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무협소설/지백천년'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20.04.30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3
  2. 2020.04.29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2
  3. 2020.04.28 [지백천년] 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1
  4. 2020.04.27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3
  5. 2020.04.26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2
  6. 2020.04.25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7. 2020.04.24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1
  8. 2020.04.23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9. 2020.04.22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1
  10. 2020.04.21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느나 먼 곳에서 왔느니 1
  11. 2020.04.20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4
  12. 2020.04.19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3
  13. 2020.04.18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2
  14. 2020.04.17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1
  15. 2020.04.16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3 1
  16. 2020.04.15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2 1
  17. 2020.04.14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1
  18. 2020.04.13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19. 2020.04.12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20. 2020.04.11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1
  21.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22.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1
  23.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24.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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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3)

 

 

바로 그 순간 청년은 무슨 영문인지 눈살을 찌푸렸고,

현천록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고무공처럼 날려가 담장에 부딪혔다.

!

휘익!

현천록의 머리 위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현천록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렸다.

[네가 이긴 것으로 해주마. 노도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다. 다음에 반드시 약속대로 해주마.]

진양진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신궁 오무한으로 변신한 상태로 물 속에서 숨을 쉬기 어려워지자 그대로 귀식대법을 펼쳤다.

그후 현천록이 이끄는대로 우물까지 와서 다시 귀식대법을 풀었지만 현천록에게 들키지 않았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서 소천성수로 현천록을 공격하고 도주해버린 것이었다.

현천록의 손에는 진무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이 현천록에게 다가왔다.

현천록은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흠뻑 젖은 옷에 흙까지 묻어버려 도포가 아주 뻑뻑하다. 조금 있으면 얼어서 완전히 뻐득뻐득해져 버릴 것 같다.

청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장력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도장은 금강불괴에 달했군.]

현천록은 쓴 입맛을 다셨다.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느새 다섯 명의 소녀들이 비수를 들고 그를 애워싸고 있었다.

청년이 말했다.

[신법도 바람을 탄 것처럼 자연스러우니 도장은 정말 듣던 것보다 훨씬 고명한 인물인 것 같소.]

현천록은 나몰라라는 듯이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교활한 진양진인에게 또 당하고 보니 어지간히 속이 상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는 이번엔 무슨 수로 진양진인을 붙잡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바보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청년이 손가락을 뻗었다.

번쩍!

소리없이 빛줄기가 현천록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현천록에게는 약간 따끔거리는 정도의 느낌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청년이 소녀들에게 말했다.

[이 도사는 이상하오. 무공도 그렇게 마음도 보통과 다른 듯하니 그냥 둘 수는 없겠소.]

소녀들 중 하나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 오늘따라 간섭이 심하군요. 그걸로 당신 잘못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아가씬 안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다 들었으니까요.]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녀와 나의 문제니 당신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오. 일단은 저 도사를 뇌옥에 가두는게 나을거요.]

돌아서서 걷는 청년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한 소녀가 현천록의 혈도를 몇 군데 거듭 찌르더니 오라로 온몸을 꽁꽁 묶었다.

두 손과 두 발도 하나로 묶였지만 현천록은 내버려두자는 심정으로 몸을 맡겨버렸다.

다른 소녀가 장대를 가져와 두팔사이로 끼워들었다.

현천록은 원시인들한테 잡혀가는 돼지새끼마냥 들리웠다.

앞에서 장대를 든 소녀의 엉덩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눈을 어지럽게 한다.

세상이 거꾸로 보이고 피가 머리에 모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상쾌한 새벽 공기, 그리고 그의 몸에 묻었던 물기가 증발되면서 모락모락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같은 안개...

현천록은 세상을 거꾸로 보면서 알듯 말듯한 펼쳐지는 요지경을 보았다.

소녀들은 몇 개의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 갔다.

건물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건물들 너머로 우뚝한 탑이 하나 보였다.

이리저리 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 이따금씩은 나이든 중년 여인들이 뭔가를 들고 가는 모습,

그곳은 조용한 가운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현천록은 탑 아래에 있는 뇌옥에 그냥 던져졌다.

소녀들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품을 뒤져보지도 않았다.

뒤쪽은 석벽이고 앞쪽은 듬성듬성한 쇠창살로 된 뇌옥이다.

현천록이 던져진 칸 외에도 한 사람씩 들어있는 칸이 세 개, 아무도 없는 빈 곳이 두 개가 더 있었다.

현천록의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이 나가는 소녀들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신경쓰지 않아서 무슨 욕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소녀들이 재빨리 나가고 문을 쾅 닫는 소리만 들렸다.

욕을 하던 사람은 사십 쯤 되어보이는 서생인데 얼굴이 아주 훤한 미남이었다.

뇌옥에 갖힌지 꽤 된 듯 차림새는 꾀죄죄하지만 이상하게 얼굴만은 반들거렸다.

그리고 보니 그 양 옆에 있는 칸의 사람들도 얼굴만은 반들반들했다.

현천록의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건네왔다.

[도장! 도장도 재수없는 년들한테 걸렸구려.]

현천록은 빙긋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전까진 진양진인 만이 그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침울한 얼굴의 청년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도장도 재주가 아주 용한 사람이오. 하하하하! 우리야 세치혓바닥과 반지르르한 얼굴을 앞세워 계집을 호리지만 도장은 무슨 수법을 쓰는거요?]

현천록이 고개를 들고 빤히 보았다.

앞에 있는 중년인이 말했다.

[거 사람 싱겁게 말게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여기 잡혀오는 사람은 다 똑같은 죄를 짓고오는데 부끄러워 할 게 뭐있소?]

중년인인 자기의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저 친구는 화양일음도(華陽一淫盜) 모청(毛鯖)이오. 하하하! 수고스럽게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소. 전문적으로 처녀만 골라가며 길을 내줬으니 뒷사람이 얼마나 고마워했겠소.]

현천록이 멀뚱하게 중년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중년인이 또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잡식성이오. 치마두른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데... 쩝 문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종종... ... 아무튼 나도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오. 음약에 관한한 저 친구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거요.]

잡식성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죽겠네. 방금 전의 고 감질나는 것들이 들어왔다 가는 통에 몸이 달아서 미칠지경이네.]

중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소린 집어치우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기회가 있을 테니까. 아참 이제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난 채음신(採陰神) 목요봉(穆耀峯)이네. 주로 채음보양을 하지.]

현천록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좋지 않은 사람들이군.]

세 사람이 껄껄 웃었다.

[도사도 여기까지 잡혀온 걸보면 만만치 않을 텐데 뭘 그러시오? 도사는 무슨 수법을 쓰는지나 말해보시오.]

[혹시 참배하러 온 여인들 방을 몰래 덮치는 치졸한 수법을 쓰는 건 아니오?]

[여기 여주인은 천하절색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혹시 도사한테는 몸을 허락할 지도 모르겠소.]

음탕한 소리를 주고 받으며 세 음적은 여자의 어디가 어떻게 어떤 여자는 거기가 어떻는데 어떻게 절묘하고, 자기가 뭘 어떻게 했는데 여자가 아주 음탕하여 무슨 수법을 요구했느니 하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반쯤은 현천록을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반쯤은 현천록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적으로는 음담패설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현천록은 화를 내며 백금퉁소를 꺼내들었다.

음담패설이 뚝 그쳤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의 공력을 실어서 백금퉁소를 검처럼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철창살이 한꺼번에 네 대가 소리없이 베어졌다.

세 음적이 겁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현천록은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중년인을 가두고 있는 창살을 베어버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당신같은 사람은 내가 죽이나 죽이지 않으나 마찬가지지만 그냥가지는 못하겠소.]

중년인이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 도사님! 소인들은 그저 심심하다보니...]

현천록은 퉁소를 뻗어서 중년인의 가슴을 겨냥했다.

투툭! !

뼈가 부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서 뒤로 넘어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폐인이 되어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현천록은 다른 두 사람도 똑같은 꼴로 만들어 놓고나자 속이 후련했다.

아주 즐거운 일을 한 것처럼 통쾌했다.

[하하하하!]

한바탕 실컷 웃고 나서 철문을 밀어보니 철문 만은 열 도리가 없었다.

공력을 모두 실어서 퉁소로 내리쳐도 철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손이 울려서 퉁소를 망칠 뻔했다.

현천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났다. 동굴에 갇혔다가 나온지 금방인데 이번엔 뇌옥에 갇혔구나. 내가 무슨 마음으로 순순히 여기까지 잡혀왔지?)

스스로 자기 머리를 꽉 쥐어 박았다.

그리고 보니 번쩍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 침울한 얼굴의 청년 때문이었다.

진양진인은 놓쳐버렸고 청년이 묘한 힘으로 그를 묶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현천록은 자기가 어떤 것에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고 사는 것도, 갇히거나 풀려나는 것도, 죽이는 것이나 살리는 것도, 현천록에게는 조금도 심각하거나 큰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오른쪽길로 갈까 왼쪽 길로 갈까 선택하는 단순한 선택문제 같이 느껴졌다.

오로지 호기심만이 그에게 점점 더 큰 비중으로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고 있었다.

현천록이 생사탄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생긴 변화였다.

잠시 후, 현천록은 철문 아래 계단에 앉아서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에게 배운 광릉산이었다.

칙칙한 뇌옥안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퉁소소리로 가득찼다.

세 사람의 음적도 그 혼이 반쯤은 빠져서 음률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 빠져들어 버렸다.

광릉산은 대륙을 가로지는 장강과도 같아서 어떤 곳에서는 급하고 어떤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며 어떤 곳은 한없이 높아지고 어떤 곳은 몸을 허물어뜨릴 만큼 낮아졌다.

광릉산의 열두 소절 중에서 일곱 소절이 끝나고 여덟 소절이 막 시작될 때였다.

갑자기 둔중한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우아한 자태로 들어왔다.

허리가 아주 가늘고 목도 가늘어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진 듯하다.

그윽한 향기가 일순간에 뇌옥을 감돌고 소녀의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현천록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소녀의 전신에 어려있는 이상한 기운이, 이상한 아름다움이 그를 질식하게 했다.

갑자기 온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퉁소소리가 뚝 끊어졌다.

소녀가 현천록 앞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인이 왕림하신 줄 모르고 누추한 곳에 모셨습니다.]

사람의 입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이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천록은 퉁소를 내리며 속으로 말했다.

(내가 미색에 빠지고 말았구나!)

소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두 말않고 바칠 것만 같았다.

현천록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떨려왔다.

강렬한 두근거림. 소녀의 체향, 귓속을 맴도는 목소리, 사그락거리는 옷자락소리. 가늘게 들리는 숨소리. 잘게 흔들리는 소녀의 속눈썹...

그 모든 것이 현천록을 포위하고 사로잡아버렸다.

얼굴은 보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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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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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2)

 

 

현천록이 오무한에게 물었다.

[두분은 우리 외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아무도 못봤습니다.]

현천록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현천록은 일곱사람과 함께 진양진인에게서 태극혜검을 배웠던 곳으로 돌아왔다.

지하에 흐르는 강은 신비로움을 주고,

흘러오는 곳과 가는 곳은 모두 또 다른 동굴이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에게 여기서도 방위를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신궁 오무한이 지남철(指南鐵)을 꺼내 놓았다.

오무한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항상 지남철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물이 들어오는 쪽은 북쪽이고 나가는 쪽은 남쪽이었다.

자금산은 장강의 남쪽에 있으니까 물은 장강으로 들어가는 물이 아니라 장강에서 지하동굴로 흘러오는 물일 가능성이 많았다.

어느 쪽을 통하는 것이 나가기 더 수월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속으로 가야하는 만큼 밖이 나올 때까지 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천산삼로 중의 노대가 노삼을 물에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귀찮게 생각할 것 없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라. 한 달이고 두달이고 간에 언젠가는 밖에 이르겠지.]

노이는 노대를 피해서 머뭇거렸다.

노대가 가까이 가자 노이가 급하게 말했다.

[노대! 내 검은 독검이오. 물에 들어가면 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고 말거요.]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마라. 주머니가 이렇게 많은 데 무슨 걱정이냐?]

노대가 노이의 독검을 뺏었다.

그리고 벼락같이 오무한의 등줄기에 칼집채로 내리박았다.

[으악!]

오무한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현천록도 장군묵도 막지 못했다.

옆에 있던 포두화상이 오무한을 옆으로 당겼다.

노대가 내려친 검은 오무한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쳤다.

오무한이 쓰러져버렸다.

[이 흉악한 마두!]

마춘보가 철연화를 유성추처럼 날리며 고함쳤다.

노대는 손에 들었던 검으로 철연화를 튕겨버리고 두 걸음 물러섰다.

노대는 오무한의 몸을 노이의 독검을 감싸는 도구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오무한이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아주 놀라운 속도였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 시주 공력이 놀랍군. 뽑히진 않았지만 노대의 칼에 맞고도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순간 장군묵이 고함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멈춰라!]

추앙!

용이 뛰어든 듯 물이 높이 치솟았다.

현천록도 속으로 욕을 하며 물에 뛰어들었다.

(교활한 도사! 어쨌든 내가 빠져나가게 해주지. 하지만 당신은 나한테 졌다구.)

멀리 사라졌는가 했던 진양진인이 신궁 오무한으로 변장해서 가까이 숨어있었다.

어쩌면 나가려다가 동굴이 막혀버려서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노대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마각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현천록은 장군묵보다 늦게 물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주 깊이 몸을 가라앉혔다.

자기가 진양진인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현천록은 물 속에서 미미하게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꾸륵! 꾸륵하는 소리도 들렸다.

초상감각에 눈을 뜬 현천록은 그 소리들이 무엇인지 즉시 알았다.

쿵쿵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꾸륵꾸륵하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왔다.

심장소리, 그리고 내장이 움직이는 소리다.

현천록이 다가옴을 알고 심장은 느리게 뛰게 하거나 박동을 멈춘 모양이지만 내장이 내는 소리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은 살그머니 손을 뻗었다.

쇠갈쿠리같은 억센 뼈마디가 현천록의 손을 휘감았다.

현천록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버렸다.

서로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위에서 첨벙이는 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한 덩어리가 되어 물밑 바닥에 가라앉은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현천록의 허파에 물이 가득찼다.

하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않고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자니 발버둥치던 진양진인이 축늘어졌다.

현천록은 그제서야 진양진인을 겨드랑이에 끼고 물을 거슬러 헤엄치기 시작했다.

 

x x x

 

현천록은 한참 후에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되고 말았다.

무작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그만 샛길로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또다른 동굴로 들어와버렸는지 사방은 꽉 막혀있고 위는 칠흑처럼 깜깜하다.

매끈한 사방은 어디 발이라도 올려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다시 물 속의 미로를 헤엄쳐야 한다는 사실에 맥이 쭉 빠졌다.

그러나 일단 폐속의 물을 겨워내고 공기로 채우고 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허파 속이 얼어붙는 것같은 묘한 느낌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진양진인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찢어진 가죽부대에 담긴 술처럼 물이 저항없이 흘러나왔다.

현천록은 일단 그곳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진무검을 들어서 석벽에 깊숙히 박고 자루에 진양진인을 걸어놓았다.

바로 그때 콧소리가 섞인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여기서 얼쩡대다가 우리 아가씨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리고 죽을걸요?]

[다른 뜻은 없소. 난 다만 먼발치에서라도 소저를 한 번 뵙고 싶은 마음뿐이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현천록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하늘인가 저승인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당신한테 얼굴을 보이겠어요?]

[나는... 나는... 나는 다만...]

남자가 말을 더듬는 모양이다.

여자가 차갑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가씨의 면사를 벗기려다가 실패해서 죽은 사람만도 서른이 넘어요. 한데 당신은 공짜로 몰래 숨어서 보려하다니 아주 뻔뻔스럽군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나는 싸우고 싶지 않소. 하지만 소저는 꼭 보고 싶소.]

[웃기는 소리 말고 빨리 꺼져요. 삼년 동안 본 안면이 있으니 그냥 보내주겠어요. 자꾸 딴소리하면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여자의 말소리가 얼음장보다 더 차갑다.

부드럽고 달콤하던 처음의 그 여자 음성이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현천록은 여자는 정말 열두번도 더 둔갑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한테 모욕을 당하고 참는 건지 분노하지 못하는 건지 몰라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휘이익!

허공에서 무언가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현천록은 급히 진양진인을 붙잡고 검을 거둔 후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철퍼덕!

물위에 뭔가 떨어졌다.

현천록은 그 순간에 확연히 깨달았다. 자기는 네모난 우물 속에 들어있고 방금 떨어진 것은 커다란 두레박이라는 것을.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구나!)

현천록은 두레박을 기울여 물을 쏟아버리고 진양진인을 넣었다. 보나마나 도르레로 움직이는 아주 큰 두레박이다.

드륵드륵!

두레박이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

현천록은 두레박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따라올라갔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렸다.

[좋게 말할 때 빨리 꺼져요. 난 아가씨한테 꾸중듣고 싶은 생각없으니까.]

목소리의 주인이 말하면서 보이는 호흡과 두레박이 올라가면서 보이는 박자가 동일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난 소저를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다만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을 뿐이오.]

여자가 소리친다.

[! 직접 나설 용기도 없는 작자가.]

드륵!

두레박이 끝까지 다 올라왔다.

열 여덟 쯤 된 소녀가 두레박을 끌어서 옮겨부으려고 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고 위로 솟구쳤다.

휘익!

[!]

소녀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리고 현천록은 깜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돌려 다시 우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

우물을 덮고 있던 지붕과 도르레를 받치듯 받침대가 박살나버렸다.

[웬놈이냐?]

소녀가 앙칼진 소리를 외치며 현천록을 향해서 공격해왔다. 손에는 다섯치 길이의 비수가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은 검의 자루로 소녀의 손목을 치고 물러났다.

시비를 붙을 이유도 없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미안하오.]

현천록은 정중하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날렸다.

하지만 현천록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희뿌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며 멈춰섰다.

스물살 쯤 된 청년이 마치 허깨비처럼 공중에 서있었다.

현천록은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설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의 어깨에는 수실이 삭아버리고 가죽이 바랜 고검(古劍)이 걸려있고 청년의 얼굴은 희뿌연데 암울한 눈빛을 하고 있다.

청년은 어느 새 다시 현천록의 앞에 내려서 있었다.

현천록은 말 그대로 등골이 서늘했다.

청년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다만 그의 앞을 가로막기만 했지만 현천록에게 아주 기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뒤에서 소녀가 현천록의 등을 공격해왔다.

현천록은 보지도 않고 칼집 채 휘둘러 소녀의 공격을 받았다.

소녀가 길길이 날뛰며 비수를 휘둘렀지만 현천록에게 다가설 수 조차 없었다.

현천록은 암울한 눈빛의 청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중얼거렸다.

[무당파의 진양도장이었군. 가보시오.]

청년은 어느 새 삼보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말 그대로 부동이면서 동()인 미묘한 신법이었다.

하지만 현천록은 지나가지 못했다.

청년이 말했다.

[소저에게 불측한 마음을 품은 자인줄 알았소. 가도 좋소.]

[!]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바보 도터지는 소리를 냈다.

우물에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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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녀를 부르는 퉁소소리

 

 

 

 

 

현천록과 장군묵이 달려갔을 때 그곳에는 노삼과 뚱뚱한 중이 싸우고 있었다.

노삼은 천산육유장(天山六喩掌)을 펼쳐서 뚱뚱한 중을 몰아부치고 있었고 뚱뚱한 중은 합장을 한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겨우 피하는 중이었다.

뚱뚱한 중은 현천록을 보자 반색을 하며 말했다.

[도장! 여기 있었구려. 어디 말좀 해주시오. 내가 그런게 아니라고.]

현천록은 그가 계명사에서 만났던 포두화상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포두화상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노삼의 천산육유장을 상대했다.

노삼이 소리쳤다.

[이 중놈아! 네가 그러지 않았어면 도깨비라도 그랬단 말이냐?]

장군묵이 버럭 고함쳤다.

[입닥쳐라!]

[...]

노삼은 귀속이 윙하고 울려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굴 속도 노삼의 귀속처럼 한참동안 웅웅거렸다.

현천록은 장군묵의 소리에 기침을 크게 했을 때처럼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장군묵의 공력은 정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공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강했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젊은 시주의 공력이 아주 놀랍네 그려. 사자후(獅子吼) 못지 않았네.]

장군묵은 포두화상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천록이 노삼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소?]

노삼은 장군묵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제각기 흩어져서 출구를 찾는 중이오.]

현천록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쓰면 금방 뚫을 수 있는 곳이 있소.]

노삼은 그의 말은 듣지 않고 어떻게 장군묵의 손에서 아직도 현천록이 무사한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도장! 늙은 중이 약속에 좀 늦었소.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그만 용서하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대사와 싸우지 않겠소. 여기서 나가는데 힘을 모읍시다.]

포두화상이 껄껄웃었다.

[진작부터 그랬어야 옳은 일이오. 도장이 이제야 깨달았구려. 노납은 중이라 부처님이 계신 서방극락은 가보고 싶어도 옥황신전인가 하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오.]

말을 끝맺기도 전에 포두화상은 머쓱해졌다.

현천록은 노삼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검을 돌려 주시오.]

노삼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닌지라 현천록에게 순순히 진무검을 돌려주었다.

현천록은 검을 받아 칼집에 넣으며 물었다.

[아까 있던 그 네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

노삼이 말했다.

[노대가 시키는 대로 동굴을 조사하는 중이오.]

장군묵이 말했다.

[아니. 그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다.]

과연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노대와 노이가 연이어 도착하고 금전표 곽기와 수리전 형가운이 그 뒤에 도착했다.

노이가 말했다.

[틀렸다 틀렸어. 노삼! 우린 아주 지독한 놈한테 걸렸다. 꼼짝없이 여기서 죽을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노삼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요. 길이 없으면 뚫으면 돼고 무너진 건 치우면 언젠가는 나가게 될 텐데 재수없는 소릴하는거요?]

노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에는 노이의 말이 옳다. 우린 기주인지 뭔지 하는 독한 놈한테 당해버렸다. 재수가 없어 남의 무덤에 들어와 죽는거지.]

현천록이 노대를 채근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노대가 섭선을 확 펼치며 말했다.

[늙은 도사야! 네놈을 쫓아왔다가 이지경이 됐으니 일단 네놈부터 죽여야 좀 들 억울하겠다.]

학이 날개짓을 하듯 섭선이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하지만 마치 예리한 도끼날 같은 기운이 팔방에서 현천록을 애워싼 채 몰려왔다.

현천록은 검이 없었다. 창졸간에 백금퉁소를 휘둘러 연달아 이검을 펼쳐 노대의 공격을 막았다.

추잇!

노대의 섭선이 더욱 변화를 부렸다.

하지만 갑자기 섭선은 걷히고 노대가 풀죽은 얼굴로 물러섰다.

현천록이 돌아보니 장군묵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쏘아보고 있었다.

포두화상이 노대를 알아보고 말했다.

[천산육유장에 천산백학선법! 시주들은 고명한 천산삼로들이셨군. 무슨 영문으로 우리가 나갈 수 없는지나 알아봅시다.]

그때 금전표 곽기가 말했다.

[이 종이가 바로 해답입니다.]

스윽!

포두화상은 소매를 흔들었다.

곽기의 손에 있던 종이가 포두화상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포두화상이 큰소리로 읽었다.

[무너진 흙과 바위 더미 속에는 벽력탄이 들어있다. 함부로 치우려하다가는 폭사하고 말 것이다? 시주! 이건 누가 쓴 거요?]

뒤에 말은 종이에 없는 말이었다.

곽기가 의기소침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님! 기주가 쓴 것입니다. 왼쪽 아래쪽에 보면 작은 깃발이 하나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포두화상이 곽기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

[왕년에 삼상에서 이름을 날렸던 금전표 곽시주로군. 이 몇 해동안 금전표에 죽은 시체들이 한해에 여섯 구식 꼭꼭 발견되더니 곽시주가 범인이오?]

곽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해마다 곽기는 기주의 명령에 따라 여섯 명씩을 죽여왔다.

하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시체는 태우고 어떤 시체는 바다에 가라앉혔으며 어떤 시체는 산짐승에게 던져주기도 했는데 포두화상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곡을 찔려버리자 부인조차 할 수 없었다.

[... 소인이 범인입니다.]

포두화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곽시주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는데... 쯧쯔... 안타깝군.]

수리전 형가운은 포두화상의 눈이 자기를 훑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시주는 수리전 형시주구먼. 형시주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한해에 여섯 식 죽였소? 수리전이 심장에 박히긴 했지만 등을 뚫고 나오지도 않고 가슴에 뒤가 남아있지도 않았으니 그런 수법은 오직 형시주만이...]

수리전 형가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죄과를 어찌 다 거두려고 그런 짓을 다 하셨소? 나무아미타불...]

금전표 곽기가 말했다.

[저희는 기주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 그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포두화상이 또 말했다.

[석년에 구화산 명경곡(明鏡谷)에서 장씨 모자(母子)를 죽인 것도 명령 때문이었소?]

금전표 곽기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변해버렸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조차 쉬지 못했다.

수리전 형가운도 포두화상이 저승의 사자처럼 두려워졌다.

곽기와 형가운이 포두화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두화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수로 그대들은 그대들의 죄과를 씻으려는고?]

곽기가 오른손으로 자기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

수박이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곽기의 머리가 깨어져 골수가 피와함께 흩어졌다.

형가운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심장에는 수리전이 박혀 있었다.

노대가 냉소하며 말했다.

[신통력이 대단한 중이군. 몇 마디 말로 두 사람을 자결케 했어.]

노이가 말했다.

[그 신통력으로 막힌 동굴도 뚫어보시오.]

포두화상이 나지막하게 경을 외우고 나서 말했다.

[세상이 원래 헛된 것이니 선과 악도 다 헛된 것이오. 자기의 진면목을 보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니 이들은 자기를 대할 수가 없었던 거요.]

노삼이 불쑥 말했다.

[나도 적지 않게 죽였소. 기분이 나빠 죽인 놈도 있고 힘도 없이 도전하길래 죽여버린 것도 있소. 어디 나도 한 번 죽게 해보시오.]

포두화상이 껄껄 웃었다.

[시주는 노납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오. 노납도 사람인지라 불쑥 객기가 치밀었던 거요. ! 어서 동굴을 빠져나갈 궁리나 합시다.]

신궁 오무한과 철연화 마춘보가 횃불을 들고 왔다.

오무한의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무슨 내용이 적혀잇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노대가 포두화상에게 말했다.

[화상! 저 두사람도 죽여야 하지 않소?]

오무한과 마춘보는 그제서야 포두화상의 앞에 있는 두구의 시체가 곽기와 형가운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포두화상이 말했다.

[노납은 살생을 즐기지 않소. 내말이 틀렸소 진인?]

[! 옳고말구요.]

현천록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다가 건성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진양진인의 목소리지만 말하는 투는 영락없이 어린아이의 말투였다.

노대가 말했다.

[당신이 기주라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그 두사람도 빨리 죽여야지.]

오무한과 마춘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포두화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시주는 노납이 그들의 죄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의심하는 모양이구려. 그건 사실 그들이 말해준 것이오.]

노삼이 말했다.

[죽은 놈들은 계집처럼 입이 하나씩 더 달려있었소? 아니면 화상이 귓구멍이 하나 더 달려있어서 하지도 않은 말을 들었소?]

포두화상이 말했다.

[후자가 옳소. 노납은 종종 마음 속의 귀로 남의 마음을 옅듣곤 한다오.]

노대가 차갑게 말했다.

[소림사의 포두화상이 혜광심어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남의 마음 속에 말을 하는데 그 마음 속에 있는 걸 듣기도 당연히 들을 수 있겠지.]

포두화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나무관세음.]

[하지만 그걸로 화상 당신이 기주가 아니라는걸 증명할 수 있을까?]

노대가 은근히 비위를 건드리는 투로 말했다.

장군묵이 말했다.

[천산삼로의 첫째는 머리가 아주 총명하다고 들었는데 그럴 듯한 말을 하는군.]

포두화상은 자기의 등에 박히듯 하는 힘을 느꼈다.

[진양진인! 노납을 위해서 한 마디 변명도 해주지 않을 테요?]

현천록이 말했다.

[대사는 철인연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 분이시니 기주일리는 없겠지요. 더구나 이곳을 봉쇄하면서 남아있을 바보는 더더욱 아닐테고.]

포두화상이 호탕하게 웃었다.

[도우는 역시 노납을 잘 알고 있네 그려. 도우가 노납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면서도 이따금씩 만나는 것처럼 노납 또한 도우를 통해 옥황신전을 조금이라도 알까 싶어서 멀리가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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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3)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장군묵은 출구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마다 가봤지만 무너져 내린 바위더미 위에는 볼 수 없었다.

그것들을 다 뚫고 나간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기주인가 뭔가 하는 자에 의해 모두 막혀버린 것 같소.]

장군묵은 현천록을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린 다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장이 들어온 곳은 어딘가?]

현천록이 말했다.

[제일 먼저 무너졌소.]

장군묵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만약 허튼짓을 하려한다면 두 손부터 날려버리겠소.]

현천록은 입을 삐쭉했다.

[내겐 그런 능력도 없소. 당신이 믿을 지는 몰라도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나도 꼭 알고 싶은 것들이오.]

장군묵이 묵묵히 현천록을 보다가 말했다.

[도장이 지난 세월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옥황빙서가 말해주는거요?]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양진인은 팔십년 전부터인가 옥황신전에 들어가 옥황사자가 되었소. 삼년 마다 한 장식의 옥황빙서를 적임자에게 전해주는 역할이었소.]

현천록이 순순히 대답해버리자 장군묵이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하지만 옥황신전이 어디있는지 또 뭐하는 곳인지 물으면 할 말이 없소. 나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이오.]

장군묵이 물었다.

[옥황빙서는?]

[그놈의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당신네 아홉째에게 줬소. 목숨을 요구하는 대가로.]

현천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가 진양진인인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말이니까 언 듯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홉째? 아홉째를 만났단 말이오?]

현천록이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지 않으면 결코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거요.]

장군묵은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함부로 하면 현천록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잠시 보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오. 조금 긴 이야기도 될 수 있소. 교활한 늙은 도사와 호기심 많고 해보고 싶은 것 많은 철부지 소년의 이야기요.]

장군묵은 호기심이란 말에 깊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기심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삼년을 기다리는가 하면 또 한 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흉흉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훔치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오.]

장군묵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않은가? 결과가 나온다면 백년도 기다리고 목적을 위해서면 만번이라도 싸울 수 있지. 하물며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죽을 인간을 죽이는 것 따위가 뭐 어떴단 말인가?]

현천록이 칭찬하며 말했다.

[정말 호탕하오. 대장부는 마땅히 그래야 할 거요.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오. 나를 죽이려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장군묵이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 귀찮을 뿐이지. 사실 죽이는 것도 귀찮지. 하지만 그냥 두는 것이 더 귀찮을 때는 약간 덜 귀찮은 쪽을 택하오. 그쪽이 바로 죽이는 쪽이지.]

현천록이 안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겠소.]

장군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중원 어딘가에 칼이나 검, 방패, 창 따위를 잘 파는 꼬마가 있었소. 상당히 수완이 좋아서 단골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소. 그런데 어느 겨울날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소.]

현천록이 힐끗보니 장군묵은 이야기에 끌리는지 몸을 현천록 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꿈은 참 빨리도 이루는구나. 되고 싶은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했더니, 시체도 되어보고 순찰사자노릇도 해보고, 사기꾼 노릇에 퉁소쟁이까지 되었다가 도사가 되는가 했더니 이제 이야기꾼이 되는구나. 그래 멋대로 되라. 언젠가는 다 정리가 되겠지.)

재미가 없지는 않다.

자기 속에 얼마나 많은 모습이 있는지, 아니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하나인데 아직 굳어지지 않아서 어떤 형태로든 상황에 맞춰서 변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현천록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자기의 이야기였다.

[지독한 노인이 하나 찾아왔는데 자기가 가진 검을 팔려고 했소. 검은 무당파의 진무검보다 못하지 않은 보검이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쓰기는 어렵고 그 노인의 몸은 딱 그검을 쓰기에 알맞았소. 몸과 검이 서로 닮아있었던 거요. 나는 아주 싸게 사려고 했소. 노인은 그걸 되사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느냐고 물었소. 나는 그검을 다시 사려면 판 가격의 칠백배를 내야 된다고 말했소.]

장군묵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 비싸군.]

현천록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비싸지 않았소. 오히려 내가 단단히 당했으니까?]

[도장이?]

장군묵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현천록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장군묵은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빨려들고 있는 중인데 흐름을 끊으면 산통도 깨어진다.

[그 꼬마가 당했단 말이오. 노인은 한푼도 받지 않고 검을 팔았소. 황당한 노릇이었지. 한푼도 받지 않았으니 칠백배 아니라 만배라도 똑같지 않소? 그냥 그 노인이 와서 다시 달라고 하면 나도 그냥 줄 수 밖에 없으니까. 꼬마는 그때서야 후회했소. 그럴 줄 알았다면 보관료를 아주 비싸게 책정하는 게 백번 낫지 않겠소.]

장군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단서까지 달아놓았소. 검을 잃어버리거나 하여 자기에게 되팔지 못할 때에는 꼬마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소. 꼬마는 검을 들고 주인에게 가서 소상히 다 고했소. 주인은 그 검을 곰곰히 보고는 고독마검이라고 했소.]

장군묵이 코웃음을 쳤다.

[고독마검 불이태가 아직 살아있었군.]

현천록이 물었다.

[고독마검은 어떤 고수요?]

장군묵이 말했다.

[칠검동(七劒洞)의 제사검(第四劒)이지. 그 사이에 순위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만.]

현천록이 말했다.

[칠검동이라는 데도 있었군. 하여간 일은 그날 터졌소. 꼬마가 주인에게 고하고 자기 방으로 가는데 갑자기 눈 앞에 하얀 손바닥 하나가 보이지 않겠소? 그리고 꼬마는 정신을 잃어버렸소.]

장군묵이 말했다.

[그건 풍허객의 소월심인장(素月心印掌)이겠군. 상처도 없이 그냥 정신을 잃게 만들지.]

현천록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마 그럴거요. 꼬마는 맞은 것 같지도 않고 다친데도 없었으니까. 하여간 풍허객이란 사람이 나타났소. 그 꼬마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꼬마가 갑자기 죽고 말았소.]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풍허객이 죽였소?]

현천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소. 저절로 고개를 뒤로 휙 젓히며 머리를 땅에 부딪히고 죽어버렸소.]

장군묵의 얼굴이 굳어지고 그의 눈이 현천록을 빤히 현천록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이 그런 눈빛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구장심조의 첫 번째 껍질이 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데 죽었으되 죽은 건 아니었소. 꿈인지 생신지 산건지 죽은건지 꼬마는 다시 정신을 차렸소. 삼년이 지났다고 하고, 온몸이 새까만, 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꼬마를 반겼소. 그 여인 이름이 아마 보초였을 것이오.]

순간 현천록은 목이 꽉 막혔다.

장군묵이 한손으로 현천록의 목을 쥐고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생사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무당파 제자는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이제 그 맹세를 깨뜨릴 수도 있다.]

장군묵의 음성은 아주 무거웠고 숨이막힐 듯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의 장군묵의 두 팔을 잡고 매달리며 겨우 말했다.

[이야기는 아직 남았소. 가만히 기다리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듣게 될거요.]

장군묵은 다시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조금전처럼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검의 자루를 은근히 만지면서 허튼짓을 하지말라는 위협적인 행동도 포함되어있었다.

현천록은 한숨을 쉬었다.

장군묵은 필요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 꼬마는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소. 구장심조라는 무공이면서도 아니고 아니면서도 무공인 이상한 힘 때문이었소.]

장군묵의 입이 실룩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보초라는 분에게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사탄의 비밀과 구장심조의 진정한 뜻을 찾기 위해서 세상을 나다닌다고 들었소. 그말을 듣자마자 꼬마는 자기도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소.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먼저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소. 자기 앞에 펼쳐질 운명을 믿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는 일단 좀더 많이 알기로 작정했소.]

장군묵은 현천록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기네 아홉째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다면 생사탄의 사람을 어떤 수단으로도 말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호기심이 걷잡을 수없이 피어올랐지만 현천록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세상에 다시 나왔다가 일곱째를 만났소. 그리고 그날 밤에 현무호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퉁소소리에 이끌려 계명사 활몽루로 갔소. 활몽루에는 어떤 도사가 퉁소를 불고 있었는데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었소. 그 때문인지 꼬마보다 먼저 일곱째가 그 도사를 혼내주려 했소. 한데, 도사가 요상한 수법을 부려서 활몽루를 사라지게 했소.]

장군묵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은 그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말했다.

[꼬마는 활몽루와 함께 그들이 사라져버리자 재빨리 성안으로 달려가 퉁소를 하나 구했소. 그리고 현무호 가운데 섬에서 퉁소를 불었소. 그 도사와 똑같은 곡이었소. 이윽고 허공에서 갑자기 도사만 나타났소. 호수에 떨어졌는데 퉁소소리에 이끌려 꼬마가 있는 쪽으로 나왔소. 꼬마는 도사를 포로로 잡았소. 그도 도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있었기 때문이오.]

꿀꺽!

장군묵이 침을 삼켰다.

현천록은 계속 말했다.

꼬마가 도사를 데리고 자금산의 동굴 속에 숨은 일과 그 도사와 내기를 한 일, 그리고 어떻게 태극혜검을 배우게 되었고 어떻게 암습을 당했으며 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그래서 그 꼬마는 졸지에 빨간 머리띠를 맨 도사가 되어버렸던 것이오.]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목을 덮썩 잡았다.

현천록은 가만히 있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왼손을 보며 소리쳤다.

[미장! 정말 아홉째 너구나!]

현천록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묵심환이 나타나고 있었다.

현천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장군묵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발로 땅을 굴렸다.

쿠웅!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동굴 전체가 울렸다.

[그 교활한 도사놈이 이런 짓을 꾸미다니! 아직 멀리 가진 못했겠지.]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을 봐요. 남의 몸도 이렇게 바꿔버리는데 자기가 변신하는 건 더 쉽겠지요. 어떻게 알아보고 찾는단 말입니까?]

장군묵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네 몸에 펼쳐진 수법은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현천록이 놀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어야 된단 말예요?]

장군묵이 힐끗보며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허허허!]

현천록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변신을 하자고 했는데 너무 기가막힌 변신을 해버렸다.

빨간 머리띠를 맨 늙은 도사가 되어버렸다.

그때 펑펑! 하는 장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강맹한 장력인지 현천록과 장군묵이 있는 곳까지 바람이 확 밀려왔다.

[이 미친 중놈아! 죽으려면 곱게 죽지 왜 동굴은 무너뜨리려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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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2)

 

 

새로 온 사람이 버럭 소리쳤다.

[개똥같은 도사놈아! 모가지를 비틀어야 옥황빙서를 내놓겠느냐?]

현천록이 말했다.

[난 진양진인이 아니오. 난 현천록이오. 진양진인이 나를 이렇게 해놓았소.]

장군묵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튼 수작으로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해.]

장군묵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순간 현천록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부드러운 기운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든 검이 휘둘러졌다.

번쩍!

그의 검은 장군묵의 부드러운 장력을 베어버리고 그의 왼쪽 눈을 찌르고 있었다.

태극혜검 중의 소경심매란 초식이다.

장군묵의 붉으스레한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현천록은 앗차 했을 때 벌써 자기도 모르게 장군묵의 눈을 찌르고 있는 중이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반격에 다시 반격을 가했다.

검이 부딪혀도 챙강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불똥이 튀고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날뿐이었다.

현천록도 울며겨자먹기로 반격에 반격을, 그 반격에 다시 반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태극혜검은 원래부터 공수를 겸한 것이기에 반격을 반격으로 맞는다.

눈부시게 검광이 흐르고 불꽃이 뛰는 가운데 순식간에 사십여 초가 지나갔다.

현천록은 장군묵과의 싸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태극혜검 중의 수법들을 쥐어짜내며 겨우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군묵이 사용하는 검법도 역시 태극혜검이지만 현천록이 미처 모르던 수법들도 섞여 있었다.

장군묵도 현천록이 자기의 검술에 검술로 당당히 맞서고 있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자기한테 입은 중상 때문에 공력도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태극혜검을 펼치는 진양진인의 공력이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잡다한 것 보다는 공력이 순수하면 순수한 만큼 강해진다.

공력에도 양이 아니라 질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태극혜검의 수법이 지난 밤에 싸웠을 때보다 오히려 더 정치(精緻)하게 느껴진다.

장군묵은 버럭 소리쳤다.

[재주를 숨기고 있었군. 하지만 그정도의 태극혜검으로 나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

장군묵의 검에서 뿜어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아주 강해졌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에게 초상감각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단 일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운들은 느끼는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겉으로 볼 때 현천록과 장군묵의 싸움은 눈부신 검광으로 인해 사람을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 였다.

[노대! 진양진인의 검술이 아주 대단하군요.]

나중에 온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조금 늘었군. 하지만 저 청년이 더 대단해. 나이도 젊어보이는데 완전히 압도하고 있어. 진양은 보검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야. 저 보검만 아니라면 벌써 끝장났을 걸?]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노대! 조금 이상합니다. 진양진인의 검술이 싸우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군요. 저 정도라면 저도 백초를 넘기기 힘들 것 같은데요.]

세 사람은 절벽 중간의 입구로 들어왔던 천산삼로였다.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은 여우굴처럼 여러 개의 굴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노대가 이를 부드득 갈며 욕을 했다.

[빌어먹을 도사놈! 검술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노이!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나도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구만.]

노삼이 물었다.

[노대! 검술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뭐요?]

노대가 말했다.

[썩어빠질 놈아! 너는 사부한테 들은 말은 전부 똥통에 쳐박아버렸냐? 말 그대로 검술이 몸속에 스며들어 사람이 검이 되고 그 사람의 움직임이 바로 검술이 되는 그런 걸 말하잖나. 어떤 검술이 위력이 아니고 수법으로서는 최고에 달한 거야. 소위 검신(劍神)이 된 거지.]

현천록은 꼼짝없이 진양진인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습과 목소리가 똑같을 뿐 아니라 태극혜검까지 썼으니 아무리 자기가 아니라고 해도 알아줄 리가 없을 것 같다.

함께 싸우고 있는 장군묵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현천록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장군묵은 진양진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살수를 써야할 때도 상처만 입히는 가벼운 수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현천록의 짐작은 틀림없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똑같은 검술로 상대하는 현천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 수 없다.

잠시는 재롱삼아 봐줄지 모르지만 마침내는 장군묵이 손을 크게 쓰고 말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장군묵에게 잡힌다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고 자기도 알고 싶어하지만 모르는 사실을 말하라고 강박당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현천록은 진짜 진양진인이 되어 도망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진양진인이 되어 도망치려면, 현천록은 진양진인이 자기를 속였듯이 장군묵을 속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더 이상 저항은 하지 말아야 한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장군묵의 검을 억지로 막고는 검을 떨어뜨려 버렸다.

피웃!

장군묵의 검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목에 쌍검을 가위처럼 교차시켜 걸쳤다.

조금만 힘을 주면 현천록의 늙은(?) 목은 순식간에 잘려질 판이다.

현천록이 저절로 나오는 진양진인의 음성으로 말했다.

[일곱째! 내가 졌소. 하지만 당신도 졌소.]

투투투툭!

장군묵이 장검으로 현천록의 몸에 여섯 군데 혈도를 찍었다. 그는 이번에야 말로 단단히 작정한 한 것 같았다.

[보검인데.]

천산삼로 중의 노삼이 현천록이 떨어뜨린 진양진인의 보검을 줏어들며 말했다.

노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금석을 두부자르듯 하는 신검이야. 어지간한 보검은 무베듯이 베어버릴거야.]

노대는 장군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당파의 진산지보인 진무검(眞武劍)이다. 그나저나 자네는 태극혜검을 정말 잘 쓰는군. 젊은 나이에 아주 대단하네.]

장군묵은 피식 웃었다.

노대가 말했다.

[사실 난 진양진인을 혼자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무림엔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아주 뜻밖이야. 자넨 누군가?]

장군묵이 차갑게 말했다.

[꺼져라! 네 사부 천산일괴(天山一怪)와 안면만 없었다면 그냥 죽였을 거다.]

노삼이 나서며 말했다.

[그건 우리 보고 한 소리겠지?]

노이가 물었다.

[우리 사부를 알고 있나? 죽은지 백년도 더 됐는데.]

노삼이 말했다.

[미친 소리요. 젊은 놈이 어떻게 사부를 알아.]

장군묵이 현천록을 한손으로 들어올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나는 젊었지. 늙지는 않았어. 세상에 있을 땐 진양의 사부의 사부의 사부가 나한테 사형이라고 불렀지.]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노삼과 노이가 미친 것처럼 웃으며 미친놈을 보듯이 장군묵을 본다.

하지만 노대는 장군묵에게 보통 사람과 다른 뭔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진양! 그 사람 말이 정말인가?]

현천록은 동동 매달린 채 말했다.

[정말이오.]

!

노삼과 노이가 웃음을 멈췄다.

장군묵이 현천록에게 말했다.

[도장! 이제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잠깐!]

노대가 돌아서는 장군묵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자네가 진양의 태사숙조가 된다면 왜 진양에게 호칭을 그렇게 하는가?]

장군묵이 언찮은 표정을 지었다.

현천록이 재빨리 말했다.

[이분께선 이미 본파를 떠나셨소. 그래서 나를 대할 때도 본파의 어른으로서 나를 대하는 게 아니라 남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대하는 것이오.]

장군묵이 뜻밖인 듯 현천록을 힐끗 본다.

현천록은 빙그레 웃었다.

웃어야할 상황인지는 판단이 쓰지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 웃음은 꼭 자기가 잘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노삼이 나서며 말했다.

[그대가 옛날 도사였는지 지금도 도사였는지는 알바 없소. 우린 진양에게 물건을 얻으려고 왔는데 당신이 진양을 그냥 데려간다면 곤란하지 않겠소.]

현천록이 또 말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요?]

노삼이 말했다.

[우린 천산에서 몇 달이나 걸려서 왔는데 헛걸음질치고 돌아가면 최소한 일년은 허송세월하는 셈이오. 우리 나이는 적지 않아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일년은 적은 시간이 아니지.]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을 보상받고 싶으면 그 검을 가지시오.]

노삼이 말했다.

[아니! 아니! 진양! 나는 검을 쓰지 않으니 필요가 없소. 또 가진다 해도 노이에게 주는게 최선이오. 우리 중에서 오직 노이만이 검을 쓰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검을 돌려줄테니 당신이 갖고 있는 옥황빙서를 우리한테 주시오.]

하하하하!

현천록은 그렇게 웃었지만 허허거리는 소리가 되어 나왔다.

노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웃는가?]

장군묵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천산삼로도 입을 다물었고 현천록도 입을 다물었다.

장군묵이 손을 이상하게 한 번 썼다.

[어어!]

그의 앞을 막았던 노삼이 둥실 떠올라 동굴 벽에 부딪혔다.

장군묵이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도 보지 못했다.

[멈추시오!]

노대가 소리쳤다.

하지만 장군묵은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불가사의에 가까운 신법이었다.

노삼이 욕을 했다.

[빌어먹을 작자! 감히 나를 집어던지다니. 똥통에나 빠져버려라.]

노이도 사라지고 없었다.

노대가 큰소리로 불렀다.

[노이! 돌아와라! 그를 따라갈 순 없다.]

휘이이익!

노이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노대 앞으로 날아왔다. 그는 장군묵이 신법을 펼칠 때 함께 신법을 펼쳐 뒤쫓았던 것이다.

노대는 어둠 속에 대고 물었다.

[여기에 들어온 놈은 모두 몇이냐?]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우리 일행은 칠십 명이 들어왔소. 하지만 다 죽고 지금은 여기있는 네 명만 남은 것 같소.]

노대가 말했다.

[네 놈들도 옥황빙서를 노리고 왔느냐?]

신궁 오무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명령을 받고 왔을 뿐이오. 진양진인을 찾으라는.]

노삼이 코웃음을 쳤다.

[노대, 저놈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오. 진양진인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찾는데 칠십 명씩이나 동굴에 집어넣을 바보 멍청이가 있겠소?]

노대가 말했다.

[네놈들의 이름은 뭐냐?]

네 사람이 각기 대답했다.

[활을 좀 쏜다고 해서 신궁이라 불러주는 오무한이오.]

[금전표(金錢鏢) 곽기(郭基).]

[수리전(袖裏箭) 형가운(衡駕雲)이오.]

[철연화(鐵蓮花) 마춘보(馬春寶).]

노이가 말했다.

[노대! 모두 질 좋는 놈들이 아니오. 암기나부랑이나 쓰는 녀석들이오. 모두 죽여버립시다.]

금전표 곽기와 수리전 형가운, 그리고 철연화 마춘보가 찬바람을 들이켰다.

자기들이 무슨 수를 써도 괴상한 세 노인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을 때 신궁 오무한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리가 죽기를 원한다면 세 분이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소. 우린 그냥 둬도 여기서 죽게 될거요.]

노삼이 말했다.

[무슨 소리냐? 우리가 죽이지 않아도 죽는단 말이냐?]

오무한이 말했다.

[이미 동굴 입구는 다 무너졌소. 여기서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노삼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그 때문에 네놈들이 죽는다면 우리도 그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냐?]

오무한이 말했다.

[기주는 이미 동굴을 무너뜨렸소. 혹시 뚫고 나간다고 해도 기주 손에 죽고 말것이오. 당신들은 우리 때문에 죽게 된 피해자요.]

노대가 물었다.

[기주란 놈은 또 뭐냐?]

오무한이 말했다.

철연화 마춘보가 말했다.

[기주는... 기주요.]

노삼이 고함쳤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금전표 곽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걸 어떡하겠소?]

노대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나머지는 여기를 나간 후에 알아보도록 하지.]

노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노대! 무슨 냄새를 맡았소?]

노대가 손을 저어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따라와. 이 동굴은 간단치 않아.]

노이와 노삼은 물론이고 신궁 오무한과 금전표 일행도 노대의 뒤에 따라붙었다.

노삼은 자꾸만 오무한과 금전표 등을 죽여버리고 싶은지 힐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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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동쪽 절벽은 아주 높고 컸다.

이매봉은 한시간이나 벽호공(壁虎功)을 펼쳐 절벽을 탄 후에야 천산삼로의 노이가 말한 그 동굴로 짐작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매향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괜한 짓을 했군. 녀석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한가하게 그녀석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는데...]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매봉은 동굴 입구의 바위턱에 걸터앉았다.

파란 하늘 아래 먹이를 찾아 날고 있는 매 한 쌍이 보인다.

눈에 덮힌 산등성이 주름진 여름 이불자락같고,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눈으로 치장하고도 푸른 가시창날같다.

바람은 절벽을 만나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한 참 올라와버린 해는 겨울날의 미미한 자기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말해준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텅빈 속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밤에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천산삼로 중 둘째의 말 한마디에 이곳까지 와본 자기가 한심하기도 했다.

어쩌면 벌써 현천록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괘심한 마음이 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욱 같이 있게 될 것같은 기분이었는데, 단지 몇 시간 만이 주욱이란 기분인가 싶다.

이매봉은 품에서 물소뿔 모양의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

 

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매봉이 다시 한 번 나팔을 불었을 때 절벽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까마귀처럼 깃털은 새까맣고 매처럼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으며 머리는 닭과 비슷했다.

괴조(怪鳥)는 이매봉을 발견하고 동굴 앞으로 천천히 미끌어지듯이 내려왔다.

이매봉은 훌쩍 날아 괴조의 등에 올라 목 뒤의 깃털 속에 몸을 묻었다.

깃털 하나가 파초잎 만하다.

괴조의 체온이 이매봉의 몸을 훈훈하게 한다.

이매봉은 괴조의 등을 두드려주듯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서안(西安)으로 가자.]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금산 정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는 괴조를 힐끗 본 후에 절벽으로 뛰어내려왔다.

수 십장의 절벽을 떨어져 내리던 그 사람의 몸은 마치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둥실 멈추더니 동굴에 내려섰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포두화상이었다.

나한상처럼 둥글고 납작한 얼굴에는 해픈 웃음이 걸려있지만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포두화상은 동굴 입구를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의 새 환우마조(寰宇魔鳥)가 나타났다는 건 환우회의 회주가 왔었다는 이야기인데... 환우회마저 옥황빙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포두화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환우회의 회주가 여기에 왔었다면 이 화상도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지.]

포두화상의 몸이 구름을 밟는 듯 기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후,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치달려 올라와 동굴로 들어갔다.

비슷하게 생긴 천산삼로였다.

 

***

 

현천록은 생각했다.

(동굴을 되돌아 간다면 입구가 막혔으니 뚫고 나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우같은 진양진인이 여기서 사라졌으니 그곳 말고도 출구는 있다. 물이 흐르고 있으니 물을 거슬러간다면 장강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이 동굴은 지하세계처럼 넓고 거대하니까 또 다른 출구도 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막힌 곳을 뚫고 나가고 그 전에는 다른데를 찾아보자.)

암흑 속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현천록은 들어온 곳과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체중이 없는 그의 몸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흘렀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굴 속 바람을 따라 얼마동안 갔을 때, 앞이 점점 밝아졌다.

그가 가는 앞쪽 어딘가에 불이 있었다.

일렁이는 것으로 봐서 횃불인 것 같았다.

현천록은 그와 진양진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출구가 또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현천록은 불을 향해서 다가갔다.

한데, 불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백개도 넘을 것같은 횃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두런 거리며 주고 받는 말소리도 들린다.

[난 이번일만 끝내고 나면 정말 무림을 떠날 생각이네.]

[뭘 할 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살겠어.]

[! 신궁(神弓) 오무한(吳武漢)이 사냥도 아니고 농사를 짓겠다고?]

나직한 탄식이 섞인 소리로 먼저 말한 자가 말했다.

[더 이상 죽이기가 지겨워졌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냥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기르고 보살피는...]

[한심한 소릴 하는군. 이십년 동안 자네 활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와서 그런 소린가? 우리한테 다른 길은 없네. 그냥 살아왔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옳은 이야기야. 지금 다르게 살아봤자 아무도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아.]

신궁 오무한이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심한 소리라는 건 아네. 하지만 이제 죽이고 빼앗는 건 너무 질렸어. 누구의 용서를 바라거나 동정을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라네.]

끼어든 목소리가 코웃음을 쳤다.

[답답한 소리군. 자네 활이 정말 신궁인지 의심이 다가는군. 자네는 가만히 숨어살고 싶겠지만 자네 원수들도 그냥있을까? 아마 끝까지 찾아가서 죽이려 들걸세.]

[난 이번 일로 패혼기(覇魂旗)에 진 빛을 다 갚게 되네. 살아난다면 말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고 싶네.]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기주(旗主)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비록 여기엔 패혼기에 얽매인 사람들만 들어왔다 하지만 조심하는게 좋을걸세.]

[이렇게 큰 동굴에 그자가 숨었다면 스스로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거네. 어쩌면 기주에겐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로 그때였다.

쿠쿵!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동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굉음이 동굴 속의 두런거리던 소리들을 모두 삼켜버린 듯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구 쪽이다!]

누군가가 소리치며 횃불을 팽개치고 달려갔다.

가지런히 움직이던 횃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어떤 것은 몰려들고 어떤 것들은 멀어져갔다.

하지만 대체로 횃불들은 현천록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엔 다른 쪽이었다.

현천록은 근처에 떨어진 횃불을 하나 집어들었다.

입구 쪽으로 달려가지 않고 머뭇거리던 불빛은 겨우 두세개 밖에 없었다.

현천록도 횃불을 들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동굴속이라 불이 있어도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치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가... 기주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하고 있어. 동굴 속에 생매장하려고... 나쁜 노옴!]

다른 사람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틀렸어. 기주는 우리가 다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자야. 우릴 죽이려 마음 먹은 이상 다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우린 모두 칠십명이다. 각기 지닌 재주가 다르니까 어쩌면 다른 출구를 찾아 나갈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네. 다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

신궁 오무한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기주가 온 산을 다뒤져 진양진인을 찾으라고 한 것도 결국 우릴 여기에 들여보내 죽이려고 꾸민 일이란 말인가?]

[현무호에서 죽은 사람만해도 삼백 명이 넘네.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우리처럼 패혼기에 복종하고 왔을 걸세.]

오무한의 목소리는 아주 침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을 뚫고 나갈 수는 없을까?]

바로 그때 아주 길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그곳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그처럼 처절한 비명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시작이었다.

연이어 지옥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비명들이 공포가 되어 동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휘익! 픽픽!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자기들의 횃불을 꺼버리는 것을 보면서 현천록도 양의신공을 입으로 불어내 꺼버렸다.

[저렇게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기주뿐이다.]

다른 사람도 말했다.

하지만 모두 혼란에 빠져버렸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있다면 대체 누가 입구를 파괴했단 말인가?

모두 호흡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비명에 이어서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까지는 정말 찰라지간이었다.

꺼지지 않은 횃불들 중 어떤 것은 시체위에 떨어져 살을 태우는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그 불빛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양 손에 각기 하나씩의 검을 들었으며 검날을 타고 피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현천록은 입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장군묵이었다.

두 손에 낭아봉 대신 검을 들었지만 틀림없는 장군묵이었다.

장군묵의 눈은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군묵은 검으로 현천록을 가리켰다.

밝은 곳에서도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신궁 오무한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기주가 아니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들을 살해했는가?]

장군묵이 씨익 웃었다.

젊은이란 말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전음으로 오무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기주는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고술세. 움직일 때는 함께 하세.]

전음은 현천록의 귀에도 들렸다.

장군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 세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물러섰다. 장군묵이 그들 앞 세자 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때문이다.

쉬이이이익!

검광이 어둠을 양단했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들은 폭포수같은 검광 앞에서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바로 앞에 있을 때는 압도당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치지지직! !

 

찬물에 달군 쇠를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가 오무한과 동료들을 깨웠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혔다가 미끌어지며 파란 불꽃을 튕겼다.

[후후후... 이번에도 태극혜검인가? 내가 낭아봉대신 검을 들었을 때는 당신한테 검술을 한 수 가르치려는 뜻이 있다는 걸 알았을텐데...]

장군묵이 쌍검 중 하나는 등 뒤로 돌리고 하나는 앞에 세우며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가 진양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혈을 제압해놓은 것은 금방 풀렸었지만 모습을 바꾼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군묵이 믿고 안 믿고는 차후에 생각해볼 일이고 일단 말부터 꺼냈다.

[일곱째! 진양진인은 벌써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장군묵이 어리둥절했고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장군묵은 자기가 일곱째라는 걸 진양진인이 어떻게 아는가 싶어서 였고, 현천록은 아혈이 풀렸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늙수구레한 진양진인의 목소리가 나와서였다.

붉으스름한 장군묵의 눈이 현천록을 노려보았다. 안개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의 뒤에 섰던 네 사람은 본능적인 공포에 비칠비칠 물러섰다.

장군묵이 말했다.

[역시 당신은 뭔가 있어. 후후후... 그 이상한 행동에 이어... 내가 일곱째라는 것을 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인가?]

현천록은 당황했다. 이러다간 정말 진양진인의 의도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났구나! 이사람은 나를 정말 진양진인으로 단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않겠구나.)

항상 여유를 갖고 즐겁게 지내려는 그의 정신상태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마음 속을 기쁨이 아닌 다른 침울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뒤에서 신궁 오무한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진양진인이오?]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거냐? 개똥같은 도사놈아!]

먼저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네놈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는다.]

현천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 설상가상이구나! 한 사람도 모자라서 두 명 세명이 이 가짜 진양진인한테 볼일을 보려하다니.)

그의 머리가 아주 오랜만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여차했다간 정말 재수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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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진양진인이 말했다.

[가장 뛰어난 검법인 태극혜검이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입문할 엄두도 못내는 절학이지. 할 수 있겠느냐?]

현천록이 말했다.

[동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구결을 외우게. 구결에 따라 내력을 운용하며 펼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내가검법(內家劍法)이 있을 수 없네.]

무당파 최고의 절학이라는 태극혜검의 구결은 두 가지로 천결과 지결로 나뉘어 있었다.

천결(天訣)은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 각 초식마다 양의신공을 따로 운용하는 특이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지결(地訣)은 각 초식이 어떤 상황에서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것이며 그 효능을 분명히 해주는 비결이다.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마음을 두가지로 나누어 사용하지 못하면 천결과 지결 역시 동시에 운용할 수 없고 위력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양의신공에 포함되어 있는 양심공으로 공력을 안팎으로 함께 운용해야 되는 것이니 만큼 태극혜검은 아주 특이하고도 그 위력을 직접 보기 전에는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지도에 따라 태극혜검을 모두 익혔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아주 고팠다.

현천록이 건져올린 물고기를 진양진인이 삼매진화로 구웠다.

현천록은 시쳇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두 가지의 절기를 지닌 고수가 되었고 그를 고수로 변모시킨 진양진인은 오히려 자기가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현천록은 백금퉁소로 검을 대신해서 태극혜검을 연습했고, 그를 보며 진양진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자세에 너무 치중하고 있군. 자세를 잃지는 않아야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어야 하네.]

진양진인은 보검으로 현천록을 가볍게 내질렀다.

태극혜검의 첫 번째 수법인 지일고승(指日高升)이었다.

현천록은 여섯 번째 수법인 고월침강(孤月沈江)을 펼쳐 보검을 걷어냈다.

진양진인은 즉시 수법을 바꾸어 우밀휘진(羽密揮塵)의 맹렬한 수법을 사용했다.

현천록은 비홍횡강(飛鴻橫江)을 써서 진양진인의 머리를 노렸다.

진양진인은 벽죽소영(碧竹掃影)을 사용했다.

지일고승이나 고월침강, 우밀휘진, 비홍횡강, 그리고 벽죽소영에서 볼 수 있듯이 태극혜검의 열 두 초식은 모두 수비와 공격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처음에 열두초식을 펼쳐 초식만으로 일곱 번 현천록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세 번만이 현천록의 초식을 뚫을 수 있었고,

세 번째에는 두 번의 기회를 가졌으며, 세 번째에는 아예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네 번째에 이르자 현천록의 태극혜검은 완벽에 가까워지면 마치 다른 검법처럼 보였다.

전체가 하나의 초식처럼도 사용되고 두 초식이 하나가 되기도 하며 한 초식이 나누어져 세 초식이 되기도 했다.

진양진인은 이런 변화에 깜짝 놀랐다.

현천록을 연습을 통해 단련시킨다는 목적이었을 뿐이었는데 태극혜검을 자기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번쩍 하는 순간에 진양진인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찬바람이 이마에 몰려왔다.

그보다 먼저 현천록의 퉁소가 한치 앞에 멈춰있다.

지일고승! 진양진인이 제일 먼저 펼쳤던 수법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서로가 대결했으나 이미 초상감각을 터득한 두 사람은 보지 않아도 거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심장이 터질 듯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보검을 휘둘러 용도천문(龍到天門)과 한망충소(寒茫沖宵)를 잇달아 펼쳤다.

그러나 현천록의 소경심매(掃徑尋梅)는 말 그대로 길을 헤치고 매화를 찾듯이 용도천문과 한망충소를 뚫고 진양진인의 목젖에 다다랐다.

진양진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왈칵 두려움이 일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족족 자기를 능가해버리는 현천록에게 경이를 넘어 공포까지 느껴 지는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음성을 떨면서 물었다.

[자넨... 자넨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넨 정말 사람이 아닐세.]

현천록이 말했다.

[제게 남이 갖지 못한 재주가 한가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재주인가? 자넨...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진 않았지만 내게 태극혜검을 배웠으니 그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진양진인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말했다.

[사람과 물건을 볼 줄 아는 재주입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적합한지가 즉시 떠오르고 물건을 보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금방 아는 재주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럼 검을 보면 검법이 떠오르고 퉁소를 보면 부는 법이 저절로 떠오른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비슷합니다.]

진양진인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자넨... 생지지자(生知之者)로군! 전생에 아마 절세고수였던 모양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는 없습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현천록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귓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현천록은 서있던 곳에서 두 번이나 굴러서 눅눅한 바위에 떨어졌다.

[생지지자도 강호의 험난함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양의신공을 익혔다 해도 아직 부족한 화후로는 소천성(小天星)의 중수법을 견뎌낼 수가 없네. 무림에선 항상 가까이 있는 자를 경계해야하거늘 다음에 태어나거든 그때는 좀더 현명해지도록 하게.]

현천록은 잠시 충격을 받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구장심조를 익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데 다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진양진인의 말은 그가 신화병기점에 있을 때 여러 무림인들로에게 듣곤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소천성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현천록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진양진인이 그토록 공을 들여 자기를 가르치고 이제와서는 또 왜 해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백 수십 살이나 먹은 신선같은 노인이 하는 짓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안아서 자기가 누웠었던 편평한 장소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자네한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아네. 하지만 노도는 아직 죽을 수 없고 자네는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사람이네. 오히려 자네같은 사람이 마음을 한 번 잘못 먹고 나면 세상을 크게 해치지. 어느 누구도 자네를 막을 수 없을 테니 그 위험이야 오히려 더 크지 않겠나?]

현천록은 겨우 그런 이유로 자기를 해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기를 해치고 나서 진양진인은 일곱째인 장군묵의 손아귀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도 궁금했다.

진양진인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뭘 궁금하게 여겼는지 대충은 짐작하네. 자네를 죽게 만드는 마당에 노도가 뭘 숨기겠는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주겠네. 듣고 말고는 자네 문제일세.]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노도는... 먼곳에서 왔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가고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네. 바로 옥황신전(玉皇神殿)일세.]

현천록은 자기의 얼굴이 진흙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진양진인은 말을 하면서도 특이한 수법으로 현천록의 얼굴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노도가 옥황빙서(玉皇聘書)를 전달하는 옥황사자(玉皇使者)가 된 건 칠십 년 전이네. 그 이후 삼년 마다 한 장씩의 옥황빙서를 각각 주인을 찾아서 전달했네.]

진양진인은 자기의 수염을 떼서 현천록의 얼굴에 심었다.

말 그대로 진흙처럼 물러진 그의 얼굴에 수염을 하나하나 심은 것이다.

[옥황사자가 되어 옥황신전의 무공을 익히고 노도는 새로 눈을 떴었지. 하늘 밖에 존재하는 진정한 하늘에 대해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머리카락마저 하얗게 만들었다.

[노도를 노리는 자들은 생각밖에 많다네. 특히 철인련맹은 유일하게 옥황신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곳이지. 그들은 옥황신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며 항상 노도를 죽이려고 했네. 포두화상 그 도우가 철인련맹에 속해있네. 아마도 내가 옥황빙서를 가졌다는 소문을 낸 것도 철인련맹일 것일세.]

그가 중얼거리며 현천록을 주물럭거리는 동안에 현천록의 모습은 완전히 진양진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피부는 계수나무 껍질처럼 검버섯이 피었고 골격마저 노인의 골격으로 바뀌어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하지만 여러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첫째는 왜 창허진인이 나를 쫓는가 하는 문제고, 둘째는 자네같은 기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나는가 하는 거네. 세상에는 조금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지 귀재(鬼才)는 오히려 해롭다네. 수십년 동안 고수들을 만나고 옥황신전으로 초빙하는 사자의 역할을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모두가 이해될 만한 사람들이었지. 하여간 자네는 죽게 되겠지만 내가 만난 최고의 인재라는 의미에서 옥황빙서를 주겠네. 이걸로 삼년 안에는 어느 누구도 옥황빙서를 얻지 못하게 됐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여벌의 옷을 현천록에게 입혔다.

품에는 옥황빙서와 현천록의 소지품을 넣어주고 옷은 흐르는 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후에 몇 개의 혈도를 찍었다.

현천록은 그 혈도들이 아혈(啞穴)과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누르기만 하면 아무 소리도 입밖에 내지 못하는 혈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퍼퍼퍽!

가슴과 배에 세 번의 장력이 떨어졌다.

기혈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소천성의 장력이었지만 그다지 강하게 친 것 같지는 않았다.

 

현천록은 비로소 진양진인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확연하게 깨달았다.

진짜 진양진인은 가버렸지만 가짜 진양진인은 남아있다.

양의신공과 태극혜검까지 익히고 있는 가짜 진양진인이.

진양진인은 아마도 이런 상태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천록이 어설픈 흉내라도 내다가 일곱째 장군묵에게 죽으면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가르친 건 자기의 내공을 촉발시킬 수 있는 조력자로 만들기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태극혜검을 가르치게 된 것은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익히는데 놀라운 소질을 보였기에 내친 김에 더 완벽하게 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의신공을 그처럼 빠르게 터득하는데 태극혜검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현천록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방법을 썼더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런 할말이 없다.

내기는 이겨야 주장할 수 있으니까.

현천록은 몸을 일으켰다.

늙은이로 변해있었지만 속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마를 만져보니 천잠사로 만든 머리띠가 그대로 있다.

용의주도한 진양진인도 긴장했던지 머리띠를 벗기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초상감각을 발휘해 현천록은 물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있는 자기의 옷을 다시 찾았다.

진양진인은 벌써 멀리 갔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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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이매봉은 일백수십 살씩이나 먹은 노인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징그럽게 느껴졌다.

꼭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본 것같은 기분이다.

정나미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왜 왔는지를 물었다.

노삼이 말했다.

[옥황빙서를 얻을 목적으로 왔다. 설마 너도 옥황빙서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매봉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세상은 옥황빙서로 완전히 뒤집어졌군요. 은거했던 사람들도 다시 뛰쳐나와서 죽기나 하고...]

노이가 말했다.

[우리는 다르다. 다른 놈들은 진양진인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그에게서 옥황빙서를 빼앗을 것이다.]

이매봉은 말을 돌렸다.

[한데 당신들은 형제예요? 어쩜 그렇게 닮았죠?]

노대는 코웃음을 쳤고 노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는 사람보는 눈이 있구나. 우리는 형제는 아니지만 꼭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땐 정말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었다. 우리 사부도 우리와 꼭 닮았었지.]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핏줄도 섞이지 않았는데 사부나 제자들이 모두 닮다니... 믿을 수 없군요.]

노이가 말했다.

[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는 자기와 닮은 우리를 찾기 위해 꽤 고생을 했으니까.]

이매봉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신들 사부는 왜 그렇게 했죠?]

노삼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 버릇없는 것아! 지금까지 잘 대답했더니 별 시시콜콜한 걸 다 묻는구나!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우리가 언제 너를 죽이겠느냐?]

이매봉은 슬그머니 웃었다.

바보는 바보라도 뭔가 규칙이 있는 바보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이매봉이 간절하게 말하자 노삼이 뿌르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키우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자기와 얼굴이라도 닮아야 정도 빨리 들고 사랑스러운 게 당연하지. 제자들도 사부와 얼굴이 닮았으니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쉬운 노릇이고.]

[호호호호!]

이매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너무 단순한 이유다.

벼란간 노삼이 이매봉에게 덥쳐들면서 소리쳤다.

[! 그럼 이만 죽어라!]

노삼의 손가락이 갈구리처럼 변해서 이매봉의 목을 죄여왔다.

이매봉은 바람처럼 물러서면서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한가지만 더! 한가지만 더 물을께요.]

[에잇!]

노삼이 손을 중간에서 거둬들이고 화난다는 듯이 발로 눈을 걷어찼다.

노대가 얼굴을 굳히고 부채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매봉은 재빨리 말했다.

[이 근처에 동굴이 있다고 하셨죠? 그 동굴은 어디에 있죠?]

노이가 말했다.

[동쪽에 있는 절벽 중간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진양진인의 냄새가 동쪽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노이와 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눈을 번쩍 치켜뜨고 물었다.

[너는 진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이냐?]

이매봉이 말했다.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향기 같기도 한 냄새가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걸요.]

이매봉은 소매 속에서 일매향이 들어있는 작은 병의 마개를 살짝 열어서 동쪽으로 은밀히 쏘았다.

이매봉이 동쪽을 등지고 섰기 때문에 일매향 병이 날아가는 모습은 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노대!]

노삼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노대는 벌써 동쪽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이매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애와 스무고개 놀이를 지겹게 하고난 것같네.]

한데, 이매봉의 앞으로 새까만 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노이가 검으로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이매봉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두 자루의 장검이 쥐어지며 노이의 검을 튕겨냈다.

타탕!

치이익!

노이의 검에 닿은 장검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매봉의 왼쪽 소매자락이 조금 베어지며 색이 바랬다.

역한 냄새가 풍긴다.

노이의 검은 독검(毒劒)이다.

노이는 이미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아무소리없이 검으로 순식간에 서른 여섯 번을 베어왔다.

눈앞이 온통 노이의 독검으로 시꺼멓게 되는 것 같았다.

이매봉은 서른 다섯 번을 막아내고 서른 여섯 번째는 검의 힘이 말린 듯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아앗!]

노이가 독검을 거두고 동쪽 절벽가에 우뚝 섰다.

이매봉이 푸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이는 노대를 부르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매봉은 벼랑 위로 뛰어올라왔다.

돌아보니 그녀의 겉옷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있다.

이매봉이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엉망이야! 젠장! 앞으론 금선탈각(金蟬脫殼)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도무지 숙녀가 쓸 수법이 아니야.]

경장 차림이 된 이매봉은 동쪽 절벽을 천천히 내려가며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코가 개보다 더 예민한 노대는 이매봉이 던진 일매향 병을 찾아갔을 것이다.

먼저 동굴을 찾아야 한다.

현천록을 진양진인인줄 알고 뒤쫓는 귀찮은 늙은이들과 또 마주친다는 건 일단은 짜증나는 일이다.

만나고 나면 조금 그 상황을 즐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x x x

 

[내가 얼마나 잤는가?]

진양진인은 가만히 눈을 뜨고 물었다.

현천록은 지하를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를 두 마리 건져올려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시간 정도 됐을겁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자네의 양의신공으로 내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네.]

현천록은 누워있는 진양진인의 단중에 오른손 장심을 붙였다.

그리고 진양진인이 말하는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현천록의 오른손을 통해서 순수한 선천지기가 진양진인의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양진인은 배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그 기운을 끌어들여 기해혈을 바로잡았다.

이각 정도 걸려서 기해혈을 바로 잡고 났을 때 현천록이 맥이 팍 풀려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직은 공력이 부족해서 그렇네. 하지만 아주 큰 일을 했네. 허허허! 기해혈을 바로 잡자면 스무날을 걸릴 것이라 생각했건만... 양의신공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게.]

현천록이 물었다.

[도장이나 내가 똑같은 양의신공을 익혔는데도 왜 내 공력이 바위를 뚫고 가는 것 처럼 힘들게 도장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길이 뒤집어졌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 근본이 바로 잡혔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자네가 도와주면 금방 바로 잡을 수도 있네.]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사이에 진양진인도 구슬 땀을 흘리며 자기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현천록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아예 진기요상(眞氣療傷)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해혈이 회복된 이상 더디긴 해도 조금씩 노력하면 공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더구나 현천록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선천지기를 일부 받아들였으니 내력이 더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진양진인은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자기가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천록은 힘을 보충하고나서 다시 진양진인을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그 힘이 배는 강했다.

진양진인은 자기의 회복된 힘과 현천록의 힘을 합하여 단숨에 열 일곱 개의 대혈을 회복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써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는 삼백육십여 혈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현천록도 진양진인도 완전히 땀으로 흠벅 젖어버렸다.

진양진인은 온 몸이 솜뭉치처럼 축 쳐져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현천록은 완전히 탈진했지만 오히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몸 안은 텅비어버린 것 같은 데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기운들은 모공으로 들어와 길을 찾고 모여드는 것처럼 현천록의 기해혈로 응집되었다.

현천록은 기해혈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전신이 힘으로 가득찬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가득 든 것 같기도 하며 불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도 맑아지고 피로는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천록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무엇이든지 간에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리 춤에 찌르고 있던 백금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도 백금퉁소에 새겨진 용이 희미하게 빛난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퉁소를 불었다.

맑고 그윽한 음율이 암흑의 동굴 속으로 퍼져나갔다.

구슬픈 가락의 애상곡이었지만 슬픈 느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만 가득했다.

애상곡은 세 번을 연거푸 연주되었지만 그때마다 그 느낌이 달랐다.

처음에는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이었고 두 번째는 웅장하고 엄숙했으며 세 번째는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세 번의 연주 모두 원래의 애상곡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마치 아기를 달려는 듯하군.]

세 번째 애상곡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을 차린 진양진인이 말했다.

[애상곡은 언제 배웠는가?]

[도장이 부는 걸 보고 흉내를 내봤을 뿐입니다.]

현천록은 퉁소에서 입을 떼면서 말했다.

진양진인이 실소했다.

[음율을 단번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당년의 왕산악이라 해도 마찬가질 걸세.]

진양진인의 음성은 이제 기운이 있었다.

현천록은 그 음성 만으로 이제 그가 몸을 다 치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현천록이 말했다.

[애상곡 외에 다른 곡은 없습니까?]

진양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배울 수 있다면 한 번 배워보게. 아예 이소곡(離騷曲)이나 광릉산(廣陵散)을 가르쳐줌세.]

진양진인은 말을 마치자 마자 자기의 퉁소를 꺼내서 불었다.

이소곡이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진양진인의 곡이 끝나자마자 퉁소에 입을 대었다.

진양진인이 부른 곡과 똑같은 곡이 흘러나왔다.

완급과 호흡마저 완전히 동일했다.

진양진인은 한방 맞은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진양진인은 이소곡을 부르며 음이 아주 높은 세 소절은 빼고 부르지 않았다.

현천록이 그전부터 이소곡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천록은 완전히 자기와 똑같이 연주하고 있었다.

아니, 음이 오히려 더 고아한 것 같다.

현천록의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다시 퉁소를 입에 대고 광릉산을 불었다.

광릉산은 위진(魏晋)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분인 완적(阮籍)이 만든 것으로 그 이후에 곡이 끊어 졌다고 알려져 있다.

진양진인은 젊었을 때 남쪽에 갔다가 어느 낡은 도관의 천장에 광릉산의 악보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배웠다.

광릉산이야말로 당금의 세상에서는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진양진인이었다.

광릉산의 곡은 길기도 길거니와 온갖 현란한 기교와 은밀한 수법이 들어있어 십년을 배운다 해도 이루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그가 지금의 중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광릉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자기가 연주하지 않은 광릉산을 듣는 홍복을 누리게 되었다.

현천록은 너무 자연스럽게 누에가 실을 뽑는 것처럼 퉁소로 광릉산을 뽑아내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자기의 퉁소를 꺾어버렸다.

파각!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 못됐지만 퉁소로는 천하제일을 자부했더니... 허허... 말짱 헛된 오만이었구나.]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곡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광릉산은 아주 좋은 곡이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마 다시는 듣지 못할 걸세. 자네같은 사람이 또 있기도 어렵고 노도는 결코 연주하지 않을 테니까. 광릉산을 알아주는 사람은 또 한 분이 있네만 이제 그분도 더 듣지는 못하게 돼군.]

진양진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자넨 귀재(鬼才)네 귀재. 내가 평생 처음 만나는 기재일세.]

번쩍!

진양진인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현천록의 목에 닿아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든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금석을 무베듯 하던 시퍼런 장검이 목을 시리게 한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같은 기재가 무공을 익힌다면 십 년 래에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자네 발밑에 무릎을 꿇어야 할 걸세. 아마 다른 고수들이 자넬 발견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걸세. 죽여서 싹을 제거하든가 제자로 키워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하겠지.]

현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장께선 어느 쪽입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느 쪽은 어느 쪽이겠나? 그냥 자네와 난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일세. ! 이 검은 줄 수 없으니 그 퉁소로 따라하게.]

진양진인은 훌쩍 물러나며 검을 춤을 추듯이 휘둘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현천록의 눈에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 질 뿐이었다.

착각!

삽시간에 검광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 되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다 보았으면 어디 한 번 해보게.]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두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직 제 느낌으로는 확연하게 다 잡지 못했으니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싸늘하게 웃고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검광이 순식간에 눈을 부시게 한다.

현천록은 눈을 감고 진양진인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다.

처음보다 훨씬 확연하게 진양진인이 느껴졌다.

베고 찌르고, 걷는가 하면 치고 찍는 모두 동작이 하나의 선을 이룬 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 두가지의 수법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한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알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이제 하나 하나 따로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현천록의 말대로 열 두가지 동작을 따로 따로 펼쳐보였다.

현천록은 느낀 대로 머리 속에서 열 두 개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머리와 꼬리가 없었다.

어떤 것이든 머리가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꼬리가 될 수 있었다.

현천록은 머리 속으로 곰곰히 더듬어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대단한 검법이군요. 이런 검법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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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휘익!

노대가 바위를 날아 넘어 이매봉 앞에 내려섰다.

[! 숨을 죽인다고 냄새까지 없앨 수 있을 줄 알았나?]

[노대! 진양이오?]

노이와 노삼이 뒤이어 날아왔다.

이매봉은 그들이 하는 짓이 총명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찾던 사람이나 잘 찾아봐요. 난 웬 놈도 아니고 도사도 아니니 나를 찾진 않았을 거잖아요.]

노삼이 말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넌 우리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니 죽어야겠다.]

이매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죽어야 하는가요? 난 몰랐어요. 미리 알았으면 귀를 막고 듣지 않는건데...]

노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우릴 놀릴 셈이냐? 어린 계집애가 앙큼하구나.]

이매봉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가요?]

노대가 말했다.

[이른 아침에 산정에 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흥! 이 근처의 눈 위에 네 발자국이 없다는 건 뭘 말하느냐? 적어도 설상비(雪上飛)보다 뛰어난 경신술을 쓸 줄 안다는 얘긴데 순진한 척 시치미를 떼려하다니.]

이매봉이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거참! 하는 수 없군요. 적당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들이겠죠?]

노삼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요즘 나 다니는 강호의 시러배 잡놈들과는 다르다.]

[호호호호!]

이매봉이 깔깔 웃고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확실히 좀 달라 보여요.]

노삼이 칭찬을 듣고 우쭐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여기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노대가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주마. 시체도 손상시키지 않겠다.]

노삼이 말했다.

[만약 말하지 않으면 먼저 두 눈을 파내고 배에다 구멍을 낸 후에 사지를 자르고 송곳을 귀속에 넣어 두개골을 휘저어 죽이겠다.]

노이가 말했다.

[거짓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휴~ 무서워라.]

이매봉은 정말 겁내는 것처럼 몸을 움추렸다.

노대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이매봉이 울먹울먹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왕!]

노삼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노대! 울어버리는군요. 우는 아이는 어떻게 달래야하죠? 당장 죽여버릴까요? ]

노이가 말했다.

[우는 아이는 엉덩이를 까서 볼기짝을 두들겨 주는 법이야. 나도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그렇게 맞았네.]

이매봉이 울면서 말했다.

[난 이제 죽게 되는군요. 흑흑! 너무 슬퍼요. 얼마 살지도 못했는데 죽게 되다니...흑흑! 이건 너무 억울해요.]

노삼이 말했다.

[노대, 이 아이가 억울하다는 군요.]

노대가 말했다.

[죽을 땐 누구나 다 억울한 법이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죽인 놈들 중에선 억울하다고 한 놈이 하나도 없었는데...]

노삼은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마라! 그렇게 슬퍼할 것 없다. 노부가 직접 죽이면 너도 다른 놈들처럼 억울하지 않고 잘 죽을거다.]

이매봉이 말했다.

[왜 억울하지 않겠어요? 엉엉! 난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당신들 말 다 들었으면 죽어야 된다고 해놓고 다 듣지도 못한 나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요. 엉엉, 다 들었으면 죽어도 억울하지 않는건데... 엉엉.]

노삼이 아주 당황했다.

[그건... ... 노부가 그렇게 말했었군. 으음... 노부 일백사십 평생에 처음하는 실수다.]

노대가 소리쳤다.

[노삼! 입 다물어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이 문제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

노삼은 노대의 살벌한 눈초리를 대하고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노대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이매봉은 눈물을 닦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 아비나 사부의 이름은 뭐냐?]

이매봉이 말했다.

[그 또한 아랫사람이 허락없이 함부로 들먹일 수 있는 함자가 못되는군요.]

[방자한 것!]

노대는 섭선을 모아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순간 섭선의 끝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바람소리가 났다.

쉬익!

이매봉은 깜짝 놀랐다.

(무형강기(無形罡氣)!)

몸속의 내공을 뭉쳐서 밖으로 발출하되 그것이 형체는 없으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하고 단단하다면 무형강기라고 부른다.

무형강기를 발할 수 있는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몇 명이 나올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드물다.

피하지 않으면 금강불괴라 해도 온전하기가 힘들다.

이매봉은 즉시 옆으로 두걸음 비켜섰다.

한데,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서 번득하더니 어느새엔가 노삼이 그의 앞을 막아서 있었다.

!

무형강기는 노삼의 가슴에 격중했다.

[!]

노삼이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어?]

노삼이 말했다.

[노대! 생각해보니 이 아이가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소. 게다가 이 아이가 억울하면 우리가 우리 얼굴에 똥칠한 꼴이 되지 않겠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듣고 싶은 말은 다 듣게해줍시다.]

노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삼 말이 옳은 것 같소. 노대 그렇게 합시다. 그래야 죽는 저 아이는 편안하게 죽을 거고 우리도 신용을 지키지 않겠소?]

노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희 둘은 완전한 바보 멍청이들이야. 그런다고 죽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나?]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럴 것 같아요.]

노이와 노삼이 그것보라는 듯이 노대를 본다.

노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우린 여기에 있지만 먼곳에서 왔다. 이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하러 온게 아니란 걸 명심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데요?]

노대가 말했다.

[바보짓을 하려면 천산(天山)도 족하지. 그 먼곳에서 여기까지 와서 바보짓을 할 건 뭐란 말이냐?]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정말 바보짓을 한 거요? 억울함을 풀어주고 신용을 지켜 명예를 보전하려 했을 뿐인데...]

이매봉이 맞장구를 쳤다.

[옳아요!]

노대가 이매봉을 흘겨보았다.

이매봉은 슬그머니 노삼의 등뒤에 숨었다.

그녀는 노삼의 몸이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무형강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금강불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대가 말했다.

[강호가 험난 한 건 이래서 험난하다. 노인을 조심해야 하고, 어린아이를 조심해야 하고, 특히 이런 젊은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얼굴이 예쁘면 더욱 조심해야되지.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강호로 잘 나오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당신은 예쁜 여자한테 속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예쁜 여자를 나쁘게 말하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데.]

노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대는 절대로 남에게 속지 않는다. 노대도 우리같은 바본 줄 알면 안돼.]

노삼이 말했다.

[맞다. 노대는 바보가 아니지. 우리와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정말 똑똑해. 물론 우리한테 화를 잘 내고 짜증부리지만.]

이매봉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세 사람이 작당해서 나 하나를 괴롭히려 하는군요. 남자가 치사하지도 않아요? 비겁하게 여자 하나를 괴롭히려 하다니. !]

노삼이 머리를 긁으면 어쩔 줄 몰라했다.

[정말 야단났군. 이건 어른이 아이를 괴롭한다는 말에도 해당되고 남자가 여자를 괴롭힌다는 말에도 해당되는군. 역시 노대말씀이 옳아. 여자를 상대하는 건 머리가 아파.]

이매봉이 다그쳐 물었다.

[말해봐요. 당신들은 누구죠? 난 당신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소릴 못들었어요.]

노이가 이매봉을 상대하기로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린 천산삼로(天山三老). 좋은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쁜 사람이랄 수도 없다.]

이매봉은 생각했다.

(천산삼로라? 덜 떨어진 것 같은 이들이 천산삼로라구? 세상에나... 멀쩡한 사람들은 다 뭘하고 이 사람들이 천산삼로야? 어쩐지 무형강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고 했더니...)

천산삼로는 오래 전부터 천산에 출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이름이 알려져 왔다.

천산일대의 녹림을 장악하고 있을 뿐아니라 개개인의 무공이 아주 특이하고 고강하여 천산에 갈 때는 항상 그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해진다.

중원의 유명한 고수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낭패를 보거나 살해당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구십년 전쯤에 무당의 탁월한 고수인 진양진인이 그들의 우두머리와 싸워 이겼다는 말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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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초상감각에 아주 빨리 눈 뜨는 것을 보고 충분히 가르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천록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버렸다.

양의신공의 구결을 진양진인이 풀어주기 시작하자마자 즉시 그 의미를 해득해버린 것이다.

양의신공같은 상승무공은 연공도 연공이지만 깨달음이 주가 된다.

특히 양의신공은 그 속에 여러 가지 무공의 비결을 담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양의신공에는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사용하는 양심공이 포함되어 있다.

무당에서 원로들 중에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양의신공 속에 있는 양심공의 구결이나 그 밖의 묘용들을 깨달아 익히는 자 또한 극히 드물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완벽하게 암송해낼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이끌어내 양의신공의 바탕으로 만드는데는 진양진인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자넨... 정말 신비하군. 마치 물을 담는 그릇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넨 양의신공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네.]

현천록은 내공을 쌓기 위해서 흔히 하는 토납(吐納)과 축기(蓄氣)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보통 내공을 닦을 때는 천지의 기운을 몸속에 받아들여 쌓고 키워 나가며 더욱 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처음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지기를 이끌어내게 되면 그 순수함을 바탕으로 크지는 않아도 아주 뛰어난 내공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진양진인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해득하면서 선천지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보는 그의 감회는 아주 특별했다.

양의신공은 도가의 무공이니 선천지기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진양진인은 어쩌면 양의신공을 다른 무공을 배운 후에 익혔기 때문에 선천지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천록이야 말로 진짜 양의신공을 익히게 되는 것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진양진인은 양의신공의 구결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양의신공은 이미 현천록의 무공이 되어 있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내력을 손으로 모아서 바위를 쳐보게.]

현천록의 손이 바위에 닿자 밀가루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

가볍게 돌가루가 날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정도면 얼마나 배운거죠?]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주 잘했네. 아마도 전설 속의 그 창허진인도 자네보다는 못했을걸세. 세상에 기재는 따로 있었네 그려. 그 정도면 다른 사람의 삼십년 공력에 못지않네.]

현천록은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이 무슨 생각에서 무당파의 최고 신공인 양의신공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기를 몸 속에 지니게 됐다는 사실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이제 자네가 내 몸에 양의신공을 조금 주입해서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현기와 명문, 좌협, 천중, 선기, 협곡이네. 아니아니! 자네는 혈도를 아직 모르겠군. 총명하니 금방 배우게 될걸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우리가 내기했다는 걸 잊기라도 한 것 같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잊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자네가 지게 될걸세. 일단 내말에 따르기로 했으니 내가 시키는대로 따르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이 자기의 몸을 일일이 짚어가며 혈도의 정확한 위치와 묘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들었다.

[이제 자네 손으로 직접 자네 혈도들을 확인해보게.]

진양진인이 아주 지친 듯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이 마치 거미줄에 휘감긴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손으로 혈도를 확인해나가는 곳마다 온 몸을 거미줄같은 것이 휘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삼백육십개의 혈도를 다 확인하고 났을 때는 마치 몸밖에서 몸을 보는 것처럼 자기의 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미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끊어지기도 하고 신음도 섞여있다.

장군묵의 손에 중상을 입고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전수하느라 지칠때로 지쳐버린 진양진인의 숨소리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을 다시 연습하면서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무공을 배우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X X X

 

하얀 눈으로 뒤덮힌 자금산에 태양이 떠올랐다.

눈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겠군. 겨울에도 나다니려면 몽면을 하든지 해야지 원.]

이매봉은 투덜거리면서 황금빛 일출을 맞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코를 끙끙거리면서 눈밭을 헤맸지만 결국 희미해져버린 현천록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매봉은 손수건을 깔고 앉았지만 엉덩이가 몹시 시려왔다.

어지간히 지치기도 지쳤다.

[어휴~ 그녀석!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정도로 생각했더니 나한테서 도망을 쳐? 어디 찾기만 해봐라 그냥...]

이매봉은 눈앞에 현천록이 있으면 치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햇살이 이렇게 찬란한데 주먹질을 해대는 건 어울리지 않을 성 싶어서다.

엉덩이는 찬바위를 닮아가며 싸늘하지만 얼굴은 햇빛을 받아 따스하다.

반이나마 온화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세상사는 낙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이매봉의 드문 감상은 세 사람이 산정으로 다가오면서 끝나고 말았다.

세사람은 흑의(黑衣)를 입었는데 눈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말 그대로 검은 점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이매봉은 마주쳐봤자 귀찮은 일만 있을 것 같아 적당한 바위를 찾아 몸을 숨겼다.

세 사람 모두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상이나 눈빛이 모두 바르게 살아온 사람같지는 않다.

친형제지간인지 모두 비슷한 얼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검을 들었고, 또 한사람은 한겨울인데도 합죽선(合竹扇)을 들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손안에서 호두 두 알을 굴리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호두를 굴리는 사람이 말했다.

[노대(老大)! 진양진인 그 늙은이가 머리를 좀 쓴 것 같소. 헤헤... 물론 노대에겐 못미치겠지만 말이오.]

합죽선을 든 사람이 어깨를 한 번 우쭐하며 웃는다.

검을 든 사람이 말했다.

[노대! 노삼(老三) 말이 맞소. 그 늙은이가 함정을 파놨을 거라는 짐작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졌소. 겁없이 날뛰던 놈들은 현무호에서 모조리 죽었소.]

촤락!

합죽선을 든 사람이 한 번 펼쳐서 얼굴을 부치며 말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노이(老二)! 너도 한번 생각해봐라. 진양진인과 포두화상은 절친하다고는 못해도 옛날부터 친구지간이었지. 한데 뜬금없이 현무호에서 만나 싸운다는 게 말이나 되나?]

호두알을 굴리는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진양진인이 옥황빙서를 가졌다면 포두화상이 싸움을 걸 수도 있지 않겠소?]

노대가 말했다.

[옥황빙서? ! 다들 미쳐서 날뛰는 옥황빙서 말이지? 진양진인이 가졌다고 들었는데 글쎄... 현무호에서는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괴물같은 놈이 나왔지. 모두 그 괴물같은 놈에게 옥황빙서를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는데 어떻게 됐나? 모두 죽었어. 그 괴물같은 작자는 옥황빙서에 대해서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노이가 말했다.

[그럼 노대는...]

노대가 말했다.

[잘 생각해야돼. 괴물같은 놈과 진양진인을 혼동하면 절대로 안되지. 진양진인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무공도 뛰어나지만 항상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이용하곤하지. 철저하게 계산적인 머리를 지닌 사람이지. 괴물같은 놈도 진양진인에게 이용당했을 거야.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가지고 있을거야. 우린 무조건 진양진인만 찾아서 죽이면 돼.]

노삼이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노대는 진양진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그려.]

노대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진양진인에게 패했던 걸 비웃는거냐?]

노삼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난 노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오. 석년에 노대가 그와 싸워 이기지 못한 것도 실상 노대의 삼음장(三陰掌)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소? 지금 노대는 삼음장을 대성했으니 진양진인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확실하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 알랑방귀 따윈 집어치워라. 진양진인이 왜 진양진인이겠나? 소양지(小陽指)의 공력을 지니고 있는데 내 삼음장인들 무슨 위세를 부릴까? 하지만 흥! 내겐 비장의 수법이 있지.]

그때 노이가 불쑥 물었다.

[노대, 진양진인은 누구한테서 옥황빙서를 얻었소? 그리고 대체 옥황빙서가 뭐요?]

노대는 한심하다는 듯이 노이를 보고 나서 말했다.

[옥황빙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옥황빙서에는 어떤 곳을 가리키는 지도가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천상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옥황빙서를 얻는다면 첫째는 무공을 익히고 둘째는 지도에 적힌 곳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다.]

노이가 물었다.

[옥황빙서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 사부님께 얼핏 들은 적이 있소. 대체 옥황빙서는 얼마나 오래된 것이오?]

노대가 말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없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이 됐는지도 모르지.]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만약 옥황빙서를 얻게 된다면... 무공은 함께 익힐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곳을 찾아가는 것도 함께 할 수 있소? 혹시 한 사람만 갈 수 있다면...]

노대가 차갑게 쏘아부쳤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 쓸데없는 걱정말고 진양진인이나 찾아봐! 틀림없이 자금산 중에 있을 테니까.]

노삼이 입이 쑥 들어갔다.

노대가 말했다.

[현무호에서 자금산 쪽으로 묘한 냄새가 이어졌단 말이야.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냄새같기도 한 냄새지.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잘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묘한 냄새야. 어쩌면 옥황빙서에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고 진양진인이 가진 다른 물건 냄샐 수도 있지. 어쨌든 이 근처가 틀림없어.]

이매봉은 노대라는 자가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늙은 생강이네. 우리가 쓰는 일매향(逸梅香)은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릴 수도 없는데... 완전 개코다! 한데 일매향은 현천록한테서 나는 냄새잖아. 진양진인이라니 당신들은 짚어도 한 참 잘못짚었어.)

이매봉은 바위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나도 못찾은 녀석 당신들이 찾아주면 고맙지.]

그때 노이가 말했다.

[노대! 산 동쪽으로 가면 동굴이 하나 있소. 절벽 중간에 있는데 혹시 그곳에 숨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갑자기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웬놈이냐!]

이매봉은 그 소리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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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4)

 

 

 

현무호에 왔던 이매봉은 혀를 찼다.

[! 한 발 늦었어.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겠는걸.]

근처 바위 위에 서있던 상관숭이 시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자는 이십년 전에 좌검우도(左劒右刀)로 이름을 날렸던 관부의 고수 황보전호(皇甫戰虎)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은거했다질 않았나?]

상관숭이 말했다.

[속하가 살펴본 스물일곱은 모두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뭣 때문에 다시 강호에 나와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옥황빙서 때문이야. 죽은 놈들이 외치는 소리도 못 들었어? 멀리까지 들리던데.]

상관숭이 이매봉 앞에 날아내리며 말했다.

[옥황빙서는 전설입니다. 아직 누구도 그걸 가졌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곱째라는 자가 옥황빙서라는 걸 가졌겠군. 그러니까 그처럼 대단한 척하겠지.]

이매봉이 말했다.

[그 괴물을 잡아놓고 한 번 확인해보자구. 어때 너하고 한 번 붙어볼 만 하겠어?]

상관숭이 머리를 저었다.

[이백 초를 넘기지 못하고 찢어질 것입니다. 그자는 무공에 있어서 이미 일대종사(一代宗師)입니다. 어느 누구도 무공으로는 그의 앞에서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살며시 접근해서 실험만 해보면 되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고 말 걸?]

상관숭이 말했다.

[금은동철석의 오보(五寶)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매봉이 말했다.

[한 녀석이 사기치길래 그냥 줘버렸어. 한 삼년 있으면 다시 구하게 되겠지.]

상관숭이 아주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매봉이 활달하게 말했다.

[이봐! 너희들 오신검(五神劍)은 지금도 충분히 강해. 그리고 삼년 뒤에 다시 오보가 준비될 테니 서두르지마!]

[알겠습니다.]

상관숭이 머리를 숙였다.

금은동철석, 이 다섯 가지의 정화는 상관숭이 속해있는 오신검(五神劍)의 검을 다시 녹여 보강할 중요한 재료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할 검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검이 된다.

상관숭은 머리를 숙였지만 지난 삼년을 기다렸는데 다시 삼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이매봉이 말했다.

[오보는 그 녀석을 찾는 중요한 단서다. 우리 물건들에는 특이한 향이 들어있다는 걸 녀석은 모르고 있어.]

상관숭이 불쑥 말했다.

[그를 좋아하는군요.]

순간 이매봉의 손이 춤을 추었다.

짜짜짜자작!

상관숭의 양쪽 뺨에 불이 튀었다.

그리고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턱을 걷어찼다.

상관숭은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 까뒤집어진 후에 눈 위에 떨어졌다.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머리를 밟았다.

상관숭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매봉이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숭! 본회주를 청루의 기녀쯤으로 아느냐?]

상관숭은 머리를 들래야 들 수도 없었다.

[속하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이매봉이 소리쳤다.

[죽여 달라는 소리 대신 용서하라고?]

[죽여...주십시오.]

상관숭이 힘없이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이매봉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살아나긴 틀렸다 싶었다.

이매봉은, 상관숭이 아는 이매봉은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망설이거나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이매봉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들이 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거칠 것 없이 행동하고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매봉이었다.

상관숭도 그녀의 입에서 무시무시하고도 중대한 결정들이 장난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숱하게 봤었다.

이매봉이 말했다.

[본 회주를 빈정거리거나 억누르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 상관숭! 여기서 머리를 박살내고 싶지만 바꿔 신을 신이 없어 그냥 둔다. 하지만 즉시 돌아가라. 돌아가서 형극(荊棘)의 방에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

형극의 방...

상관숭은 앞이 캄캄해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간다면 죽어나오거나 미쳐 나오는 두가지 경우 밖에 없다.

약한 자는 모두 죽었고 강한 자는 미쳤다.

하지만 명이 떨어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 회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상관숭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매봉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관숭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늦는다면 그 뒤에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모른다.

회주 이매봉은 여자인 것이다.

여자의 앙심은 처음에 풀어놓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보복을 당한다.

남자 보기를 소 닭 보듯 하는 이매봉에게 실언을 했으니 처음부터 그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면,

상관숭은 오보가 새로 완성되기 전에 자기는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매봉은 다정다감한 듯 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여자다.

다정다감함에 잠시 경계를 늦추었던 것이 실수다.

더구나, 제멋대로 인듯하면서도 거대한 조직을 조금의 실수도 없이 이끌고 있다.

이매봉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상관숭이 달려가는 방향은 서쪽이다.

같은 시간 이매봉은 냄새를 쫓아서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매봉은 자금산을 향해서 달려갔다.

(현천록 그 녀석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현무호에 일어났던 혈풍도 녀석 때문인지도 몰라. 재미난 일이야. 녀석을 만나고부터 계속 이상한 일들이 생기니... 게다가 옥황빙서라니 후훗!)

머릿속에 현천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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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3)

 

 

상청관(上靑館) 연무장은 일백년 래 가장 많은 제자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그 흔한 잔기침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당한 창허진인이 이대제자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상투는 풀어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취조하겠다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물었다.

[창허야!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함은 너를 해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장차 네가 이 무당의 천년 위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너는 오직 진실로 이 사부의 물음에 답해주기 바란다.]

광화도장의 말은 누가 들어도 가슴 속에 뭔가 꽉 힌 것이 있는 사람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창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체념하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부! 말씀하십시오. 사부께서 물으시는 것이라면 제자 창허는 어떤 것이든 다 대답하겠습니다.]

광화도장은 격동하는 듯했고 운집한 제자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가 본파의 제자가 된 지 이제 칠년이다. 그 동안 나와 네 사숙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무당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할 것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 부족합니다.]

광화도장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 자질도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열성으로 배워 나와 네 사숙들을 일찍이 능가했으니 아마도 무공으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너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미 본파의 시조이신 삼봉진인에 못지않으니...]

원로들의 머리가 애석한 듯 숙여진다.

무당 최고의 인재가 애꿎은 구설수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소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게 대한 두 가지의 소문 중 어느 것도 이 사부는 믿기 어렵다. 너는 말해주겠느냐?]

창허가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어떤 소문입니까?]

광화도장이 말했다.

[첫째는 네가 신선이라는 소문이다.]

모여든 제자들이 모두 놀란다.

사문에 반도가 생겨 처단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왔는데 아주 엉뚱한 소리였던 것이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칠년 전에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월이 너를 잊어버린 것처럼 너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구나. 혹시 예전에 주안과(朱顔果) 같은 과일을 먹은 적이라도 있느냐?]

창허가 말했다.

[주안과를 먹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 사부께서 지난 칠년동안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허가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촤르르릉! 소리가 나면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졌다.

옆에 있던 이대제자들이 놀라며 다시 결박하려 했지만 광화도장이 저지시켰다.

창허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에게 검을 빌려주시게 하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다시 술렁거렸다.

그의 손에 검이 들어간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광화도장이 자기의 검을 뽑아서 창허에게 건네주었다.

옆에서 원로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만류했지만 광화도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들 하라! 창허가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다.]

창허는 두손으로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제자 오직 무당산에는 사부님만이 참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광화도장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

창허가 받았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버린 것이다.

광화도장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창허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피해버렸다.

광화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자결하려느냐? 이 이만한 시련도 못참고...]

광화도장의 보검은 창허의 심장을 꿰뚫고 등뒤로 가시처럼 솟아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심장이 식는 것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창허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놀랍게도 창허의 음성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죽음의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광화도장은 말문이 막히고 맥이 탁 풀려서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서 천하의 기문(奇聞)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신선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선이 죽지 않는, 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제자가 바로 신선입니다.]

쿠웅!

그 순간 상청관 안에는 바늘만 떨어져도 굉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자가 죽지 않는 존재라니...

창허는 자기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심장에 꽂았던 검을 옆으로 밀었다.

검날이 갈비뼈를 자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창허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을 뿐 피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광화도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신선이었구나. 그럼 이 질문에도 대답해다오. 장경각의 마공을 익혔는지.]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상황이 어떻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큼은 해야한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이미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자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허가 말했다.

[익혔습니다.]

[? 무엇 때문에 익혔느냐?]

창허가 대답했다.

[본파의 무공은 탈속(脫俗)합니다. 그 뜻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탈속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자가 생각할 때 다른 도가의 문파들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본파는 그런 점을 중시한다. 공동파나 아미파도 마찬가지니라.]

창허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속된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오욕과 칠정을 가지고 나는데 어찌 그것을 모두 버리고 속되지 않은 것만 취할 수 있습니까? 이는 뿌리를 버리고 꽃이나 열매만을 좋아함과 마찬가지입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다. 도를 닦음은 먼저 몸을 청정케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마침내 우화등선하는 것은 나중의 결과일 뿐이니라. 우리 도가의 청정케 할 몸은 진신(眞身)이니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지.]

창허가 물었다.

[진신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듯이, 지금의 이 몸도 정신과 함께 있는 것인데 굳이 진신을 구해서 무엇합니까?]

광화도장이 말문이 막혔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가 마공을 익힌 이유는 바로 이같은 데 있습니다. 마공이란 원래 인간의 속성을 추종하여 창안된 것들이니 인간을 더욱 잘 알게 해줍니다. 제자도 인간인 이상 인간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참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솔잎을 씹고 이슬을 받아 마신다고 해도 인간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광화도장이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본파의 대기(大忌)를 범하는구나. 너를 파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창허가 광화도장에게 검들 돌려주며 말했다.

[사부! 제자 창허는 오늘로 사라집니다. 무공을 쓰더라도 사부께 배운 검은 쓰지 않을 것이고,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광화도장은 앞이 막막했다.

파문을 하려면 먼저 무공을 폐하는 게 순서지만 죽지도 않는 자에게 무공을 폐하려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도 하나의 전례로 남을 것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제자들에게 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창허의 기해혈을 파괴하고 주근(主筋)을 자르게 했다.

그러나 창허에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도 나지 않고 다만 칼이 지나갔다는 정도였다.

창허는 그제서야 무당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서 진짜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무당의 아랫 제자들은 신선의 우화등선을 구경하고 절을 하고 야단법썩을 떨었다.

그 사이에 자기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처리했던 광화도장은 앉은 채로 영혼만 우화등선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소란을 피울 때 그의 영혼도 창허와 함께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X X X

 

[자네는 노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진양진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이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지. 남들이 노도를 삼백년 래 무당 최고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 노도가 창허진인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했기 때문일 걸세. 한데... 허허... 노도는 그 전설 속의 창허진인을 만났네. 낭아봉을 쓴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무공들을 쓴다는 것 외에는 들었던 것과 똑같았네. 싸우고... 도망쳤지.]

진양진인이 자기가 전설속의 주인공인 창허진인과 싸웠다는 사실에 아주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자른 돌들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방안과 밖에 따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믿기 어려울 걸세.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니... 더구나 우리를 찾는 자라는 사실이...]

현천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원래 나와 만나기로 한 포두화상이 왔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네. 애상곡은 포두화상을 부르는 소리였는데 창허진인이 왔지.]

현천록이 말했다.

[포두화상은 도장보다 무공이 높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비슷하네. 하지만 그와 내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패하지는 않을 걸세.]

[대단하군요.]

[포두화상은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는 중이지. 칠십이종 절기 중 서른 여덟 가지를 익혔으니 달마(達磨)와 육조(六祖) 이후로 최고수인 셈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무슨 수로 포두화상을 여기까지 불러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말게. 나는 양의신공을 익혔으니 그 속에 포함된 양심공(兩心功)도 당연히 알고 있네.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괜찮네만, 자네는 심력을 아끼게. 당장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니까.]

현천록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진양진인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현천록은 자기가 바로 일곱째 진양진인과 똑같은 불사신이라고 말한다면 진양진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마음먹고 진양진인이 하는 대로 따라갔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구를 신통하게도 잘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가 두 번째로 읊을 때 이미 구결은 완벽하게 암기해버렸다.

하지만 진양진인은 일곱 번이나 거듭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양의신공의 내용을 해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첫째는 구결의 운율을 잘 들어놓아야 하네. 노랫가락처럼 운율부터 이해해야 외울 수가 있네. 외고 난 다음에는 앞에서부터 구결을 한구절씩 풀어서 실제로 연공을 해야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무당에서도 양의신공을 끝까지 익힌 사람은 불과 다섯을 넘지 않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무당의 최고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익힐 수도 없지.]

현천록이 물었다.

[태극혜검은 실전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쳤다.

[무림에서는 노도가 태극혜검을 다시 복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태극혜검이야말로 검술의 정화지. 창허진인도 태극혜검만큼은 나보다 못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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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2)

 

--- 더 많이 알고 싶다.

 

이것은 현천록이 생사탄을 나오기 전에 보초에게 했던 말이다.

어쩌다보니 생사탄과 구장심조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진양진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은 그 의문들은 의문들이고 일단은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은 배워야 뒤에 변신할 수 있다.

현천록은 머지않아 자신도 먼저 생사탄에 들게 되었던 사람들처럼 생사탄과 구장심조의 궁극적인 비밀을 캐기 위해서 세상을 떠돌게 될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지고, 당장은 인생이 회색으로 변하지 않게 마음 속에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진양진인이 시키는 대로 그의 장검을 가지고 현천록은 동굴 입구를 무너뜨려 막았다.

구장심조는 무공과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을 더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검의 힘을 빌리지 못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동굴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시간 정도 노력해서 동굴은 입구에서 삼장여 깊이까지 완전히 내려앉았다.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소리도 밖에서 생기는 어떤 소리도 그 깊이를 뚫고 오가지는 못한다.

입구가 막히고 모닥불이 꺼지자 동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자기 손가락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에게 자기를 안고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도록 시켰다.

그들이 숨은 동굴은 금릉 현무호 동쪽의 자금산 이름모를 골짜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동굴 속을 걷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무질서한 돌뿌리들과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 그리고 움푹꺼진 웅덩이와 벼랑들이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징그러운 벌레나 독충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뒷발에 중심을 두고 앞발로 더듬게. 그리고 천천히 중심을 이동시키며 나아가야 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현천록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앞을 막은 바위를 가볍게 타고 넘었다.

진양진인의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자네는 몸이 아주 가볍군.]

현천록은 암흑 속에서 실풋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가둔후에 도망쳐온 일곱째 장군묵과 현천록이 똑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기절초풍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것을.

현천록이 말했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눈을 감게. 시각이란 참으로 번다한 것이네. 사람의 감각은 아주 특이해서 가장 분명한 것 같은 것이 실은 가장 둔한 것이라네.]

현천록은 그의 말에 어떤 현기(玄機)가 깃들어있음을 느꼈다.

즉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감으나 뜨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눈보다는 귀가 더 정확하네, 귀보다는 코가 더 확실하고, 그보다 더 정확한 건 바로 감각을 넘어서서 느끼는 것이라네. 실상 속된 경지를 벗어나려면 오감에 의지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지.]

진양진인은 노래를 읊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 하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여 내 속에 받아들이네. 내가 나의 존재함을 껍질 밖에 알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내게 그들이 있음을 알려오네.

 

현천록이 말했다.

[물 냄새가 나는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주 총명하군. 그럼 이제 자네 코앞에 있는 튀어나온 바위를 조심하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은 채 동굴 속에서 삼리는 족히 걸었다.

거리는 겨우 삼리정도지만 그 어려움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진인이 말하는 대로 눈을 감고 그렇게 걷고 있는 동안, 현천록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였다.

암흑 속의 모든 상황이 마치 자기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점점 감각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진양진인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현천록은 물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곳으로 암흑을 헤치며 걸어갔다.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이 주위를 느낄 때마다 참기 힘든 미묘한 흥분이 일어난다.

그것은 기쁨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류의 희열이었고 맺혀 있던 무엇이 풀어지는 해방감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속 벼랑을 뛰어 넘어 좀 더 아래로 내려간 현천록은 마침내 물가에 도착했다.

멈추어 섰지만 솔직하게 말해 더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굴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두 팔에 들리운 상태에서 손가락 두 개로 현천록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현천록은 물이 어둠보다는 밝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물은 희게 보였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해서 들어왔고 진양진인이 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그 동굴이 범상한 동굴이 아님을 알았다.

동굴 속에 있는 물은 물이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물이었다.

물은 작은 강을 이루고 소리없이 흐른다.

강의 폭은 이십 장 정도고 깊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아무 소리도 없는 중에 그 엄청난 물이 발 앞에서 흐른다는 사실이, 그것을 느낀다는 사실이 현천록에서 숨이 막히는 어떤 희열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서 장엄함이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감각을 향수(享受)할 뿐이지만 마음은 무심에 가까워져 있고 발은 뿌리를 내린 듯이 굳건해져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지하의 강물처럼 시간도 조용히 흘러갔다.

현천록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진양진인을 내려놓았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넨 자네 감각을 해방시켜주었네. 지금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곧 보이지 않는 감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될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이건 무공인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초상감각(超常感覺)이지. 상승무공을 익히는 기틀일 뿐이네.]

[초상감각...]

[이 감각을 얻는 자는 상승무공을 빨리 익힐 수 있으나 익히지 못하는 자는 백년을 수련해도 상승무공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지. 노도가 자네 자질을 잠시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는데... 자넨 아주 특이하군.]

현천록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특이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가 달한 그 정도의 초상감각에 이르려 하면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삼년은 수양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일세. 그것도 무공을 상당히 지닌 상태에서! 한데 자네는 불과 한 시간 남짓 사이에 그런 경지에 달했으니... 아주 놀랍네.]

현천록이 웃었다.

[그렇게 칭찬할 것 없습니다. 도장과 내기를 했으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요.]

진양진인은 빈말이 아니었지만 현천록이 그렇게 말하자 그게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했다.

화제를 돌렸다.

[우리를 쫓는 그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네. 동굴을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일세.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어떤 방법을 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노도는 그의 손에 중상을 입었네. 노도의 공력이 전적으로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찢어발긴 시체가 되었겠지.]

얼굴에서 쓴 웃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양의신공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로 노도가 살 수 있는 것은 스무날 남짓하네. 상처가 너무 엄중하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오직 양의신공을 익힌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손을 벗어나는 방법인가요?]

진양진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멀쩡할 때도 하지 못했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기적을 꿈꿀 수 있겠는가?]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들을 벽돌처럼 재단하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노도는 원래 옛 친구와 활몽루에서 만나기로 했었네. 한데 그가 오지 않고 마왕같은 그가 왔었지.]

진양진인의 아주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같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는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 무당파의 창허진인이었던 분이지. 이제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니 그대로 말해주겠네. 창허진인은 본파에서만 전해오는 이름으로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

진양진인은 자기가 윗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창허진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허진인이 무당파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옛날이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는데, 무공을 배우기에는 이미 근골이 굳어있어서 적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가장 기본적인 무공부터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가 놀랄만큼 빨랐다.

빨리 배웠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펼칠 수 있었고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이 더해져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모두 장삼봉 조사 이후로 최고의 인재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창허진인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무당파의 모든 무공을 다 익히도록 했다.

창허진인은 존장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익히면 익힐수록 진전이 더욱 빨라졌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서 당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인 장문인의 무공을 뛰어 넘었고,

다시 이년이 지났을 때는 장문인을 삼초 이내에 패배시킬 정도의 무서운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년 쯤 무당파내에서 제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첫 번째 소문은 좋은 소문으로 창허진인이 벌써 신선이 되었거나 아니면 이전부터 신선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당에 들어온 지 오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무공을 그처럼 빨리 익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추측이 그 소문의 근거였다.

장문인이나 장로들도 이 말에는 관심을 보였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나 두 번째 소문은 달랐다.

창허진인이 장경각(藏經閣)에 숨겨져 있던 마공(魔功)들을 익힌다는 소문이었다.

무당의 장경각에는 무당파의 고수들이 마두들을 제압했을 때 빼앗아 봉인해놓은 마공비급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무당의 제자로 무당의 무공을 자기에게 허용된 이상으로 익히는 것은 다만 징계를 받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발견되는 즉시 죽임을 당한 후에 파문된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장문인은 무당의 이십칠대인 광화도장(光華道長)이었다.

의혹을 그대로 묻어둘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리자 광화도장은 먼저 강호에 흩어져 있던 모든 제자들을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당산으로 소집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전 제자들 앞에서 심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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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로 물들다. (1)

 

 

 

이매봉은 양피지로 묶인 얇은 비급을 넘겨보았다.

겨우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글씨가 작기는 하지만 한번 읽으면서 그녀는 비급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다 기억했다.

[휴우! 그럼 그렇지! 역시 별 것 아니었어! 금강불괴를 깨뜨리는 것보다도 훨씬 쉽잖아.]

이매봉은 어깨에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려면 한 번 쯤은 실험을 해봐야겠지.]

이매봉은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여 한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정말 키가 작은 소인(小人)이 무릎을 꿇고 않아있었다.

얼핏보아서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정교한 밀랍인형 처럼 보였다.

앉아있는 키는 한자가 조금 안되니 선다한들 한 자 반이나 될까말까할 정도다.

그러나 여타 난쟁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란다.

어느 하나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작지 않고 사지는 비례를 잘 이루고 있었으며 오관이 반듯하여 멀쩡한 사람이 그대로 작게 비쳐보이는 것 같과 마찬가지였다.

얼굴로 짐작해볼 때 소인의 나이는 스물 다섯 쯤 된 것 같다.

이매봉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상관숭(上官崇)! 그렇지 않아?]

소인이 말했다.

[속하 상관숭은 오직 명에 따를 뿐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합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었다.

[멍청이! 그럼 조용히 따라와.]

상관숭은 나직히 존명을 외쳤다.

키가 보통사람과 똑같다면 상당한 미남자 소릴 들었을 얼굴이다.

이매봉이 창밖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일단 그녀석을 찾아야겠어.]

 

x x x

 

인시(寅時)가 지나면서 현무호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은밀히 호변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묘시(卯時)가 되면서는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살기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계명사를 힐끗힐끗 살피는가 하면 어떤 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수공을 펼치기도 했다.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호수 면에 어리는 물안개는 현무호를 용왕의 수정궁(水晶宮)처럼 보이게 했다.

땅은 아직 어둡지만 하늘이 먼저 밝아 온다.

그리고 부지런한 잡새들이 모이를 찾아 나는 소리가 들린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도 어언 삼백 여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한데 어느 순간,

 

--- 파앙!

 

어디서 터져나온 소리 때문인지 대기(大氣)가 문풍지처럼 진동했다.

아주 먼곳에서 들려온 폭죽소리 같기도 하고 바로 곁에서 터져나온 큰 소리 같기도 했다.

 

---파앙!

 

이미 경직되어버린 고막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저기닷!]

누군가가 소리치며 몸을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하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곳에서 신기루처럼 한 채의 누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활몽루!

사라졌던 활몽루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휘휘휙!

휙휙!

군웅들이 병기를 뽑아들고 활몽루를 향해서 날아갔다.

번득이는 검광과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번쩍! 번쩍!

활몽루에서 한 거인이 허공을 밟고 걸어나왔다.

[미천한 것들!]

활몽루와 함께 사라졌던 일곱째 장군묵이었다.

[목을 바쳐라!]

장군묵은 고함치며 검을 휘두르는 자의 머리를 낭아봉으로 날려버렸다.

퍼억!

그자의 머리는 산산조각나서 흩어졌다.

[옥황빙서(玉皇聘書)를 내놔라!]

한 노인이 장군묵의 등에 일장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벌써 장군묵의 왼손에 있는 낭아봉은 노인의 배와 가슴을 찢어발기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를 끝으로 노인의 시체는 현무호로 떨어져 버렸다.

장군묵은 평지를 밟듯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갔고, 다시 옥황빙서를 외치는 자가 창으로 장군묵의 목을 찔렀다.

장군묵은 사방은 물론이고 아래 위까지 몰려드는 군웅들로 인해 포위당했다.

[버러지같은 놈들!]

장군묵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창으로 그를 찔렀던 자는 두 개의 낭아봉에 찢어져 형체도 남기지 못했다.

참혹한 모습에 군웅들은 치를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군묵을 공격했다.

장풍과 검광이 풍우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장군묵은 한줄기 바람처럼 군웅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의 찢어진 살점들을 가득 물고 있는 낭아봉이 춤을 추고, 그가 스쳐간 곳에는 찢어져 버린 시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낭아봉에 죽는 자들은 공포 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비명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장군묵을 보고 질렀다.

죽은 자들의 피를 뒤집어쓴 거인 장군묵은 그 자체로 지옥에서 도망쳐나온 악귀같았다.

살신(殺神)이었다.

공포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옥황빙서를 외치며 달려들던 자들은 콩튀듯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군묵은 이미 그들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달아나는 자들부터 쫓아가 몸을 짓이겨 죽였다.

! !

[으아아아아!]

도망치면서 공포에 질려 고함치는 자들, 하지만 그 고함소리가 끝나는 순간에 그들의 목숨도 끝나고 있었다.

일각도 채 지나기 전에 현무호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삼백여 시체들이 호수와 호변에 흩어져 있고 호수 물은 그들의 붉은 피가 흘러들고 있었다.

 

x x x

 

[소협은 능히 자기를 지킬 만한 무공을 지녔는가?]

진양진인이 속을 뻔히 짐작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없습니다.]

다시 진양진인이 말했다.

[바람보다 빨리 달아날 수는 있는가?]

현천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진양진인이 빙그레 웃었다.

[소협은 오늘 정오가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네.]

진양진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흥미진진한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활몽루를 보았다면 노도가 궁여지책으로 그곳에 가둔 마왕(魔王)도 봤을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창허진인은 도장의 윗 어른이 아닌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부 나이가 일백하고도 서른 두 살이네. 무당에 노도보다 더한 선배가 어디있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신선이 된 장삼봉 진인은 도장의 후배입니까?]

진양진인은 일순 말이 막혔다.

(이놈이 정말 만만찮구나. 은근히 내 욕을 하다니.)

진양진인은 다시 한 번 웃고 말했다.

[장삼봉조사께선 승천하시고 속세를 계시지 않으니 선배라고 할 수도 없네. 하여간 그자는 마왕이랄 수 있네. 여러 곳의 무공을 훔쳐 배웠으며 또한 나이를 짐작할 수없지. 더구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쯤으로 아는 자네.]

현천록이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내가 만든 결계를 깨뜨리고 다시 뛰쳐나올 것이네. 집요하게 노부를 찾아올텐데 자네를 그냥 둘 리가 없지. 노부와 함께 낭아봉에 찢겨 죽고 말걸세.]

그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자네가 노도를 낚았으나 먹고싶은 어떤 요리도 하기 전에 우린 함께 죽는단 말이네. 노도야 살 만큼 살았으니 죽는게 뭐가 아쉽겠나만 자네는 허허허... 조금 억울하겠군.]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진양진인이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결국 자네가 노도를 데려온 건 실수였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간에 결과는 이처럼 끔찍하게 나타날 테니까.]

현천록이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었다. 진양진인의 말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진양진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우린 완전히 그 마왕의 손을 벗어날 수도 있네. 자네가 노도한테 묻고 싶은 건 그 후에 다시 의논하면 되지.]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 그럼 내기를 하나 하도록 합시다.]

진양진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역시 어리다.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철없는 소리만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노도가 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들어주마.)

진양진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떤 내기인가? 우린 시간이 없네.]

현천록이 말했다.

[먼저 도장이 생각한 방법대로 한 번 해봅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데 걸겠습니다.]

진양진인은 껄껄 웃었다.

[노도가 이만큼 살았지만 자네처럼 명랑한 소년은 처음이네. 하지만 자네는 노도를 너무 모르고 있군. 노도는 계책을 생각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실패하고나면 그때는 내 방법을 쓰도록 하지요.]

진양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건은 어떤지 한 번 들어보세.]

현천록이 웃으며 물었다.

[분명히 자신있겠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고 말했다.

[노도가 입밖에 낸 건 모두 자신있는 것들 뿐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이길 경우에는 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장이 나을때까지 돌봐주겠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가 이길 경우에는?]

[내가 묻는 말이 어떤 것이든간에 무조건 대답해주십시오.]

진양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실룩거렸다.

현천록이 말했다.

[어쩌면 도장의 금기(禁忌)를 깨야하는 대답도 있을 것입니다.]

현천록의 눈이 그래도 과연 내기를 하겠느냐는 듯이 바라본다.

진양진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도 없군. 노도는 오직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좋네.]

[맹세하십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진양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노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맹세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도장의 계책을 말해보십시오.]

진양진인이 자기 옆에 끌려져 있는 장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네. 자네가 내 지시에 아주 잘 따라 주어야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따라야겠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저 입구부터 무너뜨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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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3)

 

 

 

삼경이 넘은 시각에 계명사는 초파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향유가 든 연화등(蓮花燈)들이 줄지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었다.

승려들은 활몽루가 사라진 앞에서 무릎이 얼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한 여름철 개구리떼가 왕왕 거리는 것처럼 불경을 목청 껏 읊어댄다.

그리고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섞여 들려오는 찌르레기 소리처럼 가날픈 퉁소소리가 현무호 호반에 흐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계명사 상공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노오옴!!!

 

중들이 놀라 목탁을 집어던지고 엎드린다.

[부처님께서 노하셨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내 빛도 사라지고 고함소리도 정적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호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중들도 보고 행여 부처님을 볼세라 밤늦게 달려왔던 열성신도들도 눈을 말똥말똥하며 보았다.

늙은 도사는 개구쟁이가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호수에 약간 큰 퐁당소리를 내며 빼지고 말았다.

중생들의 시선과 늙고 젊은 중들의 시선이 계명사 주지 과우(寡雨)대사에게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과우대사는 억지로 뚱뚱한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 불조께서 임하신 이 뜻을 누가 감히 알리오!]

제자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입가로 찬물을 흘려 넣어 준다.

과우대사는 속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슨 징조냐고 자기에게 물으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석가모니는 입이 없었다고 적혀있지 않으니 말할 수 있었겠지만 대웅전 법당속의 부처는 만들 때 잘못 만들었는지 칠십 년 동안 지켜봤지만 한 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과우대사는 내심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동정하기도 하지만 이럴 땐 난감하기만 하다.

금도금을 입혀놨으니 아무리 말 잘하던 입이었다 해도 어디 벙긋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욕을 해도 그만 절을 해도 그만 그저 한결같이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도리밖에.

 

***

 

계명사의 요란하던 벼락 법회는 연화등이 하나하나 꺼져가면서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삘릴리...!

호반에 흐르는 퉁소소리가 야반 삼경의 그윽한 정취를 더하고, 물가로 밀려온 달이 하늘 비좁음을 아쉬워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정자에는 자기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흰옷을 입은 소년이 백룡이 아로새겨진 백금퉁소를 입에 물었고, 백금퉁소는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애절한 곡을 꼬리에 달고 있다.

추웃!

진양진인은 정자 앞의 물가에서 일어났다.

옷이 흠뻑 젖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두 손을 휘저으며 겨우 정자로 걸어갔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버렸는지 진기가 안정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동서남북도 거의 가릴 수가 없다.

진양진인은 귀에 익숙한 퉁소소리에 이끌려 정자까지 와서는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

퉁소소리가 그치고 진양진인의 머리 옆에 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진양진인은 지쳐버려 누군지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제발 노도를 그냥 내버려두게. 제발... ]

[하하하! 도장(道長)은 내 소리에 걸려든 물고기입니다.]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진양진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 죽었을 중상을 입고 차가운 호수 물속에 한 참이나 있었으니 그의 노구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인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나마 숨이라도 끊이지 않고 쉴 수 있는 형편이다.

진양진인은 실오라기만큼만 진기를 모아도 방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해혈은 텅빈 표주박같아서 어떤 기운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한데 몸이 공중에 들렸다.

(노도의 질긴 목숨이 기어코 오늘의 액겁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진양진인은 왠지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를 두 손으로 안아든 백의소년이 정자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고 싶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진양진인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노도는 매 매우 춥다네.]

[곧 불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진양진인은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꼬끼오! 꼬끼오!

---왕왕왕! 왕왕왕!

 

새벽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진양진인을 깨웠다.

타탁! 타탁!

장작 타는 소리와 매운 연기 내음이 함께 몰려온다.

눈은 떴지만 노곤하여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천장은 낮고 입구는 좁은 동굴 속이다.

연기가 앞으로 잘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타오른다.

진양진인은 공기가 뒤로 흐르는 것을 보고 그 동굴이 꽤 깊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른 숨소리가 모닥불 맞은 편에서 들린다.

진양진인은 암암리에 양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억지로 기혈을 통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진양진인은 모닥불 건너편의 숨소리를 다시 확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온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력이 정심하지는 않구나. 범을 피했는가 했더니 겨우 개구리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되다니...)

그는 마음으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다 곱혔다가 펼쳐진 후 다시 네 개가 곱혔다.

진양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뒤엉킨 기혈을 뚫지 못한다면 남이 애써 죽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 수 있는 건 스무 나흘에 불과하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동료를 찾아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자가 깨어나면 상황이 또 어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살아온 일백삼십여 년의 세월을 통해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본 백의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철인련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환우회(寰宇會) 사람인가?]

잠든 줄 알았는데 즉시 대답이 들려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진양진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음성에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느꼈다.

다시 말했다.

[노도는 육십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니 아는 것이 별반 없네. 어떤 것을 물으려 하는가?]

모닥불 건너편에 있던 소년이 진양진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흰 비단옷을 입었고 붉은 색 띠를 둘러 머리를 묶은 소년이다.

소년이 말했다.

[저는 현무호에 놀러 나왔다가 도장께서 퉁소를 부는 것도 봤고 활몽루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양진인은 말했다.

[퉁소는 소협도 불지 않았는가? 노도는 정신이 희미한 중에도 소협의 퉁소 소리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하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제가 꾸민 천록여의(天祿如意)의 첫 번째 제물입니다.]

진양진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천록여의라... 뜻하는 대로의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협의 이름이 천록이고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소년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번째 뜻이 맞습니다. 제 이름이 바로 현천록이고 도장께선 제 낚시에 걸려던 물고기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 낚시가 퉁소고 미끼는 애상곡이었는가?]

진양진인은 의식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저는 이제 도장의 애상곡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활몽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군요.]

진양진인이 차분한 눈으로 현천록을 응시했다.

현천록의 눈은 맑고 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진양진인은 스스로 위엄을 갖추어 현천록을 압도하고자 했지만 현천록의 마음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보면 볼수록 혼란스러워 졌다.

처음에는 이런 짐작 저런 짐작 다해보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진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창허진인을 활몽루에 가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퉁소로 내가 불던 애상곡을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력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철인련맹의 늙은이들이라면 내력을 감추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들도 있다지만 나이로 봐서 철인련맹의 철인(哲人)일 리도 없다. 환우회에서 무공이 없는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내가 무당의 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이렇듯 대하는 걸 보면 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조차 없다.

한데 그의 갑자기 머리 속으로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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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2)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검을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을 때의 충격도 이처럼 크지는 않았다.

도깨비 장난을 본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장난의 깊숙한 곳에 자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다.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진정되지 않았다.

활몽루가 사라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생사탄이 연상되었다.

현천록은 일곱째인 장군묵도 자기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삼년이나 기다려서 진양진인을 만나려 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활몽루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뒤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계명사의 중들이 활몽루가 사라졌음을 보고 꿇어앉아 염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염불을 왼다.

현천록은 그 자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중들과 맞닥뜨리면 아직 자기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시비에 말려들 것만 같아서다.

시간은 이경하고도 반은 지났을 것이다.

현천록은 낙엽처럼 날아올라 대웅전 지붕 위에 내려섰다.

활몽루만큼은 아니지만 대웅전의 지붕에서 보는 현무호의 밤도 아주 아름다웠다.

한데 대웅전의 지붕에는 현천록보다 먼저 와있는 선객이 있었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중이었다.

현천록보다 더 작은 키에 몸은 민간에 팔리는 나한상(羅漢像)처럼 둥글고 납작한데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도무지 나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오십을 넘은 듯도 하지만 탱탱한 살 때문에 주름살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중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현천록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시주도 활몽루가 사라지는 걸 봤는가?]

불가에 비전되어 온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고절한 무공이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웃고 있는 중의 입안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의 혜광심어가 다시 들려왔다.

[노납은 진양이란 도사를 만나러 왔네. 하지만 무슨 연고인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으니 다시 열 때까지 이 근처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현천록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스님께서 진양진인이 만나기로 했다는 분이시군요.]

중이 이빨 없는 입속을 들어내 보이며 웃는다.

[말이 좋아 만나는 것이지. 그냥 한판 싸워 삼년 전에 맺지 못한 승부를 가르면 되지.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먼. 진양 그 소코같은 도사가 노납을 포기할 리 없는데.]

그때 계명사의 승려가 현천록과 중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사람이 있다!]

중이 껄껄 웃었다.

[잠시 피하세나.]

스윽!

중은 허깨비처럼 다가와 현천록의 손을 잡고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불을 머금은 종이풍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 같은 신법이다.

[자금산(紫金山)에 가면 먹을 만한 풀뿌리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고 있네. 이것도 삼세의 인연이니 함께 가지 않겠나?]

중이 계명사를 벗어나며 말했다.

현천록은 중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저는 잠시 들려야 할 데가 있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시면 찾아가도록 하지요.]

중은 현천록이 자기의 손을 놓고도 공중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떠있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하! 대단한 시주였군. 나는 포두화상(葡頭和尙)일세. 영곡사(靈谷寺)에 와서 날 찾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중은 뚱뚱한 몸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금산을 향해서 날아가버렸다.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

 

현천록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성문을 날아넘고 태평북로(太平北路)의 번화가로 들어갔다.

삼경이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아직도 불을 훤하게 밝혀두고 있는 점포들이 있다.

현천록은 악기(樂器)를 파는 점포를 찾아 들어갔다.

점포에는 각양각색의 퉁소와 피리, 앵금, 거문고, 비파, 소고(小鼓) 등이 여기 저기 놓여있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점원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지요?]

점원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말했다.

[한냥입니다.]

현천록은 점원이 자기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는 걸 알고 속으로 웃었다.

장사라면 진작 이골이 난 현천록이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내려놓고 조잡하긴 하지만 벽옥을 깎아 만든 퉁소를 들고 물었다.

[이건 얼맙니까?]

점원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스무냥입니다. 하지만 공자님께 어울리는 물건이라곤 할 수가 없군요.]

점원의 눈이 은근 슬쩍 한쪽 구석에 있는 퉁소를 향했다.

백금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얇게 뽑아 무겁지 않은 퉁소였다.

[삼백오십 냥입니다. 저희 가게에서 최고의 물건일 뿐 아니라 금릉에서는 이만한 물건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게는 겨우 두냥닷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주시오.]

현천록은 손을 내밀었다.

점원이 무명수건으로 백금퉁소를 닦은 후에 내주었다.

백금퉁소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입에 대고 불어보았다.

[! !]

하지만 바람소리만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점원이 의자를 내와서 앉게 하며 말했다.

[공자님께선 아직 퉁소를 배우지 않으셨군요. 헤헤... 소리를 내려면...]

점원은 대나무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입을 대는 위치부터 가르쳐 주었다.

 

---부우!

 

대나무 퉁소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천록은 점원이 했던 것과 똑같이 흉내냈다.

백금이 흐느끼는 듯 맑고 청아한 소리가 퉁소를 잡은 손 끝에 잔떨림을 남기며 울려나왔다.

점원이 뜻밖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천록은 손가락을 움직여 구멍을 막고 열고 하면서 소리를 변화시켜보았다.

여덟 개의 소리와 각각의 반음이 한 번씩 울리고 나서, 현천록의 백금퉁소에서는 너무도 애절하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따금씩 고개를 약간씩 아래위로 움직이며 퉁소를 불고, 소성(簫聲)은 태평북로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점원은 숨을 죽이고 현천록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도 악기를 매매하는 상인인 만큼 음()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천록의 퉁소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소인은 애상곡(愛傷曲)을 공자님처럼 연주하시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귀가 열리고 가슴에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듯 하군요.]

한데 백금소를 부는 현천록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점원이 놀라며 땅에 엎드렸다.

[아이쿠! 신선님! 천상의 선재동자께서 강림하셨군요.]

현천록은 허공에서 몸을 바르게 폈다.

애절한 퉁소소리는 계속되고, 현천록은 신선이 승천하는 것처럼 밤하늘로 올라갔다.

 

x x x

 

붉은 안개가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며 낮게 흐른다.

쌔액! 쌔액!

암흑의 동굴 속에는 상처 입은 야수의 것인듯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

동굴 앞에 꿇어 앉은 여인의 무릎에는 벌써 피멍이 들었다.

[... 이제... 됐다! ... 계속... ... 말하라.]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탁한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 나왔다.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주님께선 정말 그런 무공이나 문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죽지 않는 몸을 지녔다면 무공의 끝에 달한 것이 아니냐면서...]

[허억! ! ... 결국 묻고 시 싶은 건... 그거 였...구만.]

[그렇사옵니다.]

동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죽지... 않는 인간... ...부도... 만난...적이 있다. 허억! ! 내 몸을 망가뜨린 바로 그 자였지.]

여인이 흠칫하며 머리를 숙였다.

[허어어억!]

동굴 속의 괴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온화한 미풍같은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는 그 이후에 쭉 그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얼마 전에야 겨우 실마리를 잡게 되었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여인이 절하며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노부가 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각, 중간에 내 말을 끊지 말고 들었다가 한마디도 빠뜨림없이 공주에게 전해줘라.]

여인이 가만히 엎드렸다.

괴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사(不死)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자들은 특이한 상황을 만나게 되어 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지.

이건 무공의 높낮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노부는 일찍이 천하의 모든 무공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고금의 무공에 통달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자의 손에 어이없이 패해서 불구가 되고 말았지.

내 목숨을 연장시켜 가는 것은 능력이지만 이 능력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마침내는 다하고 말 것이다.

노부는 아직도 그자나 또 다른 자들이 어떻게 불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들도 모를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자들은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을 꿈꾸는 자들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쩌다가 그자들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그럴 수야 없겠지만 몹시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들이 장주(莊周: 장자)의 숨은 비법을 우연히 알아버린 것일 수도 있고, 하늘과 수명과 같이 했다는 고대 현인들의 법을 얻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 자들을 없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멸시켜 버릴 수는 있다.

어째든 그들도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그 존재의 고리를 끊어주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이 심장을 찔렸을 때 죽고 마는 것처럼 그들도 소멸하고 말겠지.

죽지 않는 자들, 그들이 언제부터 무림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무림의 이단자이자 이방인이기도 한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러나 노부가 다시 나서는 날에는 무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겠다.]

동굴 속에서 책 한권이 천천히 날아나왔다.

[가져가서 공주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요사스런 방사(方士)나 술사(術士)의 무리들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라. 공주가 내가 적은 방법대로 한다면 어떤 자라 할지라도 능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여인이 책을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아주 지친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정작 공주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철인련맹(哲人聯盟)이다. 그자들이야 말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여인이 절을 하고 일어섰다.

[끄아아아아악!!]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는 인간의 비명이 다시금 동굴 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짙은 혈무(血霧)가 소용돌이치며 비명과 함께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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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天祿如意

 

 

객실의 창으로는 별빛이 쏟아지고,

침대 곁에 가져다 놓은 화로(火爐)에서 파란 연기가 실날처럼 피어올라간다.

(이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하면 즉시 죽여 버려야지.)

이매봉은 손가락 끝에 은밀히 공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죽기는 죽을까?)

장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잘 들지가 않는다.

그리고 일곱째라는 장군묵도 마음에 걸린다.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변신을 한다더니 겨우 거울이나 보는 거였나? 이 밤중에 설마 사내 녀석이 단장하고 나가는 건 아닐 테고... 아니, 혹시 모르지. 기녀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매봉은 취해서 잠든 척하며 현천록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고, 정확하게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눈을 보면서 나직하지만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천록이다. 나는 열다섯이고 아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시를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이매봉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속으로 잘도 변신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현천록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봉은 가소로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서 비밀을 탐지해내고 하는 것도 바로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깔깔 웃고 말했다.

[!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웃겨! 네가 뭔데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래? 황제한테도 그런 힘은 없어.]

현천록이 슬며시 웃었다.

[다 들었어요?]

이매봉이 침대에 가부좌를 하고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뀐다.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소릴 누가 못들어.]

현천록이 말했다.

[내 말은 진짠 걸요.]

이매봉이 고개를 약간 돌려 흘겨보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현천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변신만 하면 뭐든 안될까요?]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놈의 변신! 변신! 변신! 병신같은 녀석! 네가 뭐 손오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현천록이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으음! 변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변신은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해요.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겠지만.]

이매봉은 기가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아! 이녀석 아예 날 상대로 사기칠려고 작정을 했군. 그럼 증거를 한 번 보여 봐!]

현천록이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곧 알게 되겠죠.]

[뭐야! 벌써 허풍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야?]

이매봉이 이죽거렸다.

[급해할 것 없어요. 사람이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법이니까요.]

현천록은 천연덕스럽고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어딜 가?]

현천록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함께 자요?]

이매봉이 멍하니 있다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함부로 말하면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현천록은 잘 자라 하곤 문을 닫았다.

 

X X X

 

현무호(玄武湖)는 금릉성의 열세 개 성문 중 현무문 밖에 있는 큰 호수다.

호수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으며, 그 섬들은 모두 교각과 토담으로 호수 밖 땅과 이어져 있고, 섬마다 정자와 누각이 서있어 현무호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달빛은 교교하고 달빛을 받은 눈은 은세계를 호숫가에 펼쳐놓는다.

하늘은 달과 별과 무수한 영웅들의 운명을 담고, 호수는 하늘을 담고 땅 위에 펼쳐져 있다.

성벽 위를 오가는 한 쌍의 파수꾼들 머리 위로 잠들지 못한 밤새들이 나는데,

삘릴리...!

엷은 선으로 하늘을 가둔 호수 위로는 끊일 듯 이어지며 애절한 퉁소 소리가 흐른다.

사람은 고적하여 머리를 떨구고 고향을 생각하며, 소리에 취한 노루 한 마리가 모가지를 길게 뽑아 달을 본다.

별똥별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가로 사라지고, 나직한 사람의 한숨소리는 애꿎은 이의 가슴에 떨어진다.

퉁소소리 끊인 곳에 고루의 북소리가 이경(二更)을 알리고, 밤바람이 언 눈을 쓸어 은가루를 뿌린다.

계명사(鷄鳴寺) 활몽루(豁蒙樓)는 현무호를 보기에 제일 좋은 곳, 사람 있어 좋고 현무호가 있어 아름답다.

현천록은 호반을 거닐며 퉁소소리를 듣다가 취한 듯 끌려 계명사로 왔다.

활몽루는 잘 보이건만 들려오던 퉁소소리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귀청을 얼릴 듯하다.

계명사의 문은 닫힌 지 오래지만 현천록은 활몽루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음률은 모르지만 이 퉁소소리는 너무도 그의 심금(心琴)을 울려 놓았다.

현천록은 흰색 담장을 날아 넘었다.

계명사의 승려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나 다니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눈 위를 걸으며 활몽루로 향했다.

활몽루에서 언뜻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청하는 손님은 오지 않고 청하지 않은 손님만 왔구만.]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현천록은 좀 더 다가가 불당의 그늘에서 누각 위를 보았다.

어깨에는 붉은 수실이 날리는 보검을 메고 머리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퉁소로 막 올라온 듯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사가 가리키는 인물은 현천록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오늘 낮부터 알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커다란 낭아봉에 삐죽삐죽 돋아있는 강철이빨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바로 생사탄의 일곱 번째라는 칠척거인 장군묵이다.

장군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코도사! 당신은 불과 사흘을 기다렸지만 나는 삼년을 기다렸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늙은 도사가 호통을 쳤다.

장군묵이 웃으며 말했다.

[도사! 도사와 나는 인연이 없지 않소. 하나 그 인연을 말하기 전에 도사는 좀 너그러움을 지녀야겠소.]

늙은 도사가 흉폭한 살광을 발하며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노도에게 망발을 하다니! 네놈 사조라도 노도앞에선 고개를 숙일 텐데...]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도사! 잘 들으시오. 도사에게는 내가 불청객이겠지만 내게는 도사가 삼년을 기다린 손님이오. 손님이 너무 무례한 건 아니오?]

현천록은 장군묵을 발견한 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낮에 만나본 장군묵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저런 모습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아주 멸시하는데 저 도사에 대해서는 꽤 참을성을 발휘하는구나. 저 도사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서 일까?)

늙은 도사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노도는 여기서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냥 간다면 몰라도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네놈은 목을 두고 가야 할 것이다.]

장군묵이 도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당에서 삼백년 내 최고수라 불렸던 진양진인(眞陽眞人)이 이토록 답답한 놈일 줄이야.]

진양진인이라 불린 늙은 도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육십년 만에 노도를 알아보는 자를 만났군.]

장군묵이 말했다.

[나는 소코도사 당신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삼년을 기다렸지. 쓸데없는 생각말고 순순히 대답해주시오.]

늙은 도사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 가운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가 튕겼다.

쌔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어나며 푸른 빛줄기가 장군묵의 왼쪽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살짝 치켜들어 막으며 냉소했다.

[오행지(五行指) 중에서 청목지(靑木指). 백금지(白金指)와 적화지(赤火指)도 함께 펼쳐야지.]

진양진인이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떻게 오행지를 알고 있느냐?]

장군묵이 껄껄 웃었다.

[오행지가 뭐 대단하다고 놀라? 태극혜검(太極慧劒)이나 자하천강신공(紫霞天罡神功) 쯤 된다면 몰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군묵이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의 턱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당신이 본파에서 전설로 전해오는 창허진인(蒼虛眞人)은 아... 아니겠지?]

장군묵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사한텐 안된 일이지만 옛날엔 그렇게도 불린 적이 있지.]

진양진인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대 제자 진양이 존장을 뵙습니다.]

장군묵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절이나 받자고 찾은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무당을 떠났으니 내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지.]

진양진인이 떨면서 말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진인께서 아직 세상에 계신 줄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도사가 살아있는 줄 알아도 마찬가지일 텐데.]

진양진인이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묵이 말했다.

[아직 도사가 만나기로 한 친구는 오지 않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 오늘이 정한 날의 마지막 날입니다. 반드시 날이 새기 전에 올 것입니다.]

장군묵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삼년 전에 나는 도사를 처음 보았소. 그리고 그 중놈과 약속하는 것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도사를 붙잡고 물어볼 수가 없었지. 빌어먹을! 나도 쫓기는 중이었으니까.]

진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하문하십시오.]

장군묵이 불쑥 물었다.

[도사는 지난 한 갑자 동안 어디에 있었소?]

진양진인의 잔등이 가늘게 떨렸다.

떨면서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것만은... 제자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흔들면서 말했다.

[도사가 무당 출신만 아니라면 벌써 머리가 터져 뇌수를 뿌렸을 걸?]

진양진인이 더욱 웅크리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제자는 맹세에 묶인 몸인지라...]

장군묵의 눈이 불길을 토할 것 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살기가 지나쳐서 유형화된 것이었다.

진양진인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장군묵이 입을 열고 느린 어조로 말했다.

[삼년전에 나는 도사가 펼친 수법을 보았다. 그건 결코 내가 알고 있는 무당의 수법이 아니었지. 무당의 수법이라면 모두 알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무당의 수법일 수도 없고. 더구나 내가 알기로는 현 무림에서 그런 수법을 쓰는 문파나 방회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묵이 말했다.

[그때 도사는 오늘 만나기로 한 중과 대결하면서 무공도 아니고 진법(陳法)도 아닌 요상한 수법을 펼쳤었지. 난 그 수법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도사가 어디서 그 수법을 배웠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바로 그 순간, 진양진인이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현천록의 눈에는 활몽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장군묵이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바로 이 수법이었지!]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에서 활몽루가 아지랑이로 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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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현천록은 장군묵의 손에서 빠져나와 일장 밖에 내려섰다. 공중에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장군묵이 현천록에게 말했다.

[무공을 익혀라. !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을 상대하는데는 무공이 제일이다. 인간이란 것들은 그저 무공만 강하면 죽어드는 것들이니까.]

소녀가 검을 든 손을 흔들었다.

차라락!

갑자기 그녀의 손에 있던 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군묵이 말했다.

[저 수법은 어검술이다. 멀리 있는 적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을 자기 옷속에 숨겨서 보관하기에도 편리하지. 저런 걸 익혀놓으면 괜찮을 게야.]

소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녀의 어검술을 알아본 사람도 지금까지 없었는데 거인이 대충보고 알아차리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 내가 단단히 홀렸군. 당신들 사형제인가 본데, ! 난 이제 싸우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관두자고.]

그녀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이봐! 감정갖지 마. 뭐 복수하겠다면 언제든지 받아주기는 하겠지만.]

현천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마음 없어요.]

소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현천록이 한걸음 물러섰다.

소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찌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찔러도 소용없잖아.]

장군묵이 코웃음쳤다.

[! 하찮은 인간이.]

소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봐요! 자꾸 날더러 하찮다고 하는데 당신은 하찮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뭐죠? ?]

[!]

장군묵은 코웃음을 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가 깔깔 웃었다.

[그봐요. 자기도 대답하지 못하면서. 꼬마야 그렇지 않아?]

현천록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한테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나도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소녀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 속을 들켜버렸네. 할 수 없지. 그럼 우리 친구할까? 친구사이엔 비밀도 조금씩은 나누잖아.]

현천록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생각하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옆에 와서 말했다.

[난 이매봉(李梅鳳)이야. 넌 현천록이지? 아니 미장이라고 했던가?]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을 잡고 끌며 말했다.

[저 여자는 무시해라. 아주 간살스러워서 가까이 하면 골치아픈 일만 생길게다.]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은 무공을 어떻게 익혔어요?]

장군묵이 말했다.

[? 난 하하하! 처음에 무당파에 들어갔지. 무당파에 들어가서 칠년쯤 있으니까 더 배울게 없어지더군. 가르쳐 주는 건 그대로 배우고 가르쳐 주지 않는 건 훔쳐배웠지. 그 다음에 공동파에 가서 삼년을 있었고, 다시 화산파에서 오년을 배웠지. 공동파 놈들과 화산파 놈들은 내가 배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정도 배우고 나니까 더 배울 필요가 없어서 그만두고 그때부턴 온전해지려고 세상을 계속 여행하고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지.]

현천록이 말했다.

[말씀해주시겠어요?]

장군묵과 현천록이 강변을 따라 걷고, 이매봉이 현천록의 옆에서 다정한 사이처럼 나란히 걷는다.

장군묵은 철저히 그녀를 무시하며 말했다.

[보초님은 옛날에 고향인 천축(天竺)의 무공을 배우셨고, 첫째와 둘째, 셋째는 원래부터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넷째는 혼자 연구해서 자기 무공을 몇 가지 만들었고 다섯째는 아예 무공을 배우지 않았지. 여섯째는 뒤늦게 남의 제자노릇을 해서 지금은 한 문파의 장문인 소릴 듣고 있고, 여덟째는 뭐하는지 모르겠다. 싸돌아 다니는 건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까. 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겠지. 난 이제 가마.]

나란히 걷던 장군묵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버렸다.

바람에 갈대가 날리고 장강 물이 흔들리지만 그 못지 않게 이매봉의 눈도 흔들렸다.

소매 속에서 주먹이 가볍게 쥐어졌다.

현천록은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매봉이 현천록의 손을 잡더니 손등을 꼬집었다.

[아야!]

현천록이 비명을 질렀다.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현천록이 탄식하며 말했다.

[난 사람도 아니예요.]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날 속이려고 어림도 없어. 너나 그 거인녀석이나 다 비밀이 아주 많은 문파에 속해있는 사형제지간이겠지. 너무 신비한 척 하지 말라구.]

현천록은 개구쟁이처럼 혀를 쏙 내밀었다.

시간이란 강은 넓고 넓어서 슬픔도 기쁨도 아주 빨리 쓸어가 버린다.

흘러가는 시간 속의 일들은 붙잡고 있으면 있는 만큼 고통만 커진다.

현천록은 어리지만 보낼 건 빨리 보내고 다가오는 것들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x x x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꽤 유명한 객점인 선인루(仙人樓)에 들어갔다.

이매봉이 혀를 차며 말했다.

[! 너 정말 사기꾼이지. 변신의 천재야! 모습은 바꾸지도 않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는 건 정말 여자들도 하기 힘든 고급스런 기술인데 말이야.]

현천록은 점소이가 안내하는 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속엔 원래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죠.]

이매봉이 맞은 편에 앉으며 웃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나?]

[난 항상 변신을 꿈꿨어요.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그런 꿈을 꿨으니까요.]

현천록이 담담하게 말한다.

이매봉은 가짢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뭘하겠다는 건데?]

[변신을 하겠어요. 아는 것만으로도 변신은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변신을 하겠어요.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도록.]

[얼씨구.]

이매봉이 코방귀를 뀐다.

[너같은 녀석은 정말 처음이야. 아주 웃겨.]

현천록이 말했다.

[난 원래 낙천적이었어요. 한데 다른 일이 조금 있었다고 낙천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건 옳지 않죠. 지금보다 좀 더 낙천적으로 즐겁게 살겠어요.]

[누가 말려?]

[매봉누님 말씀이 맞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즐겁기만 하면 되는 거죠. 나 이전에도 도둑놈들이 있었고 사기꾼들도 있고 강도도 있었을 테니까 도둑이나 강도가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죠.]

[누님? 큭큭!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 하겠지?]

이매봉이 기가막힌 듯 소리를 낮추고 웃었다.

현천록은 진지하게 말했다.

[강도, 사기꾼, 도둑, 거지, 학자.... 난 뭐든 다하겠어요. 뭐든 다 되어보고, 즐겁게 살겠어요.]

[왜 여자도 한 번 되어보지 그래?]

이매봉이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말리화(茉莉花) 차를 마시며 빈정거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푸웁!

이매봉의 입에서 차가 뿜어져 나왔다.

현천록은 자기가 알고 있는 요리란 요리는 모두 주문했다.

선인루의 주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는 돈 많은 공자라고 미리 지레짐작을 하고는 원하는대로 술과 요리를 갖다 주었다.

덕분에 이매봉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현천록은 처음 마시는 술에 얼굴이 붉어지고 조금 알딸딸해진 상태가 되었다.

[어떤 게 재미있을까요?]

이매봉이 약간 혀가 꼬인 음성으로 말했다.

[놀려주기, 때려주기, 골탕먹이기, 빼앗기, 속이기, 만들기, 배우기, 이기기, 죽이기, 지배하기, 애보기, 훔쳐보기, 뒤통수치기, 함정에 빠뜨리기. 물건사기, 보석감상하기, 꽃키우기, 닭잡아 먹기, 정의로운 척하기, 뽐내기..... 뭐 헤아릴 수도 없지. 남자라면 또 다른 것도 좀 있을 테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 그게 다 재미있는거야.]

[이제 계산해요.]

현천록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매봉이 따라 일어섰다.

몸이 조금 비틀거렸다.

[숙박비도 같이 계산해. 오늘은 너무 마셨어.]

이매봉이 현천록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주인이 잽싸게 주문표들 들고 와서 얼만지를 말해준다.

현천록은 이매봉에게 고개를 돌렸다.

[헤헤...]

주인이 이매봉을 보며 손을 비빈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뭐야! 돈도 없이 먹고 마셨단 말이야?]

현천록이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잖아요.]

이매봉이 골치아픈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하는 수없지. 이걸로 계산해.]

소매 속에서 분홍색 주머니가 나왔다.

현천록이 주머니를 열자 그 속에서 콩알만한 주보(珠寶)들과 금원보(金圓寶)가 보였다.

금원보 하나로 값을 치르고 현천록은 이매봉을 끌다시피하며 삼층의 객실로 올라갔다.

이매봉이 눈을 감은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설마 처음 변신한다는 게 채화음적(菜花淫賊) 따위는 아니겠지? 하여간 틈을 좀 보여 약간은 가까워져야겠어. 이 녀석도 이 녀석이지만 배후가 더 궁금하단 말이야. 장군묵인가 하는 녀석만 해도 도무지 추측할 수 없는 놈이었는데 그녀석이 겨우 일곱째라니.)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인데 몸이 푹신한 침상에 눕혀졌다.

그리고 현천록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첫 번째 변신을 하자.]

이매봉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녀석이 정말 채화음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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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1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파릇파릇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찰사자의 눈빛에 동추겸은 반쯤 얼어버렸다.

혈도를 제압당하고 양 팔의 뼈가 어긋낫지만 살기어린 순찰사자의 눈앞에서는 그걸 다 잊어버릴 정도다.

신화병기점의 일꾼들이 모두 눈밭에 엎드리고 있고,

순찰사자는 길길이 뛰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동추겸! 이 미친 놈아! 네 놈이 쇠를 다루는 재주만 없었어도, 아니 회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 놓지만 않으셨어도 네 모가지가 백 번은 짤렸을 거다.]

동추겸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입안이 모두 터져서 양쪽 뺨이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순찰사자가 고함쳤다.

[당장 벗어! 어디서 순찰사자의 옷을 주워입고 감히!]

동추겸은 어긋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토끼가죽 옷의 단추를 벗긴다.

순찰사자라고는 하지만 키가 훤칠한 처녀아이일 뿐이다.

동추겸은 속으로 재수가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머리 속으로 뭔가 불길한 생각이 확 지나갔다.

여태까지 너무 맞아서 얼떨떨했기 때문에 생각지 못했다.

(가짜 순찰사자는? 그리고 금은동철석의 오보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동추겸의 손발이 와들와들 떨기시작했다.

너무 끔직한 결과가 연상이 된다.

동추겸은 그대로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순찰사자가 앙칼지게 고함쳤다.

[웬놈이냐!]

순간, 피웃! 소리와 함께 예리한 물건이 바람을 가르며 순찰사자를 향해서 날아오고 왔다.

[!]

순찰사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왼손을 뻗었다.

빳빳하게 펼쳐진 종이 순찰사자의 손에서 부르르 떨렸다.

순찰사자가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대리석바닥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두 개나 생겨났다. 모두가 자로 잰 듯이 한치깊이였다.

순찰사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종이의 제일 왼쪽에 칙()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순찰사자가 즉시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순찰당 소속 제 삼순찰사자 조림(趙琳)이 칙서를 받듭니다.]

순찰사자가 마당을 향해서 또 고함쳤다.

[모두 엎드리지 않고 뭘하느냐! 정말 죽고 싶으냐?]

순찰사자 조림은 서쪽을 향해서 세 번 절한 후에 칙서를 소리높혀 읽었다.

[순찰사자 조림은 본 회주를 대신하여 칙서를 큰소리로 읽도록 하라.]

순찰사자 조림은 자기가 읽고 또 절하며 말했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또 읽기 시작했다.

[먼저 짧은 시간에 오보를 갖춘 동추겸의 공로를 높이 치하한다. 동추겸은 이 순간부터 순찰사자로 승진한다. 하지만 근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곳 금릉으로 제한한다.]

동추겸이 감격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순찰사자 조림은 계속 읽었다.

[동추겸의 선물은 잘 받았다. 그러나 오보가 지금의 것으로는 부족하니 몇 년의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다시 증량하도록 하라. 그리고 순찰사자는 동추겸에게 순찰사자로서 익혀야 할 무공을 전수해줄 것을 명한다.]

순찰사자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동추겸은 현천록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분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이 동추겸의 눈이 옳았다. 아마도 그분은 아직까지 아무도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우리 회주님이신게 틀림없다! 나는 회주님의 모습을 대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순찰사자 조림이 동추겸의 어깨뼈를 다시 맞추어 주었다.

뚜둑! 소리가 나며 뼈가 제 자리를 찾는다.

조림이 말했다.

[동순찰! 축하합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조림의 음성이 조금 여자다워졌다.

동추겸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잘 좀 지도해 주십시오.]

조림이 말했다.

[회주님께서는 나이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상승 무공을 익히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 회의 최고 요직인 순찰에는 아직 스물 다섯을 넘긴 사람이 없어요. 한데 동순찰은.....]

[소인은 마흔 세 살입니다.]

[더구나 동순찰은 한 꺼번에 다섯 단계나 승진했어요. 솔직히 회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신 건지 전 알 수가 없군요.]

조림이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동추겸은 황홀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조림이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와요. 순찰사자의 무공을 가르쳐 드리죠.]

 

X X X

 

현천록은 금릉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십리 가량 날아갔다.

금릉을 돌아흐르는 장강 물이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눈을 이고 서서 바람을 따라 집단으로 군무를 추는 갈대들, 그리고 그 위를 날며 먹이를 찾는 겨울 철새들의 요란한 날개짓들.

해가 서산에 잠길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땅과 하늘 사이의 모든 것들은 잠들 때를 준비 하는 듯하다.

현천록은 심한 기갈(飢渴)을 느꼈다.

품 속을 뒤져보니 생사탄에서 가져왔던 사과 한알 밖엔 먹을 게 없다.

갑자기 뒤에서 웃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신같은 꼬마네. 쫓아오느라고 애를 먹었어.]

돌아보니 신화병기점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있다.

사각! 사각!

소녀가 갈대를 해치고 다가오며 말했다.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렀을까? 전설적인 경공인 어풍비행(御風飛行)을 다 사용하고 말이야.]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난 무림인이 아닌 걸요. 무공도 배우지 못했어요.]

소녀가 현천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런 말하면 누가 믿을 것 같애? 깜찍한 녀석. 속이는게 아예 버릇이 되어버렸구나. 나도 처음 만났다면 꼼짝없이 속았을걸?]

현천록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인데.....]

소녀가 말했다.

[넌 눈이 반짝반짝하는게 잘 속이게도 생겼어. 혹시 거짓말할때는 콧구멍이 벌렁거리진 않아?]

현천록이 말했다.

[가슴이 벌렁거려요.]

소녀가 깔깔 웃고 말했다.

[! 이제 나한테는 뭘 줄거야?]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본 사람 몫도 반은 된다는 말을 알고 있겠지?]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사과를 내밀었다.

[다 가져요. 까짓 전 좀 굶죠.]

소녀가 황금빛 사과를 받아들고 또 웃는다.

[하하하하! 이 시침떼기 녀석! 좋아 이건 일단 받아놓지. 내가 말하는게 이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녀석이!]

웃는 모습이 아주 소탈하고 아름답다.

현천록은 넋을 잃고 홀린 듯이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서있었다.

!

이마에 불통이 튀겼다.

[어린 녀석이 아주 색골이네. 엉큼하게 쳐다보기는.]

소녀가 코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서며 핀잔을 준다.

현천록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정말 예뻐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뻐요.]

소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 짜식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무림인이 되는 건 아주 재미있을 것 같군요.]

[?]

소녀가 눈이 동그라지며 말했다.

[넌 그럼 정말 무공을 배우지 않은거니?]

현천록은 호주머니를 터는 시늉을 했다. 무공은 쥐뿔만큼도 배운 적이 없다는 몸짓이다.

소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럼 아까 펼쳤던 어풍비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건 그냥 제 몸이 가벼워져서.....]

[한번 시험해보면 다 알게 되겠지.]

소녀가 말하면서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번쩍!

어느 틈에 뽑아들었는지 한자루의 검이 소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검은 순식간에 현천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검날이 현천록의 등으로 삐죽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소녀를 보고 있었다.

가슴이 꽉 막혀 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녀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생글거리며 웃던 얼굴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위엄과 살기로 가득찬 얼굴이었다.

현천록의 가슴이 떨려왔다.

소녀가 현천록의 가슴을 발로 차서 몸을 밀어냈다.

쓔욱!

다시 검이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뒤로 밀려나서 오른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검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당연히 흘러야할 피가 나지 않았다.

소녀가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검결을 지어 현천록을 겨누며 말했다.

[요사스런 수법이군. 배교(拜敎)냐 아니면 마교(魔敎)?]

현천록은 손을 옷 밑으로 넣어서 상처를 만졌다.

하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생사탄에서 보초가 하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산 것에 좀 더 가깝다.

 

갑자기 슬픔이 콱 밀려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분신이 아니라면 한곳 쯤은 틈이 있겠지?]

소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순간 그녀의 검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검은 가느다란 아지랑이같은 기운을 뿜어냈고, 그것들은 엃히고 설키면서 그물처럼 되어 현천록을 애워쌌다.

한 자루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망(劍鋩)이다.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 소리없이 베어진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우리 막내에 손대느냐?]

천둥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검은 그림자가 현천록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파파파파파팟!

땅이 진동하고 푸른 불꽃이 수없이 작렬했다.

멍하니 서있는 현천록의 앞에 칠척거인이 서있었다.

양 손에는 각기 하나씩의 굵은 낭아봉(狼牙棒)을 들었고 허리에는 긴 채찍을 허리띠 대신 두르고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런 거한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나타날 때까진 기척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누구도 피하지 못한 검망을 깨뜨려버리기도 했다.

소녀는 경각심을 돋우면서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낭아봉을 쓰는 고수가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군요. 역시 세상은 넓어요.]

칠척거인은 그 큰 몸에도 불구하고 아주 균형이 잘 잡혀있고 이글거리는 눈은 불을 토할 듯하다. 갑옷만 갖춰 입는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칠척거인이 소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소녀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사람같지 않군요. 귀하는 그 녀석의 아버지인가요 형인가요?]

칠척거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는 감히 물을 자격이 없다. 다시 한 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했다가는 보초님의 명을 거역하는 한이 있어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칠척거인은 돌아서서 현천록의 어깨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장! 반갑구나! 나는 일곱째인 장군묵(張君墨)이다. 네가 태어나는 걸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켜봤다.]

[날 내려줘요.]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군묵이 말했다.

[세상은 짜증나는 곳이다. 네가 순조롭게 살아가려면 최소한 삼십년, 길면 백년은 지나야 할게다. 하하하하!]

현천록은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기쁘지 않아요.]

장군묵이 말했다.

[난 다른 형제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특히 보초님과는.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우리를 집적거리는 건 질색이다. 너도 인간들이 감히 너를 범하지 못하게 해라. 우리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하하하하하!]

장군묵은 소녀를 돌아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 하찮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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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 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현천록은 금릉으로 돌아왔다.

바람에 떠밀리다시피하여 성문을 들어서서 발이 이끄는대로 걸어서 신화병기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하는 말들을 들으니 정말 세월이 변한 것 같다. 겨우 삼년이 흘렀을 뿐인데.

병기점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점포를 보고 있다.

신화병기점에서 새로 사람을 고용한 적은 현천록이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공자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서른이 막 넘었을 듯한 점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현천록은 그 점원의 손에 들려 있는 주판을 보았다. 항상 그의 손때가 묻었던 주판인데 이제 주인이 바뀌어져 있었다.

현천록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손님이 아닙니다.]

점원이 눈치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오늘 오신다던 그분이신 모양이군요. 제가 주인어른께 즉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현천록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어른? 언제부터 노야를 주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됐지?]

현천록은 팔짱을 끼고 병기점 안을 휘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에 있던 물건들도 보이지만 전혀 보지 못한 새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에 있던 것과는 아주 달라 보였다.

적어도 현천록의 눈에는.

현천록은 짧고 뭉퉁하게 생긴 칼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잡이가 말모양으로 생긴 꽤나 멋을 부린 칼이었다.

[이건 누구 솜씨일까? 노야께서 용케도 이런 물건을 내놓으셨네. 그래도 쇠는 아주 좋아. 극상품인걸. 차라리 녹여서 장아저씨가 새로 만들게 했으면 보기드문 신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텐데.]

그때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대 여섯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모양이다.

아주 뚱뚱한 중년인이 겉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있는 좌우에 몇 명의 젊은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소식을 전하러 갔던 점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어른! 바로 그분입니다.]

중년인은 점포로 들어서자 마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순찰사자(巡察使者)님을 뵙습니다.]

따라온 네 명의 젊은이들도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현천록은 얼떨떨해져서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중년인이 흠칫하자 젊은이들 중에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름을 묻고 계십니다.]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소인은 신화병기점의 점주인 동추겸(董追謙)입니다. 강호의 친구들은 칠지한(七指漢)이라 불러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현천록은 놀라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당신이 신화병기점의 주인이라구요? 그럼 노야께서는 어디 계시죠?]

중년인이 아주 당황하며 말했다.

[.... 사자님! 그 그전의 주인에 대해서는 소인 잘 모릅니다. ...소인은 다만 삼년 전에 이곳 신화병기점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현천록이 젊은이들에게도 물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젊은이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납작하게 엎드리며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칠지한 동추겸이 현천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인이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자님께서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현천록은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아는 곳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 혼란스럽다.

[일어나세요. 전 여러분이 말하는 사자가 아닙니다.]

!

칠지한 동추겸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차라리 소인에게 자결을 명해주십시오.]

동추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현천록은 기가막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늘 자기가 앉곤 했던 자리에 앉았다.

가만 있자니 장부를 살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노야나 이곳 신화병기점의 식구들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현천록은 발 옆에 있는 서궤를 열었다.

한달에 한 번씩 책으로 엮이는 장부는 모두 그곳에 차곡차곡 들어있다. 아니 그전에는 그랬었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서궤를 열자 더욱 긴장하며 가늘게 떨었다.

서궤가 텅비어 있었다.

[여기 있던 장부들은 다 어디갔지요?]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추겸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소인이 사자께서 내전으로 방문하실 줄 알고 안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화병기점도 나만큼이나 신고(辛苦)를 겪었구나. 하여간 이 사람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알아보고 빨리 여기를 떠나자. 차라리 밖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 소문을 들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마음이 정해지자 현천록은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전으로 모두 다 모아주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추겸이 쩔쩔 매면서 대답하고, 네 장점과 점원이 서둘러 달려갔다.

현천록은 동추겸과 함께 민노야가 정성껏 가꾸었던 동백나무 정원을 가로 질러 안으로 갔다.

동백나무들은 근년에 잘 다듬어지지 않았는지 거친 모습이지만 붉은 꽃봉우리를 눈 속에 드러내는 것도 있었다.

세월이 흐른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변한 것은 없다.

현천록은 매일 같이 오가던 길을 걸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회가 새롭건만 사람들이 옛 사람이 아니라는 건 쓸쓸한 비애를 자아내게 한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너무도 익숙한 걸음으로 내전을 향하자 더욱 두려워하며 오히려 그의 뒤를 따랐다.

민노야가 주무시던 전각 앞의 마당에는 낯 선 사람들이 칠십여명 가량 석상처럼 서있다.

현천록은 민노야가 새벽마다 식솔들을 점검하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며 전각 앞의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쇠를 다루는 장인들, 가죽을 다루는 장인들, 그리고 금과 은을 다루고 정교한 세공을 하는 장인들이 구별을 지어 서있다.

현천록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지만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었다.

동추겸에게 물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동추겸이 대답했다.

[소인이 제일 먼저 왔고 뒤이어 장인들과 일꾼들이 왔습니다.]

[그때 뭐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아주 급하게 떠났던 것 같았습니다. 두 달만 지나면 꼭 그때가 되는데 불씨도 남아있었고 의복도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천록은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뿐 그들이 어떤 변을 당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저절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

억지로 웃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하하하! 이제 됐습니다. !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을 할까요? 준비해주세요.]

동추겸이 그제서야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그럼 이들은 일단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동추겸은 사람들을 흩고 난 다음에 현천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민노야가 앉던 자리 앞에 장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비단으로 싼 네모난 물건이 보였다.

크기는 가로세로너비가 모두 한자쯤 되는 것 같았다.

장부의 형식이 달랐다. 모두 새 장부고 이전에 그가 작성했던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현천록은 더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충 훑어보는 척하며 슬쩍 앞으로 밀었다.

동추겸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장부를 더 밀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당겨 놓았다.

현천록은 이게 뭐냐는 듯이 동추겸을 보았다.

동추겸이 겸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자님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소인이 준비한 것입니다. 약소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현천록은 계속 동추겸의 얼굴을 주시했다.

동추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회주님께 바칠 물건을 소홀히 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사자님께서 출발하실 때.....]

그제서야 현천록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동추겸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가져 오세요. 지금 가야겠습니다.]

동추겸이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현천록은 웃음이 터져나오려 하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어떤 상황도 비극으로만 가득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뇌물이겠지. 회주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세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현천록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죽이려고 들겠지?]

그때 동추겸이 손바닥만한 곽()을 두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자단으로 감싼 곽인데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손가락 모습을 본따 만든 작은 병들이 앙증맞게 들어있었다.

동추겸은 아주 조심스럽게 현천록의 앞에 곽을 놓았다.

한데 크기에 비해서 아주 둔중한 소리가 났다.

쿠웅!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것처럼 탁자가 약간 삐꺽거렸다.

[지난 삼년 동안 모은 금은동철석의 정화(精華)입니다.]

현천록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낼뻔했다. 다행히 손이 빨라 재빨리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동추겸은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회주님께서 각지의 금속을 보내주셔서 돌봐주신 덕분에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추겸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자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현천록에겐 다른 의미였다.

점포에서 보았던 말모양의 손잡이를 한 짧은 칼의 비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극상품의 철이 너무 쓸데없이 낭비되었던 이유를.

현천록은 오보(五寶:금은동철석의 정화)가 든 곽을 보면서 속으로 침을 삼켰다.

신화병기점에서 자란 현천록이기에 장인들로부터 오보에 대한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오보를 직접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쇠를 다루고 금을 다루는 사람들은 만대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욕심이 왈칵 일었다.

자기만 입을 꾹 다물고 꿀꺽해버리면 그냥 자기 것이 되어버릴 물건이다.

심장이 약간 빨리 뛰기 시작한다.

[좋은 물건입니다.]

동추겸이 기뻐하며 말했다.

[사자께선 역시 보물을 보실 줄 아는 눈을 가지셨군요. 회주님께서 천하의 보물을 두루 구하시지만 사실 이만한 보물은 또 구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사용된 금과 은, 구리와 철, 그리고 돌은 아마도 산을 몇 개 쌓고 남았을 것입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동점주께선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동추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얼굴이지만 감히 현천록의 앞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추겸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소 소인을 벌하지 않는 것만해도 무상의 영광입니다. 하 하온데 대가라 하오시면....]

현천록은 속으로 웃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사자는 아니지만 장사꾼이오. 장사꾼은 속이는 게 능사지만 난 물건을 속이진 않으니까 당신은 임자를 잘 만난 셈이오. 내가 당신한테 속이는 건 정황만 속이고 물건은 속이지 않으니까 용서해주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추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현천록은 사실을 말했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공이 너무 커서 사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것으로 들렸다.

현천록이 또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따로 없군요. 하지만 이 토끼털 옷은 꽤 따뜻합니다.]

동추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동추겸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께서 순찰사자가 되셨음을 속하들이 앙축합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아차했다.

일이 잘못되려니까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회주가 순찰사자를 임명할 때는 토끼털옷을 준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닫기는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토끼털옷을 벗어서 동추겸에게 줘버렸다.

혹시 몸에 걸칠 만 한게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동추겸이 토끼털 옷을 꼭 움켜쥔 손으로 붉은 비단으로 싸인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님!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습니까? 마침 속하가 준비한 선물도 바로 옷입니다.]

현천록은 붉은 비단을 풀어서 상자 속에 든 옷을 꺼냈다.

상자 속에는 아주 화려한 흰비단옷과 물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잠사(天蠶絲)로 짠 홍색 머리띠가 들어있었다.

그 홍색 머리띠는 만져보고 나서야 겨우 천잠사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감히 몸에 걸칠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천록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러면 당신이 너무 손해보는 것 아닙니까?]

동추겸이 황급히 손을 저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시늉을 한다.

옷은 현천록에게 꼭 맞았다.

홍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나자 어느 모로 보아도 현천록은 귀티나는 미소년으로 보였다.

동추겸은 입었던 옷 위에 토끼가죽옷을 걸치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 적입니다! 적이 침입을...]

[!]

동추겸이 고함쳤다.

[모두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동추겸은 현천록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으악!]

[! 아이구!]

여러 가지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현천록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민노야가 앉아있던 그 자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소인배구나. 버릇도 고치지 못하고 재물을 보고 욕심내서 속였으니 참나.....]

동추겸이 빠져나간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도망쳐야 할텐데..... ]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동추겸! 이 찢어죽일 놈아! 감히 사자가 왕림했는데도 거들먹거리기만 해? 어디 내손에 한 번 죽어봐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다.

동추겸의 호통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네 이년! 무슨 개뼈다귀같은 소리냐! 너야 말로 이옷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도 똑같은 사자의 신분이거늘. 감히 이곳에서 횡패를 부리려하다니!]

[호호호호! 네놈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사자가 입는 옷을 함부로 걸치다니! 너같은 놈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현천록은 쳐들어 왔다는 적이 실은 적이 아니라 진짜 사자라는 걸 알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속은 줄 알면 사자보다도 동추겸이 더 길길이 뛸게 틀림없다.

현천록은 계면쩍게 웃었다.

[역시 나쁜 일에는 금방 번잡함이 생기는군.]

바로 그때 현천록의 바로 옆에서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아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그의 옆에는 열일곱여덟 살 쯤 된 소녀가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서있었다.

분냄새와 소녀 특유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찌른다.

현천록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푸른 비단옷을 입었는데 아주 고운 얼굴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입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었다.

[솜씨가 아주 좋던데. 자연스럽게 속이고 자연스럽게 빼앗고, 자연스럽게 따돌리고.....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어.]

소녀의 음성은 정말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맑고 듣기 좋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다 봤어요?]

[그럼 숨긴 게 있기나 하니? 발가벗기 까지 한 주제에.]

소녀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현천록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얼버무렸다.

[바른 행동은 아니었죠. 하지만 전 상인이었으니.... ]

소녀가 현천록의 어깨를 탁 치면서 호쾌하게 말했다.

[상인이면 어떻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면 어때?]

[?]

현천록이 뜻밖이라는 듯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키는 현천록과 비슷하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현천록이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소녀가 말했다.

[세상엔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벌써 장사꾼도 많이 있었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도 많았단 말이야. 네가 그 무리들 중에 잠시 끼어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한테 당할 놈이면 어차피 다른 놈에게 당하게 돼있어. 이런 걸로 자기 변명하느라면 세상이 너무 피곤해져.]

현천록은 자기 이마를 철석 치면서 말했다.

[절묘한 말이군요.]

비명소리가 가까워진다.

소녀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추겸 그 멍청이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 어쩌면 매일 죽는 놈 중에 너 한녀석 더 보태져도 별로 다를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전 도망가야겠습니다.]

[글쎄.....]

소녀가 생글생글 웃는다.

순간 현천록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두 팔을 활짝 펴고 새처럼 활개짓을 했다.

휘이익!

그의 몸이 정말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어느 새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천록은 정말 자기의 몸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몸처럼 아무런 무게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몸을 내맡게 순식간에 십 여 채의 지붕을 넘어갔다.

소녀가 입으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무공을 아는 녀석이었네.]

소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현천록!]

멀리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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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현천록은 숲의 나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름답고 태고의 신비마저 간직한 듯한 숲이지만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벌도 없고 나비도 없고 벌레도 없다.

보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어요?]

[?]

현천록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반문하며 보초를 보았다.

보초의 눈은 측은한 빛을 담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됐느냐고 물었어요. 덕분에 이곳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이 얼떨떨하며 말했다.

[전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걸요. 아무 것도.]

보초가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인다.

[‘그 무공은 아주 특이하죠.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마주치고 나면 특별히 익히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깊숙히 파고들어 버려요.]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전 아무 무공도 모릅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배우지 못한걸요.]

보초가 풋! 하고 웃었다.

꼭 바보라고 놀리는 웃음같다.

현천록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보초가 물었다.

[미장! 아마도 사람과 물건을 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겠지요?]

[조금. 하지만 별 것 아니었어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현천록은 사과를 손바닥에서 슬슬 돌리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어요. 저도 잘 모르니까. 한데 어느 봄 날이었어요. 검을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생긴 검은 요렇게 요렇게 쓰면 좋겠구나!’하고요. 그 후에는 뭘보든지 즉시 그에 알맞는 용도가 저절로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뿐만 아니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으니까 저런 걸 가지면 잘 어울리겠구나. 또 저 사람은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게되었죠.]

보초가 말했다.

[그게 다 그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힌 것 같군요. 누구도 미장 만큼 신지가 트이진 않았거든요.]

[대체 제가 어떤 무공을 익혔다는 거죠?]

보초가 손짓을 해서 현천록을 자기 앞에 앉도록 했다.

[구장심조(九贓心照)라 불리는 무공이지요. 바로 이분께서 처음에 만드셨어요.]

보초의 손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툭 건드린다.

[하하.....]

현천록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듣고 있는 자기도 이상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그냥 자기의 감정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다.

얼핏 보니 보초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져 있다.

현천록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구장심조는 이분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분은 만들었다고 말하지도 못하셨죠. 당신의 자질로는 결코 구장심조같은 절대적인 현공(玄功)을 창안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구장심조는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다가 이분을 통해서 나타난거나 다름없죠. 아주 특이한 무공이니까요.]

현천록은 곰곰히 생각하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창안이 아니라 발견했다고 해야겠군요. 어떻게 특이하다는거죠?]

보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는 사실 온전하지 못한 무공이죠. 구장심조가 온전했다면 이곳 생사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분께서는 구장심조를 알게된 후에 직접 익히셨고, 그 때문에 생사탄이 만들어졌어요.]

현천록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보초의 흩어지는 듯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구장심조가 완전해지면 지금과는 또 다르겠죠. 하여간 구장심조는 온전하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익히게 된 사람은 이곳 생사탄에 들게 되죠.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된다고 할까요? 생사탄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 사이에 만들어진 또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실제로는 삶과 더 많이 겹쳐져 있어요.]

[생사탄의 힘이 이끌려 오게 된다구요? 그럼 저도 제발로 여기까지 온건가요?]

현천록은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를 익히고 나서 칠년이 지나게 되면 대체로 첫장에 막히게 되죠. 그때 보통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게되죠. 기도 끊어지고 심장도 멎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기가 돌게되고 심장도 뛰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몸에 한꺼풀의 껍질이 생기게 되요. 그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생사탄으로 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생사탄 밖에서 구장심조의 두 번째 장을 만나게 될테니까. 하여간 이건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되니 걱정할 건 없어요. 미장이 여기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나서 삼년동안 껍질 속에서 영글어갔던 거죠.]

현천록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삼년이라구요? 제가 정말 삼년이나 잠을 잤단 말이예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라웠어요. 아직 어느 누구도 삼년 만에 껍질을 깨진 못했거든요. 구장심조를 아주 깊이, 우리 중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익혔다는 증거죠.]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은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걸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자라겠지요.]

보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이제 생사탄 밖을 벗어나지 못해요. 미장이 아직 어려 보이지만 바깥바람을 쐬면 금방 자라는 것처럼, 나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금방 늙고 말겠죠.]

보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여자는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하잖아요.]

현천록이 물었다.

[밖에 나가면 난 그전과 똑같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수는 있습니까?]

보초가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사탄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을 볼 수는 있어요. 다만 그들이 우리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볼 수가 없겠지요.]

현천록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 속으로 자기를 질책했다.

(말도 안돼. 내가 정말 이 말들을 믿고 있는걸까? 머리도 아프지 않은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보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분이 익히셨던 구장심조공은 미장 당신과 비슷한 정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뭔가가 더 있었죠. 이분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구장심조를 익히고 또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이분의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세상과 동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이곳 생사탄도 원래는 그냥 바다로 통하는 거친 여울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분이 여기에 사셨다는 것 때문에 이곳 전체가 세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현천록은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재미있군요.]

보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분께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너무 슬픈 일이었죠. 결국 이분은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외롭게 계시다가 함께 있을 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죠.]

현천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게 바로 구장심조공이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겠군요.]

보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맞아요. 이분은 전부터 아끼던 물건들을 세상으로 보냈어요. 구장심조공을 새겨서요. 그 물건들은 어떤 계기로든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보였고 구장심조공을 자기도 모르게 익히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은 이곳 생사탄으로 왔고, 물건들은 다른 세속의 물건들과 뒤섞여 지금도 흘러다니고 있죠.]

보초가 고운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얼굴이 검어서 이빨이 모두 하얀 보석같이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 물건들이 생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는지 여기에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졌으니까요.]

현천록이 물었다.

[그 물건들은 어떤 종류죠?]

[모두 아홉가지예요. 오죽편(烏竹片)이 있고 백설부(白雪符)가 있으며 또 현현도(玄玄刀)와 무극검(無極劒), 자룡배(紫龍杯)와 비취호(翡翠壺), 녹절장(綠節杖)과 청송포(靑松袍),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심환(墨心環)이 있군요.]

[그것들에는 다 구장심조공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현천록이 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요. 대부분 구장심조공이 조금씩 기록되어 있지만 묵심환에는 이분이 자기의 공력을 나누어 담아 놓았지요. 그 때문에 그걸 얻는 사람은 저절로 구장심조공을 얻게 되죠. 내가 말한 순서대로 물건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이 백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묵심환을 내보냈다고 해요. 발견하고 손가락에 끼기만 하면 머지않아 이곳 생사탄으로 오게 될거라 생각했다죠.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까지 묵심환 때문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다른 여덟가지 물건 때문에 오게 됐죠. 한데 미장! 갑자기 얼굴색이 왜 그래요?]

현천록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보초가 근심어린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마지못한 듯 머뭇거리며 자기의 왼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 비밀이죠. 아무도 몰라요.]

현천록이 푸념하며 말했다.

보초가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린 입도 눈만큼이나 동그랗다.

[세상에..... ]

현천록의 왼손 중지에서 거무튀튀한 가락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나무가 자라나듯이....!

[묵심환! 묵심환이군요.]

[병기점에서 심부름하다가 암기들 속에 섞여 있는 걸 발견했었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거짓말 한다고 핀잔만 들었죠. 정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눈에도 안 보일 때가 많더라구요.]

현천록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보초가 묵심환을 만져보며 말했다.

[미장의 구장심조공이 특별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놀라워요.]

 

x x x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뭘하죠?]

[모두가 일을 하고 있어요. 길을 찾고 있는 거죠.]

[어떤 길?]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럴려면 미완성인 구장심조공을 완성해야 하고, 지금의 동료들은 그 나머지 비결이 세상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여기서 나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땅과 바람과 비와 햇살 사이에 그 비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요.]

[완성한다는 게 어떤거죠?]

[아홉번을 넘어서야해요. 아홉겹 속에 숨어있는 마음과 자연의 습리를 밖으로 끌어 내야하니까요. 미장 당신은 겨우 한겹을 벗은 것 뿐이죠. 지겹도록 살게 되겠죠. 여덟 겹을 더 벗게 될 때까진.]

[여덟 겹을 벗고 나면.....?]

[그땐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도 사람이 되진 않았어요. 구장심조 속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큰 힘과 진리가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요. 사람이 되면 너무 유한해서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죽고 말테니까요.]

[아홉겹을 벗은 사람도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한 사람만 아홉겹을 벗어도 생사탄은 사라지겠죠. 또 다른 생사탄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이분의 생사탄은 사라져요.]

[한겹 한겹 벗을 때 마다 어떻게 다른가요?]

[처음에는 육신의 무게를 잃어버리게 되요. 깃털보다 가벼워져서 바람에 몸을 실을 수가 있을 정도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런 건 저절로 알게 되요. 미리 안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뭘해야 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해요. 무엇이든지. 미장은 아직 젊잖아요.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시간이 있어요.]

[꼭 불노불사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호호호! 신선 비슷하긴 하지만 실패작이죠.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심해요. 어쩌면 이 생사탄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는 몽환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걸요. 여기서의 시간은 긴듯해도 실제로는 찰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그냥 백일몽을 꾼 것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구장심조공을 익힌 사람의 마음이 지어낸 곳이니 어련할까요?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미장!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볼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은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 다음은?]

[변신(變身)을 하겠어요.]

[엉뚱하군요.]

 

X X X

 

뺨이 수축되어 팽팽해질 정도로 날씨가 차갑다.

눈발이 섞여있는 바람이 성긴 베옷 속으로 스며들어 가까스로 짜낸 체온을 휩쓸어가버린다.

하얀 눈들은 산과 들과 숲을 덮고 있고, 이제 금방 생긴 발자국도 조금씩 소리없이 덮어간다.

현천록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본 첫 모습이었다.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고 이빨이 시리다.

눈은 세상을 덮은 것만으로 모자라서 이제 사람까지 덮어버릴 요양으로 진눈개비 재주를 부린다.

마음 속의 생사탄에서 자기가 빠져 나왔는지, 생사탄 속에 있던 마음이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진 않지만 생사탄은 문만 열만 볼 수 있는 방안의 침상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영원히 멀어지지 않을 것 같다.

생사탄에서 나올 때 보초가 준 고급스런 토끼가죽 옷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

열두살이던 몸이 세상을 대하면서 갑자기 커져서 몸에 걸쳤던 옷이 찢어지진 않았지만 꽉 끼인다.

하얀 눈밭에서 발가벗고 토끼가죽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눈과 흰 토끼가죽 옷을 입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분간하기 힘들게 되었다.

현천록은 가슴을 활짝 펴고 차가운 바람을 깊이 들이켰다.

들여 마신 바람은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가슴이 확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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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검은 얼굴의 미녀가 살고 있고

 

 

 

새로 생긴 무덤은 굶주린 짐승들에 의해 금방 파헤쳐진다.

그래서 상주(喪主)들은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흙이 굳어지고 띠가 자랄 때까지 무덤을 지키기도 한다.

시체 썩는 냄새는 땅속에서 땅속으로 퍼져 나가고, 영민한 여우나 들개들이 그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다.

눈은 모든 추악함을 덮고 땅은 온갖 더러움을 덮어 자신과 동화시켜 버리지만, 밤은 종종 그 속에서 신비를 잉태하기도 한다.

 

--- 여기 피지도 못한 소년 죽어가니 들을 이가 없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노라.

 

급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묘비에 쓰여진 이상한 글은 아주 보기드문 명필의 솜씨다.

밤은 신비를 잉태했으나 신음은 묘비가 하도록 했다.

묘비는 꺾이고 무덤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밤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그 무엇과 함께 사라져 갔다.

 

X X X

 

아주 어두웠다.

시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그의 눈으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입안에서 맴도는 반벙어리의 소리인양 귀바퀴를 맴돌고 있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나른하게 늘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둥둥 떠서 허공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 같기도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바람없는 무저갱 속을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미치는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해서, 다시금 자신을 자각하게 된 이 순간 직전까지의 모든 일들을 머리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정말 처음으로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혼자있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처음부터 무한히 그곳에 있었던 성도 싶고 무심코 걷다가 낯선 곳에서 갑자기 정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들과 더불어 기억들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머리가 띵해오며 천지가 지금 보이는 암흑과 똑같은 색으로 변했을 때까지.

[막 부화하려고 해요. 조심해서 지켜 보세요. 이런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무엇인가 빠져버린 것 처럼 흩어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도 저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어요. 물론 그때는 아주 오래 전이겠죠. 사실 그동안 이런 일은 너무 드물었어요.]

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웅얼거리던 소리들 마저 없어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오직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나른하게 정적 속을 퍼져 나가고 그의 귀에 까지 스며든다.

아니, 그 소리는 그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백 칠십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그때부터 제일 가까웠던 건 이백 사십년 전이었어요. 나도 다시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모두 단절되어 버리는가 했거든요.]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그 음성이 갖는 부드러운 마력때문인지 아니면 의문자체가 그의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듯 하면서도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보세요. 빛이 나죠? 저 빛이 점점 더 강해지다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가 진짜예요. ! 벌써 강해지는군요. 언제보아도 감탄스런 빛이죠. 너무 아름다워요. 북쪽의 극지에 갔을 때 본 극광보다 더 아름다워요. 모두 잘봐 두세요. 다시 이 빛을 구경하려면 이제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음성이 갑자기 격해졌다.

[정점! 이럴 수가! 벌써 빛의 정점에 달했어요. 우린 생각보다 운이 더 좋아요. 좀더 일찍 보게 되겠군요. 이제 곧 저 빛이 사라지고 암흑처럼 깜깜해질 거예요. 하지만 어둠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모두가 이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어요....... 암흑.... 암흑이군요.]

그는 몸이 두 개로 나뉘는 것 같은 이상감각을 느꼈다.

무거운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내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깃털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가벼워 바람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고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귓전으로 떨리는 음성이 흩어지며 지나갔지만 더 이상 머리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의식이 공중을 부유하는 꿈같은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속에서 치민 갑갑함에 발을 쭈욱 뻗으며 몸을 뒤척였다.

순간 강렬한 빛이 눈의 조리개를 콱 수축시켰다.

[탄생했습니다. ! 여러분. 새로운 동료입니다. 아직 이 세상과 일에 익숙치 않을 테니 어디 있으나 항상 여러분이 돌봐주기 바랍니다. 이 새로운 친구의 이름은.....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모습이니까 우린 미장(未長)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이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 제각기 바쁠테니까 인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세요. 그림자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이내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가 빛에 적응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상한 빛들이 천장을 스며들어온 빛에 의해 점점 작아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타서 없어지는 유성처럼 밝게 빛나며 사라져갔다.

! 그리고 그곳에는 공간이었다.

[미장! 활짝 웃어요. 여기서는 당연히 그래야 돼요.]

그의 앞에 불쑥 뭔가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곤륜노(崑崙奴: 흑인)처럼 새까만데 눈은 커다란 보석처럼 반짝이고 가냘픈 입술이 짙은 자주빛을 띄고 있는 여자였다.

젊은지 어린건지 구별하기 애매모호한 나이같고 얼굴의 윤곽은 마치 새기다 만 다듬어지지 않은 목각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날카롭고 선명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궁장을 했는데, 귀밑머리를 살짝 겉어 올리는 새까만 손에 하얀 손톱이 값비싼 장식품인양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흰옷과 아주 잘 어울린다.

오똑한 콧날이 그의 코에 맞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

그는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저는 현천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가냘픈 입술이 약간 샐쭉였다.

[먼저 웃어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요. 처음일 테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죠.]

현천록은 여자의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꽃향기같기도 하고 사탕을 금방 먹었을 때 사라지지 않은 냄새같기도 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소리가 깨어져 들려온다.

[당신 이름은 미장이예요. 그리고 나는 보초(步哨)라고 하죠. 여기는 생사탄(生死灘)이라 불리는데 나나 미장같은 사람들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곳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내가 태어났던 옛날만 해도 정말 거친 바닷가의 여울이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고 바다는 멀리 물러나 가버렸으니까요.]

현천록은 입술을 달짝여 말했다.

[전 죽은 것입니까 아니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보초가 흰 소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여긴 생사탄이라고... 따라서 미장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았어요. 미장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죠. 이제 그만 일어나요. 미장!]

현천록은 보초의 손길을 따라 일어나 앉았다.

천장이 눈에 확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빛이 천장의 한가운데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람 몸에 물에 젖은 종이를 붙였다가 마른 후에 떼어낸 것 같은 물체가 있었다.

약간 섬뜩하게 보인다.

현천록은 그것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제 이름은 현천록입니다. 천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보초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미장이죠. 그리고 우리들 중의 막내이기도 하고.]

[이건 당신네 문파의 전통입니까?]

현천록의 말을 들은 보초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호호호! 아휴~ 우스워!]

현천록은 자기가 다시 어떤 문파에 잡혀 왔다고 생각했다.

고독마검이란 노인도, 그리고 풍허객도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 엉뚱한 짓들을 벌였었다.

보초라는 이상한 여자가 있는 이곳도 잠시 본 대로라면 풍허객과 그 의도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 문파의 이상한 의식들이 더 우습게 느껴집니다.]

보초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따라와요. 보여주지 않을 수 없군요. 하긴 그럴만도 하죠.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오해들을 하곤 하니까.]

 

현천록은 빛이 나는 천장을 가진 둥글고 큰 방을 빠져나와 보초를 따라 걸었다.

복사뼈 만한 크기의 희고 검은 자갈들이 가지런히 깔려있는 길을 걸어 푸른 하늘이 바다처럼 맑게 보이는 숲에 이르렀다.

참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가문비나무가 서있는 그런 숲이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가지들이 구불구불했다.

단 한 번도 손보지 않은 자연목들이 분명했다.

[여기는 우리들의 무덤, 말하자면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어요.]

보초는 참나무 한그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현천록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게 장난 같았다.

[무덤은 어디 있죠?]

[전체가 무덤이지요. 이분도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답니다.]

옹이진 늙은 참나무를 만지는 보초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다.

현천록은 감회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 지금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보초가 말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굴참나무가 되는 날이 오겠죠.]

현천록은 보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슬퍼 마세요. 전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당신 이야기만큼 이상한 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한데 왜 하필이면 모두 나무가 되는 거죠?]

보초는 현천록이 잡은 손을 끌면서 우거진 숲속 굵은 가지들 밑으로 점점 깊이 걸어갔다.

[하필이면이 아닙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어요.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천록은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힐끗 보초의 옆모습을 살폈다.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상한 매력이 그 얼굴에서 흐른다.

피부는 까맣지만 너무도 맑은 것 같다.

[하지만 다들 나무가 되길 원하더군요. 나도 이제는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보초가 밝게 웃으며 현천록을 보았다.

현천록은 마주 씨익 웃었다.

적당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잘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웃음이다.

보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천지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또 우리 뜻에도 맞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은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죠.]

현천록은 손가락으로 십장 밖에 서있는 한그루의 자그마한 과일나무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나무는 아주 작군요. 제 키만한데요.]

보초가 현천록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린 저분께 인사하러 왔어요. 불평을 하려거든 저분께 실컷 해요.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니까.]

현천록은 긴가민가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초가 귀엽다는 듯이 현천록의 뺨을 톡! 건드리고 앞서 걸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황금빛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작은 나무의 밑둥만은 이 숲속의 여느 나무 못지않게 굵었다.

하지만 이내 붓끝처럼 뾰족하게 올라와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과나무 앞에서 보초가 말했다.

[생사탄을 만든 분이고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끈 분이기도 하며 가장 먼저 나무가 되신 분이기도 하지요.]

현천록은 나무의 신비함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잎을 하나 가져도 될까요?]

보초가 사과를 하나 따서 현천록에게 내밀었다.

사과냄새가 폐부까지 스며든다.

[고마워요.]

현천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는 걸요.]

보초가 옆의 풀밭에 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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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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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거라.]

붉은 장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등을 보인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물어보자고 해도 갑자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마구 떠오르는 대로 이번엔 당신이 개대신이냐고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때 중년인이 불쑥 말했다.

[내 제자가 되어 검법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

현천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갑작스런 말씀이군요.]

[하하하하하!]

중년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거지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디있느냐?]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이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다.

하지만 네모난 눈에서는 광채가 어려있고 얼굴빛도 어둠속이지만 붉은 기운이 흐른다.

큼직한 얼굴에 낙천적인 웃음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어울려 정말 대장부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소생은 대협을 처음봅니다. 한데 어찌 함부로....]

중년인이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다.

[어린 녀석이 억지문자는..... 집어치워라. 애들은 애들 말을 해야지.]

현천록은 조금 머슥해졌다.

장사를 하면서 상대를 추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너무 깊이 박혀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를 납치해온 장본인에게 조차 그렇게 말하는 건 확실히 너무하다.

[억지문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의례하는 말입니다.]

현천록은 마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하하하!]

마주 앉은 중년인이 파안대소를 했다.

[나는 풍허객(風虛客)이라고 한다. 낮에 네가 어떤 영감을 상대하는 걸 보고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지.]

현천록의 눈이 동그라졌다.

[풍허객? 풍허객이었어요?]

하마터면 도둑이 아니고 풍허객이냐고 말할 뻔했다.

현천록이 풍허객을 직접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며서 풍허객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어왔다.

풍허객은 원래 화산파(華山派)의 차대 장문인으로까지 지목되었던 기재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화산파에서 파문을 당했다.

화산파를 나온 후, 소문에 의하면 화산에서 배운 검을 버리고 독자적인 장법을 하나 창안했다고도 하며, 전설적인 고수로 알려진 삼절오악(三絶五嶽)과도 겨루었다는 말이 있다.

그때는 또 장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무림의 골치덩어리로 알려져 있는 풍허객에 대한 크고 작은 소문은 항상 끊이지 않고 전설처럼 흘러다닌다.

그리고 진짠지 아닌지 모르고 전설을 더욱 전설같이 만들어 버리는게 풍허객의 또 다른 별명이 허풍객(虛風客)이란 사실이다.

현천록은 호기심에 반들거리는 눈으로 풍허객을 보았다.

[호오! 이놈봐라! 마치 내게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 하하하하! 이놈아! 장사꾼이라 쉽게 믿지 못하고 나를 감정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허풍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눈을 하는거냐?]

풍허객이 껄껄웃었다.

현천록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석하군요. 대협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내게 엉뚱한 소릴 하면 볼기짝을 때려놓을 테다.]

현천록의 말이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낼듯하자 풍허객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현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전 대협께서 탐낼 정도의 위인이 못됩니다.]

풍허객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현천록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민정후(玟情候)영감이 벌써 손을 썼나? 그 영감은 벌써 삼십년 동안 제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 아닌 것 같은데..... ]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노야께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풍허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민영감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군.]

현천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노야에게 허락을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신화병기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데 갑자기 풍허객이 소리를 꽥 질렀다.

[민영감! 아직도 보고만 있을 거요?]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아이구 깜짝이야!]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손이 아래로 툭 쳐졌다.

풍허객이 쳐다보고 있는 나무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비추어 보였다.

현천록은 그가 민노야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야!]

현천록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민노야가 가볍게 소매를 저었다.

현천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풍허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민영감은 확실히 나를 알고 있는구려!]

민노야의 키는 다리가 길어서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훨씬 커보인다.

노인답지 않게 몸도 꼿꼿하고 키도 클 뿐만 아니라 하얀 수염이 아주 위엄있다.

현천록은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면 언젠가는 민노야처럼 수염을 기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민노야가 풍허객의 앞으로 다가오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말썽꾸러기인 풍허객을 어찌 모르겠나?]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호탕하게 살 뿐이오. 그동안 잘 있었소? 어째 좋아보이지는 않소.]

[악겁이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었는데 어찌 좋아보일 수 있겠나?]

[하하하하! 쓸데 없이 머리 굳어지는 소릴랑 맙시다. 골치아파서 뚜껑열리면 당신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풍허객은 다가오는 민노야를 보면서도 아주 친한 벗을 맞이하듯이 자연스럽게 대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민노야는 더 다가와서 풍허객과 세자 정도의 거리에 마주 섰다.

그제서야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 어떤 미묘한 긴장이 현천록에게도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현천록의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민노야가 하얀 눈썹 밑은 새까만 눈을 빛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 아이를 탐내는 건 풍허객으로선가 아니면 자네의 다른 신분으로선가?]

풍허객은 재미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거야 원~ 쩝쩝! 무림은 영감을 잘 모르는데 영감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노부의 말에 답해주게.]

민노야는 풍허객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한다.

풍허객은 수박밭을 털다가 걸린 개구쟁이같이 시큼털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꺼요?]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는 신룡(神龍)같은 인물이네. 구름 속에 숨은 신룡같은 숲 속에 숨은 바람같아서 흔적은 있어도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지. 삼절오악이 자네의 분탕질에 한숨만 쉬고 가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하하하하!]

풍허객이 숲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현천록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리가 떨려오고 속이 미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다.

내공이 깃든 웃음소리다.

신화병기점의 손님들도 웃을때는 억지로 공력을 끌어올려 과시하곤 했지만 풍허객의 웃음소리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미미한 정도였었다.

현천록은 들은 말이 있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단났다. 웃음소리로 내장을 뒤집어 죽이기도 한다는데 .....)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풍허객은 갑자기 웃었던 것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알면 됐소. 하지만 영감도 저 아이에게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무림에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걸?]

풍허객은 자기 말이 옳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하긴 영감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만도 하지.]

민노야의 눈썹 아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무슨 근거로 쓸데없는 소릴 하는가?]

풍허객은 느긋하게 바위에 기대면서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무공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소. 후후후. 영감이라면 저 아이가 보기드문 인재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또 천하 고수들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영감이 가르친다면 최소한 십오년 후에는 무림을 주름잡을 인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소?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민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자넨 노부를 과하게 평가했네.]

풍허객이 냉소하며 또 말했다.

[둘째, 삼십년 전에 무림을 떠난 영감이 내게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이오. 나를 주목하고 있는 놈들은 대체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거든. 후후. 영감이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제자로도 삼지 않는다면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결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민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옳은 말로도 들릴 수 있겠군.]

풍허객은 팔짱을 끼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민노야는 현천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 대해 많이 아는게 불만이라면 내게 대해 말해줄 수 있네. 그리고 노부는 저 아이에게 양심에 부끄러울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애석하게도 자네의 고심한 분석은 아무 소용없네.]

풍허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껄껄! 영감! 서로 더 이상 잡담은 그만두고 내게 넘기시오. 영감한테 신세 한 번 진 걸로 달아놓겠소.]

현천록은 조금 우습기도 어이없기도 했다.

신화병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종의 신분도 아니다.

의식주를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민노야가 길러준 은혜는 있지만 지금까지 밥값을 못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건네질 그런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한데도 오늘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영감은 물건을 팔면서 죽이니 살리니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훔쳐와서 민노야한테 넘기라니 말라니 하고 있다.

현천록은 지금까지 물건을 넘기고 말고 하는 주체였지 그 대상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열 두 살이면 밤마다 열 두가지 꿈을 꾸지만 한 번도 그런 꿈은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영 거래가 자기 통제를 벗어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시 풍허객의 말에 끼어들었다.

[두분께선 더 이상 언쟁하지 마십시오. 주인어른, 그리고 풍대협님! 두 분은 지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장사를 궂이 하시려고 하는 중입니다.]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전을 각오하고 있지. 그런데 왜 남는게 없단 말이냐? 이기면 너를 얻게 되는데.]

민노야가 빙그레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삼십년 전의 노부를 보는 것 같네.]

풍허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있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당금 강호에는 존재하지 않소.]

이야기가 또 현천록을 젖혀두고 이어진다.

현천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풍대협님!]

풍허객이 현천록의 이마를 툭치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일에 낄 것 없다.]

현천록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저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지 주고 받거나 팔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민노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 말이 옳네.]

풍허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말을 처음에 들었다면 조금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요런 영악한 녀석이니 내 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팔 하나쯤은 주더라도 될 성하지 않소?]

목소리가 아주 기백에 넘친다.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 너를 강탈하려는 도적을 만났구나.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현천록은 우물쭈물했다.

[....저는.....]

노야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하려하니까 물건을 지키는 건 주인이나 주인의 하수인이 하는 일이니까 노야를 주인으로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하니 무림의 말썽꾸러기라는 풍허객을 상대로 만만하지가 않다.

현천록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풍허객에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삼아서 대협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풍허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를 제자 삼아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왜 저를 제자로 삼으려하십니까?]

[왜냐고? 하하하하! 그건 저 영감이나 아까 그 삿갓 쓴 늙은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지.]

풍허객은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대협의 제가가 되지 않겠다면 죽이시겠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하하! 내가 죽이기 전에 그 늙은이가 죽일 걸?]

현천록은 민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그 노인도 풍대협과 똑같은 이유에서입니까?]

민노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말했다.

[그 늙은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민노야가 조용하게 말했다.

[고독마검(孤獨魔劒) 불이태(不二台)!]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고독마검 불이태요. 저 아이는 이미 불이태의 표적이 되었으니 내가 아니면 민영감 당신도 쉽게 지킬 수 없을거요.]

현천록은 이야기가 이정도까지 나와서야 오늘의 일들이 대충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까 그 노인이 고독마검 불이태구나. 그 사람은 세외로 나간지 팔십년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었네. 어쨌든 고독마검이나 풍허객, 두사람 다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최소한 날 죽이진 않겠다.)

현천록은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걱정 따위가 없는 낙천적인 소년이었지만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되자 그 만큼 더 느긋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야께서 천하에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기인이라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다. 고독마검이나 풍허객보다 내게는 그 사실이 더 충격적이구나.)

그때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네.]

풍허객이 민노야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물러서시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네. 나는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걸세.]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얘야. 도적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냈느냐?]

현천록은 문득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달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의 등이 활처럼 휘어져 머리가 땅에 세차게 부딪혔다.

민노야와 풍허객이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라 잡아줄 수가 없었다.

!

둔탁한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풍허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민노야와 풍허객은 동시에 현천록을 잡았다.

그러나 머리가 이미 깨진상태였다.

민노야의 손가락이 현천록의 머리 속으로 쑥 들어갔다.

피가 샘처럼 쏟아진다.

두 사람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현천록의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자살을 하다니! 이런 심약한 놈이었소?]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네. 다만 자네도 이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뿐.]

풍허객이 냉소하며 말했다.

[내게 책임을 따지겠다면 언제든지 좋소. 영감과 한 번 싸워주겠소.]

민노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멀쩡하던 현천록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져 죽다니.

암습을 받았거나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또 평소에 간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민노야는 탄식을 하면서 한 손을 휘둘러 땅을 팠다.

우우웅!

푸악!

민노야의 특이한 산수(散手)의 수법에 따라 땅에는 길죽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풍허객은 수직으로 솟아올라서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고,

민노야는 현천록을 묻은 후에 그곳을 떠났다.

자라면 언젠가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무수한 씨앗들이 그러하듯이, 큰 나무는커녕 싹도 튀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인간의 씨앗들도 많은 법이다.

현천록도 그런 씨앗에 속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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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거래하다. (1)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은 금릉(金陵)에 사는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다.

크기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꼬마라 할지라도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어느 누구도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화병기점은 낡은 중고 철검부터 시작해서 옛날 검이나 도를 모방한 물건들, 그리고 특이한 주문품에 이르기까지 무기라면 없는 것이 없다.

만약에 없다면 신화병기점 내에 있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서라도 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화병기점의 병기들 품질은 그저 그렇다.

그저 그렇다는 말은 살 때는 최소한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쓸 때는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병기를 구하기 위해서 금릉에 들린다면 몇 군데 병기점을 들려본 후에 한 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신화병기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병기들은 최소한 살 때는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천록(玄天祿)은 이런 천화병기점에서 밖으로 잘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다.

병기점의 주인인 민노야(玟老爺)의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현천록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한 사람의 몫을 충분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이며 신화병기점의 점원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현천록의 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크다. 그 점만 제외하고 나면 그가 다른아이들 보다 특별히 달라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무림인들 사이에 아주 잘 알려져있다. 그것은 그가 물건을 볼 줄 아는 특별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감별안은 다른 아이는 고사하고 어른들에게 조차 없다.

현천록의 그런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것은 그가 아홉 살 때인 삼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병기점 안에서 잡심부름을 하면서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던 현천록은 어느날 담당점원이 자리를 비운 한 시간 만에 진열되어 있는 병기들 중에서 삼분지 일을 팔아버렸다.

담당점원이 돌아와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자를 보고는 깜짝에 깜짝을 몇 번 곱한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현천록은 세 살 때 신화병기점에 들어오면서 본 이후 실로 육년 만에 주인인 민노야를 만나게 되었다.

민노야는 그를 묵묵히 보다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으로 일하라고 했고, 그 이후에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의 새로운 신화(神話)가 만들어지며 현천록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누구라도 현천록이 추천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만져본다면 결코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군가는 현천록은 병기와 사람의 인연을 잘 볼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고, 그 위에다 어떤 물건들의 특징이든간에 단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즐거워하며 손님들에게도 그 즐거움을 나누어주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기도 하다.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비밀기관이 점포 내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아직 신화병기점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린 자는 없지만 그 이유를 신화병기점에 다 돌릴 수는 없다.

신화병기점의 병기는 완벽하게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지 몰라도 그 병기를 팔고 있는 열두살짜리 꼬마는 항상 손님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나이도 어린 그가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작은 주판을 허리춤에 차고 혼자 점포를 지키지만 주인인 민노야는 걱정도 않는다.

 

어쨌든 현천록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이었고, 그 때문에 간단한 글과 회계를 배우기도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현천록에게 장사를 잘 한다는 것보다 더 뿌듯한 기쁨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기가 글을 가슴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 돈을 가득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종종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남이 모르는 두근거리는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현천록은 간단한 글을 배웠지만 점점 더 많이 알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는 것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기가 배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한가지를 배우고 한가지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그의 하루는 아주 보람되고 알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무엇을 배울 때 마다 자기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신한다고 믿고 있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존재와 무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고, 모르던 현천록에서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된 현천록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항상 변신(變身)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손님의 발길 만큼의 매상은 항상 오르는 것이기에 장사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뿐 그다지 염려하지는 않는다.

민노야는 현천록의 수완을 높이 사서 그에게 상당한 돈을 준적도 있다. 그러나 현천록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을 신화병기점에서 해결할 뿐만 아니라, 현천록에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나이지만 그가 배우고 익히는 것들은 결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언젠가는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 바로 변신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있다.

그런 생각은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즐겁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죽립(竹笠)을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린 흰 수염의 노인이 점포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의 마음 속은 항상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거웠다.

현천록은 명랑한 목소리로 죽립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협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진열되어있는 이천 종에 가까운 병기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죽립노인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병기를 살피던 죽립노인의 눈과 노인을 살피던 현천록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은 일 순간에 칼날처럼 번득이며 현천록의 눈을 파고 드는 듯했다.

현천록은 병기점을 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죽립노인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죽립노인에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공포같은 것이 있었다.

현천록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이 자기 평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느낌은 대체로 그에게 있어선 틀림없었다.

삼년 전에 정식 점원이 되는 날도 바로 이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세월 때문인지 오늘보다는 조금 약했었다.

현천록은 숨을 천천히 들여쉬면서 말했다.

[노대협께선 병기를 고르시는 것은 아닌 듯 하군요.]

죽립노인이 아주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병기를 볼 줄 안다는 아이 현천록이냐?]

현천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죽립노인이 말했다.

[내게 맞는 병기를 골라라. 네가 권하는 병기면 어떤 것이든지 다 사도록 하겠다.]

노인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다른 손님들과 진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아래로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쓰며 말했다.

[저희 가게엔 노대협께 권해드릴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

죽립노인의 눈이 다시 번개불처럼 번득였다.

현천록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냐?]

노인의 음성이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노인이 흑도의 유명한 고수일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노대협께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물건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길이는 넉자세치, 너비는 두치반, 두께는 삼푼이고 무게는 두근반인 장검이 있다면 제가 권해드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희에겐 그런 물건이 없고 노대협께선 벌써 가지고 계시는군요.]

죽립노인은 한손으로 죽립을 슬쩍 만지면서 말했다.

[그럼 노부가 내 검을 네게 팔고 난 후에 다시 산다면 어떻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파셨다가 다시 사신다면 보통은 두 배로 값을 치뤄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즉 노대협의 경우에는 송구스럽지만 칠백배의 돈을 내야 됩니다. 그래도 하시겠는지요?]

스르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날이 검갑에서 뽑혀 나왔다. 보통의 검보다 한자 가량이나 길고 한치는 더 넓은 아주 특이한 장검이다.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겠다.]

노인은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서릿발같은 한기가 현천록의 목을 파고들었다.

현천록이 담담히 말했다.

[검은 만년한철로 만들었으니 보기드문 보검입니다. 하지만 길이와 너비가 범상한 검들과는 달라서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검을 쓰는 방법도 함께 얻지 못한다면 이 검은 오히려 가진 사람을 해치는 화근이 되기 쉽습니다.]

노인은 냉소하며 말했다.

[충분한 이유가 못된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만약에 노대협께서 이 검을 제게 파신 후에 그냥 가버리신다면 저희 병기점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 검을 녹여서 다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는 검으로서가 아니라 만년한철 한 덩어리에 해당하게 되겠지요.]

노인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노대협께서 이런 명검을 다시 구하시려고 한다면 만년한철 한 덩어리의 값보다 최소한 일천배는 더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제가 칠백배를 받고 다시 팔겠다는 것은 아주 싼 값에 제공하겠다는 저희 주인님의 의지가 이미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컥!

노인은 흰무지개가 서린 명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현천록에게 불쑥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라. 칠백배다.]

현천록은 두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사백육십냥을 드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노부는 한푼도 받지 않고 팔겠다. 나중에 다시 사러오마.]

[!]

순간 현천록은 말문이 콱 막혔다.

노인이 말했다.

[보름 후에 오겠다. 그때 되사도록 하지.]

무림의 기인들이 하는 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

(당했다!)

현천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검을 팔면서 땡전한푼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 노인이 되사러 올 때 역시 땡전한푼 받을 수가 없다.

칠백배를 버는 것은 이런 계산 앞에선 한심한 노릇이다.

현천록은 자기가 보름동안 꼼짝없이 그 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신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에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에구! 검을 그냥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읽지 못했다니.)

입맛이 쓰다.

빨리 읽었으면 보관료라도 비싸게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현천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인의 모습은 벌써 십여장 밖에 있었다.

그리고 현천록의 귀로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파고 들었다.

[노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어기는 사람은 시체가 되도록 해주기도 하는 사람이지.]

깨끗하게 한 방 먹었다고 인정한 현천록은 마음에서 툴툴 털어버리고 웃었다.

[내 속에는 내가 되길 원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아직 시체는 없는데. 하하하.]

하지만 점원은 크게 웃어서는 안된다.

 

현천록은 저녁이 되어 결산을 하고 난 후에 내원에 들어가 민노야에게 보고하며 그 사실을 알렸다.

민노야는 탁자 앞에 앉은 채 자기 손으로 그 검을 뽑아서 검날을 만져보며 말했다.

[보검이군. 금석을 무처럼 자를 수 있는 검이야. 네 목이 베어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새파란 검날에 민노야의 옆얼굴과 촛불이 함께 일렁이며 비친다.

현천록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노야! 이런 보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전설상의 오대명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보검인지....]

민노야가 말했다.

[오래된 검은 아니다. 기껏해야 일백오십년, 단 한 사람만이 사용했고 아주 많은 피를 흘렸다.]

현천록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그 노인은 일백오십살이 넘었단 말씀입니까?]

민노야가 말했다.

[그렇겠지.]

현천록은 아주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일백오십살이면 강태공이 살았다는 나인데도 아직 정정했군요. 신선이 되지 않고도 그 만큼 살 수 있어요?]

민노야가 곱게 가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지는 광활하고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지. 무슨 일이든 다 있는게 세상이니라.]

현천록이 불쑥 물었다.

[한데 그 노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검을 맡기고 이런 기행을 하는 걸까요?]

검의 날은 너무도 깨끗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다. 마치 쇠가 아닌 유리같다.

뱀가죽을 감아놓은 손잡이에 상아를 깎아붙여 놓은 고독(孤獨)이란 글자가 특이할 뿐이다.

민노야는 검을 내려 놓았다.

그의 얼굴 색이 밝지 못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져 현천록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주제넘게 너무 많이 물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현천록은 자기가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 잘못 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겐 왕왕 성가신 법이니까.

[그만 물러가거라!]

한마디 가볍게 던진 후, 현천록의 대답을 찾는지 민노야는 깊은 사숙에 빠져들어 움직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 ! !

태앵~ !

아직도 병기창에서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천록은 그 소리가 자기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진 채 벗겨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죄도 지은게 없는데 왠지 가슴이 조금씩 조여드는 괴상한 기분이다.

! 한 번, 아주 오래전에 갑자기 덮친 개에 물리기 직전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현천록은 혹시 또 개가 어디 숨어있다가 덮쳐들지나 않을까 싶어서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걸었다.

헌데 현천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민노야가 정성들여 가꾼 동백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반짝!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하얀 손바닥 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천지가 캄캄해오면서 깊은 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 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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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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