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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온 마두들

 

 

밤공기가 서늘하다.

독수리들의 부리에 찢기고 피에 절은 옷을 벗어버린 탓에 벌거숭이가 된 상체에 소름이 돋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웃은 임청우는 모옥 앞으로 가서 바닥에 흩어진 약초들을 주워 모았다.

뿌리 채 뽑아온 약초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에 심고 물을 주었다.

나머지는 그늘에 말려놓은 다른 약초들과 함께 부엌으로 가져가서 다렸다.

침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약사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아려 보니 오늘은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만에 만난다는 날이지만, 임청우는 어머니를 떠나가야만 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

 

***

 

모옥을 나온 임청우는 서쪽의 절벽으로 갔다.

천길 벼랑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길 정도 아래쪽에는 임청우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인 작은 동굴이 있다.

임청우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동굴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에 내려섰다.

절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는 임청우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다.

입구 맞은편에는 임청우가 직접 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든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위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도 임청우가 힘들게 모은 책 수십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임청우는 돌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름등에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후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끼이!

호리병을 돌침대 위에 내려놓자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삐죽 내밀며 두리번거린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라.”

임청우는 이불과 함께 개어놓은 여벌의 옷을 집어들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영물답게 금관혈린사는 머리를 다시 호리병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치는 자식이라니...!)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자신의 팔자가 너무도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안의 물건들 중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수십 권에 이르는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렵게 채집한 약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한 산짐승들을 팔아서 산 책들이다.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그 책들은 임청우가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견뎌온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옛 성현들의 지혜가 깃든 책을 읽을 때만큼은 비참하고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귀하지 않은 건 단 한권도 없다.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니 다 가져갈 수는 없다.

다른 책들은 굳이 가져갈 필요 없고... 장자(莊子)와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일옹청풍일지(一翁淸風日誌)만 가져가자.”

임청우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단 두 권만 챙겼다.

장자는 도교(道敎)의 비조(鼻祖)인 노자(老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일컬어지는 장주(莊周)의 존칭이면서 그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옹청풍일지를 쓴 육일거사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당나라의 한유(韓愈)의 뒤를 이어 고문(古文)을 일으켰던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스스로 정한 호().

말하기를, 집고록(集古錄) 일천 권과 장서(臧書) 일만 권, 거문고 한 채, 바둑판 한 개가 있고 항상 술 한 단지를 두고 구양수 자신이 늙어가니 이를 육일(六一)이라 한다고 했다.

임청우는 또 다른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던 구양수를 좋아했다. 그의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칠 것이 없는 장자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임청우는 장자와 일옹청풍일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저 책 두 권을 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든든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임청우는 동굴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늘 어머니의 학대와 독설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이 동굴로 숨어들면 안전하고 편안했었다.

정이 들었던 피신처를 떠나려니 복잡한 감회가 치밀어 오른다.

동굴을 둘러보던 임청우의 눈에 금관혈린사가 들어있는 호리병이 들어왔다.

금관혈린사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 영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뱀은 뱀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꺼림칙한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청우는 호리병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끼이!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리병이 약간 흔들리더니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한다. 나를 따라 갈 테냐 여기에 남을 테냐?”

임청우는 붉은 보석같은 금관혈린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스르르르!

임청우의 말을 들은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리병의 잘룩한 부분을 꼬리로 감아 끌면서 임청우에게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

임청우가 확인하듯 묻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너라도 길동무가 되어주면 덜 쓸쓸하겠지!”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자 금관혈린사도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들을 긴 혀로 핥았다.

대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너 먹기 없기, 너는 나 먹기 없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해결하기다.”

임청우의 말에 금관혈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 뭐가 좋을까?”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관혈린사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임청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먹이의 길이를 먼저 잰 후에 먹는 게 네 식성이니까 척포(尺飽)라고 하자!”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북두무랑 앞에서 몸길이를 재어 똑같은 길이의 뱀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척포, 어때? ?”

임청우가 묻자 금관혈린사는 고개를 주억 거려 좋다는 표시를 했다.

좋다고? 그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척포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르르!

척포라는 이름을 얻은 금관혈린사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호리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되자 친구를 대신 얻게 되었구나.”

임청우는 척포가 들어간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몸, 세상에 나서는데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겠는가? 어차피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는데...”

척포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차며 임청우의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비록 미물이긴 해도 동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늘 하던 대로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는 돌출부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국자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이다.

모옥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임청우가 다가가자 모옥 안쪽에서 임단심의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납니다 어머니!”

임청우는 모옥을 향해 절을 했다.

, 마음에도 없는 헛치레는 집어 치워라.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넌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겠느냐?”

저는 그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임청우는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한다고 비꼬는 것이냐?”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모옥의 문이 덜컹 열렸다.

죽일 놈!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놔?”

이를 바득 갈며 집 밖으로 나서는 임단심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여서 귀기스럽다.

평소였다면 임청우는 어머니가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아비가 누구냐고?”

임청우를 노려보는 임단심에게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임청우는 말없이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단심의 표정과 눈빛이 짧은 사이에 여러 번 변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목숨이 몇 번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눈 몇 번 깜박이는 정도로 짧았지만 임청우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났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이윽고 임단심이 침묵을 끝냈다.

금포염왕을 찾아가서 물어봐라. 그럼 네 아비가 누군지 가르쳐줄 것이다.”

임단심은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임청우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으며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인적 드물고 궁벽한 농산에서 살아온 탓에 금포염왕이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의 뇌리에는 어떤 인물의 형상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북두무랑을 빠져나올 때 진법 속에서 보았던 인물!

태산처럼 웅장하게 느껴지는 몸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이 안개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관혈린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안개 속에 누군가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포염왕... 금포염왕이란 인물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인지요?”

임청우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네놈을 위해서 더 말해줄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임단심의 매정한 말이 임청우에게서 모든 기대를 앗아갔다.

그러시다니 소자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필요한 약초는 대부분 옮겨 심어놓았으니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임단심에게 절을 하고 일어난 임청우는 계곡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금포염왕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살기와 연민이 망설임으로 반죽이 되어 그녀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은밀하게 쥐어져 있던 머리가 뭉툭한 한 대의 철정(鐵釘)이 쩡! 소리가 나면서 떨어졌다.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단심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결국 내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구나.”

헌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임단심은 마침내 왁! 하고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임청우의 모습은 이내 좁고 어두운 계곡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청우! 네 놈을 세상으로 내쫓는 진짜 이유는 고질이 되어 버린 내 내상(內傷) 때문이다. 바로 네 아비에게 당한...”

잇달아 두 번 더 피를 토한 임단심은 가슴을 부여잡고 뇌까렸다.

더 이상 네 놈을 괴롭힐 수도 없기에...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무림에 내보내 고생하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원한 맺힌 눈으로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임단심은 비틀거리며 모옥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옥 앞 초지에 가득 심겨져 있는 화초와 진기한 약초들만이 바람결에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

 

임청우는 세상을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어머니란 존재마저도 잊어버리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비련곡(悲戀谷) 입구에 다다랐다.

곡구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늘 내뱉는 말처럼 자기가 인간같지 않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걸려있는 호리병을 툭 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척포란 놈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 화난 듯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쏙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비련곡 밖에 있는 천류폭포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다.

임청우는 한쪽 절벽에 세워둔 대나무 죽마를 집어 들었다.

곡 밖에 있는 호수 같이 넓게 퍼진 물이 비록 깊지는 않지만 그냥 건너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배를 이용할 만한 곳도 아니다.

대나무 죽마는 임청우가 비련곡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다.

한데 그가 막 대나무 죽마에 올라타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익!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새처럼 날아 들어와 비련곡 입구에 내려섰다.

임청우가 서있는 곳은 절벽 아래쪽의 달빛 그림자에 가리워진 부분이라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청우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인물이 그에게서 불과 일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저 괴물들이 어떻게 여길...)

임청우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난 자들은 그가 낮에 표운봉에서 만났던 마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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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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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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