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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와 천마의 비사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의 제자임에도 무공수련보다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더 많았던 고불선사는 천하를 떠돌며 전대의 고승들이 남긴 유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날도 고불선사는 천태산(天台山)에 남아있는 육조(六祖;선종의 육대 종사 혜능)의 유적을 연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쏟아지는 굳은 날씨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육조의 귀한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고불선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아악!”

헌데 빗속을 뚫고 발길을 재촉하던 고불선사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제자로서 위급한 처지의 중생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달려가 보니 산적들이 산속의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을 겁탈하려는 중이었다.

고불선사는 산적들을 혼내 쫓아 보내고 여인을 구했다.

전삼낭(全三娘)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사냥꾼의 아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었던 남편은 사냥 도중에 변을 당해 죽었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를 근처 산채의 산적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겁탈당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가을비를 맞은 탓인지 전삼낭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불제자로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불선사는 전삼낭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전삼낭을 보살피던 중 고불선사는 그만 파계를 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전삼낭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고불선사쯤 되는 고승이 그저 여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그 여자가 함정을 파서 고불선사를 유혹한 것이 아닐까?)

강유는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꿈같은 하루 밤낮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고불선사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금색계를 지켜야하는 불제자로서, 그것도 손녀뻘인 젊은 여인을 간음하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고불선사는 회한과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삼낭의 필사적인 애원에 고불선사는 자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삼낭은 부처님이 정말 계신다면 고불선사가 자신을 범한 것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삼낭으로부터는 용서받았지만 고불선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노리개를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고 떠나며 언제든 소림사로 찾아와 죄의 대가를 받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강유가 고불암에서 가져온 노리개는 예상과 달리 원래부터 고불선사의 것이었다.

 

전삼낭과 헤어져 소림사로 돌아온 고불선사는 토굴(土窟)에 스스로를 가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헌데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밀봉된 편지가 고불선사가 참회하고 있던 토굴에 은밀히 전해졌다.

봉투 안에는 고불선사가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었던 노리개와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기를 보러 와달라는 전삼낭의 편지였다.

고불선사는 토굴을 나와 한달음에 전삼낭을 인연을 맺은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전삼낭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전삼낭은 고불선사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불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삼낭과 아기뿐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자가 아기의 목에 칼을 댄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선사는 비로소 일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불선사가 전삼낭을 만난 것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귀면지존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마교의 당대 교주 귀면지존!)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 무림의 종가다.

동진(東晋) 시대에 결성 된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는 서역의 배화교(拜火敎)와 천축의 미륵(彌勒)사상을 받아들여 마침내 마교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교는 오십 여 년 전 제왕성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제왕성에 의해 뿌리가 뽑혔다고 알려진 마교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암약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마교의 교주 귀면지존은 무슨 목적으로 고불선사님을 파계시키는 함정을 판 것일까?)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불참회기를 읽었다.

 

전삼낭 모녀를 인질로 잡은 귀면지존은 몇 장의 종이를 고불선사에게 건네주며 해독(解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종이들은 원통형의 물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탁본(拓本)이었다.

노납은 탁본의 문양들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귀면지존은 그 고대 범어를 해독하기 위해 옛날 문자에 박학(博學)한 고불선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비록 음모에 빠져서 관계를 맺은 결과이긴 하지만 고불선사는 전삼낭이 낳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면지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탁본에 새겨진 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것인 탓에 고불선사로서도 해독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귀면지존은 고불선사는 증표로 노리개를 요구했고 그것을 가져오는 자에게 탁본의 해독본(解讀本)을 건네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노리개가 고불선사께서 귀면지존에게 건네준 증표라는 건데...)

강유는 탁자에 내려놓은 노리개를 만져보며 검미를 모았다.

(이게 어떻게 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또 아버지는 어떤 경로로 고불선사께서 탁본을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풀릴 길 없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설마!)

어느 순간 강유의 눈이 부릅뗘졌다.

(아버지도 귀면지존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대신 보내 탁본의 해독본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강유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귀면지존의 마수에 빠져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는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귀면지존이 고불선사님을 함정에 빠트려가면서까지 해독하라고 강요한 탁본의 내용은 무엇일까?)

강유는 타들어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고불참회기를 집어들었다.

(전삼낭으로 하여금 고불선사님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걸 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강유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 맙소사!)

강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불참회기를 넘겼다.

 

<노납은 십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탁본의 내용을 해독할 수가 있었는 바, 그 내용과 실체는 실로 놀라웠다. 귀면지존이 노납에게 맡긴 탁본은 바로 달마묵장에서 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불참회기의 내용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달마대사의 고사를 굳이 수기에 적어놓으신 이유가 있었구나.”

강유는 고불참회기가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견문이 일천한 강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달마묵장은 무림에 전해지는 가장 귀한 보물들인 무림칠보(武林七寶)의 으뜸이다.

달마대사가 달마묵장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힘을 얻으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고불선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음모는 바로 그 달마묵장으로 인해 벌어졌던 것이다.

(달마묵장이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무림은 다시 한 번 마교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기는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고불선사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 끝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탁본에는 두 가지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비결은 삼백육십오 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墨掌眞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글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에는 그러나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문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정수 중의 정수가 묵장진언인 것이다.

묵장진언을 이루고 있는 삼백육십오 개의 문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무공과 술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묵장진언에서 어떤 힘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소질과 기연에 달린 것이다.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긴 두 번째 비결은 아주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두 자로 이루어진 그 비결에는 묵장진언에 못지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쌍혜합벽(雙鞋合壁), 묵장전지(墨掌展指), 천마심현(天魔心現)>

 

이것이 달마묵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결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한 쌍의 신발이 합쳐지면(雙鞋合壁)

검은 손바닥이 손가락을 펼 것이며(墨掌展指)

천마의 심장이 나타날 것이다(天魔心現)

 

한 쌍의 신발이라면 달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가죽신, 달마혜(達磨鞋)일 것이다.

달마는 가죽신 중 한 짝은 자신의 관 속에 남겼고 다른 한 짝은 지팡이에 매단 채 서쪽으로 가져갔었다.

달마가 한 쌍의 신발을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비결에 포함되어 있는 천마의 심장, 천마심(天魔心)이란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무림칠보의 서열이위(序列二位)이기도 한 천마심은 마교의 중흥조(中興祖)인 천마조종(天魔祖宗)의 심장, 정확히는 그의 내단(內丹)이다.

 

보통 천마(天魔)라 불리는 천마조종은 고금제일인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마교의 제칠대 교주였던 천마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마교는 오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패권을 다퉜던 막강한 세력이다.

하지만 마교에 전해지는 것은 천마의 진정한 능력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천마에게 불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달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의 나이가 달마보다 일갑자(一甲子;60)쯤 많기는 했지만 두 절대고수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쳐져 있었다.

마도와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 간의 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천마의 패배였다.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마는 달마와의 결투에서 지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천마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렸으며 그의 모든 힘과 저주가 천마심으로 남았다고 한다.

무림에는 천마심을 얻는다면 제이(第二)의 천마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달마묵장은 달마의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는 보물일 뿐 아니라 천마의 저주, 천마심을 봉인하고 있는 법기(法器)인 것이다.

달마묵장은 무엇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하다.

그 달마묵장이 손가락을 펴서 천마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달마의 가죽신, 달마혜가 다시 합쳐지는 게 그것이다.

 

고불선사는 십여 년 만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후 오 년 동안 삼백육십오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을 연구했다.

물론 귀면지존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에서 어떤 무공비결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자질과 지식이 무공과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을 오 년 간 연구한 결과 무공 대신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만들어냈다.

 

-달마독명안(達磨讀命眼)

 

바로 이것이다.

달마독명안은 일종의 관법(灌法;진리를 살피는 법)이다.

이것을 온전히 수련해 내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흘러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달마독명안에 대한 설명을 읽은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달마독명안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무서운 신통력일 것이다. 불문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과 흡사한...)

육신통은 인간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여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것을 궤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달마독명안은 바로 이 육신통과 여러모로 통하는 능력이다.

(묵장진언을 불과 오 년 간 연구하여 육신통에 버금가는 달마독명안을 만들어내신 걸 보면 고불선사님도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강유는 새삼 고불선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적어놓은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즉 두 가지 비결을 외워 기억한 후 반드시 고불참회기를 태워 없애야할 것이다.>

 

고불참회기는 고불선사가 남긴 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염치없지만 시주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전삼낭과 그녀의 딸을 귀면지존의 마수에서 구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면 그 은혜를 삼생(三生)에 걸쳐서라도 갚을 것이다.>

 

(스님의 근심하신 바를 기억해두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강유는 고불참회기와 노리개를 향해 합장을 했다.

그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삼낭 모녀를 찾아내어 보살펴주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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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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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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