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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성(覺醒)

 

 

개봉성 동문에서 삼십여 장쯤 떨어진 관도 중앙에는 두 명의 고수가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강유와 독두태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생긴 공터 주변에는 오가던 사람들과 철위사들이 빙 둘러서서 관전을 하고 있었다.

독두태보는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강유의 상태는 손 하나만 다친 독두태보와 비교할 수 없다.

입과 코로는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며 가슴 부분은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살갗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강유의 오른손에는 짧은 비수가 거꾸로 쥐어져 있다.

누가 봐도 강유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두태보는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공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들 저래?”

낸들 아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우더니 이제는 눈싸움만 하고 있구만.”

싸울 생각이 있기나 하는 걸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기키보다도 큰 강철 지팡이를 든 노파가 한 명 서있다.

곱게 늙은 백발의 그 노파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인 고독모모였다.

철관음과 백팔금차들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강유와 독두태보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먼.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독두태보로 하여금 선뜻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독두태보가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리기만 할 뿐 공격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을 보며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한가하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유는 어떤 상황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강유는 마검칠식을 익히고 있다.

독두태보의 몸은 금강불괴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합으로 증명되었듯이 독두태보의 몸이 제 아무리 단단해도 마검칠식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급소를 찔린다면 냉혈철심 사우처럼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독두태보는 섣불리 강유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중이다.

 

<이일대로(以逸代勞)... 한가로움으로 수고로움을 대신한다. 이것이 소요보법의 요체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두고 걸음을 옮기면서 강유는 아버지 소요신군의 말을 떠올렸다.

(이일대로... 소요보법의 요체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시선을 독두태보에게서 떼지 않으며 걷고 있지만 강유의 가슴은 벅찬 흥분으로 뛰놀고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으면서 지금까지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무공 비결들이 비로소 체화(體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다고 남보다 멀리 갈 수 있는 게 아니며 서두른다고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잘못 든 채 빠르게만 가면 돌아올 때 힘들고 서두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강유는 각성(覺醒)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강유는 소요보법을 그냥 배운 대로 구사했었다.

헌데 불현 듯 소요보법에 숨겨져 있는 현묘한 이치가 봇물 터지듯 강유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며칠 간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깨우치려 노력해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요보법의 요체를 깨우쳤을 뿐 아니라 저 늙은 대머리가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어떤 허점을 드러낼지도 눈에 들어온다.)

강유는 흥분을 갈아 앉히려 애쓰며 독두태보를 자세히 보았다.

독두태보는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왼손에 공력을 집중시킨 채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제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을 다친 탓에 독두태보의 몸의 균형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다. 오른쪽을 치는 척해서 균형을 더 흐트려 놓은 후 왼쪽을 공격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강유는 몸을 조금 숙이고 좌우로 흔들면서 독두태보에게 접근했다.

직접 다가가는 것은 아니고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원형을 그리던 행로의 폭을 점점 좁히는 방식이었다.

(선제공격... 아니 유인인가?)

그걸 알아본 고독모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파앗!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강유는 돌연 폭발적으로 쇄도하며 독두태보의 오른쪽 가슴을 비수로 찔러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분노한 독두태보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왼손으로 장력을 날렸다.

!

독두태보의 왼손에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일거에 해방되면서 강맹한 역도가 강유에게 밀려갔다.

!

순간 강유는 급정거했다가 돌진 방향을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틀어버렸다.

부악!

직진하던 강유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독두태보의 왼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은 강유의 왼쪽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그와 함께 독두태보의 왼쪽 허리가 그대로 강유에게 노출되었다. 오른쪽 가슴을 노리는 강유에게 반격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튼 결과다.

옳거니!”

고독모모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겼다!)

!

강유는 자세가 무너져 휘청거리는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그자의 허리를 비수로 강하게 그었다.

대주님!”

젊은 친구가 이겼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과 사람들이 놀라고 환호했다.

(그렇게 간단히 승부가 날 리가 있나?)

오직 한 사람 고독모모만은 하얀 눈썹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강유도 비수로 독두태보의 허리를 벤 직후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강유의 비수가 베는 순간 독두태보의 허리에서 쇳소리가 난 것이다.

(아차!)

독두태보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강유는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

오른쪽으로 몸의 균형이 무너졌던 독두태보가 기왕에 돌아간 몸을 더 빨리 돌리며 다친 오른손으로 강유의 가슴을 때린 것이다.

!”

수도(手刀)로 날린 독도태보의 오른손에 가슴을 맞은 강유는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이미 다쳤던 가슴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숨이 콱 막힌다.

저런...”

그렇지!”

강유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반면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퍼억!

이장쯤 날아간 강유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나뒹군 강유는 고개를 들며 대량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늑골이 몇 개 부러지고 심장이 일시적으로 정지하여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두태보의 오른손에 제대로 공력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유의 검이 깨진 파편이 여럿 박혔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두태보의 내공이 모두 주입된 수도에 맞았다면 강유의 몸은 동강 났을 것이다.

(... 자만했다!)

강유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애쓰며 자책했다.

독두태보의 반응과 약점은 정확히 간파했다.

문제는 독두태보의 몸에 도검이 불침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약점을 파악했어도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상대를 얕보는 경적(輕敵)과 자기중심적인 예단(豫斷)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강유는 또 몸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죽는 줄 알았군!)

독두태보도 식은땀을 흘리며 강유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일 강유의 비수가 마검칠식으로 휘둘러졌다면 독두태보는 허리가 끊어져 죽었을 것이다.

독두태보로서는 천만다행인 게 강유의 몸은 마검칠식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는 것은 여기까지다!”

화악!

독두태보는 더 이상의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강유의 목을 움켜쥐어왔다.

(이런...)

엉거주춤 일어서던 강유는 독두태보의 왼손이 벼락같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은 탓에 빠른 반응을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여지없이 독두태보의 손아귀에 목이 틀어잡힐 위기에 처했다.

덜컥!

하지만 그 직후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독두태보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끄윽...”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자세 그대로 벌벌 떠는 독두태보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강유는 놀라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강유는 비로소 독두태보가 공격을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제였는지 백발의 곱게 늙은 노파가 나타나 강철 지팡이 끝을 독두태보의 등에 대고 있었다.

백발노파는 물론 고독모모다.

지지지!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 끝에서 일어난 벼락이 독두태보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절세고수다! 흑백신귀에 못지않은...)

강유는 한눈에 고독모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이번에 제왕성은 우리 황금성에 너무 큰 무례를 범했다. 살려줄 테니 돌아가서 혈가람에게 전해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고...”

지지지!

준엄하게 말하는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에서 일어나는 벼락이 강해졌다.

끄윽!”

퍼억!

독두태보는 눈을 까뒤집고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이다.

성주가 신세를 졌구먼. 노신은 황금성에서 태상호법 노릇을 하고 있는 고독모모라고 하네.”

독두태보의 몸에서 강철 지팡이를 뗀 고독모모가 강유를 돌아보았다.

(황금성의 태상호법!)

소협 덕분에 본성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었어. 은혜 있지 않음세.”

놀라는 강유에게 고독모모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당황하며 마주 포권하던 강유는 옆을 돌아보았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다가오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며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원만하게 수습이 되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다가오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심장도 진상파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 * *

 

(다행히 내가 직접 나서서 강유를 구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귀면지존은 안도 아닌 안도를 했다.

그는 지금 개봉성 내에 자리한 어느 절의 칠층탑 꼭대기에 서있었다.

그 탑으로부터 수백 장 떨어진 개봉성 밖의 강유와 진상파 일행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강유는 여자면서도 키가 그와 비슷한 백팔금차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개봉성 동문쪽으로 오고 있었다.

(고독모모 덕분에 강유 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찜찜한 기분은 어째서인가?)

강유를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미간이 귀신 가면 속에서 찌푸려졌다.

(강유 놈의 실력으로는 제왕성의 철위사를 겨우 상대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헌데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의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칼질까지 했었다.)

강유가 독두태보를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귀면지존이었다.

(무공이라는 건 점수(漸修;점진적 수행)로 발전하는 것이지 저놈의 경우처럼 돈오(頓悟;별안간 깨달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귀면지존의 가슴 속에서는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강유 놈의 무공은 상궤를 벗어나 갑자기 몇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다. 그 원인이 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가면 속에서 귀면지존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강유 놈이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물건의 안전을 위해 뒤를 밟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이 과연 화로 진행될지 복으로 변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구나.)

스스스!

귀면지존의 모습은 곧 탑 위에서 사라졌다

 

***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삼경(三更)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지만 개봉의 번화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늦도록 인파가 끊이지 않는 번화가에 자리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이장(二丈)이 넘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송나라 시절 어떤 왕족이 막대한 재물을 투입해서 만든 장원이다.

수만 평 넓이인 장원 안에는 별세계가 꾸며져 있다.

여러 개의 정원뿐 아니라 상당히 큰 인공 호수까지 품고 있어 왕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 황금성 개봉지점 깊은 곳에는 돌과 강철로 지어진 육중한 건물이 한 채 서있다.

몇 명의 백팔금차가 지키고 있는 이 건물은 보물창고 겸 연공관이다.

 

* * *

 

연공관으로 사용되는 밀실은 어둑하다.

천장에 몇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을 뿐 불은 켜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책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밀실 사면의 벽에는 책과 죽간들로 채워진 책꽂이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과 죽간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나가면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무공비급들이다.

무공비급으로 가득 찬 책꽂이 외에도 밀실에는 책상과 함께 의자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밀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중앙에 놓인 넓직한 돌 탁자다.

우윳빛의 새하얀 돌 탁자는 사실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년한옥은 천고의 보물로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고 내공이 증진된다.

그 때문에 만년한옥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싸게 거래된다.

헌데 이 밀실에는 폭 네 자에 길이 일곱 자, 두께는 한자나 되는 거대한 만년한옥으로 만든 탁자가 있다.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보물이다.

“...”

만년한옥의 탁자 위에는 강유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슈우우! 슈우!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은 강유의 온몸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강유의 몸에는 놀랍게도 상처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냉혈철심 사우, 독두태보와 거푸 싸우면서 입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제 약간의 흉터로만 남아있다.

불과 몇 시진 만에 강유는 모든 내, 외상에서 완치된 것이다.

단순히 상처가 치유된 정도가 아니다.

강유는 내공도 비약적으로 증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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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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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자의 마음을 모른 죄()

 

 

진룡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욕됨을 참고 억지웃음까지 웃어야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것같았다.

그때 짐은 안풍에 가지 말아야 했다.”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예이연의 목소리에 이어 걸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한림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성이 안풍을 얻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갔던 것인데... 만약 그 틈을 노려서 진우량이 안풍으로 공격해 왔었다면 짐은 꼼짝없이 그에게 천자의 관을 들어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사내는 바로 주원장이었다.

예이연이 주원장의 말을 받았다.

"진우량이 어리석었던 게지요. 그의 막료들중 인물이라 할만한 자는 없었으나 넷째 아들 진룡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군."

주원장이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진룡은 어리석은 아비가 내치는 바람에 강호의 떠돌이가 되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후 돌아와 파양호대전에는 참가했는데... 만약 신첩의 오라버니가 황상을 그리워하지 않고 진룡의 계책대로 싸웠다면 아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

예이연의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 듯 주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예이연이 조리있게 설명을 했다.

"진룡은 황상께서 작은 개미선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거선들의 진속에 같은 작은 개미선들을 포진시키라고 했사옵니다. 거선으로 폐하의 개미선들을 한쪽으로 몰아 붙친 후 작은 배들로 틈을 메꾸어 몰살시켜려고 하였지요."

"진우량의 자식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니... 진우량이 그 아들의 반만 되었어도 파양호대전은 쉽지 않았겠군."

주원장이 비로소 감탄하며 말했다.

"결국 오라버니가 폐하를 따르기로 작정함으로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예이연이 교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원장은 그녀를 힘주어 껴안아 주었다.

"그대 오라비의 공이 과연 적지 않군. 짐이 그의 벼슬을 더욱 높여 주도록 하지."

예이연은 주원장을 살짝 밀치고 그의 품을 빠져 나오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헌데 황제에게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그녀는 맞은편 창에 난 구멍으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예이연은 내색하지 않고 주원장에게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폐하! 청이 있사옵니다. 오늘 첩의 심신이 여의치 안사오니 침전을 옮겨 주셨으면 하옵니다."

"귀비가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군."

주원장의 허락을 들으며 예이연은 힐끗 창을 곁눈질했다.

 

진룡은 처마에 매달려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예이연이 자신을 져버렸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모든 탓을 예지운에게 돌리고 있었다.

진룡은 주원장이 아쉬워하며 방을 나가자마자 봉창을 밀치고 날아들어가 예이언 앞에 섰다.

()왕자님!”

몸매만으로도 진룡임을 알아본 예이연이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왜 이제야 왔어요? 당신은 내가 주원장 그 늙은 도적에게 수모를 겪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진룡은 매달리며 오열하는 예이연을 힘주어 안으며 목이 메었다.

"아무것도...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진룡의 말은 그녀가 어떻게 지냈던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예이연이 진룡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쓸어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당신 말을 새겨듣지 않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잡혀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인질이 되어 주원장에게 억류되어 있기로 하고 오라버니가 칼을 바꾸어 쥐었던 것이에요.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흑흑흑...!"

예이연이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진룡은 예지운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속내를 숨기며 예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 내 누이들과 조카들은 어디로 잡혀갔소?"

"그분들은 모두 잘 있어요. 제가 주원장에게 빌어서 모두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예이연의 그 말에 진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누이와 조카들의 안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함께 도망칩시다. 누이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오손도손 살아가도록 합시다."

진룡의 제안에 예이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제가 그냥 도망치면 오라버니가 주원장 손에 죽고 말 거예요. 미리 귀뜸이라도 해주어야하지 않겠어요?"

 

***

 

진룡은 예이연에게 사흘 후 도망칠 준비를 갖춘 후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그녀의 침실을 빠져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궁궐을 빠져 나오기 위해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을 때였다.

또 한 명의 백남빈한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진룡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걸어가는 그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막내누이 진산화(陣珊花)였다.

휘익!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소녀를 낚아챈 진룡은 궁궐 담장을 날아 넘은 후 미친 듯이 달렸다.

품안에 안겨있는 소녀는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릉 외곽 야산에 자리한 어느 무덤 앞에서 진룡은 소녀를 내려놓았다.

"! !"

넷째 오라버니인 줄 알아본 산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훌쩍거리기만 했다.

진룡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예이연은 누이와 조카들이 안전한 곳에서 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산화만은 궁궐에 있었단 말인가?)

 

한참을 울던 산화는 날이 밝을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자결했으며 세명의 올캐들은 무창이 떨어질 때함께 자결해버렸다.

큰언니 둘은 주원장의 군사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다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고 죽었다.

그녀와 바로 위의 언니 산산(珊珊)도 병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위험한 순간 예지운이 달려와서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산산과 산화는 예지운과 함께 금릉으로 왔다.

조카들은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릉으로 온 후 예지운은 본색을 드러내 산산을 겁탈했다.

산화도 겁탈하려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자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던져주어 버렸다.

지금 산산은 예지운의 첩이 되어 살고 있고 예지운의 부하들에게 윤간당한 산화는 예이연이 궁궐로 데리고 들어가 하녀로 쓰고 있었다.

공주(公主)의 처참한 신분하락이었다.

막내로 자란 산화는 어리고 겁이 많아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이날도 위사들의 밤참을 갖다 주기 위해서 가던 중 진룡이 발견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산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났을 땐 해가 높이 돋아 있었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산화는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미 어린 티가 하나도 없었다.

눈가의 주름살이 진룡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내막을 알게 된 진룡은 망연자실했다.

(그녀는... 그녀는 나를 속였구나. 나를 속였구나.)

정에는 약하지만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룡이다.

사흘 후 궁궐에서 만나자는 예이연의 약속이 사실은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애정도 믿음도 모두 분노로 바뀌었다.

 

***

 

진룡은 침묵으로 분노를 삭이면서 산화를 데리고 객점으로 갔다.

술과 만두를 시켜 먹은 후 사자검을 꺼내어 푸른 검신을 닦고 또 닦았다.

온 몸에서 살기가 돋아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산화는 지친 몸을 침상에 누이고 잠들었다.

고개를 들어 누이를 돌아보는 진룡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시 밤이 되었다.

진룡은 잠들어 있는 산산에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서 토닥거려 주고는 사자검을 들고 궁궐로 숨어들어갔다.

예이연의 침소까지 달려가는데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단숨에 날아들어가 휘장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깔깔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예이연과 시녀들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나가 있도록 해라."

시녀들을 내 보낸 예이연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했다.

"...! 다섯은 천정 안에 숨고, 둘은 침상 밑에 숨고 밖의 매화 숲에는 궁수(弓手)들을 숨겨 놓는 다면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할지라도 꼼짝 못할 거야."

예이연은 중얼거리며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진우량은 이길 가망이 없었어. 그리고 진룡은 재주는 있었지만 황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나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을 거야. 나는 황후가 되는 것을 바랐는데...

하여간 파양호대전에서 전향하길 잘 했어. 이겼어도 황제는 그의 형이 되고 그는 나 보고 무슨 곡에 가서 살자고 할 게 뻔했으니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진룡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이연이 허영과 사치심으로 가득 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다시 숨어들었을 때는 예이연을 보자마자 처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잔정이 그로 하여금 살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었다.

그랬는데 예이연의 속내를 엿보게 되자 남은 정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휘장을 헤치고 불쑥 그녀 앞에 나섰다.

"!"

예이연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마님! 무슨 일인가요?"

밖에서 시녀들이 황급히 묻는 소리에 예이연은"... 쥐가...!" 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애써 당황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룡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 왔어요."

"!"

진룡은 짧게 대답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이연이 덧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지금 떠나요. 당신이 와주어서 기뻐요."

진룡은 가만히 서있고 예이연은 한쪽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감싸며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녀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오른손에는 언젠지 모르게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당신, 왜 이러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예이연은 묵묵히 서있는 진룡을 재촉하는 척하며 오른손의 단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번쩍! 싸악!

밑에서 기습적으로 베어 올라오는 검은 피하기가 가장 어렵다.

진룡은 빠르게 물러섰으나 단검의 끝이 스치면서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죽엇!”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 예이연은 이를 악물며 다시 단검으로 진룡의 목을 노리고 찔렀다.

과연 미녀장군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는 신랄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 정도 손속은 대비하고 있는 진룡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객이다!”

두 번째 공격도 진룡이 간단히 피해버리자 예이연은 크게 소리치며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삐익! !

그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위사들이 몰려들었다.

스르릉!

진룡은 그제야 사자검을 뽑아들었다.

슈육!

검을 치켜들면서 내딛은 한걸음에 예이연을 따라잡았다.

번쩍!

그리고 예이연이 바닥에 발을 대기도 전에 비스듬히 목 왼쪽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베어버렸다.

위사들도 뛰어오면서 보았으나 실로 전광석화같은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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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연 아닌 기연

 

 

네 말대로 은원의 분간은 확실히 해야겠지?”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난 널 죽이는 대신 몸에 좋은 이걸 먹여줄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손에 든 화룡단정을 이검한의 얼굴 위에 대고 흔들었다.

(... 안돼!)

흑요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검한은 기겁했다.

의술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는 이검한인지라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먹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말아요! 난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

다급히 외치던 이검한의 눈이 치떠졌다. 흑요설이 말을 하느라 벌린 그의 입에 화룡단정을 밀어 넣은 때문이다.

주르르

화룡단정은 이검한의 타액과 닿는 즉시 녹아서 액체가 되었다.

그리고는 코가 막힌 탓에 입으로 밖에 숨을 쉴 수 없게 된 이검한의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크헉!”

다음 순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온 몸을 퍼덕거렸다. 액체가 된 화룡단정을 삼키자마자 뱃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마치 펄펄 끓는 쇳물을 삼킨 기분이다.

끄윽!”

이검한은 내장이 단번에 숯이 되어버리는 것같은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화악!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난 네놈에게 살수를 쓴 게 아니다. 그러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화룡단정의 열독이 이검한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에서 손을 떼었다.

파팟!

그리고는 그때까지 막혀있던 이검한의 마혈(痲穴)을 풀어주었다.

끄윽! !”

마혈이 풀린 이검한은 달궈진 가마 솥 안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몸부림쳤다. 내장이 익어 버리는 듯한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 제발... 살려줘요 왕후님!”

이검한은 엉금엉금 기어가 흑요설의 다리에 매달렸다. 오직 그녀만이 초열지옥에 빠진 것같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더러운 손을 어디에 대느냐?”

!

흑요설은 매몰차게 발길질을 해서 이검한을 떨쳐버렸다.

끄윽!”

콰당탕!

흑요설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이검한의 몸은 바닥에서 몇 바퀴 굴렀다.

제발... 제발 왕후님...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요!”

모질게 나뒹굴었던 이검한은 다시 흑요설을 향해 기어왔다.

정 참기 힘들면 바닥에 머리를 찧어라. 지금 네놈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

흑요설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이검한을 더 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몰라 서둘러 떠나려는 것이다.

호호호! 이제 시작이다. 세상에서 사내라는 족속은 나 흑요설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흑요설은 독기서린 웃음을 터트리며 밀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가지 말아요 왕후님! 살려 주세요 제발...!”

이검한은 멀어지는 흑요설에게 손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밀실을 나가려던 흑요설이 멈칫 멈춰 섰다.

(... 혹시...)

이검한은 엄청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이 헛된 것임은 이내 밝혀졌다.

흑요설이 밀실 입구에 멈춰선 것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물, 마화삼보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이 따위 구리조각에는 볼일이 없다!”

흑요설은 마화삼보중 마화경은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빠캉!

흑요설의 발에 차여서 삼장 쯤 날아간 마화경은 석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마화경에는 마화사원의 경천동지할 무공비결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마화사원의 무공들은 모두 양강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흑요설은 마화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놈은 제법 쓸모가 있겠구나!”

반면 마화신척을 본 흑요설은 눈을 반짝 빛냈다.

장차 사내놈들을 멸종시킬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마화신척을 집어 드는 흑요설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른다. 마화신척에 서려있는 강력한 화기로 사내들을 태워죽일 생각에 미리 흥분되는 흑요설이었다.

호호호! 그래도 네놈은 행복한줄 알아라. 사내놈들이 세상에서 멸절당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을 테니까!”

흑요설은 창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이검한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스슥!

직후 그녀의 모습은 꺼지듯이 밀실에서 사라졌다.

... 안돼요! 그냥 가면 안돼요 왕후님!”

이검한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호호호 나 흑요설이 간다! 기다리고 있거라 더러운 세상아!”

흑요설의 광기서린 웃음소리도 삽시에 까마득히 멀어졌다.

끄윽! ... 너무 해요! ... 날 죽게 만들고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용광로에 빠진 듯 지독한 열기에 휩싸인 채 이검한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은 화로에서 오랫동안 달궈진 쇳조각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푸스스! 화르르!

그와 함께 이검한이 입고 있는 옷가지에 불이 붙어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검한의 전신 모공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 결과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것은 옷가지뿐만이 아니었다.

이검한의 머리카락과 온몸의 털들도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오래지 않아서 이검한의 머리는 몽땅 타고 재가 되어 버렸다. 마치 중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콰득! 까드드득!

터럭과 옷가지를 태우는 연기에 덮인 채 이검한은 석실의 돌바닥을 양손으로 벅벅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삽시에 돌바닥을 긁어대는 손가락 끝이 터져 피로 범벅되고 있었다.

(... 이대로 죽고 마는 건가?)

이검한은 몸속에서 들끓는 엄청난 열기에 아득히 정신을 잃어가며 절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기가 강력한 영약인 화룡단정을 준비없이 복용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흑요설이라면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는 끔찍한 열기도 제어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요설은 이미 밀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흑요설이 가버린 이상 이검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헌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으으!

어디선가 한 가닥 서늘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이 한기는 아주 미미하여 설령 흑요설이라 해도 쉽사리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검한의 몸은 불덩이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극히 미세한 그 한기도 느낄 수가 있었다.

으으으!”

이검한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쇳물을 들이킨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중이다.

그래서 비록 미약한 한기지만 마치 가뭄 끝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 !”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열사의 사막을 헤매던 나그네가 물 냄새를 맡고 샘물을 찾아가듯이...

 

***

 

이검한이 감지한 미세한 한기는 밀실 후면의 석벽에 세로로 길게 나있는 틈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가는 균열은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의해 방금 전 생긴 것이었다.

(... 저 벽 안쪽에 내 몸의 열독(熱毒)을 치료해줄 무언가가 있다!)

이검한은 끔찍한 고열 때문에 시뻘개진 눈으로 석벽에 나있는 틈새를 노려보았다. 비몽사몽간에도 그 석벽 뒤쪽에 자신을 구해줄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 부서져라!”

이검한은 그 석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검한은 몸 속에서 들끓는 지독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석벽은 내공이 실리지 않은 이검한의 주먹질 정도에 부서질 리가 없다.

퍼석!

하지만 단단해 보이던 석벽은 이검한의 주먹이 후려치는 대로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석벽처럼 보였던 벽은 돌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흙벽 위에 회를 두텁게 발라서 석벽처럼 보였을 뿐이다.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그 벽이 갈라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회가 칠해진 흙벽은 두께가 두자가 넘었다.

그 정도 두께의 흙벽을 한 주먹에 무너트릴 힘이 지금의 이검한에게는 없다.

푸시시싯!

헌데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와 함께 흙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검한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후려친 주먹에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력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내공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 그 극양잠경(極陽潛勁)이 흙벽을 일거에 무너트린 것이다.

물론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이검한의 주먹질에서 강력한 극양잠경이 뿜어진 것은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이었다.

퍼석! 푸스스!

한 번 더 후려친 이검한의 주먹질에 흙벽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월동문 형태의 통로였다.

흑요설이 천여 년 동안 갇혀있던 밀실 후면에는 또 다른 밀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밀실을 연결하는 월동문은 회를 바른 두꺼운 흙벽으로 밀봉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

부서져 내리는 흙벽 안쪽으로부터 강력한 냉기(冷氣)가 쏟아져 나왔다.

쩌저정! 쩌적!

월동문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냉기는 얼마나 강력한지 흑요설이 갇혀있던 밀실 전체를 일거에 허연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냉기에 쏘이는 순간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얼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속에서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열기가 들끓고 있는 이검한에게는 그토록 강력한 냉기조차 그저 한 여름의 소나기같이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으으으...”

끓는 물이라도 단번에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뒤집어쓰자 혼미하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다.

이검한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무너진 흙벽 안쪽을 살펴보았다.

 

흙벽이 무너지며 드러난 월동문 안쪽도 한 칸의 밀실이다.

다만 그 밀실은 흑요설이 갇혀있던 앞쪽과 달리 천연의 종유동굴(鐘乳洞窟)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상당히 넓은 종유동굴인데 높은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서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순(石筍)들이 자라고 있다.

한데 이 종유동굴의 벽과 천장은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무언가 강력한 냉기를 품은 물체가 종유동굴 전체를 얼려버린 것이다.

크으! ... 저 여자로구나! 냉기의 근원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월동문 안쪽으로 들어선 이검한은 헐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종유동굴 중앙에는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盤石)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석자 쯤 되는 그 반석 위에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이 누워 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칠흑같이 검은 옷은 춘추전국시대에나 유행했음직한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나이가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그 여인은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서역에서 고금제일미인으로 불려온 누란왕후 흑요설이라 해도 이 흑의여인보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의여인에게는 그 빼어난 미모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일견하기에도 흑의여인이 세상 사내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여걸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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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3)

 

 

<이놈아, 잘 듣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마면혈도가 처량한 음성으로 전음입밀을 보낸다.

 

<성공한다면 살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우리 둘은 저 시체 놈의 밥이 될 것이다. 저 얼어 죽은 시체 놈은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걸 아주 좋아하니 죽어도 우린 도살 될 것이다.>

 

순간 임청우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잡아먹힌다는 것은 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전율이다.

 

<무쌍층층공은 정신을 온화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눈 꼬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밀실에서 문을 잠그고 편안하게 자리를 편 다음,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베개 높이는 두치 오푼으로 하여 반듯이 누워 눈을 막고 기를 가슴속에 넣어 닫아 버리고, 자그마한 털을 코위에 올려놓아도 떨어져 내리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삼백 호흡을 거듭하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없게 한다.>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도 나는 정신이 온화하다. 하지만 뒤의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득이 있겠는가? 당신이나 나나 죽게 될 것은 정한 이치 같은데...)

임청우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마면혈도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계속 들려준다.

 

<아침 저녁은 음양이 바뀌는 시간이니, 아침의 오경초(五更初)에 난기(暖氣)가 이르게 되고, 눈이 떠지는 것은 상생(相生)의 기가 오르는 것이며, 이름하여 양기가 동하고 음기가 소멸한다고 한다. 저녁의 일몰 후에는 냉기가 심하고 추위가 몸에 스며, 침실로 들어가 앉아, 잠을 자는 것을 하생의 기가 이른다고 하여 양기가 소멸하고 음기가 동한다고 한다. 오경초에는 난기가 이르고 해가 진 뒤로는 냉기가 이른다. 음양의 기는...>

 

마면혈도의 이마에 땀이 베인다.

그러나 그 땀은 금방 얼어붙어 얼음이 되어 버린다.

마면혈도의 음성은 가늘어지고 점점 떨려 발음이 온전하지 않다.

임청우는 차츰 마면혈도의 말에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면혈도가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음성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게다가 마면혈도의 무쌍층층공은 어떤 면에서는 불심연화지의 구결과도 비슷한 곳이 있기도 했다.

철선동시는 막바지 공격에 힘을 쏟고 있다. 밀랍같이 창백하던 그자의 얼굴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돋아나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되었다.

죽이려는 자는 죽이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죽어가는 자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하며 모든 힘을 그쪽으로 쏟고 있다.

마면혈도는 오직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운용하여 철선동시의 공력을 흡수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철선동시의 공력은 마면혈도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따라서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상, 마면혈도도 임청우의 생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단지 임청우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진기를 운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무쌍층층공을 최소한 사성(四成)까지 성취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임청우의 공력으로 흡수함으로써...

원래 무쌍층층공은 무림의 절정신공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면혈도는 태산(泰山)의 한 석실에서 우연히 그 비급을 얻어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무공을 따라가지 못해 칠성(七成)에 달한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만약에 팔성(八成)이 되기만 해도 그의 무공은 칠성일 때의 두 배가 되고, 구성(九成)이 되면 칠성의 네 배가 되는 것이니 무쌍층층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림사에 있어서 무쌍층층공을 팔성이상으로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무쌍층층공의 존재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얻은 사람이 무쌍층층공의 매력에 푹 빠진 때문이다.

무리하게 일성이라도 더 익히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십이성 다 익히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다가 늙어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면혈도가 무쌍층층공을 무림으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만약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익히기만 한다면 이미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철선동시의 공력은 꼼짝없이 임청우의 것으로 융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제발...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한 마디라도 알아듣고 진기를 움직여 봐라.)

마면혈도는 구결을 외우면서 속으로는 애원하고 있었다.

 

<...음양의 기는 이와 같이 번갈아 가며 출입을 걷듭하여 천지, 일월, 산천, 해하, 인축, 초목 등 일체 만물은 그 체내에서 대사를 거듭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그 일진일퇴함이 꼭 밤낮의 교대나 해수의 간만과 흡사하다. 이것이 천지순환의 도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며 임청우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이 괴물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성인(聖人)들의 말씀과 진배가 없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마면혈도가 읊는 구결에 심취되어 갔다.

무쌍층층공의 구결들은 그가 읽은 다른 책들, 그리고 불심연화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같으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어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깊이 심취한 만큼 마면혈도가 외는 구결은 한자도 빠짐없이 임청우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재워지고 있었다.

임청우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데 마면혈도의 음성은 급격히 가늘어지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졌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구결에 따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모아주기 만을 바라며 스스로 생각해도 그다지 가망 없는 일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미 그자의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공력으로 구사하는 전음입밀에 이어 배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을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펼치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임청우의 몸에 쌓였던 서리는 거의 사라지고 단지 얼굴과 피부만이 거무스름할 뿐인데...

 

<아침마다 오방(午方:남방(南方)을 말함)을 향하고, 두손을 무릎위에 놓고, 천천히 무릎 관절을 누르며, 입으로부터 탁기(濁氣)를 내뱉고... 현목(玄牧)의 문(), 천지(天地)의 근()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득 여기까지 들었을 때 임청우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속을 흘러 다니던 기이한 힘이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헌데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듣고 있는 동안 그 힘들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치 손을 갖다 대면 만져질 것같은 실체로 느껴졌다.

기분뿐이겠지만 자신의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것같기도 하다.

임청우는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느끼며 경이에 눈을 떴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웠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철선동시의 거친 공력은 자신의 몸을 거쳐서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의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듯이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철선동시의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아무 저항없이 통과하여 마면혈도의 몸에 그대로 이르렀다.

동시에 임청우의 몸속에 남아있던 빙골산의 독기와 색혈지독도 그 힘을 따라서 마면혈도의 몸으로 깡그리 옮겨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 임청우의 몸이 빈 대롱이 되어 들어온 물을 모두 다른 쪽 끝을 통해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청우의 내관(內觀:속을 봄)이 시작되면서 막혀있던 빈 대롱이 뻥 뚫리며 거침없이 물이 흘러가는 것과 똑 같았다.

 

<...이리하여 태화(太和)의 기가 기해(氣海)에 이르고 자연히 용천에 이르면 온몸이 흔들리고 두 다리도 오그라져 굽게 되고 자리에 앉으면 마디마디가 우두둑하고 소리가 나게 된다. 이것을 일층통(一層通)이라고 한다. 일층통에서 이층통으로 계속 연성하여 삼층통에서 오층통에 이르게 되면...,십이층통에 이르게 되면 마음 속에 허무함을 유지하고 유연(悠然)한 기도 갖추어져서 덕으로는 대자연과 합하고 도로는 천지와 융화되리니...>

 

마면혈도의 음성은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명도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질긴 말대가리... 이제야 겨우 죽었구나!)

마면혈도가 죽은 것을 확인한 철선동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몸 속의 독기를 임청우의 몸으로 옮기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임청우는 마면혈도가 전했던 구결을 다시 한번 천천히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속에 있던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이 철선동시의 통제를 벗어나 임청우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팔기경(八氣經)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수만 마리의 벌들이 여왕벌의 뒤를 쫓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

철선동시는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경략을 돌면서 그의 공력으로 융화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십이정경(十二正經)이란 수태음 폐경, 수양명 대장경, 족양명 위경, 족태음 비경, 수소음 심경, 수태양 소장경, 족태양 방광경, 족소음 신경, 수궐음 심포경, 수소양 삼초경, 족소양 담경, 족궐음 간경의 열 두가지 경략을 말하고,

팔기경(八奇經), 또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란 양교맥, 음교맥, 양유맥, 음유맥, 대맥, 충맥, 독맥, 임맥의 여덟 경략을 말한다.

순식간에 화선지에 엎질러진 먹물이 번져가는 기세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모든 경맥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리자 철선동시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지 못했다.

모든 공력으로 마면혈도를 공격했던 철선동시다.

헌데 그 공력들이 회수되지 못하고 그만 임청우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

마침내 모든 공력이 소진되어 버리자 철선동시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죽고 말았다.

임청우는 자신의 경맥을 따라서 도는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익히면서 내공이란 어떤 것인 가를 어렴풋이 알았던 것이다.

더우기 그의 몸속을 분탕질 치면서 돌아다니던 용조수의 공력이니 더욱 낯설지 않았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해 용조수 공력을 거침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버렸다.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용조수의 공력은 과연 대단한 것으로 임청우는 단숨에 무쌍층층공을 육층통(六層通)까지 익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공력은 무쌍층층공으로 운용되되, 그 속성은 용조수의 공력인지라 세상에 전혀 없는 엉뚱하고도 기이한 것이 되어버렸다.

뚜두둑! 뚜둑!

임청우의 몸에서 끊임없이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이 오그라들었다가 펴지는가 하면 몸이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 하나하나가 무쌍층층공의 일성 일성 터득해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면혈도가 몸을 자벌레처럼 구부릴 수 있었던 것도 무쌍층층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느 틈엔가 임청우의 등에 박혀있던 철선동시의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던 임청우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다가 잠잠해졌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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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강행돌파

 

 

대주님! 심상치가 않습니다.”

저희도 마차들을 저지하는데 가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서 보고 있던 동위사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기하라!”

하지만 독두태보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진정시키면서 폭주하는 마차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마부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헌데 그중 한 대의 마차를 모는 늙은 마부는 오히려 연신 고삐를 내리쳐 말들을 재촉하고 있는 게 독두태보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

독두태보는 눈을 부릅뜨며 몸을 날렸다.

대주님!”

왜 그러십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있던 동위사들도 깜짝 놀랄 때였다.

뒤에서 네 번째 마차에 진상파가 타고 있다.”

독두태보가 쏘아진 화살같이 날아가면서 외쳤다.

역시 대주님!”

단박에 표적을 찾아내셨다.”

두 명의 동위사들도 즉시 독두태보의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마부석에 전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던 강유는 언덕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독두태보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자신들이 탄 마차로 날아오는 게 들어왔다.

(과연 동위사대의 대주답구나. 단번에 이 마차를 골라내다니...)

강유는 눈을 번뜩이며 마부석에서 일어섰다.

... 공자! 일어서시면 위험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인장께서는 개봉성 동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십시오.”

휘익!

기겁하는 전노인에게 말하며 강유는 마차의 지붕으로 가볍게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에 독두태보는 어느덧 마차에서 오장(五丈;15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독두태보의 오장쯤 뒤에는 두 명의 동위사들도 날아오고 있다.

도중에 멈추면 절대 안됩니다!”

!

전노인에게 외치면서 강유는 추격해오는 독두태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면서...

이랴!”

철썩! 철썩!

강유의 지시를 받은 전노인은 전력으로 고삐를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주인의 재촉을 받은 두 필의 말은 거품을 물며 앞으로 달려간다.

 

날아오던 독두태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이 추격하던 마차의 지붕 위로 죽립을 쓴 자가 뛰어오르더니 다음 순간 발검을 하며 자신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강유!”

독두태보의 입에서 분노에 찬 노성이 터졌다. 맹렬히 날아오르는 바람에 죽립이 벗겨지며 강유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우의 수하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얼굴이다.

!

그 사이에 독두태보와의 거리를 단번에 일장 안쪽으로 좁힌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앞으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이 나선형으로 홱 뒤틀린다.

마검칠식!”

강유가 펼치는 검법의 정체를 알아본 독두태보는 경악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틈은 없었다.

독두태보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후려쳐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과 강철처럼 변한 독두태보의 손바닥이 접촉하며 벼락이 근처에 떨어진 듯한 굉음이 일어났다.

(당했다!)

직후 독두태보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강유가 내지른 검의 검극(劍極)에서 막는 게 불가능한 파괴력이 손바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유의 검을 막은 독두태보의 손바닥은 강철보다도 더 굳세다.

하지만 강유의 검극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힘은 독두태보의 그 손바닥을 두부처럼 짓뭉개려 한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빠캉! !

독두태보의 손바닥을 으스러트리려던 강유의 검이 돌연 유리처럼 깨지며 흩어졌다. 거푸 펼쳐진 마검칠식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검이 깨져버린 것이다.

검이 깨지면서 마검칠식의 파괴력도 안개같이 흩어진다.

크아!”

독두태보는 으스러지는 것을 면한 손바닥으로 독문의 장공(掌功)인 철장진살(鐵掌振煞)을 쏟아내었다.

!

집채만한 바위도 간단히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강유의 가슴에 작렬했다.

!”

후두둑!

가슴이 뭉개진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뿜어내며 뒤로 날아갔다.

콰당탕!

독두태보의 장력에 가슴을 강타당한 강유의 몸뚱이가 이장 쯤 날아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

독두태보 역시 허공에서 휘청하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내려서는 독두태보의 오른손에는 유리처럼 깨진 검의 파편이 여러 개 박혀있었다.

대주님!”

날아오던 동위사들이 그걸 보고 기겁을 했다.

(... 검이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게워내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의 손에는 손잡이만 남은 검의 잔해가 들려있었다.

죽일 놈!”

크아!”

! 스악!

두 명의 동위사가 강유에게 쇄도하며 장력을 날리고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발휘하는 장력은 천둥같고 검기는 번개같았다.

동위사들 개개인은 냉혈철심 사우보다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실력이 현격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다. 약간 약한 정도다.

그런 동위사 둘의 협공인지라 사우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흉험했다.

꽈앙! 쩍쩍!

장풍이 바닥을 박살내고 검기가 지면을 길게 가르며 골을 판다.

휘릭!

하지만 강유는 피를 토하면서도 이미 몇 장 밖으로 훌쩍 날아갔다가 내려서고 있었다.

소요보법!”

정말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놈이었구나.”

동위사들은 강유의 앞쪽으로 내려서며 이를 갈았다.

그들도 마침내 강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죽인다!”

()대주의 복수를 해주마.”

동위사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강유에게 다가섰다.

그자들 개개인의 실력이 사우보다 아주 아래는 아님을 알아본 강유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하물며 강유 자신은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다.

마검칠식을 펼친 후유증으로 경맥들이 뒤틀린 상태에서 독두태보의 강맹한 장력에 맞았다.

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놈은 내게 맡기고 너희들은 진상파의 신병을 확보하라.”

독두태보가 손바닥에 박힌 검의 파편을 뽑아내면서 다가왔다.

강유를 공격하려던 동위사들이 독두태보를 돌아보았다.

진상파가 개봉성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진다. 그 전에 따라잡아야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소이다.”

휘익! !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은 동위사들은 새처럼 날아올라 폭주하는 마차들을 추격해갔다.

어느덧 십여 대의 마차들은 개봉성 동문에 거의 이르러 있었다.

(진소저 말 대로 아슬아슬하구나. 일단 개봉성 안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제왕성의 인간들이 진소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텐데...)

강유는 성문을 지키던 관병들이 당황하며 마차들 앞에서 비켜서는 걸 곁눈질했다.

흐흐흐! 본좌가 실로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를 잡을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독두태보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이 되어 강유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요? 무후를 시해한 원수의 단서라니...”

강유는 소요보법을 펼쳐서 산책하듯 걸으며 독두태보에게 물었다.

십팔 년 전, 우리 제왕성의 안주인이시며 당금 황제의 고모 되시는 무후 영청공주께서 마검칠식에 변을 당하셨었다.”

마검칠식?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독두태보의 말에 대꾸하던 강유는 입을 다물었다.

 

<끄윽!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가 죽어가며 내뱉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필살일초라며 가르쳐주신 검법이 사실은 마교의 마공이었다. 게다가 제왕성의 안주인은 마검칠식에 죽었었고...)

어찌 된 내막인지 깨달은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요신군 강조는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필살일초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헌데 알고 보니 필살일초가 바로 마교의 저주받은 검법 마교칠식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강씨 집안이 제왕성과 철천지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흐흐흐! 무후님을 시해한 흉수와 관련 있는 네놈을 잡아가면 성주님께서 큰 상을 내리시겠지.”

독두태보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유가 마검칠식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 설명해도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데...

(상대는 지금의 내 실력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고수... 아무래도 오늘 좋게 끝나긴 힘들겠구나.)

독두태보와 대치한 강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두두두!

십여 대의 마차가 개봉성 동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성문 주변의 관병들과 사람들은 당황하며 급히 피했다.

끼럇!”

철석! 철썩!

전노인은 고삐를 연신 흔들어 말을 몰아붙였다.

앞선 마차들은 이미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진상파를 태운 전노인의 마차도 성문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되었다!)

전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실 때였다.

화악! !

돌연 마차의 앞뒤로 두 명의 사내가 날아 내렸다.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고 추격해온 동위사들이다.

으헉!”

! !

전노인이 기겁할 때 마차 앞쪽에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두 마리 말의 고삐를 하나씩 틀어쥐었다.

히히힝! 히힝!

콰드드!

엄청난 힘에 고삐가 잡힌 두 마리 말은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했다.

크왓!”

마차 뒤로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마차 후면의 기둥들을 움켜잡으며 버텼다.

콰드드! 드드드!

그 바람에 마차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으으으!”

동위사들이 달리던 말과 마차를 어렵지 않게 멈춰 세우자 전노인은 와들와들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생인지라 무림인들에게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아는 때문이다.

(간발의 차이였다. 마차가 성문 안으로 들어갔으면 관할과 규정에 까다로운 관병들이 개입해서 귀찮게 했을 것이다.)

앞쪽에서 말들의 고삐를 틀어쥔 동위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차는 개봉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수십 명의 관병들이 성문과 성문 위의 성루에서 지켜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제 아무리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황실과 각을 세울 수는 없다.

하물며 황실에 대한 영향력은 황금성이 제왕성보다 한 참 앞선다.

만일 진상파가 개봉성 안으로 들어갔다면 잡아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고삐를 잡은 자가 안도할 때 뒤쪽에서 마차를 잡아 세웠던 동위사가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갔다.

실례하겠소 진소저.”

덜컹!

그자는 거칠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창문이 닫혀있어서 어둑한 마차 안에는 진상파가 흐트러짐이 일체 보이지 않는 도도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카아!

진상파 대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섬전초가 이빨을 드러내며 앙칼지게 동위사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나오시겠소? 아니면 험한 대우를 받으시겠소?”

동위사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할 때였다.

죽이지는 마.”

진상파가 누군가에게 차갑게 말했다.

뭐요?”

!

동위사가 어리둥절할 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그자의 목을 뒤에서 움켜잡았다.

너무도 빠르고 또 강해서 동위사는 그 손을 피할 엄두도 벗어날 노력도 할 수가 없었다.

끄윽!”

우둑!

자신의 목뼈가 부러지려는 소리를 내는 것을 느끼며 동위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언제였는지 동위사 뒤에는 키가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의 여자가 나타나 그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이 거구의 미녀는 물론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진상파의 몸에서 풍기는 백리향의 냄새를 추적하여 개봉에 도착한 것이다.

죽일 놈! 감히 황금성의 성주님께 무례를 해? 아가씨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모가지를 부러트렸을 것이다.”

퍼억!

철관음은 기절한 동위사의 몸뚱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관음! 네년이 어떻게 여기에...!”

말고삐를 잡고 있던 동위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할 때였다.

! 콰직!

벼락 치듯 내리쳐진 철퇴(鐵槌)와 쇠몽둥이가 그자의 양쪽 어깨뼈를 박살내 버렸다.

크아아악!”

양쪽 어깨뼈가 자끈동 부러진 동위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 콰직!

그런 그자의 등을 한 쌍의 발이 세차게 내리밟았다.

황금성에 죄를 짓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성주님께 무례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각기 철퇴와 철장(鐵杖)을 든 육척 장신의 여자무사들이 좌우에서 동위사의 등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금색의 갑주로 무장한 그녀들은 물론 백팔금차들이다.

화악! 휘익!

뒤이어 십여 명의 백팔금차들이 허공에서 질풍같이 날아내려 마차를 에워쌌다.

... 백팔금차!”

양쪽 어깨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처박힌 동위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백팔금차 개개인의 능력은 제왕성의 은위사에 못지않다.

그 백팔금차들이 열명 넘게 나타난 것이다.

아주 늦지는 않았네.”

진상파가 마차 안의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채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왕성의 방해가 있어서 길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철관음이 고개를 숙였다.

고독할머니는?”

저희보다 먼저 도착하셔서 아가씨의 동행을 살피고 계십니다.”

애써 침착한 척 묻는 진상파의 질문에 철관음은 마차가 달려온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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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풍진세월(風塵歲月)

 

 

그후 노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짐작하건데 장사성이 그후로도 제법 오래 살아있었으니 노파가 마음을 바꾸어 먹었거나 오히려 장사성의 군사에게 죽었을 것이다.

천하를 떠돌면서 전쟁의 참상을 본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진룡이 보았던 것은 죽거나 상처 입고 신음하는 군사들의 고통이고 참상이었을 뿐이었다.

통곡하던 노파같이 전쟁의 추이(推移)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백성들마저도 그같이 고통 받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천하 전체가 전란에 신음하고 있음을 진룡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진룡은 알면 알수록 인간이 두려워졌다.

힘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를 원하며 싸우는 바람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눈물과 굶주림 속에서 하늘만 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도 힘을 가진다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각축을 벌일까?)

진룡은 파양호변을 거닐면서 끊임없이 자문했다.

"나는 전쟁이 싫다. 파리처럼 값없이 죽어가는 그 많은 인간들 중에는 이인(異人), 재사(才士)들도 끼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사(安史)의 난> 때 왕유(王維)가 귀머거리가 되었고 두보는 장안에 연금되는 신세가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밖에도 죽은 재사들이 어디 한 둘일까?

이토록 전쟁이 계속된다면, 재사는 모두 죽거나 심산에 은거하여 세상은 거친 무지랭이들만이 판을 치게 되어 황폐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진룡의 중얼거리는 말을 유심히 들은 노인이 있었으니 바로 사자검의 제십이대 전인 정사초(鄭詞樵)였다.

정사초는 진룡의 골격이 뛰어나고 문인의 기질이 있음을 높이 사서 그를 사자검의 제십삼대 전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미 세상에 흥미를 잃은 진룡인지라 스승인 정사초를 따라 창평곡으로 와서 검술을 익혔다.

그때까지 창평곡에서는 제이대 우승유로부터 스승이 제자에게 몇 가지의 검초를 가르치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사자검결이 너무도 오묘하여 말년에 가서야 겨우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전에 바탕이 될만한 검초를 가르친 것이다.

 

***

 

진룡이 창평곡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진우량은 신주(信州)에서 주원장의 군대에 패해 근거지인 무창(武昌)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삼년 후 진룡이 어느 정도 검술을 연마한 후 다시 세상에 나왔을 무렵 진우량은 세력을 회복하여 휘하의 군사가 육십만이 넘었다.

 

진룡이 창평곡을 나오기 얼마 전 장사성이 부장 여진을 보내 안풍(安豊)이란 곳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당시 안풍에는 주원장의 형식상 상관인 백련교 교주 한림아(韓林兒;한산동의 아들)가 심복인 유복통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안풍으로 가서 여진을 격퇴하고 한림아를 구했다.

진우량은 그 틈을 타 파양호 남쪽에 자리한 주원장의 군사거점 홍도(洪都)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잡느냐 못 잡느냐를 판가름할 건곤일척의 결전이 파양호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진룡은 의절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홍도로 가는 길목은 온통 진우량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왕자(王子)임을 알리자 앞을 가로 막는 사람은 없었으나 진룡은 군사들이 민간을 수탈하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도저히 그 혼자서는 말리지 못할 상황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홍도에 도착한 진룡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 무렵 진우량은 파양호 일대에 거대한 수군을 구축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대신 큰형 진선(陳善)을 만나 젊은 장수 예지운(睿芝雲)과 함께 병사를 논하고 작전을 세웠다.

예지운은 여동생 예이연(睿夷燕)과 함께 뛰어난 남매 장수였는바, 진룡은 예이연에게 한 눈에 반해 깊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

 

***

 

마침내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가 파양호에서 벌어졌다.

피아를 합쳐 무려 팔십만명의 군사가 동원된 파양호대전(鄱陽湖大戰)이 시작된 것이다.

헌데 전투는 진룡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진우량의 군대는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진룡이 신위를 발휘하기도 해서 주원장의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혼전 속에서 주원장도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긴 치열한 격전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진씨 부자가 그토록 신뢰했던 선봉장 예지운이 돌연 주원장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전세가 급변하여 진우량의 군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진우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살에 맞은 채 물에 빠져 죽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후 주원장은 진우량의 잔당을 토벌하여 호북성 일대를 평정했는데 이때 앞장 선 자가 바로 진우량의 가장 믿었던 부하 예지운이었다.

 

파양호대전에서 진룡은 뛰어난 검술로 적을 수없이 베고 큰형 진선을 구했다.

하지만 둘째형 진리(陳理)는 주원장 군대에 잡혀버렸고 셋째형 진충(陳忠)은 불타는 배와 함께 파양호에 가라앉은 후였다.

진룡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연인 예이연을 찾았다.

그러나 예이연의 함선은 깃발을 바꾸어 달고 오히려 그를 공격했다.

아수라장에서 큰형만을 구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진룡은 심한 허탈감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만약 자신이 세운 계책대로 전투가 진행되었더라면 주원장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지운의 배신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한스러울 뿐이었다.

 

진룡은 뒤쫓는 적을 베고 또 베면서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여산(廬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두 형제는 여산의 깊은 계곡에 숨어서 전군(全軍)이 다 파()했으며 아버지 또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과 함께 마음도 약해진 큰형 진선이 걱정하는 것은 무창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안위뿐이었다.

손에 들어올 뻔 했던 왕업(王業)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얼마 후 무창은 예지운이 이끄는 주원장의 군대에 함락 당했다.

자신의 가족들이 죽거나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진선은 상처가 도져 죽었다.

효자인 진선은 죽으면서도 부모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다.

진선은 죽기 직전 진룡에게 말했다. 형제 중 오직 진룡만이 살아남았으니 만약 왕업에 뜻이 있다면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재물을 찾아내어 군사를 일으키라고...

그 보물들은 무창의 어느 절에 숨겨져 있는데 진우량이 참배하려 갈 때마다 가져가서 숨긴 것이라 했다.

 

***

 

큰형을 여산에 묻은 진룡은 도처에 깔려 있는 주원장의 군사들을 피해 무창으로 갔다.

진우량이 무창에 세웠던 웅장하던 궁궐은 불타 없어졌고 남아 있는 가족도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예지운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무창을 공략한 선봉이 바로 배신자 예지운임을 들었다.

어머니는 진우량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결했으며, 형수들은 무창이 무너지던 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그리고 어린 조카들과 누이들은 주원장의 군사들에 의해 어디론지 끌려갔다고 했다.

 

***

 

진룡은 변복을 하여 신분을 감추고 명나라의 당시 도성이던 금릉(金陵) 응천부(應天府)로 갔다.

배신자 예지운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진룡은 자신의 가족이 당한 참사가 어쩌면 아버지가 일으킨 난으로 말미암은 인과응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예지운의 배신 때문이라고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끌려간 누이들과 조카들을 찾아야만 했다.

절망과 불행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진룡은 남의 불행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의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릉 응천부로 가는 길에 그가 본 것은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민초들의 모습이었다.

역설적으로 제왕들의 불운이 시작되자 민초들의 고통은 끝이 나는 듯 보였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도 이제 수습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여기저기서 활기찬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금릉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오가는 군사들의 무장(武裝)만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거리에는 검을 지닌 사람들의 수도 상당했다.

새로운 천하의 주인에게 한자리 얻기 위해서 기웃거리는 치들이리라.

 

***

 

금릉으로 들어온 진룡은 객점에 투숙한 후 사자검을 꺼내어 닦고 또 닦으면서 살기를 키웠다.

예지운은 주원장에게 공을 인정받아 광동행성우승(廣東行省右丞)이란 높은 벼슬을 하사받아 호사하고 있었다.

그의 집이 어딘지는 금릉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룡은 연인인 예이연의 소식이 궁금했다.

파양호대전 때 그녀의 함선이 자신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잘못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예이연에게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테고 배은망덕한 오라비 예지운같지는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객점의 사환을 불러 물어 보았다.

"혹시 진우량군에서 전향한 여장군 소식을 듣지 못했느냐?"

"미녀장군 말이죠? 그녀가 이곳 응천부에 왔을 때 정말 대단했죠."

"...!"

"아마 응천부 백성들 모두가 그 미녀장군을 보기위해 나갔을 겁니다. 제가 보아도 정말 예쁘더군요."

"그래 그 여장군은 지금 어찌 됐느냐?"

"주천자(朱天子)의 측실로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지요."

진룡은 사환의 말에 앞이 깜깜해졌다.

사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룡은 예지운이 출세를 위해 동생을 팔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호색한 주원장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예이연을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그리움이 밀려 왔다.

"먼저 그녀를 만나 저간의 사연을 들어 보고 누이들과 조카들의 행방도 물어보자. 어쩌면 그녀가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진룡은 그렇게 생각했다.

 

***

 

배신자 예지운을 찾아가는 것을 미룬 진룡은 야행(夜行)에 적합한 복장을 한 후 궁궐의 담을 넘었다.

무창에 있었던 아버지의 궁궐도 금릉의 궁궐을 본 따 지은 것이기에 구조가 낯설지 않았다.

대충 짐작으로 여인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숨어들어갔다.

곳곳에 내시와 위사들이 보였지만 절세고수인 진룡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순시를 도는 위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잠시 어느 지붕위에 엎드려 있을 때였다.

"호호호...!"

귀에 익은 여인의 웃음소리에 진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마 끝을 타고 봉창으로 접근하여 작은 구멍을 뚫었다.

방안에는 화려한 비단휘장이 휘감겨 있고 진기한 장식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귀비(貴妃)의 침실인 듯 했다.

금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의 뒷모습에 가려져 소매자락만 보이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호호호! 황상! 그 당시에는 무척 다급하셨던 모양이옵니다."

몽매에도 그리워한 예이연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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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녀와의 실랑이

 

 

으으으!”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눈 위에서 성숙한 여체의 비밀이 만개한 꽃처럼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란왕후 흑요설의 은밀한 부위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한 번 새겨지면 결코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처럼...

(여자... 여자의 그 부분이 저렇게 생겼었구나.)

이검한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아직 여자를 모르는 이검한에게 흑요설이 자진해서 개방해 보인 사타구니 속의 관능적인 구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호호호! 순진한 척 해 봐야 소용없다!”

그런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은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네놈도 더러운 수컷임이 확인 되었으니 오늘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드드드!

흑요설이 오른손을 쳐들자 밀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린다. 무려 천년 수위인 막강한 공력이 운용되자 주변의 공기가 저절로 요동을 친 때문이다.

쩌저적! 푸스스!

밀실의 천장과 벽이 문풍지처럼 떨리고 먼지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천년 수위의 막강한 내공이 실려 있는 흑요설의 오른손이 내리쳐지면 이검한의 몸뚱이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으스러져 버릴 것이다.

잠깐... 잠깐만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낀 이검한은 다급히 외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다행히 흑요설은 벌렸던 다리를 다시 모은 자세였다.

... 왕후님이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잘 알아요. 남자들을 증오하시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구요.”

이검한은 흑요설을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왕후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죽이시면 안돼요.”

내가 널 죽이면 안된다고?”

이검한의 말에 흑요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냐! 내가 어째서 너만은 죽이면 안되는 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살았다!)

흑요설의 반응에 이검한은 일단 안도했다.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왕후님도 일국의 안주인이셨으니 은원(恩怨)의 분간은 확실하시겠지요?”

이검한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교활한 놈이...”

흑요설의 아름다운 두 눈이 치떠졌다. 이검한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때문이다.

내가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네놈이 일조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이검한을 노려보았다.

...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가 천붕랑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왕후님은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어야 했을 테고... 그때까지 살아계실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는 없었잖아요.”

이검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하아!”

흑요설은 기가 막혔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이 부활하는 데 이검한이 일조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얄밉지만 귀여운 구석도 있는 놈이다!)

겁에 질려 자신을 곁눈질로 살피는 이검한을 내려다보며 흑요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잘 생기고 귀여운 사내아이다.

키가 흑요설 자신보다 커서 다 자란 성인인줄 알았는데 하는 행동과 말투에서 비로소 아직 어린 소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게다가 아직 철부지 애송이이기도 하고...)

흑요설은 갈등에 휩싸였다.

이검한의 말 대로 어쨌든 자신은 이검한에게 신세를 진 셈이 되었다. 이검한이 이 밀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끝내 한을 품고 마화적말강막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일국의 왕후였던 몸이다.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은 그녀의 자부심과 긍지가 용납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상대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다.

신세를 진 이 순진한 소년을 꼭 죽여야만 할까?

(...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냉혹하기만 했던 흑요설의 심사에 균열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이검한은 숨을 죽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만일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내게도 요 녀석같이 영특하고 늠름한 아들이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

흑요설의 마음속 균열은 점점 커져 어느덧 이검한에게 호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모든 여자는 늠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원한다.

그것은 흑요설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증오하여 말살하기로 맹세한 그녀였지만 본성은 보통의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평범한 여자로 살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을 낳고 정성을 다해 길렀을 것이다.

남에게 망설임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잘난 아들을 길러내는 것보다 더 뿌듯하고 행복한 일은 여자에게 없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 누워있는 이 소년이라면 모든 여자, 어머니들이 꿈꾸는 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에 비해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잘 생긴 얼굴은 한 눈에 봐도 영특하다.

이검한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만한 아들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튼실한 살덩이는 흑요설이 경험해본 어떤 사내의 것보다 우람할 것처럼 보이고...

(죽일...)

시선이 이검한의 아랫도리에 이르는 순간 흑요설의 눈 꼬리가 확 치켜 올라간다.

이검한의 아랫도리의 살덩이는 여전히 성이 나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금제일미인으로까지 여겨지는 절세미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이검한을 내려다보고 있다.

온몸의 체모가 사라진 탓에 사타구니 속까지 매끈하여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미녀중의 미녀인 흑요설의 알몸은 한창 양기가 뻗히는 나이인 이검한에게는 너무나 강한 자극이다.

그녀의 도자기처럼 희고 매끄러운 속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데워진다.

하물며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솟아난 한 쌍의 살덩이와 사타구니 사이의 목탁처럼 매끈하게 나있는 균열의 형상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애써 자제하려고 해도 이검한의 양물은 분기탱천하여 시들 줄을 모른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놈도 결국은 여자만 보면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의 알몸을 보고 극한까지 흥분해있는 이검한의 일부를 확인한 순간 갈등을 일으키던 그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 어째 느낌이 안 좋은데...)

부드러워지던 흑요설의 눈빛이 다시 서릿발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발견한 이검한은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이검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흑요설아! 흑요설아! 설마 짐승같은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어 짓밟혔던 치욕을 잊은 것이냐?)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약해지려던 마음을 추스렸다.

마화존자의 금제에서 벗어나는 데 네놈의 신세를 진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사내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몸이다.”

애써 차갑게 말하며 흑요설은 다시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 놈이 사내로 태어난 것이나 원망해라! 명복은 빌어줄 테니...”

드드드!

흑요설의 오른손에서 일어나는 역도에 의해 밀실이 다시 지진이라도 만난 듯이 뒤흔들렸다.

이제 그녀의 손이 내려쳐지며 이검한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 살려주세요 왕후님!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했다.

(요놈이...)

이검한이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자 차갑게 식어가던 흑요설의 가슴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겁에 질려 눈물을 질질 짜는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은 흑요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되살렸다.

십삼 연합국의 공격을 받고 누란왕국이 멸망할 때의 기억이 그것이었다.

누란왕국을 침공한 십삼 연합국의 군사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었다.

특히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들에게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를 썼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도살당하며 비명을 지르던 누란왕국 소년들의 모습이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떠오르는 흑요설이었다.

(죽여야 한다! 이놈도 여자만 보면 짐승이 되는 사내일 뿐이다!)

흑요설은 모질게 마음을 먹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치켜든 오른손을 바르르 떨기만 할 뿐 이검한을 내려치지 못했다. 겁에 질려 우는 덩치만 큰 소년의 모습은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이래서는 안된다!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세상에서 사내들을 없이 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를 악물어 보지만 그래도 흑요설은 선뜻 이검한에게 살수를 쓸 수가 없었다.

(뭐지?)

그렇게 갈등하던 중 흑요설은 이검한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를 감지하고 흠칫했다.

천여 년의 세월동안 마화적멸강막에 갇혀있었던 터라 열기를 감지해낼 수 있는 흑요설의 감각은 세상 누구보다 예민하다.

품속에 무얼 숨기고 있는지 보자.”

흑요설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리며 이검한에게 몸을 숙였다.

흑요설이 몸을 숙이자 아름다우면서 탄력이 넘치는 한 쌍의 살덩이가 이검한의 얼굴 위에 매달려 출렁거린다.

하지만 이검한에게는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신세였으므로...

흑요설의 섬섬옥수가 이검한의 옷 속으로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꺼낸 그녀의 손에는 오리알만한 구슬이 하나 들려있었다.

츠으! 츠으!

구슬에서는 노을같이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물론 그 구슬은 적린화룡이 죽으며 남긴 내단 화룡단정이었다.

화룡단정은 세상에 존재하는 영약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火氣)를 지니고 있다. 만일 남자가 화룡단정을 복용하면 절륜한 정력은 물론 무쇠라도 녹여버릴 수 있는 양강지기(陽强之氣)를 얻게 된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하려면 음기(陰氣)를 지닌 영약을 함께 복용해야만 한다. 화룡단정의 열독이 워낙 강한 때문이다.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복용하는 것은 펄펄 끓는 용암을 그냥 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걸 쓰면 되겠구나!)

한눈에 화룡단정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본 흑요설의 얼굴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검한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 드릴 게요. 마음에 드시면 그거 가지세요.”

화룡단정을 찾아낸 흑요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본 이검한은 급히 말했다.

화룡단정은 아깝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그걸 포기하고 살 수만 있다면 손해도 아니다.

물론 이검한은 흑요설의 생각을 잘못 짚었다.

귀한 물건이건 같지만 사양하마.”

흑요설은 배시시 웃으며 왼손으로 이검한의 코를 잡았다.

(설마...!)

코가 흑요설의 매끈한 손가락에 강하게 잡혀 숨을 입으로만 쉴 수밖에 없게 된 이검한은 불길한 예감에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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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천년만의 부활

 

 

흑요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미미하게나마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다.

츠으! 츠으!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을 감싼 마화적멸강막이 급격히 엷어져갔다.

(... 내가 천붕랑왕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다.)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한 이검한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이 밀실은 천여 년 동안 밀폐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철문을 여는 바람에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밖으로 급격히 유출되면서 약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마화적멸강막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두근! 두근!

경악하는 이검한의 귓전으로 미미하나마 누란왕후 흑요설의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저 마녀가 소생하려고 한다!)

이검한은 너무 놀라 심장이 멎을 지경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천년 이전에 살았던 누란의 왕후 흑요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약해지자 부활하려는 것이다.

사실 흑요설의 성취는 서역사천왕이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그녀는 당시에 이미 완벽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루어 도검에 해를 입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더 긴 수명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흑요설을 금제하기 위해 마화존자가 펼친 마화적멸강막조차도 그녀가 천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마화적멸강막은 외부의 영향을 완벽하게 차단해놓았으며 덕분에 흑요설은 세월의 잔인한 손톱에 할큄을 당하지 않고 육체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에 타격을 입고 정신을 잃었던 흑요설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마화적멸강막에 갇힌 후였다.

흑요설도 처음에는 마화적멸강막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내 마화사원 최강의 금제인 마화적멸강막이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이에 흑요설은 장기전을 택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마화적멸강막의 기운을 조금씩 자신의 몸에 흡수하여 중화시킬 작정을 한 것이다.

그녀의 특기는 바로 사내의 순양지기를 갈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채양보음이 아닌가?

흑요설은 동면에 들어간 개구리나 뱀처럼 신진대사를 극도로 저하시킨 상태에서 마화적멸강막의 힘을 조금씩 흡수해왔다.

몸 안으로 받아들인 마화적멸강막의 그 강렬한 화기 때문에 그녀의 온몸에서 털이란 털은 남김없이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흑요설이 마화적멸강막을 완전히 중화시키려면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지나야만 한다.

아무리 신진대사를 극한까지 저하시켰다고 해도 과연 그때까지 그녀의 육체가 견디어줄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헌데 흑요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검한이 호기심에 철문을 열면서 마화적멸강막의 힘이 밖으로 유출되며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마화적멸강막을 흐트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같은 내막을 알아차린 이검한은 다급해졌다.

(죽여야만 한다! 더 늦기 전에...!)

마화신척을 집어든 이검한은 긴장과 흥분으로 떨며 서둘러 흑요설에게 다가갔다.

흑요설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자 마화적멸강막의 잔재가 이검한을 막아선다.

치치치!

마화강막의 힘이 살갗을 태우며 연기를 일으켰으나 이검한은 개의치 않았다. 모든 관심이 흑요설을 죽이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화적멸강막을 뚫고 들어간 이검한은 백옥침상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거꾸로 잡은 마화신척을 쳐들어 흑요설의 가슴을 겨누었다.

용서하세요 왕후마마!”

이검한은 흑요설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비록 흑요설이 세상의 모든 사내를 절멸시키겠다고 맹세한 마녀라고는 해도 여자를 해치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헌데 이검한이 떨리는 손으로 마화신척을 흑요설의 가슴에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번쩍!

굳게 감겨있던 흑요설의 두 눈이 갑자기 부릅 치떠졌다.

쩌어엉!

눈썹 한 올 없는 눈꺼풀이 떨어지며 그 안에서 추수(秋水)같이 새파란 한 쌍의 신비로운 벽안(碧眼)이 드러났다.

(!)

이검한은 숨이 턱 막혔다. 흑요설의 그 푸른 벽안을 접하는 순간 마치 심혼이 몽땅 빨려 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제발... 제발 살려다오!>

 

애절한 사념(思念)이 이검한의 뇌리를 직격했다.

(가엾다!)

머릿속을 울리는 간절한 애원에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흑요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 때문에 이검한은 마화신척을 흑요설의 가슴에 찔러 넣지 못했다.

사실 흑요설은 천여 년의 세월동안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또 마화적멸강막을 중화시키느라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만일 이검한이 마화신척으로 찌르기만 했으면 흑요설의 육신은 불 속에 던져진 마른 검불처럼 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스윽!

이검한이 연민의 감정 때문에 멈칫하는 사이에 흑요설의 섬섬옥수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이검한의 옆구리를 찍어왔다.

!”

퍼억!

이검한이 뒤늦게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 줄기 강맹한 잠력이 그의 옆구리 연마혈(軟痲穴)을 후려친 후였다.

콰당탕!

이검한은 온몸이 뻣뻣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벌렁 나자빠졌다.

크윽, ,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바닥으로 나뒹군 이검한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호 어..석은... !”

느릿하고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흑요설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우두둑! 우둑!

천여 년 만에 부활한 탓에 흑요설은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동작 하나하나가 지극히 느렸다.

마치 경극(京劇)의 배우가 느리게 움직이듯 흑요설은 천천히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일어나 앉았다.

(, 큰일이다. 내 실수로 저 무서운 마녀를 부활시켰으니...!)

흑요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이검한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몸을 마비시키는 연마혈이 짚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윽고 흑요설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섰다.

..! .., .... .... ..! 하늘... 아래에서... 사내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고... 말겠다!”

흑요설은 감회와 함께 원한에 사무친 교소를 터뜨렸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탓에 그녀의 음성은 처음에는 탁하고 메마르게 들렸다.

..... .내 놈!”

흑요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이검한을 일별하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 ...! 공청석유(空靑石乳)... 몸을 적신... 후에 네놈을... 상대해 줄 테니...!”

살기 서린 눈으로 이검한을 훑어본 흑요설은 비틀거리며 침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을 훑어보는 흑요설의 시선이 마치 굶주린 짐승의 눈빛같이 느껴져서 이검한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풍덩!

그 사이에 밀실 밖으로 나간 흑요설은 현음동천 가운데 자리한 예의 그 기이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공청석유!

그 샘물이야말로 단 한 모금으로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희세의 영약 공청석유였다. 유사지존의 시체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공청석유의 힘 때문이었다.

호호... 뼈속까지... 생기가... 차오르는구나!”

공청석유에 몸을 담근 흑요설은 바르르 떨며 희열에 찬 교성을 토했다.

츠츠츠!

메마르고 건조하던 그녀의 피부는 공청석유를 빨아들여 삽시에 뽀얀 윤기를 띠었다.

호호! 꼴좋구나 유사신령!”

흑요설은 공청석유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있는 유사신령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교소를 터뜨렸다.

본 왕후를 죽이려 한 대가로 네놈의 피붙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주겠다!”

두 눈을 독사처럼 번득이며 토해내는 그녀의 음성은 어느덧 매끄럽고 윤택하게 변해 있었다. 비록 지독한 살기가 서려있긴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음성이다

촤아아!

잠시 후 흑요설은 공청석유가 찰랑거리는 연못에서 나신을 일으켰다.

아름다웠다!

공청석유의 힘을 빌어서 생기를 완전히 회복한 흑요설의 몸매는 치명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 그 어떤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인들 흑요설의 육체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흑요설은 그 옛날 십삼 왕국의 국왕들과 서역사천왕을 뇌쇄시켰던 그 절대완미의 몸매를 회복한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그 자세로 가공할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가게 만드는 흑요설의 아름다운 용모와 육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사내가 누가 있겠는가?

오래 기다렸지 귀여운 것!”

흑요설은 풍만하고 탱탱한 둔부를 한들거리며 밀실로 돌아왔다.

가슴에 매달린 한 쌍의 묵직한 살덩이는 물 풍선처럼 출렁거린다.

육감적인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매끈한 민둥산에는 목탁의 금처럼 부드럽게 갈라진 살틈이 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 살짝 입을 벌린다.

사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달아날 뇌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검한에게는 흑요설의 그 도발적인 자태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 왕후님! 혈도를 풀어 주세요! 저는 왕후님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잖아요.”

이검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흑요설을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 그럴 수는 없다. 네놈도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하지만 흑요설은 코웃음을 날리며 독기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검한은 억울한 듯 소리쳤다.

... 왜 제가 죽여야만 합니까?”

그 이유를 가르쳐 주마!”

흑요설은 이를 바득 갈며 이검한의 머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미끈한 두 다리를 벌리며 섰다.

(!)

순간 이검한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흑요설의 두 다리가 얼굴 바로 위쪽에서 벌어지면서 은밀한 비소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백옥같이 흰 계곡과 그 주위에는 한 올의 체모도 나있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여체의 비밀이 가려지는 것 없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보였다.

(... 저게 여자의 그곳...!)

난생 처음 여자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본 이검한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매끈한 민둥산 아래로 부드럽게 갈라진 균열은 생경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그 야릇하고도 오묘한 여체의 구조는 아직 동정의 몸인 이검한으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이검한의 아랫도리 일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터질 듯이 팽창되었다. 건강한 사내아이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었다.

호호! 네놈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흑요설은 이검한의 하의 속에서 불끈거리고 있는 것을 곁눈질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놈도 나의 이 더러운 곳을 보고 욕정을 일으켰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녀는 이를 바득 갈며 자신의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남편과 시동생과 양아들, 그리고 열 세 명의 왕들에게 숱하게 더럽혀졌던 그곳을...

흑요설에게 있어서 숱한 사내들을 미치게 했고 또 그자들의 추악한 욕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부분은 신성한 생식(生殖)의 도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사내들이 자신을 유린하도록 만든 재앙의 근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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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잠자는 금제 속의 마녀

 

 

 

철문 안쪽은 화려하게 치장된 침실로 중앙에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침대가 하나 놓여 있다.

츠으! 츠으!

헌데 그 백옥 침대 주위를 한 겹의 시뻘건 빛의 막이 뒤덮여 있었다.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인 그 광구(光球)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누워있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여인은 겉으로 들어난 용모로는 도저히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앳된 십대의 풋풋한 소녀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의 풍파를 모두 겪은 난숙한 중년여인같기도 하다.

이검한은 이제껏 여자라고는 냉약빙 밖에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냉약빙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검한의 그같은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냉약빙도 물론 천하절색이다. 거령삼왕을 잘못 먹어 어마어마한 거구가 되긴 했지만 그녀가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냉약빙의 빼어난 미모도 백옥침상 위에 누워있는 여인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었다.

침상 위의 여인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도 아름다워서 보는 이의 혼을 송두리 채 빼놓을 정도였다.

 

-십전완미(十全完美)!

 

여인의 미모는 말 그대로 완벽해서 어느 곳 하나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었다.

그 황홀한 미모에 더해 농익은 관능미를 지닌 육체는 금상첨화 격이라 세상 사내들의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정도의 미모라면 다른 여인들은 질투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이 여인은 중원인이 아니라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색목여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도도하고 기품어린 용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 민망하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을 살펴보던 이검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가벗고 있는 탓에 신비하고도 황홀한 여체가 그대로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 세차게 두근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여체의 신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냉약빙이 구해다 준 의서를 통해 여자와 남자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고 있던 이검한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본 것과 실제의 여자의 알몸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검한은 남녀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정의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은 여인의 나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여인의 나신은 아름다웠으며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커다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한 쌍의 젖무덤은 물풍선같은 탄력을 지니고 있으며 복부는 양지유로 빛은 듯 매끄럽고 기름지다.

미끈한 허벅지와 사이에 자리한 은밀하고도 계곡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저 여자가 바로 누란왕후겠구나!)

이검한은 홀린 듯한 눈빛으로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렇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이 서역제일미인이라 불리는 비운의 여인 누란왕후 흑요설이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놀랍게도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누란왕후가 대머리인 줄 몰랐는 걸?)

한동안 흑요설의 알몸을 바라보던 이검한은 고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끄럽고 반들거리는 머리는 마치 비구니같이 보였다.

비단 머릿결뿐만이 아니었다.

흑요설의 몸에는 단 한 올의 터럭도 나있지 않았다.

눈썹과 겨드랑이, 미끈한 허벅지 사이의 둔덕에도 한 올의 체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흑요설의 머리 주위로 희뿌연 재가 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타고 남은 재였다.

어떤 강력한 열기가 흑요설의 몸에서 모든 터럭을 태워버린 것이다.

(저 붉은 화광(火光) 때문인 모양이다!)

이검한은 석실 안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 흑요설을 뒤덮고 있는 붉은 화광이 그녀의 몸에서 모든 체모를 태워버린 원인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헌데 열어젖힌 철문을 지나 석실 안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흠칫했다. 철문 안쪽에 한명의 인물이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문에 기대앉은 자세로 죽어있는 인물은 타는 듯 붉은 피풍의(避風衣)로 몸을 가리고 있는 승려였다.

삭발을 한 것인지 원래 대머리였는지 모르지만 머리가 매끈한 이 승려는 이목구비가 깊고 선명하다.

천축(天竺) 출신인 듯이 보이는 승려의 몸에 걸쳐진 것이라고는 붉은 빛이 도는 피풍의뿐이다. 헌데 그 피풍의는 만들어진 후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깔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이분이 서역사천왕 중 최강자였다는 마화존자시겠구나!”

이검한은 조심스럽게 마화존자의 시신 앞으로 다가섰다.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는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 자 정도 길이의 자()와 붉은 빛을 토하는 작은 구리거울이 그것이었다.

츠으! 츠으!

구리거울과 자에서는 타는 듯 붉은 주황색의 노을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두 자 길이의 자는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시뻘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화신척(魔火神尺)!

 

시뻘건 자에는 그같은 글이 범문(梵文)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두 가지가 마화존자의 유물이로구나.”

이검한은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 얹혀져 있는 자와 구리거울을 집어 들려고 몸을 숙였다.

퍼억! 푸스스스!

헌데 이검한의 손이 두 가지 물건에 닿는 순간 마화존자의 시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한 줌의 재로 화해버렸다.

이크!”

이검한은 질겁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마화존자의 시신은 완전히 재가 되어 변해버린 후였다.

다만 알몸에 두르고 있던 붉은 색의 피풍의만은 전혀 손상이 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려졌다.

푸스스!

이검한이 보고 있는 가운데 마화존자의 시체는 단순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 된 것은 마화존자의 유골이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마화신척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열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재가 되었던 마화존자의 유해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검한이 건드리는 바람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또 한 번 고인의 유체를 손상시키고 말았구나.”

얼마 전 부주의로 파천도성의 시신을 훼손했던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죄책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잿더미 아래쪽 바닥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이분도 유언을 남겼구나.)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재를 치웠다.

그리고는 잿더미 속에서 드러나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마화존자가 노파심으로 글을 남긴다.>

 

재를 치우자 드러난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그 글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이었다.

 

<-(중략)- 요녀의 금강불괴(金剛不壞)를 깨뜨릴 힘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에 노납은 생명의 근원인 원정지기까지 끌어내어 요녀에게 한 가지 금제를 시전할 작정이다. 마화적멸강막(魔火赤滅罡幕)이라는 마화사원(魔火寺院) 최후의 금법이 그것이다.>

 

마화사원!”

마화존자의 유언을 읽어 내려가던 이검한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마화사원에 대해서는 냉약빙이 구해다준 고서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천축의 어딘가에 아수라(阿修羅)를 숭배하는 무리가 세운 성전이 있었다.

피와 살육의 화신인 아수라의 권능은 바로 불()이었다.

아수라의 추종자들은 그 아수라를 위해 세운 성전의 이름을 마화성전(魔火聖殿)이라 불렀다.

그러나 천축인들은 마화성전을 마화사원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마화사원에서는 공공연히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화사원은 또 다른 마의 추종자들인 소뢰음사(小雷音寺)와의 쟁패에서 패퇴하여 사멸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천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그 마화사원의 이름이 뜻밖에도 이곳 서역의 오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화적멸강막!

 

마화사원의 절기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이것은 인간의 생명력을 모조리 불의 기운으로 전환하여 한 겹 강기(罡氣)의 막을 형성하는 비법이다.

일단 그 강기의 막에 휩싸이면 무쇠라도 재가 되어 버린다.

마화존자 역시 다른 세 사람처럼 태반의 내공을 흑요설에게 탈취당한 상태였다. 비록 천붕랑왕의 도움을 받아 흑요설을 기절시키기는 했으나 죽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들 서역사천왕의 막강한 내공을 대부분 갈취한 결과 흑요설은 이미 금강지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남은 능력으로는 도저히 흑요설의 숨을 끊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화존자는 최후의 수단을 이용하여 흑요설을 죽이려 했다.

,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녹여 마화적멸강막을 만들어 흑요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물론 마화적멸강막으로도 당장 흑요설을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금강지체를 이룬 흑요설이라 해도 오랜 세월 마화적멸강막에 덮여 있다 보면 한줌 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란왕후 흑요설이 비록 천년의 내공을 지녔다 해도 마화적멸강막 아래서는 채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재로 화하고 말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본 인연자에게 간절히 원하거니와 노납과 누란왕후가 잠든 이 석실을 영원히 봉쇄하여 주길 바란다.

비록 그녀가 희대의 요부이기는 했어도 노납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하여 함께 영면하여 저승에서나마 원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수고의 대가로 마화삼보(魔火三寶)를 남기니 충분한 보답이 되리라 믿는다!>

 

마화존자의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마화삼보는 마화존자의 시체와 함께 흩어지지 않고 남은 세 가지의 물건이었다.

 

-마화신척!

-마화경(魔火鏡)!

-적룡풍(赤龍風)!

 

마화신척은 마화사원의 호법지보다. 두 자 남짓한 길이의 그 자() 안에는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극양지력(極陽之力)이 깃들어 있다.

마화경은 아수라의 상징으로 마화사원의 비전 마공들이 숨겨져 있다.

적룡풍은 화룡잠(火龍蠶)이라는 영물이 토한 비단실로 짠 피풍의로 도검불침은 물론 모든 화기를 다스리는 효능을 지녔다.

그 옛날 마화존자는 우연히 마화사원의 폐허에서 마화삼보를 얻어 서역사천왕의 첫째가 될 수 있었다.

 

(이상한데...?)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을 읽은 이검한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백옥침상을 돌아보았다.

마화존자의 유언대로라면 흑요설의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재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온몸의 체모가 소멸되어 버리기는 했어도 흑요설의 몸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설마 죽지 않았단 말인가?)

소름이 오싹 끼친 이검한은 침상에 누워있는 흑요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떴다.

스으으!

자세히 보니 흑요설의 몸을 감싼 붉은 노을이 가는 실처럼 변해 그녀의 전신 모공(毛孔)으로 빨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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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누란왕후라는 여인

 

 

측천무후의 경우 외에도 당나라를 기울게 만들어 경국지색의 고사를 만든 양귀비도 원래는 현종(玄宗)의 다섯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였다.

, 현종은 며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유목사회에서는 형사취수같은 수계혼(收繼婚)의 풍습이 형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적용되었었다.

 

누란왕국은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의 한 가운데 존재했었다. 그 때문에 형사취수처럼 유목사회에서 보편적이던 제도와 풍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란왕후 흑요설의 신세는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는 고사하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거푸 세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행로는 남편이 세 번 바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란왕국이 연거푸 일어난 왕위찬탈로 쇠락하자 호시탐탐 누란왕국의 부()에 눈독을 들여온 주위의 나라들이 일제히 쳐들어온 것이다.

총 십삼 개의 소국이 연합하여 누란왕국에 쳐들어왔고 연이은 반란으로 국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누란왕국으로서는 십삼 국 연합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흑요설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신임 누란왕은 아름다운 양모의 육체와 부귀영화를 얼마 누려보지 못하고 오체분시(五體分屍)당해 죽고 말았다.

그와 함께 화려했던 누란왕국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으며 그 얼마 후 불어 닥친 강력한 모래폭풍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운의 절세미인 누란왕후 흑요설도 전란과 재앙의 와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누란왕후 흑요설은 죽은 게 아니라 누란왕국을 멸망시킨 십삼 개 국 국왕들의 공동 전리품이 되어 버렸었다.

누란왕국의 막대한 보물을 공평하게 나눠가진 십삼 국의 국왕들은 누란왕후 흑요설의 처리 문제에 이르러서는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흑요설의 나이는 겨우 이십이 세였다.

한창 완숙하여 물이 오른 그녀의 미모에 십삼 국 국왕들이 홀딱 반한 것은 필연이었다.

십삼 국 국왕들은 흑요설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으며 급기야 십삼 국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될 판국이었다.

이에 십삼 국 국왕들은 한 가지 절충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흑요설을 어느 곳에 감금해두고 한명이 한 달씩 돌아가며 소유하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흑요설은 은밀한 이궁(離宮)에 갇힌 채 십삼 국 국왕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국의 왕후였던 고귀한 신분에서 욕정에 미친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흑요설은 처음에는 반쯤 미쳐버렸다.

그러나 본래 총명하고 의지견정 했던 흑요설인지라 오래지 않아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짐승같은 세상의 사내들에게 복수를 다짐했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후 삼년의 세월동안 흑요설은 십삼 국 국왕들의 노리개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과연 흑요설이 굴욕과 수치를 참으며 인내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오래 먹다보면 질리게 되는 법이다.

흑요설의 육체를 돌아가며 탐닉하던 십삼 국 국왕들도 삼년의 세월이 지나자 차츰 발길이 소원해졌다.

그때를 노려 흑요설은 이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된 흑요설은 대과벽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오래 전 누란왕국의 보물창고에서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본적이 있었다. 그 장보도는 현음마모(玄陰魔母)라는 전설적인 상고기인의 은거지를 찾을 수 있는 지도였다.

현음마모는 경이적인 무공뿐 아니라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신술(神術)마저 지녔었다고 알려진,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전설적인 고수였다.

무림 역사를 통틀어 봐도 현음마모만큼 강했던 여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현음마모가 남긴 절기를 익히기만 하면 흑요설은 자신을 농락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녀는 현음마모의 은거지였던 이곳 현음동천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음동천 어디에도 현음마모의 유학(遺學)은 남아있지 않았다. 흑요설이 현음동천에 들어왔을 때는 숱한 보물들 외에 무공과 관련된 유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흑요설은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물이 아니라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연자실해 있던 흑요설은 오래지 않아 복수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본래 그녀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내들을 기쁘게 해주는 방중비법(房中秘法)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누란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배웠던 그 방중비법에는 사내의 양기를 갈취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채양보음(採陰補陽)의 술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요설은 자신의 장기인 채양보음을 바탕으로 한 가지 독계(毒計)를 구상했다. 몇 명의 고수들을 현음동천으로 유인하여 내공을 갈취하는 게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 네 명의 고수가 선택되었다.

 

<서역사천왕(西域四天王)>

 

당시 서역 일대를 주름잡던 최강의 무사들로 개개인이 한 가지 방면에서 가히 우내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마화존자(魔火尊者)!

-천붕랑왕(天鵬狼王)!

-유사신령(流砂神靈)!

-파천도성(破天刀星)!

 

이들이 서역사천왕인 바, 중원무림의 역대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절세고수들이었다.

개개인의 내공이 오갑자(五甲子) 이상이었던 그들을 혹자는 중원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와 비견하기도 한다.

서역무림, 아니 변황무림이 배출한 최강의 고수들인 서역사천왕은 당시 서역을 사분(四分)한 채 웅거하고 있었다.

흑요설은 그들에게 은밀히 현음마모의 장보도의 사본(寫本)을 보내 현음동천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거의 동시에 현음동천에 이르렀고 흑요설도 우연을 가장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서역사천왕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도 흑요설과 함께 현음마모의 유물을 찾았다.

 

* * *

 

<현음마모의 유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 계집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이었다. 그 계집은 빼어난 미모와 육체로 우리 네 사람을 차례로 유혹했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계집의 간계에 넘어가 그년의 육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 계집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회한과 원통함으로 가득한 글이 이어졌다.

만년한철의 철문에 글을 새기고 죽은 늑대 가죽의 거한은 바로 서역사천왕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인물이었다는 천붕랑왕이었다.

천붕랑왕은 다른 무공도 뛰어나지만 늑대와 날짐승을 다루는 재주에서도 일가를 이룬 기인이다.

이검한의 추측대로 그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데려온 철익신응은 천붕랑왕이 기르던 영물이었다.

 

* * *

 

흑요설이 쳐놓은 함정은 완벽했다.

서역사천왕은 초절한 무공을 지닌 만큼 자존심도 극도로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고금제일의 미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흑요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수컷에 불과했다.

서역무림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던 서역사천왕이었건만 흑요설의 육체를 독점하기는커녕 그저 넷이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매일매일 흑요설의 부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역사천왕은 자신들의 몸에서 내공의 태반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역사천왕은 아연실색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들의 막강한 내공 대부분을 흑요설이 갈취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히 천년(千年) 수위의 내공이 모두 흑요설의 한 몸으로 흘러든 것이다.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한 서역사천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흑요설을 죽이기 위해 협공을 하게 되었다.

다른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무려 천년 수위에 육박하는 전무후무한 공력을 지닌 마녀가 세상으로 뛰쳐나간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서역사천왕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흑요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한 여인과 네 사내 사이에 생사를 건 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파천도성과 유사신령이 먼저 흑요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파천도성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파천삼식을 구사할 수 있고 유사신령은 어떤 공격이라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유사잠행술을 지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공의 태반을 상실한 터라 흑요설에게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천붕랑왕과 마화존자 역시 예외가 아니라 흑요설의 독수에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렇기는 해도 천붕랑왕과 마화존자는 어찌 어찌 흑요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먼저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招鵬笛)의 힘이 흑요설의 혼백을 뒤흔들어 기절하게 만들었다.

그후 마화존자가 정신을 잃은 흑요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 * *

 

<본좌와 마화존자가 천신만고 끝에 흑요설을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 계집은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을 융합하여 사람의 손으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지체(不死之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네 사람 중 최강자인 마화존자가 한 가지 금제(禁制)로 그 계집을 영원히 잠재우겠다며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화존자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본좌이지만 과연 마화존자가 흑요설을 금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서 이에 경고하거니와 그대는 발길을 돌릴지어다. 그 대가로 우리 네 사람의 절기를 그대에게 남기노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천붕랑왕의 회한에 찬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색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천붕랑왕의 참담한 감정이 그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붕랑왕이 남긴 글을 다 읽은 이검한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서역제일미인으로 이름난 누란왕후가 이 안에 잠들어 있단 말이지?”

이검한은 눈을 빛내며 철문을 주시했다.

(과연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서역사천왕 정도 되는 인물들조차 미혹케 했단 말인가?)

이검한은 강렬한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 누란왕후 흑요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천붕랑왕의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한 법이다.

이검한은 강렬하게 치미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미 천 년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이검한은 손을 뻗어 철문을 밀었다.

그그긍!

육중한 철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열려졌다.

(... 저럴 수가...!)

그리고 열리는 철문 안쪽을 들여다보던 이검한은 놀라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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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굴 속의 시체들

 

 

다시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갔을까?

와아!”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이검한 앞쪽에는 널찍한 지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하 광장은 동굴의 깊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광장의 벽과 천장 곳곳에 야명주가 박히거나 매달려 있는 덕분이었다.

수백 평은 족히 됨직한 드넓은 지하 광장은 궁궐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바닥은 융단과 대리석으로 덮여있으며 가재도구들은 하나같이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다.

흡사 황제의 거처에 들어온 것같은 지하 광장의 화려함은 보는 이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지하의 궁궐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가재도구들과 값 비싼 장식품들의 대부분은 강력한 힘에 의해 부서지고 으깨어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의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가 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지하 광장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때문이다.

첫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연못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 있었다.

직경 일 장쯤인 원형의 연못에는 우윳빛의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 고여 있다.

그 뽀얀 액체에 잠겨있는 시체의 상체는 전혀 썩지 않아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연못 밖으로 드러나 있는 시체의 하체 부분은 마도 파천의 주인처럼 바짝 말라 목내이가 되어 있다.

아마도 연못에 고여 있는 액체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아온 듯 했다.

이검한은 연못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액체 속에 상체가 잠겨있는 인물은 백발의 노인인데 얼굴도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마치 단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기라도 한 듯이...

안색이 창백한 그 노인의 시체 옆에는 벽옥패(碧玉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

 

벽옥패의 전면에는 그와 같은 글이 전자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 옆에는 두 마리 용이 모랫속을 누비고 다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벽옥패의 뒷면에는 한 가지 무공비결이 깨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유사잠행술(流砂潛行術)!

 

믿어지지 않지만 이 무공을 익히면 흐르는 모래, 즉 유사(流砂)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고 적혀있다.

일단 빠지면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유사다.

헌데 그 공포스러운 유사 속을 물처럼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비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검한이다.

유사잠행술을 익히면 가공할 무게로 눌러대는 유사의 압력을 오히려 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다.

누르는 힘이 강해지면 반발력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용수철의 원리를 이용한 무공인 것이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 강한 반발력으로 상쇄할 수만 있으면 유사든 땅 속이든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닐 수가 있다.

(유사잠행술의 이같은 이치는 다른 무공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다.)

유사잠행술의 비결을 읽어본 이검한은 가슴이 뛰었다.

압력이 가해지는 즉시 더 강력한 반발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파천삼식도 대단한 무공이지만 유사잠행술은 더 쓸모가 많겠구나.)

이검한은 유사지존령을 갈무리하며 이 광장에서 발견한 두 번째 시체로 다가갔다.

 

두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의 끝에 있었다.

지하 광장이 끝나는 그곳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철문이 있는데 오래 전에 만들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파란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철문이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체는 바로 그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 앞에 우뚝 선 채 죽어 있었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그 인물은 늑대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치고 있는데 복부에는 한 자루 기형검(奇形劒)이 관통해 있었다.

피의인의 명치 부분을 궤뚫은 기형검은 칼날 양쪽에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검을 낭아검(狼牙劒)이라고 부른다.

낭아검은 거한의 명치 부분을 관통한 후 뒤쪽의 철문에 깊이 꽂혀 있었다.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을 간단히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 낭아검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피의인은 스스로의 몸을 낭아검으로 찔러 철문에 고정시킨 듯했다. 마치 죽어서라도 철문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 인물의 오른손에 한 자루의 짧은 뿔피리가 움켜쥐어져 있는 게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철익신응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검한은 눈을 반짝이며 뿔피리를 살펴보았다. 그 뿔피리가 뭇 조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기(神器)임을 알아본 것이다.

(철익신응 정도 되는 영물을 부렸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이 인물이 죽어서도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

이검한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철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시체 옆의 철문에는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걸음을 돌려라 인연자여! 그대의 호기심이 자칫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으니...!>

 

철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글은 물론 늑대 가죽을 걸친 거한이 죽기 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걸음을 돌리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보게 되네.)

이검한 눈을 빛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죽기 전에야 그 요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현음마모(玄陰魔母)의 유물로 우리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유인한 요부는 놀랍게도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누란왕후(樓蘭王后) 흑요설(黑妖雪)이었던 것이다!>

 

누란왕후 흑요설!”

거기까지 읽은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녀가 누군가?

저 전설의 왕국 놉-노르, 즉 누란의 마지막 왕후였던 절세미녀가 아닌가?

서역 일대에서는 아직도 그녀를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최소한 서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란왕후 흑요설이 양귀비(楊貴妃)나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는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누란왕후 흑요설은 그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누란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남쪽 공작하(孔雀河)의 끝, -노르(羅布泊)호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당시 서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한다.

누란이 부유하게 된 것은 전한(前漢) 시대에 열린 비단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었다. 머나먼 서방으로 장사를 떠나는 대상(隊商)들은 반드시 누란을 경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흑요설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누란왕의 눈에 들어 서역 제일의 부국 누란의 왕후라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흑요설이 십구 세 되던 해 누란왕은 흑요설의 미모에 욕심을 낸 자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누란왕의 동생이었다.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자는 왕위 뿐 아니라 형수인 흑요설까지 차지해버렸다.

흑요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원수와 부부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흑요설이 이십이 세 되던 해에 두 번째 남편이었던 시동생마저 타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흑요설의 두 번째 남편을 살해한 인물은 전 남편의 아들이었다.

흑요설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그자가 숙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자 역시 짐승과 다름없는 사내였다. 그자는 숙부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양모인 흑요설까지 유린한 것이었다.

양모를 범해서 아내로 삼다니...

이같은 패륜무도한 일은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중원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유목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특히 연약한 여자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형사취수(兄死取嫂)라는 유목민의 전통도 그 때문에 생겼다. 형이 죽어 홀로 된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아 보살펴주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이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호엘룬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시동생인 다리타이의 아내로 살아야만 했었다. 징기스칸의 강력한 권위로도 숙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목사회에서 여자에게는 아무런 인권도 없다. 그저 말이나 양같은 재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형수든 누구든 일단 자신들의 가족 속에 들어오면 그 여자는 가족의 공동 재산이 된다.

그리고 가족의 공동 재산인 여자를 다른 가문의 사내에게 무상으로 양도할 수는 없다.

노동력을 지닌 여자를 가족의 공동 재산으로 여기거나 홀몸이 된 여자를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내로 삼아 부양하는 전통은 비단 형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父子) 사이에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전한시대의 절세미인 왕소군은 흉노의 추장인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었다.

그후 연로한 호한야선우가 죽자 그의 장남인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다는 고사가 한서 흉노전(匈奴傳)에 기록되어있을 정도다.

이처럼 유목 사회에서 아버지의 사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들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들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으로도 인식이 된다.

서방의 유다민족 역시 유목민족이었던 탓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후 아버지의 여자들을 모두 범한 기사가 구약에 나온다.

심지어 압살롬은 지붕 위에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아비의 후궁들을 차례로 범하는 장면을 백성들에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선비전(鮮卑傳)에도 선비족은 형사취수의 제도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들은 차지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선비족은 몽고와 같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삼대 황제 고종(高宗)도 자기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武氏)를 차지하여 황후로 삼았었다. 성군으로 이름 높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었건만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차지하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당고종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 후궁이 후일의 측천무후(測天武后).

하긴 당태종 이세민으로서는 자신이 품었던 미녀를 아들이 차지한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나라를 세운 이씨 일족이 원래 선비 계통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중원을 정복하긴 했으나 유목민의 피가 짙게 남아있던 당 황실에서는 아비와 자식간에 여자를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고종의 경우도 부황인 이세민이 살아있을 때부터 배분상으로는 어머니인 무씨와 사통했다고 하며 이세민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들을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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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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