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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미녀의 몸을 건 비무

 

 

 

희야가 나온 갱도는 아래쪽에 있는 화독문으로 길이 나있었다. 철광을 캐서 나르는 길이었다.

희야는 배후와 야산 위쪽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묵한 곳으로 옮겨갔다.

육연부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별도 잘 보였고 전망도 좋았다.

적들은 당장 희야를 공격할 뜻이 없는 듯 했다. 역시 곽범과 양설을 기다리는 것이다.

축릉사 하나가 말했다.

"흑귀면탈의 말은 뭣하나 맞는 게 없군. 칠접산에 중독되어 나뒹굴거라더니 멀쩡하기만 하니.”

독을 쓴 자들이 희야 등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희야는 저들이 기다리는 것이 곽범과 낭낭뿐만 아니라 육연부 여자들이 음약에 중독되어 발광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희야와 단아 등은 잘 견디고 있었다.

육연부에서 성에 대해서 솔직하고 소탈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도를 하면서 하나의 마음을 붙잡고 다른 마음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법을 익혀왔던 덕분에 음약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와 같은 상태다.

언제 시위가 터지거나 손아귀를 벗어날지 몰랐다.

희야는 업고 있던 단아를 내려놓았다.

부상자들을 뒤로 모으고 싸울 수 있는 상태인 전옥과 두 계집애가 희야 뒤에 섰다.

척살객들은 양소의 명에 따라 희야 앞에서 횡진을 쳤다.

축릉사가 말했다.

"밤길 걷는 계집이 간음을 꿈꾸지 않을 리 없는데 얼굴 없는 사내들을 만났으면 얼굴만 가리면 꿈을 이루지 않겠는가? 우리는 너희 계집들의 목숨을 취할 생각이 없으니 치마들어 얼굴 가리고 죽을 자리를 면하는 게 좋을 거야.”

다른 축릉사가 말했다.

"여자의 부끄러움은 얼굴에 있지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지. 얼굴을 가렸으니 이후에도 알아볼 사람이 없는데 늘 가린 치마 밑이야 부끄러울 일이 있나?”

은근한 말로 시작하는 노골적 유혹이었다.

말을 섞으면 오히려 말려들게 된다.

저런 말들이 계속되면 겨우 버티고 있는 아이들이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희야는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도 공력을 과도하게 쓰면 평정을 잃게 될 위험이 있었다.

"칼 든 여자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고 여럿이서 음탕한 소리만 늘어놓는다면 사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내가 아닌 짐승에게 희롱 당한다면 짐승이 수치스러우냐 희롱당한 여자가 수치스러우냐? 여자는 경멸할 뿐 수치스러워 하지는 않는다.”

희야가 냉오하게 말했다.

축릉사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가 등석자의 궤변을 여자 입에서 듣게 되는군. 말은 그래도 검으로 너를 꺾어야 사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를 꺾으면 기꺼이 몸을 바치겠다는 말도 된다는 뜻이지 않은가?”

희야가 말했다.

"나는 약한 여자인데 천하에 나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많겠나? 나는 단지 그대들이 사내인가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상대가 사내라서 몸을 허락하는 거라면 네 처와 어미는 얼마나 많은 사내에게 몸을 허락하였느냐?”

원래부터 말이 왔다 갔다하는 경향이 있는 희야는 양설의 지도에 따라 명가의 궤변을 익혀오고 있었다.

따라서 희야는 옳다고 했다가도 그르다고 하고, 그 반대로 말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고 이치를 만들어 붙인다.

사업과 거래에서는 쓸 수 없지만 싸울 때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축릉사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내 처와 노모는 밤 걸음을 하지 않지. 종을 거느리지 않고는 바깥출입도 않는다.”

"너 같은 자가 사내라면 네 집 담장을 넘고 네 처와 어미의 치마를 걷는 사내도 있겠지.”

희야가 차갑게 웃으며 축릉사를 욕했다.

“네 아비가 네 아비고 네 자식이 네 자식인 줄은 치마 들어 얼굴 덮었던 네 어미와 네 처가 아니면 누가 알까? 네 집 담장 안의 노복이 너와 닮고 어느 종놈이 네 자식과 닮지는 않았더냐?”

축릉사도 기본적으로는 유교를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집착과 처첩의 정절에 대한 강요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과도 같았다.

마침내 축릉사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방자한 년.”

희야는 처음과 같은 어조로 욕을 이어갔다.

"두 손이 있으면서 칼도 뽑지 못하고 혀끝만 놀리는 건 손 없어서 짓기만 하는 개보다 못한 자가 아니냐? 근본이 있다면 어찌 사람이 개보다 못하겠는가? 너는 네 아비를 종으로 부려먹은 놈이 틀림없구나.”

친아비를 종으로 부려먹었다는 것은 어미가 종과 사통하여 낳았다는 말이었다.

이에 더 나아가면 종놈의 자식을 적자로 키우고 자기 자식을 서자 종놈으로 키우는 놈도 나온다.

희야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도 검을 뽑지 않는 자라면 벗은 여자 앞에서도 다가설 용기가 없을 것이다.”

"네 년의 입을 찢고 주리를 틀어서 보마.”

축릉사가 이를 갈았다.

그자는 소매 속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지고 날카로운 갈고리 두개를 꺼내들었다. 단검보다는 길어 두 자 가량 되었고 찌르거나 걸거나 베는 데 쓸 수 있는 무기였다.

희야는 단공36검법의 첫번째 초식인 만천과해를 준비했다.

단공36검법은 수원의 아버지가 만든 것으로 모든 초식이 병법과 통해있어 단순한 초식 이상의 위력을 발하는 절기다.

근처로 희야와 양소를 나누어 수색하고 쫓던 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희야와 양소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곽범과 양설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미녀를 보자! 하는 소리와 맛나겠다! 는 등 음탕한 소리들도 나왔다.

신분이 낮은 자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고수들이 아래에서 희야와 미녀들을 올려다보면서 노는 형세가 되었다.

"음약이 약했던가 보군. 누가 다른 음약 있으면 좀 더 써보는 게 어떻겠소?”

희롱하는 소리도 나왔다.

희야는 단아를 묶느라 이미 찢어진 겉옷을 조금 더 찢어서 면사 밑으로 눈을 가리며 축릉사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 눈을 가렸으니 사내라면 10초 안에 나를 제압할 수 있을 테지. 10초 안에 제압할 수 없다면 스스로 모자람을 알고 물러나라.”

"응당 사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희야의 말에 찬성하는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상황은 미녀가 몸을 걸고 비무 하는 것과 비슷했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고 미녀라면 눈도 까뒤집히는 강호인들이 이 상황을 마다할리가 없었다.

누가 다시 소리쳤다.

"어서 싸워라! 누가 이기든 결과를 보고 싶다.”

희야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면사를 걷었다.

어차피 패하여 죽게 되면 다 드러날 얼굴이었다. 면사로 가려도 사내들의 음심은 끊어내지 못했다.

강호의 여검객 하나로 위기 속에서 검으로 싸우다가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것도 괜찮았다.

흰 천으로 눈을 가렸지만 그 아래 위로는 흰 천보다 더 희고 빛나는 백옥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비녀를 뒤에 받친 작은 귀바퀴에서 이어진 가녀린 턱선이 붉은 입술을 받치고, 오똑한 콧날이 좌우 얼굴의 정기를 모아 아름다움을 비추었다.

연한 분홍빛 두 볼은 입술을 매달았다.

적들이 희야의 미모에 잠시 말을 잃었다.

쌍검을 드리우고 단공36검법의 춤추는 듯한 자세를 취하니 눈 가리고 하강한 선녀 같았다.

누가 욕을 했다.

"육연은 저런 미녀가 열도 넘는다는 거지!”

희야가 당당하게 외쳤다.

"덤벼라.”

축릉자는 조롱당하고 분노하였지만 눈을 가리고 서있는 미녀에게 칼을 휘두를 마음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리칼을 거두고 물러났다.

"내가 졌다. 눈 가린 여자와 싸워 이긴들 내가 사내라 할 수는 없을 터.”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도전하지. 내 눈을 가리고 도전하지.”

음심이 동해서 주체하지 못하는 자들이 소리쳤다.

눈 가리개와 가슴가리개를 베어라는 말과 치마를 베서 다리를 보자는 소리가 연이었다.

희야는 자기가 푸줏간의 고기와 다름없는 신세라는 것을 알고 시선을 견뎌야 했다.

"말만 많은 것들.”

그저 나직하게 욕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육연부의 감독 희! 누가 나와 검을 겨루겠느냐?”

희야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음성과 태도에 모두 당당한 기상이 서려있었다.

아쉬운 듯이 상대할 수 없다고 물러나버리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말했다.

"여걸이군. 오늘 죽어도 이름을 크게 남기겠어.”

적이지만 희야에게 감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는 희야의 미모에 현혹되어 광기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장미원 계집들 보다 더 낫다는 소리며 온갖 평과 추잡한 소리가 이어졌다.

윗쪽에서 단아를 비롯한 계집애들이 눈물을 흘렸다.

양소가 그들에게 말했다.

"경동하지 마시오. 큰아가씨께서 시간을 끌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변고를 만들지 않아야하오. 육연대인은 지금도 달려오고 있을 것이오.”

전옥이 고개를 저었다.

"감독님은 조금도 쉬지 못했어요. 공력도 많이 써서 독을 누르고 있기도 힘들어요. 저러다가 정신을 놓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에요.”

전옥이 단아를 보자 단아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면서 말했다.

"가! 가서 방법이 없을 때는 감독님을 깨끗하게 보내드려.”

전옥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섰다.

“육연부에는 미녀호걸이 아닌 이가 없구나.”

술법도 깨어지고 내공도 잃어버린 양소는 안타까워서 탄식만 했다.

"저 무리들은 장차 자기들에게 닥칠 죄과를 모르겠지. 이들 하나라도 잃는다면 육연이 삼족을 멸하고도 남을 것을.”

아래쪽에서는 누군가 검으로 희야와 맞서기 시작했다.

전옥이 내려가자 시선이 분산되고 소란스러워졌지만 시작된 싸움이 그치진 않았다.

희야의 검법은 병법의 묘리를 갖추었다.

초식이 절묘하여 내공을 동원하지 않고 초식으로만 맞선다면 절세고수라 할지라도 쉽게 상대하지 못한다.

도전하고 나선 자는 주위의 눈이 있으니 눈 가린 미녀를 내공으로 찍어 내누르는 방법을 쓰지 못했다.

때로는 검이 흔들리고 때로는 몸이 움직이는 희야의 검법 앞에 10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렸다.

도전했던 자는 처음에는 약하게 공격했다.

그러다가 희야가 눈을 가리고도 전혀 불편 없는 것을 보고 제대로 공격하다.

그랬음에도 그자는 희야의 검법을 깨뜨리지 못했다.

걷어내고 끌어들이며 파고들어 흐트리는 매 초수의 절묘함이 보는 이들을 감탄시켰다.

칭찬소리와 함께 희야를 욕심내는 자들의 욕심은 더 높아졌다.

이 자리에서 희야를 탐하고 말게 아니라 굴복시켜 데려가서 첩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희야의 검술이 대단한 줄 알자 도전할 고수들이 순서를 정했다.

하지만 희야는 내리 일곱 번 모두 눈을 가린 채 10초를 버텼고 도전자들이 부끄러워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다른 도전자들 때문에 억지를 부리거나 분풀이하지도 못했다.

희야는 독을 누르는 것이 한계에 달해서 입도 열지 못하는 상태였다.

도전자가 나서면 조용히 검법을 펼쳐 버텼지만 몸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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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미녀들, 깨끗함을 남기기 위해 자결을 결심하다.

 

 

 

화독문은 하호성에서 남쪽으로 170리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일대에 넓은 농토를 소유했으며 철을 녹이고 쇠를 치는 대장간도 하던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무공을 얻어 붉게 녹은 쇳물을 손으로 치면서 단련하는 독장을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

그들의 장원이 있는 산에는 철을 캐내며 생긴 갱도가 많았다.

산의 뒷편에는 강이 접해서 생긴 갈대밭이 있다.

 

귀곡수재 양소는 추헌부 척살객 일곱 명과 함께 갈대밭에 숨어 있었다.

육연부의 여자들과 잠시 합류했으나 이내 적들의 공격에 의해 분리되어 이 상황에 몰렸다.

양소는 한 지역을 멀리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천안(天眼)과 공곡전성이라는 술법을 지녔다.

그 재주로 적들의 이목을 숨기고 피해왔지만 어느덧 한계에 이르렀다.

자기가 중상을 입으면서 탈출시킨 김혁이 육연부에 무사히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으면 양소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도 김혁을 보냈을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 육연부에 상황을 알리러 갈 사람이 적들에게도 필요했다.

양소는 유언을 준비했다.

"날이 새기 전에 육연을 만나면 너희는 산다. 나를 두고 산으로 가서 육연부의 여자들과 합류해라. 어차피 육연이 오더라도 합류하지 못하면 죽는다.”

부하들이 거부했다.

"각하를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양소가 한숨을 쉬었다.

"술법을 다했으니 나는 곧 죽는다.”

그때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행관 각하, 우리가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내공으로 말을 전하는 전음이었다.

척살객들이 긴장하며 경계했다.

양소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며 힘을 짜내 그 방향으로 전음을 보냈다.

"육연부의 큰 아가씨요?”

"셋째이지만 여기서는 그렇습니다. 저는 아까 뵈었던 육연부의 감독입니다.”

양소는 쉽사리 의심을 풀지 못했다.

적들 중에는 요사한 술법을 쓰는 자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양소가 다시 물었다.

"감독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우리를 어떻게 찾았고?”

"저에게는 우리 나으리께 전수받은 작은 재주가 있어 적을 먼저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여 이곳까지 들키지 않고 왔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희야가 그들이 은신한 진흙 구덩이 앞에 나타났다.

양소는 그 수법이 전날 곽범이 자기를 찾아낸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

 

척살객들 중 하나가 양소를 엎고 여섯 명이 희야의 뒤를 따랐다.

희야는 어둠 속에서 적들과 함정을 피해 천천히 움직였다.

갈대밭에는 크고 작은 뱀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희야는 뱀의 기척을 미리 알고 뱀이 없는 곳으로만 움직였다.

놀란 양소가 전음으로 물었다.

"감독 아가씨는 뱀의 소리도 미리 들을 수 있소?”

". 듣고자 하는 소리는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재주가 없었더라면 저희는 벌써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쉽게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 재주가 없습니다.”

 

***

 

희야는 방향을 수도 없이 바꾸며 나아가 마침내 갈대밭을 벗어나 야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야산은 경계가 더욱 삼엄했다.

희야는 성동격서의 방법으로 적을 다른 곳으로 보낸 후에 돌파하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철 냄새가 나는 동굴에 이르렀다.

하지만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움직여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틈의 작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광산 갱도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물길이었다.

일백 보 정도를 기어가자 넓은 동굴이 나왔다.

피 냄새와 분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육연부의 여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네 명이 다쳤으며 세 명이 그들을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친 계집애들 중에는 단아도 있었다.

"네 말대로 집행관님을 모시고 왔다. 집행관님도 중상이시구나.”

희야가 단아에게 말하며 다친 애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었다.

단아가 누운 채 인사한 후 말했다.

"감독님, 장영의 말을 듣고 생각하니 적들 속에 광대산(狂大山)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옮겨도 계속 따라잡히는 건 술법으로 저희를 찾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장영이 정신을 잃기 전에 했던 말이었다.

양소가 말했다.

"광대산이라면 그럴 수 있소. 그들도 무공보다는 술법이 많은 자들이니. 아가씨들 부상은 어떠하오?”

희야가 울컥하며 말했다.

"좋지 않습니다.”

양소에게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가지고 있던 영단마저 다 소모했다.

희야가 양소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다른 은신처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이곳도 발각되기 전에 움직이지 않으면 발이 묶입니다.”

희야는 필사적이었다.

계집애들의 목숨이 자신의 어깨위에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이안신통으로 숨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양소가 단아를 보살피는 전옥에게 물었다.

"아가씨들은 어떤 독에 당했소?”

전옥이 고저가 전혀 없는 음성으로 냉담하게 대답했다.

"부끄러운 독이라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저희와 거리를 두십시오.”

사정을 짐작한 양소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강호의 사마들은 언제나 교활하니.”

희야가 눈을 떴다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여기도 들켰다. 숨을 자리는 가면서 찾아야겠구나. 여기는 좀 오래 갈 줄 알았더니.”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이다.

희야와 다치지 않은 셋이 다친 넷을 등에 엎었다.

양소는 척살객과 육연부가 합류하여 인원이 16명이나 되었으니 운신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살 수 있는 방법은 함께 모여서 육연과 구양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우리는 척살객으로 강호에 몸을 던진 순간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 위급하면 나를 버리고 저들을 구하거라. 악인을 추살하는 것도 의로운 것이고 위험에 처한 여자와 어린아이를 구하고 죽는 것 또한 우리가 추구하던 협이 아니냐.”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각하.”

척살객들이 전음으로 양소에게 대답했다.

 

희야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줄을 일행 모두가 잡도록 했다. 허리띠를 이어서 만든 줄이 없다면 빛 한 점 없는 동굴속에서 희야를 따라가지 못한다.

피신함에 있어서 왔던 곳으로 직접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희야는 동굴의 넓은 쪽으로 나아가며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옥쇄하리라 결심했다.

막힌 곳으로 들어가 입구를 지키며 결사항전 하다가 버틸 수 없으면 자결하여 맑음을 지킬 것이다.

희야는 전옥에게 몰래 지시했다.

"내가 만약 자결하면 너는 다친 애들을 베고 그들이 더럽혀지지 않게 해주어라.”

", 감독님.”

대답하며 전옥이 눈물을 흘렸다.

전옥이 엎고 있는 장영은 중상으로 의식조차 없었다.

희야의 등에서 단아가 전음으로 물었다.

"감독님, 우리와 같이 온 새들이 한 마리도 남지 않았는가요?”

"다 죽거나 잡혔을 것이다. 누가 빠져나가 상황을 알렸더라면 나으리께서 벌써 오셨겠지.”

"사로잡혀 있는 새가 있다면 감독님이 찾아서 탈출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희야는 그 말에 힘이 났다.

"찾아보마.”

단아가 말했다.

"새를 찾으면 우리를 두고 척살객들과 감독님만 빠져 나가세요. 새에게 나으리와 낭낭이 오지 말라고 전하도록 해요. 지금 여기는 용담호혈이에요. 우리가 아니라 나으리를 잡으려는 함정이라서 아직 우리를 살려두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아가 담담히 말했다.

"함정에 들지만 않으면 나으리와 낭낭께서 천천히 우리 복수를 해주시겠지요. 저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무공이 우리보다 높으니 감독님이 새한테 갈 때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어차피 저분들이나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요.”

희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으리와 낭낭께선 오지 말라고 해도 오셔. 절대로 우릴 두고 물러나지 않아.”

계집애 하나가 모두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우리 여기서 죽으면 전부 처녀귀신이네. 처녀귀신 돼서 나쁜 놈들 다 죽여버리자.”

"그런 소리말고 마음에 평정이나 유지해. 무슨 추한 꼴 보이려고.”

희야가 듣고 꾸짖었다.

 

***

 

동굴의 갈림길은 위로 향하는 것도 있고 아래로 향하는 것도 있으며 양쪽으로 벌어진 곳도 있다.

두 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좁은 갱도는 물이 흘러 바위가 미끄러운 데도 있고, 깨진 암석이 칼날처럼 돌출된 곳들이 있었다.

희야는 그런 위험한 곳만 골라서 걸었다.

코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희야의 이안신통만이 지형을 읽게 해주었다.

희야가 끄는 줄을 잡고 일행은 서로의 보폭을 감지하며 나아갔다.

이렇게 하면 추적자들은 동굴속의 위험을 쉽게 간파하지 못해 속도를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야는 점점 좁혀 오는 포위망을 느꼈다.

빠져 나갈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희야는 여러 길 중에서 갱도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잡았다.

이제 끝이 가깝다.

적이 막고 있는 곳이지만 희야는 그들을 뚫고 나갈 작정이었다.

죽게 된다면 수원과 동진, 그리고 양설과 곽범이 시체를 찾아 거두기가 용이한 곳이 낫다.

갱도의 출구로 가면서 희야는 옷을 베어 등에 엎은 단아를 단단히 몸에 묶었다.

그 기척을 알고 바로 뒤에 따르는 전옥이 따라했고 이는 뒤로 이어졌다.

희야는 쌍검을 나누어 쥐고 갱도를 나섰다.

 

갱도 밖은 여전한 어둠 속에 흰옷을 입은 서생 차림의 남자들이 서있었다.

양소가 탄식하고 말했다.

"축릉사(築陵社), 무덤을 만드는 자들까지 왔군. 육연부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손을 잡았단 말인가?”

단아가 물었다.

"각하, 축릉사가 무엇인가요?”

"고대 유교의 이단자들이오. 무덤을 만들어주고 도굴하며 사는 자들인데, 제왕과 부호, 강호의 절대자들 무덤도 저들이 만드오.”

단아는 의아해했다.

"도굴 될 걸 알면서도 제왕들이 축릉사에게 무덤을 만들게 하는가요?”

"제왕들은 알 수 없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 저들은 슬그머니 끼어들어가오. 무덤을 완공하고 비밀을 감추기 위해 모두 죽여도 저들은 빠져나갈 수 있소.”

양소가 힘겹게 대답했다.

저들은 무공도 괴이하고 술법과 기관에도 능하오. 세상의 절대자들을 상대하니 일반 강호인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인데 저들이 여기서 육연부를 잡을 덫을 놓은 모양이오.”

흰옷을 입고 유생건을 쓴 축릉사들 중 한 명이 오만하게 말했다.

"집행관 양소 아니시오? 삼존청은 우리 일에 간섭하지 않는데 왜 끼어들었소?”

양소가 힘을 모아서 대답했다.

"삼존청이 축릉사를 내버려둔 이유는 강호의 살겁을 일으키거나 도리를 무너뜨리지 않았기 때문이오. 귀하들은 왜 귀하들의 일이 아닌 음모에 끼어들어 삼존청에 맞서려하시오?”

축릉사가 말했다.

"왕을 묻는 일이 우리 일이지. 우리는 염왕(閻王) 육연을 묻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소. 집행관은 여기가 무덤 속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소?”

곽범이 목장에서 염왕현신을 사용한 이후 강호에서는 염왕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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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밤에 찾아온 손님

 

 

 

6월 중순이 되었을 때였다.

곽범은 희야와 단아에게 화독문을 유명곡과 같은 방식으로 멸문시키라고 명령했다.

은희, 지우, 미연만 동진에게 남겨 놓은 채 나머지 계집애들을 모두 데리고 가게 했다.

희야의 무공은 유명곡을 칠 때 수원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단아는 용병과 지략에 능하다.

그 둘이 힘을 합치고 계집애들 여섯이 도우면 화독문을 무리없이 응징할 수 있을 것이다.

 

희야 일행이 떠난 밤이었다.

곽범의 집인 육연별부의 대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육연대인! 육연대인!”

처음 듣는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렸다.

육연부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한 밤 중에 누가 문을 두드리는 일이 발생했다.

수원은 한 달음에 곽범과 양설의 침실로 달려갔다.

동진은 벌써 검을 들고 나와 있으며 은희와 지우, 미연도 놀라서 앞마당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신가요?”

지우가 대문으로 다가가며 소리쳐 물었다.

"추헌부 집행관이신 양소 어르신의 수하 김혁입니다. 급히 육연대인을 뵙고자 왔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삼존청 추헌부의 척살객!)

동진과 계집애들은 놀라고 긴장했다.

"여기는 우리 나으리께서 손님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용무이신지요?”

지우는 경계하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대나무 잎 같이 생긴 방패를 든 청년이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서있었다. 차림새가 추혼부의 척살객이었다.

김혁이라 자신을 소개한 척살객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육연대인, 저희 집행관 나으리를 구해주십시오. 집행관께서 육연부의 아가씨들을 보호하려다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간신히 소인만 명을 받고 탈출하여 왔습니다.”

"모셔라!”

양설의 음성이 건물쪽에서 들렸다.

척살객 김혁은 기운을 다한 듯 일어서지 못했다.

미연과 지우가 달려가 부축하여 응접실로 데려갔다.

곽범과 양설은 옷을 챙겨 입은 후였다.

곽범은 김혁의 손을 잡고 요상대법을 써서 위중한 부위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은희와 지우 등은 급하게 달려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어떻게 된 거요?”

곽범은 응급처지를 해준 후 물었다.

귀댁의 아가씨들께서 함정에 빠지셨습니다.”

김혁이 기진한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그걸 안 집행관께서 돕기 위해 저희와 함께 화독문으로 갔지만 오히려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양설이 곽범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애들이 아직 괜찮을까요?”

김혁이 곽범 대신 대답했다.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친 아가씨들이 있었습니다.”

"!”

동진이 이를 악물었다.

"화독문으로 가면 되오?”

곽범이 김혁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집행관께서 전하시길, 함정은 육연대인을 잡기위한 게 분명하지만 알리지 않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적들은 추헌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김혁이 면목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분을 찻집으로 모셔서 쉬게 해드려라.”

양설이 동진에게 말한 후 곽범에게 물었다.

"수원만 데리고 우리 두 사람이 가야겠지요?”

곽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원에게 명령했다.

"새들을 깨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라.”

수원이 정원의 새장으로 달려갔다.

은희와 지우가 김혁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갔다.

미연은 마차방으로 가서 마부를 깨워 마차를 준비시켰다.

은희와 지우가 김혁을 마차에 태우고 소리쳤다.

"낭낭! 저희도 데려가주세요!”

수원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양설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같이 가자. 동진이 그동안 집을 돌봐라. 너희들은 내 가마를 가져와라.”

양설의 가마는 집에 있었다.

은희 등이 달려가서 끌고 왔다.

양설은 곽범과 가마 안에 들어가고 수원과 은희는 가마의 앞쪽을, 미연과 지우는 뒤쪽을 나누어 잡았다.

양설의 가마가 출발하자 동진은 기관을 발동시켜 집을 폐쇄했다.

그런 후 김혁을 태운 마차를 타고 찻집으로 향했다.

 

성안의 여러 곳에서 곽범의 새들이 요란하게 날아올랐다.

곽범은 숨결의 용을 이용하여 가마를 떠받쳤다.

덕분에 가벼워진 가마를 든 수원 등은 힘을 다해 경신술을 펼쳤다.

가마는 어둠을 가르고 남쪽으로 유성처럼 달려갔다.

화독문을 치러 간 희야와 단아에게도 앵무새 여섯 마리가 따라갔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위급한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양설은 희야 일행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몇 명이 다쳤다고 하니 자기의 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모두 양설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화독문은 화독장이라는 독을 쓰는 장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고 사람 숫자도 적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장문인도 희야의 손에서 10초를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 사실이 화독문을 경시하게 했고, 적들로 하여금 함정을 파게 만들었다.

양설은 육연부가 강호에 대해서 지나치게 적대감을 드러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곽범을 두려워해서 숨죽이는 자들도 있지만 힘을 합해 함정을 파는 자도 나오는 게 당연했다.

함정마저 무용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양설은 마주앉은 곽범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강호에 몸을 담아야 할까 봐요. 발만 걸치지 말고요. 사업은 원선생님과 종리서기를 내세워서 하고, 우리는 강호에 서서 사업을 돌봐야 할 것 같아요.”

"강호인들이 사업하는 방식이군요.”

곽범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양설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의 우리 사업 방식은 강호인들과는 조금 달랐어요. 세속의 사업을 하면서 방해되면 강호인을 없애려고만 했으니까요.”

곽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드는군요. 강호가 세상과 다르게 이어져 왔다면 강호의 물산도 세상과 다른 게 많지 않을까 하고요. 영단, 영물, 보물, 신병이기 외에도 더 있겠지요.”

양설은 말을 이어갔다.

"세속에 착한 사람과 악한 자가 섞여 있듯이 강호도 마찬가지고, 어느 쪽이든 사람들 세상이고 문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곽범은 한숨을 쉬었다.

"막는 자는 모두 벤다! 내가 나도 모르게 패도를 추구하고 있었군요.”

"막지 않는 자는 무시한다! 도 있었지 않겠어요?”

양설이 미소를 머금었다. 곽범의 생각이 바뀌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양설은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곽범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제 무공이 조금 늘게 되니 강호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당신을 감히 거스르려는 게 아니랍니다.”

곽범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강호에 들어가도 벗을 사귀지 못해요.”

양설은 손을 뻗어 곽범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럼 또 어떤가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게 있는지 보고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면 되지요. 제 생각으로는 사람이 가진 가능성이 강호를 열었고 강호인을 만들어 온 것 같아요.”

곽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구들을 구하고 봅시다.”

양설은 곽범의 손을 꼭 잡으며 마음을 달랬다.

양설도 곽범도 화가 나있고 식구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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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번창하는 사업

 

 

 

호숫가에는 봉사에 고자가 된 북두칠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외공이 높은 그들은 추위 속에 굶주리고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훈련이 끝난 육연부의 계집애들은 북두칠성을 일곱 마리 개라고 바꿔 부르며 평상 밑으로 옮겨 놓았다.

첩밀관 장영이 북두칠성의 심문을 맡았다.

심문이라고 해봐야 각자의 이름만 물어보고 더 묻지 않았다.

언덕 너머의 기문진 속에 갇혀 있는 놈들도 바글바글하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언덕을 올라가면 들을 수 있었다.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고문이다.

강호인들이니 며칠 가둬둔다고 얼어 죽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영은 천천히 심문할 작정을 했다.

 

***

 

은희는 다음날부터 종리율 등의 도움을 받아서 목장 공사를 일으켰다.

원래 고용하려 했던 늙은 목수 두 사람을 부르고, 겨울이라 일이 없는 인근의 목수들도 되는 대로 청했다.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마차방 앞에 모였다.

지우는 그들을 데리고 목장으로 가는 도로 공사를 하였다.

마차가 다니는 궤도가 이미 깔려있는 대로에서 목장까지는 십리 남짓한 거리였다.

먼저 소와 말에 쟁기를 달아 거친 십리 길을 평탄하게 다듬었다.

그런 다음 짐마차에 자갈을 실어 와서 길을 단단하게 메우고 다져서 궤도를 만들었다.

서로 비켜갈 수 있는 우회궤도는 1리마다 설치하였다.

그 사이에는 궤도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입출 궤도도 설치했다. 오가던 마차들이 마주쳤을 때 한 마차가 비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겨울이라 땅 파는 일이 더뎠지만 노동력은 풍부했다.

은희는 봉사가 된 북두칠성을 큰 힘이 필요한 곳마다 보내서 소처럼 부렸다.

언덕 뒤의 기문진 속에 갇혀있는 자들도 끌고 와서 일을 시켰다.

말이나 돈을 받은 자들은 풀어주었다.

몸값을 치르지 못한 포로들은 체념하고 노동에 종사했다.

칼질 주먹질 밖에 할 줄 몰랐던 자들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 거친 노동에 내몰렸다.

그들을 이용하여 호숫가에는 건물을 지을 땅고르기가 진행되었다.

목장 부지 안의 도로들도 만들어졌다.

호숫가와 산에 있는 돌을 떼서 건물과 담장, 바닥에 쓸 준비를 하였다.

석수들이 돌을 쪼는 소리가 호수의 얼음을 짜랑짜랑하게 울렸다.

인부들이 임시로 거처할 천막과 밥을 짓는 천막들이 피난처를 연상시키며 늘어섰다.

 

은희의 목장 공사는 하호성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역사였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계집애들도 전부 매달려 현장을 감독하거나 생각을 짜내서 도왔다.

검술 훈련은 새벽에 연무장에서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너무 바빠서 집안일 할 사람들을 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졌다.

동진은 가난한 집 여자들 열명을 고용해서 썼다.

 

***

 

3월이 되니 대규모 인력을 투입한 궤도가 완성되었다.

목장에는 터 고르기가 끝나고 담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호수 남쪽 4분지 1에서 시작하여 언덕배기를 에워싸는 석담 축조에는 200명 가량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궤도를 달리는 마차들로 실어온 목재들로 건물들이 올라갔다.

건축 자재들은 산더미처럼 쌓였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은희는 단순한 목장이 아니라 큰 장원을 만들고 있었다.

담으로 구획된 한 곳에는 닭장들이 옮겨왔다.

다른 구획에는 사람 장사로 번 말들이 들어갔다.

사람이 머물 건물들은 산중에 지어진 큰 절을 참조하였다.

소나 말 대신으로 밖에는 쓸모없는 강호인들 외에 닭을 치고 말을 키우며 목장을 관리할 사람도 오십 명 가까이 고용했다.

투입된 돈이 3천냥에 가까웠다.

은희는 강호 세력들에게 뜯어낸 속죄금으로 그 비용을 다 충당했다.

단아가 계집애들을 지휘하여 야생마를 세 무리, 40마리나 잡아와서 마사에 넣었다.

대규모 공사와 그에 부수한 일들을 해보면서 은희와 계집애들은 큰일을 꾸미고 진행하여 어떻게 성공시키는 가에 눈이 트였다.

늘 자기가 먼저 생각했던 거라 말해서 욕먹던 계집 미연(美姸)이 두각을 드러냈다.

미연은 여러 가지 장치에 대한 의견을 내고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공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보상으로 미연은 기공관(起工官) 자리를 꿰찮다.

 

3월 말부터 차를 실은 마차들이 육연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차 도매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암말들을 데려다가 새끼를 가지게 해서 목장으로 내보냈다.

4월 말이 되자 완공된 건물들이 생겨났고, 5월 중순쯤에는 중요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닭장에는 자연 부화시킨 노란병아리들이 바닷가 모래를 연상시킬 만큼 많았다.

 

곽범과 양설은 이따금씩 목장에 나와 보았다.

파란 기와를 얹은 긴 담장이 굽이굽이 언덕을 타고 넘어 호수에 이어져 있는 모습만으로도 장관이었다.

300 마리에 가까운 말들이 담으로 에워싸인 축사 영역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은희가 처음 계획했던 대로 말 훈련을 겸해서 수차를 돌려 언덕 위로 끌어올린 물이 목초지를 풍성하게 했다.

말들 사이로 닭들도 돌아다녔고, 닭똥은 훌륭한 거름이 되었다.

목장에서 공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갔다.

늙은 목수 두 사람과 십 여 명의 인부들만이 남아서 자잘한 손을 보거 있었다.

본의 아니게 종살이를 하게 된 강호인들의 숫자는 북두칠성을 제하고도 30여 명이었다.

그들은 목장의 경비와 허드렛일에 투입되었다.

원래 조직에서 버림받았거나 말과 바꾸어 데려가줄 가족이 없는 자들이었다.

절망하던 중 그들은 육연부의 위상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육연부에 남으면 강호의 험난함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

30여명의 강호인들은 기꺼이 종살이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두칠성은 목장에서 일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목줄을 하지는 않았지만 방울 소리를 듣고 따라가서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개처럼 한 그릇에 밥과 반찬을 던져주면 수저도 없이 손으로 먹었다.

북두칠성은 노동을 하는 외에는 무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명령을 어겼다가는 강호에서 저지르고 다녔던 악행의 대가를 혹독한 채찍질로 치렀다.

원래가 중이었던 그들은 일이 없을 때면 가부좌를 하고 참선을 하면서 시련을 견디고 있었다.

 

"은희는 역시 통이 커요. 이 큰 일을 다 해내다니.”

양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내는 은희를 칭찬했다.

은희가 한숨을 쉬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낭낭, 저기를 못 막았어요.”

"저기는 호수잖아?”

양설이 물었다.

은희가 말했다.

"말들 중에 헤엄을 잘 치는 놈들이 있더라구요. 호수에 물먹으러 들어가서 헤엄쳐서 도망가요. 배도 없어서 붙잡아 오는 데 애를 먹었어요.”

"호수에 수정(水亭)과 다리를 만들어서 막아야겠네.”

"네, 저 쯤에 수정을 짓고 다리를 북쪽과 동쪽으로 만들어 둘러쳐 막아야겠어요.”

단아가 끼어들었다.

"이런 산중 호수 밑에는 바위가 많아서 물이 얕은 곳이 있어요. 수심을 조사해보고 만들면 좋겠네요. 수정도 얕은 곳에 만들고, 수정 주변에 섬을 만들어도 좋겠네요. 여름에 들어가서 놀게.”

은희가 토를 달았다.

"이제 돈 없어. 닭하고 계란 팔아서 수정 지으려면 몇 달 걸려. 말들은 그 새 자꾸 도망가려 할 거고.”

"그럼 물가에 울타리를 쳐. 말들이 물을 꼭 거기서 먹어야 하는 거 아니잖아. 수차로 퍼올린 물이 고일 웅덩이들만 만들어줘도 되잖아.”

단아가 의견을 냈다.

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정은 굳이 만들 필요없네. 돈도 안 되는데 그걸 왜 만들어.”

지우가 펄쩍 뛰며 말했다.

"야! 손님도 청해서 묶고 가게 하고 해야지. 그거 다 돈 되는 거야. 예쁜 배도 만들어서 뱃노래도 할 수 있게 하고.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

"그럼 네가 반 부담해라.”

은희가 코웃음을 쳤다.

지우가 물러서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돈 있어?”

단아가 꼬질렀다.

"낭낭, 얘 돈 많아요. 여기 부지 살 때 1500냥 꿍쳤어요.”

양설이 깜짝 놀라고 지우가 단아와 은희를 노려보았다.

"이 배신자들!”

양설이 곽범에게 물었다.

"당신이 받은 거 아니었어요?”

"난 당신이 받은 줄 알았어요.”

곽범이 대답했다.

다들 해먹고 꿍치고 훔치고 뇌물 받는 줄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우의 경우에는 규모가 달랐다.

양설이 지우를 보며 감탄했다.

"너도 통 크구나. 그 만큼 꿀꺽하고 잠이 편하게 왔어?”

단아가 말했다.

"쟤 뻔뻔한 거하고 배짱 빼면 아무 것도 없어요. 거짓말까지 해요. 자기가 집에 일꾼 다 고용할 거라더니 결국 감독님이 했잖아요.”

양설이 단아에게 물었다.

"넌 알고 있으면서도 말 안했어?”

"고물이라도 좀 생길 줄 알았죠. 영 아니었지만요.”

양설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하루에 몇 전 벌면서 기뻐하고, 나으리가 한 두 냥 벌어다 주면 감격하던 게 엊그제였는데.”

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다 토해내야 돼요?”

"그럴 필요 없다. 네가 알아서 쓰겠지.”

양설이 손을 저었다.

"네?”

단아와 은희가 놀라서 물었다.

지우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주머니 돈이나 쌈지 돈이나 그게 그거죠. 제가 가지고 있으나 낭낭이 가지고 있으나...”

양설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 쓰려고 꿍쳐둔 거니?”

"더 모아서 전장 하나 차리게요. 그래야 안심하고 제가 돈을 빼서 쓸 수 있잖아요.”

지우가 냉큼 대답했다.

“강대인 전장하는 거 보니까 그 사업이 괜찮은 거 갈더라구요. 물어보니 만냥이면 시작할 수 있다네요.”

"운영은 누가 하고?”

"시작할 돈만 제가 마련하면 나머지는 은희가 알아서 하겠죠. 돈 있어도 전장 만드는 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제 능력 밖의 일이에요.”

은희가 기막혀했다.

"너 나한테 그런 말 안했잖아.”

지우가 버럭 소리쳤다.

"바빴잖아. 여기 공사하느라 눈코 못 뜨는데 어떻게 말해?”

은희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얼마 모았는데?”

"1700냥. 강대인이 200냥 불려 줬어. 지금 더 늘어나고 있을 거야.”

 

곽범은 이미 양설에게 줬던 일이고 그 돈을 움직이는 것도 양설과 식구들이 할 일이라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전장이라면 문제가 좀 달랐다.

사업이 커지면서 돈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곽범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돈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를 산지에서 사와서 파는 차 도매는 지금 많은 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강대인과 거래를 튼 후 지우도 돈화전장을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전장 일을 눈여겨보고 강대인에게 들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장은 일하는 사람들이 업무를 잘 알아야 할 텐데.”

"처음에는 전장에서 일 해본 사람을 데려다가 쓴대요. 그런 사람 두 사람만 있어도 작게 하는 게 가능해요.”

곽범 말에 지우가 대답했다.

"전장을 만들자.”

곽범은 전장을 만들기로 결정해버렸다.

전장을 통해서 여러 사업장의 상태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면 모든 사업 관리가 수월해진다.

그러나 곽범이 생각한 전장은 아직 대부업을 하는 전장은 아니었다.

자기 사업에서 돌고 있는 모든 자금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수준으로 시작한다면 전장 경험이 없어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어떻게 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으니까.

여기서 경험을 쌓으면 돈화전장 같은 본격적인 전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곽범은 축부관인 은희가 전장을 관리하면서 돈을 운용하여 사업을 개척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은희는 육연부의 모든 돈을 관장하는 재무관(財務官)으로 승격되었다.

벌어들인 돈은 모두 은희에게로 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돈도 은희로부터 나온다.

미연이 기공관이 된 후 새로운 직책을 맡은 계집애가 없었는데 은희만 승승장구였다.

종리율과도 동급이다.

종리율은 문서를 관장하고 은희는 돈을 관장하게 되었다.

전옥을 비롯한 계집애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죽도록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길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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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손 큰 계집애들

 

 

수원이 와서 고했다.

"나으리, 돈화전장의 강대인이 뵙기를 청합니다.”

곽범은 종리율이 챙겨준 보고서들을 읽던 중이었다.

목장에서 할 일들을 정리하던 은희가 말했다.

"그 사람이 어제 산 땅의 전 주인이었어요.”

"모셔라.”

곽범은 집무실 한 쪽에 마련된 손님을 맞는 자리로 갔다.

단아가 침실이었던 방으로 가서 지우를 불렀다.

"너 손님 왔어. 나으리하고 같이 만나.”

"누구?”

"돈화전장.”

"빠르기도 하다! 한 번 오랬더니 벌써 왔어?”

지우가 바느질하던 옷감을 집어던지고 단아보다 더 빨리 달려가며 면사를 썼다.

 

강대인은 곽범을 두려워하며 고개도 잘 들지 못하였다.

육연부 앞에 엎드려 있는 자들 중에는 강대인이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하게 굴던 강호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대고 처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강대인은 큰 호랑이를 받은 답례로 보검 한 자루와 큰 옥 벼루를 가져왔다. 육연이 벼루로 시작했으니 벼루를 선물하는 것이었다.

지우가 들어가자 강대인은 벌떡 일어섰다.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소이다.”

지우가 곽범에게 말했다.

"나으리, 제가 청을 드려 강대인께서 귀한 걸음 해주셨으니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리해라.”

곽범이 대답했고 강대인은 엉거주춤하며 다시 앉았다.

하지만 좌불안석이었다.

다행히 나갔던 지우가 금방 찻상을 들고 돌아왔다. 부엌에서 동진이 물을 데우고 있던 중이라 다과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대인께선 우리 나으리 편하게 대하세요. 강호인은 강호인의 법으로 대하지만 세속에서는 세속의 법도에 따르십니다.”

찻잔을 강대인 앞에 내려놓은 지우가 웃으며 말했다.

“아랫사람들인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들지 않은 사람에게 칼을 뽑거나 힘으로 누르지 않는답니다.”

곽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나으리께는 세속 사람들이 더 귀하고 높습니다. 강호인들은 밥버러지라고 생각하시니까요.”

지우가 곽범 대신 말을 이어갔다.

강대인이 안도하면서 물었다.

"밖에 있는 강호인들은 육연대인께 죄를 지은 것이군요.”

"그들은 우리를 적대하고 염탐하며 해치려 했던 자들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어제 나으리께서 대노하시자 오늘 살기 위해 빌러온 것입니다.”

강대인이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너그럽게 이끌어주어 보잘 것 없는 제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지우는 짐짓 겸양했다.

"강대인께서 적절히 마음을 써주셨던 덕이지요.”

강대인이 곽범에게 말했다.

"대인께서는 어진 낭낭과 현명하고 용맹한 첩들을 두루 거느리셨으니 일세의 영웅입니다.”

곽범은 머리를 저었다.

"이들은 제 첩이 아닙니다. 식구들입니다.”

"그럼 이 아가씨들은...”

"혼처가 정해지면 시집가겠지요.”

곽범의 말에 강대인은 입을 딱 벌렸다.

절세미녀들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몇 마디 횡설수설한 강대인은 곽범과 거래를 청한 후에 말했다.

"어제 대인께서 살아있는 호랑이를 오전에 보내시고 오후에는 죽은 호랑이를 보내주시니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우와 단아, 은희 등이 소리 죽여 웃었다.

강대인이 지우를 보며 곽범에게 말했다.

"오늘 대인의 진면모를 알게 됐으니 몹시 기쁩니다. 제가 드리는 보검을 저 아가씨에게 드릴 수는 없겠는지요?”

“저는 육연부의 유세관입니다. 혀가 무기이니 보검은 쓸 일이 없지요.”

지우가 사양했다.

"그 보검은 저 대신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그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았거든요. 가죽 상하지 않게 하느라고.”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강대인 놀라자 지우가 곽범에게 물었다.

"나으리, 전옥이에게 보검을 주실 거면 지금 오라 할까요?”

곽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아가 또 방으로 달려가서 전옥을 데려왔다.

가죽 상하지 않게 하려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누군가도 지우와 다를 바 없는 아가씨였다.

그걸 안 강대인은 육연부의 여자들이 요괴처럼 무서워졌다.

곽범이 전옥에게 검을 주며 말했다.

"강대인께서 보검을 선물하셨다.”

전옥이 무릎을 낮추어 받고 강대인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강대인은 육연부를 나섰다.

엎드려 있는 강호인을 위풍당당하게 훑어본 강대인은 기다리고 있던 호위무사들과 서기를 데리고 돌아갔다.

 

***

 

집무실을 나온 후 지우는 전옥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전옥은 지우가 갖고 싶어하던 빼똘구두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지우가 직접 만들 수 있지만 그 구두를 만드는 솜씨도 전옥이 최고였다.

 

은희는 장영이 뽑아온 명세서를 들고 육연부 앞에 나가서 부르는 게 값인 사람 장사를 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엎드려 있는 강호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곽범에게 바칠 보물이나 돈을 가져왔다.

은희는 어제 호수쪽으로 왔다가 붙잡힌 사람이 각각 몇 명인지를 물어보고 사람값을 말 머리로 계산했다.

그런 후에 사람값이 아닌, 침입한 죄에 대한 속죄금으로 얼마를 낼 것이냐를 각각 말하게 하여 그들의 기둥뿌리를 뽑았다.

잡힌 사람은 말을 가져오는 대로 풀어주기로 하였다.

은희는 사람장사 한 것 외에 속죄금까지 자기가 챙겼다. 목장 때문에 생긴 것이니 당연히 자기 권한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보물과 속죄금을 동진한테 맡겨 놓은 은희는 닭장을 돌보기 위해 생 계란 두 개로 점심을 대신한 채 떠났다.

바느질을 하면서 한 계집애가 중얼거렸다.

"재주는 나으리가 부리고 돈은 은희가 다 챙기네.”

"부러우면 너도 그러던가.”

지우가 말했다.

문득 전옥이 지우에게 물었다.

"너, 2천냥 중에서 500냥 쓰고 남은 거 낭낭께 돌려드렸어?”

지우가 대꾸하지 않고 속속곳에 뜸박질만 했다.

"너! 너무 심하다. 1500냥이나 꿀꺽한 거야?”

다른 계집애들이 펄쩍 뛰었다.

1500냥은 비옥한 전답을 5000평 넘게 살 수 있는 거금이다.

지우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꿀꺽한 게 아니야. 낭낭께서 돌려달라고 안하셨고... 나도 유세하고 다니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 선물도 사서 줘야 할 거고 뇌물도 뿌리고 해야 하니까 비상금으로 가진 거지.”

"1500냥이나 되는 비상금이 어디 있어? 이년 완전히 도둑년이네.”

계집애들이 펄펄 뛰었다.

지우가 말했다.

"낭낭한테 다 돌려주고 손가락 빨까? 아니면 내가 너희들 원하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줄까? 은희한테도 받고 나한테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계집애들이 금방 대꾸를 못했다.

지우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는 또 기회 많아. 다음엔 니들한테 들키지도 않을 거고. 그땐 국물도 없어.”

계집애 하나가 개탄했다.

"자리만 차지하면 탐관오리가 되어버리네. 부정부패가 우리 집만큼 심한 곳은 없을 거야.”

"장영이는 안 해먹잖아. 걔는 깨끗해.”

한 계집애가 말했다.

"장영이는 돈 많이 받아. 하는 일이 돈 많이 쓰는 일이잖아. 설마 받은 돈 다 쓰겠어? 어디 꿍쳐 놓고 있겠지.”

"감사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첩밀관은 감사해도 소용없어. 장부에 적으면 그게 다야. 대조할 수도 없고. 밝혀봤자 처벌도 못해. 적당히 해먹게 두는 게 최선이지.”

"엄청 좋은 자리였네.”

"장영이도 단아한테 상납할 걸? 단아가 첩밀관 예산 책정한다니까.”

한 계집애가 소리쳤다.

"그래도 지금 제일 많이 해먹은 건 지우 저년이야! 1500냥이라니! 무려 1500냥!”

지우가 말했다.

"지금부터 1500냥 입에 올리기만 해도 국물조차 없어. 한 번 올려 보시지. 얌전히 있으면 집에 일할 사람부터 내가 구할 거고.”

계집애가 바로 수그러들며 중얼거렸다.

"벼슬이 장땡이다. 무조건 직책을 맡아야해.”

동진이 불러서 계집애 셋이 점심 준비하러 나갔다.

남아 있는 한 계집애는 바느질 하던 야한 속치마에 여우털을 붙이고 있었다.

바깥에는 눈발이 슬슬 날렸다.

 

***

 

양설은 신신이진공을 수련하다가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늦겨울은 눈발에 봄이 묻어있다.

나른한 감이 있어서 곽범에게 기대며 물었다.

"눈 와요. 낮잠 안 잘래요?”

"난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양설은 곽범을 어깨로 쿡쿡 밀었다.

"가서 자요.”

"혼자서 어떻게 자요.”

또 어깨로 툭툭 받았다.

단아가 말했다.

"나으리,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좀 쉬세요.”

장영도 말했다.

"오늘 올 손님은 다 온 것 같아요. 눈도 오는 걸요.”

"난 잠이 안 와.”

곽범이 말했다.

양설이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자래요? 베개 해달라는 거지.”

곽범이 양설에게 끌려 침실로 가자 계집애들은 소리없이 만세를 불렀다.

커다란 눈송이에 가슴이 부풀은 계집애들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을 해치우거나 내일로 미뤄놓고는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

 

양설은 곽범에게 물었다.

"춥죠?”

"안 추워요.”

"제가 따뜻하게 해줄게요.”

"안 춥다고 했잖아요.”

"그냥 따뜻하게 해준다니까요.”

양설은 곽범의 머리를 끌어서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곽범이 가만히 있었다.

양설은 이 사람과 함께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고 생각했다.

가진 게 많아져도 태어난 것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격랑 속에 흐르는 나뭇잎 같았다.

인생에 취해서 상처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존재,

서로를 안아주고 보듬어주지 않으면 아파서 울 수밖에는 부부.

괜찮다고 해도 어루만지고 위로 해줘야할 연약한 순수.

양설은 곽범을 자꾸 안아주고 싶었다.

자기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상처가 안타까웠다.

잠이 오지 않는다던 곽범은 양설의 품에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다.

곽범에게서 느껴지는 상처의 이름도 모르겠고 영문도 알 수 없었다.

베이고 벌어져 햇살아래에서 말라가는 속살 같은 아픔도 있고, 문득 느껴지면 죽음 같이 섬뜩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죽어주면 치유해주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느낌도 있었다.

행복한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하면 이렇지 않을까?

당신이 나를 보지 못하면 이렇게 아파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당신 곁에 있는데 당신은 왜 아파하고 나는 왜 따라서 아파하는가?

당신이 이토록 좋은데. 우리는 이토록 행복한데.

양설은 자기가 알 수 없는 벽 앞에서 곽범을 보듬어 주기만 했다.

 

***

 

계집애들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꿍쳐두었던 돈으로 사고 싶은 것들을 산 후 마차방으로 몰려갔다.

은희는 닭들이 춥지 않게 하느라 닭장 위에 거적을 두 겹으로 씌우는 중이었다.

마차방의 기술자들도 돕고 있었지만 닭장이 많아 손이 더뎠다.

계집애들이 달려가서 은희를 도와 금방 거적을 다 씌웠다.

닭장에서 일했던 은희의 옷과 신발에는 닭똥도 묻었고 냄새도 심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은희는 닭장에서 그렇게 일했었다.

은희의 노력을 알기에 부러워할지라도 비방은 못한다.

은희는 옷을 갈아입고 계집애들은 사온 물건을 집에 숨겼다.

그런 후에 함께 찻집으로 몰려가 2층의 다실에서 차와 과자, 꿀대추며 사탕을 먹었다.

사람구경을 하고,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사내들을 보면서 깔깔거리다가 쌓인 눈을 밟으며 육연부로 돌아갔다.

동진이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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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신신이진, 새롭게 새로워지며 달라져서 나아간다.

 

 

 

지우는 밤새 자기 마차의 요구 조건을 정해서 이른 아침에 마차방으로 달려가 전했다.

네 마리 말이 끌며 육연부 여자들이 다 타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마차였다.

사대부나 큰 부호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비싼 물건이다.

마차방의 책임자가 된 조대붕이 물었다.

"낭낭께서 타실 마차입니까?”

"타시겠죠.”

지우는 낭낭도 가끔 태워 줄 거라 속으로 생각하며 조대붕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낭낭이 탄다고 해야 더 공을 들여 만들 거란 계산이었다.

"가마도 곧 완성될 텐데, 앞으로 낭낭께서 행차가 많으실 모양이군요.”

조대붕이 말했다.

"가마 만들기 시작했어요?”

지우가 물었다.

"얼마 전에 모양이 최종 결정 되어 제작 중에 있습니다. 만든 적 없는 형태라서 완성이 느려졌습니다.”

"구경해도 돼요?”

지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조대붕은 지우를 데리고 벽 없이 지붕만 있는 큰 공방으로 갔다.

지우는 그곳에서 이상한 물건을 보았다.

가마 같기도 한데 마차처럼 바퀴가 달려있다.

네 개의 바퀴가 한 줄로 서있다.

가운데 두 바퀴는 크기가 같았고 양 끝의 것은 훨씬 작았다.

사람이 타는 부분을 들여다보니 의자 두개를 마주 놓은 정도로 좁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타거나 혼자 탈 때에는 맞은편 의자에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구조였다.

양옆뿐만이 아니라 앞뒤로도 창이 나있다.

바닥에는 방패모양이면서 빨래판 같은 장치가 달려있다.

의자 좌우에는 지렛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가마가 참 이상하네.”

지우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이 가마는 가마꾼이 들고 움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바퀴를 밀고 갈 수 있습니다. 경사진 길을 오르거나 내릴 때도 가운데 바퀴가 크고 앞 뒤 바퀴가 작아서 마차가 크게 기울어지지 않지요.”

조대붕이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궤도가 있는 곳에서는 궤도에 올려놓고 달릴 수 있습니다. 급할 때는 가마꾼 한 명이 움직일 수도 있고, 세웠을 때는 가마가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발을 내릴 수도 있지요. 혹시 가마꾼 발이 걸려 넘어지더라도 가마는 쓰러지지 않도록 장치가 되어있습니다.”

조대붕의 설명을 들으며 지우는 가마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가마는 이상하게 생겼지만 매우 예뻤고 오밀조밀했다.

“아주 험한 길에서는 바퀴를 접을 수도 있고, 바퀴가 있는 하체를 분리해서 사람이 타는 상체부만 들고 갈 수도 있지요.”

조대붕의 설명을 듣던 지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가마 들려면 힘 쎈 가마꾼이 필요하지 않아요? 낭낭 가마면 남자 가마꾼을 못 쓸 텐데... 여자 가마꾼이 있어요?”

조대붕이 웃었다.

"여자 가마꾼이라니요?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지우가 긴장하며 또 물었다.

"혹시 우리를 가마꾼으로 쓴다든가 하는 그런 말씀은 없었어요?”

조대붕은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단지 가마꾼에 대해서는 염려 말라고 하시더군요.”

 

지우는 집으로 달려가 계집애들한테 말했다.

"늬들 큰일 났다. 낭낭 가마가 만들어지는 중인데 빨리 한 자리 못하면 가마꾼 된다.”

"진짜야?”

아직 직책을 받지 못한 계집애들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지금 그 가마 보고 왔어. 다 만들어가.”

지우는 계집애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찻집에 갈 준비를 했다.

 

***

 

아침을 먹으면서 단아가 물었다.

"낭낭, 가마가 다 되어간대요. 가마꾼 누가해요?”

직책을 받지 못한 계집애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단아를 노려보았다.

단아는 못 본척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중에 누가 들어야 할 거잖아요. 한쪽은 제가 들까요?”

양설이 웃으며 말했다.

"넌 안 해도 돼.”

"그럼 누가 해요?”

단아가 물었다.

양설은 대답 대신 계집애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직책 없는 얘들이 시선을 피했고 나름 벼슬한 것들은 당당했다.

"내가 해.”

곽범이 불쑥 말했다.

"네?”

수원마저 놀라서 소리쳤다.

양설이 웃었다.

"나으리께서 하신다잖아.”

희야가 급히 말했다.

"제가 하면 되는데 왜 나으리가 해요? 제가 할게요. 전 요새 일이 없어서 칼질이나 하면서 빈둥거려요.”

동진도 거들었다.

"나으리께서 어떻게 가마꾼을 해요. 저하고 희야가 할게요.”

동진과 희야가 하겠다고 자청하자 단아부터 모든 계집애들의 표정이 하얘졌다.

단아도 자기가 한쪽을 들까요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동진과 희야가 진심으로 말하니 물러설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수하에 계집애가 열 명이나 있는데 동진과 희야가 가마를 들게 하는 건 말이 안 됐다.

계집애 둘이 동시에 손을 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할게요.”

열 명 중에서 무공이 가장 약하고 겁도 많은 계집애들이었다.

두 계집애는 겁이 많아서 오히려 상황판단을 잘한다.

첫날 희야에게 맞을 때도 몇 대 맞고는 바로 항복했던 바 있었다.

전옥은 끝까지 버티다가 죽사발이 되었지만 그 둘은 거의 멀쩡했었다.

이번에도 버텨봐야 견딜 수 없으니 미리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양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가마는 바퀴를 안에서도 돌릴 수 있는 거야.”

 

양설은 말로 설명하기 귀찮아서 가마가 다 만들어지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계집애들은 밥 먹다 말고 우루루 몰려나가 마차방으로 달려갔다.

그 가마는 양설이 곽범의 의견을 반영하여 수많은 고심 끝에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이 굽은 가맛대 봐. 가마꾼이 들 수도 있고 놓으면 발처럼 땅에 닿는다는 거지?”

계집애들이 가마를 뜯어보다시피 구석구석 살폈다.

"그런데 안에 타고 있으면서 바퀴 굴리면 옆으로 안 넘어지나? 나으리 무공이 높으시니 공 타듯이 중심 잡는 걸까? 여간 피곤한 게 아닐 텐데.”

"이 지렛대만 당겨도 바퀴가 움직여! 지렛대가 꼭 검 같아.”

지우는 자기도 이런 가마를 만들어 달라고 할 걸 하며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는 곤란했다.

뻔뻔하게 낭낭이 탈거라며 네 마리 말이 끄는 거대한 사두마차를 주문해 놓았다.

그런 마당에 가마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신용만 까먹힐 일이었다.

마차방에 부탁할 일이 앞으로도 많을 테니 신용을 잘 지켜야 한다.

"이건 별 거 아니야. 도르레하고 지렛대, 바퀴 다 사용하면 만들 수 있어. 나도 비슷한 생각했어.”

뭐든지 다 해보고 다 아는 계집애가 또 헛소리를 했다가 욕만 먹었다.

 

***

 

찻집에서 다도를 한 곽범 일행이 일하기 위해서 육연부로 갔을 때였다.

육연부 앞에는 곽범을 기다리는 사람들 수십 명이 있었다.

강호인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엎드렸다.

복장으로 봐서는 제각각인 듯했지만 행동은 하나였다.

어제 곽범이 보였던 모습과 경고의 힘이었다.

"육연대인께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가장 먼저 엎드린 자가 애원했다.

유명곡이 멸망한 전말은 강호에 파다하다.

자신들의 힘이 유명곡 보다 윗길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가문이나 문파는 드물다.

곽범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자기 한 몸이야 도망치면 혹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남아있는 식솔들이나 문중들은 유명곡이 당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강호인들로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육연부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대인.”

강호인들이 합창하듯 입을 맞춰 애걸했다.

곽범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육연부로 들어갔다.

계집애 하나가 엎드려 비는 사람들을 발로 찰 듯한 시늉을 하면서 문으로 사라졌다.

 

***

 

직책이 없는 계집애들은 원래 그들의 침실이었던 방으로 들어가 바느질이나 노리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아와 장영, 은희는 곽범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유세관 지우는 집무실로 가봤자 할 일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바느질하러 다른 계집애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동진은 살림살이 장부며 살림 궁리 하느라 방에 처박혔다.

수원은 앵무 새끼들을 훈련시켰다.

양설은 할 일 없어 빈둥거리는 희야에게 등석자(鄧析子) 한 권을 주어서 읽게 했다.

등석자는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비조인 등석의 이름을 빌려 궤변에 가까운 변론술을 설명한 책이었다.

희야는 말에 두서가 없어 말하다보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런 희야가 적을 상대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을 공부를 하는데 필요한 책이 등석자다.

 

***

 

양설은 연공실로 내려가서 거울을 보며 자기의 몸과 얼굴을 바꾸는 무공을 연습했다.

곽범이 긴 명상과 연구 끝에 만든 무공이다.

그 무공의 바탕은 세 가지다.

몸과 얼굴은 물론 거의 모든 것을 따라서 바꾸는 곽범 사부의 역용변신공,

보는 사람의 정신과 내공까지 빨아들이는 유명곡 요경의 원리,

마지막으로 변화의 방법을 말하는 금왕경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무공이었다.

요경과 달리 이 무공은 얼굴을 보는 사람의 내공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그 사람 몸속의 심맥을 끊어 놓을 수도 있으며 주화입마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얼굴로 펼치는 일종의 심검(心劍) 또는 심공(心功)이었다.

다만 곽범도 아직 그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양설 역시 얼굴과 신체의 일부를 바꾸는 역용변신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역용변신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인양 눈빛과 목소리까지 바꾸는 게 가능했다.

누군가를 보고 모습을 바꾸면 원래 사람의 습관까지 빌려올 수 있었다.

한번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기억하는 한도에서는 재현이 가능했다.

곽범은 이 무공을 염왕현신(閻王現身)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양설은 자기가 사용할 이름을 따로 지었다. 염왕으로 현신할 이유도 없고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설은 이 무공을 익히면서 몸과 얼굴을 바꾸는 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릇이 바뀌면 담긴 내용이 달라진다.

사람의 모습이 바뀌면 그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다.

마음이 달라지면 상황을 다르게 본다.

보는 상황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다른 행동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그 과정에서 행하여 얻고 깨닫는 바도 달라지게 된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도 결국은 사람의 얼굴과 형상과 상황이라는 굴레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사람이라는 그릇을 내고 어떤 환경에 두었으면 그 해야 할 바와 할 수 있는 바가 그 안에 갖추어져 있다.

그릇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그릇을 바꿀 수 있으면 그것 역시 하늘이 지은 환경이니 바꾸어야 옳다.

바꾸어야 할 그릇을 고집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지 않는 것이다.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담고자 애쓰는 건 자기의 그릇을 그렇게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다.

배우고 익히며 깨닫고자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바를 늘여서 그릇을 바꾸는 것이다.

양설은 곽범이 만든 이 무공에서 사람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기문둔갑의 둔갑변신의 참된 의미가 여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온갖 술법들로 몸을 휘감고 있어도 정작 자신을 바꾸지 못하면 작은 도구들을 들고 다니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지식도 자기의 생각과 행동에 반영되지 못하면 먹다 버린 음식처럼 자기를 부패하게만 할 것이다.

은(殷)나라의 시조 성탕(成湯) 태을(太乙)이 세숫대야에 새겨놓고 날마다 보았다는 글귀를 떠올렸다.

일신일일신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고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

끝없는 자기 변화의 의무를 말해주는 글귀다.

양설은 바탕은 같지만 괵범과는 쓰임새가 다른 이 무공에 신신이진공(新新以進功)이라는 이름 붙였다.

새롭게 새로워지고 달라지며 나아가는 공부라는 의미였다.

하는 바에 정성을 들인다면 몸은 바뀌지 않더라도 행동과 마음은 신신이진하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양설에게 신신이진은 사람의 큰 도리였다.

달라지고 나아가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양설이 지은 도였다.

물산을 왕성하게 하여 사람을 부귀롭게 하는 것으로 이 길을 세우며, 가로막는 것을 베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은 곽범의 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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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염왕의 얼굴, 재신의 얼굴

 

 

 

마부들이 북두칠성이라 불리는 일곱 거한들을 끌어와 한 자리에 모아두었다.

북두칠성은 알이라는 알은 다 까여서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의 수작에 분노한 계집애들이 달려들어서 칼로 쓸고 발로 짓밟고 돌로 뭉개버린 것이다.

곽범은 그들의 몸에 주화입마까지 걸어놓았다. 그 때문에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절세고수들인 이십팔수도 상대할 수 있다던 북두칠성의 비참한 말로였다.

북두칠성을 모아놓은 마부들은 사냥한 짐승들을 마차에 싣고 부리나케 돌아가 버렸다. 곽범이 드러낸 염왕의 모습에 혼백이 날아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계집애들 역시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곽범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했다.

"찻집 샘은 물맛이 좋아요. 찻집에서 술도 담가보라고 할까요?”

양설이 곽범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그게 좋겠어요.”

곽범은 유순하게 대답했다.

계집애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곽범의 말투와 얼굴이 아까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은 잘 못하지만 관대하고 따뜻한 원래의 나으리였다.

곽범이 보여준 서로 다른 모습은 적응하려 애써도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아까 내가 놀라서 울지나 말라고 했지?”

양설이 웃으면서 계집애들에게 말했다.

"네...”

계집애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양설이 농을 걸었다.

"깔깔거리더니 오줌이나 싸지 않았으려나.”

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대부분의 계집애들이 실제로 지려버렸기 때문이다.

양설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건 나으리 얼굴들 중 하나야. 염왕의 얼굴! 나으리께서 싸울 때 사용하려고 만드신 거라 많이 무서워.”

"다른 얼굴들도 있나요?”

누군가가 물었다.

양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할 때 얼굴도 있어. 재물의 신, 재신의 얼굴! 그리고 원래 이 모습이시지. 더 필요한 얼굴이 있을 리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었던 계집애가 또 물었다.

"낭낭은 안 무서웠어요?”

"안 무서울 수가 없잖아. 낭군님이니까 원래 무섭고... 하지만 낭군님이니까 무서워도 괜찮은 거지.”

양설이 웃으며 대답했다.

단아가 군사답게 가장 먼저 알아들었다.

"아! 그럼 우리도 무섭지만 무서워도 괜찮구나.”

다른 계집애들의 머리도 동시에 까닥거렸다.

여기저기서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은희는 술잔을 들며 투덜거렸다.

"술 맛이 안나요. 너무 놀라서 취하지도 않는 거 같아요.”

기력을 회복한 첩밀관 장영도 말했다.

"나으리의 경고를 돌이나 비석에 새겨서 표시해놓아야겠어요. 나쁜 놈들이 우리 땅에 아예 못 들어오게. 그놈들 두 번 만 더 들어오면 제가 나으리한테 놀라 죽겠어요.”

양설이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의 이 무공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야. 지금은 무서운 정도지만 완성되면 보는 순간 급살 맞아 죽을 거야.”

계집애들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가장 겁 많고 소심한 계집애가 덜덜 떨며 물었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해요? 실수로 볼 수도 있잖아요.”

"실수가 안타까운 거지.”

양설의 놀리는 말에 그 계집애는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다른 계집애가 씩씩한 척 하며 말했다.

"괜찮아. 싸울 때 나으리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리면 돼!”

울먹이던 계집애가 빽 소리쳤다.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는데 어떻게 안 봐!”

"눈... 감아야겠네...”

또 다른 계집애가 중얼거렸다.

울먹이던 계집애가 곽범에게 물었다.

"나으리, 그 무공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우리가 다 죽일게요.”

"안 돼.”

양설이 곽범 대신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이 적어. 많은 적을 상대할 때 불리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으리께서 이 무공을 펼치면 사람이 몇 명이든 상관없어. 이 사실을 적들도 알아야해. 수가 많다고 함부로 우리를 공격 못하게.”

 

곽범은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할 줄도 모른다.

오히려 새들하고 말을 더 잘 하는 편이다.

양설이 채워준 술잔을 비운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새들과 놀았다.

새들도 남아있는 짐승들 고기를 뜯으며 놀았다.

바람쟁이가 곽범에게 날아와 물었다.

"여자 하나인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많아?”

바람쟁이는 탁양앵무들 중 가장 빨리 날았다.

그래서 반란군 속에 숨어 흑귀면탈을 감시하는 임무를 받았었다.

그러던 중 오늘 흑귀면탈이 곽범을 노리고 하호성에 다시 숨어들어왔다.

바람쟁이는 그걸 곽범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아내는 설 하나야.”

곽범이 대답했다.

바람쟁이가 다시 물었다.

"나머지는 다 첩인 거야? 짝짓기 다 해봤어?”

당황한 곽범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양설은 큭큭 웃었다.

계집애들은 바람쟁이의 노골적인 말에 황당해서 고기 씹는 것도 잊었다.

바람쟁이가 코웃음을 쳤다.

"짝짓기도 안 하면 암컷에게 무슨 쓸모가 있어? 밥만 축내지.”

곽범의 밥버러지 타령은 새들에게도 전염되어 있었다.

바람쟁이는 계집애들을 둘러보았다.

"괜찮게들 생겼네. 틈내서 확 따먹어버려.”

계집애 하나가 바람쟁이한테 말했다.

"저.... 새님. 말씀이 너무 심합니다.”

“뭐가? 따먹는 거?”

바람쟁이가 뚱해서 되물었다.

"암컷들은 따먹히는 게 당연하잖아. 따먹혀야 알 낳고 새끼 까지. 나도 봄마다 얼마나 많이 따먹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수십 놈이 달려들어. 알주머니 무겁게.”

보다 못한 빽빽이가 바람쟁이를 옆으로 끌고 갔다.

"쟤들 새 아니야. 사람이라고. 사람은 우리하고 달라.”

"다르긴 뭐 달라. 우리보다 더 하지. 밤낮 짝짓기 하는데.”

"그것도 다 사정이 있어. 사람들 사랑은 복잡해서 밤낮 짝짓기 하면서 만드는 거야. 우리는 짝짓기 해서 알 만들지만 사람들은 사랑 만들어.”

"곽범이가 그런 걸 알아? 짝짓기 못해서 안달 났던 곽범이가!”

바람쟁이가 불신에 차서 소리쳤다.

다른 새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바람쟁이를 멀찌감치 끌고 갔다.

겁쟁이가 빽빽이에게 소리쳤다.

"바람쟁이 좀 잘 가르쳐! 고생했지만 저러다 곽범이한테 맞아 죽는다.”

 

지우는 원했던 대로 유세관이 되었다.

곽범이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돈화전장 강대인을 혼내고 거래를 잘 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나으리, 저 이제 유세하고 다니려면 마차가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나이도 어린데 마차는 타고 다녀야 사람들이 무시 못할 거잖아요.”

지우가 뭘 요구할지 알고 있던 계집애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곽범의 눈치만 살폈다.

지우가 마차를 얻으면 자기들도 공을 세웠을 때 마차, 또는 그 이상의 걸 얻을 가능성이 컸다.

“마차하고 마부 한 사람만 주세요 네? 마차 타고 오가면서 생각도 해야 하고, 문서나 물건도 들고 다닐 수 없잖아요.”

지우의 간청에도 곽범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즉각 호통을 듣지 않은 건 좋은 징조다.

“특히 먼 길이라도 가면 옷이랑 가져가야 할 게 한 짐일 수도 있는데...”

이어지던 지우의 간청을 동진이 막았다.

"낭낭도 마차 없어. 나으리도 안 타시고.”

지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양설이 역성을 들어주었다.

"나야 집에만 있으니까 필요가 없는 거고. 지우는 필요하겠네.”

이미 반은 허락 받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지우가 재빨리 인사하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낭낭! 감사합니다. 유세관 역할 잘 할게요.”

희야가 지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필요할 때만 이번처럼 한 대 가져가서 쓰면 되지 왜 전용 마차가 필요해?”

"유세관 마차인데 좀 특별해야죠. 꾸미기도 꾸며야 하고.”

지우가 기다렸다는 듯 늘어놓았다.

“또 지금 마차는 타보니까 그렇게 편하지 않더라구요. 자리도 좀 더 푹신하게 해야 되겠고... 바람 안 들어오게 휘장도 치고... 멀리 갈 땐 야영 대신 잠도 잘 수 있게 긴 의자도 하나 넣고. 화살 같은 거 막게 안에 철판도 좀 대고.”

"대체 얼마나 생각했으면 저런 말이 한 번에 다 나와?”

듣고 있던 동진이 혀를 찼다.

곽범은 지우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마차방에 이야기해서 만들어라. 물과 음식을 넣어둘 자리도 마련해놓고.”

지우가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유세관 지우, 나으리와 낭낭을 위해 신명을 다 하겠습니다.”

샘이 난 은희가 단아한테 말했다.

"이제 말 잡으러 가자.”

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굿간도 없잖아. 마굿간 만들고 데려와도 돼.”

"그렇겠다. 말 먹이 아끼겠네.”

은희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첩밀관 장영이 곽범에게 물었다.

"나으리, 흑귀면탈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죽으니까 도망친 것일까요?”

단아가 곽범 대신 대답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나으리를 봤을 거야. 북두칠성을 풀 베듯 쓰러트리시는 걸 보고 도망갔을 거라고 봐.”

"집이 걱정된다. 흑귀면탈이 금왕경 찾는다고 몰래 들어가지나 않았을지.”

한 계집애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양설은 웃었다.

흑귀면탈은 무시무시한 고수지만 신중하다.

직접 곽범의 집을 침입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대신 보냈다면 그 자는 육연부나 육연별부의 기문진에 갇혀있을 것이다.

 

***

 

지우가 타고 왔던 마차도 짐마차들과 함께 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곽범 일행은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방에서는 마차방의 방장이 된 조대붕이 사냥한 짐승들을 분배하여 보낼 곳에 보내는 중이었다.

양설은 쓸개를 뽑지 않은 곰 한 마리를 찻집의 전 주인이자 투자자인 서문노인에게 보냈다.

전옥이 주먹으로 때려잡은 호랑이는 돈화전장 강대인에게 선물로 보냈다.

 

다행히 집에 침입자는 없었다.

계집애들은 방마다 불을 지피고 욕간의 물을 데우러 갔다.

고기를 먹어 든든했기 때문에 동진은 고기로 죽을 끓여 식구들 저녁으로 대신했다.

양설은 곽범과 함께 눈이 나무 밑에 쌓여있는 정원으로 나와 걸었다.

희야가 석등을 밝혀 두었다.

겨울 산책은 함께 하는 사람의 따스함을 느끼기 위해 한다.

양설은 곽범의 손을 잡고 정원을 한 바퀴 돈 후 방으로 돌아갔다.

 

계집애들은 방마다 불을 밝히고 저마다 궁리한다.

떼어 놓으면 나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계집애들은 함께 있는 한 모든 것으로 경쟁하고, 또 협력하며 다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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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천재의 무림경영 2

 

                프롤로그

 

 

 

곽범은 천재다.

도적에게 부모를 잃은 곽범을 제자로 거둔 사부는 색마다.

사부는 곽범도 색마로 만들어 자신의 무공을 높이는데 이용하려했다.

하지만 곽범은 사부가 가르쳐준 색마의 무공을 전혀 다르게 변형시켜 버렸다.

분노한 사부는 곽범을 죽기 직전까지 구타한 후 떠났다.

스스로 만든 무공 덕분에 목숨을 건진 곽범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사부가 보낸 새장수 이판이란 자가 곽범을 죽여서 새들의 먹이로 쓰려 한 것이다.

기지를 발휘하여 새장수 이판을 죽인 곽범은 그자가 기르는 탁양앵무들을 거둔다.

탁양앵무는 양을 잡아먹을 먹을 정도로 흉포한 새다.

탁양앵무들을 사람처럼 똑똑하게 길러낸 인물은 금왕(禽王) 오신이다. 사왕(四王) 중 한명인 금왕의 제자가 새장수 이판이었다.

탁양앵무들과 함께 산을 내려온 곽범에게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곽범은 그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부자가 될 결심을 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책으로 배우려던 곽범은 양설을 만났다.

낡은 책방 주인인 양설도 고아였다.

양설의 사부는 여자들 중의 제일고수였다.

양설에게 반한 곽범은 무작정 구애를 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양설은 이윽고 체념하듯 곽범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짝이 된 곽범과 양설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부자가 되어갔다.

부가 늘어나고 명성이 높아지자 곽범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사부가 알게 되었다.

곽범은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사부에게 하마터면 양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앗길 뻔했다.

분노하여 사부를 죽인 곽범은 점차 무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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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전생마왕>에서 <무림경영>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무림이 무대이긴 하지만 기업과 장사하는 이야기가 큰 뼈대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전생한 마왕이라 전생마왕이라는 제목을 지은 것인데...

이야기의 전개에 맞춰 <무림경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네이버에서 <무림경영 제1부>로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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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책 파는 소녀

 

 

겁쟁이가 곽범을 데리고 간 곳은 작고 낡은 책방이었다.

쌓여 있는 책들도 헤어지고 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주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책을 보다가 일어섰다.

"책 사게요?”

목소리가 고왔다.

곽범은 갑자기 가슴이 떨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열여섯, 일곱쯤으로 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복숭아 같은 분홍빛 뺨에는 보드라운 솜털이 있었다.

곽범은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에는 헌 책 밖에 없어요. 대신 요새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어요.”

소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찾는 책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찾아 줄게요.”

곽범은 그 순간 새소리들이 정말 싫어졌다.

새소리는 아무리 사람 비슷하게 해도 긁히는 소리나 카랑카랑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그에 비해 소녀의 음성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봄바람 같기도 했다.

올이 아주 가는 그물에라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와 눈이 부딪혔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부자 되는 책을 사려고...”

"책을 사서 부자가 되려고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부끄러워져서 땀이 났다.

왜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다.

소녀가 가까이 와서 좋은 냄새까지 났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69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권에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고 쓰여 있다고...”

말을 하긴 해도 두서가 없다.

“아! 태사공서(太史公書)!”

소녀는 용케 알아들었다.

"사기(史記)라고도 불리는 태사공서의 마지막 편 화식전 말미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 책 있어요?”

살았다 싶어진 곽범이 급히 물었다.

“저희 책방에도 있긴 하지만 전권은 아니에요. 여러 권이 빠졌어요.”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사기를 읽는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을 텐데... ”

소녀의 고개가 귀엽게 갸웃거렸다.

"부자 되는 책 아닌가요?”

곽범은 어리둥절해졌다.

“부는 복에 달린 거예요.”

소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치농고아 가호부, 지혜총명 각수빈, 열자(列子)라는 분이 지은 책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리석고 귀가 먹고 병들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고,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도 가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곽범이 되물었다.

"사기라는 책에 이런 말도 있다고 들었어요.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그러면 사기와 열자의 주장은 반대되는군요.”

소녀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태사공과 열자는 모두 훌륭한 분들이신데 주장이 반대일 리 있겠어요? 그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랐겠지요.”

곽범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상과 상황이 다르다고 말이 달라지다니...

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책을 읽는다고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은 쉽든 어렵든 제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살아요. 그리곤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소녀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는 곽범에게 물었다.

"손님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해요?”

곽범은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책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많아요?”

소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곽범은 말없이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학문은 하나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소녀가 인내하는 기색을 하며 말했다.

"하나를 알려고 공부하면 두 개, 세 개를 모른다는 것만 알게 되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거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대부분이고.”

"그럼 왜 책을 읽고 배우죠?”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고 생각에 깊이를 만들어줘요. 똑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말하더라도 깊이가 더 해져서 가치가 생겨요.”

"아!”

곽범은 감탄했다.

명쾌한 설명이다.

소녀의 말에는 깊이와 더불어 설득력이 있다.

소녀를 존경의 시선으로 보았다.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모르지요. 혹시 손님은 사기를 읽어야 부자가 될 사람인지도요. 복은 엉뚱한데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곽범은 속으로 정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인가요?”

소녀가 웃었다.

"식당 아니고는 어린 여자를 점원으로 안 써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점원이 되고 싶어요.”

소녀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조금 벌린 소녀의 얇고 여린 입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서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빠르게 말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녀는 곽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채용은 안 되겠어요. 손님은 무슨 일을 칠 것 같아 보여요. 책값 없으면 가주세요.”

 

곽범은 쫓겨났다.

낙담해서 객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겁쟁이가 말했다.

"그래도 사기꾼은 아니다. 그 애.”

 

***

 

객점에 도착하자 입맛 돌게 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의 책방에 들르기 전이었다면 별 생각없이 사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소녀의 얼굴만 눈앞에 그려졌다.

소녀와 뺨을 부비고 싶어졌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도 입을 맞추고 싶다.

 

***

 

밤이 되자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들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겁쟁이가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침상에 멍하니 누운 곽범은 새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전에 몰랐던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을 해왔다.

지금은 달랐다.

두 가지 생각이 뒤섞이고 끊이지 않는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녀에 대한 생각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소녀의 책방으로 달려갔다.

 

***

 

책방 문을 열던 소녀는 곽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왜 왔어요?”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곽범은 소녀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밤새 소저만 생각했어요.”

소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곽범은 소녀에게 다가섰다.

소녀가 경계하며 물러섰다.

"물러나요. 소리치겠어요.”

곽범이 말했다.

"책 하나 줘요. 아주 오래되고 값이 싼 걸로.”

소녀가 안도하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애써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무 책이나 사는 건 의미 없어요. 읽고 배울 책을 사야해요.”

곽범은 한쪽에 있는 붓과 벼루, 연적이며 종이 따위를 가리켰다.

"저것들도 살게요.”

"책만 읽을 게 아닌가 봐요.”

소녀는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곽범의 뚱한 말에 소녀는 멈칫했다.

차가운 말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늘해졌다.

"값이 싼 건 시집밖에 없어요. 글자가 적고 얇으니까요. 골라보세요.”

몇 권의 낡은 시집을 꺼낸 소녀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곽범은 눈에 띄는 책 하나를 손에 들었다.

소녀가 물었다.

"보고 고르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나중에 다 사서 읽을 거니까. 지금은 싼 것부터 읽는 거고.”

곽범의 말에 소녀가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언제 돈 벌어요?”

"소저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곽범은 돈을 꺼내며 대꾸했다.

소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만 애처럼 하는가 했더니 행동도 애 같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곽범도 자기 말이 예닐곱 살 어린애 말과 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이후로 사람들과는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범은 산 붓과 벼루 등을 챙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아요. 난 지금도 짝짓기 할 수 있어요.”

소녀가 충격을 받고 물러섰다.

곽범은 마치 이겼다는 듯이 소녀를 한 번 보고는 책방을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겁쟁이가 귀에 대고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짝짓기 할 수 있다고 한 거?”

"그거야 할 수 있겠지. 우린 두 살만 돼도 다 하는 건데. 내 말은 책하고 벼루로 어떻게 돈 벌거냐는 거야.”

"이걸로 금방 돈 못 벌어. 사람들이 책에 뭘 써놓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 인간들이 공들이는 건 뭐든지 좋은 거잖아.”

곽범도 집이 불타기 전에 글을 배웠고 몇 권의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모두 아이를 바르게 훈육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그나마 기억조차 희미했다.

책다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돈 벌어야지. 그래야 새장도 새로 만들 수 있으니까. 어젯밤에도 열여섯 놈이 더 왔단 말이야.”

겁쟁이가 말했다.

"돈 벌 수 있어.”

곽범은 장담했다.

하지만 겁쟁이는 영 못 미더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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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부자가 되는 법

 

 

깊은 밤이었다.

곽범은 침상의 포근함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들리는 새소리가 신경 쓰여 눈을 떴다.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소리였다.

"문 열어봐. 문 만 열면 아무 해코지도 안할게.”

"들어오기만 해봐라. 곽범이 잡아먹고 말 걸?”

겁쟁이가 창호를 사이에 두고 다른 새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말 좀 해줘. 난 원래 떠날 생각이 없었어. 그냥 좀 날고 싶었을 뿐이야.”

"왜? 내가 좋은 방에서 맛있는 거 먹으니까 부러운 거 아니고? 꺼져. 곽범은 내거야.”

새 한 마리가 돌아왔다.

겁쟁이가 못 들어오게 하는 중이었다.

"곽범이 그랬어. 나 외엔 다 귀찮다고. 성가시게 굴면 잡아먹어버린다고 했어.”

겁쟁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야야 목소리 좀 낮춰! 곽범 깨겠다.”

겁쟁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창호 밖의 새가 애원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곽범이 물었다.

겁쟁이가 놀라서 날개를 파닥거렸다.

창호 밖의 새는 달아날 준비를 하며 대답했다.

"냄새 맡고. 나는 냄새 잘 맡아.”

"냄새 못 맡는 새가 어디 있어.”

겁쟁이가 핀잔을 줬다.

곽범은 대부분의 새가 냄새를 잘 못 맡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탁양앵무가 특이한 거다.

"잘 데가 필요해. 먹을 건 내가 알아서 구할 게.”

창호 밖의 앵무가 애원했다.

"조롱이 필요하면 새장수한테 잡힐 거지 여기는 왜 와? 새장수는 먹이도 줄 거야.”

겁쟁이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통하는 무식한 놈하고 어떻게 살아.”

"그건 네 팔자지. 다들 그렇게 살아.”

“개자식!”

겁쟁이의 코웃음에 창호 밖의 앵무가 욕을 했다.

덜컹

곽범이 창을 열었다.

달아날 듯하던 새가 곽범의 표정을 보고는 방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창을 닫기 전에 두 마리가 더 날아왔다.

그놈들은 멀찍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둥지가 필요해. 알을 아무데나 낳을 수가 없잖아.”

그놈은 암놈이었다.

"우리 중에 반은 여자야. 이제 곧 알을 낳아야 한다고.”

"그전에는 알 안 낳았잖아?”

곽범이 물었다.

암놈 하나가 화를 냈다.

"빛도 없고 먹이도 물고기밖에 없는데서 어떻게 알을 낳아?”

그 암놈은 까칠했다.

감히 곽범한테 이렇게 소리친 경우는 그간 없었다.

곽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는 이런 말 없었잖아.”

"그때는.”

암놈이 말하다가 멈칫한 후에 다시 말했다.

"짝짓기 하기 전이었어.”

다른 암놈이 말했다.

"젠장... 막 하늘로 올라가니까 기분이 죽이더라고. 오랫만이잖아. 그렇게 날아본 게. 그래서 막...”

"막 뭐?”

"막 달려들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난리가 아니었어. 신나게 한 바탕했더니 알집이 무거워지더라고.”

곽범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 겁쟁이가 말했다.

"새잖아. 당연한 거야.”

암놈이 새침하게 받았다.

"봄이잖아.”

곽범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화하는 법이며 기르는 법이 적혀있다.

하지만 곽범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동굴에 있을 때는 무공보다 재미난 게 없었다.

"나도 새장수 해야 할까?”

곽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해. 너도 짝짓기 해야지.”

합류한 놈들 중 한 놈이 별 생각없이 말했다.

곽범은 그놈은 노려보았다.

그놈은 움찔해서 눈길을 피했다.

그리곤 겁쟁이한테 곽범이 왜 그러는지를 눈으로 물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이판하고 달라. 사람 같이 살고 싶은 가봐.”

"새 주제에 사람은 무슨.”

암놈 하나가 말하다가 부리를 닫았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 맞네. 같이 말하다 보면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려.”

기막힌 소리였지만 납득이 되었다.

제일 먼저 왔던 새가 곽범에게 애원했다.

"네가 우리 주인해라. 응. 말 잘들을 게. 원하면 알도 나눠줄 수 있어.”

겁쟁이가 생각을 바꿨는지 거들었다.

"품에 날아든 새는 쫓는 법이 아니라더라.”

새가 할 법한 소리도 아니었다.

"알아서 해.”

귀찮아진 곽범은 침대에 가서 누웠다.

허락받은 앵무새들이 깃털 날리지 않게 통통 뛰어와서 침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새들은 겁쟁이가 올라앉았던 장대에 나란히 앉았다.

잠이 깨버린 곽범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사람답게 사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별 거 없었다.

좋은 것으로 가득한 인간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는 것이었다.

예쁜 여자들도 많이 거느리고 싶었다.

 

***

 

아침이 밝은 후에 보니 방안은 새 노린내로 가득했다.

열었다가 대충 닫은 창문으로 십 여 마리가 더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놈 밑에는 새똥이 떨어져 있었다.

곽범이 노려보자 그놈이 변명했다.

"자다가 깜박했어. 새장인줄 알고...”

새들은 겁쟁이만 남고 나머지는 곽범이 방을 나설 때 창밖으로 날아갔다.

 

방을 나서기 전에 몸을 씻고 동경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어 띠로 묶었다.

이년이나 빛을 보지 않고 살아서 피부가 분칠한 듯 하얗다.

피부는 희지만 새들과 싸우면서 철포삼을 익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흰 피부가 올록볼록해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흰 돌이나 옥을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것같다.

아랫층에 내려가니 객점 주인이 보고 말했다.

"마마를 아주 곱게 앓았구만.”

곽범은 맛있는 냄새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주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다른 손님이 먹는 음식을 가리켰다.

"저거 주세요.”

"소고기 라면?”

"예.”

곽범은 빈자리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여러 가지 요리 냄새가 황홀했다.

행복했다.

소고기 라면이 나왔을 때도 냄새부터 실컷 마신 후에 먹었다.

곽범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어쩌면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어요?”

"다른 것도 다 맛있어? 이것도 먹어볼래?”

곽범에게 돈이 있는 줄 아는 주인은 거푸 권했다.

곽범은 주는 대로 먹었다.

겁쟁이도 식탁 위의 음식을 주워 먹었다.

 

***

 

아침을 먹는다는 게 점심 때가 될 때까지 먹어 버렸다.

곽범은 자기도 객점을 가져서 먹고 싶은 건 다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객점을 차릴 돈이 필요했다.

 

시장과 점포를 돌면서 어느 곳에 가든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 갖고 싶었다.

노리개들은 예뻤다.

붉고 푸른 비단 옷들은 매혹적이었다.

호통 치면서 일꾼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니 사람을 부리고 싶었다.

멋진 마차를 타고 가는 여인을 보니 마차 채로 다 가지고 싶었다.

"다 좋고 다 가지고 싶지?”

겁쟁이가 어깨에 올라 귀에 대고 조잘거렸다.

"촌놈인거 티 다나.”

"다 갖고 싶다.”

곽범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둑이나 강도는 싫다며? 그럼 부자가 되면 돼. 아니면 높은 벼슬아치가 되거나.”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머리를 저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곽범은 성 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들이 하는 일과 돈이 오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 중에서도 차림새가 좋고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살폈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한 두 명이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무리를 따라가니 음악소리 흘러나오는 기생집이나 요리집이 나왔다.

밖에서 듣기만 해도 흥겨웠다.

예쁘게 분단장한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애교부리는 콧소리가 가슴을 들끓게 했다.

겁쟁이는 곽범이 기생집에 들어갈까 봐 막았다.

거기 들어가고 나면 가진 돈 홀라당 다 털릴 거라며.

 

사람들은 따라 다녀 보니 그 중 반 이상의 행선지가 책방이었다.

그 바람에 책방 앞을 자꾸 어슬렁거린 꼴이 되었다.

곽범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람이 되려면 배워야 한다.

부자가 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배워야 한다.

책방 앞을 떠나지 않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간혹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들이 보따리를 갖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오는 그 사람들에게 보따리는 없었다.

(아. 가난해서 책을 팔러 나오는 사람이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책을 사서 부자 되는 법과 높은 사람 되는 법을 배우려 했다.

그랬는데 책으로 배웠음에도 가난해져서 책을 파는 사람이 있다.

뭔가 잘못 되었다.

자칫하면 돈만 날려먹을 것 같았다.

책을 읽기만 하면 부자가 되어 즐겁게 살 거라 생각했었다.

그 계획에 먹구름이 끼어버렸다.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곽범은 칼이 눈앞에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되지 못하고 돈만 날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쉽사리 책방 앞을 떠나지 못했다.

부자가 되려면 글을 읽고 배워야 한다.

더 좋은 방법은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책방으로 들어갔다.

"부자 되는 책 있어요?”

나이 지긋한 점원에게 대뜸 물었다.

점원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곽범의 얼굴을 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책은 없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말한 책은 있단다.”

점원의 말에 곽범의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점원은 책 한 권을 골라 펼치더니 한 구절을 읽었다.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곽범은 매우 기뻤다.

옳은 말이라는 걸 듣자마자 알았다.

"그 책을 사고 싶어요.”

"이 책은 69권 중의 마지막 권이야. 전부 다 사야해. 이것만 봐서는 아무 소용없어.”

점원은 책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예요?”

곽범은 책값을 물었다.

"책은 비싸다. 얼마 있는지 말하면 그에 맞춰 책을 주마.”

점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기네.”

곽범은 이마를 찌푸렸다.

점원이 의외라는 듯이 곽범을 다시 보았다.

곽범은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겁쟁이한테 들은 대로라면 이판은 겁탈과 사기, 방화를 밥 먹듯 하던 놈이었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 했다.

사부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기를 키웠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팔 년 넘게 가르친 제자를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생긴 건 촌놈인데 영 촌놈은 아닌 모양이네.”

점원이 웃었다.

"얼마 있어? 싸게 줄 테니 말해봐.”

곽범은 주머니에서 아침에 밥값으로 썼던 만큼의 돈을 꺼냈다.

"겨우? 이거면 한 권도 못줘.”

점원이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가 곽범의 귀에 대고 제제거렸다.

"그냥 가자. 허여멀건 놈들이 말은 더 번지르르해. 넌 저놈을 말로 못 이겨.”

곽범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돌아 나왔다.

점원 뒤에서 돈 더 가지고 오라고 소리쳤다.

겁쟁이가 말했다.

"여기 말고 다른데도 있어. 전에 지나가면서 한 번 본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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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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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사람이구나.

 

 

봄이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산비탈은 진달래와 철쭉이 뒤섞여서 울긋불긋했다.

숲을 벗어나 길로 들어섰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갈림길에는 인적이 없다.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풀을 따라가며 뜯었다.

곽범은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눈길이 자꾸만 십지암쪽으로 향했다.

팔년을 산 곳이다.

정이 들었다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까?”

여전히 겁이 나서 새장으로 못 돌아가는 겁쟁이가 새소리로 물었다.

"도망 안가. 절대 안가.”

즉답이 없자 겁쟁이는 거듭 다짐했다.

곽범은 허락하고 길가의 바위에 앉았다.

산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사부를 따라 왔던 길이다.

그 길 아주 먼 어디에는 자신이 태어난 집도 있다.

물기 없는 바람과 온화한 햇살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본 적 없는 낮잠이 밀려왔다.

봄풀 냄새와 여린 나뭇잎이 뿜어내는 초목의 숨결이 폐부를 씻었다.

새들도 햇살을 즐겼다.

새장 안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햇볕을 쬐려 다투었다.

"나는 사람이구나.”

곽범은 짧아진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을 보며 생각했다.

새들과 달리 자신의 팔에는 깃털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경서의 내용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꾸지람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났다.

몸은 자라서 어른처럼 커졌는데, 그간의 날들은 하룻밤의 꿈인 듯 여겨졌다.

곽범은 바위에서 일어나 새장 문을 열었다.

"가라.”

"어디로?”

새 한 마리가 뚱하게 물었다.

"가고 싶은 대로.”

"집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다른 새가 물었다.

곽범은 공력을 돋우어 새장을 뜯어버렸다.

콰드득

철사를 꼬아 만든 새장이 짚이나 왕골인 듯 찢어졌다.

새들은 곽범이 새장을 우그러뜨려 땅에 묻는 동안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어떤 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동동 뛰었다.

"새장이 얼마나 좋은데. 우리는 새장 없으면 잠도 못자.”

보통의 새들에게 새장은 가두는 도구다.

동시에 천적들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다.

그러나 범도 뜯어먹는 탁양앵무들에게는 천적이 없다.

새장 없으면 못 잔다는 건 침대 없으면 못 잔다는 투정과 같은 소리다.

"조마조마해서 잠이 안와.”

한데서 어떻게 잘 수가 있어?”

볼 매인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새가 불만인 건 아니었다.

"조금만 날고 올게.”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눈치 보던 놈들 여럿이 뒤따랐다.

그들의 신나는 비행이 다른 새들을 자극했다.

후두둑 쏴아

본능에 이끌린 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곽범은 겁쟁이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새장이 없으니 짐도 없다.

품에는 금왕경과 돈주머니만 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은 제법 거뭇하다.

커진 몸에 걸친 옷은 낡고 깡동하다.

영락없는 미친 사람 행색이다.

"다 어디 갔어?”

겁쟁이가 돌아와서 물었다.

"떠났다.”

"잡아먹은 건 아니지?”

겁쟁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밖에는 먹을 거 많아.”

"... 난 또.”

겁쟁이가 안도하며 정찰 보고를 했다.

거기엔 누가 살고 있었어. 빡빡머리 중이야.”

곽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부다.

사부가 돌아와 있다.

사부는 올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었다.

진짜 중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십지암에 머물 때는 승복을 입은 중이었다.

사부에게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먹이고 입히고 무공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죽이려 했다.

사부와 제자로서의 인연은 그때 끝이 났다.

겁쟁이가 주위를 돌면서 물었다.

"나도 가야해?”

".”

"난 같이 가면 안 돼?”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쟁이는 한 번 새장을 나온 후 계속 밖에 머물렀다.

곽범의 비위를 맞추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들었다.

겁쟁이가 다시 물었다.

"따라가면 나 잡아먹을 거야?”

"금수도 정이 있나?”

곽범은 피식 웃었다.

마음이 한결 같기는 금수가 사람보다 나을 걸. 원앙이나 기러기는 평생 짝을 배신하지 않아.”

겁쟁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같이 가자. 넌 세상 물정도 모르잖아. 난 잘 알아.”

뻐기는 겁쟁이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곽범은 순순히 인정했다.

겁쟁이가 매우 좋아했다.

높이 날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앞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와서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수다도 떨었다.

곽범은 걷는 것이 좋았다.

오랫동안 걷지 못했다가 땅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더 좋았다.

 

***

 

큰 길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겁쟁이는 새소리로만 말했다.

곽범은 거지꼴이다.

사람들은 새 한 마리 데리고 있는 소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범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마다 살펴보았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곽범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뭉클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도 그들 중 한명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계속 걸어서 저녁 무렵에 하호성에 도착했다.

곽범은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묻혀서 성문을 지났다.

겁쟁이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옷부터 사서 입어. 거지들이 동무하자 들겠다.”

"어디로 가야하지?”

"저 앞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포목하고 옷 파는 상회들이 있어.”

겁쟁이는 하호성을 잘 알았다.

곽범은 겁쟁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옷 사시게?”

점원이 곽범의 행색을 못마땅해 하며 물었다.

".”

"돈은 있나?”

곽범은 돈이 든 주머니를 툭 쳐서 소리를 냈다.

점원은 곽범의 키에 맞춰서 잿빛 장포를 건네주었다.

"이거면 맞을 것 같은데.”

겁쟁이가 새소리로 말했다.

"얼만지 물어봐.”

 

***

 

곽범은 겁쟁이의 도움으로 바가지를 쓰지 않고 신발도 샀다.

입고 있던 작아진 옷은 팔아서 빗과 거울, 머리에 두를 건을 샀다.

그리고는 객점을 찾아갔다.

가로에 있는 주루와 객점에서 풍기는 음식내음이 곽범의 혼을 뺐다.

그러나 객점에 들어가서는 요리 이름을 몰라서 만두만 시켜 먹었다.

황홀해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객실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인간 세상에 온통 좋은 것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는 곽범이 탁자에 놓은 돈주머니를 펼쳐서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아껴 쓰면 세 달은 버티겠다. 다 떨어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해.”

"어떻게?”

묻고는 웃었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새한테 돈 버는 방법을 묻는 건 우스웠다.

겁쟁이가 돈주머니를 조이고 침대로 나아왔다.

"방법이야 많아. 예전에 이판이 했던 것처럼 새를 파는 게 제일 좋고.”

이판은 곽범에게 죽은 새장수의 이름이었다.

"수입이 괜찮아. 하루 한 두 마리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어. 우리처럼 예쁜 새는 비싸서 부자들만 사가거든.”

"이판이 너희들을 팔았어?”

"당연히 팔았지. 새장수인데.”

팔려갔었는데 어떻게 이판과 계속 함께 있었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팔려가서 좀 놀다가 죽은 척하면 묻거나 갖다버리거든. 그때 이판에게 다시 돌아가는 거야. 금방 돌아가야 할 때는 새장을 부수면 되고...”

곽범은 그림이 그려졌다.

시장에서 새를 팔면 그 새가 돌아오고,

다시 팔고 다시 돌아온다.

그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사기네.”

"그게 싫으면 내가 다른 새들 잡아오면 돼. 넌 그걸 팔고. 다른 새들은 밤눈이 어두워. 숲에 들어가서 움켜쥐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해.”

곽범은 딱히 내키지 않았다.

새장수가 했던 짓을 따라하는 것 같아 꺼리낌이 있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이가 있으면 새 점을 치는 것도 괜찮은데. 어려서 수입이 적을 거야.”

"그런 거 말고는?”

겁쟁이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기 부잣집들 몇 군데 알아. 밤에 몰래가서 패물 같은 거 슬쩍 가져오는 것도 괜찮아. 갔다 올까?”

"그건 도둑질!”

"새한테 도둑질이 어디 있어? 보이면 따먹고 아무거나 가져와서 둥지에 깔고 하는 거지.”

곽범은 침대에서 몇 번 뒹굴고 일어나서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평평한 마루다.

겁쟁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기억났다. 어릴 때 바닥이 시원해서 뒹굴다가 옷 더러워진다고 혼났다.”

"그래서?”

"이렇게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방에서 살고 깨끗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못하면 혼나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거야.”

"혼나야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그러면 나도 사람이다. 얼마나 혼이 많이 났는데.”

겁쟁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투였다.

"뭐할지 천천히 찾아보겠다는 말이야.”

곽범의 말에 겁쟁이는 한숨을 쉬는 시늉을 했다.

"넌 어느 쪽이야?”

"뭐가?”

"네가 좋아하는 건 음식이야 여자야 돈이야? 아니면 좋은 집이야?”

곽범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이판은 여자를 제일 좋아했어.”

겁쟁이가 말했다.

"금왕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새장수였다더라. 새는 돈 많고 예쁜 여자들이 주로 사가거든. 여자들은 예쁜 새하고 놀면 더 예뻐 보인다는 걸 알아.”

"그렇구나! 예쁜 여자들을 매일 보겠다.”

곽범의 음성이 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길이 좁아졌다.

겁쟁이는 곽범의 얼굴을 가까이 와서 보며 말했다.

"이판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오면 한 쌍 중에서 꼭 한 마리만 팔았다더라. 그런 후에 밤에 남은 한 마리만 들고 나가는 거야. 짝을 부르면서 그 새가 울면 팔려간 새가 듣고 같이 울어.”

"! 그러면 그 새를 몰래 찾아오는구나.”

"... 바보야. 그럴 거면 예쁜 여자한테만 한 마리를 팔 이유가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여자가 이판의 짝짓기 상대가 되는 거야.”

겁쟁이가 말을 이었다.

"이판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가 있는 방에서 먼 곳에 불을 질러. 사람들이 불 끄려 몰려갈 때 이판은 그 여자를 붙잡아서 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짝짓기를 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데, 이판은 그때 여자가 제일 예뻐 보인다더라.”

"그거 겁탈이다.”

곽범은 사부를 만나 따라가기 전에 거리를 떠돌았다.

그때 거지들한테 여자가 겁탈 당하는 것도 봤다.

겁쟁이가 말했다.

"이판은 새라니까. 새한테 겁탈이 어디 있어. 마음에 들면 달려들어서 붙잡아 끝장 보는 거지. 놓치면 병신이고.”

여자, 겁탈, 예쁜 미녀.

곽범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저었다.

"난 사람이야. ... 짝짓기에는 그 이상 뭔가 있을 것 같아.”

"있지. 암컷이 알 낳고 새끼 까는 거. 결국 새끼 까는 거면서 인간처럼 별스럽게 구는 것도 없어. 그냥 한 번 하고 알 낳으면 되는 건데.”

"난 별스러워야겠다.”

곽범이 단언했다.

"짝짓기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야. 아까 길에서도 예쁜 애들한테 달려들어서 막 만지고 짝짓기 하고 싶었어.”

"내숭이다.”

겁쟁이는 포르르 날아올라 옷을 거는 장대에 내려앉았다.

평평한 땅은 움켜잡을 것이 없어서 불편했다.

곽범은 겁쟁이와 자기의 차이를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겁쟁이는 금수이고 곽범 자신은 사람이다.

남녀의 차이와 이성에 대해서도 배운 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안다.

옳고 그름을 모두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아는 게 당연했다.

시비를 가리는 것도 이성에 대한 것처럼 본능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이 할 짓과 아닌 것이 구분되었다.

더불어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 세상으로 돌아오니 기억났다.

"다듬어야 옥도 그릇이 되고 배워야 사람은 도리를 알게 된다.”

곽범은 자기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숲을 배웠다.

이제는 인간들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한다.

인간들의 세상을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모래나 바위 위에 누워 자도 불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평한 바위가 편했어도 침상의 부드러운 이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동물들의 고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오늘 먹은 만두 한조각보다 못했다.

길에서 본 여자들은 산 중의 어떤 꽃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인간 세상은 무한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곽범은 이 좋은 것을 왜 안 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몸속에 공력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끓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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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신공을 완성하다.

 

 

곽범은 열여섯 살이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도적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혼자 살아남았다.

외갓집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2년 동안 거지로 살았다.

그러다가 사부를 만나 산으로 왔다.

글은 일찍 배워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 세상의 이치 같은 건 몰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기 때문이다.

곽범에게 인의도덕이며 군자 같은 말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세상과 연결되는 점이 없었다.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것도 밥 먹기 전에 손 씻어야 한다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는 건 부모가 죽었으니 뜬 구름 잡는 소리였다.

곽범이 겪은 2년의 세상살이와 8년의 산중 생활은 똑 같았다.

사람도 짐승이고 짐승도 짐승이다.

도리를 가져다 따질 대상이 아니다.

그냥 서로가 할 일을 하는 존재들이다.

사냥을 하거나 당하거나,

부리거나 부림을 당하거나.

곽범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도리였다.

무공은 그런 도리들 중에서도 높은 도리다.

말보다 느끼고 깨닫는 게 더 많다.

오히려 말하려면 더 어렵고 힘들다.

 

새장 아래에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금왕경(禽王經)이라는 책이 나왔다.

금왕(禽王) 오신,

날짐승들의 왕이라 불리던 자가 남긴 책이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리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새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법이 적혀 있는 게 아니다.

새들에게 외공(外功)을 가르치는 법까지 있었다.

특별히 조제한 약을 먹이고 훈련시킨다.

그러면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놀랍도록 단단해진다.

탁양앵무라는 새들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 이유다.

새의 말을 알아듣는 법도 있었다.

새들에게 사람 말을 가르칠 수도 있다.

금왕경의 내용은 읽을수록 신기했다.

또 이상하기도 했다.

곽범이 보기에 금왕 오신의 무공은 형편없었다.

금왕경에는 철포삼(鐵袍衫)의 수련비결이 적혀 있었다.

철포삼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의 일종이다.

외공들 중에서도 손을 꼽는 절기다.

철포삼 수련비결 뒤에는 금왕 오신의 주석이 달려있다.

그 주석에 오류가 상당했다.

곽범은 머리가 명료해진 덕분에 오류들을 알아차렸다.

주석의 수준으로 보아 금왕 오신의 철포삼 성취는 6성 정도에 그쳤다.

곽범은 철포삼의 구결과 미흡한 주석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런 후에 6성에 그친 금왕의 이해를 확장시켰다.

칠주야에 거쳐 노력한 끝에 철포삼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었다.

 

***

 

"우린 물새가 아니야.”

새장에서 물고기를 쪼던 새 한마리가 들으라는 듯이 제제 거렸다.

"물고기만 먹고는 못 산다고.”

곽범이 말했다.

"나도 그래.”

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새 고기가 맛있었어.”

곽범은 입맛을 다셨다.

새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새장 밖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곽범과 새들에게 제공해온 겁쟁이는 더 겁을 냈다.

곽범이 새장 열기 귀찮아서 자기부터 먹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곽범은 겁쟁이에게 도망가면 새장 속에 있는 두 마리를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겁쟁이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추적당하다가 죽을 게 뻔했다.

"난 물고기 좋아해.”

새장 속의 어떤 놈이 큰 소리로 말하며 부리로 생선의 머리를 쪼았다.

새들은 여섯 살 때의 곽범 같았다.

천방지축이고 아는 것 같으면서 물어보면 바보다.

그러면서도 입은 주워들은 소리를 지껄이느라 조잘거렸다.

그리고 흉악했다.

세상에 못 먹는 것이 없었다.

풀과 열매는 물론이고 벌레와 고기를 먹었다.

심지어 소화를 돕기 위해서 돌도 쪼아 먹었다.

탁양앵무는 이름 그대로 양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금왕이 번식시키고 훈련시켜서 천적이 없는 포식자가 되었다.

곽범은 철포삼을 정리하느라 묻지 못했던 걸 물었다.

"내가 죽인 그놈이 금왕이야?”

"금왕은 무슨.”

"금왕이 살았으면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자식은 어쩌다가 금왕한테 걸려서 제자가 된 놈이야.”

"철포삼을 익힌 것 같지 않던데.”

"크하하하하. 그놈이 철포삼을 익혀?”

“이판은 인내심이 없었어. 십 년을 단련해도 부족한 철포삼을 무슨 재주로 익혀.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들이 의기양양해서 재잘거렸다.

새장수의 이름은 이판이었다.

"그래도 이판은 새소리를 잘 알아들었어. 아마 스무 가지도 넘게 알았을 걸? 그 때문에 금왕의 제자가 됐지만.”

"너희들 철포삼 별거 아니잖아. 입에 넣고 씹으니 툭 터지던데.”

곽범이 새들을 자극했다.

한 마리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대답했다.

"사람 턱 힘이 얼마나 센데. 양쪽 어깨 힘보다 더 셀 때도 있어.”

"나한테 씹히고도 터지지 않을 놈 누가 있어?”

새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 시험하는 거 아니야.”

곽범은 새장 문을 열었다.

새들은 의아해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들의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동굴 천장에 나있는 구멍으로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새들은 지난 칠 일동안 곽범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았다.

곽범은 하루 두 시간 정도 동굴 벽을 옆으로도 거꾸로도 달렸다.

날래기가 자신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섣불리 달아나려 했다가는 잡힐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곽범 뱃속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곽범은 새를 먹을 줄 아는 놈이었다.

새를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새를 깃털 채 불에 그슬려 먹는다.

그슬린 새의 깃털은 양념이 되어 새고기에 맛을 더한다.

정말 좋아하는 인간들 중에는 털 채로 새를 씹어 먹고 찌꺼기만 뱉어버린다.

곽범은 그것도 하지 않고 다 삼키는 놈이다.

새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겁쟁이는 곽범의 겨드랑이 근처로 숨었다.

"뭐하자는 거야?”

마침내 새 한 마리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시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 했잖아.”

곽범은 옷을 벗어서 바위 위에 올렸다.

"나를 쪼아봐.”

"헹. 그래놓고는 쪼았다고 잡아먹으려고.”

“안 속아. 안속는다구.”

"쓸모없네. 다 잡아먹을까?”

곽범이 중얼거렸다.

순간 한 마리가 뛰쳐 나오며 외쳤다.

"내가 할게.”

새떼가 와르르 쏟아져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새의 부리와 발톱을 느껴지면 공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쪼면 받아서 튕겼다.

백 여 마리나 되는 새들이 전신에 달라붙고 튕겨나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부분은 살이 뚫리고 피가 쏟았다.

새들은 한동안 고기를 못 먹었었다.

피 맛과 생살에 흥분한 새들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고통으로 숨이 멎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곽범은 버텼다.

대처가 늦어서 상처를 입은 부분에는 더 많은 공력을 보내 치료했다.

곽범의 철포삼은 공력을 바탕으로 한 철포삼이었다.

철포삼은 겉을 단련하여 구리로 된 내장과 쇠로 된 뼈를 가진다는 외공이다.

그 철포삼을 뒤집어서 공력을 겉으로 보냈다.

피부를 강화하며 공력의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했다.

시간이 지나며 곽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부리가 닿기 전에 먼저 느끼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면 곽범의 공력은 피부가 부리에 찍히지 않게 단단해졌다.

단단해지자마자 새의 부리를 튕겨냈다.

다만 피는 많이 흘렸고 공력은 소모가 심했다.

"그만.”

곽범이 선언했다.

대부분의 새들이 멈추고 물러났다.

두 마리만은 비어있는 곽범의 가슴과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 맛에 눈이 까뒤집힌 것이다.

곽범은 양손으로 한 마리씩 잡아서 차례로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도독. 팍팍.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새들은 바닥에 내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공포에 떨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새들은 조용히 새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좌정하여 자기 몸을 관조하는 곽범은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철포삼을 외공 아닌 내공으로 펼치다 거두었다.

전신이 거문고의 현처럼 통통 튕겨지고 있었다.

몸 곳곳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같았다.

몸속의 공력은 이제 길을 아는 것처럼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치유와 반탄과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달려들어 쫀 곳을 또 쪼고 할퀴는 흉악한 새들에 공력이 반응한 것이다.

새들의 공격은 그쳤지만 공력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몸속의 새떼라도 된 것처럼 날 뛰었다.

심법을 운용하여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곽범은 자기의 몸이 더 작아지고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굴 벽을 달려보니 공력을 더 적게 쓰면서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내공과 외공이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

 

새들을 이용한 수련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곽범이 새들에게 지시하는 말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새들은 그 말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곽범이 놀 때는 무슨 말을 하든 괜찮았다.

곽범은 권각법도 새들을 이용해서 연습했다.

그가 배운 것은 다리 힘을 기르고 팔 힘을 기르는 매우 기본적인 훈련 방법뿐이었다.

공방은 없었다.

곽범은 새들이 공격하는 것을 손발로 막는 훈련을 했다.

아무 격식도 없었으나 하는 중에 점차 길이 생겼다.

동작에 따라서 공력이 이동한다.

공력에 따라 동작에 힘이 가해진다.

그것을 느낀 후에는 저절로 공방의 길이 만들어졌다.

금왕경을 읽으면서 새소리를 알아듣는 법도 배웠다.

곽범은 자기가 이전에도 새소리는 좀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2년 동안 동굴을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간 세상이나 숲이나 동굴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새들은 두 번 털갈이를 하면서 울긋불긋하던 색깔이 하얀 물새처럼 되었다.

어떤 놈은 물고기만 먹으니 물새가 되어버렸다고 투덜거리며 물새처럼 끼룩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동굴이 좁고 갑갑했다.

2년 전 봉우리 근처 샘물에서 보았던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숲을 달리며 곰의 노랑내와 딸기의 새콤한 맛이 그리워졌다.

고운 꽃도 보고 싶고, 보드라운 것도 만지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맡고 싶었다.

곽범은 새장을 지고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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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피와 살을 먹는 새

 

 

곽범은 누운 채 도끼를 들었다.

힘을 다해 새장수의 가슴을 찍었다.

퍼석! 퍽!

도끼는 급히 날아든 새들과 부딪혀 빗나갔다.

새들의 몸뚱이가 쇳덩이 같다.

믿기 힘든 단단함이다.

"뼈도 남기지 말고 쪼아 먹어.”

새장수가 중얼거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손으로 눈과 귀를 가렸다.

새들의 부리는 송곳같이 날카로웠다.

쪼는 대로 살이 파이고 피가 튀었다.

그때마다 까무라칠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나마 부상은 대부분 치유된 상태다.

새장수의 공력을 끌어들여 신공을 운용한 덕분이다.

주로 다친 곳에 공력을 보냈었다.

곽범의 공력이 가는 곳을 새장수의 고강한 공력이 따라왔었다.

새장수의 공력은 곽범의 공력을 흉내 내며 상처를 치유했다.

곽범의 몸에는 일시적이지만 새장수의 거의 전 공력이 들어와 있다.

그 공력들은 곽범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곽범은 그 힘을 빌어 껑충 뛰어 올랐다.

도망 가야한다.

이 일대의 길은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새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곽범은 팔다리가 둘씩 밖에 없다.

새들은 어찌 보면 새장수보다 더 똑똑했다.

곽범의 온몸에 달라붙어 쪼고, 내동댕이치고, 바닥에 굴렸다.

곽범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몸은 삽시에 피를 내뿜고 있었다.

"눈알을 빼버려. 눈알을. 고 새까맣고 교활한 눈알부터.”

새장수가 소리치고 또 피를 토했다.

곽범은 공력을 피부로 돌려서 새들의 부리를 견디려했다.

무리였다.

이제 겨우 다친 곳으로 공력을 보내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공력은 피부를 단단하게 하기 보다는 상처를 치유하는 쪽으로 저절로 쓰였다.

새들이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상처에 부리를 박고 피를 마시는 놈도 있다.

곽범은 고통보다도 미물들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더 견딜 수 없었다.

목을 쪼으려 파고드는 새를 턱으로 튕겨내었다.

튕겨나가던 새의 날개죽지가 입에 닿았다.

곽범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새를 물어버렸다.

새의 몸뚱이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턱에 힘을 주니 입안에서 퍼석 터져버렸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날카로운 발톱이 입천장과 목을 긁었다.

개의치 않았다.

비어있던 위장이 든든해졌다.

곽범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한손으로 어깨에 붙어 살을 뜯는 새를 잡아챘다.

그놈을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은 후 삼켜 버렸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막히지는 않았다.

네 마리를 연거푸 잡아먹었다.

새는 사람을 먹고 사람은 새를 먹는 혈전이 반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마침내 곽범이 이겼다.

열일곱 마리의 새를 문자 그대로 털도 뽑지 않고 씹어 삼켰을 때였다.

곽범은 도끼날을 새장수의 목에 걸치는데 성공했다.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정말 단단하다.

도끼에 찍혀도 다치지 않는다.

그 새들을 곽범은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걸 본 새장수의 마음은 탐욕으로 들끓었다.

곽범의 무지막지한 힘이 방금 경험했던 신공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 힘이 자기의 공력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새장으로.”

곽범은 피가 흐르는 손으로 열여덟 마리째 새를 잡으며 말했다.

"새장으로.”

피를 뒤집어 쓴 곽범의 모습에 질린 새장수가 급히 말했다.

파다닥 쏴아

새들은 새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새들의 몸은 곽범의 피에 젖어 붉었다.

날개 짓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곽범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새장을 걸어 잠궜다.

새장에는 백 마리 정도의 새가 들어있다.

새들은 곽범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날개짓을 했다.

"비급 있지요?”

새장을 등지고 새장수에게 물었다.

"무슨 비급? 나는 무공이 약해. 비급 갈은 거 없어.”

"이 새들을 훈련시킨 비급!”

"비급 없다. 거짓말인 거 같으면 내 몸을 뒤져봐.”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가만있으면 너도 출혈이 심해서 죽어. 나한테 약이 있다.”

곽범은 새장수에게 걸어갔다.

걸음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새장수가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이 약이 부리에 쪼인 상처를...”

곽범은 도끼로 새장수의 목을 찍었다.

텅텅

잘린 머리가 몇 번 튀었다가 멈췄다.

머리를 튕겨낸 피가 여전히 뛰는 심장의 힘으로 추욱, 추욱 뿜어졌다.

"필요 없어요.”

곽범은 새장수의 손에 들린 파란 약병을 옆에 두고 품을 뒤졌다.

약병은 두 개가 더 나왔다.

하나는 노란 약병이고 하는 붉었다.

옆구리에는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호패와 함께 걸려 있었다.

새들은 새장에서 날뛰며 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곽범이 새장 문을 새들이 열수 없도록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먹지 못할 큰 짐승을 잡았다.

곽범은 곰도 잡고 표범도 잡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지금처럼 큰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화가 몹시 났다.

사부에 대한 원한이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새장수를 보내 시체를 처리하게 한 걸 보면 사부는 다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하늘에 빠질 뻔 한 후로 명징해진 곽범의 사고가 말해주고 있었다.

 

곽범은 주방에 있는 물로 몸의 피를 씻어냈다.

새가 쪼았던 상처에서는 새살이 차오르고 있다.

올록볼록 작은 밥풀떼기꽃이 새겨진 것 같았다.

새가 쫄 때마다 공력을 보내서 치료했었다.

그러다보니 경맥들이 몰라보게 넓어졌다.

내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근육과 피부가 회복되었다.

(사부는 이렇게 쉬운 것도 내가 빨리 못 깨달아서 화난 것일까?)

곽범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산과 숲은 곽범 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가 찾아오지 못할 곳이 있다면 바로 이 산속뿐이다.

또 무공에 대한 이해가 터져 나와 정리하고 다듬을 장소도 필요했다.

곽범은 새장수의 새장과 그의 봇짐을 지고 이전에 발견했던 숲속 동굴로 갔다.

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는 곳이었다.

 

***

 

곽범은 숲속에 있는 모든 동굴은 알고 있다.

그 중 가장 은밀한 동굴을 찾아갔다.

그 동굴은 숲속을 흐르는 계곡물이 크게 휘도는 곳에 있었다.

입구가 그늘져서 물 건너편에서 보면 작은 바위처럼 보였다.

동굴 안은 제법 넓고 깊다.

계곡물 한 가닥이 동굴을 통과한다.

모래톱과 마른 땅도 있다.

빛은 오전에만 천장의 좁은 바위틈 새로 잠시 들어왔다.

곽범은 바위를 가져와 동굴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지난 8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른다.

단지 사부가 와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가 좋았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혼자서 절벽을 타고 숲을 뛰어 다녔다.

수련이었지만 즐거운 놀이기도 하였다.

짐승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돌을 쌓아서 작은 성벽도 만들면서 노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맑은 물에 비치던 햇빛이 마지막 바위에 의해서 막혔다.

동굴 속은 손바닥만한 구멍으로 들어온 빛만 남았다.

전에 동굴 천장 위쪽에 가보았었다.

매우 가팔라서 날쌘 곽범도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쌓여 있었다.

바위들 틈새가 조금 열려 있어서 빛을 들여보낸다.

아늑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서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운기행공을 한 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햇빛이 들던 곳으로 달빛이 들었다.

새들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있었다.

곽범은 심법을 운용해서 운기조식을 했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새장수한테 뺏은 공력의 양은 줄어들었다.

대신 앙금처럼 정순한 공력은 기해혈에 쌓였다.

그 양이 상당했다.

지난 8년 간 혼자 쌓은 것보다 배 이상 많은 것 같다.

양만 많은 게 아니다.

곽범은 자신의 공력이 더 정순해지는 걸 느꼈다.

어둠이 마냥 어둡지 않았다.

눈으로 기운을 돌리면 시력이 좋아진다.

달빛이 닿지 않은 곳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새들은 조용히 있었다.

밤새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반짝이는 눈을 보면 여타 새들처럼 밤눈이 어두운 것 같지도 않았다.

곽범은 새장 앞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누가 말할 줄 알아?”

새들 중 한마리가 흠칫한다.

곽범은 어둠 속에서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새장의 문을 걸어잠근 걸쇠를 손으로 폈다.

문을 열고 냉큼 손을 넣어 그놈을 잡아 꺼냈다.

예상과는 달리 새들은 곽범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잡힌 새도 얌전했다.

곽범은 새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 말할 줄 알아.”

새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꾸엑!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잡힌 새가 비명처럼 외쳤다.

"난 아니야. 내가 한 말 아니야.”

새장이 조용해졌다.

"새를 꾈 때 새소리로 속이는데 사람 소리에 속는 새도 있네.”

곽범은 손에 든 새를 노려보았다.

새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외면했다.

다 말할 줄 안다고 외친 건 곽범이었다.

"저 바보.”

새장 속에서 어떤 놈이 외쳤다.

"너희들 무슨 새야?”

곽범이 물었다.

잡혀 있는 새가 즉시 대답했다.

"탁양앵무.”

양을 쪼는 앵무새라는 뜻이다.

"양 아니라 범도 잡아먹겠던 걸.”

"우린 범도 잡아먹어. 외공을 익혔거든.”

새장에서 어떤 새가 말했다.

"쓸모도 많아. 아주 많아.”

곽범은 코웃음을 쳤다.

"맛도 괜찮더라.”

앵무새들이 조용히 부리를 다물었다.

스무 마리에 가까운 새들이 털도 뽑히지 않은 상태로 곽범에게 잡아먹혔다.

"살려줘.”

새장에 있던 한 마리가 말했다.

"뭐든지 다 할게.”

"대장이 누구야?”

"네가 먹었어. 제일 먼저.”

"그것 잘 됐네.”

곽범은 새들을 훑어보았다.

"배고프면 그 바보 먹어도 돼.”

새장에서 누가 말했다.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비명을 질렀다.

"절대 안돼.”

"왜?”

"난 한입 거리밖에 안 돼. 먹으려면 저 자식도 같이 먹어.”

서로를 비난하는 새소리가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왔다.

곽범이 물었다.

"비급은 어디 있어?”

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새가 일제히 새장 바닥을 날개로 가리켰다.

“하하하!”

곽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들 중 한마리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금수가 하는 게 다 이렇지 뭐.”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급하게 말했다.

"조심해. 재들 발톱에 독 묻히고 기다리는 중이야.”

"배신자!”

새소리가 다시 귀를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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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성공한 사냥

 

 

“도철영감한테 배운 무공이 뭔지 말해봐.”

새장수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럼 안 아프게 죽여줄게. 아니면 새들이 살아있는 채로 네 살점을 뜯어먹을 거야.”

오싹한 협박이 이어졌다.

곽범은 오래전 사부로부터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아무에게도 이 무공을 말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라.

-무공을 줬으면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라.

-죽더라도 내 말을 어겨선 안 된다.

 

곽범은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무공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사부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돼. 난 고문을 길게 할 인내심이 없어.”

새장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철영감 무공이 탐나긴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인내심이 늘어나지는 않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말해봐.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더 안 물으마.”

새장수가 애원했다.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에 대한 의리나 두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고 손을 썼다.

사부의 은혜는 죽음과 상쇄되었다.

그러나 곽범은 입을 다물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은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기 싫었다.

아픈 것보다 죽는 건 비교할 수도 없이 괴로울 것이다.

"그 눈깔. 새까만 그건 없어도 되겠네.”

새장수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파다닥!

두 마리 새가 벼락같이 곽범의 눈으로 달려들었다.

“안돼!”

곽범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타탁! 푹!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새장수의 발이 곽범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새들은 부리로 새장수의 발등을 쪼았다가 날아올랐다.

"것봐. 너도 눈 빠지는 건 싫어하잖아.”

새 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눈두덩에 문질렀다.

"말할게요.”

곽범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어.”

새장수가 발을 치우며 씨익 웃었다.

"뻔한 걸 가지고 뭘 어렵게 가? 그냥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그런 후에 볼일 보면 되는 거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말할 힘도 없어요.”

곽범이 힘없이 말했다.

"그걸 생각 못했네.”

새장수가 자기 이마를 툭 쳤다.

"내가 널 위해 밥을 지을 순 없고, 술과 새 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걸 먹을래?”

곽범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술!”

"이놈 남자네.”

새장수가 껄껄 웃었다.

"나라서 주는 거지 아무나 못 주는 술이야. 그러니 알고 마셔.”

 

곽범은 새장수가 건네준 술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날짐승 냄새가 밴 술이 입안을 태우며 뱃속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몸에 열기가 돌았다.

통증은 가시고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그냥 자면 안 되지. 잠은 조금 있다가 푹 자고, 먹은 만큼 토해내야지. 자 말해봐.”

새장수가 곽범의 뺨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곽범은 귀찮은 듯이 그의 손을 밀쳤다.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해요. 길게 들이쉬기, 길게 내쉬기.”

새장수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래. 내공심법이구나. 이름은 뭐냐?”

"곽범.”

"이 바보 자식, 네 이름 말고 심법 이름.”

"이름 없어요. 아는 게 그것뿐인데 이름 지어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곽범은 술기운이 오른 입으로 중얼거렸다.

"도철영감이 무공 이름은 숨긴 모양이군. 그러고도 남을 영감이지. 계속 말해.”

"오래 참아요. 숨이 막혀 죽을 만큼 참았다가 쉬는 걸 계속하면 가슴에서 구멍이 뻥 뚫려요. 진짜 구멍은 아닌데, 그 구멍으로 숨을 쉬면 숨을 쉬는 듯 마는듯해요.”

"바로 그거구나!”

새장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구멍이 없으면 허사예요. 구멍을 뚫을 때는 밀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죽을 듯 말 듯한 상황을 넘나들어야 해요. 그래도 안 죽어요. 정신은 죽음으로 넘어가면 몸이 생으로 돌아오거든요.”

곽범의 졸음 묻은 말이 이어졌다.

“많이 해야 돼요. 자꾸 하면 구멍이 뚫려요. 그 구멍을 뚫고 나서 숨을 쉬면 기운이 기해혈에 쌓이기 시작해요. 아. 그때까지는 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 물하고 생콩만 먹어야 해요. 아니면 죽는대요. 단계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 따로 있는데...”

말소리가 줄어들다가 끊어졌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새장수는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새장수는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곽범을 죽이지 못했다.

도철은 무림에서 가장 흉악한 자들인 사흉신(四凶神) 중 한명이다.

도철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도철과 손을 섞는 자는 공력을 모두 빼앗기고 죽는다.

신화 속의 탐욕스러운 악귀 도철이나 마찬가지다.

도철의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세상을 횡행할 수 있다.

곽범을 살려둔 이유다.

그렇다고 죽이지 않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곽범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도 살아있었다.

곽범을 협박해서 독문무공을 뽑아냈다는 사실을 도철이 알면 매우 난감해진다.

 

새장수는 곽범의 맥문을 잡아서 기운이 흐르는 것을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이놈은 기운 움직이는 게 달라. 도철영감이 고강한 이유가 이거였어.”

곽범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읽은 새장수는 흥분했다.

곽범의 공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자석같은 흡입력이 느껴졌다.

새장수가 주입하는 공력을 끌고 간다.

(공력이 흐르는 길을 읽으면 흉내 낼 수도 있다.)

새장수의 가슴 속에서 탐욕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남의 공력 운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란 평생에 한 번 오기 어렵다.

게다가 그 남이라는 게 사흉신 중 한명인 도철이다.

도철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강해지면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

빼앗고, 즐기고, 존귀해질 수 있다.

도철의 무공을 반드시 익혀야한다.

곽범이 말했던 것처럼 호흡을 느리게 하여 죽을 듯 말듯한 경계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곽범의 기운을 새장수의 공력이 천천히 따라갔다.

곽범의 공력은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흘러갔다.

따라가기가 쉬웠다.

그러나 길이 몹시 난해했다.

조금만 속도가 빠르면 따라가다가 길을 잃을 판이었다.

새장수는 그 심오함에 놀랐다.

동시에 도철의 신공을 자기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온 정신을 다해서 공력이 흐르는 길을 외우고 거치는 혈도를 마음에 새겼다.

(절묘하다. 절묘해. 이렇게 복잡하고 오묘한 신공이라니.)

속으로 연신 감탄을 반복했다.

내공 운용의 오묘함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곽범의 공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새장수는 놓칠 새라 급하게 뒤쫓았다.

중대한 고비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만 잘 관찰한다면 신공이 자기의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가슴에 이어 어깨까지 시큰했다.

(아차! 공력이 부족해졌구나. 언제 이만큼 공력을 뽑았단 말인가?)

진퇴양난이었다.

물러서자니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쫓아가자니 공력이 고갈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공만 심후하다면 내가 도철영감보다 못할 리 없다. 평생 갈망했던 신공을 이제야 만났는데 물러서야하나?)

새장수는 짧은 순간에 깊은 갈등을 했다.

(이놈은 술에 취해서 순진하게 내력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들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입으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갈등은 곧 결론에 이르렀다.

(내공이 고갈되더라도 버틸 만큼 버티다 회수하면 된다. 이 어린놈은 몸이 만신창인데다 술까지 먹었으니 아무 위험도 없다. 더구나 나한테는 새들이 있다.)

새장수는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렸다.

진원지기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진원지기가 말라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절대 허물면 안되는 마지막 보루같은 것이다.

욕심에 눈이 먼 새장수는 그 진원지기까지 동원했다.

모자라는 내력을 진원지기로 보충하며 곽범의 공력을 따라갔다.

그러나 금방 끝날 듯 치달리던 곽범의 공력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새장수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곽범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공력을 다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속으로는 빨리 끝내라고 끝없이 외쳤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있었다.

마침내 곽범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갔다.

새장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빠르게 달릴 때의 경로는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끝이 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공력을 자기 몸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어...)

소리를 내고 싶은데 입술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가는 곽범의 공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식은땀을 더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곽범이 눈을 번쩍 떴다.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 같다.

(잘못되었다!)

새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기의 수소양삼초경을 끊었다.

진원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왁!”

그 대가로 한 웅큼의 피를 토하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곽범의 사냥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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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버림받은 천재

 

 

사부는 5일이 지난 후에 왔다.

그동안 암자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성질을 연구하느라 모든 걸 망각했다.

밥도 짓지 않았다.

사부를 위해 차를 다릴 물도 없었다.

곽범은 미친 놈 행색으로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부는 보자마자 혹독한 매질을 했다.

곽범은 고통 속에서 혼절하고 고통으로 깨어나길 반복했다.

사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8년 지은 농사였는데... 네놈이 스스로 망가졌구나!”

매질을 하며 사부가 악다구니를 썼다.

곽범은 자신이 뭔가 잘못 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놈!”

환청처럼 울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부는 떠났다.

 

곽범은 사흘 동안 암벽 앞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가을비 추적거리는 밤에 기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싯돌을 어찌 어찌 쳐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 앞에 웅크려 몸을 데웠다.

솥에 들어있던 물도 데워졌다.

데워진 물을 겨우 겨우 마셨다.

텅 빈 속에 며칠 만에 들어가는 게 물이다.

그럼에도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스스로 깨우친 심법의 효험을 봤다.

곽범은 전보다 몇 배 빠르게 공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복잡한 혈도와 경맥을 지나는 데도 그렇다.

빨라진 공력이 몸을 보호해주었다.

맞는 부위로 즉시 공력이 달려가곤 했다.

덕분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팔 다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엉금엉금 기어 방으로 들어갔다.

두 권의 무공비급은 사라졌다.

사부가 사왔다가 던져 놓은 옷 보따리만 뒹굴고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구나.)

곽범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금 세상에서 곽범이 아는 사람은 사부뿐이다.

정은 없지만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부였다.

버림받는 고통은 외로움보다 더 깊다.

곽범은 눈을 감았다.

그 무엇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자신의 몸 상태가 관조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 훤히 보였다.

혈도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간 기운이 상처에 이르며 치유하는 과정을 느꼈다.

혈도들은 얕게는 피부에, 깊게는 오장육부와 사지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모양과 성질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았다.

혈도마다 숲의 짐승들처럼 관장하는 영역이 있었다.

영역의 기능과 모양을 따라 혈도도 달랐다.

사부의 장력에 손상되었던 오장육부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혈도에 쌓여있는 공력을 근처의 상처로 이끌어 집중시켰다.

다치지 않은 곳보다 다친 곳들로 점점 더 많은 공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새벽이 왔을 때였다.

곽범은 굳어진 핏덩어리를 토했다.

오장육부는 어느덧 활기를 되찾았다.

속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한 뼈와 근육, 피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이면 근육은 대부분 나아있겠구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시간문제일 뿐 다친 몸은 결국 회복될 것이다.

잠이 밀려왔다.

회복에 집중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컸다.

곽범의 눈이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감길 때였다.

꾸욱 꾹!

어디선가 일찍 먹이를 찾아 나온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곽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지암 주변에는 나무나 풀이 거의 없다.

벌레도 없다.

숲에 사는 새가 이곳까지 올라와서 울 까닭이 없다.

높은 곳에 사는 새는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뿐이다.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곰이나 범, 늑대 같은 짐승을 만나기 전에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달려야 한다!

아직 다리로는 일어설 수 없었다.

네발로 기어 방을 나왔다.

벽에 기대두었던 도끼를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섰다.

모든 기운을 다리의 뼈와 근육을 치유하는 데로 모았다.

곽범은 부들부들 떨면서 걸었다.

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도끼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큰 짐승과 싸워야 한다면 도끼가 있어야한다.

 

곽범은 있는 힘을 다해서 30 미터 정도 움직였다.

돌아보니 어슴푸레하게 십지암이 보였다.

더 움직일 힘이 없다.

뱃속은 텅 비었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꾸욱 꾹! 꾹!

요란한 새소리가 가까워졌다.

도망치기는 늦었다.

바위 뒤에 몸을 우겨넣어 숨었다.

저벅 저벅

새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새벽의 맑은 공기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게 한다.

미약한 냄새도 선명하게 느껴지게 한다.

곽범은 바람 속에 흐르는 피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뿐만이 아니다.

어렸을 때 맡았던 닭똥 냄새 같은 것도 느껴졌다.

“도철(饕餮) 영감도 참 지독해. 죽일 거면 직접 죽일 것이지. 죽을 만큼 때린 후에 남 시켜 시체 치우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지 않아?”

투덜거림과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는 수많은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지고 있었다.

쌀가마니 두세 개쯤 되는 크기의 새장이다.

비어있는 작은 새장들이 큰 새장에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 시장에서 본 적이 있다.

새장수다.

꾹 꾸욱! 꾸룩!

새장 속의 새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람은 새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너희들 먹일 시체가 필요해도 그렇지. 젠장, 나도 무림에서 제법 신분이 있는데 말이야. 도철 영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시체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꾸룩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맞장구를 친다.

요란한 새소리는 그 자체로 섬뜩했다.

“기왕이면 다 자란 계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살이 야들야들하면서 양도 넉넉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

새장수의 중얼거림이 가까워졌다.

곽범은 숨을 죽인 채 그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새장수는 바위 근처에 멈추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사내새끼야. 계집도 어른도 아니라고.”

곽범은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

“게다가 죽어있어야 하는데.... 살아있네.”

새장수가 바위 뒤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곽범은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더 빨리 튀어! 그래서야 어디 살겠어?”

새장수가 곽범의 등을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십지암은 벼랑 끝에 서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지어졌다.

십지암으로 오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에 새장수가 있다.

십지암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새장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낫지 않은 다리뼈가 땅을 딛을 때마다 통증이 골을 울린다.

새장수는 십지암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에게는 곽범이 독 안으로 뛰어드는 생쥐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곽범은 법당을 목표로 달려갔다.

법당의 문은 두껍고 튼튼하다.

도금한 불상을 도적질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그 문을 걸어 잠그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다친 다리라 속도는 나지 않았다.

뒤에서는 새장수가 휘파람을 불면서 느긋하게 걸어온다.

법당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아이쿠. 저길 더럽히면 도철영감이 가만 안 있을 건데 깜박했다.”

새장수는 걸음을 멈췄다.

“잡자!”

파다다닥! 파닥!

새장수가 소리치는 순간 새들이 새장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막혀있던 굴뚝에서 그을음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곽범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주변이 요란한 새소리에 파묻혔다.

새떼가 달려들어 발톱과 부리로 옷을 잡고 물어 당겼다.

새들은 그리 크지 않다.

비둘기나 까치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힘이 아주 좋았다.

독수리에 못지않을 것 같다.

큰 독수리는 양을 채 가기도 한다.

게다가 새들은 숫자까지 많았다.

곽범의 몸뚱이는 간단히 들려졌다.

털썩

한길 쯤 들려졌던 몸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땅에 떨어질 때까지 새들이 옷을 붙잡아서 낙법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콱 막혔다.

뼈와 근육이 지르는 비명으로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쳤다.

새장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더 굴려 더.”

새들은 새장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곽범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들렸다가 던져지기를 반복했다.

옷은 돌부리에 걸려 찢어졌다.

피멍이 들었던 곳에서는 피와 고름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만, 이제 야들야들해져서 먹기 좋아졌을 거다.”

새장수의 명령에 새들이 곽범을 놔주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살아있었을 줄이야. 흐흐흐.”

새장수는 곽범을 내려다보며 희희낙락했다.

곽범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덮여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얘기 좀 하자.”

새장수가 곽범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눈 주변의 피와 흙이 술에 씻겨 내려갔다.

“너 도철영감 제자 맞지?”

새장수가 곽범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곽범은 울컥하고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네 사부가 시체를 없애라 해서 왔다. 그런데 살았으니 이걸 어쩐다? 도철영감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새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얼굴에 비비며 실실 웃었다.

술이 묻은 얼굴에 흙이 그림을 만들었다.

곽범은 따가운 통증에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사부가 도철이라 불린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다만 곽범은 도철의 뜻은 몰랐다.

무공비급 외의 책을 읽을 기회도,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철은 신화 속에 나오는 네 마리의 흉악한 괴물, 사흉(四凶) 중 하나다.

탐욕과 교만, 교활과 포악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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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외로운 천재

 

 

암자의 이름은 십지암(十智庵)이다.

십지암은 봉우리 정상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있다.

몇 구비 절벽을 따라 돌면 두 개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틈에 채 열 평도 안되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법당 한 칸, 방 한 칸, 부엌이 전부인 작은 암자다.

곽범은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매일 물을 긷고 밥을 지었다.

곽범의 사부는 스님이다.

곽범이 사는 곳도 암자다.

하지만 곽범은 중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규율을 배운 적도 없다.

오로지 사부의 지시대로 살아왔다.

사부는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온다.

가을 무렵이다.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으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이 된다 해도 사부가 언제 올지는 모른다.

항상 사부를 위한 찻물을 준비해놓아야 했다.

찾아온 사부는 곽범의 몸을 꼼꼼히 살펴본다.

그런 후 연마하는 무공에 대해 조언해주고 떠났다.

오래 머물러야 보름 정도다.

그래서 곽범은 늘 혼자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일꾼과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

말할 기회가 적으니 말하는 게 투박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암자에 있는 책이라고는 두 권의 무공비급이 전부다.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제목은 없다.

한권에는 내공을 기르는 심법이 적혀있다.

다른 한권에 적혀있는 건 경신법이다.

사부는 다른 책은 일절 주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는 게 심심함과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밤이면 두 권의 비급을 반복해서 읽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읽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밤만 되면 다시 읽었다.

오전에는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했다.

오후에는 봉우리를 달려 내려갔다.

골짜기에서 원숭이를 쫓으며 경신법을 익혔다.

산에는 원숭이 외에 늑대도 있고 곰도 있으며 표범도 있다.

그놈들 덕분에 곽범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곽범은 사부로부터 검을 받지 못했다.

숲에서 단련할 때는 늘 도끼를 메고 다녔다.

도끼만 있으면 곰도 범도 무섭지 않았다.

곽범은 곰을 여러 마리 잡았다.

정면 대결해서 잡은 건 아니다.

곰이 쫓아오면 나무 위로 도망간다.

대부분의 곰은 따라 올라온다.

그러면 옆의 나무로 건너뛰든가 휘어지는 가지에 매달려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 다음 도끼로 나무를 찍었다.

곰은 곽범처럼 나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곽범이 나무를 찍기 시작하면 포효는 해도 움직이지 못했다.

떨어질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매달려 있다가 나무가 쓰러지면 함께 떨어진다.

곰은 육중한 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거나 죽는다.

표범을 만날 때도 방법은 비슷했다.

나무에 올라가면 표범은 이것 봐라 하며 따라 올라온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나무의 거의 끝까지 올라간다.

그쯤 되면 표범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표범은 영악하다.

하지만 일단 나무 위로 유인당하면 도망치지 못한다.

동작은 제한되고 민첩성은 없어져 버린다.

그저 매달려 있기도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그때를 기다려 반격한다.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표범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다.

저항도 제대로 못한 표범은 머리가 깨져 땅으로 떨어진다.

곰이나 표범을 죽이면 고기를 구워먹었다.

원래 날쌨던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더 민첩하고 빠르고 강해졌다.

 

심법에 따라 기운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인다.

매일 열 번 이상 심법을 수련했다.

그러나 공력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쌓였다가도 이 빠진 바구니에서 물이 빠지듯 흩어졌다.

공력 중에서 특히 정순한 것들만 앙금처럼 기해혈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공력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강한 흡착력을 지녀 다른 힘을 끌어들인다.

다만 쌓이는 양은 매우 미미하다.

작년에 비해서도 거의 늘지 않았다.

곽범은 사부가 왔을 때 벌을 줄까 무서웠다.

사부는 게으름을 피웠다고 할 게 분명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사부님이 가르치신 대로 수련하는데 공력은 왜 늘지 않는 걸까?)

밥을 지으며 곽범은 생각했다.

전에는 품지 않았던 의문이 일어났다.

하늘에 빠질 뻔한 경험으로 머리가 트인 덕분이다.

지금까지는 늘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했었다.

명료해진 머리로 고민다운 고민을 처음 했다.

(사부님이 일부러 틀리게 가르치실 리는 없고... 혹시 심법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사부님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부를 의심할 수는 없다.

하려면 익히고 있는 심법을 의심해야한다.

결함이 있는지는 몰라도 심법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이기는 한다.

그 양이 아주 적다는 게 문제다.

(쌓이는 양이 적다면 쌓는 횟수를 늘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법을 더 많이 운용하면 쌓이는 공력도 늘어날 것이다.

심법의 운용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기운을 정해진 경맥과 혈도로 신중하게 이끌어야하기 때문이다.

심법을 더 빨리 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운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어볼까?)

고민하던 곽범은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았다.

 

곽범은 몸을 산으로 간주해보았다.

심법을 운용하는 건 경신법을 펼쳐 달리는 것에 비유했다.

여름과 가을에 숲을 달리면 짐승도 있지만 열매들도 보인다.

나무 열매도 따고 넝쿨 열매도 따서 먹으며 달리곤 했었다.

공력을 쌓는 과정은 절벽과 숲을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심법을 한번 운용할 때마다 공력은 깨알만큼 늘어난다.

숲에서 작은 열매를 따먹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다.

숲에는 달리기 좋은 길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길이 없는 곳도 있다.

있어도 힘이 부족해서 가지 못할 길도 있다.

열매는 곳곳에 있다.

큰 짐승들은 자기 구역이 있어 그 근처에서만 볼 수 있다.

처음 숲에 갔을 때는 가장 쉬운 길로 갔다.

그런데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막힌 곳에서 길을 찾아냈다.

끊어진 곳에서는 노력을 거듭하여 건너뛰었다.

큰 짐승은 도끼로 맞섰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열매가 많은 곳으로 길을 만들고 달릴 수 있었다.

두려움은 어느덧 즐거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력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려면 혈도를 잘 알아야 한다.

심법을 아주 느리게 운용해보았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듯이 운용했다.

그동안 다닌 길을 꼼꼼히 살폈다.

열매뿐 아니라 토끼 같은 작은 짐승도 찾아보았다.

아주 가끔씩 열매는 만났다.

하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토끼는커녕 벌레도 없다.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공력이 전신을 한 바퀴 돌아서 기해혈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집중력이 떨어져 간과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운용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익힌 심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자주 다니는 길에서는 열매를 찾기 힘들다. 해가 바뀌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딸 수 있다.)

아궁이 속에서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불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열매를 계속 얻으려면 길을 바꾸는 게 답이었어. 지금까지 이 생각을 왜 못했지?)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한다.

밥 타는 냄새에 관조를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솥에서 퍼낸 밥을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숲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들면서도 생각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확신했다.

그동안 익혀온 심법은 너무 단조롭다.

사람 몸에는 12정경과 기경8맥이 존재한다.

그 중 극히 일부만 심법 수련에 사용해왔다.

더 많은 혈도에 기운을 소통시키면 더 많은 공력이 쌓일 것이다.

그 과정은 숲에서의 열매 찾기와 완벽하게 같다.

더 많은 길을 달려야 더 많은 열매와 만난다.

혈도는 달리면서 건너뛰는 나무나 바위와 갈다.

나무나 바위마다 크기와 모양, 성질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혈도는 성질이 다르다.

붙잡아 놓거나 밀고 당기거나 튕기고 쏘는 혈도도 있다.

어떤 혈도를 지날 때는 기운이 느려진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더 써야한다.

저절로 빨라지게 하거나 튕겨버리는 혈도도 있다.

그런 곳에서는 노력 없이도 공력이 다음 혈도로 움직여준다.

혈도의 성질을 알고 심법을 행하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걸렸던 일주천을 같은 시간에 세 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혈도와 경맥에 기운을 소통시키는 데도 그렇다.

반복할수록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곽범은 방으로 들어갔다.

혈도의 위치와 성질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른다.

어딘가에 그려놓고 보면서 더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십지암을 양쪽에서 가두고 있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돌로 긁어 보았다.

선이 그어졌다.

곽범은 기해혈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기해혈은 쌓인 공력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곳이다.

그래서 꿀이 담긴 그릇처럼 끈적거린다.

공력이 쌓이는 곳이면서 뽑아내기가 가장 어려운 혈도가 기해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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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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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생마왕(轉生魔王)

 

 

 

 

0화

 

                      하늘에 빠질 뻔하다.

 

 

수백 길, 수천 길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간쯤 바위틈에는 작은 암자가 끼어있다.

암자에서 나온 계단이 구름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봉우리 정상 근처에 샘이 있다.

샘물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샘을 들여다보던 곽범(郭汎)은 움찔 물러섰다.

하늘에 빠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물에 빠지듯 하늘에도 빠질 수 있겠구나!)

현기증과 함께 황홀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수백, 수천 번 샘을 들여다보았었다.

오늘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쩡하며 깨졌다.

“때가 된 것일까?”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 보던 아침 풍경이다.

그럼에도 전혀 달라보였다.

모든 게 단청을 새로 덧칠한 것처럼 찬란했고 선명했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화려한 색을 입고 있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흐르는 운무는 황금빛이다.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다시 태어난 것 같기도 했다.

나른해진 몸을 바위에 기댔다.

남아있는 밤의 냉기가 등으로 스며들었다.

얼굴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랗다.

영락없는 바다다.

본 적이 없음에도 바다임을 알 수 있다.

바다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내려다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등이 바위에서 떨어져 바다로 추락할 것 같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바다로, 하늘로 뛰어들 수 있다.

하늘 너머에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다.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 같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바위가 자석처럼 등을 잡아당겼다.

아니, 이 세상인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바다는 다시 하늘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자신의 몸이 땅의 권세에 속박되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 폭풍처럼 몸을 쓸고 지나갔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니, 떨어지는 거였을까?)

방금 전의 감각을 또 느끼고 싶었다.

애쓰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아쉬움을 달래며 항아리에 샘물을 담았다.

사부가 좋아하는 차를 다릴 물이다.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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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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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 전에 써놓은 작품입니다.
대략 5-6권 정도 진행이 되었는데...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흥행>이 될만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ㅠ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읽어보시면 아실 테고...
철저히 자기 만족을 위한 작품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기대하지 말아주시길...


원래는 이세계, SF로 구상한 작품입니다.
빅뱅 이후 현재에 이르는 우주와 문명에 관한 상상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윤회하고 전생하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남녀 주인공...
여자 주인공은 성녀이지만 
남자 주인공은 시바로도 치환될 수 있는 마왕입니다.
이번 작품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전생한 마왕입니다.
제목이 <전생마왕>인 것은 시류에 편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정말?)


문피아에서 <이온레인>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반응은 거의 없지요.
요즘 세태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쉽게 읽혀지지 않을 텐데...  
그냥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는 정도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문피아 연재 게시판의 작품설명입니다.


    ****


마왕과 성녀는 소꿉친구였고 연인 사이였으나...
마성이 폭주한 마왕을 성녀는 다른 시간 대로 유배한다.
마왕이 던져진 세계는 시대적으로는 중세, 공간적으로는 동양,
미천한 존재로 세상을 떠돌던 마왕은 점차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장르는 무협이며 환타지의 탈을 쓴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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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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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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