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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난감한 관계

 

 

정신을 차린 직후 고현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리한 통증이 느껴지는 하체를 뜨겁고 단단한 이물질이 범하고 있다.

그와 함께 왼쪽 젖가슴에서도 통증과 함께 찌릿찌릿한 쾌감이 번지고 있다.

(흐윽!)

눈을 뜬 고현경은 진저리를 쳤다.

어떤 사내가 자신의 몸에 올라탄 채 발작적인 몸부림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려 보이는 그 사내는 입으로 자신의 왼쪽 젖꼭지를 문 채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죽일...)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현경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고현경은 당장 그자의 목을 부러트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젖꼭지를 물고 있던 사내가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부릅뜬 것으로 보아 절정이 임박한 것 같았다.

부르르!

헌데 그 자의 목을 부러트리려던 고현경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황홀경에 빠져 헐떡이는 소년의 얼굴이 너무도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 사형?)

고현경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이 풀린 채 필사적인 몸짓을 하는 소년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사형이고 사촌오빠인 고창룡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어린 시절의 사형이 날 범하고 있다니...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고현경은 소년 시절의 고창룡이 자신을 범하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 사이에도 소년의 빈약한 아랫도리는 고현경의 가랑이 사이에서 발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범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고창룡의 어린 시절을 빼닮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고현경의 몸도 열기에 휩싸였다.

서로의 몸이 결합된 부분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또한 소년이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몸짓에 따라 찌릿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치달린다.

죄송... 죄송해요 사고!”

그때 소년이 비명같이 흐느끼며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현경은 소년의 몸짓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렸다.

원래대로라면 하지 못하게 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하체가 저절로 물결을 일으켜 소년의 행위에 동조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하체를 밀어붙이는 순간 고현경도 절정에 이르렀다.

머릿속에서 오색 불꽃이 터지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뜨거운 분출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고현경은 생생하게 느꼈다.

(임신... 임신할지도 몰라!)

고현경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싫지가 않았다.

싫기는커녕 짝사랑했던 사형을 닮은 소년과 한 몸이 된 채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환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작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절정을 느끼기를 반복했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존재할 줄을 그녀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윽고 소년이 헐떡이며 그녀의 몸 위에 널부러졌다.

끝이 없을 것같던 환희가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소년은 얼굴을 고현경의 가슴에 부비며 가빠진 숨을 골랐다.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년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숨을 고르던 고검추는 기겁했다.

고현경의 손이 자신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고검추의 눈에 고현경이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내 양정이 주입된 덕분에 정신을 차리셨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의 얼굴에서 열기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고검추의 양기가 두 번 거푸 주입되자 고현경을 욕화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탕음마고가 만족하고 잠이 든 것이다.

"너는... 누구냐?"

고현경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분노보다는 체념이 실린 음성이다.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었는데 이 어린 소년에게 죄를 물어봐야 돌이킬 수 없다.

하물며 자신은 소년과 함께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절정을 맛보기까지 했다.

"... 죄송합니다!"

고검추는 사색이 되어 고현경의 몸에서 일어났다.

고검추가 떨어지는 순간 고현경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결합되어있던 부분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되었구나.)

고현경은 치마를 내려 맨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고!”

고현경의 몸에서 떨어진 고검추는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 사고?"

몸을 일으키던 고현경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비로소 고검추가 절정의 순간 자신을 사고라 불렀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 사형을 빼닮은 아이가 나를 사고라고 불렀다는 것은...!)

고현경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몸을 차지한 이 소년이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름... 이름이 뭐냐?”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 앉은 고현경은 자신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 소질의 이름은 고검추라 합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찾아뵈라고 하셔셔 찾아왔다가 그만..."

무릎을 꿇고 있던 고검추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 네가 사형의 아들이란 말이냐?"

고검추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고현경은 고검추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러 사고를 찾아왔습니다."

고검추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현경을 올려다보았다.

"...!"

신음을 토하는 고현경의 옥용이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짝 사랑하던 사형의 아들이 십칠 년 만에 자신을 찾아왔다.

사형에게 아들이 있음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헌데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은 사형의 아들과 관계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물며 사형은 고현경 자신의 사촌 오빠다.

, 고현경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카에게 처녀를 바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그저 기막힐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쌀은 익어 밥이 되었고 나무는 깎여서 배가 되어버린 형국이니...

"정말... 정말 다행이로구나. 사형께 유복자가 있었다니..."

그녀는 복잡한 심정을 억지로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고검추는 고현경의 말에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당사저가 말없이 호천무맹을 떠났었다. 그렇다면 사형의 아내가 당사저였단 말인가?)

고현경은 옛일을 회상하며 심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동문수학했던 당혜선도 대사형 고창룡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현경보다 세 살 위였던 당혜선은 십자검존 종극이 거둔 네 명의 제자들 중 셋째였다.

 

-철사자 고창룡!

-옥기린(玉麒麟) 종무(種武)!

-날수비연 당혜선!

-철봉황 고현경!

 

이들이 십자검존의 제자들로 하나같이 빼어난 자질을 지녀서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라 불리기도 했다.

무맹사신재의 둘째인 옥기린 종무는 십자검존 종극의 조카이기도 했다.

하지만 종극은 인중용봉(人中龍鳳)으로 불리는 빼어난 사형과 사매들에게 묻혀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자는 오래 전에 호천무맹을 떠나 본가인 십자검막(十字劒幕)으로 돌아간 상태다.

(이 아이의 나이로 미루어보면 당사저는 호천무맹을 떠날 무렵 이미 임신하고 있었겠구나.)

고현경은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고검추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고검추는 당혜선의 아들일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분부라면... 당혜선이란 분이 네 어머니겠구나."

고현경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소질의 생모는 아니고 길러 주신 양모이십니다."

"!"

고검추의 대답에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고검추는 고현경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한 후 투신한 일, 죽어가는 천면음마를 만났던 일 등등을...

"사신각주! 그놈이 감히 당사저를 시해했단 말이지?"

고검추의 이야기를 들은 고현경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결은 절로 일렁이고 두 눈에서는 시퍼런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고검추는 입술을 깨문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던 양모 당혜선의 무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검추의 그 모습을 본 고현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진정해라 추아야. 당사저의 원수는 반드시 내 손으로 갚아줄 테니..."

그녀는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흐윽!"

고검추는 고현경의 품에 안기는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한 달 사이에 겪은 일들은 아직 어린 소년인 고검추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도 어찌 어찌 견뎌왔는데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친인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가엾은 것...)

고현경은 오열하는 고검추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고검추가 그동안 겪었을 두려움과 분노, 막막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어느덧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범한 일 따위는 별일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고검추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고검추는 사랑했던 사형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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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불의의 사고

 

 

복우산의 서북쪽은 칼날을 세운 듯 험한 봉우리들이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다.

그 봉우리들 남쪽에 정파백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천무맹이 자리하고 있다.

때는 늦여름의 오후다.

음습한 비구름이 복우산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휘익!

험하기 이를 데 없는 복우산의 바위 봉우리들 사이를 나는 듯이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헝클어진 봉두난발에 다 헤어진 남루한 의복을 입었으나 눈빛만은 영기로 총총하게 빛나고 있는 소년...

바로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신개령에서 천면음마 등천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닷새 만에 복우산에 이르렀다.

열흘이 걸릴 것으로 예정했던 복우산까지 닷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화마의 경신술 덕분이었다.

탐화비록에 수록되어있는 축지성촌(縮地成寸)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실술이다.

완전히 연마하면 이름 그대로 축지법(縮地法)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게 축지성촌이다..

고검추는 복우산까지 오는 동안 꾸준히 축지성촌을 연마해왔다.

아직은 입문한 수준이지만 걷는 속도가 전과 비교했을 때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휘익! 파앗!

고검추는 복우산의 험준한 산봉우리들 사이를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치달렸다.

(거의 다 왔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호천무맹이다.)

바람처럼 달리던 고검추는 앞쪽에 거대한 병풍처럼 서있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오는 도중 심마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호천무맹은 그 봉우리를 등진 채 자리하고 있다.

고검추가 호천무맹의 앞쪽이 아니라 뒷쪽에 자리한 험한 봉우리로 접근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생부 철사자 고창룡은 호천무맹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물론 십칠 년 전 벌어진 그 치욕적인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개입된 듯한 심증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검추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아직은 자신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임을 떳떳이 밝힐 상황이 못 된다.

그래서 고검추는 은밀하게 호천무맹에 잠입하여 고현경을 만나려는 것이다.

헌데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고검추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흐윽... ... 틀렸는가?"

어디선가 여인의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와 고검추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이 산중에 웬 여인의 신음소리란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잠시 후 고검추는 높은 단애로 둘러싸인 은밀한 계곡에 이르렀다.

(!)

헌데 무심코 단애 아래를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눈을 치떴다.

그와 함께 그의 얼굴은 단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인 계곡 끝에는 그리 크지 않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높이가 오장쯤인 폭포 아래에는 원형의 연못이 형성되어 있다.

"... 으으! 도저히... 못 견디겠다."

지금 그 연못에는 한 여인이 허리까지 잠긴 채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 사고(師姑)!)

몸에 연신 물을 끼얹고 있는 그 여인을 본 고검추는 숨이 턱 막혔다.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아버지의 사매이며 사촌누이이기도 한 철봉황 고현경이었기 때문이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화에 시달리던 고현경은 복우산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연못으로 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촤아! !

고현경은 온몸 구석구석에 물을 끼얹으며 꿇어 오르는 욕화를 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도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흐윽... ... 이걸로는 안돼!"

마침내 고현경은 참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한계에 이르러 본능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몸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진 자극으로 인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부작용만 생길 뿐이다.

이제...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결국 고현경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이 되었다.

뜨거워진 몸을 식혀줄 가능성이 있는 마지막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눈이 풀린 고현경은 비틀거리며 연못 밖으로 나왔다.

(... 들키면 안된다!)

충격에 휩싸인 채 연못을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급히 근처 바위 뒤로 숨었다.

연못에서 나온 고현경은 연못가에 놓여있는 널찍한 바위 위에 무너지듯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민밍한 치태를 시작했다.

(... 보면 안된다!)

고검추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복우산으로 오는 동안 귀동냥을 통해서 자신의 생부 고창룡과 고현경이 단순한 동문이 아니라 사촌지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현경은 사고이기 전에 당고모(堂姑母;아버지의 사촌누이)인 집안 어른이다.

조카가 되어 당고모의 치태를 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걸 알면서도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사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익숙하구나.)

그와 함께 고검추는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비록 도도하고 냉철해서 고현경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젊은 여자다.

몸이 뜨거워져 견딜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럼 그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고현경의 손길이 능란하고 거리낌이 없는 데에는 그런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달구고 있는 욕정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 좋지 않다!)

철봉황 고현경의 치태를 훔쳐보는 고검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검추도 고현경의 상태를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완전히 잃을 줄은 몰랐다.

제발... 사형... 사형! 저 좀 어떻게...!”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고현경의 입에서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이 토해내는 것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고는 사촌오빠이기도 한 아버지를 짝사랑했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이 토해내는 신음을 통해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 고창룡을 연모했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에도 고현경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 저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

그걸 확인하고 다급해진 고검추는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고현경의 상태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서둘러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연못 근처에 이른 고검추는 숨이 콱 막혔다.

가까이에서 본 고현경의 치태가 너무도 민망하다.

고현경의 치태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되자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침착... 침착해야한다.)

고검추는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상의 속을 더듬었다.

다시 꺼낸 고검추의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 은제상자 안에는 수십 개의 은침(銀針)이 들어 있었다.

고검추가 복우산으로 오는 도중에 약방에 들려 구한 침이었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려면 그 은침을 정해진 순서대로 고현경의 혈도에 찔러야만 했다.

(... 우선 마혈을 찔러 진정을 시켜야만 제독술(除毒術)을 시전 할 수 있다.)

!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고현경의 가슴 근처에 자리한 마혈을 침으로 찔렀다.

!

하지만 고현경의 살갗에 닿는 순간 강력한 반진력이 고검추의 손가락 끝을 강타했다.

"!"

고검추는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 정말 강하신 분이다."

고검추는 그제서야 고현경이 은발마희 옥여상 못지않은 강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고검추는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이토록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고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윽... 사형!"

돌연 고현경이 와락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

고검추는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고현경은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뜨겁게 할딱거렸다.

"... 사형! 현경이를 제발... 빨리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악!"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아차...)

고검추는 당황했다.

고현경이 자신을 부친인 고창룡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부자지간이므로 고검추는 당연히 고창룡을 닮았다.

게다가 고현경은 끔찍한 욕화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그녀가 고검추를 고창룡으로 오인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 사고. 저는 선부가 아닙니다."

고검추는 당황하며 고현경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쥐고 있는 고현경의 손은 강철 족쇄같이 요지부동이었다.

"흐윽... ... 너무 하세요 사형!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현경이를 마다하시다니요."

그녀는 오열하며 고검추를 와락 끌어안았다.

(허억!)

얼떨결에 철봉황 고현경의 몸에 올라타게 된 고검추는 전율했다.

몸 아래 느껴지는 고현경의 알몸이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 어서... 제발 현경이를... 사형의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고현경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사지로 고검추를 휘감으며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고검추의 몸도 의지와 상관없이 달아올랐다.

"... 이러시면 안됩니다 사고!"

당황한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떨어지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강철같은 고현경의 팔 다리에 휘감겨 있어서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검추의 하의는 고현경의 손과 발에 의해 단번에 벗겨졌다.

순간 물기에 젖은 서늘한, 그러면서도 너무도 매끈하고 부드러운 고현경의 피부가 느껴졌다.

(... 안돼. 이분은 아버지의 동문 사매시다! 핏줄로는 당고모고...)

고검추는 이를 악물며 본능의 충동과 맞서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저항이었다.

고현경은 결국 고검추를 상대로 뜻을 이루었다.

쿠쿠쿵!

강제로 한 몸이 되는 순간 고검추의 귓전으로 천둥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 끝났다!)

고검추는 자신의 일부가 더 할 수 없이 뜨거운 늪으로 빨려 들어가며 절망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고검추는 동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첫 경험인 고현경도 고검추를 받아들이며 작살에 꿰뚤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고현경은 고검추를 부여안은 채 격렬한 요분질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려 고검추는 아득히 정신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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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거미줄에 걸린 봉황

 

 

-복우산(伏牛山)!

 

그 모습이 마치 엎드려 있는 소와 같다고 하여 복우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하남성의 명산이다.

복우산 동북방 오백여 리에는 저 유명한 중원 무림의 태두 소림사(少林寺)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중원 무림의 심장부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전부터 무림의 중심은 숭산에서 복우산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복우산에 중원 무림 최대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천무맹!

 

바로 그들이다.

비록 십칠 년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봉문하다시피 했으나 여전히 호천무맹이 중원 무림의 정점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구파일방등 전통의 명문들, 각기 독특한 절기를 발전시켜온 삼문육가(三門六家), 정파백도를 자처하는 천여 개의 문파들이 호천무맹에 속해있다.

구성인원 수로 따지자면 거의 백만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호천무맹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다.

그 방대한 조직의 심장부가 바로 이곳 복우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호천무맹은 변황 무림에 대항할 목적으로 세워졌었다.

삼십여 년 전 변황 무림은 서역 출신의 한 인물에 의해 일통되었었다.

 

-신월지존(新月至尊)!

 

회회교(回回敎;이슬람)가 배출한 최강의 무인이다.

신월지존이라는 별호는 회회교가 초승달, 즉 신월(新月)을 상징으로 삼는 데에서 생겼다.

사실 신월지존이 회회교 출신중 최강자이긴 했어도 서역 무림의 최강자는 아니었다. 사패천 중 한 세력이 서역을 기반으로 번성해왔기 때문이다.

사방무신 중 서호(西虎)의 후손들이 세운 태양성전(太陽聖殿)이 바로 그들이다.

무공만으로 평가하면 신월지존은 태양성전의 십대고수들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월지존이 서역 무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인물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었다.

 

-티무르(鐵木兒)!

 

제이(第二)의 징기즈칸을 자처했던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정복군주 티무르가 신월지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신월지존의 이름은 샤르흐이며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제국의 제이대 황제가 된다.

샤르흐는 티무르의 넷째 아들이라 제국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서역 무림을 지배하는 데 주력했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태양성전조차도 티무르제국과 충돌하는 데 부담을 느껴 샤르흐에게 복속했을 정도였다.

샤르흐는 서역 무림을 일통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신월동맹(新月同盟)!

 

회회교를 바탕으로 결성된 사상 최강의 세력이다.

회회교에 속한 거의 모든 무림 세력이 신월동맹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월동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중원 무림의 정복이었다.

샤르흐의 아버지 티무르는 서역과 천축은 물론 멀리 대식국까지 정복했었다.

그 티무르의 마지막 목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을 중원에서 몰아낸 명나라에 복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티무르는 넷째 아들 샤르흐를 전위로 세웠다.

본격적인 명나라 정벌에 앞서 신월동맹으로 하여금 먼저 중원 무림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중원 무림으로서는 명운이 걸린 일대위기였다.

이에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신월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통합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흑도, 백도, 녹림, 하오문 등의 이질적인 성격 때문에 파벌을 초월한 중원 무림의 결맹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같은 길을 걷던 정파백도의 문파들만으로 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호천무맹이었다.

호천무맹의 맹주는 십자검존 종극이란 인물이었다.

십자검존은 전설적인 검법의 명가 십자검막(十字劒幕)의 후예로 호천무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당시 십자검존 종극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다.

비록 초절한 검법을 지녔다지만 정파 무림인들을 영도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본래 호천무맹의 맹주로는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공인되던 소림사의 장로 철목신승(鐵木神僧)이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철목신승은 자신이 출가인임을 이유로 들어 맹주의 자리를 사양했다.

그리하여 십자검존 종극이 호천무맹의 맹주가 된 것이다.

십자검존의 영도 하에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의 공세를 막아내어 중원 무림의 위기를 해소했다.

덕분에 호천무맹은 중원 무림의 보루로 인정받았으며 맹주인 십자검존 종극도 중원제일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것이 삼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십칠 년 전 예의 그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을 좌절시키고 얻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다.

그 후 호천무맹은 거의 봉문하다시피 했다.

그 틈을 탄 사마외도의 세력들이 창궐하여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십칠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온갖 세력들로 인해 무림은 대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마천루가 마도 무림의 맹주로 부상했고 사신각이라는 암살조직이 횡행하며 살육을 일삼았다.

심지어 화류계의 기녀와 매춘부들까지 야화맹(夜花盟)이라는 조직을 이루어 자신들의 권익을 부르짖을 정도였다.

무림의 말세가 올 것일까?

뜻있는 강호인들은 도의와 명분이 상실된 무림의 실태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십칠 년의 기나긴 잠에 빠져 있던 호천무맹 내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철봉황이라는 여걸이 나타나 호천무맹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검존이 거둔 네 명의 제자 중 막내인 철봉황 고현경은 사실상 은퇴한 스승을 대신하여 호천무맹을 영도하고 있다.

먼저 철봉황 고현경은 정파백도의 젊은 인재들을 모아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란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총사(總士)가 되었다.

호천무무맹에 속한 문파와 가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철혈호천위의 전력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증강되고 있는 중이다.

천여 명의 일류고수들로 이루어졌다는 철혈호천위가 강호로 나오면 어떤 세력도 맞서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일개 여인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천무맹의 이같은 용틀임은 무림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일 호천무맹이 삼십여 년 전의 패기와 단결력을 회복한다면 그동안 무림을 농단하던 여타 세력들은 아침안개처럼 스러져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의 각 세력들은 숨을 죽인 채 호천무맹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호천무맹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존세력들이 사신각에 청탁하여 철봉황 고현경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았다.

호천무맹이라는 거인의 부활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

 

"흐윽! ...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여인의 신음소리가 그리 넓지 않은 석실을 울리고 있었다.

석실 내부는 몇 자루의 장검이 벽에 걸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어 투박해 보인다.

그 석실 가운데에 놓인 좌대 위에는 흑의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은 철봉황 고현경이었다.

철봉황 고현경은 지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은 구워진 가재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으며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에 흠씬 젖은 검은 옷에 휘감긴 탄력 넘치는 육체는 학질에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린다.

"흐으윽! ... 그때 천면음마란 놈이 무엇인가 수작을 부렸음이 분명하다."

고현경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천면음마의 저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고현경은 삼십여 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몰두해 왔었다.

그녀의 지난 삶 자체가 수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녀는 이성과 교제한 경험이 없다.

물론 고현경에게도 가슴이 설레였던 기억은 있었다.

자신보다 십여 살 연상인 동문의 사형을 남몰래 연모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사매 정도로만 여길 뿐 전혀 이성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현경은 가볍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그 사형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철사자 고창룡-!

그가 바로 고현경의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던 연모의 대상이었다.

사실 고창룡과 고현경은 사촌 남매 사이였다.

두 사람의 집안은 산서(山西)성의 명문가인 고가장(高家莊)이었는데 신월동맹의 중원 침공 때 멸문지화를 당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고검추는 당시 열다섯 살 소년이었고 고현경은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 계집아이였었다.

십자검존은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두 남매를 가엾이 여겨 함께 제자로 삼았었다.

물론 십자검존이 단순히 연민의 감정으로 두 남매를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고창룡과 고현경이 남자와 여자들 중에서 최고의 자질을 지닌 기재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두 남매의 자질에 감탄한 십자검존은 철사자와 철봉황이라는 별호를 직접 지어주었었다.

비록 사촌지간이었으나 고현경은 고창룡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유일한 피붙이이기도 해서 의지하다보니 고창룡은 어느덧 고현경에게 하늘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를 겁탈하고 자살을 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현경이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형언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날 이후로 고현경은 이성에 대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 채 무공수련에만 전념해왔다.

그 결과 그녀는 삼십대 중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우내팔강에 드는 고수가 되었다.

여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각고 연마한 성취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잃어 버렸던 본능의 유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탕음마고 때문이었다.

천면음마의 말대로 탕음마고는 고현경의 원영지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에 고현경의 육체는 부족해진 원영지기를 이성과의 교접으로 채우기를 간구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이...

"으음... 방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 간악한 말종에게 수작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고 척살했어야만 했다."

고현경은 도도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얼굴을 이지러뜨리며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정은 굶주림이나 갈증과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과의 교접을 갈구하는 욕정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다.

너무도 강렬한 욕정으로 인해 고현경의 이성이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불구덩에 빠지기라도 한 듯 뜨거워진 몸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던져 범해지고 싶은 충동이 고현경은 사로잡고 있었다.

(... 위험하다. 이러다가 사내라면 아무에게나 가랑이를 벌리는 탕녀가 될지도 모른다.)

고현경은 흩어지려는 이성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끝내 욕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자결해야한다. 나 자신과 사모님의 명예를 위해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도리 깊은 곳에서 치미는 욕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렬해질 뿐이었다.

"으음... 찬물이라도 뒤집어써야겠다."

고현경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좌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독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서 힘겹게 석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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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길한 예언

 

 

"삼낭이는... 우리 도룡곡 등씨일족의 유일한 후손이니... 잘 돌봐주기 바란다."

천면음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이동생께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巨人)으로부터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을 보살펴주겠다 약속을 들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구나."

(내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이 될 것이다?)

천면음마의 뜬금없는 칭찬에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예지력(叡智力)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 괜한 소리라 여기지 말거라.”

고검추의 속내를 알아차린 천면음마가 고검추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아마도...”

말을 잇던 천면음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앞날이 보인 것일까?)

고검추는 천면음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내 죄다.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대신 치르겠구나.”

주르르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이 관련된 앞날을 본 모양인데... 대체 세 모녀가 무슨 일을 겪기에 저토록 비탄에 빠진 것일까?)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면음마가 앞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하물며 자신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중 등삼낭과 관련된 일이니...

맹세... 맹세를 해다오.”

천면음마는 눈물로 물든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맹세를 해주길 원하십니까?”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진 천면음마의 말이 고검추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해다오.”

천면음마는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만일 손이 몸에 붙어있었다면 고검추의 옷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고검추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양모 당혜선이 투신해버린 지금 등삼낭과 그녀의 딸들은 자신에게는 거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검추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찬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낭 아주머니는 제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또 옥경이와 옥령이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 피붙이인 듯 지켜주겠습니다.”

고검추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천면음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천면음마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지신명을 걸고... 삼낭이 모녀를 네가 거둬서 보살펴주겠다고 맹세해다오.”

필사적인 표정이 된 천면음마는 고검추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드리겠습니다. 삼낭 아주머니와 옥경이, 옥령이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보살펴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세 모녀를 거둬주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면음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내 정체는 숨겨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천면음마의 당부에 고검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공노할 색마인 천면음마가 자신들의 오라버니이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등삼낭 모녀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져보아라. 네게 줄 물건이 있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돌려 토지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겉옷을 돌아보았다.

그자는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기 전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겉옷을 벗어놨었다.

고검추는 천면음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겉옷을 끌어당겨 살펴보았다.

겉옷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탐화비록(貪花秘錄)

-도룡무보(屠龍武譜)

 

두 권의 비급 중 도룡무보는 도룡곡의 비전 비급이다.

도룡무보 안에는 하마터면 고검추를 죽일 뻔한 도룡삼첩장 등 도룡곡 등씨일족의 패도적인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구식으로 이루어진 도룡도법(屠龍刀法)이었다.

도룡구식(屠龍九式)이라고도 불리는 그 도법은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신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에 도룡구식을 완전히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룡구식을 완벽히 시전할 수 있다면 그는 도제(刀帝)라 불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탐화비록은 천면음마 등천하가 십여 년 전에 얻은 비급이다.

탐화비록을 남긴 인물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마인들로 인정받는 구마(九魔) 중 한 명이었다.

 

-화마(花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숱한 여자들을 농락한 전설적인 색마다.

그 때문에 화마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탐화색마(貪花色魔)라는 혐오스러운 별호로 더 자주 불린다.

화마는 평생 삼만 명 이상의 여자를 농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탁월한 재주덕분이었다.

먼저 화마는 절묘한 역용술을 지녔다.

그자의 역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한 걸음 옮길 때 세 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화마를 무슨 재주로 잡아서 죄를 묻는단 말인가?

변화막측한 역용술 외에도 화마는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경신술로만 따진다면 화마는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정도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을 주축으로 한 중원 무림에 공격당해 멸망했다.

다만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는 그 혈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등천하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했으며 다행히 도룡곡 비전의 도룡무보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등천하의 자질이 평범했다는 점이었다.

도룡무보에 수록된 절기들을 절정까지 연마하면 능히 독보천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뛰어나지 못한 등천하는 이십여 년을 고련했음에도 도룡무보 상의 절기를 채 삼할도 연성하지 못했다.

그 정도 성취로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등천하는 무공 수련을 포기한 채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그는 운중산(雲中山)의 어느 계곡에서 화마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마의 시신에서 탐화비록을 얻은 등천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비로소 무공이 약하더라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수단이란 것이 원수들의 아내와 딸, 여제자들을 겁탈하는 것이었다.

몇 년을 고련한 등천하는 마침내 화마의 수법을 대충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등천하는 자신도 모르게 화마의 음탕한 성격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자를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등천하는 강호의 아녀자들을 짓밟는 제이의 화마, 천면음마가 된 것이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탐화비록에 수록되어... 있다."

말을 잇는 천면음마 등천하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견디기... 힘들구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고검추는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 병아리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비록 상대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때문이지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을 보니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일각이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이 분을 위하는 길이다.)

고검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면음마의 심장 부위에 자신을 손바닥을 붙였다.

"... 고맙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지잉!

고검추는 얼굴을 돌리며 태을강기의 경기를 천면음마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퍼득!

사지가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둥이가 한 차례 세차게 경련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을강기의 강력한 잠경이 천면음마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이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고검추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면음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오공으로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는 천면음마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천면음마라는 이름으로 전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가엾은 인물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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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색마의 신세한탄

 

 

"크크크... ... 동정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고검추의 어두운 표정을 본 천면음마는 체념한 듯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철봉황... 그 계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피에 섞어서 뿜어낸 탕음마고(蕩淫魔蠱)에 중독되었으니..."

이어 천면음마는 악에 바쳐 내뱉었다.

사실 그자가 준비한 진정한 암수는 철봉황에게 접근하여 탕음마고라는 지독한 최음제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천면음마는 이빨을 하나 빼서 생긴 빈틈에 최음제가 들어있는 은제 구슬을 끼워두고 있었다.

상대 못할 강적을 맞닥트릴 경우 최음제가 들어있는 그 은제 구슬을 깨트린 후 침에 섞어 분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철봉황의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맞는 순간 입속에 숨기고 있던 최음제 탕음마고를 피에 섞어 뿜어내게 되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베기 위해 쇄도하다가 탕음마고가 섞인 천면음마의 피를 일부 흡입한 것이다.

"... 철봉황! 그 여인이 철봉황이었습니까?"

천면음마의 말을 들은 고검추의 안색이 일변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고검추는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구해 토지묘를 떠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크크크... 그렇다. 그 계집이 호천무맹 최강의 무력집단인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의 총사(總士) 철봉황 고현경이다."

"!"

고검추는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머나먼 기련산으로부터 찾아온 여인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천면음마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그 계집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계집은 곧 탕음마고의 발작으로 희대의 탕녀가 될 테니..."

"... 무어라고요?"

고검추는 눈을 부릅떴다.

"클클클... 정파백도의 태두인 호천무맹의 신임 총사가 천하에 다시없을 음탕한 계집으로 변할 테니 볼만하지 않겠느냐?"

천면음마는 악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탕음마고!

 

남만 특산의 고독으로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여 생명의 근원인 원영지기(元嬰之氣)를 먹고 산다.

원영지기를 갈취당한 숙주는 격렬한 욕정을 일으켜 이성(異性)을 찾게 된다.

이성과 관계하여 상대의 정기를 흡수해야만 빼앗긴 원영지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분노의 표정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 악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는 철봉황 고현경이 아버지의 동문 사매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양모 당혜선이 그녀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한데 그런 철봉황 고현경이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에 중독 당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천면음마에게 살의가 일어나는 고검추였다.

"흐흐흐... 그 계집을 탕음마고에서 구하고 싶으냐?"

천면음마는 그런 고검추의 표정을 살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검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기도 쉽군."

고검추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들은 천면음마는 히죽 웃었다.

"본좌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다오. 그러면... 철봉황을 구할 방도를 가르쳐주마."

"말해 보시오."

고검추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면음마는 고검추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꾸했다.

"첫번째 조건은... 본좌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말에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봉황 고현경은 천면음마의 전신 경맥을 난자해 놓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피하고 난자하여 쉽사리 죽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천면음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것이다.

천면음마는 그 끔찍한 고통을 끝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나의 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천면음마는 고통으로 이지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피붙이가 있었습니까?"

고검추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기도 하고... 나같은 말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착한 누이동생이지.”

천면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숱한 여자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제에 제 누이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문 사매인 철봉황을 구하려면 천면음마와 거래를 해야만 한다.

영누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말씀해보시오.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고검추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천면음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자는 내심 고검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진 그자의 말이 고검추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내 누이의 이름은 등삼낭(鄧三娘)이고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 등삼낭!”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이 외쳤다.

“...!”

말을 이어가려던 천면음마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그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같다! 그렇다면...)

고검추는 팽가촌 촌장의 며느리인 등삼낭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네놈... 내 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냐?”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누이동생 분의 왼쪽 입 꼬리 쪽에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고검추는 등삼낭의 얼굴에 나있는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틀림없구나. 네놈은 내 누이와 아는 사이였어.”

천면음마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등삼낭 아주머니가 이 악명 높은 색마의 누이동생이었다니...)

고검추는 당혹과 함께 자신이 운명의 사슬같은 것에 엮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 지인의 오빠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고검추는 팽가촌의 촌장 팽유가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명문가가 청해의 도룡곡이었음을 깨달았다.

팽유가 등삼낭의 친가가 도룡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도룡곡이 전 무림에 공적으로 찍혔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가촌... 너는 기련산 팽가촌에서 산 적이 있겠구나.”

천면음마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검추라 하며 얼마 전까지 팽가촌에서 살았습니다.”

고검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전에 널 본 적이 있었겠지만... 마지막으로 팽가촌에 들른 게 삼 년 전이었으니 설령 널 보았다 해도 지금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말 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을 때...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종을 만나서 막내 누이가 살아있으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기련산 팽가촌의 촌장이 구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면음마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토지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듯이 말했다.

고검추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천면음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연을 만나 복수할 능력을 갖춘 나는... 우리 도룡곡의 멸망에 관여한 문파나 가문을 찾아다니며 계집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 생각해서 한 짓이었는데...”

천면음마의 눈 꼬리로 물기가 어렸다.

뒤늦게 삼낭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팽가촌을 찾아갔지만... 차마 부끄러워 삼낭이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주르르!

마침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가 누이동생인 걸 알고도 나서지 못한 건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고검추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천면음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강간해왔다.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았으며 비구니와 여자 도사들까지도 거리낌없이 강간했었다.

그런 처지에 차마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의 딸들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천면음마는 먼발치에서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이 낳은 딸들을 몇 번 훔쳐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누이동생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켰었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에게도 혈육을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구나.)

고검추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혈육은 끔찍하게 여기면서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거리낌없이 강간해온 천면음마의 행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해해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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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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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황의 살기 어린 교갈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네년도 저 암중처럼 만들어주마!"

파앗!

뜻밖에도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가 달아나기는커녕 철봉황을 덮쳐오는 게 아닌가?

그자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면음마는 절묘한 역용술과 함께 빼어난 경신술을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어떤 강적에게도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천면음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철봉황이 노렸는지는 몰라도 천면음마는 한쪽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런 몸 상태라면 달아난다고 해도 멀리가지 못하고 철봉황에게 따라잡힐 가능성이 높다.

달아나지 못한다면 먼저 철봉황을 공격하여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자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

대담하게 쇄도하는 천면음마를 향해 철봉황의 검이 벼락같이 그어졌다.

그녀의 이 일검은 빠르면서도 변화가 막측하여 천면음마가 막을 수도 피하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스슥!

헌데 쇄도하는 천면음마의 모습이 갑자기 네 개로 불어났다. 경신술과 보법을 이용한 속임수다.

스악!

철봉황은 흠칫 놀라면서도 그어냈던 검을 놀라운 속도로 회수한 후 비스듬히 내리쳤다.

그녀의 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반응에 네 명으로 불어났던 천면음마의 모습 중 세 개가 갈라졌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가 철봉황의 검을 피하며 쇄도해 들어왔다.

그것이 천면음마의 실체였다.

부악!

단번에 철봉황에게 접근한 천면음마는 오른손을 비스듬이 그었다.

강철 갈고리같이 변한 그자의 손가락에 스치면 금강불괴라 해도 상처가 날 것이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 철봉황은 도저히 천면음마의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순간 철봉황의 입에서 사나운 고함이 터졌다.

!

그러자 막 철봉황의 목을 손가락으로 그으려던 천면음마는 가슴을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휘청했다.

위기의 순간 철봉황은 소림사의 칠십이절기중 하나인 복마사자후(伏魔獅子吼)를 토해낸 것이다.

복마사자후는 일반적인 사자후와 달리 소리를 한 곳에 집중시켜 타격을 가하는 위력을 지녔다.

!”

!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강타당한 천면음마는 허공에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그자가 뿜어낸 패가 안개처럼 확 퍼진다.

!

철봉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쇄도하며 철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어냈다.

"케엑!"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번졌다.

퍼억! 털썩!

세 조각의 육괴가 바닥에 흩어졌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허벅지에서 잘린 채 나뒹군 것이다.

"...!"

헌데 철봉황의 안색도 일변하며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천면음마를 벤 직후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기증은 이내 사라져서 철봉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크크크! 네년은 이제 영원히 본좌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면음마는 두 다리가 잘렸음에도 악에 바쳐 웃었다.

"헛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해라."

철봉황은 차갑게 일갈하며 검을 흔들었다.

퍼억!

케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두 팔도 성둥 잘려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 자는 두 팔과 두 다리는 모두 잘려나간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이다.

"간단히 죽이지는 않겠다. 지옥에 이르기 전까지 네놈이 그동안 저지른 죄과를 두고두고 참회해라."

스윽! !

철봉황은 얼음같은 표정으로 철검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퍼퍼퍽!

"케에엑!"

끔찍한 비명과 함께 천면음마의 전신 혈도에서 분수처럼 선혈이 치솟았다.

철봉황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로 그 자의 전신을 난자해 버린 것이다.

끄윽...”

결국 천면음마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혼절해버렸다.

철봉황은 그제야 분이 풀린 듯 검을 거두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휴우! 한 발 늦었구나."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훑어본 철봉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남녀 관계에는 문외한인 그녀였지만 자운 비구니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당혹한 심정이 되었다.

(자운사매의 몸에 파과의 흔적이 없는 게 의외로구나.)

자운 비구니의 몸위에서 출혈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유린당한 건 확실한데 피가 나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조신한 척 해왔지만 사실은 남 몰래 어떤 사내와 통정을 한 것일까? 아니다. 무공 수련 과정에서 처녀의 상징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으니 예단하지 말자.)

철봉황은 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찢어진 승복으로 자운 비구니의 알몸을 대충 감쌌다.

"어쨌거나 오늘 일로 자운사매가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할 텐데..."

자운 비구니를 안아든 철봉황은 한숨을 쉬며 토지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쏴아아!

이내 그녀의 모습은 장대 같은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으으..."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토지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들어선 그 인물은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도룡삼첩장을 등에 맞고 순간적으로 혼절했었다.

사실 도룡곡의 비전 절기인 도룡삼첩장은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표적에 닿는 순간 세 번 연속 진동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방비하는 게 극히 어렵다.

막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연이어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고검추는 그 도룡삼첩장에 무방비 상태로 가격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잠시 격심한 고통을 느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고검추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을강기가 몸을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도룡삼첩장의 역도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태을강기가 즉각 반응하며 그 역도를 밀어내었다.

고검추의 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멀리 튕겨져 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룡삼첩장의 역도는 순간적으로 고검추의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고검추는 그 충격에 머리가 흔들려 잠시 혼절했던 것이다.

까무라쳤던 고검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알고 토지묘 밖으로 날아나가고 있었다.

고검추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자운 비구니를 구해간 여인이 바로 자신이 복우산으로 찾아가던 그 철봉황임을...

고검추는 그저 그녀가 대단한 기세를 지닌 여인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비록 정신을 차렸으나 고검추는 즉각 운신은 할 수 없었다.

도룡삼첩장에 당한 충격으로 인해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한 동안 쏟아지는 빗속에 누워 팔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려야만 했었다.

 

"...!"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참혹했다!

낭자한 선혈 속에 사지가 모두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뚱이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누워 있었다.

(... 끔찍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솜씨인 모양이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무참한 모습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헌데 그가 역겨운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할 때였다.

"으으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천면음마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천면음마가 살아있는 것을 알아차린 고검추는 갈등에 휩싸였다.

천면음마는 비구니조차 서슴없이 겁탈한 용서받지 못할 색마다.

그런 인간 말종에게 동정을 보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

하지만 고검추는 이내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에게로 다가갔다.

상대가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라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으으으... ... 내가 죽어 저승에 온 것이냐?"

고검추가 다가가자 천면음마는 피에 젖은 눈을 치뜬 채 올려다보며 헐떡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자신의 도룡삼첩장에 격살되었다고 믿었던 고검추가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유령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고검추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면음마 옆에 앉았다.

(틀렸다. 이런 몸으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다.)

그는 천면음마의 난도질당한 몸을 내려다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팔 다리가 모두 잘린 것은 치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출혈이 심할 뿐 당장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기 때문이다.

치명상은 철봉황의 검기에 온몸의 경맥이 토막 쳐진 것이었다.

철봉황은 일격에 천면음마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혀서 천면음마가 고통 속에 죽어가게 만든 것이다.

천면음마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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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룻강아지의 용기

 

 

"흐흐흐 그렇다! 내가 바로 천면음마다.."

등천하는 두 눈을 광기로 번들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악명 높은 색마 천면음마임을 자인한 것이다.

... 그런...”

짐작은 했지만 자신을 납치해온 자가 천면음마라는 사실에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었다.

호천무맹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천면음마에게 사로잡혔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짐작이 간 것이다.

본좌는 호천무맹에 속한 문파의 계집들이라면 노소를 불문하고 해치워온 건 네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천하, 즉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희롱하며 음험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네년에게도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가슴을 터트릴 듯 움켜쥐며 낄낄거렸다.

"... 아미타불! 시주는 정녕 신불(神佛)의 심판이 두렵지 않나요?"

자운 비구니는 고통과 분노에 치를 떨며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흐흐흐... 본좌가 아니라 네년 자신의 처지나 걱정해라."

천면음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의 저고리를 움켜쥐었다.

"... 안돼요 악!"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천면음마가 그녀의 승복 저고리를 거침없이 찢어냈기 때문이다.

"흐흐흐... 기막힌 젖가슴이로군!"

저고리가 찢어지며 드러난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본 천면음마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아랫도리도 구경해볼까?”

이어 그자는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 치마로 손을 옮겼다.

"... 아미타불! 시주...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는 부처님을 모시는 비구니랍니다."

천면음마의 두 손이 자신의 치마 고름을 푸는 것을 느낀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어리석구나! 네년이 비구니라 날 더 미치게 한다는 걸 모르느냐?”

천면음마는 그녀의 애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치마를 벗겨 내렸다.

!”

자운 비구니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죽일 놈!)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는 것을 본 고검추는 치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여자를 강제로 농락하는 자들에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

헌데 바로 지척에서 보통 여자도 아니고 비구니가 유린당하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 천면음마를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검추는 잘 알고 있었다.

고검추 자신은 겨우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룻강아지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천면음마는 숱한 문파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여자들을 겁탈해온 희대의 색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검추 자신은 천면음마의 상대가 못 된다.

무작정 뛰쳐나가 공격해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겁탈하는 데 온 신경을 쏟을 때를...

 

"흐흐흐 비구니는 제법 오랜만이군."

천면음마는 두 눈이 벌개진 채 자운 비구니의 몸에 올라갔다.

한데 그자가 막 자운 비구니를 욕보이려는 순간이었다.

"죽일 놈!"

돌연 천면음마의 귓전으로 사나운 폭갈이 들려왔다.

콰창! 파앗!

동시에 토지묘의 신상이 부서지며 그 뒤에서 한 줄기 인영이 득달같이 뛰쳐나와 천면음마를 덮쳤다.

그 인영은 물론 고검추였다.

기회를 엿보던 그가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천면음마를 덮친 것이다.

고검추는 은발마희 옥여상에게서 구성의 태을강기를 전수받았으나 아직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연마한 혈전삼식의 제일식 분뢰개벽으로 천면음마를 공격했다.

꽈르르릉!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은은한 우뢰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줄기 역도가 일어나 천면음마를 후려쳐갔다.

"!"

!

막 자운 비구니를 유린하려던 천면음마는 기겁하면서도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고검추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신속한 반응이었다.

사실 단순히 경신술만이라면 천면음마는 사신각주나 옥면마성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직!

그 때문에 고검추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재빨리 옆으로 구른 천면음마의 몸 위를 지나쳐 토지며 입구쪽의 바닥을 박살냈다.

웬놈이냐?”

스팟!

고검추의 기습을 흘려보낸 천면음마는 바닥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내려섰다.

"!"

헌데 토지묘 입구쪽에 내려서던 천면음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기습한 자가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크크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군."

고검추를 일별한 천면음마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공격을 늦추면 안된다!)

!

일격이 실패했지만 고검추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천면음마에게 돌진해갔다.

반격의 기회를 주면 자신이 패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꽈르릉!

쇄도하며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다시 우레성이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분뢰개벽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천면음마에게 같은 수법이 두 번 씩이나 통할 리 없었다.

"크크크 귀여운 놈이로군!"

천면음마는 고검추가 덮쳐오는 것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순간 그 자의 모습이 꺼지듯이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공격 대상을 놓친 고검추는 기겁했다.

!

직후 고검추의 등판으로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미 뒤로 돌아간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등에 강력한 일장을 가한 것이다.

! 콰쾅!

헌데 맞은 것은 한번인데 충격이 연달아 두 번 더 고검추의 몸을 흔들었다.

"!"

고검추는 척주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퍼엉!

그와 함께 고검추의 몸은 토지묘 밖으로 튕겨나갔다.

철퍽!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간 고검추의 몸은 빗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팽개쳐갔다.

부르르!

세차게 나뒹군 고검추는 한 차례 몸을 떨고는 축 늘어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 시주!"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혼절했다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천면음마의 반격을 받고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을 보았던 것이다.

"흐흐흐! 도룡삼첩장(屠龍三捷掌)에 맞았으니 척추가 박살나 뒈졌겠지."

천면음마는 빗속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고검추를 내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자가 고검추를 친 장법은 일격으로 세 번의 충격을 반복해서 가하는 도룡곡 비전의 절기다.

내공을 순차적으로 토해내서 표적을 때리고 돌아오는 힘을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는 장법인 것이다.

그 때문에 가격당한 상대는 연이어 삼장을 얻어맞는 셈이 된다.

능력도 안되면서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낸 대가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천면음마는 방금 전의 일격으로 고검추를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시 자운 비구니를 향해 돌아섰다.

... 죽여라!”

자운 비구니는 자신의 알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악을 섰다.

이년아. 죽여줄 테니 너무 재촉하지는 마라.”

천면음마는 음험하게 웃으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왔다.

곧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렸다.

정말... 정말 아깝구나.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한 번 즐기고 버려야 하다니...”

천면음마는 혼절한 자운 비구니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바로 그때였다.

"... ... !”

천면음마의 등 뒤에서 천동치는 듯한 여인의 노갈이 들려왔다.

쩌억!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천면음마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

!

자운 비구니의 몸 위에 엎드려있던 천면음마는 대경실색하면서도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자의 이같은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쩌억!

바닥을 구르는 천면음마의 몸 위로 새파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피한 천면음마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토지묘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

헌데 놀랍게도 스치고 지나갔던 검기가 낫같이 홱 휘어지며 천면음마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 참마회선검강(斬魔廻旋劒罡)!"

천면음마의 입에서 경악에 찬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퍼억! 후두둑!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솟구쳤다.

천면음마는 궤적을 바꾼 검기를 피하지 못해서 왼쪽 허벅지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은 것이다.

콰당탕!

하마터면 허벅지의 뼈까지 베일 뻔한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화라락!

동시에 토지묘 안으로 날렵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인데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 흑의여인의 미모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대단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명공이 빚은 듯 단아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를 지녔지만 흑의여인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는 도도하고 오연하기 이를 데 없다.

조각같은 여인의 얼굴에는 서릿발같은 위엄이 깔려있어서 간담이 작은 사내라면 감히 마주 바라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헌데 아름다운 외모와 고고한 분위기에 비해 여인의 차림새는 질박할 정도로 평범하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질끈 묵었으며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상당히 오래 입었는지 빛이 바래있다.

여인은 어떤 치장도 하지 않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오른손에 비껴들고 있는 석 자 네 치의 투박해 보이는 장검뿐이다.

마치 전쟁의 여신이 인간 세상에 하강한 듯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다.

헌데 세차게 퍼붓는 폭우 속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은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의 몸에서 무형의 강기가 흘러나와 빗물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인의 내공은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 흑의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토지묘가 갑자기 비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 철봉황(鐵鳳凰)!"

흑의여인을 본 천면음마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헌데 철봉황이라면 고검추가 호천무맹을 찾아가서 만나려던 여인이 아닌가?

흑의여인, 즉 철봉황은 자운 비구니를 구하기 위해 천면음마를 추적해 왔을 것이다.

빠직!

토지묘 안에 내려서던 철봉황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폭사되었다.

자운 비구니가 발가벗은 채 혼절해 있는 발견한 때문이다.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천면음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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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색마와 비구니

 

 

() 늙은이는 물론이고 고검추의 행방도 묘연해졌습니다.”

삼십살객(三十殺客) 정팔(鄭八)은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녀곡에 초혼전을 남겼었던 그자는 사신각의 삼십살객중 한명이다.

사신각에서의 직급은 청부살인을 성공한 회수로 정해진다.

열 번 성공한 자는 십살객(十殺客), 백 번 성공한 자는 백살객(百殺客)으로 불리는 식이다.

백살객은 사신각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된다.

정팔이란 자가 삼십살객으로 불리는 것은 삼십 번 이상의 청부 살인을 완수했다는 의미다.

서른 살 남짓인 정팔은 근래 들어 사신각 내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객 중 한명이다.

대 늙은이는 몰라도 고가놈은 이미 기련산을 빠져나갔다고 봐야겠군.”

사신각주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신각주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기련산 동쪽 산록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다.

그자는 기련산에 나타난 대씨 성의 무시무시한 고수를 피해 기련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신각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팔을 비롯하여 몇몇 자객들로 하여금 팽가촌 일대를 감시하게 했었다.

하지만 고검추의 행방은 묘연해져 기련산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정팔 너는 기련산에 남아서 팽가촌을 감시해라. 고가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본각이 철수했다 여기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존명!”

사신각주의 지시에 정팔은 고개를 조아린 후에 자리를 떴다.

고검추! 네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는 네놈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신분이 있으니...”

사신각주는 잘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쏴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서 있었다.

토지묘는 농사를 관장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휴우... 지독하게 퍼붓는구나."

문득 토지묘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토지묘 내부는 오랫동안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으며 칠이 벗겨진 토지신의 신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그 토지묘 문간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영준한 용모에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소년이다.

고검추... 바로 그였다.

이곳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이다.

기련산을 떠난 고검추는 한 달여 만에 이곳 신개령에 이르렀다.

이제 열흘 정도만 더 가면 호천무맹이 자리한 복우산(伏牛山)에 이를 수 있다.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의 유언대로 호천무맹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늦여름의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토지묘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개령까지 오는 동안 고검추는 태을강기를 꾸준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 십성에는 이르지 못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고검추는 태을강기와 함께 은발마희 옥여상이 남긴 혈전삼식도 틈틈이 연마했다.

덕분에 제일식 분뢰개벽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철봉황은 어떤 여인일까? 어머니는 왜 그녀를 찾아가라 하셨을까?)

토지묘 문간에 기대앉은 고검추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고검추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휘익!

멀리에서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토지묘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굴까? 이런 산중에...)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벌떡 일어섰다.

양모 당혜선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사신각의 자객들이 초혼전에 묻어있던 백일취를 맡고 추격해온 게 아닐까?)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고검추는 토지묘로 접근하고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기련산을 내려온 후 고검추는 초혼전을 불에 태워 백일취를 제거했었다.

하지만 백일취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백일취가 실수로 몸에 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 사이에 나타난 자는 토지묘에서 십여 장 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고검추가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 서글프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쓴 웃음을 지으며 문가에서 물러난 고검추는 낡은 신단 뒤쪽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었다.

쐐액! 후두둑!

그 직후 선풍과 빗물을 흩뿌리며 한 명의 인물이 토지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단 뒤쪽의 빈 공간에 몸을 숨긴 고검추는 신단에 나있는 틈으로 그 인물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헌데 사내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비구니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구니는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명공이 빚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는데 파르라니 깎은 머리 때문에 애잔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회색 승복은 빗물에 흠씬 젖어있다.

그 때문에 비구니답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흐흐흐... 이쯤이면 그 드센 계집도 못 쫓아오겠지?"

사내는 토지묘 밖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자는 어떤 여자에게 쫓기는 중인 듯 했다.

털썩!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구니를 토지묘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젖은 승복에 감싸인 비구니의 탄력 넘치는 육체가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흐흐흐... 암중이라니... 오늘은 즐거움이 배가 되겠군."

!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구니의 몸매를 훑어보던 사내는 굽혔던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사내가 날린 지력이 가슴에 파고들자 비구니는 한 차례 몸을 퍼덕인 후 눈을 떴다.

"흐윽!"

눈을 뜬 직후 비구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의 징그러운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표정을 본 비구니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깨달고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渾穴)만 풀렸을 뿐 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시주는 감히 호천무맹에 죄를 지을 작정인가요?"

비구니는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사내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호천무맹! 저 스님이 호천무맹의 문하란 말인가?)

신단 뒤에 숨어 있던 고검추는 크게 놀랐다.

호천무맹은 자신의 생부인 철사자 고창룡의 사문 아닌가?

헌데 그 호천무맹 소속의 여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검추가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호천무맹의 이름 따위로 본좌를 겁주려 해도 소용없다 자운(紫雲)!"

사내는 비구니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호천무맹이 심혈을 기울여 기르고 있는 호천십영(護天十英)의 일인이니 도룡곡(屠龍谷)이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도룡곡!"

자운이라 불린 비구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비구니는 호천무맹이 장래를 위해 육성중인 열명의 신진고수들중 한명이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역사에 해박하여 도룡곡이란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도룡곡은 청해(靑海)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던 문파였다.

도룡곡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실전적이고 악랄하여 정파보다도 사파 취급을 받았다.

비록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에 자리한 문파였으나 도룡곡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이 주축을 이룬 중원 무림인들에게 공격당해 멸망했다.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는 변황 무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때문이었다.

당시의 중원 무림은 서역 무림을 일통한 강대한 세력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호천무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중원 무림은 천신만고 끝에 서역 무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직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고 멸문한 것이다.

도룡곡은 청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 무림의 세력에 가장 먼저 제압당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해왔었다.

그것이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였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도룡곡 식솔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룡곡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완전히 제명당했다.

그 후 도룡곡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헌데 도룡곡이란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 설마 시주는..."

비구니 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그렇다. 본좌가 바로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鄧天河)."

사내는 비구니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윽!”

자신을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라 소개한 그자의 손이 뺨에 닿자 비구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나는 마루 밑에 숨어서 부모형제들이 너희들 호천무맹의 인간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등천하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인 채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혈채를 반드시 천배 만배로 갚고 말겠다고...!"

"... 아미타불!"

안색이 밀납처럼 변한 자운 비구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크크크... 이제 본좌가 왜 너를 납치해 왔는지 짐작이 가겠지?"

등천하는 음소를 흘리며 젖은 승복에 감싸인 자운 비구니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선 네년에게 극락구경을 시켜준 후 발가벗겨서 낙양 성문에 매달아 두겠다. 호천무맹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인 네년의 알몸을 가능한 많은 인간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 그러고 보니 근래 일어났던 본맹 산하 문파들의 겁탈 사건이 모두 시주의 짓이었군요."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몇 년 전부터 호천무맹 소속 문파의 아녀자들이 겁탈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문파 장문인들의 처첩이나 여자 제자, 딸들이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만 해도 서른 개가 넘는 문파와 가문의 여자들이 몸을 더럽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용모파기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인의 소행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범인이 여자들을 유린한 수법이 대동소이한 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정체불명인 범인에게는 천면음마(千面淫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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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도를 얻다

 

 

(제 정신으로 날 보는 게 민망해서 몰래 떠나셨구나.)

고검추는 아쉽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옥여상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옥여상은 냉혹하고 도도하다고 알려진 마도무림의 여걸이다.

헌데 지난밤에는 어린 소년과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짓을 했다.

옥여상이 어째서 먼저 떠났는지 짐작하며 고검추는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북해에 가서 만년화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중략-

담세황은 교활하면서도 악독한 심보를 지닌 놈이다. 네가 고모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을 그놈에게 들키면 절대 안된다. 마천루의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포기한 것도 담세황이 눈치 챌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삼초(三招)의 무공은 남긴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만 있으면 담세황과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만 줄이거니와 고모의 모든 것은 영원히 네 것임을 잊지 말거라.>

 

옥여상의 글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그 글 아래쪽으로는 세 가지 초식이 적혀있었다.

혈전삼식(血戰三式)-!

섬뜩한 이름을 지닌 그 초식들은 옥여상이 스승인 구천마야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구천마야는 마도 무림의 전설적인 마인들은 구마(九魔)중 혈마(血魔)라는 인물의 후손이다.

혈마는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적이 죽거나 항복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혈마보다 객관적으로 강했던 인물들도 혈마와 싸우는 것을 꺼려했다.

혈마라는 이름은 싸우면 늘 피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전귀(戰鬼)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혈전삼식은 바로 그 싸움광인 혈마가 남긴 무공의 정수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혈전삼식으로 죽이지 못할 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혈전삼식은 초식이라기보다는 내공의 운용비결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내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을 쓰러트리는 수법이 혈전삼식인 것이다.

그 때문에 혈전삼식은 검법, 장법, 수법등 모든 무공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분뢰개벽(分雷開闢)

-천수낙백(千手落魄)

-무량철영(無量鐵影)

 

이것이 혈전삼식이다.

분뢰개벽은 공격 속도를 극대화시켜주는 운공비결이다.

분뢰개벽으로 시전되는 초식의 빠르기는 <번개를 나눈다(分雷)>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천수낙백은 펼치는 초식에 무수한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운공비결이다.

무량철영은 중압(重壓)의 비결이다.

무량철영으로 구사되는 초식은 산을 밀어버리고 집채만한 쇳덩이를 박살내는 파괴력을 지닌다. (... 대단하다.)

혈전삼식을 읽어본 고검추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고검추가 보기에도 혈전삼식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혈전삼식을 만드신 것만 봐도 고모님은 일대종사로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고검추는 새삼 옥여상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다.

옥여상이 무림인들에게 마녀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이해가 갔다.

(고모님...)

고검추는 옥여상이 글을 남긴 속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자락에 옥여상의 그윽한 살내음이 배어있는 게 느껴진다.

(제발 돌아가시지 마십시오. 그래야 검추가 고모님께 입은 하해 같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을 테니...)

고검추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옥여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옥여상의 속옷 자락를 얼굴에서 뗀 고검추는 옥여상이 남긴 마지막 물건을 살펴보았다.

두 번 접혀있는 손수건이 그것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제법 빛이 바랜 손수건에는 어지러운 도형(圖形)이 그러져 있었다.

장보도-!

그 손수건이야말로 사신검의 하나인 복마신검이 감추어진 장소를 표시해 놓은 장보도였다.

그 장보도를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아버지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복마신검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낸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신상에 얽힌 추문을 해결할 수 있을테니...)

고검추는 장보도를 살펴보며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어머니가 주신 것도 있었지.)

장보도를 살펴보던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이 준 나무상자를 떠올렸다.

납작한 나무 상자는 고검추가 누워있던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나무 상자 옆에는 천으로 감싼 초혼전도 놓여있다.

달칵!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상자 안에는 륜()이 하나 들어 있었다. 직경 반 자 정도 크기에 중앙에는 한 마리 붕조(鵬鳥)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륜이다.

붕조의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데 눈 부위에 타는 듯 붉은 구슬이 박혀있어서 더욱 더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의 출신이 붕조를 상징으로 삼는 가문일까?)

륜에 새겨진 붕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검추는 염두를 굴렸다.

그 륜이야말로 자신의 외가가 어딘지 밝혀줄 유일한 단서인 것이다.

(아름다운 보석이다. 병기라기보다는 의식에 사용한 제기가 아닐까.)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붕조의 눈에 박힌 붉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철컹!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저 둥그스름하기만 하던 륜의 외곽으로 톱니바퀴 형태의 칼날들이 여섯 개 튀어나왔다.

그 칼날들은 종이처럼 얇았으며 얼굴이 비칠 정도로 새파란 윤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고검추는 칼날들에서 번지는 으스스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한눈에 그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들이 무쇠도 흙 베듯 하는 날카로움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훌륭한 물건이다. 이걸 사용하는 방법만 알면 유용한 호신수단이 되겠다.)

고검추는 눈을 빛내며 륜에 박혀있는 붉은 구슬을 다시 한 번 눌렀다.

기이잉! 철컥!

그러자 튀어나와있던 칼날들이 다시 륜 안쪽으로 사라졌다.

(칼날을 수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시간 날 때마다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고검추는 륜을 다시 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젠 떠날 때다.)

고검추는 륜을 넣은 나무상자에 이어 옥여상이 남긴 장보도와 편지, 헌월태을경을 챙겨 품속에 갈무리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고검추는 일어나 석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 깔린 마른 풀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들어왔다.

(고모님과 보낸 지난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은발마희 옥여상을 떠올린 고검추는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어 그는 양모 당혜선을 떠올렸다.

사신각주에게 무참히 고문당한 후 청룡탄으로 투신한 당혜선을 생각하자 고검추의 눈 꼬리가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편히 잠 드십시오 어머니! 사신각주는 소자의 손으로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습니다.)

고검추는 눈을 감고 합장하며 맹세했다.

양모에 대한 추모까지 마친 고검추는 동굴 입구로 갔다.

등나무 넝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젖혀 동굴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동굴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동쪽 산 능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탁탁!

주변을 살피며 고검추는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곧 고검추의 모습은 계곡에서 사라졌다.

고검추를 어린 소년에서 어엿한 사내로 만들어준 동굴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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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무공 전수

 

 

"내가 담세황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무림에 크나큰 화근(禍根)이 될 것이다."

옥여상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우리 마천루의 모든 절기를 연성해낸 담세황이 최강의 호신기공인 태을강기마저 얻는다면 그 누구도 놈의 폭주를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안색도 심각하게 변했다.

비로소 옥여상이 억지로 자신에게 처녀를 주려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옥여상의 말이 이어졌다.

"사로잡힐 경우 자결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담세황은 태을강기를 얻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내 시신을 욕보일 것이다. 그같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 그게..."

고검추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검추는 아직 여자를 알지 못한다.

사내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지만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뜻하지 않게 오늘 여자와 관계할 기회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검추는 선뜻 옥여상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은 양모가 원수에게 유린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런 처지에 여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옥여상의 제안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다.

자신이 옥여상관계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 깃들어있는 태을강기를 담세황이 차지할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옥여상의 말 대로 세상에 크나큰 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비록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고검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분부 따르겠습니다."

결국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고맙다 추아야."

내심 긴장하고 있던 옥여상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소녀밀법(素女密法)이라는 채음보양술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듣거라."

이어 그녀는 한 가지 구결을 고검추에게 들려주었다.

소녀밀법이라는 그 구결은 헌원태을경에 수록되어 있는 절기중 하나다.

옥여상이 들려주는 소녀밀법의 구결을 외우던 고검추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소녀밀법이란 것이 남녀가 관계하는 방법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검추의 일부는 소녀밀법을 듣는 과정에서 주책없이 반응을 보였다.

소녀밀법을 들려주는 옥여상의 얼굴도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고검추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자니 죽을 맛이다.

특히 자신의 설명이 시작되자 고검추의 일부가 즉시 반응을 보여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비록 좌도방문의 비결이지만 소녀밀법의 효과는 탁월하다.

그것을 익히면 이성의 정기를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누구보다 영특한 고검추다.

옥여상이 소녀밀법을 두 번 설명해준 것만으로 그 이치를 완전히 이해했다.

... 그만 말씀해주셔도 되겠습니다.”

고검추는 또 한 번 소녀밀법을 구술해주려는 옥여상에게 말했다.

"...!"

고검추가 소녀밀법을 이해한 것을 안 옥여상은 눈을 내리감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검추는 옥여상의 그같은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덧 고검추를 휘감고 있던 옥여상의 팔다리가 풀려있다.

...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옥여상이 가르쳐준 소녀밀법을 옥여상에게 사용했다.

"... 시작하겠습니다."

"... 오냐! ... 나도 준비가 되었다."

고검추는 소녀밀법의 흡자결(吸字訣)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옥여상도 소녀밀법의 발자결(發字訣)을 운용하여 고검추를 도와주었다.

우르르!

곧 옥여상의 내부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심맥 깊은 곳에서 거대한 암경이 출렁이며 결집되더니 고검추의 몸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연(奇緣)!

고검추는 실로 엄청난 기연을 만나고 있었다.

옥여상에게서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이어 받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리되면 세상 어떤 힘도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스으으! 스으!

두 사람의 몸에서는 자욱한 운무가 일어나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그들의 몸을 가렸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허억!”

고검추는 전신의 경맥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만감을 느끼며 소녀밀법의 시전을 중단했다.

옥여상의 몸속에서 떠돌고 있던 태을강기를 모두 흡수한 것이다.

마치 몸 안에 활화산이 하나 생겨 부글거리고 있는 것 같다.

만큼 태을강기의 힘은 강대하면서도 매우 유동적이다.

비록 구성이 넘는 태을강기를 흡수했지만 당장 사용하지는 못한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고검추가 엄청난 기연을 맞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금만 노력하면 태을강기를 완성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어떤 고수와 싸워도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고모님."

고검추는 그때까지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옥여상의 몸에서 일어났다.

헌데 떨어지려는 c의 허리를 옥여상의 두 손이 말없이 끌어당겼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전율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열풍이 동굴 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고검추는 심연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린 듯한 피곤함이 느껴졌다.

비록 몸을 피곤하지만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고검추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은 순진한 소년에서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된 것이다.

물론 고검추를 소년에서 사내로 만들어준 것은 은말마희 옥여상이다.

(그분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본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고검추는 눈을 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죄스럽고 어색해서 옥여상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든 척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 덧 아침이 되어 눈부신 햇살이 등나무 넝쿨 사이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옥여상의 모습은 석실 어디에서도 없었다.

고검추의 몸에는 옷이 단정하게 입혀져 있었다.

물론 옥여상이 입혀준 것이다.

(어딜 가셨을까?)

고검추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며 일어났다.

일어나 살펴보니 옆에 깔린 마른풀 위에는 점점이 검붉은 자극이 남아 있다.

옥여상의 몸에서 상당향의 출혈이 있었다는 증거다.

물론 옥여상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든 장본인은 고검추다.

(몸을 닦으려 밖으로 나가신 것일까?)

일어나 앉은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으로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잘 접은 손수건 한 장과 낡은 표지의 비급 한 권, 속옷을 찢어서 종이를 대신한 편지가 그것이었다.

낡은 표지의 비급은 문제의 헌원태을경이었다.

옥여상은 고검추가 태을강기를 수련할 수 있도록 헌원태을경을 남기고 간 것이다.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집어들어 대충 훑어보았다.

헌원태을경에는 태을강기 위에도 몇 가지 무공이 더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수비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절기들이라 나같은 일초무학은 이해하는 게 쉽지 않겠구나.)

헌원태을경을 한차례 훑어본 고검추의 감상이었다.

태을강기는 이미 완성 직전인 상태로 몸 속에 고여 있어서 수련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무공들은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쉽사리 그 이치를 깨우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을 두고 연구해봐야겠지.)

고검추는 헌원태을경을 내려놓고 속옷을 찢어 만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상당히 크게 찢은 속옷 자락 위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들이 깨알같은 크기고 가득 적혀 있었다.

옥여상이 심후한 내공을 이용하여 천을 태우는 방식으로 글을 남긴 것이다.

 

<네가 깨어나면 떠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먼저 떠난다.>

 

섬세한 필체의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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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두 가지 선물

 

 

"담세황이란 놈이 내게서 노리고 있는 두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옥여상은 꼭 끌어안고 있던 고검추의 머리를 조금 풀어주며 물었다.

"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고개를 조금 든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변화를 옥여상에게 들켰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장보도(藏寶圖)란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고검추의 모습을 본 옥여상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보도라면 어떤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린 지도겠군요."

고검추는 흠칫 놀라며 옥여상을 내려다 보았다.

"십칠 년 전, 그다지 친분도 없던 어떤 인물이 인편으로 손수건 한 장을 보내왔었다. 그 손수건 위에는 복잡한 암호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한 자루의 신검을 감춘 장보도인 줄 알게 되었단다."

(신검을 감춘 장보도!)

고검추는 어떤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마신검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사신각주가 자신의 양모 당혜선을 다그치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주머니께서 장보도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고검추는 떨리는 음성으로 옥여상에게 물었다.

옥여상은 야릇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내는 내가 장보도를 받은 직후 불미스러운 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파백도의 차기 맹주로 손꼽히던 철사자 고창룡이 그 장본인이다."

"...!"

고검추의 몸이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옥여상이 고검추에게 주겠다고 한 장보도는 사신검 중 복마신검을 감춘 장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보도를 옥여상에게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부친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십칠 년 전, 고창룡은 친분도 별로 없는 옥여상에게 복마신검의 장보도를 보냈었다.

고창룡과 옥여상은 한두 번 얼굴 마주친 정도의 교분밖엔 없었다. 각자 걷는 길이 다른지라 흑백양도를 대표하는 기재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헌데 고창룡이 늙은 하인을 시켜 암호가 적힌 손수건을 옥여상에게 보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나 옥여상이라면 믿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옥여상이 손수건을 전해 받은 얼마 후 고창룡이 패륜아로 몰려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창룡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여상의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창룡이 죽음을 예견하고 암호가 적혀잇는 손수건을 보낸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옥여상은 고창룡이 자신에게 손수건을 보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손수건에 적혀있는 암호는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려웠으며 마천루의 제이대 루주가 된 직후라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옥여상은 마천루를 훌륭히 영도하여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호천무맹이 봉문한 무림에서 마천루에 맞설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옥여상도 마도제일인을 넘어 중원제일인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룰 만큼 이루었고 큰 우환도 없어서 여유가 생긴 옥여상은 고창룡이 보낸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암호가 적혀있는 손수건이 사신검 중 하나를 감춘 장보도임을 알아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장보도를 전혀 남인 이 분께 보내셨을까? 어머니나 양모님은 물론이고 호천무맹의 원로들 중에서도 믿을만한 분이 계셨을 텐데...)

고검추는 옥여상의 풍만한 몸 위에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로구나. 철사자 고창룡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옥여상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검추의 경악하는 모습에서 그와 고창룡의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치 않고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담세황이 노리던 두 가지 보물을 네게 모두 줄 작정이다. 거절하지 않겠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고모님!"

"고모..."

고모라는 고검추의 호칭에 옥여상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천애고아인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옥여상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옥여상이 아버지의 지인인 것을 알고 별 생각없이 고모라 부른 것이다.

“무례는 무슨... 너같이 귀여운 조카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감... 감사합니다.”

고검추는 꽃잎같이 부드러운 옥여상의 입술을 이마에 느끼며 안도했다.

"헌데 너는 사신검의 장보도 말고 다른 한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나 알고 감사하는 것이냐?"

옥여상은 야릇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자신이 옥여상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검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옥여상이 옥용을 발그레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고모의... 처녀(處女)다."

"예엣?"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아연실색했다.

옥여상이 고검추 자신에게 주겠다는 두 번째 보물이라는 게 처녀라니... 고검추로서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모님과..."

고검추는 너무 놀라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옥여상의 시선을 피했다.

비록 젊어 보이지만 옥여상은 고검추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어떻게 교접을 한단 말인가?

"네가 왜 나의 두 번째 선물을 못받겠다고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받아 주어야만 한다. 그게 고모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옥여상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처... 처녀를 제게 주시는 것이 고모님을 구하는 방법이라니... 무슨 뜻이신지요?"

고검추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휴우... 이 모두가 담세황이라는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옥여상의 옥용이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은발마희 옥여상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옥면마성 담세황-!

바로 그 자였다.

동문의 사형제이지만 옥여상과 담세황은 모자지간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 옥여상은 마흔 세 살이고 담세황은 스물일곱 살인 것이다.

옥여상이 일찍 시집을 갔으면 담세황 또래의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사형제면서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담세황은 마천루를 세운 구천마야(九天魔爺) 담백양(潭白楊)의 다소 먼 친척이다.

비록 친척이라 해도 구천마야는 담세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인 마천루를 이끌어가려면 탁월한 무공과 영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담세황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천마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담세황의 일가의 식솔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구천마야가 유일하게 구해낸 것이 담세황이었으며 당시 여덟 살이었다.

원래 구천마야는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옥여상 외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애고아가 된 담세황이 가엾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대신 구천마야는 마천루의 차기 루주는 대제자인 옥여상이라는 것을 수시로 천명했다. 옥여상의 위상과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그같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옥여상은 담세황을 친동생인 듯 성심껏 돌보아 주었다.

다만 담세황이 지나치게 영악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언행이 계산 끝에 나온 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안이 멸족당한 후유증이거니 생각하며 담세황의 행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옥여상은 담세황을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 스승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담세황을 제자로 맞아들일 당시 구천마야는 이미 팔순을 넘겨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옥여상이 늙은 사부를 대신하여 담세황을 가르쳐야만 했다.

옥여상과 담세황은 사형제가 아니라 사실상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옥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삼 년 전 어느 날 사단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담세황이 한 권의 오래 된 책을 옥여상에게 주었다. 그 고서는 상고시대의 절기가 실려있는 비급이었다.

 

-헌원태을경(軒轅太乙經)!

 

담세황은 그같은 이름의 비급을 천산(天山)의 어느 빙동(氷洞)에서 얻었다고 했다.

옥여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헌원태을경이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남겼다고 알려진 비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원태을경은 황제 헌원씨가 총애하던 소녀(素女)를 위해 지은 비급이다.

황제는 소녀가 헌원태을경을 익혀서 몸을 지키길 원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헌원태을경의 무공들은 수비와 보신에 특화되어 있다.

헌원태을경에 수록된 무공들의 정수는 태을강기(太乙罡氣)다.

태을(太乙)은 북극성(北極星)을 의미하며 북극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

그 태을이 이름에 들어간 태을강기를 완전히 수련하면 생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온몸의 모공에서 늘 강기가 흘러나와 외부의 충격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태을강기를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다만 태을강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약점이 있다.

먼저 수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온몸의 모공으로 강기를 뿜어내려면 온몸의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안될 것이다.

즉, 태을강기의 수련 비결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태을강기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약점은 더욱 치명적이다.

태을강기는 팔만사천 개로 알려진 전신의 모공으로 발산과 수렴을 하는 까닭에 통제하기가 메우 어렵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속을 제 멋대로 떠도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막을 수 없다.

태을강기를 수련중인 인물을 제압하여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의 사술을 쓰면 그때까지 축적해놓은 태을강기를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담세황, 그 배은망덕한 놈은 내가 사신검의 장보도를 지니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놈은 내게서 장보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원태을경을 얻게 되었으며...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리고 그걸 내게 준 것이다."

듣고 있던 고검추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스스로 태을강기를 익힐 자신이 없었던 그 자는 고모님으로 하여금 태을강기를 수련하게 한 후 갈취할 생각이었겠군요."

옥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가량 수련한 결과 나의 태을강기는 구성(九成)을 넘겼다. 그걸 확인한 담세황은 방심하고 있던 나를 쇄심마장으로 암습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하루 전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 못할 말종이로군요."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여상은 그런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처녀가 왜 보물인지 알겠지?"

“예...”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옥여상이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처녀라는 사실과 태을강기를 이전받으려면 그녀와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구성 수준의 태을강기를 얻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무공에도 다치지 않는 사실상의 불사지체가 된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고모님."

잠시 고민하던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옥여상의 호의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고모가 쉰 살을 바라보는 늙은 계집이라 싫은 것이냐?"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난처한 듯 더듬거리던 고검추는 이윽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꾸만 고모님이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 같아서 도저히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 가득 뽀얗게 물기가 차올랐다.

"내게도 너같이 착한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옥여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라 불리는 나같은 계집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니 고맙구나."

"고모님..."

옥여상의 품에 안긴 고검추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고모의 처녀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고모와 천하무림을 위하는 길이란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년화리를 구하러 북해로 갈 작정이다. 하지만 만년화리를 잡아서 쇄심마장의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보다 담세황의 추적을 벗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옥여상은 그늘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나의 내공은 절반 이상이 쇄심마장의 마기를 억누르는데 소모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담세황과 백초도 겨루지 못한다."

본래 옥여상은 담세황 정도는 삼십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 담세황이 사실상의 사부인 자신을 기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방심하다 암습당해서 담세황과 백초도 겨룰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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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마녀(魔女)의 연심

 

 

당혜선의 한 맺힌 얘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검추의 얼굴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은 너무 세게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나의... 나의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였다니...)

고검추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모를 겁탈한 패륜아가 아버지인 것이다.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주르르...

질끈 감은 고검추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추야...)

당혜선은 그런 고검추의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검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고검추는 당혜선 자신의 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괴로워 할 것 없다 추아야. 사형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악한 자의 음모에 희생되신 것이란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흠칫하며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 사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는..."

당혜선의 눈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을 겪는 듯했다.

그같은 태도로 미루어 보아 당혜선은 음모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인간이 음모자임을 아셨기 때문에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하셨을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음모자가 누군지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 제발... 소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를 음해한 자가 누구인지를..."

고검추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미를 용서하거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녀곡을 떠날 때 네게 준 나무상자는 네 생모 대려군 언니가 남긴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당혜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몸을 일으킨 당혜선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았다.

(사형을 위해 고이 지켜온 정조를 유린당한 마당에...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창백한 뺨으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에 남아있는 사신각주의 흔적이 얼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당혜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하며 보인 자신의 반응이었다.

그 장면을 양아들인 고검추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당혜선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형... 이제 소매가 사형을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당혜선의 입가로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아야. 절대... 무슨 일을 겪어도 좌절해서는 안된다."

화락!

그 말을 남기고 당혜선은 돌연 청룡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고검추는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가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신 것일까?)

고검추는 멍한 표정으로 당혜선이 뛰어내린 절벽만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그러다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청룡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서도 당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아아!

그저 오십 장이 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청룡탄의 격랑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고검추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단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안됩니다 어머니!”

고검추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당혜선을 따라 투신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고검추는 끝내 청룡탄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복수... 복수해야만 한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고검추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버지를 위해한 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신각주... 네놈들을 내 손으로 쳐죽이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다.)

고검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을 수 없는 것은 복수 때문이다.

자신마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주겠는가?

결의를 다지는 고검추의 뇌리로 문득 스쳐가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은 그윽한 눈매에 새하얀 은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은발마희!)

고검추의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검추의 눈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핏빛 화살이 들어왔다.

초혼전!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하복부에 꽂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고검추는 초혼전을 천 조각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 초혼전에 묻어있다는 백일취가 피부에 닿으면 안된다.

(언제고... 이것으로 네놈의 심장을 쑤셔 주겠다.)

초혼전을 노려보며 맹세한 고검추는 몸을 돌려 어두워지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자신을 지켜보는 외눈의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밤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팽가촌 남서쪽 삼십여 리 쯤에는 은밀한 협곡이 하나 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협곡의 끝은 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 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그 석벽의 대부분은 수많은 등나무 넝쿨로 뒤덮여 있다.

"허억! 헉!"

탁! 타탁!

숨이 턱에 찬 채 그 협곡으로 달려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 소년은 고검추였다.

“허억 헉!”

고검추는 협곡 막다른 곳에 서있는 석벽 앞에 멈춰서며 가쁜 숨을 추스렸다.

서걱...

얼추 숨을 고른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석벽을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들을 젖혔다.

무성한 등나무 줄기들이 헤쳐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이다.

하지만 동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넓어져 이윽고 어른 남자가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 문득 동굴이 끝이 났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석실 바닥에는 보드라운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실 구석에는 몇 가지의 가재도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고검추는 이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꾸면 놓은 것이다.

(헉!)

헌데 막 석실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깜짝 놀랐다.

석실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황촉불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촛불도 고검추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

헌데 마른 풀이 깔린 석실 바닥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마천루의 루주라는 은발마희 옥여상이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석실 바닥 가득히 흩어놓은 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고검추가 놀란 것은 자신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주머니!"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옥여상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검추는 급히 옥여상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옥여상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 설마 내상이 도저서 타계하신 것일까.)

고검추는 떨리는 눈으로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런 그녀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검추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옥여상의 검은 옷과 새하얀 살결을 물들이고 있던 피는 깨끗이 씻겨있다.

덕분에 역겨운 피 냄새 대신 향긋한 살 내음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고검추의 귓가로 뭉클한 육봉의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고검추가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댄 직후였다.

"호호호!"

옥여상은 까르르 웃으며 와락 고검추를 끌어안았다.

"읍!"

그 바람에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의 육중한 젖가슴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여상의 다리도 영사처럼 고검추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몸 아래 느껴지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소년의 피를 단번에 비등시켰다.

"노... 놓아 주십시오!"

당황한 고검추는 몸부림치며 옥여상의 젖가슴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내가 죽은 줄 알고 겁이 난 모양이구나 겁쟁이 도련님!"

옥여상은 교소를 터뜨리며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었다. 비록 부드럽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는 옥여상의 팔 다리를 고검추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옥여상의 몸에 올라탄 자세인 채로 퉁명하게 말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봉목에 은은한 떨림이 일었다.

 

옥여상은 지금까지 냉혹하고 비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철이 든 이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옥여상을 거둬준 스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스승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옥여상 외에도 여러 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었다. 옥여상같은 고아는 물론이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납치해서라도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켰다.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라 공언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승이 평생을 걸쳐 세운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년과 소녀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 나찰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옥여상이었다. 발군의 자질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약속한 대로 스승은 옥여상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이 이룬 기업, 마천루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마천루의 루주가 되었다고 옥여상의 고단했던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마천루의 루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답게 마천루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포악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자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은 해내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냉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여 마천루 소속 마인들의 마음을 장악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 마도 무림을 호령하는 여종사가 된 것은 옥여상이 처음이었다.

마도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옥여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검추라는 이 어린 소년을 만나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놀랐느냐?"

옥여상은 확인하려는 듯 물으며 물기 어린 시선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저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옥여상의 눈 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망막이 뜨거운 물기로 덮였다.

"아아... 착한 것!"

옥여상은 치미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고검추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

고검추는 다시 옥여상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굴에 짓눌려지는 부드러운 육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관능적인 살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 안돼!)

고검추는 추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옥여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옥여상의 두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휘감고 있어서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충분히 사내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어떤 용틀임에 옥여상의 옥용에는 노을 같은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려는 선물을 무리없이 받을 수 있겠지.)

고검추의 상태를 확인한 옥여상은 어떤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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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내 아들이 아니다!

 

 

"으음!"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당혜선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머니...!"

고검추는 안도하며 당혜선의 무참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죽지 않았다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품에 안긴 채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주르르!

당혜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배어 눈 꼬리를 타고 좌우로 흘러내렸다.

"흐윽... 추아야."

당혜선은 오열하며 고검추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고검추도 분노와 회한에 오열을 느끼며 당혜선을 끌어안았다.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무참한 만행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고검추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두 모자의 뜨거운 오열은 어두워지는 청룡탄 위를 서럽게 물들였다.

 

***

 

“역시 생각한 대로다!”

사신각주의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그자는 만행이 벌어졌던 단애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었다. 거리는 대략 삼리 정도다.

“아랫놈들이 수집해온 첩보에 의하면 당가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놈의 성이 고씨인 걸 보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 당가년이 사람들 눈을 피해 고창룡과 붙어먹었다가 생긴 놈일 테고...”

사신각주는 삼리 쯤 떨어진 단애 위를 노려보며 흥분에 휩싸였다.

밤이고 제법 거리가 멀지만 사신각주의 눈에는 고검추와 당혜선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창룡의 아들까지 낳았다면 당가년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흐흐흐!”

사신각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가년이 아무리 독해도 복마신검을 아들의 목숨과 바꾸진 못할 것이다!”

사신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자는 당혜선이 아들을 데리고 선녀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당혜선의 아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혜선을 고문한 후 초혼전으로 죽인 척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당혜선이 죽어가는 걸 보면 숨어있던 당혜선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각주의 예상대로 마침내 고검추가 숨어있던 은밀한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검추를 잡아서 협박하면 독하기 이를 데 없던 당혜선도 어쩔 수 없이 복마신검의 행방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사신검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사신각주는 득의하며 단애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 사신각주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삐익! 삑!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새 울음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신각주의 귀에는 새가 우는 것같은 그 소리들에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다.

“대늙은이가 서남쪽에서 급속 접근중... 일백을 셀 정도의 시간 안에 내가 있는 이곳까지 도착할 예정...”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들을 해석하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때문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가공할 인물이 급속 접근중이다.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인물의 눈에 포착되어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당연히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를 생포할 시간 따위는 없다.

“똥물에 빠져 죽을 늙은이...”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서남쪽을 돌아보았다.

삐익! 삑!

새 우는 것같은 피리소리들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멀리고 허떤 인물이 한 가닥 유성처럼 날아오는 게 보인다.

“대늙은이!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팟!

사신각주는 저주를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사신검 중 하나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포기해야만 한다.

속이 너무도 쓰리고 쓰린 사신각주였다.

곧 사신각주의 모습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단애 위에서는 한 차례 격정의 물결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알몸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당혜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고검추는 무릎을 꿇고 당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는 사실...”

당혜선은 내적인 갈등이 심한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당혜선은 본론을 꺼냈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고검추는 하마터면 기함(氣陷)할 뻔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은 생모(生母)가 아니다."

당혜선의 말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고검추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귀가 멍멍해지고 주변 사물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듯했다.

이제껏 유일한 피붙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혜선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당혜선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검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내게는 인중지룡인 사형이 한 분 계셨다. 너는 바로 그 분의 아들이다."

"어... 어머니의 사형 되시는 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고검추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헉헉 대며 물었다.

당혜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의 성함은 고창룡... 무림인들은 그 분에게 철사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다. 그만큼 의지견정하고 용맹한 분이셨지."

"고... 고창룡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검추는 온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혜선은 흠칫했다.

"어... 어디서 그 분의 성함을 들은 적이 있느냐?"

"저녁 무렵에 옥여상이란 분을 만났었습니다."

고검추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옥여상!"

당혜선의 안색이 일변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만큼 옥여상이란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분을 아십니까?"

당혜선이 놀라는 모습을 본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무림인 된 자 치고 희세의 마녀 은발마희(銀髮魔姬) 옥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혜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부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놀라는 고검추에게 당혜선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설명해주었다.

"옥여상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들인 우내팔강(宇內八强)의 일인이며 마도 무림의 맹주격인 마천루(魔天樓)라는 문파의 지존이기도 하다."

"아!"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옥여상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사람에 들며 또 거칠고 사나운 마도 무림을 다스리는 마천루라는 문파의 주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은발마희 옥여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림인들은 사색이 된다.

그녀는 냉혹 비정한 성정을 지녀서 눈에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나이는 비록 삼십대이지만 그녀와 겨룰 수 있는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채 안된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하신 분인데... 사실은 마녀같은 존재였구나.)

고검추는 인간 세상의 존재같지 않았던 옥여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옥여상에게 은발의 마희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혜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옥여상이 왜 고검추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게 대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검추였다.

"그 마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더냐?"

당혜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검추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자에게 고창룡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으음..."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당혜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마음 속에서 격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당혜선은 결심한 듯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어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낙망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검추는 고개를 숙였다.

생모로 믿어온 당혜선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매, 즉 사고(師姑)로 변한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아버지시고 어미에게는 사형되시는 그 분은 아주 악독한 음모에 희생당해 돌아가셨다."

당혜선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철사자 고창룡에 연루된 그 치욕스런 비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인 다정관음 능벽운을 능욕한 일, 그 직후에 죄책감을 느껴 자결한 일등을...

 

-날수비연(辣手霜娥)

 

이것이 당혜선의 별호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인 그녀도 호천무맹의 맹주 십자검존의 제자였다.

호천무맹에서 사천당문이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독과 암기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사천당문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검존은 사천당문이 호천무맹에 헌신한 보답으로 당씨일족의 여식인 당혜선을 제자로 삼아준 것이다.

당혜선과 고창룡 외에도 십자검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당혜선이 고검추로 하여금 찾아가라고 했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이다.

당혜선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대사형인 고창룡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당혜선은 고창룡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었다.

잘 생겼고 다정다감하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고창룡이었다.

그런 그를 지척에서 보고 자랐으면서 반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혜선에게는 불운하게도 고창룡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누이동생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당혜선은 혼자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대사형 고창룡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려군(代麗君)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여인은 신분과 출신내력 모두가 비밀에 싸여 있었다.

분명한 것은 대려군이 대단한 미모와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고창룡과 대려군은 우연히 마주쳤으며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당혜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속내를 감추고 사형 부부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고창룡과 대려군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긴 해도 대려군의 고고한 기품과 다정한 마음씨에 반한 당혜선은 그녀를 친언니같이 여겼다.

호천무맹의 사람들 몰래 고창룡과 대려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당혜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혜선 자신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기거했다. 언젠가는 사형이 자신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벋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세 남녀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윽고 대려군은 고창룡과의 사랑의 결실을 잉태하였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대려군이 임신한 지 팔 개월 째 되던 때였다.

고창룡이 갑자기 미쳐서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한 후 자결한 것이다.

그 일은 당혜선에게는 물론 대려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난륜을 전해들은 대려군은 극도의 상심에 빠졌으며 그 충격으로 두 달 빨리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그 사내아이는 물론 고검추였다.

 

<세상 모든 사내를 저주하겠다!>

 

대려군은 출산한 직후 그같은 저주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핏덩이인 아들까지 내팽개친 채...

당혜선은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고검추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검추가 대사형 고창룡의 아들임이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호천무맹을 떠나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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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혈루(血淚)의 일막

 

 

"...!"

고검추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가 너무도 무참한 만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검추가 느낀 충격과 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흐흐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보자!”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당혜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 죽여라!"

사신각주의 마수에 고문당하며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고검추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흐흐흐! 걱정마라.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

사신각주는 히죽거리며 당혜선을 농락했다.

...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

당혜선은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다. 살고 싶으면 복마신검이 어디 있는지 실토해라!”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눈을 희번덕였다.

파르르!

복마신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애원하던 당혜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사신각주가 자신을 고문하고 협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은 때문이다.

무슨 짓을 당한다 해도 사신각주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

당혜선은 대답 대신 사신각주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물론 사신각주는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에 직접 당혜선의 침이 닿지는 못했다.

흐흐흐 이게 네년의 대답이라 이거지?”

당혜선의 침 세례를 받은 사신각주의 눈빛이 흉포해졌다.

그럼 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잔인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아악!"

다음 순간 당혜선의 입에서 단말마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마치 독침을 맞은 나비처럼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르르!

고검추의 몸에도 세찬 경련이 치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 도무지 현실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고검추는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이상하군!"

당혜선을 본격적으로 고문하며 사신각주는 의혹을 느꼈다.

그자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당혜선에게는 아들이 있다.

헌데 당혜선의 몸은 어떻게 봐도 처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신각주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흐흐흐... 네년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자는 광기에 사로잡혀 당혜선을 고문하는데 빠져 들어갔다.

"... 네놈을...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저주하겠다."

그자는 당혜선의 악에 바친 저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같던 끔찍한 고문도 결국 끝이 났다.

"흐흐흐!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본 각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마."

!

그 자는 쓰고 있는 복면 아랫부분을 들어서 얼굴을 당혜선에게 보여주었다.

사신각주는 고검추에게는 등을 돌린 자세인지라 고검추는 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흐윽!"

하지만 고문당한 자세로 누워있던 당혜선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 되어 복면 아래에서 드러난 사신각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당신이... 사신각주라니...!"

당혜선은 온몸을 벌벌 떨며 비명같은 신음을 토했다.

사신각주는 그녀가 익히 아는 자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고사형의... 참사도 바로 당신의 수작..."

당혜선은 분노와 절망에 찬 표정이 되어 사신각주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그렇다. 고가놈은 배은망덕하게도 복마신검을 얻고도 본좌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치룬 것이지."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복면을 다시 내렸다.

"... 이 짐승만도... 못한..."

당혜선이 분노와 경악으로 치를 떨 때였다.

사신각주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초혼전을 꺼내들었다.

"본좌의 비밀을 알았으니 안됐지만 죽어 주어야겠다."

그 자는 냉혹하게 말하며 초혼전을 쳐들었다.

(... 안돼!)

고검추는 전율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지척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려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자신은 짚인 혈도가 아직 풀리지 않은지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고검추는 활활 타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어머니를 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아악!"

단말마같은 짤막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사신각주가 내리꽂은 초혼전이 당혜선의 하복부로 깊이 박힌 것이다.

부르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리던 당혜선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흐흐흐... 감히 본좌의 뜻을 거스른 대가다."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화락!

이어 그 자는 검붉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으하하하! 나 사신각주이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는다."

한 줄기 광소와 함께 사신각주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적막...

다시 사위는 죽음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진 장내에는 하복부에 초혼전이 박힌 당혜선만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초혼전이 박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당혜선이 누워있는 바닥을 흥건히 물들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저녁노을도 스러지고 어둠이 스물 스물 번지고 있었다.

"크흑... 어머니...!"

문득 비통한 울부짖음과 함께 석벽 아래 동굴에서 고검추가 달려나왔다.

마침내 막혔던 혈도가 풀린 것이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어머니... 제발."

달려온 고검추는 당혜선을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아무것도 못한 자신의 무능이 저주스럽다.

사신각주! 하늘에 맹세코 네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다!”

고검추는 어머니의 알몸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헌데 그때였다.

두근 두근

고검추의 귓전으로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소리가 들렸다.

(... 설마!)

오열하던 고검추는 눈을 부릅뜨며 급히 귀를 당혜선의 왼쪽 젖가슴에 대었었다.

두근 두근

그런 고검추의 귀에 확실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 아직 살아계시다.)

당혜선의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고검추의 뇌리로 신비한 은발의 여인 옥여상의 음성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설삼신단!)

내심 부르짖은 고검추는 안고 있던 당혜선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옥여상이 준 그 옥병에는 만년설삼으로 만든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들어 있었다.

설삼신단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백년 수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효능을 지녔다.

(그 분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고 설삼신단을 내게 주었구나.)

고검추는 옥병에 들어있는 설삼신단을 보며 경이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새삼 옥여상이란 여인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설삼신단을 꺼낸 고검추는 당혜선의 하복부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초혼전을 제거해 드리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내려놓고 당혜선의 아랫배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고검추의 손은 멈칫 멈춰졌다.

(초혼전에는 백일취가 묻어있을 테니 직접 만지면 안된다.)

초혼전에 백일취라는 약물이 묻어있다는 당혜선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찢어진 옷으로 추혼전을 감싸쥐었다.

스윽!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초혼전을 뽑았다.

후두둑!

선혈이 분수같이 뿜어지며 초혼전이 당혜선의 아랫배에서 뽑혀졌다.

초혼전을 집어던진 고검추는 급히 두 손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런 후 어느 정도 피가 멎자 손을 떼고 옥병에서 설삼신단을 두 알 모두 꺼냈다.

고검추는 설삼신단 두 알을 모두 당혜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설삼신단은 당혜선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제 운명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설삼신단을 먹여준 고검추는 초조와 긴장으로 물든 시선으로 당혜선의 상태를 주시했다.

잠시 후 당혜선의 밀랍같이 창백하던 옥용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초혼전이 박혔던 하복부의 상처도 급속히 아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혜선은 세상에 보기 드문 영약인 설삼신단을 한 알도 아닌 두 알씩이나 한꺼번에 복용했다.

설령 더 심각한 상태였어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당혜선은 상처가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삼갑자 이상의 내공까지 얻었다. 게다가 강력한 극음기공까지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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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사로잡힌 여인

 

 

휘익!

질풍같이 내달리던 당혜선이 돌연 급정거했다.

"...!"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고검추는 흠칫했다.

당혜선이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단애 위였다도끼로 쪼개놓은 듯 쩍 갈라진 절벽 아래로는 거친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청룡탄(靑龍灘)!

 

기련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가는 험한 물줄기다산속을 수백 리 치달린 거친 계류는 황하와 이어진다.

당혜선이 멈춰선 단애는 그 청룡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콰르르!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다.

팽가촌에서 청룡탄까지의 거리는 오십 리가 넘는다당혜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으음... 틀렸단 말인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던 당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검추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당혜선은 선녀곡을 벗어난 직후부터 추격이 따라붙은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련산에서도 험한 곳을 골라 치달렸건만 끝내 추격을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추격에 가세한 자의 속도는 놀라웠다처음에는 이십여 리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십리 안쪽으로 따라붙었다.

혼자라면 어찌 어찌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고검추를 안고 그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자는 사신각주 본인일 텐데... 추아만이라도 그 살인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비장한 표정이 된 당혜선은 고검추를 안고 우측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바위들 사이를 지나자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입구에 바위들이 겹쳐 있어서 밖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다.

당혜선은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는 맹수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었다.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표범이 석벽 근처에서 돌연 사라졌었는데 피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굴 안에서 죽어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숨기면 누구도 추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파팟!

동굴로 들어간 당혜선은 고검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후 바닥에 눕혔다.

동굴 입구는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멀지 않은 곳으로는 청룡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내공이 제 아무리 심후한 자라도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고검추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고검추는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당혜선을 바라보았다.

대략 반 시진(1시간)쯤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혜선은 혈도가 짚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고검추를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혈도가 풀리더라도 팽가촌으로는 돌아가지 마라사신각의 악귀들이 팽가촌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대신 복우산(伏牛山)에 자리한 호천무맹으로 가서 철봉황(鐵鳳凰고현경(高玄鏡)이란 아이를 만나라내 이름을 대면 그 아이가 널 돌봐 줄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검추를 내려다보던 당혜선은 동굴을 나갔다.

휘익!

당혜선은 동굴 안에 누워있는 고검추를 한 번 더 돌아본 후 새처럼 날아올라 사라졌다.

(어머니...!)

고검추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사신각의 무리들을 유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속내와 달리 고검추는 말을 할 수도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무사하기를막혀있는 혈도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헌데 당혜선이 사라지고 일다경쯤 지났을 때였다.

스악!

한 줄기 검붉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동굴 앞을 스쳐지나갔다.

(... 사신각의 살인귀들 중 한명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검추는 곁눈질로 동굴 밖을 살펴보았다.

엇갈리게 서있는 바위들 틈새로 동굴 밖이 보인다.

하지만 나타났던 자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몸놀림이 어머니에 못지않은 걸 보면 사신각이란 조직의 두목일지도 모른다.)

고검추는 속이 타들어갔다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곳이 당혜선이 사라진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셔야할 텐데...)

고검추는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의 심정이라는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어머니가 과연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고검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반시진은 지나야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의 고검추에게 반시진은 말 그대로 여삼추(如三秋)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라락!

당혜선과 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쪽에서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사신각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오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굴 밖을 주시했다.

휘익!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동굴 앞으로 날아 내렸다.

(!)

그 직후 고검추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타난 자는 검붉은 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얼굴은 같은 색의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부분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신각주였다.

헌데 사신각주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머니!)

고검추는 기겁했다사신각주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여인은 바로 당혜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결국 달아나지 못하고 사신각주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 불리던 흑모철웅조차 쓰러트린 당혜선이다.

그런 그녀가 별 저항도 못하고 사로잡힌 것만으로도 사신각주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가년이 이 근처에서 잠깐 지체했었는데...)

사신각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심후한 공력으로 당혜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이 이쯤에서 잠시 멈췄던 것을 알아차렸었다.

사신각주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서 딱히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천시지청술을 펼쳐서 탐색하려고 해도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탄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흐르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당혜선이 의도한 대로 사신각주는 지척에 숨어있는 고검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털썩!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신각주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당혜선을 바닥에 던졌다.

"...!"

모질게 바닥에 던져졌지만 당혜선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움직이려는 시도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짚인 듯 했다.

"당혜선더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복마신검을 내놔라."

사신각주는 힘없이 누워있는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복마신검을 내놓으라니...?"

당혜선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흐흐흐알만한 인간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인데 발뺌할 작정이냐?“

사신각주는 칙칙한 살기가 서린 눈으로 당혜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혜선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복마신검을 어떻게 내놓는단 말이냐?"

"그럼 네년은 왜 십칠 년 전 호천무맹을 도망치듯 떠났느냐?"

"...!"

사신각주의 이어진 추궁에 당혜선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정관음 능벽운을 제외하면 고창룡과 가장 가까웠던 건 바로 사매인 네년이었다당연히 고창룡은 죽기 전에 네년에게 복마신검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신각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헌데 복마신검이라니... 십칠 년 전 철사자 고창룡이 사모를 겁탈하고 죽은 참사가 사신검중 복마와 관련 있단 말인가?

고창룡이 죽은 이상 오직 네년만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그러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발뺌을 해볼 생각은 마라

사신각주가 쓰고 있는 복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테면 죽여라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내 입에서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혜선은 단호하게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네년이...!"

사신각주의 두 눈이 살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자는 당혜선의 태도에 격노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수단이 없었다.

사실 사신각주는 당혜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의 성격이 얼마나 당찬지 잘 알고 있었다당혜선은 일단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고문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섭혼술을 쓰면 입을 열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된다.

문제는 사신각주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가공할 고수가 기련산에 들어와 있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고수에게 포착되기 전에 어떻게든 당혜선의 입을 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신각주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좋다네년의 입에서 복마신검의 행방을 듣는 것은 포기하겠다그 대신 다른 것을 갖도록 하지."

사신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당혜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당혜선은 불길한 예감에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복마신검은 포기하고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중 한 명이었던 네년의 속살 맛이나 봐야겠다."

사신각주는 음험한 눈으로 당혜선의 풍만한 몸매를 쓸어보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

당혜선의 분노에 찬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상의를 찢어버리듯 단번에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흐윽!”

사신각주는 분노와 수치로 떠는 당혜선의 치마마저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제 당혜선은 작은 속곳으로 은밀한 곳만 가린 민망한 자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럼 네 년의 꿀단지도 구경해볼까?"

사신각주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속곳에도 손을 댔다.

"... 안된다제발 이러지 마라!"

사신각주의 손이 속곳에 닿자 당혜선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지척에 고검추가 숨어있다.

아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했다.

당혜선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혈도가 찍힌 상태라 혀를 깨물 수도 없다.

본좌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면 복마신검의 소재를 대라.”

사신각주는 당혜선의 속곳으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당혜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신각주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모른다난 복마신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그렇게 결심했다니 어쩔 수 없군.”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살기를 뿜어냈다겁탈하겠다는 협박도 당혜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의 그같은 반응도 사신각주가 예상한 것이다.

흐흐흐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마지막 남아있던 보루인 작은 속곳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흐윽!"

하체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 당혜선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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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길한 화살

 

 

작은 분지 형태인 선녀곡에는 주황색 노을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녀곡 끝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모옥이 한 채 서있다. 지난 십칠 년 간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살아온 집이다.

모옥은 잘 가꿔진 채마밭과 화단이 감싸고 있다.

“...!”

선녀곡으로 들어서던 고검추의 눈이 치떠졌다. 모옥의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보인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타탁!

고검추는 반가운 마음에 모옥을 향해 달려갔다.

고검추는 경신술을 쓸 줄 몰라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고검추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몸속의 기운이 잘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만 수련하게 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진기토납술을 수련해온 덕분에 고검추는 무공을 쓸 줄 몰라도 온몸의 경맥은 막힘없이 뚫려있다.

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고검추의 질문에 당혜선은 즉답은 피했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당혜선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가르치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고검추는 그날 이후로 무공을 가르쳐달라 조르지 않았다.

비록 무공은 쓸 줄 몰라도 고검추의 뜀박질은 아주 빠르다.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 몸을 무리하게 써도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

삼십여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여 모옥 근처에 이른 고검추의 몸이 갑자기 멈춰졌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난장판이 된 모옥 내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방안의 집기들은 다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다. 어떤 자가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은 듯한 정황이다.

(그자 짓이었을까?)

고검추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다가 화들 짝 놀라 달아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대체 무얼 노리고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인가?)

고검추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고검추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화살!

마치 피를 칠한 듯 검붉은 화살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어지?)

핏빛 화살을 본 고검추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세히 보니 화살의 깃에는 검은색으로 글이 한자씩 적혀 있었다.

<()>자와 <()>자였다.

"초혼(招魂)? 혼백을 부른다?"

화살 깃에 적힌 글을 확인한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고검추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익!

놀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 내렸다. 촌부(村婦)처럼 피부는 가무잡잡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각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다.

비록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겼지만 이 여인을 본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가고 말 것이다. 여인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풍만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여인의 몸에는 검소한 마의가 걸쳐져 있다.

물론 수수한 그 차림새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진 못한다.

 

-당혜선

 

여인은 바로 고검추의 어머니인 당혜선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등에 짊어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호의 여걸이다.

돌아오셨군요 어머니!”

고검추는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색했다. 흑모철웅을 추살하러 떠났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검추와 달리 당혜선은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문에 박혀있는 핏빛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핏빛 화살을 살펴본 당혜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의에 감싸인 탄력 넘치는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화살이 무엇인데 어머니가 저토록 놀라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화살은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있었느냐?"

당혜선이 굳어진 표정으로 고검추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

고검추는 당혜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악랄한 무리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당혜선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무리들이라니... 누구 말씀인지요?"

의아해진 고검추가 물었다.

"이 화살의 이름은 초혼전(招魂箭)으로 사신각이라는 청부살수조직의 표기다."

당혜선은 화살을 노려보며 설명했다.

사신각...”

고검추는 사신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섬뜩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혼전에는 백일취(白日臭)라는 것이 묻어있다. 이름 그대로 냄새가 백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약물이다. 일단 백일취가 몸에 묻으면 최소 백일간은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당혜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후 서둘러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나무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왔다. 가로 세로 일곱 치 정도에 두께는 한 치가 채 안되는 납작한 상자다.

고검추는 그 나무상자를 오늘 처음 본다. 나무상자는 벽 틈에 설치 된 교묘한 공간에 숨겨져 있어서 침입자가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당혜선은 들고 나온 나무상자를 고검추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본 고검추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신각의 초혼전이 발동된 이상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혜선은 말하면서 고검추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고검추의 키는 어느덧 당혜선보다 커졌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검추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들었다.

".. 어머니...!"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안긴 고검추가 당황할 때였다.

휘익!

다 큰 아들을 두 팔로 안아든 당혜선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무공은 역시 대단하구나.)

당혜선의 품에 안겨 날아가며 고검추는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던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검에 간단히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당혜선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각이 그만큼 무서운 조직이라는 것을 고검추는 깨닫고 있었다.

 

***

 

틀림없느냐?”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부릅떠졌다.

... 분명 그 늙은이였습니다.”

사신각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는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나타났던 바로 그자다.

산적이 아닐까 했던 고검추의 추측과 달리 그자는 사신각 소속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 팔이 하나 없어졌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있긴 했지만... 본각의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는 대()늙은이의 용모파기와 일치했습니다.”

사내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살수 주제에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늙은이가 십구 년 전에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혼잣말을 하는 사신각주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역력히 묻어있다. 그만큼 그자가 떠올린 인물은 공포스러운 존재다.

기련산에 들어온 후 열 명 가까운 형제들이 점호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신각주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사신각의 자객들은 지령이 떨어지면 그 복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늙은이를 만나서 불귀의 객이 되었겠군.”

사신각주는 복면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대늙은이는 본각이 십칠 년 전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우릴 따라서 기련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대늙은이의 느닷없는 출현을 설명할 수 없겠지.”

복면인의 말에 사신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대늙은이는 정확한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형제들은 대늙은이에게 사로잡히는 즉시 입 속에 숨겨놓은 독을 깨물어서 비밀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사신각의 살수들은 입속에 독을 숨기고 있다가 임무에 실패하면 터트려서 자결을 한다. 살인청부를 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팔(鄭八) 저놈을 잡지도 않고 살려 보낸 건 잡아봤자 자결할 걸 알아서였겠군.”

사신각주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힐끔 보았다.

대늙은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당가년에 대한 추격은 중지하는 게 어떨지...”

복면인이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혜선의 거처에 초혼전을 남겨뒀다고 했지?”

사신각주는 복면인에게 대꾸하는 대신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각주님.”

긴장한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신각주의 눈치를 살폈다.

본각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가년은 즉시 기련산을 벗어나 종적을 감춰버릴 게 분명하다.”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희번덕였다.

이번에도 당가년을 놓치면 지난 몇 년간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기필코 잡아야만 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각주가 결정을 내리면 따라야만 한다.

기련산에 들어온 본각의 전력 절반을 대늙은이의 행방을 찾는데 투입하라. 그 늙은이를 발견하는 즉시 십리적(十里笛)을 써서 보고하고!”

사신각주가 지시를 내렸다.

존명!”

휘휙! !

일제히 대답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호사다마라더니...”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마천루의 떨거지들이 기련산 일대에 출몰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늘... 저 세상에 가있을 줄 알았던 무서운 노괴까지 우리 사신각의 뒤를 캐고 있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신각주의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늙은이의 눈에 띠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지만... 이제 와서 당가년의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년을 잡아야만 복마신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사신각주는 길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최대한 빨리 당가년을 찾아내 사로잡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휘익!

결의를 굳힌 사신각주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쐐액!

고검추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검추를 두 팔로 안은 당혜선은 기련산의 험한 산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당혜선이 달리는 속도는 어떤 산짐승보다도 빠르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고검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고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던 고검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홱홱 변하는 주변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십자단맥검을 쓴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고검추를 안고 달리며 당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 전, 당혜선은 납치당한 등삼낭을 구하기 위해 철웅채로 쳐들어갔었다.

철웅채의 채주이며 기련산 일대에서 최강자로 꼽히던 흑모철웅은 당혜선에게 패해 달아났었다.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다준 후 당혜선은 흑모철웅을 추격했다. 살려둘 경우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 전, 당혜선은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흑모철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흑모철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철피공을 익힌 그자의 몸뚱이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은 비장의 절기를 써야만 했다.

그 절기가 바로 십자단맥검이었다.

십자단맥검은 금강불괴라도 베어버리는 위력을 지녔다. 흑모철웅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해도 십자단맥검을 견디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단맥검에 치명상을 입은 흑모철웅은 높은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에 빠져 실종되었다.

당혜선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흑모철웅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는 워낙 거칠어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오일 동안 격류를 따라 내려가며 샅샅이 뒤졌지면 흑모철웅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팽가촌으로 돌아와 보니 사신각의 초혼전이 집의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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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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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뻔뻔한 노인

 

 

오빠! 검추오빠!”

자매중 동생인 팽옥령이 달음박질한 탓에 발개진 얼굴로 와락 고검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나 죽네!”

고검추는 팽옥령을 품에 안은 채 뒷걸음질 치며 엄살을 부렸다.

하루 종일 심심했지? 이제부터 옥령이가 오빠하고 놀아줄게.”

고검추의 허리를 가는 두 팔로 끌어안고 올려다보는 팽옥령의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다.

하하하 놀아준다니 영광이옵니다 옥령아가씨!”

고검추는 명치쯤에 닿은 팽옥령의 가슴에 약간 붕긋한 융기가 돋아나 있는 걸 느끼며 웃었다.

검추오빠 피곤할 텐데 귀찮게 하면 안된다.”

뒤이어 도착한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쌀쌀 맞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팽옥경의 두 볼에도 살짝 홍조가 어려 있는 것을 고검추는 놓치지 않았다.

오빠는 옥령이 안 귀찮아해. 그렇지 오빠?”

팽옥령은 가는 두 팔로 고검추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언니에게 눈을 흘겼다.

(저 년이...)

그 꼴을 본 팽옥경의 눈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피를 나눈 동생인 데도 고검추에게 아양을 떠는 팽옥령이 눈에 거슬리는 그녀다.

팽옥경은 고검추와 동갑이다.

당혜선이 어린 고검추를 안고 팽가촌에 나타난 며칠 후 팽옥경이 태어났었다.

당시 당혜선은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어서 고검추에게 수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당혜선을 대신해서 마침 출산한 등삼낭이 고검추에게 젖을 먹이며 키워주었다.

고검추에게 등삼낭은 사실상의 유모인 것이다.

고검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검추는 팽옥경과 함께 등삼낭의 젖을 한쪽씩 나눠 물고 빨며 자랐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고검추는 팽옥경과 친 남매처럼 지내왔다.

물론 팽옥경이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가 토실토실해지면서 서먹해지긴 했지만...

가져왔어요 엄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생에게 한 번 더 눈을 흘긴 팽옥령이 보자기로 싼 찬합을 등삼낭에게 내밀었다.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구나. 옥경이가 몇 가지 음식을 마련했으니 집에 가져가서 먹도록 해라.”

등삼낭은 큰 딸이 내민 찬합을 받지 않고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 좋은데...”

여전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팽옥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떼 쓰지마. 검추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할 거야. 이모가 오늘이라도 돌아올지 모르니...”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찬합을 내밀었다.

누가 그걸 모른데?”

팽옥령은 언니에게 마주 눈을 흘기면서 고검추에게서 떨어졌다. 고검추의 허리를 풀어주는 팽옥령의 손에서 아쉬움이 가득 느껴진다.

잘 먹을게.”

팽옥령에게서 벗어난 고검추는 어색하게 웃으며 팽옥경이 내민 찬합을 받아들었다.

그럼 내일 해뜨기 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손에 찬합을 든 고검추는 세 모녀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가라.”

잘 자 오빠!”

“...”

세 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검추를 배웅했다.

고검추는 곧 마을을 벗어나 자기 집이 자리한 동쪽으로 멀어졌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옥경이를 검추와 짝지어줄 생각이었는데... 당언니에게 너무도 참담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여서 차마 사돈 맺자는 말을 할 수가 없겠구나.)

멀어지는 고검추의 뒷모습을 보며 등삼낭은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무사했던 게 아니었다.

당혜선이 철웅채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비극은 벌어졌었다.

등삼낭은 흑모철웅의 무지막지한 몸 아래 깔려 강간을 당하다가 기절한 후였던 것이다.

당혜선은 분노하기도 했지만 등삼낭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었다.

당혜선이 기필코 흑모철웅을 죽여 버리려는 이유도 등삼낭을 위해서였다.

“...”

소리 죽여 한숨을 쉬는 엄마를 훔쳐보는 팽옥경의 표정도 복잡했다.

등삼낭을 구해 돌아온 당혜선은 마을 사람들을 일체 배제하고 팽옥경에게 엄마를 돌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혼절한 엄마의 몸을 닦아주면서 팽옥경은 엄마가 철웅채로 끌려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버렸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너무도 가엾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자신이 고검추와 맺어지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서는 팽옥경이었다.

 

***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사는 골짜기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붙을 만큼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며 아주 깊거나 험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가촌 주민들은 두 모자가 사는 계곡을 선녀곡(仙女谷)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 당혜선은 영락없는 선녀였기 때문이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한다.

 

(심마니인가?)

팽옥경으로부터 받은 찬합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올라오던 고검추는 미간을 조금 모았다.

고갯마루 못미처에 서있는 단풍나무 아래 노인 한명이 앉아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젊었을 때는 체격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서 볼품없어 보인다.

볼품없는 것은 체형만이 아니다.

백발인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역시 허연 수염은 가꾸지 않아 제멋대로 자랐다.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여있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왼쪽 뺨에는 길게 갈라졌다가 아문 상처가 나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뺨이 갈라질 때 눈도 상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팔 하나가 없다. 오른쪽 소매는 팔이 들어있지 않아서 힘없이 늘어져 있다.

독비(獨臂) 독안(獨眼)의 노인은 망태기를 하나 짊어지고 있는데 약초 캐는 괭이의 손잡이가 망태기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불구의 몸이긴 해도 전형적인 심마니의 행색인 노인이다.

노인이 걸터앉은 바위에는 옹이 진 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으로 용케 기련산을 올라왔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성치 않은 모습을 살펴보며 단풍나무로 다가갔다.

“...”

노인도 고개를 올라오는 고검추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노인인데도 눈이 참 맑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수정처럼 맑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다가 고검추는 무엇 때문인지 노인의 미간이 움찔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게서 뭘 보았기에 잠깐이지만 놀라신 걸까?)

고검추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 했다.

꼬르륵!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고검추의 귀에 들렸다.

돌아보니 노인이 하나뿐인 눈으로 고검추가 들고 있는 찬합을 유심히 보고 있다.

꼬르륵!

그와 함께 다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노인의 배에서 나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다.)

고검추는 잠깐 갈등하다가 막 지나친 노인쪽으로 돌아섰다.

노야! 출출하시면 이걸 드십시오.”

고검추는 노인에게 찬합을 내밀었다.

찬합에 팽옥경이 정성과 공을 들여 만든 음식이 들어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배를 곯고 있는 게 분명한, 그것도 불구의 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허허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노인은 사양하지 않고 헤벌쭉 웃었다.

그저 웃은 정도가 아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보다시피 이 늙은이는 손이 하나 없어서 보자기를 풀 수가 없구먼.”

노인은 흐느적거리는 오른쪽 소매를 고검추에게 보이며 말했다.

(찬합을 직접 열어달라는...)

노인의 뻔뻔한 요구에 고검추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두말 않고 보자기를 풀었다.

드시지요.”

고검추는 찬합의 뚜껑까지 열어서 노인에게 내밀었다. 찬합에는 닭과 소, 양의 고기를 써서 만든 요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젓가락도 쥐어다오.”

노인은 이제 당연한 권리라는 듯 고검추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내민 왼손에는 소지(小指)와 무명지(無名指), 즉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이 없다. 오른팔이 없을 뿐 아니라 왼손도 손가락이 세 개뿐인 것이다.

(어쩌다 이토록 심한 불구가 되신 것일까?)

고검추는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 팽옥경이 찬합과 함께 싸준 젓가락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맛나구먼. 어떤 계집인지 모르지만 자넬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요리야.”

고검추에게서 젓가락을 건네받은 노인은 게걸스럽게 찬합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세 개 뿐이지만 사용하는 데 익숙한 듯 젓가락질이 자연스럽다.

노인은 연신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걸터앉은 바위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노인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찬합을 두 손으로 들고 서있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종과 하인이거나 할아버지와 손자로 볼만한 장면이다.

꺼억! 잘 먹었다. 뱃가죽이 등가죽과 입을 맞춰서 일어날 힘도 없었던 참이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찬합의 음식을 입에 쓸어 넣은 노인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엉겁결에 일면식도 없는 노인에게 공양을 한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노인의 행동거지에서 딱히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검추의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불구의 노인을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고검추는 웃으며 찬합을 다시 보자기로 싸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

그런 고검추에게 노인이 불쑥 물었다.

고검추라고 합니다.”

고검추... 고씨란 말이지?”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가늘어졌다.

(이분도 내 이름을 듣자 옥여상이란 아주머니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구나.)

고검추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푸 두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비는 누구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민망합니다. 어머니가 가친(家親)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고검추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체 거론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남에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노인은 노을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인지 고검추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노인은 다시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성은 대()씨다.”

대노야셨군요. 헌데 기련산에는 어인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고검추의 물음에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기련산에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묘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영생불사의 묘약... 기련산 토박이인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생불사의 묘약이 기련산에 있다는 노인의 말은 얼토당토않게 느껴진다.

너는 아직 살날이 구만리 같아서 뜬 구름같은 희망에라도 매달려야만 하는 늙은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던 노인의 시선이 고갯마루쪽으로 이동했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눈에 한 사내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것이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그자는 기련산의 주민이 아니다.

몸에는 날렵한 경장을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다.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서 그자가 무공을 익혔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 산채의 산적인가?)

고검추가 긴장하며 볼 때였다.

“...!”

고개를 넘어오려던 사내의 몸이 와락 경직되는 게 고검추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뜬 그자는 뒷걸음질을 하다가 홱 돌아섰다.

!

그리고는 놀란 노루처럼 튀어 올라 좌측의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무공을 익힌 자인데 뭘 보았기에 저리 놀라 황급히 달아난 것일까?)

고검추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접 잘 받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꾸나.”

노인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를 끌며 고갯마루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다리까지도 불편한 듯 했다.

살펴가십시오.”

고검추는 팽가촌 쪽으로 멀어지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지팡이를 조금 들어보이고는 팽가촌 쪽으로 불편해 보이는 걸음을 옮겼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이다.)

고검추는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리를 끌며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신경이 쓰인다.

(저분 말씀대로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고검추는 돌아서서 고갯마루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언제쯤 돌아오실지 모르겠다.)

고검추의 생각은 다시 흑모철웅을 추격해간 어머니 당혜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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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촌의 세 모녀

 

 

-설삼신단!

 

그것은 만년설삼(萬年雪蔘)으로 만든 무림오대영약(武林五大靈藥) 중 하나다.

일갑자 전, 대설산의 어느 계곡에서 엄청난 설붕(雪崩:눈사태)이 일어났었다.

헌데 설붕이 지나간 자리에서 만년 동안 눈 속에서 자란 한 포기의 설삼이 발견되었었다.

만년설삼을 발견한 인물은 마도 무림에 속한 어떤 기인이었다.

그 기인은 만년설삼으로 다섯 알의 설삼신단을 만들었다.

설삼신단은 한 알을 복용하면 백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희세의 영약이다.

특히 여인들이 설삼신단을 복용하면 극음기공을 수월히 연성할 수 있게 된다.

고검추가 여인 옥여상의 몸속에서 찾아낸 세 알의 환약은 바로 그 설삼신단이었다.

그 중 하나를 옥여상이 복용했으므로 설삼신단은 이제 단 두 알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헌데 옥여상은 그 대단한 설삼신단을 복용하고도 자신의 내상이 낫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당한 마공이 그만큼 치명적인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쇄심마장!

 

옥여상에게 중상을 입힌 무공의 이름이다.

쇄심마장은 구마(九魔)라 불리는 전설적인 마인들 중 한명이 남긴 마공이다.

일단 쇄심마장에 격중되면 온몸의 혈맥이 말라붙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쇄심마장에 당한 상세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시전자가 쇄심마장의 마공진력을 회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만년화리(萬年火鯉)의 생혈(生血)을 마셔 손상된 혈기를 보충하는 것이다."

고검추는 옥여상을 말을 듣고 있던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의 짓인지요?"

잘 봤다.”

옥여상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누군데 아주머니를 시해하려 한 것인지요?"

고검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옥여상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놈의 이름은 담세황... 옥면마성(玉面魔星)이라는 별호를 지닌 나의 사제다."

"예엣? ... 사제라고요?"

고검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옥여상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녀를 추격하던 자가 다름 아닌 그녀의 동문사제(同門師弟)였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여유가 없구나. 다만 그 자가 내게서 두 가지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암습했다는 것만 말해 주마."

옥여상은 불신의 표정을 짓는 고검추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은신처를 알려주지 않으련? 설삼신단의 약효로 일각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사이에 운공요상을 마쳐야만 한다. 과연 내가 익힌 태을강기(太乙罡氣)가 쇄심마장에 당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서쪽으로 삼십여 리 쯤 가면 크고 작은 돌무지로 덮인 계곡에 이르실 것입니다. 그 계곡 끝의 절벽을 덮고 있는 덩굴 안쪽에 제법 아늑하고 은밀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고맙구나."

옥여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고검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고검추의 용모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조만간이라니... 무슨 말씀이실까?)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고검추의 얼굴을 뜯어보던 옥여상의 눈가로 가는 경련이 스쳤다. 그녀는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옥여상은 복잡한 심사가 실린 표정으로 말하며 일어났다.

!

그리고는 몸을 날려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분이시다."

멀어지는 옥여상을 보며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만간 설삼신단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옥여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다고도 했으니 일단 갖고 있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들어있는 옥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니 어느 덧 해가 기련산의 서쪽 능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돌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죽서기년도 품속에 찔러 넣은 고검추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향해 달려갔다.

 

***

 

-팽가촌(彭家村)

 

기련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산촌이다.

백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팽씨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팽가촌이다.

팽가촌 동쪽 오리쯤에는 모옥(茅屋;초가집) 한 채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골짜기에 지어진 그 모옥에는 팽씨가 아닌 모자(母子)가 살고 있다.

서른여섯 살인 어머니의 이름은 당혜선(唐惠善)이고 열일곱 살인 아들의 이름은 고검추다.

성씨로도 알 수 있듯이 두 모자는 팽가촌 토박이가 아니다.

십칠 년 전, 당혜선은 핏덩이인 아들을 안고 팽가촌에 나타났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된 젊은 엄마 당혜선은 당시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혜선은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랜 도피 생활을 한 듯 했다.

마음씨 좋은 팽가촌 주민들은 당혜선을 극진히 간병해주었다.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당혜선은 팽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으로 팽가촌 주민들의 은혜에 보답했다.

본래 기련산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여러 종류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 표범, 늑대, 곰등이 수시로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곤 했었다.

당혜선은 그런 맹수들을 보는 족족 잡아 죽여서 팽가촌의 오랜 우환을 제거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련산에는 맹수들 보다 더 사납고 포악한 존재들이 여럿 있다.

바로 산적들이다.

관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기련산에 산채를 마련한 산적 떼가 한 둘이 아니다.

산적들은 불시에 팽가촌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었다. 식량이나 가축을 주로 강탈해가지만 때로는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팽가촌은 외진 산촌이라 관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이나 가축을 바쳐서 산적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래야만 부녀자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이 팽가촌에 거주하면서 산적들은 더 이상 팽가촌 주민들을 괴롭히지 못했다.

당혜선은 날을 잡아 산적들의 산채 중 한 곳을 찾아가 궤멸시켜버렸다. 산적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리 한쪽을 못 쓰는 불구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본보기가 되어서 다른 산채의 산적들도 감히 팽가촌을 건드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산적들의 행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당혜선이란 여걸이 팽가촌에 정착한 덕분이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당혜선을 선녀처럼 떠받들고 공경했다.

당혜선의 아들 고검추는 아주 영특했다.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추론해서 알 정도였다.

팽가촌은 외진 산골 마을이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이 직접 영특한 아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당혜선은 무공 뿐 아니라 학식도 상당했다.

하지만 고검추는 열 살 이전에 어머니가 아는 모든 것을 배워버렸다.

더 이상 아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당혜선은 대처에 나가 책을 구해다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혜선은 아들이 생계는 신경 쓰지 말고 학문 연마에만 집중하길 바랬다.

게다가 고검추와 함께 자란 또래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업인 목축, 농사, 사냥, 약초 채집등을 배우느라 바빠졌다.

그 때문에 고검추는 팽가촌 근처에 살면서도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함께 놀 친구도 없어서 고검추는 어머니가 구해다주는 책을 읽으며 지내야했다.

그래도 열세 살 때부터는 마을 주민들이 기르는 양을 보살펴주는 일로 소일해오고 있다.

당혜선도 양치는 일은 공부에 그리 방해되지 않는 때문인지 굳이 반대하진 않았다.

오 년 가까이 양들을 보살펴온 덕분에 고검추는 이제 팽가촌의 그 누구보다 능숙한 양치기가 되었다.

오늘도 양떼를 몰고 마을 뒤편 초원으로 올라갔던 고검추는 옥여상이란 신비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에 휘몰아칠 거센 폭풍의 전조라는 사실을 고검추로서는 알리가 없었다.

 

***

 

해가 막 서산으로 떨어지고 있다.

매애애...”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이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한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백 쉰 세 마리... 오늘도 한 마리 빠트리지 않고 잘 데리고 돌아왔구나.”

마지막으로 우리에 들어간 양까지 센 등삼낭(鄧三娘)이 초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인 등삼낭은 산촌 마을의 여자답지 않게 단아한 용모를 지녔다. 이목구비가 아주 섬세하여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입술 가에 찍혀있는 점 때문에 관능적인 분위기도 충긴다.

비록 허름한 베옷을 입었어도 등삼낭의 타고난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등삼낭은 팽씨가 아니지만 팽가촌의 주민이다.

그녀는 팽가촌 촌장 팽유(彭維)의 며느리인 것이다.

등삼낭은 팽유가 젊었을 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등씨 성의 어떤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등삼낭이라는 이름은 등씨 집안의 셋째 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등삼낭의 집안은 강호의 혈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

팽유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등씨일족은 이미 몰살당한 후였다.

그래도 천우신조로 당시 다섯 살이던 등삼낭은 목숨을 건졌다. 등씨 집안 하녀 한 명이 그녀를 자신의 딸로 위장시켜준 덕분이었다.

팽유는 고아가 된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와 키웠으며 나이가 차자 자신의 외아들 팽진(彭進)과 짝을 지어주었다.

팽가촌 차기 촌장인 팽진과 부부가 된 등삼낭은 슬하에 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녀의 행복하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련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산적 두목이 팽가촌에 쳐들어와 그녀를 납치해간 것이다.

 

-흑모철웅(黑毛鐵熊)!

 

기련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철웅채(鐵熊寨)란 산채의 채주다.

흑모철웅은 타고난 신력에 더해 도검이 불침하는 철피공(鐵皮功)이란 외공까지 익혀 기련산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흑모철웅은 팽가촌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철웅채와 팽가촌이 수백 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혜선의 위명을 들어서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보름 전에 사달이 났다. 볼일이 있어 중원에 다녀오다가 팽가촌 근처를 지나던 흑모철웅의 눈에 등삼낭이 띤 것이다.

산골 출신답지 않은 단아한 등삼낭의 자태는 흑모철웅의 눈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자는 막아서는 등삼낭의 남편 팽진을 때려죽이고 등삼낭을 철웅채로 납치해갔다.

대처로 나갔다가 돌아온 당혜선은 그 사실을 알고 즉시 철웅채로 달려갔다. 다행히 당혜선은 등삼낭이 흑모철웅에게 겁탈당하기 전에 철웅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혜선은 평소 한 살 아래인 등삼낭을 친 동생인 것처럼 예뻐했다.

그런 등삼낭을 납치한 흑모철웅의 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당혜선은 산적들에게 살수를 썼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당혜선의 검에 죽임을 당했고 다친 자는 그 몇 배였다.

철피공을 익혀서 도검이 불침한다는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다.

흑모철웅을 쫓아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당혜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겁탈당할 뻔한 충격으로 실신한 등삼낭을 보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일단 등삼낭을 데리고 팽가촌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다시 철웅채로 돌아가서 흑모철웅의 종적을 추격하는 중이다. 흑모철웅을 살려두면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후환을 없애버릴 작정인 것이다.

 

당언니...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등삼낭은 양들이 들어간 우리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상복을 겸해서 수수한 베옷을 입은 등삼낭의 얼굴은 초췌하다.

남편은 산적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하마터면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겁탈당할 뻔 했다.

지난 보름은 등삼낭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시간이었다.

만일 아직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야한다는 모정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열다섯 살인 아들과 열일곱, 열세 살인 딸들이 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등삼낭은 힘을 내야만 했다. 애써 의연한 척 하며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마을의 큰 재산인 양들을 돌보아온 것이다.

때가 되면 돌아오시겠지요.”

고검추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당혜선은 수시로 팽가촌을 나가곤 했지만 아무리 길어도 닷새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보름 넘게 소식이 없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우리 왔어요.”

마을 안 쪽에서 해맑은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검추가 돌아보니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등지고 두 명의 소녀가 다가오고 있다.

등삼낭을 닮은 소녀들인데 열세 살 쯤인 계집아이는 다람쥐처럼 쪼르고 달려오고 있고 그 뒤에서 열일곱 살쯤인 새침한 인상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언니 쪽은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있다.

소녀들은 등삼낭의 딸들인 팽옥경(彭玉鏡), 팽옥령(彭玉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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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발의 미녀

 

 

사신각은 호천무맹이 봉문한 후 활동을 시작한 악명 높은 청부살인조직이다.

청부를 받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고 장담하며 설령 청부 대상이 황제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적정한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은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자가 적힌 복면을 쓰고 표적을 척살을 시도한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일단 사신각의 표적이 된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무림의 정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이 기련산의 골골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라고 하외다.”

독안랑이란 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딱히 누군가를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독안랑이다.

하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옥가년을 노리는 건 아닐 테고...”

금포장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 역시 사신각의 살인귀들에는 꺼리는 바가 있었다.

루주께서 결심만 하지만 우리 마천루(魔天樓)의 형제들이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을 기련산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독안랑이 하나 뿐인 눈을 투지로 물들이며 말했다. 외눈의 늑대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그자는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좋아한다.

사신각과는 장차 거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소.”

루주라 불린 금포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사신각과는 충돌하지 말고 옥가 년의 종적을 찾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소이다!”

대답하는 독안랑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어떤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이다.

휘익!

독안랑은 다시 날아올라 멀어져갔다.

삐익! !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적지 않은 사람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놈!”

휘익!

금포장한도 힐끔 소년을 훑어본 후 몸을 날렸다. 그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탓에 소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곧 금포장한의 모습도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우!"

그제서야 비로소 소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마로 식은땀이 번져 나왔다. 금포장한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소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

돌연 소년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는 죽서기년 위로 새빨간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주머니!"

소년은 놀라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쿠웅!

그 직후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은발여인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소년은 급히 은발여인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은발여인의 안색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숨결은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왜 이러실까?)

소년은 갑작스러운 은발여인의 변화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은발여인의 파리한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말을 하신다.)

소년은 급히 여인의 입 근처로 귀를 기울였다.

"가슴... 약병..."

은발여인은 미약한 음성으로 그같이 말하고는 실신해버렸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에 있는 약병을 찾아달란 말씀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으나 어쨌든 상대는 여자다. 생면부지인 여자의 가슴을 뒤지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술에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은발여인의 상세는 아주 위중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은발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다.

!

은발여인의 가슴을 옥죄고 있던 옷고름이 풀려졌다.

출렁!

그러자 한 쌍의 살덩이가 눌려있던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

소년은 숨이 탁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이다.

출렁! 출렁!

작은 수박을 반으로 쪼개서 엎어놓은 것같은 한 쌍의 살덩이들이 물 풍선처럼 흔들거린다. 엄청난 크기에 비해 젖가슴 위에 돋아있는 젖꼭지는 팥알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본 순간 소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어놀고 귀는 멍멍해진다.

본래 은발여인은 유난히 큰 젖가슴을 감추기 위해 비단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헌데 그 젖 가리개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으스러져 있었다.

은발여인이 걸친 흑의의 재질은 천잠사라 외력에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젖 가리개는 평범한 비단이라 으스러진 것이다.

(... 이럴 수가...!)

헌데 당황하던 소년의 눈에 경악의 빛이 더해졌다.

한 쌍의 육중한 살덩이 사이에 시뻘건 손바닥 자욱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희디흰 속살에 찍힌 핏빛 손자국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핏빛 장인을 누가 일부러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결코 그린 것이 아니었다.

(이 손바닥 자국이 이 분을 실신하게 만든 원인인 듯한데...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놀라던 소년은 서둘러 은발여인의 저고리 섶 안쪽을 뒤졌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소년의 손에 은발여인의 젖가슴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뭉실뭉실한 감촉은 한참 피가 뜨거울 나이인 소년에게는 아찔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게... 이게 여자의 젖가슴 감촉이로구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곧 은발여인의 가슴 섶에서 하나의 옥병을 찾아냈다.

반 뼘도 안되는 자그마한 옥병 안에는 밀랍에 싸인 세 알의 호두알만한 환약이 들어있었다. 비록 밀랍에 싸여있지만 환약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와 주위를 진동했다.

(이것인 모양이다.)

소년은 눈을 빛내며 급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밀랍을 벗겼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입 안에 넣어주려 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입을 꼭 다문 채 실신하고 있는 상태라 환약을 넣어줄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소년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은발여인은 인사불성이라 스스로 환약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환약을 먹이려면 물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년은 준비해온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렇다고 근처의 샘이나 개울로 물을 뜨러 갔다 올 여유는 없다.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사이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은발여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잠시 갈등하던 소년은 결심을 했다. 비록 물은 없지만 은발여인에게 환약을 먹일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소년은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상큼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와 함께 환약은 소년의 침에 녹아 걸죽해졌다.

(용서하십시오.)

환약을 자신의 침으로 녹인 소년은 입술을 은발여인의 창백한 입술 위에 포개었다.

(허억!)

입술에 느껴지는 너무도 보드라운 감촉에 소년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여인의 입술... 그 황홀한 감촉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은발여인의 꼭 다물려진 입술을 혀를 써서 벌렸다.

여인의 매끈한 치아가 혀끝에 느껴져 소년을 아찔하게 만든다.

소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면서 자신의 침으로 녹인 환약을 여인의 입속에 흘러 넣어 주었다.

잠시 후 소년은 마지못해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미 침으로 녹인 환약은 모두 은발여인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상태였다.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 소년의 가슴은 여전히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고 귀는 멍멍하다.

입가에 남아있는 꽃잎의 그것같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

이성과의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경험은 실로 충격적이면서도 황홀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어머니 못지않게...)

소년은 망연한 표정으로 은발여인의 조각처럼 단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넋이나가서 은발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은발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아왔다. 소년이 먹여준 약기운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다.

"휴우..."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은발여인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은발여인은 흠칫했다. 가슴 부위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젖 가리개가 훼손되었겠구나.)

자신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 알아차린 은발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물기 젖은 봉목이 나타났다.

"... 괜찮으십니까 아주머니?"

은발여인이 눈을 뜬 것을 본 소년은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소년의 순진한 모습에 은발여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의 젖가슴을 처음 보느냐?"

은발여인은 드러난 젖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짓궂게 물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년이 화난 음성으로 내뱉으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

은발여인의 섬섬옥수가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지극히 연약하고 보드라운 섬섬옥수다.

하지만 일단 가녀린 그 손에 잡히자 소년은 움쭉달쭉도 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

부르르!

소년은 당혹과 충격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손바닥 가득히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육질의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이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으로 녹아들어가는 것같은 기분이 되었다.

은발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란다."

"... 무슨 뜻이십니까?"

소년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은발여인은 그런 소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나 옥여상의 젖가슴을 보고 만진 것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다."

"... 죄송합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고개를 살래 저었다.

"그런 말 할 것 없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원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은발여인, 옥여상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렸다.

(...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소년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옥여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년은 얼굴이 발개진 채 은발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젖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호호호 매정한 도련님이시군요."

옥여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비록 어리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충후한 군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내도 있구나.)

옥여상은 돌아앉은 소년을 살펴보며 벌어져 있는 상의를 여몄다.

"장난으로 해본 소리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헌데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옷고름까지 단단히 동여맨 옥여상은 토라진 소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검추(劒秋)! 고검추(高劒秋)라고 합니다."

"고검추! 좋은 이름...!"

미소 지으며 말하던 옥여상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소년, 고검추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가운데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으로 하여금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그러고 보니 그를 닮지 않았는가? 성까지도 그와 같은 고씨이고...)

옥여상은 어떤 예감에 전율했다.

소년 고검추가 대체 누구를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 후사(後嗣)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미를 모으며 잠시 생각하던 옥여상은 고검추에게 물었다.

"혹시 고창룡이란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고창룡이라면 욕정에 눈이 멀어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유린했다는 희세의 패륜아가 아닌가?

그렇다면 소년 고검추가 정파의 수치인 철사자 고창룡을 닮았단 말인가?

"고창룡? 저와 종씨인 듯하지만... 그런 분은 알지 못합니다."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창룡을 모른다?"

옥여상은 실망과 안도가 교차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그보다 이 주위에 조용히 쉴만한 곳이 있겠느냐?"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기색으로 옥여상을 바라보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삼신단(雪蔘神丹)이 비록 희세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쇄심마장(碎心魔掌)에 당한 나의 내상을 완전히 치료해 주지는 못한단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삼신단이니 쇄심마장이나 하는 이름들은 그에게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옥여상의 말을 들었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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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는 여인들

 

 

틀림없습니다. 이자는 십자단맥검(十字斷脈劒)에 죽었습니다.”

이마 부분에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가 한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복면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체는 온몸이 무성한 털로 덮인 거구의 사내인데 심장 부분에 열십자로 갈라진 상처가 나있다.

특이하게도 그 열십자의 상처는 피부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다.

끊어진 경맥들이 오그라들면서 피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십자검존의 독문검법 십자단맥검에 당한 흔적이다.”

또 한명의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각주(閣主)님이 보시기에 이 작자를 죽인 범인이 바로...”

먼저 말한 복면인이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를 돌아보았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그자의 두 눈은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어 있다.

철사자 고창룡이 죽으면서 십자단맥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네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그중 셋의 행적은 확인되었다.”

각주라 불린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곰같은 놈을 죽인 건 십칠 년 전 돌연 행방을 감춘 당혜선(唐惠善)일 수밖에 없다.”

각주라는 자는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날수비연(辣手飛燕) 당혜선! 역시 그년 짓이었습니다.”

드디어 사신검 중 복마신검(伏魔神劒)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생겼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각주님!”

시체 주변에 모여 있던 복면인들이 흥분을 주체 못하며 각주라는 자에게 포권을 했다. 그자들이 쓰고 있는 복면에는 예외없이 <()>자가 적혀 있다.

진정해라. 이제 겨우 당가 년이 기련산(祁蓮山) 근처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각주라는 자가 손을 들어 다른 복면인들의 말을 막았다.

이번 일에 우리 사신각(死神閣)의 명예가 걸려있다. 기련산의 골골을 다 뒤져서라도 당가 년을 찾아내라!”

존명!”

맡겨주십시오 각주님!”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휘익! !

이어 그자들은 사방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당혜선... 당혜선... 드디어 네년이 꼬리를 드러냈구나.”

사방으로 흩어져 멀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각주라는 자는 음산하게 웃었다.

감히 본좌를 기만하고 복마신검을 빼돌린 대가를 몸으로 치르게 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사신각의 각주라 불린 복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악의에 찬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 * *

 

-기련산맥(祁蓮山脈)!

 

감숙성과 청해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곤륜산맥의 동쪽 지맥이기도 하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이천여리의 산줄기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기련산맥의 최고봉인 기련산은 높이가 무려 이만여척(6,000미터)에 이르러 정상부가 늘 만년설에 덮여있다.

기련산의 서북쪽에는 서역과 중원의 관문인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계절은 싱그러운 초여름이다.

기련산 남쪽 산록에는 녹색의 물결을 일으키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비스듬히 경사진 초원 여기저기에는 구름송이 같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또 초원에는 듬성듬성 키 큰 나무들이 서있어서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초원에 서있는 나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느릅나무 아래에는 소년이 한 명 앉아있다.

나이는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걸친 옷은 허름하고 살갗은 햇볕에 그을려 가뭇하다.

기련산 근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맑아서 보는 이의 이목을 잡아끈다.

어느 명문가의 귀한 핏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외모를 양치기 소년이 지니고 있다.

소년은 느릅나무 밑동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이 읽고 있는 책은 제법 두껍고 글씨도 작아서 가벼운 내용은 아닌 듯 했다.

“...!”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소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

한 명의 여인이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얼굴은 명장이 정성을 다해 빚은 듯 아름다운 반면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얀 은발(銀髮)이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만 보자면 여인의 나이는 이십 대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하얀 머릿결 때문에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발여인은 눈같이 흰 피부와 은발과는 대조적인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다.

헌데 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은 섬뜩하게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칠갑이 되긴 했어도 검은 옷은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옷을 물들이고 있는 피는 은발여인이 흘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인 듯했다.

유령처럼 나타난 은발여인을 본 소년은 두 눈을 조금 치떴을 뿐 딱히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담력이 큰 아이로구나.)

은발여인의 옥용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무슨 책인데 그리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은발여인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소년은 은발여인의 청아한 음성에 감탄하며 말없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죽서기년... 흥미로운 책이로구나."

적잖이 놀란 듯 은발여인의 아미가 살짝 올라갔다.

외진 산골의 양치기 소년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령 글을 읽을 줄 안다 해도 흥밋거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패설(稗說;소설) 따위일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다.

헌데 소년이 읽고 있었던 건 상당히 난해한 사서(史書;역사책)였다.

괜잖다면 죽서기년을 읽은 감상을 들어볼까?”

은발여인의 말에 소년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소년의 순진하고도 해맑은 미소를 접한 은발여인은 주책맞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젊지만 사실 은발여인은 소년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의 나이다.

그만큼 소년에게는 보는 사람, 특히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죽서기년이 어떤 책인지는 알고 계신 듯하네요."

드물고 진귀한 책이지만 아줌마도 읽어본 적이 있단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음성이 맑은 샘물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음성도 해맑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죽서기년은 전국시대에 지어졌으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었었다. 그러다가 서진(西晉) 시절 도굴당한 무덤에서 다시 발견되었으며, 죽간에 쓰여진 사서라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은발여인은 죽서기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죽서기년의 내용은 정사로 믿어지는 좌전(左傳)이나 사기(史記)와 사뭇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이 다르지요. 성군으로 알려진 순()이 사실은 요()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다거나 그 순을 또 우()가 쳐서 죽였다던지...”

은발여인의 물음에 소년은 죽서기년을 보며 대답했다.

죽서기년의 그같은 내용을 믿느냐?”

믿는다 안 믿는다 단언하기에는 저의 공부가 너무 빈약하군요.”

소년의 대답이 은발여인을 탄복시켰다. 한창 혈기 방장할 나이임에도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죽서기년의 연원을 아시는 걸 보니 아주머니도 독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소년이 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은발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몰론이다. 나도 한때는 독서로 식음을 전폐하던 때가 있었단다."

은발여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책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소년은 부러운 눈빛을 지었다.

소년의 그 모습에 은발여인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호호호! 물론이다. 이 아주머니의 서고에는 줄잡아 십만서(十萬書) 정도는 있단다."

"!"

소년은 정말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발했다.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은발여인의 부드럽던 눈빛이 파랗게 번뜩였다.

(이 분... 쫓기고 있구나!)

표정을 차갑게 일변시키며 호각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은발여인의 모습에서 소년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담세황(潭世皇)!"

은발여인은 이를 바득 갈며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추격하는 자의 이름이 담세황인 듯 했다.

"이 주위는 탁 트인 초원이라 은신하실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습니다만..."

소년은 은발여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은발여인은 흠칫하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위는 녹음이 짙어 방해받지 않고 쉬실만하실 것입니다."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기대앉은 나무의 위쪽을 가리켰다.

은발여인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꾸나."

!

이어 그녀는 소리없이 나무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은발여인의 유령같은 경신법에 소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죽서기년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은 다시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언제 나타났는지 소년 앞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인데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영준한 용모를 지녔다.

또 육척 가까운 훤칠한 몸에는 화려한 금포(錦袍)가 걸쳐져 있다.

여자라면 이 금포장한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금포장한의 눈빛이 음침하고 스산하여 결코 좋은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주변에서 은발의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

금포장한은 음산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못 봤어요."

소년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설령 누가 주위를 지나갔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독서 중에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성격인지라...”

"그래?"

금포장한은 스산하게 말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마치 독사같은 눈빛이다.)

금포장한의 시선을 접한 소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금포장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놈은 정말 옥여상(玉如霜) 그년을 못 본 것 같다.)

금포장한의 미간이 모아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에서 추호의 동요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지.)

금포장한은 내심 중얼거리며 돌아서려 했다.

번쩍!

헌데 돌아서려던 그 자의 눈가로 한광이 스쳤다.

(저 놈, 놀라운 근골(筋骨)을 지녔다.)

금포장한은 비로소 소년이 근골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심성은 올바르지 못해도 금포장한은 탁월한 자질과 안목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그자는 양치기 소년의 근골이 무공을 연마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애지신(無碍之身)! 어쩌면 전설 속의 무애지신일지도 모른다.)

금포장한의 눈가로 불꽃이 튀었다.

 

무애지신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몸을 말한다.

정확히는 몸속의 모든 경맥이 막힘없이 뚫려있는 특이하고도 진귀한 체질을 뜻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모든 경맥이 열려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맥은 굳어지고 노폐물이 쌓여 진기의 유통에 장애가 생긴다.

그 때문에 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증진되지 못한다.

진기의 유통도 차질을 빚어 내공을 구사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기기도 한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고도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의 타통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임독이맥이 뚫린 자는 진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어 내공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게 된다.

무애지신은 그 임독이맥을 비롯한 모든 경맥이 뚫려있는 보기 드문 체질이다.

헌데 일개 양치기 소년의 몸이 무애지신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금포장한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다.

 

(저놈이 정말 무애지신의 소유자라면 장차 나 담세황이 대업(大業)을 이루는 데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금포장한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에게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포장한은 소년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일단 소년이 무공을 익히면 단 시일 내에 금포장한 자신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둑!

금포장한의 움켜쥔 두 손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소년의 뛰어난 근골을 알아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일어난 것이다.

“...”

소년은 금포장한의 그같은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죽서기년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근은 미리 미리 제거해두는 게 최선이다.)

금포장한의 입가로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절체절명!

금포장한의 손이 한 차례 휘둘러지기만 해도 소년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루주(樓主)! 여기 계셨구려.”

휘익!

걸걸한 외침과 함께 금포장한 뒤로 한명의 장한이 날아 내렸다. 굶주린 늑대처럼 흉포하고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인데 한쪽 눈이 먼 애꾸다.

무슨 일이오 독안랑(獨眼狼)?”

막 소년에게 살수를 쓰려던 금포장한은 오른손에 모았던 공력을 풀어버리며 돌아보았다.

죽서기년을 읽고 있던 소년도 고개를 들어 애꾸눈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이 근처에서 다수 발견되었소이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독안랑이란 중년인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신각? 그 살인귀들이 무슨 일로 기련산에 몰려온 거요?”

독안랑의 보고를 받은 금포장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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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2

 

         패륜아(悖倫兒)의 이름

 

 

-철사자(鐵獅子) 고창룡(高蒼龍)

 

이것은 그저 한 인물의 이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불명예와 오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 인해 정파백도의 긍지는 땅에 떨어졌으며 흑도, 마도, 녹림은 물론이고 하오문의 무리들조차 정파백도를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무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륜(悖倫)이 철사자 고창룡이란 이름을 지닌 자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었다.

흑도사파에 대해 늘 당당할 수 있었던 정파백도의 군협들은 기억하기도 싫은 그 만행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철사자 고창룡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인해 정파백도는 천여 년 동안 쌓아온 명예와 긍지를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것이다.

 

* * *

 

철사자 고창룡은 정파백도의 결맹인 호천무맹(護天武盟)의 소맹주였다.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고창룡은 호천무맹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무공을 불과 십여 년 만에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성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창룡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하십대고수로 뽑혔을 정도였다.

헌데 그런 그가 어느 날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했다.

사모(師母) 겁탈-!

고창룡이 돌연 색마로 변해서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호천무맹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한 것이다.

 

-다정관음(多情觀音) 능벽운(凌碧雲)

 

그녀는 고창룡의 사모이며 호천무맹의 맹주인 십자검존(十字劒尊) 종극(種極)의 아내였다.

능벽운은 지혜로우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지녀 정파백도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런 그녀를 믿을 수 없게도 십자검존이 총애하는 제자가 겁탈한 것이다.

능벽운은 남편의 제자에게 겁탈 당했다는 엄청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으며... 고창룡은 그 직후 들이닥친 호천무맹의 원로들과 난투를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너무도 비극적이고 치욕스러운 사건이기에 호천무맹은 이 사건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했다.

그러나 영원히 지켜질 수 있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고창룡이 사모를 능욕한 만행은 요원의 불길처럼 무림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실추된 것은 비단 호천무맹의 명예만이 아니었다.

호천무맹은 정파 무림을 상징하는 결맹이다.

헌데 그 호천무맹에서 언도도단의 패륜이 벌어졌다.

그 일로 인해 정파백도의 무림인들은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호천무맹은 물론이고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백도의 유수한 문파들이 봉문하고 근신하기에 이르렀다.

단 한명이 저지른 패륜치고는 실로 엄청난 결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호천무맹의 다음 대 맹주로 지목되던 고창룡이 왜 갑자기 미친 짓을 한 것일까?

무림인들의 가슴 속에 커다란 의혹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의혹의 해명을 시도하지 못했다. 고창룡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탓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무림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호천무맹의 봉문은 무림의 정세를 뒤흔들어놓았다.

호천무맹의 위세에 눌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던 흑도와 사파의 세력들이 일제히 발호한 것이다.

무림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했으며 수많은 세력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났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그라지곤 했다.

호천무맹에 의해 주도되던 평화의 시대는 끝이 났다.

약육강식의 쟁투와 패권에 대한 야욕으로 무림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이 모두가 고창룡이라는 단 한 명의 패륜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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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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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의 변>

 

달마묵장처럼 전설신검도 현재 <리디북스> <원스토어> <미스터블루>등에 연재중인 작품입니다.

유료연재 작품이라 이 카테고리에서 전체를 연재하지는 못하고 대략 1권 분량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뒷 부분의 열람을 원하시면 상기의 플랫폼들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묘사와 설정에도 손을 봐서 연재한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와룡강 무협소설

 

                            전설신검-傳說神劒

 

재간(再刊)의 변

 

 

 

 

이번에 선보일 작품은 1990년에 전14<박스본>으로 출간했던 <기인연작(奇人連作)>입니다.

졸자 와룡강은 1982년부터 무협소설을 집필해왔으며 100 타이틀이 넘는 작품들 중에는 시리즈물, 즉 연작(連作)이 몇 작품 존재합니다.

<군마무 2부작> <십왕경-십왕무적> <대륙풍-대륙몽> <철혈기인-철혈무적> <고독천년-고독만리-고독무적> <금포영왕 2부작> <북두질풍록-무제질풍록>등이 그것입니다.

상기의 연작들은 모두 재간되어 다시 선을 보였었습니다.

다만 <기인 2부작>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체가 재간되지는 못했었습니다.

2000년에 제1<기인천년(奇人千年)><기인몽(奇人夢)>이란 제목으로 단행본 출간이 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2<기인무적(奇人無敵)>은 미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1, 2부를 합본한 온전한 기인연작을 <기인천년>이란 제목으로 재간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29년 전의 작품이며 가필(加筆)을 통해 출간 된 박스본 형태라 문장이 조야하고 구성이 거친 면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가필이란 단어의 뜻대로 원작에 보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시장의 수요와 출판사의 요구에 맞춰주다 보니 와룡강도 가필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와룡강이 스토리를 쓰고 다른 작가들이 문장을 완성하는 형태의 작업을 했지요.

데뷔 초기의 몇 작품과 시공사와 작업할 무렵에 출간된 몇몇 작품 들 외에는 대부분이 가필 작품이었습니다.

작품마다 문장이 다르다고 느끼셨다면 가필에 참가한 작가들의 필력과 필체가 원인일 것입니다.

이번에 재간을 진행하면서 최대한 문장을 다듬었으며 미진한 내용과 구성은 보완하였습니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글이지만 와룡강의 무협소설 계보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이기에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9년 여름 와룡강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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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

 

              사신검(四神劒)의 전설

 

 

<신검(神劒)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

 

이같은 말이 무림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얻으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신묘한 검!

무림인들에게 신검이란 존재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지고(至高)의 동경이다.

신검은 한 자루의 검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신검은 모두 네 자루이며 그중 하나라도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된다고 한다.

 

-사신검(四神劒)!

 

무림인들은 네 자루의 신묘한 검을 사신검이라 부르며 꿈에도 잊지 못할 갈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자전(紫電)!

-규룡(叫龍)!

-흡혈(吸血)!

-복마(伏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사신검의 이름이다.

사신검은 금석(金石)을 무 베듯 한다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날카로움만으로 따진다면 사신검이 최강은 아닐 것이다. 간장(干將), 막야(莫耶), 거궐(巨闕), 전설 속 명검들의 예리함은 사신검에 못지않거나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검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전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사신검에 새겨져있다는 무공비결 때문이었다.

사신검의 검신에는 심오한 무공비결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을 연마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같은 사신검의 전설이 시작된 것은 오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림에는 네 명의 신비한 고수들이 돌연 나타나 패권다툼을 벌였었다.

 

-동룡(東龍)!

-서호(西虎)!

-남마(南魔)!

-북신(北神)!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불리는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무공으로 무림의 동서남북을 장악했다.

사방무신은 각자의 정복지에 가문을 세우고 무림을 사분하여 지배했다.

 

-사패천(四覇天)!

 

무림인들은 사방무신이 세운 가문을 사패천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사방무신들은 모두 검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애검이 바로 사신검이다.

무릇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고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는 것은 천고불변의 진리다.

헌데 당시의 무림에는 두 명도 아닌 네 명의 패주들이 존재했다.

사방무신 간의 충돌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방무신은 은밀한 곳에 모여 누가 최강인지를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그것이 바로 사방무신의 최후였음을...

모처로 떠난 사방무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백중의 실력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동귀어진 한 듯했다.

 

사방무신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숱한 무림인들이 사방무신의 대결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방무신이 최후를 마친 장소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후 가주를 잃은 사패천은 급격히 몰락하여 이윽고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소문이 무림에 퍼져나갔다. 사방무신의 애검들이 무림에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사신검에는 사방무신의 독문절기가 한 가지씩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신검이 모두 모이면 사방무신이 동귀어진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소문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신검은 간간이 무림에 나타났으며 검신에는 난해한 무공비결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사신검의 절기를 연마하여 무림의 패주가 된 사람은 없었다. 사신검을 얻으면 그 즉시 전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신검은 때때로 무림에 나타나 가공할 혈풍을 일으킨 후 다시 사라지곤 했다.

피는 공포를 부르고 공포는 외경을 낳았다.

사신검의 전설은 과장될 대로 과장되어 무림패주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다.

과연 사신검에 새겨진 절기들이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녔는지, 사신검을 얻으면 정말 무림의 패자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

 

이것이 사신검에 얽힌 전설이다.

바야흐로 사신검이 동시에 무림에 나타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신검의 출현은 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피를 요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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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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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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