 육신은 불 속에 던져진 마른 검불처럼 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스윽!

이검한이 연민의 감정 때문에 멈칫하는 사이에 흑요설의 섬섬옥수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이검한의 옆구리를 찍어왔다.

!”

퍼억!

이검한이 뒤늦게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 줄기 강맹한 잠력이 그의 옆구리 연마혈(軟痲穴)을 후려친 후였다.

콰당탕!

이검한은 온몸이 뻣뻣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벌렁 나자빠졌다.

크윽, ,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바닥으로 나뒹군 이검한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호 어..석은... !”

느릿하고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흑요설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우두둑! 우둑!

천여 년 만에 부활한 탓에 흑요설은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동작 하나하나가 지극히 느렸다.

마치 경극(京劇)의 배우가 느리게 움직이듯 흑요설은 천천히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일어나 앉았다.

(, 큰일이다. 내 실수로 저 무서운 마녀를 부활시켰으니...!)

흑요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이검한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몸을 마비시키는 연마혈이 짚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윽고 흑요설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섰다.

..! .., .... .... ..! 하늘... 아래에서... 사내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고... 말겠다!”

흑요설은 감회와 함께 원한에 사무친 교소를 터뜨렸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탓에 그녀의 음성은 처음에는 탁하고 메마르게 들렸다.

..... .내 놈!”

흑요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이검한을 일별하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 ...! 공청석유(空靑石乳)... 몸을 적신... 후에 네놈을... 상대해 줄 테니...!”

살기 서린 눈으로 이검한을 훑어본 흑요설은 비틀거리며 침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을 훑어보는 흑요설의 시선이 마치 굶주린 짐승의 눈빛같이 느껴져서 이검한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풍덩!

그 사이에 밀실 밖으로 나간 흑요설은 현음동천 가운데 자리한 예의 그 기이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공청석유!

그 샘물이야말로 단 한 모금으로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희세의 영약 공청석유였다. 유사지존의 시체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공청석유의 힘 때문이었다.

호호... 뼈속까지... 생기가... 차오르는구나!”

공청석유에 몸을 담근 흑요설은 바르르 떨며 희열에 찬 교성을 토했다.

츠츠츠!

메마르고 건조하던 그녀의 피부는 공청석유를 빨아들여 삽시에 뽀얀 윤기를 띠었다.

호호! 꼴좋구나 유사신령!”

흑요설은 공청석유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있는 유사신령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교소를 터뜨렸다.

본 왕후를 죽이려 한 대가로 네놈의 피붙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주겠다!”

두 눈을 독사처럼 번득이며 토해내는 그녀의 음성은 어느덧 매끄럽고 윤택하게 변해 있었다. 비록 지독한 살기가 서려있긴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음성이다

촤아아!

잠시 후 흑요설은 공청석유가 찰랑거리는 연못에서 나신을 일으켰다.

아름다웠다!

공청석유의 힘을 빌어서 생기를 완전히 회복한 흑요설의 몸매는 치명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 그 어떤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인들 흑요설의 육체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흑요설은 그 옛날 십삼 왕국의 국왕들과 서역사천왕을 뇌쇄시켰던 그 절대완미의 몸매를 회복한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그 자세로 가공할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가게 만드는 흑요설의 아름다운 용모와 육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사내가 누가 있겠는가?

오래 기다렸지 귀여운 것!”

흑요설은 풍만하고 탱탱한 둔부를 한들거리며 밀실로 돌아왔다.

가슴에 매달린 한 쌍의 묵직한 살덩이는 물 풍선처럼 출렁거린다.

육감적인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매끈한 민둥산에는 목탁의 금처럼 부드럽게 갈라진 살틈이 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 살짝 입을 벌린다.

사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달아날 뇌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검한에게는 흑요설의 그 도발적인 자태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 왕후님! 혈도를 풀어 주세요! 저는 왕후님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잖아요.”

이검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흑요설을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 그럴 수는 없다. 네놈도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하지만 흑요설은 코웃음을 날리며 독기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검한은 억울한 듯 소리쳤다.

... 왜 제가 죽여야만 합니까?”

그 이유를 가르쳐 주마!”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이검한의 머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미끈한 두 다리를 벌리며 섰다.

(!)

순간 이검한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흑요설의 두 다리가 얼굴 바로 위쪽에서 벌어지면서 은밀한 비소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백옥같이 흰 계곡과 그 주위에는 한 올의 체모도 나있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여체의 비밀이 가려지는 것 없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보였다.

(... 저게 여자의 그곳...!)

난생 처음 여자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본 이검한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매끈한 민둥산 아래로 부드럽게 갈라진 균열은 생경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그 야릇하고도 오묘한 여체의 구조는 아직 동정의 몸인 이검한으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이검한의 아랫도리 일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터질 듯이 팽창되었다. 건강한 사내아이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었다.

호호! 네놈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흑요설은 이검한의 하의 속에서 불끈거리고 있는 것을 곁눈질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놈도 나의 이 더러운 곳을 보고 욕정을 일으켰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녀는 이를 바득 갈며 자신의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남편과 시동생과 양아들, 그리고 열 세 명의 왕들에게 숱하게 더럽혀졌던 그곳을...

흑요설에게 있어서 숱한 사내들을 미치게 했고 또 그자들의 추악한 욕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부분은 신성한 생식(生殖)의 도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사내들이 자신을 유린하도록 만든 재앙의 근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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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잠자는 금제 속의 마녀

 

 

 

철문 안쪽은 화려하게 치장된 침실로 중앙에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침대가 하나 놓여 있다.

츠으! 츠으!

헌데 그 백옥 침대 주위를 한 겹의 시뻘건 빛의 막이 뒤덮여 있었다.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인 그 광구(光球)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누워있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여인은 겉으로 들어난 용모로는 도저히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앳된 십대의 풋풋한 소녀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의 풍파를 모두 겪은 난숙한 중년여인같기도 하다.

이검한은 이제껏 여자라고는 냉약빙 밖에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냉약빙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검한의 그같은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냉약빙도 물론 천하절색이다. 거령삼왕을 잘못 먹어 어마어마한 거구가 되긴 했지만 그녀가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냉약빙의 빼어난 미모도 백옥침상 위에 누워있는 여인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었다.

침상 위의 여인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도 아름다워서 보는 이의 혼을 송두리 채 빼놓을 정도였다.

 

-십전완미(十全完美)!

 

여인의 미모는 말 그대로 완벽해서 어느 곳 하나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었다.

그 황홀한 미모에 더해 농익은 관능미를 지닌 육체는 금상첨화 격이라 세상 사내들의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정도의 미모라면 다른 여인들은 질투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이 여인은 중원인이 아니라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색목여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도도하고 기품어린 용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 민망하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을 살펴보던 이검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가벗고 있는 탓에 신비하고도 황홀한 여체가 그대로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 세차게 두근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여체의 신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냉약빙이 구해다 준 의서를 통해 여자와 남자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고 있던 이검한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본 것과 실제의 여자의 알몸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검한은 남녀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정의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은 여인의 나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여인의 나신은 아름다웠으며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커다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한 쌍의 젖무덤은 물풍선같은 탄력을 지니고 있으며 복부는 양지유로 빛은 듯 매끄럽고 기름지다.

미끈한 허벅지와 사이에 자리한 은밀하고도 계곡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저 여자가 바로 누란왕후겠구나!)

이검한은 홀린 듯한 눈빛으로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렇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이 서역제일미인이라 불리는 비운의 여인 누란왕후 흑요설이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놀랍게도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누란왕후가 대머리인 줄 몰랐는 걸?)

한동안 흑요설의 알몸을 바라보던 이검한은 고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끄럽고 반들거리는 머리는 마치 비구니같이 보였다.

비단 머릿결뿐만이 아니었다.

흑요설의 몸에는 단 한 올의 터럭도 나있지 않았다.

눈썹과 겨드랑이, 미끈한 허벅지 사이의 둔덕에도 한 올의 체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흑요설의 머리 주위로 희뿌연 재가 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타고 남은 재였다.

어떤 강력한 열기가 흑요설의 몸에서 모든 터럭을 태워버린 것이다.

(저 붉은 화광(火光) 때문인 모양이다!)

이검한은 석실 안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 흑요설을 뒤덮고 있는 붉은 화광이 그녀의 몸에서 모든 체모를 태워버린 원인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헌데 열어젖힌 철문을 지나 석실 안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흠칫했다. 철문 안쪽에 한명의 인물이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문에 기대앉은 자세로 죽어있는 인물은 타는 듯 붉은 피풍의(避風衣)로 몸을 가리고 있는 승려였다.

삭발을 한 것인지 원래 대머리였는지 모르지만 머리가 매끈한 이 승려는 이목구비가 깊고 선명하다.

천축(天竺) 출신인 듯이 보이는 승려의 몸에 걸쳐진 것이라고는 붉은 빛이 도는 피풍의뿐이다. 헌데 그 피풍의는 만들어진 후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깔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이분이 서역사천왕 중 최강자였다는 마화존자시겠구나!”

이검한은 조심스럽게 마화존자의 시신 앞으로 다가섰다.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는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 자 정도 길이의 자()와 붉은 빛을 토하는 작은 구리거울이 그것이었다.

츠으! 츠으!

구리거울과 자에서는 타는 듯 붉은 주황색의 노을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두 자 길이의 자는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시뻘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화신척(魔火神尺)!

 

시뻘건 자에는 그같은 글이 범문(梵文)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두 가지가 마화존자의 유물이로구나.”

이검한은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 얹혀져 있는 자와 구리거울을 집어 들려고 몸을 숙였다.

퍼억! 푸스스스!

헌데 이검한의 손이 두 가지 물건에 닿는 순간 마화존자의 시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한 줌의 재로 화해버렸다.

이크!”

이검한은 질겁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마화존자의 시신은 완전히 재가 되어 변해버린 후였다.

다만 알몸에 두르고 있던 붉은 색의 피풍의만은 전혀 손상이 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려졌다.

푸스스!

이검한이 보고 있는 가운데 마화존자의 시체는 단순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 된 것은 마화존자의 유골이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마화신척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열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재가 되었던 마화존자의 유해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검한이 건드리는 바람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또 한 번 고인의 유체를 손상시키고 말았구나.”

얼마 전 부주의로 파천도성의 시신을 훼손했던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죄책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잿더미 아래쪽 바닥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이분도 유언을 남겼구나.)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재를 치웠다.

그리고는 잿더미 속에서 드러나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마화존자가 노파심으로 글을 남긴다.>

 

재를 치우자 드러난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그 글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이었다.

 

<-(중략)- 요녀의 금강불괴(金剛不壞)를 깨뜨릴 힘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에 노납은 생명의 근원인 원정지기까지 끌어내어 요녀에게 한 가지 금제를 시전할 작정이다. 마화적멸강막(魔火赤滅罡幕)이라는 마화사원(魔火寺院) 최후의 금법이 그것이다.>

 

마화사원!”

마화존자의 유언을 읽어 내려가던 이검한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마화사원에 대해서는 냉약빙이 구해다준 고서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천축의 어딘가에 아수라(阿修羅)를 숭배하는 무리가 세운 성전이 있었다.

피와 살육의 화신인 아수라의 권능은 바로 불()이었다.

아수라의 추종자들은 그 아수라를 위해 세운 성전의 이름을 마화성전(魔火聖殿)이라 불렀다.

그러나 천축인들은 마화성전을 마화사원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마화사원에서는 공공연히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화사원은 또 다른 마의 추종자들인 소뢰음사(小雷音寺)와의 쟁패에서 패퇴하여 사멸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천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그 마화사원의 이름이 뜻밖에도 이곳 서역의 오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화적멸강막!

 

마화사원의 절기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이것은 인간의 생명력을 모조리 불의 기운으로 전환하여 한 겹 강기(罡氣)의 막을 형성하는 비법이다.

일단 그 강기의 막에 휩싸이면 무쇠라도 재가 되어 버린다.

마화존자 역시 다른 세 사람처럼 태반의 내공을 흑요설에게 탈취당한 상태였다. 비록 천붕랑왕의 도움을 받아 흑요설을 기절시키기는 했으나 죽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들 서역사천왕의 막강한 내공을 대부분 갈취한 결과 흑요설은 이미 금강지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남은 능력으로는 도저히 흑요설의 숨을 끊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화존자는 최후의 수단을 이용하여 흑요설을 죽이려 했다.

,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녹여 마화적멸강막을 만들어 흑요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물론 마화적멸강막으로도 당장 흑요설을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금강지체를 이룬 흑요설이라 해도 오랜 세월 마화적멸강막에 덮여 있다 보면 한줌 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란왕후 흑요설이 비록 천년의 내공을 지녔다 해도 마화적멸강막 아래서는 채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재로 화하고 말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본 인연자에게 간절히 원하거니와 노납과 누란왕후가 잠든 이 석실을 영원히 봉쇄하여 주길 바란다.

비록 그녀가 희대의 요부이기는 했어도 노납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하여 함께 영면하여 저승에서나마 원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수고의 대가로 마화삼보(魔火三寶)를 남기니 충분한 보답이 되리라 믿는다!>

 

마화존자의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마화삼보는 마화존자의 시체와 함께 흩어지지 않고 남은 세 가지의 물건이었다.

 

-마화신척!

-마화경(魔火鏡)!

-적룡풍(赤龍風)!

 

마화신척은 마화사원의 호법지보다. 두 자 남짓한 길이의 그 자() 안에는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극양지력(極陽之力)이 깃들어 있다.

마화경은 아수라의 상징으로 마화사원의 비전 마공들이 숨겨져 있다.

적룡풍은 화룡잠(火龍蠶)이라는 영물이 토한 비단실로 짠 피풍의로 도검불침은 물론 모든 화기를 다스리는 효능을 지녔다.

그 옛날 마화존자는 우연히 마화사원의 폐허에서 마화삼보를 얻어 서역사천왕의 첫째가 될 수 있었다.

 

(이상한데...?)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을 읽은 이검한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백옥침상을 돌아보았다.

마화존자의 유언대로라면 흑요설의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재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온몸의 체모가 소멸되어 버리기는 했어도 흑요설의 몸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설마 죽지 않았단 말인가?)

소름이 오싹 끼친 이검한은 침상에 누워있는 흑요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떴다.

스으으!

자세히 보니 흑요설의 몸을 감싼 붉은 노을이 가는 실처럼 변해 그녀의 전신 모공(毛孔)으로 빨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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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누란왕후라는 여인

 

 

측천무후의 경우 외에도 당나라를 기울게 만들어 경국지색의 고사를 만든 양귀비도 원래는 현종(玄宗)의 다섯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였다.

, 현종은 며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유목사회에서는 형사취수같은 수계혼(收繼婚)의 풍습이 형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적용되었었다.

 

누란왕국은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의 한 가운데 존재했었다. 그 때문에 형사취수처럼 유목사회에서 보편적이던 제도와 풍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란왕후 흑요설의 신세는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는 고사하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거푸 세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행로는 남편이 세 번 바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란왕국이 연거푸 일어난 왕위찬탈로 쇠락하자 호시탐탐 누란왕국의 부()에 눈독을 들여온 주위의 나라들이 일제히 쳐들어온 것이다.

총 십삼 개의 소국이 연합하여 누란왕국에 쳐들어왔고 연이은 반란으로 국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누란왕국으로서는 십삼 국 연합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흑요설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신임 누란왕은 아름다운 양모의 육체와 부귀영화를 얼마 누려보지 못하고 오체분시(五體分屍)당해 죽고 말았다.

그와 함께 화려했던 누란왕국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으며 그 얼마 후 불어 닥친 강력한 모래폭풍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운의 절세미인 누란왕후 흑요설도 전란과 재앙의 와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누란왕후 흑요설은 죽은 게 아니라 누란왕국을 멸망시킨 십삼 개 국 국왕들의 공동 전리품이 되어 버렸었다.

누란왕국의 막대한 보물을 공평하게 나눠가진 십삼 국의 국왕들은 누란왕후 흑요설의 처리 문제에 이르러서는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흑요설의 나이는 겨우 이십이 세였다.

한창 완숙하여 물이 오른 그녀의 미모에 십삼 국 국왕들이 홀딱 반한 것은 필연이었다.

십삼 국 국왕들은 흑요설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으며 급기야 십삼 국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될 판국이었다.

이에 십삼 국 국왕들은 한 가지 절충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흑요설을 어느 곳에 감금해두고 한명이 한 달씩 돌아가며 소유하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흑요설은 은밀한 이궁(離宮)에 갇힌 채 십삼 국 국왕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국의 왕후였던 고귀한 신분에서 욕정에 미친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흑요설은 처음에는 반쯤 미쳐버렸다.

그러나 본래 총명하고 의지견정 했던 흑요설인지라 오래지 않아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짐승같은 세상의 사내들에게 복수를 다짐했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후 삼년의 세월동안 흑요설은 십삼 국 국왕들의 노리개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과연 흑요설이 굴욕과 수치를 참으며 인내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오래 먹다보면 질리게 되는 법이다.

흑요설의 육체를 돌아가며 탐닉하던 십삼 국 국왕들도 삼년의 세월이 지나자 차츰 발길이 소원해졌다.

그때를 노려 흑요설은 이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된 흑요설은 대과벽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오래 전 누란왕국의 보물창고에서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본적이 있었다. 그 장보도는 현음마모(玄陰魔母)라는 전설적인 상고기인의 은거지를 찾을 수 있는 지도였다.

현음마모는 경이적인 무공뿐 아니라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신술(神術)마저 지녔었다고 알려진,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전설적인 고수였다.

무림 역사를 통틀어 봐도 현음마모만큼 강했던 여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현음마모가 남긴 절기를 익히기만 하면 흑요설은 자신을 농락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녀는 현음마모의 은거지였던 이곳 현음동천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음동천 어디에도 현음마모의 유학(遺學)은 남아있지 않았다. 흑요설이 현음동천에 들어왔을 때는 숱한 보물들 외에 무공과 관련된 유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흑요설은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물이 아니라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연자실해 있던 흑요설은 오래지 않아 복수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본래 그녀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내들을 기쁘게 해주는 방중비법(房中秘法)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누란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배웠던 그 방중비법에는 사내의 양기를 갈취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채양보음(採陰補陽)의 술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요설은 자신의 장기인 채양보음을 바탕으로 한 가지 독계(毒計)를 구상했다. 몇 명의 고수들을 현음동천으로 유인하여 내공을 갈취하는 게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 네 명의 고수가 선택되었다.

 

<서역사천왕(西域四天王)>

 

당시 서역 일대를 주름잡던 최강의 무사들로 개개인이 한 가지 방면에서 가히 우내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마화존자(魔火尊者)!

-천붕랑왕(天鵬狼王)!

-유사신령(流砂神靈)!

-파천도성(破天刀星)!

 

이들이 서역사천왕인 바, 중원무림의 역대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절세고수들이었다.

개개인의 내공이 오갑자(五甲子) 이상이었던 그들을 혹자는 중원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와 비견하기도 한다.

서역무림, 아니 변황무림이 배출한 최강의 고수들인 서역사천왕은 당시 서역을 사분(四分)한 채 웅거하고 있었다.

흑요설은 그들에게 은밀히 현음마모의 장보도의 사본(寫本)을 보내 현음동천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거의 동시에 현음동천에 이르렀고 흑요설도 우연을 가장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서역사천왕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도 흑요설과 함께 현음마모의 유물을 찾았다.

 

* * *

 

<현음마모의 유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 계집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이었다. 그 계집은 빼어난 미모와 육체로 우리 네 사람을 차례로 유혹했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계집의 간계에 넘어가 그년의 육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 계집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회한과 원통함으로 가득한 글이 이어졌다.

만년한철의 철문에 글을 새기고 죽은 늑대 가죽의 거한은 바로 서역사천왕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인물이었다는 천붕랑왕이었다.

천붕랑왕은 다른 무공도 뛰어나지만 늑대와 날짐승을 다루는 재주에서도 일가를 이룬 기인이다.

이검한의 추측대로 그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데려온 철익신응은 천붕랑왕이 기르던 영물이었다.

 

* * *

 

흑요설이 쳐놓은 함정은 완벽했다.

서역사천왕은 초절한 무공을 지닌 만큼 자존심도 극도로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고금제일의 미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흑요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수컷에 불과했다.

서역무림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던 서역사천왕이었건만 흑요설의 육체를 독점하기는커녕 그저 넷이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매일매일 흑요설의 부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역사천왕은 자신들의 몸에서 내공의 태반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역사천왕은 아연실색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들의 막강한 내공 대부분을 흑요설이 갈취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히 천년(千年) 수위의 내공이 모두 흑요설의 한 몸으로 흘러든 것이다.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한 서역사천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흑요설을 죽이기 위해 협공을 하게 되었다.

다른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무려 천년 수위에 육박하는 전무후무한 공력을 지닌 마녀가 세상으로 뛰쳐나간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서역사천왕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흑요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한 여인과 네 사내 사이에 생사를 건 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파천도성과 유사신령이 먼저 흑요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파천도성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파천삼식을 구사할 수 있고 유사신령은 어떤 공격이라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유사잠행술을 지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공의 태반을 상실한 터라 흑요설에게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천붕랑왕과 마화존자 역시 예외가 아니라 흑요설의 독수에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렇기는 해도 천붕랑왕과 마화존자는 어찌 어찌 흑요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먼저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招鵬笛)의 힘이 흑요설의 혼백을 뒤흔들어 기절하게 만들었다.

그후 마화존자가 정신을 잃은 흑요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 * *

 

<본좌와 마화존자가 천신만고 끝에 흑요설을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 계집은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을 융합하여 사람의 손으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지체(不死之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네 사람 중 최강자인 마화존자가 한 가지 금제(禁制)로 그 계집을 영원히 잠재우겠다며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화존자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본좌이지만 과연 마화존자가 흑요설을 금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서 이에 경고하거니와 그대는 발길을 돌릴지어다. 그 대가로 우리 네 사람의 절기를 그대에게 남기노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천붕랑왕의 회한에 찬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색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천붕랑왕의 참담한 감정이 그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붕랑왕이 남긴 글을 다 읽은 이검한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서역제일미인으로 이름난 누란왕후가 이 안에 잠들어 있단 말이지?”

이검한은 눈을 빛내며 철문을 주시했다.

(과연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서역사천왕 정도 되는 인물들조차 미혹케 했단 말인가?)

이검한은 강렬한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 누란왕후 흑요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천붕랑왕의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한 법이다.

이검한은 강렬하게 치미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미 천 년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이검한은 손을 뻗어 철문을 밀었다.

그그긍!

육중한 철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열려졌다.

(... 저럴 수가...!)

그리고 열리는 철문 안쪽을 들여다보던 이검한은 놀라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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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굴 속의 시체들

 

 

다시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갔을까?

와아!”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이검한 앞쪽에는 널찍한 지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하 광장은 동굴의 깊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광장의 벽과 천장 곳곳에 야명주가 박히거나 매달려 있는 덕분이었다.

수백 평은 족히 됨직한 드넓은 지하 광장은 궁궐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바닥은 융단과 대리석으로 덮여있으며 가재도구들은 하나같이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다.

흡사 황제의 거처에 들어온 것같은 지하 광장의 화려함은 보는 이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지하의 궁궐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가재도구들과 값 비싼 장식품들의 대부분은 강력한 힘에 의해 부서지고 으깨어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의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가 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지하 광장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때문이다.

첫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연못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 있었다.

직경 일 장쯤인 원형의 연못에는 우윳빛의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 고여 있다.

그 뽀얀 액체에 잠겨있는 시체의 상체는 전혀 썩지 않아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연못 밖으로 드러나 있는 시체의 하체 부분은 마도 파천의 주인처럼 바짝 말라 목내이가 되어 있다.

아마도 연못에 고여 있는 액체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아온 듯 했다.

이검한은 연못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액체 속에 상체가 잠겨있는 인물은 백발의 노인인데 얼굴도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마치 단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기라도 한 듯이...

안색이 창백한 그 노인의 시체 옆에는 벽옥패(碧玉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

 

벽옥패의 전면에는 그와 같은 글이 전자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 옆에는 두 마리 용이 모랫속을 누비고 다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벽옥패의 뒷면에는 한 가지 무공비결이 깨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유사잠행술(流砂潛行術)!

 

믿어지지 않지만 이 무공을 익히면 흐르는 모래, 즉 유사(流砂)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고 적혀있다.

일단 빠지면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유사다.

헌데 그 공포스러운 유사 속을 물처럼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비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검한이다.

유사잠행술을 익히면 가공할 무게로 눌러대는 유사의 압력을 오히려 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다.

누르는 힘이 강해지면 반발력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용수철의 원리를 이용한 무공인 것이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 강한 반발력으로 상쇄할 수만 있으면 유사든 땅 속이든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닐 수가 있다.

(유사잠행술의 이같은 이치는 다른 무공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다.)

유사잠행술의 비결을 읽어본 이검한은 가슴이 뛰었다.

압력이 가해지는 즉시 더 강력한 반발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파천삼식도 대단한 무공이지만 유사잠행술은 더 쓸모가 많겠구나.)

이검한은 유사지존령을 갈무리하며 이 광장에서 발견한 두 번째 시체로 다가갔다.

 

두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의 끝에 있었다.

지하 광장이 끝나는 그곳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철문이 있는데 오래 전에 만들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파란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철문이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체는 바로 그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 앞에 우뚝 선 채 죽어 있었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그 인물은 늑대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치고 있는데 복부에는 한 자루 기형검(奇形劒)이 관통해 있었다.

피의인의 명치 부분을 궤뚫은 기형검은 칼날 양쪽에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검을 낭아검(狼牙劒)이라고 부른다.

낭아검은 거한의 명치 부분을 관통한 후 뒤쪽의 철문에 깊이 꽂혀 있었다.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을 간단히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 낭아검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피의인은 스스로의 몸을 낭아검으로 찔러 철문에 고정시킨 듯했다. 마치 죽어서라도 철문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 인물의 오른손에 한 자루의 짧은 뿔피리가 움켜쥐어져 있는 게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철익신응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검한은 눈을 반짝이며 뿔피리를 살펴보았다. 그 뿔피리가 뭇 조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기(神器)임을 알아본 것이다.

(철익신응 정도 되는 영물을 부렸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이 인물이 죽어서도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

이검한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철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시체 옆의 철문에는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걸음을 돌려라 인연자여! 그대의 호기심이 자칫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으니...!>

 

철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글은 물론 늑대 가죽을 걸친 거한이 죽기 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걸음을 돌리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보게 되네.)

이검한 눈을 빛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죽기 전에야 그 요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현음마모(玄陰魔母)의 유물로 우리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유인한 요부는 놀랍게도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누란왕후(樓蘭王后) 흑요설(黑妖雪)이었던 것이다!>

 

누란왕후 흑요설!”

거기까지 읽은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녀가 누군가?

저 전설의 왕국 놉-노르, 즉 누란의 마지막 왕후였던 절세미녀가 아닌가?

서역 일대에서는 아직도 그녀를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최소한 서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란왕후 흑요설이 양귀비(楊貴妃)나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는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누란왕후 흑요설은 그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누란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남쪽 공작하(孔雀河)의 끝, -노르(羅布泊)호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당시 서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한다.

누란이 부유하게 된 것은 전한(前漢) 시대에 열린 비단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었다. 머나먼 서방으로 장사를 떠나는 대상(隊商)들은 반드시 누란을 경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흑요설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누란왕의 눈에 들어 서역 제일의 부국 누란의 왕후라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흑요설이 십구 세 되던 해 누란왕은 흑요설의 미모에 욕심을 낸 자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누란왕의 동생이었다.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자는 왕위 뿐 아니라 형수인 흑요설까지 차지해버렸다.

흑요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원수와 부부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흑요설이 이십이 세 되던 해에 두 번째 남편이었던 시동생마저 타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흑요설의 두 번째 남편을 살해한 인물은 전 남편의 아들이었다.

흑요설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그자가 숙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자 역시 짐승과 다름없는 사내였다. 그자는 숙부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양모인 흑요설까지 유린한 것이었다.

양모를 범해서 아내로 삼다니...

이같은 패륜무도한 일은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중원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유목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특히 연약한 여자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형사취수(兄死取嫂)라는 유목민의 전통도 그 때문에 생겼다. 형이 죽어 홀로 된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아 보살펴주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이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호엘룬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시동생인 다리타이의 아내로 살아야만 했었다. 징기스칸의 강력한 권위로도 숙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목사회에서 여자에게는 아무런 인권도 없다. 그저 말이나 양같은 재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형수든 누구든 일단 자신들의 가족 속에 들어오면 그 여자는 가족의 공동 재산이 된다.

그리고 가족의 공동 재산인 여자를 다른 가문의 사내에게 무상으로 양도할 수는 없다.

노동력을 지닌 여자를 가족의 공동 재산으로 여기거나 홀몸이 된 여자를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내로 삼아 부양하는 전통은 비단 형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父子) 사이에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전한시대의 절세미인 왕소군은 흉노의 추장인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었다.

그후 연로한 호한야선우가 죽자 그의 장남인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다는 고사가 한서 흉노전(匈奴傳)에 기록되어있을 정도다.

이처럼 유목 사회에서 아버지의 사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들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들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으로도 인식이 된다.

서방의 유다민족 역시 유목민족이었던 탓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후 아버지의 여자들을 모두 범한 기사가 구약에 나온다.

심지어 압살롬은 지붕 위에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아비의 후궁들을 차례로 범하는 장면을 백성들에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선비전(鮮卑傳)에도 선비족은 형사취수의 제도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들은 차지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선비족은 몽고와 같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삼대 황제 고종(高宗)도 자기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武氏)를 차지하여 황후로 삼았었다. 성군으로 이름 높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었건만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차지하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당고종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 후궁이 후일의 측천무후(測天武后).

하긴 당태종 이세민으로서는 자신이 품었던 미녀를 아들이 차지한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나라를 세운 이씨 일족이 원래 선비 계통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중원을 정복하긴 했으나 유목민의 피가 짙게 남아있던 당 황실에서는 아비와 자식간에 여자를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고종의 경우도 부황인 이세민이 살아있을 때부터 배분상으로는 어머니인 무씨와 사통했다고 하며 이세민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들을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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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신비한 동굴

 

 

-대과벽(大戈壁)!

 

갑자기 이검한 앞에 나타난 장대한 단층지대는 서역 제일의 절경이라는 대과벽이었다.

무려 삼천여 리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절벽인 대과벽은 마치 거대한 용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하다.

그 거대한 대과벽이 지금은 저녁노을에 물들어 피를 칠한 듯 시뻘겋게 보였다.

“책에서 읽었던 대과벽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대과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검한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쏴아아아!

그 사이에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은 대과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 내려갔다.

이검한은 고개를 빼든 채 철익신응이 날아내려가는 아래 쪽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로 대과벽 중간쯤에 쩍 갈라진 틈바구니가 보였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틈바구니다.

(신응이 나를 데려온 목적지가 저기인 모양이다.)

쏴아아아!

이검한이 생각하는 사이에 철익신응은 대과벽 중간쯤에 나있는 삼각형의 틈바구니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갔다.

삼각형의 틈바구니는 어떤 동굴의 입구였는데 그 절묘한 위치 때문에 허공에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즉, 새를 타고 살펴보기 전에는 그 동굴의 존재를 결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 화악!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이 동굴 안쪽으로 날아 내렸다.

철익신응이 내려선 동굴 입구는 상당히 넓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여 장이나 되고 아래쪽의 폭은 그 이상이다.

“이곳에 내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휘릭!

이검한은 철익신응에게 물으며 그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나직하게 울며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놈의 눈가로 물기가 번지는 것이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저 안쪽에 철익신응과 관련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건가?)

눈시울을 붉히는 철익신응의 모습을 본 이검한은 흠칫했다.

그리고는 검미를 모으며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은 아주 깊고 어둑해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부리로 이검한의 등을 밀었다.

“알았어. 들어가 볼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뜻을 알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은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이검한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서린 울음소리를 토해내었다.

 

***

 

얼마나 걸어들어 갔을까?

“이런 곳에 사람이 만든 석문(石門)이 있다니...!”

이검한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백여 장 정도 들어온 이검한의 앞을 육중한 석문이 가로막아 섰다.

강철 못지않게 단단하다는 청강석(靑剛石)을 깎아 만든 그 석문 위에는 난해한 문양(紋樣)이 사람 머리통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마치 올챙이들이 이리저리 꼬물거리는 듯이 보이는 복잡한 문양이었다.

(과두문(蝌蚪文)이다!)

그 기괴한 문양을 살펴본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석문 위에 적혀있는 사람 머리 크기만한 문양은 한자(漢字) 이전 시대에 쓰였던 상형문자인 과두문이었다.

전모 냉약빙은 엄청난 거구 때문에 미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박학다식했다. 총명한데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런 냉약빙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이검한은 한자뿐만이 아니라 서역과 천축의 문자도 대충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냉약빙이 가르쳐준 다양한 문자들 중에는 한자의 원형인 전자(篆字)뿐 아니라 과두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음동천(玄陰洞天)>

 

이검한이 기억을 더듬어 해독한 과두문은 그런 뜻이었다.

그리고 현음동천이라는 글자들 아래로는 전자체의 글들이 몇 자 더 적혀 있었다. 크기가 주먹만한 그 글들은 현음동천이란 뜻의 과두문이 새겨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추가된 듯했다.

 

<이곳은 사천왕(四天王)의 영지다. 난입(亂入)하는 자에게는 구족지멸(九族之滅)의 신벌(神罰)이 있으리라!>

 

전자체로 새겨진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천왕? 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인물들은 없었던 것같은데...”

글을 읽은 이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검한이 아는 한 무림의 역사를 통해 사천왕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사천왕이라는 게 혹시 수미산의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는 무림과는 상관이 없는 불가(佛家)의 유적이고?”

이검한은 석문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험한 표현을 써가며 경고를 해놓은 걸 보면 들어가면 안되는 곳 같은데...)

허락 없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면 구족이 멸해지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년다운 호기심이 꺼림칙함을 눌러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갈 수는 없지.)

이검한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석문을 밀어보았다.

그그긍!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시, 시체!”

헌데 석문을 밀어 젖히며 안쪽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섰다. 이검한이 열고 들어간 석문 앞에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석문 안쪽은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 그리 어둡지 않은 복도였다.

그 복도에 석문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자세로 죽어 있는 시체가 한구 있다.

깡마른 몸에 검은 색의 옷을 걸친 그 시체의 왼손에는 칼날의 폭이 좁은 장도(長刀)가 한 자루 쥐어져 있다.

길이가 네 자 정도인 그 칼은 만들어진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뜩한 빛을 흘리고 있다. 아마도 금석(金石)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일 것이다.

“이...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곳에 죽어 있는 걸까?”

이검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시체로 다가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는 아직 어린 소년인 이검한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시체는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바짝 말라있다.

비록 목내이가 되긴 했어도 시체의 얼굴은 살아있었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냉혹하고 성말라 보이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반백이다. 시체의 주인은 죽을 당시에 이미 노년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이 석문에 쓰여 있던 사천왕중 한 명이 아닐까?)

평범해 보이지 않는 시체의 얼굴을 살펴본 이검한은 몸을 숙였다. 시체의 왼손이 쥐고 있는 칼을 빼내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우두둑! 퍼석!

헌데 이검한이 칼을 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시체는 바싹 마른 흙덩이처럼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헉!”

깜짝 놀란 이검한이 급히 허리를 펴면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푸스스!

방금 전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체는 고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으며 서역의 건조한 기후는 시체를 완전하게 건조시켜버렸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의 손이 닿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고인의 유해를 훼손하다니...!”

이검한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시체 주인의 명복을 빌어준 이검한은 자신의 손에 들려진 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도(魔刀) 파천(破天)

 

설화석고(雪花石膏)로 장식된 희고 매끄러운 칼의 손잡이에는 그같은 글이 음각(陰刻) 되어있다.

“하늘을 깨트리는 마귀의 칼? 섬뜩한 이름을 지닌 놈이다.”

손잡이에 새겨진 칼의 이름을 확인한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도 파천이라는 이 칼은 이름만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있자니 절로 불끈불끈 살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당장 무엇이든 베어보고 싶은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기를 부추기다니... 마물(魔物)이다!)

이검한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마도 파천을 버리진 못했다. 무언가 인연같은 것이 그 칼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은 무너져 내린 시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을 끌러내어 마도 파천을 집어넣었다. 시퍼런 한기를 뿜어내던 칼날이 칼집 안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들끓던 살기가 갈아 앉는다.

이검한은 칼집에 넣은 마도 파천을 허리에 찼다.

이어 그놈의 주인의 신원을 밝힐만한 단서가 없을까 해서 무너져 내린 시체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뒤져보았다. 그리고 곧 두 가지를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검한이 먼저 찾아낸 것은 얇은 책자 한 권이었다.

 

<파천도보(破天刀譜)>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의 표지에는 그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책의 표지 안쪽에는 내공심법 한 가지와 삼초로 이루어진 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폭혼낙백심결(爆魂落魄心訣)!

-파천삼식(破天三式)!

 

폭혼낙백심결-!

일신의 내공을 응축시켰다가 한순간에 토해내는 파격적인 내공심법이다. 폭혼과 낙백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일거에 폭발시켜 상대방의 혼백을 끊어버리는 위력을 지닌 것이다.

편협하고도 신랄한 이 폭혼낙백심결을 운용하면 자기보다 몇 배 더 심후한 내공을 지닌 고수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내공을 일거에 토해내는 탓에 그 뒤에는 완전히 탈진해버려 운신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단점이다. 폭혼낙백심결을 써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 자신이 적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이다.

 

파천삼식-!

단 삼초로 이루어진 이 도법에는 수비란 개념이 아예 없다. 오로지 적을 베어버리기 위한 공격적인 초식만으로 이루어진 도법이 파천삼심이었다.

 

“대... 대단하다! 폭혼낙백심결과 파천삼식이 실제로 구사된 무공이라면 이 시체의 주인은 고금을 통틀어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일 것이다!”

파천도보를 한차례 읽어본 이검한은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검한은 냉약빙으로부터 전궁만리비의 경신술 외에도 여러 가지 무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냉약빙이 가르쳐준 무공들 중 폭혼낙백심결이나 파천삼식만큼 신랄하고 패도적인 것은 없었다.

(폭혼낙백심결은 몰라도 파천삼식은 익혀볼 가치가 있다.)

파천도보를 품속에 넣은 이검한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파천도보에 이어 이검한이 발견한 두 번째 단서는 바닥에 새겨진 수십 자의 글이었다. 모래처럼 곱게 부서진 시체의 잔해 아래쪽에 판독하기 어려운 난잡한 글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도 파천의 주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인 듯했다.

 

<마... 마녀(魔女)! 모든 것이 그 계집... 누란(樓蘭)...의 짓...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그 계집에게 모든 양정(陽精)을 갈취당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 머지 않아 천년공력(千年功力)을 지닌 마녀가... 세상의 종말이...!>

 

이검한이 어렵게 판독한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양정을 갈취 당하다니... 무슨 뜻일까? 또 어떻게 인간이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검한은 앞뒤의 연결이 불분명한 바닥의 글을 읽으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 남녀 관계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소년인 이검한으로서는 여자가 남자의 양정을 갈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다.

(이 동굴 안쪽에서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바닥에 새겨진 글까지 읽어본 이검한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 마라! 천년마녀(千年魔女)가 깨어난다!>

 

마도 파천 주인의 혼령이 이검한의 발길을 저지하기 위해 울부짖는 듯했다.

하지만 이검한의 왕성한 호기심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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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독수리를 타고

 

 

이검한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오리 알만한 구슬이었다. 전체가 타는 듯 붉은 그 구슬에서는 은은한 주황빛 화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단(內丹)이다!”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적린화룡의 내단이었던 것이다.

적린화룡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용암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그 용암의 화기가 응결된 것이 바로 내단이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내단의 이름인데 만일 사내가 복용하면 십처백첩(十妻百妾)을 어렵지 않게 거느릴 수 있는 절륜무쌍의 양정(陽精)을 지니게 된다.

만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복용하면 몇 갑자의 내공과 함께 강력한 화염강살(火焰罡煞)을 얻을 수 있다.

“내단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

이검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적린화룡의 시체에서 화룡단정을 집어 들었다.

구우우! 화아악!

그 사이에 철익신응이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이검한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그놈은 앉은키만 해도 무려 이장(二丈;6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 내리자 이검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것은 네 것이었지...!”

이검한은 들고 있던 화룡단정을 철익신응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적린화룡을 죽인 것은 철익신응이니 화룡단정도 철익신응의 소유인 것이다.

꾸루룩!

하지만 철익신응은 낮게 울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걸 내게 양보하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이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맙다 신응!”

철익신응의 그같은 모습에 이검한은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잘 되었다. 근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듯하신데 이 화룡단정을 드시면 다시 정정해지실 것이다!)

그는 화룡단정을 고독마야에게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사실 고독마야는 중환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십사 년 전, 그는 자칫 방심하다가 독천존 서래음이 살포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형지독에 중독당한 이상 반나절 내에 온몸이 녹아 죽고 만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달랐다. 그는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덕분에 무형지독에 중독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고독마야는 무형지독의 독기를 내공의 힘으로 한곳의 혈도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형지독이 워낙 독성이 지독한 극독인지라 그 독기가 조금씩 내장을 썩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독마야는 매일매일 내장이 녹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한 번도 그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본래 고독한 성격의 고독마야인지라 어떤 경우든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검한은 그런 고독마야에게 화룡단정을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몸을 숙여서 이검한에게 등을 보였다.

“나를 태워주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이검한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익신응은 낮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하! 좋다! 나도 한 번쯤 곤륜산을 허공에서 관람했으면 했으니까!”

휘익!

이검한은 훌쩍 몸을 날려 철익신응의 등 위로 올라탔다. 워낙 거구인지라 철익신응의 등판은 어른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직했다.

(목에 사슬을 걸고 있다!)

철익신응의 목덜미 쪽에 걸터앉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깃털에 묻혀 잘 안보였지만 철익신응의 목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둘러져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인 그 사슬은 길이가 넉넉해서 이검한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슬을 두르고 있다는 건 이 영물이 전에도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었다는 건데...)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려있는 황금 사슬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둘러 고정시키며 내심 놀랐다. 하늘의 지배자인 이 거대한 독수리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구우우! 스윽!

이검한이 자기 목덜미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철익신응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해가 뜨는 쪽으로 가다오. 그쪽에 내 집이 있으니...!”

이검한은 고독애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철익신응의 등을 다독였다.

구워어억! 화아악!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거대한 날개를 퍼득였다.

쏴아아아!

직후 철익신응의 거대한 몸은 이검한을 등에 태운 채 선풍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와앗!"

이검한의 입에서 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곤륜산의 웅장한 산봉들이 발 아래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 날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철익신응은 이미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로 날아올라 있었다.

“이야아! 정말 장관이로구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날개 아래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곤륜산의 무수한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봐! 방향이 틀리잖아!”

그렇다. 지금 철익신응은 고독애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인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아!

이검한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철익신응은 들은 척도 않고 북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갔다.

“야 임마! 안돼!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이모한테 혼난단 말이야!”

당황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나 철익신응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북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너 지금 나 유괴하는 거냐?”

철컹!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린 황금사슬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휘익! 휙!

그러거나 말거나 철익신응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북서쪽으로 꾸준히 날아갔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검한은 자포자기하여 벌렁 드러 누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수백 장 높이의 허공을 날고 있는 철익신응의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깃털로 덮인 철익신응의 등판은 아주 넓어 푹신한 침대같다. 게다가 몸을 쇠사슬로 한 바퀴 두른 상태라 안정감도 있었다.

“이모가 꽤나 걱정하겠는걸...!”

깍지 낀 두 손을 뒷덜미에 바친 채 철익신응의 넓은 등 위에서 드러누운 이검한은 흐르듯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검한은 더할 수 없이 안락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

“어엇!”

이검한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하강함을 느끼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몸을 일으키던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황혼녘이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가고 있는 주변 하늘은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물에 풀어놓은 듯 온통 홍(紅) 일색으로 물든 하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가깝게 보이는 일몰 직전의 태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비단휘장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저녁 하늘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화려한 장관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바다같이 막막한 일망무제의 사막(砂漠)뿐이었기 때문이다.

“서... 서역(西域)까지 왔구나!”

이검한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역!

 

그렇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자리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즉 서역인 것이다.

하토(鰕土)라고도 불리는 서역은 동서 일만 이천 여 리, 남북으로 육천여 리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분지다.

놀랍게도 철익신응은 곤륜산으로부터 서역까지 이검한을 태우고 날아온 것이다.

중원 사람들에게 옥문관 밖의 서역은 대부분의 땅이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역, 즉 탑리목분지의 곳곳에는 낙원같은 녹원(綠園;오아시스)과 사막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지표로 용출하여 형성된 호수를 낀 비옥한 곡창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 때문에 고대이래로 서역 일대에는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전한(前漢)시대 이래 서역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대진국(大秦國;고대 로마),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등과의 교역통로인 비단길로서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역의 곳곳에는 태고 이래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해온 끔찍한 험지도 존재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유사지대(流砂地帶)와 맹독을 지닌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 그리고 원시 아래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원시림 등등이 그곳이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집약된 곳이 바로 서역 탑리목분지인 것이다.

 

“반... 반나절도 안되어 서역까지 오다니...!”

이검한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독애가 자리한 곤륜산 남단에서 서역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천여 리 이상을 주파해야만 한다.

헌데 철익신응이란 놈은 불과 반나절 만에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검한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냉약빙의 훈육 덕분에 고대사(古代史)에도 정통한 이검한의 뇌리로 비단길을 의지하여 흥망해간 전설적인 왕국들의 고사(古事)가 그림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래폭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놉-노르, 즉 누란왕국(樓蘭王國)과 서역 역사상 최고의 미녀였다는 누란왕후(樓蘭王后)의 전설이다.

누란왕후-!

그녀는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왕국을 잃었고 끝내는 여러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던 서하(西夏)의 수도 흑수부(黑水府)의 애가(哀歌)와 북원(北元)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중원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달단왕부(韃靼王府)의 전설이 주마등처럼 이검한의 뇌리로 스쳐갔다.

이국적인 전설과 몽환적인 신비를 품고 있는 서역 땅이 바로 지금 이검한의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흥분에 몸을 떨 때였다.

구워어어억!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급격히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검한은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장대한 단층지대(斷層地帶)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치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나타난 절벽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의 남쪽이 어떤 이유로 침몰하여 이루어진 그 장대한 절벽의 모습은 마치 수많은 창(戈)을 꽃아 놓은 것같다.

“대, 대과벽(大戈壁)이다!”

이검한의 입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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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괴수대전

 

 

한 차례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멎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호!”

쐐애액!

비가 온 후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천야만야한 절벽을 평지처럼 차고 올라온 그 인영은 곤륜의 험봉들 위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과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소년!

물론 그는 이검한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그의 잘 생기고 호쾌한 인상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검한은 장춘곡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높고 험한 곤륜산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이 가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이검한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사저인 냉약빙과 사부인 고독마야가 극진히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이검한의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달했으나 정작 이검한의 마음은 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독마야를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인 이검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는 것이었다. 곤륜산의 장대한 산줄기를 따라 질풍처럼 달리다보면 어느덧 가슴 저미던 외로움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검한은 스쳐지나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산과 함께 세상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곤륜산의 곳곳을 달려본 이검한이지만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검한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고 다시 고독애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어억!

어디선가 한소리 괴성이 들려왔다.

(새의 울음소리인데...!)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방금 들린 날카로운 괴성은 어떤 거조(巨鳥)가 지른 것임이 분명했다.

(가 보자!)

스파앗!

다음 순간 이검한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

 

크아아! 키아아악!

나무 한 그루 나있지 않은 황량한 계곡 끝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무대로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거대한 독수리와 기괴한 모습의 구렁이였다.

두 괴물 중 독수리는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육장(五丈;18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철익신응(鐵翼神鷹)!

 

곤륜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제왕이다.

철익신응은 천 년 이전부터 곤륜산 일대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왔다.

즉,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이 하늘의 제왕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딱히 없다.

강철같은 발톱은 바위를 두부처럼 으깰 수 있으며 강력한 날개의 힘은 코끼리를 낚아 채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곤륜산맥의 제왕으로 인정받아온 철익신응이건만 오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적과 조우한 상태였다.

철익신응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무기나 용이라고 해야 어울릴 거대한 구렁이였다.

몸통의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대망(大蟒;큰 구렁이. 이무기)인데 배 부분에는 체구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여섯 개의 발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수련만 더 쌓으면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는 이 괴물의 몸뚱이는 강철인 듯 번들거리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적린화룡(赤鱗火龍)!

 

용이 아님에도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적린화룡은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화맥(火脈)의 열기를 흡수하며 승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화맥의 화기를 흡수해온 덕분에 적린화룡의 몸 속에는 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엄청난 열이 고여 있다.

그 때문에 적린화룡이 내뿜는 숨결에 섞여있는 열독(熱毒)은 무쇠를 얼음처럼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무시무시한 열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적린화룡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해서 도검이 불침한다. 화맥을 찾아 땅 속을 누비고 다니기 위해 무엇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강인한 비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적린화룡은 불사화망(不死火蟒)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아앙!

적린화룡은 섬뜩한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에 떠있는 철익신응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쩌어엉! 촤아아아!

그놈이 커다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수십 장까지 확 내뻗쳤다. 적린화룡이 몸속에 품고 있는 열독이 숨결을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무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그 열독에 정통으로 휩쓸린다면 제 아무리 곤륜산맥의 제왕이라는 철익신응이라 해도 숯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카아악! 화악!

도리 없이 철익신응은 다급히 날개 짓을 해서 적린화룡이 뿜어내는 열독을 피해냈다.

하지만 철익신응의 깃털은 이미 상당 분량이 열독에 스쳐 시커멓게 그슬려져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곤륜산의 하늘을 지배해온 제왕답지 않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철익신응은 호시탐탐 적린화룡을 노리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괴물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계곡 한쪽의 절벽 위에 멈춰 선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검한은 냉약빙이 구해다 준 고서들을 통해 적린화룡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곤륜산맥의 뭇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익신응이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영물이 이검한 자신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를 일별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이 불리한 싸움을 하면서도 이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검한이 서있는 곳과 맞은 편인 절벽 가운데에는 거대한 새둥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초가집만한 그 둥지 안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송아지만한 그 새끼 독수리는 바로 철익신응의 새끼였다.

철익신응이 수백 년 만에 겨우 얻은 그 새끼를 적린화룡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 화맥의 화기를 흡수하며 살아온 적린화룡이지만 가끔은 배를 채운 먹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린화룡은 철익신응의 새끼를 노리고 둥지로 접근해 온 것이고 철익신응은 필사적으로 그놈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적린화룡 쪽이 유리했다.

카아아! 화아악!

적린화룡은 연신 지독한 열독을 방사하여 철익신응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적린화룡은 둥지에 이르러 철익신응의 새끼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나쁜 놈이로군!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남의 귀한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다니...!)

상황을 파악한 이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약육강식이 자연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새끼를 노리는 적린화룡의 만행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철익신응을 도와주자!)

이검한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검불침의 괴물인 적린화룡이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적린화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검한은 장내를 돌아보며 염두를 굴렸다.

(일단 적린화룡의 주의를 분산시켜보자. 그럼 철익신응이 그 틈에 공격을 해서 적린화룡은 물리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검한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쐐액!

직후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장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검한은 질풍같이 적린화룡의 옆을 스치며 그놈의 머리통을 노리고 돌을 던졌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이검한이 던진 돌이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비록 그 일격이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적린화룡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카아아아! 화악!

돌 조각에 머리를 맞자 분노한 적린화룡은 자신의 옆을 질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검한을 향해 열독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에 휩쓸릴 이검한이 아니었다.

“하하! 여기다 이 바보야!”

쐐액! 텅!

이검한은 유령같이 휘돌며 재차 돌을 던져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크아아앙!

두 번이나 연달아 이검한에게 우롱당한 적린화룡은 사나운 괴성을 토하며 발광했다.

마침내 그놈은 공격 대상을 철익신응에서 이검한으로 바꾸었다.

촤촤촤! 쏴아아아!

적린화룡은 거구를 끌고 이검한을 뒤쫓으며 시뻘건 열독을 연신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철익신응은 이내 이검한이 자신을 도와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철익신응은 이검한을 쫓아가느라 주의가 분산된 적린화룡은 향해 벼락같이 내리 꽃혔다.

적린화룡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콰드드득!

철익신응의 강철같은 발톱이 그대로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카오오오!

바위도 간단히 으깨버리는 철익신응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찍혀 두 눈이 으깨져버린 적린화룡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저항해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키아아악! 쏴아아아!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쥔 철익신응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머리통을 잡힌 이상 적린화룡의 열독도 더 이상 철익신응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거대한 몸뚱이를 움켜쥐고 수백 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발톱을 풀어 버렸다.

쾅!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린화룡의 거구는 계곡의 바닥에 팽개쳐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적린화룡의 몸뚱이가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우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고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수백 장 높이에서 떨어진 적린화룡은 벌린 입으로 내장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제 아무리 그놈의 몸뚱이가 도검불침이라 해도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진 충격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껍질이 질기고 단단하여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적린화룡의 내장과 척추는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휴우, 정말 끔찍한 놈이로군!”

스스스!

이검한은 숨이 끊어진 적린화룡의 시체 옆으로 내려서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 널부러진 적린화룡의 몸뚱이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했다. 그 때문에 계곡 바닥에 작은 둔덕이 하나 새로 생겨난 듯이 보였다.

(저것은...!)

헌데 적린화룡의 시체를 살피던 이검한은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츠츠츠!

내장과 피를 토하고 죽은 적린화룡의 아가리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불그스름한 화광(火光)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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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장춘곡의 남녀

 

 

초가집 내부는 단촐하고 검박(儉朴)했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가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방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큼직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앞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다.

먼저 여인의 체격이 확 눈에 뛴다.

그녀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를 지녀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 만하다.

팔 하나가 어지간한 장정의 허벅지같이 우람하고 청동으로 빚은 듯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전쟁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추하지가 않다. 비록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긴 하지만 단정한 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 얼굴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 역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넉넉한 저고리에 감싸인 젖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크지만 허리는 확실히 들어갔고 비록 엄청나게 굵기는 해도 두 다리 역시 늘씬하여 절로 시선을 잡아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은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전모 냉약빙!

 

바로 그녀였다.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 연남천을 오라비로 두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인인...

십사 년의 세월이 흘러 냉약빙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십사 년 전 그대로였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도 거의 변화가 없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또 내공이 정심한 덕분에 그녀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처자로 보인다.

잔혹한 세월의 흐름도 전쟁의 여신같은 그녀의 모습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어. 석련(石蓮)의 잎사귀!”

질풍같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 단삼의 소년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채 연꽃 잎사귀 하나를 냉약빙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미는 것은 석련이라는 바위에 피는 희귀한 연꽃의 잎사귀였다.

석련은 곤륜산의 특산으로 이곳 장춘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석룡벽(石龍壁)이라는 곳에서만 자생한다.

헌데 단삼소년은 일다경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왕복 육십여 리나 되는 그 석룡벽까지 달려가서 연꽃잎을 따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의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겨우 육십 리를 왕복한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지다니... 제대로 전궁만리비의 경공을 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냉약빙은 단삼소년을 바라보며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좀 봐줘 누나. 다음에는 잘 할게!”

단삼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소년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것은 소년에게 냉약빙은 이 세상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봐라! 빗물이 묻었는지 보자.”

냉약빙은 소년을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렀다.

“만일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앞으로 삼 일 간 면벽폐관 해야만 한다.”

냉약빙의 엄한 음성에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돼?”

소년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왔는데 빗방울이 몸에 묻었는지를 조사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사실 경신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몸 주위에 진공의 막이 생겨 빗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같은 경지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냉약빙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냉약빙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신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꾀를 부려도 소용없다.”

스윽!

냉약빙은 준엄하게 말하며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비록 단삼 소년이 육척에 가까운 키를 지녔지만 냉약빙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아이쿠!”

피잉!

단삼소년은 냉약빙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자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초가집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딜!”

콱!

하지만 냉약빙의 차가운 교갈이 일며 소년의 오른쪽 손목이 마치 솥뚜껑같이 큼직한 손에 움켜쥐어졌다. 비록 소년의 몸놀림이 경이적으로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냉약빙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에이! 잡히고 말았네!”

소년은 냉약빙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입을 삐죽거렸다.

“네 녀석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스슥!

눈을 흘기는 냉약빙의 큼직한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소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행여 소년의 몸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었을까 조사하는 것이었다.

헌데 냉약빙의 손이 막 소년의 사타구니 부분을 쓰다듬고 지나갈 때였다.

(아이쿠!)

소년은 얼굴이 화끈 붉어지며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내아이가 십대 후반의 나이라면 한창 양기가 충천할 때다. 솥뚜껑같이 큼직하지만 어쨌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불끈 곤두선 것이었다.

“...!”

한 겹의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불기둥의 느낌에 냉약빙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움찔했다.

“헤헷! 기회당!”

스팟!

소년은 장난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제압당한 손목을 미꾸라지처럼 냉약빙의 손에서 빼내며 문밖으로 날아갔다.

“검한(劒恨)아!”

냉약빙은 급히 달아나는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헤! 할아버지에게 다녀올 게!”

멀리서 소년의 장난기 서린 음성만이 여운을 끌며 들려올 뿐이었다.

“휴!”

냉약빙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검한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냉약빙은 소년의 늠름한 실체를 만졌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튼튼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바닥에 생생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삼 년 전부터는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었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냉약빙은 직접 소년을 목욕시켜주곤 했었다.

소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냉약빙이 몸을 닦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아직 붙지 않은 소년의 여린 몸을 닦아주는 게 냉약빙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소년을 통해서 육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삼 년 전부터 소년은 냉약빙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귀엽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 변화가 생겼었다. 목소리도 좀 굵어지고 맨숭맨숭하던 불두덩에 가뭇가뭇 어른의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의 키가 어느덧 오척을 넘겼고 뼈대도 제법 굵어졌지만 냉약빙은 별 생각없이 씻겨주었었다.

그전까지는 냉약빙이 고추를 만지고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닦아줘도 신경 쓰지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냉약빙의 손길이 아랫도리 쪽으로 접근하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몸을 배배 꼬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삼 년 전부터 소년은 혼자 목욕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약빙으로서도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직접 목욕시켜주는 걸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난 지금 소년의 몸에서는 성인의 모습이 문득 문득 느껴졌다.

방금 전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만져본 소년의 몸 가락은 이미 더 이상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추가 아니었다. 얼추 느끼기에도 한 뼘은 충분히 됨직한 튼실한 양물이었다.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기련산에서 어린 검한이를 거둔 것이 벌써 십사 년 전의 일이라니...!)

소년의 양물의 감촉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냉약빙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초가집 밖으로 달아난 소년은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고독마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소년에게 검한(劒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검(刀劍)에 운명을 건 자신의 지난 생애를 한스럽게 생각해온 고독마야로서는 소년이 무림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사방무신 중 한명이었던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무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고독마야는 소년에게 검(劒)을 한(恨)스러워한다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소년 이검한은 자신의 출신내력을 모른다. 기련산에서 변을 당할 때 나이가 서너 살에 불과했기도 했지만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이검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은 이검한은 굳이 고독마야와 냉약빙에게 부모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검한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냉약빙과 고독마야가 피붙이에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양육을 해준 덕분이다.

이검한은 철이 들자마자 냉약빙과 고독마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냉약빙과 고독마야! 그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고독마야!

경신술로 천하무적인 냉약빙!

그들의 지도하에 이검한은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도 이검한은 능히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검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남과 싸워보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검한은 고독마야의 제자다.

하지만 이검한이 알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은 사저(師姐)뻘인 냉약빙이 전수해준 것이었다.

고독마야는 이검한에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만을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내공 외에 경신술 등 잡다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모두 냉약빙의 몫이었다.

냉약빙은 이검한을 친 아들처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검한을 보살펴온지라 냉약빙은 종종 자신이 이검한을 낳은 생모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한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냉약빙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가득했다.

(검한이도 머지않아 자기를 낳아준 생모와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저 아이가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냉약빙의 새하얀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음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는 냉약빙이었다.

그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냉약빙이 이검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부디 언제까지나 지금의 그 밝은 성품을 잃지 말거라. 검한아!)

냉약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검한이 사라진 초가집 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장대같이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덧 가늘어져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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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뜻밖의 제안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냉약빙은 고독헌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의 말에 유령마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오 냉여협?”

하지만 그자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냉약빙이 지니고 있는 굉천벽력탄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며 냉약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비겁한 자들, 너희들은 평생 가도 오라버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차갑고 오연한 음성으로 알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들 마음에 달렸어요!”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한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세 권의 낡은 비급이 들려 있었다.

“오오! 저...저것은 혈마대장경이다!”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환호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렇다. 냉약빙이 쳐든 것은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혈마대장경을 본 군웅들의 눈이 탐욕과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유령마제 등 삼인은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계집, 무슨 꿍꿍이지?)

그자들은 갑자기 냉약빙이 혈마대장경을 쳐들자 환호하는 대신 이마를 찌푸렸다.

냉약빙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고독애로 몰려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한 이유는 이 혈마대장경 때문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말에 독천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는 말이오. 냉여협!”

그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냉약빙의 손에 들린 혈마대장경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라버니께서는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으세요.”

냉약빙은 차가운 표정으로 군웅들을 대표하는 삼인의 고수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 세 권의 비급의 처분을 당신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셨어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끝내 오라버니께 대항하다가 몰살당할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자유예요!”

“그, 그럴 수가...!”

“혈, 혈마대장경을 내놓다니...!”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냉약빙의 제안은 실로 천만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선뜻 포기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소란이 일어났다.

유성신검황 등의 안색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고독마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비록 무형지독에 중독되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과 동귀어진 할 수도 있었다.

유성신검황이 군웅들의 소란을 저지하며 냉약빙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냉여협!

이어 그는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며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자리에 모인 세 거두는 머리를 맞대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즉 내공으로 뜻을 전하는 수법을 써서 숙의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일각(一刻;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세 거두는 숙의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성신검황이 삼인을 대표하여 냉약빙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삼인이 연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빌어먹을, 혈마대장경을 자기들끼리 나눠먹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헛물만 들이킨 꼴이 아닌가?)

군웅들은 저마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이지러트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독천존과 유령마제 등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거니와 현재 고독애 일대에는 세 거두의 수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잘 생각했어요!”

유성신검황의 말에 냉약빙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마대장경을 양손으로 나눠들었다.

“받아요.”

피핑!

냉약빙은 세 권의 혈마대장경을 각기 한 권씩 삼인에게 날려 보냈다.

파팟! 팟!

유성심검황등은 행여 남에게 빼앗길 새라 급히 몸을 날려 자신들에게로 날아드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진품이다!)

혈마대장경을 받아든 즉시 뒤적여본 삼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들이 받아든 비급은 틀림없이 혈마대장경임을 확인한 것이다.

“경고해 두겠어요! 이 시간 이후 고독애 주위를 얼쩡거리는 자는 나 냉약빙과 오라버니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참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냉약빙은 장내를 둘러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독천존이 혈마대장경을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냉약빙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흘흘, 알겠소이다. 냉여협! 노부는 그럼 이만 실례하오!”

쐐애액!

독천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고독애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군웅들 중에 섞여있던 독천존의 수하들도 그자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뒤이어 유령마제도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마지막으로 유성신검황은 회의와 갈등의 눈빛으로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유성신검황마저 떠나자 나머지 군웅들도 앞을 다투어 고독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삽시에 장내는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뿐...

“어리석은 인간들...!”

냉약빙은 군웅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넉넉잡아 십오 년, 십오 년만 기다려라! 네놈들에게 오늘의 빛을 받으러 갈 아이가 있을 테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고독헌으로 들어갔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감회에 찬 눈길로 자신의 무릎에 누인 사내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라면 고금제일인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경지를 초월해 보려던 나 연남천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실로 오랜 만에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장차 무림이 운명을 바꾸어놓을 천고기재와 천하제일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고독애!

운명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 * *

 

세월여류(歲月如流)라 했던가?

곤륜산 고독애에서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이 절반 가까이 몰살당한 혈겁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 십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은 공포와 근심으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십사 년 전에 벌어진 두 가지 참사로 인해 무림에 머지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대혈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두 가지 겁난(劫亂) 중 첫째는 물론 고독애의 혈겁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지방을 제패하고 있던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결국 혈마대장경이 사방무신 중 세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으로 고독애의 겁난은 해소되었다.

그 후 고독애 사방 백 리는 금역(禁域)으로 화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겁난은 신주사패천에 들던 태양곡이 의문의 궤멸을 당한 사건이었다.

태양곡이라면 불과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에 올랐던 일대기협 태양신협 이청천의 거처가 아닌가?

바로 그 태양곡이 고독애의 겁난이 있기 며칠 전에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이 경악하며 달려갔지만 태양곡은 이미 온전한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된 후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흉수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개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혈겁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이었건만 흉수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태양곡의 멸망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태양곡의 참사를 장차 무림을 피로 씻을 대겁풍의 전조로 여기고 전전긍긍했다.

혹자는 미리 겁난을 피하기 위해 세외로 은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중원무림에는 유래 없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같은 평화가 십사 년 간 이어지자 무림인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았다.

현자(賢者)나 노강호(老江湖)들은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했다.

작금의 평화가 정말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진정한 평화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독한 천하제일인의 거처가 있는 곤륜산 고독애에서 바야흐로 향후 무림 천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음을...!

 

***

 

우르르릉!

구름 속에서 뇌성이 운다.

마치 굶주린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공복으로 울어대는 듯한 뇌성이다.

곤륜산 고독애 일대는 짙은 먹장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아!

어느 순간 시커먼 먹장구름은 장대같은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의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듯 요란하다.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고독애의 북쪽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지하에 대량의 열천(熱川)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봄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장춘곡(長春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장춘곡 끝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서있다.

십사 년 전부터 금지가 된 고독애 근처에 누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일까?

“차핫!”

문득 초가집 안으로부터 낭랑한 소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펑! 쐐애액!

이어 초가집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초가집 밖으로 질풍같이 뛰쳐나왔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단삼(單衫)을 걸친 소년인데 육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녔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달리 소년의 나이는 잘해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한 듯 단아하다.

단순히 잘 생긴 것이 아니라 숯같이 짙은 눈썹에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쐐애액!

초가집을 박차고 뛰쳐나온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계곡 밖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이 내달리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줄기 검은 선이 장춘곡 밖으로 쭈욱 뻗쳐나간 듯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삽시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채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

장춘곡 밖에서 다시 낭랑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예의 그 단삼 소년의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장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년의 건장한 모습이 계곡의 어귀에 다시 나타났다.

스파앗!

장춘곡 입구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소년은 이미 한 걸음에 계곡을 날아 건너 초가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누나! 다녀왔어!”

초가집 안으로 뛰어든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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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뤄진 혈겁

 

 

(나 연남천은 팔십 평생 단 한 번도 도전을 회피해 본 적이 없다. 비록 저 어리석은 자들이 남의 꾐에 빠져 도전해 오기는 했으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서늘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밖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는 나 연남천과 함께 이곳 고독애에 뼈를 묻게 되리라! 비록 무형지독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갈 힘은 남아 있으니...!)

고독마야는 서탁 위로 손을 뻗어 혈마대장경을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저주받은 마물들부터 없애야 하리라. 못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크나 큰 화근이 될 테니...!)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혈마대장경에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천마공(逆天魔功)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비록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흡혈마조가 남긴 혈마대장경상의 무공도 고독마야의 일신 절기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혈마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마공들의 잔혹하고 신랄한 면은 고독마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해서 고독마야는 죽기 전에 아예 이 화근덩어리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흡혈마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비록 저주받을 마공이긴 해도 필생의 성취라고 남겼는데 없애 버려야 하니...”

고독마야는 고소를 흘리며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마대장경을 태워버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우우!”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고독애 아래에서 들려왔다. 걸걸하기는 하지만 그 장소성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막 혈마대장경을 재로 만들어 버리려던 고독마야는 흠칫하며 삼매진화의 운용을 멈추었다.

쐐애애액!

그 직후 고독애 측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한줄기 흐릿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하나같이 천하를 위진 시키고 있는 고수들인 군웅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전모 냉약빙이다!”

막아랏!”

고독헌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빠른 경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명뿐임을 안 때문이다.

멈춰라 전모!”

못 들어간다!”

파팟! 쐐애액!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급급히 날아올라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쏴아아아!

고독애 측면의 절벽을 날아오른 인영은 자신을 막아서려는 군웅들의 머리 위를 한 걸음에 뛰어넘어 고독헌 쪽으로 날아갔다.

훤칠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을 지닌 그 인영의 이같은 가공할 경신술은 이곳에 운집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닭 쫓던 개처럼 만들어버렸다.

잡아랏! 혈마대장경이 전모의 손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 서랏!”

쐐애액! 휘익!

일차 저지에 실패한 군웅들은 저마다 고함을 터트리며 고독헌 쪽으로 날아가는 인영의 뒤를 쫓아갔다.

절벽을 날아오른 후 일거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날아 넘은 여인은 다름 아닌 전모 냉약빙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같은 경이적인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다.

죽고 싶은 작자들은 와라!”

단번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독헌 앞에 내려선 냉약빙은 빙글 돌아서며 군웅들을 향해 사나운 일갈을 터뜨렸다.

피핑!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검붉은 구슬 하나가 추적해오는 군웅들을 향해 던져졌다.

(저것은...!)

원래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성신검황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냉약빙이 던져낸 검붉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피해라! 굉천벽력탄이다!”

유성신검황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한걸음 늦고 말았다.

콰르릉! 콰콰쾅!

수십 개의 천둥이 일제히 작렬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콰아아아!

그와 함께 고독애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면서 시뻘건 화염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수십 장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일거에 수십 명의 군웅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굉천벽력탄이 터진 자리에는 깊이 삼장, 너비 십여 장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주위로 터지고 그슬린 인간의 육신들이 널려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벽력당(霹靂堂)의 화기를 지니고 있다니...!”

히익!”

몸을 날린 게 늦은 덕분에 살아난 군웅들은 사색이 되어 고독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놀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냉약빙의 두 눈은 싸늘한 한광을 토해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경거망동해도 좋다!”

칠척 가까운 거구로 고독헌 입구를 완전히 가린 채 우뚝 선 냉약빙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몇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굉천벽력탄이었다.

냉약빙의 수중에 들린 굉천벽력탄을 본 독천존과 유령마제의 안색이 낭패로 물들었다.

으득! 저 계집이 산통을 다 깨는군!”

독천존과 유령마제도 일세를 풍미하는 고수들이긴 하지만 굉천벽력탄의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냉약빙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내최강의 경공술을 지니고 있다. 만일 냉약빙이 자신들을 폭사(爆死)시킬 작정을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냉약빙이 번개가 치는 듯한 빠르기로 달려들어 던지는 굉천벽력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천존과 유령마제가 낭패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명심해라! 고독헌에 접근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굉천벽력탄을 안겨줄 것이다!”

냉약빙은 군웅들에게 경고를 남기고는 거구를 홱 돌려 고독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두가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내의 그 누구도 냉약빙의 가슴 섶이 유난히 불록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한 걸음 늦었다 약빙아!”

고독마야는 고독헌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약빙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 지금 이 순간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냉약빙이야말로 고독마야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음을 주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親姻)이기 때문이다.

먼 친척 사이인 두 사람은 비록 조손(祖孫) 사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이좋은 오빠고 누이동생이었다.

게다가 고독마야가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 유일한 존재가 냉약빙이다. , 고독마야에게 냉약빙은 누이동생일 뿐 아니라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라버니...!”

칠척 거구의 냉약빙이 들어서자 그리 넓지 않은 고독헌 안이 꽉 차 보인다.

냉약빙도 본래는 평범한 계집아이였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같은 어마어마한 거구가 된 데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냉약빙은 어린 시절 우연히 거령삼왕(巨靈蔘王)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거령삼왕은 산삼의 일종으로 기사회생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약효가 지나쳐서 복용한 사람의 체격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거령(巨靈)이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거령삼왕을 복용한 덕분에 냉약빙은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이르는 막강한 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여자임에도 칠척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독마야는 냉약빙의 막강한 내공과 엄청난 체격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경신술을 가르쳤고 그 결과 냉약빙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인물이 되었다.

 

, 중독당하셨군요 오라버니...!”

고독헌 안으로 들어선 직후 냉약빙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마야가 지독한 극독에 중독된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득,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래음에게서 해약을 빼앗아오겠어요!”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며 고독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오라비를...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냐 약빙아?”

하지만 고독마야의 나직한 한 마디 말에 냉약빙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고독마야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크흐윽, 오라버니...!”

냉약빙은 분노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돌림병으로 일가 피붙이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 고독마야만이 유일한 친인이다.

헌데 그 고독마야마저 지금 중독당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울지 마라 약빙아! 인간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고독마야는 오열하는 냉약빙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냉약빙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한 정감이 담겨져 있었다.

하여간 잘 왔다. 저 어리석은 작자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이제 네게 그것을 맡기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쓰레기들과 동귀어진하실 작정인가요 오라버니?”

하지만 냉약빙은 깜짝 놀라며 고개들 들어 고독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들이라니...! 그래도 저자들은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들인 대단한 고수들 아니냐?”

고독마야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된 자들을 모조리 동반하여 저 세상에 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냉약빙은 고독마야의 그 말에 질겁했다.

, 그래서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나 고독마야의 뜻은 이미 확고해진 상태였다.

비록 너라고 해도 나를 막지는 못 한다 약빙아!”

부드러운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말하는 고독마야를 올려다보며 냉약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소매에게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만한 수단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차서 장담했지만 고독마야는 믿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고독마야는 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내포한 미소였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소매의 무기예요!”

냉약빙이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가슴 섶을 좌우로 벌려보였다.

“...!”

순간 고독마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몸으로 한 차례 세찬 경련이 스쳐가기까지 했다.

냉약빙의 헐렁한 겉옷 안쪽에는 머리를 흰 천 조각으로 동여맨 사내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고독마야는 숨을 죽였다.

(천골(天骨)이다!)

한눈에 사내아이가 세상에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사내아이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팔십 평생 이룩한 성취가 절전(絶傳)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고독마야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을 때 냉약빙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사내아이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교활한 아이구나 약빙아!”

고독마야의 창백한 안색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깡마른 두 손이 어느새 냉약빙이 내미는 사내아이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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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독한 천하제일인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오른쪽에는 음산한 인상을 지닌 중년 장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이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그 검은색 장포 위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본뜬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자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그러나 안색이 지나치게 희고 창백하여 차갑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너무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기까지 보이는 얼굴 탓에 마치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유령마제(幽靈魔帝) 구양수(九陽秀)!

 

신마풍운록 서열 오위(五位)인 그는 얼마 전 북망산(北邙山) 유령궁(幽靈宮)의 새로운 궁주가 된 인물이다.

음유하고 악독한 마공을 연마하여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암수(暗手)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유령마제 구양수가 무림패권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

독천존 서래음-!

유령마제 구양수-!

 

신마풍운록의 서열 삼, ,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고독애에 운집한 군웅들의 사실상 통솔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인 태양신협 이청천을 합쳐 무림인들은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혁련검호각, 독성부, 유령궁, 태양곡 등의 네 문파는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현재 고독애에는 그 사방무신과 신주사패천 중 태양신협 이청천과 태양곡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전 무림의 정영들이 이 비좁은 고독애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서(西)부주?”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마제 구양수였다. 그자는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독천존 서래음을 돌아보았다.

()노괴는 이미 서부주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한 데다가 오백여 명의 고수들을 해치운 대가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요. 그렇거늘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유령마제가 음침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물론 노부의 무형지독은 제법 쓸만 하지!”

독천존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연남천이라 해도 무형지독을 이겨내지는 못할걸?”

그 말을 들은 유령마제가 다시 재촉했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망설이는 것이오? 당장 쳐들어갑시다!”

그러자 독천존의 가늘게 뜬 두 눈에 언 듯 비웃음이 어렸다.

끌끌, 구양궁주는 혈마대장경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는 듯하구만!”

독천존의 그 말에 유령마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독천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천하의 고독마야 연남천이야.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고...”

“...!”

독천존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듯 유령마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어쨌든 독천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자그마한 석옥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은 유령마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인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고독마야와 맞대결해서 십초(十招)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아무도 없다.

클클,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야. 연노괴가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독천존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휴우...!)

독천존의 말에 유성신검황 혁련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마제나 독천존과 달리 광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그는 비록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독되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앞장서서 석옥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그 자신이 평생 동안 극복해보려고 절치부심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괜한 객기를 부려 단기돌입(單騎突入)했다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손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유성신검황은 내심 탄식하며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필부지용으로 고독마야와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한다면 독천존과 유령마제만 이롭게 만들 뿐이다.

독천존의 독성부와 유령마제의 유령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력이 바로 유성신검황 자신의 혁련검호각이 아닌가?

(치욕스러운 일이나... 이 방문좌도(榜門左道)의 무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유성신검황은 소리없이 탄식하며 석옥쪽을 주시했다.

 

석옥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는 마의(麻衣)노인 한 명이 무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술도... 이것이 마지막이로군!”

!

마의노인은 빈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허하게 웃었다.

육척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머리... 얼굴은 비록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형형한 한망(寒茫)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마의노인의 분위기는 아주 독특했다.

온통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잘 벼린 칼로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마야 연남천!

 

마의노인이 바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며 신마풍운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지난 육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고독한 절대자인...!

고독마야가 한 자루 철검(鐵劍)을 짊어지고 무림에 나선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는 적수를 찾기 위해 중원뿐 아니라 새외(塞外)와 변황(邊荒)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어낸 인물조차 없었다.

비록 세상이 한없이 넓고 그 안의 인간이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진정한 인걸(人傑)은 드문 법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세대에 걸쳐도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부의 자질의 소유자인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그런 그를 감복시킬만한 인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적수를 찾아 구주팔황을 헤맨 고독마야의 오십여 년에 걸친 여정은 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긴긴 여정에서 고독마야가 확인한 것은 세상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막강한 그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에 실망하고 인간들의 천박함에 좌절한 고독마야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곤륜산의 깊은 곳에 들어와 석옥 한 채를 짓고 은거해버렸다.

고독마야는 곤륜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해 인적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을 고독애라 이름 짓고 거처로 마련한 석옥에 고독헌(孤獨軒)이라는 현판을 새겼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이 모두가 강호 무림의 파멸을 노린 음모인 줄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나방처럼 몰려든 꼬락서니들이라니...!”

! 퍼석!

고독마야 연남천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빈 술병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안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그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였다.

무형지독-!

색도 냄새도 없는 무색투명한 극독으로써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기에 누구라도 이 무형지독의 암산을 피해내지 못한다.

일단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반각 이내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고독마야가 그 무서운 무형지독을 다량 흡입한 상태에서도 반나절 넘게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의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내공으로도 무형지독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극독은 내공의 힘으로 태워버릴 수도 없다.

고독마야는 그저 무형지독이 발작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독마야는 독천존 서래음의 장담대로 결국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이곳 고독애가 나 연남천의 무덤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이 혼탁하고 추악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의 주름진 눈꼬리로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마풍운록이라는 못된 물건을 만들어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든 놈의 상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고독마야는 눈길을 한쪽 옆 서탁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보는 서탁 위에는 표지가 새것인 책자 한 권과 아주 낡아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세 권의 비단 책자가 놓여있었다.

 

-신마풍운록!

 

최근에 지어진 새 책자는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 고독마야의 수중에 들어왔다.

 

-혈마대장경!

 

세 권의 낡은 비단 책자는 다름 아닌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고독마야를 합공하게 만든 원인인 혈마대장경이었다.

두 달 전, 고독마야는 약초를 구하러 천산(天山)에 갔다가 어느 빙곡(氷谷)의 빙동(氷洞)에서 우연히 혈마대장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마야가 전대기인의 은거지였던 그 빙동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

새북인마(塞北人魔)라는 그자는 신마풍운록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북인마란 작자는 그저 하루살이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먼저 전대기인의 유물을 발견한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새북인마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자는 상대가 고독마야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초나 캐러 다니는 평범한 심마니로 오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비급을 발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하고는 살인멸구 한답시고 고독마야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한 팔이 으깨진 채 거꾸러졌다.

새북인마는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는 사색이 되어 고독마야 앞에 오체복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굳이 새북인마의 목숨까지 뺏을 이유가 없었던 고독마야는 그자가 발견한 비급만 뺏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고독마야가 새북인마에게서 빼앗은 비급이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허둥지둥 달아난 후에야 자신이 흡혈마조가 남긴 비급을 얻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혈마대장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 자신의 무공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이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다른 무공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북인마를 그냥 살려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에게 복수한답시고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지닌 사실을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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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몰려든 군웅들

 

 

아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약빙이 자책하며 급히 미소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힘없이 쓰러지는 미소부의 가슴에는 비수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혀있었다.

(제발...)

우르르!

냉약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미소부의 단전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을 주입했다.

으음!”

심후한 내공이 주입되자 숨이 끊어지려던 미소부는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냉약빙이 주입해준 내공이 죽어가는 그녀를 잠시 되살린 것이다.

... 정말 전모 냉여협이신가요?”

미소부는 죽어가는 눈으로 냉약빙을 올려다보며 미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냉약빙이에요!”

냉약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죽기 전에 냉여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저희 이씨(李氏)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군요!”

미소부는 냉약빙의 대답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이씨!)

냉약빙은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로 이씨 성을 지닌 젊은 기협(奇俠)이 떠오른 때문이다.

, 부탁이 있어요 냉여협!”

미소부는 꺼져드는 미약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냉약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부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 아이를 부탁드려요. 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이청천(李靑天)...!”

이청천!”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냉약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청천이란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청천이란 인물은 냉약빙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태양신협(太陽神俠) 이청천!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六位)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비록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여섯 번째지만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사실상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협 이청천이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 내에 드는 기인들 중 가장 젊기 때문이다.

태양신협 이청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신마풍운록에 서열 육위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은 비단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격이 인후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기인이사들이 따르고 추종했다.

만일 그가 천하제패의 야심만 있었다면 단시일 내에 거대한 조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태양신협 이청천은 애초에 천하의 패권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의 교외에 자리한 태양곡(太陽谷)에 장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서북제일미인(西北第一美人)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옥수상아(玉手霜娥) 우담혜(憂曇慧)!

 

태양신협 이청천이 혼탁한 강호를 떠나 태양곡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절세미인인 이 여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바로 이대협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

태양신협 이청천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냉약빙인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미소부는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이며 서북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옥수상아 우담혜였다.

(대체 태양곡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옥수상아가 이런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냉약빙은 의아함과 함께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협 이청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냉약빙은 태양신협 이청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기력이 쇠잔한 옥수상아 우담혜가 그녀의 품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절벽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물론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이었다.

(가엾은 여인이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인물의 아내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다니...!)

냉약빙은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 앞에 서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 안겨있었다. 귀엽고 총기 있는 용모를 지닌 이 아이는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다.

(훌륭한 근골(筋骨)이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기뻐하시겠구나!)

냉약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오라버니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냉약빙은 다시금 자신이 처한 급박한 사정을 깨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편히 잠드세요 우부인! 아드님은 나 냉약빙이 친아들처럼 보살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팟!

옥수상아의 무덤에 대고 맹세를 한 직후 냉약빙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거구를 날려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무참한 만행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

 

곤륜산은 천산(天山)과 함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를 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대륙의 지붕이다.

본래 곤륜(崑崙)은 신들의 거처를 뜻한다.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뭇 신들이 곤륜산에 금전옥루(金殿玉樓)의 궁궐을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다던가?

그 장대한 곤륜산의 동쪽 끝에는 남쪽의 청해성(靑海省)을 굽어보고 있는 천길 단애가 자리하고 있다.

 

-고독애(孤獨崖)!

 

지면에서 수직으로 수백 장이나 치솟아 올라 있어 마치 거꾸로 꽂힌 칼의 허리 부분을 뚝 분질러 세워놓은 듯 웅장한 단애의 이름이다.

너무 높아 허리 부분이 늘 운무로 휘감겨 있는 고독애의 형상은 이름 그대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 고독애의 정상부분은 의외로 넓어서 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이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차있는 넓직한 평지 끝에는 돌로 지은 석옥(石屋)이 한 채 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석옥은 마치 세외도원의 일부인 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별세계의 선경과도 같은 고독애 일대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독애 정상의 넓은 평지에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독애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석옥 주변에는 머리가 으깨졌거나 몸뚱이가 짓뭉개진 수백 구의 시신들이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들이 질펀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전율하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처참한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가 된 자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지역의 패자들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자들은 하나같이 신마풍운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명숙들이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같이 막중한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중원으로부터 머나먼 이곳 곤륜산의 고독애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

“...!”

장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비록 운집한 군웅들 중 절반 정도가 죽음을 당했으나 여전히 고독애에는 오륙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웅들은 그 납덩이같은 침묵 속에 반월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고독애 끝에 자리한 석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석옥을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면면을 보면 실로 대단했다. 당금 무림의 명숙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군웅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석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나타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이 공포의 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석옥 안에는 과연 누가 있기에 뭇 군웅들을 떨게 만든단 말인가?

 

군웅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었다.

석옥 뒤쪽의 천길 단애를 제외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기도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만 했다.

반월형 포위망의 정면 맨 앞쪽에 서있는 인물은 일신에 푸른색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노검수(老劒手)였다.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 노검수의 허리춤에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깍은 목검(木劒)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 목검은 유서 깊은 검술명가(劒術名家)의 상징이다.

 

<혁련검호각(赫蓮劒豪閣)>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술명가다.

현련검호각은 연원을 따져보면 무려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호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력검호각의 일족은 오랜 세월 오직 검술 한 가지에만 매진해 왔으며 그 결과 무적의 검법을 이룩해냈다.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혁련검호각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의를 걸친 노검수는 바로 그 혁련검호각의 당대 가주다.

 

-유성신검황(流星神劒皇) 혁련휘(赫蓮輝)!

 

신마풍운록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비록 당금 무림의 세 번째 고수로 꼽히지만 단순히 검법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대검호가 유성신검황 혁련휘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왼쪽에는 오척(五尺) 단구(短軀)의 꼽추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키만한 길이의 긴 곰방대를 빨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 꼽추노인의 피부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비단 피부색만이 녹색이 아니었다. 이 인물은 눈동자마저도 섬뜩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마치 뱀이나 악어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듯한 그자의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 괴상망측한 행색의 꼽추노인 주변 십여 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꼽추노인을 극히 두려워하는 듯 연신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신마풍운록의 서열 사위(四位)의 인물로서 일반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독천존 서래음이 독공(毒功)으로는 천하제일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 전체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배어 있어 단지 숨결만으로도 십 리 밖의 적을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림인들이 역신(疫神)처럼 두려워하는 독천존 서래음은 대리(大里)에 자리한 독성부(毒聖府)의 부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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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속의 인연

 

 

-기련산(祈蓮山)!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자리한 험산으로 서북쪽에는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중원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남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기련산의 서쪽 끝은 곤륜산의 장대한 산맥과 이어져 있다.

쏴아아아!

늦여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기련산 전역을 맹렬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쐐애애액!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질풍같이 질주하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이 인물의 경신술은 너무도 빨라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설령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지닌 무림고수라 해도 그저 흐릿한 사람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이나 쭉쭉 나아가는 경이적인 경신술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테니...”

질풍같이 달리는 인영으로부터 문득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 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처럼 걸걸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섬전처럼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 인물이 여자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경신술을 연마했기에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여인의 몸 주위로는 진공(眞空)의 막()이 생겨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들! 이 모두가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간악한 음모이거늘... 그 까짓 비급에 눈이 멀어 고독애로 몰려들다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연신 이를 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주 특이하여 한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구(巨軀)!

여인은 무려 칠척(七尺; 2m 10cm)에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린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이 여인은 다리 하나의 굵기도 어지간한 사내들의 몸통만하다.

투학!

그 강인한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여인의 늘씬한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일까?

비록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 구릿빛 피부에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는 경국지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만이 아니다.

칠척 가까운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팔 다리가 늘씬할 뿐 아니라 들어갈 곳은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나올 곳은 당당하게 나와 있다.

무지막지한 거구의 소유자라는 것만 빼면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께서 이미 변을 당했다면... 전 무림이 나 냉약빙(冷若氷)의 손에 피로 씻기리라!)

거구의 여인은 질풍같이 날아가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큼직한 손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게 오라버니는 생명과 다름없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굉천벽력탄(轟天霹靂彈)보다 더한 것이라도 쓸 수 있다!)

냉약빙이란 이름의 여인은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에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 십여 개가 들어있다. 굉천벽력탄이라는 그 화탄은 한 알로 십장 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여간 서둘러야 한다! 곤륜산의 고독애까지는 아직도 천여 리나 남았으니...!)

쐐애애액!

냉약빙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천여리라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먹히는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이 여인에게는 천리 길도 그저 하루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헌데 냉약빙이 막 하나의 산봉을 새처럼 날아 넘을 때였다.

아악!”

퍼붓는 빗속에서 한소리 애처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산 속에서 웬 여자가...!)

콰우우우!

빛살처럼 질주하던 냉약빙의 몸이 송곳을 꽂듯이 딱 멈춰졌다. 그녀는 달리는 것도 빨랐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빨랐다.

쏴아아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우뚝 멈춰선 냉약빙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그녀의 거구가 삽시에 빗물에 젖어들면서 얇은 여름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흠씬 젖은 옷자락을 통해 그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냉약빙의 젖가슴은 하나하나가 가장 큰 수박만하다. 그 육중한 한 쌍의 살덩이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가빠진 탓에 연신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멈춰선 냉약빙은 먹물을 칠한 듯 짙은 눈썹을 모으며 비명이 들려온 우측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가볼까?)

냉약빙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평상시였다면 당연히 달려가 보았을 것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녀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촌각을 다투어 곤륜산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냉약빙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악! 안돼! 안된다 이놈들아! 아악!”

또 다시 여인의 절박하고도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어떤 여인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냉약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은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같이 초조했지만 같은 여인의 입장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스파앗!

다음 순간 냉약빙의 모습은 흐릿하게 변해서 어떤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온 계곡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는 계곡에도 장대발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그 계곡의 끝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수십 길 높이인 그 절벽 앞쪽으로는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옷을 걸친 사내 십여 명이 어떤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흘흘! 고것 육덕 한번 기막히군!”

빨리 끝내라 장가야! 너 혼자 즐길 계집이 아니지 않느냐?”

빙 둘러선 혈포인들이 저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보는 가운데 한 명의 여인이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내들에게 깔려 능욕당하고 있는 그 여인은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부(美少婦)였다.

여인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우아한 기품까지 지녀 한눈에 보기에도 명문가의 안주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으며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채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미소부의 팔 다리는 흉칙한 인상의 사내 넷이 활짝 벌려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 미소부의 몸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자가 하체를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깔린 여체는 마치 작살을 맞은 듯 물고기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한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인데 그곳에는 사내아이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귀엽고 잘 생긴 그 아이는 바로 유린당하고 있는 미소부의 아들이었다.

사내아이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은 미소부의 아들을 해치고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는 중이었다.

... 정말 기가 막히구만! 이런 계집을 마누라로 두었었느니 태양신협(太陽神俠)이란 놈도 여한은 없었겠다.”

미소부의 몸 위에서 날뛰는 사내가 헐떡이며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였다.

크악!”

커억!”

돌연 단말마의 비명 십여 마디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산통깨지게!”

미소부를 유린하던 사내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직후 그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퍼퍼퍽! 콰당탕!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육시를 할 놈들!”

화악!

뒤 이어 사나운 일갈과 함께 장내로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바로 냉약빙이라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 당신은!”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냉약빙을 본 순간 미소부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자의 뇌리로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여살성(女煞星)의 존재가 떠오른 때문이다.

... 전모(電母) 냉약빙!”

파앗!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여체에서 떨어진 사내는 다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자는 벌거벗은 하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존재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모 냉약빙!

 

여자의 몸으로 신마풍운록에 서열 십위(十位)로 기록되어 있는 절세고수다.

별호가 암시하듯 냉약빙의 경신술은 단연 우내최강이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하다.

냉약빙이 구사하는 전궁만리비(電弓萬里飛)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로 알려져 있다.

전궁(電弓)은 번개를 뜻한다.

전모라는 별호는 냉약빙의 경신술이 번개가 치는 것만큼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냉약빙의 표적이 된 자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전모 냉약빙이 나타났으니 일개 음적에 불과한 사내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으헉!”

나타난 여인이 전모 냉약빙임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뿌옇다 싶은 순간 냉약빙의 모습이 유령같이 앞쪽에 나타난 것이다.

쩌어엉!

이어 그녀의 큼직한 손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고...

안돼, 케엑!”

퍼억!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연 뇌수가 빗속으로 확 뿌려졌다. 냉약빙의 손가락에서 일어난 강력한 파괴력이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머리통이 으깨져 나뒹구는 음적의 시체를 노려보며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았다.

헌데 그 직후였다.

흐윽!”

그녀의 뒤에서 짤막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반사적으로 돌아본 냉약빙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내들에게 유린을 당하던 미소부가 한 자루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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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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