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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기다려온 여인

 

 

 

섭대낭은 벽혈마희(碧血魔姬)라 불리며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력이 있다.

다시 무림에 나가면 구대문파 장문인들일지라도 그녀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헌데 겨우 반 년 수련한 요문천의 무공이 섭대낭에 필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터무니없는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광효는 섭대낭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요문천은 영특할 뿐 아니라 놀라운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불과 십여 년 공부한 것만으로 천하의 재사(才士)들이 모여 있는 한림원(翰林院)의 어떤 학사(學士)에게도 뒤지 않는 학문을 쌓았었다.

그런 요문천이 식음과 수면까지 전폐하고 무공 수련에 매진해왔다.

반년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히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무공에 대한 이해야 워낙 영특한 분이니 막힘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천녀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도련님의 심후한 공력이옵니다.”

섭대낭이 아미를 모으며 말했다.

“석 달 전쯤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문천이의 내공이 일갑자(一甲子)를 상회하는 것같긴 했다.”

요광효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광효도 정심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현재 도련님의 내공은 삼갑자(三甲子)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추측되옵니다.”

섭대낭이 조금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삼갑자!”

요광효도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말이 쉬워 삼갑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팔십 년의 세월동안을 쉬지 않고 수련해야 쌓을 수 있는 공력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인간이 백팔십 년을 살 수는 없다.

아무리 내공이 심후한 무림고수라도 백오십 년 정도 사는 것이 한계다.

당연히 삼갑자 수준의 내공을 지니려면 수련하는 것 외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직접 수련하지 않아도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데에는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흡정대법(吸精大法)으로 타인의 공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다만 흡정대법을 쓰면 대개는 끝이 좋지 않다.

이질적인 내공이 몸속에서 뒤섞인 채 존재하게 되는 탓이다.

사마외도의 인간들이 다양한 흡정대법을 구사하면서도 절세고수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타인에게서 공력을 물려받는 개정대법(開頂大法)이 있다.

흡정대법과 달리 개정대법은 동일한 내공심법을 수련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시전이 가능하다.

같은 성질의 무공을 익혔으므로 흡정대법처럼 주화입마에 빠지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다만 개정대법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십 년 수위의 공력을 전수받으면 일이 년 수위 정도의 내공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개정대법의 이같은 비효율이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대파들이라고 해서 늘 절세고수가 나오지는 못하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내공 증진에 효과가 있는 약초나 그것들로 만든 영약을 복용하면 단 시일 내에 내공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대표적인 약초가 성형하수오(成形何首烏)나 삼왕(蔘王)등이며,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영약으로는 소림사의 대환단(大丸丹)이 있다.

대환단은 내상의 치료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삼십 년 동안 면벽 수련한 것에 필적하는 내공을 단번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영약에도 한계는 있다.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영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 영약의 약효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유다.

 

“본부의 연공관에도 다양하고 효능이 탁월한 영약들이 준비되어 있긴 하다만... 불과 반 년만에 삼갑자의 내공을 쌓은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요광효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인물은 불과 열 명 남짓일 것이다.

“천녀의 생각으로는 철접... 동영의 그 야차같은 년에게 납치되셨을 때 어떤 기연을 만나셨던 것같사옵니다.”

섭대낭도 약간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요문천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파사의 내단을 얻었겠군.”

요광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예?”

갑작스러운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아니다. 문천이의 내공이 심후해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요광효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내일 있을 폐하의 개선식(凱旋式) 준비 때문에 올해의 기제사(忌祭祀)에는 참석할 수 없다. 그러니 네가 문천이를 데리고 영은사(永恩寺)에 다녀와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름과 출신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요광효의 처, 즉 요문천의 생모의 기일(忌日)이다.

마씨(馬氏)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은 십팔 년 전 바로 오늘 죽었다.

그래서 오늘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무렵에 제사를 지내야한다.

요씨 집안에는 따로 사당이 없다.

대신 북경 외곽의 영은사라는 절에 조상들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요광효가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불문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문이다.

“영은사의 주지 무진사태(無塵師太)에게는 기별을 넣어놓았으니 문천이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예...”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제사를 지내러 외출한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요문천과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낭아.”

속마음을 들킬까봐 서둘러 방을 나가려는 섭대낭을 요광효가 불러 세웠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섭대낭은 문고리를 잡다가 요광효를 돌아보았다.

“문천이도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다. 응석을 전부 받아주지는 말거라.”

요문천이 그런 섭대낭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명... 명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요광효의 방을 나서면서 섭대낭은 가슴 한 구석에 전에 없는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요광효의 마지막 당부에 복잡한 심사가 서려있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

 

퍼억! 푸스스!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청강석(靑剛石) 기둥이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럭저럭 지옥장강(地獄掌罡)도 쓸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요문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청강석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뒀다.

그가 손바닥을 대고 있던 청강석은 옥(玉)의 일종으로 단단하기가 강철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지옥장강이 흘러들어간 결과다.

지옥장강이 주입된 대상은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하지만 내부는 강한 진동으로 인해 완전히 으스러져버린다.

만일 인간의 몸에 지옥장강이 닿으면 뼈가 가루가 되고 살과 내장은 곱게 갈은 곤죽처럼 변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하며 죽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옥장강은 직접 대상에 닿아야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지옥장강의 내력에 대해 아는 적이라면 직접적인 접촉을 피함으로써 지옥장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저주마경에 적힌 바로는 지옥장강은 십성(十成)에 이르면 벽공장(闢空掌)처럼 거리를 두고도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는 지옥장강에 직접 닿지 않는다 해도 내부가 으스러져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실로 지난(至難)하다.

요문천도 팔성(八成)까지는 석달만에 이르렀지만 그후로는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지옥장강을 벽공장처럼 구사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니 조급해할 건 없다.)

요문천은 모래가 되어 흩어진 청강석 기둥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이곳은 승상부의 연공관이다.

승상부에는 아주 넓고 무공 수련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연공관이 존재한다.

직접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 외에도 수천 권의 무공비급으로 채워진 서고(書庫)와 온갖 종류의 무기가 마련되어 있는 무고(武庫)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서고와 무고뿐 아니라 승상부의 연공관에는 무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영약들을 모아놓은 약고(藥庫)도 있다.

열의와 결심만 충분하다면 이 연공관에 들어오는 사람은 절세고수가 되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요문천은 연공관 내의 무공비급과 영약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무공은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면 충분하다.

또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상태라 공력을 증진시켜주는 영약은 먹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문천이 연공관에서 가끔 드나드는 곳은 무기들이 마련되어 있는 무고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저주마경과 함께 독왕보궁에 남겨두고 왔다.

지옥교가 워낙 특이하게 생긴 탓에 남의 눈에 띄일 것을 우려해서였다.

지옥교가 없으니 마검팔식(魔劍八式)을 수련하는 데는 다른 검을 쓸 수밖에 없다.

요문천이 무고에서 고른 검은 검날이 얇으면서도 날카로워 금석을 무 베듯 한다.

날카로움으로는 지옥교에 비교해도 그리 뒤지지 않는 그 검은 전설속의 명검인 청평(淸平)이다.

 

(근접전에서는 지옥장강이 절대적이고 거리를 둔 싸움에는 마검팔식이 무적의 위력을 발휘한다.)

요문천은 청평검을 집어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검법의 초식들은 공격과 방어를 겸하게 되어 있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산 후에 적을 죽인다는 위기(圍碁;바둑)의 격언이 여지없이 통하는 것이 무공이다.

설령 내가 적을 베더라도 나 역시 적에게 베어지면 소용이 없다.

그 때문에 공격보다는 방어에 보다 비중을 두는 일반적인 무공이고 검법이다.

하지만 마검팔식은 오직 적을 베고 죽이는 데만 집중한다.

자신의 안전은 도외시하고 적의 약점과 실수를 맹렬하게 파고 들어가 공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검팔식을 상대하는 적은 기필코 피를 보게 된다.

이 검법에 마검(魔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마검팔식이 이토록 무모하게 적을 쓰러트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저주마벽 덕분이다.

저주마벽은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탁월한 호신공부다.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최대 세배의 힘으로 타격을 돌려보낸다.

저주마벽의 이같은 막강한 힘에 보호되는 덕분에 오직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지옥검조가 애첩 혈미인을 죽여서 그녀의 살가죽에 지옥성의 무공을 적을 때 저주마벽과 지옥장강과 마검팔식을 우선적으로 적은 이유가 있다.

지옥성의 열 가지 무공 지옥십결(地獄十訣)중 그 세 가지가 다른 일곱 가지보다 특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만으로도 지옥성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만 수련해왔다.

연공관의 다른 무공비급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요문천은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멀지 않았다. 이제 곧 여길 나갈 수 있다.)

쩌억! 슈욱!

청펑검으로 빗발같은 검기를 그어내며 요문천은 눈을 번뜩였다.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마검팔식을 펼치면서 요문천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초겨울에 내리는 서리를 연상케하는 서늘한 분위기를 지닌 절세미녀...

순진하던 자신을 어른의 세계로 이끌어준 여인...

그녀를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그 여인은 철접 용천파다.

 

***

 

“요문천이 무공 수련에 미쳐있다?”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물었다.

삼단 같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삭도(削刀;머리 깎는 칼)에 의해 깎여 나가고 있는 중이다.

“어떤 계기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요문천은 반 년 전부터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데... 비록 섭대낭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로 확인한 것뿐이지만 요문천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고이옵니다.”

여인의 앞쪽에 무릎을 꿇은 젊은 비구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문천... 그 아이도 몇 달 후면 열아홉 살... 써먹을 수 있는 정도로 자라긴 했겠지.”

여인은 바닥에 흩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나이 든 비구니가 삭도로 머리를 밀어주고 있다.

“산동성으로 몰려든 주체(朱棣;영락제의 이름)의 졸개들이 제법 유능한 탓에 교착되어버린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북경에 잠입한 것인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로구나.”

어느덧 머리카락이 모두 밀려져서 비구니의 모습이 된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비로소 불모(佛母)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연재 종료 공지>

 

무림일기의 연재는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현재 유료로 연재중이라 형평상 더 이상 게시할 수는 없군요. 대부분의 싸이트에서는 1권 가량은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서 1권의 일부를 연재했었습니다.

이해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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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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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잠룡의 세월

 

 

 

흐윽!”

섭대낭은 요문천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오열을 터트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녀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요문천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정오 무렵에 돌아온 요문천으로 인해 승상부는 발칵 뒤집혔다.

섭대낭은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왔다.

요광효도 어제 있었던 영락제의 피습 사건 수습으로 분주하던 중에 승상부의 입구까지 나왔다.

몰려든 시녀들도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반면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만일 요문천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면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미안해 유모. 걱정 끼쳐서...”

요문천은 자신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오열하는 섭대낭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그런 요문천의 눈에 요광효가 곱게 늙은 노파와 함께 승상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머리카락은 백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는 서늘한 인상의 그 노파는 신비각 사대영반의 첫째인 고독모모(孤獨母母).

고독모모는 출신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인이다.

혹자는 그녀가 고려(高麗)의 전설적인 문파 치우령(蚩尤嶺)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고독모모는 갈태독이나 사해무존에 필적하는 고수였구나.)

요문천은 섭대낭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고독모모를 살펴보았다.

그전에는 몰랐었다.

하지만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덕분인지 요문천의 눈에는 고독모모의 몸 주위로 무형의 역장(力場)이 감돌고 있는 게 들어온다.

다친 곳은 없느냐?”

다가온 요광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요문천의 몸을 살피며 묻는다.

...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요문천은 요광효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되었다. 대낭이는 문천이를 데리고 가서 쉬게 해주거라.”

요광효는 요문천의 뒤에 붙어서서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섭대낭에게 말했다.

예 부주님.”

섭대낭은 대답한 후 요문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곧 전후 경과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할 때 얘기 하거라.”

요문천의 말에 요광효는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들어갔고 모여들었던 하인들과 무사들도 흩어졌다.

“...”

고독모모는 섭대낭에게 이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가는 요문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모의 눈에도 저 녀석이 전과 다르게 보이시는 것같소이다.”

요광효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지만 고독모모는 요광효보다 십여살 연상으로 백세(百歲)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영식이 복연(福緣)이 많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던 바인데... 이번의 소동을 겪으면서 오래되고 신령스러운 힘이 몸에 깃들었군요.”

고독모모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뜬 채 요문천을 보며 말했다.

기쁜 일이긴 하지만... 자식이 평온한 삶을 바라는 아비의 입장으로는 근심이기도 하지요.”

요광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한 저 녀석 어미와의 약속은 지키기 힘들지 모르겠구나.)

요광효의 늙은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리고 있었다.

 

***

 

(도련님의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섭대낭은 본능적으로 그같이 느꼈다.

그녀는 요문천을 목욕시켜주고 있는 중이었다.

욕조에 들어앉은 요문천을 씻겨주면서 섭대낭을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단 하룻밤 못 본 것뿐인데 어쩐지 요문천이 낯설게 느껴진 때문이다.

외양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헌데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요문천에게서 어른의 느낌이 난다.

의젓해졌고 진중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눈빛에 깊은 우수가 어려 있다.

그 눈빛이 먼 곳의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 느껴져서 섭대낭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대체... 섬나라의 야차(夜叉)같은 계집에게 끌려가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요문천의 몸을 닦아주는 섭대낭의 손끝이 떨린다.

그녀는 머잖아 요문천이 자신의 품을 떠날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깃털이 돋아나고 날개에 힘이 생긴 아기 새는 필연적으로 둥지를 떠나 이소(離巢)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뻐해야할 일이다. 도련님이 어른스러워지는 것은 마땅히 기뻐해야만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억지로 웃는 섭대낭의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

 

반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봄이었던 계절은 어느덧 초가을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세상은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영락제의 제삼차(第三次) 몽고 친정(親征)이 진행되었다.

오십만 명의 군사를 동원한 대규모의 정벌은 황실 재정의 고갈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부작용을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산동(山東)에서는 불모(佛母)를 자처하는 백련교(白蓮敎) 출신의 여걸 당새아(唐塞兒)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새아는 임삼(林三)이라는 농부의 아내라고 알려진 여인이다.

일찍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그녀는 기연을 만나 천서(天書)와 보검(寶劍)을 얻었다고 한다.

천서와 보검은 백련교에 전해지는 세 가지 보물 광명삼보(光明三寶)에 속한다.

광명삼보는 백련교의 마지막 교주 한림아(韓林兒)가 주원장에게 암살당할 때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혹자는 광명삼보가 한림아를 암살한 주원장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팔 년 전 금릉이 연왕의 군세에 함락당할 때 황실보고에 수장되어 있던 광명삼보의 행방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 광명삼보 중 천서와 보검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육십여 년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천서와 보검을 얻은 덕분에 당새아는 백련교의 새로운 교주로 추대되었다.

당새아도 스스로를 불모로 자처하고 있는데 천서와 보검의 힘을 빌어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자유자재로 하며 재물과 의식(衣食)을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전해진다.

이에 북원(北元), 즉 몽고 정벌을 위한 영락제의 혹독한 징발과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이 당새아 주변으로 몰려들어 삽시에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웠으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세상에서 사라졌던 백련교가 육십여 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당새아가 주도한 백련교의 반란은 초반의 기세가 많이 위축된 상태다.

관군의 지속적인 투입 덕분에 산동성 밖으로는 세력을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당새아의 난으로 인해 민심은 급격히 흉흉해지고 있었다.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안정되어가던 천하의 정세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승상부는 이같은 어지러운 풍파에서 온전히 비켜나 조용했다.

반 년 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 타이시의 사주를 받은 동영의 인자들이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는 변고가 있었다.

그때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중 한명이 승상부에 난입했던 일이 있었지만 철저하게 기밀에 붙어져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외면상 평온해 보이는 승상부는 그러나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승상부의 다음 대 주인이 될 요문천의 변화 때문이었다.

 

***

 

문천이는 요즘 어찌 지내느냐?”

요광효는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섭대낭에게 물었다.

늘 밝고 활기차던 섭대낭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사이 부쩍 표정이 어두워져 요광효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 두 번,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鍊功關)에서 나오지 않고 있사옵니다.”

섭대낭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만 읽던 녀석이 무공에 관심을 갖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구나.”

요광효도 한숨을 쉬었다.

 

반 년 전 철접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요문천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승상부에는 다양한 무공비급과 영약, 무기등이 갖춰진 연공관이 있다.

요문천은 자신의 안락한 거처 대신 그 연공관에 들어가 생활해오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두 번, 밥을 먹고 목욕을 하기 위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승상부에는 고수들이 많다.

호장무사들 외에도 요광효를 존경하여 모여든 식객(食客)들 중에 강호의 기인이사들이 다수 섞여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조차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충분히 드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요문천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청하지 않고 혼자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다.

요광효는 이와같은 요문천의 변화를 대견해했다.

하지만 유모인 섭대낭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무리하다가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혼자 무공을 수련하다 잘못되어 주화입마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노심초사해오고 있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 문천이의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인 것같으냐?”

요광효는 초췌해진 섭대낭을 측은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영락제가 몽고에 친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실상 정무(政務)는 요광효가 보고 있는 중이다.

영락제의 장남인 황태자 주고치(朱高熾)는 제법 성군(聖君)의 자질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주고치는 병약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데에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요광효가 주고치를 대신해서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요광효는 자금성에서 살다시피 해야만 했고,

지난 반년동안 요문천을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련님의 무공은 불과 반 년만에 천녀를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사옵니다.”

섭대낭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비록 걱정을 끼치긴 했지만 요문천이 지난 반 년동안 보인 놀라운 성취가 그녀를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그 정도냐?”

요광효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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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귀역(鬼域)에서의 초야(初夜)

 

 

 

하실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의아해진 요문천이 물었다.

철접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나란 계집,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밉거나 흉하게 보이지는 않느냐?"

철접은 그 창백한 얼굴에 살짝 홍조를 떠올리며 물었다.

"밉다니요? 소저는 제가 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답습니다."

요문천은 철접에 말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십팔 년의 세월동안 제법 많은 명문가의 미녀들을 보아온 요문천이다.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이 여()인자에 비견될만한 여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파팟!

철접이 갑자기 요문천의 가슴에 자리한 마혈(痲穴)을 찍었다.

"!"

요문천은 찌릿한 충격과 함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철접은 마혈이 찍혀 쓰러지는 요문천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서 품에 안았다.

"...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문천은 철접의 품에 안기며 당황하여 물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말은 할 수가 있는 상태였다.

"해치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거라!"

철접은 요문천을 두 팔로 안아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철접의 키가 훨씬 큰 탓에 그녀의 품에 안긴 요문천이 마치 아기처럼 보인다.

철접은 요문천을 품에 안은 채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첫번째 지하 광장으로 나섰다.

(이 여자 설마...!)

철접의 품에 안겨 보물의 산쪽으로 옮겨지며 요문천은 어떤 기대로 인해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파사의 내단까지 주저 없이 먹여준 철접이 새삼 자신을 해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저항하지 못하게 혈도를 찍었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어쩌면 이 여자는 특별한 방법으로 은혜를 갚을 생각인 것 같다.)

요문천은 기대와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접을 훔쳐보았다.

비록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철접의 창백하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다.

철접은 성벽처럼 쌓여있는 금괴의 벽을 지나 보물의 산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예상한 대로구나.”

보물의 산 중심부에 도착한 철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접이 요문천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마치 방처럼 꾸며져 있다.

탁자와 의자, 온갖 종류의 집기들과 함께 아주 넓은 침대도 하나 놓여있다.

언듯 보면 누군가의 침실같은 분위기다.

차이점은 침실을 구성하고 있는 집기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보물들이라는 점이다.

금괴를 천장까지 쌓아올려 벽을 만들었다.

바닥에도 금괴와 은괴를 벽돌 대신 깔아놓았다.

금괴의 벽으로 구획되어진 넓은 공간 안에 집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고 온갖 보석들로 치장이 된 물건들이다.

커다란 황금 탁자 위에는 수많은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가장 작은 접시 하나만 내다 팔아도 한 사람의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침실 한쪽에 놓여있는 침대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기둥과 틀은 황금이며 그 위에 깔려있는 것은 이무기의 껍질이다.

이무기의 가죽으로 만든 그 침대는 하룻밤만 자도 어떤 질병이든 낳게 해준다는 보물이다.

갈태독은 어느 군벌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진상했던 그 교피만복침(蛟皮萬福寢)을 거의 강탈하듯 받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삼았었다.

(여기는 갈태독이 자신의 보물들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장소겠구나.)

침대로 다가가는 철접의 품에 안겨 요문천도 주변을 곁눈질로 돌아보며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갈태독은 탐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가장 큰 도락(道樂)은 자신이 모은 보물들을 혼자 감상하는 것이었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들어온 이 공간은 바로 그럴 목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 이 공간에 있는 보물들이야말로 갈태독이 모은 보물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헤어지면 우린 아마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네게 진 빚을 마저 갚을 작정이다. 은혜와 원한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리 온미쯔(隱密宗;인자)의 전통이므로...!"

침대에 이른 철접은 요문천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그리고는 요문천의 몸에 걸쳐진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이러실 필요는...”

철접의 손길에 의해 옷이 벗겨지며 요문천은 헐떡거렸다.

하지만 말과 달리 요문천의 몸은 이미 기대와 흥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다.”

요문천의 옷을 벗기며 철접의 얼굴 역시 어쩔 수 없이 달아오른다.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에 처녀라니.,.. 하물며 인자라는 험한 직업을 가졌으면서...)

요문천이 놀랄 때였다.

철접이 요문천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쥐고 끌어내렸다.

요문천은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번 본 것만으로 마음을 빼앗겨버린 미녀의 눈에 알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로...)

요문천을 발가벗긴 철접은 가슴이 미어졌다.

요문천에게서 비명에 간 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반면 요문천은 이 상황이 그저 황홀할 뿐이다.

(미안해 지로야!)

철접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들인 듯 조카인 듯 키워온 어린 동생...

그 가엾은 동생은 불귀의 객이 되어 멀지 않은 곳에 누워있다.

동생이 여자도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철접이었다.

지난 밤 그녀는 지로, 즉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었다.

하지만 기녀들이 너무 대담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용차랑은 기겁을 하며 도망쳐 나왔었다.

그후 철접은 용차랑에게 맛난 음식을 사 먹인 후 천독친왕부로 돌아와 함께 잤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 용차랑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철접은 동생이 무얼 원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접은 애써 용차랑의 눈길을 피했었다.

결국 철접과 용차랑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보냈으며...

용차랑은 허무하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그토록 원하던 걸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주르르!

마침내 철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아이가 지로 대신이다. 지로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것을 이 아이에게 해주자.)

어느덧 철접에게 요문천은 용차랑의 환생인 듯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린 어린 동생을 위해 해주지 못할 일이 없다.

철접은 정성을 다해 요문천을 귀여워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문천은 현실의 일이 아닌 듯한 황홀경의 극치를 맛보게 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요문천을 귀여워해주며 철접 역시 몽롱해졌다.

그녀는 비로소 여자 인자들이 그토록 이성과의 관계에 집착하는지 깨달았다.

이 순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온전히 황홀경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지로! 지로야!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두 손으로는 요문천의 얼굴을 보듬어 쥐고 울었다.

요문천의 입에서도 자지러지는 비명이 연신 터져 나왔다.

오늘 밤 요문천은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곤히 잠들었던 요문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철접은 사라진 후였다.

(갔구나.)

비어있는 옆 자리를 돌아보며 요문천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을 받았다.

침대 옆의 황금 탁자에는 지옥교와 저주마경은 놓여있다.

하지만 갈태독이 남긴 구독진경 상편과 묵린천독편은 보이지 않았다.

철접이 떠나면서 가져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날 동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철접과의 일을 떠올리며 요문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로... 미안해 지로. 나만... 누나만 살아서...!”

관계하는 내내 철접은 비탄이 서린 오열을 토해냈었다.

(가엾은 여자였다.)

요문천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철접이 느끼는 비탄이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그래서 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요문천과 철접은 밤이 새도록 특별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지칠 줄을 몰랐다.

복용한 파사의 내단과 천독시균 덕분이었다.

철접의 상처도 이미 대부분 완치되었을 정도다.

그래도 어느 순간 요문천은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몸에는 옷이 걸쳐져 있었다.

요문천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동안 누워있었다.

파사의 내단 덕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겠고 몸에는 힘이 넘친다.

한번 도약하며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아서 요문천은 쉽사리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이윽고 요문천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펴보니 지옥교와 저주마경이 놓여있는 탁자에는 글이 새겨진 금판(金板)이 한 장 놓여있었다.

금판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날 찾지 말거라. 네가 날 필요로 할 때면 내가 찾아갈 테니.. 날 위해 지로를 대신해준 배려는 잊지 않으마.>

 

금판에 적힌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길지 않은 그 글에 철접의 모든 심사가 깃들어 있는 것을 요문천은 느꼈다.

(철접 용천파...!)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든 채 철접을 떠올렸다.

요문천은 동침하는 도중에 나눈 단편적인 대화들을 통해서 철접이 누구며 본명이 용천파라는 사실도 알아낸 상태였다.

(내가 어찌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 요문천을 비로소 어른으로 만들어준 당신을...)

요문천은 철접의 글이 적힌 금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찾아내서... 두 번 다시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나 자신도 강해져야만 한다.)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쥔 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귀역(鬼域)으로 소문난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서 바야흐로 장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뜻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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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체에서 자란 버섯

 

 

 

"갈태독은 파사가 품고 있는 보물을 빼앗아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아마 파사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갈태독에게서 달아났을 것이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내밀어 자신의 앞쪽을 가로막는 독충들을 물러나게 하며 파사의 골격 중간쯤으로 갔다.

"결국 갈태독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얼마 후 중상을 입은 파사도 이곳으로 돌아와 최후를 맞았겠습니다."

"다 왔다!"

철접은 대답대신 걸음을 멈추며 말아 쥔 묵린천독편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파사의 골격 중간쯤인 그곳에는 쌀가마 하나 정도 크기인 큼직한 물체가 놓여있다.

츠츠츠! 끼기기!

바위같이 단단해 보이는 그 물체에는 수많은 독충들이 뒤덮고 있다.

헌데 독충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철접이 묵린천독편을 내밀어도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독충들도 물러서지 않는다! 저 바위같은 게 대체 뭔데 독충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드는 것일까?)

요문천이 의아해할 때였다.

"비켜라!"

촤악!

철접이 묵린천독편을 바닥에 대고 내리쳤다.

화악!

그러자 바닥을 때린 묵린천독편에서 검은색의 안개같은 것이 확 뿜어져 나와 바위 근처의 독충들을 휩쓸어버렸다.

푸스스! 화악!

묵린천독편에서 뿜어진 검은 안개에 휩쓸리는 순간 바위를 뒤덮고 있던 독충들이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끼끼! 츠츠츠!

살아남은 독충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가공하구나! 독충들을 녹이는 게 아니라 아예 증발 시켜버렸다.)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묵린천독편에 농축되어 있는 멸절독강은 내공을 주입해야만 발출된다. 그래서 평소에는 맨손으로 만져도 안전한 것이다."

철접은 휘둘렀던 묵린천독편을 다시 감아쥐며 말했다.

"그건 참 편리하군요."

"이게 무얼 것 같으냐?"

철접은 둘둘 말아 쥔 채찍으로 앞쪽에 놓인 바위같은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독충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걸 보면 귀중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겠습니다!"

"이건 파사의 쓸개다."

철접은 가마솥만한 크기인 바위같은 것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쓸개라니... 파사란 놈은 덩치에 어울리게 쓸개도 정말 엄청난 크기로군요!"

요문천은 놀라 눈을 치뜨며 바위같은 물체, 파사의 쓸개를 새삼 바라보았다.

"이 석화(石化)된 쓸개 속에 파사가 품고 있던 진짜 보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

철접은 말하면서 다시 채찍을 펼쳐서 파사의 거대한 쓸개를 후려쳤다.

그러자 묵린천독편에서 다시 검은 안개같은 것이 터져 나와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던 파사의 쓸개를 덮어씌웠다.

퍼석!

검은 안개같은 휩쓸리는 순간 파사의 거대한 쓸개도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반짝!

그리고 흩어지는 파사의 쓸개의 속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물체가 드러났다.

계란만한 크기의 구슬인데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있다.

(저 구슬은 혹시!)

파사의 쓸개가 흩어지며 드러나는 구슬을 본 요문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이게 바로 파사의 내단(內丹)이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허리띠에 끼우고는 몸을 숙여서 구슬을 집어들었다.

(역시!)

요문천은 철접이 고운 모래같은 파사의 쓸개 잔해 속에서 진어든 구슬을 바라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들의 왕인 파사는 몸속에 내단을 만들어 왔다.

파사가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흡수한 천지간의 정기가 그 작은 구슬 안에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걸 복용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모든 상처와 고질이 고쳐진다. 사해무존에게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으로서는 파사를 죽여서 내단을 꺼내먹는 것 외에는 달리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철접은 구슬에 묻어있던 쓸개의 잔해를 자신의 옷에 닦으며 말했다.

갈태독은 정말 무정(無情)한 인간이었군요. 아무리 목숨이 소중해도 수천리 밖에서 찾아온 이 영물을 죽일 생각을 했으니...”

요문천은 갈태독의 시신 쪽을 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정하고 무의(無義)한 인간이 어찌 갈태독 뿐이겠느냐? 그보다 입을 벌려봐라!"

철접은 파사의 내단을 자신의 옷자락에 깨끗하게 닦으며 요문천에게 말했다.

"?"

요문천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입을 벌렸다.

!

순간 철접은 파사의 내단을 요문천의 벌린 입에 그대로 넣어버렸다.

"무슨...!"

파사의 내단이 입속으로 들어오자 요문천은 기겁하며 뱉어내려고 했다.

!

하지만 철접의 손이 물 흐르듯이 요문천의 턱을 움켜쥐어 다물게 했다.

(파사의 내단이 침에 닿자 그대로 녹아버린다!)

요문천은 강제로 입을 다물린 채 눈을 부릅떴다.

입안에 들어온 파사의 내단이 마치 얼음인 듯이 그대로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꿀꺽!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요문천은 녹아서 액체가 된 파사의 내단을 그대로 삼키고 말았다.

"되었다!"

요문천이 파사의 내단을 모두 삼킨 것을 확인한 철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까지 쥐고 있던 요문천의 턱을 놓아주었다.

"... 이게 무슨 짓입니까?"

턱이 자유로워진 요문천은 목을 쥐고 콜록거렸다.

파사의 내단이 녹아서 흘러 들어간 뱃속이 독한 술을 마신 듯 화끈거리긴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수선 떨지 마라! 파사의 내단은 무궁무진한 효능을 지닌 절세의 보물이다."

철접은 파사의 골격 밖을 향해 돌아서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이후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독에도 해를 입지 않게 될 것이고 내공심법을 연마하면 어렵지 않게 오갑자(五甲子) 수위의 공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소저께서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요문천은 철접을 따라가며 물었다.

뱃속에서 시작한 화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서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내게는 따로 먹을 것이 있다!"

철접은 골격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로 먹을 게 있다고?)

요문천은 어리둥절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파사의 골격 밖으로 나왔다.

온몸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열기 탓에 어느덧 요문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파사의 골격에서 나온 철접은 다시 갈태독 시체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왜 다시 갈태독의 시체 쪽으로 온 건가? 설마 갈태독의 시체라도 먹겠다는 건가?)

요문천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갈태독은 생시에 수천 가지 극독을 복용하여 피와 살이 모두 독에 물든 독인(毒人)이 되었었다!"

철접이 갈태독의 해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자연스럽게 저고리가 위로 들려지며 탐스러운 엉덩이가 일부 드러난다.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저고리 아래쪽으로 드러나는 철접의 뽀얀 둔부를 곁눈질하며 요문천은 침을 삼켰다.

파사의 내단을 복용하여 몸이 뜨거워진 때문일까?

철접의 둔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요문천은 온몸이 확 달아올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독인이었던 자가 죽으면 생시에 복용한 극독들의 정수가 한 곳으로 모여 특이한 형태를 갖추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갈태독의 웃옷을 벌렸다.

철접이 몸을 앞으로 숙이자 저고리가 끌려올라가며 뽀얀 둔부가 더 많이 드러나 요문천의 눈을 부릅뜨게 만든다.

역시 있었구나.”

철접이 갈태독의 상의를 벌린 채 무언가를 보며 말한다.

그녀의 허연 둔부를 노려보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갈태독의 시신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접에 손길에 의해 드러난 갈태독의 아랫배, 단전 부근에 영지(靈芝)의 모습을 한 버섯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시신에서 버섯이 자라다니...! 혹시 시균(屍菌)입니까?"

요문천은 철접 뒤에서 고개를 숙여 버섯을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다더니 아는 게 많구나."

철접은 갈태독의 시신 단전 부근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았다.

"그렇다! 이것은 동물의 시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동충하초(冬蟲夏草), 즉 시균이다!"

!

그녀는 신중하게 버섯을 갈태독의 아랫배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 시균은 보통의 동충하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갈태독이 살아생전 복용한 모든 독의 정수가 모여 있는... 굳이 이름붙이자면 천독시균(千毒屍菌)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접은 떼어낸 버섯을 두 손으로 쳐들어 살펴보며 말했다.

영지초를 닮은 그 버섯은 반투명한 껍질 안쪽에 액체가 가득 고여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천독시균?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보통의 시균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천독시균을 먹으면 갈태독이 평생 수련했던 독공(毒功)과 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 , 이걸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제이(第二)의 갈태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저의 말씀대로라면 천독시균이라는 그것은 정말 대단한 보물이로군요."

철접의 설명을 들은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이것도 네가 먹겠느냐?"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돌아보며 천독시균을 내밀었다.

"... 싫습니다!"

철접의 말에 요문천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뱀의 내단이야 엉겁결에 먹었지만 시체에서 돋아난 버섯이라니...! 갈태독이 아니라 갈태독 할애비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못 먹겠습니다!"

요문천은 혐오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쉽구나! 천독시균을 먹겠다고 했으면 네게 진 두 번의 신세를 전부 갚는 셈이 되었는데...!"

철접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철접이 몸을 움직이자 여기저기 갈라진 저고리 속에서 육중한 가슴이 물결치듯 출렁인다.

"파사의 내단을 먹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보답은 충분히 하셨습니다."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철접의 가슴을 훔쳐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내 마음은 편치가 않구나."

철접은 천독시균을 손에 든 채 한숨을 쉬었다.

"정 부담이 되신다면 이리 주십시오.“

!

요문천은 그런 철접에게 다가가 천독시균을 낚아챘다.

잘 생각했다.”

요문천이 천독시균을 낚아채자 철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의 내단에다가 천독시균까지 복용하면 너는 어렵지 않게 천하무적이 될 수가...”

말하던 철접의 눈이 부릅떠졌다.

요문천이 손에 들고 있던 천독시균을 말하느라 벌어진 철접의 입에 재빨리 집어넣은 때문이다.

철접이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천독시균은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온 후였다.

철접은 입을 다무는 과정에서 천독시균의 얇은 껍질을 이빨로 깨물게 되었다.

그 즉시 천독시균 안에 들어있던 점액질의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입을 벌리게 되면 천독시균의 정수가 밖으로 쏟아지게 된다.

철접은 어쩔 수 없이 천독시균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서로 비긴 게 되었지요?”

이마를 살짝 찡그린 철접이 우물거리며 천독시균을 먹는 것을 보며 요문천은 싱긋 웃었다.

(정은 많고 욕심은 없는 아이다.)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보며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냉혹비정한 성격의 인자로 키워진 철접이다.

그녀가 사내를 대상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었는데...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구나.)

철접은 무언가를 결심하며 천독시균을 껍질까지 모두 씹어서 삼켰다.

어떻습니까? 천독시균의 약효가 느껴지시는지요?”

요문천이 철접의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파사의 내단도 그렇고... 천독시균 역시 약효를 온전히 흡수하려면 제대로 내공심법을 운용해야만 한다.”

철접이 소매로 입가를 조금 닦으며 말했다.

그럼 어서 운기조식 하셔서 천독시균의 약효를 흡수하십시오. 몸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게 급선무이니...”

그래야겠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철접은 재촉하는 요문천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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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독왕(毒王)이 남긴 보물

 

 

 

종유석의 뒤쪽에는 또 다른 지하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앞쪽의 지하 광장에 비하면 작은 규모다.

또 빛을 뿜어낼만한 보물들이 없어서 어둑하다.

그 어둠 속에 거대한 뱀의 골격이 누워있다.

형태를 보면 분명 뱀의 것이다.

한데 죽 늘어선 갈비뼈 안쪽으로 사람이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스스스! 지지지!

몸길이가 끝이 안 보일 지경으로 긴 그 괴수의 시체에는 수많은 독충들이 달라붙어 있다.

(무슨 뱀의 골격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요문천이 어둑한 광장 안쪽을 기웃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저놈은 아마도 파사(巴蛇)일 것이다."

"파사!"

요문천은 놀라 철접을 돌아보았다.

"전설 속의 영웅 예(羿)가 죽였다는 그 거대한 뱀 말입니까? 코끼리도 한 입에 삼켰다는...?"

"그 옛날 후예(后羿)가 동정호(洞庭湖)에서 잡아 죽인 파사는 얼마나 컸는지 그 뼈를 모아놓은 것이 언덕이 되어 파릉(巴陵)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진짜 파사에 비하면 저놈은 아주 작은 축에 속할 것이다."

철접이 어둑한 지하 광장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파사는 용이 되다만 영물로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의 왕이었다고 한다.

크기가 코끼리를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또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신통력과 한번 뿜어내면 수십 리 안쪽의 모든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 끔찍한 독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파사는 용이 되지 못한 분풀이를 세상에 해대었다.

그 때문에 동정호 일대는 수시로 물난리가 났고 파사가 내뿜는 독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천신(天神) 중 한명인 후예로 하여금 파사를 죽이게 했다 것이 전설의 내막이다.

후예의 아내가 달에 홀로 산다는 항아(姮娥).

 

키키키! 키키! 샤샤샥! 스르르!

철접이 연기를 뿜어내는 등을 들고 다가가자 파사의 뼈에 달라붙어 있던 독충들이 썰물처럼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독충들이 달아나면서 광장 바닥에 손바닥보다 큰 비늘들이 수없이 널려있는 게 드러난다.

금속인 듯 번쩍이는 그것들은 파사의 몸을 덮고 있었던 비늘이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그 비늘 덕분에 인간의 힘으로는 파사를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었다.

이놈이 진짜 파사의 후손이라면 멀리 남쪽 동정호 근처에 살았을 텐데... 어떻게 멀고 추운 이곳 북경 근처까지 와서 죽은 것일까요?”

요문천은 철접의 뒤를 따라 두 번째 광장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갈태독이 이놈을 동정호에서 이곳으로 불러왔을 것이다. 시시각각 북경으로 육박해오는 주원장의 군세를 상대할 무기로 쓰기 위해서... 독왕보궁 일대에 서식하는 독충들은 갈태독이 기르던 것들일 테고...”

철접이 파사의 골격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요문천의 뇌리에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나라 말엽에 조백하에 용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나라는 망하지 않을 거라고들 했지만 채 한 달이 못 되어 대장군 서달의 군세가 북경을 점령했지요.”

만일 이놈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사람들이 보았다면 용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철접은 등을 쳐들어서 무언가를 찾는 표정으로 파사의 골격 옆을 지나갔다.

(오래 살아 영통했을 터인 파사는 동정호에 살던 중 갈태독의 부름을 받고 장강(長江)을 따라 동해(東海)로 나갔다가 북상하여 북경 근처를 흐르는 조백하로 거슬러 올라왔을 것이다. 이 지하광장은 조백하와 연결되어 있을 게 분명하고...)

요문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파사의 거대한 뼈 옆을 지나갔다.

"독왕보궁 근처에 사는 독충들이 유별나게 컸던 것은 파사의 시체를 뜯어먹은 때문일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한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의 독충들이 비정상적으로 큰 건 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군요."

요문천도 철접의 말에 동의했다.

(헌데 누가 이 엄청난 괴물을 죽인 것일까? 유력한 후보라면 사해무존 초패강이지만 그가 이무기나 대사(大蛇)를 죽였다는 얘기는 없는데...)

요문천이 파사의 사인(死因)에 대해 생각하며 갸웃거릴 때였다.

"네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파사의 골격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철접이 어떤 종유석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 시체로군요!"

멈춰선 철접 옆으로 다가간 요문천은 다시 한 번 놀라 침을 꼴깍 삼켰다.

철접이 보고 있는 종유석 아래쪽에는 한 구의 시신이 기대앉아 있다.

시신은 살이 독충들에게 뜯어 먹힌 듯 모두 사라져 뼈만 남은 상태였다.

헌데 기이하게도 남아있는 뼈가 온통 수북한 털로 뒤덮여있다.

골격으로 보아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인물일 것이다.

그 시체 옆에는 낡은 책 한권과 수없이 많은 마디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채찍이 한 자루 놓여있다.

(사람의 뼈에서 털이 자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시신의 뼈가 털로 덮여있는 것을 본 요문천이 놀랄 때였다.

"이 시신의 주인이 누구일 것 같으냐?"

등을 바닥에 내려놓은 철접이 시신 옆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가지 물건을 집어들며 물었다.

순간 요문천의 뇌리를 벼락같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천독친왕 갈태독? 사해무존에게 패해 중상을 입고 달아난 후 두 번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자의 유골입니까?"

"네가 직접 확인해봐라!"

철접은 흥분하여 묻는 요문천에게 바닥에서 집어든 두 가지 물건 중 낡은 책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미는 검은색의 책 표지에는 <九毒眞經 上篇>이라는 글이 적혀있는 게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구독진경(九毒眞經) 상편(上篇)!)

요문천은 눈을 치뜨며 책을 받아들어 표지를 넘겨보았다.

표지 안쪽의 첫번째 장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필체의 글이 아래위로 적혀있다.

 

<구독신왕(九毒神王) 갈극(葛極)이 독문(毒門)의 영광을 위해 구독진경 상, 하편을 짓는다.>

 

이것이 상단에 적혀있는 글이다.

저주마경처럼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듯 서체가 전자체(篆字體).

(구독신왕 갈극? 이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인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아래쪽의 글을 읽었다.

 

<못난 후손 갈태독이 조사님의 보우하심 덕분에 구독진경 상, 하편 중 상편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사님의 뜻을 받들어 우내사천과 다른 천외오패(天外五覇)를 세상에서 없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두 번째 글은 해서체(楷書體)로 적혀있는데 먹의 색이 선명하여 쓰여진 것이 아주 오래 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갈태독! 역시 저 해골은 천독친왕 갈태독의 것이었군요!"

두 번째 글을 읽은 요문천은 털로 뒤덮인 해골을 돌아보며 흥분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해골은 오른쪽 팔이 팔꿈치 위에서 잘렸으며 가슴의 늑골들도 여러 개 잘려져 있다.

무언가 예리한 것이 해골의 팔과 가슴을 동시에 베어버린 형상이다.

해골의 주인은 바로 천독친왕 갈태독이었던 것이다.

(각기 한 시대를 호령했던, 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인 사이인 사해무존 초패강과 천독친왕 갈태독이 지척에서 최후를 맞이했구나.)

해골이 된 시신이 갈태독의 것임을 확인한 요문천은 복잡한 심사가 되었다.

사해무존과 갈태독이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해무존에게 패해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은 이곳 독왕보궁에 숨어서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을 것이다."

철접이 구독진경과 함께 집어든 검은색의 채찍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럼 그 채찍이 바로...!"

요문천은 놀라 눈을 치뜨며 철접의 손에 들린 채찍을 바라보았다.

"갈태독의 애병인 묵린천독편(墨鱗千毒鞭)이다. 듣기로는 한번 휘둘러지면 어떤 호신강기라도 촛농처럼 녹여버렸다는구나."

철접은 말하며 검은색의 채찍, 묵린천독편을 요문천에게 내밀었다.

 

묵린천독편은 이무기의 비늘을 천 가지 독()에 담가 만든 채찍디.

내공을 주입시키면 멸절독강(滅絶毒罡)이라는 무시무시한 독기가 뿜어져 나간다.

묵린천독편에서 뿜어지는 멸절독강의 위력은 실로 가공하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철벽을 녹여 버릴 정도라고 한다.

오십이 년 전, 사해무존 초패강이 지옥교를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상 그 어떤 신병이기도 묵린천독편에 맞설 수 없었다.

사실 묵린천독편과 지옥교는 모두 고금십병(古今十兵)에 드는 무서운 병기들이었다.

경륜이 일천한 요문천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독왕보궁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찾은 건 너다.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요문천에게 내밀며 말했다.

"묵린천독편은 필요 없습니다. 전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문천은 허리에 차고 있는 지옥교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묵린천독편은 내가 잠시 보관하도록 하마!"

요문천이 사양하자 철접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따라 오너라!"

그녀는 묵린천독편을 둘둘 말아 쥐며 파사의 골격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도 구독진경 상편을 품속에 넣으며 철접을 따라서 파사의 뼈 안으로 들어갔다.

 

파사의 골격은 워낙 커서 철접과 요문천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골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찌찌찌! 스스스!

철접이 둘둘 말아 쥔 묵린천독편을 앞으로 내민 채 다가가자 파사의 골격에 달라붙어 있던 독충들이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묵린천독편에 농축되어있는 독기가 워낙 강해서 독물들도 두려워하는구나!)

요문천이 그것을 보며 생각하며 따라갈 때였다.

"여길 봐라!"

이윽고 파사의 목 부분에 이른 철접이 묵린천독편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요문천이 올려다보니 그 부분의 뼈가 마치 촛농처럼 녹아있다.

"파사의 목 부분 뼈가 녹아있군요! 저 상처는 혹시...!"

"묵린천독편에 당했을 것이다!"

요문천의 말에 철접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를 죽인 게 다른 사람도 아닌 갈태독이었군요. 헌데 갈태독은 어째서 수천 리 밖에서 자신을 찾아온 이 영물을 죽인 걸까요?"

"파사는 몸 속에 한 가지 보물을 품고 있었다. 그걸 빼앗아 복용하면 사해무존의 검기에 심장이 갈라지는 중상을 입었던 갈태독도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철접은 요문천의 물음에 대답하며 다시 돌아섰다.

"갈태독이 독왕보궁으로 숨어들어온 이유가 단지 몸을 숨기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철접을 따라가며 요문천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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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둠 속에서의 설렘

 

 

 

(이런...)

박속같이 하얀 철접의 둔부를 본 요문천은 숨이 턱 막혔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허리를 숙인 채 표창을 회수하고 있다.

너무도 자극적인 그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

갑자기 철접이 왼쪽 발로 바닥을 세차게 밟아서 요문천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콰직! 끼이익!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터진다.

!”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가죽신을 신은 철접의 왼쪽 발에 손바닥만한 전갈이 으스러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 전갈은 몰래 다가와 철접의 발목에 독침을 쏘려다가 밟혀 죽은 것이다.

우지직!

밟았다가 옆으로 문지르는 철접의 가죽신 아래쪽에서 전갈의 몸통이 완전히 으스러진다.

(과연 인자로구나. 여자면서도 독충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요문천은 무심히 전갈을 밟아 으스러트리는 철접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함께 철접이 신고 있는 가죽신의 바닥에 강철같이 단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이곳에 출몰하는 독충들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 그렇다는 건 아주 오래 산 놈들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요문천은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하며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사이에 철접은 표창들을 모두 회수했다.

"내 뒤를 바싹 따라 오너라! 세 걸음 이상 뒤처지면 안된다."

표창에 묻은 독충들이 체액을 옷깃에 닦으며 철접은 걸음을 옮겼다.

...!”

요문천은 대답하며 급히 철접을 따라붙었다.

한 걸음이 채 안되게 다가서자 향긋한 내음이 요문천의 코를 간지럽힌다.

"어쩌면 오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목매며 찾던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표창을 챙긴 철접은 다른 것을 꺼냈다.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요문천이 약을 찾기 위해 그녀의 품속에서 찾았던 큰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주머니들 중 하나다.

(사람들이 목매며 찾던 것? 설마 갈태독의 보물창고가 이 앞쪽에 있단 말인가?)

요문천이 흠칫할 때였다.

물론 그 전에 귀찮은 놈들을 쫓아버려야겠지.”

작은 주머니를 꺼내든 철접이 고개 짓으로 앞쪽을 가리켯다.

!”

고개를 옆으로 빼서 철접의 앞쪽을 보던 요문천은 기겁했다.

츠으! 츠으!

철접 앞 쪽 어둠 속에 수많은 불빛이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반딧불이가 떠있는 것같은 광경이다.

그때 철접이 왼손에 들고 있는 등을 높이 쳐들었다.

화악!

그와 함께 철접이 쳐든 등의 불빛이 갑자기 몇 배로 밝아진다.

그 등에는 요문천이 알지 못했던, 불빛을 조절하는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몇 배로 밝아진 등의 불빛으로 인해 통로 앞쪽의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 맙소사!)

순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부릅떴다.

한낮의 태양인 듯 밝아진 등의 불빛에 의해 드러난 앞쪽의 통로를 수많은 벌레가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갈, 지네, 거미, 갑충, 그리고 이름 모를 기괴한 벌레들...

통로의 좌우 벽과 천장, 바닥이 온갖 종류의 벌레들로 뒤덮여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적인 독을 머금고 있는 독충들이다.

등의 불빛이 밝아지기 전에 요문천이 보았던 수많은 반딧불같은 것들은 그 독충들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여긴 완전히 독충들의 소굴이로구나. 아까 들었던 모래가 흐르는 듯한 소리는 저놈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것이었고...!)

요문천은 진저리를 치며 허리띠에 꽂고 있는 지옥교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여차하면 뽑을 생각이었다.

철접은 품속에서 꺼낸 작은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이빨로 끊어서 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고운 가루를 왼손으로 들고 있는 등의 위쪽에 나있는 구멍으로 솔솔 부어넣었다.

화악!

순간 등에서 대량의 연기가 일어나 주변을 뒤덮었다.

콜록!”

갑자기 퍼지는 연기를 들이마신 요문천은 세차게 기침을 했다.

사람에게는 그리 해롭지 않은 연기이니 마셔도 된다.”

철접은 연기를 연막처럼 뿜어내는 등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미리 경고를 좀 해주지 않고...)

요문천은 콜록거리며 철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끼익! ! 사사삭! 츠츠츠!

연기가 퍼지자 통로의 사방 벽을 뒤덮고 있던 독충들이 질겁하며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에서 뿜어지는 이 연기에 독충들을 쫓는 효과가 있구나!)

요문천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철접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슈욱! !

그러는 사이에도 등에서는 연기가 확확 뿜어져 나왔다.

그 연기는 독충들을 앞쪽으로 달아나게 만들고 있다.

(온갖 악조건 하에서 임무를 수행해하는 인자답게 독충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독충들이 지키고 있는 이 통로를 살아서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문천은 새삼 감탄하며 철접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철접의 뒷모습을 보며 걸어갔을까?

갑자기 앞서 가던 철접이 걸음을 멈췄다.

요문천은 철접이 멈출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또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요문천은 얼굴을 철접의 등에 처박고 말았다.

"어이쿠!"

철접의 키가 요문천보다 반 뼘 쯤 더 큰 탓에 얼굴이 그녀의 등에 부딪힌 것이다.

요문천은 허우적거리다가 본능적으로 철접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철접을 뒤에서 끌어안은 요문천의 양손에 부드럽고 탄력이 넘치는 살덩이들이 와락 움켜쥐어진다.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철접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쥔 자세가 된 것이다.

요문천의 양손이 자신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쥐었으나 철접은 한 차례 움찔 했을 뿐 가만히 서있었다.

(이크!)

요문천은 기겁하면서도 즉시 손을 철접의 가슴에서 떼지는 못했다.

크기는 유모 섭대낭의 것보다 작지만 탄력은 비교할 수도 없이 좋은 살덩이들이다.

그 황홀한 감촉에 요문천은 자신이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망각했다.

심지어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서 철접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감촉,

양지유(羊脂油)를 굳힌 듯 매끄러운 그것들은 요문천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라도 만지고 싶게 만든다.

(이렇게... 이렇게 감촉이 좋다니...)

요문천은 황홀경에 빠져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잠시 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사실은 숨 몇 번 쉰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목적지에 온 것같다.”

철접이 나직하게 말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요문천의 두 손은 철접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 죄송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요문천은 얼굴이 벌개져서 철접에게 사과했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새삼스럽긴... 금창약을 발라주느라 내 몸을 구석구석 만지지 않았느냐?"

걸음을 옮기는 철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등을 높이 쳐들었다.

요문천은 철접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 그렇긴 하지만... !"

그래도 사과를 하려던 요문천은 흠칫 하며 앞쪽을 보았다.

철접이 높이 쳐드는 등의 불빛에 의해 앞쪽 삼, 사장 쯤에 육중한 철문이 서있는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철문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빛을 내며 번들거린다.

지하 밀로에 가득 찬 습기에 전혀 훼손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철문의 재질이 부식에 강한 합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쪽으로 이루어진 철문은 약간 열려있다.

쏴아아!

그 열린 틈으로 지하 통로를 메우고 있던 수많은 독충들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있다.

츠츠츠!

그와 함께 조금 열려진 철문 틈으로 오색(五色)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주 강한 빛은 아니지만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빛이다.

(저 빛은 보광(寶光)이다!)

요문천의 눈이 흥분으로 치떠졌다.

조금 열려져 있는 철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그긍!

그 사이에 철접은 철문 중 한쪽을 오른손으로 밀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악!

철접의 손에 의해 철문이 활짝 열리면서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이 더 강렬해졌다.

(틀림없다! 저 철문 안쪽이 지난 오십여 년동안 누구도 찾지 못했다는 천독친왕 갈태독의 보물창고다.)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서둘러 철접의 뒤를 따라 철문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

그리고 철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철접이 밀고 들어간 철문의 안쪽은 건너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지하 광장이다.

지하 광장의 도처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들이 늘어서서 높은 천장을 떠받히고 있다.

지하광장은 원래 천연의 동굴이었던 것이다.

족히 수천 평은 됨직한 그 넓은 지하광장에 산더미같은 보물들이 쌓여있다.

벽돌크기만한 금괴와 은괴가 마치 성벽이나 건물처럼 여기저기 쌓여있다.

금괴와 은괴들이 쌓여있는 사이의 공간을 보석과 골동품, 진귀한 그림, 명장이 만든 공예품등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광장 중앙에는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사람 키만한 금제 항아리들 수십 개에 담겨진 채 영롱한 빛을 뿜어내기도 한다.

요문천이 철문 밖에서 본 보광은 그 보석들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탓에 재물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믿어왔던 요문천이다.

"이건... 이건...!"

그런 그였건만 입을 쩍 벌린 채 헐떡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요문천의 눈앞에 있는 보물의 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인 것이다.

"천독친왕 갈태독의 보물에 대해서는 바다 건너에서 살던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아마 갈태독이 비밀리에 세웠다는 독왕보궁(毒王寶宮)일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 전설은 사실이었구나! 갈태독이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긁어모은 재보가 수억만 냥에 이르러 천하의 절반을 사고도 남는다는...)

철접을 따라가며 요문천은 넋이 나가 주변에 쌓여있는 보물의 산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당금의 명 황실 재산도 이곳에 쌓여있는 재보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리 와 봐라!"

그때 앞 서 간 철접이 돌아보며 요문천을 불렀다.

그녀는 보물들의 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굵은 종유석 옆에 서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저?"

요문천은 서둘러 철접에게 다가갔다.

철접은 요문천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말없이 종유석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맙소사!"

철접이 가리킨 곳을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요문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그곳에는 또 어떤 놀라운 게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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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궁(迷宮)의 비밀

 

 

 

<노부는 누구보다도 옥사후, 그놈을 잘 안다.

옥사후는 절대 혼자만의 판단으로 노부에 대한 독살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배포가 큰 놈이 못 된다.

무엇보다도 옥사후에게 강력한 무공을 지닌 조력자가 있었다는 게 그놈이 다른 인간에게 사주를 받은 확실한 증거다.

무존성을 떠난 직후 정체불명의 인간들이 노부를 공격해왔던 것이다.

비록 노부의 손에 모두 죽기는 했지만 그자들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위력적이었다.

당금 무림에 존재하는 무공다운 무공은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노부건만 놈들의 무공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 데 놈들은 우내사천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해무존의 죽음에도 우내사천이 관련되어 있단 말인가?”

긁을 읽던 요문천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득한 옛날 옥문관 밖 서역에 자리한 지옥성이라는 문파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우내사천이라는 인물들이었다.

헌데 지옥성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사해무존 초패강을 공격한 자들 역시 우내사천의 후손일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무존성이 자리한 황산에서 이곳 북경까지 오는 동안 노부는 정체불명의 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노부는 놈들이 옥사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습격한 자들의 대부분은 노부의 손에 죽었지만 그 대가로 노부 역시 회생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력을 쓰는 바람에 만성독약의 독성이 급격히 온몸으로 퍼져간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천독친왕부의 폐허에 도착한 노부는 오십여 년 전에 파악해두었던 비밀통로를 통해 갈태독의 보물창고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사이에 독은 골수(骨髓)에까지 퍼져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만일 누군가 이글을 본다면... 무존성에서 노부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딸에게 흉수가 옥사후라는 사실을...>

 

글은 그렇게 끝이 나있었다.

사해무존 초패강은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독기가 골수에 미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이분은 옥면환룡의 배후에 우내사천의 후손들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죽었다.)

저주마경에 적힌 글을 모두 읽은 요문천은 고개를 들어 사해무존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결국 얘기는 돌고 돌아서 우내사천으로 돌아가는구나. 지옥성이란 문파를 멸망시킨 것도 우내사천이고, 그 지옥성의 절기를 얻어 천하제일인이 된 사해무존 초패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후도 우내사천의 후손들인 듯하니...!)

어느덧 요문천의 마음속에도 우내사천이라는 존재가 거대한 바위처럼 들어차게 되었다.

(어쩌면 강호무림을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도 우내사천의 후손들일지 모르겠구나!)

요문천이 저주마경을 덮으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

갑자기 요문천의 왼쪽 다리 옆의 바닥에 뾰족한 날이 네 개 달린 얇은 표창이 날아와 박혔다

!”

깜짝 놀라 돌아보는 요문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끼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시커먼 전갈이 뒤쪽에서 날아든 표창에 등이 찍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갈은 요문천의 다리 바로 옆에까지 다가왔다가 표창에 꽂혔다.

하마터면 요문천을 독침으로 찌를 뻔했던 상황이었다.

(전갈!)

요문천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날 때였다.

"조심해야한다. 이렇게 덥고 습기 찬 곳은 전갈 같은 독충(毒蟲)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니...!"

요문천이 지나온 쪽의 어둑한 통로로 어떤 여자가 말하며 다가왔다.

스윽!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는 물론 철접이었다.

(...)

헌데 그녀의 복장이 요문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철접은 하의는 입지 않고 상체에 저고리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허리띠를 매고 있는 저고리의 하단이 엉덩이와 사타구니까지는 가리고는 있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튼실하면서도 미끈한 다리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발에는 버선과 가죽신을 신고 있고...

요문천은 철접이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저고리의 아랫단이 조금이라도 들쳐지면 은밀한 부분이 무방비로 드러나는 차림인 것이다.

그와 함께 요문천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절세무공의 비결을 집중하여 읽느라 거의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 몸은 좀 어떠십니까?”

요문천은 저고리의 아래쪽으로 드러나 보이는 철접의 희고도 미끈한 다리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졌다. 네게 또 한 번 신세를 졌구나!"

철접은 한숨을 쉬며 요문천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요문천이 발라준 금창약에 아주 빠르게 지혈이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 것이다.

물론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지만...

"거듭 입은 은혜는 꼭 갚도록 하마!"

철접이 애잔한 표정으로 요문천을 보며 말했다.

인자답게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던 철접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표정이 떠오르자 요문천은 가슴이 찌릿한 자극을 받았다.

인형같이 느껴지던 그녀가 비로소 피가 흐르는 여자로 느껴진 때문이다.

"... 마땅히 도와드렸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요문천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두 손을 마주 쥐어 포권을 했다.

"늦었지만 동생 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요문천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로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을 어찌하겠느냐?"

철접도 우울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여서 답례를 했다.

그와 함께 내려 까는 철접의 눈가로 눈물이 맺히는 것이 언듯 요문천의 시야에 들어왔다.

(애처롭다.)

철접의 눈물을 본 요문천은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작은 표정, 감정의 변화등이 어째서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요문천이었다.

(그나저나 뭐가 급해서 하체는 벌거벗은 차림으로 온 것일까? 치마가 찢어지고 피로 물들긴 했어도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문천은 치마를 입지 않아서 그대로 드러난 철접의 미끈한 다리를 곁눈질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인지요?"

그러면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글쎄다!"

요문천의 물음에 철접은 힘없이 웃었다.

"청부받은 일을 실패했으니 막북의 토곤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이젠 내게 없구나!"

철접은 천장을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아무리 비정하고 냉혹한 인자로 길러져온 나라고 해도 일단 첫 시도에서 실패한 자살을 다시 하기는 쉽지 않단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가로 눈물이 비치는 게 요문천의 눈에 들어온다.

"자살이란 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요문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철접의 말에 동조했다.

"세상은 넓고 넓지만 내가 돌아가고 속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지!"

철접은 눈 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면서 처연하게 웃었다.

(너무도 가엾다.)

철접의 모습의 요문천은 가슴 깊은 곳이 다시 한 번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의 외로움과 비애가 내 일처럼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런 감정은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인데...!)

그런 요문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우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서 전갈을 찔러 죽인 표창을 회수했다.

철접이 몸을 숙이자 저고리 사이로 묵직한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이 들여다보여 요문천의 입속을 마르게 한다.

"내가 아는 바가 정확하다면... 난 너보다 열 살 연상이다."

철접은 표창에 묻은 전갈의 흔적을 옷깃에 닦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이 여자 벌써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구나!)

요문천은 철접의 나이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한 두 살 차이도 아니니 앞으로도 계속 말을 놔도 되겠지?"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지긋이 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요문천은 얼굴이 좀 붉어지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우선은 여길 더 살펴볼...!"

말하던 철접이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 모습에 요문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도 귀를 기울여 봐라!"

철접이 손가락으로 어둑한 통로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요문천은 저주마경을 들지 않은 왼손을 귀에 대고 철접이 가리키는 쪽으로 청각을 집중했다

사락! 사락! 사각!

그러자 무언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이건...!"

요문천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모래가 흘러가는 듯한 소리로 들립니다만... 썩 기분이 좋은 소리는 아니군요."

"같이 가보자!"

요문천의 말에 철접이 그때까지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려있던 등을 떼어 들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

요문천은 대답하며 급히 저주마경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사해무존의 시신이 두르고 있는 허리띠에서 빈 칼집을 뽑아내었다.

칼집은 전체가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 상당히 묵직하다.

요문천은 그때까지 바닥에 꽂아놓았던 지옥교를 뽑아서 그 칼집에 꽂았다.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지옥교는 칼집 속으로 정확하게 채워지며 들어갔다.

(역시 이게 지옥교 전용의 칼집이었구나!)

요문천은 칼집에 넣은 지옥교를 자신의 허리띠에 끼웠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초노사의 사인은 무존성에 분명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어 그는 사해무존 초패강의 시신에 대고 정중하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철접이 앞서 간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요문천의 앞쪽에 철접이 등을 왼손으로 쳐들어서 앞쪽을 비추며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철접이 상체에 걸치고 있는 저고리는 대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어 어두운 색조를 띄고 있다.

또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려 뽀얗던 목덜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철접의 상체는 어둠에 동화되어 그 형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옷을 걸치지 않은 하체는 흐릿한 등불에 비쳐져서 뚜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마치 아랫도리만 있는 여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같다.)

요문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종종 걸음으로 철접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앞서가던 철접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요문천이 철접 바로 뒤에 멈춰서며 물을 때였다.

피핑!

철접은 대답하지 않고 앞쪽의 어둠 속을 향해 오른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틈엔지 네 개의 뿔이 달린 얇은 표창이 몇 개 쥐어져 있다가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 끼익! 빠카캉! !

어둠 속에서 불똥이 튀면서 무언가 비명을 지른다

(또 전갈인가?)

요문천이 흠칫 놀랄 때 멈춰서있던 철접이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삼장 정도 앞쪽의 통로 여기저기에 표창들이 박혀있다.

전갈과 커다란 지네, 거미등이 그 표창에 꽂혀 벌벌 떨고 있다.

독충들은 모두 비정상적으로 커서 손바닥만하다.

전갈과 지네, 거미등이 그렇게 크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요문천이다.

(이 안의 독충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저렇게 큰 것일까?)

요문천이 놀라며 기웃거릴 때였다.

앞서가던 철접이 허리를 숙여서 독충들의 몸에 박힌 표창을 다시 회수하기 시작했다.

(으헉!)

순간 요문천은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눈을 부릅떴다.

철접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저고리가 위로 딸려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달덩이같은 둔부가 요문천의 시야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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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가죽(人皮)으로 만든 비급(秘笈)

 

 

 

<본성의 형제들이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중과부적! 우내사천과 그놈들이 이끌고 온 중원 무림의 인간들에게 본성의 식솔들은 몰살당했으며 오직 노부와 노부의 애첩 혈미인(血美人)만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도 내상이 깊어 곧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지옥일맥(地獄一脈)의 멸망을 의미하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여 노부는 애첩 혈미인을 죽여 그녀의 살가죽에 본성의 비전절기들을 기록하게 되었다. 달리 절기들을 적어 놓을만한 재료가 없어서...>

 

"... 인피(人皮)!"

털썩!

요문천은 기겁하며 들고 있던 저주마경을 떨어트리면서 뒤로 주저앉았다.

그는 비로소 저주마경의 재질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촉감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으으으! ... 저 책이 사... 사람 가죽으로 지어진 것이었다니... 그것도 여자의 살가죽으로..."

요문천은 덜덜 떨면서 바닥에 떨어트린 비급을 곁눈질로 보았다.

설마 사람 가죽으로 지은 책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자신의 애첩을 죽여 그 살가죽으로 책을 만들다니... 너무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요문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저주마경을 곁눈질했다.

(문파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비전의 절기를 남겨야하는데 기록할 수단은 없고...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된 애첩을 미리 죽여서 그 살가죽으로 책을 엮었구나. 먹물 대신 피를 뽑아내어 글을 썼을 테고...)

요문천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떨리는 손을 저주마경 쪽으로 뻗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물건이지만 버릴 수도 없다. 끝까지 한 번 읽어나 보자!)

그리고는 용기를 내서 집어든 저주마경을 다시 펼쳤다

 

<노부는 우내사천 중 만겁마종(萬劫魔宗)이 날린 단맥마장(斷脈魔掌)에 맞아 온몸의 경맥이 끊어진 상태라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본래 우리 지옥성에는 지옥십결(地獄十訣)이라는 열 가지 절기가 있지만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적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아무쪼록 저주마경을 얻은 그대가 우내사천의 후손들을 꺾어 우리 지옥일맥(地獄一脈)의 절기가 결코 우내사천의 잡기(雜技)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길 바란다!

지옥검조 하륜이 죽어가며 적는다.>

 

표지 안쪽 첫 번째 지면의 글을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다음 지면부터 아주 난해하고 기괴한 무공비결들이 적혀있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세 배의 힘으로 돌려보내는 호신무공 저주마벽(詛呪魔壁),

철벽도 모래처럼 으깨버리는 지옥장강(地獄掌罡),

마검 지옥교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검법 마검팔식(魔劍八式)...

하지만 저주마경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은 그 세 가지가 전부였다.

또한 저주마경 전체 지면중 절반 이상이 빈 상태로 남아있었다.

스스로 우려했던 대로 지옥검조 하륜은 지옥십결이라는 지옥성의 열 가지 절기 중 단 세 가지만을 기록한 후 절명했던 것이다.

(유감이로구나. 지옥십결이라는 무공들 중 일곱 가지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요문천은 아쉬운 마음에 비어있는 지면을 넘겨보았다.

저주마벽, 지옥장장, 마검팔식등의 무공비결을 읽는 동안 어느덧 저주마경이 사람의 가죽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진 상태였다.

(글이 또 있다!)

헌데 저주마경의 맨 뒤쪽 지면을 펼쳐보던 요문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곳에 또 다른 글이 어지러운 필체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맨 뒷장에 적힌 이 글은 지옥검조가 남긴 것이 아니다!)

요문천은 한눈에 그 글이 지옥검조의 필체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글은 전자체가 아닌 초서체(草書體)로 적혀있으며 급히 휘갈겨 쓴 듯 글씨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또 지옥검조처럼 먹물 대신 피로 글을 썼다.

지옥검조가 남긴 글이 아주 검은 것에 반해 맨 뒷장에 적힌 글은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 글들이 적힌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님을 뜻한다.

 

<노부의 이름은 초패강(楚覇强)이다. 홍무(洪武) 폐하로부터 사해무존(四海武尊)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하사받았던 어리석은 인간이 사람을 잘못 본 대가로 비참하게 죽어가며 이 글을 남긴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사해무존 초패강!"

그리고 그 글을 읽은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저 시신이 지난 오십여 년간 무림을 지배해온 무존성(武尊城)의 성주 사해무존의 것이었다니...!"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앞쪽 석벽에 기댄 자세로 죽어있는 시체를 돌아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

 

그는 바로 오십이 년 전 천독친왕 갈태독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젊은 검객이었다.

출신이 비밀에 쌓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주원장을 찾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었다.

비록 약관을 갓 넘긴 애송이였으나 초패강은 이름에 걸맞게 경이적인 무공을 지녔다.

주원장의 휘하에 운집했던 그 어떤 무림 고수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만족한 주원장은 초패강을 최일선에서 원나라의 군세를 상대하고 있는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보냈다.

서달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원장 막하(幕下)의 최고 명장이다.

당연히 언제 자객이 그의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의 선견지명대로 원나라 측의 최고 고수인 천독친왕 갈태독이 서달을 암살하기 위해 그의 군막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의 경과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대로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막지 못했던 갈태독의 독공이건만 초패강이 일으킨 저주마벽은 뚫지 못했다.

오히려 초패강이 지옥교로 구사한 마검팔식에 갈태독은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갈태독의 기습에서 서달을 지켜준 이후로도 초패강은 수다한 전공을 세웠다.

서달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몽고족의 근거지로 쳐들어가서 원나라 황실이 동원한 무수한 고수들을 베어 넘긴 것이다.

만일 초패강의 활약이 없었다면 명나라 측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자명했다.

특히 서달은 몽고족이 동원한 자객들의 손에 결국 쓰러졌을 것이다.

서달은 고비사막의 깊은 곳까지 원나라 황실을 추격하여 분쇄함으로서 몽고족으로 하여금 다시는 중원 정복을 도모하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서달이 원나라 황실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초패강의 조력과 활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같은 혁혁한 전공에 보답하기 위해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사해무존이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다.

사해(四海), 즉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의 지존(至尊)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뿐만 아니라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무림에 속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부여했다.

초패강의 애검인 지옥교가 어떤 인간을 죽이든 그 죄를 묻지 않겠다는 칙령(勅令)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초패강을 무림의 주인, 무림왕(武林王)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후 초패강은 주원장의 권유도 있고 해서 황산(黃山)에 무존성(武尊城)을 세우고 무림의 대소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던 탓에 무림인들은 초패강과 그가 세운 무존성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황실이 존엄한 존재인 것처럼 무림인들에게는 무존성이 자신들의 주인이며 지배자인 것이다.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강호 무림의 주인인 사해무존 초패강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시신이 되어있다니...”

요문천은 경악과 충격으로 전율하며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시체, 사해무존 초패강을 살펴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의 주인이고 제왕이 아닌가?

자연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문천이 알기로 사해무존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다.

(무존성에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강호 무림뿐만 아니라 황실까지도 뒤흔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음모가...!)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다시 저주마경의 마지막 장에 적혀있는 글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사해무존 초패강의 사문내력은 밝혀진 바가 전혀 없었는데... 그는 지옥성이라는 고대의 문파에서 유래한 지옥교와 저주마경을 얻어서 천하제일인이 되었구나!)

요문천은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불에 비춰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부를 죽게 만든 범인은 통탄스럽게도 둘째 제자인 옥면환룡(玉面幻龍) 옥사후(玉獅吼)란 놈이다. 그 놈이 오래전부터 만성독약(慢性毒藥)을 음식에 조금씩 넣어 노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놈은 아마도 무존성의 성주 자리를 노리고 이같은 패륜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이 둘째 제자라고?"

글을 읽어 내려가며 요문천은 경악과 함께 분노를 금치 못했다.

"세상 말세로구나. 제자가 스승을 독살하기까지 하다니...!"

그와 함께 요문천은 살이 썩으며 드러난 사해무존 초패강의 뼈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조금씩 사해무존의 몸에 축적된 만성독약 때문에 그의 뼈가 푸른 빛을 띠게 된 것이다.

요문천은 놀란 마음을 갈아 앉히려 애쓰면서 글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절명하기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던 듯 초패강이 남긴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만성독약에 중독된 사실을 알아차린 노부는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무존성을 떠나 이곳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노부가 중독된 만성독약의 독성은 아주 지독해서 천독친왕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갈태독의 독경(毒經)을 얻어야만 해독이 가능할 것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진 글에는 사해무존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죽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사해무존은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독약의 독기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에 사해무존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갈태독이 남긴 독경을 손에 넣으면 어떤 극독이라도 해독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해무존은 자신이 중독당한 사실과 천독친왕부로 갈태독의 독경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수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무림의 주인이며 천하제일인임을 자처해온 처지에 남의 독수에 어이없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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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가 남긴 기연(奇緣)

 

 

 

어둠 속에 끝이 없을 듯 이어진 통로의 대부분은 두꺼운 이끼로 뒤덮여 있다.

바로 근처에 조백하가 흐르는 탓에 사시사철 습한 때문일 것이다.

(습할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도 하다. 지하라면 당연히 서늘해야하는데...)

요문천은 등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북경은 중원의 동북쪽 끝에 자리한 탓에 겨울이면 추위가 매섭다.

설령 계절이 여름이라 해도 깊은 지하는 서늘해야 정상이다.

헌데 요문천이 지금 걸어가는 지하의 통로는 습기로 가득 차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까지 하다.

이끼가 무성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마 지하의 깊지 않은 곳으로 화맥(火脈)이 지나가는 때문일 것이다.)

바닥에도 두텁게 깔린 부드러운 이끼를 밟고 걸어가며 요문천은 나름대로 지하통로가 더운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화맥, 즉 땅 속의 화기가 흐르는 경로가 지상에 가까워지면 화산으로 분출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하의 물을 데워 온천을 만든다.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팔달령 일대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천독친왕부 아래로 화맥이 지나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반짝!

어둑한 동로 저편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앞쪽에 빛을 발하는 무언가 있다!)

요문천은 등을 쳐든 채 서둘러 그 반짝이는 물체로 다가갔다.

() 아닌가?”

이윽고 반짝이는 물체 앞에 이른 요문천은 눈을 치떴다.

통로가 직각으로 꺾어지는 곳인데 좌측의 벽에 한 자루의 검이 깊이 박혀있다.

특이하게도 검날이 유리처럼 투명한 검인데 검신의 중앙으로 붉은 선이 한 가닥 길게 그어져 있다.

검의 손잡이 끝에 귀신의 머리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징징!

유리같이 투명한 검날이 낮으막히 진동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검날에서 서늘한 빛이 뿜어진다.

요문천이 멀리서 본 빛은 바로 투명한 검날이 진동하면서 산란(散亂) 시킨 빛이었다.

(검날이 저절로 진동하고 있다. 절대 평범한 검은 아니다!)

요문천은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가 그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의 손잡이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귀신의 머리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로 <地獄橋>라는 글이 전자(篆字), 즉 오래 된 옛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지옥교(地獄橋)? 지옥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검명(劍名)을 확인한 요문천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이 검이 휘둘러지면 반드시 상대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뜻일 텐데...)

요문천은 등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런 후 오른손으로 지옥교라는 이름을 지닌 그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감촉은 비록 서늘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의 손잡이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벽에서 조심스럽게 뽑았다.

검날이 돌로 이루어진 벽에 깊이 박혀있어서 뽑을 때 상당한 저항을 예상했다.

스윽!

하지만 지옥교는 석벽에서 너무도 쉽게 뽑혔다.

뽑히는 과정에서 검날에 닿는 순간 석벽이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으며 간단히 갈라진 때문이다.

(단단한 석벽을 마치 두부처럼 갈라버린다. 정말 날카로운 놈이다!)

요문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지옥교를 얼굴 앞에 수직으로 세워 검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옥교의 검날은 유리처럼 투명하여 맞은편이 비쳐 보인다.

그 투명한 검날 중앙으로 방금 전 사람의 몸에서 흐른 피처럼 선명한 붉은 선이 떠있다.

웅웅!

그와 함께 요문천의 손에 들려진 지옥교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진동한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걸 휘둘러서 무엇이든지 베어보고 싶다!)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는 요문천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갔다.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와 무엇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민 탓이다.

(설마 이검이 내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살의(殺意)와 파괴본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인가?)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던 요문천은 오싹한 느낌을 받고 급히 시선을 떼었다.

지잉!

요문천의 시선이 이탈하자 지옥교의 진동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내가 보지 않자 칭얼거림이 잦아든다. 검 주제에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고 이해한다는 건가?)

요문천은 아래로 내려트린 지옥교를 곁눈질로 보며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이놈이 신검(神劍) 아니면 마검(魔劒)이라는 건데... 살기가 강하니 신검이라기보다는 마검이겠구나.)

징징!

요문천이 곁눈질로 보자 지옥교는 다시 진동을 일으킨다.

(내가 자길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무섭다면 무섭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이 마검이 어쩌다가 이런 외진 곳에 버려진 것일까?)

요문천은 급히 지옥교에서 시선을 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요문천이 걸음을 옮기는 앞쪽에는 밀로가 거의 직각으로 꺾여있다.

!”

헌데 그 직각의 통로를 돌아나간 직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리며 주춤거렸다.

모퉁이를 돌아간 그의 앞쪽에 한 구의 시신이 벽에 기댄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 시체...)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춤 주춤 시신쪽으로 다가갔다.

만일 밀로 밖의 석실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놀라 주저앉았을 것이다.

(혹시 천독친왕부의 지하로 숨어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던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가 아닐까?)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시체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시체가 갈태독의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가 완전히 육탈(肉脫)이 되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체는 체격이 아주 좋아서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어 보인다..

그 장대한 몸에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있는 시체는 반쯤 썩어서 살이 여전히 뼈에 붙어있다.

오십여 년 전에 죽은 것이 거의 확실한 갈태독의 시체가 아직도 부패가 진행 중일 리는 없다.

결정적으로 시체의 허리춤에는 빈 칼집이 하나 걸려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갈태독은 채찍과 비수, 암기들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갈태독이 검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빈 칼집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곤룡포를 걸친 시체가 갈태독의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비어있는 칼집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옥교라는 이 마검의 주인이었던 모양인데... 어쩌다 천독친왕부의 지하에 들어와 죽은 것일까?)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요문천은 몸을 숙여서 시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체는 얼굴 부위가 심하게 부패되어 있어 살아있을 때의 용모는 추측할 수가 없다.

살이 썩으면서 드러난 뼈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

뼈의 색으로 이 인물이 극독에 중독되어 죽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살이 이 정도 썩은 상태라면 불과 몇 달 전에 죽었다는 건데...)

등을 든 왼쪽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시신의 상태를 살피던 요문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시신의 가슴 부분이 불룩한 것이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품속에 무언가 들어있다!)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시체가 걸치고 있는 곤룡포의 가슴부분을 들쳐보려고 했다.

비록 두렵지는 않지만 썩어가고 있는 중인 시체에 직접 손을 댈 정도로 대범하진 못한 때문이다.

서걱!

헌데 지옥교의 날이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곤룡포가 간단히 갈라진다.

그만큼 지옥교의 날은 날카로운 것이다.

그리고 갈라진 곤룡포 속에 책이 한 권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한권 품고 있다.)

!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곤룡포를 좀 더 길게 아래로 찢었다.

털썩!

그러자 한권의 책이 시체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 두껍지 않은 그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표지가 검붉게 퇴색되어 있다.

(혹시 무공비급 아닐까?)

요문천은 지옥교를 바닥에 꽂은 후 왼손에 들고 있던 등을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었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와 그 안쪽의 지면까지 다 합쳐도 이십 장 남짓인 그 얇은 책의 재질은 종이가 아니었다.

양피지와 같은 가죽의 일종인데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만지는 감촉이 야릇했다.

(어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부드러울까?)

요문천은 갸웃하며 지옥교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의 불빛에 의지하여 책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검붉은 책의 표지에는 <저주마경(詛呪魔經)>이라는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있다.

"저주마경? 지옥교라는 검명에 못지않게 섬뜩한 제목이다."

요문천은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침을 삼키며 책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전자체로 적혀있다는 것도 저주마경이라는 이 책이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것을 품고 있던 시체는 불과 몇 달 전에 죽은 듯 아직 시신이 완전히 썩지 않은 상태다.

, 저주마경은 원래부터 요문천의 눈앞에 있는 시신의 소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곤룡포를 입고 있는 시체의 주인도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저주마경을 얻어서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목도 그렇고...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는 책이다.)

요문천은 꺼림칙했지만 용기를 내어 책을 펼쳐보았다.

겉표지를 젖히자 첫 번째 지면에 역시 전자체로 쓰인 글이 가득 적혀있다.

 

<지옥성(地獄城) 제구대 성주인 지옥검조(地獄劍祖) 하륜(河崙)이 한을 품고 죽어가며 이 글을 적는다. 노부가 남긴 저주마경과 지옥교를 얻는 자가 곧 지옥성의 제십대 성주(城主).>

 

어두운 책의 재질보다 더 짙은 검은색으로 적힌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옥성? 무림에 그런 문파가 있었나?"

글의 앞부분을 읽어본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이 요문천 역시 강호 무림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게다가 요문천은 승상부의 소부주라는 신분 덕분에 현재의 강호 정세에 대한 내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문천의 기억에 지옥성이라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지옥성이 중원 무림에 속하지 않거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문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지옥성을 멸망시킨 것은 우내사천(宇內四天)이라 불리는 중원의 인간들이었다. 그놈들은 악마삼보(惡魔三寶)를 노리고 서역(西域) 하미(合密)에 자리한 본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우내사천? 악마삼보? 역시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이름들인데...)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내사천이니 악마삼보니 하는 이름들도 요문천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옛날의 서체인 전자(篆字)로 쓰여진 것도 그렇고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사연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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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감한 치료(治療)

 

 

 

요문천은 먼저 손가락 두 개 마디만한 길이의 은제 병을 집어 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로 그 은병(銀甁) 안에 물약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문천은 은병의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알싸한 속에 그윽한 약냄새가 느껴지는데 그 약냄새를 들이키자 속이 시원해진다.

(이건 속의 상처를 다스리는 내상약이겠구나.)

내용물이 내상약(內傷藥)임을 확신한 요문천은 철접의 얼굴로 몸을 숙였다.

철접은 창백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입부터 벌리게 해야겠구나.)

요문천은 왼손으로 마늘쪽같은 코를 잡아 눌렀다.

그러자 코로 숨을 쉴 수 없게 되면서 철접의 가늘지만 단정한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푸른빛을 띤 창백한 입술이 벌어지며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백옥을 연상시킨다.

쪼르르!

요문천은 오른손에 든 약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그녀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아무쪼록 내상약이 효과가 있어야할 텐데...)

은제 약병의 물약을 모두 철접에게 먹여준 요문천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잠시 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던 철접의 숨소리가 좀 더 커졌다.

또 움직임이 거의 없던 그녀의 불룩한 젖가슴이 조금씩 아래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덜미를 만져보니 얼음장같이 차갑던 철접의 몸에서 조금이나마 온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내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같고...)

요문천은 안도하며 철접의 몸을 살펴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철접의 몸에 걸쳐진 옷은 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옷이 찢어진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설령 내상이 나아진다 해도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위험해질 것이다.)

요문천은 철접의 품에서 나온 약통들을 살펴보았다.

몇 개의 약통들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크고 납작한 합 모양의 것을 열어보았다.

약통 안에는 투명한 고약이 가득 들어있다.

(양도 많고 특별히 자극적인 냄새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창상(創傷;날붙이에 베인 상처)을 치료하는 금창약(金瘡藥)일 것이다.)

요문천은 고약을 손가락에 조금 묻혀서 자신의 목에 난 상처에 발라보았다.

약간 쓰리지만 동시에 갈라진 상처가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도 난다.

(금창약인 건 틀림없는데...)

약통을 들고 요문천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망설였다.

지혈이 되도록 약을 발라주려면 철접의 옷을 모두 벗겨야하기 때문이다.

(목숨이 오고가는 상황이니 인륜도덕이나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다.)

한동안 망설이던 요문천은 이윽고 결심을 하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철접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고름이 풀린 저고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금방 내린 눈같이 희고 비단결같이 매끄러운 철접의 속살이 드러난다.

저고리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어서 저고리가 벌어지자 바로 속살이 드러난 것이다.

요문천이 약을 찾기 위해 한번 더듬어본 대로 철접의 가슴은 날씬한 몸매에 비해 상당히 크고 풍만하다.

철접 자신의 얼굴만한 두 개의 살덩이가 묵직하게 얹혀 있다.

그 살덩이들은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산처럼 붕긋하게 솟은 형상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또한 작은 움직임에도 이리저리 흔들거려서 금방 쑨 묵을 연상시킨다.

(이런.... 이런...)

철접의 가슴을 본 요문천은 넋이 나갔다.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하며 또 풍만한 철접의 가슴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주르르!

요문천이 넋을 잃고 보는 중에 철접의 왼쪽 가슴에 비스듬히 나있는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와 가슴 골로 흘러내린다.

새하얀 피부를 따라 흐르는 아리도록 붉은 핏줄기가 요문천으로 하여금 퍼뜩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체온이 올라가면서 낙일금검이 관통했던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요문천은 서둘러 금창약을 손가락으로 떠서 철접의 젖가슴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너무도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탄력 넘치는 감촉은 요문천을 아찔하게 만든다.

(딴 생각 말고 치료에 집중하자! 이 여자는 지금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느냐?)

철접의 가슴에 금창약을 발라준 요문천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왼팔로 철접의 상체를 끌어안고 저고리를 완전히 벗겼다.

등쪽에 난 상처에도 금창약을 발라준 요문천은 철접의 상체에 난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양쪽 팔과 옆구리, 복부 등에도 날붙이에 베인 상처가 여럿 있었지만 다행히 치명상들은 아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상체에 나있는 모든 상처에 꼼꼼히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상체의 치료를 마친 요문천은 또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철접의 하체에도 여러 곳 베인 상처가 있다.

그 상처들은 상체의 상처들보다 오히려 깊어서 출혈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겨우 두 번째 만난 여자인데...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다.)

잠시 망설이던 요문천은 다시 결심을 하고 철접의 치마에 손을 가져갔다.

요문천의 떨리는 손에 의해 치마가 아래로 벗겨지면서 철접의 하체가 드러난다.

잘룩한 허리에 비해 철접의 둔부는 아주 풍만하다.

키가 큰 만큼 철접은 다리도 보통의 여자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길다.

허벅지는 오랜 단련 덕분에 튼실하면서도 탄력이 넘친다.

(설마...)

헌데 겉치마와 속치마를 함께 골반 아래로 벗겨 내리던 요문천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겉치마와 속치마 속에 당연히 입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속곳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국의 인간들이...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속옷을 입지 않는 풍습이 있다더니...)

요문천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철접의 치마를 골반 아래로 벗겨 내렸다.

허억!”

직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려야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철접은 치마 속에 속곳을 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드러나는 철접의 비밀...

요문천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온몸의 피가 폭발적으로 끓어오르고 어지러워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보면... 보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철접의 중심부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정신을 차려라 요문천! 네가 겨우 이 정도의 인간 밖에 되지 않았느냐?)

요문천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서 필사적으로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는 의식적으로 철접의 중심부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애쓰며 상처를 살폈다.

철접의 양쪽 허벅지와 엉덩이, 다리등에 상당히 깊은 자상들이 여럿 나있다.

그런 다리로 지금까지 먼 길을 달려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요문천은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고약을 퍼서 철접의 상처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철접의 피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탄성이 느껴진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늘 단련을 해온 증거다.

요문천은 벌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철접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하지만 철접의 비밀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후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요문천의 기억은 흐릿했다.

어쨌든 요문천은 철접의 몸에 나있는 대부분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줄 수 있었다.

이윽고 치료를 마쳤을 때 요문천의 몸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치료를 끝내자마자 요문천은 서둘러 벗겨놓은 옷가지로 철접의 몸을 가려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철접의 알몸을 보고 있다가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겪은 최고 난이도의 고역이었다!)

철접의 몸을 옷가지로 가려준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힘을 소진한 듯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내가 이 여자를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아쉽지만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요문천은 아쉬움을 달래며 석실을 나가려고 했다.

헌데 떠나기 전에 석실을 한 바퀴 더 둘러보던 요문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뭔가 이상하다.)

요문천은 눈을 치뜨며 용차랑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용차랑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긁어대었던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용차랑이 손톱이 빠질 지경으로 긁어댄 벽에는 피와 함께 이리저리 긁히고 깊이 패인 자국들이 나있다.

용차랑은 죽어가던 상태로 쓸 수 있는 공력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벽이 진짜 돌이라면 핏자국은 남을 지언정 긁히거나 깊이 패일 일은 없다.

하지만 벽에는 분명 긁히고 패인 흔적들이 여럿 나있다.

(석실의 다른 곳과 달리 이 부분의 벽은 돌이 아니다!)

요문천은 어떤 예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손으로 벽을 긁어보았다.

푸스스!

그러자 요문천의 손가락이 긁는 대로 벽면이 푸슬푸슬 흩어진다.

(석회(石灰)! 누군가 이 부분을 흙으로 채워 넣고 겉을 석회로 발라 돌인 것처럼 위장했다.)

벽면을 긁어보던 요문천은 눈을 반짝이며 벽에서 조금 물러섰다.

(혹시 이 부분이 갈태독이 천독칠왕부의 어딘가에 마련해놓았다는 보물창고의 입구가 아닐까?)

요문천은 염두를 굴리며 오른쪽 발을 높이 쳐들었다.

!

그리고는 힘껏 벽면을 찍듯이 내려찼다.

퍼억! 푸스스!

표면에 발라진 석회가 쩍쩍 갈라져 흩어지면서 그 안쪽의 흙벽이 나타난다.

(한 번 더!)

!

요문천은 다시 한 번 온힘을 모아 흙벽을 발로 찍어 찼다.

콰드득...!

다음 순간 흙으로 만들어진 벽이 안쪽으로 와락 무너져 내리며 밀로(密路)가 나타났다.

어둑하면서도 눅눅한 습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어둑한 통로가 무너진 흙벽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 갈태독이 생전에 모아놓았다는 수억냥 값어치의 재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통로 안쪽을 기웃거렸다.

통로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무공을 지니지 않은 요문천으로서는 그냥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문천은 석실의 벽에 걸려있는 원통형의 등을 벗겼다.

동영의 인자들이 어둠 속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하는 그 등은 아주 밝지는 않다.

대신 완전히 밀폐되어 있어 비바람이 불 때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가 있는 구조다.

등을 든 요문천은 조심스럽게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요문천이 통로 안쪽으로 멀어짐에 따라 석실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또르르!

헌데 어둠 속에 누워있는 철접의 눈 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요문천이 치료를 해주는 도중에 정신이 돌아왔던 것이다.

(미안해 지로! 널 지켜주지 못한 못난 누나를 용서하거라!)

철접은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자책과 절망에 찬 오열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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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속의 참극(慘劇)

 

 

 

요문천은 주먹만한 돌을 주워 우물 안쪽으로 던져보았다.

첨벙!

잠시 기다리자 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이 우물에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은 철접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요문천은 무언가 깨닫고 서둘러 우물 턱으로 올라섰다.

휘익!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우물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너무 무모했나? 내 생각이 틀렸으면 우물물에 빠져 익사할 텐데...)

뛰어내리자마자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출렁!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래로 추락하던 요문천의 몸은 도로 위쪽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생각했던 대로다.)

몸이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요문천은 안도했다.

우물은 상당히 깊은데 지상에서 칠, 팔장쯤 되는 곳에 그물이 쳐져 있었다.

재질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가늘면서도 탄력이 아주 좋은 밧줄로 짜여진 그물이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침투와 탈출 등에 사용하는 밧줄일 것이다.

철접이 우물 안으로 뛰어내렸음에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 그물 덕분이었다.

텅 텅!

요문천은 그물 위에서 몸이 퉁겨지는 사이에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우물은 몹시 깊어서 달빛이 흘러들지 못하는 바람에 상당히 어둡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우물의 한쪽 벽에 크지 않은 동굴이 있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동굴 입구가 매끈한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물 속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동굴이 숨겨져 있었구나.)

요문천은 그물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동굴로 다가갔다.

(혹시 저 동굴이 갈태독이 천독친왕부의 어딘가에 만들어 놓았다는 보물창고의 입구가 아닐까?)

동굴로 다가가며 요문천은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독친왕 갈태독이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았었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천독친왕부가 죽음의 귀역이 되고 갈태독이 실종되면서 그의 재보 역시 세상에서 사라졌다.

만일 갈태독이 숨겨놓은 재보를 찾아낸다면 단번에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족함이 없이 자란 요문천인지라 재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태독의 보물 창고와는 관련이 없더라도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요문천은 흥분을 억누르며 동굴로 기어들어갔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아서 엉금엉금 기어야 들어갈 수 있다.

헌데 동굴로 기어들어가면서 요문천은 섬뜩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굴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피가 흐른 후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끈적이는 감촉이 양손과 무릎에 느껴진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다.)

요문천은 동굴 바닥 전체에 피가 덮여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서리를 쳤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그 여자 혼자 흘린 피는 아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동굴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동굴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의 양은 엄청 나서 한 사람이 흘릴 수 있는 정도의 피가 아니다.

마르기 시작하여 끈적이는 피에 섞여 가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피도 손바닥에 느껴진다.

그 피는 아마도 철접이 동굴을 기어들어가는 동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 것이다.

(그 여자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앞서서 이 동굴을 기어들어갔다. 대량의 피를 흘리면서...)

 

요문천이 몸서리를 치며 기어가는 동안 동굴은 점점 넓고 높아졌다.

잠시 후에는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었는데 요문천의 양손과 무릎은 동굴 바닥을 뒤덮고 있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다.

동굴 천장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그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어 그리 어둡지 않다.

요문천은 달빛에 의지하여 바닥을 살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어진 동굴의 바닥에 여러 가닥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사람이 대량의 피를 흘리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이다.

(아마도 여기가 영락폐하를 습격했던 인자들의 비밀 거점이었을 것이다.)

요문천은 핏자국을 따라 걸어 들어가며 깨달았다.

영락제를 암살하기 위해 중원으로 잠입한 동영 이가류의 자객들은 오래전부터 인적이 끊긴 이곳 천독친왕부를 은신처로 삼았을 것이다.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죽음의 귀역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으니 은신처로 천독친왕부만한 곳은 없다.

이 우물 속의 은밀한 동굴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천독친왕부를 거점으로 삼은 후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일 테고...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살아남는 자는 이 동굴로 피신한다는 약조가 사전에 있었겠지.)

요문천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멀지 않은 앞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불빛쪽으로 걸어갔다.

 

불빛은 동굴의 끝에 자리한 한 칸의 석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요문천이 문이 부서진 그 석실로 다가갈 때였다.

안돼! 안된다!”

석실에서 그리 높지 않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나직하지만 내장을 칼로 긁어내는 듯한 처절한 고통이 실려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요문천은 서둘러 석실로 다가갔다.

오장육부를 다 토해내는 듯한 울음소리의 주인이 철접임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

 

부르르!

석실로 들어서던 요문천의 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석실 안에는 요문천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벽에 걸린 원통형의 등이 흘려내는 불빛 아래 여섯 구의 시체가 석실 바닥에 널려있다.

입구에 가까운 곳에는 이남이녀(二男二女)가 죽어있다.

이남이녀 중 부부로 보이는 삼십대의 남녀는 무릎을 꿇은 채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아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은 자세로 죽어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줄줄 흘러나오는 남녀는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넣고 왼팔로는 서로의 몸을 감싸 안고 있다.

회생불가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동반자살을 한 모습이다.

이남이녀의 다른 한 쌍은 부녀지간으로 보인다.

아직 앳된 모습이 보이는 소녀가 목이 부러져 죽어있으며 그 소녀의 시체 위에 중년의 남자가 엎드린 자세로 죽어있다.

소녀는 왼쪽의 팔과 어깨가 강한 힘에 으스러져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반면 중년 사내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무수히 나있지만 치명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내의 입과 코에서 검푸른 피가 흘러나와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몸을 적시고 있다.

아마도 중상을 입은 딸이 고통스러워하자 아비가 딸의 목을 졸라 죽인 후 자신도 독을 먹고 죽었을 것이다.

나머지 두 명은 노인과 소년이다.

노인은 석실 가운데쯤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작은 칼로 배를 그어 자결을 한 모습이다.

노인의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 그의 하체와 바닥을 뒤덮고 있다.

그 노인의 앞쪽에는 앳된 소년이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다.

소년의 다리 하나는 허벅지쯤에서 잘려나갔으며 길게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있다.

소년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어 다닌 듯 내장이 터져서 오물과 피로 바닥이 칠갑아 되어 있다.

소년은 고통에 몸부림을 친 흔적은 바닥뿐만 아니라 석실의 벽에도 남아있다.

소년이 양손으로 마구 긁은 흔적이 입구 맞은편의 벽에 남아있는 것이다.

벽을 얼마나 세게 긁었는지 소년의 열 손가락은 손톱이 모두 빠지거나 부러져 있고 손가락 끝은 문드러진 상태다.

(그 아이다!)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는 소년을 본 요문천은 전율했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어젯밤 동대루의 기루에서 뛰쳐나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리던 순진해보이던 소년이 배가 갈라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것이다.

소년은 바로 철접의 동생인 용차랑이었다.

그리고 철접은 용차랑의 시체 뒤쪽, 늙은 인자 시바타가 할복한 근처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다.

눈물이 말라버린 듯 철접의 눈에서는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요문천은 이내 이 석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차렸다.

철접의 어린 동생도 영락제에 대한 암살에 참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에 늙은 인자 시바타와 네 명의 남녀 인자가 용차랑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이미 되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용차랑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었을 것이고 당주의 어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늙은 인자 시바타는 할복을 했을 것이다.

동행한 네 명의 남녀 인자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했고...

지로... 지로...!”

중얼거리던 철접의 입에서 꺽꺽 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쥐어짜듯 말하며 동생의 시체 쪽으로 기어갔다.

너를... 너를 꽁꽁 묶어서라도... 여기 남겨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맥이 빠져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용차랑의 시신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

털썩!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내 용차랑에게 기어가려던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충격과 비통이 극에 달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소저!”

요문천은 급히 철접에게 달려가 그녀의 가는 목에 손을 대어 진맥을 해보았다.

철접의 목에 손을 대는 순간 차가운 한기가 느껴져서 요문천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몸이 마치 시체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내 느리게나마 뛰고 있는 맥이 느껴져 요문천을 안심시켰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심장을 아주 느리게 뛰도록 조절하고 있다. 그 때문에 몸이 냉혈동물의 그것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문천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철접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요문천은 철접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다량의 출혈을 한 상태고 또 심장 근처를 금검존이 어검술로 날린 낙일금검에 꿰뚫리고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았다.

철접은 신진대사를 느리게 조절하여 기력의 소모를 최대한 늦춰왔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심장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덕분에 왼쪽 가슴이 낙일금검에 꿰뚫렸으면서도 즉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낙일금검이 꿰뚫은 상처 부위의 체온을 극한까지 낮춰서 출혈을 막고 있다. 동영의 인자들이 자신의 몸속 장기와 신진대사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요문천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관통상을 입은 가슴을 제외한 철접의 몸에 난 다른 상처들에서는 양은 적지만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동생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철접은 정신을 놓은 상태다.

이대로 방치하면 오래지 않아 철접도 죽어버릴 게 확실하다.

(치료를 해줘야한다.)

요문천은 결심하며 철접을 석실 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그녀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늘 목숨을 내놓고 사는 인자인 만큼 효과가 빠른 비상약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뭉클!

철접의 저고리 속으로 집어넣은 요문천의 손에 차갑지만 부드러운 살덩이가 만져진다.

(날씬한 외양과 달리 의외로 풍만한 젖가슴을 지녔구나.)

요문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모인 섭대낭을 제외하면 난생 처음 만져보는 여자의 젖가슴인 탓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크기는 유모 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탄력은 훨씬 뛰어나고 매끄럽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손을 철접의 품속으로 깊이 집어넣었다.

철접의 젖가슴은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매끄러우면서도 갓 쑨 묵처럼 탱탱한 탄력을 지니고 있다.

떨면서 그 젖가슴 주변을 더듬던 요문천의 손에 곧 가죽 주머니가 하나 만져졌다.

(찾은 것같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가죽 주머니를 철접의 품 속에서 꺼냈다.

상당히 크고 묵직한 주머니다.

(자객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있겠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투둑! !

그런 후에 거꾸로 뒤집자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여러 가지 물건이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진다.

아주 얇은 표창 십여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주머니들 서너 개, 그리고 몇 개의 약통등이다.

약통들은 충격을 받아도 쉽게 훼손되지 않도록 유리나 도자기 대신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다양했다.

물약이 든 작은 병의 형태도 있고 고약이나 분말 형태의 약이 든 납작한 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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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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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폐허의 비밀

 

 

 

조백하(潮白河)는 북경의 동북방을 휘감고 흐르는 상당히 넓은 강이다.

조백하 북안(北岸)에는 무려 수천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그 폐허는 오십이 년 전까지만 해도 원나라의 황궁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던 장원의 흔적이다.

 

-천독친왕부(千毒親王府)!

 

폐허가 된 장원의 이름이다.

이 장원의 주인은 천독친왕(千毒親王) 갈태독(葛太毒)이란 인물이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말기 최고의 권세가였던 그는 원래 무림인이었다.

일개 낙척한 서생이었던 갈태독은 강남을 여행하던 도중 우연히 한 권의 독경(毒經)을 얻어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이 되었다.

사실 갈태독의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독을 자유자재로 쓰고 치명적인 독공(毒功)을 구사하는 갈태독과 싸울 경우 세상 어떤 고수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갈태독의 이같은 능력은 원나라 황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 황실은 고질적인 내분과 부패, 군벌들의 득세등으로 인해 중원에 대한 통제 능력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에 편승하여 백련교(白蓮敎), 즉 홍건적(紅巾賊)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 몽고족에 의한 중원의 지배를 종식으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위기상황에서도 몽고족 군벌들은 황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또 황제 직속의 군대는 그 질이 형편없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원나라 황실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갈태독을 회유하여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하면서...

탐욕스러운 성격이었던 갈태독은 한족(漢族)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몽고족의 정권인 원나라 황실의 앞잡이가 되어 가공할 혈겁을 일으켰다.

원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던 숱한 한족 출신의 반군들과 이에 동조한 무림의 명숙들이 갈태독이 쓰는 치명적인 독과 끔찍한 독공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갈태독의 활약에 만족한 원나라 황실은 일개 무부(武夫)였던 그에게 천독친왕(千毒親王)이라는 왕작(王爵)을 내렸으며 약속했던 것 이상의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갈태독은 원 황실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인 반군들과 무림인들의 재산까지 가로채 주머니를 채웠다.

그 결과 갈태독은 오래지 않아 천하제일의 거부(巨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재물을 모은 갈태독은 이곳 조백하 북쪽 강변 위에 자신만의 성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천독친왕부다.

그러나 영원할 것같았던 갈태독의 좋은 시절은 너무도 빨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강남에서 몸을 일으킨 풍운아 주원장(朱元璋)이 파죽지세로 중원을 장악한 후 원 제국의 심장부인 북경으로 육박해온 것이다.

갈태독은 원나라 황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주원장의 군세를 저지하려고 했다.

원 황실이 무너지면 갈태독 자신의 부귀영화도 끝이 나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으로 쇄도해온 주원장 군세의 수장은 명장 서달(徐達)이었다.

주원장의 고향 친구이기도 한 서달만 죽이면 주원장의 군세도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에 갈태독은 단기필마로 서달의 군막(軍幕)으로 잠입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서달은 중원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고 전략가다.

그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면 백기(白起), 한신(韓信)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달의 일신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다.

신변에 접근할 수만 있으면 갈태독의 능력으로 서달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헌데 갈태독은 서달의 군막에 돌입한 직후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서달 옆에는 한명의 젊은 검객이 있었다.

약관을 갓 넘긴 그 젊은 검객에게는 갈태독의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젊은 검객의 몸을 뒤덮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의 장막은 갈태독이 구사한 지독한 독과 끔찍한 독공을 너무도 간단히 분쇄해버렸던 것이다.

반면 젊은 검객이 휘두른 검에서 내뻗힌 삼엄한 검기는 여지없이 갈태독의 몸을 갈라버렸다.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은 필사적으로 서달의 군영을 탈출했다.

젊은 검객을 제외한 그 누구도 갈태독이 뿌리는 독을 견디지 못하는 덕분에 갈태독은 사지를 탈출할 수 있었다.

중상을 입은 갈태독은 자신의 거처인 천독친왕부로 숨어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북경을 함락시킨 주원장의 군세가 천독친왕부에도 들이닥쳤다.

그러나 주원장의 막강한 군세도 천독친왕부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갈태독이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막대한 양의 극독을 천독친왕부 일대에 뿌려버린 때문이다.

갈태독이 뿌린 지독한 독은 주원장의 군세를 막아낸 대신 천독친왕부에 거주하던 그의 수하와 일족, 측근들까지 남김없이 몰살시켜버렸다.

또한 천독친왕부의 어디론가 숨어들어간 갈태독 역시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후 오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독친왕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귀역(鬼域)이 되었다.

처음에는 갈태독이 숨겨둔 막대한 재물을 노리고 수많은 인간들이 천독친왕부로 들어가 수색을 하였다.

하지만 갈태독이 뿌려놓은 지독한 극독으로 인해 천독친왕부에 들어갔던 자는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했다.

자연히 천독친왕부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결코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하는 사지(死地)로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인적이 완전하게 끊겨버렸다.

 

***

 

(여긴 천독친왕 갈태독의 저주가 서려있다는 귀역 천독친왕부인데...)

요문천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휘익!

그는 지금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승상부를 빠져나온 철접은 촌각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천독친왕부로 달려왔다.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면서 요문천은 수시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철접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하얘지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하얘서 금방 내린 눈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 되어 있다.

홍옥같이 붉던 입술도 탈색이 되어 옅은 청색을 띠고 있다.

그것은 다량의 피를 흘린 것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철접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창백해져가는 안색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밝고 선명해진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익히는 술법 중에 생명을 태워서 힘을 내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요문천은 곁눈질로 철접의 안색을 살피며 침을 삼켰다.

여자는 한 끼를 굶으면 배로 예뻐지고 병이 깊을수록 미녀가 되어간다는 말이 있다.

생기가 소멸되며 창백해지는 철접의 얼굴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헌데 이 여자는 왜 이 죽음의 귀역으로 달려온 것일까?)

요문천은 주체할 수 없게 철접에게 끌려가는 마음을 다 잡으려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으 스으...

천독친왕부는 전체가 검푸른 안개같은 것에 덮여있다.

그것은 갈태독이 주원장 군세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뿌려놓은 지독한 독들과 그 독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썩으며 만들어낸 독장(毒瘴)이다.

독장이 처음 천독친왕부를 뒤덮었을 무렵에는 한 모금만 마셔도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십이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독장은 많이 옅어지고 독성도 약해졌다.

지금은 지나치게 오랜 시간만 아니라면 천독친왕부 내에 머물러도 죽지는 않는다.

그래도 숱한 사람들이 독장을 마시고 죽어간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천독친왕부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서 기분이 안좋아진다.)

요문천은 철접이 눈치 채지 못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철접의 팔에 안겨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마신 독장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요문천이 억지로 구역질을 참으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휘익!

마침내 철접이 질주를 멈추며 바닥에 내려섰다.

콰당탕! 퍼억!

그러나 바닥에 발을 댄 직후 철접은 무너지듯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요문천도 바닥에 팽개쳐졌다.

어구구...”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요문천은 죽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런 그의 눈에 철접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기력을 모두 소모했구나.)

요문천은 철접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고 서둘러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철접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쉬지 않고 삼십여 리를 달려왔다.

그 바람에 몸속의 모든 기운을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괜잖으십니까?”

요문천은 걱정스럽게 말하며 철접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다.

“...”

하지만 철접은 말없이 요문천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일어섰다.

얼굴은 백짓장같이 하얗고 일어선 두 다리를 금방이라도 다시 무너질 듯이 후들거리고 있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이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철접은 요문천과 마주 서며 오른손을 품속에 넣었다.

요문천의 키는 또래들 보다 작은 편이다.

반면 철접은 육척에서 두 치 남짓만 빠지는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다.

그 때문에 마주 선 철접은 요문천을 내려다보게 된다.

이걸 먹고... 힘들겠지만 너 혼자 힘으로 승상부에 돌아가라.”

철접은 품속에 넣었던 오른손을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기름종이로 싼 환약이 하나 들려져 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환약이다.

이건 혹시...”

요문천은 두 손으로 환약을 받으며 눈을 치떴다.

내가 당주로 있는 이가류의 비전 해독약이다. 그걸 복용하면 천독친왕부를 덮고 있는 이 독장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돌아섰다.

(역시 독장의 해독약이었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기름종이를 벗기고 환약을 입에 넣었다.

동영의 인자들은 독을 쓰는 재주도 탁월하다.

도검을 쓰는 것보다 독을 써서 표적을 죽이는 편이 위험부담은 낮고 성공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독을 잘 쓴다는 것은 해독약도 잘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문천은 환약을 씹어 삼키자마자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맑아지자 비로소 주변 상황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온 곳은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 자리한 정원이었다.

무너지고 불탄 건물 잔해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상당히 넓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제멋대로 자란 정원수들과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다.

요문천이 환약을 먹고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철접은 무게가 없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가는 앞쪽에는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다.

길쭉한 석재들을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우물인데 한쪽 변이 일장 가까이나 되는 상당히 큰 규모의 우물이다.

아마도 천독친왕부가 번성했을 당시에 식수를 해결한 우물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물에는 왜...)

요문천이 의아해할 때 철접은 비틀거리며 우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발을 들어 우물의 턱으로 올라섰다.

(설마...)

요문천이 섬뜩한 느낌에 눈을 치뜰 때였다.

스윽!

우물의 턱으로 올라선 철접의 몸이 우물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위험합니다.”

요문천은 기겁하며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철접은 우물 안쪽으로 사라진 후였다.

(투신을 할 줄이야!)

요문천은 사색이 되어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철접이 우물 안쪽으로 떨어졌음에도 물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른 우물인가?)

요문천은 덜덜 떨며 우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비록 반달이 떠있다고는 해도 한밤중인데다가 우물이 상당히 깊어서 아래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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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처(自處)한 인질(人質)

 

 

 

설마...!”

섭대낭의 눈이 찢어질 듯 치떠지며 그녀의 거구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런...)

곽산해도 얼굴이 와락 굳어지며 섭대낭을 따라서 일어났다.

그 직후였다.

보고! 소부주님께서 자객의 인질이 되셨습니다.”

!

대청의 뒷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날아든 호장무사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돼!”

파앗!

거의 동시에 섭대낭은 사납게 울부짖으면서 호장무사와 엇갈려 대청 뒷문으로 날아나갔다.

콰창!

한줄기 섬전처럼 대청 후면으로 쇄도하는 그녀의 어깨에 부딛혀서 대청의 후문과 문틀이 함께 박살나버렸다.

 

***

 

(금검존의 검갑이 비어있다!)

요문천은 순간적으로 금검존이 빈 검갑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는 건...)

이어 요문천은 곁눈질로 자기 뒤쪽에 붙어서있는 철접의 몸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철접의 가슴에는 전체가 황금빛인 보검이 꿰뚫고 들어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이 여자의 몸을 꿰뚫은 보검은 금검존의 애검 낙일금검(落日金劒)이었구나. 금검존은 어검술(馭劍術)을 써서 이 여자를 격중시켰을 테고...)

"포기하라 계집! 천지개벽해도 네년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철접과 요문천의 앞에 내려선 금검존이 온몸에서 폭풍같은 기세를 흘리며 눈을 부릅뜬다.

"함부로 장담하지 마라 금검존! 만일 내가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한다면 필히 저승으로 동행을 데려갈 것이다!"

스윽!

철접도 서늘한 시선으로 금검존을 마주 보며 비수의 날을 요문천의 목젖에 더욱 바짝 밀착시켰다.

"... 살려 주십시오 뇌영반!"

철접이 차갑게 내뱉는 것에 맞춰서 요문천도 다급히 외쳤다.

"... 장가도 못 가고 죽기는 싫습니다! 제발 이 여자 손에서 날 좀 구해주세요"

요문천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금검존에게 애원했다.

(!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는 옛말도 틀릴 때가 있군! 어쩌다 황사같은 대인(大人)에게서 저런 약골이 나왔단 말인가?)

금검존은 입맛이 썼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무 걱정 말게! 그 계집이 소부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네!"

"... 제발 그래주십시오 뇌영반!"

금검존의 말에도 요문천은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비천한 오랑캐 계집과 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탐탁치 않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도리가 없군. 네년이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금검존은 벼락이 뿜어지는 것같은 눈으로 철접을 노려보며 말했다.

철접이 비록 대역의 죄인이긴 하나 황사인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 요문천의 안위를 도외시 할 수는 없다.

"나는..."

철접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금검존이 오른손을 그녀의 들어 막았기 때문이다.

"미리 경고하겠는데... 무리한 주문은 삼가하라! 우리에게는 소부주의 목숨보다는 대역죄인인 네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니...!"

(여차하면 내 목숨은 돌보지 않고 척살해 버리겠다는 뜻이군!)

금검존의 말에 요문천은 내심 쓴 입맛을 삼켰다.

"걱정마라!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루의 시간뿐이다!"

"단 하루의 시간을 원한다? 무슨 뜻이냐?"

금검존이 찡그리며 되물었다.

"하루가... 지나면 이 글 벌레를 돌려보내겠다! 이가류 당주의 명예와... 우리 대화일족(大和一族)의 시조이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다!"

"섬나라 난쟁이들의 시조 나부랑이에는 관심 없다! 다만 네년도 본좌와 같은 무사이기에 믿어줄 뿐이다!"

금검존은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옆으로 저었다.

! 스슥!

그러자 건물을 에워싼 포위망 중 한쪽이 썰물처럼 갈라져서 길을 낸다

"하고 싶지는 않으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철접은 요문천을 끌고 포위망 밖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고맙다!"

"!"

철접의 말에 금검존은 같잖다는 듯이 냉소할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문천은 그 순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금검존이 아니라 나한테 한 거로군!)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을 끌고 사람들이 터준 길을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소부주님!"

"속하들의 무능을 용서하여주십시오 도련님!"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서 철접을 포위망 밖으로 내보냈다.

헌데 철접이 막 포위망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잠깐!"

금검존이 다시 철접을 불러 세웠다.

철접은 혹시 금검존이 생각을 바꾼 게 아닌가 하여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금검존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 더 있느냐?"

"본좌의 검은 놓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금검존은 냉소하며 철접의 몸을 가슴에서 등 쪽으로 관통하고 있는 황금색의 보검 낙일금검을 턱으로 가리켰다.

철접은 금검존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러나 일체 표정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낙일금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스윽!

이어 그녀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낙일금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낙일금검은 철접의 몸통을 관통한 궤적 그대로 빠져나오는데 특이하게도 피는 함께 흘러나오지 않았다.

(독한 계집! 생살이 갈라지는 데도 신음소리 한 마디도 안 내다니...!)

(과연 동영의 인자들은 다르구나!)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보는 가운데 이윽고 철접은 낙일금검을 완전히 몸에서 뽑아내었다.

(뭔가 특별한 조치를 한 모양이로구나. 낙일금검에 관통당한 상처에서는 피가 전혀 흘러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요문천은 낙일금검의 끝이 마침내 철접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곁눈질로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 진 빚은 기억해 두겠다 금검존!"

철접은 서늘하게 말하며 가슴에서 뽑아낸 낙일금검을 금검존에게 던졌다.

쐐액!

그녀의 손을 떠난 낙일금검은 마치 활로 쏘아진 것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금검존에게 날아갔다.

"!"

금검존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낙일금검을 보며 냉소와 함께 턱을 오만하게 위로 젖혔다.

!

그러자 금검존의 가슴으로 날아들던 낙일금검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슈욱! 철컹!

뒤이어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방향을 튼 낙일금검은 금검존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검갑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어검술이다!)

(과연 황실제일검이시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낙일금검이 저절로 검갑을 찾아들어가는 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루만 기다려라. 내일 안으로 이자는 확실히 돌려보낼 테니...!!"

몸통에서 낙일금검이 제거된 철접은 왼팔로 요문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돌아섰다.

휘익!

이어 철접은 요문천을 한 팔로 끌어안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방금 전까지 심장 부분이 검이 관통 당한 상태였던 것이 믿어지지 않는 날렵한 경신술이었다.

"도련님! 존체보중하십시오!"

"약속은 지켜라 계집!"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분노에 찬 외침을 배경으로 철접은 이내 승상부 밖으로 날아나갔다.

"육시를 해도 시원잖을 오랑캐 계집년...!"

금검존은 철접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영반?"

금의위 위사들중 좀 나이가 지긋한 인물이 금검존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건넸다.

"만에 하나...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대역죄인을 놓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대역죄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상각하의 일점혈육의 안위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금검존은 차갑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괜한 걱정은 하지 마라!"

불안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는 나이든 위사의 말을 금검존은 확신에 찬 어조로 끊었다.

"바뀌는 것은 단 한 가지! 저 왜국의 계집년 목이 하루 늦게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

금검존의 말에 나이 든 위사는 미진한 표정으로 수긍하며 물러섰다.

"천라지망을 더욱 넓게 펼쳐라! 저 계집을 포함하여 단 한명의 대역죄인도 놓쳐서는 안된다!"

파앗!

금검존은 허공으로 새처럼 날아오르며 금의위 위사들에게 지시했다

"존명!"

"봉명하겠습니다 영반각하!"

금의위 위사들은 철접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가는 금검존을 향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 휘휙!

이어 그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정원에는 승상부의 호장무사들만이 남아 분루를 삼키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 도련님이 인질이 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화악!

천둥치는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거구의 여자가 거센 회오리를 몰고 장내에 내려섰다.

물론 그 여인은 뒤늦게 변고를 알아차리고 대청에서 요문천의 거처로 한 달음에 날아온 섭대낭이었다.

뒤이어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와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 석호륜도 황망(慌忙)한 표정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 마님... 그것이...”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호장무사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 무사 진영(陳永)이란 인물이 전후의 경과를 서둘러 보고했다.

... 이 무능한 밥버러지들...”

!

진영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곤두선 섭대낭이 이를 갈며 오른 발로 세차게 바닥을 굴렀다.

그녀가 구른 오른 발 아래에서 정원 바닥이 직경 삼장, 깊이 세자 정도로 움푹 들어갔다.

드드드!

그와 함께 정원 전체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뒤흔들리면서 요문천의 거처인 은천각도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요동을 쳤다..

(방금의 진각(振脚)에는 신비각 사대영반에 못지않은 공력이 실려 있었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함께 비틀거리며 곽산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알기로 섭대낭은 결코 그 정도의 공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대낭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진짜 공력보다 두 세배 더 강력한 힘을 몸 밖으로 내뿜었다.

그것은 그녀가 타고난 살기, 천살지기를 몸 안에 품고 있어서 분노가 극에 달하면 순간적으로 몇 배 더 강력한 힘을 토해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도련님의 신상에 불미한 일이 생긴다면...!”

드드드!

진흙 바닥처럼 뒤흔들리고 출렁이는 지면을 딛고 선 채 섭대낭은 이를 갈며 호장무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안광에 호장무사들은 숨통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네놈들을 모두 내 손으로 때려죽이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섭대낭이 사납게 토해내는 살기는 승상부 내의 모든 숨 쉬는 존재들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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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만나다!

 

 

 

(끝났다.)

사방에서 호장무사들과 번견들이 몰려들며 내는 소란을 들으며 철접은 체념했다.

(조원(組員)들이 몰살당할 때 함께 죽지 않은 건 중상을 입은 지로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시바타 일행이 지로를 피신시킨 곳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졌다.)

!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철접은 비수를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임무에 실패한 자객이 사로잡힐 경우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가엾은 어머니가 무로마치막부의 관병들에게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고문과 강간을 당하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철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다.

탈출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선택은 단 한가지뿐이다.

어머니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기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

(미안하구나 지로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철접은 겁 많은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수로 자신의 목을 그으려 했다.

그때였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

요문천이 기겁하며 달려들어 철접의 비수를 든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으려고 애쓰며 애원했다.

눈앞의 여자는 잔인무도한 자객이며 감히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대역죄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제 따위는 요문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 온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녀가 자살을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해도 무공에는 문외한인 요문천이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철접은 동영의 양대 인자파벌중 하나인 이가류의 당주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방해하지 마라."

철접은 왼손으로 요문천의 가슴을 쳐서 밀쳐내었고,

!”

콰당탕!

그 바람에 요문천은 옷장 밖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요문천을 밀쳐낸 철접은 다시 오른손에 든 비수로 자기의 목을 그으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 사람 살려!"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요문천이 갑자기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

비수로 목을 그어 자살하려던 철접은 갑작스러운 요문천의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였다.

"자객이다! 자객이 날 죽이려 한다!"

그 사이에도 요문천은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입에 대고 다급하게 외치고 있다.

(내가 자살하려던 것을 말리려던 자가 왜 갑자기...)

의아해하며 요문천을 보던 철접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 치떠졌다.

그녀는 비로소 본 것이다.

요문천이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두눈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구나!)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여자답게 철접은 순간적으로 요문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 요문천은 자신을 인질로 잡으라고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리 닥쳐라!"

요문천의 의도를 깨달은 철접도 짐짓 앙칼지게 고함을 지르며 옷장 밖으로 나섰다.

중상을 입고 시바타등에게 호송되어 간 동생의 안위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이용해야만 한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요문천은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며 철접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일어섰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허튼 짓을 하면 목을 따버리겠다!"

철접도 더욱 크게 목청을 높이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요문천의 울대에 비수를 대었다.

그 직후였다.

"여기다!"

"도망 친 자객이 소부주님의 거처에 숨어있다!"

콰창! 퍼펑!

사방의 창문과 벽이 박살나며 십여명의 무사들이 요문천의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내로 돌입한 무사들의 절반쯤은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이었지만 나머지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다.

단단하게 묶은 포승줄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그 비단 옷의 관인들이 바로 금의위의 위사(衛士)들이다.

개개인이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의 무공을 지닌 금의위 위사들은 그 집요함과 냉혹한 행사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이런...”

... 소부주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실내로 뛰어든 직후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급히 멈춰 섰다.

가슴을 황금색 보검에 관통당한 철접이 왼손으로는 요문천의 어깨를 잡은 채 오른손에 든 비수를 요문천의 울대에 대고 있다.

요문천의 목에는 이미 베어진 상처가 생겨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다.

누가 봐도 요문천이 철접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 이런! 소부주께서 인질로 잡혔다!"

"조심하라! 소부주께서 다치면 안된다!"

방안으로 뛰어들었던 호장무사와 금의위 위사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이 누구인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황사 요광효의 외아들이 아닌가?

요문천은 영락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 요문천의 몸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호장무사들은 물론이고 금의위 위사들 역시 목을 내놔야하는 상황이다.

"소부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하들이 구해드리겠습니다!"

"계집! 그분께 위해를 가하면 사지를 찢어죽이겠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댄 철접이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 그들 앞으로 나온 때문이다.

(이자가 영락제의 황사이며 명나라 조정의 사실상 승상인 요광효의 외아들 요문천이었구나.)

철접도 비로소 요문천의 신분을 알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문천이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승상부의 소부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 소부주님께서 죄인에게 인질로 잡히셨다!”

그 사이에 요문천의 거처 주변으로 몰려들던 수십명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입에서도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창문과 벽을 통해서 철접이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때문이다.

빨리... 빨리 마님께 상황을 보고하라!”

입조(入朝)하신 승상께도 파발을 띄워라!”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 몇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현장을 떠난다.

섭대낭과 요광효에게 변고를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 살려주세요! ... 이 여자는 흉악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벌써 제 목에 상처를 내었다구요."

요문천은 철접에게 떠밀려 부서진 벽쪽으로 다가가며 짐짓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하여간 귀한 집 도련님들이란...!)

(명색이 사내면서 험한 일 좀 당한다고 벌벌 떠는 꼴이라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요문천의 모습에 금의위 위사들은 내심 혀를 찼다.

"길을 열어라!"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서 부서진 벽쪽으로 접근하며 차갑게 외쳤다.

그에 따라 철접 앞쪽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건물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밀려나갔다.

"이 샌님을 살리고 싶다면 날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철접은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바짝 들이댄 채 건물 밖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별 수 없다. 승상각하의 유일한 핏줄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좌우로 물러서며 이를 갈았다.

(됐다!)

앞쪽을 가로 막고 있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무사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며 철접은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잘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녀는 요문천을 앞세운 채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대담한 계집이로군! 감히 대명제국의 심장부에서 이런 분탕질을 벌이다니...>

 

누군가의 장중한 음성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를 천둥처럼 뒤흔들었다.

(그자다!)

순간 철접의 가늘고 긴 눈이 차가운 살의를 뿜어냈다.

만일 살아남는다면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쿠오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에 허공으로부터 한 명의 노인이 마치 산 하나가 통 채로 하강하듯 장중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뒷짐을 짚은 자세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노인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관운장(關雲長;관우)을 연상케 한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려한 금포(錦袍)를 걸친 노인의 등에는 비어있는 검갑(劍匣)이 짊어져 있다.

화악!

이윽고 금포노인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건물 앞의 정원 일대가 강렬한 돌풍을 휩싸인다.

"영반(領班)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뇌()영반님!"

금포노인이 내려서자 금의위 위사들이 아연긴장한 모습으로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인다.

(신비각 사대영반의 서열사위 금검존(金劒尊) 뇌극형(雷極形)!)

바르르!

요문천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철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비각이 무섭긴 무섭구나. 냉혹 비정하기로 소문난 동영의 인자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니...!)

그 떨림을 느낀 요문천은 새삼 신비각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요문천은 지금 자신들 앞에 내려선 금포노인을 잘 알고 있다.

신비각의 사대영반은 정기적으로 승상부를 방문하여 요광효에게 업무보고를 해왔다.

요문천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안면을 텄었다.

금검존 뇌극형은 칠십을 넘긴 나이지만 신비각 사대영반 중에서는 가장 젊다.

비록 나이 때문에 사대영반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긴 해도 금검존이 검법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 세상의 평판이다.

바로 그 금검존 뇌극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내 허락도 없이 당신네 금의위 위사들을 이미 승상부 내에 진입시켰다고?”

섭대낭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통령! 당신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가요?”

대청 안에는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을 비롯하여 십여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숨조차 크게 못 쉬고 있었다.

키가 육척이 넘어 보통 사내들을 압도하는 체격을 지닌 섭대낭의 몸에서 폭풍같은 살기가 터져 나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때문이다.

붉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수초처럼 일어나 흩날리고 벽안(碧眼)에서는 푸른 벼락이 치달린다.

(과연 한 때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벽혈마희(碧血魔姬)답구나.)

섭대낭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금의위 부통령답게 곽산해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무공 역시 신비각 사대영반을 제외하면 황실 내에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산해는 섭대낭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 거녀는 성정(性情)이 불같아서 일단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천살지기(天殺之氣)를 타고 태어난 이런 류의 인간과는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싸움이 붙게 되면 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는 기필코 피를 보는 격렬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땅히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했사오나... 역적의 흔적이 승상부 담장 안으로 이어진지라...”

곽산해는 곁눈질로 섭대낭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닥쳐요! 아무렴 나와 본부의 식솔들이 숨어든 쥐새끼 한 마리 처리 못할 것같았나요?”

곽산해의 변명은 이어진 섭대낭의 분노서린 일갈에 파묻혀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급한 마음에 이 암표범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같구나.)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섭대낭의 분노와 살기를 느끼며 곽산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만에 하나 당신들이 오판을 하여 본부에 난입한 것으로 밝혀지면...”

이를 갈며 곽산해를 노려보던 섭대낭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곽산해의 얼굴도 얼어붙듯이 굳어졌다.

 

<소부주... 자객... 인질...>

 

백여장 쯤 떨어진 곳에서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고함소리들이 섭대낭과 곽산해의 귀로 파고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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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옷장 속의 미녀

 

 

 

(도련님과 오랜만의 동침이라 어색하겠구나.)

섭대낭도 주책맞게 가슴이 뛰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 훼방꾼이 끼어들었다.

"마님! 죄송합니다."

문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섭대낭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 맞은 표정으로 문쪽을 돌아보았다.

"금의위에서 승상부도 수색을 해야 하니 위사들의 진입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자객들 중 달아난 자의 흔적이 승상부 근처에서 사라졌다면서..."

문밖의 인물이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인물은 승상부의 경비를 책임지는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의 수령인 석호륜(石虎倫)이었다.

"금의위 따위가 감히..."

석호륜의 보고를 받은 섭대낭이 불끈 화를 낸다.

그러자 섭대낭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한다.

요문천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유모이지만 일단 화를 내면 나찰이나 야차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 속하들도 안된다고 했지만 금의위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서..."

문 밖의 석호륜이 아연긴장한 채 더듬거린다.

 

승상부의 주인인 요광효에게는 처()도 첩()도 없다.

비록 영락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환속을 하긴 했지만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는 않은 것이다.

요광효가 환속을 하고도 여전히 승려처럼 사는 걸 보다 못한 영락제는 종종 궁녀들 중 미녀를 골라 하사하곤 했다.

하지만 요광효는 영락제가 보낸 여자들을 일단 받았다가 다른 사내들과 짝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래서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이 승상부의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모라면 하녀나 다름없는 천한 신분이다.

헌데 어쩐 일인지 요광효는 아들의 유모인 섭대낭을 매우 존중한다.

자연스럽게 승상부의 사람들도 섭대낭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승상부에서 섭대낭에게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요광효와 요문천 부자뿐인 것이다.

 

"금의위에서는 어떤 인간이 책임자로 왔는가요?"

섭대낭이 문쪽을 노려보며 물었다.

"금의위의 부통령(副統領) 곽산해(郭山海)가 마님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석호륜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대답했다.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은 한 때 강북 일대를 주름잡던 호걸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부터 섭대낭의 준엄한 기세에 압도당한 석호륜은 섭대낭의 목소리만 들어도 한없이 위축되곤 한다.

"알았어요. 곧 갈 테니 그자를 대청으로 들이세요."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석호륜이 멀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대청에 다녀올 동안 도련님 혼자 계셔야겠어요."

요문천을 돌아보며 말하는 섭대낭의 얼굴은 언제 살기등등했는가 싶게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요문천은 대답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호장무사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밖으로 나가지는 마세요."

섭대낭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요문천의 서재를 떠났다.

(역시 유모밖에 없어.)

닫히는 문을 보며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동대로에서 본 여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대낭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말고 오늘 읽을 계획이었던 책들이나 마저 읽자.)

요문천은 탁자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털썩!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요문천의 귀에 들렸다.

요문천이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은 서재와 연결된 침실쪽이다.

침실 문은 닫혀있는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창문을 닫아놔서 바람이 들이칠 리는 없는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침실 문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이 문을 열고 들어간 침실은 어둑하다.

아직 잠자리에 들 때가 안되어서 불을 켜놓지 않은 때문이다.

침실은 승상부 소부주의 잠자리답게 넓고 화려하다.

침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침대는 기둥과 지붕이 달려있다.

매우 넓어서 대여섯명이 함께 자도 될 크기의 침대다.

벽에는 여러 개의 옷장이 세워져 있으며 한쪽에는 욕실로 통하는 문이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둑한 침실에 전에는 맡아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다.)

요문천은 그 냄새가 누군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비린내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창문들은 모두 닫혀있다.

하지만 누군가 다친 몸으로 침실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호장무사들을 불러야할까?)

두려움으로 머리끝이 쭈뼛거린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호기심에 요문천은 찬찬히 침실 바닥을 살폈다.

곧 요문천은 침실 바닥에 옅은 얼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히 지우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다.

핏자국은 창문으로부터 여러 개의 옷장들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옷장 속에 누군가 숨어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핏자국의 흔적이 이어진 옷장으로 다가갔다.

(아마 영락폐하를 습격했다가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일 것이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의 손은 이미 옷장의 문을 열고 있다.

번쩍!

옷장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섬광이 요문천의 목으로 날아든다.

하지만 눈을 치뜬 요문천은 자신의 목을 그어오는 새파란 칼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옷이 가득 걸린 어둑한 옷장 안쪽에 한명의 여인이 숨어 있다가 짧은 칼을 휘두르고 있다.

옷장 속이 어둑하다.

게다가 몸에 걸친 옷도 피로 물들어 있어 여인의 새하얀 얼굴만이 또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출혈이 심한 탓에 한층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다.

분칠을 한 것같은 그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어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 여자다!)

눈을 치뜬 요문천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진다.

지난밤 한번 본 후로 하루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여인!

그녀의 얼굴이 믿어지지 않게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

 

크르르르!

갑자기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버둥거린다.

"이놈들이 왜 이래?"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인 진준(陳俊)과 여구(呂九)는 갑자기 날뛰는 번견(番犬;경비견)들의 목줄을 잡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번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순찰을 돌던 곳은 다른 저택과 맞닿은 담장 근처였는데

그곳의 관상수와 꽃잎에 핏방울이 점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던 자객이 승상부에 들어왔다!)

진준과 여구의 안색이 와락 굳어졌다.

그와 함께 그들은 반사적으로 호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

 

"절색(絶色)이다!"

 

지난밤에 들었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철접의 귀를 울렸다.

철접은 금의위 위사들이 집요한 추적을 피해 어느 화려한 저택으로 숨어들었었다.

헌데 그 저택의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 내부의 옷장에 몸을 숨긴 직후 누군가 다가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자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 침묵시켜야만 한다.

철접은 옷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병(小柄;일본식 비수)으로 그자의 목을 빠르게 찔러갔다.

바로 그 순간 지난밤에 들었던 <절색(絶色)이다!> 라는 외침이 해빙기에 갈라지는 얼음처럼 쨍하게 철접의 머리 속을 울렸다.

양손으로 옷장의 문을 활짝 연 해맑은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얼굴을 언제 어디서 봤는지가 순간적으로 철접의 뇌리에 떠올랐다.

지난밤 동생 용차랑을 들여보냈던 기루 앞에서 본 젊은 서생이다.

(안돼!)

철접은 찔러가던 소병을 필사적으로 틀었다.

!

간발의 차이로 철접이 내지른 소병의 끝이 서생의 목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비수 끝에 스친 목옆의 살갗이 쩍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생의 얼굴에 피어오른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양손으로 옷장을 연 요문천과 그에게 비수를 내지른 자세인 철접의 몸이 함께 굳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상황이 사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이 여자를 다시 만났다.)

요문천은 목이 베인 상처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갔던 여인이 기적처럼 바로 눈앞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자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철접 역시 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훑으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 보았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사내..

그를 넓디넓은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전율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마치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숨 몇 번 들이키고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삐익! !

돌연 들려온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두 사람을 몽환경(夢幻境)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쪽이다!"

"자객의 흔적이 소부주님의 거처 은천각(恩天閣)쪽으로 이어진다."

"빨리 마님께 알려라!"

컹컹! !

호각소리에 이어 여러 명이 다급히 지르는 고함 소리와 사나운 개의 짖음이 들려왔다.

승상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늘 조용하던 요문천의 거처 일대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여자가 내 거처로 숨어들어온 흔적이 호장무사들에게 발견되었구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장무사들이 자신의 거처로 몰려들며 지르는 고함을 통해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영락제를 습격했던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요문천의 눈에 비로소 여인의 몸 상태가 들어왔다.

철접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마 북경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위장한 채 기다리다가 자금성으로 귀성하던 영락제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철접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탓에 원래는 희던 옷이 피로 물들어 혈의(血衣)로 변해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장의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을 정도였다.

가장 심각한 상처는 왼쪽 가슴에 나있다.

한 자루 금빛으로 번쩍이는 검이 철접의 가슴에 박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가슴이, 그것도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왼쪽 가슴이 검에 관통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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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지러운 밤

 

 

 

영락제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 몽고족에 대한 친정(親征)을 감행했었다.

이를 삼리오출(三犁五出)이라 한다.

삼리는 몽고족의 근거지를 세 번 쳐부순 것을 의미하고 오출은 다섯 번 고비사막을 넘은 것을 뜻한다.

다섯 번의 원정은 매번 대상이 바뀌긴 했다.

그래도 몽고족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대한 오이라트(瓦喇, 또는 衛拉)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달단(韃靼)과 함께 몽고족의 양대 세력인 오이라트에는 몇 년 전 토곤(妥爟)이라는 젊은 영걸이 나와서 대원(大元)제국의 재건을 공공연히 주창하고 있다.

이에 영락제는 세 번째 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오십만 대군을 북경 북쪽 팔달령(八達嶺) 근처에 소집하여 열병식을 갖었었다.

열병식은 정오 무렵에 진행되었었다.

그후 자금성으로 돌아오던 영락제의 귀성(歸城) 행렬을 자객들이 습격했을 것이다.

 

(딱히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신비각(神秘閣)의 경호를 받으시는 상태에서는 세상 어떤 자객도 영락폐하의 존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을 테니...)

승상부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요문천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숱한 적이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벼온 영락제다.

그 때문에 신변 경호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수많은 위사들이 영락제 주변에 포진해있다.

특히 암중에서 황제를 지키는 비밀조직 신비각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신비각의 경호를 받는 영락제가 위험해지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신비각은 주원장을 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후 원() 황실이 수집한 숱한 무공비급과 영약들을 신비각에 하사했었다.

덕분에 신비각에 가입한 무림인들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신비각의 실력자들이 몇 명만 세상으로 나가도 단번에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판이다.

(어쩌면 당대의 신비각 각주는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요문천은 신비각과 함께 아버지 요광효를 떠올렸다.

<정난의 변>에서 신비각은 중립을 지켰다.

문관을 우대하고 군부를 홀대한 건문제의 정책이 원래가 무사들인 신비각 구성원들의 반감을 산 때문이다.

신비각이 침묵해준 덕분에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신비각을 전보다 더 중시하였으며 자신의 황사 요광효에게 신비각의 관리를 맡겼었다.

관례에 따라 신비각의 각주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공표되지 않는다.

다만 사대영반(四大領班)이라는 네 명의 기인이 숫자 미상의 신비위사(神秘衛士)들을 직접 지휘한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래도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며 공신인 요광효가 신비각의 각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다.

요문천이 북경의 밤거리를 들썩이게 만드는 소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셨지요 도련님?"

드륵!

요문천의 뒤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키가 육척이 넘는 그 여인이 들어서자 그리 좁지 않은 서재가 꽉 차는 느낌이 든다.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임에도 균형 잡힌 몸매와 이목구비가 깊고 뚜렷하여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요문천의 유모 섭대낭이다.

"놀라긴 뭘..."

요문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유모를 돌아보았다.

섭대낭은 몇 달 전 마흔 살을 넘긴 중년의 나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정심한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內家高手)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색목인의 혈통인 섭대낭은 젊은 시절 강호를 뒤흔들어놓았던 여걸(女傑)이었다.

헌데 어떤 일을 계기로 무림에서 은퇴하고 요문천의 유모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전적으로 기르고 보살펴온 것이 섭대낭이다.

유모라는 이름 그대로 섭대낭은 요문천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서 길렀다.

요문천을 만나기 얼마 전에 섭대낭도 출산을 했었지만 곧 아기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퉁퉁 불어 오른 젖을 요문천에게 물리며 섭대낭은 아기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섭대낭에게 요문천은 단순한 젖아들이 아니다.

낳자마자 잃은 아기의 대신이었다.

자연히 그녀는 요문천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요문천에게 있어서도 섭대낭은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사실상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병약하게 태어난 요문천이다,

섭대낭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던 모양이지?"

요문천은 다시 창밖을 돌아보며 유모에게 물었다.

"저도 아직은 자세한 경과를 듣지는 못했는데... 열병식을 마치고 귀성하시던 영락폐하의 행렬을 일단의 자객들이 습격했다는군요."

다가온 섭대낭은 자연스럽게 요문천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물론 어림없는 시도였겠지?"

요문천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섭대낭의 큼직한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거구에 어울리게 크지만 길고 갸름하여 아름답기도 한 손이다.

"영락폐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으셨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네요. 승상께서도 급히 입궐(入闕)하셨구요."

섭대낭은 사랑스러운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뭘 직접 나서시나? 자객들의 추포(追捕)는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에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

요문천은 혀를 찼다.

도연, 즉 요광효의 나이는 올해 여든 다섯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신도 어려울 노령(老齡)이지만 여전히 정정해서 조정의 중요한 사안에는 대부분 관여해오고 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의 자객이 동원된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일 거예요."

"대규모? 자객이 몇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섭대낭의 이어진 말에 요문천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최소한 오십 명 이상이었다고 해요. 백 명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도 하구요."

"오십 명이 넘는 자객이 북경에 잠입하다니...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요문천도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인 만큼 치안이 아주 엄중하다.

그런 북경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자객이 동시에 잠입한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객들 중 태반은 현장에서 위사들에게 척살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자객들은 생포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자결을 했다네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요문천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걸 보면 아직 잡히지 않은 자객들이 있는 것같고...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오늘 밤 못 돌아오시겠네!"

섭대낭의 품에 안긴 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정하다고는 해도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부친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 규모의 자객들을 동원할 자라면...!"

"금의위와 동창에서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요문천의 말을 섭대낭이 이어 받았다.

"토곤! 토곤 타이시(太師)...!"

요문천은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시, 즉 태사(太師)는 몽고족의 군 사령관의 칭호다.

"징기스칸의 정통 후계자인 푼야스리(木雅失里)를 암살한 후 대칸(大汗)을 자칭하고 있는 그 효웅이 또 사단을 벌렸겠군!"

요문천은 부친으로부터 들은 토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본래 몽고족의 지도자인 대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핏줄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

이를 <징기스칸의 법>이라고 하는 바,

몽고족 내에서 아무리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자라도 황금씨족이 아니면 타이시가 되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헌데 토곤은 징기스칸, 정확히는 쿠빌라이의 마지막 후손인 푼야스리를 살해한 후 스스로 대칸을 자처하고 있다.

물론 오이라트 외의 다른 몽고 부족들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몽고족 내에서는 격심한 내분이 일어난 상태다.

 

"토곤의 짓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번에 그자가 동원한 자객들은 좀 특이하다고 해요."

섭대낭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을 이었다.

"특이하다니 어떤 면이...?"

요문천은 고개를 조금 돌리며 물었다.

"자객들이 몽고족 출신이 아니라 동영(東瀛)의 인자들이었다는 거예요."

섭대낭은 자신의 가슴에 코를 문지르는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인자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동쪽 섬나라의 마귀들이잖아."

섭대낭의 향긋한 살 냄새를 맡던 요문천이 흠칫 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본다.

"맞아요. 잡혀 죽었거나 도망칠 수 없자 망설이지 않고 자살을 한 자객들은 모두 왜국(倭國)의 인간들이었대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아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젖아들의 작은 몸짓, 목소리 한마디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섭대낭이었다.

"동영의 인자들을 고용하다니... 토곤이 제법 머리를 굴렸군!"

섭대낭의 부드러운 입술을 이마에 느끼면서도 요문천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 명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토곤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세력이다.

당연히 오이라트의 도발에 대한 대비는 치밀하다.

그래서 몽고족 출신 자객들이 들키지 않고 대규모로 북경에 잠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몽고족이 아닌 다른 종족의 북경 출입은 비교적 자유스럽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방(異邦)에서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곤은 그것을 노리고 몽고족이 아닌 동영의 인자들을 동원하여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 오늘밤은 저와 함께 주무시도록 해요."

섭대낭이 요문천의 머리를 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 그럴까?"

섭대낭의 말에 요문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 요문천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섭대낭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

섭대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맡아 기르면서 한시도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기를 낳은 직후 잃어버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문천도 그런 섭대낭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라왔다.

진짜 어머니라면 적당한 시기에 아들을 분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헌신만 할 줄 하는 유모인지라 섭대낭은 요문천이 다 큰 후에도 자신의 품에서 밀쳐내지 않았다.

요문천 역시 무슨 요구든 들어주는 섭대낭이 마냥 좋아서 그녀의 치마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문천은 잘 때도 반드시 섭대낭의 품에 안겨야만 잠이 들곤 했다.

장가를 가도 충분할 나이인 요문천이 여전히 유모인 섭대낭과 동침하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들이 떠돌았다.

명문가의 또래들은 이미 다 장가를 갔다.

반면 요문천이 여전히 혼자 몸인 것도 섭대낭의 봉사 덕분에 딱히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하지만 섭대낭과 요문천은 어디까지나 유모와 젖아들의 관계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혹과 달리 요문천과 섭대낭은 늘 동침을 해도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문천과 섭대낭의 순수한 동침도 일 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섭대낭이 거부해서가 아니라 요문천쪽에서 자진하여 혼자 자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성숙한 남자라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핏덩이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섭대낭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문천은 자진해서 섭대낭과 떨어져 자게 되었다.

물론 그 이유를 섭대낭도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기특하기도 해서 그날부터 섭대낭은 요문천을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방을 쓴 지 일 년여만에 섭대낭과 다시 동침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선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요문천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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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승상부 소부주

 

 

 

처음에는 살의(殺意)가 불끈 치밀었다.

누군가 자신의 순결한 몸을 색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는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절색이다!> 라고 외친 한마디에 온전히 감탄만이 깃들어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철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낸 인물을 보았다.

이장(二丈;6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젊은 서생이 눈을 치뜬 채 그녀를 보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채 안되어 보인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원래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

추호의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은 서생이 유복한 가정에서 근심없이 자랐음을 보여준다.

(지로가 잘 자라면 저자처럼 되겠구나.)

그것이 젊은 서생을 보는 순간 느낀 철접의 감상이다.

호기심과 경탄으로 가득한 젊은 서생의 눈이 웃고 있다.

진지하면서도 순수하여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이다.

젊은 서생 뒤에는 벽처럼 보이는 존재가 서있다.

처음에는 남자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여자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육척(六八;180센티)을 훨씬 넘는다.

젊은 서생의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다.

체격 역시 당당해서 철접으로 하여금 남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이가 마흔 살 언저리,

사내를 압도하는 체격을 지녔지만 거녀(巨女)의 얼굴은 추하지 않다.

추하기는커녕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윤곽이 깊고 뚜렷하며 눈동자에는 푸른색이 감돈다.

거녀의 몸에는 아마도 색목인(色目人)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녀의 머리카락도 완전히 검지 않고 붉은 색을 띄고 있다.

(고수로구나.)

철접은 푸른색을 띤 거녀의 눈으로 언뜻 번갯불같은 섬광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미련하게 보이는 거녀의 몸에 측량불가의 심후한 공력이 깃들어있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죽일 수 있을까?)

인자의 본능으로 철접은 자연스럽게 거녀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으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간단히 압살(壓殺) 당할 것이라는 게 철접이 내린 판단이었다.

(중원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고수도 많구나. 일개 호위가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철접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자신들이 척살을 시도할 황제의 주변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소생이 초면에 결례를 했습니다."

젊은 서생이 포권을 하며 말을 건네 철접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불쾌하셨다면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진지한 사과다.

서생이 사과하는 말을 들은 철접은 마음에서 불쾌한 감정을 씻어낸다.

"딱히 결례를 하신 것도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철접은 건조한 어조로 말하다가 시선을 기루쪽으로 돌렸다.

기루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기루로 들어가던 한량들과 그들을 맞이하던 기녀들이 무엇때문인지 놀라고 당황하며 허둥거린다.

이어 그들을 헤집고 한명의 소년이 달려 나온다.

벗겨졌던 상의를 다시 입으며 기루에서 뛰쳐나오는 그 소년은 철접 자신의 동생 용차랑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다.

용차랑의 행색과 표정을 본 철접은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마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녀들이 다짜고짜 용차랑의 옷을 벗기려 들었을 테고,

기겁한 용차랑이 기방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울먹이며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뒤로 늙은 인자 시바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따라 나오고 있다.

"누나!"

기루를 뛰쳐나온 용차랑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철접을 발견하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달려온 용차랑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래. 싫으면 억지로 할 거 없다."

철접은 키가 작아 머리가 자기 어깨쯤에 닿는 어린 동생을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오늘밤에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도록 하자꾸나."

철접은 계집아이처럼 훌쩍이는 동생을 한 팔로 끌어안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며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칫 지금이 소동이 발단이 되어서 내일 있을 거사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가급적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한다.

용차랑을 안고 걸음을 옮기면서 철접은 한 쌍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은 거구의 여인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는 젊은 서생이었다.

 

***

 

요문천(姚聞天)은 승상부(丞相府)의 소부주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 승상(丞相)이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초기에는 송()나라의 관제를 본 따서 정무를 관장하는 승상이 있었고 승상부 역시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홍무제 주원장이 친정(親政)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승상 제도는 폐지되어 버렸었다.

관직에 승상이 없으므로 승상부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승상부가 분명 존재한다.

그리 된 이유는 승상부의 주인이 영락제의 치세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사(皇師) 도연(道衍)!

 

그가 바로 승상부의 주인이다.

도연은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안배가 없었다면 영락제는 여러 번왕(藩王)중 한명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영락제는 도연에게 어떤 공신에게 내린 것보다도 더 큰 상을 내리려고 했다.

문제는 도연이 무소유(無所有)를 본분으로 삼는 승려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속인이 아닌 도연에게 아무리 큰 상을 내려도 의미가 없다.

이에 영락제는 도연에게 속인의 신분으로 은상(恩賞)을 받으라 명하였다.

천자의 명인지라 도연도 어쩔 수 없이 환속하여 요광효(姚廣孝)라는 원래 이름을 쓰게 되었다.

승려의 신분을 버린 도연, 즉 요광효에게 영락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은상을 내렸다.

그중에는 북경 내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가 요광효에게 하사한 그 저택은 처음에는 요부(姚府)로 불렸었다.

하지만 요부라는 이름은 발음상 아름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광효는 실질적인 승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요부는 승상부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승상이라는 관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치하에서 승상부가 존재하게 된 연유였다.

그 승상부의 소부주가 요문천이다.

요문천은 요광효가 환속하기 전에 관계한 어떤 여인의 소생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열여덟 번째 생일을 치룬 요문천의 신분은 여러 왕가의 왕자들을 능가하여 영락제 슬하의 황자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요문천과 그의 아버지 요광효는 겸손한 성품이라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서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존귀한 신분이 요씨부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요문천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하늘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어젯밤, 요문천은 유모(乳母) 섭대낭(葉大娘)과 함께 환락가로 유명한 동대로를 구경하러 갔었다.

섭대낭은 요문천이 글 읽는 것만 좋아할 뿐 여자나 세상 물정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장소인 동대로에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깊은 밤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동대로는 순진한 책벌레 요문천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루들과 짙은 화장 때문에 그림에서 빠져나온 선녀처럼 보이는 기녀들의 고혹한 자태는 소년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요문천은 동대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그 여인의 자태는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호객을 하는 기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문천은 이내 그 여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기녀라면 결코 지닐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자태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었다.

 

"절색(絶色)이다!"

 

그 때문에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입 밖으로 내놓게 되었다.

탄성을 들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돌아보었다.

순간 요문천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직감했다.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방금 전 물에 씻긴 백옥인 듯 깨끗한 얼굴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진다.

특히 가늘고 긴 여인의 두눈은 서늘한 빛을 흘려내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었다.

자신이 여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여인도 대답을 했던 것같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요문천이다.

여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재회를 기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요문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 직후 근처 기루에서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허둥대며 뛰쳐나오더니 여인의 품에 와락 안겼기 때문이다.

여인은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을 안고 달래며 현장을 떠났다.

그 모습에서 요문천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누이가 어린 동생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여인은 요문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여인의 모습은 요문천의 뇌리에서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병에 걸린 것같구나. 상사(相思)라는 불치의 병에...)

요문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눈에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그 신비한 여인의 자태만이 온통 뇌리에 떠돌 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 읽는 것조차 잊었으며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상태로 그 여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 차려라 요문천.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여인에게 홀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요문천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호르륵!

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호각과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어두워지는 북경의 거리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불빛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불과 횃불을 든 사람들이 떼 지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뭐지?)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쓰던 요문천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창밖을 보았다.

"벽돌 하나, 기와 한 장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단 한 놈의 자객도 놓쳐서는 안된다!"

"대역무도한 역적들을 놓치면 모두 칼을 물고 자결할 각오를 해라."

호르륵! 호륵! 삐익!

승상부 근처의 골목에서도 거친 고함과 호령들이 호각소리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온다.

(영락폐하께서 열병식(閱兵式)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행로에 사단이 생겼구나.)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던 요문천은 이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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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절색(絶色)이다!

 

 

밤이 깊었다.

하지만 북경 외성(外城)의 동쪽에는 불야성이 형성되어 있다.

독특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저마다 내건 형형색색의 등불들이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북경 최대의 환락가다.

동대로(東大路)라 불리는 거리는 금릉(金陵)의 진회하(秦淮河)에 못지않은 규모와 빼어난 미기(美妓)들로 유명하다.

이십일 년 전에 시작되어 십팔 년 전에 끝났던 <정난(靖難)의 변()>의 결과로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帝位)에 오른 영락제는 일단 금릉을 도읍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천도(遷都) 준비를 했으며,

마침내 영락십육년(永樂十六年)에 자신의 권력 근거지인 북경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 이전까지 북경은 연경(燕京), 북평(北平)등으로 불렸었다.

명나라의 수도가 된 덕분에 북경 일대 환락가들 중에서도 최대규모인 동대로는 유래 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늦은 밤임에도 동대로의 넓은 거리는 하룻밤의 쾌락을 찾는 한량, 부호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분칠한 여인들로 가득하다.

이 거리의 여인들은 단 한 종류뿐이다.

좋게 말하면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이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먹고사는 창기(娼妓)들만이 동대로에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사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어느 기루에서 호객(呼客)을 위해 내보낸 기녀일 것이라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아름다운 여인,

하지만 수작을 붙여볼 생각으로 그 여인에게 다가간 순간 사내들은 몸속의 피가 일거에 얼어붙는 듯한 오한(惡寒)을 느껴야만 했다.

훤칠한 몸에 수수한 옷을 걸친 여인의 눈빛은 너무도 깊고 투명하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서늘한 눈빛에 접하는 순간 사내들은 자신의 머릿속이 얼음송곳으로 후벼 파이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어떤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서 멀어졌다.

덕분에 번잡한 동대로에서도 여인이 서있는 나무 그늘 근처는 한산했다.

여인은 철접이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의 그늘에 동화되듯이 서있는 철접은 길 건너편 건물을 보고 있었다.

철접이 보고 있는 건물은 동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루다.

현란한 등이 내 걸린 기루 입구는 하룻밤 인연을 찾는 사내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기녀들로 북적인다.

(시바타는 누구보다 노회(老獪)하니 내 뜻을 알아차리고 잘 처리하는 중일 것이다.)

철접은 웃음소리 낭자한 기루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늙은 인자 시바타와 용차랑을 기루로 들여보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철접이 동대로를 찾아온 이유는 내일의 거사를 앞두고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 경험을 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용차랑에게도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철접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난생 처음 기녀들과 어울려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분방하게 즐기다보면 용차랑은 곯아떨어져서 내일 있을 거사에는 끼지 못할 것이다.

철접의 뜻을 알아차렸을 늙은 인자 시바타는 기녀들을 사주하고 있을 게 확실하다.

술과 여자로 용차랑을 쉴 새없이 공략하여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리라고...

(지로(次郞)에게는 못할 짓을 한 기분이다. 누구보다 순진하고 겁이 많은 그 녀석이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철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시바타의 손에 이끌려 기루로 들어가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송아지같은 표정으로 돌아보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자들은 철이 완전히 들기 전부터 이성을 경험한다.

()에 일찍 눈을 떠야만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도 있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차랑 또래의 소년 인자들이라면 대부분 여자와 동침해본 경험이 있다.

소년 인자들은 첫 경험을 위해 유곽(遊廓)이나 사창가(私娼街)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인자 마을의 나이 든 여자들이 첫 경험을 하게 해준다.

아무래도 매춘부들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다.

소년들로서는 딱히 배울 게 없다.

그에 반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며 소년들이 자라는 것을 봐온 여자들은 성심성의껏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려주게 된다.

여자의 몸이 남자와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기교를 써야 완전하게 정복할 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치는 것이다.

소년들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여자가 상대라면 겁을 먹거나 긴장하지 않고 첫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집안의 나이 든 여자들이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게 해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삼 년 전에 죽은 철접의 첫째 동생 용태랑이 그렇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용태랑은 집안의 어떤 여자를 통해 첫 경험을 한 것같았다.

용태랑은 두 살 위의 누이인 철접을 닮아 결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깔끔하기가 여자들보다 더 한 데다가 더럽거나 추한 것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용태랑이 유곽에 가서 창녀를 사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가류 내의 여자들과 관계를 갖기도 쉽지가 않다.

만에 하나 상대 여자가 용태랑의 아이를 배기라도 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이가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용태랑의 나이는 어느덧 약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장차 이가류를 이어야할 후계자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자를 모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심지어 용태랑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색가(男色家)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이가류 내에 퍼지고 있었다.

이가류의 당주가 될 사내가 남색가라 소문나면 심각한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다.

다른 인자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주인 용사무가 결단을 내렸다.

집안의 여자들 중 한 사람이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되어주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집안 여자라면 용태랑도 결벽증이나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관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대가족인 용씨 집안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오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 여자들 중 사내 경험이 없는 처녀들은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에서 제외 되었다.

남녀관계에 대해 뭘 알아야 용태랑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나이가 많은 여자 역시 배제되었다.

서른 명 남짓 남은 여자들 중 제비뽑기로 결정된 누군가가 용태랑의 첫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 여자가 누군지는 끝내 비밀로 붙여졌다.

용태랑은 집에서 그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동안 철접과 어린 아이들은 잠시 친척 집에 가있었다.

다음 날 철접이 귀가했을 때 용태랑은 더 이상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변함이 없지만 어쩐지 어른의 분위기가 났었다.

집안의 어른들 중 누구도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누구였는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철접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인자 마을의 어른들도 대부분 용태랑의 상대를 눈치 채고 있는 것 같 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여자가 누군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인자들의 삶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인자들에게 인륜도덕은 그리 대단한게 아니다.

이런 분위기인지라 인자 마을의 소년들은 대개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철접이 알기로 용차랑은 여전히 여자를 모른다.

형인 용태랑은 지나치게 결벽한 성격이라 첫 경험이 늦었었다.

반면 용차랑은 이가류 종가의 자손답지 않게 겁이 많고 순진하여 여자들을 무서워했다.

이가류 내의 여자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종가의 막내아들인 용차랑을 유혹하려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도발을 할 기미만 보여도 용차랑은 기겁하며 도망치곤 했다.

계집아이보다도 여린 성품의 소유자인 용차랑에게 여자들은 기승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로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용차랑이 무서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 한명의 여자가 철접이다.

철접 역시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나 나는 용차랑을 동생이 아니라 조카나 아들인 듯이 대해왔다.

 

(내가 직접 지로에게 경험을 시켜주었어야 했을까?)

철접은 조금 아쉽고 후회가 되는 기분이었다.

인자들의 세계에서는 남매가 부부가 되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이다 보니 바깥세상의 인간들과 인연을 맺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낯을 많이 가리고 겁도 많은 용차랑은 어쩌면 철접에게 은밀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가류의 나이 많은 여자들의 유혹과 호의를 뿌리쳐 왔을 테고...

하지만 철접은 어린 동생 용차랑과 도저히 마지막 일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철접은 이가류 내의 일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용차랑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도맡아 키워왔었다.

열두 살이나 어린 동생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전적으로 용씨일족의 장녀인 철접의 몫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과 민망한 짓을 할 용기가 철접에게는 없었다.

(지금까지야 그랬지만 어차피 내일 이맘때면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을 몸뚱이... 지로의 소원을 들어 줄 걸 그랬나?)

철접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조카나 아들같이 키워온 어린 동생이 창녀를 상대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후회의 감정이 밀려든다.

(결국 나는 처녀 귀신이 될 운명이었다.)

철접의 차가운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이가류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철접은 아직 처녀의 몸이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여자로서의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체가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몸뚱이를 아무 사내에게 내맡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접은 서른 살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사내를 모르는 처녀의 몸이다.

물론 처녀로 죽는 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다.

다만 내일이면 죽어서 썩어질 몸뚱이임에도 사랑하는 동생의 소원을 들어줄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바로 그때였다.

"절색(絶色)이다!"

누군가의 탄성이 심란해하는 철접의 귓전을 천둥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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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정전야(出征前夜)

 

 

 

"내일,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죽는다."

너무도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인물은 아직 젊은 여인이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흰 반면 가느다란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목구비는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조각이 살아서 말을 하는 듯하다.

한 쌍의 눈은 가늘고 길다.

그런가 하면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고요하며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어둑한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여인의 눈빛에 동요가 떠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여인의 별호는 테츠노초우, 즉 철접(鐵蝶)이다.

오랜 세월 동영(東瀛;일본)의 밤을 지배해온 인자(忍者)들의 양대 파벌 중 이가류(伊賀)의 당대 당주(堂主)가 그녀다.

 

본래 이가류의 당주는 용사무(龍司戊)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가류는 삼 년 전에 벌어진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내분에 휘말려 멸문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용사무는 장남 용태랑(龍太郞)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가류 인자들은 용사무의 장녀이며 <강철(鋼鐵)의 나비()>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용천파(龍千波)를 자신들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게 되었었다.

 

"황제가 표적인 이상 척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역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철접 용천파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빛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가류 내에서도 엄선한 인자들답게 두려움 따위는 목숨에 대한 미련과 함께 온전히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곳은 동영이 아니라 이역만리 중원이다. 초목개병(草木皆兵)!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철접 용천파의 말에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인 그녀의 말 대로 이곳은 자신들의 고향 동영, 즉 일본(日本)이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주인을 죽이려는 처지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희망일 뿐이다.

"우리가 내일 죽는 대신 우리의 피붙이들은 막북(漠北)의 새로운 터전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고 맡겨진 바의 소임을 완수하기 바란다."

당주인 철접의 훈시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철접이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한다.

사람들도 철접을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을 한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이며 내일 치를 거사에 대한 결의의 표현이다.

절을 하는 여()인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지만 우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철접이 일어나 밀실을 나갔다.

당주가 자리를 뜬 밀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밀실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접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사내들의 짐승같은 신음이 천둥치듯 들려온다.

시노마츠리... <죽음()의 축제()>.

철접 자신은 혐오한다.

하지만 다른 인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는 광란의 축제가 밀실에서 밤새 이어질 것이다.

 

전란(戰亂)이 끊일 날 없는 동영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여자를 품게 해주는 전통이 있다.

여자를 품지 못하고 죽으면 그 미련 때문에 혼백이 성불(成佛)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인자들이 임무에 나서는 것도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인자들 역시 출정전야(出征前夜)에는 원하는 대로 여자를 품을 수 있다.

물론 여자 인자들의 경우는 남자를 구해 안기는 것이 전통이다.

극한의 쾌락에 몸을 맡기고 나면 목숨은 하찮게 느껴지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을 잊은 채 온전히 임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욕정을 해소할 대상을 밖에서 구하여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역만리 중원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상대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자칫 자신들이 내일 치를 막중한 거사가 들통 날 위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자신들끼리 뒤엉켜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남녀 인자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쾌락에 빠져들고 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목숨들이다.

인륜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본능을 채워줄 대상뿐이다.

 

(하늘 아래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다지만 우리네 인자들만큼 비참한 삶이 또 있을까?)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소음을 들으며 철접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자들의 도구가 되어 개처럼 부려지다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이 인자들의 숙명이다.

자신의 아버지 용사무와 오빠 용태랑 역시 권력에 눈이 먼 한 인간의 욕망에 휘둘렸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았었다.

그리고 가엾은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가 당한 처절한 최후를 떠올리면 지금도 슬픔과 분노가 전율이 되어 온몸을 훑고 지나는 철접이었다.

 

삼 년 전, 그녀는 중상을 입은 채 어머니와 함께 막부의 관군들에게 쫓겼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어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철접을 숨겨두고 관군들을 유인해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군들에게 사로잡힌 어머니는 철접이 숨어있는 근처로 끌려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혔으며 마침내 손가락과 발가락이 차례로 잘려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내 딸이 숨어있는 곳은 발설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악에 바친 관군들은 어머니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었다.

어머니는 이미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리고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유린당하며 어머니는 도살장에 끌려와 도축당하는 짐승같이 울부짖었었다.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때마다 부러진 뼈들이 장기를 찌르고 생살을 찢어댄 때문이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하는 어머니와 숨어있는 철접의 시선이 몇 번인가 교차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린당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너무도 다정하여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자 관군들의 만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관군들이 떠난 후에도 철접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다가는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때의 형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처참한 몸뚱이를 남겨두고 철접은 피눈물을 흘리며 현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다른 인간의 도구가 되어 결국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하는 것이 인자의 삶이고 숙명인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다른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내 의지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어머니의 처절한 죽음을 떠올린 철접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며 밀실의 문 앞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여자 인자들의 흐느낌과 남자 인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

 

"...!"

철접의 고요하던 눈동자에 오늘 밤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곳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은신하고 있는, 오십여 년 전에 버려진 황폐한 장원의 입구였다.

"... 미안해 누나."

철접의 평정심을 깨트린 것은 이제 십오륙 세쯤 된 소년이다.

얼굴이 계집아이같이 해맑고 눈이 유달리 커서 겁먹은 사슴을 연상케 하는 그 소년은 바로 철접의 하나뿐인 핏줄 용차랑(龍次郞)이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용차랑의 몸과 의복은 먼지에 덮여있고 땟국물로 얼룩져 있다.

용차랑의 뒤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수천 리 밖 막북(漠北)에 있어야할 어린 동생...

용차랑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을 본 철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절망감을 느꼈다.

유일한 핏줄인 이 아이가 예기치 않게 나타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이가류 종가(宗家)의 후손으로 안전한 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어. 나도 영락제(永樂帝)를 척살하는 살행(殺行)에 참가할 기회를 줬으면 해."

용차랑은 열두 살 위인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철접의 시선은 용차랑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당주님."

여든 살을 바라보는 늙은 인자 시바타(紫田)가 철접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연다.

"도련님께서 혼자라도 북경(北京)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타는 당장 할복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철접은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용차랑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한번 세운 뜻과 고집은 꺽은 적이 없는 아이다.

다시 막북으로 돌아가라거나 내일 있을 거사에서 빠지라고 해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거나 따돌리려고 시도했다가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내일의 거사를 무산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따라와라. 같이 갈 곳이 있다."

철접은 한숨을 쉬며 폐허가 된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용차랑과 늙은 인자 시바타가 눈치를 보며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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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전 공지>

무림일기는 원스토어, 미스터블루, 리디북스, 판무림등에 연재중인 신작입니다.

연재가 진행중인 작품이라 블로그에 많이는 올리지 못합니다.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이라 블로그에 올리는 데 제약이 있기도 하고...

맛보기 삼아 앞 부분을 일부 올릴 예정입니다.

물론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내용은 수정이 될 것입니다.

연재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와룡강 무협소설

 

               무림일기 -武林日記

 

 

 

 

서장(序章)

 

 

종말(終末)과 시작(始作)

 

 

 

시뻘건 불길이 뱀의 혓바닥처럼 사방에서 넘실거린다.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던 실내는 이미 불길에 삼켜져 용광로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보좌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 엄정(嚴正)한 자태를 추호도 흩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화려한 궁장과 구름같이 틀어 올린 첩지머리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으나 여인은 마치 남의 일인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연왕(燕王)의 왕사(王師) 도연(道衍)!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원한다면 본후(本后)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물네 살에 불과한 젊은 나이지만 여인의 말에는 추상같은 위엄과 태산의 그것같은 무게가 서려 있다.

"만일 거부하거나 사소한 토라도 달 경우 홍무(洪武)폐하로부터 전해진 명조(明朝)의 국새(國璽)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길과 함께 실내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연기 속에서 여인의 눈이 청옥(靑玉)처럼 서늘한 빛을 발한다.

"아미타불! 천한 중이 어찌 감히 존귀하신 황후(皇后)마마의 성지를 거스를 수 있겠소이까?"

도연은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나이 이미 예순 일곱이지만 눈앞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손녀뻘의 어린 여자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진다.

단지 그녀의 신분이 황후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 가냘픈 육신 안에 품고 있는 단호한 결기(決氣)는 도연의 육십칠 년 삶을 되돌아봐도 비견될 대상이 없는 정도였다.

"이 아이를... 세상이 아직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 핏덩이를 지켜주겠다고 신불(神佛)에 대고 맹세하라. 그리하면 본후도 전국의 옥새를 내놓겠다."

여인은 자기 발치에 놓인 상자를 지나가는 눈길로 가리키며 말했다.

뚜껑이 열려있는 상자 안에는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가 뉘어져 있다. 태어난 지 하루 이틀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듯 핏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핏덩이다.

"신불에 기댈 것도 없이 빈승 도연의 명예를 걸고 황자(皇子) 아기씨를 험한 인심(人心)으로부터 지켜드리겠소이다."

"과연 그대가 약속을 지키는지는 혼령(魂靈)이 되어 지켜보겠다."

도연의 다짐을 들은 여인은 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근에 출산을 한 몸인데다가 옷과 머리에 이미 불이 옮겨 붙은 상태임에도 그녀의 운신(運身)에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 막내아들을 서달(徐達)의 막내 딸 서묘금(徐妙錦)에게 보여주면 국새를 내줄 것이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건문제(建文帝)의 황후 마은혜(馬恩慧)는 넘실거리는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마치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듯이...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마황후의 몸은 잠깐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내 도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난(靖難;나라의 위난을 평정함)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연왕 주체(朱棣)의 군세에 금릉(金陵)이 함락 당하던 날 자금성(紫金城)의 깊은 곳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오직 두 명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거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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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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