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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닭 쫓는 노인

 

 

백남빈은 배가 고플 때 외에는 조사동을 나가지 않았다.

나가 보았자 강미루도 없고 흑왕도 없는데 새소리만 듣기는 싫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백 조사의 사자검결과 진룡 사부의 검결만을 외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어 나머지 십일 인의 사조들의 검결도 모두 외우기로 하였다.

 

한번 몰두하여 깊이 빠지자 세상의 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사조들의 검결을 외우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혹시 틀린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자검결은 본래 그 뜻이 애매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읽어도 읽어도 쉽게 외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이것저것 뒤죽박죽되어 버리곤 했다.

다른 사조들의 검결 역시 이백조사의 사자검결에서 파생한 탓에 비슷한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이백과 진룡의 검결만을 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백남빈은 먼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검결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암송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거듭거듭 확인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찾아먹고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다시 새로운 검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암기가 확실히 되어갈 수록 각각의 검결들 사이에 무언가 서로를 구분 짓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열세 개의 검결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독립성이 뚜렷하여 전혀 섞일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백남빈이 조사동에서 검결을 외느라고 쳐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큰비가 몇 번이나 왔다.

겨울이지만 창평곡은 눈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큰비가 여러 번 왔다는 것은 큰 눈이 자주 왔다는 말이 된다.

며칠 전 그는 열세 개의 검결을 전혀 헷갈리지 않고 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의 점검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

 

이날도 백남빈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요기를 하기 위해 조사동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평곡에 들어 온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미루가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미루가 떠나고도 수십일은 족히 흘렀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녹지를 지나치는데 그날따라 겨울 장마에 무너진 오두막이 그의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한데 풀색과는 전혀 다른 남색 천이 사각으로 접혀져 빗물을 튕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전에 입었다가 미루에게 준 남색상의였다.

백남빈은 그것을 힐끗 보았다.

전에도 몇 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색상의 속에 어떤 각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른 날에는 옷자락이 부풀어서 알 수 없었던 것이 옷감이 비에 젖어 달라붙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루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했었는데... . 남색상의... 뭐였더라?)

백남빈은 그 사이 강미루의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가가서 접혀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속에 다른 것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확 펼쳤다.

펄럭!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갑자기 기름종이에 싸여진 한권의 책이 옷자락 속에서 빠져나와 앞쪽으로 날아갔다.

백남빈의 몸이 일렁이는 순간 땅으로 떨어지던 책은 그의 손에 빨리듯이 들어갔다. 녹지의 물이 그 정도로 깊은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다.

 

<八陣圖解>

 

표지에 적힌 그같은 제목이 백남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미루가 한 말은 이 책을 찾으라는 거였구나. 그녀는 창평곡을 들고 날 수 있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나 몰래 감추고 있었고...)

백남빈은 비로소 강미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자신들의 집안은 원수나 다름없다.

그 때문의 두 사람의 사랑은 오직 이곳 창평곡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강미루는 창평곡을 나가기 싫었고 팔진도해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강미루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백남빈은 팔진도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강미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바닷가의 정월 바람은 차갑기도 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이 푸른 바다색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도처에서는 패권다툼이 일어나고 무황성과 신랑성의 격돌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산산맥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바닷가는 세상의 혼란과 상관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사별의 슬픔은 목이 메고

생이별은 항상 가슴 쓰리네.

강남은 풍토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조차 없구나.

친구(;이백)가 내 꿈에 찾아오니

나를 오래도록 생각함일세.

평소의 혼이 아닌 듯하여 두려우나

길이 멀어 알 수가 없네.

그대의 혼이 올 때 풍림(楓林) 푸르더니

돌아갈 때 관문(關門) 요새(要塞) 어둡구려.

그대는 지금 유배되었건만

어찌 날개 얻어 여기 왔는고.

지는 달이 내 집 들보 비추는데

그대 얼굴 아닌가 의심하였노라.

물은 깊고 파도 거치니

부디 교룡(鮫龍)에게 잡히지 말게.

 

바닷가를 따라 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낭송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녹색의 장검을 어깨에 둘러맨 청년이 산길에 쌓인 눈을 밟고 걸어오면서 책을 펴든 채 읽고 있었다.

청년은 창평곡을 나선 백남빈이었다.

무황성으로 가는 일은 급했었지만 자신이 알려야 할 소식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야심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증빙물(證憑物)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양부의 명령이므로 무황성으로 가서 군명(軍命)을 완수해야겠지만 거들떠보기나 할지 몰랐다.

자연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밤 꿈에 강미루가 보여 울적했었다.

그래서 창평곡을 나설 때 갖고 나온 여러 권의 시집 중 하나를 뒤적이자 두보가 이백을 꿈에 보고 지은 시가 있었다.

그 정이 흡사 자신이 강미루를 그리워하는 심정 같은지라 길을 걸으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의 심금(心琴)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길 옆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상투를 튼 노인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 떨어지는 소리에 백남빈이 고개를 돌릴 때 노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는데 노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이어 노인은 다시 고개를 낮추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동에 백남빈은 어리둥절했다.

백남빈이 갸웃하며 다시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고수였구나!)

백남빈은 노인의 유령같은 신법에 놀라고도 감탄했다.

노인은 백남빈이 무슨 소리라도 낼까 싶어 주의를 주면서 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백남빈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끄는데로 따라갔다.

길 옆 숲속의 커다란 나무들을 몇 개 지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백남빈의 귀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지키고 서있다가 저 나무사이에서 작은 짐승이 뛰쳐나올 때 크게 소리 한번만 질러주게. 그러면 내 평생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백남빈의 소매를 잡고 있는 노인의 입술이 옴찔거리며 전음술(傳音術)을 펼친 것이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지라 백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까닥였다가 드니 상투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 외에 다른 무공은 평범한 백남빈에게는 부럽게만 느껴지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부러움이 일어 노인이 서있었던 곳을 한 번 더 쳐다볼 때였다.

!

갑자기 앞쪽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노란 그림자가 휙 뛰쳐나왔다.

백남빈은 소리를 질려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사사삭!

노란 그림자는 쏜살처럼 백남빈의 옆을 스쳐 다른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앞이 어른거리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바보같으니... !"

욕을 하면서 땅에 침을 탁 뱉은 노인은 백남빈을 한번 노려본 후 노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노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백남빈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품속에 집어넣고 노인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은 따로 신법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창평곡에서 내공과 외공을 깊이 쌓게 된 후로 몸이 강해지고 가벼워져서 바람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를 오리쯤 달려가니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말라버린 가시덤불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백남빈이 자기를 쫓아 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도 고수였을 줄은 몰랐구만."

"아닙니다. 저는 무황성의 일개 무사에 불과 합니다."

백남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빈정거렸다.

". 언제부터 무황성에서 그대같은 절세고수를 일개 무사로 두기 시작했을꼬?"

백남빈은 오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결이 전혀 흩트려 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걸 보고 백남빈이 실력을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육정풍(陸靖風)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아무튼 그딴 것은 조금 있다가 따지자. 지금은 바쁘니까."

노인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다시 가시덤불 쪽을 돌아보았다.

백남빈은 육정풍이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는 않아서 육정풍이란 노인과 함께 가시덤불 쪽을 살펴보았다.

무성한 가시덤불 맞은편에는 노란색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닭인 듯 한데 노란 깃털이 선명하며 부리가 강철같이 야무지고 새빨간 벼슬이 멋있어 보였다.

그 노란 산닭의 뒤는 절벽이었다.

(왜 이 노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지 알겠다. 만약 덤불을 건드리기만 하면 닭은 절벽으로 뛰어 내리고 말겠지.)

백남빈은 노란 산닭이 맘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닭도 백남빈과 육정풍을 쳐다보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척 오만해 보이는 자태였다.

"! 네놈도 저 황계(黃鷄)를 탐내고 있구나.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육정풍이 백남빈에게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저놈은 내가 장백산(長白山)에서 발견하여 여기까지 몰아온 거야. 비록 아직 내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내 것이나 다름 없다구."

"어째서 별 것 아닌 산닭 한 마리를 이천 리 넘게 쫓으면서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백남빈의 물음에 육정풍이 눈을 부라리며 얼굴표정을 무섭게 했다.

"별것 아니라고? 저 황계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놈!"

백남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열네 살에 무황성 등천제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양부의 영향으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를 무식한 놈으로 취급하자 백남빈은 영 기분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황계라는 이름의 산닭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저놈의 황계를 내가 잡아버려야지. 이 영감이 얼마나 애걸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계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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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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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처절한 일막

 

 

청포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반월도(半月刀)가 꽂혀 있다.

또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난 오른쪽 손목에 특이한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무쇠로 만든 팔찌인데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는 징기스칸의 상징이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교숙하를 납치한 장본인인 철목풍이었다.

그 계집이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겠군!”

철목풍은 포대붕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음침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라!”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에 찬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는 장차 대원제국의 가한(可汗;황제)이 될 존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

철목풍은 음산하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두두두!

그러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대과벽쪽으로 달려왔다.

그 말들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명씩 타고 있는데 맨 앞쪽에서 달려오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양쪽 손목이 함께 묶인 채 질질 끌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의복이 갈가리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분노와 안도감을 함께 느끼며 포대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래선 안돼지!”

꽈르릉!

하지만 철목풍이 음험하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철목풍! 네놈이...!”

포대붕은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휘릭!

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로 지면으로 내려서야했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은 장내에 이르러 멈춰 섰다.

그 즉시 선두의 장한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으으으!”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그 여인은 바로 포대붕 자신의 아내인 교숙하였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아도 교숙하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같았다.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데려온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웃었다.

죽일 놈!”

포대붕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라!”

휘익!

포대붕은 안고 있던 금발소녀 철산산을 철목풍에게 던졌다.

으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철목풍은 날아든 철산산을 두 팔로 받아 안으며 득의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자신의 두 팔에 안긴 철산산을 내려다보는 철목풍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찢어 죽일...!”

헌데 아내 곁으로 내려선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교숙하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교숙하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쳐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교숙하의 아랫도리는 말고삐에 묶여 끌려오는 도중에 알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하의가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숙하는 이미 수많은 사내들에게 짓밟힌 상태였다.

으으으...”

아내의 상태를 살펴보며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징기스칸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속을 지킬 줄 알았다!”

포대붕은 아내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급히 풀며 철목풍을 향해 이를 갈았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철목풍은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뭐라고?”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철목풍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철산산의 얼굴을 살펴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교숙하의 허옇게 들어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교숙하를 유린하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하여간 불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이 짐승만도 못한...!”

철목풍의 뻔뻔한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 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포대붕에게 있어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 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으으음!”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해주자 교숙하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안심하시오 부인. 내가 왔소!”

아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부르르!

정신을 차린 교숙하는 눈을 부릅뜨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 당하던 와중에서도 잊지 않았던 남편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교숙하의 가슴을 메운 것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숱한 사내들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떠오른 때문이다.

!”

직후 교숙하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혓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교숙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문 것이었다.

... 부인!”

포대붕은 기겁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교숙하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런!”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푸들푸들 떨었다.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보고 있던 철목풍이 혀를 찼다.

... 뭐라고?”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같지 않게 보이는 그였다.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네 마누라의 꿀단지를 가장 먼저 맛본 건 바로 나였다. 내게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의 몸 아래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죽인다!”

쐐애애액!

철부를 뽑아든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가 대지를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커억!”

콰당탕!

하지만 다음 순간 피를 뿌리며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 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로 덤빈 결과 철목풍의 단 일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교숙하가 당한 무참한 일들을 떠벌린 것이다.

크으... ... 짐승만도 못한 놈!”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포대붕은 가슴의 혈도 몇 곳이 파괴되는 바람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다.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다. 포대붕!”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집이 딸을 납치한 네놈을 어떻게 처단할지 궁금하구나!”

철목풍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

철목풍은 두 눈을 야릇하게 번득이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네놈 설마!”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마라!”

포대붕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혈도가 짚인 상태인 그가 철산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포대붕은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미 한 마리 짐승으로 변한 철목풍의 귀에 포대붕의 애원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철목풍은 철산산의 속옷도 거침없이 벗겨버렸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소녀의 교구는 말 그대로 황홀한 것이었다.

철목풍 주변에서 철산산의 알몸을 들여다보는 장한들의 눈이 짐승의 그것같이 번들거린다.

흐흐흐 기가 막히군.”

철산산을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놓은 철목풍의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우리 공주님의 꿀단지를 구경해볼까?”

철목풍은 극한의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산산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죽일 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악을 쓰던 포대붕은 선혈을 울컥 토해내고는 축 늘어졌다. 눈앞에서 어린 주인이 철목풍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기혈이 뒤집혀 기절한 것이다.

흐흐... 곧 달단여왕이란 오만한 네 어미도 본좌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목풍은 황금색의 춘초로 덮인 철산산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며 도착척인 흥분에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그만 하지! 보기에 흉하니...!”

돌연 철목풍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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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청풍의 집이 있는 성 밖의 빈민가.

그곳으로 달려오는 청풍. 청풍이 앞장서서 달려오고 그 뒤를 이진진이 숨이 턱에 차서 헐떡이며 따라온다. 거리가 제법 떨어졌다.

[!] 눈 부릅뜨며 앞을 보는 청풍.

청풍의 집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며 안쪽을 보고 있다. 그러다가

청풍과 이진진을 발견하고 돌아보는 사람들

[청풍이다!] [청풍이가 왔어!] [빨리 와봐라 청풍아! 네 엄마 큰일 났어!] 사람들 손 흔들며 외치고

와장창! [진진아버지! 제발...] [어디 있어? 빨리 안 내놔?] 물건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악쓰는 소리가 청풍의 귀에 들리고

청풍; (젠장!) 더 빨리 달려가고. 그러다가

곁눈질로 옆을 보는 청풍

골목에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건달 두 놈. #4>에 나온 도박장 지키던 건달들

청풍; (이 마을에서 못 보던 놈들...)

청풍; (행색을 보면 흑사회의 버러지들인데...) 생각하는 사이에 집 앞에 이르는 청풍. 사람들이 급히 물러서고

와장창!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서 눈 치뜨며 멈춰서는 청풍

 

#11>

와장창! 콰창! 문이 활짝 열려 들여다보이는 집 안 내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집 안의 모습. 원룸처럼 방 한 칸에 부엌이 있는 구조인데. 집안에서 절름발이 이산하가 집안의 집기들을 쓰러트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 진삼낭이 매달리며 애원하고 있고

이산하; [그거 어디 있어? 어디에다 숨겼냐고?] 와장창! 장롱을 잡아 당겨 쓰러트리고.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해서 질질 끄는 모습이다. + 진삼낭; [제발 그만 하세요 진진아버지!] 이산하의 팔에 매달리며 울부짖고

진삼낭; [말했잖아요. 그 팔찌는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구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애원하지만

이산하; [거짓부렁 하덜 말어!] [임자가 그 팔찌를 얼마나 애지중지해왔는지 아는데 잃어버렸다고?] 충혈 된 눈을 번들거리며 이를 갈고

이산하; [빨리 이실직고해! 살림 다 부수기 전에!] ! 발로 장을 걷어차고

진삼낭;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신?] [얼마나 빚을 졌기에 없는 팔찌까지 내놓으라는 건가요?] 매달리며 애원하고

이산하; [임자가 알 거 없어! 그 팔찌를 꼭 팔아야할 일이 생긴 것뿐이야!] 와장창! 다른 가구도 쓰러트리고

진삼낭; [없는 걸 어떻게 내놔요? 있다고 해도 못 내줘요.] 악에 바쳐 외치고

진삼낭; [노름으로 날려먹을 게 뻔한 데 어떻게 당신에게 내놓겠어요?] 역시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이산하; [말 다 했어 이 여편네야?] ! 자기 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진삼낭; [!] 철퍼덕! 바닥에 나뒹굴고

이산하; [내가 다리병신 된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 삿대질하고

이산하; [네년과 청풍이 놈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이 이런 꼬라지가 되진 않았다구!]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진삼낭을 때리려 하고

! 이산하의 손목을 잡는 큰 손

이산하; [!]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눈 치뜨고

! 어느 틈에 방에 들어온 청풍이 이산하의 손목을 잡고 있다. 굳은 표정. 키가 청풍이 이산하보다 한 뼘 쯤 크다. 몸도 더 건장하고

진삼낭; [... 청풍아!] 안도하며 올려다보고

이산하; [너 이 새끼...] 손목을 청풍의 손에서 빼내려 애쓰지만

꿈쩍도 않는 청풍의 손

이산하; [이거 안놔? 네놈 눈에는 아비도 안보여?] 퍽퍽! 다른 손으로 청풍을 때리며 악을 쓰지만 청풍은 꿈쩍도 않고. 그때

이진진; [엄마!] 울면서 뛰어 들어온다. 숨이 턱에 찬 표정이고

진삼낭; [진진아!] 울며 돌아보고. 밖에서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청풍; [뭔 구경났소?] 밖을 노려보며 말하고.

찔끔! 하는 사람들

[... 가세!] [청풍이가 왔으니 별일 없겠지.] [이게 대체 뭔 난리래?] [그렇게 금슬 좋던 부부가 대낮에 싸움이라니...] 혀를 차며 흩어지는 사람들. 그러자

청풍; [문 닫아라 진진아.] 여전히 이산하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문간에 서서 숨을 고르는 이진진에게

이진진; [... 알았어 오빠!] 급히 문을 닫고

! 문이 닫히며 집안이 어둑해진다. 이제 밖과는 시선이 차단되었고, 그러자

청풍; [말해보시오.] ! 거칠게 이산하의 손목을 뿌리치듯 놔주며 말하고

비틀하다가

털썩! 주저앉는 이산하

청풍; [이 난리를 친 이유가 대체 뭐요?]

이산하; [너 이놈 아비에게 무슨 행패를...] 일어나며 눈 부라리다가

내려다보는 청풍. 어둑한 방안을 배경으로 청풍의 눈이 화등잔처럼 번들거린다

이산하; (무슨 놈의 눈빛이...) 오싹! 소름이 돋아 시선 피하고

진삼낭; [청풍이 말 대로 털어놔요 여보!] 무릎 꿇으며 이산하에게 애원하고. 이진진은 방 밖의 부엌에 서서 듣고 있고

진삼낭; [당신은 온순한 분이었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릇 밤 새 사람이 변한 것처럼 군 건가요?] 애원하고

이산하; [... 그게...] 시선 피하며 말을 못하고

청풍; [얼마나 잃었소?]

움찔! 하는 이산하

청풍; [집안의 돈을 몽땅 털어서 바친 것도 모자라 도박장에 빚까지 진 거요?]

이산하; [... 그러니까 그게...]

진삼낭; [말해 봐요 여보.] [나도 일해서 벌고 청풍이도 수입이 적지 않잖아요.] [얼만지 말씀만 하시면 어떻게든 갚아드릴게요.] 이산하를 달리는데

이산하; [... ...] 더듬

진삼낭; [오십 냥을 빚졌어요?] 놀라고

이진진; (오십 냥이면 오빠가 몇 달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질린 표정이 되고

청풍도 찡그릴 때

이산하; [오십 냥이 아니오.] 삭 죽어서 눈치 보며

이진진; (맙소사!) 경악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진삼낭; [... 당신!] 털썩! 기가 막혀 주저앉는 진삼낭

찡그리는 청풍

진삼낭; [오십 냥이 아니면... 오백... 오백냥을 빚졌단 말인가요?] 숨이 막혀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산하; [사기도박에 당한 거요.] 고개 들고 항변

이산하; [절대 질 수 없는 패가 떴는데 그놈들이 짜고 말도 안되는 패를 만들어서 날 물 먹인 거요.] 흥분해서 외치고

진삼낭;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악을 쓰고. 움찔! 입을 다무는 이산하

진삼낭; [아무리 도박에 미쳤어도 어떻게 오백냥이나 빚을 질 수가 있어요?] [오백냥은 청풍이와 내가 몇 년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거액인데...] 울며 이를 갈고

이산하; [... 면목이 없소.] 삭 죽는데

청풍; [뭘 담보로 걸었소?] 이산하를 노려보며

움찔! 하는 이산하

진삼낭; [... 담보라니...?] ! 하는 표정

청풍; [도박장을 운영하는 흑사회의 악귀들이 담보도 없이 오백 냥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진삼낭에게

진삼낭; [하지만 우리 집에 걸만한 담보 따위는 없는데...] + [!] 말하다가 깨닫고

반사적으로 이진진을 돌아보는 청풍과 진삼낭

[!]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전율하는 이진진

진삼낭; [정말이에요?] 와락! 두 손으로 이산하의 멱살을 부여잡고

진삼낭; [진진이를... 우리 딸 진진이를 담보로 돈을 빌린 거예요?] 이를 갈며 울고

이산하; [... 그래서 내가 당신 보고 팔찌를 내놓으라고 한 거요.] 뻔뻔하게 눈을 가재미 눈으로 만들며

이산하; [사흘... 사흘 안에 오백 냥을 갚아야 진진이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소.] [그리고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팔찌라면 오백 냥 이상 받고 팔 수 있을 거요.]

이산하; [그러니... 우리 딸을 위해서라도 팔찌를 주시오.]

진삼낭; [닥쳐요!] 이산하를 확 뿌리치고. 그러자

! 이산하의 몸이 몇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집 전체가 흔들리고

청풍; (연약하게만 보이던 어머니에게 저런 힘이...) 움찔 놀랄 때

털석! 바닥에 나뒹구는 이산하

진삼낭; [당신이란 인간... 어떻게... 어떻게 딸을 담보로 걸고 노름을 할 수 있어요?] 벌떡 일어나 삿대질하며 이를 갈고

진삼낭;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독 오른 고양이처럼 악을 쓰고

이산하; [미안하오. 면목이 없소.] 일어나려 애쓰며 비참하게

진삼낭;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요.] [진진이는 절대 못 내줘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돼요.] 악을 쓰며 울고

이진진도 문간에 주저앉아 울고. 그러다가

움찔! 하는 이진진. 청풍이 방을 나와 이진진의 옆을 지나간다

이진진; [... 오빠!] 겁에 질려 부르지만

청풍은 들은 척도 않고 문을 열고 나간다.

 

#12>

집 밖으로 나오는 청풍. 근처에서 엿듣던 마을 사람들 움찔하며 시선 피하고

굳은 표정으로 그 사람들을 무시하고 한쪽으로 가는 청풍. 건달들이 숨듯이 서있는 골목이다

[!] [!] 골목에 서 있던 건달들도 움찔! 하고. 청풍이 다가온다

딴청 부리는 건달들.

청풍; [어느 조직 식구들이오?] 멈춰서며 말하고

[이 새끼가...] [네까짓 게 우리가 어느 조직 소속인지 알아서 뭐하게?] 눈 희번득이며 청풍을 노려보지만

말없이 노려보는 청풍.

[우리 소속은 알 거 없고...] [우린 네놈 아비한테 볼일 있으니 넌 깝치지 마라.] + [!] 청풍을 협박하다가 움찔하는 두 놈

청풍의 주변이 어둑해지고 눈이 강렬해진다.

(!) (이게 무슨...) 겁에 질려 비틀 물러서는데

<백정 노릇을 해 와서 눈빛이 저런 건가?> <오금이 저려 마주 볼 수가 없다.> 시선 피하는 두 놈

청풍; [어느 조직인지 물었소.] 살벌

건달1; [... 우린 단지회다!] 한 놈이 겁에 질리면서도 용기를 내며 말하고. 손을 들어 보이면서

그자의 새끼손가락이 없는 손 크로즈 업

청풍; (단지회...) 그걸 보며 찡그리고

청풍; (금릉 흑사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이라던가? 조직에 들어가려면 손가락을 하나 잘라야한다는...) 찡그릴 때

건달1; [우리가 어디 소속인지 알았으면 잔머리 굴려도 소용없다는 거 알 거다.] 히죽

건달2; [금릉, 아니 강남(江南) 일대에 우리 단지회의 손이 뻗히지 않은 곳은 없다.] [그러니 행여 야반도주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야비하게 웃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청풍; [당신네 사두(蛇頭;두목)에게 가서 전하시오.] [반드시 오백 냥을 구해서 찾아갈 테니 차용증 준비해두라고...] 홱 돌아서고

이어서 빈민가 입구쪽으로 걸어가는 청풍.

건달1;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멀어지는 청풍을 보며 눈 부라리고. 안도하면서

건달1; [나도 성질 많이 죽었어.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에게 교훈을 내리지도 못하고...] 궁시렁. 이마의 식은땀 닦으며

건달2; [저년을 보면서 화 죽여.] 청풍의 집 쪽을 보며 히죽 웃고. 돌아보는 건달1

청풍의 집.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던 이진진이 건달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

! 급히 문을 닫는 이진진

건달2; [이진진이란 저 년, 행색이 초라해서 그렇지 지금까지 본적이 절세미녀야.] 히죽 거리며

건달2; [저 년만 잘 팔아넘기면 오백냥이 아니라 오천냥도 넘게 벌 수 있을 거야.]

건달1; [물론 그러려면 절름발이의 아들놈이 돈을 구해오지 못해야 하잖은가?]

건달2;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뱅이들이 오백 냥을 어디 가서 구해? 그것도 사흘 안에...?] 눈 흘기고

건달1; [그렇긴 한데...]

건달2; [두고 봐! 이진진이란 년은 결국 우리 단도회 차지가 될 테니...] 음험하게 웃고

 

#13>

도축장.

어느 건물. 백정들이 지나가면서 힐끔 거리고

[백냥 조금 안된다.] ! 돈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는 손을 배경으로

추노대; [우리도 매일 지출해야하는 돈이 있어서 이것 밖에는 여유가 안되는구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청풍과 마주 서서 말하고

추노대; [일단 이걸로 급한 불을 끄고 말미를 얻거라.] [며칠 내로 더 마련해보도록 할 테니...] 청풍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데

청풍; [괜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노대.] ! 돈주머니를 다시 추노대 앞으로 밀어주고

추노대; [청풍아!] 난색

청풍; [제가 어떻게 해결해보겠습니다. 그동안 온정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포권하며 고개 숙이고

추노대; (황금전장을 찾아갈 생각이로구나.) + [온정은 무슨... 다 나 좋다고 널 쓴 것뿐인데...] 체념하고

청풍; [자주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입구로 가며 말하고

추노대; [오냐!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구나.] 억지로 웃고

! 나가서 문을 닫는 청풍.

추노대; (불쌍한 놈...) 털석! 의자에 앉고

추노대; (아직 어린 나이인데 제 앞가림 뿐 아니라 노름쟁이 아비의 뒷치닥까지 해야 하다니...)

추노대; (아무쪼록 별일 없어야할 텐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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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1)

 

 

산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보이는 곳에 주점(酒店)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점 앞에 내 놓은 의자와 식탁에는 다섯 명의 손님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임청우는 길가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주인을 찾았다.

음식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건네 준 후에 다가왔다. 육십이 넘은 노인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이다.

임청우는 삶은 돼지고기와 만두, 그리고 술을 주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없이 눈이 옆 자리로 계속 돌아가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행과 함께 앉아있던 옆 자리 사람이 그런 임청우가 못마땅한지 음식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놓고 먹기 시작했다.

!

다행히 주인이 음식을 빨리 가져왔다.

?”

헌데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보았다. 식탁에 놓인 것은 그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한 그릇의 미음이었던 것이다.

급체에 걸려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네. 먼저 그것을 먹고 나면 주문한 것을 가져다주겠네.”

늙은 주인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을 굶은 후이니 기름진 음식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미음부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임청우는 주인의 성심에 감동하며 미음 그릇을 들고 한입에 마셔버렸다. 미음은 이미 식어있어서 먹기도 쉬었다.

한데 미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임청우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있던 다섯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차! 했다.

에워싼 사람들은 검을 멘 세 명의 중년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임청우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청우는 혈도가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이란 참으로 경우가 없구나. 낯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보기만 하면 뺏으려 드니...)

임청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연이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을 멘 중년인들 중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본인는 화산파(華山派)의 상승칠검(常勝七劒)중 오검(五劒) 척광태(擲光太)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내 사제로 육검(六劒) 마진산(馬晉山)과 칠검(七劒) 동호복(董毫福)이다.”

임청우는 농산을 내려와 소림사니 무당파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미음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상승삼검의 맞은편에 서있던 두 청년 중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만상보(萬商堡)의 진가형제(眞價兄弟). 소형제는 그 칼을 우리에게 팔 생각이 없는가?”

만상보는 무림인들 중에서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와, 상인들 중에서 야심이 큰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은 중원 천하에 발을 뻗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고팔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생명을 팔고 사는가 하면 무림의 온갖 기보(奇寶)와 신병이기(神兵異器), 무공비급(武功秘級)을 거래하기도 했다.

진가형제는 만상보의 수천 명 상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들로 실제에 있어서는 무림인들이 그들을 진가형제(眞假兄弟)라고 불렀다.

그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

상승오검 척광태가 검을 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진가형제!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이자는 마면혈도의 칼을 지니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형제가 가고 나면 혈도를 혼자서 차지하겠다는 것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소리친 자는 음식을 임청우가 보지 못하도록 돌려놓고 먹던 청년이었다.

진가형제중 형쪽인 그자는 임청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그 칼을 우리에게 팔기만 하면 자네의 목숨은 우리가 지켜주겠네.”

한데 그자는 손바닥이 뜨끔함을 느끼며 황급히 임청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던 무쌍층층공과 용조수가 합쳐진 공력, 즉 용조층층공이 은연중에 발동하여 그자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그 공력의 대단함은 감히 자기들 진가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자는 즉시 아우의 소매를 끌면서 은밀히 말했다.

가자, 이번 장사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하는 것 같다.”

“...?”

진가형제의 아우쪽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두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주점의 뒤로 돌아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척광태 등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가형제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눈앞의 소년에게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척광태는 아무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쩌면 혈도의 주인인 마면혈도가 주위에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척광태의 시력과 청력으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청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음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이 어떻게 마면혈도의 성명병기인 혈도를 가지고 있을까?)

척광태가 은근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임청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슷!

마치 안개가 이는 듯 하더니 임청우 곁에 서있는 동호복의 뒤에 황색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척광태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며 소리쳤다.

사제! 피해라!”

 

한 인간의 생명은 전우주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어느 누군가가 판결의 취지문에 써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우주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생명은 전혀 고귀할 것도 없는 다른 어떤 사실들 앞에 맥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 말은 너무 고매해서 사람에게서조차 멀리 떠올라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승칠검의 다섯 째 척광태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동호복은 외침을 듣는 순간에 움찔했지만 죽음의 손길로부터 피하지는 못했다.

미친 마귀의 눈빛을 한 그 황색 가사의 중()은 합장하듯이 손바닥을 모았고, 두 개의 동발(銅鉢)이 합쳐지듯 그 손바닥이 합쳐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던 동호복의 머리는 압착기에 눌린 계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척광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엔 불신과 공포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직후 척광태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

묘한 콧소리와 함께 척광태의 시체 뒤에 한 명의 노파(老婆)가 나타났다.

손에는 금방 사용되었을 법한 가는 천잠사를 감고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것 같은 노파다.

그렇지만 결코 곱게 늙지는 못했다.

세파가 스쳐가며 만든 주름살일랑은 차치하고라도 얼굴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근육들이 남아있는 것은 노파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긴장이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임청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상승칠검중 육검 마진산이 죽는 모습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엔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차르르륵!

문득 임청우의 눈앞에 한 폭의 족자(簇子)가 펼쳐졌다.

비단폭이 스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족자 뒤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거지가 서있다.

거지가 임청우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거지의 눈빛은 종이를 태울 만큼 강렬하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임청우는 단지 보았다고 했을 뿐인데...

으하하하!”

그 즉시 거지의 살벌한 눈빛이 가시면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킬킬킬!”

거의 동시라 할만큼 노파와 중도 덩달아서 웃었다.

삼인의 웃는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임청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공력이 뛰어난 고수들의 웃음소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뒤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 신체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노파가 웃음을 뚝 그치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있느냐?”

임청우도 즉시 되물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거지가 큰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늙은이가 이걸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분명히 여기서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분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임청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체에 걸릴까봐 미음부터 내주었던 주점 주인을 생각하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끈 치솟는 무엇이 있었다.

네놈이 감히 흥정하려는 건가?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

날카롭고도 높은 소리의 음성으로 노파가 말했다.

임청우는 이 순간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는 그가 숲속에서 불과 얼마 전에 본 황의소녀였다.

그리고, 높고 낮은 휘파람 소리의 주인들이 바로 이들 세 명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한데 이들이 왜 엉뚱하게 자기를 닦달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끊어놓기까지 하는가?

황의소녀를 쫓기만 한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닦달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그러해야할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아왔기에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선 미워하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청우의 속에서는 빙산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던 자들이 이젠 한갓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 중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소저를 이놈은 봤다고 하니 어쩌면 이놈과 소저는 아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면서 중을 쳐다보았다.

중이 근처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이 근처에 계신 줄 알고 있소이다.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소.”

중이 임청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반반하군.”

하지만 그 반반한 임청우의 목에는 어느 새 노파의 천잠사가 감겨져 있다. 살짝 힘주어 당기기만 하면 무처럼 성둥 베어지고 말 터이다.

임청우의 입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이 있으면...”

나지막하고 탁한 음성이지만 폭발할 듯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은 세 사람의 이목을 그에게 끌었다.

임청우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노파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슴이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는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릇됨을 용납하지 않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천지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것은 우협 장백승을 은연중에 닮아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걸승(妓乞僧), 즉 기녀 차림의 노파와 거지 중은 그제서야 임청우의 면목을 바로 대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몰골이지만 한 자루의 보검과 보도를 가지고 있다.

청강사자검(靑鋼獅子劒)!”

거지가 먼저 임청우의 검을 알아보고 경악하며 주춤 물러섰다.

! 휘익!

노파와 중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장 밖으로 피했다.

... 넌 우협 장백승과 어떤 관계냐?”

임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무엇이건 벨 것 같은 검기가 청강사자검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만 가자! 만리향(萬里香)으로 봐서 소저는 아직 종남산(終南山)을 벗어나진 않았다.”

노파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지며 거지와 중에게 말했다. 그 음성에서만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거지와 중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임청우는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책속에 매장 당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덜컹!

길가 주점의 좌측 숲에 있던 굵은 나무 한 그루의 껍질이 열리더니 황의소녀가 튀어나왔다.

슈우우웅!

소녀는 임청우의 곁을 스치면서 그를 나꿔채 숲으로 달려갔다.

임청우는 순간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꼼짝없이 소녀에게 끌려 허공을 날아갔다.

황의소녀가 날아가는 곳은 노파 일행이 간곳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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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색마와 비구니

 

 

() 늙은이는 물론이고 고검추의 행방도 묘연해졌습니다.”

삼십살객(三十殺客) 정팔(鄭八)은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녀곡에 초혼전을 남겼었던 그자는 사신각의 삼십살객중 한명이다.

사신각에서의 직급은 청부살인을 성공한 회수로 정해진다.

열 번 성공한 자는 십살객(十殺客), 백 번 성공한 자는 백살객(百殺客)으로 불리는 식이다.

백살객은 사신각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된다.

정팔이란 자가 삼십살객으로 불리는 것은 삼십 번 이상의 청부 살인을 완수했다는 의미다.

서른 살 남짓인 정팔은 근래 들어 사신각 내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객 중 한명이다.

대 늙은이는 몰라도 고가놈은 이미 기련산을 빠져나갔다고 봐야겠군.”

사신각주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신각주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기련산 동쪽 산록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다.

그자는 기련산에 나타난 대씨 성의 무시무시한 고수를 피해 기련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신각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팔을 비롯하여 몇몇 자객들로 하여금 팽가촌 일대를 감시하게 했었다.

하지만 고검추의 행방은 묘연해져 기련산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정팔 너는 기련산에 남아서 팽가촌을 감시해라. 고가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본각이 철수했다 여기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존명!”

사신각주의 지시에 정팔은 고개를 조아린 후에 자리를 떴다.

고검추! 네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는 네놈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신분이 있으니...”

사신각주는 잘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쏴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서 있었다.

토지묘는 농사를 관장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휴우... 지독하게 퍼붓는구나."

문득 토지묘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토지묘 내부는 오랫동안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으며 칠이 벗겨진 토지신의 신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그 토지묘 문간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영준한 용모에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소년이다.

고검추... 바로 그였다.

이곳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이다.

기련산을 떠난 고검추는 한 달여 만에 이곳 신개령에 이르렀다.

이제 열흘 정도만 더 가면 호천무맹이 자리한 복우산(伏牛山)에 이를 수 있다.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의 유언대로 호천무맹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늦여름의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토지묘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개령까지 오는 동안 고검추는 태을강기를 꾸준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 십성에는 이르지 못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고검추는 태을강기와 함께 은발마희 옥여상이 남긴 혈전삼식도 틈틈이 연마했다.

덕분에 제일식 분뢰개벽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철봉황은 어떤 여인일까? 어머니는 왜 그녀를 찾아가라 하셨을까?)

토지묘 문간에 기대앉은 고검추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고검추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휘익!

멀리에서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토지묘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굴까? 이런 산중에...)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벌떡 일어섰다.

양모 당혜선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사신각의 자객들이 초혼전에 묻어있던 백일취를 맡고 추격해온 게 아닐까?)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고검추는 토지묘로 접근하고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기련산을 내려온 후 고검추는 초혼전을 불에 태워 백일취를 제거했었다.

하지만 백일취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백일취가 실수로 몸에 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 사이에 나타난 자는 토지묘에서 십여 장 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고검추가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 서글프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쓴 웃음을 지으며 문가에서 물러난 고검추는 낡은 신단 뒤쪽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었다.

쐐액! 후두둑!

그 직후 선풍과 빗물을 흩뿌리며 한 명의 인물이 토지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단 뒤쪽의 빈 공간에 몸을 숨긴 고검추는 신단에 나있는 틈으로 그 인물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헌데 사내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비구니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구니는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명공이 빚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는데 파르라니 깎은 머리 때문에 애잔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회색 승복은 빗물에 흠씬 젖어있다.

그 때문에 비구니답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흐흐흐... 이쯤이면 그 드센 계집도 못 쫓아오겠지?"

사내는 토지묘 밖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자는 어떤 여자에게 쫓기는 중인 듯 했다.

털썩!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구니를 토지묘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젖은 승복에 감싸인 비구니의 탄력 넘치는 육체가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흐흐흐... 암중이라니... 오늘은 즐거움이 배가 되겠군."

!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구니의 몸매를 훑어보던 사내는 굽혔던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사내가 날린 지력이 가슴에 파고들자 비구니는 한 차례 몸을 퍼덕인 후 눈을 떴다.

"흐윽!"

눈을 뜬 직후 비구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의 징그러운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표정을 본 비구니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깨달고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渾穴)만 풀렸을 뿐 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시주는 감히 호천무맹에 죄를 지을 작정인가요?"

비구니는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사내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호천무맹! 저 스님이 호천무맹의 문하란 말인가?)

신단 뒤에 숨어 있던 고검추는 크게 놀랐다.

호천무맹은 자신의 생부인 철사자 고창룡의 사문 아닌가?

헌데 그 호천무맹 소속의 여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검추가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호천무맹의 이름 따위로 본좌를 겁주려 해도 소용없다 자운(紫雲)!"

사내는 비구니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호천무맹이 심혈을 기울여 기르고 있는 호천십영(護天十英)의 일인이니 도룡곡(屠龍谷)이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도룡곡!"

자운이라 불린 비구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비구니는 호천무맹이 장래를 위해 육성중인 열명의 신진고수들중 한명이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역사에 해박하여 도룡곡이란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도룡곡은 청해(靑海)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던 문파였다.

도룡곡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실전적이고 악랄하여 정파보다도 사파 취급을 받았다.

비록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에 자리한 문파였으나 도룡곡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이 주축을 이룬 중원 무림인들에게 공격당해 멸망했다.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는 변황 무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때문이었다.

당시의 중원 무림은 서역 무림을 일통한 강대한 세력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호천무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중원 무림은 천신만고 끝에 서역 무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직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고 멸문한 것이다.

도룡곡은 청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 무림의 세력에 가장 먼저 제압당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해왔었다.

그것이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였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도룡곡 식솔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룡곡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완전히 제명당했다.

그 후 도룡곡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헌데 도룡곡이란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 설마 시주는..."

비구니 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그렇다. 본좌가 바로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鄧天河)."

사내는 비구니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윽!”

자신을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라 소개한 그자의 손이 뺨에 닿자 비구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나는 마루 밑에 숨어서 부모형제들이 너희들 호천무맹의 인간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등천하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인 채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혈채를 반드시 천배 만배로 갚고 말겠다고...!"

"... 아미타불!"

안색이 밀납처럼 변한 자운 비구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크크크... 이제 본좌가 왜 너를 납치해 왔는지 짐작이 가겠지?"

등천하는 음소를 흘리며 젖은 승복에 감싸인 자운 비구니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선 네년에게 극락구경을 시켜준 후 발가벗겨서 낙양 성문에 매달아 두겠다. 호천무맹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인 네년의 알몸을 가능한 많은 인간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 그러고 보니 근래 일어났던 본맹 산하 문파들의 겁탈 사건이 모두 시주의 짓이었군요."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몇 년 전부터 호천무맹 소속 문파의 아녀자들이 겁탈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문파 장문인들의 처첩이나 여자 제자, 딸들이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만 해도 서른 개가 넘는 문파와 가문의 여자들이 몸을 더럽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용모파기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인의 소행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범인이 여자들을 유린한 수법이 대동소이한 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정체불명인 범인에게는 천면음마(千面淫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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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등장

 

 

안탕산 일대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무렵처럼 어둑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겁게 깔린 먹장구름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

문득 한 줄기 기화(旗火), 즉 불꽃 신호가 안탕산의 깊은 산중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기화가 쏘아진 곳은 물이 마른 계곡이다.

그곳에 제왕성의 철위사 다섯 명이 모여 있다.

철위사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인데 두 명은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살피고 있으며 두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철위사는 빈 금속통을 든 채 허공을 보고 있다.

방금 전에 기화를 쏘아올린 것은 바로 그자였다.

허공에서는 어느덧 불꽃이 흩어지고 있다.

기화를 쏘아 올린 게 너희들이냐?”

휘익!

외침과 함께 누군가 계곡으로 날아 내려 철위사들은 급히 돌아보았다.

여기서도 일이 벌어진 것이냐?”

계곡에 내려서는 인물은 바로 제왕성의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휘익! !

궁무독과 함께 두 명의 동위사들도 현장에 내려섰다.

총관님!”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궁무독을 본 철위사들은 비로소 안도한 표정이 되며 급히 포권을 했다.

형제들이 또 흉수에게 변을 당했습니다.”

철위사들이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며 철위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철위사가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데 사인은 가슴에 난 사발만한 구멍이 었다.

마검칠식!”

이번에도 마검칠식에 당했습니다.”

궁무독을 따라온 두 명의 동위사가 급히 시체로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동위사들이 시체의 사인을 살피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틀림없습니다 총관님! 이 형제들을 죽인 무공은 천마의 구대절기중 마검칠식입니다.”

안탕산에 접어든 이래 벌써 스물세 명이나 당했습니다. 마검칠식을 쓰는 놈들이 우리 제왕성의 안탕산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위사들의 사인을 확인한 동위사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이제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 참사의 원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요신군이나 그자의 수하들이 본성에 적대하는 건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정하지 마라. 진짜 범인이 소요신군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이는 짓일 수도 있으니...”

궁무독은 냉정한 어조로 철위사와 동위사들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소요신군의 아들놈도 마검칠식을 구사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동위사 중 한명이 오만상을 쓰며 이의를 제기했다.

누명을 썼든 어쨌든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의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건 분명...”

불만을 토로하던 그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궁무독이 한손을 들어 자신의 말을 막으며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무독이 보고 있는 쪽에는 철쭉이나 찔레같은 키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데 거리는 십장 남짓이었다.

(총관님이 왜 저러시지?)

(저곳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철위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목 숲을 보았다.

찌릿! 찌릿!

하지만 동위사들은 몸을 마비시키는 것같은 살기를 느끼고 숨을 멈췄다.

! 스릉!

동위사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

그때 궁무독은 오른발을 관목 숲 쪽으로 내딛으며 오른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 스릉!

궁무독은 내민 오른발로 세차게 발을 구르며 발검을 했다.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흔한 검기조차 궁무독의 검에서는 내뻗치지 않았다.

스악!

궁무독은 발검한 검으로 앞쪽을 수평으로 그어내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검기도 내뻗치지 않는 궁무독의 이 일초는 무공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허세를 부리는 칼부림처럼 느껴졌다.

(뭘 하신 거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철위사들은 발검 했던 검을 거둬들인 궁무독이 다시 두 발을 모으며 서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서걱!

관목 숲이 일제히 같은 높이에서 잘려 나갔다.

좌우로 이장(二丈;6미터), 앞뒤로 일장(一丈)쯤인 반달형으로 관목 숲이 매끈하게 잘린 것이다.

!”

!”

동위사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철위사들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철위사들은 자신들의 외총관인 궁무독이 무공을 쓰는 것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퍼억! 푸스스!

그때 똑같은 높이로 갈라진 관목들의 잘려진 부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 가공!)

(족히 십장은 되는 거리를 두고 관목 숲을 무형의 검기로 베어버렸다.)

(과연 우리 제왕성의 총관다운 솜씨다.)

철위사들은 감탄과 흠모의 표정으로 궁무독을 보았다.

독검마유 궁무독은 몇 대째 제왕성을 섬겨온 충신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무독이 가문과 출신을 배경으로 제왕성의 총관이 되었다 여겨왔다.

하지만 사실 궁무독은 은위사나 금위사들에 못지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방금 전 소리없이 관목 숲을 베어버린 일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러나 검을 거둔 궁무독의 이마는 심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동위사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들 저러시지?)

(총관님 뿐 아니라 동위사들도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잖은가?)

철위사들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놀랍군. 마교의 몰영만안대법(沒影瞞眼大法)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가 당대에 존재할 줄이야.”

궁무독이 앞쪽을 노려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몰영만안대법!)

(그건 빛을 반사하거나 흘려보내서 상대방의 눈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교의 은신술 아닌가?)

(저곳에 누가 있단 말인가?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철위사들은 관목 숲이 반달형으로 갈라진 곳을 보며 놀라워했다.

 

<흐흐흐! 역시 만만치 않아!>

 

그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내의 음성인데 어디서 들리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독검마유 궁무독! 당신이 제왕성에서 총관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단지 운이 좋았거나 출신 배경 덕분이 아니라는 걸 방금 전의 일격으로 알게 되었다.>

 

츠으! 지이!

말소리와 함께 반달형으로 잘려나간 관목 숲 뒤쪽의 허공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같은 그 현상은 곧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 저기에 사람이 있다.”

무언가 움직인다.”

! 차창!

철위사들도 비로소 알아차리고 다급히 무기를 뽑아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다!>

 

!

음산한 외침과 함께 섬뜩한 섬광이 철위사 한명에게 날아들었다

!”

표적이 된 철위사는 다급히 칼을 들어 그 섬광을 막으려 했다.

콰창!

하지만 날아든 섬광에 닿는 순간 철위사의 칼은 유리처럼 깨졌다.

그 섬광은 마검칠식으로 발휘된 검기였던 것이다.

가강!

일거에 검을 깨트린 섬광은 철위사의 가슴으로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죽었다!)

철위사는 자기 가슴으로 파고 드는 차가운 섬광을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불쑥 내밀어진 누군가의 검이 철위사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섬광을 쳐냈다.

그 검의 주인은 물론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 감사합니다 총관님!”

스팟!

구사일생한 철위사는 뒤로 휙 날아 피하며 외쳤다.

스악!

철위사를 구한 궁무독은 몸을 홱 돌리며 허공에 대고 다시 검을 그었다.

이번에도 검에서 검기가 내뻗치는 흔적은 없었다.

 

<멸적살검(滅跡殺劍)!>

 

!

하지만 누군가의 긴장한 외침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두둑!

뒤이어 허공에서 피가 한줄기 확 뿌려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떤 자가 궁무독이 발휘한 기척 없는 검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베었다!”

그렇지!”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안도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휘청!

허공에서 사람의 흐릿한 형상이 휘청하고 있는데 그 형상의 어깨 쪽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다.

스악! !

철위사들이 환호할 때 동위사들은 이미 소리없이 쇄도하여 그 사람 형상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빠르고 격렬한 공격이다.

카캉! !

그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과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을 일으켰다.

파캉! !

하지만 그 직후 동위사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혀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역시 마검칠식에 당한 것이다.

“...!”

“...!”

스팟! 휘익!

무기가 부러진 동위사들은 벼락같이 뒤로 물러섰다.

스악!

물러서는 동위사들 뒤에서 궁무독이 다시 소리없이 검을 그어냈다.

다만 이번에는 수평으로 긋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그었는데 역시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크!>

 

!

아지랑이 같은 사람의 형상이 피를 허공에 뿌리면서 차가운 섬광을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그어 올렸다.

빠캉! 카앙!

궁무독이 발휘한 보이지 않는 검기가 그 섬광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검을 거둬들였다.

그만 합시다 궁총관! 오늘은 내가 진 것으로 할 테니...”

츠츠츠!

그 직후 젊은 사내의 음성과 함께 궁무독의 오장쯤 앞쪽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일신에 은박처럼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도 은박 재질에 눈 부위에만 구멍이 나있는 자루 모양의 복면을 쓰고 있다.

양손에는 같은 재질의 장갑을 끼었으며 발에 신은 신발도 같은 은박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자의 일신을 뒤덮고 있는 그 은박 재질의 천이 사람 눈에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 듯 했다.

무림에 나온 이래 본좌의 몸에 상처를 낸 건 궁총관이 처음이었소.”

말하는 복면인의 오른쪽 어깨에는 제법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궁무독이 두 번째로 그어낸 무형의 검기에 베어진 것이다.

마교의 인간이냐?”

철컥!

궁무독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렇소이다. 본좌는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막내인 검마(劍魔) 비무강(非无姜)이라고 하외다.”

복면인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마교!)

(구대마왕은 대대로 마교가 세상에 내보내는 최강의 고수들 호칭 아닌가?)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저자가 구대마왕의 일인이었구나.)

철위사들과 동위사들은 아연긴장하며 복면인, 검마를 노려보았다.

마교가 소요신군 강조를 비호하는 이유를 들어볼까?”

검마 비무강에게 걸어서 다가가는 궁무독의 두 눈이 차갑게 갈아 앉았다.

유감이지만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이다. 궁총관과 더 교분을 나누고 싶어도 혹시 정들까봐 겁이 나니...”

스스스!

검마 비무강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마음대로 오고가지는 못한다.”

! !

거의 동시에 궁무독은 칼집에 꽂았던 검을 다시 발검하여 허공을 종횡으로 긋고 갈랐다.

콰쾅! 투쾅!

그러자 검마가 서있던 곳 뒤쪽에서 두 번의 폭발이 일어난다. 궁무독이 발휘한 무형의 검기가 그 부분의 바닥을 박살낸 것이다.

 

<첫인사 치고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소이다. 기억해두리다. 흐흐흐!>

 

하지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마 비무강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놓쳤구나.)

동위사와 철위사들은 상황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말없이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 진 피 빚은 가급적 빨리 갚아드릴 테니 기대하시구려. 흐흐흐!>

 

검마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죽일 놈!”

서라!”

! 휘익!

분노한 동위사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쫓지 마라.”

궁무독이 그런 그들을 저지했다.

총관님!”

하지만 저놈 손에 스무명이 넘는 형제들이 당했는데...”

! 휘익!

동위사들은 분개하면서도 궁무독의 명령에 따라 도로 날아내렸다.

저자가 정말 구대마왕중 한명이라면 섣불리 상대해선 안된다.”

궁무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연락해서 반드시 네 명 이상이 조를 짜서 움직이라고 전하라. 일단 놈과 조우하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찾아내도록 시도하라 전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 !

동위사들은 복창한 후 왔던 길로 도로 날아갔다.

(마교의 최고 고수들인 구대마왕중 한 놈이 안탕산에 진을 치고 있다 이거지?)

날아가는 동위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두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요신군 강조! 점점 더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궁무독의 얼굴에는 어느덧 서릿발같은 살의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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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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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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