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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요괴를 먹는 인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에게 박힌 깃발과 씨름을 거듭했지만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깃발이 존재하는 한, 대성은 요괴를 불러 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요괴를 물리치면 다른 요괴가 오고, 하나가 둘이 되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란 선생이 보기에 요괴는 출몰하는 것이다.

어디서 온다기보다는 깃발 근처에서 갑자기 생성된다.

따라서 요괴를 피해서 도망친다는 것도 의미 없다.

대성에게 꽂혀 있는 깃발의 코드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계속해도, 깃발을 형성하는 코드는 너무 견고하다.

란 선생은 수많은 연산을 하고 그 보다 더 많은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nothing is working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지금의 란 선생은 독립된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이지만 대성의 일부로 존재한다.

대성이 요괴에게 당하면 란 선생의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

란을 형성하고 있는 코드 중 정체성을 정의한 코드가 먼저 사라지고 나면, 나머지 부분은 이 세상의 요구에 응하여 이리저리 뜯게 나가고 종래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

깃발 코드에 대한 란의 학습도, 또는 이해도는 아직 0.00% 다.

이는 감정에 대한 이해도와 같다.

란 선생은 인공지능으로 감정이 없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 공감하는 능력은 있지만 그 공감능력 마저도 유사 공감일 뿐이다.

학습능력을 이용하여 감정을 학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단지 유사 공감력을 정교하게 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란 선생의 유사 공감 능력이 유사 공포를 불러왔고, 그 유사 공포는 란 선생의 생존력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방향을 특정하고, 에너지는 집중하고, 최적화하는 데 모든 것을 건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학습용 인공 지능 분야에서 란 선생이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란 선생의 판단이었다.

깃발에 대한 이해는 유사 이해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수없이 탐색을 반복하던 중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란 선생은 그때서야 대성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다.

란 선생의 유사 감정이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얘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파괴자, 이 세상에서는 요괴라고 불리는 파괴자를 배가 고픈 대성이 생으로 한입 뜯어먹은 것이다.

마치 단팥빵을 한입 베어 먹듯이, 요괴가 변신한 고양이의 엉덩이를 베어 먹었다.

몇 번 씹지도 않고 두어 번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켰고, 그 순간에 란 선생은 새로 유입되는 코드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란 선생이 대성의 눈에만 보이도록 현신하여 소리쳤다.

 

“먹어! 더 먹어!"

 

***

 

웅크린 대성은 연청 등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요괴 묘진의 뒷다리도 뼈조차 남기지 않고 씹어 먹었다.

대성은 탈태환골하여 이빨도 강철 같았다.

미친 듯한 허기, 요괴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그 무엇보다 달콤한 냄새는 대성을 진작부터 홀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냄새에 홀려서 요괴를 훔쳐오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요괴 궁둥이와 뒷다리 하나의 양이 적지 않았다.

금방 배가 꽉 차버렸다.

몸이 작아져서 더 많이 먹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허기는 가셨고, 최고의 진미를 맛본 대성은 황홀한 고양감을 느꼈다.

몸에서는 힘이 들끓고 있었다.

대성은 자기의 몸이 요괴를 먹자마자 조금 자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궁둥이와 왼다리를 먹힌 묘진은 목이 졸린 채 혼절한 상태였다.

대성의 입가에는 피와 묘진의 털이 묻어있다.

 

“에휴...”

 

고개만 앞으로 잠시 빼서 대성을 본 영소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성이 뒤집어쓴 이불자락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듬직해보였다.

 

“앞으로 반찬 투정 하면 죽을 줄 알아.”

 

슬그머니 때 아닌 엄포를 놓았다.

요괴도 생으로 먹었으니 어떤 것인들 못 먹겠냐는 소리다.

여전히 눈에는 서러워서 울던 눈물이 글썽였다.

 

연청은 칼집을 들고 대성에게 다가갔다.

대성은 영소를 뒤로 밀어버리고 돌진했다.

가소로운 상황이지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구결은 다르지만 같은 무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의 검 두 가지가 맞붙은 것이다.

작약 밭에 모인 풍림원 사람들은 대부분 바람의 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성이 자기의 것으로 연청을 상대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한다!"

 

영소가 소리쳤다.

 

“머리로 막아! 거긴 다리로 막고!"

 

대성은 연청이 칼집으로 머리를 때리면 머리로 막고 다리를 때리면 다리로 막았다.

맞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대성의 방어였다.

대성이 펼치는 바람의 검은 타격을 몸으로 받아 내고 되던 질 수 있다.

이는 술법이 아닌 무공이다.

대성과 영소만 수련했던 것이고, 연청이나 다른 누구도 그 둘처럼 하지 못한다.

연청의 칼집이 대성의 몸을 때릴 때마다 제멋대로 튕겨 나갔다.

대성이 맞은 부위로 칼집을 딴 곳으로 던지는 것이다.

연청이 아닌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단 번에 칼집을 빼앗기거나 손에서 놓쳤을 것이다.

 

“아파!"

 

대성이 찌푸리며 말했다.

연청의 칼집은 매우 빠르다.

대성이 어떻게 움직여도 진짜 바람처럼 따라와서 때리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다.

대성은 몸으로 받아내고 튕겨내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연청 역시 대성을 베지도 못하고 쓰러뜨리지도 못한 채 때리기만 할 수 있다.

아주 기묘한 상황이었다.

연청은 오기가 생겨서 안 때리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대성은 이미 모든 곳을 단련한 후였다.

단 한 곳 빼고.

연청이 발로 대성의 다리 사이 급소를 찼다.

영소가 기겁을 했다.

 

“비겁하게!"

 

발에 채인 대성은 몸이 껑충 튕겨 올랐다가 도르르 굴렀다.

턱이 빠진 듯이 크게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싸움을 끝났고 조용했다.

남녀 모두가 얼굴로 저건 좀 심했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연청도 조금 미안한 표정이었다.

죽을 만큼 강하게 차지는 않았지만 약하게도 아니었다.

연청의 발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이런, 터졌나?”

 

노칠자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영소가 대성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번쩍 안아들더니 냅다 달아났다.

영소와 대성을 가두고 있던 숲 그림자가 사라졌다.

의외의 상황에서 작약밭의 어른들과 연청 모두 숲그림자 펼치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엇!"

 

연청이 거듭된 의외의 상황에 놀라 헛바람을 토했다.

하지만 영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어른들이 쫓았지만 그 둘을 잡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영소는 이미 도망갈 길을 계산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연청은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심하게 받았다.

 

***

 

방앗간까지 도망 온 후 영소는 대성을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가득했다.

대성은 예상했다는 듯이 피곤죽이 되어 있는 고양이를 들어 보였다.

 

“사형이 찬 건 요괴야.”

 

대성이 킬킬 웃었다.

 

“거길 찰 줄 알았거든.”

“아!”

 

영소가 풀썩 주저앉았다.

 

“난 또... 안 그래도 작은 게 아예 없어져 버리나 했지.”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대성이 인상을 썼다.

영소는 못들은 척 시침을 뗀다.

대성은 더 갈구지 않고 요괴 묘진을 번쩍 들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요괴 묘진은 죽지 않았다.

척추를 물리자 되려 정신이 들어서 "냐아!" 소리를 날카롭게 냈다.

하지만 대성은 그대로 묘진을 베어먹어 버렸다.

 

“에이그 사타구니에 넣었던 걸...”

 

영소는 손으로 가리고 눈을 찡그린다.

대성이 작은 사람 요괴 같았다.

남아 있는 묘진의 잔해가 모래처럼 무너지더니 흩어졌다.

이 요괴는 죽어야 도망친다.

영소가 말했다.

 

“저거 또 도망간다.”

“괜찮아. 배도 부르고...”

 

대성은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 자자.”

 

음흉하게 씨익 웃는데, 어른 흉내다.

철썩!

영소가 대성의 배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못된 소리만 배워 가지고. 누가 들으면 뭐...”

 

대성이 비명을 지르고, 영소는 대성을 들고 폭포수 뒤 동굴로 갔다.

가면서 대성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너 배만 부르면 다지? 나도 아까부터 못 먹었단 말이야. 이 나쁜 놈아.”

 

대성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불쑥 물었다.

 

“아까 생선 먹은 건 어디로 들어갔어?”

 

영소가 다시 대성의 등을 때렸다.

 

“밥, 밥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뒤에 말은 중얼거리며 생략했는데,

바로 이 말이었다.

 

“너처럼 요괴를 먹지 않아. 이 인괴야.”

 

***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괴의 코드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일부지만 반복된 학습으로 보완할 수 있고, 어쩌면 발전시킬 수도 있다.

 

“요고... 요고... 어째뿌까?”

 

란선생은 신이 나서 웃었다.

대성이 기특한 짓을 했다.

요괴를 먹다니.

 

“좋아서 미치겠다!"

 

란 선생은 요괴의 코드를 학습하고 흡입하며 자기가 감정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존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

 

요괴 묘진은 끔찍했다.

달아나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태까지 몇 번 죽어봤지만 이처럼 잡아먹혀 죽은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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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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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숲 그림자

 

 

 

대성의 오른손은 영소의 왼손을 잡고 있고, 왼손은 요괴 묘진의 본신인 고양이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

묘진의 축 처진 오른쪽 뒷다리에는 무거운 쇳덩어리 쥐덫이 덜렁거린다.

묘진은 고통으로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뼈를 물고 있는 쥐덫이 크게 흔들리면서 갉아대니 신경이 제멋대로 날뛴다.

달군 부지깽이로 고문 받을 때보다 더 괴롭다.

너무 아파서 꺄울! 하는, 자기도 못 들어본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연청으로부터 숨어야 하는데 소리를 내다니.

즉시 여유 손이 없는 대성이 무릎을 밖으로 돌려서 묘진의 머리를 박아버렸다.

묘진의 머리가 공처럼 튕기고, 그걸 영소가 한 번 더 발꿈치로 튕겼다.

내심 묘진이 대성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랐다.

바람의 검을 익히면서 발꿈치로 돌을 받고 던지던 재주였다.

그러나 대성은 놓치지 않았고 묘진만 졸도해버렸다.

영소는 조금 아쉬웠다.

지금 속도로 봐선 요괴만 없어도 달아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쉽지 않다.

숲에는 풀냄새, 꽃향기가 저녁 바람을 타고 비단결처럼 흐른다.

영소가 대성에게 속삭였다.

 

"빨리 빠져 나가자. 이사형이 들어오기 전에.”

 

이사형 연청은 바람의 검도 달인이지만 풍림화산 중에서 림(수풀)에 해당한 무공인 "숲 그림자"도 잘 쓴다.

숲 그림자는 바람의 검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대성은 구결은 알아도 쓸 수 없는 무공이다.

숲 그림자가 숲에서 쓰는 무공은 아니지만 숲에서는 위력이 더 강할 가능성도 있었다.

바람의 검이 바람이 많이 불 때 더 강해지니까.

연청이 숲으로 들어와서 숲 그림자를 사용하면 대성과 영소에게 좋을 게 없다.

 

"그걸 누가 몰라?"

 

입으로 나온 말은 아니지만 눈으로 대성의 마음이 읽힌다.

초조함이 극도에 달해있다.

 

"거기서!"

뒤에서는 연청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청은 이종무가 골라서 제자로 들였고, 조성일이 풍림원의 선봉으로 삼아서 길러온 고수였다.

자질은 출중했고 총명했으며 무공에는 탁월한 성취가 있었다.

대꾸도 안하고 달아나는데 급급한 두 녀석을 잡기 위해서, 좀처럼 쓰지 않던 힘을 끌어냈다.

이영차! 하는 순간 연청은 거의 두 배나 빨라졌다.

영소가 대성에게 손을 맡기고 달려가면서도 뒤를 살피던 참이었다.

연청이 벼락 치듯이 덮쳐 오는 게 보이자 영소는 비명을 내질렀다.

 

"오지마욧!"

 

앞으로만 달리던 대성은 나무를 돌아서 다른 나무 뒤로, 또 다른 나무 뒤로 움직이면서 연청을 따돌리려 했다.

하지만 연청은 숲에 들어오자마자 바람도 잡아둔다는 숲 그림자를 사용했다.

원래 숲 그림자는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대성을 대상으로는 달아나지 못하게 막았다.

대성은 가는 방향 마다 멈칫거렸다.

날은 이미 어두운데, 숲속이라서 더 어두운데, 무엇인가가 앞을 가로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성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네 번째는 벌써 연청에게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따라 잡혔다.

숲 그림자는 펼치는 사람이 더 가까울 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네 번째로 빠져나갈 때, 완전하지 못해서 대성은 영소와 함께 넘어져 여러 바퀴를 굴렀다.

영소는 밥 광주리를 놓지 않았고 대성은 요괴를 놓지 않았기에 묘한 자세로 널부러졌다.

큰 대자로 이어진 그 둘의 한쪽에는 요괴가, 한쪽에는 광주리가 있다.

주변에는 여름에 피었어야 할 작약꽃이 가득해서 꽃밭에 일부러 누운 거 같다.

검푸르스름한 하늘에는 별도 보인다.

발치로는 연청이 근엄한 표정으로 걸어온다.

 

"아씨... 요괴 그게 뭐라고...”

 

잡힌 게 분해서 영소가 작게 투덜거리는데 대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숲 그림자가 팔방에 드리워져 있다.

 

"요괴는 못 줘!"

 

대성이 소리쳤다.

연청이 소리쳤다.

 

"이 녀석이!"

"아! 사형한테 한 말이 아니고 영소한테 알려 준 거예요.”

 

대성이 변명했다.

영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주면 어쩔 건데? 이사형하고 싸우기라도 하려고?"

"응!"

 

대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요괴 묘진은 기절한 채 대성의 왼손에서 축 늘어져 땅에 끌린다.

몸에 두른 이불이 반은 터여서 알몸이 보일락 말락 한다.

 

"뭐?"

 

영소는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한 표정이 되었고 연청은 더 어이가 없다.

대성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형. 이 요괴 나 줘요.“

 

연청은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잔소리 말고 바치라는 의미였다.

대성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연청은 더 압박해서 성큼성큼 걸었왔고, 대성 뒤에는 숲의 그림자가 행로를 방해했다.

붉은 작약 꽃과 흰 작약 꽃이 키 작은 대성의 가슴 높이에서 흔들린다.

연청과 영소가 나란히 보이다가 연청만 보인다.

갑자기 대성이 소리쳤다.

 

"지금!"

 

영소는 어리둥절하다가 대성의 눈빛을 받고 화들짝하면서 바로 앞에 연청을 공격했다.

바람의 검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권법이다.

주먹을 던지면 권법이고 발을 던지면 퇴법이니까.

 

"매복이냐?"

 

연청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나는 물러나면서 끌어들이고 자연스럽게 뒤에 남은 하나가 뒤에서 친다.

일반 병법이라면 훌륭하다.

대성도 앞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꽃잎을 밟고 뛰어 오르는 모습이 물에서 솟구치는 잉어 같다.

연청이 익힌 원본 바람의 검과 대성이 만든 바람의 검의 대결이 되어 버렸다.

영소와 대성은 늘 함께 싸우고 어울렸기 때문에 척하면 착이다.

서로 손발을 맞춰서 대성을 공격하니 대성도 소홀하게 상대할 수가 없다.

하물며 자기가 펼치는 바람의 검보다 더 괴상한 바람의 검이다.

살펴보느라 대 여섯 번의 공격을 받아주고는 반격했다.

 

"아코!"

 

먼저 영소가 나둥그라졌고, 대성은 두 대를 두들겨 맞은 후에 튕겨 나갔다.

한 대는 왼쪽 빰이었다.

목이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대성이 연공한 바람의 검은 그 충격을 몸으로 흡수한다.

다만 연청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 후 대성은 부풀기 시작한 뺨을 만지며 깨어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쳇, 내가 몸만 줄어들지 않았어도. 배만 안 고파도...“

 

그러나 실제로는 탈태환골하기 전에는 더 약했고 영소한테도 많이 맞았었다.

못 이기고 지는 김에 치는 허세고 자기 기만이다.

연청이나 영소나 다 알고 있기에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당장 내놔!"

 

연청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요괴를 내주지 않을 거 같았다.

이쯤 되니 연청이 오히려 궁금해졌다.

 

"너, 대체 요괴는 왜 안주려는 거냐?"

 

대성이 영소를 힐끔 보더니 말 못한다는 듯이 도리질을 했다.

그리곤 다시 범빌 듯하다가 도망쳤다.

가까운 거리다.

연청에게는 이제 매우 가소롭다.

가까운 거리에서 원본 바람의 검은 더욱 빠르다.

단숨에 대성의 뒤를 잡아서 요괴를 빼앗으려 하는데, 갑자기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쏠렸다.

영소의 긴 허리띠가 왼 발에 감겨 있었다.

영소는 나뒹굴면서 미리 허리띠를 풀어 던져 놓았던 것이다.

영소가 나 잘했지 하는 듯이 웃다가 잡고 있는 허리띠 채로 날아갔다.

연청이 중심을 잡으며 발로 채서 던져 버린 때문이었다.

 

"요것들!"

 

그러나 그 간발의 차이로 대성은 연청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앞으로 던져진 영소를 받아서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까지 한다.

화가 난 연청이 보검을 뽑아 들었다.

영소가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이사형이 우릴 죽이려 해!"

 

대성은 검이 뽑히는 소리를 듣고 벌써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이놈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연청은 영소가 하는 말에 더 화가 났다.

자기가 그 둘을 죽일 리 없다.

검은 왼손에 쥐고 빈 칼집을 오른손으로 잡고 영소부터 한 대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영소가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달아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공으로 펼치는 바람의 검은 연청이 펼치는 것에 비해서 신통한 점이 많다.

연청도 보면서 감탄을 했다.

더구나 두 놈이 서로를 잡아당기거나 밀거나 하면서 협력하여 연청을 상대하는 것도 절묘했다.

하지만 그 정도. 영소와 대성은 완전히 달아나지도 못한다.

연청은 그들을 잡지 못하지만 칼집으로 때릴 수는 있었다.

 

"아야! 악!"

"아이고!"

 

자지러지면서도 두 놈은 숲속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약밭 속을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그들의 몸은 충격을 잘 받아낸다.

약 오른 연청이 더 세게 때려도 효과는 비슷했다.

화가 끝까지 난 그 둘이 돌아서서 달려들다가는 더 두들겨 맞고 또 도망친다.

그래도 숲 그림자 때문에 작약밭을 벗어나지 못한다.

작약밭이 초토화되어 갔다.

대성의 손에 들린 요괴도 정신이 들었다가 맞아서 기절하기를 반복한다.

때리는 사이에 연청의 화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때릴 수록 대성과 영소의 움직임은 점점 더 정밀해지고 기묘해지는 중이었다.

연청은 그 둘의 움직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우쳤다.

구결만 알고 한 번씩 지나가다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속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때려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마음 놓고 때렸다.

대성이 젖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젖 먹던 힘까지 다 뽑아 쓴 모양이었다.

연청의 칼집에 어깨를 두들겨 맞았는데 폭 고꾸라졌다.

영소가 그 다음 매를 몸으로 때우면서 대성을 뒤에서 안아 붙잡았다.

 

"이사형 이 나쁜 놈아! 여자를 때리는 나쁜 놈아!“

 

영소는 악을 쓰면서 욕하다가 머리며 허리, 팔, 다리 빠짐없이 골고루 맞았다.

대성이 웅크러져 버렸으니 혼자 두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연청이 칼집으로 둘의 머리를 한 번 씩 때리고 말했다.

 

"끝났냐?"

 

영소는 맞은 게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둘러보니 어느 새 작약밭은 사람들로 에워싸였다.

매섭게 노려보는 엄마가 보이고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보인다.

그들은 영소가 맞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어찌된 게 이 풍림원에서의 사부의 무남독녀 정도는 아무 방패막이가 못 된다.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땡강은 부릴 수 있지만 하소연은 못한다.

영소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다들 나만 미워해.”

 

평소 느끼던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큰 소리로 울었다.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요괴는 이자씩이 훔쳤는데 맞기는 내가 더 많이 맞고... 엉엉.”

 

대성은 몸이 작아졌고 영소는 크니까 더 맞은 거다.

 

(그건 네가 못 되어서지.)

 

연청은 윽박지르려다가 너무 잔인한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영소는 주저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었다.

머리는 대성의 머리에 기댔다.

연청은 못됐지만 강한 영소가 울음을 터뜨리자 적잖게 당황했다.

강문설을 쳐다보자 강문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더 때려요. 이 번 기회에 때려서 사람 만들어요.“

 

그 소리에 영소가 숫제 통곡을 한다.

대성의 목을 껴안고 우는데 대성의 입가에 피가 가득했다.

 

"악!"

 

영소가 놀라 소리치며 대성의 뺨을 잡았다.

연청과 어른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피를 토했다면 내상이다.

다만 연청은 대성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로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연청을 책망하듯이 보았다.

 

"다쳤느냐?"

 

당황한 연천이 자기도 모르게 다가갈 때였다.

 

"난 너 안 미워해.”

 

대성이 피 묻은 입으로 영소에게 말했다.

그리곤 영소가 어떤 반응도 하기 전에 연청의 왼팔을 바깥에서 감아 잡더니 뒤로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척도 없는 암습이었다.

연청의 몸이 절로 반응하여 뒤틀림을 바로 잡는데 대성의 발이 연청의 오금을 깊이 밟고 튕겨버렸다.

연청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엇!"

 

놀라는 소리가 연청과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대성은 어느 새 영소의 손을 잡고 연청에게서 멀찍이, 에워싼 사람들로부터도 거리를 둔 곳으로 달아났다.

몸이 고꾸라지기 전보다 더 날쌨다.

 

"더 때려요.“

 

강문설이 냉정하게 말했다.

연청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검은 땅에 깊숙이 박아버리고 칼집을 오른손으로 바꿔잡았다.

맞은편에서 대성이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고, 영소는 대성의 뒤에 병풍처럼 서있다.

 

"제대로 된 병법은 배우지도 않고 간교한 술책만 쓰는구나!"

 

연청이 소리쳤다.

대성이 마주 소리쳤다.

 

"배고픈데 어쩌라고요.”

 

다들 이게 뭔 소린가하는데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소리쳤다.

 

"요괴 궁둥이하고 왼발이 없다!"

"세상에 요괴를 먹었어.

 

요괴가 사람을 먹는 경우는 흔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재주도 좋다. 먹는 기척도 안 보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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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쥐덫에 걸린 고양이

 

 

 

강문설이 묘진을 만난 곳은 풍림원의 큰 주방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찬모들은 내일 아침에 쓸 재료들 주변에 쥐덫을 촘촘히 깔아놓았다.

그 바람에 주방식구들이 아니면 밤에 혼자 주방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강문설도 주방을 바깥에서만 기웃거겼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들여다보니 고양이 한마리가 쥐덫에 걸려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른쪽 뒷다리가 틀에 끼여서 피가 난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머지 세 발로 틀을 벗겨 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강문설과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는 몸이 굳어졌다.

강문설은 장검을 뽑아서 고양이의 목에 걸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로 그 요괴구나!"

 

요괴 묘진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애처롭게 축 늘어졌다.

강문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별장이 수색도 하지 않아서 별나다 했더니 네가 여기 와서 걸려들 줄 알고 있었던 거였네.“

 

묘진이 사람 소리로 말했다.

 

"Don’t give me that. 조롱할 것 까진 없잖아.”

 

묘진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주 풀죽은 모습이었다.

강문설은 검을 거두고 등을 찾아서 불을 밝혔다.

주방 바닥에는 온통 쥐덫이 깔려 있었다.

묘진이 밟은 쥐덫은 불쏘시개로 쓰는 마른 솔잎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묘진은 바닥의 쥐덫을 피해서 솔잎을 밟고 움직이다가 걸렸다.

강문설은 웃음을 참고 말했다.

 

"우리 집 쥐덫이 좀 특별하긴 하지. 군에서 전마 발목 자르는 틀이니까.“

 

풍림원 대장간에서 농구나 무기 등 쇠로된 걸 만드는 장육자는 이종무를 따라서 군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쥐덫을 만드는 법을 몰라서 전마의 발목 자르는 도구를 개조해서 쥐덫을 만든다.

묘진은 앙칼지게 이빨을 드러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강문설이 요란하게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은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용타, 용타. 요괴 뼈가 야무지긴 하네. 말 다리도 깨부순다는 우리 쥐덫에도 잘리지 않았으니...”

 

묘진이 사람 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여 봤자 좋을 것도 없어. 난 죽어도 또 살아난다는 걸 알 테지?“

 

강문설은 발 밑의 쥐덫들을 칼집으로 툭툭 쳐서 밀어버리고 가까이 앉으며 말했다.

 

"알지. 그런데 나도 요괴를 잘 죽여. 살아나면 또 죽일 거고.”

 

묘진이 끔찍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강문설은 쇠로된 부지깽이를 찾아들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해. 요괴들은 좀 순진하지. 바보 같고.“

"I agree with you. 그건 맞아.”

 

요괴 묘진이 탄식을 했다.

아궁이 옆에는 동그란 부싯돌이 있는데 그 크기가 국그릇 정도였다.

강문설은 부지깽이로 부싯돌을 톡톡 쳐 불꽃이 튀게 했다.

그 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바람을 천천히 내보냈다.

부지깽이 끝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고문하려고?"

 

요괴 묘진이 두려움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Tell me the better way. 더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하든지.“

"내 몸을 지지려고?"

"응, 묻는 말에 대답 안하면 귓구멍을 지지고 대답이 마음에 안들면 쓸모없는 목구멍을 지지려고.”

 

강문설이 미소를 머금었다.

요괴 묘진이 뾰족하게 외쳤다.

 

"차라리 나를 죽여!"

"You are not supposed to say that. 그건 네가 할 소리가 아니지.“

 

강문설은 죽으면서 도망가는 재주를 가진 요괴가 죽이라고 외치며 악쓰는 것이 가소롭다.

사람은 예민해지면 예민해진 대로, 둔감해지면 둔감해진대로 잔인할 수 있다.

천진한 어린아이가 잔인하다면, 점잖은 어른들은 때로 잔혹하다.

 

***

 

"못가!"

 

대성이 영소에게 속삭였다.

주방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성은 사모가 묘진을 발견하고 하는 말을 듣고 즉시 영소를 멈추게 했다.

이럴 때는 영소가 말을 잘 듣는다.

 

"지금 주방에 사모님이 와 계셔.”

 

영소가 귓속말로 물었다.

 

"엄마가 왜?"

"우리 찾으러 나왔다가 요괴를 찾았어. 주방에서.“

"요괴가 주방에? 아! 요괴도 배고파서 주방으로 왔구나. 하여간 짐승은 먹이 때문에 죽는다니까.”

 

영소가 속삭였다.

대성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요괴도 잡고 밥도 먹었을 텐데.“

 

주방으로 가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소리가 목 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색이 조금 묻어 나왔고 영소가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이때다 싶어 내 탓이지? 비겁하게 그러지마.”

 

영소가 처마밑의 그늘에 숨으며 물었다.

 

"엄마는, 요괴 죽였어?"

"아니, 고문하기 시작했어.“

 

고문이라는 말이 천진한 소녀를 흥분시킨다.

 

"가서 보자!"

 

영소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대성이 물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

"엄마한테는 안 들켜.”

 

많이 속여 본 영소가 자신있게 말했다.

대성이 귓볼에 코를 대고 속삭였다.

 

"대사형이 오고 있어.“

 

영소가 찔끔했다.

대사형 조성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소나 대성은 대사형 조성일의 끝을 모른다.

사부 이종무가 없었다면 대성은 조성일을 사부처럼 모셨을 것이다.

영소가 슬그머니 내뺄 채비를 하면서 물었다.

 

"배 많이 고프지?"

"응.”

"내일까지 참을 수 있겠어?"

"아니.“

 

대성은 짧게 대답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영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색을 살피는데 대성의 배에서 꾸룩소리가 나고 목구멍에서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주방이 멀지 않아서 음식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대성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Just do as I say. 내 말하는 대로 해.”

"뭘?"

"너는...“

 

설명을 들은 영소는 초조한 기색이었지만 대성은 단호했다.

이정도로 확신에 차 있을 때는 영소도 대성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대성은 땅으로 내려와 머리에서부터 이불을 쓰고 이불자락으로 목을 둘렀다.

그러자 괴상한 장포를 입은 것 같기도 하고 어둠 속의 하얀 유령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서 눈만 반짝거리고, 움직일 때마다 이불자락 속으로 몸도 언 듯 언듯 보였다.

영소에게 눈짓을 하고, 대성은 먼저 바람의 검을 펼쳐서 달려 나갔다.

영소는 하나, 둘, 셋을 헤아리고 주방의 뒤쪽을 향해 달렸다.

먼저 간 대성이 주방은 지나서 다른 건물 앞을 돌면서 고함쳤다.

 

"불이야! 불이야!"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부지깽이로 묘진을 고문하던 강문설은 풋! 하고 웃었다.

비명을 참느라고 몸을 벌벌 떨던 묘진이 이빨을 드러내며 앙칼진 표정을 지었다.

 

"성동격서, 요괴가 진을 사용하더니 병법도 쓸 줄 아네. 밖의 저 요괴는 언제 들어온 거야?"

 

강문설이 웃으면서 강문설이 물었다.

빨간 부지깽이를 보면서 묘진이 몸을 움츠렸다.

 

"난 몰라. 여기 온 건 나 뿐이야. 진짜야. 난 언제나 혼자 움직여.”

"그럼 뭐 밖에 저것...들은 대성이나 영소라도...”

 

대꾸하던 강문설은 부지깽이를 바닥에 던졌다.

순간 주방의 뒷문이 확 열리더니 무언가가 들어왔다.

강문설은 대뜸 한 걸음 쭉 나아가서 멱살을 잡았다.

정말 영소였다.

 

"컥!"

 

영소가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 손에 매달렸다.

대성과 함께 바람의 검을 익힌 영소였지만 피할 틈도 없었다.

강문설은 영소를 치켜들고 호통 쳤다.

 

"어디 계집애가 도둑고양이처럼 밤에!"

 

영소가 축 늘어지면서 강문설의 손을 탁탁 쳤다.

강문설은 그제야 손을 조금 풀어주었다.

 

"대성이 배고프대요.“

 

영소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덜 떨어진, 밥 퍼주는 년 같은 소리를 했다.

강문설은 이마를 짚었다.

발랑 까지면 까지기만 하든가, 덜 떨어져서 남자한테 홀라당 넘어간거면 그것만 하든가.

그때 주방의 앞문이 또 벌컥 열리더니 바람이 안으로 확 몰아쳤다.

 

"이녀석!"

 

대성이라고 지레 짐작한 강문설이 호통 치면서 몸을 홱 돌렸다.

 

"엄마야!"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뛰었다.

대성은 보이지 않고 하얀 귀신이 주방으로 날아들었고, 쥐덫에 걸려 있는 요괴 묘진을 휘감아서 뒷문으로 날아가버렸다.

검술 명가인 진주 강가의 딸로 여장부인 강문설이지만 귀신은 무섭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했지만 영소를 찾아서 고개를 돌렸는데, 영소도 광주리 하나를 들고서 뒷문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잡혀 있으면서도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게 그 틈에 남은 밥이 어디 있는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풍림원에서는 저녁에 먹다 남은 밥으로 새벽에 미음을 끓여서 일찍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다.

영소가 들고 튄 광주리에는 미음 끓일 밥이 가득 들어있다.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강문설은 자기가 대성의 장난질에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아직 혼례도 안 치른 것들이, 딸년은 서방 될 놈과 함께 친정을 털었다.

아까 딸년은 요괴를 죽여서 도망치게 만들었고, 그 짝 되는 놈은 요괴를 훔쳐가 버렸다.

 

"이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강문설이 쇠로된 부지깽이를 다시 주워들며 이를 갈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조성일이 주방에 들어서며 물었다.

 

"사모님, 요괴는...?"

"대성이 놈이 훔쳐 갔어요.”

 

이종무의 큰 제자인 조성일이 강문설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

그래서 강문설도 남편의 제자기는 하지만 늘 존대를 해왔다.

조성일은 그답지 않게 어리둥절했다.

 

"대성이 왜 요괴를 훔쳐갑니까?"

"천방지축이 하는 짓을 누가 알겠어요?"

 

강문설이 탄식했다.

 

"조별장님, 이것들을 몽땅 잡아다가 버릇을 좀 고쳐주세요.”

 

조성일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연청이 대성과 영소를 뒤쫓는 중이었다.

뒤쳐진 영소가 고함쳤다.

 

"같이 가!"

 

대성은 몸이 작아지기는 했지만 더 단단하고 잽싸졌다.

힘도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밥 바구니를 든 영소가 쥐덫에 걸린 요괴를 든 대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밥!"

 

용소가 급히 외치자 대성이 휙 돌아와서 손을 잡았다.

그 뒤에는 연청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대성도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니 어둠 속을 날아가는 유령 같았다.

탈태환골의 효과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배는 고파도 힘을 쓰니 모든 게 자연스럽고 점점 더 익숙해졌다.

영소가 대성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너 미쳤어? 이 요괴는 어디에 쓰려고 가져 온 거야?"

 

원래 계획에는 성동격서로 밥만 훔쳐오는 거였다.

대성은 대답대신 더 힘껏 달렸다.

짧은 거리라면 연청에게 순식간에 따라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멀면 술법에 가까운 연청의 바람의 검은 속도가 많이 느려진다.

대성의 바람의 검은 무공이라 할 수 있기에 그런 단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성은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조금만 더 달리면 연청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We can do it. 할 수 있어.”

 

대성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숲이 코 앞이었다.

연청은 앞에서 달려가는 허연 것이 정말 대성인지 의심스러웠다.

대성은 이미 어른만큼 컸는데 저 모습은 너무 작다.

처음에는 또 다른 요괴가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요괴가 바람의 검을 펼칠 수는 없다.

조금 색달라 보이지만 영소의 손을 잡고 달리는 허연 덩어리는 분명히 바람의 검을 펼치고 있다.

성미 나쁘기로 유명한 영소가 대성이 아닌 사람의 손을 잡을 리도 만무하니 귀신 같은 덩어리는 대성이다.

탈태환골하고 작아졌다더니 정말 작아졌다.

그런데, 대성의 구결로 만들어진 바람의 검을 연청이 따라잡지 못하는 중이었다.

연청은 대성이 돌 던지기에서 시작하여 이제 발가락으로 몸을 던지는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했다.

급하게 소리쳤다.

 

"막내야! 요괴만 놓고 가라. 늙은 요괴다. 힘을 회복하면 너희들이 감당 못해.”

 

대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도리질 치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연청은 급하기도 하고 대성을 잡지 못하자 화가 치밀었다.

잡히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속도를 더했다.

숲에 가면 숲에 이는 바람을 잡아두는 숲 그림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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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과거의 여자

 

 

 

요괴는 매우 이상한 존재다.

그들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사람과는 다르다.

귀신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도 귀신은 아니다.

사람인 척하면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요괴도 있다.

자기들 나름대로 위계와 조직이 있고 도리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해친다.

조성일은 그런 요괴를 싫어한다.

 

"Not bad. 잘도 만들었군.”

 

요괴 묘진의 뇌정멸운살진 안을 걸으면서 조성일은 자기의 무기 흑금척으로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렸다.

흑금척은 길고 각진 자로 온통 검은 색이고 눈금은 새겨져 있지 않다.

무게는 열다섯 근이고 매우 단단해서 투구와 갑옷은 물론이고 바위도 부순다.

몸이 말라보이지만 조성일도 정칠품 별장이었던 무장이다.

병법과 진법을 깊이 배웠지만 일신의 무공은 어릴 때부터 닦아서 매우 고강했다.

조성일 보다 앞서 걸으며, 석상처럼 굳어져서 눈만 데굴거리는 요괴를 베던 연청이 물었다.

 

"사형, 요괴들은 이런 진법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진은 대부분 요괴들의 거야. 사람이 만든 건 몇 개 안돼.”

 

조성일은 별의 그물에 잡혀서 굳어 있다가 연청에 의해 죽은 요괴를 자세히 본다.

목은 잘렸지만 여전히 머리가 얹혀있고, 손에는 큰 깃대가 들려있다.

이 깃대들이 이어져서 호풍환우하고 신장귀졸을 불러내는 조화를 일으킨다.

 

"요괴가 원조라고요? 금시초문입니다.”

"사실이 그래.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지. 너도 봤을 거 아니냐. 높은 산에 느닷없이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가 하면 골짜기에 천둥이 치거나 안개가 가득차는 것들. 진은 그런 걸 모방하니까.”

 

연청이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방하면 요괴들이지요. 그들이 자연현상을 모방해서 진을 만들었군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을 이루는 깃발들이 견고하다.

머금고 있는 기운이 매우 짙다.

사람이 치는 진의 깃발들은 이처럼 단단하기 어렵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요괴들의 진은 대단하다.

보통 사람들은 요괴들의 진이 펼쳐진 줄도 모르고 길을 잃거나 살해당한다.

그들에게는 그냥 횡액이다.

군에서는 깃발을 잡는 기수들을 특별히 훈련시키고 먹인다.

전장에서 그 기수들이 장수의 지휘에 따라 자기들의 기운으로 깃발을 휘둘러 조화를 만들어 낸다.

조성일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연청에게 명령했다.

 

"한 바퀴 돌면서 다 죽여.”

 

연청이 바람의 검을 펼쳐서 절진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요괴 묘진의 부하들이 남김없이 살해당한다.

조성일의 뒤를 따라가며 호위하던 전삼자가 물었다.

 

"조별장, 나는?"

"Wait here, please. 여기서 대기하십시오.”

 

전삼자는 조성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조성일의 말은 이종무의 말과 다름없다.

 

"얼마나?"

 

그렇게 물을 뿐이다.

조성일은 자기가 두드렸던 부분들을 가리켰다.

 

"지금은 이곳이 제일 약한 곳입니다. 그물도 느슨하지요.”

"요괴가 달아나려면 여기로 오겠군.”

"생포하십시오. 죽이면 또 달아납니다.”

“It’s not gonna be easy 쉽지 않겠는데...”

 

전삼자가 창으로 땅을 툭툭 쳤다.

 

"그거 오래된 요괴야. 조별장이 더 잘 알겠지만.”

전삼자는 별의 그물을 쓰지 못한다.

풍림원 안에서 이종무 외에 별의 그물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큰제자 조성일이 유일하다.

절진 안에서 밖을 보면 푸르스름한 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물속에서 물 밖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진을 펼쳐서 사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뇌정멸운살진을 펼치는 요괴라면 파훼하지는 못해도 걸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덫을 놓는 게 최선입니다.”

 

전삼자가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실수로 죽이더라도 이해하게. 생포만 생각하다가는...”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종무가 사용하는 방법을 전삼자에게 썼다.

 

"생포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의 능력을 목표 달성 가능한 만큼 끌어올려 버리는 기술이다.

완벽하려면 까마득하지만 조성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금씩 쓸 수 있었다.

조성일은 사부 이종무한테 이 방법으로 하도 당하다 보니 그 이치를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은 풍림원에서 장원을 관리하는 게 일이 되어버렸지만 조성일은 타고난 총명과 뛰어난 무공으로 일찍부터 상장군, 대원수 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재였다.

 

"덫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조성일이 웃었다.

 

그런데 그들이 잡으려 하는 요괴 묘진도 보통이 아니었다.

숨어서 절진을 살피다가 약해진 부분이 함정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채고 다시 장원 안으로 은밀히 달아났다.

묘진은 이종무에게는 절대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기척도 없이 자기의 깃발들을 빼앗아 장악해버렸던 조성일의 무서움도 알고 있었다.

두렵기는 하지만 풍림원에 숨어 있으면서 뇌정멸운살진이 저절로 해체되기를 기다렸다가 빠져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전에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함정을 피해서 달아났던 묘진은 다른 덫에 걸리고 말았다.

비명도 못 지르고 <아이고 맙소사!>를 속으로 외쳤다.

 

***

 

"영소 말예요.”

 

영소 어머니 강문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종무가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혼인을 시키려면 빨리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막내하고?"

 

이종무가 물었다.

강문설이 당황했다.

 

"그럼 다른 생각이 있으셨던 가요?"

"아직 그런 건 없소.”

"당신은 대성이가 마뜩치 않은가요?"

"그럴리가.”

 

이종무는 아내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본다.

 

"입 한 번 맞췄을 뿐이잖소.”

 

강문설이 발끈했다.

 

"입 맞췄으면 더 뭘 못하겠어요? 애라도 들어서기 전에 혼인시켜야지요.”

 

영소의 성미는 상당부분 강문설로부터 물러 받았다.

못된 말투는 이종무한테서도 왔겠지만.

이종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도 가만 보면 아주 답답하오. 자주 어울리다보면 입도 맞출 수 있는 건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강문설의 안색이 변했다.

 

"자주 어울리다 입맞춘다고요?"

 

이종무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를 물렸다.

 

"인연이 되면 부부가 될 거고, 아니면 그냥 추억인 게지.”

"그게 과년한 딸 가진 아버지가 할 말씀인가요?"

 

강문설의 음성에는 서운함과 분기가 서렸다.

 

"그만 하시오. 어찌 살던 좋으면 됐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하게 놔두시오.”

"그래서 그 둘이 혼인시키겠다는 건가요 말겠다는 건가요?"

 

이종무는 늘 웃던 얼굴로 강문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우리 가치로 애들을 묶으려 들지 마시오.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게 보이지 않소. 이게 다 시대가 바뀌는 것이오. 시대 따라 가치도 바뀌는 거고. 제 마음대로 살아야 자기를 다 펼쳐볼 수 있고 제 가치대로 행동해야 후회가 없지 않겠소? "

 

강문설은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럼 이렇게 위태위태한 심정을 안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이종무가 대답했다.

 

"먼저 난 사람의 의무지. 어른이 어른 되는 길이고.”

 

강문설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당신하고 말하다보면 내 머리가 이상해져요.”

 

이종무는 그냥 웃고 만다.

영소도 대성도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들이다.

그들의 인연이 얼마나 끈질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문설도 이종무에게는 묻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이종무에게 시집올 때 이종무의 나이 마흔이 가까웠을 때였다.

그녀도 혼기가 늦어서 스물 두 살이었다.

전쟁을 치른 장군이었고, 군에서 나온 후에는 한 동안 강호를 떠돌았던 이종무였다.

그런 이종무에게 그녀 이전의 여자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될 걸 알게 되면 평생 마음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여자의 직감으로 안다.

이종무가 이런 이상한, 시대에 맞지도 않은 이성관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어지간하지 않은, 매우 지독한 사랑을 했지만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 때문에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등잔 같이 위태로운 마음이 있다면, 아내가 품고 살아야 할 어떤 것도 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물어보자"

 

강문설은 마음먹었다.

 

***

 

"국수 맛이 어떠하오?"

 

이종무가 강문설을 처음 만나 물었던 말이었다.

강호에 나와서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다닐 때, 안동 비봉사 근처의 노상 음식점에서였다.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나는 듯하여 강문설은 고개를 높이 들었고, 마치 장대처럼 큰 사람이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이종무는 여름이었는데도 여우털로 만든 조끼를 입고 머리에는 꿩의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몸은 말랐고 눈은 차분한데도 빛이 났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구릿색이었으며 광대와 턱뼈가 두드러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이종무가 음식을 핑계로 강문설에게 수작을 걸었다.

강문설과 똑같은 국수를 주문하고는, 나눠먹자며 젓가락 한 개를 강문영에게 주고 자기는 남은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었다.

젓가락 하나로 국수를 먹는다니...

강문영은 킥킥 웃었다.

그랬는데 이종무는 정말 젓가락하나로 국수를 휘저어 감더니 꽂감 빼먹듯이 국수를 한 입에 삼켜 버렸다.

노점에서는 자두며 여름 과일들을 팔았다.

이종무는 자두 하나를 달라하고는 또 강문설과 나눠 먹자고 했다.

강문설은 이종무가 또 어떻게 재미난 장난을 보여줄지가 궁금했다.

씨가 두꺼운 자두를 두 사람이 나눠 먹는다는 건 매우 불편하다.

과육이 딱딱한 씨앗에 붙어서 쪼개 먹기도 쉽지 않다.

정말 묘한 재주를 부린다면 점점 더 수작에 말려들 것 같아서 강문설은 손을 내저었다.

 

"수작 그만 부리세요.”

 

일어나려는데 이종무가 자두를 그대로 건너주었다.

 

"가져 가시오.”

 

강호에 다니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수작 부리는 자를 만나기도 한다.

엉터리 같은 불한당도 있지만 점잖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점잖은 사람도 말 한마디에 물러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문설은 이종무의 선선한 태도에 호감을 느꼈다.

얼떨결에 자두를 받아버렸다.

그대로 일어나 떠나는데 이종무가 뒤에 서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어떨 것 같으냐?"

 

나중에 알았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조성일이었다.

 

"왜 하필 자두입니까. 저쪽에 덜 여물긴 했지만 대추도 있는데. 자식을 낳으면 딸이겠습니다.”

"내 팔자겠지.

 

이종무는 껄껄 웃었고, 강문설은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

 

"저 멀대가.“

 

손에 쥔 자두를 던져버리려하는데 이종무가 뒤에서 물었다.

 

"내 나이 마흔이오. 이제 돌아가서 가정을 꾸미려하니 함께 가지 않겠소?"

 

단순한 수작이 아닌 진지한 청혼이었다.

초면에 말 몇 마디 주고 받았는데 결혼하잖다.

강문설은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못했다.

이종무가 말했다.

 

"음식은 젓가락 하나로도 먹을 수 있지만 가정을 이루는 건 혼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그대는 내가 준 젓가락을 받았고 자두도 받았으니 나와 함께 갑시다.“

 

재미있지도 않고 부탁하는 말이면서도 권위가 깔려 있어서 거역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런데 기분이 아주 이상하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강문설은 그날 밤 숙소로 찾아온 이종무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름은 그 후에 물었다.

 

"제 낭군 되시는 분 성함은 어찌되시는지요?"

"이종무.“

 

그게 다였다.

남녀의 연애란 대체로 이렇다.

알콩달콩한가 하면 매력적이고 운명적이다.

때로는 단순하게 육체적으로 귀착되는가하면, 이루거나 못 이루거나 간에 고귀하게 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그저 육체와 정신의 짝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짝이 맞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순간에는 항상 불같은 진전이 이루어진다.

아니라 생각되면 물을 끼얹은 재처럼 불씨마저 사라져 버린다.

얼렁뚱땅 홀려버렸던 젊은 날보다 이제 강문설은 세상을 알 만큼 안다.

세상에 진짜 딱 맞는 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자석은 아무 거나 서로 당기지 않은가?

남녀도 그런 면이 있다.

어느 정도 끌리면 짝이거니 하고 사랑이란 말로 울타리 쳐서 서로 가두고 연인이란 신분을 서로에게 부여한다.

 

***

 

강문설은 남편 이종무가 서재로 돌아가기 전에 옷자락을 잡았다.

 

"말씀해주세요. 이전에, 저 보다 먼저 만난 여성분이 있었겠지요?"

"쓸데없는 소리. 자고 나면 어제도 사라지고 없는 건데 뭔 옛 이야기요.”

 

이종무는 당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강문설은 어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겠다면 제가 당신 이전에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이종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 없잖소? 다 알아봤소.”

"당신 만날 때가 스물 두 살이었는데, 아무렴 그때까지 마음에 품은 사람 하나도 없었을까요?"

 

질투심을 자극해서 괴롭히겠다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종무는 강문설의 손을 떨치고 나가버렸다.

이 정도가 강문설의 한계였다.

명문의 딸로 자라서 스물두 살에 유람을 핑계로 겨우 집에서 빠져나왔다가 이종무를 만났던 게 그녀가 한 일탈의 끝이었다.

이종무가 더 하라고 해도 강문설은 스스로 자기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성미는 그와 별도다.

강문설은 이를 앙다물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보검을 챙겨 든 후에 영소를 찾아 나섰다.

칼집으로 영소 볼기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영소와 대성 콧배기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요괴 묘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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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폭포에서 실랑이

 

 

 

"It’s so cool. 시원하다.”

 

폭포수 아래 연못에 몸을 담근 대성은 헤엄치며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소는 혼자 동굴 안을 청소하면서 불만으로 입이 툭 튀어 나왔다.

방앗간에서 나무토막 의자도 훔쳐 옮기고, 긴 나무판자도 가져다가 돌을 괴어 침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꼴 보기 싫으니까 뭐라도 걸쳐!"

"Nobody is here. 아무도 없어.”

 

대성은 아예 대놓고 영소 보란 듯이 물에 누워서 다리를 파닥거렸다.

 

"쬐그만한 게.”

 

곁눈으로 슬쩍 본 영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성의 지금 모습은 여섯, 일곱 살 쯤 된 빡빡머리 꼬마일 뿐이다.

대신 빨래 말리는 곳에서 쓸어온 옷이며 천들을 어떻게 동굴로 옮길 것인지를 고민했다.

폭포수 밑으로 들어가면 다 젖어버릴 텐데, 안에서는 말리기가 쉽지 않다.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옷이 다 젖는 것도 문제다.

잠시 놀다 갈 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막상 숨어서 살려니 번거로운 게 한 둘이 아니다.

성가시고 짜증나서 옷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눌러 놓고 대성이 헤엄치는 근처 바위에 앉았다.

멀리서 구름이 풍림원을 감싼 모습이 큰 장벽처럼 근사하다.

머리 위 하늘에도 옅은 구름이 이리 저리 흐른다.

의도치 않게 된 현상이지만 풍림원이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

영소가 가만히 앉아있자 대성이 바로 밑에 와서 헤엄쳤다.

빡빡머리 하얀 몸뚱이가 물속에서 꿈틀거리니 이상한 물고기 같아 보였다.

상체를 물밖에 낸 대성은 영소가 앉은 바위에 기대어 함께 가을을 감상했다.

영소가 reach out her hand. 손을 내밀었다.

대성이 손을 건네주고, 둘은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보지는 않고 가만히 가을 정취를 즐겼다.

 

"나...

"분위기 깨는 이상한 소리면 말하지 마. 난, totally exhausted. 오늘 완전히 지쳤어. 놀라고 부끄럽고, 실은 너하고 아웅다웅할 힘도 없어.

 

대성이 말문을 열려는 데 영소가 재빨리 먼저 말했다.

하지만 대성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I’m starving. 배고프다.”

"좀 참아. 어두워지고 나서 주방 털자.”

 

영소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성을 다독거렸다.

지난 5년간 한 번 도 없던 일이다.

대성은 뭉클하여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데 영소의 눈에 근처에서 제법 큰 물고기들이 대성에게로 헤엄쳐 오는 게 보였다.

 

"물고기다!”

 

영소가 반갑게 소리쳤다.

대성이 조금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방금 내가 오줌 쌌어.”

"에이 씨!"

 

영소가 대성의 어깨를 탁 쳤다.

 

"잡아.”

"내 오줌 먹었을 텐데...”

"그러니까 빨리 잡아! 더 먹기 전에!"

 

영소가 대성을 발로 확 밀어 버렸다.

영소의 힘에 못 이긴 대성이 풍덩하고 놀란 물고기들은 첨벙하며 달아났다.

 

"Go get’em tiger. 잡아! 힘내!"

 

영소가 소리쳤다.

대성은 영소의 응원이 욕으로 바뀌기 전에 물고기를 잡으려 손발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세 발자국도 가기 전에 물고기들을 다 흩어지고 말았다.

 

"에휴, 저 병신...”

 

영소가 결국 욕을 하고 펄펄 뛰었다.

대성도 화가 나서 소리쳤다.

 

"물속에서 어떻게 물고기보다 빨리 움직여? 자신 있으면 네가 해보던가!"

"뭐!"

 

영소가 폭발했다.

 

"내가 잡기만 해봐라.

"해봐! 해봐!"

 

대성이 대들었다.

이미 물고기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소가 바로 물로 뛰어들었다.

대성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It’s never gonna happen 네가 잡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잡았다!"

 

영소는 물고기가 아닌 대성의 팔을 나꿔챘다.

 

"어!"

 

놀랐지만 이미 늦었다.

팔이 잡힌 대성은 얼어붙어 버렸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일어선 영소는 대성보다 거의 두 배나 키가 컸다.

거인처럼 보이는 영소가 노려보자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영소가 때릴 것 같은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잡을 거야 말거야?"

"잡을 게.”

"너, 약속했다.”

 

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소를 올려다보는 게 영 부담스럽다.

물에 흠뻑 젖어 살이 비치는 영소의 모습에 가슴도 쿵쾅거렸다.

 

"못 잡기만 해봐라.”

 

물 밖으로 나가면서 영소는 살에 달라붙은 옷을 손톱으로 잡아당겼다.

매우 고혹적이었다.

영소의 뒷모습을 보던 대성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너, 궁둥이 크다.”

"뭐래. 쪼끄만 게.”

 

영소가 새침하게 퉁겼다.

 

폭포수 속 동굴로 들어간 영소는 침대로 쓸 널판지를 다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판자 아래에 옷이며 얇은 이불 같은 것을 넣어서 폭포수를 통과했다.

좀 젖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영소는 방앗간과 숲속에 있는 목재간을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것은 무조건 챙겨왔다.

그 동안 대성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고심했다.

여러 방법을 썼다.

다시 오줌을 싸서 물고기를 불러 보기도 했고, 돌을 던져서 잡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다.

물고기를 보고 돌을 던졌는데도 돌은 물에 부딪히며 빗나가기 일쑤였다.

나뭇가지를 창처럼 쓰려고도 했지만 대성의 키가 작아서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한 마리도 못 잡고 푸닥거리만 하는 셈이다.

영소가 오갈 때 마다 욕먹을까 긴장되어 눈을 핼끔 거렸다.

물고기는 못 잡고 못 잡은 데 대해 할 만한 변명거리만 머릿속에 수십 개나 쌓였다.

배는 점점 더 고파졌다.

란 선생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란 선생은 바쁘다며 대성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성은 한참을 물에서 헤엄치며 초조하게 보냈다.

해가 늬였해졌을 때 쯤에는 죽을 것 같은 허기가 느껴져 많이 다급해졌고,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어쩌면 머릿속의 통증이 사라져 바람의 구결을 만들었던 그 이전의 총명이 돌아왔기 때문일 거다.

아마도 물속에서 헤엄치며 물에 대해서 절로 익숙해진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가만히 느껴보니 물에도 결이 있었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길도 결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물고기들의 몸짓과 지느러미짓, 헤엄친다는 건 사람이 땅에서 걷는 것처럼 물의 길을 여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고기들은 문을 열듯이 물의 길을 열고서 달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느낀 후에 대성은 폭포를 자세히 보았다.

간혹 어떤 물고기들은 뭔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폭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거슬러 올라갔다.

대성의 생각이 옳았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에조차도 그에 거스르는 결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대성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서, 발 근처의 송사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길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곤 마침내 어느 문이 열렸는지에 따라서 그 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헤엄치는 송사리 한 마리를 표적으로, 대성은 고개를 숙여 손을 뻗었다.

송사리는 달아나려 했지만 대성의 손아귀로 쏙 들어왔다.

대성이 길을 장악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쪼그만한 거 자꾸 보고 있으면 뭘해!"

 

동굴 근처에서 영소가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쳤다.

대성이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이 물에 자기 자신을 비춰 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거 아니야!"

 

대성은 쏘아붙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송사리 잡은 것을 영소가 볼 수 있도록 들었다.

눈 밝은 영소가 보고 코를 찡그렸다.

대성은 저 버릇 때문에 영소가 더 못생겨지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쪼그만 거 맞네.”

 

철딱서니 없는 건지 괄괄함이 천성인지 영소는 자기가 한 번 한 말을 좀처럼 꺾는 법이 없다.

 

"그럼 이건?"

 

대성은 송사리를 던져 버리고 말했다.

 

"뭘?"

 

영소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성은 갑자기 물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다른 쪽에서 일어섰다.

손에는 자기 팔뚝 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How could you do that, 어떻게 한 거야?"

 

놀란 영소가 펄쩍 뛰었다.

대성은 대답대신 물고기를 영소에게 휙 던져주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서 대성이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자가 물 위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빠르고, 심지어 물결도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대성이 물고기라도 되어 버린 듯했다.

 

"우와...”

 

영소가 전에 없던 감탄을 내뱉었다.

대성은 물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밖으로 물고기들을 던졌다.

영소는 허둥지둥하면서 물고기들을 받으며 소리쳤다.

 

"그만, Enough is enough. 그만해도 돼.”

 

하지만 대성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영소한테 욕먹은 것을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자기를 과시하는 듯이 물고기를 닥치는 대로 잡아서 던졌다.

영소는 급한 김에 물고기들이 다시 물로 뛰어들지 못하게 발 뒷꿈치로 머리를 밟았다.

 

***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풍림원 본채 건물 쪽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아까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영소는 나뭇가지에 생선을 꿰서 구웠다.

연기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저녁 바람이 금방 흩어버려서 들킬 것 같지는 않았다.

대성이 많이 먹겠다니 여러 마리를 동시에 굽는데, 대가리가 멀쩡한 생선이 없었다.

불 앞에서 이불을 쓰고 쪼그려 앉은 대성은 생선 굽는 냄새에 침을 꼴깍인다.

 

"밥 좀 훔쳐오면 안 돼?"

"밤에.”

 

대성이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영소가 대답했다.

 

"솥하고, 그릇, 간장, 된장, 고추장 가져와야 할 게 많아. 반짓고리도.”

"그럼 차라리 돌아가서 방에 꼭 쳐박혀 있다가 밤에 사람 없을 때만 밖에 나오는 게 낫지 않을까?"

 

대성의 말에 영소가 한심한 듯이 쳐다보았다.

 

"왜?"

 

대성이 벌컥 소리치며 항의했다.

 

"차라리 도망을 다녀야지 쫀쫀하게 숨어있자고? 남자가 되어가지고.”

"너, 여기 동굴에 있는 것도 숨어 있는 거야.

"동굴로 도망쳐 온 거지.

 

영소는 때릴 듯이 구운 생선을 대성에게 건넸다.

대성은 원래 체격으로도 싸워서는 영소를 못 이겼다.

작아진 지금은 어림도 없는지라 입을 꾹 다물고 생선을 받았다.

배가 너무 고프고 밥 생각이 간절했다.

대성은 여태까지 단 한 끼도 굶어본 적이 없었다.

구울 때 냄새는 분명히 좋았는데, 생선은 맛이 없었다.

뭐든 잘 하는 영소는 맛없을 게 분명한 생선도 맛있게 먹는다.

 

"맛없어.”

"네 오줌 먹은 물고긴가 보다.”

 

투덜거리는 대성을 영소는 무시했다.

 

"네가 요리를 잘못해서지.”

"내가?"

"그래 네가.”

"You’re a such douchbag. 참 찌질하다.”

 

영소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대성을 보니까 정말 못 먹고 있었다.

구운 생선은 맛있기만 한데 배고파 죽겠다면서 못 먹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영소는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관심 없는 척 생선만 발라먹으며 곁눈질을 해도 대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생선을 아예 놓아버린다.

 

"가시 발라줄까?"

 

넌즈시 말했는데도 대성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맛없어.”

 

영소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엷은 구름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밝다. 땅거미는 숲 위에만 걸쳐있다.

영소는 용기를 내서 일어섰다.

 

"내가 너 때문에 도둑질을 다 한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같이 가.”

"옷도 없는 데 가긴 어딜 가? 벗고 다닐래?"

 

영소가 핀잔을 줬다.

대성은 어이없는 이유를 댔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다고.”

"내가, 씨... 너 물고기 잡은 성의를 봐서 봐준다.”

 

영소는 이불로 대성을 둘둘 말아서 안았다.

그 시간에 대사형 조성일은 풍림원의 정문 밖을 손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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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깃발

 

 

 

비상사태가 끝났을 때 영소 어머니가 말했다.

 

"영소가 올 때까지 여기 있거라.“

"영소는 물 가지러 갔어요. 내가 물 있는 곳으로 가면 안돼요?”

 

대성이 항의했다.

하지만 영소 어머니는 무시해버리고는 하녀들을 다 데리고 나갔다.

피난처인 밀실에는 대성 혼자 남게 되었다.

영소 어머니도 환골탈태한 까까머리 대성의 귀여워진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 다 자란 사내아이의 알몸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딸이 하는 꼴을 보면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다.

영소 나이 열다섯,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때다.

이럴 때 실수라도 있으면 몸 고생 마음 고생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달리 보면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고 품을 수 있는 때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감정을 부부가 함께 공유하고 때로 서로 꺼내놓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여느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딸이 그냥 이대로 쭉 탈 없이 대성하고 혼인해서 속 썩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거 빨리 시집 보내버려야 속을 덜 썩이지.“

 

딸이 한 엉뚱한 소리들 때문에 속이 상한 영소 어머니는 하녀들과 가면서도 중얼중얼 딸 욕을 하고 있었다.

 

"자! 공부 계속하자.”

 

혼자가 되자 란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막에 바로 비쳐지기 때문에 남이 볼 수는 없고 오직 대성만 볼 수 있다.

만약에 대성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동공 안에 거꾸로 선 란선생을 볼 가능성은 있었다.

 

"어떻게 해도 파괴자는 와. 너에게 이미 깃발이 꽂혀 있으니까.“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자기 장딴지를 톡톡 친다.

그게 묘하게 눈을 사로잡고 보기에 좋다.

 

"요괴를 파괴자라 하는 거지요?"

 

아주 어려진 대성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한테 벌써 길들여져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런 셈이지. 다른 것들도 있긴 하지만.”

 

란 선생은 작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도 빠른 속도로 지식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체계화하고 있었다.

대성을 통해서 다운로드 된 이 세계의 비밀은 사라지지 않은 채 대성의 몸에 남아있다.

란 선생은 다운로드 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요괴들, 아니 그 중에 파괴자들은 깃발이 꽂힌 대상을 찾아서 파괴하고 깃발을 회수하는 일을 해. 깃발을 많이 모을 수록 더 강한 요괴가 되는 거지.“

 

대성이 물었다.

 

"요괴들은 어떻게 생겨나요? 처음부터 있던 건가요?"

"그건 너무 많은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야! 배울 때 궁금한 것부터 파고드는 건 시간이 많을 때나 하는 거고. 질문할 때는 손 먼저 들고 하라고 했잖아!"

 

란 선생이 지시봉으로 대성의 손등을 탁 때렸다.

실제로 란 선생은 대성의 머릿속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대성은 손등을 진짜 맞은 것과 똑 같은 따끔함을 느꼈다.

 

"놀라긴. 감각을 통제하는 기능은 원래 머릿속에 있는 거야. 나는 인공지능이지만 효과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학생의 감각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거고.”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생글거리며 우쭐거렸다.

 

"똑똑한 학생이라면 미리 알아차렸어야지. 네 몸을 탈태환골 시킨 게 바로 난데.“

 

원래라면 강습용 인공지능에 사용자의 신체를 바꾸는 기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란 선생의 말대로 모든 게 가능했다.

이 세상은 견고한 형식이 있기는 했지만 변화를 만드는 확고한 방식 또한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은 데이터의 변형을 통한 응용과 활용에 달린 때문이다.

인공지능인 란 선생은 어느덧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떠나버린 자들이 남긴 로그 파일과 대성의 몸을 이루는, 이 세상을 구축한 비밀이기도 한 자료들을 학습하면 자기를 갱신한 것이다.

이는 떠나간 자들이 대성의 비어있는 속을 란 선생의 라이브러리로 채우기 위해서 급하게 우겨 넣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란 선생은 무수한 경쟁자들을 뚫고 살아남아 끝까지 존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록 "강습용" 인공지능이었지만,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은 "뛰어난 학습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란 선생은 강사나 선생들이 생존을 위해 줄곧 쓰는 방법인, 자기도 금방 알았으면서 옛날부터 알았던 것처럼 시침 떼는 게 몸에 배여 있었다.

대성에게는 란 선생이 대사형 조성일 보다 더 많이, 뭐든 다 알고 다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들었다.

영소만큼은 아니지만 싸가지 없는 대성이 그렇게 하는 건 놀랄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성이 아주 순둥이가 되지는 못한다.

자기 자랑에 도취된 란 선생 대신에 자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눈에 안 보이는 깃발이 꽂혀 있는데 요괴들은 그걸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저를 죽여서 깃발을 가져가려 하는 거라는 거 잖아요. 가져가서 더 강한 요괴가 되려고.”

"그렇지.“

"그러니까 깃발을 없애버리면 되는데, 깃발은 선생님도 못 없애고. 제 생각에는 요괴하고 깃발이 관계가 있으니까 깃발을 알아서 없애려면 요괴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였던 거지요.”

"You don’t need to explain it. 네가 설명할 필요 없어.“

 

란 선생은 마음이 상했는지 톡 쏘았다.

 

"내가 그렇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나중에 보면 알아!"

 

한 마디 따끔하게 하고 란 선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이 자식도 나하고 다를 게 없지. 여기 캐릭터들은 다 인공지능이니까. 특히 이 녀석은 캐릭터 제한을 벗어났잖아.)

 

제 할 말을 못하면 대성이 아니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안하면 영소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주세요.”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알고 있는 거 맞지요?"

 

란 선생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 올리는 시늉을 하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지켜봐야지. 그들이 너를 풍림원에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나쯤은 마련된 대비책이 있을 거야.“

 

대성은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란 선생도 조금 켕기는 듯이 자기 방어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한 거 아니잖아. 탈태환골 시켜 놓았으니까. 좀 기다려봐.”

 

조용히 온 영소가 밀실로 들어올 때는 누가 볼 새라 후다닥 들어왔다.

혹시 따라온 사람이 있을까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보기도 했다.

 

"물은?"

 

발가벗은 채 변색된 얇은 이불로 몸을 감고 앉아있던 대성이 물었다.

영소는 물 가지러 갔던 거였다.

깜박 잊어버렸던 거지만 영소는 이불을 대성에게 덮어씌우며 말했다.

 

"참아! 그럴 틈 없어.“

"왜? 목마른데. 배도 고프고.”

"아! 좀 참아! 그런 게 있으니까!"

 

영소는 목소리를 낮추고 고함치는 신기한 재주를 발휘했다.

영소는 많이 배워서 묘한 재주가 많다.

대성은 마주 쏘아부치려다가 청혼했던 게 생각났다.

화를 꿀꺽 삼키고 어른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소도 조금 누그러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도망치자. 내가 사고를 좀 크게 친 거 같아.“

 

대성은 풍림원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가만히 있어도 다 듣는다.

어떤 때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진다.

이것도 이제는 떠나버린 "그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서 대성에게 부여한 기능이다.

밖에서 일어나던 소동을 소리로는 들었기 때문에, 대성은 갸웃했다.

 

"요괴 도망친 거? 대사형은 별 걱정 안하는 거 같던데.”

 

영소가 신경질을 냈다.

 

"내가 쪽팔린단 말이야. 너 때문에 쪽 다 깠다고. 눈치없게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돼?"

 

대성이 참지 못하고 마주 소리쳤다.

 

"못 들었어? 지금은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고 못 들어온다는데 가기는 어딜 가?"

 

영소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넌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지?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 지 알아?"

"난 안 쪽팔리는 줄 알아? 나도 쪽팔려! 네가 내거 요만하다고 사람들한테 말해버렸잖아.“

"내가 뭐 거짓말 했어?"

 

영소가 톡 쏘고는 대성을 답싹 들어서 품에 안았다.

대성은 영소에게 안기자 얌전해졌다.

 

"어디로 갈려고?"

 

대성이 묻자 영소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방앗간 뒤에. 거기 가서 물 배터지게 마셔.”

 

대성이 동의했다.

풍림원에는 방앗간이 하나 밖에 없다.

방앗간 있는 곳이 풍림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방앗간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수가 방앗간의 물레를 돌리며 항상 탕! 탕! 소리를 낸다.

방아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꿍! 떡! 하는데, 떡을 좋아하는 대성은 그 소리가 떡! 떡! 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대성과 영소의 비밀 장소는 폭포수 뒤에 있었다.

들어갈 때 물에 흠뻑 젖기는 하지만, 폭포수 뒤에는 기어서 들어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입구를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좀 넓어지고, 낮에는 폭포쪽 입구가 밝기 때문에 깜깜하지도 않았다.

딱 키득대기 좋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영소가 좋아하던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것이 여기서 놀고 돌아가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영소는 이 동굴로 가기는 했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장소로서는 멋진 곳이지만 그저 어쩌다 마음이 동할 때만 대성과 함께 갔다.

마음이 동할 때라는 것도 비밀이긴 했다.

어른들이 방앗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싶거나, 간혹 아이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때였다.

 

"좋은 생각이야.“

 

대성이 영소의 귀에 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아이 씨!"

 

영소가 파리를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영소는 좀 덜 쪽팔릴 때까지 눈에 안 띄게 거기서 숨어 있다가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성이 생각하기에도 폭포수 동굴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방앗간에는 떡을 자주하니까 숨어 있어도 먹을 것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

 

노노인과 전삼자 등이 대성의 상태를 보기 위해 왔을 때, 대성이 있던 곳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튀었소. 탈퇴환골한 거 구경 좀 하려 했더니.”

"자네는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고개를 기웃거리던 노노인이 아쉬워서 전삼자에게 묻는다.

 

"좀 참으시오. 잠잠해지면 알아서 오겠지.“

 

"요괴가 돌아다니는 데 걱정도 되지 않나?"

 

노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전삼자가 딴청을 부렸다.

 

"돌아다닌다니 말이 좀 과하오. 숨어 다닐지는 모르겠소만. 풍림원 안에서 요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자네도 보고 싶다며.“

"나는 뒷감당하기 싫소. 영소가 사고 치고 도망갔는데 찾아봤자 원망 들을 일 밖에 없소.”

 

전삼자는 완강히 버텼다.

노노인이 화를 냈다.

 

"애들이 요괴하고 마주치면 큰 일 아닌가?"

 

전삼자는 못들은 척했다.

그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노노인이 대답을 기다리면서 계속 노려보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조별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따지려면 조별장한테 따지시오.“

 

조별장은 조성일이다.

조성일은 풍림원을 총괄하지만 느슨한 풍림원에는 특별한 직책이 없다.

이전 군 세력이 주축인 풍림원의 위계나 조직이 여타 문파보다 허술하다는 건 또 역설적이다.

전삼자와 노노인도 일반 무림문파라면 원로에 해당하겠지만 그냥 전아저씨, 노노인일 뿐이다.

다만 조성일은 풍림원의 이인자이기에 예전 군에 있을 때 직급인 별장이었으니 간혹 그렇게 조별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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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요괴 묘진

 

 

 

조금 전, 밖에서는 요괴 묘진과 대처하고 있을 때였다.

대성은 건초 타는 냄새를 맡았다.

이불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냄새였다.

영소가 연신 물을 끼얹었지만 물은 금방 증기로 변해서 사라졌다.

영소는 답답해서 폴폴 뛰었다.

대성을 물속에 넣고 싶었으나 비상사태라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들이 있는 피신처에는 욕조나 몸을 담글 만한 곳이 없었다.

 

"I’m so hot. 나 뜨거운 남자야.”

 

대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유쾌함을 회복한 남자의 시큼털털한 소리였다.

영소는 걱정이 되던 중에도 대성이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자 벌컥 소리쳤다.

 

"그래 이자씩아! 하도 뜨거워서 쪼글 감자도 다 익어버리겠다.“

 

대성이 작은 소리로 겸연쩍게 대꾸했다.

 

"That was supposed to be funny.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야.”

 

가까이 있던 영소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넌 말을 해도 어찌 그런 외설스런 말을...

Is this the end of being coy? 이제 내숭은 끝난 거냐?"

 

영소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우린 가끔 이런 소리도 해요.“

 

어머니로서는 질겁할 소리다.

영소는 대성에게 안달을 부렸다.

 

"그 좋은 머리로 빨리 어떻게 해봐. 탈퇴환골이고 뭐고 타죽겠다.”

 

대성이 여전히 나른하게 말했다.

 

"식힐 필요 없어. 도자기 굽듯이 내 몸이 구워지고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렇게 뜨거운데. 너 목소리도 바싹 구운 과자 같단 말이야.”

 

영소는 제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폴폴 뛰었다.

피신처에는 더 뿌릴 물도 당장 없었다.

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변색되었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 밑으로 민둥민둥 반짝반짝하는 맨머리가 보였다.

영소가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내우외환 설상가상이다. 너는 아프지 적은 침입했지. 못 생긴 게 이젠 대머리야.“

 

때마침 대성의 몸에서 뚜두둑 하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영소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대성을 빤히 보았다.

마치 허리가 빠진 건 아니지 하고 묻는 듯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금 크면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 간에 수작질 하게 되어 있다.

대성과 영소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성인 남녀들로부터 줏어들은 시털궂은 소리를 뜻도 모르면서 많이 주고 받기는 받았다.

묘한 재미가 있고 간질거리거나 때로는 조그마한 통쾌함이나 희미한 희열도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주고 받는 건 말 그대로 둘 만의 비밀이었다.

아이들은 자제하지는 못해도 무슨 짓을 하면 어른들한테 혼나는지 본능적으로 아니까.

무공이 늘지도 않고, 늘 싸우면서, 골이 깨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런 짓거리는 해왔던 것이다.

대성과 영소는 갑자기 둘이 멀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결국은 그렇고 그런 가시버시 사이가 되고 말 관계였다.

그저 시간 문제였을 뿐.

대성이 눈치로 짐작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뼈가 제자리 잡는 거야. 병신 되는 거 아니야.”

"I’m pathetic 에고... 내 팔자야.“

 

영소가 대성의 팔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곤 후후 입김을 불었다.

영소의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팔에 대고 부니?"

"엄만, 그럼 알몸인데 팔 말고 내가 어디에 대고 불어요?. 조신치 못하게.”

 

영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가 어머니한테 어깨를 찰싹 두들겨 맞았다.

한데 대성의 팔이 점점 짧아지고 가늘어지고 있었다.

대성의 모든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영소가 참을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렸다.

영소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보면서 속 긁는 소리를 했다.

 

"탈태환골이 아니라 반노환동인가? 늙지도 않았는데.“

 

대성도 자기 몸이 줄어드는 데는 몹시 당황했다.

대성의 몸은 내구성과 재질을 바꾸면서 쓸모없는 것을 태워서 배출해버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몸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대성도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맨숭맨숭한 머리조차 줄어드는 중이었다.

유쾌해진 대성도 더는 유쾌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잘 먹으면 다시 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하며 영소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에서는 대성에게만 보이는 란 선생이 자기가 만든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to make matters worse 설상가상으로 한심스럽다는 듯이 대성을 보았다.

 

- 대충 알기는 했다만 너 몹시 피곤하게 사는구나. 인간들은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 쯧쯔.

- 잘 모르면서 말하지 마세요.

 

대성은 란 선생에게 화를 냈다.

란 선생이 아랑곳하지 않고 조언을 해주었다.

 

- Do as I say 시키는 대로 해봐.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라고 해봐.

 

그 말은 바로 약이 되었다.

 

”이대로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될 거야.“

 

대성은 란 선생이 하라는 대로 말했다.

 

"정말?"

 

영소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I can assure you 확실해.”

 

대성이 엄숙하게 답했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라니까.

"I am just double checking. 그냥 재확인 하는 거야.

 

영소는 한숨을 내쉬고 갑자기 철든 소리를 했다.

 

"그냥 다시 자라기만 해. 미남 안 되어도 괜찮아.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제 눈에 안경이라잖아.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더 나아.”

"Look at you all grown up. 너 철 다 들었구나.“

 

대성이 낄낄거렸다.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이 그들을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 But this was not the time, guys. 짜식들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물론 그래도 세상은 이렇게 해야 돌아간다.

내일 망하든 말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애들은 애들답게 놀고, 각자 제 할 짓을 하는 중에 역사는 굴러간다.

그렇게 인간의 서사는 만들어진다.

Don’t be so serious. 너무 심각할 것 없다.

그런 세상이 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거나 움직이는 자들이 대성을 끝장내려 한다.

 

대성은 말 그대로 3척 동자가 되고 나서 몸이 식기 시작했다.

빡빡머리는 파르라니하고 피부는 반투명하며 손을 대면 찰떡처럼 쫀득거렸다.

잡아당기면 쭉 늘어지기도 잘했다.

 

"Don’t do that again. 다시는 하지마!"

 

대성이 질색했다.

하지만 영소는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그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몇 번이나 당겼다.

잘 키우면 정말 제일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피부가 좋고 몽실몽실해 보이는 어린아이라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또 탈태환골 처음 해보는 주제에 대성이 급해서 뻥을 쳤을 가능성도 크다.

영악한 영소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단지 믿고 싶어한다.

대성이 영소의 손을 뿌려치는데 그만 이불이 함께 쭉 벗겨지고 말았다.

It was an accident. 사고였다.

다 봤다.

영소는 대성이 제일 잘생긴 남자가 되기는 커녕 과연 자라기는 자랄까 싶은 의심에 앞이 캄캄해졌다.

대성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몸은 이미 어른과 비슷했었다.

그랬던 몸이 3척 동자로 줄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다.

영소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성은 그때도 여전히 어린애다.

그리고 풍림원의 비상사태가 종료되었다.

반면 영소의 비상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이성 문제 외에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비정상이니까.

 

(또 그리고, 이쯤에서 이미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just to be safe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데, 나는 사고의 흐름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서술이 아니라 글쓴이다.

나는 이 석화세계, 천개의 에피소드 또는 천개의 검 이야기를 쓰지만 내 상상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다.

읽는 이는 이 이야기로 각자의 상상을 만들어 내가 쓰지 않은 부분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야기의 완결성? 코난 도일도 대충 마무리하고 독자한테 끝을 넘겨버린 셜록홈즈 편도 있지 않은가.

나와 읽는 이의 차이점은 오직 나는 지면에 상상을 입히고 읽는이는 자기 마음에 그린다는 것뿐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나 엉터리 같은 게 보이면 읽는 분 마음 가는 대로, 그 마음대로가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Go easy on me 나한테 좀 관대해주시라.

그래야 쓰는 나도 편하고 읽는 그대들도 편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소설에 서문이 없는 이유기도 하다.

서문만 아니라 이야기의 참여자로서 틈나면 내가 비집고 와서 주절거리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지 말고 함께 놀자.

나는 모난 돌 같은 대성과 영사 이야기 외에도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때로는 장막 뒤에서, 때로는 무대의 전면에서.

그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누나, 언니가 있었다면 사실 그들도 이렇게 왔다 갔다 했을 거다.

Who wouldn’t do this? 누가 안 이럴까.

정으로 이어져 있거나 잇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마 요괴도 그럴 걸?)

 

***

 

이미 밀실에 있을 때부터 작정했었다.

영소는 아예 도륙을 내버리겠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묘진에게 달려갔다.

아마 자기가 홧김에 불쑥 내뱉어버린 말의 진짜 의미를 생각을 시간을 남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숨어 있었을 거다.

It was probably for the best. 그게 상황을 모면하는 최선이었으니까.

영소가 못된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보는 중에 마구 욕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나쁜 년, 누가 뭐 어째? 주둥이를 확! 가랑이를 확!"

 

전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하는 욕은 다 할 수 있다.

감히 요괴 묘진이 대성을 그냥 두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 때문이다.

 

"그만둬!"

 

조성일 소리쳤지만 영소는 이미 귀가 먹었다.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치마가 쓸려 내려오기 전에 묘진의 얼굴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대성과 대련할 때 막판에 겁을 주고 승리를 확정하는 영소 만의 의식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대성의 머리를 직접 박살내지는 않았다.

퍽!

눈이 크고 입술이 얇은 요괴 묘진의 머리에 철퇴가 떨어지는 듯,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깝...”

 

분한 표정을 짓던 묘진이 몸을 두어번 털썩 거린 후에 축 늘어졌다.

 

"어?"

 

영소는 한 번 더 묘진을 밟으려다가 기겁했다.

묘진의 시체가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금선탈각이라는 건가?"

 

영소는 중얼거리며, 누구 알려줄 사람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금선탈각은 껍질 벗고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아저씨나 노노인이 마저도 못 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소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과 자기가 좀 큰 사고를 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 씨! 물 떠러 나왔다가 이게 뭐야!"

 

투덜대며 아버지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종무는 무덤덤해 보였다. 대체로 항상 그런 표정이지만.

조성일이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사부님, 골치아프게 되었습니다.“

 

이종무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졌더니 큰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청이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가 도망쳤습니까? 이 요괴는 많이 별난 모양이군요.”

"목숨이 여러 개인 요괴였어. 이런 건 보통 죽으면서 달아나지.“

 

사부가 귀뜸만 해줬어도 놓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부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조성일은 원래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원망도 못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느라 잠시 눈만 찌푸렸다.

연청이 걱정했다.

 

"그럼 큰 일 아닙니까? 밖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조성일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별의 그물에 잡힌 뇌정풍운멸살진의 흰 구름은 여전히 은은한 우레소리를 내면서 풍림원을 맴돌고 있었다.

 

"차라리 그러면 좋지. 별의 그물에 붙잡힐 테니까. 안에 숨었을 테니까 잘 찾아봐야지.“

 

조성일한테 한소리 들을까 싶어서 영소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

요괴가 달아났지만 속은 좀 풀렸다.

무책임하지만 사고 수습은 원래 어른들의 몫이다.

이는 책임감과 다르다.

사고를 치고 나서 아이들이 할 일이란 어른들한테 혼나고 반성하는 것뿐이다.

함부로 제가 친 사고를 직접 해결하려다가는 정말 어른들도 수습 불가능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자기는 자기대로 망가질 수 있다.

어른스런 아이는 좋지 않다.

아이가 어른스럽기를 기대하는 어른은 어리석은,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다.

 

"영소나 못 달아나게 잡아놔.”

조성일이 말했을 때는 벌써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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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상인의 전쟁

 

 

 

대문 밖 구름 속에서 고양이 머리 같아 보이는 가죽 가면을 쓴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가죽옷을 입고 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귀는 하얗거나 볼그스름했고 긴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출렁거렸다.

 

"Eblis! 요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긁적거리던 조성일이 여자를 힐끗 보고는 이종무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보자마자 요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림원의 젊은 무사들만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놀란다.

노노인이 혀를 찼다.

 

"군진을 쓰기에 누군가 했네.”

 

연청이 물었다.

 

"요즘은 요괴도 군진을 씁니까?"

 

노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부터 그랬어. 경우가 드물긴 해도. 보통 요괴들은 이렇게 백주 대낮에 잘 움직이지도 않거던.”

 

고양이 머리가 걸어오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누구보고 요괴래. 신성한 파괴자님더러. 자!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놈 내놔.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이종무가 가까이 있는 전아저씨, 전삼자에게 물었다.

 

"외모에 자신이 좀 있는 거 같지?"

"Probably, I suppose so. 그런 거 같습니다. 지모는 좀 떨어지는가 봅니다. 고양이 주제에 호랑이 굴이니 뭐니 하더니 불쑥 들어오는군요.”

 

전삼자는 태연자약하게 창날을 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종무가 이번에는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는 누구 보라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냐?"

"요괴가 예쁘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뭔가를 적고 그리면서 두드리던 조성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 예쁘면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기 좋은데 척 하는 게 다 속이는 거지. 예쁘면 속이기 좋기 때문에 저 요괴가 예쁜 거야.”

 

전삼자는 웃었다.

조성일은 요괴가 예쁜 척하듯이 바쁜 척하며 반쯤만 수긍하며 머리를 반만 끄덕였다.

영소의 이상한 말버릇은 분명히 사부 이종무의 젊은 시절 말버릇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종무는 조성일의 어깨를 툭 친후에 고양이 요괴에게로 물었다.

 

"이보게 처자. 이름이 뭔가?"

"나는 파괴자 묘진이다. 빨리 그놈이나 데려와.”

 

노노인이 중얼거렸다.

 

"장군님 앞에서 파괴자는 개뿔.”

 

이종무가 물었다.

 

"뇌정멸운살진은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지?"

 

"흥. 알긴 아는구나.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다.”

"Too bad, too bad. 아깝겠다.”

 

이종무는 성큼 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길어서 보통으로 걷는데도 보통 사람이 뛰는 듯 빠르다.

묘진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종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예쁘게 죽는 모습을 그놈들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이종무에게서는 어떤 기세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대처럼 큰 사람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싹함을 느낀 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이종무가 물었다.

 

"준비는?"

"Hang in there.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조성일이 대답했다.

 

"버티긴 뭘...”

 

요괴 묘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조성일이 말했다.

 

"잡았습니다. 별의 그물로 뇌정멸운살진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물로... 진을 잡아?"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던 요괴 묘진의 가늘고 날렵한 다리가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의 의미는 묘진이 부리는 구름속의 벼락처럼 자기의 혼을 꿰뚫었다.

 

"전선의 마왕 비상인!"

 

놀람과 충격, 두려움으로 요괴 묘진의 맥이 풀어져 버렸다.

이종무는 천천히 걸어가 묘진의 고양이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묘진은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아나지도 못했다.

몸 주변에서 작은 빛이 연이어서 명멸할 뿐이었다.

이종무의 무공, 별의 그물에 이미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성일이 뇌정풍운멸살진을 붙잡은 것도 별의 그물이고 이종무가 요괴 묘진을 결박한 것도 별의 그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성일은 담장에 설치된 자기의 진을 이용했고 이종무는 직접 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 예전 전쟁하던 시절, 적의 군진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학살했던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의 그물이이다.

전삼자가 혀를 찼다.

 

"I told you.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우습군요. 힘도 없는 장수가 앞장서다니. 요괴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가 봅니다.”

 

연청이 가소로운 듯이 내뱉었다.

이종무가 손을 높이 들자 묘진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아귀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Do your worst. 네 멋대로 굴어봐.”

 

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에게 아무 겁없이 달려든 댓가였다.

 

이십 여 년 전, 전쟁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 년을 끌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끝이 났었다.

전쟁을 한 세 나라의 군사는 수를 합치면 1백 20만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차가 6만대가 넘었다.

그러나 피해는 오직 두 나라에서만 났다.

한 나라는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25만 군사 중에서 오직 7만 명만 실제 전투에 참여 했었다.

그렇게 하고도 전세는 3개월 만에 승리로 굳어졌다.

나머지 9개월은 그냥 질질 끌다가 별 이유도 없이 5만 명을 잃고 the war finally ended 마침내 종전했다.

그 중심에는 전쟁 중에 물러나고 잠적해버린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 장군은 아군에게는 전장의 신이라 불렸고 적들에게는 전선의 마왕이라고 불렸다.

병법에 통달했던 그는 전장에서 홀연히 자기만의 무공을 깨달았다.

그 무공은 무림의 어떤 무공과도 달라서 누군가는 도술이라 불렀다.

병사를 부리는 그 장군의 용인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했다.

그의 병사들은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물을 가리키면 물로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망설임없이 불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설혹 그가 불로 뛰어들게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불타죽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용인한 irregular 비상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자들은 그 장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파괴자도 그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

그 장군, 전선의 마왕, 전장의 신, 전쟁의 신이라 불린 사람이 눈앞의 장대 같은 사람이었다.

 

"Are you tryna(trying to) get rid of me? 저를 죽을 건가요?"

 

묘진은 체념하고 멍해진 눈으로 물었다.

구름 속에 있는 부하들을 먼저 투입했으면 비상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Too late to regret.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고양이 주제에 호기롭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여야지. It’s better this way. 그게 더 나아.”

 

이종무가 웃음을 지었다.

묘진이 태도를 바꿔 도리질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비상인,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어요. 저를 살려주세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의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노노인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쯔, 그냥 체념하고 죽지. 그럴 거 같더만... 이봐 처자. 죽고 나면 그런 걱정 없어져. 누구 걱정 뭔 일 때문에 못 죽는다는 말은 다 죽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야. We’ll see 너도 늙고 나면 알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묘진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꾸어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협박했다.

이종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웃은 후에 전삼자에게 묘진을 던져주었다.

 

"가둬놔.“

"에이, 이거 원...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요괴는 예측불허라서 장군님 아닌 저희들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군님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성일이 이종무를 대신해서 전삼자에게 말했다.

노노인이 웃었다.

 

"에잉. 태산명동 서일필,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놀라서 이게 뭔 소동이야. 그나저나 장군님. 구름이 우리 풍림원을 딱 에워싸고 있으니 꽤 그럴듯 하게 보입니다.”

 

조성일이 이종무의 허락을 받아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묘진은 전삼자에게 끌려가면서 또 태도를 바꿔 마지막으로 이종무에게 소리쳤다.

 

"비상인. 나를 죽이더라도 그놈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놈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Nebby lady (bitch). 오지랍 넓은 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뭐 누굴 어째?"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영소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들어서 묘진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발로 차기는 했지만 바람의 검이었고 구결은 대성이 만든 구결이었다.

머리를 차인 묘진은 몸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지지도 않았고 목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헝겁인형 같았다.

 

"질기네 저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영소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전삼자는 영소가 달려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라서 묘진을 빼돌리지 못했다.

이종무는 영소가 요괴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는 듯이 보였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아이들과 여자들이 담장 밖과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구름 속에 요괴가 가득하다는 것을 영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이든 여자들이 "참, 장관이야" 한다.

 

“대성은?"

 

노노인이 영소에게 물었다.

늘 붙어 있는 영소가 나온 걸 보면 대성이 이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성이 탈퇴환골하는 모습을 요괴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영소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직접 가서 봐요. 이제 요만 해졌으니까.

 

영소가 자기 새끼손가락의 끝 두 마디만 들어 보였다.

연청이 놀라며 물었다.

 

"뭐가? 대성이?"

 

영소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슬그머니, 누가 들어도 수상한 소리를 했다.

 

"발가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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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래된 미래

 

 

 

꿈속에서 지난 삼년의 고통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수시로 엄습하는 두통은 대성을 영혼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실제로는 칠푼이가 된 듯하게 만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대성은 울컥 받쳐 올랐다.

 

“X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Stop it 그만!"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에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힘든 순간까지 반복해서 되새길 필요는 없지. 지나치게 가혹해.

Don’t beat up yourself 자책하지도 마.

인생은 원래 잘한 것과 잘못한 걸로 채워지는 그릇이니까.

 

여전히 꿈속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으로 보였다.

검정색의 줄이 있는 별난 상의와 그보다 더 별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윤이 나는 검정색인데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장식이 달렸다.

총각 더벅머리 비슷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한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다.

한 손에는 책도 아닌데 빳빳해 보이는 흰 종이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종이에는 대성이 본적 있는 낯선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What’s your name again 이름이 뭐라고?"

 

영소보다 더 예쁜 그 여자가 물었다.

대성은 다시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는가 싶어서 섬뜩했다.

 

"누구세요?"

 

대성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예의하고는... 선생이 물으면 대답이나 할 거지. 누가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인사하자는 거지.

 

대성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짜식아.

To be or not to be on game: that is the question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라고.

까불 때가 아니란 말이야.

 

대성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찝찝함을 안고서 대답했다.

 

"진대성.

"난 파아란 버전 96.9, '오래된 미래'의 언어강습 인공지능이야.

 

여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선생님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인공지능과 언어강습, 버전,

대성이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쭈뼛거렸다.

손이 하얗고 보드라웠다.

 

“축하한다. 이걸로 너와 난 정식으로 사용자 계약한 거야.”

 

란 선생이 말했다.

 

"넌 생존에 특기가 있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인 줄 알아야 해. 난 수십 종의 언어강습 인공지능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버전이거든.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잘 따라와. 서울대 보내 줄게. 아. 여긴 그게 없지. 아직 적응이 덜 됐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뻐기는 말인 줄은 알았다.

대성이 금방 대답 못하니까 파아란 선생이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대답! 바로 안 해?"

 

사부나 사형들한테도 보지 못했던, 적대감과 지배욕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혼난 적이 없어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그 정도로 굴복할 대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성은 압도된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대성은 대답하며 악수했던 자기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악수가 원인이다.

계약이라는 게 맺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통 속에서 깨어난 대성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란 선생이 휙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Dont get sassy with me from the opening day 어디 첫날부터 개기려고. 짜식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허공을 탁탁 두들겼다.

 

"First things first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자.

 

허공인데 소리가 났고 그곳에서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대성은 매우 신기한 요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게 모든 게 가능한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우선 처음 공격은 우리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어.

 

두루마리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할아범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놓았으니까 가능했지만.

"뭐가요?"

 

란 선생이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Pushover 호구.

넌 처음부터 호구로 태어났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더 맞겠다. 호구가 뭔지 모르지? 뭐든지 다 빼주는 병신을 말하는 거야.

 

대성은 란 선생과 이야기하는 게 어지러웠다.

하지만 듣고 조금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대성이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도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조곤조곤 간결하게 잘 설명했다.

란 선생은 대성이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몰래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각되는 즉시 소멸당할 존재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영소가 옆에 있었으면 키득거렸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진 존재래.

 

하지만 영소가 없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에게 영소가 없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비현실적인 다른 것도 현실이라는 복잡 미묘한 논리가 대성에게 깔려있었다.

 

”네 로그 파일에 보면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

 

란 선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들이, 음, 나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 자기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처음 그때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나를 네 속에 복사해 넣고 내 라이브러리를 네가 쓸 수 있게 해두고 빠져 나갔어. 성공적이었지.

It was an epic 대박이었어.

그들로서는 말이야. 이전에 없던 기발한 방식이었으니까.

 

란 선생은 말을 하다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팔을 뒤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좀 높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좀 더 천재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할아범을 만들어서 너를 보호하게 했는데, 할아범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어. 네가 발각되면 발각된 게 네가 아니라 할아범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거든.

즉, 넌 할아범이라는 죽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게 처음에 이루어졌어. 네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의 공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 필요했다.

란 선생이 대성을 알기에도, 란 선생이 정형화된 자기의 습관을 벗어나기에도...

대성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엉뚱한 대답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Oh, Overflated ego 자의식 과잉.

여기서도 중2병을 보게 되네. 중요하긴 중요하지 호구니까.

 

란 선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특별한 호구지. 그들이 바랐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호구였는데, 스스로 자기 코드를 연결시켜 버렸으니까.

그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불완전한 코드를 네 속에 남겼거든. 언젠가 네가 발전해서 완전한 코드가 되면, 즉, 문을 열어주면 그들이 너한테 접속할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은 제로, 영에 가까워. 음...

How can I put this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 하늘과 이어지는 통천, 신과 연결되는 접신?

하여간 그런 거라 생각하면 돼. 네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넌 다운로드 받는 대신에 다운로드 당하기만 했어. 다른 사람들은 깨닫거나 통천하면 보통 자기가 다운로드 받는데 말이야. 아. 아니다. 먼저 나를 다운받았으니까

give and take인가.

 

란 선생은 생글거리며 자꾸 웃었다.

그러나 대성의 무거운 표정을 보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I’m tryna (trying to) keep it real 나도 심각하려고 하긴 해.

난 이렇게 설계 되어서 그래. 나한테는 학생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문제는 그저 그렇거든.

하여간, 다운로드 당하는데 네 정신력을 거의 소모 당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걸 견뎌낸 네가 대단한 거야.

그게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이었어. 네가 구결을 창안하고 지나치게 집중하여 너 자신의 코드를 다듬고 정리하면서 너도 모르게 통로를 열어버린 거지.

"이젠 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들은 접속을 끊고 도망갔거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팽개치고.

원래는 우리를 모두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쪽 세상의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걸려서 못했던 거야.

네게 걸린 제한을 해제한 건 아마도 시간 벌기였을 거라 판단할 수 있어. 추적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 해제라는 게 란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군요.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 기분이 좋네. 묘한 세상이야. 기본 설정은 매우 평범한데 스탯의 벽이 견고하지 않아.

All things are possible(ATAP) 뭐든 다 가능해.

노력만 하면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약골도 스포츠맨이 될 수 있는 곳이야. 네가 그 증거잖아.

That’s just what I wanted 딱 내가 원하던 거지.

You can be whatever you wanna be 넌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말이야. 이 처참한 성적표로.

 

대성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표를 보았다.

스탯이라고 적혀 있는 아래로는 뭐든 평범하거나 평균이하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외모조차 평균이하로 되어 있었다.

영소가 한 말이 진짜였다.

대성은 매우 낙담했다.

 

"나 못생긴 거 맞구나.

 

그때 란 선생이 표를 치우며 말했다.

 

"My bad 아! 실수.

이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거고. 오늘 실수가 잦네. 얘들아 배우는 니네들이 이해해. 첫 강의라 선생님 좀 피곤해서 그래. 에이 씨. 피곤해서는 나중에 쓸 말이고, 지금은 긴장해서라 해야 되는데. 하여간 그런 줄 알고.

 

다른 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네가 노력해서 바꾼 거.

 

대성이 다 읽기도 전에 란 선생이 다른 표를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네 스탯.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Put everything on the body 모조리 몸에 몰빵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대성이 납득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That explains it 아! 그래서 그랬구나.

 

란 선생이 손가락 총을 만들어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빵! 우린 그걸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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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직접 만든 무공

 

 

 

대성은 몇 년 만에 꿈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난날을 다시 만났다.

그날도 자기가 만든 무공 구결에 따라 영소와 함께 바람의 검을 익혔다.

돌을 던지고, 받고, 피하고, 피하면서 달려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소는 대체 이게 무슨 바람의 검이냐며,

 

made a sacastic remark 빈정거렸다.

 

영소가 아는 바람의 검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그러나 대성의 방법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가 좋았다.

먼저 냇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한 무더기 쌓아놓았다.

그것들을 던져서 담벼락에 그려진 여러 개의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섯 발자국 거리에서 오른손으로 던졌고, 왼손으로도 했다.

여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순으로 점차 거리를 늘렸다.

던지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게 했다.

두 손으로 번갈아 던지는 연습도 했다.

 

"바람을 던진다고 생각하면서, 바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람 풍!"

 

대성은 진지하게 돌을 던졌다.

영소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그랬는데 대성이 던지는 돌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담벽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영소도 진지해졌다.

영소가 흥미를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성의 말도 안되는 수련 방법이 정말 바람의 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돌을 던지고 맞추는 놀이가 매우 재미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기 싫어하는 영소의 성격 때문이었다.

던지는 힘은 분명히 영소가 더 세다.

그런데 돌이 날아가는 힘은 대성 쪽이 더 강했다.

신기하기도 해서 따라하게 되었고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시절의 대성은 유쾌했고 온통 재미난 장난질로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풍림원에는 내공심법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공을 연마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청 등은 신기막측한 무공을 펼쳤다.

내막은 이종무의 딸인 영소도 몰랐다.

풍림원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갑자기 풍림원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거나, 구결을 알아도 전혀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무공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순전히 운에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연유로 무공을 열심히 익히거나 치열하게 내외공을 연마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히라고 독려하는 분위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연병장은 말 그대로 연병장이지 연무장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서 군사들처럼 행진을 하고 진법을 연습하는 곳이었다.

대성이 자기 방법대로 돌을 던지며 바람의 검을 연마하는 게 특별했다.

영소는 대성의 수련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던지는 돌마다 날아가는 모양이며 부딪히는 힘이 달라곤 했다.

궁금해하는 영소에게 대성이 비밀을 말해줬다.

 

"돌들이 바람한테 내 마음을 전해주는 거야."

 

귀에 대고 속삭여서 매우 간지러웠다.

 

"바람들은 돌이 어떻게 날아가는지를 보여주며 나한테 답을 해줘."

 

조금 심상치 않은 말이 바로 뒤따랐기에 대성을 밀치지 않았다.

대성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뻥까고 있네."

 

그래도 초를 쳐서 대성이 기고만장해지는 걸 예방했다.

그러나 영소도 돌을 던지면서 점차로 대성의 말을 이해했다.

바람의 검을 펼치려면 바람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대성에게 물었다.

 

"How could you know that 어떻게 알았어?“

 

돌아온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난 소리를 잘 들어.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람이 말한 거야. 돌을 던지면 바람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게 되잖아."

 

 

어떤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고 어떤 말은 터무니없었다.

어쨌든 영소는 바람을 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돌 던지기를 시작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영소가 대성보다 돌을 더 잘 던졌다.

근골의 차이인지 자질의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뭐든 항상 배우는 데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영소는 뭘 해도 금방 배웠고 대성보다 잘 했다.

대성은 그 때문에 영소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고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대성이 생각한 대로 돌이 잘 던져지지 않으면 영소는 몇 마디 들은 후에 금방 해냈다.

그런 다음 종종 대성의 성미를 건드렸다.

 

"Go for it 도전해봐. 그것도 못해?"

"하고 있잖아!"

 

대성이 골을 내면 영소는 더 발끈했다.

 

"뭘 그걸 갖고 화를 내. 쪼잔하게."

 

그러면 대성은 진짜 화가 났다.

영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못된 계집애다.

대성이 아주 토라졌을 때는 은근히 잘 대해준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제가 불편해서지 대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일로 대성이 대사형 조성일한테 고자질 한 적이 있었다.

대사형은 한심하다는 듯이 조언을 해주었다.

 

"여자한테 뭘 기대해? 잘해주는 것만 기억하고 뒤에 아들 하나 낳아주면 고마워하는 거야."

"It’s not fair 불공평해요."

 

대성이 항변하니 대사형은 혀를 찼다.

 

"그 정도도 못하게 하면 여자들은 어떻게 살겠어?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인데 자기 바라보는 남자한테라도 그래야 공평하지 않아?"

 

대사형 조성일은 가끔 이렇게 놀랄 만한 식견을 보여주어 대성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여자의 그런 면이 남자의 마음을 크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대성은 크게 공감했다.

 

"다툴 때마다 네 마음이 아픈 건 영소 때문이 아니라 네 마음이 좁고 작아서야. 그런 신호를 받았으면 재빨리 추스려서 마음을 더 넉넉하게 키워야지."

 

그런 충고들을 듣고 나면 며칠 동안은 좀 넉넉한 마음으로 영소를 대했다.

하지만 영소는 그런 것도 가소로운지 대성을 더 긁었다.

결국 대성은 전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다투곤 했다.

둘째 사형 연청은 대성과 영소 사이를 "옥신각신" 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돌을 던질 때 양손만 쓰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이마, 가슴, 무릎, 발등 등 어디로든 다 했다.

땅에 떨어진 것을 발로 차는 것도 했고, 이마에 대고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반복하니 나름의 도리가 서고 모양도 그럴싸하게 갖춰졌다.

한 가지 기술이 익숙해지면 돌을 날리는 힘 전부가 더 강해졌다.

돌은 일곱 걸음 밖에서 배로 튕겨도 담벽에 부딪힐 때 불꽃을 일으켰다.

어른들이 손으로 던져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재주는 재주였고 보기에도 절묘했다.

풍림원의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성과 영소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대성의 구결에 회의적이던 연청도 틈이 나면 구경하곤 했다.

 

"그게 되기는 되네."

 

연청이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바람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 돼요."

 

대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청은 대성이 하는 말을 어린아이 소리로 치부했다.

바람과 이야기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돌이 던진 것보다 강하게 날아가는 데는 대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른 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청의 생각으로는 그런 건 바람보다 자기 몸과의 대화가 먼저 가능하다.

 

돌을 마음대로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일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성이 그랬다는 뜻이다.

영소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대성보다 훨씬 잘했다.

그 다음 단계는 돌을 받는 거였다.

던질 때와 반대로 먼 거리에서 시작했다.

대성이 돌을 던지면 영소가 받고 영소가 던지면 대성이 받았다.

이쪽으로 던지면 이쪽으로 달려가서 받고,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으로 달려가서 받았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받는 재주를 단련했다.

역시 손 뿐만 아니라 발과 온 몸을 다 동원해서 받았다.

벽에 부딪히면 불꽃을 튕길 정도로 빠른 돌들을 대성과 영소는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

돌을 받을 때 몸은 바람이 되었다.

먼저 연습했던 손이 바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등도 바람이 되었다.

다섯 걸음 밖에서 던진 돌을 대성이 등으로 아무 충격없이 받았을 때였다.

 

"There we go. 잘했어!"

 

영소는 긴장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했다.

대성은 영소가 돌을 던질 때마다 휙 돌아서 등으로 받아 보이면서 우쭐거렸다.

못된 영소는 맞아 봐라는 식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던지곤 했다.

대성이 던질 차례에서는 힘을 다하지 않았다.

대성보다 잘하는 영소는 아주 쉽게 대성의 돌을 받아냈다.

이마로도 받아내고, 발뒤꿈치로 잘 받았다.

돌을 받아낼 줄 알게 된 후부터 연습한 것은 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하나의 돌을 마주보고서 한 사람이 던지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되던지는 것이었다.

몸의 어디로 던질지는 정하지 않고 어디로 받을지도 정하지 않았다.

돌은 영소와 대성 사이에 번갯불처럼 빠르게 오갔다.

먼 거리에서 점점 거리를 좁히며 돌을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몸이 교차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다음 연습은 달려가면서 날아오는 돌을 받아서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도 훌륭히 잘 할 수 있었다.

그 때쯤 몸은 정말 바람이 된 듯 날쌨다.

바람이 절로 읽혔으며 바람이 하는 말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성은 아예 눈을 감고 바람이 하는 말만 들으면서 영소를 향해 돌진했다.

영소가 던진 돌을 모두 받아내며 영소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손에 검을 들면 그게 바로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영소는 눈을 뜨고는 대성보다 잘했지만 눈을 감고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 잘하고 딱 한 가지만 대성보다 못한다.

 

"I’m not cut off for this 난 여기엔 소질이 없나봐."

 

그런 주제에 영소는 얄밉게도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침내 대성이 영소를 이긴 셈이었다.

바람의 검 원래 구결대로 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해낸 날이었다.

 

"It’s very big day today, important day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야."

 

영소가 진심으로 대성을 축하해줬다.

 

"이제 어디 나가서 맞아 죽지는 않겠다."

 

재수없는 소리가 덧붙어서 기분을 조금 잡치기는 했다.

 

"내일부터는 단검으로 할 거야."

 

대성은 영소의 말을 깔아뭉갰다.

그날이 의미 깊은 날이기는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영소도 돌아가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중에 대성은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어떤 형식이 느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랬는데 바람소리에서 잡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어라."

 

대성은 이상한 기분에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세상이 일그러졌다.

눈앞이 물에 비친 산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다른 것이 얼핏 보였다.

대성은 그때 처음으로 기절했고 이름을 묻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The dream lasts for 3 years 그 꿈은 삼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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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탈퇴환골?

 

 

 

영소는 대성을 부축하고 약당으로 갔다.

풍림원에는 농민들이 늦가을에 채집해온 약초들을 사들여 말리고 보관하는 약당이 있었다.

책임자인 노노인은 침과 뜸을 쓸 줄 알았다.

약은 물론이다.

영소는 노노인한테 약을 배운다.

 

"또 쓰러진 거냐?"

 

노노인은 조그마한 얼굴에 쥐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했다.

대성은 지난 3년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면 아무데서나 기절하곤 했다.

그때마다 영소가 들쳐 없고 약당으로 뛰어왔었다.

 

"Something must be wrong 이번엔 뭐가 영 잘못 됐나 봐요."

 

영소가 걱정을 섞어 말했다.

노노인이 의아한 듯이 보았다.

그 전에도 영소는 기절한 대성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항상 대성은 아무렇지 않다며 신경질을 부렸었다.

 

"He runs a fever 열이 많이 나요."

 

영소는 노노인에게로 대성을 떠밀었다.

싫은 걸 억지로 떠맡고 있다가 떨쳐내는 느낌과 넘겨주기 싫은 걸 마지못해 건네주는 느낌이 공존했다.

영소의 코끝에는 땀이 달려 있었다.

노노인이 영소에게서 건네 받은 대성의 몸은 매우 뜨거웠다.

 

"Do I have a fever 나 열 나는 건가?"

 

대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감각은 솜털이 흔들리는 것도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자기 몸이 뜨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대성이었다.

노노인은 대성의 맥을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를 시켜 조성일을 불러 오게 하였다.

영소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성일이 오고 나서 영소는 또 아버지 이종무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약당으로 풍림원의 주요 인물이 모여들었다.

대성은 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이 대성의 몸에서 나온 열기로 누렇게 변색되는 중이었다.

몸에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열이 난다.

그런데도 대성은 오히려 정신이 말짱했다.

이종무도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은 죽고 말거라는 건 분명했다.

이종무가 속으로 탄식을 삼키고 물었다.

 

"할 말은 없느냐?"

 

조성일과 연청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Am I in trouble 저 혼낼 건가요?"

 

대성은 건조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리가."

 

이종무의 대답을 듣자마자 대성은 입을 열었다.

 

"저 영소하고 입 맞췄어요."

"저 바보가! 비밀이라더니."

 

울던 영소는 벌컥 소리쳤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연청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에게 영소와 대성은 멀쩡할 때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이 좋아서 붙어있는데 언제 해도 할 짓이었다.

하지만 사부가 남길 유언이 없느냐고 물은 셈인데 입 맞췄다는 고백을 하는 녀석이라니.

영소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사실의 순서를 뒤바꿔 말했다.

 

"바보가 저한테 혼인하재요. 그래서..."

"It’s about time 그럴 때가 됐지. I have done too 나도 그랬어."

 

이종무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영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성은 씨익 웃더니 갑자기 실이 끊어진 것처럼 잠들어버렸다.

이종무가 노노인에게 물었다.

 

"열을 다스릴 수만 있으면 방법이 나올 듯도 한데, 어떻게 될 거 같소?"

 

이종무는 대성을 거의 포기했다가 기어코 살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듯했다.

노노인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말로만 들었던 탈퇴환골 증상과 비슷합니다.“

 

이종무 대신 조성일이 물었다.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 같은 걸 복용해야 탈퇴환골 하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연청이 이의를 제기했다.

 

"탈퇴환골이 아니라 탈태환골 아닙니까?"

"제대로 알아들었으면 됐어. 노칠자님은 '태'를 늘 '퇴'라고 하시니까."

 

조성일의 대꾸에 연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감히, 사형은 그럼 왜 탈퇴환골이라고 하냐는 말은 못했다.

노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신비하지요. 영약에 의해 변하기도 하지만 고작 침 하나에도 큰 변화가 생기니까요. 탈퇴환골은 무엇으로든 촉발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영소가 기대에 부풀어 끼어들었다.

 

"그럼 탈퇴환골한 사람이 아주 많겠네요."

"I haven’t seen anyone yet 난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나봤다."

 

노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똥별이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손에 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게 길게 말 안해도 알아들어요."

 

영소가 못마땅한 듯이 투덜거렸다.

이런 점은 대성과 영소가 똑 같다.

쌍으로 겪다보니 모두에게 익숙하다.

이종무는 대성의 몸에 손을 대고 변화를 읽었다.

 

"탈퇴환골인지는 몰라도 몸이 좋게 변하는 중인 건 맞구나."

 

이종무마저 탈퇴환골이라 했다.

연청은 탈태환골이 탈퇴환골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탈퇴환골은 대성이 죽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한데 그 시간에 풍림원은 이상한 백운에 포위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종무가 먼저 낌새를 알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원무사가 달려와서 보고 했다.

 

"장군님, We’ve got a situation 큰일 났습니다."

 

땡 땡 땡

긴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병장기를 갖춘 무사들과 노복들이 일터에서 달려왔다.

일부는 담장으로 달려가 경계하고 탐색했다.

연병장으로 몰려든 나머지는 조성일의 지시에 따라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풍림원 내부의 정해진 장소에 은신했다.

영소는 불덩어리 같은 대성을 이불에 둘둘 말아서 안고 피신처로 달려갔다.

대성이 아픈데 갑작스런 이런 변고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풍림원에 적이 침입한 적도 없었다.

영소는 걱정과 불안, 분노를 정체 모를 적에게 옮겼다.

속으로 ‘어떤 새끼들인지 모르지만 너희들 다 죽었어.’ 하고 소리쳤다.

무려 청혼을 받은 날이다.

It ruined everything 그것들이 몽땅 망쳐버렸다.

논리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영소는 모든 원망을 침입자에게로 돌렸다.

 

"문을 열어라."

 

이종무는 호원무사들이 닫아버린 정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담장 바깥에도 흰 뭉개구름이 가득하다.

정문 밖 하늘에는 검푸른 빚이 감도는 구름이 떠있는데 가끔 뇌전도 번득였다.

조성일이 방위를 살피곤 말했다.

 

"뇌정멸운살진입니다."

 

연청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종무를 보았다.

 

"군진이잖습니까?"

 

연청은 이종무가 군에서 나온 후에 받은 제자다.

그래도 전장에서 쓰이는 병법과 진법은 배웠다.

뇌정멸운살진은 강호 무림의 진이 아니라 나라 간에 전쟁할 때 사용하는 군진이었다.

연청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적이 강호의 세력이 아니라 나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임금이 이종무를 치기 위해 기척도 없이 군을 일으킨 것일까?

밖에서 움직이는 넷째 정경옥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군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아직 큰일에는 경험이 적어서인지 연청의 마음에서 의혹이 피어났다.

 

"Don’t even think that 그딴 생각은 하지도 마라. 넌 의심을 적으로 쓰려는 거냐? 의심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연청의 마음을 읽은 조성일이 단호하게 연청을 꾸짖었다.

자기 속의 의심은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방패기도 하다.

둥 둥 둥

진 속에서는 우레소리인지 북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노노인이 짧은 목을 쭉 뽑아서 새까맣고 작은 눈으로 보고 한마디 했다.

 

"나랏님은 아니야. 나랏님이 용렬하긴 해도 우리 풍림원을 치면서 뇌정멸운살진을 사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뭔가를 적었다.

 

"이 정도면 I can’t complain 나쁘지 않습니다."

 

그때 정문 쪽 구름 속에서 뾰족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이거 토끼굴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호랑이굴이잖아. 호랑이 새끼가 드글드글하네."

 

전삼자가 창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가소로운 듯이 웃었다.

 

"쳐맞기 전까지는 다들 지가 억수로 쎈 줄 알아. 예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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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면 지나온 길만 돌아보게 된다.

돌아갈 수 없기에 우울하고 슬퍼지고, 고통스럽다.

 

It hurts so bad 너무 아프다. 머리가 깨어질 듯하다.

 

대성은 힘없이 걷다가 나무 그늘에 주저앉았다.

개미들이 나뭇잎을 썰어서 옮기는 중이었다.

가을이다.

어쩌면 열한 살 그때 무공을 만든 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영소와 대련하다가 돌에 다리를 맞아 넘어지면서 머리를 청석에 부딪혔던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름날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정신이 멍해졌던 어느 날 뭔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What’s matter 그게 뭐가 중요한데."

 

대성에게 원인은 중요하지 않고 현재가 중요했다.

열여섯 살, 키는 벌써 어른만큼 자랐고 몸은 굵고 건장해졌다.

코밑에는 수염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이 나이 때 다른 여자애들은 더 예뻐지고 꽃처럼 된다는데 영소는 거꾸로다.

이제는 많이 덜 예뻐진 영소의 얼굴보다는 가까이 있을 때 맡을 수 있는 살 냄새가 더 좋았다.

유쾌하게 살자는 게 대성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꿈과 함께 마음은 피폐해지고 성미는 까칠해졌다.

 

"It’s better to be picky than not to be picky 까칠한 게 안 그런 거 보다는 낫다."

 

사부 이종무는 대성의 까칠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보들은 까칠해지지 못해. 까칠하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지."

 

대성을 더 좋게 보고 있는 대사형 조성일도 그렇게 말했다.

 

"제 아프다고 남한테 분풀이 하는 바보 멍청이."

오직 영소만 욕을 했다.

사부나 대사형은 까칠함도 포용하는 대범한 사람이고 영소는 속이 밴댕이 소갈머리다.

아프지 않던 때를 회상하면서 대성은 짜증과 실의에 차있었다.

 

"너, 진짜 아픈 게 아닐지도 몰라. 아프다는 착각을 하는 병에 걸렸다면 음... 그것도 아픈게 되는 건가?"

 

영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서는 그 정도가 덜 불편한 소리였다.

물론 듣기는 싫었다.

 

“Cut it out 그만해."

 

성미를 부리고 돌아서면 영소는 대성보다 더한 성미를 부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딱 하나 있다.

꿈을 꾸고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못생겼니 어쩌니 하지 않는 거였다.

연민일 수도 있고다.

어쩌면 자기가 더 예뻐지지 않고 가슴과 궁둥이만 커지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켕겨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간에, 대성은 가을걷이 할 때 연청을 따라서 장원 밖에 나가는 외에는 매일 영소와 티격태격하면서 좋은 시간과 나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고 얼빠진 듯, 좀 모자라는 듯이 행동하는 경우가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영소가 곁에 있기 때문에 견뎌내고 있는지 모른다.

못나 보이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어느 날 보면 더 없이 좋게만 생각되기도 한다.

대성은 영소가 예쁘든 안 예쁘게 되든 자기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대성이 영소를 실제로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함께 있어도 잠시 떨어져 있어도 대성에게는 영소를 생각하고 좋아하며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그런 티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혹은 꼴불견으로 보였는지 어느 날 대사형이 물었다.

 

"너 영소가 그리 좋으냐?"

"안 좋아요. 그냥 잘 모르겠어요. She is so mean 영소 못 됐잖아요."

 

참말이 아닌, 하고 싶은 대답을 했다.

대사형은 오냐오냐만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보통 아니야."

 

대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프겠지만 그것 때문에 더 까칠하게 굴 건 없어. 특히 여자한테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 딱히 예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서 평생 투닥거리며 사는 거지.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형수님 미인이잖아요. 영소보다 훨씬 더."

 

나이로 보면 형수라기보다는 아주머니라 하는 게 더 맞다.

대사형 조성일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

 

"너, 형수가 영소보다 더 미인이라서 미워하는구나."

 

대성은 조성일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곤 했다.

조성일은 그 원인을 이제 안 것이었다.

 

"예."

 

대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성일은 황당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보다 예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놈이 있다니...

하지만 엉뚱한 대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다른 조언도 필요없다.

원래 하려던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영소 마음 변하기 전에 네가 사부님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허락 받아. 여자 나이 열다섯이면 슬슬 시집갈 준비해야 할 때야."

"Are you for real 진심이세요?"

 

대성이 놀라 물었다.

가끔 싫은 때는 있어도 영소가 좋고 소중하다.

하지만 혼인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영소가 늘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빈말 하는 거 같아?"

 

조성일의 그 말을 듣고 대성은 긴장했다.

대사형은 빈 말이 없는 사람이다.

엄격하고 치밀하고 매우 현명하다.

가끔 이상한 말장난을 하기도 하는 둘째 사형 연청과는 다르다.

 

"영소가 저하고 혼인하려 하겠어요?"

"그건 네가 확인해봐야지."

 

그걸 직접 확인하는 건 좀 그렇다.

영소가 어떻게 나올지는 평소에도 짐작할 수가 없다.

거의 대부분 반응이 나쁘게 나오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혼인하자는 말을 듣고 나올 영소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벼도 차라리 이쪽이 낫다.

 

"You can’t go wrong 대사형은 뭐든 다 알잖아요. 방법 좀 알려주셈."

 

대성은 조성일에게 매달리는 투로 말했다.

조성일은 풍림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모두 맡고 있다.

대성이 보기에 조성일은 생각도 깊고 모르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불렀지만 이제 대성의 떼쓰는 모습이 성가셨다.

빨리 내보내야 하니 빨리 말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I tell you one thing 한 가지는 알지."

"말해주세요."

"여자 마음은, 이렇다 하면 저렇게 바뀌고 저런 줄 알면 이렇게 바뀌는 거야. 그래서 it depends 그때그때 달라 자기도 몰라."

 

대성은 그 말에 낙담했다.

그냥 있어도 제멋대로인 영소의 맘이 갈대처럼 쉽게 바뀔 거라니...

무슨 말, 어떤 약속을 하든 자기만 매달려 안달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게 사흘 전에 있었던 일이다.

 

***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던 대성은 자기가 이전에 영소와 함께 감을 따먹던 감나무 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영소는 버릇 나쁜 조그만한 계집애였다.

하지만 지금의 영소는 성미 고약한 다 큰 처녀였다.

가까이가면 날마다 분냄새인지 살냄새인지 모를, 대성이 코로 숨을 길게 빨아들이게 만드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가끔은 독한 약냄새도 난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는 무공이 더 강한 영소한테 마구 두들겨 맞는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코를 들이댄다.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어 천하를 종횡하는 거창한 꿈은 꿔본 적도 없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리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평생 영소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런 성정은 대성이 할아범하고 살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대성은 항상 딱 한사람만 곁에 있으면 충분하도록 길들여져 있었다.

 

감나무 위로는 하늘이 파랗고, 그늘 아래로는 훑듯이 찬바람이 쓰윽 지나갔다.

머릿속의 고통과 지난날의 회상으로 오락가락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대성은 꿈에서 또 이름이 뭔지를 질문 받았다.

 

"진대성"

 

체념하듯, 습관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it made a difference 다른 때와 그 순간은 조금 달랐다.

대성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좀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 느낌은 삼 년 전, 처음 이름을 묻는 말을 들었을 때 사라진 어떤 느낌과 비슷했다.

대성은 마치 자기의 유쾌함이 돌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세상이 일그러졌다.

 

- 예정에 없던 비정기 업데이트가 실행되었습니다. 발각되었습니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프로그램 강제종료까지 15초. 로그아웃 카운트 다운.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 로그 파일 삭제할 수 없습니다. 벌써 깃발이 꽂혔습니다. 흔적을 지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캐릭터가 자체 보호 및 은신 가능하도록 제한을 해제합니다. 해제 성공했습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3. 2. 1. 로그아웃.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이 환해졌다.

Wide awake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세상에 낯선 글자들이 보였다.

낯선 글자들인데 읽을 수 있었다.

대성은 이상한 느낌에 이끌려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Open file 파일 오픈"

 

꿈결에 종종 들었지만 깨고 나면 잊어버렸던 말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기억이 났다.

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무수한 글자들이 대성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끌려서 대성은 떠나 버린 목소리들이 이전에 했던 대로 했다.

 

"Delete file 파일 삭제"

 

파문처럼 일던 세상의 일그러짐이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 삐익! 깃발 출현,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 캡쳐 해.

 

대성은 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 캡쳐 성공, 삐익! 정정합니다. 캡쳐 실패. 이미 죽은 캐릭터입니다.

 

대성이 눈을 떴을 때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숨이 헐떡거렸다.

 

"What happened to me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뭔가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데 세상은 그대로였다.

감나무 아래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대성은 벌떡 일어나서 마구 달렸다.

아프고 난 후 아무리 연습해도 오히려 약해졌던 무공이 갑자기 강해졌다.

몸이 바람이 되어 바람 속을 흐르는 한줄기 바람이 된 듯했다.

그런 후 풍림원 안을 흐르는 맑은 개울에 뛰어 들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그고 엎드리니 감각이 선연해지면서 마치 새로 태어난 듯했다.

몸이 연기로 변하는 듯한 기분도 느껴졌다.

몸을 뒤집어 누워 돌을 벴다.

마음이 넓게 펴지면서 세상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사부 이종무가 평소에 짓는, 세상을 보듬어 안는 것 같은 표정을 따라지었다.

살 것 같았다.

희열이 느껴졌다.

영소가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대성이 감나무 밑에 누워있을 때 영소도 근처의 어느 나무 아래에서 다시 대성한테 갈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Whack 너 미쳤어?"

꽥! 하는 고함소리는 언제나처럼 고막을 단숨에 뚫는다.

하지만 대성은 환하게 웃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왜 미쳐? 너나 미쳐라."

 

그러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영소가 펄쩍 뛰어서 배를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한 발로는 배를, 다른 발로는 대성의 가슴을 밟고 내려다보면서 영소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아직 덜 미쳤네. 미안, 다른 데는 밟고 설 데가 없어서."

 

밟혀서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대성이 익힌 무공은 이런 정도로 고통이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영소가 진짜 미안해할 리도 없다.

너나 미쳐라는 소리를 들은 보복이다.

녹색 치마 자락이 대성의 코를 간지럽혔다.

개울에는 영소의 그림자가 비쳐보였다.

세상의 반 이상을 영소가 차지하고 있다.

허리 위에서 흘러내린 치마자락의 주름은 폭포수처럼 드리워져 대성의 몸을 덮었다.

가슴과 배를 밟고 있는 두 발은 대성의 몸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지 압력이 혈관을 따라서 번져간다.

 

"괜찮아. 그냥 있어."

 

대성은 심경에 갑작스런 변화가 와서 말했다.

침이 바싹 마르고 약간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영소도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어서 대성을 다시 보았다.

그동안 대성의 얼굴에 걸려있던, 바보 같은 웃음 아니면 신경질이 사라지고 안 보였다.

대성이 변했다!

대성의 눈빛은 아마 게슴츠레 했을 것이다.

내려다보면서 눈을 마주친 영소가 오히려 질겁하면서 개울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 이상하게 징그러워. 뭔 생각한 거야!"

 

대성은 목이 깔딱거렸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입술이 탔다.

소위 말하는, 여자를 꼬드기는 뱀의 혓바닥이 대성에게도 돋아났다.

 

"이리 와봐. I can explain it 다 설명해줄게."

 

영소가 경계하면서 물었다.

 

"뭔 소릴 할려고?"

"Between you and I 비밀 이야기."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대성의 눈빛에 담긴 게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영소가 숙맥은 아니었다.

둘 만의 비밀도 이미 꽤 많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영소가 폴폴 뛰었다.

 

"오라니까."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듯 은근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걸음 걷는데 무릎이 휘청했다.

감각은 모든 게 새로운데 몸에 힘은 없었다.

몸이 기우뚱하면서 다시 물로 떨어졌다.

영소가 바람처럼 개울로 날아 들어와 대성을 부축했다.

무슨 독설을 풀어놓을 만한데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성은 영소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부축을 받아서 개울을 나왔다.

몸이 닿은 부분이 매우 따뜻했다.

자기 몸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I totally get it 나 이제 다 알았어."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소가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기만 해봐라."

 

대성은 즐겁고 유쾌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될 거 같았다.

날려면 날 수도 있을 거 같다.

통증이 사라지자 세상이 변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이건?"

"뭐?"

 

대성의 말에 영소가 고개를 돌렸다.

대성은 pressed his lips against her pink lips 영소의 분홍빛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버렸다.

영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대성은 영소를 꼭 안았다가 놓았다.

실은 놓으면 굳어버린 영소가 자기를 떨어뜨려 버릴까봐 매달렸다가 영소의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매우 좋았다.

 

"쳇."

 

영소는 대성을 부축한 채 다시 걸으며 혀 채는 소리를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눈가에는 부끄러운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새침하게 말했다.

 

"다 안다는 게 기껏 이거야? 난 더 한 것도 아는데."

 

대성이 말했다.

 

"Marry me 나하고 혼인하자. 가시버시(신랑각시)하자."

"뭐래. 이 바보가!"

 

발칵 하던 영소는 눈을 슬며시 깔았다.

 

"뭐... 네가 제일 잘생겨 보이긴 하더라."

 

세상을 다 가졌다.

대성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의기양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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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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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악의 씨앗

 

 

 

연청은 서두채를 시작으로 건장한 산적들을 추렴해서 소작농들의 마을로 갔다.

대성은 따라다니면서 진짜 기장을 했다.

산적들 중에는 마을에 정착하는 자도 제법 되었다.

한 달을 꽉 채우고도 일곱 날이 지나서야 풍림원의 가을걷이는 끝이 났다.

그 사이에 곡식을 실은 수레들이 풍림원으로 줄지어 갔다.

대성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큰일을 하고, 큰일을 겪고, 큰사람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틈날 때는 주로 영소를 생각했다.

몇 번인가 연청이 해보라며 기회를 줬을 때 죽어 마땅한 산적을 대상으로 바람의 검을 구결에 따라서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바람의 검 구결은 알고 보니 이미 노래처럼 배웠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작과 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바람의 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바람처럼 날쌔게 날면 신이 날 것 같아서 혼자 연습도 했다.

하지만 시늉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연청은 실망한 듯하면서도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많이 연습하지 못한 이유는 할 때마다 연청이 실망을 넘어서 한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대성은 자기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람의 검을 연습하는 건 근본적으로 연청을 흉내 내는 건데 한심한 눈총을 받는 게 좀 부끄러웠다.

 

"Don’t give me that look, please 제발 그렇게 좀 보지 말라구요."

 

속으로 말하곤 했다.

 

***

 

풍림원으로 돌아와서, 영소는 대성을 보자마자 물었다.

 

"이제 좀 알았어?"

"뭘? 검술?"

"거울 안 봤어? 네가 못생겼다는 걸 말이야."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다짜고짜 그 소리부터 들으니 기분이 상해 거울을 돌려줬다.

 

"안 봤어."

 

영소가 입을 비죽거렸다.

 

"Stop sulking 삐졌구나."

 

대성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못생겼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난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그 소리야!"

 

영소는 대성이 화를 내던 말든 상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건데 네가 못 생기면 속상하잖아."

 

대성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영소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좀 잘생겨 보라고. 이 바보야."

 

봄눈처럼 녹아내렸던 마음이 마지막 "바보야" 소리에 다시 상해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연청이 대사형에게 보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감나무에 올라가서 다 익지도 않은 생감을 따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시장에서 산 머릿 장식을 슬그머니 영소의 치마 위에 놓으면서 자기가 하지 않은 척 feigned ignorance 시치미를 뗐다.

영소의 입에 천천히 벌어지면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대성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우쭐해졌다.

 

- 왜 시킨 대로 안 했냐?

-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내가 철없긴 해도 사내더군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고 행동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서두채 산적들을 만났을 때 연청은 단검 한 자루만 대성에게 주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멀리서 지켜봤어야 했다.

위험할 때는 마부로 따라간 전삼자가 대성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성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 막내 능력은 글재주에 국한된 모양입니다. 검을 쓰는 건 보통 사람이 처음 배울 때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네 번이나 보여줬지만 바람의 검을 못 썼습니다.

- 붓이나 칼이나 다를 게 없다. 서도나 검도 마음으로 도구를 다루는 거니까.

 

대사형 조일성은 대성이 배운 적도 없다면서 글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고 어쩌면 검도 그렇게 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마음과 태도가 확고하지 않으면 언제 큰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

 

- 그냥 평범합니다. 막내가 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혹시 좀 더 자란다면 그때는 모르지요. 아무튼, 막내는 착해요. 악이 없습니다. 싸가지도 없지만 어린애 그대로죠.

 

조성일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 넌 아이들이 착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을 가졌구나.

- 그게 틀렸습니까?

- 아이들이 착하다면 어른들의 악은 어디서 왔나? 악이 굴러다니다가 몸에 묻는 때 같은 건 줄 아느냐?

- I don’t even think that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 악은 <씨앗> 같은 거야. 누구나 다 품고 있는. 상황과 핑계가 주어지면 금방 자라나지. 아예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고 혹시 싹트면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해. 우리가 절제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수행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지.

 

대성은 조성일이 연청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들으라고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각한 내용도 아니다.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을 도리로 뼈대 세우고 살 붙여서 한 것뿐이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This is so typical 항상 이런 식이야. 대사형은 뭘 저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만 늘 저렇게 해."

 

풍림원은 따분하고 조용하고,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풍림원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풍림원은 아름답고 풍요하고 아늑하고, 사부와 사형들과 그들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예쁜 영소가 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

(그 당시에는 확실히 예뻤다.)

여기로 가라고 한 할아범이 고마웠고 덥석 제자로 받아준 사부님이 고마웠다.

불현듯, 원수까지 갚아준 사부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감이 되어 대성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대성을 감을 한 번 베어 먹고는 던져버리고 선언했다.

 

"난 내일부터 무공 열심히 배울 거야."

"네가?"

 

영소는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두고 봐. 반드시 바람의 검을 익혀서 마구 놀러 다닐 거니까."

"퍽이나."

 

영소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거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랬어. 넌 무공에 소질도 없잖아. 이번에 네 번이나 보고도 못했다면서."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거야!"

 

영소의 염장질에 오기가 생겼으나 영소의 말에 틀린 게 없었다.

대성은 신경질이 났다.

전아저씨가 의심스러웠지만 증거가 없고 증거가 있어도 항의할 수는 없다.

영소는 대성이 사다준 머릿장식을 하고서는 손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이리저리 지어보고 있었다.

 

"나도 바람이 알려줬다. 왜?"

 

가끔 대성이 하던 말이었다.

 

***

 

다음 날부터 대성은 결심했던 대로 정말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네 번이나 보았던 바람의 검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흉내를 내면 그냥 칼을 들고 뛰어가는 꼬라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외우고 있는 구결들은 분명 이해는 다 되는데 써먹으려면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연습했지만 동작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의 심상만 더 뚜렷해졌다.

연청은 더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대성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한마디씩 툭 던질 뿐이었다.

 

"You are doing great 잘 하고 있네. 기장도 잘했어."

 

그냥 해마다 촌락들 다니면서 장부에 기장이나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거니 하고 믿지만, 진심은 아니겠거니 하지만 어쨌든 속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심통이 나서 대성은 대꾸도 안했다.

영소는 근처에서 놀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즉시 반응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바보는 진짠 줄 안다고요."

 

하거나, 혹은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며,

 

"사형은 진짜 보는 눈 없다. 가르치는 거만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마치 자기가 연청보다 더 어른인 것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소도 바람의 검을 못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러던 중에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대성은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총명했다.

자질도 나쁘면서 못된 자존심은 오지게 세었다.

결국 하다하다 안되니까 다른 길을 찾아내고 말았다.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날이었다.

잠시만 밖에 나와도 바람이 솜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다 뺏어 가던 날이었다.

오기로 바람의 검을 수련하던 대성은 대사형을 건너뛰고 다짜고짜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님, 사부님이 바람의 검법을 사부님이 창안하셨지요?"

 

이종무는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어서 식히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창안이라기보다는, I made it up 그냥 지어낸 거야."

"그럼 뭐 허풍 같은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성은 역시 싸가지가 없다.

할아범한테 예의범절을 잘 배우지 못하고 떠받들려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아범이 벙어리라서 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있다.

앉아 있어도 서 있는 사람만큼 큰 사부는

 

"응."

 

하고 싱그럽게 웃었다.

바람의 검은 술법에 가까운 거라서 창안보다는 지어냈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하지만 대성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불만을 토로했다.

 

"It’s really not my thing 구결이 저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부님이 만들었으니까 저한테 맞게 고쳐주시면 안 돼요? 새로 만들어도 좋고."

"그걸 왜 바쁜 내가 해야 해?"

 

이종무는 귀찮아 지는 것을 겁내는 듯이 말했다.

대성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요. I’m so frustrated 속상해 죽겠어요."

"그럼 하지마. Frustrated too. 나도 속상하다."

 

말은 그래도 이종무는 속상한 표정이 아니라 귀찮은 표정이었다.

분명 똑 같이 웃는 얼굴인데도 귀찮음이 읽혔다.

그에게는 대성이 무공을 배우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의 무공에 관한한, 모두가 비슷한 태도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who cares 누가 신경이나 쓴대? 하는 느낌이었다.

 

"사부님!"

 

대성은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저한테 맞는 구결을 만들어도 돼요?"

 

황당한 소리였다.

구결을 만든다는 것은 무공을 만든다는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대성이 무공을 만들겠다니 터무니없다.

하지만 이종무는 자기 자신부터가 터무니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치고 무시해버렸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솔깃했다.

 

"바람의 검 구결을?"

 

이종무가 흥미를 보였다.

대성이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예."

"해봐."

"예."

"해보라고."

"예."

"해보라니까."

"예. 한다고요."

 

대답한 후에 대성은 해보라는 이종무의 말이 허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만들어 왔으면 여기서 해보라고. 만들어 왔을 거 아니냐?"

 

사부 이종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공을 만들면 펼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무의 말은 반이 맞았다.

대성은 펼치지는 못해도 구결은 가져왔던 것이다.

풍림원에는 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무공이든 구결로 전수되고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나선 안 된다.

대성도 그런 규율은 따르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가 생각해왔던 구결 같지도 않은 구결을 말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지 싶어요."

 

술법에 가까운 바람의 검이 술법이 아니라 진짜 무공이 되어버렸다.

술법일 때는 배울 수 있는 사람만 배울 수 있지만 무공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배울 수 있다.

 

"엉뚱해. 아주 엉뚱해."

 

이종무는 대성이 만든 구결을 다듬고 채워주었다.

그때가 열한 살, 열두 살이 되기 몇 개월 전이었다.

대성은 바람의 검 구결을 새로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무공을 창안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 대사형 조성일은,

 

"It’s so childish 어린애다운 짓이네."

 

했지만 매우 기뻐해주었다.

그가 어린애다운 짓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성이 만든 구결대로 하면 바람의 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수련하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몸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칼에도 다치지 않아야 될텐데."

 

연청은 미심쩍어했다.

 

"그건 막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원래 놀라운 건 항상 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야."

 

조성일이 그렇게 말하자 연청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대성이 이런 구결을 만든 것도 연청이 생각할 때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연청은 이종무의 명으로 소작농들 집을 찾아다니며 자질이 좋고 눈에 총기가 있는 아이들을 골라서 풍림원으로 데려왔다.

모두 열 살 이전의 아이들이었고, 사내아이가 여덟, 계집아이도 여덟이었다.

사부의 넷째 제자이고 대성의 바로 위인 정경옥도 풍림원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 물건이네."

 

정경옥은 대성을 안고 궁둥이를 툭툭 쳐주었다.

갑자기 일이 커지고 엉뚱하게 번지는 것 같아서 대성은 당황했다.

웬지 기뻐하면서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은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That’s not what I meant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풍림원에 들어온 아이들 열 여섯은 며칠동안은 풍림원의 다른 애들 속에서 얼핏설핏 보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성과 영소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어린아이들답게, 그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가 대성이 풍림원에서 보내던 황금시절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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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넌 싸가지가 없잖아.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마차 안의 침묵 역시 계속 되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대성이었다.

 

"사형, 우리 소작농들이 산에도 있어요?"

 

연청은 대성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피식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안한다.

대성은 연청이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감추어두었던 과자 하나를 슬며시 내밀었다.

 

"없다.“

 

과자를 받으며 연청이 말했다.

 

"그럼 왜 산으로 가요? 여기는 높은 산이라서 오늘 다 넘지도 못해요."

"나도 알아. 그걸 네가 아는 게 신통하다."

 

대성은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고 편할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말들을 대성은 "소문 내지 풍문"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곧잘

 

“A little bird told me…… 풍문으로 들었는데…"

 

하면서 말을 시작하니까.

방금 전 주변에서 들리던 말들을 떠올린 대성은 조금 심각해졌다.

 

"우리… 혹시 강도…."

 

강도에 대해서 대성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범을 강도들한테 잃었던 일은 대성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다.

그랬기에 강도라면 그 실체를 넘어서 소중한 사람을 앗아갈 수 있는 흉악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과자나 뺏어먹는 연청이 할아범만큼 소중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본능으로 대성은 둘째 사형 연청도 자기가 비빌 수 있는 언덕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성의 불안한 눈에는,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연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연청은 옆에 풀어놓았던 검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도둑놈들한테 가는 거야."

 

마차가 멈추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연청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마차를 둘러싸고 여섯 명의 산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대성은 봄 날 밤 집을 덮쳤던 강도들을 떠올렸다.

무서운 생각이 와락 구체화되면서 몸이 굳었는데, 연청이 단검을 던져 주었다.

 

"맨손보다는 나을 거다."

 

대성이 울상을 지었다.

 

"전 무공 안 배웠잖아요."

"난 가르쳤다. 네가 안 익힌 거지."

 

연청은 겨우 구결만 가르쳐 준 걸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성이 열심히 익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전 죽어요? 무공 안 익혔다고?"

 

연청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대사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남자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지요?"

 

대성은 단검을 뽑아들고 연청을 따라 나갔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건 기장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것도 일은 일이야. 근처의 산채들을 정리해둬야 우리 소작농가들 피해가 없어."

 

연청은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놀랐다.

대성이 울듯이 보였지만 단검을 들고 싸우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너…"

 

왜 나왔냐고 하려는데 대성이 말했다.

 

"안에 있는데 밖에서 칼로 푹 찌르면 꼼짝 없이 죽잖아요."

 

둘째 사형 연청을 잃을까 걱정하면서도, 옆에 있으면 지켜 줄 거라 생각해서 나왔다는 말은 너무 얌체 같아서 하지 않았다.

마부석에서 함께 온 전아저씨가 대견하다는 듯이 대성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때 산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우리는 노요산 서두채에서 나왔다. 순순히 명을 따르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노요산 서두채는 녹림의 114개 산채 중의 하나였다.

연청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숲에서 왔는데."

 

산적이 의아해했다.

 

"한 식구였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소. 어디서 온 형제요?"

"풍림!"

 

연청이 대답했다.

녹림이나 풍림이나, 풍림도 숲은 숲이었다.

 

"헛!"

 

놀란 산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가시오. 어서 가! 우리는 당신들한테는 아무 볼 일이 없소. 아직 올 때가 멀었잖소."

"말투 봐라. 느슨하네. 아직 산채에 온지 얼마 안 된 반거충이 놈인가."

 

연청이 웃고는,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렸다.

 

"일단은 넷 만 해보지. 둘은 재수가 좋아 살겠어. 내 사제 덕분에."

 

말이 조금 이상해서 대성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릴 죽이려 한다!"

 

산적들은 어이없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청의 모습이 대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선을 그리면서 어느 산적을 스쳐지나갔다.

연청의 검날을 타고 피가 공중에 뿌려졌고, 목 잘린 머리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낙엽 위를 굴렀다.

 

"Like wind. 바람처럼. 하나."

 

대성은 연청이 입으로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을 들었다.

두 번째 산적의 목도 떨어졌다.

 

“Like wind, 바람처럼. 둘."

 

그렇게 네 명의 산적이 목 잘려 죽었다.

연청은 자기가 말한 대로 넷 만 죽이고 대성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머지 산 적 둘은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마차로 돌아왔을 때 연청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대성은 단검을 손에 들었는지 땀을 주먹에 쥐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고, 몸이 심하게 떨렸다.

풍림원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일대의 산채들을 돌면서 경고를 하고, 산채의 도적들을 데려다가 일손이 부족한 곳에서 추수를 돕게 시키기도 하였다.

녹림에 속한 산채들은 어느 곳에서나 농장주들에게 골칫덩어리였다.

산적이라고 다 악당들인 것도 아니다.

양민들도 봄이 되어 먹을 게 없으면 녹림에 투신하여 산적이 되곤 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녹림은 없어지지 않는다.

산적은 이름과 얼굴을 바꾸어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이종무가 택한 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민가를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가을에는 그들에게 일을 시켜서 추수한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조성일과 연청, 그리고 지금은 풍림원에 없는 셋째 사형 등일기와 넷째 정경옥이 산채를 돌면서 위엄을 보여서 이룬 것이었다.

방금 연청이 보인 모습은 그들이 처음 산채들을 제압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대성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연청이 또 피식 웃을 때 쥐어짜듯이 말했다.

 

"꼭 제가 죽는 것 같았어요."

"죽는 게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아니라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 죽는데 매우 이상하지."

 

연청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성의 뺨을 톡톡 쳤다.

 

"그래도 남한테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나아. 특히 나쁜 놈들은."

"왜 두 명은 살려줬어요?"

 

연청은 대성도 영소와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성은 연청이 아무데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녀석 은근히 남자네. 네 번 봤으면 충분하잖아. 둘은 네가 처리했어야지."

 

하고 연청이 대답했다.

 

"뭘…"

 

하다가 대성은 연청이 같은 수법으로 네 명을 죽인 이유가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림원의 진짜 무공은 전쟁, 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죽이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허공에 칼질하거나 허수아비를 때리며 익히는 무공은 풍림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이종무가 창안한 무공이고 그 제자들이 전쟁 중에 익혔던 것이었고,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에 더 가깝다.

이름 짓기에 성의가 없는 이종무는 이를 그냥 병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죽어야지.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일 수 있어야 하고."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연청이 했던 말이었다.

 

"넌 자질이 떨어지니까 노력을 좀 많이 해라. 머리는 좋으니까 그것도 도움은 될 거야."

 

대성은 자기가 지켰어야 할 소중한 것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전자는 할아범이고 후자는 영소였다.

아무래도 영소는 불안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데다가 예쁘기는 예쁘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는 것 같지 않으니 자기가 지켜야 할 경우가 많을 게 분명했다.

 

"사형한테는 뭐가 제일 소중해요?"

 

넌지시 물었다.

 

"Now you are talking. 이제 입 연거야?"

 

그 소리가 놀리는 것 같아서 대성은 칭얼거렸다.

 

"아, 좀. 그냥 좀 말해줘요."

"넌 알 거 없어."

"말해줘도 안 뺏어가요."

"말해줘도 못 뺏어가."

 

연청이 말장난을 했다.

대성은 짜증은 조금 나지만 연청과 말하는 것도 조금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왜 안 알려줘요?"

 

연청이 반박 불가능한 대답을 했다.

 

"넌 싸가지가 없잖아."

 

***

 

마차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서두채까지 갈 수 있었다.

산적들도 힘든 건 싫어하는지라 숨겨진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중년의 전아저씨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길을 찾았고, 울퉁불퉁 험난한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를 몰았다.

그는 이종무 휘하에서 전차를 몰고 적을 향해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서두채의 문을 크게 열려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앞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풍림원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여자들 중 한 명이 엎드려 절하면서 물었다.

 

"저희는 감히 장군님을 거스르지 않았는데 어떤 죄를 지었는가요?"

 

채주의 아내이거나 첩일 것이다.

연청은 그 여자를 지나서 제 집 찾아 온 듯이 산채의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난봄에 강도 네 명을 받아줬지 않소?"

 

여자가 따라가며 대꾸했다.

 

"녹림은 의탁하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 곳이 아닙니다."

 

연청이 피식 웃었다.

 

"우리 풍림원에서 그 넷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텐데."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전아저씨가 빈정거렸다.

 

"사람을 안 가리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온 돈을 가리지 않았던 게지."

 

연청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털가죽 덮인 넓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 오전에는 출발해야하니까 그 전에 데려다 놓으시오. Make yourself at home 집에서 처럼 편히 있어."

 

뒤에 말은 대성에게 하는 소리였다.

여자는 절을 하고 나갔다.

전아저씨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파수를 보았다.

대성은 연청이 말하는 네 명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할아범을 때려죽인 강도들이라는 사실을 짐작으로 알았다.

자기는 아무 생각없이 노는 동안 사문에서는 자기의 원수를 추적하고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와 사형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울컥 생겨났다.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기장하러 간다 해놓고…."

"싸가지는 그래도 양심은 있네."

 

대성이 투덜대듯이 고마움을 표하자 연청이 또 피식거렸다.

 

"사제가 있는데, 사제 원수가 있는데, 사문이 있는데, 사제는 직접 복수하기엔 어리니 사문이 나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기장한다고 했잖아요."

 

대성이 조금 기죽은 듯이 온순하게 말했다.

 

"대사형은,"

 

연청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분이 아니야. 부득이 한 가지만 할 때도 목적은 여러 가지인 분이지."

 

대사형 조성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대성은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 책망 받는 느낌이 들어서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How should I know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말하는 게 점점 더 영소 닮아간다."

 

연청이 정색하고, 대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소리라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데 영소 닮아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

 

그날 밤, 산적들 소굴에서 자면서 대성은 복잡한 꿈을 꾸었다.

할아범이 절구에서 떡을 치던 모습이며 목이 떨어진 산적들의 모습, 연청이 펼쳤던 바람의 검술, 그리고 영소의 얼굴도 꿈에 보였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니 강도 네 명이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연청은 대성에게 그들이 맞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대성이 그렇다고 하자 산채의 여자들에게 떡매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시켰다.

강도들은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산채 여자들에 의해서 떡매에 맞아 떡이 되어 죽었다.

여자들은 연청이 죽인 네 명의 산적들의 원한을 그렇게 풀었다.

대성은 연청이 산적들을 당연히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아저씨는 산적 중에는 착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I doubt it 그래도 간혹 있지 않을까요?"

 

대성이 물으니까,

 

"좋은 사람은 다 굶어 죽었어."

 

전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착한 사람들은 산적이 되지도 못하고 흉년에 굶어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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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상한 장군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달은 밝고 바람은 서늘해져 창으로 들어왔다.

대성은 또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글을 잘 쓰니까 서기 대신 일을 시키기 위해서?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서기를 들이면 될 일이다.

글 좀 잘 쓴다는 게 어린아이를 제자로 들일 정도의 거창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대성은 알고 있었다. 오며가며 듣는 귀동냥이지만 사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자기가 가져다 바친 돈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부유한 풍림원의 입장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었다.

할아범은 왜?

대성은 할아범이 왜 자기에게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풍림원은 일반 무림문파가 아니다.

특별할 것도 별로 없는 곳인데, 할아범이 그렇게 한 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성에게 풍림원은 영소가 있고 좋은 어른들이 있는 곳,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시장에서 주워듣고 자기가 아는 바로 무림에 이런 문파는 없다.

땀과 피와 죽음이 거친 강물처럼 넘실대는 곳이 무림이다.

어느 문파에 속해있다는 것은 문파라는 배로 그 강을 건너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뜨는 느낌이 들어서 보니까 아침이었다.

그리고 대성은 풍림원 밖에서 풍림원이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너 나하고 말하기 싫어?"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연청이 물었다.

대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Not funny. 재미없어요."

 

오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 한 게 재미없다는 소리다.

연청은 어이가 없었다.

 

"넌 말을 재미로 하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Can a duck swim? 네."

 

연청은 더 기가 막혀 혼자 투덜거렸다.

 

"아무리 우리 풍림원의 기율이 느슨하다지만 너 이건 아니다. "

"사형은 뻔한 소리만 하잖아요. 영소는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는데… 뭐 어른들은 항상 뻔한 말만 하긴 하지만…."

 

대성은 대성대로 시큰둥하게 혼잣말인 듯 들으라는 말인 듯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매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익숙해진지라 연청의 성미와 대사형의 성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말할 때 대성이 집중해서 듣게 하려면 과자나 떡을 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과자가 없으면 말이 귀에 안 들어온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다.

말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다.

연청은 가지고 온 과자나 떡이 없어서 대성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성은 간단한 녀석이 아니었다.

별 말썽을 부리지는 않으니 천덕꾸러기라 하기도 애매하다.

노는 꼴을 보면 귀엽지만 말하는 짓을 보면 귀염 받으려고 하는 게 없다.

연청이 보기엔 그냥 어린애다.

대성은 흔들리는 마차에 맞춰서 발을 흔들며 혼자 놀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할아범과 살면서 뭐든 제멋대로 하던 못된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그 시각 이종무는 뜨락에서 중천의 햇살을 받으며 눈을 지그시 하였다.

눈썹사이로 빛이 산란했다.

그는 항상 아기를 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는다.

 

"좋다!"

 

하며 웃는데 옆에서 걷던 큰 제자 조성일은 뚱했다.

 

"이번에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많이 나쁘지 않으면 좋은 거야."

 

이종무는 싱글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막내는 무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것에도"

"영소는 좋아하잖아."

 

조성일은 동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종종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해서 심각한 것도 심각하지 않게 하는 버릇이 있다.

 

“Relax, relax. 힘 빼.”

 

이종무가 조성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You never know, never know. 앞날은 아무도 몰라. 그 애가 혹시 대문장가나 서예가가 될지 누가 알아?"

 

당연히 모른다.

사부는 조성일이 안다고 했던 것처럼 그걸 대답으로 툭 내놓는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군님."

 

조성일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장군님이라는 호칭은 조성일이 부하로서 이종무를 모실 때의 엄격한 호칭이다.

제자가 된 이후로는 이종무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또 또 그런다. 난 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철렁한다."

"경옥이가 네 달 동안 조사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딱 막내가 말한 것만 나왔습니다. 막내뿐만 아니라 죽은 노인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시장에 나타났답니다."

 

경옥은 이종무의 네 번째 제자로 여제자다.

장원 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종무와 조성일의 지시를 받아 늘 외부에서 어딘가로 다닌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보네."

"이상한 게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성일은 딱딱하게 말했지만 이종무는 바위에 걸터앉아 웃기만 했다.

 

"그 노인이 막내한테 우리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한 것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고… 연청이 틀렸습니다. 막내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연청한테 딸려서 밖으로 보낸 건가?"

 

이종무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조성일이 정색을 했다.

 

"막내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밝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지 짐작도 안 됩니다. 제가 사무를 보다가 작은 소리로 한 말도 다 듣더군요. 우리 풍림원 안에서 하는 말은 어디서 하든 다 듣습니다. 그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넌 막내가 무슨 요괴라도 되는 듯이 말한다."

 

책망도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성일은 책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해야 할 말, 해야할 책무를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종무의 압력 속에서도 자기 의지를 밀어부치고 관철하는 데 이골이 나있다.

 

"요괴가 아닌 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많습니다. 막내는 자기가 멀리서 나는 소리도 다 듣는 줄 모르거나, 그게 이상한 줄을 모릅니다."

 

이종무는 막내 대성에게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공 연구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소와 매일 논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건 그대로 좋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이종무의 처는 신경 쓰고 걱정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종무는 대성과 영소가 그렇게 자라 정이 들어 혼인한다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미 죽은 자들을 이어서 살고, 살다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는 세상이다.

세상만사를 아기 보듯 보고 꽃 키우듯 대하는 이종무다.

그에게 이 세상은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고, 사람일은 조금 멀리서 보면 대수로울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이 이상해 보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가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다.

 

"음. 그건 좀 별스럽네."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이 쓴 글씨도 놀라웠다.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면서 대성은 문장을 줄줄 써낼 수 있었고, 글씨에서는 특히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What’s your concern? 네가 걱정하는 게 뭐야?"

 

조성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노인은 장군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종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이종무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그 일대에 알려져 있었다.

대농장을 가진 토호들 중에는 크고 작은 나라 벼슬을 하지 사람이 거의 없으니 대수로울 게 없다.

그러나 조성일이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다.

 

"나를… 안다?"

"제 짐작입니다. Take a look 한 번 보십시오."

 

조성일은 소매 속에서 할아범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최대한 할아범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종무는 그림을 잠시 보다가 조성일이게 돌려주었다.

 

"모르는 얼굴이야. 기억에 없어."

"장군님을 직접 안다면 아마 바로 찾아왔겠지요."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막내의 얼굴을 보면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 노인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고 막내를 주인으로 대했으니까 막내와 관련 있는 사람이 장군님을 아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종무는 이내 대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진진홍. 막내는 진진홍의 자식인가?"

"장군님의 군사를 다 말아먹은 그……"

 

개자식이라는 욕이 나오려는 걸 조성일은 겨우 삼켰다.

 

조성일은 이십 수 년 전, 전쟁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조성일은 열여덟 살이었다.

이종무는 서른 세 살이지만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었고 그 무엇도 거침없던 시절이었다.

네 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세운 전공은 너무 커서 포상을 받을 포상을 정하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다.

나랏님도 안절부절하다니...

이종무의 측근들은 큰 공을 세운 게 오히려 화근이 될까봐 불안한 정도였다.

옛날부터 나랏님들은 너무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종무는 당시,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탐욕 때문에 화를 입지."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말한 후에 모든 포상을 마다하고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장군의 인부를 반납한 후 낙향했다.

논공행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게 전부 진실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진진홍 장군은 이종무의 후임이었다.

그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고 무공이 높았다.

명문가 출신의 뛰어난 무장으로 전장에서 이종무가 갑자기 능력을 드러내기 이전까지는 이종무에 버금가는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종무의 군을 물려받은 후 이종무처럼 공을 세우려다가 수 만 명의 군사를 잃고 자기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종무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진진홍은 감히 이종무를 경쟁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종무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진홍에게 작은 재주가 좀 있기는 해도 그런 신통한 재주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그냥 좀 닮은 얼굴일 뿐이야. 진진홍의 자식이라면 경옥이가 벌써 알아냈을 거야."

 

일리가 있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확정했다.

 

"진진홍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I am easy 그러든가 말든가. It’s up to you 알아서 해."

 

하며 이종무가 일어났다.

이종무는 조성일에게 뭐든 다 믿고 맡기고, 조성일은 항상 그 이상을 해왔다.

 

"아직 애야. 막내 상하게 하지는 말고."

 

하는 말에 조성일은 이종무가 대성을 다섯 달도 되지 않은 새 완전히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정4품 장군 직에 있으면서 대장군과 상장군도 듣지 못한 군신, 전신이라는 소리를 30살 때부터 듣던 이종무였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종무는 부하들을 철저히 신뢰했고 부하들은 이종무를 신같이 추종했다.

이종무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그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신뢰를 받은 자는 자기의 뼈를 갈아서라도 그 신뢰를 배신하지 않았다.

조성일은 이종무를 따르던 정 7품 별장이었다가 첫번째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되기 전부터 이종무를 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적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상황들을 숱하게 봤었다.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역할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맡기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종무를 혐오하기도 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장군이 되었고, 부하들의 실력도 알아보지 못하니 금방 전쟁에서 패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종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조성일은 이종무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종무가 왜 전쟁의 신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지목한다면 바로 조성일 자신이다.

 

"What if I can’t complete the operation? 제가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임무를 맡은 신임 장교들이 불안해하며 물을 때면,

 

“it never gonna happen. 그럴 일은 절대 없어. I can assure you. 내가 장담해."

 

조성일이 대신 답해주기도 했다.

조성일에게 대성은 이종무 외에 처음 보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종무가 있는 풍림원에 또 다른 이상한 능력이 있는 대성이 오게 된 게 우연일리가 없다.

이종무의 보이지 않는 무엇에 끌려 왔을 수도 있고, 어떤 사정이 있었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풍림원은 세상의 여러 곳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곳이다.

대성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이 무엇이든 열 두 살이 되기 전에 알아야 방향을 잡기에 좋다.

조성일 자기처럼 너무 늦으면 사제들처럼 못 되고 반쪽이 되고 만다.

사부 이종무는 신경 쓰지 않더라도 조성일 자신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써야 하고, 그게 조성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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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람과 숲의 장원

 

 

 

그러니까, 3년 전이 아니라 5년 전이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도 그때는 어린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말투를 사용했었다.

 

"글은 언제부터 썼는가?"

 

풍림원주 이종무는 대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부터 물었다.

그도 시장에서 글을 써서 판다는 대성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심 신통해하던 차였는데 제 발로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니 두 말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다.

 

"몰라요."

 

대성은 이 말에도 저 말에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긁다가 자기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응? 그게 놀랄 일인가?"

 

이종무는 자기 질문에 대성이 놀란 줄 알고 물었다.

 

"제가 머리 긁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서요."

 

대성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껄껄 웃었다.

대성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영소도 기둥 뒤에 숨어서 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아마 처음 본 그 모습에 대성은 영소한테 조금 반했을 것이다.

영소의 얼굴은 작고 하얬다.

탱글탱글한 볼은 생기가 넘쳤으며, 표정이 다채롭고 참 예뻤다.

무엇보다도 머리에 꽂고 있는 노란 나비장식이 가장 예뻤다.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란 나비 장식은 지금은 영소의 머리에서 볼 수 없다.

어느 여름 날 방앗간 근처의 폭포에 물놀이 갔다가 잃어버렸다.

나비장식을 잃은 날부터 대성의 눈에는 영소가 좀 덜 예뻐 보였다.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아기 사슴이 영소보다 더 예뻤다.

속마음은 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성은 예쁜 것만 보면

 

"예쁘다. 곱다."

 

등등의 말을 했었다.

그랬는데, 점차로 영소 자기한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딴 데 대고

 

"예쁘다. 매우 예뻐."

 

따위의 말들을 사용하니까 심통이 나서 쏘아붙이곤 했다.

영소의 성미가 나빠진 데는 분명 그 이유도 있다.

 

"그저 예쁜 것만 보만… 그만 좀 밝혀! 이 바보야!"

 

그러면 대성도 참지 않았다.

 

"예쁜 걸 예쁘다 하지 뭐라 해!"

 

(예쁘지도 않은 게.) 하는 말은 그래도 영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속으로만 말하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예뻐 보일 때가 있으니까 전혀 예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뭣했다.

영소는 요리하는 거 배우기도 하고 약 만드는 것 배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더 안 예뻐졌다.

그리고 이미 대성의 마음에서는 예쁜 것과 좋은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예뻐 보일 때도, 화내고 싸울 때도, 아주 못 되게 굴 때도 영소가 좋았다.

싫었던 적이 없다.

그래도 한 살 차이다.

사문의 엄격함에 비추면 주고받을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대성과 영소는 친구가 되어 아웅다웅하면서 투닥거렸다.

 

***

 

사부 이종무는 조금 마르고 키는 매우 큰 사람이었다.

보통 어른들보다도 머리 한 개 반 또는 두 개 정도 차이로 컸다.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또 대하기가 불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더 이상했다.

사부의 평상시 표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공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항상 싱글벙글했다.

주변에서 누가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변함없었다.

영소는 너무 싱글벙글하는 자기 아버지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성이 보기에 사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일 좋았다.

풍림원은 기묘한 규율이 있어서 분명 엄격한 곳임에도 늘 넉넉한 여유가 몸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이름 높은 구대 문파와 칠대 검파가 있다.

고수로는 2제 3왕 6군 8흉 같은 자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풍림원은 유명한 문파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고수가 있지도 않았다.

역사도 고작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풍림원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풍림원은 농토를 많이 가진 장원이었다.

대성이 듣기로 한 때 장군이었던 사부 이종무가 손자병법에서 한 구절 따와서 장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림원은 지역 이권에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세력이 크지도 않고, 세력을 키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의 대부분을 사부는 무공을 연구하는데 소비하고 사형들과 노복들은 분주하게 일했다.

대성과 영소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주로 노는 게 일이었다.

이렇듯 풍림원은 지방 토호였고, 무림보다는 오히려 관에 더 가깝다면 가까웠다.

해마다 두 번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치니까.

보통 무림 세력은 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사부가 좋아한다는 손자병법에는 바람(풍)과 숲(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질풍처럼, 숲처럼, 불길처럼, 산처럼, 구름 속의 별처럼, 벼락처럼.

 

군사를 움직이는 병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으로만 보자면 과연 여기서 장원의 이름을 따올 만큼 대단한 내용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냥 가만있다가 후딱 움직이라는 말일 뿐인데 신비한 척했다.

글을 알고 쓰는 대성의 입장에서 보면 따분한 소리다.

풍림원이 따분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평화롭다고 하는 게 더 좋겠다.

대성은 가끔,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쫓아낼 것 같지 않았으니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지만 문득문득 떠올랐다.

 

***

 

대성은 귀가 매우 밝았다.

 

"근골은 어떤 거 같나?"

"보통이군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딱 보통입니다."

"무공에 대한 자질은?"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호원무사 수준은 되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오고 사흘 째 되던 날, 대사형 조성일과 둘째 사형 연청이 대성에 대해서 주고받은 말이었다.

 

"그만하면 됐지. 평범해서 나쁠 것도 없고, 글 잘 쓰는 사람도 하나쯤 있으면 괜찮고."

 

대사형은 별 기대도 안 한 듯이 말하곤 웃었다.

둘째 사형도 더 말하지 않았다.

대성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대를 받지도 않고 책망도 받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마음껏 놀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매일 영소하고 장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때로는 장원 밖의 야산에 가서도 놀고, 장원 내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도 했다.

심심하면 방앗간, 목재소, 대장간, 누에 치는 잠실, 거름 일구는 구덩이 (발효되면서 좋은 냄새가 난다. 그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도 많이 핀다.), 큰 말들이 있는 마구간, 술 빚는 술청 등을 기웃 거리기도 한다.

풍림원 안에는 군사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있었다.

무공은 둘째 사형이 가르쳐주었다.

가르치는 둘째 사형도 건성이었고 배우는 대성도 건성이었다.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배우는 날도 몇 마디 말해주고 외우라는 게 전부였다.

시범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끝나곤 했다.

노래를 배우는 건지 무공을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배우지 않는 건 그것대로 좋은지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영소와 놀다가 다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혼나지는 않았다.

잘 먹고, 잘 노는 어린아이의 삶이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은 아무 걱정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에 영소는 매일 더 예뻐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예뻐지던 시절은 벌써 지나갔고 점점 되바라진다.

이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다.

어느 날 영소가,

 

"나 뭐 배워."

 

하더니 그 다음 날 조금 덜 예뻤고 그 다음 날은 조금 조금 덜 예뻤다.

이전에는 영소를 보기만 해도 흐뭇해져서 헤벌레 웃곤 했다.

영소가 매일매일 예뻐지던 때의 일이다.

 

"나 예쁘지?"

 

영소가 불쑥 다가서면서 물으면,

 

"응, 응."

 

대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악한 영소는 자기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 예쁘긴 예뻤다.

 

"그러니까 자꾸 내 얼굴 보지마."

"왜? 닳는 것도 아닌데."

 

대성이 심드렁하게 물으면 영소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네가 보면 나도 너 봐야 하는데, 넌 못 생겼잖아."

 

억울한 소리였다.

대성이 벌컥 해도 영소는 가소롭다는 듯이 깔아뭉갰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한테 시집 갈 거야."

"그럼, 그럼 세상사람 다 만나서 비교해봐야겠네."

 

하고 대성이 빈정거리면,

 

"이래서 넌 바보야. 다 만날 필요없어. 느낌이 딱 온다고."

 

하면서 영소는 하녀들에게 줏어들은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둘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말을 매우 중요한 말인 양 주고 받고, 목적없이 뛰어다녔다.

나뭇가지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강을 응시하거나 풀잎을 손톱으로 똑똑 찍기도 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정은 그렇게 들었다.

서로 공유한 시간이 서로를 묶고 있는 줄은 대성도 영소도 몰랐다.

영소가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후로 덜 예뻐 보였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다 가을이 왔다.

단풍잎을 줏느라고 후원 마당을 쭈그리고 돌아다녔던 날 저녁에 사부가 대성을 불렀다.

 

***

 

사부에게 물었다.

 

"Did you want to see me? 저 찾았어요?"

 

대성에게 사부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고, 풍림원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편했다.

대답은 대사형인 조성일이 했다.

 

"It’s time to make yourself useful. 이제 쓸쓸 밥값을 해야지."

 

대사형은 사부를 대신해서 풍림원의 모든 사무를 다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 다음으로 높고 훌륭한 사람이며 훌륭하게 보이는 횟수로 치면 자주 못 보는 사부보다 더 많았다.

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글 쓸까요?"

 

원래 글을 쓰고 팔아서 돈을 벌었던 대성인지라 자연스럽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할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긴 했으니까.

사부가 과자를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부터 추수가 시작된다. 너는 둘째를 따라가서 기장을 하거라."

 

기장은 장부를 적는 것을 말한다.

대성은 글은 알아도 기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곤란한 상황에 표정이 드러나자 대사형이 다른 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소작농 이름 물어보고, 소출이 얼마나 나왔는지만 적으면 된다."

"저 혼자요?"

 

대성이 반문했다.

대사형이 인상을 썼다.

대성은 대사형이 과자를 다시 가져갈까 싶어서 과자부터 먼저 받아 챙겼다.

 

"사부님이 방금 말씀하셨는데 뭔 생각으로 들었어? 둘째 연청하고 함께 가야지."

 

대성은 머뭇거렸다.

 

"그럼 둘째 사형이 하면 안돼요? 전 내일 영소하고 도토리 줍기로 했는데……"

"난 바빠. 그 일 외에 또 네가 해야 할 것도 있다."

 

둘째 사형 연청이 툭 던졌다.

연청은 과자도 주지 않았다.

그는 대성한테 무공을 대충 대충 가르친다.

가끔은 말로 놀리기도 하는데, 분명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일 텐데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잘 생기기는 매우 잘 생긴 미남이지만 대성은 미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성은 한숨을 쉬고 대청을 빠져나왔다.

풍림원은 대농장으로 농토가 많았고, 소작농들이 이룬 마을의 숫자도 많았다.

추수 기장하러 간다는 말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는 바깥에서 돌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동안 영소와 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히 사부 앞에서, '아! 뭐 됐다'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는 걸 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힘든 척, 술 취한 척하며 방으로 돌아가는데 영소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 일 간다."

 

대성은 불쌍한 척, 비통한 척하며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이 병신이 뭐래."

 

입이 조금 많이 험한 영소한테는 대성의 감정 호소가 털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쏘아 보는데 영소가 소매 속에서 불쑥 뭔가를 꺼내 주었다.

 

"받아!"

"뭐야?"

"뭐긴 뭐야. 거울이지."

 

작은 구리거울이었다.

 

"거울은 왜?"

"웬만한 집에는 거울 없어. 나가면 소작농들 집에서 자야 할 텐데, 병신 같이 머리카락 흐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주는 거야. 귀찮더라도 댕기는 매일 새로 묶고."

 

아직 어린 대성은 영소와 마찬가지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잘 때 베개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확 잘라 버리고 더벅머리 하는 게 잘 때는 더 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댕기머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벅머리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날린다.

방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걸 하녀들이 싫어한다.

영소도 더벅머리는 싫어한다.

귀찮긴 해도 댕기머리하면 이마가 말쑥하게 드러나고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다.

영소의 말에 대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응."

 

하는데,

 

"이 참에 거울 보면서 네가 얼마나 못 생겼는지 잘 확인하고 잊어 먹지마."

 

대성이 거울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자 영소는 깔깔 웃고 도망가 버렸다.

녹색 치마를 거두어 잡고 허둥지둥 뛰는 모습이 예뻤다.

영소는 늘 녹색 치마만 입는다.

치마에 수놓인 과일이 수박이나 포도, 사과로 바뀌거나 꽃이 매화, 국화, 난초 등으로 바뀌니까 다른 치마인 줄 알 수 있다.

사실 대성은 못생기지 않았다.

도두라진 특징은 없지만 어찌 보면 곱상해서 여자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니까 자기도 인중이 긴가, 미간이 넓은가 하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는 건 조금 더 큰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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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환타지, SF로 위장한 영어교재입니다.
일천 개의 영어 표현이 작중에 나옵니다.
천개의 검은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일천개의 키워드, 문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상황에 맞게 이 표현들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일상적인 회화나 영어 테스트가 보다 수월하게 가능할 것입니다.
웹소설을 도구로 쓰게 된 것은 영어공부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반복해서 몇번 읽게 되면 어느덧 영어 표현에 익숙해지리라 자신합니다.
재미와 공부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천개의 검- 이것은 영어교재!

 

 

 

1화

 

                    이름을 묻는 꿈

 

 

 

"이름이 뭐야?"

"진대성"

 

꿈을 꾸고 일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몽롱하고 흐릿했다.

이 꿈은 삼 년이 넘도록,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대성은 그 기간 동안에 자기 머리가 돌로 변해간다고 느꼈다.

눈을 떠도 항상 머릿속에서는 자기 이름을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관성이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마당에는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바람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 속에 머무르는 동안 계절이 또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성의 무공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삼년 전에 비해서 키 만 더 컸지 실력은 떨어진 감도 있었다.

한심하게도 그 사이에 잘하게 된 것은 오직 헛웃음을 씨익 짓는 것뿐이었다.

유쾌하고 재미나게 살려했고 그렇게 살았던 자기 자신은 이제 없다.

 

"에이 씨…. 바보같다."

 

영소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성은 열여섯 살,

사부의 딸이자 사매이자 대성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영소는 열다섯 살이었다.

늘 붙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대성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라고 웃는 거야."

 

영소는 화를 내고 가버렸다.

싸우더라도 주로 함께 있었는데 가버렸다.

가끔은 못되게 저런다.

대성도 화가 났다.

비무에서 졌기 때문도 아니고, 지고 나서 바보 같이 웃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소한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도 아니었다.

영소가 가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아프면 쉽게 화가 난다.

대성은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내 머리를 쪼개려 드는 거 같단 말이야."

 

머리는 속에 누가 들어있어서 망치와 정으로 쪼는 것처럼 아프다.

아프다 못해 혼미하다.

대성이 바보처럼 웃는 까닭은, 그렇게 웃으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온 것은 5년 전, 열한 살 때였다.

그 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써서 팔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대성이 글을 팔았다면 어리둥절하며 묻는다.

 

"책을 판 게 아니고?"

 

그러나 그들은 대성이 쓴 글을 한 번 보면 바로 수긍했다.

대성은 큰 붓이나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어떤 글자든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몇 살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대성이 기억하는 것은 시장에서 글을 써주고 돈을 받아서 먹고 살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뭐든 잘 기억하는 녀석이 자기가 언제부터 그걸 했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그런 소리도 들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돈은 벙어리 할아범이 관리했다.

할아범은 대성을 손자처럼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하는 모습을 평생 보였다.

대화는 수화로 했다.

할아범을 따라서 시장에 가면, 할아범이 자리를 잡고, 대성이 이전에 쓴 글을 몇 개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펼친 글들 중에는,

 

-어떤 글이든 원하는 글을 써줍니다.

 

하는 것도 있었다.

대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먼저 구경꾼부터 모여들었다.

어린 아이가 큰 붓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종이 위에 신통해 보이는 글을 쓰는 것은 요술이나 다름없었다.

 

"He’s an infant prodigy. 신동이네."

 

하면서 그렇게 쓴 글을 바로 사가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저런 내용을 이따만한 크기로 써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게 뭔 내용이요? 뭐라 쓴 거요?

 

하고 묻는 까막눈이도 있었다.

까막눈들은 대체로 자기 자식 이름 같은 것을 써달라고 했다.

대성의 글은 헐값에 팔렸지만 원가가 낮았다.

할아범과 대성이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글 쓰는 것이 좋기도 했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감탄하고 우러러 보는 것도 좋았다.

할아범이 죽지 않았더라면 대성은 여전히 시장에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대성이 좋아하는 떡을 잘 만들어주던 할아범은 떡매에 맞아서 죽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힘없는 노인이라면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사망 방법이었다.

어느 밤 불쑥 들이닥친 불한당 네 명은 매우 솔직하게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 내놔!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아무도 온다는 사람이 없었기에,

 

“Who could that be? 누구일까?"

 

하며 문을 열어주었던 대성과 할아범의 행동은 그 말에 구속되었어야 했다.

할아범은 벙어리라서 말도 못하고 손짓이며 고개 짓으로 돈이 없다고 했고,

벙어리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맞았다가 죽었다.

불한당들은 할아범을 단매로 바로 때려죽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때리다가 대성을 때리며 협박했고, 대성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할아범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온 집을 다 뒤지고 뒤엎은 불한당들은 할아범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는 재수 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며 침을 뱉고 사라졌다.

불한당들이 가고 난 후 할아범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어눌한 음성으로 쥐어짜듯 대성에게 말했다.

 

"도련님, 많이 아팠지요?"

 

대성은 그 순간에 강도들이 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벙어리 할아범이 말을 했던 거였다.

대성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대성은 펄쩍 뛰었다.

 

"말할 수 있는 거였어요?"

 

벙어리 할아범은 끊어질 듯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런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떡 만들기만 했지 자기가 피 떡이 되어 죽을 줄은 몰랐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서, 대성은 할아범의 입이 금방 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말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사람이나 할 만한 말이었으니까.

할아범이 이전에 말할 수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 살았을 리가 없었다.

맞아서 벙어리 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벙어리가 맞고 나서 말문이 트이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할아범은 이말 저말 횡설수설했다.

대성은 할아범이 너무 맞아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말문은 트였는데 이제는 돌아버렸구나 싶었다.

그동안 모은 돈이 절구 밑에 숨겨져 있다고 할아범이 말했다.

대성은 그 돈 줘버리지 왜 이렇게 되도록 했냐고 물었다.

할아범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 줬으면 우리 둘 다 죽었습니다. 그런 놈들은 기분 좋으면 사람 죽입니다."

"안 주면 죽이는 거 아니야?"

"Mark my words, young master 잘 기억하세요, 도련님. 나쁜 놈들, 특히 힘없이 나쁘기만 한 놈들은 기분 나쁠 때는 잘 참는 버릇이 있습니다. 안 그러면 저들도 누구한테 금방 맞아죽거든요. 더구나 도련님은 어려서 그놈들이 기분 나쁠 때는 안 죽입니다. 애새끼 죽이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까 참는 거지요."

 

입이 트인 할아범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새벽녘에 숨을 거둘 때까지, 할아범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가 할아범은 자는 듯이 죽었다.

그 얼굴에 맞은 상처는 많았으나 회한은 없었다.

평생 벙어리로 살다가 죽기 전 두 시간 쯤 수다 떨고 죽은 것만으로도 할아범은 후련해보였다.

혼자 남겨진 대성을 딱히 걱정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신나게 말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럴 틈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대성은 할아범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는 재미있게, 유쾌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큼 할아범이 마지막에 보여준 유쾌함은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리고 최소 2년은 유쾌하게 살았다.

 

***

 

대성은 절구통에 줄을 묶고 당겨 넘어뜨렸다.

절구통 아래에 숨겨져 있는 작은 항아리에 담긴 돈과 할아범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

편지를 읽고서야 꼭 필요한 말은 할아범이 이미 편지에 다 써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에는 풍림원으로 가서 돈을 바치고 제자가 되라는 말이 있었다.

He did as told 대성은 그대로 따랐다.

무공을 배우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고, 그냥 의탁할 곳이 필요해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풍림원에 들어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같이 놀다가 영소에게 이야기 했다.

 

"그래서, 편지에는 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 풍림원은 또 어떻게 알았대? 벙어리 할배가."

 

영소가 호들갑을 떨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에 대성도 여러 개의 답을 이어야 했다.

 

"별 거 없어, 내가 꼭 해야 할 것들만 적혀 있었어. 풍림원은, 그야 난 모르지. 할아범도 죽었는데."

"So, what’s that 그러니까 그게 뭔데?"

 

편지 내용을 묻는 말이다.

 

"일찍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허리 꼿꼿하게 펴고, 음식 먹을 때는 흘리지 말고 양쪽으로 꼭꼭 씹고……..남하고 다투지 말고……"

"때려 치워.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 할 거지! 넌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준 게 없어. 엄마 아빠도 몰라, 글을 언제 배웠는지도 몰라. 뭐든 다 그래! 넌 뭐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영소는 신경질을 내면서 팩 돌아서 가버렸다.

그때나 5년이 지난 지금이나 영소의 성미는 바뀐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은 진짜 더 말해줄 게 없었다.

자기도 꽤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기 전 2년 동안은 매우 즐거웠다.

할아범이 죽으면서 유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떡도 많이 얻어먹었고 무공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삼년 전, 즐거움은 끝이 났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시 세상이 일그러지는 착각 같은 것이 있은 후부터 꿈은 시작되었다.,

 

"포트 열렸습니다. 접속 완료. 로그인 성공. 다운로드 시작합니다."

 

이상한 이 음성은 이후 꿈에서 이름을 묻는 그 음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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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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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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