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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북두무맥 -北斗武脈

 

서장

 

                   눈알을 뽑고 복수를 맹세하다!

 

 

츄훅!

눈에 박힌 화살을 잡아 뽑자 안구(眼球)와 함께 대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상상 밖으로 큰 눈알의 안쪽에는 명주실 같은 것들이 여러 개 달려 있다가 함께 뽑혀진다.

눈알이 뽑히자 시뻘겋게 달궈진 송곳이 머릿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주윤문(朱允炆)에게 그 정도 통증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 사랑하는 아내가 어린 딸을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아악!”

끼야악!”

시뻘건 불길에 휩싸이며 모녀가 함께 토해내던 단말마의 비명은 안구가 뽑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한 고통으로 그의 심장을 난도질 했었다.

미안하오 황후! 미안하다 공주야!”

지하의 어둑한 통로를 엉금엉금 기어가며 주윤문은 피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의 무능과 우유부단함이 아내와 딸을 타죽게 만들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자책과 회한에 당장이라도 돌바닥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복수!

복수를 해야만 한다!

후두둑! 후둑!

눈알이 뽑힌 왼쪽 눈에서 피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체액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두고 비굴하게 도망치던 중 연왕(燕王)의 졸개가 쏜 화살이 눈에 박혔었다.

화살촉이 한 치만 더 깊이 박혔어도 아내와 딸의 뒤를 따라갔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복수를 해야만 한다!”

주윤문은 이를 갈며 어둑한 통로를 기어갔다.

출혈이 심한 탓인지 정신이 급격하게 흐려진다.

눈에 박혀있던 화살을 잡아 뽑은 것도 멀어지려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알이 뽑히면서 느껴졌던 고통도 이내 무뎌지며 정신은 다시 혼미해지고 있다.

짐은... 짐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귀신이든... 악귀든 나타나다오! 복수를 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나 주윤문의 혼백이라도 기꺼이 바칠 테니...”

허연 눈알이 꽂혀있는 화살을 움켜쥔 채 기어가며 주윤문은 간절하게 소망했다.

유학(儒學)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온 터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주윤문은 세상 그 어떤 인생보다도 간절하게 귀신과 악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존재는 인간중에 없으므로...

지금의 그 맹세를 믿어도 되겠소?”

누군가의 말이 의식이 멀어지는 주윤문의 귓전을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환청인가 싶어 의심하면서도 주윤문은 하나뿐인 눈을 치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앞쪽에 어떤 존재가 있었다.

통로는 지하에 나있어 어두운 데다가 극심한 출혈로 인해 실체를 뚜렷하게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주윤문은 그 존재가 인간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한 쌍의 눈이 그의 앞쪽 허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누구냐?”

주윤문은 흐려지려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며 그 인물을 노려보았다.

다시 묻겠소.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으시오?”

푸른 눈빛의 인물이 다시 물었다.

천지신명께 맹세코... 기꺼이...”

주윤문은 폐부를 쥐어짜 토해낸 목소리로 맹세했다.

그렇다면 되었소. 이제부터 폐하는 대명(大明)의 황제(皇帝)가 아니고 마교(魔敎)의 제자요.”

푸른 눈의 인물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이 명()나라 제이대 황제였던 건문제(建文帝) 주윤문이 정신을 잃기 전에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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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는 여인들

 

 

틀림없습니다. 이자는 십자단맥검(十字斷脈劒)에 죽었습니다.”

이마 부분에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가 한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복면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체는 온몸이 무성한 털로 덮인 거구의 사내인데 심장 부분에 열십자로 갈라진 상처가 나있다.

특이하게도 그 열십자의 상처는 피부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다.

끊어진 경맥들이 오그라들면서 피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십자검존의 독문검법 십자단맥검에 당한 흔적이다.”

또 한명의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각주(閣主)님이 보시기에 이 작자를 죽인 범인이 바로...”

먼저 말한 복면인이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를 돌아보았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그자의 두 눈은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어 있다.

철사자 고창룡이 죽으면서 십자단맥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네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그중 셋의 행적은 확인되었다.”

각주라 불린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곰같은 놈을 죽인 건 십칠 년 전 돌연 행방을 감춘 당혜선(唐惠善)일 수밖에 없다.”

각주라는 자는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날수비연(辣手飛燕) 당혜선! 역시 그년 짓이었습니다.”

드디어 사신검 중 복마신검(伏魔神劒)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생겼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각주님!”

시체 주변에 모여 있던 복면인들이 흥분을 주체 못하며 각주라는 자에게 포권을 했다. 그자들이 쓰고 있는 복면에는 예외없이 <()>자가 적혀 있다.

진정해라. 이제 겨우 당가 년이 기련산(祁蓮山) 근처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각주라는 자가 손을 들어 다른 복면인들의 말을 막았다.

이번 일에 우리 사신각(死神閣)의 명예가 걸려있다. 기련산의 골골을 다 뒤져서라도 당가 년을 찾아내라!”

존명!”

맡겨주십시오 각주님!”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휘익! !

이어 그자들은 사방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당혜선... 당혜선... 드디어 네년이 꼬리를 드러냈구나.”

사방으로 흩어져 멀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각주라는 자는 음산하게 웃었다.

감히 본좌를 기만하고 복마신검을 빼돌린 대가를 몸으로 치르게 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사신각의 각주라 불린 복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악의에 찬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 * *

 

-기련산맥(祁蓮山脈)!

 

감숙성과 청해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곤륜산맥의 동쪽 지맥이기도 하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이천여리의 산줄기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기련산맥의 최고봉인 기련산은 높이가 무려 이만여척(6,000미터)에 이르러 정상부가 늘 만년설에 덮여있다.

기련산의 서북쪽에는 서역과 중원의 관문인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계절은 싱그러운 초여름이다.

기련산 남쪽 산록에는 녹색의 물결을 일으키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비스듬히 경사진 초원 여기저기에는 구름송이 같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또 초원에는 듬성듬성 키 큰 나무들이 서있어서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초원에 서있는 나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느릅나무 아래에는 소년이 한 명 앉아있다.

나이는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걸친 옷은 허름하고 살갗은 햇볕에 그을려 가뭇하다.

기련산 근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맑아서 보는 이의 이목을 잡아끈다.

어느 명문가의 귀한 핏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외모를 양치기 소년이 지니고 있다.

소년은 느릅나무 밑동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이 읽고 있는 책은 제법 두껍고 글씨도 작아서 가벼운 내용은 아닌 듯 했다.

“...!”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소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

한 명의 여인이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얼굴은 명장이 정성을 다해 빚은 듯 아름다운 반면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얀 은발(銀髮)이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만 보자면 여인의 나이는 이십 대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하얀 머릿결 때문에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발여인은 눈같이 흰 피부와 은발과는 대조적인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다.

헌데 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은 섬뜩하게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칠갑이 되긴 했어도 검은 옷은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옷을 물들이고 있는 피는 은발여인이 흘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인 듯했다.

유령처럼 나타난 은발여인을 본 소년은 두 눈을 조금 치떴을 뿐 딱히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담력이 큰 아이로구나.)

은발여인의 옥용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무슨 책인데 그리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은발여인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소년은 은발여인의 청아한 음성에 감탄하며 말없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죽서기년... 흥미로운 책이로구나."

적잖이 놀란 듯 은발여인의 아미가 살짝 올라갔다.

외진 산골의 양치기 소년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령 글을 읽을 줄 안다 해도 흥밋거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패설(稗說;소설) 따위일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다.

헌데 소년이 읽고 있었던 건 상당히 난해한 사서(史書;역사책)였다.

괜잖다면 죽서기년을 읽은 감상을 들어볼까?”

은발여인의 말에 소년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소년의 순진하고도 해맑은 미소를 접한 은발여인은 주책맞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젊지만 사실 은발여인은 소년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의 나이다.

그만큼 소년에게는 보는 사람, 특히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죽서기년이 어떤 책인지는 알고 계신 듯하네요."

드물고 진귀한 책이지만 아줌마도 읽어본 적이 있단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음성이 맑은 샘물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음성도 해맑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죽서기년은 전국시대에 지어졌으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었었다. 그러다가 서진(西晉) 시절 도굴당한 무덤에서 다시 발견되었으며, 죽간에 쓰여진 사서라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은발여인은 죽서기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죽서기년의 내용은 정사로 믿어지는 좌전(左傳)이나 사기(史記)와 사뭇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이 다르지요. 성군으로 알려진 순()이 사실은 요()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다거나 그 순을 또 우()가 쳐서 죽였다던지...”

은발여인의 물음에 소년은 죽서기년을 보며 대답했다.

죽서기년의 그같은 내용을 믿느냐?”

믿는다 안 믿는다 단언하기에는 저의 공부가 너무 빈약하군요.”

소년의 대답이 은발여인을 탄복시켰다. 한창 혈기 방장할 나이임에도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죽서기년의 연원을 아시는 걸 보니 아주머니도 독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소년이 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은발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몰론이다. 나도 한때는 독서로 식음을 전폐하던 때가 있었단다."

은발여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책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소년은 부러운 눈빛을 지었다.

소년의 그 모습에 은발여인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호호호! 물론이다. 이 아주머니의 서고에는 줄잡아 십만서(十萬書) 정도는 있단다."

"!"

소년은 정말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발했다.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은발여인의 부드럽던 눈빛이 파랗게 번뜩였다.

(이 분... 쫓기고 있구나!)

표정을 차갑게 일변시키며 호각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은발여인의 모습에서 소년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담세황(潭世皇)!"

은발여인은 이를 바득 갈며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추격하는 자의 이름이 담세황인 듯 했다.

"이 주위는 탁 트인 초원이라 은신하실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습니다만..."

소년은 은발여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은발여인은 흠칫하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위는 녹음이 짙어 방해받지 않고 쉬실만하실 것입니다."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기대앉은 나무의 위쪽을 가리켰다.

은발여인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꾸나."

!

이어 그녀는 소리없이 나무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은발여인의 유령같은 경신법에 소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죽서기년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은 다시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언제 나타났는지 소년 앞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인데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영준한 용모를 지녔다.

또 육척 가까운 훤칠한 몸에는 화려한 금포(錦袍)가 걸쳐져 있다.

여자라면 이 금포장한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금포장한의 눈빛이 음침하고 스산하여 결코 좋은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주변에서 은발의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

금포장한은 음산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못 봤어요."

소년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설령 누가 주위를 지나갔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독서 중에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성격인지라...”

"그래?"

금포장한은 스산하게 말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마치 독사같은 눈빛이다.)

금포장한의 시선을 접한 소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금포장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놈은 정말 옥여상(玉如霜) 그년을 못 본 것 같다.)

금포장한의 미간이 모아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에서 추호의 동요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지.)

금포장한은 내심 중얼거리며 돌아서려 했다.

번쩍!

헌데 돌아서려던 그 자의 눈가로 한광이 스쳤다.

(저 놈, 놀라운 근골(筋骨)을 지녔다.)

금포장한은 비로소 소년이 근골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심성은 올바르지 못해도 금포장한은 탁월한 자질과 안목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그자는 양치기 소년의 근골이 무공을 연마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애지신(無碍之身)! 어쩌면 전설 속의 무애지신일지도 모른다.)

금포장한의 눈가로 불꽃이 튀었다.

 

무애지신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몸을 말한다.

정확히는 몸속의 모든 경맥이 막힘없이 뚫려있는 특이하고도 진귀한 체질을 뜻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모든 경맥이 열려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맥은 굳어지고 노폐물이 쌓여 진기의 유통에 장애가 생긴다.

그 때문에 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증진되지 못한다.

진기의 유통도 차질을 빚어 내공을 구사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기기도 한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고도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의 타통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임독이맥이 뚫린 자는 진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어 내공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게 된다.

무애지신은 그 임독이맥을 비롯한 모든 경맥이 뚫려있는 보기 드문 체질이다.

헌데 일개 양치기 소년의 몸이 무애지신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금포장한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다.

 

(저놈이 정말 무애지신의 소유자라면 장차 나 담세황이 대업(大業)을 이루는 데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금포장한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에게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포장한은 소년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일단 소년이 무공을 익히면 단 시일 내에 금포장한 자신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둑!

금포장한의 움켜쥔 두 손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소년의 뛰어난 근골을 알아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일어난 것이다.

“...”

소년은 금포장한의 그같은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죽서기년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근은 미리 미리 제거해두는 게 최선이다.)

금포장한의 입가로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절체절명!

금포장한의 손이 한 차례 휘둘러지기만 해도 소년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루주(樓主)! 여기 계셨구려.”

휘익!

걸걸한 외침과 함께 금포장한 뒤로 한명의 장한이 날아 내렸다. 굶주린 늑대처럼 흉포하고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인데 한쪽 눈이 먼 애꾸다.

무슨 일이오 독안랑(獨眼狼)?”

막 소년에게 살수를 쓰려던 금포장한은 오른손에 모았던 공력을 풀어버리며 돌아보았다.

죽서기년을 읽고 있던 소년도 고개를 들어 애꾸눈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이 근처에서 다수 발견되었소이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독안랑이란 중년인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신각? 그 살인귀들이 무슨 일로 기련산에 몰려온 거요?”

독안랑의 보고를 받은 금포장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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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2

 

         패륜아(悖倫兒)의 이름

 

 

-철사자(鐵獅子) 고창룡(高蒼龍)

 

이것은 그저 한 인물의 이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불명예와 오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 인해 정파백도의 긍지는 땅에 떨어졌으며 흑도, 마도, 녹림은 물론이고 하오문의 무리들조차 정파백도를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무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륜(悖倫)이 철사자 고창룡이란 이름을 지닌 자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었다.

흑도사파에 대해 늘 당당할 수 있었던 정파백도의 군협들은 기억하기도 싫은 그 만행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철사자 고창룡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인해 정파백도는 천여 년 동안 쌓아온 명예와 긍지를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것이다.

 

* * *

 

철사자 고창룡은 정파백도의 결맹인 호천무맹(護天武盟)의 소맹주였다.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고창룡은 호천무맹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무공을 불과 십여 년 만에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성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창룡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하십대고수로 뽑혔을 정도였다.

헌데 그런 그가 어느 날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했다.

사모(師母) 겁탈-!

고창룡이 돌연 색마로 변해서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호천무맹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한 것이다.

 

-다정관음(多情觀音) 능벽운(凌碧雲)

 

그녀는 고창룡의 사모이며 호천무맹의 맹주인 십자검존(十字劒尊) 종극(種極)의 아내였다.

능벽운은 지혜로우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지녀 정파백도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런 그녀를 믿을 수 없게도 십자검존이 총애하는 제자가 겁탈한 것이다.

능벽운은 남편의 제자에게 겁탈 당했다는 엄청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으며... 고창룡은 그 직후 들이닥친 호천무맹의 원로들과 난투를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너무도 비극적이고 치욕스러운 사건이기에 호천무맹은 이 사건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했다.

그러나 영원히 지켜질 수 있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고창룡이 사모를 능욕한 만행은 요원의 불길처럼 무림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실추된 것은 비단 호천무맹의 명예만이 아니었다.

호천무맹은 정파 무림을 상징하는 결맹이다.

헌데 그 호천무맹에서 언도도단의 패륜이 벌어졌다.

그 일로 인해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은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호천무맹은 물론이고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백도의 유수한 문파들이 봉문하고 근신하기에 이르렀다.

단 한명이 저지른 패륜치고는 실로 엄청난 결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호천무맹의 다음 대 맹주로 지목되던 고창룡이 왜 갑자기 미친 짓을 한 것일까?

무림인들의 가슴 속에 커다란 의혹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의혹의 해명을 시도하지 못했다. 고창룡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탓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무림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호천무맹의 봉문은 무림의 정세를 뒤흔들어놓았다.

호천무맹의 위세에 눌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던 흑도와 사파의 세력들이 일제히 발호한 것이다.

무림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했으며 수많은 세력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났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그라지곤 했다.

호천무맹에 의해 주도되던 평화의 시대는 끝이 났다.

약육강식의 쟁투와 패권에 대한 야욕으로 무림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이 모두가 고창룡이라는 단 한 명의 패륜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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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의 변>

 

달마묵장처럼 전설신검도 현재 <리디북스> <원스토어> <미스터블루>등에 연재중인 작품입니다.

유료연재 작품이라 이 카테고리에서 전체를 연재하지는 못하고 대략 1권 분량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뒷 부분의 열람을 원하시면 상기의 플랫폼들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묘사와 설정에도 손을 봐서 연재한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와룡강 무협소설

 

                            전설신검-傳說神劒

 

재간(再刊)의 변

 

 

 

 

이번에 선보일 작품은 1990년에 전14<박스본>으로 출간했던 <기인연작(奇人連作)>입니다.

졸자 와룡강은 1982년부터 무협소설을 집필해왔으며 100 타이틀이 넘는 작품들 중에는 시리즈물, 즉 연작(連作)이 몇 작품 존재합니다.

<군마무 2부작> <십왕경-십왕무적> <대륙풍-대륙몽> <철혈기인-철혈무적> <고독천년-고독만리-고독무적> <금포영왕 2부작> <북두질풍록-무제질풍록>등이 그것입니다.

상기의 연작들은 모두 재간되어 다시 선을 보였었습니다.

다만 <기인 2부작>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체가 재간되지는 못했었습니다.

2000년에 제1<기인천년(奇人千年)><기인몽(奇人夢)>이란 제목으로 단행본 출간이 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2<기인무적(奇人無敵)>은 미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1, 2부를 합본한 온전한 기인연작을 <기인천년>이란 제목으로 재간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29년 전의 작품이며 가필(加筆)을 통해 출간 된 박스본 형태라 문장이 조야하고 구성이 거친 면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가필이란 단어의 뜻대로 원작에 보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시장의 수요와 출판사의 요구에 맞춰주다 보니 와룡강도 가필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와룡강이 스토리를 쓰고 다른 작가들이 문장을 완성하는 형태의 작업을 했지요.

데뷔 초기의 몇 작품과 시공사와 작업할 무렵에 출간된 몇몇 작품 들 외에는 대부분이 가필 작품이었습니다.

작품마다 문장이 다르다고 느끼셨다면 가필에 참가한 작가들의 필력과 필체가 원인일 것입니다.

이번에 재간을 진행하면서 최대한 문장을 다듬었으며 미진한 내용과 구성은 보완하였습니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글이지만 와룡강의 무협소설 계보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기에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9년 여름 와룡강 배

 

**********************************************************************

서장 1

 

              사신검(四神劒)의 전설

 

 

<신검(神劒)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

 

이같은 말이 무림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얻으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신묘한 검!

무림인들에게 신검이란 존재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지고(至高)의 동경이다.

신검은 한 자루의 검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신검은 모두 네 자루이며 그중 하나라도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된다고 한다.

 

-사신검(四神劒)!

 

무림인들은 네 자루의 신묘한 검을 사신검이라 부르며 꿈에도 잊지 못할 갈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자전(紫電)!

-규룡(叫龍)!

-흡혈(吸血)!

-복마(伏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사신검의 이름이다.

사신검은 금석(金石)을 무 베듯 한다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날카로움만으로 따진다면 사신검이 최강은 아닐 것이다. 간장(干將), 막야(莫耶), 거궐(巨闕), 전설 속 명검들의 예리함은 사신검에 못지않거나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검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전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사신검에 새겨져있다는 무공비결 때문이었다.

사신검의 검신에는 심오한 무공비결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을 연마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같은 사신검의 전설이 시작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림에는 네 명의 신비한 고수들이 돌연 나타나 패권다툼을 벌였었다.

 

-동룡(東龍)!

-서호(西虎)!

-남마(南魔)!

-북신(北神)!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불리는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무공으로 무림의 동서남북을 장악했다.

사방무신은 각자의 정복지에 가문을 세우고 무림을 사분하여 지배했다.

 

-사패천(四覇天)!

 

무림인들은 사방무신이 세운 가문을 사패천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사방무신들은 모두 검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애검이 바로 사신검이다.

무릇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고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는 것은 천고불변의 진리다.

헌데 당시의 무림에는 두 명도 아닌 네 명의 패주들이 존재했다.

사방무신 간의 충돌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방무신은 은밀한 곳에 모여 누가 최강인지를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그것이 바로 사방무신의 최후였음을...

모처로 떠난 사방무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백중의 실력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동귀어진 한 듯했다.

 

사방무신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숱한 무림인들이 사방무신의 대결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방무신이 최후를 마친 장소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후 가주를 잃은 사패천은 급격히 몰락하여 이윽고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소문이 무림에 퍼져나갔다. 사방무신의 애검들이 무림에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사신검에는 사방무신의 독문절기가 한 가지씩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신검이 모두 모이면 사방무신이 동귀어진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소문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신검은 간간이 무림에 나타났으며 검신에는 난해한 무공비결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사신검의 절기를 연마하여 무림의 패주가 된 사람은 없었다. 사신검을 얻으면 그 즉시 전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신검은 때때로 무림에 나타나 가공할 혈풍을 일으킨 후 다시 사라지곤 했다.

피는 공포를 부르고 공포는 외경을 낳았다.

사신검의 전설은 과장될 대로 과장되어 무림패주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다.

과연 사신검에 새겨진 절기들이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녔는지, 사신검을 얻으면 정말 무림의 패자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

 

이것이 사신검에 얽힌 전설이다.

바야흐로 사신검이 동시에 무림에 나타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신검의 출현은 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피를 요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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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waryonggang

 

와룡소

무협소설 작가 와룡강의 작업실입니다. 딴지나 비판은 사양합니다.

cafe.daum.net

2004년 부터 운영중인 나름 유서깊은(흐흐흐) 와룡강의 카페입니다.

방문하시면 와룡강의 작품들을 감상하실 수 있으며...

1만명이 넘는 회원님들과의 교유도 가능합니다.

들르셔서 함께 지난 시절을 추억해보시면 어떠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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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호출도

 

 

! 카캉!

강유의 목검과 타복의 목도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주로 타복의 목도가 공격하고 강유의 목검은 부드럽게 휘돌면서 타복의 공격을 막거나 휘감아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

카캉! 스악!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나 물러섬도 없이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하게 공방을 펼쳤다.

(... 너무 빨라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보이질 않아.)

분이는 눈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분이로서는 강유와 타복의 공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련님도 아버지도 다치지 말아야하는데...)

분이는 그저 물통에 달린 줄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가슴만 조일 뿐이었다.

하여간 볼수록 놀라운 녀석이오. 나도 붕정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치기까지는 십년이 넘게 걸렸는데...”

강조는 타복과 공방을 벌이는 강유를 보며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

반면 냉상영은 여전히 미간을 조금 모은 채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이에 강유와 타복의 대결은 정점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타복의 목도는 격렬하면서도 숱한 변화를 일으키며 강유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강유는 목검과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서 타복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오히려 역습을 가했다.

임기응변도 자연스럽고... 이제는 나로서도 더 가르칠 게 없는 것같소.”

강유가 능숙하게 타복을 상대하는 걸 보며 강조의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번쩍! 서걱!

그때 강유와 타복의 무기가 뒤엉키며 서로의 몸을 베었다.

목검과 목도에 묻은 먹물들이 두 사람이 걸친 흰 옷에 흔적을 남겼다.

일격을 주고받은 후 물러섰던 강유와 타복은 다시 서로에게 돌진하려고 했다.

그쳐라!”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강유와 타복은 즉시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오호단문도 칠십이식이 일순(一巡)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강조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타복은 순식간에 오호단문도의 모든 초식을 한 차례 구사했던 것이다.

헌데 멈춰서는 강유와 타복이 걸친 흰 옷 여기저기에는 먹물이 묻어있었다.

강유의 옷에는 주로 점이 찍혀있는 반면 타복의 옷에는 먹물 자국들이 길게 이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유는 목검을 두 손으로 든 채 타복에게 포권을 했다.

별 말씀을...”

타복도 목도를 내리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서로 상대방의 옷에 찍힌 먹물 자국의 숫자를 확인해라.”

예 아버지!”

...”

강조의 말에 강유와 타복은 동시에 대답하며 서로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흰 옷을 입고 무기에 먹물을 묻혔던 것은 승패를 판독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타복의 몸에는 모두 열 세 곳에 먹물 자국이 나있습니다.”

강유가 먼저 강조에게 말했다.

강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복을 보았다.

도련님의 몸에는 스물한 개의 자국이 났습니다.”

!”

타복의 말에 분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 대련에서는 타복이 이겼군.”

강조는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타복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실전에서라면 노복이 졌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가?”

강조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패배를 자인하는 걸까?)

분이도 의아해하며 타복을 바라보았다.

주인님께서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복이 도련님 몸에 남긴 먹물 자국은 그리 짙지도 길지도 않습니다.”

타복은 강유의 몸을 살펴보며 말했다.

, 실전이었다면 그냥 옷이 베어지거나 약간의 자상이 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반면 노복의 몸에 난 먹물자국들은 대부분 짙고 길뿐 아니라 치명적인 요혈(要穴) 근처에 나있습니다.”

타복은 말하면서 자기 몸에 난 먹물 자국들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아비의 설명을 들은 분이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개졌다.

언제부터인가 분이는 아비의 안위보다는 작은 주인의 성취를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한 분석이네.”

강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는 무도의 이치에도 부합하니 오늘 대련은 유가 이겼다.”

소자,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강조의 칭찬에 강유는 포권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복이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면...”

그만해라.”

강조가 손을 들어 강유의 말을 저지했다.

겸양도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되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강조의 지적에 강유는 머쓱해서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말씀이 맞아.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가 양보한 건 아니야.)

분이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타복의 실력은 당금의 무림을 통틀어 백대고수(百大高手) 안에 든다. 칠절의 한명으로 꼽히는 아비라 해도 타복을 쉽게 이기지는 못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강조의 말에 타복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타복과 호각으로 싸웠으니 무림에 나갈 자격이 있다.”

하오면...”

강유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혈기왕성한 다른 젊은이들처럼 강유도 인적이 드물고 외진 산중에서의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비의 심부름도 한 가지 할 겸, 안탕산을 내려갔다 오너라.”

강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강유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와 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 *

 

스윽! !

타복은 대련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당을 비로 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온 신경은 강유의 침실이 있는 왼쪽 모옥을 향해 있었다.

그 모옥 앞에는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가 울상을 지은 채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모옥 안에서는 냉상영이 먼 길 떠날 차림인 강유의 옷을 매만져 주고 있는 중이다.

 

너 혼자 강호에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매사에 조심해야만 한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지만 냉상영의 말에는 절절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강유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갔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혼자 집을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냉상영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고 아버지의 심부름만 하고 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느냐? 세상은... 특히 무림인들이 설치는 강호가 얼마나 험한 곳인데...”

냉상영은 강유의 상의를 매만져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늘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하고... 하여간 일을 보는 대로 지체없이 돌아와야만 한다.”

당부를 하며 냉상영은 곁눈질로 문 밖을 살폈다.

냉상영의 시야에는 분이만 보이고 타복과 강조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불안해하신다.)

강유가 바깥의 눈치를 살피는 냉상영의 모습을 낯설어할 때였다.

유야!”

곁눈질로 문 밖을 살피던 냉상영이 두 손으로 강유의 저고리를 잡고 몸을 바짝 접근시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예 어머니...”

심상치 않은 냉상영의 태도에 강유도 긴장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

냉상영이 극도로 긴장한 채 강유에게 속삭이려는데 문 밖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아니다.”

그러자 냉상영은 깜짝 놀라며 강유에게서 떨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문 밖에는 강조가 뒷짐을 짚은 채 서있다.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는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한 노파심이라 여기지 말고...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거라.”

냉상영은 억지로 웃으며 문밖의 강조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좀 이상하시구나.)

강유의 가슴 속에서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심려 끼쳐드리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만 나가자.”

...”

냉상영이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강유도 탁자에 올려놓은 검을 집어들고 그 뒤를 따랐다.

봇짐에 빠진 건 없지?”

밖으로 나온 냉상영은 남편 강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분이에게 물었다.

예 마님. 말씀하신 건 전부 챙겼어요.”

그럼 되었다. 뒷마무리는 분이 네가 하거라.”

냉상영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하며 분이와 강조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소요유거 가운데에 자리한 가장 큰 모옥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이 정말 심란하신 모양이네.)

분이가 돌아보는 사이에 냉상영은 모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긴 사랑하는 외아들이 난생 처음 혼자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님 속이 걱정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겠지.)

가운데 모옥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분이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준비 되었습니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강유가 허리띠에 고정한 검을 만지며 강조에게 말했다.

그럼 가자. 관도(官途) 근처까지는 아비가 함께 가주마.”

강조는 분이가 건네주는 봇짐을 받는 아들에게 말하며 돌아섰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분이는 안고 있던 봇짐을 강유에게 건네주며 울상 지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 강호래요. 한시도 긴장을 늦추시면 안돼요.”

걱정마라. 내가 누구냐?”

강유는 봇짐을 등에 비스듬히 걸치면서 웃었다.

무공뿐 아니라 지혜로도 칠절중 으뜸이신 소요신군님의 아들 아니더냐? 눈치와 임기응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도...”

강유가 어깨를 다독이며 안심을 시켰지만 분이는 여전히 울상을 지우지 못했다.

숭산(崇山)까지 다녀올 동안 어머니를 부탁하마. 외로워하지 않으시도록 자주 말 상대도 해드리고...”

집 걱정은 말고 도련님 몸이나 잘 챙기세요.”

강유의 당부에 분이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이 너만 믿는다.”

강유는 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돌아섰다.

그 사이에 마당을 가로질러 간 강조는 사립문 근처에 타복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타복은 다가오는 강유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 없는 동안 고생 좀 해줘요 타복.”

강유는 타복에게 포권을 한 후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곧 두 부자의 모습은 소요유거가 자리한 계곡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정말 별일 없겠죠 아버지?”

사립문쪽으로 나온 분이가 울상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복이 많은 분이다. 설령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전화위복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타복은 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가고 싶어. 도련님이 눈에서 보여야 안심이 될 테니...)

분이는 강유가 강조를 따라 사라진 계곡 입구를 보며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울먹이는 분이와 달리 타복의 눈빛은 스산해지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타복의 입가로 음산한 미소까지 서렸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좀 더... 좀 더 대범했어만 했다. 그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어둑한 방안을 서성이며 냉상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그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줬어야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 아이가 알도록...)

뒤늦은 후회가 냉상영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유는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후였다.

(제발... 부디 무사히 돌아오너라. 네게 해줄 이야기가 너무도 많으니...)

이제 냉상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하늘의 가호가 그 아이와 함께 하기를 빌 뿐이다.)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모으는 냉상영의 눈가로 물기가 서리고 있었다.

 

* * *

 

안탕산은 절강성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명산으로 이름났다는 것은 그만큼 험하다는 뜻도 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 험한 안탕산을 동네 뒷동산이라도 되는 듯 뒷짐을 쥔 채 여유롭게 걷고 있다.

천천히 걷는 것같지만 실제로 강조의 걸음은 흐르는 구름같다.

(역시 아버지의 경신술은 대단하구나.)

강유는 앞서가는 강조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쳐야만 했다.

(틈만 나면 안탕산을 누비고 다닌 덕분에 경신술은 나름대로 자부해왔지만... 산책하듯 걷는 아버지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뒷짐을 짚고 유유자적 걸어가는 강조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강유는 숨이 턱에 닿도록 힘을 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무림칠절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소요보법과 붕정검법만 완전히 익혀도 무림을 독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자신의 아버지의 무공에 감탄하던 강유는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관도까지 배웅해주시겠다더니 어째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강유는 점점 더 험해지는 주변의 산세를 곁눈질하며 의아해했다.

백여 리를 달려왔음에도 관도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익!

강유가 의아해할 때 강조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도 거친 숨을 고르며 강조의 뒤로 내려섰다.

두 부자가 멈춰선 곳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바위 봉우리 위였다.

강조와 강유가 달려온 쪽만이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봉우리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가 몇 그루 서있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인데...)

강조를 따라 봉우리 위로 올라선 강유는 자신이 낮선 곳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안탕산은 워낙 넓어 북()안탕산, ()안탕산, ()안탕산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철이 들 때부터 안탕산에서 살아온 강유도 못 가본 곳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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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지(絶地)의 수인(囚人)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허튼 수작이시오 교주.”

잠시 동요하는 것같던 제갈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영(娥英)이를 내세워 협박 해봤자 통하지 않소. 혈왕아(血王牙)를 내놓는다 해도 아내와 아영이가 무사할 리 없는데 미쳤다고 교주에게 굴복하겠소?”

귀면지존이 오랜 세월 제갈륜을 이곳에 가둬두고 고문을 해온 목적은 혈왕아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역시 만만치 않군.)

제갈륜의 냉소를 들은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라. 본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네 딸의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뿐이다.”

그러시다니 눈물 나게 고맙구려. 물론 눈알이 뽑힌 이런 몰골이라 눈물을 흘릴 수도 없지만...”

귀면지존의 회유를 제갈륜은 냉소로 받아넘겼다.

네 딸 아영이도 어느덧 열일곱 살이 되어간다. 막 피어나려는 꽃 봉우리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나이지.”

귀면지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딸이 다시 거론되자 제갈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한때 천하오대미인(天下五大美人)중 한명으로 불렸던 어미의 미모를 물려받아 아영이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녀로 자랐다.”

어디 밭만 좋다 뿐이오? 그 밭에 뿌려진 씨도 절세미남의 것이니 예쁠 수밖에...”

귀면지존의 수작에 제갈륜은 냉소로 응대했다.

네가 별호에 옥룡(玉龍)이 들어갈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던 것도 사실이지.”

귀면지존은 느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두 달 후면 아영이도 열일곱 살이 된다. 여자로서 절정의 시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요?”

제갈륜은 눈알이 뽑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귀면지존을 노려보았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귀면지존은 음험하게 웃었다.

부르르! 끼이!

제갈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어 쇠사슬로 하여금 쇳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아영이는 너무 어리고 애처로워서 두고 보기만 했으나... 열일곱 살을 넘기면 어엿한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귀면지존은 귀신 가면 속에서 야비하게 웃었다.

제갈륜은 그자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암시하는지 모를 리 없다.

헌데 제갈륜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흐흐흐! 제발 그러시구려.”

뭐라?”

제갈륜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귀면지존의 눈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복수할 능력이 없고, 또 당금의 하늘아래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죗값을 치르게 해줄 수 있는 인간도 거의 없을 것이오.”

제갈륜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늘이 인간들을 대신해 당신에게 벌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중인데... 당신이 아영이까지 욕보이면 그 죄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질 터! 당연히 하늘이 벌을 내리는 때도 가까워지지 않겠소?”

제갈륜의 어조가 점점 더 열기를 띠며 고조되어갔다.

반면 귀면지존의 눈빛은 차갑게 갈아 앉았다.

아영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소. 난 그저 내가 살아있을 때 당신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오. 크크크!”

끼이! 끼이!

제갈륜은 자신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흔들며 웃었다.

닥쳐라!”

!

그 직후 귀면지존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제갈륜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치치치!

제갈륜의 복부에서 살이 타는 역한 냄새와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제갈륜의 뱃속으로 깊이 파고 든 귀면지존의 손가락들이 화로에서 꺼낸 부젓가락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모든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제갈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떠냐? 창자가 익어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치치치!

귀면지존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제갈륜의 뱃속에 찔러 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잔인하게 웃었다.

... 고맙소 교주. 무료해서 지옥같던 참에 이런 여흥을 마련해주어서...”

제갈륜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여흥?”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교주도 한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혼자 갇혀있어 보시오. 그럼... 무료함이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제갈륜의 그 말에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교주가 자극을 해주니 내 몸뚱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구려.” “고맙고 고맙소이다.”

제갈륜은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껄껄 웃었다.

개소리는 적당히 해라.”

!

귀면지존은 제갈륜의 복부에서 거칠게 손가락을 뽑아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만... 다음번에는 좀 더 흥미진진한 여흥을 준비해서 찾아오겠다.”

배에 난 구멍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제갈륜을 노려보며 귀면지존은 이를 갈았다.

사랑하는 딸년이 눈앞에서 유린당하고 찢겨죽는 데도 지금처럼 태연한 척, 대범한 척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귀면지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자의 모습은 곧 먹물을 뿌려놓은 듯한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허억! 또 한 번... 또 한 번 고비를 넘겼구나.”

귀면지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갈륜은 참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날 찾아와다오 아이야.”

내장이 익어버린 듯한 고통에 떨면서 제갈륜은 이각(二刻; 30) 전쯤에 보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제갈륜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념(思念)을 수용해줄 대상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깊은 산중이라 인적이 드문데다가 간혹 그의 사념을 감지했던 인간들은 놀라 까무라치는 바람에 생각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마침내 제갈륜은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가 있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한()을 남기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

끼이! 끼이!

원한에 사무친 제갈륜이 몸을 떠는 대로 쇠사슬들이 부딪히며 대신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 * *

 

강유의 아버지 강조의 별호는 소요신군(逍遙神君)이다.

보법과 검법으로 명성을 날린 그는 무림칠절의 일인으로 꼽힌다.

 

당금의 무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신주이십팔숙(神州二十八宿)이란 인물들이다.

신주이십팔숙은 다시 일제(一帝), 이비(二秘), 삼기(三奇), 사신(四神),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로 구분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중 칠절에 속한다.

가전의 절기인 소요보법(逍遙步法)과 삼십육식 붕정검법(鵬程劍法)을 구사하는 강조는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덕분에 그는 젊은 나이에 소요신군이라는 비범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강조는 삼십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해버렸다.

사랑하는 아내 냉상영이 은원이 끊이지 않는 강호에서의 삶을 혐오한 탓도 있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제왕성(帝王城)!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을 지배해온 최대 최강의 세력이다.

강조는 바로 그 제왕성과 갈등을 빚었었다.

갈등의 원인은 무림인들을 대하는 제왕성의 폭압적인 처사였다.

제왕성은 자신들에게 맞서거나 반대하는 세력, 인간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제왕성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멸문을 당한 문파나 가문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강조는 몇 번인가 제왕성과 충돌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강조 혼자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세력 제왕성과 맞서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결국 강조는 아내의 애원도 있고 해서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무림을 떠난 강조는 절강성(浙江省)의 명산인 안탕산(雁蕩山)의 깊은 곳에 소요유거(逍遙幽居)라는 띠집을 짓고 유유자적해왔다.

 

* * *

 

해가 제법 높이 솟았다.

소요유거의 마당에서는 강유와 타복이 대련을 하고 있다.

목검(木劒)과 목도(木刀)를 써서 대련하는 두 사람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소요유거를 이루고 있는 세 채의 건물 중 가장 큰 모옥 앞에는 일남일녀가 의자에 앉아서 강유와 타복의 대련을 보고 있다.

강조와 냉상영 부부다.

냉상영에게서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는 타복의 딸 분이가 서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작은 주인의 대련을 보고 있는 분이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하나 들고 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타복이 일방적으로 강유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빗발치듯 날아드는 타복의 목도를 강유는 보법을 펼쳐 피하고 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한가로워 보이는 그 보법이 강씨 집안의 비전절기인 소요보법이다.

스악! !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타복의 목도가 움직일 때마다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일어난다.

타복은 곱사등이임에도 키가 육척에 이른다.

만일 등이 곧게 펴져있다면 칠척을 훌쩍 넘는 장신일 것이다.

타복의 몸은 불구답지 않게 건장하며 특히 양팔은 굵고 길다.

그 강인하고 긴 팔을 써서 휘둘러지는 타복의 목도는 진짜 칼에 못지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 조심하세요 도련님!)

물통에 달린 굵은 끈을 움켜쥔 분이의 양 손 손등에 핏줄이 생긴다.

종횡으로 긋고 찌르고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급소를 노리며 들이닥치는 타복의 목도는 무공을 모르는 분이가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요보법으로 피하고 있지만 강유의 얼굴도 어느덧 땀으로 흠씬 젖어들고 있다.

몇 번인가는 타복의 목도가 강유의 몸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뻔했다.

(아버지도 좀 적당히 하시지...)

그걸 보며 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전인 듯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강유를 공격하는 타복이 못내 미운 분이였다.

부인이 보기에 유의 보법이 어떤 것같소?”

강조는 타복과 대련하는 강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일초무학(一招無學)인 제게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냉상영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냉상영은 정이 그리 많은 성격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 강유에게조차 엄한 것을 넘어 매몰차게 대할 때가 많은 냉상영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냉상영은 종의 딸인 분이는 살갑게 대해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강유가 아니라 분이를 냉상영의 자식으로 여길 정도다.

그래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워 보이는군요. 억지로 꾸며서 보법을 펼치는 것같지는 않고...”

남편의 질문에 너무 성의 없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냉상영이 마지못해 평을 추가했다.

잘 보셨소. 우리 강씨가문의 절기인 소요보법은 소요(逍遙;여유롭게 거님)라는 이름 그대로 자연스러움이 생명이오.”

강조는 타복의 격렬한 공격을 여유있게 피하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무림의 오대보법(五大步法)중 하나이기도 한 소요보법을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가 있소. , 소요보법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유를 무림에 내보내도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오.”

“...”

남편의 말에도 냉상영은 미간을 조금 모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 스슥!

그 즉시 강유와 타복은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소요보법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붕정검법으로 타복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상대해봐라.”

!”

아버지의 말에 강유는 목검을 든 채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먹물을 준비해라.”

강조가 아내 옆쪽에 서있는 분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주인님.”

분이는 즉시 대답하며 강유와 타복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만든 물통을 두 손으로 든 채...

여기 있어요.”

분이가 강유와 타복에게 내미는 물통에는 먹물이 절반 정도 들어있다.

수고한다.”

첨벙!

강유는 목검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며 분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별 말씀을요.”

강유의 미소를 접한 분이의 얼굴이 와락 달아올랐다.

그걸 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강조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지만 냉상영의 미간은 찡그려졌다.

타복도 미간을 조금 모으며 목도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었다.

다시 꺼낸 타복의 목도는 끝 쪽이 한 뼘 정도로 검게 물들었다.

강유도 분이가 들고 있는 물통에서 목검을 뽑았는데 역시 앞쪽의 한 뼘 정도가 검게 변해있었다.

분이 넌 방해되지 않게 멀리 물러나 있어라.”

후두둑!

타복은 목도를 털어서 너무 많이 묻은 먹물을 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

분이가 대답하며 물러서는 사이에 강유도 목검을 흔들어 먹물을 털어내었다.

준비를 마친 강유와 타복은 일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대치했다.

강유는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양팔을 거의 수평으로 벌려 새가 날개를 편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타복은 목도를 상단으로 겨누며 강유와 마주 섰다.

그럼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복.”

양팔을 펼친 강유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몸짓으로 타복에게 다가섰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노복(奴僕)도 전력을 기울일 테니...”

타복도 상단으로 겨눈 목도를 강유에게 겨눈 채 흔들며 마주 다가섰다.

쩍적! !

다음 순간 타복은 호랑이가 앞발로 사냥감을 내려치듯 격렬하게 목도를 내리그었다.

방향과 각도를 각기 달리하며 순간적으로 십여 차례 그어지는 타복의 칼질은 상대가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타복의 독문절기인 오호단문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섯 호랑이가 모든 문을 막아선다는 이름에 어울리는 맹렬한 도법이다.

하지만 강유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스악!

오히려 그는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검을 찌르고 걷어 올렸다.

경쾌한 보법과 함께 펼쳐지는 강유의 검법은 마치 독수리가 날고뛰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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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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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한 방문객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 것으로 생각했다.

새벽이 멀지 않은 깊은 밤중, 강유(姜諭)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있었다.

츠으...

칠흑같이 어두운 천장 귀퉁이에 한 쌍의 푸른빛이 떠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눈...)

강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푸른빛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슈욱!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때 한 쌍의 푸른빛은 천장 귀퉁이를 떠나 강유에게 내려왔다.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은 그것들 뒤로 두 가닥의 푸른 띠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 정말 사람의 눈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한 쌍의 푸른빛을 올려다보며 강유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뒤쪽으로 투명한 끈이 이어진 한 쌍의 눈은 강유의 얼굴 바로 위에 이르러 눈동자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유를 살펴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욱!

이윽고 탐색을 마친 한 쌍의 눈이 강유의 두 눈을 향해 내려왔다.

으아아악!”

푸른빛을 띤 그것들이 자신의 동공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강유는 비명을 질렀다.

 

* * *

 

“...!”

강조(姜祚)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들 강유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벌떡 일어나는 강조 옆에서 아내 냉상영(冷霜英)도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한다.

염몽(厭夢;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오. 내가 가서 살펴볼 테니 당신은 더 자도록 하시오.”

강조는 아내를 안심시키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드디어 나 제갈륜(諸葛崙)과 영혼의 파장이 일치하는 인간을 찾아내었다.>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제갈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강유는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 쌍의 눈이 동공으로 스며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부젓가락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끄윽! !”

입에서는 죽어가는 짐승의 그것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온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펄떡거린다.

푸르면서 투명한 끈 같은 것들이 강유의 눈에서 빠져나와 천장 귀퉁이와 이어져 있었다.

 

* * *

 

강조는 옷을 대충 걸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새벽이 멀지 않았지만 아직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품()자형으로 서있는 세 채의 모옥(茅屋) 중 왼쪽 모옥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강조의 시야에 들어왔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등이 곱사등이인 인물이다.

타복(駝僕)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곱사등이는 강조의 하인이다.

타복 역시 강유가 지른 비명을 듣고 잠이 깬 듯 했다.

주인님...”

타복은 허리띠를 매며 다가오는 강조에게 고개를 숙였다.

늘 하던 잠꼬대인가?”

강조는 아들의 침실 문을 보며 타복에게 물었다.

강유의 나이는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요란하게 성장몽(成長夢)을 꾸곤 한다.

그렇다 생각했는데... 오늘 밤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타복도 강유의 침실 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강조는 눈을 조금 치뜨며 강유의 침실 문으로 다가갔다.

 

* * *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덕분에 천의(天意)가 존재함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천의 운운 하는 것이 강유에게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끄윽... ...”

하지만 강유는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눈알이 후벼 파이는 것같아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이제 너를 만났으니 나의 오랜 한도 풀릴 수가...>

 

유야!”

강유의 머릿속을 울리던 속삭임은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강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몇 달 간 출타했다가 이틀 전에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다.

 

<방해꾼이 끼어들었군.>

 

무슨 일이냐? 괜찮은 것이냐?”

머릿속의 속삭임과 강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 아버지! 그게...”

강유가 꽉 막혀 있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히며 말하려 할 때였다.

 

<명심해라. 네가 나와 접촉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

 

슈우...

속삭임과 함께 강유의 동공으로 스며들었던 한 쌍의 푸른 눈이 빠져나갔다.

!

단단하게 막혀있던 병마개가 뽑히는 듯한 소리가 강유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끄윽!”

한 쌍의 푸른 눈이 동공을 통해 빠져나가는 충격에 퍼덕이는 강유의 귀로 속삭임이 이어졌다.

 

<동북방(東北方) 오십여 리쯤에 깊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라.>

 

스으!

그 속삭임을 끝으로 한 쌍의 푸른 눈은 다시 천장 귀퉁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동북방 오십여 리쯤의 계곡...)

강유가 푸른 눈동자의 속삭임을 되새길 때였다.

들어가겠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강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아버지!”

강유는 나무토막같이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열린 문을 통해서 마당에 타복이 서있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방으로 들어온 강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 아들에게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유는 푸른 눈동자가 한 말을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으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 온전히 속일 수는 없다.)

강유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가위눌림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저곳에서 사람의 눈 같은 것이 나타났었습니다.”

강유는 천장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의 눈 같은 것?”

강조의 시선이 아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데...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한동안 소자를 살펴보다가 사라졌습니다.”

특기할만한 다른 현상은 없었고?”

강조는 천장 귀퉁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눈 모양의 그 빛들이 말까지 건넸다는 얘긴 할 필요 없겠지.)

강유는 아버지를 속인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

공자께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하셨다. 아마 염몽을 꾼 영향으로 헛것을 본 듯하니 잊어버리도록 해라.”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본 강조는 문쪽으로 돌아섰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도록 해라.”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여전히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선 강유는 방을 나서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

!

강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주었다.

(아버지가 눈치채실까봐 조마조마했다.)

다시 혼자가 된 강유는 가슴 쓸어내렸다.

(하지만 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괴상한 눈이 동북방 오십여 리쯤에 있는 계곡으로 찾아오라고 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털썩!

강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왠지 말씀드리면 안될 것같은 느낌이 든 때문인데... 나중에라도 자백하면 용서해주시겠지.)

눈을 감은 강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꿈의 일부인 듯 느껴지는 강유였다.

 

* * *

 

도련님은 괜찮으신지요?”

아들 방의 문을 닫아주는 강조의 안색을 살피며 타복이 물었다.

다 큰 놈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위에 눌린 모양이네.”

몸은 제법 자랐지만 아직 어른이라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험한 꿈을 꿨으면 놀랐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타복은 작은 주인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긴 하네만... 저 녀석이 염몽을 꾼 원인이 주변에 삿된 것이 있어서일 수도 있네. 잠이 깬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 자네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게.”

타복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강조는 계곡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다녀오십시오.”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겠네.”

휘익!

강조는 타복의 배웅을 받으며 몸을 날렸다.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던 강조는 바람처럼 계곡 밖으로 날아갔다.

타복이 주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덜컹!

세 채의 모옥 중 오른쪽 모옥의 문이 열리며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한밤중인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밖으로 나온 것은 열여섯, 일곱 살쯤 된 소녀였다.

잠옷 위에 겉옷 대신 담요를 두른 유순한 인상의 이 소녀는 타복의 딸이다.

이름이 분이인 타복의 딸은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잃어 주인마님인 냉상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사연도 있어서 비록 주종지간이지만 강유와 분이는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분이 너야말로 왜 이 밤중에 깨어났느냐?”

타복은 딸이 나온 모옥으로 다가갔다.

제가 잠귀 밝은 거 아시잖아요. 밖에서 두런두런 거리는데 잘 수가 있어야죠.”

분이는 쫑알거리며 담요의 앞자락을 끌어 모았다.

도련님이 가위에 눌리셨던 모양이다. 다시 잠자리에 드신 것같으니 그만 들어가자.”

타복은 딸이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도 참, 나이가 몇인데 가위에 눌리신담.”

분이도 강유의 침실 쪽을 향해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남 말하지 마라. 가끔 자지러지는 잠꼬대를 해서 아비를 놀라게 하는 주제에...”

저야 아직 한창 자라는 나이니까 그렇죠 뭐.”

타복의 타박에 분이는 샐쭉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처럼 내가 같이 자 주면 도련님이 가위에 눌릴 때마다 돌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방문을 닫으며 곁눈질로 강유의 침실 쪽 보는 분이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유와 분이는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잤었다.

하지만 강유의 목젖이 도드라지면서 어른들은 둘이 함께 자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어쩔 수 없이 내외를 하게 되었지만 분이의 꿈은 언제까지라도 강유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천한 종년 주제에 언감생심이지만...)

문을 닫는 분이의 입에서 아비 몰래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새벽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어둠은 전부 걷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한낮에도 햇빛이 닿지 못하는 깊고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다.

마치 저승으로 내려가는 입구인 듯한 계곡 끝에는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끼이! 끼이!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의 막다른 곳에 한명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다.

부러진 팔 다리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잃었고 눈알이 뽑혀 퀭한, 눈이 있던 자리에서는 누런 고름이 흘러나온다.

오랜 세월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온 사내의 육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이만도 못하다.

하지만 목숨은 실로 질긴 것이어서 사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쌔액! 쌔액!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사내의 쇠약해진 가슴이 숨을 쉬기 위해 힘겹게 기복을 일으킨다.

끼이! 끼이!

그때마다 사내의 몸을 벽에 매달고 있는 쇠사슬이 조금씩 움직이며 쇳소리를 낸다.

이런 이런...”

문득 힘없이 떨구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조금 들려지며 입이었던 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를 고문해온 자는 그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 혀는 자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는 손가락과 발가락, 심지어 양물까지 잘려나간 몸으로도 말은 할 수 있다.

존귀하신 마교(魔敎)의 교주(敎主)께서 오랜만에 친히 발걸음을 해주셨소이다 그려.”

사내는 눈알이 뽑혀서 시커먼 구멍이 된 눈으로 앞을 보며 웃었다.

“...!”

사내의 앞쪽 어둠 속에 누군가 서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마귀 형상의 가면을 얼굴에 쓴 인물이다.

제갈륜(諸葛崙)... 너 요즘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어둠과 동화되어 서있던 마귀 가면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번뜩였다.

꿍꿍이라...”

제갈륜이라 불린 사내는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시오 귀면지존(鬼面至尊) 나으리! 십수 년 째 죽은 것보다도 못한 몰골로 갇혀있는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무림칠절(武林七絶)중 한명이며 천고기재라 불리던 신안옥룡(神眼玉龍)께서 찍소리 한번 못 내보고 인생을 마감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귀면지존이란 자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 무공이 아닌 술법(術法)을 쓴다든지...”

귀면지존의 눈이 마귀 가면 속에서 번득였다.

날 떠보려고 해도 소용없소이다 교주.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제갈륜은 비웃음으로 귀면지존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 치고... 제법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족 소식을 전해주지.”

귀면지존은 화제를 바꿨다.

움찔!

그러자 제갈륜의 얼굴에 경련이 스치면서 웃음기도 사라졌다.

늙어가는 마누라야 관심 없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 대해서는 독심장부인 너라 해도 완전히 무심할 수만은 없겠지?”

귀면지존이 쓰고 있는 가면 속에서 악의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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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묵장(達磨墨掌)

 

 

 

 

서장

 

 

 

 

달마(達磨)는 시기하는 자들에게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혔다.

삼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를 만났다.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있던 달마는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달마혜(達磨鞋)의 전설이다.

하지만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 검은색 팔 하나가 신발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검은색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그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달마의 관에 가죽신 한 짝만이 남아있었다고 알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가 남긴 검은색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가 남긴 정체 모를 팔 하나가 수백 년의 세월동안 강호 무림을 뒤흔들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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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혀()와 검()의 합작

 

 

끼끼끼!

어디선가 미미한 금속성이 들렸다.

츠으으! 스스스!

그러자 아름드리 물푸레나무와 수양버들이 주변을 가리고 있는 연못이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녁 짓는 연기처럼 피어오른 그 안개는 삽시에 연못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그긍! 촤아아!

뒤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연못 속에서 석탑(石塔) 하나가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보천검문 후원에 자리한 고룡지(古龍池)라는 이름의 이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다.

고룡지는 보천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항간에는 오래 된 용이 산다고 전해진다.

그 고룡지의 수면 위로 치솟은 석탑은 나선형으로 뒤틀려 있어서 산양의 뿔을 연상케 한다.

높이 오장(五丈;15미터) 정도인 석탑은 아래위로 분리된 두 개의 큰 바위를 겹쳐서 만든 것이었다.

그그긍!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석탑의 윗부분이 맷돌처럼 한 바퀴 돌아갔다.

그러자 석탑의 아래 부분에 건장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휘익!

연못가에 서있던 보천검객 양시우가 먼저 몸을 날렸다.

스윽!

장광유설 주대곤도 발끝으로 땅을 찍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경신술의 달인이라는 무림의 평판대로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주대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시우의 등에 닿을 듯 말듯 바짝 따라붙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끼끼끼!

주대곤의 뒤쪽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동굴 입구가 사라져 버렸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동굴 안은 먹물 속인 듯 깜깜하여 눈앞에 댄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렵지 않은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양시우가 교묘하게 손을 놀려 주대곤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손목에 자리한 맥문은 주요한 사혈(死穴)중 하나다. 약하게 누르면 사지가 마비되는 정도지만 강하게 누르면 명줄이 끊어진다.

맥문을 잡힌 순간 주대곤은 흠칫했으나 이내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입만 조심하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이다.”

완전히 밀폐된 이곳에서는 빠른 발도 소용없다.

마음만 먹으면 양시우가 주대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다.

그러나 주대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양시우도 그를 죽여 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다.

주대곤이야말로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

슬그머니 주대곤의 맥문을 놓아준 양시우가 화섭자로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지자 드러난 것은 넓이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정방형의 작은 석실이었다.

한데 석실 벽에는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검무(劒舞)를 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선이 굵고 거칠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사면에 각기 하나씩 그려져서 네 가지의 모습으로 검무를 추는 사람은 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간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검술의 비결(秘訣)이다!)

검술을 익힌 바는 없지만 주대곤은 석벽의 그림들이 세상에 보기 드문 절세적인 검법의 이치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대곤은 자신도 모르게 힐끗 양시우를 쳐다보았다.

양시우는 주대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 그림들은 내 보천검법(補天劒法)의 모체가 되는 것일세. 노부는 수십 년을 연구하고도 겨우 십육 식의 보천검법을 만들어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가 보고 알 수 있을 것같으면 보아도 무방하네.”

너 따위는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에 숨은 깊은 뜻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대곤은 등골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양시우가 자신의 무공의 연원이 되는 곳으로 데려와 검법의 도해(圖解)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양시우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인 일왕일협삼괴칠절(一王一俠三怪七絶)에는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십사 세의 젊은 나이에 보천검문을 세웠을 뿐 아니라, 보천검법이라는 검법을 창안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양시우의 무공이 일왕(一王), 일협(一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삼괴(三怪), 칠절(七絶)과 비교하면 그리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주대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비밀이 양시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양시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한다면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주대곤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목숨을 판돈으로 놓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세.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타협을 해보도록 하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하는 양시우의 말에 주대곤은 웃으며 대답했다.

문주께 이런 대범한 면이 있으시기에 소생이 굳이 삼괴도 칠절도 아닌 문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노부가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이야기하게.”

양시우가 귀찮다는 듯이 주대곤의 말을 딱 잘랐다.

주대곤도 양시우와 마주 앉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문주께선 북두문(北斗門)이란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금시초문이네.”

양시우는 자신의 견문이 짧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이곳 고룡지에서 기연을 만나 수련에 매진해왔다.

보천검법을 창안하고 수련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무림에 대한 양시우의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대곤이 거론한 북두문은 무림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전설 속의 문파다.

양시우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생은 어렸을 때 은사(恩師)로부터 북두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중 대충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주대곤은 자신을 가르쳤던 사부 은일우사(隱逸羽士)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대곤의 사부 은일우사는 무림에서 명망이 드높은 현자(賢者)였다.

주대곤이 거친 무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부인 은일우사의 음덕 덕분인지도 모른다.

은일우사는 주대곤이 팔구 세 정도 되었을 때 북두문이라는 문파와 관련된 고사를 이야기 해주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황제(皇帝)의 신분을 버리고 서장(西藏)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가서 승려가 된 인물이 있었다.

 

-석경당(石敬瑭)!

 

오대십국(五代十國)중 후진(後晉)의 시조인 석경당이 바로 그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재위 칠년 만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결심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의 아들, 즉 조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달랍궁을 찾아가 출가했던 것이다.

그후 이십여 년 동안 석경당은 포달랍궁의 진산절예를 모두 익힌 후 중원으로 돌아왔다.

헌데 그는 중원으로 오기 전에 포달랍궁의 당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들이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을까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석경당이 다시 중원 땅을 밟았을 때, 포달랍궁에는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으로 돌아온 석경당은 황제였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승(魔僧)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리고는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열 두 개의 비밀문파와 열 네 개의 명문대파를 방문하여 모두 굴복시켰다.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 아니 마승 석경당이 벌인 그 일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삼십육 개의 문파들이 겪은 수모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네.”

양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승 석경당이 일으켰던 풍파는 워낙 유명해서 견문이 얕은 양시우도 알고 있었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숭산(崇山)에 모여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고 문파의 보전을 빌어야만 했다지?”

그렇소이다. 마승 석경당은 숭산에 무림성궁(武林聖宮)을 짓고 무림황제(武林皇帝)가 되고자 했었소이다. 한데...”

주대곤의 말이 이어졌다.

 

삼십육문파 수뇌들의 무릎을 꿇려 기고만장하던 마승 석경당은 그 직후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었다.

양시우가 알고 있는 고사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림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 후의 내막은 이러했다.

마승 석경당이 무림황제로 등극하려는 현장에 그때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한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신비노인은 단 일장(一掌)에 마승 석경당을 쓰러트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마승 석경당은 그대로 달아나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그 신비노인에게 북두호천패(北斗護天牌), <북두칠성이 하늘의 도리를 지켰다.>라는 뜻을 지닌 영패를 만들어 바치면서 한 가지 서약을 했소이다.”

주대곤은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양시우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북두호천패를 지닌 사람에게는 한 해에 단 한 번,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비록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파가 멸문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

양시우는 극도의 놀라움과 흥분으로 침묵했다.

강호 무림의 기둥인 삼십육문파에 대해 일 년에 단 한 차례일망정 생사여탈(生死與奪)과도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북두호천패...!

그것을 지닌다는 게 무림의 지존(至尊)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본 적도 없는 북두호천패가 양시우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승 석경당을 물리치고 북두호천패를 얻었던 노인은 북두문이라는 문파의 당시 문주였던 북두노조(北斗老祖)였소이다.”

주대곤은 양시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 무림에서 일왕(一王)으로 불리는 금포염왕 조천영은 바로 그 북두문의 당대문주이외다.”

“...!”

양시우는 가슴을 둔기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금포염왕이란 그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온 순간 양시우의 몸은 마치 돌처럼 굳어져 버리는 듯했다.

 

금포염왕...!

수십 년 간 무림을 굴러다니면서도 애써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그와 부딪힐 만한 언행 하나조차 감히 범하지 못했던 양시우다.

자신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이나 무림삼괴(武林三怪)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다가도 금포염왕에 생각이 이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금포염왕의 일초를 받아낸 인물이 있었던가?

금포염왕의 손아래에서 목숨을 건진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과 맞섰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이란 말에는 절대(絶對)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한 것이 아니던가?

그 금포염왕이 바로 북두문의 당대 문주였던 것이다. 무림황제를 꿈꿨던 마승 석경당을 단장(單掌)으로 물리친 북두노조의 후손인...

양시우는 금포염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더욱 더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일곱 층으로 쌓여있는 산, 바로 그 산에서 소생은 북두문의 표기를 발견했소이다. 북두문의 힘은 그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주대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양시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 삼십육문파 중 어느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당시의 비사를 그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양시우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발했다.

스승으로부터 들었다지만 그것만으로 자네 말을 믿기가 어렵네. 자네는 원래 입으로 사는 사람이니...”

주대곤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생의 은사이셨던 은일우사께서는 삼십육문파 중 문선곡(文仙谷)의 곡주였소이다.”

그랬군. 자네의 경신술이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생각했었지.”

양시우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문선곡이라면 지금은 그 명맥(命脈)조차 흐릿해져 버렸지만 기관진식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예의 달인들만이 살고 있던 특이한 문파였다.

양시우가 주대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손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굳게 잡혔다.

()와 검(), 지혜와 힘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일기 시작한 풍운의 서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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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옷을 입은 염라대왕

 

 

-금포염왕(錦袍閻王) 조천영(趙天永)!

 

무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錦袍)을 즐겨 입어 금포염왕이라 불리는 그의 시대는 어느덧 이십 년을 넘겼다.

금포염왕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맞설 상대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고수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목숨을 부지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비록 마도(魔道)에 속하진 않지만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는 인물이 금포염왕인 것이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이라는 별호에 걸 맞는 금포염왕의 폭압(暴壓) 아래 무림은 숨죽인 평화를 이어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힘을 기르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금포염왕의 시대를 끝내고 자신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야망에 찬 인물들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첩첩산중(疊疊山中)이 아니라 층층산상(層層山上)이라니...!”

산을 넘고 또 넘어가야 한다면 첩첩산중이겠지요. 하지만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면 층층산상이라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르다 했는가? 말인즉 맞는 말이네만... 그런 산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가?”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는 보천검객(補天劒客) 양시우(楊翅祐)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매만졌다.

양시우 앞에 공수(拱手)한 채 서있는 문사차림의 깡마른 중년인은 긴장으로 입이 마르는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른 후 힘주어 말했다.

소생이 직접 확인한 사실이외다.”

듣고 있던 양시우는 고개를 설래 저었다.

산이 무슨 시루떡도 아닐 터, 켜켜이 쌓인 산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자네 말은 믿을 수가 없군.”

양시우의 말에 중년문사의 표정이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믿으십시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 산은 존재하외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그 위치까지 말할 수 있소이다.”

중년문사는 초조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양시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문사를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양시우의 보천검문(補天劒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한다.

양시우가 태사의에 앉으면서 팔걸이 끝에 설치된 손잡이를 살짝 돌렸던 그 순간부터 보천검문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되어있는 것이다.

양시우 앞에 서있는 삐쩍 마른 중년문사는 입으로 빌어먹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장광유설(長廣溜舌) 주대곤(朱岱崑)이란 인물이었다.

주대곤은 비록 무공은 별 볼 일 없으나,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달변과 재빠른 발,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빠른 눈치로 살아가는 자였다.

(장광유설 주대곤! 무림을 통틀어도 네놈보다 입심이 센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겁먹은 듯한 그 표정마저도 네 공력(功力)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네놈의 치명적인 실수다.)

양시우는 염두를 굴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층층 뭔가 하는 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 없네. 노부는 한가롭게 같잖은 이야기나 들어줄 처지가 못 되니 그만 가보시게.”

노골적인 축객령(逐客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대곤은 양시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관심 없으시오?”

(이 작자가...)

양시우의 눈으로 얼핏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우는 속에서 불끈 치솟는 살의를 꾹 눌러 참았다.

주선생 나가신다. 정중히 모셔라.”

양시우는 주대곤이 강호의 소문과는 달리 당돌한 데가 있는 놈이라 생각하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어 큰 걸음으로 대전의 문쪽으로 걸어가며 양시우는 희미한 냉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무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본래 입만 살아있는 놈들이야 가둬놓고 족치면 금방 다 불게 마련이지.)

양시우는 주대곤의 말투와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어떤 것을 알고 있음을 느꼈었다.

기름칠한 미꾸라지같은 주대곤을 요리하자면 먼저 김이 좀 빠지게 한 후 잡아 가둬야한다.

주대곤이 다른 재주는 없어도 경신술 하나는 무림에서 일류 가는 인물이니 경솔히 다루면 놓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양시우가 대전을 나가려 하자 주대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의 뒷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양시우가 막 대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될 기회도 마다하는군.”

주대곤의 냉랭한 음성이 양시우의 귓전을 때렸다.

순간 양시우는 벼락에 맞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천하제일!

 

()을 공부하는 자는 삼십 년을 배워도 글을 안다고 자부하지 못하지만 무()를 배운 자치고 삼 년이면 천하제일이 아닌 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무예를 배운 자는 하나같이 천하제일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가 있어 감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자부할 수 있단 말인가?

당금의 무림에는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까지 불리는 금포염왕이 존재하는데...

넘을 수 없는 벽!

극복할 수 없는 좌절!

무림인들에게 금포염왕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천하제일인은 여전히 모든 무림인들의 소망이며 궁극의 목표라 할 수 있다.

물론 보천검객 양시우도 예외는 아니다.

주대곤이 내뱉은 <천하제일>이란 한마디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떨려오는 양시우였다.

양시우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주대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월에 찌든 눈동자 속에 피어오르는 야망마저 감출 수는 없다.

야망은 감추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숨어있었고, 숨어있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주대곤은 양시우의 웃자라버린 그 야망을 노리고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

“...!”

양시우와 주대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치열하게 부딪혔다.

주대곤도 더 이상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세객(說客)이 아니었다.

그 또한 야망을 깊숙이 감춘 불타는 눈을 가진 자였다.

이윽고 양시우가 뇌까리듯이 내뱉었다.

장소를 옮겨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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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금포염왕 -錦袍閻王

 

                                             제1

 

 

서장

 

 

 

 

!

부엌칼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뒤로 나뒹구는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임청우(林靑牛)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퍼억!

간발의 차이로 임청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부엌칼은 마당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 둥치에 깊이 박혔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임청우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퍼억!

또 한 자루의 부엌칼이 임청우가 처음 나뒹굴었던 바닥에 박혔다.

이번에도 반응이 조금만 늦었으면 큰 사단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달군 철판 위의 콩처럼 튀어 오르며 임청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리 닥쳐!”

어둑한 부엌에서 임단심(林丹心)이 악을 쓰며 뛰어나왔다.

병이 깊어 초췌한 얼굴에 산발까지 한 여자가 부엌칼을 들고 뛰쳐나오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면서도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었다.

(정말 날 죽이시려는구나.)

임청우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신을 모질게 대해오긴 했었다.

악담과 저주, 매질과 학대가 없었던 날은 임청우의 기억에 단 하루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한 손찌검은 당하지 않았었다.

헌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핏발 선 눈과 온몸에서 뿜어내는 독기는 임단심이 살의(殺意)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주받을 악귀의 새끼야! 너 같은 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해!”

임단심은 부엌칼을 휘두르며 임청우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임단심의 무공은 일류고수라는 말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반면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어가지만 임청우는 무공다운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어머니는 절기를 여러 가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들인 임청우에게는 단 한 가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일류고수인 임단심이 죽일 작정을 했다면 임청우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임청우는 체념하며 뒷걸음질을 멈췄다.

어머니가 죽이려든다면 죽어드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은 임청우가 죽을 날이 아니었던 듯 했다.

!”

콰당탕!

아들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임단심이 왈칵 피를 토하며 나뒹군 때문이다.

임단심은 아주 오래 전, 원수의 독수에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 상처는 뿌리가 깊고 악독하여 어떤 영약으로도 완치되지 않았다.

헌데 겨우 다스려놨던 그 상처가 격한 감정의 폭발로 인해 도져버렸던 것이다.

끄윽! !”

부엌 앞의 마당에 나뒹군 임단심은 손으로 흙바닥을 긁으며 연신 피를 게워냈다.

어머니...”

임청우는 급히 임단심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임청우는 몇 발 떼지 못하고 몸이 굳어졌다.

피를 게워내면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눈이 새파란 살기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진정하시고 몸을 돌보세요.”

꺼져라!”

걱정하는 임청우의 말을 임단심은 차갑게 끊었다.

더 이상... 단 한시도 네놈의 상판을 보고 싶지 않다.”

임단심은 억지로 일어나 앉으며 내뱉었다.

오늘 안으로 짐을 챙겨 떠나라. 만일 자정이 지나서도 내 눈에 뜨인다면...”

아들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얼굴에서는 추호의 모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내손으로 토막 쳐 버릴 것이다.”

어머니의 모진 말을 들으며 임청우는 가슴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자신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는 것을 절감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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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의 목록입니다.

 

           武俠小說 執筆日誌() 단행본

 

1; 사대천왕(四大天王) <전3권>

2; 사련오맹(四聯五盟)

3; 천년무벌(千年武閥)

4; 흑룡왕(黑龍王)

5; 화룡왕(火龍王)

6; 해룡왕(海龍王)

7; 혈룡왕(血龍王)

8; 무림기병(武林奇兵)

9; 사황마존(邪皇魔尊)

10; 도수무영(盜帥無影)

11; 고독사랑(孤獨死狼)

12; 마면신협(魔面神俠)

13; 혈무연(血霧淵)

14; 폭풍세가(暴風世家)

15; 탄검강호(彈劍江湖)

16; 천왕팔가(天王八家)

17; 신마팔황(神魔八荒)

18; 패왕투(覇王鬪)

19; 혈해등룡(血海騰龍)

20; 촉루혈(燭淚血)

21; 자객혈(刺客血) <전4권>

22; 마제열전(魔帝列傳) <전3권>

23; 탑마생사화(塔魔生死花)

24; 종횡사해(縱橫四海)

25; 유아독존(唯我獨尊)

26; 환신(幻神)

27; 신행마동(神行魔童)

28; 영웅산맥(英雄山脈)

29;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30; 역천항로(逆天航路)

31; 패왕전승(覇王傳承)

32; 무영신화(無影神話)

33; 백면투신(白面鬪神)

34; 무명신협(無名神俠)

35; 풍류몽(風流夢)

36; 마왕투(魔王鬪)

37; 존(尊)

38; 황(皇)

39; 패(覇)

40; 전황(戰皇)

41; 철인(鐵人)

42; 천외천(天外天)

43; 용왕투(龍王鬪)

44; 무적혼(無敵魂)

45; 철혈혼(鐵血魂)

46; 천인혈(千人血)

47; 초인행(超人行)

48; 금포염왕(錦袍閻王) 제1부 <전4권>

49; 적붕왕(赤鵬王) <전3권>

50; 호화지존(護花至尊)

51; 군림몽(君臨夢)

52; 철환교(鐵環轎)

53; 대혈하(大血河)

54; 초혼무(招魂舞) <전4권>

55; 호협도(豪俠道) <전3권>

56; 철혈시대(鐵血時代)

57; 기상천외(奇想天外)

58; 철왕투(鐵王鬪)

59; 무적시대(無敵時代)

60; 열혈시대(熱血時代)

61; 혈왕겁(血王劫)

62; 흑도백도(黑道白道)

63; 금포염왕(錦袍閻王) 제2부 <전4권>

64; 지옥교(地獄橋) <전3권>

65; 몽환시대(夢幻時代)

66; 사신검(四神劍)

67; 질풍록(疾風錄) 제1부

68; 질풍록(疾風錄) 제2부

69; 폭풍시대(暴風時代)

70; 강호야화(江湖夜話)

71; 고검추애기(孤劍追愛記)

72; 사신겁(邪神劫)

73; 지백천년(至白千年)

74; 강호두목(江湖頭目)

75; 만인루(萬人淚)

76; 백왕경(百王經)

77; 낭인맹(浪人盟)

78; 흑백강호(黑白江湖)

79; 강호전선(江湖戰線)

80; 고독천년(孤獨千年) 제1부

81; 팔혼번(八魂幡)

82; 화왕시대(花王時代)

83; 벽공일월(碧空一月)

84; 고독천년(孤獨千年) 제2부

85; 고독천년(孤獨千年) 제3부

86; 강호천년(江湖千年)

87; 기인몽(奇人夢)

88; 마도겁(魔刀劫)

89; 탐화랑객(探花浪客)

90; 군마무(群魔舞) 제1부

91; 생사지존(生死至尊)

92; 군마무(群魔舞) 제2부

93; 도(刀)

94; 쾌도난마(快刀亂魔)

95; 천방지축(天房地築)

96; 연정무한(戀情無限)

97; 기정무한(奇情無限)

98; 독행무한(獨行無限)

99; 저주마경(詛呪魔經)

100; 몽정무림(夢征武林)

101; 다정독왕(多情毒王) 제1부

102; 엽기도사(獵奇道士)

103; 대마일대기(大馬一代記)

104; 흑백염라(黑白閻羅)

105; 불루(不淚)

106; 래도(來盜)

107; 절대고수(絶代高手)

108; 환골탈태(換骨奪胎) <전8권>

109; 삼절지존(三絶至尊) <전4권>

110; 나한대협(羅漢大俠) <전5권>

111; 패왕독보(覇王獨步) <전6권>

112; 대륙독보(大陸獨步) <전6권>

113; 지존독보(至尊獨步) <전5권>

 

단행본 출판은 지존독보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웹 전용으로 집필중이며 그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고독천년(전8권)>

<북두무맥(전8권)>

<전설신검(전14권)>

<달마묵장(전10권)>

<무림일기(전11권)>

<제2천마(연재 중)>

 

상기의 작품들은 카카오페이지, 문피아, 원스토오, 리디북스, 미스터불루, 판무림등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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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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