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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사로잡힌 여인

 

 

휘익!

질풍같이 내달리던 당혜선이 돌연 급정거했다.

"...!"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고검추는 흠칫했다.

당혜선이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단애 위였다도끼로 쪼개놓은 듯 쩍 갈라진 절벽 아래로는 거친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청룡탄(靑龍灘)!

 

기련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가는 험한 물줄기다산속을 수백 리 치달린 거친 계류는 황하와 이어진다.

당혜선이 멈춰선 단애는 그 청룡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콰르르!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다.

팽가촌에서 청룡탄까지의 거리는 오십 리가 넘는다당혜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으음... 틀렸단 말인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던 당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검추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당혜선은 선녀곡을 벗어난 직후부터 추격이 따라붙은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련산에서도 험한 곳을 골라 치달렸건만 끝내 추격을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추격에 가세한 자의 속도는 놀라웠다처음에는 이십여 리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십리 안쪽으로 따라붙었다.

혼자라면 어찌 어찌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고검추를 안고 그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자는 사신각주 본인일 텐데... 추아만이라도 그 살인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비장한 표정이 된 당혜선은 고검추를 안고 우측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바위들 사이를 지나자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입구에 바위들이 겹쳐 있어서 밖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다.

당혜선은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는 맹수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었다.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표범이 석벽 근처에서 돌연 사라졌었는데 피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굴 안에서 죽어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숨기면 누구도 추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파팟!

동굴로 들어간 당혜선은 고검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후 바닥에 눕혔다.

동굴 입구는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멀지 않은 곳으로는 청룡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내공이 제 아무리 심후한 자라도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고검추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고검추는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당혜선을 바라보았다.

대략 반 시진(1시간)쯤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혜선은 혈도가 짚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고검추를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혈도가 풀리더라도 팽가촌으로는 돌아가지 마라사신각의 악귀들이 팽가촌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대신 복우산(伏牛山)에 자리한 호천무맹으로 가서 철봉황(鐵鳳凰고현경(高玄鏡)이란 아이를 만나라내 이름을 대면 그 아이가 널 돌봐 줄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검추를 내려다보던 당혜선은 동굴을 나갔다.

휘익!

당혜선은 동굴 안에 누워있는 고검추를 한 번 더 돌아본 후 새처럼 날아올라 사라졌다.

(어머니...!)

고검추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사신각의 무리들을 유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속내와 달리 고검추는 말을 할 수도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무사하기를막혀있는 혈도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헌데 당혜선이 사라지고 일다경쯤 지났을 때였다.

스악!

한 줄기 검붉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동굴 앞을 스쳐지나갔다.

(... 사신각의 살인귀들 중 한명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검추는 곁눈질로 동굴 밖을 살펴보았다.

엇갈리게 서있는 바위들 틈새로 동굴 밖이 보인다.

하지만 나타났던 자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몸놀림이 어머니에 못지않은 걸 보면 사신각이란 조직의 두목일지도 모른다.)

고검추는 속이 타들어갔다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곳이 당혜선이 사라진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셔야할 텐데...)

고검추는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의 심정이라는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어머니가 과연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고검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반시진은 지나야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의 고검추에게 반시진은 말 그대로 여삼추(如三秋)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라락!

당혜선과 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쪽에서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사신각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오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굴 밖을 주시했다.

휘익!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동굴 앞으로 날아 내렸다.

(!)

그 직후 고검추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타난 자는 검붉은 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얼굴은 같은 색의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부분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신각주였다.

헌데 사신각주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머니!)

고검추는 기겁했다사신각주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여인은 바로 당혜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결국 달아나지 못하고 사신각주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 불리던 흑모철웅조차 쓰러트린 당혜선이다.

그런 그녀가 별 저항도 못하고 사로잡힌 것만으로도 사신각주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가년이 이 근처에서 잠깐 지체했었는데...)

사신각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심후한 공력으로 당혜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이 이쯤에서 잠시 멈췄던 것을 알아차렸었다.

사신각주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서 딱히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천시지청술을 펼쳐서 탐색하려고 해도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탄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흐르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당혜선이 의도한 대로 사신각주는 지척에 숨어있는 고검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털썩!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신각주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당혜선을 바닥에 던졌다.

"...!"

모질게 바닥에 던져졌지만 당혜선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움직이려는 시도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짚인 듯 했다.

"당혜선더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복마신검을 내놔라."

사신각주는 힘없이 누워있는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복마신검을 내놓으라니...?"

당혜선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흐흐흐알만한 인간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인데 발뺌할 작정이냐?“

사신각주는 칙칙한 살기가 서린 눈으로 당혜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혜선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복마신검을 어떻게 내놓는단 말이냐?"

"그럼 네년은 왜 십칠 년 전 호천무맹을 도망치듯 떠났느냐?"

"...!"

사신각주의 이어진 추궁에 당혜선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정관음 능벽운을 제외하면 고창룡과 가장 가까웠던 건 바로 사매인 네년이었다당연히 고창룡은 죽기 전에 네년에게 복마신검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신각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헌데 복마신검이라니... 십칠 년 전 철사자 고창룡이 사모를 겁탈하고 죽은 참사가 사신검중 복마와 관련 있단 말인가?

고창룡이 죽은 이상 오직 네년만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그러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발뺌을 해볼 생각은 마라

사신각주가 쓰고 있는 복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테면 죽여라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내 입에서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혜선은 단호하게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네년이...!"

사신각주의 두 눈이 살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자는 당혜선의 태도에 격노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수단이 없었다.

사실 사신각주는 당혜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의 성격이 얼마나 당찬지 잘 알고 있었다당혜선은 일단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고문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섭혼술을 쓰면 입을 열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된다.

문제는 사신각주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가공할 고수가 기련산에 들어와 있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고수에게 포착되기 전에 어떻게든 당혜선의 입을 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신각주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좋다네년의 입에서 복마신검의 행방을 듣는 것은 포기하겠다그 대신 다른 것을 갖도록 하지."

사신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당혜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당혜선은 불길한 예감에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복마신검은 포기하고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중 한 명이었던 네년의 속살 맛이나 봐야겠다."

사신각주는 음험한 눈으로 당혜선의 풍만한 몸매를 쓸어보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

당혜선의 분노에 찬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상의를 찢어버리듯 단번에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흐윽!”

사신각주는 분노와 수치로 떠는 당혜선의 치마마저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제 당혜선은 작은 속곳으로 은밀한 곳만 가린 민망한 자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럼 네 년의 꿀단지도 구경해볼까?"

사신각주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속곳에도 손을 댔다.

"... 안된다제발 이러지 마라!"

사신각주의 손이 속곳에 닿자 당혜선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지척에 고검추가 숨어있다.

아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했다.

당혜선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혈도가 찍힌 상태라 혀를 깨물 수도 없다.

본좌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면 복마신검의 소재를 대라.”

사신각주는 당혜선의 속곳으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당혜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신각주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모른다난 복마신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그렇게 결심했다니 어쩔 수 없군.”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살기를 뿜어냈다겁탈하겠다는 협박도 당혜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의 그같은 반응도 사신각주가 예상한 것이다.

흐흐흐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마지막 남아있던 보루인 작은 속곳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흐윽!"

하체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 당혜선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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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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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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