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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2)

 

 

대안탑은 총 칠층이다.

각층의 높이는 삼장(三丈;9미터)이나 되어 천장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임청우는 난간을 잡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수십 번의 힘든 걸음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더 이상 계단이 없는 것을 느끼고서야 임청우는 자신이 이층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삼층에 이르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삼층에는 수많은 서가(書架)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다.

임청우는 불경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지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서가를 살펴보고 더듬어 보아도 단 한권의 책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불경들은 모두 어딘가로 옮겨지고 먼지 쌓인 서가들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임청우는 다시 사층으로 올라갔다.

사층이라고 해서 삼층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역시 텅 빈 서가들만이 근 백 여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휘유! 저 많은 서가에 불경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대체 몇 권이나 됐을까?”

임청우는 서가에 꽂혀있었을 불경들의 숫자를 생각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대안탑에 자기가 볼 것이라고는 빈 서가들뿐인가 싶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승려들이 불경 번역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방 벽에 하나씩 나있는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있다.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층을 지나고 육층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고, 마지막 칠층에 올라섰을 때는 밖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천장을 올려다 본 임청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안탑의 천장은 삼각형의 판자를 여러 장 엇갈리게 기대놓은 형태였다. 뾰족한 윗부분은 단단히 맞물려 있지만 아래쪽은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어서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비와 눈은 들어올 수 없지만 바람과 빛은 그대로 통과한다.

위로 올라올수록 밝아진 이유는 바로 그같은 천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임청우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칠층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대신 달이 떠올라 창백한 달빛이 지붕에 나있는 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달빛 덕분에 자세히 볼 수 있는 칠층의 구조는 다른 층들과 달랐다.

서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대신 네 좌의 불상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가운데에는 임청우의 키만큼 큰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香爐)가 세 발로 버티고 서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왼손을 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고,

남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인 비로자나여래(毘盧蔗那如來)이며,

북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나누어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였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향로의 아랫부분에는 황동을 입혀서 만든 연화(蓮花)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연꽃무늬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대안탑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였다.

임청우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현장법사께서 쓰셨던 의자라도 구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불상 넷과 향로 하나가 전부라니...”

실망하자 허기가 더욱 심하게 밀려왔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 임청우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 천장에 난 틈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비로자나여래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러자 비로자나여래의 백호(白毫:불상의 미간에 박혀있는 보석)가 빛을 발하며 향로의 한 부분을 비추었다.

헌데 백호를 통해 달빛이 반사된 향로 표면에는 물결이 일렁이듯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어!”

임청우는 그 신비한 광경에 벌떡 일어섰다.

 

<관표(觀表)>

 

향로로 다가가 살펴보니 단 두자인 글씨는 이러했다.

“관표? 겉을 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임청우는 나직하게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비로자나불의 백호에서 비친 빛이 글씨를 만들었다면 다른 불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임청우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번에는 달빛이 아미타여래를 비출 것이다. 그때 무슨 글씨가 나타나는지 봐야겠다. 아마 관표에 이어지는 글일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차서 달이 움직여 아미타여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달빛이 마침내 아미타여래를 비추었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청동향로를 응시했다.

달빛은 아미타여래의 백호에 반사되어 청동향로에 비춰졌다.

그리고 임청우의 짐작대로 두자의 글씨가 물결이 일렁이듯이 나타났다.

 

<망피(望皮)>

 

나타난 글자는 이러했다.

임청우는 먼저 나타났던 <관표>와 함께 읽어 보았다.

“관표망피(觀表望皮)?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고 적어놓은 듯한 글이로군.”

임청우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서상 달빛이 다음으로 비출 대상은 약사여래였다.

임청우는 끈기를 갖고 달빛이 약사여래를 비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넘어가도 달빛은 약사여래를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달빛은 약사여래뿐 아니라 석가여래도 비껴갔다.

“계절에 따라서 달이 움직이는 길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지금은 약사여래와 석가여래에게 달빛이 닿지 않는 때인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임청우는 실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임청우는 청동향로의 세 다리 중 하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쓸 대상이 없어지자 허기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관표망피... 관표망피...)

임청우는 허기를 잊을 목적으로 향로에 나타났던 글씨들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청우의 머릿속으로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대구(對句)는 <속을 보는 것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가 아니겠는가?)

임청우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알맹이를 보려면 속을 보라는 뜻이다!)

임청우는 흥분하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보라는 속이 불상의 속은 아닐 테고... 이 향로의 속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노자(老子)도 좋은 책은 명산(名山)에 수장(收藏)한다고 했듯이 옛사람들은 책을 숨기기 좋아했다. 어쩌면 현장법사께서는 이 향로 속에 가장 귀중한 책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없는 힘을 쥐어짜 자기 키만한 향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향로의 둥그런 배 부분의 직경은 여섯 자가 넘지만 입구는 상당히 좁아서 직경이 채 두자가 안된다.

향로 입구에 올라앉은 임청우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둥근 항아리 형태인 향로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은 거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임청우는 향로의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이 향로는 너무 커서 향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둡고 깊은 향로 속은 마치 어머니 뱃속 같다.

위에서 들여다보아서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향로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임청우는 몸을 일으켰다.

향로가 깊긴 하지만 자기키보다는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휙!

임청우는 주저 없이 향로 속으로 뛰어 내렸다.

헌데 그는 향로의 입구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캉!

왼손에 들고 있던 우협 장백승의 청강검이 향로 주둥이에 가로로 걸려버렸다.

“억!”

뛰어내린 기세와 체중에 의해 홱 채여지면서 왼팔이 어깨로부터 쑥 빠져버렸다.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둥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어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바보같이...!”

향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를 때였다.

빡!

향로 주둥이에 걸려있던 청강검이 떨어지면서 임청우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했다.

백회혈은 인체의 급소중의 급소다.

또한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청강검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악!”

백회혈에 불똥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임청우는 향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웅크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 배속에 든 태아와도 같아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으으으! 정수리리가 뚫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임청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엇갈린 구조의 지붕 틈 사이로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보인다.

(아직 밤이로구나.)

임청우는 뜨뜨 미지근한 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 밤인지 아니면 하루나, 또는 그 이상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 올리려던 왼팔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다시 졸도할 뻔 했다.

다쳤던 팔이 부어올라 소매가 팽팽해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한 여름이다.

여름의 융성한 화기(火氣)는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것은 겨울이 한기(寒氣)가 융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겨울이 추울수록 불이 자주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의 오묘한 법리라고 할 수 있다.

고열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거나 죽게 될 것이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농산의 깊은 산중에서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의서(醫書)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덕분에 의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지간한 병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

(침이라도 있으면 꽂아보련만...)

임청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겐 흔한 쇠침 하나도 없었다.

열을 내릴 수단이나 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이 계절에 얼음을 구하는 것은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는 황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찬물로 몸을 식히기엔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거늘 몸을 식힐 물이야 말해 무엇 하랴?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겨우 향로 속에서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몸이 되는구나.)

임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있어서 나 임청우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을 알기나 할까?)

임청우는 한탄하면서 향로의 벽에 기댔다.

신열(身熱)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불현 듯 머릿속으로 비련곡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쇠 부채로 뿜어낸 한기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었다.

하지만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리자 정신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청우는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고열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점차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방향과 시간조차 없는 별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멀리서 북두칠성이 그 국자같은 오묘한 형상을 뽐내고 있었다.

북극성 쪽으로 국자의 손잡이 끝을 향한 채 천천히 돌아가는 북두칠성을 보고 있자니 흐려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련곡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한 차례 유영하자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은 회복되었지만 육신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은 더 뜨거워져 불덩이 같고 어깨에서 빠진 왼쪽 팔에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로구나.)

임청우는 허탈해졌다.

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살해위협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 깊은 향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임청우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에 맞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조용하게 순응하고 싶었다.

“...?”

헌데 늘어뜨린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 감각은 마치 주물로 부어 놓은 활자(活字)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정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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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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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첫 번째 실전

 

 

 

이곳은 주점에서 오리 쯤 떨어진 숲속의 공터다.

“...”

진상파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숙인 채 공터 중앙에 서있었다.

진상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는 섬전초가 앉아서 몸통 길이만한 탐스러운 꼬리를 앞발과 혀로 다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도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진상파를 십여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론 그자들은 철위사대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와 그의 수하 철위사들이었다.

진상파는 주점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 일행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 일행을 안내한 놈은 한쪽에 앉아서 얄밉게 털을 고르고 있는 섬전초다.

무공 방면에서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인지라 행적이 노출된 이상 섬전초와 사우 일행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진소저! 아무쪼록 우리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은 터라 끝내 동행을 거부하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사우가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심기는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무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가서 당신들의 소성주에게 전하세요. 내가 왜 제왕성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날 밤 일신재에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군.)

(소성주님이 내총관과 내연관계인 걸 알아버렸구나.)

사우와 그의 수하들은 진상파가 혼례식 전날에 갑자기 달아난 이유를 깨닫고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그 분부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우리가 받은 명은 단 하나! 소저를 제왕성으로 모셔오라는 것뿐이었소이다.”

사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상파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개에 불과한 사우와 말을 섞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아는 때문이다.

“더 시간 끌 거 없다. 진소저를 성으로 모시고 간다.”

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예 대주님!”

“결례하겠소이다 진소저.”

그 즉시 두 명의 철위사가 좌우에서 진상파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인가?)

철위사들이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것을 보며 진상파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왕성으로 끌려가면 모용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

천박하고 음탕한 모용준과 부부가 될 경우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황금성의 재산을 노린 탕부탕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진상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치떠졌다.

끼이...

탐스런 꼬리를 앞발로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그분 소저께서 귀하들과 함께 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소?”

공터로 들어서며 말하는 인물은 강유였다. 사우 일행의 뒤를 밟은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저놈은...”

“주점에서 대주님에게 죽을 뻔했던 애송이 아닌가?”

강유를 알아본 철위사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만 사우의 얼굴은 불쾌하게 찡그려 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또...)

숲에서 나와 공터로 들어서는 강유를 본 진상파는 반갑다기보다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주점 주인을 혼내는 것과 사우 일행을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진상파도 제왕성의 위사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강유라는 이름의 청년은 의협심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나섰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일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그것도 여럿이 아녀자 하나를 핍박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공터 외곽에 멈춰선 강유는 사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거 참...”

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 없는 네놈의 피를 본 부담도 있고 해서 좋은 말로 하마. 내일 해를 다시 보고 싶다면 모른 척 하고 갈 길 가라.”

사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했다.

강유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변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스릉!

진상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아버지 강조가 마련해준 그 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지금까지 애써 무공을 수련한 의미가 없소. 끝내 그 소저를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할 거요.”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강유의 진지한 말을 들은 사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평소의 사우라면 당장 살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성의 안주인이 될 진상파가 보고 있는 자리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주님! 능력도 안되면서 객기를 부리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내려주겠습니다.”

사우가 난감해할 때 철위사중 한명이 칼을 뽑으며 나섰다. 장흔(張欣)이라는 이름의 그자는 사우가 대동한 철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다.

“교훈만 내려주고 죽이지는 마라. 진소저가 보는 앞이니...”

사우는 장흔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주님 말씀 들었지? 네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우의 허락을 받은 장흔은 칼끝을 이리저리 돌려서 강유를 희롱하며 다가섰다.

“같은 말을 귀하에게 해드리겠소.”

강유는 냉소하며 마주 다가갔다.

“나 역시 저분 소저가 보는 앞이라 귀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피를 보긴 하겠지만...”

“이 새끼가...”

강유의 비아냥을 들은 장흔의 얼굴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부악! 쩍!

다음 순간 장흔은 강유를 향해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칼을 쓰는 속도는 전광석화같고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장흔이 구사하는 이 도법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가 뒤섞여있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실로 까다롭다.

비록 제왕성 사대무력집단의 최하위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철위사 개개인이 일류고수라는 무림의 평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스슥!

하지만 강유는 산보하듯 걸어서 장흔의 칼질을 피해내었다. 소요신군을 칠절의 첫째로 만들어준 소요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 보법!)

한가로운 듯이 보이지만 장흔의 공격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강유의 보법을 보며 사우의 눈이 번뜩였다.

철위사대의 대주답게 사우는 무림에서 사대보법중 하나로 불리는 소요보법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아!”

치칫! 쉬학!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악에 바친 장흔의 공격이 더 빠르고 신랄해졌다.

(명불허전... 제왕성 위사들중 최하등급인 철위사임에도 타복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장흔의 격렬해진 공격을 피하면서 강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서걱!

빨라진 그자의 칼끝이 스치면서 강유의 옷이 여기저기 베어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보자!”

칼끝이 강유의 몸에 닿기 시작하자 장흔은 기세가 올라 더욱 사납게 칼질을 했다.

(소요보법으로도 피하는 게 한계가 있다.)

캉!

어쩔 수 없이 강유는 검을 휘둘러 장흔의 칼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장흔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쩍!

강유는 장흔의 칼질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며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런 강유의 뒤로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는 듯한 형상이 떠올랐다.

(붕정검법까지...!)

강유가 구사하는 검법을 알아본 사우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카캉! 빠카앙!

찌르는 강유의 검과 그어대는 장흔의 칼질이 엇갈리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큭!”

장흔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며 휘청거렸다. 강유가 찌른 검이 그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스팟!

일격을 성공한 강유는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가슴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한 뼘 쯤 갈라져 있으며 피부에도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니다. 장형쪽의 상처가 비교할 수 없이 깊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봐도 승패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옅은 자상을 입은 반면 장흔은 어깨가 앞뒤로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어 삽시에 상체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철위사를 상대해서 이겼네.)

강유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단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 새끼...”

장흔은 관통상을 입은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왼쪽 어깨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창!

또 한명의 철위사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그만 둬라.”

그자가 강유를 공격하려는데 사우가 저지했다.

“대주님! 하지만...”

“최윤, 네가 나서봤자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몇 명이 협공 하지 않는 한 쓸데없이 피만 볼 뿐이니 물러서도록 하라.”

“예...”

사우가 나서자 최윤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철위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섰다.

“네놈, 소요신군 강조와 무슨 관계냐?”

사우는 수하들 대신 강유와 마주 서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강유는 내심 움찔하며 부인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봐야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뺌해봤자 소용없다. 방금 전 네놈이 사용한 무공이 소요신군의 절기인 소요보법과 붕정검법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강유는 노려보았다.

“소요보법과 붕정검법!”

“그건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독문절기 아닌가?”

다른 철위사들도 비로소 장흔이 패한 이유를 깨닫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일이 커져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집안이 제왕성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강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기왕에 정체가 들통 난 마당에 발뺌을 할 수도 없다.

“과연 제왕성 철위사대 대주의 안목은 비범하구려. 짐작하시는 대로 소요신군이란 분은 본인의 가친이시오.”

“소요신군의 아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강유의 시인에 철위사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칠절중 한명의 아들이라면 경솔하게 상대할 수는 없다.

“...”

강유의 정체를 안 진상파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소요신군 강조가 제법 빼어난 아들을 두었군.”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비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네놈이 오늘 우리 제왕성에 죄를 지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대주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사우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대주님께서 파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계시거늘...”

철위사들은 분노하여 강유를 노려보았다.

사우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만일 저분 소저와 함께라면 떠날 수도 있겠소이다만...”

강유는 진상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본좌로 하여금 소요신군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드는구나.”

스릉!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철위사대 대주가 되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핍박했다는 뒷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십초를 공격할 기회를 주겠다. 물론 본좌는 오직 방어만 할 것이고...”

치직!

사우가 검을 한 바퀴 휘두르자 그자를 중심으로 직경 다섯 자 쯤의 원이 그려졌다.

(검기(劍氣)...)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우의 검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와 바닥에 원을 그린 것을 알아본 때문이다.

검기라 불리는 그 기운은 직접 닿지 않아도 표적을 살상하는 힘을 지녔다.

당연히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검법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냉혈철심 사우가 그중 한명인 것이다.

강유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십초 안에 본좌로 하여금 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거나 네놈의 검이 옷자락에라도 닿으면 진소저를 데리고 떠나도 좋다.”

검기로 바닥에 원을 그린 사우가 비웃는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강유는 사우가 자신은 얕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우는 자신의 아버지 소요신군에 필적하는 고수다.

“지금 그 말 잊지 마시오.”

슈학!

강유는 일갈과 함께 벼락같이 검을 찔러갔다. 그의 이 일초는 아주 빠르고 강력해서 철위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제일초!”

캉!

철위사들의 걱정과 달리 사우는 강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캉! 카캉!

강유가 붕정검법으로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우는 강유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냉혈철심이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저 모질고 독한 성격 때문에 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에서도 그의 평정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반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강유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사우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했다.

사우가 철위사대의 대주가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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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劍)

 

 

"그만 갑시다. 내일 또 찾아보기로 하고..."

어느 정도 땀이 식자 백남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녹지 옆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계곡이 넓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도 서쪽 끝까지 오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백남빈의 신발이 석탁 위에 놓여져 세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미루가 손가락을 검으로 살짝 베어서 피를 몇 방울 신발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신발속의 녹색물이 순식간에 유백색(乳白色)으로 변하며 짙은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드세요."

살짝 교태가 배어 있는 강미루의 음성은 듣기가 좋았다.

백남빈이 신발을 받으며 농을 걸었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이대로 잘 배우고 연습하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겠어."

"부끄럽게 하지 마셔요. 누가 절... 음... 절 아내로..."

칭찬은 들었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부끄러워 이을 수가 없었다.

“미워요.”

민망해진 강미루는 눈을 흘기며 백남빈의 손등을 꼬집었다.

백남빈이 큰소리로 글을 읽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하다고 마음대로 꼬집는 거요?"

강미루가 그제야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내고는 백남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무그릇이라도 하나 깎아야겠어요."

"신발로 물을 마시자니 내 발 냄새가 나서?"

"아니라구요!"

백남빈이 들었던 신발을 놓으며 강미루에게 묻자 그녀는 백남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강미루와 백남빈이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적당한 애정행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평곡에 갇히고 사흘째 되던 날 녹지의 신비를 일부나마 풀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녹지의 물은 침에 닿으면 독이 되고 피에 닿으면 아주 향기로운 물이 되었다.

어떤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유빛으로 변한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내외공이 함께 증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사흘 정도 마셨을 뿐인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전보다 배 이상 증진되어 있었다.

 

"잘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줄 테니..."

백남빈이 강미루를 보면서 말했다.

푸스스!

계란만한 돌을 손에 쥔 백남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돌은 소리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돌을 부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을 소유한 자라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남빈처럼 새알을 쥐듯이 부드럽게 잡아서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미루도 배시시 웃으면서 역시 계란만한 돌 두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양손 손바닥으로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가루가 팥고물처럼 떨어지고 강미루의 손바닥에는 이내 콩알같이 작고 매끄럽게 변한 돌멩이 두개만 남게 되었다.

강미루가"훅" 하고 입김을 불자 그 작은 돌들은 휙 하니 날아가서 녹지에 퐁당 빠져 버렸다.

그걸 본 백남빈이 손뼉을 쳐서 찬사를 보낸 후 말했다.

"이 녹지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봐야겠소."

 

풍덩!

백남빈은 짧은 속바지만 입고 뜨거운 녹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지의 물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아주 짙어서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백남빈은 조금씩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물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밖에서 강미루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나오지 않자 불안해졌다.

"조심하셔요!"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의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결국 그녀도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수하던 백남빈은 강미루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헤엄쳐 올라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강미루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푸우!”

“하아!”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마주잡고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쉬었다.

녹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서 물을 털어 주었다.

"녹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같소. 그 외에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당신은 걱정말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숨을 고른 후 강미루를 안심시킨 백남빈은 다시 녹지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강미루는 그런 백남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내같이 백남빈을 염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남빈은 백근 정도 되는 바위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의 무게로 인해서 그의 몸은 처음보다 비교도 안되게 빨리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정말 깊고 뜨거운 곳이구나. 내 피부가 영약으로 변한 녹지의 물을 마시고 강인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미 종이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백남빈은 엄청난 수압에 귀가 멍멍해졌다.

두 눈은 뜨거운 온천수에 의해 눈알이 익어버릴 것 같아서 질끈 감고 있었다.

(제법 큰 바위를 안았는데도 부력이 이토록 세니 바위만 놓으면 그대로 물위로 솟구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녹지의 바닥이었다.

(어떻게 연못의 바닥이 이렇게 매끄럽고 평평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서쪽 절벽에 창평곡이라고 새겨놓은 사람이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세적인 능력을 지닌 기인이 이 창평곡에 살았었다는 사실이다.)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든 백남빈은 바위를 안은 채 발로 더듬더듬 바닥을 밟으며 돌았다.

매끈한 바닥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서쪽 절벽에 새겨진 창평곡이란 글 이외에 처음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 사이에 숨이 턱까지 찼다.

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긴 싫어서 꾹 참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했다.

깊은 물속에서는 바위도 아주 가벼워서 마치 솜덩이 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몸도 한걸음 한걸음에 수초처럼 일렁거리며 나아갔다.

잠시 조사해 본 백남빈은 녹지가 마치 우물같은 형태임을 확인했다. 연못가에서 중심부를 향해 몇 장 들어간 쪽부터 거의 직각의 벽을 이루며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구조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우물 형태를 어떤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수압과 뜨거운 열기를 견디면서...

그런데 그때까지 반반하던 바닥에 뭔가 뭉툭한 것이 백남빈의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손으로 쓰다듬어본 백남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검(劍)! 장검이로구나.)

백남빈의 발에 밟힌 것은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의 길쭉한 장검이었다.

백남빈은 그때까지 안고 있던 바위를 놓고 대신 장검을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화악!

뜨거운 물이 귓가로 스쳐지나가며 화끈거렸다.

 

“푸학!”

삽시에 수면으로 올라온 백남빈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연못가로 헤엄쳐갔다.

"괜찮아요?"

녹지 밖에서 가슴 조리고 있던 강미루가 뛰어와 백남빈이 내미는 장검을 받았다.

후딱 물 밖으로 뛰쳐나온 백남빈의 피부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이 연못은 확실히 이상하오! 바닥에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게 사람이 일부러 그래놓은 것 같소."

백남빈이 머리를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았던 전대기인의 흔적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강미루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 쳤다.

"물속에 이 검만 있던가요? 혹시 창은 없었어요?"

강미루는 백남빈에게서 받아든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호가 홍의창인 만큼 그녀의 무기는 창이었다.

"욕심 많은 아가씨로구만. 창 같은 건 없었어."

“욕심쟁이라 미안하네요.”

백남빈의 우스개소리에 강미루가 샐쭉 토라져버렸다.

"내가 다음에 좋은 창을 하나 구해주겠소."

미안해진 백남빈은 강미루를 달랬다.

"그런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강미루는 검을 백남빈의 손에 들려주었다.

토라진 척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작은 말에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백남빈의 손에 들린 검의 청동색 검집에는 <사자(獅子)>라는 검명(劍名)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검명은 지금은 쓰지 않는 상고시대의 고전체(古篆體)여서 처음에는 장식을 위한 문양인 줄 알았다.

“당신 별호에 잘 어울리는 검이네요.”

백남빈과 함께 살펴보다가 사자라는 검명을 판독해낸 강미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호가 검사자(劍獅子)인 백남빈이 연못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검의 이름이 사자검(獅子劍)이라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재질이 청동은 아닌 것같은 데... 무슨 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묵직할까?"

백남빈도 사자검을 두 손으로 든 채 살펴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사자검은 보통의 검보다 폭과 두께가 한 배 반쯤 된다.

하지만 무게는 같은 크기의 검보다 서너 배 이상 나가서 아주 묵직하다.

스르르릉!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을 잡아서 비틀어 당기자 역시 짙은 녹색인 검신(劍身)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비록 번쩍이지는 않지만 녹옥(綠玉)같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자검의 녹색 검신을 본 백남빈과 강미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보검이구나.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검이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자검의 검신은 날이 서있지도 않고 예기를 흘리지도 않으며 맑고 담백하다.

검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지만 사자검은 누가 봐도 보물이라 할 만했다.

검신과 검병은 하나로 돼 있었고 검집은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겁긴 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백남빈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보검을 얻게 된 백남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보검이 손에 드니 절로 춤이 나오는구나. 백만 오랑캐도 두렵지 않고 십만 악마도 두렵지 않도다. 검이 이르는 곳에 악도의 피가 튀고 웃음이 이르는 곳에 만마가 도망치는도다."

백남빈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자검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찌르고 하였다.

강미루도 덩달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도(天道)를 이 사자의 검으로 밝히리라!”

백남빈은 사자검을 쭉 뻗어 하늘을 가르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순간 사자검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뻗혀나갔지만 흐릿하고 또 순간적인 일이라 백남빈은 물론이고 강미루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자신이 사자검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하늘 높이 뻗어가게 한 것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의 낭낭한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창평곡을 맴돌았다.

 

***

 

(검기(劍氣)...)

신가람은 눈을 빛내며 멀리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은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을 뚫고 들어가며 진땀을 빼던 중 잠시 숨을 돌리려 하늘을 보았었다.

그런 신가람의 눈에 멀리 앞쪽 몇 개인가의 산봉우리 너머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들어왔다.

찰라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신가람은 그 기운이 검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가람 자신이 평생 검법을 수련해왔기에 그 검기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저곳에서 방금 전 신검(神劍)이 세상에 나왔다.)

신가람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검법을 수련하는 자가 오매불망하는 것은 훌륭한 검을 얻는 것이다.

상서로운 검기로 하늘을 찌른 신검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가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검을 얻은 자와 말괄량이 처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다.

(장인 어른께 면목이 서려면 한시라도 서둘러야겠구나.)

신가람은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매망량의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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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괴수대전

 

 

한 차례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멎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호!”

쐐애액!

비가 온 후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천야만야한 절벽을 평지처럼 차고 올라온 그 인영은 곤륜의 험봉들 위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과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소년!

물론 그는 이검한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그의 잘 생기고 호쾌한 인상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검한은 장춘곡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높고 험한 곤륜산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이 가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이검한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사저인 냉약빙과 사부인 고독마야가 극진히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이검한의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달했으나 정작 이검한의 마음은 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독마야를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인 이검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는 것이었다. 곤륜산의 장대한 산줄기를 따라 질풍처럼 달리다보면 어느덧 가슴 저미던 외로움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검한은 스쳐지나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산과 함께 세상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곤륜산의 곳곳을 달려본 이검한이지만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검한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고 다시 고독애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어억!

어디선가 한소리 괴성이 들려왔다.

(새의 울음소리인데...!)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방금 들린 날카로운 괴성은 어떤 거조(巨鳥)가 지른 것임이 분명했다.

(가 보자!)

스파앗!

다음 순간 이검한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

 

크아아! 키아아악!

나무 한 그루 나있지 않은 황량한 계곡 끝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무대로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거대한 독수리와 기괴한 모습의 구렁이였다.

두 괴물 중 독수리는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육장(五丈;18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철익신응(鐵翼神鷹)!

 

곤륜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제왕이다.

철익신응은 천 년 이전부터 곤륜산 일대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왔다.

즉,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이 하늘의 제왕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딱히 없다.

강철같은 발톱은 바위를 두부처럼 으깰 수 있으며 강력한 날개의 힘은 코끼리를 낚아 채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곤륜산맥의 제왕으로 인정받아온 철익신응이건만 오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적과 조우한 상태였다.

철익신응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무기나 용이라고 해야 어울릴 거대한 구렁이였다.

몸통의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대망(大蟒;큰 구렁이. 이무기)인데 배 부분에는 체구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여섯 개의 발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수련만 더 쌓으면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는 이 괴물의 몸뚱이는 강철인 듯 번들거리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적린화룡(赤鱗火龍)!

 

용이 아님에도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적린화룡은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화맥(火脈)의 열기를 흡수하며 승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화맥의 화기를 흡수해온 덕분에 적린화룡의 몸 속에는 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엄청난 열이 고여 있다.

그 때문에 적린화룡이 내뿜는 숨결에 섞여있는 열독(熱毒)은 무쇠를 얼음처럼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무시무시한 열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적린화룡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해서 도검이 불침한다. 화맥을 찾아 땅 속을 누비고 다니기 위해 무엇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강인한 비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적린화룡은 불사화망(不死火蟒)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아앙!

적린화룡은 섬뜩한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에 떠있는 철익신응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쩌어엉! 촤아아아!

그놈이 커다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수십 장까지 확 내뻗쳤다. 적린화룡이 몸속에 품고 있는 열독이 숨결을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무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그 열독에 정통으로 휩쓸린다면 제 아무리 곤륜산맥의 제왕이라는 철익신응이라 해도 숯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카아악! 화악!

도리 없이 철익신응은 다급히 날개 짓을 해서 적린화룡이 뿜어내는 열독을 피해냈다.

하지만 철익신응의 깃털은 이미 상당 분량이 열독에 스쳐 시커멓게 그슬려져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곤륜산의 하늘을 지배해온 제왕답지 않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철익신응은 호시탐탐 적린화룡을 노리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괴물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계곡 한쪽의 절벽 위에 멈춰 선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검한은 냉약빙이 구해다 준 고서들을 통해 적린화룡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곤륜산맥의 뭇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익신응이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영물이 이검한 자신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를 일별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이 불리한 싸움을 하면서도 이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검한이 서있는 곳과 맞은 편인 절벽 가운데에는 거대한 새둥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초가집만한 그 둥지 안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송아지만한 그 새끼 독수리는 바로 철익신응의 새끼였다.

철익신응이 수백 년 만에 겨우 얻은 그 새끼를 적린화룡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 화맥의 화기를 흡수하며 살아온 적린화룡이지만 가끔은 배를 채운 먹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린화룡은 철익신응의 새끼를 노리고 둥지로 접근해 온 것이고 철익신응은 필사적으로 그놈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적린화룡 쪽이 유리했다.

카아아! 화아악!

적린화룡은 연신 지독한 열독을 방사하여 철익신응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적린화룡은 둥지에 이르러 철익신응의 새끼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나쁜 놈이로군!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남의 귀한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다니...!)

상황을 파악한 이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약육강식이 자연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새끼를 노리는 적린화룡의 만행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철익신응을 도와주자!)

이검한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검불침의 괴물인 적린화룡이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적린화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검한은 장내를 돌아보며 염두를 굴렸다.

(일단 적린화룡의 주의를 분산시켜보자. 그럼 철익신응이 그 틈에 공격을 해서 적린화룡은 물리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검한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쐐액!

직후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장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검한은 질풍같이 적린화룡의 옆을 스치며 그놈의 머리통을 노리고 돌을 던졌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이검한이 던진 돌이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비록 그 일격이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적린화룡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카아아아! 화악!

돌 조각에 머리를 맞자 분노한 적린화룡은 자신의 옆을 질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검한을 향해 열독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에 휩쓸릴 이검한이 아니었다.

“하하! 여기다 이 바보야!”

쐐액! 텅!

이검한은 유령같이 휘돌며 재차 돌을 던져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크아아앙!

두 번이나 연달아 이검한에게 우롱당한 적린화룡은 사나운 괴성을 토하며 발광했다.

마침내 그놈은 공격 대상을 철익신응에서 이검한으로 바꾸었다.

촤촤촤! 쏴아아아!

적린화룡은 거구를 끌고 이검한을 뒤쫓으며 시뻘건 열독을 연신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철익신응은 이내 이검한이 자신을 도와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철익신응은 이검한을 쫓아가느라 주의가 분산된 적린화룡은 향해 벼락같이 내리 꽃혔다.

적린화룡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콰드드득!

철익신응의 강철같은 발톱이 그대로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카오오오!

바위도 간단히 으깨버리는 철익신응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찍혀 두 눈이 으깨져버린 적린화룡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저항해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키아아악! 쏴아아아!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쥔 철익신응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머리통을 잡힌 이상 적린화룡의 열독도 더 이상 철익신응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거대한 몸뚱이를 움켜쥐고 수백 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발톱을 풀어 버렸다.

쾅!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린화룡의 거구는 계곡의 바닥에 팽개쳐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적린화룡의 몸뚱이가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우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고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수백 장 높이에서 떨어진 적린화룡은 벌린 입으로 내장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제 아무리 그놈의 몸뚱이가 도검불침이라 해도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진 충격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껍질이 질기고 단단하여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적린화룡의 내장과 척추는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휴우, 정말 끔찍한 놈이로군!”

스스스!

이검한은 숨이 끊어진 적린화룡의 시체 옆으로 내려서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 널부러진 적린화룡의 몸뚱이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했다. 그 때문에 계곡 바닥에 작은 둔덕이 하나 새로 생겨난 듯이 보였다.

(저것은...!)

헌데 적린화룡의 시체를 살피던 이검한은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츠츠츠!

내장과 피를 토하고 죽은 적린화룡의 아가리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불그스름한 화광(火光)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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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1)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우는 검댕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비련곡을 빠져나왔다.

검댕을 묻혀 시꺼멓게 변한 임청우의 얼굴에서는 볼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만 눈에 띨 뿐이었다.

사실 얼굴에 검댕을 바르는 건 임청우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임청우의 얼굴만 보면 화를 내고 죽이려 들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이래 임청우는 수시로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잘 씻지 않았다. 검댕을 묻히면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목욕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정성껏 씻은 기억은 거의 없는 임청우였다.

물론 얼굴에 검댕을 바른다고 해서 어머니의 학대가 줄어들지는 않았었다.

 

농산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임청우인지라 가장 은밀한 길만 골라서 빠져 나왔다.

그 덕분인지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만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산을 벗어난 임청우는 서안(西安)을 목적지로 삼았다.

농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가 서안이다.

그 서안에 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농산 밖의 세상은 벌써 몇 달 째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청우는 관도(官途)로 서안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져 음식은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기갈이 심할 때에는 황하의 탁한 물을 들이키고 배가 고플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서 생긴 웅덩이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었다.

무작정 황하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서 보름이 지났을 때 중원 제일의 고도(古都)인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서안은 한(漢)대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렸고 당(唐)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전설이 살아 숨 쉬었던 곳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중국을 일통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향한 집념이 피어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뭄의 고통은 서안 곳곳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버텨온 고도 서안은 그 역사의 힘으로 자연의 시련마저 견디는 듯했다.

여전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

임청우는 옛 건물들로 가득 찬 서안의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적 드문 산속 깊은 곳에 살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처에 나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한 구경거리들이다.

물론 서안은 임청우에 대해서 결코 감탄하지 않았다. 그의 몰골은 거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골뿐 아니라 형편도 거지보다 못했다.

거지는 구걸이라도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임청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구걸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거지 역시 직업인만큼 강한 직업의식이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나 바가지 들고 나서서 될 수 있는 게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다.

민심이 흉흉한 때인 만큼 도둑질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임청우는 그같은 경우를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이처럼 임청우의 배는 하루에 한번 채워지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척포는 언제나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게다가 놈의 식성은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놈은 어디서든지 아침이 되면 호리병 속에서 기어 나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면 불과 일각도 되기 전에 임청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몰려와 구더기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척포란 놈은 오만하게 황금빛 뿔이 달린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뱀들 사이로 들어간다.

몰려온 뱀들은 가지각색의 기기묘묘한 모양과 색깔을 갖춘 독사들이었지만 척포가 가까이 가면 모두 <날 잡아 잡슈!> 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꼼짝도 않는다.

척포는 그 뱀들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길이가 같은 놈을 물색한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수백 마리의 뱀을 걸러 보낸 후 자기와 길이가 꼭 같고 굵기도 꼭 같은 독사를 발견하면 한 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린 후에 아가리를 쫙 벌려 독사의 머리부터 삼켜버린다.

임청우는 몰려왔던 뱀들이 모두 음식으로 보였지만 그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한두 마리라면 잡아서 배를 채우련만, 수백 수천 마리가 되고 보니 한 마리 먹겠다고 덤비다간 되려 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물과 물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에서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농산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엔 눈을 빨갛게 하고 있지도 않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속에 몰입하여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

 

일옹청풍일지를 펼쳐들고 중얼중얼 읽으면서 임청우는 역사의 현장인 자은사(慈恩寺)로 갔다.

그저께 저녁부터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한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어서 꼬르륵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도 서안에 왔으니 자은사와 대안탑(大雁塔)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우협 장백승으로부터 받은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청강검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자은사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씩씩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玄獎)은 직접 천축으로 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범어로 씌여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있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이대(二大) 역성(譯聖)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구마라습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백마사(白馬寺)인 반면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바로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이었다.

높이가 무려 이십일장(二十一丈;63미터)에 달하는 대안탑은 밑변이 정방형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각뿔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분주했을 대안탑이지만 이제는 폐쇄되고 인적이 끊어졌다.

오직 대안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자은사 승려들만이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대안탑이 멀리 보이는 자은사 정문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글쎄, 너 같은 거지는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까.”

지객승(知客僧)으로 보이는 젊은 중이 소년을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왼손에 고색창연한 보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서 눈만 반들거리고 있으며 입은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검은 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훤칠한 키와 손에 든 보검 외에는 거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은 물론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밀어내려는 지객승의 손을 뿌리치며 무게 있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단지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오.”

“하하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럼 형편이 좋은 거지도 있던가?”

지객승이 큰소리로 비웃으며 다시 임청우를 밀어내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지객승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끔과 동시에 옆으로 슬쩍 비키며 발을 걸었다.

“어이쿠!”

지객승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스님께 구걸하지 않았소. 그런 나를 거지라고 할 수 있소? 나를 모욕한 댓가라 생각하시오.”

임청우는 빠르게 말하고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객승이 씩씩거리며 일어섰을 때 임청우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거지새끼야!”

지객승은 발바닥에 부리나케 뒤쫓아 들어갔다.

 

일단 절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아무도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객승도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포기해 버렸는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임청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년 고찰 자은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설전(無說殿)과 비로전(毘盧殿)을 돌아본 후에 대안탑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십장이 넘는 웅장한 대안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대안탑의 형상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산을 연상케 했다.

올려다보면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는 대안탑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임청우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집을 짓는다면 저같이 천년을 갈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사람으로 났으면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하리라!”

지는 석양을 보면서 야망을 일깨운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임청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에 몸을 떨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사로잡혔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대안탑에서 불경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

삼론종(三論宗), 성실종(誠實宗), 열반종(涅槃宗), 찰론종(擦論宗), 지론종(持論宗)은 물론이고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마저도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청우의 독백처럼 현장이 세웠던 대안탑은 천년을 가는 집이었고, 현장이 행한 바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큰일을 하리라.)

임청우는 마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苛)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숙! 혹시 어린 거지새끼 한 놈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가 대안탑 근처에 있는 극락전(極樂殿) 쪽에서 들려왔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미 고약한 지객승이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임청우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대안탑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나무나 건물이 없었다.

타타탁!

지객승이 다른 중으로부터 임청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임청우는 이내 지객승을 발견했지만 지객승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만든 대안탑의 그림자가 임청우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임청우는 출입을 금하는 붉은 줄이 쳐져있는 대안탑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대안탑으로 들어온 즉시 문 옆의 벽에 바싹 등을 붙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꺼져버린 거야!”

대안탑 주변에서도 임청우를 찾지 못한 지객승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임청우는 지객승을 속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밖은 아직 훤한데도 대안탑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대안탑에는 사방에 하나씩 창문이 나있지만 벽돌을 쌓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려던 임청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잘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대안탑에서 자고 가면 어떨까? 여기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자고 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임청우는 밖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대안탑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그 옛날 언젠가는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졌으며 수많은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으리라.

과거로 흘러가버린 밝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임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더듬어 가노라니 난간이 만져졌다.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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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앙큼한 추격자

 

 

 

(심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여자임에 분명하다. 어쩐지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고...)

멀어지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점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확실히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다.)

안내받은 창가의 자리로 가서 앉은 강유는 진상파가 주고 간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반지의 재질은 은이고 두 마리 용의 눈 부위에 박혀있는 보석들은 질 낮은 홍옥이다.

시장에 내다팔면 아마 은자 몇 냥 받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는 반지다. 마치 언젠가 전에 이 반지를 보거나 만진 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유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홀린 듯이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이런 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것일 텐데... 비록 싸구려로 보이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반지임에 틀림없다.)

강유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꺄악!”

“엄마야!”

“으헉!”

갑자기 주점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강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을 가던 사람들과 말들이 화들짝 놀라 피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과 말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사이로 한 마리의 짐승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길이가 세 자쯤인 담비인데 온몸이 황금색 털로 덮여있고 한 쌍의 눈은 타는 듯이 붉다.

그놈은 바로 구미호리 구숙정이 진상파를 추적하라고 풀어놓은 영물 담비 섬전초였다.

(별일이 다 있구나. 어떤 짐승보다 조심성이 많고 사람을 싫어하는 담비가 백주 대낮에 관도를 활보하다니...)

강유가 놀라며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는 주점 입구에 이르러 급정거했다.

킁킁!

그리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저 짐승 새끼가...”

“들어오지 마!”

“엄마야!”

주인과 점원들은 기겁하여 외치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동행한 사내들에게 달라붙었다.

담비는 비록 체구는 작아도 아주 날래고 사나워서 늑대에 못지않은 맹수로 통한다.

대부분의 경우 담비가 알아서 사람을 피한다.

하지만 담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수무책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너무 날래서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담비를 두려워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끼이...

그러거나 말거나 섬전초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저리가 이놈아! 나가!”

“꺼져라 이 못된 짐승!”

휙휙!

주인과 점원들은 빗자루를 휘둘러 섬전초를 주점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휘익!

하지만 섬전초는 바람처럼 움직여 빗자루질을 피하며 주점 안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꺄악! 엄마야!”

“오... 오지마라!”

주점 안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안기며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 중에서도 겁이 많은 자는 의자나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피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강유를 비롯한 몇 몇 무림인들뿐이었다.

(볼수록 맹랑한 놈이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다니...)

강유는 자신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담비가 날래고 사납다는 건 산속에서 살아온 강유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금모적안의 희귀한 담비인 섬전초의 모습에는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면이 있었다.

강유가 신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의 새빨간 눈이 무언가 발견한 듯 번뜩였다.

카아!

이어 그놈은 강유의 탁자 옆에 이르러 강유를 올려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야 임마! 언제 봤다고 나한테 시비냐?”

강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카아!

하지만 등을 활처럼 굽힌 섬전초는 한층 더 흉포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조... 조심하시오 젊은이. 담비는 작다고 깔보면 안되는 위험한 짐승이오.”

“옛말에도 범 잡는 담비라는 말이 있지 않소? 몇 마리만 모이면 호랑이도 사냥한다는 무서운 놈이오.”

주변 사람들이 강유를 향해 외치며 걱정을 해주었다.

“이거 참...”

강유는 한숨을 쉬었다.

“초면인데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 아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빨 감춰라.”

강유가 섬전초에게 눈을 부라릴 때였다.

“이쪽이다.”

“섬전초가 주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 강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익! 휙!

섬전초가 온 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바람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옷자락에 <鐵>자가 새겨진 무림인들이었다.

“저... 저자들은...!”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중 철위사대의 철위사들이다.”

“저 흉악한 것들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

달려오는 무사들을 본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겁에 질리고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들에게 제왕성의 위사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시비가 붙을 경우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칫 객기를 부리거나 분을 참지 못해서 제왕성 위사들과 싸우게 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제왕성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들이 제왕성의 철위사...)

강유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적잖게 놀랐다.

소요신군 강조는 안탕산을 떠나는 강유에게 제왕성의 위사들과는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었다.

섬전초를 따라온 자들은 물론 철위사대 대주 냉혈철심 사우와 철위사들이었다.

강유가 보고 있을 때 사우 일행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주점으로 들어온 그자들은 곧 섬전초를 발견하고 강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섬전초는 그때까지 강유 옆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다가온 사우가 음산한 눈초리로 강유의 아래위를 살피며 물었다.

강유는 한눈에 사우가 일행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진상파? 금시초문인 이름이오만...”

강유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저 새끼가 건방지게 대주님 말씀에 대꾸를...”

사우 뒤에 서있던 철위사 한 놈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으려 하였다.

“진상파를 모른단 말이냐?”

사우는 손을 들어 그자를 자제시키며 다시 강유에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진상파라는 이름을 귀하를 통해 오늘 처음 들었소.”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직후였다.

쩍!

강유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의 날이 닿아있었다.

사우가 발검하여 검을 강유의 목에 댄 것이다.

“헉!”

“저... 저런...”

주변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은 기겁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우의 발검이 너무나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주르르!

사우의 검이 강유의 목으로 조금 파고들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대단한 쾌검! 검을 뽑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강유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사우는 강유가 강호에 나와 처음 상대해보는 일류고수였다.

실제로 철위사대의 대주인 사우의 실력은 강유의 아버지이며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와 비교해도 그리 아래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검을 강유의 목에 댄 채 사우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물읍시다.”

강유는 목에 검이 닿아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우를 올려다보았다.

“뭐라?”

“저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는 무뚝뚝한 어조로 사우에게 말했다.

“귀하는 내가 왜 진상파라는 여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영물중의 영물인 섬전초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진상파의 냄새만 맡고도 삼백여리를 달려왔으니...”

사우는 스산한 냉기가 느껴지는 눈초리로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였군.)

강유는 비로소 자신에게 쌍룡환을 주고 간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의 성주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내게서 진상파란 여자의 냄새가 난다는 거요?”

강유는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 네놈은 어떤 식으로든 진상파와 관련이 있...”

거기까지 말하던 사우는 멈칫 하며 강유의 뒤를 보았다.

끼기! 끼!

섬전초가 다른 좌석으로 가서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그 좌석에서 국수를 먹었었다.

“히익!”

“저... 저리 가!”

섬전초가 살피고 있는 자리 근처의 사람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다.

“저놈이 왜 저러지?”

“저 자리에서도 진소저의 냄새가 나는 건가?”

다른 좌석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는 섬전초를 보며 사우와 철위사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소... 소인은 이 가게의 주인 장씨입니다요.”

그때 주인이 용기를 내서 나섰다.

“어떤 소저가 얼마 전 저희 가게에 들렸다 갔는데 저 담비 놈이 그 냄새를 맡고 들어온 듯합니다요.”

주인은 비지땀을 흘리며 섬전초를 가리켰다.

“그럼 섬전초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가?”

“주점 안에 남아있는 진소저의 냄새를 오인해서 들어왔구나.”

상황을 파악한 사우와 철위사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끼이!

진상파가 앉아있던 자리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던 섬전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휘익!

코를 허공에 대고 벌름거리던 그놈은 바람같이 주점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피해주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젠장! 헛걸음 했다.”

“저놈이 엉뚱한 짓을 했군.”

“가자!”

철위사들은 섬전초를 따라 급히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우도 강유의 목에서 검을 떼었다.

“바짝 따라붙어라. 또 놓치면 안된다.”

철컹!

사우는 검을 칼집에 꽂으며 먼저 주점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귀하의 이름이나 압시다.”

강유는 목의 상처에서 나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수하들을 따라 주점에서 나가려던 사우는 멈칫 하며 돌아보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강유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좌에게 앙심이라도 품었다는 거냐?”

사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유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자를 바라보았다.

(안... 안돼!)

(상대는 제왕성의 철위사야!)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사우와 강유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제왕성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수 없는 게 당금 무림의 현실이다.

(저 벽창호가... 가게 안에서 칼부림이 나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봐 힘들게 무마시켰건만...)

주점의 주인 역시 원망스런 표정으로 강유를 흘겨볼 때였다.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해서 본좌가 누군지 알려주마. 본좌는 제왕성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다!”

사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 냉혈철심 사우!)

(맙소사! 평범한 철위사가 아니라 철위사대의 수령이었구나.)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저자와 싸우면 이긴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는데...)

사우의 정체를 안 무림인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답게 사우는 적을 대함에 있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기어코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 때문에 설령 사우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라도 사우와 싸우는 것은 꺼려한다.

“피를 본 게 억울하면 언제든지 본좌를 찾아와라. 상대해 줄 테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주점에서 나갔다.

휘익!

그리고는 앞서 주점을 나간 수하들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에휴! 십년 감수했구만.”

“하여간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하여간 요즘 제왕성의 인간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와 이유를 불문하고 도륙한다잖아.”

“마교와 혈교를 절멸시켜 세상을 구한 제왕성이 저렇게 패도적인 세력으로 변질될 줄 누가 알았겠나?”

“십팔 년 전부터는 제왕성에 밉보이고 무사한 인간이나 문파가 없잖아.”

“진짜 문제는 제왕성의 폭압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야.”

“하긴 황실도 제왕성의 눈치를 본다더만...”

제왕성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쏟아내던 사람들은 흠칫했다.

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보게 젊은이, 화가 나더라도 참게나.”

“냉혈철심 사우를 만나고도 그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사우가 인간백정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손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무림인들이 입구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강유에게 충고를 했다.

(진상파라고 했지?)

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서둘러 주점을 나섰다.

(그 여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왕성의 표적이 되었다.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었던 여자인데 위험에 빠진 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휘익!

주점을 나온 강유는 사우 일행이 간 쪽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저 어린 친구가 혈기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구만.”

“안됐어. 제왕성에 죄를 짓고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삽시에 멀어지는 강유를 보며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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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강미루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 백남빈은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강미루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강미루는 다시 입을 맞추려고 내미는 백남빈의 입에 불쑥 과일을 갖다 대었다.

백남빈이 말없이 웃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즙과 함께 과육이 녹듯이 넘어가 버렸다.

(잘 익은 감과 비슷한 맛이로구나.)

백남빈은 과일을 하나 더 집어 입에 가져갔다. 왕성한 식욕이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던 백남빈은 과일 하나를 집어 그때까지 미소를 띤 채 보고만 있는 강미루에게 건네주었다.

강미루도 그제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두 사람의 상처는 놀라울 만치 회복이 빨랐다.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는 온천에서 나왔을 무렵에 벌써 아물고 있었고, 강미루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창평곡에서 청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신랑성의 도발은 시작되고 있었다.

토곤이 신랑성으로 하여금 오이라트 기마군단의 남침을 위한 통로의 개척을 명령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마군단이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장애물의 제거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신랑성의 고수들은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몇 군데 요충지를 목표로 쇄도해왔다.

만리장성 일대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저지에 나섰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인 신랑성의 정예들을 막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부는 무황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황성이 북경 북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였으며 지금까지는 매번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황성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황성의 당대 성주 주진충은 오래전부터 무황성 깊은 곳에 은거한 채 무림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 왕소군이 무황성을 관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왕소군은 무황성 상하(上下)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인지라 대국적인 안목이 없는데다가 측근들만 중용하고 방탕하여 무황성의 화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실정으로 인해 무황성의 강대한 힘은 결집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신랑성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다.

토곤이 전면적인 중원 침공을 시도하게 된 데에는 무황성의 쇠락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무황성으로서는 명나라 군부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왕소군은 신랑성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며 각처의 분타에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북과 산서성의 각지에서 신랑성과 무황성의 고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왕소군은 은거 중인 남편 주진충을 찾아가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한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

 

-유우겸(劉盂兼)!

 

육순에 접어든 그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국조미랑 왕소군의 지도력 부재와 방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무황성을 애써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의열전(義烈殿)의 전주인 유우겸이었다.

의열전은 중원 밖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무황성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철령보도 공식적으로는 의열전에 속해 있을 정도다.

왕소군은 그 철령보로부터 날아든 전서구의 내용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의열전을 맡고 있는 유우겸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독안룡 이탁의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하북과 산서 일대의 분타에 경계령을 발동했다.

그 덕분에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온 신랑성의 세력을 하북과 산서의 분타들이 제 때 요격할 수 있었다.

비록 의열전주 유우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무황성의 대세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중원 내부를 관장하는 조직인 군림전(君臨殿)의 전주 예운림(睿雲林)이란 자가 야욕을 품고 왕소군을 방조하고 있는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유우겸은 의열전의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몸이 묻힌 만큼이나 그의 고심의 깊이도 깊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랑성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 무황성은 기필코 패배하고 만다."

유우겸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

그의 뒤로 백의의 문사 차림인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전주, 꼭 그렇지 만도 않소이다."

갑작스런 백의문사의 등장이지만 유우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사의에 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남궁대협(南宮大俠)! 군림전주 예운림의 숨겨진 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유우겸의 말에 남궁대협이라 불린 백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무황성의 쟁쟁한 인물들치고 자기 세력을 암암리에 키워 오지 않은 자가 없지 않소이까?"

백의문사의 말을 들은 유우겸은 탄식했다.

"세상에 알려진 무황성의 힘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외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 누가 앞장서서 자신의 힘을 소비하려 들겠소?"

"사실이 그렇긴 하오. 그래도 무황이 검을 높이 들기만 하면 무황성의 모든 힘이 다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역시 무황과 그의 후처인 국조미랑 왕소군이오."

백의문사의 말을 받아 유우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궁대협. 노부의 집안은 대대로 무황성에 충성을 바쳐왔소. 노부는 감히 성주와 주모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소이다."

"무황성의 충신인 유전주의 입장은 이해하오."

백의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는 없소. 남궁대협께서 노부를 도와주기만 하신다면 토곤의 야심을 꺾을 가능성은 충분하오."

 

무황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유우겸과 백의문사의 밀담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헌데 남궁대협이라고 불린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이기에 무황성의 기둥인 의열전 전주가 이토록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창평곡의 아침은 푸른색 온천수로 채워져 있는 연못 녹지(綠池)에 반사된 햇살에 서쪽 절벽이 아롱지며 시작된다.

흑왕은 언제 일어났는지 남쪽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백남빈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구석에는 강미루가 고개를 백남빈쪽으로 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추한 차림도 선녀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하지는 못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백남빈이 상아같은 뺨에 살짝 입술을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면서도 피곤했는지 쉽사리 깨어나지는 못하는 강미루다.

 

"정말 세상 밖에 서야만 세상을 잊게 되는구나."

혼자 오두막 밖으로 나선 백남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평곡의 아침은 세외선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계곡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게 한다.

“아아아!”

기분이 고조된 백남빈은 크게 한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북쪽 숲에서는 새들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고성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

 

백남빈의 고함을 들은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바탕이 반석(盤石)같은 자다.)

신가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거리가 먼 때문인지, 아니면 진법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장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공이 심후한 신가람을 제외하면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려장 무사들 중 누구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록 소리는 작게 들렸지만 지축이 순간적으로 흔들 하는 것을 신가람은 감지했다.

마치 항아리같은 지형인 창평곡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함 소리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사형(大師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신가람은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그 인물이라면 방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놈의 장소성이었으니 대사형은 아니다.)

신가람은 고함이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미간을 모았다.

철부지 처제가 실종된 근처에 젊은 사내놈이 함께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점이 신가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가람이 파진을 시도한 후로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신가람은 미혼진을 칠할 넘게 파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법에 빠져 실종되었던 네 명의 대려장 무사들을 발견했다.

네 명중 둘은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공포에 질려 들고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의 고함 덕분에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미혼진의 파진이 좀 더 쉽게 되었다.)

닷새 넘게 깎지 않은 수염으로 덥수룩해진 턱을 만지며 신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백남빈이 지른 고함이 신가람에게는 지남철(指南鐵)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신가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지난 닷새 동안 자신을 곤혹하게 만들었던 미혼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진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진법이 또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매망량(魑鬽魍魎)들이 사방에서 신가람을 위협하며 덮쳐들었다.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散魄陣)이 신가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삐익!"

한 차례 고함을 지른 후 백남빈은 휘파람을 불어 흑왕을 불렀다.

그리고는 껑충거리며 다가온 흑왕을 타고 그리 넓지 않은 분지를 신바람 나게 몇 바퀴 돌았다.

흑왕과의 아침 산책은 상처가 완쾌된 이후로 매일같이 행하는 일과였다.

 

곤히 잠들었던 강미루도 백남빈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다.

서둘러 녹지로 가서 세수를 한 그녀는 가지가지의 과일을 꺼내어 돌탁자 위에 놓았다.

때맞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두막으로 들어온 백남빈이 탁자 앞에 앉았다.

이곳 창평곡은 아무래도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이 나곤했다.

"잘 잤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백남빈이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창평곡에 들어오기 전의 백남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글맞은 수작이다.

"네! 공자님!"

하지만 강미루는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엿새간 두 사람은 부부처럼 지내왔다.

서로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서로가 없으면 단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선만은 지켰다.

비록 한 지붕 아래 몸을 눕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벼운 애정표현 이상은 하지 않아온 것이다.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사람은 동쪽절벽으로 갔다.

동쪽절벽은 백남빈이 내려왔던 곳이다.

당연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끝내 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곳에 출로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백남빈이었다.

한참 동안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두드려 보고 하다가 지친 두 사람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묶은 강미루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때마다 일렁거려서 그림자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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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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