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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신비한 동굴

 

 

-대과벽(大戈壁)!

 

갑자기 이검한 앞에 나타난 장대한 단층지대는 서역 제일의 절경이라는 대과벽이었다.

무려 삼천여 리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절벽인 대과벽은 마치 거대한 용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하다.

그 거대한 대과벽이 지금은 저녁노을에 물들어 피를 칠한 듯 시뻘겋게 보였다.

“책에서 읽었던 대과벽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대과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검한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쏴아아아!

그 사이에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은 대과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 내려갔다.

이검한은 고개를 빼든 채 철익신응이 날아내려가는 아래 쪽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로 대과벽 중간쯤에 쩍 갈라진 틈바구니가 보였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틈바구니다.

(신응이 나를 데려온 목적지가 저기인 모양이다.)

쏴아아아!

이검한이 생각하는 사이에 철익신응은 대과벽 중간쯤에 나있는 삼각형의 틈바구니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갔다.

삼각형의 틈바구니는 어떤 동굴의 입구였는데 그 절묘한 위치 때문에 허공에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즉, 새를 타고 살펴보기 전에는 그 동굴의 존재를 결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 화악!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이 동굴 안쪽으로 날아 내렸다.

철익신응이 내려선 동굴 입구는 상당히 넓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여 장이나 되고 아래쪽의 폭은 그 이상이다.

“이곳에 내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휘릭!

이검한은 철익신응에게 물으며 그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나직하게 울며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놈의 눈가로 물기가 번지는 것이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저 안쪽에 철익신응과 관련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건가?)

눈시울을 붉히는 철익신응의 모습을 본 이검한은 흠칫했다.

그리고는 검미를 모으며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은 아주 깊고 어둑해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부리로 이검한의 등을 밀었다.

“알았어. 들어가 볼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뜻을 알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은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이검한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서린 울음소리를 토해내었다.

 

***

 

얼마나 걸어들어 갔을까?

“이런 곳에 사람이 만든 석문(石門)이 있다니...!”

이검한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백여 장 정도 들어온 이검한의 앞을 육중한 석문이 가로막아 섰다.

강철 못지않게 단단하다는 청강석(靑剛石)을 깎아 만든 그 석문 위에는 난해한 문양(紋樣)이 사람 머리통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마치 올챙이들이 이리저리 꼬물거리는 듯이 보이는 복잡한 문양이었다.

(과두문(蝌蚪文)이다!)

그 기괴한 문양을 살펴본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석문 위에 적혀있는 사람 머리 크기만한 문양은 한자(漢字) 이전 시대에 쓰였던 상형문자인 과두문이었다.

전모 냉약빙은 엄청난 거구 때문에 미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박학다식했다. 총명한데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런 냉약빙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이검한은 한자뿐만이 아니라 서역과 천축의 문자도 대충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냉약빙이 가르쳐준 다양한 문자들 중에는 한자의 원형인 전자(篆字)뿐 아니라 과두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음동천(玄陰洞天)>

 

이검한이 기억을 더듬어 해독한 과두문은 그런 뜻이었다.

그리고 현음동천이라는 글자들 아래로는 전자체의 글들이 몇 자 더 적혀 있었다. 크기가 주먹만한 그 글들은 현음동천이란 뜻의 과두문이 새겨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추가된 듯했다.

 

<이곳은 사천왕(四天王)의 영지다. 난입(亂入)하는 자에게는 구족지멸(九族之滅)의 신벌(神罰)이 있으리라!>

 

전자체로 새겨진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천왕? 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인물들은 없었던 것같은데...”

글을 읽은 이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검한이 아는 한 무림의 역사를 통해 사천왕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사천왕이라는 게 혹시 수미산의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는 무림과는 상관이 없는 불가(佛家)의 유적이고?”

이검한은 석문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험한 표현을 써가며 경고를 해놓은 걸 보면 들어가면 안되는 곳 같은데...)

허락 없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면 구족이 멸해지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년다운 호기심이 꺼림칙함을 눌러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갈 수는 없지.)

이검한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석문을 밀어보았다.

그그긍!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시, 시체!”

헌데 석문을 밀어 젖히며 안쪽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섰다. 이검한이 열고 들어간 석문 앞에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석문 안쪽은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 그리 어둡지 않은 복도였다.

그 복도에 석문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자세로 죽어 있는 시체가 한구 있다.

깡마른 몸에 검은 색의 옷을 걸친 그 시체의 왼손에는 칼날의 폭이 좁은 장도(長刀)가 한 자루 쥐어져 있다.

길이가 네 자 정도인 그 칼은 만들어진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뜩한 빛을 흘리고 있다. 아마도 금석(金石)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일 것이다.

“이...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곳에 죽어 있는 걸까?”

이검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시체로 다가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는 아직 어린 소년인 이검한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시체는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바짝 말라있다.

비록 목내이가 되긴 했어도 시체의 얼굴은 살아있었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냉혹하고 성말라 보이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반백이다. 시체의 주인은 죽을 당시에 이미 노년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이 석문에 쓰여 있던 사천왕중 한 명이 아닐까?)

평범해 보이지 않는 시체의 얼굴을 살펴본 이검한은 몸을 숙였다. 시체의 왼손이 쥐고 있는 칼을 빼내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우두둑! 퍼석!

헌데 이검한이 칼을 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시체는 바싹 마른 흙덩이처럼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헉!”

깜짝 놀란 이검한이 급히 허리를 펴면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푸스스!

방금 전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체는 고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으며 서역의 건조한 기후는 시체를 완전하게 건조시켜버렸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의 손이 닿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고인의 유해를 훼손하다니...!”

이검한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시체 주인의 명복을 빌어준 이검한은 자신의 손에 들려진 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도(魔刀) 파천(破天)

 

설화석고(雪花石膏)로 장식된 희고 매끄러운 칼의 손잡이에는 그같은 글이 음각(陰刻) 되어있다.

“하늘을 깨트리는 마귀의 칼? 섬뜩한 이름을 지닌 놈이다.”

손잡이에 새겨진 칼의 이름을 확인한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도 파천이라는 이 칼은 이름만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있자니 절로 불끈불끈 살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당장 무엇이든 베어보고 싶은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기를 부추기다니... 마물(魔物)이다!)

이검한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마도 파천을 버리진 못했다. 무언가 인연같은 것이 그 칼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은 무너져 내린 시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을 끌러내어 마도 파천을 집어넣었다. 시퍼런 한기를 뿜어내던 칼날이 칼집 안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들끓던 살기가 갈아 앉는다.

이검한은 칼집에 넣은 마도 파천을 허리에 찼다.

이어 그놈의 주인의 신원을 밝힐만한 단서가 없을까 해서 무너져 내린 시체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뒤져보았다. 그리고 곧 두 가지를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검한이 먼저 찾아낸 것은 얇은 책자 한 권이었다.

 

<파천도보(破天刀譜)>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의 표지에는 그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책의 표지 안쪽에는 내공심법 한 가지와 삼초로 이루어진 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폭혼낙백심결(爆魂落魄心訣)!

-파천삼식(破天三式)!

 

폭혼낙백심결-!

일신의 내공을 응축시켰다가 한순간에 토해내는 파격적인 내공심법이다. 폭혼과 낙백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일거에 폭발시켜 상대방의 혼백을 끊어버리는 위력을 지닌 것이다.

편협하고도 신랄한 이 폭혼낙백심결을 운용하면 자기보다 몇 배 더 심후한 내공을 지닌 고수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내공을 일거에 토해내는 탓에 그 뒤에는 완전히 탈진해버려 운신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단점이다. 폭혼낙백심결을 써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 자신이 적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이다.

 

파천삼식-!

단 삼초로 이루어진 이 도법에는 수비란 개념이 아예 없다. 오로지 적을 베어버리기 위한 공격적인 초식만으로 이루어진 도법이 파천삼심이었다.

 

“대... 대단하다! 폭혼낙백심결과 파천삼식이 실제로 구사된 무공이라면 이 시체의 주인은 고금을 통틀어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일 것이다!”

파천도보를 한차례 읽어본 이검한은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검한은 냉약빙으로부터 전궁만리비의 경신술 외에도 여러 가지 무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냉약빙이 가르쳐준 무공들 중 폭혼낙백심결이나 파천삼식만큼 신랄하고 패도적인 것은 없었다.

(폭혼낙백심결은 몰라도 파천삼식은 익혀볼 가치가 있다.)

파천도보를 품속에 넣은 이검한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파천도보에 이어 이검한이 발견한 두 번째 단서는 바닥에 새겨진 수십 자의 글이었다. 모래처럼 곱게 부서진 시체의 잔해 아래쪽에 판독하기 어려운 난잡한 글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도 파천의 주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인 듯했다.

 

<마... 마녀(魔女)! 모든 것이 그 계집... 누란(樓蘭)...의 짓...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그 계집에게 모든 양정(陽精)을 갈취당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 머지 않아 천년공력(千年功力)을 지닌 마녀가... 세상의 종말이...!>

 

이검한이 어렵게 판독한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양정을 갈취 당하다니... 무슨 뜻일까? 또 어떻게 인간이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검한은 앞뒤의 연결이 불분명한 바닥의 글을 읽으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 남녀 관계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소년인 이검한으로서는 여자가 남자의 양정을 갈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다.

(이 동굴 안쪽에서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바닥에 새겨진 글까지 읽어본 이검한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 마라! 천년마녀(千年魔女)가 깨어난다!>

 

마도 파천 주인의 혼령이 이검한의 발길을 저지하기 위해 울부짖는 듯했다.

하지만 이검한의 왕성한 호기심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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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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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3)

 

 

(바로 이것이었구나! 현장법사는 명산에 수장하는 심정으로 이 향로 안에 글을 새겨 두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절묘한 방법이다. 책이라면 손상될 수도 있겠지만 구리로 만든 향로라면 천년이 아니라 수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여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 향로는 향불을 피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재를 비우기 위해 들어올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임청우는 끔찍한 고통과 신열에 시달리면서도 오른손으로 향로의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톱보다 조금 큰, 즉 발톱만한 글자들이 향로 안쪽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임청우는 윗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더듬어 내리며 읽었다.

 

<노납 현장은 황상(皇上)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홀로 장안을 출발하여 간다라를 거쳐 마침내 천축에 이르렀다.

-중략(中略)-

십팔 년이 지나 노납은 일백오십 개의 불사리(佛舍利)와 여덟 체의 불상(佛像), 육백오십칠 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중략-

자은사에 대안탑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하기 이십칠 년, 노납의 나이 고희에 달했으며 번역하지 못한 책은 오직 한 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노납의 실책인가? 아니면 삼세를 굽어 살피시는 불타의 뜻이신가? 노납이 천축에서 가져온 경전 중 마지막 한부가 불법을 설파한 것이 아닌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노납은 삼 년의 망설임 끝에 그 마지막 한 부를 번역했다.

하지만 그 내용의 가공함으로 인하여 감히 세상에 흘리지 못하고 노납이 머물던 대안탑 칠층에 불심연화로(佛心蓮花爐)를 만들어 깊이 숨기는 바이다.

뜻이 있는 자는 구할 것이오, 인연이 있는 자는 얻을 것이다.

행하는 자는 불타의 자비를 잊지 말 것이며, 전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글을 읽은 임청우는 고소했다.

“불심연화로! 역성(譯聖)께서는 자신이 애써 만든 불심연화로가 한낱 떠돌이 임청우의 무덤이 될 줄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현장이 그토록 고심한 내용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 자신은 이 향로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생을 마쳐야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천명(天命)이라면, 은밀하게 숨겨져 온 비전(秘傳)을 접하게 된 것 또한 천명이 아니겠는가?

줄이 바뀌면서 갑자기 문장이 바뀌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

임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글자들 보다 약간 크게 쓰여진 굵은 글자는 <불심연화지>였다.

(이럴 수가...!)

제목에 이어진 내용을 읽어가던 임청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처럼 생소하고 기이한 문장을 그는 한 번도 대해본 적이 없었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이야기할 때는 모든 성인(聖人)들과 비슷했으나 신체의 굴신(屈身)에 대한 구절에서는 도가의 양생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마치 한 줄에 꿰인 수백 개의 곶감들처럼 어떤 오묘한 원리에 의해 이어져 있었다.

인체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 부분에서는 의서를 읽는 듯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기(氣)라는 것에 대한 부분에서는 마치 무서(巫書)를 읽는 듯이 황당무계하면서도 신비한 감이 있었다.

임청우는 그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불심연화지의 구결에 빠져들어 몸이 아픈 것조차 잊어버렸다.

입으로는 연신 구결을 중얼거리며 눈은 망연히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는 구결을 더듬었다.

구결을 외워감에 따라서 몸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뜨거운 열기가 생겨났다.

그 열기는 배꼽 아래 세치 쯤 되는 곳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생겨났다.

아지랑이같고 연기같던 열기는 이내 뭉쳐져 불덩이처럼 변하더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랫배와 명치를 지나 가슴 앞쪽을 통과한 불덩이같은 기운은 얼굴로 올라왔다.

턱 중앙을 지나 코 위로 흘러간 그 기운은 미간을 약간 더 올라간 위치에서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마치 불이 붙은 솜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임청우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거듭 반복하여 읽었다.

읽을수록 머릿속은 선명해지고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신열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 글속에 이처럼 신비한 힘이 있을 줄이야.)

임청우는 뛸 듯이 기뻤다. 몸의 상태가 구결을 외움에 따라 표가 날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을 안 것이다.

네 번을 거듭 읽고 나자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임청우는 눈을 감은 후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그에 따라 그의 몸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배꼽 아래쪽에서 꾸준히 생겨난 기운은 이마의 튀어나온 부분까지 상승하여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꽃같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같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얼음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 속성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임청우는 농산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진기한 약초를 채집하고 또 복용해왔었다.

덕분에 임청우의 몸속에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양의 영약 기운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청우가 내공심법의 구결을 외자 단전에 잠복하고 있던 그 영약 기운은 구결을 따라 앞머리의 신정혈(神庭穴)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공력을 단전(丹田)에 모은다.

그에 반해 임청우가 암송하고 있는 불심연화지는 단전이 아닌, 이마 위에 자리한 신정혈에 공력을 모으는 특이한 내공심법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움에 따라서 임청우의 몸에서 신열은 사라지고 부어올랐던 팔의 부기도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한데 임청우가 도취된 듯이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을 때였다.

 

“지독한 유가놈! 하지만 제 놈도 설마 우리가 이 대안탑에 숨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큿큿!”

임청우의 귓가로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면혈도란 자다!)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들린 음성은 바로 비련곡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달아났던 마면혈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청우가 너무 놀라 숨조차 멈춘 직후 아래층에서 또 하나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말대가리! 또 검주 유소기를 과소평가하는군. 이곳을 찾지 못하길 바랄 수 있을 뿐, 찾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다간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나게 될 걸?”

철선동시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 까마귀가 우는 듯한 역겨운 음성이었다.

(저 괴물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마치 내가 가는 곳마다 일부러 쫓아오는 것같다.)

임청우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인 척포를 깨웠다.

임청우가 호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자 척포가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내밀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쉿!)

임청우는 자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때 다시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하지만 우리가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유소기 놈쯤이야 간단히 찢어죽일 수 있지!”

츠으!

마면혈도의 음성을 들은 척포의 눈이 붉은 빛을 쏘아냈다.

척포는 농산의 비련곡에서 마면혈도와 싸울 때 그자의 혈도에 맞아 상당수의 비늘이 상하는 타격을 입었었다.

그 원한이 뼛속에 사무쳐 있었던 모양이다.

쉬쉭!

척포는 혀를 날름거리며 호리병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금 나가면 안돼!)

임청우는 다급히 척포의 머리를 눌렀다.

끽!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척포의 머리가 호리병 속에 밀려들어가 버렸다.

(휴! 큰일 날 뻔했다. 만약 이 녀석이 뛰쳐나간다면 저는 몰라도 나는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지.)

임청우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척포는 임청우가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호리병 속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기 시작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주둥이로 쿡쿡 찍어대는 데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웃을 수가 없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속으로 욕을 했다.

(만약에 들통이 나게 되면 네 녀석을 호리병 채 불속에 넣어서 구워버리겠다.)

막상 척포를 욕하고 나니 우습지만 그놈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말귀신과 얼어 죽은 강시는 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가?)

임청우는 대상을 바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농산에서 두 번이나 보고 수백 리나 떨어진 이 대안탑에서까지 만난단 말인가? 귀신은 저놈들 안 잡아가고 뭣하며 벼락은 눈이 멀기라도 했나?)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평소에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던 욕도 마음속으로 실컷 해댔다.

그러는 사이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대안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칠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조바심이 나서 미칠 지경인데도 척포는 여전히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라 뱀 새끼야!)

임청우의 얼굴이 숫제 울상이 되었다.

 

“제길. 유소기 그 개같은 놈만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 다닐 필요도 없는데...”

마면혈도는 칠층의 바닥을 밟으면서 소리쳤다.

철선동시가 속이 뒤집어질 것같은 역겨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유소기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자네를 뒤쫓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자에 비하면 유소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면혈도는 안색이 홱 변하며 급히 물었다.

“이봐, 철선동시! 마황이 나를 뒤쫓기 시작한 기미라도 있나?”

마면혈도의 어조는 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그동안 철선동시에게 한 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황은 멀리 있고 그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철선동시가 냉소하며 대답한다.

“그? 그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가?”

마면혈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입가로 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자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니 패할 걱정은 할 필요 없네.”

“그럼 들을 필요도 없군. 그만하지.”

마면혈도는 석가여래의 무르팍에 걸터앉으면서 손을 저었다.

철선동시는 그런 그자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갑자기 마면혈도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휘익!

그자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철선동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면혈도에 비해 키가 작은 철선동시가 발까지 땅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흔들렸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유소기보다 더 무섭다는 자가 나를 이길 수 없다니... 그런 개같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마면혈도는 고함을 치면서 철선동시의 멱살을 흔들었다.

휘익!

순간 철선동시의 발이 빙글 돌아가며 마면혈도의 턱과 겨드랑이 아래를 동시에 노렸다.

쩌엉!

경쾌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면혈도는 철선동시를 집어던지고 혈도를 뽑아들었다.

철선동시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있었으면 턱이 부서졌거나 팔이 떨어졌을 것이다.

휘릭!

철선동시는 몇 바퀴 맴을 돈 후에 아미타여래의 어깨 위에 내려서면서 소리쳤다.

“말대가리!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네놈은 돌대가리야. 기껏해야 그 정도까지만 생각할 줄 아는 걸 보면...”

“개 수작마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얼어 죽은 놈이 칼 맞아 죽은 놈으로 변할 것이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번쩍!

혈광이 번득이는 순간 철선동시는 아미타여래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비로자나불의 머리위로 피했다.

쿵!

혈도에 베어진 아미타여래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쩍!

마면혈도는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그대로 철선동시를 베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철선동시의 가슴 앞자락이 길게 베어졌다.

휘릭!

철선동시는 급히 비로자나불 뒤로 뛰어내려 숨었다.

“끼압!”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마면혈도는 공력을 돋우어 괴성과 함께 비로자나불을 양단해버렸다.

쿠르르르!

비로자나불이 두 조각이 되어 좌우로 나누어졌다.

순간 철선동시가 좌측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이 미친 말대가리 놈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것 아니냐? 네놈을 쫓는 사람이 우협 장백승이라 해도 내말이 틀렸다고 할 테냐?”

순간 마치 시간이 멎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마면혈도가 우뚝 서버렸다.

그자의 몸이 석고처럼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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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해보니 만화 시나리오도 참 많이 썼군요.

현대물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몇편 썼지만 무협극화 시나리오만 정리해봤습니다.

극화와 비교해서 보시면 제법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이재학>

 

철사자 (1993년)

천마성 (1994년)

전신 (1995년 01월)

무림악인전 (1995년 07월)

요마환술록 (1995년 10월)

 

<야설록>

 

남성북궁 (1995년 12월)

율궁협성 (1996년 04월)

제왕기행 (2001년 10월)

불사기행 (2001년 11월)

천마2세 (2002년 04월)

사대세가 (2002년 07월)

천하무적 (2002년 08월)

오수맹 (2003년 01월)

무림왕 (2004년 08월)

귀면왕 (2004년 10월)

구룡왕 (2004년 11월)

옥면염라 (2005년 04월)

호색군자 (2005년 07월)

사자왕 (2005년 12월)

도룡계 (2006년 04월)

다정사신 (2006년 08월)

전신강림 (2007년 01월)

협골독심 (2007년 05월)

실명대협 (2008년 04월)

천애독행 (2013년 10월)

제왕본색 (2014년 09월)

대도독행 (2015년 04월)

악군자전 (2015년 09월)

마협독행 (2016년 06월)

살수대협 (2016년 11월)

 

<황성>

 

마검천자 (1995년 04월)

십왕지존 (1996년 04월)

혼돈마조 (1996년 07월)

백치룡 (1997년 04월)

장한검 (1997년 07월)

마인 (1998년 05월)

역천행 (2002년 04월)

구마경 (2002년 10월)

아수라 (2003년 01월)

낭왕일대기 (2003년 04월)

백면무적 (2003년 09월)

도부 (2003년 11월)

지옥도 (2004년 03월)

냉혈대협 (2004년 07월)

달마2세 (2004년 11월)

백인천 (2005년 02월)

파죽지세 (2005년 03월)

태산북두 (2005년 11월)

생사탄 (2006년 05월)

남사여호 (2006년 08월)

무적의생 (2006년 10월)

천방지축 (2007년 03월)

일기당천 (2007년 07월)

사자불루 (2007년 11월)

질풍노도 (2008년 04월)

황금전장 (2008년 08월)

금포염왕 (2008년 10월)

요리지존 (2009년 01월)

혈로독행 (2009년 07월)

무림창세기 (2010년 02월)

오대무벌 (2010년 04월)

백마사원 (2010년 06월)

독행일지 (2010년 08월)

구중천 (2010년 11월)

고금제일인 (2011년 03월)

칠보하천하 (2011년 06월)

무명초인 (2011년 11월)

승풍파랑 (2012년 01월)

용맥백정 (2012년 06월)

마귀대협 (2012년 10월)

협기천추 (2013년 03월)

무제천추 (2013년 06월)

기인천추 (2013년 10월)

마면기정 (2014년 03월)

마왕유희 (2014년 07월)

건곤일척 (2015년 02월)

아랑힐월 (2015년 10월)

투천환일 (2016년 06월)

마고천장 (2017년 02월)

보보경천 (2017년 04월)

불멸무성 (2017년 05월)

퇴마신협 (2017년 07월)

마인총 (2017년 10월)

천지무쌍 (2017년 12월)

발검진천 (2018년 01월)

마왕강림 (2018년 03월)

신마유희 (2018년 05월)

자객일지 (2018년 07월)

무쌍일지 (2018년 10월)

신선부 (2018년 12월)

폭풍신마 (2019년 04월)

몽유강호 (2019년 07월)

견자전설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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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첫 번째 살인

 

 

 

“그럼 그렇지!”

“역시 대주님이시다.”

잠시 마음을 졸였던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그자들이 보기에도 강유의 공격은 실로 맹렬했던 것이다.

반면 진상파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가 제왕성으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은 강유가 사우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전력으로 공격하는 것같은 데도 사우를 직경 다섯 자쯤의 원 안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비참해질 운명인 것같구나.)

진상파가 체념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크왓!”

강유가 벼락같이 기합을 토해내었다.

가가강! 슈학!

그와 함께 강유의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며 사우를 쓸어갔다. 붕정검법의 초식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고 현란한 대붕전시(大鵬展翅)가 펼쳐진 것이다.

사우도 이번에는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열 번을 베고 다섯 번을 찔렀다.

카카캉! 빠카캉!

서로의 검이 섞이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지고 시퍼런 불꽃이 작렬했다.

강유가 일으킨 수많은 검의 그림자는 베어지거나 튕겨졌다.

콰드득!

하지만 사우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은 듯 두 발이 뒤로 밀려서 하마터면 원 밖으로 나갈 뻔했다.

“방금 것이 제십 초! 이제 네놈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부악!

밀려나던 몸을 멈춘 사우가 폭발적인 기세로 강유에게 쇄도하며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강유가 방금 전에 펼쳤던 대붕전시가 사우가 양보한 십초의 공격중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쩍!

강유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치는 사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내뻗힌다,

헌데 그 검기의 형태가 특이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던 검기의 끝 부분이 돌연 홱 꺾이며 강유를 베어온 것이다.

(위험...)

흡사 낫을 연상케 하는 사우의 검기가 날아들자 강유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스팟!

강유는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방어하려고 했다.

캉! 쩌억!

하지만 사우의 검기는 강유의 검에 막히는 순간 다시 홱 방향을 틀며 목으로 파고들었다.

낫의 형태를 한 검기가 거듭 궤적을 바꾸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

“!”

패액!

거의 동시에 강유는 어떤 영감을 느끼고 몸을 홱 틀었다.

서걱!

강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사우의 검기 끝이 강유의 목 대신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푸학!

강유는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슴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목이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슴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악!”

보고 있던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달마독명안 덕분에 살았다!)

휘릭!

강유는 단번에 삼장 밖으로 물러나며 몸서리를 쳤다.

사우의 이번 공격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수박 겉핥기로 깨우친 달마독명안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 달마독명안의 예지력(豫知力)이 발동하여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는 쪽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꼴좋다 강가야!”

“제왕성에 맞선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철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

반면 비명을 질렀던 진상파는 두 손을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끼이...

사람들과 함께 관전하고 있던 섬전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자기 꼬리 다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물인 그놈이 보기에도 강유와 사우의 대결은 결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보자.”

사우는 강유에게 흐르듯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고 그었다.

쩌억! 부악!

그때마다 사우의 검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진 검기가 내뻗혀 강유를 베어왔다.

캉! 카캉!

강유는 소요보법을 극한까지 펼치면서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았다.

푸학! 서걱!

치명상은 어찌어찌 피하지만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어설픈 달마독명안으로는 사우의 변화막측한 검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삽시에 강유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사우의 검기에 베어져 생기는 상처에서 피를 뿜어대는 강유의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포기하고 목을 늘어트려라.”

스악! 쩍!

사우는 냉혹하게 웃으면서 검을 휘둘러 강유를 몰아붙였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겨우 겨우 사우의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강유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출혈이 과다하다는 게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급격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사우의 검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른 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인 건가?)

공포와 절망이 강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헌데 절체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마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써선 안된다.>

 

바로 안탕산을 떠날 때 아버지 강조가 자신에게 필살일초라는 검법을 전수하며 하던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가 구명(救命)의 절초(絶招)로 가르쳐주신 그 검법을 사용할 때가...!)

부악! 휘익!

강유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은 후 훌쩍 물러섰다.

이번에도 사우의 검기를 완전히 막지 못해서 왼쪽 뺨에 반 뼘 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그 대가로 강유는 사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슬슬 네 운명이 어찌 될지 실감이 가겠지?”

사우는 얼굴까지 피로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강유를 보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떠나세요.”

보다 못한 진상파가 외쳤다. 무공 방면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이 승부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자!”

“네놈은 살아서 여길 떠나진 못한다!”

스슥! 슥!

진상파의 안타까운 마음을 비웃듯 철위사들은 강유의 뒤쪽으로 이동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유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달아나거나 피하려는 시도 대신 오히려 사우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간 것이다.

“...”

그걸 본 사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 애송이놈이...”

“달아나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투지 하나는 감탄스러운 놈이로군.”

철위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강유의 행동에 진상파의 미간도 모아졌다.

징!

그때 사우를 향해 내밀어진 강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냐?”

사우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강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네놈이 어떤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견식해 보도록 하자.”

비록 웃고 있긴 하지만 사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착 갈아 앉은 강유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때문이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

그 직후 사나운 기합과 함께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뻗었다.

쩌엉!

사우를 향해 내뻗치는 강유의 검 검신(劍身)이 나선형으로 홱 꼬인다.

(이 검법은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사우는 전력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앙!

사우의 검에서 몇 가닥의 검기가 확 내뻗혀 강유를 찍어갔다.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의 검기가 날아드니 강유가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흑!”

그걸 알아차린 진상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투쾅! 텅!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잠경(潛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사우의 검기들을 간단히 튕겨버린 것이다.

사우 자신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강유의 검은 벼락같이 가슴으로 날아든다.

사우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워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쩍!

검신이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극(劍極), 즉 검의 끝 부분이 사우의 검날과 접촉했다.

빠캉!

다음 순간 사우의 검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헉!”

명검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깨지자 사우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우의 검을 간단히 깨트리고 다가선 강유의 검 검극은 이미 사우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화악!

뒤틀리는 강유의 검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파괴력이 사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펑!

폭발과 함께 사우의 가슴과 등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났다.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통의 앞뒤로 매끈하게 나버린 것이다.

푸학!

사우의 등쪽으로 난 구멍을 통해서 잘게 다져진 살과 뼈와 장기들이 확 터져 나갔다.

“...!”

“...!”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 숨이 멎었고 꼬리를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온몸을 덮고 있는 황금색 털을 고추 세우며 굳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말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컥!”

털썩!

강유는 피를 왈칵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는 비틀거리며 서있는데 정작 사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강유가 먼저 주저앉은 것이다.

(경... 경맥이 뒤틀려서 끊어지려 한다.)

강유는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인의 손이 몸 전체를 움켜잡고 젖은 수건에서 물을 짜듯 비틀어대는 기분이다.

필살일초는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끌어올리는 운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내공의 근원으로부터 비틀리며 발휘되는 힘이기에 부딪히는 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구사하는 쪽도 경맥이 뒤틀려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자칫 일신의 경맥이 모두 터지거나 끊어져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게 필살일초였다.

“끄륵!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을...”

주저앉은 강유를 노려보는 사우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마교의 마검칠식?)

강유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끄윽... 무후님을 시해한 게 네놈 아비...”

비틀거리던 사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퍼억!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나뒹군 사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대... 대주님!”

“안돼!”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넋이 나가 있던 철위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죽일 놈!”

“감히 대주님을 시해하다니...”

“다 함께 공격해서 죽이자!”

철위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

“잘 생각하시오.”

슥!

강유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왼쪽 소매로 닦으며 일어났다.

사우에게 당한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의 경맥이 뒤틀려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강유는 내색하지 않고 검으로 앞쪽의 철위사들을 겨누었다.

“당신네 대주도 간단히 죽인 내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덤벼도 좋소.”

쿠오오오

강유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음산한 살기는 철위사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자신들이 하늘같이 여기던 대주조차 간단히 죽인 상대다.

철위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우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사우의 시신은 철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으...”

“으으...”

철위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강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됐다!)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을 확인한 강유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강유는 내, 외상이 심각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철위사들이 일제히 덤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진소저! 그만 갑시다.”

강유는 검으로 무사들을 겨누며 진상파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진상파는 도도한 자태로 걸음을 옮겨 공터 밖으로 향했다.

강유는 철위사들을 감시하며 진상파를 따라갔다.

다행히 철위사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끼이...

다만 섬전초는 눈을 번뜩이며 진상파와 강유를 따라오려고 했다.

“네놈도 잘 생각해라.”

강유는 걸음을 멈추며 섬전초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산 채로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릴 것이다.”

끼이!

강유의 서늘한 눈빛을 접한 섬전초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수백 년을 산 영물답게 강유의 말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영특한 놈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기색이다.)

겁에 질린 섬전초를 돌아보며 강유는 진상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떠나는 강유의 발걸음은 그러나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사우와의 악전고투로 가볍지 않은 내상과 외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유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한 인간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강유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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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사자검은 보면 볼수록 백남빈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백남빈은 사자검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왔다갔다하며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휙 뽑아서 흔들어 본 후 집어넣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뽑아서 재주를 넘으며 찌르고 하여 강미루로 하여금 입을 가리고 웃게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여 어른들도 어려워하던 철령보의 소보주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던 백남빈의 검무(劍舞)는 점점 격식을 갖추면서 정교해져 갔다.

양부 이탁에게서 배운 삼재검법이 누에가 실을 뽑듯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펼쳐봤던 삼재검법이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웅! 웅!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배 이상 증진된 내공으로 인해 백남빈이 휘두르는 사자검은 웅혼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쿠오오! 파파팟!

사자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 궤적을 따라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의 작은 돌들과 흙을 휘감아 튕겨 내었다.

자신의 내공이 이 정도로 증진되어있을 줄은 백남빈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늘어나 펄펄 날 것만 같아서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이내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삼재검법만으로는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도저히 다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갑함을 느낀 백남빈은 격식에서 벗어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자검을 움직였다.

쿠쿠쿠! 쩌저적!

강맹한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연달아 번쩍이는 검광(劍光)에 가려 백남빈의 모습은 강미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강미루는 돌풍과 검광에 가려진 백남빈 쪽을 보며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강미루의 놀란 심정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을 기다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힘을 분출할 수 있는 검로(劍路)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 위험해!)

백남빈의 몸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검광과 검풍(劍風)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강미루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십장 이상 물러섰음에도 강맹한 바람은 그녀의 몸을 단숨에 하늘 밖으로 날려 버릴 듯 했고 작렬하는 검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갈가리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으야압!"

그러던 어느 순간 백남빈은 천둥치는 듯한 폭갈을 터뜨리며 온 힘을 다해 사자검을 휘둘렀다.

크와앙!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자검에서 한 무더기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 녹지의 표면을 강타했다.

퍼엉!

수십 장 넓이의 녹지가 둘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백남빈은 바닥에 팍 엎어졌다. 몸속에서 들끓던 강대한 기운이 일거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경악하면서"검기(劍氣)"하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확 트인 듯하여 시원하고도 통쾌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불쑥 치솟아 전중혈(田中穴)을 지나 검으로 빠져나갔었다.

그 기운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해서 수십 장 넓이의 녹지를 순간적으로 갈라버렸는지 백남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탈진해서 몸은 나른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아주 후련해져서 눈도 뜨기 싫었다.

“공자님!”

강미루가 뛰어와 그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무서워 혼났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해요."

백남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가 일으켰던 거센 돌개바람은 아직도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며 완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던 백남빈이 눈을 감은 채 잠결처럼 물었다.

"미루, 내가 대체 뭘 한 거요?"

"미친 듯이 검무를 추었잖아요. 가까이 있었더라면 나도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강미루는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힘이 마구 들끓었었소.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같았는데 갑자기 속이 후련해지더군."

백남빈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강미루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이제 검으로 검기를 발출하게 된 거예요. 우리 형부도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데 멀리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깨뜨리고 나무를 베어 버리더라구요."

강미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에 형부와 언니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형부 집에 숨어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부가 검을 들고 있다가 저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휘둘렀어요. 그런데 그 바람에 오장이나 떨어져 있던 내 머리에 쓴 모자가 잘려버리지 않았겠어요?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부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고요"

백남빈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림에 고수는 많지만 검기를 마음대로 발출해 낼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자랑스러운 형부는 검신(劍神)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 모양이오."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가 핏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도 검기를 발출하게 됐으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마셔요."

백남빈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후로 형부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번 졸랐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다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대신 궁술과 창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활과 창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내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어요? 단지 내 궁술과 창법이 치밀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더 이상 늘지 않아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하는 말이었다.

백남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공수련과 검기(劍技)가 부족한데 어째서 검기를 발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사자검이 부린 조화가 아닐까?"

강미루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지 당신이 쓰러질 때를 맞추어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연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놀려 백남빈의 여기저기에 글로 적으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더 해봐야겠어!"

백남빈은 옆에 떨구었던 사자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미루가 그런 그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하셔요."

그녀는 물그릇(물론 백남빈의 가죽신이지만)을 가져와 백남빈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우유빛 물이 마치 유액(乳液) 같았다.

백남빈은 그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소매도 없는 팔로 쓱 닦았다.

폐부를 상쾌하게 해주는 신비의 물. 그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오직 이곳에만 있는 신령스러운 영약이지마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만일 다른 식수가 있었다면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속이 다시 힘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백남빈은 강미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스악!

정신을 검 끝에 모으고 기합과 함께 강하게 떨쳐내었다.

과연 기합소리와 동시에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그의 검 끝을 지나서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이어 몇 번을 휘두르자 검기는 실날같이 가늘게 뽑혀 나오며 그의 몸주위에 그물처럼 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미루가 돌멩이를 주워 백남빈에게 던지자 돌은 검기에 부딪혀 소리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다.

진정 놀라운 경지였다.

그것은 백남빈에게 검술을 가르친 독안룡 이탁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

 

백남빈은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삼재검법은 검기를 펼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검과 검력에 알맞은 검식(劍式)을 고안해야만 했다.

가전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다른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삼가야한다는 양부 이탁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은 후였다.

녹지에 다시 들어가 혹시 검식을 적은 검보(劍譜)가 있지 않나 찾아 봤다.

하지만 녹지의 바닥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빈은 보름달이 떠올라 창평곡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검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미루가 쪼그리고 앉아 달빛에 단검을 반짝이며 나루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때 깎을 생각이었으나 백남빈이 검무를 추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루었다가 이제야 깎는 것이다.

백남빈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단검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에 열중하여 전혀 백남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강미루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순간 강미루는 백남빈의 눈길이 닿은 곳이 자신의 단검임을 깨닫고 죄라도 진 듯이 황급히 손바닥 안에 단검을 감추었다.

그 단검으로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러 하마터면 죽게 만들 뻔한 기억 때문이다.

힐끗 보니 백남빈은 여전히 단검을 보고 있다.

핑!

강미루는 입술을 꼭 깨물며 녹지쪽으로 단검을 던져 버렸다.

퐁당! 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은 녹지에 잠겨버렸다.

"아!"

그제야 백남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강미루가 깎는 둥근 나무그릇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강미루가 깎는 나무 그릇은 원래 나무토막에 불과 했으나 그녀가 빙글빙글 돌리며 깎아나가자 점차 모양을 갖춰 동그란 나무그릇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검식도 저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백남빈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잡히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단검이 물속에 빠지는 퐁당 소리에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쉬릭! 쉭!

백남빈은 사자검을 들어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선(螺旋)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차례 반복하자 뱀처럼 영활하게 검이 살아있는 듯이 뻗어 나갔다.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검기로 형성되는 여러 개의 작은 원과 원이 서로 엉기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정작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오로지 한 초식뿐인 검법이지만 백남빈은 스스로 검법을 만든 것이다.

백남빈은 내심 기뻐하면서 강미루를 향해 씩 웃었다. 성취한 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 내 단검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군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성취에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슴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단검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 생각이 났었다.

비록 백남빈이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애정을 품고 있는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강미루였다.

그래서 백남빈의 돌연한 태도에 비록 정이 든 단검이지만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백남빈이 검초를 깨닫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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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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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마녀(魔女)의 연심

 

 

당혜선의 한 맺힌 얘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검추의 얼굴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은 너무 세게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나의... 나의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였다니...)

고검추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모를 겁탈한 패륜아가 아버지인 것이다.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주르르...

질끈 감은 고검추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추야...)

당혜선은 그런 고검추의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검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고검추는 당혜선 자신의 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괴로워 할 것 없다 추아야. 사형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악한 자의 음모에 희생되신 것이란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흠칫하며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 사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는..."

당혜선의 눈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을 겪는 듯했다.

그같은 태도로 미루어 보아 당혜선은 음모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인간이 음모자임을 아셨기 때문에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하셨을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음모자가 누군지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 제발... 소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를 음해한 자가 누구인지를..."

고검추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미를 용서하거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녀곡을 떠날 때 네게 준 나무상자는 네 생모 대려군 언니가 남긴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당혜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몸을 일으킨 당혜선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았다.

(사형을 위해 고이 지켜온 정조를 유린당한 마당에...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창백한 뺨으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에 남아있는 사신각주의 흔적이 얼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당혜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하며 보인 자신의 반응이었다.

그 장면을 양아들인 고검추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당혜선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형... 이제 소매가 사형을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당혜선의 입가로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아야. 절대... 무슨 일을 겪어도 좌절해서는 안된다."

화락!

그 말을 남기고 당혜선은 돌연 청룡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고검추는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가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신 것일까?)

고검추는 멍한 표정으로 당혜선이 뛰어내린 절벽만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그러다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청룡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서도 당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아아!

그저 오십 장이 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청룡탄의 격랑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고검추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단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안됩니다 어머니!”

고검추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당혜선을 따라 투신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고검추는 끝내 청룡탄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복수... 복수해야만 한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고검추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버지를 위해한 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신각주... 네놈들을 내 손으로 쳐죽이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다.)

고검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을 수 없는 것은 복수 때문이다.

자신마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주겠는가?

결의를 다지는 고검추의 뇌리로 문득 스쳐가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은 그윽한 눈매에 새하얀 은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은발마희!)

고검추의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검추의 눈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핏빛 화살이 들어왔다.

초혼전!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하복부에 꽂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고검추는 초혼전을 천 조각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 초혼전에 묻어있다는 백일취가 피부에 닿으면 안된다.

(언제고... 이것으로 네놈의 심장을 쑤셔 주겠다.)

초혼전을 노려보며 맹세한 고검추는 몸을 돌려 어두워지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자신을 지켜보는 외눈의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밤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팽가촌 남서쪽 삼십여 리 쯤에는 은밀한 협곡이 하나 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협곡의 끝은 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 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그 석벽의 대부분은 수많은 등나무 넝쿨로 뒤덮여 있다.

"허억! 헉!"

탁! 타탁!

숨이 턱에 찬 채 그 협곡으로 달려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 소년은 고검추였다.

“허억 헉!”

고검추는 협곡 막다른 곳에 서있는 석벽 앞에 멈춰서며 가쁜 숨을 추스렸다.

서걱...

얼추 숨을 고른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석벽을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들을 젖혔다.

무성한 등나무 줄기들이 헤쳐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이다.

하지만 동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넓어져 이윽고 어른 남자가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 문득 동굴이 끝이 났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석실 바닥에는 보드라운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실 구석에는 몇 가지의 가재도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고검추는 이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꾸면 놓은 것이다.

(헉!)

헌데 막 석실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깜짝 놀랐다.

석실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황촉불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촛불도 고검추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

헌데 마른 풀이 깔린 석실 바닥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마천루의 루주라는 은발마희 옥여상이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석실 바닥 가득히 흩어놓은 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고검추가 놀란 것은 자신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주머니!"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옥여상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검추는 급히 옥여상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옥여상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 설마 내상이 도저서 타계하신 것일까.)

고검추는 떨리는 눈으로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런 그녀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검추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옥여상의 검은 옷과 새하얀 살결을 물들이고 있던 피는 깨끗이 씻겨있다.

덕분에 역겨운 피 냄새 대신 향긋한 살 내음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고검추의 귓가로 뭉클한 육봉의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고검추가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댄 직후였다.

"호호호!"

옥여상은 까르르 웃으며 와락 고검추를 끌어안았다.

"읍!"

그 바람에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의 육중한 젖가슴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여상의 다리도 영사처럼 고검추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몸 아래 느껴지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소년의 피를 단번에 비등시켰다.

"노... 놓아 주십시오!"

당황한 고검추는 몸부림치며 옥여상의 젖가슴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내가 죽은 줄 알고 겁이 난 모양이구나 겁쟁이 도련님!"

옥여상은 교소를 터뜨리며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었다. 비록 부드럽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는 옥여상의 팔 다리를 고검추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옥여상의 몸에 올라탄 자세인 채로 퉁명하게 말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봉목에 은은한 떨림이 일었다.

 

옥여상은 지금까지 냉혹하고 비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철이 든 이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옥여상을 거둬준 스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스승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옥여상 외에도 여러 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었다. 옥여상같은 고아는 물론이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납치해서라도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켰다.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라 공언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승이 평생을 걸쳐 세운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년과 소녀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 나찰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옥여상이었다. 발군의 자질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약속한 대로 스승은 옥여상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이 이룬 기업, 마천루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마천루의 루주가 되었다고 옥여상의 고단했던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마천루의 루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답게 마천루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포악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자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은 해내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냉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여 마천루 소속 마인들의 마음을 장악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 마도 무림을 호령하는 여종사가 된 것은 옥여상이 처음이었다.

마도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옥여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검추라는 이 어린 소년을 만나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놀랐느냐?"

옥여상은 확인하려는 듯 물으며 물기 어린 시선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저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옥여상의 눈 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망막이 뜨거운 물기로 덮였다.

"아아... 착한 것!"

옥여상은 치미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고검추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

고검추는 다시 옥여상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굴에 짓눌려지는 부드러운 육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관능적인 살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 안돼!)

고검추는 추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옥여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옥여상의 두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휘감고 있어서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충분히 사내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어떤 용틀임에 옥여상의 옥용에는 노을 같은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려는 선물을 무리없이 받을 수 있겠지.)

고검추의 상태를 확인한 옥여상은 어떤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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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독수리를 타고

 

 

이검한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오리 알만한 구슬이었다. 전체가 타는 듯 붉은 그 구슬에서는 은은한 주황빛 화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단(內丹)이다!”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적린화룡의 내단이었던 것이다.

적린화룡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용암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그 용암의 화기가 응결된 것이 바로 내단이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내단의 이름인데 만일 사내가 복용하면 십처백첩(十妻百妾)을 어렵지 않게 거느릴 수 있는 절륜무쌍의 양정(陽精)을 지니게 된다.

만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복용하면 몇 갑자의 내공과 함께 강력한 화염강살(火焰罡煞)을 얻을 수 있다.

“내단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

이검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적린화룡의 시체에서 화룡단정을 집어 들었다.

구우우! 화아악!

그 사이에 철익신응이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이검한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그놈은 앉은키만 해도 무려 이장(二丈;6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 내리자 이검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것은 네 것이었지...!”

이검한은 들고 있던 화룡단정을 철익신응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적린화룡을 죽인 것은 철익신응이니 화룡단정도 철익신응의 소유인 것이다.

꾸루룩!

하지만 철익신응은 낮게 울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걸 내게 양보하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이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맙다 신응!”

철익신응의 그같은 모습에 이검한은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잘 되었다. 근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듯하신데 이 화룡단정을 드시면 다시 정정해지실 것이다!)

그는 화룡단정을 고독마야에게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사실 고독마야는 중환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십사 년 전, 그는 자칫 방심하다가 독천존 서래음이 살포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형지독에 중독당한 이상 반나절 내에 온몸이 녹아 죽고 만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달랐다. 그는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덕분에 무형지독에 중독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고독마야는 무형지독의 독기를 내공의 힘으로 한곳의 혈도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형지독이 워낙 독성이 지독한 극독인지라 그 독기가 조금씩 내장을 썩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독마야는 매일매일 내장이 녹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한 번도 그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본래 고독한 성격의 고독마야인지라 어떤 경우든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검한은 그런 고독마야에게 화룡단정을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몸을 숙여서 이검한에게 등을 보였다.

“나를 태워주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이검한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익신응은 낮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하! 좋다! 나도 한 번쯤 곤륜산을 허공에서 관람했으면 했으니까!”

휘익!

이검한은 훌쩍 몸을 날려 철익신응의 등 위로 올라탔다. 워낙 거구인지라 철익신응의 등판은 어른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직했다.

(목에 사슬을 걸고 있다!)

철익신응의 목덜미 쪽에 걸터앉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깃털에 묻혀 잘 안보였지만 철익신응의 목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둘러져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인 그 사슬은 길이가 넉넉해서 이검한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슬을 두르고 있다는 건 이 영물이 전에도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었다는 건데...)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려있는 황금 사슬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둘러 고정시키며 내심 놀랐다. 하늘의 지배자인 이 거대한 독수리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구우우! 스윽!

이검한이 자기 목덜미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철익신응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해가 뜨는 쪽으로 가다오. 그쪽에 내 집이 있으니...!”

이검한은 고독애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철익신응의 등을 다독였다.

구워어억! 화아악!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거대한 날개를 퍼득였다.

쏴아아아!

직후 철익신응의 거대한 몸은 이검한을 등에 태운 채 선풍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와앗!"

이검한의 입에서 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곤륜산의 웅장한 산봉들이 발 아래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 날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철익신응은 이미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로 날아올라 있었다.

“이야아! 정말 장관이로구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날개 아래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곤륜산의 무수한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봐! 방향이 틀리잖아!”

그렇다. 지금 철익신응은 고독애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인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아!

이검한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철익신응은 들은 척도 않고 북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갔다.

“야 임마! 안돼!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이모한테 혼난단 말이야!”

당황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나 철익신응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북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너 지금 나 유괴하는 거냐?”

철컹!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린 황금사슬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휘익! 휙!

그러거나 말거나 철익신응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북서쪽으로 꾸준히 날아갔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검한은 자포자기하여 벌렁 드러 누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수백 장 높이의 허공을 날고 있는 철익신응의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깃털로 덮인 철익신응의 등판은 아주 넓어 푹신한 침대같다. 게다가 몸을 쇠사슬로 한 바퀴 두른 상태라 안정감도 있었다.

“이모가 꽤나 걱정하겠는걸...!”

깍지 낀 두 손을 뒷덜미에 바친 채 철익신응의 넓은 등 위에서 드러누운 이검한은 흐르듯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검한은 더할 수 없이 안락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

“어엇!”

이검한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하강함을 느끼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몸을 일으키던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황혼녘이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가고 있는 주변 하늘은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물에 풀어놓은 듯 온통 홍(紅) 일색으로 물든 하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가깝게 보이는 일몰 직전의 태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비단휘장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저녁 하늘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화려한 장관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바다같이 막막한 일망무제의 사막(砂漠)뿐이었기 때문이다.

“서... 서역(西域)까지 왔구나!”

이검한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역!

 

그렇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자리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즉 서역인 것이다.

하토(鰕土)라고도 불리는 서역은 동서 일만 이천 여 리, 남북으로 육천여 리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분지다.

놀랍게도 철익신응은 곤륜산으로부터 서역까지 이검한을 태우고 날아온 것이다.

중원 사람들에게 옥문관 밖의 서역은 대부분의 땅이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역, 즉 탑리목분지의 곳곳에는 낙원같은 녹원(綠園;오아시스)과 사막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지표로 용출하여 형성된 호수를 낀 비옥한 곡창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 때문에 고대이래로 서역 일대에는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전한(前漢)시대 이래 서역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대진국(大秦國;고대 로마),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등과의 교역통로인 비단길로서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역의 곳곳에는 태고 이래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해온 끔찍한 험지도 존재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유사지대(流砂地帶)와 맹독을 지닌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 그리고 원시 아래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원시림 등등이 그곳이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집약된 곳이 바로 서역 탑리목분지인 것이다.

 

“반... 반나절도 안되어 서역까지 오다니...!”

이검한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독애가 자리한 곤륜산 남단에서 서역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천여 리 이상을 주파해야만 한다.

헌데 철익신응이란 놈은 불과 반나절 만에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검한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냉약빙의 훈육 덕분에 고대사(古代史)에도 정통한 이검한의 뇌리로 비단길을 의지하여 흥망해간 전설적인 왕국들의 고사(古事)가 그림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래폭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놉-노르, 즉 누란왕국(樓蘭王國)과 서역 역사상 최고의 미녀였다는 누란왕후(樓蘭王后)의 전설이다.

누란왕후-!

그녀는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왕국을 잃었고 끝내는 여러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던 서하(西夏)의 수도 흑수부(黑水府)의 애가(哀歌)와 북원(北元)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중원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달단왕부(韃靼王府)의 전설이 주마등처럼 이검한의 뇌리로 스쳐갔다.

이국적인 전설과 몽환적인 신비를 품고 있는 서역 땅이 바로 지금 이검한의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흥분에 몸을 떨 때였다.

구워어어억!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급격히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검한은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장대한 단층지대(斷層地帶)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치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나타난 절벽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의 남쪽이 어떤 이유로 침몰하여 이루어진 그 장대한 절벽의 모습은 마치 수많은 창(戈)을 꽃아 놓은 것같다.

“대, 대과벽(大戈壁)이다!”

이검한의 입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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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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