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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부동(五獸不動)

 

 

너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설령 그게 피붙이라도...”

철령보(鐵嶺堡)의 소보주 백남빈(白藍斌)은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렸다.

이름이 정취려(鄭翠麗)였던 어머니는 십삼 년 전 그의 곁을 영영 떠났었다.

오늘이 바로 그 어머니의 기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백남빈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다.

백무염(白無染)이란 이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육 년 전, 백남빈의 나이 겨우 세 살 때였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몸이 산처럼 컸고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처럼 환했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사랑하는 남편의 오랜 부재가 어머니에게서 생기(生氣)를 빼앗아 간 것같았다.

시름으로 나날이 쇠약해지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만을 세상에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백남빈을 거두어준 것은 이모인 정가려(鄭佳麗)였다.

백남빈은 이모 부부의 양자(養子)가 되어 자랐다.

철령보의 보주가 그의 이모부이며 양부(養父)인 것이다.

(얼마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기에 어머니는 피붙이도 믿으면 안된다고 하셨을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의 위패를 올려다보며 백남빈은 생각에 잠겼다.

피붙이조차 믿으면 안된다는 유언은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오직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한을 품고 돌아가신 연유는 차마 이모에게 여쭐 수가 없다.)

백남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피붙이일지라도 믿으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피붙이인 이모에게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긴 분이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만나 봐야만 어머니가 그리 유언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玉佩)가 들어있다.

얼음처럼 서늘한 그 옥패가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모와 이모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내려면 옥패의 내력부터 알아내야할 것이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내어 어머니 영전으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어머니의 위패에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사당을 나섰다.

 

이미 삼경(三更)에 접어든 시간이라 철령보의 사당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어둠 속에 백남빈을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다. 철령보의 총관인 사해검객(四海劍客) 종리완(鍾里阮)이다.

사해검객은 검법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인후한 성품을 지녀 아랫사람들로부터 인망이 두텁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당 밖에 서있는 사해검객을 보자 백남빈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영당(令堂)의 제사는 잘 모셨는가?”

사해검객이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 그보다 저와 의논할 일이 생겼겠습니다.”

백남빈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되물었다.

이모부이면서 양부인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獨眼龍) 이탁(李卓)은 사흘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다. 숙적인 대려장(大麗莊)의 동향이 심상치 앉아서 직접 접경지역을 순찰하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보주인 백남빈이 철령보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중이다.

신랑성(神狼城) 방면을 감시하던 형제들이 날려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네.”

사해검객은 들고 있던 폭이 좁고 긴 종이를 백남빈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는 전서구가 수백 리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자가 은밀히 월경(越境)을 했단 말이지요?”

전서를 받아 읽으며 백남빈의 미간이 조금 모아졌다. 전서에 적혀있는 이름이 범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주님께도 전서구를 날려 보냈네만... 서둘러 대응해야할 사안인 것같아서 소보주가 제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네.”

전서를 읽는 백남빈의 얼굴을 살피며 사해검객이 말했다. 말과 태도가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백남빈이 자못 어렵게 느껴지는 사해검객이었다.

제가 오늘밤 당직인 형제들을 이끌고 요격(邀擊)에 나서겠습니다. 총관께서는 양부와의 연락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남빈은 전서를 다시 사해검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함세.”

사해검객은 경험이 많은 자신이 요격에 나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나이는 아들뻘이지만 이 어린 주인의 말은 어쩐지 거스르기가 어렵다.

 

잠시 후 백여 기의 날쌘 기마대가 철령보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기마대의 선두에 선 것은 물론 철령보의 소보주인 백남빈이었다.

 

***

 

-오수부동(五獸不動)!

 

다섯 짐승이 서로를 노려서 피차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오수부동이야말로 당금의 무림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중원의 무황성(武皇城)과 농성(農城), 만리장성 밖의 대려장, 신랑성, 극품당(極品堂)등 다섯 세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칠십여 년 간 무림을 지배해온 것은 무황성이다.

무황성의 창건자는 철면무황(鐵面武皇) 한산림(韓山林)이라는 인물이다.

사문내력은 불분명하지만 철면무황은 백년 내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린다.

기이하면서도 실전적인 무공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중원에서 몽고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주원장은 철면무황에게 주()씨 성을 내리고 강호 무림의 주재자로 책봉했다.

한산림에서 주산림(朱山林)으로 개명한 철면무황은 호시탐탐 중원으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는 몽고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과 만리장성 사이에 거대한 성채를 세웠다.

그 성채는 무황성이라 불리며 칠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림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철면무황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과 명나라 황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무황성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특히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강탈한 <정난(靖難)의 변()>은 무황성과 명 황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만들었다.

무황성으로서는 주원장의 후계자인 건문제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건문제의 숙부인 연왕, 즉 영락제(永樂帝)였기 때문이다.

비록 영락제가 무황성을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인 주원장처럼 우대하지도 않았다.

자연히 무황성의 세력은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남쪽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농성이라는 세력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몽고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신랑성과 극품당, 그리고 동이족(東夷族)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이 차례로 흥기(興起) 했다.

오랜 세월 무림의 주인을 자처해왔던 무황성은 장강과 황하 유역에만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농성을 제외한 사대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이 동북방의 요하(遼河) 일대다.

요동(遼東)에는 동이족의 맹주 대려장이 웅거하고 있으며 요하의 북쪽에는 몽고의 유력한 부족 달단(韃靼)을 배경으로 둔 극품당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요하의 발원지이기도 한 서북쪽은 몽고의 가장 강력한 부족 오이라트(瓦刺)가 세운 신랑성의 세력권이다.

마지막으로 요서(遼西)에 펼쳐진 드넓은 철령평야(鐵嶺平野)에는 무황성의 최북단 거점인 철령보가 변황의 삼대세력 사이에 쐐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철령보는 그 전략적 위치에 어울리게 무황성의 여러 분타들 중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철령보 소속 무사들 중 약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강호의 평판이다.

철령보의 보주는 독안룡 이탁이란 인물이다.

무황성 감찰전(監察殿)의 전주였던 독안룡 이탁은 무공도 뛰어나지만 기문진법(奇門陣法)의 재주가 일절(一絶)로 꼽힌다.

그 독안룡 이탁의 양자인 백남빈이 야심한 중에 철령보를 나와 서북 방면으로 출격하면서 오수부동이던 강호의 정세에 일대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

화살이 얼굴 옆을 스치며 쨍한 소음을 낸다.

!”

젊은 시종 다얀(達延)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몸을 숙였다.

무공에는 소질뿐 아니라 흥미도 없어서 신랑성의 서재에만 틀어박혀 살아온 다얀이다.

당연히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오늘이 처음이다.

상당히 떨어진 옆쪽으로 흘러가는 화살조차 다얀의 온몸을 떨게 만든다.

자세를 흩트리지 마라. 그렇잖아도 지친 말을 힘들게 한다.”

앞서 달려가던 완안진(完顔進)이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 죄송합니다 부()성주님.”

몸을 숙였던 다얀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말들은 천리마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놈들이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숨은 턱에 차있고 발걸음은 눈에 띄게 어지럽다.

그렇다고 쉬게 할 수도 없다.

두 주종(主從)은 지금 다수의 적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며 달리고 있는 곳은 일망무제의 평야라 몸을 숨길만한 곳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밀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간 것일까?)

앞서 말을 달리는 완안진의 미간이 모아졌다.

 

올해 쉰 두 살인 완안진은 신랑성의 부성주다.

직책은 비록 부성주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사실상 신랑성의 성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몽고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오이라트에 의해 세워진 신랑성은 대대로 오이라트의 족장이 성주를 겸임해왔다.

신랑성의 당대 성주 신랑태사(神狼太師) 토곤(脫灌)은 제이(第二)의 징기스칸으로 불리는 영걸이다.

능력에 걸맞게 야심도 큰 토곤은 중원에서 쫓겨난 후 사분오열된 몽고족을 정복하고 통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만주(滿洲)와의 경계인 흥안령(興安嶺)에서 오이라트의 숙적 달단을 공격하다가 내일은 수천 리 밖의 서역으로 기마군단을 몰고 가 티무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샤 루흐와 격돌하는 식이다.

그 때문에 토곤은 신랑성의 성주 자리를 비워두다시피 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부성주인 완안진이 신랑성을 이끌고 있다.

토곤이 이십여 년 간 동분서주한 보람이 있어서 몽고의 부족 대부분은 오이라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밀려난 달단만이 원()나라 황실의 보위를 위해 세워졌던 무사집단 극품당을 전위(前衛)로 내세운 채 토곤에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몽고를 사실상 통합하는데 성공한 토곤의 야심은 이제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성주인 완안진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요동의 대려장으로 파견한 것인데...

대려장으로 가기 위해 극품당과 철령보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완안진과 시종 다얀은 종적이 발각되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진족(女眞族) 출신인 우리 형제들을 시기질투 하는 누군가가 극품당과 대려장에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완안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안(完顔)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완안진은 금()나라를 세워 한 때 중원을 정복했던 여진족 출신이다.

완안진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인 몽고의 유력한 부족 오이라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몽고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 덕분에 신랑성의 부성주가 되었지만 완안진에게는 적이 많다.

그 적들 중 누군가가 완안진이 토곤의 밀명을 받고 신랑성을 떠난 것을 틈 타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대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다니... 이번 일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대로 신랑성에 서식하는 버러지들을 일소해버리고 말겠다.)

완안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를 때였다.

삐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명적(鳴鏑), 즉 우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완안진과 다얀의 눈에 이리(二里) 쯤 뒤쪽에서 모래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수십 기의 기마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서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있다.

무황성의 동북면 거점인 철령보 소속의 기마대다.

그들은 해가 뜬 직후 자신들 주종을 발견한 이래 지치지도 않고 추격을 지속하고 있다.

하루 종일 추격해오면서도 대형을 흐트리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개개인이 무시 못 할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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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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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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