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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잡힌 거물(巨物)

 

 

삐이이이! 퍼억!

기마대의 선두가 날려 보낸 명적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뿐 완안진과 다얀에게 한 참 미치지 못하는 뒤쪽에 떨어졌다.

살상의 위험은 없지만 명적은 다른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는 쫓기는 표적으로 하여금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예민한 말들도 명적이 울릴 때마다 발작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진정해라.”

완안진은 그런 애마를 다독여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소리뿐인 명적에 이어 실질적인 위협이 쇄도한다.

피잉! 시잉!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든 유엽전(柳葉箭)과 세전(細箭)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말을 잘 달래라. 달리는 중이라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완안진은 실전 경험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다얀에게 외치며 몸을 좀 숙였다.

두 사람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있다.

또 말이 달려가는 속도가 날아든 화살의 위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이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은 맞아봤자 그저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 티팅!

날아든 화살 몇 개가 투구와 방패에 맞아 퉁겨진다.

히히힝! 푸르르!

엉덩이에 한 두 개씩의 화살이 꽂힌 말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완안진의 말 대로 달리는 속도가 화살의 힘을 약화시켜 깊이 박히진 않는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완안진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십여 리쯤 저편에 약간 높은 언덕이 길게 가로 누워있다.

그 언덕 너머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만 넘으면 대려장과 철령보의 경계인 요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만 건너가면 철령보도 무리하게 우릴 추적하진 못할 것이다.”

완안진은 겁에 질린 다얀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굳어졌다.

두두두!

갑자기 요하 변의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의 기마가 나타나 달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 철령보가 우릴 함정으로 몰아왔습니다.”

뒤 따라 오던 다얀이 겁에 질려서 계집애처럼 높은 소리를 낸다. 요하 쪽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기마대 역시 철령보 소속임을 알아보고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철령보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구나.)

완안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들을 추적하는 철령보의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멀리 우회한 동료들이 포위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종일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추격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완안진 자신도 전력으로 말을 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북쪽으로 간다.”

두두두! 히히힝!

완안진은 말의 방향을 급격하게 북쪽으로 틀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얀도 허둥대며 완안진을 따라 말을 몰았다.

요하의 북쪽은 극품당, 정확히는 달단의 영영이다.

같은 몽고의 부족이지만 달단은 신랑성을 세운 오이라트와 철천지원수 사이다. 신랑성의 부성주인 자신을 보면 기필코 잡아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철령보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일단 달단의 영역으로라도 피신해야만 한다.

두두두!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두 필의 준마는 서쪽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철령보의 기마대 사이에 끼어 북쪽으로 내달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같다.)

완안진은 곁눈질로 오른쪽을 보며 말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요하 변에 매복하고 있던 철령보의 기마대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진하면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오리(五里)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두두! 히히히힝!

완안진과 다얀이 달려가는 북쪽의 관목더미 뒤에서 두 필의 준마가 뛰쳐나온 때문이다.

(아차!)

완안진은 자신이 다시 한 번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아차렸다.

적은 앞뒤로 협공을 당한 자신과 다얀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매복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강행돌파 할 수 밖에...)

차앙!

완안진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다얀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역시 칼을 뽑으며 따라온다.

대략 이리 정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필의 준마 위에는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짙은 남색 옷을 걸친 청년은 약관 전후로 보이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깊고 형형하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하게 사경을 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부릅뜬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호 같고 건장한 몸에서는 사나운 살기가 뿜어진다.

(철령보의 오대고수(五大高手)중 한명인 철담도호(鐵膽刀虎) 고불귀(高不歸)겠구나.)

완안진은 중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독안룡 이탁이 직접 나섰다면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철담도호 고불귀가 사해검객 종리완과 함께 철령보 오대고수에 속하는 인물이긴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십초 내에 쓰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구명절초(救命絶招)가 있다.

그걸 쓰면 십초가 아니라 일격에라도 철담도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놈은 내가 맡겠다. 다얀 너는 젊은 놈을 상대하되 접전은 피하고 추격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라.”

완안진은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는 철담도호와 청년을 노려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

다얀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비록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오이라트 족장 토곤의 핏줄인지라 무공은 꾸준히 수련해왔다.

자신의 현재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가는 다얀이다.

그래도 상대 역시 자기 또래이니 잘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같다.

두두두!

그 사이에 양측의 거리가 삼십여 장 쯤으로 좁혀졌다.

(장심뢰(掌心雷)를 날려서 일격에 고불귀를 격살하자.)

완안진은 고삐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빼든 칼은 미끼에 불과하다.

그의 왼손에는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천근 무게의 철퇴가 휘둘러지는 위력을 지닌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철담도호는 완안진의 오른손에 들린 칼만 주의하다가 느닷없이 날아든 장심뢰의 일격에 몸뚱이가 으스러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계산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콰드드! 두두두!

거리가 십장쯤으로 좁혀졌을 무렵 그때까지 나란히 달려오던 청년과 철담도호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어서 거리를 확 넓힌 것이다.

마치 완안진과 다얀으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고 길을 터주듯이...

(위험하다!)

완안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얀이 위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적중했다.

! 촤라라!

철담도호와의 거리를 확 벌린 청년이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쇠사슬을 옆쪽으로 던졌다.

건너편의 철담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던진 쇠사슬 끝을 틀어쥔다.

완안진과 다얀의 앞쪽에 쇠사슬이라는 장애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거리는 그 사이에 오장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피하긴 늦었다!)

완안진은 눈을 부릅떴다.

말을 버려라!”

파앗!

완안진은 다급히 외치며 말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히익!”

다얀도 상황을 깨닫고 급히 말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콰창! 히히히힝!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과 철담도호가 양쪽에서 잡아끌고 온 쇠사슬에 목이 걸린 것이다.

! 촤라랑!

완안진과 다얀이 타고 있던 말들이 쇠사슬에 걸리자 청년과 철담도호는 즉시 쇠사슬을 놓았다.

콰당탕! 퍼억! 히히힝!

쇠사슬에 목이 휘감긴 말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뒹군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

완안진보다 한 박자 늦게 말 등으로 올라섰던 다얀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촤락!

청년이 놓은 쪽의 쇠사슬이 다얀의 하체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퍼억!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서 균형을 잃은 다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헌데 뒤로 넘어진 그의 머리가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퍼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다얀의 몸은 세차게 퍼덕인 후 축 늘어졌다.

... 안돼!”

허공으로 날아오른 후 철담도호를 공격하려던 완안진이 그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얀!”

휘익!

완안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다얀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끄윽...”

다얀은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깨져 기식이 엄엄한 상태다.

이런...”

완안진은 다얀의 뒷통수 쪽의 혈도를 찍어 출혈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막아주며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다얀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나 완안진은 성주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

벌벌 떠는 다얀을 내려다보며 완안진은 대려장을 향하던 자신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말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완안진을 에워싼다.

몰려든 백여 기의 기마대가 거대한 원진을 그리며 완안진과 다얀을 포위하고 있다. 말을 탄 철령보의 무사들은 강전을 재운 활로 완안진을 겨누고 있고...

고대협, 투항할 테니 용납하여 주기 바라오.”

완안진은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철담도호 고불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항서(降書)를 쓸 생각이라면 대상이 틀렸소 부성주.”

하지만 철담도호는 옆으로 물러서서 완안진의 예를 피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 완안진이 오늘 거푸 세 번이나 실태를 범하는구먼.”

옆으로 물러서는 철담도호를 보며 완안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철담도호가 비켜서는 뒤쪽에서 쇠사슬을 던졌던 냄색 옷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큰일을 치뤘음에도 청년의 눈빛은 깊게 갈아 앉아 있는데 걸음걸이는 무거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철담도호를 비롯하여 철령보의 모든 무사들의 시선은 그 청년을 향하고 있다.

비로소 완안진은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을 추격해온 철령보 무사들의 수령임을 알아차렸다.

함정에 거푸 두 번 빠진 것도 모자라 그 함정의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신랑성을 이끌어온 완안진답지 않은 실책이다.

부성주, 투항하시겠다면 항장(降將)으로 예우해드리겠소.”

완안진의 일장 앞에 멈춰선 청년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인생이다.)

완안진은 아들뻘인 청년이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철령보의 소보주 검사자(劍獅子) 백남빈! 중원무림에서 신진제일고수라 불린다는 그대에게 투항하면 수치심이 조금이나마 감해지겠군.”

완안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청년은 바로 철령보의 소보주 백남빈이었다.

 

백남빈의 별호는 검사자다.

그에게 검사자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은 무황성의 당대 성주인 주진충(朱盡忠)이다.

무황성에서는 매년 젊은 무사들중 일인자를 가리는 비무대회, 등천제(登天祭)가 열린다.

헌데 오 년 전,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등천제에 출전한 백남빈이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백남빈이 이기는 일이 반복되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수의 왕인 사자 같다고 해서 주진충은 백남빈에게 검사자라는,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내려주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백남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투항의 조건을 말씀해보시오.”

백남빈이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의 치료와 무사귀환을 원하네. 대신 본인이 대려장으로 가던 목적은 숨김없이 자백하겠네.”

완안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의 손잡이를 백남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 대협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소.”

백남빈은 완안진이 내민 칼을 받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몽고 최강의 부족 오이라트가 세운 신랑성의 이인자 완안진은 무황성 동북 분타 철령보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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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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