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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

 

 

말 그대로 세외선경인 창평곡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유는 창평곡 주위에 펼쳐져 있는 세 가지 절진 때문이다.

창평곡의 원래 주인이었던 상고시대의 기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설치한 진법을 이백이 보완하여 난공불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백은 제갈공명이 남겼다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얻어 기문둔갑으로도 일절(一絶)이었었다.

이백에 의해 창평곡 주위에 구축된 미혼(迷魂), 산백(散魄), 박령(縛靈)의 절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둘 정도에 불과하다.

삼대절진(三大絶陣)은 비단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것 역시 저지한다.

창평곡 밖으로 나가려면 삼대절진의 바탕이 된 팔진도해가 있어야한다.

헌데 동부 어디에서도 팔진도해는 발견되지 않아서 백남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사자검결의 수련에 전념해야하는 터라 창평곡을 빠져나가는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

 

히히힝! 푸르르!

천리마인 흑왕은 보름 넘게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갑갑한지 풀밭의 이쪽에서 풀쩍 저쪽에서 풀쩍 하면서 뛰고 있다.

백남빈은 녹지 앞의 작은 바위에 앉아 그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지난 열흘 간 백남빈은 사자검결의 모호한 구절들을 수없이 되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사자검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백남빈은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며 만든 검초의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열흘간 연습한 결과 사자검을 찌를 때마다 고리같은 검기가 자연스럽게 쏘아져 나가게 되었다.

어느덧 백남빈의 이 검초는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비록 단 한 수뿐이지만 수비와 공격 모두를 겸하여 전혀 빈틈이 없는 검초다.

고리같은 검기는 뻗어나가는 방향마다 각기 다른 변화를 보이니 실은 수만 초로 이루어진 검법이나 다름없다.

강미루도 좌측 석실에 구비되어 있는 철검(鐵劍)들 중 하나를 꺼내 연습하고 있지만 백남빈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검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사자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강미루는 사자검은 너무 무거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했다.

사실 무겁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사자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주인이므로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강미루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백남빈은 그녀가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무공의 성취와 달리 백남빈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사자검결을 접한 후로 그의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왜 그토록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했을까?)

백남빈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백 조사(祖師)께서는 황제도 미워하고 전쟁도 미워하셨다. 각기 다른 출신과 배경을 지니셨던 열 두분의 전인들께서도 하나같이 황제처럼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졌음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셨다.)

원래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의 백남빈이었다.

그 때문에 이백과 사자검전 전인들의 사연과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왔을까? 무황성을 위해서?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 끝없는 일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강미루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여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 백남빈을 지켜보던 강미루는 전처럼 신나고 활발하게 만들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변방의 쾌활한 연가(戀歌)를 불러 주기도 하고 재미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갈아앉은 백남빈의 기분은 쉽사리 되살아나지 않았다.

(저 사람의 기분을 되살리려면 헐렁한 옷과 풀치마를 입고 있을 때처럼 도발을 해서 가슴에 불이라도 질러 줘야하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강미루였다.

 

슥!

녹지 가에 앉아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백남빈에게 강미루가 철검을 확 찔러왔다.

철검의 끝이 나사처럼 돌면서 날아든다.

바로 백남빈이 창안한 그 검초였다.

“억!”

백남빈은 갑작스런 강미루의 공격에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굴려 가까스로 피해냈다.

비록 백남빈처럼 검기를 쏘아내지는 못했지만 강미루의 이 검초는 빠르고 강했다. 녹지의 물을 꾸준히 마셔서 내공이 심후해진 결과다.

(아니 왜 이래?)

라는 소리가 백남빈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데 강미루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쫑알거렸다.

"대체 이 검법의 이름은 뭐죠? 그냥 무명검법(無名劍法)이라고 할까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심기일전하도록 일부러 도발을 해온 것이다.

“그럼 미루일검(美樓一劍)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백남빈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니면 소녀절세검(少女絶世劍)? 그것도 아니면 미녀참마검(美女斬魔劍)이라고 할까?"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장난기를 회복하는 백남빈이었다.

"장난처럼 말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당신의 이 검법은 정말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절학이란 말이에요."

백남빈이 오랜만에 농을 하자 강미루는 내심 기뻤지만 눈을 흘기는 척 했다.

"당신이 그릇 깎는 것을 보고 훔쳐 배운 것에 불과한데 무슨 절학이라고까지 하겠소. 그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이라고 하지. 그래 그게 가장 적합하겠어."

대충 대답하던 백남빈의 눈이 반짝였다. 별 생각없이 지어낸 미녀각기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 것이다.

"쳇, 검법이라면 이름도 위풍 있고 당당해야지 그게 무슨 검법이름 같기나 해요?"

강미루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하여 백남빈이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기이한 검초는 미녀각기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강미루의 도발이 성공해서 백남빈의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미루, 당신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오."

백남빈은 녹지 가에 강미루와 함께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사과했다.

“사자검전을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백 조사와 여러 전인들의 삶이 절절하게 와 닿아서 마음을 무겁게 했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강미루도 백남빈의 허리를 뒤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저도 열 세분 전인의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며지는 기분이 되곤 한답니다.”

강미루는 한숨을 쉬며 백남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였다.

시대 탓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사자검의 전인 열세명의 삶은 누구 하나 평탄하지 못했다.

모두가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결국 실의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와 쓸쓸히 삶을 마치곤 했다.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던 이백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백남빈과 강미루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사자검의 마지막 전인인 진룡(陳龍)이란 인물의 삶이었다.

 

***

 

사자검의 전인들은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시조인 이백을 필두로 좁은 강호가 아닌 더 큰 세상에 뜻을 두고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무림의 패권다툼에 개입한 바가 없다 보니 사대비문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사자검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자검의 전인들은 세상에 뜻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영합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세상에서 배척을 당해 말년에는 쓸쓸히 창평곡에 돌아와 생을 마치곤 했다.

명재상(名宰相)이었던 제이대 우승유는 물론이고 제칠대 조개지(趙介志)는 왕공(王公)이었음에도 끝내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그들 중에서도 제십삼대 진룡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창평곡에 들어왔으며 다음 대 전인조차 지정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진룡은 백남빈. 강미루와 팔십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살았었다.

진룡의 유해 앞에 남겨진 사연은 구구절절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는데 그가 남긴 검결에는 실용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전인들의 검결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에 반해 진룡의 검결은 비록 염세적인 분위기에다가 고독과 허무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해가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의 사자검결 다음으로 진룡의 검결을 많이 본 터였다.

이 진룡이란 인물의 신세는 실로 파란만장하여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이 동정하고 있었다.

 

***

 

진룡은 원(元)말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 한명이던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의 넷째아들로 자는 거비(去非), 호는 낙이(樂而)였다.

진우량이 홍건적(紅巾賊)에 몸을 담고 있을 무렵에 얻은 넷째아들 진룡은 날 때부터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군의 태(態)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불과 사, 오세때부터 시(詩)를 짓는 총명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진룡은 자라면서 시문에 더욱 능해져서 무인으로 키우려는 부친과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열일곱 살 때 아버지 진우량과 포로들의 처우 문제를 두고 큰 의견 충돌을 빚었다.

분노한 진우량은 칼을 뽑아 진룡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내치는데 그쳤다.

부친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자 진룡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문인이 되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날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작별인사를 드린 진룡은 집을 나와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진룡이 여산(廬山)을 구경하고 내려와 파양호반(鄱陽湖畔)을 거닐 때였다.

한 노파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보였다.

진룡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다가가 물어보았다.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슬프게 우십니까?"

"아이고 애고..."

노파는 더욱 설움이 복받치는지 더 크게 울었다.

잠시 노파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서 한 차례 더 물었다.

"할머니 영감님이 돌아가셔서 우십니까?"

노파는 훌쩍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젊은이... 영감이 죽었으면 험한 꼴 보지 않고 잘 죽은 거라오."

"...!"

"큰 아들 놈은 일월교(日月敎)에 미쳐 돌아다니더니... 한산동(韓山童;일월교, 또는 명교라 불리는 백련교의 교주) 밑에서 죽고, 둘째 놈은 친구 따라 주원장(朱元障) 밑에 들어가더니 진우량 그 난폭한 놈에게 잡혀서 죽었소."

“...!”

“막내놈만은 끼고 살며 밤낮으로 밖에 내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장사성(張思誠)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오. 가면 죽는 것이 전장(戰場)인데 오늘 달려갔으니 다시는 못 볼 것같아서 내 이런다오.”

장사성은 주원장과 마지막까지 패권을 다퉜던 강남의 유력한 군벌이다.

"전쟁에서 나간 군사들이 다 죽는 것은 아니랍니다."

진룡이 위로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쟁을 하려면 제 놈들이나 할 일이지... 이것 뺏고 저것 뺏고 하더니 이제는 내 아들까지 빼앗아가? 천하에 벼락 맞아 죽을 것들! 왕은 무슨 왕이고 황제는 무슨 놈의 황제야? 몽땅 도적이고 강도일 뿐이지."

진룡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노파가 실성한 듯이 하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진룡이 묵묵히 듣기만 하자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내 이 장사성 놈을 호미로 찍어 죽이고 말테다."

노파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진룡은 노파가 떠난 자리에 넋을 잃은 듯이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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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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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마지막 고비

 

 

문은 물론 창문까지 굳게 닫혀있어서 마차 안은 어둑했다.

강유와 진상파는 마차 안에 설치 된 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양산을 떠난 두 사람은 제왕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길로만 이동하여 마두집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마두집에서 개봉까지는 평지라 마땅히 몸을 숨기며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부득불 두 사람은 마두집에서 마차를 대절하여 개봉까지 온 것이다.

“시간상 곧 개봉에 도착할 거예요.”

마차의 앞쪽을 보는 위치에 앉아있는 진상파가 말했다.

그녀의 품에는 섬전초가 몸통 길이만한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다.

강유에게 사로잡힌 후 이틀 밖에 안 지났건만 섬전초는 마치 오래전부터 길들여진 것처럼 진상파를 따르고 있다.

수백 년을 산 영물이라 진상파의 남 다른 점을 알아차린 듯 했다.

“개봉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이래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수운(水運)의 중심지이기도 해요. 그 때문에 개봉의 분점은 저희 황금성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답니다.”

“개봉분점에만 무사히 진입하면 제왕성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최소한 모용준의 심복들이 허튼 짓을 시도하진 못하겠지요.”

“그렇겠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강유도 동감을 표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안탕산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제법 멀리 돌아가시게 되었군요.”

진상파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친이 맡긴 일은 완수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으니...”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사실 강유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우와의 대결 과정에서 강유 자신의 정체가 제왕성에 노출되었었다.

제왕성의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안탕산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야만 한다.

“달마독명안의 비결은 완전히 외우셨습니까?”

초조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강유는 화제를 돌렸다.

“외우기는 했는데... 소림사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제가 달마독명안을 수련해도 되는 것인지요?”

진상파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서 다른 문파의 절기를 허락 없이 익히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그리고 강유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달마독명안을 만든 인물은 소림사의 고승 고불선사다.

소림사가 자신들의 절기가 유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물며 달마독명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은 무림인인 저보다 황금성을 이끌어가야 하는 소저에게 더 필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강유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는 충동적으로 진상파에게 달마독명안을 가르쳐주었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달마독명안이 진상파를 위해 만들어진 절기인 듯이 느껴진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인간을 상대해야하는 제게 정말 유용한 재주이긴 하지만...”

진상파는 석연찮은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달마독명안이 소림사 출신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곱씹어볼수록 너무도 대단한 비술인 게 느껴져서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다.

“고불선사께서도 당신이 고심하여 만든 절기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여기고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강유가 안심을 시키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고불선사님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그분의 딸을 찾는 데 저희 황금성의 능력을 총동원하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강유가 대답할 때였다.

덜컹!

느리지만 천천히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끼이...

그 바람에 강유와 진상파가 움찔했을 뿐 아니라 잠 들어있던 섬전초도 깨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의 자기 뒤쪽의 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벽 뒤가 마부석이다.

 

<밖... 밖에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요 손님.>

 

마부석 쪽에서 전노인의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적으로 변고를 알아차린 강유는 마차 문을 조금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백여 장 쯤 앞쪽에 개봉성의 동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우마차들과 사람들이 멈춰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일단의 무사들이 진을 친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자들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마차는 내부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통과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심각한 정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관병(官兵)들은 아닌데... 어떤 자들이 관도를 막고 검문 중입니다요.”

전노인이 겁에 질려서 앞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제왕성의 인간들이다!)

강유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검문을 하고 있는 자들은 제왕성의 위사들인데 철(鐵)위사 뿐 아니라 그 윗 서열인 동(銅)위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직접 검문을 하고 있으며 길가의 조금 높은 곳에는 세 명의 동위사들이 서서 길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세 명의 동위사들중 한명은 바로 동위사대의 대주인 독두태보였다.

외총관 궁무독의 판단에 따라 은(銀)위사대 대주 백월사신은 금릉 방향을 수색 중이고 개봉쪽은 독두태보가 담당한 것이다.

이곳 동문 뿐 아니라 개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제왕성의 고수들이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 인원이 오백 명 정도인 동위사들은 개개인이 철위사대 대주였던 냉혈철심 사우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라던가?)

강유는 조금 연 문을 통해 성문쪽을 살피며 심각해졌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우에 못지않은 고수가 최소한 세 명이나 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아마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 뇌종횡(雷縱橫)일 것이다.)

강유는 두 명의 동위사를 거느린 채 눈을 부라리면서 사람들과 마차들을 노려보는 독두태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독두태보는 그 독특한 외양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상대가 동위사대 대주라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필살일초를 쓴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강유가 난감해 할 때였다.

“제왕성의 인간들인가요?”

뒤에서 진상파의 음성이 들렸다.

“제왕성 측에서도 소저를 개봉에 들여보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철위사들 뿐 아니라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가 직접 나서서 검문을 하고 있군요.”

마차의 문을 닫은 강유는 다시 진상파와 마주 앉았다.

“아슬아슬하네요.”

진상파는 아미를 조금 모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봉이 바로 목전인데...”

“개봉까지의 거리도 있지만... 사실 저를 도와줄 분이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진상파의 말에 강유는 흠칫 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의 몸에서는 백리향(百里香)이 배어있답니다.”

진상파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옅은 홍조를 띤 그녀의 두 볼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강유였다.

“백리향이라면 백 리밖에 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꽃 아닌지요?.”

“백리까지는 아니고...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십 리 밖에서도 백리향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어요.”

“그럼 소저의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수같은 게...”

“저는 유괴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갓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음식에 백리향을 섞어서 먹어야만 했어요. 덕분에 저의 몸에는 백리향이 깊이 배어있어서 어디를 가든 흔적이 남는답니다.”

진상파는 애잔한 표정이 되었다.

귀하고 부유하게 태어난 인생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철이 든 이래 진상파는 늘 독살과 유괴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저를 호위하는 분들이 백리향을 맡으며 접근하고 있겠습니다.”

“아마 거의 접근해왔을 텐데... 자칫 제왕성의 인간들에게 먼저 발견될 수도 있겠어요.”

“그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봐야겠지요.”

덜컥!

강유는 웃으며 다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음이 간다.)

진상파는 강유가 마차에서 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문이 닫히고 이제 마차 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핏줄인 나를 강하게 훈육하신 덕분인데... 어제 이후로는 강유, 저 사람에게 저절로 의지하게 되었다.)

닫힌 문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강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평안해지고 몸은 더워진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던 변화다.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 모양이구나 초아야.”

진상파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르릉!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섬전초도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처럼 골골 거렸다.

 

“올라가겠습니다.”

마차에서 나온 강유는 고개를 숙인 채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공자! 안에 계시지 않고...”

마부 전노인은 옆으로 물러앉아 강유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죽립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요.”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전노인이 건네준 죽립을 머리에 썼다. 제왕성의 무리들로부터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냉혈철심 사우를 죽인 강유의 용모파기는 이미 널리 배포되었을 것이다.

“답답해서 나오셨는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이걸 받아주십시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강유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전노인 손에 쥐어주었다.

“삯이라면 이미 과하게 주셨는데...”

전노인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

“삯을 더 드리는 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돈주머니를 챙기던 전노인은 강유의 낮지만 심각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켜야했다.

 

* * *

 

독두태보는 언덕 위에 서서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높은 이 언덕은 개봉 성문과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독두태보 뒤에는 동위사 두 명이 서서 관도의 좌측과 우측을 따로 감시하고 있었다.

(총관 말대로 진상파는 개봉으로 행로를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까지는 너무 멀어서 우리 제왕성의 이목에 걸리지 않고 갈 자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두태보는 언덕 아래를 지나 개봉의 동문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철위사들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우마차의 문을 열어서 꼼꼼하게 검문을 하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다.

(진상파가 황금성 개봉분점으로 피신할 생각이라면 오늘쯤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진상파와 동행하고 있는 소요신군의 아들 놈 역시...)

독두태보가 기필코 진상파와 강유를 포획하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였다.

진상파와 강유를 태운 마차가 마침내 철위사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 * *

 

두 명의 철위사가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로 다가왔다.

앞쪽에는 검문을 통과한 마차들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가고 있으며 좌우에는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서서 검문을 받고 있었다.

“이 마차에는 몇 명이 타고 있소?”

철위사 중 한명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은 강유와 마부를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며 물었다.

그자의 동료는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그게...”

전노인은 긴장해서 더듬거릴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강유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하겠소.”

마차로 다가간 철위사가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팅!

팔짱을 낀 자세인 강유가 손 안에 숨기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나란히 서있는 다른 마차의 말에게 은밀히 튕겼다.

퍽!

동전은 말의 엉덩이에 깊이 꽂혔다.

히히힝!

순간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고 날뛰었다.

“헉!”

“이놈의 말이 왜 갑자기...”

그 마차를 검문하던 철위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고 마부는 당황하여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두두두!

하지만 동전이 엉덩이에 깊이 박힌 탓에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말은 마차를 끌고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앞서가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기겁하며 길가로 피했다.

“잡아라!”

“저 마차가 수상하다.”

휘익! 휙!

철위사들 몇 명이 미쳐 날뛰는 말이 끄는 마차를 따라 몸을 날렸다.

언덕 위의 독두태보와 두 명의 동위사도 눈을 번뜩이며 그 마차를 주시했다.

팅! 티팅!

그 사이에 강유는 동전들을 연달아 좌우에 서있는 말들에게 튕겨 보냈다.

퍽! 퍼퍽!

강유가 날린 동전들은 여지없이 말들의 엉덩이에 깊이 박혔으며,.

히히힝! 히히힝!

두두두! 콰드드!

동전에 맞은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거나 앞으로 돌진했다.

“헉! 이게 무슨...”

“말들이 미쳐 날뛴다.”

“조심해라!”

검문을 하던 철위사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한다.

“지금입니다.”

주변의 다른 마차들이 치달리는 것을 확인한 강유가 전노인에게 짧게 말했다.

촤락! 철썩!

그 즉시 전노인은 고삐를 세차게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때렸다.

히히힝! 히힝!

두두두!

주인이 흔든 고삐에 세차게 얻어맞은 두필의 말이 맹렬히 앞으로 돌진했다.

“흑!”

그 바람에 마차 안의 진상파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 했다.

끼이!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섬전초가 깜짝 놀라며 품으로 파고 들었다.

두두두! 두두!

어느덧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를 포함한 십여 대의 마차들이 경주하듯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부 잡아라!”

“마차를 멈추게 하라.”

“저 마차들 중 하나에 진상파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휘익! 쐐액!

철위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마차들을 따라왔다.

팅! 팅!

달리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쥐고 있던 동전들을 모두 좌우로 날려 보냈다.

퍼퍽! 퍽!

그 동전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가 주변의 말과 소들의 몸뚱이로 파고들었다.

상처를 입은 말과 소들은 예외없이 미쳐 날뛰었다.

“조... 조심해라!”

“위험하다. 피해라!”

마차들을 쫓던 철위사들이 기겁했다. 다친 말과 소들이 부리는 난동에 휘말려 버린 때문이다.

두두두! 두두!

추격하려던 철위사들이 허둥대는 사이에 십여 대로 불어난 마차들은 개봉을 향해 돌진해갔다. 마치 마차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 가던 우마차와 사람들은 길가로 피했고 맨 처음에 달려간 마차를 추격하던 철위사들도 다급히 몸을 날려 관도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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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2)

 

 

(우라질...)

철선동시는 생사를 도외시한 마면혈도의 공격에 진땀을 흘렸다.

독기가 임청우의 몸속으로 퍼져나가면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었는지라 공력의 운행이 전 같을 수가 없다.

철선동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말대가리는 같이 죽기만 바랄 뿐이다. 이대로 공력을 겨룬다면 결국엔 둘 다, 아니 이 쥐새끼는 원래 죽을 놈이었으니 셋 다 죽게 된다.)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한 철선동시는 독심을 품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저 말대가리를 먼저 죽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헛!)

마면혈도는 갑자기 철선동시의 공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가 그랬던 것처럼 독기를 억누르고 있던 공력마저 풀어서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공력은 철선동시가 마면혈도보다 심후하다.

그 때문에 임청우의 모든 경맥에서 마면혈도의 공력이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 속에서는 두 절정고수의 공력이 충돌하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장은 공력에 충격을 받아 망가지기 직전이 되었으며 혈관은 팽창하고 심장은 박동을 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차디찬 서리로 뒤덮여 하얗게 변해있다.

그 서리 아래의 피부는 독기로 인해 시꺼멓게 변색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철선동시가 전력으로 공격을 하여 마면혈도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임청우의 몸을 덮고 있던 서리는 점차 줄어들고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두터운 서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철선동시가 심후한 공력으로 공격하면서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빙골산의 독기마저 마면혈도의 몸에 밀어 넣은 때문이다.

마면혈도는 이미 빙골산의 독기에 중독당한 상태였다.

헌데 더 많은 빙골산의 침습을 받게 되자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면서 공력이 점점 위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임청우의 몸속에서 벌어지던 공력의 충돌이 잦아들고 빙골산의 독기도 감퇴했다.

빙골산이 빠져나가면서 한기가 수그러들자 임청우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으...)

정신을 차렸지만 임청우는 신음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지독한 한기 때문에 입과 혀가 얼어붙은 때문이다.

정신이 되돌아오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온몸이 쇠망치에 수없이 맞아 짓이겨진 것같다.

뼈란 뼈는 다 부러지고 근육은 갈가리 찢어진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그 때문에 몸뚱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통제할 수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듯 속이 니글거리기까지 한다.

헌데 가까스로 힘을 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리에 덮인 이마에서 송알송알 땀을 쏟고 있는 마면혈도와 눈길이 부딪혔다.

(허억!)

흉측하면서도 기괴한 마면혈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접한 임청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반면 마면혈도는 뛸 듯이 기뻤다.

할 수만 있다면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얼어 죽은 시체 놈! 내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미련한 그답지 않게 머릿속으로 절묘한 계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몸에서 즉시 자신의 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우르르!

그러자 철선동시의 공력이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 마면혈도의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반격하지 않고 굳게 방비만 하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기이한 힘을 느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울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워보았지만 몸속을 누비는 기이한 힘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 힘은 살아있는 뱀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임청우의 몸속을 제멋대로 헤집고 다닌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이다.

임청우는 헛된 노력은 포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전히 혼미하고 멍한 정신을 온전히 하는 게 그것이었다.

임청우는 북두무랑에서 보았던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끝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하며 자기 몸속에 깃든 북두칠성을 확인했다.

그러자 온몸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이 점차 잦아들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귓속으로 모기가 앵앵거리는 듯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마면혈도가 눈을 껌뻑한다.

임청우는 그자의 얼굴이 정말 말 귀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입과 코 부분은 영락없이 말이다.

그런 입에서 인간의 말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른하고 권태롭게까지 느껴지는 마음이 된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말을 들은 척 만척했다.

 

<네 손목을 잡고 있는 얼어 죽은 시체같은 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마면혈도의 가느다란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와하하하하!)

임청우는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 했다. 마면혈도의 잔학성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바 있는 그였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농산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 딴에는 임청우를 설득해보려고 철선동시의 험담을 한 것이다.

그같은 수작은 임청우에게 인간이 얼마나 뻔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누가 누굴 보고 나쁜 놈이라는 건가?)

임청우의 혀끝에서 마면혈도의 양심을 찌르기 위한 말이 맴돈다.

그러다가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자의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놀랐다.

(이 말대가리 귀신은 입이 두갠가?)

마면혈도가 진짜 말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 소름이 끼친다.

불심연화지를 깨우치기 전까지는 무공을 배워본 적이 없는 임청우다.

당연히 공력을 써서 특정 대상에게만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리 없다.

임청우가 놀라고 있을 때 마면혈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만약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눈을 한번만 깜박여라. 그럼 노부는 죽어도 너는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임청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몇 권의 의서를 읽어보았기에 자기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두 가지의 치명적인 극독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으니 해독하기 전에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

그리고 마면혈도가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지는 이미 경험한 임청우였다.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겨온 마면혈도가 굳이 임청우 자신을 살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시체같은 철선동시도 후회하느니 어쩌니 하더니 지금은 자신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 있다.

임청우로서는 마면혈도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말해도 믿지 못할 터였다.

만에 하나 마면혈도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손목을 잡고 있는 철선동시가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믿을 말을 믿지.)

임청우는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마면혈도를 흘겨보았다.

말을 닮은 그자의 얼굴은 다시 봐도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헌데 마면혈도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임청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자의 눈에는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설마 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게 진심인 건가?)

임청우는 흠칫했다.

(속은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마면혈도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되지 않을 소리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도 해서 될 것과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저 흉악한 마귀의 흉악한 수법을 배워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요사스런 수법을 익혀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건 몸을 해치게 마련인데...)

임청우의 단호한 표정을 본 마면혈도는 당황했다.

(쥐새끼 정도로 생각했던 놈이 뼈마디가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군. 구슬리자면 꽤 힘이 들것 같군.)

그 사이에 철선동시의 공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어 심장이 터질 것같은 압박이 전해진다.

잠시 전력을 다해 방어한 후 마면혈도는 간절한 어조로 다시 임청우에게 말했다.

 

<노부의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은 대성하기만 한다면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절세의 신공이다. 노부는 비록 칠성(七成)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강호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되었다.>

 

마면혈도의 간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요지부동,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우협 장백승의 모습이 마치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박힌 임청우다.

무쌍층층공 어쩌고 아무리 떠든다 하더라도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마면혈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중한 공력을 허비하며 억지로 말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우르르르...

철선동시는 마면혈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임청우의 몸으로 색혈지독을 옮기기 전에 공력이 소진되어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면혈도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생각에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철선동시의 맹공격에 궁지에 몰린 마면혈도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임청우가 장백승에게 들은 것 외에는 무공이니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벽창호라는 사실도 모른 채 안간힘을 다해 말을 이어갔다.

 

<무쌍층층공은 일성(一成)을 익히게 되면 맨손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있고, 이성(二成)을 익히면 일성의 두 배가 되며, 삼성(三成)은 이성의 두 배가 되고, 사성(四成)은 삼성의 두 배가 된다. 자질과 인연이 닿아서 십이성(十二成)을 대성하게 된다면 무림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래도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어조가 사뭇 애원조다.

그래도 마음이 돌덩이 같은 임청우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임청우는 목숨마저 체념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을 떨게 만들던 한기도 이미 많이 가셨다.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서리가 덮여 얼음이 되었다.

임청우의 몸속에서 빙골산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선동시의 공력이 몸속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한기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다만 몸을 자꾸 무겁게 하는 그 무엇이 약간 불편할 따름이다. 그것도 실상은 철선동시가 그의 몸 안으로 불어넣은 색혈지독 때문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는 자신이 그처럼 애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임청우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다.

(이 어린놈은 바보 멍청이인가? 죽을 사람이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는가? )

철선동시의 공력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데 겨우 찾아냈다 싶은 마지막 수법은 사용도 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마면혈도는 억울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속으로 자기는 재수가 정말 없는 놈이라 생각하며 전음입밀로 말한다.

 

<좋다, 이놈아! 내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네놈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말대로 해야 할 것이다.>

 

말투가 거칠어지고 떨려나온다.

빙골산의 독기를 방비하지 않은 탓에 이미 한 치 두께로 얼어붙은 서리가 마면혈도의 몸을 덮고 있다.

그러나 마면혈도가 뭐라 하던 간에 임청우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잠잠히 있었다.

철선동시의 심후한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경유한 후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비유하자면 미친 들소 떼가 비좁은 골목길을 치달리며 닥치는 대로 짓밟고 뭉개버리는 형국이었다.

우둑! 우두둑!

손목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왔다가 발목으로 빠져나가는 철선동시의 공력이 경맥과 근육을 제멋대로 뒤틀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그리 큰 고통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망망하기 이를 데 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한 기억이 정신을 육신에서 분리해주고 있는 덕분이다.

임청우는 어느덧 자신의 육신이 두 악귀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남의 일처럼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몸을 잊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상태에 은연중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두 괴인은 임청우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더구나 알 생각도 없다.

단지 서로가 임청우를 이용하여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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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과연 어부 소년이 찾아와서 시선의 뒤를 이었을 것 같소?"

백남빈이 궁금해 하며 강미루에게 물었다.

"바로 아래에 계신 저분이 그분 아닐까요?"

강미루는 이백이 좌화한 바위섬의 정상 바로 아래쪽의 석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풍채가 좋은 이백과 달리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지만 역시 청수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다.

그 노인이 이백이 동정호에서 만났던 어부 소년의 나이 든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시선께서 전한다는 검법이 이것이란 말인가?"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백남빈은 의아해하며 누구에게 묻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백이 좌정한 앞쪽 바닥에는 천여 자의 글만 더 적혀 있을 뿐 검법의 이치를 담은 검보(劍譜)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眞理)는 몸에 담고 빛은 정신(精神)에 비추었으며,

움직이지 아니하여 극(極)에 이르렀도다.

하늘의 무거움은 몸으로 느끼며

땅의 너그러움을 품안에 가두었다.

지혜(智慧)에 머물러 흐려짐이 없었고

어짐(仁)을 함께 하여 치우침이 없었도다.

낯빛은 항상 부드러웠고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사자(獅子)는 담백한 뜻과 맑은 정신이 흔들리는 법 또 한 없었도다.

 

뜻이 흩어지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해(害)하고

정신이 흐려지면 근본을 잃고 마는 것인지라,

담백한 뜻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용(龍)을 누르고 범(虎)을 방비하듯 해야만 한다.

한순간 가벼우면 용은 승천하고 말 것이요.

범은 뜻을 상하게 하고 말 것이로다.

 

뜻을 저해하는 모든 것이 범이니,

범은 그 모습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용은 스스로 비롯하는 것이니 범보다 더욱 지키기 어렵도다.

독기를 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나약하게 하는 것이 능수(能手)이나

위험에 처하더라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때로 용호(龍虎)가 안팎으로 발호하여 뜻을 흩으려는 바 있으나,

그 기세가 비록 장엄한 바 있어도 모두가 허상이니,

스스로 동(動)하지 않으면 털 한 올 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울 지라도 스스로 지키어 움직이지 아니하면 절로 소멸하고 만다.

 

대저 먼저 그치고 나중에 움직임이 대도(大道)인즉,

가슴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욕망을 능히 견뎌야 한다.

정신은 참고 견딤으로 맑아지고 자라게 되며,

정신이 길러져야 대사(大事)를 이룩할 수 있으니,

참으면 참는 만큼, 견디면 견딘 만큼 정(正)은 자라는 것이다.

정(正)을 기름으로 근본은 두터워 지고 사악함과 요괴함이 절로 물러나게 된다.

 

사자(獅子)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여도 놀라지 아니하였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도 두려워한 바 없고,

사물을 대하여 마음으로 의심치 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것에 현혹됨이 없었다.

의혹을 몰아내면 자연히 원정기(元精氣)가 자라고,

원정기가 자라지 않으면 어느 새 사마(邪魔)가 자리 잡는다.

 

놀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의심치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이요

현혹되지 않으면 응(應)하지 않을 것이다.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니 사자(獅子)에게는 빠르고 느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여자의 비결(秘訣)이 이어진 후 이백의 글은 더 이상 없었다.

무엇인가 잡힐 듯 말듯 아른거림에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검법을 전한다 했는데 어디에도 검을 쓰는 비결은 보이지 않고 모호한 글만 적혀있다.

하지만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경구들이 바로 검법의 놀라운 비결이라 여겼다.

"뒷부분으로 올수록 내용이 와 닿는 듯도 하지만... 깊은 뜻은 한마디도 짐작할 수 없구나."

사자검결(獅子劍訣), 흑은 천자검결(千字劍訣)이라 이름 붙일만한 글들을 몇 번 읽어본 백남빈은 난감해졌다.

강미루는 고민하는 대신 통 채로 외우려는 듯 자꾸만 사자검결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남빈도 사자검결을 외워버리기로 작정했다.

 

***

 

그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에 없다.

백남빈은 사자검결을 앞에서 뒤로 외고 그것이 가능해지자 뒤에서 앞으로 외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자 저절로 술술 입에서 나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백남빈에 비해 강미루는 암기하는 게 백남빈하지 않은 듯 했다.

중얼중얼 외면서 한두 구절 씩 막혀서 다시 외우곤 했다.

백남빈이 비결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도와주었다.

"먼저 이만큼만 외우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다시 이만큼만 외우고... 나중에 이것들끼리만 백남빈하게 이어버리면 되지 않겠소?"

방법을 알고 나자 금방 앞에서 뒤로 줄줄 외우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이백의 유해(遺骸)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밤은 휑하니 지나가 버리고 창평곡에는 해가 한 뼘 넘게 떠 있었다.

동부의 입구는 보름달이 서쪽으로 지면서 다시 닫혀버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신묘한 기술에 의해 동부의 입구는 한달에 한 번,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저절로 열렸다가 닫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열고 닫는 장치가 있어서 입구를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과일을 따먹고 녹지의 물에 피를 풀어 마셨다.

배를 채운 후 오두막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나란히 뉘었을 때 강미루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사자검결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이 그러했다.

신경의 소모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

 

백남빈이 조사전(祖師殿)이라 이름붙인 마지막 석동의 인물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이백과 그의 전인(傳人)들이었다.

원래 바위섬은 모양이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백이 바위섬의 정상을 평평하게 다듬고 진전을 남긴 후 그의 전인 우승유(宇承悠)가 본받아 아래쪽에 자신의 좌화단(座化壇)과 심득(心得)을 남길 곳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승유의 전인 초장객(楚璋客) 이하 모든 전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바위섬은 기묘한 탑으로 변해 버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이 남긴 사자검결 외에도 사자검의 전인 십삼인의 심득(心得)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연들과 뜻이 모호한 비결들만 있을 뿐 실제로 검을 쓰는데 유용한 검보는 구경할 수 없었다.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처를 오두막에서 동부로 옮겼다.

동부에 들어와 살면서 곧 그 안의 기물(器物)들에 백남빈해졌다.

특히 맨 좌측 석실에 있는 수백 권의 책들 중 <창평곡기(蒼平谷記)>라는 책을 통해 창평곡의 모든 사정들을 알게 되었다.

창평곡기는 이백과 역대 전인들이 창평곡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팔십여 년 전부터는 기록이 끊겨 있었다.

창평곡기에 의하면 창평곡은 이백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이백은 당나라 현종이 선물로 준 연단술(鍊丹術)과 관련된 고서(古書)에서 창평곡의 존재를 알았다.

그 고서를 통해 이백이 찾아낸 창평곡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첫 번째 보물은 물론 사자검이다.

이백도 사자검의 재질이 무엇이고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이백이 옛사람이라 칭한 상고시대의 어떤 기인이 남긴 사자검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힘든 조화(造化)를 만들어낸다.

사자검은 사용하는 자의 의지(意志)를 실체(實體)로 구현(具顯)해주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때문의 사자검의 위력은 주인의 그릇과 상상력의 크기로 결정된다.

필부(匹夫)가 얻으면 그저 무겁고 단단한 쇳덩이일 뿐이지만 초인(超人)이 쓰면 신선이나 귀신도 벨 수 있을 정도다.

삼재검법 외에는 아는 무공이 없던 백남빈이 검도의 최상승경지인 검기를 단번에 뽑아낼 수 있게 된 것도 사자검의 조화였다.

사자검의 이같은 신비한 힘은 <사자검을 전한다(獅子劒傳)>라는 문파의 이름이 지어진 연유이기도 하다.

사자검전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자검 자체인 것이다.

이백은 사자검과 함께 뜻이 모호한 비결을 백여 자 얻었었다. 사자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그 비결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많은 부분이 소멸된 상태였었다.

이백은 육십여 년 간 사자검을 쓰면서 불완전한 그 비결을 갈고 닦아서 천여자로 이루어진 사자검결을 만들었다.

다만 사자검결은 실제로 검을 쓰는 검결이 아니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서 마음이 자라게 하는 양심(養心)의 비결이다.

이 사자검결로 얻을 수 있는 성취의 크기는 개인의 도량으로 결정된다.

그 때문에 이백 이후의 전인들이 사자검결을 통해 이룬 것은 제각각이었다.

 

이백이 창평곡에서 찾아낸 두 번째 보물은 바로 녹지의 물이었다.

녹지의 물은 창평곡 지하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어떤 광물질이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 물은 그냥 마실 경우 침과 섞이면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피와 섞이면 공력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줄 뿐 아니라 강인한 몸과 엄청난 치유력을 갖게 해주는 영약이 된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났던 깊은 상처가 단번에 치유된 것도 녹지의 물 덕분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영약이 되어 몸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던 것이다.

강미루도 백남빈과 함께 하체를 녹지에 담그고 있었던 터라 환골탈태에 가까운 효험을 봤었다. 백남빈의 상처가 만든 영약이 피부를 통해 흡수된 덕분이다.

피가 섞인 녹지의 물은 기사회생의 효능을 지녔다는 자부현청(紫府玄淸)이나 공청석유(空靑石乳)에 비견될만한 영약이다.

그것을 매일 식수 대신 마셨기에 백남빈과 강미루의 공력은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증진되어 있었다.

녹지의 바닥에는 백남빈이 발견한 장방형의 매끈한 석괴가 있다.

어떤 이치인지는 이백도 몰랐지만 그 석괴는 보름달의 달빛을 온전히 받으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벽쪽에 숨기고 있던 배수구를 드러낸다.

그 배수구를 통해 녹지의 물이 창평곡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동부의 입구가 열리는 것이다.

녹지 아래의 석괴가 한 달에 한 번씩 동부의 입구를 열었다 닫기도 하지만 내부에서도 입구의 개폐와 고정이 가능하다.

그 장치는 입구의 바로 안쪽에 있었다.

 

사자검과 녹지의 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창평곡에는 보물이라 할만한 것들이 여럿 더 있었다.

숲에서 열리는 자령과(紫靈果)라는 붉은 색 과일은 장복하면 대부분의 독에 내성이 생긴다.

또 풀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별모양의 열매는 근골을 튼튼하게 해주고 밤눈을 밝게 해주는 약효를 지녔다.

그 외의 각가지 열매나 과일도 세상에 나가면 영약 소리를 들을만한 보물들이었다.

창평곡에서 자라는 과일과 열매들의 약성이 그토록 뛰어난 것은 녹지의 물을 흡수하며 자라는 덕분일 것이다.

짐승들도 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청묘(雪靑猫)라는 흰 털의 야생묘(野生猫)가 있으나 영특하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청묘들이 숨어 사는 곳도 물론 창평곡기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창평곡에는 별별 신기한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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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운명을 읽는 눈

 

 

(황금성에 갇혀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곤경과 상심을 겪겠지만 오늘 밤의 이 따뜻하고 유쾌한 기억이 그때마다 큰 위안과 힘이 될 것이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의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감정이 번져 올랐다.

(강유, 저 사내가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특별한 경험...)

고개를 들며 강유를 훔쳐보려던 진상파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언제부터인지 강유는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 절벽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상파를 긴장시킨 것은 강유가 단순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유는 한쪽 무릎을 꿇어서 언제든지 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바닥에 놓여있던 검을 끌어당겨 움켜잡고 있다.

(강소협의 온몸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진상파는 숨을 멈추며 강유의 모습을 주시했다.

섬전초도 무언가 느낀 듯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강유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긴장한 진상파는 강유가 보고 있는 오른 쪽 절벽 위를 함께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상파의 이목에는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내공이 그리 심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유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으...

진상파와 달리 강유의 이목에는 무언가 절벽 위에서 사라지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산짐승이었을까?)

강유는 절벽 위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산짐승은 아니다. 방금 전까지 날 지켜보던 시선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강유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고불선사가 묵장진언을 연구하여 만든 달마독명안을 수련한 덕분에 강유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보다 몇 배 더 민감해진 강유의 감각은 방금 전까지 오른쪽 절벽 위에 누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등봉현부터 날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일 텐데... 대체 어떤 자이기에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인가? 고불선사님을 이용하고 시해한 귀면지존과 관련 있는 자일까?)

덜컥!

강유는 움켜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팽팽하던 긴장도 풀었다.

(상황이 끝났네.)

그제야 진상파도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 내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곳에 무언가 있었군요.”

진상파는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 지나가던 산짐승이었을 것입니다.”

강유는 웃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깊은 산중이니 오가는 짐승도 많겠지요.”

진상파는 강유가 자신이 걱정할까봐 둘러대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쉽게 잠들기는 틀린 것같습니다.”

“저도 잠이 다 달아나버렸네요.”

진상파는 품에 안겨 골골 거리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잠도 오지 않고 하니 한 가지 재미있는 재주를 배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강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르쳐주신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래 제게 가르쳐주실 재미있는 재주라는 게 무언가요?”

 

<달마독명안이라는 비술입니다.>

 

진상파의 물음에 강유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답했다.

전음술(傳音術)이라고도 불리는 전음입밀은 내공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에게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술이다.

(갑자기 전음술로 말하다니... 달마독명안이라는 게 남이 알면 안되는 재주인 모양이네.)

 

<맞습니다.>

 

진상파가 생각할 때 강유가 다시 전음술로 말했다.

(내 생각을 읽었다?)

진상파의 눈이 놀라 동그랗게 치떠졌다.

 

<저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상대방의 운명(運命)까지 읽을(讀) 수 있습니다.>

 

(세상에나...)

강유의 설명을 들으며 진상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 * *

 

스윽!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다.

얼굴에 섬뜩한 형상의 귀신 가면을 쓴 인물!

바로 마교의 당대 교주로 알려진 귀면지존이었다.

등봉현부터 끈질기게 강유를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귀면지존이었던 것이다.

“...!”

산봉우리에 내려선 귀면지존은 무언가 생각하며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어둠 속에 보인다.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에 피워진 모닥불의 불빛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상황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된다.)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방금 전에도 저놈은 내 존재를 확실하게 알아차렸었다.)

귀면지존은 강유가 갑자기 자신이 서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강유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마음먹고 은신한 날 탐지해낼 수 있는 인간은 철면제왕 섭장천을 포함하여 다섯 명 안팍에 불과하다. 헌데 저놈은 번번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다.)

귀면지존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인물이다. 천하를 통틀어도 자신의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철면제왕 섭장천뿐이라 확신해왔다.

당연히 강유 정도의 애송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강유는 수시로 귀면지존이 숨어있는 곳을 돌아보곤 했다.

한 두 번 반복 된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강유는 귀면지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불암을 떠난 걸 확인한 후 다시 등봉현에서 발견될 때까지 저놈의 종적을 잠깐 놓쳤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공백 동안 저놈에게 무언가 기연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계곡을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눈으로 냉혹한 살기가 번개 치듯 지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유를 잡아족쳐 마음속의 의혹을 해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귀면지존에게는 강유를 이용하여 추진중인 원대한 계획이 있다.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오랜 세월 공 들여온 노력을 무산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저놈의 주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만...)

휘익!

귀신 가면 속에서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귀면지존은 산봉우리를 날아 내려갔다.

 

* * *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제왕성의 분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제왕성 분타의 그 누구도 밤 새 잠들지 못했다.

 

“소요신군의 아들놈은 진소저와 함께 금릉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소이다.”

사우의 수하들이 자신들의 대주가 안치 된 관에 뚜껑을 고정시키는 것을 보며 궁무독이 말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동위사대 대주 독두태보가 고리같은 눈을 희번덕이며 물었다.

반면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우를 살해한 이후 금릉으로 향하는 길 어디에서도 둘의 종적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있소이다만...”

궁무독은 생각에 잠긴 백월사신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진소저 입장에서는 굳이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으로 가지 않아도 안전을 확보할 방도가 있기 때문이오.”

“개봉!”

쾅!

비로소 깨달은 독두태보가 주먹으로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의 관에 뚜껑을 닫고 있던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진소저는 금릉이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개봉의 황금성 분점으로 향할 수도 있겠소!“

독두태보가 초조한 표정이 되어 이를 부득 갈았다.

“황금성 개봉 분점의 경호능력은 금릉의 본점에 못지 않소. 일단 진소저가 개봉 분점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봐야만 하오.”

궁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저도 진소저지만 강유라는 놈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오! 십팔 년 전 비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놈이니...”

독두태보의 대머리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중년 이상의 나이인 제왕성 무사들 중 십팔 년 전의 비극을 떠올리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자는 없다.

자신들의 주모인 무후 영청공주는 천마구절기중 마검칠식에 시해 당했었다.

그리고 냉혈철심 사우 역시 그 마검칠식에 죽임을 당했다.

진상파를 제왕성으로 데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검칠식을 구사한 강유를 놓칠 수는 없다.

“강유란 놈의 추적은 노부들이 맡을 테니 사대주의 운구는 총관께서 맡아주시오.”

침묵하고 있던 백월사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 대주께서 수고해주시오.”

궁무독은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에게 포권을 했다.

“맡겨주시오!”

“수시로 연락드리겠소!”

휙! 휙!

백월사신과 독두태보도 궁무독에게 포권을 한 후 대청에서 달려 나갔다.

(십팔 년... 십팔 년만에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직속 수하들과 함께 분타를 빠져나가는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눈이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었다.

(마검칠식을 사용한 자가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이라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드디어 혈가람 패거리들에게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다.)

궁무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섭무궁(葉無窮)! 우리 제왕성의 진정한 후계자인 섭무궁공자만 찾아내면 혈가람과 마교의 세력을 제왕성에서 일거에 뽑아버릴 수 있다!)

 

궁무독은 대대로 섭씨일족을 섬겨온 가신(家臣) 집안 출신이다.

반면 혈가람등 제왕성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근래에 영입된 자들이다.

혈가람이 대표격인 신흥세력은 모용준이 섭장천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때문에 전대부터 섭씨일족을 섬겨온 충신들은 제왕성 내에서 급격히 입지를 상실하고 있다.

궁무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원래 제왕성에는 총관이 궁무독 한명이었다.

헌데 부성주인 혈가람등은 총관 자리를 둘로 늘렸으며 새로 신설된 내(內)총관 자리에 모용준의 유모 출신인 구미호리 구숙정을 앉혔다.

자연히 궁무독의 역활은 제왕성의 대외적인 업무만 담담하는 외(外)총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제왕성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궁무독도 자세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흥세력들 중에는 마교와 연줄이 닿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은 어느덧 제왕성의 요직을 차지해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제왕성이 마교에 의해 장악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궁무독이 느끼고 있는 이 절박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귀면지존에 의해 납치당한 소성주 섭무궁을 찾아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섭무궁이 제왕성으로 돌아온다면 모용준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모용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려온 혈가람 일파도 간단히 일소해버릴 수 있다.

제왕성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들에게도 철퇴를 내릴 수 있을 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섭무궁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한다.)

궁무독은 결의를 다지며 대청 안을 둘러보았다.

사우가 안치 된 관의 뚜껑을 고정시킨 철위사들이 관을 둘러싼 채 비통해하고 있다.

“네놈들...!”

궁무독은 사우의 수하들에게 준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며 궁무독을 돌아본다.

“어이없이 죽은 너희 대주를 위해 복수할 결의가 되어 있느냐?”

“하명만 하십시오 총관님!”

“기꺼이 섭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궁무독의 말에 철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결의라니 좋다. 네놈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마.”

독검마유 궁무독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 * *

 

변경(汴京)이라고도 불리는 개봉(開封)은 송(宋)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때는 해가 지기 직전인 저녁 무렵이다.

개봉의 동문(東門)으로 이어진 넓은 관도는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로 북적이고 있다.

“오늘 따라 길이 왜 이리 막히누?”

전(全)씨 성의 늙은 마부는 쓰고 있는 죽립 끝을 쳐들며 앞쪽을 살펴보았다.

개봉으로 들어가는 길은 엄청난 정체를 빚고 있었다.

개봉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나 우마차의 행렬은 순조로운데 들어가는 길만 막히고 있는 것이다.

“해 지기 전에는 성문에 닿아야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전노인은 연신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앞쪽의 상황을 살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가 지면 성문을 닫는다.

그리고 일단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떠야만 열린다.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데 일몰 이후에는 특권층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오늘 안으로 개봉에 들어가려면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유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손님들과 함께 노숙을 하게 생겼구먼.)

전노인은 혀를 차며 자신이 몰고 있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전노인의 집은 개봉에서 동북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마두집(碼頭集)이란 마을에 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두 마리의 말과 마차 한 대로 열 명이 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온 늙은 마부가 전노인이다.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전노인의 집을 찾아와 마차를 대절(貸切)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개봉으로 데려다달라면서 무려 백 냥의 거금을 내놓은 것이다.

백 냥은 전노인이 몇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다.

오늘 안으로 개봉까지 데려다달라는 주문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아는 길이기도 해서 힘껏 달린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개봉 근처에 이를 수가 있었다.

헌데 정작 개봉에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날도 저녁 무렵에는 막히긴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막힌 적은 없는데...)

전노인은 고개를 학처럼 빼며 개봉의 성문쪽을 살폈다.

그런 전노인의 시야로 전에는 보지 못한 특이한 상황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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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1)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겠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났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 된 임청우는 필사적으로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어갔다. 조금이라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임청우가 힘겹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에 박혀있는 철선동시의 팔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물위에 떠있는 조각배의 돛대처럼...

(불심연화지라는 무공이 이번에도 나를 살려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떠올렸다.

불심연화지를 수련한 덕분에 끔찍한 고열을 극복했었다.

어쩌면 불심연화지가 이 지독한 냉기에서도 자신을 살려줄지 모르는 일이다.

“네놈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린 금포염왕을 이기고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얼어 죽은 네놈의 욕심때문이다.”

뒤쪽에서 마면혈도가 분통이 터져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도 내심 후회막급이었다.

(기습으로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내 무공을 너무 과신했다. 저놈이 그런 괴상한 수법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손을 썼더라면 마면혈도가 비장의 수법을 숨기고 있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었을 철선동시였다.

마면혈도는 어쩌면 철선동시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척하여 방심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지만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이제는 일어나 땅조차 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제기랄... 제기랄...)

철선동시는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의 품속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반부의 몽선도가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마면혈도의 품에 나머지 반부의 몽선도가 있다.

그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무림에 전해지고 있었다.

평생 억눌려 지내왔던 금포염왕이란 절망적인 존재!

같은 삼괴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을 종 부리듯 하던 무비옹의 횡포!

그들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는 최후,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제 몽선도의 비밀을 풀어서 무공을 연마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작은 실수 하나로 말미암아 고금제일의 고수가 되기는커녕 곧 죽어야만 한다.

그 사실에 철선동시는 미칠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철선동시의 머릿속으로 번갯불 같은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막힌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이다.

(저 말대가리의 색혈지독(索血之毒)은 천년설삼(千年雪蔘)같은 영약이 없으면 해독할 수 없다. 그렇지만 꼭 해독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철선동시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내게는 정종 무공인 용조수 공력이 있고, 이 공력을 이용한다면 다른 놈 몸에 내 몸 속의 독을 옮겨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아직 화경(化境)에 달하지 못해 직접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머리가 나쁘거나 자질이 둔한 자가 절정의 무공을 깨우쳐 익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절정의 무공을 소유한 자는 그 외모가 어떻든 간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근골과 머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철선동시는 물론이고 비록 머리회전이 조금 늦기는 하지만 마면혈도 역시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다.

죽음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 철선동시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한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빙골산에 중독된 쥐새끼를 돌아보았다.

등에 자신의 팔이 박혀있는 임청우가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휘릭! 털썩!

“흐흐흐... 네놈은 이 나으리의 빙골산에 중독되었으니 곧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을 것이다.”

철선동시는 몸을 나무토막처럼 굴려서 임청우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임청우는 몸속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는 냉기를 몰아내보려고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겨우 입문한 불심연화지의 구결로 빙골산이란 극독을 몰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갈수록 의식이 희미해져 오는 중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주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갈까마귀가 우짖는 것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가만 둬도 죽을 지경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건가?)

불끈 오기가 치밀면서 화가 났다.

휘릭! 털썩!

철선동시는 다시 몇 바퀴 굴러서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청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떤 방법이오?”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저 마두가 죽을 때가 되자 참회를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다.

사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넙죽 대답하고만 자신이 멍청이같다.

스스스!

자신에게 화가 나 입을 벌리는데 턱이 달달 떨리고 입에서 차가운 흰 김이 나온다. 이미 빙골산의 독기가 뼛속 깊이 스며든 증거다.

철선동시는 임청우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색혈지독을 모두 옮겨버리기 전에 임청우가 죽어버린다면 고심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말짱 도로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철선동시는 듣기 싫은 음성이지만 최대한 목청을 가다듬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까지 섞어서 임청우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이 나으리는 지금 너무도 고통스럽다. 으으... 저 말대가리가 칼에다 지독한 극독을 묻혀놓았기 때문에 나도 곧 죽게 될 것이다.”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소?”

임청우가 벌벌 떨면서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큭큭큭...”

철선동시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마면혈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시시!

웃는 마면혈도의 입에서 피가 쿨럭쿨럭 쏟아지다가 이내 동결되어 버린다.

그자의 얼굴은 마치 철선동시의 다치기 전의 모습처럼 하얗게 변해있다. 서리가 얼굴을 뒤덮은 때문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임청우가 쉽게 속지 않자 철선동시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애처로운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네 녀석의 중독을 풀어주고 싶다.”

말하는 철선동시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몸도 급격히 굳어지고 있다.

색혈지독이 철선동시가 내공으로 형성한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의... 의심하지... 마라. 전... 적으로... 너를 도와주려는 거뿐이다.”

안면의 근육이 굳어지며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소리가 웅얼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의 말이 어눌해졌을 뿐 아니라 임청우 자신도 지독한 한기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유달리 강인한 몸을 타고 난 덕분에 아직까지는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고 평소의 습관과 버릇에 따라 반사적인 행동과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와 달리 임청우는 독에 저항할 수 있는 공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은 점차 굳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청우의 그런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철선동시는 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임청우의 손이나 발목,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해독약은... 내 옷... 속에 있다. 나는... 너무 고통... 스럽다. 내 옷에서... 해독약을... 꺼내는 즉시 내... 겨드랑이의... 소요혈(笑腰穴)을 눌러... 주기 바란다. 죽는... 것만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

임청우가 속아 넘어가서 겨드랑이를 누르려고 하면 철선동시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내공으로 빙골산의 독기를 억제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선동시의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숨에 깨달았다.

“교활한 놈!”

팟!

마면혈도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뒤집어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가 확 튕겨 올렸다.

“네놈 뜻대로는 안된다!”

털썩! 콱!

몸을 굽혔다가 펴는 반동으로 튀어 올랐던 마면혈도는 임청우 곁으로 떨어지며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철선동시에 의해 이용당하기 전에 먼저 임청우를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콱!

그러나 철선동시도 마면혈도와 거의 같은 순간에 임청우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빠지직! 우두둑!

두 마두는 임청우의 발목과 손목을 잡자마자 전력을 기울여 공력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지독한 한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임청우였다.

그런 그의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체는 끓는 기름에 담가진 것 같고 상체는 얼음구덩이에 던져진 것같다.

산 채로 몸이 둘로 찢어지는 것같기도 하다.

“끄으윽...”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 끔찍한 고통에 임청우는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다.

고통이 너무도 엄청난 탓에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두칠성의 힘을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용하지 않은 후로 수백 년이 지난 대안탑 칠층의 먼지 쌓인 바닥에 조각 편(片)자 비슷한 형태로 누운 세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마면혈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빙골산은 원래 해약(解藥)이 없는 지독한 독이다.

철선동시가 마치 강시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빙골산을 오랫동안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선동시가 빙골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독되지 않은 것은 어떤 특별한 묘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몸속에 빙골산의 독기가 서서히 쌓이면서 내성(耐性)이 생긴 것뿐이다.

철선동시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면혈도로서는 내공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마면혈도는 늘 내뱉던 말처럼 얼어 죽은 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억울한 노릇이다.

나쁜 짓으로 말하자면 자기 못지않게 철선동시도 했다.

더구나 나쁜 짓으로나 무공으로나 전혀 미칠 수 없는 대형(大兄) 무비옹도 있다.

무비옹은 몰라도 최소한 철선동시와는 함께 죽어야 한다.

헌데 철선동시는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을 빌어서 배출하려고 한다.

철선동시와 함께 죽자면 임청우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임청우만 죽이면 철선동시도 따라 죽게 된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빙골산에 저항하던 내공마저 풀어버렸다.

우르르!

대신 임청우를 죽이기 위해 임청우의 발목에 자리한 태계혈(太溪)에 모든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심맥을 모두 끊어 주겠다 쥐새끼야!)

어차피 죽을 목숨, 마면혈도는 물귀신처럼 한명이라도 더 물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자 철선동시도 다급해졌다.

무공에 있어서 그는 마면혈도보다 약간 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임청우가 마면혈도의 손에 죽지 않도록 보호해한다.

(저놈의 말 대가리가...)

철선동시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임청우의 몸속으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을 주입했다.

우르르!

손목에 있는 혈도인 맥문(脈門)을 통해서 철선동시의 대해와도 같은 공력이 주입되며 임청우의 내장과 심맥을 두텁게 감쌌다.

마면혈도가 주입한 내공과 철선동시의 내공이 임청우의 몸속에서 호각으로 대치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 마면혈도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임청우의 몸에 쏟아 넣었다.

덕분에 철선동시의 우세한 내공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철선동시는 공력을 임청우의 몸속에 쏟아 넣으면서 색혈지독도 함께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츠츠츠!

그러자 임청우의 하얗게 서리로 뒤덮힌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갔다.

철선동시는 흠칫하며 독기를 줄이고 공력을 더 많이 주입하여 임청우의 심맥과 오장을 보호했다.

임청우는 빙골산에 중독된 후라 색혈지독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죽이려고 독을 밀어 넣으면서 죽지 않게 공력으로 보호해주어야 하다니...)

철선동시는 기가 막힌 상황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임청우가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철선동시 자신의 기발한 계획도 말짱 헛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머리가 쭈뼜해졌다.

그와 함께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철선동시가 보인 찰나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면혈도가 직접 공력을 움직여 공격해온 것이다.

우르르!

마면혈도의 공력이 맹렬히 밀고 올라왔다.

철선동시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고서야 겨우 마면혈도의 공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타고서 말이 달리듯이 급박하게 쫓고 쫓기고, 밀고 밀리면서 치닫는 데도 깨어날 줄 몰랐다.

자신의 몸이 두 사람의 전쟁터가 되리라곤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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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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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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