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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한 화살

 

 

작은 분지 형태인 선녀곡에는 주황색 노을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녀곡 끝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모옥이 한 채 서있다. 지난 십칠 년 간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살아온 집이다.

모옥은 잘 가꿔진 채마밭과 화단이 감싸고 있다.

“...!”

선녀곡으로 들어서던 고검추의 눈이 치떠졌다. 모옥의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보인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타탁!

고검추는 반가운 마음에 모옥을 향해 달려갔다.

고검추는 경신술을 쓸 줄 몰라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고검추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몸속의 기운이 잘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만 수련하게 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진기토납술을 수련해온 덕분에 고검추는 무공을 쓸 줄 몰라도 온몸의 경맥은 막힘없이 뚫려있다.

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고검추의 질문에 당혜선은 즉답은 피했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당혜선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가르치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고검추는 그날 이후로 무공을 가르쳐달라 조르지 않았다.

비록 무공은 쓸 줄 몰라도 고검추의 뜀박질은 아주 빠르다.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 몸을 무리하게 써도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

삼십여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여 모옥 근처에 이른 고검추의 몸이 갑자기 멈춰졌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난장판이 된 모옥 내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방안의 집기들은 다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다. 어떤 자가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은 듯한 정황이다.

(그자 짓이었을까?)

고검추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다가 화들 짝 놀라 달아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대체 무얼 노리고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인가?)

고검추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고검추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화살!

마치 피를 칠한 듯 검붉은 화살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어지?)

핏빛 화살을 본 고검추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세히 보니 화살의 깃에는 검은색으로 글이 한자씩 적혀 있었다.

<()>자와 <()>자였다.

"초혼(招魂)? 혼백을 부른다?"

화살 깃에 적힌 글을 확인한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고검추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익!

놀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 내렸다. 촌부(村婦)처럼 피부는 가무잡잡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각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다.

비록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겼지만 이 여인을 본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가고 말 것이다. 여인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풍만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여인의 몸에는 검소한 마의가 걸쳐져 있다.

물론 수수한 그 차림새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진 못한다.

 

-당혜선

 

여인은 바로 고검추의 어머니인 당혜선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등에 짊어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호의 여걸이다.

돌아오셨군요 어머니!”

고검추는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색했다. 흑모철웅을 추살하러 떠났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검추와 달리 당혜선은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문에 박혀있는 핏빛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핏빛 화살을 살펴본 당혜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의에 감싸인 탄력 넘치는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화살이 무엇인데 어머니가 저토록 놀라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화살은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있었느냐?"

당혜선이 굳어진 표정으로 고검추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

고검추는 당혜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악랄한 무리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당혜선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무리들이라니... 누구 말씀인지요?"

의아해진 고검추가 물었다.

"이 화살의 이름은 초혼전(招魂箭)으로 사신각이라는 청부살수조직의 표기다."

당혜선은 화살을 노려보며 설명했다.

사신각...”

고검추는 사신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섬뜩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혼전에는 백일취(白日臭)라는 것이 묻어있다. 이름 그대로 냄새가 백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약물이다. 일단 백일취가 몸에 묻으면 최소 백일간은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당혜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후 서둘러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나무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왔다. 가로 세로 일곱 치 정도에 두께는 한 치가 채 안되는 납작한 상자다.

고검추는 그 나무상자를 오늘 처음 본다. 나무상자는 벽 틈에 설치 된 교묘한 공간에 숨겨져 있어서 침입자가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당혜선은 들고 나온 나무상자를 고검추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본 고검추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신각의 초혼전이 발동된 이상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혜선은 말하면서 고검추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고검추의 키는 어느덧 당혜선보다 커졌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검추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들었다.

".. 어머니...!"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안긴 고검추가 당황할 때였다.

휘익!

다 큰 아들을 두 팔로 안아든 당혜선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무공은 역시 대단하구나.)

당혜선의 품에 안겨 날아가며 고검추는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던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검에 간단히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당혜선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각이 그만큼 무서운 조직이라는 것을 고검추는 깨닫고 있었다.

 

***

 

틀림없느냐?”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부릅떠졌다.

... 분명 그 늙은이였습니다.”

사신각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는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나타났던 바로 그자다.

산적이 아닐까 했던 고검추의 추측과 달리 그자는 사신각 소속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 팔이 하나 없어졌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있긴 했지만... 본각의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는 대()늙은이의 용모파기와 일치했습니다.”

사내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살수 주제에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늙은이가 십구 년 전에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혼잣말을 하는 사신각주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역력히 묻어있다. 그만큼 그자가 떠올린 인물은 공포스러운 존재다.

기련산에 들어온 후 열 명 가까운 형제들이 점호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신각주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사신각의 자객들은 지령이 떨어지면 그 복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늙은이를 만나서 불귀의 객이 되었겠군.”

사신각주는 복면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대늙은이는 본각이 십칠 년 전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우릴 따라서 기련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대늙은이의 느닷없는 출현을 설명할 수 없겠지.”

복면인의 말에 사신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대늙은이는 정확한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형제들은 대늙은이에게 사로잡히는 즉시 입 속에 숨겨놓은 독을 깨물어서 비밀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사신각의 살수들은 입속에 독을 숨기고 있다가 임무에 실패하면 터트려서 자결을 한다. 살인청부를 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팔(鄭八) 저놈을 잡지도 않고 살려 보낸 건 잡아봤자 자결할 걸 알아서였겠군.”

사신각주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힐끔 보았다.

대늙은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당가년에 대한 추격은 중지하는 게 어떨지...”

복면인이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혜선의 거처에 초혼전을 남겨뒀다고 했지?”

사신각주는 복면인에게 대꾸하는 대신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각주님.”

긴장한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신각주의 눈치를 살폈다.

본각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가년은 즉시 기련산을 벗어나 종적을 감춰버릴 게 분명하다.”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희번덕였다.

이번에도 당가년을 놓치면 지난 몇 년간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기필코 잡아야만 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각주가 결정을 내리면 따라야만 한다.

기련산에 들어온 본각의 전력 절반을 대늙은이의 행방을 찾는데 투입하라. 그 늙은이를 발견하는 즉시 십리적(十里笛)을 써서 보고하고!”

사신각주가 지시를 내렸다.

존명!”

휘휙! !

일제히 대답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호사다마라더니...”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마천루의 떨거지들이 기련산 일대에 출몰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늘... 저 세상에 가있을 줄 알았던 무서운 노괴까지 우리 사신각의 뒤를 캐고 있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신각주의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늙은이의 눈에 띠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지만... 이제 와서 당가년의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년을 잡아야만 복마신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사신각주는 길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최대한 빨리 당가년을 찾아내 사로잡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휘익!

결의를 굳힌 사신각주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쐐액!

고검추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검추를 두 팔로 안은 당혜선은 기련산의 험한 산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당혜선이 달리는 속도는 어떤 산짐승보다도 빠르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고검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고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던 고검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홱홱 변하는 주변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십자단맥검을 쓴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고검추를 안고 달리며 당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 전, 당혜선은 납치당한 등삼낭을 구하기 위해 철웅채로 쳐들어갔었다.

철웅채의 채주이며 기련산 일대에서 최강자로 꼽히던 흑모철웅은 당혜선에게 패해 달아났었다.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다준 후 당혜선은 흑모철웅을 추격했다. 살려둘 경우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 전, 당혜선은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흑모철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흑모철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철피공을 익힌 그자의 몸뚱이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은 비장의 절기를 써야만 했다.

그 절기가 바로 십자단맥검이었다.

십자단맥검은 금강불괴라도 베어버리는 위력을 지녔다. 흑모철웅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해도 십자단맥검을 견디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단맥검에 치명상을 입은 흑모철웅은 높은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에 빠져 실종되었다.

당혜선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흑모철웅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는 워낙 거칠어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오일 동안 격류를 따라 내려가며 샅샅이 뒤졌지면 흑모철웅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팽가촌으로 돌아와 보니 사신각의 초혼전이 집의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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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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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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