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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뜻밖의 제안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냉약빙은 고독헌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의 말에 유령마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오 냉여협?”

하지만 그자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냉약빙이 지니고 있는 굉천벽력탄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며 냉약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비겁한 자들, 너희들은 평생 가도 오라버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차갑고 오연한 음성으로 알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들 마음에 달렸어요!”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한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세 권의 낡은 비급이 들려 있었다.

“오오! 저...저것은 혈마대장경이다!”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환호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렇다. 냉약빙이 쳐든 것은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혈마대장경을 본 군웅들의 눈이 탐욕과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유령마제 등 삼인은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계집, 무슨 꿍꿍이지?)

그자들은 갑자기 냉약빙이 혈마대장경을 쳐들자 환호하는 대신 이마를 찌푸렸다.

냉약빙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고독애로 몰려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한 이유는 이 혈마대장경 때문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말에 독천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는 말이오. 냉여협!”

그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냉약빙의 손에 들린 혈마대장경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라버니께서는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으세요.”

냉약빙은 차가운 표정으로 군웅들을 대표하는 삼인의 고수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 세 권의 비급의 처분을 당신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셨어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끝내 오라버니께 대항하다가 몰살당할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자유예요!”

“그, 그럴 수가...!”

“혈, 혈마대장경을 내놓다니...!”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냉약빙의 제안은 실로 천만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선뜻 포기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소란이 일어났다.

유성신검황 등의 안색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고독마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비록 무형지독에 중독되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과 동귀어진 할 수도 있었다.

유성신검황이 군웅들의 소란을 저지하며 냉약빙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냉여협!

이어 그는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며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자리에 모인 세 거두는 머리를 맞대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즉 내공으로 뜻을 전하는 수법을 써서 숙의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일각(一刻;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세 거두는 숙의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성신검황이 삼인을 대표하여 냉약빙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삼인이 연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빌어먹을, 혈마대장경을 자기들끼리 나눠먹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헛물만 들이킨 꼴이 아닌가?)

군웅들은 저마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이지러트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독천존과 유령마제 등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거니와 현재 고독애 일대에는 세 거두의 수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잘 생각했어요!”

유성신검황의 말에 냉약빙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마대장경을 양손으로 나눠들었다.

“받아요.”

피핑!

냉약빙은 세 권의 혈마대장경을 각기 한 권씩 삼인에게 날려 보냈다.

파팟! 팟!

유성심검황등은 행여 남에게 빼앗길 새라 급히 몸을 날려 자신들에게로 날아드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진품이다!)

혈마대장경을 받아든 즉시 뒤적여본 삼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들이 받아든 비급은 틀림없이 혈마대장경임을 확인한 것이다.

“경고해 두겠어요! 이 시간 이후 고독애 주위를 얼쩡거리는 자는 나 냉약빙과 오라버니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참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냉약빙은 장내를 둘러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독천존이 혈마대장경을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냉약빙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흘흘, 알겠소이다. 냉여협! 노부는 그럼 이만 실례하오!”

쐐애액!

독천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고독애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군웅들 중에 섞여있던 독천존의 수하들도 그자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뒤이어 유령마제도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마지막으로 유성신검황은 회의와 갈등의 눈빛으로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유성신검황마저 떠나자 나머지 군웅들도 앞을 다투어 고독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삽시에 장내는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뿐...

“어리석은 인간들...!”

냉약빙은 군웅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넉넉잡아 십오 년, 십오 년만 기다려라! 네놈들에게 오늘의 빛을 받으러 갈 아이가 있을 테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고독헌으로 들어갔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감회에 찬 눈길로 자신의 무릎에 누인 사내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라면 고금제일인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경지를 초월해 보려던 나 연남천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실로 오랜 만에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장차 무림이 운명을 바꾸어놓을 천고기재와 천하제일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고독애!

운명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 * *

 

세월여류(歲月如流)라 했던가?

곤륜산 고독애에서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이 절반 가까이 몰살당한 혈겁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 십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은 공포와 근심으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십사 년 전에 벌어진 두 가지 참사로 인해 무림에 머지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대혈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두 가지 겁난(劫亂) 중 첫째는 물론 고독애의 혈겁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지방을 제패하고 있던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결국 혈마대장경이 사방무신 중 세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으로 고독애의 겁난은 해소되었다.

그 후 고독애 사방 백 리는 금역(禁域)으로 화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겁난은 신주사패천에 들던 태양곡이 의문의 궤멸을 당한 사건이었다.

태양곡이라면 불과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에 올랐던 일대기협 태양신협 이청천의 거처가 아닌가?

바로 그 태양곡이 고독애의 겁난이 있기 며칠 전에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이 경악하며 달려갔지만 태양곡은 이미 온전한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된 후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흉수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개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혈겁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이었건만 흉수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태양곡의 멸망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태양곡의 참사를 장차 무림을 피로 씻을 대겁풍의 전조로 여기고 전전긍긍했다.

혹자는 미리 겁난을 피하기 위해 세외로 은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중원무림에는 유래 없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같은 평화가 십사 년 간 이어지자 무림인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았다.

현자(賢者)나 노강호(老江湖)들은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했다.

작금의 평화가 정말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진정한 평화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독한 천하제일인의 거처가 있는 곤륜산 고독애에서 바야흐로 향후 무림 천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음을...!

 

***

 

우르르릉!

구름 속에서 뇌성이 운다.

마치 굶주린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공복으로 울어대는 듯한 뇌성이다.

곤륜산 고독애 일대는 짙은 먹장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아!

어느 순간 시커먼 먹장구름은 장대같은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의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듯 요란하다.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고독애의 북쪽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지하에 대량의 열천(熱川)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봄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장춘곡(長春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장춘곡 끝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서있다.

십사 년 전부터 금지가 된 고독애 근처에 누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일까?

“차핫!”

문득 초가집 안으로부터 낭랑한 소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펑! 쐐애액!

이어 초가집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초가집 밖으로 질풍같이 뛰쳐나왔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단삼(單衫)을 걸친 소년인데 육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녔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달리 소년의 나이는 잘해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한 듯 단아하다.

단순히 잘 생긴 것이 아니라 숯같이 짙은 눈썹에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쐐애액!

초가집을 박차고 뛰쳐나온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계곡 밖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이 내달리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줄기 검은 선이 장춘곡 밖으로 쭈욱 뻗쳐나간 듯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삽시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채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

장춘곡 밖에서 다시 낭랑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예의 그 단삼 소년의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장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년의 건장한 모습이 계곡의 어귀에 다시 나타났다.

스파앗!

장춘곡 입구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소년은 이미 한 걸음에 계곡을 날아 건너 초가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누나! 다녀왔어!”

초가집 안으로 뛰어든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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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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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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