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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인들의 제안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가장 빨리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주시오. 건량(乾糧;마른 음식)도 사흘치 정도 포장해주고...”

강유는 점소이에게 동전을 넉넉히 건네주며 말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손으로 동전을 받으며 굽신거렸다.

재빠른 셈으로 최소한 한 두 냥은 남는다는 걸 확인한 점소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점소이는 동전을 세면서 희희낙락 하며 주방쪽으로 갔다.

(장강을 건넜으니 여정의 절반쯤은 지난 셈이다.)

강유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안탕산을 떠난 게 사흘 전이다.

전에도 아버지를 따라 안탕산을 내려온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강유 혼자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앞으로 사나흘만 부지런히 가면 숭산(崇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품속에 오른손을 넣으며 생각했다.

 

<숭산 태실봉(太室峰) 뒤쪽에 고불암(古佛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아버지 강조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품속에서 꺼낸 강유의 손에는 여자들이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가 하나 들려있었다.

네모 난 녹옥(綠玉)에 호박(琥珀)으로 만든 구슬이 몇 개 달려있는 노리개다.

 

<고불암에 기거하는 노승에게 이 노리개를 건네주면 대신 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오는 게 아비의 심부름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면서 강유는 강조의 말을 떠올렸다.

강유가 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하는 곳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패옥(佩玉)이다.)

강유는 노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리개의 재료인 녹옥과 호박은 그리 질이 높은 게 아니었다.

녹옥의 색은 탁하고 호박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있다.

그렇다고 세공 솜씨가 정교한 것도 아니다.

네모 난 녹옥에는 봉황이 투각(透刻)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솜씨가 어설프고 조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시장통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장신구일 뿐이다.

(단지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한 걸 보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인 것같긴 하다.)

강유는 반질반질한 녹옥의 모서리를 만져 보았다.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는 것 외에는 값어치가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이 패옥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노리개에 얽힌 사연이 궁금한 강유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그저 아버지의 분부만 이행하면 되니까.)

강유는 생각을 그치며 노리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나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고 혼자 강호에 보내신 것일지도...)

노리개를 챙기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의자에 피부가 검고 흰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물론 두 노인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였다.

(이 노인들...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앞자리에 와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유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마만 조금 찡긋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다.)

강유는 한 눈에 흑백신귀가 자신은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지라 묵묵히 흑백신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흑백신귀도 그런 강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

국수 한 그릇을 얹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와 흑백신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언제 이 자리로 옮겨왔지?)

점소이는 당황하여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 어떻게 할까요 손님?”

놓고 가시오.”

강유는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두 노인을 향한 채...

점소이는 흑백신귀의 눈치를 보면서 강유 앞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두 분 노야, 식사는 하셨는지요?”

강유는 젓가락을 집어들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던 점소이는 혹시나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가 묻자 백귀는 끄덕이고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두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강유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후배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히...”

강유의 권유에 흑신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백괴가 점소이에게 가라고 손짓을 해서 막았다.

... 건량은 포장해놓았으니 나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강유에게 굽신거렸다.

(이상한 늙은이들이잖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자리에 합석이나 하고 말이야.)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이자니 좀 부담스럽군.)

강유는 쓴웃음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세외기인들이고 내게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겠지.)

후룩! 후루룩!

가능한 빨리 식사를 마칠 생각에 강유는 쉬지 않고 국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용골호체(龍骨虎體)!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의 골격이고 체질이야>

 

부지런히 국수를 먹는 강유를 보면서 흑백신귀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주님 못지않은 자질을 지녔어.>

<어떤 면에서는 성주님보다도 빼어날 정도야>

<이놈을 후계자로 삼으면 우리 신귀각(神鬼閣)이 제이(第二)의 제왕성이 될 수도 있겠어.>

<성주님께는 불충한 생각이지만 자네 생각에 동의함세.>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우리 신귀각의 후계자로 삼아야지.>

 

흑백신귀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이에 이윽고 강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국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것이다.

후배는 가부(家父)의 명을 서둘러 수행해야만 하는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흑백신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강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강유, 한 달 후면 열아홉 살이 됩니다.”

일어나려던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강씨였군.”

기초가 튼튼한 걸 보니 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가르쳤어.”

흑백신귀는 또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시차 없이 말을 해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강유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당금 무림에 강씨 성을 지녔으면서 아들을 너 정도로 기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구파일방과 삼문육가(三門六家)에도 강씨성을 쓰는 인간들이 제법 있지만 후손을 잘 둔 놈은 없고...”

흑백신귀는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무명지배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

결국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볼수록 놀라운 인물들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까지 단번에 추론 해내다니...)

흑백신귀의 분석을 들은 강유가 놀랄 때였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이신 일제(一帝) 철면제왕님은 당연히 강씨가 아니고...”

또 쌍비(雙秘)는 여자인 데다가 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

삼기(三奇)와 사신(四神) 중에도 강씨가 둘 있지만 너무 늙었으니 제외...”

결국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중 한명이겠군.”

흑백신귀의 분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흑백신귀는 동시에 강유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주시했다.

오왕, 육패, 칠절에 속하면서도 성이 강씨고 검법이 특기인 놈이라면...”

이제야 알겠도다!”

! !

흑백신귀는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네 아비는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겠구나.”

그렇지? 맞지?”

흑백신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두 분 노야의 해박한 견문에는 후배,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강유는 다시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소요신군이라 불리는 분이 후배의 가부입니다.”

역시 그랬어!”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 백미(白眉)라 불리던 소요신군의 자식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흑백신귀는 동시에 무릎을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를 높이 쳐주시니 자식 된 입장으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두 분 노야께서는 후배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십년 안에 널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마.”

흑백신귀는 다시 동시에 말하면서 몸을 강유 쪽으로 숙였다.

후배를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반면 강유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두 늙은이는 신주이십팔숙중 일제 철면제왕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상좌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창 때는 마교와 혈교의 교주들도 우리를 두려워했을 정도야.”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당금 무림에 철면제왕을 제외한 신주이십팔숙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강유가 당혹스러워할 때였다.

노부들의 별호는 흑백신귀이며 노부가 그중 흑신이다.”

노부가 백귀다.”

우린 마교와 혈교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신귀각의 공동 문주들이다.”

사연이 있어서 남의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분은 아니다.”

흑백신귀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흑백신귀는 물론이고 신귀각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는 아버지 강조로부터도 흑백신귀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신주이십팔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쌍비, 삼기에 필적하는 고수가 존재하고... 역시 세상은 넓구나.)

강유는 강호에 기인과 고수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며 흑백신귀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모자란 후배를 어여삐 보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승을 모시는 일은 실로 엄중한 대사인지라 후배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리가 있군.”

만일 네 아비 소요신군이 허락하면 노부들의 제자가 되겠느냐?”

가부가 허락하면 두 분 노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

네 아비의 허락이 떨어지면 넌 우리 신귀각의 차기문주다.”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강조가 당연히 아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노친네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고...)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가부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 치고 우리 두 늙은이의 이목이 뻗어있지 않은 곳은 없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고개 저어 강유의 말을 막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강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다니 후배는 안심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냐! 일 봐라.”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게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답례했다.

강유는 벗어놓았던 봇짐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객잔 입구로 간 강유는 점소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았다. 며칠간 먹을 건량이다.

건량 꾸러미를 건네받은 강유는 서둘러 객잔을 나갔다.

흑백신귀의 시선은 그런 강유에게서 촌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볼수록 기막힌 자질이야.”

흑신은 강유가 주점에서 나가는 걸 보며 새삼 감탄했다.

반면 백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본문의 오랜 숙원인 신귀합벽(神鬼合壁)을 저놈이라면 완성해낼 지도 모르겠어.”

흑신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백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자네, 강유 저놈에게서 뭐 느낀 거 없는가?”

흑신의 물음에 백귀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몸을 망칠 수도 있는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의 교정이야 우리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무공 얘기가 아닐세. 저 놈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떠올려 보게.”

흑신의 대답에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연상시킨다? 뜬금없이 저놈이 누구를 닮았다고...”

백귀의 말에 대꾸하던 흑신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 맙소사!”

얼마나 놀랐는지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네.”

백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놈이 성주와 흡사한 분위기를 지녀서 마음이 불편했던 걸세.”

그럼... 그럼 저놈이 혹시 십팔 년 전에 귀면지존이 납치해간...”

흑신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아닐 걸세.”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정인군자로 소문났으며 출신도 확실한 소요신군이 저놈 아비일세. 소요신군의 아들이 생사가 불명한 소성주일 리는 없어.”

그렇긴 하네만... 핏줄로 이어지지 않고는 저렇게 분위기가 흡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절대자(絶代者)의 운명을 타고 나서 성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네.”

그럴 가능성도 있군.”

백귀의 말에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소요신군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세.”

그놈을 만나보면 강유에게서 성주가 연상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우리 두 늙은이의 죄책감이 강유 저 아이를 소성주와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고기재를 후계자로 삼게 될 기대로 들떴던 두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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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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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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