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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반지

 

 

 

제왕성에 경사가 생긴 것은 십팔 년 만이다.

소성주 모용준(慕容俊)이 배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왕성 섭씨일족은 자손이 귀하다.

삼대(三代)가 거푸 외아들로 이어져 올 정도였다.

당대 성주인 철면제왕 섭장천도 자식 복이 없었다. 본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첩을 뒀지만 후손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본처가 병으로 죽자 섭장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었다.

섭장천의 두 번째 아내 주영청(朱永淸)은 황제의 누이였다.

주영청은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가 다음해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었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쓸쓸히 지내는 누이를 보다 못해 재가를 권유했다.

이에 주영청은 다른 좋은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할아버지뻘인 섭장천에게 시집을 왔었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 온 다음 해에 늙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 섭무궁(葉無窮)의 돌 잔칫날에 비극이 벌어졌다.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 달마묵장을 노리고 제왕성에 잠입했다가 주영청을 살해하고 섭무궁을 납치해간 것이다.

그날 이후 제왕성에서는 웃음이 끊겼다.

섭장천은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성격도 모질고 괴팍해져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관대하고 정의롭던 제왕성이 포악한 패도(覇道)의 집단이 된 것도 십팔 년 전의 그 비극이 벌어진 이후부터였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무림을 지배해온 제왕성은 어느덧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두려움과 증오의 악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십여 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면지존에게 납치당한 섭무궁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섭장천의 나이는 칠순을 넘어버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양자를 들여 제왕성의 대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섭장천의 결단으로 덕을 본 행운아가 바로 모용준이다.

모용준은 하남성에 근거를 둔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였다.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는 제법 기침 꽤나 하지만 무림 전체로 놓고 보면 딱히 특출 날 것도 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모용세가가 내세울만 자랑거리가 한 가지는 있었다.

전전대의 안주인이 철면제왕 섭장천의 먼 친척 누이였다는 게 그것이다.

섭장천은 생판 남보다는 그래도 약간의 피가 섞인 모용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용준은 핏줄 덕분에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서 일약 무림의 패자인 제왕성의 소성주가 된 것이다.

바로 그가 내일 혼례를 올릴 예정이다.

 

* * *

 

(이런 허접 쓰레기를 예물이라고 내놓다니...)

진상파(陳祥芭)는 치밀어 오르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제왕성의 내()총관 구숙정(具淑貞)이 가져온 패물함의 내용물이 그녀를 기막히게 만든 것이다.

 

내일 모용준과 혼례를 올릴 예정인 진상파는 황금성(黃金城)의 성주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제왕성이라면 대륙의 상계(商界)는 황금성이 장악하고 있다.

황금성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실조차도 황금성의 눈치를 본다고 할 정도다.

올해 나이 스무 살인 진상파는 바로 그 황금성의 성주다.

전대 성주였던 새석숭(賽石崇) 진보륜(陳寶輪)이 돌연사하면서 외동딸인 진상파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전대 성주의 유일한 핏줄이라 황금성을 물려받긴 했으나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상파를 몰아내고 황금성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인척들이 호시탐탐 진상파의 자리를 노려왔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제왕성의 무력이라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진상파는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이 패물들이 황금성의 주인이신 소저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왕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 구숙정은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패물함의 패물들은 질과 양에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영청공주(永淸公主)님께서 제왕성으로 시집오실 때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구숙정은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나이지만 구숙정은 여전히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구숙정에게는 구미호리(九尾狐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별호가 붙어있다.

성주님께서 다음 대 제왕성의 안주인이 되실 소저에게 친히 내리신 것이니 소중하게 다뤄주시길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패물함을 진상파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주님께는 총관이 나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진상파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제왕성에 왔지만 진상파는 아직 성주인 섭장천을 접견하진 못했다.

소저의 말씀은 그대로 성주님께 전해드리지요. 내일 있을 혼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열려있는 문 밖에는 여자답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여자 무사들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거구의 여자들은 진상파의 전속 호위들인 백팔금차(百八金叉)들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약물로 단련된 그녀들의 몸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백팔금차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단 한시도 신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백팔금차들 덕분에 진상파는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팔금자들은 구숙정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년...)

백팔금차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영빈관(迎賓館)을 나서는 구숙정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진상파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가 구숙정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그 상판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제왕성의 진짜 안주인이 누군지 알게 될 테고...)

독기를 품고 영빈관을 떠나는 구숙정의 뒤에서 백팔금차들이 방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방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 패물들이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주제라도 아니 다행이네.”

진상파는 코웃음 치며 패물함의 내용물들을 흘겨보았다.

세공(細工)은 고리타분하고 보석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관리 상태까지 엉망이고...”

진상파는 패물들을 건성으로 뒤적였다.

물론 패물함의 패물들이 값어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들은 아니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제법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품질을 지닌 보물들만 보며 자라온 진상파의 눈에는 한 없이 허접하게만 보였다.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면 뭐해? 이 패물들을 다 팔아봐야 내가 끼고 있는 반지 하나 값도 안 나올 텐데...”

패물들을 뒤적이는 진상파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두 씨만한 금강석이 박힌 그 반지를 팔면 수만 평의 옥토(沃土)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왕성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니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만...”

냉소하던 진상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패물을 뒤적이던 진상파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쑥 끼워졌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저절로 끼워진 그 반지를 살펴보았다.

용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반지인데 재질은 은이며 용의 눈 부위에는 콩알보다도 작은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다.

하다하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진상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쌍룡패미(雙龍敗尾)!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삼키는 세공이라니... 황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면서 어쩜 이토록 조잡할 수가 있지?”

진상파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재질은 은(), 용의 눈이라고 박아 넣은 건 질 낮은 홍옥(紅玉), 잘 춰줘야 은자 백냥 정도 나갈 이따위 싸구려 반지까지 패물이라고 내놓아? 황금성의 성주인 날 엿 먹여도 유분수지.”

진상파는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뽑아내려했다.

헌데 반지는 의외로 꽉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끼워질 때는 어째서 그리 쉽게 끼워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개 다 속을 썩이네.”

오만상을 쓰며 반지를 뽑으려던 진상파의 손이 멈칫, 멈춰졌다.

말해!”

진상파는 왼손으로 반지를 만지면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모용준은 저녁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진상파의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들이라는데 그다지 질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뭉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였다.

여자는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는데 엄청난 거구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 몸매를 지니고 있다.

얼굴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이 거녀(巨女)의 이름은 철관음(鐵觀音)이다.

진상파의 수신 호위들인 백팔금차의 수령이 바로 그녀다.

백팔금차의 수령답게 철관음의 무공은 심후하여 신주이십팔숙중 오왕, 육패, 칠절에 필적할 정도다.

내일 혼례를 앞둔 인간이 악우(惡友)들과 어울리고 있다?”

철관음의 보고를 받은 진상파는 이를 바득 갈았다.

철관음은 진상파의 지시로 제왕성의 소성주 모용준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계집들도 있겠지?”

진상파는 철관음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철관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언니 잘못은 아니니까.”

!

진상파는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 타당!

패물이 들어있던 패물함이 탁자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상파는 황금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에 매진해온 탓에 무공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진상파의 무공 수준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정색하고 화를 내면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타고난 기질과 위엄이 남다른 탓이다.

... 환락가로 유명한 양주(揚州)에서 창기(娼妓)들을 여럿 불러와 놀고 있습니다.”

철관음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요충지 양주는 환락가로 유명하다.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북경과 금릉을 제외하면 창기로 이름난 네 고장이 있고 그중 한 곳이 양주다.

양주의 창기들은 양주수마(揚州瘦馬)라 불린다.

양주수마에 비견되는 유명한 창기들로는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仙娘), 태산고자(泰山姑子)가 있다.

양주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모용준은 그래서 양주로부터 창기들을 조달해왔을 것이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도 태산고자라는 이름의 특별한 창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산고자는 매춘을 하는 도고(道姑)들이다.

아무리 대담한 모용준이라 해도 음란한 도고들을 제왕성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다니들까지 끼고 농탕(弄蕩)을 치고 있다 이거지?”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에 이를 바득 갈았다.

진상파는 당연히 남편이 될 모용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모용준은 섭씨일족의 피가 조금 흐른다는 이유로 운 좋게 제왕성의 후계자가 된 행운아일 뿐이다.

성격은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밝혔다.

그저 출신 배경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내가 모용준인 것이다.

모용준이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진상파는 자세히 알고 있다.

모용준의 악행과 엽색에 관한 보고서의 지면이 백장을 넘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은 황금성 성주로서의 지위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도덕군자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앞둔 작자가 창기들까지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제왕성 내의 계집들을 끼고 놀면 뒷말이 생길 것같으니까 밖에서 창기들을 조달한 듯합니다.”

찰관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앞장서!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진상파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상파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철관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행실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와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창녀들을 집에 끌어들여?”

!

진상파는 거칠게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놔야만 해!)

진상파는 이를 부득 갈며 영빈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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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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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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