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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안룡(獨眼龍)

 

 

칠십년 넘게 강호 무림을 지배해온 무황성에서 최고의 요직은 감찰전(監察殿)의 전주다. 무황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독안룡 이탁은 사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감찰전의 전주였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주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菊造美浪) 왕소군(王昭君)에게 밉보여 일개 분타인 철령보의 보주로 좌천되었다.

이탁의 지인들은 왕소군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탁은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고 철령보로 부임했다.

이탁은 가족들 중 양자인 백남빈만 데리고 철령보로 왔다. 아내는 병약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어려서 무황성에 남겨둔 것이다.

그후 사 년 동안 이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철령보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이탁의 지도하에 철령보 무사들의 무공은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이탁은 기문진법을 바탕으로 각가지 병진(兵陣)을 창안하여 철령보 무사들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무황성의 일개 분타에 불과했던 철령보는 단독으로 대려장이나 극품당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사 년 간 중원의 동북방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안룡 이탁의 능력에 기인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신랑성의 이인자를 생포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다?”

이탁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시절 불행한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붙은 것이다.

... 그자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저항을 포기해서 속하도 놀랐습니다.”

백남빈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철담도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탁은 주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탁 앞에 서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하나뿐인 이탁의 눈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같이 느껴져서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이탁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양자인 백남빈이다.

그런 백남빈조차 양부의 검고 깊은 시선을 오래 접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섬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너희들이 완안진을 요격하러 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탁은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백남빈은 양부의 그 말에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질책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철령보에서 무공으로 완안진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주인 이탁뿐이기 때문이다.

소자가 경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되었다.”

사죄하는 양자에게 이탁은 고개를 조금 저어 보였다.

 

이탁은 순찰을 위해 대려장과의 접경 북쪽 끝까지 갔다가 사해검객 종리완이 보낸 연락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철령보로 다시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려장이 느닷없이 도발을 하여 긴장을 조성했던 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완안진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백남빈보다 먼저 철령보로 돌아온 이탁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는 총관인 사해검객이 잘 알고 있다. 평소의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빈 일행은 새벽이 되어서야 철령보로 돌아왔다. 완안진의 시종 다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서 행군을 서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다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왼안진은 혈도가 짚여 무공이 금제된 채 다얀과 함께 철령보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무황성을 통틀어도 완안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그런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생포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려장으로 파견된 목적까지 순순히 자백했다.”

이탁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훑어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밀봉된 편지 한통, 손잡이에 푸른 늑대의 형상이 정교하게 장식 된 단검 한 자루, 그리고 상당히 큰 반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은 백남빈이 완안진의 몸에서 압수한 것들이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들의 의견들을 말해봐라.”

이탁은 탁자 위의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들어 살피며 말했다.

폭이 반치 정도나 되는 상당히 큰 금 반지인데 표면에는 물감이 흐르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상을 입은 시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한 게 아닐지요?“

철담도호가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완안진은 대려장과 결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신랑성의 밀사다.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자가 겨우 종놈 하나 구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냐?”

... 죄송합니다.”

이탁의 말에 철담도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종의 안위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완안진은 시종을 다얀이라 불렀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남빈이 입을 열었다.

순간 반지를 들고 있던 이탁의 손가락이 경직되는 것을 철담도호는 놓치지 않았다.

다얀... 다얀...”

이탁은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혹시... 다얀이란 이름의 그 시종이 의외로 중요한 존재였는지요?”

철담도호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이탁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신랑성주 토곤의 둘째 아들 이름이 다얀이었습니다.”

백남빈이 양부를 대신해서 철담도호에게 말했다.

그런...”

철담도호는 자기도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비로소 완안진이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가 추측하는 대로 완안진이 대동한 자는 진짜 시종이 아니라 토곤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이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남빈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야심이 큰 토곤의 꿈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곤은 결코 칸이 되지 못한다. 몽고족 지배자인 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후손들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는 징기스칸의 법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토곤은 몽고족의 군사령관인 타이시, 즉 태사(太師)로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딸을 징기스칸의 후손 중 한명인 터터부카(脫脫不花)란 인물에게 시집보낸 후 터터부카를 칸으로 추대했다.

딸이 낳을 외손자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 토곤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토곤에게는 터터부카에게 시집보낸 딸 외에도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토곤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이름이 에센(也先)이고 차남이 다얀이라는 것을 백남빈은 뒤늦게 떠올렸었다.

 

토곤은 둘째 아들을 대려장에 볼모로 보내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탁은 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들을 볼모로 제공할 정도라면 토곤이 대려장과 맺으려던 게 단순히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결맹은 아니겠습니다.”

백남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그는 완안진으로부터 대려장을 찾아가는 목적이 결맹을 맺기 위해서라는 진술만을 들었을 뿐이다. 비록 포로로 잡긴 했지만 완안진이 시종이라 소개한 다얀의 상태가 심각해서 집요하게 추궁은 못한 것이다.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武君子) 강진남(姜震南)에게 보낸 밀서는 읽어보았느냐?”

이탁은 탁자에 놓여있는 밀봉된 편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보셔야할 것같아서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양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탁은 봉서 입구를 뜯어 몇 장의 편지를 꺼냈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담도호가 두 부자의 눈치를 보며 대청을 나갔다.

(볼수록 특이한 반지다.)

홀로 남아서 양부가 편지를 읽는 것을 보던 백남빈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에 놓인 반지로 끌렸다.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그 반지는 백남빈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다섯 가지 색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열기와 은은한 향기까지 느껴진다.

완안진은 그 오색의 금반지, 오채금환(五彩金環)을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토곤이 결맹의 대가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일 것이다.)

백남빈의 생각이 오채금환에 끌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 승부에서 진 것은 완안진이 아니라 우리 부자로구나.”

!

이탁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백남빈은 말없이 양부가 내민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들 부자가 완안진에게 졌다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성주 토곤이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은 백남빈의 예상을 한 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토곤은 현재 십만 이상의 기마대를 만리장성 밖에 결집 시켜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토곤에게 가장 큰 우환은 동족인 달단의 존재다.

원래 몽고초원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행사해온 부족은 달단이었다,

몽고족의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달단은 몽고초원에 남아있었고 덕분에 다른 부족들이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달단은 원래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달단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달단이 곧 징기스칸의 가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이라트는 뒤늦게 몽고족으로의 편입을 허락받은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토곤이 칸으로 옹립한 터터부카도 원래는 달단 출신이었다.

달단의 족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패해 오이라트로 망명했던 터터부카는 토곤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토곤은 몽고족의 칸으로 추대한 사위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기 위해 달단을 맹렬히 몰아붙여왔다.

그 결과 달단은 본거지인 몽고초원에서 쫓겨나 만주 지역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달단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 힘을 되찾아 역습을 가해올지 모른다.

토곤으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에 결맹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토곤이 직접 쓴 밀서에는 달단을 견제해주면 그 대가로 대려장이 요동과 만주 일대를 정복하는데 조력하겠다는 제안이 적혀 있었다.

또 밀서의 말미에는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는 내용과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두 명의 밀사중 먼저 도착한 쪽의 친서를 접수해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완안진이 순순히 포로가 된 것은 주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밀사가 대려장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양부를 닮아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백남빈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길로 간 토곤의 두 번째 밀사는 이미 대려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탁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경계 수준을 높여서 대려장의 동향을 세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남빈은 서둘러 양부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려장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

이탁이 백남빈을 불러 세웠다.

지금의 상황을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하는데... 아비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신을 지그시 보며 말하는 이탁의 뜻을 백남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전서구로도 무황성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겠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합작은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를 무황성에 갖고 가야하는 것이다.

소자가 무황성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양부 독안룡 이탁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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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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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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