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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식 전야

 

 

 

하늘같은 남편이 될 소성주를 중인환시리에 개망신 시키다니... 아무리 속 좁은 계집의 소행이라 해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소.”

혈가람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며 말했다.

소성주님을 위해 격분하시는 부성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혼례를 목전에 둔 지금 진소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자제해야하지 않을런지요?”

신중하게 입을 연 중년인은 제왕성의 외()총관 독검마유(毒劍魔儒) 궁무독(宮無獨)이다.

제왕성의 외총관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를 전담한다.

궁무독은 심기가 깊고 꾀가 많아 외총관의 역할을 능란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외총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일단 내일의 혼례를 원만히 치르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자인 내총관 구숙정이다.

황금성의 진소저가 제 아무리 당찬 성격이라도 일단 소성주의 여자가 되고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요?”

구숙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어쨌든 진소저도 여자는 여자이니...”

무엇보다 혼례를 무사히 치르는 게 중요하긴 해.”

구숙정의 말에 살천인조는 물론이고 혈가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쯧쯧! 그나저나 보지 않아도 뻔하구먼. 소성주는 분을 참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을 게야.”

살천인조가 혀를 끌끌 찼다. 전설적인 자객답게 살천인조는 모용준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성주는 제가 가서 달래볼 테니 부성주님들께서는 귀빈들의 접대에 전념해주세요.”

구숙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 *

 

네가 모용준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독모모(孤獨母母)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하얀 백발에 곱게 늙은 노파인 고독모모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이다.

출신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독모모가 절세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금성의 제일고수이기도 한 고독모모는 어린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제왕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 모용준을 직접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

고독모모는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다.”

진상파의 새침한 말에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보고받은 대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더군요.”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고독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내들 중에서도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어요.”

모용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상파의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노신을 비롯하여 황금성의 모든 식솔들은 상파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모용준이 정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가자.”

고독모모가 연민의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진상파를 사실상 길러온 것이 고독모모다.

고독모모에게는 진상파가 주인이라기보다는 딸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뇨! 내일 있을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파야!”

여자로서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황금성 성주로서의 책임이 더 무거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독모모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모용준은 모든 면에서 제 배필이 되기에 모자란 사내예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제왕성의 강력한 힘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군요.”

진상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성의 안위를 위해 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저는 여자로서도 행복해질 거예요. 모용준을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사내로 변모시키면 되니까요.”

진상파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고독모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독모모인지라 성인이 된 인간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미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구나.”

고독모모는 강철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고독모모는 배웅하려고 일어나는 진상파를 만류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파는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이 얼마나 각박하고 인간은 또 어디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진상파의 방을 나서며 고독모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파가 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모용준의 천박한 성품은 변함이 없을 테고... 결국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고독모모는 문 밖을 지키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의 인사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그저 모용준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괜찮은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한숨을 쉬는 고독모모의 미간에 전에 없던 주름이 깊이 파였다.

 

* * *

 

밤이 깊었다.

(다 큰 사내의 성품을 고치려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진상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악전고투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상파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모용준의 경박하고도 비열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있는 기분이 되는 진상파였다.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라도 모용준을 번듯한 사내로 변모시켜야만 한다.)

진상파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결의를 다졌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고독모모가 방을 나가면서 남긴 말이 쟁쟁하다.

그와 함께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며 집기들을 때려 부수던 모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것이다. 내일 대사를 치러야하니 이 밤이 가기 전에 찾아가서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덜컹!

진상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오셨는지요?”

철관음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진상파는 철관음을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진상파는 철관음을 뿌리치고 영빈관을 떠났다.

괜찮을런지요 단장님?”

백팔금차 중 한명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내원(內院)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 별일 없을 것이다.”

철관음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진상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몰래 경호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치안상태를 믿고 기다려보자.”

...”

철관음의 말에 백팔금차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심란하시겠지. 평생 같이 살아야할 사내의 천박한 실체를 알아버렸으니...)

철관음은 진상파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새석숭님만 급사하지 않으셨어도 인중(人中)의 봉황(鳳凰)인 아가씨가 모용준같이 비루한 인간을 배필로 맞은 일은 없었을 텐데...)

새삼 자신의 전 주인이 비명에 간 것이 아쉬운 철관음이었다.

 

* * *

 

제왕성에는 고수들이 구름같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왕성의 녹을 먹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두 명의 부성주와 오래전에 제왕성을 나간 태상호법 흑백신귀가 신주이십팔숙중 섭장천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명의 부성주와 두 명의 태상호법 외에도 제왕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강호에 알려진 제왕성의 대표적인 전력은 사대무력집단(四大武力集團)이다.

금위사대(金衛士隊), 은위사대(銀衛士隊), 동위사대(銅衛士隊), 철위사대(鐵衛士隊)가 바로 그들이다.

제왕성은 소속 무사들에게 황실을 본 따 위사(衛士)라는 직함을 부여해온 것이다.

 

사대무력집단중 가장 낮은 등급은 철위사대다.

하지만 철위사대 소속 철위사(鐵衛士)들은 강호에 나가면 일류고수 소리를 듣고도 남는 실력자들이다.

그 철위사들의 숫자가 무려 천 명이다.

제왕성에는 위사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이 수만 명 존재한다.

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선발되는 것이 철위사다.

 

동위사(銅衛士)의 숫자는 오백 명으로 각대문파 장로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다.

 

은위사(銀衛士)의 숫자는 삼백 명이며 각대문파 장문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금위사(金衛士)의 숫자는 불과 백 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주이십팔숙에 이름을 올려도 무리가 없는 절세고수들이다.

, 제왕성에는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신주이십팔숙이 무려 백 명이나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에 금위사들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고수들의 집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원로원(元老院)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한 전대고수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로원이다.

숫자 미상인 원로원의 원로들은 제왕성의 대소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성에 심각한 도전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발 벗고 나선다.

원로원의 전력만으로도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나 사파 무림의 주인이었던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평판이다.

 

이처럼 백여 년 간 축적되어온 제왕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전설 속의 천마가 부활한다 해도 제왕성에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 * *

 

일신재는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제왕성 성주가 될 후계자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일신재의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

낮에는 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 무등위(無等位) 위사들이 경비를 선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일신재를 물 샐틈 없이 에워싼 채 지킨다.

 

진상파는 일신재가 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는 울창한 관목들 사이에 숨듯이 서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옷자락에 <>자가 수놓아진 무사들이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철위사대 소속의 철위사들이다.

(제왕성 후계자의 거처답게 경비가 삼엄하구나.)

진상파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녀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다.

철위사 한명도 상대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자존심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모용준을 다독여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래서는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엄한 일신재의 경비를 확인한 진상파는 난감해졌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면 무리없에 일신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 깊은 시간에 자신이 모용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마치 진상파 자신이 먼저 모용준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관목 사이에 숨은 진상파가 철위사들을 훔쳐보며 갈등 할 때였다.

“...!”

“...!”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연 철위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진상파의 눈에 들어왔다.

(들킨 것일까?)

철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진상파는 몸을 좀 더 숙였다.

!

그 직후 누군가 관목 옆을 지나 일신재로 다가갔다.

(저 계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신재로 다가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눈이 치떠졌다.

여자인 진상파가 보기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 여자는 바로 제왕성의 내총관인 구미호리 구숙정이었다.

철위사들은 구숙정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긴장했던 것이다.

(이 야심한 중에 저 천박한 계집이 무슨 일로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것일까?)

진상파가 일신재로 다가가는 구숙정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였다.

휘익!

건물 뒤편에서 날듯이 달려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철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인데 다른 철위사들과 다른 점은 소매에 세 가닥의 검은 색 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 가닥의 줄은 중년인이 철위사대의 수령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자가 철위사대의 대주(隊主)인 냉혈철심(冷血鐵心) 사우(査愚).

내총관님!”

서둘러 달려온 냉혈철심 사우가 포권을 하며 구숙정을 맞이했다.

소성주님은?”

구숙정은 사우에게 물으면서도 일신재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지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우는 구숙정의 눈치를 보며 따라갔다.

사우가 비록 철위사대의 대주이긴 해도 총관인 구숙정보다는 한참 직급이 낮다.

게다가 구숙정에게는 부성주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배경이 있는데...

그럴만도 하지. 평생 부모님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소성주가 천한 계집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구숙정은 코웃음을 치며 일신재의 입구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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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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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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