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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국(破局)의 전조(前兆)

 

 

 

일신재(日新齋)는 제왕성 소성주 모용준의 거처다.

섭장천은 양자로 삼은 종매의 손자 모용준이 제왕성 성주에 걸맞는 인재가 되길 원하는 마음에 일신재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주었다.

섭장천도 경박하고 호색한 모용준의 인성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에서만 후계자를 고르다보니 모용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신재라는 당호에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을 양자로 삼아야만 했던 섭장천의 고뇌와 기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호호호 아이 공자님도...!”

어머나 엉큼하셔라.”

띠리리링! 띠링!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당호가 무색하게 일신재에서는 풍악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질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농탕질은 밤이 되면서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무얼 보았는지 일신재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혐오로 물들어있었다.

소성주님 거처에서 나오는 년들마다 가자미눈이 되는군.”

일신재 주변을 지키던 제왕성 무사들 중 한명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지. 내일 장가 갈 새신랑이 갈보들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걸 봤을 테니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후환이 없을지 모르겠구만. 황금성의 진소저도 한 성깔 한다는 소문이던데...”

처음 말을 꺼낸 무사가 혀를 찼다.

계집 성깔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단 한 남자의 마누라가 되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는 건데...”

입조심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잖아.”

듣고 있던 동료무사가 급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쪽에서 크고 작은 두 명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여자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지만 뒤따르는 여자는 칠척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다.

진상파와 철관음이다.

황금성의 암호랑이께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군.”

이거 뭔 일 나도 나겠는걸.”

내가 안에 들어가 기별함세.”

무사들 중 한 명이 급히 일신재 안쪽에 통보하려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자의 발걸음은 진상파가 내뱉은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무사들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색이지만 진상파의 말에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삼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띠딩!

호호호! 하하하!

일신재로 다가온 진상파의 귀에 풍악소리와 함께 남녀가 수작을 벌이는 낮 뜨거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짐승같은 것들...)

진상파는 치를 떨었다.

철관음의 보고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주겠다.)

진상파는 이를 갈며 일신재 입구로 다가갔다.

(일 났구만!)

(저 암호랑이가 들이닥친 걸 알리지 못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어.)

곁눈질로 진상파를 훔쳐보는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일신재 안에서는 진상파가 생각하는 대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정난 짐승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사내는 다섯 명이고 여자는 그 배가 넘는 열 명 이상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끼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자! 오늘은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방문 정면의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은 모용준은 흥에 겨워 웃었다.

상의를 풀어헤쳐 맨살을 드러낸 모용준 좌우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녀 두 명이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 밤만 지나면 슬프게도 난 더 이상 총각이 아닌 거다. 불쌍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이 더 화끈하게 놀아야한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나 말하는 본새는 영락없는 시정의 파락호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되는 건데...”

주안상 사이에 기녀를 눕히고 희롱하고 있던 자가 모용준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장가를 가야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모용준도 마주 눈을 흘기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먼저 장가 간 형님의 말씀이니 잘 새겨들어 임마. 마누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오입질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내가 다시 하던 짓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소리의 근거를 말해보라니까.”

!

모용준은 짐짓 거칠게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준이 넌 풍류한량을 자처하는 놈이 일도(一盜), 이비(二卑), 삼기(三妓), 사첩(四妾), 오처(五妻)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옳거니!”

모용준은 그제야 악우(惡友)의 말뜻을 깨닫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자고로 계집은 훔쳐 먹는 게 가장 맛나고 하녀와 창녀, 첩이 그 다음 순서인 거다.”

물론 가장 재미없는 건 마누라야. 마누라와 동침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니까.”

맞아. 맞아. 대를 이을 새끼를 만들어야하는 게 아니라면 마누라하고는 살도 맞대기 싫지.”

다른 놈들도 낄낄 대며 친구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마누라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이거야. 눈 부라리며 감시하는 마누라가 있어야 몰래 훔쳐 먹거나 사먹는 게 맛나거든...”

여자를 눕히고 희롱하는 놈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냐? 제대로 된 오입질은 마누라 눈을 속이면서 하는 것이다?”

모용준은 피식 웃었다.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흥미진하고 살 떨리는 경험인지 준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모용준 옆에서 두 명의 기녀를 함께 희롱하고 있던 다른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 말을 들으니 낙담 대신 기대가 되는구나. 나도 내일 부터는 제대로 된 바람을 피워볼 수가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진정한 오입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모용준!”

장래의 제왕성 성주가 오입장이라니 볼만하겠구먼.”

못된 친구놈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였다.

!

일신재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

뭐냐?”

꺄악!”

엄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놈들과 기녀들은 기겁하며 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짝 열린 문 밖에 진상파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진상파의 표정은 차분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이크!”

... 진소저!”

엉겨 붙어 있던 사내놈들과 기녀들이 불 맞은 짐승들처럼 펄쩍 뛰며 떨어졌다.

... 진소저! 여긴 어쩐 일로...”

어서 오시오 진소저.”

사내놈들은 억지로 웃으며 급히 옷을 추스렸다.

기녀들도 겁에 질려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사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가요.”

진상파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

가라니... 어디를...”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들은 당황하여 진상파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준도 술잔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제왕성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만일 다시 내 눈에 띠는 인간이 있다면...”

진상파의 들끓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집안을 완전한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요.”

진상파는 고저(高低)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진상파의 서늘한 눈가로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진소저.”

당장 사라지겠소이다.”

두 번 다시 제왕성에 얼씬 거리지 않겠소.”

사내들은 겁에 질려 좌우의 쪽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진상파가 서있는 정문으로는 나갈 엄두를 못낸 것이다.

겁에 질린 기녀들도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끌어안고 사내들 뒤를 따랐다.

모용준의 친구들은 제법 사는 집안 출신들인지라 황금성에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어 마침내 돈을 쌓아놓고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황금성에 밉보이면서까지 거래를 하려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일신재 안에는 모용준만이 남게 되었다.

진상파는 문 밖에 서서 모용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젠장...)

진상파의 시선을 피하면서 모용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친구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양부 섭장천이 추진한 이 혼사가 깨질 경우 자신이 제왕성의 주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소저. 소꿉친구들과 기분을 내는 게 좀 지나쳤던 것같소. 내 사과하리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포권을 했다.

진짜 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자기 소행을 변명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의 후계자께서 남에게 머리를 숙일 일을 해서야 되겠어요?”

진상파가 여전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멸감으로 얼굴이 이지러지긴 했지만 모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는...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길 바라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진상파는 일신재를 떠났다.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거야.)

철관음을 거느리고 일신재에서 멀어지며 진상파는 생각했다.

(몸에 밴 못된 버릇이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더 나빠지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살아야한다면 겉모습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밖에...)

진상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뒤이어 분을 못 참고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졸장부가...)

진상파는 미간을 모으며 일신재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의 무사와 하녀들도 겁에 질려 일신재를 보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그 사이에도 일신재 안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용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가씨...”

걱정마. 나도 간단한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감해하는 철관음에게 말하며 진상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속 좁고 천박한 인간!)

진상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모용준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진상파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저런 졸장부와 부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진상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진상파가 바로 응한 것은 아니다. 뒷조사를 통해서 모용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망설이는 진상파에게 적극적으로 혼사를 권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정확하게는 의모(義母)였다.

이름이 조예(趙芮)인 진상파의 의모는 새석숭 진보륜이 늦으막이 거둔 후처였다.

비록 새석숭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예는 황금성의 가장 큰 어른이다.

의모의 강력한 권유도 있고 해서 진상파는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키워온 황금성을 탐욕스러운 떨거지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혼인을 물릴 수도 없다.)

진상파의 손이 핏줄이 드러나도록 강하게 쥐어졌다.

(결국 저 못난 인간을 길들이는 것 외에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진상파는 거푸 심호흡을 하여 참담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렸다.

 

* * *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제왕성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소성주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휘해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때문이다.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이 십팔 년 만에 맞이한 경사다.

무림의 거의 모든 방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축하하기 위해 제왕성을 찾았다.

제왕성의 식솔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하객들을 대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모여 있는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진소저가 기선을 제압했군!”

제왕성의 부()성주 중 한명인 살천인조(殺天忍祖)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제왕성에 부성주라는 직책은 없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처음으로 부성주 두 명이 세워졌다.

납치당한 아들을 찾는 데 전념하던 섭장천은 자신을 대신하여 제왕성의 대소사를 꾸려갈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성주라는 직책은 그렇게 생겼으며 그중 한명이 살천인조다.

인조(忍祖)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천인조는 왜국(倭國) 출신의 전설적인 자객이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지만 현역일 때의 살천인조가 노린 표적은 결코 죽음을 면치 못했었다.

비록 섭장천 때문에 신주이십팔숙에는 끼지 못하지만 살천인조는 섭장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세고수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인조! 소성주가 느꼈을 수모와 모멸감을 생각해보시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붉은 빛 털로 뒤덮인 거구의 중이 화등잔같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불곰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격을 자랑하는 노승의 별호는 혈가람(血伽藍)이다.

혈가람은 소림사 출신으로 소림사 당대 방장에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혈가람은 성격이 급하고 살기가 넘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일단 때려죽이고 보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천명이 넘는 목숨이 혈가람의 손에 희생되자 결국 소림사는 혈가람을 파문시켜버렸었다.

비록 소림사에서 쫓겨난 몸이지만 혈가람의 무공은 막강했다.

섭장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인물이 혈가람이다.

혈가람도 제왕성의 부성주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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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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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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