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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落拓文士

 

 

천강마존을 향해 다가서던 삼제(三帝)는 문득 부르르 신형을 떨며 멈추어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강마존이 돌연 번쩍 고개를 든 것이었다.

[...]

가공할 한망이 치뻗치는 그의 두눈을 대하자 상제는 섬칫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증스러운 놈들...!]

천강마존은 부드득 이를 갈아부치며 번쩍 천강검(天罡劍)을 치켜들었다.

삼제 역시 긴장된 안색으로 각기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구유명제는 새하얀 도신(刀身)의 보도(寶刀)를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___빙혼마도(氷魂魔刀), 슬쩍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심맥을 얼어붙게 만드는 가공할 한빙살기(寒氷殺氣)를 지닌 보도(寶刀),

유성검제___ 그의 무기는 유성검문(流星劍門)의 지보인 은하유성검(銀河流星劍)이었다.

만천독제는 백독(白毒)의 정화를 흡수한 독혈낭아봉(毒血狼牙奉)을 움켜쥐었다.

___ ___ ___ ___ !

일진 설풍(雪風)이 팽팽히 고조된 장내의 기운,

순간,

[유명천세(幽冥千世)___!]

[유성비류(流星飛流)___!]

[화독만천(火毒滿天)___!]

삼제는 동시에 대갈을 터뜨리며 신형을 움직였다.

... 츠츠츠츠츳___!

파파파팟___! ___ ___!

낙혼애를 단번에 허물어 뜨릴 듯한 엄청난 파공음과 도기(刀氣)가 팔방(八方)을 난무했다.

천강마존은 불근 이를 악물었다.

[천강참마(天罡斬魔)___!]

아아___!

천하(天下)에서 가장 강맹한 무적(無敵)의 검법 천강검식(天罡劍式)!

가공할 검기(劍氣)의 소용돌이와 함께 일순 섬뜻한 청광(靑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차차차___ ___!

___ ___ ___!

들썩 장내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며,

 

동시에,

[흐윽...!]

[...!]

잇따라 다급한 신음성이 터졌다.

잠시 후, 사방을 몰아쳤던 난석이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구유명제, 유성검제, 만천독제, 즉 삼제(三帝)는 모두 가슴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약간만 더 깊었더라면 치명적인 중상을 면치못했을 것이다.

하나 천강마존, 그 역시 온전치는 못했다.

조금 전에 비해 안색은 더욱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한 사발이나 되는 흑혈(黑血)을 울컥 토해냈다.

이때, 구유명제가 재빨리 지혈을 하고 이제(二帝)를 둘러보았다.

[힘을 냅시다!]

그는 다시 불끈 빙혼마도를 치켜들며 벼락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쐐애애___ ___!

유성검제와 만천독제도 그와 합세하여 무섭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촤르르...!

츠츠츠츠___!

경천동지(經天動地)!

그들 삼인의 합공(合攻)은 실로 천지를 뒤엎고도 남을 위력이 있었다.

허나 천강마존, 그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오너라! 천강뢰격(天罡雷擊)___!]

그는 전신의 심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천강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___ ___ !

고막을 산산이 파열시키는 엄청난 폭음이 터져올랐다.

[허억...!]

[으음...!]

[... ...!]

그 폭음 속에서 급박한 신음성이 연이어 터졌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튕겨지듯 장내에서 빠져나왔다.

인영, 그는 바로 만천독제였다.

헌데, 놀랍게도 그의 오른쪽 다리가 싹둑 끊어져 나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와 유성검제 또한 적지않은 타격을 입고 신형을 비틀거렸다.

허나 그들보다 심한 치명적 상처를 입은 인물은 역시 천강마존이었다.

그의 상세는 엄중하기 그지없이 안색은 거의 사색(死色)에 가가왔다.

번갯불 같은 신광마저 흐릿하게 꺼져갔다.

허나 그는 휘청거리는 신형을 쓸어안고 삼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유명제와 유성검제는 섬뜩한 공포와 함께 전율마져 느꼈다.

(... 지독한 늙은이.. 저 지경이 되어도 버티다니..!)

그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유성은한(流星銀寒)!]

유성검제의 은하유성검이 전광처럼 번뜩 허공을 갈랐다.

[유명구궁(幽冥求宮)!]

거의 동시에 구유명제의 빙혼마도가 천강마존의 복부를 노리며 한망을 발출했다.

허나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左手)로부터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천강마존은 골수까지 저미는 죽음의 통증을 느꼈다.

허나 그는 그 고통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전력(全力)을 쏟아 검()을 휘둘렀다.

천강파극식(天罡破極式)___.

츠츠츠츠...!

헌데,

[으윽...!]

그는 검세를 펼치다 말고 다급한 신음성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력이 끊어짐을 느끼고 그는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파팟___!

구유명제의 빙혼마도는 간신히 피해냈으나 유성검제의 일검이 그의 허리를 그었다.

[!]

천강마존은 한차례 신형을 비틀했다.

바로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그 불꽃은 화전(火箭)처럼 천강마존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은 힘겹게 몸을 비틀어 불길을 피했다.

허나 그는 완전히 몸을 피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크윽...!]

그는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___!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낙혼애의 끝부분, 실로 위험천만의 위기였다.

천강마존은 그러나 피에 젖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의 충혈된 두눈은 구유명제를 향해 부릅떠져 있었다.

[... 네놈이 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를 연성하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___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

이는 희대의 마인(魔人) 마화자(魔火子)가 창안한 가공할 마공(魔功)이었다.

마화융천강기를 펼치면 전율스럽게도 푸른 인화가 피어오른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할 것 없이 이 인화에 적중되면 그 부분은 완전히 삭아버리는 전율의 위력이 있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정면으로 마화융천강기를 적중당하고도 건재한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는 경악의 눈길로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곧 그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빙혼마도를 치켜들었다.

[흐흐흐흣... 이제 죽어랏!]

___ 츠츠츠츳...!

삼엄한 도기가 그물처럼 천강마존을 뒤덮을 듯 몰아쳤다.

천강마존은 허나 속수무책.

그의 신형은 일순간 굳어졌다.

허나, 빙혼마도가 막 천강마존의 몸을 양단하려는 순간, 축 늘어졌던 천강검이 돌연 영사같이 튕겨져 올랐다.

[...!]

구유명제는 예상밖으로 급변한 천강마존의 태도에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허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빙혼마도로 천강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의 좌수가 푸른 인화에 휩싸여 천강마존의 가슴을 꿰뚫었다.

차차창___! ___!

[크아악___!]

천강마존은 정통으로 가슴에 마화융천강기를 맞고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 그의 몸아래는 바로 천야만야한 죽음의 절곡 낙혼애가 아닌가?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낙혼애 아래로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

구유명제는 이 예기치못한 사태에 당황성을 터뜨렸다.

허나 천강마존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한 만길 단애 아래로 사라져 버린 되었으니...

[으음...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가 분명 그의 몸에 있었을 텐데...]

그는 원통함에 발을 굴렀다.

이때,

[__ __ __ ___!]

돌연 폐부를 뒤흔드는 긴 장소성이 구련한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건데 공력이 극상에 이른 내가 최절정고수임이 분명했다.

구유명제와 이제는 안색이 홱 변했다.

[...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낙혼애 아래에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절세의 경공으로 낙혼애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한 번에 근 백여 장 씩의 엄청난 도약이었다.

___ !

순식간에 인영은 단에 위로 날아내렸다.

순간, 삼제는 일제히 두눈을 크게 떴다.

[낙척문사(落拓文士)!]

구유명제가 경악의 음성으로 짧게 부르짖었다.

삼제의 앞에 나타난 인영___.

그는 서생차림을 한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헌데 그는 일신에 헤질대로 헤져 누덕누덕 기운 장삼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___고죽취옹(枯竹醉翁).

___낙척문사(落拓文士).

중년인, 그가 바로 쌍기(雙奇) 중 일인(一人)인 낙척문사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삼, 사십대의 중년인이었으나 실상은 백 삼십(百三十)이 넘은 노인이었다.

이때, 낙척문사는 장내를 둘러보며 부르르 신형을 경련했다.

[으으... 이럴 수가...!]

그는 곧 사태를 짐작하고 분노가 끓는 눈빛으로 삼제를 노려보았다.

그 강렬한 안광에 삼제는 흠칫 했다.

(저 늙은이는 무공을 익혔다고 알려지지 않았다. 헌데... 이제보니 천강마존에 못지않은 무공을 지닌 고수다...!)

구유명제는 일순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낙척문사.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무섭게 삼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허나 잠시 후 그는 사납던 안광을 거두며 문득 탄식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법. 그대들의 과욕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삼제를 향해 조용하나마 깊은 위엄이 깃든 음성으로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구양형님의 시신이라도 찾아야겠군.]

몸을 돌리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___ !

그는 주저없이 까마득한 낙혼애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급격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그의 신형이 점차 허공을 빙빙 돌며 여유있게 날아내려갔다.

낙혼애 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삼제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문득 자신의 실력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다.

낙척문사의 무공은 경악의 한도를 넘어 초쾌한 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으니...

문득 구유명제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끝난일. , 돌아갑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휙 신형을 날렸다.

이어, 유성검제가 그를 뒤따랐고 만천독제와 백독랑아봉에 몸을 의지한 채 낙혼애를 내려갔다.

 

X X X

 

철썩... 우르릉___!

절해고도(絶海孤島)!

노호(怒號)같은 파도가 섬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

그것은 전체가 하나의 암석으로 형성된 기이한 섬이었다.

콰르릉... 우르르... ___ ___!

섬둘레는 겨우 십 리 남짓___

허나 그 주위로는 수십 길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천험의 위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돌연 까마득히 먼 수평선 위에 하나의 흑점이 번득 나타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인영은 바다 위를 마치 육지에서 걷는 것과 같이 미끄러지듯 유유히 돌섬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점차 뚜렷이 드러나는 인영, 그는 허름한 장삼을 걸친 중년문사였다.

낙척문사, 바로 그가 아닌가?

헌데, 그는 기이하게도 왼손에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감싸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척문사는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유유하게 타며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파도를 넘고 수면을 가로질러 높다란 암초 뒤로 돌아갔다.

동굴, 그곳에는 놀랍게도 약 이 장 정도의 높이로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은 반정도가 바닷물에 잠긴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낙척문사는 망설임없이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굴의 통로를 따라 얼마쯤 나아가자 수면이 끝나며 바닥이 드러났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약 십여 장 전진했을까?

낙척문사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하나의 석문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석문을 밀었다.

끼이익___!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석실이었다.

수만 권의 장서가 빽빽이 들어차 흡사 서실(書室)을 연상케하는 석실___.

석실의 한쪽에는 석상(石床)이 놓여 있었다.

헌데, 지금 그 석상 위에는 한 명의 청삼노인이 묵묵히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낙척문사는 석실을 들어서며 청삼노인을 향해 말했다.

[형님, 소제 돌아왔습니다.]

그말에 돌아앉아 있던 청삼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헌데, ! 이럴수가...!

청삼노인, 그는 바로 낙혼애 아래로 떨어진 천강마존이 아닌가?

그가 어찌 살아 이곳 석실에 앉아있단 말인가?

 

천강마존___.

그는 낙척문사와 오래 전부터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사이였다.

낙척문사는 천강마존이 무형기독에 중독되자 해약을 구하기 위해 그와 헤어졌다.

허나 그가 해약을 구해 낙혼애로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천강마존은 낙혼애로 떨어진 후였다.

그는 낙담 끝에 낙혼애로 뛰어내렸다.

천강마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실로 천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강마존은 수백 년 묵은 나무등걸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는 엄청난 내상을 입은데다가 독기(毒氣)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결국 공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강마존은 들어서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네갈노제, 어서오게.]

허나 문득 그는 낙척문사의 안색을 살피며 나직이 탄식했다.

[,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것을 보십시오.]

그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천강마존의 앞으로 내밀었다.

[웬 어린아이인가?]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한 듯 천강마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홱 급변했다.

일순 그의 흐릿하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신광이 번쩍였다.

[.. 이럴 수가...! 천년(千年) 내에 나타난 적이 없는 천양신맥(天養神脈)을 지니고 있다니...?]

그의 두눈은 엄청난 경악으로 흡떠졌다.

그는 벅찬 감정을 다스리며 강보 속 아이의 골격을 살폈다.

헌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아니는 앙징스럽게도 한 손에 옥패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 황룡(黃龍)이 승천하고 있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진 옥패였다.

[... 이것은...?]

천강마존의 표정이 다시 한 차례 크게 변했다.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신물(信物)입니다.]

천강마존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황룡보에 무슨 변괴라도 있었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황룡보가 의문의 괴멸을 당했습니다.]

천강마존의 안색이 일시지간 창백하게 굳었다.

[자세히 얘기해보게.]

그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닫았다.

 

[... 으음...]

끊일 듯 미약한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 웬 여인이...?]

낙척문사는 검미를 찌푸리며 우뚝 걸음을 멈추어섰다.

이곳은 돈탕 근처의 험지.

싯누런 황토의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낙척문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다가갔다.

여인은 삼십 정도의 소부(小婦)로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인이었다.

허나 지금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백의(白衣)가 혈의(血衣)로 변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낙척문사는 이미 그녀의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흔들며 말했다.

[부인,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은 문득 힘겹게 눈을 뜨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제 아이를... 부탁... 황룡보는 무너지고... 대제께선... 함정에... 적들은... ...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잇고는 그만 축 늘어졌다.

! 그녀의 가슴에는 강보에 싸인 한 명의 사내아이가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황룡보가...!]

낙척문사는 급히 여인과 아이를 안고 몸을 날렸다.

그곳에서 황룡보까지의 거리는 불과 삼십여 리___

그는 순식간에 황룡보에 이르렀다.

허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초토화된 황룡보의 잔해 뿐이었다.

낙척문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황룡보 식솔들을 모두 안장해 주고 소부의 시신도 따로 안장시켰다.

허나 기이하게도 황룡대제의 시신은 어느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낙척문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황룡대제! 그는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기재였건만...]

문득 그는 낙척문사에게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는 세 명의 처가 있었습니다만 오년 전에 혼인한 청해설랑(靑海雪郞)에게서만 얼마전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청해설랑이었단 말이군.]

[.]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허허...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안배인지 모르겠군! 비록 복수할 마음은 없으나 하늘이 이 아이를 내게 보냈셨음은 이 아이로 하여금 중원에 불어닥친 혈겁을 막게 하시려함인가?]

그말에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혈겁은 형님의 무학이 아니면 막을 수 없습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이내 어두운 신색을 지었다.

[허나 오절(五絶)이 이 아이가 장성할 동안 가만히 있겠는가? 이 아이가 장성했을시는 이미 전 무림이 오절(五絶)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오절(五絶)___!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대체 어떤 인물들이기에 천강마존이 염려한단 말인가?

허나 낙척문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점에 대해선 소제가 이미 손을 써놓았습니다.]

[손을 써 놓다니...?]

[강호에서는 형님이 건재한 것으로 알려지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오절이 비록 암중모색은 할수 있어도 표면으로 나서 활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네가 한 일이라면 틀림없겠지.]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허... 보면 볼수록 훌륭한 골격이군. 이 녀석은 아마 노부를 능가하는 불세제일인(不世第一人)이 될 수 있을 것이네.]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과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

이들의 만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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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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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은 강시(畺屍) ! 이제야 따라왔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둥그레졌던 마면혈도는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휘익!

껄껄 웃는 마면혈도 앞으로 사각 모자를 쓴 초로의 인물이 임청우의 멱살을 오른손으로 틀어쥔 채 훌쩍 내려섰다.

결코 가볍지 않을 임청우의 몸을 헝겊 쪼가리인 듯 흔들면서 내려선 인물은 왼손에 쥔 쇠로 만든 접는 부채, 철선(鐵扇)을 성마르게 부치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의 몰골도 마면혈도 못지않게 기괴하다.

안색은 시체처럼 하얗고 창백한 반면 입술은 피를 마신 듯 새빨갛다.

또 열흘은 굶은 듯 퀭한 두 눈은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낄낄낄... 얼어 죽은 송장 놈아! 이 형님보다 한발 늦었구나.”

마면혈도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어 죽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괴인의 별호는 철선동시(鐵扇凍屍).

철선동시는 성격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자였다.

우리를 본 놈을 살려서 보내려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마면혈도!”

!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한쪽에 던져버리며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자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바닥에 던져진 임청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낄낄낄... 그놈은 무림인이 아니야.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내버려뒀으면 살아남지 못했어.”

마면혈도가 다친 말이 우는 것같은 걸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악명 높은 마면혈도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군.”

철선동시는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엎어져 있는 임청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

마면혈도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맹세를 어겼단 말이냐? 나 마면혈도가 살인, 방화, 강간을 가리지 않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그래 그래,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는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빴을 뿐이로군.”

철선동시는 냉랭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 얼어 죽은 송장 놈이...”

!

대노한 마면혈도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손잡이만 핏빛이 아니라 칼날도 피를 칠한 듯이 붉었다.

토막 쳐 버리고 말겠다아아아!”

마면혈도는 날이 넓은 핏빛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철선동시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그자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하늘로 뻗어 올랐다.

! 서걱!

핏빛의 칼이 내뻗는 그 혈광에 스친 바위들이 마치 두부처럼 소리없이 베어졌다.

스슥!

그러나 철선동시는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면혈도의 사나운 칼질을 피해버렸다.

날 죽이려 드는 것만 봐도 자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머리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농산 표운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만도 다행이지.”

빗발치듯 날아드는 핏빛 칼을 흘려보내면서 철선동시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면혈도는 흠칫하며 칼질을 멈추었다.

네놈을 죽이려는 게 뭐 어떻단 말이냐? 나는 네놈만 죽어 없어지면 속이 후련하겠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유()가 놈을 완전히 따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철선동시의 그 한마디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마면혈도의 핏빛 칼, 즉 혈도(血刀)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보도(寶刀).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그 혈도를 아무 생각없이 마구 휘둘렀으니, 강적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혀서 붉으락푸르락 하는 마면혈도의 얼굴을 보면서 철선동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전한 곳에 숨을 때까지는 만나는 모든 놈을 죽여 버리자고 자네가 먼저 말했었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여서 화골산(化骨酸)으로 녹여 없앤 놈들만 하더라도 무려 이백 칠십 아홉일세. 한데 자네는 저 이백 팔십 번째 놈을 죽이지 않았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거지.”

철선동시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임청우를 가리켰다.

그만해! 지금이라도 저놈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마면혈도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야지.”

철선동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저놈을 구한 것도 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자네 손으로 저놈을 죽여야만 자네가 이부지자(二父之子) 개새끼가 아니게 될 테니...”

마면혈도는 성미가 급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철선동시의 말을 듣자 자기 손으로 임청우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개새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마면혈도는 혈도를 어깨위로 반쯤 비스듬히 돌려서 임청우를 향해 휘두르려 했다.

번쩍!

핏빛 칼에서 혈광이 다시 한 번 길게 일어났다.

기절한 임청우는 영문도 모르고 몸뚱이가 무 토막처럼 잘라질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

하늘을 뒤흔드는 용의 울음소리인 듯, 초목산천을 떨게 만드는 대호(大虎)의 포효인 듯한 웅혼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그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합창하듯 외쳤다.

그런 그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

다음순간 철선동시가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마면혈도도 혈도를 회수하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대가리를 깨서 골수를 파먹어도 시원찮을 유가놈 같으니...”

마면혈도는 표운봉 아래로 달려가는 철선동시의 뒤를 따라가며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표운봉에서 사라졌다.

우워어어어어!”

그와 함께 두 마두를 쫓아버린 고함소리는 바위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방향을 바꿔 멀어져갔다.

고함소리의 주인은 두 마두의 종적을 발견하고 추격해갔을 것이다.

이제 표운봉 정상에는 죽은 듯 미동도 않는 임청우만이 뜨거운 태양아래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 산봉우리 위로 기울어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그 노을 속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표운봉 정상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의 왕에는 못 미치지만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사람 키 정도는 되는 커다란 독수리들이다.

오래전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던 그놈들은 주린 배를 채워줄 희생물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퍼덕거리는 날개 짓이 돌먼지를 날리고, 날카로운 부리들은 임청우의 등을 쪼았다.

! 퍼퍽!

세차게 찍어대는 독수리들의 부리에 임청우의 등에서 살이 뜯기며 피가 번져 나왔다.

짊어지고 있던 망태와 입고 있던 삼베옷도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누더기가 되어갔다.

!

또 한 번 등을 깊이 쪼이는 순간 임청우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

뒤이어 다른 독수리의 부리가 임청우의 어깨 부위도 찍었다.

!”

순간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끼약! 카아악!

만찬을 즐기려던 독수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높이 날아올라갔다.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공으로 혈도를 막아버렸었다.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임청우의 혈도가 독수리들의 부리에 쪼이면서 풀어진 것이다.

망할 놈의 날짐승들 같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리는 임청우의 등과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털썩!

임청우는 누더기가 된 망태를 벗어 던졌다.

쫘악!

이어 피로 물든 웃옷도 찢듯이 벗었다.

등에 생긴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지나 뒤쪽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임청우는 벗은 옷을 수건처럼 둘둘 말아서 때를 벗기듯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거친 삼베 옷감이 상처를 쓸고 지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다.

빌어먹을!”

등에서 대충 피를 닦아낸 임청우는 피에 젖은 옷을 확 집어던졌다. 옷은 피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서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옷을 집어던진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절을 두 번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임청우는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대가리야! 얼어 죽은 송장같은 놈아! 네놈들이 살아있어도 내게는 죽은 놈들로 보인다. 이제 내가 두 번을 절했으니 네놈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오. 네놈들이 죽었다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독수리들의 먹이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임청우는 땅바닥에 패대기친 망태에서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약초들을 입안에 쑤셔 넣은 임청우는 우걱우걱 씹어 다진 후 근처 바위에 턱 붙였다.

그리고는 등의 상처를 바위에 붙인 약초에 대고 비벼대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신통하게 멎었다.

어머니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산을 타며 채약을 해온 임청우인지라 어떤 약초가 어떤 증상에 잘 듣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대낮에 귀신같은 것들을 만나서 십년감수하질 않나... 농산을 떠나긴 떠나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라면 진작 떠났을 농산이지만...”

상처에서 피가 멎으며 임청우의 화도 조금은 풀렸다.

옷은 포기해야겠구나.‘

집어던졌던 웃옷을 살펴본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웃옷은 원래 낡았었는데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헤집어져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피에 절고 살점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웃옷을 다시 던져버린 임청우는 망태를 챙겼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망태에 활과 화살을 우겨넣은 임청우는 절벽 끝으로 갔다.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절벽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북두홀을 찾는 건 포기해야하나?)

임청우는 갈등했다.

그는 멱살을 틀어쥔 마면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북두홀로 그자의 팔을 찍었었다.

하지만 북두홀은 강철같은 마면혈도의 팔뚝에 전혀 상처를 못 내고 임청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표운봉의 남쪽 절벽은 가파를 뿐 아니라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가 없다.

산을 타는데 능숙한 임청우라도 쉽사리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북두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북두칠성이 새겨진 북두홀은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북두홀은 임청우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보아온 물건이다.

임단심은 가끔씩 북두홀을 꺼내보며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북두홀이 아버지 것이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단심이 임청우를 데리고 농산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 전이다.

그 얼마 후 임단심은 북두홀을 깊은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임단심에게 북두홀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북두홀은 너무도 단단하여 훼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깊은 계곡에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임청우는 북두홀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청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으로 내려가 북두홀을 회수했었다.

임단심은 임청우가 북두홀을 찾아온 걸 알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후로 임청우는 북두홀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열두 살 때도 천길 벼랑을 타고 내려가 북두홀을 찾아왔었다.)

임청우는 망태를 등에 짊어지며 심호흡을 했다.

망태의 거친 표면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쓸어 오만상을 쓰게 만든다.

(어렸을 때 했던 일을 지금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절벽의 틈새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대가리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되었구나.)

깎아지른 절벽을 신중하게 타고 내려가며 새삼 마면혈도가 미워지는 임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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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필살일초(必殺一招)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장강(長江)과 만나게 된다.”

강조가 손을 들어 멀리 북쪽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안탕산을 종단해서 북쪽으로 왔구나.)

강유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겹겹이 늘어선 북쪽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험한 길로 온 이유는 혹시나 끼어들지 모를 마()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

강조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의 가지를 하나 꺾었다. 길이 네 자 정도로 곁가지와 나뭇잎이 조금 붙어있지만 반듯한 나뭇가지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네게 한 가지 구명절초(求命絶招)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강조는 나뭇가지에서 곁가지들과 잎사귀를 떼어내며 말했다.

붕정검법에 소자가 익히지 않은 초식이 있는지요?”

강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가르쳐주려는 것은 붕정검법이 아니다.”

강조는 곁가지와 잎사귀를 떼어내어 나뭇가지를 고르게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젊었을 때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전수받은 일초의 검법인데 그 위력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치명적인 탓에 사용한 적은 없다.”

강조는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고 치명적인 검법이기에...”

어느 정도인지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조는 한쪽에 서있는 사람 키만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강조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겨누며 말했다.

필살일초...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집니다.”

강유는 긴장하며 강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초식이 아니라 내공의 운용법이다.”

지잉!

강조가 바위를 겨눈 나뭇가지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유는 나뭇가지에 측량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이 운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운용에 변화를 주는 비결인데...”

투투툭! 드드드!

진동이 점점 강해지면서 나뭇가지는 나사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발산되는 내공의 위력이 치명적으로 변한다.”

강조는 뒤틀리며 진동하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찔렀다.

퍼억!

그러자 나뭇가지 끝이 두부를 찌른 것처럼 바위 속으로 푹 들어갔다.

! 퍼퍽!

뒤이어 바위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나뭇가지도 터져버렸다.

!”

강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뜨며 탄성을 토해냈다.

나뭇가지에 찔린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이 앞뒤로 뻥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나뭇가지가 뒤틀림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긴 했지만 단단한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을 냈다.)

강유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이것이 필살일초의 위력이다.”

!

강조는 손에 남아있던 한 자 가량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무공이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사용해선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필살일초의 연공비결을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이어 강조는 한 가지 내공심법의 비결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 가공하다!)

그 비결을 들으면서 강유는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말 그대로 상궤를 뛰어넘는 무공이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릴 때부터 뒤틀고 꼬아버리는 운공비결인데... 위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심맥에 심각한 무리를 주게 된다.)

강유는 강조가 가르쳐주는 필살일초의 무시무시한 위력과 함께 치명적인 결함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무공이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절대로 써선 안되겠구나.)

적을 죽이기 위해 내 몸을 망치는 무공!

그것이 바로 필살일초였다.

필살일초의 결함을 알아차린 강유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집중해서 강조가 읊어주는 운공비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 * *

 

위가진(衛家津)은 그리 크지 않은 강가의 마을이다.

비록 마을은 작지만 장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많다.

끼니때가 되어서인지 위가진의 유일한 객잔 위가반점(衛家飯店)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두 노인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두 노인은 쌍둥이다.

체격과 이목구비가 같은 틀로 찍어낸 듯이 똑같다.

그러나 닮은 것은 체격과 얼굴뿐이다.

두 노인의 모발과 피부의 색은 극단적이다.

한 명은 먹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의 모든 부위가 새카맣다. 흰 것은 오직 눈의 흰자위뿐이다.

다른 한명은 정 반대로 모든 부위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같이 하얗다. 심지어 눈동자조차 흰색에 가깝다.

두 노인은 몸의 색과는 정 반대 색상의 옷을 입고 있다.

검은 노인은 눈같이 흰 백의를 거치고 있다.

반면 흰 노인은 새카만 흑의를 걸치고 있다.

백귀(白鬼), 자네는 여전하구먼. 저승사자나 염라대왕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니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지.”

검은 얼굴의 노인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남 말 하지 말게 흑신(黑神).”

백귀라 불린 하얀 얼굴의 노인이 술병을 집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어디 살아있는 인간처럼 보이는 줄 아는가?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인상 쓰고 있는 내 얼굴 보다 더 섬뜩한 거 알기나 해?”

쪼르르!

백귀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검은 얼굴의 노인, 흑신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참 세상은 살만 했었으니까.”

흑신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지난 일 얘기해서 뭐하겠는가? 우리 두 늙은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거늘...”

백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두 노인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흑신과 백귀, 합쳐서 흑백신귀(黑白神鬼)라 불리는 그들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 십팔 년 동안 태산(泰山)에 자리한 제왕성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자신들의 과오로 벌어진 어떤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왕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때문이다.

얘기해보게!”

얘기해봐!”

! !

흑신과 백귀는 동시에 술잔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 그런지 두 사람의 행동거지는 판박이다.

말이 서로 부딪히자 흑신과 백귀는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내가...”

내가 먼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두 노인은 또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말이 부딪히자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는 자네가 먼저 말했으니 올해는 내가 얘기를 시작함세.”

흑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나.”

백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여간 우리끼리는 얘기 시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백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인 탓이니 어쩌겠는가?”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 간 자네는 성과가 좀 있었나?”

전혀 없었네.”

백신의 물음에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공쳤다는 건가?”

백귀는 새하얀 눈썹 사이의 미간을 모았다.

십팔 년 전, 무후(武后)님을 시해하고 소성주(少城主)를 납치해간 그놈... 귀면지존은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가 없네.”

흑신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의 단서를 남겼다가도 추적을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잠적해버리니 말일세.”

지난 십팔 년간 끝없이 반복해온 숨바꼭질이지.”

백귀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백신귀가 태상호법으로 봉사하고 있는 제왕성이 세워진 것은 백여 년 전이다.

제왕성을 세운 것은 섭초천(葉超天)이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섭초천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섭초천은 기이한 무공으로 기존 세력들을 가차없이 쓰러트렸었다.

당시의 강호를 호령하고 있던 어떤 세력이나 고수도 섭초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통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 사파 무림의 본산인 혈교(血敎)도 섭초천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훗날 제왕노조(帝王老祖)라 불리게 된 섭초천은 자신의 무공 내력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구사하는 무공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섭초천이 구사하는 경이적인 무공의 출처에 대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달마묵장!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겼다는 비결만이 섭초천이 이룬 놀라운 성취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섭초천과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달마묵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제왕성이 달마묵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왕성의 당대 성주는 철면제왕(鐵面帝王) 섭장천(葉長天)이란 인물이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인 일제(一帝)가 바로 철면제왕 섭장천이다.

제왕노조 섭초천의 손자인 철면제왕 섭장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다.

마교와 혈교의 잔당들을 비롯하여 숱한 고수들이 섭장천에게 도전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섭장천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다쳤다.

삼대에 걸쳐 거푸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제왕성의 성세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헌데 십팔 년 전, 제왕성에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었다.

섭장천의 아내인 무후 주영청(朱永淸)이 살해당하고 한 살짜리 외아들 섭무궁(葉無窮)이 납치된 것이다.

범인은 제왕성 섭씨일족의 가전 보물을 훔치러 잠입한 도둑이었다.

도둑이 노린 가전 보물은 물론 달마묵장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달마묵장은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가 근처에 늘 상주하며 지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은 용케 달마묵장을 훔쳐냈다.

도둑은 얼굴에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훗날 밝혀진 정체는 마교의 신임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친 직후 흑백신귀에게 포착되었었다.

흑백신귀는 함께 손을 쓰면 섭장천과도 호각을 이룰 수 있다는 절세고수들이다.

귀면지존이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흑백신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후원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소성주인 섭무궁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섭장천의 아내 무후 주영청은 어린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귀면지존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삼 년 전부터 강북(江北) 육성(六省)에서는 놈의 종적이 뚝 끊겼네.”

흑신이 말을 이었다.

아마 강남(江南)으로 근거지를 옮겼거나 어딘가에 깊이 숨어서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때문일 걸세.”

내가 담당한 강남 칠성(七省) 쪽에서는 그래도 지난 일 년 간 서너 번 놈의 흔적이 포착되었었네.”

백귀가 흑귀의 말을 받았다.

흑백신귀는 주모인 주영청이 살해당하고 소성주 섭무궁이 납치된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 자책했다.

그래서 귀면지존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고 제왕성을 떠났었다.

그 후 십팔 년의 세월 동안 흑백신귀는 강북과 강남을 나누어 귀면지존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강북에서의 수색은 흑신이 맡았고 강남은 백귀가 뒤져온 것이다.

놈은 서너 달마다 한 번씩 대처(大處)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볼일만 보고는 재빨리 모습을 감추길 반복해왔네.”

어디 어디서 놈의 흔적이 발견되었는가?”

흑신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백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무창(武昌), 소주(蘇州), 상해(上海), 마지막으로 두 달 전쯤 광릉(廣陵)에 모습을 드러냈었네.”

광릉이라...”

백귀의 말에 흑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광릉이라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가 서린 유서 깊은 고장인데... 근처에 숨을 만한 곳이 있는가?”

산이 깊기로는 안탕산(雁蕩山), 물길이 험하기로는 대택향(大澤鄕)이 있네만...”

백귀가 대답했다.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이목이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물처럼 깔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흑신이 새카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일 은신처를 마련한다면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겠군.”

백귀도 무슨 말인지 깨닫고 눈을 치떴다.

앞으로는 외진 곳을 중점적으로 뒤져 봐야하는 이유일세.”

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놈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광릉 근처의 안탕산과 대택향을...”

말을 이어가려던 흑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백귀의 치떠진 눈이 자기 뒤쪽의 객잔 입구에 고정되어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집중해야지 딴전을 피우면...”

백귀를 타박하며 뒤를 돌아보던 흑신 역시 눈을 치뜨며 입을 다물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본 때문이다.

청년은 먼 길을 가는 듯 등에 봇짐을 비스듬히 짊어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 저놈...)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천부(天賦)의 무골(武骨)이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빈자리에 앉는 청년의 모습을 살펴보며 흑백신귀는 실로 오랜만에 온몸을 뒤흔드는 전율을 느꼈다.

청년의 빼어난 자질은 백 년 가까이 살아온 흑백신귀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안탕산을 떠나온 강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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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촌의 세 모녀

 

 

-설삼신단!

 

그것은 만년설삼(萬年雪蔘)으로 만든 무림오대영약(武林五大靈藥) 중 하나다.

일갑자 전, 대설산의 어느 계곡에서 엄청난 설붕(雪崩:눈사태)이 일어났었다.

헌데 설붕이 지나간 자리에서 만년 동안 눈 속에서 자란 한 포기의 설삼이 발견되었었다.

만년설삼을 발견한 인물은 마도 무림에 속한 어떤 기인이었다.

그 기인은 만년설삼으로 다섯 알의 설삼신단을 만들었다.

설삼신단은 한 알을 복용하면 백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희세의 영약이다.

특히 여인들이 설삼신단을 복용하면 극음기공을 수월히 연성할 수 있게 된다.

고검추가 여인 옥여상의 몸속에서 찾아낸 세 알의 환약은 바로 그 설삼신단이었다.

그 중 하나를 옥여상이 복용했으므로 설삼신단은 이제 단 두 알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헌데 옥여상은 그 대단한 설삼신단을 복용하고도 자신의 내상이 낫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당한 마공이 그만큼 치명적인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쇄심마장!

 

옥여상에게 중상을 입힌 무공의 이름이다.

쇄심마장은 구마(九魔)라 불리는 전설적인 마인들 중 한명이 남긴 마공이다.

일단 쇄심마장에 격중되면 온몸의 혈맥이 말라붙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쇄심마장에 당한 상세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시전자가 쇄심마장의 마공진력을 회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만년화리(萬年火鯉)의 생혈(生血)을 마셔 손상된 혈기를 보충하는 것이다."

고검추는 옥여상을 말을 듣고 있던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의 짓인지요?"

잘 봤다.”

옥여상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누군데 아주머니를 시해하려 한 것인지요?"

고검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옥여상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놈의 이름은 담세황... 옥면마성(玉面魔星)이라는 별호를 지닌 나의 사제다."

"예엣? ... 사제라고요?"

고검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옥여상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녀를 추격하던 자가 다름 아닌 그녀의 동문사제(同門師弟)였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여유가 없구나. 다만 그 자가 내게서 두 가지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암습했다는 것만 말해 주마."

옥여상은 불신의 표정을 짓는 고검추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은신처를 알려주지 않으련? 설삼신단의 약효로 일각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사이에 운공요상을 마쳐야만 한다. 과연 내가 익힌 태을강기(太乙罡氣)가 쇄심마장에 당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서쪽으로 삼십여 리 쯤 가면 크고 작은 돌무지로 덮인 계곡에 이르실 것입니다. 그 계곡 끝의 절벽을 덮고 있는 덩굴 안쪽에 제법 아늑하고 은밀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고맙구나."

옥여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고검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고검추의 용모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조만간이라니... 무슨 말씀이실까?)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고검추의 얼굴을 뜯어보던 옥여상의 눈가로 가는 경련이 스쳤다. 그녀는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옥여상은 복잡한 심사가 실린 표정으로 말하며 일어났다.

!

그리고는 몸을 날려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분이시다."

멀어지는 옥여상을 보며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만간 설삼신단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옥여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다고도 했으니 일단 갖고 있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들어있는 옥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니 어느 덧 해가 기련산의 서쪽 능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돌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죽서기년도 품속에 찔러 넣은 고검추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향해 달려갔다.

 

***

 

-팽가촌(彭家村)

 

기련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산촌이다.

백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팽씨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팽가촌이다.

팽가촌 동쪽 오리쯤에는 모옥(茅屋;초가집) 한 채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골짜기에 지어진 그 모옥에는 팽씨가 아닌 모자(母子)가 살고 있다.

서른여섯 살인 어머니의 이름은 당혜선(唐惠善)이고 열일곱 살인 아들의 이름은 고검추다.

성씨로도 알 수 있듯이 두 모자는 팽가촌 토박이가 아니다.

십칠 년 전, 당혜선은 핏덩이인 아들을 안고 팽가촌에 나타났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된 젊은 엄마 당혜선은 당시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혜선은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랜 도피 생활을 한 듯 했다.

마음씨 좋은 팽가촌 주민들은 당혜선을 극진히 간병해주었다.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당혜선은 팽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으로 팽가촌 주민들의 은혜에 보답했다.

본래 기련산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여러 종류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 표범, 늑대, 곰등이 수시로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곤 했었다.

당혜선은 그런 맹수들을 보는 족족 잡아 죽여서 팽가촌의 오랜 우환을 제거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련산에는 맹수들 보다 더 사납고 포악한 존재들이 여럿 있다.

바로 산적들이다.

관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기련산에 산채를 마련한 산적 떼가 한 둘이 아니다.

산적들은 불시에 팽가촌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었다. 식량이나 가축을 주로 강탈해가지만 때로는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팽가촌은 외진 산촌이라 관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이나 가축을 바쳐서 산적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래야만 부녀자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이 팽가촌에 거주하면서 산적들은 더 이상 팽가촌 주민들을 괴롭히지 못했다.

당혜선은 날을 잡아 산적들의 산채 중 한 곳을 찾아가 궤멸시켜버렸다. 산적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리 한쪽을 못 쓰는 불구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본보기가 되어서 다른 산채의 산적들도 감히 팽가촌을 건드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산적들의 행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당혜선이란 여걸이 팽가촌에 정착한 덕분이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당혜선을 선녀처럼 떠받들고 공경했다.

당혜선의 아들 고검추는 아주 영특했다.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추론해서 알 정도였다.

팽가촌은 외진 산골 마을이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이 직접 영특한 아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당혜선은 무공 뿐 아니라 학식도 상당했다.

하지만 고검추는 열 살 이전에 어머니가 아는 모든 것을 배워버렸다.

더 이상 아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당혜선은 대처에 나가 책을 구해다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혜선은 아들이 생계는 신경 쓰지 말고 학문 연마에만 집중하길 바랬다.

게다가 고검추와 함께 자란 또래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업인 목축, 농사, 사냥, 약초 채집등을 배우느라 바빠졌다.

그 때문에 고검추는 팽가촌 근처에 살면서도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함께 놀 친구도 없어서 고검추는 어머니가 구해다주는 책을 읽으며 지내야했다.

그래도 열세 살 때부터는 마을 주민들이 기르는 양을 보살펴주는 일로 소일해오고 있다.

당혜선도 양치는 일은 공부에 그리 방해되지 않는 때문인지 굳이 반대하진 않았다.

오 년 가까이 양들을 보살펴온 덕분에 고검추는 이제 팽가촌의 그 누구보다 능숙한 양치기가 되었다.

오늘도 양떼를 몰고 마을 뒤편 초원으로 올라갔던 고검추는 옥여상이란 신비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에 휘몰아칠 거센 폭풍의 전조라는 사실을 고검추로서는 알리가 없었다.

 

***

 

해가 막 서산으로 떨어지고 있다.

매애애...”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이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한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백 쉰 세 마리... 오늘도 한 마리 빠트리지 않고 잘 데리고 돌아왔구나.”

마지막으로 우리에 들어간 양까지 센 등삼낭(鄧三娘)이 초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인 등삼낭은 산촌 마을의 여자답지 않게 단아한 용모를 지녔다. 이목구비가 아주 섬세하여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입술 가에 찍혀있는 점 때문에 관능적인 분위기도 충긴다.

비록 허름한 베옷을 입었어도 등삼낭의 타고난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등삼낭은 팽씨가 아니지만 팽가촌의 주민이다.

그녀는 팽가촌 촌장 팽유(彭維)의 며느리인 것이다.

등삼낭은 팽유가 젊었을 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등씨 성의 어떤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등삼낭이라는 이름은 등씨 집안의 셋째 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등삼낭의 집안은 강호의 혈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

팽유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등씨일족은 이미 몰살당한 후였다.

그래도 천우신조로 당시 다섯 살이던 등삼낭은 목숨을 건졌다. 등씨 집안 하녀 한 명이 그녀를 자신의 딸로 위장시켜준 덕분이었다.

팽유는 고아가 된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와 키웠으며 나이가 차자 자신의 외아들 팽진(彭進)과 짝을 지어주었다.

팽가촌 차기 촌장인 팽진과 부부가 된 등삼낭은 슬하에 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녀의 행복하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련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산적 두목이 팽가촌에 쳐들어와 그녀를 납치해간 것이다.

 

-흑모철웅(黑毛鐵熊)!

 

기련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철웅채(鐵熊寨)란 산채의 채주다.

흑모철웅은 타고난 신력에 더해 도검이 불침하는 철피공(鐵皮功)이란 외공까지 익혀 기련산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흑모철웅은 팽가촌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철웅채와 팽가촌이 수백 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혜선의 위명을 들어서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보름 전에 사달이 났다. 볼일이 있어 중원에 다녀오다가 팽가촌 근처를 지나던 흑모철웅의 눈에 등삼낭이 띤 것이다.

산골 출신답지 않은 단아한 등삼낭의 자태는 흑모철웅의 눈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자는 막아서는 등삼낭의 남편 팽진을 때려죽이고 등삼낭을 철웅채로 납치해갔다.

대처로 나갔다가 돌아온 당혜선은 그 사실을 알고 즉시 철웅채로 달려갔다. 다행히 당혜선은 등삼낭이 흑모철웅에게 겁탈당하기 전에 철웅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혜선은 평소 한 살 아래인 등삼낭을 친 동생인 것처럼 예뻐했다.

그런 등삼낭을 납치한 흑모철웅의 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당혜선은 산적들에게 살수를 썼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당혜선의 검에 죽임을 당했고 다친 자는 그 몇 배였다.

철피공을 익혀서 도검이 불침한다는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다.

흑모철웅을 쫓아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당혜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겁탈당할 뻔한 충격으로 실신한 등삼낭을 보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일단 등삼낭을 데리고 팽가촌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다시 철웅채로 돌아가서 흑모철웅의 종적을 추격하는 중이다. 흑모철웅을 살려두면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후환을 없애버릴 작정인 것이다.

 

당언니...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등삼낭은 양들이 들어간 우리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상복을 겸해서 수수한 베옷을 입은 등삼낭의 얼굴은 초췌하다.

남편은 산적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하마터면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겁탈당할 뻔 했다.

지난 보름은 등삼낭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시간이었다.

만일 아직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야한다는 모정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열다섯 살인 아들과 열일곱, 열세 살인 딸들이 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등삼낭은 힘을 내야만 했다. 애써 의연한 척 하며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마을의 큰 재산인 양들을 돌보아온 것이다.

때가 되면 돌아오시겠지요.”

고검추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당혜선은 수시로 팽가촌을 나가곤 했지만 아무리 길어도 닷새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보름 넘게 소식이 없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우리 왔어요.”

마을 안 쪽에서 해맑은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검추가 돌아보니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등지고 두 명의 소녀가 다가오고 있다.

등삼낭을 닮은 소녀들인데 열세 살 쯤인 계집아이는 다람쥐처럼 쪼르고 달려오고 있고 그 뒤에서 열일곱 살쯤인 새침한 인상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언니 쪽은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있다.

소녀들은 등삼낭의 딸들인 팽옥경(彭玉鏡), 팽옥령(彭玉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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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안룡(獨眼龍)

 

 

칠십년 넘게 강호 무림을 지배해온 무황성에서 최고의 요직은 감찰전(監察殿)의 전주다. 무황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독안룡 이탁은 사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감찰전의 전주였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주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菊造美浪) 왕소군(王昭君)에게 밉보여 일개 분타인 철령보의 보주로 좌천되었다.

이탁의 지인들은 왕소군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탁은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고 철령보로 부임했다.

이탁은 가족들 중 양자인 백남빈만 데리고 철령보로 왔다. 아내는 병약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어려서 무황성에 남겨둔 것이다.

그후 사 년 동안 이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철령보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이탁의 지도하에 철령보 무사들의 무공은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이탁은 기문진법을 바탕으로 각가지 병진(兵陣)을 창안하여 철령보 무사들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무황성의 일개 분타에 불과했던 철령보는 단독으로 대려장이나 극품당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사 년 간 중원의 동북방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안룡 이탁의 능력에 기인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신랑성의 이인자를 생포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다?”

이탁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시절 불행한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붙은 것이다.

... 그자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저항을 포기해서 속하도 놀랐습니다.”

백남빈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철담도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탁은 주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탁 앞에 서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하나뿐인 이탁의 눈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같이 느껴져서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이탁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양자인 백남빈이다.

그런 백남빈조차 양부의 검고 깊은 시선을 오래 접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섬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너희들이 완안진을 요격하러 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탁은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백남빈은 양부의 그 말에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질책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철령보에서 무공으로 완안진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주인 이탁뿐이기 때문이다.

소자가 경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되었다.”

사죄하는 양자에게 이탁은 고개를 조금 저어 보였다.

 

이탁은 순찰을 위해 대려장과의 접경 북쪽 끝까지 갔다가 사해검객 종리완이 보낸 연락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철령보로 다시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려장이 느닷없이 도발을 하여 긴장을 조성했던 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완안진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백남빈보다 먼저 철령보로 돌아온 이탁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는 총관인 사해검객이 잘 알고 있다. 평소의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빈 일행은 새벽이 되어서야 철령보로 돌아왔다. 완안진의 시종 다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서 행군을 서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다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왼안진은 혈도가 짚여 무공이 금제된 채 다얀과 함께 철령보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무황성을 통틀어도 완안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그런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생포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려장으로 파견된 목적까지 순순히 자백했다.”

이탁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훑어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밀봉된 편지 한통, 손잡이에 푸른 늑대의 형상이 정교하게 장식 된 단검 한 자루, 그리고 상당히 큰 반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은 백남빈이 완안진의 몸에서 압수한 것들이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들의 의견들을 말해봐라.”

이탁은 탁자 위의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들어 살피며 말했다.

폭이 반치 정도나 되는 상당히 큰 금 반지인데 표면에는 물감이 흐르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상을 입은 시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한 게 아닐지요?“

철담도호가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완안진은 대려장과 결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신랑성의 밀사다.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자가 겨우 종놈 하나 구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냐?”

... 죄송합니다.”

이탁의 말에 철담도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종의 안위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완안진은 시종을 다얀이라 불렀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남빈이 입을 열었다.

순간 반지를 들고 있던 이탁의 손가락이 경직되는 것을 철담도호는 놓치지 않았다.

다얀... 다얀...”

이탁은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혹시... 다얀이란 이름의 그 시종이 의외로 중요한 존재였는지요?”

철담도호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이탁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신랑성주 토곤의 둘째 아들 이름이 다얀이었습니다.”

백남빈이 양부를 대신해서 철담도호에게 말했다.

그런...”

철담도호는 자기도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비로소 완안진이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가 추측하는 대로 완안진이 대동한 자는 진짜 시종이 아니라 토곤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이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남빈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야심이 큰 토곤의 꿈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곤은 결코 칸이 되지 못한다. 몽고족 지배자인 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후손들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는 징기스칸의 법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토곤은 몽고족의 군사령관인 타이시, 즉 태사(太師)로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딸을 징기스칸의 후손 중 한명인 터터부카(脫脫不花)란 인물에게 시집보낸 후 터터부카를 칸으로 추대했다.

딸이 낳을 외손자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 토곤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토곤에게는 터터부카에게 시집보낸 딸 외에도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토곤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이름이 에센(也先)이고 차남이 다얀이라는 것을 백남빈은 뒤늦게 떠올렸었다.

 

토곤은 둘째 아들을 대려장에 볼모로 보내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탁은 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들을 볼모로 제공할 정도라면 토곤이 대려장과 맺으려던 게 단순히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결맹은 아니겠습니다.”

백남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그는 완안진으로부터 대려장을 찾아가는 목적이 결맹을 맺기 위해서라는 진술만을 들었을 뿐이다. 비록 포로로 잡긴 했지만 완안진이 시종이라 소개한 다얀의 상태가 심각해서 집요하게 추궁은 못한 것이다.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武君子) 강진남(姜震南)에게 보낸 밀서는 읽어보았느냐?”

이탁은 탁자에 놓여있는 밀봉된 편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보셔야할 것같아서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양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탁은 봉서 입구를 뜯어 몇 장의 편지를 꺼냈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담도호가 두 부자의 눈치를 보며 대청을 나갔다.

(볼수록 특이한 반지다.)

홀로 남아서 양부가 편지를 읽는 것을 보던 백남빈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에 놓인 반지로 끌렸다.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그 반지는 백남빈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다섯 가지 색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열기와 은은한 향기까지 느껴진다.

완안진은 그 오색의 금반지, 오채금환(五彩金環)을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토곤이 결맹의 대가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일 것이다.)

백남빈의 생각이 오채금환에 끌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 승부에서 진 것은 완안진이 아니라 우리 부자로구나.”

!

이탁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백남빈은 말없이 양부가 내민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들 부자가 완안진에게 졌다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성주 토곤이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은 백남빈의 예상을 한 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토곤은 현재 십만 이상의 기마대를 만리장성 밖에 결집 시켜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토곤에게 가장 큰 우환은 동족인 달단의 존재다.

원래 몽고초원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행사해온 부족은 달단이었다,

몽고족의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달단은 몽고초원에 남아있었고 덕분에 다른 부족들이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달단은 원래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달단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달단이 곧 징기스칸의 가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이라트는 뒤늦게 몽고족으로의 편입을 허락받은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토곤이 칸으로 옹립한 터터부카도 원래는 달단 출신이었다.

달단의 족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패해 오이라트로 망명했던 터터부카는 토곤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토곤은 몽고족의 칸으로 추대한 사위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기 위해 달단을 맹렬히 몰아붙여왔다.

그 결과 달단은 본거지인 몽고초원에서 쫓겨나 만주 지역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달단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 힘을 되찾아 역습을 가해올지 모른다.

토곤으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에 결맹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토곤이 직접 쓴 밀서에는 달단을 견제해주면 그 대가로 대려장이 요동과 만주 일대를 정복하는데 조력하겠다는 제안이 적혀 있었다.

또 밀서의 말미에는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는 내용과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두 명의 밀사중 먼저 도착한 쪽의 친서를 접수해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완안진이 순순히 포로가 된 것은 주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밀사가 대려장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양부를 닮아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백남빈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길로 간 토곤의 두 번째 밀사는 이미 대려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탁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경계 수준을 높여서 대려장의 동향을 세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남빈은 서둘러 양부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려장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

이탁이 백남빈을 불러 세웠다.

지금의 상황을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하는데... 아비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신을 지그시 보며 말하는 이탁의 뜻을 백남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전서구로도 무황성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겠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합작은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를 무황성에 갖고 가야하는 것이다.

소자가 무황성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양부 독안룡 이탁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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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血洗落魂

 

 

 

󰡔___ ___ ___!󰡕

심혼(心魂)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___

()! 피의 광풍(狂風)이 하늘을, 땅을 몰아쳤다.

시뻘건 혈수(血手)가 허공을 움켜쥐며 허무하게 꺾어지고 있었다.

___ ___ ___ ___!

살갗을 후벼파는 혹독한 한풍(寒風)이 백설(白雪)을 동반한 채 장내를 휩쓸었다.

허나, 꾸역꾸역 쏟아지는 선혈은 뜨겁고 강렬한 색채로 한 자가 넘게 쌓인 백설을 빨아들일 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 속에 널브러진 시체, 시체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참상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끊어지고 살갗이 짓찢어진 채 나뒹구는 시체, 허연 뇌수와 함께 무참히 박살난인두(人頭)와 갈라진 복부 사이로 흘러내린 시뻘건 창자

아아...!

아비규환(阿鼻叫喚)! 인간지옥(人間地獄)!

인세(人世)에 어찌 이토록 처참한 광경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흑의(黑衣)를 걸친 수백 구의 시신들은 어느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벌판___.

시산혈해(屍山血海)의참경에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깃든 벌판이었다.

, 그런데 보라!

수백 명의 시신들 사이에 한 명의 거인(巨人)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六尺) 장신(長身)에 본시는 푸른색이었으나 인육(人肉)이 달라붙고 선혈로 얼룩져 검붉게 변한 장삼을 걸친 인물, 반백(半白)의 머리, 한 자 철판도 단번에 꿰뚫어 버릴 듯 형형히 번쩍이는 안광, 그의 전신에서는 태산같은 위엄과 가공할 살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굳게 다문 입술사이로 흘러내리는 선명한 액체, 그것은 바로 피였다.

그의 오른 손에 들린 반투명한 보검(寶劍)에서도 뚝뚝 선혈이 떨어지고 있었다.

󰡔으음...󰡕

문득, 청삼인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렀다.

허나 곧 그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흑룡신군(黑龍神君)...!󰡕

___! 흑룡신군(黑龍神君)이라면...?

그렇다.

흑룡신군, 그는 무림영웅보에 오른 백팔무인(百八武人) 중의 일인(一人)으로 협서(夾西)일대에서 흑룡방(黑龍幫)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백 년 전에 실전된 흑룡묵혈강(黑龍墨血罡)을 대성(大成)하여 백팔무인 중 서열 제 사십이위(四十二位)에 오른 절정의 고수(高手),

헌데, 그런 그가 지금 천삼인의 발밑에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채 누워있지 않은가?

!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천하(天下)를 떨어 울리던 백팔무인, 그 중 당당한 한 사람으로 군림한 그가 수백 명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이 황량한 벌판에 잠든 것이었다.

과연, 청삼인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가공할 살겁(殺刦)을 저질러 놓았단 말인가?

이때, 태산처럼 버티고 선 청삼인의 신형이 일순 휘청했다.

󰡔으윽... 으음...󰡕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구양천(九陽天)! 네 종말이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하하핫...!󰡕

돌연 그는 한()이 깃든 허탈한 광소를 터뜨리며 하늘을 우러렀다.

일순, 그의눈빛이 절망과 체념으로 흐릿하게 꺼졌다.

󰡔으음, 무형기독(無形奇毒)... 점점 심맥을 갉아먹는구나...󰡕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시신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___ ___ ___!

눈보라가 몰아쳤다.

물씬 피냄새가 한풍을 타고 흩어졌다.

청삼인,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혼자 뇌까리듯 말을 흘렸다.

󰡔흐흐... 결국 나는 마존(魔尊)이외에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살인마(殺人魔)라는 이름까지 얻겠군.󰡕

헌데 이때, 흐릿하게 잠겨들던 그의 두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___ ___ ___ ___!

한풍이 몰아치는 백여 장 밖, 그곳에 어느새 육인(六人)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 아닌가?

___!

찰나지간, 그들 중 한 명의 청삼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왔다.

노인(老人), 그는 마치 얼음으로 깎아놓은 듯 냉막한 인상을 지닌 백발노인이었다.

노인의 두눈에서는 심방을 동결시켜버릴 듯 가공할 안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공이 극()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했다.

헌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청삼인 앞에 내려선 노인은 전신을 가늘게 경련하며 침중한 신음성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으음...󰡕

혹독한 추위 때문인가?

아니다. 절정고수인 그가 추위를 느낄 리 없었다.

! 그는 바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 ! !

노인에 이어 장내에 도착한 다섯 명의 인물, 그들 역시 이미 육순(六旬)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헌데, 그들의 얼굴에도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만 짙은 두려움의 빛이 여실히 깔려있지 않은가!

대체, 한결같이 절정고수인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청삼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인가?

___ !

한 차례 매서운 설풍(雪風)이 장내에 대치한 칠인(七人)의 살갗을 때렸다.

그와 함께, 고목처럼 서 있던 청삼인의 입술이 열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 덤벼라!󰡕

그의 일갈이 떨어지자 앞서 나타났던 백발노인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___

!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그는 백팔무인 중에서도 최절정에 속하는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일인(一人)이 아닌가?

 

천하십웅(天下十雄)___

 

소림(少林)의 천불노승(天佛老僧),

무당(武當)의 삼양노조(三陽老祖),

북해(北海)의 패자(覇者) 북명일신(北冥一神),

중주(中州)명가 만화검선(萬花劍仙),

곤륜(崑崙)의 전대고수 비룡신협(飛龍神俠),

담긍베일의 거도(巨盜) 신풍무영비(神風無影飛),

봉황곡주(鳳凰谷主) 봉황검(鳳凰劍),

천지쌍괴(天地雙怪),

개방(丐幫)의 방주(幫主) 천결타개(千結陀丐),

 

이들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으로서 사제(四帝)에는 못미치지만 백팔무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백발노인, 그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한 명인 북명일신이었다.

이때, 북명일신은 두겨움을 떨치기라도 하듯 입술을 악물며 대갈했다.

󰡔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그의 일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명일신의 뒤에 나열해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이 순식간에 청삼인을 포위했다.

___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이는 북해일문(北海一門)의 비전전술(秘傳戰術)이었다.

또한 다섯 명의 노인들은 북해일문의 최고고수, 즉 북명오로(北冥五老)였다.

이때, 다시 북명일신의 입에서 벼락같은 일갈이 터졌다.

󰡔현음추살(玄陰刺殺)!󰡕

순간, 휘르르___ ___ ___!

북해오로의 전신에서 맹렬한 빙풍(氷風)이 불어닥쳤다.

동시에 그들의 신형은 하얀 백무(白霧)로 휩싸였다.

헌데, 그 백무가 점차 확산되는가 싶더니 서로 이어져 하나의 환()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엽___!󰡕

북명오로의 벼락같은 기합성이 터지는 순간 백환(白環)은 청삼인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파파팟___!

허나 바로 그 순간,

󰡔으하하하하핫...!󰡕

청삼인의 입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광소가 터져나왔다.

찰나, 꽈르르릉___!

󰡔___ __ !󰡕

󰡔___ ___ !󰡕

장내를 득썩 뒤흔드는 굉음과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북명오로___.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어느새 형체도 없이 짓이겨져 끔찍하게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럴 수가...!󰡕

북명일신의 두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청삼인.

그는 온몸에 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채 냉오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때, 사색(死色)이 되어 신형을 비틀거리던 북명일신이 다시 불끈 이를 악물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시커먼 경기가 극맹한 한기를 동반한 채 뻗어나왔다.

그 모습에 청삼인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나직한 비웃음과 함께 번쩍 왼손을 치켜들었다.

󰡔후후... 현음빙살강기(玄陰氷煞罡氣)로군. 후후...󰡕

치켜든 그의 좌수(左手)가 순식간에 섬뜩한 청색(靑色)으로 물들었다.

청수(靑手)___ 그것은 마치 하나의 가공할 청강도(靑罡刀)를 연상케 했다.

우우___ ___!

두 사람 사이에는 무형의 경기가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이때,

󰡔현음빙살(玄陰氷煞)!󰡕

북명일신이 먼저 신형을 움직이며 발악하듯 대갈을 터뜨렸다.

츠츠츠츳...!

극렬한 빙음지기(氷陰之氣)를 동반한 묵기(墨氣)가 청삼인을 짓쳐들었다.

허나 그보다 먼저 청삼인의 좌수가 번득 청광(靑光)을 뻗었다.

󰡔___ ___ !󰡕

비명!

북명일신은 피보라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올라갔다.

이어, ___!

그것이 끝이었다.

허나 이때 청삼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 졌다.

󰡔으음... 이놈의 무형기독(無形奇毒)만 아니었다면...󰡕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그의 넒은 이마에는 점차 검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독기가 이미 골수까지 침범한 것이었다.

허나 청삼인은 돌연 두눈을 부릅뜨며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 그러나.. 사제(四帝) 네놈들을 베기 전에는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크하하... 기다려라. 본존(本尊)이 간다...!󰡕

다음 순간, 그는 벼락같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번뜩 황야를 가로질렀다.

구련산(九蓮山) 낙혼애(落魂崖)___.

평평하던 지면이 갑자기 끝나며 마치 지옥의 입구(入口)처럼 쩍 갈라진 단애의 정상(頂上).

이곳에도 한 자가 넘는 백설이 숨막히도록 쌓여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펑펑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헌데,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절지에 언제부터인가 몇 개의 인영이 동상처럼 서 있었다.

__ __ ! __ !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강풍이 목석처럼 굳어있는 인영들의 옷자락을 거세게 휘날렸다.

이때, __ __ !

돌연 잿빛 허공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날카로운 새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중인들은 흠칫하여 고개르 들어올렸다.

그때 까마득한 허공에서 하나의 검은 점이 쏜살같이 낙혼애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그것은 두 자 정도 크기의 검은 독수리였다.

헌데 그것은 내리꽂히듯이 하강하여 중인들 중 가운데 흑의노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가운데의 흑의노인___.

그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

움푹 들어간 두둔에서는 귀화처럼 푸르스름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흑의노인은 독수리의 발에 묶여있던 천을 끌러 읽어보았다.

󰡔...󰡕

문득 그의 입에서는 둔중한 신음성이 흘렀다.

그러자 그의 우측에 서 있던 학발동안의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명제(冥帝)! 무슨 소식이오?󰡕

황의노인은 붉으레한 안색에 신선같은 인상을 풍겼으며 품속에 한 자루의 고색 창연한 고검(古劍)을 비단으로 싸서 안고 있었다.

󰡔그가 모든 관문을 돌파했소!󰡕

흑의노인은 움푹 들어간 두눈에 살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흑의노인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백팔무인 중 우리를 제외하고 이번 일에 참석치 않은 십여 명의 인물들을 빼고 모두 그의 손에 죽었소.󰡕

그말에 좌측에 서 있던 현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자는 분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을 텐데도 그 정도의 신위를 발하다니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소.󰡕

그는 안색이 푸르뎅뎅하고 가늘게 찢어진 두눈에는 기괴하게도 벽광(壁光)이 번뜩여 섬한 전율을 풍겼다.

흑의노인은 그의 말에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러나 그는 이미 기독이 전신에 퍼져 평소의 오할 정도밖에 공력을 쓰지 못한다고 하오.󰡕

이어 그는 힐끗 한쪽 옆을 응시했다.

그들 삼인(三人)과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황의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이 넘는 거구의 장한으로 시커먼 구레나룻이 턱을 뒤덮고 있었다.

무섭게 부릅뜬 호목(虎目)에 먹으로 꾹 찍어놓은 듯 짙은 검미(劍眉).

두눈에서 뻗치는 가공할 신광은 가히 만인을 압도하고는 남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뒤에는 각각 홍포와 청포를 입은 두 명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노인이 황의중년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대에게 할말이 있다.󰡕

황의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___!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렇다. 이 황의중년인이야말로 바로 중원북부를 위무하고 있고 황룡대제 기용천(奇龍天)이었다.

그리고 삼제(三帝)!

세 명의 노인들이야말로 황룡대제와 함께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삼제가 아닌가?

___구유명제(九幽冥帝).

___유성검제(流星劍帝).

___만천독제(滿天毒帝).

 

흑의의 음산한 노인, 그가 바로 구유명제였다.

동안학발에 고검을 지닌 노인은 유성검세.

현의에 귀면(鬼面)인 노인이 만천독제였다.

황룡대제 기용천은 구유명제를 바라보며 당당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흐흐... 그렇다. 그는 지금 낙혼애 아래서 본제와 다른 두 분의 수하를 상대하고 있다.󰡕

그 유명제는 문득 만천독제와 유성검제를 바라보았다.

󰡔헌데 보고에 의하면 그대의 황룡보(黃龍譜) 수하들은 구경만 하고 있다고 들었다.󰡕

순간,

󰡔닥치시오!󰡕

황룡대제의 뒤에 서 있던 두 괴인 중 홍포를 걸친 뚱뚱한 체구의 노인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보주님의 명호를 함부로 도용하여 천하군웅들을 모아놓고 무슨 헛소리요!󰡕

그는 성질이 매우 급한 듯 구유명제를 내려보며 두눈을 부릅떴다.

구유명제는 음악한 표정으로 홍포괴인을 노려보았다.

󰡔흐흐... 열양신괴(熱陽神怪),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제에게 대들다니...󰡕

이때 전신이 대나무처럼 비쩍마른 청포괴인이 문득 홍포괴인을 저지시키며 나섰다.

󰡔구유명제! 우리 천지쌍괴(天地雙怪)가 당신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다만 보주님의 허락이 없어 당신과의 일전을 참고있는 것 뿐이오.󰡕

청포괴인, 그는 심기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에 구유명제는 안면을 부르르 경련했다.

___천지쌍괴(天地雙怪),

빙심마괴(氷心魔怪),

열양신괴(熱陽神怪),

이들은 쌍둥이 형제로서 빙심마괴가 첫째였다.

이때, 구유명제가 분노를 참지못해 전신을 경련하자 문득 기용천이 나섰다.

󰡔사실 후배는 이번 사건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수하들에게 방관하도록 지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구유명제는 잡아먹을 듯이 황룡대제를 노려보았다.

(이 어린 놈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공력이 늘고 있다. 설사 모든 일이 성공한다 해도 이놈을 제거하지 못하면 강호독패(江湖獨覇)는 힘든 일이다.)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헌데 이때,

󰡔___ 우우___ ___!󰡕

낙혼애 아래로부터 폐부를 뒤흔드는 장소성이 들려왔다.

순간 구유명제는 번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오고 있소.󰡕

그의 말이 끈나는 순간, 낙혼애를 따라 한 줄기 인영이 빛살처럼 쏘아올랐다.

󰡔크하하하하핫...!󰡕

인영은 낙혼애가 무너질 듯 쩌렁쩌렁한 광소를 터뜨리며 눈 깜짝할 순간 중인들의 앞에 내려섰다.

󰡔...!󰡕

󰡔으음...!󰡕

중인들은 그 인영을 대하자 절로 침음성을 발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인영___

그는 바로 북명일신 등을 단번에 쓰러뜨린 청삼노인이 아닌가?

청삼노인은 낙혼애 위의 중인들을 쓸어보며 재차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사제(四帝)! 네놈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구나. 이 천강마존(天罡魔尊)이 쓰러질 줄 알겠지만 어림없다. 크하하핫...!󰡕

 

! 천강마존(天罡魔尊)___!

이처럼 가공스러운 이름이 하늘아래 또 어디에 있겠는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는 단연코 천하를 떨어울리는 공포의 마존(魔尊)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천강마존! 그는 이미 십일 전에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절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다.

범인이라면 중독되는 순간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맹독에 십일 이상을 버텨온 것이 아닌가?

이때, 문득 천강마존의 광소를 막으며 황룡대제가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순간 기이하게도 천강마존의 강렬한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무엇인가?󰡕

황룡대제 기용천은 당단한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를 얻으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기용천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두눈에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

(기재(奇才)로다.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제일인이 되기에 충분한 재목이다.)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이네. 노부는 혈음패황도를 얻었네.󰡕

󰡔으음...󰡕

그 말에 기용천은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___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 이는 마도(魔道) 제일의 마기(魔器)로 불려지는 마물이었다.

처음 이것을 얻는 자는 칠백 년 전 절대마종(絶代魔宗)으로 군림했던 혈음마황(血吟魔皇)이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우연히 이 마도(魔刀)를 얻게 되었다.

그 사유는 이러했다.

 

백팔무인 중 일인인 흑장마군(黑掌魔君)은 천협산(天峽山) 부근에서 혈음패황도와 혈음마황(血吟魔皇)의 혈황경(血皇經)을 얻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얻은 후 악행을 일삼다가 천강마존에 의해 마도(魔刀)와 혈황경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기를 면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흑장마군은 무림에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천강마존이 혈음패황도를 익혀 무림을 피로 씻으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항상 천강마존을 제거키위해 기회를 엿보던 구유명제와 만천독제는 사제(四帝)의 이름으로 무림첩을 돌려 군웅들을 모은 것이었다.

 

황룡대제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혈음패황도는 마물입니다.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문득 나직한 어투로물었다.

󰡔그대는 노부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인정하는가?󰡕

황룡대제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선배님이야말로 천하제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인이십니다.󰡕

황룡대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천강마존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는 이제 확실한 판단을 얻었다.

천하제일인!

이 당당한 이름을 두고 천강마존은 무슨 또 다른 야욕을 꿈꿀 수 있겠는가?

황룡대제는 문득 존경어린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급급히 말했다.

󰡔후배는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때가 적당치 않음은 알고 있으나 한수 가르침을 바랍니다.󰡕

천강마존은 이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은 채 쾌히 스낙했다.

󰡔좋네. 단 일검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네.󰡕

황룡대제는 정중히 검례를 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황룡대제의 고검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휘황한 광채가 쏟아졌다.

󰡔... 태양검강(太陽劍罡)!󰡕

관전하던 중인들은 침중히 부르짖었다.

대치한 천강마존의 안면 또한 일시 굳어졌다.

___태양검강(太陽劍罡).

이는 무려 천여 년 전에 실전되었던 검도 최고의 비학이 아닌가?

허나 이때, 스스스스...!

천강마존의 반투명한 천강검에서 실같은 백선이 가늘게 사위로 뻗었다.

순간 황룡대제의 전신은 완전히 태양같은 광휘에 휩싸여 단지 검봉(劍奉)의 모양을 한광망이 일 장 길이로 뻗어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눈에 문득 애석한 빛이 스쳤다.

(아깝군, 팔성(八成)의 화후에서 멈추었군.)

허나 생각을 끝낸 바로 그 순간,

󰡔검강만천(劍罡萬天)!󰡕

낙혼애를 허물어뜨릴 듯한 엄청난 일갈과 함께 황룡대제의 고검이 낙뢰를 일으키듯 천강마존을 쪼개갔다.

허나 그와 동시에 천강마존의 천강검도 번뜩 허공을 갈랐다.

󰡔천강파극(天罡破極)!󰡕

츠츠츳___ 파파파팟___

미친 듯한 검기의 충돌이 대기를 갈가리 짓찢었다.

󰡔으음...󰡕

일순 침중한 신음성이 일며 황룡대제는 어깨를 부여잡고 물러섰다.

허나 천강마존은 여전히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황룡대제는 급히 정중히 에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노부의 천강검식 중 제 삼식(三式)을 받아낸 인물은 자네가 처음이네.󰡕

그말에 황룡대제는 부끄러운 기색을 지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강이 부딪친 순간 천강검세가 여지없이 태야검강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목을 노렸다는 것을...

허나 결정적인 순간 천강검이 슬쩍 옆으로 비껴지며 가볍게 어깨를 베는 것에 그쳤다는 사실도, 황룡대제는 빙글 몸을 돌리며 천지쌍괴를 향해 말했다.

󰡔들어갑시다.󰡕

이어, ___!

그는 먼저 신형을 날려 낙혼애 아래로 사라졌다.

천지쌍괴도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천강마존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어 그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무거운 일검을 펼쳐 무형기독이 급속히 전신으로 퍼진 것이었다.

이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구유명제가 음침한 표정으로 만천독제와 유성검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거의 폐인이나 다름이 없소. 해치웁시다.󰡕

그 말에 이제(二帝)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천강마존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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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2020. 3. 12. 17:31 공지

업데이트 주기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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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카테고리에 올리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매일 1회 이상 올릴 계획입니다.

가능한 1일 2회 연재를 하겠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도 매일 1회씩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댓글도 환영 ㅎㅎㅎ

 

 

필부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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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기정무협소설

 

                     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

 

1

 

 

 

 

 

序 章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수천년 무림의 역사(歷史)는 그야말로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___겁륜천하(刦輪天下).

피의무림사는 수없이 돌고 도는 수레바퀴의 기록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무림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가 작성(作成)된 것은 불과 백년래(百年來)의 일이다.

무림군웅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근세 백년무림계는 실전되었던 수많은 신공지학(神功之學)들이 속속 발굴되어 뛰어난 영웅들이 무림사상 최고의 정화로 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년래 가장 강()했던 고수(高手)들이 확연히 드러났다.

 

___백팔무인(百八武人).

 

모두 도합 백팔 명의 절세고수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어 무림을 빛냈다.

그들의 명단을 기록할 것이 바로 무림영웅보(武林英雄譜)였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무림영웅보란 한 권의 책자(冊子)도 아니었다.

단지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이었다.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팔무인은 가히 시대만 잘 타고 났으면 족히 무림의 패자(覇者)가 되고도 남을 개세고수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나타났기에 각기 한 지방의 패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걸출한 개세인물들이 있었다.

 

___일존(一尊) 천강마존(天罡魔尊).

 

백팔무인 중 최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년무림은 물론 무림사를 통해 서로 최강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칭송 받았다.

가히 개세무적의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었다.

일존 천강마존, 그는 무림에 활동한지 일갑자(一甲子)하고도 반갑자(半甲子)가 지났다.

그러나 지금껏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조차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여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칠 명의 절정고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예로, 백칠무인 중 최절정에 속하던 무위대제(武威大帝)조차도 그의 삼겁(三刦)을 못 받아내고 불귀의 객이 된 것이었다.

허나, 비록 그의 별호에 마()자가 붙었다고 하나 결코 그는 마두(魔頭)는 아니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하고 패도적이어서 자신의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여 마음에 거슬리는 자를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제거했기에 무림인들이 그에게 마존(魔尊)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무림군웅보의 두 번째 서열에는 이인(二人)이 올라 있었다.

 

쌍기(雙奇),

고죽취옹(枯竹醉翁).

낙척문사(落拓文士).

 

그들 두 기인(奇人)은 천강마존과 함게 당금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았다.

특히 고죽취옹(枯竹醉翁)은 천강마존이나 낙척문사보다도 오히려 한 배분이 높았다.

그는 각종 기문진학(奇門陣學)과 역리(易理)에 능통한 기인이었다.

낙척문사(落拓文士)는 무불통지(無不通知)의 대학자(大學者)로서 성품이 고결했다.

그들 쌍기(雙奇)는 성격이 매우 고고하여 타인과 좀체로 다툰적이 없어 진정한 실력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무림군웅보는 세 번째 서열에 사인(四人)을 놓고 있었다.

 

사제(四帝).

 

당금 천하무림(天下武林)을 사분(四分)하고 있는 무적의 패자(覇者).

그들은 명성이나 위용은 구주사해(九州四海)를 진동시켰다.

 

구유명제(九幽冥帝).

유성검제(流星劍帝).

만천독제(滿天毒帝).

황룡대제(黃龍大帝).

 

이들 사인은 오히려 일존(一尊)이나 쌍기(雙奇)보다도 더욱 무림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본래, 일존 천강마존에게 죽음을 당한 무위대제(武威大帝)가 사제(四帝)의 일인(一人)이었다.

허나 그가 죽은 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젊은 기협(奇俠) 황룡대제(黃龍大帝)가 사제의 일원이 되었다.

사제는 한결같이 경세적인 무학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잣 사순(四旬)인 황룡대제를 제외하고는 모구 백 세가 넘는 자들이었다.

시제는 모두 웅심호담을 지닌 대야심가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불행히도 한 시대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일존 천강마존으로 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칼을 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무림을 위해서는 그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일 일존이 없었다면 그들 사제의 패권다툼으로 인해 무림은 평지(平地)가 될지도 모를 것이므로,

구유명제(九幽冥帝).

그는 사십 년 전 무위대제가 죽어 해체된 무위궁(武威宮)을 휘하에 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구유문(九幽門)과 병합하여 유명궁(幽冥宮)을 세워 천하독패의 꿈을 꾸고 있었다.

 

유성검제(流星劍帝), 그는 무려 삼백 년(三百年)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성검문(流星劍門)을 당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대검사(大劍士)였다.

그 결과 유성검문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그리고 장강(長江) 일대의 패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만천독제(滿天毒帝), 그는 사천(四川)에 독존궁(毒尊宮)을 세웠다.

그의 독존궁은 천하의 수많은 고수들을 끌어들여 나날이 세력을 확장할 뿐 아니라 강남(江南)과 멀리 천남(天南)에 까지 점차 마역(魔域)을 넓히고 있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는 성품이 지극히 담백한 군자(君子)였다.

비록 사십의 중년에 불과하나 그의그런 인풍 때문에 그의 곁에는 절로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모였다.

때문에 비록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으나 휘하의 도움으로 그는 돈황(敦皇)에 황룡보(黃龍堡)를 건립했다.

 

황룡보, 비록 건립된지 십여 년에 불과하나 황룡보는 정사(正邪) 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기인들이 모여 점차 무림의 태두(泰斗)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로 방대한 세력을 북()으로부터 뻗치고 있었다.

 

사제(四帝), 그들의 세력은 가히 천년 전통의 구파일방을 짓누르고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아무도 감히 천하제패의 발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

 

___천강마존(天罡魔尊),

 

모두가 무림군옹보의 첫머리를 장식한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제로서는 한시라도 천강마존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무림(武林)___!

풍운일변의 혈세무림천하여___.

무림군웅보의 백팔무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무림은 흡사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이 무림사상 유래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허나...,

허나....!

무림군웅보의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던 백팔인의 개세고수들이 어느날 태반이 쓰러지면서 중원무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대혈풍(大血風)이 일기 시작했으니...

새로운 무림의 혈사(血史)가 창조되려는가?

... 바람()이 분다.

()와 살()과 마()와 죽음()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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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로잡힌 거물(巨物)

 

 

삐이이이! 퍼억!

기마대의 선두가 날려 보낸 명적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뿐 완안진과 다얀에게 한 참 미치지 못하는 뒤쪽에 떨어졌다.

살상의 위험은 없지만 명적은 다른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는 쫓기는 표적으로 하여금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예민한 말들도 명적이 울릴 때마다 발작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진정해라.”

완안진은 그런 애마를 다독여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소리뿐인 명적에 이어 실질적인 위협이 쇄도한다.

피잉! 시잉!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든 유엽전(柳葉箭)과 세전(細箭)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말을 잘 달래라. 달리는 중이라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완안진은 실전 경험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다얀에게 외치며 몸을 좀 숙였다.

두 사람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있다.

또 말이 달려가는 속도가 날아든 화살의 위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이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은 맞아봤자 그저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 티팅!

날아든 화살 몇 개가 투구와 방패에 맞아 퉁겨진다.

히히힝! 푸르르!

엉덩이에 한 두 개씩의 화살이 꽂힌 말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완안진의 말 대로 달리는 속도가 화살의 힘을 약화시켜 깊이 박히진 않는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완안진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십여 리쯤 저편에 약간 높은 언덕이 길게 가로 누워있다.

그 언덕 너머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만 넘으면 대려장과 철령보의 경계인 요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만 건너가면 철령보도 무리하게 우릴 추적하진 못할 것이다.”

완안진은 겁에 질린 다얀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굳어졌다.

두두두!

갑자기 요하 변의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의 기마가 나타나 달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 철령보가 우릴 함정으로 몰아왔습니다.”

뒤 따라 오던 다얀이 겁에 질려서 계집애처럼 높은 소리를 낸다. 요하 쪽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기마대 역시 철령보 소속임을 알아보고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철령보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구나.)

완안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들을 추적하는 철령보의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멀리 우회한 동료들이 포위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종일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추격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완안진 자신도 전력으로 말을 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북쪽으로 간다.”

두두두! 히히힝!

완안진은 말의 방향을 급격하게 북쪽으로 틀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얀도 허둥대며 완안진을 따라 말을 몰았다.

요하의 북쪽은 극품당, 정확히는 달단의 영영이다.

같은 몽고의 부족이지만 달단은 신랑성을 세운 오이라트와 철천지원수 사이다. 신랑성의 부성주인 자신을 보면 기필코 잡아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철령보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일단 달단의 영역으로라도 피신해야만 한다.

두두두!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두 필의 준마는 서쪽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철령보의 기마대 사이에 끼어 북쪽으로 내달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같다.)

완안진은 곁눈질로 오른쪽을 보며 말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요하 변에 매복하고 있던 철령보의 기마대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진하면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오리(五里)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두두! 히히히힝!

완안진과 다얀이 달려가는 북쪽의 관목더미 뒤에서 두 필의 준마가 뛰쳐나온 때문이다.

(아차!)

완안진은 자신이 다시 한 번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아차렸다.

적은 앞뒤로 협공을 당한 자신과 다얀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매복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강행돌파 할 수 밖에...)

차앙!

완안진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다얀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역시 칼을 뽑으며 따라온다.

대략 이리 정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필의 준마 위에는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짙은 남색 옷을 걸친 청년은 약관 전후로 보이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깊고 형형하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하게 사경을 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부릅뜬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호 같고 건장한 몸에서는 사나운 살기가 뿜어진다.

(철령보의 오대고수(五大高手)중 한명인 철담도호(鐵膽刀虎) 고불귀(高不歸)겠구나.)

완안진은 중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독안룡 이탁이 직접 나섰다면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철담도호 고불귀가 사해검객 종리완과 함께 철령보 오대고수에 속하는 인물이긴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십초 내에 쓰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구명절초(救命絶招)가 있다.

그걸 쓰면 십초가 아니라 일격에라도 철담도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놈은 내가 맡겠다. 다얀 너는 젊은 놈을 상대하되 접전은 피하고 추격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라.”

완안진은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는 철담도호와 청년을 노려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

다얀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비록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오이라트 족장 토곤의 핏줄인지라 무공은 꾸준히 수련해왔다.

자신의 현재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가는 다얀이다.

그래도 상대 역시 자기 또래이니 잘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같다.

두두두!

그 사이에 양측의 거리가 삼십여 장 쯤으로 좁혀졌다.

(장심뢰(掌心雷)를 날려서 일격에 고불귀를 격살하자.)

완안진은 고삐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빼든 칼은 미끼에 불과하다.

그의 왼손에는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천근 무게의 철퇴가 휘둘러지는 위력을 지닌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철담도호는 완안진의 오른손에 들린 칼만 주의하다가 느닷없이 날아든 장심뢰의 일격에 몸뚱이가 으스러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계산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콰드드! 두두두!

거리가 십장쯤으로 좁혀졌을 무렵 그때까지 나란히 달려오던 청년과 철담도호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어서 거리를 확 넓힌 것이다.

마치 완안진과 다얀으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고 길을 터주듯이...

(위험하다!)

완안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얀이 위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적중했다.

! 촤라라!

철담도호와의 거리를 확 벌린 청년이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쇠사슬을 옆쪽으로 던졌다.

건너편의 철담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던진 쇠사슬 끝을 틀어쥔다.

완안진과 다얀의 앞쪽에 쇠사슬이라는 장애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거리는 그 사이에 오장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피하긴 늦었다!)

완안진은 눈을 부릅떴다.

말을 버려라!”

파앗!

완안진은 다급히 외치며 말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히익!”

다얀도 상황을 깨닫고 급히 말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콰창! 히히히힝!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과 철담도호가 양쪽에서 잡아끌고 온 쇠사슬에 목이 걸린 것이다.

! 촤라랑!

완안진과 다얀이 타고 있던 말들이 쇠사슬에 걸리자 청년과 철담도호는 즉시 쇠사슬을 놓았다.

콰당탕! 퍼억! 히히힝!

쇠사슬에 목이 휘감긴 말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뒹군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

완안진보다 한 박자 늦게 말 등으로 올라섰던 다얀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촤락!

청년이 놓은 쪽의 쇠사슬이 다얀의 하체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퍼억!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서 균형을 잃은 다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헌데 뒤로 넘어진 그의 머리가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퍼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다얀의 몸은 세차게 퍼덕인 후 축 늘어졌다.

... 안돼!”

허공으로 날아오른 후 철담도호를 공격하려던 완안진이 그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얀!”

휘익!

완안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다얀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끄윽...”

다얀은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깨져 기식이 엄엄한 상태다.

이런...”

완안진은 다얀의 뒷통수 쪽의 혈도를 찍어 출혈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막아주며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다얀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나 완안진은 성주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

벌벌 떠는 다얀을 내려다보며 완안진은 대려장을 향하던 자신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말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완안진을 에워싼다.

몰려든 백여 기의 기마대가 거대한 원진을 그리며 완안진과 다얀을 포위하고 있다. 말을 탄 철령보의 무사들은 강전을 재운 활로 완안진을 겨누고 있고...

고대협, 투항할 테니 용납하여 주기 바라오.”

완안진은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철담도호 고불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항서(降書)를 쓸 생각이라면 대상이 틀렸소 부성주.”

하지만 철담도호는 옆으로 물러서서 완안진의 예를 피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 완안진이 오늘 거푸 세 번이나 실태를 범하는구먼.”

옆으로 물러서는 철담도호를 보며 완안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철담도호가 비켜서는 뒤쪽에서 쇠사슬을 던졌던 냄색 옷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큰일을 치뤘음에도 청년의 눈빛은 깊게 갈아 앉아 있는데 걸음걸이는 무거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철담도호를 비롯하여 철령보의 모든 무사들의 시선은 그 청년을 향하고 있다.

비로소 완안진은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을 추격해온 철령보 무사들의 수령임을 알아차렸다.

함정에 거푸 두 번 빠진 것도 모자라 그 함정의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신랑성을 이끌어온 완안진답지 않은 실책이다.

부성주, 투항하시겠다면 항장(降將)으로 예우해드리겠소.”

완안진의 일장 앞에 멈춰선 청년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인생이다.)

완안진은 아들뻘인 청년이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철령보의 소보주 검사자(劍獅子) 백남빈! 중원무림에서 신진제일고수라 불린다는 그대에게 투항하면 수치심이 조금이나마 감해지겠군.”

완안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청년은 바로 철령보의 소보주 백남빈이었다.

 

백남빈의 별호는 검사자다.

그에게 검사자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은 무황성의 당대 성주인 주진충(朱盡忠)이다.

무황성에서는 매년 젊은 무사들중 일인자를 가리는 비무대회, 등천제(登天祭)가 열린다.

헌데 오 년 전,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등천제에 출전한 백남빈이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백남빈이 이기는 일이 반복되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수의 왕인 사자 같다고 해서 주진충은 백남빈에게 검사자라는,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내려주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백남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투항의 조건을 말씀해보시오.”

백남빈이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의 치료와 무사귀환을 원하네. 대신 본인이 대려장으로 가던 목적은 숨김없이 자백하겠네.”

완안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의 손잡이를 백남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 대협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소.”

백남빈은 완안진이 내민 칼을 받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몽고 최강의 부족 오이라트가 세운 신랑성의 이인자 완안진은 무황성 동북 분타 철령보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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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발의 미녀

 

 

사신각은 호천무맹이 봉문한 후 활동을 시작한 악명 높은 청부살인조직이다.

청부를 받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고 장담하며 설령 청부 대상이 황제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적정한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은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자가 적힌 복면을 쓰고 표적을 척살을 시도한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일단 사신각의 표적이 된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무림의 정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이 기련산의 골골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라고 하외다.”

독안랑이란 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딱히 누군가를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독안랑이다.

하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옥가년을 노리는 건 아닐 테고...”

금포장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 역시 사신각의 살인귀들에는 꺼리는 바가 있었다.

루주께서 결심만 하지만 우리 마천루(魔天樓)의 형제들이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을 기련산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독안랑이 하나 뿐인 눈을 투지로 물들이며 말했다. 외눈의 늑대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그자는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좋아한다.

사신각과는 장차 거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소.”

루주라 불린 금포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사신각과는 충돌하지 말고 옥가 년의 종적을 찾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소이다!”

대답하는 독안랑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어떤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이다.

휘익!

독안랑은 다시 날아올라 멀어져갔다.

삐익! !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적지 않은 사람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놈!”

휘익!

금포장한도 힐끔 소년을 훑어본 후 몸을 날렸다. 그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탓에 소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곧 금포장한의 모습도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우!"

그제서야 비로소 소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마로 식은땀이 번져 나왔다. 금포장한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소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

돌연 소년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는 죽서기년 위로 새빨간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주머니!"

소년은 놀라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쿠웅!

그 직후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은발여인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소년은 급히 은발여인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은발여인의 안색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숨결은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왜 이러실까?)

소년은 갑작스러운 은발여인의 변화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은발여인의 파리한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말을 하신다.)

소년은 급히 여인의 입 근처로 귀를 기울였다.

"가슴... 약병..."

은발여인은 미약한 음성으로 그같이 말하고는 실신해버렸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에 있는 약병을 찾아달란 말씀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으나 어쨌든 상대는 여자다. 생면부지인 여자의 가슴을 뒤지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술에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은발여인의 상세는 아주 위중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은발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다.

!

은발여인의 가슴을 옥죄고 있던 옷고름이 풀려졌다.

출렁!

그러자 한 쌍의 살덩이가 눌려있던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

소년은 숨이 탁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이다.

출렁! 출렁!

작은 수박을 반으로 쪼개서 엎어놓은 것같은 한 쌍의 살덩이들이 물 풍선처럼 흔들거린다. 엄청난 크기에 비해 젖가슴 위에 돋아있는 젖꼭지는 팥알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본 순간 소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어놀고 귀는 멍멍해진다.

본래 은발여인은 유난히 큰 젖가슴을 감추기 위해 비단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헌데 그 젖 가리개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으스러져 있었다.

은발여인이 걸친 흑의의 재질은 천잠사라 외력에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젖 가리개는 평범한 비단이라 으스러진 것이다.

(... 이럴 수가...!)

헌데 당황하던 소년의 눈에 경악의 빛이 더해졌다.

한 쌍의 육중한 살덩이 사이에 시뻘건 손바닥 자욱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희디흰 속살에 찍힌 핏빛 손자국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핏빛 장인을 누가 일부러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결코 그린 것이 아니었다.

(이 손바닥 자국이 이 분을 실신하게 만든 원인인 듯한데...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놀라던 소년은 서둘러 은발여인의 저고리 섶 안쪽을 뒤졌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소년의 손에 은발여인의 젖가슴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뭉실뭉실한 감촉은 한참 피가 뜨거울 나이인 소년에게는 아찔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게... 이게 여자의 젖가슴 감촉이로구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곧 은발여인의 가슴 섶에서 하나의 옥병을 찾아냈다.

반 뼘도 안되는 자그마한 옥병 안에는 밀랍에 싸인 세 알의 호두알만한 환약이 들어있었다. 비록 밀랍에 싸여있지만 환약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와 주위를 진동했다.

(이것인 모양이다.)

소년은 눈을 빛내며 급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밀랍을 벗겼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입 안에 넣어주려 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입을 꼭 다문 채 실신하고 있는 상태라 환약을 넣어줄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소년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은발여인은 인사불성이라 스스로 환약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환약을 먹이려면 물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년은 준비해온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렇다고 근처의 샘이나 개울로 물을 뜨러 갔다 올 여유는 없다.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사이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은발여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잠시 갈등하던 소년은 결심을 했다. 비록 물은 없지만 은발여인에게 환약을 먹일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소년은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상큼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와 함께 환약은 소년의 침에 녹아 걸죽해졌다.

(용서하십시오.)

환약을 자신의 침으로 녹인 소년은 입술을 은발여인의 창백한 입술 위에 포개었다.

(허억!)

입술에 느껴지는 너무도 보드라운 감촉에 소년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여인의 입술... 그 황홀한 감촉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은발여인의 꼭 다물려진 입술을 혀를 써서 벌렸다.

여인의 매끈한 치아가 혀끝에 느껴져 소년을 아찔하게 만든다.

소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면서 자신의 침으로 녹인 환약을 여인의 입속에 흘러 넣어 주었다.

잠시 후 소년은 마지못해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미 침으로 녹인 환약은 모두 은발여인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상태였다.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 소년의 가슴은 여전히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고 귀는 멍멍하다.

입가에 남아있는 꽃잎의 그것같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

이성과의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경험은 실로 충격적이면서도 황홀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어머니 못지않게...)

소년은 망연한 표정으로 은발여인의 조각처럼 단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넋이나가서 은발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은발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아왔다. 소년이 먹여준 약기운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다.

"휴우..."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은발여인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은발여인은 흠칫했다. 가슴 부위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젖 가리개가 훼손되었겠구나.)

자신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 알아차린 은발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물기 젖은 봉목이 나타났다.

"... 괜찮으십니까 아주머니?"

은발여인이 눈을 뜬 것을 본 소년은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소년의 순진한 모습에 은발여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의 젖가슴을 처음 보느냐?"

은발여인은 드러난 젖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짓궂게 물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년이 화난 음성으로 내뱉으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

은발여인의 섬섬옥수가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지극히 연약하고 보드라운 섬섬옥수다.

하지만 일단 가녀린 그 손에 잡히자 소년은 움쭉달쭉도 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

부르르!

소년은 당혹과 충격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손바닥 가득히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육질의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이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으로 녹아들어가는 것같은 기분이 되었다.

은발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란다."

"... 무슨 뜻이십니까?"

소년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은발여인은 그런 소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나 옥여상의 젖가슴을 보고 만진 것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다."

"... 죄송합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고개를 살래 저었다.

"그런 말 할 것 없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원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은발여인, 옥여상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렸다.

(...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소년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옥여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년은 얼굴이 발개진 채 은발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젖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호호호 매정한 도련님이시군요."

옥여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비록 어리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충후한 군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내도 있구나.)

옥여상은 돌아앉은 소년을 살펴보며 벌어져 있는 상의를 여몄다.

"장난으로 해본 소리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헌데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옷고름까지 단단히 동여맨 옥여상은 토라진 소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검추(劒秋)! 고검추(高劒秋)라고 합니다."

"고검추! 좋은 이름...!"

미소 지으며 말하던 옥여상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소년, 고검추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가운데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으로 하여금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그러고 보니 그를 닮지 않았는가? 성까지도 그와 같은 고씨이고...)

옥여상은 어떤 예감에 전율했다.

소년 고검추가 대체 누구를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 후사(後嗣)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미를 모으며 잠시 생각하던 옥여상은 고검추에게 물었다.

"혹시 고창룡이란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고창룡이라면 욕정에 눈이 멀어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유린했다는 희세의 패륜아가 아닌가?

그렇다면 소년 고검추가 정파의 수치인 철사자 고창룡을 닮았단 말인가?

"고창룡? 저와 종씨인 듯하지만... 그런 분은 알지 못합니다."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창룡을 모른다?"

옥여상은 실망과 안도가 교차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그보다 이 주위에 조용히 쉴만한 곳이 있겠느냐?"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기색으로 옥여상을 바라보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삼신단(雪蔘神丹)이 비록 희세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쇄심마장(碎心魔掌)에 당한 나의 내상을 완전히 치료해 주지는 못한단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삼신단이니 쇄심마장이나 하는 이름들은 그에게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옥여상의 말을 들었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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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두(魔頭)를 만나다!

 

 

층층산상(層層山上)-!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던 두꺼운 천이 다시 내려앉으며 겹쳐진 듯한 형상의 바위산이 있다.

모두 일곱 층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산의 뿌리 쪽은 사시사철 안개에 덮여있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깊은 계곡이다.

바위산은 높고도 험준한 농산산맥(隴山山脈)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다.

그 때문에 바위산 정상에 서면 사방 수백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임청우의 눈에는 그 절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째서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그토록 증오하시는 걸까?)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정상에 선 채 임청우는 벌써 이각(二刻; 30) 넘게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머니 임단심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건 아침 무렵의 일이다.

그 직후 집을 나섰지만 어머니 곁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임청우는 어머니의 경고대로 오늘 안에 농산(隴山)을 떠날 결심을 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해둘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고질을 다스리는 데 쓸 약초를 채집할 수 있는 대로 채집해야하고 또 산짐승도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갖다 드려야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임청우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핏줄이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식의 도리는 다 해야만 한다.

임청우가 서있는 바위산의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쪽 외의 세 방향은 험하긴 해도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어서 올라올 수 있다.

임청우는 전에도 여러 번 이 바위산에 올라왔었다.

사방이 확 트인 바위산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악담과 학대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낫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약초를 담는 망태와 사냥을 위해 준비한 활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망태에는 제법 많은 약초가 들어있다. 이 바위산까지 오는 동안 채집한 약초들이다.

임청우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큼직한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에는 산행 중에 지치고 힘들 때 마시기 위해서 준비한 술이 들어있다.

임청우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은 호리병뿐만이 아니다.

왼쪽 허리춤에는 특이한 쇠붙이가 하나 끼워져 있다.

길이 한 자 정도인 쇠붙이는 끝이 뾰족하긴 하지만 칼이나 검은 아니다. 날이 서있지 않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전체 모양이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드는 홀()을 닮은 쇠붙이다.

먹물에 담았다가 꺼낸 듯 검은 색인 쇠붙이 양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임청우는 이 쇠붙이에 북두홀(北斗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날은 서있지 않지만 북두홀은 아주 단단해서 어떤 것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임청우는 호미나 칼 대신 북두홀을 써서 약초를 캐왔다.

 

(아버지를 거론한 게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 무렵, 임단심은 편치 않은 몸으로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임단심은 임청우가 어제 사냥해온 꿩과 비둘기로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을 들여다보던 임청우는 별 생각없이 말을 꺼냈었다.

 

<아버지도 날짐승 요리를 좋아하셨나요?>

 

그 한마디가 임단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거론하면 안된다는 금기(禁忌)를 임청우는 깜빡했던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어머니가 아버지를 철천지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임청우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학대는 점점 더 강도가 심해졌었다.

아마도 임청우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때문일 것이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

임청우는 머리를 흔들어서 번민을 떨쳐버리려 했다.

떠나라 하셨으니 떠나면 된다. 하긴 농산 따위는 나 임청우가 뛰어놀기엔 너무 작기도 하지. 하하하!”

!

임청우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 !

절벽 아래로 떨어진 돌멩이는 켜켜이 쌓인 바위에 부딪혀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모두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은 각층의 높이가 수십 장 이상이다.

그 때문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

임청우가 점점 멀리 들리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끼이이!

절벽 아래쪽에서 무언가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지?)

임청우는 고개를 내밀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악!

그런 임청우의 눈에 새 한 마리가 절벽 중간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활짝 편 날개 길이가 일장(一丈;3미터)이 넘는 거대한 독수리였다.

(독수리들의 왕!)

임청우의 눈이 커졌다.

바위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거대한 독수리는 임청우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그 놈은 농산 일대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그 놈이 산양이나 늑대, 심지어 다 자라지는 않았어도 곰까지 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하늘의 폭군이 무슨 일로 깊디깊은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던 것일까?)

임청우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수리들의 왕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기라도 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화악! 화악!

임청우가 물러서는 사이에 독수리는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절벽 위쪽으로 떠올랐다.

(!)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올려다보던 임청우는 한 번 더 놀랐다.

강철같이 번쩍이는 독수리의 두 발이 뱀을 한 마리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뱀은 독수리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았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되지 않아서 독수리의 끼니거리로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다만 독수리에게 잡혀가고 있는 그 뱀은 크기는 작아도 생김새는 매우 특이했다.

몸 전체가 피를 칠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머리에는 황금색 뿔이 두 개 돋아나 있다.

크기는 비록 세치 남짓에 불과하지만 황금색 뿔의 형상은 영락없이 용()의 그것이었다.

카아!

뿔이 달린 작은 뱀은 독수리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독수리의 발톱은 강철 족쇄같아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 !

뿔 달린 작은 뱀은 몸부림치면서 독수리의 발목을 연신 물고 있었다.

그러나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도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그놈의 다리는 아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어서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은 흠집조차 못 내고 있었다.

발목 위쪽의 깃털로 덮인 부분이라면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뿔 달린 작은 뱀의 몸이 워낙 작아서 주둥이가 그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뿔 달린 작은 뱀은 어떻게든 독수리 다리에 상처를 내보려고 반복해서 물고 있었다.

카아!

헌데 뿔 달린 작은 뱀이 연신 자신의 발목을 무는 걸 무시하고 날아오르던 독수리는 갑자기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바위산 정상에 서있던 인간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임청우는 짊어지고 있던 활을 벗어서 시위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반달처럼 부푼 활에는 강철 촉이 달린 화살이 매겨져 있다.

화악!

깜짝 놀란 독수리는 급히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십여 장쯤인 거리를 단번에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깊이 박혀버렸다.

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독수리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뒤집어졌다.

임청우가 쏜 화살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화악!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해온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이내 독수리들의 왕과 그놈이 쥐고 있던 뿔 달린 작은 뱀은 바위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임청우는 한숨을 쉬며 활을 내렸다.

잡혀가는 작은 뱀이 마치 운명에 희롱당하는 내 신세 같아서 충동적으로 쏘고 말았다.”

딱히 독수리들의 왕이 미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살려고 몸부림치던 뿔 달린 작은 뱀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서 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여기서 너무 지체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임청우는 하늘을 보며 돌아섰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헌데 임청우가 막 절벽을 등지며 돌아설 때였다.

여기가 농산 표운봉(飄雲峰)이냐?”

벼락 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임청우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틀어잡아서 쳐든 것이다.

!

놀라서 활을 떨어트리는 임청우의 눈앞에는 삼태기만큼이나 크고 길쭉한 말()같은 얼굴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손잡이와 칼집이 온통 핏빛인 칼을 등에 메고 있는 이 괴인의 키는 무려 팔척(八尺;2미터 40센티)이 넘어 보인다.

그 때문에 그리 작지 않은 키의 임청우였지만 말같은 얼굴을 한 괴인의 손에 멱살이 잡혀 쳐들려지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여기가 표운봉이냐고 묻질 않았느냐?”

성미 급한 괴인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끄윽...”

멱살이 틀어 잡히면서 옷깃에 목이 조여진 임청우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대답은커녕 숨조차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질식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임청우는 왼쪽 허리춤에 끼우고 있던 북두홀을 급히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괴인의 팔뚝을 북두홀로 힘껏 내리찍었다.

!

북두홀이 괴인의 팔뚝을 찍자 마치 철벽을 때리기라도 한 듯 요란한 쇳소리가 냈다.

!

이어 괴인의 팔뚝에서 일어난 강한 반탄력에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 따당! 휘익!

바닥에 떨어졌던 북두홀은 쇳소리를 내며 몇 번 튕겨졌다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놈이 감히 마면혈도(馬面血刀) 어르신의 말씀에 대답을 거부해?”

말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당돌한 반격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표정이 되었다.

! !

그자는 임청우를 패대기칠 생각인지 번쩍 쳐들어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이 말대가리 괴인의 머리위에서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뒈져라!”

스스로를 마면혈도라고 밝힌 말 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몸뚱이를 서너 바퀴 돌린 후 절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휘익!

던져진 임청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절벽으로 날아갔다.

맞소. 여기가 표운봉이오!”

멱살이 풀려서 숨을 쉴 수 있게 된 임청우가 날아가면서 소리쳤다.

?”

마면혈도가 의외라는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움찔했다.

화악!

움찔하는가 싶은 순간 그자는 어느새 임청우 앞에 이르러 다시 멱살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임청우의 몸은 이미 절벽 밖에 이르러 있었다.

임청우를 잡으려면 마면혈도 역시 발을 땅에 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막 임청우의 멱살을 잡으려던 마면혈도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우라질!”

뻗었던 손을 급히 거두어들인 마면혈도가 욕설을 내뱉었다.

말하려면 조금 빨리 할 것이지... 아가리를 찢어죽일 놈같으니...!”

바로 그때였다.

화라락!

절벽 아래로 추락하려던 임청우의 몸이 돌연 돌개바람에 휘말린 낙엽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임청우를 휘감아서 끌어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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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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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군웅보는 1982년 12월에 탈고 하여 1983년 3월에 출간한 와룡강의 데뷔작입니다.

정확히 37년 전에 출간이 되었군요.

모든 작가의 데뷔작이 그렇듯 이후 와룡강의 모든 작품의 씨앗은 무림군웅보에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애송이가 글을 쓰면 얼마나 잘 쓰겠습니까?

무림군웅보도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문장과 구성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피식 실소를 연발하실 게 분명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박스본 무협 형태 그대로 연재를 합니다.

무려 37년전의 골동품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3월 12일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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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부동(五獸不動)

 

 

너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설령 그게 피붙이라도...”

철령보(鐵嶺堡)의 소보주 백남빈(白藍斌)은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렸다.

이름이 정취려(鄭翠麗)였던 어머니는 십삼 년 전 그의 곁을 영영 떠났었다.

오늘이 바로 그 어머니의 기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백남빈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다.

백무염(白無染)이란 이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육 년 전, 백남빈의 나이 겨우 세 살 때였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몸이 산처럼 컸고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처럼 환했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사랑하는 남편의 오랜 부재가 어머니에게서 생기(生氣)를 빼앗아 간 것같았다.

시름으로 나날이 쇠약해지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만을 세상에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백남빈을 거두어준 것은 이모인 정가려(鄭佳麗)였다.

백남빈은 이모 부부의 양자(養子)가 되어 자랐다.

철령보의 보주가 그의 이모부이며 양부(養父)인 것이다.

(얼마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기에 어머니는 피붙이도 믿으면 안된다고 하셨을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의 위패를 올려다보며 백남빈은 생각에 잠겼다.

피붙이조차 믿으면 안된다는 유언은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오직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한을 품고 돌아가신 연유는 차마 이모에게 여쭐 수가 없다.)

백남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피붙이일지라도 믿으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피붙이인 이모에게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긴 분이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만나 봐야만 어머니가 그리 유언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玉佩)가 들어있다.

얼음처럼 서늘한 그 옥패가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모와 이모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내려면 옥패의 내력부터 알아내야할 것이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내어 어머니 영전으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어머니의 위패에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사당을 나섰다.

 

이미 삼경(三更)에 접어든 시간이라 철령보의 사당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어둠 속에 백남빈을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다. 철령보의 총관인 사해검객(四海劍客) 종리완(鍾里阮)이다.

사해검객은 검법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인후한 성품을 지녀 아랫사람들로부터 인망이 두텁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당 밖에 서있는 사해검객을 보자 백남빈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영당(令堂)의 제사는 잘 모셨는가?”

사해검객이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 그보다 저와 의논할 일이 생겼겠습니다.”

백남빈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되물었다.

이모부이면서 양부인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獨眼龍) 이탁(李卓)은 사흘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다. 숙적인 대려장(大麗莊)의 동향이 심상치 앉아서 직접 접경지역을 순찰하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보주인 백남빈이 철령보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중이다.

신랑성(神狼城) 방면을 감시하던 형제들이 날려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네.”

사해검객은 들고 있던 폭이 좁고 긴 종이를 백남빈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는 전서구가 수백 리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자가 은밀히 월경(越境)을 했단 말이지요?”

전서를 받아 읽으며 백남빈의 미간이 조금 모아졌다. 전서에 적혀있는 이름이 범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주님께도 전서구를 날려 보냈네만... 서둘러 대응해야할 사안인 것같아서 소보주가 제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네.”

전서를 읽는 백남빈의 얼굴을 살피며 사해검객이 말했다. 말과 태도가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백남빈이 자못 어렵게 느껴지는 사해검객이었다.

제가 오늘밤 당직인 형제들을 이끌고 요격(邀擊)에 나서겠습니다. 총관께서는 양부와의 연락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남빈은 전서를 다시 사해검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함세.”

사해검객은 경험이 많은 자신이 요격에 나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나이는 아들뻘이지만 이 어린 주인의 말은 어쩐지 거스르기가 어렵다.

 

잠시 후 백여 기의 날쌘 기마대가 철령보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기마대의 선두에 선 것은 물론 철령보의 소보주인 백남빈이었다.

 

***

 

-오수부동(五獸不動)!

 

다섯 짐승이 서로를 노려서 피차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오수부동이야말로 당금의 무림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중원의 무황성(武皇城)과 농성(農城), 만리장성 밖의 대려장, 신랑성, 극품당(極品堂)등 다섯 세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칠십여 년 간 무림을 지배해온 것은 무황성이다.

무황성의 창건자는 철면무황(鐵面武皇) 한산림(韓山林)이라는 인물이다.

사문내력은 불분명하지만 철면무황은 백년 내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린다.

기이하면서도 실전적인 무공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중원에서 몽고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주원장은 철면무황에게 주()씨 성을 내리고 강호 무림의 주재자로 책봉했다.

한산림에서 주산림(朱山林)으로 개명한 철면무황은 호시탐탐 중원으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는 몽고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과 만리장성 사이에 거대한 성채를 세웠다.

그 성채는 무황성이라 불리며 칠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림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철면무황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과 명나라 황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무황성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특히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강탈한 <정난(靖難)의 변()>은 무황성과 명 황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만들었다.

무황성으로서는 주원장의 후계자인 건문제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건문제의 숙부인 연왕, 즉 영락제(永樂帝)였기 때문이다.

비록 영락제가 무황성을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인 주원장처럼 우대하지도 않았다.

자연히 무황성의 세력은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남쪽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농성이라는 세력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몽고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신랑성과 극품당, 그리고 동이족(東夷族)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이 차례로 흥기(興起) 했다.

오랜 세월 무림의 주인을 자처해왔던 무황성은 장강과 황하 유역에만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농성을 제외한 사대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이 동북방의 요하(遼河) 일대다.

요동(遼東)에는 동이족의 맹주 대려장이 웅거하고 있으며 요하의 북쪽에는 몽고의 유력한 부족 달단(韃靼)을 배경으로 둔 극품당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요하의 발원지이기도 한 서북쪽은 몽고의 가장 강력한 부족 오이라트(瓦刺)가 세운 신랑성의 세력권이다.

마지막으로 요서(遼西)에 펼쳐진 드넓은 철령평야(鐵嶺平野)에는 무황성의 최북단 거점인 철령보가 변황의 삼대세력 사이에 쐐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철령보는 그 전략적 위치에 어울리게 무황성의 여러 분타들 중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철령보 소속 무사들 중 약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강호의 평판이다.

철령보의 보주는 독안룡 이탁이란 인물이다.

무황성 감찰전(監察殿)의 전주였던 독안룡 이탁은 무공도 뛰어나지만 기문진법(奇門陣法)의 재주가 일절(一絶)로 꼽힌다.

그 독안룡 이탁의 양자인 백남빈이 야심한 중에 철령보를 나와 서북 방면으로 출격하면서 오수부동이던 강호의 정세에 일대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

화살이 얼굴 옆을 스치며 쨍한 소음을 낸다.

!”

젊은 시종 다얀(達延)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몸을 숙였다.

무공에는 소질뿐 아니라 흥미도 없어서 신랑성의 서재에만 틀어박혀 살아온 다얀이다.

당연히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오늘이 처음이다.

상당히 떨어진 옆쪽으로 흘러가는 화살조차 다얀의 온몸을 떨게 만든다.

자세를 흩트리지 마라. 그렇잖아도 지친 말을 힘들게 한다.”

앞서 달려가던 완안진(完顔進)이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 죄송합니다 부()성주님.”

몸을 숙였던 다얀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말들은 천리마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놈들이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숨은 턱에 차있고 발걸음은 눈에 띄게 어지럽다.

그렇다고 쉬게 할 수도 없다.

두 주종(主從)은 지금 다수의 적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며 달리고 있는 곳은 일망무제의 평야라 몸을 숨길만한 곳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밀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간 것일까?)

앞서 말을 달리는 완안진의 미간이 모아졌다.

 

올해 쉰 두 살인 완안진은 신랑성의 부성주다.

직책은 비록 부성주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사실상 신랑성의 성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몽고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오이라트에 의해 세워진 신랑성은 대대로 오이라트의 족장이 성주를 겸임해왔다.

신랑성의 당대 성주 신랑태사(神狼太師) 토곤(脫灌)은 제이(第二)의 징기스칸으로 불리는 영걸이다.

능력에 걸맞게 야심도 큰 토곤은 중원에서 쫓겨난 후 사분오열된 몽고족을 정복하고 통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만주(滿洲)와의 경계인 흥안령(興安嶺)에서 오이라트의 숙적 달단을 공격하다가 내일은 수천 리 밖의 서역으로 기마군단을 몰고 가 티무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샤 루흐와 격돌하는 식이다.

그 때문에 토곤은 신랑성의 성주 자리를 비워두다시피 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부성주인 완안진이 신랑성을 이끌고 있다.

토곤이 이십여 년 간 동분서주한 보람이 있어서 몽고의 부족 대부분은 오이라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밀려난 달단만이 원()나라 황실의 보위를 위해 세워졌던 무사집단 극품당을 전위(前衛)로 내세운 채 토곤에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몽고를 사실상 통합하는데 성공한 토곤의 야심은 이제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성주인 완안진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요동의 대려장으로 파견한 것인데...

대려장으로 가기 위해 극품당과 철령보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완안진과 시종 다얀은 종적이 발각되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진족(女眞族) 출신인 우리 형제들을 시기질투 하는 누군가가 극품당과 대려장에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완안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안(完顔)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완안진은 금()나라를 세워 한 때 중원을 정복했던 여진족 출신이다.

완안진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인 몽고의 유력한 부족 오이라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몽고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 덕분에 신랑성의 부성주가 되었지만 완안진에게는 적이 많다.

그 적들 중 누군가가 완안진이 토곤의 밀명을 받고 신랑성을 떠난 것을 틈 타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대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다니... 이번 일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대로 신랑성에 서식하는 버러지들을 일소해버리고 말겠다.)

완안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를 때였다.

삐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명적(鳴鏑), 즉 우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완안진과 다얀의 눈에 이리(二里) 쯤 뒤쪽에서 모래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수십 기의 기마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서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있다.

무황성의 동북면 거점인 철령보 소속의 기마대다.

그들은 해가 뜬 직후 자신들 주종을 발견한 이래 지치지도 않고 추격을 지속하고 있다.

하루 종일 추격해오면서도 대형을 흐트리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개개인이 무시 못 할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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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북두무맥 -北斗武脈

 

서장

 

                   눈알을 뽑고 복수를 맹세하다!

 

 

츄훅!

눈에 박힌 화살을 잡아 뽑자 안구(眼球)와 함께 대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상상 밖으로 큰 눈알의 안쪽에는 명주실 같은 것들이 여러 개 달려 있다가 함께 뽑혀진다.

눈알이 뽑히자 시뻘겋게 달궈진 송곳이 머릿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주윤문(朱允炆)에게 그 정도 통증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 사랑하는 아내가 어린 딸을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아악!”

끼야악!”

시뻘건 불길에 휩싸이며 모녀가 함께 토해내던 단말마의 비명은 안구가 뽑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한 고통으로 그의 심장을 난도질 했었다.

미안하오 황후! 미안하다 공주야!”

지하의 어둑한 통로를 엉금엉금 기어가며 주윤문은 피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의 무능과 우유부단함이 아내와 딸을 타죽게 만들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자책과 회한에 당장이라도 돌바닥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복수!

복수를 해야만 한다!

후두둑! 후둑!

눈알이 뽑힌 왼쪽 눈에서 피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체액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두고 비굴하게 도망치던 중 연왕(燕王)의 졸개가 쏜 화살이 눈에 박혔었다.

화살촉이 한 치만 더 깊이 박혔어도 아내와 딸의 뒤를 따라갔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복수를 해야만 한다!”

주윤문은 이를 갈며 어둑한 통로를 기어갔다.

출혈이 심한 탓인지 정신이 급격하게 흐려진다.

눈에 박혀있던 화살을 잡아 뽑은 것도 멀어지려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알이 뽑히면서 느껴졌던 고통도 이내 무뎌지며 정신은 다시 혼미해지고 있다.

짐은... 짐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귀신이든... 악귀든 나타나다오! 복수를 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나 주윤문의 혼백이라도 기꺼이 바칠 테니...”

허연 눈알이 꽂혀있는 화살을 움켜쥔 채 기어가며 주윤문은 간절하게 소망했다.

유학(儒學)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온 터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주윤문은 세상 그 어떤 인생보다도 간절하게 귀신과 악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존재는 인간중에 없으므로...

지금의 그 맹세를 믿어도 되겠소?”

누군가의 말이 의식이 멀어지는 주윤문의 귓전을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환청인가 싶어 의심하면서도 주윤문은 하나뿐인 눈을 치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앞쪽에 어떤 존재가 있었다.

통로는 지하에 나있어 어두운 데다가 극심한 출혈로 인해 실체를 뚜렷하게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주윤문은 그 존재가 인간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한 쌍의 눈이 그의 앞쪽 허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누구냐?”

주윤문은 흐려지려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며 그 인물을 노려보았다.

다시 묻겠소.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으시오?”

푸른 눈빛의 인물이 다시 물었다.

천지신명께 맹세코... 기꺼이...”

주윤문은 폐부를 쥐어짜 토해낸 목소리로 맹세했다.

그렇다면 되었소. 이제부터 폐하는 대명(大明)의 황제(皇帝)가 아니고 마교(魔敎)의 제자요.”

푸른 눈의 인물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이 명()나라 제이대 황제였던 건문제(建文帝) 주윤문이 정신을 잃기 전에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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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는 여인들

 

 

틀림없습니다. 이자는 십자단맥검(十字斷脈劒)에 죽었습니다.”

이마 부분에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가 한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복면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체는 온몸이 무성한 털로 덮인 거구의 사내인데 심장 부분에 열십자로 갈라진 상처가 나있다.

특이하게도 그 열십자의 상처는 피부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다.

끊어진 경맥들이 오그라들면서 피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십자검존의 독문검법 십자단맥검에 당한 흔적이다.”

또 한명의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각주(閣主)님이 보시기에 이 작자를 죽인 범인이 바로...”

먼저 말한 복면인이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를 돌아보았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그자의 두 눈은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어 있다.

철사자 고창룡이 죽으면서 십자단맥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네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그중 셋의 행적은 확인되었다.”

각주라 불린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곰같은 놈을 죽인 건 십칠 년 전 돌연 행방을 감춘 당혜선(唐惠善)일 수밖에 없다.”

각주라는 자는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날수비연(辣手飛燕) 당혜선! 역시 그년 짓이었습니다.”

드디어 사신검 중 복마신검(伏魔神劒)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생겼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각주님!”

시체 주변에 모여 있던 복면인들이 흥분을 주체 못하며 각주라는 자에게 포권을 했다. 그자들이 쓰고 있는 복면에는 예외없이 <()>자가 적혀 있다.

진정해라. 이제 겨우 당가 년이 기련산(祁蓮山) 근처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각주라는 자가 손을 들어 다른 복면인들의 말을 막았다.

이번 일에 우리 사신각(死神閣)의 명예가 걸려있다. 기련산의 골골을 다 뒤져서라도 당가 년을 찾아내라!”

존명!”

맡겨주십시오 각주님!”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휘익! !

이어 그자들은 사방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당혜선... 당혜선... 드디어 네년이 꼬리를 드러냈구나.”

사방으로 흩어져 멀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각주라는 자는 음산하게 웃었다.

감히 본좌를 기만하고 복마신검을 빼돌린 대가를 몸으로 치르게 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사신각의 각주라 불린 복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악의에 찬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 * *

 

-기련산맥(祁蓮山脈)!

 

감숙성과 청해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곤륜산맥의 동쪽 지맥이기도 하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이천여리의 산줄기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기련산맥의 최고봉인 기련산은 높이가 무려 이만여척(6,000미터)에 이르러 정상부가 늘 만년설에 덮여있다.

기련산의 서북쪽에는 서역과 중원의 관문인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계절은 싱그러운 초여름이다.

기련산 남쪽 산록에는 녹색의 물결을 일으키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비스듬히 경사진 초원 여기저기에는 구름송이 같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또 초원에는 듬성듬성 키 큰 나무들이 서있어서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초원에 서있는 나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느릅나무 아래에는 소년이 한 명 앉아있다.

나이는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걸친 옷은 허름하고 살갗은 햇볕에 그을려 가뭇하다.

기련산 근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맑아서 보는 이의 이목을 잡아끈다.

어느 명문가의 귀한 핏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외모를 양치기 소년이 지니고 있다.

소년은 느릅나무 밑동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이 읽고 있는 책은 제법 두껍고 글씨도 작아서 가벼운 내용은 아닌 듯 했다.

“...!”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소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

한 명의 여인이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얼굴은 명장이 정성을 다해 빚은 듯 아름다운 반면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얀 은발(銀髮)이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만 보자면 여인의 나이는 이십 대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하얀 머릿결 때문에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발여인은 눈같이 흰 피부와 은발과는 대조적인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다.

헌데 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은 섬뜩하게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칠갑이 되긴 했어도 검은 옷은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옷을 물들이고 있는 피는 은발여인이 흘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인 듯했다.

유령처럼 나타난 은발여인을 본 소년은 두 눈을 조금 치떴을 뿐 딱히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담력이 큰 아이로구나.)

은발여인의 옥용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무슨 책인데 그리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은발여인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소년은 은발여인의 청아한 음성에 감탄하며 말없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죽서기년... 흥미로운 책이로구나."

적잖이 놀란 듯 은발여인의 아미가 살짝 올라갔다.

외진 산골의 양치기 소년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령 글을 읽을 줄 안다 해도 흥밋거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패설(稗說;소설) 따위일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다.

헌데 소년이 읽고 있었던 건 상당히 난해한 사서(史書;역사책)였다.

괜잖다면 죽서기년을 읽은 감상을 들어볼까?”

은발여인의 말에 소년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소년의 순진하고도 해맑은 미소를 접한 은발여인은 주책맞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젊지만 사실 은발여인은 소년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의 나이다.

그만큼 소년에게는 보는 사람, 특히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죽서기년이 어떤 책인지는 알고 계신 듯하네요."

드물고 진귀한 책이지만 아줌마도 읽어본 적이 있단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음성이 맑은 샘물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음성도 해맑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죽서기년은 전국시대에 지어졌으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었었다. 그러다가 서진(西晉) 시절 도굴당한 무덤에서 다시 발견되었으며, 죽간에 쓰여진 사서라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은발여인은 죽서기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죽서기년의 내용은 정사로 믿어지는 좌전(左傳)이나 사기(史記)와 사뭇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이 다르지요. 성군으로 알려진 순()이 사실은 요()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다거나 그 순을 또 우()가 쳐서 죽였다던지...”

은발여인의 물음에 소년은 죽서기년을 보며 대답했다.

죽서기년의 그같은 내용을 믿느냐?”

믿는다 안 믿는다 단언하기에는 저의 공부가 너무 빈약하군요.”

소년의 대답이 은발여인을 탄복시켰다. 한창 혈기 방장할 나이임에도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죽서기년의 연원을 아시는 걸 보니 아주머니도 독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소년이 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은발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몰론이다. 나도 한때는 독서로 식음을 전폐하던 때가 있었단다."

은발여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책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소년은 부러운 눈빛을 지었다.

소년의 그 모습에 은발여인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호호호! 물론이다. 이 아주머니의 서고에는 줄잡아 십만서(十萬書) 정도는 있단다."

"!"

소년은 정말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발했다.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은발여인의 부드럽던 눈빛이 파랗게 번뜩였다.

(이 분... 쫓기고 있구나!)

표정을 차갑게 일변시키며 호각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은발여인의 모습에서 소년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담세황(潭世皇)!"

은발여인은 이를 바득 갈며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추격하는 자의 이름이 담세황인 듯 했다.

"이 주위는 탁 트인 초원이라 은신하실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습니다만..."

소년은 은발여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은발여인은 흠칫하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위는 녹음이 짙어 방해받지 않고 쉬실만하실 것입니다."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기대앉은 나무의 위쪽을 가리켰다.

은발여인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꾸나."

!

이어 그녀는 소리없이 나무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은발여인의 유령같은 경신법에 소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죽서기년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은 다시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언제 나타났는지 소년 앞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인데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영준한 용모를 지녔다.

또 육척 가까운 훤칠한 몸에는 화려한 금포(錦袍)가 걸쳐져 있다.

여자라면 이 금포장한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금포장한의 눈빛이 음침하고 스산하여 결코 좋은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주변에서 은발의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

금포장한은 음산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못 봤어요."

소년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설령 누가 주위를 지나갔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독서 중에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성격인지라...”

"그래?"

금포장한은 스산하게 말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마치 독사같은 눈빛이다.)

금포장한의 시선을 접한 소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금포장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놈은 정말 옥여상(玉如霜) 그년을 못 본 것 같다.)

금포장한의 미간이 모아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에서 추호의 동요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지.)

금포장한은 내심 중얼거리며 돌아서려 했다.

번쩍!

헌데 돌아서려던 그 자의 눈가로 한광이 스쳤다.

(저 놈, 놀라운 근골(筋骨)을 지녔다.)

금포장한은 비로소 소년이 근골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심성은 올바르지 못해도 금포장한은 탁월한 자질과 안목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그자는 양치기 소년의 근골이 무공을 연마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애지신(無碍之身)! 어쩌면 전설 속의 무애지신일지도 모른다.)

금포장한의 눈가로 불꽃이 튀었다.

 

무애지신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몸을 말한다.

정확히는 몸속의 모든 경맥이 막힘없이 뚫려있는 특이하고도 진귀한 체질을 뜻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모든 경맥이 열려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맥은 굳어지고 노폐물이 쌓여 진기의 유통에 장애가 생긴다.

그 때문에 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증진되지 못한다.

진기의 유통도 차질을 빚어 내공을 구사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기기도 한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고도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의 타통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임독이맥이 뚫린 자는 진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어 내공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게 된다.

무애지신은 그 임독이맥을 비롯한 모든 경맥이 뚫려있는 보기 드문 체질이다.

헌데 일개 양치기 소년의 몸이 무애지신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금포장한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다.

 

(저놈이 정말 무애지신의 소유자라면 장차 나 담세황이 대업(大業)을 이루는 데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금포장한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에게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포장한은 소년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일단 소년이 무공을 익히면 단 시일 내에 금포장한 자신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둑!

금포장한의 움켜쥔 두 손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소년의 뛰어난 근골을 알아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일어난 것이다.

“...”

소년은 금포장한의 그같은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죽서기년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근은 미리 미리 제거해두는 게 최선이다.)

금포장한의 입가로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절체절명!

금포장한의 손이 한 차례 휘둘러지기만 해도 소년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루주(樓主)! 여기 계셨구려.”

휘익!

걸걸한 외침과 함께 금포장한 뒤로 한명의 장한이 날아 내렸다. 굶주린 늑대처럼 흉포하고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인데 한쪽 눈이 먼 애꾸다.

무슨 일이오 독안랑(獨眼狼)?”

막 소년에게 살수를 쓰려던 금포장한은 오른손에 모았던 공력을 풀어버리며 돌아보았다.

죽서기년을 읽고 있던 소년도 고개를 들어 애꾸눈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이 근처에서 다수 발견되었소이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독안랑이란 중년인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신각? 그 살인귀들이 무슨 일로 기련산에 몰려온 거요?”

독안랑의 보고를 받은 금포장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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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2

 

         패륜아(悖倫兒)의 이름

 

 

-철사자(鐵獅子) 고창룡(高蒼龍)

 

이것은 그저 한 인물의 이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불명예와 오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 인해 정파백도의 긍지는 땅에 떨어졌으며 흑도, 마도, 녹림은 물론이고 하오문의 무리들조차 정파백도를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무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륜(悖倫)이 철사자 고창룡이란 이름을 지닌 자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었다.

흑도사파에 대해 늘 당당할 수 있었던 정파백도의 군협들은 기억하기도 싫은 그 만행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철사자 고창룡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인해 정파백도는 천여 년 동안 쌓아온 명예와 긍지를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것이다.

 

* * *

 

철사자 고창룡은 정파백도의 결맹인 호천무맹(護天武盟)의 소맹주였다.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고창룡은 호천무맹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무공을 불과 십여 년 만에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성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창룡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하십대고수로 뽑혔을 정도였다.

헌데 그런 그가 어느 날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했다.

사모(師母) 겁탈-!

고창룡이 돌연 색마로 변해서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호천무맹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한 것이다.

 

-다정관음(多情觀音) 능벽운(凌碧雲)

 

그녀는 고창룡의 사모이며 호천무맹의 맹주인 십자검존(十字劒尊) 종극(種極)의 아내였다.

능벽운은 지혜로우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지녀 정파백도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런 그녀를 믿을 수 없게도 십자검존이 총애하는 제자가 겁탈한 것이다.

능벽운은 남편의 제자에게 겁탈 당했다는 엄청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으며... 고창룡은 그 직후 들이닥친 호천무맹의 원로들과 난투를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너무도 비극적이고 치욕스러운 사건이기에 호천무맹은 이 사건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했다.

그러나 영원히 지켜질 수 있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고창룡이 사모를 능욕한 만행은 요원의 불길처럼 무림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실추된 것은 비단 호천무맹의 명예만이 아니었다.

호천무맹은 정파 무림을 상징하는 결맹이다.

헌데 그 호천무맹에서 언도도단의 패륜이 벌어졌다.

그 일로 인해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은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호천무맹은 물론이고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백도의 유수한 문파들이 봉문하고 근신하기에 이르렀다.

단 한명이 저지른 패륜치고는 실로 엄청난 결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호천무맹의 다음 대 맹주로 지목되던 고창룡이 왜 갑자기 미친 짓을 한 것일까?

무림인들의 가슴 속에 커다란 의혹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의혹의 해명을 시도하지 못했다. 고창룡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탓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무림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호천무맹의 봉문은 무림의 정세를 뒤흔들어놓았다.

호천무맹의 위세에 눌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던 흑도와 사파의 세력들이 일제히 발호한 것이다.

무림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했으며 수많은 세력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났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그라지곤 했다.

호천무맹에 의해 주도되던 평화의 시대는 끝이 났다.

약육강식의 쟁투와 패권에 대한 야욕으로 무림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이 모두가 고창룡이라는 단 한 명의 패륜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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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의 변>

 

달마묵장처럼 전설신검도 현재 <리디북스> <원스토어> <미스터블루>등에 연재중인 작품입니다.

유료연재 작품이라 이 카테고리에서 전체를 연재하지는 못하고 대략 1권 분량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뒷 부분의 열람을 원하시면 상기의 플랫폼들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묘사와 설정에도 손을 봐서 연재한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와룡강 무협소설

 

                            전설신검-傳說神劒

 

재간(再刊)의 변

 

 

 

 

이번에 선보일 작품은 1990년에 전14<박스본>으로 출간했던 <기인연작(奇人連作)>입니다.

졸자 와룡강은 1982년부터 무협소설을 집필해왔으며 100 타이틀이 넘는 작품들 중에는 시리즈물, 즉 연작(連作)이 몇 작품 존재합니다.

<군마무 2부작> <십왕경-십왕무적> <대륙풍-대륙몽> <철혈기인-철혈무적> <고독천년-고독만리-고독무적> <금포영왕 2부작> <북두질풍록-무제질풍록>등이 그것입니다.

상기의 연작들은 모두 재간되어 다시 선을 보였었습니다.

다만 <기인 2부작>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체가 재간되지는 못했었습니다.

2000년에 제1<기인천년(奇人千年)><기인몽(奇人夢)>이란 제목으로 단행본 출간이 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2<기인무적(奇人無敵)>은 미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1, 2부를 합본한 온전한 기인연작을 <기인천년>이란 제목으로 재간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29년 전의 작품이며 가필(加筆)을 통해 출간 된 박스본 형태라 문장이 조야하고 구성이 거친 면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가필이란 단어의 뜻대로 원작에 보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시장의 수요와 출판사의 요구에 맞춰주다 보니 와룡강도 가필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와룡강이 스토리를 쓰고 다른 작가들이 문장을 완성하는 형태의 작업을 했지요.

데뷔 초기의 몇 작품과 시공사와 작업할 무렵에 출간된 몇몇 작품 들 외에는 대부분이 가필 작품이었습니다.

작품마다 문장이 다르다고 느끼셨다면 가필에 참가한 작가들의 필력과 필체가 원인일 것입니다.

이번에 재간을 진행하면서 최대한 문장을 다듬었으며 미진한 내용과 구성은 보완하였습니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글이지만 와룡강의 무협소설 계보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기에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9년 여름 와룡강 배

 

**********************************************************************

서장 1

 

              사신검(四神劒)의 전설

 

 

<신검(神劒)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

 

이같은 말이 무림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얻으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신묘한 검!

무림인들에게 신검이란 존재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지고(至高)의 동경이다.

신검은 한 자루의 검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신검은 모두 네 자루이며 그중 하나라도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된다고 한다.

 

-사신검(四神劒)!

 

무림인들은 네 자루의 신묘한 검을 사신검이라 부르며 꿈에도 잊지 못할 갈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자전(紫電)!

-규룡(叫龍)!

-흡혈(吸血)!

-복마(伏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사신검의 이름이다.

사신검은 금석(金石)을 무 베듯 한다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날카로움만으로 따진다면 사신검이 최강은 아닐 것이다. 간장(干將), 막야(莫耶), 거궐(巨闕), 전설 속 명검들의 예리함은 사신검에 못지않거나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검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전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사신검에 새겨져있다는 무공비결 때문이었다.

사신검의 검신에는 심오한 무공비결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을 연마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같은 사신검의 전설이 시작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림에는 네 명의 신비한 고수들이 돌연 나타나 패권다툼을 벌였었다.

 

-동룡(東龍)!

-서호(西虎)!

-남마(南魔)!

-북신(北神)!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불리는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무공으로 무림의 동서남북을 장악했다.

사방무신은 각자의 정복지에 가문을 세우고 무림을 사분하여 지배했다.

 

-사패천(四覇天)!

 

무림인들은 사방무신이 세운 가문을 사패천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사방무신들은 모두 검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애검이 바로 사신검이다.

무릇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고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는 것은 천고불변의 진리다.

헌데 당시의 무림에는 두 명도 아닌 네 명의 패주들이 존재했다.

사방무신 간의 충돌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방무신은 은밀한 곳에 모여 누가 최강인지를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그것이 바로 사방무신의 최후였음을...

모처로 떠난 사방무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백중의 실력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동귀어진 한 듯했다.

 

사방무신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숱한 무림인들이 사방무신의 대결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방무신이 최후를 마친 장소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후 가주를 잃은 사패천은 급격히 몰락하여 이윽고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소문이 무림에 퍼져나갔다. 사방무신의 애검들이 무림에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사신검에는 사방무신의 독문절기가 한 가지씩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신검이 모두 모이면 사방무신이 동귀어진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소문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신검은 간간이 무림에 나타났으며 검신에는 난해한 무공비결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사신검의 절기를 연마하여 무림의 패주가 된 사람은 없었다. 사신검을 얻으면 그 즉시 전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신검은 때때로 무림에 나타나 가공할 혈풍을 일으킨 후 다시 사라지곤 했다.

피는 공포를 부르고 공포는 외경을 낳았다.

사신검의 전설은 과장될 대로 과장되어 무림패주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다.

과연 사신검에 새겨진 절기들이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녔는지, 사신검을 얻으면 정말 무림의 패자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

 

이것이 사신검에 얽힌 전설이다.

바야흐로 사신검이 동시에 무림에 나타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신검의 출현은 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피를 요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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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소

무협소설 작가 와룡강의 작업실입니다. 딴지나 비판은 사양합니다.

cafe.daum.net

2004년 부터 운영중인 나름 유서깊은(흐흐흐) 와룡강의 카페입니다.

방문하시면 와룡강의 작품들을 감상하실 수 있으며...

1만명이 넘는 회원님들과의 교유도 가능합니다.

들르셔서 함께 지난 시절을 추억해보시면 어떠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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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호출도

 

 

! 카캉!

강유의 목검과 타복의 목도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주로 타복의 목도가 공격하고 강유의 목검은 부드럽게 휘돌면서 타복의 공격을 막거나 휘감아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

카캉! 스악!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나 물러섬도 없이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하게 공방을 펼쳤다.

(... 너무 빨라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보이질 않아.)

분이는 눈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분이로서는 강유와 타복의 공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련님도 아버지도 다치지 말아야하는데...)

분이는 그저 물통에 달린 줄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가슴만 조일 뿐이었다.

하여간 볼수록 놀라운 녀석이오. 나도 붕정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치기까지는 십년이 넘게 걸렸는데...”

강조는 타복과 공방을 벌이는 강유를 보며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

반면 냉상영은 여전히 미간을 조금 모은 채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이에 강유와 타복의 대결은 정점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타복의 목도는 격렬하면서도 숱한 변화를 일으키며 강유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강유는 목검과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서 타복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오히려 역습을 가했다.

임기응변도 자연스럽고... 이제는 나로서도 더 가르칠 게 없는 것같소.”

강유가 능숙하게 타복을 상대하는 걸 보며 강조의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번쩍! 서걱!

그때 강유와 타복의 무기가 뒤엉키며 서로의 몸을 베었다.

목검과 목도에 묻은 먹물들이 두 사람이 걸친 흰 옷에 흔적을 남겼다.

일격을 주고받은 후 물러섰던 강유와 타복은 다시 서로에게 돌진하려고 했다.

그쳐라!”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강유와 타복은 즉시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오호단문도 칠십이식이 일순(一巡)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강조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타복은 순식간에 오호단문도의 모든 초식을 한 차례 구사했던 것이다.

헌데 멈춰서는 강유와 타복이 걸친 흰 옷 여기저기에는 먹물이 묻어있었다.

강유의 옷에는 주로 점이 찍혀있는 반면 타복의 옷에는 먹물 자국들이 길게 이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유는 목검을 두 손으로 든 채 타복에게 포권을 했다.

별 말씀을...”

타복도 목도를 내리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서로 상대방의 옷에 찍힌 먹물 자국의 숫자를 확인해라.”

예 아버지!”

...”

강조의 말에 강유와 타복은 동시에 대답하며 서로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흰 옷을 입고 무기에 먹물을 묻혔던 것은 승패를 판독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타복의 몸에는 모두 열 세 곳에 먹물 자국이 나있습니다.”

강유가 먼저 강조에게 말했다.

강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복을 보았다.

도련님의 몸에는 스물한 개의 자국이 났습니다.”

!”

타복의 말에 분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 대련에서는 타복이 이겼군.”

강조는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타복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실전에서라면 노복이 졌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가?”

강조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패배를 자인하는 걸까?)

분이도 의아해하며 타복을 바라보았다.

주인님께서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복이 도련님 몸에 남긴 먹물 자국은 그리 짙지도 길지도 않습니다.”

타복은 강유의 몸을 살펴보며 말했다.

, 실전이었다면 그냥 옷이 베어지거나 약간의 자상이 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반면 노복의 몸에 난 먹물자국들은 대부분 짙고 길뿐 아니라 치명적인 요혈(要穴) 근처에 나있습니다.”

타복은 말하면서 자기 몸에 난 먹물 자국들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아비의 설명을 들은 분이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개졌다.

언제부터인가 분이는 아비의 안위보다는 작은 주인의 성취를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한 분석이네.”

강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는 무도의 이치에도 부합하니 오늘 대련은 유가 이겼다.”

소자,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강조의 칭찬에 강유는 포권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복이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면...”

그만해라.”

강조가 손을 들어 강유의 말을 저지했다.

겸양도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되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강조의 지적에 강유는 머쓱해서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말씀이 맞아.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가 양보한 건 아니야.)

분이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타복의 실력은 당금의 무림을 통틀어 백대고수(百大高手) 안에 든다. 칠절의 한명으로 꼽히는 아비라 해도 타복을 쉽게 이기지는 못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강조의 말에 타복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타복과 호각으로 싸웠으니 무림에 나갈 자격이 있다.”

하오면...”

강유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혈기왕성한 다른 젊은이들처럼 강유도 인적이 드물고 외진 산중에서의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비의 심부름도 한 가지 할 겸, 안탕산을 내려갔다 오너라.”

강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강유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와 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 *

 

스윽! !

타복은 대련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당을 비로 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온 신경은 강유의 침실이 있는 왼쪽 모옥을 향해 있었다.

그 모옥 앞에는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가 울상을 지은 채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모옥 안에서는 냉상영이 먼 길 떠날 차림인 강유의 옷을 매만져 주고 있는 중이다.

 

너 혼자 강호에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매사에 조심해야만 한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지만 냉상영의 말에는 절절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강유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갔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혼자 집을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냉상영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고 아버지의 심부름만 하고 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느냐? 세상은... 특히 무림인들이 설치는 강호가 얼마나 험한 곳인데...”

냉상영은 강유의 상의를 매만져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늘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하고... 하여간 일을 보는 대로 지체없이 돌아와야만 한다.”

당부를 하며 냉상영은 곁눈질로 문 밖을 살폈다.

냉상영의 시야에는 분이만 보이고 타복과 강조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불안해하신다.)

강유가 바깥의 눈치를 살피는 냉상영의 모습을 낯설어할 때였다.

유야!”

곁눈질로 문 밖을 살피던 냉상영이 두 손으로 강유의 저고리를 잡고 몸을 바짝 접근시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예 어머니...”

심상치 않은 냉상영의 태도에 강유도 긴장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

냉상영이 극도로 긴장한 채 강유에게 속삭이려는데 문 밖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아니다.”

그러자 냉상영은 깜짝 놀라며 강유에게서 떨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문 밖에는 강조가 뒷짐을 짚은 채 서있다.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는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한 노파심이라 여기지 말고...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거라.”

냉상영은 억지로 웃으며 문밖의 강조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좀 이상하시구나.)

강유의 가슴 속에서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심려 끼쳐드리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만 나가자.”

...”

냉상영이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강유도 탁자에 올려놓은 검을 집어들고 그 뒤를 따랐다.

봇짐에 빠진 건 없지?”

밖으로 나온 냉상영은 남편 강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분이에게 물었다.

예 마님. 말씀하신 건 전부 챙겼어요.”

그럼 되었다. 뒷마무리는 분이 네가 하거라.”

냉상영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하며 분이와 강조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소요유거 가운데에 자리한 가장 큰 모옥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이 정말 심란하신 모양이네.)

분이가 돌아보는 사이에 냉상영은 모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긴 사랑하는 외아들이 난생 처음 혼자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님 속이 걱정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겠지.)

가운데 모옥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분이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준비 되었습니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강유가 허리띠에 고정한 검을 만지며 강조에게 말했다.

그럼 가자. 관도(官途) 근처까지는 아비가 함께 가주마.”

강조는 분이가 건네주는 봇짐을 받는 아들에게 말하며 돌아섰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분이는 안고 있던 봇짐을 강유에게 건네주며 울상 지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 강호래요. 한시도 긴장을 늦추시면 안돼요.”

걱정마라. 내가 누구냐?”

강유는 봇짐을 등에 비스듬히 걸치면서 웃었다.

무공뿐 아니라 지혜로도 칠절중 으뜸이신 소요신군님의 아들 아니더냐? 눈치와 임기응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도...”

강유가 어깨를 다독이며 안심을 시켰지만 분이는 여전히 울상을 지우지 못했다.

숭산(崇山)까지 다녀올 동안 어머니를 부탁하마. 외로워하지 않으시도록 자주 말 상대도 해드리고...”

집 걱정은 말고 도련님 몸이나 잘 챙기세요.”

강유의 당부에 분이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이 너만 믿는다.”

강유는 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돌아섰다.

그 사이에 마당을 가로질러 간 강조는 사립문 근처에 타복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타복은 다가오는 강유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 없는 동안 고생 좀 해줘요 타복.”

강유는 타복에게 포권을 한 후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곧 두 부자의 모습은 소요유거가 자리한 계곡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정말 별일 없겠죠 아버지?”

사립문쪽으로 나온 분이가 울상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복이 많은 분이다. 설령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전화위복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타복은 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가고 싶어. 도련님이 눈에서 보여야 안심이 될 테니...)

분이는 강유가 강조를 따라 사라진 계곡 입구를 보며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울먹이는 분이와 달리 타복의 눈빛은 스산해지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타복의 입가로 음산한 미소까지 서렸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좀 더... 좀 더 대범했어만 했다. 그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어둑한 방안을 서성이며 냉상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그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줬어야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 아이가 알도록...)

뒤늦은 후회가 냉상영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유는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후였다.

(제발... 부디 무사히 돌아오너라. 네게 해줄 이야기가 너무도 많으니...)

이제 냉상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하늘의 가호가 그 아이와 함께 하기를 빌 뿐이다.)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모으는 냉상영의 눈가로 물기가 서리고 있었다.

 

* * *

 

안탕산은 절강성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명산으로 이름났다는 것은 그만큼 험하다는 뜻도 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 험한 안탕산을 동네 뒷동산이라도 되는 듯 뒷짐을 쥔 채 여유롭게 걷고 있다.

천천히 걷는 것같지만 실제로 강조의 걸음은 흐르는 구름같다.

(역시 아버지의 경신술은 대단하구나.)

강유는 앞서가는 강조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쳐야만 했다.

(틈만 나면 안탕산을 누비고 다닌 덕분에 경신술은 나름대로 자부해왔지만... 산책하듯 걷는 아버지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뒷짐을 짚고 유유자적 걸어가는 강조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강유는 숨이 턱에 닿도록 힘을 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무림칠절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소요보법과 붕정검법만 완전히 익혀도 무림을 독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자신의 아버지의 무공에 감탄하던 강유는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관도까지 배웅해주시겠다더니 어째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강유는 점점 더 험해지는 주변의 산세를 곁눈질하며 의아해했다.

백여 리를 달려왔음에도 관도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익!

강유가 의아해할 때 강조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도 거친 숨을 고르며 강조의 뒤로 내려섰다.

두 부자가 멈춰선 곳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바위 봉우리 위였다.

강조와 강유가 달려온 쪽만이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봉우리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가 몇 그루 서있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인데...)

강조를 따라 봉우리 위로 올라선 강유는 자신이 낮선 곳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안탕산은 워낙 넓어 북()안탕산, ()안탕산, ()안탕산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철이 들 때부터 안탕산에서 살아온 강유도 못 가본 곳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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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절지(絶地)의 수인(囚人)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허튼 수작이시오 교주.”

잠시 동요하는 것같던 제갈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영(娥英)이를 내세워 협박 해봤자 통하지 않소. 혈왕아(血王牙)를 내놓는다 해도 아내와 아영이가 무사할 리 없는데 미쳤다고 교주에게 굴복하겠소?”

귀면지존이 오랜 세월 제갈륜을 이곳에 가둬두고 고문을 해온 목적은 혈왕아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역시 만만치 않군.)

제갈륜의 냉소를 들은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라. 본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네 딸의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뿐이다.”

그러시다니 눈물 나게 고맙구려. 물론 눈알이 뽑힌 이런 몰골이라 눈물을 흘릴 수도 없지만...”

귀면지존의 회유를 제갈륜은 냉소로 받아넘겼다.

네 딸 아영이도 어느덧 열일곱 살이 되어간다. 막 피어나려는 꽃 봉우리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나이지.”

귀면지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딸이 다시 거론되자 제갈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한때 천하오대미인(天下五大美人)중 한명으로 불렸던 어미의 미모를 물려받아 아영이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녀로 자랐다.”

어디 밭만 좋다 뿐이오? 그 밭에 뿌려진 씨도 절세미남의 것이니 예쁠 수밖에...”

귀면지존의 수작에 제갈륜은 냉소로 응대했다.

네가 별호에 옥룡(玉龍)이 들어갈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던 것도 사실이지.”

귀면지존은 느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두 달 후면 아영이도 열일곱 살이 된다. 여자로서 절정의 시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요?”

제갈륜은 눈알이 뽑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귀면지존을 노려보았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귀면지존은 음험하게 웃었다.

부르르! 끼이!

제갈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어 쇠사슬로 하여금 쇳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아영이는 너무 어리고 애처로워서 두고 보기만 했으나... 열일곱 살을 넘기면 어엿한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귀면지존은 귀신 가면 속에서 야비하게 웃었다.

제갈륜은 그자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암시하는지 모를 리 없다.

헌데 제갈륜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흐흐흐! 제발 그러시구려.”

뭐라?”

제갈륜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귀면지존의 눈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복수할 능력이 없고, 또 당금의 하늘아래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죗값을 치르게 해줄 수 있는 인간도 거의 없을 것이오.”

제갈륜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늘이 인간들을 대신해 당신에게 벌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중인데... 당신이 아영이까지 욕보이면 그 죄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질 터! 당연히 하늘이 벌을 내리는 때도 가까워지지 않겠소?”

제갈륜의 어조가 점점 더 열기를 띠며 고조되어갔다.

반면 귀면지존의 눈빛은 차갑게 갈아 앉았다.

아영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소. 난 그저 내가 살아있을 때 당신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오. 크크크!”

끼이! 끼이!

제갈륜은 자신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흔들며 웃었다.

닥쳐라!”

!

그 직후 귀면지존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제갈륜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치치치!

제갈륜의 복부에서 살이 타는 역한 냄새와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제갈륜의 뱃속으로 깊이 파고 든 귀면지존의 손가락들이 화로에서 꺼낸 부젓가락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모든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제갈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떠냐? 창자가 익어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치치치!

귀면지존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제갈륜의 뱃속에 찔러 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잔인하게 웃었다.

... 고맙소 교주. 무료해서 지옥같던 참에 이런 여흥을 마련해주어서...”

제갈륜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여흥?”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교주도 한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혼자 갇혀있어 보시오. 그럼... 무료함이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제갈륜의 그 말에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교주가 자극을 해주니 내 몸뚱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구려.” “고맙고 고맙소이다.”

제갈륜은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껄껄 웃었다.

개소리는 적당히 해라.”

!

귀면지존은 제갈륜의 복부에서 거칠게 손가락을 뽑아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만... 다음번에는 좀 더 흥미진진한 여흥을 준비해서 찾아오겠다.”

배에 난 구멍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제갈륜을 노려보며 귀면지존은 이를 갈았다.

사랑하는 딸년이 눈앞에서 유린당하고 찢겨죽는 데도 지금처럼 태연한 척, 대범한 척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귀면지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자의 모습은 곧 먹물을 뿌려놓은 듯한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허억! 또 한 번... 또 한 번 고비를 넘겼구나.”

귀면지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갈륜은 참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날 찾아와다오 아이야.”

내장이 익어버린 듯한 고통에 떨면서 제갈륜은 이각(二刻; 30) 전쯤에 보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제갈륜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념(思念)을 수용해줄 대상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깊은 산중이라 인적이 드문데다가 간혹 그의 사념을 감지했던 인간들은 놀라 까무라치는 바람에 생각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마침내 제갈륜은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가 있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한()을 남기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

끼이! 끼이!

원한에 사무친 제갈륜이 몸을 떠는 대로 쇠사슬들이 부딪히며 대신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 * *

 

강유의 아버지 강조의 별호는 소요신군(逍遙神君)이다.

보법과 검법으로 명성을 날린 그는 무림칠절의 일인으로 꼽힌다.

 

당금의 무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신주이십팔숙(神州二十八宿)이란 인물들이다.

신주이십팔숙은 다시 일제(一帝), 이비(二秘), 삼기(三奇), 사신(四神),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로 구분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중 칠절에 속한다.

가전의 절기인 소요보법(逍遙步法)과 삼십육식 붕정검법(鵬程劍法)을 구사하는 강조는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덕분에 그는 젊은 나이에 소요신군이라는 비범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강조는 삼십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해버렸다.

사랑하는 아내 냉상영이 은원이 끊이지 않는 강호에서의 삶을 혐오한 탓도 있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제왕성(帝王城)!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을 지배해온 최대 최강의 세력이다.

강조는 바로 그 제왕성과 갈등을 빚었었다.

갈등의 원인은 무림인들을 대하는 제왕성의 폭압적인 처사였다.

제왕성은 자신들에게 맞서거나 반대하는 세력, 인간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제왕성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멸문을 당한 문파나 가문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강조는 몇 번인가 제왕성과 충돌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강조 혼자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세력 제왕성과 맞서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결국 강조는 아내의 애원도 있고 해서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무림을 떠난 강조는 절강성(浙江省)의 명산인 안탕산(雁蕩山)의 깊은 곳에 소요유거(逍遙幽居)라는 띠집을 짓고 유유자적해왔다.

 

* * *

 

해가 제법 높이 솟았다.

소요유거의 마당에서는 강유와 타복이 대련을 하고 있다.

목검(木劒)과 목도(木刀)를 써서 대련하는 두 사람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소요유거를 이루고 있는 세 채의 건물 중 가장 큰 모옥 앞에는 일남일녀가 의자에 앉아서 강유와 타복의 대련을 보고 있다.

강조와 냉상영 부부다.

냉상영에게서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는 타복의 딸 분이가 서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작은 주인의 대련을 보고 있는 분이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하나 들고 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타복이 일방적으로 강유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빗발치듯 날아드는 타복의 목도를 강유는 보법을 펼쳐 피하고 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한가로워 보이는 그 보법이 강씨 집안의 비전절기인 소요보법이다.

스악! !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타복의 목도가 움직일 때마다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일어난다.

타복은 곱사등이임에도 키가 육척에 이른다.

만일 등이 곧게 펴져있다면 칠척을 훌쩍 넘는 장신일 것이다.

타복의 몸은 불구답지 않게 건장하며 특히 양팔은 굵고 길다.

그 강인하고 긴 팔을 써서 휘둘러지는 타복의 목도는 진짜 칼에 못지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 조심하세요 도련님!)

물통에 달린 굵은 끈을 움켜쥔 분이의 양 손 손등에 핏줄이 생긴다.

종횡으로 긋고 찌르고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급소를 노리며 들이닥치는 타복의 목도는 무공을 모르는 분이가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요보법으로 피하고 있지만 강유의 얼굴도 어느덧 땀으로 흠씬 젖어들고 있다.

몇 번인가는 타복의 목도가 강유의 몸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뻔했다.

(아버지도 좀 적당히 하시지...)

그걸 보며 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전인 듯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강유를 공격하는 타복이 못내 미운 분이였다.

부인이 보기에 유의 보법이 어떤 것같소?”

강조는 타복과 대련하는 강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일초무학(一招無學)인 제게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냉상영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냉상영은 정이 그리 많은 성격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 강유에게조차 엄한 것을 넘어 매몰차게 대할 때가 많은 냉상영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냉상영은 종의 딸인 분이는 살갑게 대해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강유가 아니라 분이를 냉상영의 자식으로 여길 정도다.

그래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워 보이는군요. 억지로 꾸며서 보법을 펼치는 것같지는 않고...”

남편의 질문에 너무 성의 없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냉상영이 마지못해 평을 추가했다.

잘 보셨소. 우리 강씨가문의 절기인 소요보법은 소요(逍遙;여유롭게 거님)라는 이름 그대로 자연스러움이 생명이오.”

강조는 타복의 격렬한 공격을 여유있게 피하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무림의 오대보법(五大步法)중 하나이기도 한 소요보법을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가 있소. , 소요보법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유를 무림에 내보내도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오.”

“...”

남편의 말에도 냉상영은 미간을 조금 모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 스슥!

그 즉시 강유와 타복은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소요보법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붕정검법으로 타복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상대해봐라.”

!”

아버지의 말에 강유는 목검을 든 채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먹물을 준비해라.”

강조가 아내 옆쪽에 서있는 분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주인님.”

분이는 즉시 대답하며 강유와 타복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만든 물통을 두 손으로 든 채...

여기 있어요.”

분이가 강유와 타복에게 내미는 물통에는 먹물이 절반 정도 들어있다.

수고한다.”

첨벙!

강유는 목검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며 분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별 말씀을요.”

강유의 미소를 접한 분이의 얼굴이 와락 달아올랐다.

그걸 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강조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지만 냉상영의 미간은 찡그려졌다.

타복도 미간을 조금 모으며 목도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었다.

다시 꺼낸 타복의 목도는 끝 쪽이 한 뼘 정도로 검게 물들었다.

강유도 분이가 들고 있는 물통에서 목검을 뽑았는데 역시 앞쪽의 한 뼘 정도가 검게 변해있었다.

분이 넌 방해되지 않게 멀리 물러나 있어라.”

후두둑!

타복은 목도를 털어서 너무 많이 묻은 먹물을 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

분이가 대답하며 물러서는 사이에 강유도 목검을 흔들어 먹물을 털어내었다.

준비를 마친 강유와 타복은 일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대치했다.

강유는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양팔을 거의 수평으로 벌려 새가 날개를 편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타복은 목도를 상단으로 겨누며 강유와 마주 섰다.

그럼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복.”

양팔을 펼친 강유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몸짓으로 타복에게 다가섰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노복(奴僕)도 전력을 기울일 테니...”

타복도 상단으로 겨눈 목도를 강유에게 겨눈 채 흔들며 마주 다가섰다.

쩍적! !

다음 순간 타복은 호랑이가 앞발로 사냥감을 내려치듯 격렬하게 목도를 내리그었다.

방향과 각도를 각기 달리하며 순간적으로 십여 차례 그어지는 타복의 칼질은 상대가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타복의 독문절기인 오호단문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섯 호랑이가 모든 문을 막아선다는 이름에 어울리는 맹렬한 도법이다.

하지만 강유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스악!

오히려 그는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검을 찌르고 걷어 올렸다.

경쾌한 보법과 함께 펼쳐지는 강유의 검법은 마치 독수리가 날고뛰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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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한 방문객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 것으로 생각했다.

새벽이 멀지 않은 깊은 밤중, 강유(姜諭)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있었다.

츠으...

칠흑같이 어두운 천장 귀퉁이에 한 쌍의 푸른빛이 떠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눈...)

강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푸른빛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슈욱!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때 한 쌍의 푸른빛은 천장 귀퉁이를 떠나 강유에게 내려왔다.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은 그것들 뒤로 두 가닥의 푸른 띠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 정말 사람의 눈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한 쌍의 푸른빛을 올려다보며 강유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뒤쪽으로 투명한 끈이 이어진 한 쌍의 눈은 강유의 얼굴 바로 위에 이르러 눈동자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유를 살펴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욱!

이윽고 탐색을 마친 한 쌍의 눈이 강유의 두 눈을 향해 내려왔다.

으아아악!”

푸른빛을 띤 그것들이 자신의 동공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강유는 비명을 질렀다.

 

* * *

 

“...!”

강조(姜祚)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들 강유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벌떡 일어나는 강조 옆에서 아내 냉상영(冷霜英)도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한다.

염몽(厭夢;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오. 내가 가서 살펴볼 테니 당신은 더 자도록 하시오.”

강조는 아내를 안심시키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드디어 나 제갈륜(諸葛崙)과 영혼의 파장이 일치하는 인간을 찾아내었다.>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제갈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강유는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 쌍의 눈이 동공으로 스며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부젓가락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끄윽! !”

입에서는 죽어가는 짐승의 그것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온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펄떡거린다.

푸르면서 투명한 끈 같은 것들이 강유의 눈에서 빠져나와 천장 귀퉁이와 이어져 있었다.

 

* * *

 

강조는 옷을 대충 걸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새벽이 멀지 않았지만 아직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품()자형으로 서있는 세 채의 모옥(茅屋) 중 왼쪽 모옥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강조의 시야에 들어왔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등이 곱사등이인 인물이다.

타복(駝僕)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곱사등이는 강조의 하인이다.

타복 역시 강유가 지른 비명을 듣고 잠이 깬 듯 했다.

주인님...”

타복은 허리띠를 매며 다가오는 강조에게 고개를 숙였다.

늘 하던 잠꼬대인가?”

강조는 아들의 침실 문을 보며 타복에게 물었다.

강유의 나이는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요란하게 성장몽(成長夢)을 꾸곤 한다.

그렇다 생각했는데... 오늘 밤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타복도 강유의 침실 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강조는 눈을 조금 치뜨며 강유의 침실 문으로 다가갔다.

 

* * *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덕분에 천의(天意)가 존재함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천의 운운 하는 것이 강유에게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끄윽... ...”

하지만 강유는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눈알이 후벼 파이는 것같아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이제 너를 만났으니 나의 오랜 한도 풀릴 수가...>

 

유야!”

강유의 머릿속을 울리던 속삭임은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강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몇 달 간 출타했다가 이틀 전에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다.

 

<방해꾼이 끼어들었군.>

 

무슨 일이냐? 괜찮은 것이냐?”

머릿속의 속삭임과 강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 아버지! 그게...”

강유가 꽉 막혀 있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히며 말하려 할 때였다.

 

<명심해라. 네가 나와 접촉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

 

슈우...

속삭임과 함께 강유의 동공으로 스며들었던 한 쌍의 푸른 눈이 빠져나갔다.

!

단단하게 막혀있던 병마개가 뽑히는 듯한 소리가 강유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끄윽!”

한 쌍의 푸른 눈이 동공을 통해 빠져나가는 충격에 퍼덕이는 강유의 귀로 속삭임이 이어졌다.

 

<동북방(東北方) 오십여 리쯤에 깊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라.>

 

스으!

그 속삭임을 끝으로 한 쌍의 푸른 눈은 다시 천장 귀퉁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동북방 오십여 리쯤의 계곡...)

강유가 푸른 눈동자의 속삭임을 되새길 때였다.

들어가겠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강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아버지!”

강유는 나무토막같이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열린 문을 통해서 마당에 타복이 서있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방으로 들어온 강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 아들에게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유는 푸른 눈동자가 한 말을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으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 온전히 속일 수는 없다.)

강유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가위눌림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저곳에서 사람의 눈 같은 것이 나타났었습니다.”

강유는 천장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의 눈 같은 것?”

강조의 시선이 아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데...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한동안 소자를 살펴보다가 사라졌습니다.”

특기할만한 다른 현상은 없었고?”

강조는 천장 귀퉁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눈 모양의 그 빛들이 말까지 건넸다는 얘긴 할 필요 없겠지.)

강유는 아버지를 속인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

공자께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하셨다. 아마 염몽을 꾼 영향으로 헛것을 본 듯하니 잊어버리도록 해라.”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본 강조는 문쪽으로 돌아섰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도록 해라.”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여전히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선 강유는 방을 나서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

!

강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주었다.

(아버지가 눈치채실까봐 조마조마했다.)

다시 혼자가 된 강유는 가슴 쓸어내렸다.

(하지만 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괴상한 눈이 동북방 오십여 리쯤에 있는 계곡으로 찾아오라고 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털썩!

강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왠지 말씀드리면 안될 것같은 느낌이 든 때문인데... 나중에라도 자백하면 용서해주시겠지.)

눈을 감은 강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꿈의 일부인 듯 느껴지는 강유였다.

 

* * *

 

도련님은 괜찮으신지요?”

아들 방의 문을 닫아주는 강조의 안색을 살피며 타복이 물었다.

다 큰 놈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위에 눌린 모양이네.”

몸은 제법 자랐지만 아직 어른이라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험한 꿈을 꿨으면 놀랐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타복은 작은 주인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긴 하네만... 저 녀석이 염몽을 꾼 원인이 주변에 삿된 것이 있어서일 수도 있네. 잠이 깬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 자네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게.”

타복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강조는 계곡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다녀오십시오.”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겠네.”

휘익!

강조는 타복의 배웅을 받으며 몸을 날렸다.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던 강조는 바람처럼 계곡 밖으로 날아갔다.

타복이 주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덜컹!

세 채의 모옥 중 오른쪽 모옥의 문이 열리며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한밤중인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밖으로 나온 것은 열여섯, 일곱 살쯤 된 소녀였다.

잠옷 위에 겉옷 대신 담요를 두른 유순한 인상의 이 소녀는 타복의 딸이다.

이름이 분이인 타복의 딸은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잃어 주인마님인 냉상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사연도 있어서 비록 주종지간이지만 강유와 분이는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분이 너야말로 왜 이 밤중에 깨어났느냐?”

타복은 딸이 나온 모옥으로 다가갔다.

제가 잠귀 밝은 거 아시잖아요. 밖에서 두런두런 거리는데 잘 수가 있어야죠.”

분이는 쫑알거리며 담요의 앞자락을 끌어 모았다.

도련님이 가위에 눌리셨던 모양이다. 다시 잠자리에 드신 것같으니 그만 들어가자.”

타복은 딸이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도 참, 나이가 몇인데 가위에 눌리신담.”

분이도 강유의 침실 쪽을 향해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남 말하지 마라. 가끔 자지러지는 잠꼬대를 해서 아비를 놀라게 하는 주제에...”

저야 아직 한창 자라는 나이니까 그렇죠 뭐.”

타복의 타박에 분이는 샐쭉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처럼 내가 같이 자 주면 도련님이 가위에 눌릴 때마다 돌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방문을 닫으며 곁눈질로 강유의 침실 쪽 보는 분이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유와 분이는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잤었다.

하지만 강유의 목젖이 도드라지면서 어른들은 둘이 함께 자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어쩔 수 없이 내외를 하게 되었지만 분이의 꿈은 언제까지라도 강유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천한 종년 주제에 언감생심이지만...)

문을 닫는 분이의 입에서 아비 몰래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새벽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어둠은 전부 걷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한낮에도 햇빛이 닿지 못하는 깊고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다.

마치 저승으로 내려가는 입구인 듯한 계곡 끝에는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끼이! 끼이!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의 막다른 곳에 한명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다.

부러진 팔 다리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잃었고 눈알이 뽑혀 퀭한, 눈이 있던 자리에서는 누런 고름이 흘러나온다.

오랜 세월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온 사내의 육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이만도 못하다.

하지만 목숨은 실로 질긴 것이어서 사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쌔액! 쌔액!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사내의 쇠약해진 가슴이 숨을 쉬기 위해 힘겹게 기복을 일으킨다.

끼이! 끼이!

그때마다 사내의 몸을 벽에 매달고 있는 쇠사슬이 조금씩 움직이며 쇳소리를 낸다.

이런 이런...”

문득 힘없이 떨구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조금 들려지며 입이었던 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를 고문해온 자는 그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 혀는 자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는 손가락과 발가락, 심지어 양물까지 잘려나간 몸으로도 말은 할 수 있다.

존귀하신 마교(魔敎)의 교주(敎主)께서 오랜만에 친히 발걸음을 해주셨소이다 그려.”

사내는 눈알이 뽑혀서 시커먼 구멍이 된 눈으로 앞을 보며 웃었다.

“...!”

사내의 앞쪽 어둠 속에 누군가 서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마귀 형상의 가면을 얼굴에 쓴 인물이다.

제갈륜(諸葛崙)... 너 요즘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어둠과 동화되어 서있던 마귀 가면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번뜩였다.

꿍꿍이라...”

제갈륜이라 불린 사내는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시오 귀면지존(鬼面至尊) 나으리! 십수 년 째 죽은 것보다도 못한 몰골로 갇혀있는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무림칠절(武林七絶)중 한명이며 천고기재라 불리던 신안옥룡(神眼玉龍)께서 찍소리 한번 못 내보고 인생을 마감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귀면지존이란 자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 무공이 아닌 술법(術法)을 쓴다든지...”

귀면지존의 눈이 마귀 가면 속에서 번득였다.

날 떠보려고 해도 소용없소이다 교주.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제갈륜은 비웃음으로 귀면지존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 치고... 제법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족 소식을 전해주지.”

귀면지존은 화제를 바꿨다.

움찔!

그러자 제갈륜의 얼굴에 경련이 스치면서 웃음기도 사라졌다.

늙어가는 마누라야 관심 없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 대해서는 독심장부인 너라 해도 완전히 무심할 수만은 없겠지?”

귀면지존이 쓰고 있는 가면 속에서 악의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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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묵장(達磨墨掌)

 

 

 

 

서장

 

 

 

 

달마(達磨)는 시기하는 자들에게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혔다.

삼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를 만났다.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있던 달마는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달마혜(達磨鞋)의 전설이다.

하지만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 검은색 팔 하나가 신발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검은색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그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달마의 관에 가죽신 한 짝만이 남아있었다고 알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가 남긴 검은색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가 남긴 정체 모를 팔 하나가 수백 년의 세월동안 강호 무림을 뒤흔들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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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혀()와 검()의 합작

 

 

끼끼끼!

어디선가 미미한 금속성이 들렸다.

츠으으! 스스스!

그러자 아름드리 물푸레나무와 수양버들이 주변을 가리고 있는 연못이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녁 짓는 연기처럼 피어오른 그 안개는 삽시에 연못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그긍! 촤아아!

뒤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연못 속에서 석탑(石塔) 하나가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보천검문 후원에 자리한 고룡지(古龍池)라는 이름의 이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다.

고룡지는 보천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항간에는 오래 된 용이 산다고 전해진다.

그 고룡지의 수면 위로 치솟은 석탑은 나선형으로 뒤틀려 있어서 산양의 뿔을 연상케 한다.

높이 오장(五丈;15미터) 정도인 석탑은 아래위로 분리된 두 개의 큰 바위를 겹쳐서 만든 것이었다.

그그긍!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석탑의 윗부분이 맷돌처럼 한 바퀴 돌아갔다.

그러자 석탑의 아래 부분에 건장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휘익!

연못가에 서있던 보천검객 양시우가 먼저 몸을 날렸다.

스윽!

장광유설 주대곤도 발끝으로 땅을 찍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경신술의 달인이라는 무림의 평판대로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주대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시우의 등에 닿을 듯 말듯 바짝 따라붙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끼끼끼!

주대곤의 뒤쪽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동굴 입구가 사라져 버렸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동굴 안은 먹물 속인 듯 깜깜하여 눈앞에 댄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렵지 않은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양시우가 교묘하게 손을 놀려 주대곤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손목에 자리한 맥문은 주요한 사혈(死穴)중 하나다. 약하게 누르면 사지가 마비되는 정도지만 강하게 누르면 명줄이 끊어진다.

맥문을 잡힌 순간 주대곤은 흠칫했으나 이내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입만 조심하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이다.”

완전히 밀폐된 이곳에서는 빠른 발도 소용없다.

마음만 먹으면 양시우가 주대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다.

그러나 주대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양시우도 그를 죽여 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다.

주대곤이야말로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

슬그머니 주대곤의 맥문을 놓아준 양시우가 화섭자로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지자 드러난 것은 넓이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정방형의 작은 석실이었다.

한데 석실 벽에는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검무(劒舞)를 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선이 굵고 거칠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사면에 각기 하나씩 그려져서 네 가지의 모습으로 검무를 추는 사람은 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간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검술의 비결(秘訣)이다!)

검술을 익힌 바는 없지만 주대곤은 석벽의 그림들이 세상에 보기 드문 절세적인 검법의 이치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대곤은 자신도 모르게 힐끗 양시우를 쳐다보았다.

양시우는 주대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 그림들은 내 보천검법(補天劒法)의 모체가 되는 것일세. 노부는 수십 년을 연구하고도 겨우 십육 식의 보천검법을 만들어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가 보고 알 수 있을 것같으면 보아도 무방하네.”

너 따위는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에 숨은 깊은 뜻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대곤은 등골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양시우가 자신의 무공의 연원이 되는 곳으로 데려와 검법의 도해(圖解)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양시우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인 일왕일협삼괴칠절(一王一俠三怪七絶)에는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십사 세의 젊은 나이에 보천검문을 세웠을 뿐 아니라, 보천검법이라는 검법을 창안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양시우의 무공이 일왕(一王), 일협(一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삼괴(三怪), 칠절(七絶)과 비교하면 그리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주대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비밀이 양시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양시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한다면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주대곤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목숨을 판돈으로 놓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세.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타협을 해보도록 하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하는 양시우의 말에 주대곤은 웃으며 대답했다.

문주께 이런 대범한 면이 있으시기에 소생이 굳이 삼괴도 칠절도 아닌 문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노부가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이야기하게.”

양시우가 귀찮다는 듯이 주대곤의 말을 딱 잘랐다.

주대곤도 양시우와 마주 앉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문주께선 북두문(北斗門)이란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금시초문이네.”

양시우는 자신의 견문이 짧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이곳 고룡지에서 기연을 만나 수련에 매진해왔다.

보천검법을 창안하고 수련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무림에 대한 양시우의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대곤이 거론한 북두문은 무림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전설 속의 문파다.

양시우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생은 어렸을 때 은사(恩師)로부터 북두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중 대충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주대곤은 자신을 가르쳤던 사부 은일우사(隱逸羽士)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대곤의 사부 은일우사는 무림에서 명망이 드높은 현자(賢者)였다.

주대곤이 거친 무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부인 은일우사의 음덕 덕분인지도 모른다.

은일우사는 주대곤이 팔구 세 정도 되었을 때 북두문이라는 문파와 관련된 고사를 이야기 해주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황제(皇帝)의 신분을 버리고 서장(西藏)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가서 승려가 된 인물이 있었다.

 

-석경당(石敬瑭)!

 

오대십국(五代十國)중 후진(後晉)의 시조인 석경당이 바로 그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재위 칠년 만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결심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의 아들, 즉 조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달랍궁을 찾아가 출가했던 것이다.

그후 이십여 년 동안 석경당은 포달랍궁의 진산절예를 모두 익힌 후 중원으로 돌아왔다.

헌데 그는 중원으로 오기 전에 포달랍궁의 당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들이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을까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석경당이 다시 중원 땅을 밟았을 때, 포달랍궁에는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으로 돌아온 석경당은 황제였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승(魔僧)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리고는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열 두 개의 비밀문파와 열 네 개의 명문대파를 방문하여 모두 굴복시켰다.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 아니 마승 석경당이 벌인 그 일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삼십육 개의 문파들이 겪은 수모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네.”

양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승 석경당이 일으켰던 풍파는 워낙 유명해서 견문이 얕은 양시우도 알고 있었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숭산(崇山)에 모여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고 문파의 보전을 빌어야만 했다지?”

그렇소이다. 마승 석경당은 숭산에 무림성궁(武林聖宮)을 짓고 무림황제(武林皇帝)가 되고자 했었소이다. 한데...”

주대곤의 말이 이어졌다.

 

삼십육문파 수뇌들의 무릎을 꿇려 기고만장하던 마승 석경당은 그 직후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었다.

양시우가 알고 있는 고사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림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 후의 내막은 이러했다.

마승 석경당이 무림황제로 등극하려는 현장에 그때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한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신비노인은 단 일장(一掌)에 마승 석경당을 쓰러트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마승 석경당은 그대로 달아나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그 신비노인에게 북두호천패(北斗護天牌), <북두칠성이 하늘의 도리를 지켰다.>라는 뜻을 지닌 영패를 만들어 바치면서 한 가지 서약을 했소이다.”

주대곤은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양시우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북두호천패를 지닌 사람에게는 한 해에 단 한 번,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비록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파가 멸문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

양시우는 극도의 놀라움과 흥분으로 침묵했다.

강호 무림의 기둥인 삼십육문파에 대해 일 년에 단 한 차례일망정 생사여탈(生死與奪)과도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북두호천패...!

그것을 지닌다는 게 무림의 지존(至尊)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본 적도 없는 북두호천패가 양시우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승 석경당을 물리치고 북두호천패를 얻었던 노인은 북두문이라는 문파의 당시 문주였던 북두노조(北斗老祖)였소이다.”

주대곤은 양시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 무림에서 일왕(一王)으로 불리는 금포염왕 조천영은 바로 그 북두문의 당대문주이외다.”

“...!”

양시우는 가슴을 둔기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금포염왕이란 그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온 순간 양시우의 몸은 마치 돌처럼 굳어져 버리는 듯했다.

 

금포염왕...!

수십 년 간 무림을 굴러다니면서도 애써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그와 부딪힐 만한 언행 하나조차 감히 범하지 못했던 양시우다.

자신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이나 무림삼괴(武林三怪)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다가도 금포염왕에 생각이 이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금포염왕의 일초를 받아낸 인물이 있었던가?

금포염왕의 손아래에서 목숨을 건진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과 맞섰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이란 말에는 절대(絶對)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한 것이 아니던가?

그 금포염왕이 바로 북두문의 당대 문주였던 것이다. 무림황제를 꿈꿨던 마승 석경당을 단장(單掌)으로 물리친 북두노조의 후손인...

양시우는 금포염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더욱 더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일곱 층으로 쌓여있는 산, 바로 그 산에서 소생은 북두문의 표기를 발견했소이다. 북두문의 힘은 그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주대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양시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 삼십육문파 중 어느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당시의 비사를 그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양시우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발했다.

스승으로부터 들었다지만 그것만으로 자네 말을 믿기가 어렵네. 자네는 원래 입으로 사는 사람이니...”

주대곤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생의 은사이셨던 은일우사께서는 삼십육문파 중 문선곡(文仙谷)의 곡주였소이다.”

그랬군. 자네의 경신술이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생각했었지.”

양시우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문선곡이라면 지금은 그 명맥(命脈)조차 흐릿해져 버렸지만 기관진식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예의 달인들만이 살고 있던 특이한 문파였다.

양시우가 주대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손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굳게 잡혔다.

()와 검(), 지혜와 힘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일기 시작한 풍운의 서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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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옷을 입은 염라대왕

 

 

-금포염왕(錦袍閻王) 조천영(趙天永)!

 

무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錦袍)을 즐겨 입어 금포염왕이라 불리는 그의 시대는 어느덧 이십 년을 넘겼다.

금포염왕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맞설 상대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고수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목숨을 부지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비록 마도(魔道)에 속하진 않지만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는 인물이 금포염왕인 것이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이라는 별호에 걸 맞는 금포염왕의 폭압(暴壓) 아래 무림은 숨죽인 평화를 이어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힘을 기르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금포염왕의 시대를 끝내고 자신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야망에 찬 인물들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첩첩산중(疊疊山中)이 아니라 층층산상(層層山上)이라니...!”

산을 넘고 또 넘어가야 한다면 첩첩산중이겠지요. 하지만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면 층층산상이라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르다 했는가? 말인즉 맞는 말이네만... 그런 산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가?”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는 보천검객(補天劒客) 양시우(楊翅祐)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매만졌다.

양시우 앞에 공수(拱手)한 채 서있는 문사차림의 깡마른 중년인은 긴장으로 입이 마르는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른 후 힘주어 말했다.

소생이 직접 확인한 사실이외다.”

듣고 있던 양시우는 고개를 설래 저었다.

산이 무슨 시루떡도 아닐 터, 켜켜이 쌓인 산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자네 말은 믿을 수가 없군.”

양시우의 말에 중년문사의 표정이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믿으십시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 산은 존재하외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그 위치까지 말할 수 있소이다.”

중년문사는 초조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양시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문사를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양시우의 보천검문(補天劒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한다.

양시우가 태사의에 앉으면서 팔걸이 끝에 설치된 손잡이를 살짝 돌렸던 그 순간부터 보천검문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되어있는 것이다.

양시우 앞에 서있는 삐쩍 마른 중년문사는 입으로 빌어먹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장광유설(長廣溜舌) 주대곤(朱岱崑)이란 인물이었다.

주대곤은 비록 무공은 별 볼 일 없으나,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달변과 재빠른 발,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빠른 눈치로 살아가는 자였다.

(장광유설 주대곤! 무림을 통틀어도 네놈보다 입심이 센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겁먹은 듯한 그 표정마저도 네 공력(功力)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네놈의 치명적인 실수다.)

양시우는 염두를 굴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층층 뭔가 하는 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 없네. 노부는 한가롭게 같잖은 이야기나 들어줄 처지가 못 되니 그만 가보시게.”

노골적인 축객령(逐客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대곤은 양시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관심 없으시오?”

(이 작자가...)

양시우의 눈으로 얼핏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우는 속에서 불끈 치솟는 살의를 꾹 눌러 참았다.

주선생 나가신다. 정중히 모셔라.”

양시우는 주대곤이 강호의 소문과는 달리 당돌한 데가 있는 놈이라 생각하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어 큰 걸음으로 대전의 문쪽으로 걸어가며 양시우는 희미한 냉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무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본래 입만 살아있는 놈들이야 가둬놓고 족치면 금방 다 불게 마련이지.)

양시우는 주대곤의 말투와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어떤 것을 알고 있음을 느꼈었다.

기름칠한 미꾸라지같은 주대곤을 요리하자면 먼저 김이 좀 빠지게 한 후 잡아 가둬야한다.

주대곤이 다른 재주는 없어도 경신술 하나는 무림에서 일류 가는 인물이니 경솔히 다루면 놓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양시우가 대전을 나가려 하자 주대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의 뒷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양시우가 막 대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될 기회도 마다하는군.”

주대곤의 냉랭한 음성이 양시우의 귓전을 때렸다.

순간 양시우는 벼락에 맞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천하제일!

 

()을 공부하는 자는 삼십 년을 배워도 글을 안다고 자부하지 못하지만 무()를 배운 자치고 삼 년이면 천하제일이 아닌 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무예를 배운 자는 하나같이 천하제일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가 있어 감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자부할 수 있단 말인가?

당금의 무림에는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까지 불리는 금포염왕이 존재하는데...

넘을 수 없는 벽!

극복할 수 없는 좌절!

무림인들에게 금포염왕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천하제일인은 여전히 모든 무림인들의 소망이며 궁극의 목표라 할 수 있다.

물론 보천검객 양시우도 예외는 아니다.

주대곤이 내뱉은 <천하제일>이란 한마디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떨려오는 양시우였다.

양시우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주대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월에 찌든 눈동자 속에 피어오르는 야망마저 감출 수는 없다.

야망은 감추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숨어있었고, 숨어있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주대곤은 양시우의 웃자라버린 그 야망을 노리고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

“...!”

양시우와 주대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치열하게 부딪혔다.

주대곤도 더 이상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세객(說客)이 아니었다.

그 또한 야망을 깊숙이 감춘 불타는 눈을 가진 자였다.

이윽고 양시우가 뇌까리듯이 내뱉었다.

장소를 옮겨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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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금포염왕 -錦袍閻王

 

                                             제1

 

 

서장

 

 

 

 

!

부엌칼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뒤로 나뒹구는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임청우(林靑牛)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퍼억!

간발의 차이로 임청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부엌칼은 마당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 둥치에 깊이 박혔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임청우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퍼억!

또 한 자루의 부엌칼이 임청우가 처음 나뒹굴었던 바닥에 박혔다.

이번에도 반응이 조금만 늦었으면 큰 사단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달군 철판 위의 콩처럼 튀어 오르며 임청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리 닥쳐!”

어둑한 부엌에서 임단심(林丹心)이 악을 쓰며 뛰어나왔다.

병이 깊어 초췌한 얼굴에 산발까지 한 여자가 부엌칼을 들고 뛰쳐나오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면서도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었다.

(정말 날 죽이시려는구나.)

임청우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신을 모질게 대해오긴 했었다.

악담과 저주, 매질과 학대가 없었던 날은 임청우의 기억에 단 하루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한 손찌검은 당하지 않았었다.

헌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핏발 선 눈과 온몸에서 뿜어내는 독기는 임단심이 살의(殺意)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주받을 악귀의 새끼야! 너 같은 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해!”

임단심은 부엌칼을 휘두르며 임청우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임단심의 무공은 일류고수라는 말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반면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어가지만 임청우는 무공다운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어머니는 절기를 여러 가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들인 임청우에게는 단 한 가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일류고수인 임단심이 죽일 작정을 했다면 임청우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임청우는 체념하며 뒷걸음질을 멈췄다.

어머니가 죽이려든다면 죽어드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은 임청우가 죽을 날이 아니었던 듯 했다.

!”

콰당탕!

아들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임단심이 왈칵 피를 토하며 나뒹군 때문이다.

임단심은 아주 오래 전, 원수의 독수에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 상처는 뿌리가 깊고 악독하여 어떤 영약으로도 완치되지 않았다.

헌데 겨우 다스려놨던 그 상처가 격한 감정의 폭발로 인해 도져버렸던 것이다.

끄윽! !”

부엌 앞의 마당에 나뒹군 임단심은 손으로 흙바닥을 긁으며 연신 피를 게워냈다.

어머니...”

임청우는 급히 임단심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임청우는 몇 발 떼지 못하고 몸이 굳어졌다.

피를 게워내면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눈이 새파란 살기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진정하시고 몸을 돌보세요.”

꺼져라!”

걱정하는 임청우의 말을 임단심은 차갑게 끊었다.

더 이상... 단 한시도 네놈의 상판을 보고 싶지 않다.”

임단심은 억지로 일어나 앉으며 내뱉었다.

오늘 안으로 짐을 챙겨 떠나라. 만일 자정이 지나서도 내 눈에 뜨인다면...”

아들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얼굴에서는 추호의 모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내손으로 토막 쳐 버릴 것이다.”

어머니의 모진 말을 들으며 임청우는 가슴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자신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는 것을 절감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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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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