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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을 먹는 뱀

 

 

퍼억!

임청우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억겁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임청우는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근육이 열기에 녹은 엿가락처럼 풀어지고 관절 마디가 전부 벌어져버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에 젖은 솜처럼 퍼져 누운 채 임청우는 멍하니 흑옥의 벽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깊고도 검은 흑옥의 벽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이 내 몸 속으로 빨려 들어왔던 것같은데...)

투명하게 변해가던 자신의 몸으로 북두칠성이 하나씩 흡수되었었다.

환각인가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인간의 생사와 운명,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차례차례 임청우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었었다.

덕분에 광활한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가던 임청우는 다시 형상을 갖추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임청우였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모른다.

이윽고 풀어졌던 근육에 탄성이 돌아오고 벌어졌던 관절도 맞물려졌다.

임청우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옥의 벽에 박혀있는 북두홀을 만져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임청우는 아쉬움을 남기고 흑옥의 벽 앞을 떠났다.

 

***

 

임청우는 북두무랑을 나왔다.

두 개의 월동문 중 <>자가 새겨진 오른쪽 월동문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북두무랑 안에서 보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단 한 구절의 무공비결도 얻을 수 없었다.)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북두무랑을 나섰다.

(하긴 기연이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림고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밖으로 나온 임청우는 아쉬운 마음에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왼쪽 월동문처럼 오른쪽 월동문 옆의 벽에도 상당히 많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게 들어왔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글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서명은 수십 줄인데 한 줄에 하나의 이름만 새겨진 경우도 있고 십여 개가 나란히 적혀있기도 했다.

(살아서 북두무랑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한 줄이 한 세대를 의미할 테고...)

임청우는 서명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았다.

윗부분의 십여 줄은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어서 판독이 불가능했다.

중간쯤부터는 읽을 수가 있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이름의 주인이 직접 새겨 넣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름들 가운데 임청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을 살펴보자. 어쩌면 북두무랑을 훼손한 범인도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몸을 숙여서 맨 아랫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천영(趙天永), 번리충(樊利忠), 풍건군(馮建軍), 왕천달(王千達), 당소광(唐小光), 양시우(梁翅祐)...

여섯 개의 서명 중 앞쪽의 다섯 개는 파인 부분의 색이 절벽과 비슷하다. 이름을 새긴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양시우(梁翅祐)라는 이름에는 바위 안쪽의 밝은 색이 남아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그 이름이 새겨진 후 이십 년 이상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찾았다! 바로 이자다!”

임청우는 마지막에 새겨진 서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풍화된 정도로 봐서 양시우란 이 이름은 북두무랑의 무학비결들이 훼손되었을 무렵에 새겨졌다. 거의 틀림없이 이자가 범인이다!”

임청우는 양시우라는 자가 북두무랑을 통과한 후 다른 사람이 북두무제의 무학비결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해버렸음을 확신했다.

하긴 범인을 알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북두무제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북두무랑의 상태나 알려주도록 하자.”

임청우는 월동문을 등지고 돌아서 안개의 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헌데 임청우는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기겁하며 멈춰 섰다.

월동문 앞쪽의 땅 바닥에 수많은 뱀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한 뼘 쯤 되는 작은 새끼 뱀이 있는가 하면 대들보만한 크기의 구렁이도 보인다.

그 많은 뱀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미동도 않고 누워있다.

... 이 뱀들, 왜 갑자기 몰려든 건가?”

소스라치듯 놀란 임청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산을 타다보면 뱀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저 놈 뭐하는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임청우는 금관혈린사를 발견했다.

금관혈린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뱀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인데 하는 짓거리가 기이했다.

그 놈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거만하게 고개를 세운 채 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뱀 옆에 이르면 쭉 몸을 펴서 길이를 잰다.

금린혈관사가 자기 옆에 몸을 누이면 비교당하는 뱀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에 길이를 잰 뱀은 금관혈린사보다 한 뼘쯤 더 크다

툭툭!

금관혈린사는 불만스럽게 그 뱀을 꼬리로 건드렸다.

금관혈린사의 꼬리에 닿은 뱀은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안도하며 긴장을 푼다.

다른 뱀들의 길이를 재고 있는 건가?”

임청우가 어리둥절할 때 금관혈린사는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떠는 그 뱀 옆에 몸을 쭉 펴며 누웠다.

이번에는 길이가 딱 맞다.

쉿쉿!

그걸 확인한 금관혈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쳐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스스스! 사사삭!

그러자 다른 뱀들은 안도하며 일제히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있고 조각상처럼 보이는 시체들 사이로 숨는 놈도 있다.

이제 동굴 앞쪽의 바닥에는 금관혈린사와 그놈이 길이를 잰 놈만이 남았다.

(죽은 듯 누워있던 뱀들이 마치 황제의 칙명을 받은 신하들처럼 흩어진다.)

임청우가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감탄할 때 금관혈린사는 홀로 남은 뱀의 머리를 붉은 혀로 핥았다.

금관혈린사의 혀가 머리에 닿은 뱀은 보기에도 딱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

(뭘 하려고 몸길이를 비교했을까? 설마 짝짓기 상대를 찾은 것일까?)

임청우가 의아해할 때였다.

금관혈린사가 남아있는 뱀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뱀을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뭐야? 잡아먹기에 적당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길이를 재본 건가?”

후루룩!

임청우가 놀라는 사이에 금관혈린사는 순식간에 뱀을 다 삼켜버려서 꼬리만 입 밖으로 나와 흔들리고 있다

참 빨리도 먹는다!”

그 꼬리마저 이내 삼키는 금관혈린사를 보며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끄억!

자기 몸 길이만한 뱀을 삼킨 금관혈린사는 사람처럼 트림까지 하는데 어느덧 그놈의 몸은 전보다 배로 통통해져 있었다.

트림까지하고... 참 골고루 한다.”

꼬르륵!

쓴웃음을 짓는 임청우의 배에서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저놈이 배 채우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출출해지는구나. 먹을 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면서 백초주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간다.

그러자 배를 채우고 누워있던 금관혈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꼴꼴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임청우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금관혈린사가 그의 발치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왜 또?”

임청우는 경계하며 호리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거냐?”

임청우가 혹시나 해서 묻자 금관혈린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참... 뱀이 술을 달래기도 하고...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임청우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리병을 금관혈린사의 머리 위로 가져가 기울였다.

조금 맛만 봐라. 넌 덩치가 작아서 술에는 약할 거다!”

쪼르르!

임청우가 아래로 기울이는 호리병에서 술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금관혈린사는 그 즉시 입을 쩍 벌려서 술을 받아마셨다.

술맛 좋지? 백가지 약초를 삭혀서 만든 백초주라는 거다. 내가 이래 뵈도 사냥과 채약뿐 아니라 술도 잘 담근다는 거 아니냐?”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에게 술을 먹이며 자랑할 때였다.

!

갑자기 금관혈린사가 호리병 입구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임청우는 기겁하며 호리병을 쳐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금관혈린사는 단번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관혈린사는 머리에 뿔도 달려있고 식사를 한 직후라 몸통도 호리병 입구보다 더 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혈린사는 마치 연기나 물처럼 변해 호리병에 들어가 버렸다.

놈은 임청우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빨리 나와! 잘못 하면 너 뱀술 된다!”

당황한 임청우는 호리병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금관혈린사가 다시 불쑥 머리를 호리병 밖으로 내밀었다.

끄억!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트림을 한다.

호리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 그 새 남아있던 술을 다 마신 거냐?”

스르르!

임청우가 놀라는데 금관혈린사는 뿔을 몸통에 찰싹 붙이더니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롱! 고로롱!

이어 호리병 속에서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술 병 속에서 잠들고... 뭐 이런 벽창호가 다 있는 건가?”

임청우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금관혈린사는 호리병 속이 아늑해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을 꺼내려면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을 찢어야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호리병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

어쩔 수 없이 금관혈린사를 넣은 채 호리병을 가져가야한다.

하긴 너같은 친구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잘 자라! 술 깨면 풀어주마!”

임청우는 호리병을 허리띠에 묶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길 빠져 나가자!”

호리병을 허리에 찬 임청우는 서둘러 안개의 벽으로 다가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흐려졌지만 점점이 광점이 남아있다. 금관혈린사가 임청우를 안내하며 남겼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청우는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는 광점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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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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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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