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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속의 인연

 

 

-기련산(祈蓮山)!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자리한 험산으로 서북쪽에는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중원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남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기련산의 서쪽 끝은 곤륜산의 장대한 산맥과 이어져 있다.

쏴아아아!

늦여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기련산 전역을 맹렬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쐐애애액!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질풍같이 질주하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이 인물의 경신술은 너무도 빨라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설령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지닌 무림고수라 해도 그저 흐릿한 사람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이나 쭉쭉 나아가는 경이적인 경신술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테니...”

질풍같이 달리는 인영으로부터 문득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 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처럼 걸걸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섬전처럼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 인물이 여자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경신술을 연마했기에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여인의 몸 주위로는 진공(眞空)의 막()이 생겨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들! 이 모두가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간악한 음모이거늘... 그 까짓 비급에 눈이 멀어 고독애로 몰려들다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연신 이를 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주 특이하여 한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구(巨軀)!

여인은 무려 칠척(七尺; 2m 10cm)에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린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이 여인은 다리 하나의 굵기도 어지간한 사내들의 몸통만하다.

투학!

그 강인한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여인의 늘씬한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일까?

비록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 구릿빛 피부에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는 경국지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만이 아니다.

칠척 가까운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팔 다리가 늘씬할 뿐 아니라 들어갈 곳은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나올 곳은 당당하게 나와 있다.

무지막지한 거구의 소유자라는 것만 빼면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께서 이미 변을 당했다면... 전 무림이 나 냉약빙(冷若氷)의 손에 피로 씻기리라!)

거구의 여인은 질풍같이 날아가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큼직한 손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게 오라버니는 생명과 다름없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굉천벽력탄(轟天霹靂彈)보다 더한 것이라도 쓸 수 있다!)

냉약빙이란 이름의 여인은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에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 십여 개가 들어있다. 굉천벽력탄이라는 그 화탄은 한 알로 십장 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여간 서둘러야 한다! 곤륜산의 고독애까지는 아직도 천여 리나 남았으니...!)

쐐애애액!

냉약빙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천여리라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먹히는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이 여인에게는 천리 길도 그저 하루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헌데 냉약빙이 막 하나의 산봉을 새처럼 날아 넘을 때였다.

아악!”

퍼붓는 빗속에서 한소리 애처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산 속에서 웬 여자가...!)

콰우우우!

빛살처럼 질주하던 냉약빙의 몸이 송곳을 꽂듯이 딱 멈춰졌다. 그녀는 달리는 것도 빨랐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빨랐다.

쏴아아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우뚝 멈춰선 냉약빙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그녀의 거구가 삽시에 빗물에 젖어들면서 얇은 여름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흠씬 젖은 옷자락을 통해 그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냉약빙의 젖가슴은 하나하나가 가장 큰 수박만하다. 그 육중한 한 쌍의 살덩이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가빠진 탓에 연신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멈춰선 냉약빙은 먹물을 칠한 듯 짙은 눈썹을 모으며 비명이 들려온 우측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가볼까?)

냉약빙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평상시였다면 당연히 달려가 보았을 것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녀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촌각을 다투어 곤륜산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냉약빙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악! 안돼! 안된다 이놈들아! 아악!”

또 다시 여인의 절박하고도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어떤 여인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냉약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은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같이 초조했지만 같은 여인의 입장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스파앗!

다음 순간 냉약빙의 모습은 흐릿하게 변해서 어떤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온 계곡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는 계곡에도 장대발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그 계곡의 끝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수십 길 높이인 그 절벽 앞쪽으로는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옷을 걸친 사내 십여 명이 어떤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흘흘! 고것 육덕 한번 기막히군!”

빨리 끝내라 장가야! 너 혼자 즐길 계집이 아니지 않느냐?”

빙 둘러선 혈포인들이 저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보는 가운데 한 명의 여인이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내들에게 깔려 능욕당하고 있는 그 여인은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부(美少婦)였다.

여인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우아한 기품까지 지녀 한눈에 보기에도 명문가의 안주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으며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채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미소부의 팔 다리는 흉칙한 인상의 사내 넷이 활짝 벌려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 미소부의 몸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자가 하체를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깔린 여체는 마치 작살을 맞은 듯 물고기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한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인데 그곳에는 사내아이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귀엽고 잘 생긴 그 아이는 바로 유린당하고 있는 미소부의 아들이었다.

사내아이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은 미소부의 아들을 해치고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는 중이었다.

... 정말 기가 막히구만! 이런 계집을 마누라로 두었었느니 태양신협(太陽神俠)이란 놈도 여한은 없었겠다.”

미소부의 몸 위에서 날뛰는 사내가 헐떡이며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였다.

크악!”

커억!”

돌연 단말마의 비명 십여 마디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산통깨지게!”

미소부를 유린하던 사내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직후 그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퍼퍼퍽! 콰당탕!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육시를 할 놈들!”

화악!

뒤 이어 사나운 일갈과 함께 장내로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바로 냉약빙이라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 당신은!”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냉약빙을 본 순간 미소부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자의 뇌리로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여살성(女煞星)의 존재가 떠오른 때문이다.

... 전모(電母) 냉약빙!”

파앗!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여체에서 떨어진 사내는 다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자는 벌거벗은 하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존재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모 냉약빙!

 

여자의 몸으로 신마풍운록에 서열 십위(十位)로 기록되어 있는 절세고수다.

별호가 암시하듯 냉약빙의 경신술은 단연 우내최강이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하다.

냉약빙이 구사하는 전궁만리비(電弓萬里飛)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로 알려져 있다.

전궁(電弓)은 번개를 뜻한다.

전모라는 별호는 냉약빙의 경신술이 번개가 치는 것만큼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냉약빙의 표적이 된 자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전모 냉약빙이 나타났으니 일개 음적에 불과한 사내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으헉!”

나타난 여인이 전모 냉약빙임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뿌옇다 싶은 순간 냉약빙의 모습이 유령같이 앞쪽에 나타난 것이다.

쩌어엉!

이어 그녀의 큼직한 손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고...

안돼, 케엑!”

퍼억!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연 뇌수가 빗속으로 확 뿌려졌다. 냉약빙의 손가락에서 일어난 강력한 파괴력이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머리통이 으깨져 나뒹구는 음적의 시체를 노려보며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았다.

헌데 그 직후였다.

흐윽!”

그녀의 뒤에서 짤막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반사적으로 돌아본 냉약빙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내들에게 유린을 당하던 미소부가 한 자루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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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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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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