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무협소설/북두무맥'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20.03.27 [북두무맥] 제 25장 닭 쫓는 노인
  2. 2020.03.26 [북두무맥] 제 24장 단지맹정,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3. 2020.03.26 [북두무맥] 제 23장 최초의 패배
  4. 2020.03.25 [북두무맥] 제 22장 삼녀삼심
  5. 2020.03.24 [북두무맥] 제 21장 여자의 마음을 모른 죄
  6. 2020.03.24 [북두무맥] 제 20장 풍진세월
  7. 2020.03.23 [북두무맥] 제 19장 미녀각기검
  8. 2020.03.23 [북두무맥] 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9. 2020.03.22 [북두무맥] 제 17장 소년이여. 창평곡에 와서 검을 받으라.
  10. 2020.03.22 [북두무맥] 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11. 2020.03.21 [북두무맥] 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2
  12. 2020.03.20 [북두무맥] 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
  13. 2020.03.20 [북두무맥] 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14. 2020.03.19 [북두무맥] 제 12장 지극한 정성
  15. 2020.03.18 [북두무맥] 제 11장 싹 트는 연정
  16. 2020.03.17 [북두무맥] 제 10장 단 둘만의 절지, 낙원
  17. 2020.03.16 [북두무맥] 제 9장 가슴 떨리는 치료법
  18. 2020.03.16 [북두무맥] 제 8장 신비한 계곡
  19. 2020.03.15 [북두무맥] 제 7장 진법에 빠진 남녀
  20. 2020.03.14 [북두무맥] 제 6장 같은 말을 탄 원수
  21. 2020.03.13 [북두무맥] 제 5장 말괄량이의 가출
  22. 2020.03.13 [북두무맥] 제 4장 떠버리 기재
  23. 2020.03.12 [북두무맥] 제 3장 독안룡
  24. 2020.03.12 [북두무맥] 제 2장 사로잡힌 거물
  25. 2020.03.12 [북두무맥] 제 1장 오수부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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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닭 쫓는 노인

 

 

백남빈은 배가 고플 때 외에는 조사동을 나가지 않았다.

나가 보았자 강미루도 없고 흑왕도 없는데 새소리만 듣기는 싫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백 조사의 사자검결과 진룡 사부의 검결만을 외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어 나머지 십일 인의 사조들의 검결도 모두 외우기로 하였다.

 

한번 몰두하여 깊이 빠지자 세상의 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사조들의 검결을 외우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혹시 틀린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자검결은 본래 그 뜻이 애매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읽어도 읽어도 쉽게 외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이것저것 뒤죽박죽되어 버리곤 했다.

다른 사조들의 검결 역시 이백조사의 사자검결에서 파생한 탓에 비슷한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이백과 진룡의 검결만을 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백남빈은 먼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검결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암송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거듭거듭 확인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찾아먹고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다시 새로운 검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암기가 확실히 되어갈 수록 각각의 검결들 사이에 무언가 서로를 구분 짓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열세 개의 검결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독립성이 뚜렷하여 전혀 섞일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백남빈이 조사동에서 검결을 외느라고 쳐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큰비가 몇 번이나 왔다.

겨울이지만 창평곡은 눈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큰비가 여러 번 왔다는 것은 큰 눈이 자주 왔다는 말이 된다.

며칠 전 그는 열세 개의 검결을 전혀 헷갈리지 않고 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의 점검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

 

이날도 백남빈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요기를 하기 위해 조사동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평곡에 들어 온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미루가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미루가 떠나고도 수십일은 족히 흘렀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녹지를 지나치는데 그날따라 겨울 장마에 무너진 오두막이 그의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한데 풀색과는 전혀 다른 남색 천이 사각으로 접혀져 빗물을 튕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전에 입었다가 미루에게 준 남색상의였다.

백남빈은 그것을 힐끗 보았다.

전에도 몇 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색상의 속에 어떤 각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른 날에는 옷자락이 부풀어서 알 수 없었던 것이 옷감이 비에 젖어 달라붙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루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했었는데... . 남색상의... 뭐였더라?)

백남빈은 그 사이 강미루의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가가서 접혀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속에 다른 것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확 펼쳤다.

펄럭!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갑자기 기름종이에 싸여진 한권의 책이 옷자락 속에서 빠져나와 앞쪽으로 날아갔다.

백남빈의 몸이 일렁이는 순간 땅으로 떨어지던 책은 그의 손에 빨리듯이 들어갔다. 녹지의 물이 그 정도로 깊은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다.

 

<八陣圖解>

 

표지에 적힌 그같은 제목이 백남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미루가 한 말은 이 책을 찾으라는 거였구나. 그녀는 창평곡을 들고 날 수 있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나 몰래 감추고 있었고...)

백남빈은 비로소 강미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자신들의 집안은 원수나 다름없다.

그 때문의 두 사람의 사랑은 오직 이곳 창평곡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강미루는 창평곡을 나가기 싫었고 팔진도해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강미루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백남빈은 팔진도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강미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바닷가의 정월 바람은 차갑기도 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이 푸른 바다색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도처에서는 패권다툼이 일어나고 무황성과 신랑성의 격돌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산산맥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바닷가는 세상의 혼란과 상관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사별의 슬픔은 목이 메고

생이별은 항상 가슴 쓰리네.

강남은 풍토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조차 없구나.

친구(;이백)가 내 꿈에 찾아오니

나를 오래도록 생각함일세.

평소의 혼이 아닌 듯하여 두려우나

길이 멀어 알 수가 없네.

그대의 혼이 올 때 풍림(楓林) 푸르더니

돌아갈 때 관문(關門) 요새(要塞) 어둡구려.

그대는 지금 유배되었건만

어찌 날개 얻어 여기 왔는고.

지는 달이 내 집 들보 비추는데

그대 얼굴 아닌가 의심하였노라.

물은 깊고 파도 거치니

부디 교룡(鮫龍)에게 잡히지 말게.

 

바닷가를 따라 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낭송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녹색의 장검을 어깨에 둘러맨 청년이 산길에 쌓인 눈을 밟고 걸어오면서 책을 펴든 채 읽고 있었다.

청년은 창평곡을 나선 백남빈이었다.

무황성으로 가는 일은 급했었지만 자신이 알려야 할 소식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야심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증빙물(證憑物)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양부의 명령이므로 무황성으로 가서 군명(軍命)을 완수해야겠지만 거들떠보기나 할지 몰랐다.

자연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밤 꿈에 강미루가 보여 울적했었다.

그래서 창평곡을 나설 때 갖고 나온 여러 권의 시집 중 하나를 뒤적이자 두보가 이백을 꿈에 보고 지은 시가 있었다.

그 정이 흡사 자신이 강미루를 그리워하는 심정 같은지라 길을 걸으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의 심금(心琴)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길 옆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상투를 튼 노인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 떨어지는 소리에 백남빈이 고개를 돌릴 때 노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는데 노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이어 노인은 다시 고개를 낮추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동에 백남빈은 어리둥절했다.

백남빈이 갸웃하며 다시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고수였구나!)

백남빈은 노인의 유령같은 신법에 놀라고도 감탄했다.

노인은 백남빈이 무슨 소리라도 낼까 싶어 주의를 주면서 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백남빈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끄는데로 따라갔다.

길 옆 숲속의 커다란 나무들을 몇 개 지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백남빈의 귀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지키고 서있다가 저 나무사이에서 작은 짐승이 뛰쳐나올 때 크게 소리 한번만 질러주게. 그러면 내 평생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백남빈의 소매를 잡고 있는 노인의 입술이 옴찔거리며 전음술(傳音術)을 펼친 것이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지라 백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까닥였다가 드니 상투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 외에 다른 무공은 평범한 백남빈에게는 부럽게만 느껴지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부러움이 일어 노인이 서있었던 곳을 한 번 더 쳐다볼 때였다.

!

갑자기 앞쪽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노란 그림자가 휙 뛰쳐나왔다.

백남빈은 소리를 질려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사사삭!

노란 그림자는 쏜살처럼 백남빈의 옆을 스쳐 다른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앞이 어른거리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바보같으니... !"

욕을 하면서 땅에 침을 탁 뱉은 노인은 백남빈을 한번 노려본 후 노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노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백남빈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품속에 집어넣고 노인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은 따로 신법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창평곡에서 내공과 외공을 깊이 쌓게 된 후로 몸이 강해지고 가벼워져서 바람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를 오리쯤 달려가니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말라버린 가시덤불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백남빈이 자기를 쫓아 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도 고수였을 줄은 몰랐구만."

"아닙니다. 저는 무황성의 일개 무사에 불과 합니다."

백남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빈정거렸다.

". 언제부터 무황성에서 그대같은 절세고수를 일개 무사로 두기 시작했을꼬?"

백남빈은 오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결이 전혀 흩트려 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걸 보고 백남빈이 실력을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육정풍(陸靖風)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아무튼 그딴 것은 조금 있다가 따지자. 지금은 바쁘니까."

노인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다시 가시덤불 쪽을 돌아보았다.

백남빈은 육정풍이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는 않아서 육정풍이란 노인과 함께 가시덤불 쪽을 살펴보았다.

무성한 가시덤불 맞은편에는 노란색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닭인 듯 한데 노란 깃털이 선명하며 부리가 강철같이 야무지고 새빨간 벼슬이 멋있어 보였다.

그 노란 산닭의 뒤는 절벽이었다.

(왜 이 노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지 알겠다. 만약 덤불을 건드리기만 하면 닭은 절벽으로 뛰어 내리고 말겠지.)

백남빈은 노란 산닭이 맘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닭도 백남빈과 육정풍을 쳐다보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척 오만해 보이는 자태였다.

"! 네놈도 저 황계(黃鷄)를 탐내고 있구나.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육정풍이 백남빈에게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저놈은 내가 장백산(長白山)에서 발견하여 여기까지 몰아온 거야. 비록 아직 내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내 것이나 다름 없다구."

"어째서 별 것 아닌 산닭 한 마리를 이천 리 넘게 쫓으면서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백남빈의 물음에 육정풍이 눈을 부라리며 얼굴표정을 무섭게 했다.

"별것 아니라고? 저 황계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놈!"

백남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열네 살에 무황성 등천제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양부의 영향으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를 무식한 놈으로 취급하자 백남빈은 영 기분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황계라는 이름의 산닭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저놈의 황계를 내가 잡아버려야지. 이 영감이 얼마나 애걸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계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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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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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단지맹정(斷指盟情),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강미루는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녹지 옆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을 헤치고 흙을 조금 파내자 접혀진 남색 옷자락이 보였다.

강미루는 잘 접은 남색 옷을 두 손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백남빈의 머리 옆에 놓았다.

세상 모든 일이 바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남빈의 가슴과 코에 손을 대보니 형부의 말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가람이 보고 있음에 불구하고 백남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가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광평검법은 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형의 기운인 광평기(廣平氣)를 뿜어내어 상대방을 팔방(八方)에서 압박한다.

그런 후에야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상대방을 검으로 쓸어 베는 것이다.

일검을 교환할 때 신가람의 광평기는 팔방에서 백남빈을 압박하여 들어갔었다.

그러나 백남빈이 펼쳐낸 미녀각기검에는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자검결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가람의 광평기는 사자검으로 펼친 백남빈의 미녀각기검법에 휘말려 방향을 바뀌었고 검의 진로도 틀어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백남빈의 검에서 예리한 검기가 긴 나선형을 이루며 폭출되어 나왔다.

미녀각기검의 나선형 검기는 날아드는 동안 수없이 궤적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디로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같아서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백전노장답게 신가람은 순간적으로 둔형보(遁形步)를 펼쳐 땅에 스치듯이 하여 백남빈의 뒤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매자락은 백남빈의 나선형 검기에 베어져 허공으로 날렸다.

동시에 신가람이 둔형보를 펼치며 다시 내뿜은 광평기에 백남빈은 심맥을 다쳤던 것이다.

신가람이 수 십 종의 검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백남빈의 미녀각기검을 깨뜨릴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백남빈에게 패할 리야 없겠지만 일초에 그를 제압한 것은 다분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젊은 무사의 검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말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신가람의 눈에 강미루가 백남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들어왔다.

마음에서 살기가 꿈틀거렸으나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인물!"

강미루는 형부가 안타까워하며 백남빈을 높이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백남빈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서며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 형부는 영웅이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가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하여 강미루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부탁만은 꼭 들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는 강미루의 고집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치 강하다.

죽겠다고 결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신가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들어는 보자구나."

"이곳에는 설청묘라는 야생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늘 갖고 싶었지만 우리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답니다. 형부가 그 고양이를 잡아 주기만 하면 두말 않고 따라 가겠어요."

신가람은 창평곡을 쭉 훑어보았다.

잘해야 만평 남짓인 곳에 숨어 있을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이 귀여운 말괄량이 처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우리가 전에 있었다는 보금자리를 찾아가 보았으나 옮겨 버렸는지 눈에 뛰지 않았어요. 형부는 능력이 신선과 같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새인가 강미루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설청묘는 찾기가 어렵다. 잡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형부가 잡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올 리 없다. 그러면 저 사람은 그 사이에 정신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든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야 저 사람의 모습이 영영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눈물이 어리는 강미루였다.

신가람이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전에 있었다던 야생 고양이의 보금자리는 어디냐?"

미루는 북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 뒤에 있는 절벽 틈이었어요."

신가람은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숲으로 날아들어 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시위(示威)인 듯 했다.

 

신가람이 숲으로 떠나자 강미루는 즉시 백남빈을 품에 안았다.

사랑하는 임은 심하게 다쳐서 기절해 있는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스스로의 무능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녹지의 물을 생각해 냈다.

녹지로 달려가서 신발로 가득 물을 떠왔다.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자 물은 금방 우유빛으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물을 백남빈의 입을 벌리고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팔다리를 주물러 주자 백남빈이 마침내 눈을 떴다.

"당신, 아직 가지 않았군!"

강미루를 본 백남빈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열흘 전 백남빈이 한 청혼에 대한 답이 이제야 나왔다.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듯 했다.

"그 사람은?"

백남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강미루는 힘없이 북쪽 숲을 가리켰다.

"설청묘를 잡아달라고 했어요. 아마도 금방 잡아 오겠죠."

"미루, 우리 영원토록 잊지 맙시다."

백남빈은 격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제 가슴에 당신이 준 흔적이 남았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강미루는 가슴을 누르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백남빈은 그녀의 그 말에 죽음보다도 더 깊은 맹세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대의 형부를 따라 가시오. 언제고 반드시 대려장으로 찾아가서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하늘과 땅을 두고 피로서 맹세하오."

백남빈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사자검을 들어 강미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 첫마디를 잘라버렸다.

!”

순간 피가 튀고 강미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손을 마주 쥔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진심과 맹세가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신가람이었다.

그는 벌써 양손에 한 마리씩의 눈같이 흰 설청묘를 잡아 쥐고 기척도 없이 돌아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피로 물든 손을 놓고 일어섰다.

"소녀 강미루는 영원토록 당신만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신가람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보름 남짓 함께 지내면서 처제와 저 철령보의 청년무사 사이에서는 깊은 정이 생기고 말았다.

처제의 신세가 벌써부터 평탄하지는 않아보였다.

저 청년무사를 잊게 하는 방도는 가능한 빨리 멋진 사내를 찾아서 처제와 맺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진 밖에는 본장의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너를 찾아서 보름이 넘도록 돌아다니는 바람에 차질이 적지 않았다."

돌아서는 강미루의 손을 잡으며 백남빈이 품에서 하얀 옥패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강미루의 손에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표(情表)였다.

하지만 강미루는 살래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옥돌보다는 당신의 잘려진 손가락을 갖고 싶답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남빈의 피 묻은 손가락 한마디를 손수건에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남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우리가 떠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도록 해라."

신가람이 백남빈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백남빈은 그에게 악의를 품을 수 없었다. 신가람은 적인 자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법도를 갖고 대한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신가람은 그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많이 닮았어."

백남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알 수 없어 설핏 미소만 지었다.

강미루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골짜기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털어 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헤아리고 있던 백남빈이었다.

"삐이익!"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히히힝! 두두두!

흑왕이 옛 주인의 부름을 받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은 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서 흑왕의 등에 앉았다.

신가람 앞쪽에 앉혀진 강미루가 비명처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색상의(藍色上衣)! 남색상의를 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강미루의 말이 끝날 쯤 흑왕은 이미 동쪽 절벽까지 달려가있었다.

몇 번 흑왕의 모습이 바위들 틈에서 보였는데 다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미루는 신가람에게 이끌려 창평곡을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강미루가 떠나버린 창평곡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백남빈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가 떠나며 부르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꿈결인양 아스라히 맴돌고 있었다.

백남빈은 일어서서 동부를 향해 비칠비칠 걸어갔다.

잘려진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검의 전인이 된 후로 난 벌써 사랑하는 여인을 멀리 보내고 말았구나. 이것이 정말 사자검을 익힌 때문일까?)

정사초 사조의 한탄어린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자검의 전인의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도 나와 같이 사자검결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도 같은 신세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말 것이다!

 

백남빈은 조사동에 들어가서 여러 사조 앞에서 한바탕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 졌다.

감정이 풀어져 버린 듯, 어느새 낙천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가 되자면 마음을 다스리는데 백남빈해져야 한다.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툴툴 털어버리고 오직 호쾌한 마음으로 사자검을 휘둘렀다.

신가람과 대적하면서 백남빈의 검술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외고 있는 사자검결이야말로 절학 중의 절학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힘껏 뻗어도 그의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검기만이 폭출되어 미녀각기검의 방향을 따라 그물처럼 뻗어나갈 뿐이었다.

신가람과 대적할 때 미녀각기검이 광평기를 되돌려 놓지 못했더라면 백남빈 자신은 신가람의 검이 이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미녀각기검법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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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최초의 패배

 

 

백남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녹지 옆에 서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넓은 얼굴, 크지 않은 것이 없는 오관(五管)...

대려장의 신비고수 신가람의 풍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범인(凡人)과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태산이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남빈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지금의 나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인물이다.)

강미루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신가람을 보면서 백남빈은 자신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마치 산이 움직여서 다가오는 듯하다.

강미루가 틈만 나면 자기 형부를 자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윽고 신가람과 함께 돌아온 강미루가 백남빈의 팔을 잡으며 뭐라 말하지만 백남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아는 어떤 분과 닮았구나."

신가람이 온화한 음성으로 백남빈에게 말했다.

어투와 달리 백남빈을 천천히 살펴보는 신가람의 눈에는 깊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백남빈의 모습은 신가람이 하늘 아래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며 또 존경하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은 신가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가람은 백남빈이 그저 철령보의 일개 무사인 줄로만 알고 있다.

신가람의 우호적인 말과 태도에도 백남빈은 미소만 슬쩍 지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와 상관없이 그를 적이라 생각하는 백남빈이었다.

"내 처제 미루에게 불손했던 점은 당사자인 미루가 원치 않으니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려장의 무사들을 상하게 한 책임은 져야 한다. 검을 들어라."

신가람은 느릿느릿 말을 하면서도 전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을 백남빈은 그때서야 보았다.

분명 명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보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검은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에 가려져 빛을 잃고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형부, 먼저 공격한 건 우리예요. 그러니 그를 탓할 수 없어요."

강미루가 팔을 벌려 백남빈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백남빈에게도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형부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백남빈은 강미루를 보지 않고 그녀 너머의 신가람에게 말했다.

신랑성의 침공은 시작되었습니까?”

신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산(陰山)과 백석산(白石山) 쪽의 장성이 돌파 당해서 무황성 분타들 중 묘아장(猫牙莊)과 양화보(兩華堡)가 신랑성에 떨어졌다."

신가람은 시종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몇 마디 말 속에는 격변하는 정세가 함축되어 있었다.

묘아장과 양화보는 철령보만큼이나 중요한 북방의 거점이다.

만리장성 바로 안쪽에 자리한 그 두 곳이 신랑성에 떨어졌다면 사태는 실로 엄중하다.

그 일대의 명나라 수비군도 와해되었을 게 분명하니 토곤이 결심만 하면 오이라트의 십만 기마대가 무인지경으로 중원에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나마 철령보는 신랑성의 요인들을 잡고 있어서 공격을 면한 상태다.”

신가람이 호의를 베풀 듯이 철령보의 사정도 이야기 해주었다.

자신들의 부성주와 토곤의 둘째 아들이 잡혀있으니 신랑성으로서도 철령보에는 쉽사리 도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빨리 도망쳐요!"

안도하는 백남빈의 귀에 강미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남빈은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루, 내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같소? 나도 명색이 무사요. 욕되게 하지 마시오."

하지만 강미루의 말은 아예 애걸조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형부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제발..."

백남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사자검을 힘껏 잡으며 신가람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비록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지라도 도망치지는 않겠소."

과연 인물이라 할 만하군. 그래야 네가 닮은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지.”

신가람이 백남빈의 사나이다움에 감탄을 표시했다.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감정이었다.

"앞으로 때를 잘 만난다면 능히 영웅(英雄)이 될 수 있겠어."

신가람은 허리에서 자신의 기도에 비하면 볼품없게 보이는 보검을 천천히 뽑았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신가람으로서는 미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후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리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강미루는 한쪽 옆으로 물러서서 제발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가슴 졸일 뿐이었다.

백남빈은 천천히 검을 뽑는 신가람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자검결 중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라는 구절이었다.

놀랍게도 신가람의 발검(拔劍)하는 태도가 바로 그 검결에 부합했다.

백남빈은 신가람의 몸 어디에도 검을 갖다 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막막해졌다.

그러면서도 백남빈의 몸은 자신이 만든 검초, 미녀각기검을 펼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공수를 겸비한 단 일초의 검식 미녀각기검만이 지금의 백남빈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허어...”.

신가람의 짙은 눈썹 끝이 약간 올라갔다. 천하의 무학종사(武學宗師)라고 자부할 수 있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기식(起式)이었기 때문이다.

베려는 것도 아니고 찌르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신가람에게는 백남빈의 몸이 검극(劍極;검의 끝 부분)에 다 가려져 버리는 듯이 느껴졌다.

게다가 백남빈의 윤기 있는 음성과 맑게 빛나는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승의 내공을 지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철령보의 일개 무사가 뜻밖에도 검술을 깊이 체득한 고수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당금 강호의 인물 중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남빈은 여러 가지로 신가람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대사형(大師兄)을 보는 듯해서 놀랐었다.

이어 백남빈의 의연한 태도에 놀랐고, 기이한 검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신가람은 검을 수평으로 뉘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그의 독문절기 광평검법(廣平劍法)의 기식(起式)이었다.

(이게 무슨...)

백남빈은 당혹감과 섬뜩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세하게 보면 볼수록 시선이 신가람의 몸에서 벗어나 자꾸만 옆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일부러 신가람를 보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 같았다.

미녀각기검으로 찌른다 하더라도 분명 신가람의 옆 쪽 허공을 찌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신가람이 검을 뽑는 순간 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이게 신가람이 지닌 무공의 무서움이다.

검을 든 적을 앞에 두고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죽여 달라고 목을 느리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나마 백남빈이 자꾸만 시선을 고쳐서 신가람을 향할 수 있는 것은 근본(根本)을 볼 수 있는 힘, 신명안(神明眼)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명안을 지닌 것조차 대사형을 닮았다.)

백남빈이 옆으로 흐르던 시선을 즉시즉시 수정해서 다시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신가람의 가슴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에게는 뛰어난 사형제들이 많지만 신명안을 지닌 인물은 오직 대사형뿐이었다.

(살려 둬야하나?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하나?)

신가람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맹렬하게 자라났다.

신명안까지 지닌 무서운 자질을 방치하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보면 볼수록 대사형을 닮아서 꺼려진다.

마음속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가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는 시시각각 짙어졌다.

백남빈도 자신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걸려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신가람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을 맞게 될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남빈은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웠다.

지금의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자검결뿐이다.

이전에 배운 삼재검법 따위는 신가람 같은 고수에게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이 마치 정지한 듯 지나며 백남빈의 머리에서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가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망부석 같았다.

반면 백남빈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신명안으로 흐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신가람을 보면서 그를 겨눈 사자검도 함께 움직인다.

(제발...)

옆에서 지켜보는 미루가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고 사는 긴박한 순간에 백남빈은 사자검결속에서 아지랭이같이 아른거리며 잡힐 듯 말듯한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신가람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의 머리에서 번개불같은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번쩍! 번쩍!

그는 그대로 미녀각기검을 펼쳐 고리같은 검기로 신가람을 공격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강미루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빡 했을 때 백남빈은 다시 사자검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있었고, 신가람은 그런 백남빈의 뒤쪽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팔락!

아무런 소리도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공중에서는 신가람의 동그랗게 잘려진 소매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풀 위에 내려앉을 때였다.

"훌륭하군. 훌륭해. 진정 멋진 검법이고 대단한 내공이었다. 족히 일갑자(一甲子) 수위는 되겠군. 내 일검을 받았으니 살려 주도록 하지."

몸을 휙 돌린 신가람은 강미루를 보면서 서늘해진 가슴을 숨기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의 일검(一劍)이 교환될 때 강미루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지 백남빈이 졌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강미루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백남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 처제.”

신가람이 다시 강미루를 재촉했다.

"형부, 그는 괜찮을까요?"

신가람의 태도에서 백남빈에 대한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 강미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지 그의 심맥(心脈)만을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무 이상 없을 것이다."

!‘

강미루는 비로소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무게를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신가람의 말은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다. 그의 말은 그게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다.

퍼억!

그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백남빈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달려가서 그를 안으려던 강미루는 멈칫했다.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면 형부가 혹시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백남빈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신가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떠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이 있어요."

신가람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태산같았지만 그것이 허락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강미루는 습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가람의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강미루 자신의 창평곡에서의 행복은 끝나버린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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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삼녀삼심(三女三心)

 

 

퍼억!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에 떨어진 예이연의 모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피가 흐르기 시작해서 삽시에 주변 바닥이 붉게 변해 버렸다.

진룡은 검으로 땅을 가리킨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별을 가린 구름이 은하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위사들이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짓쳐 들어오지 못했다.

스스스스스...

고요한 중에도 진룡의 몸 주위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좌중은 진룡이 뿜어내는 그 살기에 압도당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으하하하!”

그러던 어느 순간 내공을 실은 엄청난 웃음소리와 함께 사자검이 대리석 바닥을 쳤다,

!

대리석 바닥에 검이 닫았다 싶은 순간 진룡의 몸은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사자검이 닿았던 대리석바닥은 푸석해져서 그의 검에 실린 공력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위사들은 그를 추격할 생각조차도 못했다.

 

***

 

궁궐을 빠져 나온 진룡은 미리 알아 두었던 예지운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그의 얼굴은 바람에 밀리는 눈물로 얼룩졌다.

 

달리면서 어느 정도 진정된 감정으로 예지운의 집으로 넘어 들어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달리면서 가장 큰 본채를 찾았다.

이윽고 그 건물에 도착해서 창문 밑에 몸을 낮추고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지운의 거처가 틀림없었다.

진룡은 거리낌 없이 방문으로 걸어가 덜컹 열었다.

피가 묻은 사자검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었고 살짝 베어진 그의 가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예지운이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런 자객에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린 검을 잡았다.

진룡은 저지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을 베고 오는 길이다."

자르듯이 내뱉자 예지운은 그제야 상대가 진룡임을 알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진룡도 파양호대전 때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떠는 것도 잠깐, 예지운은 진룡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코웃음을 쳤다.

"내 동생이 그렇게 약한 줄 아느냐? 아비에게 쫓겨난 어리석은 놈아! 자 오너라! 단칼에 죽여주마."

"산산은 어디에 있느냐?"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진룡이 물었다.

"그년은 내가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잡소리 말고 어서 덤벼라."

예지운의 거친 말에도 한번 크게 좌절을 겪은 진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바닥을 가리키고 있던 진룡의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크악!"

순간 예지운의 왼쪽 손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사자검은 언제 휘둘러졌는지 그자의 손목을 자르고 다시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진룡의 검공(劍功)에 예지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룡의 무위(武威)는 일 개 장군에 불과했던 그자로서는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올라가는 사자검을 보면서 예지운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예지운이 들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진룡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런 진룡이 거인처럼 느껴진 예지운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였다.

천천히 올라가 허공을 가리키던 검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예지운의 오른쪽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팍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지운의 짝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새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공포와 불행을 맛보게 해주겠다!"

진룡은 단호하게 내뱉으며 땅을 가리키고 있던 검을 다시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여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그들만의 공간을 부수며 들려왔다.

"... 오라버니?"

산산이었다.

 

털썩!

산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지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지운이 죽였다고 한 누이동생 산산이 문간에 서있었다.

"너는 살아 있었구나."

진룡은 산산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산은 물러서면서 물었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죽었나요?"

"아직 죽지 않았다. 쉽게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진룡은 인간 마음의 추악함을 경험한지라 어느 정도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리며 다시 예지운에게 돌아섰다.

"그를... 그를 죽이지 마셔요."

산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진룡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산산은 진룡의 옆을 지나 예지운에게로 달려가더니 잘려져 피가 흐르는 그의 손목을 치마자락으로 감싸고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진룡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산산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떨면서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 저는 이 사람의 아기를 가졌어요."

진룡이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낸 그 원수를 살려 주어야 한단 말이냐?"

가슴 속에서는 격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

"그자가 작은 이득을 위해 무거운 신의(信義)를 배반한 걸 아느냐?"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음을 아느냐?"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너를 능욕했음을 잊었단 말이냐?"

"잊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그를 살려주어야 한단 말이냐?"

역시 당연하다는 듯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진룡은 기가 막히고 맥이 탁 풀렸다.

예지운의 앞을 산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들어 올리던 검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옆에 있는 탁자를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파파파팍!

책과 찻주전자는 허공으로 튕겨 올랐고 탁자는 산산조각이 나며 주저앉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해 호흡마저 고르지 못하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며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이동생 산산이 예지운이 떨어뜨린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룡의 가슴을 찌른 그 검은 예이연이 낸 상처를 다시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산산이 찌른 검인지라 진룡의 내공에 막혀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진룡의 가슴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네가... 네가...!"

진룡의 말이 떨려나왔다.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정말 찌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겁에 질린 산산의 음성은 이미 진룡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

진룡은 용의 울음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뛰쳐나와서 방향을 분간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탈진하여 이름 모를 산속에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풀냄새가 진룡의 코를 자극했다.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 십 년을 산 것 만 같았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산화... 산화... 우리 산화를 데려 와야지."

진룡은 천근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

 

산에서 내려오다가 작은 마을이 있어 물어 보았더니 마을 이름은 백가촌(白家村)이지만 백()씨와 이()씨가 같이 살고 있다 한다.

금릉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훗날 이곳에서 백남빈 부자와 이탁이 태어났다.

 

***

 

밥도 넘어가지 않고 술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물로 목을 축이며 진룡은 터벅터벅 걸어 이틀 만에야 금릉에 다시 돌아왔다.

위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예귀비(藝貴妃)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 하였다.

그러나 금릉으로 들어오는 그를 범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그의 모습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산화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냉기가 확 감돌았다.

들보에 산화가 목을 매어 죽은 채 늘어져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산화는 진룡이 궁궐로 떠날 때 잠든 척 했으나, 사실은 떠나는 오라버니를 뒤에서 훔쳐보며 안녕을 고했었다.

오라버니가 떠나자 산화는 허리띠를 들보에 걸고 목을 맸다. 오빠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비록 어리지만 공주로서 예교(禮敎)를 배우고 자란 산화였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가 되살아난 이성(理性)은 더 이상 그녀가 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막내 누이는 죽었고 사랑했던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또 다른 누이 산산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진룡은 조카들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평곡에는 또 하나의 죽음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인 스승 정사초의 죽음이었다.

팔십이 세의 나이이니 살 만큼 산 그는 진룡이 돌아 온 직후 죽었다.

정사초는 죽기 전에 진룡에게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후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우리들 사자검의 전인은 세상에서 환영받는 이가 없구나. 너의 신세도 처량하다마는 네 사조들도 절세의 총명을 지니고도 세상에서 그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사자검의 전인은 마음이 세상을 앞서 가니 세상이 알아주기 어려운 때문이니라. 다 시대를 앞서 태어난 탓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슬픔이 너의 정신을 흐트릴까 두렵구나."

 

그 후 진룡은 창평곡에서 사자검을 익히고 시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살며 두 번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조들과 달리 사자검을 익혀도 세상을 구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서 전인을 구하여 사자검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인도 두지 않고 혼자서 창평곡에 쓸쓸하게 살다가 사자검을 녹지에 던진 후 죽었다.

그의 검결은 고독과 허무가 깊이 베여있고 염세(厭世)의 분위기를 절로 풍기게 된 것이다.

 

***

 

진룡의 애절한 사연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룡의 원수인 예지운은 그후로도 벼슬을 계속하여 몇 대에 걸쳐 부귀를 누렸던 것을 백남빈은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사자검의 전인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그 뜻이 꺾인단 말인가? 정말 정사초 사조의 말마따나 세상을 앞서 살아가는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백남빈은 탄식했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우측, 녹지의 동쪽 절벽 앞에 흰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난공불락의 절진으로 둘러쳐진 창평곡에 누군가가 들어 온 것이다.

히히히힝!

흑왕이 나타난 사람을 향해 길게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형부!"

강미루도 벌떡 일어나 뛰어가며 소리쳤다.

단번에 동쪽 절벽 아래까지 달려간 강미루는 그 인물의 품에 거리낌없이 안겼다.

흰 옷을 입은 그 인물은 바로 출신내력이 신비에 싸인 대려장의 제일고수이자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인 광평객 신가람이었다.

그가 마침내 보름 만에 미혼, 산백, 박령의 삼대절진을 뚫고 창평곡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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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자의 마음을 모른 죄()

 

 

진룡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욕됨을 참고 억지웃음까지 웃어야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것같았다.

그때 짐은 안풍에 가지 말아야 했다.”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예이연의 목소리에 이어 걸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한림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성이 안풍을 얻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갔던 것인데... 만약 그 틈을 노려서 진우량이 안풍으로 공격해 왔었다면 짐은 꼼짝없이 그에게 천자의 관을 들어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사내는 바로 주원장이었다.

예이연이 주원장의 말을 받았다.

"진우량이 어리석었던 게지요. 그의 막료들중 인물이라 할만한 자는 없었으나 넷째 아들 진룡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군."

주원장이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진룡은 어리석은 아비가 내치는 바람에 강호의 떠돌이가 되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후 돌아와 파양호대전에는 참가했는데... 만약 신첩의 오라버니가 황상을 그리워하지 않고 진룡의 계책대로 싸웠다면 아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

예이연의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 듯 주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예이연이 조리있게 설명을 했다.

"진룡은 황상께서 작은 개미선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거선들의 진속에 같은 작은 개미선들을 포진시키라고 했사옵니다. 거선으로 폐하의 개미선들을 한쪽으로 몰아 붙친 후 작은 배들로 틈을 메꾸어 몰살시켜려고 하였지요."

"진우량의 자식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니... 진우량이 그 아들의 반만 되었어도 파양호대전은 쉽지 않았겠군."

주원장이 비로소 감탄하며 말했다.

"결국 오라버니가 폐하를 따르기로 작정함으로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예이연이 교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원장은 그녀를 힘주어 껴안아 주었다.

"그대 오라비의 공이 과연 적지 않군. 짐이 그의 벼슬을 더욱 높여 주도록 하지."

예이연은 주원장을 살짝 밀치고 그의 품을 빠져 나오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헌데 황제에게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그녀는 맞은편 창에 난 구멍으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예이연은 내색하지 않고 주원장에게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폐하! 청이 있사옵니다. 오늘 첩의 심신이 여의치 안사오니 침전을 옮겨 주셨으면 하옵니다."

"귀비가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군."

주원장의 허락을 들으며 예이연은 힐끗 창을 곁눈질했다.

 

진룡은 처마에 매달려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예이연이 자신을 져버렸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모든 탓을 예지운에게 돌리고 있었다.

진룡은 주원장이 아쉬워하며 방을 나가자마자 봉창을 밀치고 날아들어가 예이언 앞에 섰다.

()왕자님!”

몸매만으로도 진룡임을 알아본 예이연이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왜 이제야 왔어요? 당신은 내가 주원장 그 늙은 도적에게 수모를 겪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진룡은 매달리며 오열하는 예이연을 힘주어 안으며 목이 메었다.

"아무것도...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진룡의 말은 그녀가 어떻게 지냈던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예이연이 진룡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쓸어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당신 말을 새겨듣지 않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잡혀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인질이 되어 주원장에게 억류되어 있기로 하고 오라버니가 칼을 바꾸어 쥐었던 것이에요.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흑흑흑...!"

예이연이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진룡은 예지운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속내를 숨기며 예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 내 누이들과 조카들은 어디로 잡혀갔소?"

"그분들은 모두 잘 있어요. 제가 주원장에게 빌어서 모두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예이연의 그 말에 진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누이와 조카들의 안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함께 도망칩시다. 누이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오손도손 살아가도록 합시다."

진룡의 제안에 예이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제가 그냥 도망치면 오라버니가 주원장 손에 죽고 말 거예요. 미리 귀뜸이라도 해주어야하지 않겠어요?"

 

***

 

진룡은 예이연에게 사흘 후 도망칠 준비를 갖춘 후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그녀의 침실을 빠져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궁궐을 빠져 나오기 위해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을 때였다.

또 한 명의 백남빈한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진룡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걸어가는 그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막내누이 진산화(陣珊花)였다.

휘익!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소녀를 낚아챈 진룡은 궁궐 담장을 날아 넘은 후 미친 듯이 달렸다.

품안에 안겨있는 소녀는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릉 외곽 야산에 자리한 어느 무덤 앞에서 진룡은 소녀를 내려놓았다.

"! !"

넷째 오라버니인 줄 알아본 산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훌쩍거리기만 했다.

진룡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예이연은 누이와 조카들이 안전한 곳에서 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산화만은 궁궐에 있었단 말인가?)

 

한참을 울던 산화는 날이 밝을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자결했으며 세명의 올캐들은 무창이 떨어질 때함께 자결해버렸다.

큰언니 둘은 주원장의 군사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다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고 죽었다.

그녀와 바로 위의 언니 산산(珊珊)도 병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위험한 순간 예지운이 달려와서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산산과 산화는 예지운과 함께 금릉으로 왔다.

조카들은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릉으로 온 후 예지운은 본색을 드러내 산산을 겁탈했다.

산화도 겁탈하려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자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던져주어 버렸다.

지금 산산은 예지운의 첩이 되어 살고 있고 예지운의 부하들에게 윤간당한 산화는 예이연이 궁궐로 데리고 들어가 하녀로 쓰고 있었다.

공주(公主)의 처참한 신분하락이었다.

막내로 자란 산화는 어리고 겁이 많아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이날도 위사들의 밤참을 갖다 주기 위해서 가던 중 진룡이 발견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산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났을 땐 해가 높이 돋아 있었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산화는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미 어린 티가 하나도 없었다.

눈가의 주름살이 진룡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내막을 알게 된 진룡은 망연자실했다.

(그녀는... 그녀는 나를 속였구나. 나를 속였구나.)

정에는 약하지만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룡이다.

사흘 후 궁궐에서 만나자는 예이연의 약속이 사실은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애정도 믿음도 모두 분노로 바뀌었다.

 

***

 

진룡은 침묵으로 분노를 삭이면서 산화를 데리고 객점으로 갔다.

술과 만두를 시켜 먹은 후 사자검을 꺼내어 푸른 검신을 닦고 또 닦았다.

온 몸에서 살기가 돋아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산화는 지친 몸을 침상에 누이고 잠들었다.

고개를 들어 누이를 돌아보는 진룡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시 밤이 되었다.

진룡은 잠들어 있는 산산에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서 토닥거려 주고는 사자검을 들고 궁궐로 숨어들어갔다.

예이연의 침소까지 달려가는데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단숨에 날아들어가 휘장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깔깔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예이연과 시녀들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나가 있도록 해라."

시녀들을 내 보낸 예이연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했다.

"...! 다섯은 천정 안에 숨고, 둘은 침상 밑에 숨고 밖의 매화 숲에는 궁수(弓手)들을 숨겨 놓는 다면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할지라도 꼼짝 못할 거야."

예이연은 중얼거리며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진우량은 이길 가망이 없었어. 그리고 진룡은 재주는 있었지만 황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나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을 거야. 나는 황후가 되는 것을 바랐는데...

하여간 파양호대전에서 전향하길 잘 했어. 이겼어도 황제는 그의 형이 되고 그는 나 보고 무슨 곡에 가서 살자고 할 게 뻔했으니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진룡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이연이 허영과 사치심으로 가득 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다시 숨어들었을 때는 예이연을 보자마자 처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잔정이 그로 하여금 살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었다.

그랬는데 예이연의 속내를 엿보게 되자 남은 정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휘장을 헤치고 불쑥 그녀 앞에 나섰다.

"!"

예이연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마님! 무슨 일인가요?"

밖에서 시녀들이 황급히 묻는 소리에 예이연은"... 쥐가...!" 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애써 당황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룡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 왔어요."

"!"

진룡은 짧게 대답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이연이 덧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지금 떠나요. 당신이 와주어서 기뻐요."

진룡은 가만히 서있고 예이연은 한쪽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감싸며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녀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오른손에는 언젠지 모르게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당신, 왜 이러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예이연은 묵묵히 서있는 진룡을 재촉하는 척하며 오른손의 단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번쩍! 싸악!

밑에서 기습적으로 베어 올라오는 검은 피하기가 가장 어렵다.

진룡은 빠르게 물러섰으나 단검의 끝이 스치면서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죽엇!”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 예이연은 이를 악물며 다시 단검으로 진룡의 목을 노리고 찔렀다.

과연 미녀장군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는 신랄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 정도 손속은 대비하고 있는 진룡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객이다!”

두 번째 공격도 진룡이 간단히 피해버리자 예이연은 크게 소리치며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삐익! !

그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위사들이 몰려들었다.

스르릉!

진룡은 그제야 사자검을 뽑아들었다.

슈육!

검을 치켜들면서 내딛은 한걸음에 예이연을 따라잡았다.

번쩍!

그리고 예이연이 바닥에 발을 대기도 전에 비스듬히 목 왼쪽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베어버렸다.

위사들도 뛰어오면서 보았으나 실로 전광석화같은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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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풍진세월(風塵歲月)

 

 

그후 노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짐작하건데 장사성이 그후로도 제법 오래 살아있었으니 노파가 마음을 바꾸어 먹었거나 오히려 장사성의 군사에게 죽었을 것이다.

천하를 떠돌면서 전쟁의 참상을 본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진룡이 보았던 것은 죽거나 상처 입고 신음하는 군사들의 고통이고 참상이었을 뿐이었다.

통곡하던 노파같이 전쟁의 추이(推移)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백성들마저도 그같이 고통 받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천하 전체가 전란에 신음하고 있음을 진룡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진룡은 알면 알수록 인간이 두려워졌다.

힘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를 원하며 싸우는 바람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눈물과 굶주림 속에서 하늘만 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도 힘을 가진다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각축을 벌일까?)

진룡은 파양호변을 거닐면서 끊임없이 자문했다.

"나는 전쟁이 싫다. 파리처럼 값없이 죽어가는 그 많은 인간들 중에는 이인(異人), 재사(才士)들도 끼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사(安史)의 난> 때 왕유(王維)가 귀머거리가 되었고 두보는 장안에 연금되는 신세가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밖에도 죽은 재사들이 어디 한 둘일까?

이토록 전쟁이 계속된다면, 재사는 모두 죽거나 심산에 은거하여 세상은 거친 무지랭이들만이 판을 치게 되어 황폐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진룡의 중얼거리는 말을 유심히 들은 노인이 있었으니 바로 사자검의 제십이대 전인 정사초(鄭詞樵)였다.

정사초는 진룡의 골격이 뛰어나고 문인의 기질이 있음을 높이 사서 그를 사자검의 제십삼대 전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미 세상에 흥미를 잃은 진룡인지라 스승인 정사초를 따라 창평곡으로 와서 검술을 익혔다.

그때까지 창평곡에서는 제이대 우승유로부터 스승이 제자에게 몇 가지의 검초를 가르치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사자검결이 너무도 오묘하여 말년에 가서야 겨우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전에 바탕이 될만한 검초를 가르친 것이다.

 

***

 

진룡이 창평곡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진우량은 신주(信州)에서 주원장의 군대에 패해 근거지인 무창(武昌)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삼년 후 진룡이 어느 정도 검술을 연마한 후 다시 세상에 나왔을 무렵 진우량은 세력을 회복하여 휘하의 군사가 육십만이 넘었다.

 

진룡이 창평곡을 나오기 얼마 전 장사성이 부장 여진을 보내 안풍(安豊)이란 곳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당시 안풍에는 주원장의 형식상 상관인 백련교 교주 한림아(韓林兒;한산동의 아들)가 심복인 유복통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안풍으로 가서 여진을 격퇴하고 한림아를 구했다.

진우량은 그 틈을 타 파양호 남쪽에 자리한 주원장의 군사거점 홍도(洪都)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잡느냐 못 잡느냐를 판가름할 건곤일척의 결전이 파양호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진룡은 의절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홍도로 가는 길목은 온통 진우량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왕자(王子)임을 알리자 앞을 가로 막는 사람은 없었으나 진룡은 군사들이 민간을 수탈하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도저히 그 혼자서는 말리지 못할 상황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홍도에 도착한 진룡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 무렵 진우량은 파양호 일대에 거대한 수군을 구축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대신 큰형 진선(陳善)을 만나 젊은 장수 예지운(睿芝雲)과 함께 병사를 논하고 작전을 세웠다.

예지운은 여동생 예이연(睿夷燕)과 함께 뛰어난 남매 장수였는바, 진룡은 예이연에게 한 눈에 반해 깊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

 

***

 

마침내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가 파양호에서 벌어졌다.

피아를 합쳐 무려 팔십만명의 군사가 동원된 파양호대전(鄱陽湖大戰)이 시작된 것이다.

헌데 전투는 진룡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진우량의 군대는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진룡이 신위를 발휘하기도 해서 주원장의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혼전 속에서 주원장도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긴 치열한 격전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진씨 부자가 그토록 신뢰했던 선봉장 예지운이 돌연 주원장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전세가 급변하여 진우량의 군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진우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살에 맞은 채 물에 빠져 죽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후 주원장은 진우량의 잔당을 토벌하여 호북성 일대를 평정했는데 이때 앞장 선 자가 바로 진우량의 가장 믿었던 부하 예지운이었다.

 

파양호대전에서 진룡은 뛰어난 검술로 적을 수없이 베고 큰형 진선을 구했다.

하지만 둘째형 진리(陳理)는 주원장 군대에 잡혀버렸고 셋째형 진충(陳忠)은 불타는 배와 함께 파양호에 가라앉은 후였다.

진룡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연인 예이연을 찾았다.

그러나 예이연의 함선은 깃발을 바꾸어 달고 오히려 그를 공격했다.

아수라장에서 큰형만을 구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진룡은 심한 허탈감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만약 자신이 세운 계책대로 전투가 진행되었더라면 주원장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지운의 배신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한스러울 뿐이었다.

 

진룡은 뒤쫓는 적을 베고 또 베면서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여산(廬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두 형제는 여산의 깊은 계곡에 숨어서 전군(全軍)이 다 파()했으며 아버지 또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과 함께 마음도 약해진 큰형 진선이 걱정하는 것은 무창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안위뿐이었다.

손에 들어올 뻔 했던 왕업(王業)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얼마 후 무창은 예지운이 이끄는 주원장의 군대에 함락 당했다.

자신의 가족들이 죽거나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진선은 상처가 도져 죽었다.

효자인 진선은 죽으면서도 부모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다.

진선은 죽기 직전 진룡에게 말했다. 형제 중 오직 진룡만이 살아남았으니 만약 왕업에 뜻이 있다면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재물을 찾아내어 군사를 일으키라고...

그 보물들은 무창의 어느 절에 숨겨져 있는데 진우량이 참배하려 갈 때마다 가져가서 숨긴 것이라 했다.

 

***

 

큰형을 여산에 묻은 진룡은 도처에 깔려 있는 주원장의 군사들을 피해 무창으로 갔다.

진우량이 무창에 세웠던 웅장하던 궁궐은 불타 없어졌고 남아 있는 가족도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예지운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무창을 공략한 선봉이 바로 배신자 예지운임을 들었다.

어머니는 진우량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결했으며, 형수들은 무창이 무너지던 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그리고 어린 조카들과 누이들은 주원장의 군사들에 의해 어디론지 끌려갔다고 했다.

 

***

 

진룡은 변복을 하여 신분을 감추고 명나라의 당시 도성이던 금릉(金陵) 응천부(應天府)로 갔다.

배신자 예지운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진룡은 자신의 가족이 당한 참사가 어쩌면 아버지가 일으킨 난으로 말미암은 인과응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예지운의 배신 때문이라고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끌려간 누이들과 조카들을 찾아야만 했다.

절망과 불행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진룡은 남의 불행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의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릉 응천부로 가는 길에 그가 본 것은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민초들의 모습이었다.

역설적으로 제왕들의 불운이 시작되자 민초들의 고통은 끝이 나는 듯 보였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도 이제 수습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여기저기서 활기찬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금릉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오가는 군사들의 무장(武裝)만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거리에는 검을 지닌 사람들의 수도 상당했다.

새로운 천하의 주인에게 한자리 얻기 위해서 기웃거리는 치들이리라.

 

***

 

금릉으로 들어온 진룡은 객점에 투숙한 후 사자검을 꺼내어 닦고 또 닦으면서 살기를 키웠다.

예지운은 주원장에게 공을 인정받아 광동행성우승(廣東行省右丞)이란 높은 벼슬을 하사받아 호사하고 있었다.

그의 집이 어딘지는 금릉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룡은 연인인 예이연의 소식이 궁금했다.

파양호대전 때 그녀의 함선이 자신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잘못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예이연에게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테고 배은망덕한 오라비 예지운같지는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객점의 사환을 불러 물어 보았다.

"혹시 진우량군에서 전향한 여장군 소식을 듣지 못했느냐?"

"미녀장군 말이죠? 그녀가 이곳 응천부에 왔을 때 정말 대단했죠."

"...!"

"아마 응천부 백성들 모두가 그 미녀장군을 보기위해 나갔을 겁니다. 제가 보아도 정말 예쁘더군요."

"그래 그 여장군은 지금 어찌 됐느냐?"

"주천자(朱天子)의 측실로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지요."

진룡은 사환의 말에 앞이 깜깜해졌다.

사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룡은 예지운이 출세를 위해 동생을 팔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호색한 주원장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예이연을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그리움이 밀려 왔다.

"먼저 그녀를 만나 저간의 사연을 들어 보고 누이들과 조카들의 행방도 물어보자. 어쩌면 그녀가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진룡은 그렇게 생각했다.

 

***

 

배신자 예지운을 찾아가는 것을 미룬 진룡은 야행(夜行)에 적합한 복장을 한 후 궁궐의 담을 넘었다.

무창에 있었던 아버지의 궁궐도 금릉의 궁궐을 본 따 지은 것이기에 구조가 낯설지 않았다.

대충 짐작으로 여인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숨어들어갔다.

곳곳에 내시와 위사들이 보였지만 절세고수인 진룡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순시를 도는 위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잠시 어느 지붕위에 엎드려 있을 때였다.

"호호호...!"

귀에 익은 여인의 웃음소리에 진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마 끝을 타고 봉창으로 접근하여 작은 구멍을 뚫었다.

방안에는 화려한 비단휘장이 휘감겨 있고 진기한 장식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귀비(貴妃)의 침실인 듯 했다.

금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의 뒷모습에 가려져 소매자락만 보이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호호호! 황상! 그 당시에는 무척 다급하셨던 모양이옵니다."

몽매에도 그리워한 예이연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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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

 

 

말 그대로 세외선경인 창평곡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유는 창평곡 주위에 펼쳐져 있는 세 가지 절진 때문이다.

창평곡의 원래 주인이었던 상고시대의 기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설치한 진법을 이백이 보완하여 난공불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백은 제갈공명이 남겼다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얻어 기문둔갑으로도 일절(一絶)이었었다.

이백에 의해 창평곡 주위에 구축된 미혼(迷魂), 산백(散魄), 박령(縛靈)의 절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둘 정도에 불과하다.

삼대절진(三大絶陣)은 비단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것 역시 저지한다.

창평곡 밖으로 나가려면 삼대절진의 바탕이 된 팔진도해가 있어야한다.

헌데 동부 어디에서도 팔진도해는 발견되지 않아서 백남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사자검결의 수련에 전념해야하는 터라 창평곡을 빠져나가는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

 

히히힝! 푸르르!

천리마인 흑왕은 보름 넘게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갑갑한지 풀밭의 이쪽에서 풀쩍 저쪽에서 풀쩍 하면서 뛰고 있다.

백남빈은 녹지 앞의 작은 바위에 앉아 그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지난 열흘 간 백남빈은 사자검결의 모호한 구절들을 수없이 되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사자검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백남빈은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며 만든 검초의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열흘간 연습한 결과 사자검을 찌를 때마다 고리같은 검기가 자연스럽게 쏘아져 나가게 되었다.

어느덧 백남빈의 이 검초는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비록 단 한 수뿐이지만 수비와 공격 모두를 겸하여 전혀 빈틈이 없는 검초다.

고리같은 검기는 뻗어나가는 방향마다 각기 다른 변화를 보이니 실은 수만 초로 이루어진 검법이나 다름없다.

강미루도 좌측 석실에 구비되어 있는 철검(鐵劍)들 중 하나를 꺼내 연습하고 있지만 백남빈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검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사자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강미루는 사자검은 너무 무거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했다.

사실 무겁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사자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주인이므로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강미루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백남빈은 그녀가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무공의 성취와 달리 백남빈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사자검결을 접한 후로 그의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왜 그토록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했을까?)

백남빈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백 조사(祖師)께서는 황제도 미워하고 전쟁도 미워하셨다. 각기 다른 출신과 배경을 지니셨던 열 두분의 전인들께서도 하나같이 황제처럼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졌음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셨다.)

원래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의 백남빈이었다.

그 때문에 이백과 사자검전 전인들의 사연과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왔을까? 무황성을 위해서?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 끝없는 일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강미루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여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 백남빈을 지켜보던 강미루는 전처럼 신나고 활발하게 만들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변방의 쾌활한 연가(戀歌)를 불러 주기도 하고 재미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갈아앉은 백남빈의 기분은 쉽사리 되살아나지 않았다.

(저 사람의 기분을 되살리려면 헐렁한 옷과 풀치마를 입고 있을 때처럼 도발을 해서 가슴에 불이라도 질러 줘야하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강미루였다.

 

슥!

녹지 가에 앉아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백남빈에게 강미루가 철검을 확 찔러왔다.

철검의 끝이 나사처럼 돌면서 날아든다.

바로 백남빈이 창안한 그 검초였다.

“억!”

백남빈은 갑작스런 강미루의 공격에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굴려 가까스로 피해냈다.

비록 백남빈처럼 검기를 쏘아내지는 못했지만 강미루의 이 검초는 빠르고 강했다. 녹지의 물을 꾸준히 마셔서 내공이 심후해진 결과다.

(아니 왜 이래?)

라는 소리가 백남빈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데 강미루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쫑알거렸다.

"대체 이 검법의 이름은 뭐죠? 그냥 무명검법(無名劍法)이라고 할까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심기일전하도록 일부러 도발을 해온 것이다.

“그럼 미루일검(美樓一劍)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백남빈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니면 소녀절세검(少女絶世劍)? 그것도 아니면 미녀참마검(美女斬魔劍)이라고 할까?"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장난기를 회복하는 백남빈이었다.

"장난처럼 말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당신의 이 검법은 정말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절학이란 말이에요."

백남빈이 오랜만에 농을 하자 강미루는 내심 기뻤지만 눈을 흘기는 척 했다.

"당신이 그릇 깎는 것을 보고 훔쳐 배운 것에 불과한데 무슨 절학이라고까지 하겠소. 그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이라고 하지. 그래 그게 가장 적합하겠어."

대충 대답하던 백남빈의 눈이 반짝였다. 별 생각없이 지어낸 미녀각기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 것이다.

"쳇, 검법이라면 이름도 위풍 있고 당당해야지 그게 무슨 검법이름 같기나 해요?"

강미루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하여 백남빈이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기이한 검초는 미녀각기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강미루의 도발이 성공해서 백남빈의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미루, 당신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오."

백남빈은 녹지 가에 강미루와 함께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사과했다.

“사자검전을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백 조사와 여러 전인들의 삶이 절절하게 와 닿아서 마음을 무겁게 했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강미루도 백남빈의 허리를 뒤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저도 열 세분 전인의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며지는 기분이 되곤 한답니다.”

강미루는 한숨을 쉬며 백남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였다.

시대 탓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사자검의 전인 열세명의 삶은 누구 하나 평탄하지 못했다.

모두가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결국 실의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와 쓸쓸히 삶을 마치곤 했다.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던 이백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백남빈과 강미루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사자검의 마지막 전인인 진룡(陳龍)이란 인물의 삶이었다.

 

***

 

사자검의 전인들은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시조인 이백을 필두로 좁은 강호가 아닌 더 큰 세상에 뜻을 두고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무림의 패권다툼에 개입한 바가 없다 보니 사대비문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사자검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자검의 전인들은 세상에 뜻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영합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세상에서 배척을 당해 말년에는 쓸쓸히 창평곡에 돌아와 생을 마치곤 했다.

명재상(名宰相)이었던 제이대 우승유는 물론이고 제칠대 조개지(趙介志)는 왕공(王公)이었음에도 끝내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그들 중에서도 제십삼대 진룡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창평곡에 들어왔으며 다음 대 전인조차 지정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진룡은 백남빈. 강미루와 팔십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살았었다.

진룡의 유해 앞에 남겨진 사연은 구구절절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는데 그가 남긴 검결에는 실용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전인들의 검결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에 반해 진룡의 검결은 비록 염세적인 분위기에다가 고독과 허무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해가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의 사자검결 다음으로 진룡의 검결을 많이 본 터였다.

이 진룡이란 인물의 신세는 실로 파란만장하여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이 동정하고 있었다.

 

***

 

진룡은 원(元)말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 한명이던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의 넷째아들로 자는 거비(去非), 호는 낙이(樂而)였다.

진우량이 홍건적(紅巾賊)에 몸을 담고 있을 무렵에 얻은 넷째아들 진룡은 날 때부터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군의 태(態)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불과 사, 오세때부터 시(詩)를 짓는 총명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진룡은 자라면서 시문에 더욱 능해져서 무인으로 키우려는 부친과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열일곱 살 때 아버지 진우량과 포로들의 처우 문제를 두고 큰 의견 충돌을 빚었다.

분노한 진우량은 칼을 뽑아 진룡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내치는데 그쳤다.

부친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자 진룡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문인이 되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날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작별인사를 드린 진룡은 집을 나와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진룡이 여산(廬山)을 구경하고 내려와 파양호반(鄱陽湖畔)을 거닐 때였다.

한 노파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보였다.

진룡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다가가 물어보았다.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슬프게 우십니까?"

"아이고 애고..."

노파는 더욱 설움이 복받치는지 더 크게 울었다.

잠시 노파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서 한 차례 더 물었다.

"할머니 영감님이 돌아가셔서 우십니까?"

노파는 훌쩍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젊은이... 영감이 죽었으면 험한 꼴 보지 않고 잘 죽은 거라오."

"...!"

"큰 아들 놈은 일월교(日月敎)에 미쳐 돌아다니더니... 한산동(韓山童;일월교, 또는 명교라 불리는 백련교의 교주) 밑에서 죽고, 둘째 놈은 친구 따라 주원장(朱元障) 밑에 들어가더니 진우량 그 난폭한 놈에게 잡혀서 죽었소."

“...!”

“막내놈만은 끼고 살며 밤낮으로 밖에 내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장사성(張思誠)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오. 가면 죽는 것이 전장(戰場)인데 오늘 달려갔으니 다시는 못 볼 것같아서 내 이런다오.”

장사성은 주원장과 마지막까지 패권을 다퉜던 강남의 유력한 군벌이다.

"전쟁에서 나간 군사들이 다 죽는 것은 아니랍니다."

진룡이 위로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쟁을 하려면 제 놈들이나 할 일이지... 이것 뺏고 저것 뺏고 하더니 이제는 내 아들까지 빼앗아가? 천하에 벼락 맞아 죽을 것들! 왕은 무슨 왕이고 황제는 무슨 놈의 황제야? 몽땅 도적이고 강도일 뿐이지."

진룡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노파가 실성한 듯이 하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진룡이 묵묵히 듣기만 하자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내 이 장사성 놈을 호미로 찍어 죽이고 말테다."

노파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진룡은 노파가 떠난 자리에 넋을 잃은 듯이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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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과연 어부 소년이 찾아와서 시선의 뒤를 이었을 것 같소?"

백남빈이 궁금해 하며 강미루에게 물었다.

"바로 아래에 계신 저분이 그분 아닐까요?"

강미루는 이백이 좌화한 바위섬의 정상 바로 아래쪽의 석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풍채가 좋은 이백과 달리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지만 역시 청수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다.

그 노인이 이백이 동정호에서 만났던 어부 소년의 나이 든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시선께서 전한다는 검법이 이것이란 말인가?"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백남빈은 의아해하며 누구에게 묻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백이 좌정한 앞쪽 바닥에는 천여 자의 글만 더 적혀 있을 뿐 검법의 이치를 담은 검보(劍譜)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眞理)는 몸에 담고 빛은 정신(精神)에 비추었으며,

움직이지 아니하여 극(極)에 이르렀도다.

하늘의 무거움은 몸으로 느끼며

땅의 너그러움을 품안에 가두었다.

지혜(智慧)에 머물러 흐려짐이 없었고

어짐(仁)을 함께 하여 치우침이 없었도다.

낯빛은 항상 부드러웠고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사자(獅子)는 담백한 뜻과 맑은 정신이 흔들리는 법 또 한 없었도다.

 

뜻이 흩어지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해(害)하고

정신이 흐려지면 근본을 잃고 마는 것인지라,

담백한 뜻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용(龍)을 누르고 범(虎)을 방비하듯 해야만 한다.

한순간 가벼우면 용은 승천하고 말 것이요.

범은 뜻을 상하게 하고 말 것이로다.

 

뜻을 저해하는 모든 것이 범이니,

범은 그 모습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용은 스스로 비롯하는 것이니 범보다 더욱 지키기 어렵도다.

독기를 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나약하게 하는 것이 능수(能手)이나

위험에 처하더라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때로 용호(龍虎)가 안팎으로 발호하여 뜻을 흩으려는 바 있으나,

그 기세가 비록 장엄한 바 있어도 모두가 허상이니,

스스로 동(動)하지 않으면 털 한 올 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울 지라도 스스로 지키어 움직이지 아니하면 절로 소멸하고 만다.

 

대저 먼저 그치고 나중에 움직임이 대도(大道)인즉,

가슴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욕망을 능히 견뎌야 한다.

정신은 참고 견딤으로 맑아지고 자라게 되며,

정신이 길러져야 대사(大事)를 이룩할 수 있으니,

참으면 참는 만큼, 견디면 견딘 만큼 정(正)은 자라는 것이다.

정(正)을 기름으로 근본은 두터워 지고 사악함과 요괴함이 절로 물러나게 된다.

 

사자(獅子)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여도 놀라지 아니하였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도 두려워한 바 없고,

사물을 대하여 마음으로 의심치 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것에 현혹됨이 없었다.

의혹을 몰아내면 자연히 원정기(元精氣)가 자라고,

원정기가 자라지 않으면 어느 새 사마(邪魔)가 자리 잡는다.

 

놀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의심치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이요

현혹되지 않으면 응(應)하지 않을 것이다.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니 사자(獅子)에게는 빠르고 느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여자의 비결(秘訣)이 이어진 후 이백의 글은 더 이상 없었다.

무엇인가 잡힐 듯 말듯 아른거림에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검법을 전한다 했는데 어디에도 검을 쓰는 비결은 보이지 않고 모호한 글만 적혀있다.

하지만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경구들이 바로 검법의 놀라운 비결이라 여겼다.

"뒷부분으로 올수록 내용이 와 닿는 듯도 하지만... 깊은 뜻은 한마디도 짐작할 수 없구나."

사자검결(獅子劍訣), 흑은 천자검결(千字劍訣)이라 이름 붙일만한 글들을 몇 번 읽어본 백남빈은 난감해졌다.

강미루는 고민하는 대신 통 채로 외우려는 듯 자꾸만 사자검결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남빈도 사자검결을 외워버리기로 작정했다.

 

***

 

그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에 없다.

백남빈은 사자검결을 앞에서 뒤로 외고 그것이 가능해지자 뒤에서 앞으로 외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자 저절로 술술 입에서 나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백남빈에 비해 강미루는 암기하는 게 백남빈하지 않은 듯 했다.

중얼중얼 외면서 한두 구절 씩 막혀서 다시 외우곤 했다.

백남빈이 비결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도와주었다.

"먼저 이만큼만 외우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다시 이만큼만 외우고... 나중에 이것들끼리만 백남빈하게 이어버리면 되지 않겠소?"

방법을 알고 나자 금방 앞에서 뒤로 줄줄 외우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이백의 유해(遺骸)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밤은 휑하니 지나가 버리고 창평곡에는 해가 한 뼘 넘게 떠 있었다.

동부의 입구는 보름달이 서쪽으로 지면서 다시 닫혀버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신묘한 기술에 의해 동부의 입구는 한달에 한 번,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저절로 열렸다가 닫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열고 닫는 장치가 있어서 입구를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과일을 따먹고 녹지의 물에 피를 풀어 마셨다.

배를 채운 후 오두막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나란히 뉘었을 때 강미루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사자검결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이 그러했다.

신경의 소모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

 

백남빈이 조사전(祖師殿)이라 이름붙인 마지막 석동의 인물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이백과 그의 전인(傳人)들이었다.

원래 바위섬은 모양이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백이 바위섬의 정상을 평평하게 다듬고 진전을 남긴 후 그의 전인 우승유(宇承悠)가 본받아 아래쪽에 자신의 좌화단(座化壇)과 심득(心得)을 남길 곳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승유의 전인 초장객(楚璋客) 이하 모든 전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바위섬은 기묘한 탑으로 변해 버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이 남긴 사자검결 외에도 사자검의 전인 십삼인의 심득(心得)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연들과 뜻이 모호한 비결들만 있을 뿐 실제로 검을 쓰는데 유용한 검보는 구경할 수 없었다.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처를 오두막에서 동부로 옮겼다.

동부에 들어와 살면서 곧 그 안의 기물(器物)들에 백남빈해졌다.

특히 맨 좌측 석실에 있는 수백 권의 책들 중 <창평곡기(蒼平谷記)>라는 책을 통해 창평곡의 모든 사정들을 알게 되었다.

창평곡기는 이백과 역대 전인들이 창평곡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팔십여 년 전부터는 기록이 끊겨 있었다.

창평곡기에 의하면 창평곡은 이백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이백은 당나라 현종이 선물로 준 연단술(鍊丹術)과 관련된 고서(古書)에서 창평곡의 존재를 알았다.

그 고서를 통해 이백이 찾아낸 창평곡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첫 번째 보물은 물론 사자검이다.

이백도 사자검의 재질이 무엇이고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이백이 옛사람이라 칭한 상고시대의 어떤 기인이 남긴 사자검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힘든 조화(造化)를 만들어낸다.

사자검은 사용하는 자의 의지(意志)를 실체(實體)로 구현(具顯)해주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때문의 사자검의 위력은 주인의 그릇과 상상력의 크기로 결정된다.

필부(匹夫)가 얻으면 그저 무겁고 단단한 쇳덩이일 뿐이지만 초인(超人)이 쓰면 신선이나 귀신도 벨 수 있을 정도다.

삼재검법 외에는 아는 무공이 없던 백남빈이 검도의 최상승경지인 검기를 단번에 뽑아낼 수 있게 된 것도 사자검의 조화였다.

사자검의 이같은 신비한 힘은 <사자검을 전한다(獅子劒傳)>라는 문파의 이름이 지어진 연유이기도 하다.

사자검전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자검 자체인 것이다.

이백은 사자검과 함께 뜻이 모호한 비결을 백여 자 얻었었다. 사자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그 비결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많은 부분이 소멸된 상태였었다.

이백은 육십여 년 간 사자검을 쓰면서 불완전한 그 비결을 갈고 닦아서 천여자로 이루어진 사자검결을 만들었다.

다만 사자검결은 실제로 검을 쓰는 검결이 아니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서 마음이 자라게 하는 양심(養心)의 비결이다.

이 사자검결로 얻을 수 있는 성취의 크기는 개인의 도량으로 결정된다.

그 때문에 이백 이후의 전인들이 사자검결을 통해 이룬 것은 제각각이었다.

 

이백이 창평곡에서 찾아낸 두 번째 보물은 바로 녹지의 물이었다.

녹지의 물은 창평곡 지하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어떤 광물질이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 물은 그냥 마실 경우 침과 섞이면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피와 섞이면 공력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줄 뿐 아니라 강인한 몸과 엄청난 치유력을 갖게 해주는 영약이 된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났던 깊은 상처가 단번에 치유된 것도 녹지의 물 덕분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영약이 되어 몸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던 것이다.

강미루도 백남빈과 함께 하체를 녹지에 담그고 있었던 터라 환골탈태에 가까운 효험을 봤었다. 백남빈의 상처가 만든 영약이 피부를 통해 흡수된 덕분이다.

피가 섞인 녹지의 물은 기사회생의 효능을 지녔다는 자부현청(紫府玄淸)이나 공청석유(空靑石乳)에 비견될만한 영약이다.

그것을 매일 식수 대신 마셨기에 백남빈과 강미루의 공력은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증진되어 있었다.

녹지의 바닥에는 백남빈이 발견한 장방형의 매끈한 석괴가 있다.

어떤 이치인지는 이백도 몰랐지만 그 석괴는 보름달의 달빛을 온전히 받으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벽쪽에 숨기고 있던 배수구를 드러낸다.

그 배수구를 통해 녹지의 물이 창평곡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동부의 입구가 열리는 것이다.

녹지 아래의 석괴가 한 달에 한 번씩 동부의 입구를 열었다 닫기도 하지만 내부에서도 입구의 개폐와 고정이 가능하다.

그 장치는 입구의 바로 안쪽에 있었다.

 

사자검과 녹지의 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창평곡에는 보물이라 할만한 것들이 여럿 더 있었다.

숲에서 열리는 자령과(紫靈果)라는 붉은 색 과일은 장복하면 대부분의 독에 내성이 생긴다.

또 풀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별모양의 열매는 근골을 튼튼하게 해주고 밤눈을 밝게 해주는 약효를 지녔다.

그 외의 각가지 열매나 과일도 세상에 나가면 영약 소리를 들을만한 보물들이었다.

창평곡에서 자라는 과일과 열매들의 약성이 그토록 뛰어난 것은 녹지의 물을 흡수하며 자라는 덕분일 것이다.

짐승들도 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청묘(雪靑猫)라는 흰 털의 야생묘(野生猫)가 있으나 영특하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청묘들이 숨어 사는 곳도 물론 창평곡기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창평곡에는 별별 신기한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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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소년이여.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우리 이쪽 문도 열어 봐요"

강미루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가운데 석문으로 갔다.

그긍!

백남빈이 손으로 밀자 가운데 석문도 그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열렸다.

석문 안쪽의 석실에는 석탁이 하나, 돌로 만든 침대가 하나가 놓여있다.

침실인 게 분명한 데 특이하게도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맨 우측의 석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데 그곳은 앞쪽의 두 곳과 달리 그냥 석실이 아니었다.

“어머!”

“억!”

석문을 열고 들어서던 강미루와 백남빈의 입에서 놀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것은 석문을 열자마자 한기(寒氣)가 확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성을 토한 석문 안쪽에 상상도 못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어서였다.

 

***

 

마지막 석문의 내부는 앞선 두 곳과 전혀 달랐다.

먼저 넓이가 달랐다.

석문 안쪽에는 석실 밖의 뜰 보다가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넓을 뿐 아니라 그 형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 석문 내부는 천장이 아주 높은 천연의 지하광장이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타원형이다.

입구에서 열 걸음 쯤 가면 갑자기 길이 뚝 끊기면서 수직의 절벽이 나타난다.

높이가 오장 쯤 되는 그 절벽 아래쪽은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이다.

백남빈과 강미루를 오싹하게 만든 한기는 그 차가운 연못물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직경이 삼십 장 쯤 되는 타원형의 연못 한 가운데에는 바위섬이 하나 솟아있다.

헌데 이 바위섬의 형태가 기묘했다.

위는 좁고 밑은 넓으면서 전체 형태는 둥근 원추(圓錐)형인 것이다.

마치 깔때기를 엎어 놓은 듯한 바위섬의 평평한 정상은 폭이 일장쯤이며 맨 아랫부분은 직경이 십여 장 쯤 되어 보인다.

원추형의 바위섬에는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의 길이 나있다.

그 나선형 길 중간 중간에는 석감(石龕;불상등을 안치하기 위해 바위에 판 공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석감마다 좌화(座化)한 시신들이 한 구씩 앉아있는데 그 숫자가 모두 열셋이었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기묘한 바위섬에 창평곡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석문의 입구와 높이가 같은 바위섬의 정상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녹이 슬지 않는 쇠로 만들어진 다리는 폭이 좁아서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어떤 분들인지 건너가서 살펴봅시다.”

백남빈은 바위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좁은 철제 다리 옆에 사람 키만한 비석이 하나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자검처럼 짙은 녹색인 그 비석에는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네 자의 글이 적혀있었다.

 

<獅子劒傳>

 

“사자검전(獅子劒傳)!”

녹색의 비석에 적힌 글을 확인한 강미루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오 미루?”

강미루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백남빈이 놀라며 돌아보았다.

“이런... 이런 바보같은... 아아! 난 정말 멍청한 계집이에요! 사자검을 보고도 사자검전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강미루는 흥분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자기 이마를 치며 자책했다.

백남빈은 영문을 몰랐지만 말없이 기다렸다. 강미루의 흥분이 갈아 앉아야만 자책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비문(四大秘門)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요?”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백남빈에게 물었다.

“네 개의 비밀스러운 문파라... 무림에 그런 문파들이 있었소?”

백남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양부 이탁의 영향으로 독서량이 남다른 백남빈이지만 사대비문이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불교로 비교하자면 구대문파처럼 세상에 잘 알려진 문파들은 현교(顯敎;교리가 드러난 종파)이고 사대비문은 밀교(密敎;교리가 감춰진 종파)라 할 수 있는데...”

구구절절 설명하려던 강미루는 방법을 바꿨다. 백남빈이 뜬 구름 잡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마교(魔敎)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알고 있소. 명교(明敎)라고도 불리었으며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한 때 몸을 담았다고 알려진 비밀결사 아니오?”

강미루의 물음에 대답을 하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혹시 마교도...”

“사대비문중 하나예요.”

강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외에 삼성동(三聖洞), 북두무맥(北斗武脈), 그리고 사자검전이 사대비문이랍니다.”

쉽사리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한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교-!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누구는 동진(東晋) 시대에 존재했던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가 마교의 뿌리라고 한다.

또 누구는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와 마니교(摩尼敎)가 중원에 전래되었다가 사교(邪敎)로 낙인찍혀 지하로 숨어들면서 마교가 되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난세가 되면 마교가 백련교, 명교, 미륵교등의 이름으로 민초들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뻗힌다는 사실이다.

마교의 기본 교리가 명왕(明王)이 현세하여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 신앙과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는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되는 마교를 탄압하기에 혈안이 되어 왔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홍무제 주원장의 권력 기반이 되어주었던 마교, 즉 명교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마교는 깊이 잠적하여 지금은 종적이 묘연해진 상태다.

 

삼성동-!

북송(北宋) 시절에 살았던 무공과 의술과 공장(工匠) 방면에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세 명의 기인이 세운 문파다.

십절무성(十絶武聖), 대라의성(大羅醫聖), 성수신장(聖手神匠)이 삼성(三聖)이다.

삼성은 각 방면에서 절세적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향이 같다는 인연으로 해서 의기투합하여 만든 문파가 삼성동이다.

 

북두무맥-!

천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여전히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추앙받고 있는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의 후예들이다.

북두무제 섭장홍은 스승도 없이 무공을 깨우쳤으며 이십오 세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수들을 꺾은 것으로 신화가 된 인물이다.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만큼 북두무제의 무공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한 사람이 다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북두무제는 일곱 명의 기재를 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심득을 나누어 가르쳤다.

북두무제의 일곱 제자들은 북두칠성을 관장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으로 불렸다.

 

“사자검전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마교, 삼성동, 북두무맥보다도 없어요.”

강미루는 어느 정도 흥분이 갈아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무림 어딘가에 검을 쓰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가 있으며 사자검전이라 불리는 그들의 검술이 절세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랍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허리에 차고 있는 기괴한 검, 사자검을 곁눈질로 보았다.

“사자검(獅子劒)을 전(傳)한다라... 문파 이름도 특이하군.”

백남빈도 새삼 자신의 사자검을 만져 보았다.

사자검을 휘두르면 검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고 몸속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 용솟음 쳤던 것이 모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헌데 미루는 세상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사대비문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요?”

백남빈은 두 살이나 어린 강미루의 견문이 자신과 비교도 안되게 넓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 물었다.

“어렸을 때 형부가 옛날이야기 대신 해줘서 알고 있었어요.”

강미루의 대답을 들은 백남빈은 그녀의 형부인 광평객 신가람이란 인물에 대해 새삼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마흔 살도 안되었다는 광평객 신가람은 어떻게 독안룡 이탁도 모르고 있는 것같은 강호의 깊은 비밀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축하드려요. 사자검을 얻으셨으니 공자님은 이제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전인(傳人)이세요.”

강미루가 두 손을 모은 채 진심어린 표정으로 축하했다.

“사자검은 우리 둘의 공동 소유요. 따라서 미루 역시 사자검전의 전인이니 축하드리겠소.”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포권을 하며 웃었다.

(나... 나도 사자검전의 제자라니...)

백남빈의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이 앞장서고 강미루가 뒤 따르며 좁은 다리를 건넜다.

원추형의 바위섬 정상은 평평한 데 폭이 일장 남짓으로 제법 널찍하다.

경건한 자세로 그곳에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신선같은 풍모(風貌)를 지닌 노인이었다.

바위섬 정상의 평지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이 노인은 오래 전에 좌화한 시신이건만 얼굴이 불그스레하여 금방이라도 눈을 부릅뜰 것만 같다.

바위섬을 에워싼 차가운 연못물의 냉기가 시신의 원형을 보전해주기도 했지만 생시에 내공이 신화경에 이르렀었다는 반증이다.

풍채도 좋아서 보는 이를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노인의 시신 주변 바닥에는 글이 가득 새겨져 있다. 어떤 명가(名家)의 글씨보다 수려한 필체의 글이었다.

 

<나 이백(李白)이 마침내 술을 깨고 보니 더 이상 세상에 아름다운 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인(佳人;양귀비)의 마음은 추악하고 제왕(帝王;당 현종)은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탐욕스러웠다.

인세의 드문 수재(秀才)인 친구(親舊;杜甫.)는 날마다 굶어서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었다.

도적이 곳곳에 일어나도 혼미한 대부(大夫;벼슬아치)들은 자신의 곳간만 지킬 뿐이었다.

벗의 말마따나 대부들의 집에선 고기가 썩어 나가고 백성들의 집에서는 날마다 아사(餓死)한 시체가 썩어 나갔다.

나는 술 취한 사람이라 그렇다지만 나라는 어찌 하여 비틀거리며 기강을 잃었단 말인가?

황제도 의지할 바 못되고 지사(志士)도 믿을 바가 못 되도다.

평생의 뜻을 얻고자 천하를 주유했으나 성인(聖人:德이 많은 사람, 또는 孔子)은 보이지 않고 문왕(文王: 周의 문왕)도 만나지 못했도다.

세상의 친구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처량하게 되었으니 취한 유객(遊客)이 마침내 잔(盞)을 버리고 달 속에 들었도다.>

 

붓으로 직접 바위에 쓴 듯한 수려한 필체의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백남빈은 읽기를 중단하고 노인의 시신에 대고 큰절을 했다.

"시선(詩仙)의 유해(遺骸)가 이곳에 계셨습니다. 후진이 일찍이 시선의 유협(遊俠)을 부러워하고 분방함을 존경하여 마지않았는데 유해나마 직접 뵙게 되었으니 어찌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은 바로 시선으로 불리던 이백, 이태백이었다.

놀랍게도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시조는 다름 아닌 이백이었던 것이다.

이백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대시인일 뿐 아니라 협객으로도 이름을 청사(靑史)에 남겼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백이 사대비문 중 사자검전의 시조였을 줄을 백남빈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강미루도 덩달아 이백의 시신에 절을 올리고 이백의 유지(遺旨)를 함께 읽어 내려갔다.

 

<짧은 깨달음에 의지하여 잔을 들듯 검을 들기를 육십여 년, 잔은 전하여지지 않아도 나의 기호(嗜好)이니 무방하나 검은 옛사람으로부터 전해진 것이기에 묻을 수가 없다.

마침내 동정호에서 어부 소년을 만나 그에게 전하기로 하였다.

유객이 말하기를

"그대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하였더니

소년 어부가 답하여 가로되

"검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선기(禪氣)를 지녔으니 가히 옛사람의 법을 전할 만하지 않겠는가?

세세히 그림을 그려 이곳을 일러주고 찾아오기를 거듭 당부하였다.

백(;李白)은 여기서 죽는다마는 검은 마침내 전해지리라.

소년, 그대 지금 나를 보거든 구배(九拜)하기를 주저치 말라.

오늘 여기에 옛사람의 검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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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어? 당신 손에 있던 단검은 어쨌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에 단검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녹지에 던져 버렸어요."

강미루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대답했다.

"아니 왜?"

"당신을 찔렀던 물건을 계속 갖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혹시 당신을 찌르는 경우가 또 생기면 어떡하라구요?"

말하는 강미루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린다.

백남빈은 그런 강미루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녀가 자신을 깊이 생각해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애정이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강미루의 깊은 애정에 다 보답하지 못하는 듯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몰랐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틀림없는 구혼(求婚)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미루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백남빈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던 여걸의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백남빈도 강미루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녹지의 푸른 물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녹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평곡의 야경(夜景)이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평곡은 사방이 수백 길 절벽으로 에워싸인 항아리같은 구조다. 그 때문에 햇빛에 의하든 달빛에 의하든 한쪽에는 늘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해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잠깐 동안이지만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중천에 이르자 창평곡 어느 곳에도 절벽의 그늘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노란 보름달은 새파란 녹지 중앙에도 떠올랐다.

녹지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콕 찍어 누르는 송곳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는 보름달이 녹지 중앙에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치떴다.

녹지의 수면이 천천히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줄어들고 있다!>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백남빈과 강미루는 서로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마치 보름달의 달빛에 실린 무게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녹지의 수면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백남빈과 강미루가 알아차렸을 때 녹지의 수면은 이미 한길 이상이나 갈아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럭! 크르럭!

어디선가 쇠사슬 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았다.

크럭! 크드드!

연달아 쇳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맞은편, 즉 서쪽 절벽인데 그 절벽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蒼平谷>이라 적혀있는 부분이 절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폭과 두께는 각 일장쯤이고 길이는 오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석괴가 위쪽부터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다.

크릭! 끼끼익!

석괴의 안쪽 윗부분에는 두 가닥의 굵은 쇠사슬이 달려있어 석괴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마치 해자(垓字) 위에 놓여지는 다리처럼 내려오는 석괴 뒤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글... 글씨가 적혀 있던 부분이 감춰진 문이었어요!"

“가봅시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잡고 함께 신법(身法)을 펼쳐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크럭 크럭 끼릭 끼릭!

거대한 석괴를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가 타는 냄새를 공기 중에 뿌린다.

크드드!

이윽고 석괴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석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 안쪽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眼力)이 생긴 터였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밀장치를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의 내부는 천연의 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통로였다.

천장에는 종유석(鐘乳石)들을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의 종유석들은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열주랑(列柱廊)처럼 안쪽까지 도열해 있다.

종유석들의 열주랑을 지나 왼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일반적인 암동(巖洞)으로 종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암동 끝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지 달빛이 흘러들어와 밝았다.

 

십여 장 길이의 암동을 지나자 백 평 정도의 제법 넓직한 뜰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사방의 석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조그맣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 개의 절벽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천연의 동부(洞府)였다.

달빛이 흘러드는 위쪽 입구는 까마득하게 높은데, 그 입구마저 바깥쪽 절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동부의 존재를 결코 눈치 챌 수 없다.

뜰에는 키가 작으면서도 옆으로 떡 벌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고 그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납작한 돌판으로 덮인 오솔길을 따라가자 세 개의 석문(石門)이 나란히 붙어있는 벽이 나왔고 벽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바가지가 놓여있는 작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깥도 아름다운데 여기는 오밀조밀해서 더 아름답군요. 정말 신선이 살았던 곳이 아닐까요?"

신비한 정경에 도취되어 묻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의 말에 강미루가"칫!"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길 보세요. 이 바가지는 사람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반치는 쌓였는데 누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당신이 그토록 총명하니 장차 남편을 마음대로 흔들겠군."

백남빈이 웃으면서 농(弄)을 했다.

"어쩜, 지금 같은 때에도 장난이 나와요? 저를 놀려서 당신은 무엇이 좋은가요? 아까 밖에서 저한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강미루가 눈을 흘기며 힐난하자 뜨끔해진 백남빈은 얼른 굽신거리며 둘러대었다.

"천만에, 천만에! 내말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진정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강미루는 보면 볼수록 교묘한 동부인지라 백남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엉뚱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우리 이 문들이나 열어 봐요."

백남빈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에 걸린 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검을 돌려 달라고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로군."

"차라리 검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잖아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이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세 개의 문 중 좌측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긍!

백남빈이 슬쩍 밀자 석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눈에 가장 먼저 뛴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몇 권의 책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든지 보다가 던져져서 엎어진 책장(冊張)들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백남빈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먼지를 툭툭 털고 제목을 읽었다.

 

<이백시선(李白詩選)>

 

바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를 모은 시집이었다.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시를 좋아한 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매우 아취(雅趣)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요"

함께 보고 있던 강미루가 말하자 백남빈이 대뜸 받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책도 어질러 놓으려고?"

"남의 거처에 와서까지 주인을 욕하는 거예요?"

백남빈은 강미루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심이 센 그녀를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백남빈이었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손에서 책을 받아 옆에 있는 서가의 빈곳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정에 박힌 야광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은은히 비치는 이 석실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서가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책 뿐 아니라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도 석실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가요. 밀폐되어 있어서인지 공기가 탁해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석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백남빈이"어__?" 하며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강미루는 재빨리 안에서 석문을 닫아버렸다.

"미루, 미루, 왜 그러는 거요?"

강미루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백남빈은 겁이 털컥 나서 석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석문 안쪽에서 강미루의 대답이 들린다.

 

사실 강미루는 창평곡에 들어온 이후로 옷 같은 옷을 입어 보지 못했다.

비록 기후가 따뜻해서 지내는데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상체는 백남빈이 벗어 준 남색 상의를 입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풀로 엮어 만든 치마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버석거리고 까칠한 감촉은 둘째 치고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속살이 드러나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모퉁이에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한 강미루는 대단히 기뻤었다. 어떤 종류의 옷이든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전부 남자들의 옷뿐이네."

그래도 옷가지들을 들쳐본 강미루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석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옷은 모두 남자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 옷이라도 풀치마보다는 났다.

강미루는 헐렁한 남색 상의를 벗어버리고 옷가지들 중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옷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턴 후 입어 보니 옷 전체가 몸에 착 붙고 가느다란 소매는 팔목을 살짝 조였다. 상당히 작은 체형의 사내가 입었던 옷 같았다.

한 벌인 듯한 꼭 끼는 바지를 마저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하지만 속옷도 없이 맨살에 겉옷만 두른 상태라 뭔가 허전하다.

"뭘 하는 거요?"

밖에서 초조해진 백남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어요."

강미루는 마주 소리치며 재빨리 헐렁한 장삼을 하나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장삼의 허리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서 대충 크기를 맞추었다.

몸을 슬쩍 돌려 살펴보니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강미루는 몇 벌의 옷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

확 달라진 강미루의 모습에 백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아이같이 변한 강미루의 모습은 어여쁠 뿐 아니라 깜찍하기까지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안고 나온 옷가지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혀 주었다.

품이 넉넉한 장삼을 걸치고 사자검을 허리에 찬 백남빈의 모습이 옛날이야기 속의 검선(劍仙)을 떠올리게 해서 강미루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은 엿새만에 사람의 형용(形容)을 되찾게 되었다.

석실 안팍에 벗어놓은 남색상의와 풀잎 옷 한 벌은 장차 높이 날아오를 그들의 껍질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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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사자검은 보면 볼수록 백남빈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백남빈은 사자검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왔다갔다하며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휙 뽑아서 흔들어 본 후 집어넣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뽑아서 재주를 넘으며 찌르고 하여 강미루로 하여금 입을 가리고 웃게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여 어른들도 어려워하던 철령보의 소보주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던 백남빈의 검무(劍舞)는 점점 격식을 갖추면서 정교해져 갔다.

양부 이탁에게서 배운 삼재검법이 누에가 실을 뽑듯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펼쳐봤던 삼재검법이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웅! 웅!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배 이상 증진된 내공으로 인해 백남빈이 휘두르는 사자검은 웅혼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쿠오오! 파파팟!

사자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 궤적을 따라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의 작은 돌들과 흙을 휘감아 튕겨 내었다.

자신의 내공이 이 정도로 증진되어있을 줄은 백남빈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늘어나 펄펄 날 것만 같아서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이내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삼재검법만으로는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도저히 다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갑함을 느낀 백남빈은 격식에서 벗어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자검을 움직였다.

쿠쿠쿠! 쩌저적!

강맹한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연달아 번쩍이는 검광(劍光)에 가려 백남빈의 모습은 강미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강미루는 돌풍과 검광에 가려진 백남빈 쪽을 보며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강미루의 놀란 심정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을 기다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힘을 분출할 수 있는 검로(劍路)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 위험해!)

백남빈의 몸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검광과 검풍(劍風)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강미루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십장 이상 물러섰음에도 강맹한 바람은 그녀의 몸을 단숨에 하늘 밖으로 날려 버릴 듯 했고 작렬하는 검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갈가리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으야압!"

그러던 어느 순간 백남빈은 천둥치는 듯한 폭갈을 터뜨리며 온 힘을 다해 사자검을 휘둘렀다.

크와앙!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자검에서 한 무더기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 녹지의 표면을 강타했다.

퍼엉!

수십 장 넓이의 녹지가 둘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백남빈은 바닥에 팍 엎어졌다. 몸속에서 들끓던 강대한 기운이 일거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경악하면서"검기(劍氣)"하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확 트인 듯하여 시원하고도 통쾌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불쑥 치솟아 전중혈(田中穴)을 지나 검으로 빠져나갔었다.

그 기운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해서 수십 장 넓이의 녹지를 순간적으로 갈라버렸는지 백남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탈진해서 몸은 나른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아주 후련해져서 눈도 뜨기 싫었다.

“공자님!”

강미루가 뛰어와 그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무서워 혼났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해요."

백남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가 일으켰던 거센 돌개바람은 아직도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며 완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던 백남빈이 눈을 감은 채 잠결처럼 물었다.

"미루, 내가 대체 뭘 한 거요?"

"미친 듯이 검무를 추었잖아요. 가까이 있었더라면 나도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강미루는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힘이 마구 들끓었었소.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같았는데 갑자기 속이 후련해지더군."

백남빈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강미루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이제 검으로 검기를 발출하게 된 거예요. 우리 형부도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데 멀리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깨뜨리고 나무를 베어 버리더라구요."

강미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에 형부와 언니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형부 집에 숨어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부가 검을 들고 있다가 저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휘둘렀어요. 그런데 그 바람에 오장이나 떨어져 있던 내 머리에 쓴 모자가 잘려버리지 않았겠어요?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부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고요"

백남빈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림에 고수는 많지만 검기를 마음대로 발출해 낼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자랑스러운 형부는 검신(劍神)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 모양이오."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가 핏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도 검기를 발출하게 됐으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마셔요."

백남빈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후로 형부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번 졸랐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다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대신 궁술과 창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활과 창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내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어요? 단지 내 궁술과 창법이 치밀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더 이상 늘지 않아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하는 말이었다.

백남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공수련과 검기(劍技)가 부족한데 어째서 검기를 발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사자검이 부린 조화가 아닐까?"

강미루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지 당신이 쓰러질 때를 맞추어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연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놀려 백남빈의 여기저기에 글로 적으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더 해봐야겠어!"

백남빈은 옆에 떨구었던 사자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미루가 그런 그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하셔요."

그녀는 물그릇(물론 백남빈의 가죽신이지만)을 가져와 백남빈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우유빛 물이 마치 유액(乳液) 같았다.

백남빈은 그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소매도 없는 팔로 쓱 닦았다.

폐부를 상쾌하게 해주는 신비의 물. 그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오직 이곳에만 있는 신령스러운 영약이지마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만일 다른 식수가 있었다면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속이 다시 힘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백남빈은 강미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스악!

정신을 검 끝에 모으고 기합과 함께 강하게 떨쳐내었다.

과연 기합소리와 동시에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그의 검 끝을 지나서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이어 몇 번을 휘두르자 검기는 실날같이 가늘게 뽑혀 나오며 그의 몸주위에 그물처럼 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미루가 돌멩이를 주워 백남빈에게 던지자 돌은 검기에 부딪혀 소리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다.

진정 놀라운 경지였다.

그것은 백남빈에게 검술을 가르친 독안룡 이탁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

 

백남빈은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삼재검법은 검기를 펼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검과 검력에 알맞은 검식(劍式)을 고안해야만 했다.

가전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다른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삼가야한다는 양부 이탁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은 후였다.

녹지에 다시 들어가 혹시 검식을 적은 검보(劍譜)가 있지 않나 찾아 봤다.

하지만 녹지의 바닥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빈은 보름달이 떠올라 창평곡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검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미루가 쪼그리고 앉아 달빛에 단검을 반짝이며 나루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때 깎을 생각이었으나 백남빈이 검무를 추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루었다가 이제야 깎는 것이다.

백남빈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단검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에 열중하여 전혀 백남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강미루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순간 강미루는 백남빈의 눈길이 닿은 곳이 자신의 단검임을 깨닫고 죄라도 진 듯이 황급히 손바닥 안에 단검을 감추었다.

그 단검으로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러 하마터면 죽게 만들 뻔한 기억 때문이다.

힐끗 보니 백남빈은 여전히 단검을 보고 있다.

핑!

강미루는 입술을 꼭 깨물며 녹지쪽으로 단검을 던져 버렸다.

퐁당! 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은 녹지에 잠겨버렸다.

"아!"

그제야 백남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강미루가 깎는 둥근 나무그릇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강미루가 깎는 나무 그릇은 원래 나무토막에 불과 했으나 그녀가 빙글빙글 돌리며 깎아나가자 점차 모양을 갖춰 동그란 나무그릇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검식도 저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백남빈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잡히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단검이 물속에 빠지는 퐁당 소리에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쉬릭! 쉭!

백남빈은 사자검을 들어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선(螺旋)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차례 반복하자 뱀처럼 영활하게 검이 살아있는 듯이 뻗어 나갔다.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검기로 형성되는 여러 개의 작은 원과 원이 서로 엉기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정작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오로지 한 초식뿐인 검법이지만 백남빈은 스스로 검법을 만든 것이다.

백남빈은 내심 기뻐하면서 강미루를 향해 씩 웃었다. 성취한 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 내 단검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군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성취에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슴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단검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 생각이 났었다.

비록 백남빈이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애정을 품고 있는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강미루였다.

그래서 백남빈의 돌연한 태도에 비록 정이 든 단검이지만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백남빈이 검초를 깨닫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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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劍)

 

 

"그만 갑시다. 내일 또 찾아보기로 하고..."

어느 정도 땀이 식자 백남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녹지 옆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계곡이 넓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도 서쪽 끝까지 오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백남빈의 신발이 석탁 위에 놓여져 세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미루가 손가락을 검으로 살짝 베어서 피를 몇 방울 신발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신발속의 녹색물이 순식간에 유백색(乳白色)으로 변하며 짙은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드세요."

살짝 교태가 배어 있는 강미루의 음성은 듣기가 좋았다.

백남빈이 신발을 받으며 농을 걸었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이대로 잘 배우고 연습하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겠어."

"부끄럽게 하지 마셔요. 누가 절... 음... 절 아내로..."

칭찬은 들었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부끄러워 이을 수가 없었다.

“미워요.”

민망해진 강미루는 눈을 흘기며 백남빈의 손등을 꼬집었다.

백남빈이 큰소리로 글을 읽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하다고 마음대로 꼬집는 거요?"

강미루가 그제야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내고는 백남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무그릇이라도 하나 깎아야겠어요."

"신발로 물을 마시자니 내 발 냄새가 나서?"

"아니라구요!"

백남빈이 들었던 신발을 놓으며 강미루에게 묻자 그녀는 백남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강미루와 백남빈이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적당한 애정행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평곡에 갇히고 사흘째 되던 날 녹지의 신비를 일부나마 풀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녹지의 물은 침에 닿으면 독이 되고 피에 닿으면 아주 향기로운 물이 되었다.

어떤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유빛으로 변한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내외공이 함께 증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사흘 정도 마셨을 뿐인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전보다 배 이상 증진되어 있었다.

 

"잘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줄 테니..."

백남빈이 강미루를 보면서 말했다.

푸스스!

계란만한 돌을 손에 쥔 백남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돌은 소리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돌을 부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을 소유한 자라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남빈처럼 새알을 쥐듯이 부드럽게 잡아서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미루도 배시시 웃으면서 역시 계란만한 돌 두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양손 손바닥으로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가루가 팥고물처럼 떨어지고 강미루의 손바닥에는 이내 콩알같이 작고 매끄럽게 변한 돌멩이 두개만 남게 되었다.

강미루가"훅" 하고 입김을 불자 그 작은 돌들은 휙 하니 날아가서 녹지에 퐁당 빠져 버렸다.

그걸 본 백남빈이 손뼉을 쳐서 찬사를 보낸 후 말했다.

"이 녹지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봐야겠소."

 

풍덩!

백남빈은 짧은 속바지만 입고 뜨거운 녹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지의 물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아주 짙어서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백남빈은 조금씩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물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밖에서 강미루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나오지 않자 불안해졌다.

"조심하셔요!"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의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결국 그녀도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수하던 백남빈은 강미루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헤엄쳐 올라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강미루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푸우!”

“하아!”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마주잡고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쉬었다.

녹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서 물을 털어 주었다.

"녹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같소. 그 외에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당신은 걱정말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숨을 고른 후 강미루를 안심시킨 백남빈은 다시 녹지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강미루는 그런 백남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내같이 백남빈을 염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남빈은 백근 정도 되는 바위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의 무게로 인해서 그의 몸은 처음보다 비교도 안되게 빨리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정말 깊고 뜨거운 곳이구나. 내 피부가 영약으로 변한 녹지의 물을 마시고 강인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미 종이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백남빈은 엄청난 수압에 귀가 멍멍해졌다.

두 눈은 뜨거운 온천수에 의해 눈알이 익어버릴 것 같아서 질끈 감고 있었다.

(제법 큰 바위를 안았는데도 부력이 이토록 세니 바위만 놓으면 그대로 물위로 솟구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녹지의 바닥이었다.

(어떻게 연못의 바닥이 이렇게 매끄럽고 평평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서쪽 절벽에 창평곡이라고 새겨놓은 사람이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세적인 능력을 지닌 기인이 이 창평곡에 살았었다는 사실이다.)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든 백남빈은 바위를 안은 채 발로 더듬더듬 바닥을 밟으며 돌았다.

매끈한 바닥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서쪽 절벽에 새겨진 창평곡이란 글 이외에 처음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 사이에 숨이 턱까지 찼다.

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긴 싫어서 꾹 참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했다.

깊은 물속에서는 바위도 아주 가벼워서 마치 솜덩이 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몸도 한걸음 한걸음에 수초처럼 일렁거리며 나아갔다.

잠시 조사해 본 백남빈은 녹지가 마치 우물같은 형태임을 확인했다. 연못가에서 중심부를 향해 몇 장 들어간 쪽부터 거의 직각의 벽을 이루며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구조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우물 형태를 어떤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수압과 뜨거운 열기를 견디면서...

그런데 그때까지 반반하던 바닥에 뭔가 뭉툭한 것이 백남빈의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손으로 쓰다듬어본 백남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검(劍)! 장검이로구나.)

백남빈의 발에 밟힌 것은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의 길쭉한 장검이었다.

백남빈은 그때까지 안고 있던 바위를 놓고 대신 장검을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화악!

뜨거운 물이 귓가로 스쳐지나가며 화끈거렸다.

 

“푸학!”

삽시에 수면으로 올라온 백남빈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연못가로 헤엄쳐갔다.

"괜찮아요?"

녹지 밖에서 가슴 조리고 있던 강미루가 뛰어와 백남빈이 내미는 장검을 받았다.

후딱 물 밖으로 뛰쳐나온 백남빈의 피부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이 연못은 확실히 이상하오! 바닥에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게 사람이 일부러 그래놓은 것 같소."

백남빈이 머리를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았던 전대기인의 흔적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강미루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 쳤다.

"물속에 이 검만 있던가요? 혹시 창은 없었어요?"

강미루는 백남빈에게서 받아든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호가 홍의창인 만큼 그녀의 무기는 창이었다.

"욕심 많은 아가씨로구만. 창 같은 건 없었어."

“욕심쟁이라 미안하네요.”

백남빈의 우스개소리에 강미루가 샐쭉 토라져버렸다.

"내가 다음에 좋은 창을 하나 구해주겠소."

미안해진 백남빈은 강미루를 달랬다.

"그런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강미루는 검을 백남빈의 손에 들려주었다.

토라진 척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작은 말에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백남빈의 손에 들린 검의 청동색 검집에는 <사자(獅子)>라는 검명(劍名)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검명은 지금은 쓰지 않는 상고시대의 고전체(古篆體)여서 처음에는 장식을 위한 문양인 줄 알았다.

“당신 별호에 잘 어울리는 검이네요.”

백남빈과 함께 살펴보다가 사자라는 검명을 판독해낸 강미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호가 검사자(劍獅子)인 백남빈이 연못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검의 이름이 사자검(獅子劍)이라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재질이 청동은 아닌 것같은 데... 무슨 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묵직할까?"

백남빈도 사자검을 두 손으로 든 채 살펴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사자검은 보통의 검보다 폭과 두께가 한 배 반쯤 된다.

하지만 무게는 같은 크기의 검보다 서너 배 이상 나가서 아주 묵직하다.

스르르릉!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을 잡아서 비틀어 당기자 역시 짙은 녹색인 검신(劍身)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비록 번쩍이지는 않지만 녹옥(綠玉)같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자검의 녹색 검신을 본 백남빈과 강미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보검이구나.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검이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자검의 검신은 날이 서있지도 않고 예기를 흘리지도 않으며 맑고 담백하다.

검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지만 사자검은 누가 봐도 보물이라 할 만했다.

검신과 검병은 하나로 돼 있었고 검집은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겁긴 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백남빈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보검을 얻게 된 백남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보검이 손에 드니 절로 춤이 나오는구나. 백만 오랑캐도 두렵지 않고 십만 악마도 두렵지 않도다. 검이 이르는 곳에 악도의 피가 튀고 웃음이 이르는 곳에 만마가 도망치는도다."

백남빈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자검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찌르고 하였다.

강미루도 덩달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도(天道)를 이 사자의 검으로 밝히리라!”

백남빈은 사자검을 쭉 뻗어 하늘을 가르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순간 사자검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뻗혀나갔지만 흐릿하고 또 순간적인 일이라 백남빈은 물론이고 강미루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자신이 사자검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하늘 높이 뻗어가게 한 것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의 낭낭한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창평곡을 맴돌았다.

 

***

 

(검기(劍氣)...)

신가람은 눈을 빛내며 멀리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은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을 뚫고 들어가며 진땀을 빼던 중 잠시 숨을 돌리려 하늘을 보았었다.

그런 신가람의 눈에 멀리 앞쪽 몇 개인가의 산봉우리 너머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들어왔다.

찰라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신가람은 그 기운이 검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가람 자신이 평생 검법을 수련해왔기에 그 검기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저곳에서 방금 전 신검(神劍)이 세상에 나왔다.)

신가람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검법을 수련하는 자가 오매불망하는 것은 훌륭한 검을 얻는 것이다.

상서로운 검기로 하늘을 찌른 신검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가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검을 얻은 자와 말괄량이 처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다.

(장인 어른께 면목이 서려면 한시라도 서둘러야겠구나.)

신가람은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매망량의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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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강미루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 백남빈은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강미루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강미루는 다시 입을 맞추려고 내미는 백남빈의 입에 불쑥 과일을 갖다 대었다.

백남빈이 말없이 웃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즙과 함께 과육이 녹듯이 넘어가 버렸다.

(잘 익은 감과 비슷한 맛이로구나.)

백남빈은 과일을 하나 더 집어 입에 가져갔다. 왕성한 식욕이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던 백남빈은 과일 하나를 집어 그때까지 미소를 띤 채 보고만 있는 강미루에게 건네주었다.

강미루도 그제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두 사람의 상처는 놀라울 만치 회복이 빨랐다.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는 온천에서 나왔을 무렵에 벌써 아물고 있었고, 강미루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창평곡에서 청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신랑성의 도발은 시작되고 있었다.

토곤이 신랑성으로 하여금 오이라트 기마군단의 남침을 위한 통로의 개척을 명령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마군단이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장애물의 제거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신랑성의 고수들은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몇 군데 요충지를 목표로 쇄도해왔다.

만리장성 일대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저지에 나섰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인 신랑성의 정예들을 막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부는 무황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황성이 북경 북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였으며 지금까지는 매번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황성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황성의 당대 성주 주진충은 오래전부터 무황성 깊은 곳에 은거한 채 무림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 왕소군이 무황성을 관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왕소군은 무황성 상하(上下)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인지라 대국적인 안목이 없는데다가 측근들만 중용하고 방탕하여 무황성의 화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실정으로 인해 무황성의 강대한 힘은 결집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신랑성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다.

토곤이 전면적인 중원 침공을 시도하게 된 데에는 무황성의 쇠락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무황성으로서는 명나라 군부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왕소군은 신랑성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며 각처의 분타에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북과 산서성의 각지에서 신랑성과 무황성의 고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왕소군은 은거 중인 남편 주진충을 찾아가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한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

 

-유우겸(劉盂兼)!

 

육순에 접어든 그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국조미랑 왕소군의 지도력 부재와 방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무황성을 애써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의열전(義烈殿)의 전주인 유우겸이었다.

의열전은 중원 밖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무황성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철령보도 공식적으로는 의열전에 속해 있을 정도다.

왕소군은 그 철령보로부터 날아든 전서구의 내용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의열전을 맡고 있는 유우겸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독안룡 이탁의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하북과 산서 일대의 분타에 경계령을 발동했다.

그 덕분에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온 신랑성의 세력을 하북과 산서의 분타들이 제 때 요격할 수 있었다.

비록 의열전주 유우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무황성의 대세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중원 내부를 관장하는 조직인 군림전(君臨殿)의 전주 예운림(睿雲林)이란 자가 야욕을 품고 왕소군을 방조하고 있는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유우겸은 의열전의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몸이 묻힌 만큼이나 그의 고심의 깊이도 깊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랑성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 무황성은 기필코 패배하고 만다."

유우겸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

그의 뒤로 백의의 문사 차림인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전주, 꼭 그렇지 만도 않소이다."

갑작스런 백의문사의 등장이지만 유우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사의에 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남궁대협(南宮大俠)! 군림전주 예운림의 숨겨진 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유우겸의 말에 남궁대협이라 불린 백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무황성의 쟁쟁한 인물들치고 자기 세력을 암암리에 키워 오지 않은 자가 없지 않소이까?"

백의문사의 말을 들은 유우겸은 탄식했다.

"세상에 알려진 무황성의 힘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외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 누가 앞장서서 자신의 힘을 소비하려 들겠소?"

"사실이 그렇긴 하오. 그래도 무황이 검을 높이 들기만 하면 무황성의 모든 힘이 다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역시 무황과 그의 후처인 국조미랑 왕소군이오."

백의문사의 말을 받아 유우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궁대협. 노부의 집안은 대대로 무황성에 충성을 바쳐왔소. 노부는 감히 성주와 주모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소이다."

"무황성의 충신인 유전주의 입장은 이해하오."

백의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는 없소. 남궁대협께서 노부를 도와주기만 하신다면 토곤의 야심을 꺾을 가능성은 충분하오."

 

무황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유우겸과 백의문사의 밀담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헌데 남궁대협이라고 불린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이기에 무황성의 기둥인 의열전 전주가 이토록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창평곡의 아침은 푸른색 온천수로 채워져 있는 연못 녹지(綠池)에 반사된 햇살에 서쪽 절벽이 아롱지며 시작된다.

흑왕은 언제 일어났는지 남쪽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백남빈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구석에는 강미루가 고개를 백남빈쪽으로 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추한 차림도 선녀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하지는 못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백남빈이 상아같은 뺨에 살짝 입술을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면서도 피곤했는지 쉽사리 깨어나지는 못하는 강미루다.

 

"정말 세상 밖에 서야만 세상을 잊게 되는구나."

혼자 오두막 밖으로 나선 백남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평곡의 아침은 세외선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계곡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게 한다.

“아아아!”

기분이 고조된 백남빈은 크게 한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북쪽 숲에서는 새들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고성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

 

백남빈의 고함을 들은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바탕이 반석(盤石)같은 자다.)

신가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거리가 먼 때문인지, 아니면 진법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장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공이 심후한 신가람을 제외하면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려장 무사들 중 누구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록 소리는 작게 들렸지만 지축이 순간적으로 흔들 하는 것을 신가람은 감지했다.

마치 항아리같은 지형인 창평곡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함 소리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사형(大師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신가람은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그 인물이라면 방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놈의 장소성이었으니 대사형은 아니다.)

신가람은 고함이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미간을 모았다.

철부지 처제가 실종된 근처에 젊은 사내놈이 함께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점이 신가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가람이 파진을 시도한 후로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신가람은 미혼진을 칠할 넘게 파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법에 빠져 실종되었던 네 명의 대려장 무사들을 발견했다.

네 명중 둘은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공포에 질려 들고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의 고함 덕분에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미혼진의 파진이 좀 더 쉽게 되었다.)

닷새 넘게 깎지 않은 수염으로 덥수룩해진 턱을 만지며 신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백남빈이 지른 고함이 신가람에게는 지남철(指南鐵)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신가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지난 닷새 동안 자신을 곤혹하게 만들었던 미혼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진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진법이 또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매망량(魑鬽魍魎)들이 사방에서 신가람을 위협하며 덮쳐들었다.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散魄陣)이 신가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삐익!"

한 차례 고함을 지른 후 백남빈은 휘파람을 불어 흑왕을 불렀다.

그리고는 껑충거리며 다가온 흑왕을 타고 그리 넓지 않은 분지를 신바람 나게 몇 바퀴 돌았다.

흑왕과의 아침 산책은 상처가 완쾌된 이후로 매일같이 행하는 일과였다.

 

곤히 잠들었던 강미루도 백남빈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다.

서둘러 녹지로 가서 세수를 한 그녀는 가지가지의 과일을 꺼내어 돌탁자 위에 놓았다.

때맞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두막으로 들어온 백남빈이 탁자 앞에 앉았다.

이곳 창평곡은 아무래도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이 나곤했다.

"잘 잤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백남빈이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창평곡에 들어오기 전의 백남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글맞은 수작이다.

"네! 공자님!"

하지만 강미루는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엿새간 두 사람은 부부처럼 지내왔다.

서로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서로가 없으면 단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선만은 지켰다.

비록 한 지붕 아래 몸을 눕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벼운 애정표현 이상은 하지 않아온 것이다.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사람은 동쪽절벽으로 갔다.

동쪽절벽은 백남빈이 내려왔던 곳이다.

당연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끝내 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곳에 출로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백남빈이었다.

한참 동안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두드려 보고 하다가 지친 두 사람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묶은 강미루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때마다 일렁거려서 그림자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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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극한 정성

 

 

비록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함께 잠자리를 만들자고 말하기 쑥스럽다.

그래서 백남빈은 혼자서라도 이슬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마련해볼 생각으로 숲으로 갔다.

강미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백남빈을 부축하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녀도 드디어 백남빈의 뜻을 알아차렸다.

몸도 편치 않으니 제게 맡기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을 바위에 앉아있게 한 후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렀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들은 자르고 큰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줄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들을 뗏목을 엮듯이 엮어 세우자 한쪽 벽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미루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게 척척 잘해냈다.

"소저는 최고의 목수요."

구경하던 백남빈이 미안해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백남빈이 칭찬하는 말을 들은 강미루는 쌩긋 웃으며 나무줄기를 훑어 잎들을 백남빈을 향해 뿌렸다.

백남빈도 역시 나뭇잎들을 훑어 뿌렸다.

 

몇 차례의 장난질이 오가고 강미루는 다시 나무를 자르고 묶었다.

머잖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백남빈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도왔다.

이날 그들은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 짓는데도 그렇게 많은 나무가 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남빈은 따뜻한 온천 연못가에서 흑왕이 날라온 나무들로 집을 짜 맞추었다.

지붕에는 나뭇가지들을 얹고 진흙을 개어 발랐다.

따뜻한 창평곡의 기온 덕분에 지붕은 잘 말랐고 해가 질 무렵 오두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리하게 몸을 쓴 탓에 아물어가던 강미루의 가슴과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은 상체가 벌겋게 물들었고, 한 사람은 하체가 벌겋게 물들어 서로가 보기에 몹시도 처참하고 가련했다.

몇 개의 열매를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지혈하는 것도 잊고 곯아 떨어졌다.

 

***

 

백남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이 그로 하여금 눈뜨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품에는 강미루가 피곤에 지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백남빈은 참기 힘든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여 강미루를 깨울까봐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왼쪽 다리는 그의 것이 아닌 양 고통 외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었다.

비록 급한 대로 상처를 싸매긴 했지만 그전에 말을 달리면서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자꾸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다시 치료해야겠구나)

백남빈은 청랑검을 꺼내 허벅지의 퉁퉁 부은 상처에 대고 그었다.

싸악! !

쇠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청랑검의 날이 스치자 고름이 와락 쏟아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누렇고 뻘건 고름은 보기에도 끔찍할 뿐 아니라 지독한 냄새까지 풍긴다.

계곡 밖이었다면 이토록 상처가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평곡의 따뜻한 기온이 그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자니 식은땀이 팍팍 솟았다.

고름이 남지 않도록 빨아냈으면 좋겠는데 입이 상처에까지 닿지 않았다.

고름을 짜내면서 강미루의 가슴에 난 상처도 곪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약도 없는데 이러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죽는 건 아닐까?)

백남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숱한 사경을 경험한 내가 이런 정도의 상처에 죽기야 할려고...)

애써 위안해보았지만 크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여 죽는 일도 허다하므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미루가 깨어났다.

왜 그래요? !”

눈을 부비며 일어나던 강미루는 쩍 벌어진 백남빈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는 퉁퉁 부어있는데다가 고름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강미루는 자기가 낸 상처로 인해서 백남빈이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고 있던 백남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시오 미루. 당신이 내 다리를 찌른 것은 그때 상황으론 잘한 일인데 왜 운단 말이오? 나도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내지 않았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머리칼을 가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플 뿐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강미루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제가 나빴어요.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백남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미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설령 이 상처로 인해 죽는다 해도 당신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상처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공자!”

다정한 말을 들은 강미루는 백남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강미루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백남빈이 다시 말했다.

"진심이오 미루,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가니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소."

백남빈은 강미루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열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를 방불케 할만큼 뜨거웠다.

 

백남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미루는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고름을 다 빨아낸 후였다.

또 체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기 위해 백남빈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커다란 나뭇잎을 모아 부채마냥 부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강미루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청초한 백합같아서 백남빈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백남빈의 다리는 다시 부어오르고 있었다.

열도 금방 올라가서 목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백남빈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고 애쓰며 강미루의 손바닥에 몇 마디를 적었다.

 

<온천물 속에 나를 넣어 주시오. 중독은 반지로 치료할 수 있으니 입에다 반지를 물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남빈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쉽지 않구나! 쉽지 않아.)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곡 일대에 구축되어 있는 진법은 만만하지가 않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켜서 그때까지 구사한 파진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간단하지만 원론적인 이치에 의지하여 진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반면 신가람은 진법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오히려 파진(破陣)이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진법이 일으키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일이 대조하다 보니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뚫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처제의 안위가 걱정이다.)

신가람은 조금씩 가슴이 타들어갔다.

정황상 말썽쟁이 처제가 이 진법에 빠진 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다.

말괄량이라 소문났지만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많은 강미루다.

어린 처제가 위험에 처해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자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신가람이었다.

(진법의 중심부가 어딘지만 알아도 파진이 좀 더 수월할 텐데...)

신가람은 한숨도 자지 못해 시린 눈을 문지르며 다시 진법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강미루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덧 대려장의 강인한 홍의창 강미루가 아닌 연약한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타액이 닿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독으로 변하는 온천 속에 백남빈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지금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을 것 같았다.

하물며 백남빈이 정신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따라주어야 한다.

간병하느라 기진맥진한 강미루는 백남빈의 몸을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연못으로 갔다.

연못가에 이르자 백남빈의 왼손에서 오채금환을 빼어 입에 물렸다.

하얀 이빨 사이에 물려진 오채금환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입에 문 채 백남빈이 죽어가는 중임을 떠올리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끝없이 일었다.

오채금환을 물고 있는 백남빈의 벌거벗은 몸은 연못 속에 천천히 잠겨들어 머리만이 물위에 떠 있었다.

무릎까지 온천수에 다리를 담근 강미루는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백남빈의 머리가 물속으로 갈아 앉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펄펄 끓는 온천수에 잠기자 백남빈의 머리는 뜨거운 찜통처럼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강미루도 연못의 열기와 백남빈의 열기로 인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온천 속에 한 사람은 몸을 담그고 한 사람은 다리를 담근 채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까무라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백남빈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강미루의 몸도 몇 번을 땀으로 뒤집어썼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해는 다시 뉘엿뉘엿 서쪽에 걸쳐져 있고, 천리마 흑왕만이 두 사람이 염려스러운지 다가와서 힐끔힐끔 보다가 가곤 했다.

 

***

 

지면 아래 깊은 분지인 창평곡에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창평곡 밖에서 밀려든 그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강미루가 먼저 정신이 들었다.

몸이 가뿐해져 있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도 백남빈의 머리만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백남빈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의 열이 많이 내린 것이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고 나서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입에 물고 있는 반지는 이빨에 걸려 있었지만 긍방이라도 떨어질듯 말듯 위태로웠다.

강미루는 재빨리 손을 뻗쳐 반지를 잡은 후 백남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평온해진 백남빈의 숨결은 폭풍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했다.

비로소 강미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나도 따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죽었다면 따라 죽을까?)

강미루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 가슴의 상처는 작은 흉터만 남고 다 아물어 버렸구나. 이 연못의 물이 정말 신통한데... 이 사람의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겠지?)

백남빈을 연못에서 좀 더 끌어내 허리 아래만 온천수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난 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릴 동안 과일이나 몇 개 따올 생각으로 근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왕을 불렀다.

몸이 나른하여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흑왕의 등에 오를 수는 있었다.

흑왕이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되자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강미루가 숲으로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열매들을 따서 돌아 왔을 때 백남빈도 정신을 차리고 나른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땀을 푹 뺀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알몸의 백남빈을 연못에서 끌어내어 풀잎 웃도리를 감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쁨에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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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싹 트는 연정(戀情)

 

 

푸른 색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지난 밤 흑왕이 떨어진 절벽인데 윗부분이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나와 있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절벽 아래쪽과 연못 사이의 넓지 않은 바닥에는 동물들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강미루와 흑왕처럼 길을 잘못 들어 절벽에서 떨어진 놈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절벽의 수십 장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하늘을 향해 돌출해있다.

어젯밤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져 내리던 흑왕이 뛰어넘었던 그 바위다.

만일 흑왕이 그 바위를 뛰어넘기 위해 도약하여 멀리 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바위에 부딪혀서 즉사했거나 절벽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서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강미루는 아찔해졌다.

흑왕의 도약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연못에 빠지지 못하고 절벽 아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강미루 자신과 흑왕도 저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처럼 되어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앞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의 중간 부분에 낀 이끼가 마치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창평곡(蒼平谷)>이라고 읽혔다.

(이 분지의 이름이 창평곡이었군.)

(전에 누군가 여기에서 살았었네.)

백남빈과 강미루는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더 큰 창평곡이라는 글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절벽에 깊이 글을 새겨놓았었는데 그늘이 져서 서늘한 그곳에만 이끼가 잘 자라 글씨를 푸르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창평곡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은 없었다. 창평곡 전체가 수백 길의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는 항아리 같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면 절벽을 올라가지 못할 갈 것도 아니지만 그럴 경우 목숨을 걸어야한다.

하물며 왼쪽 다리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백남빈으로서는 수백 길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창평곡 내에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창평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남빈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중원 침공이 임박했다는 증거들을 무황성에 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띠고 있다.

헌데 이 괴상한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서구라도 무황성에 잘 도착했을까?)

답답한 생각에 앞쪽에 앉아있는 강미루에게 집적거렸다.

"소저! 혹시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날린 전서구들도 모두 붙잡은 거요?"

그러나 강미루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백남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백남빈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강미루의 손목을 잡아 주의를 환기시켰다.

... 왜 이래요?”

손목이 잡힌 강미루는 백남빈이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아랫도리를 사실상 발가벗은 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백남빈이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에게 물어볼 게 좀 있소.”

... 물어보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안심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우리가 무황성으로 날려 보낸 전서구들을 전부 잡았소?"

백남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려장은 해동청(海東靑)을 비롯한 많은 매를 길들여 부리고 있다. 그 매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철령보의 전서구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강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전서구를 모두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철령보에서 나오는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서구들이 전멸하지만 않았다면 무황성과 명나라 황실에서도 신랑성의 동향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증거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다.

 

"허벅지의 상처는 어때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썩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열이 나오."

"당신의 그 신기한 반지로도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강미루가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백남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험해 봤지만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만 있는 것 같소"

강미루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리고 이야기하기가 거북하고 힘이 들었다.

!

그래서 별 생각없이 백남빈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풀로 만든 치마가 흔들리며 상아같이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여 백남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체에 걸친 헐렁한 남색상의 사이로도 탐스러운 젖가슴이 다 가려지지 못하고 살짝살짝 엿보였다.

백남빈은 눈앞이 아롱거려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가을인데도 여기는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흑왕의 등에 마주 보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들어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말등인지 소등이지도 잊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인 상대라는 사실 때문인지 강미루는 백남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게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과 원수지간인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남빈 역시 여자와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무작정 좋기만 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대려장 장주의 둘째 딸과 깊이 마음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무황성에 대한 근심이 감해지기까지 해서 백남빈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이 순간만이 시간의 전부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남빈은 무심코 말했다. 깊은 정이 깊이 배인 말이다.

그러나 강미루는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그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단지 백남빈의 중얼거림에 스며있는 애틋한 정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여장부인 내가 그토록 경멸스러워하던 다른 여자들처럼 사내 앞에서 교태나 부리고 있다니...)

강미루는 차츰 혼란한 감정에서 벗어나며 한탄했다.

(미루야! 미루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형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넌 원수인 철령보의 소보주에게 푹 빠져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도 않는구나.)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강미루는 이미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정(戀情)이라는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덫에...

 

***

 

이 앞쪽에서 실종된 동료들이 있단 말이지?”

신가람은 앞쪽에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 점호에 일곱 명의 형제가 빠져서 확인을 해봤더니... 흑왕의 것으로 보이는 발굽자국을 발견하고 이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려장의 기마대를 이끌고 당산산맥까지 온 구철륵(具鐵勒)이란 중년의 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곱 명중 세 명은 기진한 모습으로 계곡 안쪽에서 발견되었지만...”

구철륵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가람과 구철륵에게서 멀지 않은 뒤쪽에 세 명의 사내가 동료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자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 탈진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머지 네 명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구철륵은 다시 계곡 쪽을 보며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미혼진(迷魂陣)이 설치되어 있군.”

신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곡 쪽을 보았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계곡이다.

하지만 그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네 명은 실종되고 세 명은 반송장이 된 채 발견 되었다.

계곡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탈진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고 깊이 진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철륵이 신가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했다. 다시 돌아 나온 셋은 그나마 침착해서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빠져나왔지만 나머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치달리다가 탈진해버렸을 것이다.”

신가람은 계곡 안쪽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이 강진남을 한참 능가할 뿐 아니라 기문진법의 재주도 장인에 못지 않다.

덕분에 계곡 안쪽에 흉험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진법을 연구하고 공부해온 신가람으로서도 처음 접해보는 미지의 진법이다.

그 어떤 강적보다도 위험한 곳이다.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누구도 이 계곡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신가람은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구철륵에게 말했다.

...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구철륵과 대려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등지고 천천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며 신가람은 오랜만에 잠잠하던 몸 속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진법이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계곡 일대에 설치 된 진법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승부욕이 신가람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정말 못 말리는 것이 젊은이들의 벼락같은 사랑이다.

백남빈과 강미루의 감정적 연대는 짧은 시간이건만 더할 수 없이 깊어 갔다.

서로에 대한 연모의 감정에 취해 두 사람은 흑왕이 창평곡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백남빈과 강미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강미루의 얼굴은 발그레하여 햇살 아래 더욱 붉었고 백남빈의 얼굴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상기되어 있었다.

흑왕이 연못가에 와서 발을 멈추었을 때야 강미루가 활짝 웃으며 백남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헌데 뛰어내리는 순간 백남빈하지 않은 풀잎 치마가 위로 훌렁 올라가는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였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엉덩이가 펄럭이는 풀잎 치마 밖으로 언듯 들어났다가 숨어버린다.

강미루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백남빈은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강미루가 말에서 내리려는 백남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백남빈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강미루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비록 소녀에 불과하지만 무공을 익힌 강미루의 완력은 대단하여 백남빈의 몸을 가볍게 받아 땅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이다.

하지만 항아리 형태인 깊은 골짜기에서 낮은 짧을 것이 불문가지다.

백남빈은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말을 꺼내기가 멋쩍었다.

<잠자리>라는 말이 잠은 자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하늘을 보았다가 숲을 보았다가 했다.

(저 사람이 어젯밤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남빈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하자 강미루는 덜컥 겁이 났다. 낮선 곳에서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몸서리 처지도록 경험했었다.

또 혼자 남겨질 수는 없다.

강미루는 백남빈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어젯밤에도 나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백남빈은 강미루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난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언젠가 알 때가 있겠지.)

그것이 백남빈의 생각이었고 원래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은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지만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양부 독안룡 이탁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니 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생부 백무염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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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둘만의 절지(絶地), 낙원(樂園)

 

 

... 죄송합니다 신()공자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작은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백남빈의 말을 끌고 돌아간 몇 명을 제외하고 백여 명의 대려장 무사들 모두는 밤새 당산산맥을 달리며 강미루의 종적을 찾았다.

어두운 산속을 말로 달리다보니 몇 명인가는 낙마하여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강미루와 흑왕이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백여 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대들이 죄를 청할 일은 아니니 자책할 것도 없다.”

대려장 무사들 앞쪽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인물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인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시원시원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 좋은 몸에는 도포(道袍)라는 이국적인 형태의 흰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당건(唐巾)을 썼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만 아니라면 무사가 아니라 유생(儒生)으로 보였을 이 인물이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다.

강진남의 큰 딸 강미조의 남편인 그의 이름은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伽藍)이다.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으로 이름이 바뀐 압록강 너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가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강호의 물 좀 먹은 요동 일대의 늙은 무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가람을 대려장의 으뜸 가는 고수로 꼽고 있다.

강진남이라 해도 이 잘 생긴 사위보다 무공으로는 아래라는 것이 늙은 생강들의 일치 된 의견이다.

유모 최씨의 눈물 어린 애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신가람은 강미루를 대려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한 발 늦어서 강미루는 철령보를 빠져나온 전령과 싸우다가 당산산맥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수색 범위를 백리 밖으로 넓히되 말이 달릴 만한 지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신가람의 지시에 대려장의 무사들은 봉명(奉命)을 외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썽쟁이를 찾아내면 볼기짝부터 쳐야겠구나.”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려장 무사들을 보며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

 

강미루는 자신의 애마가 목을 핥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강미루는 기가 막혔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이 조각조각 잘려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선머슴같은 말괄량이라지만 어제 처음 만난 사내에게 알몸을 홀딱 보이고 말았으니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다.

대려장의 둘째 공주로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강미루다.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남빈을 죽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백남빈을 죽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백남빈을 보면 풀이 죽어서 땅만 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마음이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백남빈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강미루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의 붉은 옷을 갈기갈기 잘라버렸었다.

원래 옷이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된 터라 강미루는 백남빈의 남색상의(藍色上衣)로 알몸을 가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알몸이 된 백남빈의 상체가 당당하게 보여 강미루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날은 이미 밝았으나 강미루는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체는 백남빈의 헐렁한 웃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라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쳐 앉을 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너무도 부끄러운 곳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뱃속에서는 드디어 꾸룩 꾸룩 비둘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두 사람이 있는 분지의 형상이 전모를 드러냈다.

분지는 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치 거대한 항아리같은 형태의 분지라 바닥에서는 하늘이 타원형으로 보인다.

분지의 바닥에는 직경이 수십 장인 타원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는 그 연못을 에워싸고 절벽과 원시림과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바깥세상은 이미 깊은 가을이지만 분지 내부는 한 여름처럼 덥다.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연못물은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띄고 있다.

녹색의 온천수가 고여 있는 연못은 주변의 풀, 나무, 바위들과 어울려 낙원을 연상하게 한다.

늘 한 여름인 이 분지는 진정 세상 밖의 세상이요 평화와 안락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호가 홍의창(紅衣槍)이었던 강미루는 하룻밤 사이에 나신창(裸身槍)이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려장의 원수인 철령보 소속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뜻으로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것도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찌 하나?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와 형부가 알면 저 사람을 살려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강미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녀로서 알몸을 보였으면 상대에게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신의 집안과 오랜 원수지간인 철령보 출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부가 허락을 하실지 미지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번민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옆에서", !" 하는 기척이 나서 강미루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백남빈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상당한 양의 풀 뭉치를 내밀고 있다.

그런 백남빈은 상체를 풀로 얼기설기 엮은 것을 도롱이처럼 걸치고 있다.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언제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풀로 몸을 가릴 것을 만든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내미는 것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받아 들었다.

다리를 한껏 오무려 매무새를 바로하고 팔만 돌려서 받노라니 백남빈의 어깨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무의 속껍질과 긴 풀로 만들어진 풀옷은 백남빈을 무슨 요정전사(妖精戰士)처럼 보이게 했다.

준수한 백남빈의 옆모습이 햇살에 밝게 빛나 더 없이 보기 좋았다.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로 된 옷을 가슴에 안았다.

(나도 이 옷을 입으면 저 사람과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야릇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풀 뭉치를 받자 백남빈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강미루에게는 그런 백남빈의 행동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어쩐지 볼일 다 본 후 버림받은 여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강미루가 상의(上衣)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풀 옷은 예상과는 달리 치마였다.

부드럽고 긴 풀들을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엮어서 마치 초가집의 이엉처럼 만들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꽤 정성을 들여 만든 풀 옷이었다. 남자의 거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풀이 흩어지지 않도록 나무의 속껍질로 여러 번 엮어 놓은 것이다.

풀 옷을 허리에 감고 일어서서 온천물에 모습을 비춰보니 우스운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는 헐렁한 남자의 상의를 걸쳤고 아래에는 풀로 된 치마를 입었으니 그보다 더 우스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도 녹색이고 그것에 비친 사람도 녹색이다.

문득 강미루와 정반대의 차림을 한 사내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 곁에 나타났다.

물론 백남빈이다.

그의 품에는 여러 개의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안겨져 있었다.

강미루는 조금 심술이 났다. 물에 비친 백남빈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인 때문이다.

백남빈의 풀 옷 상의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기의 풀로 짠 치마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코웃음을 치며 돌아선 강미루는 백남빈의 품에 있는 열매를 몽땅 집어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토라진 계집아이같은 강미루의 짓거리에도 백남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연못을 향해 앉은 강미루는 백남빈이 따온 이름 모를 과일을 하나 먹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백남빈에게 향해있어 무슨 맛인지 음미할 수도 없다.

백남빈이 그런 강미루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놓여진 과일을 하나 슬며시 집어든다.

강미루는 새침한 표정인 채 관심 없는 척 했다.

백남빈은 강미루의 눈치를 보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벗긴 것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녀의 나신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본성의 발현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몸을 보고 만졌던 어쨌든 자신은 강미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소녀한테 꿀려서 기를 못 편단 말인가)

백남빈은 내심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이성(異性)의 경험이 없는 백남빈으로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감정(人間感情)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인 것을...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백남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빨리 이 분지를 빠져 나가야하는데... 타고 갈 말도 없고 다리마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속은 타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만 한다.”

깊이 몰두하다 보니 백남빈의 생각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강미루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한마디 했다.

"이 분지를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걸요?"

그러나 백남빈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묵묵히 속으로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강미루는 왠지 이 아름다운 분지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곳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일로 허기를 면한 백남빈은 아픈 다리를 끌면서 분지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미루는 휘파람으로 흑왕을 불렀다. 흑왕도 온천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생생하게 기력을 회복한 후였다.

강미루는 다가온 흑왕의 등에 훌쩍 몸을 날려 올라탔다.

그러나 몸을 날릴 때의 시원한 아랫도리의 감촉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치마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이 쓰여 눈이 아래를 보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백남빈을 보다가 하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백남빈 옆에 다다른 강미루가 손을 뻗자 백남빈은 사양할 수 없어 그녀의 뒤로 올라가 앉았다.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말에 타고 있자 어제 저녁의 그 치열했던 쟁투가 생각난다.

백남빈은 겸연쩍어 웃었고 강미루는 설레어 두 뺨이 발개졌다.

 

자세히 둘러보니 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기껏해야 만 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지는 그야말로 세외선경 같다.

북쪽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서쪽에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푸른 연못과 거의 맞닿아있으며, 남쪽 절벽 밑에는 풀밭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름 모를 새들을 제외하고는 토끼 한 마리도 눈에 뛰지 않았다.

동쪽의 절벽은 어제 밤에 백남빈이 내려온 곳인 듯한 데 한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데다가 수백길이나 되는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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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슴 떨리는 치료법

 

 

연못가 풀밭에 눕혀진 강미루의 피부는 먹물을 담은 통에 빠졌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몸이 돌처럼 단단해져 있다. 뜨거운 연못물에서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미루의 모습은 마치 흑옥(黑玉)으로 빚어놓은 옥상(玉像)인 듯 보였다.

(뭔가에 중독되었다.)

백남빈은 검게 변한 강미루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던 연약하고 오똑하던 콧날도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쉽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백남빈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강미루를 보며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이 든 이래 처음 살을 맞대본 여자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 어여쁜 소녀의 죽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다.

흑마의 등에서 자신의 턱을 물었던 악착스러움까지도 죽은 지금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복받친 백남빈은 자신도 모르게 강미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싸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 전해진다.

하지만 백남빈 몸속의 피는 꽃같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은 자신의 왼손이 닿은 강미루의 오른쪽 귀가 언뜻 흰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손을 떼자 강미루의 오른쪽 귀는 다시 검어 졌다.

왼손을 또 갖다 대자 강미루의 피부는 흰빛을 되찾았다.

왼손을 대었다 떼었다 몇 번 해본 백남빈은 그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의 조화임을 알았다.

오채금환은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것으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오채금환을 얼굴에 갖다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서 검은 색이 잠시 없어졌다.

그걸 보며 백남빈은 생각했다.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인데...)

혹시 마땅한 실험대상이 없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백남빈의 눈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는 흑왕이 보였다.

백남빈은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에서 강미루를 꺼내면서 흑왕도 함께 끌고 나왔었다.

흑왕은 오랫동안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녹초가 된 외에는 딱히 독에 중독되거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디에 독상을 입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저 말은 멀쩡한데 사람만 중독되는 독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백남빈은 강미루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몇 겹의 옷이 걸쳐져 있어서 상처가 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사아악!

잠시 망설인 후에 백남빈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강미루가 걸치고 있는 붉은 옷을 청랑검으로 잘라서 벗기기 시작했다.

몸이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옷을 훼손하지 않고는 벗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옷과 속옷이 모두 청랑검에 잘려나간 후 강미루의 알몸이 흑옥같은 빛을 띤 채 드러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소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고 있었다.

백남빈은 자신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체같이 굳어진 모습이지만 굴곡이 뚜렷한 여체를 난생 처음 보는 때문이다.

독에 중독된 후 모든 근육이 긴장을 일으킨 탓에 가슴은 일부러 세운 듯 봉긋했고 다리며 팔은 마치 깎아놓은 조각품 같이 쭉 뻗어있다.

팽팽한 아랫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두둑한 둔덕에는 피부색같이 검은 풀같은 것들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다.

미끈하기만 한 피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숲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백남빈은 마치 독사를 보기라도 한 듯이 질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언 듯 시야로 스쳐지나간 수림 아래의 깊이 갈라진 형적이 백남빈의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트려버릴 듯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언제까지 눈을 감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남빈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강미루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하지만 굳은 다짐과 달리 소녀의 알몸을 본 백남빈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황하여 지리멸렬한 신음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약관이 목전인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더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본 적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화끈 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것같은 여인을 보면서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비록 큰 맘 먹고 옷을 벗기기는 하였으나 막상 벗기고 나자 독상(毒傷)을 입은 곳을 찾기는커녕 왜 발가벗겼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여자를 모르는 숫총각에게 벌거벗은 여체는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눈을 감아도 선하고 눈을 뜨면 정신이 몽롱해 지는것 같았다.

"대장부가... 대장부가... 겨우 여자의 알몸 때문에 평정심을 잃다니..."

백남빈은 용기를 갖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떨려왔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젊음의 끓는 피라는 게 이성(理性)에 의하여 진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검은 조각상같은 강미루의 모습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록 백남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백남빈은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강미루의 몸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훑어보았지만 작은 상처 하나 눈에 뛰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독을 먹었던 것이로구나. 그걸 몰랐어. 그런데 어디서 독을 먹었을까?왜 먹었을까?"

백남빈은 마침내 강미루가 독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음독(飮毒)한 것을 알았다.

백남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강미루의 뻣뻣해진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시시!

그러자 오채금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독을 빨아들인 후 연기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입 속이 독으로 가득 차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백남빈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연못의 물이 독인 것은 아닐까? 뜨겁기도 했지만 뭔가가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었다."

백남빈은 그 즉시 연못물에 젖어 있는 자신의 옷에 반지를 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내심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백남빈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독을 마신 게 분명한데...”

백남빈은 자신이 조금 벌려놓은 강미루의 입술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혹시...)

강미루의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백남빈은 생각 난 것이 있어 연못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에 침을 뱉어 보았다.

츠츠츠!

순간 침이 닿은 옷자락은 먹물에라도 닿은 듯이 검은 색으로 확 변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다."

백남빈은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본래 연못물은 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액(唾液)과 섞이면 독특한 극독(劇毒)이 되어 생명체를 석상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약하게 중독된 사람은 생각도 그대로 할 수 있고 보고 들을 수도 있으나 몸은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의식마저도 잃어버리고 숨도 멈춰서 완전히 검은 조각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미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못물을 들이켰었다.

그래도 흑왕이 헤엄치면서 떠받쳐준 덕분에 연못물을 아주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마셨더라면 강미루는 온몸이 진짜 돌같이 굳어져서 백남빈이 입을 열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남빈의 영감(靈感)이 독을 찾아내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다.

백남빈은 절뚝거리며 일어나 흑왕에게 다가갔다.

파김치가 되어 주저앉아있는 흑왕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허벅지의 상처를 묶었던 머리띠를 끌러서 침을 뱉었다.

연못물에 젖어 있던 머리띠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변했다.

푸르르!

그것을 본 흑왕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지금 네 주인은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잠시 동안만 참아보렴. 네 주인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

백남빈의 부드러운 말에 흑왕이 가만히 있을 때 백남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머리띠를 푸릉거리는 흑왕의 입속에 확 넣어버렸다.

흑왕이 깜짝 놀라"푸럭" 하며 머리띠를 뱉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입속으로 독이 들어가자마자 흑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탑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보통 말의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천리마 흑왕마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본래 검은 색이던 흑왕의 몸은 쇳덩어리처럼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목에 손을 대 보니 벌써 뻣뻣해져있다.

말이 사람보다도 더 독에 민감한 것 같았다.

스윽!

백남빈은 쓰러진 흑왕의 가슴을 청랑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벌써 진하게 굳어진 검은 피가 상처에서 배어나왔다.

백남빈은 그 상처에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스스스!

그러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백남빈은 코를 막으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바닥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푸시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돌처럼 굳어졌던 흑왕의 몸이 가슴의 상처부위부터 시작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백남빈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생각한 오채금환의 사용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말()만큼이나 드센 대려장의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을 죽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남빈이다.

헌데 대려장의 소녀를, 그것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를 구하는데 왜 이처럼 정성을 쏟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럴까?"

백남빈은 반문해 봤으나 뚜렷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채금환은 크기는 작아도 독을 제거하는 효능은 아주 강력해서 벌써 흑왕의 중독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가 점차로 줄어들다가 종래에는 나지 않았다.

몸에서 독이 빠지자마자 흑왕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푸르르!

고개를 든 그놈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백남빈을 보고 있었다.

백남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먹은 그놈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강미루에게 돌아갔다.

푸른 풀밭 위에 누워있는 소녀의 검은 나체가 희미한 새벽에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백남빈의 가슴은 다시금 세차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진정하자!)

벌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강미루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말에게 했듯이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가볍게 칼로 그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중독 상태는 흑왕보다 심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당황하여 조금 더 깊이 베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백남빈은 강미루의 가슴에서 동전만한 크기로 살점을 도려내었다.

도려진 살점은 돌조각 같이 딱딱했다.

불룩한 젖가슴 위에 파여진 오목한 부위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그 상처 부분에 집어넣었다.

치이이!

그러자 달군 쇠를 물속에 집어넣은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연기가 뭉클 일어났다.

강미루의 왼쪽 젖가슴 위에 뚫린 구멍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인양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강미루의 검은색 나신은 점차 흰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백남빈은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해가며 강미루의 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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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계곡

 

 

무공과 달리 기문둔갑(奇門遁甲), 즉 진법은 짧은 시간의 공부나 타고난 재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걸쳐야만 진법을 설치하고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물론 백남빈은 보통 사람보다는 기문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양부 이탁이 기문진법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현장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지금 자신들이 빠진 진법과 유사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순하고 평범한 검법이지만 그 안에 무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

 

난감해하던 백남빈은 양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독안룡 이탁은 백남빈에게 기초적인 무공 두 가지만 가르쳤었다.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삼재검법과 육합심법(六合心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천년 이상 무림인들 사이에서 수련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이 이루어져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무공이 되었다.

물론 무공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것과 위력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은 워낙 단순하고 변칙이 없는 무공이라 그 위력이 위협적이거나 빼어나지는 않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을 진지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탁은 다른 무공들은 다 제쳐두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백남빈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독문절기인 칠로절천검(七路絶天劍)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백남빈이 백무염을 만나 가문의 절기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탁의 말을 통해 백남빈은 자신의 아버지 백무염도 무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닌...

하지만 이탁은 구체적으로 백무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남빈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백무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백남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가전절기를 익혀야하므로 함부로 다른 무공은 익히면 안된다는 양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무공을 폭 넓고 다양하게 익히는 대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극한까지 수련해온 것이다.

만일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으로 겨룬다면 백남빈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백남빈이 오 년 전 등천제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공도 삼재검법이었다.

위력이 평범한 삼재검법만을 구사하다 보니 매번 어려움에 처했었다.

그러나 결국 근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백남빈은 상대 무공의 결점을 파악해서 승리하길 반복했었다.

 

(하늘의 뜻, 땅의 이치, 인간의 도리...)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검결을 되새겼다.

(), (), ()을 삼재(三才)라 부르며 도가에서는 우주가 오직 삼재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진법이라는 것도 결국 우주의 원리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복잡한 진법이라도 삼재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삼재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칙, 즉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에 구름이 다소 흩어져 반쯤 찬 달과 함께 여러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저쪽에 있으니 북쪽은 이 방향이고...)

백남빈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찾았다.

그리고는 북두칠성이 떠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앞쪽 하늘에 있던 북두칠성이 갑자기 좌측으로 성큼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다시 몇 걸음 내딛자 하늘이 또 빙글 돌면서 북두칠성의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북두칠성이 바뀌는 방향과 걸음을 옮긴 거리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하자 주위의 경물이 확 바뀌었다.

 

***

 

!”

흑왕의 등에 앉아 있던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백남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왕을 황급히 돌려서 백남빈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마치 안개가 흩어진 것처럼...

주위는 어둡고 함께 있던 사람마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너무도 고요한 공간에 강미루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방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생겨난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든다.

공포에 휩싸이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고 이빨은 저절로 닥닥 부딪친다.

"...!"

극심한 공포에 질린 강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흑왕의 등에 와락 엎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친 듯이 흑왕의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잉! 두두두!

갑자기 박차가 가해지자 흑왕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발굽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음을 느낀 강미루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경사가 심한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주르르르! 티틱!

흑왕은 뒷발을 웅크리고 앞발은 버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콰드드드!

그러나 비탈의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라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강미루는 십여 장쯤 앞쪽에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왕이 미끄러져 가는 속도는 이미 쏘아진 화살 같다.

이대로 미끄러진다면 말과 사람은 그 바위에 부딪혀서 서로를 구분 못할 정도의 피떡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히히힝!

흑왕도 위기를 느끼고 웅크렸던 뒷발을 벌떡 세웠다.

파앗!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리던 속력보다 더 빨리 달려서 눈앞의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바위 너머는 허공이었다.

바위는 가파른 비탈의 끝 부분이었으며 그 너머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절벽이었던 것이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강미루의 귓가에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흑왕도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강미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악!”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강미루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 직후 강미루는 후끈한 열기가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기기를 십여 차례 했을 때 백남빈은 마침내 원형의 미로를 벗어나 진법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주위의 경물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강미루와 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차!)

깜짝 놀란 백남빈이 강미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협곡으로 들어 온 방법으로는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아악!>

멀리서 강미루가 내지른 게 분명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서 백남빈의 속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소저!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비명이 들린 방향을 어림하여 외쳐보았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바위들 틈에 나있는 사람이 다닌 듯한 길을 따라갔다.

 

***

 

길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끊겼는가 싶으면 바위 뒤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고 수시로 꼬불꼬불해져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백남빈은 단검에 찔려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려가는 길이 사라졌을 때 백남빈은 자신이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의 바닥에 이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가 지면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바닥이라 분지의 형태와 넓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말괄량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백남빈은 강미루가 아직도 원형의 미로를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빠져 나갔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좀 쉬어야한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지친 데다가 강미루의 단검에 찔린 허벅지의 상처에서 출혈이 가볍지 않아서 어지럽다.

털썩!

백남빈은 풀이 무성하게 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하늘을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면서 상큼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고르며 소지품을 점검해봤다.

악전고투를 치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무황성에 제출해야하는 밀서를 만지던 백남빈의 손길에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가 만져졌다.

정교하게 만든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가 들어있다.

옥패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단단하다.

그 옥패가 막아준 덕분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날린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디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하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날 지켜주신 셈이다.)

백남빈은 냉옥패를 어루만지면서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푸르르! 꿀럭! 꿀럭!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괴상한 소리가 상념에 잠긴 백남빈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 뭔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소리에 백남빈은 모골이 송연해 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남빈은 토곤이 강진남에게 예물로 보내려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꾸르륵! 푸르르!

그 사이에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한 괴성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청랑검이라 이름 붙인 단검의 날을 번득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싼 백남빈은 살금살금 기어서 괴성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반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나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제법 환해 주변을 분간할 수 있다.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로 다가가니 바닥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펴본 백남빈은 이내 그것이 실제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이가 족히 삼십 장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연못에 달빛과 별빛이 비친 것이다.

꾸르르! 푸륵!

괴성(怪聲)은 바로 그 연못 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흙은 따뜻하고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못은 온천(溫泉)인 게 분명하다.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 주변에는 여러 가지 풀이 자라고 있으며 꽃이 핀 것과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 연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백남빈의 콧속으로 풀냄새와 함께 각가지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다.

푸륵! 푸르르!

연못 가운데에서 다시 괴성이 들렸는데 말이 내는 투레질 소리 같다.

백남빈은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살펴봤지만 딱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르! 푸릉!

붉은 색의 무언가가 물위에 떠 있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발버둥을 치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내었다 잠겼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 시커멓고 거대한 머리로 보아하니 강미루의 천리마 흑왕인 게 분명하다.

(붉은 물체는 대려장의 그 말괄량이겠구나.)

백남빈은 비로소 흑왕과 강미루가 자기보다 먼저 이 신비한 절곡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구하고 볼 일이다.

연못에 발을 담가 보니 너무 뜨거워서 살갗을 바늘로 치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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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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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법에 빠진 두 남녀

 

 

두두두!

마상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 끝에 두 남녀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찰떡처럼 붙어있는데 흑왕은 정신없이 당산산맥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방금 전까지 자신의 꼬리에 달라붙어있던 귀신같은 놈이 따라붙을까봐 전력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요동평야를 활개치고 다녔던 흑왕은 강미루의 형부인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加籃)이란 인물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졌었다.

당시의 흑왕은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에게 한눈을 팔다가 기습을 당해서 올가미가 목에 걸렸었다.

만일 경계하고 있었던 상태라면 절세고수인 신가람이라 해도 흑왕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신가람이 사흘 내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고도 흑왕을 따라잡지 못한 게 그 증거다.

당연히 흑왕은 달리는 자기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백남빈에게 꼬리를 잡혔었기에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신같은 존재가 지금은 자기의 등위에 앉아있음은 꿈에도 모르고 있고...

 

***

 

대려장의 기마대는 백남빈과 흑왕이 일으킨 대량의 흙먼지로 인해서 앞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먼지가 갈아 앉았을 때는 강미루와 흑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쫓던 철령보 전령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해가 지면서 급격히 짙어지는 당산산맥의 산그늘이 두 남녀와 흑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단지 백남빈이 타고 있던 말이 흑왕의 뒤로 쳐져서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대려장 무사들 중 몇은 보고를 하기 위해 그 말을 끌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당산산맥 안쪽으로 들어가 강미루와 흑왕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같이 사라진 흑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수색은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

 

***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넓은 등은 아기 혼자 태워놓아도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다.

백남빈은 흑왕의 엉덩이를 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다.

그 때문에 주변의 풍경이 뒤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당산산맥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구나.)

백남빈은 조금 여유를 되찾아서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졌던 격전은 그야말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차 실수라도 했었다면 중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부상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턱을 물리긴 또 처음이군.)

백남빈은 자신의 턱을 물고 있는 붉은 옷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턱을 물고 물린 자세다 보니 서로의 코가 아주 가깝다.

소녀는 입으로 백남빈의 턱을 가득 베어 물고 있는 탓에 숨은 전적으로 버선코같이 오똑하고 어여쁜 코로만 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연신 새근대며 코로 뿜어내는 소녀의 숨결이 바로 위쪽에 자리한 백남빈의 코로 흘러들어온다.

내뿜는 숨결이니 당연히 탁하고 역겨워야하는데 난초나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하게 느껴져서 백남빈을 혼란에 빠트렸다.

백남빈은 약관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껏 여자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백남빈이 알고 있는 여자라고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뵌 이모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론 하녀들이야 적지 않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성격인 백남빈을 어려워해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사내들하고만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당연히 시큼하고 쿰쿰하다는 편견이 백남빈에게 있었다.

헌데 자신의 품에 답삭 안겨있는 이 붉은 옷의 소녀는 다른 세상의 존재같다.

몸은 뼈가 하나도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용수철 같고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 같은 탄력을 지녔다.

살결은 극상품의 백옥같이 희고 깨끗해서 설부(雪膚)라는 표현이 어째서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특히 냄새!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땀조차 향기롭다.

(양귀비의 몸에서 난 땀이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는 고사가 그냥 지어낸 게 아니겠구나.)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온몸으로 흘려내는 그윽한 내음에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강미루는 커다란 두 눈을 흡뜬 채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봉긋한 강미루의 젖가슴의 감촉과 그 안쪽의 심장이 쿵닥거리는 것도 백남빈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반대로 백남빈의 몸에서 일어나는 망측한 변화 역시 강미루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백남빈은 두 다리로 강미루의 허리를 휘감은 자세로 마주 앉아있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아랫도리는 강미루의 하복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죽일...)

강미루는 서로의 몸이 강하게 짓눌려 있는 부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백남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강미루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금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가?)

분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와서 울컥해지는 강미루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다 보니 힘까지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뽀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백남빈은 잠시 고통도 잊고 중얼거렸다.

"찔리고 물린 내가 울지 않는데 찌르고 문 여나찰(女羅刹)이 우는군."

물론 그 중얼거림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말같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철부지같은 성미의 이 말괄량이가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강미루는 턱에 힘을 가하여 더 세게 백남빈을 턱을 깨물었다.

"!"

강미루가 온힘을 다해 물은지라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턱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이 독종(毒種)이 마음이 바뀌어서 놓아주었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백남빈은 강미루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크게 웃어버렸다.

강미루는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표정이 야릇했다. 백남빈을 깨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턱이 빠져 버린 것이다.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두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미루를 보면서 백남빈은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백남빈은 눈앞의 이 말괄량이 소녀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소녀에게 악감정도 살기도 생기지 않았다.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풀어 한 손으로는 강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걸치며 턱을 받쳐 올려서 교정시켜 주었다.

강미루로서는 백남빈의 이같은 행동이 너무도 의외였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한 적의 턱을 교정해주는 것이건만 백남빈의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하다.

(이 작자 뭐야?)

강미루는 잘 끼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턱을 만지는 백남빈을 바라보며 얼굴이 발개졌다.

어느덧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 솟아서 두 팔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백남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살기는 봄눈 녹 듯 걷혀졌다.

마주 보며 말 등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자세는 묘하다.

이제는 껴안고 있지 않았지만 백남빈의 다리는 여전히 강미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이다.

"!"

이 야릇한 상황에서 강미루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져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남자, 참 잘생겼구나.)

어리둥절해하는 백남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미루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상대가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걸 알 리 없는 흑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계곡으로 접어들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그믐은 아니지만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어있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푸악!

백남빈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백남빈은 아픔을 참으며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단검을 강미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끌러 허벅지의 상처를 싸맸다.

강미루는 단검을 받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침과 피로 얼룩진 백남빈의 얼굴 하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백남빈은 묵묵히 강미루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남빈은 이미 이 대려장의 말괄량이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백남빈의 얼굴을 닦아준 강미루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백남빈의 다리로 슬쩍 향한다.

... 미안하오.”

백남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미루의 허리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천리마 흑왕이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그놈 위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몸과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거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내공이 정심한 두 사람인지라 주위를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똑같은 길을 계속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의 풍경은 한동안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같은 처지라는 은연중의 생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앞쪽으로 이동하여 말고삐를 바르게 잡았다.

백남빈도 돌아앉아 강미루의 바로 뒤에 걸터앉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긴장과 불안한 감정이 원래 적이었던 두 사람을 한마음이 되게 만들었다.

"끼럇!"

두두두! 히히힝!

강미루가 박차를 가하자 흑왕은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자 그들의 앞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분명 말이 달린 흔적이었다.

백남빈이 두 손으로 강미루의 허리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팟! 휘릭!

강미루가 말고삐를 잡아채자 흑왕은 언제 달렸는가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백남빈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흑왕 앞쪽으로 간 백남빈은 바닥에 생생하게 남은 말발자국을 뼘으로 재어보았다.

그리고 흑왕의 뒤로 돌아가 그놈이 방금 전에 딛은 발굽 자국과 비교해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백남빈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왕을 타고 같은 장소를 뺑뺑이 돈 것이다!

"기문진(奇門陣)이오. 느끼지도 못하는 새 어떤 진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소."

기문진에 빠졌다는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강진남의 딸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여 진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백남빈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한 데 진법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강미루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그저 백남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의 대가인 독안룡 이탁을 양부로 둔 백남빈 역시 파진법(破陣法)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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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같은 말()을 탄 원수

 

 

(누가 활을 쏜 건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란 백남빈은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얼마 전 대려장 기마대와의 거리가 십리 이상인 것을 확인 했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팔 힘이 좋은 궁수라도 화살을 십리 넘게 날려 보내지는 못한다.

하물며 말의 목에 상처를 낸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든 게 아니라 수평으로 들이닥쳤었다.

“!”

몸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던 백남빈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과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쇄도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백남빈으로서는 십여 리나 되는 거리를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좁힐 수 있는 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화악!

낙타보다도 큰 흑마는 말 그대로 나는 듯이 들이닥치고 있다.

콰드드!

얼마나 빠른지 그 흑마의 네 개의 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올 정도다.

거센 바람을 탄 먹장구름처럼 다가오는 흑마에는 날씬한 몸에 붉은 옷을 걸친 소녀가 타고 있는데 상체를 고추 세운 채 철궁의 시위를 놓고 있었다.

(아차!)

붉은 옷의 소녀가 시위를 놓은 자세인 것을 본 백남빈의 눈이 다시 치떠졌다.

!

두 번째 화살이 이미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까지 이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

두 번째 화살이 말 위에서 돌아보는 자세인 백남빈의 가슴에 여지없이 꽂히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티잉!

하지만 화살은 백남빈의 가슴을 궤뚫지 못하고 궤적을 바꾸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화살에 실린 강력한 힘에 백남빈의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어떤 갑옷이라도 뚫을 수 있는 강철촉의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저자의 옷 속에 든 더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때문이다.)

츄학!

강미루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면서도 물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다시 두 자루의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았다.

"! !"

"미루! 미루!"

십여 리 뒤에서 따라오는 대려장 기마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의 눈에는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허억!)

왼쪽 늑골에 가해진 충격에 백남빈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강미루가 쏜 화살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백남빈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며 말 등에 엎어졌다.

(아버지가 날 지켜주셨다.)

백남빈은 말의 갈기를 움켜쥐어 옆으로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면서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두 번째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 든 옥패 덕분이었다.

실종 된 아버지가 남겼다는 그 옥패가 화살을 막아준 것이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백남빈이 지닌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옥패는 정확히 화살이 닿는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강철로 만든 화살촉도 그 옥패를 깨트리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 !

말 등에 엎드린 백남빈의 귀에 연달아 시위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강미루를 태운 거대한 흑마 흑왕은 불과 십여 장 뒤에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흑왕도 진저리치게 빨랐고 강미루 속사(速射)도 무섭게 빨랐다.

!

백남빈은 말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려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 피잉!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날아든 두 자루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백남빈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콰드드!

백남빈의 몸은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으나 두발은 땅에 끌리면서 먼지를 확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대량의 먼지에 의해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던 강미루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가려졌다.

강미루는 다시 활에 화살을 재운 상태였지만 백남빈의 모습을 놓쳐 쏠 수가 없었다.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남빈은 땅에 끌리던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가 다시 말 등을 구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달리는 속도가 번개같은 흑왕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반격할 수밖에 없다.

!

백남빈은 허공에 뜬 채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두두두!

그 사이에 흑왕은 백남빈의 발 아래로 달려왔다.

!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등 위로 떨어져 내리며 검으로 강미루를 찔러갔다.

하지만 강미루는 이미 왼손에 흑왕의 안장에 달아놓았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백남빈이 두 발로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자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서 방패를 집어든 것인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림없다!“

!

강미루는 앙칼지게 외치며 백남빈의 검을 방패로 막았을 뿐 아니라 강하게 옆으로 밀쳐 버렸다.

아직 어린 여자답지 않은 기민한 반응이다.

몸은 허공에 떠있는데 전력을 기울여 찔렀던 검은 강하게 옆으로 밀쳐졌다.

휘익!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백남빈의 몸은 강미루의 머리를 넘어 흑왕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패대기쳐지려는 순간 백남빈은 왼손으로 흑왕의 길고 풍성한 꼬리를 잡아챘다.

히이잉!

느닷없이 꼬리가 잡힌 흑왕은 깜짝 놀라 껑충 껑충 뛰며 앞으로 달려갔다.

낙타보다 큰 체격의 흑왕은 겅중겅중 뛰면서도 질풍같이 달려갔고 그 바람에 그놈의 꼬리를 잡은 백남빈의 몸은 마치 깃발처럼 허공에 휘날려졌다.

!

그런 백남빈의 머리를 향해 방패가 맹렬히 돌면서 날아든다. 강미루가 몸을 돌린 자세로 왼손의 방패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놀란 흑왕이 겅중겅중 뛰면서 달리고 있는 탓에 조준을 정확히 할 수가 없었다.

! 따다당!

백남빈의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 방패는 뒤쪽의 땅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방패로 백남빈을 때리는 게 실패하자 강미루는 활을 던져버리고 안장에 걸려 있는 창을 뽑아들었다.

떨어져랏!”

그리고는 몸을 뒤쪽으로 돌린 자세로 창을 휘둘러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부악!

던져진 방패와 달리 수직으로 내리쳐지는 창은 정확히 백남빈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흑왕의 꼬리를 잡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백남빈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다.

별 수 없이 내공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그대로 얻어맞았다.

!

굵은 창대가 백남빈의 정수리를 강타하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창대에 맞아 치명상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서 백남빈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놓쳐버렸다.

만일 강미루가 당황하지 않아서 창대에 내공을 주입해서 휘둘렀더라면 백남빈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깨어졌을 것이다.

따다당!

백남빈이 놓친 검도 흑왕의 뒤로 아스라이 멀어진다.

"차앗!"

그 사이에 창을 짧게 고쳐 잡은 강미루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백남빈을 찔러왔다.

검을 놓쳐버렸으니 찔러오는 창날을 막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흑왕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창날을 피했다.

가뜩이나 휘날리던 몸인데 이제 백남빈의 몸은 바람 속에서 세차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변했다.

미꾸라지 같은...”

강미루에게는 황당한 일이었으나 백남빈에게는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말에서는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흑왕의 꼬리를 놓치면 뒤 따라오는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사람의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네 발로 달리는 말의 추격을 떨쳐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놀라긴 흑왕도 마찬가지였다.

히히힝! 두두두!

백남빈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자 놀란 흑왕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죽엇! 죽어라!”

슈슉! 피핑!

강미루는 뒤를 돌아보는 자세인 채 기를 쓰고 백남빈을 찌르려 했고 백남빈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창끝을 피해냈다.

백남빈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상태를 타개하지 못하면 결국 창에 찔리고 말 것이다.

반격을 해야만 한다.

"크왓!"

화악!

다시 한 번 강미루의 세찬 창질을 피한 백남빈은 온 힘을 모아 말꼬리를 축으로 몸을 옆으로 휘돌렸다.

그리고는 몸이 돌아가는 기세를 빌어 양발로 강미루의 허리를 찍어갔다.

!”

강미루는 기겁하며 몸을 흑왕의 엉덩이 쪽으로 홱 젖혀서 백남빈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다.

발길질이 빗나가려 하자 백남빈은 붙이고 있던 두 다리를 확 벌렸다.

콰득!

그리고는 뒤로 몸을 젖히던 강미루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아버렸다. 몸은 거의 수평으로 누인 채로...

네놈이...”

허리가 휘감긴 강미루는 깜짝 놀라 창대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

백남빈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흑왕의 꼬리를 놓고는 자신을 내리쳐오는 창대의 중간을 잡았다.

백남빈의 이같은 수법은 대담하고 재빨랐지만 강미루 또한 임기응변이 아주 빨랐다.

!

창대가 상대에게 잡히자마자 강미루는 즉시 창을 놓아버리며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

그리고는 그 단검을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에 힘껏 꽂았다.

(!)

백남빈은 까무라칠 듯한 통증에 눈을 흡떴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도 백남빈에게는 없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강미루가 다시 단검을 쓰게 하면 위험하다.

우둑!

잡고 있던 창을 던져버린 백남빈은 강미루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초식이고 뭐고 나올 게재가 아니었다.

아흑!”

강미루의 눈이 치떠졌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꽂은 단검을 뽑을 새도 없이 두 팔이 백남빈의 강철 족쇄같은 팔에 묶여 버린 것이다.

!

놀라고 분노한 강미루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을 벌려 백남빈의 턱을 덥썩 물었다.

(!)

턱이 물린 백남빈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심보가 악독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다.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몸도 사리지 않고 덤빈단 말인가?)

난생 처음 겪는 고통에 백남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밀착한 채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수준의 내공을 지녔으며 그 내공을 상대방이 혈도를 찍지 못하도록 중요한 혈도를 방어하는데 동원하고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내공을 흐트렸다가는 상대방에게 혈도를 제압당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완력으로만 대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남빈은 허벅지를 찔린 고통으로 인해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지만 강미루 역시 죽을 맛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철령보의 종자들은 하나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헌데 자신의 몸을 팔과 다리로 제압하고 있는 이 사내가 보여준 임기응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만나서 육탄전(肉彈戰)을 벌이는 곤욕을 치룬담!)

강미루는 부끄럽고도 화가 치밀어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철이 든 이래 사내의 손가락 끝조차 몸에 닿아본 적이 없는 강미루다.

헌데 지금 사내의 품에 으스러지도록 안겨 있으며 사내는 또 그녀의 하체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다.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강미루의 입이 물고 있는 부위가 문제였다.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자니 오히려 그녀의 턱이 얼얼해 왔다.

사람의 턱은 정말 물어뜯을 곳이 못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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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괄량이의 가출

 

 

단숨에 주워 삼키는 에센의 분석은 정확했다.

(확실히 평범한 인재는 아니다. 말만 좀 가려서 할 줄 알고 겸손하기만 하다면 미루와 짝을 지어주어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강진남이 에센을 아쉬운 표정으로 볼 때였다.

... 장주님! 큰일...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문루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그 중년여인은 강미루의 유모 최씨였다.

미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둥대며 문루로 올라오는 유모 최씨를 본 강진남은 미간을 찡그렸다.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는 조신한 성품인 첫째 딸 강미조(姜美藻)와 딴판으로 지나치게 활달하여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 작은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요.”

헐떡이며 문루로 올라선 유모가 울상을 짓는다.

미루가 사라지다니? 어디로?”

강진남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뿔난 망아지같은 둘째 딸이 말썽을 부리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꽤 오래 안 보이시기 계실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출진한 애들 속에 묻어서 본장을 빠져나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 녀석 참...”

울먹이는 유모와 달리 강진남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 당장 파발을 보내 돌아오라고 분부하셔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니옵니까?”

그럴 거 없네. 제 녀석도 오죽 답답했으면 가출을 했겠는가?”

유모의 애원에도 강진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혼자도 아니고 대려장의 정예들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니 딱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물론 강미루가 핏덩이일 때부터 키워온 유모의 심정은 달랐다.

... 장주님! 작은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매정한 말씀을...”

서운해 하는 유모의 말에 강진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지. 정 걱정되면 그 녀석 형부에게 가서 부탁해보게나.”

... 그리 합지요.”

강진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유모는 서둘러 문루를 달려 내려갔다. 강미루의 형부, 즉 강진남의 사위를 찾아가 부탁하는 쪽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루사매도 이제 제법 여자 태가 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에센이 히죽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성주는 내 딸을 전에 본 적이 있겠군.”

강진남은 자신의 둘째 딸과 이 오이라트의 떠버리 후계자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었지요. 사모님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데리고 왔었으니까요.”

안하무인이던 방금 전과 달리 에센은 강진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에센의 사부와 강미루가 사부로 모신 여기인은 부부지간이다.

그 때문에 에센은 강미루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에센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강미루는 아직 철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제가 이번에 밀사를 자처한 이유 중 하나도 미루사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에센이 다시 강진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강진남의 둘째 딸이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린지는 이미 오래다.

대려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고 해서 무림의 수많은 청년들이 강미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혈기방장한 에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강미루가 사모의 제자이기도 해서 무례하게 수작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 못해왔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는 에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모다.

그러던 중 아버지 토곤이 대려장으로 밀사를 보낸다고 하자 냉큼 자원을 했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지만 에센의 기대는 강진남의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소성주의 사부... 검왕(劍王)과 관련된 염문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내 귀에 들리더군.”

바람둥이를 사부로 둔 너도 똑같은 인간 아니냐는 뜻이다.

 

***

 

강진남과 에센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탁은 백남빈에게 무황성을 향해 직진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요서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인 진황도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라고 지시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배 이상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높은 행로다.

다만 같은 생각을 강진남도 했다는 게 문제다.

대려장주가 동북의 제갈량이라는 평판이 과장된 건 아니로군.”

백남빈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리쯤 뒤쪽에서 흙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일백이 넘는 숫자의 기마대가 백남빈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다.

대려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대는 수백기였지만 도중에 철령보의 기마대와 격돌하는 바람에 대 부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래도 특히 발이 빠른 일단의 기마대는 철령보의 저지를 뚫고 남진하여 백남빈을 추격하는 중이다.

물론 백남빈이 대려장의 기마대에 따라잡힐 위험은 거의 없다. 사해검객이 준비해준 말이 철령보에서 으뜸가는 준마이기 때문이다.

십여 리나 간격이 있으니 진황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꼬리를 달고 진황도에 도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천진으로 가는 배를 수배하는 동안 대려장의 고수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다.

(진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대려장의 인간들을 따돌려야한다.)

백남빈은 진행방향의 우측, 즉 서쪽을 돌아보았다.

철령평야에서 발해만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험준한 산맥이 오른쪽에 보인다.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불리는 장대한 협곡의 서쪽 면을 이루는 당산산맥(唐山山脈)이다.

일망무제한 평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른 탓에 당산산맥의 봉우리들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고 험준하게 보인다.

(길은 좀 험하겠지만 요서주랑을 타는 대신 당산산맥을 횡단해서 진황도로 가자. 그 과정에서 귀찮은 파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

두두두!

결심 한 즉시 백남빈은 말머리를 서쪽, 당산산맥을 향해 돌렸다.

대략 삼십여 리쯤을 달리면 당산산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저 놈이 진로를 바꿨다.”

당산산맥으로 들어가서 우릴 따돌릴 생각이다.”

백남빈을 추격하던 대려장의 기마대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남빈이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본 때문이다.

백남빈이 달려가는 서쪽에는 지는 해를 머리에 인 당산산맥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것이다.

만일 백남빈이 이대로 당산산맥으로 들어가 버리면 따라잡을 희망이 거의 없다.

박차를 가해라!”

저놈이 당산산맥의 산그늘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한다!”

두두두! 히히힝!

대려장의 무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말을 몰아붙여도 십여 리쯤 되는 백남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백남빈이 타고 있는 말의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 이러다가 놓치고 말겠다!”

젠장! 저놈이 타고 가는 말이 우리들의 말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백남빈이 당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에잇! 답답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려장 기마대의 후미에서 갑자기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해되니까 비켜!”

어이쿠!” “!”

히히힝! 두두두!

앙칼진 외침에 이어 무사들의 비명과 당황한 말들의 울부짖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겁하며 돌아보는 선두의 무사들 눈에 칠흑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와락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흑마(黑馬)였다.

단순히 털만 검은 게 아니다.

흑마는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배는 됨직하다.

낙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그 거대한 흑마의 등에는 날씬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옷을 걸치고 죽립을 깊이 눌러쓴 기사(騎士)가 타고 있다.

흑마의 엄청난 체구에 비해 타고 있는 기사는 대려장의 다른 무사들보다 몸이 작고 가냘프다.

그 때문에 마치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보이는 그 기사의 등에는 수십 자루의 화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서 꽂은 화살통이 짊어져 있다.

또 기사는 허리에 단검에 가까운 짧은 검을 차고 있으며 말 안장 좌우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과 긴 창이 한 자루씩 걸려 있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

작고 날씬한 체구의 기사는 그때까지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것은 두 뺨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다.

... 작은 아가씨!”

... 이제 보니 저놈은 작은 아가씨의 애마 흑왕(黑王)이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놀라면서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마 위의 소녀는 바로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였다.

유모 최씨의 추측대로 강미루는 새벽에 대려장을 빠져나온 기마대에 섞여 가출을 한 것이다.

강미루의 별호는 홍의창(紅衣槍)이다.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창술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타오르는 불같이 활달해서 붙여진 별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강미루는 제법 오래 외출을 못해 답답하던 차에 원수같은 철령보에 대한 공격이 시도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도 철령보의 공격에 참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봤자 들어주실 리 없다.

그래서 강미루는 죽립을 눌러쓴 채 몰래 기마대에 끼어든 것이다.

 

저 새끼는 내가 잡아버리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전부 비켜!”

정체를 드러낸 강미루는 흑마에게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히히힝! 화악!

거대한 흑마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질풍같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대려장의 기마대는 물살처럼 갈라져 흑마에게 길을 내주었다.

낙타보다도 큰 이 거대한 흑마의 이름은 흑왕(黑王)이다.

흑왕은 요동평야의 모든 야생마들을 지배하던 말들의 왕이었는데 강진남의 사위가 사흘 밤낮을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길을 들였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천리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흑왕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살처럼 갈라지는 대려장의 다른 말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흑왕은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당산산맥의 산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당산산맥 너머로 지고 있다.

그와 함께 백남빈도 산그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달리면 당산산맥의 험준한 산중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대려장의 추격은 떨쳐버릴 수 있겠구나.)

백남빈은 가까워지는 당산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보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숨을 곳이 없는 평야와 달리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당산산맥에서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오싹!

백남빈은 냉수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위험...)

!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히힝!

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몸을 앞으로 확 숙인 백남빈의 머리 위로 지나간 화살이 말의 목 옆을 스치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냈다.

만일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남빈은 그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백남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안이라는 남다른 능력이 미리 살기를 감지해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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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떠버리 기재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은 동북(東北)의 제갈량이라 불린다.

병법과 진법으로 강진남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 이탁뿐이다.

강진남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요동의 군소문파중 하나였던 대려장을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로 키워냈다.

당금의 무림에서 강진남의 이름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당대에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과 달리 강진남은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다. 본처와 여러 첩들에게서 겨우 두 명의 딸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독안룡 이탁이란 벽에 막혀 요서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강진남을 번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큰 근심이다.

 

***

 

아이 참,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강미루(姜美樓)는 잠옷 차림인 채로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히히힝! 푸르르!

몇 개의 담장 너머에 있는 마당에서 수많은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가씨도 깨셨군요.”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유모 최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가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마당 쪽이 대낮같이 환한 게 보인다.

한밤중에 마구간에서 끌려나온 말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그 말들에게 마구(馬具)를 채우는 마부들의 호통소리가 요란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잖아. 한밤중에 왜 저 난리래?”

무군자 강진남의 둘째딸인 강미루는 유모와 함께 창가에 서서 마당 쪽으로 목을 빼들었다.

쇤네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철령보쪽으로 급히 출동할 일이 생겼다네요.”

유모는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철령보의 잡것들이 또 시비를 걸어온 거야?”

강미루는 도끼눈으로 마당 쪽을 흘겨보았다.

강미루는 대려장의 그 누구보다도 철령보를 미워한다. 아버지 강진남이 철령보에 막혀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직 서는 아이들 말로는 이각(二刻;30) 전쯤에 본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해요. 그 손님이 가져온 급보를 접한 장주님이 철령보쪽으로 출동을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유모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려장의 둘째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철령보 쪽으로 출동한단 말이지?”

유모의 설명을 들은 강미루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지며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

 

백남빈은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을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며 대청을 나섰다. 반지는 워낙 커서 가운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감싼다.

완안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오채금환은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무황성에 가져가는 도중 분실할 수도 있어서 손가락에 낀 것이다.

오채금환 외에도 백남빈은 기름종이로 만든 두툼한 봉투를 상의 속에 품고 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신랑성주 토곤이 대려장주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이탁의 보고서가 들어있다.

또 백남빈의 허리춤에는 길이가 한자 반쯤 되는 단검이 끼워져 있다. 손잡이에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그 단검 역시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같다.

청랑검(靑狼劍)으로 이름 붙인 그 단검은 강철도 어렵지 않게 자를 정도로 날카롭다.

대청을 나서니 총관인 사해검객 종리완이 행장이 준비 된 말의 고삐를 잡고 서있다.

이틀 전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괜잖겠는가?”

다가오는 백남빈을 보며 사해검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더 밤을 새도 끄덕없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남빈은 사해검객 앞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 종리완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주님을 보필할 테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게.”

사해검객도 마주 포권을 하며 웃었다.

헌데 그런 사해검객의 모습이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져 백남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백남빈은 사해검객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속내를 들킬지도 몰라서...

사해검객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 둘러보니 주변에 서있는 철령보의 무사들, 심지어 철령보의 건물들까지도 꿈속인 듯 흐릿하게 느껴진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령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불안한 감정이 백남빈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철령보에 남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신랑성과 대려장이 손을 잡은 사실은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소자가 무황성에 다녀올 때까지 존체보중하십시오.)

백남빈은 양부 이탁이 있는 대청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힘차게 말에 올라탔다.

두두두!

곧 백남빈은 사해검객과 철령보 무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철령보를 달려 나갔다.

 

홀로 대청 안에 앉아있는 이탁의 귀에도 백남빈을 태운 말의 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린다.

백남빈과 달리 이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리 근심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남빈이가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이탁은 근심 대신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치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형님의 핏줄이니 결국 극복해낼 테지.)

이탁은 백남빈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는 손위 동서가 되는 백무염을 떠올렸다. 백무염은 이탁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또 두려워하는 존재다.

백남빈은 여러모로 생부인 백무염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백무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백남빈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볼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탁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백남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남빈에게 백무염처럼 근본(根本)을 알아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안(神明眼)이라 불리는 그 힘을 지닌 덕분에 어떤 위장이나 눈속임도 백남빈을 미혹시키지 못한다.

백남빈이 불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등천제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의 실체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탁은 가끔 양아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눈 속에 감춰진 깊은 어둠을 이미 다 들여다 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빈이가 무황성까지 가는 길에 치명적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한다.)

이탁은 백무염과 백남빈 부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끊고 사해검객을 불렀다.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대려장과의 접경으로 이동시켜라. 요하를 건너는 대려장의 인마는 무조건 주살한다."

이탁의 명령을 받은 사해검객은 곧 수하들을 이끌고 철령보를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철령보와 대려장 사이에 전에 없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

 

요하 건너 대려장에도 어느덧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철령보에서 나가는 것은 새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신랑성의 밀사가 본장에 도착한 것을 무황성이 알게 해선 안된다!”

두두두! 히히힝!

흥분에 찬 호통과 긴장어린 고함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우레처럼 터져 나온다.

활짝 열린 대려장의 정문을 통해 수백기의 기마대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간이지만 대려장의 기마대는 거침없이 요하쪽으로 몰려갔다. 요하에는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가설되어 있었다.

 

대려장의 정문에 설치 된 높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검은 물결인 듯 서쪽으로 몰려가는 기마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초로의 인물이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하며 차림새가 격식을 갖추지 않아 분방하게 보이는 청년이다.

소성주(少城主)가 직접 밀사로 올 줄은 몰랐네.”

초로의 인물은 대려장을 빠져나가는 기마대를 내려다보며 청년에게 말했다. 그가 바로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이다.

구처기(丘處機), 즉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징기스칸께 진언하기를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소이다.”

강진남의 말에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훤칠한 체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은 청년이다.

하지만 나 에센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했으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처지! 가야만 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직접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청년은 제 흥에 겨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청년이 바로 신랑성의 소성주 에센이다.

오이라트의 족장이기도 한 신랑성주 토곤의 장남인 그가 직접 아비의 밀서를 들고 대려장을 찾아온 것이다.

에센은 토곤이 보낸 밀사인 동시에 볼모인 셈이다.

(영걸 소리를 듣는 제 아비보다도 몇 배 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놈이다.)

강진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센이 대려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시진 남짓 전이었지만 강진남이 지난 한 달 동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많은 것은 에센의 성격이 수다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몽고초원을 지배하는 오이라트의 후계자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에센의 혀를 자제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를 숨기고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은 높이 사줄만 하다.)

강진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센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얀을 대동한 부성주는 어제 오후에 귀장에 도착해야만 했소. 부성주 정도 되는 인물이 연락조차 보내오지 못한다는 것은 철령보에 의해 죽거나 잡혔다는 뜻이오. 사실 부성주는 여진족 출신이라 본성 내에 적이 많소. 그 중 어떤 버러지가 부성주의 종적을 극품당과 철령보에 누설했을 것이오.”

다 알고 있고 짐작하는 내용이지만 강진남은 끈기를 갖고 에센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강진남의 인내심이 남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에센이 쏟아내는 말 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다수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성주에게는 완안준(完顔俊), 완안극(完顔極)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소. 본성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을 맡고 있는 그 둘과 부성주를 합쳐서 완안삼절(完顔三絶)이라 부르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철풍사(鐵風社)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소. 철풍사는 극품당에 패해 망명한 여진족 무사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에센이 몸을 조금 문루 밖으로 내밀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 대려장을 빠져나간 기마의 선발대는 이미 십여 리 밖에 있는 요하를 건너고 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기마대는 마치 개미떼처럼 작고 까맣게 보인다.

헌데 배다리를 건넌 개미떼같은 기마대는 철령보가 자리한 서쪽으로 가지 않고 요하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주의 수하들이 남쪽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기마대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일 것 같은가?”

강진남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 에센을 시험하시는구려.”

에센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강진남에게 다시 말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서남진(西南進)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 신랑성에서도 만일 대비하여 그쪽으로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소. 이를 모를 리 없는 독안룡 이탁은 전령(傳令)을 남쪽으로 보내 진황도(秦皇島)에서 배편으로 천진(天津)까지 가게 했을 것이오. 천진에서 북경 근처 무황성까지는 지척지간이니... 이에 장주께서도 철령보쪽이 아니라 진황도 방면으로 추격하라 명령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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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안룡(獨眼龍)

 

 

칠십년 넘게 강호 무림을 지배해온 무황성에서 최고의 요직은 감찰전(監察殿)의 전주다. 무황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독안룡 이탁은 사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감찰전의 전주였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주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菊造美浪) 왕소군(王昭君)에게 밉보여 일개 분타인 철령보의 보주로 좌천되었다.

이탁의 지인들은 왕소군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탁은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고 철령보로 부임했다.

이탁은 가족들 중 양자인 백남빈만 데리고 철령보로 왔다. 아내는 병약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어려서 무황성에 남겨둔 것이다.

그후 사 년 동안 이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철령보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이탁의 지도하에 철령보 무사들의 무공은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이탁은 기문진법을 바탕으로 각가지 병진(兵陣)을 창안하여 철령보 무사들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무황성의 일개 분타에 불과했던 철령보는 단독으로 대려장이나 극품당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사 년 간 중원의 동북방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안룡 이탁의 능력에 기인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신랑성의 이인자를 생포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다?”

이탁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시절 불행한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붙은 것이다.

... 그자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저항을 포기해서 속하도 놀랐습니다.”

백남빈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철담도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탁은 주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탁 앞에 서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하나뿐인 이탁의 눈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같이 느껴져서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이탁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양자인 백남빈이다.

그런 백남빈조차 양부의 검고 깊은 시선을 오래 접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섬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너희들이 완안진을 요격하러 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탁은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백남빈은 양부의 그 말에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질책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철령보에서 무공으로 완안진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주인 이탁뿐이기 때문이다.

소자가 경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되었다.”

사죄하는 양자에게 이탁은 고개를 조금 저어 보였다.

 

이탁은 순찰을 위해 대려장과의 접경 북쪽 끝까지 갔다가 사해검객 종리완이 보낸 연락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철령보로 다시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려장이 느닷없이 도발을 하여 긴장을 조성했던 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완안진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백남빈보다 먼저 철령보로 돌아온 이탁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는 총관인 사해검객이 잘 알고 있다. 평소의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빈 일행은 새벽이 되어서야 철령보로 돌아왔다. 완안진의 시종 다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서 행군을 서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다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왼안진은 혈도가 짚여 무공이 금제된 채 다얀과 함께 철령보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무황성을 통틀어도 완안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그런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생포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려장으로 파견된 목적까지 순순히 자백했다.”

이탁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훑어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밀봉된 편지 한통, 손잡이에 푸른 늑대의 형상이 정교하게 장식 된 단검 한 자루, 그리고 상당히 큰 반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은 백남빈이 완안진의 몸에서 압수한 것들이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들의 의견들을 말해봐라.”

이탁은 탁자 위의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들어 살피며 말했다.

폭이 반치 정도나 되는 상당히 큰 금 반지인데 표면에는 물감이 흐르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상을 입은 시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한 게 아닐지요?“

철담도호가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완안진은 대려장과 결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신랑성의 밀사다.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자가 겨우 종놈 하나 구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냐?”

... 죄송합니다.”

이탁의 말에 철담도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종의 안위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완안진은 시종을 다얀이라 불렀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남빈이 입을 열었다.

순간 반지를 들고 있던 이탁의 손가락이 경직되는 것을 철담도호는 놓치지 않았다.

다얀... 다얀...”

이탁은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혹시... 다얀이란 이름의 그 시종이 의외로 중요한 존재였는지요?”

철담도호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이탁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신랑성주 토곤의 둘째 아들 이름이 다얀이었습니다.”

백남빈이 양부를 대신해서 철담도호에게 말했다.

그런...”

철담도호는 자기도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비로소 완안진이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가 추측하는 대로 완안진이 대동한 자는 진짜 시종이 아니라 토곤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이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남빈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야심이 큰 토곤의 꿈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곤은 결코 칸이 되지 못한다. 몽고족 지배자인 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후손들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는 징기스칸의 법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토곤은 몽고족의 군사령관인 타이시, 즉 태사(太師)로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딸을 징기스칸의 후손 중 한명인 터터부카(脫脫不花)란 인물에게 시집보낸 후 터터부카를 칸으로 추대했다.

딸이 낳을 외손자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 토곤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토곤에게는 터터부카에게 시집보낸 딸 외에도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토곤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이름이 에센(也先)이고 차남이 다얀이라는 것을 백남빈은 뒤늦게 떠올렸었다.

 

토곤은 둘째 아들을 대려장에 볼모로 보내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탁은 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들을 볼모로 제공할 정도라면 토곤이 대려장과 맺으려던 게 단순히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결맹은 아니겠습니다.”

백남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그는 완안진으로부터 대려장을 찾아가는 목적이 결맹을 맺기 위해서라는 진술만을 들었을 뿐이다. 비록 포로로 잡긴 했지만 완안진이 시종이라 소개한 다얀의 상태가 심각해서 집요하게 추궁은 못한 것이다.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武君子) 강진남(姜震南)에게 보낸 밀서는 읽어보았느냐?”

이탁은 탁자에 놓여있는 밀봉된 편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보셔야할 것같아서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양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탁은 봉서 입구를 뜯어 몇 장의 편지를 꺼냈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담도호가 두 부자의 눈치를 보며 대청을 나갔다.

(볼수록 특이한 반지다.)

홀로 남아서 양부가 편지를 읽는 것을 보던 백남빈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에 놓인 반지로 끌렸다.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그 반지는 백남빈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다섯 가지 색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열기와 은은한 향기까지 느껴진다.

완안진은 그 오색의 금반지, 오채금환(五彩金環)을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토곤이 결맹의 대가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일 것이다.)

백남빈의 생각이 오채금환에 끌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 승부에서 진 것은 완안진이 아니라 우리 부자로구나.”

!

이탁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백남빈은 말없이 양부가 내민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들 부자가 완안진에게 졌다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성주 토곤이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은 백남빈의 예상을 한 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토곤은 현재 십만 이상의 기마대를 만리장성 밖에 결집 시켜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토곤에게 가장 큰 우환은 동족인 달단의 존재다.

원래 몽고초원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행사해온 부족은 달단이었다,

몽고족의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달단은 몽고초원에 남아있었고 덕분에 다른 부족들이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달단은 원래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달단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달단이 곧 징기스칸의 가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이라트는 뒤늦게 몽고족으로의 편입을 허락받은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토곤이 칸으로 옹립한 터터부카도 원래는 달단 출신이었다.

달단의 족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패해 오이라트로 망명했던 터터부카는 토곤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토곤은 몽고족의 칸으로 추대한 사위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기 위해 달단을 맹렬히 몰아붙여왔다.

그 결과 달단은 본거지인 몽고초원에서 쫓겨나 만주 지역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달단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 힘을 되찾아 역습을 가해올지 모른다.

토곤으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에 결맹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토곤이 직접 쓴 밀서에는 달단을 견제해주면 그 대가로 대려장이 요동과 만주 일대를 정복하는데 조력하겠다는 제안이 적혀 있었다.

또 밀서의 말미에는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는 내용과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두 명의 밀사중 먼저 도착한 쪽의 친서를 접수해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완안진이 순순히 포로가 된 것은 주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밀사가 대려장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양부를 닮아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백남빈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길로 간 토곤의 두 번째 밀사는 이미 대려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탁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경계 수준을 높여서 대려장의 동향을 세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남빈은 서둘러 양부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려장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

이탁이 백남빈을 불러 세웠다.

지금의 상황을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하는데... 아비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신을 지그시 보며 말하는 이탁의 뜻을 백남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전서구로도 무황성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겠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합작은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를 무황성에 갖고 가야하는 것이다.

소자가 무황성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양부 독안룡 이탁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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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로잡힌 거물(巨物)

 

 

삐이이이! 퍼억!

기마대의 선두가 날려 보낸 명적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뿐 완안진과 다얀에게 한 참 미치지 못하는 뒤쪽에 떨어졌다.

살상의 위험은 없지만 명적은 다른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는 쫓기는 표적으로 하여금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예민한 말들도 명적이 울릴 때마다 발작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진정해라.”

완안진은 그런 애마를 다독여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소리뿐인 명적에 이어 실질적인 위협이 쇄도한다.

피잉! 시잉!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든 유엽전(柳葉箭)과 세전(細箭)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말을 잘 달래라. 달리는 중이라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완안진은 실전 경험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다얀에게 외치며 몸을 좀 숙였다.

두 사람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있다.

또 말이 달려가는 속도가 날아든 화살의 위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이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은 맞아봤자 그저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 티팅!

날아든 화살 몇 개가 투구와 방패에 맞아 퉁겨진다.

히히힝! 푸르르!

엉덩이에 한 두 개씩의 화살이 꽂힌 말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완안진의 말 대로 달리는 속도가 화살의 힘을 약화시켜 깊이 박히진 않는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완안진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십여 리쯤 저편에 약간 높은 언덕이 길게 가로 누워있다.

그 언덕 너머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만 넘으면 대려장과 철령보의 경계인 요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만 건너가면 철령보도 무리하게 우릴 추적하진 못할 것이다.”

완안진은 겁에 질린 다얀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굳어졌다.

두두두!

갑자기 요하 변의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의 기마가 나타나 달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 철령보가 우릴 함정으로 몰아왔습니다.”

뒤 따라 오던 다얀이 겁에 질려서 계집애처럼 높은 소리를 낸다. 요하 쪽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기마대 역시 철령보 소속임을 알아보고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철령보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구나.)

완안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들을 추적하는 철령보의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멀리 우회한 동료들이 포위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종일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추격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완안진 자신도 전력으로 말을 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북쪽으로 간다.”

두두두! 히히힝!

완안진은 말의 방향을 급격하게 북쪽으로 틀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얀도 허둥대며 완안진을 따라 말을 몰았다.

요하의 북쪽은 극품당, 정확히는 달단의 영영이다.

같은 몽고의 부족이지만 달단은 신랑성을 세운 오이라트와 철천지원수 사이다. 신랑성의 부성주인 자신을 보면 기필코 잡아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철령보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일단 달단의 영역으로라도 피신해야만 한다.

두두두!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두 필의 준마는 서쪽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철령보의 기마대 사이에 끼어 북쪽으로 내달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같다.)

완안진은 곁눈질로 오른쪽을 보며 말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요하 변에 매복하고 있던 철령보의 기마대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진하면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오리(五里)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두두! 히히히힝!

완안진과 다얀이 달려가는 북쪽의 관목더미 뒤에서 두 필의 준마가 뛰쳐나온 때문이다.

(아차!)

완안진은 자신이 다시 한 번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아차렸다.

적은 앞뒤로 협공을 당한 자신과 다얀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매복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강행돌파 할 수 밖에...)

차앙!

완안진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다얀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역시 칼을 뽑으며 따라온다.

대략 이리 정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필의 준마 위에는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짙은 남색 옷을 걸친 청년은 약관 전후로 보이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깊고 형형하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하게 사경을 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부릅뜬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호 같고 건장한 몸에서는 사나운 살기가 뿜어진다.

(철령보의 오대고수(五大高手)중 한명인 철담도호(鐵膽刀虎) 고불귀(高不歸)겠구나.)

완안진은 중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독안룡 이탁이 직접 나섰다면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철담도호 고불귀가 사해검객 종리완과 함께 철령보 오대고수에 속하는 인물이긴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십초 내에 쓰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구명절초(救命絶招)가 있다.

그걸 쓰면 십초가 아니라 일격에라도 철담도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놈은 내가 맡겠다. 다얀 너는 젊은 놈을 상대하되 접전은 피하고 추격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라.”

완안진은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는 철담도호와 청년을 노려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

다얀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비록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오이라트 족장 토곤의 핏줄인지라 무공은 꾸준히 수련해왔다.

자신의 현재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가는 다얀이다.

그래도 상대 역시 자기 또래이니 잘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같다.

두두두!

그 사이에 양측의 거리가 삼십여 장 쯤으로 좁혀졌다.

(장심뢰(掌心雷)를 날려서 일격에 고불귀를 격살하자.)

완안진은 고삐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빼든 칼은 미끼에 불과하다.

그의 왼손에는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천근 무게의 철퇴가 휘둘러지는 위력을 지닌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철담도호는 완안진의 오른손에 들린 칼만 주의하다가 느닷없이 날아든 장심뢰의 일격에 몸뚱이가 으스러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계산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콰드드! 두두두!

거리가 십장쯤으로 좁혀졌을 무렵 그때까지 나란히 달려오던 청년과 철담도호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어서 거리를 확 넓힌 것이다.

마치 완안진과 다얀으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고 길을 터주듯이...

(위험하다!)

완안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얀이 위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적중했다.

! 촤라라!

철담도호와의 거리를 확 벌린 청년이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쇠사슬을 옆쪽으로 던졌다.

건너편의 철담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던진 쇠사슬 끝을 틀어쥔다.

완안진과 다얀의 앞쪽에 쇠사슬이라는 장애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거리는 그 사이에 오장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피하긴 늦었다!)

완안진은 눈을 부릅떴다.

말을 버려라!”

파앗!

완안진은 다급히 외치며 말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히익!”

다얀도 상황을 깨닫고 급히 말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콰창! 히히히힝!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과 철담도호가 양쪽에서 잡아끌고 온 쇠사슬에 목이 걸린 것이다.

! 촤라랑!

완안진과 다얀이 타고 있던 말들이 쇠사슬에 걸리자 청년과 철담도호는 즉시 쇠사슬을 놓았다.

콰당탕! 퍼억! 히히힝!

쇠사슬에 목이 휘감긴 말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뒹군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

완안진보다 한 박자 늦게 말 등으로 올라섰던 다얀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촤락!

청년이 놓은 쪽의 쇠사슬이 다얀의 하체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퍼억!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서 균형을 잃은 다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헌데 뒤로 넘어진 그의 머리가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퍼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다얀의 몸은 세차게 퍼덕인 후 축 늘어졌다.

... 안돼!”

허공으로 날아오른 후 철담도호를 공격하려던 완안진이 그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얀!”

휘익!

완안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다얀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끄윽...”

다얀은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깨져 기식이 엄엄한 상태다.

이런...”

완안진은 다얀의 뒷통수 쪽의 혈도를 찍어 출혈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막아주며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다얀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나 완안진은 성주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

벌벌 떠는 다얀을 내려다보며 완안진은 대려장을 향하던 자신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말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완안진을 에워싼다.

몰려든 백여 기의 기마대가 거대한 원진을 그리며 완안진과 다얀을 포위하고 있다. 말을 탄 철령보의 무사들은 강전을 재운 활로 완안진을 겨누고 있고...

고대협, 투항할 테니 용납하여 주기 바라오.”

완안진은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철담도호 고불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항서(降書)를 쓸 생각이라면 대상이 틀렸소 부성주.”

하지만 철담도호는 옆으로 물러서서 완안진의 예를 피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 완안진이 오늘 거푸 세 번이나 실태를 범하는구먼.”

옆으로 물러서는 철담도호를 보며 완안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철담도호가 비켜서는 뒤쪽에서 쇠사슬을 던졌던 냄색 옷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큰일을 치뤘음에도 청년의 눈빛은 깊게 갈아 앉아 있는데 걸음걸이는 무거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철담도호를 비롯하여 철령보의 모든 무사들의 시선은 그 청년을 향하고 있다.

비로소 완안진은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을 추격해온 철령보 무사들의 수령임을 알아차렸다.

함정에 거푸 두 번 빠진 것도 모자라 그 함정의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신랑성을 이끌어온 완안진답지 않은 실책이다.

부성주, 투항하시겠다면 항장(降將)으로 예우해드리겠소.”

완안진의 일장 앞에 멈춰선 청년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인생이다.)

완안진은 아들뻘인 청년이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철령보의 소보주 검사자(劍獅子) 백남빈! 중원무림에서 신진제일고수라 불린다는 그대에게 투항하면 수치심이 조금이나마 감해지겠군.”

완안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청년은 바로 철령보의 소보주 백남빈이었다.

 

백남빈의 별호는 검사자다.

그에게 검사자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은 무황성의 당대 성주인 주진충(朱盡忠)이다.

무황성에서는 매년 젊은 무사들중 일인자를 가리는 비무대회, 등천제(登天祭)가 열린다.

헌데 오 년 전,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등천제에 출전한 백남빈이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백남빈이 이기는 일이 반복되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수의 왕인 사자 같다고 해서 주진충은 백남빈에게 검사자라는,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내려주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백남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투항의 조건을 말씀해보시오.”

백남빈이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의 치료와 무사귀환을 원하네. 대신 본인이 대려장으로 가던 목적은 숨김없이 자백하겠네.”

완안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의 손잡이를 백남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 대협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소.”

백남빈은 완안진이 내민 칼을 받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몽고 최강의 부족 오이라트가 세운 신랑성의 이인자 완안진은 무황성 동북 분타 철령보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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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부동(五獸不動)

 

 

너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설령 그게 피붙이라도...”

철령보(鐵嶺堡)의 소보주 백남빈(白藍斌)은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렸다.

이름이 정취려(鄭翠麗)였던 어머니는 십삼 년 전 그의 곁을 영영 떠났었다.

오늘이 바로 그 어머니의 기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백남빈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다.

백무염(白無染)이란 이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육 년 전, 백남빈의 나이 겨우 세 살 때였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몸이 산처럼 컸고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처럼 환했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사랑하는 남편의 오랜 부재가 어머니에게서 생기(生氣)를 빼앗아 간 것같았다.

시름으로 나날이 쇠약해지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만을 세상에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백남빈을 거두어준 것은 이모인 정가려(鄭佳麗)였다.

백남빈은 이모 부부의 양자(養子)가 되어 자랐다.

철령보의 보주가 그의 이모부이며 양부(養父)인 것이다.

(얼마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기에 어머니는 피붙이도 믿으면 안된다고 하셨을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의 위패를 올려다보며 백남빈은 생각에 잠겼다.

피붙이조차 믿으면 안된다는 유언은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오직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한을 품고 돌아가신 연유는 차마 이모에게 여쭐 수가 없다.)

백남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피붙이일지라도 믿으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피붙이인 이모에게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긴 분이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만나 봐야만 어머니가 그리 유언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玉佩)가 들어있다.

얼음처럼 서늘한 그 옥패가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모와 이모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내려면 옥패의 내력부터 알아내야할 것이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내어 어머니 영전으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어머니의 위패에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사당을 나섰다.

 

이미 삼경(三更)에 접어든 시간이라 철령보의 사당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어둠 속에 백남빈을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다. 철령보의 총관인 사해검객(四海劍客) 종리완(鍾里阮)이다.

사해검객은 검법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인후한 성품을 지녀 아랫사람들로부터 인망이 두텁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당 밖에 서있는 사해검객을 보자 백남빈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영당(令堂)의 제사는 잘 모셨는가?”

사해검객이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 그보다 저와 의논할 일이 생겼겠습니다.”

백남빈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되물었다.

이모부이면서 양부인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獨眼龍) 이탁(李卓)은 사흘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다. 숙적인 대려장(大麗莊)의 동향이 심상치 앉아서 직접 접경지역을 순찰하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보주인 백남빈이 철령보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중이다.

신랑성(神狼城) 방면을 감시하던 형제들이 날려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네.”

사해검객은 들고 있던 폭이 좁고 긴 종이를 백남빈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는 전서구가 수백 리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자가 은밀히 월경(越境)을 했단 말이지요?”

전서를 받아 읽으며 백남빈의 미간이 조금 모아졌다. 전서에 적혀있는 이름이 범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주님께도 전서구를 날려 보냈네만... 서둘러 대응해야할 사안인 것같아서 소보주가 제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네.”

전서를 읽는 백남빈의 얼굴을 살피며 사해검객이 말했다. 말과 태도가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백남빈이 자못 어렵게 느껴지는 사해검객이었다.

제가 오늘밤 당직인 형제들을 이끌고 요격(邀擊)에 나서겠습니다. 총관께서는 양부와의 연락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남빈은 전서를 다시 사해검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함세.”

사해검객은 경험이 많은 자신이 요격에 나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나이는 아들뻘이지만 이 어린 주인의 말은 어쩐지 거스르기가 어렵다.

 

잠시 후 백여 기의 날쌘 기마대가 철령보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기마대의 선두에 선 것은 물론 철령보의 소보주인 백남빈이었다.

 

***

 

-오수부동(五獸不動)!

 

다섯 짐승이 서로를 노려서 피차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오수부동이야말로 당금의 무림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중원의 무황성(武皇城)과 농성(農城), 만리장성 밖의 대려장, 신랑성, 극품당(極品堂)등 다섯 세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칠십여 년 간 무림을 지배해온 것은 무황성이다.

무황성의 창건자는 철면무황(鐵面武皇) 한산림(韓山林)이라는 인물이다.

사문내력은 불분명하지만 철면무황은 백년 내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린다.

기이하면서도 실전적인 무공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중원에서 몽고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주원장은 철면무황에게 주()씨 성을 내리고 강호 무림의 주재자로 책봉했다.

한산림에서 주산림(朱山林)으로 개명한 철면무황은 호시탐탐 중원으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는 몽고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과 만리장성 사이에 거대한 성채를 세웠다.

그 성채는 무황성이라 불리며 칠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림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철면무황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과 명나라 황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무황성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특히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강탈한 <정난(靖難)의 변()>은 무황성과 명 황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만들었다.

무황성으로서는 주원장의 후계자인 건문제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건문제의 숙부인 연왕, 즉 영락제(永樂帝)였기 때문이다.

비록 영락제가 무황성을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인 주원장처럼 우대하지도 않았다.

자연히 무황성의 세력은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남쪽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농성이라는 세력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몽고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신랑성과 극품당, 그리고 동이족(東夷族)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이 차례로 흥기(興起) 했다.

오랜 세월 무림의 주인을 자처해왔던 무황성은 장강과 황하 유역에만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농성을 제외한 사대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이 동북방의 요하(遼河) 일대다.

요동(遼東)에는 동이족의 맹주 대려장이 웅거하고 있으며 요하의 북쪽에는 몽고의 유력한 부족 달단(韃靼)을 배경으로 둔 극품당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요하의 발원지이기도 한 서북쪽은 몽고의 가장 강력한 부족 오이라트(瓦刺)가 세운 신랑성의 세력권이다.

마지막으로 요서(遼西)에 펼쳐진 드넓은 철령평야(鐵嶺平野)에는 무황성의 최북단 거점인 철령보가 변황의 삼대세력 사이에 쐐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철령보는 그 전략적 위치에 어울리게 무황성의 여러 분타들 중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철령보 소속 무사들 중 약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강호의 평판이다.

철령보의 보주는 독안룡 이탁이란 인물이다.

무황성 감찰전(監察殿)의 전주였던 독안룡 이탁은 무공도 뛰어나지만 기문진법(奇門陣法)의 재주가 일절(一絶)로 꼽힌다.

그 독안룡 이탁의 양자인 백남빈이 야심한 중에 철령보를 나와 서북 방면으로 출격하면서 오수부동이던 강호의 정세에 일대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

화살이 얼굴 옆을 스치며 쨍한 소음을 낸다.

!”

젊은 시종 다얀(達延)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몸을 숙였다.

무공에는 소질뿐 아니라 흥미도 없어서 신랑성의 서재에만 틀어박혀 살아온 다얀이다.

당연히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오늘이 처음이다.

상당히 떨어진 옆쪽으로 흘러가는 화살조차 다얀의 온몸을 떨게 만든다.

자세를 흩트리지 마라. 그렇잖아도 지친 말을 힘들게 한다.”

앞서 달려가던 완안진(完顔進)이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 죄송합니다 부()성주님.”

몸을 숙였던 다얀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말들은 천리마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놈들이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숨은 턱에 차있고 발걸음은 눈에 띄게 어지럽다.

그렇다고 쉬게 할 수도 없다.

두 주종(主從)은 지금 다수의 적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며 달리고 있는 곳은 일망무제의 평야라 몸을 숨길만한 곳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밀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간 것일까?)

앞서 말을 달리는 완안진의 미간이 모아졌다.

 

올해 쉰 두 살인 완안진은 신랑성의 부성주다.

직책은 비록 부성주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사실상 신랑성의 성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몽고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오이라트에 의해 세워진 신랑성은 대대로 오이라트의 족장이 성주를 겸임해왔다.

신랑성의 당대 성주 신랑태사(神狼太師) 토곤(脫灌)은 제이(第二)의 징기스칸으로 불리는 영걸이다.

능력에 걸맞게 야심도 큰 토곤은 중원에서 쫓겨난 후 사분오열된 몽고족을 정복하고 통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만주(滿洲)와의 경계인 흥안령(興安嶺)에서 오이라트의 숙적 달단을 공격하다가 내일은 수천 리 밖의 서역으로 기마군단을 몰고 가 티무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샤 루흐와 격돌하는 식이다.

그 때문에 토곤은 신랑성의 성주 자리를 비워두다시피 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부성주인 완안진이 신랑성을 이끌고 있다.

토곤이 이십여 년 간 동분서주한 보람이 있어서 몽고의 부족 대부분은 오이라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밀려난 달단만이 원()나라 황실의 보위를 위해 세워졌던 무사집단 극품당을 전위(前衛)로 내세운 채 토곤에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몽고를 사실상 통합하는데 성공한 토곤의 야심은 이제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성주인 완안진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요동의 대려장으로 파견한 것인데...

대려장으로 가기 위해 극품당과 철령보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완안진과 시종 다얀은 종적이 발각되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진족(女眞族) 출신인 우리 형제들을 시기질투 하는 누군가가 극품당과 대려장에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완안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안(完顔)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완안진은 금()나라를 세워 한 때 중원을 정복했던 여진족 출신이다.

완안진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인 몽고의 유력한 부족 오이라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몽고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 덕분에 신랑성의 부성주가 되었지만 완안진에게는 적이 많다.

그 적들 중 누군가가 완안진이 토곤의 밀명을 받고 신랑성을 떠난 것을 틈 타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대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다니... 이번 일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대로 신랑성에 서식하는 버러지들을 일소해버리고 말겠다.)

완안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를 때였다.

삐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명적(鳴鏑), 즉 우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완안진과 다얀의 눈에 이리(二里) 쯤 뒤쪽에서 모래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수십 기의 기마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서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있다.

무황성의 동북면 거점인 철령보 소속의 기마대다.

그들은 해가 뜬 직후 자신들 주종을 발견한 이래 지치지도 않고 추격을 지속하고 있다.

하루 종일 추격해오면서도 대형을 흐트리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개개인이 무시 못 할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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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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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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