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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뱀을 먹는 뱀

 

 

퍼억!

임청우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억겁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임청우는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근육이 열기에 녹은 엿가락처럼 풀어지고 관절 마디가 전부 벌어져버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에 젖은 솜처럼 퍼져 누운 채 임청우는 멍하니 흑옥의 벽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깊고도 검은 흑옥의 벽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이 내 몸 속으로 빨려 들어왔던 것같은데...)

투명하게 변해가던 자신의 몸으로 북두칠성이 하나씩 흡수되었었다.

환각인가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인간의 생사와 운명,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차례차례 임청우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었었다.

덕분에 광활한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가던 임청우는 다시 형상을 갖추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임청우였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모른다.

이윽고 풀어졌던 근육에 탄성이 돌아오고 벌어졌던 관절도 맞물려졌다.

임청우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옥의 벽에 박혀있는 북두홀을 만져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임청우는 아쉬움을 남기고 흑옥의 벽 앞을 떠났다.

 

***

 

임청우는 북두무랑을 나왔다.

두 개의 월동문 중 <>자가 새겨진 오른쪽 월동문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북두무랑 안에서 보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단 한 구절의 무공비결도 얻을 수 없었다.)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북두무랑을 나섰다.

(하긴 기연이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림고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밖으로 나온 임청우는 아쉬운 마음에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왼쪽 월동문처럼 오른쪽 월동문 옆의 벽에도 상당히 많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게 들어왔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글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서명은 수십 줄인데 한 줄에 하나의 이름만 새겨진 경우도 있고 십여 개가 나란히 적혀있기도 했다.

(살아서 북두무랑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한 줄이 한 세대를 의미할 테고...)

임청우는 서명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았다.

윗부분의 십여 줄은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어서 판독이 불가능했다.

중간쯤부터는 읽을 수가 있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이름의 주인이 직접 새겨 넣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름들 가운데 임청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을 살펴보자. 어쩌면 북두무랑을 훼손한 범인도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몸을 숙여서 맨 아랫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천영(趙天永), 번리충(樊利忠), 풍건군(馮建軍), 왕천달(王千達), 당소광(唐小光), 양시우(梁翅祐)...

여섯 개의 서명 중 앞쪽의 다섯 개는 파인 부분의 색이 절벽과 비슷하다. 이름을 새긴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양시우(梁翅祐)라는 이름에는 바위 안쪽의 밝은 색이 남아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그 이름이 새겨진 후 이십 년 이상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찾았다! 바로 이자다!”

임청우는 마지막에 새겨진 서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풍화된 정도로 봐서 양시우란 이 이름은 북두무랑의 무학비결들이 훼손되었을 무렵에 새겨졌다. 거의 틀림없이 이자가 범인이다!”

임청우는 양시우라는 자가 북두무랑을 통과한 후 다른 사람이 북두무제의 무학비결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해버렸음을 확신했다.

하긴 범인을 알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북두무제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북두무랑의 상태나 알려주도록 하자.”

임청우는 월동문을 등지고 돌아서 안개의 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헌데 임청우는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기겁하며 멈춰 섰다.

월동문 앞쪽의 땅 바닥에 수많은 뱀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한 뼘 쯤 되는 작은 새끼 뱀이 있는가 하면 대들보만한 크기의 구렁이도 보인다.

그 많은 뱀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미동도 않고 누워있다.

... 이 뱀들, 왜 갑자기 몰려든 건가?”

소스라치듯 놀란 임청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산을 타다보면 뱀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저 놈 뭐하는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임청우는 금관혈린사를 발견했다.

금관혈린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뱀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인데 하는 짓거리가 기이했다.

그 놈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거만하게 고개를 세운 채 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뱀 옆에 이르면 쭉 몸을 펴서 길이를 잰다.

금린혈관사가 자기 옆에 몸을 누이면 비교당하는 뱀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에 길이를 잰 뱀은 금관혈린사보다 한 뼘쯤 더 크다

툭툭!

금관혈린사는 불만스럽게 그 뱀을 꼬리로 건드렸다.

금관혈린사의 꼬리에 닿은 뱀은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안도하며 긴장을 푼다.

다른 뱀들의 길이를 재고 있는 건가?”

임청우가 어리둥절할 때 금관혈린사는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떠는 그 뱀 옆에 몸을 쭉 펴며 누웠다.

이번에는 길이가 딱 맞다.

쉿쉿!

그걸 확인한 금관혈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쳐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스스스! 사사삭!

그러자 다른 뱀들은 안도하며 일제히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있고 조각상처럼 보이는 시체들 사이로 숨는 놈도 있다.

이제 동굴 앞쪽의 바닥에는 금관혈린사와 그놈이 길이를 잰 놈만이 남았다.

(죽은 듯 누워있던 뱀들이 마치 황제의 칙명을 받은 신하들처럼 흩어진다.)

임청우가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감탄할 때 금관혈린사는 홀로 남은 뱀의 머리를 붉은 혀로 핥았다.

금관혈린사의 혀가 머리에 닿은 뱀은 보기에도 딱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

(뭘 하려고 몸길이를 비교했을까? 설마 짝짓기 상대를 찾은 것일까?)

임청우가 의아해할 때였다.

금관혈린사가 남아있는 뱀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뱀을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뭐야? 잡아먹기에 적당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길이를 재본 건가?”

후루룩!

임청우가 놀라는 사이에 금관혈린사는 순식간에 뱀을 다 삼켜버려서 꼬리만 입 밖으로 나와 흔들리고 있다

참 빨리도 먹는다!”

그 꼬리마저 이내 삼키는 금관혈린사를 보며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끄억!

자기 몸 길이만한 뱀을 삼킨 금관혈린사는 사람처럼 트림까지 하는데 어느덧 그놈의 몸은 전보다 배로 통통해져 있었다.

트림까지하고... 참 골고루 한다.”

꼬르륵!

쓴웃음을 짓는 임청우의 배에서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저놈이 배 채우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출출해지는구나. 먹을 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면서 백초주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간다.

그러자 배를 채우고 누워있던 금관혈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꼴꼴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임청우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금관혈린사가 그의 발치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왜 또?”

임청우는 경계하며 호리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거냐?”

임청우가 혹시나 해서 묻자 금관혈린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참... 뱀이 술을 달래기도 하고...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임청우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리병을 금관혈린사의 머리 위로 가져가 기울였다.

조금 맛만 봐라. 넌 덩치가 작아서 술에는 약할 거다!”

쪼르르!

임청우가 아래로 기울이는 호리병에서 술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금관혈린사는 그 즉시 입을 쩍 벌려서 술을 받아마셨다.

술맛 좋지? 백가지 약초를 삭혀서 만든 백초주라는 거다. 내가 이래 뵈도 사냥과 채약뿐 아니라 술도 잘 담근다는 거 아니냐?”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에게 술을 먹이며 자랑할 때였다.

!

갑자기 금관혈린사가 호리병 입구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임청우는 기겁하며 호리병을 쳐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금관혈린사는 단번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관혈린사는 머리에 뿔도 달려있고 식사를 한 직후라 몸통도 호리병 입구보다 더 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혈린사는 마치 연기나 물처럼 변해 호리병에 들어가 버렸다.

놈은 임청우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빨리 나와! 잘못 하면 너 뱀술 된다!”

당황한 임청우는 호리병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금관혈린사가 다시 불쑥 머리를 호리병 밖으로 내밀었다.

끄억!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트림을 한다.

호리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 그 새 남아있던 술을 다 마신 거냐?”

스르르!

임청우가 놀라는데 금관혈린사는 뿔을 몸통에 찰싹 붙이더니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롱! 고로롱!

이어 호리병 속에서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술 병 속에서 잠들고... 뭐 이런 벽창호가 다 있는 건가?”

임청우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금관혈린사는 호리병 속이 아늑해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을 꺼내려면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을 찢어야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호리병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

어쩔 수 없이 금관혈린사를 넣은 채 호리병을 가져가야한다.

하긴 너같은 친구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잘 자라! 술 깨면 풀어주마!”

임청우는 호리병을 허리띠에 묶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길 빠져 나가자!”

호리병을 허리에 찬 임청우는 서둘러 안개의 벽으로 다가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흐려졌지만 점점이 광점이 남아있다. 금관혈린사가 임청우를 안내하며 남겼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청우는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는 광점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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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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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들보 위의 비급(秘笈)

 

 

고불선사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한쪽으로 밀어두었고 책과 종이들은 반대쪽에 쌓아서 탁자의 가운데를 비게 만들었다.

덜컹!

문득 고불암의 문이 열리면서 귀면지존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하지만 고불선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탁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귀면지존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노납이 교주라 해도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고불선사는 정리한 물건들 중 몇 장의 종이를 탁자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하물며 이토록 중요한 탁본(拓本)이 유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고불선사가 귀면지존 쪽으로 미는 종이들 위에는 무언가에 먹물을 묻혔다가 찍은 탁본이 새겨져 있다.

주먹을 쥔 사람 팔뚝에 종이를 대어 탁본을 뜬 형태인데 생생한 핏줄과 함께 수많은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범어, 즉 고대 천축의 문자였다.

본좌가 선사에게 맡겼던 그 탁본의 정체를 알아낸 거요?”

귀면지존은 탁자 앞에 멈춰서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비록 파계(破戒)하긴 했지만 노납도 소림사의 제자요. 아무렴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남기신 유물의 탁본을 못 알아보겠소?”

고불선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맞소! 역시 선사는 학식과 혜안으로는 소림제일이시오.”

귀면지존은 탁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스슥!

그러자 탁본을 뜬 종이들이 귀면지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귀면지존은 그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며 확인했다.

유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 모습을 보며 고불선사가 말했다.

무궁무진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달마묵장의 탁본을 세상에 내보내서 풍파를 일으킬만한 배짱이 노납에게는 없으니 말이오.”

선사께서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 말씀은 믿어드리겠소. 하지만...”

화르르!

귀면지존 손이 달아오르면서 탁본을 뜬 종이들이 단번에 불타올랐다.

만에 하나 달마묵장에서 비롯된 무공을 쓰는 자가 발견된다면... 선사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여자로서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귀면지존은 삼매진화로 탁본을 재로 만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불선사는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교주의 암계(暗計)에 빠져 파계를 한 그날 이후로 노납에게 사바세계는 온전히 고해(苦海)일 뿐이었소. 어서 노납을 이 끔찍한 업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구려.”

눈을 감은 고불선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좌를 위해 큰 공을 세워주신 선사의 부탁이니 들어드리리다.”

귀면지존은 탁본을 태운 재를 털어낸 오른손으로 고불선사를 겨누었다.

지징!

그자의 오른손이 진동을 일으키며 달아올랐다.

(시주...)

귀면지존의 손바닥이 진동함에 따라 몸을 떨며 고불선사는 강유를 떠올렸다.

(부디 세존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겠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불선사의 의식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태실봉 일대도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유는 고불암이 자리한 태실봉 동쪽의 절벽 위에 서있었다.

태실봉을 내려갔던 강유는 숲이 울창하여 남의 눈에 띠지 않을만한 곳에서 방향을 돌려 고불암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이각(二刻;30)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강유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각이면 내 걸음으로 오십 리는 충분히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니 고불암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지.)

휘익!

생각을 마친 강유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은 거의 수직인 데다가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하고 높은 절벽이다.

하지만 경신술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요신군의 아들 강유에게 이 정도 절벽을 내려가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 타탁!

강유는 마치 산양처럼 절벽을 이리저리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백여 장쯤 내려가자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세워진 고불암 지붕이 보였다.

휘릭!

강유는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불암 앞의 마당으로 내려섰다.

강유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살펴보니 고불암의 문은 닫혀있다.

스님! 소생 돌아왔습니다.”

강유는 작게 말하며 고불암의 닫혀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강유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얼굴이 굳어졌다.

(피비린내!)

그렇다.

흐릿하지만 고불암의 문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

덜컹!

급히 문을 열고 고불암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불암 내부는 강유가 떠날 때와 딱히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암자 중앙에 놓인 탁자 건너편에 고불선사가 누워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있는 고불선사의 입과 코, 양쪽 귀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주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스님!”

강유는 급히 고불선사 옆으로 다가가가 목 주변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진맥하는 강유의 손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적(入寂)하셨다.)

고불선사를 진맥해본 강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사인(死因)은 심장과 혈맥의 급작스런 파열... 내공을 잘못 운용하여 혈기(血氣)가 폭주한 듯한 모습이다.)

소요신군은 다 방면에 박식하여 강유에게 의술도 상당히 깊이 가르쳤다.

덕분에 강유는 어지간한 의원 못지않은 의술 지식을 갖고 있다.

(사인만 보면 전형적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인데...)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아는 범주 안에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불선사는 자연사 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유는 고불선사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불선사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강유는 고불선사가 탁자에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틀림없다. 스님은 어떤 자에게 살해당하셨다.)

강유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한 마공에 당해 심장과 혈맥이 터져버린 것이다. 내게 오십 리 쯤 갔다가 돌아오라 하신 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흉수가 나도 해코지 할까 우려하신 때문이었고...)

분노하던 강유는 고불선사가 말없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휘익!

급히 일어난 강유는 대들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대들보 근처까지 뛰어오른 강유의 눈에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 않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책이다.

(!)

!

강유는 놀라면서도 재빨리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 후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다.

강유가 대들보에서 발견한 그 책에는 <古佛懺悔記>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불참회기(古佛懺悔記)... 고불선사께서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를 적어놓은 수기(手記)겠구나.)

강유는 책의 내용이 궁금하여 펼쳐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

강유의 귀에 바람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파공성(破空聲)이다!)

강유는 급히 문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고불암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강유는 책을 품속에 넣으면서 암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강유의 눈에 암자 입구 맞은편인 뒤쪽 벽에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게 보였다.

(자칫 고불선사님을 시해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서둘러 쪽문으로 가려고 고불선사의 시신 옆을 지나던 강유는 발길을 멈추었다.

고불선사의 허리 아래에 깔려 있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스님의 원수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 챙겨가자.)

강유가 몸을 숙여 노리개를 집어들 때였다.

휘익! !

옷자락 날리는 소리들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강유는 급히 입구 반대쪽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유가 빠져나온 쪽문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휘익

하지만 강유는 바람처럼 절벽의 측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비스듬히 달린 강유의 앞쪽에 앞쪽으로 조금 돌출 된 모서리가 나타났다.

강유는 그 모서리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며 고불암을 내려다보았다.

휘익! !

그 직후 고불암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서 네 명의 인물이 날 듯이 달려 올라왔다.

네 명 모두 중인데 나이 든 초로의 승려 한 명과 젊은 승려 세 명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왔다.)

강유는 승려들의 복장으로 그들이 고불선사와 동문임을 알아보았다.

!”

... 이런...!”

고불암 앞의 마당에 올라서던 승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불암의 문이 열려있어서 고불선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님!”

급히 고불암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불선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아미타불!”

사숙조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곧 고불암 안에서 승려들의 불호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스님.)

승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는 노리개를 손에 든 채 합장했다.

(스님을 시해한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죄값을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휘익!

강유는 맹세를 하며 절벽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은 이내 고불암에서 사라졌다.

 

* * *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께서는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히셨다.>

<삼 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조사를 만났다.>

<헌데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계셨던 달마조사께서는 낡은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승려들의 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조사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불선사께서는 어찌 하여 당신의 삶을 참회하기 위해 적은 수기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하신 것일까?)

태실봉을 내려온 강유는 숭산 아래 등봉현(登封縣)에 자리한 객잔에 투숙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객실로 돌아온 강유는 서둘러 고불참회기를 꺼내 읽었다.

헌데 강유의 예상과 달리 고불참회기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고 어떻게 살다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고불선사가 남긴 고불참회기의 앞부분에는 바로 그 달마대사의 고사가 적혀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강유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고불참회기에는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비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가죽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팔 한쪽도 가죽신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형태의 그 팔뚝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지만 무엇으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용광로의 쇳물에 넣었다 꺼내도 멀쩡했다.

황제는 달마가 남긴 그 단단한 검은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숨기고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때문에 세상에는 달마의 관에 오직 가죽신 한 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의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세상에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絶代無敵)이 된다는 소문도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묵장... 달마묵장...)

강유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강유는 달마묵장이라는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묵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강유는 자신과 달마묵장이 운명적으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강유가 느꼈던 기이한 감상은 이어진 고불참회기의 내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납 고불은 불제자로서 결코 지으면 안되는 죄를 범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녀자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까지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달마묵장의 고사에 이어 그같은 고백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고불선사께서 금색계(禁色戒)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두었다니...)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와 함께 강유는 고불암에서 자신이 노리개를 건네주었을 때 보였던 고불선사의 심상치 않았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 노리개...)

강유는 고불암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건 고불선사가 범했던 여인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노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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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같은 말()을 탄 원수

 

 

(누가 활을 쏜 건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란 백남빈은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얼마 전 대려장 기마대와의 거리가 십리 이상인 것을 확인 했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팔 힘이 좋은 궁수라도 화살을 십리 넘게 날려 보내지는 못한다.

하물며 말의 목에 상처를 낸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든 게 아니라 수평으로 들이닥쳤었다.

“!”

몸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던 백남빈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과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쇄도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백남빈으로서는 십여 리나 되는 거리를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좁힐 수 있는 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화악!

낙타보다도 큰 흑마는 말 그대로 나는 듯이 들이닥치고 있다.

콰드드!

얼마나 빠른지 그 흑마의 네 개의 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올 정도다.

거센 바람을 탄 먹장구름처럼 다가오는 흑마에는 날씬한 몸에 붉은 옷을 걸친 소녀가 타고 있는데 상체를 고추 세운 채 철궁의 시위를 놓고 있었다.

(아차!)

붉은 옷의 소녀가 시위를 놓은 자세인 것을 본 백남빈의 눈이 다시 치떠졌다.

!

두 번째 화살이 이미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까지 이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

두 번째 화살이 말 위에서 돌아보는 자세인 백남빈의 가슴에 여지없이 꽂히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티잉!

하지만 화살은 백남빈의 가슴을 궤뚫지 못하고 궤적을 바꾸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화살에 실린 강력한 힘에 백남빈의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어떤 갑옷이라도 뚫을 수 있는 강철촉의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저자의 옷 속에 든 더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때문이다.)

츄학!

강미루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면서도 물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다시 두 자루의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았다.

"! !"

"미루! 미루!"

십여 리 뒤에서 따라오는 대려장 기마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의 눈에는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허억!)

왼쪽 늑골에 가해진 충격에 백남빈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강미루가 쏜 화살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백남빈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며 말 등에 엎어졌다.

(아버지가 날 지켜주셨다.)

백남빈은 말의 갈기를 움켜쥐어 옆으로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면서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두 번째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 든 옥패 덕분이었다.

실종 된 아버지가 남겼다는 그 옥패가 화살을 막아준 것이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백남빈이 지닌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옥패는 정확히 화살이 닿는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강철로 만든 화살촉도 그 옥패를 깨트리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 !

말 등에 엎드린 백남빈의 귀에 연달아 시위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강미루를 태운 거대한 흑마 흑왕은 불과 십여 장 뒤에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흑왕도 진저리치게 빨랐고 강미루 속사(速射)도 무섭게 빨랐다.

!

백남빈은 말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려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 피잉!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날아든 두 자루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백남빈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콰드드!

백남빈의 몸은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으나 두발은 땅에 끌리면서 먼지를 확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대량의 먼지에 의해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던 강미루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가려졌다.

강미루는 다시 활에 화살을 재운 상태였지만 백남빈의 모습을 놓쳐 쏠 수가 없었다.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남빈은 땅에 끌리던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가 다시 말 등을 구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달리는 속도가 번개같은 흑왕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반격할 수밖에 없다.

!

백남빈은 허공에 뜬 채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두두두!

그 사이에 흑왕은 백남빈의 발 아래로 달려왔다.

!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등 위로 떨어져 내리며 검으로 강미루를 찔러갔다.

하지만 강미루는 이미 왼손에 흑왕의 안장에 달아놓았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백남빈이 두 발로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자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서 방패를 집어든 것인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림없다!“

!

강미루는 앙칼지게 외치며 백남빈의 검을 방패로 막았을 뿐 아니라 강하게 옆으로 밀쳐 버렸다.

아직 어린 여자답지 않은 기민한 반응이다.

몸은 허공에 떠있는데 전력을 기울여 찔렀던 검은 강하게 옆으로 밀쳐졌다.

휘익!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백남빈의 몸은 강미루의 머리를 넘어 흑왕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패대기쳐지려는 순간 백남빈은 왼손으로 흑왕의 길고 풍성한 꼬리를 잡아챘다.

히이잉!

느닷없이 꼬리가 잡힌 흑왕은 깜짝 놀라 껑충 껑충 뛰며 앞으로 달려갔다.

낙타보다 큰 체격의 흑왕은 겅중겅중 뛰면서도 질풍같이 달려갔고 그 바람에 그놈의 꼬리를 잡은 백남빈의 몸은 마치 깃발처럼 허공에 휘날려졌다.

!

그런 백남빈의 머리를 향해 방패가 맹렬히 돌면서 날아든다. 강미루가 몸을 돌린 자세로 왼손의 방패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놀란 흑왕이 겅중겅중 뛰면서 달리고 있는 탓에 조준을 정확히 할 수가 없었다.

! 따다당!

백남빈의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 방패는 뒤쪽의 땅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방패로 백남빈을 때리는 게 실패하자 강미루는 활을 던져버리고 안장에 걸려 있는 창을 뽑아들었다.

떨어져랏!”

그리고는 몸을 뒤쪽으로 돌린 자세로 창을 휘둘러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부악!

던져진 방패와 달리 수직으로 내리쳐지는 창은 정확히 백남빈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흑왕의 꼬리를 잡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백남빈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다.

별 수 없이 내공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그대로 얻어맞았다.

!

굵은 창대가 백남빈의 정수리를 강타하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창대에 맞아 치명상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서 백남빈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놓쳐버렸다.

만일 강미루가 당황하지 않아서 창대에 내공을 주입해서 휘둘렀더라면 백남빈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깨어졌을 것이다.

따다당!

백남빈이 놓친 검도 흑왕의 뒤로 아스라이 멀어진다.

"차앗!"

그 사이에 창을 짧게 고쳐 잡은 강미루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백남빈을 찔러왔다.

검을 놓쳐버렸으니 찔러오는 창날을 막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흑왕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창날을 피했다.

가뜩이나 휘날리던 몸인데 이제 백남빈의 몸은 바람 속에서 세차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변했다.

미꾸라지 같은...”

강미루에게는 황당한 일이었으나 백남빈에게는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말에서는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흑왕의 꼬리를 놓치면 뒤 따라오는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사람의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네 발로 달리는 말의 추격을 떨쳐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놀라긴 흑왕도 마찬가지였다.

히히힝! 두두두!

백남빈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자 놀란 흑왕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죽엇! 죽어라!”

슈슉! 피핑!

강미루는 뒤를 돌아보는 자세인 채 기를 쓰고 백남빈을 찌르려 했고 백남빈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창끝을 피해냈다.

백남빈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상태를 타개하지 못하면 결국 창에 찔리고 말 것이다.

반격을 해야만 한다.

"크왓!"

화악!

다시 한 번 강미루의 세찬 창질을 피한 백남빈은 온 힘을 모아 말꼬리를 축으로 몸을 옆으로 휘돌렸다.

그리고는 몸이 돌아가는 기세를 빌어 양발로 강미루의 허리를 찍어갔다.

!”

강미루는 기겁하며 몸을 흑왕의 엉덩이 쪽으로 홱 젖혀서 백남빈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다.

발길질이 빗나가려 하자 백남빈은 붙이고 있던 두 다리를 확 벌렸다.

콰득!

그리고는 뒤로 몸을 젖히던 강미루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아버렸다. 몸은 거의 수평으로 누인 채로...

네놈이...”

허리가 휘감긴 강미루는 깜짝 놀라 창대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

백남빈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흑왕의 꼬리를 놓고는 자신을 내리쳐오는 창대의 중간을 잡았다.

백남빈의 이같은 수법은 대담하고 재빨랐지만 강미루 또한 임기응변이 아주 빨랐다.

!

창대가 상대에게 잡히자마자 강미루는 즉시 창을 놓아버리며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

그리고는 그 단검을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에 힘껏 꽂았다.

(!)

백남빈은 까무라칠 듯한 통증에 눈을 흡떴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도 백남빈에게는 없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강미루가 다시 단검을 쓰게 하면 위험하다.

우둑!

잡고 있던 창을 던져버린 백남빈은 강미루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초식이고 뭐고 나올 게재가 아니었다.

아흑!”

강미루의 눈이 치떠졌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꽂은 단검을 뽑을 새도 없이 두 팔이 백남빈의 강철 족쇄같은 팔에 묶여 버린 것이다.

!

놀라고 분노한 강미루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을 벌려 백남빈의 턱을 덥썩 물었다.

(!)

턱이 물린 백남빈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심보가 악독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다.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몸도 사리지 않고 덤빈단 말인가?)

난생 처음 겪는 고통에 백남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밀착한 채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수준의 내공을 지녔으며 그 내공을 상대방이 혈도를 찍지 못하도록 중요한 혈도를 방어하는데 동원하고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내공을 흐트렸다가는 상대방에게 혈도를 제압당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완력으로만 대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남빈은 허벅지를 찔린 고통으로 인해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지만 강미루 역시 죽을 맛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철령보의 종자들은 하나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헌데 자신의 몸을 팔과 다리로 제압하고 있는 이 사내가 보여준 임기응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만나서 육탄전(肉彈戰)을 벌이는 곤욕을 치룬담!)

강미루는 부끄럽고도 화가 치밀어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철이 든 이래 사내의 손가락 끝조차 몸에 닿아본 적이 없는 강미루다.

헌데 지금 사내의 품에 으스러지도록 안겨 있으며 사내는 또 그녀의 하체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다.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강미루의 입이 물고 있는 부위가 문제였다.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자니 오히려 그녀의 턱이 얼얼해 왔다.

사람의 턱은 정말 물어뜯을 곳이 못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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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無人島奇綠

 

 

잠시 숨을 돌린 기검룡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두눈은 경이로 크게 떠졌다.

[...!]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섬은 파석도(波石島)와는 전혀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수목들이 마치 그림같이 신선한 경이감을 느끼게 했다.

헌데 이때, 정신없이 섬의 풍경에 취해있던 기검룡은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하루종일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보지도 못한 탓이었다.

[먹을만한 것이 없을까?]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문득 걸음을 옮겨 섬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정도 들어갔을까?

울창하던 수림이 끝나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다투어 피어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헌데, 그 초원의 끝에 허술한 한 채의 석옥(石屋)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인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초원을 가로질러 뛰듯이 석옥을 향해 다가갔다.

석옥 앞에 이른 기검룡은 한쪽 옆을 바라보며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석옥 옆에는 장정 두 사람이 팔을 둘러도 다 안을 수 없는 큰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대략 이 장 정도.

또한 그것은 도저히 몇 년이나 묵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고목(古木)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 어린아이 머리만큼 커다란 하나의 금빛 복숭아가 살짝 감추어진 채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그 금과(金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굉장히 큰 봉숭아구나...)

단번에 시장기를 자극하는 금빛 복숭아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긋한 향기가 풍겼다.

기검룡은 즉시 복숭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순간 그는 멈칫 했다.

(석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있는 물건인지 모른다. 더우가 저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몰래 먹어버린다면 주인이 화를 낼 것이다.)

기검룡은 평소 낙척문사에게 엄한 예의범절을 배운 탓으로 비록 허기가 밀려왔으나 선뜻 복숭아를 따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석옥 앞에 우뚝 섰다.

지은지 매우 오래인 듯 벽이며 문() 등이 온통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의아함을 느끼며 석문을 밀었다.

___ ___ !

어렵지 않게 석문은 열렸다.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허나 그 순간,

[... ... 시체...!]

기검룡은 경악성을 발하며 그 자리에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석옥의 한 곳에 놓여있는 돌침상에 한 구의 백골(白骨)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석옥 안을 살펴보았다.

백골이 누워있는 돌침상 앞에는 높이 두 자 정도의 석탁(石卓)이 놓여있었다.

또한 석문의 맞은편 벽에는 기이하게도 한 폭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기검룡은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키고 석옥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조심스럽게 석탁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석탁 위에는 수북이 먼지가 쌓인 가운데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

기검룡은 두눈에 이채를 발하며 그 물건을 살폈다.

그중 하나는 극히 낡은 한 권의 책자였다.

책의 겉장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한 자의 글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

 

기검룡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서슴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허나 그 순간,

[... 이런...!]

그는 당황성을 발했다.

책자의 앞부분이 그의 손에 닿자 한 줌의 가루로 화해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못내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그는 부서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내용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읽은 것은 한 가지 장공(掌功)의 진결(眞訣)이었다.

앞부분이 삭아 없어져 어떤 종류의 장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머지 진결의 내용으로 미루어 끔찍한 음한장력(陰寒掌力)의 위력이 내포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검룡은 다음장을 넘겼다.

허나 장력의 진결부분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부서져 나갔다.

두 번째의 내용은 고어로 씌어진 한 가지 지공(指功)이었다.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

 

기검룡은 지공의 구결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지공은 익힌바 없는 그로서는 생소하고 난해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내용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 지나쳤다.

허나 그순간 구결은 이미 그의 뇌리에 암기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무공은 한 가지의 음공(音功)이었다.

 

<척천마음(擲天魔音).>

 

이것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악기로도 탄주가 가능하다.

이 마음(魔音)이 한 번 펼쳐지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를면 치못한다.

[...!]

기검룡은 척천마음의 위력 앞에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가공할 음공이 하늘아래 존재하다니...]

그는 경악의 심정을 억제치 못했으나 곧 그 낡은 비급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비급의 옆에 놓여있는 것은 하나의 소금(小琴)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니 반질반질 윤이나는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이 드러났다.

허나 그것은 마땅이 일곱 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정말 기이한 소금이구나.]

기검룡은 고개를 갸우뚱 했으나 경이함으로 두눈을 빛내며 그것을 갈무리했다.

이어 문득 그는 정면에 걸린 화폭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폭의 상단에는 용비봉무(龍飛鳳舞)의 웅휘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태극조원(太極造元).>

 

또한 글자 아래에는 한 가지 기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짙은 채색의 힘있는 화법으로 그려진 훌륭한 그림이었다.

헌데 그것은 기이하게도 작아지는 듯한 절벽이 갈라져 무너지는 형상을 마치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

기검룡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 깊은 현기(玄氣)가 깃든 그림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화폭에 담긴 속에는 어떤 은밀한 안배가 가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림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재삼 감탄하고 말았다.

짙은 채색 밑으로 극히 세밀하게 절벽의 결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몇번 그 그림을 훑어보는 동안 그림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외우고야 말았다.

허나 끝내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그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할아버지들께서 보시면 알아내실지도 모른다.]

기검룡은 화폭을 거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나, 우수수...!

비급과 마찬가지로 그 화폭역시 순식간에 부서져 한줌 먼지로 화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순 가볍게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온전한 것이라고는 소금(小琴)밖에 없군.]

그는 호기심이 사라지자 낮게 투덜거렸다.

이때 문득 그는 다시 극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금빛 복숭아를 생각하고 석옥 밖으로 나갔다.

[주인이 없는 것이니...]

그는 금빛 천도(天桃)를 따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순간 입안 가득 더할 수 없이 향기롭고 달콤한 맛이 느껴지며 복숭아는 그대로 사르르 녹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가 있었다니...]

기검룡은 순식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복숭아를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허기가 거짓말처럼 싹 가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배고픔이 가시자 기검룡은 문득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파석도로 돌아가야할 것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문득 그는 섬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산봉(山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산봉에 올라가면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을지가 모른다.]

그는 한 가닥 기대를 갖고 획! 몸을 솟구쳤다.

헌데, 산봉을 향해 달리던 기검룡은 문득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아무리 빨리 달렸으나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달리면 달릴수록 전신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막강한 진력이 용솟음치며 단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순식간에 공력이 배로 늘어난 것 같으니...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산봉의 정상에 이르러 우뚝 몸을 멈추었다.

기검룡은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곧 그는 실망의 표정을 짓고 말았다.

주위는 끝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___.

어디를 둘러봐도 푸르게 출렁이는 물(), 물뿐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점차 서쪽 수평선이 진홍의 불덩이에 잠겨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석양(夕陽). 해가 지고 있는 것이다.

기검룡은 막연한 심정이 되어 한동안 산봉에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아무리 뛰어난 절기를 지녔다 하나 그는 이제 십오 세밖에 안된 소년이 아닌가!

허나 기검룡은 결코 나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슬을 피할 장소를 찾았다.

[어두워지기 이전에 잠잘 곳은 찾아봐야겠다.]

석옥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웬지, 그곳은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백골과 함께 밤을 새우기에는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다시 산봉을 내려갔다.

산봉중턱___.

그곳에 다행히 하나의 작은 암혈(暗穴)이 있었다.

기검룡은 그곳에 잠자리를 만들어 드러누웠다.

[... 할아버지들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실텐데...]

그는 문득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허나 몇 번을 뒤척이던 기검룡은 깜박 잠이 들었다.

 

[___ ___ ___!]

돌연 멀리서 허공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기검룡은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벌떡 일어났다.

섬칫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나 그는 혹시하는 기대감으로 조심스럽게 암혈을 나섰다.

밖은 칠흑의 밤이었다.

암혈을 빠져나온 기검룡은 순간 두눈을 크게 떴다.

[... 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소리쳤다.

섬의 동쪽 바다 위___.

두 척의 거선(巨船)이 거의 맞붙다시피 떠올랐다.

헌데, 그 중 한 척은 온통 시뻘건 화염으로 휩싸인 채 파선직전에 놓여있었다.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었다.

그의 눈에 불붙은 거선에서 한척의 소주가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이 소주(小舟)는 빠르게 무인도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두 배에 탄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血戰)을 벌이고 있는 듯 했다.

허나 기검룡은 그들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급히 산봉을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해안에 닿았을 때 예의 소주는 해안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허나, 북붙지 않은 거선에서 내려진 또다른 한 척의 소주가 앞의 그것을 바싹 뒤쫓고 있었다.

기검룡은 앞의 소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이때, 뒤따르던 소주가 무서운 속도로 앞의 소주를 향해 쇄도하여 들어왔다.

동시에, 한 명의 흑의인이 뱃전을 박차고 앞의 소주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앞의 소주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이때, 흑의인이 덮쳐들자 한 중년인이 벌떡 일어서며 무섭게 장()을 후려쳤다.

허나, 그순간 중년인은 한 줄기 싸늘한 검망이 자신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___ !]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물속으로 급속히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냈다.

[굉장한 쾌검(快劍)!]

이때 나머지 한 명의 중년인이 노를 젓다가 벌떡 일어서며 쇠로 만들어진 노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중년인, 그는 마치 철탑을 연상케하는 거구(巨軀)였다.

또한 얼굴 전체가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뒤덮여 있어 몹시 위맹해 보였다.

___ ___ ___!

긴 노는 풍차처럼 돌며 흑의인을 단번에 박살낼 듯 몰아쳐갔다.

소주로 내려서려던 흑의인은 그 공세를 피하기 위해 일순 흠칫 하는 순간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그때,

[당주님! 갑시다.]

뒤따르던 소주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치며 넓적한 판자를 흑의인의 발밑으로 던졌다.

[타핫___!]

흑의인은 재빨리 그 판자를 찍으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중년의 대한은 버럭 노갈을 터뜨리며 재차 노를 휘둘렀다.

[내려가랏!]

허나 한 번 겪어본 흑의인은 날렵하개 그의 공세를 피해내며 기쾌한 일검을 내뻗었다.

츠츠츠츳...!

[!]

섬전같은 검기의 공세를 피하지 못하고 대한은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보라가 솟구쳤다.

흑의인은 일검이 성공하자 점차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랏!]

그의 장검이 막 대한의 심장을 향해 짓쳐오는 순간,

[멈추시오!]

낭랑하고 위엄있는 소년의 음성이 흑의인의 손속을 제지시켰다.

___!

흑의인은 새파란 강기(罡氣)가 무섭게 자신의 장검을 타격해 들어오자 자칫 쥐고 있던 검()을 놓칠뻔 하였다.

그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일갈이 떨어지는 순간 기검룡이 가볍게 흑의인과 대한 사이로 날아내렸다.

[이보시오! 왜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거요?]

기검룡은 흑의인을 바라보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그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마야 비켜라!]

그는 기검룡의 존재를 싹 무시하고 이번에는 무겁게 장()을 휘둘렀다.

___ ___ !

웅후한 음향과 함께 막강한 장력이 노도처럼 기검룡을 짓쳐들었다.

기검룡은 냉혹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내려보았다.

[당신은 나쁜사람이군!]

이어, 그는 번쩍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___ ___ !

그의 장심(掌心)에서 일순 새파란 강기가 폭사되었다.

순간,

[___ ___ ___!]

흑의인은 자신의 장력이 가볍게 무산됨을 느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바닷 속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대한과 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허나 정작 더욱 놀란 사람은 기검룡 자신이었다.

그는 흑의인이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 버리자 도리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___천강신공(天罡神功),

그가 펼친 이 무공에 대적할 무공이 천하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리 없는 그였다.

이때, 뒤따르던 소주에서 또 다른 흑의인이 벼락같이 기검룡을 덮쳤다.

[... 꼬마 놈이... 죽어랏!]

그들은 흉폭한 기세로 맹렬하게 검을 쪼개갔다.

허나 기검룡은 빙글 몸을 돌리며 우수를 휘둘렀다.

[! 돌아가랏!]

그의 우수가 섬전처럼 허공을 가른 순간, ___! ___!

[으헉!]

[!]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다급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이어, ___ ___! 첨벙___!

두 명의 흑의인은 거의 동시에 바닷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기검룡은 단번에 세 명의 흑의인을 격퇴하고 나자 일순 멍한 표정으로 지었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저지른 살생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공손하고도 미세한 대한의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들렸다.

[소공자님! 위험한 지경에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말에 기검룡은 퍼뜩 정신이 들어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 우직하고 순박해 보이는 대한과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한 소녀가 놀란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소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십 사오 세 가량의 취의소녀, 그녀의 용모는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막 여인(女人)으로 발돋움하는 풋풋하고 청초한 아름다움, 그녀의 전신은 샘물처럼 맑은 싱그러움으로 뭉쳐져 있는 듯 했다.

기검룡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러자 취의소녀 역시 배시시 따라 웃는 것이 아닌가?

눈부시도록 맑고 고운 웃음이었다.

기검룡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기검룡(奇劍龍)이다. 파석도(波石島)에서 왔지.]

그 말에 취의소녀는 반짝 두눈을 빛내며 생긋 웃었다.

[파석도라는 이름은 처음듣는 것 같아요. 흑아저씨는 혹시 알고 있나요?]

그녀의 의아하다는 듯 옆의 거한을 바라보았다.

허나 거한은 우직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누벼 동해(東海)라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지만 파석도는 처음듣는 섬이름입니다.]

파석도, 남해에서도 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절해고도를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문득 취의소녀가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머! 배가 가라앉으려고 해요!]

기검룡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취의소녀 등이 처음에 타고 있던 기선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호승심이 치솟았다.

그의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대신 저기 큰 배를 가라앉혀 버릴까?]

허나 그말에 취의소녀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모습은 보기 싫어 아저씨 빨리 이곳을 떠나요!]

그녀의 재촉에 거한은 상처를 싸매고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삐걱... 삐걱...!

그들 삼인(三人)을 태운 작은 배는 물살을 가르며 쉼없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근 한 시진이 지나자 그들은 완전히 치열한 해전(海戰)이 벌어졌든 수역(水域)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동녘이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문득 기검룡이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취의소녀는 크고 해맑은 눈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능소취(陵素翠)라고 해. 그냥 취아(翠兒)라고 불러줘.]

이어 그는 거한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철담흑객(鐵擔黑客)이라고 불러. 취아는 그냥 흑아저씨하고 부르지만 말이야.]

취의소녀, 즉 능소취의 말에 거한은 노를 젓으며 기검룡을 기검룡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기검룡은 사람좋아 보이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는 굉장히 힘이 세어보이는데 아까는 왜 그 사람의 검을 그냥 맞았지요?]

철담흑객은 머쓱하게 웃었다.

[소인은 아가씨의 부친이신 사해신룡(四海神龍)을 모시는 일개 종복인지라 정식으로 내공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저 외공(外功)을 약간 익혔기 때문에 내가고수(內家高手)들을 당하기는 힘들지요.]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환한 표정으로 탄성을 발했다.

[... 그렇군.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능소취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기검룡은 철담흑객과 그녀를 동시에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혹시 철벽신공(鐵壁神功)을 알고 있나요?]

허나 철담흑객과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기검룡은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설명했다.

[철벽신공(鐵壁神功)은 외가(外家) 최고의 기공이예요. 철파상이나 금종조 같은 외공(外功)보다도 뛰어난 외공으로 만일 이것을 완전히 연성하면 내공으로 이룰 수 있는 금강기체(金剛之體)와 똑같이 될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난 능소취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넌 참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런 것은 다 어디서 배웠어?]

기검룡은 가볍게 씨익 웃었다.

[난 그동안 두분 할아버지와 살았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별별신기한 냉용의 책을 다 갖고 계시지. 철벽신공도 할아버지의 책을 보고 외운거다.]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의 어떠십니까? 어렵신 하지만 철벽신공을 익혀보지 않겠습니까?]

철담흑객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배울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보겠습니다.]

기검룡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시간이 나는대로 철벽신공을 연마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겠어요.]

그들 사이의 대화가 끝나자 능소취는 두눈을 반짝이며 기검룡을 응시했다.

[그런데 넌 왜 그 무인도에 혼자 있었지?]

[백경(白鯨)과 싸우다가 그놈이 나를 꿀꺽 삼키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기검룡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삼키는 시늉을 하자 능소취는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고래에게 잡혀먹혔는데 어떻게 살아나올 수가 있어?]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기검룡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자신이 겪는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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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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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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