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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맹정(斷指盟情),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강미루는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녹지 옆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을 헤치고 흙을 조금 파내자 접혀진 남색 옷자락이 보였다.

강미루는 잘 접은 남색 옷을 두 손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백남빈의 머리 옆에 놓았다.

세상 모든 일이 바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남빈의 가슴과 코에 손을 대보니 형부의 말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가람이 보고 있음에 불구하고 백남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가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광평검법은 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형의 기운인 광평기(廣平氣)를 뿜어내어 상대방을 팔방(八方)에서 압박한다.

그런 후에야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상대방을 검으로 쓸어 베는 것이다.

일검을 교환할 때 신가람의 광평기는 팔방에서 백남빈을 압박하여 들어갔었다.

그러나 백남빈이 펼쳐낸 미녀각기검에는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자검결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가람의 광평기는 사자검으로 펼친 백남빈의 미녀각기검법에 휘말려 방향을 바뀌었고 검의 진로도 틀어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백남빈의 검에서 예리한 검기가 긴 나선형을 이루며 폭출되어 나왔다.

미녀각기검의 나선형 검기는 날아드는 동안 수없이 궤적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디로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같아서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백전노장답게 신가람은 순간적으로 둔형보(遁形步)를 펼쳐 땅에 스치듯이 하여 백남빈의 뒤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매자락은 백남빈의 나선형 검기에 베어져 허공으로 날렸다.

동시에 신가람이 둔형보를 펼치며 다시 내뿜은 광평기에 백남빈은 심맥을 다쳤던 것이다.

신가람이 수 십 종의 검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백남빈의 미녀각기검을 깨뜨릴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백남빈에게 패할 리야 없겠지만 일초에 그를 제압한 것은 다분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젊은 무사의 검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말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신가람의 눈에 강미루가 백남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들어왔다.

마음에서 살기가 꿈틀거렸으나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인물!"

강미루는 형부가 안타까워하며 백남빈을 높이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백남빈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서며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 형부는 영웅이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가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하여 강미루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부탁만은 꼭 들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는 강미루의 고집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치 강하다.

죽겠다고 결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신가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들어는 보자구나."

"이곳에는 설청묘라는 야생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늘 갖고 싶었지만 우리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답니다. 형부가 그 고양이를 잡아 주기만 하면 두말 않고 따라 가겠어요."

신가람은 창평곡을 쭉 훑어보았다.

잘해야 만평 남짓인 곳에 숨어 있을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이 귀여운 말괄량이 처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우리가 전에 있었다는 보금자리를 찾아가 보았으나 옮겨 버렸는지 눈에 뛰지 않았어요. 형부는 능력이 신선과 같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새인가 강미루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설청묘는 찾기가 어렵다. 잡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형부가 잡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올 리 없다. 그러면 저 사람은 그 사이에 정신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든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야 저 사람의 모습이 영영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눈물이 어리는 강미루였다.

신가람이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전에 있었다던 야생 고양이의 보금자리는 어디냐?"

미루는 북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 뒤에 있는 절벽 틈이었어요."

신가람은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숲으로 날아들어 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시위(示威)인 듯 했다.

 

신가람이 숲으로 떠나자 강미루는 즉시 백남빈을 품에 안았다.

사랑하는 임은 심하게 다쳐서 기절해 있는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스스로의 무능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녹지의 물을 생각해 냈다.

녹지로 달려가서 신발로 가득 물을 떠왔다.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자 물은 금방 우유빛으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물을 백남빈의 입을 벌리고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팔다리를 주물러 주자 백남빈이 마침내 눈을 떴다.

"당신, 아직 가지 않았군!"

강미루를 본 백남빈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열흘 전 백남빈이 한 청혼에 대한 답이 이제야 나왔다.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듯 했다.

"그 사람은?"

백남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강미루는 힘없이 북쪽 숲을 가리켰다.

"설청묘를 잡아달라고 했어요. 아마도 금방 잡아 오겠죠."

"미루, 우리 영원토록 잊지 맙시다."

백남빈은 격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제 가슴에 당신이 준 흔적이 남았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강미루는 가슴을 누르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백남빈은 그녀의 그 말에 죽음보다도 더 깊은 맹세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대의 형부를 따라 가시오. 언제고 반드시 대려장으로 찾아가서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하늘과 땅을 두고 피로서 맹세하오."

백남빈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사자검을 들어 강미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 첫마디를 잘라버렸다.

!”

순간 피가 튀고 강미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손을 마주 쥔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진심과 맹세가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신가람이었다.

그는 벌써 양손에 한 마리씩의 눈같이 흰 설청묘를 잡아 쥐고 기척도 없이 돌아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피로 물든 손을 놓고 일어섰다.

"소녀 강미루는 영원토록 당신만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신가람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보름 남짓 함께 지내면서 처제와 저 철령보의 청년무사 사이에서는 깊은 정이 생기고 말았다.

처제의 신세가 벌써부터 평탄하지는 않아보였다.

저 청년무사를 잊게 하는 방도는 가능한 빨리 멋진 사내를 찾아서 처제와 맺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진 밖에는 본장의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너를 찾아서 보름이 넘도록 돌아다니는 바람에 차질이 적지 않았다."

돌아서는 강미루의 손을 잡으며 백남빈이 품에서 하얀 옥패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강미루의 손에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표(情表)였다.

하지만 강미루는 살래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옥돌보다는 당신의 잘려진 손가락을 갖고 싶답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남빈의 피 묻은 손가락 한마디를 손수건에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남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우리가 떠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도록 해라."

신가람이 백남빈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백남빈은 그에게 악의를 품을 수 없었다. 신가람은 적인 자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법도를 갖고 대한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신가람은 그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많이 닮았어."

백남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알 수 없어 설핏 미소만 지었다.

강미루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골짜기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털어 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헤아리고 있던 백남빈이었다.

"삐이익!"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히히힝! 두두두!

흑왕이 옛 주인의 부름을 받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은 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서 흑왕의 등에 앉았다.

신가람 앞쪽에 앉혀진 강미루가 비명처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색상의(藍色上衣)! 남색상의를 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강미루의 말이 끝날 쯤 흑왕은 이미 동쪽 절벽까지 달려가있었다.

몇 번 흑왕의 모습이 바위들 틈에서 보였는데 다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미루는 신가람에게 이끌려 창평곡을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강미루가 떠나버린 창평곡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백남빈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가 떠나며 부르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꿈결인양 아스라히 맴돌고 있었다.

백남빈은 일어서서 동부를 향해 비칠비칠 걸어갔다.

잘려진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검의 전인이 된 후로 난 벌써 사랑하는 여인을 멀리 보내고 말았구나. 이것이 정말 사자검을 익힌 때문일까?)

정사초 사조의 한탄어린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자검의 전인의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도 나와 같이 사자검결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도 같은 신세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말 것이다!

 

백남빈은 조사동에 들어가서 여러 사조 앞에서 한바탕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 졌다.

감정이 풀어져 버린 듯, 어느새 낙천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가 되자면 마음을 다스리는데 백남빈해져야 한다.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툴툴 털어버리고 오직 호쾌한 마음으로 사자검을 휘둘렀다.

신가람과 대적하면서 백남빈의 검술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외고 있는 사자검결이야말로 절학 중의 절학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힘껏 뻗어도 그의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검기만이 폭출되어 미녀각기검의 방향을 따라 그물처럼 뻗어나갈 뿐이었다.

신가람과 대적할 때 미녀각기검이 광평기를 되돌려 놓지 못했더라면 백남빈 자신은 신가람의 검이 이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미녀각기검법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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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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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과벽의 밤

 

 

내가 하루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이 원시천존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현음마모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이검한은 믿기지 않는 심정이 되었다.

자신이 철익신응을 만나 곤륜산에서 대과벽까지 날아온 것도,

누란왕후 흑요설에 의해 화룡단정은 먹은 것도,

화룡단정의 열기 덕분에 흑요설과 서역사천왕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현음마모의 거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 의도한 대로라는 것이다.

원시천존은 정말로 현음마모를 통해서 초연심결이 이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검한 자신에게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원시천존은 물론이고 현음마모 역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던 분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검한은 원시천존과 현음마모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현음마모가 초연심결을 깨우치기 위해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이 엿본 하늘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

현음마모는 그 초연심결을 이십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이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원시천존이 남긴 고금최강의 무공 대신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십여 년 동안 쓰지 않고 축적만 한 덕분에 그녀의 내공은 정심해질 대로 정심해졌다.

초절의 경지에 이른 그 내공 덕분에 현음마모의 수명은 보통 사람의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현음마모는 오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초연심결의 이치는 깨우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읽은 천기를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에 현음마모는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장생불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원시천존에게서 전수받은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응용하여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이라는 술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빙백불훼대법은 이름 그대로 강력한 냉기를 이용하여 혼백과 육신이 훼손되지 않게 보전해주는 술법이다.

현음마모는 빙백불훼대법은 써서 길고 긴 잠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현음진기를 수련할 때 사용했던 만년한옥도 그녀가 육신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장구한 세월을 거스른 현음마모가 다시 깨어나려면 태양같은 열기를 품고 있는 사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음마모가 원한 대로,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검한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본녀를 통해 네게 초연심결을 전하려 하신 이유를 알려주겠다.

너의 시대에는 악마의 화신이 등장할 것이며 그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을 반드시 깨우쳐야만 한다.

이것이 스승님이 네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내가 당신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고?”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이검한은 아연실색했다.

설마... 설마 내가 태양천자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이검한의 머리 속은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현음마모가 남긴 이글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비록 스스로를 어리석다 자조(自嘲)했지만 현음마모는 여자들 중에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여인이다.

심지어 천기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가 허튼 내용을 남겼을 리 없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을 것까지 알고 계셨던 분이니 내가 태양천자의 먼 후손이라는 암시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천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철이 든 이래로 처음 자신의 출생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검한이었다.

(장춘곡으로 돌아가는 대로 누나에게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이검한은 생각에 잠기며 현음마모가 남긴 비급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월동문 밖에서 한 쌍의 눈이 벽을 투과하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물론 그 눈의 주인은 현음마모였다.

 

현음마모는 이검한의 몸속에서 들끓는 화룡단정의 힘을 빌어 부활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현음마모는 화룡단정의 기운을 갈무리 하여 이검한의 단전에 넣어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음마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이검한에게 허락해야만 했다.

비록 빙백불훼대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지만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물며 그 소년은 자신이 사랑했던 정인의 먼 후손인 것이 분명한데...

정신을 차린 이검한과 얼굴을 맞댈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음마모는 이검한이 깨어나기 전에 종유동굴을 빠져나왔었다.

(볼수록 사형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다.)

두자가 넘은 두꺼운 석벽을 간단히 투과하여 이검한의 얼굴을 살펴보며 현음마모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저 아이의 앞날에 숱한 파란과 우여곡절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와줘서도 안되고 간섭해서도 안된다.)

현음마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축복은 종종 고난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정인의 후손인 소년이 걱정되어 자신의 손으로 고난을 해소시켜주다가는 소년에게 주어질 더 큰 축복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현음마모가 읽은 천기는 이검한을 지켜보기만 할 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복이 많은 아이이니 역경을 잘 헤쳐 나가며 성장할 것이다.)

현음마모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돌아섰다.

(빙백불훼대법으로 잠들어 있었던 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보자.)

걸음을 옮기는 그녀 앞에는 문이 아닌 석벽이 가로 막고 있다.

스윽!

하지만 현음마모의 몸은 그림자가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듯 석벽을 통과하여 난장판이 된 지하광장에 나타났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내가 맺고 있었던 인연은 모두 끊어졌을 것이다.)

유사신령의 시신이 잠겨있었던 공청석유의 연못을 지나며 현음마모는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천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장생불로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사연과 인간들은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음마모 자신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혼자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무섭고도 슬픈 일인가?

(세상을 둘러보다 지치면 저 아이를 찾아와 의지하면 되겠지. 비록 수십 세대가 지났겠지만 저 아이가 사형의 후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스윽!

벽으로 스며들어가며 이검한을 떠올리는 현음마모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 * *

 

밤이다.

서역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

동서로 삼천여리나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가 적막 속에 마치 한 마리 용처럼 누워 있다.

서쪽 지평선으로 갈아 앉고 있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뿌리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액!

문득 서북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인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모직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금발뿐만 아니라 마치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윤곽으로도 소녀가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금발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

장한은 먼 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여기로군!”

대과벽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흑의장한은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포대붕!

 

신력(神力)을 타고 난 그는 서역 일대에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진 역사(力士).

서역의 여러 부족들이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르며 경원하는 포대붕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교숙하(喬淑賀)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철목풍이라는 자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교숙하를 납치한 그자는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납치의 대상이 된 소녀는 다름 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포대붕은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 대한 애정과 근심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철목풍이란 자의 협박을 모른 척 한다면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숱한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결국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다.

 

-철산산(鐵珊珊)!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비록 원()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로부터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같은 인간이라 해도 징기스칸님의 핏줄인 산산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포대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아내만 구해내면 소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철목풍을 쳐죽일 것입니다!)

포대붕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할 때였다.

흐흐!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선택을 했구나 포대붕!”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 대 중반쯤의 장한인데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청포장한의 눈동자는 쉴 새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얄팍한 입술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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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임청우는 발에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듯이 질풍같이 대안탑을 달려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일 때는 발끝에 힘을 불끈 주자 순식간에 뛰어 넘어 버렸다.

마치 바람처럼 대안탑을 내려온 후에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 저 저...”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해댔다.

 

임청우는 담장을 뛰어넘고 메말라 버린 화원을 뛰어 넘으며 자은사를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지.”

대안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까지 들어온 임청우는 나무 뒤에 몸을 붙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십 리는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 데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숨도 가쁘지 않다.

그러나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뱃가죽은 등에 붙어 혹시 위장을 삭혀버리지나 않을 까 싶을 정도다.

허기로 인해서 눈알이 팽팽 돈다.

(잘못 왔구나 잘못 왔어. 인가(人家)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임청우는 속으로 후회하며 나무열매라도 어디 없는가 싶어 살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그의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듯 하더니 무언가 싸늘한 감촉이 목에 느껴졌다.

!”

임청우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우연히 익힌 용조층층공으로 인해 그의 몸은 아주 재빨랐다.

그러나 임청우가 한 걸음을 채 옮기기 전에 다시 뭔가가 번쩍 하더니 그의 목에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슷!

임청우의 눈앞에 한 사람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임청우의 목에 닿아있는 것은 그 중년인의 검이었다.

푸른색 장삼을 차려입은 중년인은 삼척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손가락질 하듯이 검으로 임청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임청우는 중년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협 장백승의 절대적인 위엄과는 또 다른 것이 중년인에게는 있었다.

임풍옥수(臨風玉樹)의 용모와 입가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 맑은 빛을 발하는 눈은 서글서글한 봉목(鳳目)이었다.

백금(白金)으로 만들어진 눈부신 보검은 입고 있는 청삼(靑衫)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번 보기만 한다면 어떤 여인이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내놔라!”

청삼인(靑衫人)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음성이 마치 연인(戀人)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다감(多情多感)하다.

임청우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혈도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청삼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미녀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릴 때마저도 아름다웠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임청우는 남자가 찌푸리는 눈살도 그처럼 황홀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속에도 은연중에 위엄이 있고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빼어난 기상이 있는 난초(蘭草) 같은 사람이었다.

!

백금으로 만들어진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혈도를 튕겨냈다.

혈도는 칼집에서 빠져나와 삼장 밖에 있는 바위 속에 깊이 박혔다.

내놔라!”

청삼인이 다시 말했다.

백금검은 어느새 다시 그의 목에 붙어있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청삼인이 노리는 것이 바로 몽선도라는 것을 알았다.

혈도를 지니고 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달라고 부탁을 하면 몰라도 막무가내로 뺏으려 드는 사람에게 몽선도를 내놓기는 싫었다.

해서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물러섰다.

무슨 말입니까? 제게 뭘 내놓으라는 말인지...?”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놔라. 대안탑에서부터 너를 쫓아왔다.”

청삼인은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가 능히 웃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검주(劍主) 유소기(劉蘇起) 대협 아니십니까?”

청삼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유소기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말라는 엄포로 들렸다.

청삼인은 일왕일협삼괴칠절 중 칠절의 우두머리이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기를 쓰고 피하려던 바로 그 검주 유소기였다.

임청우는 유소기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찾으시는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그 두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검주 유소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비록 남다른 데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그에게 몽선도를 넘겨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몽선도를 넘겨주었다면 혈도를 주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강시놈에게 속은 모양이구나.)

휘익!

유소기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즉시 몸을 날렸다.

조호이산지계(鳥虎移山之計)!

소년으로 하여금 혈도를 가지고 도망치게 하여 자신을 유인한 후 그 사이에 두 놈은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죽이고 물건을 찾아보지 않은 걸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남의 것을 억지로 뺏으려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청우는 유소기의 몸이 다시 번쩍하더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대하고 좋은 사람은 좋게 대하면 되는 일이다.”

검주 유소기는 임풍옥수 같은 용모와는 달리 임청우의 가슴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으로 새겨졌다.

다짜고짜 상대방을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강도(强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청우는 바위에 박힌 혈도를 뽑아서 다시 허리춤에 끼웠다. 혈도의 무게가 근 이십 근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무거운 줄을 몰랐다.

() 안으로 들어가서 뭐든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배가 고프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제 그만 가려고? 남을 속이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던데...”

갑자기 임청우의 뒤에서 맑고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

임청우는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천천히 돌아섰다.

혈도가 꽂혔던 바위의 위에서 머리에 화려한 금장식을 달고 있는 예쁜 소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의(黃衣)를 입은, 얼굴이 손바닥만한 소녀였다.

그러나 뽀얀 얼굴에 보석처럼 빛을 반짝이는 눈을 가졌으며, 짓궂게 웃음 짓는 두 볼에는 볼우물이 패여 있다.

나이는 임청우와 비슷하게 보였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임청우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소저야 말로 대단하군. 검주 유소기를 감쪽같이 속였어. 그도 소저가 그곳에 있는 줄은 몰랐을 테니...”

소녀가 처음부터 반말을 했기에 임청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소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나도 그를 속였어. 이번 한 번만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백 번도 더 속일 수 있겠지. 하지만 넌 벌을 받아야 해.”

임청우는 자신의 눈앞에 누런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짝!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틈에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뺨을 때리고 다시 바위위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귀신처럼 재빠른 솜씨였다.

임청우의 어머니도 그를 때릴 때 빨랐지만 소녀의 솜씨는 기척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빨랐다.

황의소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게 반말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어. 그 사람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뿐이지.”

임청우는 입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켰다.

자기 또래의 계집애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짐짓 대범한 척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버릇없는 것을 자랑하는 계집애는 또 처음 보겠군.”

황의소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바보같은 자식이 제 신분 천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말을 함부로 하네. 하는 짓이 귀여워 약간은 마음에 들었는데...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수밖에...)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빛냈다.

임청우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여기에 더 있다간 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질 나쁜 계집애를 또 건드려 놨으니 어떻게 나올지는 뒤를 짐작할 수 없다.

(모른 척하고 빨리 이 자리를 떠는 것이 상책이다.)

험험!”

임청우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소녀의 뒤를 가만히 보았다.

“...?”

황의소녀는 어리둥절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 누가...?)

(이때다!)

임청우는 있는 힘을 다해서 산아래를 향해 달렸다.

! !

(아이쿠!)

그러나 임청우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며 앞으로 넘어져 땅에 세차게 머리를 찧었다.

채 두 걸음도 떼지 못했다.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조이고 있다.

호호호! 네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러도 소용없어.”

황의소녀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실이 잡혀있었다. 임청우의 빰을 때릴 때 이미 그녀는 천잠사(天蠶絲)를 그의 발에 살짝 걸어 놓았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생각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잔머리를 굴리는 상대는 잔머리를 굴려서 상대할 수가 없다. 원래의 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높이가 오장인 나무라면 그 뿌리는 오십 장에 달한다. 이런 나무라면 바람이 불어도 가지만 흔들릴 뿐 뿌리를 뽑아 올리지는 못한다. 흔들면 흔들리는 데로 가만히 두지만 결코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임청우는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의연한 기세가 일어났다. 마치 천년 거목인양 무게가 있는 태도였다.

황의소녀가 변해버린 그의 기세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임청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황의소녀를 묵묵히 응시하던 임청우는 왼쪽 발에 묶여있는 천잠사를 풀어버렸다.

너 너...”

황의소녀가 화가 나서 입을 열었지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임청우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에게서는 마치 우협 장백승을 닮은 듯한 기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돌아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삐익! !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소리가 높은가 하면 다른 한 소리는 낮아서 마치 서로 화답하는 것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황의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무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따라서 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와의 일을 통해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하나이고 외물(外物)은 수천, 수만 가지로 그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데, 외물에 따라 나를 이리저리 흔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자신을 굳게 지키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버린 심정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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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보도를 얻다

 

 

(제 정신으로 날 보는 게 민망해서 몰래 떠나셨구나.)

고검추는 아쉽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옥여상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옥여상은 냉혹하고 도도하다고 알려진 마도무림의 여걸이다.

헌데 지난밤에는 어린 소년과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짓을 했다.

옥여상이 어째서 먼저 떠났는지 짐작하며 고검추는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북해에 가서 만년화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중략-

담세황은 교활하면서도 악독한 심보를 지닌 놈이다. 네가 고모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을 그놈에게 들키면 절대 안된다. 마천루의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포기한 것도 담세황이 눈치 챌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삼초(三招)의 무공은 남긴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만 있으면 담세황과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만 줄이거니와 고모의 모든 것은 영원히 네 것임을 잊지 말거라.>

 

옥여상의 글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그 글 아래쪽으로는 세 가지 초식이 적혀있었다.

혈전삼식(血戰三式)-!

섬뜩한 이름을 지닌 그 초식들은 옥여상이 스승인 구천마야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구천마야는 마도 무림의 전설적인 마인들은 구마(九魔)중 혈마(血魔)라는 인물의 후손이다.

혈마는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적이 죽거나 항복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혈마보다 객관적으로 강했던 인물들도 혈마와 싸우는 것을 꺼려했다.

혈마라는 이름은 싸우면 늘 피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전귀(戰鬼)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혈전삼식은 바로 그 싸움광인 혈마가 남긴 무공의 정수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혈전삼식으로 죽이지 못할 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혈전삼식은 초식이라기보다는 내공의 운용비결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내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을 쓰러트리는 수법이 혈전삼식인 것이다.

그 때문에 혈전삼식은 검법, 장법, 수법등 모든 무공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분뢰개벽(分雷開闢)

-천수낙백(千手落魄)

-무량철영(無量鐵影)

 

이것이 혈전삼식이다.

분뢰개벽은 공격 속도를 극대화시켜주는 운공비결이다.

분뢰개벽으로 시전되는 초식의 빠르기는 <번개를 나눈다(分雷)>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천수낙백은 펼치는 초식에 무수한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운공비결이다.

무량철영은 중압(重壓)의 비결이다.

무량철영으로 구사되는 초식은 산을 밀어버리고 집채만한 쇳덩이를 박살내는 파괴력을 지닌다. (... 대단하다.)

혈전삼식을 읽어본 고검추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고검추가 보기에도 혈전삼식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혈전삼식을 만드신 것만 봐도 고모님은 일대종사로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고검추는 새삼 옥여상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다.

옥여상이 무림인들에게 마녀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이해가 갔다.

(고모님...)

고검추는 옥여상이 글을 남긴 속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자락에 옥여상의 그윽한 살내음이 배어있는 게 느껴진다.

(제발 돌아가시지 마십시오. 그래야 검추가 고모님께 입은 하해 같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을 테니...)

고검추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옥여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옥여상의 속옷 자락를 얼굴에서 뗀 고검추는 옥여상이 남긴 마지막 물건을 살펴보았다.

두 번 접혀있는 손수건이 그것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제법 빛이 바랜 손수건에는 어지러운 도형(圖形)이 그러져 있었다.

장보도-!

그 손수건이야말로 사신검의 하나인 복마신검이 감추어진 장소를 표시해 놓은 장보도였다.

그 장보도를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아버지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복마신검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낸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신상에 얽힌 추문을 해결할 수 있을테니...)

고검추는 장보도를 살펴보며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어머니가 주신 것도 있었지.)

장보도를 살펴보던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이 준 나무상자를 떠올렸다.

납작한 나무 상자는 고검추가 누워있던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나무 상자 옆에는 천으로 감싼 초혼전도 놓여있다.

달칵!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상자 안에는 륜()이 하나 들어 있었다. 직경 반 자 정도 크기에 중앙에는 한 마리 붕조(鵬鳥)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륜이다.

붕조의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데 눈 부위에 타는 듯 붉은 구슬이 박혀있어서 더욱 더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의 출신이 붕조를 상징으로 삼는 가문일까?)

륜에 새겨진 붕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검추는 염두를 굴렸다.

그 륜이야말로 자신의 외가가 어딘지 밝혀줄 유일한 단서인 것이다.

(아름다운 보석이다. 병기라기보다는 의식에 사용한 제기가 아닐까.)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붕조의 눈에 박힌 붉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철컹!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저 둥그스름하기만 하던 륜의 외곽으로 톱니바퀴 형태의 칼날들이 여섯 개 튀어나왔다.

그 칼날들은 종이처럼 얇았으며 얼굴이 비칠 정도로 새파란 윤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고검추는 칼날들에서 번지는 으스스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한눈에 그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들이 무쇠도 흙 베듯 하는 날카로움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훌륭한 물건이다. 이걸 사용하는 방법만 알면 유용한 호신수단이 되겠다.)

고검추는 눈을 빛내며 륜에 박혀있는 붉은 구슬을 다시 한 번 눌렀다.

기이잉! 철컥!

그러자 튀어나와있던 칼날들이 다시 륜 안쪽으로 사라졌다.

(칼날을 수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시간 날 때마다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고검추는 륜을 다시 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젠 떠날 때다.)

고검추는 륜을 넣은 나무상자에 이어 옥여상이 남긴 장보도와 편지, 헌월태을경을 챙겨 품속에 갈무리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고검추는 일어나 석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 깔린 마른 풀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들어왔다.

(고모님과 보낸 지난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은발마희 옥여상을 떠올린 고검추는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어 그는 양모 당혜선을 떠올렸다.

사신각주에게 무참히 고문당한 후 청룡탄으로 투신한 당혜선을 생각하자 고검추의 눈 꼬리가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편히 잠 드십시오 어머니! 사신각주는 소자의 손으로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습니다.)

고검추는 눈을 감고 합장하며 맹세했다.

양모에 대한 추모까지 마친 고검추는 동굴 입구로 갔다.

등나무 넝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젖혀 동굴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동굴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동쪽 산 능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탁탁!

주변을 살피며 고검추는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곧 고검추의 모습은 계곡에서 사라졌다.

고검추를 어린 소년에서 어엿한 사내로 만들어준 동굴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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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릉의 성 밖. 빈민가. 게딱지같은 집들이 성벽 밖에 다닥다닥 붙어있고. 아직 이른 새벽이라 해는 뜨지 않았다. 그래도 일 나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빈민가의 어느 집.

삐꺽!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청풍.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띠를 둘렀으며 허리춤에는 칼집에 끼운 단도를 한 자루 꽂고 있다.

이진진; [다녀와 오빠.] 따라 나오는 소녀. 16살 정도.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절세 미녀. 예쁘지만 병약해 보인다.

청풍; [나오지 마라 진진아. 아직 새벽에는 쌀쌀하다.] 돌아보며 말하고

이진진; [괜잖아. 잠도 깼고...] 옷을 여미며 웃고

청풍; [다녀온다.] 돌아서고

청풍; [입 맛 없어도 밥 잘 챙겨 먹어라. 그래야 잔병치레가 줄어들 테니...] 빈민가 입구쪽으로 가고

이진진; [알았어.] [오빠도 날붙이 쓸 때 조심해!] 외치고

손 흔들며 멀어지는 청풍. 헌데

이진진; (기분이 이상해.)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는 이진진. 이마를 찡그리며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걸어오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이진진의 생각 나레이션. 진진이 집의 문간에 서서 보고 있다.

 

#7>

청풍; (아버지가 지난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집을 등지고 걸어오며 찡그리고

청풍; (도박에 몰두하다가 통금(通禁)에 걸려서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셨을 것이다.) 찡그리고

청풍; (몇 달 전 나쁜 친구의 꾐에 빠져 도박장을 구경 가셨던 게 문제였다.) 한숨

청풍; (다리 하나를 못 쓰는 불구인 탓에 소심하고 열등감이 많으신 분인데...) (도박을 하는 동안에는 비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청풍; (그래서 도박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시는 걸 테고...)

청풍; (취미 정도라면 못 본 척 할 수도 있다.)

청풍; (하지만 도박에 몰입하는 도가 지나쳐서 이제는 어머니와 내가 힘들게 모아놓은 돈에까지 손을 대고 계신다.)

청풍; (더 늦기 전에 도박을 끊으시게 해야 한다. 무도한 수단을 써서라도...)

청풍; (일 때문에 피곤했어도 어젯밤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를 찾아봤어야할 것같은 생각이...) + [!] 생각하다가 흠칫! 하며 앞을 보고.

빈민가 입구. 어떤 여자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초조하게 금릉 성문쪽을 보고 있다. 금릉성의 성문은 아직 열려있지 않고. 그 앞에 마차와 사람들이 모여서서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담요를 어깨에 두른 여자 앞모습.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정이 많은 인상의 여자. 청풍과 이진진의 어머니인 진삼낭이다.

청풍; (어머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가고

청풍; (깨어나 보니 집에 안 계셨는데...) (예상대로 동구 밖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구나.) 다가갈 때

[!] 인기척 느끼고 돌아보는 진삼낭

청풍; [그만 집으로 돌아가십쇼.] 짐짓 뚱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진삼낭; [청풍아...] 억지로 웃고

청풍; [아버지가 어린 애도 아니고...] [세상 물정 잘 아는 어른인데 뭘 그리 안달을 하십니까?] 옆에 멈춰서고

진삼낭; [미안하구나. 하루 종일 험한 일 해야 할 텐데 아침도 챙겨주지 못해서...] 애잔한 표정으로 보고

청풍; [도축장에 가면 널려있는 게 고기요.] [배고프면 대충 구워먹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십쇼.]

진삼낭; [그래도 어미가 아침을 차려 줬어야했는데...] 미안한 표정

청풍; [난 됐으니까 진진이나 잘 챙겨 먹이십쇼.] 말하며 성문쪽으로 걸어가고.

진삼낭;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외치지만

손 흔들며 성문쪽으로 간다. 그때

철컹!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성문을 여는 건 관병들이다. 성루에서도 관병들이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와 사람들. 하지만

청풍은 성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반대쪽으로 간다. 그쪽에 도축장이 있다. 진삼낭의 시점

진삼낭; (가엾은 것...) 한숨

진삼낭; (진진이 아버지는 다리 하나를 못 쓰는 불구라 생계를 책임지지 못해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날품팔이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해왔는데...)

진삼낭; (그걸 보고 자란 탓인지 청풍이는 철이 들자마자 돈을 벌겠다고 나다녔다.)

진삼낭; (온갖 궂은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이년 전 부터는 도축장에서 백정 노릇을 하고 있다.)

진삼낭; (가축 잡는 솜씨가 좋아서인지 청풍이는 돈도 많이 벌어온다.) (어른인 내가 버는 것의 몇 배를...)

진삼낭; (덕분에 살림살이가 펴지나 했더니...) 한숨

진삼낭; (진진이 아버지가 도박에 중독되어 우리 모자가 모아둔 돈을 탕진하고 있다.)

진삼낭; (부디 진진이 아버지가 정신 차리고 옛날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8>

도축장. 시간은 오전. 해가 떴다.

도축장에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 짐승들을 건물로 끌고가는 사람. 건물에서 고기를 실은 수레를 끌고 나오는 사람. 도축장 안에서 청소하는 사람들. , 돼지등을 잡는 백정들

청풍도 다른 백정들과 함께 소를 잡고 있다. 가죽 벗기고 내장 제거한 소의 두 다리를 밧줄에 묶어 천장에 걸고 있다.

 

도축장 내의 다른 건물. 허름한 작업장과 달리 이 건물은 제법 번듯하다. 건물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있다.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구유에 양동이로 물을 부어주는 모습

건물 내부. 일종의 마트다. 나무로 만든 진열대가 죽 놓여있고 그 진열대 위에 손질한 고기들이 넓은 나뭇잎 위들이 깔린 위에 부위별로 놓여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뚱뚱한 중년인이 고기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 중년인이 황금전장 총주방장인 주대육이다. 나이 들고 구부정한 백정이 따라다니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늙은 백정이 도축장의 우두머리인 추노대다. 건물 입구쪽에는 중년의 백정과 젊은 백정이 서서 보고 있고

백정1; [저 뚱보 누굽니까?] 중년의 백정에게 속삭이며 묻고

백정2; [넌 손님 접대 처음이라 저분을 모르겠군.] 함께 보며 설명하는 중년 백정

백정2; [저분이 바로 우리 도축장의 중요한 단골인 황금전장(黃金錢莊) 총주방장님이야.] [대령숙수(待令熟手;황실요리사) 출신이시지.]

백정1; [황금전장이라면 천하의 전장(錢莊;은행)들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곳 아닙니까?] 놀라고

백정2; [황금전장은 천하삼대 부호가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해.] 끄덕

백정2; [중원에 황금전장 지점이 없는 곳이 없을 뿐 아니라 황실도 급전이 필요하면 황금전장에 손을 벌린다고 할 정도야.]

백정1; [그 황금전장의 총주방장이라면 엄청난 분인데...] [무슨 일로 직접 우리 도축장을 찾아온 걸까요?]

백정2; [정말 좋은 고기가 필요해서겠지. 귀한 손님 대접하기 위해서...]

주대육; [... 잘 봤네 추노대(秋老大)!] 마지막 고기를 살펴보며 말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총주방장 주대육(朱大育)>

추노대;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없으신지요?] 눈치 보며

주대육;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네.] 다시 돌아가며 끄덕이고

주대육; [이틀 후에 정말 중요한 손님이 본장을 방문하는데...] [그분이 특히 소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내가 직접 와본 걸세.]

추노대; [그런데도 흡족한 물건을 준비해놓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굽신

주대육; [이건 고기가 좋아.] [최상품이지.] 어떤 고깃덩이 앞에 서며 그 고깃덩이를 만지면서 말하고.

추노대; [잘 보셨습니다.]

추노대; [술지기미와 보리만 먹여 기른 고려(高麗) 산 흑우(黑牛)입지요.] [이만한 품질의 소고기는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주대육; [그런데 정형(整形;손질)이 잘못 됐어.] 고개 젓고

주대육; [피와 근육, 비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쓸데없는 손짓이 더해진 때문이지.] [피가 살에 배어들었고 과도한 칼질 때문에 고기 상태도 난잡해.] 뒤적이며 혀를 차고

추노대; [노부가 근래 눈이 어두워져서 아랫것들에게 맡겼더니만...] 변명

주대육; [이건 누가 손질한 건가?] 다른 고기를 만지며. 그 고기는 각지고 깔끔하게 썰려있다.

추노대; [청풍이라고... 아직 어린 신참 놈이 정형한 물건입지요.]

주대육; [어리다면...?] 고기 만지고

추도내; [이제 겨우 열여덟 살입지요.] [저희 도축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채 이년이 안되었구요.]

주대육; [놀랍군. 불과 이년 만에 이 정도 정형을 하다니...] [피도 완벽하게 뺏고 근육과 비계처리도 감쪽같아.]

주대육; [소의 육질만 좋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쉽구만.]

추노대; [내일까지 고려산 흑우를 한 마리 더 조달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마음에 드시면 청풍이에게 그놈을 도축하도록 시키겠습니다.]

주대육; [그래주면 나야 좋지만...]

주대육; [청풍이란 아이의 작업을 볼 수 있을까?]

추노대; [물론입니다. 이리 오시지요.] 입구쪽으로 안내하고

주대육; (열여덟 살짜리 백정이라...) 따라가며 생각하고

주대육; (우연히 정형을 잘 한 게 아니라면 천재라고 해야겠군.)

 

#9>

도축이 벌어지는 큰 가건물. 그곳으로 오는 추노대와 주대육

그러다가 흠칫! 하는 주대육

건물 입구에 백정들이 서서 건물 안을 보고 있다

주대육; [무슨 볼거리라도 있는 건가?]

추노대; [아마 청풍이가 정형하는 걸 다른 놈들이 구경하는 걸 겝니다.]

주대육; [경험 많은 백정들까지 신참의 솜씨를 구경을 하다니... 거 참 별일이로구만.] 추노대를 따라가고.

가건물 입구에 서있던 백정들이 흠칫! 하며 돌아보고.

백정들이 비켜주는 사이를 지나는 추노대와 주대육

[!] 놀라는 주대육

가건물 안에서는 여기저기서 도축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청풍이 가죽 벗긴 소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뼈에서 고기를 발라내는 중이다. 주변에는 다른 백정들이 청풍이 발라내는 뼈와 고기를 받아서 바구니에 담고 있고. 이제 소는 청풍이 고기 대부분을 발라내서 뼈만 앙상하다.

무심한 표정으로 단도를 써서 살을 발라내는 청풍

주대육; (놀랍군. 정말 놀라워.) 감탄

<경력이 이년도 안된다는 놈이 칼질하는 솜씨가 지금껏 본 어떤 백정보다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청풍의 칼질하는 모습 배경으로

주대육; (의심의 여지도 없이 저 놈은 천재다.) 감탄하고. 그때

청풍; [끝났습니다.] ! 그 사이에 마지막으로 발라낸 고기를 바구니에 던져 넣는 청풍

청풍; [뼈 처리는 형님들이 해주십시오.] 칼을 소매에 닦으며 돌아서고

[수고했다 청풍아.] [다음 작업할 때까지 한숨 돌려.] 바구니를 가져가며 말하는 백정들

청풍; [물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하고. 그러다가

[!] 흠칫! 하며 입구쪽을 보는 청풍.

입구에는 백정들 앞쪽에 주대육과 추노대가 서있다. 추노대가 오라고 손짓하고

청풍; (못 보던 얼굴이 있군.) 비수를 허리에 찬 칼집에 꽂으며 다가가고. 모여 있던 백정들은 흩어지고 있고

추노대; [인사드려라. 황금전장의 총주방장이신 주선생이시다.] 주대육을 소개하고

청풍; (황금전장의 총주방장쯤 되는 위인이 무슨 일로 도축장에...) +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청풍입니다.] 포권하는데

! 흐르듯이 다가와 청풍의 왼쪽 손목을 잡는 주대육의 오른손. 놀라는 청풍

청풍; (손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았다.) 놀랄 때

주대육; [실례함세.] ! 청풍의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는 주대육의 왼손

드러나는 청풍의 왼쪽 팔뚝.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주대육; [깨끗하구만. 다쳤던 흔적이 전혀 없어.] 청풍의 팔뚝 보며 감탄하고

청풍; (왜 이러지?) 놀랄 때

주대육; [손바닥도 좀 볼 수 있겠나?]

청풍; [...]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고.

청풍의 손바닥 크로즈 업. 역시 깨끗하다

주대육; [손바닥에도 상처가 난 적이 없군. 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야.] 청풍의 손바닥을 보며 감탄

청풍; [제게 이러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요?] ! 주대육의 손에서 손목을 빼며

주대육; [백정이든 요리사든 칼을 쓰다보면 다칠 수밖에 없는 게 숙명이야.] 청풍의 손목을 놔주며

주대육; [그런데 자네는 지금까지 도축 과정에서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던 것같구먼.]

청풍; [무리하지 않으면 다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어리둥절

주대육; [무리하지 않으면?] 놀라고

주대육; [자네 눈에는 도축하는 짐승들의 몸속 구조가 훤히 보인다는 건가?]

청풍; [도축을 오래 하면 저절로 익숙해지는 게 아닙니까?] 다른 백정들을 돌아보며 말하지만.

<그럴 리가...> <사람 얼굴이 제각각이듯 짐승들의 몸 속 상태는 천차만별이지.> 고개 젓는 주변의 백정들

청풍; [뜻밖이군요. 다들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갸웃

주대육; [그 칼은 언제부터 써왔는가?] 청풍이 허리띠에 끼우고 있는 비수를 보며

청풍;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노대께서 주신 물건입니다.]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고

주대육; [구경 좀 하세.] + 청풍; [그러지요.] 비수를 두 손으로 내미는 청풍. 역시 두 손으로 받는 주대육

스릉! 비수를 뽑는 주대육

원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비수

주대육; [추노대가 보기에 어떤가?] 비수를 보여주며

추노대; [이 년 전 주었을 때와 거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군요.] 비수를 보며

청풍; [가끔 날만 세워주었을 뿐입니다.]

주대육; (이년 동안 쓴 칼인데 원래 모습 대로라는 건 한 번도 뼈를 건드린 적이 없다는 뜻이다.)

주대육; (이놈은 백정들의 조종(祖宗)인 포정(庖丁)의 재래나 다름없다.) 찰칵! 감탄하며 다시 칼을 칼집에 넣고.

주대육; [잘 봤네.] 칼을 내밀고. 두 손으로 받는 청풍.

주대육; [자네 혹시 요리를 배워볼 생각은 없는가?]

청풍; [요리...] 흠칫! 하며 주대육을 보는데. 칼을 허리춤에 끼우며

추노대가 울상을 짓고 있다. 다른 백정들도 놀라 돌아보고

주대육; [칼을 쓴다는 점에서 도축과 요리는 일맥상통하는 분야야.] [자네 정도의 감각이라면 어렵지 않게 요리를 배울 수 있을 걸세.]

청풍; (저 노친네가 울상이로군.) + [어여삐 봐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만...] 추노대를 힐끔보며

청풍; (신세진 게 많은데 내 생각만 할 수는 없지.) + [전 아직 노대에게 배울 게 많이 남았습니다.] 포권하고

안도하는 추노대. 백정들도 안도하고

주육대; [그렇다니 유감이로군.] 입맛 다시고

주육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황금전장으로 날 찾아오게나.] 돌아서며 말하고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멀어지는 주육대, 서둘러 따라가는 추노대

청풍; (어려웠을 때 추노대에게 진 신세 때문에 거절을 하긴 했다만...) 멀어지는 두 사람 보며 입맛 다시고

청풍; (아쉽긴 하다. 백정보다는 요리사가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직업이니...)

청풍; (물론 황금전장이라면 대우도 좋을 테고...) + [!] 생각하다가 흠칫! 하고

멀어지는 추노대와 주대육. 그 맞은편에서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이진진이다.

숨이 턱에 차서 달려오는 이진진의 모습 크로즈 업. 오가던 백정들과 백정촌 여자들이 놀라 돌아보고 있고

청풍; (진진이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불길한 표정으로 마주 걸어가고

[! 저 애는 청풍이 동생 아니야?] [무슨 일인데 저리 급히 달려오는 걸까?] 주변의 다른 백정들도 놀라고

주대육과 추노대도 흠칫! 하며 돌아보는 옆으로 헐떡이며 달려지나가는 이진진

주대육; (차림새는 허름해도 귀티가 난다.) + [이 마을 아이는 아닌 것 같군.] 멀어지는 이진진을 보며

추노대; [진진이라고... 청풍이 동생입죠.] 돌아보며

주대육; [누이동생이라...]

추노대; [도축장까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는 아이인데...] [아무래도 집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같습니다요.] 말할 때

그 사이에 청풍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이진진. 마주 걸어오는 청풍

다리에 힘이 빠져 나뒹구는 이진진.

놀라서 달려와 부축하는 청풍

청풍에게 매달려 우는 이진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놀라는 청풍. 이어

분노한 표정으로 이진진을 부축해서 오는 청풍

주대육과 추노대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지나가는 청풍

멀어지는 두 남매의 뒷모습

주대육; (집안 일이라는 게 대게는 돈문제...) (조만간 저놈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걸 보며 웃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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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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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충 고른 게 신검(神劍)

 

 

간장과 막야는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부부 장인의 이름이다.

()나라 왕 합려(闔閭)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인 그들 부부에게 보검을 만들게 한 후 다른 사람에게 더 뛰어난 보검을 만들어 줄까봐 남편인 간장을 살해했었다.

다행히 아내인 막야는 구사일생했으며 아들인 미간척(眉間尺)으로 하여금 복수를 하게 했다는 야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부부는 마지막으로 만든 한 쌍의 보검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었다.

자웅쌍검(雌雄雙劍)으로 불리는 두 자루의 보검 중 웅검(雄劍), 즉 남편 검이 간장이다.

 

검을 뽑아서 살펴보세요.”

그럼 실례를...”

스릉!

진상파의 권유에 강유는 천천히 간장을 칼집에서 뽑았다.

!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유리처럼 반짝이는 검신(劍身)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 가운데에는 옛날 글자들이 문양처럼 길게 새겨져 있다.

끼이!

간장의 검신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자 섬전초가 겁에 질려 웅크렸다.

간장은 날카로울 뿐 아니라 척사(斥邪)의 힘까지 지니고 있어서 영물인 섬전초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예기(銳氣)! 검신이 칼집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다.)

스릉!

강유는 극도로 긴장하며 간장의 검신을 완전히 칼집에서 뽑았다.

간장의 검신이 드러나자 밀실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검광(劍光)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혼절할 것이다.

그만큼 간장이 뿜어내는 검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간장은 지금은 잊혀진 고대(古代)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신검이랍니다. 그 때문인지 만들어진 후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지요.”

진상파는 두려움에 떠는 섬전초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강유는 칼집에서 완전히 뽑아낸 간장의 검신을 얼굴 앞에 세운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리같은 검신을 들여다보는 강유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번 시험해보세요.”

진상파가 한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유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무기를 정비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강철제 탁자 위에 무기를 고치는 데 쓰는 도구들과 수리중인 병장기들이 놓여있다.

탁자 옆에는 커다란 모루도 하나 놓여있다. 강철제인 그 모루는 높이가 네 자 가량이나 되고 길이는 다섯 자가 넘는다.

(저 모루가 시험 대상으로 적당하겠군.)

모루로 다가간 강유는 두 손으로 쥔 간장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성둥!

그러자 마치 오이가 잘리듯 모루의 앞 부분이 간단히 잘라졌다.

!

잘려진 모루 앞부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 경이로운 예리함이로군요. 슬쩍 그은 것만으로도 강철로 만들어진 모루를 잘라버리다니...”

강유는 매끈하게 잘린 강철모루의 단면을 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간장의 날카로움에는 어떤 호신강기라도 종이처럼 베어진답니다. 제왕성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 유용할 테니 사용하도록 하세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스릉!

진상파가 권유했지만 강유는 간장을 다시 칼집에 꽂았다.

춘추오대신검중 하나인 간장은 선물로 받기에는 너무 과한 보물입니다. 소저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강유는 칼집에 꽂은 간장을 원래 위치에 걸었다.

(둔한 사람...)

강유가 간장을 원위치 시키는 걸 보며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염치와 분수를 아는 강유의 심성을 확인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자웅쌍검인 간장과 막야는 부부의 금슬과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금릉의 황금성에는 자검(雌劍), 즉 아내쪽의 검인 막야가 있다.

진상파는 비록 검법을 익히진 않았지만 막야를 가까이 두고 아껴왔었다.

간장과 막야의 전설에 감명을 받는 그녀는 언제고 자신의 짝이 될 사람을 만나면 웅검인 간장을 줄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간장을 줄만한 상대를 만난 것인데...

눈치 없는 그 인간은 간장을 거절했다.

간장이 부담되신다면 다른 검으로 하나 가져가세요.”

진상파는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이 곳에 있는 검들은 모두 전설적인 보검들인데...”

강유는 난감해졌다. 그게 어떤 검이든 황금성의 무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호신을 위해서라도 검이 필요할 테니 사양하지 마세요.”

진상파가 새침한 표정이 되어 재차 권했다.

강유는 진상파가 왜 마음이 상했는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끝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염치없지만...”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가치가 떨어지는 검으로 한 자루 고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간장에 의해 잘려진 모루 옆의 강철제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수선 도구들과 함께 망가지거나 낡은 병장기들이 쌓여있다.

(망가진 도검 중 하나를 가져가면 그나마 부담이 덜하겠군.)

강유는 탁자로 다가갔다.

(혹시...)

철문 밖에서 보고 있던 철관음의 눈이 번뜩 이채로 빛났다.

“...!”

섬전초를 품에 안고 있는 진상파도 유심히 강유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철컹! 철컹!

두 여자가 심상치 않은 눈길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탁자 위의 병장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도끼, 극등의 병장기들은 열 자루가 넘는데 대부분 녹이 슬었거나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사용해본 적이 없는 무기들은 제외하고...)

강유는 무기들 중 창, 도끼, 극등은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자 대여섯 자루의 칼과 검들만 남았다.

(이것들 중에서 한 자루를 가져가면 되겠지.)

강유는 분류된 칼과 검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먼저 집어 들었다.

금은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검인데 손잡이에도 몇 개의 보석이 박혀있다.

푸스스!

하지만 검신을 칼집에서 뽑는 순간 검붉은 녹이 함께 빠져나와 흩어진다.

(이건 도저히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로군.)

검붉게 녹이 쓸었을 뿐 아니라 이빨까지 빠진 검신을 확인한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꾸밈으로 보아 역사적으로는 이름이 높았겠지만 실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려한 보검을 내려놓은 강유는 다른 도검들을 살펴보았다.

나머지 칼과 검들도 대부분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도저히 실전에서는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 도검들에게는 수선 대상이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헌데 난감해하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꾸밈새가 화려한 칼과 검들 사이에 칼집도 없는 검이 한 자루 섞여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검의 형태를 한 쇳덩이였다.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인 모습인데 먹칠을 한 듯 검은 색이고 표면도 우둘투둘하다.

(이 검...)

덜커덕!

강유는 다른 칼과 검들 사이에서 그 검은색의 검, 쇳덩이를 집어 들었다.

“...!”

“...!”

순간 섬전초를 안은 진상파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철관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강유는 두 여자의 심상치 않은 반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겁다.)

쇳덩이같은 검을 집어든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길이가 네 자 남짓인 그 검의 무게는 무려 열관(38kg) 이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고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무게인 것이다.

(대체 재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겁단 말인가? 같은 분량의 납보다도 몇 배 더 무거운 것같은데...)

강유는 놀라면서도 두 손으로 검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체가 한 덩이로 되어있는 형태의 이 검은 만들다 만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끝은 뾰족하고 손잡이 위의 호수(護手), 즉 검격(劍格)까지 삐져나와 있어서 일단 검의 모습은 갖추고 있다.

다만 검의 날이 아주 투박해서 무엇을 베거나 자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하시겠어요?”

쇳덩이같은 검을 살펴보는 강유에게 진상파가 말을 건넸다.

이 검... 아니 쇳덩이에도 사연이 있겠습니다.”

강유는 두 손으로 검을 든 채 살펴보며 물었다.

이름은 극맹인데... 극맹(劇猛;몹시 사나움)으로도 쓰고 극맹(劇孟;전설 속의 협객)으로도 쓴답니다.”

진상파는 대답하며 탁자로 가서 그곳에 쌓여있는 여러 권의 낡은 책들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극맹(劇猛)과 극맹(劇孟)... 둘 다 무서운 이름이로군요.”

미완의 검이며 완성시켜줄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진상파는 낡은 책을 들고 다시 강유에게 돌아왔다.

완성되지 않은 탓에 제 몫을 못하므로 불출검(不出劍)이라고도 불리는 그 검에 대한 내력은 이 책에 적혀있어요. 시간 나실 때 읽어보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탁자에서 가져온 낡은 책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책 표지에는 <劒經>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맙습니다.”

강유는 불출검 극맹을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검경(劍經)이라는 제목의 그 책을 받았다.

이제 불출검 극맹의 주인은 강소협이에요. 아무쪼록 귀하게 대해주시기 바라겠어요.”

책을 건네준 진상파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출검 극맹... 아무래도 난 지나치게 중요한 물건을 선물로 받은 것같구나.)

진상파의 사뭇 진지한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 강유였다.

 

* * *

 

밤은 더 깊어졌다.

밤늦도록 소란스럽던 황금성 개봉분점 주변의 번화가도 이제는 한산해져 있다.

고독모모는 장원의 중앙에 자리한 인공호수 가의 정자에 앉아있었다.

흔들!

문득 고독모모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 전체가 한번 휘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기가 어지럽구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고독모모의의 미간이 모아졌다.

(깊은 사연과 은원이 서린 물건이 이곳을 떠나려 한다.)

고독모모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물건이 세상으로 나가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뒤바꿀 것처럼 격한 요동을 한 번 일어나겠지.)

늙었어도 곱던 고독모모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 * *

 

진상파와 철관음은 복도 끝의 철문 앞에 서있었다.

철문 안쪽은 다듬지 않은 비밀통로인데 지금까지의 복도와 달리 불빛이 전혀 없다.

그 밀로를 십리쯤 가면 개봉성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 속의 낡은 사당이 나올 것이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던 강유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강유는 튼튼한 칼집에 넣은 불출검 극맹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너무 무거워서 허리에 차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상파와 철관음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강유는 곧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 두 여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버렸네.)

진상파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불과 사흘 남짓 함께 있었을 뿐인데 저 사람이 안 보이자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소리없는 한숨이 진상파의 입가로 흘렀다.

끼이...

영물답게 주인의 상심한 마음을 알아차린 섬전초가 올려다보며 위로한다.

그만 닫아.”

섬전초에게 들킨 마음을 숨기려고 진상파는 짐짓 차갑게 철관음에게 지시했다.

예 아가씨!”

철컹! 그그긍!

철관음은 육중한 철문을 서둘러 닫았다.

(지금까지의 나는 황금성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고 백만 명이 넘는 식솔들을 보살피기 위해 철저하게 이성적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진상파는 철관음에 의해 닫히는 철문을 보면서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그 결과 여자로서의 감정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마(心魔)가 스며든 것같구나.)

강유를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진상파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요?”

철컹!

그 사이에 철문을 완전히 닫은 철관음이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불출검 극맹의 비밀이 밝혀지면 세상이 피바람에 잠길 우려도 있는데... 유출될 것을 대비하여 일부러 망가진 병기들에 섞어 방치한 그것을 용케 찾아낼 줄은 몰랐어요.”

무공을 익혀야겠어.”

철관음의 우려 섞인 말에 진상파는 엉뚱한 대답을 하며 돌아섰다.

... 무공을 말인가요?”

철관음은 흥분에 휩싸인 표정이 되어 진상파를 따라갔다.

지금까지는 황금성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수리(數理)와 학문을 배우느라 무공을 수련할 여유가 없었어. 그 때문에 지난 며칠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고...”

저희들 백팔금차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철관음은 송구한 표정이 되었다.

언니가 미안해할 거 없어. 몸 하나 스스로 지킬 능력을 기르지 못한 내 탓도 있으니...”

아가씨께서 무공을 익히시면 무림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입니다. 자질과 지혜로는 천하제일이시고 태어나신 직후 벌모세수(伐貌洗髓)를 받으셔서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어 있으시기까지 하잖아요.”

흥분한 철관음이 평소와 달리 수다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진상파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영약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내공은 단시일 내에 극한까지 쌓으실 수 있으며 본성이 사들인 무공비급 중에는 절세적인 것도 부지기수... 늦어도 몇 달 안에 아가씨는 신주이십팔숙중 어지간한 인간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되실 거예요.”

기왕 무공을 익힐 거라면 만인부당(萬人不當)의 경지를 노려야겠지.”

진상파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렴요! 머잖아 우리 황금성은 부()뿐 아니라 무()로도 천하제일 소리를 듣게 되겠어요.”

철관음은 자기 일인 듯 기뻐했다.

진상파가 무공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자질로는 세상에 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철관음이다.

지금까지는 학문을 닦는 데만 열중하던 진상파가 무공을 수련하면 무림의 정세는 일거에 뒤집힐 것이다.

(언니는 몰라. 내가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

진상파는 철관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난 두 번 다시 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강유를 떠올리며 가슴이 거칠게 뛰어노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진상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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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패배

 

 

백남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녹지 옆에 서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넓은 얼굴, 크지 않은 것이 없는 오관(五管)...

대려장의 신비고수 신가람의 풍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범인(凡人)과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태산이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남빈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지금의 나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인물이다.)

강미루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신가람을 보면서 백남빈은 자신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마치 산이 움직여서 다가오는 듯하다.

강미루가 틈만 나면 자기 형부를 자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윽고 신가람과 함께 돌아온 강미루가 백남빈의 팔을 잡으며 뭐라 말하지만 백남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아는 어떤 분과 닮았구나."

신가람이 온화한 음성으로 백남빈에게 말했다.

어투와 달리 백남빈을 천천히 살펴보는 신가람의 눈에는 깊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백남빈의 모습은 신가람이 하늘 아래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며 또 존경하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은 신가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가람은 백남빈이 그저 철령보의 일개 무사인 줄로만 알고 있다.

신가람의 우호적인 말과 태도에도 백남빈은 미소만 슬쩍 지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와 상관없이 그를 적이라 생각하는 백남빈이었다.

"내 처제 미루에게 불손했던 점은 당사자인 미루가 원치 않으니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려장의 무사들을 상하게 한 책임은 져야 한다. 검을 들어라."

신가람은 느릿느릿 말을 하면서도 전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을 백남빈은 그때서야 보았다.

분명 명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보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검은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에 가려져 빛을 잃고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형부, 먼저 공격한 건 우리예요. 그러니 그를 탓할 수 없어요."

강미루가 팔을 벌려 백남빈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백남빈에게도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형부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백남빈은 강미루를 보지 않고 그녀 너머의 신가람에게 말했다.

신랑성의 침공은 시작되었습니까?”

신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산(陰山)과 백석산(白石山) 쪽의 장성이 돌파 당해서 무황성 분타들 중 묘아장(猫牙莊)과 양화보(兩華堡)가 신랑성에 떨어졌다."

신가람은 시종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몇 마디 말 속에는 격변하는 정세가 함축되어 있었다.

묘아장과 양화보는 철령보만큼이나 중요한 북방의 거점이다.

만리장성 바로 안쪽에 자리한 그 두 곳이 신랑성에 떨어졌다면 사태는 실로 엄중하다.

그 일대의 명나라 수비군도 와해되었을 게 분명하니 토곤이 결심만 하면 오이라트의 십만 기마대가 무인지경으로 중원에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나마 철령보는 신랑성의 요인들을 잡고 있어서 공격을 면한 상태다.”

신가람이 호의를 베풀 듯이 철령보의 사정도 이야기 해주었다.

자신들의 부성주와 토곤의 둘째 아들이 잡혀있으니 신랑성으로서도 철령보에는 쉽사리 도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빨리 도망쳐요!"

안도하는 백남빈의 귀에 강미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남빈은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루, 내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같소? 나도 명색이 무사요. 욕되게 하지 마시오."

하지만 강미루의 말은 아예 애걸조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형부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제발..."

백남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사자검을 힘껏 잡으며 신가람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비록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지라도 도망치지는 않겠소."

과연 인물이라 할 만하군. 그래야 네가 닮은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지.”

신가람이 백남빈의 사나이다움에 감탄을 표시했다.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감정이었다.

"앞으로 때를 잘 만난다면 능히 영웅(英雄)이 될 수 있겠어."

신가람은 허리에서 자신의 기도에 비하면 볼품없게 보이는 보검을 천천히 뽑았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신가람으로서는 미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후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리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강미루는 한쪽 옆으로 물러서서 제발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가슴 졸일 뿐이었다.

백남빈은 천천히 검을 뽑는 신가람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자검결 중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라는 구절이었다.

놀랍게도 신가람의 발검(拔劍)하는 태도가 바로 그 검결에 부합했다.

백남빈은 신가람의 몸 어디에도 검을 갖다 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막막해졌다.

그러면서도 백남빈의 몸은 자신이 만든 검초, 미녀각기검을 펼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공수를 겸비한 단 일초의 검식 미녀각기검만이 지금의 백남빈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허어...”.

신가람의 짙은 눈썹 끝이 약간 올라갔다. 천하의 무학종사(武學宗師)라고 자부할 수 있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기식(起式)이었기 때문이다.

베려는 것도 아니고 찌르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신가람에게는 백남빈의 몸이 검극(劍極;검의 끝 부분)에 다 가려져 버리는 듯이 느껴졌다.

게다가 백남빈의 윤기 있는 음성과 맑게 빛나는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승의 내공을 지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철령보의 일개 무사가 뜻밖에도 검술을 깊이 체득한 고수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당금 강호의 인물 중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남빈은 여러 가지로 신가람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대사형(大師兄)을 보는 듯해서 놀랐었다.

이어 백남빈의 의연한 태도에 놀랐고, 기이한 검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신가람은 검을 수평으로 뉘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그의 독문절기 광평검법(廣平劍法)의 기식(起式)이었다.

(이게 무슨...)

백남빈은 당혹감과 섬뜩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세하게 보면 볼수록 시선이 신가람의 몸에서 벗어나 자꾸만 옆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일부러 신가람를 보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 같았다.

미녀각기검으로 찌른다 하더라도 분명 신가람의 옆 쪽 허공을 찌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신가람이 검을 뽑는 순간 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이게 신가람이 지닌 무공의 무서움이다.

검을 든 적을 앞에 두고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죽여 달라고 목을 느리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나마 백남빈이 자꾸만 시선을 고쳐서 신가람을 향할 수 있는 것은 근본(根本)을 볼 수 있는 힘, 신명안(神明眼)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명안을 지닌 것조차 대사형을 닮았다.)

백남빈이 옆으로 흐르던 시선을 즉시즉시 수정해서 다시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신가람의 가슴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에게는 뛰어난 사형제들이 많지만 신명안을 지닌 인물은 오직 대사형뿐이었다.

(살려 둬야하나?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하나?)

신가람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맹렬하게 자라났다.

신명안까지 지닌 무서운 자질을 방치하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보면 볼수록 대사형을 닮아서 꺼려진다.

마음속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가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는 시시각각 짙어졌다.

백남빈도 자신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걸려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신가람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을 맞게 될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남빈은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웠다.

지금의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자검결뿐이다.

이전에 배운 삼재검법 따위는 신가람 같은 고수에게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이 마치 정지한 듯 지나며 백남빈의 머리에서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가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망부석 같았다.

반면 백남빈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신명안으로 흐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신가람을 보면서 그를 겨눈 사자검도 함께 움직인다.

(제발...)

옆에서 지켜보는 미루가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고 사는 긴박한 순간에 백남빈은 사자검결속에서 아지랭이같이 아른거리며 잡힐 듯 말듯한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신가람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의 머리에서 번개불같은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번쩍! 번쩍!

그는 그대로 미녀각기검을 펼쳐 고리같은 검기로 신가람을 공격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강미루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빡 했을 때 백남빈은 다시 사자검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있었고, 신가람은 그런 백남빈의 뒤쪽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팔락!

아무런 소리도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공중에서는 신가람의 동그랗게 잘려진 소매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풀 위에 내려앉을 때였다.

"훌륭하군. 훌륭해. 진정 멋진 검법이고 대단한 내공이었다. 족히 일갑자(一甲子) 수위는 되겠군. 내 일검을 받았으니 살려 주도록 하지."

몸을 휙 돌린 신가람은 강미루를 보면서 서늘해진 가슴을 숨기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의 일검(一劍)이 교환될 때 강미루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지 백남빈이 졌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강미루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백남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 처제.”

신가람이 다시 강미루를 재촉했다.

"형부, 그는 괜찮을까요?"

신가람의 태도에서 백남빈에 대한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 강미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지 그의 심맥(心脈)만을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무 이상 없을 것이다."

!‘

강미루는 비로소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무게를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신가람의 말은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다. 그의 말은 그게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다.

퍼억!

그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백남빈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달려가서 그를 안으려던 강미루는 멈칫했다.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면 형부가 혹시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백남빈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신가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떠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이 있어요."

신가람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태산같았지만 그것이 허락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강미루는 습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가람의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강미루 자신의 창평곡에서의 행복은 끝나버린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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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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