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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제일인의 제자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장의 두루마리와 비단으로 엮은 책 한 권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사라진 흑의여인이 남긴 물건이겠구나!)

이검한은 두 가지 물건 중 두루마리부터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두루마리는 천잠사같은 것으로 짜여 진 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촤락!

두루마리를 펼치자 한 장의 그림이 나타났다.

이게 뭐지? 폭포를 그린건가?”

이검한은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은 아주 기괴했다. 그저 시커먼 먹물 자욱이 아래위로 죽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폭포를 그린 그림 같기도 하지만 그냥 성의 없이 아래위로 여러 번 먹칠을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기(玄氣)가 숨겨져 있다!)

이검한은 그 기괴한 그림을 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폭포를 그린 듯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

이검한이 다시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폭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다면 이 그림이 한 번의 칠로 그려진 게 아니라 수많은 선이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점이었다.

수백 수천 번의 붓 칠 끝에 완성되었을 이 그림에는 오묘한 현기와 신묘함이 내포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잠시 끙끙거리며 그림을 살펴보던 이검한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리고는 흑의여인이 남긴 두 번째 물건인 비단으로 엮은 책을 집어 들었다.

... 이런...!”

하지만 책자를 집어 들려던 이검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푸스스스!

이검한의 손길이 닿자 그 책이 위쪽부터 재로 변해 부서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책은 거의 이천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비록 좋은 재질의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이긴 하지만 이천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견디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이검한이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법 두툼하던 책이 마지막 서너 장만 남은 상태였다.

 

<현음마경(玄陰魔經)>

 

비급의 표지가 부서지기 직전 그 같은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 있었던 것이 이검한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음마경! 그렇다면 설마 그 흑의여인이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자였던 상고시대의 여기인 현음마모(玄陰魔母)란 말인가?)

이검한은 경악하며 흑의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음마모!

 

그렇다. 이검한이 폭주하는 화룡단정의 열기를 식히는데 도움을 받은 흑의여인은 바로 현음마모였다.

이검한은 그 사실을 몇 장 남지 않은 비급의 잔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몇장 남지 않은 비급에는 한 가지 씩의 장법(掌法)과 심법(心法), 그리고 현음마모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현음마모라 불리던 불운한 계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는 아마도 입에 올리기에 민망한 죄를 내게 지었을 것이다.>

 

전자체로 적힌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현음마모는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육체가 이검한에게 희롱당할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는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던 듯했다.

 

<모두가 운명의 장난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이루지 못한 심원을 이루어 준다면 내게 진 빚을 갚는 것이 되리라. 그것은 이 글과 함께 있는 그림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 그림 속에는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한 절기 한 가지가 감추어져 있다. 나는 그 그림을 스승으로부터 하사 받은 후 오랜 세월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의 강호에는 마치 용 같고 신선같은 절세기인이 한 명 있었다.

그 기인은 난세로 인해 사라질 뻔한 상고시대의 무공들을 수습하고 정리하여 무림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종사였다.

 

-원시천존(元始天尊)!

 

고금오대고수의 첫째이며 사실상 고금제일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안배와 노력 덕분에 중원무림의 역사는 아득한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원시천존은 너무나도 오래 전의 인물이다.

무려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당금의 무림인들 대부분은 원시천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혹시 별호는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어떤 무공과 제자들을 남겼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검한은 원시천존을 존경하고 그의 경지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의 후계자다.

덕분에 일반 무림인들과 달리 이검한은 원시천존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다.

고독마야의 말에 의하면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말 그대로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역시 고금오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고독마야조차 감히 헤아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심오해도 윈시천존 역시 유한한 수명을 타고 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백 살도 오래 전에 넘겨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만한 인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원시천존 자신에 필적하는 기재가 아니면 온전히 깨우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원시천존 정도의 재능이 같은 시대에 또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원시천존은 차선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만은 못해도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 불리기에는 충분한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한 것이다.

, 남자 제자에게는 양강(陽强)한 절기를, 여자 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전수한 것이다.

 

-태양천자(太陽天子)!

-현음마모(玄陰魔母)!

 

그들이 바로 원시천존이 거둔 남녀 제자였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삼초지적(三招之敵)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스승의 슬하를 떠나 무림으로 나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씩 문파를 세웠다. 태양천자는 숭양무벌(崇陽武閥),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창건했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흑백(黑白)으로 나뉘는 무림판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동문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 성격 탓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의 관계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게 되었다.

호승심의 대상은 연인이라 해도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연인관계가 깨진 정도가 아니었다.

연마한 무공과 성격이 상극이었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천수를 다하고 우화등선하게 된 원시천존이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원시천존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게 두 가지의 물건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이것들이었다.

태극보정은 원시천존에 의해 세워진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를 상징하는 보물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시대의 성군 순()이 구주(九州)를 순행한 뒤 만들었다는 구정(九鼎) 중 하나였다.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구정은 그러나 주()왕조가 유목민족인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그 구정중 하나를 우연히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에 태극보정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징표로 삼았었다.

, 원시천존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태극보정을 물려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원시무맥의 종사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용도 없었다.

그에 반해 초연심결은 엄청난 유혹을 품고 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마지막 절기가 숨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마해내는 자는 제이(第二)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천존은 제자들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중 한 가지씩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보물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초연심결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실로 난제였기 때문이다.

오랜 고심 끝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태양천자는 태극보정을,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한 것이다.

태양천자는 고금최강의 무공을 얻는 것 보다는 존경하는 스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승의 상징인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모는 태양천자를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경지를 넘보다니...>

 

이어지는 현음마모의 글에서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을 놓고 벌인 암투에서 패배한 것은 본명이 종선인 현음마모였던 것이다.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으로 은거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원시천존이 창안한 최후의 절기 초연심결을 익히는 것 이상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연심결의 이치가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현음마모는 여자중에서는 고금최강으로 불렸던 천고기재다.

그런 현음마모건만 이십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연심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이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의 절기인 초연심결의 도해(圖解)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해야만 했던 시절에 무려 이십여 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은 어리석은 제자를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먼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스승님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과 종국에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초연심결을 보전하는 역할이나 감당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님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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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2)

 

 

쉭쉭!

임청우는 자신의 가슴에 올라앉아 얼굴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척포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으악!”

임청우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척포의 목을 움켜잡고 패대기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 배가 고파도 서로 잡아먹기 없다고 했는데...”

헌데 임청우가 바닥에 패대기쳐진 척포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치는 순간이었다.

!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며 기와가 와르르 쏟아졌다.

몸이 저절로 튀어 올라 무려 삼장이나 되는 천장에까지 솟구쳤던 것이다.

어이쿠!”

콰당탕!

임청우은 낭패한 몰골로 다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

마지막에 떨어지던 기와 한 장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간밤에 떨어진 청강검에 다쳤던 그 머리건만 기와만 산산조각 나고 머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임청우가 패대기쳤던 척포만이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화를 내며 코앞에서 쉭쉭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는 실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간밤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자기 때문에 철선동시가 죽은 것도, 우협 장백승이 왔다가 자신의 몸속에 든 색혈지독을 제거해주고 두 구의 시체를 태워버린 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마면혈도의 혈도(血刀)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氷魂鐵扇)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도 두구의 시체가 없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네가 먹었냐?”

임청우는 눈을 부라리며 척포에게 물었다.

하지만 척포는 고개를 저었다. 결코 먹지 않았다는 시늉이다.

꿈이었나 하고 생각해봐도 목이 없는 아미타여래의 불상이라든가, 반으로 잘려진 비로자나여래의 불상이 어젯밤의 일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군다나 등의 상처는 신통하게 아물었지만 한쪽에 떨어져 있는 철선동시의 왼팔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졸여졌다.

어디선가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연히 임청우의 눈이 사방을 살피게 되었다.

문득 바닥에서 누런빛이 비치는 곳이 두 군데나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밤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있던 곳이다.

(한데 나는 어째서 석가여래 앞에 놓여있었지? 이게 바로 부처님의 조화인가?)

임청우는 기이하게 생각하며 석가여래를 향해 합장한 후에 철선동시의 시체가 재가 되어 사라진 곳으로 갔다.

반짝이는 것은 녹아버린 누런 황금이었다.

옆에는 은도 함께 녹아있었다.

그리고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몽선도다!)

이미 몇 차례나 몽선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기에 임청우는 펼쳐보기도 전에 그것이 몽선도라고 생각했다.

쫘락!

펼쳐보니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지랑이가 아롱지는 듯한 꽃밭에서 신선으로 보이는 노인이 죽장을 짚은 채로 허리를 숙여 꽃을 구경하는 그림이다.

신선의 모습도 생생하고 꽃도 생생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신선 주위에는 아지랑이같은 것이 흐르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결같은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임청우는 황금과 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즉시 마면혈도가 있던 자리에 있는 양피지도 집어들었다.

그림은 두 개의 양피지가 이어진 것이었다.

마면혈도의 양피지에는 궁장을 한 절세가인(絶世佳人)이 그려져 있는데, 한 송이 부용꽃을 들고 고개를 젖힌 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나 그 표정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지 임청우는 호호호호! 하고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함께 얻었던 몽선도를 둘로 나누어 가질 때 여색을 밝히는 마면혈도는 주저 않고 절세가인을 택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단 한번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임청우는 여인의 미모에 넋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장의 그림을 함께 생각해 볼 때 꽃을 구경하는 노인을 보고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꾸르르르!

한동안 몽선도의 감상에 빠져있던 임청우의 뱃속에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극심한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보고 있던 두 장의 양피지를 함께 겹쳤다.

헌데 임청우가 도르르 만 양피지를 막 품으로 넣으려고 할 때였다.

휘익!

갑자기 척포가 날아올랐다.

임청우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척포는 말린 양피지의 가운데에 난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신기하게도 척포의 몸은 그리 길지 않은 양피지 속에 모두 들어가 꼬리도 머리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놈이 무슨 신통력을 부린 모양이다.)

임청우는 신기해하면서도 내심 꺼림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친구라고 하기는 하지만 척포는 성질이 급하고 흉악한 데가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을 품속에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찜찜하지 않을 수 없다.

척포! 당장 나와! 나오지 않으면 불에 태워버린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척포는 임청우의 으름장에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더욱 깊숙이 움추리며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척포는 우협 장백승이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시체를 삼매진화로 태워버릴 때에도 몽선도는 벌겋게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결코 불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영물인 척포가 생각할 때 그것은 예사 보물이 아닌 것이다.

척포는 몽선도를 집으로 삼는다면 자신의 위엄이 더욱 높아질 것같은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허영이 아닐 수도 있지만...

탁탁탁!

임청우는 바닥에 대고 몽선도를 두들겼다.

그래도 척포는 나오지 않았다.

배는 고파 죽을 지경인데, 그리고 무엇이나 살 수 있는 금과 은이 두 무더기나 눈앞에 있는 데도 척포와 말도 안되는 다툼을 벌이노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침내 임청우가 항복하고 말았다.

좋다! 내가 졌다. 하지만 만약에 내 몸에 긁힌 자국이라도 하나 내는 날에는 앞뒤로 끈을 꽁꽁 묶어 불속에 집어넣어 버릴 테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고집 부릴 때도 마찬가지고!”

척포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알았다는 시늉을 한다.

요놈!”

임청우는 잽싸게 머리를 잡고 끌어내려고 했지만 척포는 그보다 더 빨리 쏙 들어가 버렸다.

고집불통같으니...”

임청우는 투덜거리며 몽선도를 품속에 넣고 바닥에 녹아있는 금은을 챙겼다.

그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숙님! 틀림없다니까요. 어젯밤의 그 거지새끼가 탑 위에 올라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대로 뒀다간 대안탑이 거지 소굴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그 건방진 지객승이구나!)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막아섰던 젊은 지객승의 것이었다.

(여기 올라와서 부서진 향로와 불상을 물어내라고 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금 한 무더기는 남겨두고 가야겠다.)

임청우가 서둘러 금과 은이 녹아있는 곳으로 갈 때였다.

지덕(智德)! 네 녀석은 어찌 그리 입이 험하냐? 입을 깨끗이 함도 수도라는 것을 모르느냐?”

늙구수레한 목소리가 지객승을 꾸짖는 것이 들려왔다.

대저, 험한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가장 가까운 귀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험한 말을 내뱉는 것이 버릇이 되면 마음도 자연 거칠어지느니라. 그런고로 남을 꾸짖을 때도 엄한 말로 자신도 꾸짖는 말을 써야만 하지 함부로 그 행위를 비방하거나 욕설을 해서는 결코 아니 되느니라.”

노승의 준엄한 목소리에 지객승의 음성이 쑤욱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는 품속에 넣은 금과 은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띠를 졸라맨 후 우협 장백승이 준 청강검을 챙겨들었다.

그런 후에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마면혈도의 혈도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이 눈에 들어왔다.

(흉악한 병기(兵器)를 절에 남겨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가져가서 깊은 계곡이나 물 속에 던져버려야겠구나.)

휘익! !

임청우는 재빨리 달려가 빙혼철선을 소매 속에 넣고 혈도를 허리춤에 끼웠다.

그 직후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하며 자신의 발을 내다보았다.

틀림없이 자기의 발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빨라졌지?)

임청우가 철선과 혈도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순식간에 도달해 버렸던 것이다.

한쪽 발을 들어 발바닥을 보았지만 기름이 묻어있지도 않다.

다른 발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척포 때문에 놀랐을 때도 단번에 삼장이나 솟구쳐 머리를 천장에 박았었다.

어쩌면 간밤에 마면혈도가 일러주던 무쌍층층공의 구결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깊이 연구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육조(六祖)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저 말만 왼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지덕 너도 스스로 닦음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래에서 노승이 지객승에게 훈계하는 음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하나......!)

!

임청우는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휘이익!

귓가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발이 땅을 밟을수록 힘은 솟구치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휘이익!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치 날듯이 해서 내려갔다.

으앗! 귀신!”

지객승이 자기의 머리를 훌쩍 뛰어 넘어 내려가는 임청우를 보고 기겁해서 소리치며 엎드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수염이 허연 노승은 연신 아미타불을 중얼거리며 벽면을 더듬고 있었다. 이미 혼은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대략 일각의 시간이 지나서야 지객승은 고개를 들었다.

사숙이 염불을 외우며 벽을 더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이 빠져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눈치다.

지객승은 사숙의 소매를 끌면서 말했다.

사숙! 요괴는 이미 사라진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노납은 지금 남아있는 요괴들을 쫓았느니라.”

노승이 황망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지객승이 씨익 웃자 노승은 용기를 쥐어 짜내어 앞장 서서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이리로 와 보거라. 이제는 요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데 요괴가 분탕질을 쳤을까 싶어 그것이 걱정스럽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노승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헌데 노승을 따라 칠층에 올라온 지객승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 잘린 아미타부처님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사숙께선 벌써 득도하신 모양이구나. 올라와 보지도 않고 요괴들이 분탕질 친 것 까지 아시다니...)

지객승은 사숙의 다리가 후들거린 것은 이십장이 넘는 대안탑을 노구의 몸으로 올랐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리고 존경이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때 노승은 눈을 감은 채 아미타불을 외고 있었다.

(부처님...제발... 이 어리석은 중을 굽어 살피소서. 나이어린 사질(師姪)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만은 면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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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무공 전수

 

 

"내가 담세황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무림에 크나큰 화근(禍根)이 될 것이다."

옥여상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우리 마천루의 모든 절기를 연성해낸 담세황이 최강의 호신기공인 태을강기마저 얻는다면 그 누구도 놈의 폭주를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안색도 심각하게 변했다.

비로소 옥여상이 억지로 자신에게 처녀를 주려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옥여상의 말이 이어졌다.

"사로잡힐 경우 자결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담세황은 태을강기를 얻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내 시신을 욕보일 것이다. 그같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 그게..."

고검추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검추는 아직 여자를 알지 못한다.

사내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지만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뜻하지 않게 오늘 여자와 관계할 기회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선뜻 옥여상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은 양모가 원수에게 유린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런 처지에 여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옥여상의 제안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다.

자신이 옥여상관계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 깃들어있는 태을강기를 담세황이 차지할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옥여상의 말 대로 세상에 크나큰 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비록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고검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분부 따르겠습니다."

결국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고맙다 추아야."

내심 긴장하고 있던 옥여상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소녀밀법(素女密法)이라는 채음보양술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듣거라."

이어 그녀는 한 가지 구결을 고검추에게 들려주었다.

소녀밀법이라는 그 구결은 헌원태을경에 수록되어 있는 절기중 하나다.

옥여상이 들려주는 소녀밀법의 구결을 외우던 고검추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소녀밀법이란 것이 남녀가 관계하는 방법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일부는 소녀밀법을 듣는 과정에서 주책없이 반응을 보였다.

소녀밀법을 들려주는 옥여상의 얼굴도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고검추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자니 죽을 맛이다.

특히 자신의 설명이 시작되자 고검추의 일부가 즉시 반응을 보여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비록 좌도방문의 비결이지만 소녀밀법의 효과는 탁월하다.

그것을 익히면 이성의 정기를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누구보다 영특한 고검추다.

옥여상이 소녀밀법을 두 번 설명해준 것만으로 그 이치를 완전히 이해했다.

... 그만 말씀해주셔도 되겠습니다.”

고검추는 또 한 번 소녀밀법을 구술해주려는 옥여상에게 말했다.

"...!"

고검추가 소녀밀법을 이해한 것을 안 옥여상은 눈을 내리감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검추는 옥여상의 그같은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덧 고검추를 휘감고 있던 옥여상의 팔다리가 풀려있다.

...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옥여상이 가르쳐준 소녀밀법을 옥여상에게 사용했다.

"... 시작하겠습니다."

"... 오냐! ... 나도 준비가 되었다."

고검추는 소녀밀법의 흡자결(吸字訣)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옥여상도 소녀밀법의 발자결(發字訣)을 운용하여 고검추를 도와주었다.

우르르!

곧 옥여상의 내부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심맥 깊은 곳에서 거대한 암경이 출렁이며 결집되더니 고검추의 몸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연(奇緣)!

고검추는 실로 엄청난 기연을 만나고 있었다.

옥여상에게서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이어 받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리되면 세상 어떤 힘도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스으으! 스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자욱한 운무가 일어나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그들의 몸을 가렸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허억!”

고검추는 전신의 경맥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만감을 느끼며 소녀밀법의 시전을 중단했다.

옥여상의 몸속에서 떠돌고 있던 태을강기를 모두 흡수한 것이다.

마치 몸 안에 활화산이 하나 생겨 부글거리고 있는 것 같다.

만큼 태을강기의 힘은 강대하면서도 매우 유동적이다.

비록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흡수했지만 당장 사용하지는 못한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고검추가 엄청난 기연을 맞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금만 노력하면 태을강기를 완성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어떤 고수와 싸워도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고모님."

고검추는 그때까지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옥여상의 몸에서 일어났다.

헌데 떨어지려는 c의 허리를 옥여상의 두 손이 말없이 끌어당겼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전율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열풍이 동굴 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고검추는 심연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린 듯한 피곤함이 느껴졌다.

비록 몸을 피곤하지만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고검추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은 순진한 소년에서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된 것이다.

물론 고검추를 소년에서 사내로 만들어준 것은 은말마희 옥여상이다.

(그분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본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고검추는 눈을 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죄스럽고 어색해서 옥여상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든 척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 덧 아침이 되어 눈부신 햇살이 등나무 넝쿨 사이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옥여상의 모습은 석실 어디에서도 없었다.

고검추의 몸에는 옷이 단정하게 입혀져 있었다.

물론 옥여상이 입혀준 것이다.

(어딜 가셨을까?)

고검추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며 일어났다.

일어나 살펴보니 옆에 깔린 마른풀 위에는 점점이 검붉은 자극이 남아 있다.

옥여상의 몸에서 상당향의 출혈이 있었다는 증거다.

물론 옥여상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든 장본인은 고검추다.

(몸을 닦으려 밖으로 나가신 것일까?)

일어나 앉은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으로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잘 접은 손수건 한 장과 낡은 표지의 비급 한 권, 속옷을 찢어서 종이를 대신한 편지가 그것이었다.

낡은 표지의 비급은 문제의 헌원태을경이었다.

옥여상은 고검추가 태을강기를 수련할 수 있도록 헌원태을경을 남기고 간 것이다.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집어들어 대충 훑어보았다.

헌원태을경에는 태을강기 위에도 몇 가지 무공이 더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수비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절기들이라 나같은 일초무학은 이해하는 게 쉽지 않겠구나.)

헌원태을경을 한차례 훑어본 고검추의 감상이었다.

태을강기는 이미 완성 직전인 상태로 몸 속에 고여 있어서 수련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무공들은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쉽사리 그 이치를 깨우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을 두고 연구해봐야겠지.)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내려놓고 속옷을 찢어 만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상당히 크게 찢은 속옷 자락 위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들이 깨알같은 크기고 가득 적혀 있었다.

옥여상이 심후한 내공을 이용하여 천을 태우는 방식으로 글을 남긴 것이다.

 

<네가 깨어나면 떠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먼저 떠난다.>

 

섬세한 필체의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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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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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팔년후(十八年後)> 강을 끼고 세워진 거대한 도시. 때는 해가 지려는 저녁 무렵

<-금릉(金陵)> 위 도시의 모습을 배경으로.

멀리 금릉이 보이는 강가. 수십 채의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공장 같은 분위기인데 도축장이다. 규모가 엄청나서 요즘 공장의 가건물들처럼 벽체가 없고 기둥과 천장만 있는 큰 건물이 십여 채 있고 작은 건물들은 수십채다. 건물들 사이를 백정차림의 사람들이 오가고. 건물 안에서 도축하는 모습이 작게 보이고. 마차도 연신 도축장을 드나든다. 외부에서 마차에 실려 오는 짐승들. 마차에 실려 도축장을 떠나는 포장된 물건들. 도축당할 소, , 돼지등이 갇혀있는 우리들도 있고. 우리에서 짐승들을 끌고 나오는 백정들도 보이고. 건물들 사이에는 거의 벌거벗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거나 근처 강에서 물장난을 친다.

고기를 어깨에 짊어지거나 잡을 짐승들을 몰고 오가는 백정들의 복장을 잘 묘사. 백정들은 상투를 틀지 않아서 봉두난발인데 끈 같은 것으로 대충 묶고 있다. 소매가 없는 낡은 옷들을 대충 걸쳤다. 바지도 짧아서 정강이가 다 드러나고 신발은 짚신이나 맨발이다. 여자들도 짧은 치마에 소매가 짧은 저고리를 입고 다닌다.

 

도축장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높은 나무 위. 어떤 여자가 서서 도축장을 보고 있다.

크로즈 업. 운신장이다. 18년 전과 모습이 같다.

[...] 도축장을 보며 뭔가 생각하는 운신장. 그때

<?> 휘익! 옆의 나무 위로 유령같이 나타나며 말 거는 사람의 형상. 돌아보는 운신장

풍신장; [눈에 띠는 것이라도 있나?] 가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지만 나뭇가지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운신장은 나이가 들어서 이제 완전히 중년인으로 보인다. 십팔년 전과 달리 귀밑머리가 희끗해졌다. 실제로 50이 넘은 나이다.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사신장의 일인 풍신장>

운신장; [어서 오세요 풍오라버니.] 고개 좀 숙이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사신장의 일인 운신장>

운신장; [저기도 살펴봐야하나 생각 중이었어요.] 다시 도축장을 보고

풍신장; [도축장(屠畜場)이로구만.] 고개 빼서 도축장을 보고

운신장; [금릉 주변에 있는 십여 곳의 도축장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라는군요.] 함께 도축장을 보며

풍신장; [금릉은 인구가 많으니 소비되는 고기의 양도 막대하겠지.]

운신장; [규모가 큰 만큼 저 도축장에서 일하는 백정의 숫자도 삼백 명이 넘는 것같더군요.] [스무 살 안쪽의 젊은 사내들도 적지 않고...]

풍신장; [하지만 수색해볼 엄두가 나지 않겠지?] [지저분한데다가 짐승들이 해체되는 끔찍한 장면을 봐야하니...] 웃고

운신장; [십팔년전, 아연아가씨의 아들과 함께 사라진 진삼낭(陳三娘)이 금릉 쪽으로 온 흔적이 있었어요.]

풍신장; [그래서 그때부터 수시로 금릉 일대를 수색해왔었지.] 끄덕

운신장; [샅샅이 뒤진다고 했지만 금릉은 워낙 큰 도시라 우리 무림맹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여전히 많아요.]

풍신장; [저 도축장도 그중 하나고 말이야.]

풍신장; [엄두가 안나면 내가 들어가서 살펴보고 오마.] 몸을 날리려 하고

운신장; [그러실 필요없어요.] 고개 조금 저으며 말하고. 몸을 허공에 좀 띄웠다가 돌아보는 풍신장

운신장; [아무리 생각해도 진삼낭이 도련님을 백정으로 키울 것같진 않네요.] 찡그리고

풍신장; [하긴...] ! 다시 나뭇가지 위로 내려서고

풍신장; [십팔년전 아연아가씨의 거처에서는 아연아가씨의 패물과 상당한 양의 은자가 사라졌었다.] [몇 대가 일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재물이었지.]

운신장; [그 정도 재물이 있으면서 귀하디귀한 아연아가씨의 아들에게 백정 노릇을 시킬 리는 없겠지요.]

풍신장; [맞는 말이다.]

운신장; [곧 총관이 소맹주의 혼서(婚書;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서찰)를 갖고 금릉으로 올 거예요.] [아연아가씨의 아들 찾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총관 맞을 준비에 집중해야만 해요.]

풍신장; [마교의 잔당들이 총관을 노리고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지.] 끄덕이고

운신장; [금릉 외곽은 제가 맡을 테니 오라버니는 성내를 살펴주세요.] 휘익! 날아오르고

풍신장; [수고해라.]

멀어지는 운신장

풍신장; [이제 그만 자책해도 될 텐데...] 멀어지는 운신장을 보며 혀를 차고

풍신장; [운매는 아연아가씨 모자에게 벌어진 비극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풍신장; [자책하지 말라는 말이 통할 리는 없고...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랄 뿐이다.] 휘익! 날아오르고.

사라진다

 

#3>

도축장 내의 어느 건물. 벽체가 없는 작업장 건물이다.

우머! 코에 걸려있는 고삐를 좌우에 선 건장한 사내 두명의 손에 틀어 잡힌 소가 애처롭게 우는 모습. 머리 크로즈 업.

퍼억! 그 소의 정수리를 뾰족한 망치가 깊이 박힌다.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소

털썩! 쓰러지는 소. 그 앞에는 망치를 든 청풍이 서있다. 이때 나이 18. 하지만 체격이 건장해서 어른 같다. 다른 백정들과 달리 낡았지만 소매가 있는 옷을 입었고 이마에는 머리띠를 묶고 있다. 허리띠에는 단도를 꽂고 있다. 주변에는 양동이를 든 백정들 대 여섯 명이 있고. 그중 두 명의 백정이 소의 코에 걸린 고삐를 놓으며 일어선다.

청풍의 모습. 헌데

섶이 벌어진 상의 사이로 나비 모양의 반점이 있다. 손바닥 크기만한 반점. 청풍이 바로 섭아연과 용무린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청풍이 서있는 곳은 천장이 높고 넓은 가건물 내부다. 사방의 벽은 트여있고. 바닥에는 돌 판이 깔려있다. 돌 판에는 오물과 물이 흘러가게 홈이 파여 있고. 수시로 물을 뿌려 청소하는 백정도 있다. 여기저기 짐승들을 묶는 틀이 설치되어 있고 곳곳에서 소, 돼지, 양등이 도살되고 있다. 청풍은 소들을 도살하는 장소에서 소를 죽였다.

[잘 가시오 우공(牛公)!]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다음 생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시구려.] 청풍 주변의 백정들이 합장하거나 고개 숙이며 소의 명복을 빌고

촤아! 촤아! 양동이에 담겨있던 물을 소의 시체에 뿌리는 백정들. 청풍은 그 사이에 망치를 옆의 탁자에 내려놓고. 이어

청풍; [시작합시다.] 허리에 끼우고 있던 칼을 뽑으며 소의 시체로 가는 청풍.

[피 받을 준비해!] [한 방울도 흘리면 안된다.] [오늘 처리할 마지막 작업이다.] [빨리 끄내자.] 서둘러 양동이를 들고 다가오는 백정들

스윽! 한쪽 무릎 꿇고 소의 목을 따는 청풍.

쏟아지는 피를 양동이로 받는 백정들. 그 옆에서 소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하는 청풍

[역시 현란하구만.] [청풍(淸風)이의 칼 쓰는 솜씨는 언제 봐도 감탄이 저절로 나와.] [살점 한 점 붙어있지 않게 가죽 벗기는 저 솜씨 좀 봐.] 청풍이 칼질하는 걸 주변에서 둘러보며 감탄하는 백정들

[저게 어디 봐서 이년 밖에 안된 솜씨야?] [이젠 백정질로 수십 년을 먹고 살아온 우리가 오히려 청풍이에게 배워야할 판이야.] [포정(庖丁;전설 속의 백정)이 재림한 것같구만.] 감탄하는 백정들

청풍; (보는 사람마다 내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슥슥! 무언가를 가르는 자세인 채로 생각하는 청풍

청풍; (가축을 죽이고 가죽과 살과 뼈를 분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청풍; (내 눈에는 가축의 몸 상태가 일목요연하게 보여서 그냥 따로 따로 분리하면 되는 것뿐인데...)

청풍; (물론 도축(屠畜) 일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다.) 한숨

청풍;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하며 아버지와 우리 남매를 먹여살려왔다.)

청풍; (난 어머니를 돕기 위해 철이 들자마자 돈을 벌려 다녔는데...) (어쩌다보니 도축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청풍;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만큼 끔찍하고 역겨운 일도 없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일보다 벌이가 좋아서 도축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다.)

청풍; <무엇보다도 도축이 이렇게 쉬운 걸 보면 난 백정이 될 운명이었던 것같다.> 청풍이 도축하는 걸 다른 백정들이 둘러서서 보는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4>

<-금릉> 아주 깊은 밤이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 날은 밝아오기 시작하지만 거의 모든 건물들에 불이 꺼져 있다.

술병과 쓰레기들이 뒹구는 환락가. 기루와 술집들이 빼곡하고 인적은 없다.

그 환락가 뒷골목의 몇몇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다. 도박장이다. 흑사회, 족 조폭조직의 건달들로 보이는 자들이 도박장 입구를 어슬렁거리고 있고. 입구 근처의 의자에 앉아 조는 자들도 있다. 무기를 지니고 있고

<大慶賭場>이라는 간판이 걸린 도박장. 창문이 두꺼운 판자인데 창문 틈으로 빛이 흘러나온다. 그 도박장 주변에도 건달 몇 놈이 경비를 서고 있다. 좌우의 길쪽을 감시하는 젊은 놈들도 있고 입구에는 의자를 문 좌우에 놓고 앉은 30대의 건달 두 놈도 있다. 이 두 놈은 나중에도 몇 번 나올 캐릭터. 모두 칼을 차고 있다.

건달1; [아웅! 오늘 야근도 끝나가는구만.] 의자에 앉은 놈중 한 놈이 하품. 뺨에 칼자국이 나있다.

건달2; [교대해줄 놈들 오면 자러 가기 전에 한잔 하세.] 닫혀있는 도박장 입구를 돌아보며. 육중한 문틈으로도 불빛이 흘러나오고. 뺨이 홀쭉한 놈. 음침한 인상

건달1; [그거 좋지.] 입맛 다시며 문을 돌아보고.

건달1; [그나저나 참 징한 놈들이야. 날밤 꼬박 새면서 도박을 하고...] 굳게 닫힌 문을 보며 혀를 차고

건달2; [도박에 미치면 고칠 약도 없다잖아.] [이 시간까지 죽치고 있는 놈들은 도박하기 위해서라면 제 마누라라도 팔 말종들이야.]

건달1; [머 저런 인간들 덕분에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들이 먹고 살긴 하지.] 히죽

건달2; [어차피 어디 가서든 재산 몽땅 꼴아 박을 놈들이지.] [기왕이면 우리 단지회(斷指會)의 도장(賭場;도박장)에 풀어주면 감사할 뿐이야.] 히죽 웃으며 왼손을 들어 보이는데 새끼손가락이 없다. 단지회라는 흑사회 조직의 상징이다.

 

#5>

어둑한 실내. 도박에 열중하는 사람들. 마작 하는 자들도 있고 카드나 주사위 노름을 하는 자들도 있고. 투패(3센티에 길이 20센티 정도 되는 얇은 나무판에 새겨진 숫자와 글로 하는 카드놀이와 비슷한 규칙의 도박)를 하는 자들도 있다. 여기 저기 건달들이 앉아서 도박꾼들을 감시하고. 야한 차림의 여자들이 도박꾼들의 시중을 들기도 한다. 요즘의 카지노 같은 분위기.

한쪽 구석에는 교활한 인상의 사내가 탁자를 앞에 두고 졸고 있다. 이자가 도박장의 책임자로 이름은 정필이다. 정필의 책상에는 돈다발과 함께 서류들이 널려있다.

어느 원형 탁자. 다섯 명의 사내들이 앉아서 투패 도박을 한다. 100장 정도 되는 패를 탁자 중앙에 쌓아놓고 차례로 한 장씩 가져와 다섯 장으로 승부하는 도박이다.

다섯 명 중 한명은 초췌한 인상의 중년인. 원래는 잘 생겼지만 페인처럼 눈이 퀭하다. 청풍의 아버지인 이산하. 직전 작품 <신마유희>의 이산하 캐릭터를 변형. 이때 나이는 40살 정도인데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전다. 이산하 옆의 기둥에는 지팡이가 하나 기대어 있다. 다리 불편한 사람들이 겨드랑이에 끼워서 쓰는 목발 형태의 지팡이다.

이산하와 함께 도박하는 자들은 뚱보 상인, 껄렁거리는 인상의 건달, 투박한 인상의 나무꾼, 꼬장꼬장한 노인등의 분위기인 자들이 순서대로 앉았다. 이산하 좌우에 상인과 노인이 앉은 모습.

탁자 가운데에는 뒤집어놓은 백여 장의 패와 함께 지폐와 은자, 동전등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패를 쪼고 있는 다섯 사람

패를 쪼는 이산하. 긴장

맨 앞의 패에는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고.

! 맨 뒤의 패를 위로 끌어올려 확인하는 이산하

마지막 패에는 <朱雀>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산하; (주작(朱雀)!) 흥분하여 눈이 치떠지고.

그런 이산하를 곁눈질로 보며 히죽 웃는 건달. 패를 쪼는 자세인데 상인을 사이에 두고 이산하와 나란히 앉아있다.

건달이 쪼는 마지막 패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때

상인; [니미...] 패를 쪼며 오만상. 이놈 앞에 돈과 지폐가 가장 많이 있다.

상인; [뭐 이런 개패만 주구장창 걸리는 건가?] ! 말하면서 발로 옆에 앉은 건달을 치고

건달; [거 죽는 소리 좀 그만합시다.] 패를 쪼는 자세로 궁시렁 거리고

건달;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소.] 툭툭! 발로 상인 발 옆의 바닥을 친다. 신호를 주고받는 것

나무꾼; [밤새 *됐다는 말만 해대서 조()대인의 말은 믿을 수가 없소.] 동조하며 패를 쪼고

노인; [하지만 노부는 누구와 달리 솔직하지. 이번 판은 죽었어.] ! 들고 있던 다섯 장의 패를 바닥에 던지고

건달; [()형은 어쩌시겠소?] 심각한 표정으로 마지막 패를 쪼는 이산하에게

이산하; [... 날도 샜는데 이기든 지든 그만 일어나야겠소. 나머지 열두 냥 모두 걸었소.] ! 자기 앞에 있던 은자와 동전을 앞으로 밀어 넣고. 이산하가 밑천이 가장 적다.

<저 호구!> <이번에는 높은 족보가 들어온 게 훤히 보이잖아!> 노인과 나무꾼이 티 안내며 비웃고. 이어

나무꾼; [이 족보 갖고 죽긴 아깝고...] 노인 다음 자리에 앉은 나무꾼이 오른손으로 자기 앞의 돈을 세고.

나무꾼; [받기만 했소.] ! 돈을 밀어 넣고

이산하; (한 놈 걸렸고...) 좋아 죽으려 하고

건달; [판 접는다는데 확인은 해주는 게 꾼의 도리겠지?] [나도 받기만 하겠소.] ! ! 은자 몇 개를 판에 던지고

이산하; (됐어.) 좋아 죽으려 하고

이산하; (두 놈이 받으면서 판돈이 백 냥을 넘겼다. 덕분에 오늘 밤에는 잃지 않게 되었다.) 안도할 때.

건달; [조대인은 어쩔 거요?] 자기 옆의 건달에게 말하며 탁자 아래로 손을 내밀고.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내미는데 패가 하나 들려있다.

상인; [어디 보자...] 판에 쌓인 돈을 보는 척 하고

상인; [얼마나 되려나? 대충 백 냥 정도인가?] 패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돈을 뒤적이고. 왼손은 탁자 모서리 밖으로 향하게 하면서. 그러자

이산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돈을 세는 상인의 오른손을 향하고. 그때

! 왼손에 들고 있는 패 중 하나를 자연스럽게 탁자 아래로 떨구는 상인.

건달; [모두 몸을 사려서 판돈이 얼마 안되는구만.] ! 동시에 자기 손에 든 패를 위로 튕기는 건달

! ! 서로 패를 주고받는 건달과 상인의 손

상인; [백냥이 적은 돈은 아니지.] [백냥이면 식구 네 명인 가족이 일 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잖은가?] 판돈을 뒤적이며

건달; [가난뱅이들에게야 큰돈이겠지.] [안 그렇소 이형?] 히죽 웃으며 이산하를 보고

이산하; [조대인, 죽을 건지 살 건지 어서 결정하시오.] 건달은 상대하지 않고 자기 옆의 상인을 재촉하고. 하지만 이미 상인은 건달이 건네준 패로 바꾼 후고

상인; [! 오랜만에 어렵게 족보를 만들었는데 죽긴 좀 그렇군.] 고민하는 척하다가.

상인; [나도 오늘은 그만 끝내야겠어.] 오른손으로 자기 앞에 놓인 상당히 많은 돈과 지폐를 앞으로 민다.

상인; [오백 냥이 좀 넘지만 오백 냥으로 쳐서 전부 걸도록 하지.] 히죽

이산하; [... 오백 냥!] 경악하고

나무꾼; [허어! 오늘 밤에 벌어진 판 중에서 최대로구만.]

노인; [오백 냥이면 그럴 듯한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을 거금인데...] [조대인 족보도 상당히 강한 모양이구만.]

건달; [이번 판만 먹으면 이형은 지난 한달 간 잃은 돈의 몇 배를 챙기겠어.] 히죽 웃으며 이산하를 보고. 이산하를 부축인다. 하지만

이산하; [그러게나 말이오.] 난감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고

상인; [날도 밝아오는 데 빨리 결정들 하셔.] 느긋하게 둘러보고. 그러자

건달; [난 죽었소.] ! 패를 바닥에 던지고

나무꾼; [나도 낄 판이 아니로구만.] 역시 패를 던지고

상인; [이형은 어쩌시겠소?] 이산하를 보고

이산하; [어쩌다니...] [방금 전에 전부 걸어서 더는 돈이 없는 거 알지 않소?] 울상

상인; [그럼 사전에 약속한 대로 이형은 날 이겨도 이번 판에 건 돈만큼 가져가는 거요.] [패 깝시다.] 패를 까려 하고

이산하;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급히 손을 흔들어 저지하고

상인; [할 말 있으시오?] 패를 까려던 상인 멈칫! 하고

이산하; [()총관!] [나 좀 봅시다.] 구석에 앉아있던 정필에게 손을 들고

잠에서 깨는 정필.

정필; [왜 그러시오 손님?] 하품하며 다가오고

이산하; [판돈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오백 냥만 대부(貸付) 해주시오.] 말하며 자기 패를 정필에게 내밀고

정필; [어디 보자.] 패를 받아서 확인하고

이산하; [... 그 정도면 충분히 승부를 걸만하지 않겠소?] 비굴하고 간절한 표정

정필; [그렇긴 하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건데...] 패를 다시 이산하에게 돌려주며 난색을 표하고

이산하; [차용증을 쓰라면 쓰겠소. 제발 대부를 해주시오.] 간절하게. 그러자

정필;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패도 잘 떴으니 편의를 봐줘야겠군.] 뒤를 향해 손짓하고. 그자의 뒤에는 건달 한 놈이 서류철과 연필을 갖고 온다.

이산하; [고맙소. 정말 고맙소 총관!] 굽신굽신. 그 사이에 건달은 서류철에 끼운 종이와 일종의 연필인 지필묵을 이산하 앞에 내려놓는다.

정필; [손님에게 마땅히 걸 담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대로 차용증을 쓰시오.]

이산하; [그럽시다.] 지필묵을 잡고 글 쓸 준비하고

정필; [나 이산하(李山河)는 대경도장(大慶賭場)으로부터 일금 오백 냥을 하루 일푼의 이자로 빌리며...] 말하고

그걸 받아쓰는 이산하

<저 어리석은 놈!> <하다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흑사회(黑社會)의 돈을 빌리는구만.> <못 갚을 경우에는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도 나락으로 떨어질 텐데...> 주변에서 도박하는 놈들 힐끔거리며 혀를 차고

건달들은 히죽거리며 보고

정필; [사흘 내로 변제하지 못할 경우 딸 이진진(李眞眞)의 소유권을 대경도장에 넘길 것을 약속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이산하; [... 뭐요?] 기겁하며 돌아보고

<드디어 나왔다!> <흑사회 놈들이 남의 집 귀한 딸을 뺏는 수단!> <이산하라는 놈 딸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전부터 노리고 있었구만.> <이진진이란 계집이 절색인 모양이여.> 도박꾼들 힐끔거리고. 혀를 차는 놈들도 있고

이산하; [... 이보시오 정총관!] [딸을 담보로 걸라니...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분노

정필; [심하게 느껴지시오?] 웃고

이산하; [잠깐 돈 빌리는 건데 못 갚을 경우 딸의 소유권을 넘긴다는 조항을 넣는 경우가 어디 있소?]

정필; [마음이 상하셨구려.] [알겠소!] 이산하 앞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들고. 당황하는 이산하

정필; [오백 냥 대부 건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빈정 상하게 해드렸다면 사과하겠소이다.] 정중하게 고개 숙이고.

이산하; [... 그게...] 당황하고

정필; [판돈도 마르신 것 같은데 안녕히 가시오.] [얘들아! 손님 가신다.] 말하며 돌아서고. 그때

이산하; [... 기다려주시오 정총관.] 급히 일어나며 정필의 소매를 잡고

정필; [하실 말씀이 남으셨소?] 돌아보며 무표정

이산하; [... 그러니까...] 탁자에 올려놓은 자기 패를 보고. 그러다가

이산하; (저 패가 질 리 없다.) + [알겠소!] 결심

이산하; [총관이 원하는 대로 차용증을 쓸 테니 대부 해주시오.] 애원하고

<결국...> <쯧쯧! 또 한 집안 풍비박산 나겠구만.> 혀를 차는 도박꾼들

정필;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군.] 히죽 웃으며 서류철을 다시 이산하에게 주고

이산하; [... 고맙소.] 서류철을 받아서 자리에 앉고

이산하; [은혜는 잊지 않겠소.] 종이에 글을 적는다.

정필; (은혜라...) 히죽 웃으며 보는 정필

이산하; [여기 있소.] 서류철을 다시 내밀고. 받는 정필

정필; [어디 보자.] 읽고

정필; [내용은 정확하고 수결(手決;싸인)까지 하셨군. 좋소.]

정필; [이분 손님께 오백 냥을 드려라.] 작은 상자에 은자를 가득 담아서 들고 온 건달3에게 말하고

건달3; [예 총관님!] 대답하며 다가와

건달3; [은자로 오백 냥이오. 확인해보시오.] 이산하에게 상자를 건네주는 그자

이산하; [고맙소 총관.] 상자를 받으며 정필에게 인사하고

이산하; [조대인의 오백 냥, 받았소.] 상자를 호기롭게 탁자 중앙으로 밀어 넣고.

상인; [얼마나 대단한 족보이기에 차용까지 하면서 들어오셨을까?] 자기 패를 다시 보며 웃고

이산하; [사신주(四神柱)!] 촤악! 자기 패를 바닥에 호기롭게 깐다.

이산하가 깐 다섯 개의 패에는 <朱雀> <> <> <玄武>등의 글이 적혀 있다. 마지막 한 개의 패에는 <>이란 숫자가 적혀있고

[오오! 사신주!] [투패(鬪牌)에서 서열이위의 족보가 떴다.] [저런 강패를 쥐었으니 딸까지 담보로 걸고 돈을 빌렸지.] [말 그대로 도박에 성공했구만.] 구경꾼들 환호. 다른 자리의 도박꾼들까지 몰려와서 보고 있고

이산하; (널 담보로 건 아비를 용서해라 진진아.) 거만하게 웃고

이산하; (하지만 아비가 질 수가 없는 도박이었다.) (사신주는 오직 투패의 최고 족보인 오행륜(五行輪)에게만 질뿐이니...) + [!] 생각하다가 눈 부릅뜨고

상인이 히죽 웃으며 패를 깔려고 한다.

이산하; (... 설마!) 경악. 숨이 멎는 표정을 지을 때

상인; [아깝게 되었소 이형!] 촤악! 자기 패를 깐다

<오행륜!> ! 모두의 경악을 배경으로 상인의 패를 보여준다. <> <> <> <> <>의 글이 적혀있다.

[나왔다!] [투패의 무상(無上) 족보 오행륜이다!] 사람들 환호하고. 그 배경으로 벌떡 일어나는 이산하.

상인; [오백 냥, 잘 먹겠소!] ! 두 손으로 판돈을 끌어 모으고

이산하와 함께 도박한 건달과 정필등의 의미심장한 웃음

이산하; (... 안돼!) 비틀. 사색

<아비를 용서해라 진진(眞眞)!> 털썩! 넋이 나가 의자에 주저앉는 이산하를 배경으로 나레이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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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약(靈藥)을 물처럼 마시다.

 

 

원래 강유의 내공은 이십 년 정도 수위였다.

그리 대단하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이십 년 수위의 내공도 강유의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 년 동안 쉬지 않고 면벽수련을 해야 쌓을 수 있는 정도의 내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림에서는 일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고 오직 면벽수련만 육십 년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에는 몇 갑자의 내공을 지닌 고수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세 가지 경우다

 

첫째, 누군가에게서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내공을 이전 받는 것이다.

대개의 명문대파에서는 전대고수가 죽음이나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필생 내공을 후손들에게 전수해준다.

다만 개정대법은 효율이 낮아서 전수해주는 내공중 열에 하나도 흡수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선대가 이전해주는 약간의 내공이나마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명문대파들이 대대로 세력을 유지해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가 개정대법의 존재다.

 

두 번째는 내공의 증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만들어주는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이 있다.

특별한 무공을 수련하면 남들보다 몇 배, 심하면 몇 십 배 빠르게 내공이 늘어날 수 있다.

무림인들이 신공절기를 얻기 위해 목을 매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靈藥)의 힘을 비는 것이다.

공청석유(空靑石乳), 자부현청(紫府玄淸), 인형삼왕(人形蔘王),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화리내단(火鯉內丹), 금구내단(金龜內丹), 이무기와 용의 쓸개나 내단, 골수...

대자연의 기운과 세월의 힘이 만들어낸 이런 영약들을 복용하면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단순히 내공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영약을 얻는 것은 기연(奇緣)을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유는 어렸을 때부터 타복과 함께 안탕산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산삼이나 오래 묵은 하수오등을 캐서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된 강유의 내공이 이십 년 수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헌데 강유의 현재 내공 수위는 일갑자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단 시간 내에 어떻게 내공이 세 배 이상으로 증진할 수 있었을까?

원인은 강유의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그 주전자는 술이나 물 한 되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주전자에는 우윳빛의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진상파는 강유에게 그 주전자를 주며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되니 마시라고 했었다.

목도 마르고 해서 강유는 별 생각없이 주전자의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었다.

강유가 우윳빛의 액체를 물처럼 마시고 나자 진상파가 미소 지으면서 말했었다.

사실 그 주전자에 담겨있던 것은 공청석유였답니다.”

 

* * *

 

황금성 개봉분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칠 층짜리 탑이다.

장원의 정 중앙에 자리한 그 탑의 용도는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칠층탑의 맨 꼭대기 층에는 네 명의 백팔금차가 각 방향의 창가에 서서 장원 안팍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고한다.”

계단을 통해서 철관음이 칠층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단장님...”

네 방향을 감시하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고개만 옆으로 돌려 철관음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상황이냐?”

철관음은 장원의 정문쪽을 감시하고 있는 백팔금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예상하신 대로 제왕성의 인간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바글거리고 있습니다.”

석부용(石芙蓉)이라는 별호를 지닌 백팔금차가 시선을 장원 밖에 둔 채 대답했다.

철관음은 석부용 옆에 서서 장원의 정문 밖을 살펴보았다.

황금성 개봉분점은 번화가에 자리한 탓에 밤이 깊었음에도 주변이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다.

헌데 상점가의 골목골목마다 숨듯이 서서 장원쪽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물론 그자들은 제왕성 개봉분타 소속의 무사들이다.

간간히 철위사와 동위사들도 그자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눈에 띈다.

중상을 입었던 독두태보까지 잠깐 얼굴을 비춘 후 다시 모습을 숨겼습니다.”

석부용이 장원 정면의 객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두태보는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객잔에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강공자가 제왕성 인간들의 이목에 감지되지 않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철관음은 석부용이 가리키는 객잔을 보며 물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지 않을런지요?”

석부용이 철관음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철관음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두태보는 제왕성으로 지원을 요청했을 게 분명하다. 은위사나 금위사들까지 몰려오면 태상호법님이 계신다 해도 끝까지 강공자를 지켜줄 수는 없다.)

철관음의 미간이 모아졌다.

가능한 빨리 강유를 개봉지점 밖으로 탈출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 *

 

후우...”

강유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공청석유를 마신 후 거푸 삼주천(三周天) 운기조식을 한 후였다.

(실로 대단하구나.)

정신을 차린 강유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내상과 외상이 말끔히 나은 것은 물론이고 내공이 일갑자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증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몸속의 경맥과 혈도에는 미처 내공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막대한 잠경(潛勁)이 도사리고 있다.

한 되나 되는 공천석유를 물처럼 마신 결과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공청석유를 한 모금만 마시면 되살아난다.

무림인이라면 십 년 동안 면벽수련 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헌데 그 귀한 공청석유를 강유는 한 되 가량이나 물 마시듯 마셔버렸었다.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가득 들어있던 것이 공청석유라는 걸 알았다면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릉의 본점 뿐 아니라 황금성의 중요한 분점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절세의 영약들을 상비해두고 있다.

강유가 마신 공청석유도 황금성이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 구한 것이었다.

(돈이라면 구하지 못하는 게 없다더니만...)

새삼 황금의 힘에 놀라는 강유였다.

강유는 엉겁결에 마신 공청석유의 약효를 극히 일부만 내공으로 만든 상태다.

공청석유의 약효는 꾸준히 내공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강유의 몸은 어지간한 독에는 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공청석유의 약효는 무궁무진하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내공이 모자라서 패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유는 후유증이 심한 마검칠식도 무리없이 펼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공이 심후해진 데다가 경맥도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튼튼해졌기 때문이다.

(황금성의 성주를 구해준 대가를 좀 과하게 받은 느낌이 든다.)

강유가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연공관의 문 밖에서 누군가의 들리는 음성이 들렸다.

(진상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린 강유는 급히 만년한옥의 탁자에서 내려섰다.

! 들어오십시오.”

강유는 서둘러 책상 위에 준비되어 있는 새 옷을 상체에 걸치며 대답했다.

실례하겠어요.”

덜컹!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연공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 열어주는 철문 밖에는 진상파가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서있었다.

카아!

진상파의 품에 안긴 섬전초가 가자미눈으로 강유를 흘겨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밧줄 대신 보석이 박힌 화려한 목걸이를 차고 있는 그놈은 여전히 강유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터면 강유에 의해 산 채로 불에 구워져 야식이 될 뻔 했었다.

영물이니만큼 원한도 쉽게 잊지 않는 것이다.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했던 말과 달리 진상파는 연공관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철문 밖에 서서 물었다.

귀한 영약을 주신 덕분에 내상이 완치되었을 뿐 아니라 내공까지 몇 배로 증진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강소협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만분지일도 안되는 것이었으니 과례(過禮)는 거두어주세요.”

강유가 포권으로 사례(謝禮)하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겸양했다.

같이 가시면서 말씀 나누도록 하지요.”

이어 진상파는 옆으로 물러서며 함께 가기를 청했다.

...”

강유는 대답하며 연공관을 나섰다.

 

연공관 밖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등(油燈)이 밝혀져 있는 복도다.

지하에 나 있는 그 복도를 진상파가 앞장서서 걷고 강유가 따라갔다.

뒤쪽에서는 철관음이 철문을 닫은 후 따라온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희 개봉분점은 제왕성에 의해 물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예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조신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강유는 제왕성의 인간들이 황금성과 척을 지면서까지 개봉분점을 포위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느덧 제왕성의 목표는 진상파가 아니라 강유 자신이 되어버렸다.

무후 영청공주를 죽인 범인과 관련이 있는 자신을 반드시 잡으려 드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제가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폐라고 하실 것도 없어요. 비록 제왕성의 무력이 대단하긴 해도 대놓고 저희 황금성을 적대하진 못하니까요.”

강유가 미안해했지만 진상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돈의 힘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지.)

강유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상파가 결혼식 전날 밤에 야반도주하면서 혼담은 깨어졌다.

제왕성으로서는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그렇다고 황금성을 핍박하진 못한다.

비록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과 원수가 되면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제왕성의 진짜 고수들이 도착하면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 강소협의 신병을 확보하려들 가능성은 있어요. 강소협께서 서둘러 포위망을 빠져나가셔야만 하는 이유랍니다.”

혹시 이 밀로(密路)...?”

유사시에 개봉성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 만들어놓은 비밀통로랍니다.”

 

황금성이 개봉분점으로 삼고 있는 장원은 송나라, 정확히는 북송(北宋) 시절에 지어졌다.

한족(漢族)이 세운 그 어느 왕조보다 허약했던 북송은 수시로 외침(外侵)을 당했었다.

먼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시달렸고 뒤이어 흥기한 여진족의 금()나라에게는 황제가 잡혀가는 수모까지 당했었다.

나라의 힘을 믿을 수 없게 된 유력자들은 스스로 보신책을 마련하는데 골몰했다.

지하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대피시설을 마련하거나 개봉이 포위당할 경우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만든 것이다.

강유가 상처를 치료한 연공관과 지금 지나고 있는 복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밀통로일 뿐 아니라 이곳은 값나가는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수장고(守藏庫)이기도 해요.”

진상파는 복도에 일정 간격으로 달려있는 철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내상을 치료하던 연공관에는 무공비급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 저 철문들 안쪽에는 황금성이 벌어들인 재물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강유가 그 철문들을 보며 생각할 때였다.

여기에 잠깐 들렸다 가도록 해요. 강소협께 드릴 게 있어요.”

진상파는 어떤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철관음이 서둘러 다가와 철문을 열었다.

철문에는 <武庫>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고(武庫)... 병기고인가?)

덜컹!

강유가 생각할 때 철관음에 의해 철문이 열렸다.

연공관의 경우처럼 철문 안쪽은 그리 어둡지 않다.

(역시...)

진상파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족히 백 평은 됨직한 넓은 밀실에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 , , 철퇴, , 활 등등 각가지 형태의 무기들 뿐 아니라 갑옷과 투구, 방패등 호신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양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견문이 그리 넓다고 할 수 없는 강유가 보기에도 이 밀실에 보관되어 있는 무기들 중 평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짐작하셨겠지만 이곳에 수장되어 있는 병장기들은 무림인이라면 꿈에라도 얻기를 원하는 신병이기들이랍니다.”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시렁들 사이를 지나며 진상파가 말했다.

고대 이래로 화북(華北) 지방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화북 지방에서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만들어지거나 유입되었다.

그 병장기들 중에서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거나 위력이 뛰어난 것들은 대부분 황금성으로 흘러들어왔다.

신병이기들의 값을 제대로 쳐주는 곳은 황금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봉 뿐 아니라 낙양(洛陽), 서안(西安)등 오래 된 도시에 자리한 황금성 분점들은 대량의 신병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보관하고 있는 신병이기들의 양과 질에서는 화북지방의 분점들이 금릉에 자리한 황금성 본점을 압도한다.

소협의 검은 독두태보와 싸우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버렸지요?”

이윽고 진상파는 무고의 맨 안쪽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독두태보의 장력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제가 사용한 검법이 검에 무리를 준 탓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검을 대신할 무기를 드리고 싶으니 골라보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물러서며 권했다.

진상파와 강유의 앞쪽에는 무고 내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습기를 막기 위해 숯과 소금을 채워 넣은 두꺼운 벽체가 삼면의 벽뿐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 안쪽 벽에는 백여 자루의 무기들이 걸려있다.

또 벽 앞쪽에는 철제 탁자가 놓여있는데 그 위에는 낡은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한눈에 봐도 무공비급들이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은 특히 귀한 신병이기들이겠습니다.”

강유는 벽에 걸려있는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잘 보셨어요.”

진상파는 섬전초를 탁자에 내려놓고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 한 자루를 벽에서 떼어냈다. 칠보(七寶)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그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검이다.

이 검의 이름은 소협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진상파는 보검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칼집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보검의 손잡이에는 옛날 글씨체로 <干將>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간장(干將)!”

보검의 손잡이, 즉 검병(劍柄)에 새겨진 그 글을 판독한 강유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 혹시 이 검이...”

보검을 받아든 강유의 두 손이 흥분으로 벌벌 떨렸다.

검법을 익힌 처지다 보니 뛰어난 보검을 만나면 자제하기가 힘든 것이다.

춘추오대신검(春秋五大神劍)중 하나이며 또 다른 보검 막야(莫耶)와는 부부지간이기도 한 간장이랍니다.”

강유가 만난 이래 처음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상파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 속의 간장, 막야가 실제로 존재했군요.”

강유는 좀체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하며 보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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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삼녀삼심(三女三心)

 

 

퍼억!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에 떨어진 예이연의 모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피가 흐르기 시작해서 삽시에 주변 바닥이 붉게 변해 버렸다.

진룡은 검으로 땅을 가리킨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별을 가린 구름이 은하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위사들이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짓쳐 들어오지 못했다.

스스스스스...

고요한 중에도 진룡의 몸 주위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좌중은 진룡이 뿜어내는 그 살기에 압도당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으하하하!”

그러던 어느 순간 내공을 실은 엄청난 웃음소리와 함께 사자검이 대리석 바닥을 쳤다,

!

대리석 바닥에 검이 닫았다 싶은 순간 진룡의 몸은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사자검이 닿았던 대리석바닥은 푸석해져서 그의 검에 실린 공력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위사들은 그를 추격할 생각조차도 못했다.

 

***

 

궁궐을 빠져 나온 진룡은 미리 알아 두었던 예지운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그의 얼굴은 바람에 밀리는 눈물로 얼룩졌다.

 

달리면서 어느 정도 진정된 감정으로 예지운의 집으로 넘어 들어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달리면서 가장 큰 본채를 찾았다.

이윽고 그 건물에 도착해서 창문 밑에 몸을 낮추고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지운의 거처가 틀림없었다.

진룡은 거리낌 없이 방문으로 걸어가 덜컹 열었다.

피가 묻은 사자검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었고 살짝 베어진 그의 가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예지운이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런 자객에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린 검을 잡았다.

진룡은 저지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을 베고 오는 길이다."

자르듯이 내뱉자 예지운은 그제야 상대가 진룡임을 알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진룡도 파양호대전 때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떠는 것도 잠깐, 예지운은 진룡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코웃음을 쳤다.

"내 동생이 그렇게 약한 줄 아느냐? 아비에게 쫓겨난 어리석은 놈아! 자 오너라! 단칼에 죽여주마."

"산산은 어디에 있느냐?"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진룡이 물었다.

"그년은 내가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잡소리 말고 어서 덤벼라."

예지운의 거친 말에도 한번 크게 좌절을 겪은 진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바닥을 가리키고 있던 진룡의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크악!"

순간 예지운의 왼쪽 손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사자검은 언제 휘둘러졌는지 그자의 손목을 자르고 다시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진룡의 검공(劍功)에 예지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룡의 무위(武威)는 일 개 장군에 불과했던 그자로서는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올라가는 사자검을 보면서 예지운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예지운이 들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진룡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런 진룡이 거인처럼 느껴진 예지운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였다.

천천히 올라가 허공을 가리키던 검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예지운의 오른쪽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팍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지운의 짝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새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공포와 불행을 맛보게 해주겠다!"

진룡은 단호하게 내뱉으며 땅을 가리키고 있던 검을 다시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여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그들만의 공간을 부수며 들려왔다.

"... 오라버니?"

산산이었다.

 

털썩!

산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지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지운이 죽였다고 한 누이동생 산산이 문간에 서있었다.

"너는 살아 있었구나."

진룡은 산산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산은 물러서면서 물었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죽었나요?"

"아직 죽지 않았다. 쉽게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진룡은 인간 마음의 추악함을 경험한지라 어느 정도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리며 다시 예지운에게 돌아섰다.

"그를... 그를 죽이지 마셔요."

산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진룡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산산은 진룡의 옆을 지나 예지운에게로 달려가더니 잘려져 피가 흐르는 그의 손목을 치마자락으로 감싸고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진룡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산산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떨면서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 저는 이 사람의 아기를 가졌어요."

진룡이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낸 그 원수를 살려 주어야 한단 말이냐?"

가슴 속에서는 격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

"그자가 작은 이득을 위해 무거운 신의(信義)를 배반한 걸 아느냐?"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음을 아느냐?"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너를 능욕했음을 잊었단 말이냐?"

"잊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그를 살려주어야 한단 말이냐?"

역시 당연하다는 듯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진룡은 기가 막히고 맥이 탁 풀렸다.

예지운의 앞을 산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들어 올리던 검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옆에 있는 탁자를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파파파팍!

책과 찻주전자는 허공으로 튕겨 올랐고 탁자는 산산조각이 나며 주저앉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해 호흡마저 고르지 못하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며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이동생 산산이 예지운이 떨어뜨린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룡의 가슴을 찌른 그 검은 예이연이 낸 상처를 다시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산산이 찌른 검인지라 진룡의 내공에 막혀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진룡의 가슴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네가... 네가...!"

진룡의 말이 떨려나왔다.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정말 찌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겁에 질린 산산의 음성은 이미 진룡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

진룡은 용의 울음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뛰쳐나와서 방향을 분간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탈진하여 이름 모를 산속에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풀냄새가 진룡의 코를 자극했다.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 십 년을 산 것 만 같았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산화... 산화... 우리 산화를 데려 와야지."

진룡은 천근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

 

산에서 내려오다가 작은 마을이 있어 물어 보았더니 마을 이름은 백가촌(白家村)이지만 백()씨와 이()씨가 같이 살고 있다 한다.

금릉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훗날 이곳에서 백남빈 부자와 이탁이 태어났다.

 

***

 

밥도 넘어가지 않고 술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물로 목을 축이며 진룡은 터벅터벅 걸어 이틀 만에야 금릉에 다시 돌아왔다.

위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예귀비(藝貴妃)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 하였다.

그러나 금릉으로 들어오는 그를 범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그의 모습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산화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냉기가 확 감돌았다.

들보에 산화가 목을 매어 죽은 채 늘어져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산화는 진룡이 궁궐로 떠날 때 잠든 척 했으나, 사실은 떠나는 오라버니를 뒤에서 훔쳐보며 안녕을 고했었다.

오라버니가 떠나자 산화는 허리띠를 들보에 걸고 목을 맸다. 오빠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비록 어리지만 공주로서 예교(禮敎)를 배우고 자란 산화였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가 되살아난 이성(理性)은 더 이상 그녀가 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막내 누이는 죽었고 사랑했던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또 다른 누이 산산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진룡은 조카들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평곡에는 또 하나의 죽음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인 스승 정사초의 죽음이었다.

팔십이 세의 나이이니 살 만큼 산 그는 진룡이 돌아 온 직후 죽었다.

정사초는 죽기 전에 진룡에게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후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우리들 사자검의 전인은 세상에서 환영받는 이가 없구나. 너의 신세도 처량하다마는 네 사조들도 절세의 총명을 지니고도 세상에서 그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사자검의 전인은 마음이 세상을 앞서 가니 세상이 알아주기 어려운 때문이니라. 다 시대를 앞서 태어난 탓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슬픔이 너의 정신을 흐트릴까 두렵구나."

 

그 후 진룡은 창평곡에서 사자검을 익히고 시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살며 두 번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조들과 달리 사자검을 익혀도 세상을 구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서 전인을 구하여 사자검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인도 두지 않고 혼자서 창평곡에 쓸쓸하게 살다가 사자검을 녹지에 던진 후 죽었다.

그의 검결은 고독과 허무가 깊이 베여있고 염세(厭世)의 분위기를 절로 풍기게 된 것이다.

 

***

 

진룡의 애절한 사연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룡의 원수인 예지운은 그후로도 벼슬을 계속하여 몇 대에 걸쳐 부귀를 누렸던 것을 백남빈은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사자검의 전인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그 뜻이 꺾인단 말인가? 정말 정사초 사조의 말마따나 세상을 앞서 살아가는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백남빈은 탄식했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우측, 녹지의 동쪽 절벽 앞에 흰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난공불락의 절진으로 둘러쳐진 창평곡에 누군가가 들어 온 것이다.

히히히힝!

흑왕이 나타난 사람을 향해 길게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형부!"

강미루도 벌떡 일어나 뛰어가며 소리쳤다.

단번에 동쪽 절벽 아래까지 달려간 강미루는 그 인물의 품에 거리낌없이 안겼다.

흰 옷을 입은 그 인물은 바로 출신내력이 신비에 싸인 대려장의 제일고수이자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인 광평객 신가람이었다.

그가 마침내 보름 만에 미혼, 산백, 박령의 삼대절진을 뚫고 창평곡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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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사회생

 

 

종유동굴의 다른 곳과 달리 우윳빛 반석과 그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에는 얼음이 덮여 있지 않다.

극한의 냉기는 얼음조차 증발시켜버린다.

반석도 그렇지만 흑의여인의 몸은 너무 차가워 얼음이 쌓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이검한은 헐떡이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흑의여인이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한기의 근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흑의여인이 누워있는 우윳빛 반석에서도 살을 에는 냉기가 느껴지긴 한다. 아마도 한옥(寒玉)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우윳빛 반석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냉기도 흑의여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한기에 비하면 봄바람 정도로 느껴진다.

! !

이검한이 반석으로 다가감에 따라 공기 중에서 쇠가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난다. 극한의 냉기가 흑의여인의 몸 주변에 첩첩이 쌓여 있다가 요동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꺼운 얼음으로 덮어버린 막대한 양의 냉기는 바로 이 흑의여인의 그리 크지 않은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허억!”

마침내 반석 옆에 이른 이검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반석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끄으윽!”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 이검한은 마치 얼음물에 뛰어든 듯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흑의여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극음한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연마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흑의여인의 몸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몸 근처 일 장 안으로 접근만 해도 지독한 냉기에 침습당해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버린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한 이검한만은 예외였다. 그의 몸속에는 활화산의 용암같은 열기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치치!

이검한이 흑의여인을 끌어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확 일어난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처럼 변한 이검한의 몸과 얼음보다 몇 배 더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이 닿으면서 주변의 공기가 응결하는 것이다.

쿠오오오!

이검한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열기는 반석 주변의 얼음들도 녹였고 그에 따라 수증기는 폭발적으로 짙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 아래 깔린 흑의여인의 몸도 수증기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검은색의 옷이 흠씬 젖어 피부에 달라붙자 흑의여인의 뇌쇄적인 육체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다.

크으... ...!”

흑의여인을 끌어안은 이검한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여체를 끌어안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검한의 몸 속은 여전히 펄펄 끓는 기름을 마신 듯한 초고열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화룡단정의 가공할 열독은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을 잠깐 끌어안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열독을 어떻게든 밖으로 배출해내야만 한다.

이검한은 살기 위해, 내장이 익어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 쳤다.

푸시시시!

두 사람의 맨살이 부벼지면서 달군 쇳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은 것같은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일어난다.

츠츠츠!

그와 함께 일어난 수증기는 급격히 짙어져 이제는 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오랜 세월 차가운 냉기만 흐르던 종유동굴은 삽시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검한의 몸에 고여 있던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고열은 맞닿고 문질러지는 살갗을 통해 흑의여인의 몸속으로 노도같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증기는 점점 더 짙어져서 마침내 드넓은 종유동굴을 가득 메우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체같이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이검한의 몸이 요동칠 때마다 축 늘어져 있던 흑의여인의 몸도 움찔 움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심지어 흑의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미약하지만 숨결이 토해지기까지 했다.

부활(復活)!

그렇다! 흑의여인은 오랜 가사상태(假死狀態)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흑의여인은 한 가지 술법(術法)을 스스로에게 걸어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다. 엄청난 냉기를 일으켜서 육신 뿐 아니라 혼백까지 얼려 시간의 해()를 극복해온 것이다.

다만 이 술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흑의여인 스스로는 술법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것이다.

누군가 용암처럼 뜨거운 양기를 그녀의 몸에 주입해주어야만 술법이 소멸된다.

그리고 흑의여인이 필요로 하는 막강한 양기는 이검한의 몸에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이검한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문질러대는 살갗을 통해 주입되고 있는 그 순양지기가 흑의여인의 얼어붙어 있던 피를 덥히고 순환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두근 두근

마침내 오랫동안 활동을 멈췄던 흑의여인의 심장이 다시 깨어나 온몸으로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윽! !”

그걸 알 리 없는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얼음보다 차가운 몸뚱이를 끌어안고 펄펄 끓는 피를 식히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휴우!”

어느 순간 흑의여인은 긴 숨을 토하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직후 흑의여인의 아미가 약간 모아졌다.

허억! ! 끄윽!”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형...?)

소년의 얼굴이 자신의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어떤 사내를 닮아서 흑의여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흑의여인은 상대가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가 스스로 가사상태에 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사형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없다. 살아있다 해도 어린 소년의 모습일 리도 없고...)

흑의여인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천기(天機)를 믿고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을 펼친 보람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건너 뛴 후 다시 한 번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을 감은 흑의여인의 얼굴로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그녀의 무공은 천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천기를 읽고 미래를 내다본 결과 자신이 술법을 펼쳐 스스로를 재우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무사히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있었지만 흑의여인은 자신이 읽은 천기를 믿고 가사상태에 들어갔었다. 회한과 부끄러움만 남은 당시의 삶을 단 하루도 이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엮인 모든 인연이 소멸된 후에 다시 삶을 이어갈 생각으로 긴긴 잠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에 성공한 것인데...

깨어나 보니 아직 어린 소년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형을 닮은 이 아이에 의해 부활한 것도 운명이겠지. 하지만 차마 부끄러워 다시 깨어난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구나.)

흑의여인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 이검한에게 몸을 맡겼다.

끄윽! 누나... ... 미안해!”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육체에 열독을 토해내며 죄책감에 헐떡였다.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몸뚱이의 주인이 전모 냉약빙인 것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에게 가장 가까운 여인은 냉약빙이다.

화룡단정의 열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상대가 냉약빙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자신을 키워온 냉약빙에게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이검한은 화룡단정의 열독을 해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의여인의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냉약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녀석이 날 누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흑의여인은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몸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정작 이 어린 놈은 자신을 다른 여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게 그 여자가 누군지 물어보기는커녕 차마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 전 시대의 인간인 자신이 어린 소년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도 부끄러운 때문이다. 과연 이검한에 의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이 흑의여인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

 

(꿈이었을까?)

이검한은 우윳빛 반석 위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깜빡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껍게 뒤덮고 있던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얼음뿐만이 아니었다.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 위에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검한 자신의 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내장을 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가 완전히 갈아 앉아있다.

그렇다고 화룡단정의 약효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전을 살펴보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잠력이 도사리고 있다. 양강의 성질을 지닌 그 잠력은 물론 화룡단정을 몸이 흡수하며 생긴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룡단정의 기운은 몸 밖으로 발산되는 열기와 함께 소멸되었어야 했다. 이검한이 도중에 정신을 잃어 화룡단정의 약효를 흡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화룡단정의 기운은 거의 손실됨이 없이 단전 속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다. 마치 누군가 화룡단정의 효능을 모아서 단전에 넣어준 것 같은 상황이다.

(만년한옥(萬年寒玉)인 것같은 이 반석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누워있었는데...)

이검한은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어 자신이 누워있는 반석을 돌아보았다.

물론 반석 위에는 이검한 혼자 누워있다.

맨살에 닿는 반석은 매끈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갑다.

이검한이 짐작하는 대로 이 반석은 만년한옥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 냉기가 모여 이루어진 게 한옥이다.

그 한옥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아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는 만년한옥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만년한옥에는 동정호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냉기가 농축되어 있다.

당연히 만년한옥은 옥중의 옥으로 불리며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이검한이 누워있는 크기 정도의 만년한옥이라면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수 있다.

이검한은 하마터면 자신을 태워죽일 뻔한 화룡단정의 열기를 다스려준 게 만년한옥의 묘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 이 종유동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낼 단서가...

 

있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반듯하게 누워있던 몸을 조금 움직이자 등쪽에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급히 일어나 보니 그리 두껍지 않은 상자 하나가 반석 중앙에 놓여있다.

두께는 한 치, 폭은 한 자, 길이는 한자 반 쯤 되는 납작한 상자인데 재질은 순수한 황금이다.

그 황금상자는 그리 두껍지 않아서 등에 깔고 누워있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이 반석 위에 누워있었던 여인이 남긴 것이다.)

딸칵!

무릎을 꿇은 이검한은 흥분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검한 자신이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흑의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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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교(魔敎)> .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음침한 계곡. 상당히 넓은 계곡에는 중세 유럽의 고성 같은 분위기의 성채가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 있다. 잡초가 무성하고. 도처에 마귀나 괴물의 조각들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다. 이곳이 마교의 총단이었다.

<한 때 천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사상 최강의 세력 마교는 십여 년 전에 멸망했다.> 폐허를 배경으로 나레이션

<마교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무림의 거의 모든 문파가 합세하여 결성한 무림맹(武林盟)과 마교 내부의 배신자들이었다.> 끄아아악! 폐허의 어디선가 비명이 들리고.

<비록 멸망했지만 마교가 뿌려놓은 공포는 여전히 악령처럼 무림을 뒤덮고 있었다.> 폐허의 끝. 절벽 아래 악마의 입 같은 형상의 동굴이 있다. 동굴 위에는 <天魔牢>라는 글이 크게 새겨져 있고. 수많은 부적이 붙여진 철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활짝 열려있다. 동굴 입구에는 얼굴에 복면을 쓴 무사들 몇 명이 서있다.

<천마(天魔)의 검은 손(墨掌)이 나타나는 날 마교에 빚을 진 자는 몰살을 면치 못한다는 저주와 함께...> [끄아아악!] 비명이 울리는 동굴 내부. 동굴 끝에서 들려온다.

[끄아아악!] 동굴의 끝, 정확히는 막다른 곳. 횃불이 밝혀진 가운데 어떤 사내에 대한 고문이 진행중이다. 전체적으로 원형의 광장 형태인데 입구 정면에는 높은 철문이 있다. 두 쪽으로 이루어진 철문에는 수많은 마귀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철문이 합쳐지는 부분의 지면으로부터 1.5미터쯤에 원형의 틈이 있다. 직경 15센티 정도의 고리가 끼워지게 된 형태. 그 원형의 틈에는 수평으로 흠이 있다. 무언가를 끼우고 돌리는 일종의 열쇠구멍이다.

광장 내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있고 그 의자에 엄숙한 표정의 노인이 앉아서 광장의 좌측을 보고 있다. 다른 작품의 섭장천. 이 작품에서도 이름은 철면무제 섭장천으로 무림맹의 맹주다. 이때 나이는 60살 정도. 아주 늙은 노인은 아니다.

섭장천 뒤쪽에는 머리가 유달리 큰 노인과 덩치가 큰 중년인이 서있다. 머리 큰 노인은 다른 작품의 쌍뇌마로나 쌍뇌신로. 이 작품에서는 쌍뇌신로로 표기. 덩치 큰 노인은 <신마유희>에 나온 섭패천 캐릭터. 이 작품에서도 이름은 섭패천. 섭장천의 사촌동생이다.

용무린; [끄아아악!] 비명 지르는 용무린. 20대 초반의 나이에 잘생긴 청년. 마교의 소교주인데 청풍 캐릭터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용무린은 섭장천 앞쪽에 놓인 철제의 고문용 의자에 팔 다리가 묶인 채 비명을 지른다. 상체는 벌거벗고 있는데 지독한 고문을 당해 상처투성이인데 용무린의 몸은 왼쪽은 얼어붙고 오른쪽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용무린 뒤에는 두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서있다. <신마유희>에 나온 무림맹 사신장중 용신장과 호신장이다. 이 작품에서도 용신장과 호신장으로 표기. 다만 이때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젊다. 입고 있는 옷에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용무린 앞에는 음침한 인상의 노인이 서서 용무린의 상태를 보고 있다. <마고천장>등 다른 작품의 <독심귀의> 캐릭터. 이 작품에서도 이름은 독심귀의. 정인군자가 아니라 괴짜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손에 유리병을 하나 들고 있다.

용무린; [끄으으윽!] 치치치! 츠츠츠! 몸의 한쪽은 얼어붙고 한쪽은 불덩이처럼 변한 채 고통에 떠는 용무린

독심귀의; [마교 소()교주 용무린(龍武吝)!] [음양독망(陰陽毒蟒)의 독혈(毒血)을 마신 기분이 어떠냐?] 음산하게 웃으며 용무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유리병을 들어 보인다. 유리병에는 걸쭉한 액체가 절반 쯤 들어있다.

독심귀의; [음양독망의 피를 마시면 몸의 반쪽은 얼음이 되고 반쪽은 숯이 되어버린다.]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푸시시! 츠츠츠! 반은 얼고 반은 타들어가는 용무린의 모습을 보며. 말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형당(刑堂) 당주 독심귀의(毒心鬼醫)>

독심귀의; [이 지옥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천마뢰(天魔牢)를 열 수 있는 열쇠 광명륜(光明輪)을 어디에 숨겼는지 자백해라.]

용무린; [... 헛된 꿈 꾸지 마라 늙은이!] 헉헉 대며 독심귀의를 노려보고

용무린; [내가 광명륜을 내놓길 바라느니 해가 서쪽에서 뜨길 바라는 게 나을 것이다.] 고통에 떨면서도 이를 갈고

독심귀의; [쯧쯧! 아무래도 음양독망의 독혈을 덜 먹인 것 같군.] 혀를 차며 용신장과 호신장에게 고개 짓을 하고. 그러자

! 호신장이 용무린의 머리채를 부여잡아 고개를 젖힌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독심귀의; [십여 년 전 마교가 궤멸당할 때 네놈은 용케 도망쳤었지.] 유리병 입구를 용무린의 입에 기울이고

독심귀의; [그랬는데 이제는 아비 구천마존(九天魔尊) 용백(龍伯) 곁으로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니 도와주도록 하마.] 주르르! 벌어진 용무린의 입에 유리병의 액체를 또 흘려 넣는다.

[끄륵!] 강제로 액체를 마시며 눈을 까뒤집는 용무린. 이어

쩌저적! 치치치! 용무린의 몸 반쪽은 얼음이 되고 반쪽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독심귀의; [기왕에 마시는 거 사양하지 말고 모두 마셔라.] 잔인하게 웃으며 유리병의 액체를 용무린의 입에 모두 부어넣고

용무린; [끄으으...]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몸의 반은 얼고 반은 타들어가면서

[...] 그걸 보며 무표정한 섭장천.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맹주 철면무제(鐵面武帝) 섭장천(葉長天)>

용무린; [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용무린. 독심귀의는 유리병을 다 비우고 물러섰고. 호신장은 여전히 용무린의 머리채를 뒤에서 잡고 있다.

!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는 섭장천의 양손에 힘이 들어간다.

쌍뇌신로; (맹주님은 심사가 복잡하시겠지.) 그걸 곁눈질로 보며 소리없이 한숨 쉬는 쌍뇌신로. 그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삼태상(三太相) 중 문()태상 쌍뇌신로(雙腦神老)>

쌍뇌신로; (비록 숙적인 마교의 소교주이지만 당신에게는 사위인 셈이니...) 침통한 표정을 짓고. 그때

섭패천; <독심귀의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찡그리며 전음으로 쌍뇌신로에게 말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삼태상중 무()태상 철신금강(鐵身金剛) 섭패천(葉覇天)>

섭패천; <저러다가 용가놈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광명륜을 찾아낼 방법이 없는데...> 난감해 하며 보고. 호신장은 용무린의 머리채를 놓고 물러선다.

쌍뇌신로; <독심귀의가 알아서 조절할 거요.> 전음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조금 젓고.

쌍뇌신로; <어떻게든 광명륜을 찾아내야만 무림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말하며 입구 맞은편의 철문을 보고

섭패천; <그나저나 마교의 시조 천마(天魔)는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물이오.> 철문을 돌아보고

<자신의 진정한 힘을 숨겨놓은 천마뢰에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금제(禁制)를 설치해놓은 것만 봐도.,..> 철문을 배경으로 섭패천의 생각 나레이션.

쌍뇌신로; <마교를 멸망시킨 후 천마뢰를 열어보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었소.> 고개 끄덕이며 역시 철문을 돌아보고

쌍뇌신로; <전해지는 대로 천마뢰는 두 개의 열쇠가 있어야만 열린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광명륜인데...> 찡그리고

쌍뇌신로; <광명륜만 찾아내서 파괴하면 절대무적이라는 천마의 저주가 세상에 나올 일은 없을 것이오.>

섭패천; <그걸 아시기에 맹주께서도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결단을 내리신 것이오.> 끄덕이고. 그때

용무린; [끄으...] 몸이 얼고 타들어가며 신음하는 용무린. 그러다가

! 고개 떨구는 용무린

보고 있다가 움찔! 하는 섭장천

쌍뇌신로; [어찌 된 겐가?] 급히 묻고. 독심귀의는 용무린의 목을 만지고 있고

독심귀의; [명색이 천마의 후손인 놈이오. 쉽게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진맥하며 대답하고.

쌍뇌신로; [조심해서 다루게나.] + (다행이로군.)

독심귀의; [명심하겠소이다.] [하지만...] 쿡쿡! 용무린의 몸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찍고

독심귀의; [보시다시피 몸을 괴롭히는 고문만으로는 이 독종의 입을 열기 힘들 것같습니다 맹주님!] 섭장천에게

섭패천; [귀의! 설마 아연(娥姸)이가 낳은 아이를 이용하자는 건가?] 눈 부릅뜰 때

독심귀의; [무태상께 다른 방책이 있으시다면 가르쳐주시구려.] 포권하며 음산하게 웃고

섭패천; (저 독사같은 놈이...) 노려볼 때

쌍뇌신로; [천마의 저주를 소멸시키는 건 물론 중요하다.] 대신 독심의에게 말하고

쌍뇌신로; [그렇다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어떻게 맹주님의 유일한 핏줄인 아연이를 ...] 말할 때 + 섭장천; [그리하게.] 침통한 표정으로 독심귀의에게 말하고

쌍뇌신로; [맹주님!] 당황. + 섭패천; [형님!] 기겁

용신장과 호신장도 놀라고. 독심귀의만 히죽 웃고

섭장천; [무림맹의 존립, 더 나아가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명륜을 찾아내야 하네.] 쌍뇌신로와 섭패천을 조금 돌아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섭장천; [천마의 저주를 봉인할 수만 있다면 치르지 못할 희생은 없어.]

섭패천; [... 물론 세상을 생각하는 형님의 숭고한 뜻은 잘 알지만...] [아연이의 아들은 우리 섭씨일족의 핏줄이기도 한데...] 당황

섭장천; [본좌를 배려하지 말고 심문을 진행하게!] 독심귀의에게

독심귀의; [분부 받들겠습니다.] 포권. 이어

독심귀의; [아가씨를 안으로 모셔라.] 입구를 향해 외치고. 그러자

[!] 대답이 들리더니

수수한 옷을 입은 20살 남짓인 절세미녀가 두 명에게 끌려온다. 양팔이 잡혀서 끌려들어는 여자는 섭장천의 딸인 섭아연이다. 입에 천으로 만든 재갈이 물려있는데 두 팔로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다. 좌우에서 섭아연의 팔을 잡고 들어오는 남녀는 사신장중 풍신장과 운신장이다. <발검진천> <신마유희> 나왔던 캐릭터와 일치. 옷에 <> <>자가 새겨져 있다

[!] 끌려 들어오다가 눈 치뜨는 섭아연

실내의 모습.

고개 떨구고 있는 용마린의 모습.

섭아연; [으읍!] 몸부림치는 섭아연

독심귀의; [아가씨의 재갈을 풀어드려라.]

운신장; [!] 대답하며 섭아연의 팔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재갈의 뒷부분을 잡아 푸는 운신장. 그러자

섭아연; [아버지!] 섭장천에게 악을 쓰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주 섭장천의 딸 섭아연>

섭아연; [그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비록 무림맹의 숙적인 마교 출신이지만 저이는 아버지의 사위 아닌가요?] 표독하게 이를 갈며 눈물 글썽

섭장천; [자중해라.] [이 자리에서 나는 네 아비가 아니라 무림맹의 맹주다.] 엄숙하게 말하고

섭아연; [제 아버지가 아니라 무림맹의 맹주란 말씀이시지요?] 이를 갈고

섭아연; [좋아요. 그럼 저도 섭씨일족의 딸이 아니라 마교 용씨일족의 며느리로 행동하겠어요.] 악에 바친 표정으로 웃고

섭아연; [무림맹은 우리 부부를 핍박해서 결코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거예요.] 이를 갈며 섭장천을 노려보고

독심귀의; [과연 그럴지 두고 봅시다 아연아가씨.] 파팟! 히죽 웃으며 용무린의 가슴 몇 곳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찍고. 그러자

용무린; [!] 퍼덕이며 정신을 차리고.

용무린; [포기해라 독심귀의!] 헐떡

용무린; [무슨 수작을 부려도 네놈이 원하는 건 얻을 수 없...] + [!] 말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섭아연; [상공! 정신이 드셔요?] 운신장과 풍신장에게 팔이 잡힌 채 애절하게

용무린; [독하구나 인간의 마음이여!] [목적을 위해서는 핏줄도 간단히 버리다니...] 헐떡이며 웃고.

섭장천; [...] 침통한 표정으로 듣기만 하고. 쌍뇌신로와 섭패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독심귀의; [상황 파악 되었을 테니 길게 말하지는 않겠다.] 용무린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 처들게 하면서 윽박

독심귀의; [아가씨는 차마 해치지 못하겠지만 아가씨와 네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그렇지 않다.] 용무린과 함께 섭아연 쪽을 보며. 말하고.

섭아연; [독심귀의! 네놈이 감히...] 분노에 치를 떨며 강보의 아기를 끌어안지만

독심귀의; [아들놈이 무사하길 원한다면 광명륜의 소재를 자백해야할 것이다.] 섭아연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고 용무린을 협박하고

용무린; [으으...] 갈등하고

쌍뇌신로; (갈등이 되겠지. 아들을 지킬 것인지 광명륜을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독심귀의; [괜한 협박으로 생각하지는 마라.] 머리채를 잡은 용무린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고

독심귀의; [맹주님께서는 네놈의 입을 열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셨으니까.] 사악하게 웃고

독심귀의; [핏덩이 아들놈이 눈앞에서 찢겨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광명륜의 소재를 실토해야할 것이다.] 사악하게 웃고

용무린; [으으...] 갈등에 휩싸인 표정. 그때

섭아연; [그 늙은이의 협박은 무시해요 상공!] 악을 쓰고

용무린; [!] 움찔! 하며 섭아연을 돌아보고

섭아연; [저희 모자의 안위는 생각지 마시고... 절대 굴복하면 안돼요!] [광명륜을 빼앗기면 마교의 부흥은 영원히 불가능해지잖아요.] 울면서. 그러자

용무린; [고맙소 아연!] 웃고

용무린; [당신의 그 한마디로 더는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소.]

쌍뇌신로; (설마!) 무언가 깨닫고 눈 부릅. 섭장천도 찡그리는데

용무린; [섭맹주! 귀하가 광명륜을 얻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요.] 섭장천에게 웃으며 말하고

쌍뇌신로; [자결을 막게!] 다급히 외치며 앞으로 나서고

<자결!> 독심귀의와 용무린의 뒤에 있던 용신장과 호신장이 기겁할 때

! 강하게 혀를 무는 용무린. 입에서 잘리는 혀와 피가 확 뿜어진다

섭아연; [상공!] 비명. 몸부림. 섭아연의 팔을 좌우에서 잡고 있던 풍신장과 운신장도 기겁하고

[!] 눈 치뜨는 섭장천

주르르! 용무린의 악 다문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섭아연

섭아연; [안돼요! 안돼요 상공!] 몸부림. 울부짖고. 하지만 양팔이 풍신장과 운신장에 잡혀 있어 운신의 폭이 좁고

! 고개 떨구며 죽는 용무린.

독심귀의; (이런...) 급히 용무린의 목을 만져보지만

섭아연; [상공!] 으아아아! 울부짖으며 몸부림치고. 그러면서 그때까지 안고 있던 아기를 떨어트리고. 운신장이 흠칫! 하며 볼 때

털썩! 바닥에 떨어지는 강보에 싸인 아기

[으아아앙!]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

운신장; [아가씨를 잡고 있어요 풍()오라버니!] 울부짖고 몸부림치는 섭아연의 팔을 놓으려 하며 말하고. 그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사신장(四神將)의 일인 운신장(雲神將)>

풍신장; [그러지.] ! 뒤에서 섭아연의 양쪽 팔을 잡고. 운신장은 섭아연의 팔을 놓고 몸을 숙이려 하고. <으아아아!> 그 사이에도 섭아연은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고. 그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사신장의 일인 풍신장(風神將)>

앙앙! 울어대는 아기 옆에 무릎을 꿇고 아기를 안아들려는 운신장,. 아기도 울며 몸부림쳐서 강보가 흩어져 알몸이 드러나려 하고 있고

[!] 무언가 알아차리고 눈 치뜨는 운신장

운신장; (맙소사!) 경악하며 강보 채로 아기를 안고 일어나고. 그때

쌍뇌신로; [어떻게 되었는가 귀의?] 섭장천 뒤에서 묻고. 독심귀의는 여전히 용무린의 몸을 만지며 진맥하고 있고. [상공!] [돌아가시면 안돼요 상공!] 배경으로 섭아연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독심귀의; [... 그게...] 당황, 난감

쌍뇌신로; (살리긴 틀렸군!) 굳어진 얼굴. 그때

운신장; [맹주님! 직접 보셔야할 게 있사옵니다.] 아기를 안고 다가오고. 모든 사람이 그녀를 돌아보고. 강보에 싸인 아기도 울고 있고

섭패천; [아기는 무사한가?] 대신 묻고

운신장; [그렇사옵니다만...] 난색을 표하며 섭장천 일행 앞에 멈춰서고

운신장; [이 아기, 사내가 아니라 계집이옵니다.] 강보를 조금 젖혀서 아랫도리를 보여주며 말하고

쌍뇌신로; [계집?] 경악

섭패천;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연이의 해산을 도운 유모(乳母)는 분명 아연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보고했는데...] 경악. 눈 부릅뜨고. 섭장천과 쌍뇌신로도 경악

쌍뇌신로; [아연아! 너 아들을 빼돌린 것이냐?] ! 고개 돌려 섭아연을 보고. 그러자

섭아연; [호호호! 이제 알아봤자 틀렸답니다!] 미친년처럼 웃고

섭아연; [우리 부부의 아들은 이미 천리 밖으로 피신시켰어요.] [물론 광명륜과 함께...] 웃으면서

섭패천; [그런...] 경악. 다른 사람들도 경악

쌍뇌신로; (우리 무림맹이 추적하는 걸 알아차리고 아들을 미리 빼돌렸구나.)

섭아연; [기대해도 좋아요 아버지.] 섭장천을 돌아보며

섭아연; [이십 년 안으로 우리 아들이 아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뵐 테니까요.] 호호호호! 미친년처럼 웃어대는 섭아연.

쌍뇌신로; [당장 추적을 시작하라!] 버럭 고함 지르고

깜짝 놀라는 사신장들과 독심귀의

쌍뇌신로; [유모의 제보에 의하면 아연이의 아들 가슴에는 나비 형상의 반점이 있다고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를 찾아와라!]

[존명!] 동시에 대답하는 용신장과 호신장.

화악! 휘익! 바람처럼 광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용신장과 호신장. 독심귀의도 허둥대며 두 사람을 따라가고

! 섭아연의 등을 찍는 풍신장. 눈을 치뜨며 기절하는 섭아연

풍신장; [가자 운()!] 기절한 섭아연을 바닥에 누이며

운신장; [!] 아기를 안은 채 돌아서고

휘익! ! 풍신장과 운신장도 광장 밖으로 날아나가고

쌍뇌신로; [속하들도 수색에 나서겠습니다.] 섭장천에게 포권하고

말없이 고개 끄덕이는 섭장천

쌍뇌신로; [갑시다 무태상!] 휘익! 먼저 날아나가고.

섭패천도 쌍뇌신로를 따라가면서 섭장천을 돌아보고

무표정하게 앉아서 용무린의 시체와 기절한 섭아연을 보는 섭장천

섭패천; (형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자기 손으로 사위를 죽인 셈이니...) 고개 저으며 광장을 날아나가고

광장 안에는 이제 섭장천과 용무린의 시체와 기절한 섭아연만 남았다.

고개 떨군 채 죽은 용무린.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섭아연의 감은 눈꼬리로 흐르는 눈물

섭장천;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어!) ! 의자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섭장천; (하나뿐인 딸조차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주제에 대의(大義) 운운했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참담한 인생인가?) 주르르! 눈물이 흐르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이키고 싶을 뿐이다.> 고개 떨군 채 울고 있는 섭장천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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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화백의 화실에서 만화로 제작한 시나리오입니다. 만화와 비교하며 보시면 제법 흥미로울 것입니다. ***

 

                          자객일지 -刺客日誌

          

<설정>

청풍은 금릉의 빈민가에 산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이산하, 어머니 진삼낭, 누이동생 이진진이 있다. 이산하는 다리 하나를 못 쓰는 불구자라 생활 능력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진삼낭이 힘들게 일을 해서 집안을 꾸려왔다. 어머니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생하는 걸 보며 자란 청풍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 돈을 벌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청풍이 현재 일하는 곳은 도축장이다. 나이는 어려도 실력이 뛰어나 백정들과 손님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청풍을 눈 여겨 본 손님중 한명이 황금전장의 주방장 주대육이다.

청풍이 돈을 벌면서 청풍의 가족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왔다.

문제는 이산하가 도박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도박에 중독 된 이산하는 아내와 청풍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탕진한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산하는 결국 사고를 치게 된다. 사기도박에 걸려들어 조폭들이 운영하는 도박장에 거액을 빚지게 된 것이다.

돈을 갚으라는 조폭들의 독촉에 시달린 이산하는 아내가 숨겨둔 어떤 물건을 빼돌리려고 한다. 특이하게 생긴 팔찌인데 청풍의 신세내력과 관련이 있는 물건이다.

청풍은 이산하가 팔찌를 빼돌리는 걸 막지만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폭들에게 협박을 받게 된다. 누이동생을 데려가 팔아버리겠다는 조폭들과 한바탕한 청풍은 며칠 말미를 얻게 되고 궁리 끝에 황금전장의 주방장 주대육을 찾아간다.

천하삼대 부호가문중 하나인 황금전장을 찾아가던 길에 청풍은 백주대로에 말을 달리던 소녀와 시비가 붙는데 알고 보니 황금전장 장주 벽초천의 큰딸 벽소소였다.

우여곡절 끝에 황금전장을 찾아간 청풍은 주방장 주대육과 만난다. 질 좋은 고기를 구하기 위해 도축장을 찾아왔다가 청풍을 눈여겨보았던 주대육은 총관 이세창의 허락을 받고 청풍에게 선금을 주고 채용한다. 청풍은 황금전장 주방에서 고기 담당을 맡게 되는데 텃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잘 적응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축장을 다녀오던 청풍은 벽소소가 어떤 사내와 밀회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이 화근이 된다. 벽소소는 무림맹의 소맹주 위진천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는데 만일 벽소소의 분방한 행실이 무림맹에 알려질 경우 파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풍은 무림맹에서 찾아온 무림맹 총관 장세명의 눈에 들어 따로 만나게 되는데 황금전장에서는 그걸 청풍이 장세명에게 고자질 한 것으로 오해를 한다.

이런 저런 오해가 쌓여서 청풍은 여러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된다.

특히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진 벽소소가 악독한 계책을 꾸며 청풍을 함정에 빠트린다.

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청풍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아버지가 진 도박 빚이 조폭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누이동생 이진진이 사창가에 팔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벽소소와 총관 이세창이 있었다.

분노한 청풍은 감옥에서 탈출하여 벽소소에게 화풀이를 한 후 이진진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진진은 이미 기루에서 탈출한 후였다. 이산하와 진삼낭이 기루를 습격하여 이진진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무공을 지니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폭들에게 쫓기게 되고 이산하는 아내와 딸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진삼낭과 이진진은 실종되었는데 북경으로 간 흔적이 있었다.

이에 어머니와 누이를 찾아 북경으로 가던 중 청풍은 인신매매를 당해서 악명 높은 살수조직 살인상단에 팔려간다.

살인상단의 지옥십관을 신기록으로 돌파한 청풍은 살인상단의 소단주 소수마녀에게 속아서 이진진을 살인상단이 인질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살인상단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살인상단이 지목한 열 명의 표적을 암살하면 이진진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소수마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청풍의 표적이 된 열명은 하나같이 절세고수들인데 그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청풍은 자객으로서 완성되어 간다. 죽인 자들의 재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드디어 열 번째 표적이 정해지는데 바로 청풍 자신과도 인연이 있었던 무림맹 소맹주 위진천에 대한 암살 의뢰였다.

당금의 무림은 30여 년 전부터 무림맹이 지배해오고 있다. 무림맹은 숙적인 마교를 궤멸시키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마교는 교주를 잃고 지하로 잠적해서 복수를 노리고 있다.

무림맹의 맹주는 철면무제 섭장천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섭장천에게는 대를 이을 핏줄이 없다. 외동딸 섭아연은 십팔 년 전에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먼 친척 조카인 섭비연의 아들 위진천을 후계자로 삼는다.

바로 그 위진천에 대한 암살 청부를 접수하면서 청풍은 전 무림을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음모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데...

 

<등장인물>

이청풍; 금릉 빈민가에 살고 있는 소년 백정. 불구인 아버지 대신 백정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진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선불을 받고 황금전장의 하인이 된다. 하지만 황금전장 장주의 첫째 딸 벽소소와의 악연으로 인해 청풍 자신은 물론 가족 전부가 환란을 겪는다. 헌데 청풍에게는 신세의 비밀이 있다. 무림맹주 섭장천의 딸 섭아연과 마교의 소교주 용무린의 아들인 것이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청풍은 섭아연의 몸종에 의해 길러진 것이다.

이산하; 청풍의 아버지. 다리 하나를 못 쓰는 불구자다. 다리를 다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진삼낭; 청풍의 어머니. 친어머니는 아니고 키워준 양어머니다. 진삼낭은 청풍의 생모 섭아연의 몸종이었다. 청풍의 신분을 밝혀줄 특이한 팔찌를 숨기고 있다. 진삼낭은 어린 청풍을 데리고 탈출하던 중 위기에 처했었는데 표사였던 이산하의 도움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산하는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다. 그에 대한 보은으로 진삼낭은 이산하와 부부가 되었지만 못난 남편 때문에 고생한다.

이진진; 청풍의 누이동생. 착하고 아름답지만 병약하다. 벽소소의 음모로 기루에 팔려간다. 이산하와 진삼낭 사이에서 태어나 청풍과는 혈연관계가 없다.

냉혈전호 벽초천; 천하를 통틀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 가문인 황금전장 장주.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서 냉혈전호라 불린다. 딸을 무림맹의 소맹주 위진천에게 시집을 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한다.

황금공자 벽세황; 벽초천의 아들. 야심이 크고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냉혹하다. 무림맹의 맹주 철면무제 섭장천의 제자들중 한명이다.

벽소소; 벽초천의 두 딸중 큰 딸이다.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경박하다. 욕심도 많고 남자도 밝힌다. 무림맹의 소맹주인 위진천의 약혼자가 된다.

벽옥령;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의 둘째 딸. 언니와 달리 착하고 순수하다.

벽세황; 냉혈전호의 아들. 섭장천의 네 제자중 한명이다.

분면랑군 사우; 벽소소를 유혹한 제비. 준수한 얼굴과 화려한 언변으로 벽소소를 함락시킨다. 사실은 마교의 잔당중 한명으로 황금전장의 재산을 노리고 벽소소에게 접근했었다.

철면무제 섭장천; 무림맹의 맹주. 당대의 천하제일인. 삼십여 년 전 무림맹을 세워 마교를 멸망직전으로 몰아넣었다. 마교 교주 구천마존 용백은 섭장천의 손에 죽었고 마교도들은 무림맹의 추적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전설 속의 문파 무성동의 후예다. 외동딸이 있었으나 구천마존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를 배신한다. 어쩔 수 없이 친척 조카인 섭비연의 아들 위진천을 후계자로 삼는다.

구천마존 용백; 마교의 마지막 교주이며 용무린의 아버지. 무림맹 맹주인 철면마제 섭장천에게 패해 죽는다. 하지만 용백이 패사한 것은 마교내의 배신자 때문이었다. 용백은 배신자의 배신으로 최강의 무기를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섭장천과 싸워 패사했기 때문이다.

위진천; 무림맹의 소맹주. 섭장천 사촌동생의 딸의 아들이다. 하지만 위진천의 출신 가문에도 마교의 마수가 뻗어있는데...

용무린; 마교의 소교주. 즉 구천마존의 아들이다. 마교가 무림맹에 멸망당할 때 십대 초반이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원수인 무림맹주 섭장천이 딸 섭아연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얻는다. 그 아이가 청풍이다.

섭아연; 무림맹주인 철면무제 섭장천의 외동딸. 섭장천이 데릴사위를 들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할 생각으로 곱게 길렀지만... 섭아연은 마교의 후손인 용무린과 사랑에 빠진다. 남편이 자살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미쳐 버린다.

장세명; 무림맹의 총관.

사신장; 섭장천이 기른 사실상의 제자들. , , , 운이며 개개인이 절세고수다.

위태무; 마교의 부교주. 위태무의 배신으로 마교는 무림맹에 멸망을 당한다.

독심귀의; 무림맹 소속으로 독공과 의술의 달인이지만 성격이 냉혹하다. 그 때문에 무림맹에서 찬밥 신세가 되자 복수하기 위해 악독한 음모를 꾸미지만...

섭패천; 무림맹 삼태상의 일인. 섭장천의 사촌동생이고 섭장천의 후계자가 된 위진천의 외조부다. , 위진천의 어머니인 섭비연이 섭패천의 딸이다. 유서 깊은 명가 위가장에 딸을 시집 보내지만 사실은 그 위가장이 마교의 사대마가중 하나였다.

쌍뇌신로; 무림맹의 문태상. 무림맹에 마교의 마수가 스며든 것을 알아차린다.

사대마가; 마교를 이루는 네 가문. 마교의 시조인 천마의 직계 천마종가, 번뇌마가, 암흑마가, 혈전마가가 사대마가다. 그중 번뇌마가 위진천의 가문이고 암흑마가가 무림맹의 주적이며 암흑마가의 생존자들이 살인상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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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1)

 

 

여름의 짧은 밤이건만,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 지나가고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뎅뎅뎅!

자은사의 범종이 울리면서 승려들이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고 예불소리가 멀리멀리 퍼져갔다.

대안탑은 자은사를 굽어보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뚝 서있다.

헌데 대안탑 입구 근처의 대리석 바닥에는 심하게 우그러진 호리병이 뒹굴고 있다. 간밤에 칠층에서 떨어진 임청우의 호리병이었다.

휘이익!

문득 대안탑 앞으로 마치 신선이 하강하는 듯이 허공을 밟고 천천히 내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육척에 달하는 거구에 소매 자락이 넓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일신에서 풍기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기도는 마치 천신을 보는 듯했다.

각진 얼굴의 중심부에 자리한 각진 눈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하고 천천히 내려서는 전신에서 풍기는 가공할 기도는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바로 일왕일협삼괴칠절 중에서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천하의 기인 우협 장백승이었다.

우협 장백승은 어제 낮에 대안탑에 왔었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었다.

그러나 서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찾아본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대안탑이었다.

서안에서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숨을 곳이라고는 대안탑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대안탑을 찾아온 것이다.

휘릭!

우협 장백승은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대안탑 안으로 귀신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휘이잉!

잠시 후 대안탑 칠층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장백승이 올라왔다.

번쩍!

동시에 한줄기 홍광이 빛살같은 기세로 장백승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낱 미물이...”

장백승의 눈이 횃불같은 광채를 내쏘았다.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홍광이 기겁하며 뚝 떨어져 내리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백승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실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상들이 처참히 훼손되고 키 큰 향로가 두 쪽이 나서 뒹굴고 있다.

그 난장판 가운데 두 구의 시체와 한명의 소년이 한 덩이가 되어 누워 있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한 참상이건만 장백승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빛이 없다. 마치 원래부터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예상대로 여기에 있었군!”

장백승은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슬쩍 뻗었다.

!

고색창연한 청강(靑鋼) 보검이 한쪽 구석으로부터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뚜벅뚜벅!

장백승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가 임청우를 안아 올렸다.

쉬익!

그때 다시 홍광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임청우가 누워있던 바로 밑에서였다.

번쩍!

하지만 그 홍광은 이번에도 장백승의 눈빛을 받고는 찔끔하며 도망쳐버렸다.

쉬쉬쉬...

그래도 홍광은 장백승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홍광은 물론 간밤에 대안탑 밖으로 떨어졌던 척포였다.

천하 독물들의 제왕이며 뱀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금관혈린사 척포였지만 우협 장백승의 눈빛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장백승은 척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청우를 석가여래의 무릎 앞 단상에 내려놓았다.

인연이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억지로 맺을 수는 더욱 없는 일... 네 몸 속의 독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다음의 인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장백승은 사방이 웅웅 울리는 그 특유의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바닥에 임청우의 왼쪽가슴이 완전히 덮여버렸다.

그 사이에도 척포는 계속 장백승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는 마면혈도의 시체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철선동시 사이에서 장백승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백승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척포는 장백승의 등을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장백승의 몸에서 뿜어지는 장엄한 기도는 척포를 자꾸 주눅 들게 만든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독이 오를 데로 오른 척포는 쉬익! 하고 푸른 독기를 뿜었다.

화악!

푸르스름한 독무(毒霧가 피어오르며 장백승의 등 뒤로 몰려갔다.

푸스스!

그러나 장백승의 몸 두자 밖에 이른 독무는 태양에 녹는 안개처럼 사르르 사그라져버렸다.

척포가 독무를 내뿜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척포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사삭!

그놈은 빠르게 꽁무니를 흔들며 목이 잘려진 아미타여래가 있는 단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척포가 생각할 때 우협 장백승은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팔백 년 넘게 산 척포는 용이 되기 위해 천하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도(修道)해왔었다.

각 명산에 사는 갖가지 이물(異物) 괴물(怪物)을 만나보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 척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물론 척포에게도 두려운 대상은 있었다.

농산에서 수도할 때 만난 어떤 인간은 반 쯤 용이 된 척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인간 외에 다른 인간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던 척포다.

헌데 오늘 또 한명 척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간밤에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시 색혈지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터득한 덕분에 그의 몸속에 있던 색혈지독과 빙골산의 독기는 일제히 마면혈도의 몸으로 옮겨가 버렸었다.

임청우는 그후 무쌍층층공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도 흡수했었다.

이에 철선동시는 최후의 발악으로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에 주입했었다.

무쌍층층공과 용조수 공력은 융화되면서 용조층층공(龍爪層層功)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공력이 되었다.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한 덕분에 그 용조층층공이 단번에 육층통(六層通)에 이르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색혈지독에 의해 피가 굳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임청우의 몸은 충만한 공력에도 불구하고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의 상태를 살펴본 우협 장백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하니 저 두 놈이 죽어가면서 이 아이에게 공력을 주입해 주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돌아 본 후에 다시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런 공력은 저 두 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헤어진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공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백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자 머리 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임청우의 신발을 벗겨 낸 후 발가락을 툭 쳤다.

그러자 발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검붉은 피가 붕어 알처럼 송골송골 올라왔다. 도저히 피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진득한 농도다.

색혈지독이 임청우의 몸속 피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번쩍!

다음 순간 장백승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백광이 일어났다.

화악!

그 빛은 이내 임청우의 몸으로도 퍼져나갔다.

그러자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얼음이 녹듯이 축 쳐졌다.

츠츠츠!

이어 임청우의 칠공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장백승의 몸에서 일어난 강렬한 기운은 임청우의 몸에서 독연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백승은 극렬한 양강기공으로 색혈지독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다.

마침내 임청우의 피부가 원래의 색을 회복했다.

장백승은 임청우의 가슴에서 손을 떼면서 임청우의 얼굴을 슬쩍 쓰다듬었다.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장백승은 임청우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었다. 임청우의 얼굴에 옅긴 해도 검댕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

장백승의 손이 스쳐지나가면서 검댕이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이 일어나 머리 뒤로 떨어졌다.

짙은 검댕이 제거되자 관옥같이 희고도 붉으스레한 동안이 드러났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오관은 반듯하고 온화하면서도 곧은 심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년의 얼굴이다.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장백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뚫어지게 임청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장백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쪽인가? 조천영(趙千英)인가 아니면 유소기(劉蘇起)인가? 그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그 두 사람을 닮았으니... 게다가 이 아이의 근골은 노부가 세 번 째로 보는 놀라운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그 두 사람 중의 누군가의 자식이 틀림없을 듯한데...”

조천영은 일왕(一王)인 금포염왕의 이름이다.

장백승은 일찌기 금포염왕을 만났을 때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그리고 칠절의 우두머리인 검주 유소기를 보았을 때 훗날 언젠가는 금포염왕에 필적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놀라워했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두 사람을 모두 닮았으면서도 그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근골을 가진 임청우를 만난 것이다.

임청우의 근골의 뛰어남은 그가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알아본 바이지만 임청우의 얼굴마저 금포염왕과 검주 유소기를 닮았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장백승은 여기에는 무슨 알지 못할 어떤 연유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임청우의 아버지가 될 만한 자로 조천영과 유소기 외에는 더 꼽을 자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장백승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청강검을 임청우의 가슴에 놓아주었다.

네가 깨어나면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싶지만... 너를 구해준 것이 내 제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이만 떠난다.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장백승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고 있다.

문득 엇갈린 지붕으로 빠져나가려던 장백승이 손을 흔들었다.

휘익!

장백승의 소매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더니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향해 뻗어갔다.

장백승의 몸은 지붕 밖의 하늘로 사라져 버렸고 그가 떨친 뜨거운 경풍은 두 구의 시체에 이르렀다.

사르르르---

그러자 놀랍게도 두 마귀의 시체는 한 무더기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푸스스스!

시체들은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더니 마침내 재조차 남기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우협 장백승!

백전백패(百戰百敗), 만전만패(萬戰萬敗)의 대영웅 우협 장백승,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지만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그의 측량할 수 없는 가공할 무공의 한 측면이었다.

헌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신이 재가 되어 흩어진 자리에는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무쇠 토막이 하나씩 있었다.

!

두르고 있던 띠가 터지면서 두 개의 무쇠 토막은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펼쳐졌다.

환하게 펼쳐진 그것은 달아오른 얇은 철판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 철판 위에는 백색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있었다.

그 글자들은 철판이 식어감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식어버린 철판은 다시 도르르 말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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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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