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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내 아들이 아니다!

 

 

"으음!"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당혜선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머니...!"

고검추는 안도하며 당혜선의 무참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죽지 않았다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품에 안긴 채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주르르!

당혜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배어 눈 꼬리를 타고 좌우로 흘러내렸다.

"흐윽... 추아야."

당혜선은 오열하며 고검추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고검추도 분노와 회한에 오열을 느끼며 당혜선을 끌어안았다.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무참한 만행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고검추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두 모자의 뜨거운 오열은 어두워지는 청룡탄 위를 서럽게 물들였다.

 

***

 

“역시 생각한 대로다!”

사신각주의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그자는 만행이 벌어졌던 단애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었다. 거리는 대략 삼리 정도다.

“아랫놈들이 수집해온 첩보에 의하면 당가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놈의 성이 고씨인 걸 보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 당가년이 사람들 눈을 피해 고창룡과 붙어먹었다가 생긴 놈일 테고...”

사신각주는 삼리 쯤 떨어진 단애 위를 노려보며 흥분에 휩싸였다.

밤이고 제법 거리가 멀지만 사신각주의 눈에는 고검추와 당혜선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창룡의 아들까지 낳았다면 당가년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흐흐흐!”

사신각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가년이 아무리 독해도 복마신검을 아들의 목숨과 바꾸진 못할 것이다!”

사신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자는 당혜선이 아들을 데리고 선녀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당혜선의 아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혜선을 고문한 후 초혼전으로 죽인 척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당혜선이 죽어가는 걸 보면 숨어있던 당혜선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각주의 예상대로 마침내 고검추가 숨어있던 은밀한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검추를 잡아서 협박하면 독하기 이를 데 없던 당혜선도 어쩔 수 없이 복마신검의 행방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사신검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사신각주는 득의하며 단애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 사신각주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삐익! 삑!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새 울음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신각주의 귀에는 새가 우는 것같은 그 소리들에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다.

“대늙은이가 서남쪽에서 급속 접근중... 일백을 셀 정도의 시간 안에 내가 있는 이곳까지 도착할 예정...”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들을 해석하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때문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가공할 인물이 급속 접근중이다.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인물의 눈에 포착되어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당연히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를 생포할 시간 따위는 없다.

“똥물에 빠져 죽을 늙은이...”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서남쪽을 돌아보았다.

삐익! 삑!

새 우는 것같은 피리소리들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멀리고 허떤 인물이 한 가닥 유성처럼 날아오는 게 보인다.

“대늙은이!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팟!

사신각주는 저주를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사신검 중 하나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포기해야만 한다.

속이 너무도 쓰리고 쓰린 사신각주였다.

곧 사신각주의 모습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단애 위에서는 한 차례 격정의 물결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알몸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당혜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고검추는 무릎을 꿇고 당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는 사실...”

당혜선은 내적인 갈등이 심한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당혜선은 본론을 꺼냈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고검추는 하마터면 기함(氣陷)할 뻔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은 생모(生母)가 아니다."

당혜선의 말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고검추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귀가 멍멍해지고 주변 사물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듯했다.

이제껏 유일한 피붙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혜선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당혜선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검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내게는 인중지룡인 사형이 한 분 계셨다. 너는 바로 그 분의 아들이다."

"어... 어머니의 사형 되시는 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고검추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헉헉 대며 물었다.

당혜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의 성함은 고창룡... 무림인들은 그 분에게 철사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다. 그만큼 의지견정하고 용맹한 분이셨지."

"고... 고창룡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검추는 온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혜선은 흠칫했다.

"어... 어디서 그 분의 성함을 들은 적이 있느냐?"

"저녁 무렵에 옥여상이란 분을 만났었습니다."

고검추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옥여상!"

당혜선의 안색이 일변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만큼 옥여상이란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분을 아십니까?"

당혜선이 놀라는 모습을 본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무림인 된 자 치고 희세의 마녀 은발마희(銀髮魔姬) 옥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혜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부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놀라는 고검추에게 당혜선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설명해주었다.

"옥여상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들인 우내팔강(宇內八强)의 일인이며 마도 무림의 맹주격인 마천루(魔天樓)라는 문파의 지존이기도 하다."

"아!"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옥여상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사람에 들며 또 거칠고 사나운 마도 무림을 다스리는 마천루라는 문파의 주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은발마희 옥여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림인들은 사색이 된다.

그녀는 냉혹 비정한 성정을 지녀서 눈에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나이는 비록 삼십대이지만 그녀와 겨룰 수 있는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채 안된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하신 분인데... 사실은 마녀같은 존재였구나.)

고검추는 인간 세상의 존재같지 않았던 옥여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옥여상에게 은발의 마희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혜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옥여상이 왜 고검추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게 대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검추였다.

"그 마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더냐?"

당혜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검추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자에게 고창룡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으음..."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당혜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마음 속에서 격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당혜선은 결심한 듯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어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낙망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검추는 고개를 숙였다.

생모로 믿어온 당혜선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매, 즉 사고(師姑)로 변한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아버지시고 어미에게는 사형되시는 그 분은 아주 악독한 음모에 희생당해 돌아가셨다."

당혜선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철사자 고창룡에 연루된 그 치욕스런 비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인 다정관음 능벽운을 능욕한 일, 그 직후에 죄책감을 느껴 자결한 일등을...

 

-날수비연(辣手霜娥)

 

이것이 당혜선의 별호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인 그녀도 호천무맹의 맹주 십자검존의 제자였다.

호천무맹에서 사천당문이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독과 암기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사천당문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검존은 사천당문이 호천무맹에 헌신한 보답으로 당씨일족의 여식인 당혜선을 제자로 삼아준 것이다.

당혜선과 고창룡 외에도 십자검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당혜선이 고검추로 하여금 찾아가라고 했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이다.

당혜선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대사형인 고창룡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당혜선은 고창룡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었다.

잘 생겼고 다정다감하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고창룡이었다.

그런 그를 지척에서 보고 자랐으면서 반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혜선에게는 불운하게도 고창룡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누이동생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당혜선은 혼자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대사형 고창룡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려군(代麗君)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여인은 신분과 출신내력 모두가 비밀에 싸여 있었다.

분명한 것은 대려군이 대단한 미모와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고창룡과 대려군은 우연히 마주쳤으며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당혜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속내를 감추고 사형 부부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고창룡과 대려군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긴 해도 대려군의 고고한 기품과 다정한 마음씨에 반한 당혜선은 그녀를 친언니같이 여겼다.

호천무맹의 사람들 몰래 고창룡과 대려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당혜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혜선 자신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기거했다. 언젠가는 사형이 자신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벋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세 남녀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윽고 대려군은 고창룡과의 사랑의 결실을 잉태하였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대려군이 임신한 지 팔 개월 째 되던 때였다.

고창룡이 갑자기 미쳐서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한 후 자결한 것이다.

그 일은 당혜선에게는 물론 대려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난륜을 전해들은 대려군은 극도의 상심에 빠졌으며 그 충격으로 두 달 빨리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그 사내아이는 물론 고검추였다.

 

<세상 모든 사내를 저주하겠다!>

 

대려군은 출산한 직후 그같은 저주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핏덩이인 아들까지 내팽개친 채...

당혜선은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고검추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검추가 대사형 고창룡의 아들임이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호천무맹을 떠나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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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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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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