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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두무랑(北斗武廊), 천하제일인을 만드는 복도

 

 

표운봉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안개의 벽을 빠져나온 임청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청우가 들어선 곳은 계곡의 막다른 곳인데 아주 높은 안개의 벽이 반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다.

(내가 통과한 안개의 벽은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의해 형성된 게 틀림없다. 안개 속에서 배회하던 기괴한 존재들도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 테고... 만일 뿔 달린 작은 뱀이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절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안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을 살펴보았다.

삼십여 장쯤 앞쪽에는 얼마나 높은지 정상 부분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서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그 절벽은 마침 서쪽 멀리에서 비치는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는 <北斗武廊>이라는 사람크기 만한 글씨들이 옛날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북두무랑(北斗武廊)...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무예의 복도라는 뜻인데...“

임청우는 절벽에 세로로 새겨진 큰 글씨들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북두홀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북두무랑이라는 글과 북두홀이 관련이 있는 기분이 든다.

쉬쉭!

그 사이에도 임청우를 인도한 금관혈린사는 절벽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금관혈린사를 따라가던 임청우는 절벽 아래쪽에 두 개의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륙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뚫려있는 그것들은 멀리서 봐도 천연동굴은 아니다. 동굴 입구가 원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월동문을 방불케 한다.

그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앞쪽 바닥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널려있었다. 앉거나 누운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은 얼추 보기에도 백여 개나 된다.

(시체!)

헌데 절벽으로 다가가던 임청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각상들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시체였기 때문이다.

앉고 누운 시체들은 모습이 다양할 뿐 아니라 죽은 시기도 제각각으로 보였다.

이끼로 뒤덮여 진짜 조각상처럼 보이는 해골이 있는가 하면 아직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도 있다.

육탈(肉脫)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아서 살이 붙어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나 몸이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빠져 죽은 사람들일까?)

임청우는 곁눈질로 시체들을 훔쳐보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산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시체나 해골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거의 백여 구의 시체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임청우는 각가지 형상을 한 시체들 사이를 지나 두 개의 동굴이 뚫려있는 절벽 아래쪽에 이르렀다.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중 왼쪽 것의 위쪽에는 <>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동굴 위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과 출()... 왼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오라는 뜻인데... 주화입마에 걸려 죽은듯한 시체들도 그렇고... 여긴 어떤 무림 문파의 성지인 모양이다!)

두 개의 월동문을 살펴보며 임청우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이런 걸 기연(奇緣)이라고 하나? 잘하면 절세의 무공비결을 얻어 무림인이 될 수도 있겠다!)

임청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입()자가 새겨진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갔다.

금관혈린사는 왼쪽 월동문 입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놈은 임청우를 여기까지 안내한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 여기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는 금관혈린사를 지나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가니 문 옆의 매끈한 벽에 글이 여러 자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북두무랑이란 곳을 통과하기 전에 읽어야하는 안내문인가?”

임청우는 가까이 다가가 글들을 읽어 보았다

 

<고금 이래 존재한 거의 모든 무공을 연구한 후 최악의 난제(難題)들만을 모아 북두무랑에 남긴다. 북두무랑을 통과하며 노부가 남긴 난제들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능히 세상을 굽어볼 수 있으리라.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

 

그리 길지 않은 글의 내용이다.

풍화된 상태로 보아 글이 새겨진 후 수백 년의 세월은 족히 흐른 것같다.

북두무제 섭장홍... 북두무랑을 조영한 분인 것같은데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임청우는 북두무제 섭정홍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다.

철이 든 이래 어머니와 단 둘이 외진 산중에서 살아온 탓에 무림에 대한 임청우의 견문은 일천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북두무제 섭장홍은 성당(盛唐) 시절의 인물이다.

아득한 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견문도 일천한 임청우가 알 리 없다.

무공과 관련된 최악의 난제들만을 모아놨다면 나같은 일초무학(一招無學)은 기웃거릴 곳이 못된다.”

내심 기연을 기대했던 임청우는 실망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다.

그런 그에게 무림 역사상 최고 난이도의 문제들이라면 전혀 쓸모가 없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시체들은 북두무제께서 남긴 무학의 난제들을 풀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희생자들이겠구나.)

임청우는 절벽 아래 널려있는 시체들의 사인이 무언지 짐작이 갔다.

북두무랑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임청우는 용기를 냈다.

(나같은 일초무학이 난해한 무학비결을 접한다고 주화입마에 빠질 리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

임청우는 긴장하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수가...!”

헌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선 직후 임청우의 눈이 충격과 분노로 부릅떠졌다.

 

북두무랑은 말굽자석이나 말의 편자 형태로 절벽을 파서 만든 복도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천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빛이 나는 구슬들이 박혀있어 그리 어둡지 않다.

전체 길이가 오십여 장인 말굽 형태의 복도 벽에는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었다.

헌데 그 글들을 누군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서 훼손시켜버렸다.

... 어떤 자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북두무제라는 분께서 남긴 무학비결들을 전부 훼손해버렸잖아!”

임청우는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가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복도에 새겨져 있던 글들은 철저하게 훼손되어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북두무제가 남긴 무학비결을 보길 원치 않은 누군가의 짓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북두무랑은 죽었다. 북두무랑이 죽어버렸으니 북두무랑을 바탕으로 세워졌을 문파도 절맥(切脈)되었다고 봐야한다.”

임청우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며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 판독이 가능한 글이 남아있을까 했던 임청우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두무랑의 무학비결을 훼손한 자의 만행은 실로 철저해서 단 한자의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임청우는 글자 대신 그림을 한 폭 발견할 수 있었다.

북두무랑의 가장 안쪽, 입구 쪽의 복도가 일단 끝나는 곳에 그 그림이 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부분의 벽은 전체가 칠흑같이 검은 옥(黑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색은 검지만 유리처럼 투명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흑옥이다.

높이 일장 남짓에 길이는 삼장이 넘는 흑옥의 벽에는 밝은 점들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 점들은 표면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흑옥 안쪽에서 반짝이는 이물질들이었다.

새카만 흑옥 안쪽에 박힌 채 반짝이는 그 이물질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 같다.

박혀있는 깊이와 밝기도 제각각이라 실제 밤하늘처럼 입체감이 느껴진다.

흑옥의 벽은 높고도 길어서 그 앞에 서면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 때문에 흑옥의 벽을 마주 보고 있자니 임청우는 마치 자신이 새카만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이건 천상열차분야도(天上列次分野圖).)

흑옥의 벽을 살펴보던 임청우는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다.

무질서하게 찍혀있는 점들 중에서 비교적 밝게 빛나는 점들이 눈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점들은 천문도경(天文圖經)이란 책에서 본 별자리의 그림이다.

천상열차분야도는 하늘의 형상을 분야별로 그린 천문도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옥석에 저절로 천상열차분야도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걸까?)

임청우는 놀라움에 휩싸인 채 흑옥에 박혀있는 별자리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흑옥의 벽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임청우는 다시 한 번 전율했다.

흑옥의 벽 정중앙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천상열차분야도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유달리 밝아서 놓칠 수가 없다.

헌데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회전할 때 중심축이 되는 북극성(北極星) 자리에 별 대신 길쭉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그 홈의 아래쪽은 평평하고 위쪽은 마름모꼴이다.

(북두홀과 형태가 같다!)

그 홈을 본 임청우는 어떤 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것을 느끼며 허리춤에서 급히 북두홀을 뽑아냈다.

북극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파여 있는 홈은 영락없이 북두홀의 형상이었다.

임청우는 떨리는 손으로 북두홀을 그 홈에 맞춰보려고 했다.

!

순간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을 떠나 그 홈에 그대로 딸려 들어가 끼워졌다.

!”

당황한 임청우는 홈에서 북두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홈과 북두홀은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같아서 틈새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흑옥의 벽 안쪽에서 어떤 강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 때문에 북두홀은 흑옥의 벽과 완전히 합쳐진 모습이 되었다.

안돼! 북두홀은 나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란 말이야.”

임청우는 울상이 되어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임청우의 능력으로는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북두홀과 흑옥의 벽에 나있는 홈은 면도날조차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딱 맞는데다가 흑옥의 벽 안쪽에서 강력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되는데...”

임청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북두홀 주변의 흑옥을 손톱으로 긁어댈 때였다.

갑자기 흑옥의 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

북두홀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어...”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움직임에 따라 임청우의 몸도 돌기 시작했다.

 

어느덧 임청우의 몸은 어둡고 광활한 밤하늘에 떠있었다.

북두칠성이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별과 별 자리와 성운이 함께 회전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별의 바다에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조차 의미가 없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끝이 없도록 넓은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하면 임청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하다.

그것을 절감하자 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감각도 급속히 사라져간다.

임청우는 자신이 물에 풀어진 종이처럼 시시각각 소멸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직전에 임청우는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응답이 있었다.

슈우!

임청우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북두칠성이 하나 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임청우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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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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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십 리를 간 후 돌아오라.

 

 

숭산(崇山)이 유명한 것은 소림사(少林寺)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少室峰) 역시 그 중턱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명승이 되었다.

하지만 숭산에 소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봉(太室峰)과 준극봉(峻極峰)등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숭산을 중악(中岳)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장강 변의 위가진을 떠난 강유는 닷새 만에 숭산에 도착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결과다.

해가 한 뼘쯤 남은 오후에 강유는 태실봉을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태실봉을 올라가던 강유는 중턱쯤에서 숨을 돌렸다.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돌아보는 강유의 오른쪽에 태실봉보다 좀 낮지만 자락이 아주 넓은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턱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수많은 건물과 탑들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봉우리가 소실봉이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사찰이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대로 무림에 퍼져 있는 무공들 중 대부분은 소림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강유는 멀리 보이는 소림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오랫동안 인재가 끊긴 탓에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초라해졌지만 소림사가 천하무림의 종가(宗家)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유는 다시 걸음 옮겼다.

(그 소림사를 지척에 두고도 들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집중할 때다.)

강유는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암벽의 중간에 나있는 산길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암자 한 채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세워진 암자는 거리가 제법 멀고 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암자로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저 암자가 고불암이다.)

강유는 수많은 계단 위쪽으로 작게 보이는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는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불암에 기거하는 분은 고불선사(古佛禪師)라는 고승이다.)

족히 천여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강유는 고불암에 대해 수소문 한 것을 되새겨보았다.

숭산에 자리한 암자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불선사는 소림사 출신이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출신이므로 고불선사는 당연히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불선사는 무공보다는 학식(學識)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천축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불선사가 고불암에 홀로 기거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범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 범어의 권위자인 고불선사와 교류를 나누게 된 것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같은 계단을 올라가며 강유는 새삼 의문을 느꼈다.

 

* * *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가 자리한 그 돌출부의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래도 고불암 앞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강유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암자 앞의 마당으로 올라섰다.

(비록 외지고 험해도 절경이긴 하다.)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며 암자로 다가갔다.

저 멀리로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 보인다.

(세상 풍파와 온전히 단절된 곳이니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이겠구나.)

강유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암자 문 앞에 이르렀다.

(암자 안에 인기척이 있다.)

암자의 닫혀진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잔기침 섞인 숨소리가 들려서 강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청수(淸修)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님.”

강유는 의관을 정제한 후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스님께 맡겨둔 물건을 받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다시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반응이 있었다.

아미타불! 들어오게나.”

암자 안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강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암자 내부는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들이 쌓여있거나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 때문에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암자 중앙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너머에는 한 명의 노승이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상당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노승이었다.

노승이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 뿐 아니라 주전자, 찻잔, 여러 권의 책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저분이 고불선사...)

강유는 문을 닫으며 노승, 고불선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자 안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지만 고불선사의 모습은 강유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소하고 꼬장꼬장한 늙은 선비같은 인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풍채가 좋고 인상이 호방해서 도저히 학승(學僧)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유는 글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고불선사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학후진 강유가 선사께 인사 올립니다.”

강유는 탁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했다.

강유라...”

고불선사는 중얼거리면서도 강유는 보지 않고 종이에 글만 쓰고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가려면 증표를 보여라.”

고불선사는 여전히 강유를 보지 않고 글을 쓰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딸칵!

강유는 품속에서 꺼낸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 글을 쓰고 있던 고불선사의 손길이 멈춰졌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조금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강유는 붓을 들고 있는 고불선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해온 노승이 격동하고 있다. 대체 저 볼품없는 노리개가 무엇이기에 불문 고승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인가?)

강유의 의아함을 느낄 때 붓을 내려놓은 고불선사가 노리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집어든 고불선사의 입에서 회한이 서린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비구(比丘)가 쌓은 업보가 구천(九天)에 이를 정도로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는 고불선사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린다.

강유는 궁금증이 구름같이 일었지만 말없이 그런 고불선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건은 확실히 받았네.”

고불선사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강유를 보았다.

헌데 시주는 이 물건을 맡긴 인물과 어떤 사이인가?”

고불선사는 강유를 살펴보면서 노리개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게 중임을 맡기신 분은 가부입니다.”

가부라...”

강유의 대답을 들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불가해(不可解)... 불가해로다. 그에게 시주같은 보배가 열매로 맺힐 복연(福緣)은 없어 보였거늘...”

(무슨 뜻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분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유가 의아해할 때였다.

사연과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불선사는 혼잣말을 하며 탁자 위에 쌓여있는 종이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

이윽고 고불선사는 책 사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패옥을 전해주라고 한 중생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걸세.”

고불선사는 봉투를 강유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무릎 꿇고 있었던 강유는 상체를 세우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스님의 청수를 어지럽힌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후학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한 강유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고불선사가 다시 탁자 위의 책들을 뒤지면서 말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이 늙은 중의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게나.”

곧 고불선사는 쌓여있던 책들 사이에서 얇은 책을 한권 꺼내 강유에게 내밀었다

헌데 그 책을 받으려던 강유는 깜짝 놀랐다.

책의 표지에는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스님! 혹시 그 책은 혹시...”

강유는 내밀었던 손을 급히 거두며 굳어진 표정으로 고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소림칠십이절기 중 탄지신통을 수련할 수 있는 비결일세. 진본은 아니고 노납이 심심할 때 적어놓은 필사본이지.”

고불선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하지만 강유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이라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강호를 독보할 수 있는 게 소림칠십이절기다.

고불선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기에 속하는 탄지신통의 비급을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탄지신통을 익히면 십장 밖에 있는 한 치 두께의 철판도 궤뚫을 수 있다네.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스님의 성의는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강유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부의 명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지 말게나. 노납의 성의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불선사가 다시 권했지만 강유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기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유출할 생각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로구나.)

강유는 쓴웃음 지으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좋네 좋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네.”

강유가 탄지신통의 비급을 사양하자 고불선사는 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 오른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대신 노납의 인사는 받고 가시게나.”

결례를 했다면 용서를...”

문간에서 돌아서던 강유의 눈이 치떠졌다.

용서는 노납이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고불선사가 찻잔에 담갔다가 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물로 탁자에 글을 쓴다.)

강유는 고불선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탁자 앞으로 갔다.

다가가서 보니 탁자 위에는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십리거후(五十里去後) 회귀(回歸)... 오십 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

강유가 탁자에 찻물로 적힌 글을 읽고 놀랄 때였다.

산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

강유가 글을 읽은 것을 확인한 고불선사는 찻물로 쓴 글을 소매로 쓸어 지워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분은 설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어서 감시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찻물로 뜻을 전한 것인가?)

강유가 놀라고 당황할 때였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들어서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대들보를 왜...)

강유는 반사적으로 고불선사와 함께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걸세.”

고불선사가 합장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 역시 스님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강유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불선사와 인사를 나눈 강유는 암자를 나갔다.

!

문이 닫히고 고불암에는 다시 고불선사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재(善哉)로다! 세존의 가호로다.”

고불선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합장을 했다.

크나큰 죄를 안고 소리없이 지옥으로 들어가려 했거늘... 세존께서는 못난 제자가 세상에 뿌려놓을 업보를 거둘 인연을 마련해두셨구나.”

주르르!

합장한 고불선사의 주름 진 손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뭔가 있다.)

강유는 마당 끝의 계단 입구로 가며 곁눈질로 고불암을 보았다.

(탄지신통의 비급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나에 대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고불선사가 왜 뜬금없이 소림칠십이절기 중 한 가지를 선물이라며 내놨는지 짐작이 가는 강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테지만... 그걸 거절한 덕분에 나는 고불선사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겠지.)

강유는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일단 고불선사님의 지시대로 오십 리쯤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자.)

강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이 고불암 앞의 마당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마당 가운데에 안개 같은 것이 서리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공포스러운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바로 안탕산 깊은 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는 제갈륜을 협박했던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그자가 안탕산에서 이천여 리나 떨어진 숭산에 나타난 것이다.

“...”

마당 끝으로 간 귀면지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유가 날렵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 귀면지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귀면지존은 고불암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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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괄량이의 가출

 

 

단숨에 주워 삼키는 에센의 분석은 정확했다.

(확실히 평범한 인재는 아니다. 말만 좀 가려서 할 줄 알고 겸손하기만 하다면 미루와 짝을 지어주어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강진남이 에센을 아쉬운 표정으로 볼 때였다.

... 장주님! 큰일...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문루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그 중년여인은 강미루의 유모 최씨였다.

미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둥대며 문루로 올라오는 유모 최씨를 본 강진남은 미간을 찡그렸다.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는 조신한 성품인 첫째 딸 강미조(姜美藻)와 딴판으로 지나치게 활달하여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 작은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요.”

헐떡이며 문루로 올라선 유모가 울상을 짓는다.

미루가 사라지다니? 어디로?”

강진남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뿔난 망아지같은 둘째 딸이 말썽을 부리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꽤 오래 안 보이시기 계실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출진한 애들 속에 묻어서 본장을 빠져나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 녀석 참...”

울먹이는 유모와 달리 강진남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 당장 파발을 보내 돌아오라고 분부하셔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니옵니까?”

그럴 거 없네. 제 녀석도 오죽 답답했으면 가출을 했겠는가?”

유모의 애원에도 강진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혼자도 아니고 대려장의 정예들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니 딱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물론 강미루가 핏덩이일 때부터 키워온 유모의 심정은 달랐다.

... 장주님! 작은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매정한 말씀을...”

서운해 하는 유모의 말에 강진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지. 정 걱정되면 그 녀석 형부에게 가서 부탁해보게나.”

... 그리 합지요.”

강진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유모는 서둘러 문루를 달려 내려갔다. 강미루의 형부, 즉 강진남의 사위를 찾아가 부탁하는 쪽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루사매도 이제 제법 여자 태가 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에센이 히죽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성주는 내 딸을 전에 본 적이 있겠군.”

강진남은 자신의 둘째 딸과 이 오이라트의 떠버리 후계자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었지요. 사모님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데리고 왔었으니까요.”

안하무인이던 방금 전과 달리 에센은 강진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에센의 사부와 강미루가 사부로 모신 여기인은 부부지간이다.

그 때문에 에센은 강미루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에센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강미루는 아직 철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제가 이번에 밀사를 자처한 이유 중 하나도 미루사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에센이 다시 강진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강진남의 둘째 딸이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린지는 이미 오래다.

대려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고 해서 무림의 수많은 청년들이 강미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혈기방장한 에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강미루가 사모의 제자이기도 해서 무례하게 수작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 못해왔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는 에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모다.

그러던 중 아버지 토곤이 대려장으로 밀사를 보낸다고 하자 냉큼 자원을 했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지만 에센의 기대는 강진남의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소성주의 사부... 검왕(劍王)과 관련된 염문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내 귀에 들리더군.”

바람둥이를 사부로 둔 너도 똑같은 인간 아니냐는 뜻이다.

 

***

 

강진남과 에센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탁은 백남빈에게 무황성을 향해 직진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요서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인 진황도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라고 지시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배 이상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높은 행로다.

다만 같은 생각을 강진남도 했다는 게 문제다.

대려장주가 동북의 제갈량이라는 평판이 과장된 건 아니로군.”

백남빈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리쯤 뒤쪽에서 흙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일백이 넘는 숫자의 기마대가 백남빈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다.

대려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대는 수백기였지만 도중에 철령보의 기마대와 격돌하는 바람에 대 부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래도 특히 발이 빠른 일단의 기마대는 철령보의 저지를 뚫고 남진하여 백남빈을 추격하는 중이다.

물론 백남빈이 대려장의 기마대에 따라잡힐 위험은 거의 없다. 사해검객이 준비해준 말이 철령보에서 으뜸가는 준마이기 때문이다.

십여 리나 간격이 있으니 진황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꼬리를 달고 진황도에 도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천진으로 가는 배를 수배하는 동안 대려장의 고수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다.

(진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대려장의 인간들을 따돌려야한다.)

백남빈은 진행방향의 우측, 즉 서쪽을 돌아보았다.

철령평야에서 발해만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험준한 산맥이 오른쪽에 보인다.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불리는 장대한 협곡의 서쪽 면을 이루는 당산산맥(唐山山脈)이다.

일망무제한 평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른 탓에 당산산맥의 봉우리들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고 험준하게 보인다.

(길은 좀 험하겠지만 요서주랑을 타는 대신 당산산맥을 횡단해서 진황도로 가자. 그 과정에서 귀찮은 파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

두두두!

결심 한 즉시 백남빈은 말머리를 서쪽, 당산산맥을 향해 돌렸다.

대략 삼십여 리쯤을 달리면 당산산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저 놈이 진로를 바꿨다.”

당산산맥으로 들어가서 우릴 따돌릴 생각이다.”

백남빈을 추격하던 대려장의 기마대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남빈이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본 때문이다.

백남빈이 달려가는 서쪽에는 지는 해를 머리에 인 당산산맥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것이다.

만일 백남빈이 이대로 당산산맥으로 들어가 버리면 따라잡을 희망이 거의 없다.

박차를 가해라!”

저놈이 당산산맥의 산그늘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한다!”

두두두! 히히힝!

대려장의 무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말을 몰아붙여도 십여 리쯤 되는 백남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백남빈이 타고 있는 말의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 이러다가 놓치고 말겠다!”

젠장! 저놈이 타고 가는 말이 우리들의 말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백남빈이 당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에잇! 답답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려장 기마대의 후미에서 갑자기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해되니까 비켜!”

어이쿠!” “!”

히히힝! 두두두!

앙칼진 외침에 이어 무사들의 비명과 당황한 말들의 울부짖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겁하며 돌아보는 선두의 무사들 눈에 칠흑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와락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흑마(黑馬)였다.

단순히 털만 검은 게 아니다.

흑마는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배는 됨직하다.

낙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그 거대한 흑마의 등에는 날씬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옷을 걸치고 죽립을 깊이 눌러쓴 기사(騎士)가 타고 있다.

흑마의 엄청난 체구에 비해 타고 있는 기사는 대려장의 다른 무사들보다 몸이 작고 가냘프다.

그 때문에 마치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보이는 그 기사의 등에는 수십 자루의 화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서 꽂은 화살통이 짊어져 있다.

또 기사는 허리에 단검에 가까운 짧은 검을 차고 있으며 말 안장 좌우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과 긴 창이 한 자루씩 걸려 있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

작고 날씬한 체구의 기사는 그때까지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것은 두 뺨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다.

... 작은 아가씨!”

... 이제 보니 저놈은 작은 아가씨의 애마 흑왕(黑王)이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놀라면서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마 위의 소녀는 바로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였다.

유모 최씨의 추측대로 강미루는 새벽에 대려장을 빠져나온 기마대에 섞여 가출을 한 것이다.

강미루의 별호는 홍의창(紅衣槍)이다.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창술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타오르는 불같이 활달해서 붙여진 별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강미루는 제법 오래 외출을 못해 답답하던 차에 원수같은 철령보에 대한 공격이 시도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도 철령보의 공격에 참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봤자 들어주실 리 없다.

그래서 강미루는 죽립을 눌러쓴 채 몰래 기마대에 끼어든 것이다.

 

저 새끼는 내가 잡아버리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전부 비켜!”

정체를 드러낸 강미루는 흑마에게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히히힝! 화악!

거대한 흑마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질풍같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대려장의 기마대는 물살처럼 갈라져 흑마에게 길을 내주었다.

낙타보다도 큰 이 거대한 흑마의 이름은 흑왕(黑王)이다.

흑왕은 요동평야의 모든 야생마들을 지배하던 말들의 왕이었는데 강진남의 사위가 사흘 밤낮을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길을 들였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천리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흑왕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살처럼 갈라지는 대려장의 다른 말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흑왕은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당산산맥의 산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당산산맥 너머로 지고 있다.

그와 함께 백남빈도 산그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달리면 당산산맥의 험준한 산중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대려장의 추격은 떨쳐버릴 수 있겠구나.)

백남빈은 가까워지는 당산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보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숨을 곳이 없는 평야와 달리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당산산맥에서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오싹!

백남빈은 냉수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위험...)

!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히힝!

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몸을 앞으로 확 숙인 백남빈의 머리 위로 지나간 화살이 말의 목 옆을 스치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냈다.

만일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남빈은 그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백남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안이라는 남다른 능력이 미리 살기를 감지해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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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萬年白鯨

 

 

철썩... 철썩...!

쿠르릉___ ___!

천지개벽을 일으키듯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천지를 삼킬 듯한 기세로 밀고 밀린다.

 

파석도(波石島)___.

오직 돌()과 파도만이 있는 섬, 아무도 찾지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돌연,

[하하하...!]

호탕하고도 낭랑한 웃음이 파석도의 적막을 깨뜨렸다.

파석도의 정상!

짧은 초지가 깔려있는 분지가 있었다.

그곳에 하나의 남삼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십 사오 세 정도 되었을까?

헌데, !

천상(天上)의 선동(仙童)이랄까?

혜지가 가득 담긴 두눈은 한 번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력(魔力)을 발산했다.

피부는 거의 투명할 정도로 희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산()같은 기개를 풍겼고 입술은 붉으면서 굳센 의지가 서린 듯 붉었다.

전신에 짙은 남색의 무복(武腹)을 가뿐하게 걸친 그 모습은 실로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헌데, 그는 나이에 비해서 월등이 큰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 육 척(六尺)이 넘는 거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언뜻보면 장성한 청년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영준한 얼굴에는 아직 장난스런 치기가 어려있었다.

이때, 소년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리며 소리쳤다.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오늘도 저놈이 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그의 눈은 바다 한복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곳에는 마치 하나의 작은 섬과 같은 거대한 백경(白鯨)이 유유자적 물기둥을 뿜어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길이만 해도 무려 오십 장(五十丈).

실로 엄청난 크기의 고래였다.

이 백경은 근 일만 년(一萬年) 이상을 산 영물이었다.

이때, 풀밭사이로 난 계단으로 두 명의 인영이 올라왔다.

천강마존과 낙척문사___

바로 그들이었다.

문득, 낙척문사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하... 백경이 또 나타난 모양이구나?]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백경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쥐어보였다.

[두고봐요! 오늘은 꼭 저놈의 등에 타고 말거예요!]

낙척문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하하... ()아야, 어제도 그러더니 도리어 백경에게 혼나지 않았느냐!]

[! 어제는 방심을 했기 때문이예요. 오늘은 저놈의 등에 타보고 말거예요.]

용아라 불리운 소년은 고집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혜지 가득한 두눈은 계속 백경을 쫓고 있었다.

백경은 유유히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순간,

[기다려라! 용아가 간다!]

소년은 휙! 지면을 박차고 바다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석도 정상에서 바다까지는 수백 장의 거리에 달했다.

헌데 소년은 일직선으로 신형을 쏘아가며 단번에 삼십 장을 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가볍게 신형을 멈추며 다시 이십 장을 날고 또 바위를 찍으며 다시 떠올랐다.

실로 찬탄할 절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낙척문사는 그러한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조심하거라! 용아!]

[하하... 걱정없어요. 용아의 해연약파(海燕掌波)는 완벽하다고요!]

소년은 바다 위를 스치듯이 날았다.

천강마존은 문득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묵묵히 파석도의 정상에 선채 소년을 지켜볼 뿐이었다.

소년은 가볍게 파도를 밟고 백겨에게 접근했다.

[!]

그는 거대한 파도의 파봉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우르르... 철썩... !

미친 듯 광난하는 파도를 교묘히 타고 소년은 점점 앞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마침내 백경의 등으로 접근했다.

이때, 지켜보던 낙척문사가 문득 감탄의 표정을 입을 열었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저 아이의 자질은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저 해연약파의 경공은 꼬박 십 년(十年)이 넘어도 익히기 힘드는데 검룡(劍龍) 저 아이는 불과 일년 사이에 터득하고 말았으니...]

검룡(劍龍)___.

이것이 소년의 이름인가?

천강마존은 말없이 눈빛을 번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우형이 천강신공(天罡神功)을 육성(六成) 이루는데 꼬박 팔년(八年)이 걸렸네. 헌데 용아는 천강심결(天罡心訣)을 전수받은지 오년만에 육성의 조예를 이루었지 않은가! 정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녀석이야.]

소년 검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문득 자애롭게 변했다.

검룡.

그는 바로 낙척문사가 데려온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적자 즉, 기검룡이었다.

이때, 소년 기검룡은 마치 거대한 빙산(氷山)을 연상케하는 만년백경(萬年白鯨)에게 달려들어가고 있었다.

만년백경은 기검룡이 가가오는 것을 커다란 두눈을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이 수면을 박차고 자신의 등위로 올라타려고 하자 거대한 동굴같은 입을 쩍 벌리며 세찬 물기둥을 쏘아올렸다.

쏴아___!

기검룡은 전에도 한 번 그 물기둥에 맞아 곤욕을 치룬적이 있었으므로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하하... 어림없다!]

그와 동시에 그는 힘껏 장()을 내밀어 물기둥의 힘을 받으며 그대로 삼사 장을 더 치솟아 올랐다.

___!

[어엇!]

기검룡은 허공에서 쏜살처럼 만녀백경의 등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에잇!]

그가 막 백경의 등을 밟으려는 순간 만년백경의 동체가 갑자기 물속으로 숙 잠겨지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시지간 발디딜 곳을 잃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한 모금의 진원진기를 모아 발끝으로 수면을 찍으며 그는 다시 허공으로 이 장 정도 떠올랐다.

그 순간, 백경의 거대한 꼬리가 사방을 휘저으며 산더미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

기검룡은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곧 그는 입술을 물며 전력을 다해 장()을 뻗어 파도와 맞닥드렸다.

콰르르릉___!

[...!]

기검룡은 천강기공이 파도의 전면을 후려쳤다고 느낀 순간 뒤이어 쏟아지는 파도에 거세게 전신을 얻어맞았다.

이때,

[용아! 위험하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낙척문사가 대경하여 소리쳤다.

낙척문사의 외침을 들은 기검룡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진기를 모아 허공에 떠올라 몸을 고정시키려 했다.

허나 그보다 빨리 만년백경의 꼬리가 재차 산악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그의 몸을 쳤다.

[아앗!]

기검룡은 재차 파도에 가격당하며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용아!]

낙척문사와 천강마존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허나 그 순간, 만년백경의 거구가 기검룡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심해(深海)로 가라앉았다.

 

X X X

 

기검룡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순간, 그는 온몸이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암흑(暗黑)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문득 몸을 일으켰다.

순간, 미끈하는 감촉과 함께 그는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악___!]

그 바람에 전신관절이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낀 기검룡은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헌데 그는 실로 기이함을 느꼈다.

누워있는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미끈미끈한 액체의 감촉마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뜨겁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기검룡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허나 다시 주르르 발이 미끄러지며 그는 그만 풍덩 웅덩이게 빠지고 말았다.

웅덩이 속에는 끈끈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헌데 이때, 웅덩이의 맞은편에서 문득 한 줄기의 빛이 비쳐드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어 눈을 감았다 크게 떴다.

그것은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하얀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구슬은 맞은편의 벽에 매달려 있었고 그 주위로 그물과도 같은 이상한 줄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신비한 흰색기류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며 기검룡은 당장 호기심을 느꼈다.

[! 신기하게 생긴 구슬이구나!]

본래, 이 백색구슬은 백경이 만년(萬年) 동안 정기(精氣)를 모아 형성한 내단(內丹)이었다.

! 그렇다면 기검룡 그는 지금 만년백경의 몸속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기검룡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따보자!)

결심한 순간 그는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그는 손목이 찌르르함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백경의 내단은 백경의 진원(眞元)이나 다름없이 스스로 보호하는 진기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 시도에 실패하자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어 그는 천강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양팔이 청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그는 벼락같이 쌍수를 떨쳐냈다.

파파팟___ 꽈릉___!

파열음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허나 천하에서 가장 강맹한 천강신공이건만 백색구슬 주위의 하얀기류를 흩어버릴 수는 없었다.

[!]

기검룡은 재차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기듯이 물러났다.

일순 전신의 기혈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에 그는 눈앞이 아찔했다.

허나 잠시 후 기혈이 가라앉자 기검룡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천강신공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强)한 신공이라 하셨다. 헌데 저 흰색기류를 제거치 못하다니...?]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는 문득 낙척문사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___무릇 장수하며 오래사는 영물들은 자연으로부터 정기(精氣)를 얻어 단기(丹氣)를 이룬다. 그 단기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서로 뭉쳐 고형화(固形化)되어 구슬과 같은 모양을 하게 되는데 이를 단주(丹珠) 또는 내단(內丹)이라 한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여기며 무인(武人)이 이것을 용해하여 단기(丹氣)를 흡수하면 공력을 연마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___

 

이러한 낙척문사의 말을 기억해낸 기검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것은 내단(內丹)임에 틀림없다. 그럼 여기가 짐승의 뱃속...!]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만년백경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괘씸한 마음이 들어 소리쳤다.

[백경! 나를 삼키다니 도저히 용서치 못하겠다!]

이어, 꽈릉___! 꽈르릉___!

기검룡은 백경의 내단을 향해 마구 천강신공을 쳐냈다.

허나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기검룡은 그만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하면 백경을 시원하게 골탕먹일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문득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단의 주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선을 향해 천강신공을 벼락같이 쳐냈다.

파팍___!

허나 의외로 신경선은 매우 질겨 간신히 한 가닥만이 끊어졌을 뿐이었다.

(굉장히 질긴걸?)

기검룡은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천강신공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았다.

파파팍___ !

그의 손이 힘차게 내려쳐지자 단번에 십여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졌다.

허나 그것은 수천 줄기의 신경선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검룡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신공(神功)만 쓰면 이렇게 질긴 것을 자르는데 별효과가 없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수법이 있다면 좋을텐데...)

다음 순간 그는 문득 손뼉을 탁 쳤다.

(그렇다!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가 있다!)

 

___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

 

본래 도가(道家)의 중수법(重手法)이었던 참마인(斬魔刃)이라는 수법을 사백 년 전 점창의 절정고수였던 제룡신협(制龍神俠)이 개조한 무공이었다.

강기(罡氣)를 파해하는 전문수법으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신랄한 무공이다.

검창에서는 오래 전에 실전하였으나 낙척문사가 이를 얻었던 것이다.

기검룡은 참마제룡수의 구결을 마음 속으로 외우고 난 다음 신경선이 뻗친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순간 그는 우수(右手)를 번쩍 치켜들어 사정없이 신경선을 내려쳤다.

파파파팍___!

그러자 놀랍게도 단번에 수십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다!]

기검룡은 환성을 지르며 쉬지않고 수도(手刀)를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 새파란 광망이 번뜩일 때마다 수많은 신경선들이 속속 끊어져 나갔다.

파파___ ! ! !

그렇게 거듭할수록 청망은 더욱 짙어지고 한 번에 끊어지는 신경선의 숫자도 많아졌다.

[다 됐다!]

기검룡은 탄성을 발하며 기뻐했다.

어느새 내단의 뒤에 달린 굵직한 주신경선(主身俓線)만 남곤 미세한 신경선은 모두 끊어져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주신경선을 후려쳤다.

순간,

[크아악___!]

만년백경은 극심한 내부의 충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그로인해 기검룡이 서 있는 부분의 사방벽이 짓눌리며 그를 압박했다.

[!]

기검룡은 재빨리 만녀백경의 내단을 집어들고 입구로 날아올랐다.

쏴아아___!

그가 처음에 누워있던 장소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전면에서 밝은 햇살이 비쳐들었다.

또한 만년백경이 물을 들이키는 듯 해일같은 기세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회는 지금이다!)

내심 생각한 그는 빛을 향해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이얍!]

힘찬 일갈과 함께 천강신공을 펼치자 바닷물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___ !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전속력으로 뛰쳐나갔다.

콰르릉___!

그가 마침내 만년백경의 입에서 뛰쳐나오자 대노한 만년백경은 미친 듯이 불기둥을 쏘아올렸다.

허나,

[하하... 고맙다!]

기검룡은 오히려 그 물기둥을 타고 삼십여 장 상공으로 까마득히 치솟았다.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우측 수평 위에 아스라이 섬그림자가 보였다.

기검룡은 지체없이 방향을 틀어 섬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내단을 빼앗긴 만년백경은 대노하여 기검룡의 뒤를 쫓았다.

(이크...! 저놈이 정말 화가 난 모양이구나...!)

쏜살같이 해연약파(海燕掌波)의 경공을 펼쳐 섬으로 달아나던 기검룡은 등뒤에서 세찬 물살을 가르며 쫓아오는 만년백경 보고 기겁했다.

그는 더욱 속력을 가했다.

허나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만년백경과 기검룡의 거리는 좁혀들었다.

이윽고 전면에 뚜렷이 하나의 섬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사이는 불과 이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쏴아아___!

재차 산악같은 물기둥이 쏘아졌다.

[어엇...!]

기검룡은 십여 장 넓이의 물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바닷 속으로 잠겨들었다.

(으흡...!)

기검룡은 바닷 속에 잠겨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뻔 했다.

만년백경은 일시에 기검룡의 행적을 놓치자 잠시 멈칫 했다.

허나 곧 만년백경은 섬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쏘아가기 시작했다.

기검룡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만년백경의 배밑에 숨죽여 숨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거의 섬의 전역에 들어온 듯 바닷속이 얕아져 백경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빠르게 앞으로 나가다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만년백경은 막 방향을 틀다가 기검룡이 떠오른 것을 보고 쏜살같이 물살을 가르며 덮쳐들었다.

___ ___!

허나 섬이 이미 코앞에 있었다.

소년은 번개같이 몸을 띄워 섬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다가 문득 힐끗 뒤를 돌아보니 만년백경은 섬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을 못하고 그 부근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하하...! 요놈아 꼴좋구나...!]

기검룡은 돌아서서 크게 외치며 섬주변의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___ ___ 처얼썩...!

[... 힘들다...]

기검룡은 백사장에 닿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까지도 만년백경은 미련이 남았는지 섬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기검룡의 천진한 얼굴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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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길한 화살

 

 

작은 분지 형태인 선녀곡에는 주황색 노을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녀곡 끝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모옥이 한 채 서있다. 지난 십칠 년 간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살아온 집이다.

모옥은 잘 가꿔진 채마밭과 화단이 감싸고 있다.

“...!”

선녀곡으로 들어서던 고검추의 눈이 치떠졌다. 모옥의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보인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타탁!

고검추는 반가운 마음에 모옥을 향해 달려갔다.

고검추는 경신술을 쓸 줄 몰라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고검추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몸속의 기운이 잘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만 수련하게 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진기토납술을 수련해온 덕분에 고검추는 무공을 쓸 줄 몰라도 온몸의 경맥은 막힘없이 뚫려있다.

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고검추의 질문에 당혜선은 즉답은 피했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당혜선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가르치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고검추는 그날 이후로 무공을 가르쳐달라 조르지 않았다.

비록 무공은 쓸 줄 몰라도 고검추의 뜀박질은 아주 빠르다.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 몸을 무리하게 써도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

삼십여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여 모옥 근처에 이른 고검추의 몸이 갑자기 멈춰졌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난장판이 된 모옥 내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방안의 집기들은 다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다. 어떤 자가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은 듯한 정황이다.

(그자 짓이었을까?)

고검추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다가 화들 짝 놀라 달아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대체 무얼 노리고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인가?)

고검추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고검추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화살!

마치 피를 칠한 듯 검붉은 화살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어지?)

핏빛 화살을 본 고검추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세히 보니 화살의 깃에는 검은색으로 글이 한자씩 적혀 있었다.

<()>자와 <()>자였다.

"초혼(招魂)? 혼백을 부른다?"

화살 깃에 적힌 글을 확인한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고검추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익!

놀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 내렸다. 촌부(村婦)처럼 피부는 가무잡잡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각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다.

비록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겼지만 이 여인을 본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가고 말 것이다. 여인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풍만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여인의 몸에는 검소한 마의가 걸쳐져 있다.

물론 수수한 그 차림새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진 못한다.

 

-당혜선

 

여인은 바로 고검추의 어머니인 당혜선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등에 짊어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호의 여걸이다.

돌아오셨군요 어머니!”

고검추는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색했다. 흑모철웅을 추살하러 떠났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검추와 달리 당혜선은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문에 박혀있는 핏빛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핏빛 화살을 살펴본 당혜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의에 감싸인 탄력 넘치는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화살이 무엇인데 어머니가 저토록 놀라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화살은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있었느냐?"

당혜선이 굳어진 표정으로 고검추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

고검추는 당혜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악랄한 무리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당혜선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무리들이라니... 누구 말씀인지요?"

의아해진 고검추가 물었다.

"이 화살의 이름은 초혼전(招魂箭)으로 사신각이라는 청부살수조직의 표기다."

당혜선은 화살을 노려보며 설명했다.

사신각...”

고검추는 사신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섬뜩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혼전에는 백일취(白日臭)라는 것이 묻어있다. 이름 그대로 냄새가 백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약물이다. 일단 백일취가 몸에 묻으면 최소 백일간은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당혜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후 서둘러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나무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왔다. 가로 세로 일곱 치 정도에 두께는 한 치가 채 안되는 납작한 상자다.

고검추는 그 나무상자를 오늘 처음 본다. 나무상자는 벽 틈에 설치 된 교묘한 공간에 숨겨져 있어서 침입자가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당혜선은 들고 나온 나무상자를 고검추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본 고검추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신각의 초혼전이 발동된 이상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혜선은 말하면서 고검추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고검추의 키는 어느덧 당혜선보다 커졌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검추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들었다.

".. 어머니...!"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안긴 고검추가 당황할 때였다.

휘익!

다 큰 아들을 두 팔로 안아든 당혜선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무공은 역시 대단하구나.)

당혜선의 품에 안겨 날아가며 고검추는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던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검에 간단히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당혜선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각이 그만큼 무서운 조직이라는 것을 고검추는 깨닫고 있었다.

 

***

 

틀림없느냐?”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부릅떠졌다.

... 분명 그 늙은이였습니다.”

사신각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는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나타났던 바로 그자다.

산적이 아닐까 했던 고검추의 추측과 달리 그자는 사신각 소속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 팔이 하나 없어졌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있긴 했지만... 본각의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는 대()늙은이의 용모파기와 일치했습니다.”

사내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살수 주제에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늙은이가 십구 년 전에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혼잣말을 하는 사신각주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역력히 묻어있다. 그만큼 그자가 떠올린 인물은 공포스러운 존재다.

기련산에 들어온 후 열 명 가까운 형제들이 점호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신각주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사신각의 자객들은 지령이 떨어지면 그 복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늙은이를 만나서 불귀의 객이 되었겠군.”

사신각주는 복면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대늙은이는 본각이 십칠 년 전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우릴 따라서 기련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대늙은이의 느닷없는 출현을 설명할 수 없겠지.”

복면인의 말에 사신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대늙은이는 정확한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형제들은 대늙은이에게 사로잡히는 즉시 입 속에 숨겨놓은 독을 깨물어서 비밀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사신각의 살수들은 입속에 독을 숨기고 있다가 임무에 실패하면 터트려서 자결을 한다. 살인청부를 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팔(鄭八) 저놈을 잡지도 않고 살려 보낸 건 잡아봤자 자결할 걸 알아서였겠군.”

사신각주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힐끔 보았다.

대늙은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당가년에 대한 추격은 중지하는 게 어떨지...”

복면인이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혜선의 거처에 초혼전을 남겨뒀다고 했지?”

사신각주는 복면인에게 대꾸하는 대신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각주님.”

긴장한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신각주의 눈치를 살폈다.

본각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가년은 즉시 기련산을 벗어나 종적을 감춰버릴 게 분명하다.”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희번덕였다.

이번에도 당가년을 놓치면 지난 몇 년간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기필코 잡아야만 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각주가 결정을 내리면 따라야만 한다.

기련산에 들어온 본각의 전력 절반을 대늙은이의 행방을 찾는데 투입하라. 그 늙은이를 발견하는 즉시 십리적(十里笛)을 써서 보고하고!”

사신각주가 지시를 내렸다.

존명!”

휘휙! !

일제히 대답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호사다마라더니...”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마천루의 떨거지들이 기련산 일대에 출몰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늘... 저 세상에 가있을 줄 알았던 무서운 노괴까지 우리 사신각의 뒤를 캐고 있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신각주의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늙은이의 눈에 띠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지만... 이제 와서 당가년의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년을 잡아야만 복마신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사신각주는 길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최대한 빨리 당가년을 찾아내 사로잡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휘익!

결의를 굳힌 사신각주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쐐액!

고검추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검추를 두 팔로 안은 당혜선은 기련산의 험한 산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당혜선이 달리는 속도는 어떤 산짐승보다도 빠르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고검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고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던 고검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홱홱 변하는 주변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십자단맥검을 쓴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고검추를 안고 달리며 당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 전, 당혜선은 납치당한 등삼낭을 구하기 위해 철웅채로 쳐들어갔었다.

철웅채의 채주이며 기련산 일대에서 최강자로 꼽히던 흑모철웅은 당혜선에게 패해 달아났었다.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다준 후 당혜선은 흑모철웅을 추격했다. 살려둘 경우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 전, 당혜선은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흑모철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흑모철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철피공을 익힌 그자의 몸뚱이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은 비장의 절기를 써야만 했다.

그 절기가 바로 십자단맥검이었다.

십자단맥검은 금강불괴라도 베어버리는 위력을 지녔다. 흑모철웅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해도 십자단맥검을 견디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단맥검에 치명상을 입은 흑모철웅은 높은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에 빠져 실종되었다.

당혜선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흑모철웅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는 워낙 거칠어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오일 동안 격류를 따라 내려가며 샅샅이 뒤졌지면 흑모철웅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팽가촌으로 돌아와 보니 사신각의 초혼전이 집의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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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허억!”

털썩!

임청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아래의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임청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파르고 험한 절벽이라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어느덧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게 해가 진 때문인지 바위산 아래 계곡이 너무 깊어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절벽은 높고도 높아서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북두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려올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잘도 살아서 저길 내려왔구나.)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임청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등쪽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임청우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반쯤 크기의 반점(斑點)이 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반점은 얼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우(靑牛)라는 이름은 그 반점에서 딴 것이다.

 

임단심은 아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 대신 온갖 욕설과 악의가 섞인 말로 아들을 불렀었다.

어쩔 수 없이 임청우는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성을 모르니 어머니의 성인 임()씨를 썼고 가슴에 있는 푸른 소 형상의 반점에 착안하여 청우를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임청우였다.

 

한숨 돌린 임청우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끌렀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은 임청우와 함께 바닥에 패대기쳐졌었지만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다. 한쪽이 조금 이지러졌을 뿐이다.

!

호리병의 주둥이에 박혀있던 나무 마개를 뽑자 그윽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호리병에 든 것은 임청우가 여러 가지 약초와 과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다. 백초주(百草酒)로 이름붙인 그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꿀꺽! 꿀꺽!

목도 마르고 해서 독한 백초주를 거푸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 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영차!”

다시 마개를 막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찬 임청우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북두홀을 찾아야한다.

 

***

 

다행히 북두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뜨인 것이다.

북두홀을 찾았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헌데 북두홀을 허리띠에 끼우던 임청우의 코가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가 타는 듯한 그 냄새를 따라갔다.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삼, 사십 장쯤 갔을 때 임청우는 연기에 휩싸인 독수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푸스스스!

날개를 활짝 펼친 길이가 일장이 넘는 독수리들의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살은 이미 다 타서 굵은 뼈와 깃털들만이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는 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무서운 독이 살을 녹였구나.)

임청우는 놀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푸스스! 퍼석!

임청우가 보고 있는 사이에 굵은 뼈들도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에서 남아있는 것은 크고 작은 깃털들과 강철같이 번들거리는 발톱뿐이었다.

(이놈에게 잡혀가던 뿔 달린 작은 뱀의 짓일까?)

임청우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저절로 녹아내렸을 리는 없다.

그놈은 죽기 전에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던 게 분명하다.

바로 그때였다.

툭툭!

무언가가 임청우의 오른쪽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

무심코 내려다보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쉭쉭!

머리에 황금색 뿔이 돋아나있는 작은 뱀이 고개를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통이 피 칠을 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등줄기를 따라 갈기까지 나있다.

영락없는 용의 모습인 작은 뱀은 독수리들의 왕에게 잡혀가던 바로 그놈이었다.

(... 이놈이 독수리들의 왕을 물어죽였구나!)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서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를 녹여버릴 정도의 독을 지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다.

!

헌데 뒤로 물러서던 임청우의 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렸다.

!”

임청우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쪘다.

쉭쉭!

뿔 달린 작은 뱀이 그런 임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다가왔다.

(... 죽었다!)

임청우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저앉은 상태라서 그놈이 달려들어 물려고 하면 피할 수가 없다.

임청우의 몸이 공포로 굳어질 때였다.

임청우를 잠시 살펴보던 뿔 달린 작은 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냐

임청우는 어리둥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뱀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잖아!)

임청우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뿔까지 달려있고... 외양만 특이한 게 아니라 진짜 영물이란 건가?)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생긴 임청우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이 금관혈린사(金冠血鱗蛇)인 뿔 달린 작은 뱀은 세상 모든 뱀들의 왕이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안되지만 금관혈린사는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복사(蝮蛇)의 일종인 이놈은 한 때 몸길이가 삼장(三丈;9미터)이 넘는 대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연을 만나 무한한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오히려 작아졌다.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 정기(精氣)가 농축되자 몸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몸은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기뿐 아니라 독기도 농축이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관혈린사의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금관혈린사는 표적을 직접 물지 않고 독기(毒氣)를 뿜어서 죽일 수도 있다.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들의 왕의 입장에서는 모든 뱀들의 제왕인 금관혈린사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늘 금관혈린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었다.

금관혈린사가 비록 모든 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힘으로는 독수리들의 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려고 시도해봤지만 독수리들의 왕의 발목은 강철같은 비늘로 덮여있어서 상처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독기를 뿜어도 봤지만 허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독기가 바람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금관혈린사는 꼼짝없이 독수리들의 왕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임청우가 충동적으로 활을 쏴서 독수리들의 왕을 떨어트렸었다.

다만 임청우가 쏜 강철 촉의 화살도 독수리들의 왕의 숨통을 즉시 끊어놓지는 못했었다. 그놈의 깃털과 가죽이 단단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도 독수리들의 왕은 충격을 받아서 허우적대며 떨어졌었다.

그 바람에 금관혈린사는 강철같은 발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수리들의 왕의 몸통을 물어서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던 것이다.

 

(작고 다리가 없을 뿐 용을 빼닮은 놈이다.)

임청우가 금관혈린사를 보며 전설 속의 용을 떠올릴 때였다.

! !

금관혈린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동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인사치례도 했으니 그만 제 갈길 가나보다 생각했다.

헌데 금관혈린사는 조금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기어가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따라오라는 거냐?”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 !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임청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영물인 게 분명한 놈이 따라오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금관혈린사를 따라 오십여 장쯤 갔을까?

임청우 앞쪽에 안개의 벽이 나타났다.

계곡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마치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금관혈린사는 망설이지 않고 안개의 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째 좀 으스스한데...!”

임청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금관혈린사를 따라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섰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이토록 짙은 안개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짙은지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봐도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금관혈린사 덕분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금관혈린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반딧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나는 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독을 흘린 것인지 다른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점(光點)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앞서 가며 남긴 기이한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안개다. 마치 수초가 몸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 !)

헌데 광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시커먼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작은 것은 개만하고 큰 것은 사람 키의 몇 길이나 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짐승같고 어떤 것은 사람 같으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형상도 있다.

처음에는 한 두 개가 보이던 그것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진다.

괴상한 형상들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그것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눈인 모양인데 머리 뿐 아니라 몸통에도 달려있으며 하나를 단 놈이 있는가 하면 두 개, 세 개, 심지어 십여 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다.

(... 뭐지?)

소름이 오싹 끼친 임청우는 허리춤에 끼운 북두홀을 움켜잡았다.

(안개 속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있다!)

겁에 질린 임청우가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할 때였다.

쉭 쉭!

앞쪽에서 금관혈린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임청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서 금관혈린사의 뿔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뿔 아래에서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이 임청우를 보고 있다.

(... 길을 아니까 따라오라는 거겠지? 일단 저놈만 믿고 가보자!)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개 속을 배회하는 기괴한 형상들도 임청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아서 임청우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금관혈린사가 지나가며 남긴 광점들과 안개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그놈의 뿔이 아니었으면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을 것이다.

화악!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의 벽이 사라지며 임청우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마침내 안개의 벽을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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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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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인들의 제안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가장 빨리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주시오. 건량(乾糧;마른 음식)도 사흘치 정도 포장해주고...”

강유는 점소이에게 동전을 넉넉히 건네주며 말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손으로 동전을 받으며 굽신거렸다.

재빠른 셈으로 최소한 한 두 냥은 남는다는 걸 확인한 점소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점소이는 동전을 세면서 희희낙락 하며 주방쪽으로 갔다.

(장강을 건넜으니 여정의 절반쯤은 지난 셈이다.)

강유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안탕산을 떠난 게 사흘 전이다.

전에도 아버지를 따라 안탕산을 내려온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강유 혼자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앞으로 사나흘만 부지런히 가면 숭산(崇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품속에 오른손을 넣으며 생각했다.

 

<숭산 태실봉(太室峰) 뒤쪽에 고불암(古佛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아버지 강조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품속에서 꺼낸 강유의 손에는 여자들이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가 하나 들려있었다.

네모 난 녹옥(綠玉)에 호박(琥珀)으로 만든 구슬이 몇 개 달려있는 노리개다.

 

<고불암에 기거하는 노승에게 이 노리개를 건네주면 대신 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오는 게 아비의 심부름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면서 강유는 강조의 말을 떠올렸다.

강유가 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하는 곳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패옥(佩玉)이다.)

강유는 노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리개의 재료인 녹옥과 호박은 그리 질이 높은 게 아니었다.

녹옥의 색은 탁하고 호박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있다.

그렇다고 세공 솜씨가 정교한 것도 아니다.

네모 난 녹옥에는 봉황이 투각(透刻)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솜씨가 어설프고 조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시장통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장신구일 뿐이다.

(단지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한 걸 보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인 것같긴 하다.)

강유는 반질반질한 녹옥의 모서리를 만져 보았다.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는 것 외에는 값어치가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이 패옥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노리개에 얽힌 사연이 궁금한 강유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그저 아버지의 분부만 이행하면 되니까.)

강유는 생각을 그치며 노리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나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고 혼자 강호에 보내신 것일지도...)

노리개를 챙기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의자에 피부가 검고 흰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물론 두 노인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였다.

(이 노인들...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앞자리에 와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유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마만 조금 찡긋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다.)

강유는 한 눈에 흑백신귀가 자신은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지라 묵묵히 흑백신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흑백신귀도 그런 강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

국수 한 그릇을 얹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와 흑백신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언제 이 자리로 옮겨왔지?)

점소이는 당황하여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 어떻게 할까요 손님?”

놓고 가시오.”

강유는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두 노인을 향한 채...

점소이는 흑백신귀의 눈치를 보면서 강유 앞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두 분 노야, 식사는 하셨는지요?”

강유는 젓가락을 집어들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던 점소이는 혹시나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가 묻자 백귀는 끄덕이고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두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강유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후배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히...”

강유의 권유에 흑신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백괴가 점소이에게 가라고 손짓을 해서 막았다.

... 건량은 포장해놓았으니 나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강유에게 굽신거렸다.

(이상한 늙은이들이잖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자리에 합석이나 하고 말이야.)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이자니 좀 부담스럽군.)

강유는 쓴웃음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세외기인들이고 내게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겠지.)

후룩! 후루룩!

가능한 빨리 식사를 마칠 생각에 강유는 쉬지 않고 국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용골호체(龍骨虎體)!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의 골격이고 체질이야>

 

부지런히 국수를 먹는 강유를 보면서 흑백신귀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주님 못지않은 자질을 지녔어.>

<어떤 면에서는 성주님보다도 빼어날 정도야>

<이놈을 후계자로 삼으면 우리 신귀각(神鬼閣)이 제이(第二)의 제왕성이 될 수도 있겠어.>

<성주님께는 불충한 생각이지만 자네 생각에 동의함세.>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우리 신귀각의 후계자로 삼아야지.>

 

흑백신귀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이에 이윽고 강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국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것이다.

후배는 가부(家父)의 명을 서둘러 수행해야만 하는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흑백신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강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강유, 한 달 후면 열아홉 살이 됩니다.”

일어나려던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강씨였군.”

기초가 튼튼한 걸 보니 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가르쳤어.”

흑백신귀는 또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시차 없이 말을 해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강유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당금 무림에 강씨 성을 지녔으면서 아들을 너 정도로 기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구파일방과 삼문육가(三門六家)에도 강씨성을 쓰는 인간들이 제법 있지만 후손을 잘 둔 놈은 없고...”

흑백신귀는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무명지배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

결국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볼수록 놀라운 인물들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까지 단번에 추론 해내다니...)

흑백신귀의 분석을 들은 강유가 놀랄 때였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이신 일제(一帝) 철면제왕님은 당연히 강씨가 아니고...”

또 쌍비(雙秘)는 여자인 데다가 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

삼기(三奇)와 사신(四神) 중에도 강씨가 둘 있지만 너무 늙었으니 제외...”

결국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중 한명이겠군.”

흑백신귀의 분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흑백신귀는 동시에 강유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주시했다.

오왕, 육패, 칠절에 속하면서도 성이 강씨고 검법이 특기인 놈이라면...”

이제야 알겠도다!”

! !

흑백신귀는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네 아비는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겠구나.”

그렇지? 맞지?”

흑백신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두 분 노야의 해박한 견문에는 후배,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강유는 다시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소요신군이라 불리는 분이 후배의 가부입니다.”

역시 그랬어!”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 백미(白眉)라 불리던 소요신군의 자식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흑백신귀는 동시에 무릎을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를 높이 쳐주시니 자식 된 입장으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두 분 노야께서는 후배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십년 안에 널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마.”

흑백신귀는 다시 동시에 말하면서 몸을 강유 쪽으로 숙였다.

후배를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반면 강유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두 늙은이는 신주이십팔숙중 일제 철면제왕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상좌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창 때는 마교와 혈교의 교주들도 우리를 두려워했을 정도야.”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당금 무림에 철면제왕을 제외한 신주이십팔숙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강유가 당혹스러워할 때였다.

노부들의 별호는 흑백신귀이며 노부가 그중 흑신이다.”

노부가 백귀다.”

우린 마교와 혈교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신귀각의 공동 문주들이다.”

사연이 있어서 남의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분은 아니다.”

흑백신귀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흑백신귀는 물론이고 신귀각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는 아버지 강조로부터도 흑백신귀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신주이십팔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쌍비, 삼기에 필적하는 고수가 존재하고... 역시 세상은 넓구나.)

강유는 강호에 기인과 고수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며 흑백신귀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모자란 후배를 어여삐 보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승을 모시는 일은 실로 엄중한 대사인지라 후배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리가 있군.”

만일 네 아비 소요신군이 허락하면 노부들의 제자가 되겠느냐?”

가부가 허락하면 두 분 노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

네 아비의 허락이 떨어지면 넌 우리 신귀각의 차기문주다.”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강조가 당연히 아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노친네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고...)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가부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 치고 우리 두 늙은이의 이목이 뻗어있지 않은 곳은 없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고개 저어 강유의 말을 막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강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다니 후배는 안심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냐! 일 봐라.”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게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답례했다.

강유는 벗어놓았던 봇짐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객잔 입구로 간 강유는 점소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았다. 며칠간 먹을 건량이다.

건량 꾸러미를 건네받은 강유는 서둘러 객잔을 나갔다.

흑백신귀의 시선은 그런 강유에게서 촌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볼수록 기막힌 자질이야.”

흑신은 강유가 주점에서 나가는 걸 보며 새삼 감탄했다.

반면 백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본문의 오랜 숙원인 신귀합벽(神鬼合壁)을 저놈이라면 완성해낼 지도 모르겠어.”

흑신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백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자네, 강유 저놈에게서 뭐 느낀 거 없는가?”

흑신의 물음에 백귀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몸을 망칠 수도 있는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의 교정이야 우리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무공 얘기가 아닐세. 저 놈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떠올려 보게.”

흑신의 대답에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연상시킨다? 뜬금없이 저놈이 누구를 닮았다고...”

백귀의 말에 대꾸하던 흑신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 맙소사!”

얼마나 놀랐는지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네.”

백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놈이 성주와 흡사한 분위기를 지녀서 마음이 불편했던 걸세.”

그럼... 그럼 저놈이 혹시 십팔 년 전에 귀면지존이 납치해간...”

흑신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아닐 걸세.”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정인군자로 소문났으며 출신도 확실한 소요신군이 저놈 아비일세. 소요신군의 아들이 생사가 불명한 소성주일 리는 없어.”

그렇긴 하네만... 핏줄로 이어지지 않고는 저렇게 분위기가 흡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절대자(絶代者)의 운명을 타고 나서 성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네.”

그럴 가능성도 있군.”

백귀의 말에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소요신군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세.”

그놈을 만나보면 강유에게서 성주가 연상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우리 두 늙은이의 죄책감이 강유 저 아이를 소성주와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고기재를 후계자로 삼게 될 기대로 들떴던 두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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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뻔한 노인

 

 

오빠! 검추오빠!”

자매중 동생인 팽옥령이 달음박질한 탓에 발개진 얼굴로 와락 고검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나 죽네!”

고검추는 팽옥령을 품에 안은 채 뒷걸음질 치며 엄살을 부렸다.

하루 종일 심심했지? 이제부터 옥령이가 오빠하고 놀아줄게.”

고검추의 허리를 가는 두 팔로 끌어안고 올려다보는 팽옥령의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다.

하하하 놀아준다니 영광이옵니다 옥령아가씨!”

고검추는 명치쯤에 닿은 팽옥령의 가슴에 약간 붕긋한 융기가 돋아나 있는 걸 느끼며 웃었다.

검추오빠 피곤할 텐데 귀찮게 하면 안된다.”

뒤이어 도착한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쌀쌀 맞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팽옥경의 두 볼에도 살짝 홍조가 어려 있는 것을 고검추는 놓치지 않았다.

오빠는 옥령이 안 귀찮아해. 그렇지 오빠?”

팽옥령은 가는 두 팔로 고검추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언니에게 눈을 흘겼다.

(저 년이...)

그 꼴을 본 팽옥경의 눈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피를 나눈 동생인 데도 고검추에게 아양을 떠는 팽옥령이 눈에 거슬리는 그녀다.

팽옥경은 고검추와 동갑이다.

당혜선이 어린 고검추를 안고 팽가촌에 나타난 며칠 후 팽옥경이 태어났었다.

당시 당혜선은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어서 고검추에게 수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당혜선을 대신해서 마침 출산한 등삼낭이 고검추에게 젖을 먹이며 키워주었다.

고검추에게 등삼낭은 사실상의 유모인 것이다.

고검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검추는 팽옥경과 함께 등삼낭의 젖을 한쪽씩 나눠 물고 빨며 자랐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고검추는 팽옥경과 친 남매처럼 지내왔다.

물론 팽옥경이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가 토실토실해지면서 서먹해지긴 했지만...

가져왔어요 엄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생에게 한 번 더 눈을 흘긴 팽옥령이 보자기로 싼 찬합을 등삼낭에게 내밀었다.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구나. 옥경이가 몇 가지 음식을 마련했으니 집에 가져가서 먹도록 해라.”

등삼낭은 큰 딸이 내민 찬합을 받지 않고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 좋은데...”

여전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팽옥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떼 쓰지마. 검추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할 거야. 이모가 오늘이라도 돌아올지 모르니...”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찬합을 내밀었다.

누가 그걸 모른데?”

팽옥령은 언니에게 마주 눈을 흘기면서 고검추에게서 떨어졌다. 고검추의 허리를 풀어주는 팽옥령의 손에서 아쉬움이 가득 느껴진다.

잘 먹을게.”

팽옥령에게서 벗어난 고검추는 어색하게 웃으며 팽옥경이 내민 찬합을 받아들었다.

그럼 내일 해뜨기 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손에 찬합을 든 고검추는 세 모녀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가라.”

잘 자 오빠!”

“...”

세 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검추를 배웅했다.

고검추는 곧 마을을 벗어나 자기 집이 자리한 동쪽으로 멀어졌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옥경이를 검추와 짝지어줄 생각이었는데... 당언니에게 너무도 참담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여서 차마 사돈 맺자는 말을 할 수가 없겠구나.)

멀어지는 고검추의 뒷모습을 보며 등삼낭은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무사했던 게 아니었다.

당혜선이 철웅채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비극은 벌어졌었다.

등삼낭은 흑모철웅의 무지막지한 몸 아래 깔려 강간을 당하다가 기절한 후였던 것이다.

당혜선은 분노하기도 했지만 등삼낭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었다.

당혜선이 기필코 흑모철웅을 죽여 버리려는 이유도 등삼낭을 위해서였다.

“...”

소리 죽여 한숨을 쉬는 엄마를 훔쳐보는 팽옥경의 표정도 복잡했다.

등삼낭을 구해 돌아온 당혜선은 마을 사람들을 일체 배제하고 팽옥경에게 엄마를 돌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혼절한 엄마의 몸을 닦아주면서 팽옥경은 엄마가 철웅채로 끌려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버렸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너무도 가엾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자신이 고검추와 맺어지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서는 팽옥경이었다.

 

***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사는 골짜기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붙을 만큼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며 아주 깊거나 험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가촌 주민들은 두 모자가 사는 계곡을 선녀곡(仙女谷)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 당혜선은 영락없는 선녀였기 때문이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한다.

 

(심마니인가?)

팽옥경으로부터 받은 찬합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올라오던 고검추는 미간을 조금 모았다.

고갯마루 못미처에 서있는 단풍나무 아래 노인 한명이 앉아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젊었을 때는 체격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서 볼품없어 보인다.

볼품없는 것은 체형만이 아니다.

백발인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역시 허연 수염은 가꾸지 않아 제멋대로 자랐다.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여있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왼쪽 뺨에는 길게 갈라졌다가 아문 상처가 나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뺨이 갈라질 때 눈도 상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팔 하나가 없다. 오른쪽 소매는 팔이 들어있지 않아서 힘없이 늘어져 있다.

독비(獨臂) 독안(獨眼)의 노인은 망태기를 하나 짊어지고 있는데 약초 캐는 괭이의 손잡이가 망태기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불구의 몸이긴 해도 전형적인 심마니의 행색인 노인이다.

노인이 걸터앉은 바위에는 옹이 진 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으로 용케 기련산을 올라왔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성치 않은 모습을 살펴보며 단풍나무로 다가갔다.

“...”

노인도 고개를 올라오는 고검추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노인인데도 눈이 참 맑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수정처럼 맑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다가 고검추는 무엇 때문인지 노인의 미간이 움찔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게서 뭘 보았기에 잠깐이지만 놀라신 걸까?)

고검추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 했다.

꼬르륵!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고검추의 귀에 들렸다.

돌아보니 노인이 하나뿐인 눈으로 고검추가 들고 있는 찬합을 유심히 보고 있다.

꼬르륵!

그와 함께 다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노인의 배에서 나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다.)

고검추는 잠깐 갈등하다가 막 지나친 노인쪽으로 돌아섰다.

노야! 출출하시면 이걸 드십시오.”

고검추는 노인에게 찬합을 내밀었다.

찬합에 팽옥경이 정성과 공을 들여 만든 음식이 들어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배를 곯고 있는 게 분명한, 그것도 불구의 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허허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노인은 사양하지 않고 헤벌쭉 웃었다.

그저 웃은 정도가 아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보다시피 이 늙은이는 손이 하나 없어서 보자기를 풀 수가 없구먼.”

노인은 흐느적거리는 오른쪽 소매를 고검추에게 보이며 말했다.

(찬합을 직접 열어달라는...)

노인의 뻔뻔한 요구에 고검추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두말 않고 보자기를 풀었다.

드시지요.”

고검추는 찬합의 뚜껑까지 열어서 노인에게 내밀었다. 찬합에는 닭과 소, 양의 고기를 써서 만든 요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젓가락도 쥐어다오.”

노인은 이제 당연한 권리라는 듯 고검추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내민 왼손에는 소지(小指)와 무명지(無名指), 즉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이 없다. 오른팔이 없을 뿐 아니라 왼손도 손가락이 세 개뿐인 것이다.

(어쩌다 이토록 심한 불구가 되신 것일까?)

고검추는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 팽옥경이 찬합과 함께 싸준 젓가락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맛나구먼. 어떤 계집인지 모르지만 자넬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요리야.”

고검추에게서 젓가락을 건네받은 노인은 게걸스럽게 찬합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세 개 뿐이지만 사용하는 데 익숙한 듯 젓가락질이 자연스럽다.

노인은 연신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걸터앉은 바위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노인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찬합을 두 손으로 들고 서있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종과 하인이거나 할아버지와 손자로 볼만한 장면이다.

꺼억! 잘 먹었다. 뱃가죽이 등가죽과 입을 맞춰서 일어날 힘도 없었던 참이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찬합의 음식을 입에 쓸어 넣은 노인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엉겁결에 일면식도 없는 노인에게 공양을 한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노인의 행동거지에서 딱히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검추의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불구의 노인을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고검추는 웃으며 찬합을 다시 보자기로 싸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

그런 고검추에게 노인이 불쑥 물었다.

고검추라고 합니다.”

고검추... 고씨란 말이지?”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가늘어졌다.

(이분도 내 이름을 듣자 옥여상이란 아주머니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구나.)

고검추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푸 두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비는 누구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민망합니다. 어머니가 가친(家親)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고검추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체 거론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남에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노인은 노을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인지 고검추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노인은 다시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성은 대()씨다.”

대노야셨군요. 헌데 기련산에는 어인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고검추의 물음에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기련산에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묘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영생불사의 묘약... 기련산 토박이인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생불사의 묘약이 기련산에 있다는 노인의 말은 얼토당토않게 느껴진다.

너는 아직 살날이 구만리 같아서 뜬 구름같은 희망에라도 매달려야만 하는 늙은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던 노인의 시선이 고갯마루쪽으로 이동했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눈에 한 사내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것이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그자는 기련산의 주민이 아니다.

몸에는 날렵한 경장을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다.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서 그자가 무공을 익혔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 산채의 산적인가?)

고검추가 긴장하며 볼 때였다.

“...!”

고개를 넘어오려던 사내의 몸이 와락 경직되는 게 고검추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뜬 그자는 뒷걸음질을 하다가 홱 돌아섰다.

!

그리고는 놀란 노루처럼 튀어 올라 좌측의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무공을 익힌 자인데 뭘 보았기에 저리 놀라 황급히 달아난 것일까?)

고검추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접 잘 받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꾸나.”

노인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를 끌며 고갯마루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다리까지도 불편한 듯 했다.

살펴가십시오.”

고검추는 팽가촌 쪽으로 멀어지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지팡이를 조금 들어보이고는 팽가촌 쪽으로 불편해 보이는 걸음을 옮겼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이다.)

고검추는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리를 끌며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신경이 쓰인다.

(저분 말씀대로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고검추는 돌아서서 고갯마루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언제쯤 돌아오실지 모르겠다.)

고검추의 생각은 다시 흑모철웅을 추격해간 어머니 당혜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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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버리 기재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은 동북(東北)의 제갈량이라 불린다.

병법과 진법으로 강진남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 이탁뿐이다.

강진남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요동의 군소문파중 하나였던 대려장을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로 키워냈다.

당금의 무림에서 강진남의 이름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당대에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과 달리 강진남은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다. 본처와 여러 첩들에게서 겨우 두 명의 딸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독안룡 이탁이란 벽에 막혀 요서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강진남을 번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큰 근심이다.

 

***

 

아이 참,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강미루(姜美樓)는 잠옷 차림인 채로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히히힝! 푸르르!

몇 개의 담장 너머에 있는 마당에서 수많은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가씨도 깨셨군요.”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유모 최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가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마당 쪽이 대낮같이 환한 게 보인다.

한밤중에 마구간에서 끌려나온 말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그 말들에게 마구(馬具)를 채우는 마부들의 호통소리가 요란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잖아. 한밤중에 왜 저 난리래?”

무군자 강진남의 둘째딸인 강미루는 유모와 함께 창가에 서서 마당 쪽으로 목을 빼들었다.

쇤네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철령보쪽으로 급히 출동할 일이 생겼다네요.”

유모는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철령보의 잡것들이 또 시비를 걸어온 거야?”

강미루는 도끼눈으로 마당 쪽을 흘겨보았다.

강미루는 대려장의 그 누구보다도 철령보를 미워한다. 아버지 강진남이 철령보에 막혀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직 서는 아이들 말로는 이각(二刻;30) 전쯤에 본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해요. 그 손님이 가져온 급보를 접한 장주님이 철령보쪽으로 출동을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유모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려장의 둘째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철령보 쪽으로 출동한단 말이지?”

유모의 설명을 들은 강미루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지며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

 

백남빈은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을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며 대청을 나섰다. 반지는 워낙 커서 가운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감싼다.

완안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오채금환은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무황성에 가져가는 도중 분실할 수도 있어서 손가락에 낀 것이다.

오채금환 외에도 백남빈은 기름종이로 만든 두툼한 봉투를 상의 속에 품고 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신랑성주 토곤이 대려장주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이탁의 보고서가 들어있다.

또 백남빈의 허리춤에는 길이가 한자 반쯤 되는 단검이 끼워져 있다. 손잡이에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그 단검 역시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같다.

청랑검(靑狼劍)으로 이름 붙인 그 단검은 강철도 어렵지 않게 자를 정도로 날카롭다.

대청을 나서니 총관인 사해검객 종리완이 행장이 준비 된 말의 고삐를 잡고 서있다.

이틀 전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괜잖겠는가?”

다가오는 백남빈을 보며 사해검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더 밤을 새도 끄덕없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남빈은 사해검객 앞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 종리완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주님을 보필할 테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게.”

사해검객도 마주 포권을 하며 웃었다.

헌데 그런 사해검객의 모습이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져 백남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백남빈은 사해검객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속내를 들킬지도 몰라서...

사해검객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 둘러보니 주변에 서있는 철령보의 무사들, 심지어 철령보의 건물들까지도 꿈속인 듯 흐릿하게 느껴진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령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불안한 감정이 백남빈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철령보에 남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신랑성과 대려장이 손을 잡은 사실은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소자가 무황성에 다녀올 때까지 존체보중하십시오.)

백남빈은 양부 이탁이 있는 대청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힘차게 말에 올라탔다.

두두두!

곧 백남빈은 사해검객과 철령보 무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철령보를 달려 나갔다.

 

홀로 대청 안에 앉아있는 이탁의 귀에도 백남빈을 태운 말의 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린다.

백남빈과 달리 이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리 근심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남빈이가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이탁은 근심 대신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치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형님의 핏줄이니 결국 극복해낼 테지.)

이탁은 백남빈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는 손위 동서가 되는 백무염을 떠올렸다. 백무염은 이탁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또 두려워하는 존재다.

백남빈은 여러모로 생부인 백무염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백무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백남빈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볼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탁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백남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남빈에게 백무염처럼 근본(根本)을 알아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안(神明眼)이라 불리는 그 힘을 지닌 덕분에 어떤 위장이나 눈속임도 백남빈을 미혹시키지 못한다.

백남빈이 불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등천제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의 실체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탁은 가끔 양아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눈 속에 감춰진 깊은 어둠을 이미 다 들여다 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빈이가 무황성까지 가는 길에 치명적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한다.)

이탁은 백무염과 백남빈 부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끊고 사해검객을 불렀다.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대려장과의 접경으로 이동시켜라. 요하를 건너는 대려장의 인마는 무조건 주살한다."

이탁의 명령을 받은 사해검객은 곧 수하들을 이끌고 철령보를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철령보와 대려장 사이에 전에 없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

 

요하 건너 대려장에도 어느덧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철령보에서 나가는 것은 새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신랑성의 밀사가 본장에 도착한 것을 무황성이 알게 해선 안된다!”

두두두! 히히힝!

흥분에 찬 호통과 긴장어린 고함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우레처럼 터져 나온다.

활짝 열린 대려장의 정문을 통해 수백기의 기마대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간이지만 대려장의 기마대는 거침없이 요하쪽으로 몰려갔다. 요하에는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가설되어 있었다.

 

대려장의 정문에 설치 된 높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검은 물결인 듯 서쪽으로 몰려가는 기마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초로의 인물이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하며 차림새가 격식을 갖추지 않아 분방하게 보이는 청년이다.

소성주(少城主)가 직접 밀사로 올 줄은 몰랐네.”

초로의 인물은 대려장을 빠져나가는 기마대를 내려다보며 청년에게 말했다. 그가 바로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이다.

구처기(丘處機), 즉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징기스칸께 진언하기를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소이다.”

강진남의 말에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훤칠한 체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은 청년이다.

하지만 나 에센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했으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처지! 가야만 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직접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청년은 제 흥에 겨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청년이 바로 신랑성의 소성주 에센이다.

오이라트의 족장이기도 한 신랑성주 토곤의 장남인 그가 직접 아비의 밀서를 들고 대려장을 찾아온 것이다.

에센은 토곤이 보낸 밀사인 동시에 볼모인 셈이다.

(영걸 소리를 듣는 제 아비보다도 몇 배 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놈이다.)

강진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센이 대려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시진 남짓 전이었지만 강진남이 지난 한 달 동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많은 것은 에센의 성격이 수다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몽고초원을 지배하는 오이라트의 후계자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에센의 혀를 자제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를 숨기고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은 높이 사줄만 하다.)

강진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센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얀을 대동한 부성주는 어제 오후에 귀장에 도착해야만 했소. 부성주 정도 되는 인물이 연락조차 보내오지 못한다는 것은 철령보에 의해 죽거나 잡혔다는 뜻이오. 사실 부성주는 여진족 출신이라 본성 내에 적이 많소. 그 중 어떤 버러지가 부성주의 종적을 극품당과 철령보에 누설했을 것이오.”

다 알고 있고 짐작하는 내용이지만 강진남은 끈기를 갖고 에센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강진남의 인내심이 남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에센이 쏟아내는 말 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다수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성주에게는 완안준(完顔俊), 완안극(完顔極)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소. 본성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을 맡고 있는 그 둘과 부성주를 합쳐서 완안삼절(完顔三絶)이라 부르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철풍사(鐵風社)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소. 철풍사는 극품당에 패해 망명한 여진족 무사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에센이 몸을 조금 문루 밖으로 내밀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 대려장을 빠져나간 기마의 선발대는 이미 십여 리 밖에 있는 요하를 건너고 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기마대는 마치 개미떼처럼 작고 까맣게 보인다.

헌데 배다리를 건넌 개미떼같은 기마대는 철령보가 자리한 서쪽으로 가지 않고 요하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주의 수하들이 남쪽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기마대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일 것 같은가?”

강진남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 에센을 시험하시는구려.”

에센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강진남에게 다시 말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서남진(西南進)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 신랑성에서도 만일 대비하여 그쪽으로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소. 이를 모를 리 없는 독안룡 이탁은 전령(傳令)을 남쪽으로 보내 진황도(秦皇島)에서 배편으로 천진(天津)까지 가게 했을 것이오. 천진에서 북경 근처 무황성까지는 지척지간이니... 이에 장주께서도 철령보쪽이 아니라 진황도 방면으로 추격하라 명령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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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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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落拓文士

 

 

천강마존을 향해 다가서던 삼제(三帝)는 문득 부르르 신형을 떨며 멈추어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강마존이 돌연 번쩍 고개를 든 것이었다.

[...]

가공할 한망이 치뻗치는 그의 두눈을 대하자 상제는 섬칫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증스러운 놈들...!]

천강마존은 부드득 이를 갈아부치며 번쩍 천강검(天罡劍)을 치켜들었다.

삼제 역시 긴장된 안색으로 각기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구유명제는 새하얀 도신(刀身)의 보도(寶刀)를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___빙혼마도(氷魂魔刀), 슬쩍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심맥을 얼어붙게 만드는 가공할 한빙살기(寒氷殺氣)를 지닌 보도(寶刀),

유성검제___ 그의 무기는 유성검문(流星劍門)의 지보인 은하유성검(銀河流星劍)이었다.

만천독제는 백독(白毒)의 정화를 흡수한 독혈낭아봉(毒血狼牙奉)을 움켜쥐었다.

___ ___ ___ ___ !

일진 설풍(雪風)이 팽팽히 고조된 장내의 기운,

순간,

[유명천세(幽冥千世)___!]

[유성비류(流星飛流)___!]

[화독만천(火毒滿天)___!]

삼제는 동시에 대갈을 터뜨리며 신형을 움직였다.

... 츠츠츠츠츳___!

파파파팟___! ___ ___!

낙혼애를 단번에 허물어 뜨릴 듯한 엄청난 파공음과 도기(刀氣)가 팔방(八方)을 난무했다.

천강마존은 불근 이를 악물었다.

[천강참마(天罡斬魔)___!]

아아___!

천하(天下)에서 가장 강맹한 무적(無敵)의 검법 천강검식(天罡劍式)!

가공할 검기(劍氣)의 소용돌이와 함께 일순 섬뜻한 청광(靑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차차차___ ___!

___ ___ ___!

들썩 장내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며,

 

동시에,

[흐윽...!]

[...!]

잇따라 다급한 신음성이 터졌다.

잠시 후, 사방을 몰아쳤던 난석이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구유명제, 유성검제, 만천독제, 즉 삼제(三帝)는 모두 가슴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약간만 더 깊었더라면 치명적인 중상을 면치못했을 것이다.

하나 천강마존, 그 역시 온전치는 못했다.

조금 전에 비해 안색은 더욱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한 사발이나 되는 흑혈(黑血)을 울컥 토해냈다.

이때, 구유명제가 재빨리 지혈을 하고 이제(二帝)를 둘러보았다.

[힘을 냅시다!]

그는 다시 불끈 빙혼마도를 치켜들며 벼락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쐐애애___ ___!

유성검제와 만천독제도 그와 합세하여 무섭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촤르르...!

츠츠츠츠___!

경천동지(經天動地)!

그들 삼인의 합공(合攻)은 실로 천지를 뒤엎고도 남을 위력이 있었다.

허나 천강마존, 그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오너라! 천강뢰격(天罡雷擊)___!]

그는 전신의 심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천강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___ ___ !

고막을 산산이 파열시키는 엄청난 폭음이 터져올랐다.

[허억...!]

[으음...!]

[... ...!]

그 폭음 속에서 급박한 신음성이 연이어 터졌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튕겨지듯 장내에서 빠져나왔다.

인영, 그는 바로 만천독제였다.

헌데, 놀랍게도 그의 오른쪽 다리가 싹둑 끊어져 나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와 유성검제 또한 적지않은 타격을 입고 신형을 비틀거렸다.

허나 그들보다 심한 치명적 상처를 입은 인물은 역시 천강마존이었다.

그의 상세는 엄중하기 그지없이 안색은 거의 사색(死色)에 가가왔다.

번갯불 같은 신광마저 흐릿하게 꺼져갔다.

허나 그는 휘청거리는 신형을 쓸어안고 삼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유명제와 유성검제는 섬뜩한 공포와 함께 전율마져 느꼈다.

(... 지독한 늙은이.. 저 지경이 되어도 버티다니..!)

그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유성은한(流星銀寒)!]

유성검제의 은하유성검이 전광처럼 번뜩 허공을 갈랐다.

[유명구궁(幽冥求宮)!]

거의 동시에 구유명제의 빙혼마도가 천강마존의 복부를 노리며 한망을 발출했다.

허나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左手)로부터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천강마존은 골수까지 저미는 죽음의 통증을 느꼈다.

허나 그는 그 고통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전력(全力)을 쏟아 검()을 휘둘렀다.

천강파극식(天罡破極式)___.

츠츠츠츠...!

헌데,

[으윽...!]

그는 검세를 펼치다 말고 다급한 신음성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력이 끊어짐을 느끼고 그는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파팟___!

구유명제의 빙혼마도는 간신히 피해냈으나 유성검제의 일검이 그의 허리를 그었다.

[!]

천강마존은 한차례 신형을 비틀했다.

바로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그 불꽃은 화전(火箭)처럼 천강마존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은 힘겹게 몸을 비틀어 불길을 피했다.

허나 그는 완전히 몸을 피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크윽...!]

그는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___!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낙혼애의 끝부분, 실로 위험천만의 위기였다.

천강마존은 그러나 피에 젖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의 충혈된 두눈은 구유명제를 향해 부릅떠져 있었다.

[... 네놈이 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를 연성하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___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

이는 희대의 마인(魔人) 마화자(魔火子)가 창안한 가공할 마공(魔功)이었다.

마화융천강기를 펼치면 전율스럽게도 푸른 인화가 피어오른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할 것 없이 이 인화에 적중되면 그 부분은 완전히 삭아버리는 전율의 위력이 있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정면으로 마화융천강기를 적중당하고도 건재한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는 경악의 눈길로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곧 그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빙혼마도를 치켜들었다.

[흐흐흐흣... 이제 죽어랏!]

___ 츠츠츠츳...!

삼엄한 도기가 그물처럼 천강마존을 뒤덮을 듯 몰아쳤다.

천강마존은 허나 속수무책.

그의 신형은 일순간 굳어졌다.

허나, 빙혼마도가 막 천강마존의 몸을 양단하려는 순간, 축 늘어졌던 천강검이 돌연 영사같이 튕겨져 올랐다.

[...!]

구유명제는 예상밖으로 급변한 천강마존의 태도에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허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빙혼마도로 천강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의 좌수가 푸른 인화에 휩싸여 천강마존의 가슴을 꿰뚫었다.

차차창___! ___!

[크아악___!]

천강마존은 정통으로 가슴에 마화융천강기를 맞고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 그의 몸아래는 바로 천야만야한 죽음의 절곡 낙혼애가 아닌가?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낙혼애 아래로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

구유명제는 이 예기치못한 사태에 당황성을 터뜨렸다.

허나 천강마존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한 만길 단애 아래로 사라져 버린 되었으니...

[으음...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가 분명 그의 몸에 있었을 텐데...]

그는 원통함에 발을 굴렀다.

이때,

[__ __ __ ___!]

돌연 폐부를 뒤흔드는 긴 장소성이 구련한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건데 공력이 극상에 이른 내가 최절정고수임이 분명했다.

구유명제와 이제는 안색이 홱 변했다.

[...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낙혼애 아래에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절세의 경공으로 낙혼애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한 번에 근 백여 장 씩의 엄청난 도약이었다.

___ !

순식간에 인영은 단에 위로 날아내렸다.

순간, 삼제는 일제히 두눈을 크게 떴다.

[낙척문사(落拓文士)!]

구유명제가 경악의 음성으로 짧게 부르짖었다.

삼제의 앞에 나타난 인영___.

그는 서생차림을 한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헌데 그는 일신에 헤질대로 헤져 누덕누덕 기운 장삼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___고죽취옹(枯竹醉翁).

___낙척문사(落拓文士).

중년인, 그가 바로 쌍기(雙奇) 중 일인(一人)인 낙척문사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삼, 사십대의 중년인이었으나 실상은 백 삼십(百三十)이 넘은 노인이었다.

이때, 낙척문사는 장내를 둘러보며 부르르 신형을 경련했다.

[으으... 이럴 수가...!]

그는 곧 사태를 짐작하고 분노가 끓는 눈빛으로 삼제를 노려보았다.

그 강렬한 안광에 삼제는 흠칫 했다.

(저 늙은이는 무공을 익혔다고 알려지지 않았다. 헌데... 이제보니 천강마존에 못지않은 무공을 지닌 고수다...!)

구유명제는 일순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낙척문사.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무섭게 삼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허나 잠시 후 그는 사납던 안광을 거두며 문득 탄식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법. 그대들의 과욕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삼제를 향해 조용하나마 깊은 위엄이 깃든 음성으로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구양형님의 시신이라도 찾아야겠군.]

몸을 돌리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___ !

그는 주저없이 까마득한 낙혼애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급격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그의 신형이 점차 허공을 빙빙 돌며 여유있게 날아내려갔다.

낙혼애 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삼제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문득 자신의 실력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다.

낙척문사의 무공은 경악의 한도를 넘어 초쾌한 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으니...

문득 구유명제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끝난일. , 돌아갑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휙 신형을 날렸다.

이어, 유성검제가 그를 뒤따랐고 만천독제와 백독랑아봉에 몸을 의지한 채 낙혼애를 내려갔다.

 

X X X

 

철썩... 우르릉___!

절해고도(絶海孤島)!

노호(怒號)같은 파도가 섬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

그것은 전체가 하나의 암석으로 형성된 기이한 섬이었다.

콰르릉... 우르르... ___ ___!

섬둘레는 겨우 십 리 남짓___

허나 그 주위로는 수십 길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천험의 위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돌연 까마득히 먼 수평선 위에 하나의 흑점이 번득 나타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인영은 바다 위를 마치 육지에서 걷는 것과 같이 미끄러지듯 유유히 돌섬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점차 뚜렷이 드러나는 인영, 그는 허름한 장삼을 걸친 중년문사였다.

낙척문사, 바로 그가 아닌가?

헌데, 그는 기이하게도 왼손에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감싸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척문사는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유유하게 타며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파도를 넘고 수면을 가로질러 높다란 암초 뒤로 돌아갔다.

동굴, 그곳에는 놀랍게도 약 이 장 정도의 높이로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은 반정도가 바닷물에 잠긴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낙척문사는 망설임없이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굴의 통로를 따라 얼마쯤 나아가자 수면이 끝나며 바닥이 드러났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약 십여 장 전진했을까?

낙척문사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하나의 석문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석문을 밀었다.

끼이익___!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석실이었다.

수만 권의 장서가 빽빽이 들어차 흡사 서실(書室)을 연상케하는 석실___.

석실의 한쪽에는 석상(石床)이 놓여 있었다.

헌데, 지금 그 석상 위에는 한 명의 청삼노인이 묵묵히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낙척문사는 석실을 들어서며 청삼노인을 향해 말했다.

[형님, 소제 돌아왔습니다.]

그말에 돌아앉아 있던 청삼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헌데, ! 이럴수가...!

청삼노인, 그는 바로 낙혼애 아래로 떨어진 천강마존이 아닌가?

그가 어찌 살아 이곳 석실에 앉아있단 말인가?

 

천강마존___.

그는 낙척문사와 오래 전부터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사이였다.

낙척문사는 천강마존이 무형기독에 중독되자 해약을 구하기 위해 그와 헤어졌다.

허나 그가 해약을 구해 낙혼애로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천강마존은 낙혼애로 떨어진 후였다.

그는 낙담 끝에 낙혼애로 뛰어내렸다.

천강마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실로 천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강마존은 수백 년 묵은 나무등걸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는 엄청난 내상을 입은데다가 독기(毒氣)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결국 공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강마존은 들어서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네갈노제, 어서오게.]

허나 문득 그는 낙척문사의 안색을 살피며 나직이 탄식했다.

[,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것을 보십시오.]

그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천강마존의 앞으로 내밀었다.

[웬 어린아이인가?]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한 듯 천강마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홱 급변했다.

일순 그의 흐릿하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신광이 번쩍였다.

[.. 이럴 수가...! 천년(千年) 내에 나타난 적이 없는 천양신맥(天養神脈)을 지니고 있다니...?]

그의 두눈은 엄청난 경악으로 흡떠졌다.

그는 벅찬 감정을 다스리며 강보 속 아이의 골격을 살폈다.

헌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아니는 앙징스럽게도 한 손에 옥패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 황룡(黃龍)이 승천하고 있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진 옥패였다.

[... 이것은...?]

천강마존의 표정이 다시 한 차례 크게 변했다.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신물(信物)입니다.]

천강마존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황룡보에 무슨 변괴라도 있었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황룡보가 의문의 괴멸을 당했습니다.]

천강마존의 안색이 일시지간 창백하게 굳었다.

[자세히 얘기해보게.]

그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닫았다.

 

[... 으음...]

끊일 듯 미약한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 웬 여인이...?]

낙척문사는 검미를 찌푸리며 우뚝 걸음을 멈추어섰다.

이곳은 돈탕 근처의 험지.

싯누런 황토의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낙척문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다가갔다.

여인은 삼십 정도의 소부(小婦)로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인이었다.

허나 지금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백의(白衣)가 혈의(血衣)로 변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낙척문사는 이미 그녀의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흔들며 말했다.

[부인,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은 문득 힘겹게 눈을 뜨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제 아이를... 부탁... 황룡보는 무너지고... 대제께선... 함정에... 적들은... ...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잇고는 그만 축 늘어졌다.

! 그녀의 가슴에는 강보에 싸인 한 명의 사내아이가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황룡보가...!]

낙척문사는 급히 여인과 아이를 안고 몸을 날렸다.

그곳에서 황룡보까지의 거리는 불과 삼십여 리___

그는 순식간에 황룡보에 이르렀다.

허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초토화된 황룡보의 잔해 뿐이었다.

낙척문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황룡보 식솔들을 모두 안장해 주고 소부의 시신도 따로 안장시켰다.

허나 기이하게도 황룡대제의 시신은 어느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낙척문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황룡대제! 그는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기재였건만...]

문득 그는 낙척문사에게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는 세 명의 처가 있었습니다만 오년 전에 혼인한 청해설랑(靑海雪郞)에게서만 얼마전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청해설랑이었단 말이군.]

[.]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허허...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안배인지 모르겠군! 비록 복수할 마음은 없으나 하늘이 이 아이를 내게 보냈셨음은 이 아이로 하여금 중원에 불어닥친 혈겁을 막게 하시려함인가?]

그말에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혈겁은 형님의 무학이 아니면 막을 수 없습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이내 어두운 신색을 지었다.

[허나 오절(五絶)이 이 아이가 장성할 동안 가만히 있겠는가? 이 아이가 장성했을시는 이미 전 무림이 오절(五絶)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오절(五絶)___!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대체 어떤 인물들이기에 천강마존이 염려한단 말인가?

허나 낙척문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점에 대해선 소제가 이미 손을 써놓았습니다.]

[손을 써 놓다니...?]

[강호에서는 형님이 건재한 것으로 알려지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오절이 비록 암중모색은 할수 있어도 표면으로 나서 활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네가 한 일이라면 틀림없겠지.]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허... 보면 볼수록 훌륭한 골격이군. 이 녀석은 아마 노부를 능가하는 불세제일인(不世第一人)이 될 수 있을 것이네.]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과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

이들의 만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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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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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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