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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둘만의 절지(絶地), 낙원(樂園)

 

 

... 죄송합니다 신()공자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작은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백남빈의 말을 끌고 돌아간 몇 명을 제외하고 백여 명의 대려장 무사들 모두는 밤새 당산산맥을 달리며 강미루의 종적을 찾았다.

어두운 산속을 말로 달리다보니 몇 명인가는 낙마하여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강미루와 흑왕이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백여 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대들이 죄를 청할 일은 아니니 자책할 것도 없다.”

대려장 무사들 앞쪽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인물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인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시원시원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 좋은 몸에는 도포(道袍)라는 이국적인 형태의 흰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당건(唐巾)을 썼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만 아니라면 무사가 아니라 유생(儒生)으로 보였을 이 인물이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다.

강진남의 큰 딸 강미조의 남편인 그의 이름은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伽藍)이다.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으로 이름이 바뀐 압록강 너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가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강호의 물 좀 먹은 요동 일대의 늙은 무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가람을 대려장의 으뜸 가는 고수로 꼽고 있다.

강진남이라 해도 이 잘 생긴 사위보다 무공으로는 아래라는 것이 늙은 생강들의 일치 된 의견이다.

유모 최씨의 눈물 어린 애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신가람은 강미루를 대려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한 발 늦어서 강미루는 철령보를 빠져나온 전령과 싸우다가 당산산맥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수색 범위를 백리 밖으로 넓히되 말이 달릴 만한 지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신가람의 지시에 대려장의 무사들은 봉명(奉命)을 외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썽쟁이를 찾아내면 볼기짝부터 쳐야겠구나.”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려장 무사들을 보며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

 

강미루는 자신의 애마가 목을 핥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강미루는 기가 막혔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이 조각조각 잘려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선머슴같은 말괄량이라지만 어제 처음 만난 사내에게 알몸을 홀딱 보이고 말았으니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다.

대려장의 둘째 공주로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강미루다.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남빈을 죽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백남빈을 죽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백남빈을 보면 풀이 죽어서 땅만 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마음이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백남빈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강미루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의 붉은 옷을 갈기갈기 잘라버렸었다.

원래 옷이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된 터라 강미루는 백남빈의 남색상의(藍色上衣)로 알몸을 가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알몸이 된 백남빈의 상체가 당당하게 보여 강미루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날은 이미 밝았으나 강미루는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체는 백남빈의 헐렁한 웃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라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쳐 앉을 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너무도 부끄러운 곳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뱃속에서는 드디어 꾸룩 꾸룩 비둘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두 사람이 있는 분지의 형상이 전모를 드러냈다.

분지는 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치 거대한 항아리같은 형태의 분지라 바닥에서는 하늘이 타원형으로 보인다.

분지의 바닥에는 직경이 수십 장인 타원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는 그 연못을 에워싸고 절벽과 원시림과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바깥세상은 이미 깊은 가을이지만 분지 내부는 한 여름처럼 덥다.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연못물은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띄고 있다.

녹색의 온천수가 고여 있는 연못은 주변의 풀, 나무, 바위들과 어울려 낙원을 연상하게 한다.

늘 한 여름인 이 분지는 진정 세상 밖의 세상이요 평화와 안락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호가 홍의창(紅衣槍)이었던 강미루는 하룻밤 사이에 나신창(裸身槍)이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려장의 원수인 철령보 소속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뜻으로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것도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찌 하나?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와 형부가 알면 저 사람을 살려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강미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녀로서 알몸을 보였으면 상대에게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신의 집안과 오랜 원수지간인 철령보 출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부가 허락을 하실지 미지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번민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옆에서", !" 하는 기척이 나서 강미루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백남빈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상당한 양의 풀 뭉치를 내밀고 있다.

그런 백남빈은 상체를 풀로 얼기설기 엮은 것을 도롱이처럼 걸치고 있다.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언제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풀로 몸을 가릴 것을 만든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내미는 것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받아 들었다.

다리를 한껏 오무려 매무새를 바로하고 팔만 돌려서 받노라니 백남빈의 어깨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무의 속껍질과 긴 풀로 만들어진 풀옷은 백남빈을 무슨 요정전사(妖精戰士)처럼 보이게 했다.

준수한 백남빈의 옆모습이 햇살에 밝게 빛나 더 없이 보기 좋았다.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로 된 옷을 가슴에 안았다.

(나도 이 옷을 입으면 저 사람과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야릇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풀 뭉치를 받자 백남빈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강미루에게는 그런 백남빈의 행동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어쩐지 볼일 다 본 후 버림받은 여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강미루가 상의(上衣)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풀 옷은 예상과는 달리 치마였다.

부드럽고 긴 풀들을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엮어서 마치 초가집의 이엉처럼 만들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꽤 정성을 들여 만든 풀 옷이었다. 남자의 거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풀이 흩어지지 않도록 나무의 속껍질로 여러 번 엮어 놓은 것이다.

풀 옷을 허리에 감고 일어서서 온천물에 모습을 비춰보니 우스운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는 헐렁한 남자의 상의를 걸쳤고 아래에는 풀로 된 치마를 입었으니 그보다 더 우스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도 녹색이고 그것에 비친 사람도 녹색이다.

문득 강미루와 정반대의 차림을 한 사내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 곁에 나타났다.

물론 백남빈이다.

그의 품에는 여러 개의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안겨져 있었다.

강미루는 조금 심술이 났다. 물에 비친 백남빈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인 때문이다.

백남빈의 풀 옷 상의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기의 풀로 짠 치마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코웃음을 치며 돌아선 강미루는 백남빈의 품에 있는 열매를 몽땅 집어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토라진 계집아이같은 강미루의 짓거리에도 백남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연못을 향해 앉은 강미루는 백남빈이 따온 이름 모를 과일을 하나 먹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백남빈에게 향해있어 무슨 맛인지 음미할 수도 없다.

백남빈이 그런 강미루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놓여진 과일을 하나 슬며시 집어든다.

강미루는 새침한 표정인 채 관심 없는 척 했다.

백남빈은 강미루의 눈치를 보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벗긴 것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녀의 나신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본성의 발현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몸을 보고 만졌던 어쨌든 자신은 강미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소녀한테 꿀려서 기를 못 편단 말인가)

백남빈은 내심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이성(異性)의 경험이 없는 백남빈으로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감정(人間感情)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인 것을...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백남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빨리 이 분지를 빠져 나가야하는데... 타고 갈 말도 없고 다리마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속은 타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만 한다.”

깊이 몰두하다 보니 백남빈의 생각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강미루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한마디 했다.

"이 분지를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걸요?"

그러나 백남빈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묵묵히 속으로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강미루는 왠지 이 아름다운 분지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곳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일로 허기를 면한 백남빈은 아픈 다리를 끌면서 분지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미루는 휘파람으로 흑왕을 불렀다. 흑왕도 온천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생생하게 기력을 회복한 후였다.

강미루는 다가온 흑왕의 등에 훌쩍 몸을 날려 올라탔다.

그러나 몸을 날릴 때의 시원한 아랫도리의 감촉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치마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이 쓰여 눈이 아래를 보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백남빈을 보다가 하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백남빈 옆에 다다른 강미루가 손을 뻗자 백남빈은 사양할 수 없어 그녀의 뒤로 올라가 앉았다.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말에 타고 있자 어제 저녁의 그 치열했던 쟁투가 생각난다.

백남빈은 겸연쩍어 웃었고 강미루는 설레어 두 뺨이 발개졌다.

 

자세히 둘러보니 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기껏해야 만 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지는 그야말로 세외선경 같다.

북쪽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서쪽에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푸른 연못과 거의 맞닿아있으며, 남쪽 절벽 밑에는 풀밭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름 모를 새들을 제외하고는 토끼 한 마리도 눈에 뛰지 않았다.

동쪽의 절벽은 어제 밤에 백남빈이 내려온 곳인 듯한 데 한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데다가 수백길이나 되는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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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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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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