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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 떨리는 치료법

 

 

연못가 풀밭에 눕혀진 강미루의 피부는 먹물을 담은 통에 빠졌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몸이 돌처럼 단단해져 있다. 뜨거운 연못물에서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미루의 모습은 마치 흑옥(黑玉)으로 빚어놓은 옥상(玉像)인 듯 보였다.

(뭔가에 중독되었다.)

백남빈은 검게 변한 강미루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던 연약하고 오똑하던 콧날도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쉽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백남빈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강미루를 보며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이 든 이래 처음 살을 맞대본 여자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 어여쁜 소녀의 죽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다.

흑마의 등에서 자신의 턱을 물었던 악착스러움까지도 죽은 지금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복받친 백남빈은 자신도 모르게 강미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싸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 전해진다.

하지만 백남빈 몸속의 피는 꽃같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은 자신의 왼손이 닿은 강미루의 오른쪽 귀가 언뜻 흰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손을 떼자 강미루의 오른쪽 귀는 다시 검어 졌다.

왼손을 또 갖다 대자 강미루의 피부는 흰빛을 되찾았다.

왼손을 대었다 떼었다 몇 번 해본 백남빈은 그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의 조화임을 알았다.

오채금환은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것으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오채금환을 얼굴에 갖다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서 검은 색이 잠시 없어졌다.

그걸 보며 백남빈은 생각했다.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인데...)

혹시 마땅한 실험대상이 없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백남빈의 눈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는 흑왕이 보였다.

백남빈은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에서 강미루를 꺼내면서 흑왕도 함께 끌고 나왔었다.

흑왕은 오랫동안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녹초가 된 외에는 딱히 독에 중독되거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디에 독상을 입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저 말은 멀쩡한데 사람만 중독되는 독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백남빈은 강미루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몇 겹의 옷이 걸쳐져 있어서 상처가 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사아악!

잠시 망설인 후에 백남빈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강미루가 걸치고 있는 붉은 옷을 청랑검으로 잘라서 벗기기 시작했다.

몸이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옷을 훼손하지 않고는 벗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옷과 속옷이 모두 청랑검에 잘려나간 후 강미루의 알몸이 흑옥같은 빛을 띤 채 드러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소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고 있었다.

백남빈은 자신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체같이 굳어진 모습이지만 굴곡이 뚜렷한 여체를 난생 처음 보는 때문이다.

독에 중독된 후 모든 근육이 긴장을 일으킨 탓에 가슴은 일부러 세운 듯 봉긋했고 다리며 팔은 마치 깎아놓은 조각품 같이 쭉 뻗어있다.

팽팽한 아랫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두둑한 둔덕에는 피부색같이 검은 풀같은 것들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다.

미끈하기만 한 피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숲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백남빈은 마치 독사를 보기라도 한 듯이 질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언 듯 시야로 스쳐지나간 수림 아래의 깊이 갈라진 형적이 백남빈의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트려버릴 듯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언제까지 눈을 감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남빈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강미루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하지만 굳은 다짐과 달리 소녀의 알몸을 본 백남빈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황하여 지리멸렬한 신음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약관이 목전인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더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본 적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화끈 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것같은 여인을 보면서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비록 큰 맘 먹고 옷을 벗기기는 하였으나 막상 벗기고 나자 독상(毒傷)을 입은 곳을 찾기는커녕 왜 발가벗겼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여자를 모르는 숫총각에게 벌거벗은 여체는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눈을 감아도 선하고 눈을 뜨면 정신이 몽롱해 지는것 같았다.

"대장부가... 대장부가... 겨우 여자의 알몸 때문에 평정심을 잃다니..."

백남빈은 용기를 갖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떨려왔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젊음의 끓는 피라는 게 이성(理性)에 의하여 진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검은 조각상같은 강미루의 모습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록 백남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백남빈은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강미루의 몸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훑어보았지만 작은 상처 하나 눈에 뛰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독을 먹었던 것이로구나. 그걸 몰랐어. 그런데 어디서 독을 먹었을까?왜 먹었을까?"

백남빈은 마침내 강미루가 독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음독(飮毒)한 것을 알았다.

백남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강미루의 뻣뻣해진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시시!

그러자 오채금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독을 빨아들인 후 연기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입 속이 독으로 가득 차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백남빈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연못의 물이 독인 것은 아닐까? 뜨겁기도 했지만 뭔가가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었다."

백남빈은 그 즉시 연못물에 젖어 있는 자신의 옷에 반지를 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내심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백남빈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독을 마신 게 분명한데...”

백남빈은 자신이 조금 벌려놓은 강미루의 입술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혹시...)

강미루의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백남빈은 생각 난 것이 있어 연못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에 침을 뱉어 보았다.

츠츠츠!

순간 침이 닿은 옷자락은 먹물에라도 닿은 듯이 검은 색으로 확 변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다."

백남빈은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본래 연못물은 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액(唾液)과 섞이면 독특한 극독(劇毒)이 되어 생명체를 석상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약하게 중독된 사람은 생각도 그대로 할 수 있고 보고 들을 수도 있으나 몸은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의식마저도 잃어버리고 숨도 멈춰서 완전히 검은 조각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미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못물을 들이켰었다.

그래도 흑왕이 헤엄치면서 떠받쳐준 덕분에 연못물을 아주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마셨더라면 강미루는 온몸이 진짜 돌같이 굳어져서 백남빈이 입을 열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남빈의 영감(靈感)이 독을 찾아내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다.

백남빈은 절뚝거리며 일어나 흑왕에게 다가갔다.

파김치가 되어 주저앉아있는 흑왕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허벅지의 상처를 묶었던 머리띠를 끌러서 침을 뱉었다.

연못물에 젖어 있던 머리띠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변했다.

푸르르!

그것을 본 흑왕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지금 네 주인은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잠시 동안만 참아보렴. 네 주인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

백남빈의 부드러운 말에 흑왕이 가만히 있을 때 백남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머리띠를 푸릉거리는 흑왕의 입속에 확 넣어버렸다.

흑왕이 깜짝 놀라"푸럭" 하며 머리띠를 뱉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입속으로 독이 들어가자마자 흑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탑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보통 말의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천리마 흑왕마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본래 검은 색이던 흑왕의 몸은 쇳덩어리처럼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목에 손을 대 보니 벌써 뻣뻣해져있다.

말이 사람보다도 더 독에 민감한 것 같았다.

스윽!

백남빈은 쓰러진 흑왕의 가슴을 청랑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벌써 진하게 굳어진 검은 피가 상처에서 배어나왔다.

백남빈은 그 상처에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스스스!

그러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백남빈은 코를 막으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바닥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푸시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돌처럼 굳어졌던 흑왕의 몸이 가슴의 상처부위부터 시작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백남빈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생각한 오채금환의 사용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말()만큼이나 드센 대려장의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을 죽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남빈이다.

헌데 대려장의 소녀를, 그것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를 구하는데 왜 이처럼 정성을 쏟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럴까?"

백남빈은 반문해 봤으나 뚜렷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채금환은 크기는 작아도 독을 제거하는 효능은 아주 강력해서 벌써 흑왕의 중독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가 점차로 줄어들다가 종래에는 나지 않았다.

몸에서 독이 빠지자마자 흑왕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푸르르!

고개를 든 그놈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백남빈을 보고 있었다.

백남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먹은 그놈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강미루에게 돌아갔다.

푸른 풀밭 위에 누워있는 소녀의 검은 나체가 희미한 새벽에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백남빈의 가슴은 다시금 세차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진정하자!)

벌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강미루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말에게 했듯이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가볍게 칼로 그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중독 상태는 흑왕보다 심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당황하여 조금 더 깊이 베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백남빈은 강미루의 가슴에서 동전만한 크기로 살점을 도려내었다.

도려진 살점은 돌조각 같이 딱딱했다.

불룩한 젖가슴 위에 파여진 오목한 부위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그 상처 부분에 집어넣었다.

치이이!

그러자 달군 쇠를 물속에 집어넣은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연기가 뭉클 일어났다.

강미루의 왼쪽 젖가슴 위에 뚫린 구멍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인양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강미루의 검은색 나신은 점차 흰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백남빈은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해가며 강미루의 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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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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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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