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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十七 章

 

               찬란한 太陽

 

 

 

어느 분이 오셨소?”

뇌옥 안쪽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염무위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대꾸했다.

노부일세!”

이어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형님!”

태상장로님!”

철문 안쪽에 갇혀 있던 백여 명의 인물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이검엽도 염무위를 따라 들어와 그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염무위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육십 세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한 눈에 봐도 그들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홍의와 청의를 입은 백령공 또래의 노인은 특출해보였다.

홍령공(紅靈公)과 청령공(靑靈公),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백 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천외천궁의 진정한 힘은 천존군영대 따위의 젊은 놈팽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노장들이다. 이들의 힘은 천존군영대보다 십() 배는 강한 것이다!)

이검엽은 그들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때 염무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우님들에게 이분 천황성수 이공자를 소개하겠소.”

! 천황성수(天荒聖手)!”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검엽에게 모아졌다.

그리고 이검엽을 본 순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영웅(英雄),

젊은 기협(奇俠)으로 자신들의 난국을 타개해줄 인물,

그의 참() 면목을...

이검엽은 정중히 포권했다.

이검엽이라 하외다. 지도와 편달 있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늙은이들이야 말로 가르침 있으시길 바라오.”

청령공과 홍령공이 중인들을 대표하여 인사를 했다.

! 모두 앉게나.”

염무위의 말에 중인들은 이검엽 주위로 몰려와 앉았다.

그리고 나직하고 비밀스런 대화가 오갔다.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자는 없으리라.

그 사이 중인들의 눈길은 마치 빨려들 듯 이검엽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절대적인 신망(信望)을 담은 채,

 

***

 

그르르... !

석문(石門)이 열리며 들어서는 인물,

이검엽이었다.

작은 뇌옥(牢獄) 안에는 여러 가지 형구(刑具)가 놓여 있고,

송진 횃불 하나가 그을음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뇌옥이라기보다는 형장(刑場)을 연상시키는 곳,

그곳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검엽이 들어선 문의 맞은편 석벽에 전라여인(全裸女人) 한명이 쇠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여인의 나신,

섬세한 곡선이 두드러진 훌륭한 몸매였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몽클한 것 같은 감촉이 시각(視覺)만으로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백옥지신(白玉之身),

특히 그녀는 피부가 백옥처럼 고왔다.

하지만 그 백옥지신은 지금 끔찍한 상흔만이 남아 있었다.

멋대로 휘갈긴 듯한 수많은 채찍 자국,

살갗이 타들어간 인두자국 등,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그녀의 나신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불쌍한...”

이검엽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여인이 꿈틀했다.

이어 그녀는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더러운 놈들! 차라리 죽여다오!”

휴우...”

이검엽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쳐들었다.

스스스...!

그러자 쇠사슬은 모래와 같이 부서져 내리고

여인의 몸은 둥실 떠오라 이검엽의 팔에 안겼다.

... 누구?”

그제야 여인은 흠칫하여 힘겹게 눈을 떴다.

나요 검지(劍芝)!”

이검엽의 나직한 부름,

... 공자님!

여인은 바로 검황종(劍皇宗)의 손녀인 매검지(梅劍芝)였다.

공자님! 공자님! 흑흑...”

그녀는 이검엽의 품에 안긴 채 오열을 거듭했다.

가엾은 것... 섣불리 천외천궁주에게 달려들 것을 걱정했더니...”

이검엽이 다독이자 그녀는 오열과 함께 부르짖었다.

흑흑... 참을 수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검엽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오빠가 누이에게 하듯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라. 검황종 노선배님의 원한은 내가 갚아줄 것이니...”

공자님...!”

매검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

 

심야(深夜),

화려한 전각(殿閣) 한 채가 달빛 아래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커억!”

전각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십여 명의 금의인들이 돌연 쓰러졌다.

------!

!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 직후,

스스스...!

마치 유령처럼 한 명의 백의인이 장내에 나타났다.

이검엽이었다.

금의인들이 쓰러져간 이유는 뻔했다.

이심제기(以心制氣).

그 가공할 무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검엽은 자기 집인 듯 유유히 걸어 전각으로 다가갔다.

(이곳에 금령시위대장인 금령무존(金靈武尊)이라는 자가 머문다고 했겠다!)

스르륵,...

그가 다가서자 전각의 문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누구냣!”

전각 안쪽에서 일성 냉갈이 터져 나왔다.

(역시 범상치 않은 자로군.)

이검엽은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다.

누군가 전각의 깊숙한 내실에 있으면서 입구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것만으로도 그 인물이 지닌 무공의 깊이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검엽은 태연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를 막는 자는 없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겠구나. 경호조차 거부하는 것을 보면...)

하나 둘 쯤이라도 있음직한 호신무사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전각 안,

이검엽은 그곳을 가로질러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화려한 침실,

한 명의 노인(老人)이 침대에서 내려와 이검엽을 맞이했다.

건장한 체구에 대추빛 안색, 수염을 길게 길러 의젓한 풍모를 풍기는 노인이다.

전설 속의 관운장(關雲將)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누군데 감히 본존의 처소에 난입하는가?”

노인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

하지만 노인은 이내 대경실색했다.

이검엽과 마주한 순간 가이 없는 창공(蒼空)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이검엽에게서는 거칠면서도 유연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대해와도 같은 기도가 느껴진다.

노인은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 귀하는 누구신가?”

그는 형용키 어려운 감정을 담은 시선으로 이검엽을 응시했다.

이검엽이 되물었다.

그대가... 금령무존이신가?”

노인, 금령무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한데 귀하는 누구신가?”

이어진 그의 질문에 이검엽은 나직이 대답했다.

천황(天荒)에서 온 사람이오.”

... 그렇다면 천... 천황존신(天荒尊神)이란 말인가?”

금령무존은 부르짖듯 되물었다.

천황에서 온 것은 확실하나 존신(尊神)이란 칭호는 과분하오.”

그러나 그 순간 금령무존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인물이 전설 속의 천황존신(天荒尊神)임을...!

그는 신음하듯 뇌까렸다.

으음... ...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그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전설...

 

중원(中原)이 한 가닥 신음조차 끊이고,

혼돈(混沌)의 혈야(血夜)가 억겁()을 지나려 할때,

돌연 한 줄기 외로운 그림자(孤影)!

천황(天荒)으로부터 오다.

절대금검(絶代金劍)의 광휘!

천세(天世)를 초월(超越)하고...

()을 꺾고 기()를 빼앗겼던 천만군협(千萬群俠)!

하나로 환호하며 우러러 받들다.

절대존명(絶代尊名)!

 

-----천황존신(天荒尊神)------

-----천황존신(天荒尊神)이시여-------

 

어느덧 금령무존은 사색이 되었다.

천황존신의 출현-------

전설은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천외천궁의 종말을 고()함이 아닌가?

그때 이검엽은 나직이 말했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그대를 제거해야겠소!”

------ !

쏴아아...!

순간 무형의 극강한 힘이 금령무존을 휩쓸었다.

...!”

금령무존은 부르르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일신의 공력을 모두 쏟아내어 맞섰다.

금령천강공(金靈天罡功)------!”

콰르릉...!

콰쾅------!

실로 엄청난 힘()이 실린 금광(金光)이 금령무존의 쌍장에서 폭출 되었다.

스스스...!

하지만 금령천강공은 마치 바다에 빠진 모래가루처럼 일시에 스러지고 말았다.

----- !”

동시에 그의 몸이 휘청했다.

분명 그는 멀쩡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내부가 완전히 박살이 나있음을,

그는 자신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 천황존신...! ,... 궁주는... 때를 잘못 타고 났다.”

------ !

말을 맺기도 전에 그의 몸은 고목이 쓰러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

이검엽은 묵묵히 돌아섰다.

무심한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담담하고 고요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곁에는 홍, , 백의 태상장로들이 와 있었다.

아연실색!

그들은 저마다 경악으로 인해 부르르 경련했다.

(금령무존... 궁주 다음가는 고수가 단 일초의 저항도 못해보고...!)

(놀랍다! 딱히 손을 쓰지도 않았거늘 기()로써 금령무존 정도의 고수를 일거에 제거하다니...)

이검엽은 경악에 찬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전각을 나섰다.

그러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궁주만 남았군!”

야공(夜空),

한 줄기 유성(流星)이 길게 꼬리를 그으며 서천(西天)으로 사라졌다.

마치 천예지(天刈芝)가 죽었던 밤처럼,...

 

X X X

 

아침이 되었다.

... !”

눈을 뜨자마자 단목운뢰(丹木雲雷)는 검미를 찌푸렸다.

기이하게도 궁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는 침상에서 일어서며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밖에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금령시위대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또 그 많던 시비들은 또 어디로 간 것인가?

문득 서늘한 봄바람이 그의 옷깃을 스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 혼자란 말인가? 천존군영대... 금령시위대... 전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였다.

그의 눈에 한 명의 청년이 휘적휘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깨끗한 백의(白衣)를 걸친 초탈한 용모,

허리에는 비스듬히 초라한 고검(古劍)을 걸고...

단목운뢰는 흠칫했다.

(묵령신검(墨靈神劍)! 저것이 어떻게...!)

그 사이 청년은 창문에 가까이 다가왔다.

단목운뢰는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탈하구나. 세속을 초월한 인물...!)

그때 청년이 정중히 포권했다.

궁주! 잠시 모시고 싶소이다.”

담담하고 낭랑한 음성,

단목운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했다.

기꺼이 응하리다.”

이어 그는 이내 의복을 단정히 갖춘 후 밖으로 날아 나갔다.

귀공의 성함은?”

그가 묻자 청년은 간단히 대답했다.

이검엽이라 하외다.”

단목운뢰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천황존신(天荒尊神)...!”

이검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과분한 칭호외다.”

그렇지 않소.”

단목운뢰는 고개를 저었다.

전설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귀공을 대하니 믿지 않을 수 없구료.”

이검엽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명호(名號)... 한때 스치는 춘풍같이 허망한 것... 무엇이던 상관이 있겠소이까?”

이윽고 두 사람(兩人)은 나란히 걸었다.

본인을 어디로 인도할 참인가?”

단목운뢰의 물음에 이검엽은 선선히 대답했다.

궁주를 뵙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소이다.”

단목운뢰는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때가 아닌 모양이군.”

체념에서인가?

단목운뢰는 분명 자신의 종말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초연했다.

()과 사()의 개념을 이미 초월한 듯,

이검엽과 단목운뢰,

그들 두 사람은 지금 한결같이 똑같은 심정이었다.

감정의 대립이라든가 살심(殺心) 따위,

그런 것들은 이순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십년지기(十年知己)인 양 그들은 온화한 미소를 지고 받을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묵묵히 걸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드넓은 연무장(鍊武場)이었다.

수천을 헤아리는 천외천궁도들이 연무장을 빽빽이 매운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단목운뢰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의 심리란... 조변모개와 같이 부지없는 것인 것 같소.”

궁주께서는 조금 더 일찍 그것을 깨달으셨어야 했소이다.”

이검엽의 말에 단목운뢰는 공허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그 말이 맞소. 동감하는 바요.”

두 사람은 천외천궁도들의 시선이 집중된 채 높은 대위로 올랐다.

이미 예정된 자신의 종말을 느낀 것일까?

단목운뢰는 허허롭게 웃었다.

허헛... 본인이... 형님을 천주산에서 시해하고 돌아와 보니... 천외신존이 남긴 백팔십(百八十) 개의 점토판 중 마지막 팔백십번째 점토판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소.”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토판에 숨겨진 이치를 궁주께서는 곧 보시게 될 것이외다.

알겠소. 그럼...!”

단목운뢰는 말했다.

천외존극신강(天外尊極神罡)이라는 것이외다. 천외천궁의 일천년(一千年) 정화가 실린 것이오!”

콰르르------- !

쿠르르...!

돌연 천지를 함몰시킬 듯 거창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이검엽을 덮쳤다.

그것은 집채만한 바위라도 돌개바람에 휘말린 지푸라기처럼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스스스...!

하지만 천외존극신강의 힘은 이검엽의 주위에 이르자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검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다.

단목운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 대단하구려! 손도 쓰지 않고 어떻게 천외존극신강의 역도를 흩어버린 것이오?”

이검엽은 무심히 대답했다.

대천황존신강(大天荒尊神罡)이라는 것이었소이다.”

그랬었군.”

단목운뢰는 두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천극굉연대천황(天剋轟然大天荒)마저 보고 싶구려!”

보여 드리리다!”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그는 천천히 절대금검을 뽑았다.

순간 찬란한 금광(金光)이 비무대를 가득 메웠다.

... 절대금검(絶代金劍)!”

단목운뢰는 놀라며 부르짖었다.

위잉-------!

츠츠츠츠...!

그 사이 절대금검은 이검엽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 ------!

------- !

일순 천외천궁 전체가 온통 휘황한 금광으로 뒤덮였다.

! 저럴 수가!”

단목운뢰는 꿈인 듯 정신없이 부르짖었다.

절대금검-------

그 자체가 허공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백 장(百丈)인가?

아니, 이백 장... 오백 장(五百丈)까지...!

아아!

천외천궁 전체가 거대한 절대금검에 짓눌리고 마는 것인가?

아니었다.

파츠츠... 츠츠... ...!

한 순간 그 거대한 검봉(劍峯)은 서서히 내려 꽂히고 있었다.

정확히 단목운뢰를 향해!

붕천극강(崩天剋罡)-------!”

단목운뢰는 사력을 다해 양손을 휘둘렀다.

콰르르릉-------!

꽈꽈------- -----!

태산이라도 허물어뜨릴 듯한 강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디작은 한 인간이 창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돌팔매질에 불과했다.

대자연(大自然)!

대우주(大宇宙)의 크나큰 이치!

그것에 어찌 인간이 대항하랴!

------ !

----- ------ !

거대한 검봉은 드디어 단목운뢰를 관통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거대하던 절대금검의 자취가 삽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장내에 남은 것은 두 자 여섯 치의 절대금검에 관통당해 비틀거리는 단목운뢰였다.

단목운뢰,

()의 종말을 장식하려 함인가?

그는 의미 깊은 한 마디를 남겼다.

... 자연... 을 상대하려 했으니... 나는... 천하제일의... 바보였... !”

푸스스...!

다음 순간 기이한 음향과 함께 단목운뢰의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추악한 생전(生前)의 야심과 함께 영원히 증발해 버린 것인가?

“...!”

“...!”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감히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열 자는 없었다.

휴우...!”

이윽고 이검엽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덩그렇게 남은 절대금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는... 너를 쓰는 일이 없기를...!”

이로써 모든 혈겁()은 종식되었다.

절대금검!

그 휘황한 광휘를 마지막으로...

와아-------!”

비로소 군웅들의 함성이 터졌다.

그들은 천지가 떠나갈 듯 소리 높여 외쳤다.

천황존신-------!”

천황존신이여------!”

천외천궁도들.

그리고 밤을 지새워 달려온 군협들은 환호에 거듭했다.

-------!

! ------!

그때 백, , 홍의 세 태상장로가 분분히 날아와 이검엽 앞에 꿇어 엎드렸다.

노신(老臣), 궁주님을 알현합니다!”

백령공의 손에는 찬연한 금빛 영부가 들려져 있었다.

 

<천궁지존령(天宮至尊令)>

 

하지만 이검엽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염공(苒公)...! 본인은 그것을 받을 수 없소이다.”

그러나 백령공 염무위는 의미있게 미소했다.

궁주께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들을 보십시오!”

염무위가 가리키는 것.

그것은 수많은 천외천궁도들이었다.

궁주님을 알현하옵니다!”

그들은 일제히 이검엽을 향해 대례(大禮)를 올리고 있지 않은가?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천외천궁주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진실로 본인을 난처하게 만드는구료...!”

이검엽은 씁쓸히 웃으며 천궁지존령(天宮至尊令)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천외천궁은 환호했다.

와아-------! 궁주님 만세-------!”

와아-------!”

천외천궁! 영원하라------!”

천황존신(天荒尊神)!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젊은 영웅(英雄)!

그는 천외천궁주로서 군림(君臨)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오빠------!”

상공-------!”

아우님...!”

군웅들 사이에서 여러 줄기의 왜영이 솟구쳣다.

무두가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태극신후.

그녀에게 안긴 자운(紫雲).

그리고 빙후(氷后)와 설미조(雪美藻).

또한,

매검지(梅劍芝).

그녀들은 일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와 이검엽을 둘러쌌다.

------- !”

------!”

끝없이 계속 될듯한 환성, 환성------!

하지만 멀찍이 뒤에 숨어 홀로 눈물을 흘리는 미녀(美女)가 한 명 있었다.

이공자님...!”

그녀는 무너지듯 쓰러져 오열했다.

흐느끼는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

그녀는 바로 단목자혜(丹木紫慧)였다.

 

찬란한 태양(太陽)이 솟는다.

창공(蒼空)을 향해 우뚝 솟은 아미금산(天外神山) 위로 찬란한 양광(陽光)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천황존신(天荒尊神)>

 

그의 이름도 그 태양처럼 영원히 무림사(武林史)에 기록되리라!

 

< 大 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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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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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장

 

               무참한 여인들 (2)

 

 

 

“당신... 당신이 어떻게 이런 짓을...”

누군가 만화선자를 굶주린 짐승들에게 던져준 천외천궁주에게 악을 썼다.

지후(地后).

바로 천외천궁주의 부인인 그녀였다.

“이게 다 부인의 헛된 망상이 초래한 결과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소?”

천외천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지후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런 말도 안되는...!”

지후는 딸 단목자혜와 함께 서서 치를 떨었다.

“부인! 고집부리지 말고 날 따라 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천외천궁주가 짐짓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쳐요! 다른 사람은 속일지언정 난 못 속여요!”

지후는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쳤다.

“자진해서 못가겠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구료.”

천외천궁주는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멈춰라-------”

휘르르르...

두 부부 앞으로 한 청년이 내려섰다.

봉두난발에서 풍기는 술냄새.

바로 대천제군이었다.

“지후! 걱정마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그는 사뭇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지후와 단목자혜의 눈에는 실망의 기색이 어렸다.

어떻게 보아도 대천제군은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이다.

대천제군을 본 천외천궁주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네놈이 대천제군이라는 얼간이이더냐?”

“무엇이!”

대천제군은 발끈하여 소리쳤다.

“에잇! 죽어라-----”

위----- 잉!

일순 대천제군의 몸은 성스러운 불광(佛光) 속에 휩싸였다.

“허어! 무아(無我)일맥의 패엽불강(貝葉佛罡)인가?”

천외천궁주는 코웃음치며 즉시 우수를 내밀었다.

콰------ 앙!

강맹한 일장이 그대로 불광을 깨뜨리며 들어가 대천제군을 후려쳤다.

“크------- 윽!”

대천제군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겨우 멈춰서는 대천제군을 향해 천외천궁주는 조소를 흘렸다.

“흐흐흐 네놈이 천황성수를 무림에서 몰아내 주어 본궁주의 수고를 덜어준 댓가로 단번에 죽여주마!”

대천제군은 천황성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더욱 길길이 뛰었다.

“어림없다! 풍운개벽대정신강(風雲開闢大霆神罡)-------”

콰르릉-----

풍운이 변색하는 듯한 극강한 강기가 천외천궁주를 쓸어갔다.

하지만

“삼정(三鼎)의 무공으로는 어림없다!”

냉소하는 천외천궁주의 몸이 서기로운 광휘를 일으켰다.

콰------ 앙!

대천제군이 천외천궁주를 내쳤다싶은 순간,

“크------ 악!”

사방에서 피보라가 날렸다.

대천제군은 박살이 나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부여안고 부르짖었다.

“크..... 내가 이렇게 약하진 않았는... 데!”

쿵-----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뒹군 대천제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과실을 범했다 치더라도 어쨌든 그는 이검엽 이전에는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였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고 만 것이었다.

“으... 으...”

지후는 실망과 낙담이 어우러져 비칠거렸다.

천외천궁주는 의도적으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부인, 이제 그만 궁으로 들어 갑시다!”

“에익!”

지후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천허존신강기를 일으켰다.

콰르릉------!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스스스...!

하지만 그녀가 발휘한 천허존신강기는 천외천궁주의 몸에 닿자 눈 녹듯 스러졌다.

사력을 다했다한들 그녀의 성취는 천외천궁주의 그것에 일할에도 채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흐윽.....!”

직후 지후는 교구를 휘청하며 쓰러졌다.

소리없는 지력이 혼혈을 찍은 것이다.

“으우하하하핫-----!”

천외천궁주는 앙천광소하며 무너지는 지후의 몸을 받아 안았다.

“어머니!”

단목자혜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X X X

 

“흐흐... 부인! 왜 이러시오!”

야밤의 침실,

탄탄한 사내의 동체가 강압적으로 여인을 찍어 눌렀다.

“비켜랏! 네놈이 감히... 아악!”

여인의 발버둥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그녀는 사내의 완력에 간단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후------- 욱!

사내는 입으로 등잔을 불어 껐다.

불빛이 스러진 방안,

창으로 스미는 월광(月光)은 오히려 포근한 빛으로 그들을 비춰 주었다.

“흐흐... 부인!”

사내의 입술이 거칠게 여인을 훑어갔다.

“안... 안돼...!”

여인은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본능(本能),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그녀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허억!”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인의 나신 위에 올랐다.

“아...!”

여인의 팔은 어느새 사내의 목을 휘감아 갔다.

뒤엉켜진 남녀,

“아학!”

마침내 악문 여인의 이빨 사이로 자지러드는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합일(合一),

드디어 그들은 본격적인 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지칠 줄 모르는 듯 거듭거듭 숨가쁘게 율동했다.

“아... 아... 학...!”

여인은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교수는 사내의 등을 마구 쥐어뜯었다.

사내는 마치 굶주린 야수와 같이 끝없이 여체를 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발... 그만...!”

여인은 어느덧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듯, 그자는 지칠 줄 모르고 여체를 농락했다.

 

다시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이 기울고 있었다.

“으헉... 헉...!”

사내의 거친 숨소리는 여전했다.

“으... 음...!”

여인은 거의 실신지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 사이에 새벽의 여명(黎明)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방안의 광경이 훤히 드러났다.

알몸으로 뒤엉킨 채 몸부림치는 남녀...

한데 일순,

“아------ 악!”

사내에게 깔려있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지나친 쾌락으로 혼미해져있던 그녀의 눈에 너무도 끔찍한 얼굴이 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몸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사내는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었다.

“안돼!”

여인은 단말마같은 비명과 함께 사내를 확 밀어내었다.

“억!”

방심하고 있던 사내는 여인에게서 밀려나 나뒹굴었다.

와장창-------!

사내를 밀쳐낸 여인은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발가벗은 채 미친 듯 뛰어나온 여인,

놀랍게도 그녀는 지후(地后)가 아닌가?

사내에게 시달린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나신,

그녀는 처절히 부르짖었다.

“설... 설마... 당신일 줄이야!”

한편 방안에서는 밤새 지후를 유린했던 사내가 황급히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실수했군. 역용이 풀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당황한 사내,

그자는 패도적인 분위기의 중년 사내였다.

바로 천주산에서 형인 백의인을 모살한 청의인이었다.

지후는 남편을 해친 원수에게 짓밟혔던 것이다.

실로 가혹한 운명이었다.

“호호호홋-------”

지후는 발가벗은 채 미친 듯이 웅장한 전각들 사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과 몸을 섞은 지후는 미쳐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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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장

 

               혈궁과 삼패의 궤멸 (2)

 

 

 

절곡(絶谷),

나는 새(鳥)라도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깊고 깊은 계곡이다.

마치 지옥의 입구같은 절곡의 끝에는 의외로 수만 평은 됨직한 원형의 분지가 있다.

그 분지를 가득 메우고 음산한 혈기(血氣)에 뒤덮인 궁(宮)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혈기가 감싸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자욱한 혈무(血霧)요, 피보라였다.

창! 차창----

콰르릉---- 펑!

쐐------ 에---- 액! 파츠츠츳-----!

쾅! 콰릉------!

“와----- 아------!”

“크----- 악!”

“크------ 으---- 아------ 악------!”

아수라(阿修羅)가 만드는 지옥도(地獄圖)인가?

절곡 끝의 분지에 자리한 궁(宮) 일대에서는 무려 이만(二萬)에 달하는 인물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공할 혈전(血戰)이었다.

궁을 방어하는 무리는 오천(五千)에 달하는 혈포인(血袍人)들이었다.

혈포인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여러 부류였다.

팔구천(八九千)에 달하는 백포인(白袍人)들,

천(千)여 명의 요녀(妖女)들,

이천(二千)여의 잡다한 인물들,

그리고 수천 명의 악귀(惡鬼)같은 모습의 인물들이었다.

혈세사패의 무리들이 혈포인들을 합공(合攻)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처절한 사투였다.

“크-----악!”

“크---- 아----- 악!”

꽈르릉---- 콰쾅-----!

쐐----- 애----- 액!

차차------창---- 창------!

비명과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요란한 폭음, 금속음이 절곡을 메웠다.

숫적으로는 열세였으나 혈포인들 개개인의 무공은 혈세사패보다 우월했다.

다만 공격하는 혈세사패 수하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내에는 피의 시신이 산(山)처럼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루고 있었다.

실로 인세(人世)의 종말들 보는 듯한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한데 그때였다.

“우... 우... 우... 우...”

돌연 한 줄기 장소성이 궁의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화악!

이어 한 줄기 혈영(血影)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혈영은 전신에 핏빛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쉬------- 익!

단번에 수십 장 높이로 솟구쳐 전세를 살펴본 혈포노인의 얼굴이 무시무시한 살기로 물들었다.

“혈세사패(血洗四覇)! 네놈들이 감히 혈궁(血宮)을 치다니! 간이 부었구나!”

혈포노인은 음산무비한 일갈을 터뜨렸다.

절곡에 자리한 궁은 혈궁이었다.

그렇다면 혈포노인은 혈궁의 궁주인 혈종(血宗) 아니겠는가?

쉬------ 익!

혈종은 곧장 혈세사패의 무리들에게로 폭사해갔다.

콰르릉...

직후 일성 폭음과 함께 엄청난 혈강(血罡)이 장내를 휩쓸었다.

콰르르... 콰,... 응...

“크------- 악!”

“아----- 아------ 악!”

“크----- 아------ 악!”

놀랍고 끔찍한 일이었다.

혈종이 쏟아낸 혈강이 휩쓸자 혈세사패의 인물들은 추풍낙엽같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핫... 가거랏! 염라전으로...”

혈종은 광소를 터뜨리며 양손을 뻗었다.

스스스! 화악!

혈종의 양손에서 피 안개같은 것이 확 뿜어져 나왔다.

순간 그자 근처에 있던 혈세사패의 수하들은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쥐었다.

“크----- 아! 독... 독(毒)이다.”

“아아악-----”

“크------ 으----- 악!”

삽시에 백여 명의 혈세사패 수하들이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되어 나뒹굴었다.

실로 가공할 독의 위력이었다.

혈종은 엄청난 살기를 발산하여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핫... 모두 모두 죽이리라.”

그는 양손을 내저었다.

그때마다 백여 명이 무더기로 짚단 쓰러지듯 넘어졌다.

실로 가공할 독공이었다.

그때였다.

“호호호홋...”

돌연 혼백을 빼앗을 듯이 요란한 교소가 터짐과 동시,

“크크큿... 혈종!”

음산한 외침과 함께,

휘르륵...

혈종의 주위로 삼인(三人)의 인영이 내려섰다.

그들이 나타난 순간 혈종은 만면에 더욱 살기를 발산했다.

“크하하... 네놈들이었군!”

나타난 삼인은 다름 아닌 천살백제, 지옥천공. 요지선녀였다.

즉 혈세사패의 수뇌들인 것이었다.

단지 그들 가운데는 환공강의 주인인 환영비마만이 없었다.

천살백제가 입을 열어 음침하게 말했다.

“혈종! 순순히 검황종의 검경을 내놓아라!”

그 말에 지옥천공과 요지선녀의 얼굴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혈종은 그 말에 노갈을 터뜨렸다.

“미친 소리! 검황종의 검경이라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

그러자 요지선녀가 요사스럽게 몸을 흔들며 웃었다.

“흣흣흣...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시치미를 떼다니 혈종답지 않군요.”

지옥천공도 음침하게 한 마디했다.

“혈종! 검황궁의 검경을 혼자 독차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들의 말에 혈종은 마침내 만면에 흉폭한 살기를 드러냈다.

“크크크... 네놈들이 본 혈종을 위해하기 위해 별 수작을 다 꾸미는구나! 좋다! 오랏! 받아주마!”

수르르르...

혈종의 전신 핏빛장포가 부풀어 오르며 그의 전신에서 시뻘건 혈기가 일어났다.

“갈!”

천살백제가 먼저 기형장도를 발출했다.

번쩍!

쐐------ 애----- 액----!

가공할 도기(刀氣)가 전광처럼 떨었다.

“으핫핫핫... 감히!”

콰르릉!

혈종은 뭉클한 혈기를 뻗으며 도세를 막았다.

“흣흣흣흣... 여기도 있다!”

“흣흣흣... 지옥이 너를 부른다!”

콰르릉... 콰릉...

사인(四人) 대격돌.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혈세사패의 주인과 천하를 주름잡는 혈궁의 궁주 혈종이 삼대 일로 맞붙은 것이었다.

콰르릉------- 콰------- 앙!

파츠츠츠츠... 콰릉...

콰르르...

엄청난 경풍, 강기의 소용돌이가 일어 지면에 구덩이가 파이고 흙먼지가 십 장 높이로 치솟았다.

막상막하의 접전이었다.

혈종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삼패의 주인들의 협공을 막힘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콰------- 콰릉-------

치열한 격전이 자욱한 흙먼지와 폭풍 속에서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천살백제는 싸움의 와중 속에서 힐끗 장내를 살펴보았다.

어느덧 대혈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혈세사패와 혈궁의 수하들은 거의 만오천명(萬五千名)이 시신으로 화해 있었다.

혈궁 일대는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창... 차차차... 창...

꽈릉... 콰... 쾅...

“으------ 아----- 악!”

“크----- 아------- 악!”

싸움은 끝이 없을 듯 계속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는 고작 천여 명의 혈궁도, 오천여 명의 혈세사패 수하들이 전부였다.

상황을 파악한 천살백제는 내심 중얼거렸다.

(빙궁(氷宮)까지 끌어들였어야 했는데... 게다가 환공강의 주인인 환영비마(幻影飛魔), 그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니...)

천살백제는 두 눈 가득 살기를 띄었다.

(이제 끝을 내자. 너무 오래 끌었다.)

스스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옆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그는 도(刀)를 기이하게 비껴들었다.

그것은 베는 것도, 찌르는 것도 아닌 괴이한 자세였다.

파파팟!

이어 엄청난 도강(刀罡)이 장도로부터 폭사되었다.

“헉!”

혈종은 느닷없이 폭사된 도강에 기겁을 하도록 놀랐다.

그는 전력을 다해 방어했다.

콰르릉-------!

일성폭음과 함께,

“크------- 윽!”

그는 가슴이 화끈함과 동시에 분수같은 피가 솟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앗...!”

“아니...!”

그 갑작스런 변화에 합공하던 지옥천공과 요지선녀도 놀라 경악성을 발했다.

위------- 잉!

뒤미처 천살백제의 장도에서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찬란한 광채가 눈부시게 일어났다.

아!

그것은 부챗살처럼 쫘악 펼쳐지더니 일순간에 봉황(鳳凰)의 형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네... 네놈...!”

혈종은 아연하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나 그런 중에도 그는 전력을 다해 쌍장으로 혈강을 내쳤다.

“크------ 악-----!”

그에게 뻗치던 도기(刀氣)는 여지없이 그의 혈강을 관통하고는 혈종의 가슴을 꿰뚫고 말았다.

“끄----- 끄... 으... 큭!”

혈종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끄득거리며 천살백제를 노려보다가는 뒤로 넘어갔다.

쿠------- 웅!

그는 말없는 사목(死木)이 되었다.

그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허망한 사신(死身)이 되고 만 것이다.

“...!”

“...!”

놀라운 사실에 지옥천공과 요지선녀는 너무나 아연하여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천살백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도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그들 양인을 돌아보았다.

요지선녀가 문득 공포스러운 기색을 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대... 천살백제가 아니... 으------- 악!”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요지선녀의 입에서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눈앞에 갑자기 봉황이 나타나 나래를 편다싶은 순간 번쩍하는 도광(刀光) 아래 고혼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요염한 허리가 여지없이 두 동강 나고 만 것이다.

일대요녀(一大妖女)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허무했다.

지옥천공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 으... 우리 모두... 네게 속았... 구나!”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요지선녀를 벤 가짜 천살백제, 즉 이검엽은 말없이 도를 비껴들었다.

매우 괴이한 자세였다.

“그... 그것은...!”

지옥천공은 그 자세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듯 안색이 홱 변했다.

바로 그 순간,

“잘 가시오!”

번------- 쩍!

파츠츠츳------!

가공할 도기(刀氣)가 작렬하듯 전광처럼 뻗었다.

그 순간 지옥천공도 전력을 다해 반격했다.

“우------- 얍!”

지옥유명강(地獄幽冥罡)이 펼쳐진 것이다.

콰콰콰------- 쾅----!

폭음이 작렬하고,

“크------- 악!”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지옥천공의 심장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그는 가슴을 부여안고 휘청거렸다.

“지... 지옥명살... 조사(祖師)의... 무공이... 었군.”

이검엽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소. 어기천강산(御氣天罡散)이라는 것이오.”

지옥천공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그대... 는... 누구... 요?”

이검엽은 장도를 내리며 담담히 물었다.

“그대는 검황종을 기억하시오?”

지옥천공의 얼굴에 죽음이 내렸다.

“그... 그랬었나...?”

쿠------- 웅!

그는 거목이 쓰러지듯 뒤로 넘어졌다.

그때였다.

“사부님의 원수!”

쐐------ 액!

갑자기 이검엽의 측면에서 노도같은 강기가 쇄도해 왔다.

이검엽은 그 공격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러고 싶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군.)

번------- 쩍!

그의 손에 들린 도가 한 차례 섬광을 그렸다.

항거할 수 없는 도강이 먼저 쇄도한 강기를 종잇장처럼 찢으며 파고들어갔다.

“크------ 흑!”

한 차례 비명과 함께 한 명의 청년이 장도에 가슴이 갈라져 나뒹굴었다.

그는 바로 지옥마군자(地獄魔君子)였다.

“끄윽...”

지옥마군자는 가슴이 갈라진 채 눈을 부릅뜨며 신음을 토했다.

이검엽은 천천히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본 지옥마군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대... 였군.”

이검엽은 영준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귀공과 본인은 때를 잘못 타고 났소.”

“동감... 이오.”

지옥마군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문득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대와... 술을 한번 거나하게 마셔보지도 못한 것이... 유감천만... 내생에는 필히... 친구로... 태어나길...”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지옥마군자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마침내 생(生)을 마친 것이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지옥마군자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이검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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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六 章

 

        太極神后 危機 (2)

 

 

 

 

방심했군. 저자의 혈응비천보(血應飛天步)가 무림일절임을 잊다니...”

이검엽은 혀를 찼다.

그때였다.

스스스...!

무엇인가가 이검엽의 손으로 날아왔다.

번쩍이는 편린이 혈응신수를 격상시키고 신기하게도 되날아온 것이었다.

용린!

바로 천지곤룡의 비늘이었다.

일만(一萬) 년에 겨우 하나씩 생기는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물체.

이검엽은 그 용린을 어심극검(御心剋劍)의 수법으로 던져낸 것이었다.

되날아온 용린을 회수한 이검엽은 태극신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직후 그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너무도 아름다운 태극신후의 몸매에 절로 가슴이 떨렸던 것이다.

태극신후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얼굴은 물론 긴 목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 이공자님이신가요?”

그녀는 두 눈을 꼭 같은 채 더듬더듬 물었다.

이검엽은 급히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한데... 어디를 제압당하셨습니까?”

... 마혈을...”

------- !

이검엽은 일지(一指)를 튕기고는 돌아섰다.

혈도가 풀린 태극신후는 급히 일어나 의복을 걸쳤다.

그리고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검엽에게 물었다.

청아와 홍아는 어찌 되었나요?”

이검엽은 태극신후를 향해 몸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무사합니다.”

그 직후였다.

두두두!

절벽 위에 백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미조가 백운의 등에 앉아있는데 앞쪽에 청아와 홍아를 앉히고 있었다.

청아와 홍아, 위경을 넘긴지 반각도 안되었건만 두 소녀는 다시 장난기 가득한 말괄량이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 사부님 옥안에 꽃이 피어잖아!”

당연하지! 저 아저씨하고 같이 있잖아!”

제자들의 짓궂은 장난에 태극신후는 홍시같이 얼굴을 붉히며 이검엽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어찌 감사해야할지...”

이검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마침 문주를 찾아뵈려다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천녀를 만나려 발걸음 하셨습니까?”

,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외다.”

부탁이라니요?”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 말썽꾸러기 두 소녀가 끼어들었다.

어머! 사부님은 언제까지 아저씨를 혼자 독차지할 거예요?”

정말! 청아와 홍아는 이미 사부님 신랑감으로 결정했지만 벌써부터 너무했다!”

저 애들이 정말...”

제자들의 쫑알거림에 태극신후는 질겁했다.

그녀는 확확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헤헤...!”

호호...!”

청아와 홍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검엽 역시 멋쩍게 웃었다.

허참! 이거야 원...”

그는 태극신후를 보며 말했다.

우선 올라가십시다. 이곳에 더 있다간 두 말괄량이들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요.”

휘르르르...!

휘익!

두 남녀는 몸을 날려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 즉시 청아와 홍아는 백운의 등에서 뛰어내려 이검엽에게 달려왔다.

아저씨!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하하... 나도 보고 싶었다.”

이검엽은 달려드는 두 소녀를 끌어안았다.

! 다 큰 아가씨들이라 꽤 무거운 걸?”

홍아가 먼저 이검엽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아저씨. 홍아가 아저씨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글쎄 얼마만큼이나 보고 싶었을까?”

이검엽은 짐짓 관심있는 척 물었다.

홍아는 팔을 크게 벌려 원을 그려 보았다.

이마만큼!”

그러자 청아와 입술을 삐쭉거렸다.

! 청아는 저 하늘만큼 보고 싶었는 걸?”

홍아가 그 말을 받아 다시 삐쭉!

피이! 네가 아무리 그래도 사부님만큼 보고 싶지는 않았을 걸?”

덕분에 태극신후가 쩔쩔 매였다.

청아, 홍아! 너희들 정말 이럴 테냐?”

그녀는 입장이 난처해 땀을 뺐다.

, 장난꾸러기 아가씨들. 이리로 앉자.”

이검엽은 흐뭇하게 웃으녀 두 소녀를 풀밭에 앉혔다.

그리고는 설미조를 태극신후에게 소개했다.

문주께선 아마 미조를 아실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태극신후는 설미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혹시... 흑룡방의 꼬마 아가씨가 아니야?”

설미조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칠년 전, 언니께서 아버지를 뵈러 오셨을 때 저도 언니를 뵌 기억이 나요.”

태극신후는 설미조의 손을 꼭 쥐었다.

정말 몰라보게 자랐구나. 그후 영친과는 여러 가지 일들로 수차 만났지만 동생은 처음이구나.”

그녀는 감개가 무량한 듯 설미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태극신후는 궁금한 듯 물었다.

한데... 미조 동생은 어떻게 이공자님과 동행하게 되었지?”

이검엽이 대신 대답했다.

이중에는 좋지 않은 사연이 있소이다.”

이어 그는 설미조의 부친인 흑룡방주 흑룡왕(黑龍王)이 뒤바뀐 사실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태극신후는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 어떻게 그런... 일이...!”

이검엽은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소생이 미조를 돌보아 주기로 했으나 여러 가지로 다망하여... 잠시 미조를 문주께서 데리고 계셔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태극신후는 선뜻 대답했다.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그녀는 말과 함께 설미조의 두 손을 꼭 쥐었다.

“...!”

설미조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검엽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은 미조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었소이다. 소생 손으로 흑룡방을 미조에게 도로 찾아 주려하는 데 그동안만 문주께 폐를 끼치려 하는 것이외다.”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태극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미조는 언제까지든 친동생같이 돌보겠어요.”

감사합니다.”

친남매간인 양 이검엽은 설미조를 대신해 깊이 머리 숙였다.

사부님. 이 언니가 그럼 우리하고 살 거야?”

그렇단다.”

태극신후가 대답하자 청아와 홍아 두 소녀는 손뼉을 쳤다.

와아! 좋아라! 언니 잘 부탁해요.”

우리도 이제 언니가 생겼다. 그치?”

두 소녀의 호들갑에 설미조의 표정도 환해졌다.

그래. 미조도 잘 부탁한다.”

이검엽과 태극신후.

두 사람은 설미조를 포함한 세 소녀가 하는 양에 미소를 교환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좋아하며 어울리나 봐요.”

하핫... 그런 것 같습니다.”

이어 태극신후는 정중하게 청했다.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가시지요. 폐문이 멀지않은 곳에 있사오니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군요.”

폐를 끼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검엽은 대답하고는 백운의 등에 설미조를 태웠다.

그리고 그녀의 앞뒤로 청아와 홍아를 앉혔다.

백운. 난폭하게 굴면 안된다.”

그가 등을 두드려주자 백운은 알았다는 듯 울어댔다.

히히힝...

! 신난다. 백운 달려라! 달리라구!”

홍아는 백운의 등에서 마구 펄쩍펄쩍 뛰어 올랐다.

그 바람에 백운은 지면을 박차며 내닥기 시작했다.

! -------

두두두두...

------- !”

소녀들의 환성은 산이 떠나갈 듯 메아리쳤다.

백운은 산길을 평지 달리듯 신나게 달려 내려갔다.

태극신후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신마(神馬)로군요.”

이검엽은 마주 미소했다.

그렇습니다. 백리신구의 혈통을 지닌 순종입니다.”

곧 이어 이들 두 남녀도 백운의 뒤를 따랐다.

하하! 백운 같이 가자!”

스스슥...

이들은 마치 행운유수처럼 지면을 스치며 날았다.

청아와 홍아는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호호홋! 아저씨 사부님! 빨리 와요. 빨리요.”

하하핫... 그러마.”

호호...”

이검엽을 비롯한 그들 일행은 웃음을 여운으로 남기며 멀리 사라져 갔다.

한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스스...

절벽 아래로부터 가냘픈 왜영이 날아올랐다.

그 왜영은 한 명의 자의여인이었다.

절벽 위에 핀 한 송이 꽃이런가?

꽃이라면 사천초목이 일시에 넋을 잃고 말리라.

그만큼 그 여인은 절세의 미인이었다.

바로 고금제일미인 단목자혜였다.

보름달을 연상시키듯 자태!

너무도 완벽한 미를 갖춘 여인.

그러나 지금 단목자혜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우수에 찬 시선으로 이검엽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겠구나.”

깊은 탄식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왔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키 어려운 듯 두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처음에는 단지 그가 파천대업에만 동행하면 그 뿐이라 생각했거늘... 저 평범한 서생이 어느덧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게 아닐까?”

사실 이검엽은 어리석을 정도로 단목자혜에게 몰두해 있었다.

때문에 대의(大義)와 그녀의 말을 혼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를 향한 이검엽의 마음은 거센 폭풍과도 같았다.

반면 단목자혜는 달랐다.

지나치도록 현명하고 영악한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쉽게 이검엽을 조종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분명 애를 태우는 쪽은 이검엽보다 단목자혜였다.

절세미남은 아닐지언정, 이검엽에게는 은은한 기품으로써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역시 단목자혜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문득 단목자혜는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자혜야 자혜! 정신 차려라. 네게는 선대(先代)에 정해진 혼약자가 있지 않느냐?”

그녀는 자책을 함이 분명했다.

못난 계집. 외간 남자에 방심이 흔들리다니...”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스쳤다.

휴우...”

저절로 나오느니 깊은 한숨 뿐.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머물렀다.

------ !

을씨년스러운 새벽 바람이 그녀의 옷깃을 날렸다.

그녀는 한없이 고적함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

이윽고 단목자혜는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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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四 章

 

           夫婦의 情

 

 

 

“우------- 우------!”

우렁찬 장소성이 천중산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쐐------- 액!

한 줄기 찬연한 검광이 충천한 가운데,

빛살처럼 단애 밑으로부터 일직선으로 곧장 치솟는 것이 있었다.

창룡(蒼龍)이 비상하는가?

그것은 한 명의 젊은 청년이었다.

휘르르르...

드디어 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단애 위로 우뚝 올라섰다.

남루한 의복에 꾀죄죄한 형색.

더구나 허리에는 고철덩이같은 묵검 한 자루가 덜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초탈한 외모와 범접키 어려운 기품을 지녀 청년은 마치 신선(神仙)과도 같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단애 밑을 향하고 있었다.

문득 맑은 그의 두 눈에 뿌연 감회가 어렸다.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는 탄식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청년은 바로 이검엽이었다.

이곳에 발을 디딘지가 어언 석달.

드디어 그는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었다.

그는 시선을 움직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성하(盛夏)임을 알려주듯 짙푸른 녹음을 본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났군.”

이어 그는 갑자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 익!”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듯 꼼짝않고 서 있었다.

하지만 일각이 지나도록 주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흑풍... 이 녀석이 나를 기다리지 않을 리 없는데...!”

애마(愛馬) 흑풍(黑風).

그는 흑풍을 부른 것이었다.

“흑풍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그는 초조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혼자 집으로 갔을 게다. 영리한 녀석이니...!”

문득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환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자운(紫雲)...!”

그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자운이 무척 걱정했겠군, 돌아가면 내 자운에게 큰 낭패를 당하리라.”

이어 그는 호통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자운, 조금만 기다리시오. 바람처럼 달려가리라!”

번------- 쩍!

다시 찬란한 검광이 일었다.

쐐----- 액!

검인(劍人), 일체(一體).

그의 신형은 즉시 흐르듯 날아가고 있었다.

 

X X X

 

보국승상부(保國丞相府)의 정문을 향해 한 명의 백포서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본 정문의 호원무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소... 소부주님이시다!”

“장팔(張八)! 빨리 안으로 알려드리게!”

“알았네.”

한 장한이 나는 듯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머지 호원무사들은 백포서생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소부주님! 어디 계시다가 이제야 돌아오셨습니까?”

백포서생은 보국승상의 소부주인 이검엽이었다.

이검엽은 가볍게 미소했다.

“이삼(李三). 수고가 많네.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무고하시겠지?”

“예. 하오나 두 분께선 걱정이 크셨습니다.”

이검엽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겠지. 수고하게.”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던 하인들과 시녀들이 그를 보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이검엽은 그들을 지나 웅장한 대전 앞에 이르렀다.

대전 앞에 한명의 미소부(美少婦)가 두 명의 시비를 거느리고 서 있었다.

창백하고 초조한 안색으로...

이검엽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운(紫雲)!”

그가 부르자 자운은 망연히 그를 보았다.

“상... 상공!”

그녀의 눈이 금세 촉촉히 젖어 들었다.

그녀는 눈에 뛸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이검엽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몹시 마음이 저려왔다.

“자운. 미안하오.”

그는 자운의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상... 공!”

자운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맞잡은 두 사람의 손등을 적셨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뇌이고 있었다.

(되었습니다. 이처럼 건강하게 돌아오셨는데 소첩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어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아버님 어머님이 심려하심이 무척 크셨사옵니다.”

“알겠소. 자! 함께 들어갑시다.”

이검엽은 자운의 가냘픈 어깨를 이끌어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

입구 전면의 태사의(太師椅)에 승상부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소자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이검엽은 우선 부모님들에게 문안을 올렸다.

“엽아...!”

그의 모친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맞았다.

그러나 승상은 노한 표정으로 호령했다.

“어찌된 일이냐? 석달 가량이나 아무 연락도 없이 집을 비우다니! 애비와 네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을 잊고 있었더냐?”

이검엽은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소자가 어찌... 다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인적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석달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승상 이성진(李聖眞).

지위의 고하(高下)와 무관한 것이 부정(父情)이런가?

그는 아들의 난색에 표정이 금세 누그러들고 있었다.

“음. 어찌 되었던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이어 그는 다시 엄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황망스럽게도 황상께옵서 내 안위를 염려하시어 수 차례 애비에게 하문(下問)이 계셨다.”

“황상께옵서,...”

이검엽은 할 말을 지은 듯 말끝을 흐렸다.

승상은 다시 나무라기를 멈추지 않았다.

“황상께서 너를 유달리 총애함을 모르지는 않질 않느냐? 의관을 정제하고 입궐하여 문안을 여쭙도록 해라.”

“예.”

이검엽은 고개를 조아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자, 물러가 준비하겠습니다.”

“오냐. 어서 가보도록 해라.”

이검엽은 부친의 말이 떨어지자 곧 자운을 데리고 대전을 나섰다.

 

이검엽과 자운.

두 사람은 나란히 후원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검엽은 걸으면서 자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삼단같이 틀어올린 그녀의 머리결은 탐스러웠다.

그의 눈길을 의식한 탓인지 우유빛 긴 목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운... 걱정 많이 했겠구료.”

그는 은근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작고 여린 옥수(玉手)를 꼭 쥐었다.

자운의 촉촉히 젖은 새초롬한 두눈이 이검엽을 응시했다.

반짝이는 그녀의 동공이 그에게 많은 말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는 담담히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소첩보다도... 아버님 어머님께서 끼니마저 잊으시며 상공의 안위를 걱정하셨사옵니다.”

이검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자운 고맙소.”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나마 자운이 곁에 있었기에 아버님, 어머님의 심려도 많이 덜어졌을 것이오.”

“상... 상공...!”

그녀는 당황한 듯 그의 팔을 풀려했다.

하지만 그때 이검엽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끌어안았다.

“자운에게 감사하는 의미요.”

“어머머... 시녀들이 보옵니다!”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며 그는 대뜸 그녀의 입술을 찍어 눌렀다.

달콤한 숨결,

팔딱이는 심장의 고동이 그의 가슴으로 전해왔다.

이렇게 되자.

민망한 것은 그들을 뒤따르던 시녀들이었다.

시녀들은 저마다 황망히 고개를 돌리며 물러가고 있었다.

“아이 참...!”

이윽고 입술이 풀리자 자운은 부끄러운 듯 총총히 달아나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검엽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이어 그 역시 걸음을 옮겨 자운의 뒤를 따랐다.

 

***

 

달밤(月夜).

승상부의 후원,

가산 위 정자에는 푸른 달빛이 그득했다.

그 아래로 널찍한 연못,

우아한 백련(白蓮)이 가득하고 계류(溪流)가 조약돌을 간지르고 있었다.

띵! 띠딩!

청아한 비파성이 정자로부터 흘러나와 연못 위로 퍼졌다.

정자 안의 일남일녀(一男一女),

이검엽과 자운이었다.

이검엽은 폭신한 포단에 비스듬히 기대누워 자운을 바라보았다.

자운은 그림같이 고운 자태로 비타줄을 당기고 있었다.

구름같이 틀어올린 머리,

연어(연漁)의 속살같이 뽀얀 피부,

게다가 살포시 내리 감은 긴 속눈썹.

오똑한 콧날.

촉촉히 젖어 발갛게 윤기 흐르는 입술.

그녀는 정말 너무도 아름다왔다.

더구나 길고 우아한 목아래로 나사(羅紗)에 살짝 숨겨진 단려한 동체.

이검엽의 눈길은 차츰 뜨거워졌다.

띵! 띠디딩!

그는 섬세한 비파의 선율과 함께 넋이 나간 듯 자운의 미태를 감상하고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정경(情景)이었다.

한데 어느 한순간-------

띠------ 잉!

비파음이 뚝 끊기고 말았다.

자운은 비파를 매만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오랫만에 잡아본지라 소첩이 그만 실수를 했사옵니다.”

이검엽은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주 훌륭했소.”

이어 그는 나직히 청했다.

“자운, 한곡 더 들려주지 않겠소?”

“예.”

자운은 다시 비파를 뜯었다.

애잔한 비파음이 낮게 흐르는 가운데 자운은 단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美人捲珠簾

深坐嚬蛾眉

但見淚痕濕

不知心恨誰

 

주렴을 걷고 그린 듯이 앉은 가인,

곱게 모아 흐린 아미,

옥같은 볼에 이슬이 적시니,

누구를 원망함인가?

 

노래를 마치자 자운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바로 이백(李白)의 미인(美人)이 아닌가?

이검엽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이백의 시(詩)이나 자운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소.”

“부끄럽사옵니다.”

그녀의 머리는 더욱 숙여져 버렸다.

“...!”

이검엽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해야할 말이 있었으나 하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어렵게나마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운이었다.

“다시... 떠나셔야 하옵는지요...?”

이검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자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구료.”

그는 따스함이 깃든 시선으로 자운을 바라보았다.

자운은 미태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끓는 내심을 보여주듯 그것은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검엽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이번 강남행에서... 원치를 않았으나 한 가지 은원을 짊어지게 되었소.”

그가 짊어진 은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검황종의 일이었다.

“황상께서는 나를 곁에 두시고자 하셨으나 나는 경륜의 부족함을 들어 일 년(一年)의 말미를 구하였소.”

그는 다시 자운을 응시하였다.

이어 가녀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일년... 일 년이면 되오. 모든 은원을 그안에 마무리 짓고 돌아와 자운과 조용히 지낼 것이오.”

“...!”

“황상께선 어사(御使)의 직분을 일년 더 위임시켜 주시었소. 일 년만 더 강호에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오.”

그말에 자운의 고운 아미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의 서늘하고 맑은 두 눈에는 염려의 기색이 어렸다.

“소... 소첩은 안심이 되지를 않사옵니다. 강호라 하면... 항시 위험이 뒤따르는 곳이라 들었아온데...”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잊지 못한 채 바르르 교구를 떨었다.

“자운! 이것을 보시오.”

이검엽은 웃으며 우수(右手)를 쳐들었다.

그 순간,

쩌------- 엉!

기이한 음향을 울리며 그의 우수는 삽시에 새파란 강기(靑色강氣)로 물들었다.

위------- 잉!

파팍!

이어 섬전같은 강기가 날아 십 장(十丈) 밖의 거대한 바위에 작렬했다.

푸스슥...!

그러자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바윗덩어리는 그 순간 가루가 되고 말았다.

“어머낫! 어떻게 저럴 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광경!

평소 지나치리만큼 침착한 그녀였으나 이 순간만은 달랐다.

엄청난 경악이 그만 그녀의 자제력을 무너뜨린 것인가?

그녀는 안색이 핼쓱해진 채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말 놀랍군요...!”

이검엽은 이러한 그녀의 모습에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말했다.

“보시오. 내 한몸 지킬 능력은 충분하지 않소?”

“예...”

“여유가 있으면 몇달 내로 들를 것이오. 한데 그 때는...”

이검엽은 자운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기쁜 소식이 있기를 바라오.”

“...!”

자운은 귓볼까지 새빨개져 어쩔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이검엽의 손길은 그때 이미 그녀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었다.

자운은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손에 몸을 내맡겼다.

이윽고 이검엽은 자운을 부드럽게 안아 자신이 깔고 있던 포단 위에 뉘였다.

물씬 짙은 육향이 코에 스미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사르륵...

그녀를 감쌌던 꺼풀들이 한겹한겹 벗겨져 내렸다.

이검엽의 숨소리는 차츰 고조되었다.

그는 더욱 숨결과 함께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운... 내가 홀로 강호에 떠돌며 자운을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아시오?”

“상공...!”

자운은 신음하듯 뇌이며 그를 껴안았다.

드디어 이검엽은 탄탄한 육체를 그녀 위에 실었다.

여인(女人)으로서의 은밀한 즐거움을 아는 자운,

“아... 아...!”

닥쳐올 희열에 대한 기대로 그녀는 몸부림 쳤다.

“자운...!”

은밀한 이검엽의 애무...!

그의 입술이 지닌 뜨거운 열기는 자운의 온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운의 매끈한 팔 다리가 스스럼없이 그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들은 쾌락의 심연(深淵)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살(肉)과 살(肉)이 부딪히며 무수히 불꽃을 튕겨내었다.

이미 서로의 몸을 알고 있어 익숙한 몸짓들...!

뜨겁고 달콤한 부부지정(夫婦之情)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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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三 章

 

           巨人의 最後

 

 

 

염천(炎天),

사계(四季)의 변화는 어김없이 돌고 돌아 폭염지절(暴炎之節)을 맞이한다.

천중산(天中山),

폭양(暴陽)은 마치 천중산 전체를 태워 버릴 듯 했다.

하지만 폭염조차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은밀한 곳이 있었다.

구천지옥인 양 까마득한 절곡,

이곳은 지면으로부터 무려 이백 장(二百丈)이나 낮은 지대였다.

한 줄기의 햇빛도 스며들지 못해 주위는 너무도 습하고 음침했다.

몇 백 년을 자랐는지 이끼가 풀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것은 좌우로 시커먼 흑요석의 절벽이 가로막힌 때문이리라.

한데 이 곳에 언제부터인지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이검엽이었다.

그는 상의를 벗고 하의만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좀 더 초탈하게 보일 뿐 이전과 별반 달라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가까운 지인들도 몰라보리만치 건장해져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

알맞게 붙은 근육,

미끈하게 쭉 빠진 허리 등,

한 마디로 보기 좋게 잘 발달한 상체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일신은 영웅의 기개를 발산하고 있었다.

한데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스스슥!

이검엽의 주위로 새파란 기류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바로 태청대라신공의 지고무상한 정화였다.

이어 그것은 삽시에 엄청난 선풍을 몰아쳤다.

휘르르!

그것은 일순 그를 휘감는가 싶더니 금세 삼십 장 방원으로 확산되었다.

우르르------- 릉!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사위는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휘몰아치는 선풍에 사석들이 제멋대로 흩날렸다.

그 순간,

“이------- 얍!”

한 줄기 낭랑한 기합성이 울렸다.

동시에,

쿠------- 앙!

콰르르-------!

실로 폭풍노도와 같은 강풍이 폭사되었다.

펑!

요란한 굉음이 터지는 찰나,

콰르릉!

무쇠같이 단단한 흑요석 절벽의 일각이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우수수...

하나 그때 재차 기합성이 터졌다.

“하------- 앗! 태청강기(太靑罡氣)!”

그 순간 선풍 내에서 새파란 유형의 강기가 폭출되었다.

쩌------ 엉!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것은 다시 절벽을 짓쳐갔다.

파파팟!

절벽면은 한 차례 새파란 불꽃을 튕겨 내었다.

다음 순간,

쩌------- 억!

절벽면은 무려 석 자 깊이로 삼 장이나 갈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을 초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흑요석으로 된 절벽이 입을 쩍 벌린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능히 만년한철이라도 부술만한 위력이 아닌가?

이윽고,

스스스...!

주위를 휩싸던 선풍도, 기류도 모두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 개의 신형이 드러났다.

이검엽, 바로 그였다.

그는 다음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목검(木劍),

자신이 차고 있던 목검을 빼어든 것이었다.

“차------- 앗!”

그는 목검을 휘둘렀다.

위------ 잉!

천변만화(天變萬化)!

일순 목검은 수천수만의 검영(劍影)을 일으켜 천지를 뒤덮었다.

촤르르!

쐐------- 액!

태풍이 몰아치듯,

노도가 넘실거리듯,

연이은 검기와 검영이 천지변색의 조화를 일으켯다.

그 순간,

“극(極)!”

위------- 잉!

목검이 그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원을 그렸다.

다음 순간,

우르릉!

콰------- 쾅!

방원 오 장 내의 모든 물체는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검기(劍氣)의 륜(輪)!

바로 그것이 빚어낸 엄청난 결과였다.

이검엽은 목검으로 원을 긋자,

그 원은 그대로 방원 오장의 거대한 검기(劍氣)의 륜(輪)으로 돌변한 것이었다.

이검엽은 손을 멈추며 나직이 뇌었다.

“파천패혈삼십육파! 이젠 더 이상 깨우칠 것이 없다.”

그렇다. 지금 그가 펼쳐낸 것이 바로 파천패혈삼십육파의 최후초식이었다.

 

<극(極)>

 

그렇다면 지금의 이검엽은 역시 혈검파천황의 무공을 완전히 연성해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의외로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오직 무공 익히기에만 몰두한 것인가?

뒤이어 그는 목검을 쳐들어 또 한번 전면을 내쳤다.

“파천무적강살(破天無敵罡煞)!”

쩌엉!

순간 휘황찬란한 청색 검강(劍罡)이 사위를 밝혔다.

다음 순간,

쾅! 쿠르릉!

절벽은 흑요석 덩어리를 마구 토해내고 말았다.

목검이 끝이 향햇던 부분,

바로 그곳에는 무려 방원 삼 장에 깊이 일 장은 됨직한 구멍이 뻥 뚫린 것이다.

낙뢰(落雷)!

그것은 마치 낙뢰가 짓쳐간 자국과도 같았다.

이를 보자 이검엽은 스스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파천무적강살이다! 호신강기 파해전문의 검공(劍功)! 천하의 어떤 호신강기가 이에 견디어 내겠는가?”

그때였다.

끼루룩!

절애의 상공을 선회하는 한 마리 독수리가 그의 눈에 띄었다.

“가랏!”

이검엽은 들고 있던 목검을 허공으로 힘차게 던져냈다.

슈------- 웅!

그 순간 목검은 뇌전으로 돌변했다.

번------- 쩍!

한 무더기 검광이 하늘을 뒤덮었다.

푸------ 학!

그것으로 독수리는 절단이 나고야 말았다.

까------ 악!

찢어지는 괴성(怪聲)!

피(血),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짓이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렷다.

독수리는 정확히 양단된 채 급강하하고 있었다.

위------- 잉!

목검은 검명(劍鳴)을 발하며 그의 손에 회수되었다.

툭!

양단된 독수리의 시신이 곤두박질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역시... 어심극검(御心克心)이다.”

이검엽은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이어 그는 목검을 바로 잡아들며 엄숙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품에 안듯 목검을 왼팔에 비스듬히 기대어 쥐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뢰벽력섬(天雷霹靂閃)!”

우렁찬 일갈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 앙!

한 무더기 검기가 이십 장 밖의 거대한 바위를 비스듬히 스쳤다.

흔들-------!

그르르... 릉...!

이검엽은 그때 이미 검을 거두고 난 후였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무려 만 근(萬斤)이 넘어뵈는 바위가 마치 무우 잘리듯 싹둑 잘려져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잘려진 면은 유리같이 반질반질 했다.

쾌검(快劍)!

실로 믿기 어려운 쾌검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쾌(快)하면 중(重)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검엽의 검세만은 달랐다.

쾌하면서도 족히 만 근이 넘는 힘(力)이 실려있는 것이었다.

스스스...!

이검엽과 목검은 혼연일치가 되어 섬칫한 예기를 무럭무럭 발산시키고 있었다.

뒤이어,

“건곤멸절파(乾坤滅絶破)!”

위------- 잉!

츠츠츳!

이검엽의 일갈과 함께 가공할 검기가 방원 이십여 장을 뒤덮었다.

푸스스...!

경천동지, 그 자체인가?

검기에 스치는 모든 물체가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검엽은 멈추지 않고 재차 대갈했다.

“천폭혈살뢰(天暴血殺雷)!”

위------ 잉!

그 순간 이검엽은 보이지 않았다.

목검을 중심으로 시뻘건 검기에 휘감긴 것이었다.

“차----- 앗!”

슈------- 웅!

시뻘건 검기는 이내 검강이 덩어리가 되어 목검의 끝으로 뭉쳤다.

동시에,

쉬------ 잇!

번쩍-------!

한 줄기 뇌전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쾅! 콰릉!

오십 장 밖의 바위가 폭발하듯 부서져 날아갔다.

실로 가공할 위력의 검강이었다.

“음...”

이검엽은 나직하게 신음하며 또 다른 동작을 취해갔다.

한데 문득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어느새------

츠츠츠...!

양손으로 목검을 쥔 그는 무형검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멸겁패천류(滅劫覇天流)!”

위------ 잉!

일순 절곡 전체가 검기로 뒤덮였다.

그것은 그대로 절곡을 초토화시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스스...!

이내 가공할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으음!”

이검엽은 짙은 검미를 모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역시 안되는구나...!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천황사대검종 중 제삼(第三)검종까지 뿐이었던가?”

그는 안타까운 듯 탄식을 금치 못했다.

 

-천황사대검종(天荒四大劍宗).

 

이검엽은 물론 그 오의를 모두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도의 실전경험을 토대로 한 절정의 검학(劍學)이었다.

그러므로 실전경험이 없는 그가 천황사대검종을 모두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른 것은 모르되, 집대성(集大成)인 최후초식 멸겁패천류(滅겁覇天流)만은 펼치지 못한 것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스스스...!

절벽 한쪽의 석동으로부터 한 명의 괴인이 소리없이 나섰다.

검황종이었다.

그는 이검엽의 무공 시전을 모두 지켜 보았다.

그리고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는 터였다.

(저 녀석... 사람을 너무 놀라게 하는군. 천황사대검종만도 적게 잡아 반년은 걸려애 익히는 것을... 겨우 석달만에 그것을 비롯한 모든 것을 마쳐 내었구나!)

문득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흡혈옥령망을 쓰다듬었다.

(이제... 저 녀석을 강호로 내보낼 때가 왔구나...!)

일순 무엇인가 결연한 비치 그의 시선을 스쳤다.

(강해야만 한다. 무림의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저 녀석이 그 험한 세파와 싸워 더욱 강해져야만...)

그는 협혈옥령망을 의미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흡혈옥령망의 피는 공력을 복돋아 주고 혜지를 맑게 해준다...! 저 녀석이 지금까지 융해한 천지곤룡의 내단은 겨우 이갑자(二甲子) 공격이다.)

그의 눈은 망연히 허공을 응시했다.

(일반 고수들을 상대하는 데야 모자람이 없다. 하나 절정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많은 부족함이 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직이 이검엽을 불렀다.

“엽아(葉兒). 이리 들어오너라.”

이검엽은 그 목소리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

“예 노야.”

대답을 한 이검엽은 서둘러 동굴로 달려갔다.

 

동굴의 끝부분.

그곳은 이검엽이 검황종에게 구원을 받고 깨어난 곳이었다.

즉. 두 사람이 처음 상면한 곳이었다.

검황종은 그곳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이검엽은 밝은 표정으로 그와 마주했다.

한데 그는 늘상 검황종의 가슴에 박혀 있던 흡혈옥령망이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는 기이했으나 곧,

(어딘가 다른 짐승의 피를 빨아 먹으러 나갔겠지.)

하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나 육감이란 무서운 것인가?

이검엽은 웬지 모르게 불안한 심정이 되고야 말았다.

그때, 검황종이 미소하여 입을 열었다.

“네 진전이 무척이나 빠르더구나.”

“부끄럽습니다.”

이검엽은 슬쩍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검황종과 이검엽.

늘 그렇듯 그들의 대화는 예사로웠다.

검황종은 다시 말했다.

“노부는 네가 천황사대검종까지 모두 익혀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돌연 그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한데 네녀석은 정말 놀랍게도 모두 연성해 내고 말았구나.”

“모두가 어르신의 가르치심 덕분입니다.”

“허헛!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할 생각은 말아라. 이 모두 너의 뛰어난 자질 덕분이다.”

이어 그는 짐짓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마지막 멸겁패천류까지 시전이 가능 하더냐?”

그 말에 이검엽은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실은... 그 중의 현오함은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되나 막상 펼치려면 되지를 않습니다.”

검황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하나 걱정 마라. 몇 차례 강적들과 부딪히다 보면 자연히 터득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검황종은 묵묵히 이검엽을 주시했다.

얼핏 그의 눈에는 따뜻함이 어렸다.

하지마나 곧 그는 무심한 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마지막 무공을 전수하겠다.”

“예...!”

이검엽은 바짝 긴장하여 검황종을 주시했다.

“어검비행술(馭劍飛行術)...! 바로 이 절곡을 빠져나갈 무공이다.”

검황종은 이어 난해한 구결들을 줄줄이 쏟아내었다.

 

-어검비행술(馭劍飛行術).

 

이는 절세의 경공술(輕功術)이다.

문자 그대로 검기(劍氣)를 빌어 허공으로 나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이검엽은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자리에서 구결들을 외우려 애썼다.

잠시 후------!

검황종이 나직이 물었다.

“모두 외웠느냐?”

“예 노야.”

이검엽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럼 이것을 단숨에 마셔라.”

검황종은 돌로 깎은 큼직한 사발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

이검엽은 의아했으나 주저없이 그것을 즉각 받아 마셨다.

비릿하고 다소 역겹기까지 했다.

(피를 마시는 기분이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발을 입에서 떼었다.

한데, 그때였다.

“윽!”

돌연 이검엽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그는 전신의 경맥에서 엄청난 폭발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급히 부르짖었다.

“어... 어르신 이것은 혹시...”

검황종은 그의 말을 막고 대뜸 불호령을 내렸다.

“이놈! 어서 운공하여 공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이검엽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룰없이 즉시 운공에 들어갔다.

스스스...!

그의 전신에서 새파란 강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헉!)

헌데 그 직후 이검엽은 기겁했다.

하나의 손이 자신의 백회혈(百會穴)에 닿음을 느낀 것이다.

쿠쿠쿠!

이어 그 손으로부터 장강대하와도 같은 엄청난 공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공력은 이내 이검병 본신의 진기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본신진기와 용해되지 않은 잠력. 그리고 외부에서 흘러드는 강력한 공력...

서로 다른 세 가지 기운은 서로 좌충우돌하며 이검엽의 심맥을 터려버릴 듯 팽창시켰다.

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이 이검엽을 엄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 가지 기운은 합쳐져 강대하고도 도도한 흐름이 되었다.

그리던 어느 순간,

꽈------- 꽝!

“크윽!”

머리 속에서 대폭발이 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혼절하고 말았다.

이는 무슨 현상인가?

무림인이라면 꿈에서라도 숙원인 경지!

바로 생사현관이 타통(打通)함이 아닌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검엽은 눈을 번쩍 떴다.

직후 그는 스스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일신이 마치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체내의 힘(力)의 충만함을.

그러나 그는 곧 검황종을 의식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 직후,

“헛!”

이검엽은 대경실색했다.

검황종.

그는 이미 이승을 하직하고 난 후였다.

편안한 미소를 띄운 채 자는 듯 죽어 있는 것이었다.

“노... 노야!”

검황종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이검엽은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검황종은 자신의 최후의 한방울 공력까지 이검엽에게 불어넣어주고 죽은 것이었다.

또 한쪽에는 껍질만 남은 흡혈옥령망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검염이 마셨던 검붉은 액체는 바로 흡혈옥령망의 피(血)였던 것이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노야!”.

이검엽은 오열하며 온몸을 떨었다.

“이.. 이건...”

그러던 어느 순간 이검엽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황종의 시신 옆의 바닥에 피로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아... 울지 말아라... 노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어야할 몸이었다...>

 

그것은 검황종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쓴 일종의 유언이었다.

 

<네 녀석은 정말로 손자사위를 삼고 싶은 녀석이었다. 강호에 나가면 매검지(梅劍芝)라는 아이를 찾아 보아라. 그 녀석은 양 젖가슴 사이에... 검(劍)모양의 흉터가 있다.>

 

글씨는 점점 흔들려 서체가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만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네 녀석의... 첩(妾)으로 주... 마... 허허... 잘 가... 거라... 짧은 기간이었... 으나... 네놈같이... 뛰... 어난... 놈을... 만날 수... 있어... 기뻤...>

 

이검엽은 통곡을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검황종이 호쾌한 반면 정(情)이 깊은 인물이라는 것을.

단지 그릇이 너무 커 자잘한 위인이 아닐 뿐이지 않았던가?

검황종은 한맺힌 생(生)을 이렇게 마친 것이었다.

이검엽은 눈물어린 시선으로 검황종의 시신을 응시했다.

“어르신께서 비록 사제지간을 강요하지는 않으셨으나 소생은 어르신을 평생의 스승으로 섬기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경건히 검황종의 시신에 구배(九拜)를 올렸다.

배사지례(拜師之禮).

그것은 실로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배사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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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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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十 二 章

 

          古今最强의 劍法

 

 

 

검황종은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백여년 전이었다. 절강성의 어느 호숫가를 지나던 노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작은 동굴에 들어갔다가 한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완전히 해골이 된 것으로 보아 그 시신은 연대를 가늠하기 힘든 오랜 옛날에 죽은 게 분명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검황종의 진무른 눈은 우수로 물들었다.

“그 시신을 수습해 주려던 노부는 시신이 꼭 껴안고 죽은 한 권의 비급과 한 자루의 보검을 얻었다.”

“그 해골의 주인이 혈검파천황이겠군요.”

“그렇다. 천여 년 전, 이존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혈검파천황이었다.”

검황종의 대답을 들은 이검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구마가 이존에게 감금당했다는 전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닐까요?”

검황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혈검파천황이 갇혔던 곳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

이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부연 설명을 했다.

“어쩌면... 혈검파천황 말고도 한두 명이 더 세상에 나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검엽은 검황종이 뜻하는 바에 긍정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파천검보로 향했다.

(어쨌든 구마와 인연이 닿다니 정말 뜻밖이로구나.)

그는 가시지 않는 흥분으로 몸을 조금 떨었다.

이를 본 검황종은 얼핏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혈검파천황은 대단한 인물이다. 아마 삼천마종도 그를 얕보진 못했을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초식상으로 혈검파천황은 구대천마 중 으뜸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검법의 바탕이 되어줄만한 뛰어난 신공(神功)이 없었다.”

“아...!”

“내공의 바탕이 모자란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지닌바 검법의 위력도 오할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검황종의 말에 이검엽은 새삼 의구심을 느꼈다.

(혈검파천황의 검법이 그리 대답했나?)

검황종은 이검엽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부연 설명을 했다.

“오할의 위력인 검법으로도 혈검파천황은 삼천마종을 제외한 육마(六魔) 중 수좌를 차지했었다.”

“그 정도였다면 삼천마종도 혈검파천황을 무시하지 못했겠습니다.”

이검엽은 검황종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검황종은 자신의 일로 화제를 돌렸다.

“노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노부의 경우는 혈검파천황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검법의 위력을 받쳐줄만한 신공이 없었으나 노부에게는 고금오대신공의 하나인 태청대라신공(太靑大羅神功)이 있었다!”

“아!”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검황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삼년 동안 미친 듯이 파천검보를 연마했으며 결국 십이성(十二成)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이검엽은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결례인지는 모르오나... 그 경지는 삼천마종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검황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다. 직접 삼천마종과 겨룰 수 없으니 단정지울 수는 없겠지만...”

곧 검황종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최소한 삼천마종에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런 그의 가슴 속에는 검황종에 대한 인식이 새삼 새로워지고 있었다.

“파천검보를 보아라.”

검황종의 말에 따라 이검엽은 파천검보를 펼쳤다.

 

<파천패혈삼십육파(破天覇血三十六破)>

 

천하만종(天下萬種)의 검법요결이 집약된 것!

이 삼십육식(三十六式)의 검법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극강의 검세를 발휘하는 구개(九個)요결, 즉-------

변(變), 환(幻), 류(流), 탈(奪), 살(煞), 멸(滅), 절(絶), 쇄(碎), 극(極).

거기에 또한 네 가지 변화가 깃들어 있었다.

경(輕), 중(重), 완(緩), 급(急).

이를 모두 훑어본 이검엽은 저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실로 대단한 검법이로군요!”

비록 무공을 정식으로 익힌 적은 없는 이검엽이다.

그러나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파천패혈삼십육파의 위력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초극에 이른 검식!

단 일초라 할지라도 가히 천하를 쓸어버릴만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검황종이 정색을 하며 설명했다.

“혈검파천황은 그 잔혹한 손속 때문에 구대천마에 끼었다. 그러나 검도(劍道)에 있어서는 그 만큼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이 없었다.”

“그렇겠습니다.”

이검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검황종의 말에 완전히 수긍이 갔던 것이었다.

이어 그는 파천검보의 뒷부분을 읽어갔다.

한데 맨 뒤쪽에는 두 가지의 무공비결이 적혀 있었다.

 

<파천무적강살(破天無敵罡煞)>

 

지독히 빠르고도 예리한 검강(劍罡)이다.

파천무적강살이 십성에 이르면 금강불괴라도 벨 수 있다.

 

<어심극검(御心剋劍)>

 

일종의 어검술(御劍術),

더우기 이것은 일반 어검술과는 달리 검(劍)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시전이 가능했다.

이검엽은 두 가지 비결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말할 수 없는 흥분에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검황종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노부가 파천패혈삼십육파를 완성하고 무림에 나왔을 때 적수라고는 없었다.”

그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동시에 한 줄기 고독한 빛이 얼굴을 스쳤다.

이를 본 이검엽은 내심 뇌까렸다.

(절대자(絶對者)란 고독한 지위임을 느끼신 것이겠구나!)

검황종은 다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단 삼검을 받아내는 자도 없었다.”

낮은 음성 가운데 돌연 그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단 한번 싸움다운 싸움! 그것은 사성(四聖)중 한 명인 무정마제(無情魔帝)와였다. 그래도 그는 노부의 삼검을 받아냈다. 결국 패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적수였다.”

“무정마제!”

이검엽은 낮게 되뇌었다.

(비록 삼검에 패했다지만 무정마제라는 인물은 상당한 고수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는 새삼 검황종을 다시 보았다.

천래비룡 막운비의 말에 의하면 일종(一宗)과 사성(四聖)을 모두 다 수위로 꼽았었다.

하지만 일종인 검황종은 사성 중 한 명을 단 삼검으로 굴복시키고 만 것이었다.

검황종!

정녕 그는 검(劍)의 지존(至尊)이란 말인가?

그러나 최강의 검객답지 않게 검황종의 얼굴에는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정마제 이후로 노부는 무인다운 무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한순간 자만하기도 했으나... 그 뒤로 노부는 자신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검엽은 싱긋 웃으며 나섰다.

“스스로와의 싸움... 소생이 한번 그 의미를 맞추어 볼런지요?”

“허허... 좋도록 해라.”

“노인장께선 아마 생존하지도 않는 삼정, 이존, 구마를 모두 능가해 보려하셨을 것입니다.”

그 말에 검황종은 대소했다.

“하하... 용케 알아맞추는구나. 네 녀석은 여러모로 노부의 마음을 당기는 놈이다, 하핫...!”

실로 오랫만이었다.

검황종의 얼굴에는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자애롭고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노부는 네 녀석을 손자사위로 삼았을 것이다.”

검황종의 이어진 말에 이검엽은 흠칫했다.

“손녀가 있으셨습니까?”

“그렇다. 너보다는 한 두 살 어린 열여덟 살이다. 검지(劍芝)라는 이름이었는데...”

문득 검황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예기치 못했던 참화!

그것으로 아들 부부가 한꺼번에 몰살당하고 자신은 처참한 운명에 놓이질 않았는가?

덕분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손녀 검지...!

검황종은 일순 가슴이 메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엄숙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노부는 일갑자(一甲子)를 각고했다. 다시 천하 팔만사천종의 검류(劍流)를 연구한 것이다.”

“오...!”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한 인간이 어떻게 팔만사천 가지의 검법을 익히고 연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노부는 마침내 파천패혈삼십육파보다 두 배는 강한 사식(四式)의 검법을 완성시켰다.”

이검엽의 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황종은 말을 이어갔다.

“흐흐... 당년의 이존이나 삼천마종이 환생을 한다 해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그런 검법이었다.”

검황종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노부는 그 사식의 검법에 천황사대검종(天荒四大劍宗)이라 이름을 붙였다!”

“천황사대검종!”

이검엽은 다시 한번 탄성을 발했다.

종(宗)이란 무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스스로 만든 검법에 천황사대검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만큼 자부심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흐흐흣! 노부는 마침내 고금제일검법을 완성한 것이다!”

검화종은 강렬한 시선으로 이검엽을 주시하며 말했다.

“...!”

이검엽은 감히 입을 뗄 수 없었으나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받았다.

검황종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부는 파천검보는 물론 태청대라신공과 천황사대검종을 모두 네게 전수할 것이다.”

이검엽은 다소 난감해졌다.

“소생이 노인장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런지요?”

“크크... 그 따위 소리는 두번 다시 하지도 마라!”

검황종은 딱 잘라 말했다.

“너는 단지 노부가 전수하는 무공으로 그 오인(五人)을 베기만 하면 된다!”

이어 그는 다소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본래는 네 녀석을 태청문의 차기 장문인으로 삼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네 녀석은 너무 큰 그릇이다.”

이검엽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황종은 껄껄 웃었다.

“허허... 네 녀석은 일문일파(一門一派)에 얽매일 재목이 아니다. 능히 천하만종(天下萬宗)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다.”

그 말을 듣자 이검엽은 비로소 얼굴을 붉혔다.

“지나친 과찬, 부끄럽습니다.”

검황종은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네 일신에는 족히 육갑자(六甲子)가 넘는 막강한 잠재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물론 천지곤룡의 내단을 복용한 때문에 생긴 잠력(潛力)이다.”

이어 그는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힘은 너무 강해 고금오대신공의 하나인 태청대라신공으로도 완전히 용해할 수 없다. 때문에 이를 완전한 네 것으로 하려면 극양과 극음의 상반되는 기공들을 익혀야 한다.”

“상반되는 기공이라면..?”

“그건 지금 말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나중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윽고 검황종은 설명을 끝내고 당부했다.

“네 일신에는 차고도 넘치는 내공이 있으므로 일단 무공에 입문하면 무섭게 성장할 수 있다. 다만 그 시기의 장단(長短)은 네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세상에 나가려면 각고의 수련 외에 달리 길이 없음을 명심해라.”

이검엽은 공손히 읍했다.

“노인장의 금과옥조(金科玉條).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검황종은 미소를 띄우며 신뢰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우선 네게 태청문의 절정신공인 태청대라신공(太靑大羅神功)을 전수하겠다.”

이검엽은 대답대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그는 전신경을 모두 두 귀로 모았다.

“태청(太靑)이라 함은 천지만물(天地萬物) 중 가장 정순((精純)함을 말함이며 대라(大羅)라 함은...”

검황종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현기가 서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검엽은 그의 말을 입안으로 따라 외우며 오의(奧意)를 가슴 속 깊이 새겨나갔다.

 

-태청대라신공(太靑大羅神功).

 

명실상부 도가제일기공이다.

지극히 현오하면서도 도가기공의 특징인 강맹(强猛)함에 있어 극(極)에 이른다.

반면 그 오의를 깨치기가 힘들어 백 년(百年)을 수련해도 그 진실된 성취를 이루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데 검황종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는 분명 단 두 번 읊었을 뿐이다.

헌데 이검엽은 지금 어떠한가?

몰아지경(沒我之境)!

이검엽은 이미 스스로 그 오의를 깨친 것이었다.

“허어... 그 녀석...! 노부가 열흘 밤낮을 물 한 모음 마시지 않고 씨름해서야 비로소 그 오의를 깨닫기 시작했거늘...”

그는 감탄한 듯 혀를 찼다.

“단 두 번 듣고 그중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다니 예사 놈이 아니군!”

흐뭇한 미소가 스르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본래는 일 년(一年)을 예정했으니 너무도 턱없이 길게 잡은 것 같군!”

이윽고 그는 허공을 우러러 득의만면한 채 중얼거렸다.

“흐흐... 어쨌든, 이제 곧 제이(第二)의 검황종이 중원무림을 뒤흔들게 될 것이다!”

드디어 숙원을 이룬 때문일까?

검황종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감개가 스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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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一 章

 

             二尊과 九大天魔

 

 

 

“노... 노인장께서 그럼 일종(一宗)이신 검황종(劍皇宗)이셨습니까?”

이검엽은 대경실색하여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이검엽의 반응에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네가 노부의 명호를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 노부가 바로 검황종이다.”

“아!”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검황종(劍皇宗)-------

천하무림의 숭앙을 한몸에 받아오던 무종(武宗),

그는 단연코 최고수위인 일종(一宗)으로 불리웠다.

또한, 풍전등화격인 현무림을 구출한 유일한 거목으로 지목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분명 죽었다.

천중산에서 지존(至尊)이라는 신비 인물에게 암습당해 절명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이같이 처참함 모습으로,

검황종의 죽음(死),

검황종의 재생(再生),

실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되신 일입니까? 소생이 알기로는 노인장께선 오래 전에 은거하셨다고...?”

이검엽은 궁금해서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검황종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인가?

고작 천래비룡 막운비에게 들은 것뿐이다.

어찌 지금 상황에서 경솔히 이것저것을 물을 수 있겠는가?

검황종이라 자처한 그 노인이 말을 이었다.

“흐흣... 일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는 자조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폭사되었다.

이어 그는 치를 떨며 말을 이었다.

“흐흐... 그때에 노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다섯 놈에게 당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놈들의 정체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자신이 겪은 엄청난 불운(不運).

검황종은 스스로 그것을 되씹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다섯 놈 중 적어도 네(四) 놈만큼은 알 수 있었다.”

“...?”

이검엽은 단정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검황종은 다시 말했다.

“그자들은 천여 년 전 이존(二尊)에게 패퇴했던 구대천마(九大天魔)의 후인들이었다.”

“이존!”

이검엽은 흠칫하여 물었다.

“혹시 말씀하신 이존은 천허존자(天虛尊子)와 절대패존(絶代覇尊) 아니십니까?”

그 물음에 검황종은 다소 억양이 가라앉았다.

“허허... 이존을 알다니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이존과 구대천마와의 일도 알고 있느냐?”

“거기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럼 노부가 얘기해주마. 우선 구대천마는...”

그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피의 역사를 창줄해낸 마인(魔人)들이 있었다.

이른바 구대천마(九大天魔),

 

혈천존(血天尊),

태양염제(太陽焰帝),

빙백존후(氷魄尊后),

혈검파천황(血劍破天荒),

광혈도귀(狂血刀鬼),

독종음절(毒宗淫絶),

환락선요(幻樂仙妖),

지옥명살(地獄冥煞),

환영마신(幻影魔神).

 

바로 이들이 구대천마다.

구대천마는 천하를 구분(九分)하여 피로 씻었다.

이들이 지나는 곳에는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모두 그들 앞에 승복하거나 쓸려버린 것이었다.

특히 구대천마 중에서도 삼인(三人)은 별격의 존재들이었다.

 

혈천존(血天尊)!

태양염제(太陽焰帝)!

빙백존후(氷魄尊后)!

 

그들은 가히 패천(覇天)의 마공(魔功)을 지닌 개세마두(蓋世魔頭)였다.

때문에 그들은 구대천마 중에서도 따로 지칭되고 있었다.

 

-삼천마종(參天魔宗).

 

이것이 바로 그들 삼인의 이름이었다.

한데 어느 날,

구대천마는 돌연 한 곳의 은밀한 장소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그 직후,

두 명의 절대기인들과 대접전을 벌였다.

무려 칠주칠야(七晝七夜),

마침내 구대천마는 그 두 기인에게 제압당해 어떤 절지에 감금되고 말았다.

한데 그것이 바로 구마(九魔)의 최후가 될줄이야...

그들은 너무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만큼 구대천마는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불과 칠주야만에 제압했고 또 완전히 감금시킨 두 기인은 누군가?

 

-이존(二尊),

 

바로 그들이었다.

 

천허존자(天虛尊子),

절대패존(絶代覇尊).

 

이 두 기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신비문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바로 천외천궁(天外天宮)이다.

그 이후 천여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천외천궁은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왔다.

천외천궁,

그들은 강호에 그 정체를 드러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림에 혈란(血亂)이 일어나면 반드시 초절정 고수들을 파견했다.

그들로 인해 무림은 어김없이 평정되고 마(魔)가 제압된다.

천외천궁,

그들은 정녕 무림의 수호신(守護神)적 존재인가?

 

“비록 구마가 이존에 패해 갇혔다지만 이중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검황종은 심각한 어투로 덧붙였다.

“사실 구마 중 삼천마종은 너무도 초절한 고수들이었다. 한데 과연 이존의 실력으로 그들을 비롯한 구마를 모두 가둘 수 있었는지가 바로 의문점이다.”

“...!”

“이존이라 해도 삼천마종을 능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쨌든 구대천마는 제압되었으나 천하에는 여전히 그들의 후인들이 있었다.”

 

구대천마의 후인(後人),

알려진 바로는 다음과 같았다.

 

혈천종의 혈궁(血宮),

빙백존후의 빙백전(氷魄殿),

혈검파천황의 검황문(劍皇門),

광혈도귀의 백살파(白煞巴),

독종음절의 만독문(萬毒門),

환락선요의 요지(遙池),

지옥명살의 지옥림(地獄林),

환영마신의 환공상(幻空岡).

 

등이 그들이었다.

 

듣고 있던 이검엽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태양염제만이 문파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그러나 혈궁, 빙백전, 검황문, 만독문 등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들은 다시 천하제채를 꿈꾸다가 천외천궁과 전 무림의 합공에 괴멸되었다.”

일순 검홍종의 눈은 기이하게 번뜩거렸다.

“백살파, 지옥림, 환공강, 요지만이 잔명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일년 전 그놈들이 본종을 습격한 것이다.”

이검엽은 이해가 가는 듯 끄덕였다.

“그럼 네 명이란 바로 그 네 문파의 인물들이었겠군요.”

“흐흐... 그렇다. 그러나 그놈들 정도의 실력으로는 본종의 단 백초도 못 넘긴다. 한데...”

검황종의 두눈은 원독에 차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때 암습을 가한 놈이 있었다. 지존(至尊)이라 불리우는 놈...! 노부 총망중인데다 그놈의 무공은 극강했다. 결국... 노부는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지존이란 자가 백살파 등을 배후에서 조종했겠군요?”

검황종은 분노를 삭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은 지존이란 자의 무공이 지즉히 광명정대하다는 점이다.”

“...?”

“그래도 확실한 것은 결코 그 자가 선심(善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오인(五人)을 베라하심은 그 지존이란 자를 비롯한 그 일행이겠군요?”

“흐흐... 그렇다. 아마도 그자들은 당금무림을 뒤집어 놓고 있을 것이다.”

거인(巨人).

검황종의 혜지(慧智)는 깊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원한보다 전무림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또한 벌써 백살파 등의 만행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검엽은 대답대신 아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검황종을 응시했다.

검황종은 다시 덧붙였다.

“본종의 명예를 걸고라도 그자들이 횡행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그의 어조는 감히 범치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스르륵!

무언가가 바닥을 기는가 싶더니 미끄러지듯 그의 가슴에 난 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흡혈옥령망이었다.

검황종은 흡혈옥령망을 보며 중얼거리듯 낮게 말했다.

“이놈이 아니었다면 노부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는 씁쓸히 웃어 보였다.

“노부의 심장은 반 이상 부서져 나갔다. 이놈은 노부의 정혈(精血)을 빨아먹는 대신 자신이 흡수했던 영물들의 피를 나누어 주어 이나마 노부를 연명시켰다.”

이검엽은 싱긋 웃었다.

“실로 기문(奇聞)입니다.”

“허허... 이제는 노부의 일부가 된듯 하다.”

검황종은 가볍게 흡혈옥령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어 그는 이검엽의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노부는 네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네 몸을 살펴보았다. 너는 이전에 혹 천고기연(千古奇緣)을 만난적이 있었느냐?”

이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셨습니다. 소생은 우연찮게 천지곤룡(天地崑龍)의 내단을 복용하였습니다.”

검황종은 흠칫했다.

“천지곤룡의 내단을 먹었다고...?”

“예!”

이검엽은 이어 가급적 간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천지곤룡을 만난 것에서부터 천황비부(天皇秘府)에 들었던 일을...

검황종은 시종 묵묵히 듣고 있다가 껄껄 웃었다.

“허허헛... 기연이로군! 너라는 녀석은 역시 범상치 않은 놈이다!”

이검엽은 멋쩍게 웃었다.

“어쩌다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검황종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여간 천황비부라는 곳에서 이존(二尊)과 인연을 맺었다니 대단한 일이다.”

문득, 그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했다.

“한데... 아무래도 천황비부 앞에서 부복한 채 죽었다는 그 인물의 정체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이어 그는 혼잣말로 되뇌였다.

“설마... 천외천궁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듣고 있던 이검엽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노인장께선 그 인물이 천외천궁의 인물이라 생각하십니까?”

검황종은 안색을 굳혔다.

“그렇다. 더우기 네가 차고 있던 이 묵검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묵령신검이 천외천궁의 보물이란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이것은 바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절대패존께서 사용하시던 애검이다.”

“옛? 이게 절대패존의 애검이라구요?”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검황종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일... 천외천궁 내부에서 큰 변란이 일어났다면...!”

문득, 그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듯 치를 떨었다.

그리고 이검엽을 향해 당부했다.

“이곳을 나가에 되면 천외천궁의 동태도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

이검엽은 두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검황종은 화제를 돌렸다.

“너는 노부의 사문이 어딘지 궁금하지 않느냐?”

이검엽은 다소 들뜬 음성으로 대꾸했다.

“소생이 듣기로 노인장께선 절대무적지경에 이르셨던 고인이시라 했습니다.”

검황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낯 뜨거운 소리하지 마라. 지금의 이 몰골을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검엽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거야 다수의 적을 상대하신데다 또 암습을 당하셨으니...”

검황종은 그의 말을 제지했다.

“무인(武人)이 되어 암습당하는 것만한 치욕도 없다. 그러니 암습당해서 졌다는 것은 변명이 못된다.”

“...!”

그 말에 이검엽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연히 화제는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노부는 하나의 사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검황종은 말을 하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삼정(三鼎)이라고...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그럴 테지. 삼정이라 함은...”

검황종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삼정(三鼎).

구마이래 최강이던 삼인(三人).

각기 도가(道家), 불문(佛門), 속가(俗家)를 대표하던 절정기인들이었다.

 

태청노군(太靑老君).

 

전설 속의 도가(道家) 문파인 태청문(太靑門)을 세운 도가제일기인이다.

태청대라신공(太靑大羅神功).

이는 태청노군의 독문(獨門)으로 고금오대신공(古今五大神功) 중 하나였다.

지극히 현오하고 강맹함이 그 특징이다.

 

무아성승(無我聖僧).

 

당시의 불문제일고수다.

본래 소림(少林)의 제자로서 일찌기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에 통달했었다.

한데 어느 날, 천축여행중에 그는 패엽진경(貝葉眞經)을 얻었다.

패엽진경(貝葉眞經)!

이는 천축에서 이르기를 절세비급으로 단연 무아성승을 불가최대의 고수로 부상시켰다.

 

풍운대제(風雲大帝).

 

전설적인 무제(武帝).

그는 단신으로 중원천하를 석권했다.

풍운개벽대정신공(風雲開霹大霆神功).

이는 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패도지공이었다.

풍운대제는 이것으로 대영웅의 권좌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 중 한 분의 진전을 노인장께서 이으신 것입니까?”

이검엽의 물음에 검황종은 미소했다.

“그렇다. 바로 태청문(太靑門)이 노부의 사문 중 하나다.”

이어, 그는 자부심이 깃든 신비한 표정으로 한 권의 책자를 내밀었다.

“흐흐... 이것을 보아라. 노부의 또 다른 사문이다.”

낡아빠진 양피지의 비급.

더구나 피에 젖은 채 말라붙어 허름하기까지 했다.

이검엽은 그 비급을 받아 살펴보았다.

 

<파천검보(破天劍譜)>

 

그 비급의 겉장에 적힌 제목이었다.

이검엽은 흠칫하여 물었다.

“혹시... 구대천마 중 혈검파천황의... 무공이 실린 비급이 아닙니까?”

검황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했다.

“겉장을 넘겨보아라.”

“예...”

이검엽은 검미를 모으며 겉장을 넘겼다.

 

<혈검(血劍)의 검향(劍香)이 파천(破天)의 살운(殺雲)을 부르다.

------ 혈검파천황(血劍破天荒) 절필(絶筆).>

 

“혈(血), 검(劍), 파(破), 천(天), 황(荒)...!”

이검엽은 나직이 되뇌었다.

그런 그의 동공은 크게 떠지고 있었다.

 

고금제일검수(古今第一劍手)-------

혈검파천황(血劍破天荒)!

피(血)와 명예로 뒤덮인 마명(魔名)!

 

그의 비급이 이 순간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검엽은 흥분과 격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이미 그의 가슴은 수없이 맞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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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章

 

                    아! 劍皇宗

 

 

 

스슥!

백의인의 발끝이 흠칫하는가 싶은 다음 순간이었다.

쐐------ 액!

그야말로 뇌전이 흐르는 듯 빠르고 악랄한 도세가 허공을 갈랐다.

파팟-------!

카----- 앙!

이검엽의 검이 그를 맞받아 후려쳐냈다.

그러나,

“웃!”

“허엇!”

두 마디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검엽.

그는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해 있었다.

조금전에 당했던 도흔(刀痕).

바로 그곳이 깊숙이 패인 것이었다.

그의 가슴은 무참하게도 시뻘건 선혈로 젖어들었다.

백의인,

그는 무사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형언키 어려운 경악을 담고 있었다.

이가 뭉턱 빠져 버린 장도.

그는 넋이 나간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제정신이 든 백의인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살기를 발산시켰다.

“크크... 제법이다만 이번에는 정녕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는 장도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이검엽을 겨누었다.

그 순간,

스스스...!

그의 도신(刀身)은 희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것은 엄청난 도기(刀氣)의 덩어리를 형성해 내었다.

이를 본 이검엽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심상치 않은 기세다. 저 도세에 정면으로 가격당한다면 나로서도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드디어 백의인은 도를 뻗어내었다.

“죽어랏!”

슈------ 악!

아!

쾌도 중 쾌도였다.

뇌전의 매속도를 십분(十分)한다한들 이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차------- 앗!”

위------ 잉!

맹렬한 검세로 그에 맞닥뜨린 묵령신검!

족히 삼천 근에 이르는 일검(一劍)이었다.

카------ 앙!

파팟-------!

휘황인 불꽃이 작렬했다.

무게(重)와 속도(快)의 대격돌!

그속으로부터 터지는 처참한 두 마디 비명-------

“크----- 악!”

“크윽!”

이검엽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갔다.

휘------- 익!

그는 한줄기 선연한 피의 무지개를 그으며 급강하했다.

아! 그곳은 바로 깎아내린 절벽이 아닌가!

그는 곧장 천야만야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 악!”

그의 처절한 비명이 긴 메아리를 남기고 있었다.

아! 이검엽-------

그는 희뿌연 도기(刀氣)에 격중 당해 가슴이 박살이 났었다.

또한,

그 가공할 도세로 인해 절벽 아래로 튕겨져 버린 것이었다.

점점이 남은 혈흔.

절벽 모퉁이는 온통 시뻘건 피투성이였다.

한편,

백의인, 그는 어찌 되었는가?

정확히 양단된 처참한 시신.

그것은 분명 백의인이었다.

두 조각난 더욱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주위는 온통 시뻘건 선혈로 강(江)을 이루었다.

조금 전까지 만도 살아 숨쉬던 그는 이미 육괴(肉塊)에 불과했다.

또한, 쾌도를 자랑하던 그의 장도(長刀)-----

그것 역시 완전히 두 동강이 난채 그 곁에 있었다.

격전의 종말.

그것은 고요 일색(一色)이었다.

휘------- 잉!

지나가는 산풍(山風)에 역한 피비린내만이 장내를 휩싸고 돌았다.

이검엽,

그의 자취는 사라졌다.

과연 그의 생(生)은 이로서 막(幕)을 내릴 것인가-------

 

히힝...!

주인을 잃은 구슬픈 울부짖음...!

흑풍이었다.

충마(忠馬) 흑풍은 이검엽이 떨어져 내려간 절벽 아래를 보며 처량히 울어댔다.

그러나,

까마득한 절벽은 그밑이 어디인지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휘------ 이------ 잉!

싸늘한 산풍만이 절벽을 휘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쐐------- 액-----!

한 줄기 선풍(旋風)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공할 빠르기로 날아드는 인영이었다.

극히 섬세하고 가냘픈 인영.

스스슥...

그 인영은 이내 절벽 위에 내려섰다.

여인(女人),

대략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그린 듯한 고운 아미.

정결한 피부.

빼어난 미녀라기보다는 고귀한 기품이 흐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 마리 학과도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미(美)에는 가시가 있었다.

살기(殺氣)!

끔찍한 살기가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의 얼구른 얼음장보다도 더욱 싸늘하게 보였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흘깃 고천봉을 바라보며 앙칼지게 뇌까렸다.

“사부님 말씀대로군! 아버님은 구파일방과 팔절(八絶) 등의 수법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겁간당하신 채 목이 잘리셨다!”

이어 그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섭게 외쳤다.

“중원무림! 호호홋! 기다려라! 감히 검황종(劍皇宗) 일가를 건드린 보복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보여주마!”

그녀는 전신에서 줄기줄기 원독에 찬 살광을 뿜어냈다.

히힝!

갑작스런 그녀의 출현과 엄청난 살기에 흑풍은 몸서리를 쳤다.

푸르르...!

흑풍은 대뜸 그녀에게 경계의 빛을 띄웠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흑풍과 마주했다.

“신마(神馬)로군!”

그녀는 탐욕에 두 눈이 반짝 빛났다.

“호호... 이곳에서 신마를 얻다니 정말 뜻밖이군. 모두 할아버님과 아버님, 어머님의 덕분일거야.”

그녀는 마음대로 지껄이며 흑풍에게 다가섰다.

쿵, 쿵...

“이리 오너라.”

그러나 흑풍은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푸르르...!

“호호... 한낱 미물인 주제에 감히 나와 맞서려 하다니,...!”

그녀는 냉소하며 대뜸 흑풍의 등으로 날아 올랐다.

히힝!

흑풍은 발작적으로 몸을 흔들며 그녀를 떨치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림없지! 네 녀석 하나 못 다룰 내가 아니야!”

그녀는 한 손으로 고삐를 바짝 잡았다.

동시에, 나머지 한 손을 들어 흑풍의 등을 후려갈겼다.

철------- 썩!

여인의 교수(嬌手),

그것이 이처럼 혹독할 수도 있단 말인가?

이어, 그녀는 매몰차게 박차를 가했다.

“이럇! 가자!”

히------ 잉!

흑풍은 길게 울며 산아래로 달렸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일임을 흑풍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일까-------

 

***

 

암흑(暗黑),

그리고 너무도 조용했다.

(후훗... 기이한 인연이군. 천주산의 절애에서 천지곤룡과 함께 추락한 것이 불과 반년 전이거늘...!)

이검엽.

그의 뇌리는 쉬지않고 움직였다.

하나 그의 육신은 도무지 꼼짝할 수 조차 없었다.

눈꺼풀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게 내리감기고,

전신골격이 모두 어긋난 듯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다만 기이할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번번이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나는 것을 보면 나라는 놈은 일찍 죽지는 않을 것인가...?)

그는 눈을 내리감은 채 피식 실소했다.

그때였다.

“이놈! 웃을 기력이 있으면 냉큼 일어나지 못할까!”

벽력같은 고함이 그를 강타했다.

“헛!”

이검엽은 대경하여 무의식적으로 급히 눈을 떴다.

그 순간에 비로소 그는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이었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음침한 동굴,

그 돌바닥에 자신이 누워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어느 분이 소생을... 헛!”

말하는 도중 그는 흠칫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동굴 안 귀퉁이에 앉아있는 괴인(怪人)을 발견한 것이었다.

괴인,

그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실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인가? 귀신인가?)

이검엽은 문득 소름이 오싹함을 느꼈다.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은 괴인,

그는 우선 봉두난발이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옷은 본래 색을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피와 오물로 찌들어 있었다.

더우기,

그는 가슴이 으스러져 허연 갈비뼈가 끔찍하게 삐죽 드러났다.

이검엽은 그것을 보자 낡은 초가(草家)의 서까래를 보듯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섬뜩하게도 괴인의 가슴 한복판에 시뻘건 물체가 박힌 것이었다.

아!

그것은 놀랍게도 핏빛 가죽의 뱀이 살속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득,

괴인은 부서진 자신의 가슴에서 쭉 붉은 뱀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검엽은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났다.

“노... 노인장께선... 어떻게...”

그는 말문이 막혔다.

봉두난발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안광!

그것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머리털이 몽땅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괴인은 냉소를 터뜨렸다.

“크크... 사내 놈이 이 정도에 놀라다니...”

그는 기이한 눈빛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뻥 뚫러진 뱀의 거처가 드러나자 이검엽은 흠칫했다.

(피 한 방울도 나지 않는군! 어제 오늘 뱀이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본데...)

그의 상념을 깨듯 괴인이 말했다.

“크크... 홍아(紅兒), 나가서 배를 채우고 오너라.”

그말에 홍사(紅蛇)는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끼르륵...!

괴이한 뱀의 울부짖음이 음산한 여운을 남겼다.

이검엽은 그 울음소리에 소름이 돋옴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흡혈옥령망(吸血玉靈망)이라는 것인가 보군요.”

괴인은 그 말에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 어린 놈치고 안목은 제법이로군!”

조소인지 칭찬인지 이검엽은 그 말에 신경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뇌리에는 흡혈옥령망에 대한 기록만이 맴돌았다.

 

-흡혈옥령망(吸血玉靈蟒),

 

문자 그대로 다른 짐승의 피(血)를 빨아먹고 사는 일종의 영물(靈物)이었다.

특히 즐기는 것은 다른 영물이나 영사(靈蛇) 등의 피였다.

그래서인지,

흡혈옥령망은 가히 희세의 보물로 꼽히고 있었다.

그 피를 만일 복용할 수 있다면 장생불로(長生不老)는 물론 영민한 지혜(知慧)를 지닐 수가 있었다.

또한,

무림인에게라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내공증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검엽은 생각을 접으며 괴인을 의식했다.

그는 다소 마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노인장께서 소생을 구하신 것... 입니까?”

“그렇다.”

괴노인(怪老人)은 억양이 없는 투로 잘라 말했다.

이검엽은 즉시 일어나 허리를 굽히려했다.

어찌 되었건 그 괴노인은 자신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 괴노인은 손을 저으며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만 두거라. 노부 또한 목적이 있어 네놈을 살린 것이다.”

이검엽의 허리는 굽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의(自意)가 아니었다.

강력한 무형의 경기!

그것이 그의 몸을 저지한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검엽은 똑바로 서서 노인을 응시했다.

그리고 담담히 물었다.

“그 목적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갑자기 노인은 무섭게 두눈을 희번덕였다.

“다섯 명을 죽여라!”

“살인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이검엽은 대경하여 되물었다.

노인은 잘라 말했다.

“그렇다!”

이검엽은 난감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참 어려운 일이로군. 어찌 사람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그것도 다서 명씩이나...)

그의 짙은 검미가 잔뜩 찌푸려졌다.

(실로 기이하군. 천황비부와 또같은 일을 또다시 겪게되는 셈이다.)

그의 표정의 변화에 노인은 다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걱정 말아라. 선자(善者)를 죽이라는 것은 아니다.”

(으음....!)

이검엽은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내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악인(惡人)이라면 소생을 구해 주신 은혜를 보답키 위해 밸 수도 있습니다.”

“...!”

노인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두눈은 여전히 이검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조금 전과는 달리 그 눈빛은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어 노인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검황종(劍皇宗)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느냐?”

노인이 복잡한 감정이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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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血洗四覇

 

 

 

바로 그 순간,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 있었다.

“친구들! 그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착 가라앉은 침착한 음성.

“누구냐?”

백의인들은 대경실색하며 급히 돌아섰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조소가 어렸다.

그들을 막아선 인물.

그는 무명의 청년서생이었던 것이었다.

백의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냉소했다.

“흐흐... 책벌레...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싱거운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과연 그들이 이렇게 나올만 했다.

청년서생,

기실 그는 수려하고 초탈한 외모이긴 하였으나 무(武)자도 모르는 백면서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서생은 그들의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당당히 대꾸했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를 베려는 것은 결코 명예롭지 못하오.”

그늠 무우를 베듯 딱 잘라 말했다.

“그 정도에서 그만 그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런 찢어죽일 놈!”

백의인들은 몹시 분개한 듯 욕설을 퍼부어댔다.

“크크... 감히 본파가 하는 일을 방해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소원이라면 네놈의 목도 날려 주마!”

그들은 천래비룡을 베려던 장도를 청년서생에게 겨누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멈칫할 뿐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청년서생.

그는 바로 이검엽이었다.

아! 그렇다!

이검엽은 이미 신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정인군자(正人君者)의 품위를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이검엽의 일신에서는 은연중 서생답지 않게 은근히 만인을 누루는 듯한 기도가 번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쓰러져 있던 천래비룡은 걱정스럽게 그를 만류했다.

“귀공! 귀공같은 문사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 어서 물러서시오.”

“...!”

이검엽은 대답대신 묵묵시 묵령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백의인들은 마치 감전되듯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실소했다.

“크크...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놈인줄 알았더니...!”

묵령신검.

기실 외양으로야 그것은 한낱 고철덩어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백의인들은 상대를 얕보는 마음이 생기자 살기를 띄우며 덮쳤다.

“뒈져랏-------!”

쐐------- 액!

두 자루의 장도가 금세 이검엽을 양단할 듯 날아왔다.

(헛!)

이검엽은 흠칫하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첫 실전이라 긴장한 것이다.

그것을 본 백의인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다.

“크크... 죽어랏!”

사삭-------!

다시 장도가 이검엽을 그어갔다.

하나 다음 순간,

파파팟----!

장도는 마치 철벽을 두드린 듯 모두 튕겨지고 말았다.

“엇! 이런...!”

“이런 변이 있나?”

백의인들은 안색이 대변한 채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때였다.

위------- 잉!

웅후한 음향과 함께 수많은 묵령신검의 검영이 난무했다.

“그것... 용조파뢰!”

천래비룡이 질겁을 하여 외쳤다.

다소 어색하고 서툰 검세.

하나 그것은 분명 자신이 사용한 용조파뢰식(式)이었던 것이었다.

캉-------!

“크아악!”

과연 용조파뢰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인의 백의인 중 한 명의 단말마가 뒤를 이었다.

“끄르륵------!”

아, 보라!

백의인의 쩍 갈라진 가슴은 시뻘건 선혈을 뭉클뭉클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장도는 박살이 난지 오래였다.

“...!”

천래비룡은 놀라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검엽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난생 처음의 살인에 이검엽은 다소 당혹해진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죽일 놈! 가랏-----!”

쐐------- 액!

마지막 남은 백의인의 장도가 날아들었다.

“헉!”

이검엽은 총망중 다급성과 함께 발을 움직였다.

스슥!

간발의 차이로 그는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본파의 잔마보(殘魔步)!”

천래비룡이 다시 경악성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위------- 잉!

묵령신검의 검신에서 한 무더기 검기가 작렬했다.

천래비룡은 아예 대경실색이었다.

“신... 신룡비운까지...!”

그렇다!

그것은 바로 거의 정확한 진마보요, 신룡비운이었다.

“크아악!”

백의인은 처참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의 오른팔은 장도를 쥔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는 시뻘건 피가 콸콸 솟는 어깨를 움켜쥐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크으... 두고 보자!”

휘------- 익!

백의인은 오던 방향으로 몸을 날려 도망을 쳤다.

“으음...!”

이검엽은 낮게 신음했다.

도망치는 백의인을 보면서도 그는 따라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착잡한 심정이 되어 죽은 자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무의식 중이라지만 사람을 죽이다니...)

그는 새삼 자신이 한일에 대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데 문득,

그는 주위가 너무 조용함을 느꼈다.

“...?”

기이한 생각에 그의 시선은 천래비룡쪽을 돌아다 보았다.

천래비룡.

그는 벌써 가부좌를 튼채 운공요상을 하고 있었다.

(저것은 무엇하는 자세일까?)

이검엽은 그러한 모습을 처음 본지라 유심히 살폈다.

스스스...!

드디어 천래비룡의 몸에서는 희뿌연 기류가 솟아올랐다.

이어 그 기류는 점차 그의 전신을 휩쌌다.

(기이하군.)

이검엽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긍정적으로 나섰다.

(무엇인가 큰 이유가 있어 저런 일을 하는 모양인데 방해자가 나타날지 모르니 지켜주어야겠군.)

이검엽은 묵령신검을 거두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범인(凡人)보다 백 배는 뛰어난 그의 시력(視力)과 청력(聽力).

그는 백 장 내에서 기어가는 개미를 보며 벌레가 풀잎 건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누구보다 완벽한 호법(護法)을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후,

“귀공!”

그는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천래비룡이었다.

신과이 번뜩이는 얼굴.

천래비룡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달리 굳건한 기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귀공 덕분에 이제 견딜만하게 되었소이다.”

그는 이검엽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완전치는 못하나 그래도 몸을 움직일만은 하니 모두 귀공 덕분이오이다.”

그 말에 이검엽은 미소로 답했다.

“별 말씀을... 그보가 웬만큼 회복되셨다니 천만다행이구려.”

이어 그는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소생 이검엽이라 합니다. 일개 백면서생이오이다.”

천래비룡은 마주 웃었다.

“아! 이공이셨구료. 소제는 곤륜 문하(門下)의 막운비(莫雲飛)라는 사람이오이다.”

이어 그는 정식으로 깊이 읍했다.

“위급한 지경에 도와 주셔서 무어라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오이다. 그저 약간의 힘이 있어 쓸데 썼을 뿐 대단치 않은 일이오.”

이검엽의 말에 천래비룡은 두눈을 빛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온데... 소제는 놀랐습니다. 이공께서는 어디서 폐문의 무공들을 연마 하시었소? 특히 운룡등천소법은...”

이검엽은 멋쩍게 웃었다.

“다른 곳에서 배운 게 아니오. 그저 아까 막형께서 펼치신 것을 보고 흉내만 좀 내봤소이다.”

“예엣? 흉내라고요?”

천래비룡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운룡등천소법을 흉내를 내다니-------

그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기 힘든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운룡등천소법(雲龍騰天嘯法),

이것은 본래 오식(五式)으로 되어 있었다.

한데, 백년(百年) 전,

곤륜쌍선(崑崙雙仙)이 실종되면서 후이식(後二式)이 실전되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삼식(三式)만으로도 천하제일소법이라 불리웠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복잡함과 절묘함으로써 가히 완벽을 구가하는 소법인 때문이었다.

 

막운비는 다소 황망히 물었다.

“이... 이공께서는 그럼 신안공(神眼功)이라도 익히신 것이오?”

“아니외다. 소생은 무공에는 문외한이오.”

막운비는 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엄청난 내공을 지니셨소?”

그의 손가락이 한 백의인의 시신을 가리켰다.

“아까 이 자를 베실 때 보여주신 내력(內力)은 적어도 일갑자 이상의 수련이 있어야만 가능하거늘...”

“소생은 내공이 무엇인지 내력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오이다.”

이검엽은 나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단지 기연으로 신력(神力)을 얻을 수 있었소.”

“신... 신력이라 하시면...?”

막운비는 다소 더듬거리며 물었다.

“소제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드오이다.”

그 말에 이검엽은 미소하며 죽은 자의 부러진 장도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보검은 아니었다.

하나 백 번을 단련하여 만든 이른바 백련정강(百鍊精鋼)이었다.

“보십시오.

이검엽은 그것을 움켜 쥐었다.“

그 순간,

우지직!

백련정강으로 된 도신은 박살이나고야 말았다.

막운비는 대경했다.

“이... 이럴 수가!”

이어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도(刀)에 베이신 것 같았는데...”

막운비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배여 나간 옷자락으로 언뜻 보인 속살,

그 곳에는 손톱만한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놀라움은 거의 극에 이르고 있었다.

(기... 기인이다!)

그의 시선은 뚫어져라 이검엽을 주시했다.

겉보기에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서생,

그러나 그에게 이렇듯 엄청난 내력이 존재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문득,

그는 이검엽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氣)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실로 태산고도 같은 기개였다.

그는 내심 외치듯 부르짖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향후 백 년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기인을 만나고 있는지고 모른다.)

천래비룡 막운비.

그는 비로소 산위에 있음을 실감했다.

교만한 것은 아니나,

자신의 무공에 대해 매우 자신해 오던 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앞에 있는 이 신비한 인물을 통해 그는 보다 넓은 천하를 느낀 기분이 되었다.

(정말... 너무도 그릇이 큰 인물이다.)

일순 그의 눈에는 호감이 어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침착을 찾은 듯 낮게 말했다.

“이 곳은 안전치가 못합니다. 언제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우선 이곳을 떠나십시다.”

“그렇게 합시다.”

이검엽은 선뜻 수긍했다.

사실 그로서도 상대방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천래비룡 막운비의 말에 따라 그 곳을 떠나려 흑풍을 불렀다.

“흑풍! 오너라.”

히힝!

흑풍은 이검엽의 부름에 나는 듯 달려왔다.

“신마(神馬)인 것 같소이다.”

막운비는 흑풍을 보자 감탄한 듯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소이다.”

이검엽은 가볍게 웃어보이며 그에게 권유했다.

“자! 함께 타십시오.”

천래비룡은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외다. 소제의 경공은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합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휘------- 익!

막운비는 재빨리 앞서 몸을 날렸다.

“흑풍, 가자!

이검엽은 얼른 말을 몰아 그의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

이인(二人)과 일기(一騎)는 질풍처럼 산중을 내달았다.

이검엽은 전면에서 달리고 있는 막운비를 응시했다.

천래비룡 막운비,

그는 의호답게 멋지고 쾌속하게 신형을 놀리고 있었다.

끔찍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신룡이 비상하듯 날고 있었다.

이검엽은 큰소리로 외쳤다.

“대단하오. 막형!”

천래비룡 막운비는 대답 대신 뒤돌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한데 문득,

이검엽의 시선이 이채를 띄었다.

그는 막운비가 계속 여덟 가지 동작을 반복하며 날아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치솟고, 허공을 가르고-------

회전하는가 하면 투이겨지는,

(대단한 몸놀림이다. 비록 여덟 가지지만 그 안에는 무려 칠백 이십(七百二十) 가지의 변화가 있다.)

이검엽은 내심 감탄하는 한편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그 중의 현기(玄氣)가 너무 깊어 일시에 모두 알 수 없음이 아쉽구나.)

이검엽,

그의 시력은 과연 놀라왔다.

천래비룡 막운비가 펼치는 경공,

그것은 운룡대팔식이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이는 공히 곤륜의 최고비학(最高秘學)이다.

본시 운룡대팔식은 곤륜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인 운룡상인(雲龍上人)이 창안한 것이었다.

고금일절(古今一絶),

이는 절기 중 절기라 할 수 있는 경공술이었다.

하나 천여 년을 거치며 실전되었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다시 재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곤륜쌍선,

바로 이 두 사람에 의해 운룡대팔식의 맥(脈)은 다시 이어진 것이었다.

 

천래비룡 막운비,

그는 사실 운룡대팔식을 의도적으로 펼치는 중이었다.

모든 자세를 반복하여 펼쳐내고 있는 그는 내심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비록 서샹에 불과하나 틀림없이 거인(巨人)이 될 인물... 그에게서 운룡대팔식이 빛을 발한다면 조사께서도 탓하지는 않으시리라...)

전면을 향한 그의 얼굴에는 얼핏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스스슥...!

두두두두...

그들은 극히 험준한 절봉(絶峯)에 이르렀다.

흑풍은 이검엽을 실은 채 나는 듯 절봉을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막운비가 뒤로 처지며 대소했다.

“하하... 과연 신마(神馬)로군! 이 험한 산봉을 날 듯이 올라가는구나!”

드디어 흑풍은 하늘을 찌를 듯한 절봉의 봉두(峯頭)에 섰다.

고천봉(孤天峯).

그곳에 우뚝 선 흑풍은 마치 구름에 몸을 묻은 것 같았다.

그러나 흑풍은 숨이 약간 거칠어졌을 뿐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았다.

“대단한 친구로군 그래.”

막운비는 뒤따라 올라와 흑풍의 등을 두드렸다.

이어 그는 마상의 이검엽에게 말했다.

“이 정도 왔으면 그 자들도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외다.”

“그럴 것 같소이다.”

이검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이검엽과 막운비는 널찍한 반석 위에 마주 앉았다.

“막형께선 어쩌다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으셨소?”

이검엽이 물었다.

그는 마치 오랜 지기(知己)를 대하듯 걱정스러운 어투였다.

막운비는 그의 그러한 감정을 느낀 듯 두눈에 따스함이 어렸다.

“괜히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소이다. 외상보다 내상이 문제지만...”

막운비는 씁쓸히 웃었다.

“한 열흘 면벽요상하면 완치야 되겠으나...”

돌연,

그는 어조를 바꾸어 심각하게 물었다.

“이공께선 무림에 대해 아시오?”

이검엽은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세계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에 관해선 전혀 모르오이다.”

“이공이야 모르시겠지요.”

막운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공께서도 어쩔 수 없이 무림에 관계하시게 될지도 모르겠소이다.”

이검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막운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외다. 이공께 드릴 말씀이 아니었는데 소제가 그만 실수한 것 같소이다.”

“...?”

이검엽은 의아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

“...!”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럿다.

이윽고,

이검엽이 무거운 분위그르 깨듯 먼저 입을 열었다.

“무림이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하구려...!”

막운비는 일순 멈칫했다.

하나 그는 마음을 정한 듯 두눈을 빛냈다.

“학문과는 다른 길... 무공일도(武功一道)의 천하, 그것이 바로 무림이오.”

이검엽은 반문했다.

“무공일도...! 그렇다면 무(武)만을 숭상하는 세상이겠구료.”

“그렇소이다.”

막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림의 역사(歷史)를 설명했다.

본시 무림은 두 가지 맥(脈)이 있었다.

첫째-------

그것은 천여 년 전 천축의 파사국(婆巳國)의 왕자(王子)의 달마선사(達磨禪師)에게서 비롯되었다.

달마선사.

그는 천축에 근원을 두고 있으나 그곳의 무공을 중원(中原)으로 이식(移植)시켰던 것이었다.

두번째-------

그것은 중원 본토(本土)에서 자생(自生)하여 사천여 년 동안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던 도가(道家)의 일맥(一脈)이었다.

이 두 가지 맥은 정(正)을 지향하여 이른바 정파(正派)라 지칭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여 발족된 것이 바로 사파(邪派)였다.

사파는 정(正)에 대응키 위해 급속히 대공(大功)을 이루려했다.

그 결과로 사파는 사악한 술수로써 무공을 연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곧 사파인들의 심성을 사악(邪惡)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말을 하던 막운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당대에 들어 갑자기 사(邪)가 융성하여 무림을 어지럽히고 있소이다.”

이어 그는 다시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금 무림.

무림은 지금 사파의 농간에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경에 놓여 있었다.

돌연 나타난 거대한 사의 집단들.

 

백살파(白煞巴).

지옥림(地獄林).

환공강(幻空岡).

요지(遙池).

 

이들 집단은 각기 무림제패를 부르짖으며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엄청난 혈풍(血風)을 몰아오고 있었다.

 

동(東)의 환공강.

서(西)의 요지.

남(南)의 지옥림.

북(北)의 백살파.

 

그들이 지나는 길은 그야말로 혈로(血路)였다.

최근 들어 그들은 단 일년(一年) 사이에 무려 사백여 개의 군소문파를 괴멸시키거나 사파에 병합시키고 있었다.

이들의 세력은 실로 엄청났다.

그로 인해 무림은 이들을 혈세사패(血洗四覇)라 부르고 있었다.

 

이검엽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정파라는 인물들은 수수방관이라도 한단 말씀이시오?”

“그럴 리야 있겠소이까?”

막운비는 얼른 부인했다.

“우리 구파일방(九派一幇)이 보다 못해 십파연맹(十派聯盟)을 맺고 대항하려 했소이다. 한데...”

그는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다.

“어떻게 비밀이 새어 나갔는지 십파연맹의 최초 회합 장소를 백살파와 지옥림의 정예고수들이 급습했습니다.”

비분강개!

막운비의 두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십파의 고수 일천(一千)은 허무하게 전멸을 당했소.”

이검엽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럴 수가... 사전에 비밀이 새어나갔다함은 십파 내에 간세가 있었겠구료.”

“분하지만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소이다.”

막운비는 격분하는 한편 우울하게 덧붙였다.

“소제는 간신히 사지(死地)를 탈출했으나 십파의 수뇌인 일백(一百)분들의 생사를 알 길조차 없으니...”

그는 탄식하듯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이제는... 오래 전에 은거하신 일종사성(一宗四聖)께서 재출도하시어 이 난국을 타개해 주시기를 빌밖에 별도리가 없소이다.”

이검엽은 내심 그의 염려에 공감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일종(一宗)과 사성(四聖)이라 하심은...?”

그 말에 막운바는 다소 활기를 되찾은 듯 대꾸했다.

“일종(一宗)은 백 년내 절대무적이시던 한분 무종(武宗)을 말하외다. 그분은 검황종(劍皇宗)이라 불리시던 분으로 고금무적(古今無敵)으로까지 여겨지던...!”

그는 갑자기 안색이 홱 변하며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오, 막형?”

“백살파의 마도들이오.”

막운비는 벌떡 일어나며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십여 리 밖.

여러 개의 백영(白影)이 유유히 산봉을 오르고 있었다.

“저자들... 경공으로 보아 소제로서도 감당키 어려운 고수들일 것이외다.”

막운비는 이검엽의 손을 굳게 쥐었다.

“이곳에서 일다경만 계시다가 소제가 가는 반대쪽으로 가십시오.”

이검엽은 섬칫하며 부르짖었다.

“막형? 혹시... 막형께서는...!”

막운비는 싱긋 웃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걱정마십시오. 소제를 따라잡을 자, 천하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두눈에는 강한 신념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공을 만나 뵙게되어 정말 기뻤소이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이검엽의 손을 한번 꽉 쥐고는 이내 몸을 날렸다.

휘------- 잉!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허공을 날았다.

“우------- 우------!”

웅후한 장소성.

그것을 남긴 채 막운비는 동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러자,

백영, 즉 백의인들은 즉시 장소성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이를 본 이검엽은 낮게 중얼거렸다.

“음. 내가 위험에 빠질까보아 적을 유인한 게로군.”

그는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막운비를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진심으로 사귀어볼만한 친구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다시금 막운비의 준수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는 몸을 돌렸다.

“막형의 고심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괜히 섣부르게 나서기보다는 차라리 자리를 피해 주어야겠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선뜻 흑풍에 올라탔다.

“흑풍! 우리도 이곳을 어서 떠나자!”

히힝...!

두두두...!

흑풍은 질풍같이 절봉을 달려 내려갔다.

 

헌데 절봉의 중간지점쯤 되었을까?

깎아지른 단애를 달릴 때였다.

슈------- 욱!

돌연 뼈끝까지 스미는 한기가 쇄도했다.

“헛!”

이검엽은 흠칫했다.

그 순간,

그는 벌써 흑풍의 등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파------- 앗!

한 자루의 얇은 유엽비도가 그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

그것으로서 그는 위기를 모면한 것이었다.

히힝...

놀라 울부짖는 흑풍의 등으로 이검엽은 사뿐히 내려섰다.

휘르르...

그리고 도중 그는 내심 몹시 놀랐다.

(내가 이렇게 할 수가 있다니...!)

그렇다!

그는 무의식중 막운비가 펼쳣던 운룡대팔식을 그대로 시전한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훌륭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로 인해 마수(魔手)에 걸려들줄이야...

“흐흐흐...운룡대팔식을 쓰는 것을 보니 곤륜의 잔당인 모양이로구나.”

스스스슥...!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유령같이 다가드는 괴인영!

아!

그것은 다름아닌 백의인들의 무리 중 일인(一人)이었다.

“...!”

이검엽은 그를 보자 흠칫했다.

백의인.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절로 긴장이 앞섰다.

(이 자... 아까 상대했던 자들보다 몇 배는 강한 자일 것이다.)

문득 이검엽의 시선이 백의인의 소맷부리를 보았다.

그 부분에는 보기에도 섬칫한 한 자루의 핏(血)빛 장도가 수놓아져 있었다.

(저것은 아마도 이 자의 신분이나 무공 정도의 표식인가 보군. 아쨋든...)

이검엽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윽고.

그는 짐짓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귀하는 무슨 연유로 소생을 암습하는 것이오?”

백의인은 무시무시한 살과을 뿜어내며 대꾸했다.

“흐흐흐... 구파일방의 잔당은 한 놈도 살아서 천중산(天中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시치미를 때봐야 네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이검엽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하는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소. 소생은 구파일방파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이다.”

“흐흐...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백의인은 귀찮다는 얼굴로 선뜻 차고있던 기형장도를 뽑았다.

그 순간,

쐐------ 액!

언제 그었는지 엄청난 도기(刀氣)가 이검엽을 엄습했다.

“헉!”

이검엽은 얼굴로 쏟아 부어지는 엄청난 기운에 대경실색했다.

“웃!”

그는 일순 전력을 다해 뒤로 후퇴했다.

하나 그는 휘청하며 가슴을 감싸 안았다.

“크으...”

그는 나직이 신음하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찢어진 옷자락.

그리고 속살을 벤 흐릿한 혈흔.

(대단한 쾌도(快刀)였다. 게다가 족히 천 근(千斤)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이검엽은 내심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쉽게 그어댄 단 일도(一刀)!

만일 그가 천지곤룡의 피로 목욕을 하여 도검불침이 못되었던들 지금쯤 아마 가슴이 쫙 갈라졌을 것이다.

피부만 약간 갈라졌을 뿐 그는 별반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이런...!”

백의인이 황망히 부르짖었다.

그는 사실 정확하게 이검엽을 베었다.

하지만

이검엽은 멀쩡하지 않은가?

(실... 실수였겠지.)

백의인은 스스로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재차 살기를 띄우며 장도를 움켜 쥐었다.

이검엽은 내심 머리를 굴렸다.

(대단한 쾌도... 내 실력으로 대하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지금은 도(刀)을 치켜든 상태이니 아까보다 배는 빠른 도세가 펼쳐질 것이다.)

스르릉-------

그는 묵검을 뽑아 들었다.

(저 자의 쾌도를 깨는 길은 정면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나의 피부는 다행히 이지간해선 찢기지 않으니...)

이때,

백의인이 그를 보며 싸늘하게 냉소했다.

“크크... 그것도 검(劍)이라는 것이냐? 그것으로 날 상대하겠다고?”

백의인의 얼굴에는 잔뜩 조소가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가,

이검엽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음...”

백의인은 낮게 신음했다.

그는 그 순간 이검엽의 범상치 않은 기도를 동감한 것이었다.

이윽고,

양인은 각기 도(刀)와 검(劍)을 든채 서로 대치상태가 되었다.

휘------- 익!

스산한 산풍이 양인의 옷자락을 스쳤다.

양인의 긴장감은 더욱더 팽배해 갔다.

 

<제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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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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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天來飛龍

 

 

 

밀지(密地),

산풍(山風)조차 스며들기 어려운 은밀한 절곡,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언제 세워졌는지 이곳에는 거대한 장원(莊園)이 있었다.

인적이 전혀 뜨이지 않은 채 덩그렇게 서 있는 한 채의 장원,

 

<홍엽장(紅葉莊)>

 

이름과는 달리 그 장원은 퍽이나 적막하고 괴괴(怪怪)해 보였다.

한데 문득,

스스스슥...

수십 줄기의 인영이 이곳에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그들의 선두에는 한 명의 노인이 날아내렸다.

신선(神仙)의 풍모를 지닌 노문사(老文士),

중후한 기개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탈속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사(世事)에 달관(達觀)한 듯한 중압감마처 풍기는 인상이었다.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무리를 이끌어 홍엽장의 정문으로 다가섰다.

끼------- 익!

그를 알아보는 듯 거대한 장원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안에서 몇몇 장한들이 달려나와 노문사에게 길게 음했다.

그들은 보자 노문사는 짧게 물었다.

“모두 오셨는가?”

“예!”

장한들은 모두 공손히 대꾸했다.

이어,

그들의 인도에 따라 노문사를 비롯한 일행은 모두 장원의 뜰로 나갔다.

드넓은 마당,

이곳에서는 천여 명에 이르는 군협들이 가부좌를 튼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문사는 잠시 그들은 훑어본 후,

자신의 일행 중 중후해 뵈는 한 청의청년을 향해 명령했다.

“비(飛)아야, 문하들과 여기서 잠시 기다리거라.”

“예.”

청년은 짧게 대답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가 허리를 굽히자 거기에 매달려 있던 한 자루의 옥소(玉簫)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노문사는 대청으로 향햤다.

그가 다가오자 대청문 앞에 시립해 있던 한 장한이 크게 외쳤다.

“곤륜(崑崙)의 종대선생(鍾大先生)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청 안에는 이미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도합 구인(九人)으로 그들은 각기 다른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승(僧), 도(道), 속 등에서 하물며 여인과 거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부류는 다양했다.

하나 이들의 모두 함께 지닌 특성-------

그것은 결코 범상치 않은 기도라는 점이었다.

한눈에 이들은 모두 초절정에 이르는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중,

잿빛 가사를 걸친 한 노승(老僧)이 일어나 노문사를 맞았다.

종장문인(鍾掌門人)께서 원로에 수고가 많으시오.

노문사는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수고는 무슨... 당치 않소이다.”

이어 그는 다소 안색을 굳히며 덧붙였다.

“모두 무림을 위하는 일이거늘 천만 리라 한들 멀다 하겠소이까?”

이 말에 좌중의 분위기는 일순 매우 심각해졌다.

잠시 후,

노문사가 자리에 앉자 노승은 좌중을 향해 굳은 어조로 말했다.

“뜻(意)은 정해졌소이다. 결과는 세존(世尊)께서만 아실 뿐,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오.”

“...!”

“...!”

중인들은 모구 침음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굳건한 결의의 빛이 어렸다.

한데 그때였다.

콰------- 앙!

콰릉-------!

엄청난 폭음에 대청까지 온통 흔들거렸다.

또한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여기저기서 외침성이 터졌다.

“적이닷!”

“기습이다!”

이어 병장기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창창-------!

펑!

“으악!”

“크윽-------!”

그 위로 물밀 듯한 함성이 덮쳤다.

“와아------! 모두 죽여랏-------!”

“우하핫! 십파(十派)의 버러지들! 모조리 쓸어주마!”

 

대청 안의 십인(十人),

그들은 돌연한 사태에 경악했다.

하나 놀라고 있기에 바깥 사태는 너무도 위급하지 않은가?

“이게 무슨...”

“어서 밖으로 나가 봅시다!”

그들은 황망히 대청을 나섰다.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청 바깥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지옥도였다.

홍엽장 사방에서 날아드는 수많은 인영들,

혈의 또는 백의를 걸친 이들의 숫자는 수천에 달하고 있었다.

이들 혈의인과 백의인들은 닥치는대로 살상과 파괴를 거듭했다.

“으아------- 악-------!”

“크------- 악!”

돌연한 침입에 홍엽장은 금세 피바다가 되고 있었다.

“으... 비밀이 새어 나갔구나!”

십인 중 한 명이 이를 갈았다.

한데 그 순간,

화르르르...

홍엽장의 한 귀퉁이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이어 그것은 삽시간에 홍엽장 곳곳에 번져 나갔다.

예상치도 못했던 화마(火魔)의 급습이 가세된 것이었다.

십인의 고수도 이에 맞서 혈의인과 백의인들을 짓쳐갔다.

“누워랏-------!”

그들까지 합세하자 전세는 더욱 치열해졌다.

펑------!

꽈르르릉------!

시뻘건 화마 속에서 장(掌)과 병기들이 무섭게 작렬했다.

그러나,

불길은 그들을 모두 뒤덮을 듯 홍엽장 전체를 휘감아갔다.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하늘마저 공포스럽게 변화하고 있었다.

드디어...

혈겁의 장(掌)은 열리려는가?

 

X X X

 

양춘가절(養春佳節).

춘록(春綠)이 무르익은 천중산(天中山).

산기슭을 따라 관도(官道)가 있고 물오른 나뭇가지들이 길옆으로 휘늘어져 있었다.

관도 위.

따각따각...!

한 필의 준마가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청년이 타고 있었다.

수려한 용모였다.

시원스런 이마와 도사린 담담한 눈매.

게다가 깨끗한 피부에 붉은 입술은 마치 여인의 그것과도 같았다.

반면 청년은 수렴함에 못지않은 고고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탈속한 외모라고나 할까?

그는 깨끗한 의복차림새와는 달리 검고 칙칙한 묵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다름아닌 이검엽이었다.

이검엽은 자신의 애마(愛馬), 즉 흑풍에 걸터 앉아 유유자적 이곳을 지나던 길이었다.

“흑풍.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

그가 흑풍의 등을 두드리자 흑풍이 기쁜 듯 울부짖었다.

히힝...!

“집을 떠난지 벌써 반년(半年). 그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한 채 강남(江南)의 칠(七)개성을 달리게 하였구나.”

이검엽.

그는 어전시에 장원하여 어사(御使)로 봉직되었다.

황제는 그의 재주를 아껴 그를 은밀히 불러 친히 밀지(密地)를 내린 것이었다.

밀지(密地)란-------

바로 강남의 칠개성을 암행(暗行)하며 민정(民政)을 순시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는 그 임무를 마치고 현재 황정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습이 있었다.

대임(大任)을 맞고 길을 떠나기 전, 대례(大禮)로서 부부가 된 여인,

자운이었다.

“자운. 그녀의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어서 가서 반가움을 나누고 싶다.”

이검엽은 웃으며 흑풍에게 말을 건넸다.

“하하... 흑풍 너도 백운(白雲)이 그립겠구나!”

히힝!

흑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白雲).

흑풍과 짝 지워준 암말로 본시 자운이 기르던 애마였다.

여인(女人)을 그리는 마음.

한 쌍의 인마(人馬)가 공감을 갖는 흐뭇한 일이 아닌가?

“이제 돌아가면 싫도록 백운과 놀아보아라.”

이검엽은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 듯 흑풍에게 말했다.

한데 그때,

두두두...!

그들의 후면이었다.

십여 기의 준마가 질풍같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흑풍! 물러서자.”

이검엽은 흠칫하여 어른 길옆으로 비켜났다.

두두두...!

일단의 준마가 바람처럼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나 그 사이 이검엽은 마상의 인물들의 얼굴을 살필 수가 있었다.

싸늘한 한기와 살기를 띈 냉혹한 인상의 백의인들.

그들은 폭이 좁고 긴 장도(長刀)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검엽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무림인들이군! 과히 선량한 자를 같지는 않구나.)

무림(武林).

기실 이검엽으로서는 지금껏 무림이란 전혀 미지(未知)의 세계였다.

단지 안행중 보고 들은 약간의 지식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내 무심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흑풍! 가자.”

그는 한가로이 흑풍을 몰아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약 삼사리 정도 지났을까?

문득,

그의 귓전을 때리는 소성(小聲)이 있었다.

창! 창!

(병기 부딪치는 소리...? 그렇다면 조금 전에 본 그자들일까?)

이검엽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으나 곧 다시 무심해졌다.

(무림인들 사이의 분란이거늘 무림인이 아닌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일부러 말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한데, 그때였다.

“으------- 악!”

“크------ 윽!”

처절한 비명이 천중산역을 메아치는 것이 아닌가?

“...!”

이검엽은 흠칫했다.

아울러 그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름을 느꼈다.

“흑풍! 가보자!”

드디어 그는 소리난 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히힝...!

두두두두...!

흑풍은 그가 지시하는 쪽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관도가 아닌 그 옆의 계곡 방향이었다.

 

계곡의 중간.

과연 그곳에서는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예의 백의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명의 청년을 포위한 채 합격을 퍼붓고 있었다.

청의(靑衣)의 청년.

매우 영준하고 충후한 인상이었다.

한데,

그는 단 한 자루의 옥소(玉簫)만으로 어렵게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수없는 악전고투를 겪은 듯 청의가 거의 혈의(血衣)였다.

그의 주위로는 벌써 칠팔 구나 되는 시신이 피를 뒤집어쓴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백의인들은 기형(奇形)의 장도를 무섭게 그에게 들이댔다.

“흐흐흐... 천래비룡(天來飛龍)! 네놈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이곳에서 빠져 나가지는 못한다!”

과연 백의인들의 기세는 엄청났다.

하지만

청의청년 즉, 천래비룡이라는 인물은 의연하게 호통을 쳤다.

“닥쳐랏! 네놈들 정도의 졸개들에게 당할 나 천래비룡이 아니다!”

그는 말과 함께 수중의 옥소를 내쳤다.

위------- 잉!

한 줄기 소영(簫影)이 섬전처럼 허공을 갈랐다.

한 백의인이 다급히 외쳤다.

“조심들 해라!”

하지만 다음 순간,

파팟-------!

날쌘 파공성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으------- 악!”

한 백의인이 목을 안고 나뒹굴었다.

보라!

그의 천돌혈에는 이미 구멍이 뻥 뚫려져 있지 않은가?

뚫린 구멍은 피분수를 뿜어냈다.

그러나,

“윽-------!”

청의청년 즉 천래비룡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또 다른 백의인의 장도가 그의 옆구리를 깊이 베고만 것이었다.

그의 신형은 일순 휘청했다.

이를 본 백의인들은 기세등등하게 다시 덤벼왔다.

“흐흐... 도륙을 내고 말겠다!”

쐐------ 액!

위------- 잉!

백의인들의 장도가 일시에 호선을 그었다.

그 순간,

“이얍!”

천래비룡은 절묘한 신법을 펼쳤다.

그의 신형은 선풍같이 날았다.

아울러 그는 다시 옥소를 휘둘렀다.

캉!

카캉!

그의 옥소는 백의인들의 공격을 모두 차단시켰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터뜨렸다.

“크윽!”

동시에 그의 허리에서 시뻘건 선혈이 튀었다.

조금 전 베인 상처가 힘을 쓰자 입을 쩍 벌린 것이었다.

그러나,

휘르르...

그는 마치 신룡(神龍)이 비상하듯 휘몰아 오장 밖으로 멋지게 내려섰다.

 

관전하던 이검엽은 감탄했다.

“훌륭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의 두눈은 번쩍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이검엽은 천래비룡의 움직임을 뇌리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천래비룡의 움직임은 절묘할 뿐만 아니라 극히 뛰어난 경공신법이었던 것이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바로 이렇게 불리우는 것으로 한 때는 천하제일을 구가하기도 했었다.

이검엽은 물론 무림인이 아닌 이상 이것까지야 알 리 없었다.

 

스스스슥...

백의인들은 유령같이 움직여 다시 천래비룡을 포위해갔다.

이미 오래 전에 이검엽이 이곳에 와 있으나 천래비룡을 비롯한 백의인들은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 듯 했다.

다만 혈전에 온 정신을 쏟을 뿐이었다.

덕분에 이검엽은 관찰이 자유로왔다.

(저자들의 보법은 매우 은밀하고 교활하구나.)

그때,

이검엽은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천래비룡의 안색이 잿빛으로 되어가도 있었던 것이다.

천래비룡.

그는 내심 다급히 부르짖었다.

(크... 큰일이다. 상세가 도졌구나.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올지도 모르겠구나.)

이어 그는 분한 듯 으드득 이를 갈았다.

(지옥마군자(地獄魔君者)! 그놈 때문이다! 그 악랄한 놈과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천래비룡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백의인들은 더욱 포위망을 좁혀왔다.

“크흐흐... 이제 그만 목을 길게 늘여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래비룡은 의연하게 부르짖었다.

“곤륜의 제자는 결코 맥없이 쓰러지지는 않는다!”

그는 옥소를 굳게 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 줄기 피가 손목으로부터 흘러 옥소를 적셨다.

대단한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는 곁눈으로 그것을 알아챘으나 이내 정면을 향했다.

(별 수 없다. 이렇게 된바에야 한 번만 더 운룡등천소를...)

천래비룡은 옥소를 자신의 눈높이와 맞추어 겨눴다.

“이얏!”

그의 옥소가 그 위치에 튕쳐지는 순간,

“크크...”

쐐------- 액!

백의인들이 일제히 장도를 쓸어갔다.

삼엄하고 쾌첩한 도세!

(빠르다!)

이검엽은 절로 손에 땀이 배였다.

그 순간,

“용조파뢰(龍爪破雷)!”

슈------- 욱!

쐐----- 애------- 액!

천래비룡의 낭랑한 외침에 뒤이어 격렬한 파공성이 울렸다.

동시에,

용의 발톱과도 같은 소영이 삽시에 삼 장 방원을 뒤덮었다.

이검엽은 두눈이 다시 크게 떠졌다.

그의 뇌리는 그 순간 빠르게 그것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창!

차창!

“크------- 악!”

“악!”

두 자루의 장도가 날아가고 이인의 백의인이 안면을 안고 나뒹굴었다.

“크------- 으!”

천래옥룡도 어깨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의 어깨는 허옇게 뼈를 드러낸 채 피를 뭉턱 쏟아냈다.

이제 남은 백의인은 육명,

그들은 동료의 죽음과 천래비룡의 상세를 보자 더욱 기세를 높였다.

“죽어랏!”

그들은 질풍같이 천래비룡을 베어갔다.

그러나 천래비룡은 또다시 이에 맞닥뜨렸다.

“신룡비운(神龍飛雲)!”

슈------- 악!

천래비룡의 옥소와 여섯 자루 장도가 무섭게 격돌했다.

창!

파파팍!

“크------ 윽!”

“으... 악!”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다행히도 그것은 백의인들의 비명이었다.

여서 명 중 두 명이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졌다.

천래비룡.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을 뿐 굿굿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밑은 어느새 짙은 선혈로 질퍽해졌다.

(마... 마지막 두명!)

그는 강인하게 부르짖고 있었으나 의식은 이미 가물가물했다.

다만 그의 의지력으로 다시 옥소를 움켜 쥐었다.

백의인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 음! 과연 곤륜의 종대선생의 수제자(首弟子)답다.”

“그런 몸으로도 쓰러지지 않다니...”

천래비룡은 웃었다.

“흐흐흐... 그렇다! 곤륜은 강하다. 네놈들 백살파(白煞巴)같은 사(邪)의 집단과는 비교 될 수 없다.”

그 말에 백의인들은 비웃음을 던졌다.

“크크... 그것은 곤륜쌍선(崑崙雙仙)의 살아 있었을 시대의 이야기다.”

그들의 음성에는 자신이 넘쳤다.

기실 지금껏 살아남은 만큼 그들은 가장 강한 자들인 때문이다.

스스스...

이어 그들은 미끄러지듯 천래비룡의 양옆으로 벌려섰다.

(사부님! 제자에게 힘을...)

천래비룡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크크... 죽어라!”

쌔------- 액!

뇌전같은 도세가 그를 짓쳤다.

천래비룡은 전력을 다해 옥소를 떨쳤다.

“운룡등천(雲龍騰天)!”

파파팟!

위------- 잉!

선풍같은 소용이 마치 신룡이 하늘로 휘말려가듯 휘돌았다.

“...!”

이검엽은 경탄에 찬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아깝다!)

천래비룡의 공세는 일순 허공에서 격감되고만 것이다.

파파팟!

겨렬한 충격음에 이어 천래비룡은 비명을 토해냈다.

“크------- 윽!”

쿵쿵!

그는 연속 두 걸음 후퇴하고 말았다.

“으... 음!”

“크...!”

백의인들도 낮게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쿠------- 웅!

천래비룡은 기어코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흐흐흐...”

“각오해랏!”

백의인들은 부상을 감수하며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부... 분하다! 지옥마군자... 그놈에게 당한 내상이 도지지만 않았던들... 네놈들 따위에게...”

천래비룡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그는 운신도 못하는 듯 꼼짝하지 못했다.

다만 격분에 몸을 떨 뿐이었다.

“크크... 그만 가거라!”

백의인들은 동시에 도를 쳐들었다.

절체절명(絶體絶命),

천래비룡은 사신(死神)이 보였다.

과연 그는 이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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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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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슬픈 情事

 

 

드넓은 정원(庭園),

잘 가꾸어진 관목들이 즐비했다.

휘늘어진 가지.

우수수...!

추풍(秋風)이 볼 때마다 가지 끝에 달린 이파리가 바르르 떨었다.

단풍 든 홍엽(紅葉)이 어느새 낙엽을 떨구려 함인가?

널찍한 연못.

시원한 추수(秋水)가 건듯 부는 바람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연못이 자리한 가산(假山)은 온통 기이한 암석들이 가득했다.

암석들 사이로는 한 채의 정자(亭子)가 있었다.

기암괴석들에 싸인 이 정자는 마치 선계(仙界)의 누각인 양 자연과 벗하는 듯 하였다.

 

정자 안,

한 명의 청년이 정좌하고 있었다.

침묵과 고요가 그 청년을 감쌌다.

“...”

청년은 무심히 연못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초탈한 외모,

모습은 완전히 선계의 누각인 듯한 정자와 동화된 것이어서 결코 범속치 않아 보였다.

마치 한 마리 학을 보는 듯 그에게는 고아한 기품이 흘렀다.

아! 이검엽,

바로 그였다.

그가 지금 머무는 곳은 바로 북경(北京)의 승상부(丞相府)였던 것이었다.

그는 이미 보름 전에 이곳에 돌아왔다.

하지만

침묵에 싸인 그의 얼굴에서는 일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어전시를 치르고 난 후라면 당연히 겪는 불안과 초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의 뒤,

자운(紫雲)이 어느새 와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삼단같이 틀어올린 채 다소곳이 그의 곁에 앉았다.

이검엽은 나직이 신음했다.

“휴...”

자운은 그의 신음에 슬픈 눈길을 보냈다.

벌써부터 그녀는 이검엽의 번민도 알고 있었다.

여인만이 가지는 직감이랄까?

그녀는 이검엽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에 대해서도 대충 짐작을 하였다.

(저분은... 필시 누군가 아름다운 분을 못잊어 저러시는 것 같구나...)

자운의 고개는 푹 떨구어졌다.

(못난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 내가 미흡하여 저분의 마음을 잡아 드릴 수 없음이 안타깝구나...)

또르륵...!

맑은 옥루(玉淚)가 숙여진 얼굴로부터 치마폭 위로 굴렀다.

그녀는 이검엽에 대한 원망이란 추호도 없었다.

오직 자신에 대한 자책만이 앞설 뿐이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왔다면... 저분이 저런 번민에 빠지지 않도록 해드리련만...)

“휴... 우...”

또다시 흘러나오는 이검엽의 한숨.

자운은 자신의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검엽,

그는 과연 냉심(冷心)의 사나이인가?

곁에 애처로운 심경의 여인을 두고 다른 여인만을 생각하는 것인가-------

(잊을 수가... 도저히 잊을 수가...)

그는 내심 부르짖듯 되뇌이고 있었다.

하지만

실은 그 자신 역시 스스로 당혹을 금치 못하는 처지였다.

일별하며 스친 짧은 순간의 대면.

그것이 주는 느낌은 오히려 처절한 상처였다.

잊으려 무진 애를 쓸수록 명확히 떠오르는 신비한 얼굴,

그 얼굴은 매혹적인 미소로 자신을 유혹하였다.

“...!”

이검엽은 문득 생각 난듯 품에서 봉황금차를 꺼내었다.

봉황금차,

자세히 보면 그것은 양끝이 극히 여리하게 세공이 된 일종의 암기였다.

만일 무길로 쓴다면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검엽에게 있어 그 봉황금차에 담긴 의미는 단 한 가지였다.

신비여인이 지녔던 물건,

그녀의 머리를 아름답게 장식시켜 주었던 비녀.

그것으로서 그는 충분했다.

봉황금차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신비여인의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그는 갈등 속을 헤매기도 했다.

(이검엽아. 자운에게 미안하지도 않으냐? 자운은 이제껏 묵묵히 기다려 오지 않았더냐?)

그렇다.

이검엽의 본심은 자운을 충분히 이해하고 아끼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자운을 버리면... 자운이 너무 불쌍하다...)

생각이 자운에게로 치닫자 그는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명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힘껏 내젓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나...)

일순 그의 얼굴조차 몹시 일그러졌다.

우두둑...!

그의 손이 닿았던 난간의 한부분이 으스러졌다.

걷잡을 수 없는 심경에 내리누르는 순간,

자단목으로 된 난간이 순식간에 가루로 화하다니...

그것은 인력(人力)이 아닌 신력(神力)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이검엽은 씁쓸히 부르짖었다.

(신력을 지닌들... 십만 권, 아니 백만 권의 서적을 읽은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 내마음 하나 가누지 못할진대 모두 허사가 아닌가...!)

그때,

자운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무슨 일이냐?”

자운은 멀찍이 시립해 있는 시녀를 향해 물은 것이었다.

그 말에 시녀는 공손히 대꾸했다.

“승상께서 퇴청(退廳) 하셨사옵니다. 퇴청하시자마자 소부주님과 아씨를 모셔오랍시는 분부가 계셨사옵니다.”

자운은 차분하게 시녀를 물렸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네.”

시녀가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자운은 살며시 이검엽의 뒤로 가까이섰다.

그녀의 태도는 침착하고도 부드러웠다.

자신의 동요로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갸륵한 심정의 바로일까?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공자님, 승상께서 퇴청하시어... 뵙고자 하신다 하옵니다.”

어쩔 수 없는 미미한 떨림.

이검엽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 앉았다.

자운의 고개는 푹 꺾이고 말았다.

“...!”

“...!”

잠시 두 남녀 사이에는 침묵이 오갔다.

하나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피차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아닌가?

이검엽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순간 어렵게 그의 입이 열렸다.

“자운...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공... 공자님...!”

자운은 당황하여 멈칫했다.

그 순간,

이검엽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풍요한 머릿결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참아다오. 창해가 마르는 한이 있더라도 자운... 너만은 버리지 않겠다!”

자운은 이검엽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소리없이 오열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검엽에 대한 끝없는 연민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괴로우신가? 얼마나 괴로우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자운의 뜨거운 눈물이 이검엽의 가슴팍을 적셨다.

옷깃이 젖어듬을 감지한 이검엽은 마음을 많이 추스릴 수가 있었다.

돌연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결의가 떠올랐다.

(결심하자...! 내 마음 하나에 되는일... 자운을 내 사람으로... 그러면 그 여인의 환상을 잊을지도...!)

그는 벌떡 일어섰다.

“가자. 아버님은 어전시의 결과를 가져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께 드릴 소청이 있다.”

그는 말을 맺기도 전에 성급히 정자 밖으로 나섰다.

“...?”

자운은 다소 아연했으나 이내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이검엽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자운의 걸음은 그를 따르지 못했다.

“잠깐 참아다오.”

이검엽은 돌아섬과 동시에 자운을 번쩍 들어 안았다.

“어... 머머... 공... 공자님!”

자운은 대경실색하며 발버둥쳤다.

“...!”

이검엽은 대답대신 나는 듯한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 나갔다.

자운도 이제는 체념한 듯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월동문(月洞門)을 지나고-------

웅장한 전각들이 속속 그들의 시야를 지나갔다.

그들이 그 곳을 지날 때,

시립해 있던 하인과 시녀들이 난색을 지으며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이검엽은 총총걸음으로 자운을 안고 계속 나아갔다.

자운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져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이윽고,

그들은 취의청(聚議廳)에 당도했다.

“이... 이제... 그만 내려 주시어요.”

자운은 수줍은 듯 애원했다.

“...”

이검엽은 여전히 묵묵한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 놓았다.

이어,

그들은 나란히 취의청 안으로 들어갔다.

“허허... 엽아(葉兒)! 어서 오너라.”

굵직하고 우렁찬 음성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의 정면에는 두 명의 남녀(男女)가 앉아 있었다.

육십이 넘은 듯한 노인(老人)과 극히 허약해 뵈는 사십대(四十代)의 여인(女人)이었다.

바로 이검엽의 부친과 모친이었다.

방금 말한 음성은 바로 부친의 음성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검엽의 부친(父親) 이성진(李聖眞),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丞相)답게 위엄과 후덕함이 엿보이는 인물이었다.

또한 강직한 기개가 넘쳐 황가(皇家)의 충신(忠臣)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검엽의 모친(母親).

이 여인은 이검엽의 생모(生母)이나 승상에게는 후실(後室)이었다.

무자(無子)인 처지에서 상처(喪妻)한 승상과 혼인해 그녀는 이검엽을 출산한 것이었다.

하나 그녀는 본시 몹시 허약했었다.

한데 현재는 그래도 한 가닥 혈색이 감돌았다.

그것은 바로 천지곤룡의 쓸개를 이검엽이 복용시킨 덕분이었다.

그녀는 아들인 이검엽을 보며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퇴청하셨사옵니까?”

이검엽과 자운은 승상부처(夫妻)에게 나란히 큰절을 올렸다.

승상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오냐! 내 기쁜 소식을 가져 왔다.”

“...!”

자운은 살포시 미소했다.

하나 반면, 이검엽은 오히려 담담하기만 했다.

이성진은 흐뭇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어전시에 장원을 하였다. 그것도 발군(拔群)하여 황상(皇上)께서 크게 기꺼워 하셨느니라.”

이검엽은 담담히 대꾸했다.

“모두 아버님과 어머님의 덕입니다.”

이성진은 여전히 미소를 띄웠다.

“그래서 황상께서는 내일 너를 입궐(入闕)시키라 명하셨다. 아마도 네게는 어사(御使)가 봉직(奉職)될 것이다.” 

그의 음성은 아들의 일로 인해 기쁨을 감추지 못한 듯 매우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검엽의 모친은 달랐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서 어른거리는 짙은 그늘을 발견한 것이었다.

“네 안색이 말이 아니구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모친의 음성에는 따스한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이검엽은 황급히 이를 부인했다.

“아... 아니옵니다. 어머님.”

일순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보다 아버님 어머님께 소자 소청이 있습니다.”

이성진. 아들의 기분을 알아차리자 그의 안면에 깔렸던 미소가 가셨다.

대신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 말해 보아라. 이 애비가 들어 줄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마. 오늘은...”

그는 아들의 기색을 살피며 은근히 덧붙였다.

“네가 어전시에 장원했음이 발표된 날이 아니냐?”

이검엽은 부모님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었다.

또한 독자인 자신에 대한 그들의 기대도 알고 남았다.

그는 이러한 것들로 더욱 마음을 다졌다.

(그렇다. 내가 마음을 잡고 안팎으로 충실해야만이 부모님들께도 효도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옵고, 외람되오나... 자운과 하루 속히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공자님! 어찌 저같은 것을...!”

곁에 섰던 자운이 황망히 그를 만류했다.

승상 부처(夫妻)는 일순 전혀 뜻밖인 듯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성진이 파안대소했다.

“네 부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느냐?”

“네. 면구스럽습니다.”

이검엽의 얼굴도 다소 붉어졌다.

부친 이성진은 유쾌한 듯 우렁차게 말했다.

“하핫... 그것은 네가 부탁할 일이 아니라 애비가 먼저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다. 애비도 죽기 전에 어서 손자녀석을 안아 보아야하지 않겠느냐?”

“...!”

이검엽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흘렀다.

자운.

그녀는 이순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만사를 그대로 순응하면 그 뿐이었다.

이때,

이성진이 일어나 이검엽과 자운의 엎으로 다가왔다.

이어 드는 두 사람을 일으켜 서로의 손을 쥐어 주었다.

“당장에라도 혼인을 시키고 싶구나. 허헛...”

그는 흡족한 듯 웃으며 자운을 보았다.

“운아(雲兒)야. 하루 빨리 튼튼한 손자 녀석을 안겨 주어야 하느니라.”

자운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번엔 이검엽의 모친이 그녀에게 당부했다.

“운아. 네가 지금껏 잘해온만큼... 앞으로도 엽아(葉兒)를 잘 보필해 주어야겠구나.”

“명... 명심... 하겠습니다.”

자운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대꾸했다.

이성진은 호쾌하게 두 젊은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헛...! 자! 이제 나가 보아라. 식은 곧 올릴 것이니 그 동안 다정히 지내고들 있거라!”

“물러가겠습니다.”

이검엽은 자운을 데리고 부모의 면전을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

이검엽의 모친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공... 아무래도... 엽아에게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성진 역시 무거운 음성이었다.

“흠. 그런 듯 하구료. 하나...”

그는 자소 밝게 덧붙였다.

“자운이 있질 않소? 현명한 아이니 엽아의 근심을 크게 덜어줄 것이오.”

 

***

 

조용한 전각(殿閣).

이검엽과 자운의 거처로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아담하고 깨끗한 정실.

이검엽과 자운이 마주하고 있었다.

자운은 다소 어색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아니다, 자운 이리 오너라.”

이검엽은 다소 강하게 그녀를 끌어 당겼다.

“...”

자운은 입을 다문 채 다소곳이 그의 코앞에 섰다.

이검엽은 그녀의 손을 꼭쥐었다.

“자운... 지금 당장은 큰 사랑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평생 자운을 버리지는 않겠다.”

자운의 입술이 바르르 떨었다.

이검엽.

자운은 그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에도 다른 여인을 생각라도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한평생 자신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자운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상... 상공... 의 사랑하심... 천... 비는 감당키 어렵습니다.”

그 말에 이검엽은 입술을 지즈시 물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여인.

항시 자신을 보살펴 주며 자기 곁을 지키던 여인.

자운을 두고 다른 여인을 생각하는 자신의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자운...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던 여인이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자운을 내사람으로...)

그는 눈빛을 빛내며 자운을 보았다.

(나를 자운에게 완전히 구속시키면 번민을 잊을 수도 있다.)

이검엽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그는 자운의 옷섶으로 손을 가져갔다.

“...!”

일순 자운의 처녀지신(處女之身)은 흠칫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손길.

그러나 자운은 피하지 않았다.

스르르 눈을 내리 감으며 그녀는 그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자운... 나는 자운을 갖고싶다.”

속삭이듯 나직한 이검엽의 음성.

자운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이윽고,

자운의 옷섶이 풀렸다.

사르르륵...!

가벼운 음향과 함께 그녀의 상의가 흘러 내렸다.

뽀얗고 동그란 어깨에 이어 빨간 젖가리개가 나왔다.

이검엽의 떨리는 손끝이 젖가리개를 떼어냈다.

아! 물결치는 유방이여.

불긋한 두 개의 젖무덤은 고혹적인 매력을 뿜어냈다.

거기에 달린 두 개의 상큼한 포도알.

이검엽의 시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운은 부끄러운 듯 낮게 신음하며 두 손으로 유방을 가렸다.

이검엽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자신의 가슴이 식기전에 그는 일을 치르고 싶었던 것이었다.

스르륵...

그녀의 하의가 한꺼번에 모두 벗겨져 내렸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신.

빙기옥골(氷肌玉骨).

뽀얗게 피어 오르는 듯한 탄력있는 피부.

솟을 곳은 제대로 솟고 꺼질곳은 움푹 꺼진 현란한 곡선미.

평소에 따스하게만 느껴지던 자운의 육체는 이 순간 폭발적인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검엽의 동정(童貞)은 이끌리듯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하늘(天)이 내린 본분이랄까?

순양지체(純陽之體)와 순음지체(純陰之體)의 교합(交合)은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으윽...! 음...”

일순 자운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려 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자 그녀는 깊은 쾌락의 늪을 지나고 있었다.

이검엽.

첫순간의 성급함과는 달리 그의 육체는 서서히 타올랏다.

그는 끊임없이 노를 저었다.

자운(紫雲)이란 고요했던 바다는 그에 의해 엄청난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억...!”

“아아...!”

두 남녀의 신음이 뒷섞이며 그들은 더욱 뜨겁게 타들어갔다.

끈끈한 율동과 율동.

“흐으윽...”

희디흰 교구가 절정을 향해 돌진했다.

“허억...!”

이검엽도 절정을 향해 돌진했다.

격렬한 몸부림으로 그는 자운을 정복하고야 말았다.

“아아아아-------!”

꺼져들어가는 듯한 자운의 신음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자운의 여인 손톱은 그의 등을 마구 찍어대고 있었다.

까마득한 희열의 나락.

거대한 입을 쩍 벌린 그 곳에 두 사람은 휩쓸리듯 빨려 들었다.

이검엽은 현실을 모두 잊었다.

이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살과 살의 교점 뿐이었다.

그는 인간의 육체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윽고,

격렬한 동작은 모두 멎고 그들의 가슴은 포만감으로 가득했다.

이검엽은 자운의 귓볼을 씹으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아... 보고 싶었소 소저! 당신과 이렇게...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자운은 쾌락으로부터 순식간에 동떨어져 버리는 충격을 받았다.

(아... 이 분은 나를 다른 여인으로 착각하고 계시는구나...)

자운의 눈언저리는 금세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검엽에게서 몸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주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상공... 당신이 누구를 생각하시든지... 저는 오직 상공만을...”

그녀의 낮은 속삭임이 이검엽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런! 내가 큰 실수를,...)

그는 단번에 몸이 식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미끄러지듯 가만히 그는 자운의 몸에서 내려왔다.

나란히 누운 두 남녀(男女).

자운은 소리를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끝없이 솟아 나와 배갯머리를 흠뻑 적셨다.

“...!”

이검엽은 그녀에 대한 죄책감에 몹시 난감했다.

그러나 결코 변명따위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솔직히 털어 놓았다.

“자운... 미안하구나... 내 본심은 이게 아니었다. 그녀의 환상을 잊으려 한 것이 그만 네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구나.”

자운은 흐느끼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흑흑흑...!”

이어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아니어요... 소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자운...!”

이검엽은 부르짖듯 신음했다.

자운이 다시 말했다.

“흑... 소녀는... 소녀는... 상공께서 삼전사원(三殿四院)에 첩실을 가득 두시더라도 절대 원망치 않을 거예요. 상공께서 정히 잊을 수 없는 분이라면...”

그녀는 울음을 멈추며 애써 또렷하게 덧붙였다.

“억지로 잊으려 하지 마세요.”

이검엽은 한숨을 토해냇다.

“자운... 네게는... 네게는 오직 미안할 따름이다...!”

“상공...”

자운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어렸다.

“자운...”

이검엽은 그를 꽉 끌어 안았다.

나신과 나신이 접하자 그는 훈훈한 정감(情感)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자운보다 좋은 여인은 없을 것이다. 자운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나는 사내도 아니다...!)

그는 내심 부르짖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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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天荒秘府의 神秘한 紋樣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 음!”

한 차례 신음과 함께 이검엽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이어,

“휴...”

긴 한숨과 함께 그는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어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엇... 이럴 수가...”

그는 대경했다.

혈포인의 시신-------

시신은 어디로 가로 그 자리에는 유골의 가루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 자레는 단지 그가 입고있던 옷과 그를 관통한 묵검(墨劍)이 놓여 있었다.

이검엽은 어찌된 일인지 대뜸 짐작했다.

(선인(仙人)의 유체를 훼손시키다니...)

그것은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에 벌어진 일임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검엽은 죄책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가루가 된 혈포인의 시신을 옷자락과 함께 주워 모았다.

한데 이때,

가루를 걷어내자 뜻밖에 바닥에 지력(指力)으로 쓴 글씨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을 읽는 분은 필시 의인(義人)일 것이오. 의인이기에 노부의 시신에 일편 연민을 느껴 인정을 베푸셨을 것이오.>

 

순간,

그 글을 읽은 이검엽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인이라고 선인의 시신을 훼손시킨 내가 의인이란 말인가?)

그는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귀공(貴公)에게 한 가지 간절한 부탁이 있소. 나의 등에 꽂혔던 신검 묵령(墨靈)을 알아보는 자를 훗날 만나면 필히 죽이시오...>

 

이검엽은 흠칫했다.

(사람을 죽이라고?)

그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文)만을 익히 인명(人命)을 극히 귀중히 여겨온 그가 아닌가?

그로서는 살인(殺人)이란 감히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다음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 자를 죽일 수 있는 힘(力)은 이미 노주의 원영화령정(元榮華靈精)으로 그대에게 흡수되었소. 그 기운은 노부의 생전에 생성한 내가진공(內家眞功)으로 그대에게 향후 커다란 공효를 줄 수 있을 것이오...>

 

이검엽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원영화령정... 내가진공 그것이 무엇이길래... 아까 내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도 그럼 그때문이었단 말인가?)

그는 다시 글을 보았다.

 

<그 자를 죽일 방도는 노부의 옷자락에 기록해 놓았소. 부디 부탁하는 바이오. 그 일은 노부 개인의 원한(怨恨) 뿐만 아니라 중원무림(中原武林)의 천만동도(天萬同徒)를 구(救)하는 길이기도 하는 것이오.>

 

글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이검엽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사람을 죽여달라니... 그일이 곧 중원무림을 천만동도를 구하는 길이라니... 내게 너무 큰 짐을 남겼군.

이검엽.

그는 원래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므로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어 그는 유체의 옷자락을 들춰보았다.

문득,

옷자락 안쪽에 한 장의 양피지가 붙어 있는 것을 그는 발견했다.

그는 양피지를 떼어 살펴보았다.

양피지에는 기이한 무늬가 잔뜩 찍혀 있었다.

(음, 이것도 갑골문(甲骨文)이군. 그리고 점토판에 새겨진 것을 찍어낸 것이구나.)

이검엽은 갑골문을 해독해 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천극굉연대천황(天剋轟然大天荒)>

 

“천극굉연대천황!”

이검엽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그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양피지의 앞뒤로 빽빽이 찍혀있는 글자.

그 글자는 모두 일천자(一千字)였다.

하나 그 내용은 너무도 난해하여 십만 권의 책을 독파한 이검엽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아닌가?

그러나 이검엽은 책벌레로서의 오기가 있었다.

그는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갑골문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그의 머리 속에는 어렴풋이나마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도 넓은 기(氣)를 일으켜 천하(天下)를 일시에 항복 시킬 수 있는 장법을 적은 가공할 내용이다...)

이검엽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환해졌다 했다.

(하나... 뭔가 완전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어떤 바탕이 결여되어 있다. 어쩌면 그 바탕이 없다면 이것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런지도 모른다.)

이검엽.

그는 양피지를 움켜 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은 것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뿐,

그는 현실로 돌아와 문득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어느새 이것에 푹 빠졌군. 하긴 제법 머리를 쓸만한 난제를 만난 셈이군.”

이검엽은 홍미어린 눈으로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품속에 집어 넣었다.

이어 바닥에서 묵검을 취해 들었다.

순간,

“끄응!”

그는 힘을 썼다.

겨우 한자반밖에 안되는 묵검이 엄청나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능히 수백근(數百斤)은 나갈 듯 했다.

이검엽이 기연을 만나 신력(神力)을 얻었기 망정이지 보통사람이라면 들어 올리지도 못할 무게였다.

묵검.

그것은 끝이 뭉툭하고 광채도 없는 거무틱틱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신검(神劍)이라 했는가? 묵령(墨靈)이라고?)

이검엽은 피식 실소했다.

하지만

(볼품없는 검... 하나 웬지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놈이다.)

이검엽은 손으로 검신을 가볍게 쓸었다.

웬지 점차 지기(知己)를 만난 듯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그는 묵검 즉 묵령신검을 꽉 힘주어 쥐며 말했다.

“좋다. 이제 너를 한시도 손에서 놓지않고 아껴주마!”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우... 우... 웅...

돌연 검신이 미미한 전운을 일으키며 우는 것이 아닌가?

검명(劍鳴)!

검명이었다.

“헛!”

이검엽은 깜짝 놀라 묵검을 주시했다.

“예로부터 신검(神劍)은 주인을 알아본다 했거늘...”

그렇다.

묵령신검은 검명을 울림으로써 그를 알아 보았다.

“핫하하... 묵령 역시 너는 신검이었구나!”

이검엽은 만족스런 대소를 발했다.

그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크게 호협(豪俠)한 기운이 일어났다.

아!

훗날 그 기운으로 인해 무림에 대영웅이 탄생할 줄이야...

 

<천황비부(天荒秘府)>

 

이검엽은 전면의 글씨를 응시했다.

(천황비부... 천황(天荒)...)

이검엽은 검미를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천극굉연대천황의 글자와 같군.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저 안에 혹시...)

이검엽은 일단 호기심이 동하자 석문(石門)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 보았다.

크르릉...

능히 천년(千年) 이상을 닫혀있을 것 같았던 석문이 열렸다.

우수수...

돌조각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하나 다음 순간,

이검엽은 눈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석문 안.

그것은 커다란 석전(石殿)이었다.

석전 안으로부터 눈부시고 휘황한 야명주(夜明珠)의 불꽃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이검엽은 잠시 멈칫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순간,

“엇!”

그는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석전의 중앙.

그곳에 두 개의 석대(石대)가 놓여 있었고 석대 위에는 두 명의 노인(老人)이 마치 산사람처럼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측노인.

그는 흡사 신선(神仙)같은 노도인(老道人)이었다.

백색도포를 입었으며 백발은미는 세속을 초월한 선인(仙人)의 그것이었다.

우측노인.

그는 대조적으로 극히 패도적인 기개가 넘치고 있었다.

흑색장포(黑色長袍)를 전신에 걸쳤으며 대추빛 얼굴에 검은 눈썹과 수염은 몹시 위맹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검엽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들이 앉은 채 죽은 시신임을 알았다.

이어 그는 곧 바닥에 엎드려 배래를 올렸다.

“소생 이검엽 두분 선인(仙人)의 영거에 난입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어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나 그 순간 그는 흠칫했다.

바로 바닥에 글씨가 쓰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바닥에 엎드리지 않았다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허존자(天虛尊子)와 절대패존(絶代覇尊)이 남긴다------->

 

이검엽은 잠시 흠칫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외모로 보아 백의도인이 천허존자, 흑포노인이 절대패존이겠구나.)

이검엽은 또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까 석문 밖에 죽어있던 분은 이 두 노인의 후인(後人)이었겠군.)

일단 그렇게 생각되자 이검엽은 수중에 가지고 있던 혈포자락을 공손히 받쳐 들었다.

이어, 앞에 놓고 말했다.

“고인(故人)을 대신하여 삼가 소생이 기인들을 배견합니다.”

그는 내심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이 두 기인이 살아 생전 명망이 극히 존귀했기에 혈포인은 감히 유전에 들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제 내가 그분의 유언을 대신이나마 이루어 드렸으니 그분도 유계에서 만족히 눈을 감으실 것이다.)

이검엽은 다소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이어, 그는 바닥에 쓰여진 글씨를 다시 읽었다.

 

<우리 양인(兩人)은 본시 사형제(師兄弟) 지간으로 공동으로 오백 년(五百年) 전의 절대무성(絶代武聖)이신 천외신존(天外神尊)의 반푼 진전을 얻었다...>

 

거기까지 읽은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천외신존...”

그는 즉시 다음을 읽었다.

 

<천외신존, 그분의 진전은 모두 삼백 육십 개(三百六十個)의 점토판에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우리 사형제가 얻은 것은 전반부의 백 팔십 개(百八十個)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검엽은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 두분 기인들 조차 천년 전의 분이거늘 천외신존이란 분은 그 두 분보다도 오백년(五百年) 전의 분이시라니... 그렇다면 그분은 천 오백 년 전의 선인이 아닌가?)

이검엽의 가슴은 놀라움으로 가득차고 말았다.

그는 다시 다음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그 전반부의 진전만으로도 우리 사형제의 앞에 적(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구대천마(九大天魔)까지도 제압할 수가 있었다.>

 

이검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구대천마...? 인세(人世)에 그런 마인(魔人)들도 있었던가?”

 

<... 中略... 노부들의 평생 소원은 실전된 천외신존의 하반부 절학을 찾는 일이었다. 한데 우리는 우연히 이곳 천황비부를 발견하여 들어오게 되었다.>

 

이검엽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이 천황비부는 이들 두 분이 세운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어리둥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검엽은 의문을 느끼며 다시 바닥에 쓰여진 글씨를 읽었다.

 

<오...! 이곳 석전(石殿)에 들어오자... 오...! 사방 석벽에 새겨진 문양(文樣)! 그 문양들을 본뒤 우리 두 사람은 비로소 그 비밀을 풀게 되었도다! 아...!>

 

이검엽은 가슴이 진동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반부 진전이 바로 석벽에 새겨진 것이란 말인가?)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무려 일갑자(一甲子)를 참수했어도 문양의 오의를 풀지 못했음에야... 우리 두 사람의 자지리 미천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검엽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얼마나 어렵기에 육십 년 간이나 뜻을 풀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시선을 돌려보았다.

과연, 있었다.

사방의 석벽,

그곳에는 가득히 기이한 형태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선(線)과 점(點)으로,

그리고, 기이한 모양의 원형(圓形)들이 수없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신비무쌍한 벽화(壁畵)였다.

사방의 석벽!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통 혼(魂)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유혹을 담고 있었다.

강유(剛柔)의 조화,

강하고 부드러움이 함께 있었다.

그뿐인가?

사면 벽은 어떻게 보면 사계(四季)를 나타내는 그림같기도 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사상(四像)을 나타내는 도형(圖形)이기도 했다.

문득,

이검엽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면의 벽화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이 강렬하게 마음에 부딪혀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온통 심혼(心魂)을 빼앗는 신비한 기운이 있었다.

“...!”

이검엽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벽화에 빨려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는 고개를 천장으로 올렸다.

천장에는 하나의 거대한 원(圓)이 그려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무수한 점(點)이 모인 것이었다.

또한, 중앙으로는 선(線)이 기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것은...!)

이검엽의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태양(太陽).

태양인가? 아니었다. 달(月)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물(水)? 불(火)?

이검엽은 또다시 넋을 잃었다.

그것은 실로 오묘불가사의한 느낌이었다.

우주일원(宇宙一元),

태극혼천(太極混天),

음양일색(음約一色),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심오한 정화가 천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검엽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무엇을 암시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그는 천허존자와 절대패존을 바라보았다.

(하긴... 저 두 분께서 일갑자를 고심하고도 알지 못했다고 하거늘...)

그는 거의 체념상태에 이르러 다시 바닥의 글을 읽어보았다.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문양의 심오한 뜻은 알지 못했으나 깨닫음은 있었다. 이에, 우리는 그 심득을 남긴다. 그 심득을 이 석전 바닥에 남기나 후인(後人)은 유용하기 바란다.

천허존자, 절대패존 서(書).>

 

이검엽은 모두 읽은 후 의아함을 느끼며 바닥을 둘러보았다.

다음 순간,

“헛...!”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석전의 바닥에는 빽빽이 갑골문이 가득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미처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글이었다.

수없이 많은 갑골문자들,...

이검엽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나, 곧 그는 그 문자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그의 얼굴은 경악에서 경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자연(自然)과 우주(宇宙), 그리고 인간(人間)에 대한 심오한 진이다...)

이검엽,

그는 어느덧 무릎걸음으로 걸으며 바닥의 갑골문을 읽기에 몰두했다.

천하만사의 그 어떠함도 이 순간의 그를 멈추게할 수는 없었다.

무릎 옷이 헤어지고 맨살이 드러나고 다시 살갗이 까져 피가 흘렀으나 그는 여전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로 완전히 몰아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휴-------!”

이검엽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두눈은 야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이 또한 나의 재주로는 일시에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우리 속에 담아 둔다. 그리고 앞으로 차근차근 생각해 본다.)

그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어, 머리 속으로 갑골문자을 기억했다.

이윽고 모두 기억하자,

그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섯다.

문득,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천황비부에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운... 자운이 걱정하겠구나.)

그는 자운의 얼굴을 떠올랐다.

항상 관심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자운,

하지만

“...!”

문득 이검엽의 표정이 흔들렸다.

뜻밖에도 자운의 얼굴 대신 다른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신비여인(神秘女人),

얼마 전 만낫던 신비여인의 매혹적인 얼굴이 자운의 영상을 누르고 대신 떠오른 것이었다.

(아...!)

이검엽은 당혹과 함께 자책을 느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딱 한번 보았을 뿐인데...)

문득 그는 자신을 나무랐다.

(이검엽아! 이검엽... 무슨 짓이냐? 너는 자운을... 울릴 셈이냐? 네가 장부(丈夫)라면... 한낱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여인 때문에 자운을 불행하게 하려느냐?)

이검엽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나 어찌하랴...!

마치 운명(運命)인 듯 자꾸만 신비여인의 영상이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으음...”

이검엽은 괴로운 듯 신음을 발했다.

그는 그 생각을 지우려는 듯이 곧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절을 올렸다.

“소생 이검엽,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천하존자와 절대패존에게 대례를 올린 후 몸을 돌렸다.

아쉬운 듯 천황비부의 석전을 둘러보며...

장차,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한 장소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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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暗洞의 屍身

 

 

 

흑풍이 사라진 직후였다,

휘익! 휙!

난투의 현장에 두 줄기 인영이 날아 들었다.

홍(紅)과 백(白),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두 여인이었다.

홍의여인(紅衣女人),

그녀는 금세 피어오르는 복사꽃처럼 화사한 용모였다.

백의여인(白衣女人),

그녀는 홍의여인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름답기로 치자면 홍의여인과 쌍벽을 이루었으나 얼음장처럼 차가와 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공통된 사실은 그들 두 여인 모두 천하절색이라는 점,

결코 쓰러져 있는 신비의 자의궁장녀에 못지않은 미모였다.

“앗! 언니!”

두 여인은 당도하자마자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언니가 천지빙염독기에 당했어! 막강한 공력으로 겨우 독기를 막고는 계시지만...”

백의미녀의 싸늘한 얼굴에도 경악의 기색은 역력했다.

“빨리 천공제독산이나 천년학홍정을...”

그들은 신비여인을 안고 급급히 떠나려 했다.

문득,

홍의여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어찌 천지곤룡이 피만 남기고 사라졌을까?”

백의여인은 곱게 눈을 흘겼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어서 가자!”

“알았어요.”

홍의여인은 퍼뜩 정신이 든듯 얼굴을 붉혔다.

스스슥!

신비녀를 안은 홍, 백의여인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X X X

 

콰르릉...

거대한 폭포가 지면을 가른 것일까?

폭포는 지옥입구같은 동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몇만 년의 역서를 자랑하듯 폭포수가 이룩해낸 장관_______

한데,

폭포수 상류에는 두 개의 물체가 급격히 떠내려오고 있었다.

아!

그것은 거대한 뱀모양의 괴수와 괴수를 끌어안은 청년이 아닌가?

콰르르르...

폭포의 굉음은 그들은 한껏 포옹하고 있었다.

떠밀려 내려올수록 거세어지는 물살,

청년과 괴수를 기다리는 것은 동굴입구의 암초였다.

그대로 곧장 밀려 내려오다 보면 그들은 분명 암초와 충돌할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쾅! 콰르릉!

그들은 암초와 정면으로 엄청난 충돌을 일으켰다.

빠지직!

분신쇄골의 음향_______

하지만 천우신조랄까?

엄청난 무게탓에 쳐져 내려오던 괴수와 암초에 부딪친 것이었다.

부서진 것은 결국 괴수의 몸과 함께 충돌한 암초였다.

뒤이어,

쿠_____ 우_______ 르_______!

엄청난 소용돌이가 그들을 휩쓸어 동굴로 밀어넣었다.

괴수와 암초덩이와 청년,

그들은 모두 한 덩이가 된채 뒤엉켜 폭포 밑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청년,

그는 시종일관 정신을 차리지 못한듯 했다.

아!

과연 그를 위한 하늘의 안배가 있을런지...

수백만 근이나 되는 폭포의 압력 속에 그는 회생할 것인지...

모든 것은 운명에 달려 있을 뿐,

 

넓은 동굴 안,

종유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 동굴은 그 넓이나 종유석들의 크기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냈으리라.

동굴의 광장에는 너비가 이십여 장이나 되는 연못이 있었다.

돌연,

콰르르...

수면 위로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거대한 물체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것은 일시에 연못 전체를 빽빽이 메우고 있었다.

아!

그것은 갈기갈기 전신이 찢긴 괴수와 그 품에 감싸인 청년이었다.

폭포로부터 온 일인일수(一人一獸),

그들은 바로 이검엽과 천지곤룡이었다.

천지곤룡은 사실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검엽은 어찌된 것인가?

거센 물살로 인해 의복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가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상처하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죽이기 위해 끌어안았던 천지곤룡의 시신(屍身),

그 시진이 자신을 보호할 줄이야.

과연 그는 목숨조차도 건재할 것인가?

이윽고,

이검엽과 천지곤룡은 파문에 떠밀려 연못가에 닿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연못 속에 잠겼던 그의 손가락 끝이 움찔했다.

여인의 그것과도 같은 소수(素手),

예민한 그의 고운손이 물의 차가움을 감지한 것일까,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이 점차 심한 기복을 보였다.

이어,

검미가 파르르 떨리는 순간 그의 눈은 번쩍 떠졌다.

아!

그러나 그의 눈빛은 신비하기 그지 없었다.

은은한 청광(靑光)과 홍광(紅光)이 교차되며 흘러나오는 두눈,

일순 그의 눈은 의아함에 휩싸였다.

(여기가 어딘가? 지옥인가...?)

다소 침침한 동굴 속,

그러나 이검엽은 이내 사위를 모두 바라볼 수가 있었다.

만월이 비춰진 듯 그의 시야는 환하기 그지 없었다.

벽과 천장, 주렁주렁 매달린 종유석 등 그는 한눈에 자신이 어는 동굴에 와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아 있었구나...)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러자 곧, 옆구리에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으음.”

그는 나직이 신음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우지직!

둔탁한 음향을 내며 자신의 옆구리에 꽂혀던 천지곤룡의 발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마치 수수깡 부서지듯 쉽사리,

“헛!”

그는 대경한 나머지 휘청하며 동굴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푸스슥!

여인과도 같은 그의 소수(素手)는 그 순간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바로 긴 역사를 거치며 굳어온 석회석바닥이 두부 으스러지듯 부서진 것이었다.

“내... 내 몸이...!”

이검엽은 경악하고 말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몸에 엄청난 변화가 일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더구나, 그의 옆구리의 상처,

그것은 기실 그로서는 거의 치명적이었다.

내장까지 삐어져 나왔지 않았던가?

하지만 보통사람같으면 죽었을 정도의 상처까지 거의 완치 상태인 것이었다.

단지 천지곤룡의 발이 부서져 나간 후 발톱만이 여전히 박혀있을 뿐,

열(十) 개의 용조(龍爪),

파팍!

그가 한번 힘을 주자 그것은 모두 옆구리로부터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상처의 흔적 또한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다.

“천지곤룡의 선혈 덕분이 아닐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문득, 그의 안면 근육이 무섭게 샐룩였다.

“설... 설마 내가 천지곤룡의 십만 년의 정화가 담긴 내단을...”

그렇다 천지곤룡과의 격투끝에 그의 목을 통해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간 둥근 물체,

그것은 바로 천지곤룡의 내단이었던 것이었다.

“엉겁결에 삼킨 것이 이토록 큰 기연(奇緣)일줄은...”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가공할 기(氣)를 감지했다.

힘(力)!

그것은 밖으로 터뜨리면 태산이라도 뒤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일순,

그는 암울한 기색을 띄웠다.

광세(曠世)의 기연(奇緣)을 만난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하나 그보다 앞서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______

(신비한 여인... 내게 기연을 가져다 분 여인... 과연 무사한지...)

불현듯 그의 가슴은 격정으로 꽉 메워졌다.

이제,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로지 그 신비여인의 모습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눈속에 박히기하도 한듯 그는 여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휴...”

잡히는 것은 나직한 한숨 뿐이었다.

그러나 문득,

“아! 그렇다!”

그는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아직껏 천지곤룡의 목에 박혀있는 금차(金叉).

그것은 바로 신비여인의 물건이 아닌가?

그는 즉시 천지곤룡의 시신에 다가가 금차를 뽑으려 했다.

그 순간 그는 흠칫하여 손을 멈추었다.

(나의 힘... 나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으니 우선은...)

그는 조심스럽게 일단은 천지곤룡의 머리를 움켜 쥐었다.

한데 역시,

우지직!

약간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만(萬)근 압력인 듯 천지곤룡의 머리는 산산이 부쉬졌다.

이검엽은 난색을 지었다.

“큰일이군. 자칫하면 손에 쥐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말겠군. 나도 이 힘에 익숙해지려면 꽤나 오랜 시일이 걸릴지도...”

이윽고,

그는 그는 금차에 손을 댔다.

이마에 땀이 배일 정도로 그는 신중을 기한 것이다.

스르륵!

뽑혀 나온 금차,

그것은 지극히 정교한 금황옥(今黃玉)으로 만든 비녀였다.

두 마리의 날아갈 듯 화려한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 그 여인은 범상치 않은 신분이었군, 금황옥의 크기가 이정도면 능히 황금 백만(百萬) 냥의 가치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렇듯 세공이 정교한 봉황금차라면 몇 개의 성(城)을 사고도 남을 것이거늘...”

그는 신음에 가깝에 부르짖었다.

“이런 장식을 쓰는 여인이라면...”

그는 그 봉황금차를 신비녀의 신물(信物)인양 소중히 품안에 갈무리했다.

“인연이 있다면...”

그의 눈빛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흔들렸다.

심층 깊숙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그리움,

그것은 밀물처럼 그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비록 생사여부조차 알 수 없으나 그는 확연히 부르짖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그는 멈칫했다.

“천지곤룡은 전신이 무가지보(無價之寶)이다. 이 한 쌍의 뿔은 백독에 특효이고 이 열개의 비늘은 천하에서 가장 굳강하니...”

그의 눈이 잠시 천지곤룡의 시신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몸을 들이켰다.

“이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니... 우선 이 동굴부터 살펴 보아야...”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동굴,

하지만 어둠따위는 그에게 전혀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는 스스럼없이 일보, 일보 걸음을 떼었다.

한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푸스슥!

그가 힘주어 디디는 곳,

그의 발자국이 닿는 곳은 여지없이 뭉개지는 것이 아닌가?

이검엽은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했다.

“지나친 힘은 학문에 몰두하는데 방해만될 뿐... 이 힘을 쓸 용도조차 없는 것을...”

그는 다시 걸었다.

한데 한순간,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

그는 무엇을 발견한 듯 급히 지면을 살폈다.

드디어 면밀한 그의 주의력은 무억인가를 발견했다.

어떤 물체인가 바닥에 끌린 듯한 자국,

“그렇다면 이 안에 나 말고도 무엇인가...”

부지불식간 그는 한 차례 부르르 경련했다.

알지 못할 공포가 일순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소 긴장을 풀었다.

“흐음... 하지만 이 자국을 보니 적어도 몇년 전에 생긴 것 같군.”

미세한 자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흔적이다! 사람이 기어간 듯한 자국이다.”

그는 그 자취를 따라 계속 걸었다.

이어,

그것은 흐릿한 핏자국과 함께 찢어진 백의자락이 있는 곳까지 그를 인도했다.

하지만

백의라고 느낀 것은 그의 직감알 뿐 피에 푹 젖어 혈의처럼 보였다.

“부상당한 사람이 저 연못을 통해 이 동굴로 왔나보군.”

그는 딱딱하게 피로 엉그러 붙은 백의자락을 만져보았다.

묘한 긴장과 흥분이 그를 휩쌌다.

그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모퉁이,

동굴의 길은 휘어져 있었다.

“아!”

모퉁이를 돌던 이검엽은 그대로 그 자렝서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의 맞은편,

그곳에는 기이한 문양이 넉(四)자가 새겨진 석문(石門)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석문은 그 크기나 새겨진 문양이 웅장함을 풍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문 앞,

한 명의 혈포인이 석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혈포인(血袍人),

본시 백의일 듯한 그의 옷이 선혈로 물들은 것이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아!

그의 등에는 검은빛의 검이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음!”

이검엽은 신음성을 발했다.

끔찍한 한편 괴이한 광경에 그로서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광장으로 선뜻 들어섰다.

중앙에 우뚝 선 그는 거대한 석문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갑골문자(甲骨文字)로군.”

이검엽,

무려 십만(十萬) 권에 육박하는 책(冊)을 읽어낸 그의 학문은 과연 어디서고 진가를 발휘했다.

“천(天), 황(荒), 비(秘), 부(府).”

그는 거침없이 갑골문자를 읽어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천황비부... 갑골문자도 익혀둔 보람이 다 있군,... 한데 천황비부라는 곳은... 적어도 천년 이전 갑골문자 시대에 이룩된 곳일 것이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인물은 죽은지 불과 사오 년 남짓...?)

이검엽은 의문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무릎을 꿇고 죽었는가?”

그는 천천히 시신으로 다가갔다.

시신,

무언(無言)의 사자(死者),

단지 오체복지(五體伏地)한 채 죽어있을 뿐...

앞으로 내뻗은 팔사이로 고개를 묻어 얼굴조차 알 수 없었다.

“글씨가 있었군.”

이검엽의 두눈이 번쩍 광채를 발했다.

시신의 두 팔사이의 지면,

이검엽은 그 곳에 쓰인 글씨를 발견한 것이었다.

글씨는 매우 난잡하게 씌여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시신이 기력이 쇄진한 상태, 즉 죽기 직전에 쓴것 같았다.

 

<조사(祖師)시여! 못난 제자를 용서하소... 서... 본문의 천년기업이 제자의 불민으로 쓰러졌으니... 너무나 죄스러워 차마 부(府)에 들어 두분 조차 영전에서 죽지 못하나이다... 제자... 를 용서... 본문을... 지켜 주옵소서...>

 

혈루를 뿌리며 쓴듯 글의 중간중간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역력했다.

“무엇인가 지극히 통한을 지니고 타계하신 듯하구나.”

이검엽은 그 시신에 대한 연민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이분은 땅에 묻히기조차 부끄러워하신 듯하구나.”

그의 시선은 마지막 줄을 훑었다.

 

<본인의... 시신... 을 발견하는 자... 부디... 이대로 두어 주시길...>

 

“그럴수야 없지.”

이검엽은 머뭇거리지 않고 시신에 다가섰다.

일단 그는 혈의인 앞에 정중히 일배(一拜)했다.

“의(義)를 행함에 목숨을 아끼지 말라 했습니다. 선인(先人)께서 어찌 생각하시든 도의를 아는 이상 그냥은 지나치기가 어렵겠습니다.”

이검엽.

그의 굳은 의지는 예(禮)와 덕(德)을 지극히 숭상함에야 어찌하랴?

“미생이 편히 쉬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정중히 혈포인의 시신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헛!”

그는 대경실색했다.

우수수...!

혈포인의 시신은 모래의 성(城)처럼 그대로 허물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런...!”

이검엽은 황망히 그의 시신을 끌어 안으며 주워 모았다.

한데 그때였다.

부서진 혈포인의 시신에서 장엄한 서기가 일어났다.

그것은 휘황하게 동굴 안을 밝히며 이검엽을 뒤덮었다.

미처 놀랄 사이도 없었다.

“크윽!”

이검엽은 비명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전신의 살갗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크_______ 으!”

느닷없는 엄청난 고통에 이검염은 몸부림쳤다.

하나 그가 어찌 알았으랴?

상서롭지 않은 서기가 자신의 살갗을 통해 심맥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그러자,

그의 심맥 속에서는 일대 격변이 일어낫다.

미리 그 속에 잠재해 있던 천지곤룡의 내단의 신력(神力).

그것에 바로 서기가 뒤석였던 것이었다.

길조(吉兆)인지, 흉조(兇兆)인지...

어떻든 견디기 힘든 고통에 이검엽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푹_______!

기어코 그는 무릎으로 바닥을 헤맸다.

그의 손은 주위의 돌조각을 아무렇게나 움켜쥐어 갔다.

우두둑...!

푸스스...!

이검엽에 의해 동굴은 마구 뭉개지고 있었다.

천지분간이 힘든 아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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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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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운명의 만남

 

 

 

사르륵!

방문이 열리고 자운의 환한 얼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자님, 나와 보시옵소서.”

“무슨 일이지?”

이검엽은 책에서 시선을 떼며 마주 미소했다.

“반가운 손님이 왔어요.”

“허, 반가운 손님이라... 누굴까?”

이검엽은 선뜻 밖으로 나섰다.

히히힝______!

한 필의 건장한 오추마(烏추馬)가 그를 보자 울부짖었다.

기다리던 손님이란 바로 그 말인 듯 했다.

“아니! 흑풍(黑風)이 아니냐?”

이검엽은 몹시 반색을 하며 말에게로 뛰어갔다.

사람(人)과 말(馬).

그들은 서로 오랫동안의 지우(知友)인 양 대화하여 어쩔줄 몰랐다.

흑풍!

그 말은 이검엽이 북경에 두고온 애마(愛馬)였던 것이었다.

자운이 곁에서 이들에게 곱게 미소를 보냈다.

“흑풍이 하도 보채어 승상께서 보내시었다 하옵니다.”

그 말에 이검엽은 만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흑풍!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그는 흑풍의 이마를 긁어주며 껑충 그 잔등으로 올랐다.

“자! 오랜만에 시원하게 달려 보자!”

히_______ 힝!

따그닥 따그닥...!

흑풍은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곧장 내달았다.

“핫하... 자운, 내 한 바퀴 돌고 오겠다.”

이검엽의 목소리는 금세 멀어지며 메아리를 남겼다.

이검엽과 흑풍은 한 무더기가 되어 검은 구름처럼 몰려 갔다.

풍림소축의 담을 순식간에 뛰어 넘어 그들은 풍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자운의 고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격하신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 그러나 흑풍과 어울리심은 독서 다음으로 좋으신 모양이구나.”

언제 다가왔는지 늙은 하녀가 은근히 농을 던졌다.

“아씨께선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자칫 공자님의 사랑하심을 저 시커먼 놈에게 빼앗기시겠어요.”

“...!”

자운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험준한 산봉(山峰).

두두두...!

갑자기 관목을 타넘으며 한 무더기 흑운(黑雲)이 밀려 들었다.

“하하하핫!”

청아한 쾌소가 산중을 올렸다.

두두두...!

히히힝...!

흑운은 바로 한 쌍의 인마(人馬)였다.

먹물로 목욕을 시킨 듯한 새카만 준마였다.

마상(馬上)의 준수무비한 청년.

그들은 다름아닌 이검엽과 흑풍이었다.

“하하하... 흑풍! 다리의 힘은 여전하구나!”

이검엽은 유쾌히 외치며 훌쩍 뛰어내렸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멀리 천주신봉(天柱神峯)과 측융봉(側隆峰)이 좌우로 보이는 산봉의 정상이었다.

장대한 천주산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맑디 맑은 이검엽의 두눈이 장엄한 산세를 두루 훑었다.

문득 그의 가슴에는 피끓는 웅심(雄心)이 가득 차올랐다.

“하하하... 흑풍! 저 넓은 천주산역이 보이느냐?”

히힝______!

흑풍은 마치 그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하는 듯 울부짖었다.

이검엽은 장엄한 신색으로 낭랑히 외쳤다.

“천하도 저와 같다. 제각기 뛰어난 인재들이 저 뭇 준봉들과 같이 솟아있다. 저 하늘은 천자(天子)시며 저 뭇봉은 신하(臣下)이다.”

그는 흑풍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보아라! 나 이검엽은 저 천주신봉이 될 것이다.”

이어 그는 호탕하게 대소했다.

“하하하핫! 무릇 뜻을 풀었으면 대인(大人)이 되어 대도(大道)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히히힝!

흑풍의 우렁찬 울부짖음은 주인의 뜻에 호응하는 충실한 충복과도 같았다.

이검엽은 흑풍의 날씬한 목을 힘껏 껴안았다.

“흑풍! 기다려라. 언젠가는 천하를 네 발굽 아래 두어 보이겠다!”

이어 그는 다시 흑풍의 등에 올랐다.

“보고 있거라! 나 자신이 저 하늘 기둥(天柱)이 되어 하늘을 떠받칠 것이다.”

천주신봉은 천주산의 장대한 산세 속에 가장 높고 빼어난 거봉(巨峰)이었음에랴.

뛰어난 기재 이검엽의 웅심은 하늘을 떠받고도 남음이 있을 듯 했다.

이윽고 그는 말머리를 오던 길로 되돌렸다.

“가자! 하하... 자운을 기다리게 할 수야 있겠느냐?”

두두두_______!

흑풍은 질풍처럼 내달아 산봉을 내려갔다.

산봉을 잇는 단애를 흑풍은 거침없이 지나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파파팍!

흑풍의 발길이 지면에 꽂혔다.

푸르르르...

갑자기 멈춰선 흑풍은 갈기를 곤두세운 채 두눈에서 불을 뿜어냇다.

“엇!”

이검엽은 흠칫했다.

담대한 흑풍의 긴장에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흑풍! 무슨 일이냐?”

푸르르...

흑풍은 여전히 두눈을 번뜩이며 전면을 노려보았다.

“...?”

이검엽이 의아해하는 사이 돌연,

“으으음...!”

나직한 여인의 신음이 그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이면의 거대한 바위의 뒷쪽이었다.

(여인의 신음...?)

이검엽은 급히 마상에서 뛰어내렸다.

“흑풍, 넌 여기서 기다려라!”

그의 신형은 서슴없이 암석 위로 뛰어올랐다.

“헛!”

이검엽의 대경한 외침.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화급지경(火急之境).

한 명의 여인이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신음을 흘림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이럴 수가...

여인의 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바로 그 여인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길이 만도 무려 십여 장.

용(龍)의 머리에 뱀(蛇)의 몸.

어디 그 뿐인가?

청홍이 엇갈린 다리의 수가 여덟 개나 되었다.

크르르...!

괴물의 괴성은 여인을 위협했다.

발톱을 무시무시하게 곤두세운 채 괴물은 시시각각 여인을 조여들었다.

격렬한 난투를 벌인 듯 괴물 역시 여기저기 상처를 입기는 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엄청나고도 무시무시했다.

“천... 천지곤룡(天地昆龍)!”

이검엽은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괴이지(怪異誌)에 기록된 바_______

천지곤룡(天地昆龍)은 천지간의 가장 영통한 영물이었다.

그것은 몸에 붙은 비늘은 매 만년(萬年)마다 하나씩 생겨나는 것으로 종잇장처럼 얇으나 도검불침(刀劍不侵), 즉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었다.

한데 그 비늘이 열 개가 될 경우, 즉 십만 년의 수명을 누릴 경우 천지곤룡은 체내에 내단을 형성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지곤룡의 내단(內丹).

십만 년의 천지정기를 흡수한 이것은 천지의 음양이기가 조화되어 천하제일의 신효(神效)를 발휘한다고 전해진다.

그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게 되면 신의 지경에 이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둘, 셋, 넷...

이검엽은 괴물의 옆구리에 붙은 손바닥만한 비늘을 눈으로 확인했다.

도합 열(十)개.

그렇다면 눈앞의 천지곤룡은 무려 십만(十萬) 년을 살아온 괴물이란 말인가?

“으...”

이검엽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 경직되어 버렸다.

크크크... 캬오!

천지곤룡은 두눈에서 불같은 광채를 뿜으며 여인에게로 점점 다가들었다.

쿵,... 쿵...!

괴물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공포스러움이란_______

괴물의 거보(巨步)는 바윗덩어리를 가루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체념한 듯 내뱉았다.

“으... 방심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위기!

엄청난 위기가 그녀를 덮쳐드는 순간이었다.

“위험하오!”

이검엽은 힘껏 소리쳤다.

아울러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에서 주먹만한 돌을 집어던졌다.

휘익_______!

팍!

그것은 곧바로 천지곤룡에게 적중했다.

그까짓 것쯤은 천지곤룡에 있어 아무런 충격도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천지곤룡은 대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크아악!

또한 그 노성은 방해자인 이검엽에게 쏘아짐은 당연한 결과였다.

크르르...!

천지곤룡은 거대한 입을 딱 벌려 이검염을 급습했다.

“야_______ 앗!”

순간 여인의 교갈일성이 쏘아졌다.

쐐_______ 액!

그녀의 우수(右手)는 휘황한 금광(金光)을 폭사시켯다.

푸_______ 욱!

천지곤룡의 턱밑에는 여인의 금차(金叉)가 격중되었다.

캐_______ 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지곤룡의 거구가 거꾸러졌다.

약 반 자(半尺)가 조금 넘는 금차였으나 그것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휴_______ 우!”

이검엽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으... 음!”

쿠_______ 웅!

여인의 교구 또한 허물어지듯 옆으로 넘어갔다.

“소저!”

이검엽은 대경하여 급히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자색궁장(紫色宮裝)의 여인,

“소저,... 정신... 헛!”

그녀를 부축하려던 이검엽은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미(美)의 극치!

환상 속에서 천상의 선녀를 대하는 것인가?

도대체 인세의 속인(俗人)인가? 천상의 우물(尤物)인가?

이검엽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고 있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천하미색(天下美色).

이러한 미사여구가 그는 도저히 이 여인에게 근접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정녕 만 여인 중 하나 있을까말까한 아름다움이요,

수백 년에 하나 날까말까한 천향국색(天香國色)의 미모.

힘없이 내리 감겨진 두눈,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

이러한 극한 상황들조차 그녀의 미(美)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했다.

(아... 아름답다... 천하에 이런 미녀가 있었다니...)

이검엽은 꿈꾸듯 몽롱한 시선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그는 그 여인에게라면 자신의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설사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천하를 향한 응심도 그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검엽은 마치 억겁의 세월을 치른 것만 같았다.

서늘한 산풍(山風).

그의 뇌리는 맑아지고 있었다.

하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이 무슨 추태를...”

입으로 내뱉는 언어,

이것은 단지 이성(理性)일 뿐, 여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서는 이미 인정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여인과의 극히 짧은 대면이 자신의 생애를 뒤엎어 형극의 길을 달리게 할 줄은...!

이검엽은 애써 담담히 여인을 바로 뉘였다.

새털같이 가벼운 여인의 몸,

뭉클한 감촉에 그는 전율했다.

하지만 이검엽은 강한 자제력과 이성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 여인의 옷깃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독기에 당했군... 천지곤룡의 천지빙염독기(天地氷焰毒氣)에 당했으리라...)

그의 안색은 침중하게 변했다.

(천지빙염독기는 음양지기를 지닌 독으로 천년학홍정(千年鶴紅精)이 있어야 해독할 수 있는데...)

그러나 문득 그의 두눈이 재차 크게 떠졌다.

스스슥...!

여인의 전신에 신비로운 서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 서기가 짙어 갈수록 점차 여인은 혈색을 되찾는 것이었다.

(천지빙염독기를 자력(自力)으로 치료하다니...!)

이검엽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여인은 세속의 여인이 아니란 말인가?)

자색의 궁장은 되찾아가는 그녀의 혈색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발그스름해진 여인의 얼굴,

하여간 너무나 곱구나...

이검엽의 시선은 다시금 몽롱해졌다.

그때였다.

“으... 음!”

그녀의 속눈썹이 무겁게 들렸다.

이어 그녀는 힘없이 동공을 열었다.

“소저, 괜찮소?”

어찌 되었던 이검엽은 반색을 했다.

여인의 시선이 잠시 무심하게 이검엽을 응시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다소 놀란 듯 되물었다.

“공... 공자께서는 ... 풍림... 소축의...?”

“소생을 알고 계시었소?”

이검엽이 흠칫하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데... 그보다... 독기를 한쪽으로 몰아넣었... 으나... 반각이내에...”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점차 작아져 갔다.

“천... 천풍... 제독산(天風制毒散)을 복용해야...”

툭!

여인의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소저!”

이검엽이 다가드는 순간,

스스스...!

여인의 전신은 다시 서기로 휩싸였다.

“큰일이다... 천풍제독산을 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텐데...”

이검엽은 걱정이 앞서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선 풍림소축으로,...!”

한데 바로 그 순간,

크르르...!

그의 등뒤로부터 가래가 끓는 듯한 괴성이 일었다.

“헉!”

뒤돌아선 이검엽은 대경실색했다.

천지곤룡!

그 괴물이 목에 금차가 꽂힌 그대로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놈은 두 앞발을 겨냥한 채 상체를 일으켜 이검엽을 노렸다.

크악!

천지곤룡의 두 발은 이검엽의 양허리에 정확히 예리한 발톱을 꽂았다.

“으...”

천지곤룡의 발톱은 대뜸 그의 내장을 부숴뜨리고 있었다.

“크... 으... 이... 이놈의 미물이...”

이검엽은 사력을 다해 천지곤룡의 목을 움켜 쥐었다.

하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천지곤룡은 입을 딱 벌리며 무섭게 그의 머리를 물어 뜯으려 했다.

이검엽은 허리께가 부서지는 고통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순간 그는 천지곤룡의 목에 박힌 금차를 보았다.

“크... 네놈에게 죽을 수야...”

그는 힘껏 금차를 머리로 들이 받았다.

퍽!

카오! 카르르,...

천지곤룡은 금차가 깊숙이 박히자 발광을 했다.

“죽이리라!”

이검엽은 다시 금차를 들이 받았다.

콸콸...

금차가 박힌 천지곤룡의 목에서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검엽은 덕분에 시뻘건 선혈을 뒤집어 썼다.

그 와중에도 그는 전신이 따끔거리는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윽고 이검엽의 옆구리를 움켜쥔 천지곤룡의 발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흠. 네깐 놈이...”

이검엽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헉!”

카르르!

천지곤룡의 쩍 벌린 입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최후의 발악이었다.

“크으!”

이검엽의 허리는 뒤로 꺾이고 팔마저 구부러졌다.

“그러면!”

이검엽은 마지막 용기를 다해 가슴으로 금차를 들이받았다.

아울러 그는 천지곤룡을 꽉 끌어안은 채 피할 여유를 허락치 않았다.

크_______ 악!

천지곤룡의 단말마인가?

“악!”

헌데 이검엽은 자신의 얼굴에 부어지는 뜨겁고 찬기운에 비명을 질럿다.

그 순간 벌어진 그의 입속에서 천지곤룡의 구토물이 왈칵 들어왔다.

무엇인가 둥근 물체였다.

“아_______ 악!”

이검엽은 재차 비명을 터뜨렸다.

둥근 것이 체내에 들어가자 그는 느닷없이 고통에 휘말린 것이었다.

속은 타는 듯한 반면, 겉은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고통!

이검엽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푹!

천지곤룡의 목도 그 순간 꺾였다.

일인일수(一人一獸).

그들은 모두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까마득한 단애 밑이었다.

우르르르_______

콰_______ 릉!

이검엽은 천지곤룡의 시체와 함께 정신마저 잃은 채 깊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만 것이었다.

히힝_______

흑풍이 다급히 달려왔다.

하나 절벽 위에 남은 것이라곤 축 늘어진 여인 뿐.

푸르르...

흑풍은 슬프게 우짖으며 단애 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백운이 걸린 까마득한 낭떠러지... 무엇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두두두...

흑풍은 체념을 했는지 급급히 달려갔다.

 

풍림소축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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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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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楓林小築의 貴公子

 

 

 

깊은 가을이다.

천주산(天柱山)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천주산의 수려한 봉우리들은 오색의 단풍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우수수...!

한기를 머금은 추풍이 산역을 맴돈다.

그때마다 녹색을 잃은 잎사귀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천주산의 어느 산록,

단풍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한 채의 단아한 장원(莊園)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장원 아래로는 수십 채의 모옥들이 작은 산촌(山村)을 이루고 있었다.

정겨움이 깃들어 뵈는 작은 촌락이다.

장원은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여 마치 산촌의 머리같이 보인다.

 

-풍림소축(楓林小築),

 

그 장원을 산촌 사람들은 이렇게 붙였다.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장원,

그러나 이곳의 장주(莊主)로 말하던 그 명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당대의 승상(丞相) 이성진(李聖眞)이 바로 풍림소축의 주인인 것이다.

승상 이성진에게는 인중지룡(人中之龍)으로 불리는 아들이 있다.

이검엽(李劍葉).

이성진의 독자(獨子)이며 풍림소축의 사실상 장주다.

승상 이성진은 황제를 보필하여 국정을 운영하느라 한가할 틈이 없다.

그런 부친과 달리 이검엽은 풍림소축에 내려와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촌 마을 사람들에게 이검엽은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얼굴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이검엽은 풍림소축에 온 이후 단 한 발짝도 외부로 나가본 일이 없는 때문이었다.

 

풍림소축의 널찍한 방.

그곳은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가(書家)였다.

장식이라고는 전혀없이 백의 사면이 온통 책들로 들어차 있었다.

지향(紙香)이 코를 찌르고,

한데 방의 중앙에 한 명의 청년서생이 있었다.

그는 넓적한 식탁을 마주하고 단정히 좌정한 모습이었다.

청년서생,

그는 마치 오랫동안 햇빛을 못본 듯 안색이 무척 창백했다.

그러나 타고난 본래의 외모는 영준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깊고도 서늘한 두 눈은 지극히 심오한 혜지(慧知)을 담고 있었다.

깨끗한 백의(白衣).

그리고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는 붉은 홍옥(紅玉)이 박힌 문생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한 마디로 단번에 매료될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타인의 마음을 더욱 끄는 것이 있었으니...

지극히 초탈한 외모,

그에게서 풍기는 기품은 학처럼 고고하기까지 했다.

“...!”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단지 시선만을 움직여 앞에 펼친 고서(古書)의 행을 따를 뿐이었다.

간간이 입가에 흐르는 미소.

책장을 넘기는 뽀얀 옥수(玉手)의 움직임,

그것만이 그의 행동의 전부였다.

마치 석상인 양 그는 고요 속에 오직 독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문득,

사르륵...!

문밖에서 비단 옷자락이 끌리는 음향이 들려왔다.

이어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백옥같은 피부,

그린 듯한 아미,

십 육칠 세쯤 되었을까?

청년에 비해나이는 어리나 거의 완숙함과 동시에 포근함을 지닌 미녀였다.

특히 마치 구름같이 틀어올린 머릿결이 몹시도 탐스러웠다.

일견하여 이렇듯 아름다운 이 미녀는 찻잔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릿결을 물결치며 서탁으로 가까이 왔다.

그러나 여인은 청년을 방해치 않으려는 듯 종종걸음이었다.

또한 지극한 조심스런 몸짓으로 찻잔을 서탁에 내려놓았다.

“음, 자운(紫雲), 고마워!”

청년의 담담한 말을 들으며 그녀는 조용히 그와 마주 앉았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했다.

따스한 찻잔,

향기로운 다향(茶香)이 그에게 전한 것은 푸근한 정(情)이었을까?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내 무심하게 고서를 향했다.

자운이라 불리운 여인,

그녀의 상아빛 뺨은 조금 전 노을같이 바알갛게 물들었었다.

하나 청년의 무심함은 그녀의 홍조를 금세 거두어가 버렸다.

그녀는 몹시 서운한 표정이 되었다.

(휴...!)

그녀의 가지런한 이빨 사이로 소리없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련한 물기가 그녀의 긴 속눈썹에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탄식했다.

(분수도 모르는 계집... 일개 시비의 몸으로 공자님의 마음을 바라다니...)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비애감에 젖어들었다.

(나는 미천한 종인데 반해 저 분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신 승상님의 소공자(少公子)... 시중들며 가까이 있을 수만 있더라도...)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모님만 생존해 계셨더라도...)

승상의 소공자,

풍림소축의 소주(少主),

그는 바로 이검엽이였다.

이검엽을 향한 자운의 단심(丹心)은 뜨거운 이슬이 되어 뺨을 적셨다.

또르르... 똑!

모아진 섬섬옥수 위로 눈물방울이 굴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체념이 습관인 듯 손등의 눈물을 훔쳤다.

(속좁은 계집... 공자님의 면전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흠칫하고 말았다.

이검엽의 따스한 시선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공... 공자님,...”

자운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이검엽은 다정히 물었다.

“자운, 누가 너를 울렸지?”

“흑...!”

드디어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자운은 그만 흐느끼고 말았다.

이검엽은 정색을 했다.

“허... 자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흑흑... 죄... 죄송... 하옵... 니다.”

자운은 황망히 일어나 문께로 달려갔다.

“자운.”

하지만 이검엽의 부름에 자운은 문을 나서지 못했다.

멈추어선 그녀의 교구가 바르르 떨렸다.

이검엽은 천천히 일어서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자운, 무엇때문이냐? 말해다오.”

“공자님,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자운은 애써 담담히 대꾸했다.

“자운.”

이검엽의 목소리가 다소 엄격해졌다.

그는 자운을 잡고 돌려세웠다.

“나를 보아라.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온 너와 내가 아니었더냐?”

그의 음성은 다시 누그러졌다.

“네가 나에게 못할 말이 있었느냐?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무척 서운할 것이다.”

이검엽은 그녀의 섬섬옥수를 부여잡고 자리로 돌아와 앉혔다.

“어떤 일이든 혼자 속을 태운다고 나아질 것은 없다. 자, 어서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해다오.”

자운은 선뜻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작은 가슴이 수없이 두근두근 맞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천... 천녀는... 두려사옵니다.”

“무엇이 그리 두렵지?”

“언젠가는... 공자님께서... 천년에게 떠나라... 하시는 날이... 올 것만...”

이검엽은 잔잔히 웃었다.

“자운, 바보같구나. 지금껏 내가 자운을 단 한시라도 내곁에서 떨어져 있게 한 적이 있더냐?”

그 말에 자운의 아미에 가득 드리워졌던 그늘이 일시에 지워졌다.

그녀의 눈은 금세 감격의 빛으로 촉촉히 젖어 들었다.

“하... 하오나... 천녀같이 미천한 것을...”

이검엽은 실소했다.

“미천하다고? 허허...”

이어 그는 밝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바보같은 자운, 천만인(天萬人)을 모아놓고 물어 보아라. 사헌대부(司憲大夫) 추(秋)대감의 천금(千金)이 미천하냐고!”

“공자님... 흑...!”

자운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검엽은 가만히 자운을 안았다.

부드러운 그의 손마디가 탐스러운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자운(紫雲),

본시 그녀의 부친 추경업(秋耕業)은 사헌대부로서 그 권세가 대단했었다.

한데 가정(嘉靖) 일년(一年), 추경업은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구족지멸(九族之滅)의 참화를 입게 되었다.

그때 추경업의 어린 딸 자운만이 이검엽의 부친인 이성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었다.

그 이후 추경업의 부친의 무고함이 밝혀졌다.

정적(政敵)의 모함 때문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로 인해 자운은 본래의 신분을 되찾았다.

사실 이성진의 따뜻한 배려도 그녀는 처음부터 이씨가(家)의 친딸처럼 키워져 왔었다.

그러나 자운은 천애고아로 의지할 곳 없는 몸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로인해 그녀는 이검엽의 시비를 자처하여 지성껏 그의 시중을 들어왔다.

이검엽은 자운과 함께 자라오던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르를 스쳤다.

그는 자운의 등을 어루만지며 다정히 물었다.

“자운. 너는 왜 아버님께서 자운이 내 시중을 들도록 내버려 두셨는지나 알고 있느냐?”

“모... 모르옵니다.”

자운은 살포시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이검엽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핫... 아버님은 바로 자운을 며느리로 맞고 싶으신 것이다.”

“...!”

자운의 몸은 그 순간 경직되고 말았다.

몹시 총격을 받은 탓일까?

이검엽은 굳어진 그녀의 감촉을 느끼며 다시 대소했다.

“하하... 아버님께선 드러내시지는 않으시지만 각별히 정이 많으신분이 아니셨더냐?”

이어 그는 다소 가라앉은 음성이 되었다.

“유난히 아끼시던 사헌대부께서 변을 당하시자 그를 막지 못해 아버님은 두고두고 괴로와하셨다. 그러니 그 안타까운 심정으로라도 자운에게 더욱 정을 베푸시려 하신다.”

“흑...”

자운은 이검엽의 품에 파묻히며 오열을 터뜨렸다.

이검엽은 그녀의 교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스했다.

그리고...

뭉클한 탄력이 미묘하게 전해져왔다.

(자운도... 이제 성숙한 여인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일으켰다.

“자, 오랫만에 자운과 함께 걷고 싶구나.”

 

두 사람은 나란히 문을 나섰다.

화사한 햇살이 눈부셨다.

단풍잎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은 마냥 따사로왔다.

“거동 하시었사옵니까?”

풍림소축의 하인과 시비들이 허리를 굽히며 그들의 길을 터주었다.

건장한 호위무사 이인(二人)이 말없이 그들을 따랐다.

이검엽은 호위무사들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만들 두시게. 자운과 풍림을 거닐고 싶군.”

“예.”

호위무사들은 자리에 멈췄다.

그러나 두 남녀가 앞서 가자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공자께선 만류하셨으나...”

그들은 멀찍히 두 남녀를 따랐다.

이검엽과 자운.

먼저 이검엽이 입을 열었다.

“하하... 십만 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풍림소축을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어제같건만...”

“죄... 죄송하옵니다... 천비 때문에 괜히...”

자운이 얼굴을 붉히자 이검엽은 유쾌히 웃었다.

“하하... 자운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맹세라도 할 수 있다.”

“공자님...”

두 사람의 발길이 잠시 멈추어 졌다.

이검엽의 맑은 두눈이 자운을 향했다.

“자운. 너는 모르고 있었느냐?”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가 처음 이성(異性)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누구였는지 아느냐?”

“...”

“너무나 긴 머리를 주체 못하던... 바로 자운이라는 소녀였다.”

“고... 공자님...”

“자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을 와락 끌어 안았다.

이어 이검엽의 입술이 꽃같은 자운의 입술을 덮었다.

“으음,...”

자운은 나직한 신음을 흘려내었다.

정인(情人).

그의 마음과 입술을 한꺼번에 받아들인 그녀의 가슴은 기쁨이 충만했다.

잠시 후 입술과 입술이 서로 떨어졌다.

“아...”

자운은 몹시 부끄러운 듯 후다닥 풍림사이로 숨어들었다.

“하하... 자운 놓치지 않겠다.”

이검엽 역시 그녀를 잡으려 풍림으로 뛰어들고...

이를 본 호위무사들은 멋적은 표정을 주고 받았다.

“이보게. 아무래도 물러가는 것이...”

“그래야겠군.”

그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 사라졌다.

 

풍림이 끝나는 언덕.

멀리 평화로운 산촌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이검엽과 자운,

두 사람은 풍목(楓木)에 기대앉아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검의 한 팔은 자운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검엽의 두눈이 잔잔한 우수를 띄웠다.

“자운. 기억하느냐? 어렸을 때 나는 자운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했지?”

그의 말투는 은근하고도 따스했다.

자운은 그에게 몸을 기댄 채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사옵니다.”

그녀의 눈이 몽롱한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천비는 때론 너무 약이 올라 울기도 하였어요.”

“하하! 그래, 생각나는군.”

“하오나... 천비가 울면 공자님께서는 꼭 달래주시었습니다.”

“이렇게 해주었지.”

이검엽은 자운의 시원한 이마에 대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잘 익은 홍시같은 두볼.

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한데, 그때였다.

스스슥,...

숲속 깊은 곳,

그곳에 한 줄기 인영이 어른거렸다.

흐릿한 서기로 전신을 감싼 기이한 인영.

비록 용모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여인임은 분명했다.

그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은은히 드러난 여인의 자태는 형용할 수 없을이만치 고왔다.

문득 신비로운 음성이 낮게 흘렀다.

“휴... 저 소녀가 부럽군.”

여인의 다소 고독하게 들리는 독백이었다.

이검엽과 자운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계속 말을 주고 받았다.

“사실은 백여 권만 더 읽으면 십만 권을 읽겠다는 계획은 완성이다.”

“아! 공자님!”

그러나 그 이전,

신비여인의 흐릿한 신형이 일순 몹시도 흔들렸다.

(내 또래거늘... 십만(十萬) 권을 읽다니...)

“경하드리옵니다.”

자운의 칭찬에 이검엽은 매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백여 권을 다 읽고나면 즉시 북경(北京)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중추절 이전에 아버님을 뵐 수...”

그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예민한 그의 시선이 숲속 신비여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하나 그때,

스스스...

흐릿한 인영은 안개와도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무엇을 보시기라도...?”

자운은 궁금한 듯 그의 시선이 향한 쪽을 보았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검엽조차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정색을 했다.

“아니다. 내가 아마 헛것을 본 모양이다.”

그는 자운의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중추절 후에 개최되는 어전시(御前試)를 볼 것이다.”

그의 맑은 두눈이 자운의 아름다운 봉목을 향했다.

“어전시에 만일 장원을 하게 되면...”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여인(女人).

여인의 육감이란 대개 사물을 관통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인가?

자운은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을 몰라 했다.

이검엽은 그녀의 심중을 곧 알아차린 듯 의미있게 웃어댔다.

“하하하핫_______ 그 다음 얘기는 그때에 해야겠구나. 자, 이제 그만 일어날까?”

“네.”

자운은 기어들 듯 겨우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켯다.

두 남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걸었다.

풍림 사이, 풋풋한 햇살이 그들의 등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쫓는 한 쌍의 우울한 눈빛이 있을 줄이야...

예의 신비녀였다.

그녀는 아직껏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두 남녀가 멀찍이 사라지도록 그녀의 눈길은 그들에게서 떨어질줄을 몰랐다.

“휴우_______”

나직한 신비녀의 한숨이 은짙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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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쓰러진 劍皇宗

 

 

신비(神秘),

만사(萬事)가 신비 속에 가린 채 무심한 세월은 흘렀다.

과연 그 누구를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월이었던가?

 

X X X

 

황막한 산중(山中),

창공을 뒤덮은 시커먼 먹구름에 사위는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우_______ 웅!

금시라도 폭우를 몰고올 듯한 일진 광풍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칙칙한 폐사(廢寺),

어느 상고시대의 유물인가?

찬란했던 불존(佛尊)의 유적이었음은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차라리 지옥(地獄)의 입구(入口)인 듯,

불시에 귀신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 광풍 속에 음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데,

스스스...

이 다쓰러져가는 폐사에 유령같이 스며드는 인영이 있었다.

괴인영(怪人影),

그는 미끄러지듯 대웅전을 향했다.

번쩍!

콰르릉_______

천공(天空)은 발작적으로 뇌성벽력을 토해냈다.

그때 괴인영의 모습이 번갯불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백의몽면인은 거의 무너져가는 불상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일핏 그의 우수에는 폭이 좁고 긴 한 자루의 도(刀)가 들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쏴_______ 아!

드디어 엄청난 폭우가 산중을 휘몰아쳤다.

거센 폭우는 일시에 폐사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장관이었다.

천변만화의 역사 속에 퇴락해 버린 폐사의 건물,

대자연의 엄숙한 힘(力)앞에 오히려 더욱 초라해지는 것은...

그 순간 번쩍이는 뇌광을 등지고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등장했다.

거한이었다.

그는 짐승가죽을 두른 채 날이 두 자나 되는 거부(巨斧)를 차고 있었다.

음침하기는 하나 단아해뵈는 백의몽면인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단지 동일한 것이라면 거한 역시 몽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쿵! 쿵!

그는 역시 발걸음조차 거한다왔다.

거보(巨步)를 움직여 백의몽면인과 마주섰다.

콰르릉_______

뇌성벽력과 폭우는 점점더 그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

...

백의몽면인과 거한(巨漢),

양인은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동시에 초조한 빛을 띄웠다.

아마도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이때였다.

스스스...

뒤미처 다른 두 인영이 장내에 당도했다.

그들은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남자(男子),

흑의를 입은 듯 하나 흐릿한 그림자에 싸여져 그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괴몽면인,

일견하기에도 그는 음침하고도 흉흉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여인(女人),

그녀는 천하의 요녀(妖女)였다.

거의 속살이 다 들여다 보이는 나의를 걸친 그녀의 몸매,

실로 농염의 극치였다.

불룩하고 잘록함이 분명한 곡선미,

게다가 비록 면사로 가려져 있으나 그윽이 열린 도발적인 눈매가 무척 요염했다.

제각기 특성이 다른 사인(四人),

그들은 서로 대치하듯 사위로 나뉘어 섰다.

...

...

그들의 회합른 분명 미리 계획된 일인 듯 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숨통을 조일 듯한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콰르릉_______

콰르르_______

쏴아_______

장대밭같은 폭우에 대웅전까지도 뒤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 모였군.”

나직한 일성에 사인은 질겁을 했다.

“헉!”

“아니, 어느새...”

어느틈엔가 불상의 전면에 한 청영이 와 있지 않은가?

전신이 푸르스름한 기류로 뒤덮인 신비의 인물,

그를 보자 사인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 이럴 수가...)

(천하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인 우리조차도 감히...)

그들은 내심 찬탄을 발했다.

동시에, 그들은 한결같이 자세를 굳혔다.

“지존을 뵙습니다.”

“그 자리에 모두들 앉으시오.”

신비한 청의인이 명(命)했다.

몹시 위엄이 서려있으면서도 웬지 섬칫하고 냉혹한 음성이었다.

“...!”

“...!”

사인은 모두 말없이 그 자리에 부복했다.

청의인의 눈길이 백의몽면인에게로 향했다.

“백살파(白煞巴)!”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백의몽면인을 불렀다.

“옛!”

백의몽면인은 경건한 자세로 청의인을 향했다.

“준비는 되었소?”

“옛! 지존의 분부만 계시면 백살파용사 일만(一萬)이 언제라도 중원을 칠 터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짤막했다.

이번에는 청의인의 시선이 거한에게로 향했다.

“지옥림(地獄林), 그대는?”

“옛! 지옥림의 삼백육십지옥혈강시(地獄血강屍)는 천하무적입니다!”

거한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중원이 제아무리 넓다하나 삼백육십지옥혈강시하면 문제없이 멸망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음.”

청의인의 눈가에 알지못할 신비함이 깃들었다.

“환공강(幻空岡).”

흑의인이 즉시 대꾸했다.

“옛! 지존의 분부 거행했습니다. 중원천하에 이미 일만팔천(一萬八千)의 수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청의인은 담담히 물었다.

“물론 그 누구도 눈치는 못챘겠지?”

흑의인은 다소 긴장을 풀며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예. 설사 그들과 살을 섞고 있는 계집들일지라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청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으로 그는 홍일점의 여인을 응시했다.

“요지(遙池)!”

“예엣.”

그의 시선을 받자 여인은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입을 떼었다.

“천락환요화(天樂歡妖花) 일천(一千)은 개개인이 천하우물이옵니다.”

그녀의 음성은 확신이 있는 듯 했다.

반면 어떤 두려움에서인지 음성조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말투를 가다듬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자라도 그 아이들에게는 당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

그 말에 청의인은 대답대신 무거운 침묵을 깔았다.

사인의 조마조마한 시선은 오로지 그의 표정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윽고,

“흐흐...”

청의인은 짧고 나직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웅후한 일갈을 터뜨렸다.

“때는 왔다______!”

그 한 마디에 사인의 눈빛은 격동으로 몹시 흔들렸다.

뒤이어 청의인은 앙천광소했다.

“으하하... 천하는 그대들의 것이다! 중원천하를 철처히 괴멸시켜 버려라!”

사인은 벌떡 일어나 입을 모아 외쳤다.

“신명을 바쳐 수생하겠습니다!”

청의인은 자족한 미소를 흘렸다.

“천하를 동서남북으로 사분한다. 이날 이후 그대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 점령하라.”

“옛!”

사인은 의기가 투합된 듯 청의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눈에 투지와 신뢰를 담은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속단이었다.

청의인은 찬물을 끼얹은 듯 냉엄하게 일갈했다.

“천하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그대들의 경쟁을 허용한다. 그러나 천하제패 후에는 단 일파만이 본인과 천세를 누리리라!”

파파팟!

일순 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광폭하게 부딪쳤다.

그들은 내심 똑같이 부르짖고 있었다.

(질 수 없다! 천년! 천 년을 바라던 대업이거늘...)

청의인의 심계는 무한히 깊고도 깊었다.

그들 사인의 암투를 조장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침착을 전혀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삼일 후, 천중(天中)으로 모이도록 하시오.”

사인은 일제히 그 말에 허리를 굽혔다.

“속하를 물러가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거의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파_______ 앗!

그들은 광풍푹우를 빛살처럼 가르며 사라져갔다.

콰르릉_______!

쏴_______ 아!

이제 청의인의 시야에 남은 것은 오로지 장엄한 대자연의 격동 뿐이었다.

“흐흐흐...”

나직한 괴소.

일순 뇌전같은 신광이 청의인의 두눈으로 번뜩였다.

“때는 왔다. 천 년을 잠들어 있던 사대마파(四大魔派)를 깨웠노라.”

그는 광폭하게 대갈했다.

“흐하핫! 마음껏 짓밟아라! 천하를 피로 씻어라!”

광언(狂言)!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행함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청의인의 광기어린 음성은 광언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다.

천 년을 숨어있던 삼정(三鼎)이 꼬리를 내밀고 그것으로 중원의 대역사는 끝나리라!

폭우!

폭우의 난무는 거칠줄을 모르는 채 천지를 휘몰아쳤다.

허지만 폭우를 가르는 엄청난 장소성!

“우하하하하_______!”

중원이여!

너 그 찬란하고 무궁무진한 역사여!

그것이 과연 광마의 마수(魔手) 이래 짓밟힐 것인가?

그 무슨 괴사를 창출하여 혈(血)의 역사를 점철시킬 것인가_______

 

X X X

 

천중산(天中山).

무려 구천 팔백(九天八百) 척이나 되는 고천봉(孤天峰)이 외로이 우뚝 서 있다.

항시 백운이 감도는 장엄한 산세.

이 천중산역에 한 줄기 외로운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스스스슥...

놀라운 것은 그 인영이 내딛는 일보가 족히 십여 장씩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가공할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경공의 소유자는 과연 누구인가?

언뜻 선계(仙界)의 신인(神人)을 연상시키는 인물,

검박한 회포노인(灰袍老人).

그는 실상 별다른 특징이라고는 없었다.

단지 고독한 인상에 한 자루 검(劍)을 가슴에 안고 있을 뿐.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상만은 결코 변상치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웅대무비한 기개.

그에게서는 일대종사(一代宗師)의 면모가 은은히 엿보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다소 감회 어린 듯 읊조렸다.

산천의구(山川依舊)라... 고천봉은 에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구나...

그의 시선은 담담히 천중산역을 두루 훑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부르짖었다.

“허...! 기이한 일이다... 천중산 전체가 살기로 뒤덮이다니...!”

그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혹시... 그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그는 금세 불안과 초조가 깃들었다.

“서둘러야겠구나.”

스스슥...

그는 흐르는 유성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일백 수십 년을 검날 위에서 살아온 노강호인(老江湖人).

그의 단련된 감각이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감히 노부를 노리다니!”

한소리 냉갈이 터졌다.

그와 함께 노인은 무섭게 표정을 바꿨다.

천군만마라도 일거에 흩어버릴 듯 그의 눈에서 불꽃이 작렬했다.

“나와랏_______!”

노인은 무시무시하게 폭갈했다.

한데, 그때였다.

콰르릉_______!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십 장 밖에 있는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노인은 아무런 행동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사태는 분명 노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

그것은 심즉살(心卽殺), 즉 이사동기(以思動氣)의 경지가 아닌가?

고금을 통틀어 이런 통천가공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 과연 몇아니 되겠는가.

이때였다.

“흐흐흐...!”

음산한 괴소와 함께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슥...!

백의몽면인.

그는 길고 끝이 굽어진 기형의 도(刀)를 비껴든 채 유령처럼 나타났다.

노인은 그를 보자 노성을 발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검황종(劍皇宗)...!”

백의몽면인은 슬쩍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곤 음산하게 덧붙였다.

“오늘 이곳에서 죽어주어야겠다.”

검황종,

이 대단한 이름을 지닌 노인은 코웃음을 날렸다.

“허헛... 그대 애송이 실력으로 본인을 베겠다고?”

과연 아름답게 그는 자신의 검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백의몽면인 역시 녹녹치 않은 인물이었다.

예의 음산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흐흐... 그렇다면 이것부터 한번 보시지?”

휙!

웬 보자기에 싸인 물체가 검황종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파_______ 앗!

그것은 허공에 못박힌 듯 멈칫했다.

그 순간 보자기가 그대로 풀어지고 싸여던 물체가 드러났다.

한데 놀랍게도 그 물체는 중년남녀의 수급이었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간...

“억!”

검황종은 그 남녀를 아는 듯 대경실색했다.

아울러 순간적으로 그의 신형은 휘청 균형을 잃었다.

콰릉_______

순간 검황종의 겉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스치며 맹격을 퍼부었다.

크_______ 으!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검황종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 광경에 백의몽면인이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이런! 쓰러지지 않다니!”

실상 검황종이 괴인영으로부터 받은 일격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범인(凡人)으로서 그것을 받았다면 천살박살을 면치 못했으리라.

한데 그때였다.

스스슥...

또 다른 인영들이 그곳에 출현했다.

그들은 한 명의 거한과 나삼만을 걸친 요염한 여인이었다.

“흐흐흐...”

검황종은 어이없는 사태에 한번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피눈물보다 더 진한 고통의 표현이었음에랴_______

뒤이어 그는 처절히 부르짖었다.

“네놈들이 성아(聖兒) 부부를...!”

언제부터인가 그의 허리는 완전히 짓뭉그러져 콸콸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나 그는 자신의 상세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단지 분노로 이글거리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폭사시키고 있었다.

백의몽면인은 그를 조롱하듯 득의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그렇다. 그러나 염려마라. 네놈 늙은이도 이제 곧 이 두 년놈의 뒤를 따를 것이다!”

검황종은 이를 뿌드득 갈며 검(劍)을 들었다.

“죽이리라! 검(劍)을 봉(封)한지 채 일갑자도 못되었으나 네놈들을 죽여 성아부부의 원한을 갚으리라!”

쩌_______ 엉!

드디어 검이 뽑혀졌다.

“우훗!”

백의몽면인을 비롯한 사인은 감히 무시를 못한 채 경계를 취했다.

보검(寶劍),

그것은 가공할 광채를 발하며 중인을 압도했다.

삽시에 삼십여 장 밖까지 검광(劍光)으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으하하하핫! 죽어랏! 건곤멸절파(乾坤滅絶破)!”

피를 토하는 듯한 일갈을 터뜨리며 검황종은 일검(一劍)을 날렸다.

콰릉!

“이얍!”

사인도 지지않고 각기 이와 맞섰다.

콰릉!

엄청난 대격돌,

일인(一人)대 사인(四人),

그러나 보라!

피투성이가 되어 주르륵 밀려난 것은 사인쪽이었다.

“크으... 이렇게 강할 줄이야!”

“으으...”

그들은 저마다 경악으로 두눈을 부릅떴다.

검황종은 폭풍노도와 같이 다시 검세를 격출했다.

“천참만륙을 내리라! 굉폭혈살뢰(宏暴血煞雷)!”

콰르릉!

천중산을 온통 뒤덮는 검광(劍光)!

그것은 첫번 공격과는 엄청나게 배가된 기세였다.

“으으...!”

“허억!”

사인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상대가 아니다! 지존(至尊)에 버금가는,...)

그들은 단 한 명도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뻣뻣이 굳고 말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츠츠츠츳!

갑자기 가공할 파공성이 천지를 메웠다.

그것은 검황종의 등뒤에서 기척도 없이 순식간에 폭사된 것이었다.

미처 검황종의 태세를 갖출 사이도 없었다.

그는 전광처럼 검을 휘둘렀다.

콰릉!

순간 검황종이 휘두른 검고아은 그 순간 박살이 나고 말았다.

“크아_______ 악!”

검황종의 처절한 비명이 천중산을 메아리쳤다.

박살난 가슴을 안고 그는 십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타당!

그의 보검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

사인은 넋이 너긴 듯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잃고 있었다.

스스슥!

순간 그들 주위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 지존...!”

사인은 기척이 난 쪽을 향해 일제히 부복했다.

언제부터 였던가?

그들을 굽어볼 수 있는 높직한 곳에 서 있는 흐릿한 청영(靑影),

청영으로부터 지극히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보같은... 검황종이 비록 천하무적이라하나 네 명이 하나를 감당 못하다니...”

그 음성은 당당한 한편 천만근 무게를 지닌 듯 사인을 억눌렀다.

사인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청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검황종은 죽었다. 고금무적으로까지 접근하던 그를 쓰러뜨렸으니 그대들을 저지할 강자는 이제 중원에 없다.”

청영은 멀리 천중산역을 둘러보는 듯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엄숙히 덧붙였다.

“가랏! 이제 그대들의 뜻을 마음껏 펼쳐 보라.”

“지존!”

사인은 감격한 듯 청영을 우러러 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청영으로부터 떨어져 각기 다른 곳으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그들이 떠나자 청영은 신형을 돌려 스르르 격전의 현장으로 내려섰다.

이젠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황종이 뿌린 혈흔(血痕) 위에 주인을 잃은 고검이 떨어져 있을 뿐,

청영은 능공섭물로써 가볍게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그 고검을 빨아 들였다.

“검황종... 그대는 너무 강한 것이 잘못이었다.”

청영(靑影),

천하최강임을 단연코 입증시킨 인물,

분명 그는 검황종을 꺾었다.

음산하게 흘려내는 웃음,

“흐흐... 그대의 손녀만큼은 본인이 잘 기를 것이다.”

그것은 득의와 조소가 어울린 것이었다.

이어 그 역시 장내를 등졌다.

스스슥...

그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이제 무엇인가?

침묵과 고요,

사자(死者)의 망혼(亡魂)은 말조차 잊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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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존신보(天荒尊神譜)

 

 

 

 

 

<작품이력>

1983년 12월 전 6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第 一 章

  

               패륜의 일막

 

 

 

천학만봉(天壑萬峯)!

 

산봉(山峯)은 높아 봉두(峯頭)를 구름 속에 두었고,

골(壑)은 깊어 그 끝(低)을 운무(雲霧)로 장(帳)하다.

 

<천주산(天柱山)>

 

창천(蒼天)은 떠받치는 큰 기둥(柱)이라 하여 천주(天柱)란 이름이 붙었다.

그옛날 신(神)들이 인간(人間)과 함께 하던 시대.

 

<수신(水神) 공공(共工)이 화신(火神) 축융(祝融)과 큰 싸움을 하다.

싸움에 진 공공(共工)은 노화를 참지 못하여 불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받다.

이에 불주(不周)에 있던 천주(天柱)와 지추(地추)가 무너지다.

대지(大地)가 동남(東南)으로 기울다.

대홍수(大洪水)가 대지를 잠기우고, 맹수(猛獸) 흉금(兇禽)이 날뛰니 인간(人間)의 피해(被害) 입음이 지극하더라.

이를 본 고매신(高媒神) 여와(女와)께서 황하(黃河)의 오색석(五色石)을 내어 창천(蒼天)을 메우고...>

 

<보천신화(補天神話)>

 

여와(女와)와 공공(共工), 축융(祝融), 그리고 인간(人間)이 뒤엉켜 전해 내려오는 상고전설(上古傳說)이다.

보천신화(補天神話)의 장소가 된 곳.

 

바로 이곳 천주산(天柱山)!

 

예로부터 천주(天柱)가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되었거니와,

그 장려한 산세가 시인묵객(詩人墨客)을 미치게 하는 명산(名山)이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과 천야만야한 절곡이 그 끝을 보이지 않아,

인간(人間)의 발길을 거부하여 상고(上古)의 전설을 깊이 안으로 숨기고 있으니,

그 신비함이 상고(上古)와 현세(現世)에 다름이 없다.

천만세(千萬歲) 연륜이 하늘높이 치솟은 거목(巨木)들로 깊어가고,

세상을 등진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의 애착함이 더욱 각별해지기만 하는 곳.

 

<천주산(天柱山)>

 

X X X

 

가을도 깊어가는 어느 날.

천주산을 뒤덮은 원시림들의 무성한 잎들도 붉다 못해 적갈색으로 말라들고 있다.

 

정오 무렵,

스스스...!

서늘한 산풍이 임중(林中)을 스치고 지나갔다.

휘르르르...

안간힘을 쓰며 가지에 붙어 있던 갈색의 낙엽이 산풍(山風)에 휘말려 날아올랐다.

그와 함께,

...!

...!

산풍(山風)을 타고 흐르는 두 줄기 인영(人影)!

깊디깊은 이산중에 어인 인적(人蹟)인가?

귀신인가?

아니면, 하계(下界)에 내려온 천상선인(天上仙人)인가?

휘르르...!

스스스...!

백영(白影)과 청영(靑影)은 마치 무게도 없는 듯!

발 한번 땅에 대지 않고 수백장을 일촌지각(一寸之刻)에 날아갔다.

만일 그들이 인간이라면 너무도 놀라운 경공재간이 아닐 수 없다.

고금(古今)을 통틀어 그와 같은 경지의 경공술은 많지 않다.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다.

 

<어검비행(馭劍飛行)>

<축지성촌(縮地星寸)>

<무영비천술(無影飛天術)>

<승풍어기신보(乘風御氣神步)>

 

모두가 절진되어 현세에 이어지지 않는 비술,

하물며, 양인의 경공은 전설상의 어느 경공도 따르지 못할 지고무상한 것이니...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무엇때문에 이 깊은 천주(天柱)의 산중(山中)을 황행하는가?

휘_______ 잉!

일시에 양인의 신형이 뇌전같이 허공을 갈랐다.

휘르르르...

일순간 그들의 몸이 멈칫하는 듯하였다.

휘_______ 잉!

쏴______ 아!

강한 산풍이 불며 그들 양인의 발밑으로 군봉(群峯)들이 벌려져 보였다.

 

<천주신봉(天柱神峯)>

 

하늘의 무게를 받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척천준봉(刺天俊峯)!

천주(天柱)의 뭇 봉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도 웅장한 거봉이다.

...!

...!

천주신봉 위에 오연히 몸을 세운 양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천주(天柱)의 장관에 넋을 잃은 때문인가?

 

백의인(白衣人).

 

사십전후의 중년문사(中年文士).

마치 한 마리 백학(白鶴)을 대하는 듯 고고하고도 청수한 인물이다.

운치있게 머리를 묶은 문생건 밑으로 깊숙이 빛을 발ㅇ하는 봉목이 천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너무나도 고용하고 맑은 눈빛!

그를 보고 어찌 한 줄기 바람을 타고 천주신봉을 오른 절세고인이라 하겠는가?

 

청의인(靑衣人).

 

백의인과 몹시도 흡사한 외모를 지녔다.

아마도 형제지간이리라.

다만 청의인의 두 눈썹 끝에 불끈 치솟은 것이 백의인과 다를 뿐이었다.

아마도 그의 성품은 백의인과는 달리 강하고 야심이 큰 그런 것일 것이다.

문득 청의인의 두 눈이 싸늘한 한기를 발랬다.

찰나지간에 스쳐간 안광이지만 골수까지 스미는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지도(地圖)대로라면... 저쪽 축융봉(祝融峯) 뒤쪽이 그곳일 것이다.

홀연히 백의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천주산봉 우측에 솟은 험준한 산봉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축융봉(祝融峯)!

축융신(祝融神)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만큼 산봉의 형상은 거칠고도 험했다.

“형님!”

문득 청의인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양인은 형제지간이었다.

백의인이 청의인의 형이 되는 모양이다.

“천외(天外)에서 이곳까지 힘든 발길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

청의인의 물음에 백의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축융봉만을 바라보았다.

“본궁(本宮)의 절기들은 천년(千年) 세월을 지나오면서 갈고 닦여져 지금은 본궁을 세우신 조사님들의 유전절학(遺傳絶學)보다 십배이상 강해져 있습니다.”

청의인의 강한 어조에도 백의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청의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데 무엇 때문에 두분 조사님께 좌화하신 곳을 굳이 찾으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백의인이 손을 저어 청의인의 말문을 막았다.

“그만 두거라. 네 심정은 우형(遇兄)이 모르는바 아니다.”

청의인의 말을 막은 백의인은 발길을 축융봉쪽으로 옮겼다.

스스스...!

쉬______ 잉!

그의 신형은 다시 산풍에 실려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는 흡사 평지를 걷듯이 허공을 밟으며 곧장 축융봉을 향해 날아 내렸다.

휘_______ 잉!

검미를 꿈틀하던 청의인이 즉시 백의인이 뒤를 따랐다.

슈_______ 앙!

곧 청의인은 백의인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사람이 근본을 잊으면 금수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

청의인이 옆에 오자 백의인이 조용히 말했다.

“두분 조사께서 구대천마(九大天魔)를 무찌르고 본궁(本宮)을 여신 것이 어언 천 년 무공일도는 끝없는 발전을 이루어 이미 두 분의 절학도 구태의연한 것이 되었음을 내 어찌 모르랴? 설사 두분 조사님께서 그곳에 절기를 남겨놓으셨다 해도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백의인은 강렬한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나 후손된 도리로 두분 조사님께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신 곳을 알면서도 찾아뵙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청의인은 말없이 전면만을 바라보았다.

휘_______ 잉!

스스스...!

어느덧 양인은 축융봉의 정상 위를 날고 있었다.

축융봉의 뒤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단애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천하(天下)를 도모함보다 효(孝)를 행함이 백배 중함을 어찌 잊으랴? 그 때문에 아우님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야!”

휘르르르...!

스_______ 슥!

백의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인은 단애 위로 내려섰다.

백의인은 단애 위에 내려서자마자 단애 밑으로 내려다보았다.

고요하던 그의 얼굴은 엄숙하고도 장하게 변하였다.

“틀림없구나! 저 아래 두분 조사님의 유체가 안거해 계실 것이다.”

다소 흥분한 빛을 띄우며 백의인은 단애가로 바짝 다가섰다.

“...!”

순간 청의인의 눈실이 엄청난 살기(殺氣)를 띄우며 번뜩였다.

스_______ 윽!

그와 함께 그의 우측 소매에서 한자반 정도 길이의 묵검(墨劍)리 솟아났다.

청의인은 두눈을 부릅뜨며 등을 돌린 백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묵검(墨劍)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한 살기로 충혈된 그의 두눈에 한 가닥 갈등의 빛이 지나갔다.

천륜(天倫)을 거역하려는 자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인가?

그러나 그 갈등의 빛은 이내 사라졌다.

슈_______ 욱!

입술을 악다문 청의인은 형인 백의인의 등을 향하여 힘껏 묵검(墨劍)을 찔러내었다.

“헉!”

묵검(墨劍)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백의인의 두눈이 불신(不信)으로 치떠졌다.

(동생이 나를...)

순간적으로 자기 동생이 자신을 암습해옴을 깨달은 백의인은 아연하였다.

하지만 백의인은 피할 생각할 하지 않았다.

(어떤 보검으로도 나의 천허존신강기(天虛尊神강氣)를 뚫지 못한다.)

자신의 무공을 믿는 때문이다.

하지만 백의인은 자신의 믿음이 또다시 완벽하게 허물어짐을 절실히 느껴야만 했다.

푸_______ 욱!

파_______ 학!

“크______ 으!”

청의인은 찌른 묵검(墨劍)은 여지없이 백의인이 명문으로 박혔다.

피가 확 튀며 묵검의 끝이 백의인의 단전으로 빠져나왔다.

“크... 으... 네... 네가...!”

백의인은 두 손으로 단전으로 빠져나온 묵검을 움켜쥐며 치를 떨었다.

파_______ 앗!

“크흐흐흐흐흐...”

암습에 성공한 청의인은 기민하게 오 장 밖으로 물러났다.

백의인이 최후기력으로 반격해올까 두려워한 때문이다.

“으... 으...!”

백의인은 묵검(墨劍)에 관통당한 채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그의 백의는 삽시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백의인은 분노와 경악으로 물든 눈길로 청의인을 노려보았다.

“네... 네가... 감히...!”

백의인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의 전신은 터질 듯한 살기로 뒤덮였다.

(으... 음... 검에 관통당하고도 즉사하지 않다니...)

청의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네놈에게 무엇을 섭섭하게 하였느냐? 무엇이 부족하여 나를... 으...”

백의인은 노갈을 터뜨리다 휘청하였다.

그도 별 수 없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청의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형님은 너무 웅심(雄心)이 없었소. 본궁(本宮)은 천하최강(天下最强)의 문파요!”

청의인은 음산한 표정으로 백의인을 향해 다가왔다.

백의인은 어지러운 시선으로 다가오는 청의인을 노려보았다.

“흐흐... 본궁세력의 반만을 가지고도 천하를 손아귀에 넣어 영원히 무림종주로 군림 할 수 있단 말이외다.”

백의인이 이를 갈았다.

“네... 네놈은 천하무림 위에 군린해서는 아니된다는 조사님들의 유명을 잊었느냐?”

“흐흐... 그따위 고리타분한 유명은 필요없소. 저뿐 아니라 본궁 궁도들이 대부분이 그같은 조사유명을 탁탁치 않게 여기고 있소!”

“으으,... 아무리 그래도 네놈이 형인 나를 시해하고서야 본궁도들이 네놈의 뜻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으하하...”

청의인은 발길을 멈추며 득의하여 장소를 터뜨렸다.

“형님께서 그런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되오! 형님은 영원히 죽지 않을 터이니...”

백의인은 흠칫하였다.

그의 하체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흐흐... 이것을 보시면 알게 될 것이오.”

돌연 청의인의 얼굴 모습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으으...!”

그 모습을 본 백의인은 아연한 표정이 되어 치를 떨었다.

청의인!

그는 어느 사이엔가 백의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있었던 때문이다.

“으... 천... 천환변형술(天幻變形術)! 네... 놈이 천화변형술까지 익힌 것을 보니... 이 음모가 하루이틀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

청의인은 득의하여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핫하, 물론 그렇소. 십년 전 조사께서 남기신 묵령신검(墨靈神劍)을 조사동(祖師洞)에서 얻은 직후부터 준비한 일이었으니...”

“으... 그랬었군!”

백의인은 자신을 관통한 묵검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묵... 묵령신검(墨靈神劍)이기에 천허존신강기(天虛尊神강氣)를 관통할 수 있었지.”

청의인은 그런 백의인의 모습을 보고 음독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형님! 그만 저승으로 가셔야겠소이다.”

그의 쌍장에는 청색강기(靑色강氣)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으... 오냐! 네놈하나 죽일 힘은 남아 있다!”

백의인이 이를 악물고 쌍장을 쳐들었다.

위_______ 잉!

스스스...!

백의인의 전신에서 성스런 서기(瑞氣)가 노을같이 일어났다.

“으하핫! 잘 가시오!”

청의인이 대소하며 쌍장을 내쳤다.

카______ 카캉!

콰______ 릉!

새파란 강기(강氣)의 덩어리가 굉렬한 기세로 백의인을 휩쓸어갔다.

“오냐! 오너랏!”

백의인이 피를 토하며 쌍장을 휘둘렀다.

슈_______ 앙!

스스... 스...

백의인의 쌍장에서 일순 서기로운 노을이 크게 번졌다.

“크_______ 윽!”

그러나 백의인의 안색이 회색으로 변하는 순간 그 서기는 눈녹듯이 사그러 들었다.

콰_______ 앙!

그 순간 청의인의 청색강기가 모질게 백의인의 전신을 두들겼다.

“아_______ 악!”

푸_______ 학!

백의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튕겨졌다.

그리고는 피안개를 뿌리며 단애 아래고 떨어져 내렸다.

“흐흐흐...!”

청의인은 백의인을 떨어뜨린 단애로 내려다보며 음악하게 웃었다.

“흐흐... 형님 잘가시오. 형님의 모든 것은 이 동생이 이어받을 테니까.”

문득 그자의 얼굴에 음탕한 빛이 떠올랐다.

“흐흐... 물론 아름다우신 형수까지도...”

이어 그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 오년(五年)! 오 년(五年)이다. 천외기학(天外奇學)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후면... 천하가 나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청의인은 마치 미친듯이 웃어대었다.

휘르르,...

무심한 산풍은 천륜(天倫)을 거역한 참사가 벌어진 단애에서 혈향(血香)을 몰아 서쪽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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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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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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