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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려든 군웅들

 

 

아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약빙이 자책하며 급히 미소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힘없이 쓰러지는 미소부의 가슴에는 비수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혀있었다.

(제발...)

우르르!

냉약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미소부의 단전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을 주입했다.

으음!”

심후한 내공이 주입되자 숨이 끊어지려던 미소부는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냉약빙이 주입해준 내공이 죽어가는 그녀를 잠시 되살린 것이다.

... 정말 전모 냉여협이신가요?”

미소부는 죽어가는 눈으로 냉약빙을 올려다보며 미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냉약빙이에요!”

냉약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죽기 전에 냉여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저희 이씨(李氏)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군요!”

미소부는 냉약빙의 대답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이씨!)

냉약빙은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로 이씨 성을 지닌 젊은 기협(奇俠)이 떠오른 때문이다.

, 부탁이 있어요 냉여협!”

미소부는 꺼져드는 미약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냉약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부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 아이를 부탁드려요. 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이청천(李靑天)...!”

이청천!”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냉약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청천이란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청천이란 인물은 냉약빙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태양신협(太陽神俠) 이청천!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六位)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비록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여섯 번째지만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사실상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협 이청천이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 내에 드는 기인들 중 가장 젊기 때문이다.

태양신협 이청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신마풍운록에 서열 육위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은 비단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격이 인후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기인이사들이 따르고 추종했다.

만일 그가 천하제패의 야심만 있었다면 단시일 내에 거대한 조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태양신협 이청천은 애초에 천하의 패권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의 교외에 자리한 태양곡(太陽谷)에 장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서북제일미인(西北第一美人)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옥수상아(玉手霜娥) 우담혜(憂曇慧)!

 

태양신협 이청천이 혼탁한 강호를 떠나 태양곡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절세미인인 이 여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바로 이대협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

태양신협 이청천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냉약빙인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미소부는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이며 서북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옥수상아 우담혜였다.

(대체 태양곡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옥수상아가 이런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냉약빙은 의아함과 함께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협 이청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냉약빙은 태양신협 이청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기력이 쇠잔한 옥수상아 우담혜가 그녀의 품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절벽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물론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이었다.

(가엾은 여인이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인물의 아내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다니...!)

냉약빙은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 앞에 서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 안겨있었다. 귀엽고 총기 있는 용모를 지닌 이 아이는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다.

(훌륭한 근골(筋骨)이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기뻐하시겠구나!)

냉약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오라버니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냉약빙은 다시금 자신이 처한 급박한 사정을 깨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편히 잠드세요 우부인! 아드님은 나 냉약빙이 친아들처럼 보살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팟!

옥수상아의 무덤에 대고 맹세를 한 직후 냉약빙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거구를 날려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무참한 만행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

 

곤륜산은 천산(天山)과 함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를 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대륙의 지붕이다.

본래 곤륜(崑崙)은 신들의 거처를 뜻한다.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뭇 신들이 곤륜산에 금전옥루(金殿玉樓)의 궁궐을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다던가?

그 장대한 곤륜산의 동쪽 끝에는 남쪽의 청해성(靑海省)을 굽어보고 있는 천길 단애가 자리하고 있다.

 

-고독애(孤獨崖)!

 

지면에서 수직으로 수백 장이나 치솟아 올라 있어 마치 거꾸로 꽂힌 칼의 허리 부분을 뚝 분질러 세워놓은 듯 웅장한 단애의 이름이다.

너무 높아 허리 부분이 늘 운무로 휘감겨 있는 고독애의 형상은 이름 그대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 고독애의 정상부분은 의외로 넓어서 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이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차있는 넓직한 평지 끝에는 돌로 지은 석옥(石屋)이 한 채 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석옥은 마치 세외도원의 일부인 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별세계의 선경과도 같은 고독애 일대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독애 정상의 넓은 평지에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독애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석옥 주변에는 머리가 으깨졌거나 몸뚱이가 짓뭉개진 수백 구의 시신들이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들이 질펀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전율하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처참한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가 된 자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지역의 패자들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자들은 하나같이 신마풍운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명숙들이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같이 막중한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중원으로부터 머나먼 이곳 곤륜산의 고독애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

“...!”

장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비록 운집한 군웅들 중 절반 정도가 죽음을 당했으나 여전히 고독애에는 오륙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웅들은 그 납덩이같은 침묵 속에 반월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고독애 끝에 자리한 석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석옥을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면면을 보면 실로 대단했다. 당금 무림의 명숙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군웅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석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나타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이 공포의 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석옥 안에는 과연 누가 있기에 뭇 군웅들을 떨게 만든단 말인가?

 

군웅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었다.

석옥 뒤쪽의 천길 단애를 제외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기도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만 했다.

반월형 포위망의 정면 맨 앞쪽에 서있는 인물은 일신에 푸른색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노검수(老劒手)였다.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 노검수의 허리춤에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깍은 목검(木劒)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 목검은 유서 깊은 검술명가(劒術名家)의 상징이다.

 

<혁련검호각(赫蓮劒豪閣)>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술명가다.

현련검호각은 연원을 따져보면 무려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호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력검호각의 일족은 오랜 세월 오직 검술 한 가지에만 매진해 왔으며 그 결과 무적의 검법을 이룩해냈다.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혁련검호각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의를 걸친 노검수는 바로 그 혁련검호각의 당대 가주다.

 

-유성신검황(流星神劒皇) 혁련휘(赫蓮輝)!

 

신마풍운록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비록 당금 무림의 세 번째 고수로 꼽히지만 단순히 검법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대검호가 유성신검황 혁련휘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왼쪽에는 오척(五尺) 단구(短軀)의 꼽추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키만한 길이의 긴 곰방대를 빨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 꼽추노인의 피부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비단 피부색만이 녹색이 아니었다. 이 인물은 눈동자마저도 섬뜩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마치 뱀이나 악어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듯한 그자의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 괴상망측한 행색의 꼽추노인 주변 십여 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꼽추노인을 극히 두려워하는 듯 연신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신마풍운록의 서열 사위(四位)의 인물로서 일반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독천존 서래음이 독공(毒功)으로는 천하제일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 전체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배어 있어 단지 숨결만으로도 십 리 밖의 적을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림인들이 역신(疫神)처럼 두려워하는 독천존 서래음은 대리(大里)에 자리한 독성부(毒聖府)의 부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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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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