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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은 강시(畺屍) ! 이제야 따라왔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둥그레졌던 마면혈도는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휘익!

껄껄 웃는 마면혈도 앞으로 사각 모자를 쓴 초로의 인물이 임청우의 멱살을 오른손으로 틀어쥔 채 훌쩍 내려섰다.

결코 가볍지 않을 임청우의 몸을 헝겊 쪼가리인 듯 흔들면서 내려선 인물은 왼손에 쥔 쇠로 만든 접는 부채, 철선(鐵扇)을 성마르게 부치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의 몰골도 마면혈도 못지않게 기괴하다.

안색은 시체처럼 하얗고 창백한 반면 입술은 피를 마신 듯 새빨갛다.

또 열흘은 굶은 듯 퀭한 두 눈은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낄낄낄... 얼어 죽은 송장 놈아! 이 형님보다 한발 늦었구나.”

마면혈도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어 죽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괴인의 별호는 철선동시(鐵扇凍屍).

철선동시는 성격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자였다.

우리를 본 놈을 살려서 보내려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마면혈도!”

!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한쪽에 던져버리며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자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바닥에 던져진 임청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낄낄낄... 그놈은 무림인이 아니야.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내버려뒀으면 살아남지 못했어.”

마면혈도가 다친 말이 우는 것같은 걸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악명 높은 마면혈도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군.”

철선동시는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엎어져 있는 임청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

마면혈도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맹세를 어겼단 말이냐? 나 마면혈도가 살인, 방화, 강간을 가리지 않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그래 그래,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는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빴을 뿐이로군.”

철선동시는 냉랭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 얼어 죽은 송장 놈이...”

!

대노한 마면혈도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손잡이만 핏빛이 아니라 칼날도 피를 칠한 듯이 붉었다.

토막 쳐 버리고 말겠다아아아!”

마면혈도는 날이 넓은 핏빛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철선동시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그자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하늘로 뻗어 올랐다.

! 서걱!

핏빛의 칼이 내뻗는 그 혈광에 스친 바위들이 마치 두부처럼 소리없이 베어졌다.

스슥!

그러나 철선동시는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면혈도의 사나운 칼질을 피해버렸다.

날 죽이려 드는 것만 봐도 자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머리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농산 표운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만도 다행이지.”

빗발치듯 날아드는 핏빛 칼을 흘려보내면서 철선동시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면혈도는 흠칫하며 칼질을 멈추었다.

네놈을 죽이려는 게 뭐 어떻단 말이냐? 나는 네놈만 죽어 없어지면 속이 후련하겠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유()가 놈을 완전히 따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철선동시의 그 한마디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마면혈도의 핏빛 칼, 즉 혈도(血刀)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보도(寶刀).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그 혈도를 아무 생각없이 마구 휘둘렀으니, 강적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혀서 붉으락푸르락 하는 마면혈도의 얼굴을 보면서 철선동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전한 곳에 숨을 때까지는 만나는 모든 놈을 죽여 버리자고 자네가 먼저 말했었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여서 화골산(化骨酸)으로 녹여 없앤 놈들만 하더라도 무려 이백 칠십 아홉일세. 한데 자네는 저 이백 팔십 번째 놈을 죽이지 않았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거지.”

철선동시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임청우를 가리켰다.

그만해! 지금이라도 저놈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마면혈도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야지.”

철선동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저놈을 구한 것도 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자네 손으로 저놈을 죽여야만 자네가 이부지자(二父之子) 개새끼가 아니게 될 테니...”

마면혈도는 성미가 급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철선동시의 말을 듣자 자기 손으로 임청우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개새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마면혈도는 혈도를 어깨위로 반쯤 비스듬히 돌려서 임청우를 향해 휘두르려 했다.

번쩍!

핏빛 칼에서 혈광이 다시 한 번 길게 일어났다.

기절한 임청우는 영문도 모르고 몸뚱이가 무 토막처럼 잘라질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

하늘을 뒤흔드는 용의 울음소리인 듯, 초목산천을 떨게 만드는 대호(大虎)의 포효인 듯한 웅혼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그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합창하듯 외쳤다.

그런 그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

다음순간 철선동시가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마면혈도도 혈도를 회수하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대가리를 깨서 골수를 파먹어도 시원찮을 유가놈 같으니...”

마면혈도는 표운봉 아래로 달려가는 철선동시의 뒤를 따라가며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표운봉에서 사라졌다.

우워어어어어!”

그와 함께 두 마두를 쫓아버린 고함소리는 바위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방향을 바꿔 멀어져갔다.

고함소리의 주인은 두 마두의 종적을 발견하고 추격해갔을 것이다.

이제 표운봉 정상에는 죽은 듯 미동도 않는 임청우만이 뜨거운 태양아래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 산봉우리 위로 기울어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그 노을 속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표운봉 정상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의 왕에는 못 미치지만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사람 키 정도는 되는 커다란 독수리들이다.

오래전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던 그놈들은 주린 배를 채워줄 희생물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퍼덕거리는 날개 짓이 돌먼지를 날리고, 날카로운 부리들은 임청우의 등을 쪼았다.

! 퍼퍽!

세차게 찍어대는 독수리들의 부리에 임청우의 등에서 살이 뜯기며 피가 번져 나왔다.

짊어지고 있던 망태와 입고 있던 삼베옷도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누더기가 되어갔다.

!

또 한 번 등을 깊이 쪼이는 순간 임청우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

뒤이어 다른 독수리의 부리가 임청우의 어깨 부위도 찍었다.

!”

순간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끼약! 카아악!

만찬을 즐기려던 독수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높이 날아올라갔다.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공으로 혈도를 막아버렸었다.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임청우의 혈도가 독수리들의 부리에 쪼이면서 풀어진 것이다.

망할 놈의 날짐승들 같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리는 임청우의 등과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털썩!

임청우는 누더기가 된 망태를 벗어 던졌다.

쫘악!

이어 피로 물든 웃옷도 찢듯이 벗었다.

등에 생긴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지나 뒤쪽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임청우는 벗은 옷을 수건처럼 둘둘 말아서 때를 벗기듯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거친 삼베 옷감이 상처를 쓸고 지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다.

빌어먹을!”

등에서 대충 피를 닦아낸 임청우는 피에 젖은 옷을 확 집어던졌다. 옷은 피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서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옷을 집어던진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절을 두 번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임청우는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대가리야! 얼어 죽은 송장같은 놈아! 네놈들이 살아있어도 내게는 죽은 놈들로 보인다. 이제 내가 두 번을 절했으니 네놈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오. 네놈들이 죽었다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독수리들의 먹이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임청우는 땅바닥에 패대기친 망태에서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약초들을 입안에 쑤셔 넣은 임청우는 우걱우걱 씹어 다진 후 근처 바위에 턱 붙였다.

그리고는 등의 상처를 바위에 붙인 약초에 대고 비벼대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신통하게 멎었다.

어머니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산을 타며 채약을 해온 임청우인지라 어떤 약초가 어떤 증상에 잘 듣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대낮에 귀신같은 것들을 만나서 십년감수하질 않나... 농산을 떠나긴 떠나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라면 진작 떠났을 농산이지만...”

상처에서 피가 멎으며 임청우의 화도 조금은 풀렸다.

옷은 포기해야겠구나.‘

집어던졌던 웃옷을 살펴본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웃옷은 원래 낡았었는데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헤집어져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피에 절고 살점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웃옷을 다시 던져버린 임청우는 망태를 챙겼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망태에 활과 화살을 우겨넣은 임청우는 절벽 끝으로 갔다.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절벽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북두홀을 찾는 건 포기해야하나?)

임청우는 갈등했다.

그는 멱살을 틀어쥔 마면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북두홀로 그자의 팔을 찍었었다.

하지만 북두홀은 강철같은 마면혈도의 팔뚝에 전혀 상처를 못 내고 임청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표운봉의 남쪽 절벽은 가파를 뿐 아니라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가 없다.

산을 타는데 능숙한 임청우라도 쉽사리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북두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북두칠성이 새겨진 북두홀은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북두홀은 임청우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보아온 물건이다.

임단심은 가끔씩 북두홀을 꺼내보며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북두홀이 아버지 것이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단심이 임청우를 데리고 농산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 전이다.

그 얼마 후 임단심은 북두홀을 깊은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임단심에게 북두홀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북두홀은 너무도 단단하여 훼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깊은 계곡에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임청우는 북두홀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청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으로 내려가 북두홀을 회수했었다.

임단심은 임청우가 북두홀을 찾아온 걸 알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후로 임청우는 북두홀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열두 살 때도 천길 벼랑을 타고 내려가 북두홀을 찾아왔었다.)

임청우는 망태를 등에 짊어지며 심호흡을 했다.

망태의 거친 표면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쓸어 오만상을 쓰게 만든다.

(어렸을 때 했던 일을 지금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절벽의 틈새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대가리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되었구나.)

깎아지른 절벽을 신중하게 타고 내려가며 새삼 마면혈도가 미워지는 임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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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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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살일초(必殺一招)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장강(長江)과 만나게 된다.”

강조가 손을 들어 멀리 북쪽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안탕산을 종단해서 북쪽으로 왔구나.)

강유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겹겹이 늘어선 북쪽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험한 길로 온 이유는 혹시나 끼어들지 모를 마()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

강조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의 가지를 하나 꺾었다. 길이 네 자 정도로 곁가지와 나뭇잎이 조금 붙어있지만 반듯한 나뭇가지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네게 한 가지 구명절초(求命絶招)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강조는 나뭇가지에서 곁가지들과 잎사귀를 떼어내며 말했다.

붕정검법에 소자가 익히지 않은 초식이 있는지요?”

강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가르쳐주려는 것은 붕정검법이 아니다.”

강조는 곁가지와 잎사귀를 떼어내어 나뭇가지를 고르게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젊었을 때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전수받은 일초의 검법인데 그 위력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치명적인 탓에 사용한 적은 없다.”

강조는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고 치명적인 검법이기에...”

어느 정도인지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조는 한쪽에 서있는 사람 키만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강조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겨누며 말했다.

필살일초...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집니다.”

강유는 긴장하며 강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초식이 아니라 내공의 운용법이다.”

지잉!

강조가 바위를 겨눈 나뭇가지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유는 나뭇가지에 측량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이 운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운용에 변화를 주는 비결인데...”

투투툭! 드드드!

진동이 점점 강해지면서 나뭇가지는 나사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발산되는 내공의 위력이 치명적으로 변한다.”

강조는 뒤틀리며 진동하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찔렀다.

퍼억!

그러자 나뭇가지 끝이 두부를 찌른 것처럼 바위 속으로 푹 들어갔다.

! 퍼퍽!

뒤이어 바위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나뭇가지도 터져버렸다.

!”

강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뜨며 탄성을 토해냈다.

나뭇가지에 찔린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이 앞뒤로 뻥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나뭇가지가 뒤틀림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긴 했지만 단단한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을 냈다.)

강유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이것이 필살일초의 위력이다.”

!

강조는 손에 남아있던 한 자 가량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무공이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사용해선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필살일초의 연공비결을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이어 강조는 한 가지 내공심법의 비결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 가공하다!)

그 비결을 들으면서 강유는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말 그대로 상궤를 뛰어넘는 무공이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릴 때부터 뒤틀고 꼬아버리는 운공비결인데... 위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심맥에 심각한 무리를 주게 된다.)

강유는 강조가 가르쳐주는 필살일초의 무시무시한 위력과 함께 치명적인 결함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무공이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절대로 써선 안되겠구나.)

적을 죽이기 위해 내 몸을 망치는 무공!

그것이 바로 필살일초였다.

필살일초의 결함을 알아차린 강유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집중해서 강조가 읊어주는 운공비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 * *

 

위가진(衛家津)은 그리 크지 않은 강가의 마을이다.

비록 마을은 작지만 장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많다.

끼니때가 되어서인지 위가진의 유일한 객잔 위가반점(衛家飯店)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두 노인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두 노인은 쌍둥이다.

체격과 이목구비가 같은 틀로 찍어낸 듯이 똑같다.

그러나 닮은 것은 체격과 얼굴뿐이다.

두 노인의 모발과 피부의 색은 극단적이다.

한 명은 먹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의 모든 부위가 새카맣다. 흰 것은 오직 눈의 흰자위뿐이다.

다른 한명은 정 반대로 모든 부위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같이 하얗다. 심지어 눈동자조차 흰색에 가깝다.

두 노인은 몸의 색과는 정 반대 색상의 옷을 입고 있다.

검은 노인은 눈같이 흰 백의를 거치고 있다.

반면 흰 노인은 새카만 흑의를 걸치고 있다.

백귀(白鬼), 자네는 여전하구먼. 저승사자나 염라대왕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니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지.”

검은 얼굴의 노인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남 말 하지 말게 흑신(黑神).”

백귀라 불린 하얀 얼굴의 노인이 술병을 집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어디 살아있는 인간처럼 보이는 줄 아는가?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인상 쓰고 있는 내 얼굴 보다 더 섬뜩한 거 알기나 해?”

쪼르르!

백귀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검은 얼굴의 노인, 흑신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참 세상은 살만 했었으니까.”

흑신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지난 일 얘기해서 뭐하겠는가? 우리 두 늙은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거늘...”

백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두 노인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흑신과 백귀, 합쳐서 흑백신귀(黑白神鬼)라 불리는 그들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 십팔 년 동안 태산(泰山)에 자리한 제왕성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자신들의 과오로 벌어진 어떤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왕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때문이다.

얘기해보게!”

얘기해봐!”

! !

흑신과 백귀는 동시에 술잔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 그런지 두 사람의 행동거지는 판박이다.

말이 서로 부딪히자 흑신과 백귀는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내가...”

내가 먼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두 노인은 또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말이 부딪히자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는 자네가 먼저 말했으니 올해는 내가 얘기를 시작함세.”

흑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나.”

백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여간 우리끼리는 얘기 시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백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인 탓이니 어쩌겠는가?”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 간 자네는 성과가 좀 있었나?”

전혀 없었네.”

백신의 물음에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공쳤다는 건가?”

백귀는 새하얀 눈썹 사이의 미간을 모았다.

십팔 년 전, 무후(武后)님을 시해하고 소성주(少城主)를 납치해간 그놈... 귀면지존은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가 없네.”

흑신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의 단서를 남겼다가도 추적을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잠적해버리니 말일세.”

지난 십팔 년간 끝없이 반복해온 숨바꼭질이지.”

백귀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백신귀가 태상호법으로 봉사하고 있는 제왕성이 세워진 것은 백여 년 전이다.

제왕성을 세운 것은 섭초천(葉超天)이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섭초천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섭초천은 기이한 무공으로 기존 세력들을 가차없이 쓰러트렸었다.

당시의 강호를 호령하고 있던 어떤 세력이나 고수도 섭초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통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 사파 무림의 본산인 혈교(血敎)도 섭초천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훗날 제왕노조(帝王老祖)라 불리게 된 섭초천은 자신의 무공 내력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구사하는 무공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섭초천이 구사하는 경이적인 무공의 출처에 대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달마묵장!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겼다는 비결만이 섭초천이 이룬 놀라운 성취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섭초천과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달마묵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제왕성이 달마묵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왕성의 당대 성주는 철면제왕(鐵面帝王) 섭장천(葉長天)이란 인물이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인 일제(一帝)가 바로 철면제왕 섭장천이다.

제왕노조 섭초천의 손자인 철면제왕 섭장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다.

마교와 혈교의 잔당들을 비롯하여 숱한 고수들이 섭장천에게 도전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섭장천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다쳤다.

삼대에 걸쳐 거푸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제왕성의 성세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헌데 십팔 년 전, 제왕성에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었다.

섭장천의 아내인 무후 주영청(朱永淸)이 살해당하고 한 살짜리 외아들 섭무궁(葉無窮)이 납치된 것이다.

범인은 제왕성 섭씨일족의 가전 보물을 훔치러 잠입한 도둑이었다.

도둑이 노린 가전 보물은 물론 달마묵장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달마묵장은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가 근처에 늘 상주하며 지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은 용케 달마묵장을 훔쳐냈다.

도둑은 얼굴에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훗날 밝혀진 정체는 마교의 신임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친 직후 흑백신귀에게 포착되었었다.

흑백신귀는 함께 손을 쓰면 섭장천과도 호각을 이룰 수 있다는 절세고수들이다.

귀면지존이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흑백신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후원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소성주인 섭무궁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섭장천의 아내 무후 주영청은 어린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귀면지존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삼 년 전부터 강북(江北) 육성(六省)에서는 놈의 종적이 뚝 끊겼네.”

흑신이 말을 이었다.

아마 강남(江南)으로 근거지를 옮겼거나 어딘가에 깊이 숨어서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때문일 걸세.”

내가 담당한 강남 칠성(七省) 쪽에서는 그래도 지난 일 년 간 서너 번 놈의 흔적이 포착되었었네.”

백귀가 흑귀의 말을 받았다.

흑백신귀는 주모인 주영청이 살해당하고 소성주 섭무궁이 납치된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 자책했다.

그래서 귀면지존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고 제왕성을 떠났었다.

그 후 십팔 년의 세월 동안 흑백신귀는 강북과 강남을 나누어 귀면지존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강북에서의 수색은 흑신이 맡았고 강남은 백귀가 뒤져온 것이다.

놈은 서너 달마다 한 번씩 대처(大處)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볼일만 보고는 재빨리 모습을 감추길 반복해왔네.”

어디 어디서 놈의 흔적이 발견되었는가?”

흑신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백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무창(武昌), 소주(蘇州), 상해(上海), 마지막으로 두 달 전쯤 광릉(廣陵)에 모습을 드러냈었네.”

광릉이라...”

백귀의 말에 흑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광릉이라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가 서린 유서 깊은 고장인데... 근처에 숨을 만한 곳이 있는가?”

산이 깊기로는 안탕산(雁蕩山), 물길이 험하기로는 대택향(大澤鄕)이 있네만...”

백귀가 대답했다.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이목이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물처럼 깔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흑신이 새카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일 은신처를 마련한다면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겠군.”

백귀도 무슨 말인지 깨닫고 눈을 치떴다.

앞으로는 외진 곳을 중점적으로 뒤져 봐야하는 이유일세.”

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놈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광릉 근처의 안탕산과 대택향을...”

말을 이어가려던 흑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백귀의 치떠진 눈이 자기 뒤쪽의 객잔 입구에 고정되어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집중해야지 딴전을 피우면...”

백귀를 타박하며 뒤를 돌아보던 흑신 역시 눈을 치뜨며 입을 다물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본 때문이다.

청년은 먼 길을 가는 듯 등에 봇짐을 비스듬히 짊어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 저놈...)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천부(天賦)의 무골(武骨)이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빈자리에 앉는 청년의 모습을 살펴보며 흑백신귀는 실로 오랜만에 온몸을 뒤흔드는 전율을 느꼈다.

청년의 빼어난 자질은 백 년 가까이 살아온 흑백신귀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안탕산을 떠나온 강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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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촌의 세 모녀

 

 

-설삼신단!

 

그것은 만년설삼(萬年雪蔘)으로 만든 무림오대영약(武林五大靈藥) 중 하나다.

일갑자 전, 대설산의 어느 계곡에서 엄청난 설붕(雪崩:눈사태)이 일어났었다.

헌데 설붕이 지나간 자리에서 만년 동안 눈 속에서 자란 한 포기의 설삼이 발견되었었다.

만년설삼을 발견한 인물은 마도 무림에 속한 어떤 기인이었다.

그 기인은 만년설삼으로 다섯 알의 설삼신단을 만들었다.

설삼신단은 한 알을 복용하면 백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희세의 영약이다.

특히 여인들이 설삼신단을 복용하면 극음기공을 수월히 연성할 수 있게 된다.

고검추가 여인 옥여상의 몸속에서 찾아낸 세 알의 환약은 바로 그 설삼신단이었다.

그 중 하나를 옥여상이 복용했으므로 설삼신단은 이제 단 두 알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헌데 옥여상은 그 대단한 설삼신단을 복용하고도 자신의 내상이 낫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당한 마공이 그만큼 치명적인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쇄심마장!

 

옥여상에게 중상을 입힌 무공의 이름이다.

쇄심마장은 구마(九魔)라 불리는 전설적인 마인들 중 한명이 남긴 마공이다.

일단 쇄심마장에 격중되면 온몸의 혈맥이 말라붙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쇄심마장에 당한 상세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시전자가 쇄심마장의 마공진력을 회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만년화리(萬年火鯉)의 생혈(生血)을 마셔 손상된 혈기를 보충하는 것이다."

고검추는 옥여상을 말을 듣고 있던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의 짓인지요?"

잘 봤다.”

옥여상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누군데 아주머니를 시해하려 한 것인지요?"

고검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옥여상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놈의 이름은 담세황... 옥면마성(玉面魔星)이라는 별호를 지닌 나의 사제다."

"예엣? ... 사제라고요?"

고검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옥여상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녀를 추격하던 자가 다름 아닌 그녀의 동문사제(同門師弟)였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여유가 없구나. 다만 그 자가 내게서 두 가지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암습했다는 것만 말해 주마."

옥여상은 불신의 표정을 짓는 고검추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은신처를 알려주지 않으련? 설삼신단의 약효로 일각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사이에 운공요상을 마쳐야만 한다. 과연 내가 익힌 태을강기(太乙罡氣)가 쇄심마장에 당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서쪽으로 삼십여 리 쯤 가면 크고 작은 돌무지로 덮인 계곡에 이르실 것입니다. 그 계곡 끝의 절벽을 덮고 있는 덩굴 안쪽에 제법 아늑하고 은밀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고맙구나."

옥여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고검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고검추의 용모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조만간이라니... 무슨 말씀이실까?)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고검추의 얼굴을 뜯어보던 옥여상의 눈가로 가는 경련이 스쳤다. 그녀는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옥여상은 복잡한 심사가 실린 표정으로 말하며 일어났다.

!

그리고는 몸을 날려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분이시다."

멀어지는 옥여상을 보며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만간 설삼신단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옥여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다고도 했으니 일단 갖고 있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들어있는 옥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니 어느 덧 해가 기련산의 서쪽 능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돌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죽서기년도 품속에 찔러 넣은 고검추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향해 달려갔다.

 

***

 

-팽가촌(彭家村)

 

기련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산촌이다.

백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팽씨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팽가촌이다.

팽가촌 동쪽 오리쯤에는 모옥(茅屋;초가집) 한 채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골짜기에 지어진 그 모옥에는 팽씨가 아닌 모자(母子)가 살고 있다.

서른여섯 살인 어머니의 이름은 당혜선(唐惠善)이고 열일곱 살인 아들의 이름은 고검추다.

성씨로도 알 수 있듯이 두 모자는 팽가촌 토박이가 아니다.

십칠 년 전, 당혜선은 핏덩이인 아들을 안고 팽가촌에 나타났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된 젊은 엄마 당혜선은 당시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혜선은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랜 도피 생활을 한 듯 했다.

마음씨 좋은 팽가촌 주민들은 당혜선을 극진히 간병해주었다.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당혜선은 팽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으로 팽가촌 주민들의 은혜에 보답했다.

본래 기련산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여러 종류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 표범, 늑대, 곰등이 수시로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곤 했었다.

당혜선은 그런 맹수들을 보는 족족 잡아 죽여서 팽가촌의 오랜 우환을 제거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련산에는 맹수들 보다 더 사납고 포악한 존재들이 여럿 있다.

바로 산적들이다.

관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기련산에 산채를 마련한 산적 떼가 한 둘이 아니다.

산적들은 불시에 팽가촌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었다. 식량이나 가축을 주로 강탈해가지만 때로는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팽가촌은 외진 산촌이라 관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이나 가축을 바쳐서 산적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래야만 부녀자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이 팽가촌에 거주하면서 산적들은 더 이상 팽가촌 주민들을 괴롭히지 못했다.

당혜선은 날을 잡아 산적들의 산채 중 한 곳을 찾아가 궤멸시켜버렸다. 산적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리 한쪽을 못 쓰는 불구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본보기가 되어서 다른 산채의 산적들도 감히 팽가촌을 건드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산적들의 행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당혜선이란 여걸이 팽가촌에 정착한 덕분이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당혜선을 선녀처럼 떠받들고 공경했다.

당혜선의 아들 고검추는 아주 영특했다.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추론해서 알 정도였다.

팽가촌은 외진 산골 마을이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이 직접 영특한 아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당혜선은 무공 뿐 아니라 학식도 상당했다.

하지만 고검추는 열 살 이전에 어머니가 아는 모든 것을 배워버렸다.

더 이상 아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당혜선은 대처에 나가 책을 구해다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혜선은 아들이 생계는 신경 쓰지 말고 학문 연마에만 집중하길 바랬다.

게다가 고검추와 함께 자란 또래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업인 목축, 농사, 사냥, 약초 채집등을 배우느라 바빠졌다.

그 때문에 고검추는 팽가촌 근처에 살면서도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함께 놀 친구도 없어서 고검추는 어머니가 구해다주는 책을 읽으며 지내야했다.

그래도 열세 살 때부터는 마을 주민들이 기르는 양을 보살펴주는 일로 소일해오고 있다.

당혜선도 양치는 일은 공부에 그리 방해되지 않는 때문인지 굳이 반대하진 않았다.

오 년 가까이 양들을 보살펴온 덕분에 고검추는 이제 팽가촌의 그 누구보다 능숙한 양치기가 되었다.

오늘도 양떼를 몰고 마을 뒤편 초원으로 올라갔던 고검추는 옥여상이란 신비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에 휘몰아칠 거센 폭풍의 전조라는 사실을 고검추로서는 알리가 없었다.

 

***

 

해가 막 서산으로 떨어지고 있다.

매애애...”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이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한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백 쉰 세 마리... 오늘도 한 마리 빠트리지 않고 잘 데리고 돌아왔구나.”

마지막으로 우리에 들어간 양까지 센 등삼낭(鄧三娘)이 초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인 등삼낭은 산촌 마을의 여자답지 않게 단아한 용모를 지녔다. 이목구비가 아주 섬세하여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입술 가에 찍혀있는 점 때문에 관능적인 분위기도 충긴다.

비록 허름한 베옷을 입었어도 등삼낭의 타고난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등삼낭은 팽씨가 아니지만 팽가촌의 주민이다.

그녀는 팽가촌 촌장 팽유(彭維)의 며느리인 것이다.

등삼낭은 팽유가 젊었을 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등씨 성의 어떤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등삼낭이라는 이름은 등씨 집안의 셋째 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등삼낭의 집안은 강호의 혈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

팽유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등씨일족은 이미 몰살당한 후였다.

그래도 천우신조로 당시 다섯 살이던 등삼낭은 목숨을 건졌다. 등씨 집안 하녀 한 명이 그녀를 자신의 딸로 위장시켜준 덕분이었다.

팽유는 고아가 된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와 키웠으며 나이가 차자 자신의 외아들 팽진(彭進)과 짝을 지어주었다.

팽가촌 차기 촌장인 팽진과 부부가 된 등삼낭은 슬하에 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녀의 행복하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련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산적 두목이 팽가촌에 쳐들어와 그녀를 납치해간 것이다.

 

-흑모철웅(黑毛鐵熊)!

 

기련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철웅채(鐵熊寨)란 산채의 채주다.

흑모철웅은 타고난 신력에 더해 도검이 불침하는 철피공(鐵皮功)이란 외공까지 익혀 기련산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흑모철웅은 팽가촌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철웅채와 팽가촌이 수백 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혜선의 위명을 들어서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보름 전에 사달이 났다. 볼일이 있어 중원에 다녀오다가 팽가촌 근처를 지나던 흑모철웅의 눈에 등삼낭이 띤 것이다.

산골 출신답지 않은 단아한 등삼낭의 자태는 흑모철웅의 눈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자는 막아서는 등삼낭의 남편 팽진을 때려죽이고 등삼낭을 철웅채로 납치해갔다.

대처로 나갔다가 돌아온 당혜선은 그 사실을 알고 즉시 철웅채로 달려갔다. 다행히 당혜선은 등삼낭이 흑모철웅에게 겁탈당하기 전에 철웅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혜선은 평소 한 살 아래인 등삼낭을 친 동생인 것처럼 예뻐했다.

그런 등삼낭을 납치한 흑모철웅의 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당혜선은 산적들에게 살수를 썼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당혜선의 검에 죽임을 당했고 다친 자는 그 몇 배였다.

철피공을 익혀서 도검이 불침한다는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다.

흑모철웅을 쫓아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당혜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겁탈당할 뻔한 충격으로 실신한 등삼낭을 보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일단 등삼낭을 데리고 팽가촌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다시 철웅채로 돌아가서 흑모철웅의 종적을 추격하는 중이다. 흑모철웅을 살려두면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후환을 없애버릴 작정인 것이다.

 

당언니...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등삼낭은 양들이 들어간 우리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상복을 겸해서 수수한 베옷을 입은 등삼낭의 얼굴은 초췌하다.

남편은 산적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하마터면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겁탈당할 뻔 했다.

지난 보름은 등삼낭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시간이었다.

만일 아직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야한다는 모정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열다섯 살인 아들과 열일곱, 열세 살인 딸들이 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등삼낭은 힘을 내야만 했다. 애써 의연한 척 하며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마을의 큰 재산인 양들을 돌보아온 것이다.

때가 되면 돌아오시겠지요.”

고검추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당혜선은 수시로 팽가촌을 나가곤 했지만 아무리 길어도 닷새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보름 넘게 소식이 없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우리 왔어요.”

마을 안 쪽에서 해맑은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검추가 돌아보니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등지고 두 명의 소녀가 다가오고 있다.

등삼낭을 닮은 소녀들인데 열세 살 쯤인 계집아이는 다람쥐처럼 쪼르고 달려오고 있고 그 뒤에서 열일곱 살쯤인 새침한 인상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언니 쪽은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있다.

소녀들은 등삼낭의 딸들인 팽옥경(彭玉鏡), 팽옥령(彭玉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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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안룡(獨眼龍)

 

 

칠십년 넘게 강호 무림을 지배해온 무황성에서 최고의 요직은 감찰전(監察殿)의 전주다. 무황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독안룡 이탁은 사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감찰전의 전주였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주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菊造美浪) 왕소군(王昭君)에게 밉보여 일개 분타인 철령보의 보주로 좌천되었다.

이탁의 지인들은 왕소군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탁은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고 철령보로 부임했다.

이탁은 가족들 중 양자인 백남빈만 데리고 철령보로 왔다. 아내는 병약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어려서 무황성에 남겨둔 것이다.

그후 사 년 동안 이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철령보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이탁의 지도하에 철령보 무사들의 무공은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이탁은 기문진법을 바탕으로 각가지 병진(兵陣)을 창안하여 철령보 무사들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무황성의 일개 분타에 불과했던 철령보는 단독으로 대려장이나 극품당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사 년 간 중원의 동북방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안룡 이탁의 능력에 기인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신랑성의 이인자를 생포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다?”

이탁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시절 불행한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붙은 것이다.

... 그자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저항을 포기해서 속하도 놀랐습니다.”

백남빈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철담도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탁은 주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탁 앞에 서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하나뿐인 이탁의 눈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같이 느껴져서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이탁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양자인 백남빈이다.

그런 백남빈조차 양부의 검고 깊은 시선을 오래 접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섬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너희들이 완안진을 요격하러 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탁은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백남빈은 양부의 그 말에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질책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철령보에서 무공으로 완안진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주인 이탁뿐이기 때문이다.

소자가 경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되었다.”

사죄하는 양자에게 이탁은 고개를 조금 저어 보였다.

 

이탁은 순찰을 위해 대려장과의 접경 북쪽 끝까지 갔다가 사해검객 종리완이 보낸 연락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철령보로 다시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려장이 느닷없이 도발을 하여 긴장을 조성했던 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완안진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백남빈보다 먼저 철령보로 돌아온 이탁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는 총관인 사해검객이 잘 알고 있다. 평소의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빈 일행은 새벽이 되어서야 철령보로 돌아왔다. 완안진의 시종 다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서 행군을 서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다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왼안진은 혈도가 짚여 무공이 금제된 채 다얀과 함께 철령보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무황성을 통틀어도 완안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그런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생포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려장으로 파견된 목적까지 순순히 자백했다.”

이탁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훑어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밀봉된 편지 한통, 손잡이에 푸른 늑대의 형상이 정교하게 장식 된 단검 한 자루, 그리고 상당히 큰 반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은 백남빈이 완안진의 몸에서 압수한 것들이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들의 의견들을 말해봐라.”

이탁은 탁자 위의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들어 살피며 말했다.

폭이 반치 정도나 되는 상당히 큰 금 반지인데 표면에는 물감이 흐르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상을 입은 시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한 게 아닐지요?“

철담도호가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완안진은 대려장과 결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신랑성의 밀사다.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자가 겨우 종놈 하나 구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냐?”

... 죄송합니다.”

이탁의 말에 철담도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종의 안위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완안진은 시종을 다얀이라 불렀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남빈이 입을 열었다.

순간 반지를 들고 있던 이탁의 손가락이 경직되는 것을 철담도호는 놓치지 않았다.

다얀... 다얀...”

이탁은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혹시... 다얀이란 이름의 그 시종이 의외로 중요한 존재였는지요?”

철담도호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이탁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신랑성주 토곤의 둘째 아들 이름이 다얀이었습니다.”

백남빈이 양부를 대신해서 철담도호에게 말했다.

그런...”

철담도호는 자기도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비로소 완안진이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가 추측하는 대로 완안진이 대동한 자는 진짜 시종이 아니라 토곤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이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남빈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야심이 큰 토곤의 꿈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곤은 결코 칸이 되지 못한다. 몽고족 지배자인 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후손들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는 징기스칸의 법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토곤은 몽고족의 군사령관인 타이시, 즉 태사(太師)로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딸을 징기스칸의 후손 중 한명인 터터부카(脫脫不花)란 인물에게 시집보낸 후 터터부카를 칸으로 추대했다.

딸이 낳을 외손자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 토곤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토곤에게는 터터부카에게 시집보낸 딸 외에도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토곤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이름이 에센(也先)이고 차남이 다얀이라는 것을 백남빈은 뒤늦게 떠올렸었다.

 

토곤은 둘째 아들을 대려장에 볼모로 보내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탁은 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들을 볼모로 제공할 정도라면 토곤이 대려장과 맺으려던 게 단순히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결맹은 아니겠습니다.”

백남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그는 완안진으로부터 대려장을 찾아가는 목적이 결맹을 맺기 위해서라는 진술만을 들었을 뿐이다. 비록 포로로 잡긴 했지만 완안진이 시종이라 소개한 다얀의 상태가 심각해서 집요하게 추궁은 못한 것이다.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武君子) 강진남(姜震南)에게 보낸 밀서는 읽어보았느냐?”

이탁은 탁자에 놓여있는 밀봉된 편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보셔야할 것같아서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양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탁은 봉서 입구를 뜯어 몇 장의 편지를 꺼냈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담도호가 두 부자의 눈치를 보며 대청을 나갔다.

(볼수록 특이한 반지다.)

홀로 남아서 양부가 편지를 읽는 것을 보던 백남빈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에 놓인 반지로 끌렸다.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그 반지는 백남빈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다섯 가지 색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열기와 은은한 향기까지 느껴진다.

완안진은 그 오색의 금반지, 오채금환(五彩金環)을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토곤이 결맹의 대가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일 것이다.)

백남빈의 생각이 오채금환에 끌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 승부에서 진 것은 완안진이 아니라 우리 부자로구나.”

!

이탁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백남빈은 말없이 양부가 내민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들 부자가 완안진에게 졌다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성주 토곤이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은 백남빈의 예상을 한 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토곤은 현재 십만 이상의 기마대를 만리장성 밖에 결집 시켜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토곤에게 가장 큰 우환은 동족인 달단의 존재다.

원래 몽고초원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행사해온 부족은 달단이었다,

몽고족의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달단은 몽고초원에 남아있었고 덕분에 다른 부족들이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달단은 원래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달단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달단이 곧 징기스칸의 가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이라트는 뒤늦게 몽고족으로의 편입을 허락받은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토곤이 칸으로 옹립한 터터부카도 원래는 달단 출신이었다.

달단의 족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패해 오이라트로 망명했던 터터부카는 토곤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토곤은 몽고족의 칸으로 추대한 사위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기 위해 달단을 맹렬히 몰아붙여왔다.

그 결과 달단은 본거지인 몽고초원에서 쫓겨나 만주 지역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달단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 힘을 되찾아 역습을 가해올지 모른다.

토곤으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에 결맹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토곤이 직접 쓴 밀서에는 달단을 견제해주면 그 대가로 대려장이 요동과 만주 일대를 정복하는데 조력하겠다는 제안이 적혀 있었다.

또 밀서의 말미에는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는 내용과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두 명의 밀사중 먼저 도착한 쪽의 친서를 접수해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완안진이 순순히 포로가 된 것은 주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밀사가 대려장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양부를 닮아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백남빈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길로 간 토곤의 두 번째 밀사는 이미 대려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탁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경계 수준을 높여서 대려장의 동향을 세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남빈은 서둘러 양부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려장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

이탁이 백남빈을 불러 세웠다.

지금의 상황을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하는데... 아비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신을 지그시 보며 말하는 이탁의 뜻을 백남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전서구로도 무황성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겠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합작은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를 무황성에 갖고 가야하는 것이다.

소자가 무황성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양부 독안룡 이탁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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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血洗落魂

 

 

 

󰡔___ ___ ___!󰡕

심혼(心魂)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___

()! 피의 광풍(狂風)이 하늘을, 땅을 몰아쳤다.

시뻘건 혈수(血手)가 허공을 움켜쥐며 허무하게 꺾어지고 있었다.

___ ___ ___ ___!

살갗을 후벼파는 혹독한 한풍(寒風)이 백설(白雪)을 동반한 채 장내를 휩쓸었다.

허나, 꾸역꾸역 쏟아지는 선혈은 뜨겁고 강렬한 색채로 한 자가 넘게 쌓인 백설을 빨아들일 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 속에 널브러진 시체, 시체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참상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끊어지고 살갗이 짓찢어진 채 나뒹구는 시체, 허연 뇌수와 함께 무참히 박살난인두(人頭)와 갈라진 복부 사이로 흘러내린 시뻘건 창자

아아...!

아비규환(阿鼻叫喚)! 인간지옥(人間地獄)!

인세(人世)에 어찌 이토록 처참한 광경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흑의(黑衣)를 걸친 수백 구의 시신들은 어느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벌판___.

시산혈해(屍山血海)의참경에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깃든 벌판이었다.

, 그런데 보라!

수백 명의 시신들 사이에 한 명의 거인(巨人)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六尺) 장신(長身)에 본시는 푸른색이었으나 인육(人肉)이 달라붙고 선혈로 얼룩져 검붉게 변한 장삼을 걸친 인물, 반백(半白)의 머리, 한 자 철판도 단번에 꿰뚫어 버릴 듯 형형히 번쩍이는 안광, 그의 전신에서는 태산같은 위엄과 가공할 살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굳게 다문 입술사이로 흘러내리는 선명한 액체, 그것은 바로 피였다.

그의 오른 손에 들린 반투명한 보검(寶劍)에서도 뚝뚝 선혈이 떨어지고 있었다.

󰡔으음...󰡕

문득, 청삼인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렀다.

허나 곧 그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흑룡신군(黑龍神君)...!󰡕

___! 흑룡신군(黑龍神君)이라면...?

그렇다.

흑룡신군, 그는 무림영웅보에 오른 백팔무인(百八武人) 중의 일인(一人)으로 협서(夾西)일대에서 흑룡방(黑龍幫)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백 년 전에 실전된 흑룡묵혈강(黑龍墨血罡)을 대성(大成)하여 백팔무인 중 서열 제 사십이위(四十二位)에 오른 절정의 고수(高手),

헌데, 그런 그가 지금 천삼인의 발밑에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채 누워있지 않은가?

!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천하(天下)를 떨어 울리던 백팔무인, 그 중 당당한 한 사람으로 군림한 그가 수백 명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이 황량한 벌판에 잠든 것이었다.

과연, 청삼인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가공할 살겁(殺刦)을 저질러 놓았단 말인가?

이때, 태산처럼 버티고 선 청삼인의 신형이 일순 휘청했다.

󰡔으윽... 으음...󰡕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구양천(九陽天)! 네 종말이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하하핫...!󰡕

돌연 그는 한()이 깃든 허탈한 광소를 터뜨리며 하늘을 우러렀다.

일순, 그의눈빛이 절망과 체념으로 흐릿하게 꺼졌다.

󰡔으음, 무형기독(無形奇毒)... 점점 심맥을 갉아먹는구나...󰡕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시신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___ ___ ___!

눈보라가 몰아쳤다.

물씬 피냄새가 한풍을 타고 흩어졌다.

청삼인,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혼자 뇌까리듯 말을 흘렸다.

󰡔흐흐... 결국 나는 마존(魔尊)이외에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살인마(殺人魔)라는 이름까지 얻겠군.󰡕

헌데 이때, 흐릿하게 잠겨들던 그의 두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___ ___ ___ ___!

한풍이 몰아치는 백여 장 밖, 그곳에 어느새 육인(六人)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 아닌가?

___!

찰나지간, 그들 중 한 명의 청삼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왔다.

노인(老人), 그는 마치 얼음으로 깎아놓은 듯 냉막한 인상을 지닌 백발노인이었다.

노인의 두눈에서는 심방을 동결시켜버릴 듯 가공할 안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공이 극()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했다.

헌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청삼인 앞에 내려선 노인은 전신을 가늘게 경련하며 침중한 신음성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으음...󰡕

혹독한 추위 때문인가?

아니다. 절정고수인 그가 추위를 느낄 리 없었다.

! 그는 바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 ! !

노인에 이어 장내에 도착한 다섯 명의 인물, 그들 역시 이미 육순(六旬)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헌데, 그들의 얼굴에도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만 짙은 두려움의 빛이 여실히 깔려있지 않은가!

대체, 한결같이 절정고수인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청삼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인가?

___ !

한 차례 매서운 설풍(雪風)이 장내에 대치한 칠인(七人)의 살갗을 때렸다.

그와 함께, 고목처럼 서 있던 청삼인의 입술이 열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 덤벼라!󰡕

그의 일갈이 떨어지자 앞서 나타났던 백발노인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___

!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그는 백팔무인 중에서도 최절정에 속하는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일인(一人)이 아닌가?

 

천하십웅(天下十雄)___

 

소림(少林)의 천불노승(天佛老僧),

무당(武當)의 삼양노조(三陽老祖),

북해(北海)의 패자(覇者) 북명일신(北冥一神),

중주(中州)명가 만화검선(萬花劍仙),

곤륜(崑崙)의 전대고수 비룡신협(飛龍神俠),

담긍베일의 거도(巨盜) 신풍무영비(神風無影飛),

봉황곡주(鳳凰谷主) 봉황검(鳳凰劍),

천지쌍괴(天地雙怪),

개방(丐幫)의 방주(幫主) 천결타개(千結陀丐),

 

이들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으로서 사제(四帝)에는 못미치지만 백팔무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백발노인, 그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한 명인 북명일신이었다.

이때, 북명일신은 두겨움을 떨치기라도 하듯 입술을 악물며 대갈했다.

󰡔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그의 일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명일신의 뒤에 나열해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이 순식간에 청삼인을 포위했다.

___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이는 북해일문(北海一門)의 비전전술(秘傳戰術)이었다.

또한 다섯 명의 노인들은 북해일문의 최고고수, 즉 북명오로(北冥五老)였다.

이때, 다시 북명일신의 입에서 벼락같은 일갈이 터졌다.

󰡔현음추살(玄陰刺殺)!󰡕

순간, 휘르르___ ___ ___!

북해오로의 전신에서 맹렬한 빙풍(氷風)이 불어닥쳤다.

동시에 그들의 신형은 하얀 백무(白霧)로 휩싸였다.

헌데, 그 백무가 점차 확산되는가 싶더니 서로 이어져 하나의 환()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엽___!󰡕

북명오로의 벼락같은 기합성이 터지는 순간 백환(白環)은 청삼인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파파팟___!

허나 바로 그 순간,

󰡔으하하하하핫...!󰡕

청삼인의 입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광소가 터져나왔다.

찰나, 꽈르르릉___!

󰡔___ __ !󰡕

󰡔___ ___ !󰡕

장내를 득썩 뒤흔드는 굉음과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북명오로___.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어느새 형체도 없이 짓이겨져 끔찍하게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럴 수가...!󰡕

북명일신의 두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청삼인.

그는 온몸에 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채 냉오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때, 사색(死色)이 되어 신형을 비틀거리던 북명일신이 다시 불끈 이를 악물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시커먼 경기가 극맹한 한기를 동반한 채 뻗어나왔다.

그 모습에 청삼인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나직한 비웃음과 함께 번쩍 왼손을 치켜들었다.

󰡔후후... 현음빙살강기(玄陰氷煞罡氣)로군. 후후...󰡕

치켜든 그의 좌수(左手)가 순식간에 섬뜩한 청색(靑色)으로 물들었다.

청수(靑手)___ 그것은 마치 하나의 가공할 청강도(靑罡刀)를 연상케 했다.

우우___ ___!

두 사람 사이에는 무형의 경기가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이때,

󰡔현음빙살(玄陰氷煞)!󰡕

북명일신이 먼저 신형을 움직이며 발악하듯 대갈을 터뜨렸다.

츠츠츠츳...!

극렬한 빙음지기(氷陰之氣)를 동반한 묵기(墨氣)가 청삼인을 짓쳐들었다.

허나 그보다 먼저 청삼인의 좌수가 번득 청광(靑光)을 뻗었다.

󰡔___ ___ !󰡕

비명!

북명일신은 피보라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올라갔다.

이어, ___!

그것이 끝이었다.

허나 이때 청삼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 졌다.

󰡔으음... 이놈의 무형기독(無形奇毒)만 아니었다면...󰡕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그의 넒은 이마에는 점차 검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독기가 이미 골수까지 침범한 것이었다.

허나 청삼인은 돌연 두눈을 부릅뜨며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 그러나.. 사제(四帝) 네놈들을 베기 전에는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크하하... 기다려라. 본존(本尊)이 간다...!󰡕

다음 순간, 그는 벼락같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번뜩 황야를 가로질렀다.

구련산(九蓮山) 낙혼애(落魂崖)___.

평평하던 지면이 갑자기 끝나며 마치 지옥의 입구(入口)처럼 쩍 갈라진 단애의 정상(頂上).

이곳에도 한 자가 넘는 백설이 숨막히도록 쌓여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펑펑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헌데,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절지에 언제부터인가 몇 개의 인영이 동상처럼 서 있었다.

__ __ ! __ !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강풍이 목석처럼 굳어있는 인영들의 옷자락을 거세게 휘날렸다.

이때, __ __ !

돌연 잿빛 허공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날카로운 새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중인들은 흠칫하여 고개르 들어올렸다.

그때 까마득한 허공에서 하나의 검은 점이 쏜살같이 낙혼애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그것은 두 자 정도 크기의 검은 독수리였다.

헌데 그것은 내리꽂히듯이 하강하여 중인들 중 가운데 흑의노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가운데의 흑의노인___.

그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

움푹 들어간 두둔에서는 귀화처럼 푸르스름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흑의노인은 독수리의 발에 묶여있던 천을 끌러 읽어보았다.

󰡔...󰡕

문득 그의 입에서는 둔중한 신음성이 흘렀다.

그러자 그의 우측에 서 있던 학발동안의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명제(冥帝)! 무슨 소식이오?󰡕

황의노인은 붉으레한 안색에 신선같은 인상을 풍겼으며 품속에 한 자루의 고색 창연한 고검(古劍)을 비단으로 싸서 안고 있었다.

󰡔그가 모든 관문을 돌파했소!󰡕

흑의노인은 움푹 들어간 두눈에 살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흑의노인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백팔무인 중 우리를 제외하고 이번 일에 참석치 않은 십여 명의 인물들을 빼고 모두 그의 손에 죽었소.󰡕

그말에 좌측에 서 있던 현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자는 분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을 텐데도 그 정도의 신위를 발하다니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소.󰡕

그는 안색이 푸르뎅뎅하고 가늘게 찢어진 두눈에는 기괴하게도 벽광(壁光)이 번뜩여 섬한 전율을 풍겼다.

흑의노인은 그의 말에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러나 그는 이미 기독이 전신에 퍼져 평소의 오할 정도밖에 공력을 쓰지 못한다고 하오.󰡕

이어 그는 힐끗 한쪽 옆을 응시했다.

그들 삼인(三人)과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황의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이 넘는 거구의 장한으로 시커먼 구레나룻이 턱을 뒤덮고 있었다.

무섭게 부릅뜬 호목(虎目)에 먹으로 꾹 찍어놓은 듯 짙은 검미(劍眉).

두눈에서 뻗치는 가공할 신광은 가히 만인을 압도하고는 남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뒤에는 각각 홍포와 청포를 입은 두 명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노인이 황의중년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대에게 할말이 있다.󰡕

황의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___!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렇다. 이 황의중년인이야말로 바로 중원북부를 위무하고 있고 황룡대제 기용천(奇龍天)이었다.

그리고 삼제(三帝)!

세 명의 노인들이야말로 황룡대제와 함께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삼제가 아닌가?

___구유명제(九幽冥帝).

___유성검제(流星劍帝).

___만천독제(滿天毒帝).

 

흑의의 음산한 노인, 그가 바로 구유명제였다.

동안학발에 고검을 지닌 노인은 유성검세.

현의에 귀면(鬼面)인 노인이 만천독제였다.

황룡대제 기용천은 구유명제를 바라보며 당당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흐흐... 그렇다. 그는 지금 낙혼애 아래서 본제와 다른 두 분의 수하를 상대하고 있다.󰡕

그 유명제는 문득 만천독제와 유성검제를 바라보았다.

󰡔헌데 보고에 의하면 그대의 황룡보(黃龍譜) 수하들은 구경만 하고 있다고 들었다.󰡕

순간,

󰡔닥치시오!󰡕

황룡대제의 뒤에 서 있던 두 괴인 중 홍포를 걸친 뚱뚱한 체구의 노인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보주님의 명호를 함부로 도용하여 천하군웅들을 모아놓고 무슨 헛소리요!󰡕

그는 성질이 매우 급한 듯 구유명제를 내려보며 두눈을 부릅떴다.

구유명제는 음악한 표정으로 홍포괴인을 노려보았다.

󰡔흐흐... 열양신괴(熱陽神怪),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제에게 대들다니...󰡕

이때 전신이 대나무처럼 비쩍마른 청포괴인이 문득 홍포괴인을 저지시키며 나섰다.

󰡔구유명제! 우리 천지쌍괴(天地雙怪)가 당신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다만 보주님의 허락이 없어 당신과의 일전을 참고있는 것 뿐이오.󰡕

청포괴인, 그는 심기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에 구유명제는 안면을 부르르 경련했다.

___천지쌍괴(天地雙怪),

빙심마괴(氷心魔怪),

열양신괴(熱陽神怪),

이들은 쌍둥이 형제로서 빙심마괴가 첫째였다.

이때, 구유명제가 분노를 참지못해 전신을 경련하자 문득 기용천이 나섰다.

󰡔사실 후배는 이번 사건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수하들에게 방관하도록 지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구유명제는 잡아먹을 듯이 황룡대제를 노려보았다.

(이 어린 놈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공력이 늘고 있다. 설사 모든 일이 성공한다 해도 이놈을 제거하지 못하면 강호독패(江湖獨覇)는 힘든 일이다.)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헌데 이때,

󰡔___ 우우___ ___!󰡕

낙혼애 아래로부터 폐부를 뒤흔드는 장소성이 들려왔다.

순간 구유명제는 번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오고 있소.󰡕

그의 말이 끈나는 순간, 낙혼애를 따라 한 줄기 인영이 빛살처럼 쏘아올랐다.

󰡔크하하하하핫...!󰡕

인영은 낙혼애가 무너질 듯 쩌렁쩌렁한 광소를 터뜨리며 눈 깜짝할 순간 중인들의 앞에 내려섰다.

󰡔...!󰡕

󰡔으음...!󰡕

중인들은 그 인영을 대하자 절로 침음성을 발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인영___

그는 바로 북명일신 등을 단번에 쓰러뜨린 청삼노인이 아닌가?

청삼노인은 낙혼애 위의 중인들을 쓸어보며 재차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사제(四帝)! 네놈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구나. 이 천강마존(天罡魔尊)이 쓰러질 줄 알겠지만 어림없다. 크하하핫...!󰡕

 

! 천강마존(天罡魔尊)___!

이처럼 가공스러운 이름이 하늘아래 또 어디에 있겠는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는 단연코 천하를 떨어울리는 공포의 마존(魔尊)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천강마존! 그는 이미 십일 전에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절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다.

범인이라면 중독되는 순간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맹독에 십일 이상을 버텨온 것이 아닌가?

이때, 문득 천강마존의 광소를 막으며 황룡대제가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순간 기이하게도 천강마존의 강렬한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무엇인가?󰡕

황룡대제 기용천은 당단한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를 얻으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기용천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두눈에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

(기재(奇才)로다.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제일인이 되기에 충분한 재목이다.)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이네. 노부는 혈음패황도를 얻었네.󰡕

󰡔으음...󰡕

그 말에 기용천은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___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 이는 마도(魔道) 제일의 마기(魔器)로 불려지는 마물이었다.

처음 이것을 얻는 자는 칠백 년 전 절대마종(絶代魔宗)으로 군림했던 혈음마황(血吟魔皇)이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우연히 이 마도(魔刀)를 얻게 되었다.

그 사유는 이러했다.

 

백팔무인 중 일인인 흑장마군(黑掌魔君)은 천협산(天峽山) 부근에서 혈음패황도와 혈음마황(血吟魔皇)의 혈황경(血皇經)을 얻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얻은 후 악행을 일삼다가 천강마존에 의해 마도(魔刀)와 혈황경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기를 면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흑장마군은 무림에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천강마존이 혈음패황도를 익혀 무림을 피로 씻으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항상 천강마존을 제거키위해 기회를 엿보던 구유명제와 만천독제는 사제(四帝)의 이름으로 무림첩을 돌려 군웅들을 모은 것이었다.

 

황룡대제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혈음패황도는 마물입니다.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문득 나직한 어투로물었다.

󰡔그대는 노부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인정하는가?󰡕

황룡대제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선배님이야말로 천하제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인이십니다.󰡕

황룡대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천강마존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는 이제 확실한 판단을 얻었다.

천하제일인!

이 당당한 이름을 두고 천강마존은 무슨 또 다른 야욕을 꿈꿀 수 있겠는가?

황룡대제는 문득 존경어린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급급히 말했다.

󰡔후배는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때가 적당치 않음은 알고 있으나 한수 가르침을 바랍니다.󰡕

천강마존은 이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은 채 쾌히 스낙했다.

󰡔좋네. 단 일검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네.󰡕

황룡대제는 정중히 검례를 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황룡대제의 고검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휘황한 광채가 쏟아졌다.

󰡔... 태양검강(太陽劍罡)!󰡕

관전하던 중인들은 침중히 부르짖었다.

대치한 천강마존의 안면 또한 일시 굳어졌다.

___태양검강(太陽劍罡).

이는 무려 천여 년 전에 실전되었던 검도 최고의 비학이 아닌가?

허나 이때, 스스스스...!

천강마존의 반투명한 천강검에서 실같은 백선이 가늘게 사위로 뻗었다.

순간 황룡대제의 전신은 완전히 태양같은 광휘에 휩싸여 단지 검봉(劍奉)의 모양을 한광망이 일 장 길이로 뻗어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눈에 문득 애석한 빛이 스쳤다.

(아깝군, 팔성(八成)의 화후에서 멈추었군.)

허나 생각을 끝낸 바로 그 순간,

󰡔검강만천(劍罡萬天)!󰡕

낙혼애를 허물어뜨릴 듯한 엄청난 일갈과 함께 황룡대제의 고검이 낙뢰를 일으키듯 천강마존을 쪼개갔다.

허나 그와 동시에 천강마존의 천강검도 번뜩 허공을 갈랐다.

󰡔천강파극(天罡破極)!󰡕

츠츠츳___ 파파파팟___

미친 듯한 검기의 충돌이 대기를 갈가리 짓찢었다.

󰡔으음...󰡕

일순 침중한 신음성이 일며 황룡대제는 어깨를 부여잡고 물러섰다.

허나 천강마존은 여전히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황룡대제는 급히 정중히 에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노부의 천강검식 중 제 삼식(三式)을 받아낸 인물은 자네가 처음이네.󰡕

그말에 황룡대제는 부끄러운 기색을 지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강이 부딪친 순간 천강검세가 여지없이 태야검강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목을 노렸다는 것을...

허나 결정적인 순간 천강검이 슬쩍 옆으로 비껴지며 가볍게 어깨를 베는 것에 그쳤다는 사실도, 황룡대제는 빙글 몸을 돌리며 천지쌍괴를 향해 말했다.

󰡔들어갑시다.󰡕

이어, ___!

그는 먼저 신형을 날려 낙혼애 아래로 사라졌다.

천지쌍괴도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천강마존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어 그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무거운 일검을 펼쳐 무형기독이 급속히 전신으로 퍼진 것이었다.

이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구유명제가 음침한 표정으로 만천독제와 유성검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거의 폐인이나 다름이 없소. 해치웁시다.󰡕

그 말에 이제(二帝)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천강마존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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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2020. 3. 12. 17:31 공지

업데이트 주기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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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카테고리에 올리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매일 1회 이상 올릴 계획입니다.

가능한 1일 2회 연재를 하겠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도 매일 1회씩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댓글도 환영 ㅎㅎㅎ

 

 

필부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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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기정무협소설

 

                     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

 

1

 

 

 

 

 

序 章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수천년 무림의 역사(歷史)는 그야말로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___겁륜천하(刦輪天下).

피의무림사는 수없이 돌고 도는 수레바퀴의 기록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무림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가 작성(作成)된 것은 불과 백년래(百年來)의 일이다.

무림군웅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근세 백년무림계는 실전되었던 수많은 신공지학(神功之學)들이 속속 발굴되어 뛰어난 영웅들이 무림사상 최고의 정화로 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년래 가장 강()했던 고수(高手)들이 확연히 드러났다.

 

___백팔무인(百八武人).

 

모두 도합 백팔 명의 절세고수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어 무림을 빛냈다.

그들의 명단을 기록할 것이 바로 무림영웅보(武林英雄譜)였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무림영웅보란 한 권의 책자(冊子)도 아니었다.

단지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이었다.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팔무인은 가히 시대만 잘 타고 났으면 족히 무림의 패자(覇者)가 되고도 남을 개세고수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나타났기에 각기 한 지방의 패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걸출한 개세인물들이 있었다.

 

___일존(一尊) 천강마존(天罡魔尊).

 

백팔무인 중 최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년무림은 물론 무림사를 통해 서로 최강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칭송 받았다.

가히 개세무적의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었다.

일존 천강마존, 그는 무림에 활동한지 일갑자(一甲子)하고도 반갑자(半甲子)가 지났다.

그러나 지금껏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조차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여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칠 명의 절정고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예로, 백칠무인 중 최절정에 속하던 무위대제(武威大帝)조차도 그의 삼겁(三刦)을 못 받아내고 불귀의 객이 된 것이었다.

허나, 비록 그의 별호에 마()자가 붙었다고 하나 결코 그는 마두(魔頭)는 아니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하고 패도적이어서 자신의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여 마음에 거슬리는 자를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제거했기에 무림인들이 그에게 마존(魔尊)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무림군웅보의 두 번째 서열에는 이인(二人)이 올라 있었다.

 

쌍기(雙奇),

고죽취옹(枯竹醉翁).

낙척문사(落拓文士).

 

그들 두 기인(奇人)은 천강마존과 함게 당금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았다.

특히 고죽취옹(枯竹醉翁)은 천강마존이나 낙척문사보다도 오히려 한 배분이 높았다.

그는 각종 기문진학(奇門陣學)과 역리(易理)에 능통한 기인이었다.

낙척문사(落拓文士)는 무불통지(無不通知)의 대학자(大學者)로서 성품이 고결했다.

그들 쌍기(雙奇)는 성격이 매우 고고하여 타인과 좀체로 다툰적이 없어 진정한 실력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무림군웅보는 세 번째 서열에 사인(四人)을 놓고 있었다.

 

사제(四帝).

 

당금 천하무림(天下武林)을 사분(四分)하고 있는 무적의 패자(覇者).

그들은 명성이나 위용은 구주사해(九州四海)를 진동시켰다.

 

구유명제(九幽冥帝).

유성검제(流星劍帝).

만천독제(滿天毒帝).

황룡대제(黃龍大帝).

 

이들 사인은 오히려 일존(一尊)이나 쌍기(雙奇)보다도 더욱 무림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본래, 일존 천강마존에게 죽음을 당한 무위대제(武威大帝)가 사제(四帝)의 일인(一人)이었다.

허나 그가 죽은 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젊은 기협(奇俠) 황룡대제(黃龍大帝)가 사제의 일원이 되었다.

사제는 한결같이 경세적인 무학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잣 사순(四旬)인 황룡대제를 제외하고는 모구 백 세가 넘는 자들이었다.

시제는 모두 웅심호담을 지닌 대야심가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불행히도 한 시대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일존 천강마존으로 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칼을 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무림을 위해서는 그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일 일존이 없었다면 그들 사제의 패권다툼으로 인해 무림은 평지(平地)가 될지도 모를 것이므로,

구유명제(九幽冥帝).

그는 사십 년 전 무위대제가 죽어 해체된 무위궁(武威宮)을 휘하에 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구유문(九幽門)과 병합하여 유명궁(幽冥宮)을 세워 천하독패의 꿈을 꾸고 있었다.

 

유성검제(流星劍帝), 그는 무려 삼백 년(三百年)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성검문(流星劍門)을 당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대검사(大劍士)였다.

그 결과 유성검문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그리고 장강(長江) 일대의 패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만천독제(滿天毒帝), 그는 사천(四川)에 독존궁(毒尊宮)을 세웠다.

그의 독존궁은 천하의 수많은 고수들을 끌어들여 나날이 세력을 확장할 뿐 아니라 강남(江南)과 멀리 천남(天南)에 까지 점차 마역(魔域)을 넓히고 있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는 성품이 지극히 담백한 군자(君子)였다.

비록 사십의 중년에 불과하나 그의그런 인풍 때문에 그의 곁에는 절로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모였다.

때문에 비록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으나 휘하의 도움으로 그는 돈황(敦皇)에 황룡보(黃龍堡)를 건립했다.

 

황룡보, 비록 건립된지 십여 년에 불과하나 황룡보는 정사(正邪) 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기인들이 모여 점차 무림의 태두(泰斗)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로 방대한 세력을 북()으로부터 뻗치고 있었다.

 

사제(四帝), 그들의 세력은 가히 천년 전통의 구파일방을 짓누르고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아무도 감히 천하제패의 발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

 

___천강마존(天罡魔尊),

 

모두가 무림군옹보의 첫머리를 장식한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제로서는 한시라도 천강마존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무림(武林)___!

풍운일변의 혈세무림천하여___.

무림군웅보의 백팔무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무림은 흡사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이 무림사상 유래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허나...,

허나....!

무림군웅보의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던 백팔인의 개세고수들이 어느날 태반이 쓰러지면서 중원무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대혈풍(大血風)이 일기 시작했으니...

새로운 무림의 혈사(血史)가 창조되려는가?

... 바람()이 분다.

()와 살()과 마()와 죽음()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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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로잡힌 거물(巨物)

 

 

삐이이이! 퍼억!

기마대의 선두가 날려 보낸 명적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뿐 완안진과 다얀에게 한 참 미치지 못하는 뒤쪽에 떨어졌다.

살상의 위험은 없지만 명적은 다른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는 쫓기는 표적으로 하여금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예민한 말들도 명적이 울릴 때마다 발작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진정해라.”

완안진은 그런 애마를 다독여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소리뿐인 명적에 이어 실질적인 위협이 쇄도한다.

피잉! 시잉!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든 유엽전(柳葉箭)과 세전(細箭)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말을 잘 달래라. 달리는 중이라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완안진은 실전 경험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다얀에게 외치며 몸을 좀 숙였다.

두 사람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있다.

또 말이 달려가는 속도가 날아든 화살의 위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이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은 맞아봤자 그저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 티팅!

날아든 화살 몇 개가 투구와 방패에 맞아 퉁겨진다.

히히힝! 푸르르!

엉덩이에 한 두 개씩의 화살이 꽂힌 말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완안진의 말 대로 달리는 속도가 화살의 힘을 약화시켜 깊이 박히진 않는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완안진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십여 리쯤 저편에 약간 높은 언덕이 길게 가로 누워있다.

그 언덕 너머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만 넘으면 대려장과 철령보의 경계인 요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만 건너가면 철령보도 무리하게 우릴 추적하진 못할 것이다.”

완안진은 겁에 질린 다얀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굳어졌다.

두두두!

갑자기 요하 변의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의 기마가 나타나 달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 철령보가 우릴 함정으로 몰아왔습니다.”

뒤 따라 오던 다얀이 겁에 질려서 계집애처럼 높은 소리를 낸다. 요하 쪽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기마대 역시 철령보 소속임을 알아보고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철령보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구나.)

완안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들을 추적하는 철령보의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멀리 우회한 동료들이 포위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종일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추격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완안진 자신도 전력으로 말을 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북쪽으로 간다.”

두두두! 히히힝!

완안진은 말의 방향을 급격하게 북쪽으로 틀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얀도 허둥대며 완안진을 따라 말을 몰았다.

요하의 북쪽은 극품당, 정확히는 달단의 영영이다.

같은 몽고의 부족이지만 달단은 신랑성을 세운 오이라트와 철천지원수 사이다. 신랑성의 부성주인 자신을 보면 기필코 잡아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철령보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일단 달단의 영역으로라도 피신해야만 한다.

두두두!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두 필의 준마는 서쪽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철령보의 기마대 사이에 끼어 북쪽으로 내달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같다.)

완안진은 곁눈질로 오른쪽을 보며 말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요하 변에 매복하고 있던 철령보의 기마대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진하면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오리(五里)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두두! 히히히힝!

완안진과 다얀이 달려가는 북쪽의 관목더미 뒤에서 두 필의 준마가 뛰쳐나온 때문이다.

(아차!)

완안진은 자신이 다시 한 번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아차렸다.

적은 앞뒤로 협공을 당한 자신과 다얀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매복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강행돌파 할 수 밖에...)

차앙!

완안진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다얀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역시 칼을 뽑으며 따라온다.

대략 이리 정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필의 준마 위에는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짙은 남색 옷을 걸친 청년은 약관 전후로 보이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깊고 형형하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하게 사경을 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부릅뜬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호 같고 건장한 몸에서는 사나운 살기가 뿜어진다.

(철령보의 오대고수(五大高手)중 한명인 철담도호(鐵膽刀虎) 고불귀(高不歸)겠구나.)

완안진은 중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독안룡 이탁이 직접 나섰다면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철담도호 고불귀가 사해검객 종리완과 함께 철령보 오대고수에 속하는 인물이긴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십초 내에 쓰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구명절초(救命絶招)가 있다.

그걸 쓰면 십초가 아니라 일격에라도 철담도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놈은 내가 맡겠다. 다얀 너는 젊은 놈을 상대하되 접전은 피하고 추격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라.”

완안진은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는 철담도호와 청년을 노려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

다얀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비록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오이라트 족장 토곤의 핏줄인지라 무공은 꾸준히 수련해왔다.

자신의 현재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가는 다얀이다.

그래도 상대 역시 자기 또래이니 잘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같다.

두두두!

그 사이에 양측의 거리가 삼십여 장 쯤으로 좁혀졌다.

(장심뢰(掌心雷)를 날려서 일격에 고불귀를 격살하자.)

완안진은 고삐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빼든 칼은 미끼에 불과하다.

그의 왼손에는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천근 무게의 철퇴가 휘둘러지는 위력을 지닌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철담도호는 완안진의 오른손에 들린 칼만 주의하다가 느닷없이 날아든 장심뢰의 일격에 몸뚱이가 으스러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계산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콰드드! 두두두!

거리가 십장쯤으로 좁혀졌을 무렵 그때까지 나란히 달려오던 청년과 철담도호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어서 거리를 확 넓힌 것이다.

마치 완안진과 다얀으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고 길을 터주듯이...

(위험하다!)

완안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얀이 위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적중했다.

! 촤라라!

철담도호와의 거리를 확 벌린 청년이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쇠사슬을 옆쪽으로 던졌다.

건너편의 철담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던진 쇠사슬 끝을 틀어쥔다.

완안진과 다얀의 앞쪽에 쇠사슬이라는 장애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거리는 그 사이에 오장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피하긴 늦었다!)

완안진은 눈을 부릅떴다.

말을 버려라!”

파앗!

완안진은 다급히 외치며 말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히익!”

다얀도 상황을 깨닫고 급히 말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콰창! 히히히힝!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과 철담도호가 양쪽에서 잡아끌고 온 쇠사슬에 목이 걸린 것이다.

! 촤라랑!

완안진과 다얀이 타고 있던 말들이 쇠사슬에 걸리자 청년과 철담도호는 즉시 쇠사슬을 놓았다.

콰당탕! 퍼억! 히히힝!

쇠사슬에 목이 휘감긴 말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뒹군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

완안진보다 한 박자 늦게 말 등으로 올라섰던 다얀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촤락!

청년이 놓은 쪽의 쇠사슬이 다얀의 하체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퍼억!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서 균형을 잃은 다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헌데 뒤로 넘어진 그의 머리가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퍼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다얀의 몸은 세차게 퍼덕인 후 축 늘어졌다.

... 안돼!”

허공으로 날아오른 후 철담도호를 공격하려던 완안진이 그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얀!”

휘익!

완안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다얀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끄윽...”

다얀은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깨져 기식이 엄엄한 상태다.

이런...”

완안진은 다얀의 뒷통수 쪽의 혈도를 찍어 출혈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막아주며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다얀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나 완안진은 성주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

벌벌 떠는 다얀을 내려다보며 완안진은 대려장을 향하던 자신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말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완안진을 에워싼다.

몰려든 백여 기의 기마대가 거대한 원진을 그리며 완안진과 다얀을 포위하고 있다. 말을 탄 철령보의 무사들은 강전을 재운 활로 완안진을 겨누고 있고...

고대협, 투항할 테니 용납하여 주기 바라오.”

완안진은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철담도호 고불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항서(降書)를 쓸 생각이라면 대상이 틀렸소 부성주.”

하지만 철담도호는 옆으로 물러서서 완안진의 예를 피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 완안진이 오늘 거푸 세 번이나 실태를 범하는구먼.”

옆으로 물러서는 철담도호를 보며 완안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철담도호가 비켜서는 뒤쪽에서 쇠사슬을 던졌던 냄색 옷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큰일을 치뤘음에도 청년의 눈빛은 깊게 갈아 앉아 있는데 걸음걸이는 무거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철담도호를 비롯하여 철령보의 모든 무사들의 시선은 그 청년을 향하고 있다.

비로소 완안진은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을 추격해온 철령보 무사들의 수령임을 알아차렸다.

함정에 거푸 두 번 빠진 것도 모자라 그 함정의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신랑성을 이끌어온 완안진답지 않은 실책이다.

부성주, 투항하시겠다면 항장(降將)으로 예우해드리겠소.”

완안진의 일장 앞에 멈춰선 청년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인생이다.)

완안진은 아들뻘인 청년이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철령보의 소보주 검사자(劍獅子) 백남빈! 중원무림에서 신진제일고수라 불린다는 그대에게 투항하면 수치심이 조금이나마 감해지겠군.”

완안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청년은 바로 철령보의 소보주 백남빈이었다.

 

백남빈의 별호는 검사자다.

그에게 검사자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은 무황성의 당대 성주인 주진충(朱盡忠)이다.

무황성에서는 매년 젊은 무사들중 일인자를 가리는 비무대회, 등천제(登天祭)가 열린다.

헌데 오 년 전,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등천제에 출전한 백남빈이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백남빈이 이기는 일이 반복되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수의 왕인 사자 같다고 해서 주진충은 백남빈에게 검사자라는,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내려주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백남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투항의 조건을 말씀해보시오.”

백남빈이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의 치료와 무사귀환을 원하네. 대신 본인이 대려장으로 가던 목적은 숨김없이 자백하겠네.”

완안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의 손잡이를 백남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 대협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소.”

백남빈은 완안진이 내민 칼을 받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몽고 최강의 부족 오이라트가 세운 신랑성의 이인자 완안진은 무황성 동북 분타 철령보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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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발의 미녀

 

 

사신각은 호천무맹이 봉문한 후 활동을 시작한 악명 높은 청부살인조직이다.

청부를 받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고 장담하며 설령 청부 대상이 황제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적정한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은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자가 적힌 복면을 쓰고 표적을 척살을 시도한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일단 사신각의 표적이 된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무림의 정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이 기련산의 골골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라고 하외다.”

독안랑이란 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딱히 누군가를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독안랑이다.

하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옥가년을 노리는 건 아닐 테고...”

금포장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 역시 사신각의 살인귀들에는 꺼리는 바가 있었다.

루주께서 결심만 하지만 우리 마천루(魔天樓)의 형제들이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을 기련산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독안랑이 하나 뿐인 눈을 투지로 물들이며 말했다. 외눈의 늑대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그자는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좋아한다.

사신각과는 장차 거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소.”

루주라 불린 금포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사신각과는 충돌하지 말고 옥가 년의 종적을 찾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소이다!”

대답하는 독안랑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어떤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이다.

휘익!

독안랑은 다시 날아올라 멀어져갔다.

삐익! !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적지 않은 사람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놈!”

휘익!

금포장한도 힐끔 소년을 훑어본 후 몸을 날렸다. 그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탓에 소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곧 금포장한의 모습도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우!"

그제서야 비로소 소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마로 식은땀이 번져 나왔다. 금포장한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소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

돌연 소년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는 죽서기년 위로 새빨간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주머니!"

소년은 놀라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쿠웅!

그 직후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은발여인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소년은 급히 은발여인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은발여인의 안색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숨결은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왜 이러실까?)

소년은 갑작스러운 은발여인의 변화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은발여인의 파리한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말을 하신다.)

소년은 급히 여인의 입 근처로 귀를 기울였다.

"가슴... 약병..."

은발여인은 미약한 음성으로 그같이 말하고는 실신해버렸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에 있는 약병을 찾아달란 말씀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으나 어쨌든 상대는 여자다. 생면부지인 여자의 가슴을 뒤지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술에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은발여인의 상세는 아주 위중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은발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다.

!

은발여인의 가슴을 옥죄고 있던 옷고름이 풀려졌다.

출렁!

그러자 한 쌍의 살덩이가 눌려있던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

소년은 숨이 탁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이다.

출렁! 출렁!

작은 수박을 반으로 쪼개서 엎어놓은 것같은 한 쌍의 살덩이들이 물 풍선처럼 흔들거린다. 엄청난 크기에 비해 젖가슴 위에 돋아있는 젖꼭지는 팥알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본 순간 소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어놀고 귀는 멍멍해진다.

본래 은발여인은 유난히 큰 젖가슴을 감추기 위해 비단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헌데 그 젖 가리개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으스러져 있었다.

은발여인이 걸친 흑의의 재질은 천잠사라 외력에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젖 가리개는 평범한 비단이라 으스러진 것이다.

(... 이럴 수가...!)

헌데 당황하던 소년의 눈에 경악의 빛이 더해졌다.

한 쌍의 육중한 살덩이 사이에 시뻘건 손바닥 자욱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희디흰 속살에 찍힌 핏빛 손자국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핏빛 장인을 누가 일부러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결코 그린 것이 아니었다.

(이 손바닥 자국이 이 분을 실신하게 만든 원인인 듯한데...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놀라던 소년은 서둘러 은발여인의 저고리 섶 안쪽을 뒤졌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소년의 손에 은발여인의 젖가슴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뭉실뭉실한 감촉은 한참 피가 뜨거울 나이인 소년에게는 아찔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게... 이게 여자의 젖가슴 감촉이로구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곧 은발여인의 가슴 섶에서 하나의 옥병을 찾아냈다.

반 뼘도 안되는 자그마한 옥병 안에는 밀랍에 싸인 세 알의 호두알만한 환약이 들어있었다. 비록 밀랍에 싸여있지만 환약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와 주위를 진동했다.

(이것인 모양이다.)

소년은 눈을 빛내며 급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밀랍을 벗겼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입 안에 넣어주려 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입을 꼭 다문 채 실신하고 있는 상태라 환약을 넣어줄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소년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은발여인은 인사불성이라 스스로 환약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환약을 먹이려면 물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년은 준비해온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렇다고 근처의 샘이나 개울로 물을 뜨러 갔다 올 여유는 없다.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사이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은발여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잠시 갈등하던 소년은 결심을 했다. 비록 물은 없지만 은발여인에게 환약을 먹일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소년은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상큼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와 함께 환약은 소년의 침에 녹아 걸죽해졌다.

(용서하십시오.)

환약을 자신의 침으로 녹인 소년은 입술을 은발여인의 창백한 입술 위에 포개었다.

(허억!)

입술에 느껴지는 너무도 보드라운 감촉에 소년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여인의 입술... 그 황홀한 감촉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은발여인의 꼭 다물려진 입술을 혀를 써서 벌렸다.

여인의 매끈한 치아가 혀끝에 느껴져 소년을 아찔하게 만든다.

소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면서 자신의 침으로 녹인 환약을 여인의 입속에 흘러 넣어 주었다.

잠시 후 소년은 마지못해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미 침으로 녹인 환약은 모두 은발여인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상태였다.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 소년의 가슴은 여전히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고 귀는 멍멍하다.

입가에 남아있는 꽃잎의 그것같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

이성과의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경험은 실로 충격적이면서도 황홀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어머니 못지않게...)

소년은 망연한 표정으로 은발여인의 조각처럼 단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넋이나가서 은발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은발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아왔다. 소년이 먹여준 약기운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다.

"휴우..."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은발여인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은발여인은 흠칫했다. 가슴 부위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젖 가리개가 훼손되었겠구나.)

자신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 알아차린 은발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물기 젖은 봉목이 나타났다.

"... 괜찮으십니까 아주머니?"

은발여인이 눈을 뜬 것을 본 소년은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소년의 순진한 모습에 은발여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의 젖가슴을 처음 보느냐?"

은발여인은 드러난 젖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짓궂게 물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년이 화난 음성으로 내뱉으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

은발여인의 섬섬옥수가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지극히 연약하고 보드라운 섬섬옥수다.

하지만 일단 가녀린 그 손에 잡히자 소년은 움쭉달쭉도 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

부르르!

소년은 당혹과 충격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손바닥 가득히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육질의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이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으로 녹아들어가는 것같은 기분이 되었다.

은발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란다."

"... 무슨 뜻이십니까?"

소년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은발여인은 그런 소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나 옥여상의 젖가슴을 보고 만진 것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다."

"... 죄송합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고개를 살래 저었다.

"그런 말 할 것 없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원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은발여인, 옥여상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렸다.

(...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소년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옥여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년은 얼굴이 발개진 채 은발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젖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호호호 매정한 도련님이시군요."

옥여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비록 어리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충후한 군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내도 있구나.)

옥여상은 돌아앉은 소년을 살펴보며 벌어져 있는 상의를 여몄다.

"장난으로 해본 소리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헌데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옷고름까지 단단히 동여맨 옥여상은 토라진 소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검추(劒秋)! 고검추(高劒秋)라고 합니다."

"고검추! 좋은 이름...!"

미소 지으며 말하던 옥여상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소년, 고검추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가운데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으로 하여금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그러고 보니 그를 닮지 않았는가? 성까지도 그와 같은 고씨이고...)

옥여상은 어떤 예감에 전율했다.

소년 고검추가 대체 누구를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 후사(後嗣)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미를 모으며 잠시 생각하던 옥여상은 고검추에게 물었다.

"혹시 고창룡이란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고창룡이라면 욕정에 눈이 멀어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유린했다는 희세의 패륜아가 아닌가?

그렇다면 소년 고검추가 정파의 수치인 철사자 고창룡을 닮았단 말인가?

"고창룡? 저와 종씨인 듯하지만... 그런 분은 알지 못합니다."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창룡을 모른다?"

옥여상은 실망과 안도가 교차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그보다 이 주위에 조용히 쉴만한 곳이 있겠느냐?"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기색으로 옥여상을 바라보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삼신단(雪蔘神丹)이 비록 희세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쇄심마장(碎心魔掌)에 당한 나의 내상을 완전히 치료해 주지는 못한단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삼신단이니 쇄심마장이나 하는 이름들은 그에게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옥여상의 말을 들었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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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두(魔頭)를 만나다!

 

 

층층산상(層層山上)-!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던 두꺼운 천이 다시 내려앉으며 겹쳐진 듯한 형상의 바위산이 있다.

모두 일곱 층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산의 뿌리 쪽은 사시사철 안개에 덮여있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깊은 계곡이다.

바위산은 높고도 험준한 농산산맥(隴山山脈)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다.

그 때문에 바위산 정상에 서면 사방 수백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임청우의 눈에는 그 절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째서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그토록 증오하시는 걸까?)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정상에 선 채 임청우는 벌써 이각(二刻; 30) 넘게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머니 임단심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건 아침 무렵의 일이다.

그 직후 집을 나섰지만 어머니 곁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임청우는 어머니의 경고대로 오늘 안에 농산(隴山)을 떠날 결심을 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해둘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고질을 다스리는 데 쓸 약초를 채집할 수 있는 대로 채집해야하고 또 산짐승도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갖다 드려야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임청우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핏줄이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식의 도리는 다 해야만 한다.

임청우가 서있는 바위산의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쪽 외의 세 방향은 험하긴 해도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어서 올라올 수 있다.

임청우는 전에도 여러 번 이 바위산에 올라왔었다.

사방이 확 트인 바위산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악담과 학대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낫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약초를 담는 망태와 사냥을 위해 준비한 활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망태에는 제법 많은 약초가 들어있다. 이 바위산까지 오는 동안 채집한 약초들이다.

임청우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큼직한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에는 산행 중에 지치고 힘들 때 마시기 위해서 준비한 술이 들어있다.

임청우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은 호리병뿐만이 아니다.

왼쪽 허리춤에는 특이한 쇠붙이가 하나 끼워져 있다.

길이 한 자 정도인 쇠붙이는 끝이 뾰족하긴 하지만 칼이나 검은 아니다. 날이 서있지 않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전체 모양이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드는 홀()을 닮은 쇠붙이다.

먹물에 담았다가 꺼낸 듯 검은 색인 쇠붙이 양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임청우는 이 쇠붙이에 북두홀(北斗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날은 서있지 않지만 북두홀은 아주 단단해서 어떤 것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임청우는 호미나 칼 대신 북두홀을 써서 약초를 캐왔다.

 

(아버지를 거론한 게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 무렵, 임단심은 편치 않은 몸으로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임단심은 임청우가 어제 사냥해온 꿩과 비둘기로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을 들여다보던 임청우는 별 생각없이 말을 꺼냈었다.

 

<아버지도 날짐승 요리를 좋아하셨나요?>

 

그 한마디가 임단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거론하면 안된다는 금기(禁忌)를 임청우는 깜빡했던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어머니가 아버지를 철천지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임청우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학대는 점점 더 강도가 심해졌었다.

아마도 임청우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때문일 것이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

임청우는 머리를 흔들어서 번민을 떨쳐버리려 했다.

떠나라 하셨으니 떠나면 된다. 하긴 농산 따위는 나 임청우가 뛰어놀기엔 너무 작기도 하지. 하하하!”

!

임청우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 !

절벽 아래로 떨어진 돌멩이는 켜켜이 쌓인 바위에 부딪혀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모두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은 각층의 높이가 수십 장 이상이다.

그 때문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

임청우가 점점 멀리 들리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끼이이!

절벽 아래쪽에서 무언가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지?)

임청우는 고개를 내밀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악!

그런 임청우의 눈에 새 한 마리가 절벽 중간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활짝 편 날개 길이가 일장(一丈;3미터)이 넘는 거대한 독수리였다.

(독수리들의 왕!)

임청우의 눈이 커졌다.

바위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거대한 독수리는 임청우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그 놈은 농산 일대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그 놈이 산양이나 늑대, 심지어 다 자라지는 않았어도 곰까지 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하늘의 폭군이 무슨 일로 깊디깊은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던 것일까?)

임청우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수리들의 왕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기라도 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화악! 화악!

임청우가 물러서는 사이에 독수리는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절벽 위쪽으로 떠올랐다.

(!)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올려다보던 임청우는 한 번 더 놀랐다.

강철같이 번쩍이는 독수리의 두 발이 뱀을 한 마리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뱀은 독수리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았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되지 않아서 독수리의 끼니거리로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다만 독수리에게 잡혀가고 있는 그 뱀은 크기는 작아도 생김새는 매우 특이했다.

몸 전체가 피를 칠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머리에는 황금색 뿔이 두 개 돋아나 있다.

크기는 비록 세치 남짓에 불과하지만 황금색 뿔의 형상은 영락없이 용()의 그것이었다.

카아!

뿔이 달린 작은 뱀은 독수리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독수리의 발톱은 강철 족쇄같아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 !

뿔 달린 작은 뱀은 몸부림치면서 독수리의 발목을 연신 물고 있었다.

그러나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도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그놈의 다리는 아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어서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은 흠집조차 못 내고 있었다.

발목 위쪽의 깃털로 덮인 부분이라면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뿔 달린 작은 뱀의 몸이 워낙 작아서 주둥이가 그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뿔 달린 작은 뱀은 어떻게든 독수리 다리에 상처를 내보려고 반복해서 물고 있었다.

카아!

헌데 뿔 달린 작은 뱀이 연신 자신의 발목을 무는 걸 무시하고 날아오르던 독수리는 갑자기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바위산 정상에 서있던 인간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임청우는 짊어지고 있던 활을 벗어서 시위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반달처럼 부푼 활에는 강철 촉이 달린 화살이 매겨져 있다.

화악!

깜짝 놀란 독수리는 급히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십여 장쯤인 거리를 단번에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깊이 박혀버렸다.

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독수리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뒤집어졌다.

임청우가 쏜 화살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화악!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해온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이내 독수리들의 왕과 그놈이 쥐고 있던 뿔 달린 작은 뱀은 바위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임청우는 한숨을 쉬며 활을 내렸다.

잡혀가는 작은 뱀이 마치 운명에 희롱당하는 내 신세 같아서 충동적으로 쏘고 말았다.”

딱히 독수리들의 왕이 미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살려고 몸부림치던 뿔 달린 작은 뱀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서 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여기서 너무 지체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임청우는 하늘을 보며 돌아섰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헌데 임청우가 막 절벽을 등지며 돌아설 때였다.

여기가 농산 표운봉(飄雲峰)이냐?”

벼락 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임청우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틀어잡아서 쳐든 것이다.

!

놀라서 활을 떨어트리는 임청우의 눈앞에는 삼태기만큼이나 크고 길쭉한 말()같은 얼굴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손잡이와 칼집이 온통 핏빛인 칼을 등에 메고 있는 이 괴인의 키는 무려 팔척(八尺;2미터 40센티)이 넘어 보인다.

그 때문에 그리 작지 않은 키의 임청우였지만 말같은 얼굴을 한 괴인의 손에 멱살이 잡혀 쳐들려지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여기가 표운봉이냐고 묻질 않았느냐?”

성미 급한 괴인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끄윽...”

멱살이 틀어 잡히면서 옷깃에 목이 조여진 임청우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대답은커녕 숨조차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질식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임청우는 왼쪽 허리춤에 끼우고 있던 북두홀을 급히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괴인의 팔뚝을 북두홀로 힘껏 내리찍었다.

!

북두홀이 괴인의 팔뚝을 찍자 마치 철벽을 때리기라도 한 듯 요란한 쇳소리가 냈다.

!

이어 괴인의 팔뚝에서 일어난 강한 반탄력에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 따당! 휘익!

바닥에 떨어졌던 북두홀은 쇳소리를 내며 몇 번 튕겨졌다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놈이 감히 마면혈도(馬面血刀) 어르신의 말씀에 대답을 거부해?”

말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당돌한 반격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표정이 되었다.

! !

그자는 임청우를 패대기칠 생각인지 번쩍 쳐들어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이 말대가리 괴인의 머리위에서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뒈져라!”

스스로를 마면혈도라고 밝힌 말 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몸뚱이를 서너 바퀴 돌린 후 절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휘익!

던져진 임청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절벽으로 날아갔다.

맞소. 여기가 표운봉이오!”

멱살이 풀려서 숨을 쉴 수 있게 된 임청우가 날아가면서 소리쳤다.

?”

마면혈도가 의외라는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움찔했다.

화악!

움찔하는가 싶은 순간 그자는 어느새 임청우 앞에 이르러 다시 멱살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임청우의 몸은 이미 절벽 밖에 이르러 있었다.

임청우를 잡으려면 마면혈도 역시 발을 땅에 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막 임청우의 멱살을 잡으려던 마면혈도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우라질!”

뻗었던 손을 급히 거두어들인 마면혈도가 욕설을 내뱉었다.

말하려면 조금 빨리 할 것이지... 아가리를 찢어죽일 놈같으니...!”

바로 그때였다.

화라락!

절벽 아래로 추락하려던 임청우의 몸이 돌연 돌개바람에 휘말린 낙엽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임청우를 휘감아서 끌어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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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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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군웅보는 1982년 12월에 탈고 하여 1983년 3월에 출간한 와룡강의 데뷔작입니다.

정확히 37년 전에 출간이 되었군요.

모든 작가의 데뷔작이 그렇듯 이후 와룡강의 모든 작품의 씨앗은 무림군웅보에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애송이가 글을 쓰면 얼마나 잘 쓰겠습니까?

무림군웅보도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문장과 구성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피식 실소를 연발하실 게 분명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박스본 무협 형태 그대로 연재를 합니다.

무려 37년전의 골동품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3월 12일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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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부동(五獸不動)

 

 

너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설령 그게 피붙이라도...”

철령보(鐵嶺堡)의 소보주 백남빈(白藍斌)은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렸다.

이름이 정취려(鄭翠麗)였던 어머니는 십삼 년 전 그의 곁을 영영 떠났었다.

오늘이 바로 그 어머니의 기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백남빈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다.

백무염(白無染)이란 이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육 년 전, 백남빈의 나이 겨우 세 살 때였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몸이 산처럼 컸고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처럼 환했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사랑하는 남편의 오랜 부재가 어머니에게서 생기(生氣)를 빼앗아 간 것같았다.

시름으로 나날이 쇠약해지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만을 세상에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백남빈을 거두어준 것은 이모인 정가려(鄭佳麗)였다.

백남빈은 이모 부부의 양자(養子)가 되어 자랐다.

철령보의 보주가 그의 이모부이며 양부(養父)인 것이다.

(얼마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기에 어머니는 피붙이도 믿으면 안된다고 하셨을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의 위패를 올려다보며 백남빈은 생각에 잠겼다.

피붙이조차 믿으면 안된다는 유언은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오직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한을 품고 돌아가신 연유는 차마 이모에게 여쭐 수가 없다.)

백남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피붙이일지라도 믿으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피붙이인 이모에게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긴 분이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만나 봐야만 어머니가 그리 유언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玉佩)가 들어있다.

얼음처럼 서늘한 그 옥패가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모와 이모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내려면 옥패의 내력부터 알아내야할 것이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내어 어머니 영전으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어머니의 위패에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사당을 나섰다.

 

이미 삼경(三更)에 접어든 시간이라 철령보의 사당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어둠 속에 백남빈을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다. 철령보의 총관인 사해검객(四海劍客) 종리완(鍾里阮)이다.

사해검객은 검법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인후한 성품을 지녀 아랫사람들로부터 인망이 두텁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당 밖에 서있는 사해검객을 보자 백남빈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영당(令堂)의 제사는 잘 모셨는가?”

사해검객이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 그보다 저와 의논할 일이 생겼겠습니다.”

백남빈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되물었다.

이모부이면서 양부인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獨眼龍) 이탁(李卓)은 사흘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다. 숙적인 대려장(大麗莊)의 동향이 심상치 앉아서 직접 접경지역을 순찰하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보주인 백남빈이 철령보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중이다.

신랑성(神狼城) 방면을 감시하던 형제들이 날려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네.”

사해검객은 들고 있던 폭이 좁고 긴 종이를 백남빈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는 전서구가 수백 리 밖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자가 은밀히 월경(越境)을 했단 말이지요?”

전서를 받아 읽으며 백남빈의 미간이 조금 모아졌다. 전서에 적혀있는 이름이 범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주님께도 전서구를 날려 보냈네만... 서둘러 대응해야할 사안인 것같아서 소보주가 제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네.”

전서를 읽는 백남빈의 얼굴을 살피며 사해검객이 말했다. 말과 태도가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백남빈이 자못 어렵게 느껴지는 사해검객이었다.

제가 오늘밤 당직인 형제들을 이끌고 요격(邀擊)에 나서겠습니다. 총관께서는 양부와의 연락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남빈은 전서를 다시 사해검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함세.”

사해검객은 경험이 많은 자신이 요격에 나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나이는 아들뻘이지만 이 어린 주인의 말은 어쩐지 거스르기가 어렵다.

 

잠시 후 백여 기의 날쌘 기마대가 철령보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기마대의 선두에 선 것은 물론 철령보의 소보주인 백남빈이었다.

 

***

 

-오수부동(五獸不動)!

 

다섯 짐승이 서로를 노려서 피차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오수부동이야말로 당금의 무림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중원의 무황성(武皇城)과 농성(農城), 만리장성 밖의 대려장, 신랑성, 극품당(極品堂)등 다섯 세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칠십여 년 간 무림을 지배해온 것은 무황성이다.

무황성의 창건자는 철면무황(鐵面武皇) 한산림(韓山林)이라는 인물이다.

사문내력은 불분명하지만 철면무황은 백년 내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린다.

기이하면서도 실전적인 무공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중원에서 몽고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주원장은 철면무황에게 주()씨 성을 내리고 강호 무림의 주재자로 책봉했다.

한산림에서 주산림(朱山林)으로 개명한 철면무황은 호시탐탐 중원으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는 몽고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과 만리장성 사이에 거대한 성채를 세웠다.

그 성채는 무황성이라 불리며 칠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림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철면무황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과 명나라 황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무황성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특히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강탈한 <정난(靖難)의 변()>은 무황성과 명 황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만들었다.

무황성으로서는 주원장의 후계자인 건문제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건문제의 숙부인 연왕, 즉 영락제(永樂帝)였기 때문이다.

비록 영락제가 무황성을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인 주원장처럼 우대하지도 않았다.

자연히 무황성의 세력은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남쪽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농성이라는 세력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몽고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신랑성과 극품당, 그리고 동이족(東夷族)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이 차례로 흥기(興起) 했다.

오랜 세월 무림의 주인을 자처해왔던 무황성은 장강과 황하 유역에만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농성을 제외한 사대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이 동북방의 요하(遼河) 일대다.

요동(遼東)에는 동이족의 맹주 대려장이 웅거하고 있으며 요하의 북쪽에는 몽고의 유력한 부족 달단(韃靼)을 배경으로 둔 극품당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요하의 발원지이기도 한 서북쪽은 몽고의 가장 강력한 부족 오이라트(瓦刺)가 세운 신랑성의 세력권이다.

마지막으로 요서(遼西)에 펼쳐진 드넓은 철령평야(鐵嶺平野)에는 무황성의 최북단 거점인 철령보가 변황의 삼대세력 사이에 쐐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철령보는 그 전략적 위치에 어울리게 무황성의 여러 분타들 중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철령보 소속 무사들 중 약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강호의 평판이다.

철령보의 보주는 독안룡 이탁이란 인물이다.

무황성 감찰전(監察殿)의 전주였던 독안룡 이탁은 무공도 뛰어나지만 기문진법(奇門陣法)의 재주가 일절(一絶)로 꼽힌다.

그 독안룡 이탁의 양자인 백남빈이 야심한 중에 철령보를 나와 서북 방면으로 출격하면서 오수부동이던 강호의 정세에 일대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

화살이 얼굴 옆을 스치며 쨍한 소음을 낸다.

!”

젊은 시종 다얀(達延)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몸을 숙였다.

무공에는 소질뿐 아니라 흥미도 없어서 신랑성의 서재에만 틀어박혀 살아온 다얀이다.

당연히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오늘이 처음이다.

상당히 떨어진 옆쪽으로 흘러가는 화살조차 다얀의 온몸을 떨게 만든다.

자세를 흩트리지 마라. 그렇잖아도 지친 말을 힘들게 한다.”

앞서 달려가던 완안진(完顔進)이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 죄송합니다 부()성주님.”

몸을 숙였던 다얀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말들은 천리마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놈들이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숨은 턱에 차있고 발걸음은 눈에 띄게 어지럽다.

그렇다고 쉬게 할 수도 없다.

두 주종(主從)은 지금 다수의 적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며 달리고 있는 곳은 일망무제의 평야라 몸을 숨길만한 곳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밀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간 것일까?)

앞서 말을 달리는 완안진의 미간이 모아졌다.

 

올해 쉰 두 살인 완안진은 신랑성의 부성주다.

직책은 비록 부성주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사실상 신랑성의 성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몽고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오이라트에 의해 세워진 신랑성은 대대로 오이라트의 족장이 성주를 겸임해왔다.

신랑성의 당대 성주 신랑태사(神狼太師) 토곤(脫灌)은 제이(第二)의 징기스칸으로 불리는 영걸이다.

능력에 걸맞게 야심도 큰 토곤은 중원에서 쫓겨난 후 사분오열된 몽고족을 정복하고 통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만주(滿洲)와의 경계인 흥안령(興安嶺)에서 오이라트의 숙적 달단을 공격하다가 내일은 수천 리 밖의 서역으로 기마군단을 몰고 가 티무르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샤 루흐와 격돌하는 식이다.

그 때문에 토곤은 신랑성의 성주 자리를 비워두다시피 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부성주인 완안진이 신랑성을 이끌고 있다.

토곤이 이십여 년 간 동분서주한 보람이 있어서 몽고의 부족 대부분은 오이라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밀려난 달단만이 원()나라 황실의 보위를 위해 세워졌던 무사집단 극품당을 전위(前衛)로 내세운 채 토곤에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몽고를 사실상 통합하는데 성공한 토곤의 야심은 이제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성주인 완안진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요동의 대려장으로 파견한 것인데...

대려장으로 가기 위해 극품당과 철령보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완안진과 시종 다얀은 종적이 발각되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진족(女眞族) 출신인 우리 형제들을 시기질투 하는 누군가가 극품당과 대려장에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완안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안(完顔)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완안진은 금()나라를 세워 한 때 중원을 정복했던 여진족 출신이다.

완안진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인 몽고의 유력한 부족 오이라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몽고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 덕분에 신랑성의 부성주가 되었지만 완안진에게는 적이 많다.

그 적들 중 누군가가 완안진이 토곤의 밀명을 받고 신랑성을 떠난 것을 틈 타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대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다니... 이번 일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대로 신랑성에 서식하는 버러지들을 일소해버리고 말겠다.)

완안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를 때였다.

삐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명적(鳴鏑), 즉 우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완안진과 다얀의 눈에 이리(二里) 쯤 뒤쪽에서 모래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수십 기의 기마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서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있다.

무황성의 동북면 거점인 철령보 소속의 기마대다.

그들은 해가 뜬 직후 자신들 주종을 발견한 이래 지치지도 않고 추격을 지속하고 있다.

하루 종일 추격해오면서도 대형을 흐트리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개개인이 무시 못 할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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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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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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