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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애절한 이별

 

 

막비강은 두 소녀가 필시 뒤쫓아오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북산검호각을 나서기 무섭게 팔보간섬의 경공술을 극한까지 전개하여 유성처럼 날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질주했을까?

붉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에서 족히 오백여 리는 남쪽으로 내쳐 달린 상태였다.

돌연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산봉이 막비강으로 하여금 급히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막비강이 멈춰 선 곳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 이어진 수직의 절벽 위쪽인데 수백장은 됨직한 그 절벽 아래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막비강은 비록 깜짝 놀랐지만 적시에 걸음을 멈춘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에 제때 멈추지 못해 강변에 노출된 기암괴석 위에 떨어졌다면 분신쇄골은 말할 것도 없고 뼈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내 침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 텐데... 나같이 불효불인(不孝不仁)하고 죽어서 묻힐 땅도 없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강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하다.]

비통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 저었다.

[... 아니지. 난 마땅히 집에 돌아가 아버님 앞에서 죽어 그분에게 최후의 위안이나마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된다. 만일 아버님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면 앞으로 사람 노릇도 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아버님 앞에서 자결한다면 부모의 마음만 상하게 하는 셈이니... ... 죽기는 어차피 죽어야 할 텐데 어떤 방법으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몇 번이나 투신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생사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인지라 산봉 위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헌데 그때였다.

[히히히! 누나! 보아하니 저 사람은 이곳에 연자비운(燕子飛雲)의 경공신법을 연마하러 온 모양이야.]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치기어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막비강이 흠칫 놀랄 때 또 다른 음성이 이어졌다.

[아니다. 그는 우리처럼 죽을 장소를 찾고 있다.]

두 번째 들린 음성은 제법 나이가 든 소녀의 것이었다.

[그럼 뛰어내리기만 하면 될 텐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그렇지도 않다. 죽지도 못하고 팔다리만 부러지면 평생을 두고 고생하게 된다.]

막비강은 처음 목소리가 어린 소년의 음성인지라 의아심을 금치 못하고 귀담아들었다.

헌데 이어진 나이가 더 든 소녀의 음성이 자기들도 죽을 장소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엾은 생각이 들어 탄식을 했다.

(어린 나이에 죽으려고 하다니 애석한 일이구나!)

그는 자기의 소행은 죽는다고 해서 마음속의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그것도 나이도 어린 소년 소녀들이 죽는다는 말을 하자 무엇 때문에 꼭 죽으려 하는지의 이유를 물을 심산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의 대화를 계속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상대방이 자기를 비웃고 있음을 깨닫고 화가 치밀어 버럭 노성을 질렀다.

[내가 죽으려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자 나무 뒤에서 소녀의 놀리는 소리가 전해 왔다.

[호호호! 우리는 여기서 당신이 죽는 것을 구경할 테니 빨리 뛰어내리세요.]

이때 아래쪽 강상(江上)에서 돌연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여아(麗兒), 너는 또 천아(川兒)와 말다툼을 했구나. 천아야! 뛰어내리면 안 된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중년여인의 음성이었다.

막비강은 어둠 속에서 최대한 시력을 돋우어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까마득한 아래쪽의 강 물위로 작은 조각배 한 척이 떠가고 그 위에서 날렵한 인영이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머니! 이곳에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어요.]

중년여인의 말에 소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중년여인의 음성은 싸늘하고 무정하게 일변했다.

[자살하려는 작자가 있다면 뛰어내리게 버려 두어라!]

막비강은 멀리 떨어진 강 위에 있음에도 음성이 맑고 똑똑히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 여인의 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뛰어내렸다가 저 여인에게 구조된다면 죽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속의 일을 말해 주어야 하니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막비강은 아무 대꾸도 않고 발을 굴러 절벽을 따라 상류 쪽으로 질주해 갔다.

[호호호, 겁쟁이!]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좋다. 너희들이 내가 죽지 못한다고 비웃지만 나는 꼭 강물에 뛰어내려 죽을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보여 주겠다.)

막비강은 미친 사람처럼 질주하며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였다.

 

***

 

절벽 위의 길을 따라 다시 얼마를 달려갔을까?

그는 어느덧 또 다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천인단애 위에 도착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센 파도가 춤을 추고 괴석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이번에는 뜻대로 죽을 수 있겠구나. 여기서 뛰어내리면 분신쇄골이 되어 강물에 떠내려갈 테니 나의 이 죄 많은 몸은 세상에 뼈도 남지 않겠지.)

헌데 그가 막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길 봐요. 저 사람 혹시 둘째 오라버니가 아녜요?]

[정말 그렇구나!]

갑자기 절벽 중간쯤에서 귀에 익은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막비강은 그 목소리들을 듣는 순간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알고 깜짝 놀랐다.

바로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과 그녀의 딸 막영란이었다.

혈검산장에서 막고천과 함께 사라졌던 두 모녀가 어떻게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막비강은 당혹해하면서도 생각을 굴렸다.

(염라철장 곡 백부님의 일을 그들 모녀에게 알려 주어 그들 모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나의 부친 막고천도 이 근처에 있다면 죄를 받고 죽을 수 있으니 더욱 잘된 일이다.)

이런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강아! 절대 아래로 뛰어내려선 안 된다!]

냉상영의 애절한 음성이 전해 왔다.

화라라락!

고함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쪽으로 이어진 좁은 협도(狹道)로 한 명의 중년여인이 다급히 달려 올라왔다.

바로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이었다.

온순하고 자애로운 냉상영의 얼굴은 이 순간 당혹과 초조로 물들어 있었다.

냉상영은 혹시나 막비강이 투신할까 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냉상영의 뒤쪽으로는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체구의 소녀가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냉상영의 딸인 막영란이었다.

[이러지 말아라, 강아야!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돼!]

단숨에 절벽 위로 달려 올라온 냉상영이 와락 막비강을 끌어안았다.

막비강의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자그마한 키의 여체가 부들부들 떨며 막비강의 건장한 몸을 휘어감는다.

너무도 풍만하고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서는 막비강의 코에 매우 익숙한 내음이 났다.

은은히 백합 형기가 감도는 살내음이다.

하지만 이 순간 막비강은 그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마치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냉상영을 내려다보았다.

가녀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육중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냉상영의 젖가슴이 자신의 가슴과 그녀의 교구 사이에 끼어 납작하게 눌려져 있다.

[두 분은 어찌하여 이런 곳에 계십니까? 나의 부친은 어딜 가셨습니까?]

막비강이 망연자실하여 묻자 냉상영이 곤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누가 네 부친이란 말이냐?]

[혈검산장의 막고천 장주님 말입니다.]

[그 막가 악적 말이냐?]

순간 온순하던 냉상영의 눈에서 표독한 한기가 내뻗쳤다.

[그는 네 부친이 아니다.]

냉상영은 만면에 분노의 빛을 머금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 소리하지 마시오! 그분 어른은 나를 낳아 주신 부친이 틀림없소.]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외쳤다.

[당초 염라철장 곡 선배님이 나를 잘못 유괴하는 바람에 난 그분이 나의 부친이라 오해했던 거요. 그러나 이제 나는 염라철장 곡선배가 아주머니의 원래 남편이고 나는 막 장주의 친자식임을 알아냈소.]

막비강의 말에 냉상영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나는 염라철장 곡 선배님이 내게 금강옥액을 먹여 대공을 성취시켜 주신 은덕을 생각하여 두 분을 탓하지 않겠소. 곡 선배님의 유품을 돌려줄 테니 안전한 곳에 숨어 편히 사십시오.]

막비강은 품속에서 염라철장의 상징인 강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냉상영이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말했다.

[강아, 기구한 우리 모녀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막고천은 절대 너의 부친이 아니다. 그것은 그 악적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 사실이니 틀림없다.]

[... 그게 정말입니까?]

냉상영의 말에 막비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냉상영이 애절한 표정으로 막비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나의 진짜 부친은 누굽니까?]

막비강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급히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네 모친이 상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혹시 나를 속이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냉상영의 대답에 막비강은 검미를 찌푸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냉상영은 애잔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삼년 만에 혈검산장으로 돌아와 소란을 피웠을 때 나는 네 수중의 강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원래 남편이신 염라철장께서 너를 자기 유복자로 알고 데려갔음을 알았다. 하지만 막가 악적의 장원에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냉상영은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였다.

[네가 보인 놀라운 신위에 놀라 달아난 막가 악적은 혈검산장에서 멀지 않은 곳의 은신처에 피신했다. 그곳에서 막고천은 경파 언니에게 악독한 자식을 낳아 다리가 잘리고 수모를 당하게 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네 어머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너를 끝까지 막가 악적의 자식이라 고집했다. 그러자 막가 악적은 그제서야 네 모친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막비강은 참지 못하고 말을 받아 물었다.

[그 사실이 무엇입니까?]

[원래 그 노적은 한 가지 악독한 무공을 연성한 후 일신의 정혈(精血)이 고갈되어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노적이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이십 년도 전의 일이다.]

막비강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작자는 이미 아이를 가진 임산부만 골라 탈취했군요. 남의 자식을 훔쳐 가문을 이으려고!]

[단순히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냉상영은 한 서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막고천은 고갈된 정혈을 보충하고 또 내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수태한 여인들을 골라 욕보인 것이다!]

그녀는 지난날의 치욕이 떠오른 듯 치를 떨었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몸으로 막고천에게 처음 능욕 당하던 그날의 악몽이 지금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그녀다.

막비강도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외간 사내에게 겁탈 당했을 냉상영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는 조금쯤 상상이 간 때문이다.

[, 그렇다면 큰형 막불계도 막고천의 친자식이 아니겠군요.]

막비강은 어색함을 감추려 화제를 돌렸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냉상영은 소매 자락으로 눈가의 물기를 찍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 모친이 막가 악적의 집에 끌려온 것은 나보다 삼 년 가량 빨랐다. 그리고 경파 언니가 혈검산장에 들어왔을 때 불계는 이미 세 살이었으므로 그 애가 막가 악적의 친자식인지의 여부는 그 애의 생모만 아는 일이다.]

막비강은 냉상영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막고천에게 피를 뽑아 혈연관계를 증명하자고 말했을 때 그의 안색이 대변한 것은 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구나. 자살하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혈검산장에 돌아가 그 악적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으면 난 사람도 아니다.]

냉상영이 탄식을 하며 말을 받았다.

[지금 산장에 가 보았자 그 악적을 만나지 못한다.]

막비강은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중이 도망쳐도 절까지 짊어지고 도망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검산장이 존재하는 한 언제고...!]

[강아,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네가 산장을 떠난 후 막가 악적은 대부분의 수하들을 해산시키고 여자들과 몇 명의 심복만 데리고 떠났다. 우리 모녀는 그자의 심정이 극도로 복잡해져 있는 틈을 이용하여 간신히 도망쳐 나온 것이다.]

[그럼 제 생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비강은 급히 물었다.

[당시 제각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다른 사람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네 모친은 막가 악적의 심복들로부터 삼엄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는지라 아마 우리처럼 도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막비강은 곤경에 처해 있을 생모를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냉상영이 그런 그를 품에 안아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강아, 울음을 거두어라! 네 모친이 고생은 하겠지만 결코 죽임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적은 다시 네게 따라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그녀를 살려 둘 것이기 때문이다.]

막비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막고천! 나는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놈을 찾아내고 말겠다.]

냉상영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강아, 너는 어디서 란아의 부친을 만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 아주머니!]

이어 막비강은 염라철장에 대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냉상영은 막비강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비 오듯 흘리더니 갑자기 막비강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막비강은 그녀와 함께 무릎을 꿇으며 손을 저었다.

[아주머니, 이러시지 마십시오.]

[아니다. 네가 친히 내 남편을 안장해 주었으니 마땅히 나의 절을 받아야 한다. 란아, 너도 빨리 오라버니에게 큰절을 올려 고맙다는 인사를 해라!]

막영란은 모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꿇었다.

막비강은 안절부절못하며 급히 만류했다.

[아주머니, 이러시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냉상영은 만면에 처량한 빛을 가득 머금었다.

[강아, 네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느냐?]

막비강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염라철장 곡 선배님께 대은(大恩)을 입은 그때부터 그분을 부친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주머니는 저의 친어머니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분부만 내리십시오. 저는 어떠한 일이라도 기꺼이 복종하겠습니다.]

냉상영의 처량한 얼굴에 한 가닥 희열의 빛이 스쳐 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란아 부친의 얼굴을 봐서라도 란아에게 몇 가지 무예를 가르쳐....]

막비강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지금 저는 그날 복용했던 금강옥액을 모두 란 매에게 돌려주고 제가 연성한 절예까지 모두 전수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의 마음이 그렇게 기특하니 하늘도 너희 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

냉상영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막비강을 끌어안더니 막영란을 돌아보았다.

[란아, 똑똑히 들어라! 어미가 막고천 그 악적에게 정조를 잃고도 지난 십 팔 년간 모욕을 참으며 살아온 것은 네가 커서 부친의 원수를 갚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오라버니를 사부로 모시고 열심히 무예를 연마해라. 그래야만 이 어미를 슬프지 않게 할 수 있다.]

막영란은 눈물을 흘리며 냉상영에게 큰절을 했다.

[어머니,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아무렴 그래야지. 그럼 어미는 이만 가 보아야겠다.]

화라락!

냉상영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막비강을 힘껏 밀치더니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막비강은 그녀가 자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지라 냉상영이 미는 기세에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안 됩니다!]

막비강이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땐 냉상영은 이미 절벽 아래로 투신한 후였다.

[어머니!]

그때 막영란도 모친을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란 매, 안 돼!]

막비강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막영란이 놀랍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절벽 아래에서 바람을 타고 냉상영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란아, 굳세게 살아 남아서 부친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어미는 이제야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구나.]

절벽은 너무 높아 냉상영은 이 몇 마디 말을 하고 한참 후에야 비로소 수면에 떨어졌다.

첨벙!

물에 빠진 냉상영은 순식간에 파도에 삼켜져 버렸다.

그리고 절벽 위에서 두 남녀만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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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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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미궁에 빠진 신세내력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정신이 돌아온 막비강은 망연자실하여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혼미한 중에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꿈이었을까?)

막비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제발 악몽이기를 바랐다.

[흑흑! 혜아야!]

[흐윽! ... 이제 어쩌면 좋아, 언니?]

하지만 한옆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두 소녀의 울음소리가 그의 희망을 산산이 바스러뜨려 버렸다.

어둑한 동굴 속, 두 소녀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전씨 자매였다.

[죽여 주시오!]

막비강은 두 소녀 앞에 팍 머리를 박았다.

그저 그녀들의 처분에 맡길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그저 두 분이 죽으라면...!]

[닥쳐요!]

막비강이 다시 죄를 빌려 하자 언니 쪽인 홍의소녀가 발칵 화를 내었다.

[당신을 죽이면 우리 자매의 앞날은 어찌되죠? 다시 한 번 죽겠다는 소릴 하면 그땐 정말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어요!]

(자신들의 앞날이라고...? 완전히 옴치고 뛸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막비강은 홍의소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간파하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홍의소녀는 과연 언니답게 그 와중에서도 재빨리 막비강에게 올가미를 씌워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들 자매를 막비강이 함께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암시를 한 것이다.

[알겠소! 두 분에게 지은 죄가 태산보다도 무거우니 책임을...!]

[꺄악!]

막비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 순간 녹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녹의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인이 될 이 사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훔쳐보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로 막비강의 알몸이 들어온 것이다.

(망신살하고는...!)

막비강은 급히 옷을 끌어들여 가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에그머니나...)

막비강의 알몸을 본 녹의소녀는 새삼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본의 아니게 추태를 부린 셈이 된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서둘러 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는 역시 몸을 가린 두 자매와 마주앉았다.

녹의소녀는 원래의 녹의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언니 쪽인 홍의소녀는 헐렁한 막비강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막비강이 그녀의 적삼을 너무 거칠게 벗겨 버리는 바람에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 낭자께서 이렇게 도와 주셨으니 소생은 평생 두 분께 봉사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막비강의 말에 이제는 제법 대담해진 녹의소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봉사를 받으려는 거겠죠? 하여간 좋겠네요! 당신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양손에 꽃을 꺾어 든 셈이니...!]

[혜아야!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홍의소녀가 질겁하며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막비강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야 유구무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두 분 낭자의 방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홍의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싸움을 할 때는 매섭고 인정사정도 없더니 말하는 태도는 마치 여자 같군요. 제 이름은 전란(田蘭)이고 이 아이는 동생인 전혜(田蕙)예요. 사실 저희 자매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랍니다!]

그녀의 말에 막비강은 흠칫 놀랐다.

두 소녀가 자매인 줄은 알았지만 쌍둥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두 자매는 모든 게 대조적이었다.

언니 쪽인 전란은 몸매도 풍만할 뿐 아니라 성격도 넉넉하고 활달했다.

반면 동생인 전혜는 선병질적인 가녀린 체구에 성격도 쌀쌀맞고 매몰찬 것이다.

도저히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자매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두 소녀는 방년 십구 세로 막비강보다 두 살 아래였다.

또한 그녀들은 사패천 중 하나인 북산검호각의 직계 후손이었다.

막비강은 두 소녀와 몇 마디 형식적인 말을 나눈 후 다시 전포에 관해 물었다.

 

노호검(老虎劍) 전포(田袍)!

 

그는 전대 북산검호각의 각주로서 두 자매에게는 백조부(伯祖父), 즉 큰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막비강의 물음에 녹의소녀 전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은 왜 그분 어른에 관해서만 계속 질문을 하시죠?]

[그분 어른을 만나 뵙고 내 부친이 누군지 여쭈어 보려고 합니다.]

막비강은 지난일들을 대충 설명하고 눈동자에서 기대의 광망을 발산하며 두 자매를 주시했다.

언니 쪽인 전란이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실망하시겠지만 사실 우리 자매도 지금 그분 어른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이 이 말을 듣고 실망의 빛을 띠자 전란이 얼른 말을 이었다.

[백조부께서는 십오 년 전에 집을 떠나신 후 돌아오시지 않아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저희 집안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발생하여 전가족이 출동하여 그분 어른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막비강은 곤혹의 빛을 띠며 전란을 응시했다.

[어떤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까?]

전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혜가 옆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어쩌면 당신과 관련이 있을지 몰라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요? 나와 관련이 있다구요?]

전혜는 전란이 눈짓으로 제지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은방울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에요. 사실 지난달 우리 집 중당(中堂)에서 한 장의 산수화가 발견되었어요.]

[그림?]

[그 그림 속에는 많은 인물이 있으나 대부분이 죽었으며 만면에 놀람과 당황하는 빛을 가득 머금은 한 명의 임산부와 또 두 명의 사내가 시체 더미 속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 그림은 방금 당신이 말한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잖아요?]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매우 흡사하군요. 임신한 그 부인은 아마 나의 모친일 것이며 혈전을 벌이는 두 사람 중 한 분은 나의 부친이 틀림없습니다. 헌데 당신의 백조부는 왜 찾으려고 합니까?]

이번에는 전란이 말을 받았다.

[그 그림 뒷면에는 백조부님의 수결(手決)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걸로 미루어 보건대 그 그림은 백조부님께서 친히 집안에 간직해 두셨든지 아니면 그분 어른과 관계있는 사람이 가져왔을 거예요. 어쩌면 백조부님의 원수 소행일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조사해야만 해요.]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전씨 자매를 바라보았다.

[전 낭자, 외람된 말 같지만 나를 귀각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리하여 막비강은 두 소녀를 따라 길을 떠났다.

 

***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에 도착하여 그림 속의 인물을 보면 자기의 신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만 알아내면 막고천이 부친을 괴롭히고 모친을 탈취한 증거까지 생기게 된다.

그럼 다시 혈검산장에 찾아가 떳떳하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보름 후, 그는 기대와 흥분이 뒤엉킨 심정을 안고 드디어 북악(北岳) 항산(恒山)에 자리한 북산검호각에 도착했다.

북산검호각은 사패천 중 북패천이라 불리는 것과 달리 매우 적막했다.

깎아지른 항산의 봉우리들 사이에 지어진 드넓은 성보에는 다만 삼백여 명의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북산검호각은 제자를 받아들이는 절차가 까다롭고 또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하산을 허락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 때문에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그토록 적은 인원으로도 무림의 사패천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을 보면 북산검호각의 검호들 개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검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가솔들이 적은 북산검호각인데다 근래에는 노호검 전포의 종적을 찾기 위해 대다수의 검호들이 강호로 나간 상태라 한층 더 적막했다.

두 자매의 웃어른들은 하나도 없고 그저 몇몇 문인들과 시비들만이 북산검호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시바삐 그림을 보고 싶은 일념에 막비강은 북산검호각의 적막한 모습 같은 것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 이분은!]

헌데 예의 그림을 보는 순간 막비강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림 속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내는 젊은 시절의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과 염라철장(閻羅鐵掌) 곡강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놀람과 당황의 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임산부는 막비강 자신의 생모 한경파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 중 다섯 번째인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염라철장이 막고천에게 빼앗긴 부인이란 다름아닌 냉상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염라철장 곡강의 자식은 막비강 자신이 아니라 그의 손아래 누이동생인 막영란이었고...!

이 발견은 막비강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더니 갑자기 외마디 함성을 질렀다.

[불효자식은 죽어 마땅하다!]

전란은 그의 얼굴빛이 갑자기 크게 변하자 급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 순간 막비강의 가슴속에선 후회와 미움, 그리고 비통이 동시에 치솟았다.

(막고천과 염라철장이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던 사람이 다섯 번째 어머니 냉상영이라면 나는 막고천의 친자식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막비강은 자신이 염라철장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막고천의 사람됨이 어떻든 간에 난 그의 친자식임에 분명하다! 헌데 나는 생부를 원수로 생각하고 다리까지 부러뜨렸다.)

극도의 비통함으로 막비강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뿐 아니라 그날 큰어머니를 학대했으며 큰형님에게까지 덤볐으니 이것은 실로 극악무도한 불효 행위다! 이제 내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던 중 전란이 이런 질문을 하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미안하오! 나중에 저승에서나 다시 만납시다.]

쐐액!

막비강은 비통하게 외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생인 전혜가 어리둥절하며 막비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니, 저승에서 만나자니 그럼 저 사람 죽으려고...!]

[빨리 뒤쫓아가자!]

두 소녀가 지붕 위로 뛰어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십여 리 밖에서 하나의 흑점이 번뜩하더니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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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느닷없는 봉변

 

 

 

광풍진천장 역시 청구상인의 절기 중 하나로써 만일 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작은 동산 하나는 뿌리 채 날려보낼 수가 있다.

다만 광풍진천장은 내공 소모가 극심한 단점이 있어 연달아 펼쳐내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끝장을 내자!]

꽈르릉!

광풍진천장으로 기선을 잡은 막비강은 질풍노도같이 낙성신마를 공격해 갔다.

막비강은 비록 금강옥액을 마시고 청구단서를 익혔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어 전적으로 혼자 무공을 배워야만 했다.

그런 탓에 그의 청구절학은 아직 채 오성(五成)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 바람에 청구절학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우내사마 정도의 인물도 압도할 수 없었다.

! 퍼펑!

막비강은 자신의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지라 일단 선기를 잡자 놓치지 않고 격렬한 공격을 가해 갔다.

홍의소녀는 만면에 경악의 빛을 머금은 채 막비강이 낙성신마를 몰아붙이는 것을 구경하였다.

설마 약관의 청년이 백여년 년 전부터 악명을 떨쳐 온 거마를 이토록 쉽게 궁지로 몰아넣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홍의소녀는 다시 녹의소녀와 분면색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헌데 이때 녹의소녀와 분면색마도 싸움을 중지하고 넋 잃은 사람처럼 막비강과 낙성신마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막비강의 신위에 경악과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홍의소녀가 녹의소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녹의소녀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니!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

[혼비백산하는 꼴이 우습구나. 저 음적이 기습을 하면 어쩌려고 넋을 잃은 채 구경하고 있는 거냐?]

분면색마는 불과 일 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 서 있는지라 홍의소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음험하게 웃었다.

[소생은 저들이 승부를 가리는 것을 본 다음에 당신들 자매를 즐겁게 해줄 테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홍의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음적! 쓸데없는 주둥아리는 그만 놀리고 죽음이나 받아라!]

추학!

그녀는 장검을 휘둘러 분면색마를 공격해 갔다.

분면색마는 갑자기 홍의소녀에게 기습을 받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연달아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바로 그때였다.

퍼펑!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일어나고 모래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개의 인영이 각기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홍의소녀와 분면색마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깜짝 놀라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저런...!]

여기저기서 경악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섯 개의 인영이 각기 낙성신마와 막비강에게로 달려갔다.

막비강은 비록 일장으로 낙성신마를 격퇴시켰지만 자신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욱이 피어오른 먼지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화락! 스슷!

홍색과 녹색 두 개의 날렵한 인영이 동시에 막비강 앞에 도착하여 관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다치지 않았어요?]

막비강은 간신히 몸을 가누었지만 얼른 숨을 고를 수가 없어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녹의소녀가 홍의소녀를 돌아보며 급히 말했다.

[언니, 그에게 소환단(小還丹)을 한 알 줘!]

홍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하나 꺼냈다.

옥병 속에는 붉은 기름종이에 싸인 대추알만한 환약 두 알이 들어 있었다.

이 환약이 소림사(少林寺)에 전해지는 절세의 영약인 소환단이다.

아무리 심한 내상이라도 한 알의 소환단이면 금방 완쾌될 수가 있다.

어린 소녀들이 어떻게 소림사의 요상영단을 갖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 이걸 먹어요!]

언니에게서 소환단을 받은 녹의소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막비강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막비강은 진기를 돋우어 한바퀴 순환시켜 본 결과 기혈만 약간 뒤틀렸을 뿐 별 지장이 없는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귀한 단약(丹藥)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홍의소녀가 눈을 치켜 뜨며 약간 성이 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꺼냈는데 다시 집어넣으란 말인가요? 빨리 받으세요!]

막비강은 그녀의 화내는 모습이 귀여워 녹의소녀에게서 소환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녹의소녀가 그걸 보고 물었다.

[왜 먹지 않으세요?]

[아껴 두었다가 정말 부상을 당했을 때 먹으려고 합니다.]

모래먼지가 흩어지자 장풍이 마주쳤던 지면에 길이가 오 장 가량 길게 갈라지고 깊이는 석 자 정도로 파여 있는 것이 드러났다.

낙성신마는 움푹 파인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으며 그의 좌우에는 천수인마와 화색쌍요가 서서 그를 보호하며 막비강 일행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그자들에게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두 자매에게 물었다.

[낭자의 성이 전씨라면 혹시 전포라는 분을 아십니까?]

녹의소녀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분은 우리 백조부(伯祖父)님이세요.]

[그만둬!]

홍의소녀는 동생의 입빠른 것을 꾸짖는 듯이 눈을 흘겼다.

막비강은 홍의소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낭자께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긴한 일로 그분 어른을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리 큰할아버지를 뵈려는 거죠?]

홍의소녀가 경계를 풀지 않으며 물었다.

[제 이름은 곡능천이라 합니다.]

[! 천면신룡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녹의소녀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어느덧 막비강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약관밖에 안 된 젊은 나이에 우내사마를 물리치는 신위를 본 순간 소녀의 방심은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이야앗!]

쐐액!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세 줄기 인영이 동시에 막비강 일행에게 날아들었다.

기회를 엿보던 천수인마와 쌍요가 동시에 공격을 발동한 것이다.

퍼펑!

특히 쌍요는 악독하게도 먼저 한 무더기 분홍색 독분(毒粉)을 퍼뜨려 시야를 가린 뒤 장력을 날려 왔다.

[두 분! 빨리 후퇴하시오!]

꽈르릉!

막비강은 다급히 전씨 자매에게 외치며 쌍장을 휘둘러 청구상인의 최강절기인 치우강기를 천수인마와 쌍요를 향해 펼쳐냈다.

퍼펑!

[!]

[크흑!]

다음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천수인마와 쌍요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또한 막 물러서려던 홍의와 녹의 두 자매까지도 날려 나가 땅바닥에 곤두박질했다.

그뿐 아니었다.

[!]

십여 장 밖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던 낙성신마조차도 치우강기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치 호박처럼 오 장 밖으로 굴러 나갔다.

[!]

그러나 막비강도 선혈을 한 모금 토해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래 치우강기는 위력이 강한 대신 심대한 내공의 소모를 동반한다.

헌데 막비강은 방금 전 낙성신마와의 격돌로 기혈이 흔들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치우강기를 펼쳐내게 되었다.

그 바람에 체내의 기혈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다.

막비강이 발휘한 치우강기는 비록 대부분이 앞으로 발출되었지만 옆에 서 있던 두 자매도 상당한 타격을 받고 나뒹굴었다.

[... 무서운 무공이야!]

[청구상인의 치우강기가 천하제일의 신공이라는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그녀들은 바닥에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일어났다.

[크으...!]

그런 그녀들의 시야로 돌풍에 휘말려 뒹굴었던 낙성신마가 악을 쓰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이런 때 저 노마가 덤벼들면 큰일이다!)

두 자매는 내심 가슴이 덜컥해졌다.

[빨리 여길 떠나자!]

파앗!

홍의소녀는 급히 인사불성이 된 막비강을 등에 들쳐업고 몸을 날렸다.

녹의소녀도 막비강을 들쳐업은 언니를 호위하며 전력을 다해 질주해 갔다.

[... 거기 서라!]

뒤쪽에서 낙성신마의 악에 받친 폭갈이 들려 두 자매는 한층 힘을 내서 몸을 날렸다.

 

***

 

반 시진 가량 질주하였을까?

두 자매는 추격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두 자매가 멈춘 곳은 은밀한 계곡 안쪽이었다. 계곡 위로는 숲이 우거져 아주 은밀했다.

[언니, 잠시 쉬었다 가!]

녹의소녀가 할딱이며 말하자 홍의소녀는 한옆에 뚫린 동굴을 가리켰다.

[그자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니 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 쉬자.]

두 자매는 곧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막비강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세를 살폈다.

막비강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듯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홍의소녀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을 했다.

[이 사람은 살아나기 어렵겠는데 어쩌면 좋지?]

[소환단을 그에게 먹여.]

[상세가 몹시 엄중하니 너의 대환단(大還丹)도 한 알 먹여라!]

홍의소녀의 말에 녹의소녀도 품속에서 호두알만한 환약을 하나 꺼냈다.

밀납으로 포장된 그 환약 역시 소림사의 영약인 대환단이다.

대환단은 그 약효가 소환단보다 더 신효하여 숨이 끊어지지만 않았으면 어떤 중상이라도 고쳐 준다.

뿐만 아니라 한 알을 먹으면 이십 년 참선 수련한 것에 필적하는 내공을 증진시켜 주기도 한다.

두 자매는 대환단과 소환단을 한 알씩 꺼내어 망설이지 않고 막비강에게 먹였다.

사실 두 자매는 막비강이 낙성신마를 몰아붙이는 광경을 본 순간부터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었다.

당금 강호에서 약관밖에 안 된 나이에 우내사마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내가 막비강말고 또 있겠는가?

다른 혼인 적령기의 소녀들처럼 두 자매도 능력 있는 배우자를 원하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막비강은 최고의 배필감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인지라 두 자매는 자신들이 지닌 영약을 아낌없이 막비강에게 먹였다.

뿐만 아니라 약효가 빨리 돌도록 정성을 다해 그의 전신 혈도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양옆에 앉아 막비강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두 자매는 은근히 서로를 곁눈질로 살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들은 둘인데 배필감은 하나다.

은근히 경쟁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중원의 법도상 같은 핏줄을 타고난 자매가 한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명문가일수록 여러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은연중에 권장되기도 한다.

그것이 가문의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또 처첩들끼리 분란을 일으켜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 남자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여자의 본성이다.

두 자매는 경쟁적으로 막비강의 몸을 문지르고 주무르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자매는 막비강의 은밀한 부위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다.

탄탄한 허벅지를 주무를 때 스쳐 가는 손길에 막비강의 순양지물이 느껴지곤 한다.

두 자매는 당연히 아직 처녀의 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건장한 청년의 단단한 몸을 주무르게 되어다.

하지만 남성의 상징이 손끝에 느껴지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곧 약효가 도는지 막비강의 숨결은 급격히 정상을 회복해 갔다.

두 자매는 비로소 안도하며 추궁과혈하던 손을 멈추었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막비강은 숨결은 본래대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 헉헉!]

오히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리지 않는가?

[... 어찌된 걸까?]

[혹시 주화입마에라도 빠진 것이 아닐까?]

두 자매는 당황하여 막비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순간 막비강의 얼굴은 마치 숯불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한 전신에서 비지 같은 땀을 흘려내며 연신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막비강은 지금 치솟는 욕화로 전신의 혈맥이 터질 지경이었다.

방심하던 차에 분면색마가 날린 최음독분을 다량 들이킨 때문이다.

두 자매가 먹인 영약은 내상은 치유해 주었지만 최음독분의 독기는 해독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두 자매가 약효를 돋우어 준다고 야들야들한 손으로 추궁과혈을 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소녀의 순음지기가 오히려 막비강의 몸 속의 양정을 격발시켜 최음독분의 독기를 가일층 빠르게 확산시킨 것이다.

[몸이 불덩이 같애! 주화입마에 빠진 게 틀림없어!]

하지만 순진한 홍의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섬섬옥수로 막비강의 이마를 짚었다.

번쩍!

바로 그 순간 굳게 감겼던 막비강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시뻘건 안광을 흘려내었다.

[어멋!]

막비강의 눈빛은 흡사 굶주린 야수의 그것과 같아 순진한 전씨 자매도 무언가 깨닫고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다.

[크아!]

그러나 다음 순간 막비강은 야수같이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나 두 자매를 덮쳐 갔다.

녹의소녀는 급히 막비강의 손길을 피했으나 좀 더 가까이 있던 홍의소녀는 미처 빠져 나가지 못했다.

[아악! 왜 이래요?]

막비강의 우악스런 손길에 잡힌 홍의소녀가 놀라 비명을 질러대었다.

하지만 연약한 그녀의 힘으로 불 맞은 황소 같은 막비강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홍의소녀의 나이답지 않게 풍만한 교구를 감싸고 있던 적삼이 찢겨지며 벗겨져 내렸다.

[...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동굴 입구로 달아났던 녹의소녀가 언니의 비명을 듣고 다시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막비강의 몸 아래 깔려 바둥대는 것을 보고는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을 토했다.

[바득! 이 짐승 같은 놈! 기껏 살려 줬더니...!]

!

그녀는 검을 뽑으며 달려들어 막비강을 내리치려 했다.

[흐윽!]

하지만 다음 순간 녹의소녀는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막비강의 비밀을 본 것이다.

그것은 숫처녀인 녹의소녀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따당!

녹의소녀는 너무 놀라 빼 들었던 검을 떨구어 버렸다.

[()... 혜아야! 도와 줘!]

막비강에게 깔린 채 홍의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충격에 숨마저 멈춘 녹의소녀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하여 막비강의 만행을 지켜보기만 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모두 꿈속의 일인 양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욕심을 채운 막비강은 굶주린 야수같이 시뻘건 눈을 녹의소녀에게로 돌렸다.

망연자실해져 있던 녹의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막비강이 그런 그녀를 덮쳐왔다.

(안 돼! 안 돼요, 제발!)

막비강의 무자비한 유린이 시작되었지만 녹의소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 저항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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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시 만난 마두들

 

 

 

동녘에선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는 밤을 새워 막비강을 추격했다.

남악 형산은 이미 쫓고 쫓기는 세 사람 뒤로 아득히 멀어진 후였다.

낙성신마와 천수인마가 속한 우내사마의 서열은 천하오기보다 앞에 있다.

하지만 밤새 추격했음에도 그자들은 막비강과의 거리를 조금도 단축시키지 못했다.

물론 막비강도 두 마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강호일절이라는 우주도철의 경신술로도 우내사마에 드는 두 마두를 떨쳐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물론 막비강은 청구절학을 한 몸에 지닌지라 우내사마라 해도 그리 두렵진 않았다.

다만 그자들이 방향을 바꿔 악소궁을 추격할까 저어하여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문득 희미하게 밝아오는 아침 안개 속을 헤치고 전면에서 두 개의 인영이 달려오는 것이 막비강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려오는 두 사람은 일신에서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인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법의 쾌첩함은 전광석화 같아서 눈 깜빡할 사이에 막비강의 십 장 전면에 도착했다.

(저자들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인물의 모습을 알아본 막비강은 가슴이 덜컹했다.

그자들은 막비강이 일전 곤욕을 치른 바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화색쌍요(花色雙妖)!

 

그렇다! 그자들은 육요 중 둘인 분면색마(粉面色魔)와 도화요희(桃花妖姬)였던 것이다.

삼년 전 막비강은 그자들이 뿌린 최음제 때문에 헌원여호에게 동정을 빼앗겼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막비강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생각 같아서는 두 탕부탕녀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적에게 쫓기는 입장인지라 그자들과 시비를 걸 여유가 없었다.

(오냐! 다음에 보자!)

막비강은 내심 이를 갈며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그들을 비켜가려 했다.

그러나 막비강을 발견한 쌍요 중 분면색마가 질풍같이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했다.

[크크! 애송아! 너는 왜 도망치느냐?]

그자는 당연히 막비강을 알아보지 못했다.

분면색마가 청련사에서 막비강과 만났을 때 막비강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분면색마가 막비강을 제지하는 사이 이마가 가까이 이르렀다.

[흐흐흐! 애송아! 네놈이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테냐?]

화라락!

낙성신마는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가로막으며 징그럽게 웃었다.

막비강을 제지하던 분면색마는 비로소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보니 사마 중의 두 분 선배 아니시오?]

[! 당신들은 화색쌍요...!]

천수인마와 낙성신마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첩첩산중이로군!)

막비강은 쌍방이 서로 아는 사이임을 알고 내심 다급해졌다.

[비켜라!]

그는 화색쌍요 중 앞을 막고 있는 분면색마를 향해 맹렬히 일장을 격출했다.

[! 어린놈이...!]

분면색마는 강맹한 장풍이 엄습해 오자 코웃음을 날리며 맞받아쳤다.

퍼펑!

[어억!]

분면색마는 막비강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전신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아 비틀거리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화색쌍요 중 다른 한 사람인 도화요희가 안색이 일변하여 고함을 질렀다.

[거기에 털도 안 난 놈이 기습을 하다니!]

파팟!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오른손을 뻗어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요망한...! !]

막비강은 코웃음을 치며 반격하려다가 질겁했다.

도화요희는 여전히 속이 훤히 비치는 나삼을 걸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나삼 속에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나마 나삼은 앞과 옆이 다 터져 있어 움직일 때마다 속살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가슴에 매달린 한 쌍의 젖가슴은 움직일 때마다 세차게 상하좌우로 출렁거린다.

그리고 몸을 날림에 따라 갈라진 치마 사이로 미끈한 다리와 허연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농염하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여자의 몸에다가 무자비하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독한 심보를 지닌 사내는 드물다.

하물며 도화요희는 고의적으로 비스듬히 몸을 날리며 다리를 활짝 벌리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막비강은 본의 아니게 그녀의 치부를 그대로 보고 말았다.

(!)

막비강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사이에 도화요희의 날카로운 손톱이 어깨의 혈도를 움켜쥐려 했다.

막비강은 다급히 몸을 틀어 겨우 그녀의 공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어깨의 옷이 도화요희의 손톱에 걸려 길게 짖어진다.

화락!

(, 위험했다!)

위기를 넘긴 막비강은 찬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멀찍이 내려섰다.

[! 여기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뒤쪽을 막고 서있던 천수인마가 괴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오냐! 내 탕마일초(蕩魔一招)를 받아 봐라, 노마!]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막비강은 벼락같이 쌍장을 뻗어내며 외쳤다.

초식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치우강기가 실린 탓에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이 뻗어나갔다.

[! 이놈 봐라!]

청구절예는 과연 비범하였다.

퍼펑!

천수인마같은 전대의 거마도 막비강의 일장에 정면으로 마주치자 전신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며 비틀 물러섰다.

천수인마를 물러서게 한 막비강이 주위를 돌아보니 전후 좌우가 강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막비강은 오늘의 상황이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하하! 비겁한 요마들! 오늘 내가 천벌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줄 테니 전부 덤벼라!]

천수인마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이것은 네놈이 청구상인의 제자 된 벌이다. 사부 대신 네놈이 당년의 빚을 갚아야 한다.]

천수인마는 나이가 이 갑자가 넘는다.

그래서 젊은 시절 청구상인과 만났던 적이 있었고 또 못된 짓을 하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다.

옛날의 원한을 떠올린 천수인마는 두 눈에서 살기를 발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네놈에게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일단 말을 한 이상 약속을 지킬 테니 어서 출수해 봐라!]

막비강도 검미를 치켜 올리며 차갑게 코웃음을 날렸다.

[! 나야말로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네게 삼 초를 양보해야 마땅하다.]

[건방진 애송이놈!]

천수인마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막비강 역시 위압당하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크왓! 천수벽력장(千手霹靂掌)을 받아 봐랏!]

꽈르르릉!

천수인마가 사나운 고함을 지르며 쌍장을 내쳤다.

순간 사방이 수많은 손그림자에 뒤덮였다.

과연 천수인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장공이었다.

[잘 왔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손그림자 속에서 막비강도 고함을 치며 마주 양손을 찔러 냈다.

쩌러렁!

순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막비강의 양손에서 금색(金色)과 벽색(碧色)의 광망이 터져 나가 천수인마의 공격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이 수법은 세 권의 청구단서 중 연형편에 수록된 수공(手功)으로 전문적으로 호신강기를 파해하는 위력을 지녔다.

[허억! 청구상인의 벽금산수(碧金散手)!]

퍼펑! 꽈다당!

요란한 폭음과 짙은 모래먼지가 확 일어나는 중에서 천수인마의 신음 소리가 터졌다.

이어 천수인마가 방금의 일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듯 쓰러질 듯 휘청이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벽금산수에 의해 호신강기가 무너지며 기혈이 뒤집힌 것이다.

[이것도 받아랏, 노마!]

쐐액!

승기를 잡은 막비강은 사나운 외침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솟구쳤다.

[붕천멸압장(崩天滅壓掌)!]

꽈르르릉!

이어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그는 쌍장을 아래로 내리쳐 천수인마의 머리 위로 극히 막중한 압력을 가해 갔다.

[!]

스팟!

천수인마는 깜짝 놀라며 발끝을 힘껏 굴러 뒤로 육칠 장 가량 날아 나갔다.

하지만 정작 막비강의 장력은 천수인마가 섰던 곳에 이르자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변해 버렸다.

막비강의 이 일초는 진력이 들어가지 않은 허초였던 것이다.

막비강은 바닥에 사뿐히 내려선 후 얼굴에 경멸의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난 분명 삼 초를 양보한다고 했는데 노마는 어찌하여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후퇴하느냐?]

비로소 자신이 놀림을 당한 것을 알아차린 천수인마의 안색이 썩은 돼지 간처럼 변했다.

낙성신마는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청구상인이 남긴 금강옥액이 아무리 신묘하기로서니 이갑자 이상의 공력이 실린 천수인마의 일장을 받아내지 못해야 정상인데...! 그렇다면 저 어린 놈이 벌써 치우강기를 대성했단 말인가?)

생각을 굴린 낙성신마는 직접 확인해 볼 요량으로 막비강 앞으로 나섰다.

[애송이놈! 노부는 네게 먼저 손을 쓸 기회를 주겠다.]

바로 그때였다.

[!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구나! 비겁한 늙은이들 같으니...!]

화라라락! 스슷!

코웃음 소리와 함께 돌연 두 개의 가냘픈 인영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둘은 각기 푸르고 붉은 옷을 걸친 십팔구 세쯤 된 소녀들이었다.

두 소녀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자매인 듯 전체적인 모습이 비슷했는데 한눈에 보아도 눈앞이 훤해지는 절색의 소유자들이었다.

두 자매 중 녹의소녀(綠衣少女)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몸매에 쌀쌀맞은 인상이었다.

반면 홍의소녀(紅衣少女)는 나이답지 않게 몸매가 풍만한데다가 얼굴도 도화빛으로 화사했다.

[늙은 것들이 떼를 지어 젊은 사람을 괴롭히다니, 보아하니 너희들은 명성을 떨친 인물 같은데 어찌 이렇게 수치심도 없느냐?]

두 자매 중 녹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천수인마는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발설할 길 없던 중 이런 말을 듣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사타구니에 날 것도 안 난 어린년들이 감히!]

막비강도 두 소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녹색 경장과 홍색 의삼을 입고 등에 장검을 멘 두 자매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막비강 정도의 고수가 보기에 그녀들의 신법은 별로 고명한 편이 못되었다.

이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두 소녀의 신법을 보아하니 자기들의 안위도 보호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구나. 그녀들의 출현으로 나는 도주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침중하게 말했다.

[두 분 낭자는 어서 물러가시오! 이 마두들은 매우 무서운 자들이오.]

그러자 홍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코웃음을 날렸다.

[! 당신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런 말을 하세요? 얌전히 우리 자매의 솜씨나 구경하세요.]

파팟!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쌍장을 휘둘러 마치 눈꽃이 날리는 듯한 장풍으로 천수인마를 공격했다.

천수인마는 홍의소녀의 장법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급히 옆으로 피했다.

[지마(地魔) 사도봉(司徒鳳)의 지라신장(地羅神掌)이로구나! 아이야! 우린 한 식구나 마찬가지니 어서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천수인마가 외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소녀도 우내사마의 후손인 모양이군! 한 통속인 늑대와 여우가 어울려 싸우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는걸!)

그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노마와 어린 마녀의 혈전을 관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막비강이 뭘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천마(天魔) 황보룡(皇甫龍)!

지마(地魔) 사도봉(司徒鳳)!

 

그들이 우내사마의 나머지 둘이다. 그리고 이들 두 남녀는 부부 사이다.

비록 같은 사마의 서열에 들긴 했으나 천지이마(天地二魔)는 천수인마나 낙성신마와는 천양지차로 격이 다른 인물들이었다.

왜냐하면 천지이마는 마도무림인들에게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는 마교(魔敎) 출신이기 때문이다.

천지이마는 단지 마도에 속한 인물이라 낙성신마, 천수인마 등과 함께 우내사마로 불릴 뿐이다.

게다가 그들 부부는 낙성신마와 천수인마보다 나이가 한 참 어려 처음 강호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여년 전이다.

비록 나이는 오십 살 이상 어리지만 천지이마의 무공 실력은 낙성신마나 천수인마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자들 뿐만 아니라 일선(一仙) 이불(二佛), 삼도(三道)까지도 천지이마에게는 한 수 양보할 정도였다.

홍의소녀가 방금 펼친 장법은 바로 그 천지이마 중 지마 사도봉의 절기였다.

지마 사도봉은 마교의 마공 중에서도 아녀자들에게 적합한 마공만을 전수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가 지마 사도봉의 무공을 사용하자 천수인마는 절로 꺼려지는 바가 있어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본래 지마 사도봉은 무공이 빼어날 뿐 아니라 성격이 아주 표독하여 자신에게 터럭만한 죄라도 지은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삼십 몇 년 전, 백도 무림의 대명사인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오인하여 지마 사도봉의 친인(親姻)을 해친 적이 있었다.

이에 지마 사도봉이 무자비한 살수를 펼쳐 무려 열 배나 많은 구파일방의 제자들을 살해한 사건은 아직도 무림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아무리 천수인마가 일세를 풍미한 거마이긴 하지만 감히 지마 사도봉에게 죄를 지을 용기는 없다.

그래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으며 물러서려 했다.

[! 늙어빠진 영감아! 똑똑히 보고 주둥아리를 놀려라! 지마 사도봉만 마교의 무공을 사용하는 줄 아느냐?]

헌데 의외로 홍의소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홍의소녀가 지마 사도봉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히 천마 황보룡과도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천수인마는 홍의소녀가 지마 사도봉과의 관계를 부인하자 어리둥절해했다.

방금 전 홍의소녀가 사용한 장법은 분명 지마 사도봉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참 잘되었군!]

그러자 쌍요 중의 분면색마가 앞으로 나서며 음탕하게 웃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채화음적은 두 자매가 나타나자마자 회가 동해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계집이 스스로 천지이마와 관계도 없다니 소생이 요리하겠소.]

듣고 있던 녹의소녀가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 하는 작자냐?]

[소생의 성은 관()가고 이름은 지()라고 하오.]

막비강은 나이 오십이 넘은 작자가 자칭 소생이라 칭하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녹의소녀는 상대방의 이름을 듣고 처음에는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곧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비로소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네놈이 죽일 놈의 채화음적 분면색마였구나!]

!

그녀는 이를 갈며 벼락같이 검을 뽑아 휘두르며 분면색마를 덮쳐 갔다.

하지만 관지는 허리를 비틀며 녹의소녀의 검망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보기 좋게 펑퍼짐한 엉덩이를 살짝 만지며 음탕한 웃음을 머금었다.

[흐흐흐! 탄력이 매우 좋구나! 재미볼 때 요분질을 잘하겠어!]

[... 이 악적!]

녹의소녀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쩌저정!

다음 순간 갑자기 그녀의 검끝에서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서릿발 같은 광채가 뻗어 나왔다.

바로 전설 속의 검강(劍罡)이었다.

그것을 본 관지는 안색이 일변하며 경악의 함성을 질렀다.

[그건 북산검호각의 추상검강(秋霜劍罡)!]

(북산검호각! 저 소녀들이 사패천 중 북패천으로 불리는 북산검호각의 제자란 말인가!)

막비강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악소궁에게서 북패천 북산검호각의 일족이 전()씨라는 말을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북패천 북산검호각의 위명은 실로 대단하여 그 음탕하던 분면색마도 이 순간만큼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츠츠츠!

그자의 손바닥은 어느덧 백옥(白玉)처럼 희게 변했다.

아마도 북산검호각의 검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생의 절기를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녹의소녀의 검법도 신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쩌러렁!

서릿발 같은 기운이 그녀의 검에서 번져 나와 분면색마를 무찔러 갔다.

! 퍼펑!

분면색마는 연달아 몇 장을 발출하여 녹의소녀의 검기를 흩뜨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녹의소녀의 검기는 더욱더 날카롭게 변해 분면색마를 공격했다.

막비강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옆에서 관전하고 있는 홍의소녀에게 물었다.

[낭자, 당신들의 성은 전()씨요?]

홍의소녀가 흘겨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전씨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뭘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오. 낭자의 성이 전씨라면 내가 당신들을 도와 주겠소.]

막비강은 두 자매의 성이 전가라고 말하자 혹시 염라철장의 유서에 적힌 전포(田袍)란 인물과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두 자매를 도와 싸운 후 그녀들에게 전포의 행방을 묻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돕고 있는 거예요.]

막비강은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아 빙긋 웃었다.

[누가 누굴 돕든 지금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입니다.]

그러자 홍의소녀가 눈을 흘기며 차갑게 외쳤다.

[누가 당신과 같은 배를 탄 운명이란 말이에요?]

낙성신마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애송이놈아! 아부를 하려면 똑똑히 해라!]

낙성신마는 히죽거리며 홍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 계집애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으니 우리도 한바탕 놀아 보자! 노부는 너를 인질로 삼아 악불령을 유인해야 하므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마라!]

홍의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외쳤다.

[늙은 작자야! 우선 나와 먼저 고하를 가늠하자!]

!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일장을 격출했다.

낙성신마는 홍의소녀의 성격이 불같은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어깨를 살짝 비틀어 공격을 피해 버렸다.

물론 홍의소녀는 낙성신마의 적수가 못 된다.

그래도 낙성신마는 그녀가 혹시 지마 사도봉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손을 쓰는 것이 꺼려졌다.

대신 그는 벼락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그렇지 않아도 홍의소녀가 낙성신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내 일장부터 받아랏!]

꽈르르릉!

그는 상대방이 초식을 발출하기도 전에 먼저 오른손을 뒤집어 일장을 뻗어냈다.

청구절학은 펼쳐내기만 하면 광풍이 휘몰아치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위력이 있었다.

즉시 짙은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펼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허엇! 광풍진천장(狂風振天掌)까지...!]

낙성신마는 깜짝 놀라 연달아 여덟 걸음이나 후퇴하였다.

그런 후에야 가까스로 막비강의 흉맹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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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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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의성의 딸

 

 

 

두 사람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하여 사흘째 저녁 무렵에는 멀리 남악(南岳) 형산(衡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헌데 형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거인같이 우뚝 솟아있는 어느 산봉우리 밑에서는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남산의성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본 악소궁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여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 이미 늦어 버렸구나!]

막비강은 그런 그녀를 급히 부축했다.

[누님! 진정하십시오. 집에 불이 나긴 했지만 영존까지 해를 입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제가 먼저 달려가 볼 테니 누님은 천천히 오십시오!]

악소궁을 위로한 막비강은 곧 팔보간섬을 극한까지 전개하여 불길이 치솟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어둠의 장막이 남악 형산 위로 드리워지고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쐐액!

문득 한 줄기 포물선이 밤하늘을 가르더니 한 명의 청년이 지면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물론 그 청년은 막비강이었다.

막비강이 내려선 앞쪽에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초가집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남산의성 악불령의 거처는 몇 채의 모옥(茅屋;초가집)으로 이루어진지라 불이 붙자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해 버린 것이다.

불타 버린 초가집의 잔해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돼지, 닭 등 가축이 불에 타 죽으며 내는 고약한 악취만 풍길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흉사(凶邪)들은 일을 끝내고 이미 현장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과 그의 식솔들이 변을 당한 것같아 자신도 모르게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오른 손을 저어 한 줄기 광풍을 뿜어냈다.

화르르!

그러자 그때까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던 잔불과 연기가 모두 꺼져 버렸다.

막비강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잿더미 속으로 들어가 타다 남은 잔해들을 뒤척여 보았다. 남산의성 악불령 일가의 유골이나마 찾을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타 죽은 돼지와 닭 몇 마리만 나올 뿐 사람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악 선배님 일가가 도피하면서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지른 게 아닐까? 아니면 흉도들이 사람들을 생포해 간 다음 화풀이로 잿더미를 만들어 버린 것일까?)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잿더미가 된 집 근처에서 악소궁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악소궁은 나타나지 않았다.

헌데 막비강이 불안해 하고 있을 때였다.

[크하하하하!]

돌연 멀리서 심맥을 진탕시키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 왔다.

막비강은 이 웃음소리의 주인이 남산의성의 원수들 중 한 명일 것이라 단정하였다. 그리고 흉수가 이제야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남산의성이 화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적이 안심이 되었다.

이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가 여길 떠나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면 뒤따라올 악소궁이 적의 손에 잡힐 것은 뻔한 일이다.

[카카카!]

막비강이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음산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첫 번째 웃음소리는 십여 리 밖에서 들렸는데 두 번째 웃음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린다. 그만큼 웃음소리의 주인의 경신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쐐액!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막비강은 한 줄기 흑선(黑線)이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르며 날아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거 참 시끄럽구만!]

그의 이 음성은 맑고 우렁차 음산한 웃음소리를 완전히 제압했다.

[크크크! 어린놈이 제법이로구나!]

화라락!

직후 음산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장내에 내려섰다.

그자는 다른 곳도 아니고 잿더미 위에 내려서면서도 먼지 한 점 일으키지 않았다. 이같은 경공신법은 등봉조극(登峯造極)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오기를 능가하는 고수다!)

막비강은 긴장하며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차림은 시골 문사 차림인데 긴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었다. 머리는 백발이 희끗희끗한 반면 안색은 불그레한 것이 한창 나이의 젊은이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녹광(綠光)이 번져 나와 사이하고 괴괴한 인상을 풍겼다.

녹안(綠眼)의 괴인은 바닥에 내려서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웃음소리를 압도한 음성의 주인이 뜻밖에도 약관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누구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갔느냐?]

녹안괴인은 막비강의 아래 위를 살펴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막비강은 나타난 사람이 소리장도 강용이 아니면 백독서생 이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생소한 얼굴인지라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녹안괴인은 막비강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악불령 집안사람이냐?]

[집안사람일 수도 있고 집안사람이 아닐 수도 있소.]

녹안괴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악불령은 어딜 갔느냐?]

막비강은 시종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오.]

막비강의 무례한 대답에 녹안괴인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놈! 보아하니 빨리 죽는 게 소원인 모양이로구나.]

막비강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누군지부터 말하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나와 싸울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소.]

그러자 녹안괴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낄낄낄! 네가 감히 노부 낙성신마(落星神魔)에게 싸움을 청할 생각이냐?]

[인마(人魔)가 아니라 신마(神魔)란 말이지?]

막비강은 상대가 천수인마가 아닐까 생각했다가 예상이 빗나가자 검미를 모았다.

[헌데 자칭 신마 양반! 당신은 여기 무엇 하러 왔소?]

[요놈이 영특하게 생겨서 봐주려고 했더니...!]

낙성신마라는 자는 대답하려다 말고 갑자기 옆의 울창한 고목 쪽을 홱 돌아보며 외쳤다.

[거기 어떤 쥐새끼냐?]

그자는 나뭇가지 위에서 경미한 음향이 이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막비강도 악소궁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외쳤다.

[누님이십니까?]

그러자 나뭇가지 위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 누가 네놈의 누님이란 말이냐?]

화락!

이어 하나의 인영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번에 나타난 자는 바로 소리장도 강용이었는데 그자의 옆구리에는 혈도가 짚인 악소궁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누님이 어떻게 그에게 생포되었지?)

악소궁이 강용에게 잡힌 것을 본 막비강은 내심 놀라면서도 버럭 노성을 질렀다.

[악적! 빨리 그분을 내려놓아라!]

강용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네놈은 누구냐?]

이년의 세월이 지난 탓에 강용은 막비강을 금방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넌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다. 빨리 사람이나 내려놓아라!]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네놈도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이겠지만....]

[잔말이 많다!]

!

막비강은 강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번개같이 덮쳐가며 그자의 안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

강용은 안면을 향해 뻗어 오는 막비강의 벼락같은 일장에 기겁하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사실 그자의 안면으로 날린 막비강의 이 일장은 허초였다.

!

막비강은 강용이 깜짝 놀라 허둥대는 틈을 타 그자의 겨드랑에서 악소궁을 낚아채 재빨리 후퇴했다. 그의 이 같은 동작은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내놔라!]

꽈릉!

얼떨결에 악소궁을 빼앗긴 강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막비강에게 일장을 격출했다.

그때였다.

[잠깐!]

낙성신마라고 자칭한 녹안괴인이 가볍게 손을 들어 강용의 일장을 봉쇄했다.

!

강용의 공력도 매우 심후한데 의외로 녹안괴인이 아무렇게나 휘저은 일장에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그는 놀란 음성으로 녹안괴인에게 물었다.

[귀하는 누군데 노부의 일을 간섭하는 거요?]

순간 녹안괴인은 두 눈에서 섬뜩한 녹망을 발산했다.

[낄낄낄! 감히 내 앞에서 노부라 자칭하다니...! 네놈은 도대체 몇 살이나 처먹었느냐?]

녹안괴인의 말에 강용은 당황했다. 그는 비로소 상대가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인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기회다!)

막비강은 녹안괴인이 강용에게 눈을 부라리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날렸다.

헌데 막비강이 막 몸을 날린 그 순간이었다.

[흐흐! 어림없다!]

꽈릉!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막비강의 면전을 향해 엄습해 왔다.

막비강은 흠칫 놀라며 일장을 마주쳐 냈다.

!

다음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며 한 줄기 선풍이 지면으로부터 모래먼지를 대동한 채 허공으로 뻗어 올랐다.

막비강은 기습해 온 상대의 공격에 제지당해서 다시 원래 위치에 내려섰다.

화라락!

직후 또 다른 인영이 그의 앞으로 날아 내리며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애송아! 네놈이 노부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번에 나타난 인물은 얼굴이 유달리 하얘 음침한 인상을 주는 중년문사였는데 다름아닌 육요(六妖) 중 백독서생 이량이었다.

상대가 백독서생 이량인 것을 알아본 막비강은 화가 치밀어 악소궁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노독물! 너도 내 일장을 받아 보아라!]

꽈르릉!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막비강의 손바닥에서 강맹무비한 장풍이 노도같이 뻗어 나갔다.

백독서생 이량은 막비강의 막강한 장풍에 안색이 대변하며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소리쳐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자 역시 막비강을 오랜 만에 만난지라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바로 천면신룡이시다!]

막비강은 사납게 외치며 재차 장력을 날렸다.

[이제 보니 네놈이...! 커억!]

! 후두둑!

백독서생 이량은 경악성을 토해내다가 막비강이 다시 격출한 일장에 강타당해 나뒹굴었다. 육요 중 한 명인 백독서생조차 지금의 막비강에게는 적수가 못되는 것이다.

막비강은 바닥에 나뒹굴어 피를 토하고 있는 백독서생 이량을 노려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 노독물!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이 정말 광오하군!]

또 다른 사람이 허공에서 음험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화라락!

그 사람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장내에 내려섰다.

이번에 나타난 자는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덮여 나이를 알 수가 없는 노인인데 양팔이 유난히 길고 검었다.

(이자가 우내사마 중의 천수인마겠구나!)

막비강은 새로 나타난 노인의 정체를 간파하고 내심 긴장했다.

그때 장내에 내려선 노인, 천수인마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후학 중에 너같은 고수가 있다니 대견하도다! 해서 특별히 삼 초를 양보해 줄 테니 실력을 발휘해보거라.]

막비강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늙은이가 바로 악명높은 천수인마겠구나. 헌데 노마는 정말 나의 삼 장을 반격하지 않고도 받아낼 자신이 있느냐?]

천수인마는 막비강이 단번에 자신의 신분을 간파하자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노부가 누군지 알아보다니 기특한 놈이로다!]

바로 그때였다.

[! 당신은 천수인마 사마(司馬) 형 아니오?]

자칭 낙성신마라 하던 녹안괴인이 천수인마라는 말을 듣고는 다가왔다.

[으핫하하! 낙성신마 사공(司空) 형도 왔구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이십 년도 더 되었군 그래.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천수인마도 비로소 낙성신마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눈에도 그자가 낙성신마를 꺼려함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막비강은 웃으며 말했다.

[하나는 신마(神魔)고 하나는 인마(人魔)이니 당신들 이마(二魔)가 먼저 고하를 겨루어 보시오. 이긴 사람을 내가 상대해 주겠소!]

막비강은 그렇게 말하며 악소궁에게 다가가 재빨리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정신을 차린 악소궁은 장내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었다. 소리장도 강용과 백독서생 이량, 거기에다가 우내사마 중 두 사람이나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절망의 표정이 되어 막비강에게 말했다.

[아우! 아우는 어서 여길 빠져나가게. 누이는 선친을 따라 지하로 가겠네.]

막비강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누님은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영존께서는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분의 뒤를 따라 지하에 가겠다는 겁니까?]

[집이 모두 타 버린 것으로 보아 가친도...!]

[뿐만 아니라 돼지도 몇 마리 타 죽었더군요.]

막비강의 말에 악소궁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네 말은 가친께서 살아 계신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빨리 도주해야 하네.]

[조금 기다려 보십시다. 영존께서 왜 이런 계략을 세워야 했는지 저자들의 대화에서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막비강은 악소궁이 무사히 도주할 수 있도록 이마가 서로 싸우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마는 서로 상대방을 꺼려하는지라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고받을 뿐 싸울 의사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마! 설마 저 어린 놈과 일행은 아니겠지요?]

천수인마의 말에 낙성신마는 막비강과 악소궁을 힐끗 돌아보고 대답했다.

[노부는 악불령을 만나러 왔을 뿐 저 녀석과는 아무 관계도 없소.]

천수인마는 안도하며 다시 물었다.

[신마는 무슨 일로 악불령을 만나려 하시오?]

[늦게 얻은 딸내미의 괴질(怪疾)을 치료하기 위해서요. 보아하니 인마도 악불령을 만나러 온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오?]

낙성신마가 되묻자 천수인마는 소리장도 강용을 가리켰다.

[노부의 제자가 당년에 악불령에게 굴욕을 당했기에 빚을 갚아주기 위해 찾아왔소.]

낙성신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열흘 전 노부는 아랫사람을 통해 예물을 주며 악불령을 초빙했었소. 이런 사정으로 악불령은 현재 노부의 빈객이 된 상태니 인마는 그를 너무 난처하게 만들지 마시오.]

막비강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말을 받았다.

[옳소. 사람[]은 마땅히 신()에게 양보해야 하오.]

천수인마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애송이놈! 잠자코 있지 못할까?]

이어 그자는 다시 낙성신마를 돌아보았다.

[악불령이 집에 불을 지르고 줄행랑을 친 것은 신마가 그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었군. 하지만 그의 무남독녀가 여기 있으니 이 계집만 잡아 두면 그가 아무리 멀리 도주해도 걱정할 게 없소.]

[누가 악불령의 무남독녀요?]

낙성신마가 눈을 번뜩이며 돌아보았다.

[애송이 뒤에 있는 계집이 바로 악불령의 외동딸 악소궁이란 계집이오.]

천수신마의 말에 낙성신마는 준엄한 표정으로 악소궁에게 말했다.

[악소궁!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자 악소궁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막비강은 얼른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가면 안 됩니다, 누님.]

[잠깐!]

천수인마도 급히 낙성신마에게 말했다.

[노부는 악가 계집을 잠시 신마에게 양보하여 악불령이 영애의 병을 치료하게 하겠소. 그러니 영애의 병이 완쾌되면 그 계집을 석방하지 말고 노부에게 넘겨주시오.]

낙성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하리다!]

악소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비강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당신네들끼리 함부로 결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겠소.]

[낄낄낄....]

낙성신마가 괴소를 터뜨리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어린 녀석이 패기가 대단하구나! 하지만 너는 너무 늦게 세상에 태어난 탓에 일선(一仙), 이불(二佛), 삼도(三道), 사마(四魔), 오기(五奇), 육요(六妖), 칠절(七絶)의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오기, 육요, 칠절은 들어 봤지만 일선, 이불, 삼도, 사마는 또 어떤 자들인가?)

막비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낙성신마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일선(一仙) 음양선옹(陰陽仙翁)은 은거해 버렸고 이불(二佛)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삼도(三道) 역시 오래전 부터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당연히 당금 무림에서 우리 사마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 사마 중 이마(二魔)가 이곳에 있는데도 네놈은 큰소릴 치느냐?]

막비강은 상대방이 천하오기를 다섯 번째 서열에 두자 내심 놀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오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한 사람을 빠뜨렸소. 마땅히 나 일룡(一龍) 천면신룡도 서열에 끼워야 했소.]

낙성신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부는 천면신룡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다.]

백독서생은 막비강의 일장에 격중되어 쓰러졌다가 지금까지 운기조식을 하여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운기조식하면서도 세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라 몸을 일으키며 참견을 했다.

[저 어린 놈은 악불령의 기명제자이며 또한 우주도철의 양자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막비강이고 별명은 천면신룡입니다.]

그 말에 낙성신마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껄껄껄, 악불령의 기명제자라면 더욱 놓아줄 수 없지.]

막비강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여길 떠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악 누님을 여기 두면 너희들이 행패를 부릴 것이 뻔하므로 먼저 누님부터 보낸 다음 다시 얘기를 하겠다.]

낙성신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노부는 너희 둘을 모두 잡아 두겠다.]

막비강은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날 잡아 두고 싶으면 어디 잡아봐라. 그러나 악 누님은 연약한 아녀자니 손대지 마라!]

낙성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마라. 누구든지 그녀에게 손을 대면 노부가 가만두지 않겠다.]

[남아 일언 중천금이다.]

막비강은 이렇게 말한 후 악소궁에게 전음으로 속삭였다.

[누님을 숲 속으로 던져 넣을 테니 제 걱정은 말고 전력을 다해 도주하십시오.]

악소궁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평범한 자신은 이곳에 남아봤자 막비강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흉사들은 막비강이 악소궁과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지만 몇 마디 당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버려두었다.

[가십시오.]

그런데 막비강은 갑자기 악소궁의 몸을 번쩍 들더니 옆의 숲 속으로 힘껏 던졌다.

쐐액!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던진지라 악소궁의 풍만한 교구는 마치 유성처럼 숲 안쪽으로 날아들어갔다.

그것을 본 낙성신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 감히 노부 앞에서 속임수를 써?]

그자는 분노하여 외치며 숲으로 날아드는 악소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핫하하! 노마의 상대는 나란 걸 잊었나?]

막비강은 대소를 터뜨리며 날아올라 쌍장을 밀어냈다.

[애송이놈! 죽고 싶으냐?]

대노한 낙성신마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주 일장을 후려쳤다.

퍼펑!

다음 순간 막비강의 장력과 낙성신마가 쳐낸 장력이 충돌하며 요란한 폭음을 일으켰다.

쐐액!

헌데 서로의 장력이 부딪히는 순간 막비강의 몸은 쏘아진 화살처럼 뒤로 날아갔다. 막비강은 낙성신마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자의 장력을 빌어 현장에서 이탈한 것이다.

[!]

낙성신마는 자신이 상대방을 전송해준 꼴이 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놈은 청구상인의 문인이다. 저놈에게 감쪽같이 속았구나!]

천수인마가 급히 외쳤다. 그자는 언 듯 막비강의 장심에서 허연 강기가 번뜩이는 것을 본 것이다. 장력에 자유자재로 강기를 실을 수 있는 신공은 청구상인의 치우강기 외에는 없다.

[빨리 추격합시다!]

쐐액!

천수인마는 즉시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막비강의 뒤를 쫓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낙성신마도 이를 부득 갈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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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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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구원의 손길

 

 

 

[크흑!]

막비강은 들끓는 욕화를 참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여 필사적으로 치솟는 욕화를 억눌러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번 불붙은 욕화는 요원의 불길처럼 그의 전신으로 번져 갔다.

막비강은 너무도 강력한 욕화에 급격히 이성을 잃어 갔다

그의 순양지물은 극한대로 팽창하여 끊어질 듯이 아팠다.

지금 이 순간 막비강의 뇌리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아랫배에 그득한 채 들끓고 있는 용암을 어디론가 토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방이 밀폐된 이 철실에서 그의 욕화를 풀어 줄 대상이 있을 리 없었다.

[으아아아!]

그는 치미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걸치고 있던 의복을 모두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끊어질 듯이 아픈 일부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긍!

문득 밀실의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어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밖을 살피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철문을 다시 닫았다

그 인물은 한 명의 중년미부였는데 무엇이 꺼려지는지 얼굴은 수건으로 가려 알아볼 수 없었다.

[...!]

실내에 들어선 여인은 상황을 살펴보다가 바르르르 몸을 떨었다

한구석에 전라의 몸으로 벌렁 누운 채 정신을 잃은 막비강을 발견한 때문이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막비강의 건장한 알몸은 중년여인을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순간 막비강의 몸은 전신의 혈관이 툭툭 불거진 채 끊임없이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은 이미 까뒤집어져 허연 흰자위가 드러나 있고 입과 코에서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욕화가 기혈을 뒤집어 놓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엾은 아이...!)

면사 속에서 여인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막비강을 구하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춤주춤 막비강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막비강 옆으로 가까이 다가선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의 하체 중심부에 불끈 치솟아 있는 일부를 발견한 때문이다.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으로 양정(陽精)이 범인의 수십 배에 이른다

그 탓에 그의 실체도 평균의 배에 가까운 크기였다.

여섯 치가 넘는 막비강의 일부는 마치 무쇠로 만든 조형물처럼 강인해 보였다

여인은 살아오면서 두 명의 사내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막비강의 그것에는 비견될 수 없었다

특히 그 압도적인 굵기와 중량감은 상상도 못해 본 것이었다.

여인의 봉목은 갈등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네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서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치마를 허리 위로 걷어 올렸다.

만지면 묻어날 듯이 새하얀 허벅지가 어둠 속에서 눈이 부셨다.

헌데 기이하게도 여인의 가랑이 사이의 계곡에는 성숙한 여자라면 당연히 깔려 있어야 할 음영(陰影)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백옥(白玉) 덩이같이 뽀얀 두덩과 그 아래로 탐스럽게 벌어진 균열이 보일 뿐이었다.

인은 흥분과 수치심으로 바들 바들 떨며 막비강의 몸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와 함께 떨리는 섬섬옥수가 용틀임을 보듬어 쥐었다

여인의 손안에 쥐어진 그것은 마치 뱀처럼 꿈틀대며 맥동했다.

(뜨거워!)

손안에서 요동치는 용틀임을 느끼며 여인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치마를 복부와 다리 사이에 낀 여인은 그 용틀임을 자신의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 정말 내가 강아와 이런 짓을 해도 좋을까?)

마지막 순간 여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막비강과 이런 짓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사이였다.

인륜을 지켜야 한다는 망설임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머뭇거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인의 입술이 깨물리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어 그녀는 육중한 하체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 아파! 그이하고의 첫날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찔한 통증을 느낀 여인은 입술을 악물었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막비강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흐윽!]

여인은 막비강을 완전히 수용한 뒤 무너지듯 그의 넓은 가슴에 넘어졌다.

아랫배에 가득 들어찬 채 연신 꿈틀대는 막비강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 내가 결국 강이와 ...!)

그 와중에도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인해 흘러 넘친 여인의 뜨거운 눈물이 막비강의 가슴 위로 굴렀다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자신의 몸으로 순결한 막비강을 받아들인 것이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자신과 막비강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버렸다

남자와 여자로서 최후의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죄책감에 떠는 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되었으니 네 마음껏...!)

여인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본능에 몸을 맡겼다.

일단 분 뜨거운 열풍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 * *

 

(누구였을까?)

막비강은 망연자실하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는 온몸이 개운한 상태였다

아랫배를 그득 채우며 들끓던 용암은 이미 한 방울도 남김없이 외부로 방출된 후였다

치미는 열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벗어 젖혔던 의복도 누군가에 의해 원래대로 입혀져 있었다.

(젊은 여자는 아니었어!)

막비강의 숨결이 절로 거칠어졌다.

그는 어렴풋이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욕화로 반쯤 혼절해 있었을 때 누군가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자신의 몸 위에 걸터앉았었다는 사실을...!

그 여인의 몸에서는 참으로 좋은 냄새가 났었다

과일 냄새 같기도 하고 백합 향기 같기도 한 그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고 있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막비강은 능동적으로 욕구를 채웠었다

막비강이 짐승처럼 덤벼들자 여인은 슬픈 눈빛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막비강이 욕구를 채우던 중 여인이 얼굴에 쓰고 있는 면사를 벗겨버리려 하자 그녀는 돌변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끝내 면사를 벗기지 못한 탓에 막비강은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구한 여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몸매로 보아 제법 나이가 든 여인이었으니 혈검산장의 비녀나 하녀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막고천의 처첩(妻妾)들 중 한 명이란 얘긴데...!)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여러 여인들을 떠올려 봤다

그러나 정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해 줄 동기를 지닌 여인은 그녀들 중에는 없었다.

언뜻 막고천의 다섯 번째 첩인 냉상영의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역시 막비강 자신을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고 알게 되겠지!)

막비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정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열쇠로 연 것이 틀림없었다.

헌데 함정을 나서려던 막비강은 문간에 떨어져 있는 한 짝의 귀고리를 발견했다.

(그 여인이 흘린 것이겠구나!)

막비강은 그 귀고리를 집어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혈검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모두 떠난 드넓은 장원에는 괴괴한 적막만이 흘렀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한철로 만들어진 철문을 부수려 하자 질겁하여 달아났고, 다른 식솔들도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서패천(西覇天)이라 불리며 서북삼성(西北三省)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던 혈검산장은 삽시에 폐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네가 어디로 숨든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 막고천!)

막비강은 막고천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혈검산장을 떠났다.

 

 

***

 

쐐액!

막고천의 암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가 정체불명의 여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한 막비강은 마음속의 울분을 발설하기라도 하듯이 우주도철의 경신술 팔보간섬(八步間閃)을 극한까지 펼쳐 질주하였다.

반 자절 이상을 내쳐 달리자 수백 리를 주파하여 종남산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윽고 종남산의 험준한 산 그림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막비강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길가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제법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비강이 멈춘 곳은 야트막한 고갯마루였다.

[이제 어딜 가서 무얼 해야 하나?]

고개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막비강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그는 혈검산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진상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막고천을 생포하여 통쾌하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그렇지는 못해도 최소한 생모 한경파를 구출하여 자기의 신세내력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막고천은 놓쳤고 생모조차 어디론지 잡혀가 버린 것이다.

(막고천! 네놈이 만일 나한테 당한 화풀이로 어머니를 괴롭힌다면 기필코 사로잡아 천참만륙해 버리겠다!)

막비강은 마음이 초조해져 이를 부득 갈았다. 생모 한경파의 안위가 못내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고천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헌데 막비강이 길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두서 없는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화라라락!

고개 아래에서 하나의 작달막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오는 것이 막비강의 눈에 들어왔다

그 인영은 한 명의 여인이었는데 단번에 고개 위로 날아올라오더니 막비강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황망히 달려가는 걸까?)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본래 남의 일에 간섭하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인이 펼쳐내는 경공술이 어쩐지 눈에 익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부인! 잠깐만 걸음을 멈춰 주십시오.]

막비강이 급히 부르자 여인은 고개는 돌리지 않았으나 예의 있게 대답했다.

[용서하세요! 가친(家親)께 위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야한답니다.]

여인은 그렇게 외치며 전력을 다해 질주해 갔다

발끝이 가볍게 땅을 찍을 때마다 사, 오 장씩을 날아가는데 그 자태가 아주 가볍고 우아하다.

!

막비강은 여인의 이 같은 경신술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서 즉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뒤쫓아가기 시작했다.

날 듯이 달려가는 여인의 경신술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껏 막비강이 본 어떤 무림 고수보다도 빠르고 경쾌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경신술로 유명한 우주도철의 팔보간섬을 연마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일년 동안 수시로 공청석유를 마시고 하수오를 상식(常食)했었다. 

덕분에 공력이 전보다 배 가까이 심후해진 상태다

막비강은 오래지 않아 여인의 바로 뒤로 따라붙을 수 있었다.

여인도 막비강이 삽시에 자신을 따라붙자 놀란 듯 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질풍같이 달리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막비강이 가까이 따라붙어 살펴보니 상대는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순후한 인상의 중년여인이었다

그다지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박속같이 하얀 피부와 온유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절로 호감을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나이 탓에 비만해 보일 정도로 살이 올라 풍만한 몸에는 질박하나 깨끗한 베옷을 걸치고 있어 초탈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남산의성(南山醫聖) 악 선배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막비강은 여인과 보조를 맞추어 달리면서 물었다

그는 이 풍만한 중년여인의 경신법이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능운신보(凌雲神步)임을 알아본 것이다.

[소협의 존함을 말해 줄 수 있겠어요?]

화락!

막비강의 물음에 중년여인은 급히 걸음을 멈추며 반문했다.

[소제는 막비강이라 합니다.]

막비강도 따라 멈춰 서며 중년여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이제 보니 막 소협이었군요. 제 이름은 악소궁(岳少宮)이라고 하며 남산의성께서는 저의 가친 되세요.]

중년여인이 반색을 하며 막비강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악 누님이셨군요.]

막비강도 반색을 했다.

그는 이 년 전 악불령에게서 의술을 배울 때 그의 가족 사항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 푸근한 인상의 중년여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외동딸인 악소궁이었던 것이다.

악소궁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세 살이다

그녀는 스무 살이 채 안되어 출가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었다

즉 지금의 그녀는 과부인 것이다.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된 악소궁은 별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채약(採藥)과 연단(煉丹)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의성 어르신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누님?]

막비강은 악소궁의 안색이 매우 초조한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악불령에게 사사(私師)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 악소궁이 비록 어머니 나이뻘이었으나 스스럼없이 누님이라 불렀다.

악소궁도 막비강에 대해 부친에게서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그가 대뜸 자신을 누님이라 불렀으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삼년 전 뇌강서(雷鋼鋤)를 도난당한 일이었네.]

악소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도 상대가 자신의 사제뻘인 막비강임을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강용은 자기의 무공으로는 가친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이리저리 피해 다녔지.]

막비강 역시 그 일은 알고 있다.

소리장도 강용은 위왕, 즉 조조의 무덤을 도굴할 목적으로 남산의성 악불령의 뇌강서를 훔쳤었다

그 과정에서 막비강은 소리장도로부터 도가의 상승 운기토납술인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을 배우는 기연을 만났었다.

[도망다니던 강용은 가친이 경지하 강변에서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과 싸워 적대관계가 된 것을 알고는 많은 재물을 마련하여 그자를 찾아가 사부로 삼았다네.]

막비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을 받았다.

[백독서생 이량은 영존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 강용이 그런 자를 사부로 삼은 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건 자네가 모르고 하는 말이야. 강용이 백독서생 이량을 사부로 삼은 건 무공이 아니라 아버님을 상대하기 위한 용독절학(用毒絶學)을 배우기 위해서였거든.]

[그렇군요!]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 무림에서 남산의성의 의술에 상대될만한 것은 백독서생의 용독절학 밖에 없다.

말을 잇는 악소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강용은 전설적인 거마 천수인마(千手人魔)까지 사부로 모셔 절기를 배웠다고 하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그자는 복수를 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데 천수인마도 강용과 동행한다더군.]

막비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천수인마의 무공은 천하오기(天下五奇)에 비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네.]

악소궁은 아미를 모으며 대답했다.

[천수인마는 백여 년 전부터 무림에 명성을 떨쳐 온 천(), (), (), ()의 우내사마(宇內四魔) 중 한 명이네. 강호의 일반적인 평판으로는 우내사마가 천하오기보다 좀더 강하다고 봐야겠지!]

막비강은 우내사마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

하지만 우내사마가 무려 백여 년 전부터 악명을 떨쳐왔다는 설명을 듣고 그자들이 천하오기보다도 더 무서운 인물들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비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잘되었습니다. 소제도 영존을 만나 뵙고 어떤 사람의 행방을 물을 생각이었으니 함께 가시지요.]

[자네가 함께 가 준다면 천수인마도 감히 행패를 부리지 못할 게야.]

악소궁은 막비강이 함께 가자고 말하자 기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당금 무림에서 천하오기 외에는 나를 추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 그런데도 단숨에 내 뒤를 쫓아온 걸 보면 자네의 무공이 천하오기를 능가한다는 걸 알 수 있겠네!]

말하는 악소궁의 표정이 밝아졌다.

실제로 악소궁은 다른 무공은 평범하지만 경신공부만은 아주 빼어났다

막비강은 그녀의 젊은 시절 별호가 남산비연(南山飛燕)이었음을 떠올렸다.

막비강도 악소궁이 자신을 높게 평가해 주자 내심 기뻤다.

[헌데 소협은 가친에게 누구의 행방을 물으려는 겐가?]

악소궁이 묻자 막비강은 침중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소제가 찾으려는 사람의 이름은 전포(田袍)라고 합니다. 혹시 악 누님은 이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 금시초문이구먼. 하지만 가친께선 알고 계실 것 같네. 워낙 발이 넓으신 분이니까.]

악소궁의 대답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포가 무림의 고인이 아니라면 염라철장이 내게 전포를 만나 사정을 물어 보라고 당부할 리 만무하지.)

생각을 굴리던 막비강은 다시 악소궁에게 물었다.

[혹시 무림도상에 전()씨 성이면서 위명을 떨친 인물이 없습니까?]

[전씨라....]

악소궁은 이마를 모으며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고 보니 전씨 중에서도 무림에 명망을 떨치는 가문이 하나 있기는 하구먼!]

[그렇습니까? 그게 어느 가문입니까?]

악소궁의 말에 막비강은 급히 물었다.

[사패천 중 북패천(北覇天) 북산검호각(北山劍豪閣)이 대대로 전씨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네! 하지만 그들 일족은 중원의 북쪽 변방에 웅거한 채 외부인들과 교류가 적어 당금 북산검호각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

막비강은 악소궁에게서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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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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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함정에 빠지다!

 

 

 

부악!

막고천은 이번 기회에 후환을 없앨 작정을 하고 전력을 기울여 장력을 날렸다. 그 기세는 처음의 일장 보다 배는 더 강력하고 악독했다.

[!]

그러나 막고천의 이번 공격은 막비강이 팔보간섬의 경신술로 슬쩍 피하는 바람에 헛것이 되고 말았다.

[불효막심한 놈! 빨리 꿇어앉아 죽음을 받아라!]

화가 치민 막고천은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막비강을 덮쳐왔다.

화락!

하지만 막비강은 그 순간 몸을 날려 명륜당 밖으로 내려섰다.

[막 노적! 자신 있으면 밖으로 나와라. 오늘 내 손으로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뜰에 내려선 막비강이 막고천에게 삿대질을 할 때였다.

[! 날뛰지 마라!]

[호로자식이 어디서 감히...!]

휘휙! 화락!

막고천 대신 두 개의 인영이 동시에 날아 나왔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막고천 옆에 앉아 있던 고희의 노인들이었다.

두 노인 중 동홍선생(冬烘先生;서당 훈장)처럼 생긴 자가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너 같은 불효막심한 자식은 노부가 대신 벌을 주어야겠다.]

막비강은 이 노인이 막고천을 능가하는 고수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거만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요?]

동홍선생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피를 섞어 시험했으니 친혈육임이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계속 난동을 부리는 네놈은 금수나 다름없다. 예로부터 금수같은 인간은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법! 노부가 오늘 장주를 대신하여 네놈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

막비강은 냉소하며 말했다.

[! 당신은 나잇살이나 쳐먹어 놓고도 방금 전의 그 혼혈친인에 거짓 수작이 숨겨져 있음도 못 알아보시오?]

그때 중인들을 이끌고 명륜당에서 달려나오던 막고천이 그 말을 듣고 고함을 질렀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다 똑똑히 보았는데 무슨 거짓 수작이 숨겨져 있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뜨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았으니 나와 피가 혼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는 절대 너 같은 악적의 자식이 아니다. 자신이 있으면 나와 단독으로 혼혈친인을 해보자.]

막고천은 막비강이 단독으로 시험해 보자는 제의를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당황했다. 대답이 궁색해진 그는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질렀다.

[아비를 악적이라 욕하는 죄만으로 죽어 마땅한데 또 무엇을 시험하잔 말이냐?]

막고천은 분노하며 또 다시 막비강에게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비강은 미리 방비하고 있었던 터라 가볍게 피해냈다.

[어머니!]

막비강은 막고천을 상대하지 않고 다른 여인들과 명륜당 입구까지 나와있는 어머니 한경파 곁으로 날아갔다.

[이제 저 악적에게 시달리실 필요 없습니다! 소자와 함께 여길 떠납시다.]

막비강은 팔을 뻗혀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한경파는 슬픈 표정으로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 너나 빨리 여길 떠나거라 강아!]

[죽일 놈!]

! 퍼엉!

그 사이에 막고천이 다시 쫓아와 연달아 장력을 쳐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이 팔보간섬을 전개하자 막고천은 이번에도 그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공격을 피하며 냉랭히 웃었다.

[나는 네놈을 일장에 격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상을 먼저 알고 싶어 손을 쓰지 않을 뿐이니 분수를 알고 멈춰라!]

막비강의 조롱에 막고천은 대로하여 고함을 질렀다.

[짐승보다 못한 놈! 나를 아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 부친이 누구란 말이냐?]

[그건 내가 네게 묻고 싶은 말이다.]

이때 막고천의 장남인 막불계가 덮쳐 오며 외쳤다.

[둘째! 너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독할 테냐?]

막비강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막불계에게 수없이 괄시를 받고 매도 맞았다. 자연히 그는 지난날의 울분이 일시에 치밀어 냉랭히 대꾸했다.

[막불계! 네 모친도 이 악적이 남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겁탈했을 텐데 뭐가 고맙다고 두둔하느냐?]

막불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무엄한 놈 같으니...! 뭐가 어쩌고 어째?]

!

막불계는 악에 바쳐 일장을 후려쳤다.

[! 그런 실력으로 내게 덤비다니!]

하지만 막비강은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그의 손목을 움켜잡아 던져 버렸다.

[어헉!]

막불계의 몸은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막불계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혈검산장의 가전비학을 모두 연마했고 또 흑도의 거물들인 십악구흉, 칠열팔준들로부터 사사받아 젊은 층에선 제일인자라 불렸다.

그런 그가 미처 일초도 버티지 못하고 내 팽개쳐지자 중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막고천의 아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십대 후반의 중년부인이 눈에서 살기를 발산하며 한경파에게 노성을 질렀다.

[셋째 동서! 자네가 이 불효막심한 자식 놈을 따끔하게 벌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치도곤을 내리겠다.]

이 여인이 바로 막고천의 정실(正室)인 당숙경(唐淑瓊)이다.

막불계와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보통 여인들보다 체격이 큰 데다 상당히 살이 쪄서 몸매가 아주 당당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피부도 깨끗하고 이목구비도 뚜렷하여 여전히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기승스러워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혈검산장에서 막비강을 가장 못 살게 괴롭힌 사람이 다름 아닌 당숙경이다. 막비강이 자신의 다섯 시앗들이 낳은 아이들 중 유일한 아들인 탓인지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를 못 살게 굴었었다.

막비강은 그런 당숙경이 자신의 어머니 한경파를 윽박지르자 분노하여 이를 부득 갈았다.

[네가 날 어쩌겠다는 거냐 이 살찐 돼지야?]

[, 뭐야? 돼지?]

당숙경은 평소에도 자신이 다른 시앗들보다 살이 많이 찐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오고 있었다. 당연히 살찐 돼지라는 막비강의 욕은 그녀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그 주둥이! 찢어버리겠다!]

당숙경이 악을 쓰며 막비강을 덮쳐왔다. 서패천 혈검산장의 안주인답게 그녀의 무공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래봤자 막고천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막비강의 상대가 될 까닭이 없다.

[꺼져!]

막비강은 당숙경이 덮쳐들자마자 그녀의 하얀 손목을 잡아채 마당에 던져 버렸다.

[아이쿠!]

당숙경의 피둥피둥 살이 찐 몸뚱이가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마당에 널부러졌다.

당숙경은 여러 바퀴 뒹구는 바람에 치마가 허리 위로 걷혀 올라가버렸다. 그 바람에 투실투실 살이 오른 중년여인의 허연 아랫도리가 그대로 드러나버렸다.

유달리 육덕이 좋은 그녀인지라 허벅지 하나가 한 아름이 넘어보인다. 그러면서도 그 우람한 허벅지들은 처녀같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숙경은 발라당 나자빠지는 바람에 가랑이를 벌린 자세로 넘어졌는데 흐드러진 허벅지 사이에는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살이 두둑히 오른 둔덕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살진 두덩이를 가린 작은 고의는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본의 아니게 당숙경의 사타구니를 본 막비강은 민망하여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부친을 모독하고 형을 때렸으며 부친의 정실을 욕보였으니 막비강은 이제 패륜무도라는 오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저 놈을 잡아라!]

[이놈! 어디서 패악질이냐?]

막비강이 형인 막불계에 이어 큰 어머니인 당숙경마저 능멸하는 것을 본 혈검산장의 무리들이 분노하며 일제히 막비강을 덮쳐왔다.

[강아!]

십악구흉, 칠열팔준등이 분노하여 사방에서 아들을 덮쳐가는 것을 본 한경파가 비명을 질렀다. 육요 칠절에 버금가는 고수 삼십여명으로부터 합공을 받는 아들이 당장이라도 피곤죽이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한경파가 우려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리 삼십 명이 넘는 고수가 공격한다 해도 일시에 막비강에게 들이닥칠 수 있는 인원은 너댓명 밖에 안된다.

그리고 막비강은 이미 육요 칠절정도의 고수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절정고수가 되어있었다. 육요 칠절이 아니라 천하오기라도 지금의 막비강에게는 몇 초 견디지 못할 정도다.

[꺼져라!]

막비강은 사납게 외치며 쌍장을 후려쳤다. 그의 이 일장은 염라철장 곡강의 염라장법이다. 당연히 혈검산장의 악도들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무공이다.

하지만 막비강이 펼친 지금의 염라장법에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치우강기가 실려 있었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치우강기가 가미된 염라장법의 위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퍼펑! 꽈르릉!

[케엑!]

[크악!]

무쇠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처참한 비명이 일시에 터졌다.

치우강기에 정면으로 가격당한 혈검산장의 고수 다섯 명이 가슴과 머리통이 으깨져 즉사했다. 요행히 정면으로 얻어맞지 않은 자들도 치우강기가 실린 염라장법의 장풍이 스치는 순간 내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허억!]

[, 저럴 수가!]

십악구흉, 칠열팔준중 단 번에 다섯 명이 즉사하고 일곱명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자 장내는 공포와 전율이 휩쓸었다. 이같은 결과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막비강도 일시 넋이 나갔다. 그는 막불계나 당숙경 모자를 상대할 때는 그래도 차마 살수를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막고천의 수하들이 떼로 덮쳐오자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치밀어 치우강기를 발휘하였다.

헌데 불과 삼성의 치우강기를 염라장법에 가미했을 뿐인데도 단번에 다섯 명의 절정고수를 죽이고 일곱명을 부상 입혔다. 이것은 막비강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막비강으로서도 최초의 살인이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인 것이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보다는 치우강기의 가공할 파괴력이 그를 더욱 전율하게 만들었다. 청구단서가 왜 천하제일의 비급이고 청구상인이 어째서 무성(武聖)이라 불리는지 이 일장으로 증명된 것이다.

헌데 막비강이 스스로 벌인 살육에 넋이 나가 있을 때였다.

[이 짐승같은 놈!]

[죽어라!]

동홍선생과 또 다른 한 노인이 살기 어린 고함을 지르며 동시에 막비강을 공격해왔다. 과연 그자들은 육요 칠절을 능가하는 고수라 장풍이 닿기도 전에 숨 막히는 압력이 밀려온다.

넋을 놓고 있던 막비강은 움찔하면서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퍼펑! 콰쾅!

그 바람에 빗나간 두 노인의 장력이 지면을 강타하여 깊은 구덩이 두 개를 만들었다. 일장을 날려 깊이 석자에 폭이 일장 가까운 구덩이를 만든 두 노인의 공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자들이다!)

막비강은 두 노인이 오봉도인이나 우주도철에 그리 뒤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들임을 알고 내심 긴장했다.

[흐흐흐! 그동안 막장주로부터 후대를 받은 값을 해야겠군!]

[낄낄! 청구단서의 무공이 결코 절대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마!]

두 노인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좌우에서 막비강에게 다가왔다.

막비강도 이번에는 방심하지 못하고 양 손에 치우강기를 운집시켰다. 그때였다.

[, 그만 두세요!]

문득 겁에 질려 물러선 사람들을 헤치고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달려나왔다.

[() 노선배님! () 노선배님! 천첩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 아이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달려 나온 날렵한 인영이 두 노인을 가로 막으며 애원했다. 뜻 밖에도 그 여인은 막고천의 다섯 번째 부인인 냉상영이었다.

냉상영이 가로 막자 두 노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들을 식객으로 맞아준 막고천의 첩인 것이다.

헌데 그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천한 계집!]

지켜보던 막고천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냉상영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

막고천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허리를 걷어채인 냉상영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머니!]

보고 있던 냉상영의 딸 막영란이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넘어진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허리가 걷어채여 스러진 냉상영은 충격이 컸는지 운신을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린다.

[이 간악한 악적!]

이 광경을 본 막비강은 대로하였다.

꽈릉!

그는 분노한 나머지 일장에 치우강기를 실어 막고천을 후려쳤다.

[으악!]

다음 순간 막고천은 외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런 그자의 왼쪽 다리가 치우강기에 맞아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

[장주님!]

십악구흉등 살아남은 자들은 경악성을 지르며 막고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막고천의 혈도를 찍어 지혈해 준 다음 들쳐업고 후원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홍선생과 또 한 노인은 막고천 옆에 서 있었지만 막비강의 출수가 너무도 쾌첩한 탓에 미처 막아볼 엄두도 못냈다.

[이 개잡종!]

[죽어라!]

다음 순간 두 노인은 분노의 폭갈을 터트리며 막비강을 덮쳐왔다. 과연 이 노인들의 공력은 심후하기 이를 데 없어 그들이 일단 공세를 발동하자 막비강은 숨이 콱 막히는 압력을 느꼈다.

막비강은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두 절세고수의 합공을 받자 경시할 수 없어 치우강기를 최대한 끌어내 마주 장력을 후려쳤다.

! 꽈다다당!

쌍방의 장력이 맞닥뜨리는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난무하고 바닥에 깊이가 다섯 자가 넘는 구덩이가 움푹 파였다.

[!]

[크억!]

흩날리는 폭음 속에서 세 마디의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막비강은 기혈이 요동쳐서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반면 두 노인은 피분수를 뿌리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두 노인은 치우강기에 진탕되어 내장이 위치를 바꾸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 가세!]

[, 괴물같은 놈!]

겨우 바닥에 내려선 두 노인은 사색이 되어 몸을 날렸다. 단 일합의 격돌이었지만 천하오기에 필적하는 자신들조차도 막비강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이다.

막비강이 들끓는 기혈을 갈아앉혔을 때 명륜당 앞 마당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에 맞아 죽은 다섯 구의 시신만이 널려있을 뿐이었다.

혈검산장의 무리들은 막비강이 십악구흉등을 일장에 다섯 명이나 격살하고 막고천이 삼고초려하여 초빙한 두 명의 전대 기인조차도 간단히 패퇴시키자 공포에 질려 뿔불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그제서야 막고천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어머니 한경파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혈검산장의 무리들은 달아나면서 한경파와 냉상영등 여자들도 함게 끌고 사라진 것이다.

[막가야! 숨어도 소용없다!]

막비강은 사나운 고함과 함께 몸을 뽑아 올려 막고천 일행이 사라진 후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단 생모 한경파를 막고천의 마수에서 구해내 혈검산장을 떠날 작정을 했다. 생모에게 상세한 내막을 물은 다음 부친 염라철장의 피맺힌 원한을 갚을 심산이었다.

 

* * *

 

(모두 어디로 사라졌지?)

헌데 후원에 들어선 막비강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짧은 사이에 막고천뿐만 아니라 생모를 비롯한 막고천의 처첩들도 모두 사라져 버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주위에 내가 모르는 은밀한 밀실이 있구나!)

막비강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기다!)

이내 막비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한쪽 옆의 담벼락 밑에 몇 방울의 핏자국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콰쾅!

막비강은 즉시 그 담장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담장이 왈칵 무너지며 과연 그 뒤쪽에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 이젠 독 안에 든 쥐다! 막가 노적아!]

막비강은 온몸으로 살기를 토해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곧 끝나고 한 칸의 밀실이 나타났다.

하지만 다른 출구가 없는 그 밀실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밀로가 있는 것일까?)

막비강은 갸웃하며 사방의 벽을 두드려 보았다.

텅텅!

헌데 벽을 두드리자 둔중한 금속성이 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방이로군! 사방 벽이 철벽(鐵壁)이라니...! 만일 누가 이 안에 들어왔을 때 문을 봉쇄해 버린다면 꼼짝없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막비강은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함정(陷穽)?)

막비강은 질겁하며 다급히 밀실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한걸음 늦고 말았다.

쿠쿠쿵!

돌연 육중한 굉음과 함께 입구가 다섯 치 두께의 철문으로 막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야앗!]

막비강은 사색이 되어 맹렬히 장풍을 날렸다.

꽈릉!

하지만 굉음과 함께 먼지가 우수수 떨어질 뿐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런!]

막비강은 비로소 자신이 막고천이 판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고 신음했다. 그때였다.

[크크크! 꼴좋구나, 망나니 녀석!]

어디선가 악에 받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막고천이었다.

막비강은 분노하여 외쳤다.

[이 악적!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당당히 나서라!]

[흐흐! 네놈은 죽어 마땅한 패륜아다! 그 안에서 아사 직전이 되면 꺼내 주마!]

[닥쳐라!]

콰르르릉!

막비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맹렬히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철실 전체가 무너질 듯이 진동하며 요동을 쳤지만 벽은 깨어지지 않았다.

[크크크! 발악해 봐야 소용없다! 그 방은 사면이 한철(寒鐵)로 주조되어 만 근의 화약으로도 깨뜨릴 수가...!]

꽈르르릉!

막고천의 득의에 찬 음성은 다음 순간 요란한 폭음에 묻혀 버렸다. 막비강이 이번에는 치우강기를 최대한 일으켜 철문을 후려친 것이다.

우두둑!

그러자 굉음과 함께 철문의 중앙이 움푹 우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십여 번만 더 치면 무너뜨릴 수 있다!)

막비강은 새삼 치우강기의 위력에 놀라며 재차 장력을 날렸다.

콰드득!

이번에는 좀더 큰 폭음이 터지며 문의 형상이 이지러졌다.

[... 괴물 같은 놈!]

어디선가 지켜보던 막고천의 음성이 공포로 물들었다.

[독무! 독무(毒霧)를 안쪽으로 내뿜어라!]

푸스스스! 쉬익!

막고천의 두려움에 질린 일갈에 이어 철실의 사방 모서리에서 자욱한 운무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천오주를 지닌 탓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헛수고라는 걸 알려 주마! 곧 나가서 죽여 주마!]

꽈르릉!

막비강은 독무는 무시하고 다시 철문을 부수는 데 전념했다.

[으으으! 만독불침이란 말이냐? ... 가자!]

겁에 질린 막고천의 음성이 급히 멀어졌다. 독도 무서워하지 않는 막비강의 모습에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으하하하! 지옥 밑구멍이라도 널 숨겨 두지 못한다!]

! 콰쾅!

막비강은 살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연신 장력을 후려쳤다.

헌데 그때였다.

(허억!)

막비강은 돌연 부르르르 몸을 떨었다. 갑자기 아랫배 깊은 곳에서 무서운 열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 아차! 이놈이 다급한 김에 최음제(催淫劑)도 독무에 섞어 흘려보냈구나!)

막비강이 대경실색하여 호흡을 멈추었으나 이미 늦었다. 방심하는 사이 다량의 최음제를 들이마신 그의 전신은 삽시에 불덩이처럼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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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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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살성의 귀향

 

 

그날부터 막비강은 칠흑같이 어두운 우혈의 밀실 안에서 청구단서에 수록된 절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치우강기(蚩尤罡氣)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상고시대에 치우(蚩尤)는 황제(黃帝) 헌원씨와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전설 속의 초인이다.

중원에서도 전신(戰神)으로 추앙받는 치우는 동방 청구에서는 상고시대 그들 종족이 모셨던 제왕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강기신공(罡氣神功)에 치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치우강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무적의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무공과 초식에도 쉽게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평범한 무공이라도 이 치우강기가 실리면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한다.

청구절학의 고하(高下)는 바로 치우강기의 화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막비강은 식음도 잊고 신공수련에 몰입했다.

그와 함께 매일 한 뿌리씩의 하수오와 단호 한 병 분량의 영천석유가 사라져 갔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어느 날 문득 공력을 돋우어 보니 전신이 후끈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기를 운용하는 대로 석벽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가 일어났고, 호흡을 할 때마다 몸이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치우강기가 구체적으로 발현(發現)되는 수준인 오성(五成)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막비강은 자기의 공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천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꽈르릉!

그러자 굵은 물기둥이 공중으로 수십 장이나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가 광세절학(曠世絶學)을 연성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이 치우강기를 십 성(十成) 수준까지 올리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성의 치우강기로도 천하무적(天下無敵)은 장담할 수 없어도 충분히 강호를 호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막비강은 청구절학의 수련을 중단하고 출도할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하수오가 사라져 석벽이 드러난 상태였다.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청구단서를 얻은 후 불과 일 년 여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러나 막비강에게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생겼다.

치기가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어느덧 건장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변했으며 무공도 일류 중의 일류고수가 되어 천하오기도 능가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뿌리의 하수오와 마지막 한 모금의 영천석유를 마신 그는 선사(先師) 청구상인의 유명(遺命)에 따라 비급을 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진기를 한 모금 끌어올려 단숨에 우혈 위의 동굴에 올라섰다.

 

* * *

 

막비강은 우혈에서 나온 즉시 경신술을 전개하여 영롱탑이 있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때는 새벽무렵이다. 당연히 영롱탑 근처에도 인적이 없다.

막비강은 조씨부인 일가의 집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지난 일 년 사이 집터에 잡초만 무성해져서 한 층 더 을씨년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조씨부인의 집터에서 서성이며 막비강은 여러 가지 생각을 굴렸다.

(복수를 먼저 할까, 아니면 신세를 먼저 조사할까? 참! 염라철장께서 말씀하신 전포(田袍)라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그러다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나의 무예로 막고천을 격살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직접 혈검산장으로 찾아가자! 막가 악적을 생포하여 심문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전포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지.)

그는 직접 막고천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스악!

결심을 한 막비강은 즉시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유령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었을 무렵, 종남산 자락에 자리한 혈검산장 정문 앞에 한 명의 영준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의 나는 듯한 걸음걸이는 곧장 문을 박차고 뛰어들 것만 같았다.

[멈춰라!]

정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장한이 급히 청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네 명의 장한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청년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본장을 찾아왔느냐?]

청년이 검미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서평(徐平), 너는 어찌 나를 몰라보느냐?]

서평이라 불린 건장한 장한은 어리둥절하여 청년을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보니 둘째 도련님이시군요. 삼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이렇게 건장한 청년이 되셨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서평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곧 정문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그의 고함 소리를 들은 정문 안쪽의 사람들이 황급히 후당(後堂)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다.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통보할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을 만나겠다.]

그러자 서평이 난색을 지었다.

[둘째 도련님, 지금의 본장은 지난날과 크게 달라 어느 누구도 무단히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막비강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럼 장주님이라도 산장을 들고 날 때는 누군가에게 통보를 해야 한단 말이냐?]

막비강의 말에 서평은 말문이 막혀 대꾸를 못했다.

그때 문 안쪽에서 여러 사람이 이리 저리 부산히 움직이더니 몇 사람이 나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자들 중 우두머리는 살이 없는 강팍한 얼굴에 눈빛이 얼음같이 차가운 초로의 장한이었다.

그가 바로 혈검산장의 총관인 혈적수(血滴手) 원인초(元人初)란 인물이다.

원인초는 그 지닌 바 실력이 육요, 칠절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흑도의 거효(巨梟)인데 막고천의 초청을 받아 혈검산장의 총관일을 맡고 있었다.

[이(二)소장주께서 드디어 돌아오셨구려. 신태비범해지신 것을 보니 이미 청구단서상의 절학을 연성하신 모양이외다. 경하드리오!]

혈적수 원인초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공손하게 말하는 원인초를 보는 순간 막비강은 절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삼 년 전 혈검산장을 떠나기 전까지 혈검산장의 수하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막비강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자가 바로 총관인 원인초였기 때문이다.

원인초로부터 받은 온갖 수모와 능멸이 떠오르자 막비강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하지만 막비강은 웃음을 머금으며 마주 포권을 했다.

아직 막고천의 상판도 못 봤는데 그의 졸개인 원인초와 시비를 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총관! 내게 너무 공손하실 필요 없소. 그보다 장주께선 지금 안에 계시오?]

원인초는 얄팍한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이미 통보했으니 장주께선 곧 영접하러 나오실 것이외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만나면 안 되오?]

[소장주는 외인이라 자처하고 부친을 장주라 불렀으니 부자의 정이 끊어졌음이 분명하오. 그러므로 장주의 분부 없이는 장원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소.]

막비강은 원인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장원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비록 큰 소리는 나지 않지만 급히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와 나직 나직한 호령소리들이 들린다.

갑작스런 막비강의 귀향에 혈검산장의 인물들이 놀라 대응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혈검산장 안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고수들을 총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때 대문 안에서 이십 삼, 사세쯤 된 건장한 청년이 달려나오며 외쳤다.

[둘째! 아버지께선 너를 명륜당(明倫堂)에서 만나시겠다고 하셨다.]

그 청년이 바로 막고천의 장남인 막불계(莫不戒)로 막비강보다는 네 살이 위였다.

[알겠소!]

막비강은 응답을 한 후 막불계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명륜당은 혈검산장에서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는 일종의 형당(形堂)이다.

이 무렵 명륜당 주위에는 백여명의 무사들이 병기를 든 채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막비강이 막불계를 따라 명륜당 안으로 들어가니 낯 익은 얼굴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은 상좌에 놓인 호피를 깐 태사의에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삼년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막고천의 모습을 본 순간 막비강은 가슴 속에서 살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구박한 것을 그렇다 쳐도 가엾은 어머니를 창녀처럼 다루던 그자의 만행이 떠오른 때문이다.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살기를 억누르며 명륜당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선은 어머니 한경파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리고 한 차례 명륜당 안을 둘러본 그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만하게 앉아있는 막고천 뒤에는 하나같이 천하절색인 중년미부 여섯 명이 시립하고 있다.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까지의 나이인 이 미녀들이 바로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이다.

막고천의 여섯 아내 뒤쪽에는 다시 여섯 명의 젊은 여자들이 서있다.

막고천의 아내들이 낳은 딸들이다.

그들 중 둘은 본처 소생이고 넷은 첩들의 자식이다.

헌데 막고천의 여섯 아내 중 한 명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다.

연약한 몸매에 파리한 안색을 한 그 중년미부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였다.

(어머니!)

한경파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해 혈검산장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고천과 그의 부인들 앞쪽에는 수십명의 인물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기세가 사나워 한 지역의 패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자들!

그들이 바로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혈검산장의 십악구흉(十惡九兇)과 칠열팔준(七烈八駿)이다.

이 서른 네 명의 고수들이야말로 혈검산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막고천 외에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은 단 둘이다.

막고천 좌측에는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고희를 넘긴 노인 두 명이 앉아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노인들은 장내에 있는 누구보다고 강한 실력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막비강은 두 노인은 처음 본다.

아마도 그가 혈검산장을 떠난 후 막고천이 초청한 강호의 기인들인 모양이다.

[흥!]

명륜당을 한 바퀴 돌아본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안하무인격으로 굴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불효자식 같으니! 빨리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막고천! 너는 그래도 내 아버지 행세를 할 생각이냐? 오늘 나는 네놈의 목숨을 뺏으러 왔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던 한경파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너 미쳤느냐?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빨리 무릎을 꿇어라!]

낳아준 어머니가 호통을 치자 막비강은 하는 수 없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아직도 이 어미를 기억하고 있다니, 너는 역시 착한 아이구나.]

한경파는 막비강이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자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 두시오 삼(三)부인!]

그 순간 막고천이 한경파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저런 불효막심한 자식에게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베풀 생각이오?]

어머니의 가냘픈 몸이 막고천의 손에 잡혀 비틀거리는 것을 본 막비강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라렸다.

[노적! 너는 왜 나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제로 빼앗았느냐?]

이 말이 떨어지자 막고천 뿐 아니라 한경파도 온몸을 세차게 떨었다.

그리고 막고천의 다섯 부인들도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하지만 한경파는 곧 격동을 가라앉히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이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네 부친께서 네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나를 빼앗았다니! 누가 네게 그런 헛소리를 하더냐?]

막비강은 굳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어머니는 자진해서 저자에게 시집을 왔단 말입니까?]

막비강이 막고천을 가리키며 말하자 한경파의 가녀린 교구에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이 스쳤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파리해졌다. 지극히 심한 충격을 받았고 심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이같은 반응을 본 막비강은 자신의 의심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해서 이를 악물며 생모를 몰아붙였다.

[말씀해보십시오! 어머니는 저자와 자의로 결합했습니까?]

그러자 잠시 파르르 떨던 한경파는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그녀는 두려움이 실린 표정으로 연신 막고천의 눈치를 살핀다.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심을 숨기고 막고천을 지아비라고 인정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얼굴을 분노의 빛으로 물들이며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럼 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저... 저런 패륜무도한...!]

막비강의 이 무엄한 말에 장내의 인물들은 분노의 노성을 질렀다.

한경파도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가냘픈 교구는 애처롭게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처연하게 말했다.

[하나의 안장은 수만 마리의 말 등에 올릴 수 있지만 한 마리 말은 동시에 두 개의 안장을 올릴 수 없다. 이 어미의 남편은 네 아버지 한 분뿐인데 어찌 다른 남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막비강은 눈에서 차가운 안광을 토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진짜 나의 부친은 누굽니까?]

그러자 한경파는 서럽게 흐느끼며 대답했다.

[강아! 지난 몇 년 동안 너는 도대체 무얼 잘못 배웠기에 어미에게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 너의 진짜 부친은 네 면전에 계시는 장주님이시다.]

하지만 막비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염라철장이란 분은 누굽니까?]

한경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염라철장이라니? 어미는 그런 사람 모른다.]

다른 처첩들도 웅성대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때 막고천이 격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불효막심한 놈! 빨리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네놈이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염라철장에게 속았음이 분명하구나.]

막비강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나는 신분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너의 자식이라는 것을 네가 증명한다면 나는 즉시 자진을 해서 무례한 행위에 대한 사죄를 하겠다.]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더니 치를 바르르 떨었다.

[불효막심한 놈이 말 하는 꼴이 갈수록 가관이구나. 네 어미가 나와 결혼하여 너를 낳았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나의 모친이 너와 결혼한 것은 사실이고 네가 나를 양육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네 자식이 아니다.]

[당치 않은 소릴 계속 지껄일 테냐?]

[내 말은 절대 당치 않은 소리가 아니다.]

막고천의 노갈에 막비강도지지 않고 마주 외쳤다.

[나는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유달리 냉대를 받았다. 너는 내게 무예도 가르치지 않았고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귀여워해 주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나의 부친이 틀림없다면 중인들 앞에서 피를 섞어 시험해볼 용기가 있느냐?]

막고천은 피를 뽑아 시험하자는 말을 듣더니 안색이 일변했다.

본래 피를 나눈 부모 자식간의 피는 무리없이 섞이지만 서로 다른 피는 완전히 혼합되지 않는 법이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으로부터 이같은 이치를 배워 알고 있었다.

[이 패륜무도한 놈이 이젠 반란을 일으키려는구나!]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비강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혼혈(混血)하여 혈친 관계를 시험하자니! 삼부인! 이놈은 당신이 낳았으니 당신이 직접 사로잡으시오!]

막고천의 그 말에 한경파는 안색이 일변하여 막비강에게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강아! 너는 스스로 포박을 받지 않고 어미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들려느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막고천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좋다! 혼혈친인(混血親認)의 시험을 하고 싶다면 해주겠다. 그 시험으로 사실이 밝혀지면 네놈이 또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녀들에게 명령했다.

[물을 한 그릇 떠와라!]

명륜당에 운집한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 부자가 피를 섞어 친자 여부를 증명하는 시험을 지켜보았다.

비녀가 물을 대야에 떠오자 막고천은 한경파에게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먼저 피를 떨구시오!]

한경파는 전전긍긍하며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왼손 약지 끝을 찔러 선혈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붉은 피는 대야의 물 속에 떨어지자 붉은 구름처럼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막고천도 한경파에게서 비수를 받아 중지 끝을 찔러 핏방울을 물그릇에 떨구었다.

물 속에서 만난 부부의 피는 완만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불효막심한 놈아! 너도 와서 핏방울을 떨구어라!]

[흥!]

막비강은 코웃음을 날리더니 허리춤에서 강장을 꺼내 들며 빠르게 어머니와 막고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서 약간의 실마리나마 찾아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한경파는 시종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혼합이 진행되는 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고천이 또 흉흉하게 외쳤다.

[이놈! 빨리 피를 떨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막비강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흥! 정말 가증스런 한 쌍의 간부음부(奸夫淫婦)군.)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들고 있는 강장을 보지 않는 것과 막고천이 빨리 손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을 본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래의 남편을 배반하고 막고천과 재혼했다고 단정했다.

자연히 어머니 한경파에 대해 심한 반감이 일어났다.

그는 분노에 떨면서 강장의 날카로운 손톱 부분으로 왼손 약지를 살짝 찔렀다.

일순, 한 줄기 선혈이 흘러 그릇 속에 떨어지더니 막고천 부부의 피와 혼합되어 신속하게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피가 잘 혼합되는 것은 막고천과 막비강이 친혈육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막비강은 이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막고천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불효막심한 놈!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

막고천은 고함을 치며 막비강에게 강력한 일장을 후려쳤다.

펑!

두 사람의 거리는 석 자도 되지 않았고 막비강은 또 조금도 방비하지 않고 있던 터라 막고천의 일장에 그대로 가슴을 얻어맞았다.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은 육요 칠절을 능가하는 고수다.

그런 그자의 일장을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쿵! 쿵!

막비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으며 입가로는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만일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몸이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막고천의 이 독랄한 일장에 즉사했거나 죽지 않았다고 해도 회복 불능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내 자식을 때리지 마세요!]

막고천의 일장에 가슴을 얻어맞은 막비강이 피를 흘리며 물러서는 것을 본 한경파가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막비강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막고천은 다시 막비강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고 얼어붙어 있었다.

(저놈이 죽지 않다니...!)

전력을 기울인 자신의 일장을 정통으로 얻어맏고도 그저 몇 걸음 물러섰을 뿐인 막비강의 모습이 막고천에게는 괴물처럼 보인다.

막비강은 비록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심한 타격은 입지 않았다.

그저 일시에 기혈이 흔들여 역류했을 뿐이다.

헌데 우연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막비강은 막고천의 첩 중 한 명이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막고천의 다섯째 부인 냉상영(冷祥英)이었다.

냉상영은 웬일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소생인 딸 막영란(莫英蘭)에게 부축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막영란은 막비강보다 두 살 어린 열 일곱 살이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비강이 막고천에게 맞았는데 왜 다섯째 부인인 냉상영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일까?

막비강은 비록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비키시오!]

펑!

정신을 수습한 막고천이 한경파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또 다시 일장을 날려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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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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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아! 청구단서!

 

 

 

석 달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드디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이 되긴 했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고 한 달 새 눈도 내리지 않았다.

막비강은 삼경이 조금 안된 시간에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지하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막비강은 마음을 놓았다.

헌데 영롱탑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은 지난번에 들렀었던 조씨부인의 농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농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짧은 석 달간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무공은 석 달 전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농가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에 탄 집의 잔해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집의 일가족이 흉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것일까?)

불탄 폐허를 돌아보는 막비강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졌다. 조씨부인의 집이 타버린 것이 아무래도 자신 때문일 것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던 막비강은 유해(遺骸)나마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잔해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깨진 항아리와 불탄 가재도구들만 발견될 뿐 사람의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그가 신녀비로 잔해의 여기 저기를 찔러 보고 있을 때였다.

반짝!

갑자기 한 줄기 금광이 번뜩했다.

막비강이 얼른 흙을 파보니 자신이 이 집을 떠날 때 장연아에게 맡겼던 호로와 강장이 나왔다. 이 물건들의 발견만으로 막비강은 큰 위안을 얻었다.

(유해가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모두 무사히 피한 모양이다. 여길 떠나면서 호로와 강장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므로 여기 묻어 두고 갔을 것이다.)

 

막비강은 곧 강변으로 달려가 강장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이어 호로에 묻은 흙도 닦으려는데 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밝은 달빛이 호로에 비치었다. 그러자 돌연 호로 표면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한 폭의 산경(山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막비강은 호로의 그 문양이 청구단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이 일대의 경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았다. 다만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탑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막비강은 다시 주위의 경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영롱탑이 아리나 영롱탑의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호로를 다시 찾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일년이 걸려도 헛수고를 할 뻔했구나.]

그는 기뻐하며 호로 안에 든 찌꺼기를 모두 쏟았다. 그러자 호로 속에서 찌꺼기들과 함께 종이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쪽지를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임은 갔구나! 임 가신 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베갯머리에 엎드려 무사함을 믿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만나길 기도했지만 천첩의 뜻이 아직도 통하지 않았구나.>

 

파리 머리보다 작게 쓴 글씨는 여자의 필적임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굴까? 장연아라면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숙하게 임이니 천첩이니 하는 글을 쓸 까닭이 없는데....)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 조씨부인이 썼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이 호로 속에 이런 걸 넣어 두었을까?)

막비강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 글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로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찬 뒤 영롱탑 아래쪽의 경지하로 달려갔다.

 

***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정월 대보름날 밤 삼경이다. 한 겨울이라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막비강은 물 가 높은 바위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영롱탑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곧 영롱탑의 그림자 끝 부분이 가르키는 곳이 물 속 깊은 곳에 놓인 하나의 거석(巨石)임을 발견했다. 집채만한 크기인 그 바위는 물 속 아주 깊은 곳에 놓여있었지만 경지하의 물이 워낙 맑아 물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호로에서 떠오른 산수화에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비급은 영롱탑 꼭대기가 아니라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친 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청구상인이 후세 사람들을 농락할 의도가 없다면 청구단서는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자리한 물 속 거석 밑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풍덩!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한 막비강은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거석이 있는 곳으로 잠수했다.

거석이 놓인 곳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 거의 십여 장을 잠수하여 귀가 멍멍해지고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무렵 막비강은 가까스로 거석에 도착했다. 만일 막비강이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남달리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면 거석이 놓인 곳까지 잠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석은 마치 강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단단히 박혀있었다.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흔들어 보았지만 거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거석을 흔들어 보던 막비강은 숨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허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다 있군!]

막비강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물가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나처럼 비밀을 알아내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력이 충만함을 느낀 막비강은 움찔 놀라며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막비강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오봉도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막비강이 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고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상대방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천하오기 중 오봉도인이었다.

이에 막비강은 다시 급히 물 속으로 잠수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거석을 흔들어 보았다.

우두둑!

그러자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거석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시 숨이 목 아래까지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비강은 별 수 없이 또 수면으로 부상했다.

오봉도인은 재차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막비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너는 과연 거기서 비급을 찾고 있었구나. 빈도는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청구단서를 찾으면 즉시 갖고 나오너라. 함께 연구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자는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비급을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해 좋은 말로 막비강에게 제안했다.

오봉도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막비강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요사한 도사야! 내가 그런 수작에 걸려들 것 같으냐? 청구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찾아낸다면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멀리 헤엄쳐 가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무공 실력을 잘 아는지라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청구단서는 도가(道家)의 비급이라 배움이 얕은 후배로서는 얻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도장께서 지도해 주신다니 저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봉도인은 막비강이 순진하여 자신이 말에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총명하고 영리하여 천면신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네가 비급만 찾아 나오면 빈도는 최선을 다해 널 지도해 주겠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비강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거석을 밀어보았다.

쏴아!

다음 순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거석이 벌렁 뒤집혀졌다. 헌데 거석이 넘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수직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물이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을 막고 있던 거석은 물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다.

콰아아아!

거석이 뒤집히자 텅 비어있던 동굴 속으로 물이 와락 밀려들어간다. 삽시에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막비강의 몸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혼비백산한 막비강은 비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다급히 호흡을 멈추어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 했다.

그 상태로 막비강은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린 채 아래로 떨어졌다.

 

***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처음에는 그를 아래로 하락시키더니 다시 옆으로 백 장 가량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막비강은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낀 거석(巨石) 아래쪽에 도착하게 했다. 그는 얼른 거석을 붙잡고 일 장 가량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막비강이 나온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요행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 어떻게 밖으로 다시 나가지?)

그는 깜깜한 주위를 둘러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막비강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동굴 바닥은 고른 편이었다. 조그만 돌 조각을 사람 손으로 이어 붙여 마치 비늘같이 만들어졌는데 끝없이 길게 뻗어있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돌연 앞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지만 막비강은 기쁘기보단 긴장이 앞섰다.

(저것은 밖에서 흘러드는 빛일까? 아니면 어떤 짐승의 눈빛일까?)

그는 긴장하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한동안 그 빛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은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막비강은 용기를 내어 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석벽(石壁)에 하나의 옥합(玉盒)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막비강이 어둠 속에서 본 빛은 그 미끄러운 옥합의 표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츠으으!

막비강이 석벽에 박힌 옥합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갑자기 빛이 증가되어 주위를 백주(白晝)처럼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이 옥합은 야광옥(夜光玉)이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옥을 깍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합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야광옥합(夜光玉盒) 속에 동이족의 무학비전인 청구단서가 들어 있으니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리라.>

 

[! 이것이 바로 청구단서구나!]

막비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옥합을 바닥 위에 내려놓고 큰절을 올렸다.

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과연 한 통의 편지와 붉은 표지를 지닌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세 권의 책자 겉면에는 각각 신공결(神功訣), 연형결(鍊形訣), 초혼결(招魂訣)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막비강은 비급들 보다 먼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도는 본시 동방(東方) 청구(靑丘) 출신이다. 우리 동이족이 잃어버린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으려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명을 마치게 되었도다. 하지만 창세삼보를 찾는 일은 동방국인(東方國人)이 할 일이므로 중원인인 그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이에 그 내막을 여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우혈한천(牛穴寒泉) 위로 올라가 최소 일 년 이상 일체의 중단없이 청구절학을 연마하라. 일단 연공을 시작하면 기초가 잡힐 때까지 쉬지 말아야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혈 근처에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 형성된 영천석유(靈泉石乳)와 일 년 동안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다. 또 야광주는 비급을 읽을 수 있게 빛을 발산해줄 것이니 무공을 연마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으면 비급을 다시 야광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후세의 인연을 기다려라.>

 

막비강은 야광옥합에 적힌 글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그냥 거짓말로 추명염왕 등을 속인 것이었는데 우혈이 정말 청구단서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막비강은 비록 우혈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동굴이 우혈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상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급을 품속에 넣은 후 옥합을 들고 야광주의 광망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

 

얼마 가량 걸었을까? 전면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천면신룡!]

막비강은 이런 지하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차가운 한기가 솟구치는 연못가에 서있던 그 사람은 야광옥합을 손에 든 막비강을 발견하고는 다가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괴상한 야광옥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청구단서를 취득한 모양이구나. 당장 그걸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추명염왕! 저자가 죽지를 않았구나!)

야광옥합의 빛을 빌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상대방은 추명염왕이었다.

헌데 석달 사이 그자의 얼굴은 아주 추악하고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누런 털이 길게 자란데다 눈에서는 연신 녹광(綠光)이 번뜩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한다.

그러나 막비강은 지난 석달 간 자신의 무공도 장족의 발전을 보였음을 떠올리고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이건 빈 옥합일 뿐인데 무엇이 볼 게 있다고 그러느냐?]

[빈 옥합이라고? 네놈이 감히 노부를 속이려 드느냐?]

[이런 마당에서 당신을 속일 필요가 뭐 있느냐?]

추명염왕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청구단서는 어디 있느냐?]

막비강은 술술 말을 이었다.

[소면호가 탈취해 갔다. 그자는 청구단서 세 권을 모두 자기가 갖고 내게는 이 빈 옥합만 주더니 발길질로 나를 물 속에 처넣었다. 당신은 내 몸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막비강의 말을 곧이 들은 추명염왕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소면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노부가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가 만약 청구단서의 절학을 연성한다면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 노부는 그놈을 때려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막비강은 뻔히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여길 들어왔느냐?]

추명염왕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막비강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추명염왕은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그 어린 녀석이 알고 있지.]

[어린 녀석이라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지금은 도대체 몇 일이냐?]

[정월 보름날 아니면 정월 열엿새 아침일 것이다.]

추명염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그럼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다면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먹었느냐?]

막비강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히죽 웃었다.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추명염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들 못 먹겠느냐? 얼마 후 노부는 너도 잡아먹을 것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라고?]

추명염왕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웃었다.

[석 달 전 나이가 너와 비슷한 녀석이 소면호와 삼촌정, 그리고 노부를 데리고 네놈을 찾는다면서 이곳 우혈에 왔었다. 그런데 소면호가 방심한 노부와 삼촌정을 갑자기 공격하여 이 수직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물 속에 떨어져 죽음은 면했다.]

막비강은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 선배님도 이곳에 계시겠군요.]

그러자 추명염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이간질하려고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다고 그가 너를 구해 줄 것 같으냐? 사실대로 말해 주겠는데 그는 이미 내게 잡아먹혔다.]

막비강은 흠칫 놀랐으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노부가 너를 잡아먹을 때가 되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추명염왕은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세상이치다. 그러니 내가 몇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자는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한천이 있는데 시체를 그 한천에 담가 두면 상하지 않는다. 원래 한천에는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시체가 여러 구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걸 사이좋게 나누어 먹다가 나중엔 그 마저도 떨어지자 서로 다투게 되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삼촌정이 버릇없이 굴기에 노부는 그놈을 죽여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놈이 나타났구나.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 살려 두겠지만....]

막비강은 추명염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어라!]

추명염왕의 말을 듣던 막비강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일장을 격출했다. 그는 끔찍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이 일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 네놈이!]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감히 먼저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또한 그의 공력이 이렇게 심후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한 가운데 일장을 맞받아 냈다.

!

[커헉!]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명염왕은 우반신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받아랏!]

막비강은 일초가 성공하자 자신이 생겨 옥합을 바닥에 던져놓고 쌍장을 교차하여 쉴새없이 연달아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퍼펑!

추명염왕은 몇 장을 맞받아 낸 후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훨씬 심후함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호기가 격발하여 장력을 발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잠깐은 무슨 잠깐이냐? 나는 오늘 금릉 개방의 네 분 노개와 삼촌정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겠다.]

퍼펑!

막비강은 고함과 함께 쌍장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냈다.

[아이쿠!]

첨벙!

추명염왕은 연달아 몇 바퀴 곤두박질하더니 그대로 차가운 한천(寒泉)에 빠져 버렸다.

막비강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염왕이니 황천에 가야 마땅하다. 그래도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는 추명염왕이 밖으로 나올 것이 염려되어 한천 끝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의 추악한 시체는 수면에서 몇 바퀴 맴돌더니 천천히 물 속으로 잠겼다.

막비강은 자기가 십 성의 공력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추명염왕이 당해내지 못하고 한천에 빠져 죽자 의외였다. 추명염왕이 일장에 네 명의 노개를 격살했던 일로 미루어 자기의 무예는 이미 일류고수에 못지 않음을 알았다.

[잘 하면 지금 실력으로 막고천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자를 일장에 죽이는 것은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막비강은 비록 자신이 추명염왕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지만 천하오기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기 중의 누구라도 원수 막고천을 도우면 원수를 갚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는 청구절학을 연마한 후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옥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청구상인이 말한 양식이 있다는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한 쪽 벽에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석혈(石穴)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았다.

구멍 안쪽은 넓이가 여덟 자 가량 되는 자그마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이 석실에는 식량은커녕 돌 조각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밀실 한 곁에 우윳빛의 액체가 조금 고인 샘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청구상인이 말한 영천석유였다.

그러나 그것뿐, 석실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본래 여러 가지 약재를 알고 있는지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그 식량이란 것이....)

그는 즉시 한천의 맞은편 벽쪽으로 가서 야명주로 비춰 보았다. 과연 흙이 엉겨붙은 그곳에는 희세의 영약인 하수오(河首烏)가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 이런 희세의 영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니...!)

그는 청구상인이 말한 식량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곳에 나 있는 하수오들은 모두 수백 년 묵은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희세의 영약들인 것이다. 대충 양을 따져보니 일 년 동안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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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의부의 죽음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물러서는 것을 보며 우주도철은 광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부는 백년을 넘게 살았으나 자식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아이는 정사 양파의 무학을 지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노부와 뜻이 같으니 노부에게 양보해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우주도철도 사람 쟁탈전에 가담하려 하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는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후 우주도철을 향해 포권의 예를 올렸다.

[() 선배님께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면 이 아이의 홍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군요.]

남산의성의 그 마지막 말은 막비강에게 승낙하지 말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막비강은 악불령이 우주도철을 선배님이라 칭하자 얼른 다른 생각이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

[이 선배님과 호 선배님 모두 나를 양자로 삼으시려 하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선 먼저 실력을 겨루어 보십시오.]

백독서생 이량이 대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감히 이간책을 쓰려 하다니...!]

하지만 우주도철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으핫하하! 이것은 가장 현명한 방법인데 어찌 이간책이라 하느냐?]

백독서생 이량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푸르락붉으락하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너 따위 미친 진사(進士)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이어 왼손을 확 휘둘렀다.

쏴아아!

그러자 마치 연기 같은 독장(毒瘴)이 그의 소매 속에서 쏟아져 나와 우주도철을 덮어씌워 갔다.

중인들은 이량이 독을 쓰자 분분히 장내에서 멀어졌다. 그 독연기는 피부에 슬쩍 닿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드는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크! 이런 잔재주는 애들에게나 써먹어라!]

하지만 우주도철은 만면에 경멸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입김을 확 불었다.

콰아아아!

그러자 갑자기 한차례 광풍이 일어나 백독서생 이량의 독장을 모두 되날려 버렸다.

[대단하다!]

막비강이 우주도철의 신공에 경탄할 때, 백독서생 이량도 흠칫 놀라더니 곧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연달아 장력을 발출했다.

퍼퍼펑! 치치칙!

장풍이 난무하는 가운데 연무독장(煙霧毒瘴)도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아무렇게나 양팔을 휘젓자 백독서생 이량이 발출한 연무독장은 마치 무형의 담벼락에 부딪힌 것처럼 공중으로 상승했다. 그러다가 이내 모두 백독서생 이량의 머리 뒤로 떨어졌다.

백독서생은 흠칫 놀라다가 재차 독분을 날려 우주도철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두 절정고수의 대결을 보며 내심 곤혹을 금치 못했다.

(우주도철의 공은 백독서생보다 훨씬 고강한 것 같은데 왜 공세를 취하지 않을까?)

그는 우주도철이 여유 만만하게 상대방의 흉맹한 공세를 파해하는 것으로 보아 백독서생 이량을 죽이려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수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무림에서 보기 드문 격전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스팟!

[!]

막비강은 갑자기 뒤통수로 한 줄기 강맹무비한 경풍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동시에 우주도철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전광석화같이 일지를 퉁겼다.

[크아악!]

다음 순간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외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졌다. 막비강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소면호가 양다리를 허벅지에서 잘린 채 선혈을 샘물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우주도철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너 같은 피라미가 감히 노부 앞에서 기습을 가하다니. 만약 노부의 지난날 성격 같았으면 네놈은 뼈도 찾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소면호도 절정고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무공을 채 일초도 받아내지 못하자 구경하던 군호들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죽어 마땅한 영감 같으니...!)

막비강은 소면호가 자신을 암산하려 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소면호가 참변을 당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비록 그것이 음모가 숨겨진 가르침이었지만 어쨌든 소면호는 지난 이십여 일간 자신에게 무예를 전수해 준 정이 있지를 않은가?

해서 막비강은 급히 우주도철 앞으로 달려가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님에게 상세를 치료하는 약이 있습니까?]

우주도철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너는 저자를 살릴 생각이냐?]

[다리가 잘린 징벌만으로도 충분하니 목숨만은 살려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좋다. 너의 체면을 봐서 그에게 만령단(萬靈丹)을 한 알 주겠다.]

우주도철은 말을 끝낸 후 주머니 속에서 단약을 한 알 꺼내어 막비강에게 건네주며 사용 방법도 말해 주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의 착한 마음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군호들이 막비강이 소면호의 상세를 치료하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문득 한 명의 흑의노도(黑衣老道)가 영롱탑의 상층부에서 사뿐히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군호들의 후면에 도착했다. 그자는 바로 천하오대기인 중의 또 다른 한 명인 오봉도인이었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소면호의 치료를 끝냈다.

헌데 치료가 끝나는 순간 소면호는 갑자기 쌍장으로 땅바닥을 짚어 몸을 굴려 사도 인물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저 어린 녀석을 놓치지 마라! 저놈이 천면신룡이다!]

[뭐라고?]

[천면신룡이 저 애송이라고?]

장내는 삽시에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 되었다.

막비강은 신분을 간파당하는 순간 안색이 일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파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파 인물들도 자기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면호가 배은망덕하게 고함을 지르자 급히 몸을 솟구쳐 장권 밖으로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섰거라!]

갑자기 인영이 번쩍하더니 한 명의 흑의노도가 그의 면전을 막아섰다. 그와 함께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가슴을 향해 뻗어 왔다.

막비강은 본능적으로 일장을 격출하여 반탄력을 이용하여 옆으로 피하려 했다.

퍼펑!

[!]

하지만 상대방의 장력이 너무 강맹하여 막비강은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간신히 몸을 가눈 막비강은 상대방이 바로 천하오기 중 한 명인 오봉도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어 그는 급히 방향을 바꿔 사력을 다해 도주하려 했다.

[아이야, 겁먹을 것 없다!]

화라라락!

그때 말소리와 함께 우주도철이 날아와 막비강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어 그는 오봉도인을 바라보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 잡()도사야! 감히 노부의 양자를 괴롭히려 하다니....]

오봉도인도 음산한 눈을 빛내며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다른 사람은 너 늙은 도철을 무서워하겠지만 빈도는 안목에도 두지 않는다.]

[잡도사! 감히 노부에게 덤빌 생각이냐?]

[네가 무엇이 두려워 덤비지 못한단 말이냐?]

막비강은 강적에게 포위당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주도철에게 의지해야 무사히 빠져 나갈 희망이 있음을 알았다. 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불렀다.

[의부(義父)! 우리는 빨리 여길 떠납시다.]

그의 의부라는 말에 우주도철은 크게 기뻐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가 가지 않아도 이제는 아무도 감히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오봉도인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으핫하하! 늙은 도철아! 너무 큰소리치지 마라! 그 어린 녀석을 데려가려면 우선 빈도의 승낙부터 받아야 한다.]

우주도철은 백미를 치켜 올리며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지옥에 가고 싶다면 그건 매우 쉬운 일이다.]

오봉도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주위의 군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수고스럽지만 여러분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이때 우주도철도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내가 이 잡도사를 황천으로 보내 버릴 테니 뒤로 물러서거라.]

군호들은 천하오대기인에 속하는 두 인물이 싸움을 시작하면 치열하기 짝이 없을 것임을 알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비록 강적이 면전에 버티고 있지만 우주도철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오봉도인을 보며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잡도사! 노부는 네게 삼 초를 먼저 양보하겠다.]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눈에서 분노의 화염을 발산했다.

[늙은 도철아, 양보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는 노갈을 터뜨리며 일장을 격출했다.

콰르르르!

그의 이 일장은 보기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장경이 다가들자 광풍이 노도같이 휘몰아치고 주위 십 장 이내는 온통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찼다.

우주도철은 몸을 뽑아 올려 상대방의 머리 위를 뛰어넘더니 오 장 뒤에 내려선 후 웃으며 말했다.

[잡도사야, 너는 삼십 년간 열심히 공력을 연마했는데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구나.]

오봉도인은 우주도철이 머리 위로 뛰어넘는 것을 보고 재차 장력을 발출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신법이 너무 쾌속하여 격중되지 않았다. 그는 우주도철의 이런 행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팔을 휘둘렀다.

!

한 줄기 광염이 모래먼지를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게 하여 십여 장 밖에 서 있던 군호들의 의삼까지도 날려온 모래먼지에 맞아 무수한 구멍이 뚫렸다.

우주도철은 막 바닥에 내려섰을 때 오봉도인의 장경이 노도같이 휘말려 오자 할 수 없이 재차 몸을 뽑아 올려 강맹한 장풍을 발 밑으로 스쳐 가게 했다.

오봉도인은 교묘한 초식으로 상대방의 신법을 둔화시킨 후 즉시 절예를 전개하여 쌍장으로 쉴새없이 맹공을 가했다.

우주도철도 더 이상 상대방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공중으로 오르내리며 장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각도에서 발출했는데 이상한 것은 그가 발출하는 장력은 바람도 일지 않고 경력도 없어 오봉도인의 강맹한 강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고수는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누가 누군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막비강은 전신의 공력을 눈에 모아서야 간신히 두 사람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한편 기뻐하며 또 한편 내심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때 소면호가 갑자기 또 고함을 질렀다.

[누구든지 청구단서를 취득하려면 먼저 저 어린 녀석부터 생포하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독서생 이량 등 사파의 인물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막비강에게로 덮쳐 왔다.

[멈추시오!]

남산의성 악불령이 급히 고함을 지르며 분분히 장력을 발출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시키려 했다.

[낄낄낄....]

헌데 갑자기 음산한 괴소 소리와 함께 흑영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콰쾅!

[으악!]

[크아악!]

이어 몇 차례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군호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막비강을 포위 공격하던 사람 중 네 명이 상체가 박살이 나 죽어 있었다.

[으하하하! 내 아들은 노부가 데려간다!]

쏴아아!

막비강은 이미 우주도철에게 구출되어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서랏, 미친 늙은이야!]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한 채 우주도철을 추격했다.

오대기인 중의 두 고인은 삽시에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그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우주도철은 오봉도인이 틀림없이 추격해올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는 주로 울창한 수림과 계곡 등 적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장소만 골라 질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오봉도인을 떨쳐 버렸다.

어느덧 달이 서산으로 기울고 동녘에는 일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우주도철은 밤을 새워 질주했는지라 비록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이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만 쉬었다 가자!]

이윽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곧 자신이 어느덧 천대산(天臺山)에 도착했음을 알고 비로소 막비강을 내려놓고는 땀을 씻었다.

[노부는 가까스로 너를 구출했구나. 그러나 정사 양파의 인물들은 청구단서를 취득하기 위해 불원천리 여기까지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

우주도철의 안색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숙해졌다.

[노부는 천하를 수십 년간 종횡하여 이제 죽을 날도 머지 않았으니 청구단서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러니 너는 행여 내가 나쁜 마음을...!]

헌데 우주도철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낄낄낄...!]

갑자기 수림 속에서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하는 괴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그 웃음소리를 들은 우주도철은 안색이 일변했다.

[어서 받아라! 강적이 가까이 왔다!]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어 급히 막비강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가 저자와 싸움을 시작하면 너는 숲 속으로 숨어야 한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막비강도 사태의 엄중함을 깨달았다. 그는 보따리를 받아 품속에 넣으며 급히 물었다.

[의부께선 함께 가시면 안 됩니까?]

[저자는 나와 함께 천하오기 중에 드는 절정고수다. 평시였다면 두렵지 않지만...!]

우주도철은 말을 하다 말고 청색 인영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머금었다.

[귀화상(鬼和尙)!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막비강도 고개를 들어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대머리가 마치 거울처럼 번뜩이는 화상이었다. 몸은 마른 대나무같이 야위었으며 청색 승포를 입었는데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서 형형한 녹광(綠光)이 발산했다.

스스스!

[킬킬킬!]

그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면전에 도착했다. 그는 우주도철의 일 장 전면에서 걸음을 멈추고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은 현명한 사람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사실 빈승도 이 어린아이 때문에 찾아왔소.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직 상의할 여지가 있소.]

우주도철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귀화상! 당신은 무엇을 상의하려는지 말해 보시오.]

[빈승은 당신이 이 아이를 양자로 맞이했음을 알고 있으니 뺏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그러나 잠시 빌려주시오. 비급만 취득하면 곧 당신에게 돌려주겠소.]

[만약 노부가 빌려주지 않겠다면?]

[빈승의 말은 절대 신용이 있으니 빌려주지 않을 리 없지요.]

[미안하지만 노부는 빌려주지 못하겠소.]

[당신은 이 아이를 업고 밤새도록 달렸는데 빈승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소?]

그 사람의 이 말은 우주도철의 약점을 바로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도철은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인지라 쉽게 굴복할 리 만무했다.

[! 기껏해야 두 사람 모두 패하고 부상을 입을 것이오.]

[좋소. 정 그렇다면 빈승은 당신을 저승으로 먼저 보내 주겠소.]

[받아라!]

우주도철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함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꽈르르릉!

그는 비록 밤이 새도록 달렸지만 역시 오기 중의 인물은 비범하여 이 일장에 돌 조각이 날고 세찬 강풍이 일어났다.

귀화상은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삼 장 가량 미끄러져 우주도철의 강맹한 일장을 피한 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 노형의 일신의 음유(陰柔)한 무학이 강맹한 장세로 바꼈군. 이것은 여력이 다했다는 증거이니 빈승도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소.]

파앗!

그자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날려 막비강의 손목을 향해 잡아갔다.

막비강은 귀화상의 신법이 이렇게 쾌첩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서 인영이 번뜩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상대방에게 왼쪽 완맥을 붙잡혔음을 깨달았다.

퍼펑!

그러나 막비강은 진기를 한 모금 들이켜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다.

[놓아라!]

동시에 우주도철도 고함을 지르며 덮쳐 와 귀화상의 배심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

귀화상은 막비강의 의지가 이렇게 강한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앞가슴에 일장을 맞고 말았다. 또 우주도철의 일장이 배심을 향해 엄습해 오자 할 수 없이 몸을 솟구쳐 옆으로 피했다.

[! 함부로 날뛴 벌이다!]

우둑!

하지만 그자는 몸을 솟구치면서 막비강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고 그 바람에 막비강의 손목뼈가 그대로 빠졌다.

[아얏!]

콰당!

막비강은 격렬한 통증을 참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이 악랄한 땡추!]

우주도철은 대로하여 필생의 공력을 다해 공격을 가했다.

귀화상은 막비강을 끌며 싸우려니 행동하기가 불편했던지 막비강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살고 싶지 않다면 빈승은 살수를 펼쳐내는 도리밖에 없다.]

콰콰쾅!

우주도철은 상대방을 쫓아 버리고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맹공을 계속 가했다. 그리하여 오대기인 중의 두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생사존망의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에서 둥근 해가 떠오르고 아침 안개를 깨끗이 쓸어 갔다.

[! !]

[으음!]

천하오기의 두 고인은 기진맥진하여 강호의 일반 무사들보다 더욱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손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초식을 주고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비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왼쪽 손목에서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얏!]

그의 비명 소리에 혈전을 벌이던 두 고수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받아랏!]

[죽어랏!]

퍼펑!

두 사람 중 한 명은 막비강을 탈취하기 위하여, 다른 한 명은 막비강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서로 상반된 심리 상태에서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각각 여력을 다한 일장을 발출했다.

퍼펑!

[으아아악!]

[!]

우렁찬 폭음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개의 인영이 각자 뒤로 굴러 나갔다. 그중 하나는 그대로 뒤쪽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렸고 다른 하나는 막비강의 곁으로 굴러와 그의 몸에 부딪혀 비로소 멈추었다.

[와악!]

굴러온 인물은 검은 피를 한 모금 토하더니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의부!]

막비강은 통증을 참고 고개를 돌려보다가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으로 굴러온 사람은 바로 우주도철이었다.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진 자는 귀화상이었다.

막비강은 주위에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우주도철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맥박은 완전히 멎었으며 가슴을 만져보니 심맥(心脈)도 이미 끊어져 있었다.

[크흐흑! 의부! 저 때문에 돌아가시다니...!]

막비강은 우주도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비록 만난 지 반나절밖에 안 되었으나 우주도철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주었고, 결국 그를 지키기 위해 강적과 동귀어진한 것이다.

한동안 서럽게 울던 막비강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부상을 입고 도주한 것이 아닐까? 만약 상대방이 상세를 치료하고 되돌아온다면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눈물을 거두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손목뼈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빠진 것임을 알았다. 이에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골절을 원상대로 끼워 맞췄다.

그리고 땅을 파서 일대기인 우주도철의 시체를 매장한 후 공손히 절을 한 다음 수림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우주도철의 조그만 보따리 속에는 한 권의 연무비록(練武秘綠)과 몇 알의 만령환이 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백약에 정통한지라 만령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곧 독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성약(聖藥)임을 알고 한 알을 복용했다. 그러자 잠시 후 손목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상처가 치료되자 막비강은 연무비록을 펼쳐보았다.

우주도철의 연무비록에는 기공(氣功), 경공(勁功), 장공(掌功) 등 각가지 정묘한 절예가 기재되어 있었다. 도철식혼장(饕餮食魂掌), 우주일기공(宇宙一氣功), 일지참교룡(一指斬蛟龍)등의 절기는 하나 하나가 그 방면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든 빼어난 것들이다.

막비강이 이제껏 익힌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 남산의성등의 무공도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뛰어난 절기들이다. 하지만 우주도철의 무공을 접한 막비강은 염라철장 등의 무공이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과연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로구나!)

지금까지 익힌 무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기들은 막비강을 흠뻑 매료시켰다.

우주도철의 여러 무공들 중에서 막비강의 시선을 가장 잡아끈 것은 경신공부인 팔보간섬(八步間閃)이었다. 벼락 한 번 번쩍일 동안(間閃) 여덟 걸음(八步)을 간다는 이 경신술은 빠르고도 신묘했다. 막비강은 우주도철이 이 경신술로 같이 천하오기에 드는 오봉도인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던 일을 떠올렸다.

막비강은 비록을 한 차례 훑어보고 덮은 뒤 생각에 잠겼다.

(우주도철은 고귀한 생명을 희생해 가며 나를 구해 주었고 또 이런 절기들까지 남겼으니 그가 정파이든 사파이든 내게 베푼 은혜는 하해와 같다. 나는 기필코 그분의 피맺힌 원수를 갚고 말겠다.)

그는 귀화상이 이미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막비강은 다시 청구단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같이 고수가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경지하 강변에서 청구단서를 취득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비급이 숨겨진 곳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정월 대 보름날 밤이냐, 아니면 팔월 중추절 밤 삼경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중추절 삼경이라면 어젯밤에 많은 고수들이 경지하 물 속을 샅샅이 뒤졌을 테니 청구단서는 이미 어떤 고수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정월 대보름이라면 아직도 석 달이 남았으니 그동안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굴린 끝에 지금 경지하에 가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그는 근처 산 속에 한 채의 모옥(茅屋)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며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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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쟁탈전

 

 

 

[이놈아! 너는 누구냐?]

삼촌정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막비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추명염왕이 뒤따라 도착하며 고함을 질렀다.

[애송아! 너는 감히 막비강, 곡능천, 능곡천이 아니라고 말할 테냐?]

막비강은 그자가 단숨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자 내심 뜨끔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노인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못 알아듣겠소.]

뒤어어 도착한 소면호도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 수작 부리지 마라! 노부가 네놈의 몸을 수색해 보겠다!]

막비강은 한 걸음 물러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 몸에서 무엇을 수색하겠다는 거요?]

!

하지만 소면호는 대꾸하지 않고 지풍을 날려 막비강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수색하여 무협제원의 유물인 신녀비를 찾아냈다.

[교활한 놈! 이래도 시치미를 뗄 테냐! 이건 무협제원의 신녀비가 아니냐?]

소면호는 비수를 막비강의 목에 들이대었다. 그는 이미 막비강이 무협제원의 무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

소면호는 금방이라도 신녀비로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며 말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라니요?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소. 생사람 잡지말고 빨리 혈도나 풀어주시오! 그 단검은 허리춤에 붉은 빛이 도는 호로를 찬 내 또래의 소년이 준 것이오.]

막비강의 말에 마두들은 흠칫했다.

하지만 소면호는 끝내 의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 놈이 무엇 때문에 이런 절세보검을 네게 주었느냐?]

막비강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둘러댔다.

[그는 내게 우혈(牛穴)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소. 그래서 알려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그 단검을 내게 주었소.]

빈틈없는 막비강의 대답에 세 마두는 반신반의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의 말을 잠시 믿어주겠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놈이 보이지 않으면 네놈을 대신 우혈 속에 던져 버리겠다.]

삼촌정은 즉시 막비강을 옆구리에 끼고는 경신술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곧 경지하 변에 높이 솟아있는 절벽 앞에 이르렀다. 그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때때로 안쪽에서 소가 우는 듯한 괴성이 들려 우혈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막비강은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경지하 변에 우혈이란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다가 세 마두에게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과 세 마두가 우혈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만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어른을 속여? 네놈부터 먼저 죽이겠다.]

소면호는 우혈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살기 어린 노성을 질렀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다급히 말했다.

[당신들은 비급을 취득하러 왔다고 말했지 않소? 그럼 그 소년이 먼저 우혈 안으로 비급을 찾으러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추명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안을 살펴보자.]

삼촌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비강을 옆구리에 낀 채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그때 소면호가 삼촌정에게서 막비강을 낚아채며 말했다.

[난쟁아! 너는 몸집이 작아서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보기에 적합하다. 이놈은 내가 업고 뒤따라 들어가고 염왕을 내 뒤에서 보호하게 하자.]

삼촌정과 추명염왕은 소면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막비강도 속으로 탈출할 계획을 생각하며 소면호의 등에 업힌 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량 들어가자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 그와 함께 발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의 바닥을 이루는 바위의 아래쪽에는 지하수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의 수위가 변하며 간간이 소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는 것이다.

[... 큰일날 뻔했구나!]

문득 앞장서서 들어가던 삼촌정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동굴 바닥이 끝나며 수직 동굴이 나타난 때문이다. 자칫 했으면 삼촌정은 그대로 수직동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이 수직 동굴은 얼마나 깊은 지 알 수가 없다. 삼촌정이 품 속에서 천리화(千里火)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아래쪽을 비추어 보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직 동굴 아래쪽에서는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운 냉기(冷氣)가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든다.

길이 끊긴 것을 확인한 삼촌정은 고개를 홱 돌려 막비강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 여기 어디에 사람이 있느냐? 이 수직갱 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너무 깊어 일단 뛰어내려가면 올라올 수도 없다. 설마 막비강이란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단 말이냐?]

하지만 막비강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나라도 절세비급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을 거요.]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 !

[으악!]

[고금! 네놈이... 으아아아!]

갑자기 두 차례 둔탁한 폭음이 일어나고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풍덩! 풍덩!

그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대로 수직갱 아래의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어둠 속에서 소면호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희 두 노적은 비급 때문에 지금까지 나와 다투었지만 이제는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과 다투어라!]

수직갱 속으로 추락한 것은 바로 추명염왕과 삼촌정이었다. 소면호가 방심하고 있는 그들을 장력으로 급습하여 수직갱에 밀어버린 것이다.

막비강은 짐짓 겁에 질린 척하며 벌벌 떨었다.

[... 살려 주세요!]

[흐흐흐! 어린 녀석아, 무서워할 것 없다.]

소면호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노적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넌 죽이지 않을 테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바른 대로 말해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막비강이 시치미를 떼었으나 소면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앞에선 어리석은 수작 부리지 마라. 끝까지 곡능천이 아니라고 고집부린다면 네놈도 저 속에 던져 버리겠다.]

[난 오진강(吳振綱)이라는 소흥부 사람입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데려가 물어 보면 알게 될 텐데 왜 나를 곡능천이라 하는 거요?]

[주둥아리 닥쳐라!]

소면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외쳤다.

[아무리 교활해도 사람에겐 실수가 있는 법이다. 그저 길을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절세보검을 기증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리고 노부는 네놈의 허리띠가 원래의 그 허리띠임을 알아보았다. 설마 곡능천이 허리띠까지 네게 주진 않았겠지?]

막비강은 더 이상 시치미를 떼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자신이 천면신룡 곡능천임을 인정했다.

[확실히 당신은 죽은 두 인간보다 세심하군. 이렇게 잡혔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경지하로 돌아가자.]

소면호는 막비강을 달래기 위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만약 청구단서를 얻게 되면 노부는 청구상인의 무공과 노부의 일신 절예를 모두 네게 전수하여 제자로 삼아주겠다.]

그자의 말에 막비강은 속으로 냉소했다.

(! 만약 네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나는 그 무공으로 네놈부터 없애버리겠다.)

막비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면호가 또 웃으며 물었다.

[! 그러니 어서 말해봐라. 네가 파손한 석벽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었느냐?]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한 수의 시구가 새겨져 있었소.]

막비강은 이어 시구를 읽어 주었다. 하지만 다른 구절은 석벽에 새겨진 대로 말해 주었으나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라는 구절은 가득 찬 달밤 삼경에 북두(北斗)의 손잡이가 이동하여로 고쳐 말했다.

소면호는 막비강이 말한 시구를 한 동안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구는 과연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리는 관건이구나.]

[그렇소. 이 시구의 뜻으로 보아 달 밝은 밤에 경지하 강변에 가면 틀림없이 청구단서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오.]

소면호는 막비강이 시원하게 비급의 행방을 말하자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보니 너는 정말 총명하고 시세를 아는 아이구나. 노부는 설사 그 비급을 찾지 못한다 해도 노부의 절기를 모두 네게 전수해 주겠다.]

[아직 비급도 찾지 못했고 또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절기를 전수받은 후 노부를 기억해주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럼 우리 그만 영롱탑 근처로 가서 삼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막비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군요. 그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보름 달밤이라야 하며 그것도 팔월 중추절 밤의 삼경을 가리키는 것일 거요. 오늘은 스무날이니 앞으로 스무닷새가 더 지나야만 보름달이 옵니다.]

소면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막비강의 총명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소년의 계략에 걸려들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께닫지 못했다.

 

* * *

 

이십오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어느덧 둥글게 찬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대지는 은가루를 뿌려 대낮같이 밝았다.

막비강은 지난 이십오 일간 소면호를 따라다니며 많은 무학비결을 배웠다.

그리고 이날 소면호와 함께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강변에 이르렀다.

[와아!]

[크아아악!]

챙채앵! 퍼퍼펑!

하지만 이 무렵 경지하 강변에는 무수한 인영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죽고 죽이며 토해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내심 조소를 머금는 동시애 우려를 금치 못했다.

(저들도 청구단서 때문에 여기에 온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 시간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면호도 내심 의혹을 금치 못하고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그들도 대석비곡에 가서 그 석벽의 글자를 본 것이 아니냐?]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석벽의 글들을 긁어내긴 했지만 글이 적혀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만일 공력이 심후한 자라면 원래의 글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면호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지워진 시구를 다시 판독했다 해도 저자들 역시 나처럼 그 안의 뜻을 절반밖에는 풀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반만 풀이했다면 이렇게 공교롭게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막비강은 이렇게 대꾸한 후 영롱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영롱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귀화가 나타난다는 장몽아의 말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무림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남산의성 악불령 등 막비강도 눈에 익은 무림 고수들이 끼여 있었다.

하지만 오봉도인과 조씨부인 일가, 그리고 날수선랑 조손(祖孫)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수선랑과 조씨부인 일가는 집안에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다 하더라도 오봉도인은 대석비곡까지 왔었는데 비급 탈취 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악() 노인과 먼저 고하를 가늠하고 싶소.]

그때 많은 인파 중에서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 외치며 걸어나왔다. 그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반면 두 눈에서는 새파란 남광이 번뜩여 사이하고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저자가 육요(六妖)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李良)이다!]

소면호가 설명해 주었다.

(백독서생 이량!)

막비강도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유심히 그자를 지켜보았다.

별호 그대로 백가지 극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백독서생 이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용독(用毒)의 천하제일인이다. 그 때문에 어떤 고수라도 백독서생 이량을 상대하길 꺼려한다.

[하하하! 그동안 이 서생의 용독술이 제법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니...!]

군중들 속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약초 캐는 호미를 든 노인이 중인들을 헤치고 나갔다. 이 노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이었다. 백독서생 이량이 용독으로 천하제일이라면 남산의성 악불령을 용약(用藥)으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단났구나! 천오주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저분은 무엇으로 백독서생을 대항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대신 나가 백독서생을 상대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막비강이 숨어 있던 수풀에서 나가려 하자 소면호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끌어안았다.

[너는 왜 이렇게 마음이 착하냐? 우린 그들이 서로 싸워 죽을 때를 기다렸다 나가서 뒷수습만 하면 된다.]

[안 됩니다. 악 노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꼭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너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소면호와 함께 이십여 일을 같이 생활하며 상대방의 절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비열한 행위와 독랄한 마음을 보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반감이 더했다.

[가지 말라면 가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면호로 하여금 팔을 놓게 했다.

[이얏!]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풀 숲에서 날아 나갔다.

[이놈이...! 거기 서지 못해?]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뒤따라 몸을 솟구쳐 추격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어 근 일 갑자의 공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먼저 몸을 날렸다. 그 때문에 소면호의 경공신법이 아무리 쾌첩하다 해도 단번에 그를 추격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남산의성 악불령과 백독서생 이량은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 막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들리는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의 인영이 비조(飛鳥)처럼 날아오고 그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남산의성 악불령은 전면의 인영이 전개하는 신법에서 반년 전에 만났던 소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걱정 마라, 아이야!]

그는 급히 달려가 막비강을 맞이한 다음 소면호에게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왜 어린 후배를 괴롭히는 거요?]

[비켜라!]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상대방의 장풍이 강맹함을 느끼고 황급히 일장을 맞받아 냈다.

!

그러나 이 무렵 소면호는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는지라 남산의성 악불령은 팔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누군가 했더니 고명이 쟁쟁하신 소면호 고 노인이셨군!]

악불령은 몸을 가눈 다음에야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즉시 오른손의 뇌강서로 둥근 흑광을 형성하여 질풍처럼 덮쳐 갔다.

소면호는 자기의 무예가 상대방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음을 알고 처음부터 전신의 공력을 발출했었다. 헌데 상대방이 병기를 휘두르며 덮쳐 오자 더욱 두려움을 금치 못하고 급히 쌍구검(雙鉤劍)을 뽑아 평생의 절학을 다해 악불령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백독서생 이량 앞에 도착하여 포권의 예를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 선배님의 독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후배 오진강이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장내의 군중은 그의 그 같은 행위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대개가 강호에서 위명을 떨친 고수들이지만 백독서생 이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헌데 갑자기 약관도 안된 어린 소년이 백독서생 이량에게 도전한 것이다.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막비강의 안위를 걱정했다.

백독서생 이량은 자기 소개를 하고 나온 자가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소년임을 보고 실소했다.

[애송아! 너의 담량은 대단하구나. 너는 누구의 자제이며 사부는 누구냐?]

[후배에겐 사부도 없고 부친도 없습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이냐? 사부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부친이 없다면 너는 어디서 났단 말이냐?]

[물론 부친이야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자신도 내 부친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친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전할 필요 없이 노부를 사부로 모셔라. 그럼 네게 독문(毒門)의 용독학(用毒學)을 전수해 주겠다.]

[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잔재주 따위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독공이 잔재주라는 막비강의 말에 백독서생 이량의 눈에서 한 줄기 살기가 발산되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글쎄, 그게 쉽게 될지 의심스럽군요.]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량에게 도전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뇌강서로 강맹한 일초를 공격한 다음 소면호를 버려 둔 채 질풍처럼 날아왔다.

[얘야,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는 이어 백독서생 이량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기명제자(記名弟子).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니 실례가 있었더라도 이해하시오!]

백독서생 이량은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은 사부도 부친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당신의 기명제자라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그는 노부의 기명제자이기도 하오.]

소면호가 뒤따라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저 아이가 남산의성의 제자이며 또 소면호의 제자라고?]

장내의 군웅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정사(正邪) 양파의 무학을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너무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뿐 아니라 백독서생 이량 등도 어리둥절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자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등 세 사람의 무공을 배웠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다시 소면호의 무공을 배운 것에 대해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고 노인,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추켜세우지 마라. 설령 당신이 저 아이에게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해도 기명제자라곤 말할 수 없다.]

소면호가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를 너의 기명제자라 말하느냐?]

[그가 나의 독문의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독문무학을 배웠다.]

백독서생 이량이 옆에서 웃으며 참견을 했다.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투지 마시오. 이 아이가 내게 도전해 왔으니 나는 그를 양자로 삼아야겠소.]

[핫하하하!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비급 쟁탈전이 이제 사람의 쟁탈전으로 변하다니...!]

문득 허공에서 누군가의 가가대소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화라라라!

처음 웃음소리는 분명 수마장 밖에서 들려 왔는데 다음 순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실로 대단한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쿠쿵쿵!

지축을 흔들며 날아 내린 인물은 한 명 산발한 노인이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산발을 했고, 얼굴의 절반은 지전분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다 낡아 해진 관복이었는데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아 때로 찌든 커다란 발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미친 사람 형상의 노인이 나타나자 중인들은 안색이 변해서 급히 사방으로 물러섰다.

[우주도철(宇宙饕餮)! 우주도철이다!]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우주도철!

 

그렇다. 그 광인이야말로 전대의 최절정고수들인 천하오대기인 중의 우주도철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벼슬을 했던 적도 있어 늘 낡은 관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도철(饕餮)이란 본래 탐욕스럽고 광폭하여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의 괴물이다.

별호에 그 도철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 인물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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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머니를 닮은 여인

 

 

 

오봉도인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켰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이 어린 녀석에게 물어 보시오.]

오봉도인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빈도더러 어린아이에게 물어 보라는 거요?]

삼촌정이 옆에서 급히 말을 받았다.

[곽 형의 말이 옳소. 도장은 저 어린 녀석에게 물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오.]

[좋소. 그럼 빈도는 오늘 파격적인 일을 한 가지 하겠소.]

오봉도인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막비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빈도와 인연이 많을 것 같구나. 도대체 무슨 일로 그들과 이런 싸움을 하느냐?]

막비강은 겉으로는 청수하게 보이는 이 노도사의 무서운 내력을 모르는지라 솔직히 대답했다.

[이 노적들이 제게 청구단서의 행방을 알려 달라기에 이곳의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는데도 믿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저 분 할머니와 개방 사람들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오봉도인은 무엇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년 남짓 사이에 각처의 큰 비석이 모두 파헤쳐져 있기에 빈도는 여기의 큰 비석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내 추측이 맞았구나. 그래, 청구단서는 찾아냈느냐?]

추명염왕이 냉랭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비급이 비석 밑에 있었다면 우리가 벌써 꺼냈지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 같소?]

[그럼 비급은 지금 어디 있소?]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에게 있소.]

막비강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노마는 무슨 근거로 비급이 내 몸에 있다고 하는 거냐?]

추명염왕은 징그럽게 웃었다.

[노부는 네 놈이 석벽의 조각을 파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만약 그 가운데 비밀이 없었다면 넌 왜 그 조각을 파손시켰느냐?]

오봉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렇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툴 필요 없소. 비급이 이 비석 밑에 없으면 개방과는 무관하니 이 아이를 빈도가....]

추명염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받았다.

[당신은 이 어린 녀석을 데려갈 생각이오?]

[? 염왕은 내 행동을 제지할 작정이오?]

추명염왕은 소면호와 삼촌정에게 눈짓을 하더니 오봉도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셋이 한꺼번에 오봉도인을 상대할 속셈인 것이다.

오봉도인은 빙긋이 웃으며 막비강에게 말했다.

[너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거라. 빈도는 그들을 수습한 다음 너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겠다.]

이때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 고금의 일장부터 먼저 받아랏!]

!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격출되었다.

오봉도인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막비강을 붙잡고 옆으로 슬쩍 피했다.

하지만 삼촌정이 구르듯이 추격하며 일장을 뻗어냈고 추명염왕과 소면호도 옆에서 각각 협공을 가했다.

오봉도인은 얼굴을 굳히더니 소매 속에서 우선(羽扇)을 꺼내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스스스!

그러자 세 명의 절정고수가 격출한 장풍은 거짓말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침착한 태도와 오묘한 초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오 장 뒤로 물러선 후 내심 몹시 흠모했다.

(만약 이분 노도를 사부로 모신다면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탈한 막가 악적을 충분히 죽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날수선랑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어 막비강의 귓전으로 모깃소리 같은 작은 음성이 전해졌다.

[아이야, 빨리 여길 떠나라! 저 도인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막비강은 내심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이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오봉도인의 청수한 겉모습에 그대로 속아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비강은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오봉도인을 응원했다.

[하하하! 정말 오묘한 초식이십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봉도인을 치켜 올렸다.

파앗!

그러다가 쌍방의 격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벼락같이 몸을 솟구쳤다.

[어엇! 저 애송이가!]

[거기 서랏!]

네 명의 마두가 실색했을 때 이미 막비강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기지를 발휘하여 마두들의 추격을 따돌린 막비강은 곧 역용환으로 용모와 옷차림을 바꾼 후 소흥부(紹興府)로 향했다.

금릉에서 소흥부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무림인이라면 경신술을 펼쳐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막비강은 무려 닷새나 걸려 겨우 소흥부에 도착했다. 혹시나 마두들에게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봐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 때문이다.

덕분에 막비강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소흥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흥부에 도착한 막비강은 길을 물어 약야계(約野溪) 부근의 경지하를 찾아갔다.

경지하를 찾아간 막비강은 높직한 강변 언덕 위에 한 채의 칠층보탑(七層寶塔)이 보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칠층보탑이 있는 강변의 풍경이 대석비곡의 석실에서 본 산수화 조각과 완전히 일치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탑이 바로 영롱탑이겠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드디어 난 청구단서가 있는 곳을 찾아냈구나!)

헌데 그가 흥분하여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보탑에서 밤이면 빛을 흘리는 게 요정(妖精)일까요 요귀(妖鬼)일까요?]

돌연 어디선가 은방울 소리 같은 소녀의 음성이 전해 왔다.

[세상에 요귀가 어디 있느냐? 그건 다 무림인들이 양민들로 하여금 겁을 먹고 접급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두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닐까?)

막비강은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강변에 자리한 초가집의 대나무 울타리 뒤에 두 개의 크고 작은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녀(母女)로 보이는 두 여인은 영롱탑을 응시하느라 막비강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두 여자가 다 눈에 익잖은가?)

막비강은 두 모녀의 옆얼굴을 보며 갸웃했다.

모녀 중 딸 쪽은 열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이는데 바로 대석비곡에서 자신을 도와 준 연아란 소녀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다만 다른 점은 연아가 활달한 편에 비해 이 소녀는 새침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어머니를 닮았다!)

그리고 모녀 중 어머니 쪽을 본 막비강은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여인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와 판에 박은 듯 흡사했던 것이다.

다만 이 여인은 농사일을 하는 탓인지 피부가 좀 검다. 그리고 날씬한 한경파와 달리 상당히 살이 쪄서 풍만해 보이는 점이 차이일 뿐이었다.

또 하나 다른 점이라면 막비강의 생모 한경파가 늘 어둡고 쌀쌀맞은 표정인데 반해 이 여인은 아주 푸근하고 자애스러운 표정을 지니고 있다.

여인은 막비강이 진정으로 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여인이 어머니라면 자신의 어리광이나 투정도 다 받아줄 것만 같다.

막비강은 한동안 망연자실해서 생모를 닮은 그 촌부(村婦)를 바라보다가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넓은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인가?)

막비강은 고소를 지으며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가 막 대나무 울타리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사람이 영롱탑 쪽으로 가고 있어요. 혹시 저 사람도 요귀들의 일당이 아닐까요?]

소녀가 막비강을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다. 남의 집 귀한 도련님을 요귀의 일당이라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는 소녀를 꾸짖더니 곧 막비강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너는 이 일대에 밤만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못 들었느냐?]

막비강은 웃으며 포권을 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소흥부에 처음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한 줄 몰랐습니다.]

[!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어린 네가 혼자 나돌아다니면 집안어른들께서 걱정하지 않느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막비강은 본명이나 곡능천이라는 새 이름을 말하기 뭣해 대충 둘러대었다.

[저의 성은 능()가고 이름은 곡천(曲天)이라 합니다.]

그러자 소녀가 코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 당신은 왜 곡능천이라고 하지 않죠?]

막비강은 잠시 당황하다가 말을 이었다.

[부모가 주신 성을 어떻게 마음대로 고칠 수 있소?]

소녀가 또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성은 고칠 수 없다고요? 그럼 왜 고쳤다가 또 고치곤 하세요?]

[내 이름은 진짜 능곡천이오. 낭자에게 이름을 속일 필요가 뭐 있소?]

자애로운 인상의 촌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얘야, 우릴 속일 필요 없다. 너의 본명은 막비강이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곡능천이라고 개명했다가 금릉에서 다시 능곡천로 고치고....]

소녀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다음에 만나면 천능곡(天凌曲)이라고 바꿀 거예요.]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면전의 이 촌부의 얼굴이 생모를 빼닮은 탓에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촌부는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너의 정체는 이미 천면신룡(千面神龍)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이름만 바꿔서는 남의 눈을 속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천면신룡이란 별호가 붙었구나!)

막비강은 비로소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음을 알았다.

천면신룡이라는 별호는 제법 마음에 든 막비강은 웃으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누구신데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십니까?]

[내 성은 조()가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로 장몽아(張夢兒)라 한단다. 이 아이에게 장연아(張燕兒)라는 말괄량이 동생이 있는데 너는 이미 만나 보았을 것이다.]

막비강은 그제서야 내막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날수선랑 송 할머니께서 아주머니께 말씀해 주셨군요. 어쩐지 금릉에서 고친 이름까지 아주머니께서 알고 계시더라니....]

[네가 여기 온 건 비급을 찾는 일과 관련이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많은 무림인들이 이 근처에 출몰하고 저 낡아빠진 탑에서는 밤마다 불빛이 흘러나오더구나.]

막비강은 무림인들이 출몰한다는 조씨부인의 말을 듣고 안색이 일변했다.

[아주머니, 어떤 인물들이 이곳에 찾아왔습니까?]

조씨부인은 칠층보탑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얘기를 나누자.]

조씨부인은 사립문을 열고 막비강을 맞아들였다.

 

조씨부인의 집은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여덟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비록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가지만 뒤로는 악야계의 그림같은 봉우리들을 등지고 있고 앞쪽에는 천하절경인 경지하가 흐르고 있어 빼어난 운치를 풍겼다.

막비강이 조씨부인의 안내를 받아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집 뒤에서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말한 그 바보가 왔으니 어서들 나가 봐라!]

이어 세 명의 소동들이 왁자하니 뛰어나왔다.

일곱 살에서 열 두어살까지인 이 개구쟁이들은 장연아와 장몽아를 닮아서 그녀들의 친 동생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막비강은 아이들에 둘러 쌓인 채 집 뒤쪽을 보며 웃었다.

[내가 바보라고 해둡시다. 헌데 낭자는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소?]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거라구요!]

집 뒤에서 장연아가 웃으며 나왔다. 새침 떠는 언니 장몽아와 달리 이 말괄량이의 얼굴에서는 생글생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지자 마두들은 싸움을 멈추고 당신을 추격해 갔어요. 우리도 즉시 따라가려고 했는데 범개선이 할머니에게 당신이 경지하로 갈 거라 말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이리로 달려왔지요. 우연인지 당신이 찾아온 곳이 우리 집 근처였지 뭐예요.]

장연아가 말하는데 조씨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거라.]

막비강이 세 모녀를 따라 대청에 들어가니 십여 명의 남녀노소가 앉아 있었다.

날수선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칠순 가량의 노부인이 일가친척으로 보이는 어른들에 둘러 쌓여 앉아있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에게 그들을 차례로 소개시켜 주었다.

막비강의 어머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 조씨부인은 막비강이 생각했던 대로 날수선랑의 딸이었다.

, 장씨 집안과 날수선랑은 사돈간인 것이다.

장씨 집안은 지금은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한 때 표국을 운영했던 무가(武家).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張大日)이 표행을 나갔다가 흑도의 흉사들과 시비가 붙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사고로 장씨 일족은 표국을 그만 두었고 장대일은 얼마 안 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즉 조씨부인은 현재 과부(寡婦)인 것이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보다 한 살이 아래인 마흔 두살이다.

하지만 결혼은 한경파보다도 먼저 했다.

조씨부인은 불과 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 장대일과 금슬이 아주 좋아서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다.

장연아 장몽아 자매 위로도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은 장성대(張成大)라고 하며 벌써 스물 여섯 살이나 되었다. 조씨부인은 첫 아들을 겨우 열일곱살에 낳은 것이다.

둘째 아들 장성일(張成日)도 막비강보다 세살이 많은 스물 두 살이다.

두 아들은 이미 장성하여 집안일을 이끌어 가고 있다.

듬직한 두 아들을 낳은 후에도 조씨부인은 꾸준히 아이들을 가져서 이남삼녀를 더 낳았다.

장몽아, 장연아를 연년생으로 낳고 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것이다.

막내딸인 장상아(張翔娥)는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이 변을 당했을 무렵 아직 그녀의 뱃속에 있었다.

[엄마! 젖줘!]

올해 네 살인 이 귀여운 소녀는 사람들이 보는 중에도 자꾸만 엄마의 품에 파고 들어 젖을 찾는다. 전형적인 막내딸인 장상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

조씨부인은 손님인 막비강이 있는 자리건만 별 거리낌 없이 저고리 고름을 풀어 가슴을 들어내고는 막내딸에게 젖을 물려주었다.

물론 젖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도 장상아는 맛있다는 듯 엄마 젖을 빨며 한 손으로는 엄마의 다른 젖을 쥐고 조물락거린다. 아마도 아버지가 없이 자란 응석을 이런 식으로 부리는 모양이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얼굴과 달리 조씨부인의 젖가슴은 너무도 희고 곱다. 갓 쪄낸 백설기같이 하얀 그녀의 젖가슴은 또 아주 풍만하고 탐스럽다.

큼직한 수박만한 살덩이 두 개가 거친 삼베 저고리 사이에서 털렁 드러나 출렁거린다.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또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젖을 먹여 키운 탓인지 조씨부인의 유방은 좀 늘어진 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탄력과 묵직한 중량감을 지녀 보기에 좋다.

막비강은 막내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 한경파가 너무 쌀쌀맞은 탓에 막비강은 일찍 젖을 떼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모성, 특히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자애스러운 표정으로 막내 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은 막비강이 늘 꿈꿔오던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딸에게 젖을 물리던 조씨부인은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이 딸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넋을 놓고 보는 막비강과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굳이 자기 젖가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막비강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을 전부 소개받았다.

장신을 차린 막비강도 자신이 혈검산장을 뛰쳐나온 사정을 실토했다. 어머니를 닮은 조씨부인때문인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이 남같게 느껴지지 않은 때문이다.

[가엾기도 하지! 이젠 그만 고생하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구나.]

조씨부인에게 시어머니 되는 노파가 막비강의 손을 꼭 쥐며 인자하게 말했다.

막비강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푸근한 가족의 정을 느낀 때문이다.

[할머니! 말씀은 고맙지만...!]

헌데 막비강이 막 대답하려 할 때였다.

[우우우!]

돌연 멀리서 날카로운 여자의 장소성이 전해 왔다.

그 장소성을 들은 장씨 일족 어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돈어른이 또 그 마두들을 만난 모양이구나.]

조씨부인의 시어머니가 급히 지팡이를 들고 일어서려 했다. 비록 칠순은 넘었지만 젊은 사람처럼 정정한 것으로 보아 이 노파 역시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로 보인다.

하지만 막비강이 얼른 노파를 막았다.

[할머니께선 여기 계십시오. 마두들은 제가 다른 곳으로 유인하겠습니다.]

장연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막비강은 얼굴을 굳히며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나와 함께 나가면 이 집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오.]

막비강의 말에 장연아는 입술만 삐쭉일 뿐 더 이상 우기지는 않았다.

[대신 이걸 좀 맡아주시오!]

막비강은 호로와 강장을 장연아에게 맡겨 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장씨 일족의 집을 나선 막비강은 외침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 그의 눈에 추명염왕, 삼촌정, 그리고 소면호 등이 날수선랑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핫하하하!]

막비강은 마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소리로 광소를 터뜨리며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 저놈이 그놈이다!]

삼촌정은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날수선랑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는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거기 서랏!]

추명염왕과 소면호는 삼촌정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먼저 알 것이 염려되어 다투어 삼촌정의 뒤를 쫓았다.

날수선랑도 마두들을 유인해간 소년이 누군지 궁금하여 황급히 마두들을 추격했다.

 

막비강은 비록 일 갑자 가까운 내공을 심후한 지녔지만 이제까지 전심전력으로 무예를 연마할 시간이 없었다. 자연히 추명염왕같은 절정고수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십여리를 달렸을 때 마두들은 막비강의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따라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지만 막비강은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어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들은 왜 나를 쫓아오는 거요?]

막비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추명염왕등을 돌아보며 물었다.

삼촌정이 맨 먼저 도착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서있는 소년의 얼굴은 처음 보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막비강이 역용환을 이용하여 얼굴을 바꾼 것을 알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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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원의 손길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적수공권으로 다섯 명의 노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을 보고 무공이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강장을 손에 끼고 발출하는 공세에 거의 일 갑자의 공력이 함유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흠칫 놀라며 급히 마주 일장을 뻗어냈다.

!

한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고 추명염왕은 몸을 약간 휘청했지만 막비강은 연달아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또 한 번 받아 봐라!]

그러나 막비강은 재차 여력을 돋우어 재차 일장을 발출했다.

추명염왕은 먼지가 자욱하여 상대방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갑자기 또 한 줄기 강맹한 경기가 엄습해 오자 내심 깜짝 놀라며 급히 쌍장을 휘두르고 비석 뒤로 피했다.

헌데 그가 막 두 개의 크지 않은 비석으로 형성된 협도(夾道)까지 물러나갔을 때였다.

[차앗! 받아랏!]

돌연 머리 위에서 차가운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예리한 강풍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예의 소녀가 발사한 단전이었다.

[요 망할 계집년이...!]

추명염왕은 대로하여 어깨를 비틀어 단전을 피한 후 쏜살같이 몸을 솟구쳐 큰 비석 위에 내려섰다.

이때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작은 비석 뒤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콰르릉!

추명염왕은 부리나케 추격하여 노성과 함께 장력을 격출했다.

그러나 그 조그만 인영은 몹시 영활하여 경기가 엄습해 오자 허리를 비틀어 비석에 몸을 바짝 붙이며 손목을 뒤집어 한 줄기 경풍을 뻗어냈다.

추명염왕은 이 일장이 반드시 격중되리라 믿었었다. 헌데 의외로 소녀가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몸을 석벽에 붙이며 반격을 가하자 오히려 추명염왕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어쩔 수 없이 한바퀴 곤두박질을 하여 오 장 밖으로 날아 나갔다.

추명염왕은 본래 성격이 흉악한데다 연달아 기습까지 받자 더욱 화가 치밀어 만면에 짙은 살기를 가득 머금었다.

하지만 그가 바닥에 내려선 후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어린 계집년이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비석 모퉁이에 조그만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덮쳐 갔다.

꽈르릉!

그러나 그자가 미처 비석 모퉁이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엄습해 왔다. 추명염왕은 깜짝 놀라 허리를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그는 비석 모퉁이에서 기습을 가한 사람이 막비강임을 보고 괴소를 터뜨리며 재빨리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너는 그래도 비급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말하지 않겠느냐?]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추명염왕은 그를 일장에 격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아내야 하는지라 눈에서 흉망을 발산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이놈아! 솔직히 내가 일장을 때리면 네놈은 뼈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한다면 나는 너를 제자로 맞이하여...!]

헌데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킬킬, 헛소리 마라! 곽가야!]

돌연 한소리 음침한 일갈과 함께 막비강의 몸이 선 자세에서 갑자기 뒤로 확 끌려갔다. 어느 틈엔지 난쟁이 삼촌정이 나타나 막비강을 낚아챈 것이다.

[이 난쟁이놈이...!]

추명염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급히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달아나는 난쟁이를 추격했다.

 

삼촌정은 비록 무예가 고절하지만 옆구리에 사람을 끼고 있는지라 곡구까지 나와선 곧 추명염왕에게 추격 당했다.

삼촌정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가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나는 이 어린 녀석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추명염왕은 어리둥절하더니 곧 뒤따라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면 누구도 비급을 얻지 못하게 되겠지.]

바로 그때였다.

[으핫하하! 이 교활한 늙은이들 같으니! 너희들은 나를 그 할망구와 싸우게 하고는 여기 와서 어린 녀석을 붙잡아 보물의 행방을 추궁하고 있구나!]

거석 위에서 우렁찬 광소 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비급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 소문에 의하면 청구단서는 상, , 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니 우리 세 사람이 각각 한 권씩 나누어 가지자.]

추명염왕은 혼자 삼킬 수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이다. 난쟁아, 너는 우선 그 어린 녀석의 혈도를 풀어 주어라! 그래야만 비급의 행방을 물을 수 있을 게 아니냐.]

[알았다.]

삼촌정이 막비강의 허리 부위를 살짝 꼬집었다.

[죽엇!]

헌데 막비강은 혈도가 풀리기 무섭게 오른손에 낀 강장으로 삼촌정의 가슴을 공격했다. 동시에 왼손의 신녀비로는 추명염왕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삼촌정은 연마혈(軟痲穴)이 찍힌 상태에서 막비강이 반항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억!]

퍼펑!

쌍방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또 갑작스럽게 발생한 변고인지라 삼촌정은 막비강의 일장에 왼쪽 옆구리를 격중당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추명염왕도 막비강이 일초이식(一招二式)으로 자기를 공격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한광이 번뜩하는 것을 보고서야 급히 뒤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미 신녀비 끝이 스쳐 장포 자락이 찢어졌을 뿐 아니라 허리띠까지 끊어져 급히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한 후 흘러내린 바지춤을 끌어올렸다.

화라라락!

막비강은 일초를 성공하자 수중의 신녀비로 검화를 형성한 채 급히 도주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핫하하하. 어린 녀석아, 도망칠 필요 없다.]

회색 인영이 번뜩하더니 한 노인이 막비강의 면전에 도착하여 일장을 격출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막비강은 부득불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너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하면 노부는 책임지고 널 보호해 주겠다.]

소면호의 말에 막비강은 화가 치밀어 노성을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어 신녀비를 휘두르며 앞으로 덮쳐 나갔다.

[낄낄낄!]

소면호는 괴소를 터뜨리더니 눈에서 짙은 살염을 발산하며 번개같이 일장을 반격했다.

막비강은 상대방의 징그러운 표정에서 살수를 펼쳐내려는 것을 알고 급히 강장을 마주 뻗어냈다. 그러나 그가 강장으로 내친 기운을 뚫고 여전히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엄습해 왔다.

(이제 끝장이구나.)

막비강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소면호의 일장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의 표정이 되었다. 바로 그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꽈르릉!

돌연 옆에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나와 막비강을 일 장 밖으로 날려보냈다.

[고 영감, 너는 우리 일을 방해할 생각이냐?]

막비강이 막 몸을 가누었을 때 뒤에서 우렁찬 음향과 삼촌정의 음성이 전해 왔다. 난쟁이 삼촌정이 소면호를 급습한 것이었다.

난쟁이의 외침을 들으며 막비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놈도 사람 같은 놈이 없구나! 이 틈에 달아나자!)

생각을 굴린 막비강은 즉시 몸을 솟구쳐 날아 나갔다.

[핫하하하! 또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지만 추명염왕이 한차례 광소를 터뜨리더니 몸을 솟구쳐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이어 그는 양팔을 휘둘러 열 줄기 경풍으로 막비강의 전신요혈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일년 넘게 네 명 무림 고수의 무학을 연마했는지라 이미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즉시 구로략파(鷗鷺掠派) 초식을 펼쳐 옆으로 비스듬히 삼 장 가량 날아 나가 추명염왕의 십지구혼(十指句魂) 일초를 간신히 피해냈다.

바로 그때였다.

[늙은 것들이 정말 염치가 없구나!]

화라락!

한소리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유성처럼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막비강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인영은 한 명의 백발노부인이었다.

 

나타난 백발의 노부인은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이고 머리카락은 눈이 내린 듯 하얗다. 하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으며 또 이목구비는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젊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었던 듯 여전히 미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할머니를 전에 어디서 봤을까?)

막비강은 이 아름다운 백발의 노부인 얼굴이 왠지 눈에 익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막비강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흡사했으나 일시적으로 그게 누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야! 노신 날수선랑(辣手仙娘)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노부인은 한 손에 괴장(拐杖;지팡이)을 들고 막비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수선랑! 이분이 바로 칠절 중의 한 분인...!)

막비강은 노부인의 이름을 듣고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

 

성이 송()씨라고만 알려진 그녀는 바로 백도의 고인들인 강호칠절 중 한 명이다. 성격이 불같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아 흑도와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그녀를 야차나 나찰보다도 더 무서워했다.

막비강이 놀랄 때였다.

[너희들 세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이백 살도 넘거늘 아직 약관도 안된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

백발노파는 괴장으로 추명염왕을 가리키며 차갑게 외쳤다.

추명염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노파! 노부가 노파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아까는 우리 세 사람이 오랫동안 싸움을 하여 허점을 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니 내가 독수를 펼쳐내도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삼촌정이 옆에서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흐흐흐, 당신들은 한 명은 선랑(仙娘)이고 한 명은 염왕(閻王)이니 고하를 가름해야 옳지. 고 노인과 노부가 증인이 되어 주겠다.]

날수선랑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난쟁아, 노신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때 막비강이 얼른 말했다.

[노선배님! 그들의 간계에 걸려들지 마십시오. 염왕은 후배가 상대하겠습니다.]

[너는 그의 독장이 두렵지 않느냐?]

[후배는 백독이 불침하니 그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헌데 그때였다.

[! 허풍떨지 마! 나는 아까 네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녀가 범개선과 함께 장내에 도착하여 냉소를 날렸다.

방금 전 막비강은 추명염왕이 독장으로 개방 제자들을 살해할 것이 염려되어 비석 아래의 구멍에서 뛰어나갔었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막비강이 도주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그녀의 이 말에 검미를 치켜 올렸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두고 보아라!]

이어 한 걸음 나서며 강장을 낀 손으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이미 막비강과 싸운 적이 있는지라 막비강의 공력이 자기보다 별로 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자기의 진력을 보존해 두기 위해 얼른 옆으로 피했다.

[송 노파! 너는 후배를 대신 죽게 만들 생각이냐?]

날수선랑은 냉랭히 쏘아붙였다.

[노마는 이 아이가 무서우면 빨리 꼬리를 감추고 도주해라!]

이어 그녀는 막비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야, 내가 여기 있는 이상 그는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 마음놓고 싸워라!]

막비강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검장(劍掌)을 동시에 발출했다. 그는 소녀 앞에서 실력을 과시하기로 결심했는지라 처음부터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절학을 펼쳐냈다. 순간 검풍이 세찬 파공성을 일으키고 장풍이 곧장 추명염왕에게로 쏘아져갔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추명염왕은 비록 이렇게 고함을 질렀지만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쌍장을 비벼 손바닥을 암흑색으로 변하게 한 다음 장풍검영의 빈틈으로 초식을 뻗어냈다.

곧 두 노소는 치열하게 얽혀 돌아갔다.

소녀는 막비강이 추명염왕과 대등하게 싸우는 광경을 보고 만면에 부러운 빛을 띠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삼촌정과 소면호가 몇 마디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솟구쳤다.

[송 노파! 한가하게 구경만 하지 말고 같이 놀아보자!]

날수선랑은 얼굴을 굳히며 괴장을 휘둘렀다.

[연아(燕兒)! 빨리 후퇴해라!]

소면호와 삼촌정은 날수선랑의 실력을 잘 아는지라 뒤로 각각 한 걸음씩 후퇴하며 동시에 병기를 뽑아 들었다. 흑도팔흉의 실력은 아무래도 강호칠절보다 손색이 있는 것이다.

날수선랑은 상대방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면 손녀 연아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즉시 괴장을 휘두르며 상대방 두 사람에게 맹공을 가했다.

일순 편영(鞭影)이 난무하고 장풍(杖風)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세 사람은 한데 어울려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연아라 불린 소녀는 손에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소궁(小弓)을 들고 짧은 화살을 활줄에 걸어 소면호와 삼촌정을 겨냥했다. 하지만 세 고수가 워낙 빠르게 돌아가며 싸우는 바람에 발사하지는, 못했다.

!

그러자 연아는 갑자기 목표를 바꾸어 추명염왕에게로 화살을 발사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생포하기 위해 허초만 발출한 탓에 별로 우세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를 놓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자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짧은 화살이 세찬 바람을 대동한 채 간발의 차이로 그의 뱃가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강장으로 추명염왕의 왼쪽 어깨를 격중시켰다.

!

[크흑!]

순간 추명염왕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요 쥐방울만한 놈이!]

일격을 당한 추명염왕은 독이 올라 한 자루 금륜(金輪)을 뽑아 들고 막비강을 향해 덮쳐 왔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금륜을 휘두르자 번뜩이는 금광과 함께 사면팔방에서 강맹한 장영이 눌러 옴을 느끼고 내심 깜짝 놀랐다.

(야단났구나!)

추명염왕은 맹공을 가하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놈아! 빨리 병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전륜차(轉輪車)로 네놈의 몸뚱이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노마!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놈이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주마!]

헌데 추명염왕이 말을 막 끝냈을 때였다.

! !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단전(短箭)이 연달아 날아오더니 이어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번개같이 덮쳐 왔다.

원래 연아는 자기가 단전을 발사한 때문에 오히려 막비강이 궁지에 몰리자 다급해진 나머지 연달아 단전을 발산한 것이다.

[어린 계집년! 너부터 수습해야겠구나!]

추명염왕은 눈에서 무서운 살염을 발산하며 연아를 향해 흉험한 일장을 격출했다.

[!]

날수선랑은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의 함성을 질렀다. 그녀는 급히 수중의 괴장으로 상대방을 후퇴시킨 후 연아 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때 그녀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었다.

[받아랏!]

위기일발의 순간 막비강이 함성을 지르며 전신의 진력을 뽑아 올려 추명염왕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던 것이다.

퍼펑!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막비강은 추명염왕과 일장을 주고받아 몸이 허공으로 날려 나갔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전륜차를 돌파하고 나와 연아를 구출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여 뒤로 세 걸음 가량 밀려났다. 다행히 연아는 부상을 입지 않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연아! 너는 먼저 가거라!]

날수선랑은 공중에서 한바퀴 맴돌아 튕겨져 나온 막비강의 몸을 받은 후 급히 고함을 질렀다.

[크크! 가긴 어딜 가느냐?]

하지만 세 마두가 막비강 등 세 사람을 포위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개방 제자들은 모두 공격 준비를 갖추어라!]

범개선이 고함을 질러 상세가 완쾌된 십여 명의 개방 제자가 세 마두를 첩첩이 포위했다.

[!]

추명염왕은 경멸의 코웃음을 날리더니 날수선랑에게 냉랭히 말했다.

[송 노파! 몇 년 더 살고 싶거든 어린 녀석은 남겨놓고 손녀만 데리고 꺼져라!]

쌍방이 잠시 입씨름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틈을 이용하여 막비강은 날수선랑의 품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추명염왕을 향해 사정없이 살초를 발출했다.

날수선랑은 괴장을 휘두르며 삼촌정과 소면호를 공격했다.

연아 역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범개선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들은 나의 할머니를 도우세요. 나는 저 어린 녀석을 도우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검끝으로 추명염왕의 등뒤 명문사혈(命門死穴)을 향해 찔러 갔다.

이리하여 싸움의 국면은 두 조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 조는 막비강과 연아가 합세하여 추명염왕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고, 또 한 조는 날수선랑과 개방 제자들이 삼촌정과 소면호를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추명염왕은 비록 위력이 강맹무비한 전륜차를 지니고 있지만 소년 소녀가 절묘하게 배합을 이루어 공격하자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삼촌정과 소면호는 날수선랑 한 사람을 상대할 땐 약간 우세했었다. 하지만 범개선이 이끄는 개방 제자들이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을 가하자 판도가 뒤바뀌어 간신히 자기들의 몸만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쌍방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화라라락!

문득 장내에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팔괘도포(八卦道袍)를 입은 노도사(老道師)가 나타났다. 이 노도사의 신법은 실로 유령 같아 장중의 고수들 누구도 그가 나타난 줄 모르고 있었다.

[...!]

그 노도인은 눈에서 형형한 광망을 발산하며 쌍방의 격전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 여기서 여러 고인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이렇게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소?]

(저자는...!)

날수선랑은 나타난 사람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오봉도인(五峯道人) 왕존일(王尊一)!)

(저 노마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추명염왕 등 세 마두 역시 그 노도를 알아보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봉도인 왕존일!

 

그자는 오십 년 전부터 귀신이 보아도 두려워했다는 일대의 마두로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에 드는 전설적인 고수였다.

오기(五奇)는 육요(六妖), 칠절(七絶), 팔흉(八凶)보다 한 배분 위의 고인들이었다. 비록 추명염왕 등이 알아주는 거마들이긴 하지만 오기 중의 한 명인 오봉도인의 잔인함에는 많이 부족함이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느 한쪽을 도우면 다른 한쪽이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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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두속출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지독한 거지들이 귀신을 본 듯이 놀라 달아나다니...!)

막비강은 어리둥절하여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인물은 백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헌데 야위기가 가죽이 뼈만 감싼 것 같았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선 전광(電光) 같은 광망(光茫)이 번뜩였다. 흡사 무덤에서 방금 뛰쳐나온 강시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 사악한 무공을 익힌 자다!)

막비강은 비록 이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백포노인은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아, 아까 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냐?]

막비강은 비록 사실대로 말해도 상대방이 금방 찾아낼 수는 없다 여기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가자!]

[그곳은 개방의 총단인데...!]

[흐흐흐! 그깟 거지 떼 따위가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

파팟!

백포노인은 음침한 웃음을 터뜨리며 막비강의 팔을 움켜잡더니 쏜살같이 대석비곡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섯 거지는 얼마 도주하지 못했을 때 뒤쪽에서 세찬 파공성이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포노인이 막비강을 팔을 잡아끌고 이미 삼 장 밖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호면개 도금은 타구봉을 휘둘러 나머지 네 노개와 동시에 걸음을 멈춘 후 물었다.

[추명염왕(追命閻王) () 선배님은 무슨 일로 저희들을 추격하십니까?]

(이자가 흑도팔흉(黑道八凶) 중의 추명염왕!)

백의괴인에게 손목이 잡혀 있던 막비강은 깜짝 놀랐다.

 

추명염왕 곽여해(郭餘海)!

 

그자는 흑도에서도 악명이 높은 살인마들인 팔흉(八凶) 중 한 명이었다.

팔흉은 육요(六妖), 칠절(七絶)에게는 다소 손색이 있으나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호면개 도금이 개방 방주라 하지만 추명염왕 같은 거마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흐흐! 본좌가 쫓아온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느냐?]

추명염왕은 음산하게 내뱉음과 동시에 일장을 격출했다.

다섯 명의 거지도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타구봉을 휘둘러 반격했다.

[!]

추명염왕은 재차 일장을 뻗어냈다. 그러자 다섯 명의 거지는 비틀거리며 각자 세 걸음씩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호면개 도금의 함성을 신호로 다섯 사람은 전력을 다해 또 타구봉을 휘둘렀다.

[네놈들은 죽음을 자초하고 있구나!]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내려놓고 쌍장을 동시에 휘둘러 냈다.

퍼펑!

[으악!]

[커억!]

다음 순간 다섯 명의 거지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지더니 꼼짝하지 않았다. 한 때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불리던 개방의 수뇌 다섯이 추명염왕의 일초를 받지도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다.

(... 무서운 자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흘흘흘! 독하다, 독해! 과연 추명염왕이란 명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난데없이 뇌성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막비강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난쟁이가 한 쪽에 서 있었다. 키는 채 넉 자가 못되지만 양팔이 땅까지 늘어져 있고 눈빛이 아주 음침한 노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악하고 음독한 인상이었다.

막비강은 그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추명염왕은 몸을 돌리며 음랭하게 웃었다.

[흐흐흐! () 난쟁아, 너도 이 일에 끼여들 생각이냐?]

[청구단서는 무림의 지보(至寶)인데 얻으려는 사람이 노부 한 명뿐인 줄 아느냐?]

난쟁이는 말하며 옆의 바위를 흘깃 바라보았다.

[흐하하하! 과연 천이통(天耳通) 삼촌정(三寸釘)의 이목은 놀랍소!]

화라락!

다음 순간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바위 뒤에서 날아 나왔다. 그자는 도포를 의젓하게 걸치고 등에 불진을 짊어진 노인이었다. 차림은 분명 출가인이지만 그 얄팍한 입술과 족제비 같은 눈빛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 누군가 했더니 소면호(笑面虎) 고금(古今) 영감이었군!]

그자를 본 추명염왕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내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두 분은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오. 나 고()가도 이번 일에 한몫 껴야겠소.]

소면호 고금이라 불린 도인은 포권을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삼촌정 정발(丁發)!

소면호 고금(古今)!

 

그자들도 모두 추명염왕과 함께 흑도팔흉에 드는 거마들이었다.

소면호가 끼여들자 추명염왕은 얼굴을 굳히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 고 영감, 아마 너는 이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소면호의 웃던 얼굴이 일변하여 음침하게 변했다.

[추명염왕, 너는 이제 염라대왕(閻羅大王)이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우선 정 난쟁이와 합세하여 너부터 황천으로 보낸 다음 대책을 강구하겠다.]

추명염왕은 상대방이 연합하여 덤비겠다고 말하자 흠칫 놀랐다.

[이리 와라!]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쳐 막비강을 잡아갔다.

[어딜!]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치며 재빨리 덮쳐 와 추명염왕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도리 없이 전력을 다해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소면호! 너는 정말 노부와 싸울 생각이냐?]

[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이때 난쟁이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고 영감의 말이 옳다. 우리는 합세하여 먼저 그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책을 강구하자.]

막비강은 그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비급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싸움질부터 먼저 하다니... 이 틈에 빨리 도주해야지.)

화라라락!

그는 세 사람이 서로 대치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게 섰거라!]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도주하자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솟구쳤다.

이때 난쟁이 삼촌정이 또 일장을 격출하여 추명염왕을 제지시켰다.

추명염왕은 추격을 제지당하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난쟁아, 너의 이 행위는 무슨 뜻이냐?]

난쟁이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저 어린 녀석과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려는 것을 모르는 줄 아느냐?]

[비급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대비석 밑에 있다.]

난쟁이 삼촌정의 말에 추명염왕은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럼 우리는 먼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비급부터 찾아낸 다음 누구의 소유가 될지 결정짓자.]

[그건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려면 어린 녀석을 잡아야 한다. 비급이 숨겨진 정확한 장소를 아는 사람은 저 어린 녀석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빨리 추격하자.]

합의를 본 세 마두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막비강은 사오십 장 가량 달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추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잡으려는 목적이 정확한 장소로 안내해 달라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비급을 찾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다.

초조해진 막비강은 마침 길옆에 울창한 도림(桃林)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추명염왕은 도림 근처까지 추격하여 걸음을 멈추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녀석아, 좋게 말할 때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이 도림을 몽땅 태워 버리...!]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파라락!

갑자기 뒤쪽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추명염왕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난쟁이 삼촌정과 소면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전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놈들도 비급이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마 비석을 산산조각 내서라도 찾아내려 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추명염왕은 더 이상 막비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즉시 삼촌정과 소면호의 뒤를 쫓아갔다.

 

막비강은 도림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천만이었구나!)

그는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비급을 탐내는 흉도들의 무공이 점차 고강한 인물들만 나타나는지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일년 이상을 고생하여 가까스로 대비석의 소재지를 알아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려 하니... 게다가 나 때문에 개방의 다섯 고인들이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자책하던 막비강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시신을 수습해주다가 그들의 절학이 담긴 비급을 얻었던 일이다.

(만약 천하의 기문절학을 모두 수집한다면 내 스스로 절세무공을 창안하지 못할 것도 없다. 타구봉법은 비록 천하무적의 절예는 아니지만 독특한 면이 있는 무공이다. 게다가 개방의 다섯 거지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 시체라도 안장해 주어야겠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티구봉법이 적힌 비급을 얻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곧 도림 밖으로 나가 다섯 거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어 그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금릉삼로 중 청풍개 범개선은 아직 체온이 식지 않았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잘 하면 살릴 수 있겠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에게서 배운 응급치료법을 이용하여 범개선의 전신 혈도를 안마해 주었다.

약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범개선은 호흡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고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범개선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막비강임을 알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고맙네. 수고스럽지만 내 주머니 속에서 약을 좀 꺼내 주게.]

막비강은 상대방의 주머니를 뒤져 몇 가지 환약을 꺼내어 범개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약을 골라 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안마를 계속했다.

또 일각 가량 지나자 범개선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자기의 동문들이 모두 죽었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네 말대로 우리 개방은 결국 참화를 입었구나. 그런데 그 마두는 어딜 갔느냐?]

[그들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범개선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했다.

[그 악랄한 마두가 달려갔다면 이제 우리 개방은 완전히 끝장났구나.]

그는 여기까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막비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추명염왕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느냐?]

막비강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그의 말을 듣더니 만면에 희색을 가득 머금었다.

[그 세 명의 마두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야 될 텐데... 아이야, 방주의 몸에 우리 개방의 절기인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의 비급이 있다. 노부가 방주를 대신하여 네게 기증할 테니 장래에 우리 개방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범개선이 살아있는 마당에 낼름 개방의 비급을 받기가 염치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귀방의 제자가 아니니 개방의 절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범개선은 막비강이 개방 절기가 실린 비급들을 사양하자 한층 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네가 개방의 제자든 아니든 상관없다. 노부는 어차피 추명염왕의 독장(毒掌)을 맞아 앞으로 이삼 일밖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막비강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호면개 도금의 시체 곁으로 가서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꺼내고 허리춤에서 방주의 신물(信物)을 끌러 범개선 옆으로 돌아왔다.

[이삼 일의 시간이면 충분하니 선배님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범개선은 만면에 곤혹의 빛을 가득 머금었다.

[네게 영지옥액(靈芝玉液)이라도 있단 말이냐?]

[아닙니다. 후배에게는 백독을 쫓을 수 있는 천오주가 있습니다.]

범개선은 눈을 번뜩 뜨며 급히 물었다.

[어디 있느냐?]

[후배가 선배님을 업고 천오주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막비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범개선을 등에 업은 후 곧장 소지품을 숨겨 두었던 무덤으로 달려갔다.

 

***

 

그러나 막비강이 무덤에 도착하여 파헤쳐 보니 소지품을 싼 보따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놀람과 조급함을 금치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 좀도둑의 소행이지? 잡히기만 하면 다리뼈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

그가 막 말을 끝냈을 때였다.

[? 좀도둑이 어째?]

휘릭!

돌연 앙칼진 외침과 함께 무덤 옆의 소나무 위에서 누군가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열 여섯 살 가량 된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소녀는 왼손에 조그만 보따리를 든 채 오른손으로 막비강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저분한 녀석아, 너의 낡아빠진 물건들 여기 모두 있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내 다리뼈를 분질러 놓는지 두고 보겠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어린 소녀인지라 웃으며 사정했다.

[착한 누님, 빨리 사람을 살려야 하니 구슬을 주시오. 나는 좀도둑의 소행인 줄만 알았지 누님이 장난으로 그랬는지 모르고 실언을 했소.]

소녀는 막비강이 누님이라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너의 이런 물건은 귀신이나 가지려 할 것이다. 나는 빨리 가서 싸움 구경을 해야겠다.]

보따리를 막비강의 발 앞에 던져 준 소녀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듯이 뛰어갔다.

막비강이 잠시 멍청히 서 있다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상대방은 이미 사오십 장 밖에 나가 있었다.

(이상한 아이로군!)

막비강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 보따리에서 천오주를 꺼내어 범개선의 심장 위에 올려 독을 뽑았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범개선은 체내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오주를 막비강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너는 이런 보주가 있으면서 왜 휴대해 다니지 않느냐?]

막비강은 비급을 찾으려 개방에 들어가 신분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이곳에 숨겨 두고 역용 변장한 경과를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총명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막비강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후 말했다.

[아까 그 여자아이는 싸움을 구경한다면서 대석비곡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아 정말 흉마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우리도 빨리 가서 결과를 알아봅시다.]

[그럼세!]

범개선은 즉시 막비강과 함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석비곡을 향해 질주했다.

 

[... 이럴 수가!]

얼마후 대석비곡에 도착한 범개선과 막비강은 놀라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넓은 석비곡 안은 개방 제자들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골통이 박살나 형상조차 구별할 수 없었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음을 발출하고 있었다.

범개선은 지니고 있는 약물로 이삼십 명의 제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제하여 물어 본 결과 추명염왕과 다른 두 사람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 다음 추명염왕 등 세 사람이 서로 혈전을 벌였는데 최후에 어떤 노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 했다.

막비강이 개방 제자에게 급히 물었다.

[그들은 혹시 비석 밑에서 무슨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소?]

개방 제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더니 모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범개선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제자들을 매장하게 하고 자기는 막비강과 함께 비석 근처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막비강의 시선은 가장 석실의 석벽에 새겨진 한 수의 시구(詩句)에 꽂혔다. 그것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된 시였다.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경지하(傾脂河) 강변의 깨진 비석을 쓰다듬는구나. 영롱한 모습은 신산의 교묘함을 빼앗으니 계수나무 아래서 늦음을 후회 마라!>

 

막비강은 입 속으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더니 돌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어디엔가 경지하라 불리는 강이 있는 게 아닐까?]

범개선이 옆에서 말을 받았다.

[있네. 소흥부(紹興府) 남쪽 약야계(約野溪) 부근에 있는 강이라네. 전설에 의하면 서시(西施)가 목욕물을 그 강에 버려 강물에도 지분(脂粉) 향기를 풍긴다더군. 석벽의 이 조각은 경지하의 경치와 흡사하고 강변에 영롱탑(玲瓏塔)이라는 탑이 있는데, 그럼 이 시구에는 깊은 뜻이 내포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후배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범개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보물을 획득할 의향이 없네. 그러나 자네가 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신쇄골이 되어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네.]

[한 권의 비급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니 선배님께선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후배는 이 벽화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막비강은 신녀비와 강장을 꺼내어 조각의 그림을 긁어냈다.

헌데 그가 벽화를 절반 가량 긁어냈을 때였다.

[흐흐흐! 선인의 유적을 훼손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밖에서 난데없이 차가운 고함 소리가 전해 왔다.

막비강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추명염왕이 석실 입구에 서 있었다.

추명염왕은 절반 가량 파손된 벽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비급은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나도 모른다.]

[노부도 네가 비급이 숨겨져 있는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조각을 파손하느냐?]

[남이야 조각을 파손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감히 본 염왕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네놈은 분근착골(分筋錯骨) 맛을 좀 보아야겠구나.]

막비강도 지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 노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왜 내게 비급의 행방을 묻느냐?]

막비강은 자신이 거지의 모습에서 원래의 용모로 돌아온 것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흐흐흐! 노부는 불에 타 재가 되어도 네놈을 알아볼 수 있다. 하물며 네놈의 목소리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기까지 하다. 그러니 헛수작 말고 순순히 노부의 물음에 대답해라!]

추명염왕은 흉흉한 표정으로 천천히 막비강에게 다가섰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받아랏, 노마!]

피유웅!

돌연 석실 밖에서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짧은 단전(短箭) 하나가 세찬 파공성을 대동한 채 추명염왕을 향해 날아왔다.

막비강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강장을 뻗음과 동시에 신녀비를 휘둘러댔다.

[받아랏, 노마!]

범개선도 개방 제자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쌍장을 동시에 격출했다.

[이 연놈들이...!]

추명염왕은 비록 절학을 지녔지만 강장과 신녀비, 그리고 단전이 동시에 엄습해 오자 감히 소홀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양어깨를 비틀며 몸을 풍차처럼 한바퀴 돌렸다.

!

그러자 밖에서 날아온 단전이 막비강의 강장과 부딪쳐 요란한 음향을 발출했다.

막비강은 그 틈에 수중의 신녀비로 검기를 형성하여 추명염왕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슬쩍 그의 공세를 피해낸 뒤 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린 녀석아, 우선 저 어린 계집년부터 수습한 후 다시 찾아오겠다.]

막비강은 석동 밖에서 들려 온 음성이 바로 자기의 물건을 훔쳤던 소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어딜 가느냐 노마?]

그는 그 소녀의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피독지보(避毒之寶)가 없는 한 추명염왕의 독장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위이잉!

그가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염라장법 중의 절초인 참호양망(斬虎揚茫) 초식을 펼쳐내었다. 그러자 한 줄기 강맹한 바람이 석동 안의 돌 조각을 휘날리며 밖으로 뻗어 나가 눈도 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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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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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벽화 속의 비밀

 

 

 

(방주라고?)

막비강은 들려온 함성만으로도 이번에 나타난 인물의 내공이 매우 정순함을 깨닫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새로 등장한 인물 역시 전신에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였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구렛나루가 양쪽 뺨을 덮고 있어 아주 위맹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비록 이 인물의 나이가 금릉삼로보다 이삼십 살 가량 적어 보였으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삼로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삼엄했다.

이 중년거지는 어깨에 여덟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개방의 방주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당금 강남개방의 방주인 호면개(虎面丐) 도금(都金)이로구나!)

막비강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내심 긴장했다.

위맹한 인상의 중년거지가 바로 개방의 정통을 이어받은 강남개방의 방주 호면개 도금이었다.

호면개 도금은 강남개방의 제일대 방주였던 적족신개(赤足神丐)의 제자였다. 적족신개는 궁가방의 개파조사인 궁신 여불초의 사제였다. 그러면서도 개방의 방주로 지명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적족신개는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해 버렸다. 그 때문에 구결(口訣)로만 전해지던 개방의 숱한 진산절기가 실전되어 개방이 당금의 처지로 조락하는 이유가 되었다.

상대가 개방 방주임을 알아본 막비강은 암암리에 일신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악전고투에 대비했다.

그때 호면개 도금도 두 눈에서 살벌한 광망을 발산하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철 호법, 당신들은 무슨 일로 싸움을 하게 되었소?]

이어 그는 한쪽 옆에 시립해있는 철 호법에게 물었다.

[이 소악적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방주님!]

철 호법은 타구봉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개방 방주 도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비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의 어리고 무지한 점을 생각해 놓아줄 테니 돌아가거라!]

과연 일방의 방주다운 도량이다. 전후 사정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쓸데 없는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내심 감탄한 막비강은 손을 맞잡아 도금에게 공수의 예를 올렸다.

[방주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어 그는 곡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때 도금이 막비강을 불러 세웠다.

[본 방주가 한마디 분부해 두겠는데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만약 다시 찾아오면 네놈의 다리뼈를 분질러 놓겠다!]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리고 곡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청구단서를 취득하여 절세의 무공을 연성해야 하므로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보통 희세기진(稀世奇珍)은 심산유곡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고 또 거대한 비석은 개방의 분타 소재지가 된 것이다.

개방은 그들의 소굴 지하에 이런 비급이 숨겨져 있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막비강은 비록 알고 있지만 어느 구석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막비강 혼자 힘으로 거지 떼들을 모두 내쫓고 자세히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곡을 나선 막비강은 높이 솟아있는 석촉대(石燭臺)를 바라보며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 수법을 써야겠다.)

곧 그의 모습은 대석비곡 입구에서 사라졌다.

 

***

 

막비강은 금릉의 시장통에서 남루한 의삼과 자루, 향촉(香燭), 지전(紙錢) 등을 샀다. 그리고는 새벽무렵의 어둠을 틈타 금릉성에서 나와 황량한 공동묘지로 향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그는 남산의성 악불령의 역용환을 사용하여 전신의 피부색을 바꾸고 머리도 흐트려 지저분하게 분장했다.

그리고 약물을 먹어 목소리까지 변하게 한 뒤에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새로 만든 무덤 앞에 강장, 신녀비, 호로, 진주, 은자 등을 옷에 싸서 깊이 파묻었다.

아침이 되자 막비강은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덤 앞에 향촉에 불을 붙이고 지전을 태우며 한동안 우는 척했다. 그런 후에 해가 중천에 뜨자 무덤을 떠나 몹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묘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거지보다 더 더럽게 분장한 막비강은 어떤 부호가 사는 집 대문 옆에 깨진 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영락없이 하인들이 보고 불쌍히 여겨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주길 기다리는 거지의 행색이었다.

헌데 오래지 않아 그의 등뒤에서 음침한 일갈이 들렸다.

[어린 녀석아, 누가 너더러 이곳에서 걸식을 하라더냐?]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한 사람은 중년거지였다.

그는 거지들의 규칙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모른 체했다.

[집안에 갑자기 변고가 생겨 며칠씩이나 밥을 굶었소. 당장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누가 시켜야지 걸식을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중년거지는 이마를 찡그렸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군! 그래, 향주(香主)에게 인사는 했느냐?]

[향주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향주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면 밥을 얻으러 다니지 못한다.]

중년 거지의 말에 막비강은 눈을 부라리며 항의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놈이 어디 대고 토악질이냐?]

중년거지가 눈을 부라리며 막비강의 뺨을 후려쳤다.

막비강은 따귀를 한 대 얻어맞자 즉시 울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내가 내 밥을 얻어먹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립니까?]

그러자 약이 오른 중년거지는 세게 발길질을 하여 막비강을 바닥에 넘어지게 한 후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절을 해라.]

두 사람이 울고 욕지거리를 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했다.

중년거지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또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땅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와 함께 향주에게 가자.]

[매를 맞으러 가잔 말이냐? 구경하는 여러분이 평을 해보십시오. 나는....]

!

막비강은 또 중년거지의 발길에 엉덩이를 차였다.

비록 이것은 그가 자초한 고육지계(苦肉之計)이지만 중년거지가 지나치게 흉악하여 막비강은 화가 치밀었다. 분노한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중년거지를 노려보았다.

중년거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그래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느냐?]

[왜 너를 따라간단 말이냐?]

[이놈이 끝내 기어올라! 오냐! 내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중년거지가 주먹을 휘두를 때 막비강도 지지 않고 머리로 힘껏 상대방을 받아 갔다.

곧 두 사람은 한데 얽혀 싸움질을 했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고수들과 달리 그저 주먹질 발길질만 하는 저자거리의 치졸한 싸움질이었다.

막비강의 머리에 들이받힌 중년거지는 독이 올라 두 주먹으로 그의 등을 마치 북 치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갑자기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중년거지는 그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 놀랐다. 한 명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거나 먹어라!]

막비강은 그 틈을 이용하여 머리로 중년거지를 받아 쓰러뜨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중년거지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일어나더니 나타난 노개를 향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제자가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놈이 난폭해서... 보셨겠지만 그놈은 제자를 이런 꼴로 만들었습니다.]

노개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고 냉랭히 말했다.

[! 홍삼(洪三), 너는 가는 곳마다 일을 저지르는구나. 빨리 분타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노개는 홍삼을 쫓아 보낸 후 곧 막비강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노개의 발걸음은 늙은이 답지 않게 날렵했다.

[아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어라!]

노개가 따라붙으며 말하자 막비강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내 뒤를 쫓아오는 겁니까?]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노대(何老大)라 부릅니다.]

[너는 나의 문하가 되고 싶지 않느냐?]

[할아버지는 누구죠?]

[나는 개방의 금릉삼로 중 범개선(范開先)이라고 한다.]

노개는 바로 어제 막비강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한 바 있는 금릉삼로 중 범씨 성의 늙은 거지였다. 그의 별호는 청풍개(淸風丐)로서 금릉삼로의 우두머리였다.

청풍개 범개선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본방의 절기를 전수하여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거야말로 막비강이 바라던 전개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할아버지를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즉시 청풍개 범개선 앞에 큰절을 올렸다.

범개선은 포대에서 만두를 꺼내어 막비강에게 나누어주며 신세와 집안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막비강이 적당히 둘러대자 범개선은 정말인 줄 알고 그를 대석비곡으로 데려갔다.

 

개방 방주 호면개 도금과 금릉삼로의 다른 두 노개는 범개선이 한 명의 어린 거지를 데리고 들어오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 다음 어린 거지의 근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양이(楊二)라 불리는 중년거지에게 막비강을 데려가 개방의 제반 의식과 규칙 등을 가르치게 했다.

막비강은 양이를 따라 방중의 선배 거지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 도중 비석 아래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원래 이 대비석은 산봉의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라 비석 밑 부분이 모두 암석이며 구멍은커녕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이런 곳엔 도저히 비급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틀림없이 비석 밑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구단서를 찾을 수 있는 열쇠인 종이쪽지가 단호의 뚜껑 속에 그토록 은밀히 숨겨져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이에게 하루종일 개방의 제반 의식을 배웠다. 하지만 고의로 우둔한 사람처럼 이것을 배우면 저것을 잊고 저것을 배우면 이것을 잊은 척했다.

화가 치민 양이는 혼자 나직이 투덜거렸다.

[범 장로께선 크게 실망하시겠구나. 네놈은 근골만 좋았지 기억력은 형편없으니 이래 가지고 무슨 무예를 배우겠느냐?]

 

* * *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자 곡내의 거지들이 분분히 밖으로 나갔다.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하고 양이에게 물었다.

[밤에도 동냥을 하러 나갑니까?]

[모르면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있어라.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칭 곡능천이라는 어린 망종을 잡기 위해 매복해야 한다.]

양이가 핀잔을 주었다.

[방주님도 어제 이곳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애송이 놈이 혈검산장에서 용모파기를 돌려 찾고 있는 망나니 아들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아시고 포박하라 명을 내리신 것이다!]

막비강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의 계획도 고명하지만 나의 계책은 더욱 고명하다.)

그는 양이가 나가자 큰 포대를 두 장 끌어다 이불 대신 덮고 대비석의 큰 구멍 구석에 웅크리고 자는 척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덮여 대석비곡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석 밑의 석동도 비록 양면으로 맞뚫려 있지만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때가 되었군!)

막비강은 살며시 포대자루를 젖히고 일어나 전신의 공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물이 희미하여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주먹만한 돌을 주워 석벽과 지면을 가볍게 두드려 속이 빈 곳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는 한 칸의 석실을 모두 두드려 본 다음 석벽에 몸을 바짝 붙여 다른 석실에 가서 수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석면을 거의 모두 두드려 보았지만 속이 빈 현상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곰곰이 비급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돌연, 그는 이 비석 중앙의 큰 석동 우측 벽에 한 폭의 거대한 벽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곳의 좌측 벽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노인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노인의 눈은 맞은편 벽화에 새겨져 있는 둥근 달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고개를 숙여 지면만 조사하느라 벽화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청구비급이 혹시 그 벽화의 둥근 달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자기의 추리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 급히 벽화가 새겨진 석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맞은편 벽에 그려진 둥근 달 부분을 두드려 보았다.

한동안 벽을 두드린 그는 여전히 실망을 금치 못했다. 벽화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막비강은 실망하며 벽화에서 물러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

난데없이 석동 밖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휘이잉!

막비강이 흠칫하는 순간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왔다.

파파팟!

막비강은 내심 크게 놀라며 급히 몸을 비틀어 석동 밖으로 날아 나왔다. 이어 양발을 힘껏 굴러 비교적 작은 비석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애송이놈! 어디로 달아나느냐?]

콰아아아!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광풍이 휘감아 왔다.

막비강은 쌍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켜 상대방의 장세를 봉쇄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음향이 울려 퍼지며 맞은편 비석 뒤에서 한 명의 거지가 뒤로 주르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바로 철 호법이었다.

[어엇!]

철 호법은 막비강의 강맹한 장력에 진탕되어 뒤로 후퇴하다가 허공을 밟아 비석 아래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쐐애액!

그때 또 몇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솟구쳐 최상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뒷산으로 질주해 갔다.

[어린 녀석아, 걸음을 멈추어라!]

헌데 막비강이 몸을 솟구쳤을 때 하나의 인영이 고함을 지르며 앞을 막아섰다.

[나를 막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

외마디 경악의 비명과 함께 그 사람은 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단 일장에 그 사람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낸 막비강은 곧장 뒷산을 향해 도주했다.

그러자 개방 방주 도금을 비롯한 금릉삼로, 철 호법 등 다섯 거지들은 일제히 그를 추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린 녀석아,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으니 걸음을 멈추어라!]

그러나 막비강은 그들의 고함을 들은 체도 않고 계속 신법을 전개했다.

도금과 네 명의 노개들도 경공신법이 대단하고 또 이곳 지리를 잘 아는지라 쌍방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 이런!)

막비강은 전력을 다해 도주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 전면의 삼 장 거리는 높이가 백 장이 넘는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콰아아아!

그 절벽 아래로는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흐하하하! 네놈은 독 안에 든 쥐다!]

막비강이 걸음을 멈추자 다섯 명의 노개는 눈 깜빡할 사이에 가까이 추격하여 그의 일 장 거리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삼로 중 고죽개 학검성이 수중의 타구봉을 휘두르며 노성을 질렀다.

[어린놈아, 나는 오늘 네놈을 양자강의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막비강은 이런 상황에서 다섯 명의 노개를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말해 우선 이들과의 충돌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옆으로 피하며 고함을 질렀다.

[할말이 있으니 잠깐 손을 멈추시오!]

학검성은 자신의 일격이 빗나가자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청풍개 범개선이 얼른 나서 제지시켰다.

[우선 그가 누구며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범개선은 막비강을 제자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또 다른 노개들보다 마음이 인자하여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검성의 행동을 제지시킨 것이다.

개방 방주인 호면개 도금도 범개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우선 이 어린 녀석의 신분부터 알아봅시다.]

호면개 도금은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린 녀석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막비강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나는 그제 귀방의 분타를 찾아갔었던 곡능천입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뭐라고? 네놈이 바로 곡능천, 아니 막비강이라고?]

[그렇습니다.]

[막비강은 얼굴이....]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제가 역용술로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그가 손바닥에 양잿물 가루를 발라 얼굴을 문지르자 곧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섯 명의 노개는 막비강의 정교한 역용술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호면개 도금이 다시 물었다.

[네가 변장을 하여 본방의 본거지에 잠입한 의도는 무엇이냐?]

[그것은 청구상인께서 남기신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고 경악과 격동의 빛을 금치 못했다.

[청구단서는 강호의 인물이면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무림기보인데 그것을 어찌하여 우리들 개방의 중지에 와서 찾느냐?]

[그 비급은 거대한 비석 밑에 있습니다. 거대한 비석이란 귀방의 분타가 위치한 그 비석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도 거대한 비석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거주하는 분타의 비석 밑에 그런 비급이 숨겨져 있다고 단정했느냐?]

[방주께서도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나는 이미 대강남북에 산재해 있는 비교적 큰 비석은 모두 파헤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청구단서는 고사하고 종이쪽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호면개 도금은 이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그럼 근래 일어난 비석 도굴 사건이 모두 네 소행이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점만 보아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으므로 머지않아 이 소식이 강호에 퍼지고 그러면 귀방은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 테니 빨리 돌아가셔서 대책이나 상의하십시오.]

막비강의 말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죄가 없으나 구슬을 지닌 것이 죄가 된다더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듣고 있던 학검성이 타구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이놈! 쓸데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우리에게 화를 전가시키지 마라! 우리는 대석비곡에 수십 년을 거주했지만 비급따위는 보지 못했다.]

호면개 도금은 학검성의 이 말이 대석비곡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 역시 막비강을 죽이진 않더라도 생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타구봉을 휘두르며 막비강을 공격했다.

그러자 나머지 노개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범개선은 비록 마음이 비교적 자상했지만 방주가 출수한 이상 그도 자연히 수수방관을 할 수 없었다.

[이 염치없는 늙은이들이...!]

막비강은 다섯 거지가 합공을 가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노성을 지르며 쌍장으로 단숨에 십여 장을 격출했다. 격노한 나머지 출수했는지라 그의 장세의 강맹하기가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개방의 타구봉법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방주인 호면개 도금이 펼쳐내니 그 위력은 더욱 강맹하여 막비강으로서도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점차 막비강은 낭떠러지 쪽으로 밀려갔다. 낭떠러지의 높이는 백 장이 넘고 그 밑은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며 괴석이 즐비하여 떨어지면 목숨이 열 개라도 뼈를 찾기 어려울 실정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손을 멈추어라!]

돌연 낭떠러지 옆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쏴아아아!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장풍이 다섯 명의 노개에게 휘감아 갔다.

[!]

[... 당신은...!]

다섯 명의 노개는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경악의 함성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사력을 다해 왔던 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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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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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짜 의성(醫聖)이 준 기연

 

 

 

보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동안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으로부터 제대로 된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을 전수 받아 내공의 기초를 튼튼하게 이루게 되었다. 역시 혼자 깨우치는 것과 좋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실 소리장도 강용이 주고 간 기공입문법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이 본래 명칭인데 이것은 도가에서 오래 전에 실전한 비전 중의 비전이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깊이 깨우치면 모든 심마(心魔)를 물리치고 번뇌(煩惱)를 소멸하여 다른 무공의 습득을 몇 배 빠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문도가의 비전이라 소리장도 강용같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에게는 전혀 쓰임이 없다. 애초에 태청정명운기법의 이치를 깨우칠 바탕이 못 되기 때문이다.

강용은 이 절세의 비전을 오래 전에 얻어 지니고 있었음에도 거의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용은 막비강의 환심을 사려고 남산의성 악불령의 약전과 함께 준 것인데 이번에는 비급도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깨우친 막비강은 시야가 확 트여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했던 무학의 이론을 단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남산의성은 막비강이 예상보다 빨리 내공심법의 기초를 확립하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각가지 의술과 해독술, 그리고 기문진법과 약물로 용모와 음성을 바꾸는 방법등도 가르쳐 주었다.

소리장도 강용이 막비강에게 주었던 역용환도 사실 남산의성의 것이었다. 그자는 훔친 것으로 생색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막비강과 남산의성 악불령 사이에 사제지간의 명분은 없다.

하지만 악불령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깨우치는 막비강의 빼어난 자질과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아! 지금까지의 네 무공도 보통 고수에게는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제 기연으로 태청정명운기법까지 깨우쳤으니 장래 너의 무공방면의 성취는 누구보다도 빠른 진보가 있을 것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노부는 강용이 무덤을 도굴하다 죽는 것을 구경하러 가야겠으니 이만 헤어지자꾸나. 대신 네게 백독(白毒)을 피할 수 있는 천오주(天蜈珠)를 한 알 주겠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자.]

막비강은 헤어지는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자기 혼자 단독으로 청구단서를 찾아야 하므로 할 수 없이 남산의성 악불령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다시 가을이 되었다.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본의 아니게 뛰쳐나와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어언 일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일년 동안 막비강은 세상에 알려진 큰 묘비라면 거의 모두 찾아가 파헤쳤다. 심지어는 장안(長安) 대안탑(大雁塔) 옆의 고비(古碑), 낙양(洛陽) 망산(邙山)의 황릉(皇陵) 등 파헤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헛수고만 했으며 비급은커녕 비급 닮은 것도 없었다.

그는 내심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혹시 큰 비석이란 어떤 곳의 지명이 아닐까?)

만약 큰 비석이란 것이 실제 비석이 아니라 어딘가의 지명이라면 막비강은 지난 일년의 세월을 괜히 무덤만 파헤치며 보낸 결과가 된다.

그나마 그는 일년 동안 쉬지 않고 무예를 연마하여 내공, 장력, 검법 등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산간에서 지냈기 때문에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남긴 은자와 진주를 사용하지 않고 절약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

 

낙양에서 가장 큰 주루인 회빈루(會賓樓)는 오늘도 많은 주객들로 왁자하니 시끄러웠다.

이 회빈루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 약관이 안된 미목이 청수하며 붉은 경장을 입은 소년이 홀로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들어 보시오! 나는 이번에 표물을 강남에 호송하고 오던 도중에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을 들었소.]

문득 한쪽 자리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음성이 말했다.

[무슨 소식인지 말해 보시오.]

다른 사람이 재촉하자 처음에 말을 연 사람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세 가주들이 얼마 전 갑자기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더군요.]

[그래, 비급은 찾았답니까?]

[찾았으면야 무슨 말이 있겠소? 그들은 조상의 유골까지 휘적이며 보름간 소란을 피웠는데 결국 어떤 노인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한마디하니 다시 무덤을 원상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더군요.]

[핫하하...!]

주객들은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일이 비록 괴이하지만 근래 이 주위에서 발생한 일보다는 이상하지 않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소?]

[낙양에서 멀지 않은 북망산 일대에 있는 오래된 무덤의 묘비 중 비교적 큰 묘비는 모두 파헤쳐져 있었소.]

[묘비를 훔쳐 팔아 돈을 벌려는 좀도둑의 소행인가 보군.]

[아니오. 흔적으로 보아 그 묘비들은 넘어뜨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세워 두었소. 아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을 것이오.]

[이건 정말 이상하군요.]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 사람은 장사임이 분명하오. 고묘의 묘비는 무게가 적어도 이삼천 근이 되어 한 사람이 그것을 넘어뜨리기도 힘들 텐데 다시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혹시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태평성대에 갑자기 이런 기이한 일이 발생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큰 비석, 대묘비라! 그렇지! 금릉(金陵) 묘화문(妙化門) 밖의 대석비곡(大石碑谷)에 있는 비석은 무게가 십만 근도 넘는데 그자가 왜 그 비석은 파헤치지 않지요?]

순간 주루 구석 자리에 앉아 자작하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번뜩 떴다.

(오호라, 그런 곳에 또 큰 비석이 있었구나! 가르쳐 줘서 고맙소!)

그때 옆 좌석에 앉은 강호 인물 중 한사람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육 형(陸兄)은 허풍을 그만 떠시오! 세상에 그렇게 무거운 비석이 어디 있소?]

[나는 금릉 사람인데 왜 모르겠소?]

처음 말한 사람이 즉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비석은 높이가 십 장이 넘고 넓이는 삼사 장이 되며 두께만도 일 장 가량이나 되오. 그 외에 석향로(石香爐)와 석촉대(石燭臺)도 있는데 그 높이가 이층집 가량이나 되오.]

[웃기지 마시오! 그런 큰 비석이 어디 있단 말이오!]

[못 믿겠으면 직접 가 보면 알 게 아니오. 전설에 의하면 큰 비석은 송나라 때 유백온(劉伯溫)이 우수선(宇手善)의 반란이 두려워 태조(太祖)에게 상소하여 비석으로 진압시켜 나라를 평온하게 하자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조각을 끝낸 후 그 비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옮길 수가 없어 지금도 묘화문과 기린문(麒鱗門) 사이의 계곡에 세워 두어 금릉의 고적(古蹟)이 된 것이오.]

(거짓말은 아닌 듯하구나!)

자작자음하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막비강이었다.

그는 그토록 큰 비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곧 계산을 하고 주루에서 나와 곧장 금릉으로 향했다.

 

***

 

열흘 후, 낙양을 떠난 막비강은 금릉에 도착하여 예의 거대한 비석이 있다는 대석비곡을 찾아갔다.

과연 그곳의 비석은 들은 바대로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높이가 무려 십 장이 넘는 그 비석은 밑 부분이 아직 땅속의 산석(山石)과 맞붙어 있는데 바위와 붙어있는 비석 아랫부분에는 몇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는 구멍마다 남루한 행색의 거지 떼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개방(丐幇)의 화자(化子;거지)들이었다.

우글거리는 거지떼를 본 막비강은 난감해졌다.

(이래서야 뭘 찾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군!)

잠시 궁리를 하던 그는 곧 한 웅큼의 은자를 꺼내 들고 거지 떼에게로 다가갔다.

[이 은자를 당신들에게 줄 테니 이곳을 내게 사흘간만 빌려주시오.]

[뭐야?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와서 남의 기업을 가로채려느냐?]

그러자 돌연 거지들 중 인상이 험악한 놈이 구멍 속에서 뛰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다짜고짜 욕이 날아오자 막비강도 불끈 화가 치밀었다.

[당신들을 강제로 쫓아내려는 게 아니오! 생각이 있으면 사흘간만 빌려주고 싫으면 그만이지 왜 욕을 하시오?]

하지만 흉악한 인상의 거지는 더욱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 갈보 새끼야! 내가 네놈에게 욕을 해서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여길 빌리고 싶으면 니 에미 구멍부터 먼저 나한테 빌려다오!]

그자의 원색적인 욕지거리에 다른 거지들이 왁자하니 웃는다.

순간 막비강은 왈칵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납치 당해 몸을 더럽힌 것을 아는 그인지라 이같은 욕은 참을 수 없는 심한 것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어이쿠! 나 죽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자의 뺨은 당장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터진 입안에선 피와 부러진 이빨이 흘러나온다.

[저놈이 사람을 팬다!]

[치도곤을 내라!]

순간 구멍 속의 거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며 아우성을 쳤다.

(! 귀찮게 되었군!)

막비강은 삽시에 수많은 거지 떼에게 에워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개방의 거지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었다.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방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 방파였다. 하지만 오십 년 전, 개방은 내분으로 인해 남북(南北)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장문인 승계에 불만을 품은 궁신(窮神) 여불초(餘不草)라는 자가 개방의 무리 대부분을 이끌고 강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궁가방(窮家幇)이란 방파를 연 것이다.

그후 강북의 궁가방은 나날이 성세가 불어나 지금은 지난 날의 개방을 대신하여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반면 강남에 남은 정통 개방은 날로 조락하여 이제는 하오문 잡배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방은 여전히 휘하에 수십만 명의 방도를 지닌 거대방파다. 그들과 원한을 맺어 버리면 두고두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막비강이 꺼리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이럴 때는 일단 토끼고 보는 거다!)

파앗!

막비강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거지 떼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저 후레자식이 달아난다!]

[갈보 새끼를 잡아라!]

그런 막비강을 거지들이 아우성 치며 따라왔다.

하지만 그자들의 경공술로 막비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막비강은 삽시에 거지 떼를 떨쳐 버리고 곡구(谷口)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헌데 그가 막 곡구 근처에 서있는 돌로 깍은 거대한 향로(香爐)를 지날 때였다.

[되돌아가라!]

돌연 향로 위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흑영이 득달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한 줄기 강맹한 잠경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급히 일장을 마주쳤다.

퍼펑!

일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급습한 자는 막비강의 강력한 장력에 의해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가더니 허공에서 한바퀴 맴돈 후 바닥에 내려섰다.

그자 역시 거지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이 매우 음독하고 흉폭한 인상이었다. 허리에는 여섯 개의 마대를 차고 있어 그자의 개방에서의 지위가 호법(護法)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년 거지가 막비강을 막아선 사이에 수백명의 거지떼가 그의 뒤에 이르렀다.

[사문(四門)에 용호풍운진(龍虎風雲陣)을 펼쳐라!]

육결(六結)의 마대를 지닌 중년 거지는 뱁새눈을 부릅뜨며 막비강 뒤쪽의 거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거지떼들은 그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게 움직여 막비강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포진이 끝나자 중년의 거지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방의 총타(總舵)에 쳐들어 와 난동을 부리다니! 그렇게 자신 있으면 본 호법의 일초를 더 받아내어 보아라!]

막비강은 방금 전 비록 총망중이었지만 오성(五成) 가량의 공력을 사용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일 장 가량밖에 밀려나지 않자 상대방의 공력도 약하지 않음을 알았다.

게다가 굳이 개방과 적대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지라 막비강은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나는 개방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다만 이 대석비곡을 빌려 몇 명의 친구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이미 귀방의 분타가 되어 있더군요. 아까 귀방의 분이 먼저 욕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출수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귀하는 나를 너무 곤경에 빠뜨리지 마시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막비강이 정중하게 말하자 중년 거지도 안색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의 이름은 곡능천이라고 합니다.]

[곡능천? 이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중년 거지는 이마를 찡그리며 갸웃했다. 개방의 정보력은 아주 빼어나 어지간한 무림인의 신상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약관도 안된 나이에 개방의 호법인 자신을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지닌 젊은 고수의 이름은 언 듯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거지가 얼른 말했다.

[() 호법! 아마도 이 애송이가 혈검산장에서 도망쳐 나온 개 망나니 막비강일 것입니다. 저 놈을 생포하여 막장주에게 인계하면 필시 후한 보상을 줄 것입니다.]

철 호법이라 불린 중년 거지는 막비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아! 너는 사실 혈검산장의 둘째 아들 막비강인데 곡능천이라는 가명을 지어 남의 이목을 속이고 있지?]

철 호법의 말에 막비강은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내 성은 곡가요. 그리고 막비강이 누군지 전혀 모르오.]

철 호법이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네 사부는 누구냐?]

[내게는 사부가 없소.]

[그럼 네 부친은 누구냐?]

그자의 질문에 막비강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지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핫하하....]

거지 떼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한 놈이 조롱을 했다.

[이놈은 이제 보니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잡종이었구나. 그렇다면 아까 내가 한 말이 맞았잖아! 아랫도리를 아무 놈한테나 내돌리는 갈보의 새끼였어!]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자는 바로 그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흉악한 인상의 거지였다.

그자가 또 자신의 어머니를 갈보 운운하자 막비강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그 주둥이 닥치지 않으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그러자 철 호법이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린 녀석아, 여러 말 마라! 네가 본방이 포진한 용호풍운진을 뚫고 나간다면 순순히 놓아주겠다. 하지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타구봉(打狗棒)으로 백 대를 갈긴 다음 너의 부친에게 데려가겠다.]

[좋다. 얼마든지 덤벼 봐라!]

[야앗!]

철 호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타구봉을 휘둘러 왔다. 그러자 사면팔방에서도 무수한 지팡이 그림자가 막비강을 공격해 왔다. 개방이 자랑하는 용호풍운진이 펼쳐진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막비강은 날아드는 타구봉들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비록 겉보기에는 진세가 화려하고 기세등등했지만 정작 타구봉을 휘두르는 자들의 공력은 보잘 것 없어 위협이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휘익!

난무하는 타구봉들을 피해낸 막비강은 다음 순간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을 쭉 뽑아 올려 옆에 선 거대한 석촉대(石燭臺)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의 이같은 경신술에 거지떼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하하! 이걸로 진을 통과한 것으로 합시다.]

호탕하게 외친 막비강은 즉시 석촉대를 뛰어내려 곡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서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이없이 막비강을 놓친 철 호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부득 갈며 뒤쫓아왔다. 다른 거지들도 들개 떼처럼 아우성을 치며 그자의 뒤를 따라온다.

[! 개떼가 따로 없군!]

막비강은 냉소하며 곡구를 향해 줄달음쳤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에 막 세 명의 늙은 거지가 꾸부정한 몸을 이끌고 곡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막비강은 급히 외치며 그 세 늙은 거지의 머리 위를 단숨에 뛰어넘으려 했다.

[쯧쯧! 버릇없는 아해로다! 존장의 머리를 타넘으려 들다니...!]

하지만 혀차는 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인영이 선뜻 막비강 앞으로 날아올랐다.

[비키시오!]

막비강은 다급히 외치며 일장을 후려쳤고 그 인영도 즉시 마주 손을 내밀었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일며 막비강은 온몸이 진탕함을 느끼고 지면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막비강을 저지한 것은 곡구로 들어서던 세 늙은 거지 중 가장 키가 크지만 대신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늙은 거지였다.

막비강을 막아선 세 늙은 거지들이 모두 일곱 개의 포대를 메고 있다.

막비강은 그들이 바로 개방의 장로급 거지들임을 알아보고는 내심 긴장했다.

[흘흘! 우리 금릉삼로(金陵三老)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면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애송아.]

막비강을 가로막은 깡마른 노개가 앞으로 나서며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 비루먹은 늙은이들이 금릉삼로라니...!)

금릉삼로라는 이름에 막비강은 흠칫했다. 그들이 강남개방의 최고원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숫자만 많고 절정고수가 없는 개방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들 금릉삼로는 개방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노개들인 것이다.

상대방이 금릉삼로라는 사실에 내심 긴장했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자칭 삼로 중 한사람이라 하면서 차륜전(車輪戰)의 비열한 수단으로 어린 나를 제압할 생각이오?]

깡마른 거지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나 고죽개(骷竹丐) 학검성(鶴劍城)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스스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으니 상황이 다르다. 대신 우리 세 노화자는 절대 네게 부상을 입히지 않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지 마라!]

고죽개 학검성이란 늙은 거지의 말에 막비강도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겠소.]

학검성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거만한 녀석이구나. 큰소리치지 말고 먼저 손을 써봐라! 노부 앞을 무사히 지나가면 노부가 진 걸로 하겠다!]

이에 막비강은 늙은 거지를 덮쳐 가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하오.]

학검성은 상대방이 갑자기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자 내심 흠칫 놀랐다. 해치지 않고 어떻게 막비강을 제압한단 말인가?

[교활한 녀석 같으니!]

학검성은 눈을 부라리며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그러자 막비강은 어깨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돌연 뚱딴지같은 함성을 질렀다.

[!]

학검성이 어리둥절하여 손을 멈추며 물었다.

[너는 방금 뭐라고 말했느냐?]

쌍방의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지라 절대 정신을 분산시켜선 안 된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옆을 재빨리 통과하며 히히 웃었다.

[코는 제일 미끄러운 곳이라 쉽게 잡히지 않소이다.]

학검성은 몸을 돌려 막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어린 녀석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잘못 하면 오늘 본방이 창피를 당하겠구나.)

꾀를 써서 학검성을 통과한 막비강은 또 다른 늙은 거지 앞에 도착했다. 금릉삼로 중에 가장 풍채가 좋고 인상도 좋은 노개였다.

[죄를 범하겠소이다!]

!

막비강은 외마디 고함과 함께 오른손을 뻗어내는 척하다 갑자기 그 뒤쪽에서 왼손을 불쑥 밀어냈다.

이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일신 무공이 학검성보다 훨씬 고강했다. 그래서 막비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비강이 허초(虛招) 뒤에 실초(實招)를 숨기는 수단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바람에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엉겁결에 막비강의 왼손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지도 못했다.

! !

늙은 거지는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비틀거리며 일 장 밖으로 밀려나갔다.

[이 교활한 애송이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을 통과한 막비강을 뒤에서 덮쳐 왔다.

풍채 좋은 늙은 거지 옆을 지나치던 막비강은 갑자기 등 뒤에서 강맹한 경풍이 뻗어옴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격하려는 늙은 거지를 향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당신은 나를 통과시켜주고도 계속 공격을 하는 겁니까?]

[너는 노부가 미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기습을 했으니 통과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은 지금껏 준비하지 않고 뭐 했소?]

막비강의 그 말에 늙은 거지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범 형(范兄)! 통과시키시오. 그 망나니를 나 지당개(地堂丐) 이건영(李建英)이 혼내 주겠소!]

금릉삼로중 마지막 한 사람인 땅딸막한 늙은 거지가 나서며 말했다. 키가 작은 데가 살이 쪄서 온몸이 둥글 둥글한 이 노인의 눈빛은 새파란 빛을 띠고 있다.

(개방은 용독(用毒)에도 뛰어나다더니 이 늙은 거지는 독공(毒功)을 익혔구나!)

막비강은 지당개 이건영이란 땅딸보 거지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서 그가 일종의 독공을 연마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데다가 남산의성 악불령이 준 천오주도 갖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음독한 독을 쓴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혼내진 말게!]

범씨 성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물러서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은연중에 막비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그런 범씨 성의 노개에게 호감이 갔으나 내색하지 않고 오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당신은 아무 걱정말고 갖고 있는 재주를 다 펼쳐보시오! 내 얼마든지 상대해주겠소!]

막비강의 광오한 말에 지당개 이건영의 파란 눈빛에 살기가 더해졌다.

[애송이 놈! 스스로 자초한 화니 노부를 탓하지 말아라!]

지당개는 말하면서 양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의 열 손가락이 모두 검프르게 변해있었다.

(독공이다!)

겉으로는 큰 소리를 쳤지만 막비강은 내심 긴장했다. 독공은 처음 상대해보는 때문이다.

장내에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비강과 지당개 이건영은 서로를 노려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칫 먼저 움직였다가는 상대방의 격렬한 반격을 받을까 꺼려해서였다.

헌데 그 일촉즉발이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이장로!]

화라락!

한소리 호통과 함께 계곡 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어왔다.

[방주(幇主)를 뵙소!]

나타난 인물의 뇌성 같은 고함 소리를 들은 거지들은 즉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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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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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분서주

 

 

 

헌원여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막비강은 다시 비석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히 각지로 비석을 찾아다니면서도 틈틈이 헌원여호의 십팔초 도법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비강이 하남성 동쪽 끝에 자리한 청양(淸陽)이란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청양현 교외의 관도를 지나다가 꼬불꼬불한 오솔길 끝에 큰 무덤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다.

명문가의 무덤인지 주위로 수천평의 묘역(墓域)이 잘 가꾸어진 무덤이다. 무덤을 에워싼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들 하나 하나가 아람드리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이 아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덤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높이가 무려 삼 장이 넘고 넓이는 여덟 자 가량이나 되었다. 그것은 막비강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비석보다도 컸다.

(! 정말 큰 비석이구나!)

막비강이 내심 기뻐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황원현고위무대장군봉만호남궁공지묘(皇元顯考威武大將軍封萬戶南宮公之墓)>

 

무덤의 주인은 낭궁(南宮)성을 지닌 이 지방 출신 고위무장의 것이었다.

막비강은 이 비석 밑이야말로 무예비급을 숨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라 단정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늘 갖고 다니던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숱한 비석을 파헤치며 그의 땅 파는 재주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비석 밑을 완전히 파헤쳐 비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석 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석 자 가량 더 팠지만 여전히 낡은 종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비석을 보았지만 이 비석이 제일 큰데... 이것말고도 더 큰 비석이 어딘가에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 자만 더 파볼 요량으로 다시 또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 간악한 도적놈!]

꽈릉!

등뒤에서 난데없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등 뒤에서 한 줄기 경풍이 노도처럼 엄습했다.

돌연한 기습에 막비강은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일 장 가량 피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리며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누구요?]

위기를 모면한 막비강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르고 아주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 눈에서 분노의 안광을 발산하며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은 자신의 일장이 빗나가자 더욱 더 노하여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애송이 도적놈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누가 감히 너더러 우리 선조의 묘비를 훔쳐오라고 시키더냐?]

막비강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노인장, 고정하십시오. 저는 결코 묘비를 훔치는 도둑이 아닙니다.]

[노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느냐? 훔칠 생각이 없다면 왜 묘비를 쓰러뜨렸느냐?]

[... 그것은 소문에 거대한 비석 밑에는 육령지(肉靈芝)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기에 이런 짓을 했으니 노인장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육령지가 어째?]

붉은 얼굴의 노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다, 그는 문득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막비강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하! 이제 보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혈검산장에서 아비의 보물을 훔쳐 도망친 망나니 녀석! 네놈을 잡아 혈검산장으로 끌고 가겠다.]

막비강은 노인이 한 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노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노인장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석을 쓰러뜨린 건 사실이니 원래대로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혈검산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혈검산장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는지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대담하게 이름을 바꾸어 노부를 속이려 들어?]

막비강의 변명에도 노인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네 아비가 무림의 여러 문파에 너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두루 보내 체포를 부탁했다! 용모파기에 적힌 대로라면 네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단호(丹壺;붉은 호리병)가 네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패륜아인 증거다.]

막비강은 막고천이 자신의 용모파기를 무림에 뿌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노인장께서 믿지 않으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제 이름은 곡능천이며 이 호로는 가친께서 술을 사서 담아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선 단호라 말씀하시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주둥아리 닥쳐라! 네놈은 혈검산장의 패륜아 막비강이 분명하다.]

[노인장은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곡능천이 막비강으로 변하고 호로가 단호로 변하다니 노인장께선 혹시 술을 많이 잡수신 것이 아닙니까?]

막비강의 비아냥에 노인은 화가 치밀어 그렇지 않아도 붉은 얼굴이 자색으로 변했다.

[네놈이 막비강이든 곡능천이든 상관없이 오늘 네놈을 때려죽이지 못하면 노부 남궁수방(南宮秀方)은 이곳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겠다.]

(남궁수방!)

막비강은 노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늙은이가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중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셋째 가주인 적면화룡(赤面火龍) 남궁수방이었다니...!)

본래 무림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오대세가다.

사천당문(四川唐門), 하북팽가(河北彭家), 진주언가(秦州諺家), 남천뢰가(南天雷家), 그리고 하남의 토호(土豪)인 남궁세가가 바로 오대세가다.

 

적면화룡 남궁수방!

 

이 인물이 바로 하남(河南) 남궁세가의 셋째 가주다.

그리고 막비강은 몰랐으나 그가 파헤친 비석은 바로 남궁일족 선조의 묘비였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하남 일대의 큰 토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덤의 주인이 일찌기 비옥한 하남 땅에 많은 땅을 사놓았던 덕분이다.

(! 재수 없게 걸렸군!)

막비강은 지금의 자기 실력으로는 절대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제일이지!)

화라락!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허리를 비틀어 묘역 밖을 향해 전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채 묘역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였다.

[흐하하! 어디를 가느냐, 어린 도적놈아!]

맞은편에서 한 줄기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명 얼굴의 푸른 노인이 쏘아 왔다.

(저자는...!)

막비강은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 푸른 얼굴의 인물이 남궁세가의 둘째 가주인 청면수라(靑面修羅) 남궁중방(南宮仲方)임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하여 급히 방향을 돌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동백나무 숲 속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핫하하! 이놈아, 너는 스스로 육임대진(六任大陣)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

남궁수방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고 경물이 사라지며 운무(雲霧)가 확 피어올랐다.

(아차! 진 속에 빠졌구나!)

막비강은 자신이 기문진에 빠졌음을 알고 실색했다. 이 동백나무 숲에는 도굴꾼들을 사로잡기 위해 진법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남궁수방의 흉험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네 아비 막고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 때려죽였다. 노부는 네놈을 진식 속에서 배를 곯아 반쯤 죽도록 만든 다음 꽁꽁 묶어 네 아비에게 보내겠다.]

막비강은 동백나무 숲 속에서 방향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어빠진 노적아!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수방이 냉랭히 대꾸했다.

[어린 녀석이 어른도 몰라보다니, 노부는 우선 네놈을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때려 두 번 다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겠다.]

막비강이 재차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였다.

[아이야, 그와 말다툼하지 마라! 노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

돌연 귓전에 생소한 음성이 전해 왔다. 그 음성은 너무나 가늘어 모깃소리 같았지만 똑똑히 들렸다.

막비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근에 고인이 숨어 있음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며 고의로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중방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나를 보자 자진해서 진 속으로 뛰어든 그 어리석은 놈은 도대체 누구냐?]

[형님은 놈이 막고천의 망나니 둘째 아들놈임을 모릅니까?]

[! 그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말이냐?]

[그 되먹지 않은 놈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거 참 이상하구나. 내가 듣기로 막고천의 둘째 아들은 본래 병약하여 병아리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무게가 삼천 근이 넘는 우리 조상님의 비석을 넘어뜨릴 수 있었느냐?]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하지만 소제는 그 놈이 막비강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나 지니고 있는 붉은 호리병이 막고천이 보내온 용모파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사나흘 배를 곯려 놓은 뒤에 사로잡아 확인합시다.]

막비강이 상대방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을 때였다.

[아이야, 내가 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라. 앞으로 세 걸음... 우측으로 돌아 여덟 걸음... 좌측으로 돌아 한걸음... 앞으로 반걸음... 다시 좌측으로 돌아 열 걸음....]

귓전에 아까 그 모깃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막비강은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득 눈앞이 탁 트이며 이미 동백나무 숲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면전에는 육순 남짓한 의원 차림의 노인이 오른손에 약초를 캐는 호미를 들고 막비강을 향해 빙긋이 웃고 서 있었다.

[! 빨리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막비강의 반응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비강은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그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의원 차림을 한 이 노인의 걸음걸이는 바람 같아 막비강은 달려야지만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약 반시간 가량 따라가자 노인은 녹음이 짙은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밀림 안에 들어서더니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어린것이 제법 날래구나.]

막비강은 이 노인이 구출해 주지 않았다면 혈검산장으로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아는지라 얼른 큰절을 했다.

[선배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으면 후배 곡능천은....]

노인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을 가로챘다.

[아이야, 네 이름은 정말 곡능천이냐?]

막비강은 은인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급히 또 포권의 예를 올렸다.

[후배의 본명은 막비강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변고를 당해 곡능천이라 이름을 고쳐 강호를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혈검산장 금사혈검 막고천의 자식이 틀림없구나.]

막비강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곤혹의 빛을 띠며 물었다.

[너희 집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느냐? 그리고 네 부친 막고천은 무엇 때문에 사면팔방으로 사람을 풀어 너의 행방을 수색케 하고 있느냐?]

[이 일은 관계가 너무 중대하므로 당돌한 요청입니다만 노선배님의 존함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의 성은 악()가고...!]

순간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무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한 분 기인을 떠올리고 얼른 말을 받았다.

[혹시 남산의성(南山醫聖) 악불령(岳不靈) 노선배님이 아니십니까?]

막비강의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감히 의성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다만 몇 가지 약초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남산의성 악불령!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최고의 신의(神醫). 그의 재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백골에 살을 붙일 지경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또한 그는 의술뿐만 아니라 기문둔갑의 재주와 무공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강호칠절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다.

막비강은 급히 포권을 했다.

[후배가 미처 몰라 뵙고 실례했습니다. 사실 집안의 변고는 입을 열기 부끄럽습니다. 막고천은 후배의 생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집을 나온 것입니다.]

남산의성 악불령이 놀라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너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느냐?]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눈물을 글썽이며 처연한 표정을 짓자 얼른 또 말을 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노부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 묻겠는데 네가 남궁세가 조상의 묘비를 파헤친 의도는 무엇이냐?]

막비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육령지를 찾아 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불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이야,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육령지는 심산유곡에 들어가 찾아야지 어찌 남의 조상의 묘혈(墓穴)을 파헤쳐 얻으려 하느냐?]

악불령의 말에 막비강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악불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년의 무성(武聖) 청구상인께서는 자신의 청구단서를 지기(地氣)가 서린 한곳 용혈(龍穴)에 묻어 두었다는구나.]

(이분은 내가 비석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막비강이 부끄러워할 때 악불령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너의 무예로는 남궁세가의 세 가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도운다면 그들도 너를 어떻게 못할 테니 이 기회에 그것을 꺼내 오너라. 그러면 우리 두 사람에게 피차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후배는 노선배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노부는 우선 네게 몇 가지 진법과 내공의 입문공부를 가르쳐 주겠다. 그런 다음 보름 후 달 없는 밤에 다시 그곳에 가서 무덤을 파헤치자.]

막비강은 악불령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자 황급히 큰절을 했다.

비록 막비강이 강호의 일류고수들인 염라철장과 무협제원등의 무공을 연마하긴 했지만 제대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해 그 위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초식과 달리 내공심법은 이끌어주는 스승이 없으면 큰 성취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막비강이 절을 하려 하자 악불령은 담담히 웃으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노부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큰절까지 할 필요 없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와 환약이 든 봉투를 꺼내 막비강에게 주었다.

[노부가 보니 너의 자질이 뛰어난지라 내공심법 뿐만 아니라 특별히 노부의 진보약학(陣譜藥學)까지도 전수해 주겠다. 이 책자엔 노부가 연구하여 얻은 학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보름 동안 빌려줄 테니 열심히 보도록 해라.]

두 권의 책을 건네준 악불령은 이어 여러 알의 환약이 든 봉투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 약환은 역용환(易容丸)인데 각종 색깔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알을 사용하면 약효가 보름간 지속된다. 사용할 땐 물 속에 풀어 피부에 발라라. 그리고 원래 면목을 회복하려면 양잿물에 씻으면 된다.]

막비강은 두 손으로 환약도 받아 품속에 넣고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지금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보름 후 후배는 어디서 노선배님을 기다릴까요?]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그 책자들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악불령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 교활한 가짜놈 같으니...!]

난데없이 나직한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코웃음 소리를 들은 악불령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뽑아 올려 십여 장 밖의 고목 위로 덮쳐 갔다.

와지직!

일순 무성한 나뭇가지가 강맹한 장력에 부러지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으며 악불령은 나무줄기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과연 강호칠절 중 한 분답구나!)

막비강은 의성 악불령의 고절한 무공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악불령은 상대방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듯 나무줄기 위에서 한바퀴 맴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막비강이 놀라고 있을 때 또 다른 방향에서 냉소 소리가 전해 왔다.

[!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노적 같으니...!]

악불령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방면의 고인인지 모습을 나타내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

[오냐! 원한다면 나타나 주마!]

냉랭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예리한 파공성을 대동한 채 쏘아 왔다.

[! 당신은...!]

화라라락!

악불령은 안색이 일변하더니 황급히 숲 속으로 도주해 들어갔다. 그는 얼마나 급했던지 약초 캐는 호미까지 팽개쳐 두고 도망쳤다.

막비강은 잠시 머뭇거리다 허리를 굽혀 그 호미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이야, 잠깐 기다려라!]

화락!

말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그 사람은 고희의 나이에 인자한 용모를 지닌 갈포(葛布) 노인이었다.

노인은 막비강을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너는 속았다. 하지만 노부는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 가짜 악불령은 어디로 도망쳤느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노선배님께선 왜 그를 가짜라 하십니까?]

[그것은 노부가 바로 악불령이기 때문이다.]

[예에? 선배님이 남산의성이시라구요?]

막비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자의 이름은 강용(江庸)이고 별명은 소리장도(笑裏藏刀). 한 달 전 노부가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노부의 채약 도구인 뇌강서(雷鋼鋤)와 약물감별필록(藥物鑑別筆綠)을 사취해 갔다. 노부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 헤맸는데 여기서 또 놓치고 말았구나.]

나타난 노인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막비강은 강용이란 자가 도주할 때의 낭패한 모습으로 미루어 면전의 노인이 진짜 악불령이라 단정하고 강용이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악불령에게 돌려주었다.

[악 선배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은 이것입니까?]

악불령은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를 받아 뒤적여 보더니 가벼운 탄식을 했다.

[너는 매우 정직하구나. 이 두꺼운 약전(藥典)은 노부의 물건이다. 그러나 이 기공입문법(氣功入門法)은 강용의 물건이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노부는 여기서 보름만 머물며 네게 기공입문공부를 전수해 주겠다. 네 의사는 어떠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언일 따름입니다!]

막비강은 얼른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강용을 만나게 된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악불령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노부의 약초 캐는 호미를 사취해 간 것은 이제 보니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고 소문난 위왕묘(魏王墓)를 도굴하기 위해서였구나.]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위왕묘를 파는 데 왜 선배님의 약초 캐는 호미가 필요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파지 못합니까?]

[위왕묘는 사방이 한철(寒鐵)로 뒤덮여져 있기 때문에 보통의 도구로는 이가 먹히지 않는다! 오직 노부의 뇌강서만이 한철의 극성이라 도굴이 가능하지. 물론 간장(干將) 막야(莫耶)같은 보검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많은 시간과 진력을 소모해야 한다. 위왕묘를 도굴하려면 노부의 뇌강서가 제일 적격이지. 하지만 위왕묘에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믿지 못할 소문이다.]

[청구단서가 위왕묘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진 노부도 모른다.]

악불령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너도 생각해 봐라. 청구상인이 죽은 지는 채 백년도 되지 않는다. 반면 위왕은 삼국시대의 효웅 조조(曹操)를 칭하는 게 아니냐? 두 사람의 시대가 천년 넘게 차이가 나는데 위왕묘 안에 청구단서가 있을 리 있겠느냐?]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막비강도 고개를 끄떡였다.

[강용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진 모르겠지만 기관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는 위왕묘에 들어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단서가 비석 밑에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이 비급은 그가 절예를 연성하고 피맺힌 원수를 갚는 데 중대한 관계가 있는지라 악불령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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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덤에서의 하룻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비강은 나직한 떨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몸 아래 무언가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나직이 떨며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내가 헌원여호 아주머니와...!)

막비강은 문득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 질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손바닥 가득히 뭉클하는 살덩이가 만져졌다.

눈을 뜬 막비강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막비강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헌원여호의 한쪽 가슴을 누른 것이다

[...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막비강은 더듬거리며 급히 헌원여호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헌원여호의 벌려 세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된 막비강은 다음 순간 숨이 콱 막히는 충격을 받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무렵 어느덧 날이 밝아 고묘 입구로 밝은 햇살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 넓지 못한 석관 속인지라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 위에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석관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누워있는 헌원여호의 자세는 실로 뇌쇄적이었다.

저고리는 벗겨져 있고 치마는 허리춤까지 걷혀 올라가 있었다.

석관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헌원여호는 석관 속에 반듯하게 눕고 자신의 몸 위에 막비강을 태운 자세로 잠이 들었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한 아름이 넘는 육중한 허벅지는 비스듬히 벌려 세워져 있었다.

벌려 세워진 허벅지 중심부에는 막비강이 헌원여호에게 동정을 바치고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되었다는 증거가 보였다.

(안 돼!)

막비강은 실색을 하며 급히 석관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허리를 잡아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막비강이 놀라 내려다보니 헌원여호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막비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아주머니!]

막비강이 어찌할 줄 몰라 더듬거리려는데 헌원여호가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분면색마의 마수에 떨어져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네게 입은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겠구나!]

헌원여호는 암호랑이라는 무림의 평판과 달리 너무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견마지로를...!]

말하던 헌원여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막비강이 울상을 지으며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리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

(요 색골 꼬마가...!)

헌원여호는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본래 그녀는 사내를 버러지처럼 아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정 내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의 부친 사해신존 헌원궁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옛말을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사해신존은 숱한 여자를 사랑하여 여러 명의 자식들을 낳았었다.

헌원여호도 사해신존이 칠순이 넘어 손녀 같은 어린 시녀를 건드려 낳은 자식이었다.

시녀였던 어머니의 비천한 신분이 어린 헌원여호에게 큰 상처를 주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의 성격이 비뚤어진 것은 철이 들기도 전에 당한 난행(亂行) 때문이었다.

유달리 조숙한 그녀를 배다른 오라버니가 욕정의 제물로 삼아 버린 것이다.

 

헌원여호는 어렸을 때도 성장이 빨랐다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물론 체격만 컸지 그녀는 여전히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였다.

헌데 그런 그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복 오빠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헌원여호의 이복오빠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아주 살갑게 대했다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이런 저런 장난감이나 소품들도 자주 선물해주었다.

대신 툭하면 끌어안기도 하고 몸의 여기저기를 만지기도 했다.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어린 헌원여호는 이복 오빠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가급적 그녀를 이복오빠와 단 둘이 있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녀출신인 헌원여호의 어머니는 본처처럼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다

늙은 남편의 시중을 비롯하여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딸을 혼자 두는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봄날 마침내 사단이 벌어졌다.

늘 다정하던 이복오빠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그녀를 유린한 것이다.

그렇게 헌원여호는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순결을 잃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이복오빠에게....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헌원여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이 그녀로 하여금 사내라면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만일 다른 사내가 자신의 몸에 야심을 품었다면 그 즉시 상대의 눈알을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순진무구한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그녀는 더 이상 강호에 알려진 그 무서운 암호랑이가 아니었다.

 

헌원여호는 간밤의 경험이 막비강으로서는 처음임을 모를 리 없었다.

치욕스런 첫 경험으로 그녀 자신이 어떤 상처를 입었던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막비강이 혹여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근심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억눌러 왔던 열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 어차피 이 아이에게 허락한 몸...!)

이미 막비강을 한차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겠구나!]

헌원여호는 발그레 상기된 표정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미끈한 두 다리를 들어올렸다.

(허억!)

순간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 사이에 헌원여호는 벌려 쳐든 자신의 다리를 석관의 양쪽 모서리에 걸쳤다.

헌원여호도 다시금 흥분되어 숨을 할딱이며 막비강을 재촉했다.

드넓은 대지같은 헌원여호의 몸에 엎드린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막비강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그는 혼자였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고 헌원여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의복은 대충 입혀진 상태였는데 머리맡에 한 권의 비단책자가 놓여 있었다.

 

<헌원십팔해(軒轅十八解)>

 

고색이 창연한 그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헌원여호 가문의 비전무공 중 하나인 헌원도법(軒轅刀法)의 비급이었다

헌원여호는 하룻밤 인연의 표시로 자신의 절기가 담긴 그것을 막비강에게 남긴 것이다.

 

<널 잊지 않으마!>

 

표지 안쪽에는 그 같은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저도 아주머니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막비강은 비급을 꼭 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간밤의 일이 흡사 일장춘몽처럼 여겨졌다

막비강은 뜻밖의 상황에서 어엿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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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관 속에서 벌어진 일      

 

 

 

(과연 백도제일고수의 딸답구나!)

막비강은 소문으로만 듣던 헌원여호의 위풍에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색쌍요(花色雙妖)! 너희 연놈들이 더 이상 세상의 선량한 남녀를 망치지 못하도록 해주마!]

그때 장내의 헌원여호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하며 두 간부간녀에게로 다가섰다.

(저자들이 화색쌍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분면색마(粉面色魔) 관지(關志)!

 도화요희(桃花妖姬) 전옥교(全玉嬌)!

 

이것이 두 탕부탕녀의 이름이었다.

그자들은 한 사부를 모신 사형제간이며 또한 사실상의 부부이기도 했다

음탕한 방중술(房中術)과 채보술(採補術)로 악명을 떨친 쾌활문(快活門)이라는 문파가 그들의 사문이다.

또한 그자들은 중원육요(中原六妖)에 드는 절정고수들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무협제원이나 염라철장에 필적하는 고수들인 것이다.

만일 막비강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뛰어들었다면 응징을 하기는커녕 그들의 수중에 떨어져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원래 그자들의 실력으로는 단신으로 헌원여호와 충분히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둘 다 심한 중상을 입어 운신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실 헌원여호는 일찍이 청련사에 침입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단신으로는 화색쌍요를 확실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한 것이다.

막비강이 본 두 야행인 중 두 번째 야행인의 정체가 바로 헌원여호 헌원빙이었던 것이다.

[죽어랏! 네놈에게 몸을 망친 여자들을 대신해서 응징을 내린다!]

번쩍!

헌원여호는 중상을 입어 기식이 엄엄한 도화요희는 제껴 두고 먼저 분면색마에게 호치도를 휘둘렀다.

[악독한 계집!]

분면색마는 욕지거리를 해대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일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헌원여호는 더욱 사납게 칼을 휘둘렀다.

분면색마도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살수를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마침내 분면색마는 한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자의 몸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으으! 네년이...!]

분면색마는 절망의 표정으로 헌원여호와 그녀의 호치도를 올려다보았다.

[단칼에 죽여 주는 것을 감사해라!]

헌원여호는 냉혹한 표정으로 웃으며 호치도를 높이 쳐들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돌연 헌원여호의 당당한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으음!]

이어 갑자기 헌원여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헌원 아주머니가 왜 저러지?)

돌연한 상황에 막비강은 어리둥절했다.

[으하하하! 네년이 제 꾀에 빠졌구나!]

순간 그때까지 죽을상이던 분면색마가 갑자기 득의의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흐흐! 어떠냐, 헌원 계집년아. 환락쾌활분(歡樂快活粉)의 효과가?]

[흐윽! ... 네놈이 언제 최음제를...!]

헌원여호가 분노와 절망에 찬 음성으로 신음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삽시에 장작불처럼 달아올랐다

지독한 최음제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흐흐! 궁금하다면 가르쳐 주지! 본좌의 묘약은 바로 저 황촉(黃燭)에 뿌려져 있었다!]

(! 그래서 비구니들이 모두 최음독에 중독당한 거였구나!)

분면색마의 말에 막비강도 확연히 깨달았다

분면색마는 황촉에 최음독분을 섞은 채 비구니들을 불러들여 그녀들을 색욕의 노예로 만든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헌원여호는 무방비 상태로 독연기를 들이마셨으며 게다가 거푸 내공을 사용한 탓에 독기가 급속도로 온몸에 퍼져 버린 것이다.

[... 이 간악한...!]

헌원여호는 이를 갈았으나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그런 그녀를 분면색마는 거칠게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헌원여호는 무력하게 넘어졌고, 그 바람에 치마가 걷혀 새하얀 허벅지가 일부 드러났다

육척이 넘는 체격에 어울리게 그녀의 허벅지는 한 아름이 넘어 보일 정도로 투실투실하다.

[흐흐! 감히 본 신선의 몸에 상처를 냈겠다!]

드러난 헌원여호의 흐드러진 허벅지를 훑어보며 분면색마는 잔혹하게 키득거렸다.

[네년을 매음굴에 팔아버리겠다! 흐흐흐! 위명이 쟁쟁한 헌원여호께서 창녀가 되어 아무 놈에게나 가랑이를 벌리고 몸을 판다면 강호의 화젯거리가 되겠지?]

분면색마는 간악하게 웃으며 헌원여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헌원여호는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푸들푸들 떨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분면색마는 입맛을 다셨다.

[흐흐! 매음굴에 팔아넘기기 전에 우선 본좌가 일차 맛을 봐야겠다!]

그자는 만일에 대비하여 헌원여호의 혈도를 찍으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악적! 물러서랏!]

쐐액! 콰차창!

돌연 창문이 하나 왕창 부서지며 작은 그림자가 득달처럼 날아들었다

막비강이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다.

막비강은 자신이 결코 쌍요 같은 고수들의 적수가 못됨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무지막지한 살수를 휘둘렀다.

쐐애액!

그의 등에 짊어져 있던 곡괭이가 풍차처럼 분면색마에게 날아갔다.

[!]

분면색마가 깜짝 놀라 급히 물러서려는 순간 막비강은 이미 그의 지척으로 육박하며 장풍을 무찔러 내고 있었다.

분면색마도 다급히 장을 내밀어 막비강의 장풍을 맞받아쳤다.

퍼펑!

폭음이 일며 분면색마의 몸이 휘청했다

창졸간인지라 공력의 삼 할도 못 쓴데다가 호치도에 당한 옆구리의 상처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

그는 온몸이 쩌르르 울려 대여섯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일갑자 가까운 내공을 얻었다 해도 아직은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것이다.

[허허! 요 쥐방울만한 것이 감히...!]

상대가 누군지를 발견한 분면색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토했다.

[흐흐! 스스로 염라전에 뛰어들었으니 본좌를 야속하다 말아라!]

분면색마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막비강에게 다가들었다.

(우라질! 역시 육요의 이름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막비강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분면색마의 공력에 압도당해 찬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내공을 일으켜 분면색마와 맞설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사형! 그 귀여운 놈을 죽이진 말아요!]

한옆에서 상처를 추스르고 있던 도화요희가 다급히 외쳤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고 있던 그녀는 상대가 몸은 어른 같지만 얼굴은 아직 치기 어린 소년임을 알아보자 음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 망할 것아! 이런 지경에도 너란 년은...!]

분면색마는 화가 나서 도화요희 쪽을 돌아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그때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헌원여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녀의 호치도가 일섬 도광을 폭출했다.

[조심... 사형!]

[!]

[가자!]

세 마디의 서로 다른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분면색마는 갑자기 가해진 일격에 맞아 또다시 어깨에서 피분수를 뿜었다.

그자가 비틀하며 몸을 세웠을 때 이미 장내에는 헌원여호와 막비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헌원여호는 사력을 다해 분면색마에게 일격을 가한 뒤 막비강의 손목을 잡아채며 객당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서랏!]

분면색마가 이를 갈며 뛰쳐나갔으나 헌원여호의 모습은 이미 야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응봉현 교외에 자리한 공동묘지.

어두운 야음 아래 수많은 고분들이 음산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쐐액!

문득 야음을 가르며 한 줄기 인영이 유성처럼 고묘군 사이로 떨어졌다.

[흐윽!]

떨어져 내린 인영은 곧 괴로운 신음을 발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선배님! 정신차리십시오!]

그 인영에 이끌려 함께 바닥에 나뒹군 소년이 실색하며 외쳤다

그들은 바로 청련사를 탈출한 막비강과 헌원여호였다.

막비강과 함께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려온 헌원여호는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녀의 상세를 살피던 막비강은 다급해졌다

헌원여호의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겁고 연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때문이다.

(큰일났다! 어떻게 최음제의 해약을 구하지?)

막비강은 솥 안에 빠진 개미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두 사람이 날아온 쪽에서 분노에 가득 찬 장소성이 들리지 않는가?

(쌍요다!)

막비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장소성의 주인은 바로 분면색마였던 것이다.

(여기 있다간 잡히고 만다!)

막비강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한 몸이야 어떻게 숨는다 해도 헌원여호가 분면색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일대기인인 그녀가 분면색마 같은 색마에게 능욕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급히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의 시야에 하나의 커다란 고묘가 들어왔다.

(우선 저기로 숨고 보자!)

막비강은 급히 헌원여호를 들쳐업고 고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해야 했다

고묘 안은 휑뎅그렁하여 몸을 숨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한 듯 고묘 안에는 깨진 도자기 파편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묘실 가운데에는 큼직한 석관(石棺)이 하나 휑뎅그렁하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 뚜껑도 열려진 채 깨져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 봐야겠다!)

막비강은 급히 돌아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의 귓전으로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늦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분면색마가 지척까지 들이닥쳤음을 안 막비강은 도리 없이 헌원여호를 안고 뚜껑도 없는 석관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석관은 속이 깊고 넓어 둘이 들어갔음에도 공간이 넉넉했다.

막비강은 헌원여호를 바닥에 누이고 자신은 그 위에 엉거주춤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비록 위급한 지경이지만 감히 몸을 완전히 밀착할 용기는 없어서 두 손으로 헌원여호의 동체 옆의 바닥을 짚어 버틴 것이다.

그래도 하체가 서로 맞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막비강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헌원여호의 튼실하면서도 보드라운 하체의 감촉이 막비강의 숨을 가쁘게 만든다.

헌원여호의 체격은 정말 당당해서 지난 반년 사이 쑥쑥 자란 막비강보다도 오히려 한 뼘 가량이나 더 컸다

그래서 막비강의 얼굴은 헌원여호의 가슴에 겨우 닿을 뿐이다.

막비강이 숨은 직후 인영이 번득하며 고묘 입구에 분면색마가 날아 내렸다

그자는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음!]

막비강의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가 열에 들뜬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가?

(큰일났다!)

막비강은 질겁했다

두 팔은 바닥을 짚고 있어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이 없다

이에 다급한 김에 막비강을 고개를 빼들고는 자신의 입술로 헌원여호의 입술을 그대로 덮어 눌러 신음 소리를 막았다.

[흐흐흐! 거기 숨어 있었느냐?]

하지만 분면색마가 눈을 번뜩이며 성큼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석관이 비록 제법 깊지만 뚜껑이 없는 상태이므로 그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그대로 들키고 말 지경이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후다다닥!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다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근처에서 도굴을 하던 도굴꾼들이 분면색마의 웃음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교활한...!]

막 석관 속을 들여다보려던 분면색마는 분노의 일성과 함께 석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그자가 누군가를 쫓아가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휴우! 정말 위험했다!]

막비강은 비로소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헌원여호의 몸에서 일어서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헌원여호의 팔다리가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이 질겁하는 사이 그녀의 미끈한 지체는 그를 마구 휘감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을 토해내는 그녀의 옥용은 숯불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의 몸을 휘감은 헌원여호의 온몸이 물결치듯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막히게 조여대는 사지,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의 살이 마치 솜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의 하체 일부가 맹렬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양물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보통 어른들을 오히려 압도할 정도로 장대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 그의 남성이 헌원여호의 자극으로 난생처음 극한까지 자라난 것이다

헌원여호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섬섬옥수는 막비강의 하의를 더듬어 벗겨 내렸다.

막비강은 이내 자신의 불덩이 같은 일부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는 것을 느꼈다.

이미 헌원여호의 치마는 허리춤으로 걷어올려져 허연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막비강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수컷의 본능에 따랐다.

뜨거운 신음과 함께 헌원여호의 우람한 팔다리가 막비강을 으스러뜨릴 듯이 휘감았다.

두 남녀의 육체는 한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채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에 매달리며 본능이 시키는 대로 허리를 굴렸다

막비강의 허리가 어색하게 들썩일 때마다 헌원여호의 입에서는 죽는 듯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차갑고 비좁은 석관(石棺) 속은 어느덧 뜨거운 열락의 낙원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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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암호랑이라 불리는 여인

 

 

 

(!)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그는 지금 한 칸 객당의 처마 밑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객당의 사방 창문은 두터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천이 조금 갈라진 곳으로 불빛이 흘러 나오며 객당 안의 정경이 막비강의 눈에 들어왔다.

헌데 굵은 황촉의 불꽃이 너울거리고 있는 객당 안에서는 차마 듣기 민망한 교성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 저런 천인공노할...!)

막비강은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나 하마터면 매달린 처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널찍한 객당의 바닥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 볼 난잡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들이었다.

비구니들은 나이가 천차만별로 십오륙 세의 어린 소녀가 있는가 하면 사십대의 원숙한 중년비구니도 있었다.

그녀들은 아마도 이곳 청련사의 비구니들인 모양이었다.

비구니들은 회색 가사를 훌훌 벗어버린 채 몸을 비틀며 거친 숨을 토하고 있었다.

(바득! 겉으로만 절이었지 사실은 창녀들의 소굴이었구나!)

막비강은 여승들의 치태를 보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현장을 떠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고것들...!]

문득 객당 안에서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막비강은 움찔 놀라 시선을 옮겼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객당 바닥 한구석에서 그는 천만 뜻밖의 광경을 본 것이다.

중년의 비구니와 어린 비구니를 사내도 여자도 아닌 아닌 자가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상체는 분명 여자인데 하체는 사내인 기괴한 자였다.

믿기지 않는 장면에 막비강은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비구니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모두 미약에 중독되었다!)

막비강은 비구니들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흐려져 있는 것을 알아보았.

(악독한 놈! 저놈이 여자로 위장하고 이 절에 유숙하며 비구니들에게 미약을 썼구나!)

비로소 사정을 이해한 막비강이 분노에 몸을 떨 때였다.

[호호호! 재미가 좋군요, 사형!]

삐꺽!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새로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실내로 들어선 것은 한 명의 미소부였다

풍만한 몸매에 요염한 용모를 지닌 삼십대 중반의 그 여인은 얇은 나삼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는 한 명 소년이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잠옷을 입은 그 소년은 막비강 나이 또래였다.

막비강은 나타난 여인이 바로 자신이 처음 보았던 야행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흐흐! 누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소?]

두 비구니를 농락하던 사내가 고개만 돌린 채 여인을 돌아보았다.

[! 너무 불공평해요! 사형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재미를 보고...! 다음번에는 중들이 사는 절에서 자자구요!]

여인은 안고 온 소년을 바닥에 누이며 눈을 흘겼다.

[흐흐! 좋도록 해라! 사매가 밤새 몇 명의 땡중을 파계시키는지 지켜보는 것도 각별히 재미있겠지!]

사내는 음탕하게 웃었다.

미소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납치해 온 소년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헌데 그녀의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때였다.

콰쾅!

갑자기 한 쪽 창문이 박살나며 한 줄기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지 않는가?

[죽어랏! 요망한 것들!]

번쩍!

날아든 인영은 앙칼지게 외치며 벼락같은 섬광을 두 탕부탕녀에게로 휘몰아쳐 냈다.

[!]

[!]

한창 열락에 빠져 있던 두 남녀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유린하던 제물들을 팽개치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하지만 암습자의 무공은 실로 신쾌한 것이었다.

스팟! 후두둑!

[!]

[!]

피가 확 번지며 두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소년을 농락하던 요부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가슴까지 쩍 갈라져 나뒹굴었고

비구니들을 유린하던 사내는 옆구리에서 피분수를 흘리며 물러섰다

요부는 왼쪽 가슴이 거의 두 쪽이 나 자칫했으면 심장이 쪼개질 뻔한 중상이었다.

[... 너는!]

[헌원여호(軒轅女虎)!]

나타난 암습자를 본 두 탕부탕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헌원여호라면 강호칠절 중에 드는 고수이신데...! 그분이 나타났단 말인가?)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해 고개를 쭉 빼밀고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실내에는 피투성이가 된 두 탕부탕녀 앞에 한 명 여인이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삼십오륙 세 정도, 여자의 몸인데도 키가 육 척(六尺)에 가깝고 체격이 딱 벌어져 한눈에 봐도 일대여걸의 풍모가 풍기는 여인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반면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 얼굴도 대단한 미모로 보는 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했다.

다만 눈썹이 사내처럼 짙고, 눈꼬리가 홱 올라갔으며, 입술의 모양이 단호하고 냉막하여 절로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여호(女虎)라는 별호가 실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수중에는 호랑이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날이 돋은 육중한 호치도(虎齒刀)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방금 두 탕부탕녀를 휩쓸어 버린 것이 바로 그 칼이었다.

(여자가 저토록 무지막지한 중병기를 쓰다니...!)

막비강은 절로 질려 숨을 죽였다.

 

 헌원여호(軒轅女虎) 헌원빙(軒轅氷)!

 

이것이 바로 무림의 암호랑이로 불리는 이 여걸의 이름이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녀는 정파백도의 유수한 고수들인 강호칠절 중 일인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대단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사해무련(四海武聯)>

 

당금 강호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세력들인 사패천 중 남패천(南覇天) 사해무련이 그녀의 출신인 것이다.

사해신존(四海神尊) 헌원궁(軒轅弓)이란 영웅이 육십 년 전에 창건한 사해무련은 사패천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다

무림인들은 사해무련을 공공연히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부를 정도다.

서패천 혈검산장, 동패천 유가총림(儒家叢林), 북패천 북산검호각(北山劍豪閣)등이 비록 사해무련과 함께 사패천으로 꼽히지만 실제 전력을 비교하면 사해무련에 비해 많은 손색이 있다

사실상 장강 이남의 무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남패천 사해무련인 것이다.

그 사해무련의 창건자 사해신존 헌원궁이 헌원여호 헌원빙의 생부다. 또한 당대 사해무련의 방주인 사해용왕(四海龍王) 헌원척(軒轅拓)은 헌원빙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다.

정파무림 제일고수로 추앙받는 사해신존의 진전을 이었기에 헌원빙은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호칠절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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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석을 찾아서

 

 

 

[내가 이번에도 죽지 않았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는 이미 자기가 토해낸 선혈과 호로가 있을 뿐 이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위! 개돼지 같은 놈! 네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를 때려 피를 토하게 했으렸다? 후일 네놈에게서 이 빚을 이자까지 합쳐 받아내고 말겠다.]

막비강은 금색 호로를 집어 허리춤에 매었다.

(이위 그 흉악한 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빨리 여기를 떠나자!)

그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바닥에 쓰러진 네 구의 시체와 서로 팔이 얽혀 마주 선 채 죽은 두 노인이 생각났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냥 갈 수는 없지!)

그는 다시 동굴이 있는 절벽 앞으로 돌아갔다.

현장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두 노인은 서로의 팔을 부여잡은 채 서 있을 뿐 몸에는 아무런 상처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분들은 대체 누구일까?)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하여 두 노인의 몸을 뒤져보았다.

먼저 염라철장의 허리춤에 가죽끈으로 매달린 큼직한 쇳조각 하나가 눈에 띠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바닥 모양으로 정교하게 주조된 강장(鋼掌)이었는데 상당히 컸다. 보통 어른 손바닥의 두 배정도 넓이에 길이도 세 배 가까이 된다. 또한 다섯 손가락 끝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있다.

막비강은 이 강장을 이리 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슨 상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강장의 손등 쪽에 다섯 개의 구멍이 파여 있어 손가락을 끼워보니 딱 맡는다. 이 강장은 손가락을 끼워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강장을 손에 끼고 장법을 펼치면 그 위력이 몇 배로 무서워질 것이다.

강장을 살펴보던 막비강의 마음은 이내 크게 격동되었다. 왜냐하면 강장의 형태가 금색 호로와 함께 품안에 들어 있었던 종이의 표식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이분 선배님께서 금색 호로를 내 품속에 넣어 주셨구나!)

막비강은 이위의 말투에서 호로 속에 담겨 있던 즙액이 바로 천고의 영약 금강옥액이었음을 확인했었다. 자연히 그것을 자신의 품에 넣어 준 염라철장에게 호감이 일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선배님의 은혜로 금강옥액을 먹어 병약한 체질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 은덕을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절을 올린 그는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기로 결심하고 염라철장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문득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막비강의 손에 닿았다.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서는 한 권의 책자와 상당량의 은자가 나왔다.

 

<염라장경(閻羅掌經)>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

막비강이 흥분하여 서둘러 책자를 펼쳐 보니 한 면에 장법(掌法)의 도식(圖式)이 하나씩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이 장법의 변화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막비강은 꿈에도 그리던 무공비급을 얻자 뛸 듯이 기뻤다. 그는 한시바삐 이 현묘한 장법이 수록된 책자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더욱 시급히 알고 싶은 것은 이 노인의 신분과 내력이었다. 해서 책자의 맨 끝장까지 뒤적여 보니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내 능력이 모자라 당한 일초(一招)의 원한은 참을 수 있지만 아내와 자식을 빼앗긴 울분은 잊을 수 없다! 막가 짐승을 다시 만나면 기필코 복수하겠다.>

 

이것은 비록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막비강에게는 마치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막가 짐승이라면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분 노인이 진짜 나의 부친이란 말인가?)

그는 생각을 굴리며 염라철장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용모는 비록 인자하게 생겼지만 아무리 보아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막비강은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관계를 추측할 수 없는지라 우선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저에겐 비록 생모는 한 분뿐이지만 의붓어머니는 다섯 분이나 더 계십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정말 저의 부친이시라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는 기도를 끝낸 후 책자를 품속에 넣고 강장은 자기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황씨 형제의 강추를 하나 집어 구덩이를 판 다음 염라철장의 시체를 매장해 주었다.

막비강은 무덤 앞에 무림선배염라철장지묘(武林先輩閻羅鐵掌之墓)라는 묘비를 세워 주고 큰절을 올렸다.

다음으로 그는 무협제원의 몸을 수색했다. 막비강은 곧 무협제원의 품에서 예리한 단검 한 자루와 그의 독문 무공이 수록된 비급 신녀원공보(神女猿公譜), 그리고 몇 알의 진주와 은자 꾸러미를 얻었다.

신녀비(神女匕)라는 검명이 새겨진 예리한 비수는 금석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였다. 무협제원은 이 신녀비를 무협의 어느 석실에서 얻었었다.

무협제원이 발견한 그 석실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죽은 거대한 원숭이의 골격과 그 원숭이의 골격을 끌어안고 죽은 가냘픈 여자의 시신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전설 속의 절세고수들인 월녀(越女)와 원공(猿公)이 아닌가 싶었지만 배움이 짧은 무협제원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신녀비와 함께 발견된 신녀원공보의 전반부가 썩어 문드러 져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신녀원공보가 온전한 상태에서 발견되었고 월녀와 원공의 독문내공심법까지 얻었다면 무협제원은 거의 천하무적이 되어 강호에 크나큰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막비강은 신녀원공보 뒷면에서 무협제원의 이름도 알아내고 그를 매장한 후 무림선배무협제원지묘(武林先輩巫峽啼猿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막비강이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고 나니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자연히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배도 매우 고팠다.

그는 나머지 네 구의 시체는 대충 매장한 다음 수림 속에 들어가 산과일로 배를 채웠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가을은 더욱 깊어져 웅이산은 온통 붉고 노란 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추의 어느 저녁,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짙게 번져 만산홍엽으로 변한 웅이산을 더욱 붉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얍! 차핫!]

문득 저녁의 적막을 깨고 맑은 소년의 함성이 웅이산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웅이산의 깊은 곳에 자리한 후미진 계곡 안쪽에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소년이 오른손에는 커다란 강장을 끼고 왼손엔 예리한 단검을 든 채 마치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뛰며 양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록 체격은 다 자란 어느 어른처럼 건장하지만 얼굴에는 아직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이다.

이 소년은 물론 기연으로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강호칠절과 중원육요 중에 드는 두 무림 고수의 비급을 얻은 막비강이었다.

그가 무공을 연마한 지는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한 대신 남달리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무공을 연마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지났음에도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무공을 거의 다 파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보통 사람이 일갑자 동안 수련한 것에 해당되는 심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내공이나 무공초식은 어느덧 무림 일류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지금의 그에게 모자라는 것은 실전 경험뿐이었다.

휙휙! 파파팟!

막비강이 날고 뛸 때마다 칼날 같은 경기가 사방으로 무지개처럼 뻗쳐 나가곤 했다.

[하하하! 이젠 염라장경과 신녀원공보의 무공이 모두 내것이 되었다!]

막비강은 돌연 병기를 철회하며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는 드디어 염라철장의 십팔초 염라장법(閻羅掌法)과 무협제원의 절기인 신원탈백소, 칠십이로 신녀검법(神女法)을 모두 수련해낸 것이다.

염라철장의 염라장법도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는 무공이지만 그 현묘함에 있어서는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에 미치지 못한다.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은 무협제원이 얻은 반쪽의 신녀원공보에 남아있던 두 가지 무공이다. 둘 다 음공과 검법으로는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무공들이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운용할 수 있는 내공부분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협제원도 두 가지 무공을 본래 위력의 삼할 가량 밖에 발휘하지 못했었다.

만일 무협제원이 월녀와 원공의 내공심법마저 얻었다면 무림은 원숭이와 인간의 잡종을 천하제일인으로 모셨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은 막비강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적합한 내공심법을 얻지 못한 관계로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의 정수를 터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론과 초식상으로만 완전히 이해했을 뿐이었다.

무공 수련을 마친 막비강은 곧 자신이 만든 염라철장 곡강의 무덤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자를 보우하여 하루빨리 절예를 연성하게 해주십시오. 소자는 절예만 연성하면 막고천 그 악적을 찾아가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를 고난 속에서 구출해 내겠습니다.]

그는 어느덧 염라철장 곡강을 자신의 생부로 여기게 된 것이다.

늘 자신을 냉대하고 구박하기만 하던 금사혈검 막고천과 무림 최고의 보물인 금강옥액도 서슴지 않고 자신에게 먹여준 염라철장, 둘 중 누가 더 자신의 부친에 가까운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막고천이 자신의 생모를 생부 염라철장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은 악적으로 믿기에 이른 것이다.

막고천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부인 염라철장에서 빼앗을 것이라면 전후의 사정이 들어맞는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다른 남자의 자식이기에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생모인 한경파를 강간하는 짓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 용서 못해! 반드시 내 손으로 그 악적을 죽이고 어머니를 구해내고 말겠어!)

막비강은 막고천에게 농락당하던 어머니의 무참한 모습을 떠올리며 새삼 결의를 다졌다

당장이라도 혈검산장에 달려가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막비강 자신이 잘 안다.

분하고 조급하더라도 참아야만 한다.

(아버님과 무협제원의 무공은 이제 대충 연마했다. 이제 그만 여길 떠나야 한다!)

막비강은 떠날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정이 든 이곳을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해서 하룻밤만 더 염라철장의 무덤을 지키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 *

 

다음날 아침.

짹짹짹짹...!

자신의 처소로 삼은 커다란 고목의 가지 위에 누워 자던 막비강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에 눈을 떴다.

[뭐야?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새 떼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아직 해도 뜨지 않고 동녘 하늘만 약간 뿌옇게 밝아 오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것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떠드는구나!]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하려 할 때였다.

[거기 있는 게 누구냐?]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전해 왔다.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비강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놀라움, 분노, 미움 등이 일순 그의 전신 혈맥을 파열시킬 것만 같았다.

(... 막가 악적이다!)

막비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금 들려 온 음성은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지 말아요! 제발! 비강이가 보고 있어요!]

막고천의 시커먼 몸 아래 깔려 바둥대며 애원하던 어머니가 떠올라 막비강의 몸 속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만든다.

생각 같아선 당장 숲 밖으로 뛰쳐나가 막고천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울분을 참고 나뭇가지 사이로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위 등 혈검산장의 무사 십여 명이 막비강이 만든 무덤 앞에 까마귀 떼처럼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법 중후한 용모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얄팍한 초로의 사내였다. 

 

 금사혈검 막고천!

 

허리춤에 마치 뱀 모양을 한 한 자루의 사형괴검(蛇形怪劍)을 걸고 있는 금포장한! 그자가 바로 당금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이었다.

[장주께선 무슨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외당 당주인 학가맹(學家盟)이란 자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막고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분명 이 숲 속에서 그 어린 잡종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럴 리 없습니다. 속하는 그날 그놈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이 일대를 여러 번 수색했습니다만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학가맹의 말에 이위도 얼른 덧붙였다.

[놈은 저의 흉맹한 일장을 맞았는데 죽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혹시 다른 무림 고수가 이 근처에 은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막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있든 없든 우리는 이 부근을 샅샅이 수색해 보자.]

막비강은 막고천 일행의 대화를 듣고 더욱 노화가 치밀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막고천이 이미 자신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 그날 돌아가신 염라철장께서 내 생부셨구나!)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막고천을 사로잡아 진상을 추궁하고 싶었다.

그는 혈검산장에서의 버러지같은 생활을 떠올리면서 진저리를 쳤다. 만약 생부인 염라철장이 그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그는 멋도 모르고 도적을 부친으로 모실 뻔했다.

막비강은 염라철장과 막고천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막고천이 그의 집안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그의 생부에게서 모친을 빼앗아 갔을 리 만무하다.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할까, 아니면 도주를 해야 하나?)

짧은 시간, 상반된 생각이 그의 뇌리에서 수백 번의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자신이 아직 막고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하지만 복수는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수림에서 빠져 나와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 * *

 

막비강은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염라철장이 남긴 은자로 베옷 몇 벌과 곡괭이를 사고 밥도 배불리 먹었다.

그런 다음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입고 있던 작고 낡은 옷을 벗어 불에 태우고 염라철장의 유서와 호로 뚜껑에서 나온 쪽지를 땀에 젖지 않게 초를 녹여 쌌다.

허름한 베옷을 입고 머리까지 산발하니 허리춤에 찬 금색 호로만 아니면 막비강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누가 봐도 지금의 그는 산골에서 막 자란 무지렁이 소년이다.

막비강은 계곡 물에 자기의 변한 모습을 비춰 보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염라철장께서 나를 낳아주신 생부인 게 확실하니 이제 성을 막()씨에서 곡()씨로 고쳐야만 한다. 기왕이면 이름도 곡능천(曲凌天)으로 고쳐서 막고천, 그 악적을 놀려주어야겠다!)

능천이란 즉 하늘을 능멸(凌蔑)한다는 뜻이다. 막비강이 곡능천이라고 개명한 것은 높은 하늘(高天)이란 광오한 이름을 지닌 막고천을 놀려주기 위해서였다.

산골 소년의 모습으로 변장한 막비강은 그날부터 산속에서 마른나무를 주워 근처 도회지로 지고 내려와 팔아 밥을 사먹었다. 물론 그가 나무를 주워다 파는 것은 호구지책 때문이 아니었다.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

 

바로 호로에서 얻은 쪽지에 적힌 대로 큰 비석이 어디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고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이르면 몇 시진이고 검법과 장법을 연마했다.

 

* * *

 

그렇게 생활하는 동안 반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렀다. 어느덧 겨울도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막비강의 나이도 이제 열 일곱살이 되었다. 건장해진 몸 뿐만 아니라 나이로서도 어엿한 청년이 된 것이다.

그동안 막비강은 하남성 일대의 무수한 마을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큰 비석을 찾았다. 하지만 의심을 받을 것이 염려되어 사람들에게 큰 비석이 있는 곳을 직접 묻지는 못하고 혼자서 비석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낙양(洛陽)에서 멀지 않은 응봉현(應峯懸)을 지날 때였다.

(히야! 정말 큰 비석이다!)

막비강의 눈이 확 떠지는 일이 벌어졌다. 한 채 웅장한 절의 담벽을 따라 걷던 그의 눈에 담장 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비석의 상층부가 들어온 것이다.

일 장 높이의 담장 밖에서 비석의 윗부분이 보이는 정도라면 그 비석은 적어도 이 장 높이는 넉넉히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막비강이 지난 몇 달 동안 본 여러 비석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청련사(靑蓮寺)>

 

담장으로 둘러친 그곳은 절이었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청련사는 비구니들만 기거하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얼씬할 수 없는 곳인지라 도저히 접근할 수단이 없었다.

(별수 없지! 밤에 월담을 기도하는 수밖에!)

막비강은 한시라도 빨리 비석을 파보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날 밤, 몸에 꼭 끼는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막비강은 청련사의 긴 담장들 중 가장 한적한 곳을 골라 월담을 했다.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비구니들에게 음심을 품고 침입한 음적으로 몰릴 지경이라 충분히 주위를 살핀 뒤 담을 넘었다.

이미 삼경이 넘은 늦은 시간인 탓에 절 안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막비강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비석이 있는 절의 후원으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 비석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제발 이번에는 허탕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막비강은 내심 기원하며 준비한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려 했다.

헌데 그가 막 첫번째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파라라락!

돌연 머리 위로 무언가 휙 하니 타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크!)

막비강은 기겁하며 급히 몸을 웅크렸다.

쏴아!

그러면서도 흘깃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밤하늘로 한 줄기 날렵한 인영이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상하군! 나말고도 비구니들만 사는 이 절에 용무가 있는 사람이 있었나?)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나간 야행인은 너무 빨라 여자인지 남자인지 미처 분간할 틈이 없었다. 다만 그자가 허리춤에 무언가를 끼고 있음을 언뜻 발견했을 뿐이었다.

(야심한 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에 침입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막비강의 마음에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막비강은 다시 비석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헌데 막비강이 다시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스악!

또 하나의 인영이 청련사의 담장을 날아 넘어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가지 않는가?

(이건 또 뭐야?)

막비강은 급히 몸을 숙이면서도 재빨리 그 야행인의 모습을 살폈다.

언뜻 긴 치맛자락이 날리고 일진의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다. 이로 미루어 두 번째 야행인은 여인임이 분명했다.

(야행인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막비강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비석을 파보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 상태였다.

(따라가 보자!)

마침내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야행인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몸을 날리는 순간 청련사의 가장 깊은 객사 쪽에서 언뜻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막비강은 즉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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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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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강옥액의 기연

 

 

(확실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 많았어!)

옛날 일을 떠올린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이를 악물었다.

돌이켜보니 막고천이 보인 행태들 중에는 도저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어머니 한경파를 겁탈하곤 했다.

아니 일부러 막비강이 있는 곳에서만 한경파를 농락하는 것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인 이래 한경파는 막비강을 데리고 자지 않았다.

언제 또 막고천이 들이닥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고천의 만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모자지간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 들이닥친 막고천이 완력을 써서 겁탈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 빨리 나가!]

막고천이 자신을 강간하기 시작하면 한경파는 아들에게 그렇게 악을 써서 쫓아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막비강도 막고천이 어머니를 올라타면 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어머니를 농락하는 막고천의 음험한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숨죽인 오열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막고천을 밀쳐내고 싶지만 그럴 힘이 유달리 허약한 막비강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글에 적힌 대로 혈검산장에는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막비강은 염라철장이 남긴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가 비록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는 어둡긴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는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염라철장의 글은 막비강의 마음 깊이 사무쳤다.

본래 금사혈검 막고천에게는 한 명의 본처 외에도 다섯 명의 첩이 있었다.

막비강을 낳아준 생모 한경파는 그 일처오첩(一妻五妾)중 셋째였다.

막고천의 본처는 당숙경(唐淑瓊)이라는 거만하고 기승스러운 여자로 막고천과의 사이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본처 당숙경 외에 다섯 명의 첩은 각기 한 명씩의 자식만을 두었을 뿐인데 특이하게도 한경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딸이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자식들 중 나이순으로 따지면 넷째지만 아들로서는 둘째다.

첩에게서 난 자식들이라도 딸이면 그래도 예쁜지 막고천도 다른 첩의 자식들은 제법 귀여워한다. 안고 다니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쪽쪽 입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아들인 막비강만은 늘 흰눈으로 보며 못 살게 굴었다.

아비가 그러니 집안의 다른 인간들이 막비강을 좋게 대해줄 리 없다.

막비강은 어릴 때부터 막고천의 본처가 낳은 자식들에게 온갖 경멸과 수모를 받으며 자랐다. 또한 혈검산장의 식솔들에게서도 첩의 자식이라고 업수히 여김을 받았으며, 심지어 낳아준 모친 한경파까지도 그에게 매우 냉담했다.

한경파는 원래 차가운 성격이기도 했으나 어느날 밤 자신이 막고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막비강에게 보인 이후로는 찬바람마저 쌩쌩 돌았다.

원망과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막비강을 노려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막비강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생모마저 냉대하는데 누가 막비강을 귀히 여겨주겠는가?

이런 냉랭하고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막비강은 항상 외롭게 지냈으며 심지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을 원망까지도 했다.

어릴 때부터 혈검산장에서 냉대를 받고 자란 것이 원인이 되어 막비강은 어둡고 말이 없는 소년으로 자란 것이다.

 

막비강은 서로 팔이 엉킨 채 마주 서있는 두 노인이 깨어나면 전후 사정을 물어 보기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두 노인은 깨어날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갑다.

해서 막비강은 햇볕을 쬐기 위해 양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츠츠츠!

그는 금강옥액이 들었던 호로의 표면에서 무지갯빛 같은 보광이 발산하는 것을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슨 그림 같은데...!]

그는 호로의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호로에서 뻗치는 황금빛 서광은 흡사 아름다운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햇살에 비추자 산수화 같은 경물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는 호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다시 닫아 두었던 호로의 뚜껑을 뽑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우직!

헌데 그 순간 쇠로 만들어진 호로의 뚜껑이 그대로 우그러드는 것이 아닌가?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막비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손 힘이 전보다 수십 배 강해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훌륭한 세공품을 망쳤네!]

막비강은 아쉬워하며 뚜껑을 바로 펴려 했다.

본래 그 뚜껑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막비강은 그것을 편다는 것이 이번에도 너무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빠직!

뚜껑은 펴지기는커녕 그대로 두 조각으로 뽀개지고 말았다.

[... 이런!]

당황하던 막비강은 다음 순간 흠칫 놀랐다.

펄럭!

뽀개진 뚜껑 속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종이는 또 뭐지?)

그는 의아해하며 그 종이를 주워 펼쳐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너무 작아 보통 사람이라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옥액으로 시력이 수십 배로 증폭된 막비강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는 무학지보(武學之寶)로써 거대한 비석(碑石) 밑에 숨겨져 있다. 오직 인연이 닿는 자만이 얻으리라!>

 

[... 청구단서! 이것은 청구단서의 장보도(藏寶圖)로구나!]

글을 읽은 막비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어쨌든 그도 무가인 혈검산장에서 자란 탓에 청구단서와 금강옥액의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마신 이 호로 속의 즙액이 바로 금강옥액이 아닐까?)

막비강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어 새삼 호로를 들여다보았다.

(청구단서를 얻어 그 안의 신공절학을 익히면 내 일신에 얽힌 비밀을 푸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막비강은 매우 기뻐하며 염라철장의 유서인 종이쪽지와 호로에서 나온 종이를 같이 접어 품속에 간직하였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그가 철이 들 때부터 열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헌데 이제 무림 최고의 비전인 청구단서를 찾을 단서를 쥐게 되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아직까지 미동인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 두 분 어른은 선 채로 죽은 것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두 노인을 살펴보았다.

막비강이 다가가 노인들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두 노인의 얼굴빛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얼굴빛과 똑같았다. 그리고 콧김을 살펴보아도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겼구나!]

막비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는 아직 열 여섯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

(... 달아나자!)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쳐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거기 섰거라!]

갑자기 등뒤에서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히익!]

고함소리를 들은 막비강은 죽은 사람이 강시로 변해 쫓아오는 줄 알고 더욱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화라락!

하지만 소리를 지른 그 사람의 신법은 쾌첩하기 짝이 없어 단숨에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막아 섰다.

[소장주! 진정하시오! 속하외다!]

막비강을 가로막아선 자가 급히 막비강을 안심시켰다. 그자는 얼굴의 절반이 시커먼 구레나룻에 덮인 건장한 장한이었다.

[! 이 아저씨였군요!]

상대방을 알아본 막비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자는 바로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한 명인 규염장(糾髥掌) 이위(李衛)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위도 처음에는 막비강을 못 알아봤었다. 가냘프던 그의 체격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건장한 청년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장해진 몸과 달리 막비강의 아직 순진하고 치기가 어린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추격하는 동안에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소장주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막비강의 몸이 건장해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께선 소장주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찾고 계십니다. 무사하시니 다행...!]

그렇게 말하던 이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두 눈에서 기이한 광망을 발산했다. 그는 비로소 막비강이 들고 있는 이상한 호로를 발견한 것이다.

[소장주는 그것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이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금강옥액은 황금빛 서기가 서린 호로에 담겨 있다!

 

그런 강호의 전설을 떠올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위의 내심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것이 왜 내 수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위의 태도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변했다.

[흐흐! 어린 잡종아, 어서 그것을 내놓아라! 오늘이 바로 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다. 만약 그 금강옥액을 내게 준다면 통쾌하게 죽여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막비강은 이위가 흉흉한 기세로 다가서며 말하자 겁이 와락 났다.

[... 그만둬요!]

그는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하하! 어딜 가느냐?]

하지만 막비강이 미처 다섯 걸음도 도망치지 못했을 때 이위의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산악 같은 경기가 등뒤로 엄습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막비강이 그것을 피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퍼펑!

[아악!]

막비강은 등판에 강력한 장력을 얻어맞고 선혈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위는 일장으로 막비강을 기절시킨 후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보물을 지닌 것이 죄니 나를 탓하지 마라! 금강옥액은 마땅히 나 같은 영웅이 마셔서 공력을 증강시켜야지 옳다.]

그는 서둘러 막비강의 손에서 금색 호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호로 안에 금강옥액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호로를 들어 보며 이위는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우라질! 그냥 빈 호로가 아닌가? 이제 산장으로 돌아가서 장주에게 뭐라고 말하지?)

화가 난 그자는 막비강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염병할 놈! 빈 호로는 네놈에게 돌려줄 테니 함께 땅속에 묻혀라!]

이위는 자신이 소장주를 살해한 것이 발각될까 염려되었고, 또 호로 속이 텅 비어 자기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지라 호로를 막비강 곁에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질풍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헌데 이위가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막비강의 몸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사실 막비강은 죽은 게 아니었다. 비록 금강불괴지신은 못되었으나 금강옥액은 그의 온몸을 무쇠처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상태가 아닌가?

이위의 장력이 바위를 부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막비강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단지 일시간의 충격으로 기혈이 막혔던 것인데 이위가 떠나면서 허리를 걷어차 준 덕분에 막혔던 기혈이 확 뚫려 버리기까지 했다.

외부의 타격에 반응하여 임독이맥 주위에 몰려 있던 금강옥액의 약력은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통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일컬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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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세의 비밀

 

 

 

[낄낄낄! 지난 십 년 동안 발바닥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못 찾겠더니만... 정작 만나려니까 이렇게 쉽게 만나는구나 곡가야!]

무협제원은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클클!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네가 지니고 있는 보물까지 취득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자의 말에 염라철장은 내심 흠칫했으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넌 오늘도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원숭이놈! 하물며 내게는 네게 줄 보물 따위도 없다.]

[크크!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아느냐?]

무협제원은 야수같이 눈을 희번덕이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용문(龍門) 천불동(千佛洞)의 어느 석실에서 청구이보 중 하나인 금강옥액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 순순히 금강옥액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버리겠다.]

무협제원의 말에 염라철장은 이를 부득 갈았다.

[금강옥액이 내 몸에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 해도 네놈에게 주어 무림에 해를 끼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카카카카...!]

그러자 무협제원은 갑자기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징그러워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사실 그것은 보통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신원탈백소(神猿奪魄笑)!

 

바로 웃음소리로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무협제원의 독문마공인 것이다.

[으핫하하...!]

염라철장도 황급히 내공을 극한까지 돋우어 앙천광소를 터뜨려 상대방의 징그러운 괴소에 맞섰다.

[킬킬킬!]

하지만 무협제원의 징그러운 괴소는 염라철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눌리지 않고 점점 더 높아만 갔다.

(... 이놈의 내공이 십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염라철장은 무협제원의 괴소에 내장이 온통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이지러졌다.

음공으로는 무협제원을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염라철장은 웃음을 멈추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무협제원! 음공으로는 쉽게 승부가 나지 않으니 그만 중지하자.]

무협제원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주둥아리 닥쳐라!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 네 놈을 붙잡을 수 없게 될 터! 오늘 기필코 승부를 내고 말겠다.]

염라철장도 침중하게 외쳤다.

[열흘 후 황산 시신봉에서 보자!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헛소리말고 내 초식이나 받아봐라!]

꽈르르릉!

무협제원은 염라철장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긴 팔을 맹렬히 휘둘러 왔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긴 그자의 팔이 휘둘러지자 광풍이 휘몰아치며 두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염라철장을 휩쓸어왔다.

[오냐! 끝장을 내자!]

좋게 끝나기는 틀렸음을 깨달은 염라철장도 즉시 진기를 극한까지 돋우어 양 손바닥을 밖으로 뒤집었다.

퍼퍼펑! 꽈르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모래 기둥이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치솟았다.

우두둑! 콰득!

직후 두 사람의 네 팔이 그대로 얽혀 버렸다.

원래 무협제원의 진력은 내향성(內向性)이고 염라철장의 진력은 외향성(外向性)이다. 그 때문에 일단 피차의 팔이 한데 얽히자 어느 쪽도 감히 먼저 공격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상대방의 내공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와 내장을 박살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 수없이 두 사람은 서로 맞붙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내공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두 숙적은 마치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주 팔짱을 낀 채 꼼짝 않고 서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시진 남짓이 지났을 때였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동굴 안에 누워 있던 소년 막비강이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자신이 석동 안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음을 발견하고 만면에 곤혹의 빛을 머금었다.

그는 석동 입구에서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헌데 그때 그는 자신의 품속이 묵직함을 느꼈다.

(품속에 무엇이 들었지?)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곧 그의 손에는 하나의 술 호로와 종이쪽지가 쥐어졌다.

(이게 다 뭘까?)

막비강은 호로와 종이 조각을 번갈아 보며 갸웃했다.

그러다가 그것을 든 채 석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 시체!]

헌데 석동 밖으로 나서던 막비강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 질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동 입구 주위에는 선혈로 물들어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운 네 구의 시체와 두 명의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노인이 서로 팔이 엉킨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으!]

막비강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모두 죽었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막비강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들은 다 누구지? 왜 이런 곳에서 죽어 있는 건가?)

막비강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여섯 사람 중 염라철장이 자신을 납치해 온 장본인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이 호로는 또 누가 내 품속에 넣어 준 걸까?)

그는 고개를 숙여 호로를 내려다보았다.

츠으으!

그의 수중에 들린 호로는 마침 떠오른 햇살을 받아서 눈부신 금광을 발산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크기가 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로가 왜 이렇게 무겁지?)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마치 쇳덩이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열어 보자!)

막비강은 호기심에 꼭 닫혀 있는 호로의 뚜껑을 뽑아 보았다.

순간 호로 안에서 한 줄기 기이한 향기가 흘러 나와 코를 찔렀다.

[! 향기 좋다!]

막비강은 코를 킁킁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호로 속에는 수정같이 맑은 즙액(汁液)이 절반 가량 담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아주 향기롭고 달콤하였다.

꼬르륵!

그러자 그의 뱃속에서 식충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 보면 어제 저녁 이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막비강이다.

[뭔지 모르지만 독은 아니겠지!]

배고픔과 갈증을 참지 못한 그는 호로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내용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호로 속에 든 반병의 즙액은 삽시에 그의 목구멍을 타넘어 들어갔다.

 

금강옥액!

 

뼈를 무쇠보다도 강인하게 만들어 주고 백독이 불침하게 해준다는 희대의 영약 금강옥액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끄억!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막비강은 아무것도 모르고 배를 두드렸다. 겨우 반병의 즙액을 마신 것에 불과했지만 왠지 배가 든든했다. 마치 한 상 잘 차린 성찬을 포식한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즙액이 뱃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부터 왠지 온몸이 스멀스멀 더워지는 것이 아닌가?

[! 왜 갑자기 이렇게 더워지지?]

막비강은 헉헉대며 상체를 벗어부쳤다.

옷을 벗어버리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우르르!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더니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게 독이었구나!]

막비강은 불속에 던져진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떼굴떼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한번 치솟은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내부를 휩쓸고 다녔다.

[아아악!]

막비강은 내장이 온통 숯덩이가 되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까마득히 정신을 잃었다.

츠츠츠! 푸시시!

정신을 잃은 막비강의 온몸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검푸른 연기가 그의 전신 팔만 사천 모공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검푸른 연기에 노출된 주위의 초목들이 삽시에 시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바로 막비강의 몸속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타들어가며 내는 독장(毒瘴)이었던 것이다.

금강옥액!

바로 이 희세 영약의 조화인 것이다.

 

본래 금강옥액을 복용하면 온몸의 노폐물이 연소되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 즉 원영지체(元瓔之體)가 된다.

그리 되면 온몸의 경락이 막힘없이 뚫려 아무리 오랫동안 내공을 써도 지치지 않으며, 피부와 골격이 더할 수 없이 강인해져서 어떤 외부의 타격에도 상처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비강은 금강옥액의 효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강옥액의 효능을 극대화시키려면 복용 즉시 운공을 하거나 내가고수가 추궁과혈로 도와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막비강은 그 같은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막비강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한 가지 사악한 술법(術法)에 노출되어 원영지기(元瓔之氣)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남달리 허약해진 것이며, 나이 이십을 채우지 못하고 요절할 운명이었다.

그런 이유로 막비강은 희세 영약 금강옥액으로도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은 되지 못했다.

대신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손상되었던 원영지기가 금강옥액으로 대체되어 타고난 고질(痼疾)은 완쾌되기에 이르렀다.

금강옥액의 효능은 비단 고질을 치료해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두둑! 우둑!

기절한 막비강의 전신 골격이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닌가?

여리고 병약하던 막비강의 몸은 순식간에 튼튼하고 강건하게 변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본래 나이보다 두 세 살 어리게 보이던 그의 체격이 삽시에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건장해진 것이다.

투둑! 투둑!

막비강이 걸친 의복이 여기저기 뜯어져 나갔다. 가냘프던 소년의 몸이 갑자기 어른처럼 자라나 꽉 끼어 버린 때문이었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휴우! 내가 죽지 않다니...!]

막비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막비강은 왠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을 느꼈다.

(이상하네! 내가 마신 것은 분명 독이었을 텐데 어째서 몸이 이리 가뿐한 것일까?)

막비강은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찌직!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는 대로 바짓가랑이가 북 찢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내 몸이...!]

비로소 자신의 몸이 삽시간에 커 버린 것을 알아챈 막비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인한 근육으로 뭉쳐진 팔다리, 한 뼘 넘게 껑충 커 버린 키, 게다가 한번 발을 구르면 머리끝이 구름에까지라도 닿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온몸을 살피며 어리둥절해하던 막비강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찢어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전과는 사뭇 다른 무엇이 털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흡사 담장에 매달려 있던 다 자란 수세미 같은 크기의 검붉은 살덩이였다.

(... 내 찌찌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막비강은 멍하니 자신의 남성의 상징을 내려다보았다. 이완되었음에도 무려 다섯 치가 넘는 그것은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살덩이 위쪽의 불두덩에도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었다. 금강옥액은 병약한 소년에 불과하던 막비강을 삽시에 충분히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탈바꿈시켜 버린 것이다.

[쑥스럽네! 뭔가 가릴 게 있어야겠어!]

막비강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시야로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염라철장이 금강옥액의 호로와 함께 그의 품에 넣어 준 쪽지였다.

(뭐라고 글이 씌어져 있는 것 같은데...!)

시력이 몇 배로 좋아진 막비강은 쪽지 위에 급히 갈겨쓴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 쪽지 위에는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급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들아! 네가 생부(生父)로 알고 있는 자는 진짜 네 아비가 아니다. 하지만 너의 모친은 너를 낳아 준 생모가 틀림없다.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지금껏 만나지도 못했으니 나의 운명이 기구하기도 하구나.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으면 전포(田袍)를 찾아가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보아라. 그러나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선 절대 안 된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리고 쪽지의 맨 끝에는 손바닥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 무슨 소린가? 설마 이 글이 내게 남겨진 것이란 말인가?)

쪽지에 적힌 글은 막비강의 잔잔한 마음에 세찬 파문을 일으키게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는 한동안 망연자실하여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뇌리로 숱한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드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철이 들었을 무렵 부친인 금사혈검 막고천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일이다.

아비라면 당연히 아들이 자라 무공을 익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헌데 막고천은 무공을 가르쳐주는 것은 고사하고 격하게 화를 내며 두 번 다시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막비강도 겁에 질려 그 이후로는 아버지 막고천에게 일체 무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싶은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호원무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며 나름대로 독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막고천에게 들키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그날 죽도록 얻어맞아 몇날 며칠을 자리보전 해야만 했다.

막고천은 어째서 아들인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공을 배우려 하자 무섭게 치도곤을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여 그는 모친인 한경파(韓瓊芭)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역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칠뿐이었다.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한경파는 평소에도 막비강을 차갑게 대했다. 친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한경파에게서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지닌 자상한 구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막비강을 볼 때마다 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화를 내거나 무시하곤 했다.

(설마 내가 불미스러운 관계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란 말인가? 아니면 어머니는 날 태중에 지닌 채 지금의 부친에게 개가(改嫁)를 했든지 강제로 납치당해 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막비강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와함께 염라철장이 남긴 글이 사실일 것같은 생각이 정점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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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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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납치극

 

 

 

종남산(終南山)!

 

중원의 오대도가성지(五大道家聖地) 중 하나인 종남산은 가을빛에 물들어 있다.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는 두둥실 구름이 몇 점 떠가고 있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은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종남산의 넉넉한 산록(山麓) 아래 펼쳐진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아름답게 율동하고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선인봉(仙人峯)을 병풍처럼 등지고 한 채의 웅장한 장원이 서 있다.

 

<혈검산장(血劍山張)>

 

성문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정문에는 금박이 화려한 편액이 걸려 있다. 붉게 칠해진 둥근 고리[]를 배경으로 쓰여진 글은 웅혼하고도 패도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이 장 높이의 위압적인 돌담 너머로는 수백 채의 전각 지붕이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추녀를 잇대고 있다.

이곳이 바로 강호에서 서패천(西覇天)으로 불리는 혈검산장이다.

본래 당금 무림에는 사패천(四覇天)이라 불리는 네 개의 강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혈검산장은 바로 그중 서패천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莫高天)!

 

그가 서패천 혈검산장의 당대 주인이다. 막고천이 한 자루 사형혈검(蛇形血劍)으로 펼치는 사형검법(蛇形劍法)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에는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막고천이 이끄는 혈검산장의 위세는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 중원의 서방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막고천의 탁월한 용인술(用人術)과 교묘한 심모원려(深謨遠慮)의 결과였다.

 

막고천은 석 자[三尺]의 검보다 세 치[三寸]의 혀가 더 무섭다!

 

그 같은 비아냥이 공공연히 무림에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놓고 막고천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 그의 막하에는 구름 같은 고수, 달인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일단 막고천의 눈 밖에 난 자는 늘 비참한 최후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때는 저녁 무렵이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혈검산장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하하하!]

[까르르!]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 펼쳐진 공터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었다.

질 좋은 비단옷을 입은 아이, 허름한 베옷을 입은 아이, 일견해도 신분이 다른 아이들이 함께 뒤섞여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야 신분의 고하는 큰 문제도 아닐 것이다.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선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는 우락부락한 장한 네 명이 무료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혈검산장의 무사들말고도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또 한 쌍 있었다.

[...!]

혈검산장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는 언제부터인가 초라한 몰골을 지닌 초로의 노인이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노인은 뛰어 노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길을 가다 지친 늙은 여행객으로 보인다. 혈검산장이 무사들도 노인의 그 같은 행색에 그를 별로 유의하지 않고 보아 넘겼다.

(틀림없다! 바로 저 아이다!)

하지만 고개를 움츠린 노인의 눈빛은 뜻밖에도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의 그 눈빛은 한 소년에게서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이 보고 있는 소년은 열 서너 살 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것이 한눈에도 귀한 신분의 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소년은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키도 작은 데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빈약한 것이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대로 쓰러질 듯이 보였다.

그 때문에 소년은 원래 나이보다도 한 참 어려 보인다. 사실 소년의 나이 올해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체질 때문에 두 세살 가량 어려 보이는 것이다.

[...!]

병약한 소년은 아이들이 뛰노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돌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신이 나서 겅중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는 소년의 눈에는 부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허약한 몸을 지녀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찬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상영(祥英)을 막고천, 그 짐승에게 빼앗긴 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 상영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바로 저 나이일 것이다!)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점점 형형해졌다. 사실은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때문에 잘 해야 열 네 살가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멀리서 소년의 병약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노인의 나무껍질 같이 메마른 안면에는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막고천! 그놈은 만삭인 상영을 납치해다가 짐승 같은 야욕을 채웠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병약한 것도 제 에미 뱃속에 들었을 때 에미가 난행을 당한 결과일 것이다!)

노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려졌다.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놈의 주위에는 지켜 주는 개들이 너무 많아 번번이 실패했었지! 이제 나도 복수는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피맺힌 한은 우리의 아들이 대신 갚아줄 것이다!)

노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옆구리에 찬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

 

호로(壺瀘)!

 

그것은 은은히 황금빛 서기가 나는 한 개의 호로병이었다. 사기로 구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호로병인데 가운데가 잘룩하여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찰 수가 있다.

그 호로병을 움켜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 핏줄이 불끈 돋았다.

(놈을 이길 만한 무공을 찾아 헤매던 노부는 천우신조로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마셔 무적 공력을 얻은 뒤 막고천 그 악적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이것은 저 아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이 뜨거운 부성애로 물들었다.

헌데 금강옥액이라니! 정녕 노인이 차고 있는 호로에 청구이보(靑丘二寶) 중 하나인 금강옥액이 들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인은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내 아들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금강신체(金剛神體)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네놈 막고천을 쳐죽이게 하리라!)

노인은 격동을 감추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노인의 깡마른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쐐액!

허공으로 튀어오른 노인은 질풍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혈검산장의 앞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저 늙은이가...!]

[... 무림인이었다!]

무료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질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파팟!

[! 왜 이래요!]

단번에 마당을 가로지른 노인은 바위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병아리처럼 낚아챘다.

쐐액!

소년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와 노인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비강(比强) 도련님!]

[둘째 도련님을 내려놔라!]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왔다.

 

막비강(莫比强)!

 

이것이 그 병색 짙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둘째 아들이었다.

[막고천이란 짐승에게 전해라! 나 곡강(曲姜)이 아들을 찾아간다고!]

화라락!

노인은 한 마리 천마처럼 단숨에 혈검산장 우측의 송림을 뛰어넘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경신술은 너무나 신쾌하여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마당 중간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 쫓아가자!]

[총관께도 알려라! 삼공자가 납치되었다고!]

한 명의 무사는 도로 장원 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나머지 셋은 이를 악물고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오래지 않아 혈검산장 안에서는 수많은 무사들이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아올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마당에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쐐애액!

병약한 소년 막비강을 겨드랑이에 낀 노인은 질풍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몇 개의 산과 개울이 순식간에 노인의 발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그새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너무 놀란 데다가 병약한 몸이 자신을 안고 날아가는 노인의 엄청난 속도를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가엾은 녀석!)

노인은 달리면서도 소년을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이 모두가 아비가 못나 네 에미를 막고천, 그 악적에게 빼앗긴 결과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강옥액을 먹고 아비가 추궁과혈로 경락을 뚫어 주면 넌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노인은 염두를 굴리면서도 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이미 백여 리를 달렸으나 노인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혈검산장의 세력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종남산이 자리한 섬서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노인의 발길은 늦춰질 줄 몰랐다. 노인은 밤이슬을 맞으며 다시 수십 개의 산과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다시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은 혈검산장이 자리하고 있는 섬서성을 벗어나 하남(河南)성 경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군!]

그제야 비로소 노인은 땀을 닦으며 걸음을 늦췄다. 그가 멈춰선 곳은 하남성의 서쪽 끝에 자리한 험준한 산맥 웅이산(熊耳山) 근처였다.

(몇 번이나 방향을 틀었으니 혈검산장의 무리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지나온 곳을 흘깃 돌아보며 숲을 나섰다. 웅이산은 너무 험하여 지금까지처럼 길 아닌 길로 달릴 수만도 없다. 무림인인 자신이야 괜잖지만 병약한 막비강에게 험한 산길은 무리인 것이다.

다행히 숲에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동서로 뻗쳐 있는 관도(官道)가 거대한 뱀처럼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이제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 아이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주면 된다!)

노인은 소년 막비강을 소중히 안고 관도로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돌연 뒤쪽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귀찮은 일을 피할 요량으로 길가로 물러서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

이내 네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자가 없는 것 같군!)

노인은 내심 안도하며 땅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 직후였다.

히히히힝!

[워워!]

돌연 그를 지나쳤던 네 필의 말이 급격히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은...!)

슬쩍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던 노인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두두두!

그를 스쳐 지났던 말들이 천천히 그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말들 위에는 일견하기에도 무림인들로 보이는 네 명이 올라탄 채 형형한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필의 말들 중 맨 앞쪽의 갈색 말 위에는 우람한 체격의 백의노인이 앉아 있다. 이 노인은 온몸이 백색 일색이었다. 머리도 희고 수염도 백설같이 희며 입고 있는 의복과 얼굴색도 분을 바른 듯이 하얬다.

츠으!

백면노인의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선 연신 남색(藍色) 광망(光茫)이 번뜩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백면노인 뒤쪽의 말에는 그와 정반대로 얼굴이 숯처럼 검은 흑면노인이 타고 있다. 그자는 뼈를 발라 놓은 듯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인데 입고 있는 의복도 먹물을 칠한 듯이 새까만 흑포였다. 만약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흰빛 마저 없었다면 그저 한 덩이의 숯을 말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으핫핫! 이게 누구요? 이제 보니 고명하신 염라철장(閻羅鐵掌) 곡 노사(曲老師)시로군!]

흑백의 두 노인 중 우람한 체격의 백면노인이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막비강을 납치한 노인, 염라철장 곡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 이런 때에 흑백쌍살을 만나게 되다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구나!)

 

흑백쌍살(黑白雙煞)!

 

흑백의 두 노인은 하락(河洛) 일대에서 악명이 높은 마두들로서 얼굴 색깔에 따라 각기 백면살(白面煞), 흑면살(黑面煞)이라 불린다.

사실 흑백쌍살이 제법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들이긴 해도 염라철장 곡강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부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염라철장 곡강 자신이 무림에서도 이름이 쟁쟁한 강호칠절(江湖七絶)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정파백도의 가장 뛰어난 일곱 기인을 일컬어 강호칠절이라 하는 바, 곡강은 불의와 사마외도를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써서 염라철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게 된 인물이다.

평소의 염라철장 곡강이었다면 흑백쌍살을 만났어도 코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틀렸다. 실로 십오 년 만에 되찾은 아들과 함께인 것이다. 도저히 남과 어울려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흐흐!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정말 기쁘기 그지없소.]

백면살이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염라철장도 도리 없이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흑백쌍살 형제분들이셨군. 보아하니 두 분은 지난날의 일장을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금 고하(高下)를 가늠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오늘은 노부가 급한 일이 있으니 열흘 후 황산(黃山) 시신봉(始信峯)에서 만나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염라철장은 평소의 불같은 성질을 누르며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며 보였다.

[그럴 필요 없소, 곡 노사!]

그러나 얼굴이 검은 노인, 흑면살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나 흑면살은 따로 날짜를 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오늘은 날씨도 시원하여 손속을 교환하기에 더없이 좋은데 열흘 후에 고생해 가며 험준한 황산을 올라갈 필요가 뭐 있겠소? 혹시 곡 대협은 황산에 명당 자리라도 잡아 두기라도 한 거요?]

흑면살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굴뚝에 빠진 쥐새끼 같은 놈이...!)

염라철장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당년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이 살성은 평소 흑백쌍살 같은 자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전의 형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은가? 그는 할 수 없이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소. 이해하시오!]

그의 말에 백면살은 염라철장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막비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곡 대협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인물인데 어찌하여 어린아이의 요혈을 찍어 데려가는 것이오? 설마 유괴한 아이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흑면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형님은 참 눈치도 없소. 저 어린놈은 아마도 곡 대협과 지금은 막고천의 첩이 되어있는 냉상영(冷祥英)이란 계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게요!]

[닥쳐라!]

순간 염라철장이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주둥아리를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염라철장의 일갈에 흑면살이 흉흉한 표정으로 대꾸하려 할 때였다.

[흐하하!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흑백쌍살 뒤에 있던 한 명의 중년 장한이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휘릭!

그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동시 어깨에서 길이가 세 자 가량 되는 강추(鋼錐)를 뽑아 휘저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곡 대협은 우리 형제를 안목에 두지도 않소?]

염라철장은 그자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얼굴은 생소한데 나 곡강이 언제 어디서 귀하에게 죄를 범했소?]

[시침떼지 마시오. 우리는 태호쌍걸(太湖雙傑) 황웅(黃雄), 황렬(黃烈) 형제요. 당신이 우리 형제의 사형인 무영서생(無影書生)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소?]

[! 당신들이 바로...!]

염라철장도 비로소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강퍅한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무영서생이란 작자는 한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간 담을 넘어 들어가 못된 짓을 하던 중에 내 손에 걸려 죽었지! 설마 그 패륜음적(悖倫淫賊)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겠지?]

그가 비웃음을 흘릴 때였다.

[바로 그렇다!]

투학!

사나운 함성과 함께 두 줄기 한광이 염라철장을 향해 엄습해 왔다. 황웅이 자신의 무기인 한 쌍의 강추를 느닷없이 무찔러낸 것이다.

염라철장도 황급히 오른손을 뻗어냈다. 창졸간에 취한 임기응변이었다.

카카캉!

맑은 음향이 일어나며 황웅의 강추 두 개가 서로 맞부딪쳐 버렸다. 염라철장이 내뿜은 암경에 휘말려 버린 결과였다.

[!]

황웅은 염라철장이 말하는 사이에 기습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손목이 울리는 격통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밀려나갔다. 염라철장의 공력이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무서운 늙은이!)

(과연 강호칠절의 일인답다!)

흑백쌍살과 황렬은 이 상황을 보고 내심 놀랐다.

[모두 함께 공격하자!]

콰릉!

백면살이 일갈하며 먼저 장력을 뽑아내 염라철장을 후려쳤다.

[우우우!]

화라락!

하지만 염라철장은 사나운 장소성을 터뜨리며 맹렬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 저 늙은이가!]

[달아나다니...!]

염라철장의 뜻밖의 행동에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라철장은 어느 누구와 싸우든 절대 등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사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 염라철장은 이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진 후였다.

[싸움을 피하는 것을 보니 부상이라도 당한 모양이다!]

[쫓아가자! 이 기회에 원한을 갚자!]

화라락! 쐐애애액!

백면살의 호통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다섯 사람은 쫓고 쫓기며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렸다.

(빌어먹을...!)

웅이산의 험한 산중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던 염라철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추격하는 네 사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네 사람과의 거리는 점차 단축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염라철장이 밤새 달린 탓이었다.

철인이 아닌 이상 밤새 천여 리를 달리고도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염라철장은 지금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떨쳐 버릴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결판을 낼 수밖에...!)

내심 결심한 그는 급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의 절벽 아래에 큼직한 동굴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화라라락!

염라철장은 눈을 번뜩이며 즉시 그 산동(山洞)으로 뛰어들었다.

[으하하! 스스로 독 안에 뛰어드는구나!]

뒤쪽에서 네 흉사(凶邪)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시간이 별로 없다! 혹시 모르니...!)

염라철장은 흘깃 밖을 돌아보며 급히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는 작은 종이에 총총히 몇 자 글을 적어 내려갔다.

글을 다 쓴 그는 그 종이를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색 호로와 함께 막비강의 품속에 쑤셔 넣어 주었다.

(부디 네가 그 글을 읽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저 네 놈의 생쥐가 내 적수는 못되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염라철장은 뜨거운 부성애가 담긴 눈으로 소년 막비강을 내려다보았다.

화라라락! 스스스스!

그때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추적자가 동굴 밖에 날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염라철장의 기습이 두려워 아무도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곡가야! 자라 새끼처럼 석동 안에 숨어서 기어 나오지 않겠다면 독연기를 불어넣어 어린놈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

백면살이 동굴 안을 향해 흉갈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헛소리 마라!]

푸학! 꽈르릉!

하나의 인영이 전광석화같이 석동 밖으로 튀어나오며 사나운 장력을 쏟아냈다. 물론 그는 염라철장이었다. 그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세찬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

[크악!]

퍼퍽! 콰드득!

이 흉맹무비한 장풍에 황씨 형제의 상체가 피모래로 흩어져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흑백쌍살은 그래도 고수답게 반응이 빨라 횡액을 면했으나 황씨 형제는 여지없이 참살을 모면하지 못한 것이다.

[죽어랏! 비겁한 놈들!]

염라철장은 여세를 몰아 급히 물러서는 흑백쌍살을 덮쳐 갔다.

꽈르릉!

염라철장의 쌍장이 검게 물들며 무시무시한 경풍의 소용돌이가 뻗쳐 나왔다. 그는 장기전으로 나가면 지친 자신이 불리함을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최강의 살수를 구사한 것이다.

[! 날뛰지 마라!]

[받아랏!]

흑백쌍살도 악을 쓰며 마주 장력을 내치며 염라철장의 장풍에 맞섰다. 하지만 염라철장이란 이름은 헛것이 아니었다.

파카카캉!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염라철장의 장풍은 마치 무쇠의 창날처럼 흑백쌍살의 장풍을 여지없이 꿰뚫고 들어갔다.

[... 안 돼!]

[케에엑!]

[으하하!]

퍼퍼펑! 콰쾅!

비명 소리와 살기 가득한 웃음소리, 그리고 무언가 으깨지는 듯한 둔중한 소성이 한꺼번에 일었다. 염라철장의 창날 같은 장력은 흑백쌍살의 가슴과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콰당탕! 퍼퍽!

머리가 박살난 백면살의 거구가 뇌수를 흩뿌리며 나뒹굴고, 뒤이어 가슴이 뭉개진 흑면살이 주르르 십여 걸음 밀려났다가 고꾸라졌다.

[으으음!]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한 염라철장도 안색이 창백해져서 비틀거렸다.

[흐흐흐! 네놈들 스스로 자초한 횡액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염라철장은 사방에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를 돌아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하여간 내 아들이 애비의 유서를 읽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로군!]

염라철장은 득의해하며 지친 몸을 석동 쪽으로 돌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카하하하항!]

돌연 멀지 않은 숲속에서 누군가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살기에 찬 원숭이가 우짖는 듯 귀에 거슬리고 섬뜩한 것이었다.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광소성! 혹시 그자란 말인가?)

막 동굴로 들어가려던 염라철장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는 그의 숙적인 한 명 흉한의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염라철장이 숨을 죽이며 긴장할 때였다.

[카카카! 어떤 망종이 새벽부터 지랄을 해서 본좌의 단잠을 깨우느냐?]

화라라락!

불쾌한 악취가 풍기며 허공에서 한 줄기 인영이 공 튕겨지듯 뚝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자는 온몸에 털이 숭숭 돋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이었다. 검붉은 털이 온몸을 뒤덮은 데다 두 팔이 무릎 아래까지 뻗쳐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

[! 네놈은!]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동시에 한걸음씩 물러섰다.

[염라철장 곡강!]

[무협제원(巫峽啼猿)!]

염라철장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나타난 자는 바로 그가 떠올렸던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무협제원!

 

이것이 그자의 이름이었다. 염라철장이 당금 정파백도의 절정고수들인 칠절(七絶)에 속한다면 무협제원은 흑도무림의 최고수들인 육요(六妖)에 드는 절정고수였다.

사실 그자는 인간의 어머니와 성성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이었다. 무협 근처의 산골 마을에 홀로 살던 여자를 수백 년 묵은 원숭이가 무산(巫山)에서 내려와 겁탈한 결과 무협제원이 태어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여자와 원숭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비정상적으로 팔이 긴 무협제원의 몰골을 보면 그가 원숭이의 자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숭이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사나운 성성이의 피를 이어받은 때문인지 무협제원은 맨손으로 황소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신력과 포악한 성격을 타고 났다. 거기에 더해 기연으로 어떤 상고기인의 비급을 얻어 일신에 고절한 무공까지 지니게 되었다.

무협제원은 이같은 자신의 힘과 무공을 믿고 무협 일대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었다. 그러다가 십년 전 염라철장과 시비가 붙어 그의 일장을 맞고 무협의 격랑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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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환골탈태 換骨奪胎

 

 

 

 

 

 

제 1장

 

              단서(丹書), 옥액(玉液)의 전설

 

 

 

단서(丹書)!

옥액(玉液)!

 

그 두 가지의 이름은 지난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강호무림에 숱한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한 권의 비급과 한 병의 신비한 영약!

붉은 표지의 비급(丹書)에는 천하무적의 신공절학이 수록되어 있으며,

옥같이 보배로운 물약(玉液)은 만독불침(萬毒不浸)과 금강불괴(金剛不壞)를 만들어 준다!

칼끝에 생명을 건 무림인들이 그 이름을 들을 때 입 안의 침이 마르고 혈관의 피가 들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

<금강옥액(金剛玉液)!>

 

숱한 인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가문, 문파를 파멸로 몰아넣은 무림의 이대기보! 이것들은 백년무림,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도 가장 강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한 명 기인이 남긴 것이다.

 

무성(武聖) 청구상인(靑丘上人)!

 

저 달마(達磨)와 장삼풍(張三豊)에 비견되어 무성이란 지고의 칭호로 불리는 일대기인! 그의 숱한 기행과 업적은 한 수레의 글로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거니와, 특이한 것은 그가 중원무림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구(靑丘)! 달리 근역(槿域), 동이(東夷)라고도 불리는 고려국(高麗國)이 그의 출신인 것이다.

비록 지금은 쇠락하여 자그마한 반도(半島)에 도사린 옹색한 민족이 되었으되, 아득한 상고시대 이래로 그들 동이족이 화북(華北)과 막북(漠北) 일대를 누천년간 지배했음은 잘 알려진 바다.

동이족은 무예를 숭상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살았던 위대한 정복민족이다. 중원의 숱한 병법과 병서, 무예가 바로 그들 동이족에게서 유래했다.

태공망(太公望), 노자(老子), 공자(孔子), 황석공(黃石公)이 모두 동이족의 가계(家系)를 잇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저술인 금해병서(金海兵書)를 얻기 위해 당태종 이세민(李世珉)이 온갖 책략과 술수를 다했음은 당서(唐書)에도 전하는 바다.

누천년을 내려온 동이족 전래 무맥의 최후 전승자! 그가 바로 청구상인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여 년 전, 청구상인은 동이족이 잃어버린 세 가지의 보물,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아 중원으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사해오호를 주유하며 숱한 기인명숙들과 조우하였는바, 누구도 청구상인의 수하에서 삼 초를 버티지 못하였다.

그렇게 일 갑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청구상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원 땅에 노구를 누이게 된다.

청구상인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곳이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청구상인이 자신의 고향인 청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그의 신공절학이 담긴 단서와 옥액도 중원의 어딘가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청구단서(靑丘丹書)를 찾아라! 천하를 얻게 되리라!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어라! 죽음조차 이길 수 있으리라!

 

강호무림이 발칵 뒤집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사, 흑백을 불문하고 모든 강호인들이 명산대천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단서와 옥액, 아니 그중 하나만 얻어도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대로, 문파는 문파대로 사력을 다해 청구상인의 유택(幽宅)을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 와중에 숱한 피보라가 일고 비극이 명멸했다. 누가 청구이보(靑丘二寶)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기만 하면 전무림인들이 그를 습격했다.

어떤 천하고수라도 전무림인을 상대로 싸워서야 살아날 수 없는 법! 수만 명의 생명이 억울하게 죽어 갔고 수백의 문파와 가문이 무림도상에서 지워졌다.

어떤 자는 이런 세태를 빌미로 평소의 원한을 갚기도 했다. 자신의 적이 청구이보를 얻었다는 소문만 흘리면 거의 틀림없이 그 적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음모와 살육의 광란(狂亂)!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며 중원무림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제서야 청구이보가 일으킨 미증유의 혈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숱한 희생과 유혈 끝에 강호인들도 이제는 청구이보에 대한 미련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언 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무림인들은 단서, 옥액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욕심과 집착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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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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